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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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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

도강록(渡江錄) 6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성경잡지(盛京雜識)

성경잡지(盛京雜識) 7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 27리다.

 

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 62리다.

 

관내정사(關內程史)

관내정사(關內程史) 7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 40리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경개록(傾蓋錄)

경개록(傾蓋錄)

 

심세편(審勢編)

심세편(審勢編)

 

망양록(忘羊錄)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

혹정필담(鵠汀筆談)

 

찰십륜포(札什倫布)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

황교문답(黃敎問答)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피서록보(避暑錄補)

 

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시화(楊梅詩話)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銅蘭涉筆)

 

옥갑야화(玉匣夜話)

옥갑야화(玉匣夜話)

 

행재잡록(行在雜錄)

행재잡록(行在雜錄)

 

금료소초(金蓼小抄)

금료소초(金蓼小抄)

 

환희기(幻戲記)

환희기(幻戲記)

 

산장잡기(山莊雜記)

산장잡기(山莊雜記)

 

구외이문(口外異聞)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앙엽기(盎葉記)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되 신명(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사물(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은 것으로서 역경(易經)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역경은 미묘하고 춘추는 드러내었으니, 미묘란 주로 진리를 논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는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드러냄이란 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되는 것이다.

 

저서(著書)하는 데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내 일찍이 시험삼아 논하여 보았노라. 역경의 육십사괘(六十四卦) 중에서 언급한 물건으로서 용이니, 말이니, 사슴이니, 돼지니, 소니, 양이니, 범이니, 여우니, 또는 쥐니, 꿩이니, 독수리니, 거북이니, 붕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다 참으로 있었던 물건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진 못할 것이다.

 

또 인간에 있어서는 저 웃는 자, 우는 자, 부르짖는 자, 노래부르는 자나, 또는 눈먼 자, 발저는 자, 엉덩이에 살이 없는 자, 그 척추의 고기가 벌어진 자 들을 언급하였는데, 그런 인간이 참으로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蓍草)를 뽑아서 괘()를 벌이면, 그 참된 상()이 곧 나타나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묘한 곳으로부터 드러내는 경지로 지향하는 까닭이었으니, 우언(寓言)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춘추중에 기록된 2 42년 사이의 일에는, 온갖 제사와 수렵(狩獵)과 조회와 회합과 정벌(征伐)과 침입이, 실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좌구명(左丘明)공양고(公羊高)곡량적(穀梁赤)추덕보(鄒德溥)협씨(夾氏) 등의 전()이 제각기 같지 않을 뿐더러, 이를 논하는 자들이 남이 반박하면 나는 지키기로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는 드러난 곳에서부터 미묘한 곳으로 드는 까닭이었으니, 외전(外傳)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 “장주(莊周)가 저서에 능하다.”고 일렀던 것이다. 장주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帝王)과 성현(聖賢)이나, 임금과 정승, 처사(處士)와 변객(辯客) 들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正史)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할 수 없지 않을 것이다. () ()이나 윤() ()이 반드시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부묵자(副墨子)니 낙송손(洛誦孫)이니 하는 자는 어떤 인물들이었던가. 또 망량(罔兩 물귀신)이니 하백(河伯 물귀신)이니 하는 귀신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잇따라 변해지곤 하여, 사람으로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조궤(弔詭 궤변(詭辯))라 불러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설을 결국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저서가(著書家)로서의 웅()이 아니라 이르진 못할 것이다.

 

이제 대체로 연암씨(燕巖氏)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알지 못하겠다. 그 어떠한 글이었던고. 저 요동(遼東) 들을 건너서 유관(渝關)으로 들어 황금대(黃金臺) 옛 터에 서성이고, 밀운성(密雲城 하북성에 있다)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를 나서 난수(灤水) []와 백단(白檀 밀운성의 현())의 북녘을 마음껏 구경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땅이 있었으며, 또 그 나라의 석학(碩學)운사(韻士)와 함께 교제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인물이 있었으며, 사이(四夷)가 모두 이상한 모양과 기괴한 옷에 칼도 머금고 불도 마시며, 황교(黃敎) 반선(班禪)의 난쟁이가 비록 괴이한 듯하지마는 그가 반드시 망량이나 하백은 아닐 것이요, 진귀한 새나 기이한 짐승, 아름다운 꽃이나 이상한 나무의 그 정태(情態)를 곡진히 묘사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어찌 일찍이 그 등마루의 길이가 천 리라느니, 그 나이가 8천 세라느니 하는 따위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에서 비로소 장주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없음이 아닌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패자(覇者)에 비한다면, 진 문공(晉文公)은 허황하고 제 환공(齊桓公)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C-001]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 다른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서()가 보이지 않고, 다만 최근에 발견된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 실려 있으므로 이에 추가하였다.

[D-001]우언(寓言) : 말이나 글에 실제가 아닌 뜻을 의탁한 것이니, 장주(莊周) 남화경(南華經) 중에 우언편(寓言篇)이 있다.

[D-002]외전(外傳) : 정사(正史)에 싣지 않은 전기를 내전(內傳)과 구별하기 위한 서술이니, 방경각외전(放瓊閣外傳)이 이에 해당한다.

[D-003]시초(蓍草) : ()를 뽑는 데 쓰는 영초(靈草).

[D-004]회린(悔吝) : ()는 괘()의 상체(上體), ()은 인색(吝嗇)함이니, 곤괘(坤卦)에서 나타난 효상(爻象)의 하나.

[D-005]좌구명(左丘明) : 춘추 때 노()의 태사(太史).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D-006]공양고(公羊高) : 춘추 때 자하(子夏)의 제자. 역시 춘추전을 지었다.

[D-007]곡량적(穀梁赤) : 역시 자하의 제자로서 춘추전을 지었다.

[D-008]추덕보(鄒德溥) : ()의 학자. 덕함(德涵)의 아우. 춘추광해(春秋匡解)를 지었다.

[D-009]장주(莊周) : 춘추 시대의 철학가(哲學家). 저서에는 남화경(南華經)이 있다.

[D-010]() () : 옛 장인(匠人). ()은 그의 이름.

[D-011]() () : 옛 수레바퀴를 만드는 공인. ()은 그의 이름.

[D-012]부묵자(副墨子) …… 하는 자 : 문자(文字)에 대한 의인칭(擬人稱)이니, 남화경 대종사(大宗師), “나는 부묵자에게 들었고, 부묵자는 또 낙송손(洛誦孫)에게 들었노라.” 하였다. 낙송은 반복(反復)하여 외는 것을 이름이니, 역시 의인칭이다.

[D-013]연암씨(燕巖氏) : 저자 연암을 일컫는 말.

[D-014]유관(渝關)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

[D-015]황금대(黃金臺) : 하북성(河北省)에 있는데, 춘추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세웠다.

[D-016]고북구(古北口) : 하북성에 있는 관() 이름. 곧 호북구(虎北口).

[D-017]난수(灤水) : 찰합이(察哈爾)에서 발원하여 열하성(熱河省)을 거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D-018]사이(四夷) :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이(東夷)남만(南蠻)서융(西戎)북적(北狄)을 말한다.

[D-019]황교(黃敎) : 서장(西藏) 라마교(喇嘛敎)의 한 파. 그 교의 중들이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으므로 이름하였다.

[D-020]반선(班禪) : 황교 즉 라마교의 교주(敎主). ()은 박학(博學)이요, ()은 광대(廣大)의 뜻을 가졌다.

[D-021] …… 천 리라느니 : 남화경에 새 위나 대붕(大鵬)의 등마루가 천 리나 된다 하였다.

[D-022] …… 8천 세라느니 : 남화경에 이른바 영춘(靈椿) 8천 년을 묵었다 하였다.

[D-023]진 문공(晉文公) : 춘추 시대 진의 임금. 문공은 시호요, 이름은 중이(重耳), 당시 오패(五覇)의 하나.

[D-024]제 환공(齊桓公) : 춘추 시대 제의 임금. 환공은 시호요, 이름은 소백(小白)이니, 역시 오패의 하나.

[D-025]이용(利用)후생(厚生) : 정덕(正德)과 함께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이른바 삼사(三事)가 된다.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도강록(渡江錄)

 

도강록(渡江錄) 6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1. 도강록 서(渡江錄序)

2. 6 24일 신미(辛未)

3. 25일 임신(壬申)

4. 26일 계유(癸酉)

5. 27일 갑술(甲戌)

6. 28일 을해(乙亥)

7. 29일 병자(丙子)

8. 7 1일 정축(丁丑)

9. 2일 무인(戊寅)

10. 3일 기묘(己卯)

11. 4일 경진(庚辰)

12. 5일 신사(辛巳)

13. 6일 임오(壬午)

14. 7일 계미(癸未)

15. 8일 갑신(甲申)

16. 구요동기(舊遼東記)

17. 관제묘기(關帝廟記)

18.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19. 광우사기(廣祐寺記)

20. 9일 을유(乙酉)

 

 

 

도강록 서(渡江錄序)

 

무엇 때문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행정(行程)과 음()()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 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을까. 강을 건너면 곧 청인(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年號)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을까. 황명(皇明)은 중화인데 우리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상국인 까닭이다. 숭정 17년에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 지 벌써 1 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천 리는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年號)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에 열상외사(洌上外史)는 쓰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곧 우리 성상(聖上 정조(正祖)) 4(1780) 청 건륭(淸乾隆) 45년 이다.

 

 

[C-001]도강록 서(渡江錄序) : 연암의 수택본(手澤本)’에는 열하일기 (熱河日記) ()라 하여 열하일기 첫머리에 두었으나 그릇되었다.

[D-001]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 명의 최후 황제로서, 1635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북경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D-002]열상외사(洌上外史) : 연암의 별호(別號). ‘수택본에는 열상외수(洌上外叟)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의주관(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이 지었다. 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황하로 모여들므로 강으로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대체 이 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그럼에도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중류(中流)의 모래톱마저 흔적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행 중 역원(譯員)들은 다투어 옛 일을 끌어대어 날짜 늦추기를 굳이 청하고 의주 부윤[灣尹]이재학(李在學) 역시 비장(裨將 사신에게 시중드는 관원)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했으나,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하여 장계(狀啓)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꽉 덮였고 빗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소쇄(梳灑)가 끝나자 행장을 정돈하고, 가서(家書)와 모든 곳의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把撥) 편에 부치고 나서, 아침 죽을 조금 마시고, 천천히 관()에 이르렀다. 모든 비장들은 벌써 군복과 전립(戰笠)을 갖추었는데, 머리에는 은화(銀花)운월(雲月)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藍紡紗紬) 전대(纏帶)를 두르고 환도(環刀)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모양이 어떻소.”

하며 떠든다. 그 중에 노 참봉(盧參奉) 이름은 이점(以漸), 상방(上房) 비장 은 첩리(帖裏) 첩리는 방언(方言)으로 철릭[天翼]이라 한다. 비장은 우리 국경 안에서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협수(狹袖)로 바꿔 입는다. 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우람스러워 보인다. 정 진사(鄭進士) 이름은 각(), 상방 비장 가 웃음으로 맞으면서,

 

오늘이야 정말 강을 건너게 되겠죠.”

하자, 노 참봉은 옆에서,

 

이제 곧 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둘에게,

 

옳지 옳아.”

했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관()에 묵어서 모두들 지루한 생각을 품어 훌쩍 날고 싶은 기분이다. 가뜩이나 장마에 강이 불어서 더욱 조급하던 참에 떠날 날짜가 닥치고 보니, 이제는 비록 건너지 않으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 앞 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다.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매 운산(雲山)이 아득하여 인정이 여기에 이르자 서글퍼서 후퇴할 의사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번 구경을 해야지.”

하고,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실로 둘째에 속할 것이고, 그들의,

 

오늘에야 강을 건넌다.”

하면서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곧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일 뿐이다.

역관 김진하(金震夏) 2품 당상관 는 늙고 병이 위중하여 여기서 떨어져 되돌아가게 되자, 정중하게 하직하니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쭝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昌大 연암의 마부(馬夫) 이름)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張福 연암의 하인 이름)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성문(城門)에 못 미쳐 소나기 한 줄기가 동에서 몰려든다. 이에 말을 급히 달려 성 문턱에서 내렸다. 홀로 걸어서 문루(門樓)에 올라 성 밑을 굽어 보니,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섰고, 장복은 뵈지 않는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 옆 한 작은 일각문(一角門)에 버티고 서서 위아래를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윽고 둘은 삿갓으로 비를 가리며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바람나게 걸어온다.

알고 보니 둘이서 저희들 주머니를 털어서 돈 스물 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을 갖고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터에 그렇다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술을 샀다 한다. 나는,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다 대지도 못하옵죠.”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네놈들이 어찌 술을 할 줄 알겠니.”

하고 한바탕 꾸짖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 위안하는 말로,

 

이도 먼 길 나그네에겐 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龍灣)철산(鐵山)의 모든 메를 바라보니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담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니, 무더운 구름이 잠깐 피어 오르고 백마산성(白馬山城) 서쪽 한 봉우리가 갑자기 그 반쪽을 드러냈는데, 그 빛이 하도 푸르러서 흡사 우리 연암서당(燕巖書堂)에서 불일산(佛日山) 뒷봉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싶었다.

 

홍분루 높은 다락 막수 아씨 여의고는 / 紅粉樓中別莫愁

두어 기마 가을 바람에 변방을 달리었네 / 秋風數騎出邊頭

그림배에 실은 퉁소 장고 어이하여 소식 없나 / 畵船簫鼓無消息

애끊고 추억할 제 우리 청남 첫째 골을 / 腸斷淸南第一州

이 시는 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가 일찍이 심양(瀋陽봉천(奉天))으로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내 이제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읊고 나서,

 

이건 국경을 넘는 이가 부질없이 무료한 정서를 읊은 것이겠지. 제 이곳에서 무슨 그림배퉁소장고 따위를 얻어서 놀이를 했단 말인가.”

하고,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에 형경(荊卿)이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할 제 머뭇머뭇 떠나지 않는지라, 태자(太子)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나 의심하고, 진무양(秦舞陽)을 먼저 떠나 보내고자 하였다. 형경은 이에 노하여 태자에게 꾸짖기를,

 

내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동지(同志) 한 분을 기다려 함께 떠나려 함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경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한 듯싶다. 태자가 만일 형경의 마음을 의심할진대 이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리라. 그러나 형경의 기다리는 사람이란 또한 진정코 한 개의 성명을 가진 실재 인물은 아닐 것이다. 대체 한 자루 비수(匕首)를 끼고 불칙한 진()에 들어가려면 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족할지니 어찌 별도로 동지를 구하리오. 다만 차디찬 바람에 노래와 축()으로 애오라지 오늘의 즐거움을 다했을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지은이는 그 사람이 길이 먼 탓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변명하였으니,  멀리라는 말이 참 교묘한 칭탁이다. 그 사람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일 것이요, 그 약속이란 천하에 다시 변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떠남을 당하여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았으리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반드시 초()()삼진(三晉)의 먼 곳이 아닐 것이요, 또 반드시 이 날로써 진으로 들어가기를 기약하여 손잡고 맹세한 일도 없는 듯싶다. 다만 형경이 의중(意中)에 문득 생각나는 어떤 벗을 기다린다 하였을 따름이어늘, 이 글을 적은 이는 또한 형경의 의중(意中)의 벗을 이끌어다가 그 사람하고는 부연 설명하였으나, 그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함을 말함이니, 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서 막연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이라 하여 형경을 위로함이요, 또한 그 사람이 혹시 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릴까 저어하여 그가 오지 못할 것임을 밝혔으니, 이는 형경을 위하여 그 사람이 오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긴 것이다.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 하면, 나는 이미 그를 보았을 것이다. 응당 그 사람의 키는 일곱 자 두 치, 짙은 눈썹에 검은 수염, 볼이 처지고 이마가 날카로웠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줄 알리오마는 이제 내 혜풍(惠風)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안 것이다. 혜풍(惠風)의 이름은 득공(得恭)이요, 호는 영재(泠齋).

정사(正使)의 전배(前排)기치(旗幟)와 곤봉(棍棒) 따위를 앞에 세웠으므로 전배라 한다. 가 설렁이면서 성을 나서니, 내원(來源)과 주 주부(周主簿) 내원(來源)은 나의 삼종제(三從弟), 주 주부(周主簿)의 이름은 명신(命新)인데, 모두 상방의 비장이다. 가 두 줄로 서서 간다. 채찍을 옆에 끼고 몸을 솟구어 안장에 올라 앉으매 어깨가 으쓱하고 머리가 꼿꼿한 품이 미상불 날쌔고 용맹스럽긴 하나, 부대 차림이 너무 너털거리고, 구종들의 짚신이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어달렸으며,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조금 뒤에, 부사(副使)의 행차가 성에 나감을 기다려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하여 가장 뒤떨어져 구룡정(九龍亭)에 이르니, 여기가 곧 배 떠나는 곳이다. 이때, 만윤(灣尹)은 벌써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서장관(書狀官)이 맑은 새벽에 먼저 나가서 만윤과 함께 합동 수사함이 전례이다. 방금 사람과 말을 사열(査閱)하는데, 사람은 성명거주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삼고 금물을 뒤지니, 중요품으로 황금(黃金)진주(眞珠)인삼(人蔘)초피(貂皮 수달피)와 포() 이외에 남은(濫銀)이었고, 영세품(零細品)은 새 것이나 옛 것을 통틀어 수십 종에 달하므로 이루 다 헤일 수 없었다.

구종들에는 웃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지 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에게는 행장을 끌러 본다. 이불 보퉁이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곽이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사람들은 제각기 주워 담으면서 흘깃흘깃 서로 돌아다 보곤 한다. 대체 수색을 아니하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하자면 이렇듯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용만의 장수들은 이 수색보다 앞서 가만히 강을 건너가는 걸 누구로서 금할 재간이 있으리오. 금물이 발견된 경우에 첫째 문에 걸린 자는 중곤(重棍)을 맞히는 한편 물건을 몰수하고 다음 문이면 귀양 보내고 마지막 문에는 목을 베어 달아서 뭇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그 법의 마련인즉 엄하기 짝이 없다. 이번 길에는 원포(原包)조차 반도 차지 못하고 빈 포도 많으니 남은의 있고 없음이야 따질 것도 없었다.

다담상(茶啖床 교자상)은 초라하고 그나마 들어오자 곧 물려 내니 대체 강 건너기에 바빠서 젓갈을 드는 이가 없다. 배는 다섯 척뿐인데 마치 한강(漢江)의 나룻배와 비슷하되 조금 클 뿐이다. 먼저 방물(方物)과 인마를 건네고 정사의 배에는 표자문(表咨文 국서(國書))과 수역(首譯역관 중의 수석)을 비롯하여 상사의 하인들이 함께 타고 부사와 서장관과 그 하인들이 또 한 배에 탔다.

이에 용만의 이교(吏校)방기(房妓)통인(通引)과 평양에서 모시고 온 영리(營吏)계서(啓書)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한다. 상사 마두(馬頭) 순안(順安)의 종으로 이름은 시대(時大). 의 창알(唱謁) 소리가 채 마치지 못해서 사공이 삿대를 들어 선뜻 물에 넣는다.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격한 듯싶었다. 저 통군정(統軍亭)의 기둥과 난간과 헌함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내가 홍군(洪君) 명복(命福)수역(首譯) 더러,

 

자네, 길을 잘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또,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응당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일 것일세.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倫理)와 만물의 법칙(法則)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이 있음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 찾을 게 아니라, 곧 이 물과 언덕 가에 있는 것이란 말야.”

하고 답했다. 홍은 또,

 

외람히 다시 여쭈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또 답했다.

 

옛 글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해지고 도심(道心)은 오직 가늘어질 뿐이라고 하였는데,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기하학(幾何學)에 있어서 한 획의 선()들을 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그 세밀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였은즉 곧 빛이 있고 없음의 가늠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불씨(佛氏)는 다만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지. 그러므로 그 즈음에 선처함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 능할 수 있을 테니 옛날 정()의 자산(子産) 같은 이면 능히 그러할 수 있겠지.”

이렇게 수작하는 사이에 배는 벌써 언덕에 닿았다. 갈대가 마치 짜놓은 듯 빽빽이 들어서서 땅바닥이 뵈지 않는다. 하인들이 다투어 언덕에 내려가서 갈대를 꺾고 빨리 배 위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서 펴고자 하나, 갈대 한 그루가 칼날 같고, 또 검은 진흙이 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정사 이하 모두가 우두커니 갈밭에 서 있을 뿐이다.

 

앞서 건너간 사람과 말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도, 다들,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다. ,

 

방물은 어디 있어.”

해도 역시,

 

모르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멀리 구룡정 모래톱을 가리키면서,

 

우리 일행의 인마가 아직도 거지반 건너지 못하고 저기 개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곧 그들인 것 같습니다.”

한다. 멀리 용만쪽을 바라보매 한 조각으로는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 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그리로 쬐는 햇살이 마치 한 점 샛별 같아 뵌다.

이때 커다란 뗏목이 거센 물살에 떠내려온다. 시대(時大 상사 마두(馬頭)의 이름)가 멀리서,

 

웨이.”

하고 고함친다. 이는 대체 남을 부르는 소리인데, 저들을 높이는 말이다. 한 사람이 뗏목 위에 일어서서,

 

당신들은 어찌 철 아닌 때에 조공(朝貢)을 바치려 중국을 가시나요. 이 더위에 먼 길을 가시려면 오죽이나 고생되겠소.”

한다. 시대는 또,

 

너희들은 어느 골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어디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냐.”

하고 묻는다. 그는 답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봉황성(鳳凰城)에 사는데, 시방 장백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요.”

하고,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뗏목은 어느 새 까마득히 가버렸다.

이 즈음에 두 갈래 강물이 한데 어울려서 중간에 한 섬이 이룩되었다. 먼저 건너간 사람과 말들은 잘못 여기에 내렸으니, 그 거리는 비록 5리밖에 되지 않으나 배가 없어서 다시 건너지 못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에 사공에게 엄명을 내려서 배 두 척을 불러 재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였으나, 사공은,

 

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배로 올라감은 아마 하루 이틀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사신들이 모두 홧증을 내어 배 일을 맡은 용만의 군교(軍校)를 벌하고자 하였으나 딱하게도 군뢰(軍牢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가 없다. 알아본 즉 군뢰 역시 먼저 건너 잘못 중간 섬에 내렸기 때문이다. 부사의 비장 이서귀(李瑞龜)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마두(馬頭)를 호통하여 용만 군교를 잡아들였으나, 그 놈을 엎을 자리가 없으므로 볼기를 반만 까고 말 채찍으로 네댓 번 때리며 끌어내어서 빨리 거행하라고 호통한다. 용만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쥐고 또 한 손으론 고의춤을 잡으면서 연방,

 

예에, 예이

하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배 두 척을 내어 사공이 물에 들어서서 배를 끌었으나, 워낙 물살이 세어서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 가량 후퇴하고 만다. 아무리 호통한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다.

이윽고 배 한 척이 강 기슭을 타고 나는 듯이 빨리 내려오니 이는 군뢰가 서장관의 가마와 말을 거느리고 오는 건데, 장복이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구나.”

하니, 기뻐하는 말이다. 이에 두 놈을 시켜서 행장을 점검해 보니 모두 탈이 없으나, 다만 비장과 역관이 타던 말이 혹은 오고 더러는 오지 않았으므로, 이에 정사가 먼저 떠나기로 했다. 군뢰 한 쌍이 말 타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하고 또 한 쌍은 보행으로 앞을 인도하되 버스럭거리면서 갈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내가 말 위에서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 보니,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두꺼워서 화살을 만들 수는 없으나 붓자루를 만들기에는 알맞을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머리를 나는 새처럼 빠르게 갈대를 뛰어넘어가니 일행이 모두 놀랐다.

10리를 가서 삼강(三江)에 이르니, 강물이 비단결같이 잔잔하다. 이름은 애랄하(愛剌河)이다. 어디서 발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십 리 가량에 불과한데도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음을 보아 서로 근원이 다른 줄을 알겠다. 배 두 척이 보이는데, 꼴이 마치 우리나라 놀잇배와 비슷하나 길이나 넓이는 그만 못하되 제도는 퍽 튼튼하고도 치밀한 편이다. 배 부리는 이는 모두 봉황성 사람으로 사흘 동안을 여기서 기다리노라고 식량이 다하여 굶주렸다고 말한다. 대체 이 강은 너나없이 서로 나다니지 못하는 곳이나, 우리나라의 역학(譯學 역관들의 관계 사업)이나 중국 외교 문서가 불시에 교환할 일이 생기므로 봉성 장군(鳳城將軍봉황성에 주둔한 중국측 장수)이 이에 배를 준비해 둔 것이라 한다. 배 닿는 곳이 몹시 질척질척하다. 나는,

 

웨이.”

하고는 한 되놈을 불렀다. 이는 아까 시대한테서 겨우 배운 말이다. 그 자가 냉큼 상앗대를 놓고 이리로 오므로 나는 얼른 몸을 솟구쳐 그 등에 업히니, 그 자는 히히거리고 웃으면서 배에 들여다 놓고 후유하고 긴 숨을 내뿜으면서,

 

흑선풍(黑旋風) 어머니가 이토록 무거웠다면 아마도 기풍령(沂風嶺)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한다. 주부(主簿) 조명회(趙明會)가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는다. 내가,

 

저 무식한 놈이 강혁(江革)은 몰라도 이규(李逵)는 어찌 알았던고.”

했더니, 조군(趙君),

 

그 말 가운데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애초에 이규의 어머니가 이렇게 무겁다면 비록 이규의 신력(神力)으로도 등에 업은 채 높은 재를 넘지 못했으리라는 의미였고, 또 이규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그는 이렇게 살집이 좋은 분을 만일 저 주린 호랑이에게 주었다면 오죽 좋으랴 하는 의미죠.”

하고, 설명해 준다. 나는

 

제 따위들이 어찌 이처럼 유식한 문자를 쓸 줄 안단 말이오.”

했다. 조군은,

 

옛 말에 눈을 부릅떠도 고무래정() 자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저런 놈 따위를 두고 이름이었건마는, 그는 패관(稗官) 기서(奇書)를 입에 담아둔 상용어(常用語)로 쓰는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관화(官話)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이 애랄하의 너비는 우리 임진강(臨津江)과 비슷하다. 여기서 곧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한다. 우거진 숲은 푸른 장막을 둘렀고, 군데군데 호랑이 잡는 그물을 쳐 놓았다. 의주의 창군(鎗軍)이 가는 곳마다 나무를 찍어서 소리가 온 들판에 울려온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판국이 툭 트이고, 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그 속에 은은히 큰 부락들이 자리 잡고 개와 닭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하기에도 알맞을 것 같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편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곳이 없으니, 의당히 이곳이 거진(巨鎭)이나 웅부(雄府)를 설치함직하거늘, 너나없이 이를 버려두어 아직까지 공지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고구려 때에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이다. () 때에 진강부(鎭江府)를 두었더니, 청이 요동(遼東)을 함락시키매 진강 사람들이 머리 깎기를 싫어하여 혹은 모문룡(毛文龍)에게 가고 혹은 우리나라에도 귀화하였는데, 그 뒤에 우리나라로 온 사람은 모조리 청의 요구에 의하여 돌려보냈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많이 유해(劉海 ()을 저버린 장수)의 난리에 죽었다. 이리하여 공지가 된 지도 벌써 백여 년에 쓸쓸하게도 산 높고 물 맑은 것만 눈에 띌 따름이다.

모든 노둔(露屯) 친 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한다. 역관은 혹 세 사람씩 한 막에, 또는 다섯 사람씩 장() 하나를 쳤고, 역졸(驛卒)과 마부(馬夫)들은 다섯씩 또는 열씩 어울려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 들었다. 밥짓는 연기가 자욱히 서리고, 인마소리 소란한 품이 의젓한 한 마을을 이룩하였다. 용만서 온 장수들 한 패가 저희들끼리 한 곳에 모였는데, 시냇가에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고, 한편에서는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며 나물을 볶고, 밥은 낱낱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니 그들의 살림이 매우 푸짐하다.

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황혼이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놓되,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찍어다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힌다. 군뢰가 나팔을 한 마디 불면 3백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비함이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군뢰란 만부(灣府)에서 가장 기운 센 자를 뽑아온 것인데, 이 일행 하인들 중에서 특히 일도 많이 하고 먹음새도 제일 세다고 한다. 그 자들 차림차림이란 몹시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남색 운문단(雲紋緞)을 받쳐 댄 전립(氈笠)에 털상투의 높은 정수리에는 운월(雲月)이나 다홍빛 상모(象毛)를 걸고, 벙거지 이마에는 날랠용() 자를 붙였으며, 쇠붙이로 오려낸 아청(鴉靑)빛 삼베로 만든 소매 좁은 군복에 다홍빛 무명 배자(褙子)를 입고, 허리엔 남방사주(藍方絲紬) 전대(纏帶)를 띠고, 어깨엔 주홍빛 무명실 대융(大絨 웃옷 위에 걸치는 겉옷)을 걸고, 발에는 미투리를 신었다. 그 꼴이야 말로 어엿한 한 쌍의 사내다. 다만 그 말 탄 꼴을 보면 이른바 반부담(半駙擔)이어서 안장 없이 짐을 실었는가 하면, 타는 것도 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터앉은 셈이다. 등에는 남빛 조그마한 영기(令旗 () 자를 쓴, 군령을 전하는 기())를 꽂고, 한 손엔 군령판(軍令版 군령을 적은 널빤지), 또 한 손에는 붓벼루파리채와 팔뚝만한 마가목(馬家木) 짧은 채찍을 잡고, 입으로는 나팔을 불고, 앉은 자리 밑엔 비스듬히 여남은 개의 붉게 칠한 곤장(棍杖)을 꽂았다. 각방(各房)에서 약간 호령이 있을 때 문득 군를 부르면, 군뢰. 일부러 못 들은 체하다가 연거푸 10여 차례 불러야 무어라 중얼거리며 혀를 차고 하다가는, 금시에 처음 들은 듯이 커다란 소리로 예이 하고 곧 말에서 뛰어내려, 마치 돼지처럼 비틀걸음에 소처럼 식식거리면서 나팔군령판벼루 등속을 모두 한 쪽 어깨에 메고 막대 하나를 끌며 나간다.

한밤중 못 되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위로 장막이 새고 밑에선 습기가 치밀어 피할 곳이 없더니, 이내 날이 개고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드리워 손으로 어루만지기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D-001]당서(唐書) : 후진(後晉) 유후(劉煦)가 지은 당의 역사.

[D-002]말갈(靺鞨) : 당에서 부르던 만주(滿洲)의 별칭. 거기에 말갈족 즉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D-003]산해경(山海經) : 일명씨(逸名氏)의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

[D-004]황여고(皇輿考) : 명 장천복(張天復)이 지은 지리서.

[D-005]역원(譯員) : 통역관. 중국에 사행할 때에는 한학상통사(漢學上通事)와 청학상통사(淸學上通事) 이하 많은 역관이 따랐다.

[D-006]정사(正使) : 사행의 수석. 당시의 정사는 곧 연암의 사종형(四從兄)으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다.

[D-007]파발(把撥) : 공문서를 급히 전하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驛站).

[D-008]은화(銀花) : 정월 대보름날 밤에 등불을 다는 것. 여기에서는 그 모양을 형용하였다.

[D-009]운월(雲月) : 물건 변두리를 구름달 모양으로 곱게 꾸민 것.

[D-010]막수(莫愁) : ()의 석성(石城)에 살던 여인인데, 노래를 잘 불렀다.

[D-011]청남(淸南) : 청천강(淸川江)의 남쪽 평양(平壤)을 이름.

[D-012]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 : 연암의 일계(一系)에 속하는 학자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자요, 영재는 호이다. 다른 본에는 영재(泠齋)라는 두 글자가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연암의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D-013]형경(荊卿) :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자객(刺客)인 형가(荆軻)를 말한다. ()나라에서는 '형경'으로 불렸으며, 연나라 태자 단()의 식객(食客)이 되어 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왕(秦王)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D-014]태자(太子) : 전국 때 연()의 태자 단().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 형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였다.

[D-015]진무양(秦舞陽) : 형가가 진에 들어갈 때에, 지도(地圖)를 갖고 따르던 젊은 협사의 이름.

[D-016]() : 형가가 역수(易水)를 건널 때, 그의 친구 고점리(高漸離)는 축()을 치고, 형가는 박자 맞추어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이라는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D-017]그 사람 : 형가가 기다렸다는 그 사람.

[D-018]() : 지금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지방.

[D-019]() : 지금 중국의 강소(江蘇)호남(湖南)절강성(浙江省) 등지.

[D-020]삼진(三晉) : 당시의 한()()(). 지금의 산서(山西)하남성(河南省) 서남부.

[D-021]부사(副使) : 차석 사신. 당시의 부사는 이조 판서 정원시(鄭元始).

[D-022]서장관(書狀官) : 일행의 행정(行程)에 관한 통계 책임을 맡은 관원. 당시의 서장관은 장령(掌令) 조정진(趙鼎鎭).

[D-023]남은(濫銀) : 팔포(八包)  2천 냥, 3천 냥의 한도를 넘은 은자(銀子).

[D-024]중곤(重棍) : 대곤(大棍)보다 더 큰 곤장.

[D-025]먼저 …… 오른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에서 나온 말이다.

[D-026]()의 자산(子産) : 자산은 전국 시대 정 나라 대부 공손교(公孫僑)의 자.

[D-027]흑선풍(黑旋風) :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역사 이규(李逵)의 별명.

[D-028]강혁(江革) : 후한(後漢) 때 효자. 어려서 난리를 만나 홀어머니를 업고 갖은 곤란을 겪고서 마침내 어머니를 보전하였다.

[D-029]말이오 : ‘조군(趙君) …… 말이오 이 부분은 다른 본에 없고, 다만 일재본 유당본(綏堂本)’에 있을 뿐이다.

[D-030]모문룡(毛文龍) : 명의 장수로, 청병에게 패하여 우리나라 서해 가도(椵島)에 일시 주둔하고서 조선에 원조를 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5일 임신(壬申)

 

 

아침에 가랑비 내리더니 낮에 개다.

각방(各房)과 역관들이 모든 노둔(露屯)한 곳에서 이곳저곳 옷과 이불들을 내어 말린다. 간밤 비에 젖었기 때문이다. 쇄마(刷馬 관용으로 세 낸 말) 마부 중에 술을 갖고 온 자가 있어서 대종(戴宗)선천(宣川)의 종으로 어의(御醫) 변 주부(卞主簿)의 마두이다. 이 한 병을 사서 바치기에 서로 이끌고 시냇가에서 잔을 기울인다. 강을 건넌 뒤로 우리 술은 아주 단념하다가, 이제 갑자기 이 술을 얻어 마시게 되니 술맛이 몹시 좋을 뿐더러 한가히 시냇가에 앉아 마시는 그 멋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낚시질을 하기에, 나도 취한 김에 낚싯줄 하나를 빌려 던지자 곧 조그만 고기 두 마리가 걸리니, 아마 이 시냇고기는 낚시에 단련되지 못한 까닭이리라.

방물이 미처 대어 오지 못하였으므로 또 구련성에서 노숙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6일 계유(癸酉)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개다.

구련성을 떠나 삼십 리를 가서 금석산(金石山) 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다시 삼십 리를 가서 총수(葱秀)에서 노숙하다.

날이 새자 새벽 일찍 안개를 헤치고 길을 떠났다. 상판사(上判事)의 마두 득룡(得龍)이 쇄마 구종들과 함께 강세작(康世爵)의 옛 일을 이야기한다. 안개 속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금석산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형주(荊州) 사람 강세작이 숨었던 곳이오.”

하고 말한다. 그 이야기가 퍽 재미있어 들을 만하다. 대략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세작의 조부 임()이 양호(楊鎬)를 따라 우리나라를 구원하다가 평산(平山) 싸움에 죽고, 그 아버지 국태(國泰)는 청주 통판(淸州通判)을 지내다가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에 죄를 지어 요양(遼陽)으로 귀양오게 되었다. 그때 세작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청이 무순(撫順)을 함락하자 유격장군(游擊將軍) 이영방(李永芳)이 항복하고 말았다. 경략(經略) 양호가 여러 장수를 나눠서 파견할 제 총병(揔兵) 두송(杜松)은 개원(開原)으로, 왕상건(王尙乾)은 무순으로, 이여백(李如栢)은 청하(淸河)로 각각 나오고, 도독(都督) 유정(劉綎)은 모령(毛嶺)으로 나왔다. 이때 국태 부자는 유정의 진중에 있었는데, 청의 복병이 산골짜기에서 몰려나오자, 명의 군사 앞뒤가 연락되지 못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국태도 화살을 맞은 채 쓰러졌다.

세작이 해 저문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산골에 묻고 돌을 모아 표를 했다. 이때(1619)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는 산 위에 진을 쳤고, 조선의 좌우 영장(營將)은 산 밑에 진을 쳤었다. 이에 세작이 원수(元帥)의 진에 투신했다. 그 이튿날 청병(淸兵)이 조선의 좌영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니, 산 위에 있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러자 홍립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청병이 홍립의 군사를 두어 겹이나 에워싸고 도망쳐 온 명병(明兵)을 샅샅이 뒤져내어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세작도 역시 청병에게 붙들려서 묶인 채 바위 아래 앉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를 맡은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그러자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눈짓하여 묶인 것을 풀어 달라고 애걸했으나,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기웃기웃 보기만 하고 손 하나도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세작이 할 수 없어 스스로 등을 돌 모서리에 부비적거려 줄을 끊고 죽은 조선 군사의 옷을 바꾸어 입고 조선 군대 가운데 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이에 요양으로 돌아갔더니, 웅정필(熊廷弼)이 요양을 지키면서, 세작을 불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였다. 이해에 청이 잇달아 개원과 철령(鐵嶺)을 함락하니 정필이 갈리고 설국용(薛國用)이 대신 요양을 지키게 되자, 세작이 곧 설()의 군중에 머물러 있었더니 심양마저 함락되매, 세작이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서 봉황성에 닿아, 광녕(廣寧) 사람 유광한(劉光漢)과 함께 요양의 패잔병을 소집하여 거기를 지켰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광한은 전사하고 세작도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고향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차라리 동쪽나라 조선으로 나가서 저 치발(薙髮)좌임(左衽)의 되놈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드디어 싸움터를 탈출하여 금석산 속에 숨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양구(羊裘)를 불에 구워 나뭇잎에 싸서 먹고 두어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에 압록강을 건너 관서(關西)의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회령(會寧)까지 굴러 들어가서, 조선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고 나이 팔십이 넘어서 죽었다. 그 자손이 퍼져서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오히려 한 집에서 살림하고 있다.”

득룡(得龍)은 가산(嘉山) 사람인데, 열네 살부터 북경(北京)에 드나들어 이번이면 삼십여 차례에 이른다. 화어(華語)에 가장 능통하여 일행의 모든 일에 득룡이 아니면 그 책임 있게 해낼 자가 없다. 그는 이미 가산과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 부()의 중군(中軍)을 지내고 품계가 가선(嘉善 2품 문관 품계)에까지 이르렀다. 사행이 있을 때마다 미리 가산에 통첩하여 그 차지(次知)가속(家屬)을 차지라 한다. 를 감금(監禁)하여 그의 도피함을 막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 위인의 재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 세작이 처음 나왔을 때, 득룡의 집에 묵고 득룡의 조부와 친하여 서로 중국 말과 조선 말을 배웠으며, 득룡이 화어를 그토록 잘함도 그의 가전(家傳)의 학문이라 한다.

날이 저물어 총수에 이르다. 여기는 우리나라 평산(平山)의 총수와 흡사하다. 그제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명 짓는 예가 생각된다. 이로 미루어서 평산의 총수도 이곳과 유사하다 해서 이름을 지은 것이나 아닐까.

 

 

[D-001]상판사(上判事) : 사행이 있을 때, 임시로 잡무의 처리를 맡은 직명.

[D-002]평산(平山) : ‘수택본에는 서흥(瑞興)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7일 갑술(甲戌)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걷혔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길에서 되놈 5~6명을 만났는데, 모두 조그만 당나귀를 탔고 벙거지나 옷이 남루하며 얼굴은 지친 듯 파리하다. 이들은 모두 봉황성의 갑군(甲軍)으로 애랄하(愛剌河)에 수자리 살려 가는데, 대부분 품삯을 받고 팔려 가는 자들이라 한다. 이 일을 보니 우리나라는 염려할 것 없으나, 중국의 변비(邊備)는 너무나 허술하다고 느껴졌다.

마두와 쇄마 구종들이 나귀에서 내리라고 호통치니, 앞서 가던 둘은 곧 내려서 한쪽으로 비켜서 가는데, 뒤에 가는 셋은 내리기를 거부한다.

마두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여 꾸짖으니,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쏘아 보면서,

 

당신네 상전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 있어.”

한다. 마두가 바짝 달려들어 그 채찍을 빼앗아 그 맨 종아리를 후려갈기면서 꾸짖는다.

 

우리 상전께서 받들고 온 것이 어떤 물건이며 싸 갖고 오는 것이 어떤 문서인 줄 아느냐. 저 노란 깃발에 만세야(萬歲爺 청의 황제) 어전상용(御前上用)이라고 써 있지 않느냐. 너희 놈들이 눈깔이 성하다면 황제께서 친히 쓰실 방물인 줄 모른단 말이냐.”

하니, 그제야 그들은 곧 나귀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서,

 

그저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한다. 그 중 한 녀석이 일어나더니 자문(咨文)을 지닌 마두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영감, 제발 참아 주십시오. 쇤네들의 죄는 죽어야 하옵니다.”

한다. 마두들이 모두 껄껄 웃으면서,

 

너희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렷다.”

하니, 그들이 진흙 바닥에 꿇어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니, 이마가 죄다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일행이 모두 크게 웃고,

 

빨리 물러가라.”

호통한다. 나는 다 보고 나서,

 

내 듣기에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러 가지로 요단(鬧端)을 일으킨다더니, 이제 내 눈으로 보건대 과연 앞서 들은 바와 틀림없구나. 아까 한 일은 대체 부질없는 짓이니 이 담엘랑 아예 장난으로 요단을 일으키지 말려무나.”

하니, 모두들,

 

이렇게라도 아니 하면 먼 길 허구한 날을 무엇으로 심심풀이를 합니까.”

한다.

멀리 봉황산(鳳凰山)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하늘 가에 뭉게뭉게 떠도는 여름 구름의 기이한 자태와도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려우나, 다만 맑고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다.

내가 일찍이 우리 서울의 도봉(道峯)과 삼각산(三角山)이 금강산(金剛山)보다 낫다고 한 일이 있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그 동부(洞府)를 엿보면 이른바 1 2천 봉이 그 어느 것이나 기이하고 높고 웅장하고 깊지 않음이 없어서, 짐승이 끄는 듯, 새가 날아가는 듯, 신선이 공중에 솟는 듯, 부처가 도사리고 앉은 듯, 음산하고 그윽함이 마치 귀신의 굴 속에 들어간 것 같다. 내 일찍이 신원발(申元發)과 함께 단발령(斷髮嶺)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일이 있다.

때마침 가없이 파란 가을 하늘에 석양이 비꼈으나, 다만 창공에 닿을 듯한 빼어난 빛과 제 몸에서 우러난 윤기와 자태가 없음을 느낀 나는 미상불 금강산을 위해서 한 번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배를 타고 상류에서 저어내려 오면서 두미강(頭尾江) 어귀에서 서쪽의 한양(漢陽)을 바라보니, 삼각산의 모든 봉우리가 깎은 듯 파랗게 하늘에 솟구쳤다. 엷은 내와 짙은 구름 속에 밝고 곱게 아리따운 자태가 나타나고, 또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남문에 앉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 위의 꽃, 거울 속의 달과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초목의 윤기 나는 기운이 공중에 어림은 왕기(旺氣)라고 하였으니, 왕기(旺氣)는 곧 왕기(王氣)인즉, 이는 우리 서울은 실로 억만 년을 누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였으니, 그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이야말로 당연히 범상한 산세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이 봉황산 형세의 기이하고 뾰족하고 높고 빼어남이 비록 도봉삼각보다 지나침이 있건마는, 어린 빛깔은 한양의 모든 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넓은 들판이 질펀한데 비록 개간은 안 되었지마는, 가는 곳마다 나무 찍어 낸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소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리가 풀섶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책문(柵門)이 여기서 가깝고, 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무시로 이곳에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말을 빨리 몰아 7~8리를 가서 책문 밖에 닿았다. 양과 돼지가 산에 질펀하고 아침 연기는 푸른 빛으로 둘러 있다. 나무 쪽으로 목책(木柵)을 세워서 겨우 경계(經界)를 밝혔으니, 이른바 버들을 꺾어서 울타리를 만든다는 말이 곧 이것인 듯싶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이었고 널판자 문이 굳게 닫혔다.

목책에서 수십 보 떨어져서 삼사(三使)의 막을 치고 조금 쉬려니까 방물이 다 이르렀으므로 책문 밖에 쌓아 두었다. 뭇 되놈들이 목책 안에 늘어서서 구경을 하는데, 대부분 민머리 바람에 담뱃대를 물고 부채를 부치고 있다. 혹은 검은 공단(貢緞) 옷을 입고, 또는 수화주(秀花紬)생포(生布)생저(生苧)석새삼베[三升布]야견사(野繭絲) 옷들을 입었으며 바지들도 역시 그러하다.

허리에는 찬 것이 주렁주렁하게 많았는데, 수놓은 주머니 서너 개씩과 조그만 패도에 모두 쌍아저(雙牙箸)를 꽂았고, 담배쌈지는 호로병(胡盧甁)처럼 생겼는데 거기에다 꽃새 또는 옛사람의 이름난 글귀를 수놓았다. 역관과 모든 마두들이 다투어 목책 가에 나서서 그들과 손을 잡고 반가이 인사를 교환한다. 되놈들은,

 

당신은 언제쯤 한성을 떠났으며, 길에서 비나 겪지 않았나요. 댁에선 모두들 안녕하시고요. 포은(包銀) 돈도 넉넉히 갖고 오셨습니까.”

하고, 사람마다 수작이 거의 한 입에서 나오는 것 같다. 또 다투어 묻되,

 

한 상공(韓相公)과 안 상공(安相公)도 오시나요.”

한다. 이들은 모두 의주 사는 장사꾼들로서, 해마다 연경으로 장사 다녀서 수단이 매우 능란하고 또 저쪽 사정을 익히 아는 자들이라 한다. 그리고 상공이란 장사꾼들끼리 서로 존대하는 말이다. 사행이 갈 때에는 으레 정관(正官)에게 팔포를 내리는 법이다. 정관은 비장역관까지 모두 서른 명이고, 팔포(八包)란 이전부터 나라에서 정관에게 인삼(人蔘) 몇 근씩을 주었었는데, 이를 팔포라 일렀다. 지금은 이것을 나라에서 주지 않고 제각기 은을 갖고 가게 하되, 단지 그 포 수를 제한하여 당상관(堂上官) 3천 냥, 당하관(堂下官) 2천 냥인데, 이것을 지니고 연경에 가서 여러 가지 물건을 바꾸어 이문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가난하여 스스로 갖고 갈 수 없으면, 그 포의 권리를 파는데 송도평양안주(安州) 등의 장사꾼들이 사서 대신 은을 넣어 간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연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므로, 이 포의 권리를 의주 장수들에게 넘겨주어서 물건을 바꿔 오는 것이다. ()이나 임() 같은 장사꾼들은 해마다 연경에 드나들어서 연경을 제집 뜰처럼 여기며, 저쪽 장수들과 서로 뜻이 맞아서 물건 값의 오르내리는 것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물건 값이 날로 오르는 것은 실로 이 무리들 때문이거늘 온 나라가 도대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역관만 나무란다. 그러나 역관도 이들 장사꾼에게 권리를 빼앗기고는 어쩔 도리가 없을 뿐이다. 다른 곳 장사꾼들도 이것이 의주 장사꾼놈들의 농락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마는,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골은 낼 수 있겠으나 무어라 말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요즘 의주 장사꾼들이 잠깐 은신하고 나타나지 않는 것도 역시 흥정하는 술책의 하나다.

책문 밖에서 아침 밥을 먹다. 행장을 정돈한즉, 양편 주머니 중 왼편 열쇠가 간 곳이 없다. 샅샅이 풀밭을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장복을 보고,

 

너는 행장에 유의하지 않고 늘 한눈만 팔더니, 겨우 책문에 이르러서 벌써 이런 일이 생겼구나. 속담에 사흘 길을 하루도 못 가서 늘어진다는 격으로, 앞으로 2천 리를 가서 연경에 이를 즈음이면 네 오장인들 어디 남겠느냐. 내 듣건대, 구요동(舊遼東)과 동악묘(東岳廟)엔 본시 좀도둑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니, 네가 또 한눈을 팔다가는 무엇을 잃어버릴지 모르겠구나.”

하고 꾸짖으니, 장복은 민망하여 머리를 긁으며,

 

쇤네가 인제야 알겠습니다. 그 두 곳을 구경할 적엔 제 두 손으로 눈깔을 꼭 붙들고 있으면, 어느 놈이 빼어갈 수 있으리까.”

한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옳아.”

하고 응락하였다. 대체 장복이란 녀석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처음 길이며 바탕이 몹시 멍청해서, 동행하는 마두들이 흔히 장난으로 놀리면, 그는 곧잘 참말로 곧이 듣고 그러려니 한다. 매사가 다 이러하니 앞으로 먼 길을 데리고 갈 일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民家)들은 대체로 들보 다섯이 높이 솟아 있고 띠 이엉을 덮었는데,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고 네거리가 쭉 곧아서 양쪽이 마치 먹줄 친 것 같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며 벌여 놓은 기명들은 모두 그림 그린 자기(瓷器)들이다. 그 제도가 어디로 보나 시골 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앞서 나의 벗 홍덕보(洪德保),

 

그 규모는 크되, 그 심법(心法)은 세밀하다.”

고 충고하더니, 이 책문은 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앞으로 더욱 번화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여서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보다 하는 생각에 온 몸이 화끈해진다. 그럴 순간에 나는 깊이 반성하되,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시 성미가 담박(淡泊)하여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던 것이 이제 한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보지 못하고 벌써 이런 망녕된 마음이 일어남은 어인 까닭일까. 이는 곧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만일 여래(如來)의 밝은 눈으로 시방 세계(十方世界)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이나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모든 것이 평등하면, 저절로 시기와 부러움이란 없어질 것이다.”

하고 장복을 돌아보며,

 

네가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중국은 되놈의 나라이옵기 쇤네는 싫사와요.”

하고 대답한다. 때마침 한 소경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고 손으로 월금(月琴)을 뜯으면서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하였다.

조금 뒤에 책문이 활짝 열린다. 봉성장군과 책문어사(柵門御史)가 방금 와서 점방(店房)에 앉아 있다 한다. 여러 되놈들이 책문이 메이게 나오며, 다투어 방물과 사복(私卜 개인이 가진 짐짝들)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대체 이곳에 이르러서는 으레 되놈의 수레를 세내어서 짐을 운반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사신이 앉은 곳에 와 보고서는 담뱃대를 물고 힐끗힐끗 치어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희들끼리,

 

저이가 왕자(王子)인가.”

하고, 중얼거린다. ‘왕자란 종반(宗班 임금의 가까운 집안)으로서 정사가 된 이를 이름이다. 그 중에 잘 아는 자가,

 

아니야, 저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가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 어른인데, 지난해에도 왔던 이야.”

하고 부사를 가리키면서,

 

저 수염 좋고 쌍학(雙鶴) 무늬 놓은 관복 입은 이가 얼대인(乙大人)이지.”

하고 서장관을 보고는,

 

산대인(山大人)인데, 모두 한림(翰林) 출신이오.”

한다. ()은 이( 둘째), ()은 삼( 셋째)이요, 한림 출신이란 문관(文官)을 이름이다.

때마침 시냇가에서 왁자지껄하며 무엇을 다투는 소리가 나는데, 말 소리가 새 지저귀는 듯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급히 가 보니, 득룡이 방금 뭇 되놈들과 더불어 예물(禮物)이 많고 적음을 다투고 있다. 대체 예단(禮單)을 나눠 줄 때면 반드시 전례를 좇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봉황성의 교활한 청인들이 반드시 명목(名目)을 덧붙여서 그 가지수를 채워주기를 강요한다. 이에 대한 처리의 잘하고 잘못함은 전혀 상판사(上判事)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에 서투른 풋내기라든지, 또는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 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못하고 달라는 그대로 줄 수밖에 없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에는 벌써 전례가 되기 때문에 기어코 아귀다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신들은 이 묘리를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만 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하여 그 폐단의 유래가 오랜 것이다.

상삼(象三)상판사의 마두이다. 이 방금 예단을 나눠 주려 한다. 되놈 백여 명이 삥 둘러섰다. 그 중 한 청인이 갑자기 커다란 소리로 상삼을 욕한다. 득룡이 수염을 쓱 쓰다듬고 눈을 부릅뜬 채 내달아서 그 앙가슴을 움켜잡고 주먹을 휘두르며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뭇 청인을 둘러보고,

 

이 뻔뻔스럽고 무례한 놈 보아. 지난해에는 대담하게도 어른의 쥐털 목도리를 훔쳐 가고, 또 그 다음해엔 어른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나의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어른의 칼집에 달린 술[]을 끊어가지고 다시 나의 찬 주머니를 훔치려다가 내게 들켜서는 주먹 한 대에 톡톡히 경을 치지 않았나. 그 때는 아주 만단으로 애걸복걸하면서 나더러 목숨을 살려 주신 부모 같은 은인이라 하던 놈이 이번엔 오랜만에 오니까 도리어 어른께서 네 놈의 꼴을 몰라보실 줄 믿고 함부로 떠들고 야단이야.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은 어디 봉성장군에게 끌고 가야지.”

하고 야단한다. 여러 되놈은 모두 용서해 줄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도 수염이 아름답고 옷을 깨끗이 입은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득룡의 허리를 껴안고,

 

형님, 제발 좀 참으시오.”

하고 사정한다. 득룡이 그제야 노여움을 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만일 동생의 안면을 보지 않는다면, 이놈의 콧잔등이를 한 주먹 갈겨서 저 봉황산 밖에 던지고 말 것을.”

하며 으르댄다. 그의 날뛰는 거조는 참으로 우습다. 판사(判事) 조달동(趙達東)이 마침 내 곁에 와 섰기에 아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혼자서만 보기에 아깝더라 하니, 조군이 웃으면서,

 

그야말로 살위봉법(殺威棒法)이군요.”

한다. 조군이 득룡더러,

 

사또께서 이제 곧 책문으로 들어가실 테니, 예단(禮單)을 지체 말고 나눠 주렷다.”

하고 재촉한다. 득룡이 연방,

 

예에, 예이

하며, 짐짓 바쁜 척하고 서둔다. 나는 일부러 그 곳에 머물러 서서 그 나눠주는 물건의 명목(名目)을 상세히 보았다. 매우 괴잡(怪雜)스러운 일들이다.

 

예단물목(禮單物目)

책문수직보고(柵門守直甫古) 2(二名)과 갑군(甲軍) 8(八名)에겐 각각 백지(白紙) 10(十卷), 소연죽(小煙竹) 10(十箇), 화도(火刀) 10, 봉초(封草) 10(十封)씩이고, 봉성장군 2(二員), 주객사(主客司) 1, 세관(稅官) 1, 어사(御史) 1, 만주장경(滿洲章京) 8, 가출장경(加出章京) 2, 몽고장경(蒙古章京) 2, 영송관(迎送官) 3, 대자(帶子) 8, 박씨(博氏) 8, 가출박씨(加出博氏) 1, 세관박씨(稅官博氏) 1, 외랑(外郞) 1, 아역(衙譯) 2, 필첩식(筆帖式) 2, 보고(甫古) 17, 가출보고(加出甫古) 7, 세관보고(稅官甫古) 2, 분두보고(分頭甫古) 9, 갑군 50, 가출갑군(加出甲軍) 36, 세관갑군(稅官甲軍) 16명 등 도합 1 2명에게는 장지(壯紙) 1 56, 백지 4 69, 청서피(靑黍皮) 1 20, 소갑초(小匣草) 5 80, 봉초 8백 봉, 세연죽(細煙竹) 74, 팔면은항연죽(八面銀項煙竹) 74, 석장도(錫粧刀) 37자루[三十七柄], 초도(鞘刀) 2 84자루, 선자(扇子) 2 88자루, 대구어(大口魚) 74마리[七十四尾], 다래[月乃] 가죽 장니(障泥). 7(七部), 환도(環刀) 7(七把), 은장도(銀粧刀) 7자루, 은연죽(銀煙竹) 7, 석장연죽(錫長煙竹) 42, () 40(), () 40(), 화도 2 62, 청청다래[靑靑月乃] 2, 별연죽(別煙竹) 45, 유둔(油芚) 2부씩이다.

 

뭇 되놈은 끽소리 없이 받아 가지고 가버린다. 조군이,

 

득룡의 수단이 참으로 능하단 말요. 그는 지난해에 휘항이며 칼이며 주머니며 잃어버린 일이 도시 없답니다. 공연히 트집을 만들어서 그 중 한 놈을 꺾어놓으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수그러져 서로 돌아보고는 무료히 물러서곤 하더군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던들, 사흘이 가도 끝이 나지 않아 좀처럼 책문 안으로 들어갈 가망이 없으리다.”

한다. 이윽고, 군뢰가 와 엎드리어,

 

문상어사(門上御史)와 봉성장군이 수세청(收稅廳 세관)에 나와 계십니다.”

