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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1편 1장, 2장, 3장, 4장, 6장

논어 1편 1장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배우고 제때에 그것을 익히면 참으로 기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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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이편(學而篇)

 一.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人不知而不이면 不亦君子乎아 

        자왈학이시습지불역열호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 

공자가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친한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二. 有子曰 其爲人也孝弟요 而好犯上者ㅣ 鮮矣니 不好犯上이오 而好作亂者 未之有也니라 君子는 務本이니 本立而道生하나니 孝弟也者는 其爲仁之本與인저

        유자왈기위인야효제이호범상자선의불호범상이호작난자미지유야군자무본본립이도생효제야자기위인지본여

유자가 말했다.

"사람 됨됨이가 효성스럽고 공손하면서 윗사람을 침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 또 윗사람을 침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본 일이 없다. 군자는 근본에 힘써야 하니 근본이 서야 도가 생기게 된다. 효도와 공손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三. 子曰 巧言令色이 鮮矣仁이니라

        자왈교언영색선의인

공자가 말씀하셨다.

"교묘하게 말을 잘 꾸미고, 얼굴빛을 남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은 인이 드물다."

 

四. 曾子曰 吾日三省吾身하노니 爲人謀而不忠乎아 與朋友交而不信乎아 傳不習乎애니라

       증자왈오일삼성오신위인모이불충호여붕우교이불신호전불습호

증자가 말했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꾀함에 충실히 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귀는데 신의가 없지 않았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열심히 익히지 않았는가?(혹은 익히지 못한 것을 남에게 전하지 않았는가?)"

 

五. 子曰 道千乘之國하되 敬事而信하며 節用而愛人하며 使民以時니라 

        자왈도천승지국경사이신절용이애인사민이시

공자가 말씀하셨다.

"兵車 천대의 나라(제후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政事을 신중히 하고, 신의를 지킬 것이며,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때를 맞추어 백성을 부려야 한다."  

 

 六. 子曰 弟子入則孝하고 出則弟하며 謹而信하며 汎愛衆하되 而親仁이니 行有餘力이어든 則以學文이니라 

        자왈제자입즉효 출즉제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가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신중히 행동하고 신의를 지키며,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 해야 한다. 이렇게 행하고도 남는 힘이 있으면 곧 글을 배워라." 

 

七. 子夏曰 賢賢하되 易色하며 事父母하되 能竭其力하며 事君하되 能致其身하며 與朋友交하되 言而有信이면 雖曰未學이라도 吾必謂之學矣라하니라

        자하왈현현역색사부모능갈기력사군능치기신여붕우교언이유신수왈미학오필위지학의

자하가 말했다.

"어진 사람을 어질게 대하되 호색하는 마음과 바꾸고(곧 여색을 좋아하듯이 함),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버리며, 벗들과 사귐에 언행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말할 것이다."

 

八. 子曰 君子不重則不威니 學則不固니라 主忠信하며 無友不如己者요 過則勿憚改니라

        자왈군자부중즉불위학즉불고주충신무우불여기자과즉물탄개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가 언행이 무겁지 않으면 곧 위엄이 없으니 배운 것도 곧 견고하지 못한다(이루지 못함). 성심과 신의를 주로 해야 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벗으로 삼지 말고, 잘못이 있으면 곧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

 

九. 曾子曰 愼終追遠이면 民德이 歸厚矣리라 

        증자왈신종추원민덕귀후의

증자가 말했다.

"부모 상을 신중히 모시고, 선조를 충심으로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

  

十. 子禽이 問於子貢曰 夫子이 至於是邦也하사 必聞其政하시나니 求之與아 抑與之與아 子貢이 曰 夫子는 溫良恭儉讓以得之시니 夫子之求之也는 其諸異乎人之求之與인저 

        자금문어자공왈부자지어시방야필문기정구지여억여지여자공왈부자온양공검양이득지부자지구지야기제이호인지구지여

자금이 자공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가시는 나라마다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에 참여했는데, 이것은 스스로 찾아물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저쪽의 요청을 받아들이신 것입니까?"

자공이 대답했다.

"공자께서는 온순하고 선량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시기 때문에 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공자께서 자진하여 구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다르니라."

 

十一. 子曰 父在에 觀其志하고 父沒에 觀其行이나 三年을 無改於父之道라야 可謂孝矣니라 

        자왈부재관기지부몰관기행삼년무개어부지도가위효의 

공자가 말씀하셨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그 뜻을 살피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 행적을 살필 것이니, 삼 년 동안 아버지가 지키던 것을 고치지 않아야 효자라고 이를 만하다." 

 

十二. 有子曰 禮之用이 和爲貴하니 先王之道斯爲美라 小大由之니라 有所不行하니 知和而和요 不以禮節之면 亦不可行也니라 

        유자왈예지용화위귀선왕지도사위미소대유지유소불행지화이화불이예절지역불가행야

유자가 말했다.

"예절의 시행함에는 조화를 귀중하게 여긴다. 선왕의 도도 이것을 아름다움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작고 큰 일들이 모두 이것에서 나왔다. 그러나 행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조화만 알아서 조화만 하고 예로써 이를 조절하지 않으면 또한 행해지지 않는 것이다."

 

十三. 有子曰 信近於義면 言可復也며 恭近於禮면 遠恥辱也며 因不失其親이면 亦可宗也니라

        유자왈신근어의언가복야공근어례원치욕야인불실기친역가종야  

유자가 말했다.

"약속이 의에 가까우면 그 말을 실천할 수 있으며,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의지하는 사람이 친근함을 잃지 않으면 또한 존경할 수 있다."

 

十四. 子曰 君子食無求飽하며 居無求安하며 敏於事而愼於言이오 就有道而正焉이면 可謂好學也已니라 

          자왈군자식무구포거무구안민어사이신어언취유도이정언가위호학야이 

공자가 말씀하셨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에는 민첩하면서도 말을 삼가하고, 도가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면 가히 배우기를(학문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 

 

十五. 子貢이 曰貧而無諂하며 富而無驕하되 何如하니잇고 子曰 可也나 未若貧而樂하며 富而好禮者也이니라 子貢이 曰詩云如切如磋하며 如琢如磨라하니 其斯之謂與인저 子曰 賜也는 始可與言詩已矣로다 告諸往而知來者이오녀 

           자공왈빈이무첨부이무교하여자왈가야미약빈이락부이호예자야자공왈시운여절여차여탁여마기사지위여자왈사야시가여언시이의고제왕이지래자

자공이 말했다.

