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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도강록(渡江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도강록(渡江錄)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성경잡지(盛京雜識)
성경잡지(盛京雜識) 7월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27리다.
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월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백 62리다.
관내정사(關內程史)
관내정사(關內程史) 7월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월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백 40리다.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월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월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전편(前篇)에 9일 을묘(乙卯)를 계속하여 14일 경신(庚申)에 그쳤다. 모두 엿새 동안이다.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월 15일 신유(辛酉)에 시작하여 20일 병인(丙寅)에 그쳤다. 모두 6일 동안이다.
경개록(傾蓋錄)
경개록(傾蓋錄)
심세편(審勢編)
심세편(審勢編)
망양록(忘羊錄)
망양록(忘羊錄)
혹정필담(鵠汀筆談)
혹정필담(鵠汀筆談)
찰십륜포(札什倫布)
찰십륜포(札什倫布)
반선시말(班禪始末)
반선시말(班禪始末)
황교문답(黃敎問答)
황교문답(黃敎問答)
피서록(避暑錄)
피서록(避暑錄)
피서록보(避暑錄補)
양매시화(楊梅詩話)
양매시화(楊梅詩話)
동란섭필(銅蘭涉筆)
동란섭필(銅蘭涉筆)
옥갑야화(玉匣夜話)
옥갑야화(玉匣夜話)
행재잡록(行在雜錄)
행재잡록(行在雜錄)
금료소초(金蓼小抄)
금료소초(金蓼小抄)
환희기(幻戲記)
환희기(幻戲記)
산장잡기(山莊雜記)
산장잡기(山莊雜記)
구외이문(口外異聞)
구외이문(口外異聞)
황도기략(黃圖紀略)
황도기략(黃圖紀略)
알성퇴술(謁聖退述)
알성퇴술(謁聖退述)
앙엽기(盎葉記)
앙엽기(盎葉記)
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되 신명(神明)의 경지를 통하고 사물(事物)의 자연법칙을 꿰뚫은 것으로서 《역경(易經)》과 《춘추(春秋)》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역경》은 미묘하고 《춘추》는 드러내었으니, 미묘란 주로 진리를 논한 것으로서, 그것이 흘러서는 우언(寓言)이 되는 것이요, 드러냄이란 주로 사건을 기록하는 것으로, 그것이 변해서 외전(外傳)이 이룩되는 것이다.
저서(著書)하는 데는 이러한 두 갈래의 방법이 있을 뿐이다. 내 일찍이 시험삼아 논하여 보았노라. 《역경》의 육십사괘(六十四卦) 중에서 언급한 물건으로서 용이니, 말이니, 사슴이니, 돼지니, 소니, 양이니, 범이니, 여우니, 또는 쥐니, 꿩이니, 독수리니, 거북이니, 붕어니 하는 것들이 모두 다 참으로 있었던 물건이라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하진 못할 것이다.
또 인간에 있어서는 저 웃는 자, 우는 자, 부르짖는 자, 노래부르는 자나, 또는 눈먼 자, 발저는 자, 엉덩이에 살이 없는 자, 그 척추의 고기가 벌어진 자 들을 언급하였는데, 그런 인간이 참으로 있었다고 생각되는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초(蓍草)를 뽑아서 괘(卦)를 벌이면, 그 참된 상(象)이 곧 나타나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미묘한 곳으로부터 드러내는 경지로 지향하는 까닭이었으니, 우언(寓言)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쓴 것이다.
《춘추》중에 기록된 2백 42년 사이의 일에는, 온갖 제사와 수렵(狩獵)과 조회와 회합과 정벌(征伐)과 침입이, 실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좌구명(左丘明)ㆍ공양고(公羊高)ㆍ곡량적(穀梁赤)ㆍ추덕보(鄒德溥)ㆍ협씨(夾氏) 등의 전(傳)이 제각기 같지 않을 뿐더러, 이를 논하는 자들이 남이 반박하면 나는 지키기로 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는 드러난 곳에서부터 미묘한 곳으로 드는 까닭이었으니, 외전(外傳)을 쓰는 이가 이러한 방법을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 기록에, “장주(莊周)가 저서에 능하다.”고 일렀던 것이다. 장주의 저서 중에 나타난 제왕(帝王)과 성현(聖賢)이나, 임금과 정승, 처사(處士)와 변객(辯客) 들에 대한 일도, 더러는 정사(正史)에서 빠뜨린 일을 보충할 수 없지 않을 것이다. 장(匠) 석(石)이나 윤(輪) 편(扁)이 반드시 그 사람이 있었을 것이며, 심지어는 부묵자(副墨子)니 낙송손(洛誦孫)이니 하는 자는 어떤 인물들이었던가. 또 망량(罔兩 물귀신)이니 하백(河伯 물귀신)이니 하는 귀신이 과연 말할 수 있는 존재였던가. 외전이라면 참과 거짓이 서로 섞여 있겠고, 우언이라 하더라도 미묘함과 드러냄이 잇따라 변해지곤 하여, 사람으로서는 그 원인을 측량할 수 없으므로 이를 조궤(弔詭 궤변(詭辯))라 불러 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학설을 결국 폐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논평을 잘 전개하였기 때문이니, 그를 저서가(著書家)로서의 웅(雄)이 아니라 이르진 못할 것이다.
이제 대체로 연암씨(燕巖氏)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알지 못하겠다. 그 어떠한 글이었던고. 저 요동(遼東) 들을 건너서 유관(渝關)으로 들어 황금대(黃金臺) 옛 터에 서성이고, 밀운성(密雲城 하북성에 있다)으로부터 고북구(古北口)를 나서 난수(灤水) 가[邊]와 백단(白檀 밀운성의 현(縣))의 북녘을 마음껏 구경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땅이 있었으며, 또 그 나라의 석학(碩學)ㆍ운사(韻士)와 함께 교제하였는바 진실로 그런 인물이 있었으며, 사이(四夷)가 모두 이상한 모양과 기괴한 옷에 칼도 머금고 불도 마시며, 황교(黃敎) 반선(班禪)의 난쟁이가 비록 괴이한 듯하지마는 그가 반드시 망량이나 하백은 아닐 것이요, 진귀한 새나 기이한 짐승, 아름다운 꽃이나 이상한 나무의 그 정태(情態)를 곡진히 묘사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어찌 일찍이 그 등마루의 길이가 천 리라느니, 그 나이가 8천 세라느니 하는 따위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에서 비로소 장주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없음이 아닌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패자(覇者)에 비한다면, 진 문공(晉文公)은 허황하고 제 환공(齊桓公)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ㆍ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
[주C-001]열하일기 서(熱河日記序) : 다른 여러 본에는 모두 이 서(序)가 보이지 않고, 다만 최근에 발견된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 실려 있으므로 이에 추가하였다.
[주D-001]우언(寓言) : 말이나 글에 실제가 아닌 뜻을 의탁한 것이니, 장주(莊周)의 《남화경(南華經)》 중에 우언편(寓言篇)이 있다.
[주D-002]외전(外傳) : 정사(正史)에 싣지 않은 전기를 내전(內傳)과 구별하기 위한 서술이니, 《방경각외전(放瓊閣外傳)》이 이에 해당한다.
[주D-003]시초(蓍草) : 괘(卦)를 뽑는 데 쓰는 영초(靈草).
[주D-004]회린(悔吝) : 회(悔)는 괘(卦)의 상체(上體)요, 린(吝)은 인색(吝嗇)함이니, 곤괘(坤卦)에서 나타난 효상(爻象)의 하나.
[주D-005]좌구명(左丘明) : 춘추 때 노(魯)의 태사(太史).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주D-006]공양고(公羊高) : 춘추 때 자하(子夏)의 제자. 역시 《춘추전》을 지었다.
[주D-007]곡량적(穀梁赤) : 역시 자하의 제자로서 《춘추전》을 지었다.
[주D-008]추덕보(鄒德溥) : 명(明)의 학자. 덕함(德涵)의 아우. 《춘추광해(春秋匡解)》를 지었다.
[주D-009]장주(莊周) : 춘추 시대의 철학가(哲學家). 저서에는 《남화경(南華經)》이 있다.
[주D-010]장(匠) 석(石) : 옛 장인(匠人). 석(石)은 그의 이름.
[주D-011]윤(輪) 편(扁) : 옛 수레바퀴를 만드는 공인. 편(扁)은 그의 이름.
[주D-012]부묵자(副墨子)니 …… 하는 자 : 문자(文字)에 대한 의인칭(擬人稱)이니, 《남화경》 대종사(大宗師)에, “나는 부묵자에게 들었고, 부묵자는 또 낙송손(洛誦孫)에게 들었노라.” 하였다. 낙송은 반복(反復)하여 외는 것을 이름이니, 역시 의인칭이다.
[주D-013]연암씨(燕巖氏) : 저자 연암을 일컫는 말.
[주D-014]유관(渝關)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지명.
[주D-015]황금대(黃金臺) : 하북성(河北省)에 있는데, 춘추 시대 연 소왕(燕昭王)이 세웠다.
[주D-016]고북구(古北口) : 하북성에 있는 관(關) 이름. 곧 호북구(虎北口).
[주D-017]난수(灤水) : 찰합이(察哈爾)에서 발원하여 열하성(熱河省)을 거쳐 발해(渤海)로 들어간다.
[주D-018]사이(四夷) : 중국을 중심으로 하여 동이(東夷)ㆍ남만(南蠻)ㆍ서융(西戎)ㆍ북적(北狄)을 말한다.
[주D-019]황교(黃敎) : 서장(西藏) 라마교(喇嘛敎)의 한 파. 그 교의 중들이 누른 빛깔의 옷을 입었으므로 이름하였다.
[주D-020]반선(班禪) : 황교 즉 라마교의 교주(敎主). 반(班)은 박학(博學)이요, 선(禪)은 광대(廣大)의 뜻을 가졌다.
[주D-021]그 …… 천 리라느니 : 《남화경》에 새 위나 대붕(大鵬)의 등마루가 천 리나 된다 하였다.
[주D-022]그 …… 8천 세라느니 : 《남화경》에 이른바 영춘(靈椿)이 8천 년을 묵었다 하였다.
[주D-023]진 문공(晉文公) : 춘추 시대 진의 임금. 문공은 시호요, 이름은 중이(重耳)니, 당시 오패(五覇)의 하나.
[주D-024]제 환공(齊桓公) : 춘추 시대 제의 임금. 환공은 시호요, 이름은 소백(小白)이니, 역시 오패의 하나.
[주D-025]이용(利用)ㆍ후생(厚生) : 정덕(正德)과 함께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이른바 삼사(三事)가 된다.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도강록(渡江錄)
도강록(渡江錄)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하여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요양(遼陽)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1. 도강록 서(渡江錄序)
2. 6월 24일 신미(辛未)
3. 25일 임신(壬申)
4. 26일 계유(癸酉)
5. 27일 갑술(甲戌)
6. 28일 을해(乙亥)
7. 29일 병자(丙子)
8. 7월 1일 정축(丁丑)
9. 2일 무인(戊寅)
10. 3일 기묘(己卯)
11. 4일 경진(庚辰)
12. 5일 신사(辛巳)
13. 6일 임오(壬午)
14. 7일 계미(癸未)
15. 8일 갑신(甲申)
16. 구요동기(舊遼東記)
17. 관제묘기(關帝廟記)
18.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19. 광우사기(廣祐寺記)
20. 9일 을유(乙酉)
도강록 서(渡江錄序)
무엇 때문에 ‘후삼경자(後三庚子)’라는 말을 이 글 첫 머리에 썼을까. 행정(行程)과 음(陰)ㆍ청(晴)을 적으면서 해를 표준 삼고 따라서 달수와 날짜를 밝힌 것이다. 무엇 때문에 ‘후’란 말을 썼을까. 숭정(崇禎) 기원(紀元)의 뒤를 말함이다. 무엇 때문에 ‘삼경자’라 하였을까. 숭정 기원 뒤 세 돌을 맞이한 경자년을 말함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숭정’을 바로 쓰지 않았을까. 장차 강을 건너려니 이를 잠깐 피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를 피했을까. 강을 건너면 곧 청인(淸人)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의 연호(年號)를 썼으매 감히 숭정을 일컫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대로 ‘숭정’을 쓰고 있을까. 황명(皇明)은 중화인데 우리나라가 애초에 승인을 받은 상국인 까닭이다. 숭정 17년에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나라를 위하여 죽은 뒤 명이 망한 지 벌써 1백 30여 년이 경과되었거늘 어째서 지금까지 숭정의 연호를 쓰고 있을까. 청이 들어와 중국을 차지한 뒤에 선왕의 제도가 변해서 오랑캐가 되었으되 우리 동녘 수천 리는 강을 경계로 나라를 이룩하여 홀로 선왕의 제도를 지켰으니, 이는 명의 황실이 아직도 압록강 동쪽에 존재함을 말함이다. 우리의 힘이 비록 저 오랑캐를 쳐 몰아내고 중원(中原)을 숙청하여, 선왕의 옛 것을 광복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사람마다 모두 숭정의 연호(年號)라도 높여 중국을 보존하였던 것이다.
