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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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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1]

1 자서(自序)

2 계우(季雨)에게 증정한 서문

3 낭천(狼川) 수령으로 나가는 심백수(沈伯修)를 송별하는 서문

4 은산(殷山) 수령으로 나가는 서원덕(徐元德)을 송별하는 서문

5 대은암(大隱菴)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6 자소집서(自笑集序)

7 유구(悠久)에게 증정한 서문

8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

9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10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翰林) 추천서에 대한 기록

11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12 불이당기(不移堂記)

13 소완정기(素玩亭記)

14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조촐하게 모인 기록

 

[2]

15 만휴당기(晩休堂記)

16 명론(名論)

17 백이론(伯夷論) ()

18 백이론(伯夷論) ()

19 형암(炯菴) 행장(行狀)

20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21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22 필세설(筆洗說)

23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3]

24 주금책(酒禁策)

25 유사경(兪士京 유언호 )에게 답함

26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27 어떤 이에게 보냄

28 홍덕보(洪德保 홍대용 )에게 답함

29 두 번째 편지

30 세 번째 편지

31 네 번째 편지

32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33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3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35 순찰사에게 답함

36 어떤 이에게 보냄

37 순찰사에게 올림

38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39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40 전라 감사에게 답함

 

[4]

41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42 순찰사에게 답함

43 순찰사에게 올림

44 순찰사에게 답함

45 순찰사에게 올림

46 순찰사에게 올림

47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48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49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50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51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52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53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자서(自序)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서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말이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말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벽돌인들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도올(檮杌)은 사악한 짐승이지만 초() 나라의 국사(國史)는 그 이름을 취하였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몰래 매장하는 것은 극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

이로써 보자면 글이 잘되고 못되고는 내게 달려 있고 비방과 칭찬은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비유하자면 귀가 울리고 코를 고는 것과 같다. 한 아이가 뜰에서 놀다가 제 귀가 갑자기 울리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기뻐하며, 가만히 이웃집 아이더러 말하기를,

 

너 이 소리 좀 들어 봐라. 내 귀에서 앵앵 하며 피리 불고 생황 부는 소리가 나는데 별같이 동글동글하다!”

하였다. 이웃집 아이가 귀를 기울여 맞대어 보았으나 끝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자, 안타깝게 소리치며 남이 몰라주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어떤 촌사람과 동숙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우람하여 마치 토하는 것도 같고, 휘파람 부는 것도 같고, 한탄하는 것도 같고, 숨을 크게 내쉬는 것도 같고, 후후 불을 부는 것도 같고, 솥의 물이 끓는 것도 같고, 빈 수레가 덜커덩거리며 구르는 것도 같았으며, 들이쉴 땐 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내뿜을 때는 돼지처럼 씩씩대었다. 그러다가 남이 일깨워 주자 발끈 성을 내며 난 그런 일이 없소.” 하였다.

, 자기만이 홀로 아는 사람은 남이 몰라줄까 봐 항상 근심하고, 자기가 깨닫지 못한 사람은 남이 먼저 깨닫는 것을 싫어하나니, 어찌 코와 귀에만 이런 병이 있겠는가? 문장에도 있는데 더욱 심할 따름이다. 귀가 울리는 것은 병인데도 남이 몰라줄까 봐 걱정하는데, 하물며 병이 아닌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코 고는 것은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면 성내는데, 하물며 병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사람이 부서진 기와나 벽돌도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의 선염법(渲染法)으로 극악한 도적의 돌출한 귀밑털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요, 남의 귀 울리는 소리를 들으려 말고 나의 코 고는 소리를 깨닫는다면 거의 작자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D-001] …… 것이다 : 원문은 難得其眞인데, 종북소선(鍾北小選) 병세집(幷世集)에는  로 되어 있다.

[D-002]말이란 …… 버리겠는가 : 부서진 기와나 벽돌처럼 쓸모없는 것들에도 도()가 존재하므로, 이를 소재로 삼아 말로 표현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지북유(知北遊)에서 동곽자(東郭子) 이른바 도()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장자는 없는 데가 없다.無所不在고 하면서, 땅강아지나 개미에도 있고, 稊稗에도 있고, 기와나 벽돌瓦甓에도 있고, 똥이나 오줌에도 있다고 하였다. 시경(詩經) 용풍(鄘風) 장유자(墻有茨)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말하면 추해진다네.所可道也 言之醜也라고 하였다. 원문의 瓦礫 종북소선 병세집 糞壤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不棄瓦礫 瓦礫도 같다.

[D-003]도올(檮杌) …… 취하였고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 나라의 ()과 초() 나라의 도올과 노() 나라의 춘추(春秋)가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도올은 원래 전설에 나오는 사악한 짐승이었는데, 초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원문의 楚史取名에서  자는 종북소선 로 되어 있다.

[D-004]몽둥이로 …… 남겼으니 : 극도로 흉악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역사책에 남겨 후세 사람들이 교훈으로 삼게 한다는 뜻이다. () 나라 무제(武帝) 때 왕온서(王溫舒)라는 혹리(酷吏)가 젊은 시절 사람을 죽이고 암매장하는 악행을 자행했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혹리전(酷吏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원문의 劇盜 종북소선 병세집 狗屠로 되어 있고, ‘遷固是敍 是敍 종북소선 生色으로 되어 있다.

[D-005]이로써 보자면 : 원문은 以是觀之인데, ‘以是 종북소선에는 由是, 병세집에는 是以로 되어 있다.

[D-006]귀가 울리고 : 병으로 인해 귀에 이상한 잡음이 들리는 이명증(耳鳴症)을 말한다.

[D-007]놀라서 …… 기뻐하며 : 원문은 啞然而喜인데, 종북소선에는  로 되어 있다.

[D-008]내 귀에서 …… 동글동글하다 : 이와 비슷한 비유가 이덕무(李德懋)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1에 나온다. 이덕무가, 어린 동생이 갑자기 귀가 쟁쟁 울린다고 하여 그 소리가 무엇과 비슷하냐고 물었더니, “그 소리가 별같이 동글동글해서 빤히 보고 주울 수 있을 듯해요.其聲也 團然如星 若可覩而拾也라고 답했다. 이에 이덕무는 형상을 가지고 소리를 비유하다니, 이는 어린애가 무언 중에 타고난 지혜이다. 옛날에 한 어린애가 별을 보고 저것은 달의 부스러기이다.’라고 했다. 이런 따위의 말들은 몹시 곱고 속기를 벗어났으니, 케케묵은 식견으로는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D-009]마치 …… 같고 : 원문은 如哇如嘯如嘆如噓인데, 종북소선에는 如歎如哇로만 되어 있다.

[D-010]톱질하는 소리가 나고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鉅鍛으로 되어 있다.

[D-011]남이 일깨워 주자 : 원문은 被人提醒인데, 종북소선에는 提醒 搖惺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怒人之提醒 提醒도 같다.

[D-012]자기가 …… 사람은 : 원문은 己所未悟者인데, 종북소선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남이 …… 싫어하나니 : 원문은 惡人先覺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4]문장에도 …… 따름이다 : 원문은 文章亦有甚焉耳인데, 종북소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5]하물며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에는 이 앞에  자가 더 있다.

[D-016]선염법(渲染法) : 동양화에서 먹을 축축하게 번지듯이 칠하여 붓 자국이 보이지 않게 하는 수법을 이른다.

[D-017]극악한 도적 : 원문은 劇盜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狗屠로 되어 있다.

[D-018]돌출한 귀밑털 : 원문은 突鬢인데, 즉 봉두돌빈(蓬頭突鬢), 쑥대머리에다 돌출한 귀밑털이란 뜻으로, 거칠고 단정치 못한 모습을 말한다.

[D-019]들으려 말고 : 원문은 毋聽인데, 종북소선에는 不問으로, 병세집에는 無聽으로 되어 있다.

[D-020]깨닫는다면 : 원문 인데, 종북소선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계우(季雨)에게 증정한 서문

 

 

스승의 도()가 폐기된 지 오래되었다. 중니(仲尼 공자)가 돌아가신 때로부터 맹자(孟子) 이하는 모두 스승의 도로써 자처할 수 없었다.  스승이니 제자니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그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안다고는 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도를 믿는 것이 반드시 돈독하다고는 할 수 없다. 도가 이미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면, 스승도 존숭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공자(孔子)는 문하의 제자를 부를 적에 반드시 삼(), (), (), (), (), (), ()이라고 이름을 부르면서 너나들이하였으니, 무릇 이름을 바로 부르면서 너나들이하는 것은 자제(子弟)로부터 더 아래로 부리는 종이나 하인들에게까지도 모두 쓰는 말이다.

공자가 돌아가셨을 때 문인(門人)들이 복()을 어떻게 입을지를 정하지 못하자, 자공(子貢)이 이르기를,

 

옛날에 부자(夫子)께서 안연(顔淵)의 상()을 당했을 때 아들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였으나 복은 입지 않았으니, 지금 문인들도 부친의 상을 당한 것같이 하되 복은 입지 말도록 하자.”

하였다. 문인이 스승에 대해서 아비와 자식 관계같이 했으니 어찌 도를 믿지 않고서 그렇게 되겠는가. 수레를 팔 것을 청하자 허락지 아니하고, 후히 장사를 치르자 탄식하였으니, 이는 문인을 아들과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었고, ()와 예() 외에 특별히 들은 것이 없었으니, 이는 아들을 문인과 똑같이 대하려는 것이었다.

맹자는 일찍이 문하의 제자에 대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 그대)’라 칭했다. ‘라는 것은 상대를 높이는 언사로서, 자기와 대등한 사람으로부터 그 위로 군공(君公 제후)과 아버지나 스승에게까지 쓸 수 있는 말이니, 문인에게 이 말을 쓴다면, 이는 친구가 친구를 대하는 도리이다.

공자의 70명의 제자들 중에 제 스승을 요순(堯舜)보다 어질다고 칭송하는 자가 있어도, 참람되이 여기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알고 그 도를 깊이 믿었다면, 해와 달도 크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고, 태산(泰山)도 높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강과 바다도 깊다고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의 제자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의 무리는 재주와 식견이 낮아서, 스승의 어짊을 참으로 알지 못했고 그 도를 깊이 믿지 못했기 때문에 기껏 그 스승을 높인다는 것이 관중(管仲)과 안자(晏子)의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맹자는 문인에 대하여, 그들이 물으면 대답하였지 자신의 포부를 말한 적이 없었다. 이미 스승의 어짊을 알지 못하고 그 도를 믿지 못한다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서 너나들이하는 것도 안 될 말인데, 더구나 감히 스승의 도로써 자처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맹자는 일찍이 스승의 도에 엄하여 진상(陳相)을 책망하고, 조교(曹交)를 거절했으니, 아마도 그는 70명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심복한 것에 대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일찍이 맹자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교육할 것을 생각했지만, 또 사람들이 남의 스승되기를 좋아하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그가 경솔하게 남에 대해 스승 노릇을 하고자 아니 한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 계우(季雨)는 나이 겨우 약관인데, 험한 길을 멀다 아니 하고 대추와 육포를 품고 책상자를 짊어지고 그의 스승을 찾아가 따르려고 한다. 나는 그 선생님이 반드시 영재를 얻어 교육할 것을 생각하시고, 또 경솔하게 아무에게나 스승 노릇을 하고자 아니 하실 줄을 안다. 아마도 틀림없이 나의 이 말로써 먼저 그 선생님께 예물 삼아 올릴 터인데 선생님께서도 의당 답이 있으실 것이다. 그래서 글로 써서 계우에게 증정하는 바이다.

 

 

공자와 맹자는 100여 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사제간의 친분이 치수(淄水)와 승수(澠水)같이 판이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세상의 도의가 날로 하락한 것을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C-001]계우(季雨) :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연암집 5에 수록된 중관에게 보냄與仲觀이란 편지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01]() : 성명은 증삼(曾參), ()는 자여(子輿)이다.

[D-002]() : 성명은 안회(顔回), 자는 자연(子淵)이다.

[D-003]() : 성명은 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이다.

[D-004]() : 성명은 복상(卜商), 자는 자하(子夏)이다.

[D-005]() : 성명은 공서적(公西赤), 자는 자화(子華)이다.

[D-006]() : 성명은 중유(仲由), 자는 자로(子路)이다.

[D-007]() : 성명은 염옹(冉雍), 자는 중궁(仲弓)이다.

[D-008]너나들이하였으니 …… 말이다 : 이 부분이 병세집에는 爾汝之也者 魯之方音 此待子弟之道 弟子者子弟也 故로 되어 있다.

[D-009]공자가 …… 하였다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D-010]수레를 …… 탄식하였으니 : 안회가 죽었을 때 안회의 아버지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팔아 외관(外棺)인 곽()을 장만하기를 청하였는데, 공자는 자신의 아들 이()가 죽었을 때도 관()만 있었고 곽은 없었다고 대답하면서 승낙하지 않았다. 그리고 문인들이 후히 장사 지내려 하자 공자는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결국 후히 장사 지내자, “안회는 나를 아버지처럼 여겼는데 나는 그를 자식처럼 대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저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論語 先進

[D-011]() …… 없었으니 : 공자가 문하의 제자와 자신의 아들을 가르치는 데 차별을 두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고사(故事)이다. 진항(陳亢)이 백어(伯魚 : 공자의 아들 이)에게 그대도 뭔가 좀 특별히 들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백어가 대답하기를, “그런 것은 없었다. 언젠가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시를 배웠다. 그 후에 또 홀로 서 계실 때에 내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를 배웠느냐?’ 하고 물으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다.’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예를 배웠다. 이 두 가지를 들었노라.” 하였다. 論語 季氏

[D-012]공자의 70명의 제자들 : 공자 문하의 제자 약 3000명 중에서 재주와 덕이 출중한 제자로 72명 또는 77명을 꼽는데, 史記 卷47 孔子世家, 67 仲尼弟子列傳 대충하여 70명이라고도 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 덕으로써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이 즐거워서 진실로 복종하게 하나니, 70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복종하는 경우와 같다.”고 하였다.

[D-013]제 스승을 …… 있어도 :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 내가 보기에 부자(夫子 : 공자孔子)는 요순(堯舜)보다 훨씬 뛰어나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孟子 公孫丑上

[D-014]깊이 믿었다면 : 원문은 深信인데,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5]해와 …… 것이다 : 숙손무숙(叔孫武叔)이 공자를 헐뜯자 공자의 제자 자공은, 다른 현자들이 언덕과 같아 넘을 수 있는 존재라면 공자는 해와 달 같아 도저히 넘을 수 없다.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고 옹호하였다. 論語 子張 또한 공자의 제자 유약(有若)은 스승을 예찬하여, 언덕과 개밋둑에 비교하면 태산과 비슷하고, 길바닥에 괸 물과 비교하면 강과 바다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이 부분이 병세집에는 天地不足以爲大 日月不足以爲高 河海不足以爲深矣로 되어 있다.

[D-016]만장(萬章) …… 않았다 :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는 춘추 시대 제() 나라 사람이다. 관중은 이름이 이오(夷吾), 자가 중()인데, 환공(桓公)을 섬겨 부국강병에 힘쓰고 제후를 규합하여 환공을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안자는 이름이 영(), 자가 평중(平仲)인데, 영공(靈公) · 장공(莊公) · 경공(景公)의 재상이 되어 절검 역행(節儉力行)하여 국력 배양에 힘썼다. 공손추가 맹자에게 부자(夫子)께서 만일 제() 나라에서 요직을 맡으신다면 관중과 안자의 공적을 다시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그대는 참으로 제 나라 사람이구나, 관중과 안자밖에 모르는 것을 보니!”라고 못마땅해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D-017]진상(陳相)을 책망하고 : 등문공(滕文公)이 맹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정(仁政)을 펴자, 이 소문을 듣고 초() 나라의 유자(儒者) 진량(陳良)의 문도인 진상이 등 나라로 와서 그 백성이 되기를 자원하였다. 이때 신농씨(神農氏)의 설()을 따르는 허행(許行)도 등 나라로 옮겨와 직접 신을 삼고 자리를 짜서 생활하였는데, 진상이 허행을 보고는 자신이 그동안 해 온 학문을 버리고 허행을 추종하였다. 진상이 맹자를 만나 등 나라 군주는 현군(賢君)이기는 하지만 도()는 듣지 못했습니다. 현자(賢者)는 백성들과 함께 밭갈이해서 먹고 손수 밥을 지어 가며 다스려야 하는데, 지금 등 나라에는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가 있으니, 이는 백성들을 해쳐서 자신을 봉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맹자는 허행의 학설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설명하고, 진상이 스승의 학문을 배반한 것을 호되게 꾸짖었다. 孟子 滕文公上

[D-018]조교(曹交)를 거절했으니 : 조교는 조군(曹君)의 동생이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D-019]천하의 …… 생각했지만 : 맹자가 군자(君子)의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면서,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을 세 번째 즐거움으로 들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盡心上

[D-020]사람들이 …… 근심하였으니 : 맹자가 사람들의 병통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함에 있다.”고 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孟子 離婁上

[D-021]험한 …… 하고 : 원문은 不遠道路之險인데,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2]대추와 …… 짊어지고 : 원문은 抱棗脯 負書笈인데, 병세집에는 負書笈 抱棗脯로 되어 있다. 대추와 육포는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바치는 예물로 쓰인다.

[D-023]그의 …… 한다 : 이 대목이 병세집에는 운평(雲坪)으로 찾아가 따르려 한다. 장차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서이다.往從于雲坪 蓋將以師之也라고 되어 있다. 운평은 곧 송능상(宋能相 : 1710~1758)인 듯하다. 송능상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현손(玄孫)이자 한원진(韓元震)의 제자로 저명한 성리학자인데, 1751년부터 충청도 회덕(懷德) 운평에 살면서 운평을 호로 삼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했다. 저서로 운평문집(雲坪文集)이 있다.

[D-024]치수(淄水)와 승수(澠水) : 현재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두 강의 이름이다. 두 강의 물맛이 서로 달랐던 데서 유래하여, 두 가지 사물의 성격이 판이한 경우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낭천(狼川) 수령으로 나가는 심백수(沈伯修)를 송별하는 서문

 

 

낭천(狼川)은 고대의 맥국(貊國)으로, 땅은 외지고 백성은 가난한 지역이다. 벗인 심군 백수(沈君伯修)가 이곳에 수령으로 부임하게 되자 의기가 충만하였으며, 날을 정해서 행장을 꾸려 가족을 이끌고 떠나는데, 뜻을 이룬 사람과 몹시 흡사하였다.

심군은 겨우 약관일 적에 용모와 자태가 단정하고 수려하며 학문과 창작이 걸출하고 정민(精敏)할 뿐더러, 논의를 펴면 바람이 이는 듯하고 붓을 잡으면 나는 듯하여 명성과 예찬이 마침내 당대에 떨쳐졌다. 그래서 그가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그보다 연배나 지위가 높았는데도 그와 교유하기를 원했던 것이며, 우리 왕조 개국 이래로 조달(早達)한 이를 낱낱이 헤아려 볼 때 이한음(李漢陰 이덕형(李德馨))이나 김문곡(金文谷 김수항(金壽恒))만큼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임금께서 일찍이 진사(進士)들을 불러 정시(庭試)를 보일 적에 친림(親臨)하여 시험지를 하사하셨다. 때마침 비가 내려 선비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시험지를 하사받고 비를 피하여 행랑 아래로 들어갔으나, 군은 공수(拱手)하고 홀로 비를 맞으며 뜰 가운데 서 있었다. 임금께서 바라보고 기특하게 여겨 돌아보며,

 

저기 홀로 섰는 자가 누구냐?”

하고 묻자, 측근 신하가 군()의 이름을 아뢰었다. 임금은 감탄하며,

 

어떻게 하면 분주히 이익을 다투지 않고 홀로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그가 과거에 합격하기를 권면하고 장차 크게 쓰려는 뜻이 매우 성대하였다. 군 역시 발탁되었다가 공교롭게도 면직을 당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임금은 그의 이름을 들을 적마다 늘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오랫동안 군도 과거 답안 쓰는 공부를 그만두고 더욱 글을 읽어, 문장의 수준이 날로 높아갔다. 그러나 도리어 낭서(郞署)에 머물면서 승진되거나 좌천되거나 하였다. 지금 그를 옛사람에 비교해 보면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고 정승에 제수될 나이인데, 마침내 산간 벽지의 한 작은 고을에 벼슬자리를 얻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군을 송별하는 사람들은 바야흐로 입을 모아 군이 뜻을 펴지 못했노라고 읊었지만, 군으로 말하자면 장차 밤낮으로 장부와 문서를 정리하고 부지런히 백성의 고통을 조사하며, 청사(廳舍)는 어떻게 보수해야 하며 고을의 폐단은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생각하여, 마치 평생토록 평소에 뜻을 둔 사람같이 할 것이다. 그리고 군의 불우함을 거론하며 근심스럽게 여겨 슬퍼한 사람들은 모두 장차 겸연쩍어하면서 자신을 폄하(貶下)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다.

군이야말로 진정 내면의 만족을 얻어 외적인 영화를 잊은 사람이 아니겠는가. 선비가 성공과 실패, 영예와 치욕의 갈림길에서 자주 운명을 뇌까린다면 참으로 운명을 모르는 자가 아니겠는가. 군은 일찍이 밭을 팔아 책을 사서 몸소 만 권을 이루고 날마다 서루(書樓)에서 강독하였으니, 방법에 대해서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조그마한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C-001]낭천(狼川) …… 서문 : 낭천은 강원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화천군(華川郡)인데, 현감(縣監)이 다스렸다. 백수(伯修)는 심염조(沈念祖 : 1734~1783)의 자이다. 심염조는 연암의 젊은 시절 절친한 벗으로, 음관(蔭官)으로 공조 좌랑(工曹佐郞)을 거쳐 낭천 현감으로 나갔다. 1776년 문과에 급제하고, 1778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이덕무(李德懋)를 대동하고 연행(燕行)을 다녀왔으며, 정조의 총애를 받아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부제학,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D-001]맥국(貊國) :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에 맥족(貊族)이 세웠다는 소국(小國)이다.

[D-002]조달(早達) …… 있었다 :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21세에 문과 급제하고 31세에 대제학이 되었으며 42세에 영의정이 되었다. 김수항(金壽恒 : 1629~1689) 23세에 문과 급제하고 34세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44세에 우의정과 좌의정이 되었다.

[D-003]낭서(郞署) : 낭관(郞官)이라고도 하며, 주로 육조(六曹)의 정 5 품 벼슬인 정랑(正郞)이나 정 6 품 벼슬인 좌랑(佐郞)을 이른다.

[D-004]군을 …… 읊었지만 : 심염조와 송별할 때 사람들이 그의 불우함을 위로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는 뜻이다. 벗인 김기장(金基長)이 지은 송별시가 전한다. 在山集 卷7 送沈員外伯修出守狼川

[D-005]서루(書樓) : 김기장의 송별시에 설향루(雪香樓)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은산(殷山) 수령으로 나가는 서원덕(徐元德)을 송별하는 서문

 

 

옛날에는 사대부들이 내직(內職 중앙관직)을 중히 여기고 외직(外職 지방관직)은 가볍게 여겼다. 그래서 임금 측근의 친밀한 신하들은 정세상 조정에 있기 거북하거나 특명으로 견책을 당해 외직에 보임된 자가 아니면, 아무도 선뜻 고을살이로 자기 몸을 얽어매려 아니 하였으며, 재능과 지혜를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명예와 절조를 근엄하게 갖추었다. 대개 그 명망이 매우 높아서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과 현격히 달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명성이 클수록 관직은 더욱 맑으며, 관직이 맑을수록 그 녹봉으로 받는 것이 더욱 청렴했다.

간혹 집이 가난하고 부모가 늙은 경우에는 관례적으로 걸군(乞郡)을 할 수 있지만, 웅장하게 큰 고을은 아무리 가득 찬 고을 창고를 차지하고 있고 어업과 소금 판매의 이익을 마음대로 한다 할지라도,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자신을 기름지게 하는 데 사용하여 명예와 절조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번화하고 비옥한 지방을 다스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며, 반드시 산수가 뛰어난 지역을 선택하였다. 산에 오르고 물을 찾아가는 즐거움과 한적하고 후미진 정취가 있어야만 기꺼이 잠깐 외직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려고 하였다. 노계(露雞 야생 닭)와 석봉(石蜂)으로 몸을 보양할 만하고 기생의 춤과 노래로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지라, 날마다 나가 놀며 잔치를 열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살피지 않지만, 항상 위엄과 무게를 갖추고, 관직을 맡게 되느냐 그만두게 되느냐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겼다.

그러므로 관찰사도 그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하여, 공문(公文)으로 아뢰고 청하면 곡진히 들어주지 않음이 없으며, 늘 암행어사가 옆에서 감시하는 것같이 쉬지 않고 부지런히 근무하고 삼가고 경계하여 스스로 행실을 닦아나갔으며, 무관(武官)이나 음관(蔭官)으로 수령이 된 사람들은 이를 본받음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공을 거두었다. 백성들은 그의 간략함을 사모하고, 아전들은 그의 청렴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적을 평가할 때는 노상 모든 고을 중에서 으뜸이었으니, 유독 위엄과 명망이 특별하고 명성과 위세를 과시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청렴한 지조와 간략한 정사(政事)로 문치(文治)가 저절로 넉넉하여 조치를 번거롭게 시행하지 아니해도 효과가 착실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근세에 와서 명환(名宦 명예롭게 여기는 벼슬)이 무너져 버리고 나자, 사대부들이 날로 더욱 태만하고 방자하여 조금도 명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 염방(廉防)과 명론(名論)이 날로 따라서 무너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처신함도 유품(流品)과 다름이 없으므로, 전택(田宅)이나 재산 마련을 일삼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일단 가산(家産)에 마음을 둔 이상에는 비옥한 고을의 수령 자리가 하나 나오면, 수만 명이 눈독을 들여 청탁이 어지럽게 쏟아지므로 세력이 강하고 민첩한 자가 아니면 마침내 한 번도 얻지 못하니, 그 자리를 얻기가 본디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부서기회(簿書期會)하는 사이에 이익을 탐하게 된다. 그래서 예전에 위엄과 무게를 근엄하게 갖추었던 자들도 애써 자신을 억누르며, 대개는 단련되어 익숙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비단 감사나 병사(兵使)가 걸핏하면 군무(軍務)나 이사(吏事 관리의 사무)로써 서로 감찰하고 견책할 뿐만 아니라, 진사(鎭司)나 방영(防營)에서도 모두 상관(上官)으로서 탄압할 수 있으니, 호령을 따르고 받들 겨를도 없는데 설마 어찌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잔치하며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겠는가. 아아, 내직이 경시되고 외직이 중시됨으로써 사대부들이 비로소 재능과 지혜를 말하게 되었으니, 임금 측근의 친밀한 신하들이 진실로 휴식할 곳이 없게 된 셈이다.

벗 서군 원덕(徐君元德)이 홍문관 교리로서 은산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가 떠나면서 굳이 나에게 한마디 말을 요구하므로, 나는 자중(自重)하여 상관에게 굽히지 말 것을 굳이 권면했다.

무릇 내직과 외직에 경중(輕重)을 두어 차별하는 것은 역시 외물(外物)에 기대하는 것이다. 군자가 이에 처하면서, 어찌 경중을 분별하며, 지금과 예전에 차이가 있으랴. 그러므로 군자는 밝은 때라 해서 자신의 절의를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고, 어두운 때라 해서 자신의 행실을 태만하게 하지 않는다.” 하였다. ‘자중하라고 말한 것은 그 지체와 명망으로 위엄 있고 무게 있게 굴라는 것이 아니요, ‘굽히지 말라고 한 것은 오만불손하라는 말이 아니다. 청렴하고 간략하며 깨끗하고 신중하면, 백성은 편안하고 아전은 두려워하며, 관직을 맡느냐 못 맡느냐를 하찮게 여긴다면, 상관이 하기 어려운 일로써 책임 지우지 아니하는 법이다. 이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외직을 중시하는 것이 재물이나 이득으로 인한 혜택 때문에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서군(徐君)으로부터 깨끗하고 명예로운 관직이 되었기 때문이라면, 은산은 진실로 장차 다른 고을에 솔선하여 우뚝이 사방에서 우러러보는 바가 될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이 된다면 지방에 있는 고을을 중시하는 데 대해 내가 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직과 외직의 경중을 말한 것이 도도하면서도 근거가 있으니, 사대부의 관잠(官箴)이 될 만하다.

 

[C-001]은산(殷山) …… 서문 : 은산은 평안도에 속한 현()으로, 현감이 다스렸다. 원덕(元德)은 서유린(徐有隣 : 1738~1802)의 자이다. 서유린은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로, 1766년 문과 급제 후 1769년 홍문관 수찬 · 교리 등을 거쳐 1770년경 은산 현감으로 나갔던 듯하다. 정조 즉위 후 관찰사, 참판,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D-001]관직은 더욱 맑으며 : 비록 지위나 봉록은 높지 않으나 학식과 문벌이 높은 사람만이 임명될 수 있는 명예로운 관직을 청환(淸宦)이라 한다. 주로 홍문관 · 예문관 · 규장각 등의 당하관(堂下官)을 이른다.

[D-002]걸군(乞郡) : 지방 수령은 본인이나 처의 고향에는 부임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나, 문과 급제자에 한하여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이나 고향 가까운 곳의 수령직을 청할 수 있는데 이를 걸군(乞郡)이라 한다.

[D-003]석봉(石蜂) : 바위틈에 집을 짓고 사는 석벌을 이른다. 석벌에서 얻는 꿀이 석청(石淸)이다.

[D-004]문치(文治) : 원문은 文理인데, 이는 문교(文敎)와 예악(禮樂)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문치와 같은 말이다.

[D-005]염방(廉防)과 명론(名論) : 염방은 염치와 예방(禮防) 즉 예법을 말하고, 명론은 사대부로서의 명망을 말한다.

[D-006]유품(流品) : 유품잡직(流品雜織)이라 하여, 문무 양반만이 맡는 정직(正職) 이외의 여러 가지 잡다한 벼슬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D-007]부서기회(簿書期會) : 1년 동안의 회계를 장부에 기입하여 기일 내에 조정에 보고하는 것을 말한다.

[D-008]감사나 병사(兵使) : 원문은 方伯連帥인데, 원래 방백(方伯)은 다섯 나라 제후들의 우두머리, 연수(連帥)는 열 나라 제후들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천자의 다음이며 제후보다 상위이다. 柳宗元 封建論 조선 시대에는 고을 수령을 천자국의 제후에 비겼으므로, 방백과 연수를 감사와 병사로 번역하였다.

[D-009]진사(鎭司)나 방영(防營) : 진사는 곧 진영(鎭營)으로, 여기서는 진영장(鎭營將)을 가리킨다. 각 도의 병영이나 수영에 소속된 정 3 품 무관 벼슬이다. 방영은 곧 방어영(防禦營)으로, 여기서는 방어사(防禦使)를 가리킨다.  2 품 무관 벼슬이다.

[D-010]군자는 …… 않는다 : () 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이 한 말로, 소학(小學) 계고(稽古)에 나온다. 그녀는 한밤중에 궁궐에 출입할 때 나는 수레바퀴의 소리만 듣고도, 그 수레를 탄 사람이 위 나라의 어진 대부(大夫) 거원(蘧瑗)임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거원은 어두운 밤일지라도 대궐 문 앞에서 반드시 하마례(下馬禮)를 행하고 어가(御駕)를 끄는 말에게 경례를 표하는 예의를 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릇 충신과 효자는夫忠臣與孝子으로 되어 있는 원문을 연암은 군자는君子으로 조금 고쳐 인용하였다.

[D-011]관잠(官箴) : 관리로서 지켜야 할 계율이라는 뜻이다. ()은 원래 문체의 하나로, 스스로 경계(警戒)하기 위해 짓는 글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대은암(大隱菴)에서 창수(唱酬)한 시의 서문

 

 

무인년 섣달 열나흗날 국지(國之 이구영(李耈永)), 의지(誼之 이서영(李舒永)), 원례(元禮 한문홍(韓文洪))와 함께 밤에 백악(白岳 북악산(北岳山)) 동쪽 기슭에 올라 대은암(大隱巖) 아래 줄지어 앉았노라니, 시냇물 언 것이 똑똑 떨어져 새어나오면서 층층이 얼어서 쌓여 있고, 얼음 밑의 그윽한 샘에서는 옥이 부딪듯 맑은 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달은 몹시 차고 눈은 가무스름하여, 지경은 고요하고 정신은 차분하였다. 서로 바라보며 웃고, 농담하면서 즐겁게 시를 주고받다가, 이윽고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옛날 남곤 사화(南袞士華)가 살던 곳이다. 박은 중열(朴誾仲說)은 온 나라에 이름난 선비였는데 중열이 술을 마시려면 반드시 이 대은암으로 왔으며, 그가 시를 지을 적에는 사화와 더불어 짓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당시에 문장과 교유가 융성하여, 관리로 선발된 그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망라하였다고 할 만했으나, 수백 년이 지나는 사이에 앞사람들의 명승고적은 모두 이미 묻히고 사라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더군다나 남곤 같은 자에 있어서랴.

지금 그 무너진 담장과 황폐해진 집터 사이에서 감개하여 서성대는 것은, 성쇠(盛衰)가 때가 있음을 슬피 여김과 동시에 선악(善惡)은 민멸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원례가 이곳에 잠시 거처하여 시를 노래하며 즐겁게 놀면서 흉금을 털어놓는 것이 거의 장차 중열과 맞먹을 정도인 데다, 시냇물과 솔바람에는 상기도 여운이 남아 있다.

아아, 그 두 사람이 여기에서 노닐 적에 그들의 의기(意氣)의 융성함이 또한 어떠했겠는가. 실컷 마시고 한껏 취하여 둘이 서로 속내를 다 털어놓고는 손을 맞잡고 길게 한숨지을 적에, 그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듯하고 그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 양자강의 지류)의 둑이 터진 듯하였을 것이니, 또한 천고(千古)의 인물들을 논평할 적에도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에 엄하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중열은 연산군의 조정에서 간()하다 죽었는데, 그의 시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적다고 한스럽게 여기게 된다. 지금도 그의 시를 읽어보면 늠름하여 확고히 설 수 있었음을 상상케 한다. 남곤은 북문(北門)의 화()를 열어 바른 사람들을 참살하였는데, 남곤이 바야흐로 죽을 적에 자신의 글을 다 불태우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후세에 전한다 하더라도 누가 보려 하겠는가.’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문장과 특별한 교유도 진실로 하나의 여사(餘事)일 따름이니,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관계되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군자인 경우에는 뒷사람이 그 자취를 사모하고 후세에까지도 그 전하는 시가 많지 않음을 한스러워하며, 소인인 경우에는 오히려 자기 손으로 글을 없애 버리기에 바빴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랴.”

창수한 시는 대략 몇 편이다. 중미(仲美 연암)가 서문을 썼다.

 

[C-001]대은암(大隱菴)에서 …… 서문 : 영조 34년 무인년 12 14(양력 1759 1 12) 서울 북악(北岳) 동쪽 기슭의 대은암에서 연암이 벗들과 시를 창수한 사실은 이희천(李羲天 : 1738~1771) 석루유고(石樓遺稿) 화백록시서(和白麓詩序)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함께한 사람들은 이희천의 당숙부(堂叔父)인 이구영(李耈永 : 1736~1787), 이희천의 족숙부(族叔父)인 이서영(李舒永 : 1736~1800), 연암과 과거(科擧) 공부를 같이 하던 한문홍(韓文洪 : 1736~1792)이었다. 김윤조, 역주 과정록, 태학사, 1997.

[D-001]남곤 사화(南袞士華) : 사화는 남곤(1471~1527)의 자이다. 남곤은 중종(中宗) 때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하고 영의정까지 지냈다. 죽은 뒤에 사림파의 탄핵을 받아 시호와 관작을 삭탈당했다. 대은암(大隱巖)은 남곤의 집 뒤에 있던 바위였는데 그 밑을 흐르는 여울을 만리뢰(萬里瀨)라 하였다. 젊은 시절 남곤의 벗이었던 박은(朴誾)이 각각 그와 같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D-002]박은 중열(朴誾仲說) : 중열은 박은(1479~1504)의 자이다. 박은은 조선 중기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연산군 때 직언(直言)으로 인해 파직되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걸려 요절하였다.

[D-003]북문(北門)의 화() :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말한다. 기묘사화 때 남곤이 훈구 대신(勳舊大臣)들과 함께 승지와 사관들이 모르도록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와서 중종에게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죄를 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자소집서(自笑集序)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禮失而求諸野고 하더니 그 말이 틀림없지 않은가! 지금 중국 천하가 모두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어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알지 못한 지 이미 100여 년인데, 유독 연희(演戱) 마당에서만 오모(烏帽)와 단령(團領)과 옥대(玉帶)와 상홀(象笏 상아로 만든 홀)을 본떠서 장난과 웃음거리로 삼고 있다. 아아, 중원(中原)의 유로(遺老)들이 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혹시 낯을 가리지 않고는 차마 보지 못할 이가 있겠는가? 아니면 혹시 이 연희 마당에서 그것들을 즐겁게 구경하면서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상상하는 이라도 있겠는가?

세폐사(歲幣使 동지사)가 북경에 들어갔을 때 오() 지방 출신 인사와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고장에 머리 깎는 점방이 있는데 성세낙사(盛世樂事 태평성세의 즐거운 일)’라고 편액을 써 걸었소.”

하므로, 서로 보며 크게 웃다가 이윽고 눈물이 주르르 흐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서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습관이 오래되면 본성이 되는 법이다. 세속에서 습관이 되었으니 어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부인들의 의복이 이 일과 매우 비슷하다. 옛 제도에는 띠가 있으며 모두 소매가 넓고 치마 길이가 길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왕이 많아지면서 궁중의 수식(首飾)이나 복색이 모두 몽골의 오랑캐 제도가 되었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다투어 궁중의 양식을 숭모하여 마침내 풍속이 되어 버려, 3, 4백 년 된 지금까지도 그 제도가 변하지 않고 있다.

저고리 길이는 겨우 어깨를 덮을 정도이고 소매는 동여놓은 듯이 좁아 경망스럽고 단정치 못한 것이 너무도 한심스러운데, 여러 고을 기생들의 옷은 도리어 고아(古雅)한 제도를 간직하여 비녀를 꽂아 쪽을 찌고 원삼(圓衫)에 선을 둘렀다. 지금 그 옷의 넓은 소매가 여유 있고 긴 띠가 죽 드리워진 것을 보면 유달리 멋져 만족스럽다. 그런데 지금 비록 예()를 아는 집안이 있어서 그 경망스러운 습관을 고쳐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더라도, 세속의 습관이 오래되어 넓은 소매와 긴 띠를 기생의 의복과 흡사하다고 여기니, 그렇다면 그 옷을 찢어 버리고 제 남편을 꾸짖지 않을 여자가 있겠는가.”

이군 홍재(李君弘載)는 약관 시절부터 나에게 배웠으나 장성해서는 한역(漢譯 중국어 통역)을 익혔으니, 그 집안이 대대로 역관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시 문학을 권면하지 않았었다. 이군이 한역을 익히고 나서 관복을 갖추고 본원(本院 사역원(司譯院))에 출사(出仕)하였으므로, 나 역시 속으로 이군이 전에 글을 읽을 적에 자못 총명하여 문장의 도를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다 잊어버렸을 터이니, 재능이 사라지고 말 것이 한탄스럽다.’고 생각하였다.

하루는 이군이 자기가 지은 글들이라고 말하면서 자소집(自笑集)’이라고 이름을 붙이고는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 () 및 서(), (), (), ()  100여 편이 모두 해박한 내용에다 웅변을 토하고 있어 특색 있는 저작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의아해하며,

 

자신의 본업을 버리고 이런 쓸데없는 일에 종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더니, 이군은 사과하기를,

 

이것이 바로 본업이며 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대개 사대(事大)와 교린(交隣)의 외교에 있어서는 글을 잘 짓고 장고(掌故)에 익숙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원의 관리들이 밤낮으로 익히는 것은 모두 옛날의 문장이며, 글제를 주고 재주를 시험하는 것도 다 이것에서 취합니다.”

하였다. 나는 이에 낯빛을 고치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대부가 태어나 어렸을 적에는 제법 글을 읽지만, 자라서는 공령(功令 과거 시험 문장)을 배워 화려하게 꾸미는 변려체(騈儷體)의 문장을 익숙하게 짓는다.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이를 변모(弁髦)나 전제(筌蹄)처럼 여기고, 합격하지 못하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거기에 매달린다. 그러니 어찌 다시 이른바 옛날의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역관의 직업은 사대부들이 얕잡아 보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책을 저술하여 후세에 훌륭한 글을 남기는 참된 학문을도리어 서리들의 하찮은 기예로 간주하게 될까 두렵다. 그렇게 되면 연희 마당의 오모나 고을 기생들의 긴 치마처럼 여기지 않을 자가 거의 드물것이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 점을 두려워하여 이 문집에 대해 특별히 쓰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아아, “예가 상실되면 재야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중국 고유의 예로부터 전해 온 제도를 보려면 마땅히 배우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요, 부인 옷의 고아(古雅)함을 찾으려면 마땅히 고을 기생들에게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장의 융성함을 알고 싶다면 나는 실로 미천한 관리인 역관들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D-001]예가 …… 구한다 : 한서 30 예문지(藝文志)에 인용된 공자(孔子)의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는 주()에서 도읍(都邑)에서 예가 사라졌을 경우 재야에서 구하면 역시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였다.

[D-002]한관(漢官)의 위의(威儀) : () 나라 관리들의 위엄 있는 복식과 전례(典禮) 제도라는 말로, 중화(中華)의 예의 제도를 뜻한다.

[D-003]중원(中原)의 유로(遺老) : 한족(漢族) 왕조인 망한 명() 나라에 대해 여전히 신민(臣民)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노인 세대를 가리킨다.

[D-004]() 지방 출신 인사 : () 지방은 중국의 동남쪽 강소성(江蘇省) ·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가리킨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명 나라 말에 최후까지 만주족의 침략에 저항하여 유달리 반청(反淸) 사상이 강하였다.

[D-005]소매 : 원문은 인데, ‘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6]()를 아는 집안 :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과 예의 범절을 대대로 전승해 오는 명문가를 시례지가(詩禮之家)’라고 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는 5대조 박미(朴瀰)의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가 중국식의 상복(上服)을 착용한 이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이를 집안의 예()로 확정했으며, 조부 박필균(朴弼均)도 집안 부인네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고 한다. 居家雜服攷 內服

[D-007]이군 홍재(李君弘載) : 홍재는 이양재(李亮載 : 1751~?)의 초명(初名)이다. 이양재는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이언용(李彦容)의 아들이다. 1771(영조 48) 역과(譯科)에 급제하고 사역원(司譯院)에 재직하였다. 譯科榜目 원문은 李君인데, ‘弘載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아래에 나오는 李君은 모두 같다.

[D-008] …… 때문이었다 : 원문은 乃其家世舌官인데, ‘ 자가 추가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9]재능이 …… 한탄스럽다 : 원문은 乾沒可歎인데 간몰(乾沒)’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물속으로 침몰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D-010]특색 있는 …… 있었다 : 원문은 勒成一家인데, 글을 엮어 책을 만드는 것을 늑위성서(勒爲成書)’  늑성(勒成)’이라 하고, 특색 있는 저작을 일가서(一家書)’라고 한다.

[D-011]과연 쓸데가 있습니다 : 대본은 果有用 則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이 되면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이본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D-012]변모(弁髦)나 전제(筌蹄) : 무용지물을 뜻한다. 변모는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쓸데없는 치포관(緇布冠)과 동자(童子)의 다팔머리를 말하고, 전제는 물고기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통발과 토끼를 잡고 나면 쓸데없는 올가미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구(悠久)에게 증정한 서문

 

 

이유구(李悠久)가 부임하는 부친을 따라 장차 평안도의 영유현(永柔縣)으로 가게 되었으므로, 그와 더불어 노닐던 이들이 다 그 집에서 전송하였는데, 죄다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노닐고 함께 거처하며 글을 읽고 의리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지금 유구가 벗들을 버리고 학업조차 중단하고, 서울에서 600리나 떨어진 곳으로 떠나가 벗들과 헤어져서 외로이 지내게 되었단 말인가.

평안도는 산수가 아름답고 도회지가 풍요하고 웅대하며, 풍속이 사치스럽고 방탕하였다. 밖에 나가면 누관(樓觀)을 유람하고, 들어앉으면 기악(妓樂)을 즐기며, 편을 나누어 쌍륙(雙陸) 놀이를 하고 무리를 지어 투호(投壺) 놀이를 하며, 맑은 노래와 칼춤이 늘 좌우에 있으니, 그만하면 서울 생각도 잊을 만하고 외로이 지내는 근심을 위로할 만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안색은 우울해하는 것 같고 풀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한 사람과도 같다. 나는 이로써 유구가 오래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며, 벗들과 헤어져 외로이 지내지 않을 것임을 안다. 남아 있는 사람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을 것이 아니요, 떠난 사람은 반드시 속히 돌아올 것임을 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이가,

 

유구가 비록 배움을 위해서라 하지만 장차 혼정신성(昏定晨省 부모님을 보살펴 드리는 예의)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은 어찌하겠는가?”

하기에, 나는,

 

옛사람 중에는 수천 리 먼곳으로 유학하는 사람도 있었네. 하물며 그의 부모님이 아직 늙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을 오래 붙잡아둘 분들이 아님에랴!”

했더니, 모두들

 

그렇겠다.”

고 했다.

 

 

[C-001]유구(悠久) : 이영원(李英遠 : 1739~1799)의 자이다. 이영원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경상 감사, 대사헌, 한성부 판윤 등을 지낸 이연상(李衍祥)의 아들로서, 1774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그의 부친 이연상은 1759년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한 이후 1771년 문과 급제하기 전까지 신녕 현감(新寧縣監) 등 지방관으로 전전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름날 밤잔치의 기록

 

 

스무이튿날 국옹(麯翁)과 함께 걸어서 담헌(湛軒)의 집에 이르렀다. 풍무(風舞)가 밤에 왔다. 담헌이 가야금을 타니, 풍무는 거문고로 화답하고, 국옹은 맨상투 바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밤이 깊어 떠도는 구름이 사방으로 얽히고 더운 기운이 잠깐 물러가자, 줄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 맑게 들렸다. 곁에 있는 사람들은 조용히 침묵하고 있어 마치 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참선하는 승려가 전생(前生)을 돈오(頓悟)하는 것 같았다. 무릇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삼군(三軍)이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한다더니, 국옹은 한창 노래 부를 때는 옷을 훨훨 벗고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은 품이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여겼다.

매탕(梅宕)이 언젠가 처마 사이에서 왕거미가 거미줄 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며 나에게 말하기를,

 

절묘하더군요! 때로 머뭇거리는 것은 마치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고, 때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으며, 파종한 보리를 발로 밟아주는 것과 같고, 거문고 줄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과도 같습디다.”

하더니, 지금 담헌이 풍무와 어우러져 연주하는 것을 보고서 나는 왕거미의 행동을 깨우치게 되었다.

지난해 여름에 내가 담헌의 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담헌은 한창 악사(樂師) ()과 함께 거문고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비가 올 듯이 동쪽 하늘가의 구름이 먹빛과 같아, 천둥소리 한 번이면 용이 승천하여 비를 부를 수 있을 듯싶었다. 이윽고 긴 천둥소리가 하늘을 지나가자, 담헌이 연()더러

 

이것은 무슨 성()에 속하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천둥 소리와 곡조를 맞추었다. 이에 나도 천뢰조(天雷操)를 지었다.

 

 

[D-001]국옹(麯翁) :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홍대용(洪大容)의 벗으로, ()은 이씨(李氏)이며 시와 글씨에 빼어났다고 한다. 湛軒書 內集 卷3 次友人韻却寄李麯翁 국옹은 혹시 이한진(李漢鎭 : 1732~1815. 호 경산京山)의 일호(一號)일지 모른다. 이한진은 명필로서 전서(篆書)를 특히 잘 썼을 뿐 아니라 음률에도 밝았으며, 퉁소의 명수로서 홍대용, 김억(金檍) 등과 즐겨 합주(合奏)하였다고 한다. 만년에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하기도 했다.

[D-002]담헌(湛軒) : 홍대용의 당호이다. 담헌의 집은 서울 남산 기슭 영희전(永禧殿) 북쪽에 있었는데 그 집의 유춘오(留春塢)라는 정원에서 악회(樂會)를 자주 열었다고 한다.

[D-003]풍무(風舞) : 김억(金檍 : 1746~?)의 호이다. 본관은 청양(靑陽)이고 자는 효직(孝直)이며,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김종택(金宗澤)의 아들이다. 1774년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금사(琴師)이자 가객(歌客)으로 유명하였다.

[D-004]떠도는 …… 물러가자 : 원문은 流雲四綴 暑氣乍退인데, 종북소선에는 暑氣乍退 流雲四綴로 되어 있다.

[D-005]줄에서 나는 소리 : 원문은 絃聲인데, 종북소선에는 兩絃으로 되어 있다.

[D-006]단가(丹家)가 장신(臟神)을 내관(內觀)하고 : 단가는 연단술(煉丹術)을 행하는 도사(道士)를 이른다. 연단술은 기공(氣功)으로 정신을 수련하는 내단(內丹)과 약물을 복용하는 외단(外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내단에서 오장(五臟)에 깃든 신()을 관조하는 수련법을 내관이라 한다.

[D-007]무릇 …… 대적한다더니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부동심(不動心)의 방법으로 용기(勇氣)에 관해 논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거기에서 증자(曾子)는 공자로부터 대용(大勇)에 관해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아 올바를 경우에는 비록 수천 수만 명이라도 나는 가서 대적할 것이다.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라고 하였다. 여기서 ()’ 자는 ()’ 자와 뜻이 같다.

[D-008]두 다리를 ……  : 원문은 磅礴인데, 종북소선에는 盤礡으로 되어 있다. 서로 같은 말로, 무례하게 두 다리를 쭉 뻗은 모습을 뜻한다.

[D-009]매탕(梅宕) : 이덕무(李德懋)의 일호(一號)이다. 종북소선에는 炯菴으로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이덕무의 일호이다.

[D-010]절묘하더군요 …… 같습디다 :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서 이덕무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을 관찰하고서 한 말과 같다. 靑莊館全書 卷63

[D-011]지금 …… 보고서 : 원문은 今湛軒與風舞相和也인데, 종북소선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2]() : 연익성(延益成)이다. 담헌서(潭軒書) 내집(內集) 4 연익성에 대한 제문祭延益成文이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연익성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가로서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을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53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홍대용과는 30년 동안 교유하였다고 한다.

[D-013]용이 …… 듯싶었다 : 원문은 可以龍矣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可以龍이든 可以龍矣이든 글자가 누락된 듯하기에 문맥을 감안하여 의역하였다.

[D-014]이것은 …… 속하겠는가 : 전통음악의 다섯 가지 기본 음률인 궁() · () · () · () · ()의 오성(五聲) 중 어디에 속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D-015]나도 …… 지었다 : ()는 금곡(琴曲)에 붙이는 명칭이다. 여기서는 천뢰조라는 금곡의 가사(歌辭)를 지었다는 뜻이다. 종북소선에는 이 구절이 終未得云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마침내 거문고를 당겨 그에 맞추어 조율하였으나, 끝내 조율하지 못하였다.”라고 번역해야 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초구(貂裘)에 대한 기록

 

 

선문왕(宣文王)이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 있다가 돌아와서는 개연히 복수할 뜻을 품었으니, 하루라도 심양에 있던 날을 잊을 수 없어서였다. 이때 명() 나라가 망한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 나라가 이미 천하에서 뜻을 이루어 세계만방을 예속시킴에 따라, 중국 천하의 사대부들이 모두 이미 머리 깎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 그 조정에 나아가 그 임금을 섬기는 자들 역시 이미 있었으니, 천하에 다시 명 나라 왕실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유독 선문왕의 뜻만은 언제나 명 나라의 왕실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선문왕이 대통(大統)을 이어받은 뒤 맨 먼저 우암(尤庵)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을 초빙하여 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위대한 명 나라大明의 원수를 갚고 선왕(先王)의 치욕을 씻을 방법을 도모했으니, 이는 먼저 배우고 난 뒤에 신하로 대하려는 것이었다. 선생은 아침저녁으로 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을 아뢰었는데, 왕이 그 말을 즐겨 들음으로써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이 모두 나와서 왕의 조정에 줄을 잇게 되었다.

하루는 선생이 대궐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세자가 무릎을 꿇고서 왕이 손수 쓴 편지를 직접 건네주므로, 선생은 달려나아가 조정에 입시(入侍)하였다. 왕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초구(貂裘)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연계(燕薊)에는 추위가 일찍 오니 이것으로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왕에게 있는 힘을 다할 것을 약속하였으니, 대개 앞으로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한 뒤에 대의(大義)를 천하에 떨쳐, 비록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군중(軍中)에서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승하하고 나자 산중에 은거하던 선비들도 차차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떠나갔다. 선생은 이미 물러나 파곡(葩谷)에 살고 있었는데, 늘 혼자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가슴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며 초구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적신(賊臣)들 중에 음해하고자 하는 자들이 많아 유언비어를 만들어 청 나라에 넌지시 알리니, 청 나라 사람들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다.

선생이 안으로는 이미 적신들에게 자주 배척을 당하고 밖으로는 청 나라 사람들에게 협박을 받았지만, 배우는 사람들과 더불어 반드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여 선왕(先王 효종(孝宗))의 뜻을 밝히니, 선왕에게서 뜻을 얻지 못한 자들이 선생을 많이 원망하여 선생을 여러 번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선생은 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춘추대의를 펴지 못하고 종주국(宗主國 명 나라)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원통히 여기고, 매양 선왕을 추모하며 초구를 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마침내 죄인들이 다 처벌을 받고 선생은 돌아오게 되었으나, 선왕의 유신(遺臣)들은 이미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에 다시는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일을 말하지 않고, 아득한 40년 세월 동안 조공(朝貢)하는 사신이 해마다 연계(燕薊)의 교외를 달려가게 되었다.

급기야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적신들이 다시 정권을 쥐자, 선생이 선왕에게 불만을 품어 종통(宗統)을 폄하시키고 복()을 낮추었다고 하여 끝내 죽음에 몰아넣고 말았으니, 국내에서는 마침내 초구에 대한 일에 관해 말하기를 꺼렸다. 문인들이 선생의 유명(遺命)에 따라 파곡(葩谷)에 사우(祠宇)를 세워 명 나라 현황제(顯皇帝 신종(神宗))와 열황제(烈皇帝 의종(毅宗))를 제사하였다. 숙종(肅宗) 때 금원(禁苑)에 대보단(大報壇)을 쌓아 두 분 황제를 아울러 제사하면서도, 파곡의 사우를 보존하여 선생의 의리를 잊지 않게 하였다.

지금 임금今上 영조(英祖)32년에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되어 선생의 자손이 선생의 유상(遺像)과 초구를 받들어 임금께 올리니, 임금께서 찬()을 지어 내렸다. 3 19일은 열황제가 사직을 위해 순절(殉節)하신 날이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갑신년(1764, 영조 40)에 임금께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친히 대보단에 제사를 지냈다.

이에 즈음하여 마을 안의 부형들이 성() 서쪽에 있는 송씨의 우사(寓舍)로 가서, 선생의 초상에 절하고 초구를 꺼내어 대청 가운데에 펼쳐 놓고 서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모두 나에게 부탁하기를,

 

곡부(曲阜)의 공자 후손들은 공자가 신던 신발을 보배로 여겼고, 정호(鼎湖)의 신하들은 떨어진 황제(黃帝)의 활을 안고 울었다네. 더구나 이 초구는 선왕께서 하사하시고 선생께서 받으신 것이 아닌가. 더더구나 열황제가 순절하신 때가 바로 이해요 이날이 아닌가!”

하기에,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공손히 손 모아 큰절하며 수락하였다. 다음과 같이 시를 덧붙인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선왕에게 신하 있었나니 / 先王有臣

이름은 시열 자는 영보라 / 時烈英甫

천자님께 충성하길 / 忠于天子

제 임금께 충성하듯 했네 / 如忠其主

선왕에게 원수 있었나니 / 先王有仇

저 건주 오랑캐라 / 維彼建州

어찌 단지 사감(私憾) 때문이리 / 豈獨我私

대국의 원수로세 / 大邦之讎

왕께서 복수코자 / 王欲報之

대로 불러 상의하며 / 大老與謀

힘쓸지어다 / 王曰懋哉

초구를 하사하노라 하셨네 / 賜汝貂裘

서리 만난 갖옷은 / 秋毫啣霜

북쪽 변방에서 빛을 발했을 텐데 / 紫塞騰光

큰 공을 못 이룬 채 / 大功未集

왕이 문득 승하하셨네 / 王遽陟方

대로는 상심하여 / 大老其寒

갖옷 안고 눈물 흘리니 / 抱裘而泣

그 눈물 땅에 가득 / 其淚滿地

벽옥으로 변했고야 / 化而爲碧

갖옷 아니면 추워서가 아니라 / 匪裘不溫

미처 입지 못한 때문이요 / 未服是矣

선왕께서 내린 명령 / 先王之命

좌절된 때문일레 / 命獘是矣

오늘 저녁이 어느 땐고 / 今夕何辰

세 번째 돌아온 갑신년이라 / 甲其三申

우리는 망한 명 나라의 백성이요 / 明之遺民

선왕은 성인이셨네 / 先王聖人

 

 

[D-001]선문왕(宣文王) : 효종(孝宗)이다. 효종은 시호(諡號)가 선문장무신성현인대왕(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이다.

[D-002]빈사(賓師)의 예로써 대우하고 : 빈사는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군주로부터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을 이른다. 대본은 以賓師之禮인데, ‘ 자 다음에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3]선왕(先王) : 청 나라에 항복한 인조(仁祖)를 가리킨다.

[D-004]먼저 ……  : 군주가 현인(賢人)을 초빙할 경우 신하로 삼기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섬긴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탕왕(湯王)은 이윤(伊尹)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왕도(王道)를 행하였고, 환공(桓公)은 관중(管仲)에게 배운 뒤에 그를 신하로 삼았기 때문에 힘들지 않게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하였다.

[D-005]성의 정심(誠意正心)의 학문 : 대학(大學)을 이른다. 여기에서 군주가 자신의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서도 대학의 말을 인용하고 나서 옛날의 이른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뜻을 성실히 하는 이는 장차 그럼으로써 큰 일을 하려는 것이었다.” 하였다.

[D-006]초구(貂裘) :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을 말한다. 값비싼 방한복이다.

[D-007]연계(燕薊) : 유계(幽薊)라고도 하며, 옛 연() 나라 땅인 유주(幽州) 계지(薊地), 즉 지금의 북경을 포함한 하북성(河北省) 일대를 가리킨다.

[D-008]10 …… 뒤에 : 원문은 生聚十年인데, 이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원년(元年) 조에 월() 나라가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고 물자를 비축하며, 10년 동안 백성을 잘 가르치면十年生聚 而十年敎訓” 20년 뒤에는 오() 나라가 월 나라에게 망할 것이라고 우려한 오자서(伍子胥)의 말에 출처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상하가 합심해서 부국강병을 도모하여 원수를 갚는 것을 생취교훈(生聚敎訓)’이라 한다.

[D-009]파곡(葩谷)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화양동(華陽洞) 구곡(九曲) 중의 제 9 곡인 파곶(葩串 : 또는 巴串)을 말한다

[D-010]적신(賊臣) …… 알리니 : 1650(효종 1)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 나라에 조선의 북벌계획을 밀고한 사실을 이른다.

[D-011]춘추대의(春秋大義) : 춘추에서 강조한바 주() 나라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존주양이(尊周攘夷)의 의리를 이른다. 여기서는 명 나라를 존숭하고 청 나라를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의리를 이른다.

[D-012]바닷가로 귀양 가서도 : 효종비(孝宗妃)의 상()으로 인한 갑인년(1674)의 예송(禮訟)에서 서인(西人)들이 남인(南人)들에게 패함에 따라 우암도 파직, 삭탈되고 경상도 장기(長鬐)와 거제도(巨濟島) 등지로 귀양 간 사실을 이른다.

[D-013]죄인들이 …… 되었으나 : 1680(숙종 6)의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들이 정계에서 숙청되고 서인들이 복귀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우암은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고, 이어서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D-014]급기야 …… 말았으니 : 1689(숙종 15)의 이른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들이 숙청되고 남인들이 재집권한 사건을 이른다. 당시 숙종이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궁 장씨(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우암이 상소를 올려 다시 반대론을 제기하자, 이에 격분한 숙종은 우암을 비롯한 서인들을 축출하고 남인들을 불러들였다. 우암은 세자 책봉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기해년(1659)의 예송(禮訟)에서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을 둘로 나누고 효종이 적장자(嫡長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의 복상을 삼년복(三年服)이 아닌 기년복(朞年服)으로 강등시켰다는 공격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D-015]사우(祠宇) :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가리킨다.

[D-016]() …… 우사(寓舍) : 대본은 宋氏城西之寓舍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의거하여 宋氏之城西寓舍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D-017]곡부(曲阜) : 중국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공자의 고향이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 ()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D-018]정호(鼎湖) …… 울었다네 : 정호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솥을 만들고 난 뒤 승천(昇天)했다는 곳이다. 사기 28 봉선서(封禪書), 황제가 용을 타고 신하와 후비(后妃) 70여 인도 함께 용에 올라타고 승천하자 남아 있던 신하들이 함께 가려고 용의 수염을 잡았는데, 용의 수염이 빠지면서 신하들은 추락하고 황제의 활과 검도 함께 떨어졌다고 하였다. 제왕(帝王)의 서거를 슬퍼하는 고사로 쓰인다. 화양구곡(華陽九曲)에 읍궁암(泣弓巖)이 있다.

[D-019]건주(建州) :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남 지역으로, 이곳의 여진족(女眞族)들이 중심이 되어 청 나라를 세웠다.

[D-020]대로(大老) :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으로, 노론에서 송시열을 높여 대로라고 불렀다.

[D-021]벽옥으로 변했고야 : 장자 외물(外物)에 주() 나라 영왕(靈王)의 어진 신하인 장홍(萇弘)이 쫓겨나서 촉() 땅에서 배를 갈라 죽었는데 그 피를 3년 동안 간직해 두었더니 벽옥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충신열사가 흘린 피를 벽혈(碧血)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翰林) 추천서에 대한 기록

 

 

아아, 이는 나의 조부께서 한림 추천을 맡았을 때 손수 두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이다. 그 두 사람이 누군가 하면 영의정 신공 만(申公晩)과 이조 판서 윤공 급(尹公汲)이다.

우리 왕조가 건국한 지 이미 오래되다 보니 사대부들이 전적으로 문벌만을 숭상하는데, 그 문벌의 청환(淸宦)으로는 한림과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더욱 중하게 여겼다. 이조의 정랑(正郞)과 좌랑은 3품 이하의 관원에 대해서 통색(通塞)을 모두 주관하며 또 자기 후임을 스스로 추천하지만, 그 이름과 지위는 낭서(郞署)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한림의 고사(故事 오래된 규례)에는 회천(回薦)이 대문에 이르러,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고사에 따라,

 

자리에 계신 분들은 회피하셔야겠습니다.”

하고 아뢰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선발에 든 사람이 문벌과 재학(才學)에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완료)이 되었다. 완천한 날에는 분향하고 맹세하기를,

 

추천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사관(史官)의 직무를 중히 여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벼슬은 비록 낮으나 어디에도 통제되고 소속되지 않았으니, 이조의 정랑과 좌랑에 비해서 이름이 더욱 화려하고 돋보였다.

옛날에 종더러 말에게 콩을 더 주라고 훈계한 자가 있었고, 곡식을 말릴 적에 직접 참새를 쫓아 버린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좀스럽다는 비방을 입어 종신토록 청선(淸選)이 막히고 말았다. 말에게 콩을 더 주도록 하고 참새를 쫓아 버린 것이 그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너무도 각박하다는 혐의를 거의 면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사대부들이 집에서 생활할 적에도 오히려 모든 일에 친히 관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관직 생활을 할 적에 청렴한 절조를 함양하고 명론(名論 명망)을 중히 여기기를 바라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이로써 본다면, 사소한 부분을 질책하는 것은 너무도 각박한 데 가까운 것이 아니라, 바로 사대부를 특별히 함양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그 문벌과 재학이 한림의 선발에 충분히 들 만한 사람이라면, 비록 10년 동안이나 관리로 등용되지 못할지라도 오히려 스스로 기다리며,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당로자(當路者)들은 명론이 하급 관원들에게 있는 것을 싫어하여, 마침내 한림의 고사를 일체 파괴해서 한림 추천을 소시(召試)로 바꾸고,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일반 관리로 만들어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사대부들이 거침없이 날로 부귀영달의 길로 치달려, 한 자급(資級)이나 반 자급이라도 혹시 남에게 뒤질까봐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었으니, 300년 동안 사대부를 특별히 함양했던 제도가 거의 다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아아, 기거주(起居注)는 시정기(時政記)와 일력(日曆)을 맡은 중책인데도 분향하고 맹세하는 말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으니, 누가 다시 조부의 이 글이 한림의 고사와 관계된 것인 줄을 알겠는가. 조부께서 한림으로 추천한 두 분은 오히려 사대부들이 관직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게 하고 명예를 지키도록 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으며, 편지 글씨가 모두 대단히 뛰어나서 당시에 벼슬아치들이 이를 본떴다고 한다.

 

 

[C-001]조부께서 …… 기록 :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 : 1685~1760) 1729(영조 5)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서 한림(翰林) 즉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의 후보자 추천을 맡았던 사실을 말한다. 연암집 9에 실린 조부 박필균의 가장(家狀)에도 중요한 사실로 언급되어 있다.

[D-001]신공 만(申公晩) : 신만(1703~1765) 1762(영조 38)에 영의정이 되었다.

[D-002]윤공 급(尹公汲) : 윤급(1697~1770) 1763(영조 39)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D-003]통색(通塞) : 등용과 저지라는 뜻으로, 관원에 대한 추천권을 말한다. 일반 관직의 후보자로 천거하는 것을 통망(通望), 청환(淸宦)의 후보자로 천거하는 것을 통청(通淸)이라 한다.

[D-004]회천(回薦) : 예문관 검열의 후보자를 정한 뒤에 추천서를 가지고 전 · 현직 검열을 지낸 선배들을 두루 찾아가 가부를 묻는 것을 말한다. 그중의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추천할 수 없게 된다.

[D-005]청선(淸選) : 청환(淸宦)의 후보자로 선발되는 것을 말한다.

[D-006]당로자(當路者)들은 …… 만들어 버렸다 : 영조 17(1741)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영조의 탕평책에 호응하여, 한림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고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선발하는 한림소시(翰林召試)의 제도를 만들고,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이 통청(通淸)하던 규례도 혁파한 사실을 말한다. 그중 특히 한림 회천은 국초부터 300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였으므로, 이를 혁파하는 데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다. 英祖實錄 17 4 19, 22, 25

[D-007]파괴해서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勝溪文庫) 필사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08]기거주(起居注) : 예문관 검열을 말한다. 원래 기거주는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 5 품 관직으로, 사관직(史官職)을 주로 하고 간쟁(諫爭)과 봉박(封駁)의 임무를 지닌 간관(諫官)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예문관 검열이 사관(史官)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D-009]시정기(時政記) : 임금이 정무를 집행할 때에 있었던 중요 사안들을 훗날 실록(實錄) 편찬의 자료로 삼기 위해서 사관이 추려 적은 기록을 말한다.

[D-010]맹세하는 : 원문은 誓祝인데, ‘祝誓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1]편지 …… 한다 : 특히 윤급의 편지 글씨체는 윤상서체(尹尙書體)’라 하여 사람들이 다투어 모방했다고 한다. 槿域書畫徵 卷5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소완정(素玩亭)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에 화답하다

 

 

유월 어느날 낙서(洛瑞)가 밤에 나를 찾아왔다가 돌아가서 기()를 지었는데, 그 기에,

 

내가 연암(燕巖) 어른을 방문한즉, 어른은 사흘이나 굶은 채 망건도 쓰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고서,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누워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연암이란 금천(金川)의 협곡에 있는 나의 거처인데, 남들이 이것으로 내 호()를 삼은 것이었다. 나의 식구들은 이때 광릉(廣陵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었다.

나는 본래 몸이 비대하여 더위가 괴로울 뿐더러,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푹푹 찌고 여름이면 모기와 파리가 들끓고 무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매양 여름만 되면 늘 서울집에서 더위를 피하는데, 서울집은 비록 지대가 낮고 비좁았지만, 모기 · 개구리 ·  · 나무의 괴로움은 없었다. 여종 하나만이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문득 눈병이 나서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더니 주인을 버리고 나가 버려서, 밥을 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행랑 사람에게 밥을 부쳐 먹다 보니 자연히 친숙해졌으며, 저들 역시 나의 노비인 양 시키는 일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고요히 지내노라면 마음속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가끔 시골에서 보낸 편지를 받더라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이었다. 갈수록 등한하고 게으른 것이 버릇이 되어, 남의 경조사에도 일체 발을 끊어버렸다. 혹은 여러 날 동안 세수도 하지 않고, 혹은 열흘 동안 망건도 쓰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간혹 말없이 차분하게 앉았기도 하였다. 어쩌다 땔나무를 파는 자나 참외 파는 자가 지나가면, 불러서 그와 함께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간곡하게 하는 말이 종종 수백 마디였다. 사람들이 간혹 힐책하기를, 세상 물정에 어둡고 얼토당토아니하며 조리가 없어 지겹다고 해도 이야기를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집에 있어도 손님이요 아내가 있어도 중과 같다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느긋해하며, 바야흐로 한 가지도 할 일이 없는 것을 스스로 만족스러워하였다.

새끼 까치가 다리 하나가 부러져 짤뚝거리니 보기에도 우습길래, 밥알을 던져주었더니 더욱 길들여져 날마다 와서 서로 친해졌다. 마침내 그 새를 두고 농담하기를,

 

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하였다. 우리나라의 속어에 엽전을 푼이라 하므로, 돈을 맹상군이라 일컬은 것이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저술하여 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자그마한 철현금(鐵絃琴)을 새로 배워, 권태로우면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혹은 친구가 술을 보내주기라도 하면 그때마다 흔쾌히 술을 따라 마셨다. 술이 취하고 나서 자찬(自贊)하기를,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양주(楊朱)와 같고 / 吾爲我似楊氏

만인을 고루 사랑하는 것은 묵적(墨翟)과 같고 / 兼愛似墨氏

양식이 자주 떨어짐은 안회(顔回)와 같고 / 屢空似顔氏

꼼짝하지 않는 것은 노자(老子)와 같고 / 尸居似老氏

활달한 것은 장자(莊子)와 같고 / 曠達似莊氏

참선하는 것은 석가(釋迦)와 같고 / 參禪似釋氏

공손하지 않은 것은 유하혜(柳下惠)와 같고 / 不恭似柳下惠

술을 마셔대는 것은 유영(劉伶)과 같고 / 飮酒似劉伶

밥을 얻어먹는 것은 한신(韓信)과 같고 / 寄食似韓信

잠을 잘 자는 것은 진단(陳摶)과 같고 / 善睡似陳搏

거문고를 타는 것은 자상(子桑)과 같고 / 皷琴似子桑

글을 저술하는 것은 양웅(揚雄)과 같고 / 著書似揚雄

자신을 옛 인물과 비교함은 공명(孔明)과 같으니 / 自比似孔明

나는 거의 성인에 가까울 것이로다 / 吾殆其聖矣乎

다만 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但長遜曹交

청렴함은 오릉(於陵)에 못 미치니 / 廉讓於陵

부끄럽기 짝이 없도다 / 慚愧慚愧

 

하고는, 혼자서 껄껄대고 웃기도 했다.

이때 나는 과연 밥을 못 먹은 지 사흘이나 되었다. 행랑아범이 남의 집 지붕을 이어주고서 품삯을 받아, 비로소 밤에야 밥을 지었다. 그런데 어린 아이가 밥투정을 부려 울며 먹으려 하지 않자, 행랑아범은 성이 나서 사발을 엎어 개에게 주어 버리고는 아이에게 뒈져 버리라고 악담을 하였다. 이때 나는 겨우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그에게 장괴애(張乖崖)가 촉( 사천성(四川省)) 지방을 다스릴 때 어린아이를 베어 죽인 고사를 들어 깨우쳐 주고 나서, 또 말하기를,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서 도리어 꾸짖기만 하면, 커 갈수록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니 은하수는 지붕에 드리우고, 별똥별은 서쪽으로 흐르며 흰 빛줄기를 공중에 남겼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낙서(洛瑞)가 와서 묻기를,

 

어른께서는 혼자 누워서 누구와 이야기하십니까?”

하였으니, ()에서 행랑것과 문답하고 계셨다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또 눈 내리는 밤에 떡을 구워 먹던 때의 일을 그 글에 기록했다. 마침 나의 옛집이 낙서의 집과 대문을 마주하고 있었으므로, 동자(童子) 때부터 그는 나의 집에 손님들이 날마다 가득하고 나도 당세에 뜻이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 나이 40이 채 못 되어 이미 나의 머리가 허옇게 되었다며, 그는 자못 감개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병들고 지쳐서 기백이 꺾이고 세상에 아무런 뜻이 없어, 지난날의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기()를 지어 그에게 화답한다.

 

 

낙서의 기()는 다음과 같다.

 

 

유월 상현(上弦 7~8일경)에 동쪽 이웃 마을로부터 걸어가서 연암 어른을 방문했다. 이때 하늘에는 구름이 옅게 끼고 숲속의 달은 희끄무레했다. 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시작할 때에는 우레처럼 은은(殷殷)하더니, 끝날 때에는 물거품이 막 흩어지는 것처럼 여운이 감돌았다. 어른이 집에 계시려나 생각하며 골목에 들어서서 먼저 들창을 엿보았더니 등불이 비쳤다. 그래서 대문에 들어섰더니, 어른은 식사를 못한 지가 이미 사흘이나 되셨다. 바야흐로 버선도 신지 않고 망건도 쓰지 않은 채 창문턱에 다리를 걸쳐 놓고 행랑것과 문답하고 있다가, 내가 온 것을 보고서야 드디어 옷을 갖추어 입고 앉아서, 고금의 치란(治亂) 및 당세의 문장과 명론(名論)의 파별(派別) · 동이(同異)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하시므로, 나는 듣고서 몹시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밤은 하마 삼경이 지났다. 창밖을 쳐다보니 하늘 빛은 갑자기 밝아졌다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고, 은하수는 하얗게 뻗쳐 더욱 가볍게 흔들리며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 내가 놀라서,

저것이 어째서 그러는 거지요?”

했더니, 어른은 빙그레 웃으시며,

자네는 그 곁을 한번 보게나.”

하셨다. 대개 촛불이 꺼지려 하면서 불꽃이 더욱 크게 흔들린 것이었다. 그제서야 조금 전에 본 것은 이것과 서로 어리비쳐 그렇게 된 것임을 알았다. 잠깐 사이에 촛불이 다 되어, 마침내 둘이 어두운 방안에 앉아서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었다. 내가 말하기를,

예전에 어른께서 저와 한마을에 사실 적에 눈 내리는 밤에 어른을 찾아뵌 적이 있었지요. 어른께서는 저를 위해 손수 술을 데우셨고, 저 또한 떡을 손으로 집고 질화로에서 구웠는데, 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손이 몹시 뜨거운 바람에 떡을 잿속에 자주 떨어뜨리곤 하여, 서로 쳐다보며 몹시 즐거워했었지요. 그런데 지금 몇 년 사이에 어른은 머리가 이미 허옇게 되시고 저 역시 수염이 거뭇거뭇 돋았습니다.”

하고는, 한참 동안 서로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날 밤 이후 13일 만에 이 기()가 완성되었다.

 

[C-001]소완정(素玩亭) :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일호이다. 그 밖에 강산(薑山) · 척재(惕齋) 등의 호가 있다. 자는 낙서(洛瑞 : 또는 洛書)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연암에게 문장을 배웠으며,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문자학(文字學)과 전고(典故)에 조예가 깊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1774년 정시(庭試)에 합격한 후 전라도 관찰사, 우의정 등을 지냈다.