"가난해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괜찮다만 (그보다는)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 '切磋琢磨' 라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까?"

공자가 말씀하셨다.

"비로소 너와 함께 시를 논할 수 있구나. 지난 일을 일러주니 앞일까지 아는구나."

 

十六. 子曰 不患人之不己知오 患不知人也니라 

           자왈불환인지부기지환부지인야  

공자가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한다."

출처: https://wior.tistory.com/entry/논어-학이편學而篇-1장 [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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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성인 공자,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 [논어강의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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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크라테스(그리스어: Σωκράτης, Socrates, 기원전 470년 경 – 기원전 399년 5월 7일)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469년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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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전읽기 【1】 논어 #1. 공자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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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능호, <공자행단현가도(孔子杏壇絃歌圖)>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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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전읽기 【1】 논어 #3. 공자의 제자들

논어를 읽으매 읽기 전 어떤 사람이 읽은 후에도 같은 사람이라면 그는 논어를 읽지 않은 것이다 - 정자 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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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상은 '공자 아카데미'에서 완성된다. '논어 읽기'도 마찬가지다.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며 나누었던 대화들을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면 <논어>를 다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화들은 공자의 삶과 사상을 알 수 있는 근거들이고, 다른 고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미와 감동의 결정체다.   

공자는 젊어서 계씨 집안의 하급관리로 일한 적도 있지만 "나는 서른에 자립했다(三十而立, 위정 2.4)"는 말처럼 30대에 독자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즉, 그의 자립은 교사라는 직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34세 때 외국(주나라, 제나라)에 나갔다 돌아와, 36세 때 본격적인 학원을 열고 50세까지 교육과 학문에만 투신했다. 예악을 가르치고 도덕과 인(仁)을 설파하며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제자는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이렇게 성장한 제자들은 춘추시대 각국의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공자 아카데미는 지금의 고시학원 역할을 했던 셈이다. 물론 주목적은 그게 아니었지만.


사학은 공자가 자신의 독특한 인생 여정을 펼쳐나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주장과 사상, 이상을 선전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공자는 사학을 통해 자신의 직업과 사업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도를 찾은 셈이다.

ㅡ 바오평산, <공자전> (이연도 옮김, 나무의 철학, 2013), pp.80-81.


이전까지의 모든 학교는 나라에서 세운 것이었고, 교육받을 권리는 귀족들에게만 있었다. 하지만 공자의 사학은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시로서 파천황(破天荒)의 사건이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속수 이상의 예를 행하고 찾아오면, 내 일찍이 가르쳐주지 않음이 없었다."

子曰 "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 (술이 7.7)

자왈 "자행속수이상, 오미상무회언."

'속(束)'은 10개 묶음을 뜻하고, '수(脩)'는 육포이니  '속수(束脩)'란 포 한 묶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정도 선물만 가지고 와서 제자가 되겠다는 예를 취하면 공자는 누구든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子曰 "有敎無類" (위령공 15.39)

자왈 "유교무류"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가르칠 때는 차별이 없어야 한다."


'유교무류(有敎無類)'. 이 네 글자야말로 2500년 전에 선포된 위대한 '보통교육'의 이념이다. 가르침에 있어 어찌 무리(類)를 나눌 수 있겠는가. 수강생을 차별하지 않는 공자 아카데미에는 귀족과 부자는 물론 빈민, 천민, 심지어 전과자와 불치병 환자도 있었다. 공자는 이런 제자들과 함께 방 안에서, 야외(杏壇)에서, 길 위에서 끝없이 토론했던 것이다.


공자의 수업은 오늘날 학교 수업과는 달랐다. 요즘 학교는 한 반에 수십 명의 학생이 함께 수업을 듣지만, 공자는 학생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로는 방 안에서, 때로는 야외에서 다 같이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 수는 2~3명 혹은 3~4명일 때가 많았다. 

ㅡ 바오평산, <공자전> (이연도 옮김, 나무의 철학, 2013), p.90. 


여기서 내가 주목한 포인트가 하나 있다. 공자의 언행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개발되지 않아 필기에도 제약이 많았고, 평민 제자들의 문맹률도 높았으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다(중국은 지금도 문맹률이 높은 나라다). 즉석에서 기록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논어> 속 대화들에는 현장을 직접 보는 듯한 생생함이 넘친다. 신기한 일이다. 
불경은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난 뒤 '집결(結集)'이라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었다. 500여 명의 제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부처의 말씀을 복기하고, 문서로 만들고, 승인했던 것이다. 몇 년, 길게는 몇 십 년이 걸리는 대작업 끝에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단정하게 정제된 경전이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논어>는? 공자 사후 제자들이 결집하여 문서화했을까? 나는 다음 대화에서 한 개의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子曰 "予欲無言."

자왈 "여욕무언."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자공왈 "자여불언, 칙소자하술언."

자공이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양화 17.19)

자왈 "천하언재. 사시행언, 백물생언, 천하언재."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그래도 사계절이 운행하고 만물이 생겨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말에 신중했던 공자의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이 에피소드에서, 나는 '술(述)'이라는 한 글자에 꽂혔다. 그것은 분명 '기록하다'는 뜻이다. 공자의 강의가 결국 기록을 전제로 진행되었다는 증거다. 제자들이 즉석에서 필기했는지 강의 후 문서 정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언행이 그 당시에 기록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고대사회의 문맹률을 감안해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자 아카데미에는 어쩌면 읽기와 쓰기 공부를 위한 초급반이 따로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곳은 초등교육에서 공무원 입시까지 책임지는 종합학원이었다는 얘기다. 나는 갑자기, 그 동안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여겨졌던, 공자의 제자가 3천 명이었다는 말이 신빙성있게 느껴지며 무서워졌다 ㅋ


<논어>에 드러난 공자의 교육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일단 제자들의 특성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하는 '맞춤형 교육'이 눈이 띈다. 다음 대화를 찬찬히 읽어보자. 

子路問, 

자노문, 자로가 여쭈었다.

