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2 

 

벽암록(9) 81칙 ~ 90칙

벽암록 81칙 약산화상과 큰 사슴 사냥 납자의 사량분별 지혜의 화살로 명중시켜 {벽암록} 제81칙은 약산유엄선사와 큰 사슴을 화살로 잡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약산화

kr.buddhism.org

 

[第081則]三步雖活
〈垂示〉垂示云。攙旗奪鼓。千聖莫窮。坐斷[言+肴]訛。萬機不到。不是神通妙用。亦非本體如然。且道。憑箇什麽。得恁麽奇特。
〈本則〉擧。僧問藥山。平田淺草麈鹿成群。如何射得麈中麈。山云。看箭。僧放身便倒。山云。侍者拖出這死漢。僧便走。山云。弄泥團漢有什麽限。雪竇拈云。三步雖活五步須死。
〈頌〉麈中麈。君看取下一箭。走三步。五步若活。成群趁虎。正眼從來付獵人。雪竇高聲云。看箭。

벽암록 81칙 약산화상과 큰 사슴 사냥

납자의 사량분별 지혜의 화살로 명중시켜


{벽암록} 제81칙은 약산유엄선사와 큰 사슴을 화살로 잡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약산화상에게 질문했다. "넓게 펼쳐진 초원에 큰 사슴과 많은 사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큰 사슴 가운데 큰 사슴을 화살로 쏘아 맞출 수가 있습니까?" 약산화상이 말했다. "이 화살을 잘 봐라!" 그 스님이 벌떡 자빠지며 거꾸러지자, 약산화상이 말했다. "시자야!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 그 스님이 곧장 도망치자 약산화상이 말했다. "흙덩어리나 갖고 노는 놈! 이런 바보같은 놈들을 아무리 상대해도 끝장이 없다니까!" 설두화상이 이 이야기를 제시하여 말했다. "세 걸음까지는 살아 있다고 해도 다섯 걸음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擧, 僧問藥山, 平田淺草鹿成群, 如何射得中. 山云, 看箭. 僧放身便倒. 山云, 侍者拖出這死漢. 僧便走. 山云, 弄泥團漢有什限. (雪竇拈云, 三步雖活五步須死.)


어설픈 스님의 각본 짠듯한 행동에
'노련한 사냥군' 약산, 한방에 퇴치

늦산화상은 {벽암록} 제41칙에도 등장했다. 본칙 공안의 출처는 분명하지 않은데, 후대의 자료인 {오등회원} 제5권 약산장에 수록하고 있고, {연등회요} 19권에도 전하고 있지만 내용에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석두희천의 선법을 이은 약산유엄(藥山惟嚴, 751~834)은 전기는 {조당집} 제4권 {송고승전} 17권, {전등록} 14권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속성은 한(韓)씨, 강서성 신풍현에서 출생하여 17살에 출가했다. 뒤에 석두희천선사를 친견하고 나눈 선문답을 {조당집}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약산이 앉아있는데, 석두선사가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약산이 대답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한가히 앉은 것이구나!" "한가히 앉았다면 하는 것이 됩니다." "그대는 하지 않는다 하는데,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천명의 성인도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석두선사가 게송으로 약산을 찬탄하였다. '전부터 함께 있었지만, 이름조차 모르는데, 마음대로 서로잡고 그런 행동 짓는다. 예부터 높은 현인도 알지 못했거늘, 경솔한 예사 무리야 어찌 밝힐 수가 있으랴!'

석두선사가 약산의 안목을 인정한 게송이다. 약산은 석두선사의 지시로 마조대사를 참문하여 선문답을 나누고 마조선사가 그대의 스승은 석두선사라고 인정한 사실도 전하고 있는 것처럼, 약산화상은 당대의 명승 석두와 마조가 인정한 인물이다. 특히 상공인 이고(李)가 약산화상을 참문하여 도를 묻는 질문에 약산화상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물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는 한마디로 깨닫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지극히 당연하고 눈앞의 현실에서 작용하는 진실된 불법을 직접 깨닫도록 제시한 법문이다.

어떤 스님이 약산화상에게 "넓게 펼쳐진 초원에 큰 사슴() 많은 작은 사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왕 사슴중의 왕 사슴을 화살로 쏘아 맞출 수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했다. 똑같은 질문이 {설봉어록} 하권에도 전하고 있는데, 주()는 큰 사슴(大鹿)을 말한다. 많은 사슴 무리들을 이끌고 있는 큰 사슴들 가운데 가장 큰 왕 사슴을 ‘주중주(中)’라고 하며, 모든 사슴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왕 사슴을 잡는 방법을 약산화상에게 질문하고 있다. 큰 사슴은 꼬리털이 훌륭하여 작은 사슴들이 큰 사슴의 꼬리털을 목표로 하여 따라 다닌다고 하는데, 선문답에서는 주중(主中)의 주(主), 법왕중(法王中)의 법왕(法王)을 비유하여, 만법의 주체이며 우주의 본체를 지칭하고 있다. 만법의 주체를 어떻게 쏘아 맞출 수가 있는가? 즉 자기의 본성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를 큰 사슴으로 비유한 질문이다. 원오도 '평창'에 이러한 질문을 차사문(借事問) 혹은 판주문(辦主問)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지금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밝히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질문한 스님은 자신이 큰 사슴중의 왕 사슴이라고 자임하면서 약산화상의 안목을 점검하며 화살을 잡고 법전을 펼친 질문이다. 약산화상도 질문한 스님을 향해 화살을 잡아당긴 상황에서 "이 화살을 잘 봐라!"라고 큰 소리를 쳤다. 이 스님의 질문한 핵심을 화살로 쏘아 날려버리는 작용으로 일체의 사량분별을 떨쳐버린 날카로운 지혜의 화살인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화살로 독자적인 법문을 펼친 마조의 제자 석공선사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삼평(三平)이 석공선사를 참문하자 석공선사는 곧장 활을 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화살을 보라(看箭)"고 말했다. 삼평은 가슴을 열어제치며,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화살입니까? 살리는 화살 입니까?"라고 말하자, 석공선사는 화살을 세 번 튕겼다. 삼평이 곧장 절을 하니, 석공선사가 말했다. "30년 동안 활 한 개와 두 개의 화살을 가지고 교화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반쪽 성인을 쏠 수 있었다." 그리고는 곧장 화살을 꺾어 버렸다.] 원오는 [석공선사의 지혜작용이 약산화상과 똑같다. 삼평은 정수리(頂門)에 안목을 갖추고 한 마디 적중시켰는데, 이것은 약산화상이 "화살을 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약산화상의 화살에 큰 사슴중의 왕 사슴으로 자임한 그 스님은 몸을 뒹굴면서 벌떡 자빠지며 거꾸러졌다. 즉 스스로 약산의 화살에 명중된 큰 사슴중의 왕 사슴이라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약산이 다름 말로 던지면 또한 그에 적당한 말로서 대꾸하려는 복안의 말도 준비했을 것이 분명하다. 원오도 '망상 분별하는 놈'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그래서 약산화상은 "시자야!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고 고함쳤다. 죽은 시체를 빨리 없애 버리라고 하자, 그 스님이 곧장 도망치자 약산화상이 말했다. "흙덩어리나 가지고 노는 멍청한 놈! 이런 바보같은 놈들을 아무리 상대해도 끝이 없다니까!"

설두화상이 이 이야기를 제시하여 말했다. "이 스님은 일어나서 두세 걸음을 걸을 때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다섯 걸음 걸어가면 죽은 사람이 된다." 즉 크게 한 번 죽어야 되살아난다는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는 말처럼, 아상 인상과 번뇌 망념을 텅 비우고 불법의 지혜작용을 펼치는 시늉을 하고 있지만, 엉터리 가짜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는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곧장 죽은 인간이 되고 만다고 평한 말이다. 원오도 '백보를 도망간다 해도 반드시 목숨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착어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큰 사슴중의 왕 사슴.' 본칙의 제목으로 주중(主中)의 중(主), 법왕(法王)중의 법왕, 진여 법성, 혹은 본래면목, 법신불을 체득하는 일이 수행의 근본이다. '그대는 잘 보라.' 참선 수행자들은 큰 사슴 중에 왕 사슴인 자신의 본래면목을 잘 보도록 하라. 각자 본인 스스로 보고 깨닫는 방법 밖에 없다. 약산화상이 '화살을 보라!'는 법문을 설두는 전체적으로 제시하여 읊고 있다. 약산화상은 화살을 보라고 하며 날카로운 지혜의 '화살 하나를 쏘아' 정확하게 명중시켰다. 그것은 질문한 스님이 본래면목을 깨닫도록 베푼 자비심이었다. '세 걸음 도망치게 했네.' 스스로 큰 사슴중의 왕사슴이라고 생각하고 자빠진 스님도 약산화상이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고 한 말에 도망쳤다. 이러한 행동은 죽은 가운데 되살아난 사중득활(死中得活)의 지혜작용처럼 보였지만, 겨우 세 걸음 움직이고는 죽어버렸다. '다섯 걸음 걸어가서도 살 수 있다면, 떼를 지어 호랑이도 좇을 수 있으리.' 진실로 안목을 갖춘 스님이라면 약산이 이 죽은 놈을 끌어내라고 말할 때 약산을 역습하는 지혜를 펼쳐야 호랑이와 같은 약산도 좇을 수 있다. '정법의 안목은 원래 사냥꾼에게 있었다.' 약산은 정말 사냥꾼과 같은 노련한 선승이었기 때문에 하나의 화살로 명중시켰다. '설두가 큰 소리로 말했다. "화살을 잘 보라!" 고.' 설두 역시 약산과 같은 경지의 안목으로 천하의 수행자들에게 자기 지혜의 화살을 쏘아 본래면목을 잘 성찰해 깨닫도록 지시하고 있다.



[第082則]山花開似錦
〈垂示〉垂示云。竿頭絲線具眼方知。格外之機作家方辨。且道作麽生是竿頭絲線格外之機。試擧看。
〈本則〉擧。僧問大龍。色身敗壞。如何是堅固法身。龍云。山花開似錦。澗水湛如藍。
〈頌〉問曾不知答還不會。月冷風高古巖寒檜。堪笑路逢達道人。不將語黙對。手把白玉鞭。驪珠盡擊碎。不擊碎增瑕纇。國有憲章三千條罪

벽암록 82칙 대용(大龍)화상의 견고한 법신(法身)

사량분별 초월한 모습이 곧 '청정법신'


{벽암록} 제82칙은 대용화상이 법신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대용(大龍)화상에게 질문했다. "색신(色身)은 부서지고 파괴되는데, 견고한 법신(法身)은 어떠한 것입니까?" 대용화상이 말했다. "산에 핀 꽃은 비단결 같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다."

擧. 僧問大龍, 色身敗壞, 如何是堅固法身. 龍云, 山花開似錦, 澗水湛如藍.


색신과 법신 구분 짓는 망상을
언어도단 경지에서 부숴 버려


본칙의 공안은 어디서 채택한 것인지 알 수가 없으나, 후대의 자료인 {오등회원} 제8권 대용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대용화상은 송대에 낭주(朗州) 대용산에서 활약한 지홍(智洪)선사로 덕산의 법맥을 계승한 백조지원(白兆志圓) 선사의 선법을 이었다. 그의 법문은 {전등록} 23권 지홍 홍제(弘濟)대사전 약간의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전기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본칙의 선문답은 어떤 스님이 대용화상에게 "육체인 색신은 시절인연에 의한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사대(四大)의 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생노병사의 무상한 존재이며, 시절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부서지고 파괴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영원히 부서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법신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이 질문은 색신과 법신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며, 색신(色身)인 인간의 육체는 부서지고 파괴되는데, 영원히 파괴되지 않는 견고한 법신은 어떠한 것인가를 문제로 삼고 있다.

사실 법신의 문제는 {벽암록} 39칙과 47칙에 운문선사에게 질문한 선문답을 비롯하여 선문답의 중심과제이다. 선문답의 핵심문제는 색신과 법신에 대한 철저한 안목을 체득했는가. 아니면 법신을 어떻게 체득할 것인가. 이 문제는 수행자들이 불법의 대의와 선사상을 철저하게 확립해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불법의 근본사상을 배우고 익히며, 법신을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기 위해 선지식을 참문하고 이러한 문제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불유교경}에 "일체의 세간에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존재는 모두 파괴(敗壞)되는 것이기에 불안한 모양인 것이다"라고 하는 일절과, {화엄경} 노사나품에 "법신은 견고하여 파괴되지 않고 일체의 모든 법계에 두루 충만하고 있다"는 설법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색신은 유루법(有漏法)이고 진리의 당체인 법신은 무위법(無漏法)이다. {대지도론} 9권에 '부처는 두 종류의 몸(二種身)이 있다. 첫째는 법성신(法性身)이며, 두 번째는 부모생신(父母生身)이다'라고 설한 것처럼, 색신은 부모의 인연으로 몸을 받은 육체를 말하며, 법신은 불법을 체득한 지혜의 당체를 말한다.

색신과 법신은 부처가 구족하는 기능을 분류한 것이다. 육체가 없이 법신(마음)의 지혜작용을 전개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육신은 인연으로 가합된 것이기 때문에 생노병사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무상을 거쳐 파괴되고 만다. 무상한 육신이 파괴되는 모습을 점차로 관찰하여 세간의 다섯 가지 욕망과 육신의 애착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도록 제시한 수행법이 구상관(九想觀)이며 백골관(白骨觀)이다. 그러나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당체이며 지혜작용을 전개한 법성신(法性身) 즉 법신은 영원히 파괴되지 않고, 시방의 허공에 가득 차고 무량광명과 무량의 수명이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는다. {유마경}에 유마힐이 아난에게 "여래의 몸은 금강과 같이 파괴되지 않는 것을 본체(金剛之體)로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법신은 파괴되지 않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이다. 왜냐하면 법신은 육신과 같이 생멸법과 생사의 인연법을 초월한 지혜의 법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엄경}에도 "불자여! 비유하면 허공과 같이 일체의 모양과 형상이 있는 경계(色處)나 모양과 형색이 없는 곳(非色處)에나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며, 그래서 이르지 않거나 이르지 아니한 곳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법신도 이와 같다. 일체의 경계에 이르고 일체의 국토에 이르고, 일체 법이나 일체 중생에게 이르지 아니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의 몸은 고정된 몸이 아니기 때문에 곳에 따라 변화하여 그 몸을 나투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또 {화엄경} 여래현상품에도 "불신은 법계에 가득 충만하여 널리 일체 중생들 앞에 나투고 있다. 인연에 따라 나아가 감응하여 두루하지 아니한 곳이 없지만 항상 깨달음의 당처에 앉아 있도다"라고 읊고 있다. {유마경} 방편품에 "불신(佛身)은 곧 법신이다. 무량의 공덕과 지혜를 이룬다"라고 하고, "무량하고 청정한 법을 이루기 때문에 여래신(如來身)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대승기신론}에 "진여(眞如)의 지혜를 법신이라고 한다"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을 체득한 지혜가 법신이다. 법신은 모양도 형상도 없기에 파괴되지 않고 영원한 지혜광명과 무량한 공덕을 이루는 당체이다.

{열반경} 등 대승경론에서는 여래의 법신을 허공에다 비유하는데 허공은 태어나거나 죽는 생사와 생멸이 없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며, 무량무변하며, 일체의 만물을 포용함과 동시에 생성하도록 하고 있는 무한한 지혜광명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스님은 경전에서 주장한 색신과 법신에 대한 말을 듣고, 법신에 대한 의미를 확실히 체득하기 위해 대용화상에게 질문한 것인데, 원오는 "이 스님이 색신과 법신이라는 두 가지 차별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했는데 이러한 차별에 떨어진 스님의 질문에 대용화상은 "산에 피어 있는 많은 꽃들은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이 아름답고, 개울의 시냇물은 파란 색깔에 너무나 맑기만 하다"라고 삼라만상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게송으로 읊고 있다. 대용화상은 사량분별을 여읜 만법의 진실한 모습이 그대로 법신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청정법신은 산에 꽃이 피고 개울물이 흐르는 그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소동파도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이고, 산의 모양이 청정한 법신"이라고 읊고 있다. 중생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무심(無心)한 산의 모습이나 개울물이 그대로 청정한 법신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본칙의 공안을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읊었다. "질문도 알지 못하고", 이 스님은 색신과는 달리 법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법신과 색신에 대한 불법의 대의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질문하였다. "대답해도 알지 못하네", 법신은 언어도단의 경지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대용화상은 차별심을 초월한 입장(不會)에서 제법실상의 세계를 게송으로 읊었는데, 스님은 대용화상의 대답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네. "달은 차갑고 바람은 드높은데, 옛 바위의 쓸쓸한 전나무여", 달은 하늘에서 비추고 바람은 천지를 상쾌하게 하네. 그곳에 천년의 세월에 이끼가 낀 바위 옆에 푸른 전나무가 사철 변함없이 묵묵히 솟아 있다. 한적하고 청정한 법신 풍경의 유경(幽境)을 대용화상은 언어도단(不會)의 차원에서 읊고 있다. 일찍이 향엄지한선사는 "길에서 도인을 만나면, 말로도 침묵으로도 대꾸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우스운 일'이로다. 대용화상은 말이나 침묵으로 상대할 때도 있고, 상대하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것을 상대하지 말라고 규칙으로 정한 것은 우스운 일이다.

대용화상은 말이나 침묵, 양변(兩邊)을 여의고 더군다나 그 양변의 차별을 버리지도 않고 산에 핀 꽃과 개울물 흐르는 게송으로 견고한 법신을 제시하였다고 찬탄하고 있다. "백옥(白玉)의 채찍을 손에 잡고, 검은 용의 구슬을 모조리 부숴버렸네", 대용화상이 대답한 "산에 핀 꽃"이라는 백옥의 채찍(법신의 지혜)으로 용의 구슬을 사정없이 때려 부셔버렸다. 만약 대용화상이 용의 구슬이 아깝다고 "쳐부수지 않았다면, 흠집만 더했으리라", 이 스님은 영혼을 불성이라고 착각하고 영원히 번뇌 망념이 증가하여 불법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법률이 있는 것처럼 그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법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삼천조목의 죄로서 다스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선의 세계에도 선수행자는 불법을 체득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서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데,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졸승은 삼천 가지 죄를 적용해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송이다.



[第083則]南山雲北山雨
〈本則〉擧。雲門示衆云。古佛與露柱相交。是第幾機。自代云。南山起雲北山下雨。
〈頌〉南山雲北山雨。四七二三面相睹。新羅國裏曾上堂。大唐國裏未打鼓。苦中樂。樂中苦。誰道黃金如糞土。

벽암록 83칙 운문화상의 고불(古佛)과 기둥(露柱)

남산과 북산, 고불과 기둥이 '하나의 경지'


{벽암록} 제83칙은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설한 상당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설법을 했다. "고불(古佛)과 기둥(露柱)이 사이좋게 교제하는데, 이것은 어떤 단계의 마음작용(機)인가?" 운문화상 스스로 대답했다.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擧. 雲門示衆云, 古佛與露柱相交, 是第幾機. 自代云. 南山起雲. 北山下雨.


고불은 본래 청정한 불심 상징하고
기둥은 사물과 현상 경계 대변한 것

본칙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中卷)의 수시대어(垂示代語)에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법당에 올라 설법하였다.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고불(古佛)과 기둥(露柱)이 사이좋게 교제하는데, 이것은 몇 번째 기틀(機)인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운문화상이 물었다. '그대들에게 묻는다. 나는 그대들을 위해서 말한 것이다.' 어떤 스님이 곧바로 질문했다. 운문화상은 말했다. '이 채찍 끈은 삽십전(三十文)이다.' 앞의 말을 대신하여 말했다.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어째서 채찍 끈이 삽십전입니까?' 운문화상은 곧장 내리쳤다." 설두화상은 이 일단의 대화에서 요약한 것인데, {굉지송고} 31칙에도 똑같은 공안을 제시하고 있다.

운문문언(864~949)화상은 {벽암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전기는 생략한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공안은 번뜩이는 전광석화와도 같아 참으로 신출귀몰하다고 하겠다. (원오와 동문인) 경(慶) 장주(藏主: 경전을 관리하는 직책)는 이 공안에 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평생 설한 대장경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분별 의식으로 살림살이하면서 '부처님은 삼계의 도사이고, 사생(四生)의 자비로운 어버이다. 이미 고불(古佛)인데 무엇 때문에 기둥(露柱)과 사이좋게 지내는가'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이해해서는 운문화상의 말뜻을 결코 파악 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대웅전에 모신 불상(古佛)과 대웅전의 기둥이 서로 함께 나란히 마주하며 사이좋게 지내고 있는 것은 어떠한 경지(차원)의 지혜작용인가?'라고 대중에게 질문한 것이다. 대웅전의 불상 뿐만 아니라, 석가불이나 아미타불, 삼세의 모든 부처나 역대의 모든 조사가 고불(古佛)이다. 설봉선사가 조주선사의 법문을 듣고 '조주 고불(古佛)'이라고 칭찬하는 말이 최초인데,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도 보인다. "어떤 수재가 조주선사를 참문하고 곧장 선사를 칭찬하기를 '화상이 바로 고불(古佛)입니다'라고 말했다. 조주선사는 '수재가 바로 신 여래(新如來)입니다'라고 말했다." 고불(古佛)은 옛 부처라는 말이 아니다. 옛(古) 부처라고 하면 새(新) 여래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에 떨어진 것이다. {조당집} 제9권에 '고불은 수행과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에 따르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불(古佛)은 본래, 원래, 근본적으로 부처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전등록} 24권 법안장에 어떤 스님이 '고불이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법안선사는 '지금 그대의 마음에 일체의 의혹이 없는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동산록}에도 '그대의 본래 청정한 불심이 곧 고불심(古佛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평상심과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을 말하며, {육조단경} 등 선어록에서는 본래 청정한 거울(古鏡)의 작용을 불심에 비유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법당에서 눈앞에 전개되고 불상과 기둥이 나란히 마주하고 있는 현상의 사실을 수행자들에게 제시해 고불과 기둥과 같이 일체 상대적인 차별경계를 초월한 경지를 체득하도록 법문을 한 것이다. 법당의 불상(古佛)과 기둥이 별개인 것으로 본다면 경계에 떨어지고 차별에 떨어진 중생심이 된다. 법당의 불상으로 상징되는 고불은 일체 제불과 모든 조사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법문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구족하고 있는 본래 청정한 불심을 말한다. 법당의 기둥은 현전하는 일체의 모든 사물과 현상 경계를 대변한 말인데, 고불(古佛)과 노주(露柱)는 자각의 주체인 불심과 현상 경계의 모든 사물을 말한다. 말하자면 주체(主)와 객체(客), 인(人)과 법(法), 심(心)과 경(境)이 서로 서로 친히 교섭하며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불이일체(不二一體)가 되어 일체의 차별과 분별심이 초월된 경지를 설법하고 있다.

선에서는 주관과 객관이 일체가 된 깨달음의 세계를 하얀 은 쟁반에 흰 눈을 담아 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쟁반과 눈은 둘이지만 흰색으로 일체가 된 경지를 말한다. {반야심경}에서 설한 것처럼, 법당의 기둥을 비롯해 일체의 사물과 차별 경계에 대한 분별 의식이 없이 무심한 경지가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일체의 분별 의식이 없는 무심의 마음으로 일체의 모든 경계나 사물, 도구를 걸림없이 마음대로 생활에 사용하는 것이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자각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인 사물이 무심의 경지에서 자신의 지혜로운 생활이 되도록 하는 법문이다.

그런데 운문화상이 '고불(古佛)도 무심 기둥(露柱)도 무심의 경지에서 서로 서로 하나 된 경지의 작용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단계의 마음작용(機)인가?' 기(機)는 기관(機關)이나 기용(機用), 기근(機根), 기략(機略), 기륜(機輪)이라고 하는 말처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선에서는 마음의 지혜작용을 말한다. 마음의 지혜작용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불심으로 사물의 본체를 곧장 파악하는 직관이나, 사물을 관찰해 인식하는 작용, 문제를 깊이 사유하고 고찰하는 사색 등이 있는데, 지금 고불과 기둥이 서로 사이좋게 교제하는 마음의 작용은 어떤 단계의 지혜작용인가라고 묻고 있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운문화상 스스로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온다'라고 대중을 대신해 말했다. 고불과 기둥, 남산과 북산, 구름과 비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남산과 북산은 본래 하나의 산이며, 일체의 모든 만물은 서로 상의 상관관계 속에서 서로 서로 무심의 경지에서 존재하고 있다. 구름도 무심, 비도 무심, 구름이 일어나고 비가 오는 모습이 그대로 무심의 경지에서 법체(法體)가 현성(現成)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고불과 기둥, 구름과 비가 무심하게 주객일체(主客一體), 심경일여(心境一如)가 된 경지를 말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남산의 구름, 북산의 비.' 설두는 본 공안의 주안(主眼)인 운문화상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찬탄하고 있다. '서천의 28대, 동토의 6대 조사가 눈앞에서 본다.' 인도에서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한 서천 28대 역대조사와, 달마대사 이후 육조혜능에 이르는 중국의 6대 조사 모두가 남산에 구름이 일고, 북산에 비가 내리는 것을 본다. 역대의 모든 조사는 정법의 안목을 갖춘 선지식이기 때문에 운문이 말한 '남산의 구름과 북산의 비'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 있다. 삼세(三世)에 상주(常住)하고 법계(法界)에 두루하는 구름이며 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실 법계를 법신의 지혜로 친히 본다고 읊었다.

'신라국에서 일찍이 상당설법 하였는데, 대당국에서는 아직 북도 치지 않았다.' 선원에서 주지가 법당에서 상당 설법하기 전에 먼저 북을 치는 의식이 있다. 신라에서 상당 설법을 했는데, 당나라에서는 북도 치지 않았다는 말은 시간의 순서가 맞지 않는 것이고, 신라와 당나라는 거리도 멀리 떨어져 있다. 말하자면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고 북산의 비가 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지에서 전개된 진실법계의 실상인 것이다. 상식적인 시간과 공간개념으로 상대적인 분별의식으로 운문의 말을 이해하면 안 된다. '괴로움 가운데 즐거움, 즐거움 가운데 괴로움' 남산과 북산, 고불과 기둥, 고(苦)와 락(樂)도 하나의 경지이다. '그 누가 황금을 똥 같다고 말하리요.' {전한서(前漢書)} 열전에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양나라 사람으로 황금을 똥으로 볼 정도로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뒤에 사이가 나빠져 권력 다툼으로 똥보다도 더 더러운 사이가 됐다. 고불과 기둥은 서로 무심의 경지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황금을 똥과 같이 생각할 필요도 없고, 또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라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 황금은 황금 그대로, 똥은 똥 그대로, 무심한 그 가운데 일체 괴로움과 즐거움(苦樂)의 차별도 없는 것이다.


[第084則]不二法門
〈垂示〉垂示云。道是是無可是。言非非無可非。是非已去。得失兩忘。淨裸裸赤灑灑。且道。面前背後是箇什麽。或有箇衲僧出來道。面前是佛殿三門。背後是寢堂方丈。且道。此人還具眼
也無。若辨得此人。許爾親見古人來。
〈本則〉擧。維摩詰問文殊師利。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文殊曰。如我意者。於一切法。無言無說。無示無識。離諸問答。是爲入不二法門。於是文殊師利問維摩詰。我等各自說已。仁者當說。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雪竇云。維摩道什麽。復云。勘破了也。
〈頌〉咄這維摩老。悲生空懊惱。臥疾毘耶離。全身太枯槁。七佛祖師來。一室且頻掃。請問不二門。當時便靠倒。不靠倒。金毛獅子無處討。

벽암록 84칙 유마거사의 불이법문

일체 자취와 흔적 없는 유마힐의 '침묵'


{벽암록} 제84칙은 {유마경}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제시하고 있다.

유마힐이 문수사리에게 질문했다. "보살이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깨닫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문수가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일체의 법에 관하여 말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고, 제시할 수도 없고, 알게 할 수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여읜 그것이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에 문수사리보살이 유마힐 거사에게 물었다. "우리들은 각자의 설명을 마쳤습니다. 거사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설두화상이 말했다. "유마거사가 무슨 말을 했는가!" 설두화상은 다시 말했다. "완전히 파악(勘破)해 버렸다."

擧. 維摩詰問文殊師利.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文殊曰, 如我意者. 於一切法. 無言無說. 無示無識. 離諸問答. 是爲入不二法門. 於是文殊師利 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當說, 何等是菩薩入不二法門. 雪竇云, 維摩道什. 復云, 勘破了也.


문수보살 답변 역시 흔적 남겨
참 불이법문은 '언어도단' 경지

본칙의 공안은 {유마경} '입불이법문품'에 의거한 것이다. {유마경}에는 어느 날 비야리성의 장자인 유마거사가 석존이 설법하는 장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아, 석존이 "어떻게 된 일인가?" 걱정하면서 물어보니 제자 한 사람이 "유마거사는 병으로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석존은 제자 사리불과 여러 제자들에게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하고 오라"고 지시하였지만 이런 저런 핑계로 모두 병문안 가기를 싫어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이 세존을 대신하여 병문안 하러 가게 되었는데, 3만 2000의 대중들을 거느리고 유마거사의 병실을 찾아갔다. 유마거사는 그 많은 대중을 자신이 거처하는 방장(方丈)으로 초청하였지만, 장소가 조금도 협소함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원오는 '평창'에 유마거사와 여러 보살들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마힐이 여러 보살들에게 각기 둘이 아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말하게 하였다. 그때 32명의 보살이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견해(二見)인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진(眞)과 속(俗)의 두 가지 진리(二諦)를 합일시켜 불이법문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에 문수보살은 '내 생각으로는 일체의 법에 관하여 말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고, 제시할 수도 없고, 알도록 할 수도 없으며, 일체의 질문과 대답을 여읜 그것이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32명의 보살은 말로서 말을 버렸다. 그러나 문수보살은 말이 없는 것(無言)으로 말을 버려 일시에 털어버려 아무 것도 필요치 않는 것으로 불이법문을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령한 거북이 진흙땅에 꼬리를 끄는 것과 같이 자취를 쓸어버린다는 것이 그만 또 다른 흔적을 남긴 꼴이다."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대화로 귀결되는 본칙 공안의 핵심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체득한 견해와 안목을 점검하는 문답이라고 할 수 있다. 유마거사의 질문에 다른 보살들은 대승불교에서 제시한 불이법문(不二法門)의 의미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여러 가지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는데, 이미 언어 문자로 설명한 것은 불이법문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상대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불이의 경지를 체득한 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불이법문과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방법을 아무리 설명해도 언어 문자의 설명은 자취와 흔적이 남는다. 불이법문을 체득하는 것은 선악, 시비, 생사 등의 일체 상대적이고 이원론적인 차별심을 텅 비우는 공(空), 중도(中道)의 실천을 통해서 근원적인 불심의 반야지혜로 일체의 자취나 흔적이 없는 깨달음의 삶을 실행하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 주장하는 불법의 대의란 반야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이다. 선의 수행은 반야의 지혜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지혜로운 삶을 선의 생활로 전개하는 것이며, 선문답은 이러한 사실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스승과 제자의 구체적인 대화인 것이다. {신심명}에서는 "지극한 깨달음을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단지 취사선택하고 간택하는 분별심만 없으면 된다는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고 설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며, 칠불(七佛)의 스승이고, 시방제불의 어머니(母)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반야지혜의 완성으로 부처로서 현성되기 때문에 반야지혜(문수)는 부처를 생산하는 어머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유마경}에서는 문수보살의 안목이 유마힐의 지혜에 미치지 못하는 보살로 등장하고 있다. 문수보살은 최후로 유마거사에게 "우리들 32보살은 불이법문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밝혔는데, 이제는 유마거사 당신이 대답할 차례입니다. 거사의 견해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유마경}에 유마거사는 단지 [침묵]을 하였다고 한다. {종용록} 48칙에 "승조의 {조론} 열반무명론에 석가가 성도 후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닫고 침묵하였고, 유마도 비야리성에서 입을 닫고 침묵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불법의 근본(第一義諦) 진실은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 분별해서 알 수도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인 불립문자의 경지임을 침묵으로 표현한 것이다. 침묵은 상대적인 언어 문자로 설명하는 이원적이고 분별적인 차별심을 텅 비운 본래심의 입장이며, 진실과 하나 된 불이법문을 체득한 경지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칙에서는 유마가 침묵으로 대답한 것을 생략하고, 설두가 "유마거사가,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말했다. 원오는 "유마거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를 대신하여 무슨 도리를 설하고 있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또다시 "완전히 파악(勘破)해 버렸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설두화상이 유마가 말하지 않고 침묵한 그의 속셈을 완전히 간파해버렸다는 의미이다. 원오는 "설두 당신만 간파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도 간파했다"라고 착어하고, '평창'에 "그대들은 말해보라 간파한 곳이 어디인가? 이것은 잘잘못에 관계없고, 시비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마치 만길 벼랑 위에서 목숨을 버리고 뛰어 넘을 수 있다면 유마거사를 친견하였다고 인정하겠지만, 버리지 못한다면 울타리에 뿔이 걸려 어쩌지 못하는 염소와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자신의 존재와 상대적인 경계와 아상과 인상, 일체의 분별심과 번뇌 망념을 텅 비운 무심(無心)의 경지가 되지 않으면 유마의 침묵과 설두와 원오가 간파한 경지를 파악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야()! 유마노인." 이 한마디에 어묵(語默), 진속(眞俗), 유위(有爲)나 무위(無爲) 등 일체의 차별을 날려 버린 설두의 견해를 읊었다. "중생을 위한 자비심으로 부질없이 고뇌하네." {유마경}에 중생이 병들어 있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이라고 말한 유마의 입장. "비야리성에서 병으로 누워. 온 몸이 너무나 깡말랐다." 비야리성은 유마거사가 사는 도시이고, 그는 중생들이 병들었기 때문에 자신도 병들어 그 고통으로 온 몸이 너무나 야위고 바짝 말라 버렸다. 중생들을 위한 지극한 자비심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칠불조사(문수보살)가 찾아왔네." {방발경(放鉢經)}에 "부처님이 부처가 된 것은 문수의 은혜이며, 문수는 과거의 본사이고, 과거 무량의 제불은 모두 문수의 제자"라고 설한다. {화엄경}에도 "문수사리는 무량 나유타 제불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에 의거하여 {백장어록}에서 문수는 칠불의 스승이라고 주장했다. "일실(一室)의 방을 자주 쓸었네." 유마는 일체의 차별, 분별심을 텅 비우고, 손님을 맞이하여 문수에게 "불이법문을 청했다." '곧장 몸을 넘어뜨렸다.' 뛰어난 문수가 유마에게 도리어 불이법문의 질문을 읊고 있는데, 그러나 유마는 "몸이 넘어지지 않았다." 침묵으로 불이법문을 설한 유마의 지혜는 차별경계에 떨어지지 않았다. "황금빛 사자를 찾을 곳이 없네." 황금빛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것으로 문수보살을 비유한 것인데, 과연 문수도 유마의 침묵에 찬탄하게 되었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가 지혜로 질문한 불이법문을 유마는 침묵으로 일체의 자취와 흔적이 없는 불이법문의 경지를 제시한 것이라고 극찬했다.



[第085則]掩耳偸鈴
〈垂示〉垂示云。把定世界不漏纖毫。盡大地人亡鋒結舌。是衲僧正令。頂門放光。照破四天下。是衲僧金剛眼睛。點鐵成金。點金成鐵。忽擒忽縱。是衲僧拄杖子。坐斷天下人舌頭。直得無出氣處。倒退三千里。是衲僧氣宇。且道總不恁麽時。畢竟是箇什麽人。試擧看。
〈本則〉擧。僧到桐峰庵主處便問。這裏忽逢大蟲時。又作麽生。庵主便作虎聲。僧便作怕勢。庵主呵呵大笑。僧云。這老賊。庵主云。爭奈老僧何。僧休去。雪竇云。是則是兩箇惡賊。只解掩耳偸鈴。
〈頌〉見之不取。思之千里。好箇斑斑。爪牙未備。君不見。大雄山下忽相逢。落落聲光皆振地。大丈夫見也無。收虎尾兮捋虎鬚。

벽암록 85칙 동봉(桐峰)화상과 호랑이

“어리석은 고양이가 호랑이 흉내내는 격”


{벽암록} 제85칙은 어떤 스님이 동봉화상을 찾아가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나누었다.

어떤 스님이 동봉화상이 살고 있는 암자에 이르러, 동봉화상께 질문했다. "여기서 갑자기 호랑이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봉화상이 갑자기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자, 그 스님은 곧장 겁먹은 시늉을 하였다. 동봉화상이 껄껄대며 크게 웃자, 그 스님은"이 도적놈아!"라고 말했다. 동봉화상은 말했다. "그대는 노승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 스님은 그만 두었다. 설두화상이 말했다. "옳기는 옳다만, 어리석은 도둑놈처럼, 자신의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칠 줄만 아는구나!"

擧. 僧到桐峰庵主處便問, 這裏忽逢大蟲時, 又作生. 庵主, 便作虎聲. 僧便作勢. 庵主呵呵大笑. 僧云, 這老賊. 庵主云, 爭奈老僧何. 僧休去. 雪竇云, 是則是兩箇惡賊, 只解掩耳偸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2권과 {광등록} 13권 동봉암주전에 선문답으로 전하고 있다. {전등록}에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어 잘 알 수가 없다. 원오도 '평창'에 '백장회해선사의 법을 계승한 임제의 문하에서 대매(大梅), 백운(白雲), 호계(虎溪), 동봉(桐峰) 등의 네 암주가 배출되었다.'라고 한다. 대매(大梅) 백운(白雲)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전등록}에는 임제의현선사의 문하에 동봉(桐峰), 삼양(杉洋), 호계(虎溪), 복분(覆盆)등의 4인의 암주가 배출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봉화상도 임제의 선법을 잇고 깊은 산중에 은거한 선승이 아닌가 생각된다. 산악형 종교로 형성된 선불교는 모두 산중에서 수행하고 심산유곡에서 유유자적하게 은둔의 수행자로 삶을 살다간 선승의 숫자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조당집}에 '마조문하의 은둔자는 그 수를 셀 수도 없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름을 알 수 없는 선승은 무척 많다.

본칙에서도 산중에 은거하는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구법행각하는 어떤 수행자가 어느 날 동봉화상이 살고 있는 암자에 이르러 동봉화상에게 곧장 '암주가 홀로 이 산중에 좌선수행하고 있을 때 만약 무서운 호랑이(大蟲)를 만나면 어떻게 처리하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선문답을 선사를 시험하는 험주문(驗主問)이라고 하는데, 질문한 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너무나도 자신만만하고 자신이 일체의 만법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호랑이라고 하면서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암주의 안목을 점검하려고 하고 있다. {조당집} 16권에 남전과 귀종이 호랑이(大蟲)를 소재로 선문답을 나누고 있고, {전등록} 10권에는 앙산이 장사경잠(長沙景岑)의 지혜작용을 마치 호랑이와 같이 용맹스러운 선승이라고 평가하면서 잠대충(岑大蟲)이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처럼, 호랑이는 정법의 안목을 갖춘 용맹스러운 지혜작용을 자유롭게 펼치는 작가 선지식을 말한다. 원오는 '작가가 그림자를 가지고 논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이 스님은 안목을 갖춘 호랑이와 같은 작가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아직 진짜 호랑이는 본 일도 없는 사람같다고 비꼬고 있다.

동봉화상은 스님의 질문을 받고 갑자기 호랑이가 울부짖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즉 동봉화상은 이 산중에는 호랑이가 살고 있는가? 그런 질문은 쓸데없는 소리야. 내가 바로 살아있는 호랑이다 라고 호랑이 고함소리를 흉내낸 것이다. 호랑이가 울부짖는 고함소리를 낸 것은 {전등록} 9권 백장선사가 황벽에게 호랑이(大蟲)를 보았는가? 라는 질문에 황벽이 곧장,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백장은 상당법문에서 대웅산에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있다고 황벽을 인가한 것처럼, 법계로 동봉화상의 조부인 황벽선사가 최초로 주장한 것이다. 이와같은 선문답으로 하나의 형식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동봉화상도 이미 이러한 각본은 알고 있었기에 즉시로 자신의 지혜로 응용한 것이다. 원오는 '잘못을 잘못에 나아간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도 동봉암주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호랑이 고함소리는 냈지만, 질문한 스님을 물어 죽이는 지혜작용이 없는 그릇됨을 가지고 질문한 스님의 태만한 잘못에 나아간 것이라는 의미이다. 원오는 '같이 살고 같이 죽는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질문한 스님과 암주가 비슷한 안목에서 나눈 말이라고 야유하며, '말을 들으면 반드시 종지를 체득해야지.'라는 석두희천의 {참동계(參同契)} 일절을 인용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선승의 일문일답에서 본분의 종지를 체득해야 하는데, 동봉암주는 호랑이 질문에 호랑이 소리 흉내만 내고, 질문한 스님에게 본분의 종지인 발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동봉암주는 아직 불법의 대의(종지)를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상대방 문제점 캐내기만 할 뿐
지혜작용 없는 아류 선승 비판

동봉화상의 호랑이 고함 소리에 그 스님은 곧장 겁먹고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였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진흙덩어리를 가지고 노는 어린애와 같은 놈'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암주는 스님이 겁먹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암주의 웃음에 대하여 원오는 '웃음 속에 칼이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방심 할 수 없는 선기를 펼쳤다. 스님은 암주가 웃음이 심상치 않은 도적의 선기가 있음을 간파하고 '이 도적놈아!'라고 말했다. 그러나 스님은 암주의 도적놈 기질을 파악하고도 독설을 퍼붓는 욕만 할 뿐 손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동봉 암주는 멀리 달아나 버렸다. 원오도 '졌다'고 착어하고 암주나 스님이 모두 자신의 경지를 내보인 방행(放行)만 하고 거두는 파주(把住)가 없다고 지적했다.

질문한 스님은 호랑이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 진짜 호랑이를 본적이 없고, 암주도 호랑이 시늉만 하고 죽이고 살리는 맹수의 지혜작용이 없다. 스님이 이 도둑놈이라고 하자, 동봉화상은 '그대는 노승과 같은 도적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냉소로 대꾸하고 있다. 스님은 암주를 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기만 하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지혜작용이 없어 물러서고 말았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안목 없다. 한심하고 한심하다.'라고 착어하며, 암주와 스님 모두 유야무야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고 비판했다.

설두화상은 '옳기는 옳다만, 나쁜 도적처럼, 단지 자신의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칠 줄만 아는구나!'라고 {여씨춘추(呂氏春秋)},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여 평했다. 즉 스님과 암주 모두 훌륭한 선승이지만, 나쁜 도적의 악독한 수단으로 호랑이 소리를 흉내내고,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고, 껄껄 호탕하게 웃고, 도둑이라고 욕하기도 하는 등 상대방의 약점만을 공격하는 나쁜 작전을 여러 가지 펼쳤지만, 결국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어리석은 아류의 선승이다. 방울을 훔치면 소리가 나기 때문에 남이 곧바로 알지만, 자신의 귀만 막고 있으면 자기에게는 들리지 않으면 남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방울을 훔치는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했다. 상대방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방편의 지혜가 부족하여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작가 선승으로 능력 부족이기 때문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선승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그것(호랑이)를 보고도 잡지 못하면, 천리 밖에 가서 그것(호랑이)를 생각한다.' 선문답을 하는 그 때에 자기 본분사(호랑이)를 체득하는 찬스를 잡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암주와 스님의 부족한 경지를 읊고 있다. '호랑이의 얼굴진 무늬는 아름다운데, 발톱과 이빨을 갖추지 못했다.' 암주와 스님은 모두 훌륭한 호랑이지만, 발톱과 이빨을 갖춘 지혜작용이 없었다. '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대웅산 아래서 홀연히 만나보니, 우렁찬 목소리와 광채가 모두 대지를 진동했던 사실을. 대장부는 보았는가? 호랑이 꼬리를 잡고, 호랑이 수염을 뽑았노라.' 백장이 황벽을 대웅산의 호랑이라고 평한 선문답의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이 대화에 대하여 앙산이 백장은 황벽을 칭찬한 것뿐만 아니라, 호랑이를 살려서 활동하게 하였다. 즉 호랑이 머리와 꼬리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호랑이로서 용맹을 떨진 지혜를 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第086則]好事不如無
〈垂示〉垂示云。把定世界不漏絲毫。截斷衆流不存涓滴。開口便錯擬議卽差。且道作麽生是透關底眼。試道看。
〈本則〉擧。雲門垂語云。人人盡有光明在。看時不見暗昏昏。作麽生是諸人光明。自代云。廚庫三門。又云。好事不如無。
〈頌〉自照列孤明。爲君通一線。花謝樹無影。看時誰不見。見不見。倒騎牛兮入佛殿。

벽암록 86칙 운문화상의 광명(光明)

중생심 차별경계 넘어야 지혜광명 비춰


{벽암록} 제86칙은 운문화상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사람마다 모두가 광명을 가지고 있다. 이를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깜깜하다. 어떤 것이 여러 사람들의 광명인가?" 스스로 대중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부엌의 삼문(三門)이다." 또 거듭 말했다.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

擧. 雲門垂語云, 人人盡有光明在. 看時不見暗昏昏. 作生是諸人光明. 自代云, 廚庫三門. 又云, 好事不如無.