하고 아뢴다. 이에 삼사(三使)가 차례로 책문으로 들어간다. 장계(狀啓)는 전례대로 의주의 창군(鎗軍)에게 부치고 돌아오다.

한번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고국의 소식은 이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에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섰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향했다.

길 오른편에 초청(草廳) 세 칸이 있어서 어사장군으로부터 아역(衙譯)에 이르기까지 반열을 나눠 의자에 걸터앉고, 수역(首譯) 이하는 그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사신이 이에 이르면 마두가 하인을 호통하여 가마를 머무르고 잠시 말을 쉬어 마치 행차를 중지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재빨리 달려서 그곳을 지나가 버린다. 부사서장관도 이같이 하여 마치 서로 구원하는 듯한 모양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비장역관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지나가는데, 다만 변계함(卞季涵)만이 말탄 채 그냥 지나간다. 말석에 앉은 한 청인이 갑자기 조선말로,

 

여보 잘못이에요. 어른들 몇 분이 여기 앉아 계신데, 외국의 수행원이 어찌 이렇게 당돌하단 말이오. 사신께 빨리 고해서 볼기를 침이 마땅하지.”

하고 고함친다. 그 소리는 비록 거세고 크나 혀가 굳고 목이 꺽꺽하여 마치 어린아이의 어리광부리듯하며 주정꾼이 노닥거리는 것 같다. 이건 곧 호행통관(護行通官) 쌍림(雙林)이라 한다. 수역(首譯)이 얼른 대답하여,

 

이는 우리나라 태의관(太醫官 어의(御醫))인데 처음 길이라 실정을 몰라서 그랬으며, 태의관은 국명(國命)을 받자와 정사를 보호하는 직분이므로, 정사께서도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처지예요. 여러 어른께서는 위로 황제께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체득하시와 깊이 따지지 마시면 더욱 대국의 너그러운 도량을 잘들 인식하겠습니다.”

하매, 그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렇소, 그래.”

한다. 다만 쌍림은 눈을 부라리고 소리 지르는 것이 사나워서 노여움이 아직 덜 풀린 모양이다. 수역이 나를 보고 그만 가자고 눈짓한다. 길에서 변군(卞君)을 만났다. 변군이,

 

큰 욕을 보았어.”

한다. 나는,

 

볼기둔() 자를 잘 생각해 봐.”

하고는 한바탕 웃었다. 이에 그와 나란히 가면서 구경하는데 가끔 감탄의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책문 안의 인가는 20~30호에 지나지 않으나 모두 웅장하고 깊고 높고 통창하다. 짙은 버들 그늘 속에 푸른 주기(酒旗)가 공중에 솟은 채 나부낀다. 변군과 함께 들어가니 웬걸 조선 사람들이 그 속에 그득하다. 맨종아리며 때 낀 살쩍에 걸상을 가로 타고 앉아 떠들던 그들은 우리를 보고 모두 피하여서 밖으로 빠져버린다. 주인이 성을 내어서 변군을 가리키면서,

 

눈치성 없는 저 관인(官人)이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군.”

하고 투덜거린다. 대종(戴宗)이 주인의 등을 두드리며,

 

형님, 잔소리 할 것 없어. 두 어른은 한두 잔만 자시면 곧 나가실 텐데 그 망나니들이 어찌 제멋대로 걸상을 타고 앉았을 수 있겠소. 잠시 피한 것이니 곧 돌아와서, 이미 먹었으면 술값을 치를 것이고, 아직 덜 먹었으면 흉금을 터놓고 즐거이 마실 테니 형님은 마음놓고 우선 넉 냥 술이나 부으시오.”

한즉, 주인은 그제야 웃는 얼굴로,

 

동생, 지난해도 보지 않았소. 이 망나니들이 야로하는 바람에 모두 먹기만 하고는 뿔뿔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니 술값을 어디 가 받겠소.”

한다. 대종은 다시금,

 

형님, 염려마오. 이 어른들이 자시고 곧 일어나시면, 내 다 그들을 이리로 몰고 와서 술을 사게 할 테니.”

한즉, 주인은,

 

그러시오. 두 분이 함께 넉 냥으로 하실까. 각기 넉 냥으로 하실까.”

한다. 대종은,

 

따로따로 넉 냥씩 부으시오.”

하자, 변군이 나무라면서,

 

넉 냥 술을 누가 다 먹는단 말이냐.”

하매, 대종이 웃으면서,

 

넉 냥이란 돈이 아닙니다. 술 무게 말씀입니다.”

한다.

탁자 위에 벌여놓은 술잔이 한 냥으로부터 열 냥까지 제각기 그 그릇이 다르다. 모두 놋쇠와 주석으로 만들어서 빛깔을 내어 은과 같다. 넉 냥 술을 청하면 넉 냥들이 잔으로 부어준다. 술을 사는 이는 그 많고 적음을 계교할 필요가 없다. 대체 그 간편함이 이와 같다. 술은 모두 백소로(白燒露)인데, 맛이 그리 좋지 못하고 취하자마자 금방 깬다.

그 주위의 포치(鋪置)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고르고 단정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구차스럽게 미봉해 놓은 법이 없고, 한 물건도 허투루 어지럽혀 놓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 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제곳에 놓였으며 나무 더미나 거름 무더기까지도 유달리 깨끗하고 맵시 있는 품이 그린 듯싶다. 아아, 이러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이를 수 있겠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연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대체 이용이 되지 않고서는 후생할 수 있는 이는 드물지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오.

정사의 행차가 이미 악()의 성을 가진 사람의 집을 사처로 들였다. 주인은 신장이 일곱 척이요, 기개가 호장하고 성격이 매서운 분이다. 그 어머니는 나이 70세에 가까우나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눈매가 아직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손이 앞에 가득한 원만한 가정이라 한다.

점심 뒤에, 내원 및 정 진사와 함께 구경을 나섰다. 봉황산은 이곳에서 6~7리쯤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면을 보니 더욱 기이하고 뾰족해 보인다. 산속에는 안시성(安市城)의 옛 터가 있어서 성첩(城堞)이 지금껏 남아 있다 하나 그건 그릇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하여, 나는 새라도 오를 수 없을 성싶고 오직 정남의 한 쪽만이 좀 편평하나 주위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음을 보아서, 이런 탄알만한 작은 성에 그 때의 큰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아닐 테니, 이는 아마 고구려 때의 조그마한 보루(堡壘)가 있었던가 싶다.

셋이 함께 큰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들이고 있었다. 옆에 벽돌로 쌓은 우물이 있다. 위는 넓고 돌을 다듬어서 덮고, 양쪽에는 구멍을 뚫어서 겨우 두레박만 드나들게 되었다. 이는 사람이 빠지는 것과 먼지가 들어감을 막기 위함이었고, 또 물의 본성이 음()하기 때문에 태양을 가려서 활수(活水)를 기르는 것이다. 우물 뚜껑 위엔 녹로(轆轤 활차(滑車))를 만들어 양쪽으로 줄 두 가닥이 드리워져 있고, 버들가지를 걸어서 둥근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바가지 같으나 비교적 깊어서 한 편이 오르면 한 편이 내려가서 종일토록 물을 길어도 사람 힘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물통은 모두 쇠로 테를 두르고 조그마한 못을 촘촘히 박은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은 오래 지나면 썩어서 끊어지기도 하려니와 통이 마르면 대나무 테가 저절로 헐거워서 벗겨지므로 이렇게 쇠 테로 메우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물을 길어가지고는 모두 어깨에 메고 다닌다. 이것을 편담(扁擔)이라 한다. 그 법은 팔뚝만큼 굵은 나무를 길이가 한 길쯤 되게 다듬어서 그 양쪽 끝에 물통을 걸되 물통이 땅 위에서 한 자 넉넉히 떨어지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물이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평양에서만 이 법이 있기는 하나, 그것도 어깨에 메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니기 때문에 고샅길 좁은 골목에서는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다. 이렇게 어깨에 메는 법이 훨씬 편리할 것이다. 옛날에 포선(鮑宣)의 아내가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었다 하는 대목을 읽다가 왜 머리에 이지 않고 손에 들었을까 하고 나는 일찍 의심하였더니, 이제 보니 이 나라 부인들은 쪽진 머리가 모두 높아서 물건을 일 수 없음을 알겠다.

서남쪽은 탁 트여서 대체 평원한 산과 질펀한 물이었다. 우거진 버들에 그늘은 짙고, 띠지붕과 성긴 울타리가 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가없이 푸른 방축 위에 소와 양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다. 먼 강 다리에 행인들이 혹은 짐지고 혹은 이끌고 가는 것을 나는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못 요사이 행역(行役) 중의 고단함을 잊어버릴 듯싶다.

동행 두 사람은 저 새로 지은 불당(佛堂)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때마침 말 탄 사람 10여 명이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데 모두 수놓은 안장에 재빠른 말이어서 자못 의기가 양양하다. 그들은 내가 홀로 서있음을 보고 고삐를 돌려 말에서 내려 서로 다투어 내 손을 잡고 정답게 인사를 한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내가 땅에 글자를 써서 필담(筆談)을 시작했으나, 그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비석 둘이 있는데 모두 푸른 돌이다. 하나는 문상어사(門上御史)의 선정비(善政碑), 또 하나는 세관(稅官)아무의 선정비다. 둘은 다 만주 사람이요 넉 자 이름이다. 비문을 지은 이도 역시 만주인이어서 글이나 글씨가 모두 옹졸하다. 다만 비의 제도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공력과 경비가 절약된 것이 본받음직하다. 비석의 양쪽은 갈지 않고, 벽돌로 담을 쌓아 올리되 비 머리가 묻히게 하고, 위에 기와를 얹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비석은 그 속에서 비바람을 피하게 되었으니, 일부러 비각을 세워서 비바람을 가리는 것보다 월등 낫겠다.

비부(碑趺)에 놓인 비희(贔屭 용의 새끼)나 비문의 양쪽 변두리에 새긴 패하(覇夏 동물 이름)가 다 그 털끝을 셀 수 있으리만큼 정교하다. 이는 한갓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세운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미로움과 아담스러운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한결 더 기승을 부린다. 급히 사관으로 돌아와서 북쪽 들창을 높이 떠 괴고 옷을 벗고 누웠다. 뒤뜰이 꽤 넓은데, 파 이랑과 마늘 두둑이 금을 그은 듯 곧고 방정하다. 오이 덕박 덩굴을 올린 시렁이 착잡(錯雜)하게 뜰을 덮고, 울타리 가에 붉고 흰 촉규화(蜀葵花)와 옥잠화(玉簪花)가 방금 한창으로 피었고, 처마 끝엔 석류(石榴) 몇 분(), 수구(繡毬 팔선화(八仙花)) 한 분, 추해당(秋海棠) 두 분이 심어져 있다. 주인 악군(鄂君)의 아내가 손에 대바구니를 들고 나와서 차례로 꽃을 딴다. 아마 저녁 화장(化粧)에 쓰기 위해서이리라.

창대가 술 한 그릇과 초란(炒卵) 한 쟁반을 가지고 와 드리면서,

 

어딜 가셨습니까. 저는 기다리느라고 죽을 뻔했습니다.”

한다. 그 어리광을 짐짓 떨어 제 충성을 나타내려 하는 양은 밉살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나, 술은 내 본시 즐기는 바요, 하물며 달걀 지진 것 역시 먹고 싶던 것임에랴.

이날 30리를 행하였다. 압록강에서 여기가 1 20리다. 여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책문이라 하고, 이곳 사람은 가자문(架子門)’이라 하며, 중국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고 한다.

 

 

[D-001]이곳에 …… 마련 : 봉성에서부터 청인들에게 짐삯을 주고 짐을 실린다. 청인들 중에는 이를 독점하는 조합(組合) 같은 것이 있어서, 오랫동안 여러 가지의 폐해가 많았다.

[D-002]한림(翰林) :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에 대한 통칭으로서, 사관(史館)인 검열을 가리킨다. 문벌이 좋고 글을 잘하는 이들로 충원된다.

[D-003]예단(禮單) : 선물의 목록, 또는 선물. 여기서는 사행이 연로(沿路)의 청국 관원에게 선사하는 선물을 말한다.

[D-004]살위봉법(殺威棒法) : 중국 무술(武術) 십팔기(十八技)의 하나. 곧 도둑의 덜미를 먼저 잡는 방법.

[D-005]예단물목(禮單物目) : 제본(諸本)에 애초에는 이 예단물목을 독립시킨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몇해 전에 어디에서 독립된 본을 보고서 잘 된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므로 이에 적용(摘用)한다.

[D-006]책문수직보고(栅門守直甫古) : 보십구(甫十口)의 오사(誤寫)였으나, 이제 그대로 둔다. 청의 구실 이름. 그들의 기록에는 발습고(撥什庫)로 되었다.

[D-007]백지(白紙) …… 10(十封)씩이고 :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백지 한 권, 소연죽 한 개, 화도 한 개, 봉초 한 봉으로 되어 있다.

[D-008]봉성장군 2 : 청인과 한인 각기 한 사람씩이다.

[D-009]만주장경(滿州章京) : 청의 구실 이름.

[D-010]대자(帶子) : 청의 구실 이름.

[D-011]박씨(博氏) : 청의 구실 이름.

[D-012]필첩식(筆帖式) : 청의 구실 이름.

[D-013]1 2 : 1 80명의 오산인 듯하다.

[D-014]유둔(油芚) : 비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어 붙인 두꺼운 기름종이. ‘주설루본(朱雪樓本)’에는 유단(油單)’으로 되었다.

[D-015]호행통관(護行通官) : 사행을 호송하는 통관. 통관은 청의 구실 이름이다.

[D-016]안시성(安市城) :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치다가 패하여 돌아간 곳.

[D-017]포선(鮑宣) : ()의 강직한 관리. 왕망(王莽)에게 따르지 않았다가 피살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8일 을해(乙亥)

 

 

아침에 안개 끼었다가 늦게 개었다.

아침 일찍이 변군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대종이 멀리 한 군데 큰 장원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통관(通官) 서종맹(徐宗孟)의 집입니다. 황성(皇城)에는 저보다 더 큰 건물이 있었답니다. 종맹은 본래 탐관으로서 불법적인 행위가 많고 조선 사람의 고혈을 빨아서 큰 부자가 되더니, 늘그막에 예부(禮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황성에 있던 집은 몰수당하고, 이것만 그대로 남아 있답니다.”

하고, 또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쌍림(雙林)의 집이옵고, 그 맞은편 대문은 문통관(文通官)의 집이라 하옵니다.”

한다. 대종은 말 솜씨가 극히 예리하고 능숙하여, 마치 오래 익혀 둔 글을 외듯 하였다. 그는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벌써 예닐곱 번이나 연경을 드나들었다 한다.

봉황성에 이르기까지 30리쯤 된다. 옷이 푹 젖고 길 가는 사람들의 수염에는 이슬진 것이 마치 볏모[秧針]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다.

서쪽 하늘 가에 짙은 안개가 문득 트이며 한 조각 파아란 하늘이 살포시 나타난다. 영롱하게 구멍으로 비치는 것이 마치 작은 창에 끼어 놓은 유리알 같다. 잠시 울 안에 안개는 모두 아롱진 구름으로 화하여 그 무한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돌이켜 동쪽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타는 듯한 한 덩이 붉은 해가 벌써 세 발을 올라왔다.

강영태(康永太)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태의 나이는 스물셋인데, 제 말로 민가(民家) 한인(漢人) 민가라 하고 만주족은 기하(旗下)’라 한다. 라 한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서양금(西洋琴)을 잘 친다.

 

글을 읽었느냐?”

고 물으니, 그는,

 

벌써 사서(四書)를 외기는 하였지만 아직 강의(講義)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글 외기 강의하는 것과는 두 길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처음부터 음과 뜻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처음 배우는 이는 그저 사서의 장구(章句)만 배워서 입으로 욀 따름이요, 외는 것이 능숙해진 연후에 다시 스승께 그 뜻을 배우는 것을 강의라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강의하지 못하였더라도 입으로 익힌 장구가 곧 날로 상용하는 관화(官話)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도 중국 말이 가장 쉽다는 것이 또한 일리 있는 말이다.

영태가 살고 있는 집은 정쇄하고 화려하여 여러 가지 기구가 모두 처음 눈에 뜨이는 것이다. 구들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모두 용봉을 그린 담이고, 걸상이나 탁자에도 역시 비단 요를 펴 놓았다. 뜰에는 시렁을 메고 가는 삿자리로 햇볕을 가렸으며, 그 사면에는 누른 밭을 드리웠다. 앞에 석류대 여섯분이 벌여 놓였는데, 그 중에서 흰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또 이상한 나무 한 분이 있는데 잎은 동백(冬栢) 같고 열매는 탱자 비슷하다. 그 이름을 물은즉, ‘무화과(無花果)’라 한다. 열매가 모두 두 개씩 나란히 꼭지가 잇대어 달리었고, 꽃이 없이 열매가 맺는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서장관(書狀官)조정진(趙鼎鎭) 이 찾아와서 서로 나이를 대어 보니, 그가 나보다 다섯 해나 많았다. 이어서 부사정원시(鄭元始) 도 찾아와서 먼 길에 괴로움을 같이한 정분을 말한다. 김자인(金子仁)문순(文淳) ,

 

형이 이 길을 떠나신 줄 알고도 우리나라 지경에서는 몹시 분요해서 미처 찾지 못했소.”

하고 사과한다. 나는,

 

타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알게 되니 가히 이역(異域)의 친구로군요.”

하니,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크게 웃으면서,

 

알지 못하겠군요. 어떤 곳이 이역이 될는지요.”

한다.

부사는 나보다 두 살 위다. 우리 조부님과 부사의 조부님과는 일찍이 동창(同牕)에서 공령문(功令文 과체(科體)의 시문)을 공부하였으므로, 지금도 동연록(同硏錄 동창생끼리 기록한 문헌)이 보존되어 온다. 우리 조부께서 경조당상(京兆堂上)으로 계실 때에, 부사의 조부님께서 경조랑(京兆郞)으로 찾아오셔서, 통자(通刺)하고 서로 지난날 함께 공부한 일을 이야기하시던 걸 내가 그 때 여덟 살인지 아홉 살인지 되어서 옆에서 들었으므로, 세의(世誼)가 있음을 안다.

서장관이 흰 석류를 가리키면서,

 

전에 이런 것을 본 일이 있소.”

하고 묻는다.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소.”

하고 답하니, 서장관은,

 

내가 어렸을 때에 집에 이런 석류가 있었으나 국내 다른 곳에는 없었는데, 대체 이 석류는 꽃만 피고 열매는 맺지 않는다더군요.”

한다.

그들은 대략 이런 한담을 마치고는 일어섰다. 강을 건너던 날에 갈대 우거진 속에서 서로 낯은 알았으나 이야기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고, 또 이틀 동안 책문 밖에서 천막을 나란히 하고 한둔하였으나,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이제 이렇게 이역이니 하고 웃음소리를 붙인 것이다.

점심은 아직도 멀었다 하기에 그냥 기다릴 수 없어서 배고픈 것을 참고 구경을 나섰다. 애초에 오른편 작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사치한가를 몰랐더니, 이제 앞문으로 나가 보니 바깥 뜰이 수백 칸이나 되고, 삼사(三使)와 그 일행들이 다 함께 이 집에 들었건만, 어디에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우리 일행이 거처하고도 남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장수나 나그네들이 끊일 사이 없고, 또 수레가 20여 대나 문이 그득하게 들어온다. 그 수레마다 말과 노새가 대여섯 마리씩이었으나 떠드는 소리라고는 조금도 없고, 깊이 간직하여 텅 빈 것처럼 조용하다.

대개 그 배치해 놓은 것이 제대로 규모가 있어서 서로 거리끼는 일이 없다. 밖으로 보아서 이러하니 속속들이 세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천천히 문 밖으로 나섰다. 그 번화하고 부유함이 비록 연경에 이른들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생각된다. 중국이 이처럼 번영할 줄은 참으로 뜻밖이다. 길 좌우에 즐비하게 늘어선 점방들은 모두 아로새긴 들창 비단을 드리운 문, 그림 그린 기둥, 붉게 칠한 난간, 푸른 성적한 주련(柱聯), 황금 빛깔 현판들이 현란하게 눈부실 지경이다.

그 안에 펼쳐 놓은 것은 모두 그 국내의 진기한 물건들이다. 변문(邊門)의 보잘것없는 이 땅에 이처럼 정치하고 아담한 감식(鑑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또 한 집에 들어가니 그 굉려(宏麗)함이 아까 강씨(康氏)의 집보다도 더 지나치나, 그 제도는 거의 한가지다. 대개 집을 세움에는 반드시 수백 보의 자리를 마련하여 길이나 넓이를 알맞게 하고 사면을 반듯하게 깎아서 측량기로 높고 낮음을 재고, 나침반(羅針盤)으로 방위를 잡은 다음에 대()를 쌓되, 바닥에는 돌을 깔고 그 위에 한 층 또는 두세 층 벽돌을 놓으며, 다시 돌을 다듬어서 대를 장식한다. 그 위에 집을 세우되, 모두 한일 자로 하여 꾸부러지게 하거나 잇달아 붙여 짓지 않는다. 첫째가 내실(內室)이요, 그 다음이 중당(中堂), 셋째는 전당(前堂), 넷째는 외실(外室)이다. 외실 밖은 한길이라 점방으로나 또는 시전(市廛)으로도 쓴다. ()마다 좌우의 곁채가 있으니, 이것이 곧 행랑과 재방(齋房)이다. 대개 집 한 채의 길이는 6(六楹)81012영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매우 넓어서 거의 우리나라의 보통 집 두 칸짜리만하다. 그리고 재목에 따라 길고 짧음을 마련하지 않고 또한 마음대로 넓히고 좁히는 것도 아니요, 꼭 자로 재어서 간살을 정한다. 집은 다 들보를 다섯 혹은 일곱으로 하여 땅바닥에서 용마루까지 그 높이를 따지면, 처마는 한가운데쯤 있게 되므로 물매가 매우 싸서 병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가파르다. 집 좌우와 후면은 부연(婦椽)이 없이 벽돌로 담을 쌓아 올려서 집 높이와 가지런히 하니, 서까래가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다. 동서의 양쪽 담벽에는 각기 둥근 창구멍을 뚫고, 남쪽에는 모두 문을 내고, 그 중 한가운데 한 칸을 드나드는 문으로 쓰되, 반드시 앞뒤가 꼭 맞서게 하였으므로 집이 서너 겹이라면 문은 여섯이나 또는 여덟 겹이나 되어도, 활짝 열어젖히면 안채로부터 바깥채에 이르기까지 문이 똑바로 화살같이 곧다. 그들이 이른바,

 

저 겹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 통하게 하는구나.”

함은, 그 곧고 바름을 이에 견준 말이다.

길에서 동지(同知) 이혜적(李惠迪)역관인데 정3품 당상관이다. 을 만났다. 이군이 웃으면서,

 

궁벽한 시골 구석에 무어 볼 만한 게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연경인들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어요.”

하였더니, 이군은,

 

그렇습니다. 비록 크고 작으며 사치하고 검박한 구별은 있겠지만, 그 규모는 거의 한가집니다.”

한다.

대개 집을 짓는 데 있어 온통 벽돌만을 사용한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넓이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꼭 맞고 두께는 두 치이다. 한 개의 네모진 벽돌박이에서 찍어 낸 벽돌이건마는 귀가 떨어진 것도 못 쓰고, 모가 이지러진 것도 못 쓰며, 바탕이 뒤틀린 것도 못 쓴다. 만일 벽돌 한 개라도 이를 어기면 그 집 전체가 틀리고 만다. 그러므로 같은 기계로 찍어냈건마는 오히려 어긋난 놈이 있을까 염려하여, 반드시 곡척(曲尺)으로 재고 자귀로 깎고 돌로 갈아서, 힘써 가지런히 하여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 금으로 그은 듯싶다. 그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감( )( ) ()가 이룩된다.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이기어 붙이되 초지장처럼 엷으니 이는 겨우 돌 사이가 붙을 정도여서 그 흔적이 실밥 같아 보인다. 회를 이기는 법은 굵은 모래도 섞지 않고 진흙과 기()한다. 모래가 굵으면 어울리지 않고 흙이 진하면 터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검고도 부드러운 흙을 회와 섞어 이기어 그 빛깔이 거무스름하여 마치 새로 구워 놓은 기와와 같다. 대체 그 특성은 진흙도 쓰지 않고 모래도 쓰지 않으며, 또 그 빛깔이 순수함을 취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어저귀(()의 일종) 따위를 터럭처럼 가늘게 썰어서 섞는다. 이는 우리나라 초벽하는 흙에 말똥을 섞는 것과 같으니 질겨서 터지지 않도록 함이요, 또 동백기름을 타서 젖처럼 번드럽고 미끄럽게 하여 떨어지고 터지는 탈을 막는다.

기와를 이는 법은 더구나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모양은 마치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과 같고 그 크기는 두 손바닥만 하다. 보통 민가에는 원앙와(鴛鴦瓦 짝기와)를 쓰지 않으며, 서까래 위에는 산자를 엮지 않고 삿자리를 몇 잎씩 펼 뿐이요, 진흙을 두지 않고 곧장 기와를 인다. 한 장은 엎치고 한 장은 젖히어 자웅으로 서로 맞추어 틈사이는 한층한층 비늘진 데까지 온통 회로 발라 붙여 때운다. 이러니까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저절로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달라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아래가 허하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크고 지나치게 굽기 때문에, 저절로 빈 데가 많게 되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흙이 내리 누르니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기고, 젖은 것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진 곳이 물러나며 틈서리가 생기게 된다.

이리하여 바람이 들며, 비가 새고, 새가 뚫으며, 쥐가 숨으며, 뱀이 서리고, 고양이가 뒤적이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집을 세움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비단 높은 담 쌓기만이 아니라 집 안팎을 헤아리지 않고 벽돌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도 눈가는 곳마다 반듯반듯 바둑판을 그린 것처럼 쌓았다.

집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여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이러므로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새고양이 같은 놈들의 걱정이야 있을 수 없다. 가운데는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이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도 들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이,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벌써 이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 황새라 하고 사()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지지,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영고탑(寧古塔)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읍루(挹婁)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위씨(衛氏)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의 탁극탁이 씀),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성의 둘레는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 모서리가 반듯하여 네모 말[]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 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식후에 변계함과 정 진사와 함께 먼저 떠났다. 강영태(康永泰)가 문 밖에까지 나와서 읍()하며 전송하는데 자못 석별(惜別)의 뜻이 보이며, 또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될 터인즉 책력 한 벌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청심환(淸心丸) 한 개를 내어 주었다.

한 점포 앞을 지나다 보니, 한쪽에 금으로 ()’ 자를 쓴 패()가 걸려 있는데, 그 곁줄에는 유군기부당(惟軍器不當 군기만은 전당잡지 않는다는 뜻)’이란 다섯 글자가 씌었으니, 이것은 전당포(典當舖).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 두셋이 그 안에서 뛰어 나와서 길을 막아 서며, 잠깐만 땀을 들이고 가라 한다. 이에 모두들 말에서 내려 따라 들어가 본즉, 그 모든 시설이 아까 강씨의 집보다도 더 훌륭하다. 뜰 가운데 큰 분()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속에는 서너 대의 연()이 심어져 있으며, 오색 붕어를 기르고 있다. 한 청년이 손바닥만 한 작은 비단그물을 가져와서 작은 항아리 쪽으로 가더니, 빨간 벌레 몇 마리를 떠다가 분 속에 띄운다. 그 벌레는 게알[蟹卵]같이 작으며, 모두 꼬물꼬물 움직인다. 청년이 다시 부채로 분의 가장자리[盆部]를 두들기면서 고기를 부르니, 고기가 모두 물 위로 나와서 물을 머금고 거품을 뿜는다.

마침 때가 한낮이라 불볕이 내리쬐어서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드디어 길을 떠났다. 정 진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나는 정 진사에게 물었다.

 

그 성 쌓은 방식이 어떠한가.”

벽돌이 돌만 못한 것 같애.”

하고 답한다. 나는 또,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우리나라의 성곽제도[城制]는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잘못일세. 대저 벽돌로 말하면, 한 개의 네모진 틀에서 박아 내면 만 개의 벽돌이 똑 같을지니, 다시 깎고 다듬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아궁이 하나만 구워 놓으면 만 개의 벽돌을 제 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고 어쩌고 할 수고도 없을 게 아닌가. 다들 고르고 반듯하여 힘을 덜고도 공이 배나 되며,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운 것이 벽돌만한 게 없네.

이제 돌로 말하자면, 산에서 쪼개어 낼 때에 몇 명의 석수(石手)가 들어야 하며, 수레로 운반할 때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이미 날라다 놓은 뒤에 또 몇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며, 다듬어내는 데까지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할 것이요, 쌓을 때도 돌 하나하나를 놓기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야 하며, 이리하여 언덕을 깎아내고 돌을 입히니, 이야말로 흙의 살에 돌옷을 입혀 놓은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뻔질하나 속은 실로 고르지 못한 법일세. 돌은 워낙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못한 것이기에, 조약돌로 그 궁둥이와 발등을 괴며, 언덕과 성과의 사이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서 채우므로, 장마를 한 번 치르고 나면 속이 텅 비고 배가 불러져서, 돌 한 개가 튀어나 빠질 경우 그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무너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요, 또 석회의 성질이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붙지 않는 것일세.

내가 일찍이 차수(次修)와 더불어 성제를 논할 때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벽돌이 굳다 한들 어찌 돌을 당할까보냐 하자, 차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와 돌 하나를 두고 한 말이오 하더군 그래. 이는 가위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일세. 대개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므로 석회를 많이 쓰면 쓸수록 더 터져 버리며, 돌을 배치하고 들떠 일어나는 까닭에 돌은 항상 외톨로 돌아서 겨우 흙과 겨루고 있을 따름이네. 벽돌은 석회로 이어 놓으면, 마치 어교(魚膠)가 나무에 합하는 것과 붕사(鵬砂)가 쇠에 닿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한 뭉치로 엉켜져 굳은 성을 이룩하므로,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다 비할 수 없겠지마는,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또한 벽돌 만 개의 단단함을 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하고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겠지.”

하였다. 정 진사는 방금 말등에서 꼬부라져 거의 떨어질 것 같다. 그는 잠든 지 오래된 모양이다.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지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웬 잠을 자고 듣지 않아.”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정 진사가 웃으며,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시냇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이다. 오도하(五渡河)까지 5리만큼씩 돈대가 하나씩 있다. 이른바 두대자(頭臺子)이대자(二臺子)삼대자(三臺子)라는 것은 모두 봉대(烽臺 봉화를 놓는 곳)의 이름이다. 벽돌을 성처럼 쌓아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마치 필통(筆筒)같이 동그랗다. 대 위에는 성첩(城堞)이 시설되었는데, 형편없이 헐어진 대로 내버려 두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길가에 간혹 널을 돌 무더기로 눌러 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 두어서 나무 모서리가 썩어 버린 것도 있다. 대개 뼈가 마르기를 기다려서 불사른다 한다.

흔히 길 옆에 무덤이 있는데, 위가 뾰족하고 떼를 입히지 아니하였으며, 백양(白楊)을 많이 줄지어 심었다.

도보(徒步)로 길 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적다. 걷는 이는 반드시 어깨에 포개(鋪盖) 침구를 포개라 한다 를 짊어졌다. 포개가 없으면 여점에서 재우지 않으니, 이는 도둑이 아닌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 길가는 자는 눈의 정력을 기르고자 함이다. 말을 탄 이는 모두 검은 비단신을 신고, 걷는 이는 대체로 푸른 베신을 신었는데, 신바닥에는 모두 베를 수십 겹이나 받혀 댄 것이다. 미투리나 짚신은 보지를 못했다.

송참(松站)에서 묵다. 이 곳은 설리참(雪裏站)이라고도 하고, 또 설유참(雪劉站)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 70리를 갔다. 누가 말했다.

 

이곳은 옛날 진동보(鎭東堡)이다.”

 

[D-001]경조당상(京兆堂上) : 경조는 한성부의 별칭. 한성부의 당상관을 말함.

[D-002]당서(唐書) : 유후(劉煦) 구당서(舊唐書), 구양수(歐陽修)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D-003]동이(東彝) : 어떤 본에는 동이(東夷)로 되었으나 그릇되었다. 연암은 이()는 야만족이라 하여 이()를 썼다.

[D-004]한서(漢書) : 동한(東漢, 後漢) 반고(班固)가 지은 전한(前漢)의 역사서.

[D-005]금사(金史) : ()의 탁극탁(托克托) 등이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D-006]문헌통고(文獻通考) : 원의 마단림(馬端臨)이 지었다.

[D-007]차수(次修) : 박제가(朴齊家)의 자. 또는 재선(在先)수기(修其)라고도 하였다. 연암의 제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9일 병자(丙子)

 

 

맑게 개다. 배로 삼가하(三家河)를 건넜다. 배가 마치 말구유같이 생겼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고, 상앗대도 없이 양편 강언덕에 아귀진 나무를 세우고 큰 밧줄을 건너질렀다. 그 줄을 따라가면 배가 저절로 오가기 마련이다. 말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다시 배로 유가하(劉家河)를 건너 황하장(黃河庄)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낮이 되니 극도로 더웠다. 말 탄 채로 금가하(金家河)를 건너니, 여기가 이른바 팔도하(八渡河)이다. 임가대(林家臺)범가대(范家臺)대방신(大方身)소방신(小方身) 등지는 5리나 10리마다 마을이 즐비하고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졌으며, 때마침 올기장이 누렇게 익었고 옥수수 이삭이 한창 패었는데, 그 잎을 모조리 베었으니, 이는 말과 노새의 먹이로 쓰기도 하고, 또는 옥수숫대가 지기(地氣)를 오로지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관제묘(關帝廟)가 있고, 몇 집만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벽돌 굽는 큰 가마가 있어서 벽돌을 굽는다. 벽돌을 틀에 박아 내어 말리는 것이며, 전에 구워 놓은 것, 새로 구울 것들이 곳곳에 산무더기처럼 쌓였으니, 대개 벽돌이 무엇보다도 일용에 요긴한 물건인 까닭이다.

전당포에서 잠깐 쉬려는데, 주인이 중간방으로 맞이하여 더운 차() 한 잔을 권한다. 집안에는 진귀한 물건이 진열되었다. 시렁의 높이는 들보에 닿고, 그 위엔 전당 잡은 물건을 차례로 얹어 놓았다. 모두들 옷이다. 보자기에 싼 채 종이쪽을 붙여서 물건 임자의 성명별호(別號)상표(相標 얼굴의 특징을 기록한 것)거주(居住) 등을 적고는 다시,

 

모년모월모일에 무슨 물건을 무슨 자호(字號) 붙인 전당포에다 친히 건너주었다.”

라고 썼다. 그 이자는 10분의 2를 넘는 법이 없고, 기한을 지난 채 한 달이 넘으면 물건을 팔아 버릴 수 있다. 금자(金字)로 쓴 주련(柱聯),

 

홍범의 구주에는 먼저 부를 말하였고 / 洪範九疇先言富

대학의 십장에도 반은 재를 논하였는데 / 大學十章半論財

라는 것이 있다. 옥수숫대로 교묘하게 누각처럼 만들어, 그 속에 풀벌레 한 마리를 넣어 두고 그 우는 소리를 듣는다. 처마 끝에는 조롱을 달아매고 이상한 새 한 마리를 기른다.

이날 50리를 행하여 통원보(通遠堡)에서 묵다. 여기가 곧 진이보(鎭夷堡)이다.

 

 

[D-001]홍범(洪範) : 홍범은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국가의 기본 법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 1일 정축(丁丑)

 

 

새벽에 큰비가 내려 떠나지 못하다.

정 진사주 주부변군내원조 주부(趙主簿) 학동(學東)상방의 건량판사(乾粮判事)이다. 등과 더불어 투전판을 열어서 소일도 할 겸 술값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에 솜씨가 서툴다고 한몫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라고 한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화가 나긴 하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옆에 앉아서 지고 이기는 구경이나 하고 술은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미상불 해롭잖은 일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 온다. 하도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리라.”

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하여 부엌에 들어가 보니, 나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추하다. 나를 보고,

 

아저씨, 평안하세요.”

한다. 나는,

 

주인께서도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

하며 답하고는, 짐짓 재를 파헤치는 체하면서 그 부인을 곁눈질해 보았다. 머리쪽지에는 온통 꽃을 꽂고, 금비녀 옥귀고리에 분연지를 살짝 바르고, 몸에는 검은 빛 긴 통바지에 촘촘히 은단추를 달았으며, 발엔 풀나비를 수놓은 한 쌍의 신을 신었다. 대개 만주 여자인 듯싶다. 다리에는 붕대를 감지 않고 발에는 궁혜(弓鞋)를 신지 않았음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주렴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온다. 나이나 얼굴이나가 20여 세쯤 되어 보인다. 그가 처녀임은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서 위로 틀어올린 것으로 보아서 분별할 수 있다. 생김새는 역시 억세고 사나우나, 다만 살결이 희고 깨끗하다. 쇠양푼을 갖고 와서 퍼런 질그릇을 기울여 수수밥 한 사발을 수북하게 퍼담고, 양푼의 물을 부어서 서쪽 벽 아래 놓여 있는 교의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또 두어 자 길이나 되는 파뿌리를 잎사귀째 장에 찍어서 밥과 같이 먹는다. 목에는 달걀만 한 혹이 달려 있다. 그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얼굴엔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아마 해마다 조선 사람을 보아 와서 아주 예사로 낯익었기 때문이리라.

뜰은 넓이가 수백 칸이나 된다. 장마비에 수렁이 되어 있다. 시냇가 물에 씻긴 조약돌이, 마치 바둑돌이나 참새알 같은 것이 애초에는 쓸데없는 물건이었지마는, 그 모양과 빛이 비슷한 것을 골라서 문간에 아롱진 봉새 모양으로 무늬지게 깔아서 수렁을 막았다. 그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닭은 모두 꼬리와 깃을 뽑고 두 겨드랑 밑의 털까지도 뜯어 버리어, 이따금 고깃덩이만 남은 닭이 절름거리면서 다닌다. 이는 빨리 키우는 한 방법이요, 또 이가 이는 것을 예방함이다. 여름이 되면 닭에 검은 이가 일어서, 꼬리와 날개에 붙어오르면 반드시 콧병이 생기며, 입으로는 누른 물을 토하고 목에는 가래 소리가 난다. 이것을 계역(雞疫)이라 한다. 그러므로 미리 그 꼬리와 깃을 뽑아서 시원한 기운을 통해 준다 한다. 꼴은 하도 추악해서 차마 바로 볼 수 없다.

 

 

[D-001]일부러 …… 보니 : 이 부분은 다른 본에 빠졌고, ‘수택본 일재본에서만 보인다.

[D-002]재를 …… 보았다 : 이 구절은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다른 본들에는, “그 복식의 제도를 구경하였다.”로 되었다.

[D-003]이는 빨리 …… 준다 한다 : 이 부분은 모든 본에 빠진 것을, ‘일재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일 무인(戊寅)

 

 

새벽에 큰비가 내리다. 늦게 개었다.

앞 시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으므로 떠나지 못했다. 정사가 내원과 주 주부를 시켜 앞 시내에 나가서 물을 보고 오라 한다. 나도 따라 나섰다. 몇 리를 가지 않아서 큰 물이 앞을 가로막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서 물속에 들어가 그 얕고 깊음을 재게 하니, 열 발자국도 못 가서 어깨가 잠긴다. 돌아와서 수세를 알리니, 정사가 걱정하여 역관과 각방(各房)의 비장들을 모조리 불러서 각기 물 건널 계책을 말하게 한다. 부사와 서장관 역시 참석하였다. 부사가,

 

문짝과 수레의 바탕을 많이 세내어 떼를 매어서 건너는 게 어떠하리까.”

하니, 주 주부가,

 

, 참 좋은 계책이올시다.”

한다. 수역관이,

 

문짝이나 수레를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없으리다. 그런데 이 근처에 집 지으려고 둔 재목이 십여 간분 있으니 그것을 세낼 수는 있으나, 단지 이를 얽어맬 칡덩굴을 얻기 어려울 듯합니다. ”

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내가,

 

무어, 뗏목을 맬 것까지야 있소. 내게 한두 척이 있는데, 노도 있고 상앗대도 갖추었으나 다만 한 가지가 없소.”

하니, 주 주부가,

 

그럼, 없는 게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다만 그를 잘 저어갈 사공이 없소.”

한즉,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는다.

주인은 워낙 추솔하고 멍청하여 눈을 부릅뜨고도 고무래 정() 를 모를 무식쟁이였지만, 책상 위에는 오히려 양승암집(楊昇菴集) 사성원(四聲猿) 같은 책들이 놓여 있고, 길이 한 자 넘어 보이는 정남색(正藍色) 자기병에 조남성(趙南星)의 철여의(鐵如意)가 비스듬히 꽂혀 있으며, 운간(雲間) 호문명(胡文明)이 만든 조그만 납다색(蠟茶色) 향로며 그 밖의 교의탁자병풍장자(障子) 등이 모두 아치(雅致)가 있어서 궁벽한 시골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주인의 살림살이는 좀 넉넉한가보오.”

하고 물은즉, 그는,

 

“1년 줄곧 부지런히 일해 봐야 기한을 면하지 못한답니다. 만일 귀국 사신의 행차가 없다면, 아주 살림살이는 막연할 형편입니다.”

한다. 나는 또,

 

아들과 딸을 몇이나 두었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도둑놈 하나만 있으나, 아직 여의지 못했답니다.”

하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이오. 도둑놈 하나라니.”

, 도둑도 딸 다섯 둔 집에는 들지 않는다 하오니, 어찌 집안의 좀도둑이 아니옵니까.”

한다.

오후에 문을 나서 바람을 쐬었다. 수수밭 가운데서 별안간 새총 소리가 난다. 주인이 급히 나와 본다. 밭 속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한 손에 총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돼지 뒷다리를 끌고 나와 주인을 흘겨 보고,

 

, 이 짐승을 내놓아서 밭에 들여 보내지.”

하고 노한 음성을 낸다. 주인은 다만 송구한 기색으로 공손히 사과하여 마지않는다. 그 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끌고 가버린다. 주인은 자못 섭섭한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서 거듭 한탄만 한다. 내가,

 

그 자가 잡아간 돼지는 뉘 집에서 먹이던 돼지인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거죠.”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잘못 남의 밭에 들어갔기로서니 수숫대 하나 다친 것이 없는데, 그 놈이 왜 함부로 돼지를 잡아 죽이지요. 주인은 당연히 그 자에게 돼지 값을 물려야 하지 않겠소.”

한즉, 주인은,

 

값을 물리다니요, 돼지우리를 잘 단속하지 못한 것이 이쪽의 잘못이죠.”

한다.

대개 강희제(康熙帝 청의 제4대 황제)가 농사를 매우 소중히 여겨서, 그 법에 마소가 남의 곡식을 밟으면 갑절로 물어 주어야 하고, 함부로 마소를 놓는 자는 곤장 60대를 맞히며, 양이나 돼지가 밭에 들어간 것을 밭 임자가 보면, 곧 그 짐승을 잡아가도 주인은 감히 내가 주인인 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만 수레가 다니는 자유는 막지 못한다. 그리하여, 길이 수렁이 되면 밭이랑 사이로도 수레를 끌고 들어가기 쉬우므로, 밭 임자는 항상 길을 잘 닦아서 밭을 지키기에 힘쓴다고 한다.

마을 가에 벽돌가마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마침 거의 굳어서, 흙을 아궁이에 이겨 붙이고 물을 수십 통 길어다가 잇달아 가마 위로 들어붓는다. 가마 위가 조금 움푹 패어서 물을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 가마가 한창 달아서 물을 부으면 곧 마르고 하므로 가마가 달아서 터지지 않게 물을 붓는 것 같다. 또 한 가마는 벌써 구워서 식어졌으므로, 방금 벽돌을 가마에서 끌어내는 중이다. 대체로 이 벽돌가마의 제도가 우리나라의 기와가마와는 아주 다르다. 먼저 우리나라 가마의 잘못된 점을 말해야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와가마는 곧 하나의 뉘어 놓은 아궁이여서 가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애초에 가마를 만드는 벽돌이 없기 때문에 나무를 세워서 흙으로 바르고 큰 소나무를 연료로 삼아서 이를 말리는데, 그 비용이 벌써 수월찮다. 아궁이가 길기만 하고 높지 않으므로,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한다.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하므로 불 기운이 힘이 없으며, 불 기운이 힘이 없으므로 반드시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한다.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하므로 불길이 고르지 못하고, 불길이 고르지 못하므로 불에 가까이 놓인 기와는 이지러지기가 일쑤이며, 먼 데 놓인 것은 잘 구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굽거나 옹기를 굽거나를 무론하고 모든 요업(窯業)의 제도가 다 이 모양이며, 그 소나무를 때는 법 역시 한가지니, 송진의 불광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세다. 그러나 소나무는 한번 베면 새 움이 돋아나지 않는 나무이므로, 한번 옹기장이를 잘못 만나면 사방의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된다. 백년을 두고 기른 것을 하루아침에 다 없애 버리고, 다시 새처럼 사방으로 소나무를 찾아서 흩어져 가버린다. 이것은 오로지 기와 굽는 방법 한 가지가 잘못되어서, 나라의 좋은 재목이 날로 줄어들고 질그릇점 역시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다.

이곳의 벽돌가마를 보니, 벽돌을 쌓고 석회로 봉하여 애초에 말리고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고, 또 마음대로 높고 크게 할 수 있어서 그 꼴이 마치 큰 종()을 엎어 놓은 것 같다. 가마 위는 못처럼 움푹 패게 하여 물을 몇 섬이라도 부을 수 있고, 옆구리에 연기 구멍 네댓을 내어서 불길이 잘 타오르게 되었으며, 그 속에 벽돌을 놓되 서로 기대어서 불꽃이 잘 통하도록 되어 있다. 대개 요약해 말한다면, 그 묘법은 벽돌을 쌓는 데 있다 하겠다. 이제 나로 하여금 손수 만들게 한다면 극히 쉬울 듯싶으나, 입으로 형용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정사가,

 

그 쌓은 것이 () 와 같던가.”

하고 묻기에, 내 대답하되,

 

그런 것 같기도 하오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니, 변 주부가,

 

그러면 책갑(冊匣)을 포개 놓은 것 같습디까.”

하기에, 나는 또,

 

그런 듯도 하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을 걸.”

하였다.

대략 그 쌓는 법이, 벽돌을 눕히지 않고 모로 세워서 여남은 줄을 방고래처럼 만들고, 다시 그 위에다 벽돌을 비스듬히 놓아서 차차 가마 천장에 닿게까지 쌓아올린다. 그러는 중에 구멍이 저절로 뚫어져서 마치 고라니의 눈같이 된다. 불기운이 그리로 치오르면 그것이 각기 불목이 되어, 그 수없이 많은 불목이 불꽃을 빨아들이므로 불기운이 언제나 세어서, 비록 저 하찮은 수수깡이나 기장대를 때도 고루 굽히고 잘 익는다. 그러므로 터지거나 뒤틀어지거나 할 걱정은 저절로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옹기장이는 먼저 그 제도를 연구하지 않고, 다만 큰 솔밭이 없으면 가마를 놓을 수 없다고만 한다. 이제 요업(窯業)은 금할 수 없는 일이요, 소나무 역시 한이 있는 물건인즉, 먼저 가마의 제도를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게 되면 양편이 다 이로울 것이다. 옛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과 노가재(老稼齋)가 모두 벽돌의 이로움을 논하였으되, 가마의 제도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수깡 3백 줌이면 한 가마를 구울 수 있는데, 벽돌 8천 개가 나온다.”

한다. 수수깡의 길이가 길 반이고, 굵기가 엄지 손가락만큼씩 되니, 한 줌이라야 겨우 너덧 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즉, 수수깡을 때면 불과 천 개 남짓 들여서 거의 만 개의 벽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루 해가 몹시 지루하여 한 해[]인 듯싶고,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더욱 심해져서 졸려 견딜 수 없던 차에, 곁방에서 투전판이 벌어져 떠들고 야단들이다. 나도 뛰어가서 그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 닢을 땄으므로, 술을 사서 실컷 마시니 가히 어제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다. 내가,

 

그래도 불복인가.”

하니, 조 주부와 변 주부가,

 

요행으로 이겼을 뿐이죠.”

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 하자고 조르나, 나는,

 

뜻을 얻은 곳에 두 번 가지 말아야 하느니,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라.”

하고 그만두었다.

 

 

[D-001]양승암집(楊昇菴集) : 명의 학자 양신(楊愼)의 문집이다. 승암은 그의 호.

[D-002]사성원(四聲猿) : 명 서위(徐渭)가 지은 전기(傳奇).

[D-003]조남성(趙南星) : 명 희종(明熹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로서, 위충현(魏忠賢)에게 몰리어 대주(代州)로 귀양가서 죽었다.

[D-004]철여의(鐵如意) : 쇠로 만든 여의. 여의는 손에 지니는 완상물의 일종.

[D-005]운간(雲間) :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의 옛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일 기묘(己卯)

 

 

새벽에 큰비가 내리다가 아침과 낮에는 화창하게 개었다. 밤들어 다시금 큰비가 내려서 이튿날 새벽까지 멎지 않으므로 또 묵다.

아침에 일어나 들창을 여니, 지리하던 비가 깨끗이 개고 맑은 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며 날씨가 청명한 것으로 보아서, 낮에는 더울 것 같다. 석류꽃이 땅에 가득히 떨어져서 붉은 진흙으로 변해 버렸다. 수구화는 이슬에 함빡 젖고, 옥잠화는 눈덩이처럼 머리를 쳐든다.

문 밖에서 퉁소피리징 등의 소리가 나기에 급히 나가 보니, 신행가는 행차다. 채색 그림 그린 사초롱[紗燈籠]이 여섯 쌍, 푸른 일산(日傘)이 한 쌍, 붉은 일산이 한 쌍이요, 퉁소 한 쌍, 날라리 한 쌍, 피리 한 쌍, 징경 한 쌍이 있고, 가운데 푸른 가마 한 채를 교군 넷이 메고 간다. 사면에 유리를 끼어서 창을 내었고, 네모에는 색실을 드리워서 술을 달았다. 가마 한 허리에 통나무를 받혀서 푸른 밧줄로 가로 묶고, 그 통나무 앞뒤로 다시 짧은 막대를 가로질러 얽어매어 그 양쪽 머리를 네 사람이 메었는데, 여덟 발자국이 발맞추어 한 줄로 가므로, 흔들리거나 출렁거리거나 하지 않고 그저 허공에 떠서 가는 폭이다. 그 법이 아주 묘하다. 가마 뒤에 수레 두 채가 있는데, 모두 검은 베로 방처럼 둘러씌우고 나귀 한 마리로 끌고 간다. 한 수레에는 두 늙은 여인을 태웠는데, 얼굴은 모두 추하지만 성적(成赤)은 폐하지 않고 앞머리가 다 벗어져서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번들번들 빛난다. 시늉만 생긴 쪽이 뒤에 달렸는데 가지가지 꽃을 빈틈없이 꽂았다. 양쪽 귀에는 귀고리를 달고, 몸에는 검은 웃옷에 누런 치마를 입었다. 또 한 수레에는 젊은 여인 세 사람을 태웠는데, 주홍빛 또는 푸른빛 바지를 입고 모두 치마를 두르지 않았다. 그 중에 한 소녀는 제법 아리땁다. 대체 그 늙은이는 한님과 젖어미요, 이 소녀들은 몸종이라 한다.

30여 명의 말 탄 군사가 삑 둘러서 옹위(擁衛)한 속에 한 뚱뚱한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입 가에나 턱 밑에 검은 수염이 거칠게 헝클어지고, 구조망포(九爪蠎袍 청인 관리들이 입는 관복)를 걸쳐 입었으며, 흰 말과 금안장에 은등자를 넌지시 디디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찼다. 뒤에는 수레 세 바리에 의롱(衣籠)이 가득 실렸다.

내가 주인더러,

 

이 동리에도 수재(秀才)나 훈장(訓長)이 있을 테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이런 시골 구석에 아무런 왕래가 없으니 무슨 학구선생(學究先生)이 있사오리까마는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수재 한 분이 세관(稅官)을 따라 서울서 오셨는데, 도중에서 이질을 만나 이곳에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그려. 이곳 사람들의 각별한 구료를 입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이르기까지에 아주 말끔히 낫게 되었죠. 그 선생님은 문장이 뛰어날 뿐더러, 겸하여 만주글도 쓸 줄 안답니다. 그는 계속해 이곳에 머물러 계셔서, 한두 해 동안 글방을 내고 이 시골의 아이들을 성심껏 가르쳐서 병 구료를 해 준 은혜를 갚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 관제묘에 계십니다.”

한다. 나는,

 

그럼, 잠깐 주인이 인도해 줄 수 없겠소.”

한즉, 주인은,

 

무어, 남의 길잡이를 요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하며 손을 들어,

 

저기 저 높다란 사당집이 거기죠.”

하고 가리킨다. 나는,

 

그 선생의 성함은 무엇이지요?”

하니, 주인은,

 

이 마을에서는 모두들 그를 부 선생(富先生)이라 부릅니다.”

한다. 나는 또,

 

부 선생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소?”

한즉, 주인은,

 

나으리께서 친히 가셔서 직접 물어 보십시오.”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붉은 종이 수십 쪽을 들고 나와서 펴 보이며,

 

이게 부 선생님께서 친히 써 주신 글씨입니다.”

한다. 그 붉은 종이의 글씨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내리쓴 가는 글자로,

 

아무 어른 존전(尊前)에 아뢰옵니다. 모년모월모일에 어른께옵서 제게로 왕림하여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주인은 이어서,

 

이것은 제 아우가 지난 봄에 사위를 볼 때에 청첩을 그에게 빌려서 쓴 것입니다.”

한다. 대체로 그 글씨는 겨우 글자가 모양을 이룬 정도이다. 다만 수십 장의 자양이 크지도 않고 작지고 않으며, 실에 구슬을 꿴 듯 책판에 글자를 박은 듯 똑같다. 나는 혼자서,

 

혹시 그 수재는 부정공(富鄭公)의 후손이나 아닌가.”

생각하고, 곧 시대를 불러서 함께 관제묘를 찾아갔다. 괴괴하여 인기척이 없다.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차에, 오른편 곁방에서 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있다가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목을 늘여 한번 살피더니, 이내 뛰어나와 우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 달음에 어디로 가버린다. 나는 이 아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너의 스승님은 어디 계시냐?”

하고 물은즉, 아이는,

 

무엇 말씀이어요?”

한다. 나는 또,

 

부 선생님 말씀이야.”

하였으나, 아이는 조금도 듣는 체 않고 다만 입속으로 중얼중얼하다가 휑하니 가버린다. 내가 시대더러,

 

그 선생이 아마 이 속에 있겠지.”

하고, 줄곧 오른편 곁방으로 가서 문을 열어 보니, 빈 교의 네댓이 놓였을 뿐, 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닫고 몸을 돌이키려고 할 즈음에, 아까 그 아이가 한 노인을 데리고 온다. 생각에 이 이가 곧 란 사람인 듯싶다. 그가 잠깐 이웃에 나간 것을 아이가 달려가서 손님이 왔다 하여 돌아온 모양이다. 그 생김생김을 보니, 단아한 빛이라곤 도무지 없다. 앞으로 가서 깍듯이 읍()하자, 노인이 별안간에 와락 달려들어서 허리를 껴안고 힘껏 들었다 놓으며, 또 손을 잡고 흔들면서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는다. 처음에는 놀랍고, 다음에는 불쾌하였다. 내가,

 

당신이 부공(富公)이시오?”

한즉, 그 노인이 아주 기뻐하면서,

 

영감께서 어찌 제 성을 아십니까.”

한다. 나는,

 

저는 오랫동안 선생의 성화를 높이 들어서, 마치 우레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싶습니다.”

한즉, 부가,

 

당신의 성함은 무어라 하십니까.”

한다. 내 성명을 써서 보이니, 그 역시 써 보인다. 이름은 부도삼격(富圖三格)이요, 호는 송재(松齋), 자는 덕재(德齋)라 한다. 나는,

 

삼격이란 무슨 뜻입니까?”

한즉, 그는,

 

이건 저의 성명이옵니다.”

한다. 나는 또,

 

살고 계신 고을과 관향(貫鄕)은 어디셔요.”

한즉, 그는,

 

저는 만주양람기(鑲藍旗)에 사는 사람이올시다.”

하고 다시,

 

영감께서는 이번엔 의당 면가(面駕)하시겠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한즉, 그는,

 

황제께옵서 의당 영감을 불러 보시겠지요?”

한다. 내가,

 

황제께서 만일 접견하신다면 노인의 말씀을 잘 여쭈어서 작은 벼슬이라도 붙게 할 생각인데, 어떠하오.”

한즉, 그는,

 

만일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 박공(朴公)의 갸륵하신 은덕은 결초보은(結草報恩)으로도 갚기 어렵겠소이다.”

한다. 나는 또,

 

물에 막혀서 이곳에 머무른 지가 벌써 수일이나 되었소. 이다지 긴 여름 해를 보내기 난감하니, 노인께 볼 만한 책이 있으면 며칠만 빌려 주실 수 없겠소.”