"聞斯行諸."

"문사행제."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

子曰 

자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유부형재. 여지하기문사행지."

"아버지나 형이 계시면 어떻게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할 수 있겠느냐?"

冉有問, "聞斯行諸."

염유문, "문사행제."

염유가 여쭈었다.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

子曰 "聞斯行之."

자왈 "문사행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한다."

公西華曰

공서화왈, 공서화가 여쭈었다.

 "由也問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유야문문사행제, 자왈 '유부형재', 

"유(자로)가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부형이 계시다면'이라고 하셨고,

求也問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赤也惑, 敢問."

구야문문사행제, 자왈 '문사행지'. 적야혹, 감문."

구(염유)가 '들은 것을 바로 실행해야 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는

'들으면 바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니 저는 당혹하여 감히 여쭙습니다."

子曰 "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 (선진 11.22)

자왈 "구야퇴, 고진지. 유야겸인, 고퇴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구는 평소 물러나는 성격이라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이고,

유는 다른 사람을 앞질러 나가는 성격이라 물러서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공자는 요즘 유행하는 '자기주도형 학습'까지 실행했다.

다음의 문장은 이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子曰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위령공 15.16)

자왈 "불왈'여지하,여지하', 오말여지하야이의."

학생 스스로 의문을 품거나 문제의식을 갖는 태도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자는 제자가 그래야만 비로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응을 보이면 차츰 더 깊이 들어갔고,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울 때)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촉발하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보였을 때 (다른) 세 귀퉁이로써 반응하지 않으면 (더 이상)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술이 7.8)

자왈 "불분불계, 부비불발. 거일우불이삼우반, 칙불복야."

아래의 문장은 '역부족(力不足)'이라는 말의 출전이 된 유명한 대화인데 <논어>에서 내가 가장 감동받은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염구가 말했다. "저는 선생님의 도를 기뻐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역부족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역부족인 사람은 중간에 그만 둔다.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 (옹야 6.12)

염구왈 "비불설자지도, 력불족야." 자왈 "력부족자, 중도이폐. 금녀화."

염구는 후에 노나라의 유력한 정치가가 되어 염자(冉子)라고도 불리게 된 인물이다. 공자와 한 세대 차이(29세 연하)였지만, 공자로부터 정사(政事)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그가 슬럼프에 빠져 어느 날 '힘에 부친다(力不足)'고 고백하자 스승은 '지금 너 스스로 획을 긋고 있잖아(今女畫)'라는 한마디로 용기와 각성을 주는 장면이다. 나는 이 '획(畫, 여기서는 그림 '화'가 아니라 그을 '획'으로 읽어야 함)'이라는 한 글자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위대한 스승을 가진 염구는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런데 <논어>에는 공자가 염구를 꾸중하는 얘기들도 많다(계씨 16.1 등). 당시 노나라 실세인 계씨 집안에 재상으로 들어가 공문(公門)을 대표해 도덕정치를 행할 그가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스승의 불호령이 곧바로 떨어졌던 것이다.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선진 11.17)

계씨부어주공, 이구야위지취렴이부익지. 자왈 "비오도야. 소자명고이공지, 가야."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한데도 구(염구)는 그를 위해 세금을 거두어 (재산을) 더욱 늘려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염구는) 우리의 무리가 아니다. 북을 울려 그를 성토해도 좋다."

공자는 제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했다. "인에 대해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當仁, 不讓於師, 위령공 15.36)"는 말이 공자 학원의 모토였다. 나는 공자의 제자들이 '3년상'이 비현실적이라고 대드는 기록을 보며 놀랐고, 그걸 물리치는 공자의 꼰대같은 태도에 또 한번 놀랐다. 


宰我問,

재아가 여쭈었다.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삼년지상, 기이구의. 군자삼년불위례, 례필괴. 삼년불위락, 락필붕. 구곡기몰, 신곡기승, 찬수개화, 기가이의."

"3년상은 기간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닦지 않는다면 예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3년 동안 음악을 팽개친다면 음악도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없어지면 새 곡식이 올라오며, 불씨 얻을 나무도 다시 바꾸는 데 1년이면 충분합니다."

子曰 

자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식부도, 의부금, 어녀안호."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 편안하겠느냐?"

曰 "安."

 "안.",   "편안합니다."

 "女安, 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 則爲之." 

"녀안, 칙위지. 부군자지거상, 식지불감, 문락불락, 거처불안, 고불위야. 금녀안, 즉위지."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거라. 군자는 상을 치르는 기간에 기름진 것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움을 모르며, 집에 있어도 편안하지 않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너는 편안하다고 하니 그렇게 하거라."

宰我出, 子曰

재아출, 자왈,  재아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予之不仁也. 子生三年, 然後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양화 17.21)

"여지불인야. 자생삼년, 연후면어부모지회, 부삼년지상, 천하지통상야, 여야유삼년지애어기부모호."

"여(재아)는 인(仁)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나야만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그러니) 3년상은 천하에서 통용되는 상례인 것이다. 여(재아)도 그의 부모로부터 3년 동안 사랑을 받았을까?"

제자가 논리적으로 따지자 공자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해하며 일단 돌려보낸다. 그리고 연이어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의 뒷담화(?)를 한다. 세상에...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예기>에서 상례를 3년으로 규정하는 근거가 됐다고 하는데, 지금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하여간 공자와 제자들은 그저 예를 갖춰 설렁설렁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치열하고 솔직하게 논쟁했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자 학원의 그런 살아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子曰 "二三子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 7.24)

자왈 "이삼자이아위은호. 오무은호이. 오무행이불여이삼자자, 시구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가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숨기는 게 없다.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은 일이 없다. 이것이 바로 나 구(丘=공자의 이름)다."

공자의 제자들에 관한 기록은 후대에 많이 만들어졌으나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중니제자열전>이 가장 중요하다. <논어>에서는 '선진'편이 대표적인데, 앞 부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子曰 "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 (선진 11.2)

자왈 "종아어진채자, 개불급문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나를 따랐던 제자 가운데 이젠 아무도 없구나."