의식적 분별심으로 불심 가려
'행주좌와(行住坐臥)' 광명 아닌 것 없어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 수시대어를 인용한 것이다. 광명(光明)은 {화엄경} 11권에 '세존이 도량에 앉아 청정한 대광명을 놓으니 마치 천개의 태양이 나타나 허공세계를 두루 비추는 것과 같다.'라고 읊고 있는 것처럼, {방광반야경}, {관무량수경} 등 경전에서는 부처나 보살의 지혜작용을 광명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미혹의 어둠을 타파하는 진리의 빛으로 나타낸 것인데, 아미타불을 무량(無量)의 수명(壽命)과 광명(光明)으로 표현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광명이 있다. 이 광명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어둡고 깜깜하다."라고 고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당집} 제4권, 단하천연서사의 {고적음(孤寂吟)}에 "광명 있는 줄 모두가 다 알지만, 그 광명을 보려하면 어둡고 깜깜하여 볼 수 없다."는 말에 의거한 것이다.

{전등록} 10권 장사장에 "모든 시방세계는 바로 사문의 눈이며, 모든 시방세계는 바로 사문의 온 몸이며, 온 시방 세계는 바로 자기 광명이며, 온 시방세계는 한 사람도 자기 아닌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혜의 {정법안장} 하권에 복주대안이 광명에 대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대들 모든 사람은 각자 가치를 정할 수 없는 큰 보물을 지니고 있다. 눈(眼門)에서 빛(光)을 놓아 산하대지를 비추고, 귀에서 빛을 놓아 일체 선악의 음향을 받아들이고, 이와 같이 육문(六門)은 주야로 항상 광명을 놓는데, 이것을 방광삼매(放光三昧)라고 한다.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 인식(識取)하지 않아도 사대신중(四大身中)에 잠재하고 있다. 자 말해보라!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是甚物)? 그대가 만약 광명을 털끝만큼이라도 찾아보려고 한다면 보이지 않게 된다."

운문화상이 각자가 지니고 있는 광명을 보려고 하면 보이지 않고 깜깜하고 어두운 곳에 빠져 짐작도 할 수 없게 된다(暗昏昏)라고 주장하고 있다. 원오도 "보려고 할 때 눈이 멀게 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불심의 광명은 무심의 경지에서 항상 잠시도 쉬지 않고 눈 귀 코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지혜광명을 발하고 있지만, 만약 그 광명을 대상으로 설정하여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면 볼 수 없게 된다는 법문이다. 중생심의 분별의식이 망심이 되어 불심의 지혜광명이 어둡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능엄경} 9권에 "만약 성스러운 견해를 지으면 많은 삿된 망념에 떨어지리라."고 주장한 말과 같고, {현사어록}에 "감정에 성스러운 생각이 있으면 여전히 번뇌 망념(法塵)에 떨어진다."라는 주장과 같다.

원오가 수시에 "입을 열고 말을 하면 곧바로 틀리고, 사량분별 했다간 불심과는 어긋난다."라고 읊은 말도 운문의 법문을 대변한 것이다. 선어록에 "무엇을 하려고 의식하면 곧바로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어긋난다(擬心卽差)"는 선병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여러분들 모든 사람들의 가지고 있는 광명이란 어떤 것인가?" 그 광명을 분명히 체득하도록 법문을 하고 있다. 자기 광명이란 각자의 본래면목이며, 지금 여기 자신의 본분사를 불심의 지혜로 전개한다면 자기의 광명이 시방세계에 두루하게 된다. 그것은 임제의 법문처럼, 곳에 따라 자신이 주인이 되어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불심으로 작용할 때에 자기의 광명이 천지를 비추게 되는 것이다. 원오는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착어했는데, 산은 산으로서 본래면목을, 물은 물로서 본분사를 무심하게 작용할 때 산으로서 면목이 들어나고, 물로서 면목을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광명도 자기 본분사를 불심의 지혜로, 무심의 경지에서 살수 있을 때 자기법신의 지혜광명이 시방세계를 가득 비추게 된다.

원오는 '평창'에 운문화상은 대중들을 위해서 20년 이와 같은 법문을 하여 점검하였지만, 운문의 요구에 계합하는 대답을 한 사람이 없었다. 향림(遠侍子)스님은 훗날 이 법문에 대하여 대중들을 대신하여 말씀해 주시길 간청하자, 운문화상은 "부엌(廚庫)의 삼문(三門)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주고(廚庫)는 부엌을 말하는데, 운문의 어록에서만 보이는 말이며, 삼문(三門)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으로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이다. 운문은 부엌과 삼문을 선원의 칠당가람[七堂伽藍, 법당, 불전, 창고(庫裡), 승당, 욕실, 변소(東司), 산문(山門)]을 대변한 말로, 여러 수행자들이 매일 선원의 칠당가람과 함께 법신의 지혜작용으로 생활하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자기 광명 아닌 것이 없다. 즉 선원의 삼문이나 부엌 어디에서라도 불심으로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전개하는 그대로가 자기 광명이 현전한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원오는 "노파심의 친절"이라고 착어했는데, 운문화상의 대어(代語)가 좀 지나친 친절이라고 비난했다. 친절은 좋지만, 과잉 친절은 수행자들이 철저한 수행으로 체험해야 하는 자각적인 교육을 망치게 하는 부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에 운문화상은 선기(禪機)를 전환시켜, 또다시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好事不如無)"라고 말했다.

이말은 당시의 속담인데, {운문어록}에는 이 말을 3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설봉어록}에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고 부처님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째서 부처를 인정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설봉은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조주록}에도 "조주화상은 불전을 지나는데 한 스님이 예배하는 모습을 보고 주장자로 때렸다. 스님은 '예배하는 것은 좋은 일(好事)인데 왜 때립니까?'하자, 조주는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라고 대꾸했다. 이 두 문답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부처나 광명은 성스러운 성체라는 차별적인 생각, 예배를 올리는 일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집착이며, 호사(好事), 악사(惡事)라는 좋고 나쁜 상대적인 차별에 떨어진 분별심의 행위는 중생심의 업장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일만 못한 것이다. 그러한 일은 오히려 없었던 것이 좋다고 하는 말로, 중생심으로 지은 업장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청정하게 하여 자취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법문이다. 좋고 나쁜 분별심을 일시에 초월하고 본래 무사한 무심의 경지에서 사는 것이 자기 법신광명을 나투는 것이라고 설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본래 구족한 지혜의 비춤이 홀로 빛난다." 사람들은 각자 불심의 지혜광명을 구족하여 운문이 말하는 부엌과 삼문은 물론 절대적인 경지에서 스스로 삼라만상과 천지 만물을 모두 다 비춘다. "그대 위해 한 가닥 방편의 길을 열어 놓았다." 운문화상은 이러한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는 맹인들을 위해서 부엌과 삼문이라는 하나의 길을 열어서 광명을 보도록 하였다. "꽃잎은 시들고 나무는 그늘도 없다."

예쁜 꽃잎도 떨어져 버리고 푸른 나뭇잎도 흩어져 옛 영화의 자취가 완전히 없어지고 한가히 본분으로 되돌아갔다. 그래서 광명이 없어지고 어둠이 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광명이나 어둠의 상대적인 차별과 미혹함과 깨달음의 그림자도 없어져 일체를 초월하고 텅 비워버린 본분대도(本分大道)의 입장이다. 좋은 일도 없었던 것만 못하다고 한 것처럼, 본분의 무심한 경지에서 자기 광명이 홀로 빛나게 된다. 명암의 차별심을 비우고, 무심의 경지에서 누구나 광명을 볼 수 있는데, 어찌 '보면서 그 누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가.' '봄(見)'과 '보지 않음(不見)'의 차별심에 떨어지면 봐도 보이지 않는다. 본래면목의 광명은 명암과 見과 不見의 차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홀로 빛나는 것이다. 마치 '거꾸로 소를 타고 불전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일체 차별경계(중생심)를 초월한 절대의 세계(불심)에서 무애자재한 삶이 자기 광명이다.



[第087則]藥病相治
〈垂示〉垂示云。明眼漢沒窠臼。有時孤峰頂上草漫漫。有時鬧市裏頭赤灑灑。忽若忿怒那吒。現三頭六臂。忽若日面月面。放普攝慈光。於一塵現一切身。爲隨類人。和泥合水。忽若撥著向上竅。佛眼也覰不著。設使千聖出頭來。也須倒退三千里。還有同得同證者麽。試擧看。
〈本則〉擧。雲門示衆云。藥病相治。盡大地是藥。那箇是自己。
〈頌〉盡大地是藥。古今何太錯。閉門不造車。通途自寥廓。錯錯。鼻孔遼天亦穿卻。

벽암록 87칙 운문화상의 병(病)과 약(藥)

병 주고 약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본래 자기'


{벽암록} 제87칙은 운문화상이 대중들에게 무엇이 자기인가 문제를 제시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설했다.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한다. 온 대지가 약이다. 무엇이 자기인가?"

擧. 雲門示衆云, 藥病相治. 盡大地是藥. 那箇是自己.


번뇌 망념은 병(病), 불법 지혜는 약(藥)
분별의식 비워야 완치판정 받아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권중에 보이는 짧은 법문이지만, 최상의 선기를 설한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안목있는 훌륭한 의사의 올바른 진단과 처방은 환자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하여 병을 치료한다는 비유로 많이 설하고 있다. {불유교경}에 "나는 훌륭한 의사(良醫)와 같이 환자의 병을 잘 파악하고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은 중생들의 번뇌 망념의 심병(心病)을 지혜로 진단하고 법문을 설하여 불법의 진실을 깨닫도록 묘약을 제시하여 치료한다고 설한다.

사실 일체의 경전과 팔만사천 법문은 중생의 번뇌병을 치료한 지혜의 묘약인 것이다. {유마경} 불국품에는 "부처님은 대의왕이 되어 훌륭하게 중생들의 많은 병을 치료하시는데, 중생들의 병에 알맞은 약을 주어(應病與藥) 복용하도록 치료하여 무량한 공덕을 모두가 성취하도록 하신다"고 의사로 비유하고 있다. 또한 {법구비유경}에 호시(好施)장자를 위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법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횡사하는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병에 무관심하여 치료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의사의 치료를 받아도 의약처방에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셋째는 모든 일을 자기중심 생각대로 멋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일월(日月)과 천지(天地), 군부선인(君父先人)도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없애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고통을 벗어나려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는 몸의 사대(四大)가 조화롭지 못하고 탈이 났을 대 솔직하게 의약을 복용해야 한다. 둘째는 악귀나 삿된 마구니(망념)에 시달릴 때는 경전의 가르침인 진리의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셋째는 위로는 훌륭한 성현을 받들어 모시고 아래로는 중생의 고난과 나쁜 재앙을 구제한다면 복은 일월 천신 지신에 감응하고, 덕은 일체 중생에 두루한다. 이렇게 진실의 지혜광명이 빛나게 될 때 일체 음참한 고뇌의 그림자는 남김없이 없어지고 안온하게 장수를 누릴 수가 있다." 약을 믿지 않고 천지자연의 신묘한 영험으로 치료하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장자의 마음을 바꾸어 몸을 치료받고 불법을 깨닫도록 한 이야기다.

또 {오왕경}에 "인신(人身)은 사대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대란 지수화풍(地水火風)인데, 어느 하나라도 조화롭지 못하면 101의 병이 생긴다. 사대가 함께 조화롭지 못하면 404의 병이 동시에 모두 생긴다"라고 설한다. 불교에서는 몸과 마음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보는 심신일여(身心一如)이기에 몸의 조화는 마음도 함께 하는 것이다. 번뇌 망념이 없이 마음의 안정과 평정이 심신(身心)을 건강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지수화풍 사대의 조화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사대가 조화롭지 못하면 병이 생기고, 사대가 흩어지면 죽음인 것이다.

운문화상의 설법은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한다(藥病相治)"는 중생의 번뇌 망념의 병은 불법의 지혜라는 묘약으로 치료하는 경전의 말씀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약이 필요 없다는 사고가 불법의 가르침이다. 임제의 설법에도 이와 똑같이 "산승의 설법은 모두 한때의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하는 것을 설한 것이지, 전혀 실다운 법이란 없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약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방편이며, 병은 또한 약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병과 약은 이러한 상대관계에서만 성립된다. {백장광록}에 "부처는 바로 중생쪽의 약이다. 병이 없다면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어진다"라고 설하고, 또 "대승의 가르침은 마치 감로와 같고, 독약과 같다. 완전히 소화하여 체득하면 감로와 같고, 녹여 소화하지 못하면 독약과 같다"라고 설한 것처럼, 약의 잔재는 부작용으로 또 다른 병을 만든다. 그래서 약과 병을 모두 함께 소멸하여 자취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운문의 법문은 중생의 번뇌 망념은 병이고, 망념을 자각한 불심을 약이라고 설한 것인데, {조당집} 6권 동산장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다. "어떤 스님이 '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동산은 '잠깐 일어나는 번뇌 망념이 병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일어난 번뇌 망념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선수행에서 번뇌 망념이 일어난 것이 병이고, 번뇌 망념이 일어난 사실을 자각하여 망념이 계속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약이라고 설한 대화이다. 그래서 약과 병이 서로 치료하고 약과 병이라는 의식의 자취도 완전히 없어진 경지가 약병상치이다.

{증도가}에 "번뇌 망상을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진실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네.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바로 불성(佛性)이다"라는 말이 있다. 없애려고 하는 마음도, 구하려고 하는 마음도 망념이다. 중생심과 불심은 둘이 아닌 불이(不二)며, 다르지 않은 불이(不異)인데, 하나를 없애고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집착을 향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불심과 중생심, 번뇌와 깨달음, 약과 병에 대한 두 가지 상대적인 의식을 모두 함께 동시에 텅 비워 일체의 자취나 흔적도 없어진 경지로서 약과 병이 서로 치료된 본래의 상태가 된 것이 약병상치이다.

운문은 "온 대지가 약이다." 즉 우주 만물일체가 모두 하나의 평등한 깨달음의 약이 되었다고 한 말이다. 제법의 참된 실상은 진실 그 자체이며 깨달음의 세계이다. 이 말은 마지막으로 운문은 "무엇이 자기(自己)인가?"라고 문제 제기를 위한 전제이다. 즉 이미 약과 병이 혼연 일체가 된 일합상(一合相)으로 불가득이라면 온 대지가 약이라고 한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말이다. 약이라고 해도, 병이라고 말해도 옳지 않다. 온 대지가 모두 약이라면 자기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운문은 이 한마디를 설하고 싶었던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지금 온 대지의 삼라만상과 자기까지도 모두 약이다. 이런 경우 무엇을 자기라고 하겠는가?"라고 문제제기하고, 그대가 그저 약인 줄만 안다면 알았다가 아무리 많은 세월을 수행해도 불법을 체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온 대지가 약과 하나가 되었다면 온 대지가 자기와 하나가 된 사실을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한 법문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온 대지가 약이다" 운문의 말을 인용한 것인데, 온 대지가 약이라면 온 대지가 자기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고금(古今)에 왜 이처럼 그르치고 있나.'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체득하는 사람이 적고, 운문의 이 말을 잘못 이해하여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문닫고 수레를 만들지 말라' 이 말은 문을 닫고 수레를 만들어도 문밖에 나가면 길에 딱 맞다(閉門造車 出門合轍)는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선에서는 안과 밖이 멋지게 합치된 경지를 읊고 있다. 여기서는 자기 본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운문이 제시한 자기를 문제로 삼을 필요도 없다.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 진실한 자기이기 때문에 좌선수행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도로는 본래부터 드넓게 뚫려 있다.' 본래의 자기 수레를 확 뚫려 어떤 장애도 없는 큰 도로에서 앞으로, 뒤로 자유롭게 운전하여 달리기만 하면 된다. 범성, 미오의 분별심의 자취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종횡무진 달리기만 하면 된다. '틀렸다! 틀렸다!' 운문화상이 '온 대지가 약'이라고 한 말도 틀렸고, '무엇이 자기인가'라는 한 말도 틀렸다고 설두는 고함쳤다. '콧대를 하늘 높이 세웠지만, 콧대가 꺾였다.' 운문화상이 '온 대지가 약이고, 무엇이 자기인가'라고 주장한 것은 본래면목을 전부 들어낸 전제로서 콧대를 높이 세운 운문의 뛰어난 안목으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경지였다. 설두는 틀렸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운문의 콧대를 꺾어버렸다.



[第088則]玄沙三病
〈垂示〉垂示云。門庭施設。且恁麽。破二作三。入理深談。也須是七穿八穴。當機敲點。擊碎金鎖玄關。據令而行。直得掃蹤滅跡。且道[言+肴]訛在什麽處。具頂門眼者。請試擧看。
〈本則〉擧。玄沙示衆云。諸方老宿。盡道接物利生。忽遇三種病人來。作麽生接。患盲者。拈鎚豎拂。他又不見。患聾者。語言三昧。他又不聞。患啞者敎伊說。又說不得。且作麽生接。若接此人不得。佛法無靈驗。僧請益雲門。雲門云。汝禮拜著。僧禮拜起。雲門以拄杖挃。僧退後。門云。汝不是患盲。復喚近前來。僧近前。門云。汝不是患聾。門乃云。還會麽。僧云。不會。門云。汝不是患啞。僧於此有省。
〈頌〉盲聾瘖啞。杳絶機宜。天上天下。堪笑堪悲。離婁不辨正色。師曠豈識玄絲。爭如獨坐虛窗下。葉落花開自有時。復云。還會也無。無孔鐵鎚。

벽암록 제88칙 현사화상의 세 가지 병

"보고듣고 말한다고 다 같은 경계가 아니다"


{벽암록} 제88칙은 현사사비(師備)화상이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 세 가지 병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설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했다.

현사화상이 대중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제방 총림의 노스님들이 여러 중생들을 제접하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법문을 한다고 하지만,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눈먼 봉사에게 망치방망이를 들고, 불자를 들어 보여도 그는 볼 수 없다. 귀머거리는 일체의 언어로 설법해도 들을 수가 없다. 벙어리는 말을 하도록 시켜도 말을 하지 못한다. 세 가지 병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제접해야 할까? 만약 이를 제접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이 공안을 제시하고 법문을 청하자, 운문선사는 "그대는 절을 하라!"라고 했다. 스님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운문선사는 그를 주장자로 밀쳐버렸다. 스님이 뒷걸음치자, 운문선사가 말했다. "그대는 눈이 멀지는 않았군!" 다시 그를 불러 가까이 오라하여 스님이 다가오자, 운문선사가 말했다. "귀머거리는 아니군!" 운문선사가 "알았는가?"라고 했다. 스님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대는 벙어리는 아니군!"이라고 말하자 그 스님은 이 말에 깨달았다.

擧. 玄沙示衆云, 諸方老宿, 盡道接物利生. 忽遇三種病人來, 作生接. 患盲者, 拈鎚拂, 他又不見. 患聾者, 語言三昧, 他又不聞. 患啞者敎伊說, 又說不得. 且作生接, 若接此人不得, 佛法無靈驗. 僧請益雲門. 門云, 汝禮拜著. 僧禮拜起. 雲門以杖, 僧退後, 門云, 汝不是患盲. 復喚近前來, 僧近前. 門云, 汝不是患聾. 門乃云, 還會. 僧云, 不會. 門云, 汝不是患啞. 僧於此有省.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에서 인용한 것인데, 현사의 법문은 {현사광록} 중권, {전등록} 18권 현사전에 수록하고 있다. 현사사비 화상은 복주 현사산에서 교화를 펼친 종일(宗一, 835~908)선사인데, 운문선사와 마찬가지로 설봉의존의 선법을 계승한 뛰어난 선승이다.

현사화상이 대중들에게 "전국의 총림에서 훌륭한 선지식이 많은 수행자들을 제접하고 중생들을 깨닫도록 법문을 한다고 하지만, 갑자기 귀머거리, 봉사, 벙어리가 찾아왔을 때는 어떻게 지도해야 할까? 만약 봉사에게 망치방망이(槌砧)를 들거나, 불자(拂子)와 같은 도구를 들어 보여도 그는 볼 수 없다. 또한 귀머거리는 어떠한 말로 설법해도 들을 수가 없다. 벙어리는 말을 하도록 시켜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병을 가진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가르쳐야 할까? 만약 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불법은 영험이 없는 것이다"라고 학인들에게 참구할 문제를 제시한 법문이다.

이 공안에 대하여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코멘트하고 있다. [현사화상이 제시한 3종 병인(病人)을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유마경}에 "눈으로 사물(色)을 보아도 봉사와 같으며, 귀로 소리를 들어도 귀머거리와 같다"고 했다. 또한 장사선사는 "눈으로 사물(色)을 보지 못하고, 귀로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문수보살은 항상 눈으로 보고, 관음보살은 귀를 틀어막는다" 고 하였다. 여기에 이르러 눈으로 보아도 봉사와 같으며, 귀로 들어도 귀머거리와 같아야 현사화상의 의도와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중생심으로 소리를 듣고 사물을 보면 좋고 나쁜 감정이 일어나지만, 불심으로 무심의 경지에서는 일체의 감정과 차별심이 일어나지 않고, 산에 울리는 메아리와 같이 들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들어도 취사선택하는 분별과 애증(愛憎)의 차별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경지를 봉사와 같고 벙어리와 같다고 한다. 말하자면 현사화상은 당시 안목없는 엉터리 선승들이 다른 선사들의 기발한 언행을 흉내내고 불법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눈먼 환자(患盲者)로, 다른 선사들의 좋은 법문을 흉내내는 귀머거리 환자(患聾者)로, 독자적인 방편의 지혜가 없어 불법을 설하지 못하는 벙어리 환자(患啞者)로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사의 3종 병에 대한 법문은 오해하기 쉽고, 파악하기 어려운 공안으로 많은 선승들이 참구하고 있다. {조당집}과 선승들의 법문에 자주 제기하여 학인들에게 참구하도록 하고 있는데, 본칙은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이 공안을 제시하고 법문을 청한 내용이다.

운문선사는 "그대는 이 공안의 핵심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절을 하라!"라고 말하자, 스님은 시키는 대로 공손히 절을 하였다. 원오는 착어에 "바람이 부는 대로 풀이 쏠린다. 쯧쯧()"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남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한심한 녀석이라고 질타했다. 그 스님이 절을 하고 일어나자, 운문선사는 그를 주장자로 밀쳐버렸다. 주장자는 본분을 대신한 도구인데, 이 스님은 자기의 본분을 망각한 것을 운문이 질타한 것이다. 스님은 운문선사가 주장자로 밀자 주장자를 보고 뒷걸음쳤다.

운문선사는 이러한 스님의 행동을 보고서 말했다. "그대는 주장자를 보고 몸을 피하는 것을 보니 눈먼 녀석은 아니군!" 운문선사는 다시 그 스님을 불러 가까이 오라하니, 스님은 안심하고 다가왔다. 그러자 운문선사가 말했다. "그대를 부르면 대답하는 그대의 본래인은 귀머거리가 아니군!" 운문선사가 그 스님에게 그대의 본래주인공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는가?'라고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 한마디의 확인으로 운문선사는 "그대의 본래인은 역시 벙어리도 아니군!" 이라고 말했다.

그 스님은 운문선사의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이 스님뿐만 아니라 이 공안을 읽는 사람은 운문선사의 지시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대화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지혜작용을 펼치는 주인공이 본래면목이며, 일체의 병이 없는 약을 제시한 법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현사화상이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삼종병을 제시한 것은 '상황에 맞는 대응(機宜)이 완전히 끊어졌다.'

근원적인 본래면목의 경지로서 부모미생 이전의 소식으로 일체의 사량분별과 언어 문자의 방편을 초월한 입장이다. '천상천하' 널리 세간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눈이 멀고 귀가 먹고, 입이 벙어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소로운 일이고', 눈이 있으나 보질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듣지 못하고, 입이 있으나 말하지 못하면 '불쌍한 것이다.' '이루(離婁)도 본래의 색깔(色)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이루는 {장자} 천지편에 나오는 이주(離朱)로 태고 황제 때의 사람인데, 백보 밖에서도 터럭 끝을 보는 시력을 가졌다. 이루와 같이 아무리 강력한 육안을 가졌다고 해도 불법의 바른 색깔(본지풍광)을 볼 수 있겠는가? 불법은 원래 색깔을 여의고 형상을 초월했기 때문에 본래 볼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사광(師曠)인들 어떻게 현묘한 음률(玄絲)을 알 수 있으랴.'

사광은 진(晋)의 평공(平公) 때 사람으로 음악의 대가인데, 음률을 잘 듣는 귀가 발달하여 산 너머 개미 싸우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불법의 유현하고 미묘한 묘음(妙音)을 들을 수가 있겠는가? 이루와 사광과 같은 시력, 청력이 특출한 사람이라도 불법의 궁극적인 진리는 알 수 없으며, 참된 소경과 귀머거리가 된 무심의 경지가 아니면 정법의 색깔과 미묘한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고 한 말이다.

'툭 트인 창 아래 홀로 앉아 시절 따라 낙엽지고 꽃피는 것만 같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하기보다, 텅 빈 창 아래서 앉아 무엇을 보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사계절의 질서 있는 변화와 법신의 여여한 모습을 보여주고 설법을 끊임없이 해 줄 것이다. '다시 말하노니, 알겠는가.' 설두는 독자들에게 "이 공안의 참된 의미를 그대는 체득했는가" 확인하고 있다. 그리고 "구멍 없는 철추로다"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구멍이 없기에 손을 쓸 수가 없는 쇳덩어리처럼, 현사의 3종병 공안도 사량분별로서는 접근할 수가 없다. 무심의 경지에서 체득해야 한다.



[第089則]通身手眼
〈垂示〉垂示云。通身是眼見不到。通身是耳聞不及。通身是口說不著。通身是心鑒不出。通身卽且止。忽若無眼作麽生見。無耳作麽生聞。無口作麽生說。無心作麽生鑒。若向箇裏撥轉得一線道。便與古佛同參。參則且止。且道參箇什麽人。
〈本則〉擧。雲巖問道吾。大悲菩薩。用許多手眼作什麽。吾云。如人夜半背手摸枕子。巖云。我會也。吾云。汝作麽生會。巖云。遍身是手眼。吾云。道卽太殺道。只道得八成。巖云。師兄作麽生。吾云。通身是手眼。
〈頌〉遍身是。通身是。拈來猶較十萬里。展翅鵬騰六合雲。搏風鼓蕩四溟水。是何埃壒兮忽生。那箇毫釐兮未止。君不見。網珠垂範影重重。棒頭手眼從何起。咄。

벽암록 제89칙/관음보살의 천수천안

“몸뚱아리 중 소중하지 않은 것 있더냐”


{벽암록} 제89칙은 운암화상과 도오화상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운암화상이 도오화상에게 물었다. "대비보살이 수많은 손과 눈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요?" 도오화상이 말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 운암이 말했다. "나는 알았소." 도오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것인가?" 운암이 말했다. "전신(遍身)이 손이요 눈입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을 잘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 운암이 말했다. "사형은 어떻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

擧. 雲巖問道吾, 大悲菩薩, 用許多手眼作什. 吾云, 如人夜半背手摸枕子. 巖云, 我會也. 吾云, 汝作生會. 巖云, 遍身是手眼. 吾云, 道卽太殺道, 只道得八成. 巖云, 師兄作生. 吾云, 通身是手眼.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5권 도오장과, {전등록} 14권 운암장에 전하고 있는데, 질문자가 운암이 아니라 도오화상이다. 도오원지(道悟圓智:769~835)는 이미 {벽암록} 55칙에,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70칙에 등장한 선승인데, 모두 약산유엄선사의 제자이다. 원오는 '평창'에 "운암은 도오와 함께 약산선사를 참문하고 40년 동안 눕지 않고 정진하였다.

약산선사는 조동종(曹洞宗)이라는 한 종파를 출현하게 했는데, 거기에 3인이 있어 법도가 성행했다. 운암선사 문하에 동산양개(洞山良价), 도오선사 문하에 석상경제(石霜慶諸), 선자덕성(船子德誠)선사 문하에 협산선회(夾山善會)가 배출되었으니 바로 그들이다"라고 언급한 것처럼, 도오와 운암은 약산문하를 대표하는 뛰어난 선승들이다.

원오는 또 "대비 관세음보살은 8만 4천 모타라비(母陀羅臂:印相:mudra)가 있고 수많은 손과 눈이 있다. 그대에게도 있느냐? 백장선사는 '일체의 언어 문자는 모두 돌이켜 자기에게로 귀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하면서 공안의 사유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천수경}에서 대비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자비 손과 천개의 지혜 눈으로 다양한 중생들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서 수많은 지혜작용을 제시하고 있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미묘한 지혜작용을 단순히 경전에서 설한 말씀이라고 객관적인 대상으로 이해해서 안 된다. 백장선사가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이 관음보살이 되고 천수천안 지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임제록}에도 '대비보살의 천수안(千手眼) 가운데 어떤 것이 정안(正眼)인가?'라는 질문으로 선문답을 나누고 있는 것처럼, 선승들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었다.

본 공안도 운암화상이 도오선사의 안목을 점검하는 문제로 "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고 있다는데, 그렇게 많은 손과 눈으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즉 도오선사여! 그대는 관음보살의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작용을 체득했는가? 체득했다면 천수천안의 미묘한 지혜를 어떻게 체득하여 활용하는지 말해보라고 도오선사의 경지를 시험해보기 위한 낚시 바늘이다.

원오는 운암의 질문에 "그대는 평소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면서 무엇을 하였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그대는 일상생활의 행주좌와 모든 행동이 그대로 천수천안의 지혜작용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대비보살이 달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이라고 지적한 말이다.

운암의 질문에 도오선사는 "마치 어떤 사람이 밤중에 손으로 목침을 더듬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즉 잠자리에 몸부림 많이 치는 사람이 잠시 잠에서 깨어나 목침이 없어졌음을 알고, 깜깜한 밤중에 손을 더듬어서 목침을 찾아 처음 잠잘 때처럼, 다시 목침을 베고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과 같다고 대답한 것이다. 손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이다. 운암이 "나는 알았소."라고 말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대로군요. 도오선사가 "그대는 어떻게 알았다는 말인가?"라고 다그치며 물었다.

운암은 "신체 중(身)에 손이 있고 눈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불법 사상과 맞지 않고, 지혜작용이 없는 말이며, 진흙 속에서 흙덩이를 씻는다."라고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도오선사는 "이치로는 그럴듯하게 말했지만, 10에서 단지 8할 정도 맞는 말이다."라고 비평했다. 운암이 "사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즉 자신의 견해에 대해 도오선사는 8할 정도 인정하였기에, 10점 만점의 안목은 어떤 경지인가라고 질문한 것이다. 도오선사는 "온몸 전체가 바로 손이고 눈이다(通身是手眼)"이라고 대답했다.

운암이 '편신(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8점이고, 도오가 '통신(通身)'이라고 대답한 것은 10점 만점이다. 편신(身)은 눈과 손의 움직임과 같이 몸의 일부가 작용하는 것을 말하고, 통신(通身)은 온몸 전체가 눈이 되고 손이 되는 것처럼, 하나가 되어 작용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굳이 다른 점을 논해 본다면 편신(身)은 평면적, 외연적이라면, 통신(通身)은 입체적 내포적이라고 할까?

그러나 {조당집} 5권 도오전에는 신산(神山)이 "혼신(渾身)이 바로 눈"이라 대답하고 있다. 또 10권 경청장에는 "어떻게 처처에서 그를 상봉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경청은 "온 몸(遍身)이 눈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통신(通身), 편신(身), 혼신(渾身), 편신(遍身)은 같은 의미라고 봐야 한다.

{벽암록} 18칙과 '수시'에 "온 몸이 바로 눈"이라고 말한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손이 되고 눈이 된 경지에서 지금 여기 자신의 지혜로운 일을 하는 것이다. 손뿐만 아니라 다리나 머리도 눈이 되는 것처럼, 온 몸 전체가 원통하고 무애자재한 지혜를 펼치는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의 묘용이다. 손이 1000개, 눈이 1000개라 할지라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마음이 쏠리고 머무르면 999개의 손과 눈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마음을 어느 하나의 손과 눈에 머무르지 않는 무주(無住), 무심의 경지에서 1000개의 손과 눈이 자유자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백족(百足, 지네)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무심의 경지에서 온몸을 자유롭게 움직여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할 때 편안하고 지혜로운 삶이 되는데, 괜히 번뇌 망념을 일으켜 중생심으로 분별 의식을 일으키면 불심의 지혜로운 생활이 죽어버린다.(死人)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전신(身)이 옳은가. 온몸(通身)이 옳은가?" 본칙의 공안에서 운암의 대답이 옳은가, 도오의 대답이 옳은가?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 분별하면 10만 리나 멀어진다." 그러나 설두는 편신(身)이나 통신(通身)은 같은 말로 그러한 언어문자를 시비로 삼으면 천수천안 관음보살의 지혜와는 멀어진다. "나래치는 붕새는 천지 사방(六合)의 구름위에 날고," 운암의 지혜작용을 {장자}의 붕새에 비유하여, 한번의 날개짓에 천지를 뒤덮는 것과 같았다.

"회오리 바람은 깊은 바다(四溟水)를 들끓게 하네." 도오의 견해는 사해(四海)의 바닷물을 일시에 동요시키는 큰 역량을 갖춘 안목이다. 두 사람 견해의 우열은 논한다는 것은 어렵다. "웬일로 먼지가 갑자기 생기는가?" 운암의 지혜가 대붕과 같이 웅대하지만, 관음보살의 천수천안 활약에 비교하면 한 점의 티끌이 공중에 날리는 것과 같다. "무슨 일로 가는 털은 어찌 멈추지 않는가?" 또한 도오의 지혜도 훌륭하지만, 관음 대비의 광대무변한 원력에 비교하면 미세한 터럭이 불과하다. 전신이니 온몸이라는 차별심으로 대비관음의 천수천안을 친견할 수가 없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제석천의 구슬로 법을 드리우니 겹겹이 그림자 쌓이는 것을."

{화엄경}에 도리천에 구슬로 엮은 주련이 있는데, 구슬 하나하나에 수천 수만의 구슬이 서로서로 비추어 전부 하나의 구슬 가운데 비춘다는 중중 무진의 법계를 비유하고 있다. 온 시방세계가 하나의 구슬이며, 천수천안의 무애자재한 경지이다. "주장자 끝의 손과 눈이 어디에서 일어날까?" 대비보살의 천수천안 지혜는 덕산이 주장자를 휘두르는 것과 같고, 임제가 고함치는 것 같이 일체의 모든 도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며, 밤중에 목침을 찾아 편히 잠자는 것이다. "쯧쯧()." 말이 많았군!



[第090則]蚌含明月
〈垂示〉垂示云。聲前一句千聖不傳。面前一絲長時無間。淨裸裸赤灑灑。頭髼鬆耳卓朔。且道作麽生。試擧看。
〈本則〉擧。僧問智門。如何是般若體。門云。蚌含明月。僧云。如何是般若用。門云。免子懷胎。
〈頌〉一片虛凝絶謂情。人天從此見空生。蚌含玄免深深意。曾與禪家作戰爭。

벽암록 제90칙 지문(智門)화상과 반야지혜의 본체

반야지혜의 무분별지 體.用으로 잰들…


{벽암록} 제90칙은 지문화상에게 반야지혜의 본체와 작용에 대한 질문을 하며, 다음과 같이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반야지혜의 본체입니까?"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대합조개가 밝은 달을 삼킨다." 스님은 질문했다. "무엇이 반야지혜의 작용입니까?" 지문화상이 대답했다. "토끼가 새끼를 잉태했다."

擧. 僧問智門, 如何是般若體. 門云, 蚌含明月. 僧云, 如何是般若用. 門云, 兎子懷胎.


본체는 작용을 떠나지 않고
작용은 본체를 여의지 않아

본칙의 공안은 {고존숙어록} 제39권에 수록된 {지문광조선사어록}에 전하고 있는 선문답인데, {벽암록} 제21칙 본칙의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다. 지문광조(智門光祚)화상은 운문문언선사의 제자로서 그의 전기는 {광등록} 22권, {속등록} 2권, {연등회용} 27권 등에 전하고 있는데, 사천성 향림원 징원(澄遠)선사를 참문해 법을 잇고 뒤에 호북성 수주 지문사에서 선법을 펼쳤다. 그의 문하에 설두중현 등 30여명의 훌륭한 선지식이 배출됐다.

본칙의 선문답은 반야 지혜의 본체(體)와 작용(用)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반야란 일체의 사량분별이 없는 불심의 지혜이다. 반야(prjna)는 여성명사로 생산능력이 있는 말인데, {유마경}에 "반야바라밀(智度)은 보살의 어머니(母)이며, 방편을 아버지(父)로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불법을 깨달은 지혜의 완성을 어머니로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으로 부처의 성도(成道)가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야지혜의 보살인 문수를 제불을 출현시키는 어머니라고 한다.

{대지도론} 18권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이 초발심에서 일체의 지혜를 구하며 일체 만법의 참된 모습(諸法實相)을 깨달아 아는 지혜라고 설하며, 또 반야는 일체의 모든 지혜 가운데 제일이고 한다. 대승불교는 공(空)과 반야를 같이 주장하고 있는데, 반야의 지혜는 일체의 번뇌 망념을 텅 비우는 空(sunya)의 실천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생심 번뇌 망심을 텅 비워진 그대로가 불심으로 반야의 지혜가 일체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여법(tatha)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승의장} 10권 등에 반야는 실상(實相), 관조(觀照), 문자(文字)반야의 세 가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실상은 반야의 본체(體)로서 견고해 파괴할 수가 없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심인 것이다. 관조의 작용은 지극히 예리한 것으로 일체의 번뇌 망념을 타파하는 불심의 지혜광명이다. 문자반야는 이러한 반야지혜의 이치를 언어 문자로 표현하여 만고에 전하고 사람들이 반야지혜를 체득하도록 하는 경전이다. 반야지혜의 한마디와 짧은 문장을 설하여 세간의 등불이 되고 무명을 제거하여 해탈인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문자반야라고 한다. 실상반야는 마음의 본체로서 밝은 거울과 같음을 본체로 하고,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무심하게 비추는 작용을 관조반야라고 하며, 그러한 사실을 언어문자로 표현한 것을 문자반야라고 한다.

여기서는 반야지혜의 본체와 작용을 문제로 제시하고 있는데, 반야사상의 체(體)와 용(用), 화엄사상의 이(理)와 사(事), 유식사상의 성(性)과 상(相)의 논리는 중국불교의 각 종파의 철학체계를 확립한 핵심적인 사상이었고, 논리가 빈약한 중국인들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선사상은 반야의 체용(體用), 화엄법계의 이사(理事), 불성과 유식의 성상(性相)의 논리를 불심의 지혜와 작용으로 소화시켜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대화나 지혜로 활용하고 있다. {종경록} 45권에는 "선정은 자심(自心)의 본체요, 지혜는 자심의 작용이다. 선정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본체는 작용을 떠나지 않고, 지혜가 곧 선정이기 때문에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는다. 지혜와 선정 이 둘이 서로서로를 차단하면 함께 없어지고, 이 둘이 서로 서로를 비추면 함께 존재한다. 본체와 작용이 서로 서로 성립되면 차단함과 비춤에 걸림없이 무애하리라. 이러한 선정과 지혜 두 법이 참선수행의 요체이며 조불(祖佛)의 큰 뜻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지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반야지혜의 본체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지문화상은 "대합조개가 밝은 달(明月)을 삼킨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평창'에 "이 말은 한강에서 생산되는 조개 속에 맑은 진주가 있는데, 중추절이 되면 수면으로 떠올라 입을 벌리고 달빛을 빨아들여 교감(交感)되어 진주가 생긴다고 한다. 합포주(合浦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중추절에 달이 뜨면 진주가 많이 나오고 달이 뜨지 않으면 진주가 적게 나온다고 한다"고 했다. 강주 합포(合浦)라는 곳의 대합조개(蚌蛤)는 진주를 안고 있는데, 8월15일 밤에 조개가 명월(明月)의 정기를 받아서 진주가 된 것이라는 전설이 {조정사원} 8권과 {본초강목(本草綱目)} 등에도 전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설을 토대로 지문화상은 진주가 명월을 삼키고 있다고 대답했다. 반야의 본체에 대한 질문에 명월(明月)과 조개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명월이 창공에서 무심하게 비추고, 조개도 무심하게 명월을 머금고 있는 모습을 말한다.

스님은 다시 "무엇이 반야지혜의 작용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지문화상은 "토끼가 새끼를 잉태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평창'에 "토끼는 음(陰)에 속한 동물이다. 중추절에 달이 뜨면 입을 벌려 달빛을 삼키고 바로 새끼를 잉태하여 입으로 낳는다하니 이 또한 달이 뜨면 새끼가 많고, 없으면 적게 낳는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토끼 역시 8월 15일 밤에 달을 향해 입을 열고 달의 정기를 받아 새끼를 잉태한다는 전설을 토대로 대답한 것이다. 질문자는 반야를 본체와 작용으로 나누고 있지만, 지문화상은 체용(體用) 일체의 입장에서 대답한 것이다. 8월15일 강물 속의 조개가 밝은 달이 무심하게 비추는 달빛을 삼키어 진주를 만들고, 토끼는 새끼를 잉태하였다는 속설로 대답했는데, 밝은 달의 광명이 무심하게 만물을 비추는 모습을 말한다. 즉 반야 무분별지가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하여 역력하고도 분명하게 나타나 작용하고 있는 모습을 비교해서 대답했다. 마치 밝은 거울이 무심하게 일체의 만물을 차별심과 분별심도 없이 무심하게 비추는 것과 같이 청정한 불심이 반야의 본체이고, 무심하게 지혜를 비추는 것을 반야의 작용이기 때문에 체와 용이 둘로 나눌 수가 없고 하나가 된 경지이다. {조당집} 15권에 반산선사는 이러한 경지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마음 달 홀로 원명하니, 그 빛이 만상을 삼킨다. 빛은 경계를 비추지 않고, 경계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빛과 경계 함께 잊으니 도대체 이것은 어떤 물건인가?"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한 덩어리 맑고 투명한 것(달)은 언어와 정식(情識)이 붙을 수가 없다" 반야의 체와 용을 모두 다 송출했다. 허(虛)는 허령불매(虛靈不昧)로 인간 본심(불심)의 신령스러운 지혜의 광명이 무애자재한 것이고, 응(凝)은 응적(凝寂)의 의미로 본심의 영광(靈光, 지혜작용)이 항상하여 변함이 없으면서도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읊은 것이다. 즉 중생의 사량 분별심과 정식이 일체 끊어진 불심은 반야의 본체로서 부동이며, 지혜의 광명은 신령스럽게 시방삼세를 두루 비추고 있다. "인간과 천신이 이로부터 수보리(空生)를 본다"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가 좌선하고 있는데, 범천이 꽃비를 내린 이야기이다. 수보리가 반야에 대하여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지만, 반야의 체와 용을 설했다고 찬탄한 사실을 파악한다면 지문화상이 대답한 말의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

지문화상이 "조개는 달빛을 삼키고, 토끼는 새끼를 잉태했다고 대답한 깊고 깊은 뜻" 지문화상의 대답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조개가 달(토끼)을 삼켰다고 한 것은 조개와 토끼로 반야의 체와 용이 둘이 아닌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멋지게 비유하여 대답한 것이다. "일찍이 선승들은 한바탕 법전을 펼쳤다" 지문화상의 의미 있는 대답은 선가의 수행자들이 서로 서로 법전을 하면서 참구하였지만, 지문화상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안목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3 

 

벽암록(8) 71칙 ~ 80칙

벽암록 71칙 백장화상이 오봉의 안목을 점검하다 “깨달음의 세계엔 언어문자 초월해야” {벽암록} 제71칙은 백장화상이 오봉(五峰)에게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말해보라고 한다. 백장화상이 다

kr.buddhism.org

[第071則]斫額望汝
〈本則〉擧。百丈復問五峰。倂卻咽喉唇吻。作麽生道。峰云。和尙也須倂卻。丈云。無人處斫額望汝。
〈頌〉和尙也倂卻。龍蛇陣上看謀略。令人長憶李將軍。萬里天邊飛一鶚。

벽암록 71칙 백장화상이 오봉의 안목을 점검하다

“깨달음의 세계엔 언어문자 초월해야”


{벽암록} 제71칙은 백장화상이 오봉(五峰)에게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말해보라고 한다.