숭정 156년 계묘에 열상외사(洌上外史)는 쓰다. ‘후삼경자(後三庚子)’는 곧 우리 성상(聖上 정조(正祖)) 4년(1780) 청 건륭(淸乾隆) 45년 이다.
[주C-001]도강록 서(渡江錄序) : 연암의 ‘수택본(手澤本)’에는 《열하일기 (熱河日記)》 서(序)라 하여 《열하일기》 첫머리에 두었으나 그릇되었다.
[주D-001]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 명의 최후 황제로서, 1635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에 북경이 함락되자 자살하였다.
[주D-002]열상외사(洌上外史) : 연암의 별호(別號). ‘수택본’에는 열상외수(洌上外叟)로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6월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의주관(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馬訾水)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또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이 지었다. 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황하로 모여들므로 강으로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대체 이 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그럼에도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중류(中流)의 모래톱마저 흔적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행 중 역원(譯員)들은 다투어 옛 일을 끌어대어 날짜 늦추기를 굳이 청하고 의주 부윤[灣尹]이재학(李在學) 역시 비장(裨將 사신에게 시중드는 관원)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했으나,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하여 장계(狀啓)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꽉 덮였고 빗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소쇄(梳灑)가 끝나자 행장을 정돈하고, 가서(家書)와 모든 곳의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把撥) 편에 부치고 나서, 아침 죽을 조금 마시고, 천천히 관(館)에 이르렀다. 모든 비장들은 벌써 군복과 전립(戰笠)을 갖추었는데, 머리에는 은화(銀花)ㆍ운월(雲月)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藍紡紗紬) 전대(纏帶)를 두르고 환도(環刀)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모양이 어떻소.”
하며 떠든다. 그 중에 노 참봉(盧參奉) 이름은 이점(以漸), 상방(上房) 비장 은 첩리(帖裏) 첩리는 방언(方言)으로 철릭[天翼]이라 한다. 비장은 우리 국경 안에서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협수(狹袖)로 바꿔 입는다. 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우람스러워 보인다. 정 진사(鄭進士) 이름은 각(珏), 상방 비장 가 웃음으로 맞으면서,
“오늘이야 정말 강을 건너게 되겠죠.”
하자, 노 참봉은 옆에서,
“이제 곧 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둘에게,
“옳지 옳아.”
했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관(館)에 묵어서 모두들 지루한 생각을 품어 훌쩍 날고 싶은 기분이다. 가뜩이나 장마에 강이 불어서 더욱 조급하던 참에 떠날 날짜가 닥치고 보니, 이제는 비록 건너지 않으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 앞 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다.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매 운산(雲山)이 아득하여 인정이 여기에 이르자 서글퍼서 후퇴할 의사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번 구경을 해야지.”
하고,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실로 둘째에 속할 것이고, 그들의,
“오늘에야 강을 건넌다.”
하면서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곧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일 뿐이다.
역관 김진하(金震夏) 2품 당상관 는 늙고 병이 위중하여 여기서 떨어져 되돌아가게 되자, 정중하게 하직하니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쭝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昌大 연암의 마부(馬夫) 이름)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張福 연암의 하인 이름)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성문(城門)에 못 미쳐 소나기 한 줄기가 동에서 몰려든다. 이에 말을 급히 달려 성 문턱에서 내렸다. 홀로 걸어서 문루(門樓)에 올라 성 밑을 굽어 보니,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섰고, 장복은 뵈지 않는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 옆 한 작은 일각문(一角門)에 버티고 서서 위아래를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윽고 둘은 삿갓으로 비를 가리며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바람나게 걸어온다.
알고 보니 둘이서 저희들 주머니를 털어서 돈 스물 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을 갖고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터에 그렇다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술을 샀다 한다. 나는,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다 대지도 못하옵죠.”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네놈들이 어찌 술을 할 줄 알겠니.”
하고 한바탕 꾸짖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 위안하는 말로,
“이도 먼 길 나그네에겐 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龍灣)ㆍ철산(鐵山)의 모든 메를 바라보니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담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니, 무더운 구름이 잠깐 피어 오르고 백마산성(白馬山城) 서쪽 한 봉우리가 갑자기 그 반쪽을 드러냈는데, 그 빛이 하도 푸르러서 흡사 우리 연암서당(燕巖書堂)에서 불일산(佛日山) 뒷봉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싶었다.
홍분루 높은 다락 막수 아씨 여의고는 / 紅粉樓中別莫愁
두어 기마 가을 바람에 변방을 달리었네 / 秋風數騎出邊頭
그림배에 실은 퉁소 장고 어이하여 소식 없나 / 畵船簫鼓無消息
애끊고 추억할 제 우리 청남 첫째 골을 / 腸斷淸南第一州
이 시는 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가 일찍이 심양(瀋陽봉천(奉天))으로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내 이제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읊고 나서,
“이건 국경을 넘는 이가 부질없이 무료한 정서를 읊은 것이겠지. 제 이곳에서 무슨 그림배ㆍ퉁소ㆍ장고 따위를 얻어서 놀이를 했단 말인가.”
하고,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에 형경(荊卿)이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할 제 머뭇머뭇 떠나지 않는지라, 태자(太子)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나 의심하고, 진무양(秦舞陽)을 먼저 떠나 보내고자 하였다. 형경은 이에 노하여 태자에게 꾸짖기를,
“내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동지(同志) 한 분을 기다려 함께 떠나려 함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경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한 듯싶다. 태자가 만일 형경의 마음을 의심할진대 이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리라. 그러나 형경의 기다리는 사람이란 또한 진정코 한 개의 성명을 가진 실재 인물은 아닐 것이다. 대체 한 자루 비수(匕首)를 끼고 불칙한 진(秦)에 들어가려면 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족할지니 어찌 별도로 동지를 구하리오. 다만 차디찬 바람에 노래와 축(筑)으로 애오라지 오늘의 즐거움을 다했을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지은이는 그 사람이 길이 먼 탓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변명하였으니, 그 ‘멀리’라는 말이 참 교묘한 칭탁이다. 그 사람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일 것이요, 그 약속이란 천하에 다시 변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떠남을 당하여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았으리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반드시 초(楚)ㆍ오(吳)ㆍ삼진(三晉)의 먼 곳이 아닐 것이요, 또 반드시 이 날로써 진으로 들어가기를 기약하여 손잡고 맹세한 일도 없는 듯싶다. 다만 형경이 의중(意中)에 문득 생각나는 어떤 벗을 기다린다 하였을 따름이어늘, 이 글을 적은 이는 또한 형경의 의중(意中)의 벗을 이끌어다가 그 사람하고는 부연 설명하였으나, 그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함을 말함이니, 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서 막연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이라 하여 형경을 위로함이요, 또한 그 사람이 혹시 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릴까 저어하여 그가 오지 못할 것임을 밝혔으니, 이는 형경을 위하여 그 사람이 오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긴 것이다.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 하면, 나는 이미 그를 보았을 것이다. 응당 그 사람의 키는 일곱 자 두 치, 짙은 눈썹에 검은 수염, 볼이 처지고 이마가 날카로웠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줄 알리오마는 이제 내 혜풍(惠風)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안 것이다. 혜풍(惠風)의 이름은 득공(得恭)이요, 호는 영재(泠齋)다.
정사(正使)의 전배(前排)기치(旗幟)와 곤봉(棍棒) 따위를 앞에 세웠으므로 전배라 한다. 가 설렁이면서 성을 나서니, 내원(來源)과 주 주부(周主簿) 내원(來源)은 나의 삼종제(三從弟)요, 주 주부(周主簿)의 이름은 명신(命新)인데, 모두 상방의 비장이다. 가 두 줄로 서서 간다. 채찍을 옆에 끼고 몸을 솟구어 안장에 올라 앉으매 어깨가 으쓱하고 머리가 꼿꼿한 품이 미상불 날쌔고 용맹스럽긴 하나, 부대 차림이 너무 너털거리고, 구종들의 짚신이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어달렸으며,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조금 뒤에, 부사(副使)의 행차가 성에 나감을 기다려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하여 가장 뒤떨어져 구룡정(九龍亭)에 이르니, 여기가 곧 배 떠나는 곳이다. 이때, 만윤(灣尹)은 벌써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서장관(書狀官)이 맑은 새벽에 먼저 나가서 만윤과 함께 합동 수사함이 전례이다. 방금 사람과 말을 사열(査閱)하는데, 사람은 성명ㆍ거주ㆍ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삼고 금물을 뒤지니, 중요품으로 황금(黃金)ㆍ진주(眞珠)ㆍ인삼(人蔘)ㆍ초피(貂皮 수달피)와 포(包) 이외에 남은(濫銀)이었고, 영세품(零細品)은 새 것이나 옛 것을 통틀어 수십 종에 달하므로 이루 다 헤일 수 없었다.
구종들에는 웃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지 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에게는 행장을 끌러 본다. 이불 보퉁이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곽이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사람들은 제각기 주워 담으면서 흘깃흘깃 서로 돌아다 보곤 한다. 대체 수색을 아니하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하자면 이렇듯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용만의 장수들은 이 수색보다 앞서 가만히 강을 건너가는 걸 누구로서 금할 재간이 있으리오. 금물이 발견된 경우에 첫째 문에 걸린 자는 중곤(重棍)을 맞히는 한편 물건을 몰수하고 다음 문이면 귀양 보내고 마지막 문에는 목을 베어 달아서 뭇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그 법의 마련인즉 엄하기 짝이 없다. 이번 길에는 원포(原包)조차 반도 차지 못하고 빈 포도 많으니 남은의 있고 없음이야 따질 것도 없었다.
다담상(茶啖床 교자상)은 초라하고 그나마 들어오자 곧 물려 내니 대체 강 건너기에 바빠서 젓갈을 드는 이가 없다. 배는 다섯 척뿐인데 마치 한강(漢江)의 나룻배와 비슷하되 조금 클 뿐이다. 먼저 방물(方物)과 인마를 건네고 정사의 배에는 표자문(表咨文 국서(國書))과 수역(首譯역관 중의 수석)을 비롯하여 상사의 하인들이 함께 타고 부사와 서장관과 그 하인들이 또 한 배에 탔다.
이에 용만의 이교(吏校)ㆍ방기(房妓)ㆍ통인(通引)과 평양에서 모시고 온 영리(營吏)ㆍ계서(啓書)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한다. 상사 마두(馬頭) 순안(順安)의 종으로 이름은 시대(時大)다. 의 창알(唱謁) 소리가 채 마치지 못해서 사공이 삿대를 들어 선뜻 물에 넣는다.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격한 듯싶었다. 저 통군정(統軍亭)의 기둥과 난간과 헌함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내가 홍군(洪君) 명복(命福)수역(首譯) 더러,
“자네, 길을 잘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또,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응당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일 것일세.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倫理)와 만물의 법칙(法則)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이 있음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 찾을 게 아니라, 곧 이 물과 언덕 가에 있는 것이란 말야.”
하고 답했다. 홍은 또,
“외람히 다시 여쭈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또 답했다.
“옛 글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해지고 도심(道心)은 오직 가늘어질 뿐’이라고 하였는데,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기하학(幾何學)에 있어서 한 획의 선(線)들을 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그 세밀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였은즉 곧 빛이 있고 없음의 가늠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불씨(佛氏)는 다만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지. 그러므로 그 즈음에 선처함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 능할 수 있을 테니 옛날 정(鄭)의 자산(子産) 같은 이면 능히 그러할 수 있겠지.”
이렇게 수작하는 사이에 배는 벌써 언덕에 닿았다. 갈대가 마치 짜놓은 듯 빽빽이 들어서서 땅바닥이 뵈지 않는다. 하인들이 다투어 언덕에 내려가서 갈대를 꺾고 빨리 배 위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서 펴고자 하나, 갈대 한 그루가 칼날 같고, 또 검은 진흙이 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정사 이하 모두가 우두커니 갈밭에 서 있을 뿐이다.
“앞서 건너간 사람과 말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도, 다들,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다. 또,
“방물은 어디 있어.”
해도 역시,
“모르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멀리 구룡정 모래톱을 가리키면서,
“우리 일행의 인마가 아직도 거지반 건너지 못하고 저기 개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곧 그들인 것 같습니다.”
한다. 멀리 용만쪽을 바라보매 한 조각으로는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 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그리로 쬐는 햇살이 마치 한 점 샛별 같아 뵌다.
이때 커다란 뗏목이 거센 물살에 떠내려온다. 시대(時大 상사 마두(馬頭)의 이름)가 멀리서,
“웨이.”
하고 고함친다. 이는 대체 남을 부르는 소리인데, 저들을 높이는 말이다. 한 사람이 뗏목 위에 일어서서,
“당신들은 어찌 철 아닌 때에 조공(朝貢)을 바치려 중국을 가시나요. 이 더위에 먼 길을 가시려면 오죽이나 고생되겠소.”
한다. 시대는 또,
“너희들은 어느 골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어디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냐.”
