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의 증손이며, 윤이후의 넷째아들이다 숙종 때(26세)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쟁이 심하던 시기였기에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며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1] 글씨와 그림에 능하였는데, 특히 인물·동식물 등의 그림에 뛰어났다. 조선 후기의 화단의 선구자로 지목받으며,[1]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겸재 정선(謙齋 鄭歚)과 함께 조선의 ‘3재(三齋)’라 불린다. 작품으로 〈노승도〉, 〈산수도〉, 〈자화상〉 등이 있다. 서화뿐만 아니라 유학, 천문지리, 수학, 병법 등 각 방면에 능통한 실학적인 태도는 가풍으로 전해졌다.[1]
국립중앙박물관이 현미경과 적외선, X선 촬영 및 형광분석법 등으로 조사해 보니 초상화는 원래 완성작이었으며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퇴화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희미하지만 붉은 선으로 표현됐고 옷깃과 옷주름도 분명히 존재했다. 정밀하게 채색까지 된 사실도 밝혀졌다. 다만 무슨 이유로 선과 채색이 지워졌는지, 어떻게 얼굴만 보존될 수 있는지는 규명하지 못했다.
한글·한문 금속활자의 여러 크기인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 특소자가 모두 확인됐다. 유물 자문에 참여한 백두현 경북대 교수(국문학)는 본지와 통화에서 “15세기, 특히 1460년대 활자로 보이는 것들이 대규모로 나왔다”면서 “아버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세조가 펴냈던 불경 언해본 『능엄경언해』(1461)와 일치하는 활자들이 다수”라고 말했다. 세조(재위 1455~1468)가 즉위한 을해년에 만든 을해자(乙亥字)란 얘기다. 을해자는 현재 전해지는 조선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이전까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한글 소자(小字) 30여자가 전부였다.
중심 주제인 직지심체(直指心體)는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이라는 오도(悟道)의 명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음을 바르게 가졌을 때 그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본성은 그 자체가 본시 청정하므로 선지식(善知識)의 도움에 의하여 자기 마음 속에서 그 심성이 자정(自淨)함을 깨닫고 늘 자수(自修)·자행(自行)하면 곧 불성(佛性)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이 바로 법신(法身)이 되며, 자기 마음이 바로 불심이 된다는 요지이다.[2]
명칭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며, 간략 서명은 ‘불조직지심체’(佛祖直指心體)이다. 판심제(版心題)는 직지(直指) 또는 심요(心要)이다.[2] 간단히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 '직지(直指)'로 불리며, 영어권에도 'Jikji'로 통용된다.
흔히 직지심경(直指心經)으로도 불리는데, 불서(佛書) 중 직지는 경(經)이 아니라 요절(要節)이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5]
금속활자본
(1) 금속활자본
백운화상이 입적하고 3년 뒤인 1377년(우왕 3)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하였다. 상·하 2권을 간행했으나, 현전하는 것은 하권 1책(첫 장 결락) 뿐이며, 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간행 후 500여 년의 행적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직지의 존재가 다시 드러난 것은 19세기 말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에 의해서이다. 주한 프랑스 공사로 부임한 플랑시는 고서적 수집에 열중했는데, 땅을 파던 중 직지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플랑시가 입수했을 때 직지는 이미 상권은 없고 하권도 첫 번째 쪽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후 플랑시에 의해 프랑스로 유출된 직지는 1911년 경매에 부쳐져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에게 180프랑에 낙찰되었다. 1950년 베베르의 유족이 이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해 현재에 이른다. 1972년박병선 박사에 의해 현전하는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밝혀졌고, 그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도서의 해’ 기념 도서 박람회에 공개되었다.[5]2001년9월 4일에 《승정원일기》와 함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6][7] 현재로선 직지를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병인양요 때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와는 달리 직지는 플랑시가 합법적으로 수집해 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5]
목판본
1378년(우왕 4) 6월에 백운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에서 제자 법린(法麟) 등이 금속활자본을 바탕으로 간행한 것이다. 서문은 금속활자본의 성사달(成士達)이 쓴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앞부분에 이색(李穡)이 쓴 서문을 추가하였다.