백장화상이 다시 오봉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술을 막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오봉스님이 말했다. '화상도 역시 목구멍과 입을 닫도록 하세요!' 백장화상이 말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마에 손을 대고 그대를 바라보겠노라.'

擧. 百丈, 復問五峰, 倂咽喉唇吻, 作生道. 峰云, 和尙也須倂. 丈云, 無人處斫額望汝.


안목갖춘 선승은 말이 필요없어
화상 물음에 한마디로 기선 제압


본칙의 공안도 {벽암록} 제70칙과 똑같이 {전등록} 제6권 백장전에 전하고 있는데, 본칙에서는 백장화상이 제자인 오봉상관(常觀)스님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오봉스님 대한 자료는 {전등록} 제9권과 {연등회요} 제7권 균주 오봉산 상관선사전에 몇 편의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와 생몰년대는 전혀알 수가 없다. {전등록}에 어떤 사람이 오봉스님에게 '어떤 것이 오봉의 경지입니까?'라고 질문하니, 오봉스님은 '험준하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어떤 것이 그 경계안의 사람입니까?'라고 질문하니, '막혔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오봉화상의 깨달음의 경지를 일체의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산이 험준하여 접근 할 수 없다는 표현으로 하고 있다. 깨달음의 경계에 사는 사람은 깨달음의 경계에 갇힌 사람이다.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해야 자유자재한 지혜작용을 무애자재하게 펼칠 수가 있는 것이다.

백장화상이 위산과 오봉, 운암에게 던진 문제는 똑같다. {벽암록} 70칙에서는 위산이 독자적인 안목으로 대답했다. 본칙에서는 백장화상이 제자인 오봉에게 '목구멍과 입술을 막고 어떻게 말하겠는가?'라고 똑같은 문제를 제시하여 오봉의 견해와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원오는 "하하하!"라고 크게 웃고, "화살이 신라로 날아갔다"고 착어했다. '이미 앞에서 그와 똑같은 문제를 위산에게 하지 않았는가? 위산의 대답으로 충분한데, 화살이 멀리 신라로 날아간 뒤에 또다시 지나간 문제를 언급해서 무엇하는가?'라고 야유를 보낸 말이다.

백장화상의 물음에 오봉스님은 '화상도 역시 목구멍과 입을 막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즉 그러시면 묻고 있는 화상의 입도 닫고 혀도 움직이지 말아야 합니다. 좀 심한 말로 표현한다면 화상 자신부터 입 닫고 말씀하지 마세요! 라는 역습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화상 본인이 먼저 입을 닫고 말하지 말라는 의미인데 공격해 온 상대를 강하게 역공(逆攻)한 말이다. 선문에는 이와 같은 역공의 지혜를 전하는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면, {무문관} 제5칙에 향엄화상이 학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입으로 나무 가지를 물고, 손은 나무 가지를 붙잡지 않고, 발도 나무를 밟지 않고 매달려 있을 때에 나무 아래서 어떤 사람이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동쪽 중국에 온 의도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만약에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질문하는 사람의 뜻을 위배하는 것이 되고, 만약에 대답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나무에서 떨어져 죽고, 목숨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정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공안은 {조당집} 19권에 전하고 있는데, 그때 소(招)상좌가 향엄선사에게 '나무 위에 오른 일은 묻지 않겠습니다. 나무에 오르기 이전의 일은 어떻습니까?'라고 역공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선사는 허허! 하고 웃었다고 한다. 문제의 해결은 문제가 일어나기 이전인 본래로 되돌아가는 것이 근본적이고 유일한 해결 방법이다. 즉 번뇌 망념의 괴로운 병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잘못된 병을 치유하여 본래 건강한 상태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선의 깨달음이다.

또“어떤 사람이 선원의 어린 사미를 놀리기 위해 '이 찻잔의 차를 뚜껑을 열지 않고 그대로 마셔보게'라고 하자, 그 사미는 '찻잔의 뚜껑을 열지 않고 차를 마시겠습니다만, 차가 너무 뜨거우니 찬물을 섞어서 차를 약간 식혀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런가! 그럼 찬물을 좀 넣어 식혀주지!'하면서 찻잔의 뚜껑을 열려고 할 때 사미가 말했다. '아니 찻잔의 뚜껑을 열지 않고 찬물을 넣어 식혀 주신다면, 찻잔의 뚜껑을 열지 않고 차를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기지를 발휘하는 대화는 문제의 근본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대응 할 수 있는 것이다.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라고 한다면, 그렇게 지시하는 입을 움직이지 말고 지시하라고 역습하는 지혜를 원오는 "대장의 깃발과 북을 빼앗아 버렸다"고 착어하고 있다. 즉 '기세당당하게 북을 치고 공격해오는 백장화상의 장군 깃발과 북을 오봉스님이 탈취해서 기세를 꺾어버렸다'고 착어한 것이다. 또한 "한 마디 말로 많은 이야기를 차단해 버리니 모든 일이 잠잠하게 되었다"고 착어했다. 즉 오봉스님이 백장의 물음에 '화상도 입을 닫아야 합니다'라는 한 마디는 일체의 언어 문자의 갈등을 해결하여 차별심의 세계에서 절대 깨달음의 세계인 본래로 되돌려 적정의 상태가 되었다고 오봉을 높이 평가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오봉스님의 선기를 칭찬하고 있다. "위산스님은 자기의 영역을 굳건히 지켰고, 오봉스님은 많은 이야기를 싹뚝 끊어 버렸다. 이 본분사(일대사)의 일은 요컨대 이러한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야 그 자리에서 곧장 지혜작용을 드러낼 수가 있다. 마치 달리는 말 앞에서 승부를 겨누는 것처럼, 머뭇거림을 용납하지 않고, 대뜸 긴급하고 신속하고, 드높게 처리했다. 오봉의 지혜작용은 드넓으며 도도한 위산스님의 경지와는 다르다. 오봉스님이 백장화상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 자리에서 대뜸 (일체의 갈등을) 끊어버려 통쾌하고 준수하였다."

백장화상은 오봉스님의 한마디 대답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마에 손을 대고(斫額) 그대를 바라보겠노라.'라고 말했다. 작액(斫額)이란 말은 이마에 손을 대고 먼 곳을 쳐다보는 것을 말한다. 오봉의 한 마디가 너무나 멀고도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경지이기 때문에 손을 이마에 대고 무인(無人)의 경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다. 무인(無人)의 경계란 고위(孤危) 험준하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것인데, 백장은 오봉스님에게 그대가 말한 경지는 누가 접근 할 수 있겠는가? 그대 혼자 그러한 경지에 살 수 밖에 없기에 나도 멀리서 그대의 모습을 바라 볼 수밖에 없다고 평한 말이다. 깨달음의 뛰어난 안목은 인정하지만, 깨달음의 지혜를 차별세계에서 일체중생과 함께 나누는 자비가 부족하다고 평가한 말이다. 즉 백장은 오봉의 견해에 대하여 반은 인정하고 반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오도 "땅은 드넓은데 사람이 드무니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70칙의 게송과 똑같은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화상도 입을 닫으세요" 오봉의 대답을 제일구로 제시하여, 백장이 제시한 일체의 갈등(문제)을 차단했다. "용사진(龍蛇陳) 진법을 무찌르는 재주를 보았네." 오봉이 백장의 질문에 대응하는 자세를 읊은 것인데, 용사진은 {무비지(武備志)}와 {손자}에 언급한 것처럼, 어느 곳에서 공격해도 대응하는 지모(智謀)를 갖춘 용사의 진법이다. 오봉은 백장이 제기한 공격(문제)을 곧바로 지체없이 용사진으로 응전한 것이다.

원오는 대장군의 지모를 겸비하지 못하면 오봉과 같이 대답을 할 수 없다고 극찬하면서 "일곱 가지 무기(七事: 활, 화살, 칼, 검, 갑옷, 투구, 창)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장수"라고 착어했다. 유능한 선승이 구족해야 할 일곱 가지(七事)를 구족했다고 칭찬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광(李廣) 장군을 생각나게 하니" 오봉의 전략은 정확하게 적중한 것이 활쏘기의 명인 한나라의 장수인 이광이 백발백중 맞추는 것과 같았다. "만 리 하늘가에 독수리 한 마리 떨어졌다" 백장이 던진 문제는 멀고 먼 하늘에 독수리 한 마리를 날려보낸 것과 같은데, 이광(오봉)은 하나의 화살로 반드시 적중시켜 떨어뜨렸다.



[第072則]喪我兒孫
〈本則〉擧。百丈又問雲巖。倂卻咽喉唇吻。作麽生道。巖云。和尙有也未。丈云。喪我兒孫。
〈頌〉和尙有也未。金毛獅子不踞地。兩兩三三舊路行。大雄山下空彈指。

벽암록 72칙 백장화상이 운암(雲巖)의 안목을 점검하다

선기없는 멍청한 답변에 "법손 잃었다" 탄식

독자적인 안목 전혀 못드러낸 채
위산.오봉스님 답변 모방에 그쳐


{벽암록} 제72칙은 백장화상이 운암에게 목구멍과 입을 닫고 말해보라고 한다.

백장화상이 또다시 운암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운암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백장화상이 말했다. "나의 자손을 잃어버렸군!"

擧. 百丈, 又問雲巖, 倂咽喉唇吻, 作生道. 巖云, 和尙有也未. 丈云, 喪我兒孫.

{벽암록} 제70칙에서 72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6권 백장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백장화상은 마지막으로 운암스님에게 문제를 제시하여 운암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는 것이다.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은 백장의 문하에서 20년간 수행한 뒤 약산유엄선사의 법을 계승했다. 그의 전기는 {송고승전} 제11권, {조당집} 제5권, {전등록} 14권에 담주운암산 담성선전에 전하고 있다. 그의 문하에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가 배출되어 조동종을 개창하였다.

운암스님이 처음 백장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하였다는 말은 {전등록} 14권 운암장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운암스님은 종릉 건창사람이니 속성은 왕(王)씨다. 어려서 석문사에서 출가하여 처음 백장회해선사를 친견하고 수학하였으나, 불법의 현묘한 이치를 깨닫지 못한 채 20년 동안 시자로 백장화상을 모시다가 끝내 백장화상이 열반에 들고 말았다. 그래서 약산유엄선사를 찾아가 한마디 법문에 불법을 깨닫게 되었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운암스님은 백장화상의 문하에서 20년 동안 시자로 있었다. 그 뒤에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스님과 함께 약산에 이르자, 약산유엄(藥山惟嚴. 751~834)선사가 물었다. '백장선사 문하에서 무슨 일들을 했는가?' '투철하게 생사(生死)를 해탈하는 일을 했습니다.' '투철하게 벗어났는가?' '거기에는 생사가 없습니다.' '20년 동안 백장의 문하에서 수행하고도 아직 번뇌(習氣)를 없애지 못했구나' 운암스님은 약산선사를 하직하고 남전선사를 찾아 갔다가 그 뒤에 다시 약산으로 돌아와 불법을 깨달았다. 옛 사람을 살펴보건대, 20년 동안 참구하고도 미숙하여 살에 달라붙고 뼈에 달라붙어 썩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운암이 거기에는 생사가 없다고 말한 곳은 어디인가? 근원적인 본래심(불심)에는 번뇌 망념(生死)의 중생심이 없다는 이론에 집착하고 있다. {조당집} 제4권 약산장에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도오선사는 운암스님이 병환으로 누워있기에 문병와서 말했다. '이 육체를 버리고 어디서 또 만나야 할까요?' 운암은 '나고 멸함도 없는(不生不滅) 곳에서 만나지요.'라고 했다. 도오선사는 말했다. '나라면 불생불멸(不生不滅) 하는 곳에서도 만나려고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해야 한다'" 이 일단의 대화에서도 운암이 정법의 바른 안목이 구족되지 못한 선승임이 드러난다. 운암이 '거기에는 생사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성(심성)은 불생불멸이라는 경전의 말씀을 잘못 알고 생멸하는 것 이외에 불생불멸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무언가를 구하는 것은 중생의 생멸(생사)심인 것이다. 생멸하는 육체 외에 달리 불생불멸하는 법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은 법신을 영혼과 식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등록} 제10권에 장사화상은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불법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여, 종래의 중생심(識神)을 불성으로 착각하고 있다. 무량겁 이래로 생사(生死) 윤회의 근본이 되는 중생심(識神)을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신(法身)으로 생각하고 있다.”

중생심(識神)을 불성으로 착각하고, 또한 불성은 생사윤회를 초월하고 상주불멸이라고 주장하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불성을 영혼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정법의 안목이 없는 사람은 불법인지 외도법인지도 판단하지 못하고 혼동하고 있다. 불법을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이 불성과 영혼을 착각하고 외도법을 불법으로 착각하고 있다.

한국에서 선승들이 입적하면 '新圓寂…大宗師 覺靈'이라고 위패를 적어 모시고 있다. 스승을 완전한 열반에 든 원적(圓寂)이라고 하면서 윤회하는 영혼(覺靈)으로 탈락시키고 있다. 깨달은 영혼이나 못 깨달은 영혼이라는 말도 차별에 떨어진 중생심의 견해다. 입적하신 스승의 법신을 중생으로 탈락시켜 욕되게 하는 위패임을 알고 있는 수행자는 얼마나 될까? 법신을 영혼으로 착각하고 있다. 선승의 법신을 진상(眞相)이라고 하며, 법신의 모습을 진영(眞影)이라고 한다. 스승의 위패를 모시려면 각령(覺靈)이라고 하지 말고 '진위(眞位)'라고 해야 한다. 또 영가축원에 속히 사바세계에 오셔서 중생을 구제해 주실 것을 축원하고 있는데 영혼으로 착각하고 있는 안목 없는 사람이다.

본칙에서 백장화상이 운암스님에게 "그대는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어떻게 말하겠는가?"라고 운암의 견해를 물었다. 그런데 운암스님은 곧장 "화상께서는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언뜻 보면 운암의 대답은 문제의 초점을 질문자에게 되돌리는 훌륭한 응답처럼 보이지만, 운암은 백장화상의 말에 사로잡혀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반문이다. 즉 자신의 안목을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앞의 70.71칙에서 살펴본 것처럼, 백장화상의 똑같은 물음에 위산스님은 "화상께서 말씀해 보세요"라고 한 말이나, 오봉스님처럼 "화상도 입을 닫아야 합니다!"라는 대답은 백장의 언구를 초월한 독자적인 선기(禪機)를 제시했다.

운암의 대답은 위산과 오봉스님의 대답과는 전혀 다르다. 운암스님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구족되지 못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운암의 대답은 마치 칼을 잡고 고기의 살과 뼈 사이를 판단하여 쓰지 못하고 칼이 "살에 달라붙고, 뼈에 달라붙네."라고 착어한 것처럼, 백장의 물음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의 말에 집착하여 대답한 것을 비판했다. 원오는 또 백장화상이 묻는 언어의 진흙탕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하며, "앞으로 가자니 마을도 없고, 뒤로 돌아 가자니 주막도 없다"고 평하고 있다. 불법에 대한 안목이 없기 때문에 중생심의 미로에 헤매고 있어 지혜의 눈으로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멍청한 답변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그래서 백장화상은 "나의 자손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이러한 답변은 앞으로 못 가고 뒤로도 못 간다"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70칙에서 백장이 위산에게 "나는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을까 염려스럽다"라는 말의 전반을 언급하지 않고 뒷부분만을 말한 것은 운암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즉 불법의 혜명을 계승해야할 제자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하고 정법의 안목이 없으니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하여 중생구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게 되었음을 한탄한 말이다.

{전등록} 제6권에 백장화상이 황벽에게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감하고, 견해가 스승보다 뛰어나야 비로소 전수할 수가 있다. 그대는 스승을 초월(超師)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말이 {조당집} 7권 암두장, {임제록}등에도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당대의 선승들은 뛰어난 제자를 길러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하도록 선의 교육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화상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백장의 물음에 끄달려서 말했네. "황금빛 털 사자는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지 않네." 사자가 사냥을 할 때는 온몸을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기세를 펼치고 기회를 포착하여 순식간에 사냥을 한다. 운암 역시 황금빛 사자로서 소질은 갖추고 있지만, 수행이 원숙하지 못하여 안목이 없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자와 같은 자유자재한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삼삼오오 옛길을 가는데" 사실 운암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해서 수많은 참선 수행자들은 똑같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경전과 어록을 읽고 불조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만, 분위기만 답습할 뿐 독자적인 안목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대웅산 아래서 부질없이 손가락을 튕긴다." 운암도 백장산에서 20년 동안 백장의 지도를 받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네.


 

[第073則]頭白頭黑
〈垂示〉垂示云。夫說法者。無說無示。其聽法者。無聞無得。說旣無說無示。爭如不說。聽旣無聞無得。爭如不聽。而無說又無聽。卻較些子。只如今諸人。聽山僧在這裏說。作麽生免得此過。具透關眼者。試擧看。
〈本則〉擧。僧問馬大師。離四句絶百非。請師直指某甲西來意。馬師云。我今日勞倦。不能爲汝說。問取智藏去。僧問智藏。藏云。何不問和尙。僧云。和尙敎來問。藏云。我今日頭痛。不能爲汝說。問取海兄去。僧問海兄。海云。我到這裏卻不會。僧擧似馬大師。馬師云。藏頭白海頭黑。
〈頌〉藏頭白海頭黑。明眼衲僧會不得。馬駒踏殺天下人。臨濟未是白拈賊。離四句絶百非。天上人間唯我知。

{벽암록} 제73칙은 마조도일화상이 문하의 수제자인 서당과 백장의 안목을 평가하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마조화상에게 질문했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떠나서 화상께서는 저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곧바로 가르쳐 주십시오." 마조화상은 말했다. "나는 오늘 피곤해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지장(智藏)에게 물어보게나!" 그 스님이 지장스님에게 질문하니, 지장은 말했다. "왜 마조화상께 묻지 않는가?" 스님은 "화상께서 스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지장이 말했다.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스님은 회해스님께 묻자, 회해스님은 "나는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했다. 스님이 이러한 전후 이야기를 마조화상께 말하자, 마조화상은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말했다.

擧. 僧問馬大師, 離四句絶百非, 請師直指某甲西來意. 馬師云. 我今日勞倦. 不能爲汝說, 問取智藏去. 僧問智藏. 藏云, 何不問和尙. 僧云, 和尙敎來問. 藏云, 我今日頭痛, 不能爲汝說, 問取海兄去. 僧問海兄. 海云, 我到這裏不會. 僧擧似馬大師. 馬師云, 藏頭白 海頭黑.

본칙 공안의 출처는 {조당집}14권 마조장인데, {마조어록}, {전등록}7권 서당장에도 수록하며, 조주와 앙산, 굉지 등 많은 선승들이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를 떠나서 불법의 진실을 밝히는 설법을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무문관} 제5칙에 향엄화상이 입으로 나뭇가지를 물고, 발을 떼고 손을 놓고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대답하도록 요구하는 문제도 이 공안을 토대로 하고 있다. 또한 {무문관} 25칙에 앙산이 미륵의 처소에서 '대승의 가르침은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초월했다'라고 설한 법문도 마찬가지이다. {능가경}제2권에 '자각한 성지(聖智)의 경계에 일체법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낸 것인데, 유무(有無) 등의 사구(四句)를 여의고 자공상(自共相)을 여읜 것이다'라고 설한다. {대승현론} 제1권에 ‘진리(眞諦)는 사구(四句)를 끊고 백비(百非)를 여읜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절대의 진리는 일체의 언설과 개념을 초월한 입장을 말하며, 진리의 세계를 언어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불립문자의 의미이다.


설하지 않는 것이 참된 설법…
마조화상, 뛰어난 두 제자에 탄복

사구(四句) 백비(百非)란 불법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일체의 논의와 언어 문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사구(四句)란 일(一), 이(異), 유(有), 무(無)라는 근본 사구(四句)로 일체의 모든 사물과 존재의 이론을 세워서 논리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이 근본 사구를 세밀하게 구분하고 분별하면 백비(百非)가 되는데, 동일한 것(一)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다른 것(異)이 있고, 있다(有)고 말하지만, 없다(無)고 말하면 없는 것이다. 즉 어떤 사물이라도 동일한 것이지만 다름(異別)이 있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견해가 있다. 이 네 가지의 입장(四句)에 또 각각 사구(四句)가 있기 때문에 16이라는 숫자가 된다. 다시 그 16에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 배치하면 48비(非)가 되고, 거기에 이전에 이미 일어난 일(已起)과 일어나지 않은 일(未起)은 합치면 96비(非)가 되며, 여기에 일(一), 이(異), 유(有), 무(無)의 근본 사구(四句)를 합치면 100비(非)가 된다. 이렇게 백비(百非)라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지만 무수한 부정으로 연장되는 논리로서 결국 일(一), 이(異), 유(有), 무(無)의 사구(四句)에 귀결되는 것이다.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는 원래 고대 인도의 외도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인데, 불교에서는 형식적인 이론을 초월하여 중도(中道) 실상(實相)의 가르침을 세운 것이다. 용수의 {중론(中論)}에서 제시한 '팔부중도(八不中道)'와 대비하여 이해해야 한다.

즉 스님은 마조화상에게 입으로 일체의 언어 문자로 펼치는 논의를 벗어나 달마조사가 중국으로 온 뜻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 문제는 {종경록} 97권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남악회양과 탄연(坦然)선사가 처음 숭산 혜안국사를 참문하고 질문한 말이 최초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때 혜안국사는 '어째서 자기 자신의 의지를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의지를 질문해서 무엇 하려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마조어록}에도 어떤 스님이 '어떤 것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라는 질문에 마조는 '지금 그대 자신의 의지는 어떠한가?'라고 반문한다. 선불교에서는 남의 의지를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질문의 핵심은 달마가 전한 불법의 근본핵심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본칙에서 마조화상은 '나는 오늘 피곤해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지장(智藏)에게 물어보게나!'라고 말했다. 원오는 "몸은 숨겼지만 그림자는 노출되었다"고 착어한 것처럼, 마조의 대답에 사구백비를 초월한 서래의(西來意)를 제시하고 있는데, 안목이 없는 스님은 자신의 불심에서 체득하지 못하고 또 밖을 향해 불법을 구하려고 지장스님에게 질문했다. 지장은 말했다. '왜 마조화상께 묻지 않는가?' 지장은 마조문하의 수제자이기에 서당(西堂)이라고 부른다. 원오는 지장의 이 한마디가 숲에서 호랑이가 뛰어나온 것이라고 평하며 지장이 몸을 바꾼(轉身) 지혜작용의 날카로움을 칭찬하고 있다. 스님은 정직하게 '화상께서 스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 지장은 '나는 오늘 머리가 아파서 그대에게 말할 수 없으니, 회해(懷海) 사형에게 묻도록 하게!' 말했다. 마조는 피곤하니 지장에게, 지장은 머리가 아프니 회해에게 묻도록 한다. 스님은 백장회해께 묻자, 회해스님은 '나는 그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인사말로 대답했다. 백장이 말한 '불회(不會)'라는 한마디는 사구를 여의고 백비를 끊은 대답이다. 원오는 "쓸데없는 말하지 않고, 천고 만고에 깜깜하게 되었네"라고 하여 백장의 불회(不會)는 일체의 사량분별을 초월한 깜깜한 절대평등의 세계라고 착어했다.

{금강경}에 설한 것처럼, '설하지 않은 것이 참된 설법'인 것처럼, 사구 백비를 초월한 설법은 질문한 조사서래의를 언어 문자를 초월하여 제시한 것이다. 스님이 지장은 두통을, 백장은 불회(不會)라고 말한 전후의 이야기를 마조화상께 말하자, 마조화상은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라고 평했다. 마조화상이 두 제자의 견해에 대한 평가를 희고 검은 색깔, 우열과 철저와 불철저의 차별적인 사고로 접근하면 마조를 비롯하여 모두를 중생으로 타락시킨다. 백로는 희고, 까마귀는 검고,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은 것처럼, 희고, 검은 색은 조작도 아니고 차별도 아니다. 모든 자연의 존재가 모두 독자적인 본성(법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절대적인 경지이다. 마조화상은 서당과 백장이 각자 절대적인 본래심의 입장에서 독자적인 안목과 방편지혜로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한 말이다. 자기 본래 절대의 세계가 일체의 사구백비를 초월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다"고. 마조화상이 서당과 백장의 견해를 평가한 말을 그대로 읊고 있다. 원오는 "반은 닫치고(合) 반은 열렸다(開)"고 착어한 것처럼, 이 말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사구백비를 초월한 입장에 있다. 서당과 백장도 마찬가지다. '눈 밝은 납승도 이 말의 참뜻을 알 길이 없네.'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수행자는 "30년 더 수행하라"고 원오는 착어했다. '망아지(馬駒:마조)가 천하 사람을 짓밟으니,' 마조화상이 말한 '서당의 머리는 희고, 백장의 머리는 검다'라는 이 말이 천하의 수행자들을 일시에 짓밟아 죽였다라고 칭찬했다. "임제는 날강도가 아니었구나." 설봉이 임제를 날강도라고 평했는데, 임제의 지혜작용보다 더 훌륭한 마조대사라고 칭찬한 말이다. "사구(四句)를 여의고 백비(百非)를 끊고, 천상 인간에 오직 나만이 안다." 물을 마시고 차고 더운 맛을 아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사실이다.

 

[第074則]飯桶作舞
〈垂示〉垂示云。鏌鎁[金+耶]橫按。鋒前剪斷葛藤窠。明鏡高懸。句中引出毘盧印。田地穩密處。著衣喫飯。神通遊戲處。如何湊泊。還委悉麽。看取下文。
〈本則〉擧。金牛和尙每至齋時。自將飯桶。於僧堂前作舞。呵呵大笑云。菩薩子喫飯來。雪竇云。雖然如此。金牛不是好心。僧問長慶。古人道。菩薩子喫飯來。意旨如何。慶云。大似因齋慶讚。
〈頌〉白雲影裏笑呵呵。兩手持來付與他。若是金毛獅子子。三千里外見[言+肴]訛。

벽암록 74칙 금우화상의 밥통

음식 공덕 찬탄위해 밥통들고 춤추는 선승


{벽암록} 제74칙은 금우화상이 밥통을 치며 춤추고 웃는 기행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금우화상은 언제나 점심 공양시간이 되면 몸소 밥통을 들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껄껄 웃으며 말했다. "보살들이여! 공양하러 오시오." 설두스님이 말했다. "비록 이와 같이 하였지만 금우화상은 호의로 한 것이 아니다." 어떤 스님이 장경스님에게 질문했다. " '옛 사람이 보살들이여! 공양하러 오시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장경스님이 말했다. '마치 점심 공양을 받고 축하하고 찬양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네."

擧. 金牛和尙每至齋時, 自將飯桶, 於僧堂前作舞, 呵呵大笑云, 菩薩子喫飯來. 雪竇云, 雖然如此, 金牛不是好心. 僧問長慶, 古人道, 菩薩子喫飯來, 意旨如何. 慶云. 大似因齋慶讚.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15권, {전등록} 제8권 금우화상전에 전하고 있으며, {종문통요집} 3권, {연등회요} 5권, {오등회원} 3권 등에도 수록하고 있다. 금우화상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인데,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상산정석지(常山貞石志)} 13권에 수록한 '진정부정림통법대사탑명(眞定府定林通法大師塔銘)'에 의하면 당 현종의 개원(開元)시대에 입적한 금우화상의 탑에 대한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임제록}에도 임제가 금우화상을 참문하여 선문답을 나눈 일단을 전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금우화상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선사가 수행자들 위해 공양 준비
불보살에 정성 지극한 예찬의식

{전등록}제8권에는 "금우화상은 공양주가 되어 대중들을 공양했는데, 언제나 점심공양 시간이 되면 밥통을 메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보살들이여 공양하시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매일 이와 같이 하였다."고 전한다. {무문관} 13칙에 덕산의 문하에서 설봉이 대중의 식사를 준비하는 공양주로서 수행한 이야기처럼, 그는 평생 공양주로서 대중을 공양하기 위해 주걱을 가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재식(齋食)은 점심공양시간(午飯時)을 말하는데, 불교의 교단에서는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일체의 애욕과 애착을 끊는 두타행을 하는 것이 수행생활이 기본이다. 아침(朝)은 제천(諸天)의 선신(善神)이 식사하는 시간이고, 낮(午)은 삼세의 제불이 식사하는 시간이기에 불법의 수행하는 사람은 제불의 식사시간에 맞추어 정오를 넘기지 않는 공양시간(齋時:오전 11시경)으로 정한 것이다. {유교경}에 다음과 같이 설한다. “그대들 비구들은 모든 음식을 받아먹을 때에 약을 복용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좋은 음식이나, 나쁜 음식이나 늘리거나 줄이려고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약간의 음식으로 몸을 유지하고 배고픔과 갈증을 없애도록 하라. 마치 벌이 꽃에서 단 꿀만을 채취하고 꽃과 향기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라." 이것이 출가승이 식사에 대한 마음가짐이다. 또 {사십이장경}에도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머리와 수염을 깎고 사문이 되어 도법(道法)을 배우는 사람은 세상의 재산을 버리고 걸식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하루 한 끼의 식사(日中一食)로 나무 밑에서 하룻밤을 쉬고(樹下一宿) 이틀을 같은 곳에서 묵지 말라"고 설하고 있다. 중국선원에서는 아침에 죽을 먹고, 점심공양(齋食)이 정식이다. 교단의 규칙으로 저녁을 먹으면 안 되지만, 노동을 하는 선원에서는 옛날에는 돌을 불로 데워서 보자기에 싸서 배를 따뜻하게 하여 배고픔을 치유한다는 고사에 의거하여 저녁식사를 약석(藥石)이라고 하였다.

평창에도 "금우화상은 언제나 점심 공양시간이 되면 몸소 밥통을 들고 승당 앞에서 춤을 추면서 껄껄 웃으며 '보살들이여! 공양시간요. 공양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20년 동안 이렇게 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진주 금우산에서 선문을 개창하여 수행자들을 지도하는 금우화상이 매일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문하의 수행자들을 위해서 직접 점심공양을 준비한 밥통을 들고 좌선하는 승당 앞에 밥통을 직접 갖다놓고서 식사를 하도록 하고 있다. 우두법융선사가 대중들을 위해 쌀을 짊어지고 운반하고, 장작을 준비하고 물을 나르는 선원의 잡무를 실행한 선승들은 많지만, 대중의 식사를 직접 준비하여 공양한 선승은 없다. 그런데 금우화상은 밥통을 운반해 놓고 춤을 추면서 껄껄 웃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정상적인 선승의 행동과는 전연 다른 약간 미친 듯한 풍광승(風狂僧)의 모습이다. 원오는 '수시'에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신통 유희(遊戱)"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금우화상의 행동은 방거사가 말한 그대로 불심의 지혜작용인 신용묘용이며 유희삼매의 삶인 것이다. 금우화상이 '보살들이여! 공양하시요!'라고 말하고 제시한 밥은 보통 선원에서 식사하는 공양과는 다른 의미가 있다. 원오의 수시에 "언구 속에 비로(毘盧)의 심인(心印)을 인출한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금우화상은 수행자들이 불법을 깨닫고 보살이 되도록 최선을 다한 노파심이며, 보살의 아들인 수행자, 즉 불보살에게 올리는 공양(香飯)인 것이다. 춤추며 웃는 금우화상의 모습은 불보살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올리는 예찬의 의식인 것이다.

설두스님은 "비록 이와 같이 하였지만 금우화상은 호의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즉 금우화상이 대중들에게 밥을 지어 공양한 것은 보살행을 하기 위한 목적의식의 마음으로 실행한 것이 아니다. 금우화상의 의미심장한 교화 수단을 일반적인 생각하여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주고 있다. 원오는 "적은 적을 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설두는 금우화상의 수단을 잘 파악하고 있다. 금우화상이 보살들에게 공양한 밥(香飯)을 중생심으로 먹지 말고, 법신(비로)의 심인을 체득한 지혜로 먹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봉의존이 "밥통 옆에 앉아서 배고프다고 고함치고, 강가에서 목마르다고 울부짖는 놈이 있다."라고 말하자, 제자인 현사가 더욱 철저한 입장으로 "밥통 속에 앉아서 배고프다고 울부짖고, 물속에서 목마르다고 우는 놈이 있다."라고 주장한 말이 있는 것처럼, 선원의 수행자는 매일 세끼의 식사를 받아먹고 있지만 중생심으로 배만 채우며 먹는 음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스님이 이 이야기를 장경스님에게 제시하면서 " '옛 사람이 보살들이여! 공양하러 오시오.'라고 말한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장경스님은 '마치 점심 공양을 받고 축하하고 찬양하는 법요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네.'라고 말했다. 선원의 식사작법에는 심경(心經)과 십불명(十佛名)과 오관게(五觀偈)를 외우고 엄숙하게 공양을 받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데, 금우화상은 춤과 웃음으로 무심의 경지에서 실행한 것이다.

설두스님이 게송으로 읊었다. "흰 구름 그림자 속에서 껄껄대고 웃네." 금우화상이 깨달음의 경지에서 무심의 지혜작용을 펼친 것을 읊고 있다. 백운(白雲)은 중생심의 세속에서 높이 초월한 경지에 있는 것이며, 그 곳에 멈추어 정지하고 있다면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다. 껄껄대고 웃고 춤추는 금우화상은 무심의 경지에서 펼친 지혜작용이다. "두 손으로 가져다가 그대에게 전해 준다." 금우화상이 승당 앞에 밥통을 들고 와서 '보살의 아들아! 밥 먹어라!'고 말한 것을 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대(他)'는 옛날 금우화상의 승당 수행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모든 승당 수행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설두가 이 말을 거듭 게송으로 읊고 있는 것은 심안으로 잘 살펴 자각하도록 한 것이다. 보살의 아들은 누구를 말한 것인가? 밥통은 무엇인가? 밥을 먹어라! 말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문제를 파악해야 금위화상의 광기(狂氣) 어린 이 공안의 의미를 체득 할 수 있는 것이다. "황금빛 사자 새끼라면, 삼천리 밖에서도 문제의 당체를 알아 차렸을 것이다." 불법을 체득한 선승이라면, 장경의 말처럼, 언어 문자로 제시한 난제의 공안이라도 당체인 진실을 곧바로 체득 할 수가 있다.



[第075則]打著一箇
〈垂示〉垂示云。靈鋒寶劍。常露現前。亦能殺人亦能活人。在彼在此。同得同失。若要提持。一任提持。若要平展。一任平展。且道不落賓主。不拘回互時如何。試擧看。
〈本則〉擧。僧從定州和尙會裏。來到烏臼。烏臼問。定州法道何似這裏。僧云。不別。臼云。若不別更轉彼中去。便打。僧云。棒頭有眼。不得草草打人。臼云。今日打著一箇也。又打三下。僧便出去。臼云。屆棒元來有人喫在。僧轉身云。爭奈杓柄。在和尙手裏。臼云。汝若要山僧回與汝。僧近前奪臼手中棒。打臼三下。臼云。屈棒屈棒。僧云。有人喫在。臼云。草草打著箇漢。僧便禮拜。臼云。和尙卻恁麽去也。僧大笑而出。臼云。消得恁麽。消得恁麽。
〈頌〉呼卽易。遣卽難。互換機鋒子細看。劫石固來猶可壞。滄溟深處立須乾。烏臼老烏臼老。幾何般。與他杓柄太無端。

벽암록 75칙 오구화상이 정주화상의 선법을 묻다

수행자 근기 간파한 방망이 서문답 한판


{벽암록} 제75칙은 오구화상이 정주(烏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스님에게 정주(定州)화상의 불법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나눈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떤 스님이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뒤에 오구화상을 참문하자, 오구화상이 물었다. "정주화상의 선법은 이곳의 선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다르지 않습니다." 오구화상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다시 거기로 가라!"하면서 주장자로 곧장 후려쳤다. 스님은 말했다. "방망이에 눈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후려치면 안 됩니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오늘은 한 사람(一箇)을 친다"하면서 또 세 번이나 후려쳤다. 스님은 곧장 승당 밖으로 나갔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구나!" 스님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를 화상이 쥐고 있는데, 어떡합니까?" 오구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빌려주겠다." 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오구화상의 주장자를 빼앗아 세 차례나 치니, 오구화상이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야, 억울한 방망이!" 스님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맞습니까?" 오구화상이 말했다.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놈이군!" 스님은 곧 예배를 올렸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화상! 이렇게 하는 것이야!"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나갔다. 오구화상이 말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니, 이렇게 할 수 있다니."

擧. 僧從定州和尙會裏, 來到烏臼, 烏臼問, 定州法道何似這裏.僧云, 不別. 臼云, 若不別更轉彼中去, 便打. 僧云, 棒頭有眼, 不得草草打人. 臼云, 今日打著一箇也. 又打三下. 僧便出去. 臼云, 屆棒元來有人喫在. 僧轉身云, 爭奈杓柄, 在和尙手裏. 臼云, 汝若要山僧回與汝. 僧近前奪臼手中棒, 打臼三下. 臼云, 屈棒屈棒. 僧云, 有人喫在. 臼云, 草草打著箇漢. 僧便禮拜. 臼云, 和尙. 恁去也. 僧大笑而出. 臼云, 消得恁, 消得恁.


용맹스레 쳐들어온 납자 안목에
오구화상 즐거워 방망이 후려쳐

본칙의 공안은 {종문통요집} 제5권, {오등회원} 제3권의 오구화상장에 전하고 있다. 오구화상은 마조선사의 선법을 이은 제자로 {전등록} 제8권에 선문답을 전하고 있지만, 그의 전기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본 공안은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한 어떤 스님이 오구화상을 참문하여 나눈 대화이다. 정주화상은 북종선 보적(普寂)선사의 법을 이은 석장(石藏)선사인데, 그에 대한 행적도 전하지 않는다.

오구화상은 그 스님에게 "그대는 정주화상의 문하에서 수행했다고 했는데, 정주화상의 선법(法道)과 이곳(這裏) 나의 선법과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즉 정주화상은 북종선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이고, 나(오구)는 남종선의 선법을 계승한 선승인데, 그대는 어떠한 차이점을 파악하고 있는가? 원오도 '견해가 깊고 얕은지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오구화상은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해 보기 위한 상투적인 물음인 것이다. 그 스님은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라고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고, 본래 고정된 한 법도 없는 공(空)이며, 무법(無法)인데, 정주화상의 선법과 오구화상의 선법이 다르다고 한다면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중생이며,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지 못한 안목 없는 선승이다. 그 스님은 오구화상이 던진 물음의 본의를 파악하고 민첩하게 한마디로 다름없다고 말한 점으로 볼 때 과연 정법의 안목을 갖춘 수행자이다. 석두의 {참동계}에도 "사람의 근기는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지만, 불도는 남북의 조사가 없다"라고 읊고 있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자 오구화상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다시 거기로 가라!"하면서 주장자로 곧장 후려쳤다. 정주화상의 선법과 나의 선법이 다르지 않다면 무엇 하러 이곳에 왔는가? 속히 본래 있던 그곳(彼中)으로 되돌아가라고 하면서 곧장 주장자로 때렸다. 원오도 "올바른 법령을 시행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스님은 그냥 물러서지 않고 "방망이에 눈이 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후려치면 안 됩니다"라고 대꾸했다. 방망이에 눈이 있다는 말은 안목없는 놈은 때려야 하지만, 안목있는 납승을 함부로 때려서는 안 된다는 비판의 말이다.

"방망이를 사용할 줄 아는 안목이 있는 선승이라면 어떻게 안목있는 납승에게 방망이를 함부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습니까?"라고 날카롭게 꼬집는 말이다. 원오는 "정말 작가라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사자 새끼로다"라고 이 스님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오구화상은 "오늘은 한 사람(一箇)을 친다" 하면서 또 세 번이나 후려쳤다. 한 사람은 도안의 고사에 의거한 말로 한 사람의 성자(一箇聖者)를 말하는데, 오구화상은 오늘 비로소 정법의 안목을 갖춘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너무나 즐겁고 기뻐서 주장자를 멋지게 후려 칠 수가 있었다고 하면서 거듭 세 번이나 신나게 때리고 있다. 통쾌하고 유쾌한 오구화상의 만족한 지혜작용의 방망이이다. 그 스님은 곧장 승당 밖으로 나갔다. 오구화상의 묘용인 방망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오구화상이 그 스님에게 "억울한 방망이(屈棒)를 얻어맞은 사람이 있었구나!"라고 말했다.

억울한 방망이(屈棒)는 스님이 오구화상이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비판한 말에 대한 조소(嘲笑)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국자 자루(방망이)를 화상이 쥐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지요" 오구화상은 "그대가 필요하다면 그대에게 빌려주겠다"라고 말하자, 스님은 앞으로 나아가 오구화상의 주장자를 빼앗아 세 차례나 쳤다. 오구화상은 "억울한 방망이(屈棒)야, 억울한 방망이!"라 말했다. 이 말은 방망이에 눈이 없군! 마주잡이로 방망이를 휘두르는가? 라고 반문하는 의미이다.

오구화상과 스님의 선문답은 주객 상호이며, 빈주(賓主)가 뒤바뀌는 지혜의 묘용을 자유롭게 펼치고 있다. 스님은 오구화상에게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맞습니까?"라고 묻자, 오구화상은 "함부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놈이군!"이라고 하면서 앞에 스님이 한 말로 대꾸했다. 스님은 곧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구화상은 말했다. "그렇지, 이렇게 하는 것이야!" 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원오는 "작가 선객이 본래 있었다. 사나운 호랑이라야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훌륭한 수행자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오구화상도 "이렇게 훌륭한 지혜를 펼칠 수가 있다니, 이렇게 할 수 있다니(消得)"라고 감탄의 한마디를 남긴 것이다. 소득(消得)은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무애자재하게 지혜작용을 펼치고 있는 수행자를 훌륭하다고 극히 칭찬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부르기는 쉬워도, 보내기는 어렵다" '평창'에도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뱀을 잡는 사람이 피리를 불어 뱀을 불러모으기는 쉬워도 모인 뱀을 필요한 만큼 잡고 돌려보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잘못 취급 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다. 오구화상이 안목을 갖춘 스님을 점검하는 모습을 비유하여 읊고 있다. "서로 주고받은 기봉을 자세히 보라!" 오구화상과 스님이 나눈 선기작용은 주객이 서로 바뀌고, 빈주가 뒤바뀌며, 주고 뺏음이 자유자재하게, 준엄한 지혜를 주고받고 있다.