하고 묻는다. 그는 답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봉황성(鳳凰城)에 사는데, 시방 장백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요.”
하고,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뗏목은 어느 새 까마득히 가버렸다.
이 즈음에 두 갈래 강물이 한데 어울려서 중간에 한 섬이 이룩되었다. 먼저 건너간 사람과 말들은 잘못 여기에 내렸으니, 그 거리는 비록 5리밖에 되지 않으나 배가 없어서 다시 건너지 못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에 사공에게 엄명을 내려서 배 두 척을 불러 재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였으나, 사공은,
“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배로 올라감은 아마 하루 이틀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사신들이 모두 홧증을 내어 배 일을 맡은 용만의 군교(軍校)를 벌하고자 하였으나 딱하게도 군뢰(軍牢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가 없다. 알아본 즉 군뢰 역시 먼저 건너 잘못 중간 섬에 내렸기 때문이다. 부사의 비장 이서귀(李瑞龜)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마두(馬頭)를 호통하여 용만 군교를 잡아들였으나, 그 놈을 엎을 자리가 없으므로 볼기를 반만 까고 말 채찍으로 네댓 번 때리며 끌어내어서 빨리 거행하라고 호통한다. 용만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쥐고 또 한 손으론 고의춤을 잡으면서 연방,
“예에, 예이”
하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배 두 척을 내어 사공이 물에 들어서서 배를 끌었으나, 워낙 물살이 세어서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 가량 후퇴하고 만다. 아무리 호통한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다.
이윽고 배 한 척이 강 기슭을 타고 나는 듯이 빨리 내려오니 이는 군뢰가 서장관의 가마와 말을 거느리고 오는 건데, 장복이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구나.”
하니, 기뻐하는 말이다. 이에 두 놈을 시켜서 행장을 점검해 보니 모두 탈이 없으나, 다만 비장과 역관이 타던 말이 혹은 오고 더러는 오지 않았으므로, 이에 정사가 먼저 떠나기로 했다. 군뢰 한 쌍이 말 타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하고 또 한 쌍은 보행으로 앞을 인도하되 버스럭거리면서 갈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내가 말 위에서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 보니,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두꺼워서 화살을 만들 수는 없으나 붓자루를 만들기에는 알맞을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머리를 나는 새처럼 빠르게 갈대를 뛰어넘어가니 일행이 모두 놀랐다.
10리를 가서 삼강(三江)에 이르니, 강물이 비단결같이 잔잔하다. 이름은 애랄하(愛剌河)이다. 어디서 발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십 리 가량에 불과한데도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음을 보아 서로 근원이 다른 줄을 알겠다. 배 두 척이 보이는데, 꼴이 마치 우리나라 놀잇배와 비슷하나 길이나 넓이는 그만 못하되 제도는 퍽 튼튼하고도 치밀한 편이다. 배 부리는 이는 모두 봉황성 사람으로 사흘 동안을 여기서 기다리노라고 식량이 다하여 굶주렸다고 말한다. 대체 이 강은 너나없이 서로 나다니지 못하는 곳이나, 우리나라의 역학(譯學 역관들의 관계 사업)이나 중국 외교 문서가 불시에 교환할 일이 생기므로 봉성 장군(鳳城將軍봉황성에 주둔한 중국측 장수)이 이에 배를 준비해 둔 것이라 한다. 배 닿는 곳이 몹시 질척질척하다. 나는,
“웨이.”
하고는 한 되놈을 불렀다. 이는 아까 시대한테서 겨우 배운 말이다. 그 자가 냉큼 상앗대를 놓고 이리로 오므로 나는 얼른 몸을 솟구쳐 그 등에 업히니, 그 자는 히히거리고 웃으면서 배에 들여다 놓고 후유하고 긴 숨을 내뿜으면서,
“흑선풍(黑旋風) 어머니가 이토록 무거웠다면 아마도 기풍령(沂風嶺)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한다. 주부(主簿) 조명회(趙明會)가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는다. 내가,
“저 무식한 놈이 강혁(江革)은 몰라도 이규(李逵)는 어찌 알았던고.”
했더니, 조군(趙君)이,
“그 말 가운데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애초에 이규의 어머니가 이렇게 무겁다면 비록 이규의 신력(神力)으로도 등에 업은 채 높은 재를 넘지 못했으리라는 의미였고, 또 이규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그는 이렇게 살집이 좋은 분을 만일 저 주린 호랑이에게 주었다면 오죽 좋으랴 하는 의미죠.”
하고, 설명해 준다. 나는
“제 따위들이 어찌 이처럼 유식한 문자를 쓸 줄 안단 말이오.”
했다. 조군은,
“옛 말에 눈을 부릅떠도 고무래정(丁) 자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저런 놈 따위를 두고 이름이었건마는, 그는 패관(稗官) 기서(奇書)를 입에 담아둔 상용어(常用語)로 쓰는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관화(官話)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이 애랄하의 너비는 우리 임진강(臨津江)과 비슷하다. 여기서 곧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한다. 우거진 숲은 푸른 장막을 둘렀고, 군데군데 호랑이 잡는 그물을 쳐 놓았다. 의주의 창군(鎗軍)이 가는 곳마다 나무를 찍어서 소리가 온 들판에 울려온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판국이 툭 트이고, 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그 속에 은은히 큰 부락들이 자리 잡고 개와 닭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하기에도 알맞을 것 같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편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곳이 없으니, 의당히 이곳이 거진(巨鎭)이나 웅부(雄府)를 설치함직하거늘, 너나없이 이를 버려두어 아직까지 공지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고구려 때에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이다. 명(明) 때에 진강부(鎭江府)를 두었더니, 청이 요동(遼東)을 함락시키매 진강 사람들이 머리 깎기를 싫어하여 혹은 모문룡(毛文龍)에게 가고 혹은 우리나라에도 귀화하였는데, 그 뒤에 우리나라로 온 사람은 모조리 청의 요구에 의하여 돌려보냈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많이 유해(劉海 명(明)을 저버린 장수)의 난리에 죽었다. 이리하여 공지가 된 지도 벌써 백여 년에 쓸쓸하게도 산 높고 물 맑은 것만 눈에 띌 따름이다.
모든 노둔(露屯) 친 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한다. 역관은 혹 세 사람씩 한 막에, 또는 다섯 사람씩 장(帳) 하나를 쳤고, 역졸(驛卒)과 마부(馬夫)들은 다섯씩 또는 열씩 어울려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 들었다. 밥짓는 연기가 자욱히 서리고, 인마소리 소란한 품이 의젓한 한 마을을 이룩하였다. 용만서 온 장수들 한 패가 저희들끼리 한 곳에 모였는데, 시냇가에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고, 한편에서는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며 나물을 볶고, 밥은 낱낱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니 그들의 살림이 매우 푸짐하다.
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황혼이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놓되,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찍어다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힌다. 군뢰가 나팔을 한 마디 불면 3백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비함이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군뢰란 만부(灣府)에서 가장 기운 센 자를 뽑아온 것인데, 이 일행 하인들 중에서 특히 일도 많이 하고 먹음새도 제일 세다고 한다. 그 자들 차림차림이란 몹시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남색 운문단(雲紋緞)을 받쳐 댄 전립(氈笠)에 털상투의 높은 정수리에는 운월(雲月)이나 다홍빛 상모(象毛)를 걸고, 벙거지 이마에는 날랠용(勇) 자를 붙였으며, 쇠붙이로 오려낸 아청(鴉靑)빛 삼베로 만든 소매 좁은 군복에 다홍빛 무명 배자(褙子)를 입고, 허리엔 남방사주(藍方絲紬) 전대(纏帶)를 띠고, 어깨엔 주홍빛 무명실 대융(大絨 웃옷 위에 걸치는 겉옷)을 걸고, 발에는 미투리를 신었다. 그 꼴이야 말로 어엿한 한 쌍의 사내다. 다만 그 말 탄 꼴을 보면 이른바 반부담(半駙擔)이어서 안장 없이 짐을 실었는가 하면, 타는 것도 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터앉은 셈이다. 등에는 남빛 조그마한 영기(令旗 영(令) 자를 쓴, 군령을 전하는 기(旗))를 꽂고, 한 손엔 군령판(軍令版 군령을 적은 널빤지)을, 또 한 손에는 붓ㆍ벼루ㆍ파리채와 팔뚝만한 마가목(馬家木) 짧은 채찍을 잡고, 입으로는 나팔을 불고, 앉은 자리 밑엔 비스듬히 여남은 개의 붉게 칠한 곤장(棍杖)을 꽂았다. 각방(各房)에서 약간 호령이 있을 때 문득 군를 부르면, 군뢰. 일부러 못 들은 체하다가 연거푸 10여 차례 불러야 무어라 중얼거리며 혀를 차고 하다가는, 금시에 처음 들은 듯이 커다란 소리로 ‘예이’ 하고 곧 말에서 뛰어내려, 마치 돼지처럼 비틀걸음에 소처럼 식식거리면서 나팔ㆍ군령판ㆍ붓ㆍ벼루 등속을 모두 한 쪽 어깨에 메고 막대 하나를 끌며 나간다.
한밤중 못 되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위로 장막이 새고 밑에선 습기가 치밀어 피할 곳이 없더니, 이내 날이 개고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드리워 손으로 어루만지기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주D-001]당서(唐書) : 후진(後晉) 유후(劉煦)가 지은 당의 역사.
[주D-002]말갈(靺鞨) : 당에서 부르던 만주(滿洲)의 별칭. 거기에 말갈족 즉 여진족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D-003]산해경(山海經) : 일명씨(逸名氏)의 중국 고대의 지리서(地理書).
[주D-004]황여고(皇輿考) : 명 장천복(張天復)이 지은 지리서.
[주D-005]역원(譯員) : 통역관. 중국에 사행할 때에는 한학상통사(漢學上通事)와 청학상통사(淸學上通事) 이하 많은 역관이 따랐다.
[주D-006]정사(正使) : 사행의 수석. 당시의 정사는 곧 연암의 사종형(四從兄)으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다.
[주D-007]파발(把撥) : 공문서를 급히 전하기 위하여 설치한 역참(驛站).
[주D-008]은화(銀花) : 정월 대보름날 밤에 등불을 다는 것. 여기에서는 그 모양을 형용하였다.
[주D-009]운월(雲月) : 물건 변두리를 구름ㆍ달 모양으로 곱게 꾸민 것.
[주D-010]막수(莫愁) : 당(唐)의 석성(石城)에 살던 여인인데, 노래를 잘 불렀다.
[주D-011]청남(淸南) : 청천강(淸川江)의 남쪽 평양(平壤)을 이름.
[주D-012]유혜풍(柳惠風) 영재(泠齋) : 연암의 일계(一系)에 속하는 학자 유득공(柳得恭). 혜풍은 자요, 영재는 호이다. 다른 본에는 영재(泠齋)라는 두 글자가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연암의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주D-013]형경(荊卿) : 중국 전국(戰國) 시대의 자객(刺客)인 형가(荆軻)를 말한다. 연(燕)나라에서는 '형경'으로 불렸으며, 연나라 태자 단(丹)의 식객(食客)이 되어 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진왕(秦王)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였다.
[주D-014]태자(太子) : 전국 때 연(燕)의 태자 단(丹). 진시황(秦始皇)을 죽이려 형가를 파견했으나 실패하였다.
[주D-015]진무양(秦舞陽) : 형가가 진에 들어갈 때에, 지도(地圖)를 갖고 따르던 젊은 협사의 이름.
[주D-016]축(筑) : 형가가 역수(易水)를 건널 때, 그의 친구 고점리(高漸離)는 축(筑)을 치고, 형가는 박자 맞추어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이라는 비장한 노래를 불렀다.
[주D-017]그 사람 : 형가가 기다렸다는 그 사람.
[주D-018]초(楚) : 지금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지방.
[주D-019]오(吳) : 지금 중국의 강소(江蘇)ㆍ호남(湖南)ㆍ절강성(浙江省) 등지.
[주D-020]삼진(三晉) : 당시의 한(韓)ㆍ위(魏)ㆍ조(趙). 지금의 산서(山西)ㆍ하남성(河南省) 서남부.
[주D-021]부사(副使) : 차석 사신. 당시의 부사는 이조 판서 정원시(鄭元始).
[주D-022]서장관(書狀官) : 일행의 행정(行程)에 관한 통계 책임을 맡은 관원. 당시의 서장관은 장령(掌令) 조정진(趙鼎鎭).
[주D-023]남은(濫銀) : 팔포(八包) 곧 2천 냥, 3천 냥의 한도를 넘은 은자(銀子).
[주D-024]중곤(重棍) : 대곤(大棍)보다 더 큰 곤장.
[주D-025]먼저 …… 오른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황의(皇矣)에서 나온 말이다.
[주D-026]정(鄭)의 자산(子産) : 자산은 전국 시대 정 나라 대부 공손교(公孫僑)의 자.
[주D-027]흑선풍(黑旋風) :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역사 이규(李逵)의 별명.
[주D-028]강혁(江革) : 후한(後漢) 때 효자. 어려서 난리를 만나 홀어머니를 업고 갖은 곤란을 겪고서 마침내 어머니를 보전하였다.
