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 乘 起 信 論

馬鳴菩薩 造

梁真諦三藏 譯

 

一. 귀경(歸敬)과 술의(述意)

二. 논(論)의 체(體)를 정립함

1. 인연분(因緣分)

2. 입의분(立義分)

3. 해석분(解釋分)

  (1) 정의(正義)를 현시(顯示)함

    ① 먼저 뜻을 풀이함

      A. 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

         a. 진여문(眞如門)

         b. 생멸문(生滅門)

           가. 널리 풀이함

             ㄱ) 심생멸(心生滅)  

                 * 각의(覺義)

                 * 불각의(不覺義)  

             ㄴ) 생멸인연(生滅因緣)

             ㄷ) 생멸상(生滅相) 

           나. 훈습론(熏習論) 

             ㄱ) 염법(染法) 훈습

             ㄴ) 정법(淨法) 훈습

      B. 의장문(義章門)을 해석함

        a. 체상(體相) 이대(二大)

        b. 용대(用大)  

    ②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감

 

  (2) 사집(邪執)을 대치함 

    ① 인아견(人我見)

    ② 법아견(法我見)

  (3) 도(道)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함

    ① 信成就發心

    ② 解行發心

    ③ 證發心

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1) 시문(施門)‧계문(戒門)‧인문(忍門)‧진문(進門)

  (2) 지관문(止觀門)

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三. 총결회향(總結廻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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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乘 起 信 論

一. 귀경(歸敬)과 술의(述意)

歸命 盡十方 最勝業遍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爲欲令衆生 除疑捨邪執 起大乘正信 佛種不斷故

온 시방(十方)에서 가장 수승한 업(業)과 변지(徧知)를 갖추시고, 색(色)이 걸림이 없이 자재(自在)하신 구세(救世)의 대비(大悲)하신 이와 및 저 신체상(身體相)의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바다와 한량없는 공덕을 갖춘 이의 여실한 수행 등에게 귀명(歸命)하옵나니,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을 제거하고 잘못된 집착을 버리게 하여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불종(佛種)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위한 까닭이다.

 

二. 논(論)의 체(體)를 정립함

論曰. 有法能起摩訶衍信根. 是故應說.

논하기를, 법이 대승의 신근(信根)을 잘 일으키므로, 이 때문에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다.

 

1. 인연분(因緣分)

說有五分. 云何爲五.

一者因緣分. 二者立義分. 三者解釋分. 四者修行信心分. 五者勸修利益分.

初說因緣分.

설명함에 다섯 가지 구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분(因緣分)이요, 둘째는 입의분(立義分)이요, 셋째는 해석분(解釋分)이요, 넷째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요, 다섯째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이다.

처음은 인연분을 설하다.

 

問曰. 有何因緣而造此論.

答曰. 是因緣有八種. 云何爲八.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二者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 令諸衆生正解不謬故.

三者爲令善根成熟衆生於摩訶衍法堪任不退信故. 

四者爲令善根微少衆生. 修習信心故.

五者爲示方便消惡業障善護其心. 遠離癡慢出邪網故.

六者爲示修習止觀. 對治凡夫二乘心過故.

七者爲示專念方便. 生於佛前必定不退信心故.

八者爲示利益勸修行故. 

有如是等因緣. 所以造論.

 

묻기를,

“어떤 인연이 있어 이 논을 지었는가?”

대답하기를,

“이 인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인연의 총상(總相)이니,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여의고 궁극적인 즐거움을 얻게 하기 위함이지, 세속의 명리(名利)와 공경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의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여 틀리지 않도록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善根)이 성숙한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법을 감당하여 신심을 퇴전(退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는 선근이 미세한 중생으로 하여금 신심을 수행하여 익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섯째는 방편(方便)을 보여서 악업장(惡業障)을 없애서 그 마음을 잘 호위하고,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멀리 여의어 사악한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는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수습함을 보이어 범부(凡夫)와 이승(二乘)의 마음의 허물을 대치(對治)하기 위해서이다.

일곱째는 염불(念佛)에 전일(專一)하는 방편을 나타내어 부처님 앞에 왕생(往生)하여 반드시 절대로 신심을 퇴전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 수행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지은 것이다.”

 

問曰. 修多羅中具有此法 何須重說.

答曰. 修多羅中雖有此法. 以衆生根行不等受解緣別.

所謂如來在世衆生利根. 能說之人色心業勝. 圓音一演異類等解. 則不須論. 若如來滅後. 或有衆生能以自力廣聞而取解者. 或有衆生亦以自力少聞而多解者. 或有衆生無自心力因於廣論而得解者. 自有衆生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總持少文而攝多義能取解者.

如是此論.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 應說此論.

묻기를,

“경 가운데 이러한 법이 갖추어 있는데, 어찌하여 거듭 설명해야 하는가?”

답하기를,

“경 가운데에도 이러한 법이 있긴 하나 중생의 근기와 행동이 같지 않으며, 받아서 이해하는 연(緣)도 다르다. 이른바 여래가 세상에 계실 적에는 중생의 근기가 예리하고 설법하는 사람도 색(色)‧심(心)의 업이 수승하여 원음(圓音)으로 한 번 연설하매 다른 종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므로 논을 필요로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여래가 돌아가신 후에는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널리 듣고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혹 어떤 중생은 자력으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이가 있으며, 혹 어떤 중생은 자심력(自心力)이 없어서 광론(廣論)에 의하여 이해하게 되는 사람도 있으며, 또한 어떤 중생은 다시 광론의 글이 많음을 번거롭게 여겨 마음으로 총지(總持)와 같이 글의 분량이 적으면서 많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하여 그런 것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이 논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한없는 뜻을 총괄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논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2. 입의분(立義分)

已說因緣分. 次說立義分.

摩訶衍者. 總說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法. 二者義.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 依於此心顯示摩訶衍義.

何以故. 是心眞如相. 卽示摩訶衍體故. 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

所言義者. 則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體大. 謂一切法眞如平等不增減故.

二者相大. 謂如來藏具足無量性功德故.

三者用大.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

一切諸佛本所乘故. 一切菩薩皆乘此法到如來地故.

 

이미 인연분(因緣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입의분(立義分)을 말할 것이다.

대승이란 총괄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을 말함이니 이 마음이 곧 일체의 세간법(世間法)과 출세간법(出世間法)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하여 대승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의 진여상(眞如相)이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고, 이 마음의 생멸인연상(生滅因緣相)이 대승 자체의 상(相)‧용(用)을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의(義)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체대(體大)니, 일체의 법은 진여로서 평등하여 증감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상대(相大)니, 여래장(如來藏)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고, 셋째는 용대(用大)니, 일체의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善因果)를 잘 내기 때문이다. 일체의 여러 부처가 본래 의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모두 이 법에 의거하여 여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3. 해석분(解釋分)

已說立義分. 次說解釋分.

解釋分有三種. 云何爲三.

一者顯示正義. 二者對治邪執. 三者分別發趣道相.

 

이미 입의분(立義分)을 설명하였으니 다음에는 해석분(解釋分)을 설명하겠다.

해석분에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현시정의(顯示正義)요, 둘째는 대치사집(對治邪執)이며, 셋째는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다.

 

(1) 정의(正義)를 현시(顯示)함

① 먼저 뜻을 풀이함

A. 법장문(法章門)을 해석함

현시정의(顯示正義). 

顯示正義者. 

依一心法. 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心眞如門. 二者心生滅門. 是二種門皆各總攝一切法.

此義云何. 以是二門不相離故.

일심법(一心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무엇이 둘인가? 첫째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이요, 둘째는 심생멸문(心生滅門)이니, 이 두 가지 문이 모두 각각 일체의 법을 총괄하고 있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이 두 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a. 진여문(眞如門)

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 所謂心性不生不滅. 一切諸法唯依妄念而有差別. 若離妄念則無一切境界之相.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相離名字相離心緣相. 畢竟平等無有變異不可破壞. 唯是一心故名眞如. 以一切言說假名無實. 但隨妄念不可得故.

심진여(心眞如)란 바로 일법계(一法界)중의 대총상(大總相) 법문(法門)인 체(體)이니, 이른바 심성(心性)이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지만 일체의 모든 법이 오직 망념(妄念)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념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상(境界相)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언설상(言說相)을 여의었으며 명자상(名字相)을 여의었으며 심연상(心緣相)을 여의어서,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一心)일 뿐인 것이니, 그러므로 진여라 이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언설(言說)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요, 다만 망념을 따른 것이어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言眞如者. 亦無有相. 謂言說之極因言遣言.

此眞如體無有可遣. 以一切法悉皆眞故. 亦無可立. 以一切法皆同如故.

當知一切法不可說不可念故. 名爲眞如

 

진여라 말한 것도 상(相)이 없으니 이는 언설(言說)의 궁극은 말에 의하여 말을 버리는 것임을 이르는 것이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다 참이기 때문이며, 또한 주장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의 법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체의 법은 말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 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問曰. 若如是義者. 諸衆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 若知一切法雖說無有能說可說. 雖念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名爲得入.

묻기를,

“만약 이와 같은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수순(隨順)하여야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될 수 있는가?”

답하기를,

“만약 일체의 법이 설명되기는 하나 설명할 수도, 설명할 만한 것도 없으며, 생각되기는 하나 역시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는 줄 안다면 이를 수순(隨順)이라고 하며, 만약 생각을 여읜다면 정관(正觀)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復次眞如者. 依言說分別有二種義. 云何爲二.

一者如實空. 以能究竟顯實故.

二者如實不空. 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

 

다시 이 진여란 언설에 의하여 분별함에 있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如實空)이니 필경에는 실체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여실불공(如實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의 공덕을 구족(具足)하고 있기 때문이다.

 

所言空者. 從本已來一切染法不相應故. 謂離一切法差別之相. 以無虛妄心念故. 當知眞如自性. 非有相非無相. 非非有相非非無相. 非有無俱相. 非一相非異相. 非非一相非非異相. 非一異俱相. 乃至總說. 依一切衆生以有妄心念念分別. 皆不相應故. 說爲空. 若離妄心實無可空故.

 

공(空)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부터 일체의 염법(染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일체법의 차별되는 모양을 여읨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허망(虛妄)한 심념(心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여의 자성(自性)은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는 것도 아니며, 모양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요 모양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유(有)‧무(無)를 함께 갖춘 모양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같은 모양도 아니요 다른 모양도 아니며, 같은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요 다른 모양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고 다른 모양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이리하여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일체의 중생이 망심(妄心)이 있음으로 해서 생각할 때마다 분별하여 다 진여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空)이라 말하지만, 만약 망심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所言不空者. 已顯法體空無妄故. 卽是眞心常恒不變淨法滿足. 故名不空. 亦無有相可取. 以離念境界唯證相應故.

불공(不空)이라 말하는 것은 이미 법체가 공(空)하여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이는 진심(眞心)이며, 이 진심은 항상 하여 변하지 않고 정법(淨法)이 만족하기 때문에 불공(不空)이라 이름 한다. 그러나 또한 취할만한 상(相)이 없으니, 망념을 여읜 경계는 오직 증득함으로써만 상응하기 때문이다.

 

b. 생멸문(生滅門)

 

가. 널리 풀이함

ㄱ) 심생멸(心生滅)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非一非異. 名爲阿梨耶識.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에 의하므로 생멸심이 있는 것이니, 이른바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생멸과 더불어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을 이름 하여 아라야식(阿藜耶識)이라고 하는 것이다.

 

此識有二種義. 能攝一切法生一切法.

이 식(識)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일체법을 포괄하며, 일체법을 낼 수 있는 것이다.

 

云何爲二. 

一者覺義. 二者不覺義.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각(覺)의 뜻이고, 둘째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 각의(覺義)

所言覺義者. 謂心體離念. 離念相者等虛空界無所不遍. 法界一相卽是如來平等法身. 依此法身說名本覺. 何以故. 本覺義者. 對始覺義說. 以始覺者卽同本覺. 始覺義者. 依本覺故而有不覺. 依不覺故說有始覺.

각(覺)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심체(心體)가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함이니, 망념을 여읜 상(相)이란 허공계(虛空界)와 같아서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어 법계일상(法界一相)이며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에 의하여 본각(本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본각의 뜻이란 시각(始覺)의 뜻에 대하여 말한 것이니 시각이란 바로 본각과 같기 때문이며, 시각의 뜻은 본각에 의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 있으며 불각에 의하므로 시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又以覺心源故名究竟覺. 不覺心源故非究竟覺.                                                                                   

또 심원(心源)을 깨달았기 때문에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며, 심원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각이 아닌 것이다.

 

此義云何. 

如凡夫人覺知前念起惡故. 能止後念令其不起. 雖復名覺卽是不覺故.

如二乘觀智初發意菩薩等. 覺於念異念無異相. 以捨麤分別執著相故. 名相似覺.

如法身菩薩等. 覺於念住念無住相. 以離分別麤念相故. 名隨分覺.

如菩薩地盡. 滿足方便一念相應. 覺心初起心無初相. 以遠離微細念故. 得見心性. 心卽常住名究竟覺.

是故修多羅說. 若有衆生能觀無念者. 則爲向佛智故.

 

이 뜻이 무엇인가?

범부 정도의 사람은 먼저의 생각에 악이 일어난 것을 알기 때문에 뒤에 일어나는 생각을 그치게 하여 그 악의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는 또한 각(覺)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바로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二乘)의 관지(觀智)와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이상(異相)을 깨달아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이는 추분별집착상(麤分別執着相)을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상사각(相似覺)이라 이름 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등 정도의 사람은 생각의 주상(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이 없으니, 이는 분별추념상(分別麤念相)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수분각(隨分覺)이라 이름 한다.

보살지(菩薩地)가 다한 정도의 사람은 방편을 만족시켜서 일념(一念)이 상응하고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상(相)을 깨달아 마음에 초상(初相)이 없으니, 이는 미세념(微細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마음이 곧 상주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이름 한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만약 어떤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곧 불지(佛智)에 향함이 된다’고 말하였다.

 

又心起者. 無有初相可知. 而言知初相者. 卽謂無念. 是故一切衆生不名爲覺. 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離念故. 說無始無明. 若得無念者. 則知心相生住異滅. 以無念等故. 而實無有始覺之異. 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立. 本來平等同一覺故

또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은 알 만한 초상(初相)이 없는 것이며, 그런데도 초상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無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일체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 하지 못하는 것은 본래부터 염념이 상속하여 아직 망념을 떠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니, 이를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하는 것이다. 만약 망념이 없게 되면 심상(心相)의 생주이멸을 알게 되니무념(無念)과 같아지기 때문이며 실로 시각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니, 왜냐하면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모두 자립함이 없으며 본래 평등하여 각(覺)과 같기 때문이다.

         

復次本覺隨染. 分別生二種相. 與彼本覺不相捨離. 云何爲二.

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

智淨相者. 謂依法力熏習. 如實修行. 滿足方便故. 破和合識相. 滅相續心相. 顯現法身. 智淳淨故. 此義云何. 以一切心識之相皆是無明. 無明之相不離覺性. 非可壞非不可壞. 如大海水因風波動. 水相風相不相捨離. 而水非動性. 若風止滅動相則滅. 濕性不壞故. 如是衆生自性淸淨心. 因無明風動. 心與無明俱無形相不相捨離. 而心非動性. 若無明滅相續則滅. 智性不壞故.

不思議業相者. 以依智淨. 能作一切勝妙境界. 所謂無量功德之相常無斷絶. 隨衆生根自然相應. 種種而見得利益故.

 

또한 본각이 염(染)을 따라 분별하여 두 가지의 상(相)을 내지만, 저 본각과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아니하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정상(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다.

지정상이 법력의 훈습에 의하여 여실히 수행하여 방편을 만족하기 때문에 화합식상(和合識相)을 깨뜨리고 상속심상(相續心相)을 없애어 법신을 현현(顯現)하여 지혜가 맑고 깨끗하게 됨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모든 심식(心識)의 상이 다 무명이니, 무명의 상이 본각의 성질을 여의지 않아서 파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파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에 의하여 물결이 움직일 때, 물의 모양과 바람의 모양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바람이 그쳐서 없어지면 움직이는 모양(곧 물결)은 곧 없어지나 물의 젖는 성질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도 무명의 바람에 의하여 움직일 때 마음과 무명이 모두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마음은 움직이는 성질이 아닌지라 만일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나 지혜의 본성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부사의업상(不思議業相)이란 것은 지혜가 맑아짐에 의하여 모든 뛰어난 경계를 짓는 것이니 이른바 무량한 공덕의 상이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히 상응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復次覺體相者. 有四種大義. 與虛空等猶如淨鏡. 云何爲四.

一者如實空鏡. 遠離一切心境界相. 無法可現非覺照義故.

二者因熏習鏡. 謂如實不空. 一切世間境界悉於中現. 不出不入不失不壞常住一心. 以一切法卽眞實性故. 又一切染法所不能染. 智體不動. 具足無漏熏衆生故.

三者法出離鏡. 謂不空法. 出煩惱礙智礙. 離和合相淳淨明故.

四者緣熏習鏡. 謂依法出離故. 遍照衆生之心. 令修善根. 隨念示現故.

 

다음에 각체상(覺體相 : 성정본각의 체가 지니는 상)이란 것은 네 가지의 큰 뜻이 있어서 허공과 같으며, 이는 마치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공경(如實空鏡)이니, 모든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여의어서 나타낼 만한 법이 없는지라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훈습경(因熏習鏡)이니, 여실불공(如實不空)을 말한다. 일체 세간의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되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며, 잃지도 않고 깨지지도 않아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이는 일체법이 곧 진실성이기 때문이며, 또 일체의 염법이 더럽힐 수 없으니 지체(智體)는 움직이지 아니하여 무루(無漏)를 구족하여서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법출리경(法出離鏡)이니, 불공법이 번뇌애와 지애를 벗어나고 화합상을 여의어서 깨끗하고 맑고 밝게 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연훈습경(緣熏習鏡)이니, 법출리(法出離)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善根)을 닦도록 하여 (중생의) 생각에 따라 나타내기 때문이다.

 

* 불각의(不覺義)

所言不覺義者.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 不覺心起而有其念. 念無自相不離本覺. 猶如迷人依方故迷. 若離於方則無有迷. 衆生亦爾. 依覺故迷. 若離覺性則無不覺. 以有不覺妄想心故. 能知名義爲說眞覺. 若離不覺之心. 則無眞覺自相可說.

불각의 뜻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법이 하나임을 여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그 망념이 있게 된 것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망념은 자상(自相)이 없어서 본각을 여의지 않았으니, 마치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방향을 여읜다면 혼미함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와 같아서 각(覺)에 의하기 때문에 혼미하게 되었으나, 만약 각의 성질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을 것이며, 불각의 망상심이 있기 때문에 명의(名義)를 알아서 진각(眞覺)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만약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진각의 자상이라고 말할 만한 것도 없는 것이다.

 

復次依不覺故生三種相. 與彼不覺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 以依不覺故心動說名爲業. 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 以依動故能見. 不動則無見.

三者境界相. 以依能見故境界妄現. 離見則無境界.

 

다시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세 가지의 상이 생겨서 저 불각과 더불어 상응하여 여의지 않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무명업상이니, 불각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業)이라고 이름 하는 것이다. 깨달으면 움직이지 않으며 움직이면 고통이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능견상(能見相)이니, 움직임에 의하기 때문에 볼 수 있게 된 것이니, 움직이지 않는다면 볼 것이 없을 것이다.

세 번째는 경계상(境界相)이니, 능견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가 거짓 되이 나타나는 것이니 견(見)을 여읜다면 경계가 없어질 것이다.

 

以有境界緣故復生六種相. 云何爲六.

一者智相. 依於境界心起分別愛與不愛故.

二者相續相. 依於智故生其苦樂覺. 心起念相應不斷故.

三者執取相. 依於相續緣念境界. 住持苦樂心起著故.

四者計名字相. 依於妄執分別假名言相故.

五者起業相. 依於名字尋名. 取著造種種業故.

六者業繫苦相. 以依業受果不自在故.

 

경계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다시 여섯 가지의 상을 내는 것이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지상(智相)이니, 경계에 의하여 마음이 일어나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음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상(相續相)이니, 지상에 의하기 때문에 그 고락을 내어서 각심(覺心)으로 망념을 일으켜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취상(執取相)이니 상속에 의하여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해서 고락에 주지(住持)하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계명자상(計名字相)이니, 잘못된 집착에 의하여 거짓된 명칭과 언설의 상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기업상(起業相)이니 명자(名字)에 의하여 이름을 따라가면서 집착하여 여러 가지의 행동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업계고상(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아서 자재(自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 以一切染法皆是不覺相故.

무명이 모든 염법을 내고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왜냐하면 모든 염법은 다 불각상(不覺相)이기 때문이다.

 

復次覺與不覺有二種相. 云何爲二.

一者同相. 二者異相.

同相者. 譬如種種瓦器皆同微塵性相. 如是無漏無明種種業幻. 皆同眞如性相. 是故修多羅中依於此眞如義故說一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槃. 菩提之法非可修相非可作相. 畢竟無得. 亦無色相可見. 而有見色相者. 唯是隨染業幻所作. 非是智色不空之性. 以智相無可見故

異相者. 如種種瓦器各各不同. 如是無漏無明. 隨染幻差別. 性染幻差別故.

 

다시 각과 불각이 두 가지의 상이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동상(同相)이고, 둘째는 이상(異相)이다. 

동상(同相)이라고 말한 것은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모두 똑같은 미진(微塵)의 성상(性相)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無明)의 여러 가지 업환(業幻)도 다 똑같은 진여의 성상인 것이다. 이러므로 경 가운데 이 진여의 뜻에 의하기 때문에 ‘일체의 중생은 본래 열반‧보리의 법에 상주하여 들어가 있는 것이니, 이는 닦을 수 있는 상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상이 아닌지라 끝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상(色相)을 볼 만한 것이 없으되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염법의 업환(業幻)에 따라 지은 것이지 지색불공(智色不空)의 성질은 아니니 지상(智相)은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상(異相)이라고 말한 것은 여러 가지의 와기(瓦器)가 각기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수염환(隨染幻)의 차별이며 성염환(性染幻)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ㄴ) 생멸인연(生滅因緣)

復次生滅因緣者. 所謂衆生依心意意識轉故.

다음 생멸인연이라는 것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의하여 의와 의식이 전변하기 때문이다.

 

此義云何. 以依阿梨耶識說有無明.

이 뜻이 무엇인가? 아라야식에 의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하니,

 

不覺而起. 能見能現. 能取境界. 起念相續. 故說爲意.

此意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謂無明力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 依於動心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 所謂能現一切境界. 猶如明鏡現於色像. 現識亦爾. 隨其五塵對至卽現無有前後. 以一切時任運而起常在前故.

四者名爲智識謂分別染淨法故.

五者名爲相續識. 以念相應不斷故. 住持過去無量世等善惡之業令不失故. 復能成熟現在未來苦樂等報. 無差違故. 能令現在已經之事忽然而念. 未來之事不覺妄慮. 是故三界虛僞唯心所作. 離心則無六塵境界. 此義云何. 以一切法皆從心起妄念而生. 一切分別卽分別自心. 心不見心無相可得. 當知世間一切境界. 皆依衆生無明妄心而得住持. 是故一切法. 如鏡中像無體可得. 唯心虛妄.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故.

 

불각하여 일어나서 볼 수 있고 나타낼 수 있으며 경계를 취할 수 있어서, 망념을 일으켜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의(意)’라고 말하였다. 이 의는 다시 다섯 가지의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업식이라고 이름 하니, 무명의 힘으로 불각하여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니, 이를 말한 것이다.