하였더니, 그는,

 

별로 없습니다. 전에 서울 있을 때, 가친 절공(折公)이 명성당(鳴盛堂 북경 유리창(琉璃廠)에 있었다)이라고 이름을 붙인 각포(刻舖 판각하는 집)를 내었는데, 그 때의 책 목록(目錄)이 마침 행장 속에 들어 있사온즉, 만일 소일삼아 보시려면 빌려 드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영감께서는 이제 바로 돌아가셔서 진짜 환약 청심환이다. 과 조선 부채 중에 잘 된 것을 골라서 초면의 정표로 주신다면 영감의 참된 사귐의 뜻을 알겠으니, 그 때에 서목을 빌려 드려도 늦지 않겠소이다.”

한다. 그 생김새와 말투를 보자니, 뜻이 하도 비루하고 용렬하여 더불어 이야기할 바가 못 될 뿐더러, 오래 앉았을 수도 없으므로 곧 하직하고 일어섰다. 부가 문에 나와 읍을 하여 보내면서,

 

귀국의 명주를 살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정사가,

 

무어 볼 만한 것이 있던가. 더위 먹을까 조심스러우이.”

하기에, 나는,

 

아까 한 늙은 훈장을 만났는데, 한갓 만주 사람일 뿐 아니라 몹시 비루하여 더불어 이야기할 위인이 못 됩디다그려.”

한즉, 정사는,

 

그가 이왕 구하는 바에야 어찌 환약 한 개, 부채 한 자루를 아끼겠는가. 그리고 서목을 빌려다 봄도 해롭진 않아.”

한다. 드디어 시대를 시켜서 청심환 한 개와 어두선(魚頭扇) 한 자루를 보냈더니, 시대가 이내 크기가 손바닥만하고 몇 장 되지도 않은 작은 책을 들고 돌아온다. 그나마 모두 빈 종이였고, 기록된 서목은 모두 청인의 소품(小品) 70여 종이다. 이는 불과 몇 장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많은 값을 요구하니, 그의 뻔뻔스러움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왕 빌려 온 것이요, 또 눈을 새롭기 하기 위하여, 베껴 놓고 돌려 보내기로 한다.

 

명성당서목(鳴盛堂書目)

척독신어(尺牘新語) 6(六册) : 왕기(汪淇 청대 학자) 첨의(瞻漪 왕기의 자) ().

분서(焚書) 6, 장서(藏書) 18, 속장서(續藏書) 9 : 이지(李贄 명의 사상가요 문인, 이름을 재지(載贄)라고도 함) 탁오(卓吾 이지의 자)  ().

궁규소명록(宮閨小名錄), 장주잡설(長洲雜說), 서당잡조(西堂雜俎) : 우동(尤侗 명의 문학가) 전성(展成 우동의 자) .

균랑우필(筠廊偶筆) : 송락(宋犖 청의 문인) 목중(牧仲 송락의 자) .

동서자(同書字), 촉민소기(蜀閩小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 주량공(周亮工 명말 청조 문학가) 원량(元亮 주량공의 자) .

사례촬요(四禮撮要) : 감경(甘京 청의 학자, 자는 건재(健齋)) .

설림(說林), 서하시화(西河詩話) : 모기령(毛奇齡 청대의 학자, 자는 대가(大可)) .

운백광림(韻白匡林), 운학통지(韻學通指), 손서(潠書) : 모선서(毛先舒 청대의 시인) 치황(稚黃 모선서의 자) .

서산기유(西山紀游) : 주금연(周金然 청대의 시인, 자는 광거(廣居)) .

일지록(日知錄), 북평고금기(北平古今記) : 고염무(顧炎武 청대의 학자, 자는 영인(寧人)) .

부지성명록(不知姓名錄) : 이청(李淸 청의 학자) 영벽(映碧 이청의 호, 자는 심수(心水)) .

장설(蔣說) : 장호신(蔣虎臣) .

영매암억어(影梅菴憶語) : 모양(冒襄 명말 학자) 벽강(辟疆 모양의 자) .

고금서자변와(古今書字辨訛), 동산담원(東山談苑), 추설총담(秋雪叢談) : 여회(余懹 명말 학자) 담심(淡心 여회의 자) .

동야전기(冬夜箋記) : 왕숭간(王崇簡 청대 학자, 자는 경재(敬載)) .

황화기문(皇華記聞), 지북우담(池北偶談), 향조필기(香祖筆記) : 왕사진(王士禛 청대의 문인, 사정(士禎)이라고도 함.) 이상(貽上 왕사진의 자) .

모각양추(毛角陽秋), 군서두설(羣書頭屑), 규합어림(閨閤語林), 주조일사(朱鳥逸史) : 왕사록(王士祿 왕사진의 형으로 문인, 자는 자저(子底)) .

입옹통보(笠翁通譜), 무성희(無聲戲), 소설귀수전고사(小說鬼輸錢故事) : 이어(李漁 청대의 극작가) 입옹(笠翁 이어의 자) .

천외담(天外談) : 석방(石龎 청대 문인, 자는 천외(天外)) .

주대기연(奏對機緣) : 홍각(弘覺) .

십구종(十九種) : 시호신(柴虎臣) .

귤보(橘譜) : 저호남(諸虎男) .

일하구문(日下舊聞) 20, 분묵춘추(粉黑春秋) : 주이준(朱彝尊 청대 학자) 석창(錫鬯 주이준의 자) .

우초신지(虞初新志) : 장조(張潮 청대 학자) 산래(山來 장조의 자) .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 8 : 조길사(趙吉士 청대 학자, 자는 천우(天羽)) .

설령(說齡) : 왕완(汪涴) .

설부(說郛) : 오진방(吳震方 청대 학자) 청단(靑壇 오진방의 자) .

단궤총서(檀几叢書) : 왕탁(王晫 청대 학자) .

삼어당일기(三魚堂日記) : 육롱기(陸隴其 청대 성리학자, 자는 가서(稼書)) .

역선록(亦禪錄), 유몽영(幽夢影) : 장조(張潮) .

양경구구록(兩京求舊錄) : 주무서(朱茂曙) .

연주객화(燕舟客話) : 주재준(周在浚 주양공의 아들, 자는 설객(雪客)) .

숭정유록(崇禎遺錄) : 왕세덕(王世德 명말 절사(節士), 자는 극승(克承)) .

입해기(入海記) : 사사련(査嗣璉 청대 학자, 다른 이름은 신행(愼行), 자는 하중(夏重) 또는 회여(悔餘)) .

유구잡록(琉球雜錄) : 왕즙(汪楫 청대 학자, 자는 주차(舟次)) .

박물전휘(博物典彙) : 황도주(黃道周 명말 절사, 자는 유현(幼玄) 또는 이약(螭若)) .

관해기행(觀海紀行) : 시윤장(施閏章 청대 문인, 자는 상백(尙白)) .

석진일기(析津日記) : 주운(周篔 청대 학자, 자는 청사(靑士), 또는 당곡(簹谷)) .

 

정 진사와 함께 나누어 베껴서 이 뒤에 책사에서 참고하기로 하고, 곧 시대를 시켜서 돌려 보내고, 또 시대더러,

 

이런 책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 영감께서 이 서목을 보시지 않았소.”

라고 말하라 일렀더니,시대가 돌아와서,

 

부씨가 제가 전하는 말을 듣더니, 자못 계면쩍은 빛을 보이면서 저에게 수건 한 개를 주더이다.”

한다. 그 수건의 길이는 두 자 남짓한 추사(縐紗 올이 말려들게 짠 천)인데, 새 감으로 만든 것이다.

 

 

[D-001]수재(秀才) : ()()()의 학교에 있는 생원(生員).

[D-002]부정공(富鄭公) : () 인종(仁宗) 때의 정치가 부필(富弼). 부는 성이요, 정은 봉호.

[D-003]양람기(鑲藍旗) : 만주족은 전부 군대의 편제로 하여 팔기(八旗)로 나누었는데, 이는 그 중의 하나이다.

[D-004]명성당서목(鳴盛堂書目) : 원전에는 잇달아 씌어 있으나, 위의 예단물목(禮單物目)’의 예를 따라 별도로 제목을 붙이고 정리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4일 경진(庚辰)

 

 

어젯밤부터 밤새도록 비가 억수로 퍼부어서 길을 떠나지 못했다.

양승암집도 보며 바둑도 두어 심심풀이하다. 부사와 서장관이 상사의 처소에 모이고, 또 다른 여러 사람을 불러서 물 건널 방도를 묻다가, 오래되어서야 모두 돌아가다. 아마 별 좋은 계책이 없는 모양이다.

 

 

[D-001]바둑 : ‘수택본에는 투전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5일 신사(辛巳)

 

 

맑게 개었다. 물에 막혀서 또 묵다.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는다. 나는 그 구들 제도의 대략을 엿보았다. 먼저 높이 한 자 남짓하게 구들바닥을 쌓아서 편평하게 만든 뒤에, 깨뜨린 벽돌로 바둑돌 놓듯 굄돌을 놓고, 그 위에는 벽돌을 깔 뿐이다.

벽돌의 두께가 본시 같으므로 깨뜨려서 굄돌을 해도 절름발이가 될 리 없고, 벽돌의 몸이 본디 가지런하므로 나란히 깔아 놓으면 틈이 날 리 없다. 고래 높이는 겨우 손이 드나들 만하고, 굄돌은 갈마들며 불목이 되어 있다. 불이 불목에 이르면 그 넘어가는 힘이 빨아들이듯 하므로, 불꽃이 재를 휘몰아 메어지듯 세차게 들어간다.

그리하여 여러 불목이 서로 잡아당기어, 도로 나올 새가 없이 쏜살같이 굴뚝으로 빠져 나간다. 굴뚝의 깊이는 길이 넘는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말의 개자리[犬座]. 불꽃이 항상 재를 몰아다가 고래 속에 가득히 떨어뜨리므로, 3년 만에 한 번씩 고래목을 열고 재를 쳐내야 한다. 부뚜막은 한 길이나 땅을 파서 위로 아궁이를 내고, 땔나무는 거꾸로 집어 넣는다.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만큼 땅을 뚫고, 그 위에 돌덮개를 덮어서 봉당바닥과 가지런히 한다. 그 빈 데서 바람이 일어나서 불길을 불목으로 몰아 넣으므로, 연기가 조금도 새지 않는다. 또 굴뚝을 내는 법이,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고 벽돌을 탑처럼 쌓아올리되 지붕과 가지런하게 하였으므로, 연기가 그 항아리 속으로 굴러 들어서 서로 잡아당기고 빨아들이듯 한다. 이 법이 가장 묘하다. 대개 굴뚝에 틈이 생기면, 약간의 바람에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온돌은 항상 불을 내뿜고 방이 골고루 덥지 않다. 그 잘못이 모두 굴뚝에 있다. 혹은 싸리로 엮은 농()에 종이를 바르고, 혹은 나무 판자로 통을 만들어 쓴다. 처음 세운 곳에 흙이 틈이 나거나, 혹은 종이가 떨어지거나, 또는 나무통이 벌어지거나 하면, 연기 새는 것은 막을 길이 없고, 바람이 한 번 크게 불면 연통은 소용이 없게 된다. 나는 생각에,

 

우리나라에서는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서, 겨울이 되면 수많은 형제들의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법을 배워 가서 삼동의 그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변계함이,

 

이곳 구들은 아무래도 이상해요. 우리나라 온돌만 못한 것 같아요.”

하기에, 나는,

 

못한 까닭이 무어지.”

하고 물었다. 변군은,

 

어찌, 저 기름 넉 장을 반듯하게 깔아서, 빛은 화제(火齊 운모(雲母)의 일종으로 빛이 붉다)와 같고 번드름하기는 수골(水骨)과 같을 수야 있겠소.”

한다. 나는,

 

이곳의 벽돌 장판이 우리나라의 종이 장판만 못한 것은 그럴싸한 말이야. 그러나 이 구들 놓는 방법을 본받아 가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깔아만 보아. 누가 금할 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나라 온돌제도는 여섯 가지 흠이 있으나 아무도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내 시험조로 한번 논할 테니, 자네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드는데, 그 돌의 크고 작음과 두껍고 얇음이 애초에 고르지 못하므로, 조약돌로 네모를 괴어서 그 절름발이를 금지하려 했으나 돌이 타고 흙이 마르면 곧잘 허물어짐이 첫째 흠이요, 돌이 울퉁불퉁하여 옴폭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므로, 불을 때어도 고루 덥지 못함이 둘째 흠이요, 불고래가 덩실 높아서 불길이 서로 맞물지 못함이 셋째 흠이요, 벽이 성기고 얇아서 곧잘 틈이 생기므로, 바람이 새고 불이 내쳐서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게 됨이 넷째 흠이요,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길이 안으로 빨리어 들어가지 않고 땔나무 끝에서만 남실거림이 다섯째 흠이요, 또 방을 말리려면 적어도 땔나무가 백 단은 들고, 열흘 안으로 입주를 못함이 여섯째 흠이다. 이제 곧 자네와 더불어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이루어져서 그 위에 누워 잘 수 있을 것이니, 그 어떠한가.”

하고 설명하였다.

저녁에 여럿이 술을 몇 잔 나누고, 밤이 이슥하여 취해 돌아와서 누웠다. 정사의 맞은편 방인데, 다만 베 휘장이 중간을 가리었다. 정사는 벌써 한잠이 들었고, 나 혼자 담배를 피워 물고 정신이 몽롱한데, 머리맡에서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서,

 

거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른즉,

 

도이노음이오(擣伊鹵音爾幺).”

하고 대답한다. 말소리가 심히 수상해서, 나는,

 

이놈 누구야.”

하고 거듭 소리친즉,

 

소인 도이노음이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시대와 상방(上房) 하인들이 모두 놀라 일어난다. 뺨 치는 소리가 들리고, 덜미를 밀어서 문 밖으로 끌어가는 모양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저 갑군(甲軍)이 밤마다 우리 일행의 숙소를 순찰하여 사신 이하 모든 사람의 수를 헤어가는 것을, 깊이 잠든 뒤이므로 여태껏 그런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갑군이 제 스스로 도이노음이라 함은 더욱 절도할 일이다. 우리나라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하니, 이는 대개 도이(島夷)’의 준말이요, ‘노음(老音)’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요, ‘이오(伊吾)’란 높은 어른에게 여쭈는 말이다. 갑군이 오랫동안 사행을 치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배우되, 다만 란 말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한바탕의 소란 때문에 그만 잠이 달아나, 이어 벼룩에게 시달렸다. 정사 역시 잠이 달아났는지 촛불을 켠 채 그냥 날을 새웠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일 임오(壬午)

 

 

개었다. 시냇물이 약간 줄었으므로 길을 떠났다. 나는 정사의 가마에 함께 타고 건넜다. 하인 30여 명이 알몸으로 가마를 메고 가다가, 강 한가운데쯤 물살이 센 곳에 이르러 별안간 왼쪽으로 기우뚱하여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니 사세가 실로 위급하기 짝이 없었다. 정사와 서로 부둥켜 안고서 겨우 물에 빠짐을 면했다. 저쪽 강언덕에 올라서 물 건너는 자들을 바라보니, 혹은 사람의 목을 타고 건너고, 혹은 좌우에서 서로 부축하여 건너기도 하며, 더러는 나무로 떼를 엮어서 타고 네 사람이 어깨로 메고 건너기도 한다. 말을 타고 떠서 건너는 이는 모두 머리를 쳐들어서 하늘만 바라보고, 혹은 두 눈을 꼭 감기도 하고, 혹은 억지로 웃음을 짓기도 한다. 하인들은 모두 안장을 풀어 어깨에 메고 건너는데 젖을까 염려하는 모양이다. 이미 건너왔다 다시 건너가려는 이도 무엇을 어깨에 지고 물에 들므로, 이상하여 물은즉,

 

빈 손으로 물에 들면 몸이 가벼워 떠내려가기 쉬우므로,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어깨를 눌러야 된다.”

한다. 몇 번씩 갔다왔다한 사람은 추워서 벌벌 떨지 않는 이가 없다. 산 속 물이 몹시 찬 때문이다.

초하구(草河口)에서 점심을 먹다. 이른바 답동(畓洞)이니, 이곳이 항상 진창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이름지었다 한다. () 자는 본시 없는 글자인데, 우리나라 아전들 장부에 수전(水田) 두 글자를 합쳐서 논이란 뜻을 붙이고, ‘()’ 자의 음을 빌렸다.분수령(分水嶺)고가령(高家嶺)유가령(劉家嶺)을 넘어 연산관(連山關)에서 묵다. 이날 60리를 갔다.

밤에 조금 취하여 잠깐 조는데, 몸이 홀연 심양 성중에 있었다. 궁궐(宮闕)과 성지(城地)와 여염과 시정들이 몹시 번화장려하다. 나는 스스로,

 

여기가 이처럼 장관일 줄은 몰랐네그려. 내 집에 돌아가서 이를 자랑해야지.”

하고 드디어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내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나는 소리개처럼 날쌔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야곡(冶谷) 옛 집에 이르러 안방 남창 밑에 앉았다. 형님(박희원(朴喜源))께서,

 

심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듣기보다 훨씬 낫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 수없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마침 남쪽 담장 밖을 내다보니, 옆집 회나무 가지가 우거졌는데, 그 위에 큰 별 하나가 휘황히 번쩍이고 있다. 나는 형님께,

 

저 별을 아십니까.”

하고 사뢴즉, 형님은,

 

이름도 모르겠다.”

하시기에, 나는,

 

저게 노인성(老人星 남극성(南極星))이올시다.”

하고 일어나 형님께 절하고,

 

제가 잠시 집에 돌아옴은 심양 이야기를 상세히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제 갈 길이 바빠서 하직드립니다.”

하고, 안문을 나와서 마루를 지나 사랑 일각문을 열고 나섰다. 머리를 돌이켜 북쪽을 바라본즉, 길마재[鞍峴] 여러 봉우리가 역력히 얼굴을 드러낸다. 그제야 홀연히 깨달았다.

 

아아, 내가 바보야. 내 홀로 어이 책문을 들어간담. 여기서 책문이 천여 리니, 누가 나를 기다리고 머물러 있으리.”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안타깝기 짝이 없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나, 문지도리가 하도 빡빡하여 열리지 않으므로, 큰 소리로 장복을 부르려 하나, 소리가 목에 걸려서 나오질 않는다. 할 수 없이 힘껏 문을 밀다가 잠을 깨었다. 정사가 마침,

 

연암(燕巖).”

하고 부른다. 내 오히려 어리둥절하여,

 

여기가 어디오.”

한즉, 정사는,

 

아까부터 가위에 눌린 지 오래야.”

한다. 일어나 앉아서 이를 부딪으며 머리를 퉁기고 정신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제법 상쾌해진다. 한편 섭섭하고도 한편은 기쁜 생각에, 오랫동안 마음이 뒤숭숭하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자리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공상에 잠겨서 날새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연산관은 또 아골관(鴉鶻關)이라고도 부른다.

 

 

[D-001]야곡(冶谷) : 서울 시내 서북방에 있던 동리 이름으로, 연암이 세거하던 곳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일 계미(癸未)

 

 

개었다.

2()를 가서 말을 타고 그냥 물을 건넜다. 강물이 비록 넓지는 않으나, 물살이 어제 건넜던 곳보다도 훨씬 세다. 무릎을 옴츠리며 두 발을 모아서 안장 위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창대는 말머리를 꽉 껴안고 장복은 힘껏 내 엉덩이를 부축하여, 서로 목숨을 의지해서 잠시 동안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말을 모는 소리조차 오호(嗚呼)’ 말에게 조심해 가자고 타이르는 소리가 원래 호호(好護)’인데,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오호(嗚呼)’와 비슷하다. 하니, 어쩐지 처량하게 들린다. 말이 강 복판에 이르자, 갑자기 그 몸이 왼쪽으로 쏠린다.

대개 물이 말의 배에 닿으면 네 발굽이 저절로 뜨기 때문에 누워서 건너는 셈이다.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면서,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다.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것을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떨어짐을 면하였다. 나 역시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창대도 말다리에 채여 자칫하면 변을 당할 뻔하였으나, 말이 홀연 머리를 들고 몸을 바로 가누니, 물이 얕아져서 발이 땅에 닿았음을 알 수 있다.

마운령(摩雲嶺)을 넘어 천수참(千水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엔 몹시 무더웠다. 청석령(靑石嶺)을 넘다보니 고갯마루에 관제묘가 있는데, 매우 영검스럽다 하여 역부와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탁자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혹은 참외를 사서 바치기도 하고, 역관들 중에는 향을 피우고 제비를 뽑아서 평생의 신수를 점쳐 보는 이도 있었다. 한 도사(道士)가 바리때를 두드리며 돈을 구걸한다. 그는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 환속한 중과 같기도 하고, 머리에는 등립(藤笠)을 쓰고 몸에는 야견사(野繭紗)로 만든 도포(道袍) 한 벌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마치 우리나라 선비들의 차림새와 같으나, 다만 검은 빛깔의 방령(方領)만이 조금 다를 뿐이다. 또 한 도사는 참외와 달걀을 파는데, 참외 맛이 매우 달고 물이 많으며, 달걀은 맛이 삼삼하다.

밤에는 낭자산(狼字山)에서 묵었다. 이날 큰 재를 둘이나 넘었다. 80리를 행하였다. 마운령은 회령령(會寧嶺)이라고도 부른다. 그 높이나 가파르기가 우리나라 관북(關北)의마천령(摩天嶺)에 못지않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일 갑신(甲申)

 

개었다.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서,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 하나를 접어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국궁(鞠躬)하고 말 앞으로 달려 나와서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백탑(白塔)이 보입니다.”

한다. 태복은 정 진사의 마두다. 아직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빨리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人生)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한 곳이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였다. 정 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그래 그래, 아니 아니. 천고의 영웅(英雄)이 잘 울었고, 미인(美人)은 눈물 많다지. 그러나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기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하였소.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중에서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오. 지극한 정()이 우러나오는 곳에,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는다면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인생의 보통 감정은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고,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로 인하여 상고를 당했을 때 억지로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지. 그러나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란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그러므로, 저 가생(賈生)은 일찍이 그 울 곳을 얻지 못하고, 참다 못해서 별안간 선실(宣室)을 향하여 한 마디 길게 울부짖었으니, 이 어찌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히 여기지 않으리오.”

한즉, 정은,

 

이제 이 울음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 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한다. 나는,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 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가. 그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기쁘지 않을 리 없지. 이러한 기쁨이 늙도록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리 없으며 의당 즐겁고 웃어야 할 정만 있어야 하련만, 도리어 분한(忿恨)이 가슴에 사무친 것같이 자주 울부짖기만 하니, 이는 곧 인생이란 신성(神聖)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결같이 마침내는 죽어야만 하고 또 그 사이에는 모든 근심 걱정을 골고루 겪어야 하기에, 이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서 스스로를 조상함인가. 그러나 갓난아기의 본정이란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거요. 무릇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나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할 것이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저 비로봉(毗盧峯)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長淵황해도의 고을)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며,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1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하였다.

한낮은 몹시 무더웠다. 말을 달려 고려총(高麗叢)아미장(阿彌庄)을 지나서 길을 나누어 갔다. 나는 조 주부 달동과 변군내원정 진사와 하인 이학령(李鶴齡)과 더불어 구요양(舊遼陽)에 들어갔다. 구요양은 봉황성보다도 10배나 더 번화하고 호화스러웠다. 따로 요동기(遼東記)를 썼다. 서문(西門)을 나와 백탑(白塔)을 보았다. 제작 기술이 뛰어나고 규모가 웅장하여 요동 벌판과 잘 어울렸다. 따로 백탑기(白塔記)가 있다.

 

 

[D-001]칠정(七情) : 예기(禮記)에서 말한, 사람이 가진 일곱 가지의 감정. 곧 희()()()()()()()을 말한다.

[D-002]가생(賈生) : ()의 신진 문학가. 이름은 의()인데, 나이가 젊었으므로 가생으로 불리었다. 그는 이론이 날카로웠으므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쫓겨났으나, 오히려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이라는 정견을 올려서, 시사(時事)의 통곡(痛哭)유체(流涕)장태식(長太息)할 만함을 진술하였다.

[D-003]선실(宣室) : 한의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의 정실(正室). 문제가 이곳에서 가의에게 귀신(鬼神)에 대한 이론을 물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구요동기(舊遼東記)

 

 

요동의 구성(舊城)은 한()의 양평(襄平)요양(遼陽) 두 현() 지역에 있었다. ()이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뒤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편입되었다가, 한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웅거한 바 되었으며, ()()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거란(契丹)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은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은 행성(行省 원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은 정료위(定遼衛)를 두었더니, 지금은 요양주(遼陽州)로 승격되었다.

20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겨서 신요양(新遼陽)이라 하였으므로, 이 성은 폐하여 구요동(舊遼東)이라고 부른다. 성의 둘레는 20리인데, 혹은 이르기를,

 

이 성은 웅정필(熊廷弼)이 쌓은 것이다. 이 성이 옛날에는 몹시 낮고 비좁았는데, 정필이 적기(敵騎)가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성을 헐었다. 청인이 이를 보고 의심하여 감히 가까이 이르지 못하다가, 고쳐 쌓는다는 정보를 정탐해 알고는 군사를 이끌고 성 밑에 이르렀으나, 하룻밤 사이에 새로 쌓은 성이 높다랗게 이룩되었다. 나중에 정필이 이곳을 떠나자 요양이 함락되었다. 청인이 그 성이 견고하여 함락시키느라 어려웠던 점을 분히 여겨서 성을 헐어 버릴 적에 싸움에 이긴 열쌘 군사들을 동원했음에도 열흘이 가도 다 헐지 못하였다.”

한다. () 천계(天啓) 원년(1621) 3월에, 청인(淸人)이 이미 심양을 빼앗고 또 군사를 옮기어 요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가 세 길로 군사를 내어서 무순(撫順)을 회복하려던 차에, 청인이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요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태자하(太子河) 물을 끌어다 해자에 채우고 군사를 성 위로 올라가 빙 둘러서서 지키게 하였다.

청인이 심양을 함락시킨 지 닷새 만에 요양성 밑에 이르렀다. 누루하치[奴兒哈赤]란 자는 이른바 청 태조(淸太祖). 그가 스스로 좌익(左翼)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르니, ()의 총병(摠兵) 이회신(李懷信) 등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와서 진을 쳤다. 이때 누루하치가 좌익(左翼) 군대에 속한 사기(四旗 만주군 편성 단위)로 왼편을 공격했다. 청 태종(淸太宗)이란 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한()이라고 부르니, 그의 이름은 홍타시[洪台時]우리나라의 병정록(丙丁錄) 중에 너저분하게 실려 있는 紅打時, 또는 紅他詩는 모두 발음이 비슷한 대로 적은 것이다. 마치 영알대[英阿兒臺]를 용골대(龍骨大), 마부타이[馬伏塔]를 마부대(馬夫大)로 쓴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였다. 그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를 청했으나 누루하치가 허락하지 않다가, 홍타시는 굳이 가서 홍기(紅旗) 두 개를 세워 두고 성 옆에다 매복시켜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누루하치가 정황기(正黃旗)양황기(鑲黃旗)를 보내어 홍타시를 도와서 명()의 군영(軍營) 왼편을 치게 하였다. 또 사기(四旗) 군사가 뒤이어 이르니 명병(明兵)이 크게 어지러운지라, 홍타시가 승리를 얻어서 60리를 추격하여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이 싸움에 명병이 요양의 서문으로 나와, 앞서 청인이 성 곁에 세워 두었던 두 홍기(紅旗)를 뽑으니, 복병이 일어나서 이를 맞아들여 쳤다. 명병이 다시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느라고 저희들끼리 짓밟혔다. 총병 하세현(賀世賢)과 부장(副將) 척금(戚金)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누루하치가 패륵(貝勒 만주군의 벼슬 이름)의 왼편 사기 군사를 거느려서 성 서쪽의 수문(水門)을 파 호수의 물을 빼고, 또 오른편 사기 군사로 하여금 성 동쪽의 진수구(進水口)를 막게 하고, 자기는 우익(右翼) 군대를 성 밑에 늘어놓고는 흙을 넣고 돌을 날라서 물길을 막았다.

명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을 나와서 청병과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버티었다. 청병이 바야흐로 다리를 빼앗으려 할 즈음, 마침 수구(水口)가 막히어서 물이 거의 마를 지경이므로, 사기의 선봉이 해자를 건너 고함을 치면서 동문 밖으로 엄습하자, 명병도 이에 맞서 역전했으나, 청병 홍갑(紅甲) 2백 명과 백기(白旗) 1천 명이 내닫는 바람에 죽은 명병이 해자에 가득하였다. 청병이 무정문(武靖門) 다리를 빼앗고 양쪽으로 나누어 지키는 명병을 치니, 명병이 성 위에서 끊임없이 화포(火砲)를 터뜨리었다. 청병도 이에 용감히 맞서 서성(西城) 한 쪽을 빼앗고 민중들을 베니, 성 안이 요란하였다. 이날 밤 성 안에 있는 명병이 횃불을 들고 싸울 때, 우유요(牛維曜) 등은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명병이 다시 방패를 세우고 힘써 싸웠으나, 청 사기의 군사가 역시 성을 타고 올랐다. 경략 원응태는 성 북쪽 진원루(鎭遠樓)에 올라서 싸움을 독촉(督促)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누()에 불을 놓아서 타죽고, 분수도(分守道) 하정괴(何廷魁)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물에 빠져 죽고, 감군도(監軍道) 최유수(崔儒秀)는 목매어 죽고, 총병(摠兵) 주만량(朱萬良), 부장 양중선(梁仲善)과 참장(叅將) 왕치(王豸)방승훈(房承勳)과 유격(遊擊) 이상의(李尙義)장승무(張繩武)와 도사(都司) 서국전(徐國全)왕종성(王宗盛)과 수비(守備) 이정간(李廷幹)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

어사(御史) 장전(張銓)은 청병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으므로, 누루하치가 죽음을 내려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시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마침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청나라 황제(皇帝 고종(高宗))가 작년에 전운시(全韻詩 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를 지어 이 성이 함락한 사실의 시말을 상세히 적고 또 말하기를,

 

명의 신하로서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 우리 선황제께옵서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때 연경에 있는 명의 군신(君臣)들은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과 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러고서야 망하지 않으련들 될 수 있으리오.”

하였다. 명사(明史)를 상고하건대,

 

웅정필이 광녕(廣寧)을 구출하지 않았을 때에 삼사(三司) 왕기(王紀)추원표(鄒元標)주응추(周應秋) 등이 정필을 탄핵하기를, ‘정필의 재식과 기백이 일세를 비웃을 만하므로 지난해에 요양을 지키매 요양이 보존되고 요양을 떠나매 요양이 망했으나, 다만 그 교만하고 괴퍅한 성격은 고칠 길이 없어서 오늘에 한 소()를 올리고 다음날에는 한 방()을 걸었으니, 그는 양호(楊鎬)에게 비하여서는 도망친 한 가지 죄가 더하고 원응태처럼 죽지도 못하였으므로, 만일 왕화정(王化貞)을 죽이고 정필을 살려둔다면 죄는 같음에도 벌이 다른 것입니다.’ 했다.”

하였다. 이제 당시의 토벽(土壁)이 예와 같이 둘러 있고 벽돌 흔적이 오히려 새로우매, 그때 삼사가 탄핵한 글을 다시 외어 본즉, 그의 사람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아아, 슬프다. 명의 말운을 당하여 인재를 쓰고 버림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으므로, 웅정필원숭환의 죽음을 보건대 가히 스스로 그 장성(長城)을 허물어뜨렸다 하겠으니, 어찌 후세의 기롱을 받지 않으리오.

태자하(太子河)를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위에는 서너 채 고기잡이배가 떠 있고, 성 밑에는 낚시질하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 다들 좋은 옷을 입었고, 그 생김생김이 단아한 귀공자 같다. 모두 성 안의 장사치들이다. 내가 이에 해자를 한 바퀴 돌아서 그 수문의 여닫는 제도를 엿보려 할 때, 낚시꾼들이 왁자하게 웃으면서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나를 보고 말을 걸기에, 나는 땅에 글자를 써서 보였으나 모두 슬쩍 들여다보고는 웃고 가버린다.

서문(西門)을 나서 백탑을 구경하다. 그 만듦새가 공교롭고 화려하며, 웅장함이 가히 요동 넓은 벌판에 알맞다. 따로이 백탑기(白塔記)를 썼다.

 

 

[C-001]구요동기(舊遼東記) : 구요동성을 중심으로 하여 고금의 연혁과, 명의 말기에 명과 청의 두 나라가 이어서 격렬히 싸우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편은 원전에는 편말(篇末)에 있었으나, 이제 이곳으로 옮겼다.

[D-001]공손도(公孫度) : 후한(後漢) 말기에 어버이를 따라 현도(玄菟)에 갔다가, 요동태수(遼東太守)를 거쳐 스스로 요동후(遼東侯)가 되었다.

[D-002]웅정필(熊廷弼) : 명의 명신. 그가 요동을 지키매 신흥인 청()도 이를 넘어뜨리지 못하였으나, 당로자의 질시와 파쟁으로 말미암아 참혹하게 최후를 마쳤다.

[D-003]정황기(正黃旗)양황기(鑲黃旗) : 모두 만주군 팔기에 속한 부대.

[D-004]최유수(崔儒秀) : 어떤 본에는 최윤수(崔允秀)로 되었다.

[D-005]장전(張銓) : 자는 우형(宇衡). 국사기문(國史紀聞)을 지었다.

[D-006]명사(明史) : 청의 장정옥(張廷玉)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D-007]삼사(三司) : 시대를 따라 변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상서형부(尙書刑部)어사대(御史臺)대리시(大理寺)를 이른 듯하다.

[D-008]양호(楊鎬) : 명의 장수로서, 임진란에 구원군을 거느리고 패해서 돌아가, 요동에 나가서 청과 싸워 또 패하였으므로 사형을 받았다.

[D-009]왕화정(王化貞) : 몽고를 무마하여 일찍이 공을 세웠으나, 웅정필과 함께 청에 패했으므로 사형을 당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관제묘기(關帝廟記)

 

 

구요동성 문 밖을 나서면 돌다리 하나가 있다. 다릿가 돌 난간은 그 만든 품이 매우 정교하다. 강희(康熙) 57년에 쌓은 것이다. 다리 건너편에서 백여 보쯤 되는 곳에 패루(牌樓)가 있다. 구름 속의 용과 수선(水仙)을 새겼는데, 모두 파서 새긴 것이다. 패루에 올라 본즉 동쪽에 큰 다락이 있는데, 글자를 써서 현판을 걸어 적금루(摘錦樓)라 하였고, 그 왼편의 종루(鍾樓)는 용음루(龍吟樓), 오른편의 고루(鼓樓)는 호소루(虎嘯樓)라 하였다.

묘당(廟堂)이 웅장 화려하여 복전(複殿)과 중각(重閣)에 금빛푸른빛이 휘황찬란하다. 그 정전(正殿)에는 관공(關公)의 소상(塑像)을 모셨고, 동무(東廡)에는 장비(張飛 자는 익덕(翼德)), 서무(西廡)에는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을 배향(配享)하였으며, 또 촉()의 장군 엄안(嚴顏)의 굴복하지 않는 꼴을 설치하였다. 뜰 가운데에는 큰 비() 몇이 서 있는데, 모두 이 사당의 창건과 중수한 사실의 시말을 적은 것이다. 그 중 새로 세운 한 비는, 산서(山西)의 어떤 상인(商人)이 사당을 중수한 일을 새긴 것이다.

사당 안에는 노는 건달패 수천 명이 왁자하게 떠들어, 마치 무슨 놀이터 같다. 혹은 총과 곤봉을 연습하고, 혹은 주먹놀음과 씨름을 시험하기도 하며, 혹은 소경말애꾸말을 타는 장난들을 하고 있다. 또는 앉아서 수호전(水滸傳)을 읽는 자가 있는데, 뭇사람이 삥 둘러앉아서 듣고 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코를 벌름거리는 꼴이, 방약무인(旁若無人)의 태도이다. 그 읽는 곳을 보니, 곧 화소와관사(火燒瓦官寺 수호 중 장회(章回)의 이름)의 대문인데, 외는 것은 뜻밖에 서상기(西廂記)였다.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건만 외기에 익어서 입이 매끄럽게 내려간다. 이것은 꼭 우리나라 네거리에서 임장군전(林將軍傳)을 외는 것 같다. 읽는 자가 잠깐 중지하면 두 사람이 비파(琵琶)를 타고 한 사람은 징을 울린다.

 

 

[C-001]관제묘기(關帝廟記) : 구요동에 있는 관제묘를 구경한 기록이다. 어떤 본에는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밑에 있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관공(關公) : 촉한(蜀漢) 오호대장(五虎大將) 중의 하나. 이름은 우(), 자는 운장(雲長). 뒤에 그를 추숭하여 제()라 일컬었다.

[D-002]엄안(嚴顏) : 유장(劉璋)의 부하로서, 장비에게 굴복하지 않은 의장(義將).

[D-003]수호전(水滸傳) : 소설 이름. 곧 수호. 원의 시자안(施子安)이 엮은 것을 명의 나본(羅本, 羅貫中)이 완성하였다.

[D-004]서상기(西廂記) : 희곡 이름. 당 원진(元稹)의 회진기(會眞記)를 원의 왕실보(王實甫)가 각색하였다.

[D-005]임장군전(林將軍傳) : 조선 국문 소설의 이름. 임경업(林慶業)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본이름은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관제묘를 나와 5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이 보인다. 이 탑은 8 13층에 높이는 70[]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을 타고 요동으로 돌아와 본즉, 성곽과 인민이 이미 바뀌었으므로 슬피 울며 노래 부르니, 이것이 곧 그가 머물렀던 화표주(華表柱).”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말이다. 요양성 밖에 있으니 성에서 10리도 못 되는 곳이고, 또 그리 높고 크지도 않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조례(皁隷)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요동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 리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세 개가 놓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만 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에 울린다.

탑 아래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만주 사람으로, 약을 사러 영고탑(寧古塔)에 가는 길이다. 땅에 글자를 써서 문답을 하는데, 한 사람이 고본(古本) 상서(尙書)가 있나를 묻고, 또 한 사람은,

 

안부자(顏夫子 공자의 제자인 안회(顏回), 부자는 존칭)가 지은 책과 자하(子夏 공자 제자, 성명은 복상(卜商), 자하는 자)가 지은 악경(樂經)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이는 모두 내가 처음 듣는 것이므로 없다고만 답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아직 청년인데,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며 이 탑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길이 바빠서 그의 이름을 묻지는 못했으나 수재(秀才)인 듯싶다.

 

 

[C-001]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 어떤 본에는 관제묘기(關帝廟記) 위에 있었으나, 그릇되었으므로 여기로 옮겼다.

[D-001]울지경덕(蔚遲敬德) : 당의 명장. 태종을 따라 여러 군데에 원정하였다.

[D-002]정령위(丁令威) : 한의 선인.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의하면, 그가 신선이 되어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하였다.

[D-003]화표주(華表柱) : 큰 길거리나 고을 앞과 같은 곳에 세우는 촛대.

[D-004]고본(古本) …… 묻고 :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고본 상서가 있었다 하므로, 그들이 물은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광우사기(廣祐寺記)

 

 

백탑 남쪽에 광우사(廣祐寺)라는 옛날 절이 있다. 아까 만난 수재들의 말에,

 

한대(漢代)에 지은 절인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를 칠 때에 수산(首山)에 머물러 악공(鄂公 울지경덕의 봉호(封號)) 울지경덕으로 하여금 중수하게 하였다.”

하고, 전하는 말에는,

 

옛날 어떤 시골 사람이 광녕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동자를 만났는데, 그 동자의 말이, ‘나를 업고 광우사까지 가면 그 절 오른편으로 열 걸음 가서 고목나무 밑에 돈 10만 냥이 묻혀 있을 것이니, 그 돈을 품삯으로 주겠소 하기에, 그 사람이 동자를 업고 수백 리 길을 한나절이 못 되어 닿았다. 내려 놓고 보니, 동자는 사람이 아니고 금부처님이었다. 그 절의 중이 이상히 여겨서 절 오른편 열 걸음쯤 되는 곳 고목나무 밑을 파본즉, 과연 10만 냥이 나왔으므로, 시골 사람이 그 돈으로 절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제 절의 비문(碑文)을 읽어 보니,

 

강희 27년에 태황 태후(太皇太后 태종 홍타시의 비())가 내탕고(內帑庫)의 돈으로 세운 것이고, 강희제도 일찍이 이 절에 거둥하여 중에게 비단 가사(袈裟)를 하사한 일이 있다.”

하였다. 지금은 절이 황폐하여 중도 없다. 요양성으로 돌아오니 수레와 말의 울리는 소리가 우렁차고, 가는 곳마다 구경군이 떼를 지었다. 주루(酒樓)의 붉은 난간이 높다랗게 한길 가에 솟아 있고, 금글자를 쓴 주기(酒旗)가 나부낀다. 그 가에는,

 

이름을 듣고서는 말을 곧장 세우고 / 聞名應駐馬

향내를 찾아서 수레를 잠깐 멈추리라 / 尋香且停車

라고 씌어 있다. 나는 술을 마실 만한 기분이 들었다.

빙 둘러선 구경군은 더욱 많아져서 서로 어깨를 비빈다. 일찍이 들으니,

 

이곳에는 좀도둑이 많아서, 낯선 사람이 구경에만 마음이 팔려 자신을 잘 보살피지 못하면 반드시 무엇이든 잃어버리고 만다. 지난해 어느 사신 행차에 많은 무뢰배를 반당(伴當)으로 삼아 거느렸는데 상하 수십 명이 모두 초행이어서 의장(衣裝)이나 안구(鞍具)가 제법 호화로웠다. 이곳에 이르러 유람하는 사이에, 혹은 안장을 잃고 혹은 등자(鐙子)를 잃어버려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고 한다. 장복이 갑자기 안장을 머리에 쓰고 등자를 쌍으로 허리에 차고서 앞에 모시고 서서 조금도 창피해하는 기색이 없기에, 내가 웃으며,

 

왜 너의 두 눈알은 가리질 않나.”

하고 나무란다. 보는 이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다시 태자하에 이르렀다. 강물이 한창 부풀었을 뿐 아니라, 배가 없어서 건널 길이 막연하다. 강기슭을 타고 위아래로 바장일 무렵에, 갈대 우거진 속에 콩깍지만 한 고기잡이 배가 저어 나오고, 또 작은 배 하나가 강기슭에 아련히 보인다. 장복과 태복 등을 시켜 소리를 질러 배를 부르게 했다. 어부(漁夫)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배 두 머리에 마주 앉아 있다. 버드나무 짙은 그늘에 석양 놀이 금빛으로 아롱졌는데, 잠자리는 물을 점치며 놀고, 제비는 물결을 차고 난다. 아무리 불러도 저들은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물가 모래판에 섰노라니, 찌는 듯한 더위에 입술이 타고 이마에 땀이 번지며 허기증이 들고 몸이 몹시 지친다. 평생에 구경을 좋아하였더니, 오늘에야 톡톡히 그 값을 치르는구나 싶었다.

정군(鄭君) 등 여럿이 다투어 농담으로,

 

해는 지고 길은 먼데 상하가 모두 배고프고 고달프니, 한번 울기라도 하는 수밖에 아무런 계책이 없구려. 선생은 어찌 참고서 울지 않으시오.”

하고 서로들 크게 웃는다. 나는,

 

저 어부가 남을 구원해 주질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인심을 가히 알지니, 제가 비록 육노망(陸魯望) 선생처럼 점잖은 어른일지라도 나는 한 주먹으로 때려 눕히고 싶구려.”

하였다. 태복이 더욱 초조해하면서,

 

이제 곧 들에 해가 지려 하니, 다른 산기슭에는 벌써 어두움이 깃들었으리이다.”

한다. 대체 태복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일곱 번이나 연경에 드나들었으므로 모든 일에 익숙하다. 얼마 뒤에 사공이 낚시질을 끝마치고서 배 밑에 있던 고기 종다래끼를 거두고 짧은 상앗대로 버드나무 그늘 가로 저어 나오자, 그 속에서 별안간 대여섯 척의 작은 배가 다투어 나온다. 그들은 저 고기잡이배가 저어오는 것을 보고는, 역시 너도 나도 하고 서로 다투어 저어 와서 비싼 삯을 받으려 함이다. 남의 갈급함을 짐짓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와서 건네 주려고 하니 그 소행이 밉다. 배 한 척에 세 사람씩을 태우고, 삯은 한 사람의 몫이 일 초(一鈔 은으로는 서 돈쭝)씩이다. 배는 모두 통나무를 후벼파서 만들었다. 이른바,

 

들배는 넉넉히 두세 사람 탈 수 있네 / 野航恰受兩三人

라 함은, 실로 이를 두고 이름이다. 일행 상하가 모두 열일곱 명에 말이 열여섯 필이다. 함께 강을 건넜다. 뱃머리에서 말굴레를 잡고 순류(順流)를 따라서 7~8리를 내려가니, 그 위험스럽기가 전날 통원보(通遠堡)의 여러 강을 건널 때보다 더하다. 신요양(新遼陽)영수사(映水寺)에서 묵다. 이날 70리를 갔다. 밤에는 몹시 더워서, 잠든 중에 절로 홑이불이 벗겨져서 약간 감기 기운이 있었다.

 

 

[D-001]반당(伴當) : 가마 메는 하인. 반당(伴擋)이라고도 하였다.

[D-002]육노망(陸魯望) : 당의 문학가 육귀몽(陸龜蒙). 노망은 자. 벼슬을 하지 않고 차[]를 심으며 일생을 보내었으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강호산인(江湖散人), 또는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불렀다.

[D-003]들배는 …… 있네 : 두보(杜甫)의 시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9일 을유(乙酉)

 

 

개었다. 몹시 더웠다.

새벽의 서늘함을 타서 먼저 길을 떠났다. 장가대(張家臺)삼도파(三道巴)를 거쳐서 난니보(爛泥堡)에서 점심을 먹었다. 요동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끊이지 않고 길 너비가 수백 보나 되며, 길을 따라 양편에는 모두 수양(垂楊)을 심었다. 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는, 마주 선 문과 문 사이에 장마 때 물이 괴어서 가끔 저절로 큰 못이 이루어졌다. 집집마다 기르는 거위와 오리가 수없이 그 위에 떠서 놀고, 양편 촌집들은 모두 물가의 누대처럼 붉은 난간과 푸른 헌함이 좌우에 영롱하여, 슬며시 강호(江湖)를 방불케 한다.

군뢰가 세 번 나팔을 불고 나서 반드시 몇 리 앞서 가면, 전배(前排) 군관이 역시 군뢰를 따라 먼저 떠난다. 나는 행동이 자유로워서, 매양 변군(卞君)과 함께 서늘함을 타서 새벽에 떠난다. 그러나 10리도 못 가서 전배가 따라와 만나게 된다. 그들과 고삐를 나란히 하여, 재미 있는 이야기와 농담을 붙이면서 간다. 매일 이러하였다.

마을이 가까워질 때마다 군뢰를 시켜서 나팔을 불고, 넷이 모두 합창으로 권마성(勸馬聲)을 부른다. 그러면 집집마다 여인들이 문이 메도록 뛰어나와서 구경들을 한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간에 차림은 거의 같다. 머리에는 꽃을 꽂고 귀고리를 드리웠으며, 화장은 살짝 하였다. 입에는 모두 담뱃대를 물었고, 손에는 신바닥에 까는 베와 바늘실 등을 들고 어깨를 비비고 서서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한녀(漢女)는 여기서 처음 보는데, 모두 발을 감고 궁혜(弓鞋)를 신었다. 자색은 만주 여자[滿女]만 못하다. 만주 여자는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고운 이가 많았다.

만보교(萬寶橋)연대하(烟臺河)산요포(山腰鋪)를 거쳐서 십리하(十里河)에서 묵다. 이날 50리를 갔다.

비장과 역관들이 말등에서, 맞은 편에서 이리 보고 오는 만녀나 한녀 중에서 각기 첩 하나씩을 정하는데, 만일 남이 먼저 차지한 것이면 감히 겹으로 정하지 못하고 법이 몹시 엄격하다. 이를 구첩(口妾)이라 하여 가끔 서로 샘도 하고 골도 내며 욕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하여, 이 역시 먼 길에 심심풀이로서 한 가지의 방법이다. 내일은 곧장 심양(瀋陽)에 들어갈 것이다.

 

 

[D-001]권마성(勸馬聲) : 높은 관리의 행차에 앞서, 하인이 위엄을 돋우고 일반 행인을 물러서게 하기 위하여 길게 부르는 소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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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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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해제(解題)

 

이가원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1370A

 

이 열하일기(熱河日記) 26편은, 조선 정조왕(正祖王) 때 수많은 실학파(實學派) 학자 중에서 특히 북학파(北學派)의 거성(鉅星)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1737~1805)의 명저이다.

 

그는 정조왕 4,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隨行員)으로, () 고종(高宗)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북평(北平)열하(熱河) 등지를 역람(歷覽)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은 것이다.

 

그는 일찍이 당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일계(一系)의 학자들이 존명사상(尊明思想)에 얽혀서 아무런 실천이 없는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부르짖음에 반하여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산천(山川)풍토(風土)와 문물(文物)제도(制度)에 대하여 오랫동안 염모(艶慕)하였는데, 급기야 그 숙원(宿願)이 이루어져 그들의 통도(通都)요새(要塞)를 신력(身歷)하고는 더욱 자신이 만만하여, 모든 역사(歷史)지리(地理)풍속(風俗)습상(習尙)고거(攷據)건설(建設)인물정치경제사회종교문학예술고동(古董)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관상(觀賞)은 오로지 승지(勝地)명찰(名刹)에 그친 것이 아니었고, 특히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을 두어, 그 호화찬란한 재료의 구사와 웅려동탕한 문장의 표현이 실로 조선의 일대를 통틀어 수많은 연행문학(燕行文學) 중에서 백미적(白眉的)인 위치를 독점하였으며, 그 가치로서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수록(隨錄), 성호(星湖) 이익(李瀷) 사설(僿說),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북학의(北學議) 등과 함께 추숭(推崇)되었으나, 특히 문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결코 삼가(三家)의 추급(追及)할 바 아니었다.

 

그리고 본서는 애초부터 명확한 정본(定本)이 없는 동시에 당시의 판본(版本)이 없었으며, 다만 수많은 전사본(傳寫本)이 유행되었으므로, 그 편제(編制)의 이동(異同)이 없지 않음도 사실이었다. 이제 이 역주본(譯註本)은 연암의 수사본(手寫本), 또는 수택본(手澤本)을 근거로 삼고, 그 중의 누락된 부분은 몇십 종의 제본(諸本)을 상세히 대조하여 보충하되, 일일이 주석(註釋)에서 표시하였고, 또 최근에 발견된 원저(原著)의 세 편 중에서 열하일기서(熱河日記序)와 양매시화(楊梅詩話) 두 편은 적소(適所)에 추가하였으며, 다만 열하일기 보유(補遺) 한 편은 편질이 너무나 방대하여 뒷날에 정리 추가하기로 하였다.

 

도강록(渡江錄)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는 책문(柵門) 안을 들어서자 곧, 그들의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건설에 심취(心醉)하였다. 주로 성제(城制)와 벽돌을 쓰는 것이 실리임을 역설했다.

 

성경잡지(盛京雜識)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에는 특히 속재필담(粟齋筆談)상루필담(商樓筆談)고동록(古董錄) 등이 가장 재미로운 기사이다.

 

일신수필(馹迅隨筆)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병참지(兵站地)를 달리는 9일 동안의 기록이다. 거제(車制)희대(戲臺)시사(市肆)점사(店舍)교량(橋梁) 등에 대한 서술이다. 특히 그 서문 가운데의 이용후생학(利用厚生學)에 대한 논평이 독자의 흥미를 이끌었다.

 

관내정사(關內程史)

산해관 안으로부터 연경(燕京)에 이르기까지 11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 중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사당 중에서, “백이 숙채(熟菜)가 사람을 죽이네.”라는 이야기와 우암(尤菴)의 화상에 절하던 이야기 등 기사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호질(虎叱)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허생(許生)과 함께 가장 득의작(得意作)이었다. 남주인공 북곽 선생(北郭先生)과 여주인공 동리자(東里子)를 등장시켜서 당시 사회의 부패상을 여지없이 폭로하였다. 그 하나는 유학대가(儒學大家), 또 하나는 정절부인(貞節夫人)으로 가장하여, 사회를 속이며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그러한 정상을 알게 된 호랑이는 북곽 선생을 꾸짖었다. 사람이 호랑이를 꾸짖은 것이 아니고, 호랑이가 사람을 꾸짖은 것이다. 이는 곧 호랑이를 인격화함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연경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의 기록이다. 열하의 요해를 역설한 것이 모두 당시 열하의 정세를 잘 관찰한 논평이었고, 열하로 떠날 때의 이별의 한을 서술한 한 토막의 문장은 특히 애처롭기 짝이 없어, 후세의 독자로 하여금 눈물짓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기풍액(奇豐額)왕민호(王民皥)학성(郝成) 등과 함께 동중(東中) 두 나라의 문물(文物)제도(制度)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이내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설을 토론했다. 대체 당시 태서(泰西)의 학자 중에 지구(地球)의 설을 말한 이는 있었으나 지전에 대한 설은 없었는데, 대곡(大谷) 김석문(金錫文)에 이르러서 비로소 삼환부공(三丸浮空)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연암은 그의 지우(摯友)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대곡의 설을 부연하여 지전의 설을 주창하였던 것이었고, 그 말단(末段)에는 또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와 함께 목축(牧畜)에 대한 논평을 삽입하였으니, 자못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열하에서 다시금 연경으로 돌아오는 도중 6일 동안의 기록이다. 주로 교량(橋梁)도로(道路)방호(防湖)방하(防河)탁타(槖駝)선제(船制) 등에 대한 논평이다.

 

경개록(傾蓋錄)

열하의 태학에서 묵던 6일 동안에 그들의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다.

 

심세편(審勢編)

조선 사람의 오망(五妄)과 중국 사람의 삼난(三難)을 역설하였다. 역시 북학(北學)에 대한 예리한 이론이다.

 

망양록(忘羊錄)

윤가전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모든 견해를 교환한 기록이다. 이 편이 다른 본에는 대체로 행재잡록(行在雜錄)의 다음에 있었고, 또 연암이 비록 이 편을 혹정필담(鵠汀筆談)의 다음에 두었으나, 심세편(審勢編)의 말단에 명확히 망양록과 혹정필담을 열차(閱次)하였다.”는 구절이 있음으로 보아서, 이것이 연암 최후의 수정임을 인정하겠다.

 

혹정필담(鵠汀筆談)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유관록 중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것이다. 곧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역법(曆法)천주(天主) 등에 대한 논평이다.

 

찰십륜포(札什倫布)

열하에서 반선(班禪)에 대한 기록이다. 찰십륜포는 서번어(西番語) 대승(大僧)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반선시말(班禪始末)

() 황제가 반선에게 대한 정책(政策)을 논하였고, 또 황교(黃敎)와 불교(佛敎)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음을 밝혔었다.

 

황교문답(黃敎問答)

당시 천하의 정세를 파악하여 오망(五妄)육불가(六不可)를 논하였다. 그것은 모두 북학(北學)의 이론이었으며, 또는 황교와 서학자(西學者) 지옥(地獄)의 설에 대한 논평이다. 말단에는 또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였으되, 특히 몽고(蒙古)와 아라사(俄羅斯)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대하여 주의하여야 할 것을 논하였다.

 

피서록(避暑錄)

열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있을 때의 기록이다. 주로 동중(東中) 두 나라의 시문(詩文)에 대한 논평이다. 그 말단에는 최근에 연암 후손에 의하여 발견된 피서록 수고본을 추보하였으니,  삼한(三韓) 부인 반발(盤髮)’ 이하의 몇 칙()이다.

 

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서가(楊梅書街)에서 중국 학자들과 문답한 한시화(漢詩話)이다. 이 편은 각본(各本)에 모두 일서(逸書)로 되었었는데, 최근 연암의 후손에 의하여 발견되었으므로 이에 추보(追補)하였다. 그 책의 첫 장에 원본중낙루등입차(元本中落漏謄入次)’라는 여덟 글자가 적혀 있음으로 보아서, 당시에 옮겨 써 넣으려던 것이 우연히 누락된 것인 듯싶다. 그래서 다만 다른 편 중에 거듭된 부분과 본편과 관련이 없는 부분은 넣지 않았다.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재(銅蘭齋)에 머무를 때의 수필이다. 주로 가사(歌辭)향시(鄕試)서적(書籍)언해(諺解)양금(洋琴) 등에 대한 잡록(雜錄)이다.

 

옥갑야화(玉匣夜話)

일재본(一齋本)에는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로 되어 있다. 홍순언(洪純彥)정세태(鄭世泰)에 대한 기록도 재미있는 일이거니와, 특히 허생(許生) 한 편은 연암소설(燕巖小說) 중에서 가장 득의작(得意作)이다. 허생이 실존적인 인물인지, 또는 가상적인 인물인지는 알 수 없겠으나, 서울 묵적골에 살고 있던 한 불우한 서생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속유(俗儒)들의 위학(僞學)과는 달리하여 경세치용학(經世致用學)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서울 재벌로 이름높은 변씨(卞氏)의 돈을 빌려, 바다 가운데 한 빈 섬을 발견하고 떠돌이 도적을 몰아넣어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한 것은, 곧 수호(水滸)의 양산박(梁山泊)과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율도국(硉島國) 등 천고의 기인(奇人)기사(奇事)를 재연출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명무실한 북벌책(北伐策)을 여지없이 풍자하는 동시에, 이완(李浣)에게 세 가지의 당면한 대책(大策)을 제시하였으니, 이는 실로 북벌책의 정반대인 북학(北學)의 이론이었다. 연암은 일생을 통하여 그 소매(笑罵)와 비타(悲咤)의 일체를 모두 이 한 편에 붙여서 유감없이 표현하였던 것이다.