원오도 "일출일입(一出一入), 두 사람이 모두 작가로다. 하나의 주장자를 두 사람이 서로 붙잡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견고한 겁석(劫石)도 오히려 부서지네' 오구화상과 스님이 나눈 절대적인 선기작용은 견고한 무한의 시간을 요구하는 겁석도 일시에 파괴되고 만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지의 선기작용을 펼친 것이다. '푸른 바다 깊은 물도 디디자마자 곧 마른다' 또한 무량한 대해(大海)의 바다도 한 순간에 메마르게 하는 기운이었다.

 

[第076則]喫飯了未
〈垂示〉垂示云。細如米末。冷似冰霜。幅塞乾坤。離明絶暗。低低處觀之有餘。高高處平之不足。把住放行。總在這裏許還有出身處也無。試擧看。
〈本則〉擧。丹霞問僧。甚處來。僧云。山下來。霞云。喫飯了也未。僧云。喫飯了。霞云。將飯來與汝喫底人。還具眼麽。僧無語。長慶問保福。將飯與人喫。報恩有分。爲什麽不具眼。福云。施者受者二俱瞎漢。長慶云。盡其機來。還成瞎否。福云。道我瞎得麽。
〈頌〉盡機不成瞎。按牛頭喫草。四七二三諸祖師。寶器持來成過咎。過咎深無處尋。天上人間同陸沈。

벽암록 76칙 단하화상이 어디서 왔는가 묻다

“안목없는 수행자가 밥만 축냈구나” 비꼬아


{벽암록} 제76칙은 단하천연화상이 찾아온 한 스님에게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단하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은 대답했다. "산 밑에서 왔습니다." 단화화상이 말했다. "밥은 먹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밥은 먹었습니다." 단화화상이 말했다. "그대에게 밥을 먹도록 한 사람은 안목을 갖추었는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장경선사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밥을 먹도록 한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을까?" 보복선사가 말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두 사람 모두 눈먼 놈이다." 장경선사가 말했다. "본분의 선기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보복선사가 말했다. "나를 눈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擧. 丹霞, 問僧, 甚處來. 僧云, 山下來. 霞云, 喫飯了也未. 僧云, 喫飯了. 霞云, 將飯來與汝喫底人, 還具眼. 僧無語. 長慶問保福, 將飯與人喫, 報恩有分, 爲什不具眼. 福云, 施者受者二俱漢. 長慶云, 盡其機來, 還成否. 福云, 道我得.


"안목 있다" "없다" 팽팽한 논란
보복. 장경선사도 분별심 드러내

본칙의 공안은 {조당집} 제4권과 {전등록} 14권 단하천연장에 전하고 있으며, 장경과 보복의 문답도 수록하고 있지만, 약간의 문구와 내용이 다르다. 단하천연(丹霞天然 : 738~824)화상은 석두희천의 선법을 이었고, 등주 단하산에서 행화를 펼친 선승이다. 행각하다가 추운 날 혜림사에서 목불을 쪼개어 태워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조당집}에 의하면 단하화상은 어릴 때 유교와 묵자(墨子)를 공부하였고, 9경(經)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평창'에도 {전등록}에 의거하여 단하화상의 전기를 인용하고 있는데, 출가하기 전에 {벽암록} 42칙에 등장한 방거사와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가 행각하는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강서 마조선사의 선불장(選佛場)을 참문하여 마조의 안내로 석두선사와의 인연을 맺었다.

단하화상이 어떤 스님이 참문하러 왔기에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인사말로 물었다. '어디서'라는 질문에는 수행자가 온 장소와 본래면목의 출처에 대한 두 가지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방심하면 차별심에 떨어지고 만다. 즉 수행자의 안목을 점검하기 위해 가볍게 던지는 문제인 것이다. 스님은 "산 밑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강서나 호남이나 약산이나 백장이나 특정한 장소나 선원을 말하지 않고, 산 밑에서 산위에 있는 선사를 참문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다. 원오는 "수행자가 산 아래서 왔다는 이 말은 약간의 선기작용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 한마디 말로서는 안목을 갖춘 사람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착어했다. 그래서 단하화상은 "그대가 산 밑에서 왔다고 했는데, 배가 고프겠구나, 밥은 먹었는가?"라고 두 번째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에는 불법을 깨달은 선열식(禪悅食)으로 배를 가득 채웠는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한 지혜가 있는가? 원오도 "두 번째 발 씻은 더러운 물을 뿌렸다"고 착어했다. 그 스님은 "예! 밥은 먹었습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깨달음을 체득하여 일대사의 불법공부를 끝내고 마쳤습니다. 불법수행에 졸업이 있을까? 깨달음이 졸업인가?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하는데, 얻은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어떤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중생이다.

{반야심경}에 '지혜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왜냐하면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한 말이나 깨달음의 세계는 무소득, 무소유의 경지이며 본래무일물의 경지라는 불법의 진실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법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망념의 환상에 빠진 한 소식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단화화상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밥을 먹도록 공양한 사람도 있구나. 그는 눈이 제대로 박힌 인간인가?"라고 날카롭게 비꼬며 반문하였다. '너 같이 멍청하고 안목없는 수행자에게 선법을 지도하고 깨달음이라는 식사를 제공한 놈 역시 정법의 안목이 있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눈먼 인간이 아니냐'라고 조소한 말이다. 그 스님은 한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단하화상이 던진 세 번째 화살(말)은 스님의 심장에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죽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상이 본칙 공안의 제 일단이다. 약 100년 후 설봉문하의 장경혜릉과 보복종전선사가 이 문제의 공안을 제시한 대화를 설두는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장경선사가 보복선사에게 물었다. "스님에게 공양한 것은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자격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안목을 갖추지 못했다고 했을까?" 수행승에게 공양하는 것은 삼보의 은혜와 사회의 은혜를 갚는 의미이며,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훌륭한 공덕의 일인데, 왜 단하화상은 안목없는 놈이라고 하며, 안목없는 놈이 안목 없는 놈에게 공양했다고 하는가? 그대는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면서 동문인 보복선사의 견해를 시험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자 보복선사는 "공양을 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두 사람 모두 눈먼 놈"이라고 말했다. 깨달음의 경지인 불심은 공양을 베푸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공양물도 모두 청정하여 주객도 없고 안목있고, 없는 차별의 눈도 없다. 보복은 불법의 근본(第一義)은 공양하는자나 받는자나 보은의 자격이 있고 없음에 대한 이원(二元) 대립의 차별심도 없다고 한 말이다.

원오도 "이 한마디로 전부 다 끝냈다"고 한칼에 일체의 차별을 차단한 것이라고 착어했다. 장경선사는 "본분의 선기(禪機)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즉 이 말은 나는 보은이나 안목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불심의 지혜작용을 펼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나를 눈먼 놈이라 할 수 있는가? 단하화상이 스님에게 한 말을 빌려서 자기의 식견을 제시하고 아울러 보복의 안목을 점검하는 말이다. 원오는 "무슨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가"라고 착어한 것처럼, 장경은 무분별하게 까닭모를 소리를 하고 있다. 장경 자신이 아직 철저하지 못한 경지를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보복선사도 물러서지 않고 "그대는 나를 눈먼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힐문하고 있다. 즉 나는 선기를 다하거나 다하지 않거나 그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눈먼 놈이 아니다 라고 혼자 과시하면서 '나보고 눈먼 놈이라고 말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원오는 "두 사람 모두 풀 속에 있다"며 분별의 중생심에 떨어져 있다고 착어하며,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산승이 그러한 경우라면, (장경이)'본분의 선기를 다했다면 눈먼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라고 말할 때, 그에게 '눈먼 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애석하다. 당시 보복스님이 나처럼, "이 눈먼 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설두화상의 허다한 잔소리를 모면할 수 있었을텐데.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기를 다했다면 장님이 되지 않았을 텐데' 장경과 보복의 대화를 하나의 게송으로 읊었는데, 원오는 두 사람 모두 온전한 경지를 들러내지 못하고 "단지 절반을 말했을 뿐"이라고 착어했다. "소를 끌고 와서 풀을 먹이네" 이것은 {대지도론}과 {중경찬잡비유경(衆經撰雜譬喩經)}에 죽은 소에게 풀을 먹이려는 동자의 이야기에 의거한 말이다. 단하화상이 스님에게 공양한 사람이 안목이 있는가? 밥을 받아먹은 자는 눈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게송으로, 이것은 마치 죽은 소에게 풀을 먹도록 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읊은 것이다. '서천 28대 조사. 동토의 모든 조사의 보배 그릇(寶器)을 가져와 허물을 이루었네' 조사의 보배 그릇은 조사의 심인(心印)으로 부처님의 혜명을 계승한 불심의 지혜 그릇이다. 이 보배그릇을 활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식사를 제공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는 사람 모두 안목이 없는 눈 먼 사람은 큰 죄인이 된다. 단하산의 스님은 물론, 장경과 보복도 허물을 면할 수가 없다. 장경과 보복이 보배의 그릇을 상처 낸 허물은 '허물이 깊어 찾을 곳이 없다' '천상 인간, (삼계 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다함께 허물에 침몰되었다'

 

[第077則]餬餅
〈垂示〉垂示云。向上轉去。可以穿天下人鼻孔。似鶻捉鳩。向下轉去。自己鼻孔在別人手裏。如龜藏殼。箇中忽有箇出來道。本來無向上向下。用轉作什麽。只向伊道。我也知爾向鬼窟裏作活計。且道作麽生。辨箇緇素。良久云。有條攀條無條攀例。試擧看。
〈本則〉擧。僧問雲門。如何是超佛越祖之談。門云。餬餅。
〈頌〉超談禪客問偏多。縫罅披離見也麽。餬餅[祝/土]來猶不住。至今天下有[言+肴]訛。

벽암록 77칙 운문화상의 호떡

깨달음의 정법 불립문자 일깨워


{벽암록} 제77칙은 운문화상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질문하자 호떡이라고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호떡이다."

擧. 僧問雲門, 如何是超佛越祖之談. 門云, .


분별심 가진 선객 입 틀어막은 "호떡설법"
관념 언어에 끄달리는 중생에게

본칙의 공안은 지극히 간단한 선문답인데, {운문록} 상권에는 운문문언(864~949)화상이 상당법문하는 가운데 나눈 대화로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한마디의 말을 겨우 들면 모든 천차만별의 발자국(궤적)이 같아지며, 미진(微塵)을 모두 다 포괄한다 해도 그것은 교화 방편문으로 하는 말이다. 만약 이러할 때 납승의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조사(祖師)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가지고 사량분별(商量)한다면 조계의 일로(一路)에 빠지게 되리라. 누군가 (조사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극복한) 경지에서 말할 사람이 있는가? 말할 수 있으면 나와라"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엇이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 운문선사는 말했다. "호떡()이다" 스님이 말했다.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운문선사가 말했다. "분명히 무슨 관계가 있다" 선사는 또 말했다. "그대는 알았다고 말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조사의 의지를 말하면 그것을 듣고는 곧장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을 물을 것이다. 우선 무엇을 부처라고 하며, 무엇을 조사라고 하기에 나아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을 말하고 있는가?"

{조당집} 11권 운문장에는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라는 똑같은 질문에 "포주(蒲州)에는 마황(麻黃)이 익주(益州)에는 부자(附子)가 나지"라고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대답하고 있다. 또 {운문록} 상권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대들이 주장자를 걸머지고 나는 참선하여 도를 배운다고 하며,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도리를 찾는다. 내 먼저 그대에게 묻노라. 하루 종일 행주좌와하고 똥오줌 싸는 일과 거름 구덩이의 벌레에서 양고기 파는 탁자에 이르기까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할만한 도리가 있는가? 말할 수 있으면 나오라! 없다면 내 앞에서 거리적거리지 말라."

{운문록}과 {조당집} 운문장에는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에 대한 법문이 몇 차례 등장한다. 즉 "어떤 스님이 목주화상에게 '어떤 것이 부처를 초월하고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 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목주화상은 곧장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나는 이것을 주장자라고 하는데, 그대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대답이 없었다.

목주화상은 다시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을 그대에게 묻노라' 그 스님은 대답이 없었다" 목주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도리)이라고 제시하면서, 또 질문자에게 그 질문을 되돌리고 있다. 선문답에서 대답은 질문에 있다는 말이 있다. 운문은 상당법문에서 조사의 의지나 부처의 의지를 가지고 사량분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운문의 설법은 학인들의 안목을 열어주기 위한 방편이다.

도대체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 말이란 무엇인가? {임제록}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이 있고, 선어록에는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하고' '부처를 훼손하고, 조사를 훼손한다'는 말도 보인다. 그러면 부처나 조사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나 조사란 무엇인가?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부처인가?

부처나 조사란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으로 제시한 이름이며 가상으로 표현한 형상인 것이다. 부처나 조사를 초월한다는 것은 형체나 모양이 있는 부처나 조사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부처나 조사에 대한 권위의식이나 어떤 고정관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망념의 중생심을 텅 비워버리고 본래의 불심(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즉 부처나 조사에 대한 고정된 상상의 이미지는 물론, 부처나 조사들이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까지 초월하여 머무름이 없는 무주(無住)의 실천으로 무한한 자기 향상을 이루는 깨달음의 실천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나 조사라는 이름과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형상(모습) 이미지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나 조사에 대한 명상(名相)과 고정관념의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본래심의 지혜로운 선의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조당집} 4권에 단하천연선사가 행각하다 추운 날 혜림사에서 법당의 목불(木佛)을 쪼개어 불 피우고 추위를 막은 유명한 이야기도 형상의 불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린 행동이다. 당시 원주는 단하선사를 욕하다가 눈썹이 빠지는 형벌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불상을 부처로 착각하고 있다. 참된 부처(眞佛)는 어디에 있는가?

선에서는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면서 많은 선문답을 나누고 있다. '마음이 곧 부처' '부처를 마음 밖에서 찾으면 외도'라고 많이 주장하고 있지만 많은 수행자가 마음 밖에서 찾고 있고, {금강경}에서도 모양과 형색, 소리를 통해서 여래를 친견할 수 없다고 주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수행자가 착각하여 모양과 형상을 통해서 부처를 친견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미묘한 법문을 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자, 운문화상은 "호떡"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운문의 어록을 비롯해서 선승들의 선문답에 호떡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조정사원} 1권에는 참기름으로 구운 일종의 중국 만두라고도 한다. 그런데 운문화상은 부처나 조사를 초월하는 말씀을 '호떡'이라고 대답하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전등록} 12권에 "진조(陳操)상서가 스님들께 공양하고, 호떡을 하나 집어들고 스님에게 물었다. '강서나 호남에도 이런 것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상서는 아까 무엇을 먹었지요?' 진상서가 말했다. '종을 치니 메아리가 울린다'" 여기 진조상서가 호떡을 들고 제시한 것은 본래면목의 유무(有無)를 점검한 질문이다.

그러나 그 스님이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을 먹었는가?’라고 하며 본래면목의 작용을 제시했기 때문에 진조상서가 칭찬한 것이다. 운문화상이 호떡이라고 대답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한다는 것은 부처나 조사의 이름과 형상에 미혹하는 중생심에서 불심인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호떡이라고 대답한 말에 대하여 '혀가 입천장에 딱 붙었다'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입을 다물고 좌선하는 모습이며, 말 할 수 없는 상황을 표현한 말이다. 한 입에 가득 찬 호떡을 먹으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는가? 부처나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진정한 법문이 말로서 가능할까? 언어로도 말할 수 없는(言詮不及) 불립문자의 경지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며, 부처나 조사라는 망념을 초월한 경지이다.

말하자면 호떡을 먹은 일이 부처나 조사라는 분별의식과 고정관념도 없이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한 본래면목의 삶인 것이다. 조주화상이 '차나 한잔 마시게(喫茶去)!'라고 한 말도 마찬가지로 일체의 차별심을 초월하고 차를 마시는 불심(본래면목)의 지혜작용을 자각하도록 하는 일상생활의 법문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초월한 말을 묻는 선객이 매우 많다" 부처와 조사의 경지를 초월하는 법을 묻는 수행자는 많다. "틈새가 여기저기 터진 것을 보았느냐?" 이러한 질문과 대답은 벌써 완전무결한 불심을 언어 문자의 차별로 상처투성인 중생심으로 만들었네. "호떡으로 털어 막았는데도 아직도 긍정치 못하네"

운문은 질문한 스님의 분별심 구멍에다 호떡으로 틀어막았는데, 아직도 깨달음이나 현상에 집착하여 불법의 근본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지금도 천하의 모든 수행자들이 착각하고 있다" 운문이 스님을 위해 호떡으로 정법의 안목을 바꾼 방편법문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읊었다.



벽암록 78칙 16명의 보살이 목욕하며 깨닫다

"空한 물로 空한 몸을 씻는 것도 공(空)한 일…"


{벽암록} 제78칙은 {수능엄경}에 나오는 고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참구하게 하고 있다.

옛날에 16명의 보살이 있었는데, 스님들을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인연(본질)을 깨달았다. 여러 선덕들이여! 저네들이 미묘한 감촉 또렷이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擧. 古有十六開士, 於浴僧時, 隨例入浴, 忽悟水因. 諸禪德, 作生會, 他道妙觸宣明. 成佛子住, 也須七穿八穴始得.


나와 물이 하나인 '수아일체(水我一體)'
목욕통해 진리 깨달은 '독각(獨覺)'

본칙은 {수능엄경}제5권 다음의 일단에 의거한 것이다. 발타바라(跋陀婆羅)와 그 도반 16보살[開士]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말했다. “저희들은 처음 위음왕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스님들이 목욕할 때 차례차례로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원인(水因)을 깨닫고 보니, 때(번뇌)를 씻음도 아니오, 몸(體)을 씻음도 아니며, 중간에서 안연하게 무소유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익힌 숙습(宿習)이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금시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無學)을 체득하게 되었으며, 피불(彼佛)이 나를 발타바라라고 이름하니 미묘한 촉감(觸)이 선명(宣明)하여 불자의 보살지위(佛子住)를 이루었습니다. 부처님이 원통(圓通)을 질문하시니 제가 증득한 바는 촉인(觸因)이 으뜸이 되겠습니다.”

설두는 {설두송고} 83칙에 이 일단을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16보살(開士)은 발타바라와 같이 수행하는 일행이다. 개사(開士)는 보살의 번역어로 불법의 원만한 깨달음을 자리이타의 보살행으로 실행하는 수행자이며, 대사(大士)라고도 한다. {경음소(經音疏)}에 "개(開)는 통달(達)이며, 밝힘(明)이며, 아는 것(解)이다. 사(士)는 사부(士夫)이다. 경전 가운데 보살이라고 부르며, 개사(開士)라고 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대보적경(大寶積經)}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에는 "16명의 재가 보살이 있으니 발타바라를 상수(上首)로 한다."는 일절이 있고, {대지도론}에도 "선수(善守,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은 모두 재가의 보살이다. 발타바라 거사는 바로 왕사성의 옛 사람"이라는 일절이 보이는데, 유마거사와 같이 재가의 보살로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원오도 '평창'에 능엄회상에서 발타바라보살이 16명의 보살과 함께 청정한 수행으로 각기 원통법문의 원인(因)을 말했다. "이것은 25원통 가운데 하나이다. 16명의 보살이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수인삼매(水因三昧)를 깨치고 말했다. '육진(六塵)도 씻지 않았고, 몸도 씻지 않았다.'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늘 편안하며, 얻어 가진 것도 없이(無所有) 천만 가지 그 무엇도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참다운 반야이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사이비 반야이다."

수인삼매(水因三昧)는 {수능엄경}에서 말하는 25가지 깨달음(圓通) 가운데 하나인데,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이 수인삼매를 깨달았다는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칙에서는 수인(水因)을 깨닫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수인(水因)이란 물의 본질이나 실체, 혹은 물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 독자적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 혹은 불가득(不可得)이며 본래 공(空)한 인연으로 잠시 결합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16보살은 목욕하는 동기에서 이러한 수인(水因)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욕실에서 조용히 몸을 씻는 도중에 물을 아무리 사용해도 물은 그대로 흘러내리며, 어떠한 그릇에도 담기며, 어떤 형체와 독자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법에서 설하는 무자성(無自性)과 물질이 본래 공한 색죽시공(色卽是空)의 경지를 체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에 제로라는 숫자를 아무리 첨가해도 제로인 것처럼, 본래 공한 물로 공한 신체와 때를 씻는다는 사실 또한 본래 공한 경지인 것이다.

즉, 아상과 인상, 주관과 객관이라는 상대적인 분별심과 자아의식도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본래 공(空)한 물을 사용하여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지금 여기 자신이 물을 가지고 몸을 씻는 목욕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관적인 자기와 객관적인 대상인 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一如)가 된 수아일체(水我一體)이며, 만물일체(萬物一體), 혹은 만법일여(萬法一如)의 경지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이란 번뇌 망심의 분별심이 없이 젓가락(色)으로 무심(空)한 경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며, 공즉시색이란 젓가락을 가지고 식사한다는 의식(분별심)도 없이(空) 무심하게 젓가락과 숟가락 등의 도구(色)를 사용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식사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여러 선덕들이여! 어떻게 그들 16보살이 체득한 미묘한 감촉으로 또렷이 깨닫고 광명으로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체득해야 할 것인가?"라고 {수능엄경}에서 발타바라가 깨닫게 된 인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미묘(妙)함은 불가사의한 경지를 말하며, 감촉(觸)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촉(觸)으로 신체의 감각을 통해서 외부 경계를 받아들이면서 차갑고 부드럽고 느끼는 지각을 말한다. 16보살은 본래 공하여 무상(無相)한 물을 사용하여 무상의 신체에 목욕하는 촉감을 통해서 본래 공함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을 묘촉(妙觸)이라고 한 것이다.

물이 신체에 닿는 촉감의 묘오(妙悟)가 확실하고 선명하게 자각된 지혜작용을 선명(宣明)이라고 말한다. 세존이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은 시각(視覺)과 향엄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청각(聽覺), 그리고 16보살이 목욕하면서 물이 몸에 닿는 인연으로 깨달은 촉각(觸覺) 등이 있는 것처럼, 수행자의 매일 매사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각, 청각, 촉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인연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불자주(佛子住)'란 불자로서 불생불멸인 진여법성을 깨닫고 열반적정의 등각의 지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를 체득한 것을 말한다.

설두는 또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16보살이 묘촉(妙觸)의 체험으로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묘오(妙悟)를 체득했다고 했는데, 선의 수행으로 볼 때 목욕하는 인연으로 수인(水因)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피곤하면 잠잘 때나 지금 여기의 당처에서 불자의 지위(깨달음)에 이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혜작용이 살황자재(殺活自在)의 기용인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종횡으로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면 16보살이 깨달음을 체득한 묘촉선명(妙觸宣明)의 경지를 단적으로 파악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보살의 깨달음은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생사대사의 일대사를 마친 납승은 한사람이라도 좋다." 16명의 보살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선승이라도 출현한다면 충분하다. 사실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인물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긴 좌선상위에 다리 펴고 누웠네." {전등록} 15권 협산선회의 말로 일대사를 마친 한 사람은 {증도가}에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처럼, 부처나 깨달음을 구하는 일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한 생활을 한다. "꿈속에서 원통을 깨달았다 말하나," 16보살이 수인(水因)으로 원통을 깨달았다고 하나 꿈속의 잠꼬대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미혹함의 꿈이나 깨달음이라는 꿈도 깨고나면 모두 텅 빈 空인 것이다. "향수로 씻었다고 해도 얼굴에 침을 뱉으리." 향수로 목욕을 해도 즉 깨달음이라는 냄새(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얼굴에 침을 뱉는 것, 도리어 더러움이 되고 만다.

 

[第078則]忽悟水因
〈本則〉擧。古有十六開士。於浴僧時隨例入浴。忽悟水因。諸禪德作麽生會。他道妙觸宣明。成佛子住。也須七穿八穴始得。
〈頌〉了事衲僧消一箇。長連床上展脚臥。夢中曾說悟圓通。香水洗來驀面唾。

벽암록 78칙 16명의 보살이 목욕하며 깨닫다.

"空한 물로 空한 몸을 씻는 것도 공(空)한 일…"

{벽암록} 제78칙은 {수능엄경}에 나오는 고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여 참구하게 하고 있다.

옛날에 16명의 보살이 있었는데, 스님들을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인연(본질)을 깨달았다. 여러 선덕들이여! 저네들이 미묘한 감촉 또렷이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체득해야 하는가?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擧. 古有十六開士, 於浴僧時, 隨例入浴, 忽悟水因. 諸禪德, 作生會, 他道妙觸宣明. 成佛子住, 也須七穿八穴始得.


나와 물이 하나인 '수아일체(水我一體)'
목욕통해 진리 깨달은 '독각(觸覺)'

본칙은 {수능엄경}제5권 다음의 일단에 의거한 것이다. 발타바라(跋陀婆羅)와 그 도반 16보살[開士]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부처님께 말했다. “저희들은 처음 위음왕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였으며, 스님들이 목욕할 때 차례차례로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물의 원인(水因)을 깨닫고 보니, 때(번뇌)를 씻음도 아니오, 몸(體)을 씻음도 아니며, 중간에서 안연하게 무소유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익힌 숙습(宿習)이 없어지지도 않았으며, 또한 금시에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무학(無學)을 체득하게 되었으며, 피불(彼佛)이 나를 발타바라라고 이름하니 미묘한 촉감(觸)이 선명(宣明)하여 불자의 보살지위(佛子住)를 이루었습니다. 부처님이 원통(圓通)을 질문하시니 제가 증득한 바는 촉인(觸因)이 으뜸이 되겠습니다.”

설두는 {설두송고} 83칙에 이 일단을 요약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16보살(開士)은 발타바라와 같이 수행하는 일행이다. 개사(開士)는 보살의 번역어로 불법의 원만한 깨달음을 자리이타의 보살행으로 실행하는 수행자이며, 대사(大士)라고도 한다. {경음소(經音疏)}에 "개(開)는 통달(達)이며, 밝힘(明)이며, 아는 것(解)이다. 사(士)는 사부(士夫)이다. 경전 가운데 보살이라고 부르며, 개사(開士)라고 한다."고 주석하고 있다. {대보적경(大寶積經)}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에는 "16명의 재가 보살이 있으니 발타바라를 상수(上首)로 한다."는 일절이 있고, {대지도론}에도 "선수(善守,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은 모두 재가의 보살이다. 발타바라 거사는 바로 왕사성의 옛 사람"이라는 일절이 보이는데, 유마거사와 같이 재가의 보살로 잘 알려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원오도 '평창'에 능엄회상에서 발타바라보살이 16명의 보살과 함께 청정한 수행으로 각기 원통법문의 원인(因)을 말했다. "이것은 25원통 가운데 하나이다. 16명의 보살이 목욕시킬 때 평상시처럼 욕실에 들어갔다가 문득 수인삼매(水因三昧)를 깨치고 말했다. '육진(六塵)도 씻지 않았고, 몸도 씻지 않았다.' 말해보라 무엇을 씻었는가?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늘 편안하며, 얻어 가진 것도 없이(無所有) 천만 가지 그 무엇도 가까이 갈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얻은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참다운 반야이다. 만약 얻은 것이 있다면 사이비 반야이다."

수인삼매(水因三昧)는 {수능엄경}에서 말하는 25가지 깨달음(圓通) 가운데 하나인데, 발타바라 등 16명의 보살이 수인삼매를 깨달았다는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본칙에서는 수인(水因)을 깨닫는 지혜를 체득하도록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수인(水因)이란 물의 본질이나 실체, 혹은 물의 속성을 말하는 것으로 본래 독자적인 본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 혹은 불가득(不可得)이며 본래 공(空)한 인연으로 잠시 결합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16보살은 목욕하는 동기에서 이러한 수인(水因)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욕실에서 조용히 몸을 씻는 도중에 물을 아무리 사용해도 물은 그대로 흘러내리며, 어떠한 그릇에도 담기며, 어떤 형체와 독자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법에서 설하는 무자성(無自性)과 물질이 본래 공한 색죽시공(色卽是空)의 경지를 체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로에 제로라는 숫자를 아무리 첨가해도 제로인 것처럼, 본래 공한 물로 공한 신체와 때를 씻는다는 사실 또한 본래 공한 경지인 것이다.

즉, 아상과 인상, 주관과 객관이라는 상대적인 분별심과 자아의식도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본래 공(空)한 물을 사용하여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지금 여기 자신이 물을 가지고 몸을 씻는 목욕하는 일이다. 이것이 주관적인 자기와 객관적인 대상인 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一如)가 된 수아일체(水我一體)이며, 만물일체(萬物一體), 혹은 만법일여(萬法一如)의 경지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이란 번뇌 망심의 분별심이 없이 젓가락(色)으로 무심(空)한 경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며, 공즉시색이란 젓가락을 가지고 식사한다는 의식(분별심)도 없이(空) 무심하게 젓가락과 숟가락 등의 도구(色)를 사용하여 지금 여기 자신의 식사하는 일에 몰입하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여러 선덕들이여! 어떻게 그들 16보살이 체득한 미묘한 감촉으로 또렷이 깨닫고 광명으로 빛나며, 부처님의 아들이 되었네 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경지를 어떻게 체득해야 할 것인가?"라고 {수능엄경}에서 발타바라가 깨닫게 된 인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미묘(妙)함은 불가사의한 경지를 말하며, 감촉(觸)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촉(觸)으로 신체의 감각을 통해서 외부 경계를 받아들이면서 차갑고 부드럽고 느끼는 지각을 말한다. 16보살은 본래 공하여 무상(無相)한 물을 사용하여 무상의 신체에 목욕하는 촉감을 통해서 본래 공함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을 묘촉(妙觸)이라고 한 것이다.

물이 신체에 닿는 촉감의 묘오(妙悟)가 확실하고 선명하게 자각된 지혜작용을 선명(宣明)이라고 말한다. 세존이 새벽에 별을 보고 깨달은 시각(視覺)과 향엄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청각(聽覺), 그리고 16보살이 목욕하면서 물이 몸에 닿는 인연으로 깨달은 촉각(觸覺) 등이 있는 것처럼, 수행자의 매일 매사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시각, 청각, 촉각의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인연이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불자주(佛子住)'란 불자로서 불생불멸인 진여법성을 깨닫고 열반적정의 등각의 지위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은 경지를 체득한 것을 말한다.

설두는 또 "반드시 종횡으로 자유자재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16보살이 묘촉(妙觸)의 체험으로 부처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묘오(妙悟)를 체득했다고 했는데, 선의 수행으로 볼 때 목욕하는 인연으로 수인(水因)을 깨닫는 것이 아니고,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피곤하면 잠잘 때나 지금 여기의 당처에서 불자의 지위(깨달음)에 이르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혜작용이 살황자재(殺活自在)의 기용인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종횡으로 무애자재한 경지가 되면 16보살이 깨달음을 체득한 묘촉선명(妙觸宣明)의 경지를 단적으로 파악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국 보살의 깨달음은 선의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와 같은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생사대사의 일대사를 마친 납승은 한사람이라도 좋다." 16명의 보살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여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칠 수 있는 한 사람의 선승이라도 출현한다면 충분하다. 사실 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인물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긴 좌선상위에 다리 펴고 누웠네." {전등록} 15권 협산선회의 말로 일대사를 마친 한 사람은 {증도가}에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처럼, 부처나 깨달음을 구하는 일도 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한 생활을 한다. "꿈속에서 원통을 깨달았다 말하나," 16보살이 수인(水因)으로 원통을 깨달았다고 하나 꿈속의 잠꼬대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미혹함의 꿈이나 깨달음이라는 꿈도 깨고나면 모두 텅 빈 空인 것이다. "향수로 씻었다고 해도 얼굴에 침을 뱉으리." 향수로 목욕을 해도 즉 깨달음이라는 냄새(향수)에 젖어 있는 것은 얼굴에 침을 뱉는 것, 도리어 더러움이 되고 만다.



벽암록 79칙 투자화상과 부처의 소리

“차별심에 빠진 졸승이 평등심 논하다니”

[第079則]一切佛聲
〈垂示〉垂示云。大用現前。不存軌則。活捉生擒。不勞餘力。且道是什麽人。曾恁麽來。試擧看。
〈本則〉擧。僧問投子。一切聲是佛聲是否。投子云。是。僧云。和尙莫[尸+豖]沸碗鳴聲。投子便打。又問。麤言及細語皆歸第一義。是否。投子云。是。僧云。喚和尙作一頭驢得麽。投子便打。
〈頌〉投子投子。機輪無阻。放一得二。同彼同此。可憐無限弄潮人。畢竟還落潮中死。忽然活。百川倒流鬧[洱+舌][洱+舌]。

벽암록 79칙은 투자산에서 활약한 대동(大同)화상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그렇지." 그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는 주전자에 물이 끓는 소리와 같은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투자화상이 곧장 후려쳤다. 그 스님은 또다시 질문했다. "난폭한 말이나 부드러운 말이 모두 불법의 근본진리로 귀결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그렇지." 스님이 말했다. "화상을 말뚝에 메여있는 당나귀라고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투자화상이 곧장 후려쳤다.

擧. 僧問投子, 一切聲是佛聲是否. 投子云, 是. 僧云, 和尙莫沸碗鳴聲. 投子便打. 又問, 言及細語皆歸第一義. 是否. 投子云, 是. 僧云, 喚和尙作一頭驢得. 投子便打.


본칙의 공안의 출처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연등회요} 제21권, {오등회원} 제5권 투자화상전에 수록하고 있다. 투자화상은 {벽암록} 제41칙 본칙에 조주선사와의 대화에도 등장한 바가 있는데, 단하천연-취미무학(翠微無學)선사의 법은 잇고 서주(舒州) 투자산에서 교화를 펼친 대동(大同, 819~914)선사이다.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제15권에 전하고 있다.

원오스님은 '평창'에서 "투자화상은 소박하고 진실하면서도 많은 사람 가운데서 뛰어난 변재를 발휘했다. 흔히 질문하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하면 곧바로 그의 속을 들여다보아 괜한 힘을 들이지 않고 그의 혀를 꽉 틀어막아 꼼짝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장량(張良)이 천막 안에서 작전을 세워 천리 밖에서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과 같았다"고 평하는 것처럼, 한나라의 명장 장량에 비교하고 있다.

본칙의 대화도 어떤 운수행각하는 스님이 투자화상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서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운문선사도 "일체의 소리는 부처의 소리이며, 일체의 모습은 부처의 모습"이라고 항상 설법했다. 소동파가 읊은 "개울물 흐르는 소리는 곧 부처님의 설법소리이고, 산이 솟아 있는 모양 그대로 부처님의 청정한 법신"이라는 게송이나, {인천안목}에 "소나무에 부는 바람소리 반야를 설하고, 지저귀는 새소리는 진여를 드러낸다"고 읊고 있는 것처럼, 자연의 일체 모든 소리가 부처의 청정법신이며 설법소리이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설법소리, 즉 여래의 법음(法音)이라는 주장은 {법화경}, {수능엄경} 등 여러 경전에서 많이 주장하고 있다.

{관무량수경}에 새들과 나무들이 모두 묘법을 설하고 있으며, {아미타경}에도 아미타불의 국토에는 일체의 모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나, 산들바람이 나무를 흔들며 나는 바람소리가 부처님의 설법으로 법음으로 장엄된 국토라고 설한다. 특히 향엄선사는 기와조각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체득하고, 부(孚) 상좌(上座)는 종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닫게 된 인연을 전한다. 현사는 상당법문을 할 때, 제비가 조잘대는 소리를 듣고 "깊은 반야의 실상을 설하고 훌륭한 법문의 요지를 설한다"라고 설법했다.

그래서 무량종수는 {일용청규}에 "종소리를 듣고 번뇌가 끊어지며, 지혜가 증장하고 깨달음을 이루며, 지옥을 벗어나 삼계를 초월하고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원합니다"라는 게송으로 요약하여 일체 부처의 소리(法音)를 듣고 깨달음을 이루도록 발원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法音)'라는 질문은 {열반경} 제20권 범행품의 게송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투자화상은 "그렇지"라고 긍정하는 대답을 하였다. 그러자 스님은 "화상께서는 주전자에 물이 끓으면서 뜨거운 김이 밖으로 힘차게 새면서 나는 '뿌! 뿌!' 라는 소리가 어찌 부처의 설법소리라고 하십니까? 너무 지나친 엉터리 말씀은 삼가하십시오"라고 비판하는 어조로 말했다. 돈비완명성(沸碗鳴聲)을 방귀뀌는 소리라고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다.

{벽암록} 25칙에 '열완명성(熱鳴聲)'과 같은 말로, {오조법연선사어록}에도 "임제의 고함(喝)은 마치 주전자에 물이 끓는 소리"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자 투자화상은 주장자로 곧장 그 스님을 후려쳤다. 원오는 "잘 쳤다. 그런 놈은 놓아주면 안 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한 스님이 부처의 소리라는 절대평등의 한쪽 면에 집착되어 평등이 곧 차별이며,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전체를 보는 안목 없는 놈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법음 아닌 것이 없는데, 부처의 소리에 집착하고 있다. 주전자의 물끓는 소리나 고양이나 개가 짖는 소리 일체의 차별세계의 모든 존재의 소리가 그대로 부처의 법음이라는 사실을 체득하지 못하고, 차별과 평등을 구분하는 상대적인 견해에 떨어졌기 때문에 후려친 것이다.

그 스님은 또다시 "난폭한 말과 부드러운 말이 모두 불법의 근본진리로 귀결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라고 질문했다. 이 말은 {열반경} 범행품의 "모든 부처님은 항상 부드러운 말씀이나, 중생을 위하여 거친 말씀도 하신다. 거친 말씀과 부드러운 말씀이 모두 불법의 근본(第一義)으로 귀결된다"라는 게송이다. 즉 아무리 난폭하고 나쁜 말을 하거나 공손하고 부드러운 말을 하거나 모두 한결같이 불법의 진리에 계합된 설법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연의 모든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사람의 소리나 짐승의 소리나 무생물의 소리나 모두 부처의 법음이기 때문에 불법의 근본을 설하는 중도(中道) 제일의제(第一義諦) 라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기에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투자화상은 "그렇지"라고 전적으로 긍정하는 대답을 했다. 그 스님은 "일체의 모든 것을 불법의 근본으로 말한다면 화상을 선지식이라고 부르는 대신 말뚝에 메여있는 한 마리의 당나귀라고 불러도 좋습니까?"라고 말했다.

원오는 "송곳 끝이 날카로운 것만 보았을 뿐, 끝이 네모난 것은 보지 못했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나쁜 시각에서 평등(第一義諦)의 한쪽 면을 보고, 차별이 평등인 사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놈이라고 비평한 것이다. 원오는 피를 입에 머금어 남에게 뿌리려다 자기 입이 먼저 더럽혀 졌다라고 평하는 것처럼, 절대 진리라는 평등 한쪽에 치우친 편견에 떨어졌기 때문에 차별이 곧 평등이라는 안목이 없는 졸승이다 보니 남을 공격하면서도 도리어 자신이 중생심에 떨어진 피해를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마치 {사십이장경} 8장에 "나쁜 사람이 현자(賢者)를 해치는 것은 마치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은 것과 같다. 침은 하늘에 도달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 얼굴에 떨어지게 된다.… 현자를 비방하지 말라. 그 재앙은 자기를 멸망시킨다"라는 말과 같다. 안목 없는 엉터리 수행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 그래서 투자화상은 주장자로 후려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투자화상이여!, 투자화상이여!" 투자화상의 대기 대용을 경의심으로 찬탄하며, "선기로 펼친 지혜작용은 막힘이 없네." 마치 수레바퀴라 종횡으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이. '한 번 휘둘러 둘을 얻고,' 스님의 질문에 두 번이나 "그렇지"라는 한마디를 먹이를 던져, 두 번이나 스님의 방망이로 휘둘러 공덕을 펼친(得) 투자화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저기도 이와 같고, 여기도 이와 같네." 두 번의 질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처음은 긍정(放)하고, 뒤에서는 거두(收)는 방편을 사용했다. "가련하다. 험난한 파도를 타고 넘나드는 무수한 사람들이 결국 파도에 밀려 떨어져 죽는 구나." 투자화상의 높고 험준한 선풍은 천하에 알려져, 많은 수행자가 구경하러 몰려오지만, 안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모두 투자의 지혜풍랑에 밀려 비명의 최후를 맞이했다.

"홀연히 되살아나면, 백 천의 많은 강물이 콸 콸 콸 거꾸로 흐르게 되리라." 아상과 인상, 고정관념과 편견을 텅 비우고 지혜의 안목을 갖춘다면, 일체의 만법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사람이 되리라.

 

[第080則]急水上打毬
〈本則〉擧。僧問趙州。初生孩子。還具六識也無。趙州云。急水上打毬子。僧復問投子。急水上打毬子。意旨如何。子云。念念不停流。
〈頌〉六識無功伸一問。作家曾共辨來端。茫茫急水打毬子。落處不停誰解看。

벽암록 80칙 조주화상과 어린애의 육식

"어린애 육식은 흐르는 물처럼 머뭄이 없어"


{벽암록} 제80칙은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갓 태어난 어린애도 육식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는 대화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갓 태어난 어린애도 안, 이, 비, 설, 신, 의, 육식을 갖추고 있습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치는 것과 같다." 그 스님은 다시 투자화상에게 질문했다. "쏜살같이 급히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투자화상이 말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한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擧, 僧問趙州, 初生孩子, 還具六識也無. 趙州云, 急水上打毬子. 僧復問投子, 急水上打毬子, 意旨如何.

본칙의 공안은 {조주록} 중권에 수록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벽암록}에 자주 등장한 당대의 유명한 조주종심(778~897)선사이다. 어느 날 조주화상을 참문하러 온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갓 태어난 어린애도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안식(眼識)과 귀로 소리를 인식하는 이식(耳識), 혀로 맛을 인식하는 설식(舌識), 몸으로 촉감을 인식하는 신식(身識), 의지로 사물을 인식하는 의식(意識)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갓 태어난 어린애도 인간이기 때문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이 구족한 것이고, 육근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육근의 외부대상인 여섯 가지 경계(六境), 즉 눈으로 사물의 모양(色)을 보고 다양한 사물의 모양과 색깔을 인식하며, 귀로 소리를 듣고 소리의 내용을 인식하고 판단하며, 코로 냄새를 맡고 향기를 인식하며, 혀로 음식의 짜고 신맛 등을 인식하며, 몸의 감촉을 받아서 부드럽고 딱딱한 느낌 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활동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을 받아들여 눈, 귀 코, 혀와 몸의 다섯 가지 인식의 문을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이 전오식(前五識)의 문을 통과하여 들어온 것을 모두 받아 들여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 제6식인 의식(意識)인데, 느낌이 좋고 나쁘고, 얼굴모양이 예쁘고 밉고, 깨끗하고 더럽다는 여러 가지 현상(法)을 인식하게 된다.