둘째는 전식이라고 이름 하니, 움직여진 마음에 의하여 능히 볼 수 있는 상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이라고 이름 하니, 이른바 일체의 경계를 나타냄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현식도 그러하여 그 오진(五塵)을 따라서 대상이 이르면 곧 나타내어서 앞뒤가 없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임의로 일어나서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이름 하니, 염법과 정법을 분별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이라고 이름 하니, 망념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한량없는 기간의 선악의 업을 간직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의 고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게 하기 때문에 현재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고 미래의 일을 자신도 모르게 잘못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삼계(三界)는 거짓된 것이요 오직 마음이 지은 것이니, 마음을 여의면 육진(六塵)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 잘못 생각하여 생긴 것이어서 일체의 분별은 곧 자심(自心)을 분별하는 것이니,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만한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다 중생의 무명망심에 의하여 머물러 있게 되니, 이러므로 일체법은 거울 가운데의 형상과 같아서 얻을 만한 실체가 없고, 오직 마음일 뿐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의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의 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復次言意識者. 卽此相續識. 依諸凡夫取著轉深計我我所. 種種妄執隨事攀緣. 分別六塵名爲意識. 亦名分離識. 又復說名分別事識. 此識依見愛煩惱增長義故.

다음에 의식(意識)이라고 말한 것은 곧 이 상속식이 모든 범부의 집착함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아(我)와 아소(我所)를 계탁하여 여러 가지 망집(妄執)으로 일에 따라 반연하여 육진(六塵)을 분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또한 분리식(分離識)이라고도 이름하고 다시 분별사식(分別事識 : 사물을 분별하는 식)이라고도 이름 하니, 이 식이 견애번뇌(見愛煩惱)의 증장되는 뜻에 의하기 때문이다.

 

依無明熏習所起識者. 非凡夫能知. 亦非二乘智慧所覺. 謂依菩薩. 從初正信發心觀察. 若證法身得少分知. 乃至菩薩究竟地不能知盡. 唯佛窮了. 何以故. 是心從本已來自性淸淨. 而有無明. 爲無明所染. 有其染心. 雖有染心而常恒不變. 是故此義唯佛能知.

무명의 훈습(薰習)에 의하여 일어난 식(識)이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승(二乘)의 지혜로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이는 보살이 처음의 정신(正信)에서 발심하고 관찰함으로부터 저 법신(法身)을 증득한다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른다 하더라도 다 알 수는 없고 오직 부처만이 끝까지 다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청정하지만 무명이 있어서 이 무명에 의하여 물들게 되어 그 염심이 있는 것이니, 비록 염심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아니하는지라 그러므로 이러한 뜻은 오직 부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所謂心性常無念. 故名爲不變.

이른바 심성(心性)이 항상 망념이 없기 때문에 불변(不變)이라 이름하며,

 

以不達一法界故心不相應忽然念起名爲無明.

하나의 법계(法界)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이 상응하지 아니하여 홀연히 망념이 일어나는 것을 무명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染心者有六種. 云何爲六.

一者執相應染. 依二乘解脫及信相應地遠離故.

二者不斷相應染. 依信相應地修學方便漸漸能捨. 得淨心地究竟離故.

三者分別智相應染. 依具戒地漸離. 乃至無相方便地究竟離故.

四者現色不相應染 依色自在地能離故.

五者能見心不相應染. 依心自在地能離故.

六者根本業不相應染. 依菩薩盡地得入如來地能離故.

 

염심이란 여섯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상응염(執相應染)이니, 이승(二乘)의 해탈한 이와 신상응지(信相應地)의 사람에 의하여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이니, 신상응지에 의하여 방편(方便)을 수학(修學)하여 점점 버려서 정심지(淨心地)에 이르러서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셋째는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이니, 구계지(具戒地)에 의하여 점점 여의며 이에 무상방편지(無相方便地)에 이르러 구경에 여의기 때문이다. 

넷째는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이니, 색자재지(色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심자재지(心自在地)에 의하여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보살진지(菩薩盡地)에 의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不了一法界義者. 從信相應地觀察學斷. 入淨心地隨分得離. 乃至如來地能究竟離故.

일법계(一法界)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신상응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치단함을 배우고 정심지(淨心地)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여의게 되며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되어야 마침내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言相應義者. 謂心念法異. 依染淨差別. 而知相緣相同故. 不相應義者. 謂卽心不覺常無別異. 不同知相緣相故.

상응의(相應義)라 한 것은 심(心)과 염법(染法)이 달라서 염정에 의하여 차별하매 지상(知相)과 연상(緣相)이 같음을 말하기 때문이며, 불상응의(不相應義)란 곧 심(心)과 불각이 항상 별다름이 없어서 지상과 연상이 같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又染心義者. 名爲煩惱礙. 能障眞如根本智故. 無明義者. 名爲智礙. 能障世間自然業智故. 此義云何. 以依染心能見能現. 妄取境界違平等性故. 以一切法常靜無有起相. 無明不覺妄與法違故. 不能得隨順世間一切境界種種智故.

또 염심(染心)의 뜻이란 번뇌애(煩惱碍)라 이름 하는 것이니 진여의 근본지(根本智)를 막기 때문이요, 무명의 뜻이란 지애(智碍)라 이름 하는 것이니 세간의 자연업지(自然業智)를 막기 때문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염심에 의하여 볼 수 있으며 나타낼 수 있으며 잘못 경계를 집착하여 평등성을 어기기 때문이며, 일체법(一切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상이 없으나 무명불각이 망령되이 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경계에 수순(隨順)하는 여러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ㄷ) 생멸상(生滅相)

復次分別生滅相者有二種. 云何爲二.

一者麤. 與心相應故. 二者細. 與心不相應故. 又麤中之麤凡夫境界. 麤中之細及細中之麤菩薩境界. 細中之細是佛境界.

다시 생멸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추(麤)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細)니 마음과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추중의 추는 범부의 경계요, 추중의 세와 세 중의 추는 보살의 경계요, 세 중의 세는 부처의 경계이다.

 

此二種生滅. 依於無明熏習而有. 所謂依因依緣. 依因者. 不覺義故. 依緣者. 妄作境界義故. 若因滅則緣滅. 因滅故不相應心滅. 緣滅故相應心滅.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의 훈습에 의하여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인(因)에 의하며 연(緣)에 의하는 것이다. 인에 의한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고, 연에 의한다는 것은 잘못 경계를 짓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이 멸한다면 연이 멸하는 것이니, 인이 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不相應心)이 멸하고 연이 멸하기 때문에 상응심(相應心)이 멸하는 것이다.

 

問曰. 若心滅者云何相續. 若相續者云何說究竟滅.

答曰. 所言滅者. 唯心相滅非心體滅. 如風依水而有動相. 若水滅者. 則風相斷絶無所依止. 以水不滅風相相續. 唯風滅故動相隨滅非是水滅. 無明亦爾. 依心體而動. 若心體滅. 則衆生斷絶無所依止. 以體不滅心得相續. 唯癡滅故心相隨滅非心智滅.

 

묻기를,

“만약 마음이 멸한다면 어떻게 상속하며, 만약 상속한다면 어떻게 마침내 멸해 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멸한다는 것은 오직 심상(心相)만 멸하는 것이요 심체(心體)가 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바람이 바닷물에 의해서 동상(動相 : 파도)을 만드는 것이니, 만약 바닷물이 없어지면 풍상(風相)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마는 바닷물이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풍상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바람이 멸하기 때문에 동상(動相)이 따라서 멸하지만 바닷물이 멸하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무명도 또한 그러하여 심체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니, 만약 심체가 멸하면 중생이 단절되어 의지할 바가 없지만 심체가 멸하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며, 오직 치(癡 : 무명)가 멸하기 때문에 심상이 따라서 멸하지만 심지(心智)가 멸하는 것은 아니다.”

 

나. 훈습론(熏習論)

復次有四種法熏習義故. 染法淨法起不斷絶. 云何爲四.

一者淨法. 名爲眞如.

二者一切染因. 名爲無明.

三者妄心. 名爲業識.

四者妄境界. 所謂六塵.

 

다시 네 가지 법의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염법과 정법이 일어나 단절하지 않는 것이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정법(淨法)이니 진여라 이름하며,

둘째는 일체의 염인(染因)이니무명이라 이름하며,

셋째는 망심(妄心)이니 업식이라 이름하며,

넷째는 망경계(妄境界)니 이른바육진(六塵)이다.

 

熏習義者. 如世間衣服實無於香. 若人以香而熏習故則有香氣. 此亦如是. 眞如淨法實無於染. 但以無明而熏習故則有染相. 無明染法實無淨業. 但以眞如而熏習故則有淨用.

훈습의 뜻이란 세간의 의복이 실제로는 향기가 없지마는 만약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면 그 때문에 곧 향기가 있는 것과 같이, 이도 또한 이러하여 진여정법에는 실로 염(染)이 없지만 다만 무명으로 훈습하기 때문에 곧 염상(染相)이 있으며, 무명염법에는 실로 정업(淨業)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 때문에 정용(淨用)이 있는 것이다.

 

ㄱ) 염법(染法) 훈습

云何熏習起染法不斷. 

所謂以依眞如法故有於無明. 以有無明染法因故卽熏習眞如. 以熏習故則有妄心. 以有妄心卽熏習無明. 不了眞如法故不覺念起現妄境界. 以有妄境界染法緣故卽熏習妄心. 令其念著造種種業. 受於一切身心等苦.

此妄境界熏習義則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念熏習. 二者增長取熏習.

妄心熏習義則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業識根本熏習. 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

二者增長分別事識熏習. 能受凡夫業繫苦故.

無明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根本熏習. 以能成就業識義故. 二者所起見愛熏習. 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

 

어떻게 훈습하여 염법을 일으켜 단절되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염법의 인(因)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며, 훈습하기 때문에 곧 망심이 있게 된다. 망심이 있어서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법을 요달(了達)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하여 망념이 일어나 망경계를 나타낸다. 망경계의 염법의 연(緣)이 있기 때문에 곧 망심을 훈습하여 그로 하여금 염착(念着)케 하여 여러 가지 업을 지어서 일체의 신심(身心)등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 망경계 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념훈습(增長念熏習)이며 둘째는 증장취훈습(增長取熏習)이다.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업식근본훈습(業識根本熏習)이니,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辟支佛)과 일체 보살의 생멸고(生滅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는 증장분별사식훈습(增長分別事識)이니, 범부의 업계고(業繫苦)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명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훈습이니, 업식을 성취할 수 있는 뜻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소기견애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분별사식을 성취할 수 있는 뜻이기 때문이다.

 

ㄴ) 정법(淨法) 훈습

云何熏習起淨法不斷. 

所謂以有眞如法故能熏習無明. 以熏習因緣力故. 則令妄心厭生死苦樂求涅槃. 以此妄心有厭求因緣故卽熏習眞如. 自信己性. 知心妄動無前境界. 修遠離法. 以如實知無前境界故. 種種方便起隨順行不取不念. 乃至久遠熏習力故無明則滅. 以無明滅故心無有起. 以無起故境界隨滅. 以因緣俱滅故心相皆盡. 名得涅槃成自然業.

어떻게 훈습하여 정법(淨法)을 일으켜 단절시키지 않는가?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이니, 이 진여가 무명을 훈습하는 것이며 훈습하는 인연의 힘에 의하여 곧 망심(妄心)으로 하여금 생사(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涅槃)을 구하기를 좋아하게 하는 것이다. 이 망심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기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의 본성을 믿어서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일 뿐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여의는 법을 닦는다. 이리하여 앞의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수순행(隨順行)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잘못 생각하지도 아니하며, 내지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곧 멸하게 된다.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나는 것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가 따라서 멸한다. 인과 연이 다 멸하기 때문에 심상(心相)이 다 없어지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自然業)을 이룬다고 말한다.

 

妄心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分別事識熏習. 依諸凡夫二乘人等. 厭生死苦隨力所能. 以漸趣向無上道故.

二者意熏習.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인(二乘人)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함에 의하여 힘이 닿는 대로 점차로 무상도(無上道)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훈습(意熏習)이니, 모든 보살이 발심용맹(發心勇猛 : 마음을 발함이 용맹함)하여 속히 열반에 나아감을 말하기 때문이다.

 

眞如熏習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自體相熏習. 二者用熏習.

진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자체상훈습(自體相熏習)이며, 둘째는 용훈습(用熏習)이다.

 

自體相熏習者. 從無始世來具無漏法. 備有不思議業. 作境界之性. 依此二義恒常熏習. 以有力故能令衆生厭生死苦樂求涅槃. 自信己身有眞如法發心修行.

問曰. 若如是義者. 一切衆生悉有眞如等皆熏習. 云何有信無信. 無量前後差別. 皆應一時自知有眞如法. 勤修方便等入涅槃.

答曰. 眞如本一. 而有無量無邊無明. 從本已來自性差別厚薄不同故. 過恒沙等上煩惱依無明起差別. 我見愛染煩惱依無明起差別. 如是一切煩惱. 依於無明所起. 前後無量差別. 唯如來能知故. 又諸佛法有因有緣. 因緣具足乃得成辦. 如木中火性是火正因. 若無人知不假方便能自燒木. 無有是處. 衆生亦爾. 雖有正因熏習之力. 若不値遇諸佛菩薩善知識等以之爲緣. 能自斷煩惱入涅槃者. 則無是處. 若雖有外緣之力. 而內淨法未有熏習力者. 亦不能究竟厭生死苦樂求涅槃. 若因緣具足者. 所謂自有熏習之力. 又爲諸佛菩薩等慈悲願護故. 能起厭苦之心. 信有涅槃修習善根. 以修善根成熟故. 則値諸佛菩薩示敎利喜. 乃能進趣. 向涅槃道.

 

자체상훈습이란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무루법(無漏法)을 갖추고 부사의업(不思議業)을 갖추며 경계성(境界性)을 짓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뜻에 의하여 항상 훈습하여 훈습의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하여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는 줄 믿어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묻기를,

“만일 이러한 뜻과 같다면 모든 중생에게 모두 진여가 있어서 똑같이 훈습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여 한없는 전후의 차별이 있는 것인가? 모두 동시에 스스로 진여법이 있음을 알아서 방편(方便)을 부지런히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는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가이없는 무명이 있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차별되어 후박(厚薄)이 같지 않다. 그러므로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상번뇌(上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애염번뇌(我見愛染煩惱)가 무명에 의하여 차별을 일으키니, 이와 같은 일체의 번뇌가 무명에 의하여 일어난 것이어서 전후의 한량없는 차별이 있는 것이며,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불법에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는 것이니, 인연이 구족하여야 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나무 중의 화성(火性)이 불의 정인(正因)이지만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 방편을 빌리지 못하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정인(正因)의 훈습하는 힘이 있으나 만약 모든 부처, 보살, 선지식(善知識)등을 만나 그들로 연(緣)을 삼지 못한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외연(外緣)의 힘이 있으나 안으로 인(因)의 정법(淨法)이 아직 훈습의 힘을 갖지 못한 사람이라면 또한 구경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겨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인연이 구족한 이라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보살 등의 자비와 원호(願護)함을 받기 때문에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히며, 선근을 닦는 일이 성숙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의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함을 만나 차츰 일을 이루어 나아가 열반의 도에 향할 수 있는 것이다.”

 

用熏習者. 卽是衆生外緣之力. 如是外緣有無量義. 略說二種. 云何爲二.

一者差別緣. 二者平等緣.

差別緣者. 此人依於諸佛菩薩等. 從初發意始求道時乃至得佛. 於中若見若念. 或爲眷屬父母諸親. 或爲給使. 或爲知友. 或爲怨家. 或起四攝乃至一切所作無量行緣. 以起大悲熏習之力. 能令衆生增長善根. 若見若聞得利益故.

此緣有二種. 云何爲二.

一者近緣. 速得度故. 二者遠緣. 久遠得度故.

是近遠二緣. 分別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增長行緣. 二者受道緣.

平等緣者. 一切諸佛菩薩. 皆願度脫一切衆生. 自然熏習恒常不捨. 以同體智力故. 隨應見聞而現作業. 所謂衆生依於三昧. 乃得平等見諸佛故.

용훈습(用熏習)이란 곧 중생의 외연(外緣)의 힘이니, 이러한 외연에 한량없는 뜻이 있으나 대략 말하자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차별연(差別緣)이고, 둘째는 평등연(平等緣)이다.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부처와 보살 등에 의하여 처음 발의(發意)하여 비로소 구도(求道)할 때로부터 부처가 되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혹은 부처를 보기도 하고 혹은 생각하기도 함에 있어, 어떤 경우는 권속(眷屬)‧부모‧제친(諸親)이 되며, 어떤 경우는 급사(給使)가 되며, 어떤 경우는 지우(知友)가 되며, 어떤 경우는 원가(怨家)가 되며, 어떤 경우는 사섭(四攝)을 일으키며, 내지 일체의 짓는 한량없는 행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니 이는 대비(大悲)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켜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증장케 하여 혹은 보거나 혹은 들어서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이 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근연(近緣)이니 빨리 도탈(度脫)을 얻기 때문이고, 둘째는 원연(遠緣)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도탈을 얻기 때문이다. 이 근원(近遠)의 두 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증장행연(增長行緣)이고, 둘째는 수도연(受道緣)이다.

‘평등연(平等緣)’이란 일체의 모든 부처와 보살이 일체 중생을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훈습하여 항상 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는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써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응하여 업용(業用)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른바 중생이 삼매(三昧)에 의하여야 평등하게 모든 부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此體用熏習. 分別復有二種. 云何爲二.

一者未相應. 謂凡夫二乘初發意菩薩等. 以意意識熏習. 依信力故而能修行. 未得無分別心與體相應故. 未得自在業修行與用相應故.

二者已相應. 謂法身菩薩得無分別心. 與諸佛智用相應. 唯依法力自然修行. 熏習眞如滅無明故.

이 체용(體用)의 훈습을 분별함에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미상응(未相應)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 등은 의와 의식의 훈습으로 신력(信力)에 의하기 때문에 잘 수행을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無分別心)이 체와 더불어 상응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업(自在業)의 수행이 용(用)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상응(已相應)이니, 법신보살이 무분별심을 얻어 모든 부처의 지용(智勇)과 더불어 상응하여 오직 법력에 의하여 저절로 수행하게 되어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멸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復次染法從無始已來熏習不斷. 乃至得佛後則有斷. 淨法熏習則無有斷盡於未來. 此義云何. 以眞如法常熏習故. 妄心則滅法身顯現. 起用熏習故無有斷.

또한 염법(染法)은 무시의 때로부터 훈습하여 단절되지 않다가, 부처가 된 후에는 곧 단절함이 있으나, 정법훈습(淨法熏習)은 곧 단절함이 없어서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이 뜻이 무엇인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에 망심이 곧 멸하고 법신이 밝히 나타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므로 단절함이 없는 것이다.

 

B. 의장문(義章門)을 해석함

 

a. 체상(體相) 이대(二大)

復次眞如自體相者.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無有增減. 非前際生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 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 遍照法界義故. 眞實識知義故. 自性淸淨心義故. 常樂我淨義故. 淸涼不變自在義故. 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 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 名爲如來藏. 亦名如來法身

또한 진여의 자체상(自體相)이란 일체의 범부‧성문‧연각‧보살‧제불(諸佛)에게 증감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아니요,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에 늘 변함이 없어서 본래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法界)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이여,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常)‧락(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淸涼)하고 불변(不變)하고 자재(自在)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불리(不離)‧부단(不斷)‧불이(不異)‧부사의(不思議)한 불법(佛法)을 구족하고 내지 만족하여 부족한 바가 없는 뜻이기 때문에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라 이름 하는 것이다.

 

問曰. 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 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

答曰. 雖實有此諸功德義. 而無差別之相. 等同一味唯一眞如. 此義云何. 以無分別離分別相. 是故無二. 復以何義得說差別. 以依業識生滅相示. 此云何示. 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於念. 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明. 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 若心起見則有不見之相. 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 若心有動非眞識知 無有自性. 非常非樂非我非淨. 熱惱衰變則不自在. 乃至具有過恒沙等妄染之義. 對此義故. 心性無動則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 若心有起. 更見前法可念者則有所少. 如是淨法無量功德. 卽是一心更無所念. 是故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

 

묻기를,

“위에서 진여는 그 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상을 여의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진여의 체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덕(功德)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실로 이러한 모든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상이 없어서 똑같은 일미(一味)이며 오직 하나의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무분별(無分別)로 분별상(分別相)을 여의니, 이러므로 둘이 없는 것이다. 또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의 생멸상에 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일체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인지라 실로 망념이 없지만, 망심(妄心)이 있어서 깨닫지 못하여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라 하는 것이니, 심성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곧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의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견(見)을 일으키면 보지 못하는 상이 있는 것이니, 심성(心性)이 견을 여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자성이 없게 되며 상(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이리하여 열뇌(熱惱)하며 쇠변(衰變)하면 자재하지 못하며 이에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망염(妄染)의 뜻을 갖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뜻에 대(對)하기 때문에 심성이 움직임이 없으면 항하의 모래들보다 많은 모든 깨끗한 공덕상의 뜻을 가져 나타낸다. 만약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어 다시 앞의 법의 생각할 만한 것을 본다면 모자라는 바가 있을 터이지만, 이러한 정법의 무량한 공덕은 바로 일심(一心)이며,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한 것이니, 법신‧여래장이라 하는 것이다.”

 

b. 용대(用大)

復次眞如用者. 所謂諸佛如來. 本在因地發大慈悲. 修諸波羅蜜攝化衆生. 立大誓願盡欲度脫等衆生界. 亦不限劫數盡於未來. 以取一切衆生如己身故. 而亦不取衆生相. 此以何義. 謂如實知一切衆生及與己身眞如平等無別異故. 以有如是大方便智. 除滅無明 見本法身. 自然而有不思議業種種之用. 卽與眞如等遍一切處. 又亦無有用相可得. 何以故. 謂諸佛如來唯是法身智相之身. 第一義諦無有世諦境界. 離於施作. 但隨衆生見聞得益故說爲用.

또한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와 여래가 본래 인지(因地)에서 대자비(大慈悲)를 일으켜 모든 바라밀(波羅密)을 닦아서 중생을 섭화(攝化)하며, 크나큰 서원(誓願)을 세워 일체의 중생계를 모두 도탈(度脫)시키고자 하여 겁(劫)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미래에까지 다하는 것이니 모든 중생을 돌보기를 자기 몸과 같이하기 때문이며, 그러면서도 중생상(衆生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에 의해서인가? 일체 중생과 및 자기의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인 줄 여실히 앎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방편지(大方便智)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제멸하고 본래의 법신을 보아서 자연히 부사의업의 여러 가지 작용을 갖는 것이니, 곧 진여와 똑같이 모든 곳에 두루 하게 되며 또한 그러면서도 얻을 만한 작용의 모양도 없다. 왜 그런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와 여래는 오직 법신(法身)‧지상(智相)의 신(身)이며, 제일의제(第一義諦)로서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는 것이어서 시작(施作)을 떠난 것이나,다만 중생의 견문(見聞)에 따라 이익 되게 하기 때문에 용(用)이라 말하는 것이다.

 

此用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依分別事識. 凡夫二乘心所見者. 名爲應身. 以不知轉識現故見從外來. 取色分齊不能盡知故.

二者依於業識. 謂諸菩薩從初發意. 乃至菩薩究竟地心所見者. 名爲報身. 身有無量色. 色有無量相. 相有無量好. 所住依果亦有無量種種莊嚴 隨所示現卽無有邊不可窮盡 離分齊相. 隨其所應常能住持不毁不失. 如是功德皆因諸波羅蜜等無漏行熏. 及不思議熏之所成就. 具足無量樂相故. 說爲報身.