이것은 말년의 공자가 '진채지액(陳蔡之厄)'을 회고한 것이다. 주유열국하던 BC.489년, 공자 나이 64세 때 진나라와 채나라의 국경에 갇혀 모든 사람이 7일간 아무 것도 못먹고 쫄쫄 굶어야했던 끔찍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어느덧 아무도 남아있지 않음을 한탄하며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德行: 顔淵, 閔子騫, 冉伯牛, 仲弓. 言語: 宰我, 子貢. 政事: 冉有, 季路. 文學: 子游, 子夏. (선진 11.3) 

덕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사: 염유, 계로. 문학: 자유, 자하.



덕행에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었고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있었다.

문학은 자유와 자하였다.

여기에서 거론된 제자들을 흔히 공자의 10대 제자, 공문10철(孔門十哲), '사과(四科)십철'이라 부른다. 이 가운데 안연, 자공, 계로의 세 제자가 가장 유명하고, 10대 제자에 유약, 증삼, 자장을 더해 13대 제자를 꼽는 이들도 있다. 13대 제자를 공자의 일생에 따라 3기로 나누고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공자는 항상 즐거웠다. 다혈질인 자로를 놀려대며 '너는 제 명에 못 살 걸'하며 놀려댈 정도로... 

곁에서 선생님을 모실 때 민자건은 공손하고 엄숙했고, 자로는 당당하고 굳셌으며, 염유와 자공은 자유롭고 편안했다. 공자께서는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유(자로)처럼 행동하면 제 명대로 못 살 것이다."
閔子侍側, 誾誾如也. 子路, 行行如也. 冉有子貢, 侃侃如也. 子樂. "若由也, 不得其死然." (선진 11.13)

끝으로 자로, 안회, 자공의 3대 제자에 관한 기록들을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논어>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도 이 세 명이다. 등장 횟수를 세어보면 자로는 41회, 자공은 38회, 안회는 21회라고 한다. (김시천, <논어, 학자들의 수다> (더퀘스트, 2016), p.38)



1. 자로(子路, 일명 중유)

<중유상(仲由像)>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자로(子路, 일명 중유)는 공자보다 9살 아래인, 초창기 제자의 한 사람이다. 애초에 공자를 만났을 때 행패를 부리던 건달이었는데, 공자가 예로써 대응함에 감동하여 문하에 들게 되었다. 이후 공자는 "자로를 얻게 된 후부터 내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고 했다. 무뢰배를 제자로 데리고 다니니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했다는 뜻이다. 자로는 무인이자 야인으로 공자의 보디가드 역할을 하며 14년간 스승을 모시고 천하를 떠돌았다. 그 어려웠던 '진채지액' 시절 공자에게 대들었던 장면도 기록돼 있다.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진나라에 이르러 양식이 떨어지고, 따르는 제자들은 병이 나 아무도 일어날 수 없었다. 자로가 화가 나서 뵙고 여쭈었다. "공자도 곤궁해질 때가 있습니까?"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위령공 15.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곤궁함을 굳게 버티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아무 짓이나 한다."


자로는 공자에게 유일하게 따지고 대드는 제자였다. 이런 그를 통해 우리는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누군가로부터 일자리 제안을 받으면 공자는 매번 흔들렸는데, 그때마다 자로가 일침을 가했다. 공자는 자로에게만은 솔직하게 본심을 털어놓기도 하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공산불요(인명)가 비읍(지명)을 근거지로 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나서 (공자를) 부르자, 공자께서 가시려고 했다.

子路不說, 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자로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꼭 공산씨에게 가려고 하십니까?"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양화 17.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자가 어찌 헛되이 나를 불렀겠느냐?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주(東周)로 만들 것이다!"

佛肹召, 子欲往, 
필힐(인명)이 부르자 공자께서 가시려고 했다.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 子曰'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자로가 말씀드렸다.

"예전에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나쁜 짓을 한 자에게 군자는 가지 않는다'.

필힐은 중모(지명)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은 가시려 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양화 17.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견고한 것은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흰 것은 아무리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내가 무슨 조롱박이더냐? 어찌 매달아놓기만 하고 (물을 떠서) 먹을 수도 없단 말이냐?"


공자께서 남자(인명)를 만나자 자로가 달가워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맹세하며 말씀하셨다. "내가 부당한 짓을 저질렀다면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하늘이 나를 싫어할 것이다."
子見南子, 子路不說.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옹야, 6.28)

남자(南子)는 위나라 영공의 부인으로, 대단한 미녀였지만 소문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집요하게 요청해 결국 공자가 만나고 왔는데, 자로는 스승이 미인계에 넘어간 것 같아 불만이 많았다. 그런 자로에게 공자가 아무 일 없었다며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장면이다.

공자 아카데미는 3단계였는데, 초급반은 '입문(入門)', 중급반은 '승당(升堂)', 그리고 고급반은 '입실(入室)'이었다. 말 그대로 학원문을 처음 들어오는 게 '입문'이고, 좀 더 지나면 대청마루에 올라 수업을 들으니 '승당'이라 하였고, 더 지나면 스승과 토론하기 위해 방에 들어가니 '입실'이라 불렀던 것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그런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로의 일화다.

子曰 "由之瑟奚爲於丘之門." 門人不敬子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자로)가 거문고를 어찌하여 내 집 문 앞에서 타느냐?"

(그 뒤로) 문인들이 자로를 공경하지 않았다.

子曰 "由也升堂矣, 未入於室也." (선진 11.1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는 이미 대청에 오른 사람이다. 다만 아직 입실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 일화에 대한 나무위키의 설명. 역시 나무위키다 ㅋㅋㅋㅋ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자로는 후에 반란군을 맞아 싸우던 중, 갓의 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는 순간조차 갓을 벗어선 안된다(君子死, 冠不免)'며 갓끈을 다시 묶고 당당하게 싸우다 전사했다고 한다. 자로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공자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2. 안회(顔回, 일명 안연)

<안회상(顏回像)>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안회(顔回, 일명 안연)는 공자보다 30세 연하의 어린 제자였지만, 공자가 가장 아끼고 인정했던 인물이다. 공자는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안회를 최고로 쳤다. <논어>에는 편애에 가까운 공자의 찬사가 여러 번 나온다. 안회에 대한 공자의 믿음과, (앞서 소개한) 자로의 캐릭터를 동시에 확인할 수 있는 재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공자께서 안연에게 말씀하셨다.