[주D-029]말이오 : ‘조군(趙君)이 …… 말이오’ 이 부분은 다른 본에 없고, 다만 ‘일재본’과 ‘유당본(綏堂本)’에 있을 뿐이다.
[주D-030]모문룡(毛文龍) : 명의 장수로, 청병에게 패하여 우리나라 서해 가도(椵島)에 일시 주둔하고서 조선에 원조를 청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5일 임신(壬申)
아침에 가랑비 내리더니 낮에 개다.
각방(各房)과 역관들이 모든 노둔(露屯)한 곳에서 이곳저곳 옷과 이불들을 내어 말린다. 간밤 비에 젖었기 때문이다. 쇄마(刷馬 관용으로 세 낸 말) 마부 중에 술을 갖고 온 자가 있어서 대종(戴宗)선천(宣川)의 종으로 어의(御醫) 변 주부(卞主簿)의 마두이다. 이 한 병을 사서 바치기에 서로 이끌고 시냇가에서 잔을 기울인다. 강을 건넌 뒤로 우리 술은 아주 단념하다가, 이제 갑자기 이 술을 얻어 마시게 되니 술맛이 몹시 좋을 뿐더러 한가히 시냇가에 앉아 마시는 그 멋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낚시질을 하기에, 나도 취한 김에 낚싯줄 하나를 빌려 던지자 곧 조그만 고기 두 마리가 걸리니, 아마 이 시냇고기는 낚시에 단련되지 못한 까닭이리라.
방물이 미처 대어 오지 못하였으므로 또 구련성에서 노숙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6일 계유(癸酉)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개다.
구련성을 떠나 삼십 리를 가서 금석산(金石山) 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다시 삼십 리를 가서 총수(葱秀)에서 노숙하다.
날이 새자 새벽 일찍 안개를 헤치고 길을 떠났다. 상판사(上判事)의 마두 득룡(得龍)이 쇄마 구종들과 함께 강세작(康世爵)의 옛 일을 이야기한다. 안개 속으로 어슴푸레 보이는 금석산을 가리키면서,
“저기가 형주(荊州) 사람 강세작이 숨었던 곳이오.”
하고 말한다. 그 이야기가 퍽 재미있어 들을 만하다. 대략 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러하다.
“세작의 조부 임(霖)이 양호(楊鎬)를 따라 우리나라를 구원하다가 평산(平山) 싸움에 죽고, 그 아버지 국태(國泰)는 청주 통판(淸州通判)을 지내다가 만력(萬曆) 정사년(丁巳年)에 죄를 지어 요양(遼陽)으로 귀양오게 되었다. 그때 세작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그 이듬해에 청이 무순(撫順)을 함락하자 유격장군(游擊將軍) 이영방(李永芳)이 항복하고 말았다. 경략(經略) 양호가 여러 장수를 나눠서 파견할 제 총병(揔兵) 두송(杜松)은 개원(開原)으로, 왕상건(王尙乾)은 무순으로, 이여백(李如栢)은 청하(淸河)로 각각 나오고, 도독(都督) 유정(劉綎)은 모령(毛嶺)으로 나왔다. 이때 국태 부자는 유정의 진중에 있었는데, 청의 복병이 산골짜기에서 몰려나오자, 명의 군사 앞뒤가 연락되지 못하여 유정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국태도 화살을 맞은 채 쓰러졌다.
세작이 해 저문 뒤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산골에 묻고 돌을 모아 표를 했다. 이때(1619) 조선의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는 산 위에 진을 쳤고, 조선의 좌ㆍ우 영장(營將)은 산 밑에 진을 쳤었다. 이에 세작이 원수(元帥)의 진에 투신했다. 그 이튿날 청병(淸兵)이 조선의 좌영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니, 산 위에 있던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그러자 홍립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청병이 홍립의 군사를 두어 겹이나 에워싸고 도망쳐 온 명병(明兵)을 샅샅이 뒤져내어 모조리 목을 베어 죽였다. 세작도 역시 청병에게 붙들려서 묶인 채 바위 아래 앉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를 맡은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그러자 세작이 조선 군사에게 눈짓하여 묶인 것을 풀어 달라고 애걸했으나, 그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기웃기웃 보기만 하고 손 하나도 까딱하는 이가 없었다. 세작이 할 수 없어 스스로 등을 돌 모서리에 부비적거려 줄을 끊고 죽은 조선 군사의 옷을 바꾸어 입고 조선 군대 가운데 들어가 죽음을 면했다. 이에 요양으로 돌아갔더니, 웅정필(熊廷弼)이 요양을 지키면서, 세작을 불러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고 하였다. 이해에 청이 잇달아 개원과 철령(鐵嶺)을 함락하니 정필이 갈리고 설국용(薛國用)이 대신 요양을 지키게 되자, 세작이 곧 설(薛)의 군중에 머물러 있었더니 심양마저 함락되매, 세작이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서 봉황성에 닿아, 광녕(廣寧) 사람 유광한(劉光漢)과 함께 요양의 패잔병을 소집하여 거기를 지켰다. 그러나 얼마 아니되어 광한은 전사하고 세작도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고향길이 이미 끊어졌으니 차라리 동쪽나라 조선으로 나가서 저 치발(薙髮)ㆍ좌임(左衽)의 되놈을 면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드디어 싸움터를 탈출하여 금석산 속에 숨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양구(羊裘)를 불에 구워 나뭇잎에 싸서 먹고 두어 달 동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에 압록강을 건너 관서(關西)의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회령(會寧)까지 굴러 들어가서, 조선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고 나이 팔십이 넘어서 죽었다. 그 자손이 퍼져서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오히려 한 집에서 살림하고 있다.”
득룡(得龍)은 가산(嘉山) 사람인데, 열네 살부터 북경(北京)에 드나들어 이번이면 삼십여 차례에 이른다. 화어(華語)에 가장 능통하여 일행의 모든 일에 득룡이 아니면 그 책임 있게 해낼 자가 없다. 그는 이미 가산과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 부(府)의 중군(中軍)을 지내고 품계가 가선(嘉善 종2품 문관 품계)에까지 이르렀다. 사행이 있을 때마다 미리 가산에 통첩하여 그 차지(次知)가속(家屬)을 차지라 한다. 를 감금(監禁)하여 그의 도피함을 막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 위인의 재간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겠다. 세작이 처음 나왔을 때, 득룡의 집에 묵고 득룡의 조부와 친하여 서로 중국 말과 조선 말을 배웠으며, 득룡이 화어를 그토록 잘함도 그의 가전(家傳)의 학문이라 한다.
날이 저물어 총수에 이르다. 여기는 우리나라 평산(平山)의 총수와 흡사하다. 그제야 우리나라 사람들의 지명 짓는 예가 생각된다. 이로 미루어서 평산의 총수도 이곳과 유사하다 해서 이름을 지은 것이나 아닐까.
[주D-001]상판사(上判事) : 사행이 있을 때, 임시로 잡무의 처리를 맡은 직명.
[주D-002]평산(平山) : ‘수택본’에는 서흥(瑞興)으로 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7일 갑술(甲戌)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가 늦게야 걷혔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길에서 되놈 5~6명을 만났는데, 모두 조그만 당나귀를 탔고 벙거지나 옷이 남루하며 얼굴은 지친 듯 파리하다. 이들은 모두 봉황성의 갑군(甲軍)으로 애랄하(愛剌河)에 수자리 살려 가는데, 대부분 품삯을 받고 팔려 가는 자들이라 한다. 이 일을 보니 우리나라는 염려할 것 없으나, 중국의 변비(邊備)는 너무나 허술하다고 느껴졌다.
마두와 쇄마 구종들이 나귀에서 내리라고 호통치니, 앞서 가던 둘은 곧 내려서 한쪽으로 비켜서 가는데, 뒤에 가는 셋은 내리기를 거부한다.
마두들이 일제히 소리를 높여 꾸짖으니, 그들은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쏘아 보면서,
“당신네 상전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 있어.”
한다. 마두가 바짝 달려들어 그 채찍을 빼앗아 그 맨 종아리를 후려갈기면서 꾸짖는다.
“우리 상전께서 받들고 온 것이 어떤 물건이며 싸 갖고 오는 것이 어떤 문서인 줄 아느냐. 저 노란 깃발에 만세야(萬歲爺 청의 황제) 어전상용(御前上用)이라고 써 있지 않느냐. 너희 놈들이 눈깔이 성하다면 황제께서 친히 쓰실 방물인 줄 모른단 말이냐.”
하니, 그제야 그들은 곧 나귀에서 내려 땅에 엎드려서,
“그저 죽을 죄를 지었소이다.”
한다. 그 중 한 녀석이 일어나더니 자문(咨文)을 지닌 마두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띤 채,
“영감, 제발 참아 주십시오. 쇤네들의 죄는 죽어야 하옵니다.”
한다. 마두들이 모두 껄껄 웃으면서,
“너희들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렷다.”
하니, 그들이 진흙 바닥에 꿇어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니, 이마가 죄다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일행이 모두 크게 웃고,
“빨리 물러가라.”
호통한다. 나는 다 보고 나서,
“내 듣기에 너희들이 중국에 들어갈 때마다 여러 가지로 요단(鬧端)을 일으킨다더니, 이제 내 눈으로 보건대 과연 앞서 들은 바와 틀림없구나. 아까 한 일은 대체 부질없는 짓이니 이 담엘랑 아예 장난으로 요단을 일으키지 말려무나.”
하니, 모두들,
“이렇게라도 아니 하면 먼 길 허구한 날을 무엇으로 심심풀이를 합니까.”
한다.
멀리 봉황산(鳳凰山)을 바라보니,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고, 하늘 가에 뭉게뭉게 떠도는 여름 구름의 기이한 자태와도 같아서 무어라 형용키는 어려우나, 다만 맑고 윤택한 기운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다.
내가 일찍이 우리 서울의 도봉(道峯)과 삼각산(三角山)이 금강산(金剛山)보다 낫다고 한 일이 있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그 동부(洞府)를 엿보면 이른바 1만 2천 봉이 그 어느 것이나 기이하고 높고 웅장하고 깊지 않음이 없어서, 짐승이 끄는 듯, 새가 날아가는 듯, 신선이 공중에 솟는 듯, 부처가 도사리고 앉은 듯, 음산하고 그윽함이 마치 귀신의 굴 속에 들어간 것 같다. 내 일찍이 신원발(申元發)과 함께 단발령(斷髮嶺)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일이 있다.
때마침 가없이 파란 가을 하늘에 석양이 비꼈으나, 다만 창공에 닿을 듯한 빼어난 빛과 제 몸에서 우러난 윤기와 자태가 없음을 느낀 나는 미상불 금강산을 위해서 한 번 긴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에 배를 타고 상류에서 저어내려 오면서 두미강(頭尾江) 어귀에서 서쪽의 한양(漢陽)을 바라보니, 삼각산의 모든 봉우리가 깎은 듯 파랗게 하늘에 솟구쳤다. 엷은 내와 짙은 구름 속에 밝고 곱게 아리따운 자태가 나타나고, 또 일찍이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남문에 앉아서 북으로 한양을 바라보니 마치 물 위의 꽃, 거울 속의 달과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초목의 윤기 나는 기운이 공중에 어림은 왕기(旺氣)라고 하였으니, 왕기(旺氣)는 곧 왕기(王氣)인즉, 이는 우리 서울은 실로 억만 년을 누릴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형세였으니, 그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이야말로 당연히 범상한 산세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이 봉황산 형세의 기이하고 뾰족하고 높고 빼어남이 비록 도봉ㆍ삼각보다 지나침이 있건마는, 어린 빛깔은 한양의 모든 산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넓은 들판이 질펀한데 비록 개간은 안 되었지마는, 가는 곳마다 나무 찍어 낸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 소 발자국과 수레바퀴 자리가 풀섶에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책문(柵門)이 여기서 가깝고, 또 살고 있는 백성들이 무시로 이곳에 드나들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말을 빨리 몰아 7~8리를 가서 책문 밖에 닿았다. 양과 돼지가 산에 질펀하고 아침 연기는 푸른 빛으로 둘러 있다. 나무 쪽으로 목책(木柵)을 세워서 겨우 경계(經界)를 밝혔으니, 이른바 버들을 꺾어서 울타리를 만든다는 말이 곧 이것인 듯싶다. 책문에는 이엉이 덮이었고 널판자 문이 굳게 닫혔다.
목책에서 수십 보 떨어져서 삼사(三使)의 막을 치고 조금 쉬려니까 방물이 다 이르렀으므로 책문 밖에 쌓아 두었다. 뭇 되놈들이 목책 안에 늘어서서 구경을 하는데, 대부분 민머리 바람에 담뱃대를 물고 부채를 부치고 있다. 혹은 검은 공단(貢緞) 옷을 입고, 또는 수화주(秀花紬)ㆍ생포(生布)ㆍ생저(生苧)ㆍ석새삼베[三升布]ㆍ야견사(野繭絲) 옷들을 입었으며 바지들도 역시 그러하다.