又爲凡夫所見者是其麤色. 隨於六道各見不同. 種種異類非受樂相故. 說爲應身

復次初發意菩薩等所見者. 以深信眞如法故少分而見. 知彼色相莊嚴等事. 無來無去離於分齊. 唯依心現不離眞如. 然此菩薩猶自分別. 以未入法身位故. 若得淨心所見微妙其用轉勝. 乃至菩薩地盡見之究竟. 若離業識則無見相. 以諸佛法身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

 

이 용(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분별사식에 의한 것으로 범부와 이승의 마음으로 보는 것을 응신(應身)이라 이름 하니, 이는 전식의 나타냄인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밖에서 온 것이라 보고 색의 분제(色分齊)를 취하여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업식에 의한 것이니, 이는 모든 보살이 초발의(初發意)로부터 보살구경지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본 것을 보신(報身)이라 함을 이르는 것이다. 그 몸에 무량한 색(色)이 있고, 색에 무량한 상(相)이 있고 상에 무량한 호(好)가 있으며, 머무는 의과(依果)도 무량한 여러 가지 장엄이 있어서 곳에 따라 나타냄이 곧 가이없고 궁진(窮盡)할 수 없어 분제상(分齊相)을 여의었지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고 잃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은 모두 모든 바라밀 등 무루의 행훈(行熏) 및 부사의훈(不思議熏)에 의하여 성취된 것이니, 이러한 한량없는 낙상(樂相)을 구족하였기 때문에 보신(報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범부에게 보여 지는 것은 그 추색(麤色)이니, 육도(六道)에 따라서 각각 보는 것이 같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 이류(異類)이며, 낙상(樂相)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應身)이라 말한다. 다음, 초발의보살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적은 부분으로나마 보신을 보아서 저 보신의 색상(色相)과 장엄(莊嚴) 등의 일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어 분제를 떠났으며 오직 마음에 의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은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아직 법신(法身)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정심(淨心)을 얻으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점점 수승하며 이리하여 보살지진(菩薩地盡)에 이르러 보신(報身)을 보는 일이 구경(究竟)하게 되거니와, 만약 업식을 여의면 보는 상(見相)이 없어지는 것이니, 모든 부처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色相)을 서로 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問曰.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 云何能現色相.

答曰. 卽此法身是色體故能現於色. 所謂從本已來色心不二. 以色性卽智故色體無形. 說名智身. 以智性卽色故. 說名法身遍一切處. 所現之色無有分齊. 隨心能示十方世界. 無量菩薩無量報身. 無量莊嚴各各差別. 皆無分齊而不相妨. 此非心識分別能知. 以眞如自在用義故.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의 법신이 색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낼 수 있겠는가?”

답하기를,

“곧 이법신은 색의 체(體)이기 때문에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色)과 심(心)은 둘이 아닌 것이니, 왜냐하면 색의 본성은 곧 지(智)인 까닭에 색의 체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신(智身)이라 하며, 지성(智性)은 곧 색(色)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낸 색이 분제가 없으니 중생의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十方世界)에 무량한 보살과 무량한 보신과 무량한 장엄을 나타냄에 각각 차별이 되지만 모두 분제가 없어서 서로 방해되지 아니한다. 이는 심식(心識)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용(用)의 뜻이기 때문이다.”

 

② 진여문(眞如門)에 들어감

復次顯示從生滅門卽入眞如門. 

所謂推求五陰色之與心. 六塵境界畢竟無念. 以心無形相十方求之終不可得. 如人迷故謂東爲西 方實不轉. 衆生亦爾. 無明迷故謂心爲念 心實不動. 若能觀察知心無念. 卽得隨順入眞如門故.

다음은 생멸문으로부터 곧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른바 오음(五陰)의 색(色)과 심(心)을 추구해 보건대, 육진경계(六塵境界)가 필경 생각할 만한 모양이 없으며, 또한 마음에는 형상이 없어서 시방(十方)으로 찾아보아도 끝내 얻을 수가 없으니,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지만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으로 혼미하기 때문에 마음을 망념(念)이라 하지만 마음은 실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것이며,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망념(念)이 없는 줄 알면 곧 수순(隨順)하게 되어 진여문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2) 사집(邪執)을 대치함

 

對治邪執者. 一切邪執皆依我見. 若離於我則無邪執. 是我見有二種.

云何爲二. 一者人我見. 二者法我見.

 

사집(邪執)을 대치한다는 것은 일체의 사집이 모두 아견(我見)에 의하는 것이니, 만약 나(我)를 여의면 곧 사집이 없는 것이다. 이 아견(我見)에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인아견(人我見)이고, 둘째는 법아견(法我見)이다.

 

① 인아견(人我見)

人我見者. 依諸凡夫說有五種. 云何爲五.

인아견(人我見)이란모든 범부에 의하여 말해지는 것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一者聞修多羅說如來法身畢竟寂寞猶如虛空. 以不知爲破著故. 卽謂虛空是如來性. 云何對治. 明虛空相是其妄法體無不實. 以對色故有. 是可見相令心生滅. 以一切色法本來是心實無外色. 若無色者則無虛空之相. 所謂一初境界唯心妄起故有. 若心離於妄動. 則一切境界滅. 唯一眞心無所不遍. 此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 非如虛空相故.

첫째는 경(經)에서 ‘여래 법신이 필경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것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허공이 여래성(如來性)이라 여기는 것이니, 이를 어떻게 대치하는가? 허공상(虛空相)은 망법(妄法)인지라 체가 없어 여실하지 못한 것이나, 색에 대하기 때문에 이 볼만한 상이 있는 것이어서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색법(色法)이 본래 마음이요 실로 밖의 색이 없는 것이니, 만약 밖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상도 없음을 밝힌 것이다. 소위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에서 망령되이 일어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약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는 것을 여의면 일체의 경계가 멸하고, 오직 하나의 진심(眞心)으로서 두루 하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 이는 여래의 광대한 성지(性智)의 구경의 뜻을 말한 것이요, 허공상과 같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二者聞修多羅說世間諸法畢竟體空. 乃至涅槃眞如之法亦畢竟空. 從本已來自空離一切相. 以不知爲破著故. 卽謂眞如涅槃之性唯是其空. 云何對治. 明眞如法身自體不空. 具足無量性功德故.

두 번째는 수다라(修多羅)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는 체(體)가 공(空)하며, 내지 열반‧진여의 법도 필경에는 공한지라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여 일체의 상(相)을 여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곧 진여‧열반의 본성이 오로지 공(空)이라 여기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對治)하는가? 진여 법신은 자체(自體)가 공하지 아니하여 무량한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했기 때문임을 밝힌 것이다.

三者聞修多羅說如來之藏無有增減. 體備一切功德之法. 以不解故卽謂如來之藏有色心法自相差別云何對治. 以唯依眞如義說故. 因生滅染義示現說差別故.

세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체가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색‧심법의 자상(自相)과 차별이 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직 진여의 뜻에 의해 말하였기 때문이며, 생멸염(生滅染)의 뜻에 의하여 나타냄을 차별(差別)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四者聞修多羅說一切世間生死染法皆依如來藏而有. 一切諸法不離眞如. 以不解故謂如來藏自體具有一切世間生死等法. 云何對治. 以如來藏從本已來唯有過恒沙等諸淨功德. 不離不斷不異眞如義故. 以過恒沙等煩惱染法. 唯是妄有性自本無. 從無始世來未曾與如來藏相應故. 若如來藏體有妄法. 而使證會永息妄者. 則無是處故.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모든 세간의 생사의 염법이 다 여래장에 의하여 있는지라 일체의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生死) 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여기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본래부터 항하(恒河)의 모래보다 많은 모든 정공덕(淨功德)이 있어서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지도 아니하여 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항하의 모래보다 많은 번뇌의 염법이 오직 망령되이 있는 것이요, 그 자성(性)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니,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상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의 체(體)에 망법(妄法)이 있다면 증회(證會)하여서 영원히 망법을 없앤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五者聞修多羅說依如來藏故有生死. 依如來藏故得涅槃. 以不解故謂衆生有始. 以見始故復謂如來所得涅槃. 有其終盡還作衆生. 云何對治. 以如來藏無前際故. 無明之相亦無有始. 若說三界外更有衆生始起者. 卽是外道經說. 又如來藏無有後際. 諸佛所得涅槃與之相應則無後際故.

다섯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생은 처음이 있다고 하고, 처음을 보기 때문에 또한 여래가 얻은 열반이 마침이 있어서 다시 중생이 된다고 하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여래장은 전제(前際: 시초)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상(相)도 시작함이 없으니 만약 삼계(三界)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고 한다면 곧 이는 외도경(外道經)의 설이며, 또 여래장은 후제(後際: 마지막)가 없으니 모든 부처가 얻은 열반이 그것과 상응하여 곧 후제가 없기 때문이다.

 

② 법아견(法我見)

法我見者. 依二乘鈍根故. 如來但爲說人無我. 以說不究竟. 見有五陰生滅之法. 怖畏生死妄取涅槃. 云何對治. 以五陰法自性不生則無有滅. 本來涅槃故.

법아견(法我見)이란 이승의 둔근(鈍根)에 의하기 때문에 여래가 다만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人舞我)만을 설하였으며, 이 설함이 구경(究竟)하지 않기 때문에 오음생멸(五陰生滅)의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여 망령되이 열반을 취하는 것이니, 어떻게 대치하는가? 오음법(五陰法)은 그 자성이 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멸함도 없어서 본래 열반이기 때문이다.

 

復次究竟離妄執者. 當知染法淨法皆悉相待. 無有自相可說.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非色非心. 非智非識. 非有非無. 畢竟不可說相. 而有言說者. 當知如來善巧方便. 假以言說引導衆生. 其旨趣者皆爲離念歸於眞如. 以念一切法令心生滅不入實智故.

다음에 망집(妄執)을 끝까지 다 여읜다는 것은 염법과 정법이 모두 서로 의지하는 것이어서 말할 만한 자상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색(色)도 아니요 심(心)도 아니며, 지(智)도 아니요 식(識)도 아니며,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어서 필경에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는데도 말함이 있는 것은 여래의 교묘한 방편으로 언설을 빌어 중생을 인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취지란 모두 망념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일체법을 생각하면 마음을 생멸케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3) 도(道)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모양을 분별함

 

分別發趣道相者. 謂一切諸佛所證之道. 一切菩薩發心修行趣向義故.

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이란 모든 여러 부처가 증득한 도에 모든 보살이 발심,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을 말하기 때문이다.

 

略說發心有三種. 云何爲三.

一者信成就發心. 二者解行發心. 三者證發心.

 

대략 발심(發心)을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信成就發心이요, 둘째는 解行發心이요, 셋째는 證發心이다.

 

① 信成就發心

 

信成就發心者. 依何等人修何等行. 得信成就堪能發心. 所謂依不定聚衆生. 有熏習善根力故. 信業果報能起十善. 厭生死苦欲求無上菩提. 得値諸佛親承供養修行信心. 經一萬劫信心成就故. 諸佛菩薩敎令發心. 或以大悲故能自發心. 或因正法欲滅. 以護法因緣能自發心. 如是信心成就得發心者. 入正定聚畢竟不退. 名住如來種中正因相應. 若有衆生善根微少. 久遠已來煩惱深厚. 雖値於佛亦得供養. 然起人天種子. 或起二乘種子. 設有求大乘者. 根則不定若進若退. 或有供養諸佛. 未經一萬劫. 於中遇緣亦有發心. 所謂見佛色相而發其心. 或因供養衆僧而發其心. 或因二乘之人敎令發心. 或學他發心. 如是等發心悉皆不定. 遇惡因緣或便退失墮二乘地.

信成就發心이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어떤 행실을 닦아서 믿음이 성취되어 발심(發心)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른바 부정취중생(不定聚衆生)에 의하여 훈습의 힘과 선근(善根)의 힘이 있으므로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무상보리(無上菩提)를 구하고자 하며, 여러 부처를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信心)을 수행한다. 이리하여 일만 겁(劫)을 지나서 신심이 성취되기 때문에 모든 부처와 보살이 가르쳐서 발심케 하니, 혹은 대비(大悲)에 의하여 스스로 발심케 하며, 혹은 정법(正法)이 없어지려 함에 의해서 호법(護法)의 인연으로 스스로 발심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심이 성취되어 발심하게 된 사람은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 필경 퇴전하지 아니하니, 이를 여래종(如來種) 중에 머물러 정인(正因)과 상응한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선근이 미소(微少)하여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다면 비록 부처를 만나 공양하게 되더라도 인천(人天)의 종자를 일으키고, 혹은 이승(二乘)의 종자를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根器)가 결정되지 아니하여 어떤 때는 나아가고 어떤 때는 물러나며, 혹 여러 부처에게 공양함이 있더라도 아직 일만 겁(劫)을 지나지 아니하여 중도에 연(緣)을 만나 또한 발심함이 있다. 이른바 부처의 색상(色相)을 보고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여러 스님에게 공양함에 의하여 그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이승인의 가르침에 의하여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배워 마음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발심들은 모두 결정되지 아니한 것이니,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 퇴실(退失)하여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復次信成就發心者. 發何等心. 略說有三種. 云何爲三.

一者直心. 正念眞如法故. 二者深心. 樂集一切諸善行故. 三者大悲心. 欲拔一切衆生苦故.

다음에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이란 어떠한 마음을 밝히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직심(直心)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심심(深心)이니 일체의 모든 선행을 이루기 좋아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이니 모든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問曰. 上說法界一相佛體無二. 何故不唯念眞如. 復假求學諸善之行.

묻기를,

“위에서 법계(法界)는 하나의 상(相)이며 불체(佛體)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시 모든 선행을 배우려고 하는 것인가?”

答曰. 譬如大摩尼寶體性明淨. 而有礦穢之垢. 若人雖念寶性. 不以方便種種磨治終無得淨. 如是衆生眞如之法體性空淨. 而有無量煩惱染垢. 若人雖念眞如. 不以方便種種熏修亦無得淨. 以垢無量遍一切法故. 修一切善行以爲對治. 若人修行一切善法. 自然歸順眞如法故.

답하기를,

“비유컨대 큰 마니보(摩尼寶)가 그 체성(體性)은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를 가지고 있어 만약 사람이 마니보의 깨끗한 본성을 생각하면서도 방편(方便)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다듬지 않으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그 체성이 텅 비고 깨끗하나 한량없는 번뇌의 더러운 때가 있으니, 만약 사람이 비록 진여(眞如)를 생각하지만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훈습하여 닦지 않으면 또한 깨끗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한량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 하기 때문에 모든 선행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니, 만약 사람이 모든 선법(善法)을 수행하면 절로 진여법에 귀순하기 때문이다.

略說方便有四種. 云何爲四.

대략 방편을 설명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一者行根本方便. 謂觀一切法自性無生. 離於妄見不住生死. 觀一切法因緣和合業果不失. 起於大悲修諸福德. 攝化衆生不住涅槃. 以隨順法性無住故.

첫째는 행근본방편(行根本方便)이다. 모든 법은 자성(自性)이 생김이 없음을 보고 망견(妄見)을 여의어 생사에 머물지 아니하며,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과(業果)를 잃지 아니함을 보고 대비를 일으켜 여러 복덕(福德)을 닦아 중생을 섭화(攝化)하여 열반에 머물지 아니함을 말하니,이는 법성의 주착(住着)함이 없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二者能止方便. 謂慚愧悔過. 能止一切惡法不令增長. 以隨順法性離諸過故.

둘째는 능지방편(能止方便)이다.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모든 악법을 그치게 하여 증장하지 않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모든 허물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三者發起善根增長方便 謂勤供養禮拜三寶. 讚歎隨喜勸請諸佛. 以愛敬三寶淳厚心故. 信得增長. 乃能志求無上之道. 又因佛法僧力所護故. 能消業障善根不退. 以隨順法性離癡障故.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증장시키는 발기선근증장방편(發起善根增長方便)이다. 삼보(三寶)에게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하며, 모든 부처를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권청(勸請)하여 이와 같이 삼보를 애경(愛敬)하는 순후(淳厚)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증장되어 무상의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두며, 또 불(佛)‧법(法)‧승(僧)의 힘으로 보호됨에 의하여 업장(業障)을 녹이고 선근이 퇴전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는 법성의 치장(癡障)을 여의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四者大願平等方便. 所謂發願盡於未來. 化度一切衆生使無有餘. 皆令究竟無餘涅槃. 以隨順法性無斷絶故.

法性廣大遍一切衆生平等無二. 不念彼此究竟寂滅故.

넷째는 대원평등방편(大願平等方便)이다. 미래에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 제도하여 남음이 없게 하여 모두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이루도록 발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법성의 단절됨이 없음을 수순하기 때문이며,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에 두루 하여 평등하여 둘이 없으며 피차(彼此)를 생각하지 아니하여 구경에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菩薩發是心故. 則得少分見於法身. 以見法身故隨其願力. 能現八種利益衆生. 所謂從兜率天退入胎. 住胎出胎. 出家成道. 轉法輪入於涅槃. 然是菩薩未名法身. 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未能決斷. 隨其所生與微苦相應. 亦非業繫. 以有大願自在力故. 如修多羅中或說有退墮惡趣者. 非其實退. 但爲初學菩薩未入正位而懈怠者恐怖令使勇猛故. 又是菩薩一發心後. 遠離怯弱. 畢竟不畏墮二乘地. 若聞無量無邊阿僧祇劫勤苦難行乃得涅槃. 亦不怯弱. 以信知一切法從本已來自涅槃故.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며,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願力)에 따라서 여덟 가지로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나와서 모태(母胎)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고 모태에서 나와서 출가하여 성도(成道)하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듦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아직 법신이라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과거 한량없는 때로부터 유루(有漏)의 업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나는 바에 따라서 미세한 고통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업의 계박이 아닌 것이니, 대원(大願)에 의하여 자재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다라 중에서 ‘혹 악취(惡趣)에 물러나 떨어짐이 있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은 실제로 물러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요, 다만 초학보살(初學菩薩)로서 아직 정위(正位)에 들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자를 위하여 두려워하게 하여 저로 하여금 용맹케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이 한 번 발심한 후에는 겁약한 마음을 멀리 여의어 이승지(二乘地)에 떨어짐을 끝내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령 무량무변한 아승기겁(阿僧祇劫)에 어려운 행실을 부지런히 애써야만 열반을 얻는다는 것을 듣더라도 겁내어 좌절하지 않는 것이니, 일체법이 본래부터 스스로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② 解行發心

解行發心者當知轉勝. 以是菩薩從初正信已來. 於第一阿僧祇劫將欲滿故. 於眞如法中深解現前所修離相. 以知法性體無慳貪故. 隨順修行檀波羅蜜. 以知法性無染離五欲過故. 隨順修行尸波羅蜜. 以知法性無苦離瞋惱故. 隨順修行羼提波羅蜜. 以知法性無身心相離懈怠故. 隨順修行毘梨耶波羅蜜. 以知法性常定體無亂故. 隨順修行禪波羅蜜. 以知法性體明離無明故. 隨順修行般若波羅蜜.

解行發心이란 더욱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처음 정신(正信)으로부터 제일 아승기겁이 다 차려고 할 때이므로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나타나 닦는 것이 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법성(法性)의 체는 간탐(慳貪: 인색하고 욕심이 많음)이 없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보시(檀: 布施)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물들어 더럽혀짐이 없어 오욕(五欲)의 허물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尸: 持戒)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고(苦)가 없어 성내고 괴로워함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羼提: 忍辱)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신심(身心)의 상이 없어 게으름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정진(毘梨耶: 精進)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항상 안정하여 있어 그 체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禪定)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성은 체가 맑아서 무명을 여읜 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반야(般若)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이다.

 

③ 證發心

證發心者. 從淨心地乃至菩薩究竟地證何境界. 所謂眞如. 以依轉識說爲境界. 而此證者無有境界. 唯眞如智名爲法身. 是菩薩於一念頃能至十方無餘世界. 供養諸佛請轉法輪. 唯爲開導利益衆生. 不依文字. 或示超地速成正覺. 以爲怯弱衆生故. 或說我於無量阿僧祇劫當成佛道. 以爲懈慢衆生故. 能示如是無數方便不可思議. 而實菩薩種性根等. 發心則等. 所證亦等. 無有超過之法. 以一切菩薩皆經三阿僧祇劫故. 但隨衆生世界不同. 所見所聞根欲性異. 故示所行亦有差別.

又是菩薩發心相者. 有三種心微細之相. 云何爲三.

一者眞心. 無分別故. 二者方便心. 自然遍行利益衆生故. 三者業識心. 微細起滅故.

證發心이란 정심지(淨心地)로부터 보살구경지(菩薩究竟地)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증득하는가? 소위 진여니, 전식(轉識)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지만 이 증득은 경계가 없는 것이요 오직 진여지(眞如智) 뿐이므로 법신(法身)이라 하는 것이다. 이 보살이 일념(一念) 사이에 시방(十方)의 남김 없는 세계에 이르러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여 법륜(法輪)을 굴리기를 청하니, 그것은 오직 중생을 개도(開導)하여 이익 되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혹은 지(地)를 초월하여 빨리 정각(正覺)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겁약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며,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의 기간에 불도(佛道)를 이룬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수한 방편의 불가사의함을 보이지만 실로 보살은 종성의 근(種姓根)이 같으며 발심이 곧 같고 증득한 것도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으니, 모든 보살이 모두 다 세 아승기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 세계의 같지 않음과 보는 바와 듣는 바 근(根: 능력)‧욕(欲: 희망)‧성질(性)이 다름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보이는 것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또 이 보살의 발심상(發心相)이란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상이 있으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첫째는 진심(眞心)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심(方便心)이니 자연히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심(業識心)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又是菩薩功德成滿. 於色究竟處. 示一切世間最高大身. 謂以一念相應慧. 無明頓盡. 名一切種智. 自然而有不思議業. 能現十方利益衆生.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서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중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이니, 이는 일념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을 일체종지(一切種智)라 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작용이 있어 시방(十方)에 나타내어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다.

 

問曰. 虛空無邊故世界無邊. 世界無邊故衆生無邊. 衆生無邊故心行差別亦復無邊. 如是境界不可分齊難知難解. 若無明斷無有心想. 云何能了名一切種智

묻기를,

“허공이 무변하기 때문에 세계가 무변하며 세계가 무변하기 때문에 중생이 무변하며 중생이 무변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도 또한 무변하니, 이와 같은 경계를 한계 지을 수 없어서 알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무명이 단절된다면 심상(心想)이 없어질 텐데 어떻게 잘 알기에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이름 하는가?”

答曰. 一切境界本來一心離於想念. 以衆生妄見境界故心有分齊. 以妄起想念不稱法性故不能決了. 諸佛如來離於見想無所不遍.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 自體顯照一切妄法. 有大智用無量方便. 隨諸衆生所應得解. 皆能開示種種法義. 是故得名一切種智.

답하기를,

“일체 경계는 본래 일심(一心)으로서 상념을 떠나 있는 것이나, 중생이 경계를 잘못 보기 때문에 마음에 한정됨이 있으며, 상념을 잘못 일으켜서 법성(法性)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여래는 망견, 망상을 여의어서 두루 하지 않는 바가 없으며,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에 곧 이는 모든 법의 본성인 것이다. 그 자체(自體)가 모든 망법을 환하게 비추어 대지(大智)의 작용이 있어 무량한 방편으로 모든 중생의 응당 알아야 할 바를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의(法義)를 모두 열어 보이기 때문에 일체종지라 이름 하게 된 것이다.”

又問曰. 若諸佛有自然業. 能現一切處利益衆生者. 一切衆生. 若見其身若睹神變. 若聞其說無不得利. 云何世間多不能見

또 묻기를,

“만약 모든 부처에게 자연업(自然業)이 있어서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면 모든 중생이 혹은 그 부처의 몸을 보거나, 혹은 신비한 변화를 보거나, 혹은 그 말씀을 들어 이익 되지 않음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세간에서 보지 못하는 이가 많은가?”

答曰. 諸佛如來法身平等遍一切處. 無有作意故. 而說自然. 但依衆生心. 現衆生心者猶如於鏡. 鏡若有垢色像不現. 如是衆生心若有垢. 法身不現故.

답하기를,

“모든 부처와 여래의 법신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 하며 작의(作意: 의식적인 노력)가 없기 때문에 ‘자연(自然)’이라 한 것이니 다만 중생심에 의하여 나타낸 것이다. 중생심(衆生心)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때가 있으면, 색상(色像)이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중생심에도 만약 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4.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已說解釋分. 次說修行信心分.

