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승원음(一乘圓音)이다. 불이문 통과한 구도자의 법열이 소리로 화해 울린다고 한다. 아직 불이문에 이르지 못한 구도자에게 용기와 청량을 북돋고 일주문 바깥에서 허덕이는 중생 번뇌를 씻어주기 위함이다. 부처님 원음(圓音)을 대신해서 토해내고 있는 게다. 모두 제각기 자신의 귀로 불음(佛音)을 듣는다. 마음 그릇에 따라 불음을 담는다.
석가모니불이 『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을 뜻하는 전각으로, 불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이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는 곳임을 상징한다. 따라서 진신인 사리를 모시고 있는 이 불전에는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佛壇)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불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서의 석가모니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 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사리(舍利)는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시신(屍身, Śarīra: शरीर)을 가리키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중국 문화권에서 불교를 받아들일 때 고승이나 여래의 시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기 위해 번역할 때 일부러 음역하였다. 이미 신라시대 문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산스크리트어의 본디 의미와 달라졌다.
불교계에서는 크게 사리를 진신사리(眞身舍利)와 법신사리(法身舍利)[1], 그리고 승사리(僧舍利)로 나눈다.
진신사리는 석가모니의 실제 유해, 법신사리는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의 또다른 몸이라 하여 불경을 사리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반대중에게 다짜고짜 '사리'라고 하면 대개는 고승을 화장하면 나온다는 승사리(僧舍利)를 떠올린다. 아니, 한국 불교계에서도 승려의 시신을 높여서 법구(法軀)라고 부름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심지어 불자들조차도 '사리'라고 하면 보통은 화장하면 나오는 구슬 같은 승사리를 떠올린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펼친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을 뜻하는 전각으로 석가모니 사후에 와서는 그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 탑, 암자 등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보통 절과 보궁을 헷갈려 통도사 절 자체를 적멸보궁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틀린말은 아니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절 자체가 적멸보궁이 아니라, 절에서도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장소를 일컬어 보궁이라 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진신사리라고 하며, 이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절에서는 석가모니, 즉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여 다른 부처님을 상징할 수 있는 불상이나 조각을 절에 두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절의 시설은 전(殿)이나 각(閣)으로 나타내지만, (대웅전, 삼신각) 진신 사리를 봉안한 절은 보궁이라 하여 궁(宮)으로 높여 부른다. 적멸보궁은 여러 불교 문화재 중에서도 그 가치가 두드러지는 것[1]이라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 있는 적멸보궁 중 가장 유명한 5개의 보궁을 꼽아 5대 적멸 보궁[2]이라 하는데영축산통도사의 적멸보궁,오대산중대(中臺)상원사에 있는 적멸보궁,사자산법흥사 (영월군)(法興寺)에 있는 적멸보궁, 정선 태백산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설악산인제봉정암 한국 최고높이 사찰(鳳頂庵, 원효대사관련)에 있는 적멸보궁 등이다. 이중 태백산 정선 정암사는 임진왜란기 사명대사가 왜적의 탈취에 대비해 분산해 일부 옮겨온 것이다.
각각의 보궁과 관련된 전설은 모두 자장율사가 중국 당나라 유학후 당고종기 승려로 현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진신사리 100여과, 경전을 받으면서 시작한다. 해동에 불법을 밝히라는 보살의 말을 들은 후 율사는 친히 신라로 건너와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알리는 일에 앞장 서게 된다.
각각의 적멸보궁마다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용과 봉황 등 전설의 동물들이 나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체의 상징과 유래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설화를 설명하고자 한다.[3]
절에서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직역하면 '온갖 번뇌과 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궁전'이라는 뜻이다. 이는 석가모니가 적멸의 낙을 누리며 안식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석가모니가화엄경을 설한 중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의 적멸도량(寂滅道場)에서 유래하였다.
석가모니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으므로 따로불상을 봉안하지 않고불단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대신 적멸보궁의 바깥쪽에사리탑을 세우거나 계단(戒壇)을 만들기도 한다.
탑파(塔婆), 또는 파고다(Pagoda)는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에 어원을 둔 단어로 석가모니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일종의 무덤 건축물을 의미한다. 불탑(佛塔) 혹은 줄여서 탑(塔)이라고도 한다.