허리에는 찬 것이 주렁주렁하게 많았는데, 수놓은 주머니 서너 개씩과 조그만 패도에 모두 쌍아저(雙牙箸)를 꽂았고, 담배쌈지는 호로병(胡盧甁)처럼 생겼는데 거기에다 꽃ㆍ풀ㆍ새 또는 옛사람의 이름난 글귀를 수놓았다. 역관과 모든 마두들이 다투어 목책 가에 나서서 그들과 손을 잡고 반가이 인사를 교환한다. 되놈들은,
“당신은 언제쯤 한성을 떠났으며, 길에서 비나 겪지 않았나요. 댁에선 모두들 안녕하시고요. 포은(包銀) 돈도 넉넉히 갖고 오셨습니까.”
하고, 사람마다 수작이 거의 한 입에서 나오는 것 같다. 또 다투어 묻되,
“한 상공(韓相公)과 안 상공(安相公)도 오시나요.”
한다. 이들은 모두 의주 사는 장사꾼들로서, 해마다 연경으로 장사 다녀서 수단이 매우 능란하고 또 저쪽 사정을 익히 아는 자들이라 한다. 그리고 ‘상공’이란 장사꾼들끼리 서로 존대하는 말이다. 사행이 갈 때에는 으레 정관(正官)에게 팔포를 내리는 법이다. 정관은 비장ㆍ역관까지 모두 서른 명이고, 팔포(八包)란 이전부터 나라에서 정관에게 인삼(人蔘) 몇 근씩을 주었었는데, 이를 팔포라 일렀다. 지금은 이것을 나라에서 주지 않고 제각기 은을 갖고 가게 하되, 단지 그 포 수를 제한하여 당상관(堂上官)은 3천 냥, 당하관(堂下官)은 2천 냥인데, 이것을 지니고 연경에 가서 여러 가지 물건을 바꾸어 이문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가난하여 스스로 갖고 갈 수 없으면, 그 포의 권리를 파는데 송도ㆍ평양ㆍ안주(安州) 등의 장사꾼들이 사서 대신 은을 넣어 간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연경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므로, 이 포의 권리를 의주 장수들에게 넘겨주어서 물건을 바꿔 오는 것이다. 한(韓)이나 임(林) 같은 장사꾼들은 해마다 연경에 드나들어서 연경을 제집 뜰처럼 여기며, 저쪽 장수들과 서로 뜻이 맞아서 물건 값의 오르내리는 것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물건 값이 날로 오르는 것은 실로 이 무리들 때문이거늘 온 나라가 도대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역관만 나무란다. 그러나 역관도 이들 장사꾼에게 권리를 빼앗기고는 어쩔 도리가 없을 뿐이다. 다른 곳 장사꾼들도 이것이 의주 장사꾼놈들의 농락인 줄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마는,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골은 낼 수 있겠으나 무어라 말을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요즘 의주 장사꾼들이 잠깐 은신하고 나타나지 않는 것도 역시 흥정하는 술책의 하나다.
책문 밖에서 아침 밥을 먹다. 행장을 정돈한즉, 양편 주머니 중 왼편 열쇠가 간 곳이 없다. 샅샅이 풀밭을 뒤졌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장복을 보고,
“너는 행장에 유의하지 않고 늘 한눈만 팔더니, 겨우 책문에 이르러서 벌써 이런 일이 생겼구나. 속담에 사흘 길을 하루도 못 가서 늘어진다는 격으로, 앞으로 2천 리를 가서 연경에 이를 즈음이면 네 오장인들 어디 남겠느냐. 내 듣건대, 구요동(舊遼東)과 동악묘(東岳廟)엔 본시 좀도둑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니, 네가 또 한눈을 팔다가는 무엇을 잃어버릴지 모르겠구나.”
하고 꾸짖으니, 장복은 민망하여 머리를 긁으며,
“쇤네가 인제야 알겠습니다. 그 두 곳을 구경할 적엔 제 두 손으로 눈깔을 꼭 붙들고 있으면, 어느 놈이 빼어갈 수 있으리까.”
한다.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옳아.”
하고 응락하였다. 대체 장복이란 녀석은 아직 나이 어리고 또 처음 길이며 바탕이 몹시 멍청해서, 동행하는 마두들이 흔히 장난으로 놀리면, 그는 곧잘 참말로 곧이 듣고 그러려니 한다. 매사가 다 이러하니 앞으로 먼 길을 데리고 갈 일을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책문 밖에서 다시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民家)들은 대체로 들보 다섯이 높이 솟아 있고 띠 이엉을 덮었는데,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고 네거리가 쭉 곧아서 양쪽이 마치 먹줄 친 것 같다. 담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며 벌여 놓은 기명들은 모두 그림 그린 자기(瓷器)들이다. 그 제도가 어디로 보나 시골 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앞서 나의 벗 홍덕보(洪德保)가,
“그 규모는 크되, 그 심법(心法)은 세밀하다.”
고 충고하더니, 이 책문은 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앞으로 더욱 번화할 것을 생각하니, 갑자기 한풀 꺾여서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보다 하는 생각에 온 몸이 화끈해진다. 그럴 순간에 나는 깊이 반성하되,
“이는 하나의 시기하는 마음이다. 내 본시 성미가 담박(淡泊)하여 남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거나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던 것이 이제 한번 다른 나라에 발을 들여놓자, 아직 그 만분의 일도 보지 못하고 벌써 이런 망녕된 마음이 일어남은 어인 까닭일까. 이는 곧 견문이 좁은 탓이리라. 만일 여래(如來)의 밝은 눈으로 시방 세계(十方世界)를 두루 살핀다면, 어느 것이나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니, 모든 것이 평등하면, 저절로 시기와 부러움이란 없어질 것이다.”
하고 장복을 돌아보며,
“네가 만일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겠느냐?”
하고 물으니 그는,
“중국은 되놈의 나라이옵기 쇤네는 싫사와요.”
하고 대답한다. 때마침 한 소경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걸고 손으로 월금(月琴)을 뜯으면서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야말로 평등의 눈을 가진 이가 아니겠느냐.”
하였다.
조금 뒤에 책문이 활짝 열린다. 봉성장군과 책문어사(柵門御史)가 방금 와서 점방(店房)에 앉아 있다 한다. 여러 되놈들이 책문이 메이게 나오며, 다투어 방물과 사복(私卜 개인이 가진 짐짝들)의 무게를 가늠해 본다.
대체 이곳에 이르러서는 으레 되놈의 수레를 세내어서 짐을 운반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사신이 앉은 곳에 와 보고서는 담뱃대를 물고 힐끗힐끗 치어다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희들끼리,
“저이가 왕자(王子)인가.”
하고, 중얼거린다. ‘왕자’란 종반(宗班 임금의 가까운 집안)으로서 정사가 된 이를 이름이다. 그 중에 잘 아는 자가,
“아니야, 저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가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 어른인데, 지난해에도 왔던 이야.”
하고 부사를 가리키면서,
“저 수염 좋고 쌍학(雙鶴) 무늬 놓은 관복 입은 이가 얼대인(乙大人)이지.”
하고 서장관을 보고는,
“산대인(山大人)인데, 모두 한림(翰林) 출신이오.”
한다. 얼(乙)은 이(二 둘째)요, 산(山)은 삼(三 셋째)이요, 한림 출신이란 문관(文官)을 이름이다.
때마침 시냇가에서 왁자지껄하며 무엇을 다투는 소리가 나는데, 말 소리가 새 지저귀는 듯하여,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급히 가 보니, 득룡이 방금 뭇 되놈들과 더불어 예물(禮物)이 많고 적음을 다투고 있다. 대체 예단(禮單)을 나눠 줄 때면 반드시 전례를 좇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봉황성의 교활한 청인들이 반드시 명목(名目)을 덧붙여서 그 가지수를 채워주기를 강요한다. 이에 대한 처리의 잘하고 잘못함은 전혀 상판사(上判事)의 마두에게 달린 것이다. 만일 그가 일에 서투른 풋내기라든지, 또는 중국말이 시원찮다든지 하면, 그 자들과 시비를 따지지 못하고 달라는 그대로 줄 수밖에 없다.
올해에 이렇게 하면, 내년에는 벌써 전례가 되기 때문에 기어코 아귀다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사신들은 이 묘리를 모르고 다만 책문에 들어가기만 급하여, 반드시 역관을 재촉하고 역관은 또 마두를 재촉하여 그 폐단의 유래가 오랜 것이다.
상삼(象三)상판사의 마두이다. 이 방금 예단을 나눠 주려 한다. 되놈 백여 명이 삥 둘러섰다. 그 중 한 청인이 갑자기 커다란 소리로 상삼을 욕한다. 득룡이 수염을 쓱 쓰다듬고 눈을 부릅뜬 채 내달아서 그 앙가슴을 움켜잡고 주먹을 휘두르며 때리려는 시늉을 하며 뭇 청인을 둘러보고,
“이 뻔뻔스럽고 무례한 놈 보아. 지난해에는 대담하게도 어른의 쥐털 목도리를 훔쳐 가고, 또 그 다음해엔 어른께서 주무시는 틈을 타서 나의 허리에 찼던 칼을 뽑아 어른의 칼집에 달린 술[綬]을 끊어가지고 다시 나의 찬 주머니를 훔치려다가 내게 들켜서는 주먹 한 대에 톡톡히 경을 치지 않았나. 그 때는 아주 만단으로 애걸복걸하면서 나더러 목숨을 살려 주신 부모 같은 은인이라 하던 놈이 이번엔 오랜만에 오니까 도리어 어른께서 네 놈의 꼴을 몰라보실 줄 믿고 함부로 떠들고 야단이야. 이런 쥐새끼 같은 놈은 어디 봉성장군에게 끌고 가야지.”
하고 야단한다. 여러 되놈은 모두 용서해 줄 것을 권한다. 그 중에서도 수염이 아름답고 옷을 깨끗이 입은 한 노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득룡의 허리를 껴안고,
“형님, 제발 좀 참으시오.”
하고 사정한다. 득룡이 그제야 노여움을 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만일 동생의 안면을 보지 않는다면, 이놈의 콧잔등이를 한 주먹 갈겨서 저 봉황산 밖에 던지고 말 것을.”
하며 으르댄다. 그의 날뛰는 거조는 참으로 우습다. 판사(判事) 조달동(趙達東)이 마침 내 곁에 와 섰기에 아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혼자서만 보기에 아깝더라 하니, 조군이 웃으면서,
“그야말로 살위봉법(殺威棒法)이군요.”
한다. 조군이 득룡더러,
“사또께서 이제 곧 책문으로 들어가실 테니, 예단(禮單)을 지체 말고 나눠 주렷다.”
하고 재촉한다. 득룡이 연방,
“예에, 예이”
하며, 짐짓 바쁜 척하고 서둔다. 나는 일부러 그 곳에 머물러 서서 그 나눠주는 물건의 명목(名目)을 상세히 보았다. 매우 괴잡(怪雜)스러운 일들이다.
예단물목(禮單物目)
책문수직보고(柵門守直甫古) 2명(二名)과 갑군(甲軍) 8명(八名)에겐 각각 백지(白紙) 10권(十卷), 소연죽(小煙竹) 10개(十箇), 화도(火刀) 10개, 봉초(封草) 10봉(十封)씩이고, 봉성장군 2원(二員), 주객사(主客司) 1원, 세관(稅官) 1원, 어사(御史) 1원, 만주장경(滿洲章京) 8명, 가출장경(加出章京) 2명, 몽고장경(蒙古章京) 2명, 영송관(迎送官) 3명, 대자(帶子) 8명, 박씨(博氏) 8명, 가출박씨(加出博氏) 1명, 세관박씨(稅官博氏) 1명, 외랑(外郞) 1명, 아역(衙譯) 2명, 필첩식(筆帖式) 2명, 보고(甫古) 17명, 가출보고(加出甫古) 7명, 세관보고(稅官甫古) 2명, 분두보고(分頭甫古) 9명, 갑군 50명, 가출갑군(加出甲軍) 36명, 세관갑군(稅官甲軍) 16명 등 도합 1백 2명에게는 장지(壯紙) 1백 56권, 백지 4백 69권, 청서피(靑黍皮) 1백 20장, 소갑초(小匣草) 5백 80갑, 봉초 8백 봉, 세연죽(細煙竹) 74개, 팔면은항연죽(八面銀項煙竹) 74개, 석장도(錫粧刀) 37자루[三十七柄], 초도(鞘刀) 2백 84자루, 선자(扇子) 2백 88자루, 대구어(大口魚) 74마리[七十四尾], 다래[月乃] 가죽 장니(障泥)다. 7부(七部), 환도(環刀) 7파(七把), 은장도(銀粧刀) 7자루, 은연죽(銀煙竹) 7개, 석장연죽(錫長煙竹) 42개, 필(筆) 40지(枝), 묵(墨) 40정(丁), 화도 2백 62개, 청청다래[靑靑月乃] 2부, 별연죽(別煙竹) 45개, 유둔(油芚) 2부씩이다.