是中依未入正定. 衆生故. 說修行信心.

이미 해석분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수행신심분을 말하겠다.

이 중에 아직 정정취(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에 의거하기 때문에 신심을 수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何等信心 云何修行.

略說信心有四種. 云何爲四.

一者信根本. 所謂樂念眞如法故.

二者信佛有無量功德. 常念親近供養恭敬. 發起善根. 願求一切智故.

三者信法有大利益 常念修行諸波羅蜜故.

四者信僧能正修行自利利他. 常樂親近諸菩薩衆. 求學如實行故.

 

어떠한 신심들이며, 어떻게 수행하는 것인가?

대략 말하자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소위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믿어서 항상 부처를 가까이하고 공양하고 공경하여 선근(善根)을 일으켜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모든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사문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리(自利)‧이타(利他)할 것을 믿어서 항상 모든 보살들을 즐겨 친근히 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修行有五門. 能成此信.

云何爲五. 

一者施門. 二者戒門. 三者忍門. 四者進門. 五者止觀門.

 

수행에 오문(五門)이 있어, 이 믿음을 잘 성취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시문(施門)이요, 둘째는 계문(戒門)이요, 셋째는 인문(忍門)이요, 넷째는 진문(進門)이요, 다섯째는 지관문(止觀門)이다.

 

(1) 시문(施門)‧계문(戒門)‧인문(忍門)‧진문(進門)

 

 

云何修行施門. 若見一切來求索者. 所有財物隨力施與. 以自捨慳貪令彼歡喜. 若見厄難恐怖危逼. 隨己堪任施與無畏. 若有衆生來求法者. 隨己能解方便爲說. 不應貪求名利恭敬. 唯念自利利他迴向菩提故.

云何修行戒門. 所謂不殺不盜不婬不兩舌不惡口不妄言不綺語. 遠離貪嫉欺詐諂曲瞋恚邪見. 若出家者爲折伏煩惱故. 亦應遠離憒鬧常處寂靜修習少欲知足頭陀等行. 乃至小罪心生怖畏. 慚愧改悔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 當護譏嫌不令衆生妄起過罪故.

云何修行忍門. 所謂應忍他人之惱心不懷報. 亦當忍於利衰毁譽稱譏苦樂等法故.

云何修行進門. 所謂於諸善事心不懈退. 立志堅强遠離怯弱. 當念過去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無有利益. 是故應勤修諸功德. 自利利他速離衆苦 復次若人雖修行信心. 以從先世來多有重罪惡業障故. 爲魔邪諸鬼之所惱亂.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 或爲病苦所惱. 有如是等衆多障礙. 是故應當勇猛精勤. 晝夜六時禮拜諸佛. 誠心懺悔勸請隨喜迴向菩提. 常不休廢. 得免諸障善根增長故.

 

어떻게 시문(施門)을 수행하는가? 만약 일체의 와서 구하여 찾는 사람을 보거든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닿는 대로 베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간탐(慳貪)을 버리어 저로 하여금 환희케 하며, 만약 액난(厄難)‧공포‧위핍(危逼)을 받는 사람을 보거든 자기의 능력에 따라 무외(無畏)를 베풀어 주며, 만약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아는 대로 방편으로 설하되 명리(名利)나 공경을 탐내어 찾아서는 안 되고 오직 자리‧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계문(戒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살생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으며, 양설(兩舌)하지 않고, 악구(惡口)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기어(綺語)하지 않으며, 탐질(貪嫉), 기사(欺詐), 첨곡(諂曲), 진에(瞋恚), 사견(邪見) 등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만약 출가한 자라면 번뇌를 꺾어 굴복시키기 위한 까닭에 응당 시끄러운 것을 멀리 여의고 항상 고요한 데에 처하여 소욕(少欲)과 지족(知足)과 두타(頭陀) 등의 행을 수습하며 내지 작은 죄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부끄러워하고 회개하여 여래가 만든 금계(禁戒)를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고 마땅히 다른 사람의 기혐(譏嫌)을 막아 그 비난하는 중생으로 하여금 망령되이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인문(忍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응당 타인의 괴롭힘을 참아서 마음에 보복할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마땅히 이익과 손해, 비난과 명예, 칭찬과 기롱, 괴로움과 즐거움 등의 법을 참고 견디기 때문이다.

 

어떻게 진문(進門)을 수행하는가? 소위 모든 선한 일에 마음이 게으르거나 주저함이 없어서 마음먹은 것이 굳세고 강건하여 겁약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과거의 구원(久遠)한 때로부터 헛되이 일체의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음을 생각하여야 하며, 이 때문에 응당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자리‧이타하여 빨리 모든 고통을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만약 사람이 신심(信心)을 수행하였으나, 선세(先世)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 때문에 삿된 마구니와 여러 귀신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어지럽힘을 당하며, 혹은 세간의 사무(事務) 때문에 여러 가지로 끌리고 얽매이며, 혹은 병고(病苦)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많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응당 용맹히 정근(精勤)하여 아침 저녁의 육시(六時)에 모든 부처에게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勸請)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모든 장애를 벗어나게 되어 선근이 증장하기 때문이다.

 

 

(2) 지관문(止觀門)

 

 

云何修行止觀門. 所言止者. 謂止一切境界相. 隨順奢摩他觀義故. 所言觀者. 謂分別因緣生滅相. 隨順毘缽舍那觀義故. 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不相捨離雙現前故.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하는가? 지(止)라 하는 것은 모든 경계상을 그치게 함을 말하는 것이니 사마타관(奢摩他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요, 관(觀)이라고 하는 것은 인연생멸상(因緣生滅相)을 분별함을 말하는 것이니 비발사나관(毗鉢舍那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 점점 수습하여 서로 여의지 아니하여 쌍으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若修止者. 住於靜處端坐正意. 不依氣息不依形色. 不依於空不依地水火風. 乃至不依見聞覺知. 一切諸想隨念皆除. 亦遣除想. 以一切法本來無相. 念念不生念念不滅. 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 以心除心. 心若馳散. 卽當攝來住於正念. 是正念者. 當知唯心無外境界. 旣復此心亦無自相. 念念不可得. 若從坐起去來進止有所施作. 於一切時常念方便隨順觀察. 久習淳熟其心得住. 以心住故漸漸猛利. 隨順得入眞如三昧. 深伏煩惱信心增長速成不退. 唯除疑惑不信誹謗重罪業障我慢懈怠. 如是等人所不能入.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서 뜻을 바르게 하되, 기식(氣息)에 의하지 않으며, 형색(形色)에 의하지 않으며, 공(空)에 의하지 않으며 지(地)‧수(水)‧화(火)‧풍(風)에 의하지 않으며, 내지 견문(見聞)‧각지(覺知)에 의하지 않아야 한다. 일체의 모든 상념을 생각 생각마다 다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도 없애야 한다. 일체법이 본래 상이 없기 때문에 생각 생각이 나지 않으며 생각 생각이 멸하지 않으며, 또한 마음을 따라 밖으로 경계를 생각하지 않은 후에 마음으로 마음을 제멸(除滅)하는 것이다. 마음이 만약 흩어져 나간다면 곧 거두어 와서 정념(正念)에 머물게 해야 할 것이니,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곧 또한 이 마음도 자상(自相)이 없어서 생각 생각마다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앉은 데서 일어나 가고 오고 나아가고 머무는 데에 행위 하여 짓는 바가 있더라도 이 모든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관찰하여 오래 익혀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된다. 마음이 머물기 때문에 점점 맹리(猛利: 매우 예리함)하여 진여삼매에 수순하여 들어가게 되어 번뇌를 깊이 조복(調伏)하고 신심(信心)이 증장하여 속히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이룬다. 오직 의혹하고 불신하고 비방하고 중죄업장(重罪業障)을 짓고 아만(我慢)과 해태(懈怠)한 사람은 제외하나니, 이러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復次依如是三昧故. 則知法界一相. 謂一切諸佛法身與衆生身平等無二. 卽名一行三昧. 當知眞如是三昧根本. 若人修行. 漸漸能生無量三昧.

 

또한 이 삼매에 의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일상(一相)인 것을 아는 것이니, 일체 모든 부처의 법신이 중생신(衆生身)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아님을 말하며, 이를 곧 일행삼매(一行三昧)라 이름 한다. 진여가 이 삼매의 근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만일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무량한 삼매를 내는 것이다.

 

或有衆生無善根力.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 若於坐中現形恐怖. 或現端正男女等相. 當念唯心境界則滅終不爲惱.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모든 마구니와 외도(外道)와 귀신들에 의하여 어지럽게 되니, 혹은 좌중(坐中)에서 어떤 형체를 나타내어 공포를 일으키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낼 경우,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계가 곧 멸하여 끝내 뇌란(惱亂)되지 않을 것이다.

 

或現天像菩薩像. 亦作如來像相好具足. 若說陀羅尼. 若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 或說平等空無相無願無怨無親無因無果畢竟空寂是眞涅槃.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 亦知未來之事. 得他心智辯才無礙. 能令衆生貪著世間名利之事. 又令使人數瞋數喜性無常准. 或多慈愛多睡多病其心懈怠. 或卒起精進後便休廢. 生於不信多疑多慮. 或捨本勝行更修雜業. 若著世事種種牽纏. 亦能使人得諸三昧少分相似. 皆是外道所得. 非眞三昧. 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若三日乃至七日住於定中. 得自然香美飮食. 身心適悅不飢不渴. 使人愛著. 或亦令人食無分齊乍多乍少顔色變異. 以是義故. 行者常應智慧觀察. 勿令此心墮於邪網. 當勤正念不取不著. 則能遠離是諸業障. 應知外道所有三昧. 皆不離見愛我慢之心. 貪著世間名利恭敬故. 眞如三昧者. 不住見相不住得相. 乃至出定亦無懈慢. 所有煩惱漸漸微薄. 若諸凡夫不習此三昧法. 得入如來種性. 無有是處. 以修世間諸禪三昧多起味著. 依於我見繫屬三界. 與外道共. 若離善知識所護. 則起外道見故.

 

혹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내거나 또한 여래상을 지어서 상호(相好)가 구족하며 혹은 다라니(陀羅尼)를 설하며 혹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하며, 혹은 평등하고 공(空)하며 무상(無相)하고 무원(無願)하며 무원(無怨)‧무친(無親)하고 무인(無因)‧무과(無果)하여 필경 공적(空寂)함이 참된 열반이라고 설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숙명(宿命)의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하고 타심지(他心智)를 얻게 하여 변재(辯才)가 막힘이 없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나 이익 되는 일에 탐착(貪着)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자주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며, 혹은 장애가 많거나 잠이 많고 병이 많아서 그 마음이 게을러지게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을 하다가 뒤에 곧 그만두어 불신하는 마음을 내어 의심이 많고 염려가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위를 버리고 다시 잡업(雜業)을 닦으며 혹은 세속의 일에 집착하여 갖가지로 끄달리게 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모든 삼매를 얻게 하여 진여삼매에 든 것과 약간 비슷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외도가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닌 것이다. 혹 또한 사람들에게 혹은 하루, 혹은 이틀, 혹은 사흘 내지 이레를 정(定) 중에 머물게 하여 자연의 향미(香美)한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여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여 사람들이 그것에 애착하게 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먹는 것에 한계가 없게 하여 잠깐 많았다가 잠깐 적게 하며 안색을 변이하게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언제나 응당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을 사망(邪網: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正念)하여 취착하지 아니하면 이러한 모든 업장을 멀리 여읠 수 있을 것이다. 외도(外道)가 가지는 삼매는 모두가 견(見)‧애(愛)‧아만(我慢)의 마음을 여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리와 공경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眞如三昧)란 보는 상(相)에 머물지 않고 얻은 상(相)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내지 정(定)에서 벗어난 때에도 게을리함이 없어서 가지고 있는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되니,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익히지 아니하면 여래종성(如來種性)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禪)과 삼매를 닦으면 흔히 거기에 맛 들여 아견(我見)에 의하여 삼계(三界)에 얽매여 외도와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니 만약 선지식의 보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견(見)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 現世當得十種利益. 云何爲十.

一者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 

二者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 

三者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 

四者遠離誹謗甚深之法重罪業障漸漸微薄. 

五者滅一切疑諸惡覺觀. 

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 

七者遠離憂悔於生死中勇猛不怯. 

八者其心柔和捨於憍慢不爲他人所惱. 

九者雖未得定於一切時一切境界處則能減損煩惱不樂世間. 

十者若得三昧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또한 정근(精勤)하여 전념으로 이 삼매를 수학(修學)하는 이는 현세(現世)에서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니,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항상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와 보살에게 호념(護念)함을 입을 것이요, 둘째는 모든 마구니와 악귀에 의하여 두려움을 받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아흔 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에 의하여 혹란(惑亂)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깊고 미묘한 불법을 비방함에서 멀리 떠나 중죄(重罪)의 업장(業障)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요, 다섯째는 일체의 의심과 모든 나쁜 사고(思考)를 없애는 것이요, 여섯째는 여래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장되는 것이요, 일곱째는 근심과 후회를 멀리 여의어 생사 중에 용맹하여 겁내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교만을 버려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이요, 아홉째는 비록 정(定)을 얻지 못하였으나 모든 때에 모든 경계처(境界處)에 대하여 번뇌를 줄여서 세간을 즐기지 않는 것이요,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外緣)의 모든 소리에 의하여 놀라지 않게 되는 것이다.

 

復次若人唯修於止. 則心沈沒或起懈怠. 不樂衆善遠離大悲. 是故修觀. 修習觀者. 當觀一切世間有爲之法. 無得久停須臾變壞一切心行念念生滅. 以是故苦. 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 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 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 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 種種穢汚無一可樂. 如是當念. 一切衆生從無始世來. 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 已受一切身心大苦. 現在卽有無量逼迫. 未來所苦亦無分齊. 難捨難離而不覺知. 衆生如是甚爲可愍. 作此思惟. 卽應勇猛立大誓願. 願令我心離分別故. 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盡其未來. 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衆生. 令得涅槃第一義樂. 以起如是願故. 於一切時一切處. 所有衆善隨已堪能. 不捨修學心無懈怠. 唯除坐時專念於止. 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

 

만약 사람이 오직 지(止)만을 닦으면 곧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선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되니, 이러므로 관(觀)을 닦는 것이다. 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마땅히 모든 세간의 유위(有爲)의 법이 오래 머무름이 없어 잠깐 동안에 변하여 없어지며, 모든 마음의 작용이 생각 생각마다 생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고(苦)인 줄 알아야 하며,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하여 꿈과 같은 줄 알아야 하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하며,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서 갑자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며,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모두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더러워서 하나도 즐거워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중생이 무시(無始)의 때로부터 모두 무명의 훈습한 바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생멸케 하여 이미 모든 신심(身心)의 큰 고통을 받았으며,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고 여의기가 어렵건마는 이를 깨닫지 못하니, 중생이 이처럼 매우 가련한 것임을 늘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다음과 같이 대서원(大誓願)을 세워야 할 것이다. 즉 원컨대 내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게 함으로써 시방에 두루 하여 일체의 모든 선한 공덕을 수행케 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한량없는 방편으로 일체의 고뇌하는 중생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열반제일의의 낙(第一義樂)을 얻도록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원(願)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때, 모든 곳에 있는 여러 선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여 마음에 게을리함이 없으니, 오직 앉았을 때 지(止)에 전념하는 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다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若行若住若臥若起. 皆應止觀俱行. 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 而復卽念因緣和合善惡之業苦樂等報不失不壞. 雖念因緣善惡業報. 而亦卽念性不可得.

若修止者. 對治凡夫住著世間. 能捨二乘怯弱之見.

若修觀者. 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遠離凡夫不修善根.

以此義故. 是止觀二門. 共相助成不相捨離. 若止觀不具. 則無能入菩提之道.

 

행하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일어나거나 어느 때든지 모두 지관을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니, 소위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나지 않음을 생각하나, 또한 곧 인연으로 화합한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가 빠뜨려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음을 생각하며, 비록 인연의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곧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지(止)를 닦으면 범부가 세간에 주착(住着)함을 대치하고 이승의 겁약(怯弱)한 소견을 버릴 수 있으며, 만일 관(觀)을 닦으면 이승(二乘)이 대비를 일으키지 아니하는 협렬심(狹劣心)의 허물을 대치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여읜다. 이러한 뜻에 의하므로 이 지(止)‧관(觀) 이문(二門)은 함께 같이 조성하여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지‧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보리에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없을 것이다.

 

復次衆生初學是法. 欲求正信其心怯弱. 以住於此娑婆世界. 自畏不能常値諸佛親承供養. 懼謂信心難可成就 意欲退者. 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 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得生他方佛土. 常見於佛永離惡道. 如修多羅說.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 所修善根迴向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佛故終無有退. 若觀彼佛眞如法身. 常勤修習畢竟得生住正定故.

 

다음에 중생이 처음 이 법을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약하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머무름에 스스로 항상 제불(諸佛)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그가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신심은 성취하기가 어렵다’라고 하니, 뜻이 퇴전하려고 하는 이는 여래가 수승한 방편이 있어 신심을 섭호(攝護)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뜻을 오로지하여 부처를 생각한 인연으로 원(願)에 따라 타방불토(他方佛土)에 나게 되어 항상 부처를 친히 보아서 영원히 악도(惡道)를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수다라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생각하여 그가 닦은 선근으로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아가기를 원구(願求)하면 곧 왕생(往生)하게 되며 늘 부처를 친히 보기 때문에 끝내 퇴전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만약 저 부처의 진여법신을 관(觀)하여 항상 부지런히 수습하면 필경에 왕생하게 되어 정정(正定)에 머물기 때문이다.

 

 

5.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已說修行信心分. 次說勸修利益分.

如是摩訶衍諸佛袐藏我已總說. 

 

이미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의 제불(諸佛)의 비장(秘藏)을 내가 이미 모두 말하였으니,

 

若有衆生. 欲於如來甚深境界得生正信遠離誹謗入大乘道. 當持此論思量修習究竟能至無上之道. 若人聞是法已不生怯弱. 當知此人定紹佛種. 必爲諸佛之所授記.

 

만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매우 깊은 경계에 대하여 바른 믿음을 내어서 비방(誹謗)을 멀리 여의고 대승도에 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 논을 가지고 사량(思量)‧수습(修習)하면 구경에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듣고 나서 겁약한 마음을 내지 않으면 이 사람은 틀림없이 부처의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부처에게 수기(授記)하는 바가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다.

 

假使有人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令行十善. 不如有人於一食頃正思此法. 過前功德不可爲喩. 復次若人受持此論觀察修行. 若一日一夜所有功德無量無邊不可得說. 假令十方一切諸佛.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 歎其功德亦不能盡. 何以故. 謂法性功德無有盡故. 此人功德亦復如是無有邊際.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중에 가득한 중생을 교화하여 십선(十善)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번 식사하는 시간에 바로 이 법을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앞의 공덕보다 우월하여 그와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사람이 이 <기신론>을 받아 가져서 관찰하고 수행하기를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한다면 그가 가지는 공덕이 한량없고 가이없어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니, 가령 시방의 일체의 모든 부처가 각기 무량한 아승기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또한 다할 수가 없다. 어째서인가?  이는 법성의 공덕에 다함이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계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其有衆生於此論中毁謗不信. 所獲罪報經無量劫受大苦惱. 是故衆生但應仰信不應誹謗. 以深自害亦害他人. 斷絶一切三寶之種. 以一切如來皆依此法得涅槃故. 一切菩薩因之修行入佛智故.

어떤 중생이 이 <기신론>에 대하여 훼방(毁謗)하고 믿지 않는다면 그가 받는 죄의 과보는 무량겁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다만 우러러 믿어야 할 것이요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깊이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서 일체의 삼보(三寶)의 종자를 단절하기 때문이며, 일체의 여래가 다 이 법에 의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이며, 일체의 보살이 이로 인하여 수행하여 불지(佛智)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當知過去菩薩已依此法得成淨信. 現在菩薩今依此法得成淨信. 未來菩薩當依此法得成淨信.

과거의 보살도 이미 이 법에 의하여 정신(淨信)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제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마땅히 이 법에 의하여 정신을 이루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이니,

 

是故衆生應勤修學. 

이러므로 중생이 부지런히 수학(修學)해야 할 것이다.

 

三. 총결회향(總結廻向)

 

諸佛甚深廣大義 我今隨分總持說 迴此功德如法性 普利一切衆生界

모든 부처의 매우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이제 분(分)에 따라 요약하여 말하였으니, 법성과 같은 이 공덕을 회향하여 널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게 하여지이다.

 

*) 한문본: 신수대장경 No.1666[No.1667]/ 한글본: 은정희, [대승기신론 소‧별기], 2003, 1판 11쇄, 일지사.

[출처] 大 乘 起 信 論 |작성자 정진연하경

 

https://www.arama.kr/OldPro/2109

 

ARAMA - 체계적인 불교 공부 - 대승기신론 목차에 따른 원문+우리말

대승기신론 목차에 따른 우리말 大 乘 起 信 論 馬鳴菩薩 造 梁真諦三藏 譯 一. 귀경(歸敬)과 술의(述意) 二. 논(論)의 체(體)를 정립함 1. 인연분(因緣分) 2. 입의분(立義分) 3. 해석분(解釋分) (1)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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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乘 起 信 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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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ugvC1-KuOds&t=23s

 

 

https://www.youtube.com/watch?v=Pw4AVAm6epY 

 

*중국의 불경의 3대번역가

현장법사, 구마라집,  진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4050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www.youtube.com/watch?v=2hnOj8rCdDY 

 

 

나룻배와 행인
ㅡ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https://www.youtube.com/watch?v=dZxS9Q0GE9w 

 

 

https://kydong77.tistory.com/17953

 

동안상찰,<십현담(十玄談)> 김시습,십현담요해 > 한룡운,십현담주해

반야심경 원문 - 영인스님 https://www.youtube.com/watch?v=QlwhFljK8f0 님의침묵/(작곡 정의송, 노래 하이런) https://www.youtube.com/watch?v=v9NQ9jA7f_8 그리운 금강산 (앵콜) - 조수미 ​https://www.youtube.com/watch?v=8IAiUKg

kydong77.tistory.com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
   - 동안상찰(同安常察) 선사 지음 

https://blog.naver.com/bonem25/221339263704

내용이 길어 운영자가 그 타이틀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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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현묘한 담론이란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를 10가지로 요약한 것이 십현담이다.

 

① 心印(심인)

② 祖意(조의)

③ 玄機(현기)

④ 塵異(진이)

⑤ 佛敎(불교)

⑥ 還鄕曲(환향곡)

⑦ 破還鄕曲(파환향곡)

⑧ 廻機(회기)

⑨ 轉位歸(전위기)

⑩ 一色過後(일색과후)

 

① 心印(심인)

問君心印作何顔 (문군심인작하안)

그대에게 묻노니 
심인이 어떻게 생겼는가?


心印誰人敢授傳 (심인수인감수전)

심인을 
누가 감히 전해주고 받으랴


歷劫坦然無異色 (역겁탄연무이색)

영원토록 변함없어 
다른 모양 없거늘


呼爲心印早虛言 (호위심인조허언)

심인이라 부르는 것도 
벌써 헛된 말이라네


須知本自靈空性 (수지본자영공성)

본래 스스로
신령스럽고 빈 성품이여,


將喩紅爐火裏蓮 (장유홍로화리연)

비유하면 
벌겋게 달아 있는 
난로 속의 연꽃이네


莫謂無心云是道 (막위무심운시도)

무심을 일러 
도라 하지 말게나.


無心猶隔一重關 (무심유격일중문)

무심도 아직 
한 겹의 관문이 막혀 있다네.




② 祖意(조의)

祖意如空不是空 (조의여공불시공)

조사의 뜻은 
공한 것 같으나 공하지 않나니


眞機爭墮有無功 (진기쟁타유무공)

참된 기틀이 
어찌 있다 없다는 공과를 따지랴.