 

행재잡록(行在雜錄)

() 황제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보고 들은 모든 기록이다. 특히 청()의 친선정책(親鮮政策)의 까닭을 밝혔다.

 

금료소초(金蓼少鈔)

주로 의술(醫術)에 관한 기록이다. 연암집에서는 이 편을 보유라 하였으나, 열하일기의 제본(諸本)에는 원전의 한 편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그를 좇았다.

 

환희기(幻戲記)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중국 요술쟁이의 여러 가지 연기를 구경하고 그 소감을 적은 것이다.

 

산장잡기(山莊雜記)

열하 산장에서 여러 가지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상기(象記) 등이 가장 비장(悲壯)하고도 기휼(奇譎)하다.

 

구외이문(口外異聞)

고북구(古北口) 밖에서의 이문을 적은 것이다. 반양(盤羊)으로부터 천불사(千佛寺)에 이른 60종의 기이한 이야기이다.

 

황도기략(黃圖紀略)

황성(皇城)의 구문(九門)을 비롯하여 화조포(花鳥舖)에 이르기까지 38종의 문관(門館)전각(殿閣)도지(島池)점포(店舖)기물(器物) 등의 기록이다.

 

알성퇴술(謁聖退述)

순천부학(順天府學)으로부터 조선관(朝鮮館)에 이르기까지 역람한 기록이다.

 

앙엽기(盎葉記)

홍인사(弘仁寺)로부터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기까지 20개의 명소를 역람한 기록이다.

 

이는 실로 진고(振古)에 없는 명저이요, 거작이다. 연암이 귀국하던 날 이 책을 내어 남에게 보이니, 모두 책상을 치면서 기재 기재를 부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그를 싫어하던 도배들은 이를 노호지고(虜號之藁)’라 배격하였으니, 이는 곧 되놈의 연호를 쓴 초고라는 뜻이다. 이제 남공철(南公轍)이 지은 박산여묘지명(朴山如墓志銘) 중의 한 토막을 소개하기로 한다.

 

내 일찍이 연암 박미중(朴美仲)과 함께 산여(山如)의 벽오동관(碧梧桐館)에 모였을 적에, 청장(靑莊) 이무관(李懋官)과 정유(貞蕤) 박차수(朴次修)가 모두 자리에 있었다. 마침 달빛이 밝았다. 연암이 긴 목소리로 자기가 지은 열하일기를 읽는다.

 

무관과 차수는 둘러앉아서 들을 뿐이었으나, 산여는 연암에게, ‘선생의 문장이 비록 잘 되었지마는, 패관기서(稗官奇書)를 좋아하였으니 아마 이제부터 고문(古文)이 진흥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옵니다.’ 한다. 연암이 취한 어조로, ‘네가 무엇을 안단 말야.’ 하고는, 다시금 계속했다.

 

산여 역시 취한 기분에 촛불을 잡고 그 초고를 불살라 버리려 하였다. 나는 급히 만류하였다. 연암은 곧 몸을 돌이켜 누워서 일어나지 않는다. 이제 무관은 거미 그림 한 폭을 그리고, 차수는 병풍에다가 초서로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를 썼다. 나는 연암에게, ‘이 글씨와 그림이 극히 묘하니, 연암이 마땅히 그 밑에 발()을 써서 삼절(三絕)이 되게 하시오.’ 하여 그 노염을 풀려고 하였으나, 연암은 짐짓 노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새자, 연암이 술이 깨어서 옷을 정리하고 꿇어앉더니, ‘산여야 이 앞으로 오라. 내 이 세상에 불우한 지 오랜지라, 문장을 빌려 불평을 토로해서 제멋대로 노니는 것이지, 내 어찌 이를 기뻐서 하겠느냐. 산여와 원평(元平) 같은 이는 모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아름다우니, 문장을 공부하더라도 아예 나를 본받지 말고 정학(正學)을 진흥시킴으로써 임무를 삼아, 다른 날 국가에 쓸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네.

 

내 이제 마땅히 제군을 위해서 벌을 받으련다.’ 하고는, 커다란 술잔을 기울여 다시금 마시고 무관과 차수에게도 마시기를 권하여, 드디어 크게 취하고 기뻐하였다.”

 

이로 보아, 연암은 일시의 후배들에 대하여서도 이 글을 서슴지 않고 자랑하였던 것도 사실이었으며, 그는 또 자기의 모든 저서 중에서 이 열하일기만이 후세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자부하였던 것이다.

 

1968 4 15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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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끝]

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10권 별집 &n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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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1 열부(烈婦) 이씨(李氏) 정려음기(旌閭陰記)

2 말 머리에 무지개 선 것을 보고 기록하다

3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4 주영렴수재기(晝永簾垂齋記)

5 죽오기(竹塢記)

6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7 사장(士章) 애사(哀辭)

8 정석치(鄭石癡) 제문(祭文)

9 남수(南壽)에게 답함

10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11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12 영규비(靈圭碑)

13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14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열부(烈婦) 이씨(李氏) 정려음기(旌閭陰記)

 

박군 경유(朴君景兪)의 누이는 김씨의 처인데 지아비를 따라 죽으니 조정에서 일찍이 정려(旌閭)의 은전을 내렸다. 그 뒤 경유가 죽자 그의 아내 이씨가 의()에 따라 처신한 것이 경유의 누이에 비해 더욱 뛰어났다. 그래서 또 그 집에 정문(旌門)을 세우기를 김씨 처의 경우와 같이 하였다.

! 이런 일은 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바이거늘 마침내 박씨의 집안에는 저와 같이 용이하니, 또한 어찌 근본한 바가 없이 그러하겠는가? 박군은 나를 종유(從遊)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그 사람됨이 온유하고 효우(孝友)하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다. 다른 사람에 있어서는 혹 마지못해 한숨지으며 하는 일이라도 박군은 날마다 항상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어린 누이와 젊은 아내가 귀에 젖고 눈에 익어 그 의열(義烈)을 보기를 마치 물 긷고 방아 찧는 일처럼 몸소 할 만하고 술과 음식을 의논하여 마련하는 것같이 여겼으며, 그다지 가혹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로 보지 않고 참으로 보통 남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한 번도 얻기 어려운 것을 그 집안에서는 15년 사이에 두 번이나 보게 된 것이다.

박군은 밀양인(密陽人)으로 자()는 치연(穉然)이며 자호(自號)는 담영(澹寧)이라 한다. 이씨는 학생 윤배(允培)의 따님인데 임인년(1782) 5 18일에 죽으니, 그때 나이 36세였다. 죽은 그 이듬해 정월 21일에 나라에서 정문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D-001]박군 경유(朴君景兪) …… 내렸다 : 연암집 10 박 열부 사장(朴烈婦事狀)에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D-002] …… 뛰어났다 : 연암집 10 이 열부 사장(李烈婦事狀)에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말 머리에 무지개 선 것을 보고 기록하다

 

 

밤에 봉상촌(鳳翔村)에서 하룻밤을 묵고 새벽에 강화(江華)로 들어가는데 5리쯤 가니 하늘이 비로소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한 점의 구름이나 한 올의 아지랑이도 없더니 해가 겨우 하늘에 한 자쯤 떠오르자 갑자기 검은 구름 한 점이 일어나 까마귀 머리만 하게 해를 가렸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해의 절반을 가려 버려 어두침침해지자, 한스러운 듯 근심스러운듯 얼굴을 찡그리며 편안치 못한 것 같더니, 바깥으로 혜성과 같은 빛줄기를 뿜어 대는데 성난 폭포수처럼 하늘가로 내리쏘았다.

바다 건너 여러 산에는 각각 작은 구름이 나타나 멀리 서로 조응하여 뭉게뭉게 독기를 머금고 간혹 번개가 번쩍여 위용을 떨치며 해 아래서 우르르 꽝꽝 하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사면이 검은빛으로 온통 뒤덮여 혼솔과 틈 하나 없고, 번개가 그 사이로 번쩍하고 나서야 비로소 첩첩이 주름진 구름이 수천 꽃가지 수만 꽃잎을 이루어 마치 옷 가장자리에 선을 덧댄 듯, 꽃잎 가장자리에 무늬가 번진 듯 각각 그 엷고 짙음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천둥소리가 찢어질 듯하여 혹시 흑룡(黑龍)이라도 뛰쳐나오지 않나 하였으나, 비는 그다지 사납게 내리지 않았다. 멀리 연안(延安)과 배천(白川) 사이를 바라보니 빗발이 명주필을 드리운 것 같았다.

말을 재촉하여 십 리를 가니 햇빛이 갑자기 뚫고 나와 차츰 밝고 고와지며 아까 보이던 먹구름이 상서로운 구름으로 변하여 오색이 영롱하였다. 말 머리 위로 무슨 기운이 한 길이 넘게 뻗쳐 나 누르꾸름하여 마치 엉긴 기름 같더니, 어느새 갑자기 붉고 푸른 색으로 변하여 하늘로 높이 치솟았는데, 마치 문을 삼아 지나갈 수도 있을 듯했고 다리로 삼아 건널 수도 있을 듯했다. 그것이 처음에는 말 머리에 있어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더니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멀어져만 갔다. 이윽고 문수산성(文殊山城)에 당도하여 산기슭으로 돌아 나가 강화부(江華府)의 외성(外城)을 바라보니, 강을 누빈 백 리 연안에 하얀 성첩(城堞)이 해에 비치는데 무지개발은 여전히 강 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취하여 운종교(雲從橋)를 거닌 기록

 

 

7월 열사흗날 밤에 박성언(朴聖彦)이 이성위(李聖緯 이희경(李喜經))와 그의 아우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 원약허(元若虛 원유진(元有鎭)), 여생(呂生), 정생(鄭生), 동자 현룡(見龍)을 데리고 지나는 길에 이무관(李懋官 이덕무)까지 끌고 찾아왔다. 이때 마침 참판(參判) 서원덕(徐元德)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에 성언이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고 앉아서 자주 밤 시간을 살피며 입으로는 작별 인사하고 가야겠다고 말하면서도 짐짓 오래도록 눌러앉았다. 좌우를 살펴보아도 아무도 선뜻 먼저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원덕 역시도 갈 뜻이 전혀 보이지 않자 성언이 마침내 여러 사람들을 끌고 함께 나가 버렸다.

한참 후에 동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이 이미 떠났을 터이라 여러 분들이 거리를 산보하다가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려 술을 마시려고 합니다.”

하였다. 원덕이 웃으면서,

 

()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쫓아내는구려.”

하고서, 드디어 일어나 서로 손을 잡고 거리로 걸어 나갔다. 성언이 질책하기를,

 

달이 밝아서 어른이 집에 찾아왔는데 술을 마련하여 환대를 아니하고, 유독 귀인(貴人)만 붙들고 이야기하면서 어른을 오래도록 밖에 서 있게 하니 어쩌자는 거요?”

하였으므로, 나의 아둔함을 사과하였다. 성언이 주머니에서 50전을 꺼내어 술을 샀다. 조금 취하자, 운종가(雲從街)로 나가 종각(鐘閣) 아래서 달빛을 밟으며 거닐었다. 이때 종루(鐘樓)의 밤 종소리는 이미 삼경(三更) 사점(四點)이 지나서 달은 더욱 밝고, 사람 그림자는 길이가 모두 열 발이나 늘어져 스스로 돌아봐도 섬뜩하여 두려움이 들었다. 거리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어지러이 짖어 대는데, 희고 여윈 큰 맹견 한 마리가 동쪽에서 다가오기에 뭇사람들이 둘러싸고 쓰다듬어 주자, 그 개가 기뻐서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서 있었다.

일찍이 들으니 이 큰 맹견은 몽골에서 난다는데 크기가 말만 하고 성질이 사나워서 다루기가 어렵다고 한다. 중국에 들어간 것은 그중에 특별히 작은 종자라 길들이기가 쉽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더욱더 작은 종자라고 하는데 그래도 토종 개에 비하면 월등히 크다. 이 개는 이상한 것을 보아도 잘 짖지 않지만, 그러나 한번 성을 내면 으르렁거리며 위엄을 과시한다. 세간에서는 이를 호백(胡白)이라 부르며, 그중에 가장 작은 것을 발발이犮犮라 부르는데, 그 종자가 중국 운남(雲南)에서 나왔다고 한다. 모두 고깃덩이를 즐기며 아무리 배가 고파도 똥을 먹지 않는다. 일을 시키면 사람의 뜻을 잘 알아차려서 목에다 편지 쪽지를 매어 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반드시 전달하며, 혹 주인을 못 만나면 반드시 그 주인집 물건을 물고 돌아와서 신표(信標)로 삼는다고 한다. 해마다 늘 사행(使行)을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대부분 굶어 죽으며, 언제나 홀로 다니고 기를 펴지 못한다. 무관이 취중에 그놈의 자() 호백(豪伯)’이라 지어 주었다. 조금 뒤에 그 개가 어디론지 가 버리고 보이지 않자, 무관이 섭섭히 여겨 동쪽을 향해 서서 호백이!’ 하고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듯이 세 번이나 부르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러자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던 개떼들이 마구 달아나면서 더욱 짖어 댔다.

드디어 현현(玄玄)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술을 더 마시고 크게 취하여, 운종교를 거닐고 난간에 기대어 서서 옛날 일을 이야기했다. 당시 정월 보름날 밤에 연옥(蓮玉 유연())이가 이 다리 위에서 춤을 추고 나서 백석(白石 이홍유(李弘儒))의 집에서 차를 마셨는데,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장난삼아 거위의 목을 끌고 와 여러 번 돌리면서 종에게 분부하는 듯한 시늉을 하여 웃고 즐겼던 것이다. 지금 하마 6년이 지나서 혜풍은 남으로 금강(錦江)을 유람하고 연옥은 서쪽 관서(關西)로 나갔는데 모두 다 무양(無恙)한지 모르겠다.

다시 수표교(水標橋)에 당도하여 다리 위에 줄지어 앉으니,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히 붉은빛을 띠고 별빛은 더욱 흔들흔들하며 둥글고 커져서 마치 얼굴 위로 방울방울 떨어질 듯하며,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 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어 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겨 가니 성() 동쪽에는 청록색이 더욱 짙어졌다. 맹꽁이 소리는 눈 어둡고 귀먹은 원님 앞에 난민(亂民)들이 몰려와서 송사(訟事)하는 것 같고, 매미 소리는 일과를 엄히 지키는 서당에서 시험일에 닥쳐 글을 소리 내어 외우는 것 같으며, 닭 울음소리는 한 선비가 홀로 나서 바른말 하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는 것 같았다.

 

 

[C-001]운종교(雲從橋) : 한양의 종로 네거리 종루(鐘樓 : 종각鐘閣) 근처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D-001]박성언(朴聖彦) : 1743~1819. 서자(庶子)였던 박제가(朴齊家)의 적형(嫡兄) 박제도(朴齊道), 성언은 그의 자이다.

[D-002]서원덕(徐元德) : 1738~1802. 서유린(徐有隣)으로, 원덕은 그의 자이다. 문과 급제 후 현달하여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의 관찰사와 형조 · 병조 · 호조 · 이조의 판서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우 서유방(徐有防)과 함께 약관 시절부터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D-003]() 나라 …… 쫓아내는구려 : 원문은 非秦者逐인데, 이사(李斯)의 간축객서(諫逐客書)에 나오는 말이다. 진 시황(秦始皇)이 객경(客卿) 즉 진 나라 출신이 아닌 관리들을 추방하려 하자 이사가 글을 올려 진 나라 사람이 아닌 자는 떠나게 하고, 객경이 된 자는 추방하는非秦者去 爲客者逐 축객령(逐客令)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추방을 면하고 복직되었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文選 卷39 上書秦始皇 여기서 서유린은 그와 같은 표현을 써서, 일행이 아닌 자신을 따돌리려는 것을 농담 섞어 항의한 것이다.

[D-004]삼경(三更) 사점(四點) : 현대 시각으로 밤 12시 반쯤이다. 3경은 밤 11시에서 다음날 오전 1시까지인데, 1경은 5점으로 1점은 24분이다.

[D-005]서쪽으로 기울어 : 원문은 西隨인데,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西墮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주영렴수재기(晝永簾垂齋記)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는 양군 인수(梁君仁叟)의 초당(草堂)이다. 집은 푸른 벼랑 늙은 소나무 아래 있었다. 모두 여덟 개의 기둥을 세우고 그 안쪽을 칸으로 막아 깊숙한 방을 만들었으며 창살을 성글게 하여 밝은 마루를 만들었다. 드높이어 층루(層樓)를 만들고, 아늑히 하여 협실(夾室)을 만들었으며, 대 난간으로 두르고 띠풀로 지붕을 이었으며, 바른편은 둥근 창문이요 왼편은 교창(交窓)을 만들었다. 그 몸체는 비록 크잖으나 오밀조밀 갖출 것은 거의 갖추어졌으며 겨울에는 밝고 여름에는 그늘이 졌다. 집 뒤에는 여남은 그루의 배나무가 있고 대 사립 안팎은 모두 묵은 은행나무와 붉은 복숭아나무요, 하얀 돌이 앞에 깔려 있다. 맑은 시냇물이 소리 내며 급히 흐르는데, 먼 샘물을 섬돌 밑으로 끌어들여 네 귀가 번듯한 연못을 만들었다.

양군은 본성이 게을러 들어앉아 있기를 좋아하며, 권태가 오면 문득 주렴을 내리고, 검은 궤() 하나, 거문고 하나, () 하나, 향로 하나, 술병 하나, 다관(茶罐) 하나, 옛 서화축(書畵軸) 하나, 바둑판 하나 사이에 퍼진 듯이 누워 버린다. 매양 자다 일어나서 주렴을 걷고 해가 이른가 늦은가를 내다보면, 섬돌 위에 나무 그늘이 잠깐 사이에 옮겨 가고, 울 밑에 낮닭이 처음 우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궤에 기대어 검을 살펴보고, 혹은 거문고 두어 곡을 타고 술 한 잔을 홀짝거려 스스로 가슴을 트이게 하거나, 혹은 향 피우고 차 달이며, 혹은 서화를 펼쳐 보기도 하고 혹은 옛 기보(碁譜)를 들여다보면서 두어 판 벌여 놓기도 한다. 이내 하품이 밀물이 밀려오듯 나오고 눈시울이 처진 구름처럼 무거워져 다시 또 퍼져 누워 버린다. 손이 와서 문에 들어서면, 주렴이 드리워져 고요하고 낙화가 뜰에 가득하며 처마 끝의 풍경은 저절로 울린다. 주인의 자()를 서너 번 부르고 나서야 일어나 앉는데, 다시 나무 그늘과 처마 그림자를 바라보면 해가 여전히 서산에 걸리지 않았다.

 

 

[D-001]교창(交窓) : 실내를 밝게 하기 위해 설치하는 광창(光窓)의 일종으로, 창살을 효()자 모양으로 짜기 때문에 교창이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죽오기(竹塢記)

 

 

예로부터 대나무를 칭송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시경(詩經) 기욱편(淇奧篇)에서부터 대나무를 노래하고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이라 칭하여 높이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대나무가 마침내 이 때문에 병들고 말았다. 그렇지만 천하에서 대나무로써 호()를 삼는 자가 그칠 줄을 모르고, 더 나아가 글을 지어 기록까지 하고 있으니, 아무리 채륜(蔡倫)이 종이를 만들고 몽염(蒙恬)이 붓을 만들었다 한들 풍상(風霜)에도 변치 않는 대나무의 지조와 소탈하면서도 고고한 태도를 예찬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지었다는 글들이 모두 다 쓸데없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은 셈이어서, 대나무는 이 때문에 풀이 죽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글 못하는 나조차도 대나무의 덕성(德性)을 칭송하고 대나무의 소리와 색깔을 형용하여 시문을 지은 것이 많은데 다시 또 무슨 글을 짓는단 말인가.

양군 양직(梁君養直)은 강직하고 지절(志節)이 있는 사람이다. 일찍이 스스로 호를 죽오(竹塢)’라 하여 자기 거실에 편액을 걸고 내게 기()를 지어 달라고 청했는데, 아직껏 응해 주지 못한 것은 내가 대나무에 대하여 진실로 난처하게 여기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그대가 그 액호를 바꾸면 글은 당장이라도 지어 줄 수 있다.”

하고서, 그를 위하여 고금의 인물들이 지은 기발하고 운치 있는 이름으로 이를테면 연상각(烟湘閣), 백척오동각(百尺梧桐閣), 행화춘우림정(杏花春雨林亭), 소엄화계(小罨畵溪), 주영렴수재(晝永簾垂齋), 우금운고루(雨今雲古樓) 등 열이고 백이고 누차 꼽으면서 그더러 스스로 선택하라고 권했으나, 양직은 머리를 흔들며 다 거절하였다. 그러고는 앉으나 누우나 죽오요 잠시 잠깐도 죽오를 떠나지 아니하며, 매양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문득 죽오라 쓰게 하여 벽에 걸곤 하니 벽의 네 모퉁이가 모두 죽오뿐이었다. 향리에서 죽오를 들어 기롱하는 사람 또한 많았지만, 천연덕스레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 채 편안히 받아넘기곤 하였다. 그래서 나에게 글을 청한 것이 지금 하마 십 년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천번 꺾이고 백번 눌려도 그 뜻을 바꾸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간절하였다. 심지어는 술까지 대접하며 달래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내가 번번이 잠자코 대답하지 않으면, 분격하여 낯빛을 붉히고 삿대질하며 노려보는데, 눈썹은 개() 자 모양으로 치켜세우고 손가락은 메마른 댓마디가 되며, 꿋꿋하면서도 비쩍 마른 모습이 갑자기 대나무의 형상을 이룬다.

아아! 양직은 어쩌면 진정으로 대나무에 미쳐서 그렇게 극진히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겉모습만 보아도 그의 마음이 기암괴석처럼 울뚝불뚝하고, 그윽한 대나무 숲이 그 마음속에 무성하게 들어차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나의 글을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찌 말려야 말 수 있겠는가? 옛사람 중에 이미 대나무를 높여서 군()이라 부른 사람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양직 같은 이는 백세(百世) 뒤에 차군(此君)의 충신이 될 만하다. 나는 이에 대서특서(大書特書)하여 정표(旌表)하기를, ‘고고하고 정결한 양 처사의 집高孤貞靖梁處士之廬이라 했다.

 

 

[D-001]()이라 …… 있었으니 : 대나무를 차군(此君)이라 한다. 왕희지(王羲之)가 대나무를 몹시 사랑하여, 단 하루도 차군(此君)’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80 王羲之傳 소식(蘇軾)의 묵군당기(墨君堂記) 유독 왕희지가 대나무를 군()이라 하였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를 따라 군()으로 삼으면서도 군말이 없었다.”고 하였다.

[D-002]양군 양직(梁君養直) : 양호맹(梁浩孟)을 말한다. 그의 자가 양직이고, 호가 죽오였다. 양호맹은 개성의 부유한 향반(鄕班)으로, 연암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으로 이거하면서 개성에 잠시 머물 때 그의 별장에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교분을 맺고 연암의 문하를 출입했다.

[D-003]()  : 대 줄기를 상형(象形)한 글자로서, 대를 헤아리는 단위로도 쓰인다. 또한 동양화에서 죽엽(竹葉)을 개() 자 모양으로 그린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

 

 

무릇 꽃이 피고 지는 것은 모두 비바람에서 연유한다. 그렇다면 비바람은 바로 꽃의 조맹(趙孟)이라 할 것이다. 필운동(弼雲洞)에서 살구꽃을 구경할 때는 어찌 이 골짜기의 복사꽃이 열흘을 넘지 않아서 필 줄을 알았겠는가. 필운동에 놀던 사람들이 모두 다 이 골짜기로 왔으니, 비하자면 위기후(魏其侯)의 빈객(賓客)들이 무안후(武安侯)를 섬기자고 떠난 것과 같다. 어찌 나면서부터 고귀한 대접을 받는 복사꽃에 한()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기쁨과 성냄과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들어맞는 것을 ()’라 이르나니, ‘란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하고 자욱하며 성대하게 유행하여, 온 누리가 따뜻한 햇빛을 머금어 한 번의 숨도 끊어지지 않고 틈이 생길 만한 한 번의 모자람도 없는 것이다. 지금 이 골짜기로 와 보니 충만하고 성대하여 중화(中和)의 기운이 무성하다. 한 나무도 복사 아닌 것이 없고 한 가지도 꽃이 피지 않은 것이 없어, 온후하면서도 빼어나게 환해서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이 가라앉고 기()가 평온해지니, 평소의 편벽된 성품이 어찌 이에 이르러 누그러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저 언덕 위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노래하고 떼 지어 웃고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술 취한 사람이 통곡하며 말끝마다 제 어미를 불러 대고 있었다. 구경꾼이 담장을 두르듯 모여들었으나,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 하나 없고 거듭 흐느끼는 소리의 억양이 모두 다 절주(節奏)에 들어맞았다. 이는 그의 마음이 우는 데 전념하여 자연히 음률에 들어맞은 것이다. 만약 취한 사람이 복사꽃을 보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이는 계절과 사물에 감촉되어 저절로 슬픔이 일어났다 해도 아닐 것이요, 또 효자가 어머니를 생각하여 어디를 가도 그렇게 된다고 해도 역시 아닐 것이다. 이는 곧 구경하는 사람의 억측일 뿐이요, 취한 사람의 진정은 아니니, 모름지기 취한 사람에게 무슨 일로 통곡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아난(阿難)이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미소를 지은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날 경부(敬夫)가 특히 많이 취하여 사언(士彦)의 나귀를 거꾸로 타고 소나무 사이로 어지러이 달렸고, 일여(逸如)의 무리는 좌우에서 소리치고 둘러싸서 웃고 즐겼으며, 무관(懋官 이덕무)과 혜보(惠甫 유득공) 또한 크게 취하여 너털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가위 실컷 마시고 크게 취했다고 하겠으니 즐거움이 또한 극에 달했다. 그러나 해가 저물자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사람마다 돌아갈 길을 재촉하는데, 한 사람도 질탕하게 복사꽃 밑에서 머물러 자는 이가 없었으니, , 슬프도다! 어부가 나루터를 찾지 못한 것도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도도인(觀桃道人)이 마침내 게어(偈語)를 지었노라.

 

복숭아꽃 빛깔을 내 처음 보니 / 我見桃花色

발끈히 성낸 모습 생동하는 듯 / 勃然如有神

복숭아꽃도 역시 향기가 있어 / 亦有桃花香

바람이 불면 사람 향해 뿜어 대네 / 臨風噴射人

꽃망울은 팥알만 한 불상 같고 / 菩蕾如豆佛

뒤집힌 잎사귀는 느슨해진 활 같네 / 反葉學弨弓

향기와 빛깔 모두 형체에 덧붙은 것일 뿐 / 香色皆附質

생명력은 도로 공()을 따라 사라지네 / 生意還從空

 원문 빠짐  / □□□□□

 원문 빠짐  / □□□□□

투기 않고 앙탈도 부리잖으면 / 不妬亦不嗔

()의 의미를 결코 모르고말고 / 定不識情字

 

 

[C-001]도화동(桃花洞) : 한양의 북악(北岳) 아래에 있었다. 복숭아나무가 많으므로 도화동이라 했다. 청헌(淸軒) 문성(文晟)이 이 동리에 살았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옛 집터도 있었다. 漢京識略 卷2 名勝

[D-001]조맹(趙孟) : 조맹은 춘추(春秋) 시대 진() 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그 직계 후손들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조맹이 천하게 할 수 있다.趙孟之所貴 趙孟能賤之에서 나온 말로, 비바람이 꽃을 피게 할 수도 있고 떨어지게 할 수도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D-002]위기후(魏其侯) …… 같다 : () 나라 무제(武帝) 때에 위기후(魏其侯) 두영(竇嬰)의 권세가 약해지고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의 권세가 강해지자 권세를 좇는 사람들이 모두 무안후에게 가서 붙었다. 이 글에서 위기후는 살구꽃에 해당하고, 무안후는 복사꽃에 해당한다. 史記 卷107 魏其武安侯列傳

[D-003]유몽득(劉夢得)의 현도관(玄都觀) : 몽득은 당() 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자()이고, 현도관은 장안(長安)에 있던 도교사원道觀이다. 유우석의 꽃구경하는 군자들에게 장난삼아 지어 주다戲贈看花諸君子라는 시에서 현도관 안의 복사나무 천 그루, 모두 내가 떠난 후에 심은 것이로세.玄都觀裏桃千樹 盡是劉郞去後栽라고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劉賓客文集 卷24

[D-004]기쁨과 …… 이르나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1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D-005]고경일(高景逸)의 우정(郵亭) : 경일은 명()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우정(郵亭)의 복사꽃을 노래한 그의 시가 있는 듯하다.

[D-006]아난(阿難) ……  : 미상(未詳)이다. 석가의 염화시중(拈花示衆)에 가섭(迦葉)이 홀로 파안미소(破顔微笑)한 고사와 혼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D-007]일여(逸如) : 김사희(金思羲)의 자이다. 김사희는 호를 이아탕주인(爾雅宕主人)이라 하며, 진사 급제하였다. 이덕무와 친하여 그가 만든 윤회매(輪回梅)를 사 주었다고 한다. 靑莊館全書 卷63 輪回梅十箋 附詩 炯菴

[D-008]실컷 …… 취했다 : 원문의 劇飮 極飮과 같다. 구양수(歐陽脩)의 석비연시집서(釋秘演詩集序)에 비연(秘演)이 석만경(石曼卿)과 절친하여 실컷 마시고 크게 취하게 되면 노래 부르고 시를 읊조리며 웃고 소리치는 것으로 제 마음에 맞는 천하의 즐거움으로 삼았으니 이 얼마나 씩씩한가.當其極飮大醉 歌吟笑呼 以適天下之樂 何其壯也라 하였다.

[D-009]어부가 ……  :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 나라 때 무릉(武陵) 출신의 한 어부가 복숭아나무 숲을 지나 수원(水源)이 다하는 곳에 있는 어느 산속의 동굴로 들어갔다가 진() 나라 때 피난 왔다는 사람들의 후손이 모여 사는 별세상을 만났으나, 일단 그곳을 나온 뒤 다시는 그리로 들어가는 나루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사장(士章) 애사(哀辭)

 

 

사장(士章)이 죽어 염을 마친 뒤에야 나는 비로소 그의 방에서 곡을 하였다. 그림을 벽에서 떼어 내고 병풍과 장자(障子)를 치우고 서책(書冊)을 옮겼으며, 집기와 감상품 따위를 바깥 마루에다 흩어 놓았고, 방 한가운데에 머리를 동으로 둔 채 얇은 이불로 덮어 놓아, 마치 거문고를 집에 넣어 금상(琴牀) 위에 둔 것 같았다. 쓰다듬으며 통곡했더니 손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울컥 싫은 마음이 나서 방문을 닫고 나왔다. 뜰에는 왁자지껄하면서 뚝딱뚝딱 널을 짜고 이음매에 옻을 칠하니, 장차 우리 사장을 가두어 두려는 것이었다. 그의 벗 함원(咸原) 어경국(魚景國)과 풍산(豐山) 홍숙도(洪叔道)의 이름이 조문객 명부에 있었다. 문설주를 잡고 엎디어 울고 있는 그들에게 두 분은 그리도 애통하시오?” 하고 물었더니, “너무도 애통하오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호곡하기도 전에 눈물 콧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아! 사장은 명문가의 자제로 용모가 아름다웠다. 일찍이 필운대(弼雲臺)에서 꽃구경할 적에 그때는 바야흐로 석양이라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부채를 들어 해를 가리고 있었더니 사람마다 얼굴을 돌려 돌아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는 전우산(錢虞山 전겸익(錢謙益))을 본받고 글씨는 미남궁(米南宮 미불(米芾))을 배웠으며, 그가 좋아하는 것은 보검(寶劍)인데 그 값이 왕왕 백금(百金)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무릇 공작새가 먼지를 피하는 것과 화포(火布)가 때를 씻어 내는 것과 백지(白芷)와 백출(白朮)이 땀을 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천성이라 하겠고, 원앙새나 금계(錦鷄)가 물에 섰는 것은 물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사랑한 때문이라 하겠다. 당시의 노래 잘 부르는 자들을 좋아하여, 한밤중에 가야금을 타면서 매양 그들의 신성(新聲)을 변주(變奏)하는데 가락이 느릿느릿하게 변하여 처량하고 슬픈 회포를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혈병을 앓은 지 두어 달 만에 죽으면서 뱃속에 아들을 남겼다. 그 선세(先世)는 나와 조상이 같다.

애사(哀辭)는 다음과 같다.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는 되는 게 아니고 감정이 극에 달해야 우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모르겠네, 이른바 정이란 것이 어떤 모양이관대 생각만 하면 내 코 끝을 시리게 하는지. 또한 모르겠네, 눈물이란 무슨 물이관대 울기만 하면 눈에서 나오는지.

아아, 우는 것을 남이 가르쳐서 하기로 한다면 나는 의당 부끄럼에 겨워 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다. 내 이제사 알았노라, 이른바 그렁그렁 고인 눈물이란 배워서 될 수 없다는 것을.

 

 

[D-001]사장(士章) : 박상한(朴相漢 : 1742~1767)의 자이다. 그의 조부는 이조 판서를 지낸 박사수(朴師洙)이고, 부친은 박만원(朴萬源), 장인은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이다. 그의 집안과 연암의 집안은 야천(冶川) 박소(朴紹) 이후 갈라져, 박상한은 야천의 9대손이 되고, 연암은 8대손이 된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D-002]어경국(魚景國) : 경국(景國)은 어용빈(魚用賓 : 1737~1781)의 자이다. 함원(咸原)은 곧 함종(咸從)으로, 함종 어씨 집안과 반남 박씨 집안은 가까운 인척간이었다. 어경국은 어유봉(魚有鳳)의 손자로, 연암의 고모부인 어용림(魚用霖)의 동생이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D-003]홍숙도(洪叔道) : 숙도(叔道)는 홍낙임(洪樂任 : 1741~1801)의 자이다. 그는 홍봉한(洪鳳漢)의 아들로, 어용빈과 절친한 사이였다. 김윤조의 幷世集 所載 연암 작품의 검토(安東漢文學論集6, 1997) 참고.

[D-004]두 분은 …… 하였다 : 논어 선진(先進)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곡하며 너무도 애통해하니, 따라간 제자가 선생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십니다.’ 하였다.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는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05]사장(士章)이 죽어 …… 아름다웠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缺百六字로 되어 있는데,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 의거하여 보충 · 번역하였다. 단 보충된 원문은 모두 126자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士章歿 旣殮 余始哭于其室 畵刊于壁 撤屛捲障 遷其書冊 器什玩好 散于外廳 中霤東首 覆以涼衾 若室琴而床者 憮以慟 黏手津津 心慨然惡之 扃戶而出 中庭薨薨 約之丁丁 陳柒其坎 將以閉吾士章也 其友咸原魚景國 豊山洪叔道 名在弔簿 問其持戶伏而啼者曰 二子慟歟 曰 慟矣 泗先其咷 嗟乎 士章名家子 美姿儀

[D-006]화포(火布) : 화완포(火浣布)라고도 하며 지금의 석면(石綿)에 해당한다. 화포는 불 속에다 집어넣어 때를 없앤다고 한다. 列子 湯問

[D-007]백지(白芷)와 백출(白朮) : 백지는 우리말로 구릿대, 백출은 흰삽주라고 하며, 이것으로써 온분(溫粉)을 만들어 몸에 뿌리면 땀 나는 것이 멈춘다고 한다. 東醫寶鑑 止汗法 溫粉

[D-008]신성(新聲) : 당시 한양의 가객(歌客)들은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빠른 가락의 시조창(時調唱)을 즐겨 불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정석치(鄭石癡) 제문(祭文)

 

 

살아 있는 석치(石癡)라면 함께 모여서 곡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조문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욕을 할 수도 있고, 함께 모여서 웃을 수도 있고, 여러 섬의 술을 마실 수도 있어 서로 벌거벗은 몸으로 치고받고 하면서 꼭지가 돌도록 크게 취하여 너니 내니도 잊어버리다가, 마구 토하고 머리가 짜개지며 위가 뒤집어지고 어찔어찔하여 거의 죽게 되어서야 그만둘 터인데, 지금 석치는 참말로 죽었구나!

석치가 죽자 그 시신을 빙 둘러싸고 곡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석치의 처첩과 형제 자손 친척들이니, 함께 모여서 곡을 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적지 않다. 또한 손을 잡고 위로하기를,

 

덕문(德門 남의 집안을 높여 부르는 말)이 불행하여 철인(哲人)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하면, 그 형제와 자손들이 절하고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제 집안이 흉한 화를 만났습니다.”

하고, 그 붕우들마다 서로 더불어 탄식하며,

 

이 사람은 확실히 얻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하니, 함께 모여서 조문하는 사람들도 진실로 적지 않다.

한편 석치와 원한이 있는 자들은 석치더러 염병 걸려 뒈지라고 심하게 욕을 했지만, 석치가 죽었으니 욕하던 자들의 원한도 이미 갚아진 셈이다. 죄벌로는 죽음보다 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 세상을 꿈으로 여기고 인간 세상에서 유희(遊戲)하는 자가 있을 터이니,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진실로 한바탕 웃어젖히면서 본래 상태로 돌아갔다 여겨서,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고 썩은 나무가 꺾어지듯 갓끈이 끊어질 것이다.

석치가 참말로 죽었으니 귓바퀴가 이미 뭉그러지고 눈망울이 이미 썩어서,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며, 젯술을 따라서 땅에 부으니 참으로 마시지도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평소에 석치와 서로 어울리던 술꾼들도 참말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파하고 떠날 것이며, 진실로 장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파하고 가서는 자기네들끼리 서로 모여 크게 한잔할 것이다.

제문을 지어서 읽어 가로되,

 원문 빠짐 

 

 

[D-001]석치(石癡) : 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정철조는 정조 5(1781)에 죽었다.

[D-002]철인(哲人) : 죽은 사람을 높여 부른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죽기 얼마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는가? 대들보가 쓰러지려는가? 철인이 병들려는가?哲人其萎乎라는 노래를 불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남수(南壽)에게 답함

 

 

사흘 낮을 이어 비가 내리니 가련하게도 필운동(弼雲洞)의 번성하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붉은 진흙으로 변하고 말았네. 진작 이렇게 될 줄 알았던들, 왜 서로 주선하여 하루 동안의 심심풀이를 서둘지 않았겠는가? 긴긴날 무료히 앉아 홀로 쌍륙(雙六)을 즐기자니, 바른손은 갑()이 되고 왼손은 을()이 되어, ()를 부르고 백()을 부르는 사이에 그래도 피아(彼我)의 구분이 있어 승부에 마음을 쏟게 되고 번갈아 가며 적수가 되니, 나도 정말 모를 일이지, 내가 나의 두 손에 대하여도 역시 편애하는 바가 있단 말인가? 이 두 손이 이미 저것과 이것으로 나뉘어졌다면 어엿한 일물(一物)이라 이를 수 있으며 나는 그들에 대해 또한 조물주라 이를 수 있는데, 오히려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고 편들거나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단 말인가?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를 일이지,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들에게 사정(私情)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라 하였느니.”

그랬네. 내 나이 사십이 못 되었는데 벌써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그 기력과 태도가 하마 노인 같아, 제비 손님과 장난치며 웃으니, 이것이 노인의 소일하는 비결일세.

이때에 갑자기 그대의 서찰이 내 앞에 떨어져 나의 그리운 마음을 충분히 위안해 주기는 하였으나, 자줏빛 첩()에 쓴 부드러운 필치는 너무도 문곡(文谷)과 흡사하여 우아한 점은 있지만 풍골(風骨 웅건한 기상)이 전혀 없네그려. 이는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가 비록 진신(搢紳)의 모범은 될지언정 결국은 대가(大家)의 필법은 아닌 것과 같으니, 이 점만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네.

정존와기(靜存窩記)는 그 글을 찾으러 오겠다는 말을 지금 읽고서야 비로소 깨달았으니, 평소 남에게 너무 쉽게 승낙하기 때문에 이런 독촉을 받게 되는 것이라 자못 후회가 되고 부끄럽군. 그러나 지금 이미 유념해 두었으니 삼가 차분하게 만들어 보겠으나, 다만 그 더디고 빠름은 미리 헤아릴 수 없네. 불선(不宣).

 

 

[C-001]남수(南壽) : 박남수(朴南壽 : 1758~1787)를 말한다. 그는 자가 산여(山如), 진사 급제 후 대과에는 누차 낙방하여 불우하게 지냈다. 연암의 증조인 박태두(朴泰斗) 이후 갈라진 동족간으로, 연암의 족손(族孫)이 된다. 박남수는 남공철(南公轍)과 절친한 사이였다.

[D-001]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 : 논어(論語) 위정(爲政)에서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말하기를,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니라.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였는데, 원문의 음이 제비의 지저귀는 소리와 비슷하다 하여 제비를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

[D-002]바둑이나 …… 낫겠지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 마음도 쓰지 않고 지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라도 하는 것이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라고 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D-003]문곡(文谷) : 김수항(金壽恒 : 1629~1689)의 호이다. 김수항은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전서(篆書)와 해서(楷書) · 초서(草書)에 두루 능하였다고 한다.

[D-004]윤 상서(尹尙書) : 판서를 지낸 윤급(尹汲 : 1697~1770)을 가리킨다. 그는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에 대해 용기 있게 반대하여 자주 파직 · 좌천되었으므로 직신(直臣)으로 명망이 매우 높았다. 필법이 정려(精麗)하여 당시 이름난 고관 대신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으며, 사람들이 그의 편지를 얻으면 글씨를 다투어 모방하여 그런 글씨를 윤상서체(尹尙書體)’라 불렀다고 한다. 槿域書畵徵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심한 더위 속에 여러분들은 여전히 건강하게 지내는지? 성흠(聖欽 이희명(李喜明))은 근자에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마음에 걸리어 더욱 잊혀지지 않네. 중존(仲存 이재성(李在誠))과는 가끔 서로 만나 술이라도 마실 수 있겠지만, 백선(伯善)은 청교(靑橋)를 떠나고 성위(聖緯 이희경(李喜經))도 이동(泥洞 현재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없으니 이와 같이 긴긴날에 무얼로 소일하며 지내는지 모르겠네.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은 듣자니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다는데, 집에 돌아온 뒤 몇 번이나 서로 만났는가? 그가 이미 조강지처를 잃고 또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 같은 훌륭한 벗을 잃어, 이승에서 오래도록 외톨이로 쓸쓸하게 지내게 되었으니, 그의 얼굴과 말은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네. 그 또한 천지간에 의지가지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말고.

아아, 슬프도다! 지기(知己)를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슬픔보다 심하다고 논한 적이 있었지. 아내를 잃은 자는 그래도 두 번 세 번 장가라도 들 수 있고, 서너 차례 첩을 들여도 안 될 것이 없네. 마치 의복이 터지고 찢어지면 꿰매고 때우는 것과 같고, 집기가 깨지고 이지러지면 새것으로 다시 바꾸는 것과 같네. 때에 따라서는 후처(後妻)가 전처(前妻)보다 나을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나는 비록 늙었지만 상대는 새파랗게 젊어서 신혼의 즐거움이 초혼과 재혼 사이에 차이가 없을 수도 있네. 하지만 지기를 잃은 쓰라림에 이르러서는 그렇지가 않지. 내가 다행히 눈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보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귀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듣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입을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나의 맛을 함께하며, 내가 다행히 코를 지녔지만 뉘와 더불어 내 맡는 것을 같이하며, 내가 다행히 마음을 지녔지만 장차 뉘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영각(靈覺)을 함께한단 말인가?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났으니, 백아(伯牙)가 이 석 자의 오동나무 고목을 끌어안고 장차 뉘를 향하여 타며 장차 뉘로 하여금 듣게 한단 말인가? 그 형세로 말하자면 부득불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번에 다섯 줄을 긁어 대어 그 소리가 쟁그르르 하고 났을 걸세. 그렇게 하여 줄을 자르고 끊고 부딪고 깨고 부수고 밟아서 모조리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단번에 불태워 버린 연후에야 마음이 후련하였을 것이네. 그리고 제 자신과 이렇게 문답했겠지.

 

네 속이 시원하냐?”

시원하고말고.”

울고 싶으냐?”

울고 싶고말고.”

그러자 울음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하며, 눈물이 솟아나 옷깃 앞에 마치 화제(火齊)나 슬슬(瑟瑟)처럼 떨어졌을 것이네. 눈물을 드리운 채 눈을 들어 바라보노라면, 빈 산에는 사람 하나 없는데 물은 절로 흐르고 꽃은 절로 피어 있네.

네가 백아를 보았느냐고 물을 테지. , 보았고말고!

 

 

[C-001]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 것이다 : 연암은 정조 16(1792) 음력 1월에 안의에 부임하여 정조 20(1796) 2월까지 현감으로 재직하였다. 글 중에 이덕무(李德懋)가 사망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음을 보면, 1793년 여름 무렵에 씌어진 편지로 짐작된다.

[D-001]청교(靑橋) : 한양 남부 명철방(明哲坊)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쌍리동(雙里洞)의 개울물이 북쪽으로 흘러 이 다리를 지나 태평교와 합친다고 하였다. 漢京識略 卷2 橋梁

[D-002]영각(靈覺) : 불교 용어로,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다는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본성을 말한다.

[D-003]종자기(鍾子期) : 중국 춘추 시대 초() 나라 사람으로 음악에 정통했다는 인물이다. 거문고 명수인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하였더니, 종자기가 이를 듣고 백아의 뜻이 고산유수(高山流水)에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 세상에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사람知音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줄을 끊고 거문고를 부수어 버린 뒤 종신토록 거문고를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呂氏春秋 本味》 《列子 湯問

[D-004]울음소리가 …… 듯하며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위() 나라에 있을 때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D-005]화제(火齊)나 슬슬(瑟瑟) : 모두 구슬 모양으로 된 보석의 일종이다.

[D-006]빈 산에는 …… 피어 있네 : 원문은 空山無人 水流花開, 소식(蘇軾)의 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 나오는 구절이다. 연암은 이 구절을 빌려, 고산유수(高山流水)의 뜻을 표현했던 자신의 음악을 알아줄 이가 이제는 없음을 서글퍼한 백아의 심경을 나타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제(族弟) 준원(準源) 에게 보냄

 

 

인산(因山)이 끝나고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멀리 운향(雲鄕)을 바라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치리오.

깊은 겨울 모진 추위에 대감의 기거(起居)는 두루 좋으신지요?

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은 교정된 본()으로 모두 몇 권이나 되는지요? 말세의 풍속이 명예만을 제일로 삼고 덕을 알아보는 자는 드물지요. 이는 아마도 형님께서 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뜻은 고상하고, 겉모습은 여위었지만 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은거하면서도 친한 이를 기피하지 않아 남들이 은거하는 줄을 알지 못한 때문일 것이오. 유명해져도 선비의 본분을 벗어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소. 또 처지가 이처럼 가까운데도 멀리 떠나려는 마음은 돌이킬 수가 없었고, ()가 형통하려는 때를 만났는데도 고생을 마다 않는 굳은 절개를 굽히게 하기 어려웠으니, 이 어찌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히지 않는 그런 인물이 아니겠소. 옛 현인 중에서 찾아봐도 실로 더불어 짝할 이 드문지라, 비록 그 명성과 지위가 충분하지 못하고 출사(出仕)와 은거가 똑같지는 않지만, 민풍(民風)을 세워 세상을 선도하고 학설을 세워 후세에 남기고자 한 점에 있어서는 미상불 동일하다 아니 할 수 없소이다. 그 공이 어찌 다만 사문(斯文 유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데에 그칠 뿐이리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과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두 선조를 보좌하고 우리 종중을 더욱 튼튼히 하리라 믿소.

지난번 영남의 고을에 있을 적에 화양동(華陽洞) 선묘(先墓)에 제사 지낼 때 축문(祝文)을 쓰는 일로 장문의 편지를 나에게 내려 주신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가 유집 가운데 수록되었는지 모르겠소. 그때 답서를 올리면서 부득불 낱낱이 들어 실정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에 아울러 등초(謄抄)하여 보내니, 부디 원서(原書)의 아래에다 붙이되 글자 한 자를 낮추어 기록함이 어떻겠소?

족종(族從 연암을 가리킴)은 노병이 날로 심한데도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인지요?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바람마저 매우 달라 나무를 뽑고 기왓장을 날리곤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나며, 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이 바로 베개맡에 들린다오.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지요.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되지요.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로이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이해도 저물어 가는데 그리움으로 울적한 마음을 소폭의 편지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어 이만 줄이오.

 

 

[C-001]족제(族弟)에게 보냄 : 이 편지는 1800년 음력 9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임명된 연암이 연말에 쓴 것으로 보인다.

[D-001]인산(因山) …… 떠나셨으니 : 순조(純祖) 즉위년(1800) 11월에 거행된 정조(正祖)의 장례를 가리킨다. 원문은 珠邱事竣 弓劍永悶인데, ‘주구(珠邱)’는 순() 임금의 무덤에 새가 날아와 구슬을 떨어뜨린 것이 쌓여서 언덕을 이루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능침(陵寢)을 뜻한다. 拾遺記 虞舜 그리고 궁검(弓劍)’은 각각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지상에 떨어뜨렸다는 활과, 텅 빈 그의 무덤 속 관에 남아 있었다는 칼을 가리킨다. 史記 卷28 封禪書》 《列仙傳

[D-002]운향(雲鄕) : 운향은 백운향(白雲鄕) 또는 제향(帝鄕)과 같은 말로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 천세(千歲)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D-003]돌아가신 형님의 유집(遺集) : 박준원의 형인 박윤원(朴胤源 : 1734~1799)의 문집 근재집(近齋集)을 가리킨다. 근재집은 이후 1807년에 박준원의 아들인 박종경(朴宗慶)에 의해 전사자(全史字)로 간행되었다.

[D-004]몸가짐을 나직이 하였으되 : 원문은 卑牧인데,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初六)의 상사(象辭) 지극히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춤으로써 자신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고 하였다.

[D-005]속마음은 여유가 있었으며 : 원문은 肥遯인데,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 여유 있는 마음으로 물러가 숨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 无不利고 하였다.

[D-006]처지가 …… 없었고 : 아우 박준원의 딸이 후궁이 되어 왕세자(후일 순조純祖)를 낳음에 따라 귀근(貴近)의 처지가 되었는데도 굳이 은둔하려 했다는 뜻이다. 정조 22(1798) 원자(元子)를 위한 강학청(講學廳)이 설치되자 그 요속(僚屬)으로 천거 · 선발되었으나, 박윤원은 정조의 거듭된 엄교(嚴敎)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 대고 취임하지 않았다. 원문은 地如此近 而遐心莫回인데,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 그대의 목소리를 금옥처럼 여겨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품지 마소.毋金玉爾音 而有遐心라고 하였다. 이 시는 산중으로 떠나려는 현자(賢者)를 만류하는 시라고 한다.

[D-007]홀로 …… 않는 : 원문은 獨立而不懼 確乎其不拔인데,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상사(象辭) 군자는 이 괘를 써서 홀로 우뚝 서서 두려워하지 아니한다.君子以獨立不懼고 하였고, 건괘(乾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에 대한 문언전(文言傳)에 공자 가라사대 굳건하여 그 뜻이 뽑힐 수 없는 것이 잠룡이다.確乎其不可拔 潛龍也라고 하였다.

[D-008]영남의 …… 없었지요 : 안의 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1796년 박윤원이, 안의현 부근의 합천(陜川) 화양동(華陽洞)에 있던 선조 박소(朴紹)의 묘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호장(戶長)이 축문(祝文)을 쓴다고 잘못 전해 듣고 그 비례(非禮)를 견책하면서 시정을 촉구한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연암이 그에 대해 자세히 해명하는 답서를 보낸 바 있다. 그 답서는 연암집 2 답족형윤원씨서(答族兄胤源氏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박윤원의 편지도 부록으로 실려 있다. 근재집(近齋集) 18에도 연암에게 보낸 박윤원의 편지가 실려 있다.

[D-009]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 연암이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1800년 음력 8월 승진하여 강원도 양양(襄陽)에 부사(府使)로 부임한 사실을 가리킨다. 양양은 동해에 임하여 바닷바람이 거세고 산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험준한 고을이었다.

[D-010]고래나 악어의 울부짖음 : 원문은 鯨吼鼉鳴인데, 비바람을 몰고 오는 대해(大海)의 거센 파도 소리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규비(靈圭碑)

 

 

신종황제(神宗皇帝) 20년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25년에 왜놈이 침략해 와 우리 삼경(三京 경주 · 한양 · 평양)을 무너뜨리자, 중 영규(靈圭)가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과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수길(秀吉)의 군사를 청주(淸州)에서 크게 깨뜨리고, 군사를 금산(錦山)으로 옮겨 힘껏 싸우다 죽었다.

이때를 당하여 고경명(高敬命)과 김천일(金千鎰)은 의()를 내걸고 민병(民兵)을 일으켜 초토사(招討使)가 되었으며, 최경회(崔慶會)는 송골매 골() 자로 군기(軍旗)를 표()하고, 임계영(任啓英)은 범 호() 자로 군기를 표하고, 김덕령(金德齡)은 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곽재우(郭再祐)는 홍의(紅衣)로 군을 구별 지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부(大夫)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세신(世臣)의 후예들이었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토지나 병갑(兵甲)을 지닌 것도 아니고 부신(符信)을 발급하거나 호령을 받을 처지도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궐기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의를 내세워 궐기한 자들이 10여 진()이었다. 그들은 혹 제 고장을 스스로 호위하기도 하고, 혹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지휘를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고, 혹 연수(連帥 관찰사)의 죄를 성토하여 각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리기도 했는데, 오직 문열공 조헌의 군중만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스스로 조정과 연락을 취했으니 그 의()가 특히 정대하였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의()가 동맹자를 얻었음을 알았다.

절도사(節度使) 박홍(朴泓)은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이각(李珏)과 조대곤(曺大坤)은 군량 10여 만 가마를 불태우고 정기(旌旗)를 땅에 묻어 버리고 적을 만나자 먼저 도망했으며, 부사(府使) 서예원(徐禮元)과 군수 이유검(李惟儉)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며, 관찰사 이광(李洸)과 윤선각(尹先覺) 10여 만의 군사를 지니고도 왕을 호위하지 못했고, 왕이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거둥하였으나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영규는 승려로서, 한 치의 무기나 한 말의 군량도 지닌 처지가 아니었건만, 마침내 그 무리를 이끌고 힘껏 싸웠다. 문열공의 군사가 청주성(淸州城)의 동문(東門)을 포위하자 영규는 성의 서문에서 전투를 벌여 먼저 성에 올라가니,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여기에서 식자들은 영규의 용맹함이 반드시 그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가 대신을 보내어 조선 문제를 맡기니, 군사를 통솔한 대장군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 마귀(麻貴) · 유정(劉綎)은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고, 군무(軍務)를 맡아 다스린 어사(御史) 만세덕(萬世德) · 양호(楊鎬)와 상서(尙書) 형개(邢玠)는 모두 병법에 깊은 자들이었다. 유격장군(遊擊將軍) 낙상지(駱尙志) 낙천근(駱千斤)’이라 불릴 정도로 힘이 세었고, 양원(楊元)과 사대수(査大受)는 기이한 재주와 굳센 용맹으로 적진에 뛰어들 때는 맨 앞에서 나서고 성을 칠 때는 남보다 먼저 올라갔다. 군사들은 모두 절강(浙江) · 사천(泗川) · 운남(雲南) · 등주(登州) · 귀주(貴州) · 내주(來州)의 날랜 기병(騎兵)과 활 잘 쏘는 사수들이며, 거기에는 대장군의 집종 천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왜놈을 공격하다가 자주 군사가 퇴각했으며, 포위망을 공격하다 패한 적도 자주 있었으며, 항상 많은 군사로 적은 수효의 왜병을 공격했으되, 무기가 파손되고 군사는 지쳐서 7년 사이에 성을 쳐서 빼앗은 것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영규는 승려로서, 머리 깎고 검은 옷 입고 술과 고기를 끊고 살생을 경계하는 무리를 이끌고 하루아침에 견고한 성 아래로 육박하여, 왜병들로 하여금 제 한 목숨 구하기에도 바빠 죽은 시체를 불태우고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이런 공적은 일찍이 있은 적이 없었다. 급기야 군사를 금산으로 이동하여 절도사 및 여러 의병들과 왜병을 공격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군사들이 모두 기일을 놓치게 됨으로써 문열공이 전사하였다. 영규가 장중(帳中)에 들어갔으나 문열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공의 휘하 700사람과 더불어 같은 날에 전사하였다.

오호라! 이때를 당하여 정발(鄭撥)은 적의 습격을 받아 죽었고, 송상현(宋象賢)은 성이 무너지고 힘이 다해 적을 꾸짖고 죽었으며, 신립(申砬)과 김여물(金汝岉)은 군대가 패하여 죽었으며, 신길원(申吉元), 정담(鄭湛), 변응정(邊應井)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었으며, 황진(黃進), 원호(元豪)는 힘껏 싸우다 죽었으니, 모두 공()에 죽고 절()에 죽은 신하들이다. 저 영규는 승려로서, 공에 죽고 절에 죽어야 하는 신하가 아닌데도 마침내 그 무리들과 함께 특별히 죽었으니, 그 의열(義烈)과 충용(忠勇)은 족히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저 영규는 승려인데도 선비와 군자들이 그 절의를 지극히 사모하여 비석을 깎아 그 공을 새긴다고 한다. 영규의 법호(法號) 청허대사(淸虛大師)’라 한다.