[D-001]금천(金川) : 황해도에 속한 군()으로 개성(開城) 근처에 있었다. 박지원이 은거했던 그곳의 한 협곡은 입구에 제비들이 항시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하여 제비 바위라는 뜻으로 연암(燕巖)이라 불렀다고 한다.

[D-002]여름이면 …… 들끓고 : 원문은 夏夜蚊蠅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아 夏多蚊蠅으로 되어 있는 몇몇 이본들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D-003]시골에서 …… 받더라도 : 당시 연암은 식구들을 경기도 광주의 석마(石馬 : 지금의 분당)에 있던 처가에 보냈다. 그곳에 있는 가족들이 보낸 안부 편지를 받았다는 뜻이다.

[D-004]맹상군(孟嘗君)은 하나도 없고 : 돈이 한푼도 없다는 말이다. 맹상군은 전국(戰國) 시대 제() 나라의 공자(公子)인데, 성은 전()이고 이름은 문()이다. 연암이 아래에 덧붙인 설명을 참조하면,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푼이라고 했기 때문에, 맹상군의 이름 전문(田文)이 엽전 한푼錢文과 같다고 농담을 한 것이다.

[D-005]평원군(平原君)의 식객만 있구나 : 평원군은 전국 시대 조() 나라의 공자인데 문하(門下)에 식객이 수천 명이었다고 한다. 평원군의 이웃에 다리를 저는 사람이 있었는데, 평원군의 애첩이 그가 절뚝거리며 물 긷는 것을 보고 깔깔거리며 비웃었으므로, 평원군을 찾아와서 선비들이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오는 것은 군께서 선비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불행히 병을 앓아 불구가 되었는데, 군의 후궁(後宮)이 저를 보고 비웃었으니 목을 베어 주십시오.” 하였다. 평원군이 승낙은 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베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여겨 행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다리 저는 이웃 사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객들이 반 이상이나 떠나가 버렸으므로, 마침내 평원군은 그 애첩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여기에서는 다리를 저는 새끼 까치를 평원군의 식객에다 비유한 것이다.

[D-006]철현금(鐵絃琴) : 금속 줄로 된 양금(洋琴)을 이른다. 유럽에서 들어왔다고 하여 구라철사금(歐邏鐵絲琴)이라고도 한다. 명 나라 말에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 처음 소개하였는데, 조선에는 영조(英祖) 때에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암의 증언에 의하면, 1772년 홍대용이 국내 최초로 이 철현금을 향악(鄕樂) 음정에 조율하여 연주하는 데 성공한 뒤 그 연주법이 널리 전파되었다고 한다. 熱河日記 銅蘭涉筆

[D-007]자찬(自贊)하기를 : 한문(漢文)의 문체 중에 찬()이 있는데 대개 운문(韻文)이다. 작가가 자신에 대해 지은 찬을 자찬(自贊)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뜻과 함께, 자찬을 지었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D-008]양식이 …… 같고 : 안회(顔回)는 공자 제자로 도()를 즐거워하고 가난을 편안히 받아들여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論語 先進

[D-009]꼼짝하지 …… 같고 : 장자 천운(天運)에서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만나고 와서 용을 만나 본 것과 같다고 감탄하자, 자공(子貢) 그렇다면 정말 꼼짝하지 않으면서도 용이 나타난 것과 같은 사람尸居而竜見이 있다는 말인가?” 하며 노자를 만나러 갔다고 하였다.

[D-010]공손하지 …… 같고 : 유하혜(柳下惠)는 노() 나라 대부(大夫)로 이름은 전금(展禽)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자신의 처신을 백이(伯夷)의 처신과 비교하여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않으니, 편협한 것과 공손하지 않은 것은 군자가 따르지 아니한다.” 하였다.

[D-011]술을 …… 같고 : 유영(劉伶)은 진()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술을 매우 좋아하여 늘 술병을 지니고 다녔으며, 주덕송(酒德頌)을 지어 술을 찬양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D-012]밥을 …… 같고 : 한신(韓信)은 한() 나라 고조(高祖)의 명신(名臣)으로, 포의(布衣) 시절에 생계를 꾸려가지 못하여 항상 남에게서 밥을 얻어먹고 지냈다고 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13]잠을 …… 같고 : 진단(陳摶 : ?~989)은 송() 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로 주돈이(周敦頣)의 태극도(太極圖)의 남상이 되는 선천도(先天圖)를 남겼다. 그는 한 번 잠이 들면 100여 일 동안이나 깨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7 陳摶傳

[D-014]거문고를 …… 같고 : 대본에는 鼓琴似子桑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몇몇 이본들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상호(子桑戶)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莫逆之友)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앞의 문장들이 대개 □□□□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 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

[D-015]글을 …… 같고 : 양웅(揚雄 : 기원전 53~기원후 18)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하고 책을 박람(博覽)했으며 사부(辭賦)를 잘 지었고, 빈천(貧賤)하면서도 부귀영달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가 당시 집권자들에게 아부하여 벼슬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며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고 있음을 보고 조소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조(解謿)’를 지었다. 또한 태현경이 너무 심오하여 사람들이 알기 어렵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해명하는 해난(解難)’을 지었다. 40여 세가 지나서 비로소 상경하여 애제(哀帝) 때 낭()이 되고, 왕망(王莽)이 집권했을 때에도 벼슬이 겨우 대부(大夫)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세리(勢利)에 연연하지 않고 호고낙도(好古樂道)하면서 문장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룰 것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는데, 그로 인해 당시에 홀대를 당했으며 알아주는 이가 적었다. 유흠(劉歆) 태현경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覆醬瓿로나 쓸 것이라고 조롱했다. 漢書 卷87 揚雄傳

[D-016]자신을 …… 같으니 : 공명(孔明)은 삼국 시대 촉()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제갈량이 융중(隆中)에서 농사지으며 은거할 때 양보음(梁甫吟)을 즐겨 부르면서 매양 자신을 제() 나라의 재상 관중(管仲)과 연() 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게 견주었다고 한다. 世說新語 方正

[D-017]키가 조교(曹交)보다 모자라고 : 조교는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인물로 키가 9 4촌이나 되었다고 한다. 조교가 맹자에게 사람은 누구나 다 요순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조교가 다시 문왕(文王)은 키가 10척이고 탕() 임금은 9척이라고 했는데, 지금 저는 9 4촌이나 되는데도 밥만 축낼 뿐이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지 누구든 노력만 하면 요순처럼 될 수 있다.”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조교가 제가 추군(鄒君)을 만나면 관사(館舍)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니, 여기에 머물면서 문하(門下)에서 배웠으면 합니다.” 하므로, 맹자는 도()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뜻이 돈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는 대로(大路)와도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의 병통은 구하지 않는 데 있을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스승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면서 거절하였다. 孟子 告子下

[D-018]청렴함은 …… 미치니 : 오릉(於陵)은 곧 오릉중자(於陵仲子)인 진중자(陳仲子)를 가리킨다. 진중자는 전국 시대 제 나라 사람으로, 형이 많은 녹봉을 받는 것을 의롭지 않다고 여겨, () 나라의 오릉에 가서 은거하며 가난하게 살았으므로 오릉중자라 하였다. 당시 그는 3일 동안이나 굶주려 우물가로 기어가서 굼벵이가 반 넘게 파먹은 오얏을 삼키고 나서야 귀에 소리가 들리고 눈이 보였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19]식곤증이 나서 누웠다가 : 원문은 旣困臥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20]장괴애(張乖崖) …… 고사 : 괴애(乖崖)는 북송(北宋) 초의 명신(名臣)인 장영(張詠)의 호이다. 그는 강직함을 자처하고 다스림에 있어서 엄하고 사나움을 숭상하여, 괴팍하고 모가 났다는 뜻의 괴애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고 한다. 그는 태종(太宗) 때 익주 지사(益州知事)로 나가 은위(恩威)를 병용하여 선정(善政)을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다고 한다. 그 뒤 진종(眞宗)은 이러한 남다른 치적을 알고 그를 거듭 익주 지사로 임명했다. 宋史 卷293 張詠傳 장영이 촉() 지방 즉 익주(益州)를 다스릴 적에 어느 늙은 병졸이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난삼아 늙은 아비의 뺨을 때리는 것을 보고는 격분한 장영이 그 아이를 죽여 버리게 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48 耳目口心書1 원문에는 장괴애가 守蜀했다고 하였는데, 조신(朝臣)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열군(列郡)을 지키는 경우 이를 수신(守臣)이라 부른다.

[D-021]이미 병들고 지쳐서 : 원문은 已病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2]낙서의 …… 같다 : 이서구의 하야방우기(夏夜訪友記)는 그의 자문시하인언(自問是何人言)에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집에 인용된 것과 조금 차이가 있다. 차이 나는 부분은 각주에 밝혀 두었다.

[D-023]연암 어른 : 원문은 燕岩丈人인데, 이서구의 자문시하인언에는 燕巖朴丈人으로 되어 있다.

[D-024]종소리가 처음 울렸는데 : 서울 종루(鐘樓 : 종각鐘閣)에서 초경(初更 : 저녁 7~9)을 알리는 타종을 했다는 뜻이다.

[D-025]다리를 걸쳐 놓고 : 원문은 加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加膝로 되어 있다.

[D-026]명론(名論) : 여기서는 노론 · 소론 · 남인 등의 당론(黨論)을 가리킨다.

[D-027]내가 놀라서 : 원문은 余驚曰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顧謂丈人曰로 되어 있다.

[D-028]대개 : 원문은 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余驚視之로 되어 있다.

[D-029]잠깐 …… 되어 : 원문은 須臾燭盡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그 다음에 余欲歸待僕 卒不至 且檠上無膏燭可以繼者가 추가되어 있다.

[D-030]불기운이 훨훨 올라와 : 원문은 火氣烘騰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31]한참 …… 탄식하였다 : 원문은 因相與悲歎者久之인데, 자문시하인언에는 久之 良久 夜半始歸家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불이당기(不移堂記)

 

 

사함(士涵)이 스스로 호를 죽원옹(竹園翁)이라고 짓고, 거처하는 당() 불이(不移)’라는 편액을 걸고는 나에게 글을 써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그 마루에 올라 보고 정원을 거닐어 보았어도 한 그루의 대나무도 보지 못했다. 내가 돌아보고 웃으며,

 

이는 이른바 무하향(無何鄕)이요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집인가? 이름이란 실질(實質)의 손님이니 날더러 장차 손님이 되란 말인가?”

하였더니, 사함이 실망스러워하며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그저 스스로 뜻을 붙인 것뿐일세.”

하였다.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상심할 것 없네. 내 장차 자네를 위해 실질이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지난날 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께서 관직에 있지 않고 한가히 지낼 적에 매화시(梅花詩)를 짓고는, 심동현(沈董玄)의 묵매도(墨梅圖)를 얻자 그 시로써 두루마리 그림의 첫머리에 화제(畫題)를 붙이셨지. 그러고 나서 웃으며 나더러 말씀하시기를,

너무하구나, 심씨의 그림이여! 능히 실물을 빼닮았을 뿐이구나!’

하기에, 나는 의혹이 들어서,

그림을 그린 것이 실물을 빼닮았다면 훌륭한 화공인데 학사께서는 어째서 웃으십니까?’

하고 물었네. 그러자 학사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럴 일이 있지. 내가 처음에 이원령(李元靈)과 교유할 적에 비단 한 벌을 보내어 제갈공명(諸葛孔明) 사당 앞의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청했더니, 원령이 한참 있다가 전서(篆書)로 설부(雪賦)를 써서 돌려보냈지. 내가 전서를 얻고는 우선 기뻐하며 더욱 그 그림을 재촉하였더니, 원령이 빙그레 웃으며, 그대는 아직 모르겠는가? 전에 이미 그려 보냈네. 하길래, 내가 놀라서, 전에 보내온 것은 전서로 쓴 설부뿐이었네. 그대는 어찌 잊어버린 겐가? 했더니, 원령은 웃으며, 측백나무가 그 속에 들었다네. 무릇 바람과 서리가 매섭게 몰아치면 변치 않을 것이 어찌 있겠는가. 그대가 측백나무를 보고 싶거든 눈 속에서 찾아보게나. 하였지. 나는 마침내 웃으며 응수하기를,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는데 전서를 써 주고, 눈을 보고서 변치 않는 것을 생각하라고 하다니, 측백나무와는 거리가 너무도 머네그려. 그대가 도()를 행하는 것이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였지.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간언(諫言)을 올린 일로 죄를 얻어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그때 하루 낮 하루 밤 동안 700리 길을 달려갔는데, 도로에서 전하는 말들이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장차 이르면 후명(後命)이 있을 것이라 하니, 하인들이 놀라서 떨며 울음을 터뜨렸지. 때마침 날씨는 차고 눈이 내리며, 낙엽진 나무들과 무너진 산비탈이 들쭉날쭉 앞을 가리고 바다는 눈앞에 끝없이 펼쳐졌는데, 바위 앞에 오래된 나무가 거꾸로 드리워져 그 가지가 마른 대나무와 같았지. 나는 바야흐로 말을 세우고 도롱이를 걸치다가, 손으로 멀리 가리키면서 그 기이함을 찬탄하며 이것이야말로 어찌 원령이 전서로 쓴 나무가 아니겠는가! 하였지.

섬에 위리안치되고 나니 장기(瘴氣)를 머금은 안개로 음침하기 짝이 없고 독사와 지네 따위가 베개나 자리에 이리저리 얽혀 언제 해를 끼칠지 알 수 없었지. 어느 날 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 벼락이 치는 듯했으므로 종인(從人)들이 다 넋이 달아나고 토하고 어지러워했는데, 나는 노래를 짓기를,

남쪽 바다 산호가 꺾어진들 어쩌리오 / 南海珊瑚折奈何

오늘 밤 옥루가 추울까 그것만 걱정일레 / 秪恐今宵玉樓寒

하였지.

원령이 편지로 답하기를, 근자에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니, 말이 완곡하면서 슬픔이 지나치지 않고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뜻이 조금도 없으니, 그만하면 환난에 잘 대처할 수 있겠구려. 지난날에 그대가 측백나무를 그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대 역시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할 수 있겠소. 그대가 떠난 후에 측백나무를 그린 그림 수십 본이 서울에 남아 있는데, 모두 조리(曹吏)들이 몽당붓禿筆으로 서로 돌려가며 베껴 그린 것이라오. 그러나 그 굳센 줄기와 꼿꼿한 기상이 늠름하여 범접할 수 없고, 가지와 잎은 촘촘하여 어찌 그리도 무성하던지! 하였으므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원령이야말로 몰골도(沒骨圖)라 이를 만하구나 하였지. 이로 말미암아 보면, 좋은 그림이란 실물을 빼닮은 데 있는 것은 아니야.’

하시기에, 나도 역시 웃었다네.

얼마 있다가 학사께서 세상을 떠났기에 나는 그분을 위하여 그 시문(詩文)을 편집하다가, 그분이 유배지에 있을 적에 형님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네. 그 내용인즉,

근자에 아무개의 편지를 받아 보니, 그가 나를 위하여 당로자(當路者)에게 귀양을 풀어 주기를 청하고자 한다 하였으니, 어찌 나를 이다지도 얕잡아 대하는지요? 비록 바다 한가운데에 갇혀서 병들어 죽을지언정 저는 그런 노릇은 하지 않겠습니다.’

했네. 나는 그 편지를 쥐고 슬피 탄식하며,

이 학사(李學士)야말로 진짜 눈 속에 서 있는 측백나무이다. 선비란 곤궁해진 뒤라야 평소의 지조가 드러난다. 재난을 염려하면서도 그 지조를 변치 않고, 고고하게 굳건히 서서 그 뜻을 굽히지 않으신 것은, 어찌 추운 계절이 되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함은 성품이 대나무를 사랑한다. 아아, 사함은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인가? 추운 계절이 닥친 뒤에 내 장차 자네의 마루에 오르고 자네의 정원을 거닌다면, 눈 속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겠는가?

 

 

[D-001]사함(士涵) …… 왔다 : 사함이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불이(不移)’는 사철 내내 푸른 대나무처럼 절조를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빈천이 그의 절조를 변하게 할 수 없는貧賤不能移 사람이라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D-002]거처하는 당 : 원문은 所居之堂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3]무하향(無何鄕) :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의 준말로,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 현실의 제약을 벗어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이상향을 가리킨다. 莊子 逍遙遊

[D-004]오유선생(烏有先生) : 실존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을 뜻한다.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허부(子虛賦)에서 자허(子虛) · 오유선생 · 무시공(亡是公)이라는 가공의 세 인물을 설정하여 문답을 전개하였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D-005]이름이란 …… 말인가 : 장자 소요유에서 요() 임금이 은자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넘겨주려고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면서 한 말이다. 이름과 실질의 관계를 고찰하는 명실론(名實論)은 묵가(墨家) 등 중국 고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였다. 이름이 실질의 손님이란 말은, 이름이 실질에 대해 종속적 · 부차적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D-006]학사(學士) 이공보(李功甫) :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으로, 공보는 그의 자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므로 학사라 칭한 것이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D-007]심동현(沈董玄) : 화가 심사정(沈師正 : 1707~1769)으로, 동현은 그의 자이다.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과거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화업(畫業)에 정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화훼(花卉) · 초충(草蟲)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한다.

[D-008]훌륭한 화공 : 원문은 良工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良畫로 되어 있다.

[D-009]어째서 웃으십니까 : 원문은 何笑爲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0]이원령(李元靈) : 화가 이인상(李麟祥 : 1710~1760)으로, 원령은 그의 자이다. 호는 능호(凌壺)이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 ·  · 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D-011]제갈공명(諸葛孔明) …… 측백나무 : 두보(杜甫)의 시 촉상(蜀相) 촉 나라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으리. 금관성 밖 측백나무 울창한 곳이라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柏森森라 하였다. 여기에서 측백나무는 변치 않는 제갈공명의 절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두보의 이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D-012]설부(雪賦) : () 나라 사혜련(謝惠連 : 397~433)이 지은 부()의 제목이다. 서한(西漢)의 양효왕(梁孝王)이 양원(梁園)이라는 호사스러운 원림(園林)에서 당대의 문사인 사마상여(司馬相如) 등과 함께 주연을 벌이다가 눈이 오자 흥에 겨워 시를 주고받았던 고사를 노래하였다. 文選 卷14 雪賦

[D-013]그대가 …… 아닌가 : 중용(中庸)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중용장구  13 장에서 공자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고 하였다.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힘든 일에서 도를 찾으려는 경향을 경계한 말이다.

[D-014]나는 ……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지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8(1752) 10월 홍문관 교리 이양천은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분노를 사서 흑산도에 위리안치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이듬해 6월 위리(圍籬)가 철거되고 육지로 나왔으나, 영조 31(1755)에야 관직에 복귀했다가 이내 사망했다.

[D-015]후명(後命) : 유배형을 받은 죄인에게 다시 사약(賜藥)을 내리는 일을 말한다.

[D-016]들쭉날쭉 : 대본은 嵯砑인데, ‘ 의 오자이다. ‘치아(嵯岈)’는 둘쭉날쭉 뒤섞여 있는 모습을 뜻한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차아(嵯峨)’로 되어 있는데, 이는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뜻한다.

[D-017]남쪽 …… 걱정일레 : 옥루(玉樓)는 상제(上帝)가 산다는 곳인데, 여기서는 궁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는 개의치 않고 오직 임금께서 평안하신지 염려한다는 뜻이다. 이 시는 걸작으로 알려져, 그의 벗 이윤영(李胤永)이 지은 만시(輓詩)에도 인용되었다. 丹陵遺稿 卷10 挽功甫

[D-018]조리(曹吏) : 예조(禮曹)의 도화서(圖畫署)에 소속된 화원(畫員)을 이른다. 이들의 그림을 화원화(畫員畫)라고 하여,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 그린 문인화(文人畫)와 차별하고 그 예술적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D-019]몽당붓禿筆 : 예리하지 못한 붓이라는 뜻으로, 그림 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경우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D-020]원령이야말로 …… 만하구나 : 몰골도(沒骨圖)는 붓으로 윤곽을 그리지 않고 직접 채색하는 수법으로 그린 그림을 이른다. 몰골도에는 붓 자국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인상이 편지에서, 화원들이 모방한 측백나무 그림이 사이비(似而非)임을 언중유골(言中有骨)로 은근히 풍자했다는 뜻이다.!

[D-021]근자에 …… 하였으니 : 실록에 의하면 영조 29(1753) 3월과 4월에 언관(言官)들이 이양천의 해배(解配)를 건의했으나 모두 기각되었다. 이러한 공개적인 노력 말고도, 이양천의 벗들 중에 당시 정계의 실력자들을 찾아다니며 석방운동을 벌이려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다.

[D-022]추운 …… 아니겠는가 : 논어 자한(子罕) 추운 계절이 되어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맨 나중에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소완정기(素玩亭記)

 

 

완산(完山 전주(全州)) 이낙서(李洛瑞 이서구(李書九))가 책을 쌓아둔 그의 서재에 소완(素玩)’이라는 편액을 걸고 나에게 기()를 청하였다. 내가 힐문하기를,

 

무릇 물고기가 물속에서 놀지만 눈에 물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인가?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이라서 물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낙서 자네의 책이 마룻대까지 가득하고 시렁에도 꽉 차서 앞뒤 좌우가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 노는 거나 마찬가지일세. 아무리 동생(董生)에게서 학문에 전념하는 자세를 본받고 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동방삭(東方朔)에게서 암송하는 능력을 빌린다 해도, 장차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을 터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자, 낙서가 놀라며,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는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앞을 바라보면 뒤를 놓치고, 왼편을 돌아보면 바른편을 빠뜨리게 되지. 왜냐하면 방 한가운데 앉아 있어 제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고, 제 눈과 공간이 너무 가까운 때문일세. 차라리 제 몸을 방 밖에 두고 들창에 구멍을 내고 엿보는 것이 나으니, 그렇게 하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온 방 물건을 다 취해 볼 수 있네.”

했더니, 낙서가 감사해 하면서,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으로써 인도하신 것이군요.”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자네가 이미 약()의 도()를 알았으니, 나는 또 자네에게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관조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지 않겠는가. 저 해라는 것은 가장 왕성한 양기(陽氣)일세. 온 누리를 감싸주고 온갖 생물을 길러주며, 습한 곳이라도 볕을 쪼이면 마르게 되고 어두운 곳이라도 빛을 받으면 밝아지네. 그렇지만 해가 나무를 태우거나 쇠를 녹여내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광선이 두루 퍼지고 정기(精氣 양기)가 흩어지기 때문일세. 만약 만리를 두루 비추는 빛을 거두어 아주 작은 틈으로 들어갈 정도의 광선이 되도록 모으고 유리구슬로 받아서 그 정광(精光 양광(陽光))을 콩알만 한 크기로 만들면, 처음에는 불길이 자라면서 반짝반짝 빛나다가 갑자기 불꽃이 일며 활활 타오르는 것은 왜인가? 광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고 정기가 모여서 하나가 된 때문일세.”

하니, 낙서가 감사해 하면서,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깨달음으로써 깨우쳐 주신 것이군요.”

하였다. 내가 또 말하기를,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들은 모두가 이 책들의 정기(精氣)이니, 제 눈과 너무 가까운 공간에서 제 몸과 물건이 서로를 가린 채 관찰하고 방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본래 아니지. 그러므로 포희씨(包犧氏)가 문()을 관찰할 적에 위로는 하늘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을 관찰했다.’고 하였고, 공자(孔子)는 포희씨가 문을 관찰한 것을 찬미하고 나서 덧붙여 말하기를, ‘가만히 있을 때는 그 말을 완미(玩味)한다.’ 했으니, 무릇 완미한다는 것은 어찌 눈으로만 보고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맛보면 그 맛을 알 것이요,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알 것이요, 마음으로 이해하면 그 핵심을 터득할 것이다.

지금 자네는 들창에 구멍을 뚫어 오로지 한쪽 눈만으로도 다 보며, 유리구슬로 빛을 받아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네. 그러나 아무리 그러해도 방의 들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리알이 투명하게 비어 있지 않으면 정기를 모아들이지 못하지. 무릇 뜻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은 본래 마음을 비우고 외물(外物)을 받아들이며 담담하여 사심이 없는 데 있는 것이니, 이것이 아마도 소완(素玩)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더니, 낙서가 말하기를,

 

제가 장차 벽에 붙여 두고자 하니 선생님은 그 말씀을 글로 써 주십시오.”

하기에, 마침내 그를 위해 써 주었다.

 

 

[D-001]소완(素玩) : ‘()’는 흰 바탕의 편지나 책을 의미하므로, 이서구는 책들을 완상(玩賞)한다는 뜻으로 이 당호를 지었을 것이다. 또한 ()’에는 텅 비었다는 뜻도 있으므로, 연암은 이 뜻을 취하여 허심(虛心)으로 완상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D-002]동생(董生)에게서 …… 본받고 : 동생은 한() 나라 때 학자 동중서(董仲舒)이다. 춘추를 전공하여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학문에 전념하여 휘장을 드리우고 강송(講誦)하면서 3년 동안 정원을 한 번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漢書 卷56 董仲舒傳

[D-003]장군(張君)에게서 기억력을 빌리고 : 장군은 장화(張華 : 232~300)를 이른다. 그는 진() 나라의 유력한 정치가로 벼슬이 사공(司空)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문인 · 학자로서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기억력이 탁월하기로 당대 제일이었다고 한다.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있을 때 진 무제(晉武帝)가 한() 나라의 궁실 제도와 건장궁(建章宮)에 관해 묻자 장화는 땅에다 지도를 그려가며 청산유수로 응답하여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수레 30대에 실은 책을 읽고 나서 박물지(博物志) 400권을 지었는데, 무제가 번거롭다고 하여 10권으로 줄였다고 한다. 장화를 장군이라 호칭한 것은 그가 광무현후(廣武縣侯)에 봉해졌기 때문이다. 晉書 卷36 張華傳

[D-004]동방삭(東方朔)에게서……해도 : 동방삭은 한 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관직은 낮았지만 해학(諧謔)과 변설(辯舌), 직언(直言) 등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예로부터 전해 오는 책들을 좋아하고 경술(經術)을 좋아하였으며, 야사 · 전기와 잡서들까지 박람(博覽)하였다. 또한 시() · () · 백가(百家)의 말들을 암송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東方朔

[D-005]() : 핵심을 취한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가설(稼說)에서 학문하는 방도로 책을 널리 보되 핵심을 취하며, 실력을 두텁게 쌓되 조금만 드러내라.博觀而約取 厚積而薄發고 권하였다.

[D-006]유리구슬로 받아서 : 원문은 承玻璃之圓珠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여기서 유리구슬은 곧 돋보기를 말한다.

[D-007]불길이 자라면서 : 원문은 亭毒인데, 두 글자 모두 기른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에 도() 만물을 기르고 기른다亭之毒之고 하였다.

[D-008]포희씨(包犧氏) …… 하였고 : 포희씨는 곧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의 한 사람인 복희씨(伏羲氏), 팔괘(八卦)와 문자書契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포희씨가 문()을 관찰했다고 할 때의 ()’은 단순히 문자나 문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천문(天文)과 지문(地文)과 인문(人文)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일월(日月)은 하늘의 문()이요, 산천(山川)은 땅의 문이요, 언어는 사람의 문이라고 한다. 주역(周易)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역() 위로는 천문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관찰한 것이다.仰以觀於天文 俯而察於地理라고 하였고, 또한 계사전 하(繫辞傳下)에 옛날 포희씨가 왕이 되어 천하를 다스릴 적에 위로는 하늘에서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땅에서 법()을 관찰하여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팔괘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D-009]가만히 …… 완미(玩味)한다 : 원문은 居則玩其辭인데, 김택영(金澤榮) 중편연암집에는 居則觀其象而玩其辭로 되어 있다. 주역 계사전 상에 이런 까닭에 군자는 가만히 있을 때는 그 상을 관찰하고 그 말을 완미한다.是故 君子居則觀其象而玩其辭 하였다. ()은 팔괘와 육효(六爻)를 뜻하고 말은 괘와 효가 나타내는 길흉에 대한 설명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금학동(琴鶴洞) 별장에 조촐하게 모인 기록

 

 

연암협(燕巖峽)에 있는 나의 거처는 개성(開城)에서 겨우 30리 거리에 있었으므로 나는 항상 개성으로 나가서 노닐곤 하였다. 금년 겨울에 규장각 직제학 유사경(兪士京)이 막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부임하여 이미 여저(旅邸)에서 서로 만난 적이 있는데, 즐겁게 옛일을 이야기하기를 빈천했던 선비 시절과 똑같이 하였으니, 세속에서 말하는 출세와 몰락 따위는 서로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하루는 사경(士京)이 추도(趨導)를 단출히 하고 그의 아들을 데리고서 금학동(琴鶴洞)을 찾아주었는데, 그때 나는 양씨(梁氏)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빨리 술을 데우게 하고, 각기 지은 글들을 꺼내어 둘이 서로 평가해 보고는, 마주 보며 웃으면서 말하기를,

 

마하연(摩訶衍)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때에 비하면 어떠한가? 단지 백화암(白華菴)에서 참선하던 비구승 준()만이 없을 뿐이고, 조촐하게 모인 것은 관천(灌泉)의 모임과 비슷한데, 우리들은 어느새 다 같이 머리가 허옇게 되었네그려!”

하였다. 관천은 한양 서소문 밖 나의 옛집이 있던 곳인데, 금강산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이때 나이 스물아홉 살로 사경보다 일곱 살이 적었는데도, 양쪽 귀밑머리에는 하마 대여섯 가닥의 흰머리가 생겼으므로, ()의 재료를 얻었다고 스스로 기뻐했었다. 그런데 지금 하마 13년이 흐르고 보니 이른바 시의 재료는 주체할 수 없이 어지럽게 늘어났고, 사경은 문권(文權)을 겸대(兼帶)하면서 병권(兵權)을 쥐고 큰 부성(府城)을 진무(鎭撫)하고 있느라고 지금 그의 수염이 이처럼 다 희어지고 말았다. 사경은 스스로 귀밑머리 뒤 금관자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스스로 보기에도 겸연쩍은데, 하물며 귀밑머리 뒤편은 스스로 보지도 못함에랴!”

라고 했다.

지난날에 나는 연암협으로부터 마침 성내(城內)로 들어가다가, 군사훈련을 하고 부중(府中)으로 돌아가던 유수와 노상에서 마주쳤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갈 무렵이었는데, 말에서 내려 남녀들 틈에 끼어 길 왼쪽에 엎드렸다. 횃불이 휘황하고 깃발들이 펄럭였다.

내가 지난날 길 왼쪽에서 군대의 위용을 구경했던 일을 말하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왜 내 자()를 부르지 않았던가?”

하기에,

 

도성 사람들이 놀랄까 두려웠네.”

라고 답하고는, 서로 더불어 크게 웃었다. 사경이,

 

군대의 위용은 어떻던가?”

하기에,

 

원앙대(鴛鴦隊)를 지어 10보 간격으로 세 줄로 선 것이 훈련도감의 군대보다는 조금 못해도 평양의 군대보다는 훨씬 낫더군. 게다가 난후병(攔後兵)은 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더그레는 앞뒤로 두 치가 짧으니, 한창 의기양양하여 더욱 씩씩하더군.”

하였다. 사경이 묻기를,

 

나는 어떻던가?”

하기에,

 

나는 장군(將軍 유언호를 가리킴)의 초상화만 보았지 장군은 보지 못했네.”

하니, 사경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왼쪽에는 온 원수(溫元帥), 바른쪽에는 마 원수(馬元帥), 앞에는 조현단(趙玄壇)의 깃발이요, 초헌(軺軒) 뒤에만 유독 말 위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검은 바탕에 그려진 별은 구진(句陳)과 흡사하더군. 내 일찍이 화공을 불러 초상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반드시 잠자코 정색을 하고 있어 대체로 평상시의 태도와는 달랐으니, 장군도 접때 틀림없이 기침과 재채기를 참았을 테고, 가려워도 감히 긁지도 못했을 걸세.”

했더니, 사경은 크게 웃으며,

 

과연 또 하나의 내가 길가에서 나를 관찰했구먼!”

하였다. 나도 크게 웃으며,

 

옛날에 조공(曹公)이 스스로 일어나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나를 관찰하는 법일세. 그러나 장군은 몸소 말을 타지는 않는 점이 두원개(杜元凱)와 흡사한데 좌전(左傳)에 주()를 붙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느슨한 띠에 선비의 기풍이 있는 것은 양숙자(羊叔子)와 흡사한데 뒷날에 누가 비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지 모르겠구려.”

하였다. 그러고는 크게 웃고 나서 일어나 문밖으로 가니, 달이 한창 둥글어 달빛이 가득했다. 나는 문에서 전송하면서 말하기를,

 

내일 밤에는 달이 더욱 밝을 터이니 나는 장차 남루(南樓)에서 달을 구경할 생각이네. 장군은 다시 걸어와 주겠는가?”

했더니,

 

그러세.”

하였다.

예전에 관천에서 조촐히 모였을 때에 기()를 지은 바 있다. 사경이 먼저 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를 지어 보여 주었기에, 이 기를 지어서 화답한다.

 

 

[D-001]금년 …… 부임하여 : 사경(士京)은 젊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던 유언호(兪彦鎬 : 1730~1796)의 자이다. 실록에 의하면 유언호는 정조 1(1777) 6월 이조 참의에서 개성 유수로 특별 발탁되었고, 7월에는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하였다. 9 22일 소대(召對)에 나아간 뒤 10월경에 임지로 떠났던 듯하다. 그 후 정조 3(1779) 3월 이조 참판에 임명될 때까지 개성 유수로 재직했다. 유언호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게 된 것은 부모 봉양의 편의를 위해 왕이 특별히 배려한 결과였다. 閔鍾顯 兪文忠公行狀

[D-002]여저(旅邸) : 객지에 임시로 머물러 사는 집을 말한다. 유언호의 서경소집기(西京小集記)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개성 유수의 관아(官衙)로 유언호를 방문했으므로, 여기서는 개성 유수의 거처인 내아(內衙)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3]추도(趨導) : 고관이 행차할 때 앞장 서서 말을 끌고 길을 인도하는 기졸(騎卒)을 이른다.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는데, 뜻은 같다.

[D-004]금학동(琴鶴洞) …… 있었다 : 금학동은 개성에 있던 동명(洞名)이다. 그곳에 개성의 선비로서 연암을 종유(從遊)하던 양호맹(梁浩孟) · 양정맹(梁廷孟) 형제의 별장이 있었다.

[D-005]마하연(摩訶衍)에서 …… 뿐이고 : 마하연은 내금강에 있는 절이고, 백화암(白華菴)은 그에 딸린 암자이다. 1765(영조 41) 연암이 유언호 등 벗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다가 백화암에서 승려 준대사(俊大師)를 만났던 사실은 연암집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와 관재기(觀齋記) 등에도 언급되어 있다.

[D-006]사경은 …… 있느라고 : 문권(文權)을 지녔다는 것은 당시 유언호가 규장각 직제학의 직함을 띠고 있었던 사실을 말한 것이다. 개성 유수는 행정뿐 아니라 군사업무도 주관하였다. 즉 개성부(開城府)의 군무(軍務)와 대흥산성(大興山城)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관리영(管理營)의 우두머리인 관리사(管理使)를 겸하였다.

[D-007]금관자 : 관자(貫子)는 망건을 쓸 때 당줄을 꿰어 졸라매는 작은 고리인데 품계에 따라 그 재료와 새김장식이 달랐다. 당시 유언호는 종 2 품인 개성 유수였으므로, 초룡(草龍) 등을 새긴 금으로 된 관자를 하였다.

[D-008]스스로 보기에도 …… 못함에랴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요() 임금이 은사 허유(許由)에게 나는 스스로 겸연쩍게 생각되니, 천하를 그대에게 양도하게 해달라.我自視缺然 請致天下고 하였다. 관자는 망건의 편자下帶 귀 닿는 곳에 달아서, 편자 끝에 달린 좌우의 당줄을 맞바꾸어 걸어 넘기도록 되어 있으므로 제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여기서는 유언호가 친구 앞에서 자신의 출세를 과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한 말이다.

[D-009] …… 않았던가 : ()는 절친한 평교간(平交間)에만 부를 수 있었다.

[D-010]원앙대(鴛鴦隊) : 5인의 병사가 1조를 이루는 것을 오()라 하는데, 1 · 3 · 5 · 7 · 9번째 병사들이 좌오(左伍)가 되고 2 · 4 · 6 · 8 · 10번째 병사들이 우오(右伍)가 되어, 가로로 보면 2인이 하나의 짝을 이루도록 편성한 부대를 말한다. 兵學指南 卷2

[D-011]난후병(攔後兵) : 부대의 후방을 방어하는 부대로 난후군(攔後軍)이라고도 한다.

[D-012]벙거지를 번듯하게 쓰고 : 원문은 不淅巾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不浙巾으로 되어 있다. 어느 경우건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혹시 不折巾의 오기일지도 모른다. 절건(折巾)은 절각건(折角巾)이라 하여 한 모서리가 꺾여진 두건을 말한다. 또한 목민심서(牧民心書) 병전(兵典) 연졸조(練卒條)에 군사훈련할 때 호의(號衣)와 전립(戰笠)이 하나라도 해지거나 찢어진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호의는 군복인 더그레, 전립은 군모인 벙거지를 가리킨다.

[D-013]온 원수(溫元帥) : 원수(元帥)는 천군(天君)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도교(道敎)에서 숭상하는 무용(武勇)의 신()이다. 온 원수는 마 원수(馬元帥), 조 원수(趙元帥), 관 원수(關元帥 : 관우關羽)와 함께 도교의 호법 사신(護法四神)’의 하나로, 이들을 속칭 사대원수(四大元帥)’라고 한다. 온 원수는 원래 온주(溫州) 사람으로 이름을 경()이라고 하는데, 나중에 청면적발신(靑面赤髮神)으로 변하여 무장을 하고 용맹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동악대제(東岳大帝)가 그를 우악신장(祐岳神將)으로 삼았다고 한다. 三敎源流搜神大全 여기서는 온 원수의 모습를 그리거나 溫元帥라고 쓴 깃발을 뜻한다.

[D-014]마 원수(馬元帥) : 화광대제(華光大帝), 삼안영관마천군(三眼靈官馬天君)이라고도 한다. 전신(前身)이 남두(南斗)  6 성이어서 그 별의 이름을 따서 승()으로 이름을 삼았으며, 머리가 셋에 눈이 아홉 개였다고 한다. 옥황상제로부터 진무대제부장(眞武大帝部將)에 봉해졌다고 한다.

[D-015]조현단(趙玄壇) : 조 원수(趙元帥)를 말한다. 이름은 낭()이나, 공명(公明)이라는 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조공명은 진() 나라 때 산중으로 피난하여 수련 끝에 옥황상제로부터 신소부수(神宵副帥), 주령뢰정부원수(主領雷霆副元帥) 등에 임명되었으며, 또한 천사(天師) 장도릉(張道陵)이 선단(仙丹)을 수련할 때 옥황상제로부터 현단대원수(玄壇大元帥)에 임명되어 단로(丹爐)를 수호하러 강림했다고 한다. 검은 호랑이를 타고 다닌다고 하였다.

[D-016]구진(句陳)과 흡사하더군 : 구진은 전통 천문학의 이른바 자미원(紫薇垣)에 있는 별의 하나이다. 작은 별 6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곧 현대 천문학에서 말하는 북극성(北極星)이다. 구진은 천자(天子)의 군대를 주관한다고 하며, 금군(禁軍)을 상징한다. 원문은 似句陳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7]옛날에 …… 있었으니 : 조공(曹公)은 조조(曹操)를 이른다. 흉노(匈奴)가 사신을 보내오자, 조조는 자신의 용모가 보잘것없음을 꺼려 위엄 있고 잘생긴 신하 최염(崔琰)을 시켜 대신 용좌(龍座)에 앉아 있게 하고, 자신은 스스로 칼을 쥐고 용상(龍床) 앞에 서 있었다. 나중에 사람을 시켜 조공(曹公)이 어떻더냐?’고 물었더니, 흉노의 사신이 대답하기를 조공이 잘생기기는 했으나, 용상 앞에서 칼을 쥐고 시립(侍立)한 사람이야말로 영웅이더라.’고 했다고 한다. 三國志補注 卷3 魏書 崔琰傳》 《世說新語 容止

[D-018]몸소 …… 못했고 : 두원개(杜元凱)는 진() 나라의 유장(儒將) 두예(杜預 : 222~284), 원개는 그의 자이다. 진 나라 무제(武帝) 때 양호(羊祜)의 천거로 그의 후임으로 대장군이 되어 오()를 정벌하고 무공을 세웠으나, 말을 탄 적이 없었으며 화살이 과녁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스스로 좌전벽(左傳癖)’이 있다고 하였으며 좌전집해(左傳集解)를 저술했는데, 이는 가장 이른 시기의 좌전 주해(注解)였다. 晉書 卷34 杜預傳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한 유언호가 두예와 같은 학문적 업적을 남기기를 기대하며 한 농담이다. 유언호는 말 대신 초헌(軺軒)을 탔다.

[D-019]느슨한 …… 모르겠구려 : 양숙자(羊叔子)는 진 나라 때의 명신(名臣) 양호(羊祜), 숙자는 그의 자이다. 양호는 군진(軍陣)에 있을 때 항상 가벼운 갖옷을 입고 띠를 느슨히 맨 채 갑옷을 걸치지 않아 선비의 기풍이 있었다 한다. 양호가 장수로서 양양현(襄陽縣)을 지키고 있을 때에 이곳 주민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그가 죽자 백성들이 그가 이곳에 올라 멀리 바라보다가 인생무상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는 현산(峴山)에 추모비를 세웠다. 사람들이 이 비석을 보기만 하면 양호를 추념하여 눈물을 흘렸으므로, 두예가 타루비(墮淚碑)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晉書 卷34 羊祜傳 유언호가 양호와 같이 선정을 행하기를 기대하며 한 농담이다.

[D-020]남루(南樓) : 개성 남대문(南大門)의 문루(門樓)를 가리키는 듯하다.

[D-021]중경소집기(中京小集記) : 유언호의 연석(燕石)  2 책에 서경소집기(西京小集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밑에 소주로 정유(丁酉)’라 하여 1777년에 지은 것임을 밝혀 두었다. ‘중경 서경은 같은 말로, 개성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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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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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3]

28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29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30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31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32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33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3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35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36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37 주공탑명(麈公塔銘)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원임(原任) 이조 판서 박공 상덕(朴公相德)이 맏아들 급제군(及第君) 수수(綏壽)의 상()을 당했다. ()에 맏아들을 위해 삼 년의 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조부인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 아무와, 선친 진사(進士) 증 이조 판서 부군 휘 아무를 계승하여 따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차 모년 모월 모일에 파주(坡州) 광현(筐峴) 모 좌향(坐向)의 벌에 장사할 예정이다.

공은 지원(趾源)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내 아이가 일찍이 숙부님의 글을 몹시 좋아했으니, 숙부님이 지은 묘지명을 얻음으로써 죽은 자를 불후(不朽)하게 하고, 그뿐 아니라 산 자도 가끔 읽어 보고 그의 용모와 목소리를 상상함으로써 무궁한 그리움을 메워 볼까 합니다.”

지원은 공에게,

 

예예, 알겠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박씨(朴氏)는 여덟 망족(望族 명망 높은 씨족)이 있는데 그중에 반남(潘南)을 본관으로 한 박씨가 일족도 많고 크게 출세하였다. 다만 그 천성의 졸박(拙朴)함을 성자(姓字)와 함께 얻어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모범이 다른 씨족과는 크게 달랐다. 모두들 안에서는 부형을 스승으로 섬기고, 밖에서는 결코 허황되게 남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명론(名論)은 집 밖을 벗어나지 않고 발걸음이 뒷골목에 미치는 일이 드물었다.

그중에 곤궁한 자는 춥고 배고픈 데에 이골이 나서 삼가 자신의 분수에 충실할 뿐이며, 현달한 자는 겸양과 염치를 길러 혹시라도 선비의 본색을 벗어날까 두려워했고, 어진 이는 스스로 터득하기에 있는 힘을 다하고 선()을 보면 단단히 지키며, 어리석은 자는 차라리 고루하고 견문이 적은 탓으로 떨쳐 일어나지 못할망정 세상 돌아가는 대로 따라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순박하고 촌스럽고 비타협적이고 어눌함으로써 확연히 남다른 하나의 가풍을 이루었으며, 이른바 세태와 시속(時俗)이란 것은 배우고 싶어도 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귀 기울이고 눈길 돌릴 줄도 모르니 물들려야 물들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속에 부끄러움으로 그 낯빛을 붉힌 채 마치 농사꾼이 번화가를 걷듯 하는 자는 물을 것 없이 우리 박씨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일찌감치 귀한 신분이 되었으나 홀()을 쥐고 허리띠를 드리운 채 조정에서 행동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의 가풍을 스스로 증험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간혹 우리 집안사람들의 성품이 이러한 줄은 모르고, 남과 친히 할 때 조금 곰살궂지 못하면 오만한 게 아닌가 자못 의심하며, 응대하는 일에 왕왕 소홀하다 보면 도리어 뻣뻣한 탓으로 돌리어, 모두 이르기를 반남 박씨란 거들먹거릴 것도 없으면서 제멋대로 교만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제 중에 총명하고 재주 있어 조금이라도 그런 티를 드러내는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집안끼리 모여서 두려워하며 이놈은 어째서 우리 집안의 상규(常規)와 다른가라고 하였다.

내가 일찍이 보니 망자(亡者 박유수를 가리킴)는 재주가 그렇게 아름다운데도 오히려 집안에서라도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두텁게 가리고 숨기느라 겨를이 없었는데, 하물며 딴 사람에게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과거에 우연찮게 급제하기는 했지만 담박하여 흥미 없어 했으며, 수시로 먼 데를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마치 학이 새장 안에 있는 것같이 하였다. 그러나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홀로 술로써 속을 풀었다. 거처하는 방에는 먼지가 뽀얗고 책상에는 초라한 두어 질의 책뿐으로, 항상 하루 묵고 가는 주막집과 같았다. 감사로 나가는 아버지를 여러 번 따라다녔으나 상자 속에는 먹 한 자루도 저장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벼룻집을 만들고 싶었으나 그 품삯을 걱정하여 그만두었으니 그 졸박함이 이와 같았다.

평양은 도읍이 화려하고 돈이 물 흐르듯 하며, 높고 큰 누대들이 많아서 사방에서 유람객들이 몰려들어 오고 맑은 노래와 절묘한 춤이 노상 좌우에 있었지만, ()은 바야흐로 고개를 공손히 숙이고 날마다 정문(程文)을 공부하였다. 문밖에는 신 두 켤레밖에 없었으니,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동접(同接)의 선비였다. 때로는 스스로 아이종에게 술 한 병을 들려 따르게 하고서, 훌쩍 홀로 걸어 나가 먼 곳을 내려다보며 시를 읊조리곤 하였다. 홀홀하기가 지나가는 나그네와 같았으니, 전 감영의 군교(軍校)와 이졸(吏卒)들도 군이 관아에 있는 줄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런 군을 누가 조롱하였더니, 군은 말하기를 집에 있으면 감독(監督)이요, 관아에 있으면 나그네이지요.”라 하였다.

! ()은 아비가 된 29년에 그 아들에 대해 안 것이라곤 오직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박하여 가풍을 잃지 아니하고, 자신의 곤궁함과 현달함, 어짊과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의 맑고 트인 흉금이라든가 빛나고 화려한 문장 같은 것은 역시 어느 것도 알 수가 없었으니, 군의 어짊이 남보다 크게 나은 점이 있었지만 지금 그를 대신해서 그의 평생을 자상히 말하여 공의 마음을 거듭 아프게 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공은 듣고서 너무도 애통하여,

 

과연 그랬군요 과연 그랬다면 산 자의 원통함이 죽은 자보다 더욱 심하니, 이로써 묘지(墓誌)를 지어 주기 바랍니다.”

하므로, 드디어 그 말을 적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서문을 붙인다.

군의 자()는 공리(公履),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첨정(僉正  4 품 벼슬) ()의 따님이다. 군은 지금 임금 갑자년(1744, 영조 20)에 태어나서 임진년(1772, 영조 48) 모월 모일에 죽었다. 2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였다. 그 이듬해에 죽었으므로 미처 분관(分館)을 못한 까닭에 관례에 따라 홍문관 정자를 증직(贈職)하였다. 현감(縣監) 한산(韓山) 이응중(李應重)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딸 하나를 두었는데 현재 다섯 살이다.

군이 바야흐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장차 그의 가문을 이어 갈 터였으나, 다만 술에 병들어 갈수록 더 마시다가 황달이 들었다. 하루는 거울을 끌어다 자기 얼굴을 비춰 보고는 땅에 내던지며,

 

내가 어찌 오래가겠나.”

하고서, 공중에 대고 글자나 쓰며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더니, 이내 의관을 정제하고 부모님께 나아가 영이별을 고하는데 말이 너무나도 비창하였다. 온 집안이 크게 놀라며 비로소 그가 병든 줄 알고 바야흐로 의원을 맞아다 황달을 치료했으나 이미 늦어서, 군은 병으로 인해 혀가 굳어 말을 못한 채 며칠 만에 죽었다. 그는 사람 관상을 잘 보아 왕왕 기가 막히게 맞추었다. ()은 다음과 같다.

 

귀하게 되면 인색해지고 / 貴之徵嗇

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 富之徵濁

오래 살면 포악해진다 / 壽之徵虐

인자하고 진실한 자에겐 요절이 뒤따르고 / 慈諒者夭之躅

깨끗하여 찌끼 없는 자에겐 가난이 깃들고 / 皭無滓者貧之宅

베풀기 좋아하고 주는 것 많은 자는 높은 벼슬이 없다 / 好施多予者無高爵

이 여섯 가지 덕 중에 내 장차 어느 것을 택할꼬 / 于玆六德吾將焉擇

! 못난 자식에겐 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 吁不肖者勸以作

얌전한 자에겐 가로막아 억누르다니 / 愷悌者沮而抑

내 말을 못 믿거들랑 여기 새긴 글월을 보소 / 有不信視此刻

 

 

얼굴을 그려 낸 글로는 천고에 사마천(司馬遷) 같은 이가 없다. 그는 매양 사람의 흠 있는 부분이나 결여된 부분에 대해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그려 내었다. 요컨대 흠 있는 부분이나 결여된 부분은 그 사람의 여백이지만, 그 여백이야말로 그 사람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정신이란 이른바 붓을 들어 표현하기 이전에 있으며, 표현된 문장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대가미(戴葭湄)가 남의 얼굴을 그리면서, “그 얼굴이 둥글면 모나게 그려 내고, 그 얼굴이 길면 짧게 그려 낸다. 그린 것은 모나고 짧지만, 초상은 둥글고 길다.” 하였는데, 이 말은 문장가에게 가장 합당하다 하겠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모인 속에서 이 사람박수수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지금 이 글을 읽고는 글 짓는 요령을 대략 터득하였다.

 

[C-001]족손(族孫) …… 묘지명 : 정자(正字)는 홍문관의 정 9 품 벼슬이다. 동일한 제목의 글이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도 실려 있는데 내용이 크게 차이 난다. 운산만첩당집 중 이 글에 붙인 이재성(李在誠)의 평어에 고친 원고가 처음 원고만 못하다.改本不如草本고 했는데, 병세집에 실린 글은 여기서 말한 처음 원고가 아닌가 한다.

[D-001]박공 상덕(朴公相德) : 상덕(相德)은 박종덕(朴宗德 : 1724~1779)의 초명(初名)이다. 박종덕은 이조 판서로 전후 18년간이나 재임하였으며,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그의 조부는 박사정(朴師正 : 1683~1739)인데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연암에게는 재종숙부가 된다. 연암이 지은 묘갈명과 묘표음기(墓表陰記)가 각각 연암집 3과 권9에 수록되어 있다. 박종덕의 부친은 박흥원(朴興源 : 1708~1736)인데 진사 급제 후 요절하였다.

[D-002]() …… 하였으니 : 의례(儀禮) 상복(喪服) 아버지는 맏아들을 위해 참최(斬衰)의 복을 입는다.父爲長子고 하였다. 적장자(嫡長子)는 장차 대종(大宗)이나 소종(小宗)의 종주(宗主)가 되기 때문이다. 예기 대전(大傳) 서자(庶子)는 맏아들을 위해 3년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그 맏아들은 선조를 계승할 수 없기 때문이다.庶子不得爲長子三年 不繼祖也라고 하였다.

[D-003]아무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연암속집(燕巖續集) 중편연암집에는 師正으로 이름을 밝혀 놓았다.

[D-004]아무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연암속집 중편연암집에는 興源으로 이름을 밝혀 놓았다.

[D-005]따로 …… 때문이다 : 소종(小宗)이 되었다는 뜻이다. 고래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의하면 무릇 고조(高祖)가 같은 형제들이 하나의 소종이 되며,  5 대가 되어 고조가 같지 않게 되면 별개의 소종(小宗)으로 나뉘게 된다.

[D-006]박씨(朴氏) …… 있는데 : 박씨 중 밀양(密陽) · 반남 · 고령(高靈) · 함양(咸陽) · 죽산(竹山) · 순천(順天) · 무안(務安) ·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른바 팔박(八朴)’을 가리킨다.

[D-007]명론(名論) :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사대부로서 처신하는 문제, 즉 출처(出處)의 명분(名分)에 관한 논의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8]() …… 지키며 : 중용장구  20 장에 성실하고자 하는 자는 선()을 가려서 단단히 지키는 자이다.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라고 하였다.

[D-009]부끄러움으로 ……  : 원문은 其色赧赧然若夏畦之行于莊嶽者인데,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유래한 표현들로 점철되어 있다. 자로(子路) 남들과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데도 그들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낯빛을 살펴보면 부끄러움으로 벌겋다.觀其色赧赧然 이와 같은 처신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증자(曾子) 어깨를 움츠리고 억지 웃음 짓는 것이 여름철 밭일하기夏畦보다 괴롭다.”고 하였다. ‘夏畦는 농사꾼이란 뜻으로도 쓰인다. 또한 맹자는 말하기를, () 나라 대부(大夫)가 아들에게 말을 가르칠 때 그 아들을 데려다 장()과 악()의 사이에 수년간 두면, 아무리 회초리질을 하며 제 나라 말 대신 초() 나라 말을 배우게 강요한들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장과 악은 각각 제 나라의 도읍 안에 있던 거리와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D-010]() ……  : 임금 앞에서 신하는 반드시 홀을 손에 쥐어야 한다. 임금을 모시고 있을 때에는 허리를 굽히고 있으므로 관복의 허리띠가 아래로 드리워지게 된다. 禮記 玉藻

[D-011]먹 한 자루 : 원문은 一墨인데, 병세집에는 一筆로 되어 있다.

[D-012]정문(程文) : 과거 응시자가 지어 바치는 일정한 격식의 문장을 이른다.

[D-013]집에 있으면 감독(監督)이요 : 사기 4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집에 맏아들이 있으면 그 집안의 감독이라 한다.家有長子曰家督고 하였다. 원문은 在家則督인데, ‘ 자가 병세집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14]과연 그랬군요 : 원문 有是哉 논어 자로(子路)  3 장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해 다산(茶山)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 예전부터 의심하던 것이 이제 증명되었다는 말이라 해석하였다.!

[D-015]진사시 : 원문은 進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司馬, 병세집에는 生員으로 되어 있다.

[D-016]분관(分館) :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 성균관(成均館), 교서관(校書館)의 세 관청에 나누어 배치하여 일종의 임시직인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일을 이른다.

[D-017]홍문관 정자를 증직(贈職)하였다 : 원문은 贈弘文館正字인데, 병세집에는 그 다음에 兼知製敎’ 4자가 더 있다.

[D-018]공중에 …… 쓰며 : 원문은 書空인데, () 나라 은호(殷浩)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크게 실망한 경우를 비유할 때 쓴다. 은호(殷浩)가 무능하다 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나자 온종일 어허! 괴상한 일이로고.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공중에 대고 쓰며 지냈다고 한다.

[D-019]부모님께 …… 고하는데 : 원문은 辭訣於父母인데, 병세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0]부유해지면 더러워지고 :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것을 탁부(濁富)’라고 한다. 청빈(淸貧)의 정반대가 되는 말이다.

[D-021]포악해진다 : 원문은 인데,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2]격려하여 일으켜 세우고 : 원문은 勸以作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3]대가미(戴葭湄) : 가미(葭湄)는 청대(淸代) 초상화의 대가인 대창(戴蒼)의 자()이다.

[D-024]문장가에게 …… 하겠다 : 원문은 最宜操觚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最宜省으로 되어 있다.

[D-025]이 글 : 원문은 此篇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유인(孺人)의 휘()는 아무요 반남 박씨이다. 그 아우 지원(趾源) 중미(仲美 연암의 자)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유인은 16세에 덕수(德水) 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에게 출가하여 1 2남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 영조 47) 9월 초하룻날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鵶谷)에 있었으므로 장차 그곳 경좌(庚坐)의 묘역에 장사하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살아갈 방도가 없게 되자, 그 어린것들과 여종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등속을 끌고 배를 타고 협곡으로 들어갈 양으로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중미는 새벽에 두포(斗浦)의 배 안에서 송별하고, 통곡한 뒤 돌아왔다.

,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일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응석스럽게 누워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하게 말을 했더니, 누님이 그만 수줍어서 빗을 떨어뜨려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을 내어 울며 먹물을 분가루에 섞고 거울에 침을 뱉어 댔다. 누님은 옥압(玉鴨)과 금봉(金蜂)을 꺼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달랬었는데, 그때로부터 지금 스물여덟 해가 되었구나!

강가에 말을 멈추어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휘날리고 돛 그림자가 너울거리다가, 기슭을 돌아가고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은 역력할 뿐더러 또한 즐거움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더니, 중년에 들어서는 노상 우환에 시달리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갔으니 남매가 되어 지냈던 날들은 또 어찌 그리도 촉박했던고!

 

떠나는 자 정녕히 다시 온다 다짐해도 / 去者丁寧留後期

보내는 자 눈물로 여전히 옷을 적실 텐데 / 猶令送者淚沾衣

조각배 이제 가면 어느제 돌아오나 / 扁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자 헛되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 送者徒然岸上歸

 

 

인정(人情)을 따른 것이 지극한 예()가 되었고, 눈앞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 참문장이 되었다. 문장에 어찌 일정한 법이 있었던가? 이 글을 옛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는다면 당연히 이의가 없겠지만, 지금 사람의 문장을 기준 삼아 읽기 때문에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두기 바란다.  중존(仲存 : 이재성의 자) 

 

[C-001]맏누님 …… 묘지명 : 종북소선(鍾北小選) 망자 유인 박씨 묘지명亡姊孺人朴氏墓誌銘’, 병세집 맏누님 유인 박씨 묘지명伯姊孺人朴氏墓誌銘 과 동일한 작품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에서 크게 차이 난다. 초기작인 종북소선이나 병세집의 글을 개작한 것이라 판단된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를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중국인 호부 주사(戶部主事)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外從弟)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받아 연암에게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D-001]유인(孺人) :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 족보에 의하면, 박씨의 남편인 이현모(李顯模)는 나중에 종 2 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이에 따라 그의 선친 이유(李游)에게도 참판이 증직되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인 박씨에게도 추후에 정부인(貞夫人)의 봉작(封爵)이 내렸던 듯하다.

[D-002]이택모 백규(李宅模伯揆) : 택모(宅模)는 이현모(李顯模 : 1729~1812)의 처음 이름이다. 백규(伯揆)는 그의 처음 자이고, 나중에 이름을 고치면서 자도 회이(誨而)로 고쳤다. 이현모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D-003]아곡(鵶谷) :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楊平郡)에 통합된 지평현(砥平縣)에 있었다.

[D-004]두포(斗浦) : 병세집에는 두포(豆浦)’로 되어 있다. 두포(豆浦)는 곧 두모포(豆毛浦)를 가리킨다. 두모포는 지금의 한강 동호대교 북단인 서울 성동구 옥수동 옥정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유명한 나루였다. 우리말로는 두뭇개라고 했는데, 이는 한강과 중랑천의 두 물이 합류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지명이라 한다. 이와 같이 두모포(豆毛浦)가 원래 두뭇개를 음차(音借)한 것이었으므로, 그 준말인 두포(豆浦)’를 한자음이 같은 두포(斗浦)’로 적기도 했던 듯하다.

[D-005]말처럼 뒹굴면서 : 원문은 인데 말이 토욕(土浴)하는 것, 즉 땅에 뒹굴며 몸을 비벼 대는 것을 말한다.

[D-006]옥압(玉鴨)과 금봉(金蜂) : 옥압은 오리 모양으로 새긴 옥비녀를 가리킨다. 비슷한 것으로 옥봉(玉鳳), 옥연(玉燕) 등이 있다. 또 금으로 나비나 잠자리 모양 등을 만들어 비녀 위에 장식하는 것을 금충(金蟲)이라 한다. 금봉(金蜂)은 금으로 벌 모양을 만든 그와 같은 수식(首飾)을 가리킨다.

[D-007]조각배 이제 가면 : 원문은 扁舟從此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此時此去로 되어 있고, 과정록(過庭錄) 1에는 扁舟一去로 되어 있다.

[D-008]떠나는 …… 돌아가네 : ()을 대신하여 7언 절구를 실었다. 과정록(過庭錄) 1에서 이덕무(李德懋) 배에서 누님의 상여 행차를 송별하며舟送姊氏喪行란 제목으로 이 시를 소개한 뒤 이를 읽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스스로 금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공인의 휘()는 아무이니 완산(完山 전주(全州)) 이동필(李東馝)의 따님이요, 왕자 덕양군(德陽君)의 후손이다. 16세에 반남(潘南) 박희원(朴喜源)에게 출가하여 아들 셋을 낳았으나 다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공인은 평소 여위고 약하여 몸에 온갖 병이 떠날 새가 없었다. 희원의 조부는 당세에 이름난 고관으로서 선왕 때에 매양 한() 나라 탁무(卓茂)의 고사를 들어 벼슬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그분은 관직에 있을 때에 조그만큼도 재산을 늘려서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았으므로 청빈(淸貧)이 뼛속까지 스몄으며, 별세하던 날에 집안에는 단 열 냥의 재산도 남겨 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해마다 거듭 상()을 당했다.

공인은 힘을 다하여 그 열 식구를 먹여 살렸으며, 제사 받들고 손님 접대하는 데에 있어서도 명문 대가의 체면이 손실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미리 준비하고 변통하기 거의 20년 동안에, 애가 타고 뼛골이 빠졌으며 근소한 식량마저 바닥이 나게 되니, 마음이 위축되고 기가 꺾이어 마음먹은 뜻을 한 번도 펴 본 적이 없었다. 매양 늦가을에 나뭇잎이 지고 날이 차지면 마음이 더욱 허전하고 좌절됨으로써 병이 더욱 더치어, 몇 해 동안을 끌더니 마침내 지금 임금 2년 무술년(1778) 7 25일에 돌아갔다.

! 가난한 선비의 아내를 옛사람은 약소국의 대부(大夫)에 견주었거니와, 다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탱하려 하나 언제 망할지 모르는 지경인데도 능히 제 힘만으로 외교사령(外交辭令)을 잘하고 나라의 체모를 갖추었던 약소국의 대부처럼, 가난한 선비의 아내로서 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결코 제사를 거르지 않았으며 넉넉지 못한 부엌살림이나마 잔치를 너끈히 치러 냈으니, 어찌 이른바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 분이 아니겠는가?

시동생 지원(趾源)이 애를 낳아 막 탯줄을 끊자마자 공인이 사내임을 살펴보고서 드디어 아들을 삼았는데 그 아들이 지금 13세가 되었다. 지원이 화장산(華藏山) 속 연암(燕巖) 골짜기에 새로 살 곳을 정하고, 그곳의 산수를 좋아하여 손수 잡목 수풀을 베어 내고 수목에 의지하여 집을 만들었다.

일찍이 공인을 마주하여 말하기를,

 

우리 형님이 이제 늙었으니 당연히 이 아우와 함께 은거해야 합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稚魚)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서,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들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했다. 공인은 이때 비록 병이 심했으나,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머리를 손으로 떠받치고 한 번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바로 나의 오랜 뜻이었소!”

하였다.

그래서 같이 오기를 밤낮으로 간절히 바랐던 터인데, 심어 놓은 곡식이 익기도 전에 공인은 이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관()에 담겨 돌아와서 그해 9 10일에 집의 북쪽 동산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하였으니, 공인의 생전의 뜻을 이뤄 드리고자 해서였다. 그 지역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 속한다.

지원은 친구인 규장각 직제학 유언호(兪彦鎬)에게 명()을 청했다. 언호는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갓 부임했는데, 지역이 연암 골짜기와 인접하여 장례를 도와주고 명도 지어 주었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연암 골짜기는 산 곱고 물 맑은데 / 燕巖之洞山窈而水淥

여기에 시아주비가 터를 닦았네 / 繄惟小郞之所營築

! 온 가족 다 함께 은거하려 했더니 / 嗚呼鹿門盡室之計

마침내 여기에 몸을 맡기셨도다 / 竟於焉而托體

안온하고도 견고하니 / 旣安且固

후손들을 보호하고 도와주시리라 / 以保佑厥後

 

 

부드럽고 순하다婉嫕, 엄하고 착하다莊淑, 부지런하고 검소하다勤儉는 등의 글자가 하나도 없는데도, 조상 제사를 받들고 집안을 다스리고 우애하고 인자하고 온화하고 유순한 공인의 덕이 눈으로 보는 듯이 상상된다. 요컨대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깨끗한 글이다. 이 글을 읽으면 슬픔과 탄식으로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존(仲存) 

 

 

옛날에 원헌(原憲)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는데, 최근 세상의 가난한 선비 집안의 부인네들에게는 가난이 바로 병이요, 병이 바로 가난이다. 가난이라는 병이 단단히 엉겨 붙어 벗어 내고 떼어 버릴 길이 없어, 집집마다 똑같은 증세요, 사람마다 매한가지 빌미이다. 왕왕 진찰하여 그 원인을 찾아내도, 가려서 취해 쓸 만한 묘한 약방문이 없으며, 이와 같은 묘한 약방문이 있어 가려서 취해 쓴다 한들 또한 국의(國醫)가 없어 처방을 낼 수 없다.

엽전 꿰미가 관복에 수놓은 이무기가 서린 것 같고, 상자를 열면 베와 비단이요, 쌀과 곡식이 창고에 가득 들어오면, 손으로 한번 어루만지기만 해도 고통이 씻은 듯 가셔 버리고, 눈을 들어 한번 보기만 해도 심장이 튼튼해지고 구미가 돌아와서, 죽다가도 되살아나니 이것이 바로 최상의 약이다. 사슴 머리에서 잘라 낸 녹용과 갓난애만 한 신비한 인삼으로도 이런 부인네를 낫게 하기란 마치 물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약왕보살(藥王菩薩)의 구고진경(救苦眞經)에서 나온 약방문이다.  중존(仲存) 

 

[C-001]맏형수 …… 묘지명 : 제목에 맏형수라는 伯嫂’ 2자가 없는 이본들도 있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제목이 伯嫂李恭人墓碣銘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도 상당히 차이 난다. 공인(恭人)은 정 5 품 또는 종 5 품 벼슬아치의 부인에게 내린 벼슬을 이른다. 연암은 이 묘지명의 글씨 역시 중국인에게 받아 오도록 사행(使行) 편에 부탁하여, 서대용(徐大榕)이 그의 외종제 양정계(楊廷桂)의 글씨를 부쳐 왔다고 한다. 熱河日記 避暑錄

[D-001]덕양군(德陽君) : 중종(中宗)과 숙원(淑媛) 이씨(李氏) 사이에서 출생한 왕자인 이기(李岐 : 1524~1581)의 봉호(封號)이다.

[D-002]박희원(朴喜源)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喜源 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喜源도 같다.

[D-003]탁무(卓茂)의 고사 : 탁무(?~28)는 남양(南陽) 사람으로 자는 자강(子康)이다.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에 통유(通儒)로 불려 시랑(侍郞)에 천거되기도 하였고, 밀현령(密縣令)이 되어서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부(太傅)로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後漢書 卷55 卓茂列傳

[D-004]희원의 …… 올려 주었다 : 희원의 조부는 자헌대부(資憲大夫)요 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시호를 장간(章簡)이라 한 박필균(朴弼均 : 1685~1760)이다. 연암집 9에 실린 그에 대한 가장(家狀)에 의하면, 1758년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어 입시(入侍)했을 때 영조(英祖)가 탁무(卓茂)의 고사를 들어 특별히 지중추부사에 제수했다고 한다. 영조실록 34 7 24일 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벼슬을 올려 주었다增秩는 부분이 褒之로 되어 있다.

[D-005]게다가 …… 당했다 : 1759년에 공인의 시어머니 함평 이씨(咸平李氏)가 사망한 데 이어 1760년 시조부 박필균이 사망하고, 1761년 시조모 여주 이씨(驪州李氏)가 사망하였다. 1767년에는 시아버지 박사유(朴師愈)가 사망하였다.

[D-006]열 식구 : 시동생인 연암의 가족들을 포함한 숫자이다. 당시 연암의 가족은 부부와 1남 종의(宗儀) 2녀로 모두 다섯 식구였다.

[D-007]뼛골이 빠졌으며 : 원문은 擢髓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8]병이 더욱 더치어 : 원문은 疾益發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9]가난한 …… 견주었거니와 : 주역 곤괘(困卦)에 대한 정이천(程伊川)의 전()에 구사(九四)의 효사(爻辭)를 풀이하면서, 처음에는 고생하지만 사필귀정(事必歸正)할 점괘이니 가난한 선비의 아내와 약소국의 신하는 각자의 올바른 명분에 안주할 따름이다.寒士之妻 弱國之臣 各安其正而已라고 하였다.

[D-010] …… 하나 : 원문은 拄傾支覆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1]제 힘만으로 : 원문은 自立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自强으로 되어 있다.

[D-012]보잘것없는 제물이나마 : 원문은 澗蘩沼毛인데 계곡물과 늪에 자란 산흰쑥과 풀들이라는 뜻으로,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진실로 분명한 믿음이 있다면, 계곡물과 늪가에 자란 풀이나 개구리밥 · 산흰쑥 · 조류(藻類) 같은 나물澗谿沼沚之毛 蘋蘩薀藻之采 …… 귀신에게 바칠 수 있고 왕공(王公)에게 드릴 수 있다.”고 하였다.

[D-013]결코 …… 않았으며 : 원문은 不餒其鬼神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足以響神으로 되어 있고,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俾神不餒로 되어 있다.

[D-014]몸이 …… 그만둔 : 원문은 鞠躬盡瘁 死而後已인데,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D-015]지원(趾源)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아래에 나오는 도 같다.

[D-016]지원(趾源) …… 되었다 : 1766년에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가 출생하였다.

[D-017]화장산(華藏山) : 황해도 개성 동북쪽, 금천군(金川郡) 내에 있는 산이다.

[D-018] …… 뿌리고 : 원문은 一斗魚苗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十斛量魚, 동문집성에는 十斛養魚로 되어 있다.

[D-019] …… 놓고서 : 원문은 繫牛六角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이 다음에 身耕耘’ 3자가 추가되어 있다.

[D-020]길쌈하고 : 원문은 積麻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織麻로 되어 있다.

[D-021]여종을 …… 재촉해서 : 원문은 課婢趣榨油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收荏趣瀝油로 되어 있다.

[D-022]옛사람의 글 : 원문은 古人書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古書로 되어 있다.

[D-023]자기도 …… 웃으며 : 원문은 不覺蹶然起 扶頭一笑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聞輒欣然樂으로 되어 있다.

[D-024]심어 …… 전에 : 원문은 禾稼未熟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築室未竟으로 되어 있다.

[D-025]9 10 : 원문은 九月十日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6]규장각 직제학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內閣直學士로 되어 있다.

[D-027]유언호(兪彦鎬) : 1730~1796. 좌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정조 즉위년(1776) 음력 9월 규장각(奎章閣)이 설치될 때 정 3 품 벼슬인 직제학(直提學)에 첫 번째로 제수되었으며, 또한 정조의 특지(特旨)로 이듬해 6월에는 개성 유수에 제수되었다.

[D-028]물 맑은데 : 원문은 水淥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9]온 가족 …… 했더니 : 후한(後漢)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이끌고, 지금의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녹문산(鹿門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D-030]안온하고도 견고하니 : 묏자리를 가리켜 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유자후묘지명(柳子厚墓誌銘)의 명사(銘辭) 여기는 자후가 묻힌 곳, 견고하고도 안온하니旣固旣安, 후손에게 복리(福利)를 가져다 주리라.”라고 하였다.

[D-031]원헌(原憲) …… 말했는데 : 공자의 제자 원헌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살고 있었는데, 출세한 자공(子貢)이 찾아와 그를 보고는 탄식하며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묻자 원헌이 나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서 행하지 못함을 병이라 한다고 들었소. 지금 나는 가난한 것이지 병든 것이 아니라오.” 하니, 자공이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D-032]국의(國醫) : 나라 안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이른다.

[D-033]구미가 돌아와서 : 원문은 歸脾인데, 비장의 기능이 회복되어 식욕이 살아남을 뜻한다. 안신보심탕(安神補心湯)과 귀비탕(歸脾湯)은 정충증(怔忡症)에 특효가 있는데, 정충증은 심장이 갑자기 뛰고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운 증세로, 부귀에 급급하고 빈천을 근심하면서 소원을 이루지 못할 때 많이 생긴다고 한다. 東醫寶鑑 卷58 怔忡

[D-034]마치 …… 같다 : 돌을 물에 던져 보았자 물을 흡수하지 않듯이,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경우를 뜻한다.

[D-035]약왕보살(藥王菩薩)의 구고진경(救苦眞經) : 약왕보살은 불교에서 아미타불 25보살의 하나로 중생에게 좋은 약을 주어 몸과 마음의 병고(病苦)를 덜어 주고 고쳐 주는 보살을 이른다.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구고진경은 있으나, 약왕보살과는 무관하다. 여기서는 풍자를 위해 지어낸 불경 이름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가 죽은 지 3일 후에 문객(門客) 중에 연사(年使 동지사)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행길은 응당 삼하(三河)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삼하에는 덕보의 친구 손유의(孫有義)란 사람이 있는데 호를 용주(蓉洲)라 하였다. 몇 년 전에 내가 북경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용주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해, 편지를 남겨 덕보가 남쪽 지방으로 원이 되어 나간 사실을 자세히 서술하고 덕보가 보낸 토산물 두어 종류를 남기어 성의를 전달하고 돌아왔다. 용주가 그 편지를 떼어 보았다면 응당 내가 덕보의 벗인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문객에게 부탁하여 다음과 같이 부고를 전하게 했다.

 

건륭(乾隆) 계묘년(1783) 모월 모일 조선 사람 박지원은 머리를 조아리며 용주 족하(足下)에게 사룁니다. 폐방(敝邦 우리나라) 전임 영천 군수(榮川郡守) 남양(南陽) 홍담헌(洪湛軒) 휘 대용(大容) 자 덕보가 올해 10 23일 유시(酉時)에 영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는 병이 없었는데 갑자기 중풍으로 입이 비틀리고 혀가 굳어 말을 못 하다 잠깐 사이에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향년은 53세입니다.

고자(孤子 부친상 중의 아들) ()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어 제 손으로 부고를 써서 전할 수도 없거니와, 양자강(揚子江) 남쪽에는 편지를 전할 길이 없습니다. 이 부고를 오중(吳中)으로 대신 전달해서 천하의 지기(知己)들로 하여금 그가 죽은 날짜를 알도록 해 주어, 망자나 산 자나 족히 한이 없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문객을 보내고 나서 나는 항주(杭州) 인사들의 서화와 편지 및 시문(詩文)들 총 10권을 손수 점검하여 관 옆에 벌여 놓고, 관을 어루만지면서 통곡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덕보는 통명(通明)하고 민첩하고 겸손하고 단아하며, 식견이 깊고 견해가 정밀하였다. 특히 음률과 역법(曆法)에 뛰어났으니, 그가 만든 혼의(渾儀) 제기(諸器)는 오래오래 깊이 생각한 끝에 새롭게 기지(機智)를 짜낸 것이었다. 처음에 서양인들은 땅이 구형(球形)임을 설명하면서도 땅이 돈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덕보는 일찍이 논하기를 땅이 한 번 돌면 하루가 된다 하였다. 그 설이 미묘하고 심오하였으나, 다만 미처 그에 대해 저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만년에는 땅이 돈다는 것을 더욱 자신하여 의심이 없었다.