三賢尙未明斯旨 (삼현상미명사지)

삼현의 경지로는 
아직 이 뜻에 캄캄하고


十聖那能達此宗 (십성나능달차종)

십성인들 어찌 
이 종지(宗旨)를 통달 했으리요.


透網金鱗猶滯水 (투망금린유체수)

그물 벗어난
금비늘 고기가 
오히려 물에 걸렸는데


回途石馬出紗籠 (회도석마출사롱)

길 돌린 돌말은 
우리를 벗어났네.


慇懃爲說西來意 (은근위설서래의)

은근히 그대 위해 
서쪽에서 온 뜻을 말하노니


莫問西來及與東 (막문서래급여동)

서쪽에서 왔는가, 
동쪽에서 왔는가를 
묻지 말게나.



③ 玄機(현기)

迢迢空劫勿能收 (초초공겁물능수) 

멀고 먼 공겁부터 
거두지를 못했는데


豈爲塵機作繫留 (가위진기작계류)

어찌 티끌 속에 
매어둘 수 있으리오


妙體本來無處所 (묘체본래무처소)

미묘한 본체는
본래 처소가 없고


通身何更問蹤由 (통신하갱문종유)

온몸이 그대로인데 
어찌 다시 자취를 묻겠는가?


靈然一句超群像 (영연일구초군상)

신령한 한 말씀이 
모든 현상을 초월하였으니


逈出三乘不假修 (형출삼승불가수)

삼승 경계 뛰어 넘어 
닦는 노력 필요 없네.


撒手那邊千聖外 (철수나변천성외)

저 쪽 천성들이 못가는 
먼 밖에서 손을 흔들고


廻程堪作火中牛 (회정감작화중우)

돌아오는 길에는
불 속의 소가 되었네.


④ 塵異(진이)

濁者自濁淸者淸 (탁자자탁청자청)

탁한 것은 스스로 탁하고
맑은 것은 스스로 맑으니


菩提煩惱等空平 (보리번뇌등공평)

보리와 
번뇌가 텅 비어 
똑같이 평등하도다.

誰言卞璧無人鑑 (수언변벽무인감)

누가 변씨네 옥을 
알아보는 이 없다 하는가?


我道驪珠到處晶 (아도여주도처정)

나는 여룡의 여의주가
도처에서 빛난다 하리라.


萬法泯時全體現 (만법민시전체현)

만법을 잊을 그때
전체가 드러나고


三乘分處假安名 (삼승분처가안명)

삼승으로 
나누는 곳에서 
거짓 이름 생긴 것

丈夫自有衝天氣 (장부자유충천기)

대장부 누구나 
하늘 찌르는 기운 있으니


不向如來行處行 (불향여래행처행)

부처님 가신 곳을
향해 가지 말아야 하네.



⑤ 佛敎(불교)

三乘次第演金言 (삼승차례연금언)

삼승을 차례로 
설하신 부처님 말씀


三世如來亦共宣 (삼세여래역공선)

삼세의 여래가 
모두 같이 말씀하셨지만


初說有空人盡執 (초설유공인진집)

처음 유와 공을 설하니 
사람들이 모두 집착하더니


後非空有衆皆捐 (후비공유중개손)

뒤에는 
공과 유가 아니라 설하니
중생이 모두 버려

龍宮滿藏醫方義 (용궁만장의방의)

용궁에 저장된 장경은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약방문일 뿐


鶴樹終談理未玄 (학수종담리미현)

학수의 마지막 말씀에도
이치는 현묘하지 않았네.


眞淨界中纔一念 (진정계중재일념)

깨끗한 경계 속에 
한 생각 일으키면


閻浮早已八千年 (염부조이팔천년)

염부제에서 
벌써 8천년이 지났네.



⑥ 還鄕曲(환향곡)

勿於中路事空王 (물어중로사공왕)

공부하다 중간에 
부처님을 따로 섬기지 말라.


策杖咸須達本鄕 (책장함수달본향)

지팡이 재촉하여 
모두 본고향으로 어서 가라.


雲水隔時君莫住 (운수격시군막주)

구름과 물이 막는다고 
그대 머물지 말라.


雪山深處我非忙 (설산심처아비망)

설산 깊은 곳에서도 
나는 허덕이지 않았노라.


堪嗟去日顔如玉 (감차거일안여옥)

슬프다.
떠나던 날 
옥 같던 그 얼굴이


却歎廻來鬢似霜 (각환회래빈사상)

돌아올 때 
귀밑털이 서리와도 같구나.


撒手到家人不識 (철수도가인불식)

손을 털고 집에 오니 
식구들도 몰라보고


更無一物獻尊堂 (갱무일물헌존당)

집안의 어른에게 
드릴 것도 하나 없네.



⑦ 破還鄕曲(파환향곡)

返本還源事亦差 (반본환원사역차)

고향에 돌아온다는 것도
또한 틀린 일이니


本來無住不名家 (본래무주불명가)

본래 머문 것이 없었으니 
집인들 어디 있나?


萬年松徑雪深覆 (만년송경설심복)

오래된 솔밭 길에 
눈이 깊이 덮여 있고


一帶峯巒雲更遮 (일대봉만운갱차)

산봉우리는 
구름 띠가 막아버렸네.


賓主穆時純是妄 (빈주목시순시망)

손님 주인 화목해도
순수함이 거짓이요

君臣合處正中邪 (군신합처정중사)

임금 신하 모인 곳도 
바른 가운데 그릇됨이라


還鄕曲調如何唱 (환향곡조여하창)

귀향 노래를
어떻게 부를 건가?

明月堂前枯木華 (명월당전고목화)

밝은 달밤 
집 앞의 고목나무 꽃이 피었네.




⑧ 廻機(회기)

涅槃城裏尙猶危 (열반성리상유위)

열반성 
그 속이 오히려 위태롭고


驀路相逢沒了期 (맥로상봉몰료기)

길에서 만나 봐도 
마칠 기약 없구나.


權掛垢衣云是佛 (권괘구의운시불)

방편으로 
때 낀 옷 입혀놓고 
부처라 하였으나


却裝珍御復名誰 (각장진어부명수)

비단 옷으로 단장하면 
무엇이라 부를 건가?


木人夜半穿靴去 (목인야반천화거)

목인은 한밤중에 
신을 신고 떠나가고


石女天明戴帽歸 (석녀천명대모귀)

석녀는 새벽녘에 
모자 쓰고 돌아오네.


萬古碧潭空界月 (만고벽담공계월)

만고의 푸른 못에 있는
허공의 달을


再三勞漉始應知 (재삼로록시응지)

두 번 
세 번 건져내야 
비로소 알리라.



⑨ 轉位歸(전위기)

披毛戴角入廛來 (피모대각입전래)

털옷 입고
뿔을 이고 
저자로 들어오니


優鉢羅花火裏開 (우발라화화리개)

우발라 보배 꽃이
불속에 피었구나.


煩惱海中爲雨露 (번뇌해중위우로)

번뇌의 바다 가운데 
비와 이슬 되어주고


無明山上作雲雷 (무명산상작운뢰)

무명산 위에서는 
구름이 되고 우레가 된다네.


鑊湯爐炭吹敎滅 (확탕노탄취교멸)

활활 타는 지옥 불을 
입으로 불어 끄고


劍樹刀山喝使摧 (검수도산할사최)

검수지옥
도산지옥 
소리쳐 꺾고서


金銷玄關留不住 (금쇄현관유부주)

부처님 궁전과 
조사의 관문에도 
머물지 아니하고

行於異路且輪廻 (행어이로차윤회)

다른 길을 가면서 
윤회를 밟고 있네.




⑩ 一色過後(일색과후)

枯木岩前差路多 (고목암전차로다)

고목나무 바위 앞엔 
갈림길이 많나니


行人到此盡蹉跎 (행인도차진차타)

길가는 이 
여기서 잘못 들기 일쑤더라.


鷺鷥立雪非同色 (노사입설비동색)

백로가 눈밭에 서니 
같은 색이 아니지만


明月蘆花不似他 (명월노화불사타)

갈대꽃 위에 
달이 밝으니 
다른 빛이라 하겠는가?


了了了時無所了 (료료료시무소료)

깨닫고, 깨닫고, 깨달아도
깨달은 것 없고


玄玄玄處亦須呵 (현현현처역수가)

현묘하고 현묘해 현묘한 곳 
또한 현묘한 것 없으니


慇懃爲唱玄中曲 (은근위창현중곡)

은근히 그대 위해 
현묘한 노래를 부르건만


空裏閃光撮得麽 (공리섬광촬득마)

허공 속의 
달빛을 어떻게 잡으랴.

[출처] 《십현담(十玄談)》열 가지 현묘한 말씀|작성자 곡두

 

http://kr.buddhism.org/%ed%95%9c%ea%b5%ad-%ec%97%ad%eb%8c%80-%ec%84%a0%ec%82%ac%ec%9d%98-%ec%98%a4%eb%8f%84%ec%86%a1/

 

한국 역대 선사의 오도송 – 디지털 불교

七日關中亦有言(칠일관중역유언) 威音雷若震乾坤(위음뢰약진건곤) 欲聆無說傳千古(욕영무설전천고) 秋夜寒鐘掛寺門(추야한종괘사문) 7일 동안 관중에서 부처님의 법음소리 들었네, 위엄스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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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日關中亦有言(칠일관중역유언)
威音雷若震乾坤(위음뢰약진건곤)
欲聆無說傳千古(욕영무설전천고)
秋夜寒鐘掛寺門(추야한종괘사문)

7일 동안 관중에서 부처님의 법음소리 들었네,
위엄스런 우레소리 천지를 진동했다.
말없이 말한 천고의 진리를 알고 싶었는데,
가을밤 찬 종소리 절문에 걸렸도다.

– 영파선사 –

 

知心生故種法生
(지심생고종법생)
마음이 생기면 만물의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心滅故龕墳不二 
(심멸고촉루불이)
마음이 멸하면 무덤, 해골물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구나.

– 원효대사 –

 

忽聞人語無鼻孔(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돈각삼천시아가)
六月 巖山下路(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야인무사태평가)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삼천대천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 구나.

– 경허선사 –

 

백운자각(白雲自覺 :흰구름에 깨달은 마음)

自有靑山路(자유청산로)
白雲那得留(백운나득유)

나그네 가슴에 푸른 산의 길이 있거늘,
흰 구름이 어떻게 잡을 수 있으리까.

– 동진선사 –

 

靑來藍表靑(청래람표청)
絳來 表絳(강래천표강)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으나 쪽보다 더욱 푸르고,
붉은 물감이 꼭두서니에서 나왔으나 꼭두서니보다 더욱 붉다.

– 운파선사 –

 

서광(西光 : 부처님의 광채)

西風吹動雨初歇
(서풍취동우초헐) 서쪽(부처님의 광채) 바람이 불어오자 비로소 비 개이니, 

萬里長空無片雲
(만리장공무편운) 높고 넓은 하늘에 한 조각구름도 없다.

虛室戶居觀衆妙
(허실호거관중묘) 빈 선실에 고요히 앉아 모든 묘리를 생각하니, 

天香桂子落粉紛
(천향계자락분분) 천향의 계수 열매가 어지럽게 떨어지네.

운향(雲香 : 구름처럼 펴져나가는 부처님의 법향)

無思無廬又無牽(무사무여우무견)
閑往閑來任自然(한왕한래임자연)
只得溪山何所事(지득계산하소사)
好隨年月度年年(호수년월도년년)

생각도 없고 근심도 없고,
아무것도 걸릴 것 없으니.
한가히 가고 한가히 와서
자연에 맡기노라.
산골짝 시냇물에 머물러 있으니,
연기와 달을 따라 세월을 보내노라.

– 종봉선사 –

적일(赤日 : 붉은 햇빛)

斜日穿朱閣(사일천주각)
斷雲 玉峯(단운기옥봉)
鈴搖千古塔(영요천고탑)
發百年松(회발백년송)
지는 햇빛은 붉은 누각에 비치고,
끊어진 구름은 옥봉(玉峯)을 의지했네.
천고(千古)의 탑에서 방울소리 흔들리고,
백년 뒤 소나무에 바람소리 웅웅거리네.

– 벽허선사 –

학우심(鶴羽心 : 학의 깃털에서 깨달은 마음)

靑鸞 尾落雲中(청난삼미락운중)
五月炎天做雪風(오월염천주설풍)
一揮何 欺煩署(일휘하시기번서)
拂盡山僧名利功(불진산승명리공)

푸른 난새의 긴 꼬리가 구름 속에서 떨어져,
오월의 불꽃 하늘에 눈바람을 지어낸다.
한번 휘두르면 어찌 번뇌와 집착을 속일 뿐이겠는가,
산승의 이름과 공을 모두 떨어 버리네.

유심(幽心 : 깊고 깊은 마음)

盡日忘機坐(진일망기좌)
春來不識春(춘래불식춘)
鳥女兼僧入定(조협승입정)
窓外喚山人(창외한산인)

매일 세상을 잊고서 앉아 있노라,
봄이 와도 봄이 온 줄을 알지 못하네.
산승이 선정(禪定)에 드는 것도 새는 싫어한다.
창밖에서 산승을 자꾸 부르네.

심선각(深禪覺 : 깊고도 깊어 상상할 수 없는 마음)

底事無心臥水西(저사무심와수서)
只綠忘世愛幽樓(지록망세애유루)
茶爐爲客開深 (다로위객개심조)
藥圃諱人隔小溪(약포휘인격소계)
晴散雨聲松老小(청산우성송노소)
磨秋色岳高底(영마추색악고저)
林禽亦有來警睡(림금역유래경수)
猶恐山僧夢紫泥(유공산승몽자니)

무슨 일로 무심히 수서에 누워 있는가,
다만 세상을 잊고 깊숙한 토굴을 사랑하기 때문이네.
차 솥은 객을 위해 깊은 아궁이를 열었는데,
약초밭은 사람들을 꺼려 조그만 시내를 격해 있노라.
비개인데 뿌리는 비 소리는 소나무 늙고 또 젊었는데,
찬 서리 다가오는 가을빛은 산 높고 또 낮다.
숲 속의 새가 또 와서 잠을 깨게 하는구나,
산승이 자니(紫泥 : 세속)의 꿈을 꿀까 두렵다

– 환성선사 –

감로심(甘露心 : 맑고 깨끗한 마음)

一亦不得處(일역부득처)
踏破家中石(답파가중석)
回看沒破跡(회간몰파적)
看者亦己寂(간자역기적)
了了圓 (요요원타타)
玄玄光 (현현광삭삭)
佛祖輿山河(불조여산하)
無口悉呑 (무구실탄극)

하나도 얻을 것 없는 곳에서, 집안의 돌을 모두 밟았네.
돌아보면 밟은 자취도 없고, 본다는 것도 이미 고요하여라.
분명하고 둥글어 한곳으로 치우치지 않은데, 그윽하여 광명은 빛나네.
부처와 조사 그리고 산하까지도, 입이 없이 모두 삼켜 버렸네.

( 7일 새벽에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고 확철대오하였다.)

고불각(古佛覺 : 변함없는 부처님의 법)

趙州古佛老(조주고불로)
坐斷千聖路(좌단천성로)
吹毛 面提(취모적면제)
通身無孔竅(통신무공규)
狐兎絶潛 (호토절잠종)
身師子露(번신사자로)
打破 關後(타파노관후)
淸風吹太古(청풍취태고)

조주 옛 부처가, 앉아서 천성(千聖)의 길을 끊고.
취모리(吹毛利)의 검(劍)을 들이대매, 온몸에 빈틈이 없네.
여우와 토끼는 자취도 없고, 몸을 뒤치어 사자가 나타났네,
튼튼한 관문을 부순 뒤에, 맑은 바람이 태고암에 불어오네.

– 원증국사 –

오도화(悟道花 : 깨달음의 꽃)

盡道明星夜 廻(진도명성야야회)
當寒須信雪中梅(당한수신설중매)
塵沙久却云成佛(진사구겁운성불)
何用如今正覺來(하용여금정각래)

밝은 별(깨달음의 별)이 밤마다 돌아온다고 모두를 말하는데,
추위를 당해 비로소 눈 속의 매화를 볼 수 있네.
진사(塵沙 : 재물이 티끌과 모래처럼 많다는 뜻)의 오랜 겁( )전에 부처됐다 하거니,
무엇하러 아직까지 깨치려 하는가.

불조욕(佛 浴 : 불법에 때를 씻은 마음)
洗沐春山古澗濱(세욕춘산고간빈)
虛明無復可 塵(허명무복가전진)
本來淸淨何須浴(본래청정하수욕)
但滌多生罪業身(단척다생죄업신)

봄 산골짝 오랜 시냇물에 목욕하나니,
텅비고 환히 밝아 다시 씻을 티끌 없다.
본래 맑고 깨끗한데 무엇 때문에 목욕을 하는가,
다만 여러생 죄업의 몸을 씻을 뿐이네.

– 최눌선사 –

心菊(마음에 심은 국화꽃)

築以瓦 覆以沙(축이와전복이사)
中央種菊養朝霞(중앙종국양조하)
丹 帶露風前嫩(단파대로풍전눈)
綠葉凌霜秋後嘉(녹엽능상추후가)
彭澤籬邊無盡色(팽택이변무진색)
羅含宅裏有餘花(나함택리유여화)
看來獨坐禪窓下(착래독좌선창하)

벽돌을 쌓고 모래를 덮고
그 가운데 국화를 심어 아침 노을 즐기네
붉은 꽃송이 이슬을 머금으니 바람 앞에 연약하고
푸른 잎 서리를 능멸하나 가을이 되어야 아름다운 것을
깨끗한 연못의 울타리엔 그 빛깔 끊임없고
울타리 없는 집 안에는 많은 꽃이 피어있네
선실의 창문 아래 홀로 앉아 있노라면 어느덧 해 저문다.

雲心(구름에 심은 마음)

天開寶界藏無盡(천개보계장무진)
削立圭峰勢欲崩(삭입규봉세욕붕)
榮辱人問消息斷(영욕인간소식단)
白雲常護坐禪僧(백운상호좌선승)

하늘이 극락정토를 열어 다함없이 간직하였고
깎아지른 듯한 마음의 규봉(圭峰)은 무너질 듯한 형세일세
영예와 치욕이 있는 인간의 소식 끊어지니
흰 구름 늘 좌선하는 나를 안아주네.

– 월정선사 –

심월각(心月覺 : 마음의 달)

飄如雲不繫(표여운불계)
皓大明無痕(호대명무흔)
採藥蓬萊島(채약봉래도)
烹茗方丈雲(팽명방장운)

구름처럼 나부껴 매이지 않고,
달처럼 밝아 그 흔적 없다.
봉래도(蓬萊島)에서 약을 캐고,
방장(方丈 : 선림)의 구름에 차를 달이네.

– 재월선사 –

천지심(天地心 : 하늘과 땅의 마음과 나의 한마음)

秋山疎雨過(추산소우과)
霜葉落庭苔(상엽락정태)
白犬通消息(백견통소식)
罷禪御鶴來(파선어학래)

가을 산중에 비가 지나갔나니,
서리 맞은 잎이 앞뜰 이끼 위에 떨어진다.
하얀 개에게 소식을 전하고,
선정에서 깨어나 학(鶴)을 타고 오도다.

– 무산스님 –

검각(劍覺 : 부처님의 칼)

飛星爆竹機鋒峻(비성폭죽기봉준)
烈石崩 氣像高(열석붕의기상고)
對人殺活如王劍(대인살활여왕검)
凜凜威風滿五湖(늠름위풍만오호)

비성(飛星)과 폭죽(爆竹)의 날카로운 칼날 우뚝하고, 갈라지는 돌 무너지는 언덕의 기상 높도다.
사람을 죽이고 살림이 왕의 검과 같은데, 늠름한 위풍이 온 세상에 가득하도다.

– 혜감국사 –

각문(覺門)

忽聞杜宇啼窓外(홀문두우제창외)
滿眼春山盡故鄕(만안춘산진고향)
汲水歸來忽回首(급수귀래홀회수)
靑山無數白雲中(청산무수백운중)

홀연 들려온 소쩍새 소리에 창밖을 보니,
봄빛에 물든 온 산이 모두 고향이구나.
물 길어 오는 길에 문득 머리 돌리니,
수많은 청산이 흰 구름 속에 솟았네.

선사는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 선사 회상에 나아가 수참하여 인가를 받았다. 이후 지리산 삼철굴, 사불산 대승암 등 여러 선방에서 몇 년을 보낸 후 남원에 사는 벗을 만나러 가는 도중 한 낮에 닭 우는 소리에 확철대오하였다.

성관(聲觀 : 소리에 불타를 보고 깨우쳤네)

髮白非心白(발백비심백)
古人曾漏洩(고인증루설)
今聽一聲鷄(금청일성계)
丈夫能事畢(장부능사필)
忽得自家底(홀득자가저)
頭頭只此爾(두두지차이)
萬千金寶藏(만천금보장)
元是一空紙(원시일공지)

머리는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 우는 소리 들으니,
대장부 할 일 다 마쳤네.
홀연히 네 집을 발견하니,
모든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천언 만어의 경전들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 청허선사 –

관영불(觀影佛 : 깨달음의 화신)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劫嫌長袖掛崑崙(겁혐장수쾌곤륜)

하늘을 덮고 산을 베고 땅 위에 누웠다가,
구름 병풍에 달빛을 등불 삼아 바다 술을 마신다.

마음껏 취하여 비틀비틀 춤추려다,
어허! 소매 길어 곤륜산에 걸리겠네.

– 일옥선사 –

오무관(吾無觀 : 아무것도 없는 것)

了知諸行皆如幻(요지제행개여환)
見法惟心心自閒(현법유심심자한)
無際性空智月滿(무제성공지월만)
無靜無作獨團團(무정무작독단단)

모든 것 허깨비임을 알고,
법을 보니 마음뿐이라 마음이 절로 한가하도다.

가없는 자성 허공에 지혜의 달빛 가득하네,
고요함도 움직임도 없이 홀로 둥글구나.

– 원오선사 –

무위한(無位閑:몸도 마음도 없는 것)

松窓土壁溪邊地(송창토벽계변지)
白首緇衣懶一翁(백수치의나일옹)
意到忽然心自樂(의도홀연심자락)
朗吟閑步任西東(랑음한보임서동)

창밖에 푸른 솔이 보이는 시냇가 초암에,
흰머리 검은 승복 게으른 늙은이 하나.

마침내 한 경지 다다르고 보니 마음 절로 즐거워,
낭랑한 목소리로 경 읊조리며 한가로이 거니네.

월파공(月破空 : 깨달음의 소리)

卓立庭前栢(탁입정전백)
長靑直聳空(장청직용공)
影從千古月(영종천고월)
聲任四時風(성임사시풍)

우뚝 선 뜰 앞의 잣나무,
창공으로 솟은 늘 푸른 모습.

천고의 달빛 따라 그림자 드리우고,
사계절 바람 좇아 소리를 낸다.

– 무외선사 –

오매심(寤寐心)

不學宣王敎(불학선왕교)
寧聞桂吏玄(영문계이현)
早入西山堂(조입서산당)
唯傳六祖禪(유전육조선)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배운 일 없으니,
어찌 노장(老莊)의 학설을 들었으랴.

일찍이 서산의 집으로 들어가,
오로지 육조의 선(禪)만을 참구했네.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서는 ‘오심(悟心)’읊었다

오심(悟心)

雲走天無動(운주천무동)
舟行岸不移(주행안불이)
本是無一物(본시무일물)
何處起歡悲(하처기환비)

구름이 달리지 하늘은 움직이지 않는 법,
배가 갈뿐 언덕은 가지 않는 것을,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에 기쁨 슬픔 있으리요.