질문한 스님은 갓 태어난 어린애도 사물의 좋고 나쁨을 인식하는 제6식인 의식(意識)을 갖추고 있는지 묻고 있다.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배경은 육조혜능이 대유령 고개에서 혜명상좌에게 최초로 설한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말라. 선과 악을 모두 함께 생각하지 말라.'고 법문하면서 많은 선승들이 일체의 선과 악은 물론 사량 분별을 절단하고 무심의 경지가 되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심(無心)이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텅 비워버리고 번뇌 망념이 없는 본래의 청정한 마음인데, 이러한 무심의 경지를 어린애의 마음과 같이 순수하게 하라는 주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불교 교학의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주화상에게 '갓 태어난 애도 육식을 갖추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는 6식을 갖추고 있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가 있다. 그러나 육진을 분별하지 못하여 좋고 나쁨과, 길고 짧음, 옳고 그름, 이득이 되는지 손실이 되는지 전혀 모른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갓 태어난 어린애처럼, 영예, 오욕, 공명, 거름과 수순(逆情順境)이 동요시키려고 해도 동요되지 않아야 한다. 눈으로 모양(色)을 봐도 장님처럼, 귀로 소리를 들어도 귀머거리처럼, 마음이 수미산과 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경전에서 문수동자나 선재동자를 비롯하여 {십우도}에서 소를 찾는 구법자를 동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어린애의 천진성과 순수성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을 초월한 경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석실선도(石室善道)선사의 법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그대들은 들어보지 못했는가? 어린애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일찍이 나는 부처의 가르침을 안다고 말하더냐? 이 때는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점점 크면서 갖가지 지식과 이해를 배워서, '나는 불법을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객진 번뇌인줄 모른 것이다. 16관행(觀行) 가운데 어린애의 무심한 행동(兒行)을 으뜸으로 여긴다. 어린애가 울 때는 우는 그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 분별과 취사선택의 마음을 여읜 것에 비유한다. 그러므로 어린애를 찬탄하여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어린애를 도(道)라고 한다면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 스님의 질문은 갓난애가 6식을 갖추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던져서 조주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조주화상이 만약 '있다'라고 대답하면 왜 어린애는 좋고 나쁨 등에 대한 분별과 판단이 없는가? 라고 힐문할 것이고, '없다'라고 대답하면, 왜 울고 웃고 하는가? 반문하려고 할 것이다. 조주화상은 '쏜살같이 급히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치는 것과 같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어린애가 육식을 갖추고 있다는 말도 아니고, 갖추고 있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원오가 '지났다'라고 착어한 것처럼, 눈 깜박 하는 사이에 있다 없다라는 분별심을 초월하고 자취나 흔적도 없이 지나갔다. {능엄경}의 말에 '급류의 물을 바라보면, 편안하고 고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급히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이 끊어짐이 없이 흐르면서 흐르는 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만법이 모두 물이 흐르는 것과 같고, 어린애의 마음도 물이 흐르는 것처럼, 단지 시절인연에 따라 여여하게 흐를 뿐이다. 그 스님은 조주화상의 이 말에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투자화상을 찾아가 질문했다. "조주화상이 쏜살같이 흐르는 강물 위에 공을 치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급류 위에서 공을 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투자화상은 "한 생각, 한 생각이 한 순간도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과 똑같은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인데, 일념 일념이 서로 이어져 상속(念念相續)하면서 일체의 차별경계에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고 흐르고 있는 무심의 입장을 말한다. 원오도 '어린애의 육식이란 인위적인 꾸밈(功用)이 없지만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인위적인 꾸밈(功用) 없는 어린애의 6식에 대해서 질문하니,' 스님은 6정(六情)의 망념이 작용하지 않는 무공용처(無功用處)를 질문한 것인데, 6식의 인위적인 분별의식이 없는 육식의 인식 작용 그대로가 무공용인 것이며, 분별의식이 없이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는 것이다. 원오는 무공용의 모습을 거울이 무심하게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착어하고 있다. '두 작가가 모두 질문자의 핵심을 파악해 버렸네' 조주와 투자화상 이 두 작가는 갓난애의 육식에 관한 견해를 질문한 핵심을 곧바로 파악했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흐르는 급류에 공을 친다고 했고, 투자화상은 한 생각 한 생각 머무름이 없다고 대답하여 갓난애의 육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한 것이다. '아득한 급류에서 공을 치니' 이 말은 조주화상의 대답을 게송으로 읊은 것인데, 망망(茫茫)은 끝이 없이 아득하여 광대한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아득하고 급히 흐르는 급류의 물줄기에 공을 치는 무심(無功用)의 일구를 던진 것이다. 또한 급히 흐르는 물줄기는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으며 그냥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급류에서 공을 친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이렇게 대답한 조주화상이나 설두화상의 견해도 다시 한번 점검해 봐야 한다고 원오는 비판하고 있다. '행방(落處)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그 누가 알랴!' 투자화상은 한 생각 한 생각 머무름이 없이 흐른다고 했는데, 그 한 생각 한 생각이란 어떤 것이며,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머무르지 않는가? 그 행방(落處)을 추궁하면 누구라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알았다고 해서 불법의 진의를 체득한 것은 아니다.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4 

 

벽암록(7) 61칙 ~ 70칙

벽암록 61칙 풍혈(風穴)화상의 한 티끌(一塵) 마음 한티끌로 지옥도 만들고 천당도 만들어 {벽암록} 61칙은 풍혈화상이 한 티끌을 세운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대중에게

kr.buddhism.org

 

[第061則]若立一塵
〈垂示〉垂示云。建法幢立宗旨。還他本分宗師。定龍蛇別緇素。須是作家知識。劍刃上論殺活。棒頭上別機宜。則且置。且道獨據寰中事一句作麽生商量。試擧看。
〈本則〉擧。風穴垂語云。若立一塵。家國興盛。不立一塵。家國喪亡。雪竇拈拄杖云。還有同生同死底衲僧麽。
〈頌〉野老從敎不展眉。且圖家國立雄基。謀臣猛將今何在。萬里淸風只自知。

벽암록 61칙 풍혈(風穴)화상의 한 티끌(一塵)

마음 한티끌로 지옥도 만들고 천당도 만들어


{벽암록} 61칙은 풍혈화상이 한 티끌을 세운 법문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대중에게 법문을 제시하였다.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 설두화상이 주장자를 들고서 말했다. '함께 생사(生死)를 함께 할 납승이 있는가?'”

擧. 風穴垂語云, 若立一塵, 家國興盛, 不立一塵, 家國喪亡.(雪竇拈杖云, 還有同生同死底衲僧.)


욕심 한 티끌 세우면 번뇌 일어나
마음을 비우면 근심걱정도 사라져

풍혈화상은 임제 문하의 제4세로서 남원혜옹(南院慧)의 법을 계승한 연소(延沼. 896~973)선사인데, 여주 풍혈산에서 교화를 펼쳤기 때문에 풍혈화상이라고 불렀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 13권과 {광등록} 15권, {오등회원} 11권 등에 전하고 있고, {벽암록} 제38칙 '풍혈화상의 철우(鐵牛)'에 등장한 바가 있다. 본칙의 공안은 {광등록} 제15권 풍혈전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혈선사가 상당법문했다.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지만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고(蹙),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만 백성은 무심하여 편안(安貼)하다'" 풍혈화상의 상당법문은 역설적인 입장에서 설법한 것인데, 설두중현선사가 취사선택하여 긴요한 문제만을 제시하여 수행자들이 이 공안을 통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당설법으로 설한 수어(垂語)를 수시(垂示), 수계(垂誡), 수훈(垂訓)이라고도 하는데, 안목이 있는 선승이 학인들을 위하여 불법을 교시하는 말씀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수시의 법문에는 선문답이 아니기 때문에 스승과 학인과의 빈주(賓主) 문답이 없고 각자가 주인이 되어야 한다.

풍혈화상이 어느 날 대중을 위한 법문으로 "만약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한다"라고 설했다. 한 티끌은 일진(一塵)으로 미세한 먼지를 말한다. {벽암록} 19칙 구지화상의 한 손가락을 세우는 법문에 "한 티끌(一塵)을 들면 대지가 수용하고, 한 꽃(一花)이 피면 세계가 흥기한다"라는 말은 화엄철학의 '법성게'에서 설하는 "한 미세한 티끌에 시방세계를 포함한다(一微塵中含十方)"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도리를 설한 것이다. 풍혈화상은 한 티끌이 일어나는 것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같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국가에 한 사람의 훌륭한 인재나 영웅호걸이 배출하면 도탄에 빠진 인민의 고통을 구제하고 국가가 흥융한 사례는 역사를 통해서 많이 볼 수 있다. 풍혈화상의 설법은 이러한 국가의 문제를 화두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흥망성쇠를 비유하여 선의 정신을 설하고 있다. 즉 마음에 미세한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선악(善惡)과 범성(凡聖)의 차별심이 일어나게 되고, 지옥이 건립되고 천당도 건설된다. 한 생각의 번뇌망념에는 부처도 있고, 중생도 있으며, 인간세계나 아귀의 세계같이 육도의 윤회세계도 만들어 진다. 무명의 한 생각이 팔만사천의 번뇌망념으로 미친 듯이 번창하는 모습을 국가가 흥성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원오는 "나는 법왕이 되어 법에 자유자재하다. 꽃도 수북하고, 비단도 수북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풍혈화상이 한 티끌(一塵)을 건립한 것처럼, 국가가 흥성하거나 멸망하거나 그것은 법왕인 풍혈화상의 자유다. 풍혈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한 생각의 번뇌망념이 일어나면 번뇌의 마음가짐과 마음먹기에 따라 지옥도 만들고 극락도 건립할 수다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풍혈화상의 법문은 일체를 놓아 버린 방행문(放行門)의 교화방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티끌을 세워 국가흥융을 이루는 것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국가가 망한다'는 전연 반대의 입장을 제시한 파주문(把住門)에서 선의 실천정신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천차만별의 일체 경계를 철저하게 소탕하고 인정하지 않는 불심의 본체에서 절대평등의 세계를 제시한 것이다.

즉하나의 미세한 번뇌망념도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속에 어떠한 경계도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황제도 서민 농부도, 범부나 성인, 고락(苦樂), 미오(迷悟), 선악(善惡), 미추(美醜) 등의 일체 차별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화엄오교장}에 "한 생각의 번뇌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부처(一念不生名爲佛)"라고 한 그 경지이다. 원오는 "자취를 쓸어 없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망념의 흔적과 자취까지 완전히 없애버린 경지이다. 나라가 멸망한다는 '상망(喪亡)'은 자취나 종적도 없어진 것을 표현한 말이다. 번뇌망념이 없는 깨달음의 자취까지 텅 비워버린 경지이다. 원오는 "눈동자를 잃고 코(鼻孔)의 생명도 잃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천차만별의 차별경계를 보는 눈도 상실해버리고, 냄새를 맡는 코도 기능을 잃고, 소리를 듣는 귀도, 맛을 보는 혀도, 주관의 마음도 객관의 대상인 사물도 일체 모두를 멸각했다는 의미이다.

하나의 미세한 번뇌망념도 없어진 경지는 어떻게 되는가? 원오는 "일체처가 광명(光明)"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근원적인 본래심(本地)에서 풍광(風光)이 일어나고, 대도의 광명(光明)이 현성한다는 의미이다. 완전한 건강은 약이나 치료의 문제는 물론, 병이 다 완치되었다는 의식까지 없어지고 무심한 경지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말한다는 것은 사실 국가의 비상사태인 것이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태평 시절은 원오가 "국가를 언급해서 무엇하려고?"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라고 하는 말도 의식도 완전히 없어진 경지이다. {광등록} 풍혈의 설법에 "한 티끌을 세우면 나라가 흥성하지만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고, 한 티끌을 세우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지만 백성은 무심하여 편안하다"라는 법문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요순황제의 시대처럼, "해가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집에 와서 쉰다. 목마르면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고 씨 뿌려 곡식을 만들어 먹는다. 황제의 권력이 나에게 아무 소용없다"라고 노래한 것과 같다. 원오는 '수시'에 "성왕이 홀로 왕궁(中)에서 천하를 다스리는 일"로 표현했다. 풍혈화상의 선풍은 임제의 가풍을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의 본분사의 일을 무심의 경지에서 살고 있도록 제시한 법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뒤에 설두화상은 여러 사람들에게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이 주장자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설두가 제시한 주장자는 자기 자신이며, 온 천지와 우주와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법석의 납승과 대중, 설두나 풍혈, 뿐만 아니라 일체의 모두가 주장자와 함께 살고 함께 죽지 않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설두는 주장자를 가지고 풍혈화상의 한 티끌을 세우고 세우지 않는 입장, 흥성(興盛)과 상망(喪亡)의 두 가지 차별적인 입장을 지양하고 도리어 나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사람을 찾고 있다.

설두는 국가 흥성의 건립문(建立門)에서 중생교화의 입장으로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시골 늙은이가 설사 구겨진 이맛살을 펴지 않는다 해도" 국가를 발전시키고 문화시설과 국방예산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금을 올리고 많은 법칙과 규제를 시행한다. 따라서 시골 농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는 말이다. 수행자들을 위해 많은 법문과 잔소리를 한다는 말이다. '국가의 웅대한 터전을 세우고자 하는데' 국가의 발전을 위한 국책사업을 펼치기 위해서는 농부의 빈축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풍혈화상이 중생을 위해 다양한 방편법문으로 대기대용을 펼친 것이라는 의미이다. "지모 있는 신하들과 용맹스러운 장수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설두의 주장자 법문을 읊은 것으로, 지금 국가 흥성과 국책사업에 천자를 보필할 신하처럼, 훌륭한 수행자는 있는가? "만 리에 맑은 바람이 부니 자연히 알게 되리라." 요즘 세상에는 좋은 납승이 없지만, 설두 주장자의 살아있는 법문을 멀리 청풍(淸風)은 알리라.

 

[第062則]中有一寶
〈垂示〉垂示云。以無師智。發無作妙用。以無緣慈。作不請勝友。向一句下。有殺有活。於一機中。有縱有擒。且道什麽人曾恁麽來。試擧看。
〈本則〉擧。雲門示衆云。乾坤之內。宇宙之間。中有一寶。祕在形山。拈燈籠向佛殿裏。將三門來燈籠上。
〈頌〉看看。古岸何人把釣竿。雲冉冉。水漫漫。明月蘆花君自看。

벽암록 62칙 운문화상과 하나의 보물(雲門一寶)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은 인간의 불성”


{벽암록} 제62칙은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하나의 보물에 대하여 설한 법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화상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등불(燈籠)을 들고서 불전(佛殿)을 향해 가고, 삼문(三門)을 들어서 등불(燈籠)위로 올려놓았다."

擧. 雲門示衆云, 乾坤之內, 宇宙之間, 中有一寶, 秘在形山. 拈燈籠向佛殿裏, 將三門來燈籠上.


'삼문을 등불위에 올려놓다'는
'크다 작다' 분별을 초월한 경지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 중권의 법문(垂示 代語)에 보이며, {굉지송고} 92칙에도 인용하여 설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법문은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승조(僧肇)의 저술로 알려진 {보장론(寶藏論)} '광조공유품(廣照空有品'의 한 절을 인용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승조법사는 서천 27조 반야다라 존자의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렀는데, 어느 날 난을 만나 사형을 당하게 되었을 대 7일간의 여가를 얻어 {보장론}을 저술하였다. 운문화상은 {보장론} 가운데 네 구절을 제시하여 설법하기를 '어째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물이 음계(陰界) 속에 숨겨져 있는가' 라고 묻고 있다. {보장론}의 내용은 존문의 말들과 일치되고 있다.”

승조법사는 구마라집 문하의 이해(理解)제일의 제자로서 {조론}과 {주유마힐경} 10권의 저술이 있다. {보장론}은 8세기 후반의 저술인데, 승조에 가탁한 작품이다. 운문화상이 인용한 {보장론}의 일절은 동산양개선사도 {조당집}제6권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육체(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신령스러운 광명은 안과 밖이 텅 비었네. 적막하여 그 본체를 볼 수 없고, 그 위치는 그윽하여 파악 할 수가 없다.' 단지 자기에게서 찾아야지 다른 물건을 빌려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하늘과 땅 사이, 우주 가운데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 '하늘과 땅(乾坤)'은 천지(天地)이며, 우주(宇宙)에 대하여 위는 천(天)이고 아래는 지(地)를 우(宇)라고 하고, 고왕금래(古往今來)를 주(宙)라고 하는 것처럼, 우(宇)는 공간, 주(宙)는 시간을 말한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시방이라는 무한의 공간과 삼세라는 무한의 시간이 전개하는 그 가운데 귀중한 하나의 보물이 있으니 형산(形山)에 감추어져 있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형산(形山)은 인간의 육체를 말한다. 천지에 충만하고 있는 하나의 보물은 우주의 본체이며 진여, 혹은 법성(法性),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광대무변한 진여 법성은 우리들 인간의 본심이며 본성인 것이고, 경전에서는 불성이라고 한다.

{전등록}6권에 마조선사가 혜해에게 "지금 나에게 질문한 것이 바로 그대의 보배(寶藏)"라고 설하고 있다. 즉 중생심은 윤회의 고통을 초래하는 업장을 만들지만, 불성의 지혜작용은 무진장한 보배이며 보물과 같이 값진 삶을 만드는 창조적인 것이다. {원각경}에도 불성의 지혜작용을 여의보주(如意寶珠), 마니보주에 비유하고 있으며, {법화경}에도 상투속의 보물(珠)로 비유하고 있다. {전등록} 18권에 현사는 "온 시방세계가 바로 하나의 밝은 구슬(一顆明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성을 보물에 비유한 말은 {조당집} 5권에 운암선사가 "문으로 쫓아 들어온 것은 보배가 아니다"고 설하고 있다. 육근의 문으로 들어온 보배는 경전과 선승들의 설법을 통해서 들은 언어 문자의 법문을 말한다. 이러한 법문의 내용을 마음으로 깊이 사유하여 깨닫고, 언어 문자의 지식을 지혜로 전환시켜 자신의 무진장한 보배로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살림살이(지혜)로 만들지 않으면 인연 따라 곧 문을 통해서 나가버리게 되고 만다. 참선수행은 지식으로 전해들은 경전의 말씀과 선승들의 법문을 깊이 사유하고 관찰하여 자신의 지혜로 만드는 수행인 것이다. 경전이나 어록의 법문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면 문제의식이 남게 되며, 이 문제의식이 의심인 것이다. 간화선은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선문답을 깊이 사유하여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반야의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수행이다.

원오는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라는 말에 '찰(). 점(點)'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찰()은 정말 형산에 감추어져 있는가. 분명히 확인해 보자라는 말이고, 점(點)은 감추어져 있는 그 곳을 점검해 버린 것을 착어한 것이다. 그러나 운문화상은 원오의 착어보다도 더 강하게 점검하도록 "등불(燈籠)을 들고서 불전(佛殿)을 향해 가고, 삼문(三門)을 들어서 등불(燈籠)위로 올려놓았다"고 설하고 있다. 등불을 들고서 불전을 향해 간다고 하는 말은 하나의 보물이 형산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바꾸어서 말한 것이다. 하나의 보물이 형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상당히 신비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사량분별이 따른다. 그래서 운문은 무심한 등불을 무심한 불전에 봉납(奉納)한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생각 할 것도 없고, 사량 분별도 따르지 않고, 청정무애하고 자유자재한 경지를 설한 것이다. 즉 육체를 불전과 같이 보고, 등불이 불빛을 비추는 것과 같이 심성(心性)을 본다면 우주의 본질인 불법의 대의를 체득 할 수가 있다고 설한다.

'삼문(三門)을 등불(燈籠)위에 올려놓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삼문(三門)은 사찰에 들어가는 산문(山門)으로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 또는 무작(無作)의 삼해탈문(三解脫門)을 말하는데, 그렇게 큰 삼문(三門)을 불전의 등불 위에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불전은 대(大), 등불은 소(小), 삼문(三門)은 대(大), 등불은 소(小)로서 대소의 차별을 초월한 경지에서 대소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하여 원융무애한 불가사의 해탈의 경지를 구체적인 사물을 제시하여 설하고 있다. {유마경} 불가사의 해탈법문에 수미산이 겨자씨에 들어가고, 사해의 바닷물이 한 터럭 구멍에 들어간다고 설하고 있는 내용이다. {보장론}에서 이론적으로 설한 법문을 구체적인 사물인 삼문(三門)과 등불이 불전 가운데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보물인 불성이 육체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불가사의한 경지를 비유로 설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살펴보고, 살펴보라!” 설두는 무엇을 '살펴보라'고 하는가? 운문화상이 설법한 것처럼, 각자가 육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보물을 살펴보라고 한 것인가? 원오는 "높이 눈을 떠라"고 착어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하나의 보물은 범부의 차원 낮은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을 갖춘 정문(頂門)의 눈으로 잘 살펴봐야 한다. 대소(大小), 범성(凡聖)의 차별의 눈과 사량분별하는 정식(情識)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옛 언덕에 어떤 사람이 낚싯대를 잡고 있는가?” 운문화상은 승조법사의 말을 낚시에 매달아 고기먹이로 하여 대중에게 시중법문의 낚싯대를 던지고 있다. 마치 태공망(太公望)이 강 언덕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운문화상도 선(禪)의 바다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큰 고기를 낚으려고 한 것이다. 원오가 '수시'에서 말한 것처럼, 옛 언덕(古岸)은 대소(大小)나 범성(凡聖)의 차별을 초월한 무심(본래심)의 경지에서 무연(無緣)의 자비심으로 청하지 않은 벗이 되어 무작(無作)의 묘용(妙用)으로 낚싯대를 던진 운문의 마음을 칭찬하고 있다. “구름은 뭉게뭉게. 물은 넘실넘실” 이 말은 옛 언덕(깨달음의 경지)을 읊은 것인데, 구름과 물과 같이 운문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한한 자비심의 지혜작용(묘용)을 펼친 것이다. 또한 사람들 모두가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무심의 경지에 작용하고 있음을 말한다. “밝은 달 갈대꽃을 그대야 스스로 살펴보라!” 달빛도 희고, 갈대꽃도 흰 색이지만, 잘 살펴보면 명월(明月)은 명월의 빛이 있고, 갈대꽃은 갈대꽃의 색이 있다. 형산(形山)과 하나의 보물, 육체와 마음, 등불과 산문이 같은 것 같지만 다른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운문의 설법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第063則]南泉斬猫
〈垂示〉垂示云。意路不到。正好提撕。言詮不及。宜急著眼。若也電轉星飛。便可傾湫倒嶽。衆中莫有辨得底麽。試擧看。
〈本則〉擧。南泉一日東西兩堂爭貓兒。南泉見遂提起云。道得卽不斬。衆無對。泉斬貓兒爲兩段。
〈頌〉兩堂俱是杜禪和。撥動煙塵不柰何。賴得南泉能擧令。一刀兩段任偏頗。

벽암록 63칙 남전화상과 고양이 살해사건

“고양이 절단한건 선승들의 분별망상 절단”


{벽암록} 제63칙은 남전화상이 칼로 고양이를 절단한 사건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남전화상은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참살하지 않겠다." 대중들은 말이 없었다.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擧. 南泉一日, 東西兩堂, 爭猫兒,南泉見. 遂提起云, 道得卽不斬. 衆無對. 泉, 斬猫兒爲兩段


엉터리 선승들 고양이로 다투자
지혜의 칼 휘둘러 분쟁근원 잘라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화상은 마조도일선사의 제자로서 {조당집} 제14권, {전등록} 제6권 등에 자세한 전기를 전하고 있으며, {어록}도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의 속성은 왕씨로 왕노사(王老師)라고 불리며, 안휘성 귀지현의 남전산(南泉山)에서 행화를 펼쳤다. 문하에 조주종심, 장사경잠, 육응대부 등 뛰어난 선승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후대에 마조문하의 서당지장, 백장회해와 함께 3대선승(三大禪僧)으로 주목되고 있다.

{벽암록}에는 63칙, 64칙으로 나누어서 싣고 있는데, {무문관} 14칙, {굉지송고} 9칙에도 수록하고 있는 유명한 공안이다. 본 공안의 출처는 {조주록} 상권, {전등록} 제8권 남전장에도 전하고 있는데, {조당집} 제5권 덕산장에 본 공안의 원형으로 간주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전화상 문하에 제일수좌(第一首座)가 고양이를 길렀는데, 옆에 있는 스님이 고양이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이로 인해 싸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남전화상에게 아뢰니 화상이 당장 내려와서 고양이를 번쩍 들고 외쳤다. '누군가 한마디(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궁극적인 일구) 말할 수 있으면 이 고양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대중 가운데 대답하는 이가 없자 남전화상은 칼을 들고 고양이를 두 토막으로 잘라 버렸다. 설봉이 이 이야기를 들어서 덕산선사에게 질문했다.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벤 뜻이 무엇입니까?' 덕산선사는 설봉을 밀어내면서 때리니 설봉이 달아났다. 이에 덕산선사는 다시 설봉을 불러 세우고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그토록 애썼는데 그대는 모르는 구나 !' 덕산선사가 암두에게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것을 잘 지니는 것이 좋겠다.' '이미 모르거늘 잘 지닐 것이 무엇입니까?' 이에 덕산이 말했다. '그대는 마치 무쇠 말뚝 같구나!'"

이 이야기와 똑 같은 구조의 선문답으로 {백장광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조화상이 사람을 시켜서 편지와 간장 항아리 세 개를 보내왔다. 백장스님은 법당 앞에 나란히 놓아두라고 지시하고, 법당에 올라 설법(上堂)할 대에 대중이 모이자. 주장자로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누군가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말을 한마디한다면 이 항아리를 깨뜨리지 않을 것이요, 말하지 못하면 곧 깨뜨릴 것이다.' 대중이 말이 없자, 백장스님은 곧장 항아리를 깨뜨리고 방장으로 되돌아갔다.” 또 {오등회원} 제9권 앙산장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앙산스님은 스승 위산화상이 하나의 거울을 보내온 인연에 대하여 거울을 받아 들고 상당 설법하였다. '자! 말해보게나! 이것은 위산의 거울인가? 앙산의 거울인가? 만약 위산의 거울이라고 한다면 앙산의 손 가운데 있고, 만약 앙산의 거울이라면 이것은 위산이 보내준 것이다. 말할 수 있으면 타파하지 않겠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타파해 버리겠다.' 세 번이나 질문했지만 대중이 말이 없자, 앙산은 드디어 거울을 깨뜨려 버렸다.”

남전화상은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원오가 "이것은 오늘만 시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선원의 수행자들은 항상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고 시비 분별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수행자들이 동서로 나누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는 모습을 본 남전화상은 참고 볼 수가 없어서 곧장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자! 그대들이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참살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수행자인데, 무엇 때문에 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가. 수행자라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정법의 안목으로 자신의 지혜로 한마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무문관}에는 "정법의 안목으로 생사대사의 본분사를 해결한 지혜의 말을 한다면 이 고양이를 살려 주지만 말하지 못한다면 고양이를 절단해버리겠다"고 하였다. 원오는 "이 노인 용과 뱀을 구분하는 수단이 있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남전의 한마디는 지혜로 판단하는 안목이 있다. 원오가 '수시'에 "의식이 길이 이르지 못한 경지(意路不到)"라고 말한 것처럼, 언어 문자로 엿볼 수 없는 경지를 체득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시한 것이다. 대중 가운데 남전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남전이 절단한 것은 단지 고양이뿐만 아니라 동당 서당 선승들의 논쟁한 그 핵심을 절단한 것이며, 선승들의 분별 망상을 절단한 것이며, 아상(我相) 인상(人相)의 근원을 끊어버리고 일체 무명의 근본을 절단해서 펼쳐 밝힌 것이다. 원오도 "통쾌하고 통쾌하다"라고 착어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남전이 왜 고양이를 절단했는가, 불쌍한 고양이를 죽일 필요가 있었겠는가하는 점이다. 남전은 스스로 축생의 경계에 떨어져 불도를 실행하도록 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설법을 설한 선승으로도 유명한데, 축생도(畜生道)에서는 축생으로 응현하여 불법을 수행하도록 하는 남전화상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은 살생과 불살생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고양이를 절단한 남전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동당 서당 양쪽 승당엔 모두 엉터리 선승들(杜禪和)” 양쪽 승당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다투는 시비 분별에 떨어진 수행자들이라고 심하게 꾸짖는 말이다. 두선화(杜禪和)는 두묵(杜)이라는 시인이 운율에 맞지 않고 격식에도 틀린 엉터리 시를 지었기 때문에 두선(杜撰)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이 말을 토대로 하여 수행자의 본분을 상실하고, 격식과 품위도 없이 제멋대로 놀고 있는 엉터리 선 수행자(禪和子)들 뿐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봉화의 연기와 티끌(煙塵)만 일으킬 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연진(煙塵)은 랑연(狼煙)으로 봉화의 연기와 마진(馬塵)으로 말이 달리면서 발굽에서 일어나는 티끌을 말한다. 즉 전쟁터에서 사건이 일어난 상황을 말하는데, 천하태평으로 여유 있게 자기의 일대사를 규명하는 본분사의 수행에 몰입하였다면 좋았는데,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분쟁이 일어났다는 상황을 읊고 있다. 불법 문중에서 바람없이 풍랑을 일으키고, 불조의 생명인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망각한 일이었다. 그런데 분쟁의 당사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남전의 질문에 대답도 못하여 고양이를 살해하는 큰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다행히 남전화상이 법령을 실행하였으니.” 다행히 남전화상과 같은 능력있는 선승이 출현하여 불조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실행하고 분쟁의 근원과 망상의 뿌리를 일소하였기 때문에 사건은 해결된 것이다. 만약 남전화상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바보같은 선승들이 지옥에 떨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영원히 번뇌 망상의 먼지만 일으키는 사량분별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칼에 고양이를 두동강이로 절단하는 쪽(偏頗)을 선택했다.” 편파(偏頗)는 {서경(書經)}의 말로서 공정하지 못하고 한 쪽에 치우친 판단을 말한다. 즉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절단하여 죽이는 행동을 선택한 것을 말한다. 선은 양쪽의 의견을 절충하여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양쪽 머리의 뱀을 보는 자는 죽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양쪽의 머리를 모두 함께 절단하고 양변의 차별심을 초월하는 지혜작용을 펼치는 것이다. 남전의 일도양단(一刀兩斷)은 불조의 정법을 실행한 지혜의 칼을 휘두른 것이다.

 

[第064則]草鞋頭戴
〈本則〉擧。南泉復擧前話。問趙州。州便脫草鞋。於頭上戴出。南泉云。子若在。恰救得貓兒。
〈頌〉公案圓來問趙州。長安城裏任閑遊。草鞋頭戴無人會。歸到家山卽便休。

벽암록 64칙 조주화상이 짚신을 머리위에 올려놓다

“조주의 '머리위 짚신'은 전도몽상 비판 의도”


{벽암록} 제64칙은 남전화상이 고양이 살해사건에 대하여 조주선사의 의견을 묻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남전화상은 다시 앞에 있었던 사건(고양이 살해사건)을 조주선사에게 이야기 한 뒤에 조주선사에게 묻자, 조주선사는 곧장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남전화상은 말했다. “그대가 그 때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擧. 南泉復擧前話 問趙州. 州便脫草鞋 於頭上戴出. 南泉云 子若在 恰救得猫兒.


고양이 시비 끼어들지 않으려고
조주화상, 문밖으로 나가버려…

본칙은 {벽암록} 제63칙의 이야기가 연결된 것으로 사건의 후반 부분이다. 남전화상이 조주선사에게 앞의 이야기를 제시하였다고 한 것은 63칙에 제시한 사건을 말한다. 즉 '어느 날 선원의 동당(東堂)과 서당(西堂)의 선승들이 고양이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을 본 남전화상은 고양이를 잡아들고서 말했다. “불법을 체득한 지혜의 안목으로 생사대사를 해결한 궁극적인 한마디(一句)를 말할 수 있으면 고양이를 죽이지 않겠지만,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 고양이를 참살하겠다.” 대중들은 말이 없기에 남전화상은 칼로 고양이를 두 동강이로 절단해 버렸다.' {무문관} 14칙에는 한 칙의 공안으로 수록하고 있다.

{불유교경}에 "축생을 기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선원이나 사찰에서 짐승을 기르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당대의 선원에서는 곡식을 탕진하는 쥐를 잡기위해 고양이를 길렀다. 선원에서 일대사(一大事),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구도자들이 한 마리의 축생인 고양이 경계에 떨어져 생사망념(生死妄念)에 허덕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남전화상은 제자들을 각성시키는 교육을 위해서 부득이 고양이를 죽이고 있다. 즉 남전화상은 동서(東西) 양당(兩堂) 수행자들의 생사망념과 차별심, 분별심을 끊어버리도록 부득이 고양이를 죽이면서까지 행동으로 보여준 절실한 교육이었으며, 생사망념을 끊는 지혜의 살인도(殺人刀)를 휘두른 것이었다. 자기를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이와 똑같은 생사문제를 고양이를 제시하여 수행자들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출가하여 생사대사(生死大事)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 신명(身命)을 내 걸고 수행해야하는 수행자들이 자신의 본분사를 망각하고 고양이라는 경계에 끄달려 자신을 망각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지혜의 살인도로서 일체 생사망념을 차단하는 행동을 단행한 것이다. 남전이 고양이를 죽인 것은 전도몽상에 허덕이고 생사망념에 떨어진 학인들과 구도자들의 생사망념의 근본을 끊어 버린 행위이다.

저녁때 외출했다가 돌아온 제자 조주종심은 스승인 남전화상에게 사찰로 돌아온 인사를 하자 남전화상은 낮에 있었던 고양이 참살사건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조주선사에게 “만약 그대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조주선사는 말없이 곧장 짚신을 벗어 머리위에 이고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주는 한마디 대꾸도 없이 행동으로 자신의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공안에 조주를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전등록} 제8권 남전장이 최초인데, 조주는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참살한 일대 사건을 해결하는 구제자의 역할로서 등장하고 있는데, 고양이를 구제하기보다도 남전화상을 구제한 인물이다. 조주선사가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행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나 본말(本末)이 전도된 사실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짚신은 구도행각을 하는 수행자가 발에 신고 다니는 생활용품이다. 짚신이 발에 있어야 하는 물건인데, 머리 위에 놓는 것은 전도된 착각을 나타낸다. 즉 조주선사는 수행자들의 전도몽상(顚倒夢想)과 착각(錯覺)을 비판하면서 초월하도록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선원의 동당 서당의 양당(兩堂)에 모인 출가 수행자가 생사대사(生死大事)를 해결하는 올바른 구법의 참선수행을 하지 않고 고양이 한 마리를 가지고 다투고 있는 것은 수행자로서 너무나 전도(顚倒)된 행위이다. 또한 남전화상이 출가인으로서 불살생의 계율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칼로 참살하여 살생한 것도 전도된 행위인 것이다.

조주스님이 신발을 벗어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은 수행자들의 전도된 행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도몽상과 착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하면서 문 밖으로 나가버리는 조주의 행위는 언전불급(言詮不及)과 전도를 떨쳐 버리도록 하는 직접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체의 전도몽상과 착각을 초월하는 수행자의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 주고 있다. 부득이 고양이를 죽인 남전화상의 쓸데없이 지나친 방편수단도 떨쳐버리도록 하고 있다. 또한 조주선사가 짚신을 머리위에 얻고 문 밖으로 나간 행위는 수행자들이 일체의 본분사를 망각하고 전도몽상과 생사심, 단견과 상견, 고정관념, 착각, 사량분별심을 초월한 해탈의 경지(깨달음)에서 자유 자재롭게 살아야 한다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 주고 있다. 생사를 초월한 경지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모습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주가 짚신을 머리위에 얻고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남전화상의 수단이 쓸데없이 지나친 살생에 대하여 그것은 짚신을 머리 위에 올리는 것과 같이 쓸데없이 지나친 행위라고 비판하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남전화상은 조주선사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그대가 그 때 그 곳에 있었더라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남전은 만약 그대가 낮에 고양이를 참살하는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나 역시 그렇게 쓸데없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살생의 지나친 행동과 후회하는 마음이 뒤섞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조주가 남전을 구제해 주는 인물임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원오는 "잘못을 가지고 잘못에 나아간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가 짚신을 벗어 머리 위에 올리고 문 밖으로 나간 전도된 행동으로 남전과 수행자들의 착각을 구제하여 남전도 살리고 수행자도 살리며, 고양이도 구제하고 있는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공안을 원만하게 하여 조주에게 물었네.” 남전화상이 조주의 견해를 물었고, 조주는 짚신을 머리위에 올려놓고 문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남전화상이 고양이를 참살한 일대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고, 이 문제는 비로소 원만하게 된 것이다. 남전이 고양이를 참살한 사건이 조주가 짚신을 머리위에 올려놓은 일로서 공안은 완전하게 일원상이 되었다고 읊은 것이다. “장안성 안에서 마음대로 한가롭게 논다.”장안과 낙양은 중국의 수도이다. 대도(大道)는 장안을 통한다고 한 것처럼, 장안은 번창한 세계의 중심지이다. 남전의 질문에 조주는 무심하게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고 가볍게 문밖으로 훌쩍 나갔다. 풍류스럽지 않은 것이 풍류인 것처럼, 장안성 안에서 한가히 노닐고 있는 모습이다.

원오는 "이처럼 쾌활하고,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어야지."라고 착어한 것처럼, 무애자재한 조주의 심경을 칭찬하고 있다. “짚신을 머리위에 이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네.” 이러한 조주의 쾌활 자재한 경지를 파악하는 사람이 없다고 개탄하고 있는데, 원래 사량 분별이 미치지 않는 경지이며, 범정(凡情)과 망념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원오는 "일개(一個) 성자와 반개(半個) 성자가 있다"라고 착어했는데, 이러한 조주의 경지를 아는 사람은 누굴까? 여기 원오라는 한 사람이 있지 않는가? 라고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고향산천에 돌아가면 모두가 쉬게 된다.” 짚신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조주는 어디로 갔을까? 길이 아무리 좋아도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좋은 경치라도 자기 집에 가서 편히 쉬는 일이 최상이다. 고향은 근원적인 본래심의 경지이다.

 

[第065則]良馬見鞭影
〈垂示〉垂示云。無相而形。充十虛而方廣。無心而應。遍刹海而不煩。擧一明三目機銖兩。直得棒如雨點喝似雷奔。也未當得向上人行履在。且道作麽生。是向上人事。試擧看。
〈本則〉擧。外道問佛。不問有言。不問無言。世尊良久。外道讚歎云。世尊大慈大悲。開我迷雲。令我得入。外道去後阿難問佛。外道有何所證。而言得入。佛云。如世良馬見鞭影而行。
〈頌〉機輪曾未轉。轉必兩頭走。明鏡忽臨臺。當下分姸醜。姸醜分兮迷雲開。慈門何處生塵埃。因思良馬窺鞭影。千里追風喚得回。喚得回鳴指三下。

벽암록 65칙 외도가 부처님께 질문하다

선기 뛰어난 외도 …이심전심의 깨달음 /


{벽암록} 제65칙은 어떤 외도가 부처님에게 불법의 진수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떤 외도(外道)가 부처님에게 질문했다. "말로 대답하는 것(有言)도 묻지 않고, 말없이 침묵으로 대답하는 것(無言)도 묻지 않습니다.(말과 침묵을 여읜 경지에서 불법의 진수를 설해 주십시오)" 세존이 말없이 계셨다(良久). 외도는 찬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저를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셨습니다.” 외도가 떠난 뒤에 아난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증득했기에 깨달음을 체득했다고 합니까?” 부처님은 말씀했다.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다.”

擧. 外道問佛, 不問有言, 不問無言. 世尊良久. 外道讚歎云, 世尊大慈大悲, 開我迷雲, 令我得入. 外道去後, 阿難問佛, 外道有何所證, 而言得入. 佛云, 如世良馬見鞭影而行.


이공안은 {조당집} 제1권 석가모니불전에 최초로 등장한다. {전등록} 제27권, {심부주(心賦注)} 제1권 등에도 전하고 있는데, {수능엄경} 제4권의 아난과 세존과의 대화를 근거로 한 것이다. 어떤 외도(外道)가 부처님에게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또한 침묵으로 대답하는 것(無言)을 여읜 경지에서 불법의 진수를 설해 주십시오'라고 질문했다. 외도가 부처님을 찾아와서 불법에 대해 질문한 이야기는 {잡아함경}에 많이 보이는데, 본 공안과 같은 내용의 정확한 근거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명마(名馬)는 채찍 그림자 봐도 달리듯
여여(如如)한 부처님 모습에 즉각 체득

외도가 주장하는 공통점은 모두 윤회의 실체인 영혼(아트만:我)의 실재를 주장하고 있는 점이며, 불교는 영혼을 부정하는 무아설(無我說)을 제시해 인도 종교사상사에 한 획을 긋고 있다. 외도는 '유언(有言:언어)과 무언(無言:침묵)을 떠나서 불교의 정신을 제시해 보십시오'라고 질문한 것이다. 유언(有言) 무언(無言)은 일체의 언어 문자의 논리적인 방편을 모두 부정한 입장이다. 선(禪)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는 '사구(四句) 백비(百非)를 떠나서 불법(佛法)의 본질을 제시해 주십시오'라는 질문과 같다. 세존이 언어문자로 대답하면 유언(有言)이 되고 상견(常見)에 떨어지며, 침묵하면 무언(無言)이 되며 편견에 떨어진다고 비난할 것이다. 언어와 침묵 이 두 가지 방편과 이견(二見)을 초월한 경지에서 불법의 진수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외도의 질문에 태연하게 말없이 계셨다(良久). {무문관}에 "세존은 앉아있는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世尊據座)"고 한다. 즉 본래의 자리에서 본래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벽암록}에 세존이 "말없이 대답하지 않았다(良久)"고 한 것은 말로서 대답한 것도 아니고, 침묵으로 대답한 것도 아닌 부처본래의 경지를 여여하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즉 유언(有言)에도 무언(無言)에도 떨어지지 않고, 이 두 차별경계를 모두 포용한 불심의 지혜작용을 잠시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良久)이다. 원오는 "앉은 사람, 선사람 모두가 그를 움직일 수 없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세존의 양구(良久)는 절대적인 법신의 경지를 단적으로 제시한 모습이기에, 앉은 것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고, 서있는 것을 자빠지게 할 수 없는 무상(無相)의 형체와 무심의 경지에 순응한 입장이기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평하고 있다.

이렇게 의미가 깊고 엿보기 어려운 세존 양구(良久)의 당처에 외도는 찬탄하며 말했다. “세존께서 대자대비로 저의 미혹한 구름을 열어 주시고 깨달음을 체득하게 하셨습니다.” 즉 유무(有無)의 차별적인 이견(二見:二邊)에 미혹한 무명의 암흑 구름을 제거해 주고 진실의 광명세계를 깨닫게 됐다고 하면서 세존의 대자비한 법문에 감사의 예의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영리한 놈은 한번 튕겨주자 곧바로 깨달음으로 전향한다. 소반 위에 구르는 밝은 구슬"이라고 착어했다. 세존 양구(良久)에 선기가 발동한 외도는 미혹에서 일전(一轉)하여 깨달음을 체득하였으니 진실로 영리한 사람이다. 외도의 깨달음(轉身)은 마치 쟁반 위의 하나의 구슬이 구르는 것과 같이 산뜻하고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것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이 공안에서 참구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 세존이 양구(良久)해 외도에게 무엇을 보여 주었기에 외도는 곧바로 깨닫게 된 것인가? 또한 외도는 무엇을 깨닫게 된 것이며,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외도나 범부나 본래 법성을 구족한 것이며, 유무(有無)의 차별과 이견(二見)을 초월해 법성을 깨닫게 되면 무명(無明)의 실성(實性)이 곧 불성(佛性)인 것이라고 〈증도가〉에도 읊고 있다. 자신의 발밑을 잘 살펴 자신의 불심을 상실하지 않도록 선기를 전향해 곧바로 깨달음을 체득해야 한다.