역사
탑의 기원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그 사리를 보관한 무덤인데, 이후 석가모니의 사리가 여러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네모난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의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를 따랐다. 이 구조는 탑이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중국의 목조건축양식 혹은 벽돌건축양식과 만나 둥근 구조물과 상륜부는 축소되어 탑의 지붕 위에 장식처럼 얹히게 되었다. 이들을 각각 목탑양식, 전탑양식이라 부른다. 이 두 양식이 다시 한국으로 전해져 황룡사, 미륵사, 분황사의 탑이 만들어졌고 다시 두 양식이 혼합되어 한국 고유의 석탑양식이 만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감은사와 불국사의 탑이다. 석탑양식은 고려조까지 계속 이어졌고 고려 중기 이후 원의 영향으로 경천사 십층석탑 등이 만들어졌다. 일본으로 전파된 탑은 목조건축이 발달한 일본의 문화에 따라 목탑양식이 그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탑은 본래 석가모니의 사리인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들어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탑의 수가 늘어나자 한정된 수의 진신사리로는 수요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법신사리(法身舍利)로써 진신사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1] 법신사리는 불경·불상·옷·발우·지팡이·좌구(坐具)·보석 등이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모래·풀·대나무·나뭇가지도 될 수 있다.[2]
구조
탑은 그 역사에서 비롯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구조를 가지는데 가장 아래쪽의 기단부와 탑의 몸체를 이루는 탑신부,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상륜부가 그것이다.
기단부는 다시 상대기단과 하대 기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경우에 따라 하대 기단은 생략되기도 한다. 탑신부는 탑의 중심이 되는 부분으로 탑의 층수를 결정한다. 상륜부는 노반, 복발, 용주, 보좌 등등의 여러 부분으로 세분된다.
아소카왕은마우리아 왕조를 창건한찬드라굽타의 손자로, 왕자 시절부터 부왕(父王)빈두사라의 팽창 정책을 도와 명성을 쌓아 나갔다. 즉위 후 8년이 되었을 때 동남 벵골만 해안에 위치한 칼링가(Kalinga)국을 무력으로 정복하였다. 이로써마우리아 왕조는 제3대 아소카왕 시대(약 기원전 273~232년)에 전성기를 맞았다. 아소카왕 시대에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인도 아셈주 지역,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지역을 제외한 인도 남부 케랄라주에 이르렀다.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인도아대륙(亞大陸)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한 것이다.[2]
호불(護佛) 정책
무력에 의한 정복전쟁이 불러온 참상에 죄책감을 느낀 아소카왕은 무력정복 방침을 버리고 불법(darma)에 의한 덕치주의(德治主義)를 추구하였다. 그는 상용어인 팔리(Pali)어로 된 불경을 수집하고 10년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도처에 불탑을 세우고 불법을 역설하였다. 또한 정책이나 칙령·법령 등을 새긴석주(石柱)를 전국 30여 소에 세웠다. 높이 40~50척(13~16m)에 무게가 최소한 50~60톤이나 나가는 이석주는 뛰어난 조각예술로 장식되었다.[3]이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인마우리아 왕조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유물이자, 오늘날 인도를 대표하는 국가 상징이기도 하다.[4] 아소카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무엇보다도 불교를 지방(북인도) 종교에서 세계적 종교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는 스리랑카,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 유라시아 여러 지역과 나라에 불교 포교단을 파견하였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두 차례나 왕자마헨드라(Mahendra)와 딸산가미트라(Sanghamitra)를 파견해 포교에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스리랑카는 남방불교(소승불교)의 근거지가 되어 여기서부터 미얀마, 타이, 수마트라, 자바 등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5]
황룡사 건축
경주 황룡사건축 당시 아소카왕과 관련된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져 내려온다. 573년(신라 진흥왕 34) 3월 하곡현(河曲懸) 사포(絲浦)에 서역에서 온 큰 배가 닿았다. 이 배에는 인도의 아소카왕이 보낸 편지와 황금 3만푼, 황철 5만7,000근이 실려 있었다. 편지에는 아소카왕이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황금과 황철을 배에 띄워 보내면서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장육존상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에는장육상의 모형 불상도 함께 실려 있었다. 이에왕은 황금과 황철로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들었으며, 모형 불상은 사포 동쪽 부근의 깨끗한 곳을 골라 절을 짓고 모셨다.[6]
지극히 커도 작은 것과 동일하여, 가도 없고 밑도 없고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이 큰 것과 같다'함과 '지극히 큰 것이 작은 것과 같다'함은 쌍조(雙照)를 말한 것이며, '경계가 끊어졌다'함과 '끝과 겉을 볼 수 없다'함은 쌍차를 말한 것으로 모두 양변을 여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면 둘 아닌 세계(不二世界)에 들어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읍니다.