– 편양선사 –

오각(吾覺:나의 본모습)
頭 兮眼卓朔
두봉송혜안탁삭
此其老僧眞面目
차기노승진면목
上柱天之下柱地
상주천지하주지
佛祖元來覓不得
불조원래멱불득
呵呵呵呵是甚
가가가가시심마
南北東西唯是我
남북동서유시아
“머리카락은 더부룩하고 눈은 툭 불거진 그 모습,
이 늙은이의 진면목일세.

위로 하늘 아래로는 땅을 버티고 선 그것을,
부처님도 조사(祖師)님도 원래 찾을 길 없구나.

우습도다 그것이 무엇일까,
남북동서에 오직 나 혼자이로다.”
선사는 용문암에서 5년간 수선결사를 마치고 고향의 인근 고을인 장성 백양산 운문암으로 돌아와 쇠잔한 불교계에 새로운 전력을 하게 되었다.

– 백파선사 –

금세구(金世龜)

身遊一片仙巖寺(신유일편선암사)
夢想千秋月鶴亭(몽상천추월학정)
霜後幾看新竹綠(상후기간신죽록)
雪中惟對古松靑(설중유대고송청)
嗟吾老去難成卷(차오노거난성권)
愛爾年來易閱經(애이년래역열경)
綠苑尼山雖異路(록원니산수이로)
天然大道共門庭(천연대도공문정)

이 내몸 일편단심 선암사에 머물고,
꿈 속같이 끝없는 세월 달 아래에 학처럼 깃들어 있네.

서리가 내린 후 바라보니 댓잎은 더욱 푸르고,
눈이 온 후에 생각하니 소나무 더욱 청청하다.
슬프다 늙어짐이,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부처님만을 바라보고 살았네.
녹야원(鹿野苑)에 임하니,
만유(萬有 : 우주)의 대도를 깨달았네.

축계(竺桂)

天西竺桂海東馨(천서축계해동형)
況又秋霜月下庭(항우추상월하정)
誰信古今根自固(수신고금근자고)
我知冬夏葉常靑(아지동하엽상청)
開花爛慢隣僧榻(개화난만린승탑)
庾影婆娑送客亭(유영파사송객정)
雨後微凉除熱惱(우후미양제열뇌)
也宜端坐索禪經(야의단좌삭선경)

부처님의 밝은 법향 해동에 널리 펴졌고,
가을의 서리 월하(月下)의 뜰에 내렸다.
누구(중생)를 향한 마음 고래로 굳건한데,
나의 마음 춘하추동 푸르다.
만개한 촛불 법상에 빛나고,
그림자처럼 객이 떠난 깨끗한 정자이런가,
미동도 없이 단좌(端坐)하니 선경(禪經)이 확연하네.

– 상월선사 –

각심(覺心)

範圍天地大(범위천지대)
絶對有何 (절대유하종)
可笑觀心者(가소관심자)
量空又繫風(양공우계풍)

돌아보니 천지는 삼천대천세계,
견줄 수 없는 마음 어떻다 말하리.

이렇게 맑고 밝은 마음,
그 크기와 무게를 어떻게 논하리.

심등화(心燈花)

歷劫傳傳無盡燈(역겁전전무진등)
不會桃別鎭長明(불회도별진장명)
任他雨灑兼風亂(임타우쇄겸풍란)
漏屋虛窓影自淸(루옥허창영자청)

영겁(永劫)따라 밝혀온 등불,
꺼지고 켜짐도 없는 아름다운 밝은 빛.

삼라만상 깨끗이 할 청아한 바람 일어난다.

타락된 선실 허공의 창에 비친 나의 맑고 맑은 마음이어라.

자연을 초월하는 선사의 깨침은 청아하다 못해 생멸(生滅)도 없어 보인다. 당시 쇠잔해지는 지리의 등불에 불을 켠 선사는, 삶에 있어서 허망 속에 내재한 진실된 그 무엇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이의 구현에 힘쓰라고 가르쳤다. 선사께서 깨친 혜안은 현종(玄宗 : 현묘(玄妙)한 종지(宗旨), 즉 부처님(佛)의 통각(通覺))이다. 세속적 물욕에서 벗어나 청아한 삶을 살라는 선사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미혹한 중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다.

선사는 “가장 행복한 삶은 어떻게 사느냐”는 질문에 언제나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終日忘機坐(종일망기좌)
諸天花雨飄(제천화우표)
生涯何所有(생애하소유)
壁上掛單瓢(벽상괘단표)

세상일 잊고 고요히 앉아있노라니, 천지엔 온통 분분한 꽃과 비 뿐이네. 내게 있는 건,
다만 벽에 걸린 표주박 하나뿐.

– 함월선사 –

무일화(無一花)

一念不生全體現(일념불생전체현)
此體如何得喩齊(차체여하득유제)
透水月華虛可見(투수월화허가견)
無心鑑象照常空(무심감상조상공)
洞中流水如藍染(동중류수여람염)
門外靑山盡不成(문외청산진불성)
山色水聲全體露(산색수성전체로)
箇中誰是悟無生(개중수시오무생)

한 생각도 나지 않으면 전체가 나타나려니,
이 본체를 어떻게 말 할 수 있으리요.
물 속 달빛은 허공에서도 볼 수 있으나,
무심의 거울은 비추어도 항상 허공이로다.
골짜기 흐르는 물은 쪽물인 것 같고,
문밖의 청산은 자연 그대로이다.
산색, 물소리에 전체가 드러났으니,
그 속에서 무생(無生 : 모든 법의 실상은 생멸(生滅)이 없는 것)의 깨달음을 얻었노라.

선관(禪觀)

黃面瞿曇不良久(황면구담불량구)
室中維摩亦不默(실중유마역불묵)
恰似吹毛新發硏(흡사취모신발연)
外道天魔 處不得(외도천마처불득)

금빛 얼굴의 부처님은 유구한 세월도 없나니,
방장실의 유마힐도 침묵하지 않도다.
선의 본바탕은 새로이 연마한 취모리(번개같이 빠른) 검과도 같으니, 외도와 천마(天魔)도 넘보지 못하네

– 백운선사 –

선등(禪燈)

一點孤燈烱(일점고등형)
登床杜口時(등상두구시)
機鋒似林臨(기봉사임림)
濟奧契希夷(제오계희이)
始覺浮生幻(시각부생환)
多 宿嶪癡(다참숙업치)
禪心與禪大(선심여선대)
相照幾人知(상조기인지)

한점의 외로운 등불 빛나는 것은, 세상에 올라 입을 다문 그 때이네.

심기(心氣)는 번뇌망상과 비슷한데, 오묘한 이치는 희이(希夷 : 돈오)와 어루러졌으나. 부생(浮生)이 환상임을 비로소 깨치니, 전생업이 어리석어 부끄럼 많다. 선심(禪心)은 선행(禪行)보다 더 큰데, 그 비침을 누가 알리요.

선월(禪月)

滿庭秋月白森森(만정추월백삼삼)
人靜孤燈夜已深(인정고등야이심)
風淡霜淸不成夢(풍담상청불성몽)
紙窓簾影動禪心(지창염영동선심)

뜰에 가득한 가을 달 흰빛이 창창한데, 사람 없어 고요하고 외로운 등(燈)밤은 깊었다. 바람 담담하고 서리 맑아서 꿈 못 이루는데, 종이ㆍ창ㆍ발 그림자에 선심(禪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구나.

선사의 깨침은 태산같은 설산이 녹아내린 것과 같다.

– 설잠선사 –

연각향(蓮覺香)

定中見解最高圓(정중견해최고원)
更把乾坤比一拳(경파건곤비일권)
七冊金文開次第(칠책금문개차제)
這般心事淨如蓮(자반심사정여연)

선정에서 얻은 견해 원만한 지혜인데, 또 다시 하늘, 땅을 한 주먹에 비하노라.

부처님의 팔만경전 일곱 책을 한 권 한 권 펼쳐보니, 맑아진 마음에 가시 피어난 연꽃 한 송이로다.

불조향(佛祖香)

漸作衷翁(점작충옹)
依舊癡童(의구치동)
佛祖意(불조의)
半夜 (반야체동)
淸寒家計(청한가계)
淡泊宗風(담박종풍)
看影卽眞(간영즉진)
凡卽佛(범즉불)
色卽空(색즉공)

점점 늙어가는 데도, 예전처럼 여전히 어리석은 어린애일 뿐이네.

부처님의 뜻, 반야(半夜)에 무지개 오른다.

청빈한 가계(家計)요, 담박(淡泊)한 종풍이다.

환영(幻影)이 곧 진제(眞諦)요, 범인이 곧 부처요, 색계가 곧 진공(眞空)이구나.

– 혜장선사 –

일관(一貫)

一貫千殊妙聰明(일관천수묘총명)
森羅萬象都自己(삼라만상도자기)

일념으로 망상을 천만번 끊어 불법의 지혜를 얻으니,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로다.

선사는 마하연에서 내려와 안변 석왕사를 거쳐 은심암에서 한철을 보내고, 함흥 서쪽에 있는 백운산 국계암에서 수년간 가행정진하였다. 다시 호남을 향하여 내려가다 병을 얻어 천보산 회암사의 차안당에서 사경을 헤매던 끝에 일어나 오송(悟頌)을 지으셨다.

도산(道山)

以道名山意欲觀(이도명산의욕관)
杖藜終日苦 攀(장려종일고제반)
行行 見山眞面(행행총견산진면)
雲自高飛水自湲(운자고비수자원)

도라 이름 지은 산을 보고 싶어서,
지팡이 짚고 하루 종일 고생고생 기어오르니.

가고 또 가다가 홀연히 산의 참모습 보았노라,
구름 절로 높이 날고 개울 물 절로 졸졸 흐르네.

선사는 봉은사의 주지 명곡대사가 인퇴(引退)하면서 주지에 추천되었다. 선사는 명종(明宗) 3년 12월 15일에 문정왕후로부터 봉은사 주지로 임명받아 징부(徵赴)하였다.

선애(禪碍)
心本虛明沒惹塵(심본허명몰야진)
懷修鍊隔三千(재회수련격삼천)
非臺古鏡光常照(비대고경광상조)
無樹菩提體自圖(무수보제체자도)
隱隱俯仰行坐裏(은은부앙행좌리)
昭昭談笑視聽邊(소소담소시청변)
迷人喚作精神會(미인환작정신회)
識者還知最上禪(식자환지최상선)

마음은 본래 허명한 것으로 티끌을 일으킴이 없는 것, 도(道)를 닦는다는 생각을 함으로 3천의 사상(事像)이 가로 막힌다.

대(臺)가 없어도 고경(古鏡)의 광명은 항상 비추고, 나무는 없어도 보리(菩提)는 스스로 원만하다.

은거하여 깊이 행하고 앉는 속, 맑고 맑은 소리 또 보고 듣는데,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정신세계라 하나, 식자들이 알지 못하는 최고의 선지(禪旨)로다.

– 뇌암선사 –

유심(幽心:그윽한 마음)

山中人方在空谷(산중인방재공곡)
坐蒲團方女蘿衣(좌포단방여라의)
翠丈 環而爲屛(취장환이위병)
白雲飛而爲 (백운비이위유)
朝 葉方落松(조건엽방락송)
暮採秀方燁燁芝(모채수방엽엽지)
石泉兮冷冷(석천혜랭냉)
我齒方自潔(아치방자결)
杳然方與世相違(묘연방여세상위)
風埈方不到丈室(풍준방불도장실)

산 속 사람이 빈 골짜기에 사노라니,
부들 방석에 앉아도 비단옷일세.

푸른색 높은 산 둘러 병풍이요,
흰구름 날아 휘장이 되네.

아침에 채취한 잎은 낙락송인데,
저녁에 뜯은 잎은 향초로다.

바위 틈에서 솟은 물은 차고도 찬데,
내 이를 닦으니 스스로 맑아졌다.

아득한 자연 속세는 더욱 멀고,
저세상 회오리 바람도 내 방에는 못 드네.

선사의 오송(悟頌)은 담연(澹然)하기가 물 속의 달과 같다. 또한 선사의 깨침은 담화(曇花)이다. 담화(曇花:구름 꽃, 꽃구름, 하늘의 해와 달을 비유한 것, 즉 우담화(優曇花:상상 속의 식물, 3천년 만에 한번씩 꽃이 핀다는 꽃이다. 우담화는 하늘에 떠오른 태양을 뜻하며, 또한 사랑과 음덕의 주체를 뜻한다)로서 우리 중생들에게 임천(林泉:수풀과 샘물)이 되었다

– 취여선사 –

心燈(심등)

微言宴應(미언연응)
卽心無心(즉심무심)

부처님의 미묘한 말씀 그윽이 통하는 것이나,
마음은 항상 즉해 있으면서도 본래 없는 것이다.

– 신행선사 –

일심무애(一心無碍)

筏師旣捨矣(벌사기사의)
舟子何繫焉(주자하계언)

큰 배를 이미 버렸거늘,
어찌 작은 배에 매여 있으리요.

– 무염국사 –

무문(無聞)

眼耳元來自沒 (안이원래자몰종)
箇中誰得悟圓通(개중수득오원통)
空非相處飜身轉(공비상처번신전)
犬吠驢鳴盡豁通(견폐노명진활통)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누가 그 가운데서 원만히 깨칠 것인가.
텅 비어 형상 없는 곳에서 몸을 굴리면,
개 짖음과 나귀 울음이 모두 도(道)를 깨침이네.

이후 왕사께서는 중국 연도(燕都)에 들어가 법원사(法源寺)에 주석하고 있는 지공 선사(指空禪師)를 찾았다. 지공이 물었다.“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대를 여기 오라하던가.” “고려에서 혜근이 스스로 왔습니다.”지공은 허락했다. 이후 왕사는 지공 문하에서 수참(修參)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지공은 왕사에게“하늘의 해와 땅의 조사를 모두 다 쳐부수어, 그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무엇인가” 물었다. 왕사는“안팎이 다 붉다”면서 대각(大覺)을 이루게 되었다. 왕사의 입에서 금구(金口 : 부처님의 입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황금이나 금강에 비유한 말)가 흘러 나왔다.

대원(大圓)

包塞虛空絶影形(포색허공절영형)
能含萬像體常淸(능함만상체상청)
目前眞景誰能量(목전진경수능량)
雲卷靑天秋月明(운권청천추월명)
허공을 꽉 싸안은 그 모습 뛰어나,
온갖 형상 머금었어도 몸은 항상 깨끗하다.
눈앞의 참 경개(景槪)를 누가 능히 헤아리니,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은 밝아라.

– 나옹선사 –

불각화(佛覺華 : 부처님의 꽃)

普光明殿是吾家(보광명전시오가)
三法一源初睡起(삼법일원초수기)
百十由旬一念收(백십유순일념수)
世間時 都爲爾(세간시겁도위이)
부처님께서 화엄경을 설하신 곳(보광명전)은 그대로 나의 집이요,
삼법(敎法ㆍ行法ㆍ證法)의 한 근원에 첫잠이 깨다.

멀고도 너무 멀어서 생각하기 힘든 거리 한 생각에 거둬들이니,
세간의 시간이야 모두 헛된 것이구나.

– 진각국사 –

무애(無碍)

春日花開桂苑中(춘일화개계원중)
暗香不動小林風(암향부동소림풍)
今朝果熟沾甘露(금조과숙첨감로)
無限人天一味同(무한인천일미동)

봄날 꽃은 계원(桂苑)중에 피었는데,
암향(暗香)은 소림의 바람에 움직이질 않는구나.
오늘 아침 익은 과일은 감로에 젖었고,
한없는 인천(人天)은 한 가지 맛이구나.

그 후 국사는 감로사를 떠나서 정혜사(定慧寺)에 주석한다. 45세 되는 봄에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청천(聽泉)

鷄足峯前古道場(계족봉전고도장)
今來山翠別生光(금래산취별생광)
廣長自有淸溪舌(광장자유청계설)
何必 更擧揚(하필남남경거양)

계족산 봉우리 앞 옛 도량,
이제와 보니 푸른 산 빛 유별나네.

부처님 소리 바로 맑은 시냇물 소리인데,
무엇 때문에 귀찮게 다시 부처님 소리 세우리.

국사께서는 부처님의 법이 자연 자체인 것을, 또한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마는 국사의 수행은 끝이 없었다.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무릎에 먼지가 쌓여 새발자국이 찍히며 머리카락은 억새풀처럼 변하여 허수아비처럼 되는 선정에 들고는 하였다. 이렇게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선정에 들어있던 어느 날 천지각(天地覺)을 하였다.

천지일향(天地一香)
塵刹都盧在一庵(진찰도노재일암)
不離方丈遍詢南(불리방장편순남)
善財何用勤 甚(선재하용근구심)
百十城中枉歷參(백십성중왕력참)

티끌과 정토(淨土)가 모두 한 암자,
방장실을 떠나지 않고도 남방을 두루 순방했네.
선재동자(善財童子)는 무엇 때문에 그리도 심한 고생을 자처하여,
백십성(百十城:수를 셀 수 없는 여러 곳)을 순력(巡歷:돌아다닌다)했는가.

– 원감국사 –

영원한 향기(永香)

妙明眞性(묘명진성)
淸淨眞性(청정진성)
我爲大法王(아위대법왕)
於法悉自在(어법실자재)

만유(萬有) 세계의 그 자체는 소소영령(昭昭靈靈)하여 어느 곳 어디서나 항상 어둡지 않고, 인연에 속한 것도 아니요 자연도 아니며 본래 모든 생령이 다 갖추어 있는 여래장이다.

– 원진국사 –

심행처멸(心行處滅)

空費悠悠憶少林(공비유유억소림)
因循衰 到如今(인순쇠빈도여금)
毘耶昔一無成臭(비야석일무성취)
摩竭當年絶響音(마갈당년절향음)
似 能防分別意(사올능방분별의)
如癡必禦是非心(여치필어시비심)
故將忘計飛山外(고장망계비산외)
終日忘機對碧岑(종일망기대벽잠)

부질없이 소림(중국에 있는 절)만을 생각하다 / 어느덧 구레나룻은 희끗희끗 / 부처님 열반후 불교가 크게 펼쳐진 곳〔비야리(毘耶離)〕의 옛날은 소리도 냄새도 없고 / 마가다(摩竭陀ㆍ불멸 후 처음으로 불교가 펼쳐진 곳)의 음향은 끊어졌어라 / 말뚝인 양 앉아 있으니 일체분별 사라지고 / 바보처럼 지내라노니 시비심 일지 않네 / 헛된 생각일랑 산문 밖으로 날려 보내고 / 온종일 세사(世事)를 잊고 푸른 산만 마주한다

– 부용선사 –

일념회광(一念廻光)

趙州老露刀劍
조주노로도검
唱夢中說夢漏
창몽중설몽루

조주란 늙은이의 칼날이 드러나니
어허, 꿈속에서 꿈을 말함이라
선사의 오도송에서 나타난 것처럼 선사께서 추구하신 깨달음의 참구는 활구선이다.

界有成住壞空
계유성주괴공
念有生住異滅
념유생주이멸
身有生老病死
신유생노병사
無常之體無常
무상지체무상

유·무형 세계에는 이뤄지고 머물고 무너지고 없어지는 현상이 있고, 생각에는 생겨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없어지는 현상이 있으며,
몸에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현상이 있다.

무릇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다.

– 일선선사 –

십이각시(十二覺時)
覺非覺非覺
각비각비각
覺無覺覺覺
각무각각각
覺覺非覺覺
각각비각각
豈獨名眞覺
기독명진각
깨달음은 깨닫는 것도
깨닫지 않는 것도 아니니
깨달음 자체가 깨달음 없어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네.
깨들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을 깨닫는 것이 아니니
어찌 홀로 참깨달음이라 이름하리요.
무념(無念)
如以念念念
여이념념념
念念非眞念
념념비진념
將眞治妄念
장진치망념
未苦無一念
미고무일념
만일 생각으로써 생각을 생각한다면
생각을 생각하는 것은 참다운 생각이 아니니
참다운 생각으로써 잘못된 생각을
다스리면
괴로움 일어나기 전처럼 한 생각도 없다네.

– 청매선사 –

관선(寬禪)
參盡名家最後尋
참진명가최후심
因緣厚薄可知今
인연후박가지금
長春浪送長春洞
장춘랑송장춘동
梵海勤求梵海心
범해근구범해심
詩和竹間題竹葉
시화죽간제죽엽
宴開松下廳松琴
연개송하청송금
去留有數庸何挽
거유유수용하만
桂月團團照兩襟
계월단단조양금

몸과 마음을 다하여 도(道)를 생각함으로 길고 깊은 인연 오늘에까지 이어졌네
장춘을 물처럼 흘려보냈는데 다시 장춘동일세.
범해가 일구월심 구하는 것이 범해 마음인데
대나무 속에서 시(詩)와 함께 찻잔만 기울인다.
소나무 아래서 소나무와 벗하여
거문고 소리 즐기다 보니
덧없이 세월만 가고 낡은 수레바퀴처럼 되었고
8월의 교교한 달빛만 양 가슴속에
남았네.

– 범해선사 –

着火廚中眼忽明
착화주중안홀명
從玆古路隨緣淸
종자고로수연청
若人問我西來意
약인문아서래의
巖下泉鳴不濕聲
암하천명불습성

부엌에서 아궁이 불 붙이다 홀연히 눈이 밝았네
깨달은 후 본래 자리에서 보니 인연 따라가도 물들지 않네
만일 누가 나에게 달마가 왜 서쪽에서 왔냐고 묻는다면
바위 밑 샘 소리, 그 소리는 물에 젖지 않는다고

– 한암선사 –

黃河西流崑崙頂
황하서류곤륜정
日月無光大地沈
일월무광대지침
遽然一笑回首立
거연일소회수립
靑山依舊白雲中
청산의구백운중

항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대지는 꺼지는도다
한번 웃고 돌아서니
청산은 예대로 구름 속에 섰네

– 성철선사 –

참조글 http://blog.daum.net/34711/15249485

 

https://www.youtube.com/watch?v=E23xoQPWty8 

 

 

동안상찰,<十玄談> 김시습,요해 > 한룡운,주해

한용운, 파리 ⊙ 님의 침묵 外/ 동안상찰,<十玄談> 김시습,요해 > 한룡운,주해

 

한용운, 파리 ⊙ 님의 침묵 外/ 동안상찰,<十玄談> 김시습,요해 > 한룡운,주해

https://www.youtube.com/watch?v=i_Uu_EXaS7A&list=RDi_Uu_EXaS7A&start_radio=1 파리 ㅡ 한용운 이 작고 더럽고 밉살스런 파리야 너는 썩은 쥐인지 만두인지 분간을 못하는 더러운 파리다. 너의 흰옷에는 검은 똥칠을

kydong77.tistory.com

 

[경제 뉴스]

https://www.coindesk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91340 

 

[코인시황] 비트코인 한때 2만7000달러 붕괴…시장 전반 하락세로 전환 - 코인데스크코리아

비트코인(BTC)은 한때 2만7000달러 선이 무너지며 고무적인 인플레이션 수치에 따른 초반 상승세에서 돌아섰다. 트레이딩뷰에 따르면, 코인베이스의 비트코인/미국 달러 거래쌍은 2만6800달러까지

www.coindeskkorea.com

비트코인(BTC)은 한때 2만7000달러 선이 무너지며 고무적인 인플레이션 수치에 따른 초반 상승세에서 돌아섰다.

트레이딩뷰에 따르면, 코인베이스의 비트코인/미국 달러 거래쌍은 2만6800달러까지 하락했으나 이후 소폭 상승했다. 비트코인은 2만7400달러에 거래됐는데, 이는 오늘 새벽 4시 기준으로 최근 1시간 동안 4% 이상, 24시간 동안 1.8% 하락한 수치다. 

코인글래스에 따르면, 가격 변동에 베팅한 트레이더들은 약 1시간 동안 비트코인 매수 포지션에서 4700만달러 이상 청산한 반면, 매도 포지션에서는 500만달러가 조금 넘는 정도였다. 이 같은 유형의 롱스퀴즈는 보통 가격 하락을 촉발한다.