뭇 되놈은 끽소리 없이 받아 가지고 가버린다. 조군이,
“득룡의 수단이 참으로 능하단 말요. 그는 지난해에 휘항이며 칼이며 주머니며 잃어버린 일이 도시 없답니다. 공연히 트집을 만들어서 그 중 한 놈을 꺾어놓으면, 그 나머지는 저절로 수그러져 서로 돌아보고는 무료히 물러서곤 하더군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던들, 사흘이 가도 끝이 나지 않아 좀처럼 책문 안으로 들어갈 가망이 없으리다.”
한다. 이윽고, 군뢰가 와 엎드리어,
“문상어사(門上御史)와 봉성장군이 수세청(收稅廳 세관)에 나와 계십니다.”
하고 아뢴다. 이에 삼사(三使)가 차례로 책문으로 들어간다. 장계(狀啓)는 전례대로 의주의 창군(鎗軍)에게 부치고 돌아오다.
한번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고국의 소식은 이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 섭섭한 마음에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섰다가 이윽고 몸을 돌려 천천히 책문 안으로 향했다.
길 오른편에 초청(草廳) 세 칸이 있어서 어사ㆍ장군으로부터 아역(衙譯)에 이르기까지 반열을 나눠 의자에 걸터앉고, 수역(首譯) 이하는 그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사신이 이에 이르면 마두가 하인을 호통하여 가마를 머무르고 잠시 말을 쉬어 마치 행차를 중지하려는 듯하다가 이내 재빨리 달려서 그곳을 지나가 버린다. 부사ㆍ서장관도 이같이 하여 마치 서로 구원하는 듯한 모양이 하도 우스꽝스러워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비장ㆍ역관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 지나가는데, 다만 변계함(卞季涵)만이 말탄 채 그냥 지나간다. 말석에 앉은 한 청인이 갑자기 조선말로,
“여보 잘못이에요. 어른들 몇 분이 여기 앉아 계신데, 외국의 수행원이 어찌 이렇게 당돌하단 말이오. 사신께 빨리 고해서 볼기를 침이 마땅하지.”
하고 고함친다. 그 소리는 비록 거세고 크나 혀가 굳고 목이 꺽꺽하여 마치 어린아이의 어리광부리듯하며 주정꾼이 노닥거리는 것 같다. 이건 곧 호행통관(護行通官) 쌍림(雙林)이라 한다. 수역(首譯)이 얼른 대답하여,
“이는 우리나라 태의관(太醫官 어의(御醫))인데 처음 길이라 실정을 몰라서 그랬으며, 태의관은 국명(國命)을 받자와 정사를 보호하는 직분이므로, 정사께서도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처지예요. 여러 어른께서는 위로 황제께서 우리나라를 사랑하시는 마음을 체득하시와 깊이 따지지 마시면 더욱 대국의 너그러운 도량을 잘들 인식하겠습니다.”
하매, 그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으면서,
“그렇소, 그래.”
한다. 다만 쌍림은 눈을 부라리고 소리 지르는 것이 사나워서 노여움이 아직 덜 풀린 모양이다. 수역이 나를 보고 그만 가자고 눈짓한다. 길에서 변군(卞君)을 만났다. 변군이,
“큰 욕을 보았어.”
한다. 나는,
“볼기둔(臀) 자를 잘 생각해 봐.”
하고는 한바탕 웃었다. 이에 그와 나란히 가면서 구경하는데 가끔 감탄의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책문 안의 인가는 20~30호에 지나지 않으나 모두 웅장하고 깊고 높고 통창하다. 짙은 버들 그늘 속에 푸른 주기(酒旗)가 공중에 솟은 채 나부낀다. 변군과 함께 들어가니 웬걸 조선 사람들이 그 속에 그득하다. 맨종아리며 때 낀 살쩍에 걸상을 가로 타고 앉아 떠들던 그들은 우리를 보고 모두 피하여서 밖으로 빠져버린다. 주인이 성을 내어서 변군을 가리키면서,
“눈치성 없는 저 관인(官人)이 남의 영업을 방해하는군.”
하고 투덜거린다. 대종(戴宗)이 주인의 등을 두드리며,
“형님, 잔소리 할 것 없어. 두 어른은 한두 잔만 자시면 곧 나가실 텐데 그 망나니들이 어찌 제멋대로 걸상을 타고 앉았을 수 있겠소. 잠시 피한 것이니 곧 돌아와서, 이미 먹었으면 술값을 치를 것이고, 아직 덜 먹었으면 흉금을 터놓고 즐거이 마실 테니 형님은 마음놓고 우선 넉 냥 술이나 부으시오.”
한즉, 주인은 그제야 웃는 얼굴로,
“동생, 지난해도 보지 않았소. 이 망나니들이 야로하는 바람에 모두 먹기만 하고는 뿔뿔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니 술값을 어디 가 받겠소.”
한다. 대종은 다시금,
“형님, 염려마오. 이 어른들이 자시고 곧 일어나시면, 내 다 그들을 이리로 몰고 와서 술을 사게 할 테니.”
한즉, 주인은,
“그러시오. 두 분이 함께 넉 냥으로 하실까. 각기 넉 냥으로 하실까.”
한다. 대종은,
“따로따로 넉 냥씩 부으시오.”
하자, 변군이 나무라면서,
“넉 냥 술을 누가 다 먹는단 말이냐.”
하매, 대종이 웃으면서,
“넉 냥이란 돈이 아닙니다. 술 무게 말씀입니다.”
한다.
탁자 위에 벌여놓은 술잔이 한 냥으로부터 열 냥까지 제각기 그 그릇이 다르다. 모두 놋쇠와 주석으로 만들어서 빛깔을 내어 은과 같다. 넉 냥 술을 청하면 넉 냥들이 잔으로 부어준다. 술을 사는 이는 그 많고 적음을 계교할 필요가 없다. 대체 그 간편함이 이와 같다. 술은 모두 백소로(白燒露)인데, 맛이 그리 좋지 못하고 취하자마자 금방 깬다.
그 주위의 포치(鋪置)를 둘러보니, 모든 것이 고르고 단정하여, 한 가지 일이라도 구차스럽게 미봉해 놓은 법이 없고, 한 물건도 허투루 어지럽혀 놓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 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제곳에 놓였으며 나무 더미나 거름 무더기까지도 유달리 깨끗하고 맵시 있는 품이 그린 듯싶다. 아아, 이러한 연후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이를 수 있겠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연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대체 이용이 되지 않고서는 후생할 수 있는 이는 드물지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으리오.
정사의 행차가 이미 악(鄂)의 성을 가진 사람의 집을 사처로 들였다. 주인은 신장이 일곱 척이요, 기개가 호장하고 성격이 매서운 분이다. 그 어머니는 나이 70세에 가까우나 머리에 가득히 꽃을 꽂고, 눈매가 아직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손이 앞에 가득한 원만한 가정이라 한다.
점심 뒤에, 내원 및 정 진사와 함께 구경을 나섰다. 봉황산은 이곳에서 6~7리쯤밖에 되지 않는다. 그 전면을 보니 더욱 기이하고 뾰족해 보인다. 산속에는 안시성(安市城)의 옛 터가 있어서 성첩(城堞)이 지금껏 남아 있다 하나 그건 그릇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하여, 나는 새라도 오를 수 없을 성싶고 오직 정남의 한 쪽만이 좀 편평하나 주위가 수백 보에 지나지 않음을 보아서, 이런 탄알만한 작은 성에 그 때의 큰 군사가 오랫동안 머물 곳이 아닐 테니, 이는 아마 고구려 때의 조그마한 보루(堡壘)가 있었던가 싶다.
셋이 함께 큰 버드나무 밑에서 땀을 들이고 있었다. 옆에 벽돌로 쌓은 우물이 있다. 위는 넓고 돌을 다듬어서 덮고, 양쪽에는 구멍을 뚫어서 겨우 두레박만 드나들게 되었다. 이는 사람이 빠지는 것과 먼지가 들어감을 막기 위함이었고, 또 물의 본성이 음(陰)하기 때문에 태양을 가려서 활수(活水)를 기르는 것이다. 우물 뚜껑 위엔 녹로(轆轤 활차(滑車))를 만들어 양쪽으로 줄 두 가닥이 드리워져 있고, 버들가지를 걸어서 둥근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바가지 같으나 비교적 깊어서 한 편이 오르면 한 편이 내려가서 종일토록 물을 길어도 사람 힘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물통은 모두 쇠로 테를 두르고 조그마한 못을 촘촘히 박은 것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은 오래 지나면 썩어서 끊어지기도 하려니와 통이 마르면 대나무 테가 저절로 헐거워서 벗겨지므로 이렇게 쇠 테로 메우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물을 길어가지고는 모두 어깨에 메고 다닌다. 이것을 편담(扁擔)이라 한다. 그 법은 팔뚝만큼 굵은 나무를 길이가 한 길쯤 되게 다듬어서 그 양쪽 끝에 물통을 걸되 물통이 땅 위에서 한 자 넉넉히 떨어지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물이 출렁거려도 넘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평양에서만 이 법이 있기는 하나, 그것도 어깨에 메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니기 때문에 고샅길 좁은 골목에서는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다. 이렇게 어깨에 메는 법이 훨씬 편리할 것이다. 옛날에 포선(鮑宣)의 아내가 물동이를 들고 물을 길었다 하는 대목을 읽다가 왜 머리에 이지 않고 손에 들었을까 하고 나는 일찍 의심하였더니, 이제 보니 이 나라 부인들은 쪽진 머리가 모두 높아서 물건을 일 수 없음을 알겠다.
서남쪽은 탁 트여서 대체 평원한 산과 질펀한 물이었다. 우거진 버들에 그늘은 짙고, 띠지붕과 성긴 울타리가 숲 사이로 은은히 보이며, 가없이 푸른 방축 위에 소와 양이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다. 먼 강 다리에 행인들이 혹은 짐지고 혹은 이끌고 가는 것을 나는 바라보고 있노라니, 자못 요사이 행역(行役) 중의 고단함을 잊어버릴 듯싶다.
동행 두 사람은 저 새로 지은 불당(佛堂)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때마침 말 탄 사람 10여 명이 채찍을 휘두르며 달리는데 모두 수놓은 안장에 재빠른 말이어서 자못 의기가 양양하다. 그들은 내가 홀로 서있음을 보고 고삐를 돌려 말에서 내려 서로 다투어 내 손을 잡고 정답게 인사를 한다. 그 중에 한 사람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내가 땅에 글자를 써서 필담(筆談)을 시작했으나, 그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비석 둘이 있는데 모두 푸른 돌이다. 하나는 문상어사(門上御史)의 선정비(善政碑)요, 또 하나는 세관(稅官)아무의 선정비다. 둘은 다 만주 사람이요 넉 자 이름이다. 비문을 지은 이도 역시 만주인이어서 글이나 글씨가 모두 옹졸하다. 다만 비의 제도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공력과 경비가 절약된 것이 본받음직하다. 비석의 양쪽은 갈지 않고, 벽돌로 담을 쌓아 올리되 비 머리가 묻히게 하고, 위에 기와를 얹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비석은 그 속에서 비바람을 피하게 되었으니, 일부러 비각을 세워서 비바람을 가리는 것보다 월등 낫겠다.
비부(碑趺)에 놓인 비희(贔屭 용의 새끼)나 비문의 양쪽 변두리에 새긴 패하(覇夏 동물 이름)가 다 그 털끝을 셀 수 있으리만큼 정교하다. 이는 한갓 궁벽한 시골 백성들이 세운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정미로움과 아담스러운 품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한결 더 기승을 부린다. 급히 사관으로 돌아와서 북쪽 들창을 높이 떠 괴고 옷을 벗고 누웠다. 뒤뜰이 꽤 넓은데, 파 이랑과 마늘 두둑이 금을 그은 듯 곧고 방정하다. 오이 덕ㆍ박 덩굴을 올린 시렁이 착잡(錯雜)하게 뜰을 덮고, 울타리 가에 붉고 흰 촉규화(蜀葵花)와 옥잠화(玉簪花)가 방금 한창으로 피었고, 처마 끝엔 석류(石榴) 몇 분(盆), 수구(繡毬 팔선화(八仙花)) 한 분, 추해당(秋海棠) 두 분이 심어져 있다. 주인 악군(鄂君)의 아내가 손에 대바구니를 들고 나와서 차례로 꽃을 딴다. 아마 저녁 화장(化粧)에 쓰기 위해서이리라.
창대가 술 한 그릇과 초란(炒卵) 한 쟁반을 가지고 와 드리면서,
“어딜 가셨습니까. 저는 기다리느라고 죽을 뻔했습니다.”
한다. 그 어리광을 짐짓 떨어 제 충성을 나타내려 하는 양은 밉살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나, 술은 내 본시 즐기는 바요, 하물며 달걀 지진 것 역시 먹고 싶던 것임에랴.
이날 30리를 행하였다. 압록강에서 여기가 1백 20리다. 여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책문’이라 하고, 이곳 사람은 ‘가자문(架子門)’이라 하며, 중국 사람들은 ‘변문(邊門)’이라고 한다.