닥종이에 찍은 2권 1책으로, 크기는 세로 21.4cm, 가로 15.8cm이다.[1]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으로 간행한 이유는 지방 사찰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미숙하여 인출 부수에 제한을 받아 많이 찍어 널리 퍼뜨릴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판본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판본이 있는데,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판본이 인쇄상태가 좋은 편이고 두 개의 서문이 붙어있어 완전한 형태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판본은 1992년4월 20일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다.[9]
諸惡莫作 衆善奉行 제악막작 중선봉행 自淨其意 是諸佛敎 자정기의 시제불교 모든 악한 일들은 짓지 말고 선한 일들은 받들어 행하라. 자기 마음을 깨끗이 맑히는 것 (선정을 통하여 진리에 정진할 뿐 헛된 잡념에 사로잡히지 않음)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
*불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諸惡莫作 衆善奉行自淨其意"로 요약된다.
나머지는 이를 성취하기 위한 장식이거나 군더더기이다.
복을 비느라 역대 부처님들의 가르침을 깜박했거나 보조수단인 장식물에 가려진 탓이다.
모든 종교는 선악(善惡)을 분변하여 善한 마음의 실천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종교만이 복(福)을 받는다며 기복신앙만을 강조하는위장종교를 사이비종교라 칭한다. 영혼의 불멸성과 사후세계에 대한 논의를 전제하면 종교는 1차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실을 중시하는 사마천은 육체가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 했는데.....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업의 성공이나 부유하게 사는 일의 측면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선이란 무엇인가? 1차적으로 국리민복(國利民福)에 보탬이 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남을 헐뜯고 욕하는 마음은 개인 스스로도 생리적 측면에서 신체적 순환장애를 유발하므로 실상은 자신을 해치는 일이다.
고려시대 청주목(淸州牧)에 있었던 사찰 흥덕사(興德寺)[1]에서 만들어진 인쇄물로, 정확한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이름이 길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로 축약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직지심경'이라 부르기도 하나, 직지는 불경이 아닌 요절이므로 엄밀히 직지심경은 잘못된 표현이다.
직지심체요절은 공식적으로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2]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승려 백운 화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요절을 재구성하여 엮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본은 1372년 제작이 시작되어 1377년에 간행되었다. 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성경보다 78년 더 앞선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1234년 인종 시기의'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1239년고종 시기의'남명천화상송증도가[3]' 같은 금속활자 인쇄물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안타깝게도 소실되어 현대에 전해지지 않기에 인류에게 남아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 이 직지이다.
직지는 각 상권, 하권의 2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현재 프랑스에 있는 원본은 하권에 해당하며, 상권은 한때 현상금까지 내걸고 찾는 물건이었으나 결국 실종되어 현재는 그 행방이 묘연하다. 단, 이는 최초본의 상권이 실종되었다는 뜻으로, 직지라는 책의 텍스트 자체는 인쇄물의 특성상 오늘날에도 잘 남아 있다. 이후 간행된목판본 직지는 완본이 제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청주고인쇄박물관의 주도 하에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금속활자본 직지 하권의 글자체와 판형을 본따서 상권 내용의 디지털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후 실물활자를 전통방식 그대로 다시 만들어 상권을 복원할 계획이다.