세간에서 덕보를 흠모하는 사람들은 그가 일찌감치 스스로 과거를 폐하고 명리(名利)에 뜻을 끊고, 한가히 들어앉아 이름난 향을 피우고 거문고와 가야금을 타는 것을 보고서, 그가 장차 담담히 스스로 즐기며 속세에서 벗어나는 데 오로지 뜻을 두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덕보가 만물을 종합하고 정리해서 아무리 복잡한 것도 단호히 처리하여, 나라의 재정을 맡길 만도 하고 먼 외국에 사신으로 보낼 만도 하며, 군대를 통솔하는 기발한 책략을 지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유독 남들에게 혁혁하게 과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어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문서를 신중히 처리하고 정령(政令)을 기한 내에 집행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아전들은 설치지 않고 백성들은 절로 따르게 한 데에 지나지 않았을 따름이다.

일찍이 그의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수행하여, 육비(陸飛)와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琉璃廠)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세 사람은 다 같이 전당(錢塘)에 거주하며, 모두 문장과 예술의 선비여서 그들이 교유하는 사람들도 중국 내의 유명 인사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덕보를 추앙하여 대유(大儒)로 여겼다. 이들과 더불어 필담한 것이 누만언(累萬言)으로, 유교 경전의 뜻과 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를 분석하였는데, 굉장하고 뛰어나서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급기야 작별하는 마당에 다다르자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이 한 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서로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게 살기를 맹세합시다.”

하였다. 엄성과는 더욱 서로 마음이 맞아서, 군자가 세상에 나서거나 숨는 것은 시대에 따라야 하는 것임을 살짝 깨우쳤더니, 엄성은 크게 깨달아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 후 두어 해 만에 그가 민중(閩中)에서 객사하자 반정균이 편지를 써서 덕보에게 부고하였다. 덕보는 애사(哀辭)를 짓고 예물로 향을 갖추어 용주에게 부쳐 마침내 전당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전달된 그날 저녁이 바로 대상(大祥 2주기 제사) 날이었다. 제사에 모인 이들은 서호(西湖) 주위 여러 고을 사람들이었는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는 지극한 정성으로 혼령을 감동시킨 결과라고 일렀다. 엄성의 형 과()  이름이다.  가 예물로 보낸 향을 사르고 그 애사를 읽은 뒤 초헌(初獻)을 하였다. 아들 앙() 이름이다.  은 편지를 보내 덕보를 백부(伯父)라 칭하면서 그의 아버지 철교(鐵橋 엄성의 호)의 유집(遺集)을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비로소 받아보게 되었다. 그 문집 속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초상화가 있었다. 엄성이 민중에 있을 때 병이 위독하였는데도 덕보가 증정한 조선 먹을 꺼내 향내를 맡고 가슴에 얹은 채 죽었다. 마침내 그 먹을 관에 함께 넣었다. 오하(吳下)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특이한 일로 여기어 다투어서 시와 산문을 지었는데, 주문조(朱文藻)라는 이가 편지를 부쳐 와 그 상황을 이야기했다.

! 그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도 이미 비범하기가 마치 옛날의 특이한 사적 같았다. 벗으로서 지성(至性 선량한 천성)을 지닌 이라면 반드시 그 일을 널리 전파하여 비단 이름이 양자강 남쪽 지방에 두루 알려질 뿐만이 아닐 터이니, 구태여 내가 그의 묘지(墓誌)를 짓지 않더라도 덕보의 이름을 불후(不朽)하게 할 것이다.

부친의 휘는 역()이니 목사(牧使), 조부의 휘는 용조(龍祚)니 대사간이요, 증조의 휘는 숙()이니 참판이요, 모친은 청풍 김씨(淸風金氏)로 군수 방()의 따님이다.

덕보는 영조 신해년(1731)에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며, 곧 돈녕부 참봉으로 옮겼으나 세손익위사 시직(世孫翊衛司侍直)으로 고쳐서 제수되었다. 사헌부 감찰로 승진되고 종친부 전부(宗親府典簿)로 전직되었으며, 태인 현감(泰仁縣監)이 되어 나갔다가 영천 군수로 승진되어, 두어 해를 있다가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왔다.

부인은 한산(韓山) 이홍중(李弘重)의 따님으로 1 3녀를 낳았다. 사위는 조우철(趙宇喆) · 민치겸(閔致謙) · 유춘주(兪春柱)이다. 그해 12 8일에 청주(淸州) 모 좌()의 벌에 장사 지냈다. ()은 다음과 같다.  명은 원고를 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800여 언()이 벗으로써 시작하여 벗으로써 맺었다. 한 글자도 효성과 우애, 자애와 공경 같은 집안의 바른 행실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인륜에 독실했다는 것을 말 밖에서 찾아볼 수 있다.

 

[D-001]삼하(三河) : 하북성(河北省) 삼하현(三河縣)에 속한 고을로, 이곳과 통주(通州)를 거치면 곧 북경에 당도하게 된다.

[D-002]손유의(孫有義) : 거인(擧人)으로, 자를 심재(心栽)라고 하였다.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1766년 음력 3월 초에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계기로, 이후 10여 년간 서신을 통해 교분을 이어 갔다. 간정동회우록(乾淨衕會友錄)에는 홍대용이 그에게 보낸 편지 6통이 수록되어 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3]몇 년 …… 것이다 : 열하일기 관내정사(關內程史)에 관련 기사가 있다. 1780년 음력 7 30일 연암은 삼하에 있는 자택으로 손유의를 찾아갔으나, 그가 부재중이라 홍대용의 편지와 선물만 전하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연암이 전한 홍대용의 편지가 간정동회우록 여손용주서(與孫蓉洲書)’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그 편지에서 홍대용은 자신이 연초에 태인 현감(泰仁縣監)에서 경상도 죽령(竹嶺) 남쪽 고을인 영천(榮川)의 군수로 영전(榮轉)된 사실을 전하고, 아울러 그에게 연암을 문장과 품망(品望) 면에서 자신의 외우(畏友)라고 소개하면서 이번에 사행에 나선 연암 편에 이 편지를 부친다고 하였다.

[D-004]오중(吳中) : 항주(杭州)가 있는 절강성(浙江省) 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오하(吳下)라고도 한다.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D-005]시문(詩文) : 운산만첩당집에는 文獻으로 되어 있다.

[D-006]혼의(渾儀) 제기(諸器) : 담헌서(湛軒書) 외집(外集) 6 농수각의기지(籠水閣儀器志)에 혼의의 옛 제도를 개량하고 서양의 방법에 정통하여 새롭게 만들었다고 소개한 통천의(統天儀) · 혼상의(渾象儀) · 측관의(測觀儀) · 구고의(句股儀) 등의 천문의기(天文儀器)를 가리킨다.

[D-007]서장관(書狀官)으로 가는 데 : 원문은 書狀之行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書狀使燕之行으로 되어 있다.

[D-008]일찍이 …… 만났다 : 홍대용은 1765(영조 41) 동지사의 서장관인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북경에 갔다. 유리창(琉璃廠)은 골동품 · 서화 · 서적 · 문방구 등을 파는 북경 선무문(宣武門) 밖의 유명한 상가(商街)이다. 그 이듬해 음력 2월 일행 중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과거 응시차 상경한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筠)을 유리창에서 우연히 알게 된 것을 계기로, 홍대용이 간정동(乾淨衕)에 있던 그 두 사람의 숙소로 여러 차례 방문하여 장시간 필담을 나누었으며, 뒤늦게 상경한 그들의 친구 육비(陸飛)까지 사귀게 되었다. 육비 · 엄성 · 반정균 3인에 대해서는 담헌서 외집 권3 건정록후어(乾淨錄後語)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D-009]전당(錢塘)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이다.

[D-010]그런데도 …… 여겼다 : 엄성과 반정균은 홍대용이 주자학에 정통하다고 하여 그를 이학대유(理學大儒)’라고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3 乾淨衕筆談續 2 23

[D-011]천인성명(天人性命)과 고금(古今)의 출처대의(出處大義) : 천인성명은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관계,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관한 철학적 논의를 뜻한다. 고금의 출처대의란 벼슬하거나 은거할 때를 올바르게 판단해서 처신하여 후세의 귀감이 될 만한 역사적 사례를 뜻한다.

[D-012]그 후 …… 객사하자 : 민중(閩中)은 복건성(福建省)을 이른다. 엄성은 정해년(1767) 봄에 복건성으로 가서 가정 교사를 하다가 학질에 걸려 귀향한 뒤 그해 겨울에 병사하였다. 淸脾錄 卷2 嚴鐵橋

[D-013]애사(哀辭) : 대개 요절한 경우에 짓는 추도사를 이르는데, 여기서는 담헌서 외집 권1에 실린 엄철교에 대한 제문祭嚴鐵橋文을 가리킨다.

[D-014]서호(西湖) : 절강성 항주에 있는 유명한 호수로, 서자호(西子湖) · 전당호(錢塘湖) 등으로도 불린다.

[D-015]아들 …… 되었다 : 엄앙(嚴昻)이 홍대용을 백부라 칭한 것은, 홍대용이 엄성과 결의형제(結義兄弟)하였으며 엄성보다 한 살 위였기 때문이다. 철교(鐵橋)의 유집(遺集)이란 엄성의 벗인 주문조(朱文藻)가 편찬한 소청량실유고(小淸涼室遺稿)를 이른다. 乙丙燕行錄 附錄 소청량실(小淸涼室)은 엄성의 서실 이름이다. 손유의는 이 책과 엄성의 초상화를 맡아 두었다가, 1778년 사행차 북경에 왔다 돌아가던 이덕무 편에 전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67 入燕記下 6 17

[D-016]오하(吳下) : 중편연암집에는 越中으로, 여한십가문초에는 浙中으로 되어 있다.

[D-017]주문조(朱文藻) : 호를 낭재(朗齋)라고 하며, 육서(六書)와 금석(金石)에 정통했다. 엄성 · 육비 · 반정균 3인과 홍대용 등 조선 사행 6인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편찬한 일하제금집(日下題襟集)에 서문을 썼다.

[D-018]() ……잃었다 : 과정록 1에는 홍대용이 죽었을 때 연암이 지었다는 다음과 같은 뇌사(誄辭)가 소개되어 있다. “서호에서 서로 만난다면, 그대는 날 부끄러워하지 않을 줄 아노라. 죽어서 입에 구슬 물지 않았으니, 도굴꾼 같은 타락한 선비를 공연히 딱하게 여겼도다.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 이는 다름아닌 홍덕보 묘지명의 상실된 명사(銘辭)로 추측된다.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연암집 산고에는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詠麥儒라고 하여 宜笑舞歌呼’ 5자가 추가된 명사가 있었다고 하며,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온 열하일기에도 魂去不須 想逢西子湖 口裏不含珠 怊悵詠麥儒라는 명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세상에는 본래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돕느라고 천 냥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의로운 일이라도 한갓 은혜를 베푸는 데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다만 한 고을이나 마을의 협객은 될망정 나아가 온 고장이 선()을 향하도록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치암 최옹이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도운 것과 같은 경우는 그 자신이 의로운 일에 성급해서였다. 남에게 우환이나 상사(喪事)가 있으면 마음이 허탈하여 마치 허기진 사람이 아침을 넘길 수 없듯이 하고, 그 마음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마치 눈에 가시가 날아든 듯 여겨, 마침내는 성급하게 자신에게서 잘못을 찾으며,

 

이 사람이 무슨 까닭으로 나에게는 알리지 않았는가? 내가 혹시 남들에게 다랍게 보였던가?’

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이런 일이 없으면 기뻐하며,

나는 지금 다행히도 먼저 소식을 들었구나!’

하며, 허겁지겁 서두르기를 길 가는 사람이 해 지기 전에 대가듯이 한다. 남을 위해 시집 장가를 보내 준 것이 여러 집이고, 남을 위해 염()하고 장사 지내 준 것이 여러 집이었으니, 이러고 보면 그가 아침저녁으로 솥 씻어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일이다.

반면에 비웃는 자도 있어 말하기를,

 

너무도 하다, ()의 어리석음이여! 남이 달라고 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베풀어 주기 때문에, 늘상 남을 급한 상황에서 건져 주어도 이렇다 할 감사도 못 받고 칭찬도 못 듣고 마는 게 아닌가?”

하였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걸 가지고 무얼 어리석다 하는가? 혹시라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늘상 자기 처자나 형제들에게 숨기고 몰래 베푸니, 이야말로 어찌 대단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어리석을 ()’ 자로 옹에게 별호를 붙이니, 옹 또한 그 호를 받아들여 늙어 죽도록 바꾸지 않았다.

그러므로 잘난 이건 못난 이건 간에 옹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마치 옛일을 이야기하듯 하였으며, 몇 사람들이 앉아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곧 크게 웃는 경우는 반드시 옹이 행한 무슨 일 무슨 일에 관한 것이었다.

종가(宗家)의 아우가 젊은 나이에 허랑방탕하여 전답과 가택을 다 잃고나니, 옹은 집을 사서 그의 선령(先靈)을 편안히 모시고 나아가 그를 대신해서 제전(祭田)을 다시 마련하자, 종족(宗族)들이 서로 옹을 말리며,

 

한갓 재물만 허비할 뿐이지 아무 보탬이 안 될 거요.”

하였다. 그러자 옹은 정색을 하면서,

 

제전이 있으면 비록 제사를 못 지내게 된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는 제사 올린 거나 마찬가지요.”

하며, 그를 도와서 가업을 일으키게 하느라 천 냥이 들었다. 종족들이 자기네끼리 몰래 비난하기를,

 

옹은 전에 이미 아무 보탬이 안 되고 그의 허물만 보태 주었는데, 지금 또다시 보태 주니 이 어찌 옹의 허물이 아니겠는가?”

했는데, 과연 몇 해가 못 가서 재산을 다 말아먹고 말았다. 그래도 또 그에게 천 냥을 주었더니 마침내 가업을 일으키고 착한 선비가 되었다. 옹의 지극한 정성이 아니고야 이렇게 교화시킬 수 있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그래도 종가의 아우이기에 망정이요. 옹의 친구인 아무 어른이 어질었는데 일찍 죽자 옹은 그분의 어린애들을 어루만져 길러 주었으니, 이런 일은 옛적에나 들었지 지금 세상에는 보지 못했소이다. 고아가 된 그 아들이 장성해서는 가난하여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수 없게 되자, 그의 재산을 마련해 주기 위해 수천 냥을 썼으니 옛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가? 더구나 또 그를 대신해서 돌에 새겨 묘에 비를 세워, 그분의 어진 행실이 사라지지 않게 하였거늘!

아무 성씨인 아무 어른은 옹의 부친의 친구였는데 어진 분으로서 늙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옹은 반드시 새벽에 가서 밤새 안부를 묻고 손수 음식을 살펴 드리며, 또 매달 지급하고 남은 것을 따로 저축하여 세제(歲制)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으니, 옛날에도 또한 옹과 같이 독실하고 후덕한 사람이 있었던가?”

하였다. 혹은 의아해하는 이도 있어 하는 말이,

 

옹이 재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 할 수 있지만, 심지어 먼 일가붙이들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에도 반드시 몸소 간호해 주었으니 그런 일도 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어찌 먼 일가붙이뿐이겠는가? 오랜 친구가 열병에 걸려 곧 숨이 넘어간다는 말을 듣고, 옹은 손수 약을 달여서는 곧 단번에 땀을 내어 낫게 한 일이 있으며, 그의 종이 병들었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네.”

하였다. 옹은 의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옹이 보살펴 주기만 하면 늘 살아났다. 옹은 이럴 때면 매양 분을 내어 말하기를,

 

한 사람이 전염병에 걸리면 일족이 모두 달아나 피하는 바람에, 병자가 제때 땀을 못 내게 되니 병자가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지금 가만히 그의 행적을 검토해 보면, 한결같이 모두 소학(小學)에 열거된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었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있다 해도 실로 월등하게 뛰어난 것일 터인데, 옹에게는 아침저녁으로 마시는 숭늉이나 국물이요, 좌우에 놓여 있는 옷가지나 그릇 같은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높고 원대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인 줄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대개 그의 자질이 돈후하고 독실하여 겉모습을 엄숙하게 꾸미는 따위는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고례(古禮)를 몹시 좋아하여, 관혼상제의 예식이 시속(時俗)의 눈에는 사뭇 괴이쩍게 보이니, 향리에서는 이로써도 더욱 옹을 어리석게 여겼지만, 옹은 그럴수록 스스로 기뻐하였다. 그의 담론과 행동을 보면, 예식을 도맡아 하는 가운데 날마다 익힌 게 아닌 것이 없었다.

선산의 묘목(墓木)을 기르기를 어린아이 기르듯 하여, 열매 맺은 잣나무 수만 그루가 묘역을 빙 둘러 있었다. 그리고 객호(客戶)들을 두어 수호하게 하며, 은혜와 신의로써 그들을 어루만지니 모두 서로 타이르며 다짐하기를,

 

이는 효자가 손수 심은 것이니 가지 하나인들 차마 잘라 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 재산이 거만(鉅萬)이었지만, 죽는 날에 미쳐서는 한 냥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옹의 여러 아들들과 사이가 좋았으므로, 옹을 자세히 알기로 나 같은 사람이 없다. 그러니 지금 묘 앞의 비를 새기는 데 정분상 글을 지어 주기를 사양할 수 있겠는가?

옹의 휘는 순성(舜星)이요, 자는 경협(景協)이다. 시조인 원()이 고려 때 양천(陽川)에 백()으로 봉해져 그대로 양천 최씨가 되었다. 증조의 휘는 아무인데 증() 집의(執義), 조부의 휘는 아무인데 증 좌승지요, 부친의 휘는 아무인데 증 호조 참판이다. 모년 모월 모일에 나서 모년 모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 좌()의 벌에 장사 지냈다. 네 아들을 두었는데 진사(進士)인 진관(鎭寬)과 진함(鎭咸) · 진익(鎭益) · 진겸(鎭謙)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숭산(崧山)에 선영 / 有塋于崇

군자가 봉해진 곳이로세 / 君子攸封

새파랗다 저 나무는 / 有樹如蔥

오립송(五粒松)이 아닌가 / 五粒之松

뉜들 차마 훼손하리 / 誰忍毁傷

그 얼굴을 뵈옵는 듯한데 / 如見其容

잊으려도 잊을 수 있을까 / 俾也可忘

온후하신 치옹 어른을 / 恂恂癡翁

효를 확대하면 충이 되니 / 推孝爲忠

벗에게도 충실했네 / 忠厥友朋

의로운 일 예절에 맞아 / 義行禮中

다 충심에서 우러난 것 / 罔不由衷

명성만이 드넓은 게 아니요 / 匪博厥聲

덕이 실로 몸을 윤택하게 하였네 / 德實潤躬

천 년 뒤에 그 풍모 상상하려거든 / 千載想風

여기 새긴 명을 보시구려 / 視此刻銘

 

 

향리 사람들과 먼 일가붙이들의 입을 빌려, 시원시원하고 의로운 일을 즐기며 남의 어려움을 급히 돕는 사람을 그려 내었는데, 옆에 있는 듯이 살아 움직인다.

 

 

9층의 누대를 오르면 한 층 한 층 높아질 때마다 곧 보지 못한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고, 동천(洞天)에 들어가면 물은 단지 맑은 원천 하나이건만 매양 한 굽이마다 전에 본 모습과 달라져서, 쏟아져 내리는 것은 폭포가 되고 부딪치는 것은 여울이 되고 멈춘 것은 못이 되며, 비단 무늬처럼 잔물결이 이는 것도 있고, 거문고와 축()과 환패(環珮) 소리가 나는 것도 있는 것과 같다.

나무는 구부러진 것이 싫지 아니하고, 돌은 괴이한 것이 싫지 아니하고, 기슭은 비스듬한 것이 싫지 아니하고, 오솔길은 경사진 것이 싫지 아니하고, 띳집과 대울은 어리비치고 이지러져 가린 것이 싫지 아니하다. 그리고 가끔 밭 가는 사람이나 나무꾼을 마주치게 되면 그들의 여윈 얼굴이 기이하고, 말라서 뼈가 울뚝불뚝 드러난 것이 싫지 아니하다.

 

[C-001]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 연암은 개성 사람으로 자신의 문생(門生)이 된 최진관(崔鎭觀)의 청탁으로, 1789년 가을에 그의 부친 치암 최순성(崔舜星)의 묘갈명을 지어 주고 비석에 새길 글씨까지 직접 써 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최순성에 대해서는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전()이 있다. 崧陽耆舊傳 卷3 任恤傳 崔舜星

[D-001] …… 있다 : 음식을 곧 끓일 수 있게 솥을 깨끗이 씻어 놓고 기다리듯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다는 뜻의 속담이다.

[D-002]마찬가지요 : 원문은 인데,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동문집성 등에는 모두  자로 되어 있다. 의미는 같다.

[D-003]아무 어른 : 동문집성에는 고경항(高敬恒)’이라고 밝혀져 있다. 고경항은 본관이 제주(濟州)이고 자는 의중(義中)으로, 장창복(張昌復)의 문인이었다. 산중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다가 향년 38세로 병사하였다. 崧陽耆舊傳 卷1 學行傳 高敬恒, 3 任恤傳 崔舜星

[D-004]아무 …… 어른 : 동문집성에는 임군 두(林君㞳)’라고 밝혀져 있다. 임두는 본관이 곡성(谷城)이고, 해동악부(海東樂府)를 남긴 저명 시인이자 학자인 임창택(林昌澤)의 조카였다. 崧陽耆舊傳 卷2 文詞傳 林昌澤, 3 任恤傳 崔舜星

[D-005]세제(歲制) : 관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사람이 60세가 되면 죽을 때가 가까우므로 1년에 걸려 관을 미리 만들어 두는 법이라고 한다. 禮記 王制

[D-006]아름다운 …… 행실 : 소학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에 소개된 모범적인 사례들과 흡사했다는 뜻이다.

[D-007]객호(客戶) : 그 고장에 2() 이상 거주하고 있는 호구를 주호(主戶)라고 하고, 타향에서 새로 들어와 사는 호구를 객호라고 한다.

[D-008]() : 고려 말기에 공신들에게 내렸던 봉호(封號)이다.

[D-009]증조의 …… 참판이다 : 선계(先系)에 대한 기술(記述)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최순성의 선조 중에 집의(執義)를 증직받은 이는 증조가 아니라 고조인 천립(天立)이고, 좌승지를 증직받은 이는 조부가 아니라 증조인 일신(日新)이며, 호조 참판을 증직받은 이는 부친이 아니라 조부인 외형(巍衡)이다. 부친인 석찬(錫贊)은 벼슬을 하지 못했다. 연암집 7에 수록된 운봉 현감 최군 묘갈명(雲峯縣監崔君墓碣銘)’은 최순성의 계부(季父)인 최석좌(崔錫佐)의 묘갈명인데, 거기에는 최석좌의 부친이 증 호조 참판, 조부가 증 좌승지로, 선계에 대한 기술이 올바르게 되어 있다. 박철상, 개성(開城)의 진사(進士) 최진관(崔鎭觀)과 연암(燕岩), 문헌과 해석 32, 2005. 10. 참조

[D-010]진관(鎭寬) : 대부분의 이본들과 관련 기록들에는 모두 鎭觀으로 되어 있다.

[D-011]진겸(鎭謙) : 그의 청탁으로 지은 독락재기(獨樂齋記) 연암집 1에 수록되어 있다.

[D-012]숭산(崧山) : 원문의  자는  자와 통한다. 숭산은 개성에 있는 산으로, 송악(松嶽)이라고도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4 開城府 개성을 숭양(崧陽)이라 한다.

[D-013]오립송(五粒松) : 잣나무를 이른다. 잣나무는 잎이 다섯 개씩 모여 나기 때문이다.

[D-014]덕이 …… 하였네 : 대학장구 () 6장에 ()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 德潤身고 하였다.

[D-015]환패(環珮) : 허리에 차는 고리 모양의 옥()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한 권에 () 사인 이성택의 집에 내사함內賜故士人李聖擇家이라 제()하고 윗머리에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어인(御印)이 모셔져 있다. 대개 무신년 3월은 바로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무위(武威)를 드날려 난리를 평정한 해와 달이었는데, 위대하신 우리 성상께서 즉위하신 지 12(1788)에 그해 그달이 거듭 돌아오자, 성심(聖心)의 감격이 여느 때보다 더하시어 윤음을 널리 선포하여 팔도에 환히 효유하셨다. 이 처사와 같은 이는 평소에 제 공을 말한 바 없었으나, 포상 기록이 서책에 열거되고 존휼(存恤)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랴!

처사의 처음 휘는 성시(聖時)요 자는 집중(執中)이며, 성택(聖擇)은 뒤에 고친 휘이다. 고려 때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가 하빈(河濱)에 봉해짐으로써 그로 인하여 하빈 이씨가 되었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휘 책()이 평강현(平康縣)의 지사(知事)가 되었으며, 거창(居昌)에 대대로 살았다. 처사의 고조 때부터 비로소 안의(安義)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호는 농월담(弄月潭)으로, 동춘당(同春堂)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인근 동()에 잠시 거주할 적에 실은 주인 노릇을 했다. 증조의 휘는 아무요, 조부의 휘는 아무이고, 부친의 휘는 만령(萬齡)이다. 모친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참봉 규창(奎昌)의 따님이다.

처사는 숙종 병인년(1686, 숙종 12) 11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도 특이한 자질을 지녔더니, 차츰 장성하자 재주와 견식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비록 먼 시골에서 생장하였지만 국조(國朝)의 고사나, 사대부 집안의 길례(吉禮)와 흉례(凶禮)에 대한 예설(禮說)에 밝고 익숙하여, 원근을 막론하고 찾아와서 질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다.

약관의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학문을 닦았는데, 누구보다도 김삼연(金三淵 김창흡(金昌翕)) · 이도암(李陶菴 이재(李縡)) 등 여러 선생에게서 인정을 받았으며,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과 봉조하(奉朝賀) 이병상(李秉常)도 모두 그를 국사(國士)로서 허여했고, 정승 조도빈(趙道彬)도 그의 재주와 행실을 들어 조정에 천거한 적이 있었다.

급기야 신축년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드디어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산과 늪 사이를 방랑하였다. 영조 4년에 흉적 정희량(鄭希亮)이 안의에서 거사하여 근방의 여러 고을을 연달아 함락시켰는데, 처사를 가장 꺼리어 몹시 급하게 추적하였다. 처사는 곧장 밤중에 도망을 쳐 서울로 빨리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한 필 말을 채찍질하여 오는 사람을 만났는데 바로 새로 부임하는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였다. 그는 바야흐로 적중(賊中)으로 달려 들어가는 길이었으나 요령을 알지 못하다가, 처사를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하여 역적들을 토벌할 것을 몰래 모의하였다. 현에 당도하여 보니 역적들은 이미 처형되었으며 잔당이 바위틈이나 수풀에서 잠시 목숨을 붙이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병마절제도위를 도와 모조리 잡아 베어 죽였다.

역적들이 평정되자, 임금은 이 현에서 원흉이 나온 것을 깊이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그 고을을 혁파하고 그 땅을 거창과 함양(咸陽)에 나누어 소속시켰다. 이 두 고을은 모두 이 현의 하류(下流)에 있어, 지난날 농지에 물을 댈 적에는 항상 남아도는 물을 구걸해 갔으며, 산에 가서 나무하고 풀을 벨 때에도 도끼를 가지고 가지 못하게 했었다. 그런데 땅이 두 고을에 종속되고 나자, 공공연히 제방을 터서 물을 빼 가며 대낮에 나무를 베고 남의 묘목(墓木)까지 모조리 찍어 가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입을 다물고 감히 따지지도 못했으며, 곧 입술만 달싹거려도 도리어 역적이라 매도하였다. 부역에 종사하는 아전과 관하인들은 종놈처럼 혹사당하며, 장정을 모아 군적(軍籍)에 올릴 때 사족(士族)까지 그 대상으로 삼으니, 그 고통이 뼈에 사무쳤으나 호소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고을을 복구할 것을 원하고 있었으나 그 일을 맡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현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와서 처사에게 청하니, 처사는 당장에 일어나서 서울로 올라가, 만 자가 넘는 장문의 상소를 올리고 5000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의 목숨을 보전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궐 문 앞을 지키기 여러 해였으나, 담당자들은 아무도 안의의 일로써 임금께 아뢴 자가 없었으며, 그 땅을 추하게 보아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는 듯이 여겼다. 그러기에 경상도에서 온 자라면 대면하여 말도 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여관을 찾아 헤매며 몹시 고생하고 초췌해져도 발을 들여놓을 곳조차 없었다.

처사는 일찍이 정승 김재로(金在魯)와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에게 이렇게 설득하였다.

 

저희 고을의 산천 귀신이 어리석고 영험이 없어 극악무도한 종자를 낳은 것이 역적 정희량(鄭希亮)으로 변하였으니, 성황(城隍)에 벌이 미쳐 귀신이 굶주림을 당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입니다. 무릇 역적이 나면 그자의 집터를 더러운 웅덩이로 만들어 풀도 돋지 못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희 고을로 말하면 마시는 우물도 그대로 있고 모여 사는 부락도 여전하지만, 마침내 그 관청 소재지를 없애고 그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었으니, 이는 100리 주위를 빙 둘러 웅덩이나 못으로 만든 셈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곡물로 바치던 세금과 베로 바치던 공물(貢物)을 토산물로 못 하게 하여 나라의 정세(正稅)를 축내게 하였으니, 후토씨(后土氏)가 무슨 죄이며, 구룡씨(句龍氏)가 무슨 죄입니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 석전제(釋奠祭)를 올리자 해도 주재자가 없고 제사에 바칠 짐승도 이미 노쇠해 버렸으며, 글 읽고 공부하던 곳도 잡초만 무성하여 자제들로 하여금 임금의 교화 속에서 자립할 수도 없게 하였습니다. 사직이 폐기되어 제사를 못 지내는 것도 오히려 원통한데, 더구나 또 학교까지 죄를 얻어 폐기하게 된단 말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백성들의 고통에 관한 10여 건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감개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조가(朝歌)와 승모(勝母)는 땅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만 군자는 그래도 그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고향이 그립고 양잠과 길쌈이 소중하고 조상 무덤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거주하는 사람은 옮겨 가기를 생각하고 옮겨 간 사람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음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모두 더러움을 깨끗이 씻고 스스로 죄악에서 탈피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그곳에 더 이상 사는 사람이 없는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니, 저는 이 땅이 마침내 도깨비 떼가 들끓고 여우나 독사가 득실대는 곳이 되고 말까 두렵습니다.”

이에 김공(金公)은 크게 느끼고 깨달아,

 

그렇겠소! 마땅히 그대를 위해 힘껏 아뢰어 보리다.”

하고서, 다음 날 임금을 알현하고 안의를 폐치(廢置)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극력 말하였는데, 모두 처사가 조목조목 열거한 바와 같았다. 임금은 측은히 여겨, 마침내 명을 내려 그 고을을 회복하고 원을 예전같이 두도록 하였다. 고을이 혁파된 지 무릇 9년 만에 복구되니, 이에 현사(縣社)와 현직(縣稷)의 사방 경내가 정비되고 아전과 관하인으로 다른 고을에 나뉘어 소속된 자들도 모두 옛 직책으로 돌아왔으며, 성황(城隍)과 족려(族厲)의 귀신도 다 제사를 받아먹게 되었다.

처사는 임술년(1742, 영조 18) 9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57세였다. 그해 9월 모일에 현 남쪽 엄전동(嚴田洞) 오좌(午坐)의 벌에 안장되었다. 초취(初娶)는 정씨(鄭氏)로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인데, 1남 정전(廷銓)을 낳았으나 그 아들은 일찍 죽었고, 1녀는 선비 아무에게 출가했다. 후취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1남 택전(宅銓)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지금 나이 여든 살이다. 임금이 널리 국중에 은혜를 베풀어 선비나 평민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작위를 내렸으므로 이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급을 얻었다. 두 딸은 사인(士人) 아무와 아무에게 출가했다. 택전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종한(宗漢)은 정전의 양자가 되었고, 차남은 천한(天漢)이며, 손자는 아무와 아무이다.

! 예로부터 충의(忠義)의 선비치고 어찌 사직을 편안케 하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지 않은 적이 있었겠는가. 일개 현을 미루어서 천하와 국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그 제단의 제도에 등급의 차별이 있고 제물의 수효에 더하고 덜함은 있을망정, 신령과 사람이 의지하는 대상인 점에서는 원래 다름이 없다. 진실로 이미 없어진 뒤에 다시 존속하도록 도모할 수 있었다면, 어찌 혹시라도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이라 해서 그의 충신(忠信)을 하찮게 볼 수 있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저 옛날 무신년에 / 粵昔戊申

안음(安陰 안의(安義)의 옛 이름) 사직 없어졌네 / 安陰社亡

역적 나온 까닭으로 / 凶渠之故

그 태생지 증오한 탓 / 癉厥胎鄕

땅덩이가 더럽혀지고 말았으니 / 土壤遂醜

백성들 이 무슨 재앙인가 / 凡民何殃

신령과 사람 모두 의지할 곳 없이 / 人神無依

아홉 해가 바뀌었도다 / 九換星霜

임금께서 널리 은혜 내리사 / 王降沛澤

피비린내 단번에 씻어 내니 / 一滌腥衁

산은 높고 물은 맑고 / 山高水淸

초목조차 빛 되찾았네 / 草樹回光

사직단 고쳐 쌓아 / 靈壇改築

하늘 양기(陽氣) 다시 받고 / 復受天陽

글 읽는 노래 드높아라 / 絃歌增蔚

석전(釋奠) 제물 향기롭네 / 亦奉苾薌

이 누구의 공이런가 / 云誰之功

처사 집중(執中) 그 아니냐 / 處士執中

태수가 명() 지으니 / 太守作銘

참여만도 영광일레 / 亦與有榮

 

 

[D-001]어제표충윤음(御製表忠綸音) : 정조 12(1788)에 무신란(戊申亂) 평정 1주갑(周甲)을 맞아 당시의 공신들과 그 자손에게 내린 윤음을 편찬한 것으로, 1책이다. 그중에 제도계문포상인(諸道啓聞褒賞人)’이라 하여 포상자 명단이 실려 있다.

[D-002]영종대왕(英宗大王)께서 ……  : 영조 4(1728)에 이인좌(李麟佐) · 정희량(鄭希亮) 등이 일으킨 난을 평정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3]존휼(存恤)이 자손에게까지 미쳤으니 : 존휼은 방문하여 문안하고 음식을 하사하는 것을 말한다. 정조실록 12 3 23일 조에, 경상 감사의 장계에 따라 무신란 때 공을 세운 안의(安義) 선비 이성택(李聖擇) 등을 표창하고 그 자손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도록 명하였다고 했다.

[D-004]평강현(平康縣)의 지사(知事) : 평강현은 지금의 강원도 평강군이다. 지사는 조선 초기에 현을 맡아 다스리던 장관(長官)으로, 나중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D-005]동춘당(同春堂) …… 했다 : 송준길(宋浚吉 : 1606~1672)은 호란(胡亂)이 나자 1637년 초에 피난차 안의현에 내려와 원학동(猿鶴洞) 1년 가까이 거주한 적이 있다. 同春堂續集 卷6 附錄1 年譜 그 당시 이웃 마을에 살았던 이성택의 고조가 실질적으로는 송준길을 위해 숙식을 제공했던 듯하다.

[D-006]민진원(閔鎭遠) : 1664~1736. 송준길의 외손으로 노론의 영수로 활약했다.

[D-007]이병상(李秉常) : 1676~1748. 소론 배척에 앞장섰으며,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봉조하(奉朝賀)는 종 2 품 이상의 퇴임 관리에게 예우 차원에서 주는 벼슬이다.

[D-008]조도빈(趙道彬) : 1665~1729. 우의정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힘썼다.

[D-009]신축년의 무옥(誣獄) : 1721년 경종(景宗)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 사이에 일어난 옥사로, 그해인 신축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임인년(1722)까지 이어졌다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자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사대신이 주장하여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자 소론의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등이 반대하고 목호룡(睦虎龍)이 사대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사대신 이하 노론 일파들이 대거 실각한 사건을 말한다.

[D-010]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  6 품 무관직으로 지방 수령이 겸임했다. 안의 현감은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D-011]5000 : 연암제각기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D-012]김재로(金在魯) : 1682~1729. 영의정을 지냈다. 노론의 선봉장으로,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도 공로가 컸다.

[D-013]후토씨(后土氏) …… 입니까 : 후토씨와 구룡씨는 모두 토지를 맡아 다스리는 신을 이른다.

[D-014]선성(先聖)과 선사(先師)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무릇 처음 학교를 세웠을 때에는 반드시 선성과 선사께 석전제(釋奠祭)를 올린다.”고 하였다. 선성과 선사로 제향(祭享)된 인물들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다. 연암제각기(燕巖諸閣記)에 수록된 이본 중의 한 대목으로 보아, 여기에서의 선성은 공자(孔子)를 가리키고 선사는 안회(顔回) 이하 공자의 제자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D-015]조가(朝歌) …… 않았습니다 : 음악을 금기시했던 묵자(墨子)는 고을 이름이 조가(朝歌)라는 것을 알고는 수레를 돌렸으며, 효자로 유명한 증자(曾子)는 승모(勝母)라는 이름의 고을을 만나자 그 고을에 들어가지 않았다.

[D-016]현사(縣社)와 현직(縣稷) : 각각 현의 토신(土神)을 모신 곳과 곡신(穀神)을 모신 곳을 말한다.

[D-017]사방 경내가 정비되고 : 연암제각기에는 그다음에 공자로부터 안회(顔回)와 증삼(曾參) 이하가 모두 그 위판(位版)을 복구하였다.自孔子顔曾以下 皆復其位矣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D-018]족려(族厲) : 후사가 끊긴 대부(大夫)의 신령을 이른다. 禮記 祭法

[D-019]초취(初娶) …… 후손인데 : 원문은 初娶鄭文獻公後인데, 중편연암집이나 여한십가문초에는 初娶鄭氏로만 되어 있다. 양자를 절충하여 初娶鄭氏 文獻公後가 되어야 문리가 순탄해진다.

[D-020]임금이 …… 얻었다 : 1794년 정조가 자신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나이 일흔 이상 된 전국의 노인들에게 가선(嘉善) · 통정(通政) 등의 작위를 내리기로 하고 그 대상자를 보고하도록 하여 안의현에서도 보고를 올려 50여 명이 그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21]사직을 ……  : 원문은 社稷’ 2자뿐으로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여한십가문초 安社稷으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2]어찌 …… 있겠는가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는 열 집밖에 안 되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나처럼 충신한 사람이 있을 터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라고 하였다.

[D-023]하늘 …… 받고 : 사직단은 하늘의 양기를 받기 위해 지붕을 만들지 않는 법이다. 禮記 郊特牲

[D-024]태수 : 안의 현감인 연암 자신을 가리킨다.

[D-025]참여만도 영광일레 : 연암제각기에는 이 아래에 從縣社廢興處 鋪述感慨 文氣菀然 凡爲人作遺事而可備一縣一國廢興沿革之故實者 必一縣一國磊落奇偉之士 然幾許不爲世間惡筆所抹殺奄奄無生意哉 處士不幸爲一縣之士 亦幸而得此文 足以不朽千古라는 평어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옛적에 대도(大道)가 행해졌을 때에는 천하의 자식된 자치고 누구나 안색이 부드럽지 않은 자 없고, 그 언성이 즐겁지 않은 자 없고, 그 기()가 다소곳하지 않은 자 없고, 그 용모가 온순하지 않은 자 없고, 부모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부지런히 하지 않음이 없고, 부모의 봉양에는 가까이 나아가지 않음이 없고, 부모의 상사(喪事)에는 슬픔을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와 같은 시대에는 천하에 효자가 없었으니, 효자가 없었던 것은 효자 아닌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어버이 섬기기를 증자처럼 하면 된다.”

하였다. 이는 증자의 어버이 섬김이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할 직분에 불과해서, 굳이 놀라며 이상하게 여기거나 크게 탄식하며 칭찬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겠는가?

무릇 크게 탄식하여 칭찬하기를,

 

효자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한다면, ‘이런 사람이란 칭찬을 받는 그는 진실로 장차 이 효자라는 명칭에다가 자신의 고통을 감출 것이니, 이는 비단 이런 사람의 불행일 뿐만이 아니라 곧 천하의 불행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으로 하여금 당세에 특이한 존재로 만들어 놓으려 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사람이 천리(天理)의 극치에 직분을 다하는 동안, 그 간절하고 은밀한 사정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능히 살피지 못하는 점이 있으므로, 군자가 부득이 공공연하게 말하고 교훈을 베풀어 천하와 후세에 분명히 밝히게 되는 것이다.

! 후세에 와서는 효자의 정문(旌門)이 어찌 그리도 자주 세워지는 것일까? 나는 효자의 여막(廬幕)을 지날 때마다 송구스러워 발이 머뭇거려지면서 효자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 증() 지평(持平) 예군(芮君) 같은 이는 어째서 칭찬하는 것인가?

군의 휘는 귀주(歸周), 자는 양경(讓卿)이니, 계통은 주() 나라 사도(司徒) 예백만(芮伯萬)으로부터 나왔다. 휘 낙전(樂全)이 고려 때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의 관직을 지내고, 비로소 의흥(義興) 고을 부계(缶溪)로 본관을 삼았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 휘 난()은 예조 참의요, 휘 사문(思文)은 병조 참판이요, 휘 승석(承錫)은 이조 참의로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이르고, 휘 충년(忠年)은 경주 부윤(慶州府尹)인데, 이상은 모두 문과 출신이다. 고조의 휘는 경적(景績)으로 봉사(奉事 중앙 관아의 종 8 품 벼슬), 증조의 휘는 응선(應善)이요, 조부의 휘는 귀련(貴連)이요, 부친의 휘는 복림(福林)이다. 모친은 옥천 이씨(沃川李氏) 종신(宗信)의 따님이다.

군은 숭정(崇禎) 기묘년(1639, 인조 17) 모월 모일에 상주(尙州) 회룡리(回龍里)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차분하고 얌전하여 같은 무리 중에서 뛰어났으며, 같은 군()의 통례(通禮) 이원규(李元圭)에게 글을 배웠다. 뜻을 독실히 하고 힘써 행하며, 영달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위해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당도하여, 장차 시험장에 들어가려다가 통례의 부음을 듣고서 그날로 돌아와 상복을 입었다. 드디어 은거하여 뜻을 높이 가지며, 금산(金山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금산동)의 북쪽에 서실을 짓고 그 거처를 모초(慕初)’라 이름 지었다. 경전(經傳)을 구명(究明)하고 산수(山水) 속에서 마음을 즐겁게 하면서 세속의 재미에 대해서는 담박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당연히 힘써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충성과 신의와 학문이요, 당연히 경계해야 할 것이 세 가지이니 여색과 싸움과 이득이다.人之所當勉者三 忠信學 所當戒者三 色鬪得

하고 손수 써서 스스로 좌우명으로 삼았다. 또 말하기를,

 

남들 말이 아무가 어질다 하면, 그 부모들은 아들이 어질지 못할까 하여 항상 일깨워 주고, 부모가 내 자식은 효자다 하면 그 아들은 불효할까 하여 항상 두려워한다면 그 가도(家道)는 대체로 괜찮다 할 것이다.”

하였다. 또 글을 지어 아들들을 훈계했는데, 그 제목은 모사(慕思)’, ‘무은(無隱)’ 등이었으니 모두가 실학(實學 실천을 중시하는 참학문)이었다.

군은 숙종 무자년(1708, 숙종 34) 모월 모일에 죽었다. 모월 모일에 감문산(甘文山) 북쪽 해좌(亥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상산 김씨(商山金氏) 이명(以鳴)의 따님으로 3 2녀를 낳았다.

군이 죽은 뒤 수십 년에 그 고장 인사들이 군을 지극한 효자라 칭송하며 마땅히 표창할 만하다고 하여, 계유년(1753, 영조 29)에 감사를 통해서 임금께 사뢰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5 품 벼슬)이란 증직이 내려졌다.

그 증손 아무가 현 고부 군수(古阜郡守) 홍원섭(洪元燮)의 서한을 가지고 와서 묘갈명을 청하였다. () 대제학 남공 유용(南公有容), 증 대제학 이공 진형(李公鎭衡), 규장각 직제학 심공 염조(沈公念祖)가 모두 글을 지어 그의 효성에 감응한 특이한 사적을 기록했으며, () 참찬 유공 최기(兪公最基)는 군의 묘지(墓誌)를 지어 그 언행을 자세히 차례로 서술했으니, 모두 징빙이 될 만하다.

대개 군의 어버이 섬김은 제 몸을 제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젖 먹을 때로부터 장례와 제사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고 공경하고 예법을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친척들이 다 감화되었으며, 심지어 신명(神明)에게 통하고 조수(鳥獸)까지도 느끼게 하였다. 이 점을 들어 온 고을에서는 지극한 효자라고 군을 칭송하게 되었으나, 군이 스스로 마음 갖는 것으로 말하면, ‘나는 자식된 직책에 있어 그 분수를 다하지 못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어느 겨를에 감히 어버이를 잘 섬겼다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덩달아 대중에게 외치기를 이 사람이야말로 효자다, 효자야!’ 한다면, 역시 증자가 어버이를 섬겼던 의리와는 다르다 할 것이다. ()은 다음과 같다.

 

대개 소인이 부모 사랑하는 일은 있어도 / 蓋有小人而愛親

군자가 제 몸 제 것으로 여겼단 말 못 들었소 / 未聞君子而私其身

부모에게서 받은 살 한 점 터럭 한 올 / 一膚一髮

반 발자국 순식간이라도 / 跬步瞬息

빗나가면 방향 잃고 / 橫之則無方

곧추세우면 끝이 없네 / 竪之則無極

눈 속에 죽순 돋고 / 筍可雪抽

얼음물에 잉어 뛰니 / 鯉可氷躍

혹시라도 마지못해 한다면 / 有或俛黽

신명(神明)이 순응 않네 / 神不爾若

저 사나운 호랑이가 / 彼䯱髵者

사슴 물어 바쳐 주니 / 含鹿來効

남들은 이적(異蹟)이라 칭송하지만 / 人所稱異

그대에겐 어찌 여한(餘恨)이 없으리오 / 在君何恔

효도란 말 들먹이어 / 毋言其孝

그 마음을 아프게 마소 / 以戚其心

시로써 명()을 새기노니 / 我刻銘詩

뜻을 같이하는 이들은 잠계(箴戒)로 삼으소 / 同好爲箴

 

 

[C-001] …… 묘갈명 : 예귀주(芮歸周) 9세손 예종선(芮鍾璿)이 편한 모초재실기(慕初齋實紀) 1에는 묘지명(墓誌銘)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약간의 자구 차이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본문 중에 묘갈명을 청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원래 묘갈명으로 받았던 글을 묘지명으로 바꾸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모초재실기에는 정종로(鄭宗魯)가 지은 별도의 묘갈명과 유최기(兪最基)가 지은 별도의 묘지(墓誌)가 있다. 또한 모초재실기에 실린 연암의 글 말미에는 聖上十六年壬子月日 通訓大夫安義縣監潘南朴趾源撰이라고 명기(明記)되어 있어, 이 글이 179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D-001]그 용모가 …… 없고 : 예기 제의(祭義)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효자는 반드시 부드러운 기()를 지니고, 부드러운 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즐거운 안색을 하고, 즐거운 안색을 한 사람은 반드시 온순한 용모를 갖춘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고 하였다.

[D-002]부모에 …… 없고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좌우에 가까이 나아가 봉양하며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죽을 지경이 되도록 힘든 일에 부지런히 종사한다.左右就養無方 服勤至死고 하였다.

[D-003]부모의 …… 없었다 : 논어 자장(子張)에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은 슬픔을 극진히 하는 데 그칠 따름이다.喪致乎哀而止라고 하였다.

[D-004]어버이 …… 된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말이다. 증자가 그의 부친을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었으며, 남에게 음식을 주기 좋아하는 부친을 위해 상을 치울 때에도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지 여쭈었고,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증자의 아들은 증자를 봉양할 때 반드시 술과 고기를 갖추기는 했으나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지 여쭙지 않았고 남은 음식이 있어도 그것을 나중에 또 내놓을 속셈으로 없다고 답했다. 맹자는 증자의 아들처럼 하는 것은 부모의 몸만 봉양하는 것養口體이요, 증자처럼 해야 그 마음을 봉양하는 것養志이라고 하면서, 위와 같이 말하였다.

[D-005]천리(天理)의 극치 : ()를 가리킨다.

[D-006]예백만(芮伯萬) : 춘추 시대 예국(芮國)의 군주伯爵, 성은 희()요 이름이 만()이다. 春秋左氏傳 桓公3 그 선조인 예백(芮伯)이 주() 성왕(成王) 때 육경(六卿)의 하나인 사도(司徒)가 되었다. 書經 顧命 예백의 후예들이 나라 이름으로써 성씨를 삼았다.

[D-007]경적(景績) : 모초재실기 중의 의흥예씨세계도(義興芮氏世系圖)와 연암이 지은 묘지명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관련 기록에는 대적(大績)’으로 되어 있다.

[D-008]통례(通禮) 이원규(李元圭) : 통례는 궁중 의식을 관장하는 통례원(通禮院)의 정 3 품 벼슬이다. 이원규의 호는 서곡(鋤谷)이다.

[D-009]산수(山水) : 원문은 山林으로 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이본에 따라 山水로 고쳐 번역하였다.

[D-010]세속의 재미 : 원문은 世味인데, 이는 공명을 이루고 벼슬하고 싶은 욕심을 이른다.

[D-011]손수 …… 삼았다 : 원문은 手書以自警인데, 모초재실기 중의 유최기(兪最基)가 지은 묘지(墓誌)’에는 手書二十字以警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유최기가 연암과 똑같이 인용한 좌우명은 모두 18자로, ‘所當戒者 人之所當戒者로 되어야 20자가 된다. 모초재실기 1 잡저(雜著) 손수 20자를 써서 좌우명을 삼다.手書二十字以警란 제목의 글이 있으나, 내용은 판이하다.

[D-012]남들 …… 것이다 : 모초재실기 1 잡저(雜著) 자도(自道)’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D-013]모사(慕思) : 원문은 思慕로 되어 있으나. 모초재실기 1 잡저에는 제목이 慕思로 되어 있으며, 돌아간 부모를 그리워하는 시이다.

[D-014]무은(無隱) : 모초재실기 1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숨기면 허물을 고칠 수 없게 되고 악을 없앨 수 없게 된다.隱則過不至改 惡不至銷고 하면서, 오륜의 실천에 있어서 숨김 없음無隱의 공덕을 예찬한 글이다.

[D-015]감문산(甘文山) …… 지냈다 :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있는 산이다. 이 부분이 모초재실기에는 初葬甘文山 後移窆于回龍里로 되어 있는데, 이는 후손이 나중에 고친 듯하다.

[D-016]아무 : 모초재실기에는 수겸(秀兼)’으로 되어 있다.

[D-017]홍원섭(洪元燮) : 1744~1807. 자는 태화(太和), 호는 태호(太湖),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충주 목사를 지냈으며 고문(古文)을 잘 지었다. 연암과 친교가 있었다. 연암집 4에 그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에 차운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D-018]대제학 남공 유용(南公有容) : 모초재실기에는 參判洪公梓로 되어 있다. 실제로 모초재실기에는 남유용의 글이 없으며, 홍재(洪梓)의 글만 있다. 慕初齋實紀 卷1 孝行帖追錄

[D-019]심공 염조(沈公念祖) : 모초재실기에는 그다음에 今大提學吳公載純이 추가되어 있다.  모초재실기에는 심염조의 글은 없고, 오재순과 이진형의 글만 있다. 慕初齋實紀 卷2 孝行帖追敍

[D-020] …… 하였다 : 모초재실기에 의하면 예귀주는 세 살 때부터 이미 부모를 경애할 줄 알아 젖을 먹을 때에도 무릎을 꿇고 젖을 빨아 먹었다고 한다. 부모를 위해 노루 고기를 구했더니 호랑이가 노루를 물어다 놓기도 하고, 꿩 고기를 구했더니 꿩이 스스로 날아왔다고 한다.

[D-021]증자가 …… 의리 : 연상각집에는 맹자가 증자에 대해서 효라고 칭찬했던 의리孟子所嘗稱孝於曾氏之義라 되어 있다.

[D-022]반 발자국 순식간이라도 : 모초재실기 1 무은(無隱)에서 한순간도 간사하게 꾸미는 태도一息私僞之態가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D-023] …… 뛰니 :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소개된 효자 맹종(孟宗)과 왕상(王祥)의 고사를 말한다. 맹종은 오() 나라 사람으로 모친을 위해 죽순을 구했더니 겨울인데도 죽순이 돋았다고 하며, 왕상은 진() 나라 사람으로 계모를 위해 생선을 구하고자 얼음을 깨고 물에 들어갔더니 잉어가 뛰어올랐다고 한다.

[D-024]그대에겐 …… 없으리오 : 부모에 대한 효를 다했다고 후련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좋은 목재로 관곽(棺槨)을 두텁게 만들어 죽은 이의 피부에 흙이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 마음에 어찌 후련하지 않겠느냐.於人心 獨無恔乎고 하였다.

[D-025]뜻을 …… 삼으소 : 모초재실기에는 이 다음에 聖上十六年壬子月日 通訓大夫安義縣監潘南朴趾源撰이란 내용이 추가되어 있고, 운산만첩당집에는 이 뒤에 또 老子云 六親不和 有孝慈라는 평어가 추가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왕씨(王氏)가 고려 시대에는 다 공족(公族 왕족)이었는데, 나라가 바뀌자 자기네끼리 서로 공포에 떨어 성()을 변경하고 도피하여 숨어 살았으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옥씨(玉氏), 금씨(琴氏), 마씨(馬氏), 전씨(全氏), 전씨(田氏) 등 다섯 성에 왕씨들이 많이 숨어들었다. 우연히 들에서 서로 만나면 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러 주고받기를,

 

()을 찬 저 사람은 근본을 잊지 않네.’

거문고는 있어도 줄이 없으니 벙어리나 마찬가지네.’

꼴 아닌 곡식으로 저 말에겐 밥을 먹이네.’

 사이에 엎디어서 달갑게 남 밑에 사네.’

하였다. 이는 대개 두려움으로 움츠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은어(隱語)를 만들어 서로 알아차리도록 한 것이라 한다.

우리 왕조에서 참봉이란 관직을 만들어 왕씨를 찾아서 마전(麻田)에 있는 왕씨는 숭의전(崇義殿)을 받들게 하고, 개성(開城)에 있는 왕씨는 현릉(顯陵)을 받들게 하였으니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들이었다. ()는 아무, ()는 아무가 있는데 그 증조 휘 아무, 조부 휘 아무, 부친 휘 아무로부터 군()에 이르기까지 4대를 연달아 모두 현릉 참봉이 되었다. 모친은 울산 박씨(蔚山朴氏) 아무의 따님이다.

군은 숙종 병진년(1676, 숙종 2) 모월 모일에 태어났다. 겉으로는 겸손하여 몸 둘 바를 모르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능히 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실오라기 하나도 빠뜨림이 없었다.

임금이 선죽교(善竹橋)에 거둥하여 어필(御筆)로써 고려 충신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를 기려,

 

일월(日月)같이 밝은 충성 만고에 뻗치리니 / 日月精忠亘萬古

태산같이 높은 절개 포은(圃隱) 선생이로다 / 太山高節圃隱公

 

라 쓰고, 담당자에게 명하여 돌에 새겨 비()를 만들어 다리 입구에 세우게 하였다. 군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그의 종족(宗族)을 거느리고 날마다 비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빗돌을 받치는 귀부(龜趺)가 완성되자 이를 끌어당기는 자가 거의 만 명이었으나, 너무도 무거워서 까딱할 수가 없었다. 비를 세울 날짜는 정해져 있어, 담당자는 그 시기에 대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군이 웃통을 벗고 밧줄을 잡아 호야!’ 하고 한 번 끌어당기자 대중들의 힘이 일제히 솟아나, 돌이 가기를 물 흐르듯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담력과 용맹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장차 비각(碑閣)을 건립할 양으로 주춧돌을 고궁의 터에서 캐어 오려 하자 군은 강개한 어조로 말하기를,

 

이 역사(役事)가 누구를 표창하기 위한 것인데 하필이면 고려 고궁의 대()를 헐어서 한단 말인가!”

하니, 담당자는 말을 못 하고 한참 있다가 탄식하면서,

 

저 사람 말이 옳다.”

하고, 마침내 다른 곳에서 주춧돌을 가져왔다.

고려 왕릉의 제사는 세월이 오래되자 해이해져서, 석물(石物)이 이지러지고, 술 담는 제기(祭器) 등속이 깨지고 금이 갔으며, 겉에 새겨진 갖가지 무늬들이 마멸되어 선명하지 못하였다. 군은 개성부의 유수(留守)에게 간청하고 또 예조에 신고하여, 자리에 가선을 두르고 안석을 원래대로 했으며, 서직(黍稷) 담는 제기에 장식을 하고, 제물을 올리고 술을 땅에 붓고 일어났다가 엎드렸다 하는 것을 모두 의식에 맞게 하였다.

집안이 처음에는 몹시 가난했으나 군이 고생을 거듭하여 푼푼이 모으고,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주린 배도 견디곤 하여, 늘그막에는 살림이 윤택하였으며 자손들을 잘 깨우치고 이끌어서, 크게 재산을 이루어 향리에서 갑부가 되었다고 한다.

병인년(1746, 영조 22) 모월 모일에 죽으니 향년 83세이다. 개성부의 남쪽 봉명산(鳳鳴山) 동녘 기슭 경좌(庚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단양 우씨(丹陽禹氏) 아무의 따님인데, 슬하의 아들은 아무요, 두 딸은 선비 아무와 아무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다섯인데 맏손자 아무는 무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은 전임 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그다음 손자 아무는 진사(進士), 또 그다음 손자 아무도 진사요, 나머지 손자들은 어리다. ()은 다음과 같다.  명은 원고를 잃었다. 

 

 

[C-001]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 운산만첩당집의 목차에는 현릉 참봉(顯陵參奉) 왕군 묘갈명으로 되어 있고,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 연암집 산고(散稿)에는 여릉 참봉(麗陵參奉) 왕군 묘갈명으로 되어 있다. 후자는 대본에 비해 간략하며 자구의 차이가 적지 않아 초기작으로 추정되지만, 명사(銘辭)를 갖추고 있다.

[D-001]공족(公族)이었는데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이 다음에 本其所自出이라는 말이 더 있다.

[D-002]나라가 바뀌자 : 원문은 鼎革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革除'로 되어 있다.

[D-003]걸어가면서 노래를 불러 : 원문은 行歌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04]() …… 않네 : 예기 옥조(玉藻) 옛날의 군자는 반드시 옥을 찼다.古之君子必佩玉고 하였다. 여기서의 군자(君子)는 왕이나 귀족을 뜻한다.

[D-005]남 밑 : 다른 사람의 아래에 있다는 말로서, 사람 인() 아래에 임금 왕()이 있는 전씨(全氏)’ 성을 가리킨다.

[D-006]대개 …… 만들어 : 원문은 蓋不能無畏約 爲隱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久畏約 故爲隱으로 되어 있다.

[D-007]왕씨를 찾아서 : 원문은 求王氏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求王氏後로 되어 있다.

[D-008]숭의전(崇義殿) : 조선 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과 일곱 임금, 즉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1397(태조 6)에 경기도 마전현(麻田縣)에 왕건의 묘()를 세운 뒤, 1399(정종 1)에는 고려 태조와 일곱 임금을 제사 지내고, 1542(문종 2)에는 이곳을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족의 후손들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D-009]현릉(顯陵) : 고려 태조 왕건의 능으로 개풍군(開豐郡)에 있다.

[D-010]모두 …… 후손들이었다 : 원문은 皆太祖後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獨皆太祖後로 되어 있다.

[D-011]() …… 있는데 : 원문은 有諱某字某로 되어 있으나, 그러면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돌출한 셈이 되어 문리가 순탄하지 않다. 아마 초서로  자가  자와 유사하므로, ‘ 자를  자로 잘못 판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의 휘는 아무, 자는 아무인데로 번역되어야 한다.

[D-012] …… 되었다 : 이 부분이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여릉 참봉이다. 부친의 휘는 아무인데 급제하였고, 조부의 휘는 아무이다.麗陵參奉 考諱某 及第 祖諱某라고 되어 있다.

[D-013] …… 같지만 : 원문은 無所措躬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4]사물을 종합하고 정리하여 : 원문은 綜理事物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綜密投會로 되어 있다.

[D-015]임금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영종(英宗)’으로 되어 있다. 영조(英祖)를 가리킨다. 1740(영조 16) 9월에 영조가 개성에 거둥하여 과거를 열고 성균관에서 알성례(謁聖禮)를 행한 후 선죽교(善竹橋)에 정몽주(鄭夢周)를 추숭하는 비를 세우게 하였다.

[D-016]어필(御筆)로써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단지 손수 글을 써서 돌에 새겼다.手書刻石라고만 되어 있다.

[D-017]장차 …… 하자 : 원문은 將建閣 採礎故宮之墟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有司將建閣 採礎麗墟로 되어 있다.

[D-018]하필이면 …… 말인가 : 원문은 而壤麗氏臺爲哉인데, 운산만첩당집 하풍죽로당집에는 而壤麗氏臺爲閣哉로 되어 있고,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壤麗氏臺爲悅者乎로 되어 있다. ‘고려 고궁의 대()’란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만월대(滿月臺)를 이른다.

[D-019]탄식하면서 : 원문은 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20]세월이 오래되자 해이해져서 : 원문은 歲久弛墮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吏滋不虔으로 되어 있다.

[D-021]예조 : 원문은 秩宗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禮曹로 되어 있다.

[D-022]자리에 …… 하였다 : 서경 고명(顧命)에 천자가 죽으면 궁중 여러 곳에 가선을 두른 자리를 깔며 안석은 생시와 같이 놓아둔다고 하였다. 원문의 은 자리의 테두리를 천으로 둘러 꾸민 것을 말하고, 안석을 생시와 같이 놓아두는 것을 잉궤(仍几)’라 한다. 주례 춘관(春官) 사궤연(司几筵)에도 무릇 길사(吉事)에는 안석을 새로 바꾸고 흉사(凶事)에는 안석을 그대로 쓴다.凶事仍几고 하였다. 이 부분이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罍雲尊彪 席几純仍 式秩式威 昻頫愀喜로 되어 있다.

[D-023]집안이 …… 가난했으나 : 원문은 家初赤貧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家赤貧으로 되어 있다.

[D-024]군이 …… 모으고 : 원문은 君積苦錙銖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徒手無絲髮綠 能積苦錙銖로 되어 있다.

[D-025]주린 …… 하여 : 원문은 貶腹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6]윤택하였으며 : 원문은 阜潤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稍潤則으로 되어 있다.

[D-027]병인년 …… 83세이다 : 착오가 있는 듯하다. 생년이 숙종 병진년(1676)이므로, 향년이 83세이면 몰년은 영조 34(1758) 무인년이 되어야 옳다.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병인년에 합치되도록 향년이 ‘71로 되어 있다.

[D-028]손자는 다섯인데 : 원문은 孫五人인데,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有孫五人으로 되어 있다.

[D-029]의영고 주부(義盈庫主簿) : 의영고는 호조(戶曹) 소속으로 궁중에서 쓰는 각종 기름과 조미료 등 식품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관청이다. 주부는 종 6 품 벼슬이다.

[D-030]() …… 잃었다 : 성균관대 소장 필사본에는 티끌 모아 태산 같은 항산(恒産) 이루었으되, 누가 알리 그분이 항덕(恒德)도 지녔음을. 덕에는 크고 작음이 없나니, 자손에게 남긴 가업 항상 변함없으리.聚塵成泰恒 孰知厥德恒 德無大小然 遺厥嗣業恒라는 명사(銘辭)가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오호라! 청 나라 사람들이 처음 그 국호(國號)를 세우면서, 우리나라 사신을 겁박하여 잡아다가 기필코 한 번 그 뜰에 꿇리고서 큰 절을 받고자 했다. 이는 틀림없이 온 천하에 소리쳐 떠들기를,

 

조선은 예의의 나라로서 여러 나라들에 솔선하여 우리를 황제로 섬긴다.”

하려는 것이었으니, ! 사신된 자는 이보다 더 사정이 급박할 수 없었다. 그 머리가 잘릴망정 조아려서는 안 되고, 그 무릎이 끊길망정 꿇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진실로 고()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이 사신 노릇 하듯이 하지 아니했다면, 동해(東海) 주변 수천 리의 우리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천하에 대해 스스로 떳떳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의 힘은 족히 심양(瀋陽)을 함락시키고 요동(遼東)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약한 나라의 일개 사신을 이기지 못했고, 그들의 위엄은 족히 몽고의 40여 왕을 굴복시키고 하루아침이 못 걸려서 두송(杜松) 20만 군사를 깨뜨렸지만, 필부의 허리를 꺾어 뜰에 꿇리지는 못했다. 옥쇄를 획득하고 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기세등등하게 하늘로부터 이를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이 저와 같이 용이했건만, 그들이 우리 사신의 절 한 자리 받기란 이와 같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사건이 영토 밖에서 벌어져 국내 사람들이 통쾌하게 직접 본 바 아니었고 몸이 살아서 돌아온 데다가 저들의 서한을 받아 왔다는 혐의를 받았으므로 그 당시에 나라를 욕되게 했다는 논란이 어찌 그칠 수 있었겠는가!

그 뒤 명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천자에게 아뢴 사실과, 중원(中原)의 망한 명 나라 백성들이 당시의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둔 사실을 전문(傳聞)을 통해서 차츰차츰 알게 되자, 국내의 의심이 점점 풀리어 비로소 표창하고 증직(贈職)하는 특전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 적국의 뜰에서 강하고 굳세게 맞선 사적에 대해서는 상기도 국내 사람들이 반신반의해 온 것이 지금까지 140여 년이었다. 이는 당연히 만세가 되어도 공론(公論)에 힘입어 사라질 수 없을 사적이요, 청 나라 황제로서도 덮어 버릴 수 없었던 사적이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확()이요, 자는 여량(汝量)이다. 계통은 선파(璿派)에서 나왔으니, 시조는 왕자 경녕군(敬寧君) ()였다. 부친의 휘는 유인(裕仁)인데, 문과에 급제하고, 함경도 관찰사로서 왜병이 침략했을 때 싸우다 피살되어 예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최씨(慶州崔氏)로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 2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세 살 때에 부친을 여의었다. 장성하자 키는 팔 척이요, 음성은 큰 쇠북을 울리는 것 같았으며, 용력이 절등하여 우뚝한 장수의 재목이었다.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그가 고아로 가난하게 사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 무과(武科)를 권하니, 응시하여 갑과(甲科 첫째 등급)로 합격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제수되었는데, 사나운 범이 금원(禁苑)에 들어오자 공이 쏘아 죽였다. 그리고 적신(賊臣)이 문무백관을 위협하여 대궐 뜰에서 대비를 폐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그 반열에 참여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겨 공에게 병을 핑계 대라 권하자, 공은 성을 내며,

 

병들지 않았다면 참여해야 된단 말인가?”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날이 갈수록 패악하므로 공의 뜻을 떠보려는 자가 있자 공은 사양하기를,

 

나는 어머니가 있으니 감히 그대들을 따르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의심은 말고 다만 노력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정사(靖社)에 미쳐 밀약이 있었다. 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이 공에게 함께 가자고 요청했으나 공은 응하지 않았다. 공이 이때에 어영청 천총(御營廳千摠  3 품 벼슬)을 맡고 있었는데, 박승종(朴承宗)이 평소 공을 믿었으므로 급히 공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대장 이흥립(李興立)과 더불어 모반한다고 고자질하는 자가 있으나, 나는 너를 의심하지 않으니 급히 군사를 돈화문(敦化門 창덕궁 정문) 밖에 모아 비상에 대비하라.”

하자, 공은 드디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오늘은 내가 특장(特將)으로 지휘를 도맡았으니 감히 어기는 자는 베어 죽이리라!”

하였다. 밤에 반정군의 깃발이 돈화문을 향하자 군중이 동요하였다. 외병(外兵)이 있다고 보고하므로, 공은 말을 타고 동으로 향해 서서,

 

내 말 머리만 보고 따르라.”

하였다. 막 공의 자()를 부르려는 사람이 있었으나 공은 짐짓 못 들은 척했는데, 공을 부른 사람은 바로 동성군이었다.

일이 평정되자 여러 공신들이 공을 의심하여 공도 함께 베어 죽이려고 했으나,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그들과 맞서 힘껏 다투면서,

 

가령 이확(李廓)이 진()을 물리지 않았더라면 누가 감히 궁궐로 들어갔겠는가?”

하였다. 연평군이 평산 부사(平山府使)로서 의거를 일으켜 일약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제수되자, 공을 힘껏 보호하여 중군(中軍)을 삼았으며 다시 공을 천거하여 평산 부사를 대신 맡게 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나 박승종은 영의정으로서 처형을 당했는데, 공은 일찍이 그에게 신임을 받던 처지라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어 늘 울적하게 지내면서 뜻을 펴지 못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이 반역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전해 오자, 공은 마침 심리(審理)를 받던 중이었으나, 임금이 급히 불러 접견하고 활과 칼을 내려 주어 출정케 하였다. 저탄(猪灘)에서 적을 막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역적들은 상금을 걸고 공을 잡으려고 서둘렀으나, 급기야 공이 타던 말이 죽어서 물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공이 이미 죽었다고 여겨 마침내 가 버렸다. 공은 흘러가는 시체에 올라타서 죽음을 면하게 되자, 알몸으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군대로 달려갔으나 군중에서는 공을 역적의 첩자로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장만은 공을 특별히 사면하여 선봉장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공로를 세워 스스로 속죄하게 하였다. 드디어 역적을 쳐부수고 서울을 회복하였으나, 그 공로가 의심스럽다고 하여 책훈(策勳)되지 못했다. 외직으로 나가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가 곧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옮겼다.

강홍립(姜弘立)이 만주족(滿洲族)을 인도하고 와서 의주성(義州城)을 함락시키자 인접 고을들도 따라서 와해되었으므로, 관찰사 윤훤(尹暄)이 급히 공을 불러 평양성(平壤城)을 구원하게 하였다. 공은 도중에서 평양성이 이미 함락되고 자산 역시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근거지조차 잃어버려 낭패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격문(檄文)을 띄워 여러 고을 군사를 소집하여 절도사에게로 달려갈 작정이었는데, 김기종(金起宗)이 윤훤을 대신하여 관찰사가 되자, 공이 도중에 기웃거리기만 하고 급히 평양성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베어 죽이려고 했다. 이때 마침 조정에서는 공에게 김덕경(金德卿)과 고한룡(高汗龍)이란 자를 얼른 잡아 없애도록 맡겼다. 이 두 역적은 모두 서쪽 변방의 보잘것없는 역관으로 만주족에게 투항하였는데, 김덕경은 만주족에 의해 임시로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임명된 자였다. 공은 이 두 역적을 사로잡아 스스로 속죄할 것을 청하고는 마침내 계획을 세워 고한룡을 참수하고 김덕경을 사로잡았으며, 강물을 반쯤 건넌 역적들을 공격하여 잡혀가는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오고, 고차 박씨(高遮博氏)를 추격하여 그를 호종하는 기병 두 명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김기종은 손을 잡고 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서로 늦게 안 것이 한스럽소.”

하고, 드디어 만류하여 중군(中軍)으로 삼고 군사에 대한 것을 모두 그에게 위임하였다.

적이 물러가자, 내직으로 들어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외직으로 나가 경원 부사(慶源府使)가 되었다가 곧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옮겼다. 다시 들어와 오위도총부 부총관이 되었고, 또다시 나가 제주 목사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회령 부사(會寧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의 연로함을 들어 사직하고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때 만주족이 이미 심양을 점거하여 자주 산해관(山海關)을 침공하였으며, 몽고의 여러 부족들을 다 복속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교린(交隣)의 도리로써 대우하여 사신의 내왕이 끊이지 않았다. 숭정(崇禎) 9년 병자년(1636, 인조 14)에 만주족은 영아아대(英兒阿代)와 마복탑(馬福塔)을 보내와 서신을 전달했는데, 그 사연이 몹시 패악하고 거만하여, 우리에게 바라는 바가 전날과 아주 달랐다. 그래서 대각(臺閣 사헌부 · 사간원) 및 성균관 유생들이 번갈아 상소를 올려, 그 사신을 베어 머리를 함에 넣어 명 나라 황제께 아뢰자고 요청하니, 영아아대 등은 크게 놀라 숙소에서 뛰쳐나가 말을 빼앗아 타고 달려가면서 국서(國書)를 도중에 내버렸다.

이때 사대부들은 모두 심양에 사신 가기를 회피했으므로 마침내 공을 회답사(回答使)에 충원시키니, 서신을 가지고 뒤를 쫓아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때마침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이 공보다 먼저 출발하여 막 용만에 머물러 있다가, 드디어 동행하여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 공들을 접견하고서 더욱 거만하게 굴며 폐백을 선뜻 받아 주지 않고, 사자(使者)를 숙소로 번갈아 보내어 10여 건의 일을 들어 트집만 잡곤 하였다. ()이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 하면서, 먼저 정명수(鄭命壽)를 시켜 오만 가지로 회유하고 협박했으므로, 공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정명수에게 주면서,

 

내 머리를 가지고 가라!”

하였다. 이튿날 만주족 기병 수십 명이 채찍으로 문을 후려치고 크게 호통 치면서,

 

조선 사신은 빨리 예복을 갖추라!”

하자, 공은 탄식하며,

 

오늘에야 죽을 자리를 얻었나 보다.”

하고, 드디어 나공(羅公)과 함께 동쪽을 향해 사배(四拜)를 드려 멀리서 임금께 하직을 고하였다. 그리고 손수 관복을 찢고 사모(紗帽)를 밟아 뭉개뜨려 다시 입지 않을 뜻을 나타냈으며, 스스로 상투를 풀고 머리를 맞대어 두 가닥을 한데 합쳐 묶고 서로 보듬고 누웠다.

()이 장사(壯士)를 보내어 공들을 좌우로 끼고서 내달리어 제단 아래 이르자, 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들이 다 줄지어 서고, 몽고의 수십 만 기병이 제단을 빙 둘러 진을 쳤다. ()은 자황포(柘黃袍)를 입고 규()를 잡고 제단에 올라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尊號)를 받고, 국호를 세워 대청(大淸)’이라 하고 숭덕(崇德)’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장사들이 공을 끼고 서자, 공은 즉시 나자빠져 다리를 쭉 뻗고 누웠다. 장사들이 앞을 다투어 그 팔과 다리를 붙잡고 고개를 억누르고 꽁무니를 쳐들고 사지를 들어 땅에 엎어뜨리자, 공은 크게 호통 치며 몸을 뒤쳐 바로 누우며, 앞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누운 채 발길로 그 얼굴을 차서 코가 깨져 피가 터지곤 하니, 이날 구경하던 자들은 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차마 보지를 못했다. 마침내 거꾸로 질질 끌어다 숙소에 가두었다.

이튿날 다시 동교(東郊)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또 공들을 끌고 갔다. 공들은 더욱 사납게 항거하며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니, 정말로 그 사나움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만주족의 여러 신하들이 흔고(釁鼓)하여 대중 앞에 위엄을 보일 것을 청하자, (),

 

저것들이 시방 죽여 달라고 요구하는 판인데, 지금 죽이면 도리어 저놈들의 소원을 풀어 주는 것이 되고, 또 사신을 죽였다는 악명을 무릅쓰게 된다. 그러니 놓아 돌려보내느니만 못하다.”