외도가 떠난 뒤에 부처님의 십대제자인 아난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증득했기에 깨달음을 체득했다고 합니까?” 아난이 세존에게 '그 외도는 어떠한 깨달음을 체득했기에 세존을 찬탄하고 절을 하면서 돌아갔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은 외도의 질문에 세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을 뿐이며 아무런 설법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훌륭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아도 달리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잡아함경} 33권에 전하고 있는데, 천태지의의 {마하지관} 2권(下)에 인용하고, 담연(湛然)이 {지관보행전홍결(止觀輔行傳弘決)} 2권5에 '네 종류의 말'의 비유로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은 불제자들 가운데 근기를 나누어 비교한 것인데, 지금 세존을 참문한 외도는 최상의 근기로서 세존의 양구(良久)한 모습을 보고 유무의 차별을 초월한 법성의 진실을 깨닫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세존이 아난에게, 그 외도는 최고 좋은 말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고 비유해 말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선기(機)의 바퀴를 굴리지 않았네.” 기(機)는 불성의 지혜작용으로 무상(無相), 무심(無心)의 지혜로서 세존이 유무를 초월한 양구(良久)의 경지를 읊고 있다. “굴리면 반드시 양쪽으로 달리리라.” 법신본분은 여여(如如) 부동(不動)한 경지이기에 유무의 차별을 초월한 것이다. “밝은 거울이 경대에 걸려 있으니” 세존이 양구(良久)한 당처를 읊은 것으로, 세존의 법신광명의 거울은 시방삼세에 두루하고, 일체 제법을 분명하게 밝힌다. “당장에 예쁘고 추함을 분간하도다.” 무심의 거울로 비추면 예쁘고 추한 모습과 미혹함과 깨달음을 모두 분명하게 밝힌다. “예쁘고 추함을 구분함이라. 미혹의 구름이 열리니.” 세존이 명경을 밝게 비추니 외도는 예쁘고 추한 것을 분명히 파악하게 됐다. “자비의 문 그 어디에 티끌먼지가 일어나랴!” 외도가 깨달음을 체득해 “세존의 대자대비” 운운(云云) 감격한 것을 읊은 말로, 세존의 양구(良久)와 외도가 미혹의 구름을 걷고, 유무의 차별을 초월한 본래 무일물의 경지에서 세존의 거울과 외도의 거울이 서로 비추는 그곳에 번뇌 망념의 티끌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훌륭한 말이 채찍 그림자를 엿보니” 외도가 떠난 뒤에 세존이 아난의 질문에 대답한 말을 읊은 것인데, 다음의 맺는 말(結句)을 환기시키고 있다. '천리마인 추풍(追風)은 부르면 곧장 되돌아온다.' 추풍(追風)은 천리 준마의 대명사로서 진시황이 기른 명마 7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말이다. 여기서는 외도의 뛰어난 선기를 추풍과 같은 준마에 비유한 것인데, 만약 차별 경계인 갈림길에 떨어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채찍의 그림자만 제시해도 부르면 곧장 말머리를 돌려 되돌아온다고 읊고 있다. 즉 세존의 양구(良久)나 채찍의 그림자라고 하는 말에 집착해 차별견해를 일으키거나 착각하면 각자의 본분을 상실한다고 설두화상이 자비심을 제시하고 있다. “불러서 되돌아 왔다면, 손가락을 세 번 튕긴다.” 유무나 미혹과 깨달음도 상대적인 것, 세존과 외도의 깨달음도 쓸데없는 이야기로다.

 

[第066則]師頭落也
〈垂示〉垂示云。當機覿面。提陷虎之機。正按傍提。布擒賊之略。明合暗合。雙放雙收解弄死蛇。還他作者。
〈本則〉擧。巖頭問僧什麽處來。僧云。西京來。頭云。黃巢過後。還收得劍麽。僧云。收得。巖頭引頸近前云。[囗+力]。僧云。師頭落也。巖頭呵呵大笑。僧後到雪峰。峰問。什麽處來。僧云。巖頭來。峰云。有何言句。僧擧前話。雪峰打三十棒趕出。
〈頌〉黃巢過後曾收劍。大笑還應作者知。三十山藤且輕恕。得便宜是落便宜。

벽암록 66칙 암두화상과 어디서 왔는가?

안목 없는 선객의 '휘두름'에 가소로워 웃다


{벽암록} 제66칙은 암두전활 화상과 어떤 선객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암두화상이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장안(西京)에서 왔습니다.' 암두화상이 물었다. '황소(黃巢)의 난이 지난 뒤에 칼을 입수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입수했습니다.' 암두화상이 목을 그 스님 앞으로 쑥 내밀며 칵! 하고 소리쳤다. 스님은 말했다. '화상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 암두화상은 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그 스님이 뒤에 설봉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설봉화상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암두에서 왔습니다.' 설봉화상이 말했다. '암두화상은 무슨 말을 하시던가?' 스님이 앞의 이야기를 제시하자, 설봉화상은 30방망이를 쳐서 쫓아내 버렸다."

擧. 巖頭問僧什處來. 僧云. 西京來. 頭云. 黃巢過後. 還收得劍. 僧云. 收得. 巖頭引頸近前云. 僧云. 師頭落也. 巖頭呵呵大笑. 僧後到雪峰. 峰問. 什處來. 僧云. 巖頭來. 峰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雪峰打三十棒出.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6권 암두전에 전하고 있다. 암두전활(巖頭全豁:828~887)은 덕산선감의 제자로서 설봉과 법형제인데, {벽암록} 제5칙 '평창'에 언급한 것처럼, 설봉이 오산에서 도를 이루는 인연을 제시한 선승이다. 암두선원은 호북성 악주(鄂州)에 있었는데,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난 이후에 어떤 스님이 암두화상을 참문하면서 나눈 선문답이다.


"지혜의 칼 얻었나" 화상이 묻자
납승 "화상 목이 떨어져" 거들먹

암두화상은 찾아온 스님에게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인사말로 물었다. 이 질문은 간단한 인사말이지만 스님의 안목을 살펴보기 위한 문제를 가볍게 던지고 있는 말이다. 어디서라는 물음은 그대의 본래면목의 당처와 이전에 있었던 지역의 장소를 동시에 제시하여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장안[西京]에서 왔습니다"라고 장소를 말하고 있다. 당대에는 서경(西京)은 장안(長安), 동경(東京)은 낙양으로 양경(兩京)을 두었다. 원오도 이 스님을'과연 하나의 좀도둑'이라고 평하고 있는 것처럼, 암두화상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암두화상은 다시 "황소(黃巢)의 난이 지난 뒤에 칼을 입수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 스님이 장안에서 왔다고 대답하기 때문에 장안은 황소의 반란으로 장안이 함락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 선문답이다. 즉 당말 정치가 문란하고 세상이 안정되지 못하여 인심이 불안정하게 되자, 조주(曹州)의 황소라는 소금장사가 874년 친구인 왕선지(王仙芝)와 함께 반란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드디어 수만 명 반란군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황소는 ‘하늘이 내려준 황소(天賜黃巢)’라는 명문을 새긴 칼을 잡고 스스로 충천(衝天)장군이라고 자칭하며, 880년 장안을 함락하고 대제국(大齊國)을 세워 대재황제라 하고 연호를 금통(金統)이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이극용(李克用)이 지휘하는 당조의 반격으로 884년 고향 산동(山東)에서 자결함으로 4년간의 반란군은 막을 내린다. 여기서는 그러한 고사를 토대로 하여 암두화상이 스님에게 "그대는 하늘이 내려준 보검을 입수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즉 어려운 수행(황소의 반란)을 거쳐서 무애자재한 반야의 지혜(칼)를 체득하여 자유자재한 경지를 이루었는지를 묻고 있다.

지혜의 칼은 일체의 차별과 번뇌 망념을 차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의 묘검(妙劒)이며, 본래면목, 본지풍광, 무진장한 보배라고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불성을 지혜작용을 비유한 것이다. 그 스님은 "예! 나는 그 칼을 입수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암두화상이 던진 낚시에 걸려든 것이다. 원오는 "멍청한 놈들이 삼대와 좁쌀처럼 많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지혜의 칼을 가지고 있으면서 쓸 줄을 모르는 놈은 이 스님뿐만 아니라, 수행을 한다는 고금의 많은 선승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고 비평하고 있다.

암두화상은 "그래! 그렇다면 자네의 그 보검으로 나의 목을 한번에 끊어보도록 하게"하면서 스님 앞으로 목을 길게 쑥 내밀며 칵! 하고 소리쳤다. 화()라는 글자는 전신으로 힘쓰며 지르는 "얏! 에잇!"이라는 기합소리다. 원오는 '범을 잡는 덫'이라고 착어한 것처럼, 얏! 이라는 한 고함에 스님이 칼을 주었다고 하는 분별 망상을 한꺼번에 쳐 날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암두화상의 자비심을 알지 못하고 "화상의 머리가 떨어졌습니다"라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 있다. 겉으로는 지혜의 보검을 쓸 줄 아는 선승처럼 형색은 갖추었지만, 암두화상이 "그러면 내 목을 한번 쳐"라고 하자, 화상의 목을 쳤다고 큰 소리 친다. 자신의 목이 먼저 떨어진 줄 모른다. 암두화상이 던진 올가미에 걸려서 끌려 다니고 있는 주제에 보검을 가지고도 지혜작용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원오는 "송곳 끝이 날카로운 줄만 알고, 끌의 끝이 네모난 줄은 모른다"고 당시의 속담으로 착어하여, 정법의 안목과 융통성이 없고 방편지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비평하고 있다. 암두화상은 "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이와 같은 내용이 {전등록} 15권 덕산장에 덕산과 용아와의 선문답으로 전하고 있으며, '평창'에도 인용하고 있다.

암두의 큰 웃음은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 스님이 칼로 베어버린 암두의 머리는 땅에 떨어졌다고 했는데, 지금 암두화상은 큰 소리로 웃고 있지 않는가. 암두의 머리(법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스님은 암두화상의 머리를 탈취하여, 암두의 웃음이 자신을 인가한 것으로 착각하고, 의기양양하게 뒤에 설봉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설봉화상도 암두화상과 똑같이 "어디서 왔는가"라고 안목을 점검하는 인사말을 던졌다. 스님은 "암두선원에서 왔습니다"라고 정직하게 장소를 대답한다. 설봉화상은 "암두화상은 어떤 법문을 하시던가?"라고 묻자, 스님이 앞에 암두화상과의 선문답과 일단의 이야기를 말했다. 설봉화상은 그 스님에게 30방망이를 쳐서 쫓아내 버렸다. 즉 스님은 황소의 보검으로 암두화상의 머리를 끊어 땅에 떨어뜨렸다고 하고, 암두화상이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그 순간 설봉화상은 방망이로 30방 때려서 밖으로 내쫓아 버린 것이다. 원오는 이런 안목 없는 스님은 "아침에 3000방망이, 저녁에 800방망이를 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암두와 설봉이 덕산 문하의 동기 동창생이기 때문에 똑같이 불법의 본분사를 똑같은 입장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고 하면서, 설봉과 암두가 이 스님을 제접한 귀결처는 무엇인가를 문제로 제시하고 있다. 즉 암두의 웃음과 설봉이 30방망이를 때린 수단은 같은 것인가 잘 살펴보라고 당부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이 공안의 핵심을 게송으로 읊었다. “황소의 난이 지난 뒤에 칼을 주었네.” 스님은 하늘로부터 받은 황소의 보검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있다고 읊고 있다. 원래 사람은 본래 그러한 보검을 구족하고 있지만, 수행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추지 못하면 마음대로 쓸 수가 없다. 칼을 잘 못 쓰면 자신도 죽이고 남도 죽인다. “크게 웃는 웃음은 작가만이 알 수 있다.” 암두가 크게 웃은 것을 읊은 것이다. 암두화상은 스님을 가엽게 생각하며, 어떻게 자비의 손을 쓸까 하고 한 바탕 큰 소리로 웃었는데, 정법의 안목이 없는 바보 같은 그 스님은 자신을 인가한 것으로 착각하고 설봉의 처소로 향했다. 암두화상의 웃음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0방망이 때린 벌칙도 또한 가볍게 용서해 준 것.” 설봉은 암두의 자비로운 웃음을 30방망이 주장자로 때린 내린 벌칙도 설두는 가볍다고 읊었다. “이익을 본 것 같지만 결국 손해만 본 것이다.” 스님이 장안에서 주운 칼로 암두의 머리를 쳤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설봉의 처소에서 자신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第067則]揮案一下
〈本則〉擧。梁武帝請傅大士講金剛經。大士便於座上。揮案一下。便下座。武帝愕然。誌公問。陛下還會麽。帝云。不會。誌公云。大士講經竟。
〈頌〉不向雙林寄此身。卻於梁土惹埃塵。當時不得誌公老。也是栖栖去國人。

벽암록 67칙 부대사의 금강경강의

“진리를 말로 설명할 수 없어 몸으로 드러내”


{벽암록} 제67칙은 부대사가 양무제에게 {금강경}을 강의하는 선문답을 싣고 있다.

양무제가 부대사(傅大士)를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부대사는 법상에 올라서 경상을 한번 후려치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왔다. 양무제는 깜짝 놀랐다.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질문했다. “폐하께서는 아시겠습니까?” 무제는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공화상이 말했다. “부대사의 강의는 끝났습니다.”

擧. 梁武帝請傅大士講金剛經. 大士便於座上. 揮案一下. 便下座. 武帝 愕然. 誌公問. 陛下還會. 帝云. 不會. 誌公云. 大士講經竟.


강의 대신 경상 후려친 행위는
걸림없는 반야의 지혜 그 자체

본공안은 {분양선소어록} 중권에 보이는데, 내용은 약간 차이가 있다. 양무제는 {벽암록} 제1칙에 달마와 함께 등장했었다. 원오는 '평창'에 "양나라의 고조인 무제는 소(蕭)씨이며, 이름은 연(衍), 자는 숙달(叔達)이다. 대업을 일으켜 제(齊)나라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에 오경(五經)을 주석하여 강의하였고, 황노(黃老)의 도교를 두텁게 신봉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하루는 출세간의 불법을 얻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도교를 버리고 부처님을 받들며 누약법사에게 귀의하여 보살계를 받고, 몸소 가사를 입고 {방광반야경}을 강의하며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본칙에 처음 등장하는 세속의 성자인 부대사 흡(翕:497~569)은 중국의 유마거사로 백장과 임제, 약산유엄선사 등이 한결같이 칭송하고 있는 인물인데, 그의 전기는 {속고승전} 25권과 {전등록} 27권에 선혜(善慧)대사로 전기를 싣고 있으며, {선혜대사어록}도 전한다. 특히 그의 작품인 {심왕명}은 선승들이 많이 인용하고 있다. 원오는 '평창'에 부대사가 양무제의 초청으로 {금강경}을 강의하게 된 연유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주(州: 浙江省)에 어떤 대사가 운황산에 거처하면서 손수 나무 두 그루를 심고서 쌍림(雙林)이라고 하고, 자칭 미래의 선혜대사라고 하였다. 그가 하루 글을 지어 제자를 시켜 양무제에게 건의하여 황제께 여쭈었다. 그 때 조정에서는 군신의 예의가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대사는 금릉성에 들어가 물고기를 팔고 살았는데, 당시 가끔 양무제가 지공화상을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자, 지공화상이 말했다. “빈도는 강의를 못합니다. 시중에 부대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이 경을 강의할 수 있습니다.” 양무제는 조서를 내려 부대사를 대궐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전등록}에서는 그를 '쌍림수하 당래해탈 선혜대사(雙林樹下 當來解脫 善慧大士)'라고 하며, 미륵의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양무제가 지공화상의 권유로 부대사를 궁궐로 초청하여 {금강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금강경}은 {대반야경} 577권의 별칭인데, 반야불가득(般若不可得)과 성공(性空)의 묘리를 설한 경전으로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이 선종에서 애용되고 있으며, 특히 수지독송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기 때문에 {법화경}과 함께 공덕경으로 널리 주목하고 있다. {금강경}을 32장으로 자세히 나눈 것은 양무제의 아들 소명태자인 점으로 볼 때 특히 이 경정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부대사도 {금강경}의 사상에 부합한 게송을 읊고 있다.

양무제는 많은 강사들처럼 부대사도 {금강경}의 말씀을 자세히 강의할 것으로 기대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부대사는 법상에 올라서 경상을 한번 후려치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왔다. {금강경} 32품의 강의는 끝났다. 마치 {벽암록} 92칙에 세존의 설법에 법상에 오르자, 문수보살이 종을 치며 "법왕의 법을 자세히 관찰하니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라고 알렸다. 그러자 세존은 한마디의 설법도 없이 법상에서 내려왔다는 이야기와 같다.

경전에 "수보리야. 설법이란 법을 가히 설할 것이 없음을 설법이라 한다."라고 전한다. 이 말에 대하여 {돈오요문}에는 "반야의 본체는 필경 청정한 것이며 한 물건(一物)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이니 이것을 가히 설할 법이 없는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부대사는 {금강경}의 정체인 불법의 근본을 몸으로 직접 전부 들어낸 것이다. 원오는 "언어 문자를 번거롭게 사용하지 않고 금강경을 강의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반야심경}에도 반야의 지혜는 얻을 수 있는 물건이나 대상이 아니며(不可得), 고정된 특성이 없음(無自性)을 근본으로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부대사가 주장자로 경상을 칠 때 나는 그 소리는 자성이 없으며, 그 소리를 듣는 반야의 지혜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성의 자각적인 지혜작용일 뿐이다. 부대사가 경상을 후리친 걸림 없고 무애자재한 행위는 반야지혜의 묘용 그 자체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부대사의 {심왕명}에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마음의 공왕(空王)을 관찰하건데, 현묘하여 헤아리기 어렵다. 얼굴도 형체도 없지만 큰 신통력이 있네. 천 가지 재앙을 소멸시키고, 만 가지 공덕을 이루네. 본체와 성품이 공하지만, 온갖 법칙을 베푼다. 보면 형상은 없지만, 부르면 대답한다. 큰 법의 장수가 되어서 마음의 계법으로 경을 전한다.” {조당집} 15권에 방거사가 "사람은 한 권의 경전을 가졌는데 형체도 없고 이름도 없다. 사람이 이 경을 읽지 못하니, 나에게 집착하면 들을 수가 없다."라고 하고, 경봉스님의 글씨로 전하는 '나는 한 권의 경전이 있다. 종이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다. 경전을 펼치면 한 글자도 없지만 항상 대 광명의 지혜를 펼친다.'라는 법문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양무제는 부대사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양무제는 문자반야를 듣기 위해 초청했는데, 부대사가 경상을 한 번 후려치고는 내려왔으니 '나를 바보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생심이기 때문에 불심의 법문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반야경의 정신이 자아의식인 아상(我相)을 비우고 무아(無我)가 되어야 무아의 경지에서 설하는 법신(法身)의 설법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다. 법신의 지혜법문을 중생의 차별심으로는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양무제뿐만 아니라 불법을 수행한다는 많은 사람이 이렇다. 지공화상이 양무제에게 "폐하께서는 부대사의 강의 내용을 아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不會)."라고 했다. 회(會)는 언어 문자를 대상으로 설정하여 이해하는 것인데, 문자반야를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다는 답변이다. 지공화상은 이 법회의 사회자로서 오늘 "부대사의 강의는 끝났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고 있다. “쌍림(雙林)에 이 몸을 의탁하지 않고” 쌍림은 부대사가 살고 있는 암자인데, 양무제의 초청을 받고 황제가 있는 왕실로 나온 것을 읊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부대사가 본분의 청정한 쌍림에 안주하지 않고 왕궁으로 나온 것은 중생구제를 위한 이타의 보살행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주머니 속의 바늘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대사의 자비심"이라고 평한다. “양나라 땅에서 티끌 먼지 일으켰네.” 쌍림의 나무 밑에 안주했더라면 그의 몸은 속진(俗塵)에 물들지 않았을 텐데, 양무제의 초청에 응하여 왕궁에 나오게 되어 세속의 티끌에 더럽혀지게 되었다. “당시 지공 노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황급히 나라를 떠나는 사람이 되었으리.” {벽암록} 제1칙에서 양무제와 달마의 대화에 뜻이 계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달마대사가 양나라에서 쫓겨나 위나라로 가게 되었다는 고사를 토대로 하여 읊고 있다. 즉 부대사도 양무제와 기연이 맞지 않아 곧장 양나라에서 쫓겨나게 될 판인데, 다행이 지공화상이 있어서 부대사의 {금강경} 강의는 다 마쳤다고 말하며, 참된 강경의 본지를 밝힌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무사히 초청법회가 회향된 것이다. 원오는 부대사와 지공화상은 같은 죄인(불법을 체득한 경지)이라고 평하고 있다.

 

[第068則]汝名什麽
〈垂示〉垂示云。掀天關翻地軸。擒虎兕辨龍蛇。須是箇活鱍鱍漢。始得句句相投機機相應。且從上來什麽人合恁麽。請擧看。
〈本則〉擧。仰山問三聖。汝名什麽。聖云。惠寂。仰山云。惠寂是我。聖云。我名惠然。仰山呵呵大笑。
〈頌〉雙收雙放若爲宗。騎虎由來要絶功。笑罷不知何處去。只應千古動悲風。

벽암록 68칙 앙산혜적화상과 삼성혜연화상

“이름은 본래 없는것…허명에 집착말라”


{벽암록} 제68칙은 위산문하의 앙산화상과 임제문하의 삼성스님의 대화를 싣고 있다.

앙산화상이 삼성스님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삼성스님이 말했다. “혜적(慧寂)입니다.” 앙산화상이 말했다. “혜적은 바로 내 이름인데.” 삼성스님이 말했다. “내 이름은 혜연(慧然)입니다.” 앙산화상이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擧, 仰山問三聖, 汝名什. 聖云, 惠寂. 仰山云, 惠寂是我. 聖云, 我名 惠然. 仰山 呵呵大笑.


이름을 본래심으로 착각 말도록
'혜적'이든 '혜연'이든 상관없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2권 삼성혜연장에 수록되어 있다. 앙산은 위산문하의 수제자로 중국선종에 최초로 위앙종을 창립한 선승이다. 사실 백장이 마조문하의 수제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위산과 앙산의 독창적인 위앙종풍이 활발하게 전개된 이후의 평가라고 할 수 있다. 〈벽암록〉 34칙에 등장한 바 있는 앙산에 대한 자료는 육희성이 지은 〈비명〉과 〈조당집〉18권, 〈송고승전〉 12권, 〈전등록〉 11권 등에 전하고 있으며, 〈혜적선사어록〉도 전한다. 〈임제록〉에는 임제가 북쪽지방에서 교화를 펼치며, 임제의 행화를 도운 보화스님이 전신탈거(완전열반)할 것이라고 예언한 앙산을 소석가(小釋迦)라고 평가하고 있다.

안산을 소석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종문통요집〉 제5권에 어느 날 신통한 범승(梵僧)이 허공을 날아 나타나서 앙산화상께 예를 올리며 섰다. 앙산화상은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라고 묻자, 범승은 “아침에 서천을 떠나 왔다.”고 대답했다. 앙산은 ‘너무 늦게 온 것 아니냐’라고 말하자, ‘산천 유람하고 왔지요’라고 대답했다. 앙산화상은 “신통묘용은 그대가 뛰어나지만, 불법은 반드시 이 노승에게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범승은 “특별히 동쪽에 와서 문수를 예배하고 소석가를 만났다.”고 말하고 드디어 서천의 패엽경전을 앙산화상께 건네주고 구름을 타고 허공으로 치솟아 갔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그리고 삼성스님은, 〈임제록〉에 임제화상이 입적하려고 할때 “나의 정법안장을 멸각시키지 말라.”고 말하자 삼성이 나와서 “어찌 감히 화상의 정법안장을 멸각시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고 고함(할)을 치며, 임제스님의 정법을 계승한 선승이다.

원오도 ‘평창’에 삼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성스님은 임제문하의 큰스님이다. 어려서 많은 사람 가운데 뛰어난 지략이 있었고, 큰 지혜(大機)의 작용으로 대중 가운데 우뚝 솟아 사방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그 뒤 임제화상을 하직하고 하남성과 강소성(淮海) 등의 지방을 두루 행각 하였는데, 이르는 총림마다 큰 선지식으로 대접 하였다.” 그 후 북쪽 지방을 떠나 남방에 이르러 먼저 설봉화상의 찾아가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 잉어는 무엇을 먹이로 해서 낚아야 합니까?” 설봉화상은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올 때 말해 주리라.”라고 대답한 문답은 〈벽암록〉49칙에 전한다.

뒷날 설봉화상이 장원(莊園)으로 가는 길에 원숭이를 보고 삼성에게 말했다. “이 원숭이가 각자 옛 거울(古鏡 : 본래심)을 차고 있다네.” 삼성은 “오랜 세월을 지내도록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데 어찌 고경(古鏡)이라고 합니까?” 하자, 설봉은 “거울에 흠집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삼성은 “1500명의 대중을 지도하는 선지식이 말귀도 모르는군!”이라고 말하자. 설봉은 “노승은 주지 일이 바빠서.” 라고 대꾸했다.” 옛 거울(古鏡)은 본래 구족하고 있는 불심을 말하는데, 무심한 거울의 작용처럼, 불심은 항상 일체의 대상과 사물을 차별없이 비추는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평창’에는 삼성과 앙산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삼성스님은 뒤에 앙산화상의 처소에 이르렀다. 앙산화상은 삼성스님이 준수하고 영리하여 몹시 사랑하여 밝은 창문아래(수좌소임)자리를 배치하였다. 하루는 어떤 관리가 찾아왔기에 앙산화상이 물었다. “어떤 관직에 일하시요?” “감찰관리(推官)의 일을 합니다.” 앙산화상이 불자(拂子)를 들어 보이며 “이것도 감찰 할 수 있소?” 하니, 관리가 대답을 못하자, 여러 대중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모두 앙산화상의 뜻에 계합하지 않았다. 이 때 삼성스님은 몸이 아파서 간병실(연수당)에 있었는데, 앙산화상이 시자를 시켜서 물어보도록 하니, 삼성스님은 말했다. “본래 무사한 것인데, 화상은 괜히 일을 만들고 있군!” 앙산화상은 다시 시자를 보내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하고 다시 묻자, “다시 범(犯)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앙산은 이 말을 듣고 그의 안목을 인정하였다.” 다시 범(犯)한다는 말은 본래 청정한 마음(불심)은 번뇌 망념의 일이 없는 무사한 경지인데, 고의로 차별 분별을 일으켜 일을 만들어 질문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본칙으로 들어가자. 앙산화상이 삼성스님에게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라고 묻고 있다. 앙산화상이 뛰어난 삼성의 이름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라, 삼성의 안목을 살펴보고 시험하기 위해 인사말로 던지는 올가미인 것이다. 육체에 붙여진 수행자의 법명은 임시방편의 이름과 본래면목의 이름을 묻고 있다. 또한 자기 자신은 본래 무아이며 고정된 모습이나 실체도 없는데, 자기의 이름이라는 것이 있을까? 삼성스님은 “혜적(慧寂)입니다.” 라고 앙산화상의 본명(이름)으로 대답하고 있다. 즉 주인인 앙산의 질문에 손님인 삼성이 주인의 이름으로 대답한 것인데, 삼성은 주객의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한 근원적인 본래의 입장에서 앙산화상과 일체가 된 절대의 경지에서 대답한 것이다. 앙산화상은 “혜적은 바로 노승의 이름인데” 라고 말했다. 앙산의 이 말은 현실의 차별 경계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자신의 모습을 밝히고 있다. 즉 앙산은 앙산이고 삼성은 삼성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차별세계가 그대로 곧 절대의 세계라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각자 자기 영역을 지키는군!” 이라고 착어하며,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는다고 했다. 화상이 차별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혜적이라고 한다면, “내 이름은 혜연(慧然) 입니다.” 똑같은 차별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처음의 일문 일답은 서로 절대의 경지로 거두는 작용(雙收)이라면, 뒤의 일문 일답은 서로 차별의 세계에 펼치는 쌍방(雙放)인 것이다. 원오는 “시끄러운 시중에서 남의 물건을 뺏는 것”이라고 하며, “앙산과 삼성이 모두 각자의 본분을 잘 지켰다.”고 평하고 있다. 서로 절대의 경지를 거두어 본래심(本來心)을 상실하지 않았고, 차별경계에서도 본분을 잘 지키고 있기에 우열을 논 할 수 없는 선문답이라고 평한 것이다.

앙산화상은 껄껄대며 크게 웃었다. 원오는 “절말 좋은 시절 인연이니. 금상첨화로다”라고 평하고 있다. 앙산의 통쾌한 웃음은 만법과 하나된 경제에서 좋은 시절인연을 맞아한 웃음이다. 이러한 유쾌한 웃음이 금상첨화인 것처럼, 본래면목이 한층 더 통쾌하고 활발한 지혜작용으로 빛을 발휘하게 된 것이라고 읊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서로 거두기도 하고(雙收), 서로 놓아주기도 하니(雙放) 이 무슨 종지인가?” 앙산화상이 삼성에게 이름을 질문하자, 삼성이 혜적이라고 대답한 일문이 쌍수(雙收)이다. 즉 절대 평등한 본래의 경지에서 서로 대응한 문답이다. 그리고 앙산이 ‘혜적은 나의 이름’이라고 하자 삼성이 ‘나의 이름은 혜연’이라고 나눈 대화는 쌍방(雙放)으로 현실의 차별세계에서 자기의 본분을 밝히는 대화인 것이다. 두 선승의 훌륭한 선문답은 무슨 종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호랑이를 타기 위해서는 절묘한 기량(功)을 요한다.” 말을 타기도 어려운데 호랑이를 탄다는 것은 지혜와 용기는 물론 독자적인 기량를 갖춰야 한다. 앙산과 삼성은 기량(안목)을 갖춘 선승이었기 때문에 사량분별의 차별심을 초월하여 본분을 상실하지 않고 가볍게 호랑이를 타고 기량을 드날렸다. 앙산의 “통쾌한 웃음은 어떻게 되었는가? 단지 진실로 천고의 비풍(悲風)을 움직이게 하네.” 앙산의 웃음을 깨닫지 못한 수행자의 슬픈 일이며, 불법을 철저히 자각하여 깨닫도록 비풍(悲風)을 일으키고 있다고 읊고 있다.

 

[第069則]畫一圓相
〈垂示〉垂示云。無啗啄處。祖師心印。狀似鐵牛之機。透荊棘林。衲僧家。如紅爐上一點雪。平地上七穿八穴則且止。不落寅緣。又作麽生。試擧看。
〈本則〉擧。南泉歸宗麻谷。同去禮拜忠國師。至中路。南泉於地上。畫一圓相云。道得卽去。歸宗於圓相中坐。麻谷便作女人拜。泉云。恁麽則不去也。歸宗云。是什麽心行。
〈頌〉由基箭射猿。遶樹何太直。千箇與萬箇。是誰曾中的。相呼相喚歸去來。曹溪路上休登陟。復休登陟。復云。曹溪路坦平。爲什麽休登陟。

벽암록 69칙 남전화상과 일원상(一圓相)

도식화한 깨달음의 경지… 만법의 본체


{벽암록} 제69칙은 마조도일선사의 문하에 대표적인 남전과 귀종, 마곡화상이 남양혜충국사를 참문하는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남전, 귀종, 마곡화상이 함께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는 도중에 남전화상이 땅에 하나의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말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안목으로) 한마디를 올바르게 말하면 가겠다.' 귀종화상이 그 일원상 가운데 앉았다. 마곡화상은 여인이 절하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남전화상이 말했다. '이러한 즉 가지 않겠다.' 귀종화상이 말했다. '이 무슨 수작인가?'

擧. 南泉歸宗麻谷, 同去禮拜忠國師. 至中路, 南泉於地上, 一圓相云, 道得卽去. 歸宗, 於圓相中坐, 麻谷, 便作女人拜. 泉云, 恁則不去也. 歸宗云, 是什心行.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제8권 남전보원전에 전하고 있다. 중국 조사선을 완성한 마조도일의 문하에는 800여명, 혹은 1000여명의 수행자가 운집하였고, 법을 전한 제자가 139명이나 된다고 하는 것처럼, 마조의 뛰어난 제자들이 전국에서 교화를 펼침으로 조사선의 시대를 개막하게된 것이다.

{송고승전} 9권 석두희천전에 "강서(江西)의 주인은 대적(大寂: 마조) 호남(湖南)의 주인은 석두(石頭), 서로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당시 이 두 대사를 친견하지 못한 자를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다."고 하며, 천하의 선승들이 모두 마조와 석두의 할을 참문하여 불법을 연마했다. 마조의 비문에 10대 제자를 언급하고 있지만, 문하에는 개성 있고 뛰어난 수재들이 많이 모였다. 분주무업과 같은 불교학자도 있고, 석공혜장과 같은 사냥꾼 출신도, 방거사도 있다.


혜충국사가 창시한 '선법의 진수'
귀종, 마곡의 안목 시험하는 화두

본칙에 등장하는 남전보원과 귀종지상, 마곡보철도 마조문하의 수재들인데, 강서와 호남지방의 총림을 행각하고 당시 제도(帝都)에서 국사로 존경받고, 명성이 천하에 드날리고 있는 장안 광택사 혜충국사를 예방하고 참문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출발하여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원오는 {논어}의 말을 빌려 "3인(三人)이 동행하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지."라고 착어하고 있다.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문수의 지혜가 있다는 말도 이 말을 응용한 것인데, 남전화상이 갑자기 땅바닥에 하나의 둥근 원상(圓相)을 그려놓고 두 사람을 향해서 말했다. '불법의 대의를 체득한 안목으로 이 원상에 대하여 한마디를 말하여 나의 뜻에 계합된다면 혜충국사를 예방하러 가겠다.' 원오는 이러한 남전의 행동에 대하여 "바람도 없는데 파도를 일으켰다."고 착어했다. 남전화상이 제시한 일원상은 무슨 표시인가? 일원상에 대한 법문은 {벽암록} 33칙에 자복화상이 제시한 사례도 있다.

일원상은 우주 만법의 본체이며 원명하고 적정한 깨달음의 경지를 시간과 공간을 중복시킨 도식화로 표현한 것이다. 즉 만법의 주체인 진여법성과 본래면목을 상징화한 것으로 무상한 절대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다. 일원상을 제시한 법문은 마조를 비롯하여 그의 문하에 수노, 회의, 방거사 등 많은 선승들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일원상을 그려서 선문답의 공안으로 응용한 최초의 선승이 혜충국사이다.

{조당집} 3권 혜충국사장에 스님이 친견하러 찾아오면 손으로 일원상을 그려 제시하고 있는 법문을 했다. {조정사원} 2권에 "원상을 시작한 것은 남양혜충국사인데, 시자인 탐원(耽源)에게 전수하였고, 탐원은 예언(讖記)을 받들어 앙산에게 전수하니 드디어 위앙종의 가풍이 되었다."고 전한다. 탐원은 처음 마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선승으로 혜충국사의 법을 잇고 뒤에 마조의 처소로 돌아와 원상의 문답을 나누고, 백장, 마곡과도 원상의 선문답을 나누었다.

말하자면 일원상은 혜충국사가 창시한 선법의 진수이며 가풍이다. 혜충국사를 참문하는 것은 혜충국사의 얼굴을 보기위해 가는 것은 아니다. 혜충국사의 법문을 친견하기 위해 가는 길에, 남전화상은 혜충국사의 법문인 일원상을 땅에 그려놓고 귀종과 마곡 동문 두 사람의 안목을 판별해보려고 한 것이다.

종화상은 남전화상이 그린 일원상 가운데 앉았다. 우주 만법을 상징한 일원상 한가운데 앉은 것은 우주와 천지 건곤이 모두 귀종 자신과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된 경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혜충국사의 법문인 일원상의 정신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의 법신으로 귀향시켜 하나 된 경지(萬法一如)임을 나타내고 있는 행동이다. 원오는 "한 사람이 장단을 맞추어 바라를 치면 같은 길에서 화합되었다."고 착어한 것처럼, 남전이 일원상의 바라를 치면 같은 곡조에 맞추어 귀종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명콤비를 이룬 것이라고 박수를 보내고 있다. 마곡화상은 여인이 절하며 인사를 하는 시늉을 하였다.

여인이 예배하는 인사를 관인배(官人拜)라고도 하는데, 여인과 관료들은 머리에 두관을 쓰고 머리를 장식을 하였기 때문에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오체투지하는 인사가 아니라 허리를 약간 굽히고 가볍게 합장하는 인사이다. 마곡이 여인의 예배를 올린 것은 일원상의 법문을 제시한 혜충국사를 향한 인사이다. 지상에 그려진 그림의 일원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혜충국사의 법신불에 대한 예배인 것이다. 원오는 "한 사람이 북을 치니 세 사람의 성자를 얻었네."라고 착어했다.

남전과 귀상, 마곡의 세 사람이 법계에 유희하는 성자가 된 것을 칭찬하고 있다. 남전화상은 귀종과 마곡의 행동을 보고는 크게 만족하여 '이 정도의 안목을 갖춘 경지라면 혜충국사를 친견하러 가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그대들과 같이 훌륭한 선승이라면 일부러 멀리 혜충국사를 찾아가서 친견하고 그의 법문을 듣지 않아도 된다고 인정하고 있는 말이다. 즉 남전이 제시한 일원상은 혜충국사가 주창한 법문으로 법신의 지혜작용을 제시한 것이었다. 국사의 법문을 참문하여 듣고 깨닫는 것이나, 일원상을 통해서 깨닫고 체득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남전은 국사를 친견하러 가는 계획을 그만두자고 말한다.

원오는 "반쯤 길을 가다가 빠져 나와야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착어했는데, 세 사람이 국사를 친견하러 가는 행각 길의 중간쯤에 남전 혼자 전신(轉身)의 활로(活路)로 뛰어난 초월을 보였다고 칭찬하며, 원오는 남전의 일원상은 한 바탕의 연극을 멋지게 펼치도록 한 작가라고 극찬했다. 귀종화상은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라고 말했다. 이 말은 표면적으로는 남전이 국사를 친견하러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앞의 약속을 파기한 것에 대한 반발적인 말로 보기 쉽다. 이러한 마음은 감정이며 중생심으로 불심의 지혜를 나누는 선문답이 아니다. 원오는 "다행히 알았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귀종은 남전의 의도를 완전히 간파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다.

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유기(由基)가 화살로 원숭이를 쏘니, 나무를 끼고 도는 화살 곧바로 맞추네." 유기는 초나라 사람으로 화살을 잘 쏘는 명인이다. '평창'에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원숭이를 향해 쏜 화살이 원숭이가 나무를 안고 돌지만 화살도 따라 돌면서 명중시켰다고 한다. 남전 귀종, 마곡도 독자적인 안목으로 일원상을 중심으로 펼친 선기작용은 유기가 원숭이를 명중시킨 것과 같이 불법의 대의를 확실히 체득한 안목을 제시한 것이다.

“천사람 만사람 가운데, 어느 누가 일찍 적중 시켰을까?” 예부터 선승은 수천 수만명이 있었지만, 이 세 사람만큼 훌륭한 안목으로 대의를 체득한 사람이 있을까? “서로를 부르며 말했다. “돌아가련다. 돌아가련다.” 등산을 한 뒤에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본래심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깨달음의 세계를 읊고 있다. “조계의 길에는 가지 않겠다.” 혜능의 불법을 계승한 국사를 친견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두화상은 다시 말했다. “조계의 길은 평탄한데 무엇 때문에 가지 않는가?” 불법을 마음 밖에서 구하면 안 된다니까!

 

[第070則]倂却咽喉
〈垂示〉垂示云。快人一言快馬一鞭。萬年一念一念萬年。要知直截。未擧已前。且道未擧已前。作麽生摸索。請擧看。
〈本則〉擧。潙山五峰雲巖。同侍立百丈。百丈問潙山。倂卻咽喉唇吻。作麽生道。潙山云。卻請和尙道。丈云。我不辭向汝道。恐已後喪我兒孫。
〈頌〉卻請和尙道。虎頭生角出荒草。十洲春盡花凋殘。珊瑚樹林日杲杲。

벽암록 70칙 백장화상이 위산에게 입과 목을 막고 말하게 하다

“말보다 언어 이전의 언어를 들을 줄 알아야”


{벽암록} 제70칙은 백장화상이 제자들에게 입과 목을 막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위산(山)과 오봉(五峯), 운암(雲巖)이 함께 백장화상을 모시고 서 있었다. 백장화상은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위산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백장화상이 말했다. “내가 사양치 않고 그대에게 말해주고 싶지만 훗날 나의 자손을 잃어버릴까 염려스럽다.”

擧. 山五峰雲巖. 同侍立百丈. 百丈問山. 倂咽喉唇吻. 作生道. 山云. 請和尙道. 丈云. 我不辭向汝道. 恐已後喪我兒孫.


입으로 하는 말엔 지혜작용 없어
눈빛이나 침묵이 훨씬 더 진실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6권 백장전에 전하고 있으며, 원오는 '평창'에 백장과 위산, 오봉, 운암에게 나눈 선문답을 전부 인용하고 있지만, {벽암록} 70칙에는 백장과 위산, 71칙에는 백장과 오봉, 72칙에는 백장과 운암과의 선문답을 나누어서 싣고 있다. 따라서 본칙에서는 백장화상과 위산스님의 선문답을 살펴보자.

백장화상은 마조문하의 정법을 이은 제자로서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원을 전통적인 율원에서 독립하고 수행교단을 확립한 선승으로 불교교단의 혁신을 이루었다. 선원에는 부처님을 모신 불전을 두지 않고, 주지가 설법하고 수행자들이 불법을 탁마하는 법당만을 건립하여 선문답을 나누며 정법의 안목을 갖춘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선원의 대중 모두가 의무적으로 노동에 참여해야 하는 보청법(普請)을 제정하여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자급자족의 경제생활과 생산적인 수행교단의 생활을 확립하였다.

특히 법당에서 주지가 정기적으로 수행자들을 위해서 설법을 실시하였고, 주지와 학인들과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많은 선문답이 실행되었다. 그래서 주지의 설법과 선문답이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는 지혜의 법문이었기 때문에 성전의 의미를 갖고 기록하게 되어 어록이라는 새로운 불교의 문헌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어록은 선승들이 경율론의 삼장을 통해서 체득한 불법의 정신을 일상생활의 언어나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나눈 생활상의 설법이며 대화의 기록인 것이다. 사실 마조대사의 비문에 10대제자의 이름을 기록한 곳에 백장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마조문하에 너무나 뛰어난 선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마조의 정법을 이은 제자로는 백장이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 소위 사가(四家)어록은 마조, 백장, 황벽, 임제어록을 말하는 것처럼, 마조의 정법을 상승한 후계자의 법통을 확정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백장이 마조문하의 수제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위산영우(山靈祐:771~853)라는 위대한 선승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후대에 백장문하에 황벽이 정법상승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임제라는 선승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선종의 법통은 훌륭한 제자들에 의해서 밑에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본칙에 등장하는 위산은 {벽암록} 4칙에 등장하고 있는데, 위산이 백장의 지도로 깨닫고 법을 잇게 된 선문답이 {전등록} 9권 위산전에 전한다. 즉 백장화상이 위산스님에게 화로에 불씨가 있는지 살펴보라! 고 지시하자, 위산은 불이 없다고 대답한다. 백장은 몸소 일어나 화로의 잿더미 속을 헤쳐서 조그만 불씨를 찾아들고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그치자, 위산이 그 때 깨닫고 절을 하니, 백장이 다음과 같이 인가하는 설법을 했다.

여기가 아슬아슬한 갈림길이다. 경전에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시절 인연을 관찰하라"고 하였는데, 시절이 이르면 미혹했다가 깨닫는 것 같고, 잃어버렸던 일을 기억하면, 본래 자기의 물건이요 남에게서 얻은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조사가 "깨닫고 나면 깨닫기 이전과 같고, 망심이 없으면 경계(法)도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다만 허망하게 범부나 성인 따위의 차별생각이 없으면 본래부터 망심과 경계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잘 보호해 지니도록 하라.

기서 말하는 불씨는 불성을 상징한 것인데, 누구라도 불씨를 가지고 있다. {주자어류} 4권에도 잿더미속의 불씨를 사람의 본성에 비유하고 있으며, 대혜도 "식은 잿더미속의 한 알의 콩알이 튀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씨가 불로 연소되는 것은 시절인연이며, 시절인연을 관찰하는 자각의 지혜가 불성을 보고 깨닫는 일이다.