창세기(創世記, 히브리어: סֵפֶר בְּרֵאשִׁית세페르 베레쉬트, 그리스어: Γένεσις게네시스[*], 영어: Book of Genesis)는 천지 창조와 아담과 하와(이브)의 에덴 동산 추방, 노아의 방주와 홍수, 바벨탑 그리고 유대 민족 탄생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타나크의 율법서 토라의 첫 번째 책이며, 구약으로는 모세오경 첫 번째 책에 해당한다.[1]
타나크에서는 이 책을 율법서 토라의 첫 번째 책으로 놓고 있다.[1] 원본은 소실되어 없으며, 현재 여러 필사본들이 남아있어, 이를 기반으로 많은 언어의 번역본이 만들어졌다. 이 책은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으로 시작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 이주하는 시기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이름인 '베레쉬트'(בראשית)는 히브리어로 쓰인 이 책의 첫 번째 단어에 해당하며, 이 단어가 그대로 이 책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단어는 ‘처음에, 시작으로, 우선’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2] 이 책을 포함하는 모세오경의 5권은 전부 각각의 처음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를 따서 책 이름이 정해졌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관념과 성립에 관한 역사적 가정과 근본 이야기를 제시하며, 이스라엘 역사, 법, 관습에 관한 소개 글 역할을 한다. 창세기는 모세오경 가운데 하나로 분류하지만, 본문에 창세기 저자에 관한 언급이 없다. 성서학 학자들은 모세오경을 모세의 저작이 아니라[3]종교 지도자 등 불명의 저자들이 그전부터 내려오던 이스라엘 민족과 종교에 관한 서로 다른 문헌과 견해를 그들의 신학에 따라 묶은 것으로 생각한다.[4] 이 작업에는 적어도 4가지 다른 전승을 포함하고 있으며,[5] 창세기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편집된 시기를 대략 기원전 450-400년 무렵으로 추정하고 있다.[6]
1508년 바티칸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가 성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1529년독일카를 5세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성을 쌓았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카를 5세는 성을 쌓아서 자신과 싸운 미켈란젤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시스티나 경당 대벽화
후에 메디치 가의 폭군 알레산드로와 사이가 나빠져,1534년고향인피렌체를 영원히 떠났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이효성 지음, 최주훈 그림)에 의하면 같이 일한노동자들에게 자신의작품을 팔아서임금으로 대신할 것을 부탁하고 떠났다 한다. 로마로 옮긴 그는 새로운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존중하여, 어느 추기경이 미켈란젤로를 무지하다고 업신여기자, "무식한 것은 추기경님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주었다 한다.
1550년성구실인바티칸바오로 경당의 벽화바오로의 회심(그림은 다음 블로그에서 확인,1549년)과십자가의 베드로(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그림.카라바조가 그린 그림도 있다.)를 완성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출발점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줄 것을 부탁했고, 미켈란젤로는 두성인의 그림을 그리면서로마 가톨릭의 지도자인교종들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냈다.[2]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에 위촉되었고, 40개의 조각을 만들어야하는 방대한 양의 작업이 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교황의 후원을 받긴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업들이 있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40년동안 묘 짓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 묘는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위치하며 중앙에 놓인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에서,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2개의 조각은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 보관되고 있다.
같은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 (1508~1512).콘디비 설명에 의하면, 브라만테가 산피에트로 대성당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묘 공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다가 교황을 설득해서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도록 그에게 생소한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을 지탱해주는 삼각 궁륭에 열두 제자를 그리고 천장 중앙에 장식으로 처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를 설득해 재량권을 얻고, 천지창조/인류의 타락/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한 그리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가톨릭 성당의 대부분의 교리를 표현하는 그림의 일부이다.
작품은 500 평방미터의 천장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는 창세기에 나오는 9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지구창조; 하느님의 인간창조와 하느님 은혜 밖으로 추락한 인간,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여주는 인간의 상태.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12명의 인간이 그려져있다; 이스라엘 예언자 7명과 고전세계에 나오는 5명의 무녀. 천정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담의 창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예언자 예레미아, 그리고 쿠메의 시뷜라이다
1508년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는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다. 교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천정벽화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선조로 시작하여 천지창조 이야기 등 구약 성서의 네 가지 사건이 그려져 있다.
그리스 비극3대 작가인소포클레스의 대표적인 비극이다. 오이디푸스가 살인범을 찾는 이야기를 연극으로 각색했다. 등장인물로는 앞서 나온 오이디푸스, 크레온, 테이레시아스, 이오카스테 말고도 테바이의 원로들로 구성된 합창대가 있다.[8]
연극은 테바이의 사제들이 오이디푸스에게 테바이에 퍼진 역병을 해결해달라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아폴론의 신탁을 받기 위해 크레온을 보낸 상태였고, 이내 크레온이 신탁을 받고 돌아온다. 신탁은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도시에서 추방하거나 살해함으로써 도시를 정화하라'는 내용이었고, 이에 오이디푸스는 선왕의 살인자에게 복수하겠노라고 모두의 앞에서 맹세한다.