하였다. 드디어 서한을 만들어 보따리 속에 넣어 주고 기병 100여 명을 시켜 공을 압송하여, 아골관(鴉鶻關)까지 이르러 되돌아갔다. 공들이 비로소 보따리를 점검하고 과연 한()의 서신을 발견하자 놀라며,

 

서신에 새 도장을 찍어 봉했으니 그 내용은 뻔하다. 만일 서신을 떼어봤다가 예전 격식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장차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서신을 여점(旅店)에 놓아두고 말을 달려 돌아와 책()을 벗어났다. 변방에서는 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공들이 적의 뜰에서 절하고 춤을 추었다 했고, 관찰사 홍명구(洪命耈)는 장계를 급히 올려 국경에서 그들을 효시(梟示)할 것을 청했다. 이에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와 성균관 유생들이 모두 상소를 올려 베어 죽이기를 청하므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역설하기를,

 

두 사신을 아직 신문해 보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유독 먼저 베어 죽인단 말인가!”

하여 말감(末減)을 얻었다. 그리하여 공은 선천(宣川)으로 귀양 가고, 나덕헌은 백마산성(白馬山城)을 병사(兵士)로서 지키게 되었다.

한참 뒤에 조정에서는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가 명 나라 황제에게 아뢰는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보고서)을 얻어 보고서야 비로소 공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실상을 알게 되었으며, 양사(兩司)에서는 효수(梟首)하자는 계문(啓聞)을 잠시 정지했다. 그러나 말 많은 자들은 오히려 심 도독이 명 나라 조정에 거짓 보고한 것이라 했다. 급기야 마복탑(馬福塔)이 공들이 여점(旅店)에다 버린 서신을 이유로 몹시 성을 내며 하는 말이,

 

황제가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모시는데 사신된 자는 의당 공손히 예를 행해야 할 것이거늘 이확(李廓) 등은 패악스럽게 난동을 부려 뜰에서 천자를 욕보였으니 어찌 이놈을 당장에 죽여 대국에 사과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따라갔던 역관 신계음(申繼愔) 등이 비로소 속을 털어놓고 원통함을 호소하여 공들의 귀양을 풀게 되었다.

이해 겨울에 만주족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습격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때 공은 모친 최 부인(崔夫人)의 상을 당했으나, 임금은 기복(起復)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포위한 가운데로 들어가 임금을 뵙자, 임금은 공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을 뿐 아니라 친히 왕림하여 위로하고 격려했다. 독전어사(督戰御史) 김익희(金益熙) · 황일호(黃一皓) · 김수익(金壽益) · 이후원(李厚源) · 임담(林墰) 등 여러 공들이 공이 방비하는 데 신기한 계략을 지녔음을 보고, 국사(國士)로서 허여하며, 비로소 전에 심양에 사신 간 때의 일을 믿게 되었다. 포위가 해제되자, 돌아가 최 부인을 장사하기를 요청하였다. 복제(服制)를 마치자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발탁되어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심양에 있을 적에 하도 두들겨 맞아서, 어혈이 들고 속으로 곪아 하체가 마비되었다. 연로하자 시골에 살며 누차 제수받은 직을 사양했다. 현종(顯宗) 을사년(1665, 현종 6)에 집에서 죽으니, 양근군(楊根郡) 북쪽 울업리(鬱業里) 을좌(乙坐)의 벌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흥양 이씨(興陽李氏)로 응배(應培)의 따님인데 3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익장(益章) · 익상(益常) · 익행(益行)이요, 딸은 윤세미(尹世美)에게 출가했다. 익장과 익상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익행은 5남을 두었는데 현() · () · () · () · ()이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등주(登州)에 들어갔다가 마홍주(馬弘周)에게 사로잡혀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는데, 길에서 한 그림을 보니 바로 공들이 굴하지 않은 상황을 그린 것이었다. 이에 앞서 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가 어사 황손무(黃孫茂)를 보내어 공의 절의를 굉장히 칭찬했는데, 이때는 벌써 가도(椵島)가 깨어진 뒤라 그 조서(詔書)는 마침내 전해질 수 없었다. 이로부터 명 나라 천자의 사신은 다시 조선에 오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청 나라 황제가 역대 제왕으로부터 한()이 국호를 세운 때의 일까지를 논술하여 제목을 어제전운시(御題全韻詩)라 했는데, 시는 5권으로 간행되어 천하에 유포되었다. 그 시 속에는, “조선 사신이 절을 아니 하고 유독 틀어졌네.”라는 말이 있고, 친히 주석(註釋)을 자세히 달아 아래와 같이 말했다.

 

태종(太宗)이 이미 존호를 받았는데, 조선 사신 이확과 나덕헌이 유독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뭇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사신이 무례한 것은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나에게 맹약을 무너뜨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이니, 짐은 끝내 한때의 분풀이로 그 사신을 죽이지 않으련다. 그러니 이를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그리고 곧 이확 등을 돌려보냈다.”

거기에서 태종이라 일컬은 자가 한()이었다.

지금 임금 3(1779)에 특명으로 그 책을 구입해 들여오게 하여 어람(御覽)하고는 가상히 여기고 탄식한 다음, 이확의 집 문에 정표(旌表)하도록 명하고 시호를 충강(忠剛)이라 내렸다.

오호라! 이는 어찌 공들에 대해 백 년 동안 내려온 의심이 하루아침에 통쾌히 밝혀진 것일 뿐이겠는가? 천하로 하여금 만세토록 우리 조선만이 홀로 당시에 만주족을 황제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더욱 의롭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드디어 이를 위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우리 선왕에게도 / 維我先王

위에 임금 있었나니 / 亦維有君

대명(大明)의 천자님은 / 大明天子

우리 임금의 임금일레 / 我君之君

()이 천명 받기 전엔 / 淸未受命

이웃의 강국일 뿐이었는데 / 卽我强隣

요동 심양 점령하고 나서는 / 入據遼瀋

창 휘두르고 사방으로 눈 부릅뜨니 / 揮戈四瞋

악라(鄂羅)라 회회(回回) / 鄂羅回回

두이백특(杜爾伯特)이라 / 杜爾伯特

찰뢰(扎賴)라 옹우(翁牛) / 扎賴翁牛

오주(烏珠)라 토묵(土黙)들이 / 烏珠土黙

모두 신하로 자처하자 / 莫不稱臣

더욱 강경하고 오만해져 / 益强以傲

가한(可汗)이란 칭호 부끄러워 / 羞稱可汗

황제 칭호 넘보려네 / 謀僭大號

범 같은 우리 장수 / 我有虎將

이확(李廓)이요 자는 여량(汝量) / 曰廓汝量

사신으로 저들 관사에 묵으니 / 聘在彼館

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元不忘喪

제아무리 황제라 자처해도 / 彼雖自帝

꿈속에 배부른 격 / 若飽于夢

공의 절을 꼭 받아서 / 必借公拜

군중에게 과시하려 했네 / 以誇其衆

변발에다 붉은 모자 / 辮髮朱帽

부리부리한 눈에 귀신 같은 이빨로 / 焰瞳鬼齶

앞뒤로 끼고 몰아 / 前擁後驅

번갯불에 산 무너지듯 / 若霆摧嶽

청이 황제 노릇 할지 못 할지 / 淸之帝不

공의 절 한 번에 달렸는데 / 係公一俯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서 / 撑宙亘宇

기둥처럼 굳게 박혔네 / 確植如柱

나의 목은 토제 인형이요 / 項領土梗

등과 배는 옹기나 마찬가지 / 腹背瓮盎

창자를 베건 위장을 도려내건 / 屠腸刳胃

네 멋대로 실컷 배를 채우려무나 / 任汝飫脹

오직 이 무릎만은 간직하여 / 獨保此膝

천하 위해 굽히지 않으니 / 爲天下伸

저 역시 의()에 부끄러워 / 彼亦赧義

제 신하에게 자중하게 하였네 / 以儆厥臣

장순(張巡) 허원(許遠)처럼 죽지 않고 / 巡遠不剮

소무(蘇武) 장건(張騫)처럼 살아 오니 / 武騫生還

국론이 물 끓듯이 / 國言沸騰

입 달린 자 모두들 탓하고 헐뜯네 / 喙喙郵訕

적에게 아양 떨어 / 謂公媚敵

절 올리고 춤췄으니 / 跳躍拜舞

진실로 이런 놈은 / 洵若斯者

목을 베어야 한다 했네 / 其咽可斧

살아서건 죽은 뒤건 / 于存于歿

업적과 명성 더럽혀지니 / 跡穢名衊

황하 물 끌어다 세숫물 삼은들 / 挽河爲盥

누가 대신 씻어 주리 / 誰爲滌之

화산(華山) 돌 깎아서 송곳을 만든들 / 斲華爲觿

누가 대신 찔러 터뜨려 주며 / 誰爲摘之

깜깜하고 암담한데 / 幽昧暗黮

누가 대신 밝혀 주리 / 誰爲晳之

청은 이제 사대가 되어 / 淸今四葉

건륭이라 연호 세우고 / 號登乾隆

황제 몸소 시가 지어 / 親作歌詩

조상 공덕 찬송했네 / 頌厥祖功

공이 절 아니한 걸 의아해하며 / 訝公不拜

뜻이 유독 틀어졌다 했으니 / 謂志獨乖

이 한 말 얻기란 / 獲此一言

하늘 오르기 어려움과 같네 / 若天難階

시의 주석(註釋) 살펴보면 / 觀其所註

응당 공의 뼈를 가루로 만들었을 텐데 / 理當粉骸

패역(悖逆)하다 꾸짖은 건 / 詈公悖常

공에게는 의용(義勇)일세 / 卽公義勇

제 아량 자랑이지 / 自述宏度

공을 칭송한 것 아니고 / 非爲公頌

대서특필한 것도 / 大書特書

공을 총애한 것 아니라 / 非爲公寵

누가 글 올려 황제 구워삶았으며 / 孰章賂帝

누가 함께 달래고 권했기에 / 孰與慫慂

어찌 한 번 죽임 아끼어 / 胡靳一殺

백 년 동안이나 공을 해쳤나 / 刻公百年

곧은 일은 펴지는 법 / 無直不伸

의심나면 하늘에 물어보소 / 可質蒼天

우리 왕조 역대의 법도는 / 我聖家法

오랑캐 물리치고 중화(中華)를 받드나니 / 攘夷尊周

동해 주변 삼천리 우리나라 / 環東爲國

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一部春秋

공과 같은 신하는 / 有臣若公

오랜 세월 지났어도 어제런 듯하여 / 曠世如昨

태상시에 명 내리고 / 爰命太常

정부 관각 불러다가 / 政府館閣

글자 살펴 시호(諡號) 정하고 / 考文選號

굳센 넋을 정표(旌表)하니 / 以旌毅魄

작설(綽楔)이 엄연할사 / 綽楔有儼

이름과 작위 높이 걸렸구려 / 揭名列爵

현저한 보답 융숭하였으니 / 顯報旣崇

저승으로부터 되살아나서 / 九原可作

이 크고 아름다운 비석을 본다면 / 視此豐珉

공의 낯빛에 부끄럼 없으리라 / 色庶無怍

 

 

글 전체가 의심할 의()’ 자로써 안건(案件)을 삼았다. 사건에 대한 서술이 기발하고 변화가 많으니, 사마천(司馬遷)의 진수를 터득했다. () 역시 극도로 기이하고 전아하여, 한창려(韓昌黎 한유(韓愈))를 배웠으면서도 거기서 환골탈태하여 묘경(妙境)을 얻었다고 하겠다.

 

 

이확(李廓) · 나덕헌(羅德憲)의 성명이 일통지(一統志)에 보이기는 하지만, 어제전운시가 나오기 이전에는 특별히 표창한 사람이 없었다. 그 때문에 백여 년 동안 적막하게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당시 만에 하나라도 혹시 마음은 자기 몸을 드러눕게 하고 싶지만 힘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엎드리게 되어, 저놈들이 장차 절을 한 것으로 임시변통으로 인정해 버렸다면 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이는 다행히도 하늘이 공에게 곰과 범 같은 자질을 주어서 이 지경을 견뎌 내게 한 것이다. 그때에 여러 공들도 누군들 척화(斥和)할 생각이 없었으리오마는, 대저 모두 글 짓는 선비들이라 마음은 강하지만 뼈대는 연약하고 외모는 씩씩하지만 체질은 약하니, 비록 절의야 천지에 우뚝 세울 만하고 뜨거운 분노야 우주를 떠받칠 만하다 해도 반드시 용력이 장군과 같이 굳셀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적이 없다.

 

[C-001]가의대부(嘉義大夫) …… 신도비명(神道碑銘) : 가의대부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삼도통제사는 곧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종 2 품의 관직이다. 자헌대부는 정 2 품의 품계이다. 자헌대부의 품계가 추증되었으므로, 품계보다 관직이 낮음을 표시하는 행() 자가 삼도통제사의 관직 앞에 붙었다. 오위도총부는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를 총괄하던 최고 군령(軍令) 기관이고, 도총관은 그 우두머리인 정 2 품의 관직이다. 원문에는 시호가 충렬(忠烈)’로 되어 있으나, 이확(李廓)에게 실제로 내린 시호는 충강(忠剛)’이었다. 正祖實錄 4 11 9, 5 11 20 혹시 그와 고난을 같이하여 함께 증시(贈諡)되었던 나덕헌(羅德憲)의 시호와 혼동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전주 이씨 경녕군파 세보(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권지수(卷之首)에도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말미에 통정대부 행 안의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 박지원 지음通政大夫行安義縣監兼晉州鎭管兵馬節制都尉朴趾源撰이라고 되어 있어,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D-001]두송(杜松) : 명 나라 말기의 장수로 담력과 지혜가 뛰어나 주요 군직(軍職)을 역임하면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1619년에 양호(楊鎬)가 후금(後金)을 공격할 때 그의 주력(主力)이 되어 함께 출전하였으나, 자신의 용맹을 믿고 경솔하게 진격하다 후금의 군대에 크게 패하고 자신도 전사하였다.

[D-002]부명(符命)을 늘어놓으며 : 제왕이 천명을 받은 증거로서 하늘이 보여 주는 상서로운 조짐을 부명이라 한다. 또한 그러한 상서로운 조짐들을 늘어놓으며 제왕을 예찬하는 글도 부명이라 한다.

[D-003]덮어 …… 사적이다 : 원문은 不得掩也인데,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 동문집성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4]선파(璿派) : 전주 이씨(全州李氏)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宗派)를 이른다.

[D-005]경녕군(敬寧君) () : 태종(太宗)과 효빈(孝嬪) 김씨(金氏) 사이에 출생한 왕자이다.

[D-006]응시하여 갑과(甲科)로 합격하여 : 원문은 中甲科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그 앞에 光海中이 더 있다.

[D-007]선전관(宣傳官) : 임금이 행차할 때 호위와 명령 전달 등을 맡던 종 9 품부터 정 3 품까지의 관직이다. 임금을 측근에서 보좌하므로 장차 출세가 보장되는 무반(武班)의 명예로운 요직으로 간주되었다.

[D-008]적신(賊臣)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주도한 이이첨(李爾瞻)을 일컫는다. 중편연암집에는 그 앞에 光海君時가 더 있다.

[D-009]공의 뜻 : 원문의 公意인데, 동문집성에는 公議로 되어 있다.

[D-010]정사(靖社) : 사직(社稷)을 안정시킨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다.

[D-011]동성군(東城君) 신경인(申景禋) : 1590~1643. 무신 신립(申砬)의 아들로, 인조반정에 공로를 세워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책훈(策勳)되고 동성군에 봉해졌다.

[D-012]박승종(朴承宗) : 1562~1623. 광해조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으나, 인목대비 폐비에는 극력 반대했다. 반정이 일어나자 자결했다. 인조반정 직후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나중에 신원(伸寃)되었다.

[D-013]이흥립(李興立) : 박승종과 사돈으로서 그의 추천으로 훈련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반정군(反正軍)에 합세하여 공이 컸으므로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투항했다가 난이 평정되자 자결했다.

[D-014]특장(特將) : 어느 한 방면을 전담하는 독자적인 부대의 주장(主將)을 이른다.

[D-015]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 : 1557~1633.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1등으로 책훈되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D-016]호위대장(扈衛大將) : 인조반정 이후 왕궁의 호위를 강화할 목적에서 설치한 호위청(扈衛廳)의 우두머리인 정 1 품 관직이다. 설치한 초기에는 호위 4()’이라 하여 공신인 이귀 등 4인이 대장이 되어 각기 군관(軍官)들을 거느렸다.

[D-017]공은 …… 처지라 : 원문은 嘗爲其所厚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公嘗爲其所厚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18]뜻을 펴지 못했다 : 원문은 不得意인데, 동문집성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9]이괄(李适) :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李适로 되어 있다.

[D-020]저탄(猪灘) : 마탄(馬灘)이라고도 하며, 황해도 평산의 예성강(禮成江) 상류에 있었다.

[D-021]장만(張晩) : 1566~1629. 인조반정 직후 후금(後金)의 침략에 대비하여 평양에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자 그 우두머리인 도원수(都元帥)에 임명되었다. 1624년 평안병사 겸 부원수(平安兵使兼副元帥)인 이괄의 반란군이 도원수 장만이 주둔하고 있던 평양을 피하여 파죽지세로 남진하자, 장만은 각지의 관군과 의병을 모아 추격하여 마침내 서울 근교에서 격파했다. 그 공으로 진무 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책훈되고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D-022]강홍립(姜弘立) : 1560~1627. 명 나라의 후금(後金) 정벌 요청에 응해 오도도원수(五道都元帥)로서 출정했다가 패하자, 후금에 투항하고 억류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후금의 선도(先導)로서 입국하여 강화도에서 양국의 화의(和議)를 주선했다.

[D-023]윤훤(尹暄) : 1573~1627.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25년 평안 감사로 부임했다. 정묘호란 때 평양을 버리고 성천(成川)으로 후퇴함으로써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어 강화도에서 효수되었다.

[D-024]공은 …… 듣자 : 원문은 道聞平壤已陷 而慈亦失守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앞에  자가 더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5]김기종(金起宗) : 1585~1635.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종사관으로서 무공을 세워 진무 공신 2등으로 책훈되고 영해군(瀛海君)에 봉해졌다.

[D-026]서쪽 …… 역관 : 의주(義州)의 통사(通事)를 이른다.

[D-027]고차 박씨(高遮博氏) : 박씨(博氏)는 만주어(滿洲語)를 음역(音譯)한 관직 이름이고, 고차(高遮)는 만주족의 이름인 듯하다. 병자호란 직후 청 나라의 차사(差使)로 박씨들이 누차 입국한 바 있다. 숙종실록 36 10 7일 조의 주() 박씨(博氏)는 호인(胡人) 군졸의 명목이다.”라고 하였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6 27일 조에도 책문(柵門)을 지키는 청 나라 관원들에게 줄 예물 명단에 박씨(博氏), 가출박씨(加出博氏), 세관박씨(稅官博氏) 등의 관직이 열거되어 있다.

[D-028]기뻐하며 술잔을 나누면서 : 원문은 歡飮인데, 문맥으로 보아 勸飮의 잘못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라고 권하면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D-029]영아아대(英兒阿代) : 용골대(龍骨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백기인(正白旗人)으로, 호부 상서를 지냈다. 조선에 누차 사신으로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淸太宗)의 막료로서 참전했다.

[D-030]마복탑(馬福塔) : 마부대(馬富大 : 또는 馬夫大)라고도 한다. 만주 정황기인(正黃旗人)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왔으며,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의 막료로서 참전했다.

[D-031]회답사(回答使) : 교린(交隣) 관계에 있는 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국서를 보내왔을 때 그에 회답하는 국서를 전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신을 이른다.

[D-032]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 :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후금(後金)과 형제 맹약을 맺고 매년 봄과 가을에 사신을 심양에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봄에 보내는 사신을 춘신사라 하였다. 나덕헌(1573~1640)은 이괄의 난 때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서 공을 세워 진무 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훈되었다. 1636년 춘신사로서 회답사인 이확과 함께 심양에 가 청 태종이 칭제건원(稱帝建元)하는 의식에서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간신히 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 이후 오히려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교동수사(喬桐水使) 겸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를 지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D-033]() : 고대 북방 민족의 족장(族長) 또는 왕()을 일컫던 말로 가한(可汗), (khan)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청 태종을 이른다.

[D-034]정명수(鄭命壽) : 평안도의 천민으로 1619년 강홍립의 군대를 따라갔다가 포로가 되자 잔류하여 신임을 얻었다. 병자호란 때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의 통역으로 입국하여 갖은 횡포를 부렸다.

[D-035]패륵(貝勒)과 팔고산(八固山)과 번자(番子) : 패륵은 청() 종실(宗室)의 봉작(封爵)의 하나이다. 청 종실의 봉작은 친왕(親王), 군왕(郡王), 패륵(貝勒), 패자(貝子)의 순서로 되어 있다. 팔고산은 곧 팔기병(八旗兵)을 이른다. 팔기병은 병졸 300인이 하나의 우록(牛彔)을 이루고, 다섯 우록이 하나의 갑라(甲喇)를 이루고, 다섯 갑라가 하나의 고산(固山)을 이루어, 모두 여덟 고산이 된다. 번자는 형사(刑司)에 소속되어 체포와 형장(刑杖)을 맡은 벼슬아치를 이른다.

[D-036]자황포(柘黃袍) : 뽕나무 즙을 물들여 만든 적황색의 도포로, 수당(隋唐) 이래 황제들의 복색(服色)으로 사용되었다.

[D-037]깜짝 놀라고 혐오스러워 : 원문은 駭惡인데, ‘駭愕의 오류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깜짝 놀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D-038]이튿날 …… 갔다 : 원문은 明日復祀東郊 又擁公等去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明日復擁公等去로 되어 있다.

[D-039]흔고(釁鼓) : 전쟁을 할 때 사람을 죽여 그 피를 북에 바르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두 조선 사신을 죽이자는 뜻이다.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祭纛으로 되어 있고, 여한십가문초에는 祀東郊 又釁鼓로 되어 있다.

[D-040]보따리 속 : 원문은 裝中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公裝中으로 되어 있다.

[D-041]아골관(鴉鶻關) : 요령성(遼寧省) 요양현(遼陽縣)에 있는 관문의 이름이다.

[D-042]() : 요령성의 압록강 부근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 일대에 말뚝을 박아 국경 출입을 통제한 시설물을 이른다. 그곳의 책문(柵門)을 통해서만 사신 왕래와 교역이 이루어졌다.

[D-043]떠들썩하게 이야기하기를 : 원문은 讙言인데, 여한십가문초에는 譁言으로 되어 있다.

[D-044]홍명구(洪命耈) : 1596~1637. 인조반정 이후 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평안 감사로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향해 달려가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D-045]말감(末減) : 가벼운 죄에 처하는 것을 이른다.

[D-046]백마산성(白馬山城) : 평안도 의주(義州) 백마산(白馬山)에 있던 성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지켰던 곳이다.

[D-047]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 : 명 나라 요동도사(遼東都司) 모문룡(毛文龍)의 군대가 후금의 군대에 쫓긴 끝에 국경을 넘어 평안도 철산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주둔하게 되자, 1623년 명 나라는 후일을 도모하려고 가도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모문룡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다. 모문룡이 조정의 명에 따라 요동(遼東)에 출전했다가 실패하고 죽은 뒤, 가도로 도망한 그 잔당 사이에 누차 내분이 일어난 끝에 장사꾼 출신으로 그 딸이 모문룡의 첩이었던 심세괴가 도독이 되었다. 심세괴는 1637년 청 나라와 조선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도독 앞에  자가 더 있다.

[D-048]기복(起復) :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는 것으로,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상중에 벼슬하지 않는 관례를 깨고 특별히 조정에 불러 올리는 제도를 이른다.

[D-049]독전어사(督戰御使) …… 임담(林墰) : 독전어사는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파견된 어사로, 병자호란 때 군 통솔을 위해 특별히 설치한 관직이다. 김익희(金益熙 : 1610~1656)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로서 후일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황일호(黃一晧 : 1588~1641)는 척화파(斥和派)로서,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재임할 때 명 나라를 도와 청을 치려고 최효일(崔孝一) 등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청 나라 병사에게 피살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수익(金壽益 : 1600~1673)은 의주 부윤, 병조 참의, 목사(牧使) 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이후원(李厚源 : 1598~1660)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 3등으로 책훈되고 완남군(完南君)에 봉해졌다. 후일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담(1596~1652)은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D-050]아들은 익장(益章) : 원문은 益章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男益章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51]임경업(林慶業) …… 압송되었는데 : 임경업(1594~1646) 1640년 청 나라가 명 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함에 따라 출전했으나 오히려 명 나라 군대와 협력했다. 이 사실이 탄로 나자 청 나라의 압력으로 국내에서 체포되어 청 나라로 압송되던 도중 해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 표착(漂着)한 뒤 등주(登州)에서 명 나라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 임명되어 병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청 나라가 마침내 북경을 함락하고 명 나라 조정이 남경(南京)으로 후퇴하자, 임경업은 1645년 명 나라의 항장(降將) 마홍주(馬弘周)에게 속아서 붙잡혀 북경으로 압송되었다.

[D-052]황명 열황제(皇明烈皇帝) :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장렬제(莊烈帝) 의종(毅宗 : 재위 1627~1644)을 이른다.

[D-053]황손무(黃孫茂) : 1636년 심세괴가 상주한 내용을 본 명 나라 의종(毅宗)이 우리나라를 표창하는 조서를 내리면서 감군어사(監軍御使) 황손무를 가도(椵島)로 파견했으나, 그 이듬해 내분으로 인해 황손무는 도독 심세괴의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D-054]공의 절의 : 원문은 公節義인데,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에는 公等節義로 되어 있다.

[D-055]조선 : 운산만첩당집, 연상각집, 하풍죽로당집에는 속국(屬國)’으로 되어 있다.

[D-056]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 : 청 고종(淸高宗) 건륭제(乾隆帝)가 지은 것으로, 106()에 맞추어 상평성(上平聲) 15수는 청 나라의 발상(發祥)부터 태조(太祖) · 태종(太宗)의 사적을 다루었고, 하평성(下平聲) 15수는 세조(世祖) · 성조(聖祖) · 세종(世宗)의 사적을 다루었으며, 상성(上聲) · 거성(去聲) · 입성(入聲) 76수는 요() · ()부터 명 나라 최후의 복왕(福王)까지의 사적을 다루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의 어제시집(御製詩集) 4()  47 ,  48 ,  49 권에 수록되어 있다.

[D-057]조선 …… 틀어졌네 : 원문은 朝鮮使不拜獨乖로 되어 있으나 어제전운시에 실린 것과 차이가 있다. 그 전문은 조선 사신이 있었는데, 절을 아니 하고 뜻이 유독 틀어졌네. 가식적으로 명에 대한 예의를 지켜서, 나를 격분시켜 그 무리를 죽이게 하려는 게지.乃有朝鮮使 不拜志獨乖 知爲假守禮 激我戮其儕라고 되어 있다.

[D-058]태종(太宗) …… 돌려보냈다 : 어제전운시의 실제 주와 차이 난다. 그 전문은 태종이 존호를 받고 나서 뭇 신하들에게 선유(宣諭)하니, 모두 삼궤구고례(三跪九叩禮)를 행했으나 유독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이 절을 하지 않았다. 태종이 유시(諭示)하기를, ‘조선 사신이 무례한 경우를 이루 열거하기 힘들지만, 이는 조선 국왕이 원한을 맺으려는 의도를 품고, 짐이 먼저 분쟁의 빌미를 만들어 그 사신을 죽이게 하여 짐에게 맹약을 저버렸다는 악명을 덮어씌우고자 함일 뿐이다. 짐은 종래 한때의 하찮은 분풀이를 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와 같이 쩨쩨하게 굴어 두 나라는 이미 원수지간이 되었다. 전쟁할 때에도 일이 있어 사람을 보내면 역시 보낸 사자를 즉시 죽이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조회(朝會)하러 온 경우이겠는가? 불문에 부치라!’ 하였다. 곧 그 사신을 돌아가게 하면서 서신으로 조선 국왕을 힐책하고, 다시 그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너희 왕이 만약 스스로 죄를 후회할 줄 안다면 응당 자제를 인질로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짐은 즉시 대군을 일으켜 너희의 국경에 닥칠 것이니, 그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였다.太宗旣受尊號 宣諭群臣 皆行三跪九叩禮 惟朝鮮使臣羅德憲李廓不拜 太宗諭曰 朝鮮使臣無禮處 難以枚擧 是皆朝鮮國王有意構怨 欲朕先啓釁端 戮其使臣 加朕以背棄盟誓之名耳 朕從不肯逞一時之小忿 如此瑣屑 卽兩國已成仇敵 戰爭之際 以事遣人 亦無卽戮其來使之理 況朝會乎 其勿問 尋遣其使臣歸 以書詰責朝鮮王 復諭其使臣曰 爾王若自知悔罪 當送子弟爲質 不然 朕卽擧大軍 以臨爾境 雖悔何及乎라고 되어 있다.

[D-059]지금 임금 …… 내렸다 : 정조 2(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가 북경에 체류하던 중 수역(首譯) 이언용(李彦容) 어제전운시 4책을 빌려 와서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귀국 후 서장관 심염조(沈念祖)가 임금에게 보고하여 동지사(冬至使)가 이 책을 구입해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조 3년에 어제전운시의 기록을 근거로 이확과 나덕헌에게 증시(贈諡)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나덕헌과 달리 이확은 그의 고향과 자손을 몰라 어명을 중지했다가, 그 이듬해 심염조의 건의에 따라 재차 증시하도록 명했으며, 정조 5년 이확에게 충강(忠剛)이란 시호가 내렸다. 入燕記 下 6 12》 《全州李氏敬寧君派世譜 卷之首 嘉林君派 七世 廓》 《正祖實錄 3 9 3, 4 11 9, 5 11 20

[D-060]악라(鄂羅) …… 토묵(土黙) : 악라는 곧 악라사(鄂羅斯)로 러시아(Russia)의 음역(音譯)이다. 회회(回回)는 회흘(回紇)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위구르(Uighur)족을 이른다. 두이백특(杜爾伯特)은 내몽골 철리목맹(哲里木盟) 4()의 하나로, 청 나라 초기에 두이백특부(杜爾伯特部)를 세우고 흑룡강성(黑龍江省) 용강도(龍江道)의 동남쪽에 자리잡았다. 찰뢰(扎賴)는 찰뢰(扎賚)라고도 하며 내몽골의 찰뢰특부(扎賚特部)를 이른다. 철리목에 통합되었으며 본거지는 거란(契丹) 땅이다. 옹우(翁牛)는 내몽골의 옹우특부(瓮牛特部)로 만리장성의 고북구(古北口) 동북쪽에 거주했다. 오주(烏珠)는 내몽골의 오주목심부(烏珠穆沁部)로 역시 고북구의 동북쪽에 거주했다. 토묵은 내몽골의 토묵특부(土墨特部)로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남쪽, 성경(盛京)의 변두리에 거주했다. 淸史稿 卷77 52 地理24 內蒙古

[D-061]죽음을 각오한 용사일레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용사는 제 머리가 잘려 잃게 될 것을 잊지 않는다.勇士不忘喪其元고 하였다.

[D-062]변발에다 붉은 모자 : 모두 만주족의 풍습이다.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

[D-063]나의 …… 마찬가지 : 토경(土梗)은 흙으로 빚은 인형으로, 비에 젖으면 무너진다고 하여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옹앙(瓮盎)은 곧 옹기로, 흔해 빠져서 역시 하찮은 물건의 비유로 쓰인다.

[D-064]장순(張巡) 허원(許遠) : 장순과 허원은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관리로,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장순은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허원은 수양 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안녹산의 군대에 맞섰으나, 성이 포위된 지 몇 개월 만에 구원병도 오지 않고 양식도 떨어져 성은 함락되고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 뒤 낙양으로 압송되어, 그들의 회유에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D-065]소무(蘇武) 장건(張騫) : 소무는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武帝) 천한(天漢) 원년(기원전 100)에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들에게 구금되어 회유를 당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았다. 기원전 81년 소제(昭帝)가 흉노와 화친을 하자 19년 만에 한 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은 전한 때의 장수로, 무제 건원(建元) 2(기원전 139)에 월지국(月氏國)으로 사신 가다가 도중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전후 11년 동안 억류를 당하여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았다. 마침내 그곳을 탈출하여 본래의 목적지인 월지국에 갔다가, 한 나라를 떠난 지 13년 만에 돌아왔다.

[D-066]절 올리고 춤췄으니 : 원문 중 拜舞 연상각집에는 抃舞로 되어 있다. 또한 蹈躍 跳躍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跳躍抃舞가 되어, “기뻐 날뛰며 손뼉 치고 춤췄으니로 번역되어야 한다.

[D-067]화산(華山) …… 만든들 : 화산은 중국 오악(五嶽) 중의 서악(西嶽)으로 섬서성(陝西省) 화음현(華陰縣) 남쪽에 있는데, ‘화산지금석(華山之金石)’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금석(金石)이 난다고 한다. 淮南子 地形訓

[D-068]청은 …… 되어 : 명 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이 자결하고, 청 세조(淸世祖) 순치제(順治帝)가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여 북경을 차지한 때부터 쳐서 4대가 된다. 원문의  자가 동문집성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69]하늘 …… 같네 : 논어 자장(子張)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선생님께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은 하늘을 사다리 타고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고 하였다.

[D-070]시의 …… 물어보소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手復詳註 孰與慫慂 自述宏度 非爲公寵 胡靳一劉 刻公百年 寔破積疑 撥露覩天 帝口雖詈 筆則斯揚 公所見乖 允爲國光으로 되어 있다.

[D-071]동해 …… 우리나라 : 원문의  자가 여한십가문초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72]춘추의 의리를 지켜 왔네 : 이 부분의 원문이 연상각집에는 一袞一鉞 曰維春秋로 되어 있다.

[D-073]태상시(太常寺) : 봉상시(奉常寺)의 옛 이름으로 제사(祭祀)와 시호(諡號)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D-074]정부 관각 : 정부는 의정부(議政府)를 이르고, 관각은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봉상시에서 삼망(三望 : 세 가지 시호 후보)과 함께 시장(諡狀)을 홍문관에 보내면, 홍문관에서 삼망을 의논한 뒤 봉상시 관원과 다시 의정(議定)하고, 의정부로 넘겨 서경(署經)하는 절차를 거쳐 시호가 정해진다.

[D-075]글자 …… 정하고 : 조선 시대의 시법(諡法)에서 사용하는 글자는 모두 301자로 그 범위 내에서 시호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세종(世宗) , 주례(周禮)의 시법(諡法)에 나오는 28자와 사기(史記)의 시법에 나오는 194자에다, 의례(儀禮),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을 참조하여 107자를 추가해서 시호로 사용할 수 있게 정했다.

[D-076]작설(綽楔) : 효자(孝子)나 충신(忠臣) 등을 정표(旌表)하기 위하여 문 옆에 세운 대()를 이른다.

[D-077]환골탈태 : 원문은 換脫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78]일통지(一統志) : 청 나라 건륭 29(1764)에 청 고종(淸高宗)의 명에 따라 지어진 지리지(地理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이른다. 이 책 권421 ‘조선조(朝鮮條)’를 보면, “조선 사신 나덕헌 · 이확이 돌아갈 때 서신을 보냈으나, 조선국왕이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D-079]그 때문에 …… 뿐이다 : 원문은 故百餘年寥寥無聞耳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자 앞에 今得此銘 庶可以照耀千古라는 내용이 더 있다.

[D-080]공은 장차 어찌되었겠는가 : 원문은 公將奈何乎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公將奈何奈何乎로 되어 있다.

[D-081]이는 …… 주어서 : 원문은 此幸天賦公熊虎之材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此幸 此何幸으로 되어 있다.

[D-082]그때에 …… 선비들이라 : 원문은 其時諸公 孰不斥和 而大抵皆文儒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其時斥和諸公 大抵皆文儒也로 되어 있다.

[D-083]두려워서 : 원문은 怵然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주공탑명(麈公塔銘)

 

 

주공 스님이 입적(入寂)한 지 6일 만에 적조암(寂照菴)의 동쪽 대()에서 다비(茶毗)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은 온숙천(溫宿泉) 회나무 아래와 거리가 열 발자국도 안 되었다. 밤이면 거기서 늘 빛이 어른거리는데 벌레 등처럼 파랗기도 하고 고기 비늘처럼 하얗기도 하고 썩은 버드나무처럼 까맣기도 했다.

대비구(大比丘) 현랑(玄朗)이 뭇 중들을 거느리고 다비 장소에 둘러서서 두려운 마음으로 재계를 올리고 마음으로 공덕 쌓기를 다짐했더니, 나흘 밤이 지나서 마침내 스님의 뇌주(腦珠 사리) 세 개를 얻어, 장차 부도(浮圖 사리탑)를 세울 양으로 글과 폐백을 갖추어 나에게 명()을 청해 왔다. 나는 본시 불교의 설을 잘 모르나, 그 청이 너무도 간곡하기에 시험 삼아 다음과 같이 물었다.

 

현랑아, 내 예전에 병이 나서 지황탕(地黃湯)을 마셨는데, 약을 짜서 그릇에 부었더니 가는 거품들이 활짝 퍼져, 황금빛 좁쌀들이나 은빛 별들, 물고기 입에서 뽀글대는 물방울이나 벌집과도 같은 거품에 나의 살과 털이 찍혀, 마치 눈동자에 부처가 깃든 것처럼 각각으로 상()을 나타내고 여여(如如)하게 성()을 머금었지. 열이 식고 거품이 그쳐, 모조리 마셨더니 그릇이 텅 비었더라. 예전에 성성(惺惺)했다 한들, 어느 누가 네 스님이 그랬음을 증명하랴?”

현랑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로써 아()를 증명하니 저 상()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므로 나는 허허 웃으며,

 

()으로써 심()을 본다면, ()이 몇이나 있다는 건가?”

하고서, 드디어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붙였다.

 

구월이라 하늘에서 서리 내리니 / 九月天雨霜

나무들 모두 말라 잎이 졌는데 / 萬樹皆枯落

얼핏 보니 맨 꼭대기 나뭇가지에 / 瞥見上頭枝

과일 하나 벌레 먹은 잎에 가렸네 / 一果隱蠹葉

위는 붉고 아래는 누렇고 퍼런데 / 上丹下黃靑

굼벵이가 반은 먹어 씨가 드러났네 / 核露螬半蝕

뭇 아이들 고개 뒤로 젖히고 서서 / 群童仰面立

손을 모아 다투어 따려고 드네 / 攢手爭欲摘

팔매로는 멀어서 맞히기 어렵고 / 擲礫遠難中

장대를 이어 봤자 높아 안 닿네 / 續竿高未及

갑자기 바람 일어 툭 떨어지니 / 忽被風搖落

온 숲을 뒤져도 얻지 못했네 / 遍林索不得

아이는 나무에 도로 와서 맴돌며 울다 / 兒來繞樹啼

부질없이 까막까치 욕해대누나 / 空詈烏與鵲

나는 저 아이들에 비유하노니 / 我乃比諸兒

네 눈에도 응당 나무가 나타나 보였을 터 / 爾目應生木

쳐다보고 없어진 줄 알았을진대 / 爾旣失之仰

굽어보고 주울 줄은 어찌 모르나 / 不知俯而拾

과일이 떨어지면 필시 땅에 있는 법 / 果落必在地

발 밑에 응당 밟힐 터인데 / 脚底應踐踏

하필이면 허공에서 찾으려 드나 / 何必求諸空

실리란 보존된 씨와 같나니 / 實理猶存核

씨를 일러 인()이라 자()라 하는 건 / 謂核仁與子

낳고 낳아 쉴 줄을 모르는 때문 / 爲生生不息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양이면 / 以心若傳心

주공의 탑을 찾아 증거를 삼게 / 去證麈公塔

 

 

부처의 설법 중 비유품(譬喩品)은 온갖 사물의 모양을 곡진하게 그려 내어 고묘(高妙)함을 더욱더 깨닫게 한다. 이 글이 그와 근사하여, 육제(六諦)를 해탈하고 실상(實相)을 원증(圓證 두루 증명함)하니, 결코 대승(大乘) 이하의 구기(口氣 어조(語調))가 아니다.

 

[C-001]주공탑명(麈公塔銘) : ‘()’가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는 사슴의 일종이고, ()는 고라니에 속하여 서로 다르나 글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는 사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그 꼬리가 움직이는 대로 뭇 사슴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사슴 중의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중왕(王中王) 주중주(麈中麈)’라 한다. 또한 그 꼬리인 주미(麈尾)는 고승이 설법할 때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서 손에 쥐는 불자(拂子)로 쓰이는데 이를 승주(僧麈)라 한다. 이 글은 연암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그 시절 연암과 절친했던 김노영(金魯永1747~1797)이 이를 애송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 1783~1843)는 이 글을 불교를 배척하는 작품이라 보았고, 아들 박종채가 이 글을 어느 노승에게 보였더니 그 노승 역시 불교를 배척하는 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아울러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글은 실존했던 고승의 사리탑에 대한 명()이 아니라, 승주(僧麈)를 의인화(擬人化)한 이름의 가상적인 고승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탑명(塔銘)의 형식을 빌려 불교를 비판한 희작(戱作)이 아닐까 한다.

[D-001]벌레 …… 하고 : 원문은 蟲背之綠也 魚鱗之白也인데, 종북소선에는 魚鱗之白也 蟲背之綠也로 되어 있다.

[D-002]썩은 …… 했다 : 썩은 버드나무는 캄캄할 때 빛이 나므로 이를 도깨비불이라 하여 무서워하였다.

[D-003]대비구(大比丘) : 덕이 높고 나이 많은 비구승을 이른다. 종북소선에는 앞에  자가 더 있다.

[D-004]장차 …… 양으로 : 원문은 將修浮圖인데, 종북소선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5]폐백 : 원문은 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6]나에게 …… 왔다 : 원문은 請銘于余인데, 종북소선에는 磨頂請銘으로 되어 있다.

[D-007]지황탕(地黃湯) : 육미지황탕(六味地黃湯)이라고도 하며, 숙지황 · 구기자 · 산수유 등 6종의 약재를 넣어 만든 탕약(湯藥)으로 폐결핵 등에 효험이 있다.

[D-008]활짝 퍼져 : 원문은 細張인데,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은 앞 구절의 운자인 과 같은 평성 양() 자 운이 아니라 거성 양() 자 운이어서 운이 맞지 않는다.

[D-009]각각으로 …… 머금었지 : ()은 불교에서 주관(主觀)의 인식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삼라만상의 모습을 이르는데, 이는 아직 참모습眞如대로가 아닌 가상(假象)이라 한다. 여여(如如)는 진여와 같은 말이다. ()은 상()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삼라만상의 변치 않는 본질을 이른다. 그러나 상()은 또한 성()을 머금고 있다고 본다.

[D-010]성성(惺惺)했다 한들 : 성성은 선불교에서 참선을 통해 마음이 최고조로 각성되어 있는 상태를 이른다.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하여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또렷이 깨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D-011]()로써 아()를 증명하니 : 여기서 말하는 아()는 불교에서 가아(假我)로 간주하는 육신(肉身)을 갖춘 자아(自我)가 아니라, 진아(眞我)를 이른다.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면 본질이 변치 않고 진실되며 그 작용이 자재무애(自在無碍)한 아덕(我德)을 갖추게 되는데 이를 진아라고 한다.

[D-012]()으로써 …… 건가 : 불교에서는 관심견성(觀心見性)이라 하여, 자기 마음을 관조해서 그 본성을 밝히고자 한다. 주희(朱熹)는 관심설(觀心說)에서 불교의 학설은 심()으로써 심()을 구하고 심()으로써 심()을 부리니, 입이 제 입을 씹고 눈이 제 눈을 보는 것과 같다면서, 이는 하나인 심()을 둘로 나누고, 주체인 심()을 객체인 물()로 만들며, ()에 대해 명령하는 심()을 물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晦庵集 卷67 정도전(鄭道傳)도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이는 별도로 일심(一心)으로써 이 일심(一心)을 본다는 것이니 마음에 어찌 둘이 있으랴?”라고 하면서, 이심관심(以心觀心) 입이 제 입을 씹는 것과 같아, 응당 볼 수 없는 것으로써 본다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三峰集 卷9

[D-013]다음과 …… 붙였다 : 원문은 爲係詩曰인데, ()을 지어 붙였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한유(韓愈)가 지은 비지문(碑誌文) 중에도 명왈(銘曰)’ 대신 계왈(系曰)’, ‘시왈(詩曰)’로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D-014]나는 …… 비유하노니 : 원문의  자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및 종북소선 병세집에는  자로 되어 있다.

[D-015]과일이 ……  : 원문의 必在地 종북소선에는 應歸土로 되어 있다.

[D-016]실리란 …… 같나니 : 이 부분이 종북소선에는 核存猶自托으로 되어 있다.

[D-017]실리란 …… 때문 : 성리학에서는, 불교가 공허한 이치를 추구하는 데 비해 유교는 진실된 이치實理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만물을 끊임없이 생성하는 하늘의 도()가 곧 인()이라고 보고, 그러한 인()이 사람의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종종 곡식의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연암집 1 ‘이자후의 득남을 축하한 시축의 서문李子厚賀子詩軸序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온다.

[D-018]주공의 …… 삼게 : 병세집에는 그 다음에 地黃湯喩 演而說偈曰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여 놓았다. “我服地黃湯 泡騰沫漲 印我顴顙 一泡一我 一沫一吾 大泡大我 小沫小吾 我各有瞳 泡在瞳中 泡中有我 我又有瞳 我試嚬言 一齊蹙眉 我試笑焉 一齊解頤 我試怒焉 一齊搤腕 我試眠焉 一齊闔眼 謂厥塑身 安施堊泥 謂厥繡面 安施鍼絲 謂畫筆描 安施彩色 謂檀木鐫 安施彫刻 謂金銅鑄 安試皷橐 我欲撥泡 欲抱其腰 我欲穿沫 欲撫其髮 斯須器淸 香歇光定 百我千我 了無聲影 咦彼麈公 過去泡沫 爲此碑者 現在泡沫 伊今以往 百千歲月 讀此文者 未來泡沫 匪我暎泡 以泡暎泡 匪我暎沫 以沫暎沫 泡沫暎滅 何歡何怛 그런데 이덕무(李德懋)의 손자 이규경(李奎景)이 지은 시가점등(詩家點燈)에도 주공탑명의 전문을 소개한 다음, 다시 평왈(評曰)”이라 하면서 위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병세집과 몇 자 차이가 있다. 또한 매탕(梅宕 : 이덕무)이 평열(評閱)했다는 종북소선에도 두주(頭註) 余讀麈公塔地黃湯喩 演而說偈曰이라 하면서 역시 위와 같은 글을 싣고 있다. 다만 이 역시 병세집, 시가점등과 글자 및 순서에 사소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위의 글은 연암이 아니라 이덕무의 글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가점등에는 다시 評之又評曰이라 하면서 假佛語 寓儒旨 用筆微而婉 江郞曰 黯然消魂 余斷章取義 以評麈公塔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종북소선 말미의 평어와 일치하므로, 이덕무의 평어임을 알 수 있다.

[D-019]비유품(譬喩品) : 대승(大乘)의 교법을 설한 법화경(法華經) 28() 중 제 3 품을 이른다. 속세의 중생을 노느라 정신이 팔려 불이 난 집에서 빠져나올 줄 모르는 아이들에 비유한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로 유명하다.

[D-020]육제(六諦) : 불교에서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를 영원히 변치 않는 네 가지 진리 즉 사제(四諦)라고 하며, 여기에 속제(俗諦)와 진제(眞諦)의 이제(二諦)를 합쳐 육제(六諦)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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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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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

12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13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1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15 응지에게 답함

16 응지에게 답함

17 응지에게 답함

18 응지에게 답함

19 응지에게 보냄

20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21 이중존에게 답함

22 이중존에게 답함

23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2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25 순찰사에게 올림

26 순찰사에게 답함

27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나는 그대와 본래 가부(葭莩)의 친분도 없고, 또 티끌만 한 혐의도 없는 처지였사외다. 급기야 안의(安義)에 있게 되니, 함양(咸陽)과 안의는 본래 정해진 겸관(兼官)이어서, 4년 동안 서로 이웃이 되어 피차의 한계를 두지 아니하고, 한 달에 세 번 옥사(獄事)를 동추(同推)하는 모임이나 이웃 고을 원님들과 틈을 내어 만난 자리에서 흡족히 담소를 나누어 흉금의 간격이 없었으니, 아무리 한마을의 옛 친구라 할지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소?

하당(荷堂 연꽃이 피어 있는 집)과 죽관(竹館 대숲이 있는 집)에서 베개를 나란히 베기도 했고, 풍헌(風軒 창이 있는 작은 집)과 월사(月榭 달구경하는 정자)에서 술잔을 나누기도 했으며, 물놀이와 산놀이에도 서로 빠진 적이 없었지요. 백성의 근심이나 고을의 폐막(弊瘼)을 잠깐 사이에도 같이 상의했고, 공문이나 사신(私信)도 주고받지 않은 날이 없었소. 이른바 머리가 희도록 서로 만나도 낯선 사람 같고, 초면 인사만 나누어도 옛 친구 같다는 것이 어찌 헛말이겠소? 진실로 큰 허물이 없는 한, 어려움을 만나도 변치 않도록 함께 기약하기를 바랐던 것이외다.

그런데 지난번에 보내온 후촌집(後村集)을 지금 보니, 우리 선조 금계군(錦溪君)을 모함하여 욕보인 것이 한이 없었소. 이제 나와 그대는 하루아침에 백세(百世)의 원수가 되었구려. 이렇다면 나는 백세의 원수와 더불어 술잔을 나누고 베개를 나란히 베며, 담소를 나누고 서로 추종하면서도 4년 동안이나 까맣게 몰랐던 셈이오.

무릇 우리 선조의 후손된 자라면 누구나 원통하고 분해서 피로써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는 이와 같은 감정을 똑같이 품지 않으리오마는, 나는 그대에게 더욱더 원통하고 한스러운 것이 있소. 지난해 동추의 모임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그대가 초책(草冊 초벌로 쓴 책) 하나를 꺼내며,

 

우리 집안에는 본시 문헌이 없는데 선조 후촌공이 두어 편 남긴 글이 있어, 장차 인쇄에 부칠 생각으로 묘도문자(墓道文字)와 연보(年譜) 및 유사(遺事)를 주워 모아 겨우 한 책을 이루었소. 범례만이라도 대강 열람해 주기 바라오.”

하면서, 손수 종이에 싸 나의 하인(下人)에게 넘겨주었소. 돌아와서 잠깐 펴 보니, 표시하려고 붙여 놓은 쪽지가 하도 번잡하고 새까맣게 지우고 고쳐 쓴 자국이 몹시 어지러웠소. 나는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성미라 우선 책을 접어 둘 수밖에 없었고, 뒤미쳐 번고(飜庫)의 행차가 있어 마침내 한 번도 훑어보지 못했는데, 그대가 서울로 보내 정서(淨書)하는 일이 급하다 하며 불시에 찾아가고 말았으니, 그 속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실로 알지 못했소.

그 후에 배신전(陪臣傳)에서 뽑아 싣게 한 것도 내가 지시한 바요, 각수승(刻手僧)을 빌려 가게 된 것도 내가 보낸 것이지 않았소? 그리고 또 내가 동추하러 갔을 때 그대와 함께 함양군의 학사루(學士樓)에 올랐는데, 이때 누 가운데에서 각자(刻字)하는 일이 한창이었지요. 나는 우리 고을 중이 새긴 목판 두어 개를 가져다 보고 솜씨가 정교함을 자랑하고 나서, 인쇄한 뒤에 한 벌을 선사해 달라고까지 하였지요.

내가 이렇게 즐거이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하는 데에 참여하게 된 까닭은, 진실로 강화도에서 순절한 일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감동시킬 뿐더러 고가(故家)의 남겨진 가승(家乘)이니만큼 그 한 벌을 보관하고 싶어서였지요. 어찌 그 속의 모함과 패설(悖說)이 이 지경까지 이를 줄이야 생각인들 했겠소?

전번에 그대가 갑자기 와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실수였다고 사과하고, 또 이렇게 말하였소.

 

나는 봉급의 여유가 좀 있어서 비록 인쇄하는 역사(役事)를 맡기는 했지만, 글을 삭제하거나 그대로 살리는 일은 할 사람이 따로 있으며, 더욱이 나는 그때 병이 심하여 미처 자상히 열람하지 못했소이다. 만약 이 한 단락이 들어 있는 것을 과연 알고서 일부러 보내어 보게 했다면, 세상에 어찌 이러한 심술이 있겠소? 이 일이 사실과 어긋남이 이미 이와 같으니, 마땅히 훼판(毁板)하고 고쳐 넣도록 빨리 서둘 따름이오. 떠들썩하게 절교를 통고하는 일은 오히려 나중 일이오.”  ()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그 이야기가 분명 진정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급기야 그대가 윤신수(尹莘叟)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본즉 박 아무개가 안의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열람해 보고 아주 잘 되었다고 칭찬했다.’고 하였소. 나는 이에 또 저도 모르게 심장이 떨리고 쓸개가 뒤틀리는 듯싶었사외다. 사람이 효경(梟獍)이 아닌 이상, 무슨 심보로 남이 제 선조를 욕했는데 도리어 잘 되었다 칭찬했겠으며, 사람이 귀역(鬼蜮)이 아닌 이상 무슨 억하심정으로 남의 선조를 욕하고서 그 책을 그 자손에게 보내 준단 말이오? 이 일을 참을 수 있다면, 참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소?

그대가 이미 이러한 간계를 품은 이상, 무슨 까닭으로 와서 바야흐로 눈에 핏발이 설 이 사람을 만나 보았으며, 무엇 때문에 종전에 살피지 못한 잘못을 사과했으며 또 훼판을 빨리 서둘겠다고 말했소? 무엇 때문에 이제부터 방향을 바꾸어 능주(綾州) 족형(族兄)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했소?

아아, 원통하도다! 예전에 칠신(七臣)이 고발을 당할 때에 우리 선조는 특히나 흉악한 무리들의 원수가 되어, 그들이 칼을 숨기고 그림자를 엿본 적이 여러 해였소. 나중에 고성(高成) · 김응벽(金應璧)의 옥사를 날조함에 미쳐, 우리 선조의 공초를 구실 거리로 삼은 것은 나라를 해치려는 이이첨(李爾瞻)의 짓이었고, 앞뒤로 상관없는 일을 끌어들여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 덧붙인 것은 유감을 풀려는 기자헌(奇自獻)의 짓이었소. 급기야 계해년(1623, 인조 1)에 반정(反正)이 있은 뒤로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본래 사실을 잘 모르고 어름어름 들추어내니 비방하는 물의가 드높아지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따라서 옛 원한을 갚으려는 자, 남의 화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선조가 마침내 죄를 얻어 10여 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로 떠돌아다녔던 것이오.

그 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명(遺命)으로 사면 조치가 내렸고 선왕(先王 인조)의 밝으신 통찰이 일월같이 높이 비쳤으며, 당시 조신(朝臣)들이 죄의 경중을 심의한 기록이 의금부에 모두 남아 있고, 조정에서 같이 벼슬한 뭇 어진 이의 변론은 천지신명과 대질할 만했던 것이오. 그러기에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貞公 김상헌(金尙憲))은 비()에 명()하기를,

 

근세 사림(士林)에서 믿고 의지하며 중히 여기는 이로는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 · 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 · 신현헌(申玄軒 신흠(申欽)) · 오추탄(吳楸灘 오윤겸(吳允謙)) · 정수몽(鄭守夢 정엽(鄭曄)) 같은 분들이 있는데, 이 몇 분들은 절대로 자기 사정(私情)에 치우쳐 공론(公論)을 폐기할 분들이 아니었다. 이때 공을 비난하는 입들이 마치 남기성(南箕星)처럼 크게 벌려 있었으나, 공은 스스로 변명하지 않았으며, 이 몇 분들이 나서서 밝혀 주었다. ‘중인(衆人)들은 헐뜯었으나 군자는 완인(完人)으로 여겼다.衆人所毁 君子所完 하였으니, 그 말을 증명하기에 족하며 백세에 길이 거울이 될 것이다.”  ()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다오.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貞公 송시열(宋時烈))이 쓴 묘표(墓表)에는,

 

당시 국구(國舅)의 옥사가 여러 분에게 미쳐 갔다. 공은 다만 평소에 국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실을 원사(爰辭)에서 밝혔고, 또한 그 일은 증거도 없이 유야무야되었으니 국구에게는 아무런 손상이 없음을 보증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흉악한 무리들이 앞의 원사를 나중에 집어넣어 왕명을 포고하는 글에서 공을 욕보일 줄은 더욱 당초에 우려했던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노선생(老先生)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금계(錦溪)는 절대로 다른 의도가 없었는데, 불행히도 무고(巫蠱)의 옥사가 잇달아 일어나서 드디어 오늘날의 억울한 죄안(罪案)이 되었다.’ 하셨다.”  묘표의 글은 여기까지이다. 

하였소.

! 이것은 모두가 선현들의 정론(定論)이오. 신도비에 분명히 새겨져 있고 여러 문집 속에 환히 알려지고 널리 나열되어 있어, 온 나라의 비방이 깨끗이 풀리고 백세의 공론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새까만 후배들이 나중에 악담을 가하고 수백 년 뒤에 함부로 모함하는 붓을 휘두르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술이오? 말뜻이 참혹하고 표독하여, 우리 선조를 모함하고도 부족해서 곧장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을 무고에 몰아넣은 것은 도대체 또 무슨 심술이오?

존가(尊家)의 후촌공(後村公)이 한패거리가 되어 스스로 부화뇌동하고자 한 자가 누군지 나는 모르겠소. 원사를 주워 모아서는 흉악한 무리들이 구실로 삼은 것이 저와 같고, 억울한 죄를 애통히 여기어 뭇 어진 이들이 확실한 결론을 내린 것이 이와 같소이다. 설령 당시에는 사실을 자상히 모르고 술자리에서 떠들며 이야기하다가 혹시 함께한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 하더라도, 그 뒤에 사건의 근원이 분명하게 밝혀졌으니 필시 전에 한 말의 실수를 후회하여 기꺼이 다른 어진 분들과 생각을 같이하였을 것이오. 또 설령 당시에는 떠도는 비방을 단단히 믿고서 이전의 의혹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하더라도, 세상의 장고가(掌故家 고사(故事)에 해박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길거리에서 주워듣고 함부로 거론하는 것도 오히려 놀라운 일이거늘, 하물며 당시에 직접 기록한 글도 아니고 오로지 뒷사람이 나중에 부연한 것에서 나온 경우이리오? 이는 자기 선조의 공적을 드러내고자 하다가 먼저 스스로 선조를 속인 죄목에 빠진 것이며, 이름은 실기(實記)라 해 놓고 도리어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처지에 놓인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이오.

설사 또 당시에 대간(臺諫)으로 나갈 길이 막히어 억측으로 외쳐 댈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그 후 십수 년 동안 간관(諫官)으로 출입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무엇을 돌아보고 꺼려서 마침내 한 번도 평소 가슴에 쌓인 말을 털어놓지 않았소? 설사 또 당시에 품은 원한이 이미 깊어서 손수 기록해 두었다면 그 뜻이 출세길에 간절하여 원한을 보류했다가 집안에 전한 것을 마침 드러내 보인 셈이니, 어찌 후촌(後村) 같은 어진 이로서 과연 이런 일이 있었겠소?

더구나 우리 집안의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선생은 금계군의 손자요, 존가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바로 후촌공의 조카요. 존가에서 남에게 화를 끼칠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이와 같다면 이는 반드시 그 가정에서 들은 바가 있을 터이니, 어찌하여 그 원한을 숨기고 그 집안사람을 벗하려는 것이오? 지금 일로 미루어 보면, 그 원한을 숨기는 것이 본래부터 물려받은 가법(家法)이었는지? 이도 알 수 없겠구려.

! 성이 함락되어 풀 베듯이 목숨이 잘리던 날에 적의 칼날에 순절한 것만으로도 족히 한 세상에 드날리고 뒷자손에게 영광이 될 수 있으며, 구구한 대간의 자리에서 한 번 처진 것이 이미 세워 놓은 큰 절개에는 진실로 영향을 끼칠 것이 없는데, 하필 남의 조상을 지독하게 모함한 연후에야 비로소 그 시대에 환히 드러난단 말이오? 뒷사람들이 어름어름 포착하여 추후에 서술한 것은 역시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치졸함만 드러내 보인 것이라 하겠소.

근자에 들려온 소문에 더욱더 놀랄 것이 있었소. 그대가 황당한 말을 꺼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장황히 떠들어 대며, ‘아무개와 왕래를 끊지 않고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 한다니, 그 말이 도리에 어긋남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소!

영남의 고을을 왕래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면 상기도 몹시 가슴속이 아프고 한스러운데, 심장이 쑤시고 뼈에 사무치는 이날을 당하여 차마 다시 단란하게 만나리오? 오늘날 그대의 언행은 번번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밖으로 벗어난 것이니, 옛사람이 일컬은 사람 알기란 쉽지 않다.’란 말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오. 지난날 마주 대했을 때, 그대가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말을 머뭇거리며 요컨대는 고쳐 새기겠다는 한 가지 사항에서 벗어나지 않았었소. 그러기에 내가 참고 견디며 차분히 기다리면서 문중의 여론이 하늘을 찌를 듯이 분노로 치닫지 않도록 한 까닭은, 진실로 훼판(毁板)하겠다는 한마디 말에 성실할 것을 바랐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선조가 모함당한 본말을 낱낱이 들어서 개운하게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던 것이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말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할지라도, 이를 일러 술자리에서 단란히 정을 나누기를 예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다고 한다면 되겠소? 우리 종중(宗中)에서도 역시 나를 허물하며, 원수와 상대할 것도 없고 또한 굳이 원수와 대화를 나누며 변론할 것도 없다고 하였소. 이와 아울러 분명히 말하건대, 이제부터는 다만 상정(常情)에서 벗어나는 말을 꾸미려고 말고 분분한 입씨름을 끊기로 합시다. 지금 나는 그대에게 원한이 이미 깊어졌고 사귐도 이미 끊어졌소. 그래도 속마음을 다시 털어놓는 것은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말라는 그 뜻을 삼가 스스로 따르고자 하는 때문이오.

 

 

[D-001]가부(葭莩)의 친분 : 가부란 갈대 줄기 속에 있는 엷은 막으로, 두텁지 않은 친인척 관계를 이른다.

[D-002]겸관(兼官) : 수령의 자리가 비었을 때 바로 이웃 고을 수령이 임시로 그 사무를 겸임하는 것을 말한다.

[D-003]동추(同推)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에는 30일 안에 옥사를 판결해야 하는데, 그 경우 수령들이 추관(推官)으로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말한다. 옥사를 시급히 판결해야 하므로 열흘에 한 번 동추하는 것이다.

[D-004]머리가 …… 같다 : 원문은 白頭如新 傾蓋如舊이다. 고대 중국의 속담으로 추양(鄒陽)의 옥중상서자명(獄中上書自明) 등에 인용되어 있다. 文選 卷39

[D-005]후촌집(後村集) : 후촌은 윤전(尹烇 : 1575~1636)의 호이다. 윤전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의 숙부이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613년 유생 이위경(李偉卿) 등이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를 받아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상소하자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다 파직당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직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필선(弼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후촌집은 함양 군수 윤광석이 1795년에 간행한 후촌실기(後村實記)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를 가리킨다. 이 책은 세계도(世系圖)와 연보(年譜)를 실은 상권, 윤전의 유문(遺文)과 유묵(遺墨)을 실은 중권, 행장(行狀 : 윤증尹拯 ) · 묘지명(墓誌銘 : 조익趙翼 ) · 시장(諡狀 : 박세당朴世堂 ) · 제문(祭文)과 부록을 실은 하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서문과 윤전의 5대손인 윤광안(尹光顔)의 발문이 있다. 여기에 실린 행장에, 인목대비 폐위 반대에 공이 컸던 윤전이 인조반정 이후 대간(臺諫)으로 기용되지 못하고 경기 도사(京畿都事)로 나가게 된 것은, 그가 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변명한 말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여 미움을 산 때문이라고 했다. 묘지명과 시장에도 구체적 인명은 거론하지 않은 채 그 사실이 진술되어 있다. 부록에서도, 윤증이 지은 행장은 박세채(朴世采)의 처지를 생각해서 그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하면서, 워낙 사실이 현저하므로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당조차 시장에서 이를 은폐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D-006]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박동량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금계군에 봉해졌다. 1613년 계축옥사 때에 투옥되어, 자신이 칠신(七臣)의 한 사람으로서 인목대비의 아비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모의했다는 죄목을 부인하면서, 유릉(裕陵)의 저주 사건에 대해 발설함으로써 대북파(大北派)에게 폐모론(廢母論)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부안(扶安)에 유배되었다. 1635년 아들 박미(朴瀰)의 상소로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D-007]피로써 …… 삼키는 : 원문은 沬飮인데 沬血飮泣의 준말이다.

[D-008]번고(飜庫) : 창고의 물건을 일일이 뒤적이며 장부와 대조하여 검사하는 일을 말한다.

[D-009]배신전(陪臣傳) : 황경원(黃景源)이 지은 명배신전(明陪臣傳)을 가리킨다. 강한집(江漢集) 28 명배신전 2에 윤전의 사적을 기록한 항목이 있는데, 후촌실기 하권 부록에 채록되어 있다.

[D-010]남의 …… 데에 : 원문은 成美인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남의 아름다운 일을 도와서 완성한다.君子成人之美고 하였다.

[D-011]윤신수(尹莘叟) : 신수(莘叟)가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D-012]효경(梟獍) : 효파경(梟破獍)이라고도 하며, 악인(惡人)을 비유할 때 쓰인다. ()는 제 어미를 잡아먹는 올빼미이고, 파경(破獍)은 제 아비를 잡아먹는다는 짐승이다.

[D-013]귀역(鬼蜮) : 보이지 않게 사람을 해치는 귀신과 물여우를 이른다.

[D-014]이 일을 …… 있겠소 : 원문은 是可忍也 孰不可忍也이다.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노() 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가 감히 천자의 예악인 팔일무(八佾舞)를 추게 한 것에 분노하여 한 말이다.

[D-015]능주(綾州) : 전라도에 속한 현()으로, 현재는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속한 면이다.

[D-016]칠신(七臣) : 선조(宣祖)가 임종에 앞서 어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한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 등 일곱 신하를 일컫는다. 이들은 1613년 계축옥사 때에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과 반역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D-017]고성(高成) · 김응벽(金應璧)의 옥사 :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D-018]기자헌(奇自獻) : 1562~1624. 선조가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데 극력 반대하여 광해군의 즉위에 공로가 컸으므로 영의정까지 지냈다. 그러나 폐모론(廢母論)에는 소극적이어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고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인조 즉위 후 이괄의 난 때 사사(賜死)되었다. ‘왕명을 포고하는 글播告之文이란 광해군 5(1613) 7 15일 계축옥사의 주모자로 김제남 등을 처형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을 사면하는 일로 내린 교서(敎書)를 가리킨다. 그 교서에서 김제남의 죄상을 논하는 대목에 유릉 저주 사건에 대한 박동량 형제의 증언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기자헌이 광해군에게 교서 중에 첨가하기를 거듭 요청한 결과였다. 光海君日記 5 7 10 · 13 · 15

[D-019]사면 조치가 내렸고 : 원문은 渙發雷雨인데, 주역 해괘(解卦) 상전(象傳) 천둥치고 비 내리는 것이 해()이니, 군자가 이로써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관대히 보아준다.雷雨作解 君子以赦過宥罪고 하였다. 인조 10 6월 박동량의 죄를 용서하여 유배지를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었는데, 이는 인목대비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린 하교를 따른 조치였다. 仁祖實錄 10 6 25

[D-020]마치 …… 있었으나 : 남기성(南箕星)은 곧 기성(箕星)으로, 남방 하늘에 나타나므로 남기성이라고도 한다. 기성은 구설(口舌)을 주관하는 별로 간주되었으며, 참언(讒言)의 비유로 즐겨 쓰였다. 시경 소아(小雅) 항백(巷伯) 입을 크게 벌려 이 남기성을 이루었도다, 남을 헐뜯는 저자들은 누구와 더불어 음모를 꾸미나.哆兮侈兮 成是南箕 彼讒人者 誰適與謀라고 하였다.

[D-021]근세 …… 것이다 : 청음선생문집(淸陰先生文集) 24 ‘금계군 겸판의금부사 박공 신도비명 병서(錦溪君兼判義禁府事朴公神道碑銘幷序)’의 명()을 인용한 것이다. 단 글자에 약간 차이가 있다.

[D-022]국구(國舅) :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가리킨다.

[D-023]원사(爰辭) : 죄인이 자신의 죄상을 말한 진술서를 이른다.

[D-024]그 일 : 유릉(裕陵) 저주 사건을 말한다. 선조 말년에 영창대군의 궁방(宮房)에서 선조가 병에 시달리게 된 원인을 원비(元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에게 돌리고 고성, 김응벽 등을 시켜 그 능()인 유릉(裕陵)에 가서 저주를 하게 했다고 하여 옥사가 일어났다.

[D-025]앞의 …… 집어넣어 : 원문은 追人前爰인데, 추인(追人)은 고대 중국의 백희(百戱)의 일종이므로, 여기서는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追入前爰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송시열이 지은 묘표 중 그에 상응하는 구절은 追引爰辭라 하여 나중에 끌어넣었다는 뜻의 追引으로 되어 있다.

[D-026]무고(巫蠱) : 무술(巫術)로 사람을 호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유릉에 저주를 행한 사건을 가리킨다. 박동량은 공초에서 이는 영창대군 궁방의 사람들이 저지른 일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김제남에게 감히 따지지는 못하였다고만 말했던 것인데, 나중에 김제남이 유릉에 저주를 하도록 사주한 사실을 증언한 것으로 이용되었다.

[D-027]당시 …… 하셨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191 ‘금계군 박공 묘표(錦溪君朴公墓表)’에서 인용하였다. 단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고, 취사선택하면서 고쳐 인용하였다.

[D-028]한패거리가 ……  : 원문은 所欲比而自同인데, 논어 위정(爲政) 군자는 두루 사귀되 패거리를 짓지 않고, 소인은 패거리를 짓되 두루 사귀지 않는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고 하였고, 자로(子路)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되 남과 화합하지 않는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고 하였다.

[D-029]사람 …… 않다 : 원문은 知人未易인데, 반악(潘岳) 마견독뢰(馬汧督誄)’에 나오는 말로, 사기 범수열전(范睢列傳)에서 후영(侯瀛) 사람은 원래 자기를 알기 쉽지 않으나 남을 아는 것 역시 쉽지 않다.人固未易知 知人亦未易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D-030]절교는 …… 말라 : 사기 80 악의열전(樂毅列傳), “옛날의 군자는 절교는 해도 악평은 하지 않았다.古之君子 交絶不出惡聲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엊그제 극히 어수선한 때 귀하의 심부름꾼이 마침 왔다가 아울러 윤( 윤광석)의 편지를 달라고 했으나, 윤의 편지는 딴 곳에 빌려 주고 찾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보내 드리지 못했으니 상기도 몹시 마음에 걸리외다. 이 편지가 왔을 적에 본래는 여러 일가 분들에게 두루 돌려 보이려 했으나, 그 사이에 성묘길을 떠나 달이 지나서 막 돌아왔고, 요즘도 역시 직소(直所)에 몸이 매어 있지 않으면 자잘한 공무에 분주하여 이제껏 뜻을 이루지 못했던 거요.

연일 서설(瑞雪)이 내리는데 지내시기가 더욱 좋으신지, 그리운 마음 그지없소이다.

지난번에 거창 현령(居昌縣令) 김맹강(金孟剛)이 차원(差員 업무차 차출된 관원)으로서 상경할 적에 듣자니 윤()이 이 편지를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맹강에게 보였는데, 손님들이 좌석에 가득하여 그와 응수하기가 자못 번거로웠으므로 그 첫머리 몇 줄만을 대략 보고는 그대로 말아서 돌려주면서

 

이러한 긴 편지는 하루내 보아도 볼 둥 말 둥 하겠고, 또 지금 내가 자네에 대해 지키는 의리가 비록 박군과는 잠시 다르기는 하지만 실인즉 이 일로 편지가 오고 가는 일에는 간섭하고 싶지 않네.”

하자, 윤은 바로 소매에 도로 집어넣고 허둥지둥 작별하고 떠났다는 거요.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살펴보면 그 말미에 안의(安義)에 모였을 때 맹강과 함께 책을 보았다.’는 말이 있으니 그의 속셈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구려!

인본(印本)을 보내왔을 때 나는 과연 그 이면에 무슨 말이 들었는지 알지 못하고 한 부 보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인데, 급기야 원문 두어 편을 잠깐 열람해 보니 볼 만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대로 다른 책들 속에 뒤섞어 두고 말았던 거요. 편지에서 말한 맹강이 와서 모였다고 한 때는 바로 윤이 임기가 만료되어 하직하고 떠나던 날이었소. 이때에 기생과 풍악이 앞에 가득하고 술과 음식이 상에 널리어 저녁 모임이 아침에야 흩어졌고 실컷 즐기다 파했으니, 어느 겨를에 어지러운 책더미 속에서 밤낮으로 애써 찾아내어 부질없이 펼쳐 보는 짓을 했겠소?

가령 내가 전일에는 뒷부분을 생략하고 지나쳐 보았을망정, 이와 같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책을 보는 마당에야 어찌 깨닫지 못할 이치가 있겠소? 더더구나 맹강 집안의 선조를 모함하고 핍박한 일도 이와 조목을 같이하여 두 줄로 나란히 열거되어 있으니, 맹강도 어찌 기꺼이 편안히 셋이 함께 앉았겠으며 그 때문에 놀라 원통해하지 않았겠소?

전일에는 진실로 성의 있게 고쳐 인쇄하려고 꾀했던 것이 지금 와서 이미 그렇게 하지 못할 형세가 되자, 도리어 우선 이런 말을 만들어 증거를 세워 자신을 해명하자는 것이니, 어찌 자기 속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소? 또 그 편지 중에서 높이 추켜들어 존중하고 있는 사람이라야 송교(松郊) 한 사람뿐인데, 송교란 호를 가진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소만, 반드시 여러 선현(先賢)들과 반대로 어긋나고자 하면서 억지로 송교 한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더욱 놀랍고 한탄스러운 것은 우리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여지없이 조롱한 점이니 현배(賢輩)들이 지키는 의리는 장차 어떻게 될는지 모르겠소. 또 새로 인출(印出)한 책이 어떤 글들인지도 모르겠소이다. 나의 원래 편지까지 아울러 보내니 종이 상단에 붙여 놓은 것을 행여 빠뜨리지 말고, 본 뒤에 즉시 돌려주기 바라오.

 

 

[C-001]이원(彜源) : 박이원(朴彜源 : 1743~1801)은 박사고(朴師古)의 아들로 박사눌(朴師訥)의 양자가 되었으며, 1777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형조 정랑을 지냈다.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 문경 현감(聞慶縣監)으로서 합천 화양동에 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 정비 사업에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

[D-001]김맹강(金孟剛) : 맹강(孟剛)은 김유(金鍒)의 자()이다.

[D-002]내가 …… 하지만 : 김유가 윤광석과 같은 소론(少論)이어서 노론인 연암과는 당파적 의리가 다르다는 뜻이다.

[D-003]인본(印本) : 윤광석의 선조 윤전(尹烇)의 문집인 후촌실기(後村實記)  윤충헌공실기(尹忠憲公實記)의 인쇄본을 말한다.

[D-004]송교(松郊) : 이목(李楘 : 1572~1646)의 호이다. 이목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으로 성혼(成渾)과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었다. 1612년 문과 급제 후 병조 좌랑 등을 지냈으며 대북파(大北派)의 무고로 파직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복직하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했고, 1636년 형조 참판이 되어 병자호란을 당하자 척화를 주장했다. 사후(死後)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D-005]현배(賢輩)들이 …… 모르겠소 : 현배는 후배(後輩)를 높여 부른 말이다. 박세채는 박동량의 손자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초기 지도자가 된 인물인데, 소론의 후배 세대인 윤광석 등이 그를 조롱한다면 당파의 의리가 제대로 지켜져 나가겠느냐고 힐난한 것이다.