 

 

[D-001]초승(超乘)으로 휘장(徽章)을 만들고 : 초승은 수레 위를 훌쩍 뛰어오른다는 뜻으로 용맹스러운 군대를 가리킨다. 김덕령은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D-002]군무(軍務) …… 양호(楊鎬) :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使) 양호는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임명되었으며, 만세덕은 양호가 파직된 뒤 그의 후임으로 왔다.

[D-003]상서(尙書) 형개(邢玠) : 원문 중 尙書邢玠 다음에 몇 자가 누락된 듯하다. 정유재란 때 병부 상서 형개는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와 총독계요보정군무(總督薊遼保定軍務)를 겸임하였다.

[D-004]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D-005]원호(元豪) : 1533~1592. 퇴직 무신으로서 임진왜란 때 강원도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여강(驪江)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인물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박 열부(朴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바치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 한양의 오부(五部) 중 하나)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작고한 사인(士人) 김국보(金國輔)의 아내 밀양 박씨가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저희들은 박씨의 이웃에 살고 있는데, 이달 열아흐렛날 밤 삼경에 이웃집 문지게를 누차 두들기며 급한 목숨 구하라는 소리가 있으므로, 위아래 여남은 집이 일제히 놀라 일어나 급히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바로 박씨가 독약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 그 집안이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고, 이웃에 이에 대한 경험방(經驗方)을 여기저기 물어보아 만의 하나나마 살릴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이 일제히 그 집에 모여 그가 마신 독약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바로 간수였습니다. 그래서 방약(方藥)을 이것저것 쓰게 하고 쌀뜨물을 여러 번 퍼먹여 보았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슬피 부르짖어 차마 듣지 못하도록 참혹했습니다.

대개 박씨는 어렸을 적부터 부모에 대한 효순(孝順)이 천성에서 우러나와, 의복과 음식의 범절에 있어 부모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으며, 몸 한 번 움직이고 발 한 번 옮기는 사이에도 반드시 어른의 뜻을 받들어 중문 밖을 내다보지 않고 바깥 뜰에는 노닐지 않으며, 단장(端莊)하고 근칙(謹飭)하여 매사에 여자의 법도를 따랐으니, 비록 이웃집의 계집종이나 물건 팔러 다니는 할멈도 그 얼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예닐곱 살 때에 벌써 소문과 칭송이 무성하여 사방에서 딸 가진 자들은 누구나 박씨의 어린 딸을 칭찬하는 것으로써 자기 딸을 가르치고 타일렀습니다.

나이 열여섯 살이 되자 김씨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지아비가 불행히도 병에 걸렸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약물 치료도 계속하기 어려웠으므로 비녀와 가락지 등속을 다 팔았으며, 병간호를 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천역(賤役)을 자청하였으며, 모진 추위 심한 더위에도 허리띠를 풀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잠 한숨 붙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점치고 기도하기를 극진히 아니한 적이 없어 매번 자신이 대신 죽게 해 달라고 칠성님께 빌었는데, 그 말을 마음속으로 하면서도 행여나 남이 알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급기야 지아비가 죽어 초혼(招魂)하게 되자 크게 한 번 부르고는 까무라쳤다가 겨우 깨어났으며, 그 이후로는 입을 다물고 한 숟갈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죽어서 지하로 따라가기를 맹세하였습니다. 때때로 정신을 잃고 숨이 넘어가려 하여 친정 부모나 시부모들이 백방으로 달래고 타이르며 천 가지로 간곡히 권하자, 겨우 죽을 마음을 늦추고 억지로 부드러운 얼굴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친부모와 시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지, 죽으려는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습니다. 그 형제들이 처음에 가끔 말을 걸어 의중을 떠보면, 그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목이 막혀 하는 말이,

 

내가 김씨 집안에 들어와서 이미 한 점의 혈육도 둔 바 없으니 삼종(三從)의 도리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살아서 또한 무얼 하오리까? 한낮의 촛불같은 목숨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아 오래도록 부모님께 근심만 끼쳐 드리고 있으니, 이 역시 큰 불효입니다.”

하였습니다. 항상 조그마한 방에 따로 거처하여 발걸음이 뜰을 내려가지 않으니 사람 얼굴을 보기가 드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 집안사람들이 무언중 그 뜻을 살피고서 극력 방비하여, 비록 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반드시 그 동정을 살폈으며 잠시 동안이라도 감히 방심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반년이 되어 방비가 조금 풀어지자, 이달 초열흘경에 턱밑에 갑자기 조그마한 부스럼이 생겨 그다지 아픈 지경까지 이르지도 않았는데, 박씨는 그 오라비에게 청하여 의원에게 물어 고약을 붙이곤 하므로 그 집에서는 더욱 방심했던 것입니다. 열아흐렛날 밤 화장실에 가는 길에 그 어머니가 따라가다가 앞과 뒤가 조금 떨어졌는데 갑자기 대청 위에서 넘어져 거꾸러지는 소리가 들리기에 놀라 쫓아 나와 보니 삽시간에 이미 구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생각하고 그 곁을 두루두루 살펴봐도 칼이나 비단 같은 도구들은 없고, 간수만 대청에 흥건하였습니다. 대개 그 집안에서 막 침장(沈醬)을 하려고 소금을 달아매어 짠맛을 빼고 있었으므로, 몰래 그 액체를 마시고서 기절하여 토했던 것입니다. 워낙 일이 경각에 일어났기 때문에 먼저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일을 목격하고 서로 돌아보며 화들짝 놀라고는, 모두 말하기를,

 

놀랍도다, 이렇게 정말 죽다니!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했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 마을에 사는 정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所志)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그 아버지가 울며 중지시키면서 하는 말이,

 

내 딸이 저의 뜻을 이룰 수 있었으니 열녀라 이를 수는 있지만, 나에게 지극한 슬픔을 끼치고 죽었으니 효녀라고 이를 수는 없소. 지금 일을 크게 벌인다면 이 역시 죽은 자의 본뜻이 아닐 것이오.”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일제히 말하기를,

 

이 일은 친청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오.”

하고서 물러 나와, 마을 안의 제일 어른의 집에 일제히 모였으며, 소지를 올려야 마땅하다는 데에 아무도 이의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동안 듣고 본 바를 주워 엮어 일제히 예조의 문밖에서 부르짖는 바입니다.

아아!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여 분발하게 하는 방법은, 진실로 남다르고 정숙한 행실을 포상하고 정표(旌表)하는 은전을 베푸는 데에 있습니다. 영화(榮華)를 탐하거나 은혜를 바라서가 아니라 실은 풍속을 돈후하게 만들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閭巷)에서 부르는 풍요(風謠)의 가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신하들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을 맡은 관원들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感發)시켰는데, 지금 박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는 보통을 훨씬 넘었으며 담담하게 의()에 나아가고 결백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임금님께 아뢰어 정려(旌閭)의 은전을 얻게 하여, 이로써 풍속의 교화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고 정렬(貞烈)을 지킨 죽은 이의 넋을 위로한다면,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서 산 덕분으로 본받는 바 있을 것이며,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D-001]급기야 …… 되자 : 원문은 及其皐復인데, 초혼(招魂)을 고복(皐復)이라 한다. 죽은 사람이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손에 들고 지붕에 오르거나 마당에 서서 영혼이 돌아오라는 뜻으로 아무개 복!某復이라고 세 번 외치는데 이를 삼고(三皐)라 한다.

[D-002]침장(沈醬) : 간장이나 된장을 만들려고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는 일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 열부(李烈婦) 사장(事狀) 예조에 올리기 위해 찾아와 청하므로 대신 지어 준 것이다.

 

 

남부(南部)에 사는 아무 직책을 맡은 아무개 등은 남양 이씨(南陽李氏)의 절사(節死)한 사실을 삼가 정장(呈狀)합니다. 이씨는 곧 문장과 덕행을 지닌 선비인 박경유(朴景兪)의 아내입니다. 경유가 불행히도 여러 해 동안 앓아 오던 병으로 지난해 12월에 요절했는데, 그때에 경유의 조모(祖母)는 나이 82세로서 오래된 병고로 오늘내일하여 집안에 어떠한 상사(喪事)가 일어난 줄도 모르는 상태에 있었으며, 경유의 부친도 평소 기이한 병을 앓아 역시 위독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씨는 좌우로 병 수발하느라 남편의 죽음에 울음 울 겨를도 없이, 한편으로는 죽은 남편의 시신을 염하고 입관(入棺)할 채비를 몸소 마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 노인의 탕약을 손수 달여 올리면서 울음소리를 죽이고 눈물을 삼키며 금방 밝은 낯빛을 짓곤 하였습니다. 친척으로 조문하는 자들이 모두 그 효성에 감격하였으며, 이웃에서도 듣고 그 정경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삼우제(三虞祭)와 졸곡(卒哭)을 마치자 보살피던 두 병자가 차례로 조리되어 마침내 완쾌를 보게 되니, 모두들 이씨의 지성에 신이 감동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5 17일이 되어 집안사람들에게 두루 이별하는 듯한 말을 하였는데, 아마도 그 이튿날이 바로 이씨의 생일이라 집안사람들은 그가 살아서 이날을 당하고 보니 비통함이 마땅히 갑절이나 더하여 이런 말을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을 뿐, 죽기로 맹세한 뜻을 품고 남몰래 시기를 정해 두었을 줄은 실로 알지 못했습니다.

밤이 되자 그는 시조모를 모시고 곁에 앉았는데 그 처량한 말과 비통한 안색을 스스로 숨길 수 없어 일어나려다가 다시 앉으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대며 어물어물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니, 온 집안이 잠이 들어 변이 일어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새벽녘에 이르러 갑자기 이씨가 잠자는 방에서 숨이 끊어질 듯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가 나기에 옆방 사람들이 급히 가 보니 조금 전에 이미 혼절했으나 따스한 기운은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베개맡의 사발에 간수가 흥건해 있었으므로, 그가 이것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 집안사람들이 허둥지둥 이웃을 찾아다니며 해독할 경험방을 여기저기 묻고 다니자, 위아래 마을 여남은 집이 놀라고 가엾이 생각하여 일제히 살피러 쫓아가서 쌀을 씻어 뜨물을 내어 수없이 입에 부어 넣었으나 이미 어쩌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이 통곡하여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과연 죽은 이날이 바로 그의 생일날이라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찬탄하면서, 모두 하는 말이 열부로다!” 하였습니다.

이어 그 자리 밑에서 언문 유서 두 통을 발견했는데, 그중에 하나는 정월에 쓴 것으로서 기일을 정하여 죽기로 맹세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내용에, ‘남편이 죽었는데도 바로 죽지 못한 것은 실로 시조모와 시아버님 병환이 모두 위독한 상태였기 때문으로, 10년 동안 병자를 모시면서 작은 정성이나마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내 뜻대로 한다면 지은 죄가 더욱 클 것이요, 또 죽은 남편의 초종(初終)도 거듭되는 초상으로 인해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려워서 시일을 끌면서 참아 왔는데 5 18일은 나의 생일이니 이날이 바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이달 17일에 쓴 것으로서 시아버님께 이별을 고하는 편지였습니다. 우선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사죄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초상을 치르는 범절은 반드시 남편의 상보다 줄여 줄 것을 부탁했으며, 염할 준비는 다 갖추어 놓았는데 이는 모두 밤을 틈타 손수 만든 것이라 운운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씨가 남편을 따라 죽을 결심을 한 것은 남편이 죽던 그날에 이미 결정되었을 터인데, 다섯 달이나 시일을 끌면서 몰래 염할 옷을 꿰매었는데도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으니, 일 처리의 치밀함과 죽음을 결단하는 차분함으로 보자면 비록 옛날 전기(傳紀)에 열거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무엇이 더하오리까?

대개 이씨는 어린 나이 때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이 천성에서 우러나왔으며, 성장해서는 여자로서의 행실이 예의 법도에 절로 들어맞았으며, 구태여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바느질과 길쌈을 다 할 줄 알았습니다. 그가 경유에게 출가해서는 지아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경유는 뜻이 독실하고 행실이 옛사람 같았으며 평소에 소학(小學)으로써 몸을 다스렸으므로 아내를 벗으로 삼고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였습니다. 경유의 조모는 여러 해를 앓아 온 고질로 노상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씨가 조모를 간호하고 봉양하던 범절은 한결같이 경유의 뜻을 따른 것으로서 10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한 바 없었으니, 경유가 옷의 띠를 풀지 않으면 이씨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경유가 몸소 변기(便器)를 가져 나르면 이씨는 친히 변기를 씻었습니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마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 절통한 마음을 머금고 때를 기다리다 한 번의 결단으로 목숨을 버린 것을 가지고는 이씨의 고절(高節)을 말하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효순하다는 소문이 이미 저와 같이 자자하고, 오늘 절개를 지켜 죽은 결백한 모습이 또한 이와 같이 우뚝하니, 한마을에 사는 도의로 보아 어찌 관청에 소지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마을 안의 제일 어른 집에 일제히 모였는데, 어떤 이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기이하도다! 우리들이 이런 일을 한 것이 이번으로 두 번째요, 10년 사이에 이런 일이 모두 한집안에서 나왔는데 우리가 전번에 이미 소지를 올려 목적을 달성했으니, 어찌 뒤의 일인들 혹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소?”

하였습니다.

대개 경유의 누이인 김씨의 아내도 예전에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절개를 지켜 죽은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앞뒤로 잇닿아 빛났으므로, 저희들이 일제히 예조에 부르짖고 다시 임금님께도 들리게 하여 이미 정려의 은전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씨의 아름다운 행실과 곧은 절개도 보통보다 훨씬 뛰어나 전인(前人)의 아름다움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가 백성을 교화하고 좋은 풍속을 만들고자 하는 정책에 비추어 볼 때 실로 빛이 나는 일입니다.

아아! 남녀간에 권고하고 충고하는 말은 여항에서 부르는 풍요의 가사에 지나지 않으나, 그것이 성정(性情)에서 나와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면 시를 채집하는 관원이 이를 왕국에 바치고 악()을 맡은 관원이 음악으로 전파하여 사방을 교화하고 민심을 감발시켰는데, 지금 이씨의 성취한 바가 어찌 풍요로서 채집되거나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저희들이 다행히도 열녀와 한마을에 살고 있어 눈으로 익히 보고 귀에 젖었으면서도 연명(聯名)으로 소지를 만들고 일제히 한목소리로 집사(執事)에게 달려가 고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저희들의 죄입니다. 나아가, 숨겨진 일을 드러냄으로써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풍속을 바로 세우고 도탑게 하는 정사(政事)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각하(閣下)의 직분입니다. 저희들이 어찌 그것까지 관여하겠습니까?

 

 

[D-001]박경유(朴景兪) : 연암집 10 열부 이씨 정려음기(烈婦李氏旌閭陰記)에 소개되어 있다. 연암의 문하(門下)에 출입하던 선비로 정조 5(1781)에 요절했다. 박윤원(朴胤源)이나 이덕무의 문집에 박경유에게 준 답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는 사소절(士小節)에서 박경유를 덕행을 갖춘 인물로 칭찬했다.

[D-002]초종(初終) : 초상이 난 이후 졸곡(卒哭)까지의 모든 장례 절차를 말한다.

[D-003]거듭되는 초상 : 병 수발을 소홀히 하여 시조모와 시아버지가 잇달아 죽게 될 경우를 가정해서 한 말이다.

[D-004]슬픔과 예절을 다하여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자로(子路)가 전한 공자(孔子)의 말로 상례(喪禮)에 슬픔은 부족한데 예절이 남음이 있는 것은, 예절은 부족하되 슬픔이 남음이 있는 것만 못하다.喪禮 與其哀不足而禮有餘 不若禮不足而哀有餘고 하였다.

[D-005]각하(閣下) : 이본들에는 합하(閤下)’로 되어 있다. 집사(執事)와 각하, 합하는 모두 판서(判書)에 대한 경칭으로 통용되는 것들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암집

 

연암집 제10권 별집

 

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원사(原士)

 

선친의 글을 살펴보니 유실된 것이 많았다. 이 편()은 연암협(燕巖峽)의 묵은 종이 모아 둔 곳에서 발견한 것으로서, 글뭉치가 터지고 찢어져 윗부분에 몇 항목이 빠지고 중간에도 왕왕 빠진 데가 있으며, 또 편의 이름도 없었다. 그래서 조목 중에 원사(原士)’란 두 글자를 취하여 편명(篇名)으로 삼았다.

아들 종채(宗采)가 삼가 쓰다.

 

무릇 선비란 아래로 농() · ()과 같은 부류에 속하나, 위로는 왕공(王公)과 벗이 된다. 지위로 말하면 농 · 공과 다를 바 없지만, 덕으로 말하면 왕공이 평소 섬기는 존재이다. 선비 한 사람이 글을 읽으면 그 혜택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그 공은 만세에 남는다. 주역에 이르기를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온 천하가 빛나고 밝다.見龍在田 天下文明고 했으니, 이는 글을 읽는 선비를 두고 이름인저!

 

그러므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이다. 원래 선비라는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원(身元)은 선비인 것이다. 그러므로 작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으되 신원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며, 지위에는 귀천이 있으되 선비는 다른 데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작위가 선비에게 더해지는 것이지, 선비가 변화하여 어떤 작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를 사대부(士大夫)’라 하는 것은 높여서 부르는 이름이요, 군자를 사군자(士君子)’라 하는 것은 어질게 여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또 군졸을 ()’라 하는 것은 많음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사람마다 사()라는 점을 밝힌 것이요, 법을 집행하는 옥관(獄官) 라 하는 것은 홀로임을 나타낸 것이니, 이는 천하에 공정함을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이르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이르고,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이르고,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곳을 사림(士林)’이라 이른다.

송 광평(宋廣平)이 연공(燕公)더러 이르기를 만세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 했으니, 어찌 천하의 공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어찌 당세의 제일류가 아니겠는가? 노중련(魯仲連)이 동해(東海)에 몸을 던지려고 하자 진() 나라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으니, 어찌 사해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죽어 가고, 온 나라가 병들었네.人之云亡 邦國疹瘁라고 했으니, 이 어찌 군자가 죄 없이 죽은 것을 애석히 여긴 것이 아니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하많은 선비들이여, 문왕(文王)이 이들 덕분에 편안하셨네.濟濟多士 文王以寧라고 했으니, 학문과 도를 강론하지 않고서야 능히 이와 같이 될 수 있겠는가?

 

무릇 선비란 다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천자가 태학(太學)을 순시할 때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의 자리를 마련하여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한 것은 효()를 천하에 확대하자는 것이요, 천자의 원자(元子)와 적자(適子)가 태학에 입학하여 나이에 따른 질서를 지킨 것은 공손함을 천하에 보여 주자는 것이다. 효제(孝悌)란 선비의 근원이요, 선비란 인간의 근원이며, 본디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니, 천자도 오히려 그 본디를 밝히거든 하물며 소위(素位)의 선비이랴?

 

아아! 요순(堯舜)은 아마도 효제(孝悌)를 실천한 본디 선비雅士, 공맹(孔孟)은 아마도 옛날에 글을 잘 읽은 분인저!

 

누군들 선비가 아니리요마는, 능히 본디를 행하는 자는 적고, 누군들 글을 읽지 아니하리요마는 능히 잘 읽는 자는 적다.

 

이른바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은 소리 내어 읽기를 잘한다는 것도 아니요, 구두(句讀)를 잘 뗀다는 것도 아니며, 그 뜻을 잘 풀이한다는 것도 아니고, 담론을 잘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갖춘 사람이 있을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 사사로운 지혜로 천착(穿鑿)한 것이요, 아무리 권략(權略)과 경륜(經綸)의 술()이 있다 할지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모두가 주먹구구로 맞힌 것이니, 내가 말한 본디 선비雅士는 아니다. 내가 말한 본디 선비란, 뜻은 어린애와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일 년 내내 문을 닫고 글을 읽는 사람을 말한다.

 

어린애는 비록 연약하여도 제가 흠모하는 것에 전념하고 처녀는 비록 수줍어도 순결을 지키는 데에는 굳건하나니, 우러러봐도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봐도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은 오직 문을 닫고 글을 읽는 그 일인저!

 

참으로 고아(古雅)하도다, 증자(曾子)의 독서여! 해진 신발을 벗어던지고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그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마치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도다. 또한 공자가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안자(顔子 안회(顔回))는 자주 굶주리면서도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았다고 하는데, 안로(顔路)가 굶주릴 때에도 여전히 또한 즐거웠겠습니까?”

한다면 이렇게 답하리라.

 

쌀을 짊어지고 올 곳이 있다면 백 리도 멀다 아니 했을 것이며, 그 쌀을 구해 와서 아내를 시켜 밥을 지어 올리게 한 다음 대청에 올라 글을 읽었을 것이다.”

 

무릇 글을 읽는 것은 장차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문장술(文章術)을 풍부히 하자는 것인가? 글 잘 짓는다는 명예를 넓히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학문과 도()를 강론하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이다.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은 이러한 강학(講學)의 내용이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은 강학의 응용이니, 글을 읽고서도 그 내용과 응용을 알지 못한다면 강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학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 내용과 응용 때문이다. 만약 고상하게 성()과 명()을 담론하고, 극도로 이()와 기()를 분변하면서 각각 자기 소견만 주장하고 기어이 하나로 일치시키고자 한다면, 담론하고 분변하는 사이에 혈기(血氣 감정)가 작용하게 되어 이와 기를 겨우 분변하는 동안 성()과 정()이 먼저 뒤틀어질 것이다. 이는 강학이 해를 끼친 것이다.

 

글을 읽어서 크게 써먹기를 구하는 것은 모두 다 사심(私心)이다. 일 년 내내 글을 읽어도 학업이 진보하지 못하는 것은 사심이 해를 끼치는 때문이다.

 

백가(百家)를 넘나들고, 경전(經傳)을 고거(攷據)하여 그 배운 바를 시험하고자 하고,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그 사심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독서가 해를 끼친 때문이다.

 

천착(穿鑿)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 속에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창 천착할 때에는 언제나 경전(經傳)으로써 증거를 삼고, 천착하다 막힌 데가 있으면 또 언제나 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유추하기를 그만두지 않다가 마침내 경문(經文)을 고치고 주()를 바꾼 뒤에야 후련해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주례(周禮)는 아마도 주공(周公)의 저술인저!”

하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왕망(王莽)은 명예를 좋아하여 천하를 해쳤고, 개보(介甫 왕안석(王安石))는 법을 좋아하여 천하를 그르쳤다.”

한다.

 

덕보(德保 홍대용)가 말하기를,

 

구차스레 동조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요, 억지로 남과 달리하려는 것은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였다.

 

글을 잘 읽는다는 것이 어찌 훈고(訓詁)에만 밝고 마는 것이겠으며, 이른바 선비란 것이 어찌 오경(五經)에만 통하고 말겠는가.

 

무릇 성인의 글을 읽어도 능히 성인의 고심(苦心)을 터득할 수 있는 자는 드물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중니(仲尼)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피나는 정성을 쏟은 분이 아니겠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주자 같은 이는 성인의 고심을 터득했다 할 만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춘추(春秋)일 것이다.”

하였고, 맹자가 말하기를,

 

내 어찌 구변(口辯)을 좋아해서 그렇겠느냐? 나는 마지못해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공자가 주역(周易)을 읽어 책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 그렇기에, “나를 몇 해만 더 살게 해 준다면 제대로 주역을 읽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주역에 십익(十翼)을 달았으면서도 일찍이 문인(門人)들에게 주역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맹자는 시서(詩書)에 대한 해설은 잘 하면서도 일찍이 주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중니(仲尼)의 문하에서 주역에 대해 들은 이는 오직 증자(曾子)일 것이다. 왜냐하면 증자는,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주역으로 칭찬을 들은 이는 오직 안로(顔路)의 아들 안자(顔子)일 것이다. 안자는, 한 가지 좋은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질지 못하도다, 자로(子路)의 말이여! “거기에는 사직(社稷)도 있고 인민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했으니 말이다.

 

군자가 종신토록 하루라도 폐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오직 글을 읽는 그 일인저!

 

그러므로 선비가 하루만 글을 읽지 아니하면 얼굴이 단아하지 못하고, 말씨가 단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몸을 가누지 못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장기 두고 바둑 두고 술 마시고 하는 것이 애초에 어찌 즐거워서 했겠는가?

 

자제(子弟)들이 오만하고 방탕하며 빈둥대면서 제멋대로 온갖 짓을 다 하다가도, 곁에서 글 읽는 사람이 있으면 풀이 죽어 그 자리에서 일어날 것이다.

 

자제들이 아무리 총명하고 준수해도 글 읽기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이 없고, 부인네나 농사꾼일지라도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군자의 아름다운 말 속에도 혹 뉘우칠 만한 말이 있고, 착한 행실 속에도 혹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경우에는 일 년 내내 읽어도 뉘우칠 것이 없으며, 백 사람이 따라서 행하더라도 허물이 생기지 않는다.

 

명분과 법률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고, 쇠고기 돼지고기가 아무리 맛있어도 많이 먹으면 해가 생긴다. 많을수록 유익하고 오래갈수록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일 것이다.

 

어린애가 글을 읽으면 요망스럽게 되지 않고 늙은이가 글을 읽으면 노망이 들지 않는다. 귀해져도 해이해지지 않고 천해져도 제 분수를 넘지 않는다. 어진 자라 해서 남아돌지 않고 미련한 자라 해서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집이 가난한 이가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부자로 잘 살면서 글 읽기 좋아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대숙(大叔) 시경(詩經)을 읽느라 삼 년 동안 문밖에 나가지 않았다. 하루는 대청에서 내려와 소변을 보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그를 보고 놀라서 짖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들어도 때에 따라 귀가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경우가 있지만, 글을 읽는 경우에는 그 소리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바람은 자식이 글을 읽는 것이다. 어린 아들이 글 읽으라는 말을 듣지 않고도 글을 읽으면, 부모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자 없다. 아아! 그런데 나는 어찌 그리 읽기를 싫어했던고.

 

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술을 많이 못 마신 것을 한스러워했을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는데, 도연명은 어찌 글을 많이 읽지 못하였던 것을 한스러워하지 않았던가?

 

글 읽는 법은 일과(日課)를 정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질질 끄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없다.

 

많이 읽으려도 말고, 속히 읽으려도 말라. 읽을 글줄을 정하고 횟수를 제한하여 오로지 날마다 읽어 가면 글의 의미에 정통하게 되고 글자의 음과 뜻에 익숙해져 자연히 외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의 순서를 정하라.

 

잘 아는 글자라고 소홀히 하거나 쉽게 여기지 말고, 글자를 달리듯이 미끄러지듯이 줄줄 읽지 말며, 글자를 읽을 때 더듬거리지 말며, 글자를 거꾸로 읽지 말며, 글자를 옆줄로 건너뛰어 읽지 말라. 반드시 그 음을 바르게 읽어야 하며, 반드시 그 고저가 맞아야 한다.

 

글 읽는 소리가 입에 머무르되 엉겨붙지 말게 하며, 눈으로 뒤쫓되 흘려 보지 말며, 몸은 흔들어도 어지럽지 않게 한다.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어깨를 잡지 말고, 입을 빨지 말라.

 

책을 대하면 하품도 하지 말고, 책을 대하면 기지개도 켜지 말고, 책을 대하면 침도 뱉지 말고, 만일 기침이 나면 고개를 돌리고 책을 피하라. 책장을 뒤집을 때 손가락에 침을 바르지 말며, 표시를 할 때는 손톱으로 하지 말라.

 

서산(書算)을 만들어 읽은 횟수를 기록하되, 흡족한 기분이 들면 접었던 서산을 펴고, 흡족한 기분이 들지 않으면 서산을 펴지 않는다.

 

책을 베개 삼아 베지도 말고, 책으로 그릇을 덮지도 말며 권질(卷帙)을 어지럽히지 말라. 먼지를 털어 내고 좀벌레를 없애며, 햇볕이 나는 즉시 책을 펴서 말려라. 남의 서적을 빌려 볼 때에는 글자가 그르친 데가 있으면 교정하여 쪽지를 붙여 주며, 종이가 찢어진 데가 있으면 때워 주며, 책을 맨 실이 끊어졌으면 다시 꿰매어 돌려주어야 한다.

 

닭이 울면 일어나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 이전에 외운 것을 복습하고 가만히 다시 음미해 보라. 그 내용이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그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은 없는가, 글자를 착각한 것은 없는가? 마음속으로 검증하고 몸으로 체험해 보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으면 기뻐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등불을 켜고 옷을 다 입고서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책상을 마주한다. 이어 새로 읽을 글을 정하고 묵묵히 읽어 가되 몇 줄씩 단락을 끊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서산(書算)을 덮어 밀쳐놓고, 가만히 훈고(訓詁)를 따져 보며 세밀히 주소(註疏)를 훑어보아 그 차이를 분변하고, 그 음과 뜻을 깨우친다. 차분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며 제멋대로 천착하지 말고 억지로 의심하지 말 것이며,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하늘이 밝아지면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곧바로 부모님의 침실로 가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기침 소리가 들리거나 가래침 뱉고 하품하는 소리가 들리면 들어가서 문안을 드린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 무슨 일을 시키면, 급히 제 방으로 돌아가서도 안 되고 글을 읽는다는 핑계로 거절해서도 안 된다. 바로 이것이 글을 읽는 것이니, 혹 글 읽기에 열중하느라 혼정신성(昏定晨省)도 제때에 하지 아니하고, 때 묻은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로 지내는 것은 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 물러나 제 방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의 먼지를 털고 책들을 가지런히 바로 놓고 단정히 앉아 잡된 생각을 가라앉히기를 얼마쯤 한 연후에 책을 펴고 읽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읽지 말 것이며 자구(字句)를 분명히 하고 고저를 부드럽게 해서 읽는다.

 

긴요한 말이 아니면 한가하게 응답하지도 말며, 바쁜 일이 아니면 즉시 일어나지도 말라. 부모가 부르면 책을 덮고 바로 일어나며, 손이 오면 읽는 것을 멈추되 귀한 손님이 오면 책을 덮는다. 밥상이 들어오면 책을 덮되 반쯤 읽었으면 그 횟수는 끝마치며, 밥 먹고 나면 바로 일어나 천천히 거닐고, 밥이 소화되고 나면 다시 읽는다.

 

부모가 병이 나면 일과(日課)를 폐하고, 재계(齋戒)를 할 때는 일과를 폐하고, ()을 당하면 일과를 폐한다. 기공(朞功)의 상()에 이미 성복(成服)했으며 집이 다를 경우는 일과를 시작한다. 친구의 상사(喪事)에는 아무리 멀어도 학업을 같이 하던 사람이면 달려가 조문하고 일과를 폐한다.

 

글을 읽다가 예전에 잘 몰라서 질문을 한 적이 있던 대목을 만나면 탄식하고, 잘 몰라서 의심이 나는 대목을 만나면 탄식하고, 새로 깨닫게 된 것이 있으면 탄식한다.

 

삼년상에는 장례를 치른 뒤에 예서(禮書)를 읽고, 동자(童子)는 평상시와 같이 글을 읽는다.

 

어떤 이가 묻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아버지가 보던 책을 선뜻 읽지 못하는 것은 손 때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 전해 내려오는 책은 다 선반에 얹어 두고 읽지 않아야 하는가?”

하였는데, 답하기를,

 

옛날에 증석(曾晳)이 양조(羊棗 고욤)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 아들인 증자(曾子)는 양조를 먹지 않았다.”

하였다.

 

마치 부모의 명을 들으면 머뭇거리지 않을 것을 생각하고, 친구와 더불어 약속을 하면 곧바로 실천할 것을 생각하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글 읽는 방법이다.

 

천하 사람들이 편안히 앉아 글을 읽을 수 있게 한다면, 천하가 무사할 것이다.

 

 

[D-001]조목 중에 : 원문은 就條中인데, 이본들에는 남아 있는 조목 중에就存條中로도 되어 있다.

[D-002]아들 …… 쓰다 :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4 일찍이 사훈(士訓)이라는 글을 지으셨는데, 학자가 글을 읽는 취지를 많이 논하셨다. 문집에 있지만 빠진 곳이 매우 많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글을 가리킨다.

[D-003]지위로 …… 존재이다 : 원문은 以位 則無等也 以德 則雅事也인데, 맹자(孟子) 만장 하(萬章下)에서 맹자가 한 주장에 근거를 둔 말이다. , () 나라 목공(繆公)이 자사(子思)에게 옛날에 제후가 선비를 벗 삼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묻자, 자사가 불쾌해하면서 옛사람의 말에 그를 섬긴다고 했을지언정, 어찌 그를 벗 삼는다 했으리요.”라고 답하였다. 맹자는 이 말을 풀이하기를, 자사가 불쾌해한 이유는, “지위로 말하면 그대는 임금이요 나는 신하인데 어찌 감히 임금과 벗을 할 것이며, 덕으로 말하면 그대는 나를 섬기는 사람인데 어찌 나와 벗이 될 수 있으리요.以位 則子君也 我臣也 何敢與君友也 以德 則子事我者也 奚可以與我友라고 생각한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D-004]나타난 …… 밝다 : 주역(周易)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나온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따르면, 비록 상위(上位)에 있지는 않으나, 천하가 이미 그의 교화를 입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D-005]송 광평(宋廣平) …… 했으니 : 송 광평은 당() 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신으로, 광평군공(廣平郡公)에 봉해진 송경(宋璟 : 663~737)을 가리킨다. 연공(燕公)은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진 장열(張說 : 667~730)을 가리킨다. 송경과 장열이 함께 봉각사인(鳳閣舍人)으로 재직할 때, 무후(武后)의 총신(寵臣) 장역지(張易之)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위원충(魏元忠)을 모함하면서 장열을 증인으로 끌어들이자, 송경이 장열에게 어전(御前)에서 결코 위증(僞證)하지 말도록 당부하면서 만대(萬代)에 존경을 받는 것이 이 일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舊唐書 卷96 宋璟傳

[D-006]환관이나 …… 사람이야말로 : () 나라 때 인종(仁宗)이 왕소(王素)에게 고관 중 재상(宰相) 직을 맡길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자, 왕소가 오직 환관과 궁첩들이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선택할 만하다.”고 직언하였다. 이에 인종은 부필(富弼)을 재상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4

[D-007]노중련(魯仲連) …… 물러갔으니 : () 나라 군대가 조()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자청하여 나서 위()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상대로 진 나라 왕의 폭정(暴政)을 성토하고 자신은 동해에 빠져 죽을지언정 차마 진 나라의 백성은 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조 나라를 돕도록 설득하여 감동시킨 결과 신원연이 마음을 돌렸으며, 그 소문을 듣고 진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물러간 고사를 말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D-008]어진 …… 병들었네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  5 장의 한 구절이다.  시경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9]하많은 …… 편안하셨네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3 장의 한 구절이다.

[D-010]천자가 …… 것이요 :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은 고대 중국의 천자가 설립하여 부형(父兄)의 예()로써 봉양했다는 직위이다. 정현(鄭玄)의 설에 따르면 이들은 각 1인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 및 악기(樂記)에 관련 내용이 있다.

[D-011]천자의 …… 것이다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을 모두 얻는 이는 오직 세자뿐이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순서를 지키는 일을 말한다.”고 하였다. 원문의 天子之元子適子에서 適子 衆子라고 해야 온당할 듯하다. 주자(朱子)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 15세가 되면 천자의 원자와 중자(衆子)로부터 공경 · 대부 · 원사(元士)의 적자(適子)와 범민(凡民)의 수재(秀才)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학에 입학한다고 하였다.

[D-012]소위(素位)의 선비 : 평소의 처지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선비라는 뜻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4 장에 군자는 평소의 처지에 따라 행동하지,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고 하였다. 여기서  자는 앞 문장에서 근원으로 번역한  , ‘본디로 번역한  자와 의미가 상통하는 단어이다. 모두 평소, 평상, 본래, 본바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D-013]본디 선비雅士 : 여기서 雅士는 아정(雅正)한 선비나 고아(高雅)한 선비라는 일반적인 뜻이 아니라, 앞에서 천자는 원래 선비原士라고 한 것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 연암은  자를 문맥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쓰고 있다.

[D-014]해진 …… 같았도다 :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증자(曾子)가 몹시 가난하게 살면서도 해진 신발을 끌고 시경의 상송(商頌)을 노래하니 소리가 천지에 가득하여 종이나 경쇠에서 울려 나오는 듯했다.曳縰而歌商頌 聲滿天地 若出金石고 하였다. 연암은 曳縰 縱屣로 고쳐 인용하였다.

[D-015]공자가 …… 말씀하셨다 : 논어 술이(述而) 공자가 평소 늘 말씀하신 바는 시경 서경과 지켜야 하는 예()이니 이 셋에 대해 평소 늘 말씀하셨다.子所雅言 詩書執禮 皆雅言也고 한 구절을 조금 고쳐 인용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종래의 해석은 구구한데, 여기에서 연암은  자를 바르다는 뜻보다 평소 늘素常이라는 뜻으로 보았던 듯하다.

[D-016]안자(顔子) …… 않았다 : 원문은 顔子屢空 不改其樂인데, 논어 선진(先進) 안회는 도에 가까운저! 그러나 자주 굶주리는구나.回也 其庶乎 屢空라는 공자의 말과 옹야(雍也)에서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동네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우울해 마지않는데, 안회는 그 즐거운 마음을 변치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한 공자의 말을 합쳐서 줄인 것이다.

[D-017]안로(顔路) : 안회의 아버지이다. 역시 공자의 제자로서 이름은 무요(無繇)이고, ()는 그의 자()이다. 안회가 죽었을 때 안로가 가난하여,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서 곽()을 갖추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나 공자는 이를 완곡히 거절했다고 한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D-018]쌀을 …… 것이며 : 공자가어(孔子家語) 2 치사(致思), 자로(子路)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부모를 위해 백 리 밖에서도 쌀을 짊어지고 왔는데爲親負米百里之外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한스러워하자, 공자가 그의 효성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D-019]천착(穿鑿)하는 것 : 어떤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펴는 것을 말한다.

[D-020]경전으로써 유추해 본다 : 원문은 以經傳反之인데, 여기서  자는 유추(類推)한다는 뜻이다. 논어 술이(述而) 한 모서리를 들어 보였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유추하지 못하면 다시 일러 주지 않았다.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하였다.

[D-021]주례(周禮) …… 저술인저 : 정현(鄭玄) 주례 천관(天官) 총재(冢宰) ‘惟我王國의 주()에서 주공(周公)이 섭정(攝政)을 하면서 육전(六典)의 직책을 만들고 이를 주례(周禮)라고 불렀다.”고 하여 주례를 주공의 저술로 보았다. 이것이 후세에 통설이 되었으나, 그에 대한 반론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유흠(劉歆)의 위작설(僞作說)이다. , 왕망(王莽)의 명에 따라 유흠이 지어냈다는 것이다.

[D-022]왕망(王莽) …… 그르쳤다 : () 나라 때 정권을 찬탈한 왕망이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관제(官制)를 개혁하려고 한 사실과, 그와 마찬가지로 북송(北宋) 때 왕안석(王安石) 주례를 모범으로 삼아 신법(新法)을 추진한 사실을 비판한 말이다.

[D-023]중니(仲尼) …… 아니겠는가 : 원문은 仲尼豈不是至公血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으로, 주자의 답진동보서(答陳同夫書)에 나오는 구절이다. 晦庵集 卷28 연암은 孔子 仲尼로 고쳐 인용했다. 맹자에 대해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했다고 한 것은 맹자가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D-024]나를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D-025]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말이다.

[D-026]공자가 …… 하였다 : 사기(史記) 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오는 말을 약간 고쳐 인용한 것이다. 논어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나를 몇 해를 더 살게 해 주어 쉰 살에 주역을 배운다면 큰 허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하였다.

[D-027]십익(十翼) : 주역에 대해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계사전(繫辭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을 말한다.

[D-028]중니(仲尼) …… 때문이다 : 논어 이인(里仁), 공자가 나의 도는 한 가지 이치로 일관되어 있다.”고 하자 증자만이 알겠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나가자 문인들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부자의 도는 충서(忠恕)일 따름이다.”라고 증자가 대답하였다. 주자(朱子)와 정자(程子)는 이 충서(忠恕)’ 주역 건괘(乾卦)에서 말한 건도(乾道)로 확대 해석하였다. 연암은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소개된 이들의 해석을 따라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

[D-029]주역으로 …… 때문이다 :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의 사람됨이 중용을 택하여 한 가지 선()을 얻으면 마음속에 늘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 구절을 약간 고쳐 인용하였다. 그리고 이와 호응하는 대목이 주역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주역 계사전(繫辭傳)에서 공자가 안씨(顔氏)의 아들은 거의 도()에 가까울 것이다.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일찍이 모른 적이 없고, 알고 있으면 다시는 행하지 않았다. ()에 이르기를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뉘우침에 이르지 않을 것이니, 크게 길하리라.不遠復 无祗悔 元吉 하였다.”고 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30]거기에는 …… 하겠습니까 : 자로(子路)가 학식이 부족한 자고(子羔)를 비읍(費邑)의 읍재(邑宰)로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라고 하자, 자로가 거기에는 인민도 있고 사직도 있으니 어찌 꼭 글을 읽어야만 학문을 한다 하겠습니까.”라고 항변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論語 先進

[D-031]대숙(大叔) : 누구의 자()인지, 아니면 친척을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다.

[D-032]도연명(陶淵明)은 고아(高雅)한 선비였다 : 원문은 陶潛雅士也인데, 여기서 아사(雅士)’라 한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고상하고 멋을 아는 선비를 가리킨다. 연암이 말하는 본디 선비라는 뜻의 아사(雅士)’와는 다르다. 연암은 도연명과 같은 유형의 인물을 아사(雅士)’로 여기는 풍조를 비판한 것이다.

[D-033]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 나오는 말이다.

[D-034]글자를 거꾸로 …… 말라 : 원문은 字毋倒 字毋傍인데, 이덕무(李德懋) 사소절(士小節) 8 동규(童規) 교습조(敎習條)에 독서와 관련하여 거꾸로 읽지 말며 …… 글줄을 건너뛰어 읽지 말라.勿倒讀 …… 勿越行讀고 하였다.

[D-035]기공(朞功) …… 경우 : 상기(喪期) 1년인 경우를 기복(朞服)이라 하는데 조부모 · 백숙부모 · 형제자매 · 처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9개월인 경우를 대공(大功)이라 하는데 사촌 형제자매의 상이 이에 해당하고, 5개월인 경우를 소공(小功)이라 하는데 증조부모 · 재종형제 등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바로 뒤에 집이 다름異宮’, 즉 분거(分居)가 나오므로, 형제의 상()으로 보아야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전() 형제는 사체(四體)이다. 그러므로 형제는 의리상 나누어서는 안 되지만 그런데도 나누는 것은, 자식으로서 편애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자식이 제 부모를 편애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자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동궁(東宮) · 서궁(西宮) · 남궁(南宮) · 북궁(北宮)을 두어, 거처를 달리하되 재산은 공유한다.異居而同財고 하였다. 형제는 한 몸이므로 동거동재(同居同財)함이 원칙이나, 동거(同居)하면 백부(伯父)를 섬기는 데 힘을 다해야 하므로 각자의 부친을 섬기는 데 소홀히 할 우려가 있어 주거를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D-036]글을 …… 탄식한다 : 원문에는 앞의 단락과 연결되어 있으나, 내용상으로 보아 별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야 한다.

[D-037]아버지가 …… 때문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이다.

[D-038]옛날에 …… 않았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증자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양조를 차마 먹지 못했다고 한다.

[D-039]곧바로 실천할 것 : 원문은 無宿諾인데, 논어 안연(顔淵) 자로(子路)는 승낙한 일을 묵혀두지 않았다.子路無宿諾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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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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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9권 별집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1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2 승지 증()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사신(詞臣)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3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묘표음기(墓表陰記) 금성위(錦城尉 : 박명원朴明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4 문효세자(文孝世子) 진향문(進香文) 의빈(儀賓) 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5 정종대왕(正宗大王) 진향문(進香文)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6 양 경리(楊經理) () 치제문(致祭文)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7 형 상서(邢尙書) () 치제문(致祭文)

8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9 연분 가청 장계 정사년(1797, 정조 21)에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10 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11 공손앙(公孫鞅)이 진() 나라에 들어가다

 

 

 

조부 자헌대부(資憲大夫)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증시(贈諡) 장간공(章簡公) 부군(府君) 가장(家狀)

 

부군의 휘는 필균(弼均), 자는 정보(正甫), 초휘(初諱)는 필현(弼賢)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으며, 나주(羅州)의 반남현(潘南縣)에서 성()을 얻어 반남인이 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낸 휘 상충(尙衷)이 맨 먼저 상소를 올려 명() 나라를 받들 것을 청하였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 본전(本傳)에 실려 있으며, 우리 왕조에서 시호를 문정(文正)이라 추증하였다. 문정공의 아들 휘 은()은 우리 태종대왕을 도와 좌의정에 올랐고 시호가 평도(平度)이다. 여러 대를 지나 휘 소()는 사간(司諫)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인데, 세상 사람들이 야천선생(冶川先生)이라 불렀으며 부군에게는 6세조가 된다. 휘 응복(應福)을 낳았는데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고조(高祖)는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휘 동량(東亮)인데, 공훈을 세워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증조(曾祖)인 금양위(錦陽尉) 휘 미()는 선조(宣祖)의 제 5 녀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조부는 첨정(僉正)을 지낸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다. ()의 휘는 태길(泰吉)인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종숙부 문순공(文純公) 세채(世采)에게 사사(師事)하였고 뛰어난 행실로 명성이 사우(士友)들 사이에 자자하였으나 일찍 졸()하였다. ()는 칠원 윤씨(漆原尹氏) 진사 선적(宣績)의 따님으로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부군은 숙종 11년 을축년(1685) 정월 1일에 태어났다. 다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중부(仲父)인 교리공(校理公) 태만(泰萬)도 곧이어 졸하였으므로 부군은 종형(從兄)인 금녕군(錦寧君) 필하(弼夏)에게 양육을 받았는데, 금녕군의 아들인 판서공(判書公) 사익(師益)과 참판공(參判公) 사정(師正)이 모두다 부군보다 나이가 많았다. 부군이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약관에 이르러서는 경사(經史)를 널리 통하였는데, 이는 모두 그들을 따라 배운 덕분이었다.

금녕군이 오랫동안 담화병(痰火病)을 앓던 중에도 부군을 사랑한 것은 유독 지성(至性 극히 선량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병이 심하게 되자 발자국 소리와 문소리를 특히 싫어하였으나 부군의 발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만은 탓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군이 그 안색을 먼저 살핀 다음에 아들들을 데리고 와 뵙게 하였으며, 아들들이 매일 밤늦은 시각에 땔감을 가지고 아궁이 앞에 서 있다가 부군이 몰래 전하는 기침 신호를 받은 뒤에야 감히 불을 지피곤 하였다. 혹 그 틈을 얻지 못하면 날이 차고 눈이 얼어붙어도 문 안팎에서 함께 날을 새며 서로 가엾이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무릇 이와 같이 하기를 8, 9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하였다. 그래서 판서공 형제는 부군의 은덕이 골육보다 낫다고 감격해하였으며, 부군이 비단 양육해 준 이에게 효도를 실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효를 실천하도록 만들어 주기까지 한 것을 온 집안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대부들 사이에 언론이 서로 엇갈려 각각 자기가 어질게 여기는 이를 스승으로 삼아, 비록 한집안일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으면 나가는 길이 서로 달라지곤 하였다. 부군의 사촌 형제 수십 명 중에 부군의 나이가 가장 적었지만 명론(名論 명분론)은 가장 고명하였다. 종형 여호선생(黎湖先生) 필주(弼周)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는, 장차 한강 밖으로 은둔할 계획으로 부군의 어린 아들을 데려다 양자를 삼고 가사(家事)를 모두 부군에게 맡기면서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서는 문제)로써 부군을 권면하여 말하기를,

 

나는 죄를 짊어지고 태어난 몸이라  선생이 태어나자마자 모부인(母夫人)이 첫 국밥도 들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세상에 나갈 뜻을 끊고 지냈는데 지금 허명(虛名)으로 자신을 그르치게 되었으니, 부득불 한강을 경계로 삼아 그 너머에서 몸을 마치려 하네. 우리 아우는 재주나 학식이 모두 넉넉한데도 평생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있으니 장차 어떻게 몸과 집안을 일으킬 작정인가?”

하니, 부군은 썩 즐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지만 끝내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은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조야(朝野)에서 이익을 농단(壟斷)하려는 사람이 많지만 만약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을 잘못 끌어들여 이익을 독점하려고 한다면 우리 집안의 의론(議論)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우리 집안의 양대(兩代) 비갈(碑碣)은 대로(大老 송시열(宋時烈))께서 지은 것이요, 우리 중부(仲父 박태만(朴泰萬))께서 청한 것입니다. 우리 중부께서 불행히 세상을 일찍 떠나셨으나, 예전부터 팔학사(八學士)의 칭호를 받았는데 세상에서 국시(國是)를 어기는 자들이 멀리서 받들어 존중하였으니, 이를 어찌 변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구만(南九萬)과 유상운(柳尙運)이 각자 제 몸을 위하는 꾀를 내어 사론(邪論)을 주창했으니 이는 진실로 해독을 백세에 끼칠 것입니다. 그런데 유상운은 우리 집안의 외손이므로 그에 연루되어 점차 물들고 있으니, 마땅히 끊어야 할 것을 끊지 않는다면 이 어찌 우리 집안의 큰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한 집안의 명론(名論)이 진실로 바르게 된다면, 내가 과거 보는 것이 아무리 늦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다. 급기야 경종(景宗) 초년에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가 크게 무옥(誣獄)을 일으켜 건저(建儲)한 여러 대신을 죽이고 사류(士類)들을 마구 없애자 부군은 통진(通津)의 묘소 아래 은거하였다.

영종(英宗) 원년 을사년(1725)에 비로소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들었으니, 이때 나이 벌써 41세였다. 대개 한 번의 응시로 급제하는 경우는 세상에 드문 일이었다. 이해에 왕세자를 책봉하고 시강원(侍講院)의 요속(僚屬)들을 엄선하였는데,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 관원)은 청망(淸望)으로서 겸함(兼銜)을 더욱 중히 여겼다. 이때 부군은 아직 분관(分館)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상례(常例)를 뛰어넘어 특별히 겸설서(兼說書)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한림(翰林 예문관)에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가 대교(待敎)에 올랐다.

병오년(1726)에 모친 윤부인(尹夫人)의 상을 당하여 삼년복을 마치고, 도로 한림에 들어와 봉교(奉敎)로 올랐다. 무신년(1728) 이전에 제수받은 것은 다 구명(舊名 필현(弼賢))으로 받은 것이고 봉교 이하의 관직부터는 지금 이름으로 받은 것이다.

기유년(1729) 경종실록(景宗實錄)이 완성되자 4월에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수장하고 이어 선조(先朝 경종(景宗))의 사첩(史牒)을 고출(考出)하였다. 임금이 한림을 새로 추천할 것을 재촉하여, 부군이 추천을 맡는 것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혹자가 김약로(金若魯)를 넣어 달라고 부탁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내가 예전에 김사직(金士直 김약로의 아버지 김유(金楺))을 조상(弔喪)하였는데 여러 아들 가운데 눈이 붉은 자가 있더니 이자가 바로 그자인가?”

하였다. 분향고사(焚香故事)에 추천을 맡은 자는 추천장을 소매에 넣고 한림의 선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데, 예문관에 소속된 하인이 먼저 문으로 들어가 소리 높여 손님을 물리치라고 하면, 아무리 대관(大官)이라도 전에 검열을 지낸 사람이 아니면 으레 다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찾아온 사람과 주인이 처음부터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새 추천장을 꺼내 보여 털끝만큼의 하자도 지적되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완천(完薦 추천 완료)이 되었으니, 그 엄격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중히 여긴 까닭이다.

이때에 문벌(門閥)과 재학(才學)이 막상막하인 자가 오륙 명이었는데 급기야 신만(申晩)과 윤급(尹汲)을 한원(翰苑 예문관)에 추천해 들이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여 모두 부군을 허물하며 오로지 외모만 취하였다.’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관옥(冠玉)같이 아름다운 자라고 해서 반드시 내실을 갖춘 것은 아니다.’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찌 그리 기탄이 없는 것이 그렇게도 제 외숙을 닮았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위하여 걱정하며 눈이 붉은 자가 두렵다.’ 하더니, 마침내 이것이 구실이 되어 원망하는 뭇사람 중에 김약로가 특히 심하였다. 얼마 안 가서 마침내 대간(臺諫)의 진언(進言)으로 추천이 폐기되었고 부군은 이로 인하여 삭직되었다가, 곧 서용(敍用 복직)되어 6품에 올랐다. 경술년에 비로소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전에 임금이 새로 즉위하자 제일 먼저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 등 여러 역적을 베고 네 충신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는데 두어 해가 못 가서 저쪽 사람들이 다시 국권을 잡게 되어 네 충신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으니, 이를 정미진퇴(丁未進退 정미환국)라 한다. 무신역변(戊申逆變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있은 이후로 구신(舊臣)들을 거두어 서용하여 차츰차츰 조정에 다시 서게 하였지만, 이로부터 충역(忠逆)이 뒤섞이게 되고 시비(是非)가 똑같아지는 등 당파 간의 조정(調停)에만 힘을 쏟아 마침내 탕평책(蕩平策)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충민공(忠愍公)과 충익공(忠翼公)의 관작만을 회복시키고 충헌공(忠獻公)과 충문공(忠文公)은 죄안(罪案) 속에 그대로 두었음에도 그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없더니, 부군이 상소를 올려 극언하기를,

 

두 신하가 신원(伸寃)되지 못하면 성상(聖上)에 대한 무고도 씻을 수 없고, 뭇 흉적(凶賊)을 그대로 키우면 임금의 원수 역시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은 의리가 본시 두 가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신하는 바로 한 몸인데, 반은 신원이 되고 반은 신원이 되지 않아 두 갈래로 나눠진다면, 이는 비유컨대 중풍을 앓는 사람이 몸의 반만 마비가 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불인(不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이 이를 남의 일 보듯이 하여 조금도 구제하려 하지 않으니 그 불인이 너무 심하다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일이 어찌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정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시비(是非)를 전도시키고 억지로 호대(互對)를 찾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 것입니다. 나라의 원칙을 세우는 일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관직을 임명하고 토죄(討罪)를 명하는 것이 올바른 천리(天理)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마침내 사의(私意)를 면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본원(本源)을 다지는 입장에서 만약 이 병폐를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다스리고자 하여도 아마 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런데 장령(掌令) 윤흥무(尹興茂)가 이를 두고 부군이 당을 비호한다고 질책하면서 삭직을 요청하는 계사(啓辭)를 올렸다. 신해년(1731)에 비로소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소명(召命)을 어겼다는 죄로 파직되었다가 7월에 다시 정언에 제수되자 상소를 올리기를,

 

선왕(先王 경종(景宗))께서 병이 있으시고 후사마저 없으므로 당시 대신들이 선왕의 수필(手筆)을 받들고 자성(慈聖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언교(諺敎 언문 교서)를 받들어 종사(宗社)를 위하여 왕세제를 세웠으니 이는 대신으로서 해야 할 정상적인 직임인데, 불행히도 세도(世道)가 뒤바뀌어 새 죄안(罪案)을 억지로 첨가했으니, 어찌 거듭 원통할 일이 아니리까. 신이 지난번 상소에서 신원을 청한 것은 온 나라의 공통된 정론(正論)인데, 윤흥무가 갑작스레 당을 비호한다 일렀으니, 그가 비록 감히 그 일을 바로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과 언사에서 그 정상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특명으로 상소를 돌려주고, 소명을 어긴 죄로 파직시켰다.

임자년(1732)에 용인 현령(龍仁縣令)으로 나갔으며, 계축년(1733)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선발되었다가 교리로 승진하였고, 또 옮겨서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가 도로 수찬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다 취임하지 않았다. 시강원(侍講院)의 사서(司書), 겸사서(兼司書), 문학(文學), 보덕(輔德)을 지내고, 그 사이에 학교수(學敎授 사학(四學)의 교수), 별겸춘추(別兼春秋), 훈국랑(訓局郞 훈련도감의 낭관(郎官)),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맡았다.

경신년(1740)에 부응교(副應敎)에 제수되고 그해 6월에 효종(孝宗)의 휘호(徽號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할 때 대축(大祝 축관의 우두머리)의 직임을 맡은 노고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제수받았다. 8월에 임금이 존호를 받을 때 예방승지(禮房承旨)를 맡은 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9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에 제수되고, 10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

신유년(1741) 8월에 지방관으로 나가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는데, 임금이 능()을 알현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이르러 궁시(弓矢)와 호피(虎皮)를 하사했다. 10월에 당시 정승이 표재(俵災)의 일로 논계(論啓 잘못을 따져 아룀)하여 파직되었다.  가을에 장단(長湍)을 순시하였는데, 부사 윤경룡(尹慶龍)이 재해 보고를 사실보다 지나치게 한 일이 발각되었다. 이에 아전을 추궁하고 내사하자 윤경룡이 세도 재상 조현명(趙顯命)에게 부탁하여 조현명이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린 것이다.  곧이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으며, 좌윤(左尹)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자년(1744)에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병인년(1746) 겨울에 외직으로 나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고, 무진년(1748)에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경오년(1750)에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무인년(1758)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제수되었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입시(入侍)하자 내시를 시켜 부축하여 전(殿)에 올라오게 하며 말씀하기를,

 

경을 본 지 지금 몇 해가 지났도다.”