본칙은 백장화상이 위산스님에게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던져 위산의 안목을 점검하고 있다. 목구멍(咽喉)과 입술(脣吻)은 함께 말을 하는 인체기관이다. 언어는 여러 가지 소리가 있어 목구멍과 입술, 턱, 혓소리 등으로 나누고 있는데, 모두 이 목구멍과 입술의 기관을 통해서 발음이 가능하다. 목구멍과 입술을 닫고서는 한 마디도 발음할 수가 없다. 백장은 언어 문자로 발음하기 이전의 소식(聲前一句)을 제시해 보라고 어려운 문제를 위산에게 던진 것이다. 원오는 '수시'에 "말하기 이전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라고 문제 제기한 것이다. 백장의 물음에 원오는 "백장과 같은 훌륭한 장수 한 명을 구하기 어렵다."라고 착어했는데, 백장과 같이 훌륭한 장수 밑에는 반드시 위산과 같은 훌륭한 장수가 있기 마련이다. 위산스님은 백장의 물음이 끝남과 동시 찰나에 "화상께서 목구멍과 입을 닫아버리고 말해보라고 했는데, 먼저 화상께서 그렇게 말씀해 보십시오."라고 반문했다. 문제를 제기한 그 사람의 근본당체로 문제를 되돌리고 있는 말이다. 문제의 갈등을 갈등이 일어나기 이전의 본래 상태로 되돌려 무효화시키고 있다. 원오는 "적군의 길을 이용하여 적군을 격파한 작전은 교묘한 전술이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장화상은 "내가 그대에게 조금도 사양치 않고 말해주고 싶지만 내가 말해버리면 훗날 나의 법손이 없어질 것을 걱정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럴까? 원래 목구멍과 입술로 뱉은 말은 방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진실 그 자체는 아니다. 말하자면 지혜작용이 없는 언어문자의 표현인데, 이 언어 문자에 끄달리고 집착하여 불법의 진실을 체득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언어 문자에 끄달린 참선공부를 사구(死句)참구라고 하며,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고 불성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참선수행을 활구(活句)참구라고 한다. 원오도 백장화상은 제자와 후대의 수행자들이 올바른 활구참구로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참선수행을 하여 불혜명(佛慧命)이 단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파심이라고 평하고 있다.

설두화상이 게송으로 읊었다. "화상께서 말씀해 보시오." 위산이 백장의 문제를 차단한 말을 들고, 위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뿔 돋친 호랑이가 울창한 숲 속에서 나왔다."고 읊고 있다. 호랑이는 맹수인데 뿔까지 갖춘 호랑이가 숲 속에서 뛰어나왔기 때문에 어떤 것도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위산이 백장에게 되돌린 말 한마디 지혜작용은 뿔 돋친 호랑이가 되어 걸림이 없었다. "십주(十洲)에 봄이 저무니 꽃잎이 시들한데." 십주는 중국인들이 상상한 이상세계인데, 원오는 '평창'에 설명하고 있다. 그러한 이상세계라도 역시 봄이 저물면 꽃이 시들한 법, 인간세계와 다름없다. 불법을 체득하여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도 목과 입술을 사용하여 언어문자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하면 똑같이 중생의 차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봄이 저무는 일도 없고 꽃이 떨어지는 일이 없는 상주불멸의 세계(본래심)는 어딘가? "산호 가지마다 햇살이 빛나는 구나." 바다 속에 산호는 언제나 변함없는 아름다운 꽃나무로다.

 

 

 

http://kr.buddhism.org/%eb%b2%bd%ec%95%94%eb%a1%9d/?mod=document&pageid=1&uid=75 

 

벽암록(6) 51칙 ~ 60칙

벽암록 51칙 설봉화상과 두 스님 “깨달음은 같아도 교화하는 방법은 다르다”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

kr.buddhism.org

 

[第051則]要識末句後
〈垂示〉垂示云。纔有是非。紛然失心。不落階級。又無摸索。且道放行卽是。把住卽是。到這裏。若有一絲毫解路。猶滯言詮。尙拘機境。盡是依草附木。直饒便到獨脫處。未免萬里望鄕關。還搆得麽。若未搆得。且只理會箇理成公案。試擧看。
〈本則〉擧。雪峰住庵時。有兩僧來禮拜。峰見來。以手托庵門。放身出云。是什麽。僧亦云。是什麽。峰低頭歸庵。僧後到巖頭。頭問。什麽處來。僧云。嶺南來。頭云。曾到雪峰麽。僧云。曾到。頭云。有何言句。僧擧前話。頭云。他道什麽。僧云。他無語低頭歸庵。頭云。噫我當初悔不向他道末後句。若向伊道。天下人不奈雪老何。僧至夏末。再擧前話請益。頭云。何不早問。僧云。未敢容易。頭云。雪峰雖與我同條生。不與我同條死。要識末句後。只這是。
〈頌〉末後句爲君說。明暗雙雙底時節。同條生也共相知。不同條死還殊絶。還殊絶。黃頭碧眼須甄別。南北東西歸去來。夜深同看千巖雪。

벽암록 51칙 설봉화상과 두 스님

“깨달음은 같아도 교화하는 방법은 다르다”


{벽암록}제51칙은 설봉의존화상을 참문한 두 스님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擧. 雪峰住庵時, 有兩僧來禮拜. 峰見來, 以手托庵門, 放身出云, 是什. 僧亦云, 是什. 峰, 低頭歸庵. 僧後到巖頭. 頭問, 什處來. 僧云, 嶺南來. 頭云, 曾到雪峰. 僧云, 曾到, 頭云, 有何言句. 僧擧前話. 頭云, 他道什. 僧云, 他無語低頭歸庵. 頭云, 噫, 我當初悔, 不向他道末後句. 若向伊道, 天下人不奈雪老何. 僧至夏末, 再擧前話請益,. 頭云, 何不早問. 僧云, 未敢容易. 頭云, 雪峰雖與我同條生, 不與我同條死. 要識末後句, 只這是.


매화와 벚꽃 다르듯 모양과 작용이 달라
말후구(末後句)는 불법을 체득한 한마디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을 때 두 스님이 찾아와서 예배를 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서 말했다. "뭐야!?" 스님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이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말했다. "영남에서 왔습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예. 갔다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물었다.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스님은 지난날에 있었던 대화를 말씀드리자, 암두화상이 말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스님은 말했다. "설봉화상은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 암두화상이 말했다.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만약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 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스님은 하안거 끝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말했다. "설봉이 나와 똑같이 한줄기에서 태어났지만(生) 나와 똑같이 죽지(死)는 않는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

이 공안은 {조당집}제7권 암두장과 {오등회원}제7권 설봉장에 전하고 있다. 설봉과 암두는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 {벽암록} 22칙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암두의 교시에 의해 설봉이 오산(鼇山)에서 깨닫고 성도를 하게 되었다. 설봉화상이 영남의 암자에 은거하고 있을 때는 당나라 무종(武宗)의 회창(會昌)5년 폐불사건으로 천하의 사찰을 훼손하고 26만500명의 승려를 환속시킨 일대 법난의 시기였다. 당시 동문인 암두전활(巖頭全豁)선사는 악저호(鄂渚湖)라는 호수에서 뱃사공으로 은거하며 살고 있었다.

설봉화상이 암자에 있는데 두 스님이 찾아와서 참문하자, 설봉화상은 그들을 보고 손으로 암자의 문을 열고 뛰어 나와서 "뭐야!?"라고 묻자, 그 스님들도 역시 "뭐야!" 라고 말했다. 원오는 '화살촉이 서로 마주쳤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과 두 스님의 지혜작용(機鋒)이 일치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설봉은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다.' 원오도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설봉의 기봉에 손 쓸 수가 없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은 임제의 고함이나 덕산의 방망이처럼 격렬한 선기를 들어내지는 않았지만 깊은 선지(禪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단은 마치 {무문관} 제13칙에 설봉이 덕산선사에게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도 치지 않았는데 발우를 들고 어디를 가느냐고 다그치는 한마디에 덕산은 말없이 방장실로 되돌아갔다는 내용과 갔다.

그 스님은 뒤에 암두화상의 처소에 이르자, 암두화상은 "어디서 오는가" 라고 물었다. 암두의 물음은 스님들이 어느 지방에서 왔는가를 묻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그들의 수행 정도를 파악하기 위한 말이다. 그 스님은 "영남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암두화상은 "설봉화상을 찾아갔었는가?"라고 물었다. 암두화상은 영남지방의 선지식으로 활약하고 있는 유명한 설봉화상을 친견하고 왔는가 확인하고 있다. 단순히 설봉의 얼굴을 친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설봉의 진의(眞意)와 정법의 안목을 친견했는가를 묻고 있다. 그 스님은 "예, 찾아뵙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오는 '진실한 사람 만나기 어렵다. 차별(양변)에 떨어졌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설봉의 처소에 이르렀다는 대답은 벌써 양변의 차별적인 견해에 떨어진 것이라고 평했다. 본래의 근본당처(불심)에 도달하고 도달하지 못한 것은 이전과 지금으로 논의하거나 사량분별할 장소가 아닌 것이다. 선의 종지로 한방 먹인 것이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라고 묻자, 스님은 지난날에 설봉화상을 참문한 일과 그 당시의 대화를 말씀드렸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무슨 말을 했는가?" 라고 묻자, 스님은 "당시 설봉화상은 말도 없이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갔습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정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암두화상은 "아아!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末後句)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그때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일러주었더라면 천하 사람들이 설봉을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한마디가 본칙 공안의 핵심이며, 진실로 자비심이 깊은 암두의 인격이 들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스님이 설봉을 참문했을 때, 설봉이 "뭐야!"라고 말하자, 스님도 "뭐야!"라고 응답하자, 설봉이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갔다고 한 말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암두는 "설봉은 나와 같이 덕산을 스승으로 참선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오산에서 성도하게 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 때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를 더 제시했었더라면 이 스님들과 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을 것인데"라고 후회하고 있는 말이다. 암두의 이 말은 들은 스님은 비로소 설봉이 "뭐야!"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간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말후구가 불법을 체득해야 할 문제(疑團)가 되어 90일간 안거동안 이 문제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말후구는 최후로 궁극적인 불도를 체득하는 한마디(一句)로 중생심(의심)을 죽이고 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확신(信心)으로 불심의 지혜작용을 살리는 법문을 말한다.

그 스님은 하안거가 끝날 때에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들어내어 암두화상께 법문을 청했다. 암두화상은 "왜 진작 묻지 않았는가"라고 말하자, 스님은 "감히 쉽게 여쭙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암두화상은 "설봉이 나와 똑같이 덕산의 문하에서 수학한 동문으로서 깨달음은 같지만, 교화방법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 말(末後句)을 알고자 하는가. 단지 이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똑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불법의 대의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설봉은 설봉의 안목이 있고, 암두는 암두의 안목이 있기 때문에 학인을 교화하는 수단은 같지 않다. 불법의 궁극적인 한마디는 바로 이것뿐이다. 지견 분별과 언어문자를 여읜 본래심으로 사는 경지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설했다.

설두는 게송으로 읊었다. '궁극적인 한마디. 그대에게 말한다.' 암두가 말후구를 설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는데, 내가(설두) 학인들을 위해 설하리라. '밝음과 어둠이 쌍쌍으로 어울리는 시절이다.' 차별과 평등, 미혹과 깨달음을 함께 초월한 경지가 설두가 설한 말후구이다.

'같은 가지에서 나온 것은 알지만, 죽음을 달리한다는 사실은 모르는군.' 암두의 말을 이어 설두는 밝음이 쌍으로 이루어지는 천지 만물이 생성하는 경지와 어둠이 쌍으로 전개되는 만물일체의 절대 평등의 세계를 읊고 있다. 만물이 생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처럼, 성장과 모양과 작용은 각기 다른 것이다. 매화와 벚꽃이 다르고 산과 물이 각각 자기의 모양과 색깔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제법실상의 세계라는 사실이 설두가 제시한 말후구의 법문이다.

'달리한다는 사실.' 만물이 같이 태어나도 같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그와 같이 '석가와 달마의 다름도 잘 분별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만물이 각자 되돌아갈 본래의 곳으로 '남북동서로 돌아가라' '한밤중에 일천 바위를 뒤덮은 흰눈을 함께 본다'는 말은 밝음과 어둠(明暗)을 함께 보는 절대평등의 경지를 설두는 말후구로 읊고 있다.



[第052則]渡驢渡馬
〈本則〉擧。僧問趙州。久響趙州石橋。到來只見略彴。州云。汝只見略彴。且不見石橋。僧云。如何是石橋。州云。渡驢渡馬。
〈頌〉孤危不立道方高。入海還須釣巨鼇。堪笑同時灌溪老。解云劈箭亦徒勞。

벽암록 52칙 조주의 돌다리

“조주의 돌다리는 깨달음 인도하는 가르침”


{벽암록} 제52칙은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한 질문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말했다.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하여 우러러 사모한지 오래 되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통나무 다리뿐이군요" 조주화상이 말했다. "그대는 통나무 다리만 보았을 뿐 돌다리(石橋)는 보지 못했군!" 스님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石橋) 입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擧. 僧問趙州, 久響趙州石橋, 到來只見略. 州云, 汝只見略, 且不見石橋. 僧云, 如何是石橋. 州云, 渡驢渡馬.


어떤 사람이나 짐승도 건너가게
모두다 이끌어주는 훌륭한 스승

본칙의 공안은 {조주록} 중권과 {전등록} 제10권 조주전에 전하고 있다. 조주종심(778 ~897)은 {벽암록} 9칙에 조주 동서남북의 문에도 등장한 유명한 선승이다. {전등록}에는 위의 선문답에 이어서 다음의 질문이 첨가되어 있다. "스님이 어떤 것이 통나무 다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사람마다 각각 따로 건넌다(度)"라고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건넌다(度)'라는 말은 다리가 사람과 나귀, 말 등이 건너간다(渡)는 의미뿐만 아니라 이곳(사바세계)에서 저곳(열반)의 경지로 구제(渡)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 {조주록}에는 본칙의 공안과 똑같이 스님이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입니까"라고 질문하자, 조주화상은 "건너오게, 건너와!"라고 대답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을 찾아와 "조주의 돌다리(石橋)에 대하여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했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뭐야! 통나무 다리뿐이군!"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우러러 사모했다는 말로 구향(久響)은 구향(久嚮)이 맞다. {무문관} 제28칙에 덕산이 용담선사를 찾아가서 "오랫동안 용담을 사모(久響龍潭)하고 찾아갔는데, 연못도 없고 용도 보이지 않네"라는 덕산의 말도 같은 의미이다. 원오는 '평창'에서 "하북성 조주 땅에는 돌다리(石橋)가 있었는데, 이 다리는 이응(李膺)이 만든 것이라고 하며, 지금까지 천하에 유명하다. 약작(略)이란 외나무다리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종심화상이 거주한 조주의 관음원은 조주성의 동쪽에 있는데, 조주의 돌다리를 건너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석교(石橋)로 유명한 곳은 천태산과 남악과 조주의 돌다리 세 곳이다.

질문한 스님은 유명한 장소인 조주의 돌다리를 항상 우러러 사모하고 있었는데 와서 직접 확인해 보니 널판자 하나를 걸쳐놓은 다리 아닌가. 널판자 다리를 비유하여 조주화상을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은 안목이 뛰어나고 도가 높은 선지식으로 천하에 유명하여 항상 존경하고 사모했었는데, 찾아와서 직접 보니까 '볼품없이 늙고 메마른 영감이 아닌가'라는 의미를 내포한 비판의 일침을 내뱉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그래도 호랑이 수염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주화상을 상대하여 거침없이 비판할 수 있는 이 스님의 용기를 칭찬하면서, 그러나 자칫 잘못하다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아주 위험에 직면한 사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조주화상은 "그대는 조주의 외나무다리만 보았을 뿐, 진짜 조주의 돌다리(石橋)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눈으로 보이는 널판자의 조주 다리만 보고, 늙어빠진 조주를 친견하고도 조주화상의 진수인 지혜작용을 펼치는 참된 법신(法身)을 친견하지 못하고 있군' 즉 그대는 눈과 귀로 보고 듣고,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만을 마음이라고 믿고 중요한 본래의 불심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말이다. 원오는 "역시 조주는 이러한 스님을 상대하는 수단이 노련하다"고 착어했다. 마치 늙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조주의 접화 수단은 너무나 노련하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먹이로 제시하여 그 스님을 낚아 올리고 있다.

즉스님은 "어떤 것이 조주의 돌다리(石橋) 입니까?"라고 다그치며 질문한 것은 원오의 착어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이 던진 낚시에 걸린 것이다. 사실 질문한 스님은 조주의 돌다리와 널판자다리, 두 가지 다리(사물)로 나누어 대립시키고 있는 것부터 커다란 결함을 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라고 태연하게 대답하고 있다. 조주의 돌다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짐승도 마차도 모두 왕래하며 다니는 다리이다. 조주의 돌다리는 어떠한 사람이나 마차나 짐승이 밟고 지나가도 본래 여여한 그대로 무심한 경지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조주의 마음도 무심의 경지에서 평상심으로, 일체의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마치 돌다리와 같은 경지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말이다.

황벽의 설법에 '무심한 마음'을 허공과 갠지스 강의 모래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갠지스 강의 모래(恒河沙)라는 말은 경전에 자주 나오고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설법한다. 이 모래는 부처나 보살이나, 제석천이나 범천 등의 천인이 그 위를 밟고 걸어도 별달리 고맙고 감사하며 기쁘게 생각하지도 않고, 또한 소나 양, 곤충 벌레들이 밟고 지나가도 달리 성내거나 화내지 않는다. 진귀한 보물이나 값비싼 향수도 욕심내지 않으며, 똥이나 오줌, 더러운 물질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 갠지스 강의 모래 같은 마음을 무심(無心)의 마음이라고 한다."

"조주의 돌다리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라고 말한 것은 무심의 경지에서 묵묵히 하심행을 하는 보살이며, 부처가 중생과 함께하는 동사섭으로 철저하게 돌다리와 같고,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은 대승보살의 마음이라고 설한 것이다.

{화엄경} 정행품에 다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한다. "만약 교량을 보면 마땅히 원력을 세워라 중생을 위하여 불법의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건너게 하여 망념을 쉬도록 하리라고." 중생의 제도하는 보현보살의 정신을 다리를 건너 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자비로 실행할 것을 설하고 있다. 조주의 돌다리를 밟고 지나가는 것은 조주의 본래 부처(古佛)를 친견하는 것이며, 중생심의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경지로 인도되는 인연인 것이다.

{조당집} 제7권에 설봉은 행각하면서 천태산의 돌다리(石橋)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불도를 배우고 수행을 하기에 힘이 충분치 못하거든, 부디 이 몸을 끌고 험한 길을 걸어라. 돌다리(石橋)를 한차례 지나고 난 뒤에 허망한 이 몸이 다시 나지 않는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고고하게 위세를 부리지 않지만 도는 드높네." 조주화상이 사람들을 지도하는 방법은 임제나 덕산처럼, 고함이나 방망이를 사용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든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고, 일상생활의 평범한 대화로 말하고 있지만, 그의 평범한 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오르기 힘든 천 길의 벼랑이 있다. 설두는 이 한 마디로 조주의 위대한 교화를 찬탄하고 있다.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큰 자라를 낚아야지.” 열자(列子)에 용백국(龍伯國)이라는 곳에 큰 사람이 한 번의 낚시에 여섯 마리의 자라를 낚아 돌아간다는 고사를 토대로 읊은 것인데, 바다에서 낚시를 하려면 피라미나 새우같은 잡어를 낚아서는 안 된다. 조주화상이 불법의 대해(大海)에서 사람을 접견하는 것은 한마디의 낚시로 큰 자라를 잡는 것처럼, 출격 대장부를 낚으려고 한 것이라고 조주의 수단을 칭송한 말이다.

“우습다. 같은 시대의 관계(灌溪)스님이여”

관계스님은 임제의 법을 이은 지한(志閑)선사로 조주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평창'에 인용한 것처럼, 어떤 스님이 관계화상을 침문하고 본칙의 내용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어떤 것이 관계입니까?” 질문하자, 관계화상은 "쏜살같은 급류"라고말했다. 자신의 지혜작용은 "쏜살같은 급류"라고 말할 줄은 알았지만, "부질없는 헛수고였네." 왜 조주화상처럼,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넌다고 평탄한 말로 본지풍광을 들어내지 못했을까? 동시대의 관계스님의 안목을 비판하며 조주의 경지를 칭찬하고 있다.



[第053則]何曾飛去
〈垂示〉垂示云。遍界不藏。全機獨露。觸途無滯。著著有出身之機。句下無私。頭頭有殺人之意。且道古人。畢竟向什麽處休歇。試擧看。
〈本則〉擧。馬大師與百丈行次。見野鴨子飛過。大師云。是什麽。丈云。野鴨子。大師云。什麽處去也。丈云。飛過去也。大師遂扭百丈鼻頭。丈作忍痛聲。大師云。何曾飛去。
〈頌〉野鴨子。知何許。馬祖見來相共語。話盡山雲海月情。依前不會還飛去。欲飛去。卻把住。道道。

벽암록 53칙 마조화상과 들오리

"지극한 '도(道)'는 온 세계에 두루 퍼져있어"


{벽암록} 제53칙은 마조도일 화상과 백장스님이 들오리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조대사가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조대사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가?' 백장스님이 말했다. '들오리입니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어디로 날아갔느냐?' 백장이 말했다. '날아 가버렸습니다' 마조대사는 드디어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백장은 아픔의 고통을 참느라고 신음하였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뭐야! 날아 가버렸다고'

擧. 馬大師, 與百丈行次, 見野鴨子飛過. 大師云, 是什. 丈云, 野鴨子. 大師云, 什處去也. 丈云, 飛過去也. 大師, 遂百丈鼻頭, 丈作忍痛聲. 大師云, 何曾飛去.

본칙은 {광등록} 제8권 백장전에 처음으로 전하고 있으며, {연등회요} 제4권과 {설두송고} 53칙에 최초로 수록한 공안이다. {조당집} 제15권 오설영묵(五洩靈默)전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어느 날 마조대사가 대중을 거느리고 서쪽 담장 밑을 거닐다가 갑자기 오리떼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마조대사가 주위를 돌아보고 물었다. '무슨 소리인가?' 정(政)상좌가 말했다. ' 오리떼 입니다' '어디로 갔는가?' '날아갔습니다' 마조대사는 정상좌의 코를 잡아끄니 정상좌가 아파서 소리 지르자, 대사가 말했다. '아직 여기에 있는데 언제 날아갔다고 하는가' 정상좌가 활짝 깨달았다” 정상좌는 마조의 제자 백장유정(百丈惟政)으로, 이것이 본칙공안의 원형인데, 뒤에 {광등록}과 {설두송고}에서는 마조와 백장회해와의 인연으로 변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조도일(709~788)은 {벽암록} 제3칙에서 소개한 것처럼, 조사선의 선구자이다. {전등록}에는 그의 문하에 뛰어난 선지식이 139명이나 배출되었다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조사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선원을 독립하고 {백창청규}를 제정하여 선불교의 새로운 교단을 체계화한 사람이 백장회해(749~814)인데, 그의 법문도 26칙에 싣고 있다.

마조대사가 백장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선문답의 화제로 제시하여 백장의 안목을 시험하고 있다. 이러한 선문답을, 사물을 가리켜서 불법의 참된 정신을 체득하게 하는 문제라고 한다. 마조대사가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원오도 '평창'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조대사가 들오리인줄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마조대사는 그렇게 물었을까. 마조대사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말하자면 들오리가 날아가는 그 곳에 만물이 존재하는 본질과 미묘한 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백장이 잘 알고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던진 물음인 것이다.

백장스님은 그냥 "들오리입니다"라고 들오리가 날아가고 있는 그대로를 본대로 정직하게 대답한 것이다. 당시의 백장은 마조대사를 지도를 받고 있는 젊은 수행자였기 때문에 안목을 갖춘 날카로운 선기(禪機)가 없다. 원오도 "백장의 면목(鼻孔)이 이미 다른 사람(마조)의 손안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의 물음에 너무 정직하게 대답한 것은 자신이 자유가 없다. 때문에 그의 생명은 이미 마조대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조대사는 다시 "어디로 날아갔느냐?"고 물었다. 들오리가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 마조대사의 저의는 법계에 두루하여 감출 수 없는 대도의 지혜작용은 필경 어느 곳에 귀착되는가? 들오리와 일체의 만법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 만법의 귀결처를 묻고 있는 말이다. 두 번째로 시험하는 마조의 물음은 문제의 핵심을 더욱 분명히 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원오도 "앞의 화살은 아직 가볍게 박혔지만, 뒤의 화살은 깊게 박혔다"라고 착어했다. 원오는 또 "또한 마땅히 스스로 알아야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대사가 “이것은 무엇인가?” "어디로 날아갔는가?"라고 혼잣말로 묻는데, 들오리의 낙처를 문제로 한다면 마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백장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백장은 거듭 "날아 가버렸습니다"라고 어디까지나 바보처럼 정직하게 본대로 들오리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다. 원오는 "단지 마조대사의 말만 쫓아다닌다. 정면에서 어긋났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백장은 마조대사의 질문에 따라 너무 정직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러나 마조대사는 본분사를 문제로 하여 묻고 있는데, 백장은 들오리를 화제로 삼고 대답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빗나간 대화라고 비평하고 있다. 마조대사는 드디어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마조대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백장을 깨닫도록 여러가지 물음과 방편을 제시했지만 생각한대로 진행하지 못하자 즉시 선기(禪機)를 발동하여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원오는 "부모가 낳아준 코(본래면목)를 도리어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마조가 손으로 비틀은 코는 백장 자신의 코인데, 그 코를 다른 사람이 붙잡고 비틀고 있으니 안타깝다. 멍청하게 들오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상황이 아니며, 마조대사의 물음에 그냥 본대로 대답할 분위기도 아니다. 코는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이 전부 들어난 전기독로(全機獨露)인 것이다. 백장 자신도 원래 자신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이 있는데 왜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자신의 본래면목과 선기를 발동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실 백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공안을 읽는 모두가 자신의 본래면목과 지혜작용을 발휘해야 할 것을 자각해야 한다.

마조대사가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자 백장은 아픔의 고통을 참지 못하여 "아야!"라고 신음소리를 냈다. 백장이 고통을 참지 못해서 나오는 신음소리는 본래심의 작용으로 들어난 백장의 본분사인 것이다. 인통(忍痛)의 소리는 일부러 내는 작위성의 소리나 분별심의 소리가 아니다. 백장 자신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고함소리이며 본래면목의 지혜작용으로 나타난 전기독로(全機獨露)인 것이며, 우주법계가 감출 수 없는 본래 자연의 소리이며 법음(法音)인 것이다. 원오는 "아파서 신음하는 그 가운데 본래면목이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백장은 앞에서 "날아가 버렸다"고 말했는데, 들오리는 지금 코를 비틀자 여기서 아프다고 신음하고 있지 않는가? 신음하고 있는 것이 들오리인가, 백장인가? 이 소리는 들오리의 울음이기도 하고, 백장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며, 각자의 본래심의 소리(법음)인 것이다.

마조대사는 백장의 코를 비틀고 쳐다보며 “뭐야! 들오리가 날아 가버렸다고” 여기 내 앞에서 아프다고 고함치고 있지 않는가? 젊은 제자 백장을 지도하는 노파심이 넘치고 있다.

이후의 이야기는 '평창'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마조대사의 지도와 시절인연이 도래되어 백장은 단박에 깨닫게 되었다. 이튼날 마조대사는 "그대는 깊이 오늘의 일을 잘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며 백장을 인가하였다고 전한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들오리여!” 설두는 큰 소리로 들오리를 부르고 있다. 마조와 백장이 가는 길에 나타난 들오리인가? 여기서 말하는 들오리는 불법의 대도이며, 사람들이 구족하고 있는 불성인 들오리를 불러 자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디(何許)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들오리가 날아갔다고 하는데 어디로 갔는가? 설두는 마조를 대신하여 백장, 그대는 들오리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아는가? “마조대사는 만나자 말을 걸었네.” 마조는 들오리를 발견한 백장에게 대화를 한 것을 읊었다. 백장은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임을 파악하고, 대화를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인줄 알고 말을 걸었다. “산, 구름, 바다, 달, 등 온갖 것들에 대해서 모두 말했네.” 마조는 속진(俗塵)을 떠난 자연의 대도(大道)와 불법의 근본을 마음껏 말했네. 그러나 백장은 마조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모르고서 도리어 날아갔다"고 말했다. 백장은 코가 비틀리자 아야! 하면서 깨달았다. 설두는 "날아가려고 하는 순간, 붙잡고서 말해라, 말해봐!"라고 독자에게 재촉한다. 그대는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第054則]某甲話在
〈垂示〉垂示云。透出生死。撥轉機關。等閑截鐵斬釘。隨處蓋天蓋地。且道是什麽人行履處。試擧看。
〈本則〉擧。雲門問僧近離甚處。僧云。西禪。門云。西禪近日有何言句。僧展兩手。門打一掌。僧云。某甲話在。門卻展兩手。僧無語。門便打。
〈頌〉虎頭虎尾一時收。凜凜威風四百州。卻問不知何太嶮。

벽암록 54칙 운문화상의 ‘어디서 왔는가’

"구도자는 독자적인 지혜와 안목 갖춰야”


{벽암록} 제54칙은 운문문언 화상을 참문한 스님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운문 화상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 운문 화상이 물었다. “서선사에서는 요즘 어떤 말(言句)이 있었는가?” 스님은 두 손을 펼쳤다. 운문 화상은 손바닥으로 한방 갈겼다. 스님은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 운문 화상이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 스님은 말이 없었다. 운문 화상은 곧장 내리쳤다.

擧. 雲門問僧, 近離甚處. 僧云, 西禪. 門云, 西禪近日, 有何言句. 僧, 展兩手. 門, 打一掌. 僧云, 某甲話在. 門, 展兩手. 僧, 無語. 門, 便打.


운문문언(864~949) 화상은 {벽암록}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 당말의 선승으로 달리 소개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하권, '감변(勘弁)'에 수록되어 있는데, 본문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화 내용은 같다. 하안거를 마치고 운수납자인 어떤 수행자가 운문 화상을 친견하러 왔다. 운문 화상은 그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는가?”라고 물었다. 이것은 선지식이 처음 참문하는 수행자에게 던지는 상투적인 수단이다.

{벽암록} 10칙과 35칙에서도 목주와 앙산이 학인에게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처럼 선문답에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원오가 "탐간영초(探竿影草)"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어부가 고기를 불러들이기 위해 수단방편으로 설치하는 도구이다.

즉 수행자의 안목과 식견을 살펴 측정해 보기 위해 던지는 한마디이다. 물의 깊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사용하고, 사람의 안목과 지혜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마디 인사말(一句)를 던지는 것이다. 한마디의 말과 행동으로 벌써 상대방의 역량과 안목을 간취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학인을 맞이하는 일상적인 한마디지만 방심할 수 없는 말이다.

'어디(甚處)서 왔는가?'라고 묻고 있지만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나 위치방향을 묻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장소나 방향위치를 등지고는 물음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한 인사말이라고 할 수 없다. 학인이 장소로 대답하면 장소를 물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고, 단순히 인사로 받아들이면 운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운문이 묻고 있는 '어디(甚處)서 왔는가?'라는 한마디에 장소와 학인의 본분을 묻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된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 스님은 "서선사(西禪寺)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운문어록}에는 운문 화상이 "하안거는 어디서 보냈는가?"라는 질문에 "서선사에서 안거를 보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서선사는 소주(蘇州)에 있는 사찰인데, 이 스님은 광동성의 소주(韶州) 운문산까지 온 것이다. 당시 서선사에는 누가 주지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등회원} 제4권에는 남전보원의 제자인 소주서선 화상이 행화를 펼친 곳인데, 운문 화상과 시대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회요}에는 서선 화상의 문하에서 수학한 스님이 뒤에 운문의 스승인 설봉선사를 참문한 이야기도 전하고 있지만, 운문 당시의 서선사의 선지식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운문 화상은 스님에게 "서선사의 주지 화상은 어떠한 법문(言句)으로 학인들을 지도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즉 그대는 서선사에서 주지 화상의 법문을 듣고 체득한 경지는 어떠한지 제시해 보라는 말이다. 그러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앞으로 내보였다. 손바닥을 펼쳐 보인 행동을 전수(展手)라고 하는데, 선승들의 선문답에 자주 등장한다.

{운문광록} 중권에도 "운문 화상은 어떠한 법문을 설하는가?"라고 질문하자, 그 스님은 '두 손을 펴서 양쪽으로 내렸다(展兩手垂兩邊)'라는 일단이 보인다. {조당집} 19권, "'불법의 궁극적인 일은 무엇입니가?'라는 질문에 선사는 양 손을 펼쳤다"라고 하는 것처럼, 양손을 펼쳐 보인 행동은 불법의 근본을 제시하여 보인 행동이다. 이것으로 불법의 근본정신을 하나도 감춤없이 모두 다 들어내 보였다는 의미이다.

또한 {조주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단이 보인다. 조주선사는 새로운 스님에게 '요즘 어디서 왔는가?'라고 질문했다. 그 스님은 '오대산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조주는 '문수를 친견했는가?'라고 질문했다. 스님은 손을 펴 보였다. 조주는 '그러한 흉내를 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문수는 누가 친견한 것인가?'라는 대화가 있다. 여기서도 자신이 바로 문수이기 때문에 중생구제의 원행을 손을 펴 보인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다.

동산양개 화상이 학인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조도(鳥道), 현로(玄路),전수(展手)의 세 가지 방편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조도(鳥道)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며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일체의 경계에 걸림 없는 무심의 경지를 체득하도록 하는 것이고, 현로(玄路)는 일체의 차별 견해를 초월한 공적한 경계에 살도록 하며, 전수(展手)는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수(展手)는 수수(垂手)나 수자(垂慈)와 같은 말로 부모가 손을 내밀어 어린애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것처럼,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행을 말한다. {십우도}의 마지막에 저자거리에 나아가 중생을 구제하는 '입전수수(立廛垂手)'는 이러한 보살도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참고로 법화사상에서 말하는 수적(垂迹)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교화를 위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화신을 나툰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불보살의 근본을 본지(本地)라고 하며 화신으로 몸을 나툰것을 본지수적(本地垂迹)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님이 손을 펴서 내보이자 운문 화상은 전광석화와 같이 손으로 그 스님을 한방 후려쳤다. 덕산의 방망이와 임제의 고함과 같이 운문의 안목은 일체의 분별심과 거짓 흉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원오는 그 스님이 남의 흉내를 내고 있는 살림살이에 대하여 도적의 살림이 파산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이러한 운문의 행동에 그 스님은 "나도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은 '내 말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후려갈기면 어떠합니까'라는 강한 의사 표현이다. 그러자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이 행동으로 보인 것처럼, 곧장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손을 펼쳐보인 행동은 같지만 그 스님은 남의 흉내를 낸 것이고, 운문 화상은 그 스님을 위해서 불법의 대의를 숨김없이 모두 다 행동으로 제시해 보인 것이다. 그러나 그 스님은 운문의 자비심과 행화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이 없었다. 그래서 운문화상은 그 스님을 본격적으로 곧장 내리치며 정신 차리도록 지시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어떤 선지식을 모시고 불법을 공부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독자적인 지혜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해야 하는 것이다. {전등록} 29권에 '장부는 하늘을 찌르는 뜻이 있으니 여래가 행한 길도 가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나 여래의 경지까지 초월한 독자적인 안목을 구족해야 한다는 말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호랑이의 머리와 꼬리를 일시에 잡으니” 운문화상의 선기와 방편적인 수단이 원만하고 뛰어남을 칭찬한 말이다. 처음 운문 화상이 곧장 한방 후리치리고, 나중에 운문 화상이 두 손을 내밀어 보이자, 그 스님이 대답하지 못하자 역시 또 한방 먹인 것은 정법의 안목으로 지도한 것이다. 운문의 교화방법은 전후와 수미(首尾)에 지혜의 방편법문으로 일관되게 대응하여 제시한 것을 읊고 있다.

“늠름한 위풍이 천하(四百州)에 떨쳤네.” 앞의 한 마디로 본칙 공안의 입장을 읊었지만, 다시 뜻을 이어서 운문에 대한 찬사를 연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의 덕망과 지혜의 선풍은 중국 천하 4백주(四百州)에 두루 하네. 아무리 중국 땅이 넓다고 할지라도 운문 화상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다"고 지극히 높게 찬탄하고 있다. 원오도 "온 천하 사람들의 말문을 막고 있네. 누구 한 사람 운문화상 앞에서 일언반구도 제시할 수가 없다."고 찬탄하고 있다.

“도리어 묻노니 어쩌면 그렇게 험준한지 알 수 없어라.” 설두 화상이 학인에게 제시한 문제의 질문으로 운문 화상의 선기작용이 험준한 경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고 제시한 것이다. “설두는 운문을 대신해서 '한번 용서해 준다'라고 했다.” 어떻게 운문의 험준한 선기를 파악해야 할 것인가? 잘 사유하고 사유해야 할 것이다.


[第055則]不道不道
〈垂示〉垂示云。穩密全眞。當頭取證。涉流轉物。直下承當。向擊石火閃電光中。坐斷[言+肴]訛。於據虎頭收虎尾處。壁立千仞。則且置。放一線道。還有爲人處也無。試擧看。
〈本則〉擧。道吾與漸源至一家弔慰。源拍棺云。生邪死邪。吾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吾云。不道不道。回至中路。源云。和尙快與某甲道。若不道。打和尙去也。吾云。打卽任打。道卽不道。源便打。後道吾遷化。源到石霜擧似前話。霜云。生也不道。死也不道。源云。爲什麽不道。霜云。不道不道。源於言下有省。源一日將鍬子。於法堂上。從東過西。從西過東。霜云。作什麽。源云。覓先師靈骨。霜云。洪波浩渺白浪滔天。覓什麽先師靈骨。源云。正好著力。太原孚云。先師靈骨猶在。
〈頌〉免馬有角。牛羊無角。絶毫絶氂。如山如嶽。黃金靈骨今猶在。白浪滔天何處著。無處著。隻履西歸曾失卻。

벽암록 55칙 도오화상의 조문

“생사가 여일한데 生과 死는 왜 구별하나”


{벽암록} 제55칙은 도오원지(道吾圓智)화상과 제자 점원(漸源)이 어떤 집을 방문하여 문상하면서 나눈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수록하고 있다.

도오화상이 제자 점원스님과 함께 어느 집에서 조문을 하게 되었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말했다. “살았는가? 죽었는가?” 도오화상이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점원이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 도오화상이 말했다.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절로 돌아오는 길에 점원이 말했다. “화상은 저를 위해서 어서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 도오화상이 말했다. “때릴려면 때려라! 그러나 말할 수 없다.” 점원은 곧장 후려 쳤다. 그 뒤에 도오화상이 입적하자 점원은 석상화상께 가서 이 이야기를 했다. 석상화상은 말했다.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점원이 말했다.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 석상화상이 말했다.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 점원은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점원은 어느 날 삽을 들고 법당 안에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고가자, 석상화상이 말했다. “무엇하는가?” 점원은 말했다. “스승(先師)의 영골(靈骨)을 찾습니다.” 석상화상이 말했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까마득히 하늘까지 넘실거리는데, 무슨 스승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인가?” 설두가 착어했다. “아이고! 아이고!”점원이 말했다. “온 힘을 다해서 부딪쳐 봅니다.” 태원의 부상좌가 말했다. “스승의 영골이 아직 남아 있네.”

擧. 道吾, 與漸源, 至一家弔慰. 源, 拍棺云, 生邪死邪. 吾云, 生也不道, 死也不道. 源云, 爲什不道. 吾云, 不道, 不道. 回至中路, 源云, 和尙, 快與某甲道. 若不道, 打和尙去也. 吾云, 打卽任打, 道卽不道. 源, 便打. 後, 道吾遷化. 源, 到石霜, 擧似前話. 霜云, 生也不道, 死也不道. 源云, 爲什不道. 霜云, 不道不道. 源, 於言下有省. 源, 一日將子, 於法堂上, 從東過西, 從西過東. 霜云, 作什. 源云, 覓先師靈骨. 霜云, 洪波造渺, 白浪滔天. 覓什先師靈骨.(雪竇著語云, 蒼天蒼天.) 源云, 正好著力. 太原孚云, 先師靈骨猶在.


"살았는가 죽었는가…" 물음에
도오화상 "말할 수 없다" 대답

이일단의 선문답은 {조당집} 제6권, {전등록} 제15권 점원장에 전하고 있는데, 이야기는 약간 다르다. 도오원지(道吾圓智. 769~835)화상은 약산유엄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로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5권, {전등록} 제14권, {송고승전} 제11권 등에 전하고 있다. 점원중흥(漸源仲興)선사에 대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도오화상의 법을 이은 선승이다.

어느 날 도오화상은 제자 점원과 함께 신도 집에 조문을 하게 되었다. 점원이 관을 두드리며 도오화상에게 질문했다. “관속의 사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육체적인 현상으로 볼 때 생사가 있고, 관 속의 사람은 죽었다고 할 수 있지만, 선문답의 주제로 하는 법신의 본체상에서 볼 때 생사와 생멸이 없다. 그래서 도오화상은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생사의 차별에 떨어지지 않는 법문을 친절하게 말했다. 점원은 도오화상의 말뜻을 알지 못하고 "어째서 말씀하셔서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까"라고 다그친다.

도오화상은 역시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라고 했다. 법신의 존재 그 자체를 생사와 생멸의 차별심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중생이다.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제법의 본체를 생사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도오화상은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 문제를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점원은 절로 돌아오는 길에 도오화상에게 말했다. “화상은 저를 위해서 어서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 점원은 생사대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승에게 필사적인 결단으로 가르침을 요구하고 있다. 도오화상은 "때릴려고하면 그대 마음대로 때려라. 그러나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점원은 도오화상을 곧장 후려쳤다.

'평창'에는 이 사건의 전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도오화상은 이처럼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도록 그를 지도했으나 점원은 깨닫지 못했다. 도오화상은 맞은 뒤에 점원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 절의 책임자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에게 화가 미칠까 걱정스럽다' 남모르게 점원이 절을 떠나도록 했다. 점원은 그 뒤 작은 절에서 행자가 외우는 {관음경}의 '비구의 몸으로 제도를 받을 자에겐 비구의 몸을 나타내어 설한다'는 구절을 듣고 곧장 크게 깨치고, '내가 당시 스승의 말씀을 잘 모르고 나쁜 짓을 했구나. 생사의 일이 언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구나!'라고 말했다. 점원이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생사문제를 해결한 뒤에 스승에게 자신의 견해를 말하려고 했지만 스승이 입적한 뒤였다.”

점원은 사형인 석상경제(石霜慶諸. 807~888)선사를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제시하며 점검해 줄 것을 청했다. 석상선사 역시 도오화상의 법을 이은 선승으로, 그의 전기는 {조당집} 제6권, {전등록} 15권 등에 전하고 있는 것처럼, 담주 석상산에서 교화를 펼쳤다. 석상선사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없고,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점원은 "어째서 말할 수 없습니까?"라고 다그쳤다. 석상선사 역시 도오화상의 말과 똑같이 "말할 수 없지, 말할 수 없어"라고 했다. 점원은 그 말을 듣고 곧장 깨달았다. 많은 세월 불법의 대의를 체득하여 생사대사의 일대사(一大事)를 해결한 것이다. 이 공안은 여기서 한 단락을 맺는다.

점원은 어느 날 삽을 들고 법당 안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시늉을 하면서 동쪽에서 서족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갔다하자 석상선사가 "자네는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가?"라고 점원의 심중을 떠보려고 물었다. 점원은 "스승(先師)의 영골(靈骨. 법신)을 찾습니다"라고 말했다. 법당에서 입적하신 도오화상의 영골을 찾아 마치 삽으로 파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석상화상은 "뭐야! 여기는 거대하게 파도가 몰아치는 큰 바다 한 가운데야! 무슨 스승의 영골을 찾겠다는 것인가?"라고 말했다.