"등용되면 나아가 일을 하고, 써주지 않으면 은거한다. 오직 나와 너만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로가 (샘이 나서) 여쭈었다.

"선생님께서 3군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신다면 누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맨몸으로 강을 건너다 죽어도 후회없는 사람(즉 너같은 사람), 나는 함께 할 생각이 없다. (내가 함께 할 사람은) 반드시 일에 임해서 두려워하고 계획을 잘 세워서 성공하는 (안연같은) 사람이다."

子謂顔淵曰 "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子曰 "暴虎馮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술이 7.11)   

안회는 빈촌 출신으로 '단표누항'의 주인공이다.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도를 즐기는 현인의 모습에 공자는 일찍부터 박수를 보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구나, 회(안회)야! 한 덩어리 밥과 쪽바가지 물로 누추한 골목에 살면서도, 남들은 그 시름을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구나. 어질도다, 회야!"

子曰 "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 (옹야 6.11)

또한 안회는 '습진(拾塵, 먼지를 집어든다는 뜻)'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스승 공자를 부끄럽게 만든 이 고사가 <논어>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여기서 함께 읽어 볼 만하다.   

공자가 진채지액을 겪을 때의 일이다.

풀국도 못 먹고, 7일 간 쌀 한 톨 먹지 못하고 낮잠을 잤다. 안회가 쌀을 구하여 밥을 지었는데, 밥이 거의 익을 무렵 (배고파 초조한) 공자가 멀리서 보니 안회가 솥에서 밥을 한 줌 떠서 먹고 있었다. 얼마 뒤 밥이 다 되어 공자에게 진지를 올리니

(삐친) 공자는 못 본 체하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방금 꿈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뵈었다. 깨끗한 이 밥으로 제사를 먼저 지내야겠다."

그러자 안회가 대답하기를,

"안됩니다. 좀 전에 재가 솥으로 들어가 밥이 좋지 않게 되어 버려야겠기에 제가 한 줌 걷어 먹었습니다(배가 고파 몰래 먹은 게 아님)." 하였다.

이에 공자는 탄식하며

"믿을 것은 눈인 데도 눈을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지할 것은 마음인 데도 마음을 오히려 의지할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ㅡ <여씨춘추> 권17, 심분람(審分覽) 임수(任數)


孔子窮乎陳蔡之間, 藜羹不斟, 七日不嘗粒, 晝寢. 顏回索米, 得而爨之, 幾熟. 孔子望見顏回攫其甑中而食之. 選間, 食熟, 謁孔子而進食. 孔子佯爲不見之. 

孔子起曰, 今者夢見先君, 食潔而後饋. 

顏回對曰, 不可. 嚮者煤室入甑中, 棄食不祥, 回攫而飯之. 

孔子歎曰, 所信者目也,而目猶不可信, 所恃者心也, 而心猶不足恃

안회는 무엇보다 공자에게 인(仁)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철저하고 흔들림 없는 성격이었다. 공자의 칭찬일색이 재미없게 들릴 지경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인(仁)을 어기는 법 없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일 뿐이다."

子曰 "回也, 其心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옹야 6.7)

선생님께서 자공에서 물으셨다.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나으냐?"

자공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정도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안회만 같지 못하지. 나와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공야장 5.9)

주유천하 도중 광나라 땅에서 위험천만했던 순간이 있었다. 위기를 겪고 다시 만났을 때, 안회는 스승을 감동시킬 잊지 못할 명언을 한다.

공자께서 광나라에서 갇히게 되었을 때 안연이 뒤처졌다가 겨우 쫓아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 "子在, 回何敢死." (선진 11.23)

하지만 결국 안회는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죽음 앞에서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天喪予, 天喪予, 선진 11.9)"를 반복하며 통곡한 얘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그 뒤에도 공자는 계속 그를 그리워하고 아까워했다.

공자께서 안연에 대해 말씀하셨다.

"애석하구나.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은 보았어도, 멈춘 것은 본 적이 없다."

子謂顔淵, 曰 "惜乎. 吾見其進也, 未見其止也." (자한 9.21)

계강자(인명)가 물었다.

"제자들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안회라는 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으나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어, 지금은 없습니다."

季康子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선진 11.7)

* 똑같은 이야기가 '옹야 6.3'에도 나오는데, 이때 질문하는 이는 '노애공'임


안회는 공자의 평가 속에서 주로 등장할 뿐, 정작 본인이 남긴 말은 별로 없다. 귀한 대사 가운데 하나가 스승 공자에 대한 평가다. 나름 큰 울림이 있어 마지막에 옮겨 놓는다.
 
안연이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파고들수록 더욱 견고하구나. 바라보면 앞에 계시다가 어느새 뒤에 계신다. 선생님은 차근차근 사람들을 이끌어주시고, 문(文)으로써 나를 넓혀주시고, 예로써 나를 단속해주시니 (공부를) 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이미 나의 재주를 다 쏟아부어 일어선 것 같은데 선생님은 더욱 우뚝 서있으니 비록 따르고자 해도 어떻게 따라야 할 지 모르겠구나."

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競吾才, 如有所立, 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자한 9.11)




3. 자공(子貢, 본명은 단목사)

<단목사상(端木賜像)> (대만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자공(子貢, 본명은 단목사)은 안회와 비슷한 연배의 2세대 제자인데, 다음 두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첫째, 공자 학단의 경제적인 후원자 역할을 했다.
둘째, 공자 사후에 기록을 정리하며 <논어>의 기초를 세웠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상인들의 이야기를 따로 묶은 <화식열전>이 있는데, 자공은 거기에 두 번째로 등장할 정도로 성공한 사업가였다. 그는 공자의 제자로 있는 동안에도 투자를 계속해 재산을 불려나갔다고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안회)는 거의 도를 터득했지만 자주 쌀통이 비었고, 사(자공)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재산을 불려나갔는데 그의 예측은 대개 적중했다.
子曰 "回也其庶乎屢空. 賜不受命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 11.19)

주유천하 시기에 공자의 여비를 부담한 사람도 자공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공자는 14년 간의 순례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최악의 시간, 공자가 "시경에 이르기를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데 저 들판에서 헤매고 있구나'라고 했는데 나의 도가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내가 무엇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이냐? (詩云 '匪兕匪虎, 率彼曠野' 吾道非邪? 吾何為於此, 공자세가)"라며 탄식의 질문을 던진 이들도 결국 자로, 안회, 그리고 자공 세 사람이었다.