하고는, 앞으로 나와 용안(龍顔)을 쳐다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스스로 용수(龍鬚)를 쓰다듬으며,

 

똑똑히 보이지 않소? 수염과 털이 이렇게 다 희었다오.”

하고서, 이어 전교(傳敎)를 내리기를,

 

이 사람은 염담(恬淡)하여 내가 늘 가상하게 여겨 왔다. 마땅히 한() 나라에서 탁무(卓茂)를 봉한 예를 본떠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제수하여 예전부터 노인을 존대하던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경진년(1760)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제수되고 그 사이에 금오(金吾 의금부)의 총부(摠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와 괴원(槐院 승문원)의 제거(提擧)를 겸임하였다. 무릇 한 벼슬에 거듭 제수된 것은 다 기록하지 않았다.

그해 8월 초이튿날에 세상을 뜨시니 수() 76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이 조제(弔祭)를 내리고, 며칠 후에 교서를 내려 돌아가신 이를 애도하고 유사(有司)에게 별도로 명하여 쌀과 포목을 더 하사하여 상사(喪事)에 쓰도록 하였다. 10월 초이렛날 광주(廣州) 초월면(草月面) 학현(鶴峴) 묘좌(卯坐)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계해년에 양주(楊州) 별비면(別斐面) 성곡(星谷) 술좌(戌坐)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부군은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고 담박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털끝만큼도 세속의 영욕을 가슴속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선비의 평소 행실을 논하여 말하기를,

 

그릇이나 물건 따위를 남에게 줄 경우에 반드시 이를 깨끗이 씻고 여러 겹 싸서 조심스레 만지거늘 하물며 임금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자 하면서 먼저 자신을 더렵혀서야 되겠는가. 이는 그 임금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부군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 30년이 되도록 전답이나 자산이 백금(百金 100)도 되지 않았으며, 성 아래 있는 허름한 집이 값으로 치면 돈 30꿰미에 불과했으나 죽을 때까지 거처를 바꾸지 않았다. 오직 늙은 종 하나를 두었는데 거친 밥이나마 배를 채우지 못했음에도 죽는 날까지 주인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진신(搢紳 높은 벼슬아치)들과도 왕래하는 일이 전혀 없어서, 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등 세 분이 부군과 가장 친한 사이라 하는데도 일 년에 대개 한두 차례 오가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겉과 속이 진솔하여 격의를 두지 않았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權道)에 따라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명예나 이익이 따라붙을 것 같으면 이 또한 어찌 의리를 세운 본뜻이겠는가.”

하였다. 세간에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유감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었다.

조만간 부군이 이조(吏曹)의 관직에 제수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때마다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먼저 차지하여, 물의(物議)가 자못 비등하였다. 그러나 부군은 아무것도 못 들은 체하였다. 전법(銓法)에 당하관(堂下官)의 통색(通塞 승진 문제)은 붓을 잡은 낭관이 주관하게 되어 있다. 낭관이 후임자를 자천(自薦)할 때가 되자 이조 판서 김취로(金取魯)가 느닷없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낭관을 주시하니 낭관이 두려워 일어나 뒷간으로 나갔다. 김취로가 갑자기 부군을 홍문관 응교로 의망(擬望)하니 아전이 옛 규례를 고집하며 곧바로 승차(陞差 승진 임명)할 수 없다고 하자, 김취로가 꾸짖어 말하기를,

 

낭관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 나갔으니, 오늘 승차를 의망한 것은 바로 옥당(玉堂 홍문관)의 구차(久次 오래 승진이 지체되는 자리)이다.”

하였다. 이처럼 부군이 벼슬길에서 낭패를 본 까닭은 실로 한천(翰薦) 한 가지 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판서공(判書公 박사익)이 일찍이 여호선생(黎湖先生 박필주)에게 질문하기를,

 

이여오(李汝五)가 저에게, ‘그대의 집안에 명사(名士)가 둘이 있는데 한 사람은 해오라기가 가을 물가에 서 있어 겉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모습과 같고, 또 한 사람은 소나무가 아스라한 낭떠러지 위에 솟아나 넝쿨들이 타고 오르기 어려운 모습과 같다.’라고 하자, 이희경(李熙卿)이 이 말을 듣고는 참 좋은 말이라 하면서, ‘이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나약한 자에게 뜻을 세우게 할 수 있고 탐욕스러운 자를 청렴하게 만들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비유로 말한 저 두 인물 가운데 누가 나은가요?”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연 그렇겠다! 시숙(時叔)은 꼿꼿하고 정보(正甫 박필균)는 담박하지. 담박한 사람은 어리숙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꼿꼿하고, 꼿꼿한 사람은 오만한 듯이 보이나 실상은 담박하니, 이들은 대체로 두 사람이면서도 한 몸이나 마찬가지이겠지.”

하였다. 시숙(時叔)은 참판공(參判公 박사정)의 자()이다.

급기야 참판공의 아들 명원(明源)이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해지고, 참판공이 얼마 후 돌아가시자 집안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조정에 선 자가 없게 되었다. 부군은 등과(登科)하여 16년이 지난 뒤에도 백발의 늙은 학사(學士)로 지냈으며, 늦게서야 비로소 당상관에 올랐으니, 한미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진출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처음에는 임금의 촉망을 받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다. 승정원에서 숙직할 때에, 밤에 임금이 부군을 불러 물으시기를,

 

승지는 지금 나이가 몇이며, 집은 어디에 있는가? 왜 집을 성안으로 옮겨 살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우사(右史)만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임금이 우사에게 밖으로 나가서 정명(政命)을 전달하라고 명하자, 부군이 황공하여 물러나려고 하니 임금이 갑자기 앞으로 나오라 명하고는 말씀하기를,

 

존호(尊號)를 받는 것이 내가 즐겨하는 바는 아니지만 동조(東朝)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해 여러 신하들의 청을 마지못해 따른 것인데 이제(李濟)가 소를 올려 경계의 말을 하였으므로 나는 실로 부끄러웠다. 내시들이 이것(존호를 받는 것)은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지만, 저들이 어찌 감히 조정의 논의에 간여한단 말인가. 승지는 친인척(親姻戚)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니 바깥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다. 부군이 물러나서 생각해 보니 황송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하루아침에 두 자급(資級)을 뛰어오르는 은택을 입은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규례에 따라 도승지에 오르게 되자 열이레 동안 병을 핑계 대고는 마침내 나아가 숙배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다시는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가지 않았다.

화평옹주가 처음 시집을 올 때 의식을 가례(嘉禮 사가(私家)의 혼례)와 똑같이 하여 당시에 종족(宗族)과 빈객(賓客)들이 모두 다 모였다. 그들의 생각에, 부군이 벽제(辟除)를 잡히고 초헌을 타고 와서 상석(上席)을 맡게 된다면 비단 이날에 문호(門戶)를 빛내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부마를 위해서도 빛이 나리라 여기어, 느지막에 종질(從姪) 아무개가 와서 부군에게 권하기를,

 

숙부가 오시지 않으면 자못 실망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하니, 부군은 놀라며 하는 말이,

 

옹주의 집을 외인이 어찌 함부로 갈 수 있느냐?”

하였다.

얼마 후 옹주가 정안옹주(貞安翁主 박미(朴瀰)의 부인)의 사당을 알현하였는데, 정안옹주의 후손 중에 지위가 잘 알려진 사람이 사당의 문에서 예의를 갖추라는 중지(中旨)를 받은 데다, 장차 정안옹주에게 치제(致祭)하여 영광이 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부군이 병으로 오지 못하여 향()을 받을 자가 없어서, 마침내 치제하는 일을 중지하였다. 종중(宗中)의 여러 장로(長老)들이 모두 부군을 나무라기를,

 

어찌 병을 무릅쓰고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온 집안의 은영(恩榮)이 되도록 아니 했소.”

하였다.

명원(明源)이 병이 깊어 일 년이 넘자 어의(御醫)가 밤낮으로 간호하고 친척들이 찾아와 문병을 하였으며 날마다 병세를 기록하고 보고하였는데, 유독 부군은 이상하게도 한 차례 안부도 물은 적이 없었다. 명원 역시 일찍이 서운히 여기어 원망하기를,

 

우리 선대(先代)에서도 왕가(王家)와 혼인이 있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도 소원하게 대하여 마치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긴단 말인가. 유독 우리 선친께서 소싯적에 그 고아 신세를 비호해 준 일은 생각지도 않는가.”

하였다.

종질(從姪) 아무개가 일찍이 부군에게 와서 말하기를,

 

숙부께서는 밖으로는 산림(山林)의 명망을 짊어지고 있고 안으로는 왕실의 친척과 관계를 맺고 있어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앉아서 풍속(風俗)을 진정시킬 수 있으니, 지금의 국시(國是)를 쥐고 있는 자가 어느 누군들 옷깃을 여미고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섯 사람이 설원(雪寃)되지 못하고 세 흉적이 토죄(討罪)되지 못하고 있다고 하여 숙부께서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에 절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이 성상의 은총을 받고 앞길이 확 트여 세도(世道)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 탕평파(蕩平派)의 신하들까지도 우리 집안의 동정을 몰래 엿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니, 부군이 깜짝 놀라며,

 

너는 본래 우둔한 자인데, 누가 너에게 이 말을 가르쳐 주었으며, 산림이란 너에게 있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위로는 어진 부형에게 누를 끼치고 아래로는 어린 자식을 망치려 들려고 하느냐? 이른바 세도라는 것이 어찌 너처럼 일개 늙은 음관(蔭官)이 알 수 있는 바이겠느냐.”

하니, 아무개가 무색하여 말하기를,

 

숙부께서 답답하게도 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여론을 접하지 않으시기에 특별히 와서 진심을 토로한 것인데, 도리어 성을 내신단 말씀입니까.”

하자, 부군이,

 

돌아가 지금 세도를 행하는 자에게 말하라. 숨바꼭질하듯이 몸을 숨기는 것을 도깨비罔兩라 이르고, 구차스레 득실을 걱정하는 자를 비부(鄙夫 비열한 인간)라 이른다. 나는 진실로 답답하거니와, 어찌 너처럼 자질구레한 자 때문에 지조가 무너지겠느냐. 세상에 공정한 여론이 있다면, 지난번에 내가 갑자기 승진한 것에 대해서 논박을 달게 받을 것이다.”

하였다. 이는 추측컨대 당시 사람들이, 부군이 이미 누차 중지를 어긴 줄을 알지 못하고 근거 없는 소문에만 주목하여 남몰래 청탁할 일이 있게 되자 임금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타진해 본 것인 듯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본시 세상에 영합하여 뜻을 이루었는데, 임금의 마음이 한번 옮겨지고 정대한 여론이 마침내 펴지는 날이면 자신도 한 패거리로 몰려 빠져나오지 못할 것을 다시 두려워하여, 남들과 다르다는 점을 조금이라도 보이려고 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홀로 세상과 영합하지 않아 예전에는 김씨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얼마 전에는 또 요상(僚相)이 모함을 한 사실을 생각하고는, 자주 부군에게 관심을 보였으나 부군은 그의 언론이 항상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을 평소에 비루하게 여겨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여호선생을 천거하여 이조 판서를 삼았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세상에 영합하는 술책이었다. 그런데 임금은 본래 생각하기를 산림에 묻혀 뜻을 닦는 자는 세상에 쓰이기에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잠깐 나왔다 곧바로 떠나곤 하여 절차만 번거롭게 할 뿐이다. 게다가 조야(朝野)가 편안하지 못한 것도 대개는 이에 연유한다.’고 하였던 터였다. 하지만 이미 초빙이 되었으므로, 여호선생이 부군(府君)의 집에 와서 처소를 정하니, 처소에 모이는 자가 매일 조정의 절반은 되었다. 정승 조현명(趙顯命)이 찾아오자, 방과 대청이 협착하고 누추하여 여러 조신(朝臣)들이 피해 있을 곳이 없었다. 이에 조현명이 여러 조신들에게 읍을 하고 자리에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은 선생님을 모시고 강론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여러 분들과 더불어 함께 듣고자 하니, 조정의 예()로써 서먹서먹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소매 속에서 대학(大學)을 꺼내 혈구장(絜矩章)을 강론하기 시작하자 부군이 웃으며,

 

상공(相公)의 혈구(絜矩)는 본디 사슴 가죽으로 된 것인데 어찌하여 사슴을 타고 와서 강론하려 드시오?”

하자, 조현명이 히히 웃다가 얼굴빛이 변하면서 그쳤다. 이날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모두들 부군을 위해 걱정하였다.

홍계희(洪啓禧)는 척분(戚分)이 있어 날마다 선생을 모시고 잤는데, 부군이 몰래 선생에게 말하기를,

 

() 나라 수레와 주() 나라 면류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순서가 바뀐 듯합니다.”

하자, 선생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부군이,

 

“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하라遠佞人는 대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홍계희가 밤에 부군에게 의견을 묻기를,

 

어제 여호선생이 등대(登對)하셨을 적에 임금께서 친히 손을 잡으시고는 개정(開政)할 것을 독촉하셨으니 한번 명()을 받드는 것이 그만둘 수 없는 일인 듯싶습니다만, 부제학 자리를 만약 신통(新通 새 인물을 후보로 결정함)한다면 피차간에 어려운 점이 있어 중통(重通)만 못합니다. 그렇다면 김상로(金尙魯)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의 말이 비록 남을 위하는 것 같지만 본심은 실로 자기가 맡으려는 것이었다. 이에 부군이 말하기를,

 

이른바 집이 가까워도 사람은 멀다는 격이군요. 그대는 왜 곧장 이조(吏曹)에 가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거요?”

하였다. 이튿날 홍계희가 우암(尤庵)의 고사를 다분히 끌어대어 여호선생에게 넌지시 말하자, 부군이 버럭 소리를 치기를,

 

우암이 정사(政事)를 했다면 김상로는 제주 목사가 되고 정익하(鄭益河)는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었을 것이오.”

하자, 좌중 사람들이 몸이 오싹하여 서로 쳐다보았다. 이때 홍계희는 벌써 여러 김씨(金氏)들에게 달려가 고자질하여 부군을 위태롭게 하고자 꾀하고, 나아가 선생에게까지 위험이 미치게 하려 하였다. 그러자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제주 목사를 부풀려서 강계 부사(江界府使)니 영월 부사(寧越府使)니 하면서 다투어 상대를 지목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모두들 부군을 뼈에 사무치도록 원망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선생이 직접 차자(箚子)를 올리고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으로 상소하여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 등을 토죄(討罪)할 때 유독 김상로 형제만 참여하지 않았으며, 박문수(朴文秀)가 상소를 올려 여호선생을 쫓아냈을 때에 여러 김씨들의 힘이 작용하였으니, 이는 다 홍계희가 한 짓이었다.

9월에 비로소 유봉휘, 조태구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자 세간에서 부군을 편론(偏論)의 도가(都家)로 지목하는 일이 있게 되니, 부군은 스스로 마음이 편치 않아 지방으로 나가기를 구하여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 방어영(防禦營)을 철원(鐵原)으로 옮겨 설치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두어 달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죽자 임금이 갑자기 왕림하시니 백관들이 허둥지둥 걸어서 뒤를 따랐다. 중지(中旨)가 내리기를,

 

시가(媤家)의 존속(尊屬) 한 사람이 입장(入帳)하고 상사(喪事)를 감독하게 하라.”

하였으나, 부군이 성명(成命 공식 왕명)이 내리지 않았다 하여 병을 핑계 대고 가지 않았다. 상이 이틀 밤이 지나도록 환궁하지 않아 대신들이 누차 환궁할 것을 청했으나 거듭 엄한 분부만 듣고 모두 문밖에서 대기하였다. 어떤 사람이 부군을 원망하면서,

 

이때가 어느 때인데 정()으로 보나 의()로 보나 어찌 유독 오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장차 명정(銘旌)을 설치하려고 부군에게 와서 글씨를 요청하자, 부군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고서 쓰지 않았다. 이어 붉은 비단을 그대로 돌려보내면서, 도위(都尉 박명원)에게 편지를 써 나무라기를,

 

듣자니 삼공(三公)이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마구간 사이에 줄지어 있다 하니 이게 무슨 거조(擧措)란 말인가. 오늘날 조정이 아무리 비루하다 한들 어찌 너희같이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갖추고 도탄(塗炭)에 앉아 있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어이해 제 머리를 깨부수고 제 목을 찌를 듯이 하여 임금의 마음을 빨리 돌리지 않고 내시들과 함께 앉아서 겨우 눈물이나 흘리고 있단 말이냐?”

하였다. 이때 군사 호위가 너무도 엄하여 뭇 신하들을 들여놓지 않았으므로 도위가 실로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하다가, 급기야 이 편지를 보고서 어찌할 바를 몰라 뜰에 내려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니, 임금이 몹시 성을 내며,

 

너도 또한 조정 신하들을 흉내 내느냐? 파직시켜라, 파직시켜라!”

하였다. 얼마 후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파직을 시킨다면 결국 맹만택(孟萬澤)의 경우와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곧바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부군이 도위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는 외판(外辦)할 것을 하명하니, 대신이 그제야 비로소 진현(進見)할 수 있게 되어 바야흐로 진언을 드리려 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신사철(申思喆)을 꾸짖으며 도로 다시 편전(便殿)의 문을 닫아 버렸다. 그제야 비로소 임금이 치미는 울화가 있어서 다른 일에다 성을 낸 것을 조정의 안팎에서 알게 되었다.

당시에 사대부로서 처신에 능란한 자들에게는 기회를 엿보기에 모든 것이 좋은 때였으나 홀로 부군만이 꿋꿋이 자신을 지켜 조금도 자리를 옮겨 앉지 않았으니, 19년 동안 한산직(閑散職)을 전전한 것만 보아도 그 본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영욕(榮辱)의 사이에도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고, 방촌(方寸 마음)의 사이에 담연(澹然)하여 얽매임이 없었던 것은 오직 부군만이 그러했으니, 비록 당세에 부군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도 또한 청신(淸愼)하고 개제(愷悌 온화함)하다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는 정부인(貞夫人) 여주 이씨(驪州李氏)로 우윤(右尹) ()의 따님이다. 3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사유(師愈), 사헌(師憲), 사근(師近)인데, 사근은 현감을 지냈으며 여호선생에게 출계(出繼)했다. 딸은 판관(判官) 어용림(魚用霖)에게 출가했다. 손자는 희원(喜源)과 지원(趾源)인데 지원은 부사(府使)를 지냈으며, 손녀는 감역(監役) 이현모(李顯模)와 현감 서중수(徐重修)에게 출가했는데, 다 큰아들 소생이다. 진원(進源)은 일찍 죽고 수원(綏源)은 부사요, 손녀는 황형(黃馨)에게 출가했는데, 사근(師近)의 소생이다. 외손(外孫)에는 군수 어재소(魚在沼)와 어재운(魚在雲)이 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불초 손() 지원이 삼가 쓰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조부 …… 가장(家狀) : 연암이 만년에 지은 글이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당시 연암은 눈이 어둡고 팔이 마비되어 아들 박종채에게 구술해서 이 글을 완성했다고 한다. 純祖實錄에 의하면 순조 5(1805) 1 7일 박필균에게 장간(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연암은 그 해 10 20일에 별세했으므로, 이 글은 그가 남긴 최후의 글이었을 것이다.

[D-001]고려사》 …… 있으며 : 고려사 112 열전(列傳)25에 실려 있다. 박상충(1332~1375)은 이곡(李穀)의 문인이요 사위였으며, 신진 성리학자이자 친명파(親明派)로 활약하다가 반대파에게 암살되었다.

[D-002]모두 …… 덕분이었다 : 원문은 皆肩隨師資也인데, 예기(禮記) 곡례 상(曲禮上)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사람과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그 뒤를 따라간다.五年以長 則肩隨之고 하였다. 나이 차이가 그 정도밖에 나지 않는 사이였지만 박사익 · 박사정 형제를 스승처럼 여겨 본받았다는 뜻이다.

[D-003]사대부들 …… 하였다 : 숙종(肅宗) 때 서인(西人)이 송시열(宋時烈) 등을 추종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 등을 추종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진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집안에서도 박세채(朴世采 : 1631~1695)는 소론에 속하였고, 박필주(朴弼周 : 1665~1748)는 노론에 속하였다.

[D-004]우리 …… 것입니다 : 송자대전(宋子大全) 191에 박동량의 묘표인 금계군 박공 동량 묘표(錦溪君朴公東亮墓表)’와 권163에 박미의 신도비인 금양군 박공 미 신도비명(錦陽君朴公瀰神道碑銘)’이 수록되어 있다. 박미의 신도비는 그 손자인 박태만(朴泰萬)이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사실이 본문에 밝혀져 있다. 박동량의 묘표는 그 손자인 박세채(朴世采)가 송시열에게 지어 주기를 청한 글이었다.

[D-005]팔학사(八學士) : 송시열의 고제(高弟) 8인을 뜻하는 듯하다. 참고로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한원진(韓元震) · 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었다.

[D-006]남구만(南九萬) …… 것입니다 : 소론의 지도자였던 남구만(1629~1711)과 유상운(柳尙運 : 1636~1707)은 숙종 20(1694) 합세하여,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오빠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는 데 반대하고 그를 유배에 처하는 유화 조치를 취하여 노론의 지탄을 받았다. 또한 이 두 사람은 숙종 27(1701) 노론에 맞서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경형(輕刑)으로 다스릴 것을 주장했다가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 사사(賜死)를 내리자, 노론의 탄핵을 받고 함께 파직당하였다. 이러한 갈등은 왕위 계승 문제에서 소론이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후일의 경종)를 추대한 반면, 노론은 세자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延礽君 : 후일의 영조)을 추대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유상운은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외손자였다.

[D-007]경종(景宗) …… 없애자 : 남구만과 유상운은 소론의 초기 인물이다. 이 사건은 경종 초기에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王世弟)로 세워 대리청정을 하게 한 노론을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 과격파들이 공격하여 대대적으로 숙청을 가한 신임사화(辛壬士禍 : 1721~1722)를 가리키는 것으로, 남구만과 유상운이 이미 죽고 난 후의 일이다. 따라서 남구만과 유상운의 무리는 이들의 영향을 받은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D-008]청망(淸望) : 청환(淸宦)의 의망(擬望)이란 뜻으로, 명예로우면서도 중요한 벼슬자리, 즉 청요직(淸要職)에 삼망(三望)  3인의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천거되는 경우를 말한다. 시강원의 참하관으로는 설서(說書), 겸설서, 자의(諮議)가 있다.

[D-009]아직 …… 못하였는데도 : 과거 급제자를 박사(博士)의 채점에 따라 삼관(三館) 즉 승문원과 성균관과 교서관에 차례로 배치하는 것을 분관(分館)이라 한다. 소정의 점수를 얻지 못해 다음번 분관을 기다리는 사람을 미분관인(未分館人)이라 한다.

[D-010]고출(考出) : 실록(實錄)을 포쇄(曝曬)할 때 취래(取來) · 고출(考出) · 개장(改粧) · 개궤(改櫃) 등의 작업을 하는데, 고출은 실록의 내용을 초록(抄錄)하는 것을 뜻한다. 실록의 포쇄관(曝曬官)으로는 예문관 봉교대교검열이 파견되었다.

[D-011]김약로(金若魯) : 1694~1753.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박세채 · 송시열의 문인으로 이조참판 겸 양관의 대제학을 지낸 김유(金楺 : 1653~1719)의 아들이다. 김약로는 영조 3(1727)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고,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까지 지냈다. 판서를 지낸 그의 형 김취로(金取魯), 우의정을 지낸 아우 김상로(金尙魯), 영의정을 지낸 사촌 형 김재로(金在魯)와 함께 고위직에 있으면서 한때 세도가 매우 컸다.

[D-012]분향고사(焚香故事) : 분향은 예문관에서 한림의 새 후보자를 추천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에 분향하여 고하는 절차를 말한다. 그러나 후보자에게 소시(召試)를 보게 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면서 분향하던 절차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고사(故事)라 한 것이다. 연암집 3 왕고수서한림천기(王考手書翰林薦記)에서도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D-013]이것은 …… 까닭이다 : 예문관의 봉교(奉敎) 이하는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D-014]신만(申晩)과 윤급(尹汲) : 신만(1703~1765)은 판중추부사 신사철(申思喆 : 1671~1759)의 아들이다. 1726년 과거 급제 후 승문원 정자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할 때 파직당했다. 후일 영의정까지 지냈다. 윤급(1679~1770)은 이재(李縡), 박필주(朴弼周)의 문인으로 1725년 과거 급제 후 이조 판서, 우참찬까지 지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여 누차 파직 또는 좌천되었다.

[D-015]관옥(冠玉)같이 …… 아니다 : 사기(史記) 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서 유방(劉邦)의 총애를 받던 진평(陳平)을 헐뜯는 자들이 진평은 비록 미남자이지만 모자를 장식하는 옥과 같을 따름이니, 그 내실을 반드시 갖춘 것은 아니다.平雖美丈夫 如冠玉耳 其中未必有라고 한 말에서 따온 표현이다.

[D-016]네 충신 : 경종 때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사대가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D-017]저쪽 사람들 : 소론을 가리킨다. 영조 3(1727) 소론 측의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 조태억(趙泰億)이 우의정이 되고, 노론 측의 정호(鄭澔), 민진원(閔鎭遠)이 유배를 가게 되었다.

[D-018]() 나라와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선제(先帝 : 유비)는 한 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고 하였다. 한 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촉()은 한 나라의 역적인 위()의 조조(曹操)를 토벌해야 한다는 뜻이다.

[D-019]나라의 …… 정치 : 서경(書經) 홍범(洪範)에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하나로 임금이 원칙을 세움建用皇極을 들었다.

[D-020]호대(互對) :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을 취한 인사정책을 말한다. 노론 측 인사를 영의정으로 삼으면 소론 측 인사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는 식이다.

[D-021] …… 맞추려는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나오는 말이다. ()보다 식색(食色)이 중요하지 않느냐는 주장에 대해 맹자는 그 뿌리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끝만 맞추려는不揣其本而齊其末 궤변이라고 비판하였다.

[D-022]표재(俵災) : 재해를 입은 논밭에 대하여 그 비율에 따라 조세의 감면을 할당하는 것을 말한다.

[D-023]염담(恬淡) :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을 뜻한다.

[D-024]탁무(卓茂) : ?~28.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 대고 사직하였으므로,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특별히 불러 태부(太傅)를 삼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다.

[D-025]이병태(李秉泰) · 정형복(鄭亨復) · 황재(黃榟) : 이병태(1688~1733) 1723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참의가 되었으나 탕평책에 반대하다 파직되었고, 1730년 경상 감사 · 우부승지에 취임하기를 거부하여 합천 군수로 좌천되었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청백리로서 합천의 청천서원(淸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정형복(1686~1769) 1725년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전라도황해도 감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폈고 판서까지 지냈다. 황재(1689~?) 1718년 과거 급제 후 1721년 설서(說書)가 되었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그 후 이조 참의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노론의 청류(淸流)로 명망이 높았다. 두 차례 중국을 갔다 온 뒤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경오연행록(庚午燕行錄)을 남겼다.

[D-026]자신의 …… 사람 : 논어 미자(微子)에서 공자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을 평하여 그들은 은거하여 기탄없이 말하면서 자신의 몸을 깨끗이 지키고 권도에 따라 벼슬하지 않았다.隱居放言 身中淸 廢中權고 하였다.

[D-027]전법(銓法) : 전랑천대법(銓郞薦代法)을 말한다. 이조의 낭관이 사면(辭免)하려면 반드시 후임자를 추천하여 직책을 대신하도록 하게 한 규정이다.

[D-028]붓을 잡은 낭관 : 전랑(銓郞)이라고도 한다.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말한다.

[D-029]한천(翰薦) 한 가지 일 : 앞서 김약로를 예문관 검열에 추천하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D-030]이여오(李汝五) : 여오는 이병상(李秉常 : 1676~1748)의 자이다.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검소하게 살았다. 이병태(李秉泰)의 족형(族兄)이다.

[D-031]이희경(李熙卿) : ‘희경은 이재(李縡 : 1680~1746)의 자이다. 대제학과 참판을 지냈으며, 탕평책에 반대하였다. 낙론(洛論)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였다.

[D-032]나약한 …… 있다 : 원문은 立懦廉頑인데, 맹자 만장 하(萬章下) 및 진심 하(盡心下)에서 맹자는 백이(伯夷)를 예찬하면서 그의 기풍에 관해 들은 자라면 탐욕스러운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울 수가 있게 된다.頑夫廉 懦夫有立志고 하였다.

[D-033]학사(學士) :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여기서는 예문관의 하급 관원을 말한다.

[D-034]늦게서야 …… 올랐으니 : 원문은 晩始緋玉인데, 비옥(緋玉)은 홍포(紅袍)에다 옥관자를 붙인 당상관의 차림새를 말한다.

[D-035]우사(右史) : 고대 중국의 사관으로 좌사(左史)와 우사(右史)가 있어 각각 기언(記言)과 기사(記事)를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사관(史官)을 가리킨다. 주로 예문관의 봉교 이하가 춘추관의 사관을 겸임하였다.

[D-036]동조(東朝) : 왕대비를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숙종의 계비(繼妃)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를 가리킨다.

[D-037]승지는 …… 때문에 :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부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D-038]하루아침에 …… 입은 : 박필균은 영조 16(1740) 6월 정 3 품 통정대부에 오른 데 이어 8월에 다시 종 2 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D-039]중지(中旨) : 임금이 조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어필로 써서 내린 명령을 말한다.

[D-040]나를 …… 말인가 : 원문은 疎絶我若浼也인데,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한다. 孟子 公孫丑上

[D-041]다섯 …… 있다 : 신원되지 못한 다섯 사람이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경종(景宗) 시해 음모 혐의로 처형된 김용택(金龍澤 : 김창집의 아들), 이천기(李天紀 : 이이명의 아들), 이희지(李喜之), 심상길(沈尙吉), 정인중(鄭麟重)을 가리키며, 토죄되지 못한 세 역적이란 소론 대신인 이광좌(李光佐), 최석항(崔錫恒), 조태억(趙泰億)을 가리킨다.

[D-042]삼사(三司) ……  : 원문은 鐵限於三司인데, 철한(鐵限)은 철문한(鐵門限) 즉 얇은 철판으로 문지방을 감싼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출입의 제한을 엄중하게 하는 비유로 쓰였다.

[D-043]성벽을 마주하고 앉아 : 원문은 面郭而坐인데, 담벼락을 마주하고 서 있다는 면장이립(面牆而立)과 비슷한 표현이다. 소견이나 견문이 좁음을 비유한 말이다.

[D-044]송인명(宋寅明) : 1689~1746. 영조 때 조현명(趙顯命 : 1690~1752)과 함께 탕평책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D-045]김씨들 : 김약로, 김취로, 김상로 등을 가리킨다.

[D-046]요상(僚相) : 정승이 다른 정승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는 좌의정 송인명이 앞서 표재의 일로 박필균의 파직을 청하는 계사를 올렸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을 가리켜 한 말이다.

[D-047]혈구장(絜矩章) : 대학장구 () 10장에 이른바 평천하(平天下)가 그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효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니 백성들이 공경심을 일으키며, 위에서 고아를 돌보니 백성들이 배반하지 않나니,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혈구의 도絜矩之道가 있다. 위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아래를 부리지 말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위를 섬기지 말며, 앞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뒤에 먼저 하지 말며, 뒤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앞이 따르게 하지 말며, 오른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왼쪽에 건네지 말며, 왼쪽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오른쪽에 건네지 말라. 이것을 혈구의 도라 이른다.”고 하였다. 혈구(絜矩)란 곡척(曲尺)으로써 잰다는 뜻으로,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도덕 규범을 뜻한다. 여기서는 언행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D-048]상공(相公) …… 드시오 : 조현명의 호가 귀록(歸鹿)인 점과 녹비(鹿皮)에 가로왈이라는 속담을 연계시켜 탕평파인 그를 신랄하게 풍자한 말이다. 사슴 가죽에 쓴 날 일() 자는 가죽을 잡아당기면 가로 왈() 자도 되므로, 조현명의 처신이 바로 그처럼 주견이 없이 세상에 영합함을 풍자한 것이다. 또한 사슴을 타고 와서騎蒭라고 한 것은 조현명의 호가 백록을 타고 다니는 신선처럼 살고 싶다는 뜻의 귀백록(歸白鹿)’에서 유래한 점을 비꼰 것이다.

[D-049]홍계희(洪啓禧) : 1703~1771.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1737년 과거 급제 후 우의정 조현명의 천거로 교리에 특진되었으며, 좌의정 송인명의 천거로 공조 참의가 되었다. 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탕평파나 척신(戚臣)에 접근하여 출세했으므로 지탄을 받았다.

[D-050]() 나라 …… 말입니다 : 안연(顔淵)이 공자(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하 나라의 역법을 쓰고, 은 나라의 수레를 타고, 주 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음악은 소무를 쓰고, 정 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 정 나라 음악은 인심을 음탕하게 하고 말재주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라고 하였다. 論語 衛靈公 말재주 있는 사람은 홍계희를 빗대어 한 말이다.

[D-051]개정(開政) : 이조에서 관원들의 인사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대개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

[D-052]집이 …… 멀다 : 시경 정풍(鄭風) 동문지선(東門之墠) 동문 옆 평지 지나 언덕에 꼭두서니 자라는 곳. 그 집은 가까워도 그 사람은 몹시 멀어라.東門之墠 茹藘在阪 其室則邇 其人甚遠라고 하였다. 사모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홍계희가 인사 문제 청탁차 사처(私處)로까지 찾아온 것을 풍자하기 위해 이 시의 일절을 인용하였다.

[D-053]편론(偏論)의 도가(都家) : 다른 당파를 비난하는 편파적인 여론 조성을 도맡아 한다는 뜻이다.

[D-054]입장(入帳) : 기장(記帳), 즉 명부(名簿)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D-055]조의(朝衣) …… 있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백이(伯夷) 악인의 조정에 서서 악인과 함께 말하는 것을 마치 조의와 조관을 갖추고 도탄에 앉아 있는 듯이 여겼다.立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 坐於塗炭고 하였다.

[D-056]맹만택(孟萬澤)의 경우 : 맹만택은 맹주서(孟冑瑞)의 아들로 현종(顯宗)의 딸 명선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어 신안위(新安尉)에 봉해졌다. 그러나 공주가 미처 시집오기 전에 죽었다 하여 그 작호를 환수당하였다. 顯宗實錄 12 12 27

[D-057]외판(外辦) : 임금이 행차하기 위해 호위들을 소집하여 정돈시키는 것을 말한다.

[D-058]신사철(申思喆) : 1671~1759. 노론계 중신으로 영조 때 평안 감사, 예조 판서, 공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1745년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들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승지 증() 이조 판서 나은(懶隱) 이공(李公) 시장(諡狀)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금상(今上) 8년 갑진년(1784)에 영남 유생 아무개 등 몇 사람이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소장을 올려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우리 영종대왕(英宗大王 영조)께서 특별히 고() 승지 신() 이동표(李東標)에게 이조 판서의 관직을 추증하시고, 그 고신(告身) 청의(淸議)를 힘써 주장하여 수립한 공로가 남보다 뛰어났다.力主淸議 樹立卓然라는 여덟 자를 쓰도록 명하여 포창(褒彰)하였으니, 조정에서 이룩한 대절(大節)이 이에 밝게 빛을 발하고 위대하게 드러나, 공이 기사년(1689)에 구원하려고 했던 박태보(朴泰輔),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충신들과 아울러 백세(百世)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적의 본말에 있어서는 임금이 임종하시기 직전이라 상세히 아뢰지 못한 바가 있어, 시호(諡號)를 내리는 은전이 밝게 다스려진 이 시대에 아직까지 시행되지 않았으니, 지사(志士)들이 오랫동안 품어 온 유감이 오늘을 기다린 듯합니다.

옛날 송() 나라 신하 공도보(孔道輔)는 벼슬이 중승(中丞)이요, 추호(鄒浩)는 벼슬이 우정언(右正言)이었습니다. 법으로 따지자면 마땅히 시호를 얻지 못할 처지인데도 단지 곧은 절개로써 둘 다 당대에 훌륭한 시호를 얻었습니다. 지금 동표(東標)가 행한 의리는 이들 옛 성현과 꼭 같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순수하고 심오함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유음(兪音 허락하는 조서)을 내리시어 특별히 동표에게 증시(贈諡)의 은전을 거행케 하여 주소서. 신 등은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 소()가 아침에 올라가자 저녁에 회보를 내리기를,

 

그가 행한 의리에 대해서는 내가 익히 아는 바이니 소청(疏請)한 대로 시행할 것을 특별히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그 일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에 내리자 백관들은 경외하며 우러러보고 사림(士林)들은 면목이 섰다.

( 서유린(徐有隣))는 일찍이 관각(館閣)의 직책을 맡았고 사관(史官)을 맡은 적이 있으니, 어진 사대부의 덕업(德業 덕행과 사업)과 명행(名行 명성과 품행)에 대하여 기꺼이 드러내야 할 처지인데, 하물며 이 시장(諡狀)을 짓는 데 있어 어찌 감히 글재주가 없다 하여 사양할 수 있으랴.

삼가 살피건대, ()의 자는 군칙(君則)이요, 호는 나은(懶隱)이요, 그 선세(先世)는 진보(眞寶) 사람이다. 고려 말엽에 활동한 휘() 자수(子修)는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홍건적(紅巾賊) 토벌을 도와 공신이 되고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며, 6세조 휘 우()는 경학과 문장으로써 정릉조(靖陵朝 중종(中宗))에 이름을 드날려 세상 사람들이 송재(松齋)라 불렀는데, 이분은 퇴계(退溪) 문순공(文純公)의 숙부(叔父)가 된다. 증조(曾祖)인 휘 일도(逸道)는 봉사(奉事)를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인 휘 지형(之馨)은 참봉을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광해조(光海朝)에 상소를 올려 이이첨(李爾瞻)을 참형에 처하기를 청하였다. ()인 휘 운익(雲翼)은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으며, 종조숙부(從祖叔父) 휘 지온(之馧)에게 출계(出系 양자로 나감)하였다. ()는 순천 김씨(順天金氏)로 생원(生員) 기후(基厚)의 따님이다.

숭정(崇禎) 갑신년(1644, 인조 22) 4 5일에 공()을 낳으니, 용모가 뛰어나고 인품을 타고났다. 지학(志學 15)의 나이 때부터 분발하여 성현(聖賢)을 목표로 삼고, 한 가지 기예로써 이름이 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처사공(處士公 부친 이운익)의 임종 시 부탁을 받고 난 뒤로 더욱 스스로 노력하여 아우와 더불어 날마다 반드시 첫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여 자리를 맞대고 학문을 강론하여 침식을 잊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 아우가 죽게 되자 공은 비로소 과거(科擧) 공부에 힘을 쏟았는데 이는 모부인(母夫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을묘년(1675)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니 선비들의 기대가 더욱 커졌다. 일찍이 동당시(東堂試)에 응시한 적이 있었는데 여러 고관(考官)들이 사석에서 서로 말하기를,

 

재주와 학식이 이모(李某)보다 나은 자가 없으니 마땅히 장원을 차지할 것이다.”

하였는데, 공은 어렴풋이 이 말을 듣고서 시험 당일이 되자 일부러 머리를 천 번이나 빗고 또 빗으며 늑장을 부려 마침내 과장(科場)의 문에 들어가지 않고 물러 나왔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이천소(李千梳)라 부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정사년(1677)의 증광시(增廣試)에 회시(會試) 장원(壯元)이 되었으나 얼마 뒤 곧 파방(罷榜 급제자 발표 취소)이 되었고, 계해년(1683)의 증광시에 또다시 회시 장원이 되어 삼관(三館)에 분관(分館)하게 되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영남 선비들의 여론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한다.”

하고서, 마침내 성균관에 눌러두어 4년 동안 등용되지 못했다.

정묘년(1687)에 외직으로 쫓겨나 창락 찰방(昌樂察訪)에 제수되었다.

기사년(1689)에 사국(史局 춘추관(春秋館))에 천거되고 다시 남상(南床 홍문관 정자)에 의선(議選 선발)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전적(典籍)으로 품계를 뛰어 넘어 승진되고 그 이튿날에 홍문관 부수찬에 특별히 제수되니, 공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하여 사양하고 소명(召命)에 나가지 않았다. 5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박태보(朴泰輔), 이세화(李世華)가 상소를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였다.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여 이들을 모두 대궐 뜰에서 국문하니, 오두인과 박태보 두 분 모두 국문의 여독으로 귀양 도중 길에서 죽었다.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이 일로써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역적의 죄로써 다스리겠다.”

하였다. 공이 이때 시골집에 있다가 변을 듣고 상소를 지어 극언을 올리려 하다가 나이 많은 태부인(太夫人 어머니)에게 큰 슬픔을 끼칠까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데, 태부인이 그 말을 기껍게 듣고는 공을 재촉해서 길에 오르게 하였다.

공이 서울에 당도하자, 상소 내용 가운데, “옥산의 새 무덤엔 양마석(羊馬石)이 우뚝 서고, 여양의 옛집은 기상이 참담하다.玉山新阡 羊馬嵯峨 驪陽舊宅 氣像愁慘라는 말이 있어 보는 자마다 모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상소에 또 이르기를,

 

전하께서 이세화(李世華)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다 풀어 주셨으나 이상진(李尙眞)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다 풀어 주지 않고 있으니 어찌 한결같이 대하고 똑같이 사랑하는 도()이겠습니까. ! 일을 만나면 논쟁하는 것이 신하된 직분이거늘 전하의 오늘날 처사에 대하여 모두가 분부에 순종하여 한 사람도 과감히 말하는 자가 없으니, 천하만세(天下萬世)의 사람들이 전하의 조정에 서서 전하의 녹을 먹고 있는 자를 충신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라 하겠습니까? 오늘날 조정 신하 중에는 합문(閤門)에 엎드려 간언하기를 갑자기 중지한 것을 가지고 지금도 한스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 마음이 어찌 다 전하께 불충하거나 국가의 계책을 근심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후회한다는 한 마디 말씀을 아끼시고 사방 백성의 소망을 가볍게 저버리려 하십니까.”

하였고, 또 이르기를,

 

조사기(趙嗣基)의 말이 궁위(宮闈)를 범하여 보고 듣기에 놀라운 점이 있는데 대간(臺諫)의 계사(啓辭)를 갑자기 정지시키셨으니 신은 이를 애석히 여깁니다.”

하였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일이 장차 어찌 될지 모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얼마 있다가 임금의 마음이 풀려 그 죄가 파출(罷黜)에 그쳤다.

곧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다시 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때 여론을 쥐고 있는 자들이 노봉(老峯) 민공(閔公)을 논계(論啓)하여 기어코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삼사(三司)가 일제히 모여 공에게 논계에 참여하기를 청하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곤성(坤聖 인현왕후)께서 폐위되던 날에 여러분이 머리가 부서지도록 힘껏 간()하지 못하였으니 이미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죽는 의리를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 또다시 이 사람마저 죽이려 하고 있으니, 성모(聖母 인현왕후)에 대해 어찌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이담명(李聃命)이 이 주장을 특히 강력하게 지지하여 붓과 벼루를 앞에다 내놓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너무 사양하지 말고 나를 봐서라도 계사를 기초하라.”

하니, 공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그대가 사적인 원한을 갚고자 하면서 어찌 남의 붓을 빌리려 하는가.”

하고서, 마침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사간원 헌납,  원문 빠짐  수찬에 연이어 제수되었으나 다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공은 나랏일이 걱정되기는 하였으나 세상에 나갈 뜻을 끊어 버리고 영천암(靈泉巖)을 사랑하여 그곳에다 집을 지어 놓고 학문을 닦을 장소로 삼아 평생토록 지낼 듯이 하였다.

경오년(1690)에 또 헌납과 교리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외직을 청하여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그 이듬해 봄에 공의 경학(經學)으로 보아 외방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는 자가 있어,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겸임하고 이어 수찬으로 옮겼다. 임금이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의 묘)에 행행(幸行)할 때 호종하였는데, 임금이 육신묘(六臣墓)를 지나면서 제사를 내리고 아울러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불가함을 고집하면서 그 이유로써 춘추(春秋) 어버이를 위하여 그 잘못을 숨긴다.爲親者諱는 대문을 들고 나오자, 공이 홀로 앞에 나아가 아뢰기를,

 

광묘(光廟 세조(世祖))께서 이미 육신을 죽였으니 만약 그 충절을 포장(褒獎)해 준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교리에 제수되자 휴가를 청하여 근친(覲親)하였고, 가을에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았다가 교리로 옮겨 제수되었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들에게 광대로 하여금 앞길을 인도하도록 명하자, 공이 아뢰기를,

 

광대의 잡희(雜戱)는 성인(聖人)이 싫어하신 바이니 아마도 정색(正色)을 함으로써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도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천둥의 이변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임금이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논했는데 절실한 말들이 많았다. 공이 조정에 있을 때에는 지조가 꿋꿋했으며 풍도가 준엄하였고, 경연(經筵)에서 경서(經書)를 펼쳐 놓고 토론을 할 때에는 그 뜻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속에 따라 적당히 살고자 하지 아니하여 자주 근친을 위한 휴가를 청하고 이로 인해 아주 떠나 버리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매번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공에게 따뜻한 봄이 되면 모친을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라 명한 다음, 모친에게는 곡식과 비단을 내려 특별히 은총을 베풀었다.

또 헌납으로 부름을 받아 이조좌랑 겸 시강원사서(吏曹佐郞兼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이수인(李壽仁)과 유재(柳栽)를 청환직(淸宦職)에 통망(通望 후보 추천)하자고 하자, 공이 유재는 문학(文學)이 없고 이수인은 일찍이 기사년의 대론(大論)을 피해 갔다는 이유를 들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또 민장도(閔章道)를 통망하자고 하였는데, 그 아비 민암(閔黯)이 당시에 국권을 잡고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장도는 평소 훌륭한 행실이 없다.”

하고, 매우 준엄하게 막아 버렸다. 이에 강요를 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심지어 화복(禍福)으로써 유혹하기까지 하니,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이따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부끄럽다.”

하며, 그날로 정고(呈告 사직서를 올림)하고 비를 무릅쓰고 남으로 돌아갔다. 도롱이를 입고 배에 오르니 공을 전송하는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며 서로 말하기를,

 

오늘 작은 퇴계小退溪를 다시 보게 되었도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학문을 강론하려는 자들이 날마다 모여들어 그들과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헌납, 부교리, 교리, 겸교수에 제수되고 얼마 후 헌납으로 옮겨 제수되고 다시 이조 좌랑, 겸문학, 교리, 겸필선(兼弼善)에 제수되고 또다시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일찍이 영천암(靈泉巖)의 별장에 거처하여 조용히 앉아 주역을 읽으면서 지냈는데, 이때 문인(門人)에게 답한 태극(太極)에 대한 변설(辨說), ‘천리와 인욕이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天理人欲同行異情는 설에 대한 해석은 그 연구가 극히 정미(精微)하였다.

계유년(1693)에 의정부 사인, 사헌부 집의, 시강원 보덕에 오르고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다.

이렇게 전후로 역마(驛馬)를 보내 부른 것이 13차례나 되었으므로 마침내 마지못하여 명에 응하였다. 이때 장희재(張希載)가 장부(將符)를 차고 있으면서 권세를 믿고 불법을 많이 자행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그의 노비 가운데 심하게 우쭐대는 놈을 호되게 처벌하니, 이 소식을 들은 이들이 통쾌히 여겼다.

사복시 정(司僕寺正)으로 옮겨 제수되자 또 휴가를 빌어 귀성하였다. 사간 겸 중학교수(司諫兼中學敎授)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리고 이와 함께 시정(時政)을 논하기를,

 

주자(朱子) 사대부의 출처거취(出處去就)가 풍속의 성쇠(盛衰)에 관계된다.’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소명(召命)을 어기면 곧바로 이조의 논의를 따라 하옥하고 갈아 치우니, 이는 예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관(臺官)이 자기 직책을 소홀히 한 지 실로 이미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간신(諫臣)을 대우하는 것 또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열 사람의 대간(臺諫)이 강하게 간쟁을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던 일을 대신(大臣) 한 사람의 한 마디 말에 거뜬히 해결이 되며, 뻣뻣하게 남의 말을 거부하는 기색이 있을 뿐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미덕은 없으시니, 오늘날 언로(言路)가 막혀 버린 것이 어찌 모두가 어물쩡 넘어가는 신하들만의 죄이겠습니까. 군신간에 존재하는 정의(情義)가 신뢰감을 잃고 질책만 뒤따르니, 신하들이 무서워 성상의 마음을 거스르지나 않을까 오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른바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惶恐待罪만 나불대는 승정원(承政院) 성교가 지당하십니다.聖敎至當만 나불대는 비변사(備邊司)를 불행히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조정의 신하를 들어 쓰기도 하고 퇴출시키기도 하셨습니다. 한창 중용할 때에는 마치 무릎 위에라도 올려놓을 듯이 하다가 밀어내어 배척할 때에는 못에다 떨어뜨릴 듯이 하였으며, 정권을 바꿔 치울 때에는 대대적으로 주살(誅殺)을 행하였으니, 국운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인심이 어떻게 동요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러 신하에 대하여 은혜와 원수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하면 나라의 위망(危亡)이 장차 그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내언(內言)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고 외언(外言)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와 정도(正道)를 거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소인들이 사악한 농간을 부리는 매개가 되는 것이니, 임금이 그 술책에 한번 빠지게 되면 그들의 술책대로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러한 은밀한 샛길을 호되게 막으소서.”

하였다.

성균관 사성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다가 또다시 집의에 제수되었고 다시 응교에 제수되었다. 겨울에 조정에 돌아오자 곧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왕명에 사은하는 날 임금이 초모(貂帽)를 내리고 탑전(榻前)에서 써 보도록 명하였다.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 요역(繇役)을 줄이고 민폐(民弊)를 혁파하니 고을이 크게 다스려졌으나, 관찰사와 일의 가부(可否)를 다투다가 마침내 수령의 인()을 던지고 돌아왔다.

을해년(1695)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병자년(1696)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공은 누차 부제학, 대사성, 이조 참의의 물망에 올랐는데, 급기야 외직으로 나가게 되자 모두들 공이 나가는 것을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공은 관직에 나아가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를 쉽게 여기는 지조만은 시종 한결같이 지키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고을이 한가하고 바다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기도 해서, 한 고을을 힘껏 잘 다스려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큰 흉년을 만나 백성들이 유랑하여 고을이 거의 다 비게 되었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녹봉을 털어 진휼하였고, 아울러 삼(), , 생선, 미역 등을 세금으로 걷던 것을 모두 다 없애주고는 스스로 살길을 찾게 하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흉년 구제에 대한 편의를 요청하자 임금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정승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그 당시 암행어사가 되어 수계(繡啓)에서 공의 업적을 칭찬하였고, 해직하고 돌아온 뒤에는 그 고을 사민(士民)들이 공을 추모하여 동비(銅碑)를 만들어 그 덕을 칭송하였다.

무인년(1698) 겨울에 모친상을 만나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묘소를 살피며 호곡(號哭)하였는데, 아무리 모진 바람과 심한 비가 내려도 이를 폐하지 않았다. 2년 뒤인 경진년(1700) 7 17, 마침내 그 슬픔으로 수척해진 끝에 졸하니 향년 57세였다. 수의(襚衣)가 만들어지는 대로 염()을 마치고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여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는 정부인(貞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공이 낳은 아들과 손자들은 지갈(誌碣 묘지와 묘갈)에 실려 있으므로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사대부 간의 명론(名論)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서 나라의 불행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어질다고 여기는 분이 서로 같지 아니하여 이에 따라 호오(好惡)가 편파적으로 이루어지고 심지어 평피의 기회平陂之會에 이르러 번갈아 국시(國是)를 정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천정(天定)이면 세운(世運)이 융성하고 평화롭게 될 것이요,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 인승(人勝)이면 명의(名義 명분과 도의)가 어긋나고 어지러워질 것이니, 이는 호오가 공정하냐 아니냐에 달렸을 뿐이다.

나은(懶隱) 이공(李公)을 삼가 살펴본 적이 있는데, 공은 국시가 무너지던 날에 초연히 우뚝 서서 권세에도 굽히지 아니하고 화()를 당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윤리를 힘껏 지켜 나갔으니, 스스로 충정(忠正)을 견지하고 평소 의리에 밝아서 공정한 천정(天定)을 확실하게 자득한 자가 아니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이 옳다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아마도 공에게 가까운 말이 될 것이다.

영남(嶺南)이란 곳은 본래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에 해당되는 지역으로서 그 호오에 있어 공과 차이가 있는 사람이 거의 드무니, 이 또한 나은(懶隱)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기사년 이후로 한결같이 명의(名義)로 인해 질책을 받았으니, 이는 국시를 통일시키고 호오를 함께하려는 조정의 본뜻에서 나온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기에 선조(先朝 영조(英祖))께서 관직을 추증하는 은전을 내리고 금상(今上)께서 시호(諡號)의 은전을 내린 것이 어찌 다만 공의 이름과 덕이 온 나라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다는 이유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공이 모범을 보인 것이 저렇듯이 우뚝하니, 이 때문에 권장하고 격려하는 임금의 뜻도 전후에 한결같았던 것이다. 그러하니 조정에서 벼슬을 같이한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임금의 뜻을 우러러 본받아 이 일에 함께 힘쓰지 않겠는가.

삼가 공이 조정에서 벼슬을 한 경위를 수집하여 집사(執事)에게 고하노라.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사신(詞臣) : 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면서 각종의 글을 기초하는 문학시종(文學侍從)의 신하를 말한다. 시장(諡狀)은 봉상시와 홍문관에서 작성하므로, 여기서는 홍문관 관원을 가리킨다.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8에 수록된 시장(諡狀)은 연암이 지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 글인데 지은이가 서유린(徐有隣)으로 되어 있다. 서유린은 연암의 절친한 벗으로, 시장을 찬진할 당시 이조 판서로서 홍문관 제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등을 겸하고 있었다.

[D-001]영남 …… 사람 : 안동(安東) 유생 권이도(權履度) 등을 가리킨다. 正祖實錄 8 11 5

[D-002]공도보(孔道輔) : 공자의 45대손으로, 송 나라 인종(仁宗) 때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자 범중엄(范仲淹) 등과 함께 곽 황후(郭皇后)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사후인 인종 황우(皇祐) 3(1051)에 공부시랑(工部侍郞)에 특별히 증직(贈職)되었다고 하나,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宋史 卷297 孔道輔傳

[D-003]추호(鄒浩) : 송 나라 철종(哲宗) 때 우정언(右正言)에 발탁되자 맹후(孟后)의 폐위를 반대했으며 그 일로 인해 두 번이나 귀양을 갔다가 복직되었다. 사후인 고종(高宗) 즉위 초에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증직되고 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宋史 卷345 鄒浩傳

[D-004]민정중(閔鼎重) : 1628~1692.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송시열의 문인이자 서인의 지도자로서 좌의정까지 지냈으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 가서 죽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은 그의 동생이다.

[D-005]옥산(玉山) …… 참담하다 : 옥산은 장희빈의 본관인 인동(仁同)의 별칭으로 그 선조의 무덤이 이곳에 있으며, 여양은 인현왕후의 본관인 여흥(驪興)의 별칭으로 그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 말은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후가 된 상황을 개탄한 것이다.

[D-006]이세화(李世華) : 1630~1701. 경상 감사를 지낸 뒤 향리에 있다가,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는 상소에 참여하여 숙종의 친국(親鞫)을 받은 후 유배가던 중 풀려났다.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서용되어 판서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D-007]이상진(李尙眞) : 1614~1690. 우의정까지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비에 반대하여 간언(諫言)하다가 종성(鍾城) 등지로 귀양을 갔다. 그 뒤 용서되어 향리에서 은둔하던 중 죽었다.

[D-008]조사기(趙嗣基) …… 범하여 : 궁위(宮闈)는 현종(顯宗)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호군(護軍)으로 있던 조사기가 상소를 올려 명성왕후의 지문(誌文)을 지은 송시열을 비판하면서 명성왕후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숙종실록(肅宗實錄) 15 3 27일 조에 조사기의 상소가 실려 있다. 조사기는 이 상소로 인해 숙종 20년에 참형을 당하였다.

[D-009]이 상소 : 숙종실록(肅宗實錄) 15 5 27일 조에 이 상소가 실려 있다.

[D-010]나라를 …… 의리 : 원문은 循國之義로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殉國之義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11]이담명(李聃命) : 1646~1701. 남인(南人)으로 허목(許穆)의 문인이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홍주 목사에서 파직되었으나, 숙종 9(1683) 복관되어 감사, 참판 등을 지냈다.

[D-012]원문 빠짐 : 이동표의 문집인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부록 권8에 실린 홍중효(洪重孝) () 묘지명에는 겸지제교(兼知製敎)’ 4자가 들어 있다.

[D-013]춘추(春秋) …… 숨긴다 :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온다.

[D-014]과거 …… 명하자 : 유가(遊街)라 하여, 과거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행진하고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 친지들을 방문하던 풍속이 있었다.