즉 온 대지가 마치 하나의 파도와 같이 물거품속인에 선사의 영골을 어디서 찾으려 하는가? 선사의 영골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눈에 가득 귀에 가득 함께 하고 있는데, 굳이 삽을 들고 찾으려고 할 필요가 있는가? 석상은 점원이 깨달음의 경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타파하려고 한 말이다. 설두화상은 이 공안을 제시하면서 "아아! 아아! 통탄할 일이야!"라고 착어하고 있다. 설두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탄식하는가. 온 천지 가득찬 영골을 찾는 점원에 대한 탄식인가. 아니면 석상의 친절한 가르침에 대한 것인가. 원오는 "너무 늦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점원이 천화한 도오화상의 영골을 찾는 일이 너무 늦은 일이라고 한 것인가. 점원은 석상의 말에 대하여 "찾을 수 없는 영골을 찾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뒤에 설봉의존의 제자인 태원(太原)의 부상좌(孚上座)가 이 선문답에 대하여 "도오화상의 영골이 아직 남아 있네"라고 평했다. 본원 자성의 법신사리는 천지와 우주에 하나 가득 충만해 목전에 분명히 현전하고 있다는 말이다.

설두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토끼와 말은 뿔이 있고, 소와 염소는 뿔이 없다” 도오화상이 '말 할 수 없다'는 말을 읊은 것으로, 관 속에는 사인(死人)인데,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미세하게 가는 터럭도 끊었네.” 아주 미세한 터럭도 끊었다고 하는 것은 먼지 하나 없는 본래 무일물의 경지로서 생사망념의 차별심을 초월한 입장이다. 구름 한 점도 없는 창공, 절대의 경지는 생사망념을 초월한 본체의 입장이기에 비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일체를 초월한 절대 평등의 경지에 '산은 높이 솟아 있다' 미세한 터럭도 끊어진 절대 평등의 세계가 그대로 산이 높이 솟아 있는 차별세계가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읊고 있다. 생사의 본체인 법신은 없다고 하면 형상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이지만, 있다고 하면 분명하고 역역하게 전부 드러나고 있다. 태원 부상좌가 "황금빛 영골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말하고, 석상은 "바닷물이 파도가 하늘까지 넘실거린다"고 한 것처럼, "찾을 곳이 없다." “신발 한 짝을 가지고 서천으로 돌아가다 잃어버렸네.” 달마가 웅이산에서 장례 치른 뒤에, 관을 열어보니 유해도 없고, 인도로 돌아갔다지만, 그의 행방도 알 수 없다는 고사로 게송을 읊고 있다.


[第056則]一鏃破三關
〈垂示〉垂示云。諸佛不曾出世。亦無一法與人。祖師不曾西來。未嘗以心傳授。自是時人不了。向外馳求。殊不知自己脚跟下。一段大事因緣。千聖亦摸索不著。只如今見不見聞不聞。說不說知不知。從什麽處得來。若未能洞達。且向葛藤窟裏會取。試擧看。
〈本則〉擧。良禪客問欽山。一鏃破三關時如何。山云。放出關中主看。良云。恁麽則知過必改。山云。更待何時。良云。好箭放不著所在便出。山云。且來闍黎。良回首。山把住云。一鏃破三關卽且止。試與欽山發箭看。良擬議。山打七棒云。且聽這漢疑三十年。
〈頌〉與君放出關中主。放箭之徒莫莽鹵。取箇眼兮耳必聾。捨箇耳兮目雙瞽。可鄰一鏃破三關。的的分明箭後路。君不見。玄沙有言兮。大丈夫先天爲心祖。

벽암록 56칙 흠산화상의 화살 일촉(一鏃)

“선승 흉내낸다고 깨달음의 세 관문 통과 못해”


{벽암록} 제56칙은 흠산화상과 거양선객과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거양(巨良)선객이 흠산(欽山)화상에게 질문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돌파했을 때는 어떻습니까?" 흠산화상이 말했다. "관문속의 주인을 들어내 보여라!" 거양이 말했다. "그러한즉 허물을 알면 반드시 고쳐야지요." 흠산화상이 말했다. "다시 어느 시기를 기다리는가? 당장 고쳐야지!" 거양이 말했다. "화살은 잘 쏘았는데, 잘 맞지는 않았군요."라고 말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흠산화상이 말했다. "잠깐 보세, 화상!" 거양이 머리를 돌리자 흠산화상은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돌파하는 일은 그만두고 흠산에게 화살을 쏘아 봐라!" 거양이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이자, 흠산화상이 일곱 방망이를 치면서 말했다. "이 놈은 앞으로 30년 더 헤매야 정신을 차리겠군!"

擧. 良禪客, 問欽山, 一鏃破三關時如何. 山云, 放出關中主, 看. 良云, 恁則知過必改. 山云, 更待何時. 良云, 好箭放, 不著所在. 便出. 山云, 且來黎. 良回首. 山把住云, 一鏃破三關, 卽且止. 試與欽山發箭, 看. 良擬議. 山打七棒云, 且聽, 這漢疑三十年.


차별심 빠진 채 함부로 화살 쏘면
본래 면목 과녁 적중시킬 수 없어

본칙의 공안은 {전등록} 17권 흠산화상전에 보인다. 흠산문수(文邃)화상은 동산양개화상의 법을 이었으며, 풍주 흠산에서 교화를 펼친 선승인데, 그에 대해선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설봉의존과 암두전활, 세 사람이 도반이 되어 제방의 선지식을 참문하다 오산에서 설봉이 깨닫고 성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흠산화상에게 질문을 한 거양선객에 대해서도 전연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행각수행하는 무명의 선승이리라.

어느 날 거양선객이 흠산화상을 찾아와서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개의 관문을 돌파했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질문했다. 관(關)은 관문, 관소로서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문이다. 그런데 세 개나 되는 관문을 돌파했다고 한다. 전쟁에서는 내진(內陣), 중진(中陣), 외진(外陣)의 삼관문(三關門)으로 설치된 난공불락의 돌파하는 것이지만, 선에서는 번뇌 망념의 차별심과 중생심을 초월하고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하며, 가장 돌파하기 어려운 세 개의 관문이다. 보통 법신, 반야, 해탈이라고 하고, 동산의 조도(鳥道), 현로(玄路), 전수(展手)의 삼로(三路)라고 하거나 황용의 삼관(三關) 등을 배대하여 언급하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체의 차별경계를 초월하여 곧바로 여래의 경지를 체득한 입장이다. 거양선객이 자신이 '나는 일체의 차별세계를 초월하여 여래의 경지를 체득했습니다. 나와 같은 선객을 어떻게 제접하겠습니까'라고 흠산화상에게 정면으로 법전(法戰)을 제기하고 있다.

흠산화상은 "그래! 그렇다면 관문을 돌파한 그 주인공을 들어내 보여라!" 즉 삼관(三關)을 하나의 화살로 돌파한 관문의 주인인 그 대장을 내가 화살로 쏘아 볼 테니 지금 여기 내 앞에 들어내 보여라고 재촉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문의 주인(關中主)은 무엇인가? 원오는 "주산(主山)은 높고, 안산(按山)은 낮다."고 착어했다. 이 말은 {운문광록}의 말인데, 높은 산은 높은 그대로 낮은 산은 낮은 그대로 관문의 주인공(본래면목)이 본래 그대로 있다고 말한 것이다. '관중의 주인공'은 제불이 출세하기 이전, 부모라는 상대적인 차별심이 일어나기전의 자기 본래면목을 말한다. 그러자 거양은 "그렇습니까? 제가 화살을 쏘는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고쳐서 다시 한번 화살을 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원오는 "벌써 두 번째 차별에 떨어졌다."고 하며, 공격한 장수가 이진(二陣)으로 퇴각하고 있다고 착어했다. 그러나 흠산화상은 틈을 주지 않고 급히 추격하며, "잘못을 고친다고 이진으로 물러가더니 언제 다시 공격의 화살을 쏘려고 하는가? 지금 당장 공격해야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거양은 "내가 화살은 잘 쏘았는데, 과녁에 잘 맞지는 않았군요. 이제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장 법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량은 흠산화상에게 두 번이나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자신이 쏜 화살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흠산화상이라고 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내가 던진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흠산화상에게 정법의 안목을 점검받는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 두겠다고 큰소리치고 밖으로 나간 것이다. 거양선객이 법당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보고 흠산화상은 "잠깐 기다리게. 화상!"이라고 하며, 거양선객을 불렀다. 원오는 "부르는 것은 쉬운 일이나, 잡는 일은 어렵다."라고 착어했다. 즉 땅군이 피리를 불며 뱀을 불러모으는 일은 쉬워도 모인 뱀을 붙잡는 일은 어렵다. 뱀을 잘못 취급하다가는 뱀에게 물리기 때문에 처분하는 일은 어렵다고 한 것이다. 떠나가는 거양선객을 불러들이는 일은 쉬우나 지금부터 그를 어떻게 제접 할 것인가 어려운 일이라고 평한 말이다.

거양선객은 흠산화상이 "화상!"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머리를 돌려서 '무슨 일인가'하고 흠산화상 앞으로 되돌아 왔다. 원오는 "맞추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흠산화상이 "화상!"이라고 부르는 화살이 거양선객을 적중시켰다고 착어하고 있다. 그 때 흠산화상은 되돌아온 거양선객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다고 큰 소리 치는 일은 그만두고, 지금 나 흠산에게 한 화살을 쏘아 봐라! 자 어서!"라고 전신의 기력과 지혜의 힘을 다하여 목숨 걸고 던진 선문답이다. 그래서 원오도 "흠산이 학인을 위하여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몸을 호랑이 입에다 옆으로 누웠다."라고 하며, 흠산의 지혜작용은 '역수(逆水)의 파도'처럼 놀랄 정도로 거세게 휘몰아쳤다. 거양선객이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적인 안목을 갖춘 선승이라면 흔이 선승들이 사용하는 고함을 치거나, 주장자를 휘두르는 자신의 기봉을 펼쳐야 하는데, 엉거주춤 머뭇거리며 무슨 말을 하려고 망설였다. 이의(擬議)는 지혜작용이 없는 중생심이다. 마음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순간 불심의 지혜작용과는 어긋나고(擬心卽差), 번뇌 망념이 작동하면 곧바로 불심을 벗어난다(動念卽乖). 흠산화상은 안목없이 선승들의 흉내나 내며 큰소리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 거양선객에게 잡고 있던 주장자로 곧장 일곱 번 후려치면서 "이 놈아! 오늘은 이정도로 훈계하지만, 앞으로 30년 더 불법의 수행해야 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자신이 관중의 주인이 되어 호령하였다. 원오는 '평창'에 당시 거양선객이 안목있는 선승이었다면 흠산화상이 점검받을 곤란한 처지가 되었을 것인데, 그가 안목 없는 선승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그대를 위하여 관문속의 주인공을 내보낸다." 설두는 이 공안을 읽는 사람들에게 관중의 주인(본래면목)을 들어내 보이니 잘 파악하라는 말인데, 원오는 첫 번째 화살을 잘 쏘아 맞추었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결코 함부로 화살을 쏘지 말라." 관중의 주인공에게 화살을 쏘려고 하는 참선수행자들은 함부로 화살을 쏘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화살만 잃어버린다. 거양선객처럼, 함부로 쏘지 말라. 일심으로 신중하게 신명(身命)을 아끼지 말고 철저한 구도심으로 관중의 주인공을 쏘아 맞추도록 해야 한다. 관중의 주인공은 항상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하지만, 그를 향해 화살을 쏘아 맞추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화살을 잘 쏘는 일은 어렵다. '눈에 신경 쓰면 귀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한쪽에 치우치고 차별심에 떨어지면 적중시킬 수가 없다. 또한 '귀에 신경쓰지 않으려고 하니 두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눈과 귀 그 어느 한쪽에 신경 쓰고, 취사선택하거나 차별하며 집착하면 관중의 주인공을 쏘아 맞출 수가 없다고 지적한 말이다. "아아! 가련하다. 하나의 화살촉으로 세 관문을 격파했다"고. 거양선객의 질문은 수행자의 참구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누구나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한다면, '화살이 지난 뒷길은 분명하다.' 관중의 주인을 맞춘 그 길은 분명한 것이다. "그대 듣지 못했는가? 현사화상이 '대장부란 천지가 개벽되기 전의 마음을 근본(祖)으로 삼는다.'라는 말을" 한 화살로 세 관문을 격파한 대장부는 관중의 주인공인 마음을 깨달아 체득해야 한다고 읊고 있다.



[第057則]處是揀擇
〈垂示〉垂示云。未透得已前。一似銀山鐵壁。及乎透得了。自己元來是鐵壁銀山。或有人問且作麽生。但向他道。若尙箇裏。露得一機。看得一境。坐斷要津不通凡聖。未爲分外。苟或未然。看取古人樣子。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如何是不揀擇。州云。天上天下唯我獨尊。僧云。此猶是揀擇。州云。田厙奴。什麽處是揀擇。僧無語。
〈頌〉似海之深。如山之固。蚊虻弄空裏猛風。螻蟻撼於鐵柱。揀兮擇兮。當軒布鼓。

벽암록 57칙 조주화상과 간택하지 않음

“차별심만 없어지면 지극한 道의 경지 체득”


{벽암록}제57칙은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는 말을 주제로 다음과 같은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 조주화상이 말했다. "천상에나 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한 존재이다." 스님이 말했다. "이 말 역시 간택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이 멍청한 놈아! 어느 곳이 간택이란 말이냐!" 그 스님은 말을 하지 못했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如何是不揀擇. 州云, 天上天下唯我獨尊. 僧云, 此猶是揀擇. 州云, 田庫奴, 什處是揀擇. 僧, 無語.


간택, 즉 편견과 오해가 번뇌 불러
수행통해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도(道)

본칙의 선문답은 {신심명}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선문답의 주제로 삼고 조주화상에게 질문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벽암록} 제2칙에도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을 화제로 선문답을 한 공안을 제시하였고, 또한 58칙, 59칙에도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을 주제로 한 선문답을 {조주록}에서 인용하여 제시하고 있다.

본칙에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울 것이 전혀 없다. 오직 취사선택하고 간택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지도의 경지'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취사선택하고 간택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기까지 많은 불법공부와 수행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모두 극복한 차원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법의 대의와 어려운 과제(難題)를 완전히 체득했기 때문에 지도의 원리를 통달하고 보니 지도의 경지가 지극히 간단명료하고 쉽다는 사실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설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전과 선어록에 '도는 가까이 있다.' '눈에 부딪치는 것이 모두 도'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도를 찾아서 여기 저기 멀리 헤매며 많은 구도의 노력과 고통과 시간을 극복한 사람이 도를 체득한 뒤에 도는 가까이 있는데 멀리서 찾아 헤맨 사실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오는 '수시'에 백운수단(1025~1072)의 법문을 인용하여 "지극한 대도인 만법의 진실을 체득하기 전에는 만물과 매사가 의문 덩어리로 뭉쳐서 어디를 가나 은산(銀山)처럼 접근하기 어렵고, 철벽(鐵壁)처럼 오르기 힘들어 전후좌우로 나를 가로막고 있어 뚫고 나가기 어렵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자기 자신이 원래 견고한 절대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은 은과 철은 견고하여 뚫기 어렵고, 산과 벽은 험준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것을 말한다. 즉 범정(凡情)과 중생의 분별심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비유한 표현인데, 불가사의한 불심의 경지를 사량분별하는 중생심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신심명}에서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사량분별하고 취사선택하는 간택이 없다면 지도의 경지'라는 말은 마조가 "도는 수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번뇌 망념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는 설법에 의거한 것이다. 사량분별하는 차별심과 취사선택하는 중생심에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마조는 평상심이라고 하고,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주화상도 처음 남전화상을 참문하고 "무엇이 도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남전이 마조의 법문을 체득하여 "평상심이 도"라고 대답하고 있다.

평상심은 번뇌 망념이 없는 무심(無心)이기에 "무심(無心)이 도(道)"라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지극한 도는 평상심으로 일상생활하는 그 가운데 무심의 경지에서 실현되는 것이지 신비한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이 평상심으로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매사가 깨달음의 생활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려면 오직 간택하는 중생심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도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 취사선택하고 분별하지 않도록 하는 '불간택(不揀擇)'의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질문하고 있다. 생사와 열반을 간택하고, 번뇌와 보리를 간택하고 시비득실을 간택하며 애증호오(愛憎好惡)를 간택하며 사는 중생으로 이러한 간택을 초월하는 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원오도 "쇠가시는 많은 사람들이 삼키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쉬운 질문이 아니다. 지혜의 안목없이 함부로 이 질문을 쉽게 받아들이면 가시가 목에 걸리게 된다.

조주화상은 "천상에나 천하에 오직 내가 홀로 존귀한 존재(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대답했다. 이 말은 세존이 출생하여 한 말로 세존이 홀로 유일하게 위대하고 귀중한 존재라는 독선적인 말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각기 모두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유일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개는 개로서, 고양이는 고양이로서 절대 유일한 존재이다. 조금도 어렵지 않은 지도의 절대적인 모습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천상천하 시방법계에 충만하여 다른 어떤 무엇과 대비할 것도 없이 간택이 끊어지고 일체를 초월한 절대존재의 입장을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조주는 이 한마디로 일체의 사량분별과 간택을 차단하고 범성(凡聖)과 증애(憎愛)와 비시득실의 분별심을 초월한 간택하지 않는 경지를 제시하고 있다.

원오는 조주의 대답에 대하여 "금강으로 주조한 철권(鐵券)"이라고 착어했다. 이 말은 불조(佛祖)도 열 수 없는 한 장의 철권으로 가장 견고한 금강으로 주조한 것이다. 즉 금강과 같이 견고한 틀은 사람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지도(至道)의 보물을 지금 조주화상이 다시 끄집어내 주었다고 평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면 좋았을 텐데, 지혜의 안목이 없었기 때문에 "화상의 말씀도 역시 간택인 것"이라고 반문했다. 원오는 "과연 예상했던 대로 조주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스님은 '아(我)'라는 말이 타(他)와 상대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간택이라고 하고, '홀로(獨)'는 대중(衆)과, '존귀(尊)'함이 천박(卑)함과 간택한 말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아니면 지도의 경지나 절대의 경지를 언어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간택에 떨어진 것이 아닌가? 라는 입장에서 반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주화상은 "이 멍청한 촌놈아! 어디에 간택이 있다는 말이냐!"라고 나무랐다. 조주화상은 불법의 지혜와 안목도 없는 이 스님을 심하게 욕하며 꾸짖는 한마디인 것이다. 질문한 스님은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제법 뛰는 토끼처럼 날카롭게 질문하였지만, 안목없는 졸승이고 보니 결국 기가 죽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고 있다. "바다처럼 깊고, 산과 같이 견고하네." 이 말은 조주화상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 '이 촌놈'이라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지혜가 바다처럼 깊고 확고부동한 모습이 산과 같이 동요됨이 없이 팔풍(八風)이 불어와도 움직임이 없이 당당한 모습을 칭찬한 게송이다. "모기와 등에(파리)가 허공의 사나운 바람을 희롱하네." 이 말은 {장자}의 우화에 의거하여 조주화상에게 과감하고 무모하게 질문한 스님에 대하여 읊은 게송이다. 즉 모기나 파리와 같은 벌레는 바람이 없을 때는 여기 저기 잘 날아다니지만 허공에 태풍이 불면 어디로 날려갔는데 알 수가 없는 존재인데, 질문한 스님은 태풍과 같은 조주를 만난 모기와 파리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무쇠기둥을 흔드네." 이 말도 {회남자(淮南子)}의 고사에 의거하여 질문한 스님을 비판한 말인데, 땅강아지와 개미같이 미약한 지혜(스님)로 조주와 같은 부동의 쇠기둥을 움직이려고 하는 무모한 짓을 한 것이다. "분간하고 선택한다는 것. 난간에 매단 헝겊 북 이로다." 조주는 간택도 없는 지도의 세계에서 헝겊 북을 아무리 쳐도 한결같이 반응없는 것처럼,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살고 있다고 읊고 있다.



[第058則]烏飛免走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是時人窠窟否。州云。曾有人問我。直得五年分疏不下。
〈頌〉象王嚬呻。獅子哮吼。無味之談。塞斷人口。南北東西。烏飛免走。

벽암록 58칙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의 함정

“깨달음 경지는 시방세계에 두루 있어”


{벽암록} 제58칙은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신심명}의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至道無難)는 설법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는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고 했는데, 요즘 사람(時人)은 이 말에 집착하여 함정에 빠진 것 아닙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이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어떻다고 분명히 설명할 수가 없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是時人窟否. 州云, 僧有人問我, 直得五年分疎不下.

본칙의 주제도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인데, {벽암록}에 세 번째 등장한다.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이 말을 많이 인용하여 학인들에게 법문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 문하의 제자들과 선승들이 조주화상을 찾아와서 {신심명}의 대표적인 말을 인용하여 조주화상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여기도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찾아와서 "화상은 {신심명}에서 주장하는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간택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말을 자주 인용하여 법문을 하고 있는데, 요즘 사람이 이 말에 너무 빠져 집착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신심명}의 일절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스님의 질문에서 먼저 주의해야 할 말은 요즘 사람이라는 '인(時人)'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요즘 사람, 혹은 당시의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한 듯한 객관적인 표현이지만, 질문한 스님은 세간의 여러 일반적인 사람들을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주화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조주화상 당신은 자구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란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도무난이라는 언구에 너무 집착하여 함정에 빠져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상당히 날카롭게 비꼬며 힐문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함정이라고 번역한 말은 과굴(窟)이라는 말인데, 새집, 혹은 구멍이라는 의미이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좁은 구멍에 빠지고, 이 말에 집착한 포로가 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벽암록} 제3칙의 수시에 "(선승들이 제시한) 하나의 선기작용이나 하나의 경계, 혹은 한마디의 말이나, 하나의 문구를 가지고 깨달음을 체득하려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면 멀쩡한 살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구멍에 떨어지고 함정에 빠지게 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과굴(窟)은 깨달음의 경계나 언어 문자 등에 집착하여 벗어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번뇌나 생사, 보리와 열반, 미혹함과 깨달음, 그 어느 한쪽의 경계에 치우치거나 집착하면 모두 함정(窟)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원오는 "저울추를 밟으니 무쇠처럼 견고하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저울추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올바르게 저울질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법수행에서 자타(自他)와 미오(迷悟), 번뇌와 보리, 중생과 부처 등 어느 한쪽에만 집착하면 그 집착은 무쇠와 같이 단단하게 굳어버려서 진실된 불법수행을 할 수가 없게 된다고 평한 말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금으로 만든 쇠사슬에 속박된 것을 '금쇄난(金鎖難)'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금으로 만든 쇠사슬은 아름답고 귀중한 것이지만 여기에 속박되면 도리어 자유를 잃어버리고 만다. {전등록} 27권에 어떤 스님이 질문했다.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금의 쇠사슬에 얽힌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다. 조작심과 작위성이 없고, 번뇌 망념의 일없이 무심의 경지에서 무사하게 사는 사람이 금쇄난에 떨어진 것은 무위무사라는 조사선의 참된 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글자대로 생각하여 무위무사라는 언어문자에 집착하고 빠져서 무애자재한 자유와 지혜작용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황용혜남선사어록}에도 어떤 스님이 "무위무사인이 어째서 황금의 쇠사슬에 속박된 수난을 받습니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말도 똑같은 입장이다. {벽암록} 88칙에는 "금쇄(金鎖)의 현관(玄關)을 때려 부숴라!"라는 말도 있다. 현관은 깨달음을 체득하는 지극한 관문인데, 깨달음의 경지에 집착하지 말고, 무애자재한 반야의 지혜를 전개하는 삼매경을 뚫고 나가도록 지시한 말이다. 그밖에도 어떠한 깨달음의 경지에도 안주하거나 주착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강조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는 반야경전에서 많이 주장한 무주(無住), 무상(無相)의 구체적인 실천을 선불교의 입장에서 강조한 말이다. 질문한 스님은 조주화상 당신은 수시로 {신심명}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법문하고 있는데, 이 말에 속박되고 집착하여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원오는 "질문한 스님이 이 말의 함정에 빠져있으면서 남도 그렇게 함정에 빠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조주화상까지 의심하고 있다"고 꾸짖고 있다.

그러나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을 향하여 "아! 그 일 말인가? 전에도 어떤 사람이 나한테 그대와 똑같은 질문을 했었는데, 5년이 지났지만 아직 뭐라고 분명히 설명 할 수가 없어 말없이 가만히 있네"라고 바보처럼 태연하게 대답했다. 조주화상은 '분소불하(分疎不下)'라고 말하고 있는데, 무엇이라고 분명하게 해명(分疎) 할 수가 없다(不下)고 말한 것이다. 원오는 조주의 이 말에 대하여 "질문에 밀려 낯을 붉히는 것보다 바른 말을 하는 것이 낫다"고 착어하여 조주화상이 솔직하게 대답한 것을 칭찬하고 있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는 생기있는 법문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만이 설할 수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지도가 어려움이 없다는 언어문자로 지도의 경지를 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로 설명 할 수 없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과 중생심으로 체득할 수 없다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도(至道)의 세계를 어떻게 5년이나 10년이 지났다고 언어 문자로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천년만년이 지나도 언어문자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뭐라고 분명히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원오는 '평창'에 "조주는 함정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함정 밖에서 그에게 대답한 것인가?" 이 공안을 읽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말에 집착하면 함정에 떨어진 것이고, 이 말을 놓아버린 사람은 천지와 하나되고, 일체의 만물을 초월하여 곳에 따라 주인이 되어 자유자재한 지혜로 살수가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코끼리(象王)가 기지개를 피며 신음하고, 사자가 고함을 친다." 이 말은 조주화상의 역량이 광대하고 또한 그의 지혜작용은 준엄한 모습을 형용하여 짐승의 왕이라고 하는 코끼리과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 빈신(嚬呻)이라는 말은 평소에 초원에 누워있는 짐승이 손과 발을 쭉 펴고 하품을 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코끼리가 초원에 누워 있다가 크게 다리를 펴고 긴 코를 높이 쳐들어 움직이며, 길게 으르렁거리며 신음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은 태연한 얼굴로 5년이 지났는데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 것을 읊고 있다.

원오는 "부귀중의 부귀"라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조금도 결여된 것이 없는 복덕원만한 모습이라고 칭찬하였다. 또한 역량이 광대한 것은 코끼리와 같고, 지혜작용이 민첩하고 준엄한 것은 사자와 같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수많은 짐승이 항복하는 것처럼, 조주화상이 스님에게 대답한 말을 사자의 포효에 비교하여 읊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은 평범한 말로 대답한 것이기에 '맛도 없는 말씀'이다. 그러나 맛도 없는 이 말에 무한의 자미(滋味)가 있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 조주의 말을 씹고 또 씹어서 묘미(妙味)를 찾아봐야 한다. 맛이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단맛인가? 쓴맛인가? 어떤 맛인가? 찾아서 사량분별하는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아 버렸다.' 지도의 경지는 공간적으로 '남북동서' 시방세계에 두루하며, 시간적으로 언제나 '태양(까마귀)과, 달(토끼)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第059則]唯嫌揀擇
〈垂示〉垂示云。該天括地。越聖超凡。百草頭上指出涅槃妙心。干戈叢裏點定衲僧命脈。且道承箇什麽人恩力。便得恁麽。試擧看。
〈本則〉擧。僧問趙州。至道無難。唯嫌揀擇。纔有語言是揀擇。和尙如何爲人。州云。何不引盡這語。僧云。某甲只念到這裏。州云。只這至道無難唯嫌揀擇。
〈頌〉水灑不著。風吹不入。虎步龍行。鬼號神泣。頭長三尺知是誰。相對無言獨足立。

벽암록 59칙 조주화상과 지도무난(至道無難) 법문

“앎이 아닌 실천적 삶으로 분별심 버려라”


{벽암록} 제59칙도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의 법문에 대한 선문답을 전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질문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겨우 말을 하기만 하면 곧 간택인데, 화상께서는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 조주화상이 대답했다. "그대는 왜 이 말을 다 인용하지 않는가." 스님이 말했다. "저는 단지 여기까지 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주화상이 말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

擧. 僧問趙州, 至道無難, 唯嫌揀擇. 有語言, 是揀擇. 和尙, 如何爲人. 州云, 何不引盡這語. 僧云, 某甲只念到這裏. 州云, 只這至道無難, 唯嫌揀擇.


'지극한 道' 이미 여러 번 배워
이젠 말 대신 진실하게 실천을

본칙의 공안도 {조주록} 상권에 의거하고 있는데, 역시 조주화상이 {신심명}의 주제를 인용하여 자주 설법한 것을 문제로 하여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하였지만,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곧바로 지도의 경지와는 반대인 취사선택하고 분별하는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데, 화상께서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조주화상은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게 되면 취사 분별심에 떨어지게 된다"라고 설한 것처럼, 깨달음의 경지는 언어나 문자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경지(言語道斷)이며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이다. 개념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벌써 깨달음의 경지를 대상화하여 설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차별심과 분별심인 간택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질문한 스님에게 "그대는 왜 {신심명}의 구절과 내가 한 말을 전부다 인용하지 않는가"라고 다그쳤다. 조주화상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신심명}의 첫 번째 구절에도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는 일은 조금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취사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미워하고 사랑하는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깨달음의 경지는 분명히 드러나리라"라고 하였다. 또 '평창'에도 언급한 것처럼, 조주화상은 {신심명}의 일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있다. "지극한 불도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오직 취사 선택하는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말하는 순간에 벌써 취사선택(揀擇)하는 마음에 떨어지거나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떨어진다. 나는 깨달음(明白)의 세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깨달음(明白)의 경지를 수행의 목적으로 삼고 보호하고 아끼려고 하는가." 조주화상의 설법은 {벽암록} 제2칙에도 제시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의 설법을 전부 언급하지 않고 왜 일부만 제시하여 질문하고 있는가라고 역습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원오는 "도적은 소인배이지만 지혜는 군자보다 뛰어나다"라고 {임제록행록}의 앙산혜적의 말을 인용하여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는 정말 노련한 도적과 같이 교묘하게 질문하는 스님의 문제를 완전히 빼앗아 빈털터리로 만들었다. 조주라는 도적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있다.

질문한 스님은 "저는 단지 여기까지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머리를 숙이고 교묘하게 몸을 피하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 조주화상을 시험하는 용기있는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노련한 조주화상의 안목을 간파할 수가 있겠는가. 이 스님은 조주화상이 역습한 화살은 일단 피했지만, 조주화상의 날카로운 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원오도 "두 개의 진흙 덩어리를 가지고 논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이 스님은 이래도 저래도 진흙을 가지고 노는 어린애 취급을 받고 있다고 평가한다. 노련한 조주화상에게 덜미가 잡혀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진흙탕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조주화상은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단지 간택하는 마음이 없으면 된다"라고 {신심명}의 구절을 그 스님을 위해서 다시 그대로 설하고 있다. 그대는 오직 이 일절의 의미를 철저하게 깨닫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설법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하려면 먼저 취사 선택하거나 분별하고 차별하며 간택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결론적으로 설한 것이다.

지극한 불도를 체득한다는 것은 선악(善惡), 범성(凡聖), 시비(是非), 득실(得失)과 탐진치 삼독심으로 분별하는 번뇌 망념을 벗어나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는 {신심명}의 일절을 잘 외우도록 하라고 당부한 법문이다. 원오는 "이처럼 학인을 위한 교화는 조주노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스님의 눈동자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조주화상은 평상의 말로 지도의 당체를 제시하여 질문한 스님의 눈동자도 바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이 {신심명}의 지도무난(至道無難)에 대한 법문을 제시할지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라고 평한 말이다.

간택하는 마음은 중생심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며 분별심이다. 지극한 불도란 이러한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자각하여 본래 청정한 불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선에서 말하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청정한 불성을 깨닫게 되면 그대로 부처를 이루는 법문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현수법장의 {화엄오교장}에서도 "한 생각의 번뇌 망념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가 부처이다(一念不生名爲佛)"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번뇌 망념이 없어진 그대로가 불심이기 때문이다. 본래 청정한 불심을 깨닫는 것이 지도(至道)이며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혜능도 "도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며, 마조도 본래 청정한 평상심이 도라고 설한다. 이러한 불법의 수행구조는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심(不覺)에서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는 논리적인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번뇌 망념의 중생심을 본래의 불심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방법이 참선수행이며 불법을 체득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물을 부어도 물이 묻지 않네." 마치 연꽃잎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물방울구슬이 되어 굴러 떨어지며 연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조주화상의 대답은 이와 같이 물이 스며들어갈 틈도 없다. 이 말은 {전등록} 제9권 위산장에 보이는 말인데, 조주화상이 견고한 지도의 경지를 제시한 것을 읊은 것이다. "바람으로 불어도 들어가지 않네." 조주화상의 지혜작용은 머리위에 하늘이 없고, 발아래 땅이 없이 바람을 불어넣을 틈도 없었다. 즉 지도(至道)는 가없고(無邊) 법계에 충만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 허공이 무슨 장애가 있겠는가. 원오는 조주화상의 대답은 "허공과 같이 걸림 없이 무애자재한 지혜작용을 펼쳤고, 견고하기가 철석(鐵石)과 같다"고 착어하고 있는 것처럼, 끊을 수도 없고, 쳐부술 수도 없는 견고한 대답이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범과 같이 걸어가고, 용과 같이 간다." 범은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고 용은 구름을 일으키며 올라가는 것처럼, 위풍당당하여 감히 접근 할 수 없고, 변화무쌍하여 자유 자재한 조주화상의 선기작용을 읊고 있다. 원오는 "조주화상, 그는 자재를 얻었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조주화상의 대답에는 질문한 스님은 물론, "귀신까지 울면서 소리친다. 머리의 길이가 삼척(三尺), 그가 누군지 알 수 없네. 갑자기 머리의 길이가 삼척인 요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 그를 상대하고 마주하여 말없이 외발로 서 있다"고 읊고 있다.

'평창'에 "듣지 못했는가. 어떤 스님이 동산(洞山)스님에게 '무엇이 부처입니까' 질문하자, 동산스님은 '머리는 석자요, 목의 길이는 두 치이다'"고 대답했다. '머리 길이가 삼척'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풍모가 아니다. 조주의 풍모임과 동시에 지도의 경지는 일체의 형상을 초월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그와 '상대하지만 말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언제나 상대하고 있는 것으로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있는 그는 누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홀로 존귀하게 서 있는 조주이다.



[第060則]拄杖呑乾坤
〈垂示〉垂示云。諸佛衆生本來無異。山河自己寧有等差。爲什麽卻渾成兩邊去也。若能撥轉話頭。坐斷要津。放過卽不可。若不放過。盡大地不消一掜。且作麽生是撥轉話頭處。試擧看。
〈本則〉擧。雲門以拄杖示衆云。拄杖子化爲龍。呑卻乾坤了也。山河大地甚處得來。
〈頌〉拄杖子呑乾坤。徒說桃花浪奔。燒尾者不在拏雲攫霧。曝腮者何必喪膽亡魂。拈了也。聞不聞。直須灑灑落落。休更紛紛紜紜。七十二棒且輕恕。一百五十難放君。師驀拈拄杖下座。大衆一時走散。


벽암록 60칙 운문화상의 주장자

“산하대지는 곧 '나'…다른 데서 찾지 말라”


{벽암록} 제60칙은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이 주장자가 변화하여 용이 되어 천하를 삼켜버렸으니,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

擧. 雲門, 以仗示衆云, 仗子化爲龍, 呑乾坤了也. 山河大地甚處得來.


주장자는 자신이자 '한 생각'…
한 생각이 용 만들고 천하도 삼켜

운문화상의 법문은 {운문광록} 중권에 수록하고 있다. 운문종의 조사인 운문화상은 설봉의존의 법을 이은 당말의 선승으로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을 비롯해 18회나 등장하고 있다. 운문화상이 어느 날 법당에서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법문한 것이다. 주장자는 선승이 항상 몸에 지니는 7가지 생활도구의 하나로서 길이가 7척 정도의 나무지팡이다. 원오는 운문화상이 주장자를 잘 사용하는 선승으로 평가하며, 임기응변에 능숙하고 자유자재한 작가로 학인들을 움켜쥐고(把住) 놓아주는(放行) 교화수단과 중생들의 번뇌 망념을 차단하는 방편의 지혜(殺人刀)와 지혜작용을 발휘하게 하는 수단(活人劍)도 뛰어나다고 착어하고 있다. {벽암록} 22칙에 설봉화상이 남산의 맹독을 가진 독사를 대중에게 제시하였을 때 운문은 주장자를 들고서 응답하고 있다.

운문화상은 주장자를 들고 대중에게 "이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여 천하를 꿀꺽 삼켜버렸다. 산과 강(山河)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질문하고 있는 법문이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화하였다"는 말에 원오는 "무슨 용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는가. 주장자는 주장자 그대로 괜찮지 않는가"라고 착어하고 있다. 사실 주장자가 용이 되지 않아도 된다. 주장자가 천지를 삼켰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의 주장자는 자기자신의 주장자이며 본래면목의 주장자이다. 원오가 '수시'에 "소위 제불과 중생이 본래 다름이 없는 일심(一心)의 당체이며 산과 강이 자기와 어찌 차등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일체 만물과 자기는 하나인 것이다. 산하가 즉 자기이며 자기가 곧 산하인 것이다. 차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중생심의 분별심이다. 그래서 {신심명}에는 만법일여(萬法一如)라고 읊고 있다.

화엄철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독특한 모양과 존재하는 그대로 독자성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만물과 서로 상즉(相卽)하며, 하나의 사물은 일체의 만물을 포용하면서도 그 독자성의 하나는 만물과 서로 상입(相入)하고 있다고 설한다. 즉 자기라는 하나의 존재는 무한한 공간인 시방세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라는 하나는 일체의 만물을 포용한 만법의 근원인 것이다.

사실 주장자라는 이름도 임시로 붙인 것이며, 운문화상 자신이 항상 손에 들고 다니는 생활도구이기에 편의상 법당에서 대중들에게 제시하여 설법한 것이다. 자신의 손과 발과 육체를 마음대로 움직이고 활용하는 것처럼, 선승의 주장자나 생활도구도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는 지혜로운 도구이기 때문에 주장자는 곧 자기 자신인 것이다.

운문화상이 주장자가 "하늘과 땅(乾坤)을 삼켜버렸다"는 말에 원오는 "천하의 납승들의 목숨(性命)이 보존하지 못한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이미 주장자가 삼켜버렸기 때문에 주장자의 목숨 그밖에 납승의 목숨이 존재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천하의 납승도 주장자와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산과 강과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말에 원오는 "시방에는 벽도 없고, 사면에는 문도 없다. 동서남북 사유 상하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미친 소리다"라고 착어하고 있다. 즉 자기 주장자가 온 우주를 모두 삼켜버렸기 때문에 장벽도 없어졌고, 관문도 없는 무한의 공간이 단지 하나의 주장자가 되었기에 그곳에는 제불도 없고 중생도 없는데 산과 강과 대지가 있을 까닭이 있겠는가. 만약 주장자라는 대상에 집착하면 또다시 차별심에 떨어진 중생이 된다.

그래서 원오는 '평창'에 "몸과 마음은 하나이며, 몸 밖에 다른 것도 없다(身心一如 身外無余)"라고 주장한 혜충국사의 말로 입증하고, 또 중생이 마음과 사물에 대한 차별과 분별에 떨어진 것이라고 지적하며, {전등록} 제10권에 전하는 장사경잠(長沙景岑)선사의 유명한 법문을 인용해 주의 주고 있다. "장사선사가 말했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불법의 진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종전의 식신(識神:분별의식)에 의지하여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무량겁의 오랜 세월동안 생사 망념의 근본을 어리석은 사람은 본래인(本來人)이라고 한다.'"

식신(識神)은 {기신론}에서 분류한 중생심으로 불각(不覺)의 마음인데, 미오(迷悟), 법성(凡聖)과 생사와 열반을 차별하는 분별의식이다. 불심의 본각(本覺)은 진망(眞妄)과 미오(迷悟)는 둘이 아닌 불이(不二)이며 다르지 않는 불이(不異)인데, 중생심과 불심을 대조해 분별하는 것은 중생의 차별심이다. 참선 수행자가 이러한 불법의 진실을 잘 체득하지 못하는 것은 한결같이 분별하는 중생심(識神)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식신(識神)은 불법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의 한 생각이며, 무량겁이라는 긴 세월에 생사망념에 윤회한 미혹한 중생심의 근본인데,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은 이 식신을 본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고 읊었다. 주장자와 자기는 하나이며, 만물과 자기는 본래 하나인데, 상대적으로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중생심(식신)인 것이다. 자신이 젓가락을 갖고 식사한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식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자를 갖고 시방의 일체 만물을 자신의 생활공간과 도구로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한다.

설두화상은 게송으로 읊었다. "주장자가 건곤을 삼키니" 본칙의 공안을 이 한마디로 읊고 있다. "복사꽃 떨어지는 물결을 부질없이 말해 무엇하랴" 춘삼월 복사꽃이 필 때 붉은 꽃잎이 용문(龍門)의 물위에 떨어질 무렵, 고기가 몰려와 용문 삼단의 폭포를 뛰어 올라 용이 되어 승천한다는 고사를 토대로 해 주장자가 건곤을 삼켰다고 하는 말에 대해 설두는 그럴 필요가 없다. 주장자는 주장자로 무엇이 부족한가? "꼬리를 태운 놈이라고 해도 구름을 잡고 안개를 움켜쥐지는 못하거늘" 삼단의 폭포를 뛰어오른 용은 천화(天火)가 잉어로 살던 시대의 유물인 꼬리를 불로 태워버린다고 하지만, 구름과 안개를 마음대로 움켜진 살아있는 진짜 용은 꼬리를 태우거나 용문의 폭포를 뛰어넘을 필요가 없다. 용은 원래 용인데, 망상의 꼬리를 제거하지 않아도, 폭포를 뛰어올라 진짜를 추구하지 않아도 그대로 건곤을 삼킨 천진불인 것이다. "뱃속의 부레를 말리는 놈(용이 못된 잉어)이 되었다 해도 어찌 정신을 잃을 소냐" 용문의 폭포를 오르지 못한 낙제한 고기(중생)나 뛰어 오른 용(부처)이나 본래의 입장에서 볼 때, 일미(一味) 평등한 것인데 무슨 정신없이 슬퍼하고 실망하며 낙담할 필요가 있겠는가.

설두는 "이것으로 법문은 다 했다"고 하며 주장자가 용이 되어 건곤(乾坤)을 삼킨 공안의 이야기를 끝낸다고 한다. 여러분은 내가 한 말을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 이해했는가. 이해하지 못했는가. '곧바로 깨끗하고 산뜻해야 한다' 산뜻하고 깨끗해 일체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본래 청정한 모습을 읊고 있다. 보고 듣는 사물에 조금도 걸림없이 흐르는 물에 땀에 젖은 얼굴을 씻는 것처럼 깨끗한 경지에서 본래 청정한 불심에 계합한 경지를 말한다.

"다시는 지저분하고 어지럽게 하지 말라." 앞의 산뜻한 본래 청정에 반대된 분별 잡념에 떨어진 중생심에 떨어지지 말라는 충고이다. "72 방망이도 또한 가벼운 용서이니, 150 방망이를 쳐도 그대를 용서해 주기 어렵다." 분별망상에 떨어진 중생은 72 방뿐만 아니라 150 방망이를 쳐도 용서할 수 없다. "돌연 선사(설두)가 주장자를 들고 법좌에서 내려오니 대중들이 모두 흩어졌다." 설두의 주장자에 얻어 맞을까봐 걱정하던 대중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