<논어>를 읽으며 떠오르는 자공의 이미지는 매우 똑똑하고, 남의 마음을 잘 읽는 인물이다. 그의 질문이나 대답은 항상 반짝인다. 앞서 본 '스승님이 말씀을 안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기록하겠습니까(양화 17.19)'도 자공의 질문이었고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바라보겠습니까? 그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압니다(공야장 5.9)'도 그의 답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염유가 말했다. "선생님께서 위나라 임금을 위해 벼슬을 하실까?" 자공이 말했다. "좋습니다. 제가 여쭤보지요." 들어가서 여쭈었다. "백이와 숙제는 어떤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엣날의 현인이시다." "원망했습니까?" 말씀하시길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했겠느냐?" 자공이 나와서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벼슬하지 않으실 겁니다."
冉有曰 "夫子爲衛君乎." 子貢曰 "諾. 吾將問之." 入曰 "伯夷叔齊何人也." 曰 "古之賢人也." 曰 "怨乎." 曰 "求仁而得仁, 又何怨." 出曰 "夫子不爲也." (술이 7.15)
 
배경지식 없이도 이해가 되는 에피소드다. 같은 제자이며 선배인 염유는 전혀 알 수 없는 스승의 마음을 자공은 몇 마디 질문으로 알아내고 척척 답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과유불급'이란 말도 자공의 질문에서 비롯된 고사다. 자공이 자기보다 어린 후배 둘을 거론하며 스승의 마음을 테스트한 사건이었다.  

자공이 여쭈었다.

"사(자장)와 상(자하) 중에서 누가 더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는 지나치고(過), 상은 미치지 못한다(不及)."

자공이 여쭈었다.

"그렇다면 사가 더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過猶不及)."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 愈與."

子曰 "過猶不及." (선진 11.16)

'유(猶)'가 '같다'는 뜻임을, 그리하여 '과유불급'의 의미는 '지나침=못미침'이지 '지나침≤못미침'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자. 3년 전부터 내가 강조해 온 내용이다^^

노나라 애공 16년(BC.479), 공자가 73세 나이로 죽었다. 제자들이 모여 장사를 지내고 3년상을 치렀다. 그리고 3년 뒤, 모두 떠났으나 자공은 그대로 남아 무덤 가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더 지냈다. 그러면서 혼자서 스승의 기록들을 정리했다. 지금의 <논어>는 아마 그때 기초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자공이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더 아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자공 주위로 모여들어 함께 공자를 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촌락을 이루어 '공자마을(孔里)'이라 하였으니, 지금 취푸에 세워진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살아서 별일 없었던 공자는 이렇게, 죽어서 영원한 별이 되었다. 제자들과 함께...

 

www.youtube.com/watch?v=ecDmsiCUgPk

 

<사기>에는 제후들의 역사인 <세가> 30편이 수록돼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공자세가>편이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이긴 '월남'은 '월'나라 남쪽의 지명

 

 

 

www.youtube.com/watch?v=88pTubBhhXc

 

 

m.blog.naver.com/kenpa44/221179780998

 

2018 고전읽기 【1】 논어 #2. 공자의 일생

공자의 일생은 신격화되어 객관적인 사실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공자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사마천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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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일생은 신격화되어 객관적인 사실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공자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사마천의 『사기』 가운데 <공자세가>편인데, 이것도 공자 사후 400년이 지나서 완성됐으니(BC.91) 정확하고 완벽한 기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사마천은 역사가로서 공자의 전기를 쓰기 위해 직접 노나라를 방문해 자료를 구하고 고증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는 <논어>의 심층 독서를 위해 공자의 생애가 궁금한 바, <공자세가>의 기록 정도로도 충분할 테니 그것을 1차 자료로 삼기로 한다.

<공자세가>는 다음과 같은 아리송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공자는 노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陬邑) 생이다. 그의 선조는 송나라 사람 공방숙(孔防叔)인데 방숙은 백하(伯夏)를 낳고 백하는 숙량흘(叔梁紇)을 낳았다. 숙량흘이 안씨(顔氏)와 야합(野合)해 공자를 낳았다.
孔子生魯昌平鄉陬邑, 其先宋人也, 曰孔防叔. 防叔生伯夏, 伯夏生叔梁紇. 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

야합? 야합이라니? 이 말은 나쁜 목적으로 서로 결탁했을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본래 '들(野)에서의 합(合)', 즉 남녀가 부정하게 벌이는 성행위를 뜻한다. 우리의 성인이자 군자인 공자님이 이토록 부정하게 태어났단 말인가? 당황한 후세의 학자들이 갖가지 해석을 내놓았지만 시원한 설명은 부족했다. 어쨌든 공자의 부모가 통례에 따른 합당한 결혼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중국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굴되었다. 한나라 시대에 무덤을 장식했던 화상석(畵像石) 가운데 하나인데, 거기에 말 그대로 생생한 야합 장면이 묘사돼 있는 것이다.

<상림야합도> 성도 출토 한나라 화상전

중국인들이 '상림야합도(桑林野合图)'라고 부르는 이 낯 뜨거운 그림은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준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지의 교감을 얻기 위한 공감주술의 의미로 남녀의 집단 성행위를 장려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1) 예를 들어 가뭄이 오래 되면 비가 내리길 빌며 뽕나무 숲(桑林)과 같이 신성한 곳에서 야합 이벤트를 벌였다는 건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특히 그 이미지를 무덤 장식을 위한 화상석에 새겨 넣은 것은, 야합이 (화상석의 주된 소재인) 역사적 인물이나 전설 만큼 중요한 의식이었다는 의미다. 공자는 이처럼 신비로운 세레모니(?)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        
1) 전호태, <화상석 속의 신화와 역사> (소와당, 2009), pp.256-262


공자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공자세가>에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은 딱 한 줄 설명이 등장한다.

공자는 어려서 소꿉장난을 할 때, 항상 제사 용기들을 펼쳐 놓고 예를 올렸다.
孔子爲兒嬉戲常陳俎豆, 設禮容.