[D-006]나의 원래 편지 : 바로 앞에 수록된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얼마 전 조사에 참여한 일은, 여러 죄수들이 이미 다 문초를 받았고 재차 공초(供招)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옥사의 실정에 있어서는 별로 의혹될 단서도 없으니 문안(文案)은 이미 갖추어졌다고 하겠으며, 다만 미처 작성되지 못한 것은 언사(讞辭 판결문)뿐이었소.

저의 병은 졸지에 극심해져 잠시도 머물러 있기 어려울 때가 있음을 비단 형만이 잘 아는 게 아니라 감사께서도 이미 양찰하고 계신 터입니다. 또 임금께 장계를 올릴 일자가 대단히 촉박한 것도 아니니, 발미(跋尾)를 얽어서 내는 일은 형이 만약 혼자 하기 어렵다면 비록 귀임한 뒤에 서면 왕복으로 상의한다 해도 여유가 작작할 것 같았소. 그러므로 감히 물러간다고 알렸던 것은 이 때문이었소.

영문(營門 감사를 가리킴)이 이미 귀임하여 조리하도록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도중에서 증세가 더할까 몹시 염려하여 타고 가는 것까지 내밀히 물으며 편한 대로 하라고 허락하기까지 했으니, 병을 핑계 대고 사무를 피하여 하직도 아니 하고 바로 돌아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지 않소. 그런데 지금 그때 따라갔던 아전을 뒤늦게 잡아다가 대신 형신(刑訊)을 받게 하니, 이 어찌 꿈엔들 감히 생각했던 일이겠소!

사관(査官 검사관)을 다시 청하자고 한 점에서는 형도 역시 주선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소. 이미 번안(飜案 조사 결과를 번복함)을 하지 않을진대 하필 사관을 고쳐 정하여 허다한 말썽을 초래할 것이 있겠소? 이러니저러니를 막론하고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만 하나의 돌아갈 ()’ 자가 있을 따름이오. 사직서를 써 보내니 찾아서 읽어 보기 바라오. 노년에 서로 만나 머리가 희도록 사귀어도 낯선 사람 같더니, 갑자기 이렇게 낭패를 보게 되어 도리어 몹시도 서글픔만 맺힐 따름이외다.

 

귀하의 관아에 있을 때 처음에는 아무런 병이 없어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며칠을 편안히 지냈는데, 하루는 밥을 먹고 나서 형과 마주하여 졸다가 저는 가슴과 배 사이에 마치 물건이 걸려 있는 듯한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 급히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셨더니, 층층으로 빙빙 돌아서 나뉘어 세 덩이가 되었소. 짐작에 그 크기가 우()  민간에서 말하는 토란이다. 만 하고 수레바퀴가 소리 내듯이 호흡할 때마다 서로 치받으며, 또 간혹 다섯 손가락으로 후벼 대는 것도 같아서 온갖 맥이 다 풀려 만사가 귀찮다가 잠깐 사이에 곧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소.

이때부터는 그 증세가 생기려면 연기처럼 슬며시 오는데, 밥이라곤 한 숟갈도 뜰 수 없고 마시는 것이라곤 찻물뿐이오. 형도 역시 그 꼴을 보고는 걱정하였지요. 또 그 뒤로는 물이나 술을 막론하고 들이마셔 입에 있으면 문득 삼킬 것을 잊어버리니 생각에 목젖이 없어진 듯싶었소. 수십 년 전에 어느 한 사람이 이 증세가 있음을 보았는데 의원의 말로는 심병(心病)이라는 거요. 심장의 피가 바싹 마르면 으레 이 증세가 생긴다고 했소. 저의 지금 증상이 갑자기 전에 들은 말과 비슷해서 마음이 편치 못하고 풀이 꺾이고 스스로 의심이 나더니, 저녁 사이에 가슴이 크게 두근거리고 배 안에서 쭈루룩 흘러내리는 것이 마치 병 속에서 흔들리는 물 같아서, 비록 그 소리는 들리지 않으나 치밀어 올라 두근거리는 증상과 호응하므로 더욱 혼자서 이상히 여겼지만 실지로 꼭 집어 말할 것도 없었소.

또한 온몸이 둥둥 떠 공중에 있는 것 같아서 걸음을 걸어도 발이 헛놓여서 땅을 밟지 않은 듯하여 너무도 풀이 꺾이고 기분이 나빴소. 형과 종일토록 한담을 나누었을지라도 그 말소리가 제 입에서 나오는 것을 갑자기 잊었으며, 형의 말소리 역시 귀에 들어온 적이 없음을 깨닫고는 이 몸이 내 것인지 아닌지 더욱 의심이 났소. 이와 같은 이상한 증세는 하나뿐이 아니오.

돌아오던 날 저녁, 새벽잠에서 막 깨자 왼쪽 머리와 안면이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으며 갑자기 멍청해진 듯하고 입가와 눈꼬리가 땅기고 씰룩거려 경련이 일므로 크게 놀라 일어나 앉아 급히 병풍 건너편에서 자는 자를 불렀지요. 촛불을 켜는 동안 이 증세는 바로 그쳤으나 안면 마비의 증세는 손으로 만져도 남의 살 같았소.

지금 이 모든 증세가 형과 마주 앉은 며칠 사이에 나타난 것이니, 비록 저절로 싫은 마음이 났으나 억지로 세수하고 머리 빗고 했던 거요. 이 같은 증세는 다른 사람으로서는 세세히 살필 수도 없는 것이고, 형에게도 늘어놓은 적이 없었던 것은 듣기 좋은 얘기도 아닐 뿐더러 으레 위로하여 병자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나 할 뿐이었기 때문이오.

그러나 객지에 머물기가 한시도 어려워서 급급히 하직하고 물러난 것은 이 때문이었소. 이로써 죄를 얻은 것은 실로 본의가 아니었으나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하겠소? 귀하의 고을의 의원은 이미 홍주(洪州) 관아로 떠나서 진찰을 받지 못했소. 이 편지에 기록된 모든 증세를 들어 그가 돌아오면 자세히 의논해 봐 주기 바라오. 만일 형이 가기를 권하여 의원의 승낙을 얻는다면, 나중 인편에 자세히 알려 주시오. 그러면 인마(人馬)에 관한 모든 것은 응당 제가 준비해서 보내겠소이다.

 

 

[C-001]김응지(金應之) : 김기응(金箕應 : 1744~1808)의 자가 응지(應之)이다. 그는 본관이 광산(光山)이고, 사계(沙溪) 김장생의 후손이다. 연암이 젊은 시절 교유했던 선배인 석당(石堂) 김상정(金相定)의 아들로, 연암과 교분이 있었다. 생원시에 급제한 후 음보로 황간 현감(黃澗縣監), 공주 판관, 황주 목사(黃州牧使) 등을 지냈다.

[D-001]얼마 전 ……  : 연암이 정조 21(1797) 7월 충청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하자, 당시 충청 감사 한용화(韓用和 : 1732~1799)가 공주 판관 김기응의 천거에 따라 연암에게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狀啓)’(연암집 9)를 대신 지어 주기를 부탁한 데 이어, 연암을 도내의 옥사를 재심하는 심리관(審理官)으로 단독 차임(差任)하였다. 이에 연암은 감영으로 가서 며칠간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감사가 도내 수령들의 고과(考課)를 함께 논의하자고 은근히 끌어들이는 것을 거부했더니, 이를 괘씸히 여긴 감사가 연암을 수행한 아전을 잡아다 벌주고 연암에 대한 고과를 깎아내렸다. 연암은 이에 분개하여 감사에게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렸으나 반려되고 말았다. 공주 판관 김기응은 자신이 중간에서 주선을 잘못하여 연암과 충청 감사 사이에 갈등을 초래하지 않았나 하여 변명조의 편지들을 보냈는데, 연암집에 실린 김기응에게 보낸 답서들은 그로 인한 것이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D-002]발미(跋尾) : 발사(跋辭)라고도 하는데, 조사와 관련하여 장계의 뒤에 붙이는 건의서를 말한다.

[D-003]형신(刑訊) : 죄인을 형장(刑杖)으로 치며 캐묻는 것을 말한다.

[D-004]주선을 잘못했다 : 김기응이 연암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책한 말인 듯하다.

[D-005]노년에 …… 같더니 : 한용화와 연암은 환갑이 지난 나이에 각각 충청 감사와 면천 군수가 되어 외지에서 서로 만났는데, 두 사람의 교분이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용화가 관직에 연연하지 않는 연암의 사람됨을 알지 못하고 회유하려 들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편지에서 하신 많은 말씀의 뜻은 잘 납득하였소만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을 한 번 터뜨렸소. 제가 언제 형에게 분노를 품은 적이 있다고 형은 어찌 지레짐작하여 늘 이와 같은 변명을 하는 거요? 이야말로 나를 아는 것이 너무도 얕다 하겠소. 저를 이해하건 저를 책망하건 모두가 제 병이 빌미가 된 것이오. 이 재앙은 스스로 만든 것인데 다른 사람이 무슨 관계이겠소? 다만 그 정세는 잠시 제쳐 두고, 병세로 인해 갈수록 지쳐서 위태로운 증상과 악화될 조짐이 겹쳐서 나타나고 있소.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마저 엊그제 또다시 가 버리고, 빈 관아에 홀로 누워 곁에는 한 사람도 없으니 이야말로 고기 먹는 정승(定僧)이요, 병부(兵符)를 찬 귀양객이라 이르겠소. 돌아갈 행장(行裝)을 점검해 보니 다만 가지고 온 하나의 해진 책상자뿐인데, 두어 질의 낡은 서적이 가득 들었고, 책갈피에 두서없이 잔뜩 끼워 넣어진 것은 모두가 앙엽(盎葉)의 기록이오. 우연히 그 한 조각을 펴 보고 저도 모르게 서글퍼지면서 가슴이 쓰라렸소. 그것은 나이 젊었을 때 눈이 밝아 깨알 같은 글자도 꺼리지 않고 써서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고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게 작았소. 이미 순서도 없이 된 것이라 종당에는 버리고 말 것이니, 비하자면 꿰지 못한 야광주(夜光珠)요 구멍 없는 강철 바늘인 거요.

바쁘게 지나가는 게 인생이지만 내일은 항상 있었는데, 지금 갑자기 시력이 아득아득 글자 획이 가물가물하여, 잠시 개미 떼가 모였다가 잠깐 사이에 흰 바탕만 남아 보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소. 이는 다 내 평생의 경륜을 기록한 것으로 당대(當代)의 문헌으로 갖추어 둘 만한 것인데, 만약 지금에 이르러 손수 곰곰이 따져 보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은 편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이번에 바닷가의 외로운 성읍에 오니 고을도 궁벽하고 일도 적어서 잎이 지고 꽃이 필 때 공무에 겨를이 나면 몇 종의 기서(奇書)를 거의 엮어 낼 수 있었소. 그런데 지금 이처럼 좌절하고 보니 속절없이 다시 끌고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소. 좀 오줌, 쥐 똥과 함께 진흙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니, 이것이 상심거리일 뿐, 다른 거야 무엇을 연연하겠소? 이 밖에 공사간(公私間)에 으레 있는 걱정거리에 대해서는 별로 낭패될 것이 없소. 대개 도임한 지 겨우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아 찬지 뜨거운지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그러나 옛 친구에게 염려를 끼치지는 않은 듯하오.

 

 

[D-001]저를 …… 책망하건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공자가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春秋)이며 나를 책망할 것도 오직 춘추로다.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2]이 재앙은 …… 것인데 : 서경 태갑 중(太甲中) 하늘이 내린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가 없다.天作孼猶可違 自作孼不可逭고 하였다.

[D-003]정승(定僧) : 좌선(坐禪)에 들어간 승려를 이른다.

[D-004]병부(兵符)를 찬 귀양객 : 병부는 군대를 동원할 때 쓰던 부신(符信)으로, 감사와 병사(兵使) · 수사(水使)뿐 아니라 수령도 차고 다녔다.

[D-005]앙엽(盎葉) : 옛사람들은 농사를 짓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감나무 잎에다 적어 밭 가운데에 묻어 둔 항아리에 넣었다고 한다. 이를 본떠서, 독서하다가 깨달은 고금의 고거(考據)와 변증(辨證)에 관한 내용을 쪽지에 기록하여 모아 두는 것을 말한다. 이덕무(李德懋)에게 앙엽기(盎葉記)란 저술이 있고, 연암의 열하일기에도 앙엽기란 편()이 있다. 雅亭遺稿 卷8 附錄 朴趾源撰 行狀》 《熱河日記 盎葉記 序

[D-006]찬지 …… 때문이오 : 원문은 其爲冷煖 亦不自知인데, 물을 직접 마셔 본 사람만이 그 물이 찬지 뜨거운지를 안다는 뜻의 냉난자지(冷暖自知)’란 말이 있다. 면천에서 군수 노릇을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D-007]옛 친구에게 …… 듯하오 : 충청 감사가 된 옛 친구 한용화가 도내 고을을 잘 다스리려고 애쓰는데, 하관(下官)으로서 걱정을 끼치지는 않았다는 뜻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이번의 시끄러웠던 일은 단지 묵은 병이 객지에서 돌발했던 까닭인데, 잠깐 사이에 도리어 화단(禍端)을 이루었으니, 재앙이 나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라 뉘를 원망하고 뉘를 허물하겠소?

사가(使家 사또. 감사를 가리킴)의 한결같은 고심(苦心)은 실로 문장을 너무도 사랑한 까닭으로 반드시 언사(讞辭)가 내 손에서만 나오게 하려는 것이었고, 비직(卑職 연암을 가리킴)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결국 불쌍히 여겨 허락해 주리라 경망스레 믿은 때문으로, 돌아온 뒤에 수행했던 아전을 뒤미쳐 잡아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이오. 따져 보면 애초에는 교제가 아직도 옅은데 흠모가 지나치게 깊었고, 끝내는 마음이 아직 미덥지 못한 상태에서 의심과 노여움이 마구 생겨났으며, 병이 이미 뜻밖에 생겼으나 대접이 처음만 못했고, 의심한 것은 본심이 아니었지만 연슬(淵膝)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던 거요.

저 의서(醫書)에 이른바 각궁반장(角弓反張)이 불행히도 이와 가깝다 하겠소. 각궁(角弓 무소뿔로 장식한 활)은 굳센 데다 쇠심줄과 부레풀이 새로 되게 엉겨 붙었는데, 힘에 겹게 당기면 시위와 활 끝부분이 한계를 넘어 쥔 손을 미처 놓기도 전에 양쪽 활고자가 먼저 바깥으로 뒤집혀지게 되는 거요. 무릇 위아래가 통하지 않는 것을 바로 관격(關格)이라 하는데, 의가(醫家)에서는 뇌()와 발꿈치가 서로 접근하고, 배와 등이 서로 뒤틀리는 것을 활의 뒤집힘反張에 비유한 거지요. 지금의 증세를 살펴보면 어찌 이와 유사한 것이 아니겠소?

어젯밤 관의 하인이 약을 올리다가, 실수하여 떨어뜨려 책상과 자리를 흥건히 적시었소. 만약 이것을 누가 팔뚝을 당겼거나 팔꿈치를 비틀어서 그리 되었다고 하자니 곁에 딴 사람이 없었고, ‘삽시간에 태만해서 그리 되었다고 하자니 가득 찬 그릇을 조심스럽게 들었을 텐데 그럴 리가 없고,  일부러 발을 헛디뎌 엎질렀다 하자니 이것은 너무도 그의 본심이 아닐 것이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는 없겠으니, 다만 닦아 내어 조촐하게 할 따름이겠지요.

사직서가 기각됨으로써 또 한 가지 병의 조짐이 더해졌소이다. 이 마음이 조급하고 답답함이 어찌 한이 있겠소? 그러나 관인(官印)을 내던지고 돌아가는 것은 비단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엄중히 타이를 뿐 아니라, 고과(考課)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 혐의를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발끈 성내어 행동할 수 있겠소?

이울어진 매화가 한 해를 또 전송하는데, 도리어 가시 돋친 말만 하고 있으니 더욱더 저도 모르게 몹시 서글프기만 하오.

 

 

[C-001]응지에게 답함 : 내용으로 보아, 이 다음에 실린 응지에게 답함 직후에 작성된 편지로 판단된다.

[D-001]병이 …… 못했고 : 원문은 疾旣無妄而權輿不承인데, 무망(無妄)은 곧 무망(无妄)으로,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뜻밖의 병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희소식이 있으리라.无妄之病 勿藥有喜 하였다. 권여(權輿)는 처음이란 뜻으로, 시경 진풍(秦風) 권여(權輿) 나에게 잘 차린 음식이 가득하더니, 지금은 매 끼니조차 빠듯하네. 아아, 처음과 다르도다.於我乎 夏屋渠渠 今也每食無餘 于嗟乎 不承權輿라고 하였다. 이 시는 진() 나라 임금이 선비들을 대우하기를 시종일관하지 못함을 풍자한 노래이다.

[D-002]연슬(淵膝) : ‘고우면 무릎에 앉히고 미우면 못에 떨어뜨린다墜淵加膝는 말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지나치게 변덕스러움을 뜻한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군주는 사람을 기용하기를 마치 무릎에라도 앉힐 듯이 하고, 사람을 물리치기를 마치 못에 떨어뜨릴 듯이 한다.今之君子 進人若將加諸膝 退人若將墜諸淵고 하였다.

[D-003]각궁반장(角弓反張) :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등이 활처럼 뒤로 젖혀지는 증상을 말한다.

[D-004]양쪽 …… 거요 : 활 양끝의 시위를 매게 된 곳을 활고자라 이른다. 원문은 兩彄先臾인데, 바깥으로 많이 뒤집히는 활을 유궁(臾弓)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무망(无妄)의 병과 본의 아닌 의심은 이미 다 지난 일에 속하니 다시금 변명할 필요가 없으나, 이른바 어느 정도 성의가 부족했다.’고 한 것은 자못 이해가 가지 않사외다. 자기를 두남두고 남을 책하는 그 사이에도 역시 할 말은 있소이다.

영문(營門 감사)은 주심(主審)이고 수령(守令)은 배심(陪審)이오. 때마저 극심한 추위를 당했는데 주심의 처지에서 한 번도 자리를 만들지 않았으니, 배심을 하자 해도 할 곳이 없었소. 그렁저렁 열흘이 지나게 되니 오래 지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마침내 이아(貳衙)에서 종일토록 동추(同推)하여 여러 죄수들이 재차 공초(拱招)했고 조사의 문안도 갖추어졌으니, 가위 내 할 일은 끝났다.’ 할 수 있소. 영문은 어찌 그리 심문하는 일은 느리면서 판결문 만드는 데는 급하오? 성의가 부족했다는 책망은 반드시 전적으로 이 몸에게만 돌릴 일은 아닌 듯싶소.

이른바 공격(公格 공직에 관한 격식)에 크게 관계된다.’ 한 것도 역시 할 말이 있소. 대체 막중한 계문(啓聞 장계를 올림)을 수령이 하는 거요, 영문이 하는 거요? 더구나 공격이 존재하는 데는 수령된 자로서는 감히 한마디도 사연을 덧붙이지 못할 것 같소. 발미(跋尾)를 대신 짓는 것도 이것이 어찌 전례(前例) 있는 공격이겠소? 또 하물며 오너라 하면 오고 돌아가거라 하면 돌아가며 감히 털끝만큼도 어긴 일이 없는데. 도리어 공격을 들어 책망을 하니 자못 이해가 안 가는 일이오.

비록 그렇지만 조사하는 일을 모두 맡겼으며 언사(讞辭)마저 전담케 했으니 신임이 과연 두터웠다고 하겠고, 이미 명령을 들었으니 글도 마땅히 지었어야 할 터요. 또 그 옥사의 실정에 특별히 의심스러운 것도 없어 초검(初檢)과 복검의 문안은 실인(實因 사망 원인)이 다 같았으며, 전임 관찰사의 제지(題旨 판결)가 엄중하고 명확하여 원범은 저절로 상명(償命)의 죄목에 들게 되어 있소.

지금 이 조사는 바로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로 그 자식을 시켜 억울함을 호소한 때문인데, 그 억울함을 호소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거짓이니, 다만 그 원사(爰辭 진술서)에 대해 조목조목 사실을 남김없이 밝혀 줄 따름이오. 이와 같이 사리를 분명히 한다면 원범의 죄는 더욱 도피할 길이 없을 것이오. 완성된 옥안(獄案)의 발미도 십여 줄에 지나지 않는 문장인데 내가 무엇이 괴로워 만들지 않겠소?

뜻밖에 밤사이 병이 갑자기 심해져 숨도 쉬기 어려웠소. 요전 편지에 말한 바와 같이, 가슴과 배 사이를 마치 다섯 손가락으로 후벼 파는 것 같아서, 온갖 맥이 다 풀어지며 온갖 생각이 모두 식어 버려 객지에 머물기가 한시도 어려웠소.

스스로 생각건대 나이는 늙고 병은 잦으니 죽을 날이 머지않은 듯한데, 타향의 벼슬살이로 신세가 외로운 중과 같으니 어찌 깜짝 놀라며 스스로 위태로움을 느끼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소? 이른바 사람이 한 세상에 사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네.人生一世間 忽如遠行客라는 옛 시구(詩句)가 아마도 헛말이 아니구려. 더더구나 여관의 긴긴 밤에 고향 생각이 무척 괴롭고, 음식도 솜씨가 바뀌고 침석도 전에 눕던 자리가 아니라서, 옛사람의 병주(幷州)를 그리워하는 정이 아스라이 일어나게 되었던 거요.

형도 또한 사관(査官)으로서 의견이 나와 대략 동일하니, 발미를 지어 내는 일은 다른 사람 손을 빌릴 필요가 없소. 순석(旬席 감사가 있는 자리)에서 아뢰고, 곁에 있던 형에게 부탁했던 것은 이 때문이오.

그런데 일이 불행하여 이리저리하다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다만 입 다물고 피할 따름이지 어찌 홀로 자기 명분만 깨끗이 할 수 있겠소? 지금 이미 행장(行裝)을 정돈하고 있는데, 돌아갈 시기가 이를지 더딜지도 내 손에 달려 있지 않으니 이것이 괴롭고 답답하오.

 

 

[C-001]응지에게 답함 : 내용으로 보아 연암집 2에 수록된 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답함答公州判官金應之書을 쓴 직후에 작성된 편지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 편지 바로 다음에 수록되어야 마땅한데 편집상의 실수로 현재와 같이 배치된 듯하다.

[D-001]무망(无妄)의 병 :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뜻밖의 병을 말한다. 주역 무망괘(无妄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 아무런 까닭이 없이 걸린 병이니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낫는 희소식이 있으리라.无妄之病 勿藥有喜 하였다.

[D-002]이아(貳衙) : 감영이 있는 고을의 관아를 말한다. 공주(公州)의 목사(牧使)는 충청 감사가 겸임하고 판관 1인이 고을 실무를 관장했으므로, 여기서는 김기응이 집무를 보던 공주 관아를 가리킨다.

[D-003]상명(償命) : 살인죄로 인해 사형을 받는 것을 말한다.

[D-004]가슴과 …… 어려웠소 : 앞서 보낸 공주 판관 김응지에게 답함答公州判官金應之書 중의 일부 구절들을 인용한 것이다.

[D-005]사람이 …… 같네 : 문선(文選) 29에 실린 고시(古詩) 19() 중의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태어나니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고 하였다.

[D-006]병주(幷州)를 그리워하는 정 : 오래 살다 떠나온 타향을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정을 말하는데, () 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시 도상건(渡桑乾)’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 시에서 가도는 병주에서 10년이나 객지 생활을 하며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으나, 갑자기 그곳을 떠나 고향에서 더욱 먼 곳으로 떠나게 되니 병주가 오히려 고향처럼 그리워지노라고 노래하였다. 병주는 중국 고대 12()의 하나로, 당 나라 때에는 산서(山西) 태원부(太原府)였다. 여기서는 공주에서 불편하게 지내자니 면천에서 지낼 때가 그리워지더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D-007]돌아갈 …… 않으니 : 감사가 사직서를 받아 주어야만 귀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답함

 

 

일전에는 공무(公務)와 사사(私事)가 너무도 복잡하여 미처 편지를 올리지 못하다가, 막 장리(狀吏)의 출발 여부를 묻자 잠깐 사이에 벌써 떠나버렸다 하니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 그지없었소. 필시 나더러 편지 쓰기에 뜻이 없어서 답장을 생략해 버렸다 생각했을 거요. 급기야 먼저 보내신 짧은 편지를 받아 보니 과연 내 짐작과 같았소. 송구스럽고 부끄러워 견딜 수 없사외다. 이 아우가 어찌 이렇게 졸장부같이 굴겠소? 한 번 뜻대로 안 되었다 해서 멍하니 멍청스레 앉아 공중에 대고 글자나 쓰고 있겠소? 어쩌자고 더욱 사람을 부끄러워 죽게 만드시오?

보름날 아침에 각 고을의 아전들이 포사문(布司門) 밖에 떼로 모여 얼어붙은 붓을 호호 불어 녹이며 어깨를 서로 밀치고 발등을 서로 밟고 서서, 마치 과거 시험장에서 글 제목을 내걸면 응시자들이 베껴 써서 풀이하듯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서로 외치기를,

 

기주(冀州)의 전부(田賦)인가?”

단공(亶公)이 말을 달려간 곳인가?”

변자(卞子)가 상투가 없는가?”

복씨(卜氏)가 일() 자를 머리에 얹었는가?”

정일(精一)을 잡았느냐?”

자막(子莫)이 잡았느냐?”

어떤 장리(贓吏 뇌물을 받거나 횡령한 관리)를 잡았는고?”

하자,

 

수배(隨陪)를 잡았다네.”

라는 대답이 나왔소. 그러자 온 장내가 떠들썩하게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네 원님이 음관(蔭官)인 줄 아는데, 지금 교묘하게 발사하여 신기하게 맞혔으니 이야말로 활을 잘 쏜다고 이를 만하다. 네 원님은 혹시 찬밥 신세의 무반(武班)이 아니냐?”

하여, 면천(沔川) 고을의 이졸(吏卒)들이 크게 부끄러움을 띠고 돌아왔었더라오.

이 아우는 막 이불을 끼고 식전 미음을 마시다가 이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배를 틀어잡고 킥킥거리니 갓끈이 썩은 나무 꺾어지듯 끊어지고,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며, 마치 독한 종기가 한창 심하게 곪았는데 긴 침으로 찔러 터트리니 고름이 튀어 의복은 비록 더러워졌지만 기분만은 갑자기 상쾌한 것과 같았소.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것이 있지요.

 

삼정승 사귀려 말고 제 몸 잘 가지라.’

했으니 이는 스스로 힘쓰라는 말이고,

 

네 집 쇠뿔이 아니면 우리 집 담장이 왜 무너지나?’

했으니 이는 남을 허물하는 말이고,

 

밤에는 흰 것을 밟지 말라. 물 아니면 돌이다.’

했으니 이는 밤길 가는 사람에게 경계한 말이고,

 

나고 들 때 고개 숙임은 문을 공경해서가 아니다.’

했으니 이는 남과 충돌할까 경고해 주는 것이고,

 

주인집에 장() 떨어지자 손님이 국 마다한다.’

했으니 이는 주객이 모두 편리한 것을 이른 말이오. 형의 충고는 이 몇 가지 속담을 보자면, 나를 어느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뒷갈망 잘하는 것이 나으니, 뒷갈망을 잘하자면 그 떠나고 머물기를 잘하는 것이 낫소. 떠나기를 속히 하거나 머물기를 오래 하기를 비록 감히 성인(聖人)의 시중(時中)에 견주지는 못하지만, 또한 어찌 허겁지겁 떠나 버림으로써 더욱 남의 비웃음을 사서야 되겠소?

 

 

[D-001]장리(狀吏) : 지방 관아들 사이에서 공문을 전달하던 지자(持字)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2]한 번 …… 해서 : 정사년 12(양력 1798 1)의 고과(考課)에서 상()이 아니라 중()을 받은 사실을 가리킨다. 過庭錄 卷3

[D-003]공중에 …… 있겠소 : 원문은 咄咄書空耶인데, () 나라 때 중군(中軍) 은호(殷浩)가 무능하다 하여 먼 지방으로 쫓겨나자 온종일 어허! 괴상한 일이로고.咄咄怪事라는 네 글자만 공중에 대고 쓰며 지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크게 실망하거나 유감을 품은 경우를 비유할 때 쓰인다.

[D-004]포사문(布司門) : 포정문(布政門)을 가리키는 듯하다. 감영(監營)을 명() 나라 식으로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부르며, 영문(營門)을 포정문이라고도 부른다. 牧民心書 吏典 束吏

[D-005]기주(冀州)의 전부(田賦)인가 : 고과(考課)가 상()이냐고 물은 것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기주(冀州) 그 부세(賦稅)가 상상(上上)인데 간혹 차상(次上)이 섞였다.厥賦惟上上錯고 하였다. 기주는 고대 중국의 구주(九州)의 하나로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전부와 하북성(河北省) · 하남성(河南省) · 요령성(遼寧省)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전부(田賦)는 토지에서 생산된 곡물로 바치던 세금을 말하는데, 구등법(九等法)이라 하여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 차등을 두었다.

[D-006]단공(亶公) …… 곳인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단공은 오랑캐의 침략을 피해 주() 나라의 수도를 기산(岐山)으로 천도한 고공단보(古公亶父)를 가리킨다. 시경 대아(大雅) () 고공단보가 이른 새벽에 말을 달려,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岐山) 아래에 이르셨네.古公亶父 來朝走馬 率西水滸 至于岐下라고 하였으므로, 기하(岐下)의 하() 자를 암시한 것이다.

[D-007]변자(卞子)가 상투가 없는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는 남자의 통칭(通稱)인데 자() 자와 음이 같으므로, 여기서는 변() ()를 암시한다. ‘ 자 상단의 점이 없으면 하() 자가 된다.

[D-008]복씨(卜氏) …… 얹었는가 : 고과가 하()냐고 물은 것이다. () 자에 일() 자를 가획(加劃)하면 하() 자가 된다.

[D-009]정일(精一)을 잡았느냐 : 고과가 중()이냐고 물은 것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으리라.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10]자막(子莫)이 잡았느냐 : 고과가 중()이냐고 물은 것이다. 자막은 노() 나라의 현자(賢者)인데,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양주(楊朱)나 묵적(墨翟)과 달리 자막은 중도(中道)를 취했다.子莫執中고 하였다.

[D-011]수배(隨陪)를 잡았다네 : 고과가 하()라는 뜻이다. 수배는 수령의 시중을 들던 하인을 말한다.

[D-012]교묘하게 …… 맞혔으니 : 원문은 巧發奇中인데, 연암에 대한 고과(考課) 제목(題目) 중의 표현을 이용한 풍자적 표현이다. 충청 감사 한용화는 연암에 대해 다스림은 구차스럽지 않으나 병이 간혹 교묘하게 발동한다.治則不苟 病或巧發라고 제목을 쓰고 고과를 상()에서 중()으로 깎아내렸다. 이는 자신과 불화한 연암이 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서를 올린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때문이라 한다. 過庭錄 卷3 위의 제목 중의 교발(巧發)’을 교묘하게 활을 쏜다는 뜻으로, 고과에서 중()을 받은 것을 과녁을 명중했다는 뜻으로 바꾸어 조롱한 것이다.

[D-013]이는 …… 것이고 : 원문은 此警人所抵觸也인데, ‘ 자가 몇몇 이본들에는 其有로 되어 있다.

[D-014]성인(聖人)의 시중(時中) : 공자가 때의 변화에 맞추어 합당하게 처신한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서 떠나기를 속히 할 만하면 속히 하고, 오래 있을 만하면 오래 있고, 머무를 만하면 머무르며, 벼슬할 만하면 벼슬을 한 분이 공자이다.可以速則速 可以久則久 可以處則處 可以仕則仕 孔子也라고 하면서 공자를 시중의 성인聖之時者이라고 칭송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응지에게 보냄

 

 

현재 사직할 만한 사정과 질병 외에도 더욱더 절박한 슬픔이 있으니, 선산(先山)을 면례(緬禮)하는 일이오. 이전부터 계획하기는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일은 크고 힘은 모자라서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다 보니 그렁저렁 삼십 년 넘게 지체되었소. 언제고 두려운 건 일찍 죽게 되어 이 일이 곧 중지되고 마는 것이오.

영남 고을에서 돌아온 이래로 역량이 대략 모여져서, 몇 해 동안 벼르고 벼른 것이 지난가을로 정해져 있었소. 그래서 이장(移葬)할 때 쓰는 도구도 갖추어졌고 날짜도 잡아 놓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남쪽으로 오게 되니, 실로 낭패가 되었던 거요. 더더구나 이 몸의 나이가 환갑이 넘었으니 앞길이 매우 바쁜데 지금 또 직함에 얽매여 세월을 끈다면, 비단 풍수지리에서는 꺼리는 것도 많을 뿐만 아니라 길한 해를 만나기가 어려우며, 빈 산에 치표(置標)만 해 두면 남에게 뺏기기가 쉽소. 지난날 감사께서 이 간곡한 심정을 깊이 마음 아파하시어, 새해가 되기를 조금 기다려 말미를 청하겠노라고 하니 면전에서 틀림없이 승낙을 하셨소.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인정상으로나 도리상으로나 위급하게 되었으니, 말미를 청하는 일은 감히 다시 논할 문제가 아니오. 내심 서로 버티다가 앉아서 절기만 놓쳤으니, 사람된 도리뿐만 아니라 사체(事體)에도 손상이 가고 말았소.

바라건대 이 사정을 들어 감사에게 낱낱이 자세히 아뢰어, 그만두고 돌아가는 길을 빨리 만들어 주는 것이 어떻겠소? 이만 줄이오.

 

 

[D-001]선산(先山)을 면례(緬禮)하는 일 : 연암은 1767년에 별세한 부친의 장지(葬地) 문제로 녹천(鹿川) 이유(李濡 : 1645~1721)의 후손가와 소송이 빚어지자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으나, 남과 원한을 맺고 싶지 않아 부친의 유해를 딴 곳에 임시 매장한 뒤 장차 길지(吉地)를 얻어 이장할 계획을 줄곧 품고 있었다. 過庭錄 卷1

[D-002]일찍 죽게 되어 : 원문은 溘先朝露인데, 아침 이슬보다도 빠르게 사라진다는 뜻으로 일찍 죽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편지에서 알려 준 어떤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한 번 웃음을 터뜨릴 만하오. 속담에 중 꿈꾸고 문둥이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무엇을 이름이냐 하면, 중은 절에 살고, 절은 산에 있고, 산에는 옻나무가 있고, 옻의 독기는 사람을 문둥이처럼 만들므로, 꿈에 서로 연결되어 나타난 때문이오. 내가 예전에 중국에 들어갔었는데, 중국은 현재 되놈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 되었소. 나는 일찍이 그들과 더불어 함께 놀고 자고 술 마시고 밥 먹곤 하였으니, 꿈속에서 중을 본 것과 같을 정도만이 아니었소. 그러기에 세상 사람들이 나더러 문둥이라 해도 이상히 여길 것이 없소.

파피리를 불고 대말을 타고 놀던 옛날의 동무들로 늙도록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끼리, 침관(寢冠)을 놀려 대어 털모자毳帽라 하고 해어진 털배자를 비웃어 전구(氈裘)라 하지만 이는 어찌 참으로 붉은 실로 된 고깔을 쓰고 말굽형 소매의 옷을 입어서겠소? 대개 되놈이라 하여 비웃으면 아이들도 부끄러이 여기는 바이기 때문에 비슷한 사물을 끌어들여 서로 농담한 것이니, 마치 함께 목욕하면서 벌거벗었다고 희롱하는 격이라, 누가 그 말에 성을 내겠소? 수십 년의 길고 긴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옛날의 떼 지어 노닐던 친구들이 거의 다 죽어 아무리 하룻밤 우스개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하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그런데 지금 평소에 전혀 모르던 사람이 갑자기 되놈의 의복이란 따위의 말로 곧장 남에게 덮어씌우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글로 만들어서 욕지거리를 늘어놓는단 말이오? 정신 이상으로 실성한 사람이 아닌 바에야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제 스스로 되놈이 되어 남의 비웃음과 욕을 받겠소? 상식으로 따져 보아도 거의 이치에 가깝지 않은 일이 아니겠소? 하인들도 보기가 부끄러울 지경인데, 더더구나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는 자리에 부끄러워하는 낯짝을 하고 있겠소? 그자가 지어낸 말이 몹시도 조잡하여 비록 길에서 노는 아이들이나 저자의 심부름꾼들이라도 누가 다시 믿어 주겠소? 한 번의 웃음거리로 넘기고 말 일이오.

바라건대 우리 집 아이들에게 훈계하여 결코 남들에게 이러니저러니 변명을 말라 함이 어떻겠소? 설령 오유선생(烏有先生)의 성명을 묻는 자가 있다면 얼굴이 해맑고 눈썹이 또렷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될 거요.

 

 

[C-001]이중존(李仲存) : 중존은 이재성(李在誠 : 1751~1809)의 자이다. 이재성은 계양군(桂陽君 :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의 후손으로 호를 지계(芝溪)라고 하였다. 연암의 처남이자 평생지기였으며, 이서구 · 이덕무 · 박제가 등과도 절친하여 북학파(北學派)의 일원으로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형제에게 글을 가르쳤다. 노년에 진사(進士) 급제 후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고, 문집으로 지계집(芝溪集) 7권이 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D-001]내가 …… 들어갔었는데 : 정조 4(1780) 진하 별사(進賀別使)의 일원으로 중국에 다녀온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연암은 열하(熱河)에서는 윤가전(尹嘉銓) · 왕민호(王民皥) 등과, 북경에서는 초팽령(初彭齡) · 유세기(兪世琦) 등 청 나라 문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D-002]파피리를 …… 동무 : 원문은 葱篠舊交인데, 총소(葱篠)는 총적(葱笛)과 소참(篠驂), 즉 파의 잎으로 만든 피리와 대나무로 만든 말竹馬을 가리킨다.

[D-003]침관(寢冠) : 잠잘 때에 쓰는 모자를 말한다.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옛날에는 잠잘 때에 이미 침의(寢衣)가 있었으니 응당 침관(寢冠)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은 두풍(頭風)을 앓는 사람에게만 침관이 있다.”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53 耳目口心書6

[D-004]털모자毳帽 : 당시에 털모자를 청 나라에서 대량 수입해다 썼다. 연암집 2 ‘김 우상에게 축하하는 편지賀金右相書의 별지(別紙) 참조.

[D-005]전구(氈裘) : 북방 오랑캐들이 입던, 털과 가죽으로 된 옷을 말한다.

[D-006]붉은 실로 된 고깔 : 청 나라 때 남자의 예모(禮帽)는 모정(帽頂)의 중간 부분을 붉은 실로 짠 모위(帽緯)로 장식하였다.

[D-007]말굽형 소매 : 청 나라 때 남자 예복의 말굽형 소매인 마제수(馬蹄袖)를 가리킨다.

[D-008]그런데 …… 말이오 :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이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자자해지자 이를 시기한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 연암이 가끔 옛 의복인 학창의(鶴氅衣)를 입어 보곤 한 사실을 과장 · 왜곡하여 되놈의 의복을 입고 백성들을 대한다.胡服臨民는 설을 지어내어 서울에 전파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9]길에서 …… 심부름꾼들 : 원문은 街童市卒인데, 시졸(市卒)은 원래 시문(市門)의 문지기를 가리키는 말이나, 여기서는 식견이 가장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아동주졸(兒童走卒), 가동주졸(街童走卒)이란 성어와 같은 뜻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D-010]오유선생(烏有先生) : () 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에 나오는 허구적인 인물을 말한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되놈의 의복을 입었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D-011]얼굴이 …… 사람 : 한 나라 대장군 곽광(霍光)은 훤칠한 키에 얼굴이 해맑고 눈썹이 또렷하며 멋진 수염을 지녔다고 한다. 연암집 5 ‘대호에게 답함答大瓠 참조. 여기서는 되놈의 의복을 입은 것으로 의심받은 연암 자신의 용모를 농담으로 곽광에 비겨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에게 답함

 

 

세상 사람들이 하도 바쁜 탓인지 남의 말을 흐리멍덩하게 듣고, 전하는 말도 어물어물하니 이 때문에 근일 말하는 자들이 더욱 조리가 없게 되는 것이오. 나는 자세히 말을 할 터인데, 그대 역시 너무 길게 끈다고 싫증 냄이 없을는지요.

내가 처음 영남 고을에 부임했을 때, 용소(龍沼)에서 비를 빌게 되어, 유 선생(劉先生)  이름은 처일(處一)이다.  이라는 이가 축관(祝官)으로 와서 용소 위에 있는 절에서 재()를 지냈는데, 수염과 눈썹이 하얗고 의복이 예스럽고 특이해 보였지요. 그래서

 

선생이 입고 계신 것이 무슨 의복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학창의(鶴氅衣)입니다.”

하더군요. 이는 대개 벼슬아치의 사복을 창의(氅衣)’라 칭하므로 ()’ 자 하나를 더 얹어 그와 구별하게 한 것이오. 그 제도는 옷깃은 모나고 양 섶은 곧으며, 흰 바탕에 검은 선〕 - 음은 ()’이다.  을 둘렀으며, 세 자락이 옆으로 터지고 양 옷깃이 맞닿아서 몹시 점잖아 보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소.

 

선생은 부디 산에는 놀러 가지 마시오.”

그가 그 까닭을 묻기에, 나는 웃으며 말했지요.

 

예전에 밤에 모였던 때가 기억나는데, 좌중에 조경암(趙敬庵)  이름은 연귀(衍龜)이다.  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히 실행하는 사람이었소. 그가 일찍이 두 학동을 거느리고 구월산(九月山)을 노닐면서 치관(緇冠)을 쓰고 심의(深衣)를 입고 다녔는데, 산성(山城)의 별장(別將)이 졸개 두어 명을 거느리고 뒤를 밟았던 거요.

()는 사뭇 그런 줄도 모르고 제자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산 이름이 구월산인데 본래 이름은 아사달산(阿斯達山)이다.’ 했더라오. 그러자 성장(城將)이 별안간 호통을 치며 과연 오랑캐兀良哈로다!’ 하며 좌우에게 눈짓을 주어 포박을 하려 드는 것이었소. 조는 성을 내며 너는 어찌 남을 되놈이라 욕하느냐?’ 하니, 성장 역시 꾸짖으며 네가 되놈 옷을 입고 되놈 말을 하니 되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하였소. 조는 하도 다급하여 정수리를 드러내 보이며 너는 언제 상투 지닌 오랑캐를 본 적이 있느냐?’라 했소.

잠시 후에 절 중이 와서 알아보고 이분은 여주(驪州) 조 생원(趙生員)이오.’ 하자, 성장은 그래도 의심이 안 풀려 중에게 당부하기를 이 손님은 밥도 주지 말고 산 밖으로 내쫓아라.’ 했더라오. 그래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등에서 땀이 난다고 하여, 온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더라오.

나는 조에게 말하기를 군자란 평상시에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삼가는 법이오. 사마 온공(司馬溫公)이 심의를 증정했어도 소 강절(邵康節)은 늘 입지는 않았으니 이 어찌 평상시에 행동을 삼가는 군자가 아니겠소?’ 하니, 조의 말이 그렇다마다요. 내가 한참 곤욕을 볼 때에 머리털이 있어 덕을 보았소. 지금처럼 연로하여 대머리였더라면 무엇으로써 해명했겠소?’ 하여 온 좌중이 더욱 크게 웃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오. 지금 선생이 입고 있는 그 의복도 성장에게 의심 살 것이 아니겠소?”

() 역시 크게 웃고 나서는,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이 옷은 우리 고장 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가 물려준 제도입니다. 감히 묻자온대 성주(城主 사또)께서 입고 계신 것은 무슨 의복입니까?”

하기에,

 

이 역시 이른바 창의라는 거요.”

라고 대답했지요. 그러자 유는 말하기를,

 

명칭과 실상이 다 근거가 없습니다. 새 깃을 갈라서 옷을 만든 것을 창()이라 이르는데, 창이란 본래 학의 날개로, 그 날개를 펴면 까만 선을 두른 것 같으니 이른바 호의현상(縞衣玄裳)이란 것이 이것이요, 옛날의 의복이란 검은 선을 두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창의라 이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이른바 창의라는 것은 선을 둘러 가장자리를 구별하지 않고 소매는 중의 장삼 같으며, 더구나 옷깃을 여미는 부분督袵이 항상 열려 있고 현무(玄武)는 엄정하지 않지 않습니까? 이는 단지 습속으로 그렇게 된 것뿐이니, 옛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성장의 의혹을 사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나서, 곁에 있던 통인(通引)을 가리키며 강개한 어조로 말하였소.

 

총각이란 관을 아직 쓰지 않은 동자의 호칭이니 이른바 총각관혜(總角丱兮)’가 이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땋은 머리가 발뒤꿈치까지 드리워져도 오히려 총각이라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아이를 가르침이 바르지 못하고 명칭과 의리가 모두 어긋났으니, 이 역시 등솔이 터진 창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고장의 정동계(鄭桐溪)가 물러나 산중에서 살 적에 그 밑에 있는 동자들은 모두 땋은 머리를 풀어 쌍상투로 틀어 올렸지요. 이것은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뒤에 우리 일가 두어 사람들이 삼동(三洞)에 놀러 가기 위하여 기생과 악공(樂工)을 빌려 달라 하기에, 나는 사절하며,

 

그대들이 지금 찾아가는 그 산 전체가 바로 기생인걸요.”

했더니, 모두 놀라며 어째서냐고 물었소. 나는 웃으며,

 

적상산(赤裳山)이 아니요.”

하였소. 그리고 농 삼아 앞에서 한 말을 들려 주며, 함부로 산에 놀러 가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이 고을에는 어진 이가 많소이다.”

하였더니, 그 손들이 발끈하여 일어나면서

 

백성으로서 제 원님이 되놈 옷 입었다고 조롱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합디다.

그 뒤 이웃 고을 원님들 4, 5명이 모였을 때, 영남 풍속이 거세어 원 노릇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였지요. 그때 누군가가

 

되놈 옷과 심의에 대한 풍설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고 묻기에, 나는

 

이는 잘못 전해진 말이오. 그런데 또 어디서 들었소?”

했더니, 대답이

 

그대 집안의 족형(族兄)과 친분이 있어 근간에 찾아갔더니, 이상한 소문을 파다하게 전해 줍디다.”

하는 것이었소.

! 그 전하는 말이 비록 몹시 해괴했지만 굳이 변명할 가치도 없었소. 게다가 쟁반에 담은 음식이 계속 들어오고 거문고와 노래가 다투어 연주되었으므로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도 못했고, 남들도 자세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지요. 이때 큰 눈이 갓 개고 초승달이 누르스름하여, 서로 손을 잡고 동산에 들어가서 뭇 기생을 시켜 촛불을 잡히고 수만 그루의 긴 대나무를 구경하였지요. 그 김에 부러진 대나무 가지를 다투어 주워서 술을 덥히고 고기를 구우니, 좌우에서 대나무 토막 터지는 소리가 대포처럼 번갈아 터져 나오고, 갈대숲 까마귀와 산비둘기가 날개가 얼어붙어 어지러이 떨어졌소.

술이 얼큰하자 서로 바라보며 말을 주고받기를,

 

음산(陰山)에서 밤사냥할 제 초라함을 면치 못해, 초피 갖옷은 낡아빠져 뒤가 터진 것은 여전한데, 비파 소리 쓸쓸하고 줄 퉁기는 손가락은 추위로 떨어져 나갈 듯하네.”

하였지요. 한바탕 웃음과 해학이 흐드러졌으니 모두 다 한때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었는데, 농담거리가 굴러다니다가 남을 해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소? 그대는 어찌 잊었소? 밤에 말 탄 이교(吏校)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 속에 한껏 사냥을 했다는 말들은 모두 이런 따위가 번복되어 구실로 된 것임을 말이오. 그대는 왜 나를 위해 변명해 주지 않았소? 매란 밤에 풀어놓는 동물이 아니고, 산협(山峽) 고을 이교들이 어디로부터 그 많은 마필(馬匹)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오.

 

 

[D-001]조경암(趙敬庵) : 조연귀(趙衍龜)는 자가 경구(景九), 호가 경암(敬庵)이며,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임배후(林配垕) · 이희경(李喜經) · 이덕무 · 박제가 등과 교분이 깊었다. 靑莊館全書 卷19 雅亭遺稿11 5 趙敬庵》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詩六十首 편저로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가 있으며, 이에 대한 연암의 발문이 연암집 3에 수록되어 있다. 조연귀가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유람 다니다가 봉변당할 뻔한 일화는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1 사전(士典)1 복식조(服食條)에도 소개되어 있다. 단 구월산(九月山)이 수양산(首陽山)으로 되어 있다.

[D-002]치관(緇冠) : 선비들이 평상시에 쓰는 검은 베로 만든 관을 이른다.

[D-003]심의(深衣) : 상의와 하상(下裳)이 연결된 옷으로 대개 흰 베로 만들고 가장자리를 검은 선으로 둘렀다. 주자(朱子) 가례(家禮)에서 천거한 이래로 조선 시대 유학자 간에 이를 숭상하여 착용하게 되었으며, 그 제도에 대한 변증(辨證)이 이어져 왔다.

[D-004]아사달산(阿斯達山) : 황해도 구월산은 옛날 단군이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수천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며, 옛 이름을 아사달산이라 하였다. 고려 시대 이래 여진족(女眞族)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로 산성을 쌓고 별장(別將)을 두었다.

[D-005]오랑캐兀良哈 : ‘兀良介로도 표기하며, 오량해(烏梁海)라고도 부른다. () 나라 때 몽골 동부와 조선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女眞) 오랑캐를 가리킨다.

[D-006]사마 온공(司馬溫公) …… 않았으니 : 사마 온공은 송() 나라 때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진 사마광(司馬光), 소 강절(邵康節)은 강절(康節)이란 시호를 받은 소옹(邵雍)을 말한다. 사마광은 예기에 의거해서 심의(深衣)를 만들어 입어 보곤 했는데, 소옹에게도 이를 입기를 권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소옹은 나는 지금 사람이니 지금 사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사마광이 그 말이 이치에 맞음을 탄복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外集 卷5

[D-007]임갈천(林葛川)과 노옥계(盧玉溪) : 갈천(葛川)은 임훈(林薰 : 1500~1584)의 호이고, 옥계(玉溪)는 노진(盧禛 : 1518~1578)의 호이다. 임훈은 생원시 급제 후 참봉을 거쳐 목사까지 지냈으나 주로 고향에 은거했으며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효간(孝簡)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안의(安義)의 용문서원(龍門書院)에 제향되었다. 노진은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판서까지 지냈고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기대승(奇大升) ·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분이 깊었으며,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다. 문효(文孝)라는 시호를 받았고 함양(咸陽)의 당주서원(溏洲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D-008]까만 …… 같으니 : 원문은 如玄緣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勝溪文庫)와 연세대 소장 필사본에는 如玄端으로 되어 있다. 현단(玄端)은 고대 중국의 예복의 일종으로, 역시 옷 가장자리를 까만 선으로 둘렀다. 居家雜服攷 外服圖 玄端

[D-009]호의현상(縞衣玄裳) : 흰 비단 상의와 검은색 치마를 입었다는 뜻으로, ()의 모습을 형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D-010]현무(玄武) : ()의 검은색으로 된 테두리 장식을 말한다. 예기 옥조(玉藻) 흰 비단 관에 검은 테두리 장식을 한 것은 상중(喪中)의 자손들이 쓰는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라고 하였다.

[D-011]총각관혜(總角丱兮) : 시경 제풍(齊風) 보전(甫田), “예쁘고 아름다워라 머리털을 묶어 쌍상투를 틀었네. 얼마 안 있다 만나 보면 불쑥 관을 쓰고 있으리.婉兮孌兮 總角丱兮 未幾見兮 突而弁兮라 하였다.

[D-012]정동계(鄭桐溪) : 동계(桐溪)는 정온(鄭蘊 : 1569~1641)의 호이다. 정온은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으로,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중용되었다.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며 그 이후 관직을 버리고 덕유산(德裕山)에 은거하다 죽었다.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그의 생가가 현재 거창군(居昌郡)에 보존되어 있다.

[D-013]혐의 : 조선 시대 동자들의 땋은 머리는 원() 나라의 지배를 받은 고려 시대에 몽골의 변발(辮髮) 풍습을 모방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오랑캐의 풍습이라 비판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D-014]삼동(三洞) :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 하여 안의현의 명승지인 세 곳의 동천(洞天), 즉 화림동(花林洞) · 심진동(尋眞洞) · 원학동(猿鶴洞)을 말한다.

[D-015]적상산(赤裳山) : 전라도 무주(茂朱)에 있는 산으로 경상도 안의에서 가까운데, 가을 단풍이 여인네의 붉은 치마처럼 아름답다고 하여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D-016]음산(陰山)에서 …… 못해 : 음산은 내몽골 이남에서 내흥안령(內興安嶺)에 이르는 일대의 산들을 일컫는다. 이 대목은 흉노(匈奴) 정벌에서 패한 죄로 서민으로 강등되어 재야에서 사냥을 하며 지냈던 한() 나라 장군 이광(李廣)의 불우한 시절을 소재로 한 듯하다.

[D-017]농담거리가 ……  : 원문은 善謔之轉而爲虐인데,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에서 농담을 잘하시되 남을 해치지 않도다.善戱謔兮 不爲虐兮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선학(善謔)’은 농담을 잘한다는 뜻과 함께, 농담거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중존에게 답함

 

 

그네들이 떠들어 대는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藁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소. 연호(年號)를 말한 것이오, 지명(地名)을 말한 것이오? 이 책은 잡다한 여행 기록에 불과한 것이라, 있건 없건 잘 되었건 못 되었건 간에 본래 세도(世道)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거늘, 애초부터 어찌 춘추대의(春秋大義)에 견주어 논한 적이 있었으리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현자(賢者)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듯이 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이오.

! 청 나라의 연호가 천하에 처음 시행되었을 때 우리나라의 선정(先正)이 고신(告身 임명장)에다 쓰지 말아 달라 청한 일이 있었고, 사대부 집안의 묘에 비()를 새겨서 세울 적에도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라 추가하여 쓴 사례도 있기는 하오. 그러나 공사(公私) 문서에 이르러서는 청 나라 연호 사용을 피하지 못할 경우가 있었으니, 이는 대개 부득이한 까닭이오. 그러므로 토지나 가옥이란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어 아니하는 사람이 없을 테지만 그 증서를 만들 때 당대의 연호를 갖추어 쓰지 아니하면 매매가 성립이 되지 않는 법이오. 세상에서 유독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자는 장차 이 가옥을 오랑캐의 칭호가 붙었다 하여 살지도 않으며, 이 토지를 오랑캐의 칭호가 붙었다 하여 거기서 수확되는 곡식으로는 밥도 지어 먹지 않을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예전에 멀리 중국을 유람했을 적에 그 노정, 숙박지, 날씨, 일시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소. 그러므로 압록강을 건너던 날부터 첫머리에서 범례를 만들어 후삼경자(後三庚子)’라 했고, 다시 스스로 해설을 붙이기를,

 

어째서 ()’라 칭했는가? 숭정 기원후라는 뜻이다. 어째서 ()’이라 했는가? 기원후 세 번째 돌아온 경자년(庚子年)이라는 뜻이다. 숭정이란 연호는 어째서 숨겼는가? 장차 압록강을 건너게 된 때문이다.”

하였소. 그러고 나서 붓을 던지고 허허 웃으며,

 

옛날에는 피리춘추(皮裏春秋)가 있더니, 지금은 곽외공양(鞹外公羊)이 되었구나.”

했었소. 이는 미상불 공양전의 문체를 구차스레 빌린 것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지요.

그러나 만약 날씨의 기록 위에다 반드시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 황정월(皇正月)’이라 한다면 진실로 아니되기 때문에, 불가불 말해야 할 경우에는 왕왕 강희(康熙)라 건륭(乾隆)이라 써서 그 시대를 구별했던 것인데, 도리어 역사서의 기준으로 질책한다면 어찌 황당하지 않겠소? 이는 과연 그 원고를 보지도 않고서 억지로 말을 만든 것이오. 반드시 되놈 오랑캐 황제라 배척해야만 비로소 춘추대의를 엄수하는 것이 된단 말이오?

또 만약 오랑캐 땅이라 부끄럽다고 해서 책에다 열하(熱河)’라는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이는 더욱 당황스러운 일이지요. 고대 중원(中原)의 제후국들이 불행히도 오랑캐에게 먹힌 적은 비단 오늘날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장차 모두 다 오랑캐로 여겨서 그 지명들을 책 이름으로 삼지 말아야 된단 말이오? () 임금은 동이(東夷) 지역 사람이고, 문왕(文王)은 서이(西夷) 지역 사람이었소. 오늘날 춘추를 배우는 자를 따르자면 장차 순 임금과 문왕을 위하여 그 출생지를 기어이 숨겨야 한다는 말이오?

춘추란 중화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배척한 책임에는 틀림없지요. 그렇지만 공자도 일찍이 구이(九夷) 지역에 살고 싶다고 했소. 지금의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성인이 무엇 때문에 그가 배척하는 땅에 살고 싶어 했겠소? 이와 같은 사람이 춘추를 배운다면, 장차 호전(胡傳)은 되놈 호() 자가 들었다고 폐기해 버리고 익히지 않을 것인가요? 나를 알아줄지 나를 책망할지 시비를 가려 줄 사람이 응당 있을 터요.

대저 나는 과거를 폐한 것이 자못 일렀던 까닭에 마음이 여유롭고 활달하여, 속세를 벗어나 유유자적하면서 숙원을 이루기를 바랐던 거요. 때문에 멀리로는 목은(牧隱)을 사모하고 가까이로는 노가재(老稼齋)를 본받아, 말 채찍 하나에 단출한 보따리로 만리 길을 나섰던 것이오. 다만 생각건대, 신분은 비록 백도(白徒)이지만 명색은 유생(儒生)이라, 역관도 아니요 의원도 아니어서 행동하기 불편하였고, 몰래 갔다 몰래 와도 호칭만은 가리기가 어려웠으니, 진실로 몸을 단정히 갖는 군자로서 따진다면 스스로 마음속에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었소.

매양 이른 새벽에 말고삐를 잡고 나서면 마음속으로 독백하기를,

 

용문(龍門)의 장유(壯遊)가 무슨 대단한 일인가? 묵자(墨子)는 조가(朝歌)에서 수레를 돌렸단 말을 듣지도 못하였는가?’

하다가, 이윽고 고운 아침 해가 붉은빛을 펼치며 요동(遼東) 벌을 가득 채우면 공중에 솟아 밝게 빛나는 탑이 아스라이 말머리를 맞아 주고, 수은빛 안개가 나무숲에 자욱하며 황금빛 기와지붕은 구름 속에 솟아났었소.

나는 이 가운데에서 왼편으로 푸른 바다를 돌고 오른편으로 태항산(太行山)을 끼고 가고 또 갔었소. 마음과 안목이 날로 새로워지니 예전의 보잘것없던 포부를 비웃게 됨과 동시에, 이 기상이 호연(浩然)해짐을 깨달았던 거요. 마침내 만리장성을 벗어나 북으로 대막(大漠)에 다다랐소. 이것이 바로 열하까지 여행하게 된 연유요.

귀국한 뒤에는 물의(物議)라곤 조금도 있지 않았으며, 도리어 나의 이 여행을 부러워하는 자까지 있었소. 산중살이가 심심하고 지루해서 묵혀 둔 원고들을 모아 몇 권의 책자를 편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열하일기를 짓게 된 연유요.

안 본 것 없이 다 살펴보아 하나도 놓친 사물이 없다고 스스로 여겼으나, 문자로 옮겨 놓은 것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지나지 않고, 필치도 쇠퇴하고 말았소. 잠이 깬 뒤 베개 고이고 읽어 보니, 당초 여행에 나설 때의 마음과는 너무도 멀어졌소.

지난 발자취를 돌이켜 생각하면 구름도 물도 모두 사라지고, 이따금 낡은 초고를 펴 보면 우수마발(牛溲馬勃)이 함께 나타나니, 스스로 즐길 것도 못 되는데 누가 다시 보아 주겠소? 더욱이 중간에는 우환과 초상으로 간수해 둘 겨를조차 없었고, 또 벼슬길에 나선 이후로는 더욱더 유실되어, 겨우 그 이름만 남아 있었으니 도올(檮杌)과 같은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소. 이것이 이른바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는 거지요.

기나긴 20년 사이에 초록(蕉鹿)의 갈무리를 한바탕의 꿈으로 치부한 지 오래였는데, 시호(市虎)의 선전이 갑자기 또 날개를 달았으니 이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소?

그대는 나를 대신하여 지금 춘추를 배우는 이들에게 말 좀 해 주지 않겠소? 왜 나를 이렇게 책하지 않느냐고 말이오.

 

그대가 전번에 유람한 곳은 바로 삼대(三代) 이래의 성스럽고 영명하신 제왕들과 한() · () · () · ()이 영토로 삼은 땅이오. 지금 비록 불행하여 되놈들이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성곽과 궁실과 인민들은 물론 그대로 남아 있고, 정덕(正德) · 이용(利用) · 후생(厚生)의 도구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 · () · () · ()의 명문 씨족들도 물론 그대로 있고, () · () · 민건(閩建)의 학문도 물론 사라지지 않았소. 저 되놈들이 진실로 중국이란 땅을 손아귀에 집어넣으면 이만큼 이익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빼앗아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오.

그렇다면 그대는 왜, 예로부터 본래 지녀 온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 중국의 존숭할 만한 관례와 업적을 모조리 터득해 가지고, 돌아와서는 책자로 모조리 저술하여 온 나라에 쓰이게 하지 않소? 그대는 이런 일은 아니 하고서 한갓 피폐(皮幣)의 사신만 따라다녔단 말이오? 지금 그 기술한 내용은 모두 잡다하고 실속 없는 말로서, 한때 방랑한 자취에 불과하니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남에게 자랑할 만하다 한단 말이오? 단지 스스로 의지만 상실하고 덕만 손상할 따름이오.”

이런다면 듣는 사람이 어찌 등골이 써늘하고 입이 벌어지며 부끄럼을 못견디어 죽고 싶지 않겠소?

제후들을 끌어다가 다른 제후를 쳤기 때문에 춘추가 지어진 것인데, 지금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춘추를 끌어다가 남을 욕하는 자료로 삼는다면 되겠소? 춘추가 어찌 겉으로 꾸민 언동만으로 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소이다.

 

 

[C-001]이중존에게 답함 : 연암이 안의현에서 되놈의 의복을 입고 백성들을 대한다.胡服臨民는 설이 서울로 전파되자, 여기에 가세하여 연암과 경쟁 관계에 있던 문인 유한준(兪漢雋) 열하일기의 문체로 인해 연암이 정조(正祖)의 견책을 받은 것을 기화로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는 여론을 선동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1798년에서 1799년 사이에 호복임민(胡服臨民)’ 노호지고(虜號之稿)’라는 비방이 번갈아 일어나 큰일이 날 뻔했으나, 연암은 남들에게 해명한 적이 없었으며 오직 이재성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만 그 같은 비방을 초래한 연유를 밝혔을 뿐이라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현자(賢者)에게 …… 한다면 : 신당서(新唐書) 2 태종본기(太宗本紀)의 찬()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은 항상 현자(賢者)에게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D-002]선정(先正) : 선대(先代)의 어진 신하를 이른다. 효종실록 즉위년 8 23일 조에 응교(應敎) 조빈(趙贇)이 정축년(1637) 이래 종묘의 축문(祝文)과 조신(朝臣)의 고신(告身)에 연월(年月)만 쓰고 일절 연호를 쓰지 않은 관례를 들어 인조(仁祖)의 옥책(玉冊)과 지석(誌石)에도 연호를 쓰지 말도록 상소하자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이를 지지하는 의견을 올린 사실을 두고 말한 듯하다.

[D-003]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 숭정은 명 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연호로 1628년부터 1644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에 따라 명 나라가 망한 뒤에도 청 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숭정이란 연호를 그대로 썼다.

[D-004]다시 …… 하였소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의 서문(序文)에 나오는 대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의 기사에 대해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 한 특징인데, 연암은 그 독특한 문체를 본떠서, 열하일기 도강록의 첫머리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연도를 기록한 이유를 해설하였다.

[D-005]피리춘추(皮裏春秋) : 속으로 감춘 춘추라는 말로,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평론(評論)하는 것을 이른다. () 나라 강제(康帝)의 장인인 저보(褚裒)가 젊은 시절에 오만하고 고상한 기풍을 지녀 속에 춘추를 감추었다.”는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晉書 卷93 褚裒傳

[D-006]곽외공양(鞹外公羊) : 거죽으로 드러난 공양전이란 말로, 공양전의 문체를 본뜬 것을 스스로 풍자한 것이다.

[D-007]() 황정월(皇正月) : 춘추에서는 노()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일 년의 첫 달을 반드시 () 왕정월(王正月)’이라 적어 주() 나라 왕실의 역법(曆法)을 따르고 있음을 나타냈다. 연암이 중국 여행을 한 조선 후기 당시는 청 나라 황실의 역법을 따랐으므로, 춘추의 필법을 준수하자면 () 황정월(皇正月)’이라 적어야 한다는 뜻이다.

[D-008]강희(康熙) : 청 나라 성조(聖祖)의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사용되었다.

[D-009]건륭(乾隆) : 청 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1736년부터 1795년까지 사용되었다.

[D-010]() 임금은 …… 사람이었소 : 맹자 이루 하(離婁下) 순 임금은 저풍(諸馮)에서 태어나서 부하(負夏)로 옮겨 갔다가 명조(鳴條)에서 돌아가셨으니 동이(東夷) 지역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岐周)에서 태어나서 필영(畢郢)에서 돌아가셨으니 서이(西夷) 지역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D-011]공자도 …… 했소 : 논어 자한(子罕), 공자가 구이(九夷) 지역에 살고 싶다고 하자 어떤 이가 누추한 곳에 어떻게 사시렵니까?” 물었다. 이에 공자가 군자가 살게 된다면 무엇이 누추하겠는가.” 하였다. 구이는 동이(東夷)를 가리킨다. 동이에 9종이 있으므로 구이라고 한다.

[D-012]지금의 …… 사람이라면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지금의 이른바 훌륭한 신하란 부국강병(富國强兵)만 추구하고 임금이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을 지향하게 하지 않으니 옛날의 이른바 백성을 해치는 도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와 같이 지금의 도를 따르고 지금의 습속을 고치지 않으면, 비록 천하를 준들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할 것이다.由今之道 無變今之俗 雖與之天下 不能一朝居也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맹자의 원래 문맥에서 지금의 도는 패도(覇道) 정치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시대착오적인 존명배청(尊明排淸) 사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D-013]호전(胡傳) : () 나라 때 호안국(胡安國 : 1074~1138)이 지은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을 말한다. 좌전(左傳) · 공양전(公羊傳) · 곡량전(穀梁傳)과 함께 춘추 4()의 하나로, () · ()의 주자학파에 의해 존숭되었다.

[D-014]나를 …… 터요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공자가 나를 알아줄 것도 오직 춘추이며 나를 책망할 것도 오직 춘추로다.”라고 한 말을 이용하여, 열하일기에 대해 오랑캐의 칭호를 쓴 원고라고 한 비방이 근거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

[D-015]목은(牧隱) : 이색(李穡 : 1328~1396)의 호이다. 이색은 1348(충목왕 4)에 원() 나라의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1353년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 나라에 가는 등 여러 차례 원 나라를 드나들며 그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D-016]노가재(老稼齋) : 김창업(金昌業 : 1658~1721)의 호이다. 김창업은 1712(숙종 38)에 큰형 김창집(金昌集)이 사은사로 청 나라에 갈 때 따라갔으며 연행록(燕行錄)을 남겼다.

[D-017]백도(白徒) : 벼슬하지 못한 유생이나,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징집된 병졸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썼다. 연암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는 자제군관(子弟軍官)이란 신분으로 연행에 참여하였다.

[D-018]용문(龍門)의 장유(壯遊) : 용문은 사마천(司馬遷)을 말한다. 그의 고향이 섬서성(陝西省) 한성현(韓城縣) 부근에 있으며 등용문(登龍門)의 고사로 유명한 용문이었다. 사마천은 20세부터 수년간 역사 유적을 탐방하기 위한 큰 뜻을 품고 오늘날의 호북(湖北) · 호남(湖南) · 절강(浙江) · 산동(山東) · 안휘(安徽) · 하남(河南) 등 각 성()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들을 여행하였다. 史記 卷70 太史公自序

[D-019]묵자(墨子) ……  : 증자(曾子)는 지극한 효자였기 때문에 승모(勝母)라는 마을의 이름을 꺼려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고, 묵자는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가(朝歌)라는 고을의 이름을 꺼려 그곳에서 수레를 돌렸다고 한다. 淮南子 卷16 說山訓 소신을 지키기 위해 사소한 행동도 근신한 경우를 말한다. 또한 조가는 은() 나라의 폭군 주왕(紂王)이 세운 도읍지이기도 하다. 이 대목은 춘추대의를 엄격히 지키자면 오랑캐 황제가 통치하는 중국 땅을 아예 여행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D-020]공중에 ……  : 요동의 백탑(白塔)을 말한다. 이 탑은 구요양(舊遼陽) 교외에 있는 13층 벽돌탑으로, () 나라 이후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만주(滿洲) 동부에서 가장 크고 높은 탑이다. 열하일기 도강록에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가 있다.

[D-021]수은빛 …… 자욱하며 : 열하일기 성경잡지(盛京雜識) 7 13일자 기사에, 새벽의 짙은 안개로 인해 요동 벌이 수은 바다水銀海처럼 보인다고 묘사하였다.

[D-022]태항산(太行山) : 산서성(山西省)과 하북성(河北省) 사이에 뻗어 있는 거대한 산맥이다.

[D-023]대막(大漠) : 내몽골과 외몽골의 경계를 이루는 고비사막을 말한다.

[D-024]이것이 …… 연유요 : 원문은 此其所以爲熱河之游也인데, 일부 이본들에  자가  자로 되어 있으나 그 아래의 대응하는 구절 此其所以爲熱河日記也로 미루어  자가 옳다고 판단된다.

[D-025]산중살이가 …… 편성하였으니 : 중국 여행을 마친 연암은 황해도 금천군 연암협(燕巖峽)으로 되돌아가 열하일기의 저술에 전념했다. 현재 전하는 열하일기는 도강록 이하 모두 25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D-026] …… 살펴보아 : 원문은 燃犀之觀인데, () 나라 때 온교(溫嶠)가 무소뿔을 태워 물속을 비추어 보았더니 괴물들이 모조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異苑 卷7

[D-027]우수마발(牛溲馬勃) : 우수는 질경이車前草의 별명이고 마발은 담자균류(擔子菌類)에 속하는 식물로, 매우 흔해 빠지고 값싼 약재이다. 그러나 훌륭한 의사는 이런 것들도 빠뜨리지 않고 함께 거두어 두었다가 나중에 활용하는 법이다. 韓愈 進學解 여기서는 열하일기가 별 쓸모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다.

[D-028]우환과 초상 : 1787년 처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형 박희원(朴喜源)이 사망하고, 그 이듬해에는 일가족이 전염병에 걸려 맏며느리 덕수 이씨(德水李氏)가 사망하고 맏아들 종의(宗儀)도 죽다 살아났다. 過庭錄 卷1

[D-029]도올(檮杌) …… 말았소 : 도올은 전설 속의 가증스러운 악수(惡獸)인데, () 나라에서 악을 징계하기 위해 이로써 국사(國史)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초 나라의 국사인 도올 역시 이름만 전하고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D-030]초록(蕉鹿) …… 오래였는데 : () 나라 사람이 들에서 나무를 하다가 우연히 사슴을 때려잡은 다음 아무도 보지 못하게 땔나무로 덮어 갈무리를 해 두었는데, 나중에 갈무리 해 둔 곳을 찾지 못하자 꿈을 꾼 것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찾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周穆王》 《열하일기를 쓴 사실조차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D-031]시호(市虎)의 선전 : 시장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두 사람이 말할 때에는 믿지 않다가 세 사람이 말하게 되면 믿게 된다는 것이니, 참소하는 자가 많으면 믿게 된다는 뜻이다. 韓非子 內儲說上

[D-032]삼대(三代) :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숭상하는 하() · () · ()의 세 왕조 시대를 가리킨다.

[D-033]정덕(正德) · 이용(利用) · 후생(厚生)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삼사(三事)라고 하여 국정(國政)의 세 가지 중대사를 이른다. 정덕은 백성들의 도덕을 바르게 하는 것, 이용은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기구나 재화를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 후생은 옷과 음식 등으로 백성들의 복지를 돌보는 것을 뜻한다.

[D-034]() …… 학문 : 관은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 민건(閩建)은 복건(福建)의 주희(朱熹)를 지칭한 것으로, 송대 성리학을 통칭한 것이다.

[D-035]그대가 …… 것이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자에서 중국 제일 장관론(中國第一壯觀論)을 피력하면서 한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다. 연암집 1 회우록서(會友錄序), 7 북학의서(北學議序)에도 비슷한 내용이 보인다.

[D-036]피폐(皮幣)의 사신 :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따라 청 나라에 예물을 바치러 가는 조공(朝貢) 사신을 말한다. 피폐는 가죽과 비단 같은 예물이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옛날 태왕(大王 : 고공단보古公亶父)이 빈()에 계실 제 적인(狄人)이 침략하거늘, 가죽과 비단으로 그들을 섬겼을지라도 침략을 면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D-037]제후들을 …… 것인데 : 맹자 고자 하(告子下) 오패(五覇)란 제후들을 끌어다가 다른 제후를 친 자들이다. 그러므로 오패란 삼왕(三王)의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제 환공(齊桓公) 등 춘추(春秋) 시대의 5대 패자(覇者)들은 주() 나라 천자의 명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정벌을 일삼았으므로, 춘추는 이를 징계하기 위해 저술되었다는 뜻이다.

[D-038]어찌 …… 것인지 : 원문은 豈可以聲音笑貌爲哉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오는 구절이다. “공손함과 검소함은 어찌 부드러운 말씨와 웃는 낯빛을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춘추대의가 가식적인 언동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인용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편지로 지시하신 일은 받들어 잘 살폈습니다. 무릇 구휼정책에 있어서 가장 공명정대한 원칙으로는 공진(公賑)보다 나은 것이 없지만, 공곡(公穀 관곡)이 나뉘어 사진(私賑)으로 되는 것이 근자의 관례입니다. 그러나 공진과 사진, 명분과 실상 사이에는 모두 크게 황공하고 크게 불편한 점들이 남아 있습니다.

굶주리는 가구를 선정할 때 아무리 줄인다고 해도 매번 부풀린다는 의심을 받게 되고, 목초(牧草)를 부지런히 구했을 뿐인데 도리어 남상(濫觴)의 혐의를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굶주린 가구 숫자가 많이 줄어들어 굶어 죽어 가는 자를 구휼할 수 없게 되고, 괵량(斛量)을 줄여도 이를 잘 살피지 못해 곡식의 품질이 좋기 어려우니, 이것이 공진을 시행할 때 고려해야 할 점입니다.

명색은 사진이라 해도 실상은 공곡에 의지하게 되면, 의심과 염려가 가일층 깊어지는 동시에 관리와 단속도 더욱 까다로울 것이니, 대개 명분과 실상이 맞지 않고 공과 사는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진을 급작스레 논의할 수는 없는 점입니다.