[D-015]광대의 …… 바이니 : () 나라 정공(定公)이 제() 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때 당시 재상(宰相)의 일을 섭행(攝行)하던 공자는 제 나라가 노 나라 정공 앞에서 광대와 난쟁이를 시켜 잡희를 벌이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금을 웃긴 죄를 물어 처형하도록 하였다. 春秋穀梁傳 定公10》 《史記 卷47 孔子世家》 《孔子家語 卷1 相魯

[D-016]정색(正色) …… 도리 : 서경(書經) 필명(畢命)에서 강왕(康王)은 필공(畢公)에게 훈계하면서 정색으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하라.正色率下고 하였다. , 안색(顔色)을 엄하게 가짐으로써 아랫사람들이 경외(敬畏)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D-017]전형(銓衡)을 맡은 자 : 당시 이조 판서 오시복(吳始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8 行狀

[D-018]기사년의 대론(大論) : 숙종 15(1689)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정하는 것을 반대한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가리킨다. 이로 인해 남인(南人)들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다.

[D-019]민장도(閔章道) : 1655~1694. 남인의 영수인 우의정 민암(閔黯 : 1636~1694)의 아들로, 인현왕후의 복위를 추진하던 서인들을 체포하여 일대 옥사를 일으키려다가, 도리어 갑술환국을 당해 민장도는 국문 도중 장살(杖殺)되고, 민암은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D-020]심지어 …… 하니 : 이세택(李世澤)이 쓴 행장에 의하면, 이조 판서 오시복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넌지시 귀띔하기를 만약 민장도의 추천을 허락한다면, 나도 역시 영남 사람을 통용(通用)하겠다고 했다 한다. 懶隱先生文集 卷8

[D-021]천리(天理) ……  : 호굉(胡宏) 지언(知言)에서 천리와 인욕이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며同體異用,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고 주장하였다. 주자(朱子)는 이러한 호굉의 주장 중에서 체는 같으나 용이 다르다同體異用는 설은 비판하고 물리쳤으나, ‘행은 같으나 정이 다르다同行異情는 설은 긍정하여 받아들였다. 즉 시청언동(視聽言動)이나 식색(食色)과 같은 행동은 성인도 범인과 마찬가지이지만, 성인은 그것이 예()와 합치되게 함으로써 천리(天理)를 따른다는 점에서 정()이 다르다고 보았다. 朱子語類 卷101 程子門人 胡康侯

[D-022]문인(門人)에게 …… 정미(精微)하였다 : 그의 문인 김이갑(金爾甲 : 자는 원중元中)에게 준 편지 답김원중문목(答金元中問目)의 내용을 가리킨다. 懶隱先生文集 卷4

[D-023]장희재(張希載) …… 있으면서 :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종 18(1692) 총융청(摠戎廳)의 우두머리인 총융사(摠戎使)가 되었다.

[D-024]사대부의 …… 관계된다 : 주자는 사대부의 사수출처(辭受出處)는 비단 그 자신만의 일이 아니다. 그 처신의 득실은 바로 풍속의 성쇠에 관계가 된다. 그러므로 특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性理大全書 卷50 8 力行

[D-025]예로써 …… 도리 : 논어(論語) 팔일(八佾)에서 공자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한다.君使臣以禮고 하였다. 신하를 대할 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D-026]내언(內言) …… 들어와 : 내언은 여자가 규방에서 하는 말을 가리키고, 외언(外言)은 남자가 공무에 관해 하는 말을 가리킨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 외언이 문지방 안으로 들어오지 말아야 하며, 내언이 문지방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外言不入於梱 內言不出於梱고 하였다.

[D-027]정호(鄭澔) : 1648~1736.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송시열의 문인이다. 기사환국 때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풀려나 판서까지 지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하여 파란을 많이 겪었다. 신임사화로 파직되고 유배되었으나, 영조 즉위 후 영의정까지 지냈다.

[D-028]그 당시 …… 칭찬하였고 : 원문은 褒公績이라고만 되어 있으나, 나은선생문집(懶隱先生文集) 중의 시장에는 啓褒公績으로 되어 있으며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29]평피의 기회平陂之會 : 시운에 따라 세력이 크게 변하는 기회를 이른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다. 여기서는 숙종 때의 환국(換局)을 가리킨다.

[D-030]옳다고 …… 것이니 : 천정(天定)은 천명으로 정해진 것을 뜻하고, 인승(人勝)은 다수 대중의 힘으로 천명을 어기는 것을 뜻한다. 사기 6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서 신포서(申包胥) 사람이 많으면 하늘을 이기지만, 천명도 정해지면 사람들을 능히 격파한다.人衆者勝天 天定亦能破人는 말을 인용하여, 초 나라 평왕(平王)의 시신을 매질하여 복수한 벗 오자서의 난폭한 행동을 나무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록 한때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명을 어길 수 있을지라도, 천명 역시 화를 내려 난폭한 자들을 징계한다는 뜻이다.

[D-031]홀로 …… 않는다 : 주역 대과괘(大過卦)의 단사(彖辭) 군자는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답답해하지 않는다.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고 하였다.

[D-032]추로(鄒魯) : 맹자(孟子)와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곧 유교의 발상지를 뜻한다.

[D-033]공이 …… 고하노라 : 정조 8(1784) 11월 이동표에게 시호를 내리라는 어명이 내렸으며, 12(1788) 4월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府君) 묘표음기(墓表陰記) 금성위(錦城尉 : 박명원朴明源)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여기 파주(坡州) 읍치(邑治) 서쪽 백석리(白石里) 갑좌(甲坐 정동쪽에서 북으로 15도 방향)의 언덕에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박공지묘(禮曹參判贈領議政朴公之墓)’라는 묘표(墓表)가 있는데, 바로 우리 선고(先考)의 의리(衣履)가 매장된 곳이다. 부군(府君)의 휘()는 사정(師正)인데 초휘(初諱)는 사성(師聖)이요, ()는 시숙(時叔)이다. 세상에서 반남 박씨(潘南朴氏)를 관면(冠冕 벼슬을 한 집안)의 대족(大族)으로 높이 받드는 것은 그 선세에 문정공(文正公) 휘 상충(尙衷)과 문강공(文康公) 휘 소()가 있어 곧은 도()와 바른 학문으로 명덕(名德)이 서로 계승된 때문이었다. 증조는 첨정(僉正)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는 군수(郡守)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으며, ()는 참봉(參奉)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다. 고조(高祖)인 문정공(文貞公) 휘 미() 때부터 적손(嫡孫)으로서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의 훈봉(勳封)을 승습(承襲)하였다. ()는 윤씨(尹氏)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으며 관찰사 반()의 따님이다.

숙종(肅宗) 9년인 계해년(1683)에 부군을 낳았는데, 셋째 아들이었다. 정유년에 문과(文科)에 발탁되어 예문관 검열에 천거되었다가 대교로 승진하였다. 부모의 상을 거듭 당한 뒤 상복을 벗고서 다시 봉교에 부직(付職)되었다.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서는 실직(實職)과 겸직(兼職)으로 설서에서 보덕까지 이르렀으며, 양사(兩司 사간원과 사헌부)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집의, 대사간을 역임하였고, 옥서(玉署 홍문관)에서는 부수찬에서 응교까지 이르렀다. 전랑(銓郞 이조 좌랑)에 천배(薦拜 추천 임명)되었고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사복시 정(司僕寺正), 종부시 정(宗簿寺正)을 역임하였으며, 은대(銀臺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로부터 도승지에 이르렀다. 육조에서는 이조 · 호조 · 병조의 참의를 지내고, 호조 · 예조 · 공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경조(京兆 한성부)에서는 좌윤과 우윤을 지냈다. 외임(外任)으로는 안변 부사(安邊府使), 강화 유수(江華留守)를 제수받았고, 별직(別職)으로는 지제교(知製敎), 겸교서교리(兼校書校理), 별겸춘추(別兼春秋), 동학 교수(東學敎授), 전라도 암행어사, 실록청 낭청(實錄廳郞廳), 천릉도감 도청(遷陵都監都廳),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오위도총부 총관(五衛都摠府摠管), 태상(太常 봉상시) · 괴원(槐院 승문원) · 주사(籌司 비변사)의 제거(提擧)에 제수되었으며, 자급(資級)은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영종(英宗 영조) 기미년(1739) 10 26일에 돌아가시니 수() 57세였다. 임금이 몹시 애도하여 윤음(綸音)을 내리고 특별히 관재(棺材)를 내렸다.

예전에 한원(翰院 예문관)에서 당시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사국(史局 춘추관)으로 들여보낼 때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에 의해 밀려났다. 급기야 뭇 흉적들이 권력을 쥐고서 장차 사필(史筆)을 독점하기 위해 먼저 부군을 회인 현감(懷仁縣監)으로 내쫓아 부군이 천거되는 것을 아예 막아 버렸다. 얼마 안 있어 무옥(誣獄 신임사화(辛壬士禍))이 일어났는데 우리 백부(伯父) 장효공(章孝公 박사익(朴師益))이 위맹(僞盟)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다는 이유로 마침내 귀양을 가게 되자 부군은 시골집으로 물러 나와 버렸다.

영종이 새로 즉위하여 구신(舊臣)들을 불러들이게 되자, 부군은 마침내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김일경(金一鏡)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고, 또 시정(時政)에 대하여 극력 진언하였으며, 신치운(申致雲) 등이 박필몽(朴弼夢)에게 빌붙어 사국(史局)의 관직을 마구 차지한 것을 공박하였으며, 양사(兩司)와 합동으로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를 비롯한 역적들을 토죄(討罪)하고 사대신(四大臣)을 한 사당에 함께 제향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차자(箚子)를 올려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윤지완(尹趾完)을 묘정(廟庭)에서 출향(黜享)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조 좌랑으로 있을 때 판서가 공격(公格 공직의 격식)을 어긴 것을 비판한 것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러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전출되었다가 얼마 뒤 돌아왔다. 누차 제수(除授)가 있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특별히 남해 현령(南海縣令)에 보직되었다. 당시에 조정이 누차 평피(平陂)를 겪어 사람들이 일정한 지향이 없었으며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은 국시(國是)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였고, 선악(善惡)을 뒤섞고 반드시 양편을 짝 지워 천거하는 것으로써 조정(調停)을 삼았으므로 사대부들이 오랫동안 답답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아침에 머리를 숙이면 저녁에 벌써 조정의 윗자리에 오르게 되곤 하였는데 부군만은 홀로 본마음을 그대로 지켰다. 일찍이 충신과 소인이 함께 등용되는 것을 개탄하고 수치로 여겨서 임금의 부름에 기어이 응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하옥되어 아침에 용서받았다가 저녁에 갇히기도 하고 해를 넘기도록 갇혀 지내기도 하였다.

삼전(三銓 이조 참의)을 맡은 뒤로 공정한 판단을 견지하여 관리의 선별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당시의 규례와 완전히 다르게 하니 당로자(當路者)들이 미워하여 기어이 중상하려고 하였다.

불초(不肖 박명원(朴明源) 자신을 가리킴)가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를 들고 부군이 이조 참의로 오래 지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규례대로 강화 유수(江華留守)에 승진되는 것으로 추천되었다. 그러자 당인(黨人)들이 묘당(廟堂)의 의론을 먼저 부탁했다는 이유를 들어 조정을 협박했으나 다행히 임금께서 그들의 간사함을 환히 아셨으며, 이에 부군은 벼슬길이 갈수록 험악함을 깊이 깨닫고는 스스로 조용히 물러나 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광좌(李光佐)가 영의정이 되자 비변사의 관직을 극력 사임하였으니, 국민들이 역적이 날뛰도록 내버려 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였다.

부군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단정하였으며 용모가 아름다웠다. 몸을 조심하고 명성을 단속하여 내심과 외모가 모두 정숙하였으며, 도의(道義)를 숭상하고 유능하다고 명성이 나는 것을 억눌렀다. 또한 온화하면서도 씩씩하여 화복(禍福) 때문에 거취(去就)에 얽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계부(季父) 문경공(文敬公 박필주(朴弼周))이 당세의 유종(儒宗 유학의 대가)이 되었고, 장효공(章孝公)은 원우완인(元祐完人)이라 일컬어졌으므로, 부군이 사우(師友)와 부형(父兄)의 사이에서 나눈 명론(名論)이 집 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남들과 어울리고 쫓아다니며 열성적으로 영합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아무리 익숙한 친구일지라도 항상 처음 대면한 듯이 하여 생각 없이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다.

상하간에 논의를 하거나 일에 응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철두철미하고 화기애애하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성이 간절하여, 남들로 하여금 즐겁게 만들고 비루한 마음이 움트는 것을 저절로 녹여 버렸다. 무인(武人)이나 역관(譯官)들은 문에 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방 안에 조용히 앉아 일체 세속에서 연모하는 즐거움 따위는 마음속에 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찍이 세도(世道)를 대신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증 참판 택상(宅相)의 따님이요, 구원(九畹) 이춘영(李春英)의 후손이다. 16세에 부군에게 시집왔는데, 서사(書史 경사류(經史類)의 책)에 밝으며 말이 적고 행동이 신중하였으며, 동서들과 잘 지내 규문(閨門)의 미덕이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한 집)의 모범이 되었다. 왕가(王家)와 혼인을 맺은 후로는 더욱 조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으며, 부군보다 19년 뒤에 돌아가셨다.

4 2녀를 길렀는데, 아들은 진사 흥원(興源), 정언 창원(昌源), 형원(亨源), 불초(不肖) 명원(明源)이며, 사위는 김기조(金基祚)와 이도양(李度陽)이다.

장남은 아들이 셋인데, 종덕(宗德)은 판서요, 종악(宗岳)은 참의(參議)로 셋째 아들 형원의 집으로 출후(出后)하고, 상철(相喆)은 부윤(府尹)인데 명원의 후사가 되었다. 종덕(宗德)의 아들로는 정자(正字)에 추증된 수수(綏壽), 진사 홍수(紭壽), 경수(絅壽)이며, 종악(宗岳)의 아들로는 아무개와 아무개가 있다. 김기조는 계자(繼子) 택현(宅鉉)을 두었는데 주부(主簿)이고, 이도양은 1남 갑()을 두었는데 판서이다.

, 부군의 산소를 누차 옮기는 바람에 비석을 갖출 겨를이 없었고, 지금 아들과 손자로서는 다만 불초와 종악이 남아 있을 뿐이다. 더구나 돌아가신 이의 덕행을 징험해 줄 만한 사람으로서 아득한 50년 사이에 누가 생존하여 이를 근심할 것인가.

아침 이슬 같은 인생, 나 역시 곧 죽을 것이 두려워서 세벌(世閥)과 관력(官歷)과 자손(子孫)을 위와 같이 대략 기록해 둔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묘표음기(墓表陰記) : 묘표의 뒤에 새긴 글을 말한다. 박사정(朴師正)의 묘갈명(墓碣銘) 연암집 3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 묘갈명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D-001]의리(衣履) : 무덤에 함께 묻는 옷과 신발인데, 시신의 대유(代喩)로 쓰였다.

[D-002]동량(東亮)의 훈봉(勳封) : 박동량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한 공으로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을 받고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진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03]겸교서교리(兼校書校理) : 교서관(校書館)의 종 5 품 관직으로 겸교리라고도 한다. 홍문관 교리와 구별하기 위해 여기서는 겸교서교리라고 하였다.

[D-004]이진유(李眞儒) : 1669~1730. 소론으로서 경종 1(1721) 김일경(金一鏡) 등과 함께 노론의 사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이들을 축출하였다. 경종이 죽자 이조 참판이 되어 고부사(告訃使)로 청 나라에 다녀왔으며, 영조 즉위 후 유배 갔다가 불려 와 문초 중 장살되었다.

[D-005]위맹(僞盟) …… 되자 : 박사정은 경종 시해 음모를 고변(告變)한 목호룡(睦虎龍) 등 부사 공신(扶社功臣)의 회맹(會盟)에 불참하였다고 탄핵되어 경종 3(1723) 4월 유배되었다.

[D-006]신치운(申致雲) : 1700~1755. 경종 때 소론의 신예(新銳)로서 노론의 거두였던 권상하(權尙夏) 등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영조 31(1755)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D-007]박필몽(朴弼夢) : 1668~1728. 소론 강경파로서 김일경 · 이진유 등과 함께 노론 사대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영조 즉위 초 무신란(戊申亂)이 나자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가담하려 했으나 여의치 못해 은둔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D-008]사대신(四大臣) :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金昌集),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D-009]이조 좌랑으로 …… 전출되었다가 : 영조실록 4 6 20일 조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D-010]평피(平陂) : 주역 태괘(泰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편평하기만 하고 치우치지 않은 경우는 없고 가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는 법은 없다.无平不陂 无往不復고 하였고,  서경(書經) 홍범(洪範) 치우치지 말고 왕의 의로움을 따르라.無偏無陂 遵王之義”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하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고 하였다.

[D-011]당로자(當路者)들이 …… 하였다 :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이조 참의 박사정이 이흡을 대사간으로 의망한 것은 법을 굽혀 사정(私情)을 따른 조치라고 비난하였다. 英祖實錄 12 3 24

[D-012]묘당(廟堂) …… 들어 : 수찬 홍중일(洪重一)이 상소를 올려, 박사정이 아들 박명원이 부마가 되도록 의정부의 추천을 먼저 부탁하고廟薦先屬 순서를 뛰어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고 비난하였다. 英祖實錄 14 6 6

[D-013]유능하다고 …… 억눌렀다 : 원문은 絀抑聲能인데, ‘성능(聲能)’ 능성(能聲)’,  유능하다는 명성과 같은 뜻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D-014]원우완인(元祐完人) : 송 나라 때 철종 원우 연간(1086~1093)에 활동한 유안세(劉安世 : 1048~1125)를 가리킨다. 유안세는 사마광(司馬光)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철종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다가 장돈(章惇)에 의해 밀려난 인물이다. 그 후 30년 동안 전전하다, 휘종(徽宗) 선화(宣和) 연간에 환관 양사성(梁師成)이 권력을 잡아 그에게 자식을 위해서라도 관직에 나오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는 내가 자식을 위했더라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밀려난 지 거의 30년이 되도록 일찍이 권력을 가진 자에게 편지 한 자 주고받은 적이 없다. 나는 원우의 완인으로 그대로 남고 싶으니 그 마음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편지를 되돌려 보냈다. 사마광을 추종하고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는 당파를 원우당인(元祐黨人)이라 하며, 완인(完人)이란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란 뜻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12 여기서는 박사익이 노론의 당론에 충실한 것을 칭송한 말이다.

[D-015]남들과 …… 않아 : 원문은 不喜徵逐爲翕翕熱인데, 한유(韓愈) 당 고 조산대부 상서고부랑중 정군 묘지명(唐故朝散大夫尙書庫部郞中鄭君墓誌銘)’ 중에 不爲翕翕熱이라 한 대목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한유의 문집 중에는 翕翕熱 翕翕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異本)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문효세자(文孝世子) 진향문(進香文) 의빈(儀賓)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하늘이 우리 동방 돌보시사 / 天眷東方

광명하고 창성하니 / 景明靈昌

성신(聖神)으로 기르시고 / 聖造神育

인덕(仁德)으로 살찌우시네 / 德膴仁肪

백성 소망 살피시어 / 乃省群顒

탄생을 늦추지 않아 / 其降不遲

한 번 구해 진괘(震卦) 되고 / 一索成震

두 번 밝아 이괘(離卦) 되었네 / 兩明作离

영조의 증손이요 / 英宗曾孫

지금 임금의 세자시니 / 今王世子

나라 점()이 길조여서 / 國占用吉

선조를 계승하리라 하네 / 厥曰攸似

붉디붉은 궁중 대추 / 赫赫宮棗

백년 만에 다시 열리니 / 百年再實

숙조와 부합하는 영험을 / 肅祖靈符

오늘 다시 보게 되네 / 復覩今日

탄생하던 그날 저녁 / 誕彌之夕

붉은빛이 궁에 가득 / 紅光滿宮

추성(樞星)에 번개 두른 듯 / 如樞繞電

화저(華渚)에 무지개 지듯 / 如渚流虹

이 모든 징조들이 / 凡厥庶徵

처음부터 다 후하여 / 罔不篤初

봉의 바탕에 용의 무늬 / 鳳質龍章

실로 하늘이 예비하셨네 / 實天所儲

어질고 온화함은 / 仁孝溫文

본성에서 나왔으니 / 惟性之根

임금님이 오시면은 / 天顔載臨

기뻐하며 옹알대다 / 婉愉言言

임금님이 가시면은 / 玉趾言旋

돌아보며 앙앙 우네 / 顧懷喤喤

병풍 위의 글자 분별 / 屛間辨字

걸음마도 하기 전이요 / 時未扶床

쓴 약 권해 올릴 때도 / 誘進苦劑

반드시 책을 먼저 잡으셨네 / 必先方冊

한밤중에 화재 경고하시니 / 深宵警火

하늘이 준 예지로세 / 慧智天錫

코 골던 놈 곧 깨어나 / 彼鼾方覺

연소(延燒) 아니 되었다오 / 遂不延逮

청구를 처음 열 제 / 靑邱肇闢

요 임금의 첫해와 같았으니 / 叶堯初載

조정에서 세자 책봉 받으실 제 / 受冊大庭

해 빛나고 구름 상서로워라 / 日麗雲卿

쌍상투에 칠장복(七章服) / 雙髻七章

차비 갖춰 맞을 적에 / 備事將迎

백관의 모자 우뚝우뚝 / 會弁嵬峨

일만 눈이 다투어 보며 / 萬眸爭瞻

목을 빼고 발끝 드니 / 延頸跂踵

수염이 길게 드리웠네 / 若若其髥

의젓하게 앉았으니 / 穆然端坐

늘 본 것같이 여기되 / 若常覿之

기대거나 한눈팔지 않고 / 不凭不惰

두려워하거나 의심 않으니 / 不攝不疑

저절로 생긴 위엄 / 不威而嚴

하마 그 위()에 나타났네 / 已見其位

어릴망정 대인(大人)이요 / 雖幼大人

군자의 덕 갖추셨네 / 維德不器

이날 여러 재상들이 / 是日群卿

뛸 듯이 기뻐하며 절하고 / 忭躍俯跪

사랑으로 안고 싶었으나 / 愛若進抱

두려워서 물러나 기다렸지 / 畏將退俟

이듬해 중구일(重九日) / 翌歲重九

효경 수업 시작하니 / 肇講孝經

우리 왕가 빛난 전통 / 我家徽躅

나이와 때 꼭 맞았네 / 年辰適丁

반교(泮橋 성균관 다리)에 둘러서서 귀 기울이면 / 環橋聳聽

글 읽는 소리 경종(磬鐘)을 울리는 듯 / 若出磬鍾

천년의 밝은 운수 / 千載熙運

거듭 만나 아름다워라 / 於休重逢

사백 년의 긴긴 세월 / 厥禩四百

쌓고 쌓인 경사에다 / 積慶累洽

하늘 보답 또렷하여 / 天有顯報

큰 덕으로 왕위를 얻으리라 / 大德必得

장구한 국가 사업 / 靈長之業

영원하길 비옵고 / 永祈千秋

우리 임금 근심 없어 / 吾王無憂

병만을 근심했네 / 惟疾是憂

복이 내려 이튿날 나았으니 / 慶臻翌瘳

하늘 이치 어긋나리요 / 謂理無舛

성한 의식 거행키로 / 縟儀將擧

좋은 날을 가렸는데 / 吉日載選

하룻밤 새 이게 웬일 / 云胡一夕

온 장안 놀라 뒤숭숭 / 滿城駭遑

남종 여종에다 / 丫靑隸皂

늙은이와 어린애들까지 / 叟白童黃

허둥지둥 헐떡이며 / 顚仆喘汗

가슴 헤치고 하늘에 호소 / 袒胸龥旻

세자를 부르짖으며 / 長號貳極

모두 대신 백번이라도 죽으려 하네 / 擧懷百身

제사도 지내 봤고 / 珪璧旣卒

의술도 소용없어 / 刀圭亦窮

팔도는 슬픔으로 뒤덮이고 / 哀普八域

삼궁은 비통에 잠겼네 / 痛纏三宮

종묘 제사 어디 의탁하며 / 宗器靡托

신과 사람은 뉘를 의지하리 / 神人疇依

중륜의 칭송 스러지고 / 重輪撒謠

전성의 빛 가리우니 / 前星掩輝

상자 속 사계삼(四䙆衫)은 겨우 한 자요 / 篋䙆纔尺

소반 위 활은 겨우 석 자로세 / 盤弧厪三

슬프다 이 온 나라에 / 嗟爾匝域

수많은 어린아이들 / 有萬女男

홍역 한창 치성하여 / 疹之方熾

마을 곳곳 불 지필 때 / 衖鬨爐烘

왕께선 자식인 양 여기시고 / 王無弗子

내 몸처럼 아파하여 / 若恫在躬

영약을 집집이 돌리고 / 靈丹戶遍

의원을 보내 다 같이 치료받게 하여 / 臣跗汝偕

귀신에게서 빼앗아 내어 / 奪之鬼牙

어미 품에 돌려주니 / 還厥母懷

이 누구의 덕이더뇨 / 繄誰之賜

검은 머리 백성들아 / 群黎百姓

너희가 하루라도 안정되면 / 集汝一日

바로 네 경사로다 / 尙作汝慶

복령(茯苓) 백출(白朮) 모아다가 / 阜厥苓朮

산처럼 쌓았건만 / 猶成陵岡

하늘 실로 못 믿겠고 / 天固難諶

사람 또한 어질지 못하네 / 人亦不臧

저 의원놈 잡아다가 / 願執彼醫

승냥이나 범에게 던져 주었으면 / 投畀豺虎

아 슬퍼한들 어쩌리요 / 何嗟及矣

이내 마음 씀바귀 맛 / 我心荼苦

어린 세자 지극한 효성 / 沖齡至性

저승에 간들 다름없으리 / 無閒幽明

 원문 빠짐  / □□□□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문효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첫아들이다. 정조 6(1782) 의빈(宜嬪) 성씨(成氏)의 소생으로 태어나 정조 8년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정조 10(1786) 5월 병사(病死)하였다. 효창원(孝昌園)은 그의 묘소이다.

[C-002]의빈(儀賓) : 임금의 사위. 여기서는 금성위 박명원을 가리킨다. 당시 경희궁(慶熙宮)에 안치한 빈궁(殯宮)에 박명원이 종척(宗戚)으로서 참석하여 향을 올렸다.

[D-001]백성 소망 살피시어 : 군옹(群顒)은 군생(群生)이 앙모(仰慕)함을 뜻한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훈(俶眞訓) 이런 까닭에 성인은 음양의 기를 호흡하니 군생이 모두 앙모하여 그 덕을 우러러 유순하게 따른다.是故聖人呼吸陰陽之氣 而群生莫不顒顒然 仰其德以和順고 하였다. 옹옹연(顒顒然)은 앙망하는 모양을 뜻한다.

[D-002]한 번 …… 되고 : 주역 정전(程傳)에 의하면 진괘(震卦)는 나라를 계승하는 왕의 장남(長男)을 상징한다. 양효(陽爻)가 두 음효(陰爻)의 아래에 있어 하늘과 땅의 교접을 한 번 구하여 진()이 되니, 생물의 장()이므로 장남이 된다.乾坤之交 一索而成震 生物之長也 故爲長男고 하였다. 여기서는 장남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D-003]두 번 …… 되었네 : 3개의 효()로 된 소성괘(小成卦) ()는 밝음을 상징하는데, 이것이 중복된 것이 대성괘(大成卦) ()이다. 이괘는 왕이 선왕(先王)의 명덕(明德)을 계승하여 선정을 베풀 조짐을 상징한다. 주역 이괘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밝음이 중복되어 이()를 일으키니 대인(大人)이 이로써 밝음을 계승하여 천하를 밝게 비춘다.明兩作離 大人以繼明 照于四方고 하였다. 여기서는 왕위를 능히 세습할 만한 인물이 태어났다는 뜻이다.

[D-004]선조를 계승하리라 하네 : 점사(占辭)의 내용을 가리킨다. ()는 사속(嗣續)의 뜻으로, 선조의 유업(遺業)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사간(斯干) 선조를 계승하여 담장이 백도나 되는 집을 지었네.似續妣祖 築室百堵라는 구절이 있다.

[D-005]숙조(肅祖) …… 되네 : 숙조는 공경하는 선조란 뜻으로, 여기서는 숙종(肅宗)을 가리킨다. 정조 10 6월 판돈녕부사 김종수(金鍾秀)가 지어 올린 문효세자지문(文孝世子誌文)에 의하면, 경희궁(慶熙宮)에 있던 큰 대추나무가 한동안 시들었다가 현종(顯宗) 2(1661)에 갑자기 꽃을 피우더니 그해 가을에 숙종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 후 대추나무가 다시 시들었다가 문효세자가 태어날 때에도 꽃을 피우는 이적(異蹟)을 나타냈으며, 정조는 대추가 익자 측근의 신하들에게 이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06]추성(樞星) : 북두칠성의 첫째 별을 말한다. 황제(黃帝)는 그의 어머니가 번갯불이 추성을 에워싸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잉태하게 되었다고 한다.

[D-007]화저(華渚)에 무지개 지듯 : 황제(黃帝)의 아들 백제(白帝) 소호씨(少昊氏)는 그의 어머니가 큰 별이 무지개처럼 화저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낳았다고 한다. 宋史 卷23 符瑞志 그러므로 왕의 탄생을 유저(流渚)나 유홍(流虹)이라 한다.

[D-008]실로 하늘이 예비하셨네 : ()는 예비로 저축한다는 뜻으로, 세자를 저군(儲君)이라 하고, 세자를 세우는 것을 건저(建儲)라고 한다.

[D-009]반드시 …… 잡으셨네 : 문효세자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책을 좋아할 줄 알아서 글자가 씌어진 병풍을 곁에 두게 했으며, 몸이 아파 울 적에도 장난감이 아니라 책을 가져다 손에 쥐어 주면 진정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천자문(千字文)이 닳아지고 손때가 탔을 정도라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10]청구(靑邱) …… 같았으니 : 삼국유사(三國遺事) 1 기이(紀異) 고조선(古朝鮮) 조에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고조선의 개국이 요 임금과 같은 때與高同時라고 하였다.

[D-011]칠장복(七章服) : 무늬가 장식된 대례(大禮) 제복(祭服), 즉 면복(冕服)을 장복(章服)이라 한다. 황제는 12종의 무늬를 장식한 12장복을 입고, 왕은 9장복을 입는다. 왕세자는 화충(華蟲) · () · 종이(宗彛) · () · 분미(粉米) · () · ()의 무늬를 장식한 7장복을 입는다.

[D-012]군자의 덕 갖추셨네 : 논어 위정(爲政)에서 공자는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고 하였다. 특정한 용도를 가진 그릇처럼 특정한 기능만을 갖춘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D-013]우리 …… 맞았네 : 문효세자는 네 살이 되던 정조 9(1785) 중양절(重陽節) 날부터 효경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날은 숙종이 처음 효경을 배웠던 연월일(年月日)로부터 꼭 재주갑(再周甲 : 120)이 되는 때였다고 한다. 夢梧集 卷7 文孝世子誌文

[D-014]천년의 …… 아름다워라 : 기자(箕子)가 건국한 이래 천년이 지나 다시 조선(朝鮮)이 중흥했다는 뜻이다.

[D-015]사백 년의 긴긴 세월 : 조선왕조 건국 이후 400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D-016] …… 얻으리라 : 중용장구  17 장에서 공자는 순() 임금의 위대한 효성을 칭찬하면서 그러므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는다.故大德必得其位고 하였다.

[D-017]우리 …… 근심했네 : 논어 위정(爲政)에서 맹무백(孟武伯)이 효()에 관해 묻자 공자는 부모가 오직 그의 병만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父母唯其疾之憂라고 답하였다. 병을 앓는 일 외의 일체의 다른 일로 부모를 근심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효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는 문효세자가 다른 일로는 정조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는데 다만 홍역을 앓아 정조가 걱정했다는 뜻이다.

[D-018]제사도 지내 봤고 :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규벽도 다 썼는데 왜 호소를 들어 주시지 않나.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규벽(圭璧) 규벽(珪璧)’과 같으며, 제사 지낼 때 예물로 바치는 옥()이다.

[D-019]삼궁(三宮) : 왕과 대비(大妃)와 왕비를 가리킨다.

[D-020]중륜(重輪) : 태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광채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에는 태자(太子)를 이에 비유하였다.

[D-021]전성(前星) : 심성(心星)의 세 별 중의 하나로서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27 오행지(五行志) 심성 가운데 큰 별은 천왕(天王), 앞의 별은 태자(太子), 뒤의 별은 서자(庶子)를 상징한다.” 하였다.

[D-022]사계삼(四䙆衫) : 동자(童子)의 평상복을 가리킨다. 居家雜服攷 卷3 幼服

[D-023]소반 …… 석 자로세 : 세자가 태어난 지 3일 뒤에 활 쏘는 사람이 뽕나무 활과 쑥대 화살로 천지와 사방에 여섯 번 쏜다. 세자가 장차 원대한 뜻을 품기를 기대하는 취지에서라고 한다. 禮記 內則

[D-024]의원을 …… 하여 : ‘신부(臣跗)’ ()’는 황제(黃帝) 때의 명의(名醫)인 유부(兪跗)를 가리킨다. 유부는 편작(扁鵲)과 함께 유편(兪扁)’이라 불렸으며, 명의의 치료술을 유편지술(兪扁之術)이라 하였다. 당시 정조는 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양반과 상민을 막론하고 자력으로 약물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의사(醫司)가 의원을 지정하여 진찰하고 약물도 공급하도록 했다. 正祖實錄 附錄 行狀

[D-025]원문 빠짐 : 이본에는 장지를 정하니 율목의 언덕이라.去隧載卜 栗木之原는 구절이 더 있다. 율목은 고양군(高陽郡) 율목동으로 현재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자리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정종대왕(正宗大王) 진향문(進香文)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천 년 지나 성인 한 분 / 千載一聖

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 誕膺東方

기자(箕子) 홍범(洪範)으로 다시 질서 세우고 / 箕範再敍

문운(文運) 거듭 창성했네 / 奎運重昌

공자(孔子) 생각 주공(周公) 마음 / 孔思周情

계승하고 본받아서 / 祖述憲章

크고 넓은 정책 펴니 / 宏規鴻猷

 · 당조차 옹색하다 여기셨네 / 狹陋漢唐

재위하신 스물네 해 동안 / 二紀光御

한결같이 건강의 덕을 지켜 / 一德乾剛

궁원 호칭 바로잡고 / 號正宮園

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 / 慕深羹牆

총악 같은 간신 잘라 버리고 / 璁萼折萌

헌기 같은 외척 없애 버리니 / 憲冀鋤强

밝게 내건 큰 의리가 / 大義昭揭

모든 왕에 우뚝하네 / 卓冠百王

교화하고 상벌 주기 / 秩敍命討

우로(雨露) 같고 상설(霜雪) 같아 / 雨露雪霜

누가 감히 현혹하며 / 孰敢疑眩

누가 감히 속이리 / 孰敢譸張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즈음에 / 向背之際

군자와 소인이 판명되나니 / 斯判陰陽

저 일만 삼천 선비들 / 彼萬三千

어찌하여 광풍처럼 날뛰는가 / 云胡颷狂

군중으로써 위협하여 / 要脅以衆

우리나라의 법도(法度) 거스르니 / 悖我典常

말세 풍속 길을 헤매며 / 末俗昏衢

자빠지고 쓰러지네 / 醉顚汗僵

어찌 악취가 다르랴만 / 豈不異臭

같은 속셈 이게 웬일 / 柰此同腸

화복과 이해 따라 / 利害禍福

허둥대는 꼬락서니 / 所以披猖

그 원인을 따져 보면 / 究厥所原

망녕된 생각이 주가 된 것 / 妄度爲將

거센 물결 넘실넘실 / 滔滔狂瀾

뉘라 능히 막을쏜가 / 誰能力鄣

의리는 대소를 막론하고 / 理無巨細

털끝만 한 차이로 나뉜다네 / 析在毫芒

이 의리를 준수하는 자 / 嚴此義者

상서롭고 길하거니와 / 迺吉迺祥

이 이치를 등진 자는 / 北是理者

올빼미 아니면 승냥이라 / 爲梟爲狼

옛 성왕(聖王)의 훌륭하신 예절 / 皇王盛節

이 대방을 뉘 지키리 / 孰此大防

황극(皇極)에 모이고 귀의하게 하여 / 會極歸極

도를 따라 모두 선량하게 하니 / 與道偕臧

어허, 이 지극한 덕 / 嗚呼至德

뉘라서 잊게 하리 / 俾也可忘

용도각(龍圖閣)을 세우고 / 龍圖建閣

천책부(天策府)를 만드니 / 天策設廂

진실로 문무 갖추어 / 允文允武

그 공 그 꾀 아름답네 / 謨烈思皇

백사(百事)가 절도에 맞아 올바르시니 / 百度惟貞

이에 비로소 대양하였네 / 昉此對揚

형벌을 신중히 하고 농업을 중시하여 / 欽刑重農

일념으로 백성을 보살피시니 / 一念如傷

형벌을 감해 주신 은혜 뼈에 사무치고 / 恩蠲浹髓

내린 윤음(綸音) 빛나고 빛나 / 寶綸煌煌

모진 추위 심한 더위에도 / 祈寒盛暑

종묘 제사라면 몸소 나서고 / 必躬烝嘗

상신 더욱 중히 하니 / 尤重上辛

밝은 덕이 향기롭네 / 明德馨香

친히 지은 백 권 문집 / 御製百卷

성스러운 방략 원대하여라 / 聖謨洋洋

정주 학문 으뜸 삼고 / 學宗程朱

복희(伏羲) 황제(黃帝) 법통 이어 / 統接羲黃

대지 같고 바다 같은 학문으로 / 地負海涵

동방에 유교를 전파하셨네 / 吾道其東

 

()은 협운(叶韻)으로 도()와 량()의 반절(反切),  으로 발음한다.

세도(勢道) 물리치고 속악(俗樂) 바로잡기 / 黜霸正䵷

쇠를 긁어내고 쭉정이 솎아 내듯 / 剔鐵簸糠

열성조(列聖朝) 가법 따라 / 列聖家法

존화양이(尊華攘夷) 준수하고 / 式遵尊攘

춘추대의(春秋大義) 따라 / 一部陽秋

손수 조정의 기강 이끄시니 / 手提天綱

백성 중의 비범한 인물들 / 赤子龍蛇

임금께 대도(大道) 보였도다 / 示我周行

오늘날의 서학(西學)이란 / 今之西學

양주(楊朱) 묵적(墨翟)보다 심하기에 / 甚於墨楊

사서(邪書)를 불태우고 / 火其邪書

우리 백성 사람 되게 하셨네 / 人吾黔蒼

맹자(孟子)처럼 사설(邪說)을 물리치니 / 辭廓孟闢

우 임금처럼 크신 공로 / 功侔禹荒

선왕의 사업 잇고 앞길 개척해 / 繼往開來

세자 위해 좋은 계책 전했으니 / 燕詒元良

구여 칭송 드높고 / 九如頌騰

사중 노래 길었도다 / 四重歌長

요순의 도 한번 꽃피우리라 / 堯舜一花

은인을 용상(龍床) 앞에 두시더니 / 銀印在床

천만년 지나도록 / 謂千萬年

강녕(康寧) 길이 받으시리 믿었는데 / 永受色康

어쩌자고 하루저녁 / 胡寧一夕

하늘나라로 떠나셨소 / 遽遐雲鄕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듯 / 地坼天崩

온 세상 사람들 부모를 여읜 듯이 여기네 / 率土如喪

남방에서 부음 듣고 / 奉諱南服

북을 향해 통곡하네 / 長號北望

팔도 백성 모두 엎디어 절하며 / 頓顙八埏

천지 일월 아득아득 / 宇宙茫茫

산과 바다도 슬피 울고 / 山哀海哭

피눈물이 눈에 가득 / 血淚盈眶

지난날 깊은 인덕(仁德) / 驗昔深仁

이 큰 슬픔 보니 알겠도다 / 觀此巨創

수렴하신 성모님이 / 聖母垂簾

희정당에 납시어서 / 熙政一堂

원우의 덕 짝하시고 / 媲懿元祐

주강 미덕 이으시사 / 嗣徽周姜

어린 임금 도우시니 / 保佑聖躬

황상원길(黃裳元吉)과 화합하도다 / 吉叶黃裳

하늘이 지으신 화성에는 / 天作華城

뽕나무 가래나무 우거졌네 / 有菀梓桑

가까이 선침 있어 / 仙寢密邇

대왕을 장차 모시리라 / 劍舃將藏

신이 오 년 동안 붓을 꽂고 / 臣五載簪筆

대왕을 곁에 모셔 / 黼扆之傍

각별히 입은 총애 / 偏荷寵私

하해(河海)엔들 비하리까 / 河海莫量

맡은 직책 얽매이어 / 符守所攖

흠위도 바라보지 못했도다 / 廞衛靡瞻

 

()은 협운으로 제()와 량()의 반절,  으로 발음한다.

욕의조차 못한 몸이 / 身未褥蟻

활을 안고 방황하며 / 抱弓彷徨

삼가 토산 제물 마련하고 / 敬修壤奠

명수 따라 올립니다 / 明水在觴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 정조 24(1800) 6월 정조가 승하하자 충청 감사가 당시 면천 군수로 재임 중이던 연암을 진향문 제술관(進香文製述官)으로 차출했으므로, 충청 감사를 대신해서 이 글을 지었다. 과정록 3에도 이 진향문이 인용되어 있다.

[D-001]동방에서 왕위를 받으시니 : 서경(書經) 무성(武成)에서 무왕(武王)은 선왕인 문왕(文王)을 예찬하면서 천명을 크게 받으셨다.誕膺天命고 하였다. 탄응(誕膺)은 천명이나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뜻한다.

[D-002]기자(箕子) …… 세우고 : () 나라 무왕(武王)이 기자에게 인륜(人倫)의 질서에 관해 묻자, 기자는 하늘이 우() 임금에게 주었다는 홍범구주(洪範九疇)가 곧 인륜의 질서라고 답하였다. 書經 洪範

[D-003]건강(乾剛) : 주역(周易) 잡괘전(雜卦傳) 건괘는 강함을 상징하고 곤괘는 부드러움을 상징한다.乾剛坤柔고 하였다. 건강의 덕乾剛之德은 왕의 권위를 뜻한다.

[D-004]궁원(宮園) 호칭 바로잡고 : 정조의 어머니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여 그 묘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정한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D-005]선왕(先王)을 깊이 사모하셨네 : 정조 10(1786) 왕명으로 열성조(列聖朝) 19대의 업적을 서술한 갱장록(羹牆錄)을 간행한 일을 말한다.

[D-006]총악(璁萼) : () 나라 세종(世宗)의 신하인 장총(張璁 : 1475~1539)과 계악(桂萼 : ?~1531)을 가리킨다. 세종이 황제가 되어 자신의 생부 흥헌왕(興獻王)을 추숭하려고 하자 장총과 계악이 세종의 뜻에 영합하여 효종(孝宗)을 황백고(皇伯考), 흥헌제를 황고(皇考)로 부를 것을 청하고, 이에 반대하는 조정의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여기에서는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추숭하자고 주장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 등을 가리킨다.

[D-007]헌기(憲冀) : 후한 화제(和帝)의 외숙인 두헌(竇憲 : ?~92)과 환제(桓帝)의 외숙인 양기(梁冀 : ?~159)를 가리키며, 모두 황제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전횡한 사람이다. 여기에서는 정조 즉위년에 죽음을 당한 정조의 외종조부 홍인한(洪麟漢)과 화완옹주(和緩翁主)의 양자 정후겸(鄭厚謙) 등을 가리킨다.

[D-008]밝게 …… 의리가 : 정조는 즉위 직후 홍인한 등을 역적으로 사사(賜死)한 사건의 전말을 밝힌 명의록(明義錄)을 간행하였다.

[D-009]교화하고 상벌 주기 : 서경 고요모(皐陶謨), 하늘이 부여한 질서天敍에 오전(五典 : 오륜)이 있고, 하늘이 부여한 등급天秩에 오례(五禮)가 있으며, 하늘이 임명하심天命은 덕이 있기 때문이니 오복(五服)으로써 그런 사람을 표창하고, 하늘이 성토하심天討은 죄가 있기 때문이니 오형(五刑)을 그런 사람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서() · () · () · ()는 백성들을 전례(典禮)로써 교화하고 신하들에게 상벌을 공정하게 시행하는 것을 뜻한다.

[D-010]일만 삼천 선비들 : 정조 16(1792) 4 27일 사도세자 30주기에 즈음하여 영남 유생 이우(李㙖)  1 57명이 연명하여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 무리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5 7일에 다시 1 368명이 연명하여 2차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노론(老論)의 이병모(李秉模), 서유린(徐有隣), 정민시(鄭民始) 등이 동조하고 소론(少論) 유생 700여 명도 동조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만 삼천의 선비라고 한 것은 이들을 포함한 숫자로 보인다. 正祖實錄

[D-011]거센 …… 막을쏜가 :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 백천(百川)을 막아 동으로 흐르게 하고, 거꾸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돌이켰다.障百川而東之 廻狂瀾於旣倒고 하였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이단사설(異端邪說)의 유행에 맞서 유교의 정통을 수호한 공로를 예찬한 말이다.

[D-012]올빼미 :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하여 불효조(不孝鳥)로 간주되었다. 부모를 잡아먹는 극악무도한 인간을 효경(梟獍)이라 한다.

[D-013]대방(大防) : 백성들이 악에 빠지는 것을 막아 주는 큰 둑이란 뜻이다. 옛 성왕(聖王)들은 이를 위해 예절을 제정하였다.

[D-014]황극(皇極) …… 하여 : 황극은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치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을 말한다. 이 구절은 서경 홍범의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탕탕(蕩蕩)하며, 편당함이 없고 편벽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平平)하며, 상도(常道)에 위배됨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의 도가 정직(正直)할 것이니, 그 극()에 모여 그 극()에 돌아올 것이다.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側 王道正直 會其有極 歸其有極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D-015]용도각(龍圖閣) : () 나라의 왕실 도서관으로서 황제의 문집, 도화(圖畵), 세보(世譜) 등을 보관한 곳이다. 여기에서는 정조가 왕실 도서관으로 설치한 규장각(奎章閣)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16]천책부(天策府) : 당 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때 설치한 군부(軍府)의 이름으로 이세민은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친위 군영(親衛軍營)인 장용영(壯勇營)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17]진실로 문무 갖추어 : 시경 노송(魯頌) 반수(泮水) 진실로 문무 갖추어 조상을 빛내시니允文允武 昭假烈祖라 하였다. () 나라 임금을 칭송한 말이다.

[D-018]백사(百事) …… 올바르시니 : 서경 여오(旅獒) 귀와 눈에 부림을 당하지 않으면 백사가 절도에 맞아 올바를 것이다.不役耳目 百度惟貞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이 성색(聲色)을 멀리하였다는 뜻이다.

[D-019]대양(對揚) : 신하가 왕명을 훌륭하게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D-020]일념으로 백성을 보살피시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보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D-021]형벌을 …… 사무치고 : 정조는 재판과 형벌에도 신중을 기하여 억울한 죄인이 나오지 않도록 했으며, 형구(刑具)를 정비하기 위해 흠휼전칙(欽恤典則)을 편찬하게 했다. 정조의 판결을 모은 심리록(審理錄) 26권이 있다.

[D-022]내린 …… 빛나 : 정조는 농정(農政)을 권장하는 윤음을 여러 차례 내렸는데, 그중 특히 정조 22(1798)에는 권농정(勸農政) 구농서(求農書)의 윤음을 내려 널리 농사 진흥책을 구하였다.

[D-023]상신(上辛) …… 하니 : 상신은 매월 상순(上旬)의 신일(辛日)에 해당하는 날짜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정월(正月) 신일에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특히 중하게 다룬 것을 말한다.

[D-024]밝은 덕이 향기롭네 : 서경 군진(君陳) 훌륭한 정치는 향기로워 신명을 감응케 한다. 기장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오직 향기롭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香 明德惟馨고 하였다.

[D-025]백 권 문집 :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을 가리킨다.

[D-026]성스러운 방략 원대하여라 : 서경 이훈(伊訓)에서 이윤(伊尹)은 탕() 임금의 손자 태갑(太甲)이 왕위에 오르자, 선왕(先王) 성스러운 방략은 원대하고, 훌륭한 교훈은 매우 분명하다.聖謨洋洋 嘉言孔彰고 하면서 이러한 선왕의 모훈(謨訓)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D-027]동방에 유교를 전파하셨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오도는 일관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고 하였듯이, ‘오도(吾道)’는 공자의 가르침 즉 유교를 말한다. 또한 후한(後漢) 때 정현(鄭玄)이 마융(馬融)의 문하를 떠나자 마융이 오도가 동으로 갔구나.吾道東矣라고 탄식하였다고 한 고사에서, 동쪽으로 유학이 전파되었다는 뜻의 오도동(吾道東)’이란 성어가 생겼다.

[D-028]임금께 대도(大道) 보였도다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여 나에게 대도(大道)를 제시했네.人之好我 示我周行라고 하였다. 신하들에게 잔치를 후히 베풀어 화합을 도모하니, 신하들이 감복하여 임금인 자신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를 피력했다는 뜻이다.

[D-029]맹자(孟子)처럼 …… 공로 : 정조가 천주교를 배척한 것은 맹자가 피사(詖辭) · 음사(淫辭) · 사사(邪辭) · 둔사(遁辭)를 확청(廓淸)함으로써 양주와 묵적 같은 이단(異端) 사설(邪說)을 배척한 것과 같으며, 우 임금이 치수(治水) 사업으로 홍수를 막은 공로에 비할 만하다는 뜻이다.

[D-030]구여(九如) : 임금의 덕을 칭송하여 산과 같고如山 언덕과 같고如阜 산마루와 같고如岡 구릉과 같고如陵 냇물이 한창 흘러오는 것과 같으며如川之方至 초승달과 같고如月之恒 떠오르는 해와 같고如日之升 장구한 남산과 같고如南山之壽 무성한 송백과 같음如松柏之茂을 말한 것이다. 詩經 小雅 天保

[D-031]사중(四重) : 말을 중하게 하고重言 행동을 중하게 하고重行 용모를 중하게 하고重貌 좋아하는 것을 중하게 하는 것重好을 말한다. 揚子 法言

[D-032]요순(堯舜) …… 두시더니 : 영조 말년 대리청정할 때 정조는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승정원일기에서 자신의 생부(生父)인 사도세자와 관련된 기사를 세초(洗草)해 줄 것을 간청했다. 정조의 효성에 감동한 영조는 이를 허락하고 정조에게 유서(諭書)와 함께 효손(孝孫)’이라 새긴 은으로 주조한 도장을 하사했다. 그 후 정조는 조회할 때나 행차할 때나 항상 이 유서와 은인(銀印)을 앞에다 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조는 영조와 사도세자에 대해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므로, 정조실록에 실린 행장에서도 맹자(孟子)에서 요순의 도는 효제일 따름이다.堯舜之道 孝悌而已矣란 말을 인용하여 정조의 효를 예찬했다.

[D-033]하늘나라로 떠나셨소 : 운향(雲鄕)은 선계(仙界)를 가리킨다.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성인(聖人) 천세토록 살다가 인간 세상이 싫어지면 떠나서 신선이 되어 올라가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른다.千歲厭世 去而上僊 乘彼白雲 至於帝鄕고 하였다.

[D-034]성모님 : 영조(英祖)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가리킨다. 순조가 11세로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D-035]원우(元祐)의 덕 짝하시고 : 원우는 송() 나라 철종(哲宗)의 연호이다. 철종이 9세로 황제에 오르자 조모 선인태후(宣仁太后) 고씨(高氏)가 수렴청정을 하여 사마광(司馬光), 여공저(呂公著), 문언박(文彦博)을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안정시켰다.

[D-036]주강(周姜) 미덕(美德) 이으시사 : 주강은 주() 나라 태왕(太王)의 비()이자 문왕(文王)의 조모(祖母)인 태강(太姜)을 말한다. 현명하고 덕이 있었다. 시경 대아(大雅) 사제(思齊) 태사께서 태강의 미덕을 이으시니太似嗣徽音라고 하였다.

[D-037]황상원길(黃裳元吉) : 주역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 황색 치마이니 크게 길하리라.黃裳 元吉 하였는데, 이는 여자로서 높은 신분에 있으면서 중도를 지키고 아래에 거처하면 크게 길하다는 뜻이다.

[D-038]뽕나무 가래나무 우거졌네 : 뽕나무와 가래나무桑梓는 부모가 자손에게 물려주고자 심는 나무들이다. 따라서 고향이나 노부모를 상징하는데, 여기서는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라는 뜻이다.

[D-039]선침(仙寢) :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인 현륭원(顯隆園)을 가리킨다. 정조의 능침인 건릉(健陵)은 현륭원의 동편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두 능침은 현재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 화산(花山)에 나란히 있다.

[D-040]대왕을 장차 모시리라 : ‘검석(劍舃)’은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죽어 교산(橋山)에 묻혔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관이 텅 비고 칼과 신만 관에 남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列仙傳

[D-041]붓을 꽂고 : ‘잠필(簪筆)’은 모자에다 붓을 꽂아 두어 측근에서 임금의 말씀을 기록할 준비를 하는 것을 말한다. 사관(史官)이나 간관(諫官), 승지(承旨) 등의 직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D-042]흠위(廞衛)도 바라보지 못했도다 : 흠위는 국장(國葬)의 행렬에 동원된 군대를 말한다.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D-043]욕의(褥蟻) : 임금과 함께 죽는 것을 말한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나오는 안릉군(安陵君)의 고사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44]활을 안고 방황하며 : 황제(黃帝)가 죽을 때 용을 타고 승천하자, 용을 타지 못한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붙잡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뽑혀 떨어지면서 황제가 지니고 있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활과 용 수염을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여기서는 죽은 임금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D-045]명수(明水) : 제사 때 올리는 맑은 물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 경리(楊經理) () 치제문(致祭文) 사신(詞臣)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우리 동방 되살린 건 / 再造我東

누구의 공이던고 / 繄誰之功

천자의 명을 받은 / 天子攸命

창서 양공 이분일레 / 蒼嶼楊公

직책은 경리로서 / 職是經理

문무 재주 겸했고 / 才兼文武

범과 용 모양 부절(符節) 차니 / 虎符龍節

옛 윤길보(尹吉甫)에 견줄 만하네 / 視古吉甫

천과 휘두르며 / 天戈所揮

왜놈 소탕 맹세하니 / 誓蕩島夷

어사중승(御史中丞) 배도(裴度) / 如御史度

회서(淮西) 군사 순무하듯 / 往撫淮師

동작나루에서 군대 살피고 / 觀軍銅雀

자각을 호위하네 / 圍碁紫閣

호령소리 들릴세라 / 不聞號令

방략 지시 가만가만 / 潛授方略

으뜸 공은 뉘의 차지 / 孰占頭功

휘하에 서마 있어 / 帳有西麻

삼천 기병 풀어다가 / 發騎三千

소사에서 적 맞으니 / 迎敵素沙

깃대 하나 둑에 꽂고 / 塘置一旗

묵묵히 적의 동정 살피어서 / 黙察偃竪

천리 밖의 승부 결단 / 千里決勝

제 손바닥 금을 보듯 / 如掌其覩

적이 모인 남쪽 땅에 / 妖氛南天

나비 모양 진 만들고 / 蝴蝶爲陣

아침 해가 떠오르며 거울처럼 빛나자 / 輝鏡朝旭

칼 휘두르고 나아갔네 / 舞劍以進

이에 천자의 군사 / 于時天兵

다리 밑서 철갑을 걸치고 / 浴甲橋下

재빠른 삼백 기병(騎兵) / 弄猿三百

한꺼번에 말 채찍질 / 一時鞭馬

 원문 빠짐 - / □□□□

말굽 아래 무찔렀으니 / 悉殲蹄間

이 한 접전 아니면 / 微此一鏖

교관(郊關) 지키기 어려웠지 / 難保郊關

번개처럼 군사 달려 / 全師電馳

저 울산(蔚山) 성채 쳐부수니 / 搗彼蔚砦

왜놈 수괴 궁지 몰려 / 凶渠窮蹙

사로잡긴 시일 문제 / 指日可械

반구정(伴鷗亭) 태화강(太和江)에서 / 鷗亭和江

적의 발톱 뽑아 버렸지만 / 落其牙距

몰린 왜놈 전세를 관망하며 / 困獸隙鬪

도산성(島山城)에서 버티네 / 島山是拒

절지를 앙공하며 / 絶地仰攻

막 불을 놓아 잡으려니 / 方圖熏穴

마침 하늘 찬비 내려 / 會天凍雨

손가락 떨어지고 살갗 찢어졌네 / 指墮膚裂

남은 도적 못 벤 것은 / 殘寇逋誅

때가 아직 불리한 탓 / 緣時未利

포위 풀고 잠시 철수 / 暫撤重圍

뒷 계획을 의논하자 / 後擧是議

간교한 참설 꾸며 / 讒說如簧

성대한 공적 헐뜯으며 / 忮毁茂績

공이 패전 숨기고 / 誣公掩敗

적을 풀어 줬다 무고하니 / 咎公縱敵

온 나라가 놀라 부르짖으며 / 擧國驚號

천조(天朝)에 달려가 송사했는데 / 走訟天朝

사신 내왕 빈번했어도 / 冠蓋旁午

비방 여론 막지 못하였네 / 莫遏群囂

마침내 공이 해임되어 / 遂解重務

행차 돌려 돌아가니 / 旌棨言旋

도성 안의 백성들이 / 都人士女

앞서 뒤서 달려오네 / 奔走後先

수레 잡고 통곡하나 / 攀轅痛哭

뉘 이 걸음 만류하리 / 莫挽其行

왜 조금 더 머물러서 / 胡不少留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지 않나 / 究我生成

결국 왜놈 잡은 것은 / 終焉獲醜

실로 공의 위엄 덕분 / 寔公餘威

백성들이 안정되고 / 生靈奠妥

온 나라가 깨끗해졌네 / 區宇淸夷

무릇 우리 조선 사람 / 凡我東人

은혜 입고 못 갚았으니 / 含恩未報

눈앞에 뵈옵는 듯한 정성으로 / 如見之誠

빛나는 사당 세웠도다 / 有奐廟貌

, 군탄의 해를 맞아 / 嗚呼涒灘

중국이 상전벽해(桑田碧海) 되었으나 / 桑海中州

오직 우리나라만은 / 惟我家法

춘추 대의(春秋大義) 지켰노라 / 一部春秋

명 나라 망한 것을 슬퍼하며 / 浸苞之悲

구원병 보내 준 일 생각하니 / 采芑之思

백 년이 지나도록 / 逮玆百年

의리 더욱 깊어지네 / 罙篤是義

운거에다 풍마 타고 / 雲車風馬

칠월이라 동쪽 순행 나서시니 / 七月東巡

충만하여 곁에 계신 듯한 / 洋洋左右

공은 황제의 신하 / 公惟帝臣

성 남쪽을 돌아보니 / 顧瞻城南

이내 생각 깊어지고 / 我思邃長

깨끗하고 엄숙한 사당 / 庭宇汛肅

단청 다시 으리으리 / 丹雘復光

흡사 영용(英勇)한 모습으로 / 彷彿英姿

갑옷 입고 머무시는 듯하니 / 來憩鎧仗

신령의 위엄 미친 곳마다 / 威靈所曁

바다 육지 길이 안정되리 / 永鎭海壤

술과 고기 진설하고 / 牲醪踐列

징과 북을 울리오니 / 鐃鼓振作

밝으신 신명이여 / 神明不昧

이 잔 고이 받으소서 / 庶歆玆酌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양 경리(楊經理) 치제문(致祭文) :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도찰원우첨도어사 겸 경리조선군무(都察院右僉都御史兼經理朝鮮軍務)로서 조선에 파견되었던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에 대한 제문이다. 양호는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왜군을 격퇴했으나 울산 전투에서 고전 끝에 일시 경주로 철수한 뒤 참소를 당해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양호의 공적을 밝히고 그의 유임을 건의하면서 그에 대한 참소에 대해 해명하는 상소를 명 나라에 보냈으며, 그의 귀환을 애석해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고 선무사(宣武祠)에 배향(配享)하였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 3에 의하면 이 글은 정조 20(1796) 안의 현감의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와 산직(散職)에 있던 연암이 당시 좌승지였던 이서구(李書九)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즉 이서구가 편지를 보내, 어명으로 명 나라 장수 양호와 형개(刑玠)의 제문을 짓게 되었으나 공무에 바빠 겨를이 없으니 각각 50()으로 초고를 대신 만들어 줄 것을 간절히 부탁했으므로 지어 준 것이라 한다.