[주D-001]이곳에 …… 마련 : 봉성에서부터 청인들에게 짐삯을 주고 짐을 실린다. 청인들 중에는 이를 독점하는 조합(組合) 같은 것이 있어서, 오랫동안 여러 가지의 폐해가 많았다.
[주D-002]한림(翰林) :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ㆍ대교(待敎)ㆍ검열(檢閱)에 대한 통칭으로서, 사관(史館)인 검열을 가리킨다. 문벌이 좋고 글을 잘하는 이들로 충원된다.
[주D-003]예단(禮單) : 선물의 목록, 또는 선물. 여기서는 사행이 연로(沿路)의 청국 관원에게 선사하는 선물을 말한다.
[주D-004]살위봉법(殺威棒法) : 중국 무술(武術) 십팔기(十八技)의 하나. 곧 도둑의 덜미를 먼저 잡는 방법.
[주D-005]예단물목(禮單物目) : 제본(諸本)에 애초에는 이 예단물목을 독립시킨 것이 없었다. 다만 내가 몇해 전에 어디에서 독립된 본을 보고서 잘 된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므로 이에 적용(摘用)한다.
[주D-006]책문수직보고(栅門守直甫古) : 보십구(甫十口)의 오사(誤寫)였으나, 이제 그대로 둔다. 청의 구실 이름. 그들의 기록에는 발습고(撥什庫)로 되었다.
[주D-007]백지(白紙) …… 10봉(十封)씩이고 :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백지 한 권, 소연죽 한 개, 화도 한 개, 봉초 한 봉’으로 되어 있다.
[주D-008]봉성장군 2원 : 청인과 한인 각기 한 사람씩이다.
[주D-009]만주장경(滿州章京) : 청의 구실 이름.
[주D-010]대자(帶子) : 청의 구실 이름.
[주D-011]박씨(博氏) : 청의 구실 이름.
[주D-012]필첩식(筆帖式) : 청의 구실 이름.
[주D-013]1백 2명 : 1백 80명의 오산인 듯하다.
[주D-014]유둔(油芚) : 비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어 붙인 두꺼운 기름종이. ‘주설루본(朱雪樓本)’에는 ‘유단(油單)’으로 되었다.
[주D-015]호행통관(護行通官) : 사행을 호송하는 통관. 통관은 청의 구실 이름이다.
[주D-016]안시성(安市城) :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치다가 패하여 돌아간 곳.
[주D-017]포선(鮑宣) : 한(漢)의 강직한 관리. 왕망(王莽)에게 따르지 않았다가 피살되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8일 을해(乙亥)
아침에 안개 끼었다가 늦게 개었다.
아침 일찍이 변군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대종이 멀리 한 군데 큰 장원을 가리키면서,
“저것은 통관(通官) 서종맹(徐宗孟)의 집입니다. 황성(皇城)에는 저보다 더 큰 건물이 있었답니다. 종맹은 본래 탐관으로서 불법적인 행위가 많고 조선 사람의 고혈을 빨아서 큰 부자가 되더니, 늘그막에 예부(禮部)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어, 황성에 있던 집은 몰수당하고, 이것만 그대로 남아 있답니다.”
하고, 또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저것은 쌍림(雙林)의 집이옵고, 그 맞은편 대문은 문통관(文通官)의 집이라 하옵니다.”
한다. 대종은 말 솜씨가 극히 예리하고 능숙하여, 마치 오래 익혀 둔 글을 외듯 하였다. 그는 선천(宣川)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벌써 예닐곱 번이나 연경을 드나들었다 한다.
봉황성에 이르기까지 30리쯤 된다. 옷이 푹 젖고 길 가는 사람들의 수염에는 이슬진 것이 마치 볏모[秧針]에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다.
서쪽 하늘 가에 짙은 안개가 문득 트이며 한 조각 파아란 하늘이 살포시 나타난다. 영롱하게 구멍으로 비치는 것이 마치 작은 창에 끼어 놓은 유리알 같다. 잠시 울 안에 안개는 모두 아롱진 구름으로 화하여 그 무한한 광경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돌이켜 동쪽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타는 듯한 한 덩이 붉은 해가 벌써 세 발을 올라왔다.
강영태(康永太)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태의 나이는 스물셋인데, 제 말로 민가(民家) 한인(漢人)은 ‘민가’라 하고 만주족은 ‘기하(旗下)’라 한다. 라 한다. 희고 아름다운 얼굴에 서양금(西洋琴)을 잘 친다.
“글을 읽었느냐?”
고 물으니, 그는,
“벌써 사서(四書)를 외기는 하였지만 아직 강의(講義)는 하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그들에게는 이른바, ‘글 외기’와 ‘강의하는 것’과는 두 길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처럼 처음부터 음과 뜻을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의 처음 배우는 이는 그저 사서의 장구(章句)만 배워서 입으로 욀 따름이요, 외는 것이 능숙해진 연후에 다시 스승께 그 뜻을 배우는 것을 ‘강의’라 한다. 설령 죽을 때까지 강의하지 못하였더라도 입으로 익힌 장구가 곧 날로 상용하는 관화(官話)가 되므로, 세계 여러 나라 말 중에서도 중국 말이 가장 쉽다는 것이 또한 일리 있는 말이다.
영태가 살고 있는 집은 정쇄하고 화려하여 여러 가지 기구가 모두 처음 눈에 뜨이는 것이다. 구들 위에 깔아 놓은 것은 모두 용봉을 그린 담이고, 걸상이나 탁자에도 역시 비단 요를 펴 놓았다. 뜰에는 시렁을 메고 가는 삿자리로 햇볕을 가렸으며, 그 사면에는 누른 밭을 드리웠다. 앞에 석류대 여섯분이 벌여 놓였는데, 그 중에서 흰 석류꽃이 활짝 피었다. 또 이상한 나무 한 분이 있는데 잎은 동백(冬栢) 같고 열매는 탱자 비슷하다. 그 이름을 물은즉, ‘무화과(無花果)’라 한다. 열매가 모두 두 개씩 나란히 꼭지가 잇대어 달리었고, 꽃이 없이 열매가 맺는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라 한다.
서장관(書狀官)조정진(趙鼎鎭) 이 찾아와서 서로 나이를 대어 보니, 그가 나보다 다섯 해나 많았다. 이어서 부사정원시(鄭元始) 도 찾아와서 먼 길에 괴로움을 같이한 정분을 말한다. 김자인(金子仁)문순(文淳) 은,
“형이 이 길을 떠나신 줄 알고도 우리나라 지경에서는 몹시 분요해서 미처 찾지 못했소.”
하고 사과한다. 나는,
“타국에 와서 이렇게 서로 알게 되니 가히 이역(異域)의 친구로군요.”
하니,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크게 웃으면서,
“알지 못하겠군요. 어떤 곳이 이역이 될는지요.”
한다.
부사는 나보다 두 살 위다. 우리 조부님과 부사의 조부님과는 일찍이 동창(同牕)에서 공령문(功令文 과체(科體)의 시문)을 공부하였으므로, 지금도 동연록(同硏錄 동창생끼리 기록한 문헌)이 보존되어 온다. 우리 조부께서 경조당상(京兆堂上)으로 계실 때에, 부사의 조부님께서 경조랑(京兆郞)으로 찾아오셔서, 통자(通刺)하고 서로 지난날 함께 공부한 일을 이야기하시던 걸 내가 그 때 여덟 살인지 아홉 살인지 되어서 옆에서 들었으므로, 세의(世誼)가 있음을 안다.
서장관이 흰 석류를 가리키면서,
“전에 이런 것을 본 일이 있소.”
하고 묻는다. 나는,
“아직껏 본 적이 없소.”
하고 답하니, 서장관은,
“내가 어렸을 때에 집에 이런 석류가 있었으나 국내 다른 곳에는 없었는데, 대체 이 석류는 꽃만 피고 열매는 맺지 않는다더군요.”
한다.
그들은 대략 이런 한담을 마치고는 일어섰다. 강을 건너던 날에 갈대 우거진 속에서 서로 낯은 알았으나 이야기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었고, 또 이틀 동안 책문 밖에서 천막을 나란히 하고 한둔하였으나, 서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이제 이렇게 이역이니 하고 웃음소리를 붙인 것이다.
점심은 아직도 멀었다 하기에 그냥 기다릴 수 없어서 배고픈 것을 참고 구경을 나섰다. 애초에 오른편 작은 문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집이 얼마나 웅장하고 사치한가를 몰랐더니, 이제 앞문으로 나가 보니 바깥 뜰이 수백 칸이나 되고, 삼사(三使)와 그 일행들이 다 함께 이 집에 들었건만, 어디에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비단 우리 일행이 거처하고도 남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가는 장수나 나그네들이 끊일 사이 없고, 또 수레가 20여 대나 문이 그득하게 들어온다. 그 수레마다 말과 노새가 대여섯 마리씩이었으나 떠드는 소리라고는 조금도 없고, 깊이 간직하여 텅 빈 것처럼 조용하다.
대개 그 배치해 놓은 것이 제대로 규모가 있어서 서로 거리끼는 일이 없다. 밖으로 보아서 이러하니 속속들이 세세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천천히 문 밖으로 나섰다. 그 번화하고 부유함이 비록 연경에 이른들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생각된다. 중국이 이처럼 번영할 줄은 참으로 뜻밖이다. 길 좌우에 즐비하게 늘어선 점방들은 모두 아로새긴 들창 비단을 드리운 문, 그림 그린 기둥, 붉게 칠한 난간, 푸른 성적한 주련(柱聯), 황금 빛깔 현판들이 현란하게 눈부실 지경이다.
그 안에 펼쳐 놓은 것은 모두 그 국내의 진기한 물건들이다. 변문(邊門)의 보잘것없는 이 땅에 이처럼 정치하고 아담한 감식(鑑識)이 있을 줄은 몰랐다.
또 한 집에 들어가니 그 굉려(宏麗)함이 아까 강씨(康氏)의 집보다도 더 지나치나, 그 제도는 거의 한가지다. 대개 집을 세움에는 반드시 수백 보의 자리를 마련하여 길이나 넓이를 알맞게 하고 사면을 반듯하게 깎아서 측량기로 높고 낮음을 재고, 나침반(羅針盤)으로 방위를 잡은 다음에 대(臺)를 쌓되, 바닥에는 돌을 깔고 그 위에 한 층 또는 두세 층 벽돌을 놓으며, 다시 돌을 다듬어서 대를 장식한다. 그 위에 집을 세우되, 모두 한일 자로 하여 꾸부러지게 하거나 잇달아 붙여 짓지 않는다. 첫째가 내실(內室)이요, 그 다음이 중당(中堂), 셋째는 전당(前堂), 넷째는 외실(外室)이다. 외실 밖은 한길이라 점방으로나 또는 시전(市廛)으로도 쓴다. 당(堂)마다 좌우의 곁채가 있으니, 이것이 곧 행랑과 재방(齋房)이다. 대개 집 한 채의 길이는 6영(六楹)ㆍ8영ㆍ10영ㆍ12영으로 되어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는 매우 넓어서 거의 우리나라의 보통 집 두 칸짜리만하다. 그리고 재목에 따라 길고 짧음을 마련하지 않고 또한 마음대로 넓히고 좁히는 것도 아니요, 꼭 자로 재어서 간살을 정한다. 집은 다 들보를 다섯 혹은 일곱으로 하여 땅바닥에서 용마루까지 그 높이를 따지면, 처마는 한가운데쯤 있게 되므로 물매가 매우 싸서 병을 거꾸로 세운 것처럼 가파르다. 집 좌우와 후면은 부연(婦椽)이 없이 벽돌로 담을 쌓아 올려서 집 높이와 가지런히 하니, 서까래가 아주 보이지 않을 정도다. 동서의 양쪽 담벽에는 각기 둥근 창구멍을 뚫고, 남쪽에는 모두 문을 내고, 그 중 한가운데 한 칸을 드나드는 문으로 쓰되, 반드시 앞뒤가 꼭 맞서게 하였으므로 집이 서너 겹이라면 문은 여섯이나 또는 여덟 겹이나 되어도, 활짝 열어젖히면 안채로부터 바깥채에 이르기까지 문이 똑바로 화살같이 곧다. 그들이 이른바,
“저 겹문을 활짝 여니, 내 마음 통하게 하는구나.”
함은, 그 곧고 바름을 이에 견준 말이다.
길에서 동지(同知) 이혜적(李惠迪)역관인데 정3품 당상관이다. 을 만났다. 이군이 웃으면서,
“궁벽한 시골 구석에 무어 볼 만한 게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연경인들 이보다 더 나을 수 있겠어요.”
하였더니, 이군은,
“그렇습니다. 비록 크고 작으며 사치하고 검박한 구별은 있겠지만, 그 규모는 거의 한가집니다.”
한다.
