즉위 전 갈문왕에 책봉되어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 되고, 소지 마립간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즉위하였다. 그는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2]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연제부인 박씨(延帝夫人 朴氏)는 신라 중기의 왕족, 왕비로 지증왕의 부인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찬(伊飡) 등흔(登欣)의 딸이라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모량부(牟梁部) 대인의 딸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기골이 장대하고 체구가 커서 배우자가 없었던 지증왕에게는 즉위초 알맞은 배우자가 없었는데, 사신을 보내 신라 국내를 수소문하게 하던 중 연못가의 대변이 큰 것을 보고, 체구가 클 것이라 하여 수소문하여 연제부인(延帝夫人)을 발견하고 배우자로 삼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실제로 연제부인은 여자이면서도 당대의 웬만한 남자들보다 더 체격이 좋았다.
우리 나라 성신앙에 대한 역사적 문헌기록은 『삼국유사 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의 옥문지(玉門池)에 얽힌 여근곡(女根谷) 전설을 비롯하여, 『중종실록』 6년 기묘조(己卯條) 및 12년 병진조(丙辰條)의 부근(付根) 기록,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의 부군당(府君堂)에 목제남근을 당 안의 네 벽에 봉안하였다는 내용과 『지봉유설 芝峰類說』에 보이는 부군당 기록 등이 있다.
성에 대한 숭배는 생식 숭배, 생식기 숭배, 성교 숭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성숭배는 인간의 긴 역사 속에서 상호 밀접한 영향을 받으면서 전승되어 왔다. 특히 생식기에 대한 숭배 형태는 신앙 형태에 따라 다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남자의 생식기를 인위적으로 조각하여 세우거나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대상으로 하여 기자나 풍년, 풍어, 자손만복 등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역신(疫神)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어 신앙하는 형태,
둘째는 여성기와 모양이 흡사하거나 여성기를 상징하는 암석을 신체로 상정하여 신앙하는 형태,
셋째는 바위의 외형이 남녀성기와 모양이 유사하거나 남녀성기를 상징하는 암석을 신체로 하여 신앙하는 형태 등을 들 수 있다.
[은자주]마립간을 처음 사용한 왕은 第十七奈勿麻立干이다. 왕통이 김씨로 자리잡고 새시대를 연 것을 공포한 것이다.지증마립간/지증왕 4년 10월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것을 설화[역사]기술자가 착각한 듯하다. 일연이 주석을 달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麻立干과 王의 위치를 맞바꾸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王以永元二年庚辰卽位.(或云辛巳則三年也.)
왕은 영원 2년(500년)에 왕위에 올랐다.
王陰長一尺五寸, 難於嘉耦,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되어 배필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發使三道求之, 使至牟梁部 冬老樹下,
그래서 사자를 三道에 보내어 배필을 구하였는데,사자가 모량부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이르니
見二狗嚙一屎塊如鼓大, 爭嚙其兩端.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 한덩어리 하나를 물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개들은양끝을 물고 싸웠다.
訪於里人, 有一小女告云:
그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소녀가 말했다.
「此部相公之女子洗澣于此, 隱林而所遺也.」
"이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누고 간것입니다."
尋其家檢之, 身長七尺五寸.
사자가그 집을찾아가 보니 그녀의 신장이 일곱자 다섯치나 되었다.
具事奏聞, 王遣車邀入宮中,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어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여
封爲皇后, 群臣皆賀.
책봉하여 황후로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경하했다.
又阿瑟羅州(今溟州)東海中, 便風二日程有于陵島(今作羽陵),
또 아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가 있었다.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이 섬은 둘레가 2만6천7백30보였다.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섬에 사는 오랑캐들은 그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아니했다.
王命伊喰朴伊宗將兵討之,
왕은 이찬 박이종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박이종(신라장군 이사부)은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서 그들을 위협했다.
「不降則放此獸」,
"너희가 항복을 하지 않으면 이 사자를 놓아 버리겠다."
島夷畏降. 賞伊宗爲州伯.
섬의 오랑캐는 두려워서 항복을 하였다. 이에 왕은 이종에게 상을 내리고 그 주의 장관인 주백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