[D-001]창서(蒼嶼) : 양호의 호()이다.

[D-002]윤길보(尹吉甫) : 서주(西周) 선왕(宣王) 때의 인물로 성은 혜씨(兮氏)요 이름은 갑(), 자는 백길보(伯吉甫)이며, ()은 관직 이름이다. 선왕 때에 험윤(玁狁)이 침입하여 호경(鎬京)을 공격하자 윤길보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험윤을 태원(太原)까지 쫓아내고 돌아왔다. 여기에서 양호(楊鎬)를 굳이 윤길보에 견준 것은 양호의 ()’ 자가 서주의 도읍인 호경의  자와 같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詩經 小雅 六月

[D-003]천과(天戈) : 천자의 창 즉 제왕의 군대를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조주자사사상표(潮州刺史謝上表) 천자의 창을 휘두르니 모두 순종하네.天戈所麾 莫不寧順라고 하였다.

[D-004]어사중승(御史中丞) …… 순무하듯 : 당 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12(817)에 어사중승 배도가 회서선유초토처치사(淮西宣諭招討處置使)가 되어 채주(蔡州)의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은 일을 두고 말한 것이다. 新唐書 卷173 裵度傳

[D-005]동작나루에서 군대 살피고 : 선조 30(1597) 9 12일에 양호가 선조와 함께 한강의 동작나루에 와서 남쪽 지방의 전황을 살핀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宣祖實錄

[D-006]자각(紫閣) : 도성(都城)을 가리킨다.

[D-007]서마(西麻) : 양호 휘하의 제독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당시에 명 나라에서는 이여송(李如松)으로 대표되는 철령(鐵嶺)의 이씨와 마귀로 대표되는 사령(沙嶺)의 마씨 집안에 장수들이 가장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동리서마(東李西麻)’라 하였다. 또한 이여송의 아우 이여매(李如梅)도 총병(摠兵)으로 양호의 휘하에 함께 와 있었다. 明史 卷238 麻貴傳

[D-008]소사(素沙) : 직산(稷山)의 소사평(素沙坪)으로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장수 해생(解生), 양등산(楊等山) 등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을 격파한 곳이다.

[D-009]적의 동정 : 언수(偃竪)는 깃발을 내리거나 세우는 것을 말한다.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깃발을 내리는 것을 언기(偃旗)라 한다.

[D-010]철갑을 걸치고 : 철갑을 걸치는 것을 욕철(浴鐵)’이라 한다.

[D-011]재빠른 삼백 기병(騎兵) : 동진(東晉)의 화가 대규(戴逵)의 그림에 농원도(弄猿圖)가 있고, 마상희(馬上戱)의 하나로 원기(猿騎)가 있다. 원숭이는 동작이 민첩하여 원첩(猿捷)’이란 성어가 있다.

[D-012]원문 빠짐 :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狡彼倭奴’, 숭실대 박물관 소장 필사본에는 猾彼倭奴로 되어 있다. 둘 다 교활한 저 왜놈들이란 뜻이다.

[D-013]교관(郊關) : 도성(都城)을 에워싼 교외 지역을 방어하는 관문(關門)을 말한다.

[D-014]왜놈 수괴 :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가리킨다.

[D-015]전세를 관망하며 : 소식(蘇軾)의 초연대기(超然臺記) 마치 틈 사이로 싸움을 구경하는 것 같으니, 승부가 어느 쪽에 있을지 또 어찌 알 수 있으랴.如隙中之觀鬪 又焉知勝負之所在라고 하였다.

[D-016]도산성(島山城) : 왜장 가또오 기요마사가 울산의 해변가 험준한 곳에 쌓은 성이다. 1597 12월에 양호가 울산으로 진군하여 반구정과 태화강의 왜적 소굴을 공격하자 왜군은 미리 만들어 놓은 도산성으로 도망을 가 항거하였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D-017]절지(絶地)를 앙공(仰攻)하며 : 험악하여 출로가 없는 지역을 절지라 하며, 저지대에서 높은 곳을 공격하는 것을 앙공이라 한다.

[D-018]간교한 참설 꾸며 : 당시 병부직방사 찬획주사(兵部職方司贊劃主事)로 조선에 온 정응태(丁應泰)가 명 나라 조정에다 양호를 무고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 간교한 말 생황의 혀 같네.巧言如簧라고 하였다.

[D-019]눈앞에 …… 정성으로 : 제사 지낼 때 재계(齋戒)하는 동안 고인을 간절히 그리워하면, 그러한 정성에 감응하여 고인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禮記 祭義

[D-020]사당 : 선무사(宣武祠)를 가리킨다. 선무사는 선조 31(1598)에 형개(邢玠)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세운 생사당(生祠堂)인데, 선조 37(1604)에 왕명으로 양호를 배향하였다.

[D-021]군탄(涒灘)의 해 : 군탄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신()에 해당한다. 여기에서는 명 나라가 멸망한 1644년인 갑신년(甲申年)을 가리킨다.

[D-022]명 나라 …… 슬퍼하며 : 시경 조풍(曹風) 하천(下泉) 차갑게 흘러내리는 저 샘물, 가라지 덤불을 적시네. 아아 내 깨어나 탄식하며, 저 주 나라 서울을 생각하노라.洌彼下泉 浸彼苞稂 愾我寤嘆 念彼周京 하였다. 서주(西周)의 서울은 호경(鎬京)이므로, 양호(楊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도 함축할 수 있다.

[D-023]구원병 …… 생각하니 : 시경 소아(小雅) 채기(采芑)의 내용을 가리킨다. 주 나라 선왕(宣王) 때 만형(蠻荊)이 반란을 일으키자 방숙(方叔)에게 정벌을 명하였는데, 그때 군사들이 쓴 나물을 뜯어 먹으며 행군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정유재란 때 명 나라 천자가 양호가 이끄는 구원병을 파견한 사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24]운거(雲車)에다 풍마(風馬) 타고 : () 나라 무제(武帝) 때 만든 교사가(郊祀歌) 천지 신령의 수레는 검은 구름을 얽고 …… 천지 신령이 내려오실 때 바람같이 빠른 말을 타시네.靈之車 結玄雲 …… 靈之下 若風馬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명() 나라 신종(神宗)에게 제사를 올리니 황제의 신령이 강림한다는 뜻이다.

[D-025]칠월이라 …… 나서시니 : 음력 7 21일이 명() 나라 신종(神宗)의 기일(忌日)이었으므로,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을 향해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영조실록󰡕 36 7 21일 영조 22(1746)부터 대보단 제사에 명 나라 신종의 신하인 양호(楊鎬)와 형개(邢玠)를 배향(配享)하기로 하였다.

[D-026]충만하여 …… 듯한 : 중용장구  16 장에서 공자는 조촐하게 재계하고 엄숙한 옷차림으로 제사를 받들면 귀신이 충만하여 위에 계신 듯하고 좌우에 계신 듯하다.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 상서(邢尙書) () 치제문(致祭文)

 

 

덕 높이고 공 갚는 건 / 崇德報功

나라의 큰 예법이라 / 邦禮之經

그 공 그 덕 무엇인고 / 功德維何

사직과 백성 살리신 것 / 社稷生靈

비하자면 물과 불이 / 譬如水火

문턱까지 아슬아슬 / 危迫堂戶

아차 순간 못 구했더라면 / 斯須不救

기둥까지 미쳐 집이 무너질 뻔했네 / 延棟潰宇

엄청난 신력으로 / 有大神力

불을 잡고 물 막으니 / 撲燎湮洪

어찌 갚아 좋을는지 / 宜如何報

그런 덕과 그러한 공 / 之德之功

예전에 우리나라 / 往歲吾邦

백륙 운수 걸려들어 / 離運百六

용과 뱀을 못 죽이니 / 龍蛇未菹

고래 악어 다시 뭍에 올랐네 / 鯨鱷復陸

영남 호남 재차 함락 / 嶺湖再陷

서울 근교까지 화 미쳤네 / 震及郊圻

이에 오 년이라 긴 세월 / 于時五載

우리 군사 비바람 속에 고생했으나 / 暴露王師

뒷마무리 계책 실수하고 / 策遺善後

화친(和親) 의논 잘못되어 / 和議實謬

황제 이에 성을 내어 / 天怒斯赫

요동 바다 병력 증가 / 遼海增戍

삼십 만의 대군이라 / 雄師卅萬

징과 북 소리 천리나 이어지고 / 鉦鼓千里

육지로 바다로 내달리니 / 陸走海運

꼴과 곡식 산더밀레 / 芻粟山峙

왜놈 정벌 이제까지 / 自征倭來

이런 거동 처음이라 / 未有此擧

천자의 말씀이, 이럴 수가! / 天子曰吁

군사 뉘 독려할꼬 / 疇督我旅

늠름할사 우리 형공(邢公) / 曁曁我公

궁중의 파목이라 / 禁省頗牧

병법 알고 변방 익숙 / 知兵熟邊

온 조정이 추천하니 / 廷中推轂

너는 가서 공경히 행하라 / 汝往欽哉

내 위엄을 대신 행하라 하시며 / 朕威汝將

상방검(尙方劍)을 빌려 주시니 / 劍借尙方

추상(秋霜)보다 으시으시 / 凜若秋霜

경리라 제독이라 / 惟是經理

그 이하를 막론하고 / 提督以下

모두 네가 통제하여 / 咸汝節制

가차 없이 지휘하라 하시었네 / 無所貸假

압록강에 공이 이르러 / 公臨鴨水

선발대가 한강 넘자 / 先驅渡漢

군대 함성 우레 같고 / 軍聲震駭

벽루 모습 달라졌네 / 壁壘改觀

공이 군중 다짐할 제 / 公來誓衆

옥대에다 망포 입고 / 玉帶蟒袍

원수 장군 숨죽이며 / 元帥屛營

활집을 메고 화살통을 찼네 / 屬鞬注櫜

청산(靑山) 직산(稷山)에서 무찌르고 / 靑稷旣鏖

울산(蔚山) 도산(島山)에서 몰아치니 / 蔚島繼蹙

토끼 굴이 마구 파이고 / 窟兎橫決

상산(常山)의 뱀 움츠러드네 / 常蛇瑟縮

괴수 놈은 넋 빠지고 / 凶渠褫魄

남은 잔당 놀라 숨으니 / 餘醜駭竄

우리나라 백성들이 / 惟我邦人

도탄 속을 벗어났소 / 得出塗炭

강을 건너 다시 올 젠 / 方其再渡

상처 입고 자리에 누웠더니 / 瘡痍衽席

마침내 돌아갈 젠 / 逮厥大歸

왜병 막을 꾀 남기셨네 / 禦倭餘策

공이 처음 올 적에는 / 始公之來

천둥 번개 치는 듯이 / 迹若雷霆

요사 흉악 쓸어 내길 / 蕩沴殲妖

재빠르고 힘차더니 / 奮迅砰轟

우로(雨露) 같은 은혜 남겨 / 留作雨露

죽은 목숨 살려 주고 / 洗癍蘇枯

은택을 베푼 뒤엔 / 膏澤旣潤

없는 듯이 떠났다네 / 斂歸如無

저 천둥과 저 이슬은 / 惟彼雷露

상제님의 은덕이나 / 上帝之仁

사람으론 상제님께 / 人於上帝

은혜 삼지 못하나니 / 莫之敢恩

조선 사람 이 때문에 / 所以東人

공의 은덕 잊지 못하네 / 公之德含

은덕 잊지 못하면 어찌하리 / 含德如何

성 남쪽에 생사당(生祠堂) / 廟貌城南

남들은 사자(死者) 제사하나 / 人祭其死

우린 생자(生者) 제사하니 / 我祠其生

이는 실로 조선 사람들이 / 寔由東人

신명처럼 받들기 때문 / 奉若神明

사악(四嶽)의 정기 타고나신 분 / 嶽降之神

세상 떠나신 지 하마 오래 / 久已騎箕

더더구나 백 년 지나 / 矧復百年

중원 문물 쑥밭이라 / 周京黍離

온 누리를 돌아보니 / 顧瞻四海

한쪽 우리 땅만 조촐하이 / 片土乾淨

공의 영령 예 계시니 / 公靈在此

누구보다 큰 업적 남기셨네 / 孔烈無競

해마다 칠월이면 / 年年七月

옥로(玉輅)가 동순(東巡)하니 / 玉輅東巡

명 나라 그리는 맘 / 風泉之思

이 사당을 중수(重修)하고 / 廟宇重新

지조 있는 선비들 잔 올리며 / 介士奉斝

징과 북을 울리노니 / 鐃鼓轟鳴

공을 죽지 않도록 하는 건 / 俾公不死

우리나라 사람들 정성일레 / 我人之誠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형 상서(邢尙書) 치제문(致祭文) : 원문에는  자가  자로 잘못 되어 있다. 형개(邢玠)는 정유재란 때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 총독계요보정군무(兵部尙書兼右副都御史總督薊遼保定軍務)로서 명 나라 원병 3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형개에 대한 제문 역시 1796년경 좌승지 이서구의 부탁으로 지은 것이다.

[D-001]백륙(百六) 운수 : 액운(厄運)을 말한다. 백륙은 음양가(陰陽家)에서 말하는 양구(陽九)의 액이다. ()는 양()의 극수(極數), 양만 있고 음이 없으므로 만물이 교섭을 할 수 없어 천하가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4617() 1()으로 하고, 처음 원에 든 106세 중에 양구(陽九)  9번의 재해가 있다고 하며, 재해가 가장 많으므로 액회(厄會)라 한다.

[D-002]용과 …… 올랐네 : 용과 뱀, 고래와 악어는 모두 포악한 존재, 곧 왜적을 가리킨다. 또한 용과 뱀은 각각 진()년과 사()년을 상징하며, 이러한 용사년(龍蛇年)은 흉년으로 간주되었다. 여기서는 처음 왜란이 난 임진년과 그 이듬해 계사년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섬멸하지 못해 정유재란이 났다는 뜻이다.

[D-003]파목(頗牧) : 전국(戰國) 시대 조() 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가리키는 말로서, 궁중의 시종관(侍從官) 가운데 문무(文武)를 겸비한 신하를 금중파목(禁中頗牧)’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당시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있던 형개를 빗대어 말한 것이다.

[D-004]너는 …… 행하라 : ‘가서 공경히 행하라往欽哉 서경(書經)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곤()에게 황하로 가서 치수(治水)에 힘쓸 것을 명하면서 한 말이다.

[D-005]상방검(尙方劍) : 상방(尙方)은 천자가 사용하는 기물(器物)을 제작하는 관서로서 천자가 대신(大臣)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 그 징표로 내려주는 칼을 상방검이라 한다.

[D-006]경리(經理)라 제독(提督)이라 : 경리 양호(楊鎬)와 제독 마귀(麻貴)를 가리킨다.

[D-007]토끼 굴 : ‘영리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만들어 놓는다.狡兎三窟는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왜적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개의 은신처를 말한다.

[D-008]상산(常山)의 뱀 : 머리와 꼬리가 서로 도와 적을 공격한다는 전설상의 뱀이다. 여기에서는 군진(軍陣)의 수미(首尾)가 서로 도와 가며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진법(陣法)을 말한다.

[D-009]사악(四嶽) …… 오래 :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 사악이 정기를 내려 보후(甫侯)와 신백(申伯)을 낳으셨도다.維嶽降神 生甫及申라고 하였다.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부열(傅說)이 죽어서 기미(箕尾)를 타고 올라가 별이 되었다고 하였다. 기수(箕宿)와 미수(尾宿) 사이에 부열성(傅說星)이 있다.

[D-010]누구보다 …… 남기셨네 : 시경 주송(周頌) 집경(執競) 강력하신 무왕이여, 누구도 다툴 수 없는 업적이셨다.執競武王 無競維烈라고 하였다.

[D-011]옥로(玉輅) : 천자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

[D-012]명 나라 그리는 맘 : ‘풍천지사(風泉之思)’는 주() 나라 왕실이 쇠미해짐을 탄식한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 시를 슬픈 마음으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 22)

 

 

본도(本道)의 농사가 참혹하게 흉년이 든 연유와 절박한 백성들의 사정에 대해서는 이미 연달아 장계를 올린 바 있습니다. 신이 관할 지역을 순행하면서 연해의 고을을 먼저 하고 산간의 고을을 나중에 하여 이목(耳目)이 미치는 고을은 거의 다 파악하였으나, 길이 돌거나 구석진 고을의 경우는 편비(褊裨 측근의 비장(裨將))를 보내어 탐사하게 하거나 해당 수령들에게 물어서 처리하였습니다.

대저 본도는 경기와 영남의 사이에 처해 있어 왼쪽의 산간 지방은 그 지형이 높고 건조한 곳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오른쪽의 해안 지방은 그 토질이 소금기가 있는 땅이 절반이 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흉년이 들면 유달리 심한 흉년이 들기도 하고 풍년이 들어도 고르게 풍년이 들지 않습니다. 이 점을 호서(湖西) 사람들은 깊이 걱정하고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재해의 대장(臺帳)을 낱낱이 상고해 보면 그중에서도 가뭄의 피해가 가장 심합니다. 그런데 금년의 경우는 갓 해동(解凍)하던 때부터 이미 가뭄이 들 조짐이 있었으며, 2, 3월경에 비록 네댓 차례 비가 내리기는 하였으나 호미질하거나 쟁기질하거나 할 때 강수량이 일정치 않았으며 연해의 고을과 산간의 고을에 따라서도 강수량이 같지 않았습니다. 골짜기의 물이 나는 논이나 시내에서 봇물을 대어 오는 들판의 경우 간혹 때에 맞추어 물을 대고 파종을 하여 제때에 모내기를 한 곳이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10 2, 3에 불과합니다. 이 밖에 뭍으로 이어진 높고 메마른 땅들은 간신히 두레박으로 물을 끌어올리느라 힘은 갑절이나 들면서도 이미 모내기한 모는 땅에 심자마자 시들어 버리고 모내기를 하지 못한 모는 모판에서 그대로 타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계절이 늦여름이 되도록 한결같이 불볕 같은 가뭄이 계속되어 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인심이 목이 타들어 가듯 하였으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다른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채 눈앞에서 농사의 때를 놓치고 있으면서도 단지 황급한 사태를 쳐다만 볼 뿐 앞으로의 조처를 어떻게 변통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루 이틀 아무런 손도 써 보지 못하고 있을 때, 성상께서 특별히 염려하시어 식량을 넉넉히 할 방도를 생각하시어 다른 작물을 대신 파종하도록 권장하고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유시(諭示)하여 봄기운처럼 온화한 윤음(綸音)을 내리시니, 백성들이 갈라지고 소금기 있는 들판과 묵혀서 버려진 구릉을 갈고 파종하여 앞 다투어 일을 하였습니다.

유월 초닷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큰비가 밤낮으로 계속 쏟아져 원근의 고을에 모두 흡족히 내렸습니다. 이에 미처 모를 옮겨 심지 못한 자들도 일제히 일어나 힘을 합쳤으므로 영읍(營邑)에서 백성들을 독려하고 권면할 때면 반드시 그래도 아예 버려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였고, 요행을 바라는 백성들도 있어서 비록 늦기는 하지만 혹 수확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노약자들까지 힘을 모아 도롱이에 삿갓을 쓰고 다투어 달려 나오기는 하였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할 일은 어지럽게 많은데 인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보름이나 스무날을 끄는 바람에 이조차 차례로 중지하고 말았으니, 이 때문에 늦게 모내기한 벼가 모내기하지 않은 벼보다 많고, 모내기하지 않은 벼가 일찍 모내기한 벼보다 많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늦게 모내기한 허다한 벼들이 모두 중복(中伏) 전후로 심겨져, 설령 이후의 날씨가 고르고 비가 자주 내린다 하더라도 오히려 수확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형편이거늘, 농가(農家)에서 말하는 삼복(三伏)의 가뭄이 또다시 혹독하게 닥쳐와 유월 그믐과 칠월 스무날에 내린 비로는 이미 그 시듦을 막을 수가 없었으니, 일찍 모내기한 것은 대부분이 말라 버렸고 늦게 심은 것도 거의 다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강가의 척박한 땅과 바닷가의 소금기가 밴 땅이 가장 심하여 한 평() 두 평을 막론하고 마른 벼 포기가 논두렁에 연이어져 있고, 5 10리에 걸쳐 거친 갈대가 숲을 이루어 이것저것 보이는 것이 극히 참담합니다.

다만 산에 의지하여 조금 일찍 심은 것과 가뭄을 입되 조금 덜한 것 가운데는 혹 농사가 모양을 갖추어 간혹 수확되는 것도 있기는 하나, 여러 번 재상(災傷)을 겪어 받은 피해가 이미 고질이 되어 열매를 맺은 것이 거의 보잘것없다시피 하며 소출이 태반이나 줄어들었습니다. 대신 파종한 각종 작물은 필경 수확한 것이 처음 예상보다 배나 더하여, 늦게 모내기하느라 아무런 이익도 없이 헛수고한 것에 비하면 그 이익이 현격히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닙니다. 이에 이르러 민심이 마치 믿는 바가 있는 듯이 여기면서 모두들 조정에서 미리 다른 작물의 파종을 권장한 거룩한 덕과 지극한 뜻에 감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이는 일찌감치 힘을 써 벼농사를 포기하고 다른 작물을 파종하지 못한 점입니다.

밭농사의 경우 논농사와 비교하여 훨씬 낫기는 하지만 이삭이 팰 무렵에 가뭄을 만나고 열매가 영글 무렵에 바람의 피해를 당한 탓에, 처음 대풍을 바라던 곳은 겨우 흉작을 면하였고 처음 흉작을 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곳은 결국 제대로 익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콩팥은 화종(和種 씨를 뿌려서 심는 것)과 근경(根耕 그루갈이)을 막론하고 기름진 곳이 아니면 거의 말라 시들어 수확이 얼마 되지 않았으며, 목면(木綿)은 연해의 고을이 더러 흉년이 들기는 하였으나 산간의 밭은 자못 수확이 잘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답을 조사하여 급재(給災 재해를 입은 전답의 조세를 면제해 주는 것)해 주는 일은 위로는 나라의 살림과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고통과 관계되므로 평년이라 할지라도 진실로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거늘, 하물며 금년처럼 곳곳에서 재해를 입어 이 고을 저 고을에서 흉작을 보고해 오는 실정에서야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전번에 사목재(事目災) 1 5000결을 획하(劃下)하라는 특명을 내리셨는데 이는 실로 상례(常例)를 넘어선 전후에 보기 드문 은혜이니, 성상의 뜻을 선양하는 직책에 있는 자로서 특히나 십분 경계하고 백배 잘 살핀 다음 수령들을 연이어 신칙하여 고을마다 정리를 하게 하고 간간이 염탐하는 관리를 보내어 창고마다 살피게 하여 묵은 재탈(災頉)과 새 재탈 사이에 뒤섞이기 쉬운 것이나, 일찍 모내기하고 늦게 모내기한 것 사이에 구별하기 어려운 것 및 어느 면()이 재해가 많고 적은지와 어느 리()가 재해가 들고 풍실(豐實)한지를 별도로 조사하여 실정에 맞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려다 보니 자연 이리저리 꿰맞추게 되어 각 고을의 개장(槪狀)조차 마감해 들이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모두 도착된 다음에 신이 삼가 장부를 열람하여 재총(災摠 재결의 총수)을 비교하고 가감(加減)할 것을 변별하여 세세한 것까지 타당하게끔 만들어 차례대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재해가 일어난 해에 토지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므로 한번 착오가 생겨 혹 은혜가 고르게 베풀어지지 못하거나 조세를 편파적으로 징수한다는 원망이 나오게 되면, 이 또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성상의 뜻을 받드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이 이에 고을에서 올라온 보고와 백성들의 호소를 참고하고 직접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을 비교하여 한 도()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정했으니, 홍주(洪州)  39개 고을과 평신진(平薪鎭)은 우심읍(尤甚邑)에 올리고 충주(忠州)  18개 고을은 지차읍(之次邑)에 올리고 청풍(淸風)  7개 고을은 초실읍(稍實邑)에 올려 해당 고을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하여 예람(睿覽 임금이 열람함)하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개 이와 같이 등급을 나눈 것은 다만 격례(格例)에 따라 거행한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따져 들어가 말하자면 그 사이에 재해를 입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통틀어 논해 보면 등급을 달리할 만큼 우열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산간의 고을은 밭이 많은 데다 밭농사의 수확이 논농사의 수확보다 잘 되었으므로 간혹 초실읍이 나온 것이며, 바닷가의 고을은 논이 많으나 논농사의 수확이 밭농사의 수확보다 못하였으므로 대체로 우심읍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에 이른바 초실읍이라고 하는 곳도 거두어들인 수확을 가지고 비교해 보면 평년의 우심읍과 차이가 없으니, 지차읍이나 우심읍의 상황 또한 이를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우심읍 가운데 은진(恩津) · 석성(石城) · 부여(扶餘) · 예산(禮山) · 한산(韓山) · 연기(燕岐) · 서천(舒川) · 태안(泰安) · 덕산(德山)  9개 고을의 경우 강가의 토지는 척박하고 바다와 가까운 토지는 메말라 한눈에 보기에도 적지(赤地)여서 왕왕 모든 면()이 재황(災荒)으로 처리된 곳도 있으니, 이는 우심읍 가운데서도 특히 심한 고을입니다.

고을의 등급이 이미 나누어졌으니 면()을 나누는 일이 흉년에는 응당 시행되어야 할 것이며 리()를 나누고 가호(家戶)를 가리는 일 또한 그만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게다가 재해를 입은 곳이 예전에 비해 몇 갑절이나 되며, 한 평 안에서도 동쪽 서쪽이 판이하고 한 고() 안에서도 아래위로 현저히 달라서 우심면(尤甚面) 가운데에도 혹 초실호(稍實戶)가 있고 초실면(稍實面) 가운데에도 또한 우심호(尤甚戶)가 많이 있으니, 정밀하게 조사하는 정사(政事)를 시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전 고을로 나누어 그 대체(大體)만을 범범하게 논해서는 진실로 안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유별로 구분하게 하되 면()의 등급을 나누는 것은 고을의 보고가 올라오기를 조금 더 기다렸다가 성책(成冊)을 하여 추후에 비변사(備邊司)로 올려 보낼 계획입니다. ()를 나누고 가호를 가리는 일을 같은 식으로 기록하자면 결국 너무 번잡해지게 되겠기에 이것은 다만 영읍(營邑)에서만 사용하여 참고할 자료로 삼겠습니다.

본도(本道)로 말하자면 평소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다고 일컬어지며 평년에도 목숨을 연명하는 것조차 이어 가기가 어려운 실정인데, 이번의 참혹한 흉년을 돌아보면 옛날에도 드문 일이라 길쌈질도 그만두었을 뿐 아니라 소량의 양식도 똑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곡물 값이 배로 뛰어 다른 지역에서 사 오려고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추수가 한창인 계절에 목숨을 구걸하는 백성들과 봄이 채 되기도 전에 진휼을 청하는 백성들이 신의 일행이 가는 곳마다 말을 에워싸고 울며 호소하기를,

 

밭을 갈고 김을 매느라 온 힘과 양식을 다 바치고 열 식구가 이마에 손을 얹고 축수하며 추수 때가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한번 가뭄이 들어 온갖 곡식이 모두 흉작이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해전(海箭 어전(魚箭) 즉 어살), 염분(鹽盆 바닷물을 가마에서 졸여 소금 만드는 일), 백저(白苧 흰모시), 포소(圃蔬 채소 기르기)와 같은 민간의 부업이 될 만한 것들도 거의 다 실패하게 되었으니, 신포(身布)는 어디서 마련해 낼 것이며 환곡(還穀)은 어디에서 구해 바치오리까?”

하며, 수백 수천 명이 떼를 지어 모여듭니다. 그들을 일일이 대응할 겨를도 없거니와 신 또한 이 지경이 되니 대답할 말이 없어, 단지 조정에서 백성들을 자기 몸 상한 듯이 가슴 아파하고 어린애를 보호하듯이 여기는 덕의(德意)를 받들어 가는 곳마다 유시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위로해 줄 뿐입니다.

지금 보니 가을걷이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으므로 당장 구휼할 방법과 앞으로의 구제책을 다시 깊이 생각하여 계속해서 즉시 아뢸 계획입니다. 앙청(仰請)할 여러 조목들을 참작하고 마련하여 또한 일체 개좌(開坐 개록(開錄) 즉 기록)하였으니 묘당(廟堂 비변사)으로 하여금 성상의 지시를 받들어 분부하게 하소서.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C-001]연분(年分) 가청(加請) 장계 : 매년 호조에서 그해의 작황을 참고하여 조세 감면 대상인 급재결(給災結)과 조세 부과 대상인 실결(實結)의 총수를 정하여 각 도()에 반포한 것을 연분 사목(年分事目)이라 한다. 호조에서 연분 사목을 내려 보내면 각 도의 감사는 도내 고을 수령들이 재실(災實)을 보고한 개장(槪狀)을 참작하여, 고을별로 초실(稍實) · 지차(之次) · 우심(尤甚)으로 등급을 정한 뒤 급재결수(給災結數)를 배분하고 이를 성책(成冊)하여 호조에 보고한다. 이를 연분 장계라 한다. 호조에서 연분 사목으로 정해 준 급재(給災)를 사목재(事目災)라고 하며, 만약 사목재가 실제보다 적게 책정되었다고 판단되면 감사는 재결(災結)을 추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를 가청 장계라 한다.

[D-001]각처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 원문은 圭璧徧擧인데, 규벽(圭璧)과 같은 옥기(玉器)를 신에게 바치고 기우제를 드린다는 뜻이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음이 없고 이 희생물을 아끼지 않아, 규벽을 이미 다 바쳤거늘 어찌 나의 호소를 들어주시지 않나.靡神不擧 靡愛斯牲 圭璧旣卒 寧莫我聽라고 하였다.

[D-002]개장(槪狀) : 중요 내용을 개략적으로 보고한 문서로, 대개장(大槪狀)이라고도 한다.

[D-003]적지(赤地) : 재해를 입어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 땅을 말한다.

[D-004]() : 일정한 곳의 논밭을 말한다. 성종실록(成宗實錄) 6 4 23일 조에 토속어로 전지가 있는 곳을 고라 한다.俗以田之所在謂庫 하였다.

[D-005]관문(關文)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시달하는 공문서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분 가청 장계 정사년(1797, 정조 21)에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본도(本道)의 농사 형편은 이미 전후(前後)의 장계(狀啓)에서 대강 진술하였거니와, ()의 부임이 마침 사방 들판의 곡식들이 익어 가는 때였으므로 도로변에서 본 바로는 풍년이 들 희망이 없지 않았으며 열읍(列邑)의 보고를 참조해 보아도 또한 그렇게 파악되었습니다. 그런데 관할 지역 순행에 나섰을 때가 곡식들을 수확할 무렵이어서 직접 눈으로 본 바로는 앞서와 확연히 달라, 비단 비가 내리기를 빌고 있는 고을들만 큰 흉년이 든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순행길에 몸소 지나간 곳이 아니면 수령들을 직접 면대하여 물어보았고, 만약 또 멀리 떨어져 있는 궁벽한 곳이라면 편비(褊裨)를 나눠 파견하여 하나하나 자세히 탐문하고 곳곳마다 허위 보고를 적발하게 하였더니, 도내(道內)의 농사 정도가 보고 들은 것이 대략 동일하고 열읍(列邑)의 작황이 심중에 분명하게 파악되었습니다.

통틀어 논하자면 과연 혈농(穴農)이기는 하지만, 연해와 산간 고을 사이에 득실(得失)의 차이가 있고 한 고을 안에서도 재해와 풍실(豐實)이 다릅니다. 이는 대체로 모내기할 때부터 대부분 가뭄이 들어, 비록 방죽 아래에 있는 논이나 봇물이 닿는 땅이라 하더라도 수원(水源)이 마른 곳이 많아서 제대로 물을 대지 못하였고, 가끔씩 소낙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물이 적셔진 곳은 같은 들에서도 배미끼리 서로 물을 다투고, 같은 배미에서도 논두렁끼리 서로 물을 다투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때를 틈타서 모를 옮겨 심느라 자연히 시기를 놓치게 되다 보니 한 평 안에서도 모내기를 하지 못한 곳이 여기저기 많아졌습니다.

유월 이후부터는 한결같이 내리쪼이는 햇볕이 더욱 심하여 은진(恩津)  16개 고을은 칠월 한 달 동안 시종 기우제를 지내야 했으며, 늦게야 큰비가 내리기는 하였지만 말라붙은 벼포기를 소생시키기에는 별로 효험이 없었습니다.

무릇 바닷가의 소금기가 많은 땅은 모내기도 늦었거니와 그나마 곧바로 말라붙어, 미처 벼가 자라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금기가 올라오는 바람에 더러는 애초부터 이삭이 패지 못한 것도 있고 더러는 빈 이삭만 나온 것도 있으며, 심지어 온 들판을 바라보면 벼들이 갈대처럼 하얗게 서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골짜기에 가까운 척박한 고을은 일찌감치 가뭄을 입어 이삭도 크지 못했거니와 여문 열매 또한 드물었으며, 급기야 수확을 마치고 보니 평년보다 반이나 줄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백성들 사정이 급박한 것이 흉년을 만난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또한 감히 무슨 재해라 이름 붙여 말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여름과 가을 이래로 바람, 서리, 멸구, 우박 같은 일시적인 재앙도 없는 상태에서 단지 비가 끝내 흡족하지 못하여 절기(節氣)의 변화가 늦추어진 데서 일어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이 처음 부임하면서 풍년을 점쳤던 것이 허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비록 땅만 보고 사는 늙은 농사꾼조차도 저도 모르는 사이 가만히 앉아서 풍년을 놓친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농사의 대강입니다.

이어 밭농사에 대해 말하자면, 가뭄으로 타서 말라붙은 흙이 쇠처럼 굳어 싹을 잘 틔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나마 비를 기다려서 잡초를 제거하자니 자연 때가 지나고 말아 늦게 맺은 곡식은 절반이 쭉정이뿐이었으며, 모래흙에 메마른 밭의 경우는 간혹 온 고()가 다 버려져 종자를 찾을 희망조차 갖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면화는 아무리 한초(旱草 가뭄을 잘 견디는 식물)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너무 건조하면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비록 뿌리를 내릴 수 있다 할지라도 줄기가 왜소하고 가지가 성글어 꽃과 열매가 패지 못하여 제일 나중에 수확한 것은 겨우 큰 흉작을 면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밭농사의 대강입니다.

지금 한 도()의 좌우(左右)를 들어 논하면 우도(右道)는 해안에 접하여 논이 많고 밭이 적은 까닭에 벼가 조금이라도 익은 곳은 해안 고을이 많으며, 좌도(左道)는 산골짜기에 가까워서 밭이 많고 논이 적은 까닭에 각종 곡물이 조금이라도 익은 곳은 산간 고을이 비교적 낫습니다.

그리고 재해의 정도를 논하면 우도 해안의 포구에 가까운 논은 소금기가 유달리 심하고 좌도 산간의 높고 건조한 지대는 가뭄의 피해가 가장 심합니다. 신이 순행하며 살피는 길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도처에서 떼를 지어 어깨에 말라붙은 짚단을 메고 말 머리를 에워싸는 바람에 거의 앞으로 나가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이에 신이 하나하나 면대하여 각자 안심할 것이며 무분별하게 조세를 징수할 염려는 하지 말라는 뜻으로 타일렀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전답을 조사하여 급재(給災)를 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사로서, 위로는 국가 경비의 넉넉하고 모자람에 관계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이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급재를 베풀다 보면 나라 살림을 이어 가기 어렵고, 그렇다고 해서 과감하게 급재를 줄이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해 줄 길이 없습니다.

신이 변변치 못한 몸으로 외람되이 분수 밖의 관직을 받아, 밤낮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자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어찌하면 백성을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전하의 뜻을 만의 하나나마 받들까 생각하나, 그 길은 표재(俵災 재결을 배분하는 것)를 하는 정사보다 우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더하고 덜고 하는 사이에 털끝 하나라도 실상과 어긋난다면 신이 성은(聖恩)을 저버린 죄야 그래도 신 한 몸에 그치고 말겠으나, 나라의 살림은 어찌하며 백성의 고통은 어찌하겠습니까?

신이 열읍(列邑)의 개장(槪狀)이 모두 당도한 후로 정밀하게 분석하기에 힘썼는데, 보고된 재총(災摠) 중에서 검토 결과 타당한 것은 곧 모내기조차 못한 곳이 ()이고, 그 밖에 함손(鹹損 소금기로 인해 손상됨) · 준축(蹲縮 땅이 내려앉아 줄어듦) · 환진(還陳) 등 각종의 재탈(災頉) 결이며, 유래(流來)와 구초불(舊初不)의 경우로서 신재(新災)로 추이(推移)하여 분표(分俵 재결을 배분함)한 것이 또 1237결이어서, 신구(新舊)의 재탈(災頉)을 통계하면 도합 1 결입니다. 이를 사목재(事目災)로 획하(劃下) 1070결에 비하면 부족량이 결입니다. 만약 재해를 입은 열읍들을 통틀어서 따지자면 을묘년(1795)의 재해에 비하여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집중적으로 재해를 입은 지역만 가지고 말하자면 을묘년과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을묘년에 내린 표재(俵災) 2 5500결이었으니, 금년의 재탈이 을묘년에 비하여 3분의 2가 줄어든 것으로 볼 때 너무 지나치게 책정한 것은 아닐 듯합니다.

대저 금년의 농사는 들리는 바로는 호남과 영남이 특히 심하며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모두 가뭄으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이 관할하는 지역은 작황만 가지고 논한다면 차이가 있으나 재손(災損)을 비교해 보면 역시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이처럼 분등(分等)할 때에 신의 도를 연분(年分)  5 등에 묶어 두어 획하한 표재(俵災)가 겨우 1000결을 넘는 정도이니, 신이 아무리 변변치 못하나 도대체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의례적으로 장황하게 백성들의 고통을 실지 이상으로 늘어놓아 성상의 귀를 놀라게 하고 구중궁궐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성상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겠습니까. 만약 신이 한갓 성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아무 말 없이 세월을 보내며, 백성을 어린애 돌보듯이 하시는 성상의 은혜를 우러러 본받지 못하고 마침내 한 백성이라도 그 은택을 고루 받지 못해 탄식하게 한다면 조정에서 신을 범부(凡夫) 중에서 선발하여 특별히 직책을 주신 뜻이 자못 아닐 것입니다.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죽음을 무릅쓰고 간절한 마음을 아뢰는 바입니다.

전에 획급한 사목재 외에 부족한 급재(給災) 결을 특별히 더 획급해 주도록 하시면, 신이 삼가 순서에 따라 분표(分俵)하여 농사를 망친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다친 사람처럼 살피시는 성상의 은택을 골고루 받게 하겠습니다. 열읍의 등급을 나누는 일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므로 더욱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상호 참작하고 잘 재량하여 각각의 고을들을 우심읍(尤甚邑), 지차읍(之次邑), 초실읍(稍實邑)으로 구분하여 후면에 기록하였습니다. 앙청(仰請)할 여러 조목들을 참작하고 마련하여 일체 개좌(開坐)하였으니 아울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성상의 지시를 받들어 분부하게 하소서.

그리고 지금 재해를 가장 혹독하게 입은 우심읍 몇 고을의 백성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구휼이 있은 연후에야 자리를 잡고 생업을 지탱할 수 있을 터인데, 작년에 이미 약간의 풍년이 들었을 뿐 아니라 금년은 공통적으로 대흉(大凶)은 아닌 만큼, 격식을 갖추어 진휼하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갑작스레 거론할 바가 아니므로, 형편의 완급(緩急)에 따라 사진(私賑 수령이 자신의 녹봉을 털어 구휼함) 또는 구급(救急)의 방법을 통해 편의에 맞게 원조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은 기어코 면하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런 연유를 아울러 치계(馳啓)합니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혈농(穴農) : 곳에 따라 풍작과 흉작이 고르지 못한 농사, 즉 구메농사를 말한다.

[D-002]환진(還陳) : 논밭이 도로 묵어짐.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續還陳으로 되어 있다. 해마다 계속 묵히는 논밭을 속진전(續陳田)이라 한다.

[D-003]유래(流來) …… 경우 : 유래는 곧 여러 해 동안 계속 재해를 입은 논밭인 유래재결(流來災結)을 말하고, 구초불(舊初不)은 여러 해 전부터 경작하지 않고 묵히는 논밭을 말한다.

[D-004] 5  :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라 중중년(中中年)으로 분류되었다는 뜻이다.

[D-005]마치 …… 은택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문왕(文王)은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살피셨다.視民如傷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둔암집서(遯庵集序) 남을 대신하여 지은 것이다.

 

 

옛날 나의 선친이 일찍이 암행어사로서 호우(湖右 전라우도(全羅右道)) 지방의 민심을 채방(採訪)할 때에, 영광(靈光)에 사는 양군(梁君) 아무개가 성품이 순근(醇謹)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마치 한() 나라의 삼로(三老)가 농사에 힘쓰면서 효도와 우애를 다진 것과 같았으므로 술과 쇠고기로 위로하고 비단을 주어 장려할 만하다고 하였다.

얼마 후 조정에서 배척을 당해 호남 고을에 보직이 되자 양군이 예전에 은혜를 입었다 하여 따라와 문객(門客)이 되었고, 또 이로 인하여 왕래가 계속되어 한양에 와서도 문객이 되었다. 이때에 선친이 자주 전부(銓部 이조(吏曹))를 맡았으나 매위(靺韋 무부(武夫))와 제상(鞮象 역관(譯官))의 알현은 문전에서 거절하였으며, 심지어 먼 지방의 방기(方技)와 이술(異術)에 밝은 선비나 비록 평소 문장을 잘한다고 소문난 자에 이르러서도 모두 사절하고 한 번도 대면한 일이 없었다. 반면에 유독 양군만은 문객이 된 지 수십 년 동안 명성(名聲)이나 세리(勢利) 따위는 서로 잊어버리고 지냈다. 집 남쪽에 무성한 나무 그늘이 뜨락에 반쯤 내려와 덮게 되면 바둑을 여러 판 둘 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며, 다만 손에 책 한 권을 쥐고 저녁 내내 흥얼대면서 거의 기갈(飢渴)도 잊어버리고 형해(形骸)도 내버린 듯이 지냈다. 아마도 우리 집의 청백(淸白)하고 화락한 가풍에 깊이 탄복한 바 있어서 우리와 감고(甘苦)를 같이하여 문객이 된 것을 즐겁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집안의 젊은이들부터 그가 근후(謹厚)한 장자(長者)임을 흠모하여 따랐으며, 아래로는 하인들까지도 그를 공경하여 따를 줄을 알고 그가 문객으로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지낼 정도였다. 게다가 나는 그 당시 겨우 더벅머리 어린아이였으므로 그는 유모처럼 나를 안고서 입으로 동서남북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그어 주기도 하였다.

, 양군(梁君)은 생각해 보면 우리 양대(兩代)와 함께 지내며 백발이 된 사람이다. 그는 평소에 공손하여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다가도,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면 마치 강둑이 터져 물이 퀄퀄 내려가듯이 하였으며, 그 밖에 의술, 점술, 천문 역법, 풍수(風水)로 대상을 넓혀 이야기를 하여도 어느 것 하나 모르는 것이 없었다. 비록 그것이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독자적으로 터득하여 심오한 경지로 곧바로 나아갔으며 여러 학자들의 훈고(訓詁)에 구애되지 않은 점은 족히 칭찬할 만하였다. 또한 그의 문장은 속으로는 큰 기상이 들어 있고 겉으로는 호방하여, 글을 매끄럽게 다듬지 않았어도 예스러우면서 순박하고 노숙하면서 힘이 있어 볼 만한 것이 매우 많았다.

지금 그의 아들 아무개가 그 글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자 하여, 그 평생의 저술을 수집하여 몇 편()으로 정리하였는데 시()와 문()이 몇 권()이 된다. 그리고 재주 없는 내가 양대에 걸쳐 세의(世誼)가 있는 집안이라 하여 나의 거친 글을 청하기에 의리상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예전에 보고 기억나는 것을 낱낱이 서술하여 돌려보낸다.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 나라의 삼로(三老) : 한 나라 때 지방에서 덕행이 있는 장로(長老)를 삼로로 천거하여 향()에는 향삼로(鄕三老), ()에는 현삼로(縣三老), ()에는 군삼로(郡三老)를 두고, 지방관들을 도와 교화(敎化)에 힘쓰게 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공손앙(公孫鞅)이 진() 나라에 들어가다

 

 

 

임금께서 지으신 책문(策問)은 이러하다.

남이 자기를 비방한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 두려워하며 그 화를 피하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 공손앙은 끝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으니 계책이 밝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그에게 범인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음을 공숙좌(公叔座)가 알기는 하였으나, 위앙(衛鞅 공손앙)이 쓸 만한 인물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혜왕(惠王)이 등용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알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신하가 임금에게 고할 적에 지성으로 고하지 않고서 그 청을 받아들이게 한 사람은 없었다. 혜왕에게 그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청한 말을 보건대, 이는 대체로 공손앙을 기재(奇才)라고 한 칭찬과 임금을 신하보다 우선시하는 의리를 실증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온 나라를 들어다 그에게 맡기라고 청해 놓고 또다시 그를 죽이라고 권했으니, 어찌 앞뒤가 어긋난다는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소하(蕭何)가 한신(韓信)을 천거할 때 한신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한 고조(漢高祖)가 선뜻 그의 말을 따랐는데, 이는 단지 한 고조가 한 고조다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소하 또한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공숙좌가 진작에 지성으로 천거하고 충심으로 아뢴 다음, 위앙이 하는 일과 말을 살피고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을 다하게 했더라면, 혜왕이 과연 온 나라를 들어서 위앙에게 맡겼을 뿐만 아니라 진 효공(秦孝公)이 이룩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공렬(功烈)도 이룰 수 있지 않았겠는가?

 

() 아무개는 삼가 답합니다.

예로부터 신하가 그 임금에게 간언을 올림에 있어서는 어느 것이든 지성에서 우러나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풍언(諷言 넌지시 풍자함)으로써 간하는 것이 배우의 익살에 가깝고, 궤변으로써 대답하는 것이 회휼(回遹)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옛사람을 논한 후세의 논자(論者)들은 또한 그들의 간언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한 적이 없었고, 심지어는 죽은 뒤에 자신의 시신을 늘어놓게 한 일도 있었으나 군자가 오히려 그의 곧음을 인정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숙좌가 위앙을 천거한 것은 곧은 점으로는 사어(史魚)와 같고, 속임수를 쓴 점으로는 소하(蕭何)와 같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위앙의 나라 다스림과 한신(韓信)의 군사 거느림은 오직 크게 써야 할 능력이지 작은 일로써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무릇 길가에 재를 버리는 데에서 법을 세우고, 목재 하나 옮기는 데에서 상()을 미덥게 한 것은 곧 나라를 부유케 하고 군사를 강하게 하는 술책으로서, 이를 작은 관직에서나 일개 현()에서 시험했다면, 대중의 생각과 어긋나고 풍속을 놀라게 하여 당장에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며, 아무리 하루아침에 경상(卿相)의 자리에 앉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군주가 온 나라를 들어 맡기지 않았다면 위앙이 큰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것 또한 분명합니다.

이 때문에 평상시 일 없는 날에 위앙을 추천하고 아뢸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하는 자도 힘이 되지 못할까를 항상 걱정하고, 듣는 자도 깊이 신뢰할 수 없음을 늘 괴로워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하는 일과 그의 말을 살피는 방법은 인재를 등용하는 보통의 방법에 불과하며, 누차 시험하고 점차적으로 등용하는 방법은 단지 약한 나라의 대부(大夫)에게나 적용할 방법일 뿐이니, 도리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침저녁 좌우로 모시던 날에는 우선 참고 있다가 병문안을 온 임금을 대할 때에야 비로소 위앙을 천거한 것은, 죽음에 임박하여 비장한 말로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자신의 말을 반드시 믿게 하기에 부족하다 여겨 마지막에는 그를 죽여 버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비단 임금을 격동하여 그 부탁을 굳히자는 것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를 놓아주어 국경을 벗어나게 한다면 진실로 위() 나라에 후일의 근심이 있을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충신이 나라를 근심하는 고심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시신을 늘어놓게 한 직간(直諫)에도 부끄럼이 없다 할 것입니다.

소하가 한신을 천거한 경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소하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한 고조가 등용하지 않자, 결국은 한신을 추적했노라는 궤변을 하여 고조를 격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 한신은 적국의 한 도망병에 불과한데, 그를 위해 하루아침에 단장(壇場)을 만들고 갑작스레 상장(上將)의 인()을 수여하는 것이 충격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공숙좌의 지혜가 한 고조의 총명함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공숙좌는 단지 혜왕의 일개 구신(具臣)이요 위앙의 하류(下流)에 불과한 자입니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위 나라에 갔었는데 공숙좌가 그 임금에게 천거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인의(仁義)의 설이 천하를 통치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세상에서 진 효공(秦孝公)을 논하는 자들은 그가 위앙을 등용했다 해서 현명하다 하고, 양 혜왕(梁惠王)을 논하는 자들은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해서 어리석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설령 맹자가 진 나라에 갔다 해도 효공(孝公)은 반드시 그를 등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럴 줄을 아느냐 하면, 위앙이 먼저 제왕(帝王)의 도로써 말하자 효공이 이따금 졸았으니, 맹자라면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펴는 따위는 반드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약에 혜왕이 위앙을 직접 보았다면 반드시 허둥지둥 빗자루를 끼고 맞았을 것이니, 공숙좌의 천거가 없었더라도 나라를 들어 그에게 맡겼을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그것을 아느냐 하면, 처음 맹자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롭게 할지를 물은 것으로 보아, 공실(公室)을 강화하고 사문(私門)을 막아야 한다는 위앙의 주장이 나라를 이롭게 하는 술책이 아닌 것이 없으며 모두 혜왕이 듣기 좋아하는 말들이었으니, 혜왕이 부국강병의 공렬을 이루는 것이 어찌 진 효공보다 뒤졌겠습니까.

 

 

[B-001]고반당(考槃堂) : 당명(堂名) 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에서 따왔다. 고반은 은거한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지만, 쟁반을 악기처럼 두들기며 즐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연암은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할 때 서양금(西洋琴)을 쟁반 삼아 그 위에 밥사발을 놓고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젓가락으로 서양금을 두들기노라고 하면서, 그런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고반이라 지었다고 하였다. 弄丸堂集 卷4 與朴美仲趾源

[D-001]남이 …… 있겠는가 : ()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병이 위중하자 혜왕(惠王)이 병문안을 가서 그가 죽은 후의 대책을 물었더니 공숙좌가 대답하기를, “공손앙(公孫鞅)이 나이 비록 젊으나 기재(奇才)가 있으니 왕께서 온 나라를 들어다 맡기소서.” 하니, 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려 하였다. 이에 다시 왕께서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시겠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그런 다음 공손앙을 불러다 신하보다 임금을 우선시하는 마음에 너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빨리 도망치거라.” 하니, 공손앙이 왕이 나를 등용하라는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나를 죽이라는 말 또한 어찌 듣겠습니까?” 하고는 끝내 도망가지 않았다. 한편 혜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공숙이 병이 심하니 슬픈 일이오만, 나더러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게 하려 하니, 어찌 앞뒤 안 맞는 소리가 아니오.豈不悖哉라고 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02]한신을 …… 없다 : 승상 소하(蕭何)가 도망친 한신(韓信)을 데려와 한 고조에게 천거하면서, “왕께서 한중(漢中)에서 영원히 왕으로 지내고 싶으시면 한신을 쓸 일이 없겠으나, 반드시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와도 일을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03]성실하고 …… 때문이다 : 원문은 老實無 缺로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老實無妄耳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4]회휼(回遹) : 간사하고 편벽되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민(小旻) 정책이 회휼하니 언제 멈출 건가.謀猶回遹 何日斯沮라고 하였다.

[D-005]심지어는 …… 인정하였습니다 : 공자가어(孔子家語) 곤서(困誓)에 위() 나라 영공(靈公)이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미자하(彌子瑕)를 등용하자 대부(大夫) 사어(史魚)가 달려가 이를 간하였으나 영공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어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을 불러다 놓고, “내가 위 나라 조정에 거백옥을 등용하지도 못하고 미자하를 물리치지도 못하였다. 이는 내가 임금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니 죽어도 장례를 치를 수가 없구나. 내가 죽거든 내 시신을 창문 아래에다 그냥 두거라.”라고 하였다. 영공이 조문을 왔다가 이상하게 여겨 아들에게 물어서 그 연유를 알고는 깜짝 놀라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곧바로 거백옥을 등용하였다. 이에 대해 논어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孔子) 곧도다,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화살처럼 곧구나.”라는 말로 그를 칭송하였다.

[D-006]길가에 …… 세우고 : 공손앙이 변법(變法)을 만들면서 길가에 재를 버리는 사소한 잘못을 중형에 처함으로써 큰 법을 어기지 못하게 하였다. 史記 卷87 李斯列傳

[D-007]목재 ……  : 공손앙이 변법을 제정한 다음 이를 시행하기에 앞서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도성의 남문에 세 길이 되는 목재를 세워 놓고 이를 북문까지 옮겨다 놓는 사람에게는 50()을 상으로 주겠다고 선포한 후 목재를 옮기는 사람이 나오게 되자 곧바로 50금을 주어 백성들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08]병문안을 ……  : 원문은 東首拖紳之除際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공자는 병이 들어, 임금이 와서 살펴보시거든, 동으로 머리를 두시고, 조복(朝服)을 몸에 덮고 그 위에 큰 띠를 얹으셨다.疾 君視 東首 加朝服拖紳고 하였다.

[D-009]구신(具臣) : 단지 수효만 채우고 있는 쓸모 없는 신하를 말한다.

[D-010]위앙이 …… 졸았으니 : 위앙이 진()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霸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11]한 자를 …… 따위 : 원문은 枉尺直尋인데,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자존심을 조금 굽힘으로써 큰 이익을 얻는 짓을 말한다.

[D-012]빗자루를 …… 것이니 : 고대 중국에서는 귀빈을 맞을 때 길을 먼저 청소하고, 주인이 빗자루를 끼고 대문에서 손님을 맞음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풍습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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