이후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를 데려온다.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는 자신이 사실을 말할 시에 벌어질 참극을 알기에 궁전에 들어서면서부터 한탄을 내뱉는다. 뭔가를 아는 듯 하면서도 곧이 말하지 않고 말을 돌리는 테이레시아스의 모습에 오이디푸스는 그를 비난하고, 결국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가 찾는 살인자가 곧 오이디푸스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미 화가 나있던 오이디푸스는 이를 헛소리로 치부해 넘기고,[9]크레온이 테이레시아스를 이용해 자신을 범인으로 몰고 왕좌를 차지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10]테이레시아스는 내친 김에 살인자가 오이디푸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함과 동시에, 그가 이방이 아닌 테바이 출신이며, 이내 장님이 되고 추방당해 이방을 떠돌게 될 것을 모두 예언하며 떠난다.
크레온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정죄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이디푸스 앞에 달려온다. 아까 일로 화가 나있던 오이디푸스는 당장 크레온을 비난하나, 크레온은 이미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에게 좋은 대접을 받고 있는 자신이 뭐하러 통치를 한답시고 왕위를 노리겠냐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고, 심지어 크레온을 추방하거나 또는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다. 이 상황에 이오카스테가 끼어들어 둘을 중재하며 오이디푸스에게 진정하고 크레온을 믿어달라 호소한다. 테바이의 원로도 그녀의 의견에 합세하여 오이디푸스를 진정시키고, 크레온은 자리를 뜬다.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테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이오카스테는 '아들에게 죽을 것이란 예언을 들었지만 실제론 삼거리에서 강도(들)[11]에게 죽은 선왕 라이오스'의 사례를 들어 예언을 곧이 곧대로 들을 필요는 없다고 위로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그 사례를 듣고 더욱 동요하게 되는데, 자신이 마차가 다니는 삼거리에서 사람들을 죽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오카스테에게서 당시의 정황을 따져 묻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들은 예언의 내용과 자신이 죽인 사람들 중에 라이오스가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12]고백하고 두려움에 떨게 된다. 하지만 원로들과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에게 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하인에게 사건의 전모를 들을때까지 희망을 가지라고 위로한다. 이오카스테의 말에 따르면, 그 하인은 양치기로 라이오스 왕이 죽을 때 도망쳤다가,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걸 보고 이오카스테에게 부탁해서 땅을 받아 먼 곳의 목장으로 보내달라 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라이오스의 아이는 진작에 죽었다며 오이디푸스를 위로한다. 그러자 오이디푸스는 사람을 보내 그 하인을 부른다.
그 사이 코린토스의 사자가 테바이의 궁전에 도착해서 코린토스의 왕인 폴뤼보스가 죽었으며 코린토스인들이 아들인 오이디푸스를 왕으로 세웠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소식을 들은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를 위로하고 그도 예언이 믿을 게 못 된다며 안심하나, 그래도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찝찝했기 때문에 코린토스의 왕위를 거절한다. 이 말을 들은 사자는 의아해하며 오이디푸스가 폴뤼보스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다. 그가 바로 국경에서 갓난 아기였던 오이디푸스를 주워온 양치기였던 것이다. 그에게 오이디푸스를 넘겨준 다른 양치기가 있다는 말을 사자에게서 들은 오이디푸스는 그 양치기가 생존자인 그 하인과 동일인물인지를 이오카스테에게 묻는다. 사태를 직감한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에게 이제 더 이상 사건을 추적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나, 아직 이오카스테가 자기 어머니라고까지는 상상도 못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천한 혈통으로 밝혀졌을 경우 그녀의 위신이 깎일 것을 이오카스테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오해하여 조사를 강행한다.[13]이오카스테는 절망하며 먼저 집으로 돌아간다.
숨어 살던 그 하인이 궁전에 도착했고, 원로들과 사자는 그가 바로 그 하인/양치기임을 증언해준다. 오이디푸스와 사자의 질문에 응답하던 하인은 사태가 심각함을 눈치채고 테이레시아스처럼 더 이상 말하기를 거부한다. 오이디푸스의 협박에 결국 하인은 모든 사실을 고하고, 이제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으며 어머니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 오이디푸스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내 전령이 오이디푸스의 집에서 급한 소식을 갖고 테바이의 원로들에게 찾아온다.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자식들을 낳은 침대에서 울부짖다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뒤이어 그 광경을 보게 된 오이디푸스는 그녀의 옷에서 브로치를 뽑아 자신의 눈알을 찔렀다는 소식이었다. 뒤이어 집에서 오이디푸스가 나와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 원로 중 하나는 어째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묻는다.