'조두(俎豆)'란 제사 때 쓰는 나무 그릇을 뜻한다. 공자는 어렸을 때 이런 제기들을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조두예용(俎豆禮容)'이라는 말이 나왔고, 공자가 어려서부터 예를 숭상하는 비범한 아이였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김진여, <조두예용>(1700). 중국 왕진붕의 <공자성적도>를 모방한 작품이다.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어떤 이들은 이 대목에서 공자의 모친이 무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애초에 천지의 교감을 위한 주술 의식(야합)을 통해 아이를 가졌고, 그렇게 태어나 아이가 제사 흉내를 내며 놀았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무녀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니 그 집에 태어난 아이는 늘 제사 광경을 보고 자라 이를 흉내낼 가능성이 많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에 제사를 직업으로 하는 유(儒)가 있었을 수도 있다(유에 관해서는 지난 회에 설명하였다).

공자는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청소년기에는 어머니도 잃었다고 한다. 이 당시 중요한 에피소드 하나가 <공자세가>에 전해진다.

공자가 (상중이라) 허리에 띠를 두르고 있는데, 계씨(季氏)가 선비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공자가 나타나자 양호(陽虎)가 물리치며 말하기를 "계씨는 선비들을 초대한 것이지 너 같은 녀석을 초대한 게 아니다." 이에 공자는 물러나고 말았다.
孔子要絰, 季氏饗士, 孔子與往. 陽虎絀曰 "季氏饗士, 非敢饗子也." 孔子由是退.

공자가 살던 시기에 노나라는 계씨 가문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양호는 그 집안의 가신이었는데, 그가 어느 날 열린 잔치에서 공자를 문전박대한 것이다. 공자가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가 선비(士)가 아니라서인지, 아직 미성년자라서인지, 상복 차림이라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남들 다 가는 마을 잔치에서 까였으니(?) 매우 분했을 것이고 큰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후에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위정 2.4)"고 했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된 건 아니었을까?

여기서 잠깐 '선비(士)'라는 말에 주목해보자. 이것은 평범한 보통명사가 아니라 당시의 계급 명칭 가운데 하나다. 천자(王)가 맨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제후(公), 제후 아래에 대부(卿), 대부 아래에 선비(士)가 있었다. 그 아래는 피지배층인 일반 백성들이었는데, 공자는 어쩌면 사(士)에도 끼지 못하는 하층민이었는지 모른다.     

출처 :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1> (통나무, 2008), p.158

아닌 게 아니라 <공자세가>에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孔子貧且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논어>에도 공자가 제자들에게 직접 "나는 어릴 때 비천하여 다양한 잔재주들을 갖게 되었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 자한 9.6)"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으니, 그는 정말 장례 진행이나 하던 천한 집안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공자는 가난하고 평범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서른 살에 자립했다
(立, 위정 2.4). <공자세가>에는 그가 일찍부터 계씨 가문에 들어가 창고지기도 하고 목장관리도 했다는 설명이 있지만, 그게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쨌든 그는 34세 때 처음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를 만나기도 하였고 제나라의 제후(경공)를 만나기도 했다. <논어>에는 그 당시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실려 있다.     

공자께서 제나라에 계실 때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했다. 말씀하시기를 "음악을 짓는 게 이런 경지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술이 7.14)

'소(韶)'는 옛날 순임금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음악이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이 음악을 들으며 공자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국가를 계속 떠올렸을 것이다. 소를 일러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다(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팔일 3.25)'라고 극찬한 대목도 있는 걸로 보아('진선진미'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공자는 소에 심취해 깊은 단계까지 간 걸로 보인다. 이는 나중에 예악(禮樂)을 완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산동성 소원촌(韶院村)에 있는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 공자가 소음악을 들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BC.516년, 공자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고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아카데미를 연다. 시서예악을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인생의 황금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 공자는 중궁, 염구(염유), 재아, 안회(안연), 자공(단목사)과 같은 뒤어난 제자들을 양성하며 유가사상의 토대를 닦았다. 이러한 학문의 최전성기가 50세 때까지 14년 동안 이어졌다.

BC.501년, 공자는 51세 나이에 처음으로 정식 벼슬길에 오른다. 노나라 제후인 정공(定公)이 그를 중도(中都)의 읍재(邑宰)로 임명한 것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지방 도시의 시장쯤 되는 벼슬인데 공자는 여기에서 두각을 나타내 이후 고속 승진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이 <공자세가>에 기록돼 있다.

정공은 공자를 중도의 재(中都宰)로 삼았는데, 1년 뒤에 사방 모든 곳에서 그(가 다스리는 방식)를 따라했다. 그리하여 공자는 중도의 재에서 사공(司空)이 되었고, 사공에서 또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定公以孔子為中都宰, 一年, 四方皆則之. 由中都宰為司空, 由司空為大司寇.

사공은 토목공사 담당관이고 대사구는 법을 집행하는 총책임자다. 공자는 드디어 중앙무대의 고위 관리로 출세한 것이다. 50대 나이가 그리 빠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천출(賤出)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대단한 성공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 리링(李零) 교수는 <집 잃은 개>에서 매우 흥미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다. 공자가 "쉰이 되어서 천명(天命)을 알게 되었다(命. 위정 2.4)"고 말한 건, 바로 50세에 자신의 천직이 관리임을 깨달았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하긴, 아카데미 시절 공자는 주역에 심취해 책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읽었으니 어느 날 갑자기 관직의 천명(天命)을 들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공자의 출세가도는 얼마 안 가 장애에 부딪힌다. BC.497년 그의 나이 55세 때 고국인 노나라는 개혁에 실패하고, 심지어 망국의 조짐까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관해 <공자세가>에 기록된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이웃 제나라에서 노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녀 가무단 80명을 보냈다. 노나라의 실세였던 계환자(季桓子)는 그들의 공연에 빠져 삼일 동안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제사를 지낸 뒤 대부들에게 고기를 나눠주지 않을 정도로 예를 잊었다. 이에 실망한 공자는 노나라를 떠났다 - 드디어 그 유명한 공자의 '주유천하(周遊天下)'가 시작된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497년부터 484년까지, 무려 13년 간이나 열국(列國)을 떠돌아 다녔다. 그의 나이 55세에서 68세까지, 젊은 몸이 아니었다. 많은 제자들이 동행하였지만 결코 편안한 여행은 될 수 없었다. 공자는 (齊), 송(宋), 위(衛), 정(鄭), 초(楚)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신을 받아 줄 제후를 구했다. 하지만 뜻을 펼 기회를 잡기는 커녕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다. 송나라에서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쳐야 했고, 광나라에서는 5일 간 감금을 당한 적도 있다. 진-채의 국경에서 모든 제자들과 함께 7일 동안 아무 것도 못 먹고 개고생한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다. 그 자세한 경로와 사연은 <공자세가>에 나와 있는데, 그보다는 그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더 중요한 테마가 될 것이다. 공자가 정나라 성문 밖에 혼자 이르렀을 때 '상갓집 개()'와 같다고 전하는 기사나, 시경의 구절을 들어 '코뿔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닌 것이 들판에서 헤매고 있구나(匪兕匪虎 率彼曠野)'라며 여러 제자들에게 탄식하는 기사는 가히 절정이다. 덕치주의를 실현해 보려 하지만 패권에 눈먼 제후들은 아무 관심이 없다. 그래서 관직을 구하지 못한 공자는 매우 초조하다. <논어>에는 당시 상황들이 여러 이야기로 등장하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 안에 웬만큼 이루어내고 3년이면 성공을 거둘 것이다."
子曰 "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 (자로 13.10)