암호화폐(가상자산) 데이터 업체 카이코의 리야드 캐리 리서치 애널리스트는 “작년 11월 FTX 거래소 붕괴 이후 비트코인 시장 심도(유동성 상태를 평가하는 지표)는 2%로 집계된 후 거의 회복되지 않았다”며 “시장의 유동성 부족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노동통계국이 발표한 소비자물가지수(CPI)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3월 5%에서 4월 4.9%로 둔화해 예상치인 5%를 밑돌았다. CPI는 전월 대비 0.4% 상승해 예상과 일치했다. 3월(0.1%)보다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더리움(ETH)은 지난 24시간 동안 1% 하락해 1860달러에 거래됐다. 코인데스크시장지수(CMI)도 1% 하락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C%84%B1%EC%A0%9C

 

사성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어: catvāri āryasatyāni) 또는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제(

ko.wikipedia.org

https://ko.wikipedia.org/wiki/%ED%8C%94%EC%A0%95%EB%8F%84

 

팔정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견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제이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정도(八正道, 산스크리트어: āryāṣṭāṅgamārga, 팔리어: pa ariyo aṭṭhaṅgiko magg

ko.wikipedia.org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8365

 

초전법륜(初轉法輪)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싯다르타는 붓다가 된 후 깨달음의 법을 펴기로 결심하고, 처음으로 법을 가르칠 상대로 이전에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가 있는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찾아간다. 싯다르타가 고행을 포기하고 사치스런 삶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던 다섯 수행자는 처음에는 붓다를 거부하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붓다를 보고 자연스럽게 맞이하여 붓다가 설명하는 가르침을 듣기 시작한다.

저속하고 무의미한 쾌락에 빠지는 삶과 힘들고 무의미한 고행에 몰두하는 삶의 양 극단을 피하고 깨달음과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바른 길이자 중도(中道)인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치고 난후 붓다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를 완전히 깨달았기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포한다. 이 초전법륜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여 다섯 수행자는 차례로 첫 번째 성자의 경지인 수타원[預流]이 되었다. 이후 다섯 수행자는 붓다의 정식 제자인 비구가 되었다.

 

 

https://kds11002.tistory.com/13480702

 

초전법륜경 원본

초전법륜경 (初轉法輪經,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1. 사슴동산에서 "Evam me suttam — Ekam samayam Bhagavā Bārānasiyam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Thus have I heard — At o

kds11002.tistory.com

 

1. 사슴동산에서

"Evam me suttam  Ekam samayam Bhagavā Bārānasiyam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Thus have I heard  At one time the Blessed one was staying at the deerparkintheSage'sGrove.ThentheBlessedOneaddressedthegroupoffiveascetics:"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와라나시 근처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2. 두 가지 극단에 대하여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Katame dve? Yo cāyam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mhito, yo cāyam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mhito.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t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ni ñānakarani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These two extremes, monks, should not be followed by one gone forth. Which two? Sensual indulgence, which is low, vulgar, worldly, ignoble, and unprofitable; and self-mortification, which is painful, ignoble, and unprofitable. Avoiding these two extremes, monks, the Tathāgata has discovered the Middle Path that produces vision and knowledge, and leads to tranquillity, higher knowledge, enlightenment, and nibbāna."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3. 중도와 팔정도에 대하여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t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nī ñānakaran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Ayameva ariyo atthangiko maggo, seyyathidam: sammāditthi sammāsan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m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t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nī ñānakaran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And what, monks, is the Middle Path that produces vision and knowledge, and leads to tranquillity, higher knowledge, enlightenment, and nibbāna? It is this noble eightfold path itself, namely: right view, right thought,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The Tathāgata, monks, has discovered the Middle Path that produces vision and knowledge, and leads to tranquillity, higher knowledge, enlightenment, and nibbāna."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4. 고통의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m ariyasaccam: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byādhipi dukkho, maranampi dukkham,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m na labhati tampi dukkham: sam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suffering: birth is suffering, aging is suffering, disease is suffering, death is suffering, association with the unloved is suffering, separation from the loved is suffering, not getting what one wants is suffering, in brief the five aggregates of grasping are suffering."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이 바로 괴로움이다.

 

5. 고통의 일어남에 대한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am ariyasaccam: yāyam tanhā ponob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m: kāmatanhā, bhavatanhā, vibhavatanhā."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the cause of suffering: this craving that leads to repeated becoming, taking delight now here, now there, namely: craving for sensual pleasures, craving for existence, and craving for non-existence."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6. 고통의 소멸에 대한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m ariyasaccam: yo tassāyeva tan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tinissaggo mutti anālayo."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uffering: the cessation of craving without any remainder, giving it up, renouncing it, and complete freedom from it."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7.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런 진리에 대하여

"Idam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tipadā ariyasaccam: ayameva ariyo atthangiko maggo, seyyathidam: sammāditthi sammāsan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This, monks, is the noble truth of the way leading the cessation of suffering: this noble eightfold path itself, namely: right view, right thought,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8. 고통의 성스런 진리를 철저 하게 알고

"Idam dukkham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m ariyasaccam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m ariyasaccam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Insight, knowledge, wisdom, vision, light arose regarding things not seen before that This is the noble truth of suffering.' This noble truth of suffering should be [thoroughly] understood.' 'This noble truth of suffering has been understood.'"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9. 고통의 일어나는 성스런 진리를 철저하게 알고

Idam dukkhasamudayam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samudayam ariyasaccam pah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samudayam ariyasaccam pahī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Insight, knowledge, wisdom, vision, light arose regarding things not seen before that This is the noble truth of the cause of suffering.' This noble truth of the cause of suffering should be abandoned.' 'This noble truth of the cause of suffering has been abandoned.'"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0. 고통이 소멸 되는 성스런 진리를 철저하게 알고

Idam dukkhanirodham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nirodham ariyasaccam sacchik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nirodham ariyasaccam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Insight, knowledge, wisdom, vision, light arose regarding things not seen before that This is the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uffering.' This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uffering should be realised.' 'This noble truth of the cessation of suffering has been realised.'"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聖諦]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1. 고통을 소멸로 이끄는 도의 성스런 진리를 철저하게 알고

Idam dukkhanirodhagāminī patipad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nirodhagāminī patipadā ariyasaccam bhā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am kho panidam dukkhanirodhagāminī patipadā ariyasaccam bhā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m udapādi, ñānam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Insight, knowledge, wisdom, vision, light arose regarding things not seen before that This is the noble truth of the path to the end of suffering.' This noble truth of the path to the end of suffering should be developed.' 'This noble truth of the path to the end of suffering has been developed.'"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道聖諦]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12.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였더라면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m tiparivattam dvādasākāram yathābhūtam ñānadassanam na suvisuddham ahosi, neva tāvāham,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nabrāhman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m sammāsambodhim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m."

"As long, monks, as my knowledge of these four noble truths in three aspects and twelve ways was not completely pure, I did not, monks, claim incomparable full enlightenment in the world with its maras, brahmas, recluses and brahmins, with its gods and men."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13.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m tiparivattam dvādasākāram yathābhūtam ñānadassanam suvisuddham ahosi, athāham,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nabrāhman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m sammāsambodhim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m."

"But when, monks, my knowledge of these four noble truths in three aspects and twelve ways was completely pure, I did claim, monks, the incomparable full enlightenment in the world with its maras, brahmas, recluses and brahmins, with its gods and men."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였다.

 

14. 다시 태어남은 없다!

Ñānañca pana me dassanam udapādi: Akuppā me 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Then knowledge and vision arose in me: "Irreversible is my liberation, this is my final birth, there will be no more further existence."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지견(智見)이 일어났다.

 

15. 세존의 말씀에 마음이 흡족해진 다섯비구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m abhinandunti.

This is what the Blessed one said. The group of five monks rejoiced exceedingly in what the Blessed one had said.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16. 꼰단냐 존자에게 법안이 생기고

Imasmiñca pana veyyākaranasmim bhaññamāne Āyasmato Kondaññassa virajam vītamalam dhammacakkhum udapādi: Yam kiñ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n'ti.

When this discourse had been given, the spotless, stainless eye of Dhamma arose in the Venerable Kondañña: "Whatever arises, all that passes away."

이 설명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17. 세존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Pavattite ca pana Bhagavatā Dhammacakke, Bhummā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When the wheel of the Dhamma had been set rolling by the Blessed one, the earthbound devas declared in one voice: "The incomparable wheel of Dhamma has been set rolling by the Blessed one in the deer park, at the Sage's resort near Benares, and it cannot be turned back by any recluse, brahmin, deva, mara, brahma, or by anyone in the world."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법륜을 굴리시자, 땅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18, 사대왕천의 신들도

Bhummānam devānam saddam sutvā, Cātumahārājikā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earthbound devas, the devas of the Four Great Kings declared in one voice: "The incomparable wheel of Dhamma has been set rolling by the Blessed one in the deer park, at the Sage's resort near Benares, and it cannot be turned back by any recluse, brahmin, deva, mara, brahma, or by anyone in the world."

땅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대왕천의 신들도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도다.’라고

 

19. 모두 다 기쁨에 넘쳐

Cātumahārājikānam devānam saddam sutvā, Tāvatimsā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devas of the Four Great Kings, the devas of the Thirty-three declared in one voice: "The incomparable wheel of Dhamma has been set rolling by the Blessed one in the deer park, at the Sage's resort near Benares, and it cannot be turned back by any recluse, brahmin, deva, mara, brahma, or by anyone in the world."

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야마천의 신들이, 도솔천의 신들이, 화락천의 신들이,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범신천의 신들이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20. 야마천의 신들도

Tāvatimsānam devānam saddamsutvā, Yāmā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devas of the Thirty-three, the Yāmā devas declared in one voice ...

삽십삼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야마천의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첬다

 

20. 도솔천의 신들도

Yāmānam devānam saddamsutvā, Tusitā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Yāmā devas, the Tusita devas declared in one voice ...

야마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도솔천의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첬다

 

21. 모든 신들도 한 목소리로

Tusitānam devānam saddam sutvā, Nimmānaratī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Tusita devas, the devas who delight in creating declared in one voice ...

도솔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한 목소리로 외첬다

 

22. 그 신들은 또 다른 신들에게 알리고

Nimmānaratīnam devānamsaddamsutvā, Paranimmitavasavattī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devas who delight in creating, the devas who delight in creations declared in one voice ...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그 신들은 또 다른 신들에게 알리고

 

23. 브라흐마들도 한 목소리로 외치고

Paranimmitavasavattīnam devānam saddam sutvā, Brahmakāyikā devā saddamanussāvesum: Etam Bhagavatā Bārānasiyam Isipatane Migadāye anuttaram Dhammacakkam pavattitam appativattiyam samanena vā brāhman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Having heard the devas who delight in creations, the Brahmās declared in one voice ...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브라흐마들도 한 목소리로 외치고

 

24. 천지가 요동하고,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Itiha tena khanena (tena layena) tena muhuttena yāva brahmalokā saddo abbhuggacchi. Ayañca dasasahassilokadhātu sankampi sampakampi sampavedhi, appamāno ca ulāro obhāso loke pāturahosi atikkamma devānam devānubhāvanti.

Thus, at that very moment, at that very instant the sound reached up to the brahmā realms, and this ten-thousandfold world system trembled, and heaved, and shook, and an incomparable radiance arose in the world, even surpassing the radiance of all the deities.

이처럼 그 찰나, 그 짧은 순간, 그 순간에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소리는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만세계는 흔들렸고 강하게 요동쳤으며,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나니 그것은 천인들의 광채를 능가하였다.

 

25. 꼰단냐가 완전하게 앎으로서

Atha kho Bhagavā imam udānam udānesi: Aññāsi vata bho Kondañño, aññāsi vata bho Kondañño'"ti. Iti hidam Āyasmato Kondaññassa Aññāsikondañño' tveva nāmam ahosīti.

Then the Blessed one made this joyful utterance: "Venerable Kondañña has understood. Venerable Kondañña has understood." Thus Venerable Kondañña became known as Kondañña the Wise.'

그때 세존께서는 감탄을 하셨다.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 실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 이로 인해 꼰단냐는 안냐시 꼰단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2010-05-07

진흙속의연꽃(http://blog.daum.net/bolee591/?_top_blogtop=go2myblog)

 

진흙속의연꽃

2005년에 블로그 개설 했습니다. 2006년부터 글쓰기 했습니다. 불교블로그입니다. 자신도 이익되게 하고 타인도 이익되게 하는 블로거가 되겠습니다.

bolee591.tistory.com

 

『장아함경』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 것이며,

법[法, 진리]을 등불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남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

https://www.youtube.com/watch?v=m1yoC0VzTEs 

 

 

https://namu.wiki/w/%EC%84%9D%EA%B0%80%EB%AA%A8%EB%8B%88/%EC%9D%BC%EC%83%9D

 

석가모니/일생 - 나무위키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의 그림으로 그린 팔상도는 가장 앞에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이라는 그림으로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 이전에 거쳐온 여러 전생들과 그 전

namu.wiki

7. 초전법륜(初轉法輪)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는 사람.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에서 떨어져나와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으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이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롭도다.
이제 법을 설하려 카시(迦尸)[105]로 가거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甘露)[106]의 북을 울리리라.

『방광대장엄경』 11권. 득도 후 처음으로 만난 우파카[107]라는 자의 질문에 답하여.[108]

 

이때 다섯 수행자들은 부처님이 자리에 앉으신 것을 보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120] 고타마시여, 신색과 피부가 대단히 좋고 청정하오며 면목이 원만하옵고 또 광명이 족하오며 모든 근이 청정하나이다. 장로 고타마시여, 이제는 좋고 묘한 감로를 만났거나 청정한 감로의 성도를 얻었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나를 여래(如來)[121]라고 부를 것이요, 고타마라고 하지 말라. 무슨 까닭인가. 나는 이미 감로의 도를 발견했고, 나는 이제 감로의 법을 증득했기 때문이니라. 나는 곧바로 부처로서 일체지를 완전히 갖추었으며 고요하고 번뇌가 없어서 마음에 자재로움을 얻었느니라."

이때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다섯 수행자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장로 고타마시여, 예전에 6년 간의 극심한 고행을 하면서도 무상정등정각을 증득하지 못했거늘, 모든 성인이 수행했던 그 같은 길을 증진하지도 못했거늘, 하물며 장로께서는 지금 육신의 욕망을 좇아 나태를 내어 선정을 잃고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는데 어찌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고 하십니까?"

그때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행자여,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는 욕망에 끌리지 아니하며 선정을 잃지도 않고 또한 해태함이 몸에 얽혀 있지도 않다. 그대들은 스스로 알리라. 내 지난날 사람들에게 망령되이 거짓을 말한 것이 있는가? 또한 일찍이 상호가 이처럼 청정하고 원만히 빛나던 때가 있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존자여."
이때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내 그대들에게 법을 설하리라. 그대들이 나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따르고 청정히 수행한다면 곧 해탈락을 얻으리라. 그대들이 만약 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면 이제 조용히 법을 들을 귀를 준비하라."

 

《불본행집경》 권37상 전묘법륜품(轉妙法輪品)

 

https://www.youtube.com/watch?v=byKakoo4XuA&t=104s 

 

 

 

 

*진행이 느려터진 카눈을 보내고 나니, 문득 <어머니 마음> 노래가 생각키우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zLgmEOMuUHU  

 

* 어버이날 노래로 불러왔던 이 노래는 <부모은중경>의 어머니의 은혜 10가지를 바탕으로

양주동 선생님께서 가사를 쓰신 <어머니 마음>입니다. 작곡 이흥렬님.

*참고로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는 젖은 자리에는 어머니 자신이 눕고, 마른 자리에는 아이를 눕힌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왕사성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삼만팔천인의 대비구와 보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뼈를 보시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배를 올리셨다. 이에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계의 큰 스승이요 사생(死生)의 자비로운 어버이시기에, 수많은 사람이 공경하고 귀의하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을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나의 으뜸가는 제자 중 한 사람이요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아는 것이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에 걸친 부모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남자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는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 줄 알며, 여인은 붉은 주사와 연지를 곱게 바르고 좋은 향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자인 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라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절에 가서 법문도 듣고 경도 외우고 삼보께 예배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그 뼈는 희고 무거우니라. 그러나 여자는 세상에 있을 때 정과 본능을 좆아 자녀를 낳고 기르나니, 한번 아기를 낳을 때 서너 되나 되는 엉긴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모유를 먹이기 때문에 뼈가 검고 가볍느니라.”
이 말을 듣고 아난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야 어머니의 큰 은덕에 보답할 수 있겠나있까?”
(중략)

열 가지 어머니 은혜를 그린 그림

경의 제목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가 한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이란 뜻입니다. 줄여서 <부모은중경>이라 하는데, 사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부모은중경>의 여러 이본(異本) 중 하나입니다. 이 경은 중국 당대 중반부터 송대(宋代)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하, <부모은중경>)이 경전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제작된 많은 판본이 전합니다. 현재 전하는 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378년 제작된 판본이므로, <부모은중경>은 고려 말에는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경전은 조선이 효를 강조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불교 경전임에도 <법화경>, <금강경>과 함께 가장 많은 판본이 제작되어 전합니다. 경전의 제목은 부모의 은혜로 적었지만, 내용은 대부분 어머니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이 <부모은중경>은 태종(太宗, 1367~1422)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가 발원(發願)하여 간행한 불경(佛經)입니다. 나무에 글과 그림을 새긴 뒤 종이에 찍어 병풍 형식으로 접어 만들었습니다. 조선 전기 <부모은중경>의 경전의 도상(圖像)과 조선 전기 왕실의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어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125호)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중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부모은중경>에는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十恩]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였으며 이어 그림으로 나타낸 변상도(變相圖)에는 각 내용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열 가지 은혜와 이를 묘사한 그림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http://www.andongkwon.pe.kr/coding/sub4/sub2.asp?bseq=10&cat=-1&sk=&sv=&yy=all&page=23&mode=view&aseq=7333 

 

청남 권영한 홈페이지입니다

[일반 ] 父母恩重經(부모은중경) 1 懷身冘守護恩(회탐수호은) 청남 *父母恩重經(부모은중경) 1 懷身冘守護恩(회탐수호은) 1. 아이를 배어서 지키고 호위해준 은혜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삶이란 부

www.andongkwon.pe.kr

위 포스트에는 열 가지 은혜의 설명과 그림이 자세합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159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열 가지 은혜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 어머니 품에 품고 지켜 주는 은혜.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해산날에 즈음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어머니 은혜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는 은혜.

④ '연고감은[咽苦甘恩]'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아 먹이는 은혜.

⑤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진 자리 마른 자리 가려 누이는 은혜. 젖은 자리엔 엄마가 눕고 마른 자리엔 아기를 눕힘.

⑥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젖을 먹여서 기르는 은혜.

⑦ '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 손발이 닳도록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

⑧ '원행억념은[遠行憶念恩]' 먼 길을 떠나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⑨ '위조아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짓는 은혜.

⑩ '구의련민은 [究意憐愍恩]'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은혜 등이다.

 

첫 번째는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으로,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는 은혜입니다. 집안 내부로 보이는 공간에 의자에 앉은 여인이 있습니다. 임신한 어머니를 그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으로, 해산이 임박한 어머니가 괴로움을 이기는 은혜입니다. 가옥 안에 시녀를 동반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회탐수호은’과 유사한 도상이지만, 앉아 있는 곳에 휘장이 쳐져 침상 주인이 해산에 임박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으로, 아이를 낳은 다음 모든 근심을 잊은 은혜를 말합니다. 침상에 앉아 있는 여인이 어머니이며 그림 하단에는 목욕을 시키는 시녀와 아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어머니의 은혜를 먼저 적고 이를 이미지로 가시화하였습니다.

넷째,연고감은[咽苦甘恩]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먹이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다섯째, 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고 자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섯째, 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일곱째,세탁부정은[洗濁不淨恩]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덟째, 원항억념은[遠行憶念恩] 떨어져 있는 자식을 걱정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아홉째, 위조아업은[爲造惡業恩] 자식을 위해 몹쓸 짓도 감히 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열째,구의련민은 [究意憐愍恩]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변상도는 새김이 깔끔하여 이미지가 명확합니다. 인물들은 얼굴 형태가 갸름하고 이목구비를 단아하게 묘사하여 표정까지 살필 수 있으며, 옷주름을 묘사한 선도 정교하고 유연합니다. 이 판본은 왕실 발원본으로 사실적인 밑그림과 정교한 새김이 어울려 훌륭한 도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판각할 때 새로 밑그림을 그려서 새겼으며 고려본보다도 그림 표현과 새김이 우수합니다.

정조, 다시 부모은중경을 탄생시키다

국왕으로서 효심이 깊었던 정조(正祖, 1759~1800)는 명(命)으로 <부모은중경>을 조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왕의 명령으로 나라에서 조성되었기에 이 경전은 다른 사찰 간행본에 비해 판식이 정교하고 서체가 아름다우며 변상도도 매우 화려합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조선 1796년, 용주사간본, 구3381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간행한 배경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특히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는 경전을 제작하도록 명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이습니다. 정조가 전라도 장흥 보림사에 갔을 때 보경(寶鏡)이라는 승려가 이 경전을 바쳤는데 정조가 이에 감화 받아 용주사를 창건했으며, 경판을 새겨 용주사에 보관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조의 뜻에 따라 <부모은중경>은 변상도를 갖춘 한문본과 언해본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용주사 간행본(刊行本)은 석가모니불가 해골을 보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모습이 앞서 언급된 보물 <부모은중경>보다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화면도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구도가 꽉 차 보입니다.

송성문 선생이 국가에 기증한 부모은중경

다시 앞의 <부모은중경>으로 돌아가 봅니다. 보물 <부모은중경>은 혜전(惠田) 송성문(宋成文, 1931~2011)이 국가에 기증한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평안북도 정주(定住)가 고향인 송성문은 『성문종합영어』라는 영어참고서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1960년경 귀중한 고인쇄 자료가 민간의 벽지로 사용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어 고서적 등을 수집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 정주에 박물관을 짓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평생 유물을 수집하고 관리하였지만 이 꿈의 실현이 요원하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송성문의 기증문화재에는 국가지정문화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은중경>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며 당시의 왕실 신앙과 불교 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경전을 함께 보고 느끼며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송성문 선생이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모은중경>을 마주하며 송성문선생의 숭고하고 큰 기증의 뜻을 되새겨봅니다.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623103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하다 |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국립중앙박물관,뭉게뭉게 구름이 피어나는 가운데, 여러 무리와 함께 길을 가던 석가모니는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길바닥에 (죽은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해골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www.museum.go.kr

 

양주동님의 시 제목은 <어머니 마음> 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jLwK3bMcK0 

 

 

어버이날에 부르던 양주동님의 시는  <부모은증경>의 번역입니다.

어머니 마음

https://ko.wikipedia.org/wiki/%EC%96%B4%EB%A8%B8%EB%8B%88_%EB%A7%88%EC%9D%8C

 

어머니 마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머니 마음〉은 1930년대에 작곡된 한국의 가곡이다. 양주동의 시에 감동한 이흥렬이 곡을 지었다.[1] 가정가요로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2] 어버이날에

ko.wikipedia.org

1절: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2절: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사 그릇될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3절: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이 땅에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그림

01. 나를 잉태하시고 지켜 주신 은혜  



여러 겁을 내려오며 인연이 중하여서

어머니의 태를 빌어 금생에 태어날 때

날이 가고 달이 져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 달에 접어드니 육정이 열렸어라

한몸이 무겁기는 산악과 한가지요

가나오나 서고 안고 바람결 겁이 나며

아름다운 비단옷도 모두 다 뜻없으니

단장하던 경대에는 먼지만 쌓였더라

 

02.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받으신 은혜  



아기를 몸에 품고 열 달이 다 차서

어려운 해산달이 하루하루 다가오니

하루하루 오는 아침 중병 든 몸과 같고

나날이 깊어가니 정신조차 아득해라

두렵고 떨리는 맘 무엇으로 형용할까

근심은 눈물 되어 가슴속에 가득하니

슬픈 생각 가이없어 친족들을 만날 때면

이러다가 죽지 않나 이것만을 걱정하네

 

 

03. 자식을 낳았다고 근심을 잊어 버리는 은혜  


자비하신 어머니가 그대를 낳으신 달

오장육부 그 모두를 쪼개고 헤치는 듯

몸이나 마음이나 모두가 끊어졌네

짐승 잡은 자리같이 피는 흘러 넘쳤어도

낳은 아기 씩씩하고 충실하다 말 들으면

기쁘고 기쁜 마음 무엇으로 비유할까

기쁜 마음 정해지자 슬픈 마음 또 닥치니

괴롭고 아픈 것이 온몸에 사무친다.