이른바 스스로 비축하여 급한 일을 막는다.’는 것은 더욱 성실치 못한 것이 되니, 만약 말을 세내고 소를 고용하여 자기 농장의 곡식을 실어온 것이 아니라면 장차 어느 곳에서 그 많은 곡식을 스스로 비축할 수 있겠습니까? 앞서 입본(立本)하고 남은 액수를 취한 것도 흔히 담당자에게 발각되어 수의(繡衣 암행어사)나 도백(道伯 관찰사)의 조사가 물밀듯이 먼저 미쳐 오니 어느 누가 감히 범하겠습니까? 원납전(願納錢)을 도로 돌려줄 것과 권분(勸分)을 엄금할 것은 신구(新舊)의 법령이 명백히 선포되어 있으나, 이 두어 가지 방법을 제외하고는 곡식을 갖출 길이 없으니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연름(捐廩)하는 한 가지 일만이 가장 폐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관에서 쓰는 것이라 명분도 바를 뿐더러 본시 이 땅에서 나온 것이니, 이 땅에서 나온 것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바로 내 직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음에 개운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남 보기에는 명예를 구하는 것같이 되고, 물자를 실로 다 나누어 주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지방관이 된 자는 안팎 곱사등이가 한 몸에 모인 형편입니다. 지난번에 여러 고을에 감결(甘結)을 돌려서 물으신 데 대해, 어디로 정할지 몰라 우선 중론을 따르겠다고 아뢴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찮은 이 몸은 절하(節下 순찰사)의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일이 크게 잘 풀리리라고는 감히 스스로 보증하지 못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심읍(尤甚邑)으로 등급을 분류한 곳을 지차읍(之次邑)으로 옮겨다 놓고, 만이(晩移)를 표재(俵災) 대상에서 억지로 절반만 인정한 것이 지금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백성 구제에 있어서는 우심읍으로 시행하고, 굶주린 가구에 대한 구호 물자는 넉넉한 쪽으로 나누어 지급하라.’고 신신당부하는 편지를 하사하시니 이를 금석(金石)과 같이 받들고 있습니다만, 어찌 마음속으로 요량한 바야 없겠습니까?

그러기에 이미 지난여름 유월 초열흘께부터 가만히 비상 대비책을 마련하여, 영문(營門)에서 수고스럽게 공곡을 분배하도록 괴롭히지 않으려고 했으니 이것이 본래 의도한 바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오래도록 서성대며 확실히 정규(定規)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바로 굶주린 가구의 수효를 우선 미리 예측하기 어렵고, 정조(正租)를 판매하는 일을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대저 기근을 구제하는 정책에서 굶주린 가구를 선정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없으니, 이 어찌 이교(吏校)나 면강(面綱)이 가가호호 방문한다 하여 그 실정을 파악할 수 있겠습니까? 강보에 싸인 갓난아기는 자지 않으면 우는데, 무슨 말을 할 줄 안다고 그 사연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지가 있다고 그 소원을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소리만 듣고도 젖을 줄 줄 아는 것은 오직 자애로운 어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가슴만 쓰다듬어도 울음을 뚝 그치게 하니, 이는 반드시 먹여 줄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따스하게 쓰다듬고 부드럽게 다독거리는 것은 그로써 체득하자는 것이요, 가만히 기다리고 몰래 듣는 것은 그로써 때를 맞추자는 것이니, 이 어찌 이웃집 사람이나 길 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지금 영문에 서약을 올리노니, 굶주린 가구 선정을 물을 필요도 없고, 공곡(公穀)이라 이름한 것은 줄 필요도 없고, 열흘마다 으레 보고하는 일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구휼을 감시하는 감영의 비장(裨將)을 보낼 필요도 없고, 사또가 순찰할 때 왕림하실 필요도 없고, 황해도의 좁쌀을 나누어 줄 필요도 없습니다. 백성을 따뜻하게 사랑하는 이 늙은 수령에게 이 4000호의 많은 남녀를 맡기고 잊어 주신다면, 노둔함을 스스로 채찍질하여 위로는 백성에 대한 근심을 분담하게 하신 임금의 지극한 뜻과 아래로는 먹여 주기를 기다리는 민심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구휼사업이 효과가 없고 정상적인 법식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생각하건대 환히 비추어 보시는 사또의 눈을 벗어날 길이 없을 터이니, 또한 어찌 감히 제멋대로 옛날의 정분만 믿고서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사진(私賑)으로 정하오니, 뒤에 기록한 쪽지도 아울러 보아 주심이 어떠하옵니까?

 

 

[C-001]진정(賑政) …… 답함 : 연암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임 중이던 1799년 봄 흉년으로 인해 구휼 정책을 실시했는데, 역시 경상도 안의 고을에서 이미 행했던 예에 따라 사진(私賑)으로 시행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이 글은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이 면천군에 공진(公賑)을 시행하려고 하자 이를 사양하고 사진을 시행하겠노라고 하면서 감사에게 허락을 청한 편지이다.

[D-001]목초(牧草) …… 뿐인데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맹자가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제() 나라 대부 공거심(孔距心)에게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지(牧地)와 목초(牧草)를 구할 것이다. 목지와 목초를 구하나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 하고 질책하니, 공거심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백성들에 대한 구휼 사업을 부지런히 했다는 뜻이다.

[D-002]남상(濫觴)의 혐의 : 남상은 술잔에 넘칠 정도의 적은 물, 또는 술잔을 띄울 정도의 적은 물이라는 뜻이다. 공자가 화려한 복장을 하고 오만한 낯빛을 한 제자 자로(子路)를 나무라면서 양자강(揚子江)도 그 시원(始源)은 남상에 불과하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荀子 子道 여기서는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한다는 혐의를 뜻한다.

[D-003]괵량(斛量) …… 어려우니 : 로 곡식의 분량을 재는 것을 괵량이라 한다. 진휼미(賑恤米)를 나누어 줄 때 알곡만이 아니라 껍질이나 쭉정이와 겨 따위를 섞어서 괵량을 하는 경우를 지적한 것이다. 牧民心書 賑荒 設施

[D-004]이른바 …… 되니 : 수령이 흉년에 대비하여 스스로 비축한 곡식을 자비곡(自備穀)이라 부른다. 목민심서에서는 수령이 자비곡으로써 사진을 실시했다고 허위 과장 보고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수령에게 어찌 스스로 비축한 곡식이 있겠는가? 만약 제 집 식량을 운반해 오거나 자기 농장의 곡식을 실어 온 것이 아니라면, 모두 이 고을에서 나온 것이다. 진짜로 월봉(月俸)에서 덜어 냈다 해도 자비곡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부족한데, 하물며 교묘히 스스로 요령껏 환곡을 매매하고 함부로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서는 외람되어 자비곡이라 일컬어 임금을 속이니, 어찌 큰 죄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牧民心書 賑荒 竣事

[D-005]앞서 ……  : 입본은 장부상의 환곡의 숫자를 채우는 것을 말한다. 환곡을 운영하면서 지역별 또는 계절별 곡가(穀價) 차이를 이용하여, 쌀값이 비싼 지역에, 또는 쌀값이 비쌀 때 환곡을 팔아 돈으로 만들어 두었다가, 그 돈의 일부만으로써 쌀값이 싼 지역에서, 또는 쌀값이 쌀 때 쌀을 도로 사들여 환곡의 숫자를 채우고, 남는 돈을 딴 데 돌려쓰는 수법을 말한다.

[D-006]권분(勸分) : 수령이 기민 구제의 명목으로 자기 관하의 부자들에게 곡식을 바치도록 권유하는 것을 이른다.

[D-007]연름(捐廩) : 공적인 일을 위하여 관리들이 녹봉의 일부를 덜어 내어서 보태는 일을 이른다.

[D-008]감결(甘結)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내리는 공문을 이른다.

[D-009]만이(晩移) : 만이앙(晩移秧)이라고도 하며 모내기가 늦어 재해를 입은 경우를 말한다.

[D-010]우심읍(尤甚邑)으로 …… 때문입니다 : 흉년을 만난 고을의 원이 감사에게 재해(災害)를 보고하면, 감사는 재해의 정도가 심한 순서대로 각 고을을 우심(尤甚) · 지차(之次) · 초실(稍實)로 등급을 판정한 뒤, 조정에 보고하여 조세 감면 대상으로 배정받은 급재결수(給災結數)를 다시 각 고을에 할당하는데 이를 표재(俵災)라 한다. 고을 원이 감사에게 보고할 때 흔히 재해를 과장하기 때문에 감사는 이를 감안하여 등급을 낮추어 판정하고 급재결수를 삭감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 연암은 안의현의 극심한 재해를 실상대로 보고했으나, 감사가 우심 판정 대신 지차로 강등하고 만이를 표재 대상에서 절반 삭감하는 조치를 내렸던 듯하다.

[D-011]정조(正租) : 정규의 조세로 받은 벼를 이른다.

[D-012]면강(面綱) : 면임(面任)과 집강(執綱)을 이른다. 지금의 면장과 이장에 해당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추수하는 날에 살펴본바 굶주린 가구가 이웃 고을보다 조금 적었으니, 진실로 처음에는 생각조차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굶주린 가구를 선정할 즈음에 이르자 그중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가을에 이미 보리를 파종했으니 색갈이를 받아 농사짓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고, 나무를 해다 파는 자들은 짚신 삼는 자도 있습니다.” 하고, 길쌈하는 자는 삯방아 찧는 자도 있습니다.” 하며 사양하기에, 소원에 따라 책자를 만드니 심히 다투는 일이 없었습니다. 대개 지난가을 서리가 아주 늦게 내려 대신 파종한 곡식도 꽤 많이 그 결실을 먹을 수 있었고, 타작을 끝낸 뒤로도 일기가 매우 온난하여 모두 다 가을갈이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럭저럭 지낼 뿐 아니라 앞으로 살아 나가는 것도 믿을 데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소를 사육하는 집이나 술장사로 살아가는 부류들은 애당초 기록에 넣지 않았으므로, 지금 하문(下問)하시면서 굶주린 가구를 선정한 것이 너무 깐깐하지 않느냐고 도리어 염려하신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됩니다.

오늘에야 두 번째 순회하여 진곡(賑穀)을 나누어 주었는데, 아직 억울하게 누락되었다고 와서 호소하는 자가 없으니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경계(庚癸)의 외침이 날마다 관청 뜰에 가득 차서, 장차 간후(乾餱)의 허물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한탄스러운 것은 위로는 국가의 정책을 빛나게 함이 없고 아래로는 힘들게 농사일을 하지도 않으며, 풍년 들어 즐거운 해에도 태평시대를 글로써 화려하게 꾸미지도 못하면서, 한번 흉년만 만났다 하면 자기 생계만 도모하는 자들이 어찌 그리 많은가 하는 점입니다.

백 가마니의 곡식을 보조해 주신다니 어찌 극진하신 염려에 감격하지 않으오리까? 다만 생각하건대 전번에 마련한 것이 풍족하다고 말할 것은 못 되지만, 지난번에 하감(下鑑)하신 편지의 뒤에 기록한 정도면 될 듯합니다. 앞으로 추가로 들 것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이 숫자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듯합니다. 관청 뜰 앞의 조제(租堤)가 비록 상() 나라 도읍의 조제(糟堤)에는 못 미치지만 오히려 망오리(望五里) 정도는 됨직하니, 망오리는 바로 망우리(忘憂里)입니다.

뿐만 아니라 벼를 이무(移貿)하고 남은 밑천이 아직도 오백 냥이 있다는 것은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비축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사유물도 아닌, 바로 관에서 사용하는 것인즉, 호칭은 비록 다를망정 백성에게서 나온 것은 마찬가지이니 어느 것인들 공곡(公穀)이 아니겠습니까? ‘비용을 절약하여 비축이 있다 한다면 옳거니와, 만약 제 주머니 돈과 같이 보면서 스스로 비축한 것이 있는 양한다면 그런 조치를 취한 본뜻이 전혀 아닙니다. 하물며 분수에 넘치는 구휼 물자를 추가로 많이 주어 이미 마음이 안정된 백성들이 구차스럽게 요행을 바라도록 한단 말입니까? 전날 체가(帖加)를 돌려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백 가마니의 곡식을 보조해 주신다는 조치를 특별히 중지하여 이 몸의 하찮은 포부나마 펴게 함으로써 직분을 다할 수 있게 함이 어떠하신지요?

 

 

[D-001]책자를 만드니 : 굶주린 가구를 선정하여 그 명단을 책자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D-002]경계(庚癸)의 외침 : 본디 군대의 은어(隱語)로 군량(軍糧)을 달라는 뜻이다. ()은 서방(西方)으로, 곡식을 주관하고, ()는 북방으로, 물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春秋左氏傳 哀公 13 여기서는 굶주린 백성들이 양식을 달라고 호소하는 것을 이른다.

[D-003]간후(乾餱)의 허물 : 간후는 말린 밥을 말하며, 하찮은 먹을 것 때문에 생긴 허물을 이른다. 시경 소아(小雅) 벌목(伐木), “사람들이 덕을 잃는 것은 말린 밥 때문에 생긴 허물이다.民之失德 乾餱以愆 하였다. 여기서는 진곡을 서로 먼저 타려고 하다가 친한 사람들끼리 사이가 나빠지는 것을 말한다.

[D-004]관청 …… 미치지만 : 조제(租堤)는 벼가 둑처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조제(糟堤)는 술지게미가 둑처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 조구(糟丘)라고도 한다. 태공육도(太公六韜)에 의하면, () 나라의 폭군 주()는 도읍에 술로 채운 못酒池을 만들고 술지게미로 된 언덕糟丘을 따라 배를 돌리니 소처럼 몸을 수그려 술을 마시는 자가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하() 나라의 폭군 걸()의 고사와 흡사한데, 걸 역시 술로 못을 만드니 배가 다닐 만했으며 술지게미로 된 언덕이 족히 십 리까지 바라다보였다.糟丘足以望十里고 한다. 韓詩外傳 卷4

[D-005]망오리는 바로 망우리(忘憂里)입니다 : 발음이 비슷한 어구(語句)를 이용한 해학적 표현이다. 기민 구제를 위한 벼가 오 리나 길게 쌓여 있으니 곧 근심을 잊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D-006]이무(移貿) : 지역별 곡가(穀價) 차이를 이용하여 환곡을 사고 팔아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한다.

[D-007]체가(帖加) : 벼슬을 주면서 정식 발령은 내지 않고 임명장인 체지(帖紙)만 주는 체가자(帖加資)의 준말로, 공명첩(空名帖)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지난번에 본군 범천면(泛川面) 주민 김필군(金必軍)이 바친 책자를 영문(營門)에 보고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써 병영(兵營)이 노발대발하여 심지어 그 죄를 형리(刑吏)에게 전가한 일까지 있었으니 너무도 불안스럽습니다.

김가는 본시 천주교도의 한 사람으로 지난겨울 동안에 집을 비우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금년 9월 중에 그자의 호()가 속한 오가통(五家統) 내의 주민 중에서 김가가 도로 제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고발했으므로, 우선 늦춰 주어 그가 안착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색갈이를 독촉하는 창졸(倉卒)을 시켜 부르면서 패자(牌子)도 쓰지 않고 관차(官差)도 시키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실로 알 듯 모를 듯 긴가민가하는 사이에 처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자가 과연 크게 의구심을 내어 즉시 와서 현신(現身)하고, 소매 속에 든 책자를 바치며 아울러 소지(所志)까지 올려, 자수하여 죄를 면하는 거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그자는 본시 어리석고 무식한 자라 책자가 있건 없건 본시 염려할 것이 없으며, 더구나 제가 이미 자진해서 바친 이상 기왕지사를 추궁하여 바야흐로 고쳐먹으려는 마음을 저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날을 골라 공개리에 불에 태워 버리라는 뜻으로 그 소지에 제사(題辭)하고는, 자못 위로하고 격려하는 뜻을 보이고서 즉시 물러가게 했던 것입니다.

그 후 병영의 하리(下吏)가 지나는 길에 본군 이청(吏廳)을 들러 경내에 천주교도가 있는지 없는지 자세히 물었으므로, 여러 아전들이 말하기를,

 

전날 천주교를 배우고 익히던 자들이 저절로 사라져 모두 평민이 되었는데, 그중에 김필군이란 자가 가장 교화하기 어려웠으나 일전에 또 그 책자를 자진하여 바쳤으니, 이제는 이 고을 안에 다시 의심할 만한 일이 없소.”

하자, 병영의 하리는 여러 고을을 정탐하러 나왔다는 뜻을 슬쩍 비치면서 바로 다른 곳으로 향해 갔으니, 본 사건의 우여곡절 또한 이와 같을 따름이었습니다.

당초 생각에는 장날을 기하여 불태워 버리게 할 작정이었는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려 백성들이 많이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생각한 바 이런 일은 혼자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순영(巡營 감영)에 보고를 올린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고을은 병영과는 군사 업무가 아니면 본래 상관이 없는데, 어찌 병영에서 졸지에 와 그 책자를 찾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래서 지난날 순영으로 올려 보냈다는 뜻으로 논보(論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영을 경유하지 아니하고 바로 순영으로 보고했다고 하면서 크게 유감의 뜻을 나타냈을 뿐더러, 다시 비밀 관문(關文)을 만들어 김가를 고을 옥에 잡아 가두고 그가 종전에 책자를 감추었던 이유를 캐고 들며, 반드시 병영에서 잡은 것으로 강요하여 조서를 꾸미게 했으니, 이게 무슨 거조입니까? 도대체 병영이 누구를 보내서 잡았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몰래 수색해 냈다면 어찌 바로 붙잡아 가지 않고 이렇게 추후에 와서 찾아가는 일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듣자니, 이자들은 여러 해를 두고 타일러도 듣지 아니하며, 무릇암행어사가 출도할 때나 감사가 순시할 때에 누차 잡아다가 곤장과 형장(刑杖)을 치고 옥으로 옮겨 가두곤 했으나 자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후 수령들이 그놈들을 도례(徒隸 관하인(官下人))의 천역에 충당하고 그 처자식까지 잡아다가 구속하곤 했으며, 혹은 교졸(校卒)들을 많이 풀어 불시에 집을 에워싸고 수색하여 심지어는 항아리 속까지 다 뒤지고 상자까지 다 털었어도 일찍이 종이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깊이깊이 감춰둔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데, 제가 자진해서 바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관청의 뜰에 그 물건이 굴러와 있겠습니까?

백성을 감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방법이란 아무리 그 지극한 정성과 거짓 없음을 힘써 보여 준다 해도, 그들을 깊이 믿음으로 감동시키지 못할까 늘 걱정인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이와는 정반대로, 사납게 금단(禁斷)시킴으로써 공적을 세우고자 하여, 먼저 스스로 어리석은 백성에게 위신을 손상당한다면 그 사리와 체면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자가 과연 미혹을 깨닫고 마음을 고쳐 책자를 바치고 양민으로 돌아온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이 고을에서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옛날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고 할 따름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천주교도가 되는 것을 금단하려고 하면서, 먼저 불성실을 내보인다면 될 법이나 한 일이겠습니까? 이른바 형리(詗吏)란 놈이 전해들은 말을 가지고 돌아가 애매모호하게 고한 것인데, 이런 짓은 으레 서리(胥吏)와 같은 하류들의 본색입니다. 그래서 자질구레하게 해명하고 드러내는 것을 실로 피하고자 하여, 죄수의 진술을 보고할 때 대략 본말을 거론했던 것입니다.

필경에 조치한 것은 당초 소지(所志)의 제사(題辭)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한 번 뜻에 맞지 않았다고 해서 대신 하리(下吏)를 잡아다 다스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도입니까?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이 아무리 늙고 용렬하지만 어찌 이런 수치를 참아 가며 편안히 직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직서를 써서 올리오니 바라건대 빨리 파직을 시켜 제 분수에 안주하게 하여 주십시오. 병영에 올린 보첩(報牒 보고서)을 아울러 기록해 올리오니, 한 번 훑어보시면 당연히 그 일의 전모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草本)

 

 

상기 조항의 김필군을 비밀 관문에 의거하여 잡아와 엄밀히 조사하고 자세히 캐물은 결과, 필군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은 농사짓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글자라곤 한 자도 모릅니다. 이 몸의 자식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천성이 글 읽기를 좋아하더니, 급기야 조금 장성해서는 유업(儒業)을 부지런히 익혔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서울로 배우러 다니면서 과장(科場)에도 출입했습니다. 집안에 있을 땐 효도하고 공경할 뿐더러 글공부를 그치지 않았으며, 이따금 이 몸을 위하여 제가 읽은 책의 뜻도 풀어서 이야기했고, 또한 중이나 무당을 몹시 미워하여 간사하고 요망한 무리라 하였습니다.

그 아이의 평일 언동을 보면 절대로 패륜을 저지르거나 남을 속이는 일이 없어,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으로 제 몸을 잘못 가져 제 부모를 욕보이는 자와는 너무도 달랐으므로, 이 몸이 과연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마다 다 들어주고 하는 일마다 다 따랐습니다. 그가 배운 것이 반드시 좋은 책이라 생각하고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으며, 자식을 스승으로 삼아 오직 스스로 받들어 믿으면서 남이 몰라주는 것을 답답하게 여겼던 것일 뿐입니다.

지난 을묘년(1795) 2월 어느 날 그 자식놈이 불행히도 죽자, 이 몸은 원통하고 슬퍼 날마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 지하에서 서로 만나기를 소원했습니다. 매일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전날의 일러 주던 말이 귓전에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손때 묻은 자취라고는 단지 이 한 책뿐이었므로, 이 몸은 혹시 그 책을 유실하거나 더럽힐까 두려워서 열 겹으로 싸 간직하고, 움직이게 되면 반드시 몸에 지니고, 때로는 혹 열어 보기도 하여 그 얼굴을 다시 보는 듯이 여겼던 것입니다.

다만 이 몸은 진서(眞書 한문)를 모를 뿐 아니라 언문(諺文) 역시 한 자도 모르기 때문에 실로 그 가운데에 어떠한 요사스러운 책이 들어 있는지 몰랐는데, 이웃들이 이 몸을 지목한 것도 대개 이것 때문이었으며, 이 몸이 여러 번 심문을 겪은 것도 역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식놈이 죽은 뒤에는 듣고 익힐 길이 없을 뿐더러 해가 오래되니 자연히 잊혀져서, 다시는 이런 일로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사또께서 도임하신 이후로 천주교를 금단하는 일로 각 면에 명령을 전하기를 극히 엄중히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은 지레 겁에 질려 다른 곳으로 도망가 있었던 것입니다. ‘조정의 덕화가 하늘 같으시어 가급적 형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본군 경내의 이런 무리들이 차차로 미혹을 깨닫고 각기 제 생업에 안착한다더라.’ 하기에 이 몸도 역시 지난달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감추어 두었던 책자를 당장 관에 바쳐야 했으나, 비단 이 몸의 실정이 위에 아뢴 바와 같을 뿐 아니라, 사또께서 확실한 증거물로 우겨서 이것으로 죄를 더할까 두려워하면서 몰래 물이나 불에 던져 그 흔적을 없애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혹시 뒷날 사단(事端)이 다시 일어나면 진위를 밝히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머뭇거리던 즈음에, 과연 외창(外倉 외촌(外村)에 있는 창고)으로부터 패지(牌旨)를 전해 왔으나, 이 몸을 나오라 할 뿐 원래 책자를 바치라는 말은 없었습니다. 이 몸이 스스로 생각하기로는, 지난해에 숨어 피한 것은 죄를 벗어날 길이 없기에 지금 이 책자를 바치면 스스로 속죄가 될 듯도 하였으므로, 옛날 싸 둔 것을 끌러 보지도 아니하고 몽땅 손수 들고 창리(倉吏)와 함께 허둥지둥 달려왔습니다. 읍내에 당도하자 이 몸이 우선 사람을 찾아 소지를 쓰는 사이에 창리는 곧장 먼저 관에 고발하여 마치 제가 스스로 수색해 낸 것처럼 공을 세우려고 들었습니다. 만일 제 놈이 수색해 냈다면 끌고 가지 빈손으로 관에 고발했겠습니까? 그 거짓말로 자랑해 대는 꼴은 사또께서 이미 통촉하신 바이니 지금 다시 변명을 아니 하겠습니다.

책자의 출처는 이 몸도 그 소종래(所從來)를 알 수 없으며, 열두 권이랬자 모두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였으니, 필시 제 자식놈이 생전에 지어 만들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화폭(畵幅)에 대해서는 매번 서울에서 사 왔다고 말했는데, 처음에는 수놓은 것으로 잘못 알았다가 오래 뒤에 수놓은 것이 아니고 그림이란 것을 깨달았사온대, 200여 냥의 비싼 값으로 사 온 것은 실로 정도가 지나친 것이었지만, 당시에 이 몸은 죽은 자식을 깊이 믿어서 아무리 가산이 탕진되어도 어리석게도 아까운 줄을 몰랐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식놈이 나이 어린 소치로 반드시 남에게 속임을 당했던 것일 겁니다.

더구나 그놈이 죽은 뒤로 4년 동안은 간혹 꿈에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에 관한 일로써 문답한 적도 없고, 또한 천당에 가서 있다고 아뢰지도 아니하니, 생시와 죽은 뒤가 판이하게 다르므로 기대와 소망이 전혀 어그러졌습니다. 이로써 스스로 증험해 보면, 몇 해 동안 공을 쌓은 것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오리까?”

지금 이 필군이 전에는 비록 미혹되었지만, 뉘우치고 깨달은 것이 전에 올린 소지에 이미 입증되었으며, 흉금을 드러내어 진심으로 복종하는 품이 조금도 숨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되풀이하여 심문하고 추궁하였으나, 그 진술이 전날의 진술과 한결같고,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은 형상이 자못 말과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삼가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 대해 본시 바라는 것은 미혹과 잘못을 깨닫게 하여 형정(刑政)을 번거로이 아니 하고도 성상의 교화에 복종하게 만들자는 것이니, 태양이 막 솟으면 도깨비가 재주를 못 부리고, 훈풍이 잠시만 불어도 얼음과 눈이 저절로 녹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필공(必恭)같이 미혹된 놈이라도 하루아침에 잘못을 느끼고 깨닫자 곧 적당한 벼슬자리로 보답해 주었고, 존창(存昌)같이 흉악한 놈도 7년 동안을 완강히 항거하고 있으나 아직도 참형(斬刑)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이 감옥에 가둔 자는 특히나 먼 시골의 어리석은 백성인 데다, 그 두려워하여 자복한 바가 앞뒤로 한결같으며 속마음과 말이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진위를 알기 어렵고 번복할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기왕지사를 깊이 캐어 들어가고 기어이 소굴을 찾아내려 든다면, 비단 전날 자복한 무리들이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감화될 무리들도 당연히 주저하는 생각을 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이 한 지방을 맡아 지키는 자의 처지로서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정에서 기대하는 풍속 교화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그가 바친 책자에 대해서는 마땅히 그 자리에서 불태워 없애야 할 일이나, 그래도 마음대로 처단하기 어려웠으니, 바로 순영(巡營)에 올려 처분을 기다린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또한 더구나 순영에서 이 사건을 들어 타이르며 전후로 엄중히 경계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또한 더구나 책자를 올려 보낸 것은 지난달 17일이었고, 비밀 감결을 받아 본 것은 그로부터 열흘 조금 뒤였으니, 책자를 순영에 먼저 보냈다는 질책에 대하여는 아마도 양해하실 줄 믿습니다. 설령 통지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바로 병영으로 올려 보냈더라도, 순영에서 다시 사리와 체면을 들어 질책한다면 장차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의아스럽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 김필군은 여전히 단단히 가두어 두고 처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영에서 회답한 제사도 뒤에 등서하여 첩보(牒報 서면 보고)하는 바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올림 : 1798년경 연암이 면천 군내의 자수한 천주교도 김필군(金必軍)을 선처한 일로 병영(兵營)과 마찰을 빚고,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병영의 처사를 항의하며 사의를 표명한 편지이다.

[D-001]범천면(泛川面) : 지금의 당진군(唐津郡) 우강면(牛江面)이다.

[D-002]오가통(五家統) : 다섯 가구五戶를 한 단위로 묶어 통()이라 하고, 통마다 우두머리를 두어 관할 호구의 동태를 파악 · 감시하고 수상한 자를 관에 고발하게 한 제도를 말한다.

[D-003]창졸(倉卒) : 환곡 창고를 지키는 군졸을 이른다.

[D-004]패자(牌子) : 존귀한 신분의 사람이 비천한 신분의 사람에게 써서, 서리나 노복을 시켜 보내는 편지를 이른다. 패지(牌旨)라고도 한다.

[D-005]관차(官差) : 관아에서 파견하는 군뢰(軍牢)나 사령(使令)을 이른다.

[D-006]제사(題辭) : 하급 관청에서 올린 공문서나 백성들이 올린 소지(所志)에 대해 지령이나 판결을 내린 글을 말한다.

[D-007]논보(論報) : 상급 관청에 자기 의견을 달아 보고하는 것을 이른다.

[D-008]관문(關文) : 동급 또는 하급 관청에 보내는 공문서를 이른다.

[D-009]이 고을에서 ……  : 원문은 無俾易種於玆邑인데, 서경에서 따온 표현이다. 반경 중(盤庚中) 이 새로운 도읍으로 악의 씨앗이 옮겨 가지 않도록 하리라.無俾易種于玆新邑라고 하였다.

[D-010]불쌍히 …… 말라 : () 나라의 대부 맹씨(孟氏)가 증자(曾子)의 제자 양부(陽膚)를 법관으로 임명하니 양부가 증자에게 자문을 구하자, 증자는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백성들이 이반된 지가 오래되었다. 만일 백성들의 죄상을 찾아냈다면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 하였다. 論語 子張

[D-011]형리(詗吏) : 염탐하러 다니는 아전을 이른다.

[D-012]가급적 …… 않으시니 : 원문은 刑期無刑인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로, 형벌의 목적은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되게 하는 데에 있다는 뜻이다.

[D-013]필공(必恭) : 최필공(崔必恭 : 1745~1801)을 이른다. 그는 혜민서(惠民署)의 의원(醫員)으로 1790년 천주교에 입교했다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배교(背敎)한 뒤 관서(關西)의 심약(審藥)으로 차송(差送)되었다. 그러나 다시 천주교를 믿다가 1799년 체포되었으며,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처형되었다.

[D-014]존창(存昌) : 이존창(李存昌 : 1759~1801)을 이른다. 그는 본래 충청도의 관교(官校)로서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등에게서 천주교를 배웠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內浦) 일대에서 천주교의 지도적 인물로 활동하다가 신해박해 때 배교했다. 그러나 다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이다가 1791년 체포되었으나 배교를 서약하고 풀려났으며, 그 뒤 전도 활동을 재개하다가 1795년 다시 체포되어 감영에 구금되었다. 1797년 정조(正祖)는 이존창이 개과천선하면 방면하도록 명하였다. 1799년 이존창은 충청 감사 이태영에게 배교를 서약하고 석방되어, 연금(軟禁) 생활을 하면서 장교(將校)로 복무하던 중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한국 초기 천주교사에서 그는 충청도 지역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내포의 사도(使徒)’로 추앙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병영의 취지는 알기 어렵지 않았으므로, 그 감결의 사연에 의거하여 공초(供招 범인의 진술)를 받으면서 신신당부하며 타일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자(김필군(金必軍))는 제가 자수한 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도리어 의구심을 내어, 제 딴은 이렇게 공초를 올리고 보면 영원히 해명하기 어려운 진짜 증거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보첩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자신이 한 쪽을 갖겠다고 청하였습니다. 그 스스로 후일을 염려하는 것이 이와 같이 심각하고 절실한데, 관에서 도리어 불성실을 보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이 바로 병영에서 유감을 품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소한 일이라 시비를 가릴 가치도 없지만, 풍속 교화에 중대한 관건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상의 도의를 위하여 한 번 공언(公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예로부터 이단(異端)이란 그 시초에는 어찌 자처하여 사학(邪學)이 된 적이 있었겠습니까? 백성은 천부적인 양심이 있어 선행을 즐기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마음이 누구나 다 있는데, 오직 가리기를 정확히 못 하고 분변하기를 일찍 못 한 까닭으로, 인의(仁義)가 살짝 어긋나 양주(楊朱) · 묵적(墨翟)의 무리가 되었으며, 그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재앙은 이미 불교에서 증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소위 사교(邪敎 천주교)를 금단하는 자들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 을 잡아 묶어다가 관청 뜰 아래 꿇리고 곧장 차꼬를 채우고 내려다보면서, “네가 왜 사학(邪學)을 했느냐?” 하면, 그자는 한마디로 가로막아 말하기를, “소인은 사학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요. 그런데 명색이 관장이 된 자가 이미 그 학()이 어째서 사()가 되는지도 모르니, 추궁하는 것이 조리가 없어서 먼저 스스로 알쏭달쏭하게 말하게 되며, 그들이 대답하는 바에 따라 우선 복종한 줄로 인정하고 억지로 다짐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중 교활한 놈은 성실치 못하다고 도리어 비웃고, 어리석은 놈은 더욱 의혹이 불어나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떤 까닭으로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하는가?’ 하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니라, 근원을 타파하지 못하고서 말류(末流)를 맑게 하고자 하며, 소굴만 찾을 뿐이지 스스로 길을 잃은 격입니다.

그래서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笞刑)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놓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耶蘇 예수)를 저주하고 천주(天主)를 배척하게 하여 그 배반을 시험하고 그 진위를 관찰합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하여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입막음과 방패막이의 수단으로 삼자는 것이었으나, 마침내 어떤 우매한 백성들은 마치 그를 위한 절개를 지키는 것이 의()를 위해 죽는 것인 양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속아서 현혹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제압하는 요령을 얻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은 이 점을 경시하고 형벌로 굴복시키려 들 뿐 아니라 또 언어까지 실수하고 맙니다. 이 어찌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과 부합된다고 하겠습니까?

지금 그들을 죽여 없애고자 해도 그 무리가 실로 많으니, 이는 물건을 싣지 못할 물 새는 배를 호수나 바다에 띄운 격이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무릇 임금의 통치를 돕고 백성을 키우는 반열에 있는 자는 어느 누군들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선포하는 직분을 맡고 있지 않겠습니까? 자기 몸을 바르게 하여 백성을 인도함으로써 스스로 지주(砥柱)가 되어, 임금이 질() · () · () · ()하게 된 까닭과 천주교의 피() · () · () · ()의 말이 진실과 다른 바를 빨리 밝히어, 전부터 물들었거나 새로 퍼져 가는 나쁜 풍속이 금고옥촉(金膏玉燭) 같은 임금의 교화 아래 저절로 사라지고, 허공을 거쳐 간 구름인 양 자취가 없게 하는 것이 상책(上策)입니다. 공리(功利)만을 헤아려 나라의 위엄을 함부로 사용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하고 관과 민이 서로 각축한다면, 비록 한때의 승리는 거둘망정 상처 입은 것은 더욱 많아, 주역(周易) 사괘(師卦)에서 이기든 지든 모두 흉하다고 한 것과 같이 되는 것은 하책(下策)입니다.

비록 서벽(徐辟)이 이자(夷子)에게 전해 알려 주고, 한창려(韓昌黎)가 서()를 지어 문창(文暢)에게 주었던 것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어찌 스스로 위신을 손상하여, 남이 스스로 속죄하려는 자료를 이용해서 이미 항복한 자에 대해 공을 세우려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러기에 금하면 금할수록 더욱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밤낮으로 조마조마하며 우려가 깊어지면서 흉년으로 인한 한 해의 재난을 구하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하건대 명공(明公 순찰사의 경칭)께서는 세상에 드물게 총명하시고 도량이 무리에서 뛰어나서, 무릇 세간의 인심과 세태에 대해 눈빛이나 안색만 보고도 간파하시니, 하찮은 이 몸이 절하(節下)의 처분을 바라는 바가 어찌 한 도()에서 표재(俵災)를 공정히 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노고를 하는 데에 그치오리까? 이것은 다만 담당 관리의 한 직책에 불과합니다.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하며 특이한 공과 빠른 효험을 자랑으로 삼지 않을 것은 반드시 평소에 마음속으로 기약한 바 있으실 터이니, 저로서는 이 문제를 절하에게 고하지 아니하고 뉘와 더불어 말하오리까?

 

예로부터 이단이 천하를 어지럽힌 지 오래였다.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은 인의(仁義)를 배운 자라서 처사(處士)들이 그들의 학설에 귀의하였고 노자(老子)와 석가(釋迦)는 더욱 이치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명한 자들이 그리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맹자, 정자, 주자가 반드시 논파하여 시원스레 물리쳐 버린 것은, 특히 본원(本源)에 털끝만 한 차이가 있음으로써 말류(末流)의 폐해가 장차 아비도 임금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때문이다. 하물며 지금 이른바 서양의 학술이란, 양주도 아니요, 묵적도 아니요, 도가도 아니요, 불교도 아니요, 전혀 의리를 갖추지 못한 요사스러운 패설(悖說)에 불과한 것이니, 말류에 이르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 폐단이 화를 이룰 것은 홍수나 맹수보다 더 심한 데 그칠 뿐만이 아니다.

대개 저들의 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이나 영혼제방(靈魂帝旁)의 설은 이야말로 불교의 찌꺼기 중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른바 부모모질(父母模質)’ 등의 어구와 같은 것은 너무도 패륜이 심해 강상(綱常)의 죄를 벗어날 수 없다. 비록 어린아이들에게 이를 따르라 할지라도 오히려 수치스러움을 알아 꾸짖고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독 그 학설로 삼은 것이 새것을 지어내고 기이하기를 힘쓰며, ()로 삼은 것이 얄팍하여 알기 쉽고, 수행으로 삼은 것이 음란하고 패악하여 거리낌이 없으며, 법으로 삼은 것이 재물을 소홀히 하고 교도(敎徒)를 귀히 여긴다. 이런 까닭에, 일종의 덜렁꾼들로 신기한 것을 숭상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흐뭇하게 여기며 좋아하고, 어리석은 남녀들로 빈궁을 괴로워하고 재리(財利)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휩쓸리듯이 따라가서, 심지어는 자식이 그 아비를 등지고 도망하고, 계집이 그 남편을 버리고 달아나며, 위로는 벼슬아치와 선비들로부터 아래로는 노예와 천한 백성까지 짐승이 광야를 달리듯이 하여, 하마 그 무리들이 나라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정의 금령(禁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금령이 너무도 관대하여 참형이 한두 사람의 비천한 부류에 가해졌을 뿐이며, 외보(外補)는 마침 열배 백배로 넝쿨처럼 불어나는 기회가 되기에 충분하여, 물이 더욱 깊어지고 불이 더욱 치성해지듯이 되니, 두어 해를 못 가서 온 나라가 다 그리 쏠리고 말 것이며, 그때 가서는 금지하려야 금지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저 사학(邪學)의 무리들은 본래 거칠고 패악한 성질로서, 오래된 상도(常道)를 싫어하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며, 방종을 즐기고 구속을 꺼린다. 음란하고 더럽고 탐욕스럽고 야비한 것이 바로 저들의 장기요, 학문이나 의리와는 본래 배치되는 바라, 오늘날 이 사학을 존숭하는 것은 그들의 천성이 서로 가깝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연원에 유래가 있음이리오.

 

야사(野史)에 의하면 구라파(仇羅婆 유럽)란 나라에 기리단(伎利但)이란 도()가 있는데, 그 나라 말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12()의 게( 찬송가)가 있는데, 허균(許筠)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적에 그 게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학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아마도 허균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사학을 배우는 무리들은 자동적으로 허균의 잔당이다. 그 언론과 습관이 한 꿰미에 꿴 듯이 전해 내려왔으니, 그들이 사설(邪說)을 유달리 좋아하고 지나치게 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또 듣자니, 그 법이 삼강오륜을 무너뜨리고 명교(名敎)를 돌아보지 않으며, 남녀가 섞여 앉고 위아래도 구별이 없으며, 삶을 가벼이 여기고 죽기를 즐거워하여 칼에 죽거나 형()에 죽어 들판에 시신이 버려지는 것을 천당에 갈 수 있는 첫째가는 인과(因果)로 삼는다. 또 한 사람이 열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을 큰 공으로 삼는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한 사람이 열 사람을 전도하고, 열 사람이 백 사람을, 백 사람이 천 사람을, 천 사람이 만 사람을 전도하면 그 도당의 수효는 몇 억에 이를지 알 수 없다.

 

또 이른바 홍미(紅米) 요술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능히 주문으로 환술을 부려 없던 것도 있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현혹시키니, 장각(張角)이 부적을 태워 물에 타서 마시게 함으로써 병을 낫게 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즉 실로 많은 무리들이 백성을 현혹하는 술수를 믿고 날뛰며, 죽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써 윤리를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필경에는 그 화가 미치지 않을 곳이 없을 텐데, 한 사람도 깊이 염려하는 자가 없는 것은 웬일인가? 슬프도다!

 

한 무제(漢武帝) 원광(元光) 2(기원전 133)에 한 나라가 섭일(聶壹)을 첩자로 삼아서 선우(單于 흉노의 왕)를 요새로 들어오도록 약속한 일이 있었다. 선우가 정( 국경 초소)을 공격하여 안문(鴈門)의 위사(尉史)를 잡아 죽이려고 하니, 위사는 한 나라 군사가 잠복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선우는 크게 놀라 군사를 끌고 돌아가 요새를 벗어나서 말하기를 내가 위사를 사로잡은 것은 천행(天幸)이다.” 하고서 위사를 천주(天主)로 삼았다. ‘천주라는 두 글자는 여기서 처음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중국에 있는 천주당(天主堂)의 서양 사람들은 비록 역법(曆法)에는 정통하지만 모두 요술쟁이이다. 서남이전(西南夷傳) 요술쟁이가 능히 변화하여, 불을 뱉어 내고, 스스로 사지를 묶었다가 풀어 버리며, 소와 말의 머리를 옮겨다 바꾸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해서인(海西人)이다.’라 하였다. 해서는 바로 대진(大秦)이다.” 했고, ()에는 지금 살펴보면 대진은 바로 무제(武帝) 때 이간국(犂靬國)으로 지금은 불림(拂菻)이라 이른다.”라고 하였다. 또 한 나라 안제(安帝) 때인 영녕(永寧) 원년(기원후 120) 영창군(永昌郡)의 변새 밖에 있는 탄국왕(撣國王) 옹유조(雍由調)가 사자를 보내어 풍악과 요술쟁이를 바쳤다.” 했다.

 

사학의 이른바 기리시단(伎離施端 크리스천)’이란 네 글자는 사람의 이름인지 법호인지 모르겠으나, 대저 극히 요망하고 괴이한 것이다. 처음에 일본 시마바라島原에 살면서 야소(耶蘇 예수)의 학으로써 선교하였다. 이에 일본 민중들이 그 설을 한 번 듣고서 염세적인 생각에 휩쓸리어 제 몸뚱이 보기를 표류하는 뗏목이나 부러진 갈대 줄기처럼 여겨,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고, 사는 것이 즐거운 줄도 모르며, 칼에 죽거나 형()에 죽는 것을 도리어 자신의 영화로 여겼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기리시단이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호칭이다.’라고 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그 술법을 배워 관백(關白) 미나모또 이에야스源家康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죽음을 당했다. 유키나가의 가신(家臣) 다섯 사람도 유키나가의 죄에 연좌되어 시마바라로 귀양을 갔는데 다시 사교(邪敎)를 선동하여 그 도당이 수만 명에 달하자, 히젠주肥田州를 습격하여 태수를 죽이니, 이에야스가 토벌하고 체포하여 다 죽여 버리고, 우리나라에 서계(書契)를 보내 통고하였다. 그래서 바닷가를 순시하여 잔당을 염탐해 체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후에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이에야스가 기요마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기요마사가 마다하며 스스로 야소교를 받드는 자가 자살한다면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니 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하므로, 마침내 베어 죽였다. 유키나가와 기요마사는 모두 왜놈의 날랜 장수로서, 임진년에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을 적에 가장 흉악하고 잔인하였다. 실로 우리나라로서는 자손 만대의 원수인데도 마침내 천벌을 모면하게 되어 죽은 원혼이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원한과 분노를 씻을 수 없었는데, 끝내 스스로 사교에 빠져 모두 참형을 당했으니, 신령의 이치가 너무도 밝아서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대신(臺臣 사헌부 관원)의 상소 중에 저 가환(家煥)도 역시 성군(聖君)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사는 일개 인물인데, 감히 천륜을 허물어뜨리고 임금의 교화를 가로막음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를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개 가환이 이와 같은 지목을 받은 지가 오래였다. 치우치게 성은을 입은 것이 어떠했는가? 그런데도 묵은 버릇을 고치지 아니하니, 진실로 대신의 상소대로라면, 삼묘(三苗)와 같은 처형을 어찌 모면할 수 있으랴!

 

사학은 본시 천당에 올라간다는 설을 가지고서 어리석은 백성을 속이고 꾀었는데, 이 근본은 유연(柔然)에서 나왔다.

유연의 타한가한(他汗可汗)이 복고돈(伏古敦)의 아내 후려릉씨(候呂陵氏)를 맞아들여 복발가한(伏跋可汗)과 아나괴(阿那瓌) 등 여섯 아들을 낳았다. 복발이 즉위한 뒤 갑자기 그 어린 아들 조혜(祖惠)를 잃어버렸는데, 무당 지만(地萬)이 말하기를,

 

조혜가 지금 천상에 있으니, 제가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큰 늪 속에다 장막을 치고서 천신(天神)에게 제사하니, 조혜가 갑자기 장막 속에 나타나서 항시 천상에 있었다고 말했다. 복발은 크게 기뻐하여, 지만을 이름하여 성녀(聖女)라 하고 가하돈(可賀敦)으로 삼았다.

조혜가 차츰 장성하자, 제 어미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시 지만의 집에 있었고, 천상에 있었다는 말은 지만이가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하니, 그 어미가 복발에게 고했으나 복발은 믿지 않았다. 이윽고 지만이 조혜를 참소하여 죽이니, 후려릉씨가 대신(大臣) 이구열(李具列) 등을 보내어 지만을 죽였다. 이것이 유연이 내란으로 망하게 된 시초였다.

 

부모모질(父母模質)’ 등의 어구와 같은 것은 흉하고 더럽고 패악스러워서 붓끝에 올리고 싶지 않다. 그 근원은 한서(漢書) 예형전(禰衡傳)에 처음 나타났는데, 이것은 대개 심하게 날조한 말이다. 사람을 속이는 데 한이 있으리오만, 주저하지 않고 이처럼 몹시도 패악스럽더니, 마침내 사학의 나쁜 선례가 된 것이다.

 

 

부군(府君)이 면천(沔川)에 계실 적에 감사와 더불어 왕복한 편지에 사학을 성토하는 글이 있었으며, 그 기회에 다시 사학의 본말을 논했는데 무릇 몇 조문이다. 그것을 아울러 여기에 부록한다.

당시 면천은 사학에 물든 자가 많았으므로, 부군이 우려하여 듣는 대로 적발해서 관하인(官下人)의 천역에 붙들어 매고, 매양 공무가 파하면 한두 놈을 불러 놓고 반복하여 타이르니, 형벌을 쓰지 않고도 다 감복하여 깨달아 바른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후회하고 한탄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급기야 신유년(1801)에 큰 옥사가 일어났지만, 면천 경내에는 아무 일이 없었다. 그 당시 깨우치도록 타이른 여러 조문들은 친필로 일기 중에 그때마다 기록하였는데, 명백하고 깊이 깨달은 내용이라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깨우치기 쉽게 되었다. 지금 유실되어 부록으로 싣지 못하니 몹시 애석하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D-001]저들이……  :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천주실의(天主實義) 상권 제 2 편에 우리나라의 천주(天主)는 중국 말로 상제(上帝)이며” “옛날 경서들을 두루 살펴보면, 상제와 천주는 단지 호칭만 다를 뿐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D-002]방패막이 : 원문은 忌器인데 쥐 잡다 그릇 깰라라는 뜻인 投鼠忌器의 준말이다. 천주교를 공격하지 못하게 유교의 설을 끌어 왔다는 뜻이다.

[D-003] …… 많으니 : 원문은 其徒寔繁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어진 이를 홀대하고 권세가에게 붙는 무리가 실로 많다.簡賢附勢 寔繁有徒고 한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D-004]임금의 …… 키우는 : 원문은 輔世長民인데,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서 천하의 삼달존(三達尊)으로 작() · () · ()을 들고 임금의 통치를 돕고 백성을 키우는 데에는 덕보다 나은 것이 없다.輔世長民莫如德고 하였다.

[D-005]지주(砥柱) : 황하 한가운데 우뚝이 솟아 있는 돌산으로, 의지가 확고하여 남들의 지주(支柱) 역할을 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인다.

[D-006]() · () · () · ()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천서(天敍),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를 이른다.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D-007]() · () · () · () :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를 이른다. 각각 편벽된 말, 음탕한 말, 간사한 말, 회피하는 말을 뜻하며, 정사(政事)에 해를 끼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가리킨다.

[D-008]금고옥촉(金膏玉燭) : 밝은 등불과 촛불을 이른다.

[D-009]이기든 지든 모두 흉하다 : 주역 사괘 초육(初六)의 효사(爻辭) 군사의 출동은 군율을 따를지니, 그렇지 않으면 이기든 지든 흉하다.師出以律 否臧凶고 하였다. 연암은 이를 인용하면서 否臧皆凶이라 했으나, 주역 원문에는 모두라는  자가 없고 왕필(王弼)의 주에만 師出不以律 否臧皆凶이라 하였다. 따라서 효사의 해석도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의 주가 아니라 왕필의 주를 따랐을 것으로 보고, 여기서도 그와 같이 번역하였다.

[D-010]서벽(徐辟) …… 알려 주고 : 서벽은 맹자(孟子)의 제자이고, 이자(夷子)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에 해당하는 묵가(墨家)를 추종한 인물이다. 이자가 서벽을 통해 맹자를 만나 보고 싶어 하자 서벽이 그 사이에서 맹자의 말을 전달하여 이자를 깨우쳐 주었다. 孟子 滕文公上

[D-011]한창려(韓昌黎) ……  : 한창려는 당 나라 문장가 한유(韓愈)이고, 문창(文暢)은 한유와 동시대의 승려 이름이다. 한유는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에서 문창에게 유가의 도가 아니라 불교의 설로써 서()를 써 준 사람들을 비판하고, 유가의 도의 훌륭함을 설파하였다.

[D-012]남보다 …… 즐거워하며 : ()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옛날의 인자(仁者)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나중에 즐거워했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였다.

[D-013]양주(楊朱) …… 귀의하였고 : 회남자(淮南子) 요략(要略) 묵자는 유자(儒者)의 업()을 배우고 공자의 술()을 전수받았다.”고 하였고, 논어집주(論語集註) 학이(學而)  14 장의 주에 윤돈(尹焞)의 말을 인용하여 양주 · 묵적과 같은 경우는 인의를 배웠으나 어긋난 자이다.”라고 하였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성인(聖人)이 나타나지 아니하니 제후들이 방자하게 굴고 처사들이 함부로 논의를 벌여 양주와 묵적의 말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하였다.

[D-014]노자(老子) …… 도피하였다 : 정자(程子)는 도가와 불교가 옛날의 양주 · 묵적의 학설보다 더욱 이치에 가까워 그 피해가 더 크다고 비판하였다. 주자(朱子) 중용장구(中庸章句)의 서()에서 이단의 학설이 나날이 새롭고 다달이 성행하여, 노자와 석가의 추종자들이 나옴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치에 가까워 크게 진리를 어지럽혔다.”고 개탄하면서, 그러한 풍조에 맞서 정자(程子) 중용을 매우 중시한 공로를 예찬하였다.

[D-015]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 : 천주실의 상권 제 3 편에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불 · 공기 ·  · 흙이라는 사행(四行)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사행설(四行說)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플라톤의 저작을 통해 천주교 신학에 수용되었다. 불교의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설(四大說)과 흡사하며, 유교의 오행설(五行說)과 배치된다.

[D-016]영혼제방(靈魂帝旁)의 설 : 영혼의 사후 불멸과 승천설(昇天說)을 가리키는 듯하다. 천주실의 하권 제 6 편에 선한 사람은 죽은 뒤 그 영혼이 천당에 올라가서 하느님上帝의 곁에서 지내게 된다고 하였다.

[D-017]부모모질(父母模質) : 인류의 원조(原祖)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자자손손 그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다는 원죄설(原罪說)을 가리키는 듯하다. 천주실의 하권 제 8 편에도 세속 인간의 조상이 이미 인류의 근성(根性)을 망쳐 놓아 그 자손된 자들은 물려받은 잘못으로 인해 온전한 본성을 계승하지 못하고 나면서부터 하자(瑕疵)를 지닌다.”고 하였다.

[D-018]짐승이 …… 하여 : 원문은 如獸走壙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 백성이 인정(仁政)에 귀순하는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나아가고 짐승이 광야를 달리는 것과 같다.民之歸仁也 猶水之就下 獸之走壙也고 하였다.

[D-019] …… 관대하여 : 원문은 其柰失之太寬인데 柰失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 초서로 흘려 쓴 禁令을 잘못 판독한 것으로 보고 번역하였다.

[D-020]외보(外補) : 지방 관직에 임명하는 것을 이른다. 여기서는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밀입국 사건에 편승하여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몰아 공격한 박장설(朴長卨)의 상소가 파문을 일으키자, 정조(正祖)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당시 충청도 대부분이 천주교에 물들었는데 충주가 그중 가장 심했으므로, 정조는 이가환을 특별히 그곳의 수령으로 보내 천주교를 금하게 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하고자 했다. 그때 이가환의 무리로 지목된 정약용(丁若鏞)도 금정 찰방(金井察訪)으로 내쫓기었다. 正祖實錄 19 7 25 그러나 연암은 이러한 조치가 지나치게 관대할 뿐 아니라, 천주교의 소굴에 천주교를 비호하는 수령을 임명함으로써 더욱 이를 조장할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D-021]야사(野史) : 유몽인(柳夢寅) 어우야담(於于野談)을 가리킨다.

[D-022]기리단(伎利但) : 어우야담에는 기례달(伎禮怛)’로 표기되어 있다. ‘기리시단(伎離施端)’, ‘길리시단(吉利施端)’, ‘길리지단(吉利支丹)’ 등으로도 표기되었는데, 포르투갈어 ‘cristao’가 와전되어 음역(音譯)된 것으로, 기독교인(christian)을 뜻한다.

[D-023]명교(名敎) : 군신(君臣),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이 유교에서 정한 상하 질서의 예법을 가리킨다.

[D-024]홍미(紅米) : 오래 묵어서 붉게 변색한 쌀을 이른다.

[D-025]장각(張角) : 후한 때의 인물로 태평도(太平道)란 종교의 창시자이다. 영제(靈帝) 때에 부적과 물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통해 종교를 전파하여 10여 년 사이에 그 신도가 수십만이 되었다. 이들은 중국 각지에 분포하여 영제 중평(中平) 원년(184)에 기의(起義)하여 이른바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일으키고, 장각은 천공장군(天公將軍)이 되어 이를 지휘하였으나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D-026]섭일(聶壹) :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북부에 있던 안문군(鴈門郡) 마읍현(馬邑縣)의 토호였다고 한다. 資治通鑑 卷18 漢紀10 世宗孝武皇帝 上之下 元光 2

[D-027]위사(尉史) : 요새와 가까운 군() 100리마다 위() 1인과 사사(士史) 및 위사(尉史)  2인을 두었다고 한다.

[D-028]한 무제(漢武帝) …… 삼았다 : 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18 한기(漢紀) 10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원광(元光) 2년 조의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뿐만 아니라 그 전거가 된 사기 한장유열전(韓長儒列傳), 흉노열전(匈奴列傳)이나 전한서(前漢書) 흉노전(匈奴傳) 등에는 모두 선우가 안문의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삼았다고 하였지, ‘천주로 삼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D-029]불을 …… 바꾸는데 : 원문은 吐火 自支解 易牛馬頭인데, 각각 마술의 일종이다. 御定子史精華 卷106 樂部2 俗樂》 《위략(魏略) 대진전(大秦傳)에 의하면 自支解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묶은 몸을 푸는 마술을 말한다.

[D-030]서남이전(西南夷傳) …… 했고 : 자치통감 50 한기(漢紀) 42 효안황제 중(孝安皇帝中) 영녕(永寧) 원년 12월 조 기사에 대한 호삼성(胡三省)의 주()를 인용한 것이다. 서남이전은 후한서(後漢書) 86에 편차되어 있고, 대진(大秦)은 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D-031]이간국(犂靬國) :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소개되어 있다. 사기 대원열전(大宛列傳)에는 여헌(黎軒)’, 한서 장건전(張騫傳)에는 이간(犛靬)’, 후한서 서남이전에는 이건(犁鞬)’이라 표기되어 있다.

[D-032]()에는 …… 하였다 : 역시 자치통감 50 한기(漢紀) 42 효안황제 중 영녕 원년 12월 조 기사에 대한 호삼성의 주를 이어서 인용한 것이다. 불림(拂菻)은 동로마 제국을 말한다.

[D-033]영창군(永昌郡) …… 바쳤다 : 역시 자치통감 50 한기 42 효안황제 중 영녕 원년 12월 조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영창군은 안제(安帝) 때 익주(益州)에 설치한 군으로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지역에 있었다. 탄국(撣國) 1~2세기경 후한(後漢)에 조공을 바쳤던 서남이(西南夷)의 한 국가였다.

[D-034]시마바라島原 : 일본 큐슈九州 나가사키현長崎縣 남동부에 있는 반도(半島)이다. 1637년 천주교도의 소굴이었던 이곳에서 압정에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성을 함락했으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정벌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이를 시마바라의 난()’이라 한다.

[D-035]표류하는 …… 갈대 줄기 : 원문은 浮査斷梗인데,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단경부평(斷梗浮萍)’, ‘단경표봉(斷梗飄蓬)’ 등 비슷한 성어(成語)들이 있다.

[D-036]관백(關白) :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한다는 뜻으로, 막부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D-037]히젠주肥田州 : 큐슈에 있던 주(), 지금의 사가현佐賀縣과 나가사키현의 일부를 포함한다.

[D-038]이에야스가 …… 약속하였다 : 인조실록(仁祖實錄) 16(1638) 3 13일 동래 부사의 치계(馳啓)에 관련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D-039]원컨대 칼날에 죽여 달라 : 원문은 願得劒解인데, ‘劒解는 곧 刃解로 칼날에 잘게 썰린다는 뜻이다. ‘인영누해(刃迎縷解)’, ‘영인이해(迎刃而解)’라는 성어가 있다.

[D-040]대신(臺臣) …… 하였다 : 1795년 행 부사직(行副司直) 박장설(朴長卨)이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공격한 상소 중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상소로 인해 박장설은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조적(朝籍)에서 삭제되고 시골로 쫓겨났다. 正祖實錄 19 7 7

[D-041]가환이 …… 오래였다 : 1792년 부교리(副校理) 이동직(李東稷)이 당시 성균관 대사성이던 이가환의 삭직을 요청한 상소에서 그의 학식은 이단사설(異端邪說)에서 나온 것이라고 공격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조는 이가환을 비호하는 장문의 비답(批答)을 내렸다. 正祖實錄 16 11 6

[D-042]삼묘(三苗)와 같은 처형 : 삼묘는 요순 시대 사흉(四凶)의 하나로, 이는 악인이 처형을 받는 것을 이른다. 맹자 만장 상(萬章上), “() 임금이 공공(共工)을 유주(幽州)에 유배 보내고, 환도(驩兜)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서 죽이고, ()을 우산(羽山)에서 죽여, 이 넷을 처벌하자 천하가 모두 복종하였다. 이는 어질지 않은 자를 처벌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D-043]유연(柔然) :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몽골을 지배한 유목민족으로 연연(蠕蠕), 예예(芮芮) 등으로도 불렸다. 그 지도자 사륜(社倫)이 처음 왕이라는 뜻의 가한(可汗)을 칭하면서부터 강성하여 북위(北魏)와 자주 충돌하였으나, 두륜(豆崙)이 가한이 된 5세기 말 이후 내란으로 점차 쇠퇴하여 결국 돌궐(突厥)에게 멸망되었다. 그들의 종교는 샤머니즘이 중심이었으며, 불교도 행해졌다.

[D-044]유연의 …… 죽였다 : 자치통감 149 양기(梁紀) 5 고조 무황제(高祖武皇帝) 5의 기사를 조금 줄여서 인용한 것이다. 인용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실수가 있었던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타한가한(他汗可汗)은 유연의 제 9 대 왕으로 이름이 복도(伏圖)이고,  7 대 왕인 복고돈가한(伏古敦可汗) 두륜(豆崙)과 종형제간이다. 복발가한(伏跋可汗)은 제 10 대 왕으로 이름은 추노(醜奴)였다. 가하돈(可賀敦)은 왕의 정실 부인을 뜻하는 몽골어로 가돈(可敦)이라고도 한다.

[D-045]예형전(禰衡傳) : 후한서 110 ()에 수록되어 있다. 예형은 후한 말의 광사(狂士)로 재주가 빼어났으나 몹시 오만하여 조조(曹操), 유표(劉表), 황조(黃祖)의 문객(門客)으로 전전하다가 끝내 황조의 비위를 거슬러 피살되었다. 그가 지은 앵무부(鸚鵡賦) 문선(文選)에 전한다. 그런데 후한서 예형전에는 연암이 개탄한 바와 같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참고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관(李正觀 : 1792~1854) 역시 천학고변(天學考辨)’이란 글에서, 천주교도 정약종(丁若鍾) 영혼의 부모인 천주에 비해 친부모는 잠시 그 몸을 가탁한 육신의 부모일 뿐이라고 차별하면서 모자(母子) 관계를 독() 속의 물에 비유하여 물이 독 밖으로 나오면 물은 물이고 독은 독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을 두고 이는 곧 한서 예형전에서 나왔다.”고 하면서 극도로 패악한 설이라고 비난하였다. 闢衛新編 卷1 諸家論辨 연암이 부모모질(父母模質)’ 운운한 것은 원죄설이 아니라 그러한 육신부모설을 가리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유사한 내용 역시 후한서 예형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상소의 초안은 근근이 얽어 내어 소략함을 면치 못했으니, 쓰시기에 합당치 못하며 때에 맞추지 못한 한탄이나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 날을 두고 구상하여 절로 지체된 것은 비단 필력이 고갈되어 술술 표현할 수 없어서만이 아니라, 사정이 이리저리 꼬여 말 만들기가 심히 어려워서였습니다.

이 죄수는 여러 해를 두고 교화되지 않고 버티던 끝에 다 죽어 가는 제 목숨을 구걸하려고 지금 자백했습니다. 비록 마음을 고친 것 같기도 하나 후일에 번복하는 그런 일이 없으리라 보증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가뭄을 걱정한 끝에 죄수를 풀어 주는 것과는 사체(事體)가 같지 않사온즉, 갑자기 완전 석방을 요청하신 것은 민심을 놀라게 할 뿐더러, 정원(政院)과 언관(言官)의 입장에서 그에 대해 준절히 나무랄 것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해당되는 자는 그저 깊이 자신을 인책할 따름이지, 어찌 감히 변명하기를 대질하여 따지듯 할 수 있습니까?

절하(節下 순찰사)의 뜻은 어찌 다음과 같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사학의 무리는 총명하고 경술(經術)에 밝은 사람들 속에서 많이 나왔으며, 그 괴수된 자는 대대로 벼슬하는 문벌의 사이에 건재해 있어서, 가벼운 처벌은 겨우 외보(外補)로 마감되고 금서(禁書)는 감춰진 채 드러남이 없으며, 높은 벼슬이 금방 제수됨으로써 진장(眞贓)이 암암리에 전수되고, 화려한 직함이 그전대로 있음으로써 사설(邪說)은 더욱 치성한 형편입니다. 달아난 죄인들이 숨어 있는 소굴로 이보다 큰 것이 어디 있으며, 징계와 토벌이 엄하지 못한 것으로 이보다 더함이 어디 있겠습니까?

반면에 저 먼 시골 백성들은 지극히 미욱하여 눈을 뜨고도 글자 한 자 볼 줄 모르며, 배운 것이라고는 모두 언문으로 풀이한 것이요, 애매모호하게 입으로 전하다가 도중에 잘못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학의 찌꺼기요 이단의 말류인데도, 어리석은 백성 한 놈만 잡으면 선뜻 괴수로 지목하고, 조금 수상한 자취 하나만 염탐해 내게 되면 바로 소굴로 일컬어, 눈을 부릅뜨고 기염을 토하며 성토를 먼저 가하니, 이른바 본말이 거꾸로 되고 논의 판결이 정당성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장계를 올려 석방을 청한 것도 과연 여기에서 나왔는데, 뜻은 비록 엄준하지만 행동은 너그럽게 풀어 주는 것이 되니, 이와 같은 본뜻을 누가 다시 양찰하여 알아내리이까? 이러기에 말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었으며, 스스로 인책하는 가운데도 슬며시 이 뜻을 비친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 감사의 자핵소(自劾疏) 초본

 

 

()은 지난번에 사학의 무리로 오랫동안 수감되었던 이존창(李存昌)을 석방하는 일로써 장계를 올려 청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성군(聖君)의 덕은 생명을 살리기를 좋아하고 신묘한 무위(武威)는 죽이지 않는지라, 신은 바야흐로 손 모아 우러르며 공경하고 칭송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렴풋이 듣자니 물의가 비등하여, 신이 벌주어 다스리기를 느슨히 하고 미연에 방지하는 것마저 엄하지 못하여 법이 마침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말세의 풍속이 정화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은 진실로 놀랍고 부끄럽고 두렵고 떨리어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소홀하고 경솔한 죄는 신에게 실로 있으므로 책망하고 처벌하시기를 공손히 기다릴 뿐 어찌 감히 스스로 해명하오리까?

신은 외람되게도 변변치 못한 주제에 한 도()를 황공하게 맡았으나 그 직분을 생각하면 임금의 교화를 받들어 선포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무릇 만에 하나라도 왕명을 선양해야 할 몸으로서 형벌이 한결같지 못하여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이 역시 제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조정이 이런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본시 바라는 것은 미혹과 잘못을 깨닫게 하여 형정(刑政)을 번거롭게 아니 하고도 성상의 교화에 복종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윤상(倫常)을 무시하고 무너뜨린 권가(權哥)와 윤가(尹哥) 같은 놈은 서슴없이 사형을 가하였으나, 마음을 잡고 허물을 고친 필공(必恭) 같은 놈은 곧 적당한 벼슬자리로 보답을 주었습니다. 봄철에 살려 주고 가을에 처형하는 것은 모두 성상의 권능이니, 정말로 도깨비가 태양을 피해 숨고 얼음과 눈이 훈풍을 만난 것과 같을 터입니다. 그런데 존창은 어떤 놈이기에 감히 시골 구석에서 숨바꼭질하며 처박혀서 옛 버릇을 고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천지 사이에 용납한단 말입니까?

지난번 조정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수합하던 날에, 충청도의 괴수로 지목하고 사학의 소굴이라 지칭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법을 집행하기로 논하자면 누구인들 그자를 죽여야 한다고 아니 하리까? 신 역시 일찍이, ‘그자의 사람됨은 필시 지극히 흉악하고 참람하지만 약간의 지체와 문벌이 있어 한 고을에서 걸출하게 명망이 높든지, 그렇지 않으면 필시 언어와 외모가 사람을 움직일 만하고 식견과 지혜가 대중을 현혹시킬 만하리라.’ 추측했습니다.

또한 듣건대 그 무리가 실로 많아서, 서로 번갈아 방문하며 술과 음식을 가득 차려 내오고 양식도 넉넉히 대 주었다 합니다. 이를 근심하고 분해하는 것은 실로 여론과 같으니, 이런 놈을 공공연히 처단하지 않는다면 국법이 어찌 되며 민속이 어찌 되겠습니까?

급기야 신이 이 도를 맡은 이래로 엄밀히 조사하고 물샐틈없이 염탐했더니 직접 본 것이 전해 들은 것과 사뭇 달랐으며, 지난날 멀리서 추측했던 것은 대개 지나친 염려였습니다. 그자의 말을 들어 보고 얼굴을 살펴보았더니 바로 무식한 일개 평민이고, 괴수라는 지목은 너무도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5년을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아무도 뒷바라지하는 자가 없었으며, 실낱같은 목숨을 여전히 이어 가면서 딴 죄수가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소굴이란 지칭은 그놈에게는 곧 과분한 말입니다.

자세히 그 실정을 추구해 보면, 그는 곧 곤궁한 백성 중에 조금 교활한 자입니다. 추측건대 선비가 되기에는 일족이 미약하여 그 축에 끼이지 못하고, 농민이 되자니 농사지을 힘이 없고, 바치가 되자니 솜씨가 모자라고, 장사치가 되자니 밑천이 없고 해서, 사민(四民) 가운데 어디고 몸을 붙일 곳이 없었으며, 설령 중을 부러워한들 처자가 거추장스럽고, 차라리 도둑질을 배우자니 양심은 그래도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글자를 좀 안다는 것이 그놈에게는 재앙이요, 좌도(左道)와 사경(邪徑)이 지름길인즉, 요행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서 속이고 꾀는 것으로 일을 삼았습니다. 본죄를 제외하고 이것만으로도 확실히 용서할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부류가 또한 어찌 이놈뿐이겠습니까? 그런데 금령이 내린 뒤에 제일 먼저 잡혀 왔기 때문에 마침내 괴수로 만들어져, 혹은 강제로 굴복받기에 급하여 지레 태형을 가하고, 혹은 엄포를 놓는 것이 적절치 못하고 알아듣게 타이른다는 것이 방법상 잘못되었으며, 혹은 윽박질러 야소를 저주하고 천주를 배척하게 하여 그 향배(向背)와 진위를 시험해 왔던 것입니다.

저들이 하늘을 사칭해서 천주라는 이름을 만든 것은 너무도 불경스러우나, 이따위 어리석은 백성들로서는 더욱 저들의 마음에 의혹이 생기기를 내가 즐기는 것은 선행이요 공경하는 바는 하늘인데, 어찌하여 나의 선행을 막으며 나의 공경을 금한단 말인가?’ 하여, 드디어 그 사심(邪心)을 더욱더 굳히며, 마치 그를 위하여 제 몸을 바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속고 혹함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차꼬나 오랏줄 따위는 한갓 헛된 물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명리(命吏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된 자로서는 마땅히 성세(聖世)의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도탑게 하려는 지극한 뜻을 공경히 받들어, 임금이 질() · () · () · ()하게 된 까닭과 피() · () · () · ()의 말이 진실과 다른 바를 빨리 밝혀, 전부터 물들었거나 새로 퍼져 가는 나쁜 풍속이 밝은 등불과 촛불 같은 임금의 교화 아래 저절로 사라지고, 허공을 거쳐 간 구름인 양 자취가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무슨 까닭으로 한 놈의 거렁뱅이 같은 놈을 붙잡으면 마치 대적(大敵)이 우뚝 마주 선 것같이 여겨, 나라의 위엄을 함부로 사용하여 힘으로 억제하려 들다가, 급기야 일이 난처한 지경에 다다르면 곧 조정에 떠넘기며 이와 같이 당황한단 말입니까?

신이 지난번에 요청한 일은 과연 제 마음대로 곧바로 실행한 것이나, 그 천심(淺深)과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요량한 바 있었던 것입니다. 전후로 사학을 배우고 익힌 자들이 비록 한 꿰미에 꿴 듯하지만, 사족(士族)과 천민은 차등이 없을 수 없고, 전문적으로 한 자와 그에 의해 오도된 자도 역시 등분이 있습니다. 저 존창은 권가와 윤가 두 역적에 비하면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흔적이 없을 뿐더러, 필공에 비하면 미혹을 깨친 마음이 상당히 있사옵니다. 전자로 따지면 차등의 형률을 적용함이 합당하고, 후자로 따지면 마땅히 참작하여 용서하는 죄목에 해당됩니다. 그가 써서 바친 자술서를 보면 비록 문리는 제대로 통하지 않으나 뉘우침이 뼈에 사무쳐, 성세(聖世)의 평민이 되기를 소원하는 말뜻이 너무도 애절하여 사람을 족히 감동시키고도 남습니다. 국가가 이런 오도된 자들에 대해서도 잡히는 대로 바로 처단한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약 그 미혹을 깨닫는다면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그자의 쓰라린 뉘우침이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국가로 보자면 평민 한 명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죽여 없애 착한 사람들이 물들어 변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형정(刑政)의 한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 죄상을 찾아냈다면 이른바 불쌍히 여겨야지 기뻐하지 말라고 할 따름입니다.

만일 진위를 알기 어렵고 번복할 것이 염려스럽다 하여, 기왕지사를 깊이 캐어 들어가고 기어이 소굴을 찾아내어, 사는 것도 아니요 죽는 것도 아닌 처지에 몰아넣고 사람 세상도 귀신 세상도 아닌 경계 지대에 길이 가두어 둔다면, 이는 지난번 신이 말한 형벌이 한결같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못한다는 경우이니,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된다면 비단 전날에 자복한 무리들이 의구심을 일으키게 될 뿐 아니라, 또한 뒷날에 감화될 무리들도 당연히 주저하는 생각을 품게 될 터입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정에서 기대하는 풍속 교화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반신반의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일개 존창에 대해 법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니, 신의 구구한 어리석은 소견은 과연 후자에 있었던 것이지 전자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D-001]이 죄수 : 충청도 천주교도의 지도자로 체포되어 수감 중인 이존창(李存昌)을 가리킨다.

[D-002]진장(眞贓) : 범행의 확실한 증거물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천주교 책자나 그림 같은 것을 가리킨다.

[D-003]그 괴수된 …… 형편입니다 : 1795년 공조 판서 이가환(李家煥)을 천주교도로 공격한 박장설(朴長卨)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정조(正祖)가 이가환을 특별히 충주 목사로 보임한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D-004]자핵소(自劾疏) :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탄핵하는 상소를 이른다.

[D-005]신묘한 …… 않는지라 : 원문은 神武不殺인데,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옛날의 총명하며 슬기로운 임금은 형살(刑殺)을 사용하지 않고도 신묘한 무위(武威)로 만민을 복종시켰다고 하였다.

[D-006]윤상(倫常) ……  :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에 살던 양반이자 천주교도로서 조상의 제사를 폐하고 위패를 불살라 버린 윤지충(尹持忠)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權尙然)을 가리킨다.

[D-007]좌도(左道)와 사경(邪徑) : 둘 다 사교(邪敎)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천주교를 가리킨다.

[D-008]임금이 …… 것입니다 : 연암집 2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 첫 번째 편지에 동일한 구절이 나온다. () · () · () ·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천서(天敍), 천질(天秩), 천명(天命), 천토(天討)를 이른다.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 · () · () · () 맹자 공손추 상에 나오는 피사(詖辭), 음사(淫辭), 사사(邪辭), 둔사(遁辭)를 이른다. 각각 편벽된 말, 음탕한 말, 간사한 말, 회피하는 말을 뜻하며, 정사(政事)에 해를 끼치는 이단사설(異端邪說)을 가리킨다.