리링은 이 절의 소제목을 아예 <공자의 정치광고>라고 달기도 했다(<집잃은 개 2>, p.739). 한편 상인 출신이었던 제자 자공과는 이런 대화도 주고 받는다.


자공이 물었다.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에 넣어 보관하시겠습니까? 좋은 상인을 구하여 파시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팔아야지! 그것을 팔아야지! 나는 상인을 기다릴 것이다."
子貢曰 "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 子曰 "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자한 9.13)

'발분망식(發憤忘食)'이란 말이 있다. 공부나 일을 할 때 뭔가 될 듯 말 듯한 상황에 이르면 약이 올라 밥먹는 것도 잊고 매달리는 걸 뜻한다. 공자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설명할 때 등장하는 이 표현은 실은 그의 나이 63세, 초나라에 머물던 시절에 생긴 고사다. 그때 초나라 섭공(섭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이 공자를 스카우트 해볼까 고심하며 분위기를 보러 방문했다. 그때 마침 공자는 없고 제자인 자로만 있었는데...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자로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그 분은 공부에 빠져들면 먹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도를) 즐기느라 근심마저 잊으며, 늙음이 찾아오는 것마저 모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술이 7.19)

내막을 알면 절박하다. '발분망식(
發憤忘食)'이란 결국, 아깝게 기회를 놓쳐버린 공자가 제자를 야단치며 스스로의 PR포인트로 내놓은 키워드였던 것이다.

영화 <공자 - 춘추전국시대> 중에서

子曰 "莫我知也夫."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구나!"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자공이 말했다. "왜 스승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하십니까?"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헌문 14.35)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

나는 아래에서 배워 높은 경지까지 이르렀다.

이런 나를 알아주는 이는 저 하늘일 것이다."



결국 공자는 아무 소득없이 다시 귀국한다(BC.484). 어느덧 68세가 되었다. 이듬해에 아들 리(
鯉)가 죽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애제자 안회가 세상을 떴다. <논어>는 그때 공자의 슬픔도 전하고 있다.   

顔淵死, 子曰 "噫! 天喪予. 天喪予." (선진 11.9)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통곡하셨다. 모시던 제자가 말했다.

"스승님 통곡하시는군요."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선진 11.10)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통곡이라고? 이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


 
공자는 말년에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를 엮었고 제자들도 계속 가르쳤다. 이제 그의 사상은 완전하게 무르익은 인문학이자 정치철학이었다. 제자들은 나날이 늘어 유약, 자하, 증삼, 자장 등이 공문(公門)으로 모여들었다. 기원전 479년, 공자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은 노나라 도성의 북쪽 사수(泗水) 가에 장례를 지내고 3년 동안 상을 치렀다. 사마천은 <공자세가>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낸다.

適魯, 觀仲尼廟堂車服禮器, 諸生以時習禮其家, 余祗回留之不能去云. 天下君王至於賢人眾矣, 當時則榮, 沒則已焉.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참관했고, 여러 유생들이 그 집에서 때때로 예를 익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경모하는 마음이 일어 머뭇거리며 떠날 수가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살아있을 때만 영예로웠고 죽으면 끝이었다. 

孔子布衣, 傳十餘世, 學者宗之. 自天子王侯, 中國言六藝者折中於夫子, 可謂至聖矣.

공자는 포의(布衣)였지만 10여 세(世)가 지나도 학자들이 종주로 삼는다. 천자와 왕후로부터 나라 안에서 육예(六藝)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공자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지극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서 고향에 묻힌 공자 - 산동성 취푸(曲阜)의 공자묘

돌이켜보니 공자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미천하게 태어나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였고,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진 것 다 버리고 도전도 해 보았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초조하게 탄식도 해 보았다. 평생을 포의(布衣)로 살았지만 삶은 떳떳하였고 제자들은 많았다. 어찌 보면 살아서 별 것 아니었던 한 사람의 생각은 죽어서 점점 커지고, 깊어지고, 강해져서, 결국 인류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대사상이 되었다. <논어>의 위대함은 바로 그런 공자의 '삶'과 '사상'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飯疎食飮水 

반소사음수, "거친 밥 먹고 물 마시고, 

曲肱而枕之 

곡굉이침지, 팔 베고 누우니 

樂亦在其中矣 

낙역재기중의, 그 속에 즐거움도 있다. 

不義而富且貴 

불의이부차귀, 의롭지 못한 부(富)와 귀(貴)는 

於我與浮雲 

어아여부운,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 (술이 7.16)  


공자 개인의 뜻이 하나의 큰 이데올로기로 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의 제자들 덕분이다. 그의 제자들이 없었다면 '유교'라는 사상은 아예 이름조차 불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회에는 공자와 그 제자들에 관해 알아보기로 한다. <끝>

 

 

www.youtube.com/watch?v=tY1807LpFj4

 

 

한국가요 1090곡 /곡명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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