68.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니
有卽是無요 無卽是有니 유즉시무 무즉시유
있음과 없음이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이 가장 통하기 어려우나 진여법계에서는 모든 것이 원융하여 무애자재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69. 만약 이 같지 않다면 반드시 지켜서는 안되느니라
若不如此인댄 不必須守니라 약불여차 불필수수
았음과 없음이 둘이 아닌 진여법계를 우리가 실제로 바로 깨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인 둘 아닌 세계로 바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하기 전에는 불법(佛法)이라 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70.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이니
一卽一切요 一切卽一이니 일즉일체 일체즉일
하나는 작은 하나이며 일체는 커다란 전체입니다. 진여법계에서는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바로 하나로서 하나와 많음이 서로서로 통하여,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정체가 바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71. 다만 능히 이렇게만 된다면 마치지 못할까 뭘 걱정하랴.
但能如是하면 何慮不畢가 단능여시 하려불필
일체 진리를 깨치고 나면 일체 원리를 모두 성취하여 버렸다는 말이니, 결국 이것은 우리의 자성자리, 곧 법계실상(法界實相)을 얘기한 것입니다.
63.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捨妄心取眞理(사망심취진리)여
取捨之心(취사지심)이 成巧僞(성교위)로다
있음[有]을 버리고 공(空)을 취하려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고 한다면 이것도 양변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공부를 성취하고 중도를 바로 알려면 버리고 취하는 취사심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는 것도 병이고 진리를 버리고 망상을 취하는 것도 모두가 병이므로 진리와 망상을 한꺼번에 다 버려야만 중도실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지, 진리와 망상 어느 것에든지 집착한다면 전부가 다 병이므로 중도실상은 영원토록 모르는 것입니다. 양변을 다 버려서 쌍차(雙遮)가 되면 쌍조(雙照)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면 영원토록 중도를 모르게 되니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불법을 성취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64.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學人(학인)이 不了用修行(불료용수행)하니
眞成認賊將爲子(진성인적장위자)로다
'배우는 사람이 잘 모르고 수행한다'는 것은 망상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는 것과 같이 공부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참된 중도정견이 아니고 바른 길이 아니므로 그렇게 공부하면 어떻게 되느냐? 도적놈을 인정하여 자기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버리고 망상을 취하려 하든지 망(妄)을 버리고 진리를 취하려 하든지간에 양변에 집착하기만 하면 변견이 되어서 불법과는 정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중도를 정등각해서 바른 길로 가려면 진(眞),망(妄)을 다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한쪽으로 집착만하면 도적놈을 자식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법을 절대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진(眞),망(妄)의 양변을 다 버리고 중도를 정등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버리고 망을 취하거나 망을 버리고 진리를 취한다고 하는 그 취사심은 왜 생기는 것인가?
65.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損法財滅功德(손법재멸공덕)은
莫不由斯心意識(막불유사심의식)이라
'법의 재물을 손해내고 공덕을 없애는 병은 심,의,식에 있다'는 말입니다. 심(心)은 제팔 아뢰야식, 의(意)는 제칠 말라식, 식(識)은 제육 의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통팔식(通八識) 전체를 말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여 법의 재물을 성취하고 공덕을 완성시키려면 근본 장애물인 심,의,식의 근본을 뽑아 버려야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붙어 있으면 절대로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종에 있어서 공부라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분별의식인 제육 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중간의식인 제칠 말라식과 제팔 아뢰야식의 무기무심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심이 도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두터운 관문이 격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 망상을 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무기무심인 제팔 아뢰야식까지 완전히 버려야만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고 자성을 바로 깨친 것이며, 중도를 성취한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심,의,식의 구름이 진여본성을 덮어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이 심,의,식의 구름부터 걷어 버려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히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