[D-009]차라리 …… 것이니 : 원문은 寧失不經於一存昌인데,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고요(皐陶)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실수를 하는 편이 낫다.與其殺不辜 寧失不經고 하였다. 사형을 가하지 않고 경솔히 풀어 주는 실책을 범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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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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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2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1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2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3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4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5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6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7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8 진정에 대해 대구 판관(大邱判官) 이후(李侯) 단형(端亨) 에게 답함

9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10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11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함

 

[2]

12 함양 군수(咸陽郡守) 윤광석(尹光碩)에게 보냄

13 족제(族弟) 이원(彜源)에게 보냄

14 공주 판관(公州判官) 김응지(金應之)에게 답함

15 응지에게 답함

16 응지에게 답함

17 응지에게 답함

18 응지에게 답함

19 응지에게 보냄

20 이중존(李仲存)에게 답함

21 이중존에게 답함

22 이중존에게 답함

23 진정(賑政)에 대해 순찰사(巡察使)에게 답함

24 진정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25 순찰사에게 올림

26 순찰사에게 답함

27 순찰사에게 답함

 

[3]

28 족손(族孫) ()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박군(朴君) 묘지명

29 맏누님 증() 정부인(貞夫人) 박씨 묘지명

30 맏형수 공인(恭人) 이씨(李氏) 묘지명

31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32 치암(癡庵) 최옹(崔翁) 묘갈명

33 이 처사(李處士) 묘갈명

34 () 사헌부 지평 예군(芮君) 묘갈명

35 참봉(參奉) 왕군(王君) 묘갈명

36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삼도통제사(行三道統制使) 증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 () 충강(忠剛)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37 주공탑명(麈公塔銘)

 

 

 

삼종질(三從姪) 종악(宗岳) 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寺奴) 문제를 논한 편지

 

 

지원(趾源)이 젊었을 때 심병(心病)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불현듯, 온 세상 부인들이 첫아이를 낳으면서 너무도 지쳐 정신이 가물가물한 상태에서 만일 잠결에라도 젖이 아이의 입을 눌러 대면 어찌할 것인가 걱정이 되어 밤중에 일어나 방황하며 몸 둘 곳을 몰라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늘그막에 한 고을 원이 되어 5000호의 중남중녀(衆男衆女)를 맡아 기르게 되니, 이들은 맹자(孟子)의 이른바 적자(赤子)’, 노자(老子)의 일컬은 바 영아(嬰兒)’인 셈입니다. 영아란 한번 떼가 나면 손으로 제 머리칼을 쥐어뜯고, 한번 울음을 터뜨리면 누워서 발을 버둥거리는데, 남들이 아무리 온갖 방법으로 달래 보아도 그 옹알대는 소리가 무슨 말이며 제 의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지만, 자상한 제 어미만은 능히 이를 잘 살펴서 알아듣고 미리 짐작해서 그 뜻을 알아맞힙니다. 이에, 처음 해산한 어미는 자나 깨나 하는 생각이 오로지 안절부절 젖을 물리는 데에 있기 때문에 소리도 냄새도 없는 속에서도 묵묵히 듣고 꿈속에서도 거기에 마음을 쓰고 있는 줄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이야말로 지성(至誠)이 아니고야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원이 된 첫솜씨치고는 그다지 심한 허물은 없었다 여겼는데, 시노(寺奴) 300()에 이르러서는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배가 끓고 등이 후끈거려서 30년 전의 심병이 되살아난 듯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노비를 추가로 찾아내어 정해진 액수(額數)를 채울 적에 단지 두목(頭目)이 밀봉해서 바치는 공초(供招)에만 의거하고 있는데, 그가 추가로 찾아내어 채운 자는 모두 외손의 외손들이며 그 노비에게 보증을 서 준 자 또한 모두 외가의 외가 쪽 사람들이라 합니다. 대대로 벼슬하는 가문들도 팔세보(八世譜)를 만들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대개 씨족이 자주 바뀌고 고거(攷壉)가 자상치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시골구석의 무지한 백성들이야 허다히 제 아비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리저리 외가 쪽으로 뻗어 나간 소생의 근원을 알겠습니까. 이런 정도의 친인척은 비록 사대부의 경우일지라도 마상(馬上)에서 서로 한 번 읍()이나 하는 정도로 충분한 관계인데, 종신토록 그에 얽매여 가산을 탕진하고야 말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로 이자들을 이 고을에 정착하게 했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명단을 조사해서 검열한다는 것이 그래도 말이 되겠지만, 다른 고장으로 종적을 감추어 몰래 공포(貢布)를 바치고, 일찍이 본명을 숨겨 생사 여부도 정확하지 않으니, 아무리 장부를 점검하여 끝까지 조사하려 해도 그럴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혹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계집이 사내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시집도 안 갔는데 그 소생을 따지고, 가짜로 이름을 만들었는데 진짜로 현신(現身)하라 독촉하기도 하니, 두목이 당도하는 곳마다 사람들을 꼬이고 협박해서 그로 인연하여 농간을 부리게 됨은 형세상 필연적인 일입니다.

이 폐단이 백골징포(白骨徵布), 황구첨정(黃口簽丁)보다 더 심하건만 그래도 억울함을 드러내 호소하지 못하고, 고통이 뼛속에 사무쳐도 오히려 남이 알까 두려워 아무도 모르게 뇌물을 바치고 이웃에게도 스스로 숨기는 터입니다. 속담에 이른바 동무 몰래 양식 낸다’, ‘병 숨기고 약 구한다’, ‘가려운 데는 안 가리키고 남더러 긁어 달란다는 격입니다. 이 어찌 절박하여 부득이하고 지극히 난처한 사정이 그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조금이라도 노비안(奴婢案)에 관련되기만 하면 딸 다섯을 두었더라도 사위로 들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머리가 하얗도록 생과부로 한을 품은 채 일생을 마치니 천지 음양의 화기(和氣)를 손상함이 또한 어떻다 하겠습니까. 수령이 이 문제로 죄를 얻는 경우가 전후로 종종 있었지만 이는 덮어 두고라도, 다만 국가를 위하여 천지의 화기를 맞아들이고 임금의 은택을 펴자면 빨리 이 폐단을 바로잡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저는 단지 안의(安義) 한 고을만 특히 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을이 이와 같을진댄 다른 고을도 알 만하며, 한 도()가 이와 같을진댄 팔도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명공(明公)께서 감사(監司) 자리로부터 들어와 새로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응당 이 일을 반드시 눈으로 겪어 본 바라, 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을 반드시 익히 살핀 바 있으리니 곧 임금을 연석(筵席)에서 뵈올 때의 첫 진언(陳言)은 이보다 중요한 문제가 없을 줄로 압니다.

구구한 마음에 오로지 천하의 근심을 남보다 먼저 근심해 주기를 깊이 바라는 바입니다. 아무개는 두 번 절하고 올립니다.

 

 

[C-001]삼종질(三從姪) …… 편지 : 박종악(朴宗岳 : 1735~1795)은 자가 여오(汝五), 호는 창암(蒼巖)이다. 항렬로는 연암의 9촌 조카뻘이나 나이는 2세 연상이다. 영조(英祖)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주로 청현직(淸顯職)을 지냈으며, 정조(正祖) 즉위 초에는 홍국영(洪國榮)을 비판하다 파직되어 오랫동안 관직에서 떠나 있었다. 1790년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경기 관찰사,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792년 음력 1월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이 글은 이때 보낸 편지이다. 시노(寺奴)는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를 이른다. 이 글의 제목이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에는 하족질종악입상인론시노비서(賀族姪宗岳入相因論寺奴婢書)’,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동문집성(東文集成)에는 하족질배상인론시노서(賀族姪拜相因論寺奴書)’ 등으로 조금 다르게 되어 있다.

[D-001]심병(心病) : 마음속의 근심 걱정으로 인해 생긴 병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 감괘(坎卦) …… 사람에 대해서는 근심을 더함이 되고, 심병이 된다. …… 其於人也 爲加憂 爲心病고 하였다.

[D-002]5000 :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4000호로 되어 있다.

[D-003]맹자(孟子) …… 셈입니다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대인은 적자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했는데 그 주에 대인은 임금을 말한다. 임금이 백성을 응당 적자처럼 대한다면 민심을 잃지 않게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노자(老子)  49 장에 성인(聖人)은 항상 사심이 없다,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성인은 모든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여긴다.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聖人皆孩之고 하였다.

[D-004]꿈속에서도 : 원문은 夢魂之中인데, 백척오동각집에는 慌愡之中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蒙寐之中으로, 운산만첩당집에는 夢囈之中으로 되어 있다.

[D-005]두목(頭目) : 관청의 노비를 통솔하는 두목 노비를 이른다. 노비 10()마다 1구를 택하여 두목으로 정했다.

[D-006]팔세보(八世譜) : 8대의 조상까지 기록한 족보를 이른다.

[D-007]공포(貢布) : 지방에 거주하는 공노비가 신역(身役) 대신 나라에 바치던 베를 말한다. 영조 때 노()는 베 1, ()는 반 필로 공포를 삭감하였으며, 나아가 비의 공포를 폐지하였다. 1801(순조 1) 공노비가 해방되면서 공포의 징수도 완전 폐지되었다.

[D-008]일찍이 본명을 숨겨 : 원문은 嘗隱本名인데, 여러 이본들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9]백골징포(白骨徵布) : 조선 시대에 이미 죽은 사람을 생존해 있는 것처럼 명부에 등록해 놓고 강제로 군포(軍布)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D-010]황구첨정(黃口簽丁) : 조선 시대에 다섯 살 미만의 젖내 나는 사내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일을 이른다.

[D-011]동무 몰래 양식 낸다隱旅添粮 : 여행 비용으로 양식을 추렴하는데 길동무 모르게 내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뜻으로, 힘만 들고 생색이 나지 않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송남잡지(松南雜識)에도 諱伴出糧이라 하여 같은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정약용(丁若鏞) 이담속찬(耳談續纂)에도 동무 몰래 양식 내면서 제 양식은 계산 않는다.諱伴出粻 不算其糧는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D-012]노비안(奴婢案) : 노비의 호적으로, 20년마다 대추쇄(大推刷)하여 정안(正案)을 작성하고, 3년마다 소추쇄(小推刷)하여 속안(續案)을 만들었다.

[D-013]명공(明公) : 명성과 지위를 갖춘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D-014]그것이 폐단의 근원이 됨 : 원문은 其爲弊源인데, 백척오동각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諸般弊源으로 되어 있다.

[D-015]연석(筵席) : 임금이 학문을 닦는 경연(經筵)을 말한다. 정승은 경연의 영사(領事)를 겸하였으며, 경연이 끝난 뒤 그 자리에서 임금과 정치 문제를 협의하였다.

[D-016]천하의 …… 근심해 주기 : 원문은 先天下之憂而憂인데, () 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D-017]아무개 : 원문은 인데, 자신을 가리키는 겸칭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 우상(金右相) 이소(履素) 에게 축하하는 편지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분이라 임금께서도 실로 그에 부응하시니 정승에 제수되던 날 저녁에 온 조정이 모두 감동하였거니와, 유독 이 백열(柏悅)의 소회로서는 더욱더 이마에 두 손을 얹고 축하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합하(閤下 정승에 대한 존칭)의 집안에 4()에 걸쳐 정승이 다섯 분 나오셨습니다. 정승의 지위와 중임은 일찍이 예전이라서 더 높고 오늘이라서 손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멀리 역사책에서 찾을 것 없이 가까이 가정의 모범을 본받는다면 이야말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입니다.

화폐의 가치에 대해서 제 나름의 견해가 있기에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직위를 벗어난 참람되고 망녕된 말이라 책하지 말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별지(別紙)

 

오늘날 백성의 근심과 국가의 계책은 오로지 재부(財賦 재화와 부세)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배가 외국과 통하지 않고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생산된 재부는 항상 일정한 수량이 있어, 관에 있지 않으면 민간에 있게 된다. 그런데 공사간(公私間)에 다 고갈이 되고 상하가 모두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재(理財)하는 방법이 제 길을 얻지 못한 까닭이다.

대저 화폐의 가치가 높아지면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면 물건의 가치는 높아진다. 물가가 오르면 백성과 나라가 함께 병들고 물가가 떨어지면 농민과 상인이 함께 해를 입는 것이다.

역대 조정에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전에 엽전을 주조했으나 그나마 잠시 시행하다 이내 중지되었다. 진실로 포화(布貨 )와 저화(楮貨 지폐)는 비록 싸지만 다시 비싼 은화(銀貨)가 있어서 비싸고 싼 것 사이에 절충할 수 있었다.

무릇 위의 세 가지 화폐는 모두 백성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빨리만 만들어 내면 넉넉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엽전은 사사로이 만드는 화폐가 아니고 관의 공급에 의존하고 있다. 당시 만든 양이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민간에 보급된 것도 미처 두루 퍼지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엽전의 사용을 불편하게 여긴 것은 실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재부를 잘 다스리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폐의 가치를 헤아려 물가를 조절하며, 막힌 것은 소통시키고 넘치는 것은 막아서, 화폐의 가치가 너무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물건이 지나치게 비싸지거나 지나치게 싸지는 경우를 막는 것이다.

엽전이 세상에 통행된 지 113년이 지났다. 중앙에서는 호조(戶曹), 진휼청(賑恤廳), 오군영(五軍營)과 지방에서는 팔도(八道), 양도(兩都), 통영(統營)에서 대체로 각기 재차 혹은 3, 4차 주전(鑄錢)하였다. 그 만든 연도 및 수효는 해당 관청에 비치되어 있으므로 한번 조사하면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엽전이 관에 비축된 것이 얼마인지 파악하면 민간에 있는 것을 그에 따라 추정해 낼 수 있다. 백 년 사이에 마멸되거나 파손된 것, 물과 불에 손실된 것 등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대강 따져서 이를 제해도 관과 민간에 있는 현재 엽전의 총계는 적어도 수백만 냥이 될 것이다. 이를 엽전이 처음 사용되었을 때와 비교하면 아마 10배도 더 되는 양이다. 그럼에도 대소간에 황급해하면서 모두 돈 걱정을 않는 자 없으며, 심지어는 나라 안에 돈이 없다고도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 엽전의 이름을 상평통보(常平通寶)’라 부른 것은 항상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백성이 엽전을 사용한 지 오래되매 늘 보고 늘 써 왔기 때문에 다른 화폐는 무시하고 아울러 은화까지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엽전만 날마다 늘어나 물가는 날마다 오르게 되었고 모든 거래에 있어 엽전이 아니면 안 되게 되었다. 화폐의 흐름이란 기울어진 데로 쏟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물가가 오르면 돈이 어찌 거기에 쏠리지 않겠는가! 예전에 한푼 두푼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이 혹은 서푼 너푼으로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금 엽전으로 물건과 균형을 유지하려면 몇 배가 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엽전이 천해지고 화폐가 값싸진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국내의 재부에 대해 논하는 자들은 모두 돈이 귀하기 때문에 물가도 따라서 오른다 하니 어찌 생각을 못 함이 이다지도 심한가!

또한 은은 재부로서 으뜸가는 화폐이며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에 민간 습속이 엽전에만 익숙하고 은화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은이 드디어 한낱 물건으로만 취급되고 화폐에는 들지 않게 되었다. 북경(北京)의 시장에서 팔지 않으면 곧 무용지물과 같은 것이다. 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등의 사신 행차에 휴대하는 포은(包銀)이 매년 적어도 10만 냥은 될 것이니, 10년을 합계하면 100만 냥이나 되는 것이다. 이로써 조달하여 실어서 돌아오는 것이란 한갓 털모자일 뿐이다. 털모자는 한 해 겨울만 지나도 해져 못 쓰는 것이다. 천 년이 가도 부서지지 않는 보물을 들고 가서 한 해 겨울에 해져 못 쓰는 것을 바꿔 오고, 산천에서 캐내는 한정이 있는 재화를 실어서 한번 가면 다시 못 올 땅으로 보내 버리니 천하의 졸렬한 계책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하겠다.

간접적으로 듣건대 국내에 당전(唐錢 청 나라 동전)을 통용시켜 전황(錢荒 화폐 부족 현상)을 구제하기로 하고 이번 동지사 편에 들여오도록 허락하였다 하는데, 이는 결코 옳은 계책이 아니다. 엽전은 바람, 서리, 홍수, 가뭄 등의 재해를 받는 것도 아닌데, 어찌 곡식이 큰 흉년을 만난 것처럼 ()’이라 일컫는가. ‘이라 일컫는 까닭은 돈길이 너무도 혼잡해져서 마치 벼논에 우거진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바깥 지역에서 문은(紋銀) 1냥으로 동전 7()를 교환해 준다고 한다. 1초는 163푼으로 한 꿰미가 되니, 우리나라 엽전으로 기준을 삼아 보면 1냥의 은이면 대개 엽전 11 4 1푼을 얻을 수 있으니 거의 10배의 이익을 보는 것이다. 모든 운반비를 제하더라도 5, 6배의 이익은 된다. 저 역관들은 한갓 자기들의 목전의 이익만 탐하고 국가의 장구한 계책은 알지 못하여, 수십 년 이래 밤낮 오직 당전의 통용을 소원하고 있다. 이는 그야말로 화살 가는 데 따라 과녁 세우기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의 화폐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온갖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는데, 어찌 외국의 조악한 화폐를 들여다가 통화의 유통을 스스로 흐리게 한단 말인가. 털모자는 오히려 서민들의 방한의 용구인데도 은으로 바꾸어 오는 것이 불가하거늘, 하물며 역관배들의 일시적인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팔도에서 산출되는 귀중한 은을 쓸어다가 북경의 시장에다 밑 빠진 독을 만들어 쏟아 붓는단 말인가. 그 이해득실은 환히 알기 쉬워 굳이 지혜 있는 자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먼저 돈길을 맑게 하고 우선 은화가 북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막는 것밖에 없다.

어떻게 돈길을 맑힐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엽전을 사용한 이래로 구전(舊錢)보다 좋은 것이 없다. 구전은 모두 견고하고 중후하며 글자체도 분명하였는데, 임신 · 계유 연간에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동시에 엽전을 주조하면서 느닷없이 옛 방식을 바꾸어 납과 철을 많이 섞은 데다 두께가 너무 얄팍해서 손만 대면 쉬이 부서질 정도였다. 그리하여 엽전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으로 간주되어 맨 먼저 돈의 재앙을 만들었으니, 물가가 치솟은 것은 실로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계속 만들 때마다 그 크기가 갈수록 줄어들어, 지금의 신전(新錢)과 함께 섞어서 꿰미를 만들면 신전은 구전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서 돈을 세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돈의 난잡함이 이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

지금 옛날의 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를 모방해서 어디서든 현재 있는 구전 한 닢을 신전 두 닢에 해당하도록 하고, 일제히 돈꿰미를 바꾸면 대소가 즉시 구분될 것이니 새로 돈을 주조하는 번거로움을 겪지 않고도 앉아서 백만 냥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크고 작은 돈을 함께 통행시키더라도 가치의 경중에 따라 달리 쓰면 민심을 거스르지 않고 화폐가 잘 유통될 것이다. 임신 · 계유 연간에 세 영문(營門)에서 주조한 엽전은 큰 것도 구전만 못하고 작은 것은 신전과 맞지 않아 이미 격식에 어긋나고 형체마저 너무 얇고 졸렬하니 모두 통용을 정지시켜 저자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돈길이 맑아질 것이다.

은화가 빠져나가는 것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관과 민간에 소장되어 있는 토산의 은괴를 그냥 부숴서 화폐로 삼지 말고, 모두 호조로 바치게 해서 일률로 닷 냥, 열 냥으로 크고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천마(天馬)나 주안(朱雁)의 모양을 박아서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10분의 1의 세를 받는다. 그리고 교역한 당전은 국내에 들이지 못하게 하고 의주(義州)에 유치시켜 두었다가, 뒤에 나가는 사행의 노자에 충당시킬 것이다.

무릇 사행의 수행원도 마땅히 긴요치 않은 인원은 감해야 할 것이다. 서장관(書狀官)의 경우에 그 소임이 외교의 임무를 맡은 것도 아니요 직분이 종사(從事)와도 다른데, 그 식량이며 마부와 말 등 일체 번다한 비용은 따로 사신 한 사람의 몫이 들며 잡심부름하는 하인들을 많이 대동하고 양방(兩房)에 의존하여 취사를 해결한다. 그가 가고 오는 것은 본래 중국 측에서 알 바 아닌데도 무릇 잔치를 베풀고 상을 하사하는 자리에서 전례에 따라 염치없이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매우 부당한 일이요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구차스럽기 짝이 없다. 세 명의 대통관(大通官 벼슬이 높은 역관) 이외에 무릇 압물종사(押物從事)는 모두 감원함이 옳고, 사자(寫字), 도화(圖畵), 의관(醫官)의 직임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의 수행 비장(裨將)들에 분배시키며, 기타 무상종인(無賞從人)과 의주 상인은 일체 엄금하고, 무역하는 데 있어서는 약재 이외에는 일체 함부로 내가지 못하게 한다면 변경의 관문이 엄중해지고 국내에 은화가 저절로 풍족하게 될 것이다.

 

 

 

시국에 절실한 말로서 한() 나라 가산(賈山)과 당() 나라 육지(陸贄)와 같은데, 문장을 지은 것은 도리어 더욱 고아(古雅)하고 간결하다.

 

[C-001]김 우상(金右相)에게 축하하는 편지 : 김이소(金履素 : 1735~1798)는 자가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인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연암과는 약관 시절부터 친구였다. 영조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이조 판서를 거쳐 정조 대에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다. 이 글은 그가 1792년 음력 10월 우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보낸 편지인데, 하풍죽로당집에는 하김우상인론전폐경중서(賀金右相因論錢幣輕重書)’, 동문집성에는 하김우상이소인론천폐서(賀金右相履素因論泉幣書)’로 되어 있다.

[D-001]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육기(陸機)의 탄서부(歎逝賦) 참으로 소나무가 무성하니 잣나무가 기뻐하고, ! 지초가 불에 타니 혜초가 탄식하네.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文選 卷16

[D-002]별지(別紙) : 김택영(金澤榮) 연암집 중편연암집에는 천폐의(泉幣議)’ 또는 상김우상이소천폐의(上金右相履素泉幣議)’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

[D-003]엽전이 …… 지났다 : 숙종 4(1678)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한 일을 두고 한 말이다.

[D-004]오군영(五軍營) : 훈련도감(訓鍊都監),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을 말한다.

[D-005]양도(兩都) : 강도(江都)와 송도(松都), 즉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開城府)를 가리킨다.

[D-006]대소간에 : 원문은 大小인데, ‘小大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7]하정(賀正), 동지(冬至), 재력(䝴曆), 재자(䝴咨) : 하정은 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으로 가는 사행이고, 동지는 동짓날을 축하하러 가는 사행이며, 재력은 중국으로부터 역서를 받아 오는 것이고, 재자는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자문(咨文)을 가지고 왕래하는 것을 이른다.

[D-008]포은(包銀) : 사행(使行)의 여비 조달을 위해 인삼 열 근씩 담은 꾸러미 여덟 개 즉 팔포(八包)를 가져가도록 하다가 인삼 대신 그 값에 상당하는 은()을 가져가도록 했는데, 이를 포은이라 한다.

[D-009]이로써 …… 뿐이다 : 열하일기 일신수필(馹汛隨筆) 7 22일 조를 보면, 영원위(寧遠衛) 지나 산해관(山海關) 조금 못 미쳐 중후소(中後所)란 곳에 대규모 털모자 공장이 셋이나 있으며 사신 행차에 동행한 우리나라 의주(義州) 상인들이 그곳의 생산품을 대량 수입해 간다고 하면서, 그로 인한 은화 유출을 비판하였다. 중후소의 털모자 공장에 관해서는 김창업(金昌業)과 홍대용(洪大容) 등의 연행록에도 소개되어 있다.

[D-010]산천에서 …… 실어서 : 원문은 載採山有盡之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필사본에는 載採山川有盡之貨로 되어 있다. 이어지는 대구(對句) ‘輸之一往不返之地를 감안하면 후자처럼 1구가 8자로 되어야 옳다. 또한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은조(銀條)에도 이와 유사한 以山川有限之材 輸一往不返之地라는 구절이 있어 이를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열하일기 일신수필 7 22일 조에는 以採山有限之物 輸一往不返之地라 하여 山川이 아니라 으로 되어 있다.

[D-011]국내에 …… 허락하였다 : 정조 16(1792) 10월 은() 부족에 따라 포은을 채우지 못하게 된 역관들의 생계 대책과 전황(錢荒) 해소를 위해 청 나라 동전을 수입하기로 하자 평안 감사 홍양호(洪良浩)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가 우려한 대로 청 나라가 대청회전(大靑會典)에 동철(銅鐵)의 외국 유출을 금한다는 규정을 들어 불허함에 따라 동전 수입이 실현되지는 못했다. 正祖實錄 16 10 6 · 19, 17 2 22

[D-012]문은(紋銀) : 청 나라에서 화폐로 쓰이던 은을 이른다. 말굽 모양이라 하여 마제은(馬蹄銀)이라고도 부른다.

[D-013]임신 · 계유 연간 : 각 군영의 경비 조달을 이유로 중앙의 세 영문(營門)으로 하여금 전년부터 주조하게 한 상평통보 44 4000냥의 주조가 임신년(1752, 영조 28) 7 1일 완료되었다. 당시 주조된 동전은 원료 부족 때문에 크기가 약간 축소된 중형(中型) 상평통보였다.

[D-014]지금의 신전(新錢) : 정조 9(1785) 7월 정언 이민채(李敏采)가 상소하여 전황(錢荒) 대책을 건의한 것을 계기로 호조에서 주관하여 상평통보 67만 냥을 새로 주조하게 하였다.

[D-015]오수전(五銖錢)과 삼수전(三銖錢)의 제도 : 오수전이 처음 통행될 때 이전에 있던 삼수전과 차등을 두고 교환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오수전은 무게가 5()로서 한() 나라 무제(武帝) 원수(元狩) 5(기원전 118)에 처음으로 주조되어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 나라 때까지 통용되다 당() 나라 건국 초에 폐지되었다. 삼수전은 오수전에 앞서 한 나라 무제 건원(建元) 1(기원전 140)에 처음으로 주조되었으나 무게가 너무 가벼워 위조하기 쉬웠으므로 4년 뒤에 주조가 정지되었다.

[D-016]너무 얇고 졸렬하니 : 원문은 薄劣인데, ‘劣薄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7]주안(朱雁) : 붉은색의 기러기로 서조(瑞鳥)의 하나이다.

[D-018]종사(從事) : 원래 여러 가지 직책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사행의 실무를 맡은 관원을 말한다. 예컨대 방물 호송을 맡은 관원을 압물종사(押物從事)라 한다.

[D-019]양방(兩房) :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가리킨다. 부사를 부방(副房), 서장관을 삼방(三房)이라 한다.

[D-020]무상종인(無賞從人) : 응상종인(應賞從人)과 달리, 청 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하사받는 명단에 들지 못하는 비공식 수행원을 가리킨다.

[D-021]가산(賈山) :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문제(文帝)가 백성들이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도주전령(盜鑄錢令)을 폐지하자 가산이 글을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격절(激切)하여 문제가 끝내 처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D-022]육지(陸贄) : 754~805. () 나라 때의 인물로, 덕종(德宗) 초에 한림학사가 되어 주자(朱泚)의 반란이 일어나자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여 무인들조차 조서를 읽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고 한다. 그 후 재상이 되어 폐정(弊政)을 논하고 가혹한 조세제도를 혁파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그가 황제에게 올린 글들이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라는 책으로 남아 있는데 그 글이 대부분 시국에 절실한 내용들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현풍현(玄風縣) 살옥(殺獄)의 원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사람이 급소를 맞으면 주먹 한 방, 발길질 한 번으로도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법률 조문에서 논한 바 있거니와, 이번에 김복련(金福連)이 유복재(兪福才)를 치사(致死)한 사건은, 그 뇌후(腦後), 인후(咽喉), 양과(兩胯) 등 여러 곳에 다친 흔적이 극히 낭자하여, 상처의 치수를 재어서 합쳐 보면 거의 두어 자에 이르니 시장(屍帳 검시 기록)을 살펴보건대 다시 의논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그 정범(正犯)의 확정에 있어, 초검(初檢)에서는 삭손(朔孫)에게 무게를 두었으나, 복검(覆檢)에서는 복련으로 논단하였으니, 간증(看證)이 앞뒤로 진술을 달리한 점을 보면 임기응변으로 잘못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복련은 곧 삭손의 아비요, 삭손은 바로 복련의 자식입니다. 아무리 살인죄수라 할지라도 윤리는 있는 법인데 부자간에 그 죄를 서로 떠넘기다니 과연 어떤 인간들입니까? 판정 자체의 경중은 오히려 부차적인 일이라 하겠습니다.

바야흐로 죽기 살기로 싸우면서 주먹과 발길이 마구 오가면 비록 이웃 사람이라도 당연히 머리를 풀어뜨린 채로 달려와서 싸움을 말릴 터인데, 그 자식된 자가 아무리 배가 아파 아랫목에 드러누워 있었다.’고 말하지만 어찌 방문을 굳게 닫고 있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일의 곡직(曲直)과 싸우게 된 연유를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분김에 몸을 돌보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 나가서 제 힘껏 협공하여 아비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성난 주먹 아래 비록 당장 상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제 몸을 스스로 묶고 관청에 자수하여 살인범이 되기를 청하기에도 겨를이 없겠거늘, 어찌 부자가 죽음을 다투는 마당에 이같이 느긋하게 있었겠습니까?

시골구석의 어리석은 백성이 망녕되이 부자가 함께 살아날 꾀를 내어 이같이 이랬다저랬다 하고 진술한 것이니, 정상을 참작하여 죄를 판정할진대 우발적인 살인의 죄는 작고, 꾸며서 둘러댄 죄는 크다 하겠습니다. 과연 가까운 이웃이 증언한 바와 같다면, 싸움터에 나아가 용기가 없는 것도 오히려 효도가 아니라고 일컬었거늘 하물며 불반병(不反兵)의 원수와 만나 싸움에 있어서겠습니까.

복검에서 원범(元犯 주범)이 뒤바뀐 것은 풍속과 교화에 크게 관계되는 일이니 삭손이 사실을 자백하기 전에는 이 옥사가 바로될 수 없습니다. 각별히 조사해서 다시 주범과 종범을 가려내야만 실로 옥사를 신중히 다루는 도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가히 편언절옥(片言折獄)이라 하겠다.

 

[C-001]현풍현(玄風縣) …… 답함 : 1792(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는 길에 감영에 들렀다가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으로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들을 심리하는 일을 맡아 이를 공정하게 처리했다고 한다. 이 편지를 비롯하여 연암집 2에 수록된 옥사에 관한 편지 4통은 모두 이 일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들이다. 過庭錄 卷2

[D-001]뇌후(腦後) : 정수리의 숨구멍 자리인 백회(百會)의 뒤쪽을 말한다.

[D-002]양과(兩胯) : 두 넓적다리 사이 부분, 즉 샅을 말한다.

[D-003]상처의 …… 합쳐 보면 : 원문은 分寸之地인데, 검시할 때 영조척(營造尺)이나 관척(官尺)으로 상처의 길이와 깊이가 몇 푼() 몇 촌()인지 재는 것을 말한다. 10푼이 1촌이고, 10촌이 1()이다.

[D-004]간증(看證) : 간증(干證), 즉 범죄에 관련된 증인을 말한다.

[D-005]싸움터에 …… 일컬었거늘 :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증자(曾子)가 효()에 대하여 제자인 공명의(公明儀)에게 말하기를,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남겨주신 유체(遺體)이니, 부모의 유체를 움직임에 어찌 감히 신중하지 않겠는가. 행동거지를 장중하게 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관직에 나아가 신중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붕우 사이에 신의를 지키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며, 싸움터에 나아가 용맹하지 않는 것은 효가 아니다. 이 다섯 가지를 실천하지 못하면 그 비난이 부모에게 미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겠는가.身也者 父母之遺體也 行父母之遺體 敢不敬乎 居處不莊 非孝也 事君不忠 非孝也 莅官不敬 非孝也 朋友不信 非孝也 戰陳無勇 非孝也 五者不遂 灾及其親 敢不敬乎 하였다. 원문에서 전진무용(戰陣無勇)’  자가 예기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뜻은 같다.

[D-006]불반병(不反兵)의 원수 : 불반병은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는다는 말로서, 언제나 병기를 몸에 지니고 있다가 상대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죽이려 든다는 뜻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 아버지의 원수는 한 하늘을 함께 이지 않고 반드시 죽이며, 형제의 원수는 집으로 돌아가서 병기를 찾지 않으며, 벗의 원수와는 같은 나라 안에서 살지 않는다.父之讐 弗與共戴天 兄弟之讐 不反兵 交遊之讐 不同國 하였다.

[D-007]편언절옥(片言折獄) : 한마디 말로 판정을 내림을 말한다.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자로(子路)에 대하여 한마디 말로 옥사를 판정할 수 있는 자는 아마도 자로일 것이다.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밀양(密陽) 김귀삼(金貴三)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예로부터 의옥이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밀양 사람 김귀삼이 그 사위 황장손(黃長孫)을 치사케 했다는 사건은 의혹이 극심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초검에서는 실인(實因 사망 원인)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하였고, 복검에서의 실인도 역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것이라 했는데, 이번의 삼검(三檢)에서는 갑자기 강요당했다는 뜻의 피핍(被逼)’ 두 글자를 덧붙여 실인을 삼았으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별다른 본 것이 있어서 이 같은 단안을 내린 것입니까?

대저 이 옥사는 이미 세 차례 검험(檢驗 검시)을 거쳤으나 내내 어림짐작이어서, 상처난 자국의 치수에 가감된 것이 많았을 뿐 아니라 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조차도 분명치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논단하면서 검안(檢案)에 자상하고 소략함이 심하게 차이 난다 하여 초검과 복검을 모조리 의심하고 삼검에만 무게를 두어서는 물론 안 될 것입니다.

대개 장손이 목을 맨 것은 딴 여자를 얻어 들인 데서 발단하였고, 소를 두고 다툰 데서 결과한 것이니 저 길 가는 사람이 사연을 듣더라도 당연히 그 장인에게 의심을 많이 둘 것입니다. 하물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검관(檢官 검시관)의 도리로서 혹시 숨은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캐 보려고 한 것은 필연적인 형세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때에 목매달아 죽은 나무에 대해 가까운 곳을 피하고 먼 곳을 대는 등 진술이 여러 번 뒤바뀌니, 묵은 의심 새 의심이 무진무진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삼검의 실인에 있어 갑자기 피핍이란 단안이 덧붙여진 까닭입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말은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긴요하고 무게 있는 말인 듯 보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따져 보면 이렇다 할 형적이 없는 것입니다. 혹 뜻밖에 의심을 받거나 일이 당초 마음먹은 것과 어긋날 경우에, 빈정대는 것도 아니요 나무라는 것도 아니나 오는 말이 가시가 돋쳐, 낯이 뜨거워지고 속이 타서 더더욱 답답하고 원통할 때가 있습니다. 이 쓰라리고 괴로운 심경을 누가 이렇게 만든 것이겠습니까마는, 조급하고 경망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자살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른바 피핍이란 것은 왕왕 이와 같은 것으로서, 원인이야 비록 남 때문이지만 죽음은 스스로 자행한 것이니, 지금 비록 피핍이란 두 글자를 덧붙인다 해도 옥사의 진상에는 별로 가중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의심 갈 만한 자취를 들어 용서할 만한 정상을 참작해 본다면, 남편과 아내, 장인과 사위 사이에 일찍이 눈 부라리고 말다툼한 적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무슨 소 찾는 일로 인하여 어찌 암암리에 살해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그 의복을 망가뜨리고 문기(文記)를 찢어 버린 것을 보면 비록 정을 아예 끊어 버린 듯도 하지만, 상놈들이란 분이 나면 들이받고 치고 하는 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일인지라 조금 지나 술을 받아 함께 취토록 마시고 한이불 속에 자고 나면 묵은 감정은 하마 풀리고 옛 정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졸지에 스스로 목매달았다는 것은 실로 상정이 아닌 것입니다.

대저 장손의 자결은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로 사들일 논값은 얼마이며, 전에 기르던 소값은 얼마인가, 딴 여자에게 장가가던 첫날밤부터 온갖 계획이 이 소 한 마리에 달려 있었는데, 급기야 소를 찾으러 와서는 비단 당초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무한한 비웃음과 꾸지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내 칼도 남의 칼집에 들어가면 빼기 어렵다는 격이라, 분김에 멍청한 꾀를 내어 죽어 버리겠다는 말로 남을 위협하겠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농지거리한 것이 마침내 참말로 되어 버린 것일 수가 있습니다. 둘째, 남의 권고를 받아들여 애써 딴 여자를 보았으나 소까지 몰고 이 집을 아주 떠난다는 것은 제 본심이 아니었으며, 전에 살던 곳을 잊기가 어려워 옛집을 다시 찾아갔으나 두루 질책만 쏟아져 몸 둘 곳이 없었으며, 옛날을 그리는 정은 심중에 간절했지만 성깔 사납고 투정 많은 계집은 돌아보는 척도 않아서 한밤중에 서성대고 기다려도 그림자도 발자국 소리도 영영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속담에 이른바 게도 잃고 구럭도 잃었다는 격이어서, 떠나기도 어렵고 있기도 어려워 원망과 후회가 한꺼번에 몰려드니 술김에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차라리 죽어 버리고 만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반드시 이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한 정세를 들어 말하더라도 귀삼은 늙고 잔약한 몸이요, 장손은 힘 있는 장정이니, 설사 귀삼이 정말로 몰래 해칠 계획을 지녔더라도 장손이 어찌 남에게 제 목을 매라고 내맡기고 손 하나 까딱 않으며 그대로 얽어매였겠습니까. 설혹 늑살(勒殺 목 졸라 죽임)이라 한다면 어찌하여 빨리 구렁에 밀어넣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지 않고서 전혀 알지도 못하는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에게 급급히 통부(通訃 부고)를 했겠으며, 기필코 검험하고 말 관가에 허둥지둥 알리어 자진해서 원범이 되어 스스로 죽을 땅에 들어갔겠습니까? 통탄할 바는 목매단 장소를 끝내 곧이곧대로 말하지 아니하여 옥사의 진상에 의혹을 자아내게 한 것인데, 오직 저 어리석은 백성이 헛되이 사중구생(死中求生)의 꾀를 내어 이와 같이 어물어물한 것이요, 장손이 제 손으로 목 매어 제가 죽은 것만은 매한가지입니다. 등유목(燈油木)에 목을 매었건 도리목(都里木)에 목을 매었건 간에 그 죄에는 그다지 경중의 차이가 있지 않은 것인데, 즉시 장소를 바른대로 대지 않은 것은 그 행동을 따져 보면 비록 교활하고 흉악한 듯하나 그 정상을 헤아려 보면 그다지 괴이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 이런 사건은 오직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 진실로 옥사를 신중히 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C-001]의옥(疑獄) : 죄상이 뚜렷하지 아니하여 죄의 유무를 판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이른다.

[D-001]활투두(活套頭)인지 사투두(死套頭)인지 : 투두(套頭)는 자살할 때 쓰는 올가미를 말한다. 활투두는 올가미의 고를 움직여 죄었다 늦추었다 할 수 있어 살아날 수 있는 것이고, 사투두는 고를 단단히 매어 옴짝달싹할 수 없으므로 죽게 되는 것이다.

[D-002]문기(文記) : 소유권이나 기타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로, 문권(文券)이라고도 한다.

[D-003]등유목(燈油木) : 나무로 만든 등잔걸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D-004]도리목(都里木) : 서까래를 받치는 도리로 쓰이는 재목을 말한다.

[D-005]옥사를 …… 도리 : 원문은 審恤之道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에는 審愼之道로 되어 있다. 앞의 편지에서도 審愼之道라 하였을 뿐 아니라 이는 재판과 관련하여 흔히 쓰는 표현이므로, 이에 따라 고쳐서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함양(咸陽) 장수원(張水元)의 의옥(疑獄)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함양 사람 장수원이 한조롱(韓鳥籠)이란 계집을 치사한 사건에 있어 초검과 복검이 모두 스스로 물에 빠진 것으로 실인을 삼았으나, 조서를 반복하여 살펴보고 그 정실(情實)을 참작해 보면, 조롱이 수원에게 위협과 핍박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남의 곁방살이를 하는 처지라, 비록 몹시 부끄럽고 분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형편이 너무나 궁하여 어디 갈 곳조차 없는지라 저 맑고 깨끗한 못만이 그녀의 몸을 깨끗이 보존할 만한 곳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비록 수원이 드잡이하여 밀어 넣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순결을 지키는 처녀로 하여금 이렇게 물에 빠져 죽는 원한을 품게 만든 것이 그놈이 아니고 누구란 말입니까! 그 정상을 추궁해 가면 그놈이 어떻게 제 목숨을 내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후 진술에서 그 말이 여러 번 변했으니 이는 교활하고 완악한 습성이 그 강포한 자취를 은폐하려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강간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곁방의 처녀가 무엇 때문에 끌려갔겠으며, 제 놈이 끌어가지 않았으면 조롱의 머리털이 어찌하여 뽑혔겠으며, 지극히 분통한 일이 아니라면 뽑힌 머리털을 무엇 때문에 꼭 간직해 두었겠습니까. 이 한 줌의 머리털을 남겨 어린 남동생에게 울며 부탁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날에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증거로 삼자는 것이요, 또 한편으로는 죽은 뒤에라도 원한을 씻을 자료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이른바 이를 잡다가 유혹하고, 길쌈을 하다 말고 유혹했다거나 호미를 전해 주러 왔다가 싸우고, 버선을 잃어 버려 싸웠다고 한 진술들은 이 옥사에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수원이 강포한 짓을 한 증거물은 오직 이 머리털이요, 조롱이 죽도록 항거한 자취도 오직 이 머리털이니, 몸은 비록 골백번 으깨지더라도 이 머리털이 남아 있는 이상 보잘것없는 이 머리카락 하나로도 옥사의 전체를 단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심하는 자리에서 형적만을 가지고 따져, 죽게 된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고 상대에게는 그저 위협과 핍박을 한 죄율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로써 판결을 끝낸다면 어찌 죽은 자의 울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줄 수 있겠습니까. 정상을 참작하고 행동을 헤아려 보면 위협과 핍박을 했다는 죄율은 마침내 너무도 경한 편이니, 중한 편을 따라 논하여 강간미수의 죄율로 처벌하는 것이 아마도 적절할 듯합니다.

 

 

두 편의 글 모두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으며 문장을 지은 것이 시원스럽고 유창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밀양(密陽)의 의옥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

 

 

밀양부(密陽府)의 통인(通引) 윤양준(尹良俊)이 중 돈수(頓守)를 치사한 사건에 대하여 초검 및 복검이 모두 매를 맞은 것으로 실인을 삼았는데, 이 옥사는 시친(屍親)의 고발이 없는 이상, 법리로 따져 보면 관에서 지레 검시한 것은 벌써 옥사의 체통에 어긋난 것입니다. 다만 절의 중이 유리(由吏)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두서없이 돈수의 일을 언급했는데 거기에,

 

지난번 돈수가 통인청(通引廳)에서 형벌로부터 풀려날 때 절곤(折困)을 당하여 그로 인해 병사했으니 이런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시오.”

라고 했다는 말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 말이 아주 모호하기는 하지만 절곤(折困)’이란 두 글자는 극히 수상합니다. 더구나 그 사단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관속(官屬)에게서 일어난 일이므로, ‘병사했다는 대목은 미처 자상히 살펴보지도 않고 먼저 절곤이란 말에만 마음이 동요했던 것입니다. 뒤이어, 혐의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로 가서 초검을 시행한 것인데, 급기야 본 사건을 규명해 보니 몇 대의 태형(笞刑)으로 위엄을 보인 데 지나지 않았은즉, ‘절곤 두 글자는 저절로 허망한 고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초에 이 절곤이란 말로 인해서 검험을 했던 것이나 끝내 그 말뜻을 알 수 없었으며, 매 맞은 자국밖에 다른 상처나 병환의 증거를 찾아보았으나 늘 실상에 들어맞지 않은 듯하였으며, 끝까지 조사하려고 해도 더 이상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왕좌왕 옥사가 이루어지고 꼭 맺혀 풀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릇 타박상을 입어 목숨을 잃은 경우는 반드시 행흉(行凶)한 기장(器仗 도구)이 있기 마련이니, 행흉한 기장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내면 이 옥사가 당장에 해결될 것입니다. 하관(下官 연암 자신을 가리킴)의 얕은 소견으로는 절곤 두 글자는 바로 결곤(決棍)’의 오기인 듯합니다. 결곤이건 결태(決笞)건 볼기를 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그다지 용처(用處)의 경중을 따질 것이 못 됩니다. ‘()’ ()’로 바꾸어 발음하는 것은 상놈들의 통폐요, ‘()’ ()’으로 잘못 기록한 것은 무식한 소치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보는 자의 선입견이 절납(折拉 부러뜨림) ()’ 자에 놀라고, 곤박(困迫 곤욕을 보임) ()’ 자에 더욱 현혹된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 통인들이 다 같이 했다고 나서자 주범과 종범을 분별하기 어렵게 되니, 마치 힘을 모아 함께 두들겨 패서 낭자하게 상처를 입힌 일이 있는 것처럼 되었으며, 뭇 중놈들이 일제히 병을 앓았다고 칭하여 증언들이 덩달아 똑같고 보면, 그들이 관속을 두려워하여 숙의한 끝에 입을 맞춘 것이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러기에 전후의 검관들이 감히 그 정상을 경솔히 논하지 못한 것이요, 여러 해를 두고 결말을 못 지은 것도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다만 옥사의 진상을 들어 판단한다면 15대의 태형으로 어찌 목숨을 잃을 리가 있으며, 더욱이 두서너 곳의 상처도 급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개 각 고을의 통인들이 종이 자르는 판자를 장척(長尺)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그놈들 두목이 항용 쓰는 볼기 치는 막대인즉, 통인들이 이것으로써 벌을 시행하는데 더러는 속여서 ()’라고도 합니다. 중들이 이 장척을 잘못 보고서 혹시 ()’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는 것이니, 상식적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검관이 된 사람들은 마땅히 먼저 그 절곤이 무슨 말인가를 신문해야 할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결곤의 오기였다면, 또한 마땅히 그것이 과연 곤장(棍杖)이었는지 태장(笞杖)이었는지를 자상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아니고 라 말한다면, 또한 마땅히 그 크기가 어떤 종류인가를 자상히 분별하여, 매를 맞은 자국과 대조해 본다면 판자에 맞은 흔적인지 태를 맞은 흔적인지를 그 자리에서 저절로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태형의 여부와 병환의 진위(眞僞)도 따라서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진술들을 참조하고 검증해 보면, ‘조갈증이 나서 물을 찾다가 계단에서 떨어져 돌에 부딪쳤다느니 방을 되게 달구어 땀을 내느라 이렇게 짓무르게 되었다느니 하였는데, 열병으로 미친 증상이 생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달군 구들에 살이 데어 부풀어 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이 실인으로 단지 매 맞은 것만을 장부에 기록한다면 옥사의 체통이 서지 못할 것이며, 원범을 유독 수번(首番)에게만 뒤집어씌운다면 더욱 원통한 죄가 될 것입니다. 재량하소서.

 

 

진상을 깊이 파고들었다.

 

[C-001]밀양(密陽) …… 답함 :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이전(吏典) 어중조(馭衆條)에 이 편지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그에 의하면, 지통통인(紙筒通引)이 절에서 매달 만들어 바치는 지물(紙物)을 퇴짜 놓는 것으로 위세를 부리니 불가불 단속해야 한다면서, 산청현(山淸縣)의 수통인(首通引)이 지장(紙匠) 승려를 곤장 쳐 죽였으나 검안(檢案) 결곤(決棍)’ 절곤(折困)’으로 잘못 기록되는 바람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옥사를 연암이 마침내 해결했다고 하였다.

[D-001]유리(由吏) : 수령의 해유(解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아전, 즉 지방 고을의 이방 아전을 이른다.

[D-002]결곤이건 결태(決笞) : 조선 시대의 형()에는 죄의 경중과 형구(刑具)에 따라 태형(笞刑), 장형(杖刑), 곤형(棍刑)의 세 종류가 있었다. 결곤은 가장 가혹한 곤형을 가하는 것이고 결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태형을 가하는 것이다.

[D-003]() …… 소치입니다 : 원문은 折決易音 常漢之通患 困棍誤書 無識之所致인데,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馭衆條)에 인용된 구절은 決折通音 常漢之依例 棍困誤讀 無識之所致로 되어 있다.

[D-004]수번(首番) : 목민심서 이전 어중조의 내용으로 미루어, 통인의 우두머리인 수통인(首通引)을 가리키는 듯하다. 통인의 임무 중의 하나는 당직을 서는 수번(守番)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賑政)에 대해 단성 현감(丹城縣監) 이후(李侯)에게 답함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봄날이 쌀쌀한데 정무에 분망하신 몸이 더욱 안중(安重)하시다니 우러르고 그리던 마음이 매우 흐뭇합니다.

그런데 보내 주신 편지에,

 

()라 예라 이르지만, 기민(飢民) 구제를 이른 것이겠는가?”

라는 대문이 있으니, 말이 어긋날 뿐더러 생각지 못함이 어찌 그리도 심합니까! 지난번에 갈 길이 바빠서 긴 이야기는 못 하고, 다만 예()를 진정에도 적용할 만하다고 말했지요. 말이 비록 두서를 갖추지 못했지만 스스로 짐작이 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을 뿐더러 갑자기 한꺼번에 끄집어내었으니 그대는 본래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갑자기 해괴하게 듣고는 도리어 그 말을 구실로 삼아 나를 오활하고 괴벽스러워 실정과는 거리가 멀다고 비웃었습니다. 오활한 점이 진실로 나에게 있으니 마음에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약 기민 구제가 예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이르신다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 군자가 정치를 하면 어디에 가도 예 아닌 것이 없는데, 하물며 진정은 국가를 다스리는 큰 정사요 많은 목숨이 매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비록 운한(雲漢)’을 상고해도 관련 예의를 상고할 길 없고, 향음주례(鄕飮酒禮)가 화락한 데 비해 비참한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먹이는 것을 ()’라 하고 노인에게 잔치 베푸는 것을 ()’이라 하여 모두가 의식(儀式)이 있으니, 백성이 주리다 못해 달려들면 그 빈궁을 구해 주는 것을 진휼(賑恤)이라 하는데 유독 여기에만 규칙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온 고을 백성들을 모아 놓고서 먹이기로 하면 와 같고, ‘이라는 점에서는 잔치와도 같은데, 남녀가 섞여 앉고 어른 아이가 자리를 다투니 어찌 이렇게 분별이 없고 질서가 없습니까?

지난번에 이러고저러고 말한 것은 주린 백성에게 읍양(揖讓)을 행하자는 말도 아니요, 진휼하는 마당에서 여수(旅酬)를 본받자는 것도 아닙니다. 쪽박으로 조두(俎豆 제기(祭器))를 익히자는 말도 아니요,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사하(肆夏)에 맞추어 걸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누더기 옷을 입은 사람에게 섭자(攝齊)를 힘쓰라는 것도 아니요, 부황 난 사람에게 유철(流歠)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대개 예의란 일이 생기기 전에 방지하자는 것이요, 법률이란 일이 생긴 뒤에 금하자는 것인데, 저 기민들이 얼굴빛은 부어터지고 의복은 남루하며 바른손에는 쪽박을 들고 왼손에는 전대를 들고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모양으로 허리 굽혀 관정(官庭)에 나아오고 있으니, 그들이 아무리 불법적인 행동을 한다 해도 누가 능히 금지하겠습니까.

지난번 진주(晉州)를 가는 길에 귀하의 고을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진휼하는 날이라 수천 수백 명의 주린 백성들이 문 부근에 모여들었는데, 관아의 문은 안으로 닫히고 문지기 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말을 세우고 한참 동안 기다렸으나 통과할 길이 없었습니다. 뭇 사내 뭇 계집들은 늙은이를 부축하거나 어린애를 이끌고, 혹은 관문을 두들기며 크게 외치기도 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대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 외모를 보면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하고 숨넘어가는 형상이었으나 그 뜻을 살피면 모두 다 제멋대로 하게 내버려 둠을 믿고 당당한 기세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 하찮은 교졸(校卒)이 와서 뭇 백성에게 타이르기를, “새벽부터 죽을 끓이는데 솥은 크고 쌀은 많고 하여 무르익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우선 잠깐만 기다려 주면 곧 불러들이겠다.”고 하자, 군중이 성을 내며 일제히 일어나 떼로 덤벼들어 그 교졸을 두드려 대어 옷을 찢고 갓을 부수고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수염을 뽑는 등 못 하는 짓이 없었으며, 한 사람은 갑자기 제가 제 코를 쳐서 피를 내어 낯에 바르고 큰소리로 사람 죽인다!” 외치니 뭇 백성들이 모두 함께 외치기를, “아전이 주린 백성을 친다!” 했습니다.

저들이 비록 사정이 급하여 진휼을 받자고 문 열기를 재촉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나, 그 야료 꾸미는 것을 보면 이만저만 놀랍고 두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후에 손님 연암을 가리킴을 맞기 위해 문이 드디어 열리자 군중들이 뒤죽박죽으로 한꺼번에 관정에 밀어닥쳤으며, 이어서 음식을 제공하니 그 시끄러움은 저절로 사라졌습니다.

이날 광경은 문밖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대는 듣도 보도 못 했을 것입니다. 피차 인사를 차린 뒤에, 그대가 먼저 아까 문을 닫은 이유에 대해,

 

백성들 사는 곳이 각각 멀고 가까움이 있으므로 여기 오는 것도 선후가 있어서, 먼저 온 자는 부엌을 에워싸고 불을 쪼이며 끓이는 죽이 절반도 안 익어서 뭇 쪽박으로 지레 휘저어 대니 온 솥이 무너질 지경이므로, 부득불 문을 잠그고 백성을 못 들어오게 하여 일제히 모이기를 기다린 것이지 감히 손님을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라고 말하여, 마침내 주인과 손님이 서로 한바탕 웃었지요. 그런데 아까 목도한 광경을 거론하지 않았던 것은, 비단 이야기가 장황한 데다 좌중에 진정을 감찰하는 감영(監營)의 비장(裨將)이 있어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까지 번거롭게 알릴 필요가 없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굶주린 백성은 비유컨대 오랜 병에 시달린 아이와 같아서,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리면 그 부모된 자는 아무쪼록 잘 타일러서 그 뜻을 순순히 받아 줄 따름이지, 어찌 그때마다 꾸짖고 나무라기를 평소와 같이 할 수야 있겠느냐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정령(政令)으로써 이끌고 형법으로써 단속하면 백성은 죄를 면하기는 하나 염치가 없어지고, 도덕으로써 이끌고 예의로써 단속하면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률로 백성을 이기기보다 차라리 예의로 굴복시키는 것이 낫다 하겠으니, 왜 그렇겠습니까? 법률로 강요하자면 형벌과 위엄이 뒤를 따르게 되고, 예의를 사용하게 되면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앞을 서게 됩니다. 백성 중에 만약 위엄과 형벌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내가 법률을 무서워하는 자에게는 이길 수가 있지만 무서워하지 않는 자에겐 도리어 지게 되는 것인데, 더더구나 주림을 빙자하고서 마구 대드는 자에게 있어서이겠습니까?

무릇 인지상정으로 부끄러이 여기는 것은 가난과 굶주림보다 더함이 없고 잠시 동안은 한 사발 국물에도 염치를 차리는 법입니다. 이래서 내가 그들의 고유한 본성을 따라서, 그들을 위해 혐의를 사지 않게 남녀를 가르고 어른 아이의 순서에 따라 줄을 만들고 사족(士族)과 서민의 명분을 구별하여, 질서 정연하게 서로 넘어서지 못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있는 힘을 다해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지만 그것이 제 본심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무섭게 하는 것은 부끄럽게 만드는 것만 못하고, 억눌러 이기는 것은 순순히 굴복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른바 죄는 면하되 염치가 없어진다는 것은 이김을 두고 이름이요, ‘염치도 가지려니와 바르게 된다는 것은 굴복시킴을 두고 이름입니다.

지금 영남은 온 도가 불행히도 대흉년을 만나서 대대적인 진휼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고을 수령된 자는 힘을 다해 곡식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기민을 가려 뽑는 마당에, 어느 누가 감히 백성을 어린아이 돌보듯이 하는 조정의 성대한 마음을 본받고 우리 임금의 근심 걱정하시는 마음의 만의 하나나마 보답하려 아니 하오리까! 더더구나 잘잘못을 가려 승진시키고 벌주는 일이 이 한 번의 거행에 달렸으니, 두려워하고 삼가고 경계하고 독려하다 보면, 명예를 구하는 겉치레로 돌아가기도 쉽고, 위로하고 구호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도리어 감사할 줄 모른다는 한탄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뒷날에 계속하기 어려움을 생각지도 아니하고, 공이 되든 죄가 되든 대부분 목전의 미봉책만 힘씁니다. 준비한 곡물도 많고 구제한 민중도 많으며 모든 진정에서 잘못한 고을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두려운 것은 진정을 철회한 뒤입니다. 겨우 연명해 가던 남은 목숨을 무슨 수로 구제하며, 은혜만 바라고 사는 안이한 풍속을 장차 무슨 법률로 억누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말한 예의란 것은 통상적인 진휼 방식을 버리고 별도로 다른 법식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불쌍히 여기고 어루만져 주는 속에서도 대체(大體)를 보존하기에 힘쓰고, 나눠 주고 먹여 주기 전에 먼저 그 염치부터 길러서, 반드시 남녀는 자리를 구분하고 어른 아이는 자리를 따로 하고 사족은 앞에 앉히고 서민은 그 아래에 자리 잡게 하여 각각 제자리를 찾고 서로 차례를 어지럽히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 되면 죽을 나눠 줄 때 남자는 왼편으로 여자는 바른편으로 되어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질서 정연할 것이며, 늙은이는 앞서고 젊은이는 뒤로 서서 요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양하게 될 것이며, 곡식을 나눠 줄 때에 앞에 있는 자가 먼저 받는다 해서 시새우지 않으며 아래에 있는 자가 차례를 기다려도 다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말한 저 예의란 것이요 기민 구제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선생이 평소에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의 글을 몹시 즐기셨는데, 지금 이 글을 읽어 보니 특히 자양(紫陽 주자(朱子))의 글과도 닮았다. 자양 부자(紫陽夫子)도 역시 선공(宣公)의 글을 좋아하셨던가?

 

[C-001]진정(賑政) …… 답함 : 진정은 흉년을 만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사(政事)를 말한다. 단성은 안의현 이웃에 있던 고을로 현재는 산청군에 속한 면이다.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이후(李侯)’ 다음에 영조(榮祚)’라 하여 단성 현감의 이름을 밝혀 놓았다.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1793(정조 17) 봄에 연암은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정을 베풀 때 예법에 맞추어 질서를 유지했으며, 그 뒤에 이웃 고을 수령과 진정을 논한 장문의 편지가 문집에 실려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또한 이 편지를 읽은 사람들은 진정을 논한 주자(朱子)의 글과 같은 법도가 있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D-001]() …… 것이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예라 예라 이르지만, 옥백(玉帛)을 이른 것이겠는가?禮云禮云 玉帛云乎哉라고 한 말을 흉내낸 것이다. 공자의 말은 형식적으로 예물만 갖추고 진정한 예가 결여된 경우를 비판한 것이었는데, 단성 현감은 기민 구제의 경우에는 구태여 예를 갖출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였다.

[D-002]비웃었습니다 :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그다음에 그 형세가 실로 그러하고란 뜻의 其勢固然’ 4자가 더 있다.

[D-003]운한(雲漢) : 시경 대아(大雅) 운한을 가리킨다. 이 시는 주() 나라 때 큰 가뭄을 만나 하늘에 기우제를 올리며 불렀던 노래라 한다.

[D-004]향음주례(鄕飮酒禮) …… 있습니다 : 원문은 視諸鄕飮 而舒慘有間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舒慘 舒疾로 되어 있다. 그러면 향음주례가 여유 있는 데 비해 서두르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D-005]먹이기로 …… 같은데 : 원문은 以饋則似犒 以養則同讌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以犒則似 以養則同으로, 하풍죽로당집에는 以犒則似師 以養則同燕으로 되어 있다.

[D-006]읍양(揖讓) : 향음주례에서 주인과 손님이 상견례를 할 때,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는 읍()을 세 번하고 계단에 먼저 오르기를 세 번 양보하는 예법을 말한다.

[D-007]여수(旅酬) : 향음주례에서 헌작(獻爵)의 예식이 끝난 다음에 손님들이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돌아가며 술잔을 받는 것을 말한다.

[D-008]사하(肆夏) : () 나라 때의 궁중음악인 구하(九夏) 중의 한 곡으로, 사자(死者) 대신 제사를 받는 시()가 묘문(廟門)에 들어설 때와 나갈 때 이를 연주했다고 한다. 周禮 春官 大司樂 또한 예기 옥조(玉藻)에 옛날의 군자는 채제(采齊)의 곡에 맞추어 달려가고 사하(肆夏)의 곡에 맞추어 걸었다.趨以采齊 行以肆夏고 하였다.

[D-009]섭자(攝齊) : ()에 오를 때 옷자락을 끌어당김으로써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함과 동시에 공경의 뜻을 표하는 예법을 말한다.

[D-010]유철(流歠)하지 말라 : 예기 곡례(曲禮)에 기록된 식사 예법의 하나로, 염치없어 보이므로 죽이나 국물을 단번에 후루룩 들이켜지 말라는 뜻이다.

[D-011]정령(政令)으로써 …… 된다 : 논어 위정(爲政)에 나온다.

[D-012]잠시 …… 법입니다 : 원문은 斯須之廉 在於豆羹이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 평상시는 형을 공경하되 잠시 동안은 향리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庸敬在兄 斯須之敬 在鄕人라고 하였고,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을 얻으면 살고 못 얻으면 죽을지라도, 야단치면서 주면 길 가던 사람도 받지 않으며 발로 차서 주면 거지도 더럽다고 여긴다.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하였다.

[D-013]그들을 위해 : 원문은 爲之인데, 하풍죽로당집, 운산만첩당집 등에는 與之로 되어 있다.

[D-014]공진(公賑)이든 사진(私賑)이든 : 원문은 公私之間인데, 공진은 공곡(公穀 : 관곡)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고 사진은 수령이 자신의 봉급을 털어 기민을 구제하는 것이다.

[D-015]대체(大體) : 맹자 고자 상(告子上) 몸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이 있고 중대한 부분과 사소한 부분이 있다. 사소한 부분으로써 중대한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지니, 사소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소인이 되고 중대한 부분을 기르는 자는 대인이 된다.”고 하였고, “대체(大體)를 따르는 자는 대인이 되고 소체(小體)를 따르는 자는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집주(集註)에 몸에서 천하고 사소한 부분은 입과 배요, 귀하고 중대한 부분은 마음과 뜻이라 하였다. 대체는 천부적인 도덕심, 소체는 눈과 귀 등의 감각기관을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진정에 대해 대구 판관(大邱判官) 이후(李侯) 단형(端亨) 에게 답함

 

 

지붕에서 비둘기가 울어 비가 내렸다 날이 갰다 하니, 완연히 꽃이 피도록 재촉하는 날씨로구려. 먼 곳의 아지랑이는 눈에 가물거리고 관아 연못의 푸른 물엔 그림자 잠겼는데, 송사(訟事)하는 사람 자취 없고 동헌 뜰에 아전들도 다 물러가서 오늘에야 잠시 한가한 시간을 우연히 얻으니, 비로소 한 돌 만에 태수(太守)의 즐거움을 짐작하겠소. 뒷짐을 지고 난간을 돌면서 딴 사람 아닌 바로 그대를 향해 그리운 생각을 시로 읊었는데 때마침 그대의 편지가 내 앞에 홀연 떨어지니, ‘서로 그리워하는 정이 마음으로 통하매 산천도 그 사이를 떼어 놓진 못한다고 이를 만하외다.

영남 전도(全道) 일흔두 개 고을이 불행히 흉년을 만나서 모두 대대적인 진휼을 시행하고 있으니, 오늘날 목민(牧民)의 관리가 된 자는 기민(飢民)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가려 뽑기를 생각하고 구휼할 양식에 대해서는 널리 모으기에 힘을 쏟자니, 근심은 쌓이고 심신은 고달파서 어찌 억척스레 고생하고 초췌하지 않을 수 있겠소? 더구나 대구는 감영이 있는 업무 많은 고을이라 눈앞에 넘쳐나는 어려움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 되지 않소. 매양 한 도내 수령들의 편지를 받아 보면, 근심과 번뇌가 너무 지나쳐서 이맛살을 찌푸리는 빛이 지면(紙面)까지 드러나고 신음하는 소리가 붓끝에 끊어지지 아니하므로, 편지를 보고 나서는 미상불 그들을 대신하여 마음이 편안치 못했소. 그런데 그대 같은 낙천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도 자기도 모르게 역시 이런 태도를 지을 줄은 몰랐으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소?

허허! 우리나라의 인재 등용하는 길은 너무도 좁아서 과거(科擧)를 거치지 아니하면 아무리 학식이 천리(天理)와 인사(人事)를 꿰뚫어 알고,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비했다손 치더라도 진실로 출세할 길이 없소. 지금 조정에서 활개를 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해 대책을 세우고, 정치와 교화에 참여하고 협찬(協贊)한다는 사람치고 대과(大科)에 급제하지 않고 진출한 자가 누가 있단 말이오? 그다음은 소과(小科)에 급제한 뒤에라야 비로소 음관(蔭官)으로 보직되어 겨우 벼슬아치 명부에 이름이 오르게 되나, 낭서(郞署) 사이를 헤어나지 못하고 그저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수령으로 나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읍황(邑況)의 후박(厚薄)을 계산하고 토산물의 유무나 묻게 되니, 그 스스로 처신하는 것이 하천배나 다름이 없다오. 비록 명색이야 백성을 다스린다 하지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으며 그저 명을 받들어 행하기에만 분주하여, 인사고과(人事考課)할 때 꼴찌가 될까 두려워할 뿐이고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통 따위는 마음 쓸 겨를이 없지요. 그럴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그 병폐를 바로잡고자 해도 일이 자기 손을 거치지 않으니 형세상 어쩔 도리가 없지요.

그러므로 능란한 사람은 장부 처리나 조심하고 창고 관리나 엄중히 하여 죄나 안 지으면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니, 그 평생의 포부를 한번 펴 볼 기회란 유독 기민을 구휼하는 한 가지 일뿐일 것이오. 나나 그대가 크게는 대과 급제를 못 했을 뿐더러, 작게는 또한 진사(進士)가 되지 못했으니, 둘다 따분한 백도(白徒)요 여항(閭巷)의 미천한 신세라 실없는 얘기나 하고 날을 보내는데, 제 딴에는 그래도 유생 차림으로 거들대지만 그것은 남루해진 지 이미 오래며, 임시변통으로 양반이라 칭하지만 외람된 짓이라 부끄러울 뿐이지요. 머리는 허옇고 얼굴은 누렇게 뜬 채 당세에 대한 희망을 끊었더니, 늙마에 일명(一命)으로 잇달아 동료가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오! 비록 옛사람의 강사(强仕)의 나이는 넘었다 할지라도 그 직책에서 소임을 다하기로 할진댄 아직도 남은 날들이 있소이다. 오륙 년이 다 못 가서 그대는 이미 중요한 고을을 두 번째나 맡게 되었고 나 역시 현감 한 자리를 얻었으니, 이런 대흉년을 만나서 백성을 구제하고 은혜를 베풀려던 포부를 펼 기회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소? 정사에 마땅히 전력을 다하여 씀바귀도 냉이처럼 달게 여겨야 할 텐데, 어쩌자고 신세를 한탄하고 딱한 꼴을 스스로 짓는단 말이오?

내 신세를 돌이켜 보건대 오십 년 동안 겨우 끼니를 때우고 쌀독도 자주 비어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주제에, 임금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 갑자기 부자 영감이 되어, 뜰에는 수십 개의 가마솥을 벌여 놓고 1400여 명의 못 먹어 부황 들어 쓰러져 가는 동포들을 불러다가 한 달에 세 번씩 먹이는 즐거움을 실컷 누리니, 즐거움치고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또 어디 있겠소?

저 장공예(張公藝)가 구세동거(九世同居)할 때에 애써서 참았다는 것이 무슨 일이었겠소? 공자는 이것을 참을진댄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 하였고, 맹자는 사람이란 다 저마다 남에 대해 차마 못 하는 마음이 있다.”하였소. 성인도 참을 수 없는 일에 대해 참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참을 인()이라는 글자를 한 번만 써도 오히려 심하거늘 그 글자를 백 번이나 썼단 말이오? 그 백 번을 참을 때에 골머리가 아프고 이맛살이 찌푸려져서 온 얼굴에 주름살이 가로세로 곤두서고 모로 잡혔을 테니, 양미간(兩眉間)에는 내 천() 자요, 이마 위에는 북방 임() 자가 그려졌을 것이 뻔한 일이오. 눈으로 보고도 참으면 장님이 되고, 귀로 듣고도 참으면 귀머거리가 되고, 입으로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면 벙어리가 되는 셈이지요. 어질지 못한 일이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싹을 잘라 버리자면 마음 심() 위에 칼날 인() 자 하나면 족하거늘, 무엇 때문에 이 글자를 백 번이나 거푸 썼단 말이오?

이제 나는 즐거울 락() 한 자를 쓰니 무수한 웃음 소() 자가 뒤따릅디다. 이것을 미루어 나갈 것 같으면, 백세(百世)라도 동거(同居)할 수 있을 것이오. 이 편지를 개봉해 보는 날에 그대도 반드시 입 안에 머금은 밥알을 내뿜을 정도로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니, 나를 소소선생(笑笑先生)이라 불러 준대도 역시 마다하지 않겠소.

 

 

[C-001]진정에 …… 답함 : 판관(判官)은 감사(監司)를 보좌하는 종 5 품 벼슬이다. 경상 감영은 대구에 판관 1인을 두었다. 이단형은 자가 사장(士長)으로, 음보(蔭補)로 출사하여지방관을 전전하였다. 그는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의 이종 사촌으로 반남 박씨가의 인척이 되었으므로, 합천 화양동의 야천(冶川) 박소(朴紹)의 묘소를 정비하는 데 성금을 보태기도 했다. 이 편지는 1793년에 지은 글로 과정록 2에 관련 사실과 내용 일부가 언급되어 있다. 燕巖集 卷1 陜川華陽洞丙舍記》 《近齋集 卷13 答外弟李士長端亨

[D-001]지붕에서 …… 하니 : 염주비둘기斑鳩가 울면 비가 내린다고 하여 이를 환우구(喚雨鳩)라고도 부른다. 또한 우기(雨期)를 구우(鳩雨)라고도 한다.

[D-002]태수(太守)의 즐거움 : 구양수(歐陽修)의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여민동락(與民同樂)하는 태수의 즐거움을 서술하였다.

[D-003]낭서(郞署) : 조선 시대에 육조(六曹)의 정랑(正郞 :  5 ) · 좌랑(佐郞 :  6 ), 기타 실무를 담당하는 6품 관원을 이르던 말이다.

[D-004]읍황(邑況) : 읍징(邑徵) 또는 관황(官況)이라고도 한다. 고을의 각종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牧民心書 戶典 稅法下》 《壬戌錄 査逋狀啓》 《瓛齋集 卷9 與溫卿

[D-005]백도(白徒) : 벼슬하지 못한 유생(儒生) 즉 유학(幼學)을 말한다.

[D-006]임시변통으로 …… 뿐이지요 : 원래 양반이란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즉 문관과 무관을 가리키는 말이다. 운산만첩당집, 백척오동각집, 하풍죽로당집 등에는 兩班 生員으로 되어 있다.

[D-007]일명(一命) : 처음에 최하위 관등(官等)을 하사받고 정식 관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D-008]강사(强仕) : 40세의 별칭으로 예기 곡례 상(曲禮上), “나이 40을 강()이라 하며 벼슬에 나아간다.四十曰强而仕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D-009]씀바귀도 …… 텐데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구나.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버림받은 자신의 고통이 씀바귀보다 더 쓰다는 뜻인데, 이 편지에서는 어떤 고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D-010]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던 : 원문은 不閱我躬인데, 시경 패풍 곡풍에 내 몸도 주체하지 못하는데 나의 후생 자손들을 걱정할 겨를이 있으랴.我躬不閱 遑恤我後라고 하였다.

[D-011]장공예(張公藝) ……  : 장공예는 9대가 함께 동거하여 북제(北齊), (), () 등 세 왕조에서 그 집에 정표(旌表)를 내렸다. 당 고종(唐高宗)이 그 집에 행차하여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가 참을 인()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더니, 고종이 훌륭히 여겨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小學 卷6 善行

[D-012]이것을 …… 참으랴 :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계씨(季氏)에 대해 팔일무를 뜰에서 추게 하니 이것을 참을진댄 어느 것인들 못 참으랴?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라고 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13]사람이란 …… 있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남에 대해 참지 못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여 주는 예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생긴다고 하였다.

[D-014]소소선생(笑笑先生) : 소소(笑笑)는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는 뜻이다. () 나라의 저명한 서화가 문동(文同)의 호()가 소소선생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남 직각(南直閣) 공철(公轍) 에게 답함

 

 

금년(1793) 정월 16일에 형이 지난 섣달 28일 띄운 서한을 받고서 비로소 형이 내각(內閣 규장각)에 재직하고 있음을 알았으며, 바삐 서한을 펴 보고 또한 평안히 계심을 알았소이다. 그런데 반도 못 읽어서 혼비백산하여 두 손으로 서한을 떠받들고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렸소.

대개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임금의 명령을 받든 것이라,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두렵더니 뒤따라 눈물이 마구 쏟아졌소. 진실로 위대한 천지는 만물을 기르지 않음이 없고, 광명한 일월은 미물이라도 비추지 않음이 없음을 알게 되었소. 그러나 글방의 버려진 책이 위로 티끌 하나 없이 맑은 대궐을 더럽힐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이곳은 천 리나 동떨어진 하읍(下邑)이지만 임금의 위엄은 지척(咫尺)이나 다름이 없고, 이 몸은 제멋대로 구는 일개 천신(賤臣)이건만 임금의 말씀은 측근의 신하를 대할 때나 차이가 없으며, 엄한 스승으로서 임하시고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가르치시어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킨 죄로 처형을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편의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속죄하도록 명하셨으니, 서캐나 이 같은 미천한 신하가 어이하여 군부(君父)께 이런 은애(恩愛)를 입는단 말이오.

! 명색이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자가 몸소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이 교화를 펴는 시대를 만나고도,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이 화목하고 평온한 음향을 발하고, 서경(書經) · 시경(詩經)과 같은 저작을 본받아 임금의 정책(政策)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선비의 수치입니다. 더구나 나 같은 자는 중년(中年) 이래로 불우하게 지내다 보니 자중하지 아니하고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때때로 곤궁한 시름과 따분한 심정을 드러냈으니 모두 조잡하고 실없는 말이요, 스스로 배우와 같이 굴면서 남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했으니 진실로 이미 천박하고 누추하였소이다.

게다가 본성마저 게으르고 산만해서 수습하고 단속할 줄 몰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로(畵蘆) · 조충(雕蟲) 따위의 잔재주가 이미 자신을 그르치고 또한 남까지 그르쳤으며, 부부(覆瓿) · 호롱(糊籠)에나 알맞은 글로 하여금 혹은 잘못된 내용이 전파됨에 따라 더욱 잘못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차츰차츰 패관소품(稗官小品)으로 빠져 든 것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위항(委巷)에서 흠모를 받게 된 것도 그러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문풍(文風)이 이로 말미암아 진작되지 못하고 선비의 풍습이 이로 말미암아 날로 퇴폐하여진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교화를 해치는 재앙스러운 백성이요 문단의 폐물이라, 현명한 군주가 통치하는 시대에 형벌을 면함만도 다행이라 하겠지요.

제 자신은 웅대하고 전중한 문체를 거역하면서 후생들이 고문(古文)의 법도를 계승하려 하지 않음을 탄식하고, 벌레 울고 새 지저귀는 소리나 좋아하면서 옛사람들은 듣지도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이로 말하자면 나나 그대나 마찬가지로 죄가 있다 하겠소. 지금에 와서는 도깨비가 요술을 못 부리고 상곡(桑穀)의 재앙이 저절로 소멸되게 되었으니, 그 본심을 따져 보건대 비록 잔재주에 놀아난 결과이기는 하지만 이는 진실로 무슨 심보였던가요? 스스로 종아리를 치며 단단히 기억을 해야겠소.

허물을 용서하고 죄를 용서하시니 임금의 덕화(德化)에 함께 포용되었음을 확실히 알았으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청아(菁莪)에 거의 자포자기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나나 그대나 죽도록 같이 힘쓸 바요. 어찌 감히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뒤늦게나마 만회할 것을 급히 도모하여 다시는 성세(聖世)의 죄인이 되지 않도록 하지 않으리오

 

() 원서(原書)

 

 

서울에는 한 자가 넘게 눈이 내려 가죽옷을 껴입지 않고는 외출을 못할 지경인데, 남쪽 소식은 어떤지 몰라 애달프게 그리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요즘 정사(政事)에 수고로운 몸 안녕하신지요? 영남(嶺南)은 가뭄의 피해가 이루 다 볼 수 없을 지경인데, 귀하의 고을은 세금 독촉이며 기민 구제 사업으로 정신이 괴롭지나 않으신지 이것저것 삼가 염려되옵니다. 기하생(記下生)은 어지러운 진세(塵世)와 어수선한 몽상 속에서 예전의 저 그대로입니다.