 

 

04. 입에 쓰면 삼키고 단 것이면 뱉어서 먹이신 은혜  


중하고도 깊고 깊은 부모님 크신 은혜

사랑하고 보살피심 어느 땐들 끊일손가

단 것이란 다 뱉으니 잡수실 게 무엇이며

쓴 것만을 삼키어도 밝은 얼굴 잃지 않네

사랑하심 중하시사 깊은 정이 끝이 없어

은혜는 더욱 깊고 슬픔 또한 더하셔라

어느 때나 어린 아기 잘 먹일 것 생각하니

자비하신 어머님은 굶주림도 사양찮네

 

 

05. 마른자리에 아기를 눕히고 진자리에 누우신 은혜  


어머니 당신 몸은 젖은 자리 누우시고

아기는 받들어서 마른자리 눕히시며

양쪽의 젖으로는 기갈을 채워 주고

고운 옷 소매로는 찬 바람 가려 주네

은혜로운 그 마음에 어느 땐들 잠드실까

아기의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며

오로지 어린 아기 편할 것만 생각하고

자비하신 어머니는 단잠도 사양했네

 

 

06. 젖을 먹여 길러 주신 은혜  


아버님의 높은 은혜 하늘에 비기오며

어머님의 넓은 공덕 땅에다 비할손가

아버지 품어 주고 어머니 젖 주시니

그 하늘 그 땅에서 이 내 몸 자라났네

아기 비록 눈 없어도 미워할 줄 모르시고

손과 발이 불구라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배 가르고 피를 나눠 친히 낳은 자식이라

종일토록 아끼시고 사랑하심 한이 없네

 

 

07. 깨끗하지 못한 것을 씻어 주신 은혜  


생각하니 그 옛날의 아름답던 그 얼굴과

아리따운 그 모습이 풍만도 하셨어라

갈라지 두 눈썹은 버들잎 같으시고

두 뺨의 붉은 빛은 연꽃보다 더했어라

은혜가 깊을수록 그 모습 여위었고

기저귀 빠시느라 손발이 거칠었네

오로지 아들딸만 사랑하고 거두시다

자비하신 어머니는 얼굴 모양 바뀌셨네

 

 

08. 자식이 멀리 가면 생각하고 염려하시는 은혜  


죽어서 헤어짐도 참아가기 어렵지만

살아서 헤어짐은 아프고 서러워라

자식이 집을 나가 먼 길을 떠나가니

어머니의 모든 마음 타향 밖에 나가 있네

밤낮으로 그 마음은 아이들을 따라가고

흐르는 눈물 줄기 천 줄긴가 만 줄긴가

원숭이 달을 보고 새끼 생각 울부짖듯

염려하는 생각으로 간장이 다 끊기네

 

 

09. 자식을 위해 나쁜 일을 하시는 은혜  


부모님의 은혜가 강산같이 중하거니

깊고 깊은 그 은덕은 실로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생하면 부모 마음 편치 않네

자식이 머나먼 길 떠난다 들을지면

잘 있는가 춥잖은가 밤낮으로 걱정하고

자식들이 잠시 동안 괴로운 일 당할 때면

어머님의 그 마음은 오래 두고 아프셔라

 

 

10.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
 

 부모님의 크신 은덕 깊고도 중하여라

 크신  사랑 잠시라도 끊일 사이 없으시니

 앉으나 일어서나 그 마음이 따라가고

 멀든지 가깝든지 크신 듯은 함께 있네

 어버이 나이 높아 일백 살이 되었어도

 여든 된 아들딸을 쉼없이 걱정하네

 이와 같은 크신 사랑 어느 때에 끊이실까

 수명이나 다하시면 그때에나 쉬실까
 

 

http://blog.naver.com/nelect/40017194029

 

부모은중경 父母恩重經 - 그림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그림 01. 나를 잉태하시고 지켜 주신 은혜 여러 겁을 내려오며 인연이 중하여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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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탐수호은(懷眈守護恩) or 『회태수호은(懷胎守護恩)』

 

01. 나를 잉태하시고 지켜 주신 은혜

여러 겁을 내려오며 인연이 중하여서

어머니의 태를 빌어 금생에 태어날 때

날이 가고 달이 져서 오장이 생겨나고

일곱 달에 접어드니 육정이 열렸어라

한몸이 무겁기는 산악과 한가지요

가나오나 서고 안고 바람결 겁이 나며

아름다운 비단옷도 모두 다 뜻없으니

단장하던 경대에는 먼지만 쌓였더라

 

2.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02.해산함에 임하여 고통받으신 은혜

아기를 몸에 품고 열 달이 다 차서

어려운 해산달이 하루하루 다가오니

하루하루 오는 아침 중병 든 몸과 같고

나날이 깊어가니 정신조차 아득해라

두렵고 떨리는 맘 무엇으로 형용할까

근심은 눈물 되어 가슴속에 가득하니

슬픈 생각 가이없어 친족들을 만날 때면

이러다가 죽지 않나 이것만을 걱정하네

 

3.『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

03.자식을 낳고서야 근심 잊으시는 은혜

자비하신 어머니가 그대를 낳으신 달

오장육부 그 모두를 쪼개고 헤치는 듯

몸이나 마음이나 모두가 끊어졌네

짐승 잡은 자리같이 피는 흘러 넘쳤어도

낳은 아기 씩씩하고 충실하다 말 들으면

기쁘고 기쁜 마음 무엇으로 비유할까

기쁜 마음 정해지자 슬픈 마음 또 닥치니

괴롭고 아픈 것이 온몸에 사무친다.

 

4.『인고토감은(咽苦吐甘恩)』

04.쓴 건 삼키고 단 건 뱉아 먹여준 은혜

중하고도 깊고 깊은 부모님 크신 은혜

사랑하고 보살피심 어느 땐들 끊일손가

단 것이란 다 뱉으니 잡수실 게 무엇이며

쓴 것만을 삼키어도 밝은 얼굴 잃지 않네

사랑하심 중하시사 깊은 정이 끝이 없어

은혜는 더욱 깊고 슬픔 또한 더하셔라

어느 때나 어린 아기 잘 먹일 것 생각하니

자비하신 어머님은 굶주림도 사양찮네

 

5.『회건취습은(廻乾就濕恩)』

05.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신 은혜

어머니 당신 몸은 젖은 자리 누우시고

아기는 받들어서 마른자리 눕히시며

양쪽의 젖으로는 기갈을 채워 주고

고운 옷 소매로는 찬 바람 가려 주네

은혜로운 그 마음에 어느 땐들 잠드실까

아기의 재롱으로 기쁨을 다하시며

오로지 어린 아기 편할 것만 생각하고

자비하신 어머니는 단잠도 사양했네

 

6.『유포양육은(乳哺養育恩)』

06.젖먹이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은혜

아버님의 높은 은혜 하늘에 비기오며

어머님의 넓은 공덕 땅에다 비할손가

아버지 품어 주고 어머니 젖 주시니

그 하늘 그 땅에서 이 내 몸 자라났네

아기 비록 눈 없어도 미워할 줄 모르시고

손과 발이 불구라도 싫어하지 않으시네

배 가르고 피를 나눠 친히 낳은 자식이라

종일토록 아끼시고 사랑하심 한이 없네

 

7.『세탁부정은(洗濯不淨恩)』

07.목욕 세탁 더러움을 씻어주신 은혜

생각하니 그 옛날의 아름답던 그 얼굴과

아리따운 그 모습이 풍만도 하셨어라

갈라지 두 눈썹은 버들잎 같으시고

두 뺨의 붉은 빛은 연꽃보다 더했어라

은혜가 깊을수록 그 모습 여위었고

기저귀 빠시느라 손발이 거칠었네

오로지 아들딸만 사랑하고 거두시다

자비하신 어머니는 얼굴 모양 바뀌셨네

 

8.『원행억염은(遠行憶念恩)』

08.멀리 떠나가면 근심 걱정하신 은혜

죽어서 헤어짐도 참아가기 어렵지만

살아서 헤어짐은 아프고 서러워라

자식이 집을 나가 먼 길을 떠나가니

어머니의 모든 마음 타향 밖에 나가 있네

밤낮으로 그 마음은 아이들을 따라가고

흐르는 눈물 줄기 천 줄긴가 만 줄긴가

원숭이 달을 보고 새끼 생각 울부짖듯

염려하는 생각으로 간장이 다 끊기네

 

9.『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

09.자식을 위해서는 모진 일 하신 은혜

부모님의 은혜가 강산같이 중하거니

깊고 깊은 그 은덕은 실로 갚기 어려워라

자식의 괴로움은 대신 받기 원하시고

자식이 고생하면 부모 마음 편치 않네

자식이 머나먼 길 떠난다 들을지면

잘 있는가 춥잖은가 밤낮으로 걱정하고

자식들이 잠시 동안 괴로운 일 당할 때면

어머님의 그 마음은 오래 두고 아프셔라

 

10.『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

10.임종 때도 자식 위해 근심하신 은혜

부모님의 크신 은덕 깊고도 중하여라

크신 사랑 잠시라도 끊일 사이 없으시니

앉으나 일어서나 그 마음이 따라가고

멀든지 가깝든지 크신 듯은 함께 있네

어버이 나이 높아 일백 살이 되었어도

여든 된 아들딸을 쉼없이 걱정하네

이와 같은 크신 사랑 어느 때에 끊이실까

수명이나 다하시면 그때에나 쉬실까

 

아래 글에 대한 조회수가 많아 5월을 며칠 앞두고 다시 어머님 은혜를 기려 봅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듯 남을 대한다면 세상사 걱정거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 마음입니다.

남성인 부처님이 어찌 그리도 소상하게 어머니의 고통과 사랑을 꿰뚫었을까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그 은혜가 고작 10가지뿐이겠습니까?

아래의 10번째 대목에서 우리는 그 크신 사랑에 더욱 감격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10조목만 말씀하셨지만 수명이 다해야 끝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무한대의 것입니다.

 

어버이 나이 높아 일백 살이 되었어도

여든 된 아들딸을 쉼없이 걱정하네

이와 같은 크신 사랑 어느 때에 끊이실까

수명이나 다하시면 그때에나 쉬실까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https://kydong77.tistory.com/18237

 

신달자, 아! 어머니/ 부모은중경

https://www.youtube.com/watch?v=-DUGoeayQdg 아! 어머니 -신달자 어디에도 펼 곳이 없어서 둘둘 말아 가슴 밑바닥에 숨겨둔 그 꿈 어머니 지금은 어느 곳으로 흘러 한 자락 구름이라도 되었을까요? 구름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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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머니
ㅡ신달자

 

어디에도 펼 곳이 없어서

둘둘 말아 가슴 밑바닥에 숨겨둔 그 꿈

어머니 지금은 어느 곳으로 흘러

한 자락 구름이라도 되었을까요?


구름이 되어 애끊는 비가 되어

맨몸으로 하늘에서 뛰어내려

자식의 문전에서 궂은 바람을 씻겨 가시나요


죽더라도 이거 하나는 죽을 수 없어

이 세상 어디쯤에 샘 하나로 남겨져

흐렁흐렁 낯익은 데서

물기도는 바람타고 달려가려 하시나요


아! 어머니

아직도 그 눈물 지상에 남아 있습니다

마르지 않는 은빛의 약속 촉촉히 축여서

이 자식 저 자식에게 뿌려주고 계십니다


오직 어머니 꿈 하나는

불멸의 빛으로 살아남아서

자식의 발걸음 앞 아픈 어둠을

당신의 가슴으로 빨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저마다 어머니 뜨거운 심장을 들고

시린 어깨를 가리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젠 냉정히 돌아서십시오

우리들도 우리들의 심장을 꺼낼 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 나의 어머니여!

 

국역 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難報經:국역문)

https://www.youtube.com/watch?v=3Br_ha0Sbyw&t=1456s 

 

 

http://kydong77.tistory.com/17968

 

부모은중난보경 현대역/한문본 원문

<부모은중경>의 내용과 해석 <부모은중경> 제 1장 이 경을 설한 인연 제 2장 마른뼈의 가르침 제 3장 잉태했을 때의 고통 제 4장 낳으시고 기르신 은혜 / 열가지 부모의 은혜 제 5장 부모님 은혜를 잊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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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ZB0stGe0A4c 

 

 

[정조의 지극한 효심] 화성 융릉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하여 융릉참배,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혜경궁 홍씨와 수원에서 살겠노라고 화성 건설.

https://www.youtube.com/watch?v=7EPJRHhwP00 

 

 

https://www.youtube.com/watch?v=jGiUGfQBw5U 

 

 

 

화성능행도 이야기(8)

 

 

 

https://www.kgnews.co.kr/mobile/article.html?no=467101 

 

정조대왕 능행차 사진으로 한 번 더

수원을 기록하는 사진가회의 여섯 번째 정기사진전인 ‘왕의 행차 - 정조대왕 원행을 보다’ 展은 능행차길에 얽힌 이야기들을 사진을 통해 재조명하고자 지난 3월부터 정조의 능행차길인 서울

www.kgnews.co.kr

 

https://namu.wiki/w/%ED%99%94%EC%84%B1%ED%96%89%ED%96%89%EB%8F%84%20%EB%B3%91%ED%92%8D

1. 개요

華城行幸圖 屛風. 조선의 22대 왕 정조의 명으로 만들어진 8첩 병풍.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1430호이다.

2. 내용

수원능행도(水原陵行圖),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라고도 부른다.

정조가 돌아가신 부친인 사도세자의 회갑 잔치를 위하여 1795년(정조 19년) 윤 2월 9일부터 동월 17일까지 총 8일간 모친인 혜경궁 홍씨와 함께 수원화성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며 그 과정에 있었던 주요 행사들을 원행을묘정리의궤와 그림을 통해 남기게 한 것이다.

그림을 그린 인물들은 최득현(崔得賢), 김득신(金得臣, 1754년 ~ 1822년), 이명규(李命奎), 장한종(張漢宗, 1768년 ~ 1815년), 윤석근(尹碩根), 허식(許寔, 1762년 ~ ?), 이인문(李寅文, 1745년 ~ 1821년) 등이다.

이 병풍은 1796년에 최종 완성되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성성역의궤 등의 여러 문적들과 함께 조선 정조의 화성 행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3. 구성

3.1.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

3.2.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3.3.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3.4.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3.5. 서장대야조도(西將臺夜操圖)

3.6.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3.7.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3.8.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

https://kydong77.tistory.com/21534

 

정약용, 過舟橋(배다리를 건너며)/ 용주사와 융건릉

https://kydong77.tistory.com/21494 단원 김홍도, 조선의 르네상스를 그리다/ 화성 룡주사 후불탱화 수원 룡주사 후불탱화 - 원근법, 명암법 https://www.youtube.com/watch?v=QSqVmXMtaDc https://www.youtube.com/watch?v=kR62A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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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舟橋 (과주교)

배다리1)를 건너며

ㅡ 정약용(1762-1836)

歲歲靑陽月, 
세세청양월, 해마다 이렇게 봄이 오면

鑾輿幸華城。
난여행화성. 군주께서 화성2)으로 거둥하시매,

船從秋後集, 
(선종추후집, 가을 지난 뒤에 배를 모아

橋向雪前成。
교향설전성. 눈 내리기 전에 다리를 만드나니,

鳥翼紅欄夾, 
조익홍란협, 새 날개처럼 붉은 난간 양쪽에 세우고

魚鱗白板橫
어린백판횡. 고기비늘처럼 널판자 가로로 까누나.

艙磯石不轉, 
창기석부전, 선창가 바위는 구르지 않아3)

千載識宸情。
천재지신정. 천년토록 우리 임금 마음 기억하리라.

 

배다리1)  화성2)  3)

1792년(정조 16) 1월 24일, 정조가 현륭원에 참배하기 위해 한강 배다리를 건널 때 수행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배다리의 제작 과정과 구조를 간단히 서술하고, 정조가 매년 봄 화성의 현륭원으로 참배하러 가는 효성을 예찬하였다. 정조는 1월 25일 현륭원에 참배하고, 1월 26일 환궁하였다.

1792년(정조 16) 1월 24일, 정약용 31세 때 지음.

[네이버 지식백과] 배다리를 건너며 [過舟橋] (여유당전서 - 시문집 (시) 2권, 심경호, 박석무, 송재소, 임형택, 성백효)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758

 

양주동(梁柱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일제강점기 『조선의 맥박』, 『조선고가연구』  『麗謠箋注 등을 저술한 학자. 국문학자, 영문학자, 시인.

https://ko.wikipedia.org/wiki/%EC%96%91%EC%A3%BC%EB%8F%99_(1903%EB%85%84) 

 

양주동 (1903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양주동(梁柱東, 1903년 8월 16일(음력 6월 24일)[1] ~ 1977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시인, 문학평론가, 국문학·영문학자, 문학번역가, 수필가, 문학 교수이다. 본관은

ko.wikipedia.org

저술한 서적

  • 《조선의 맥박》, 1930.
  • 《조선고가연구》, 1942. *일본인 소창진평에 이은 향가 연구서입니다.
  • 《여요전주》, 1947. '여요'는 고려가요의 준말입니다. 백제가요 <정읍사>도 실었습니다.
  • 《국학연구논고》, 1962.
  • 《文酒半生記》, 1960. 1962.

《世界奇文選》, 탐구당, 1955. 1959. 

 

* 《世界奇文選》의  '古歌今釋'에는 <가시리>와 <西京別曲>을,

박지원의 <허생전> <호질> 을 실었고,

T.S.엘리옽의 <황무지>도 실었다.

한문의 소양에다 1928년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니 그의 박학다식은 동아방송 '유쾌한 응접실' 대담 프로그램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향가25수 정리  (0) 2017.07.20

https://kydong77.tistory.com/17178?category=485793 

 

향가25수 정리

향가25수 정리를 재수록한다. http://kydong77.tistory.com/10200 [참고] 이 블로그의 오른쪽 메뉴 아래 앞의 [T]자를 클릭하시면 세부 분류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아래의 제목을 클릭하거나 제목을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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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柱東,詞腦歌 證釋 題詞 注譯  (0) 2017.07.18

https://kydong77.tistory.com/17172

 

梁柱東,詞腦歌 證釋 題詞 注譯

무애 양주동(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 - 1977년 2월 4일 ) 선생님께서 향가연구서인 《고가연구》를 출간하자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님이 그 위업을 고시 5수로 찬양했다. 그 고시가 인데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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詞腦歌 證釋 題詞 其一  (0) 2017.07.18

https://kydong77.tistory.com/17173

 

詞腦歌 證釋 題詞 其一

詞腦歌 證釋 題詞 其一 其一 題詞 제1수 閼川川水淸且綠 알천의 냇물은 맑고 또 푸른데 東原送唱花滿谷 새내벌 건네는 노래, 골 안에 꽃이 활짝. 長短自與仁性宜 그 노래 장단이 어진 성품에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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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양주동(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 - 1977년 2월 4일 ) 선생님께서 향가연구서인 《고가연구》를 출간하자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님이 그 위업을 고시 5수로 찬양했다. 그 고시가 <詞腦歌 證釋 題詞> 인데 무애 선생은 이를 번역하고 해설하여 수필집 등에 등재한 글들이다. 그 글이 아래의 논문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注譯 중 전문성을 요하는 注는 생략하고 번역시만 옮겨 보고자 한다. 주석 부분이 필요한 분들은 아래 논문집을 참고하기 바란다.

[출처]梁柱東,詞腦歌 證釋 題詞 注譯,동악어문학 8,동악어문학회,1972.

pp.23-32.

*운영자<詞腦歌 證釋 題詞>  2차 번역은

이병주,한국한시의 이해,민음사,pp.228-232에도 있음.

[11장 조선시대의 선가시]

 

[참고1]梁柱東 <古歌硏究>출간 사항-운영자

양주동,『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박문서관, 1942) 초간본.

양주동, 增訂 古歌硏究,일조각,1965.3.15. 초판 발행.

양주동, 增訂 古歌硏究,일조각,1968.3.15. 재판.

 

*<연구의 回憶> 은  위책 pp.889-898에 발문으로 수록함.

 

[참고2] <향가연구의 회억> 발표 사항-운영자

1.양주동,국학연구론고(을유문화사,1962)를 참고하면

'약간의 자랑과 감회'란 부제가 붙은

<향가연구의 회억>(위책,pp.343-353.) 첫 발표는 1958년이다.

 

 2.<연구의 回憶>  이라는 글은 《文酒半生記》에도

<硏北論-'鄕歌'연구에의 發心>(신태양사,1960, pp. 286-297)이란 제목으로

탑재했는데 서두부분엔 다소 차이가 있다.

 

3.<연구의 回憶>   增訂 古歌硏究,일조각,1965.3.15. 초판, pp.889-898에도

발문으로 수록함. 완성본.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16684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詞腦歌 證釋 題詞 其二  (0) 2017.07.18

https://kydong77.tistory.com/17174

 

詞腦歌 證釋 題詞 其二

詞腦歌 證釋 題詞 其二 其二 題詞 제2수 大界茫茫衆星行 망망한 대우주(大宇宙)에 운행하는 저 뭇 별들, 望之無極孰經營 바라봐 끝없으니 “뉘 경영하나?‘ 해도, 獨有分度森不忒 전문가의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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詞腦歌 證釋 題詞 其三  (0) 2017.07.18

https://kydong77.tistory.com/17175

 

詞腦歌 證釋 題詞 其三

詞腦歌 證釋 題詞 其三 其三 題詞 제3수 3 誰道史志非活物 뉘라서 역사의 기록이 죽은 것이라 말하는가? 噓吸故與後昆一 그 속의 숨결이 후손과 하나인 걸! 細如毫芒迷如煙 털끝마냥 가늘고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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詞腦歌 證釋 題詞 其四  (0) 2017.07.18

https://kydong77.tistory.com/17176

 

詞腦歌 證釋 題詞 其四

詞腦歌 證釋 題詞 其四 其四 題詞 제4수 4 君才炳蔚少與倫 그대의 빛난 재주 뭇 사람에 뛰어나서 弱歲操筆已動人 약관(弱冠)에 붓을 들어 사람을 이미 놀랫것다! 玆基索具菑畚善 그 천품에 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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詞腦歌 證釋 題詞 其五  (2) 2017.07.18

https://kydong77.tistory.com/17177

 

詞腦歌 證釋 題詞 其五

詞腦歌 證釋 題詞 其五 其五 題詞 제5 5 先人永言舊擅華 선인들의 부른 노래 예부터 꽃을 피워 蘇塗瓊芳長婆娑 소도(蘇塗)의 고운 송이를 항시 너훌 춤추었네. 彗星一曲天下晏 한 곡조에 온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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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18026

 

양주동 선생님, 향가 25수 해석/ 정인보, 詞腦歌 證釋 題詞 5首

8.상수불학가 아래 포스트에서 고려가요 정리한 것을 보니 향가연구로 일세를 풍미한 양주동 선생님을 회억한 글이 생각나 재구성해 올립니다. http://kydong77.tistory.com/18023 소창진평이 시작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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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박사님은 경기도 용인의 묘원에 영면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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