오, 무서운 일을 행한 이여, 그대는 어찌 감히 그같이 그대 눈빛을 꺼 버리셨습니까? 대체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습니까? 그것은아폴론이었소, 아폴론이오, 친구여. 나의 불행을, 불행을. 나의 고통을 완성한 것은. 하지만 눈을 직접 찌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가련한 나 자신이었소. 왜 그랬냐 하면 ― 내가 눈을 뜨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겠소? 앞을 보더라도 아무런 즐거울 게 없을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 왕』, 「1327~1335행」, 소포클레스, 강대진 역
이후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신을 죽이거나 추방해달라고 요청한다. 때 마침 크레온이 도착하는데, 크레온은 오이디푸스에게 이전의 일들은 따지지 않을 테니 이런 모습을 밖에 보이지 말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말한다. 예상과 다른 크레온의 대접[14]에도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추방해달라고 하며 이오카스테의 장례와 자신의 두 아들 및 두 딸의 장래를 맡긴다. 이에 크레온은 두 딸을 오이디푸스에게 데려오며 셋은 서로 부둥켜 안고 흐느껴 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패륜으로 인해 망쳐진 딸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그들에게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라 당부한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 불행 중에서 지금 여기 없는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너희들의 아비는 제 아버지를 죽였단다. 자신의 씨앗이 뿌려졌던 바로 그 여인의 밭을 갈아 아이를 낳게 하였고, 자신이 태어난 그 사람에게서 너희를 얻었단다. 이러한 비난을 너희는 받을 것이다. 그러니 이후에 누가 너희와 결혼해 주겠느냐?
『오이디푸스 왕』, 「1496~1500행」, 소포클레스, 강대진 역
이후 딸들과 같이 도시를 떠나려던 오이디푸스는 크레톤의 제지에 의해 결국 혼자 추방당하게 된다. 테바이의 원로들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합창하며 극이 끝난다.
회수가 제대로 안된 떡밥이 있는데, 이오카스테는 유일한 생존자가 살해범은 확실히 다수였다고 했다며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킨다. 뒤이은 생존자와의 대화에선 오이디푸스의 출생의 비밀이 확인되고, 그것만으로 모든 의문이 종결된다. 살인사건 얘기는 나오지도 않고, 어째서 생존자가 강도의 수가 여럿이라 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앞서 오이디푸스가 고백한 살인의 정황이 라이오스의 죽음과 완전히 맞아떨어지고 있으므로, 단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단순한 오류일수도 있는 부분[15]에 매달리는 오이디푸스의 기구한 신세를 강조하는 요소로 볼 수 있다.
아직 사건의 전모가 완전히 드러나기 전, 라이오스가 죽음을 당한 정황이 자신이 길가던 건방진 노인네를 때려죽인 정황과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의 대사에는 "다만 내가 가진 희망은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라이오스 왕이 '강도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뿐이다. 나 혼자는 '여러 사람들'이 될 수 없지 않으냐?"라고직접적으로언급되고, 이오카스테 역시 최악의 상황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이디푸스의 이 말에 맞장구치며 오이디푸스와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 부분은 <파멸적인 진실이 시시각각 그 전모를 드러내며 자신을 얽죄어오는 상황> 에서 <고작 말 실수나 전달 과정의 오류에 불과한 사소한 문제를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치이며, 이를 통해 <당면한 파멸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에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장치 본래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근현대추리소설의 작법에 따라 본다면 <범인은 여러 명이라는 증언이 있었는데, 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은 사건 당시 혼자였다>는 것은 해당 인물이 범인이라는 추리에 대한 강력한 반증으로써[16]이에 대한 반증이나 설명, 논파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로 범인이 드러나고 작품이 결론지어진다면 이는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트리는 중요 떡밥 미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은 '근현대 추리소설'이 아니라 '고전 그리스 비극'이고, 그 주제는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밝혀내는 추리극>이 아니라 <어떠한 영웅이라도 운명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이며 상기된 바와 같이 이 장치는 파멸의 운명 앞에 놓인 주인공의 마지막 희망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이 현대 추리물을 연상시키는 강력한 미스테리 스릴러적 경향까지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장르를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