지난번에 문체(文體)가 명() · ()을 배웠다 하여 임금님의 꾸지람을 크게 받았고 치교(穉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함추(緘推)를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또 내각(內閣)으로부터 무거운 쪽으로 처벌을 받아 죗값으로 돈을 바쳤습니다. 그 돈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하여 내각에서 북청 부사(北靑府使)로 부임하는 성사집(成士執)의 송별연을 벌였는데, 대개 사집(士執)은 문체가 순수하고 바르기 때문에 이런 어명이 내렸던 것입니다. 낙서(洛瑞) 영공(令公)과 여러 검서(檢書)가 다 이 모임에 참여하였으니, 문원(文苑)의 성사(盛事)요 난파(鑾坡)의 미담이라,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워서 이에 아뢰는 바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서 천신(賤臣 남공철)에게 하교하시기를,

요즈음 문풍(文風)이 이와 같이 된 것은 그 근본을 따져 보면 모두 박 아무개의 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내 이미 익히 보았으니 어찌 감히 속이고 숨길 수 있겠느냐? 이자는 바로 법망에서 빠져나간 거물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유행한 뒤에 문체가 이와 같이 되었으니 당연히 결자해지(結者解之)하게 해야 한다.”

하시고, 천신에게 이런 뜻으로 집사(執事)에게 편지를 쓰도록 명령하시면서,

신속히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을 지어 급히 올려 보냄으로써 열하일기의 죗값을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비록 남행(南行) 문임(文任)이라도 주기를 어찌 아까워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중죄가 내릴 것이다.”

하시며, 이로써 곧 편지를 보내라는 일로 하교하셨습니다.

이런 임금의 말씀을 들으면 필시 영광으로 여기는 마음과 송구한 마음이 한꺼번에 뒤섞일 줄 상상되오나, 다만 이 순수하고 바른 글 한 편은 진실로 졸지에 지어 내기는 어려울 터이니, 어떻게 하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실로 유교를 돈독히 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선비들의 취향을 바로잡으시려는 우리 성상의 고심과 지덕(至德)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감히 그 만에 하나나마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집사는 허물을 자책하고 속죄해야 하는 도리상 더욱이 잠시라도 늦추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처지이나, 그 제목을 정하기가 딱하게도 쉽지 않으니,  · 청의 학술을 배척하는 한두 권 글을 지어서 올려 보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영남(嶺南) 산수기(山水記) 한두 권이나 혹은 서너 권을 순수하고 바르게 지어 냄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든 저렇게든 막론하고 두어 달 안에 올려 보내심이 어떨는지요? 편지를 보낸 것은 이 때문이며, 이만 줄입니다.

 

[C-001]남 직각(南直閣)에게 답함 : 남공철(南公轍 : 1760~1840)은 본관이 의령(宜寧)으로, 세손(世孫) 시절 정조(正祖)의 사부였으며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의 아들이다. 1792년 전시(殿試) 급제 후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선발되고 규장각 직각,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는 등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순조 때 더욱 현달하여 대제학,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금릉집(金陵集) 등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연암을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교분이 있었다. 직각은 규장각(奎章閣)의 관직으로 정원은 1명인데 홍문관에 속한 정 3 품에서 종 6 품 사이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이 편지는 남공철의 편지와 함께 과정록 2에도 일부 소개되어 있다.

[D-001]글방의 버려진 책 : 원문은 兎園之遺冊이다. 원래 글방에서 아동들에게 가르치던 교재 따위를 토원책(兎園冊)이라 하는데, 자신의 저술을 겸손하게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여기서는 연암이 자신의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가리켜 한 말이다.

[D-002]위로 ……  : 원문은 上汚龍墀之淸塵也인데 운산만첩당집에는 上汚 誤玷으로 되어 있다.

[D-003]임금의 …… 처형을 : 원문은 以兩觀熒惑之誅인데, 양관(兩觀)은 원래 궁궐 정문의 좌우에 있는 망루(望樓)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궁궐이란 뜻도 가지게 되었다. 공자는 노() 나라의 재상 직무를 대행하게 되자 난신(亂臣)인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노 나라 궁궐의 양관 아래에서 처형했다고 하여 양관지주(兩觀之誅)’란 성어(成語)가 생겼다. 또한 노 나라 임금과 제() 나라 임금이 회합한 자리에서 제 나라 측이 광대와 난쟁이의 유희를 공연하자 공자는 필부로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케 한 죄를 물어 그자들을 처형하도록 했다고 한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D-004]국가의 융성을 드날리지 : 원문은 鳴國家之盛인데, 한유(韓愈)의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맹교(孟郊)와 같은 그의 벗들을 뛰어난 작가라는 뜻의 선명자(善鳴者)’라고 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노래하지 말고 크게 발탁되어 국가의 융성을 노래할 날이 오기를 염원하였다.

[D-005]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아 : 원문은 以文爲戱인데, 궁귀(窮鬼)와의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 같은 작품이 글로써 장난거리를 삼은 글로 비난을 받았다.

[D-006]화로(畵蘆) · 조충(雕蟲) : 화로는 호로(葫蘆 표주박)를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말로 참신함이 없이 단순하게 남을 모방하는 것을 말하며, 조충은 벌레 모양의 글자蟲書를 새기듯이 자구(字句)를 수식하여 글을 짓는 것을 말한다.

[D-007]남까지 그르쳤으며 : 원문은 人誤로 되어 있으나, 과정록과 김택영(金澤榮) 중편연암집 등에는 誤人으로 되어 있다.

[D-008]부부(覆瓿) · 호롱(糊籠) : 부부는 항아리를 덮는다는 뜻이고 호롱은 종이로 농을 바른다는 뜻으로, 항아리 덮개로 삼거나 농이나 바르기에 족한 시원치 않은 글을 가리킨다.

[D-009]패관소품(稗官小品) : () 나라 말 청() 나라 초에 크게 유행했던 패관소설(稗官小說)과 소품산문(小品散文)을 가리킨다.

[D-010]후생들이 …… 탄식하고 : 원문은 嗟小子之不肯構인데, 서경 대고(大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 나라 무왕(武王)이 이룩한 왕업을 계승하는 일을 집 짓는 데 비유하여, 아버지가 집 짓는 법을 확립해 놓았는데도 그 아들이 기꺼이 집터를 닦으려 하지 않으니 하물며 기꺼이 집을 얽어 만들겠는가?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하였다.

[D-011]벌레 …… 소리 : 자질구레한 소재를 다룬 소품산문을 풍자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D-012]나나 …… 하겠소 : 남공철도 패관소품을 즐겨 읽고 그 영향을 받았다. 1792년 음력 10월 그는 초계문신으로서 지어 올린 책문(策文) 중에 패관소품의 문체를 구사했다는 정조의 견책을 받고 지제교(知製敎) 직함을 박탈당했으며, 어명으로 규장각으로부터 죄를 추궁하는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서를 지어 올려야 했다. 正祖實錄 16 10 19 · 24 · 25

[D-013]상곡(桑穀) : 뽕나무와 꾸지나무를 말한다. () 나라 태무(太戊) 때 상과 곡이 조정 뜰에 솟아나 하루 만에 한 아름이나 자랐다. 그것을 본 태무가 두려워서 이척(伊陟)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이척의 말이 요얼(妖蘖)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했는데 임금의 정치에 결함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니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태무가 그 말에 따라 덕을 닦자 상과 곡이 말라 죽었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

[D-014]청아(菁莪) : 시경 소아(小雅)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출처를 둔 말로 인재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정조가 인재를 발탁 · 기용하는 것을 가리킨다. 운산만첩당집에는 膏燭으로 되어 있다.

[D-015]지난날의 …… 것을 : 원문은 黥刖之補인데,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형벌을 받아 훼손된 몸을 온전하게 회복한다는 뜻으로, 개과천선과 같은 말이다. 식경보의(息黥補劓)란 성어가 있다. 또한 원문의 상유지수(桑楡之收)’ 아침에 잃은 물건을 저녁에 되찾는다(失之東隅 收之桑楡)’는 속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처음의 실수를 나중에 만회한다는 뜻이다.

[D-016]어찌 …… 않으리오 : 운산만첩당집에는 그다음에 차츰 순수하고 바르게 되고자 했으나 그래도 맹자에 나오는 풍부(馮婦)처럼 예전 솜씨를 다시 발휘하려는 버릇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 어찌 장자에서 말한 제 그림자를 피하려 하면서 해를 향해 달려가는 자가 아니겠는가?稍欲醇正 而猶不脫攘臂下車習氣 無乃畏影而走日中者耶라는 평어가 있어 글을 감상하는 데 참고가 된다.!

[D-017]기하생(記下生) : ‘기억해 주시는 아랫사람이란 뜻으로, 편지에서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상대방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하는 말이다.

[D-018]치교(穉敎) …… 하였습니다 : 치교는 심상규(沈象奎 : 1766~1838)의 자이다. 함추(緘推)는 함사추고(緘辭推考)의 준말로 6품 이상의 관원이 경미한 죄를 범한 경우 서면(書面)으로 죄를 추궁하고 서면으로 진술을 받는 것을 말한다. 심상규는 정조로부터 그의 이름과 자를 하사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792년 음력 11월 규장각 대교로서 함추를 받아 지어 올린 함답(緘答)이 구두(句讀)가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고 그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주해(註解)를 달아 올리라는 엄명을 받았다. 당시 심상규뿐만 아니라 패관소설을 즐겨 본 전과가 있던 김조순(金祖淳)과 이상황(李相璜)에게도 함추의 처분이 내렸다. 正祖實錄 16 10 24, 11 3 · 8

[D-019]성사집(成士執) : 사집은 성대중(成大中 : 1732~1809)의 자이다. 성대중은 호가 청성(靑城),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정조의 인정을 받아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에 오래 재직했으며 어명으로 문신들이 지어 올린 응제(應製)에서도 자주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 16 12월 정조는 성대중이 공령부체(功令賦體)로 지어 올린 글을 칭찬하면서 서얼 출신임에도 특별히 북청 부사에 임명하고 규장각에서 그의 송별연을 베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承政院日記 正祖 16 12 18》 《硏經齋全集 卷10 先府君行狀 이와 같이 성대중은 정조의 보수적인 문예 정책에 적극 부응하여 출세한 인물로, 연암과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남공철 등과도 교분이 깊었다.

[D-020]낙서(洛瑞) 영공(令公) : 낙서는 이서구(李書九 : 1754~1825)의 자이다. 이서구는 호가 척재(惕齋) · 강산(薑山)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조선 후기 한시(漢詩) 4대가로 불린다. 승지를 영공(令公)이라고도 부른다.

[D-021]검서(檢書) : 서적의 교정과 서사(書寫)를 담당하는 규장각의 5~7 품 벼슬로 주로 서얼 출신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성대중을 위한 규장각의 송별연에는 승지 이서구, 규장각 직각 남공철, 서영보(徐榮輔)와 함께 검서로 이덕무와 유득공이 참여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1 年譜 壬子 12

[D-022]난파(鑾坡)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규장각을 가리킨다.

[D-023]집사(執事) : 편지에서 상대방을 가리킬 때 쓰는 경칭이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다.

[D-024]남행(南行) 문임(文任) : 남행은 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거나 자신의 높은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오르는 벼슬, 즉 음직(蔭職)을 이른다. 문임은 홍문관이나 예문관의 종 2 품 벼슬인 제학(提學)을 이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형(族兄)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새봄에 도()를 닦으시며 조촐하게 보중(保重)하신다는 소식 받잡고 흐뭇함과 동시에 하례를 드립니다. 족제(族弟) 5년 동안 벼슬살이에 지친 가운데 육순이 문득 다가오니, 귀가 순해져야 할 터인데 오히려 점점 막혀 가고 나이는 비록 더해 가나 더욱 쇠퇴해만 갑니다. 사람이 60년을 사는 것도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마는, ()를 들은 것이 거의 없으니 이것이 한탄스럽고 슬픕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축관(祝官)을 썼다.’는 일은 아마도 아뢴 사람이 잘못 말한 것일 터입니다.

제전(祭田)을 되돌려 받은 것이 계축년(1793) 겨울이고, 그 이듬해인 갑인년에 종중(宗中)으로부터 비로소 의논이 정해져서, 본군(本郡 합천군)의 질청(秩廳)에 맡겨 해마다 한식(寒食)에 한 번 묘제(墓祭)를 지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해엔 한식이 이미 지나서 새로 의논하였던 것이 행해지지 않았으니, 호장(戶長)이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말할 거리조차 안 됩니다. 또 다음 해인 을묘년에는 제가 한식날 관아에서 제물을 마련하고 삼가 십여 구의 제문을 지어 몸소 제사를 지냄으로써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을 폈으니, 호장을 쓸데없이 축관으로 덧붙일 까닭이 없었음은 따라서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본군의 공형(公兄)이 비로소 제전을 받으러 왔기 때문에 그와 함께 제전 이름과 면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진설(陳設)의 도식(圖式)을 참작하여 정해 주었으니, 대개 다음 해 한식부터 도식에 의거하여 거행하도록 할 작정이었습니다.

지난해의 다음 해는 바로 금년 병진년(1796)이라 호장의 행사는 의당 금년부터 비롯될 터인데, 한식이 다가오지 않아 제사는 아직 멀었으니, 보내신 편지 가운데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는 것은 과연 누가 보고 누가 전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축관을 쓰는 것이 타당하냐 부당하냐는 고사하고, 3년 동안에 호장이 본시 한 번도 제사를 지낸 적이 없었으니 아무리 축관을 쓰고 싶은들 어디다 썼겠습니까?

사실이 이처럼 판별하기 쉽고 전하는 말이 저토록 근거가 없는데도, 보내신 편지에 널리 예설(禮說)을 인용하여 분명하게 가르침과 꾸지람을 주시고, ‘누가 이런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런 일을 꾸몄는가?’ 하고 힐책을 내리셨습니다. 대저 이치에 통달하고 판별에 밝으신 우리 형님께서도 오히려 이러한 의심을 가지셨다면, 뭇사람들이 듣고 놀라 의심할 때 어느 누가 깨우쳐 주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가슴이 서늘합니다.

무릇 선영을 받드는 일에 관해서는 설사 구구한 한 가지 소견이 있어 예()에 합당하다고 자신할지라도, 오히려 부형이나 일족들이 내가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어렵게 여기고 조심하고 두루 물어서 감히 선뜻 독단하지 못함은 진실로 경우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더더구나 중론이란 통일시키기 어려운 데다가 사람마다 제각기 정성과 공경을 바침이 나와 똑같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함부로 근거 없는 일을 만들어 경솔히 혼자 시행하여 스스로 일족에게 죄를 짓고 식자에게 기롱을 받겠습니까? 사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는 아마 산소 아래 사는 여러 윤씨(尹氏)들이 만들어 낸 말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유독 원망과 노여움을 산 것은 대개 또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애당초 이후(李侯)가 제전을 되돌려 받기로 든 것은 과연 여러 윤씨들이 사실을 알려 줌으로 인해 나온 것인데, 이것을 서울에 있는 여러 박씨들과 멀리서 의논하기는 어렵고 안의와 합천은 거리가 백 리도 못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이후가 전후로 서신을 왕복하여 매양 저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때문에 여러 윤씨들은 마치 제가 이 토지를 주장하여 주고 빼앗는 것이 제 손에 달린 줄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해 묘제를 올릴 때 여러 윤씨들로서 척분(戚分)을 일컫는 자 5, 6명이 번갈아 와서 만나 보니 대개는 모두가 토지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말이,

 

제전이 온데간데 없어진 지 여러 해인데 그것이 아무 곳에 숨어 있음을 적발해 낸 것은 우리들이었고, 그 본래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서 본래 가격을 물고 되돌려 받은 것도 우리들이었고, 서원의 선비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관에 소지(所志)를 올려 가로채려는 것을 우리 사또에게 힘껏 부탁하여 영원히 빼앗길 염려가 없도록 만든 것도 바로 우리들이었으니, 사리로 보아 마땅히 우리들에게 넘겨 도지(賭地)를 나누어 맡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저 질청은 일찍이 아무 애도 쓴 일이 없는데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앉아서 받고 있으니 우리들의 심정이 어찌 허탈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비록 순박하고 촌스럽지만 오히려 속셈을 내보였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대들의 공적은 많다 하겠지만, 이번에 질청에 제전을 맡긴 것은 바로 우리 종중의 중론이요 문중 제일 어른의 명령이외다. 내가 이웃 고을에 있기 때문에 나를 시켜 거행하게 한 것이니 나는 오직 받들어 시행할 뿐이오. 어찌 감히 중간에서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일이겠소!”

밤에 손님 한 사람이 혼자 왔는데 언사와 태도가 제 딴에는 자못 의젓스러웠습니다. 그는 깊이 탄식하며 한참 있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묘소인데 호장이 제사를 지내다니 혹시 고례(古禮)에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웃으면서,

 

그대는 진실로 고례를 아시오? 옛날엔 묘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이미 천묘(遷廟)한 묘이겠소? 진실로 세대가 점점 멀어지면 묘역을 잃을까 두려워서, 옛날에 두었던 토지와 집을 묘지기하는 노속에게 맡기기도 하고 산 아래 사는 그 고장 선비에게 부탁하기도 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 지내는 것은, 멀리서나마 그 상로지감(霜露之感)을 붙일 뿐만이 아니라 아무 집안의 선산임을 알려 주자는 까닭이지요. 세족(世族)이 토지를 질청에 맡기는 것은 그 의의가 대체로 같소. 노속의 성쇠와 존망은 일정하지 않고,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들도 제 족속이 아님은 마찬가지요. 그러나 질청이란 고을이 있는 날까지는 같이 있게 되어 백대를 가도 제사를 폐지하지 않을 수 있고 토지가 도중(都衆)에게 들어가면 한 사람이 마음대로 옮길 수도 없습니다. 이미 토지를 맡겼으면 토지를 받은 자가 제사 지내는 것일 뿐이외다. 어찌 꼭 예()의 고금(古今)과 사람의 귀천을 따지겠소.”

하였더니, 그 사람이 겉으로는 그럴 듯이 수긍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에 듣자니 도리어 서원의 선비들과 합세하여 본군의 신임 사또에게 부탁해서 그 토지를 옮겨서 서원에 귀속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했는데 본 사또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괴이한 언설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촌구석의 고루한 소견으로 제사에는 반드시 축관이 있는 줄만 알았지 호장은 절대 축관으로 쓸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이며, 그자가 배척한 것은 호장의 직품이 낮다는 것이지, 축관을 쓰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이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거기에 축관이 있으려니 멋대로 생각하고 서슴없이 이런 언설을 퍼뜨린 것입니다.

! 묘에다 제사함도 오히려 슬기롭지 못하다는 기롱이 있을 수 있는데, 이미 마지못할 경우라면 그 고장 선비나 군의 아전 중에서 손을 빌려 향기로운 제물을 진설하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어찌 제 족속이 아닌 사람이 축문을 아뢸 수 있겠습니까?

먼 곳이라 풍문의 와전됨이 대개 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후에도 괴이한 언설이 이러쿵저러쿵 일어날 터이니, 바라옵건대 저의 이 편지를 일족에게 돌려 보이시어 뭇 의혹을 깨뜨려 주심이 어떠하신지요?

 

() 원서(原書)

 

 

새봄에 정사를 돌보느라 어떻게 지내시는지 몹시 궁금하외다. 족종(族從)은 늙고 병들어 나날이 정신이 혼미해 가니 서글프고 한탄스러우나 어쩌겠소.

듣자니 선조 야천(冶川 박소(朴紹)) 선생의 묘제에 축관으로 호장의 이름을 썼다 하니 놀랍고 괴이함을 이기지 못하겠소. 만약 잘못 전해진 말이 아니라면 이는 실로 예에 어긋나도 너무나 크게 어긋난 것이오. 누가 이 의논을 주장했으며 누가 이 일을 꾸몄는가 모르겠소.

예서(禮書)에 비록 총인이 시가 된다.冢人爲尸는 글귀가 있으나 호장은 총인이 아니고, 예법에 본래 빈객이 제사를 돕는다.賓客助祭는 규정이 있으나 주사자(主祀者)는 조제자(助祭者)가 아니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근거가 없는데 그래도 행한다면 이상한 게 아니겠소.

() ()은 제 족속이 아니면 그 제사에 흠향하지 않는다.神非族類 不歆其祀 했는데, 합천의 호장은 우리 선조에 대해 같은 족속이 아니오. 무릇 우리 선조께서는 평소에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非禮勿動 마음을 가지셨는데, 그 밝으신 혼령이 어찌 족속 아닌 사람이 올리는 제사를 즐겨 와서 받으시겠소. 생각이 이에 미치니 모르는 결에 마음이 아프고 쓰리오.

무릇 세일제(歲一祭 시제(時祭))란 곧 친진(親盡)한 뒤에 자손이 먼 조상을 추모하는 무궁한 생각을 펴는 것이며, 대수(代數)를 제한하지 않는 것은 대개 묘가 사당과 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당이 이미 헐렸기 때문에 모든 지손(支孫)들이 다 제사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역시 예()이외다.

일찍이 보니 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에는 해마다 봄이 되면 자손 한 사람을 정해 보내어 제사하게 하는데, 선생의 묘에는 유독 그리 못 하는 것은 그 길이 천 리나 멀기 때문이지요. 뭇 자손이 돌아가며 가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된 이상 할 수 없이 그 고장 사람이나 고을 아전을 시켜 제물을 진설하고 잔을 올리는 것을 묘지기가 집사(執事)하는 예()와 같이 하는 것은 혹 그럴 수도 있겠거니와, 꼭 축문을 써서 호장 아무개는 감히 밝게 아룁니다.戶長某敢昭告 운운한다면 너무도 같잖은 일이 아니겠소. 그 사람을 천히 여겨서가 아니라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이럴 경우에는 축관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따름이오.

세일제에 삼헌(三獻)으로 하자는 것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주장이고, 단헌(單獻)으로 하자는 것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학설이오. 내 생각으로는 사계의 학설을 따라 단헌으로 하고 축관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기며, 비록 삼헌으로 할 경우라도 축관을 없애는 것 또한 무방하다고 생각하오.

일찍이 듣자니 제전이 없어져 제사가 소홀히 되고 말았으나 좌하(座下 연암을 가리킴)가 영남의 원으로 나가면서 옛 전토를 찾아내어 본군의 질청에 맡겨 길이 제사를 잇는 계책을 세웠다기에 잘 처리했다고 자못 다행스레 여겼는데, 뜻밖에도 그 축문 한 구절이 이토록 잘못되어 도리어 향기로운 제사 의식에 누()가 되고 말았구려.

이는 필시 제전을 맡길 때에 미처 축관을 쓸지 여부를 의논하여 지시한 바가 없어서 고을 아전들이 제멋대로 이와 같이 했을 것이요. 그렇지 않고 혹시라도 고명(高明 연암을 가리킴)의 의견에서 나왔다면 아마도 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신 것 같소.

이미 예가 아닌 줄 알았으면 당장에 고쳐야 할 것이니, 금년 한식(寒食)부터는 축문을 쓰지 말라는 뜻을 자세히 밝혀 패()를 만들어 제사를 부탁한 호장에게 훈계하고 단속하는 것이 어떠하겠소? 그래야만 제사 예법이 바르게 되고 인정과 도리상으로도 편안할 터이니 소홀히 말기를 신신 부탁하오.

선조의 제사를 받드는 일이 되고 보니 잠자코 있는 것은 경우가 아니라 부득불 여러 말을 하게 되었소. 깊이 양찰해 주기 바라오.

 

[C-001]족형 윤원(胤源)씨에게 답함 :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은 호가 근재(近齋)로 성리학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인(門人)이다. 딸이 정조의 후궁이 되어 세자를 낳음으로써 후일 순조(純祖)의 외조부가 된 박준원(朴準源)은 그의 아우이다. 박윤원은 연암에게는 일족에 속하는 형님뻘이 된다. 박윤원의 사후 그의 문집을 간행하려 할 때 연암은 박준원에게 박윤원이 보낸 원서(原書)뿐 아니라 그에 답한 자신의 이 편지도 함께 수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燕巖集 卷10 與族弟準源書 박윤원의 원서는 근재집(近齋集) 18 여족제미중지원(與族弟美仲趾源)’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연암이 보낸 이 편지를 받고 난 뒤 오해를 푼 박윤원이 연암에게 보낸 사과 편지도 여미중(與美仲)’이란 제하에 수록되어 있다.

[D-001]귀가 순해져야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가, “나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스스로 섰고, 40세에 사물의 이치에 의혹됨이 없었고, 50세에 천명을 알았고, 60세에 귀가 순해졌고, 70세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귀가 순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리지 않게 되었으며, 그 말의 미묘한 뜻까지 곧바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D-002]() …… 없으니 : 원문은 其朝聞無幾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3]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 : 박소(朴紹)의 묘를 가리킨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4]질청(秩廳) : 고을의 아전들이 직무를 보는 곳을 이른다.

[D-005]호장(戶長) : 고을 아전의 우두머리를 이른다.

[D-006]공형(公兄) : 삼공형(三公兄)이라고도 하며 호장(戶長), 이방(吏房), 수형리(首刑吏)를 이른다.

[D-007]여러 윤씨(尹氏) : 박소의 외가인 파평(坡平) 윤씨들이 합천에서 대성(大姓)을 이루고 대대로 살았다. 박소가 합천에서 은둔하다 서거했을 때 윤씨 가문에서 화양동의 묏자리를 제공하였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8]이후(李侯) : 합천 군수 이희일(李羲逸)을 가리킨다.

[D-009]서원 : 화암서원(華巖書院)을 가리킨다.

[D-010]도지(賭地) : 농사짓는 땅을 남에게 빌리면 그 대가로 해마다 일정한 수확을 바쳐야 하는데, 그러한 땅을 도지라고 한다. 그 대가로 바치는 수확을 도지 또는 도조(賭租)라고도 한다.

[D-011]천묘(遷廟) : 가묘(家廟)에서 신주를 모시는 대수(代數)가 지나면 더 이상 합사(合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D-012]상로지감(霜露之感) : 돌아가신 부모나 선조를 서글피 사모함을 이른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 제사 때에 서리나 이슬이 내리면 군자가 이것을 밟고 반드시 서글퍼지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추워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D-013]도중(都衆) : 어떤 집단이나 그 성원 전체를 가리키는 도중(都中)’이란 한국식 한자어를 조금 달리 표기한 듯하다. 여기서는 아전 집단을 가리킨다.

[D-014]족종(族從) : 편지에서 일족(一族)에 속하는 먼 촌수의 친척에 대해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박윤원 자신을 가리킨다.

[D-015]총인(冢人)이 시()가 된다 : 총인은 주() 나라의 관명으로 왕실의 묘가 있는 지역을 관장하는 관리를 이른다. 시는 신주(神主)’라는 뜻으로 죽은 이를 대신하여 제사를 받는 사람을 이른다. 주례(周禮) 춘관(春官) 총인(冢人) 무릇 묘제에 시가 된다.凡祭墓爲尸고 하였다.

[D-016]() …… 했는데 : 전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구절은 희공(僖公) 31년 조에 나온다.

[D-017]예가 …… 않는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D-018]친진(親盡) : 제사를 지내는 대수(代數)가 다 된 것을 이르는 것으로 임금은 5, 일반인은 4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낸다.

[D-019]양주(楊州) 홍 부인(洪夫人)의 묘 : 박소의 부인 홍씨는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지낸 홍사부(洪士俯)의 딸로서 박소보다 44년 뒤에 85세의 나이로 졸했으며, 그 묘가 양주의 풍양현(豐壤縣)에 있었다. 思菴集 卷4 冶川朴公神道碑銘

[D-020]삼헌(三獻) : 제사에서 초헌(初獻) · 아헌(亞獻) · 종헌(終獻) 이렇게 세 번 술을 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한 번만 술을 부어 올리면 단헌(單獻)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도(原道)에 대해 임형오(任亨五)에게 답함

 

 

지난번에 자네가 노생(盧生)과 원도(原道)편을 논하다가 그 글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자 나에게 와서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을 물었는데, 그렇게 해서 노생에게 답하려는 것이었지. 나 역시 실상은 자네에게 답할 길이 없었으니 우리 속담에 이른바 한 외양간에 암소가 두 마리라는 격이라, ‘뿔 없는 숫양을 내놓으라卑出童羖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는가? 나는 여러 날을 배회하다가 겨우 맹자에서 대저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라는 한 말씀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그것으로써 원도편의 주장을 부연 설명하고 가상적인 문답을 만들었네. 고명(高明 임형오를 가리킴)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군.

내 시험 삼아 물어보겠네.

 

자네는 올 때 갓을 바르게 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허리띠를 매고 신발끈을 묶은 뒤에 대문을 나섰네. 이 중 한 가지라도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당연히 대문을 나서려 하지 않았겠지. 또 자네는 길에 나아갈 때 반드시 궁벽진 데를 버리고 험한 데를 피하며 여러 사람들이 함께 다니는 데를 따랐지. 대저 이와 같은 것이 이른바 알기 어렵지 않다는 것이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가시밭길을 헤치고 논밭길을 가로지르다가 갓이 걸리고 신발이 찢어지며 자빠지고 헐떡이며 땀을 흘린다면 자네는 이 같은 사람을 어떻다고 생각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길을 잃은 사람일 겁니다.”

그렇다면 내 또 묻겠네.

 

걸어가는 것은 똑같은데,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도 하고 갈림길을 찾기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이는 필시 지름길을 좋아하여 속히 가고자 하는 사람이요, 필시 험한 길을 가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일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필시 남이 가리켜 준 말을 잘못 들은 사람일 겁니다.”

아닐세. 이는 길을 가다가 잘못에 빠진 것이 아니네. 대문을 나서기 전에 이미 사심(私心)이 앞섰던 것이지.”

내 또 묻겠네.

 

길이 진실로 저와 같이 중정(中正)하고 저와 같이 가야 마땅하건만, 자네가 발걸음에 맡겨 편안히 걷지 않는다면 어찌 그런 줄을 스스로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가야 마땅할 바를 아는 것은 길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아니면 발에 달려 있다고 하겠는가?”

자네는 이렇게 답하겠지.

 

진실로 아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고, 실제로 밟고 가는 것은 발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발 쓰는 법을 내 알겠노라. 반드시 장차 발을 번갈아 들고 교대로 밟는 것을 ()’라 하고, 발을 옮겼다가 멈추는 것을 ()’이라 하지. 내 모르겠네만, 밟는 곳은 확고하나 발을 드는 곳은 의지할 데가 없으며, 발을 옮길 때는 비록 전진하나 멈출 때에는 가지 못하네. 그렇다면 자네의 두 발에 장차 한 번은 허망(虛妄)함이 있는 셈이니, 진실로 알고 실제로 밟고 간다는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또 모르겠네만, 자네가 올 때 왼발이 먼저였던가 오른발이 먼저였던가? 자네는 장차 고개 들어 생각해 보고는 고개 숙인 채 답을 못할 테지. 대개 이는 발에 대해 잊은 때문이니, 잊은 것이지 망동(妄動)한 것은 아니요 애써 하지 않은 것이지 길과 동떨어진 건 아니라네.

어떤 사람이 조급히 자신을 질책하기를,

 

말과 소가 마구간에서 일어설 때 말은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는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편하다. 그렇다면 남자는 왼쪽이요 여자는 오른쪽이라는 법이 어디에 있으며, 또한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절할 때 왼손과 오른손을 위로 하는 법을 달리할 게 뭐 있나?”

하였다네.

껍질을 갓 깨고 나온 병아리도 솔개를 경계하여 숨고, 배고파 울던 어린애도 호랑이를 무서워하여 울음을 그치지. 내 모르겠네만, 무릇 이와 같은 행동은 성()에서 터득한 것인가, ()에서 터득한 것인가? 그러므로 가령 자네가 길을 갈 때 발 둘 데를 생각하여 걸음마다 안배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몇 리 가지 못할걸세. 그러므로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은 흡사 자연히 그렇게 된 듯하고, ()에 가장 근접한 것이긴 하네. 그러나 이는 독실하기도 하고 소략하기도 하며 통하기도 하고 막히기도 하니, 도의 근원에 이르는 방법은 아니지.

그렇다면 도()는 장차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는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는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은 어디에 있는가? ()에 있네. 대개 근원은 하나인 때문이지. 그러므로 공자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도라고 했네. 자사(子思)가 그렇게 된 까닭을 다시 설명하기를 분리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라고 했지.

그렇다면 도를 볼 수 있는가? ()가 아니면 이()를 드러낼 길이 없네. 그러므로 기는 도의(道義)와 짝을 이루어서 길러야만 호연(浩然)해지는 것이지. 사람에 대해 인()을 합쳐서 말하면 그것이 곧 도일세. 하늘과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요 도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음은 바로 이와 같네.

문왕(文王)이 도를 앙망(仰望)하여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했다는 것은 도를 힘써 체득한 것이요, 장자(張子)가 뒤늦게 불교와 도가(道家)에서 벗어난 것은 반성한 것이니, 반성하여 도를 구하자면 당연히 제 몸에서 만나게 될 터이지.

그러므로 중()이 아니면 어느 것도 정()을 준적(準的)할 수 없고, ()이 아니면 어느 것도 평()을 확정 지을 수 없으며, ()이 아니면 어느 것도 지()를 안정시킬 수 없네. () 이후에야 그 지()를 보게 되고, () 이후에야 그 행()을 보게 되며, () 이후에야 그 공()을 보게 되고, () 이후에야 그 공()을 보게 되지. 가령 하늘이 텅 비지 않으면不空 천둥과 바람이 어디에서 울겠으며 해와 달이 어디에서 비추겠는가? 가령 하늘이 공평하지 않다면不公 비나 이슬이 대상을 가려서 내려 만물 중에 유감을 품는 것들이 있을 테지. 이른바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 이것이네.

주역에 이르기를 때에 따라 여섯 마리 용을 타고 하늘을 통어한다.”고 하였네. 여기서 여섯 마리 용이란 기()인데 사방을 오르내리며, ‘때에 따라 탄다는 것은 이()인데 어느 때든 기를 타지 않는 적이 없지. 그러므로 고집하지도 않고 기필코 성사하려 들지도 않으며, 어느 것을 특별히 후대하지도 않고 박대하지도 않네. 하늘이 여기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한덩어리가 된 이와 기일 뿐인데.

광명정대하게 통어하되 환히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마 하늘의 덕이 아니겠는가? 만물을 낳고 자라게 하되 아집(我執)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마 하늘의 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나타내 보일 뿐이요, 땅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일 뿐이요, 사람의 도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밝히 나타낼 따름이지.

그러나 하늘과 땅의 도가 나타내고 드러내 보이는 그 사이에 명()이 존재하네. 비유하자면 내쉬었다가 들이쉬는 것이 숨이 되는데 맥락(脈絡)이 그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지. 이것은 바로 성()이 하늘의 도를 계승하고 땅의 도와 접한 까닭이니, 씨앗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는 것은 대개 오로지 순수하여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성품인 데다, 살기를 좋아하고 즐거이 천명을 따르는 생리(生理) 때문이지.

비로소 이 명()을 받게 되면, 민첩하게 이를 맞이하여 이어 나가는 것이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 이어지는 것과 같고,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고, 구름이 갑자기 피어올라 비가 퍼붓는 것과 같고, 도랑이 트이자 물이 들이닥치는 것과 같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명한 성()이지. 그리고 맹자가 명덕(明德)과 지선(至善)이 곧 성()을 따르는 도()임을 변론(辯論)하고, 다시 그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이요, 부르지 않아도 이르러 오는 것이 명()이다.” 하였지.

하늘의 명이란 충()을 내려 준 것이요, ()을 내려 줌은 중()을 따르는 것이요, 중을 따른다는 것은 허위가 없는 것이네. 허위가 없는 몸으로써 중을 따른 명()을 받자와, 하늘을 이고 땅 위에 서서 공평무사하게 사도(斯道)를 행하는 것이지.

한 번 발을 들어 공()을 잊어버리니 공()을 잊어버림은 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樂天이요, 한 번 발을 착지(着地)하여 실()로 돌아오니 실()로 돌아옴은 땅을 믿는 것이네. 천명을 즐거이 따르는 것은 형이상(形而上)의 것이요, 땅을 믿는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것이지. 인의예지(仁義禮智)는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이요, 효제충경(孝悌忠敬)은 땅에 근본을 둔 것일세.

그러므로 지극히 정성스러워야 교화(敎化)할 수 있다는 것은 아래와 친한 것이요,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야 지식이 지극해진다는 것은 위와 친한 것이네.덕성(德性)을 존경하고 학문을 준행(遵行)하는 것은 위와 아래를 모두 관통하는 우리의 도, 허무를 숭상하고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은 은밀한 이치나 찾고 기괴한 짓을 하는 이단(異端)일세.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므로 천명을 스스로 즐거이 따르는 것이요,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으므로 땅을 스스로 믿는 것이네. 타고난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것이 천명을 아는 것이며, 도를 깨우침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고, 속이기 어려운 것이 귀신이며, 이치를 끝까지 밝히는 것은 도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요,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사도(斯道)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일세.

 

의 처지에서 저 물()을 볼 것 같으면, 나나 저나 고루 이 기()를 받아서 하나도 허()하여 빌려 온 것이 없으니 어찌 천리(天理)가 지극히 공평하지 아니한가. ()의 처지에서 나를 볼 것 같으면, 나 역시 물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을 체()로 삼고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으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나의 성()을 극진히 발현하면, 물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라는 것은 심()의 덕()이며 생()의 이()이다. 맑고 밝고 순수한 것이 심의 덕이 아닌가. 공정하고 원활한 것이 생의 이가 아닌가.

주역 건도(乾道)가 변화함으로써 제각기 성()과 명()을 바르게 타고난다.乾道變化 各正性命고 하였다. 그러므로 건도란 원형이정(元亨利貞)이요 변화란 이()와 기()이며, 제각기 바르게 타고난다는 것은 사시(四時), 따뜻하고 서늘하고 차갑고 더운 것은 사시의 기()이며,  · 여름 · 가을 · 겨울은 사시의 명()이요, 원형이정은 사시의 덕()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시의 이()이다.

하늘이 하늘로 된 것은 이()와 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이와 기의 형용(形容)과 소리이다. 하늘이 이미 말없이 보여 주면, 사람은 그 형용과 소리를 체()로 삼아 언어로 드러낸다. 사실을 지시하고 물()에 비유하며 이름을 짓고 뜻을 설명하는데, ()과 정()이 서로 뿌리가 되고 체()와 용()이 서로 바탕이 된다. ()도 있고 실()도 있어 그 진위(眞僞)를 드러내며, 어떤 것은 앞으로 하고, 어떤 것은 뒤로 하여 그 처음과 끝을 분별한다. 그러니 천하의 사정(事情)에 통달하고 만물의 실정(實情)을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라는 것은 분별(分別)이다. 그것을 분별하려면 부득이 형용하지 않을 수 없고, 형용하려면 저것을 끌어다가 이것을 증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언어의 실정이다. 그런데 성()의 경우에는 그 체()가 본래 허()하기 때문에 비유하거나 형용하여 말할 수 없다. 거칠게 말하면 기()를 건드리게 되고, 정밀하게 말하면 허()가 아닌가 의심받게 된다. 또 말하지 않으면 실정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나, 말하려 하면 귀착할 곳이 없다. 그것을 일러 중묘(衆妙)가 깊고 깊다 할 것 같으면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것을 일러 타고난 성을 보존하고 보존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기질(氣質)에 엉겨 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성()을 말한 사람 중에 성을 기()로 인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고자(告子) ()’이라 이른 것과, 순자(荀子) ()’이라 이른 것, 양자(揚子) ()’이라 이른 것, 한자(韓子) 삼품(三品)’이라 이른 것, 그리고 불씨(佛氏) 작용(作用)’이라 이른 것이 모두 기요, 우리 유교에서 말하는 성은 아니다. 공자께서 서로 가깝다相近고 말씀하신 것은 기질이 각기 다름을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설명에 의하면 양자의 한계는 비록 엄격하나 본래 두 마음은 아닌 것이다. 또 맹자가 기()를 기름에 있어 말하기 어렵다難言고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오로지 순수하고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성품임을 말하면서, 자사(子思)가 명()이라고 이른 것은 자연(自然 자연히 그렇게 됨)을 말한 것이며, 맹자가 선()하다고 말한 것은 그 본연(本然)의 성()을 말한 것이요, 정자(程子)가 이()라고 해석한 것은 그 당연(當然 당위성)을 설명한 것이다.

대저 겸하면 분별(分別)이 없고 합하면 너무 혼잡하고, 둘로 하면 불가(不可)하고 단독으로 행하면 허()에 떨어지니, 어떻게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이란 글자는 심() 자와 생() 자의 뜻을 따른 것이다.  원문 빠짐 

 

()을 바로 가리키자면 기()로 가득 차 질()이 있는 것이고, ()만을 오로지 말하자면 순전히 이()로 되어 있어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심이 아니면 성이 거처할 곳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활동할 곳이 없다. 이는 흡사 성()이 심()에 버금가고 이()가 기()의 명령을 듣는 듯하다. 그러나 성이 없으면 심은 빈집이 되고, 이가 없으면 기는 곧 지나가는 나그네이다.

()은 곧 오장(五臟)의 하나이다. 만약 단지 ()’이라고만 말한다면 이는 간() · () · 신장 · 비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만약 건순오상(健順五常)으로 각각 형질(形質)을 이루었다고 할 것 같으면, 성은 비록 가깝지만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진 것이 분명하니 어떻게 그것을 밝힐 수 있겠는가?  원문 빠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르고 맹자가 성이 선함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은 것은, 성이 선함을 밝히고자 해서였다. 주역 이어 가는 것은 선()이요, 이루게 하는 것은 성()이다.繼之者 善也 成之者 性也라고 일렀으니, 이 때문에 맹자가 성이 선함을 밝히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요순을 일컬어 증명한 것이다. ()는 비유하면 곧 천()이요, ()은 비유하면 곧 성()이다. 순이 요로부터 이은 것은 선()이요, 요가 순에게 이루어 준 것은 성()이다.

 

심은 비유하면 종()이요, 성은 비유하면 소리요, ()은 비유하면 종치는 막대기이다. 그러므로 종이 꼼짝하지 않으면 소리가 어디에서 나겠으며, 막대기로 치지 않으면 오음(五音  ·  ·  ·  · )이 어떻게 분별되겠으며, 육률(六律)이 어떻게 구분되겠는가.

 

임생(任生 임형오)이 물었다.

 

심이라는 것은 형기(形器 물질), 성이라는 것은 도의(道義)입니까?”

본연(本然)의 성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공평무사한 천리(天理)는 이따금 갑자기 불쑥하는 사이에 감응하여 나타난다. 대개 이로운 길인지 해로운 길인지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옳으냐 그르냐 여부를 짐작하기도 전에 선()의 실마리가 곧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우물 옆에서 인()을 논하고 물가에서 예()를 강습한다면, 우물로 기어가는 아이를 구할 날이 장차 없을 것이고 물에 빠진 친형수를 어떻게 손으로 건져 줄 때가 있겠는가. 또 진 시황이 궁궐 기둥을 돌면서 달아날 때에 가령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신하의 대열에 있었다면, 약주머니를 던진 하무저(夏無且)에게 의()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허물을 뉘우치는 사람이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바꾼다는 말은 들었지만, ()을 고치고 이()를 바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성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이 선한 것은 마치 불이 밝은 것과 같다.

 

임생이 물었다.

 

심은 하나이나 위태함과 은미함으로 길을 달리하고, 성은 같은 것이나 이()와 기()는 근원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어떤 형상입니까? 심에 소속시키면 기()에 가릴까 두렵고, 성에 덧붙이면 허()에 떨어질 것 같습니다. 감히 묻자온대 어떻게 해야 이것을 명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자네는 불이 켜진 초를 잡고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가? 한 손으로는 촛대를 받들고 한 손으로는 그림자를 가리고, 조심조심 신을 신고 걸으며 숨을 죽이고 앞을 살피지. 비록 미욱스럽고 게으른 종놈일지언정 혹시라도 공경스레 하지 않는 법이 없네. ()이란 초와는 역시 거리가 먼 것이지만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거늘, 하물며 사람이 몸에 대해 서로 가깝기로는 자기 몸 같은 것이 어디 있겠나?

그러므로 초에는 군자(君子)의 도()가 네 가지 있네. 초가 형체를 지켜 나가는 것은 반드시 곧고, 천명을 완수하는 것은 바르며, 마음가짐은 반드시 중()이며, 같은 부류를 좇아가는 것은 반드시 화()하네. 대저 이 네 가지 덕은 촛불이 밝게 된 까닭이지. 그 지향은 활활 타 나아갈 것을 생각하고 그 기개는 밝고 밝아 비출 것을 추구하니, 이는 천하의 보편적인 도인데 초가 이것을 지녔네. 그러므로 촛불이란 통촉(洞燭)하는 것이니, ()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과 꼭 같네.”

 

()이란 심지이니 심지란 말은 주관한다는 뜻이다. ()을 세워서 불을 주관하는 것을 말함이다. 불이 붙은 후에야 그 성을 아는 것이니, 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되게 한 원인所以然之故이다. 대저 촛불이 타지 않을 때에는 밝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원문 빠짐 

 

불은 성()으로 된 물()이다. ()이란 물의 성질은 진실되고 거짓이 없는 점이니, 진실로 지닌 것을 성()이라 이르고, 진실로 얻은 것을 덕()이라 이르고, 거짓이 없는 것을 명()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명덕(明德)이란 것은 성으로 말미암아 밝아진 것自誠明이며, ‘명덕을 밝힌다明明德는 것은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진 것自明誠이니 이것은 본연(本然)의 성()을 이른 것이다.

 

임생이 말하였다.

 

예전에 삼가 들으니,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고, 땅에 근본한 것은 아래와 친하므로형이하(形而下)의 것을 기()라 이르고, 형이상(形而上)의 것을 도()라고 한다 했습니다.”

또 말하였다.

 

()와 기()가 서로 올라타서 만물이 유포되어 형체를 이룹니다. 그런데 지금 촛불로 기()를 비유하고 불로써 성()을 비유하시니, 불 역시 기()요 형이하의 것인데 어떻게 성()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불이 진실로 기()이기는 하나 어찌 형이상의 것이 없겠는가? 만물이 생겨나는 데 오직 사람과 불만이 직()으로 천명을 완수하는 것이지. 주역 하늘과 불은 동인이다.天與火同人라 한 것이 이것이고, 맹자는 곧지 않으면 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곧음으로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고 하였네.”

 

대범 물()이 형()을 이루게 되면 반드시 그 질()이 있어서 형은 비록 허물어지더라도 질은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나무가 타고 쇠가 녹고 물이 흐르고 흙이 무너지되, 그 질은 없어진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 불이란 탈 때에는 빛이 있으나 꺼지면 자취가 없으며, 더듬어 봐도 걸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는 것이 없으나, 그 근본을 찾아보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 있다. 이는 흡사 성()이 기()를 기다려서야 나타나는 것과 같다.

 

촛불이 이따금 어두워지는 것이 어찌 불의 성()이겠는가? () 중에 촛불을 가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찌끼가 조촐하지 못하거나 형질(形質)이 순수하지 못한 때문이다. 그런데 극히 작은 차이로도 마구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미세한 양으로도 사방으로 불길이 솟아 혹이 난 것 같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보고서 도리어 불을 탓하여 어떤 사람은 불에 맑은 , ()한 빛이 있다느니, 또 어떤 사람은 불에 어두운 덕과 밝은 덕이 있다느니 하지만, 이것이 어찌 불의 이이겠는가? 세상에 차갑거나 따스한 불은 없으니, 불의 성()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물이 생겨나는 데 어느 것이고 기() 아닌 것이 있겠는가. 천지는 큰 그릇이며 거기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기(), 가득 차게 하는 원인은 이()이다. 음과 양이 서로 변하여 가는데 이()는 그 가운데 있고 기()로써 감싸고 있다. 이는 마치 복숭아가 씨를 품고 있어 수만 개의 복숭아가 동일한 형상이요, 마치 엽전이 땅에 흩어져도 수만 개의 엽전을 한데 꿸 수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이()가 단일한 근원이라 길은 달라도 귀결은 같은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불은 쇠붙이와 돌을 서로 부딪치기를 지성으로 하면 얻거니와, 물에 던지면서 불이 타기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소견이 아니다.

 

불이란 물()의 성질은, 태양(太陽)으로부터 정기(精氣)를 기르고 태음(太陰)으로부터 정기를 지켜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그 열이 더해지지 않고 한겨울이라도 그 빛이 줄어들지 않으며, 부귀한 사람이라 해서 남아돌지도 않고 빈천한 사람이라 해서 부족하지도 않아, 백성들은 날마다 쓰되 그 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땔나무를 바꾸어도 불이 바뀌지 않는 것은 성() 때문이요, ()이라 칭하고 기()라 칭하지 않는 것은 덕() 때문이다. 나는 들으니, 자기 몸을 닦으려는 사람은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한다고 했는데, 촛불이 이와 흡사하다.

 

임생이 말하였다.

 

()이 서로 가까운 것 중에 불보다 더 선()한 것이 없으므로, 불을 취하여 성의 비유로 삼으신 가르침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러면 불에도 역시 하늘이 명한 성天命之性 기질의 성氣質之性의 구별이 있습니까?”

 

나는 말하였다.

 

있고말고. 만물은 다 같이 기화(氣化) 속에 있으니 어느 것인들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무릇 성()이란 심() 자와 생() 자의 뜻을 따른 것이니, ()에 갖추어진 것이요 생()과 같은 족속이지. ()가 없으면 생명이 끊어지는데 성()이 어찌 생()을 따르겠으며, ()이 아니면 성()이 그치는데 선()이 어디에 붙겠는가? 진실로 천명의 본연(本然)을 궁구하면, 어찌 성()만이 선()하리오? () 역시 선하며, 어찌 기()만이 선하리오? 만물 중에 생을 누리는 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니 그 천명을 즐거이 여기고 그 천명을 순순히 따르면 물()과 내가 같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명한 성()이라네.”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에서 편지의 뒤에 덕성이기(德性理氣)에 대하여 잡설(雜說)한 것이 모두 24개 조목인데, 부군(府君)이 만년에 손수 쓰신 것이다. 이 밖에도 성리(性理)에 관하여 언급한 차록(箚錄 메모)이 있으나, 원고가 흩어진 데다 시커멓게 지우고 고쳐 놓아 많은 부분이 미정고(未定稿)에 속하므로, 감히 여기에 부록(附錄)하지 않았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C-001]원도(原道) …… 답함 : 임형오(任亨五)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 4 일찍이 성명(性命)을 논하면서 촛불로써 비유를 삼으시니 지계(芝溪 : 이재성)가 지당한 의론이라 했다. 이 역시 문집 중에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편지를 가리킨다.

[D-001]원도(原道) : 한유(韓愈)가 지은 글로서 유교의 도가 도가(道家)나 불교의 도와 다른 까닭을 논변하였다.

[D-002] …… 마리 : 같은 것끼리 모여 있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를 뜻한다.

[D-003] …… 내놓으라卑出童羖 : 시경 소아(小雅) 빈지초연(賓之初筵)에 나오는 구절로, ‘뿔 없는 숫양이란 결코 있을 리 없는 사물을 비유한 것이다.

[D-004]대저 …… 어렵겠는가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D-005]잘못에 빠진 것 : 원문은 遂迷인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고집하는 것을 뜻한다.

[D-006]길이 …… 마땅하건만 : 중용장구  1 장의 집주(集註) ()란 일상생활에 있어서 행해야 마땅한 도리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라고 하였다.

[D-007]편안히 걷지 : 원문은 安行인데, 이는 원래 배우지 않고도 알아서 차분하게 행하는 것을 뜻한다. 중용장구  20 장에 혹은 편안히 행하며, 혹은 민첩하게 행하며, 혹은 애써 간신히 행하나, 성공함에 이르러서는 한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D-008]대개 …… 아니요 : 원문은 蓋妄於足也 妄之非爲妄也인데 뜻이 잘 통하지 않는다. ‘ 자가  자와 상통함을 이용한 어희(語戱)로 볼 수도 있다. 김택영의 연암집 중편연암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 등에는 蓋忘於足也 忘之非爲妄也로 되어 있어 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9]애써 …… 아니라네 : 원문은 不勉非違道也인데, 중용장구  20 장에 ()이란 하늘의 길이요 성실하고자 함은 사람의 길이니, 성이란 애써 하지 않아도 중정(中正)하며不勉而中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깨달아 여유 있게 길과 합치하나니, 성인(聖人)이 그러하다.”고 하였고, 그 집주에 애써 하지 않아도 중정하다는 것은 편안히 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중용장구  13 장에 충서는 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忠恕 違道不遠고 하였다.

[D-010]말은 …… 일으킨다 : 원문은 圓蹄先前 耦武先後인데 원제(圓蹄)는 발굽이 둥근 말을 가리키고 우무(耦武)는 발굽이 둘로 갈라진 소를 가리킨다. 조화권여(造化權輿)에 말은 양물(陽物)이라 발굽이 둥글고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며起先前足, 소는 음물(陰物)이라 발굽이 갈라졌고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起先後足고 하였다. 周易玩辭 卷15 馬牛

[D-011]사람이 …… 편하다 : 원문은 人之利用 右便於左인데,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7일 조에 우리나라의 어마법(御馬法)을 비판하면서 사람이 몸을 쓰기에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편리하며人之體用 右利於左 그 점에서는 말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D-012]남자는 ……  : 예기 내칙(內則)에 출생 후 3개월이 지난 사내아이는 두 갈래 상투’, 계집아이는 세 갈래 상투를 짜며 그렇지 않으면 남자는 머리 왼쪽, 여자는 머리 오른쪽으로 북상투를 짠다男左女右고 하였다. 그 밖에도,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문 왼쪽에 활을 걸고 계집아이가 태어나면 문 오른쪽에 수건을 걸며, 절할 때 남자는 왼손을 위로 하고 여자는 오른손을 위로 한다고 하였다.

[D-013]길사(吉事) …… 있나 : 노자에서 길사(吉事)에는 왼쪽을 높이고 흉사(凶事)에는 바른쪽을 높인다.吉事尙左 凶事尙右고 하였고,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길사는 양()이라 공수(拱手)할 때 왼손을 위로 하고 흉사는 음이라 오른손을 위로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의례집설(儀禮集說) 12에 남자는 길배(吉拜)에 왼손을 위로 하고 상배(喪拜)에 오른손을 위로 하며, 여자는 그와 반대로 한다고 하였다.

[D-014]()에서 …… 것인가 : 성은 타고난 본성을 말하고, ()은 신체를 말한다. 신체는 기()로 이루어져 지각(知覺)하고 운동할 수 있으므로, ‘형에서 터득한다는 것은 후천적인 체험을 통해 안다는 뜻이다.

[D-015]양지(良知)와 양능(良能) : 맹자 진심 상(盡心上)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능한 것, 그것이 양능이요 생각하지 않고서도 아는 것, 그것이 양지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는 인()과 어른을 공경하는 의()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선천적 지혜良知 선천적 능력良能을 갖추고 있다고 본 것이다. () 나라 때 왕수인(王守仁)이 이 양지 · 양능을 극히 중시하여, 주자학에 맞서 치양지(致良知)를 종지(宗旨)로 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일으켰다.

[D-016]공자는 …… 했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는 제자 증삼(曾參)에게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써 관철되어 있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의 도吾道는 유교를 말한다.

[D-017]분리될 …… 아니다 : 중용장구  1 장에 도란 잠시라도 분리될 수 없으니, 분리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중용은 자사(子思)의 저술로 간주되고 있다.

[D-018]기는 …… 것이지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정직함으로써 기르고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차게 된다.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고 하였고, 이어서 호연지기는 도의와 짝을 이루나니 이것이 없으면 기가 궁핍하게 된다.配義與道 無是 餒也고 하였다.

[D-019]사람 …… 도일세 : 맹자 진심 하(盡心下) 인이란 것은 사람이니, 인과 사람을 합쳐서 말하면 도이다.仁也者 人也 合而言之 道也라고 하였다. 인을 행할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이며, 사람이 인과 합치한 상태를 도라고 한다는 뜻이다.

[D-020]문왕(文王) …… 것이요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주() 나라 문왕은 도를 앙망하여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望道而未之見고 하였고, 진심 상에 () 임금과 순() 임금은 인()을 본성으로 타고났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힘써 체득하였다.堯舜性之 湯武身之고 하였다.

[D-021]장자(張子) ……  : 장자는 북송(北宋)의 저명한 성리학자 장재(張載 : 1020~1077)를 말한다. 그는 한동안 불교와 도가의 서적을 연구했다가 별반 수확이 없다고 여기고 육경(六經)으로 돌아왔으며, 인종(仁宗) 가우(嘉祐) 초년에 정호(程灝) · 정이(程頤) 형제와 교제하면서부터 이단의 학문을 버리고 유교 연구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D-022]반성하여 …… 터이지 : 맹자 이루 상에 행하여 얻지 못한 것이 있거든 모두 반성하여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을지니, 제 몸이 올바르게 되고 천하 사람이 귀의할 것이다.行有不得者 皆反求諸己 其身正而天下歸之라 하였고, 진심 상에 () 임금과 순() 임금은 인()을 본성으로 타고났고,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힘써 체득하였다.堯舜性之 湯武身之고 하였고, “제 몸을 반성하여 성실히 하면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고, 힘써 제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 행하면 인을 구하는 데 이보다 더 가까운 길이 없다.反身而誠 樂莫大焉 强恕而行 求仁莫近焉고 하였다. ‘도를 제 몸에서 만난다는 것은 몸소 노력하여야만 도를 체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D-023]() …… 되지 : 원문에는 空而後見其公也’ 7자가 누락되어 있다. 김택영의 연암집 중편연암집에 의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D-024]곧지 …… 않는다 : 원문은 不直則道不見인데,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로 원래  자는 직언(直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연암의 의도와 문맥을 고려하여 곧다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D-025]주역 …… 하였네 : 주역 건괘(乾卦)의 단전(彖傳)에 나온다. ‘여섯 마리의 용은 건괘의 여섯 양효(陽爻)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은둔할 때에는 잠룡(潛龍)을 타고 나설 때에는 비룡(飛龍)을 타는 등 때의 변화에 따라 처신함으로써 하늘의 도乾道를 행한다는 뜻이다.

[D-026]고집하지도 …… 않으며 : 원문은 無固無必인데, 논어 자한(子罕) 공자는 네 가지가 전혀 없으시니, 억측하지 않고, 기필코 성사하려 하지 않으며, 고집하지도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D-027]어느 것을 …… 않네 : 원문은 無適無莫인데,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는 군자는 천하에 대해서 후대함도 없고 박대함도 없으며 의()만을 따른다.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고 하였다. ‘ 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분분하다. 여기서는 각각  으로 보는 해석을 취했다.

[D-028]하늘의 …… 뿐이요 : 맹자 만장 상(萬章上) 하늘은 말하지 않는다. 행동과 사실로써 나타내 보일 따름이다.天不言 以行與事 示之而已矣라고 하였다.

[D-029]드러내 보일 : ‘ 의 옛 글자로, ‘와 같은 뜻이다. 주역 곤괘(坤卦) 육이(六二)의 상전(象傳) 육이의 움직임은 곧고 바르니, 배우지 않아도 만사가 순조로움은 땅의 도가 환히 빛나기 때문이다.六二之動 直以方也 不習无不利 地道光也라 하였다. 또한 중용장구  12 장에 군자의 도는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하늘과 땅에 환히 드러나니라.及其至也 察乎天地 하였다. 다음 문장의  자 역시 현시(顯示)의 뜻을 지니고 있다.

[D-030]맥락(脈絡) : 한의학에서 경맥(經脈)과 낙맥(絡脈)을 합쳐 부른 말로, 경락(經絡)이라고도 한다. 경맥은 세로로 간선(幹線)을 이루고 낙맥은 가로로 지선(支線)을 이루어 상호 연결되어 온몸에 기혈(氣血)을 전달하는 통로가 된다.

[D-031]씨앗이 ……  : 원문은 實含斯活인데, 시경 주송(周頌) 재삼(載芟) 온갖 곡식을 파종하니 씨앗이 생기를 머금고 살아나네.播厥百穀 實函斯活라고 하였다.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보존되어 있는 성()을 종종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연암집 1 ‘이자후(李子厚)의 득남(得男)을 축하한 시축(詩軸)의 서문 참조.

[D-032]맞이하여 이어 나가는 것 : 원문은 迓續인데, 서경 반경 중(盤庚中) 나는 하늘로부터 너희들의 명을 맞이하여 이어 나가려 한다.予迓續乃命于天고 하였다.

[D-033]하늘이 명한 성() : 중용장구  1 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하였다.

[D-034]맹자가 …… 변론(辯論)하고 : 맹자 중 특히 고자 상(告子上)에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대학장구 ()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고 …… 지선(至善)에 이르면 멈추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 在止於至善고 하였고, 중용장구  1 장에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率性之謂道고 하였다.

[D-035]하지 …… ()이다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D-036]하늘의 …… 것이요 : 서경 탕고(湯誥) 위대하신 상제가 백성들에게 충()을 내려 주셨도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라고 하였다. ‘()’ 자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 또는 복()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 즉 중도(中道)나 내심(內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D-037]()을 따르는 : 원문은 由中인데 이는 由衷과 같은 말로, 내심(內心)에서 우러나온다는 뜻이다.

[D-038]사도(斯道) : ‘이 도란 뜻으로, 유교 도덕을 가리킨다.

[D-039]땅을 믿는 것 : 땅을 믿는다는 것은 그 위에 만물을 실을 정도로 땅이 넓고 두터움(博厚)을 믿는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26 장에 넓고 두터움은 만물을 싣는 바博厚 所以載物也 넓고 두터움은 땅과 합치한다博厚配地고 하였다.

[D-040]형이상(形而上) : 형이상(形以上)과 같은 말로, 형체가 없는 추상적 존재를 말한다. 이와 대립하는 개념이 형이하(形而下)’, 형체가 있는 구체적 존재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D-041]지극히 ……것이요 : 중용장구  23 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이라야 인심을 교화할 수 있다.唯天下至誠 爲能化고 하였고,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땅에 근본을 둔 것은 아래와 친하다.本乎地者 親下고 하였다.

[D-042]사물의 …… 지극해진다 : 원문은 物格而知致인데, ‘物格而至致 또는 物格而致知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대학의 구절을 감안하면 物格而知至라야 한다.

[D-043]사물의 …… 것이네 : 대학장구  1장에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뒤라야 지식이 지극해진다.物格而后 知至고 하였고, 주역 건괘 문언전에 하늘에 근본을 둔 것은 위와 친하다.本乎天者 親上고 하였다.

[D-044]덕성(德性) …… : 원문은 尊德性而道問學인데, 중용장구  27 장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D-045]은밀한 …… 하는 : 원문은 索隱行怪인데, 중용장구  11 장에 나오는 말이다.

[D-046]소리도 …… 없으므로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하늘이 하시는 일은 소리도 냄새도 없네.上天之載 無聲無臭라고 하였다. 하늘이 하시는 일은 추측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D-047]사물이 …… 있으므로 : 시경 대아 증민(蒸民) 하늘이 만민을 낳으셨으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나니라.天生蒸民 有物有則 하였다.

[D-048]타고난 …… 것이며 : 맹자 진심 상에 형체와 안색은 타고난 성질이지만 오직 성인이라야 그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간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고 하였고, 주역 계사전 상에 천명을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49]속이기 …… 귀신이며 : 귀신(鬼神)이란 개념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중용에서 주장하는, 우주 만물을 생성하는 음양(陰陽) 이기(二氣)의 활동을 가리킨다.

[D-050]이치를 …… 것이요 : 원문은 窮道之自反也인데 뜻이 통하지 않는다. 김택영의 연암집에는 이 구절은 잘못이 있는 것으로 의심된다.”고 주를 붙여 놓았고, 다시 중편연암집에는 窮理者 道之自反也로 고쳐 놓았으므로,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D-051]길에서 …… 것일세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길에서 주워들은 말을 전하는 것은 덕을 저버리는 것이다.道聽而途說 德之棄也라고 하였다.

[D-052]물을 체()로 삼고 : 중용장구  16 장에서 공자는 귀신의 덕이 성대하도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는 않지만, 물을 체()로 삼으며 어떤 물에든 누락될 수 없다.體物而不可遺라고 하였다. ‘體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으나, 중용집주(中庸集註)의 해석을 좇아 번역하였다.

[D-053]나의 ……것이다 : 중용장구  22 장에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실이라야 자신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면 인()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고, 인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으면 물()의 성을 극진히 발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D-054]건도(乾道) …… 타고난다 : 주역 건괘(乾卦) 단전(彖傳)의 말이다.

[D-055]건도란 …… ()이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68 천도(天道)로 말하자면 원형이정이 되고, 사시로 말하자면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이 되고, 인도(人道)로 말하자면 인의예지가 되고, 기후로 말하자면 따뜻하고 서늘하고 마르고 습한 것溫涼燥濕이 되고, 사방으로 말하자면 동서남북이 된다.”고 하였다.

[D-056]형용(形容)과 소리 : 원문은 容聲인데 예기 제의(祭義)에서 제삿날에 음식을 진설할 때 엄숙하여 반드시 용성을 듣는 듯이 한다.肅然必有聞乎容聲고 하였다. 용성에 대한 해석 역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여기서는 이와 기를 두고 사용했으므로, 형용과 소리로 번역하였다. 중용집주에서 귀신을 음양 이기(二氣)의 활동으로 해석하면서 귀신은 무형무성(無形無聲)이라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D-057]천하의 사정(事情)에 통달하고 : 원문은 通天下之故인데 주역 계사전 상에 나오는 말이다. “()은 사려도 없고 작위도 없어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면 드디어 천하의 사정에 통달한다.易 无思也 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고 하였다.

[D-058]중묘(衆妙)가 깊고 깊다 : 원문은 衆妙玄玄인데, 노자에 도() 깊고 또 깊으니 중묘(衆妙)의 문이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하였다.

[D-059]말로 …… 아니요 : 노자 도는 말로 이를 형용할 수 있으면 영원불변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라고 하였다.

[D-060]타고난 …… 보존한다 : 원문은 性成存存으로 되어 있으나, 주역 계사전 상에 타고난 성을 보존하고 보존함이 도의의 문이다.成性存存 道義之門이라 하였다. ‘成性存存의 해석은 여러 가지인데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역의 이 대목은 노자에서 도() 깊고 또 깊으니 중묘(衆妙)의 문이다.”라고 한 대목과 사상적으로 통한다. 大易通解 卷13

[D-061]고자(告子) ……  : 고자는 맹자와 동시대 사람인 고불해(告不害), ()이 곧 성이며, 성에는 선악(善惡)이 없다고 주장했다. 孟子 告子上

[D-062]순자(荀子) ……  : 순자는 사람의 성이 본래 악하며, 선한 특성은 인위적인 학습과 예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荀子 性惡

[D-063]양자(揚子) ……  : 양웅(揚雄)은 사람의 성에는 선악이 혼재하며, 그 선한 성을 닦으면 선인이 되고 그 악한 성을 닦으면 악인이 된다고 하여, 서로 대립하는 맹자와 순자의 설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法言 修身

[D-064]한자(韓子) ……  : 한유(韓愈)는 원성(原性)에서 사람의 성을, 선만 있고 악이 없는 상품(上品), 교육 여하에 따라 상품이나 하품이 될 수 있는 중품(中品), 악뿐이어서 교육으로도 변화시킬 수 없는 하품(下品)으로 나누었다. 이는 맹자, 순자, 양웅의 설을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서, 맹자의 성선(性善)은 상품에 해당하고, 순자의 성악(性惡)은 하품에 해당하며, 양자의 성선악혼(性善惡混)은 중품에 해당한다.

[D-065]불씨(佛氏) ……  : 불교에서 심() · () · () 중 식()이 대상을 판별하는 활동을 작용(作用)’이라 한다. 전등록(傳燈錄) 성이 어디에 있는가? 작용에 있다.性在何處 曰在作用고 하였다. 주자나 정도전(鄭道傳)은 안전(眼前)의 작용(作用)이 곧 성이라고 하면서 작용견성(作用見性)’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의 설을 비판하였다.

[D-066]서로 가깝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사람의 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으로 인해 서로 멀어진다.性相近 習相遠고 하였다. 정자(程子)나 주자의 주장에 의하면, 공자가 사람의 성이 똑같다고 하지 않고 서로 가깝다고만 한 것은 본연의 성本然之性이 아니라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한다.

[D-067]인심(人心)과 도심(道心)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서 순() 임금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隱微)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훈계하였다. 이 말에 근거하여 정자와 주자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제창했다.

[D-068]말하기 어렵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고 말한 맹자에게 공손추가 호연지기란 무엇이냐고 묻자 맹자는 말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D-069]자사(子思) ……  : 자사의 저술로 간주되는 중용에서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한다.天命之謂性고 하였다.

[D-070]맹자가 ……  : 맹자 등문공 상에 맹자가 성이 선함을 말하되 말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었다.孟子道性善 言必稱堯舜고 하였다.

[D-071]정자(程子) ……  : 정이(程頤) 성이 곧 이이다.性卽理也라고 하여 성즉리(性卽理)의 설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D-072]겸하면 : 성을 심()과 겸하여 설명한다든가, 이를 기와 겸하여 설명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D-073]원문 빠짐 : ‘性之爲字 從心從生이란 앞 문장과 거의 같은 문장이 이 글의 마지막 조목에 夫性者 從心從生이라고 다시 나온다. 그리고 그에 이어서 心之具而生之族也로 문장이 끝나고 있음을 보면, 원문의 빠진 대목 역시 心之具而生之族也일 가능성이 높다. ‘心直指 ……로 시작하는 그다음 문장은, 이 글 말미의 안설(按說)에서 박종간(朴宗侃) 모두 24개 조목이라 한 점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의 해당 부분을 참조하면, 별개의 조목으로 나뉘어야 한다.

[D-074]건순오상(健順五常) :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의하면 건()은 건()의 성()이고 순()은 곤()의 성이다. 오상(五常)은 곧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인데 이는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곧 오장(五臟)과 상응한다. 즉 인은 목()으로 간과, 의는 금()으로 폐와, 예는 화()로 심장과, 지는 토()로 비장과, 신은 수()로 신장과 서로 상응한다고 본다.

[D-075]이어 가는 …… ()이다 : 주역 계사전 상에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이를 이어 가는 것은 선이요 이를 이루게 하는 것은 성이다.”라고 하였다.

[D-076]육률(六律) : 동양 음악의 12음계는 음양의 원리에 따라 홀수 음계인 육률과 짝수 음계인 육려(六呂)로 나뉘는데, 육률은 저음부터 차례로 황종(黃鐘 : C) · 태주(太蔟 : D) · 고선(姑洗 : E) · 유빈(蕤賓 : F#) · 이칙(夷則 : G#) · 무역(無射 : A#)을 가리킨다.

[D-077]우물로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물로 기어가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놀라면서 측은한 마음을 품는다고 하였고, 이루 상에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져 주는 것은 권도(權道)이다.”라고 하였다.

[D-078]진 시황이 …… 것이다. :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진()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 진 나라가 멸망하는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며, 하무저(夏無且)는 진 시황의 시의(侍醫)였다. 자객 형가(荊軻)가 진 시황을 죽이려 하자 진 시황이 이를 피해 기둥을 돌면서 달아났는데, 이때 하무저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약주머니를 던져 위험을 모면할 수 있게 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이는 진 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진승이나 오광조차도 진 시황의 신하로 있었다면 본성에 따라 당연히 진 시황을 구하기 위해 의로운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D-079]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 : 중용장구  1 장에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D-080]형체를 지켜 나가는 것 : 원문은 踐形이다. 맹자 진심 상에 형체와 안색은 타고난 성질이지만 오직 성인이라야 그 형체를 바르게 지켜 나간다.形色 天性也 惟聖人然後 可以踐形고 하였고, 주역 계사전 상에 천명을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천명을 알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81]천명을 완수하는 것 : 원문은 立命인데, 맹자 진심 상에 수명의 길고 짦음에 개의하지 않고 제 몸을 닦으며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천명을 완수하는 방법이다.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라고 하였다.

[D-082]같은 부류를 좇아가는 것 : 원문은 就類인데,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 물은 습한 데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데를 좇아가니 …… 각각 같은 부류를 따르는 것이다.水流濕 火就燥 …… 則各從其類也라고 하였다.

[D-083]()을 세워서 : 원문은 建中인데,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 임금은 힘써 큰 덕을 밝혀 백성에게 중도(中道)를 세우소서.王懋昭大德 建中于民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촛불 한가운데에 심지를 세운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D-084]밝음으로 ……  : 중용장구  21 장에 ()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성실해지는 것을 교()라 한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고 하였다.

[D-085]하늘에 …… 친하므로 : 주역 건괘 문언전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D-086]형이하(形而下) …… 한다 : 형체가 있는 구체적 존재를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 하였다.

[D-087]() …… 이룹니다 : 주자(朱子)는 이와 기의 관계를 승마에 비유하여 이가 기에 올라타는 것은 사람이 말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사단(四端)은 이의 발현이요 칠정(七情)은 기의 발현이다.”라고 하였다. 장재(張載) ()이 발현하지 않으면 성()이 되는데, 그 처음에 발현과 미발현未發의 사이에는 기가 이에 올라타고 나온다.氣乘理而出고 하였다. 이황(李滉)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뒤따른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현하여 이가 올라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에 반대하여 이이(李珥) 기가 발현하면 이가 올라탄다.氣發理乘는 한 가지만을 인정하였다. 주역 건괘 단전(彖傳) 구름이 가고 비가 내리니 만물이 유포되어 형체를 이룬다.雲行雨施 品物流形고 하였다. 이는 건()이 형()의 덕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 것이라 한다.

[D-088]하늘과 불은 동인(同人)이다 : 주역 동인괘(同人卦) 상전(象傳) 하늘과 불은 동인이니, 군자는 이로써 족속을 유별하고 사물을 구별한다.天與人同人 君子以類族辨物고 하였다. 하늘은 위에 있고 불의 본성은 불꽃을 일으키며 위로 타오르는 것이므로, 하늘과 불은 동류(同類)라는 뜻이다.

[D-089]곧지〕 …… 않는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이다.

[D-090]곧음으로 …… 된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 한 말이다.

[D-091]음과 …… 가는데 : 원문은 陰陽相盪인데, 음이 자라면 점차 양이 물러가고 양이 자라면 음이 점차 물러가는 것을 말한다. 주역 계사전 상에 ( :양효 陽爻)과 유( : 음효陰爻)가 서로 교감하여 팔괘가 서로 변하여 간다.剛柔相摩 八卦相盪고 하였다.

[D-092]길은 …… 때문이다 : 원문은 殊塗同歸인데, 주역 계사전 하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천하 만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랴? 천하 만사는 귀결은 같은데 길이 다를 뿐이다.天下何思何慮 天下同歸而殊塗라고 하였다.

[D-093]태양(太陽) : 태양은 해 · 여름 · 남쪽 등을, 태음(太陰)은 달 · 겨울 · 북쪽 등을 뜻한다.

[D-094]백성들은 …… 못한다 : 주역 계사전 상에 백성들은 날마다 쓰되 그 공()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를 체득한 자가 드물다.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鮮矣고 하였다.

[D-095]()이라 칭하고 : 은 오행(五行)의 하나이고, () 자에는 덕행(德行)이란 뜻이 있다.

[D-096]자기 …… 한다 : 대학장구 () 1장에 나오는 말이다.

[D-097]하늘이 명한 성 : ‘기질의 성氣質之性과 대립하는 성리학의 개념으로, ‘본연의 성本然之性’, ‘천지의 성天地之性’, ‘의리의 성義理之性이라고도 부른다.

[D-098]기화(氣化) : 성리학의 용어로, 음양의 기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만물은 그 시초에는 이러한 기화를 통해 생성된다. 이와 대립하는 것이 형화(形化), 기화에 의해 일단 형체를 갖춘 만물은 종자를 통해 그 형질을 유전한다고 본다.

[D-099]() 역시 선하며 : 성리학에서는 기 자체를 악이라 보지는 않는다. 기가 성의 발현을 저해하거나 억제하는 한에서만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러한 한계를 지니지 않은 청명하고 순수하며 조금도 혼탁이 없는 기도 있다. 사람이 이러한 기를 타고나면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된다고 한다.

[D-100]종간(宗侃) : 연암의 둘째 아들인 박종채(朴宗采 : 1780~1835)의 처음 이름이다. 박종채는 1829년 음보(蔭補)로 출사한 뒤 경산 현령(慶山縣令)을 지냈으며, 연암의 언행에 관해 상세히 기록한 과정록을 남겼다. 사후에 아들 박규수(朴珪壽)가 현달하여,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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