대개 집을 짓는 데 있어 온통 벽돌만을 사용한다. 벽돌의 길이는 한 자, 넓이는 다섯 치여서 둘을 가지런히 놓으면 이가 꼭 맞고 두께는 두 치이다. 한 개의 네모진 벽돌박이에서 찍어 낸 벽돌이건마는 귀가 떨어진 것도 못 쓰고, 모가 이지러진 것도 못 쓰며, 바탕이 뒤틀린 것도 못 쓴다. 만일 벽돌 한 개라도 이를 어기면 그 집 전체가 틀리고 만다. 그러므로 같은 기계로 찍어냈건마는 오히려 어긋난 놈이 있을까 염려하여, 반드시 곡척(曲尺)으로 재고 자귀로 깎고 돌로 갈아서, 힘써 가지런히 하여 그 개수가 아무리 많아도 한 금으로 그은 듯싶다. 그 쌓는 법은 한 개는 세로, 한 개는 가로로 놓아서 저절로 감(坎 ☵)ㆍ이(离 ☲) 괘(卦)가 이룩된다. 그 틈서리에는 석회를 이기어 붙이되 초지장처럼 엷으니 이는 겨우 돌 사이가 붙을 정도여서 그 흔적이 실밥 같아 보인다. 회를 이기는 법은 굵은 모래도 섞지 않고 진흙과 기(忌)한다. 모래가 굵으면 어울리지 않고 흙이 진하면 터지기 쉬우므로, 반드시 검고도 부드러운 흙을 회와 섞어 이기어 그 빛깔이 거무스름하여 마치 새로 구워 놓은 기와와 같다. 대체 그 특성은 진흙도 쓰지 않고 모래도 쓰지 않으며, 또 그 빛깔이 순수함을 취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어저귀(삼(麻)의 일종) 따위를 터럭처럼 가늘게 썰어서 섞는다. 이는 우리나라 초벽하는 흙에 말똥을 섞는 것과 같으니 질겨서 터지지 않도록 함이요, 또 동백기름을 타서 젖처럼 번드럽고 미끄럽게 하여 떨어지고 터지는 탈을 막는다.
기와를 이는 법은 더구나 본받을 만한 것이 많다. 모양은 마치 동그란 통대를 네 쪽으로 쪼개 놓은 것과 같고 그 크기는 두 손바닥만 하다. 보통 민가에는 원앙와(鴛鴦瓦 짝기와)를 쓰지 않으며, 서까래 위에는 산자를 엮지 않고 삿자리를 몇 잎씩 펼 뿐이요, 진흙을 두지 않고 곧장 기와를 인다. 한 장은 엎치고 한 장은 젖히어 자웅으로 서로 맞추어 틈사이는 한층한층 비늘진 데까지 온통 회로 발라 붙여 때운다. 이러니까 쥐나 새가 뚫거나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한 폐단이 저절로 없게 된다.
우리나라의 기와 이는 법은 이와는 아주 달라 지붕에는 진흙을 잔뜩 올리고 보니 위가 무겁고, 바람벽은 벽돌로 쌓아 회로 때우지 않고 보니, 네 기둥은 의지할 데가 없으므로 아래가 허하게 된다. 기왓장은 너무 크고 지나치게 굽기 때문에, 저절로 빈 데가 많게 되니 진흙으로 메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진흙이 내리 누르니 기둥이 휘어지는 병폐가 생기고, 젖은 것이 마르면 기와 밑이 저절로 떠서 비늘진 곳이 물러나며 틈서리가 생기게 된다.
이리하여 바람이 들며, 비가 새고, 새가 뚫으며, 쥐가 숨으며, 뱀이 서리고, 고양이가 뒤적이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집을 세움에는 벽돌의 공이 가장 크다. 비단 높은 담 쌓기만이 아니라 집 안팎을 헤아리지 않고 벽돌을 쓰지 않는 것이 없다. 저 넓고 넓은 뜰에도 눈가는 곳마다 반듯반듯 바둑판을 그린 것처럼 쌓았다.
집이 벽을 의지하여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하여 기둥은 벽 속에 들어 있어서 비바람을 겪지 않는다. 이러므로 불이 번질 염려도 없고 도둑이 뚫을 위험도 없으려니와, 더구나 새ㆍ쥐ㆍ뱀ㆍ고양이 같은 놈들의 걱정이야 있을 수 없다. 가운데는 문 하나만 닫으면 저절로 굳은 성벽이 이룩되어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궤 속에 간직한 셈이 된다. 이로 보면, 많은 흙과 나무도 들지 않고 못질과 흙손질을 할 필요도 없이, 벽돌만 구워 놓으면 집은 벌써 이룩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때마침 봉황성을 새로 쌓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성이 곧 안시성(安市城)이다.”
라고 한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ㆍ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
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楊萬春)이 당 태종(唐太宗)의 눈을 쏘아 맞히매, 태종이 성 아래서 군사를 집합시켜 시위(示威)하고, 양만춘에게 비단 백 필을 하사하여, 그가 제 임금을 위하여 성을 굳게 지킴을 가상(嘉賞)하였다.”
한다. 그러므로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연경에 가는 그 아우 노가재(老稼齋) 창업(昌業)에게 보낸 시(詩)에,
천추에 크신 담략 우리의 양만춘님 / 千秋大膽楊萬春
용 수염 범 눈동자 한 살에 떨어졌네 / 箭射虬髯落眸子
라 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에는,
주머니 속 미물이라 하잘것이 없다더니 / 爲是囊中一物爾
검은 꽃이 흰 날개에 떨어질 줄 어이 알랴 / 那知玄花落白羽
라 하였으니, ‘검은 꽃’은 눈을 말함이요, ‘흰 날개’는 화살을 말함이다. 이 두 노인이 읊은 시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리라. 대개 당 태종이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 하찮은 탄알만 한 작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창황히 군사를 돌이켰다 함은 그 사실에 의심되는 바 없지 않거늘, 김부식(金富軾)은 다만 옛 글에 그의 성명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을 뿐이다. 대개 부식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을 때에 다만 중국의 사서에서 한번 골라 베껴 내어 모든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또 유공권(柳公權 당의 학자요 서예가)의 소설(小說)을 끌어 와서 당 태종이 포위되었던 사실을 입증까지 했다. 그러나 《당서(唐書)》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도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아마 그들이 중국의 수치를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우리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도 감히 쓰지 못했으니, 그 사실이 미더운 것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당 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었는지 않았는지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대체로 이 성을 ‘안시’라 함은 잘못이라고 한다. 《당서》에 보면, 안시성은 평양서 거리가 5백 리요,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하였으므로, 《지지(地志)》에는 봉황성을 평양이라 하기도 한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이름인지 모르겠다. 또 《지지》에, 옛날 안시성은 개평현(蓋平縣 봉천부(奉天府)에 있다)의 동북 70리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개평현에서 동으로 수암하(秀巖河)까지가 3백 리, 수암하에서 다시 동으로 2백 리를 가면 봉황성이다. 만일 이 성을 옛 평양이라 한다면, 《당서》에 이른바 5백 리란 말과 서로 부합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므로 기자(箕子)가 평양에 도읍했다 하면 이를 믿고, 평양에 정전(井田)이 있다 하면 이를 믿으며, 평양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하면 이를 믿어서, 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다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 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 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 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 숙신(肅愼)ㆍ예(穢)ㆍ맥(貊) 등 동이(東彝)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衛滿)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또 오라(烏剌)ㆍ영고탑(寧古塔)ㆍ후춘(後春)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漢四郡)을 죄다 압록강 이쪽에다 몰아 넣어서, 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分排)하고 다시 패수(浿水)를 그 속에서 찾되, 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라 한다. 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이는 무슨 까닭일까. 평양을 한 곳에 정해 놓고 패수 위치의 앞으로 나감과 뒤로 물리는 것은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르는 까닭이다. 나는 일찍이 한사군의 땅은 요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여진(女眞)에까지 들어간 것이라고 했다. 무엇으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현도(玄菟)나 낙랑(樂浪)은 있으나, 진번(眞蕃)과 임둔(臨芚)은 보이지 않는다.
대체 한 소제(漢昭帝)의 시원(始元) 5년(B.C. 82)에 사군을 합하여 2부(府)로 하고, 원봉(元鳳) 원년(B.C. 76)에 다시 2부를 2군(郡)으로 고쳤다. 현도 세 고을 중에 고구려현(高句麗縣)이 있고, 낙랑스물다섯 고을 중에 조선현(朝鮮縣)이 있으며, 요동 열여덟 고을 중에 안시현(安市縣)이 있다. 다만 진번은 장안(長安)에서 7천 리, 임둔은 장안에서 6천 1백 리에 있다. 이는 김윤(金崙 조선 세조(世祖) 때의 학자)의 이른바,
“우리나라 지경 안에서 이 고을들은 찾을 수 없으니, 틀림없이 지금 영고탑(寧古塔)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진번ㆍ임둔은 한말(漢末)에 바로 부여(扶餘)ㆍ읍루(挹婁)ㆍ옥저(沃沮)에 들어간 것이니, 부여는 다섯이고 옥저는 넷이던 것이 혹 변하여 물길(勿吉)이 되고, 혹 변하여 말갈(靺鞨)이 되며, 혹 변하여 발해(渤海)가 되고, 혹 변하여 여진(女眞)으로 된 것이다. 발해의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가 일본(日本)의 성무왕(聖武王)에게 보낸 글월 중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하고, 부여의 옛풍속을 물려받았다.”
하였으니,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사군의 절반은 요동에, 절반은 여진에 걸쳐 있어서, 서로 포괄되어 있었으니, 이것이 본디 우리 강토 안에 있었음은 더욱 명확하다.
그런데 한대(漢代) 이후로, 중국에서 말하는 패수가 어딘지 일정하지 못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은 반드시 지금의 평양으로 표준을 삼아서 이러쿵저러쿵 패수의 자리를 찾는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옛날 중국 사람들은 무릇 요동 이쪽의 강을 죄다 ‘패수’라 하였으므로, 그 이수가 서로 맞지 않아 사실이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선과 고구려의 지경을 알려면, 먼저 여진을 우리 국경 안으로 치고, 다음에는 패수를 요동에 가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패수가 일정해져야만 강역이 밝혀지고, 강역이 밝혀져야만 고금의 사실이 부합될 것이다. 그렇다면 봉황성을 틀림없는 평양이라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만일 기씨(箕氏)ㆍ위씨(衛氏)ㆍ고씨(高氏) 등이 도읍한 곳이라면, 이 역시 하나의 평양이리라 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서》 배구전(裴矩傳)에,
“고려는 본시 고죽국(孤竹國)인데, 주(周)가 여기에 기자를 봉하였더니, 한(漢)에 이르러서 사군으로 나누었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고죽국이란 지금 영평부(永平府)에 있으며, 또 광녕현(廣寧縣)에는 전에 기자묘(箕子墓)가 있어서 우관(冔冠 은(殷)의 갓 이름)을 쓴 소상(塑像)을 앉혔더니, 명(明)의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때 병화(兵火)에 불탔다 하며, 광녕현을 어떤 이들은 ‘평양’이라 부르며, 《금사(金史)》와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광녕ㆍ함평(咸平)은 모두 기자의 봉지(封地)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영평(永平)ㆍ광녕의 사이가 하나의 평양일 것이요, 《요사(遼史 원(元)의 탁극탁이 씀)》에,
“발해(渤海)의 현덕부(顯德府)는 본시 조선 땅으로 기자를 봉한 평양성(平壤城)이던 것을, 요(遼)가 발해를 쳐부수고 ‘동경(東京)’이라 고쳤으니 이는 곧 지금의 요양현(遼陽縣)이다.”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요양현도 또한 하나의 평양일 것이다. 나는,
“기씨(箕氏)가 애초에 영평ㆍ광녕의 사이에 있다가 나중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에게 쫓기어 땅 2천 리를 잃고 차츰 동쪽으로 옮아가니, 이는 마치 중국의 진(晉)ㆍ송(宋)이 남으로 옮겨감과 같았다. 그리하여 머무는 곳마다 평양이라 하였으니, 지금 우리 대동강 기슭에 있는 평양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패수도 역시 이와 같다. 고구려의 지경이 때로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였을 터인즉, ‘패수’란 이름도 따라 옮김이 마치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때에 주(州)ㆍ군(郡)의 이름이 서로 바뀜과 같다. 그런데 지금 평양을 평양이라 하는 이는 대동강을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며, 평양과 함경(咸鏡)의 사이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이다.” 하며, 요양으로 평양을 삼는 이는 헌우낙수(蓒芋濼水)를 가리켜, “이 물은 ‘패수’다.” 하고, 개평현에 있는 산을 가리켜, “이 산은 ‘개마대산’이다.” 한다. 그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지금 대동강을 ‘패수’라 하는 이는 자기네 강토를 스스로 줄여서 말함이다.
당(唐)의 의봉(儀鳳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2년(677)에 고구려의 항복한 임금 고장(高藏)고구려 보장왕(寶藏王) 을 요동주(遼東州)도독(都督)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을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며,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에 옮겨서 이를 통할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고씨(高氏)의 강토가 요동에 있던 것을 당이 비록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니지 못하고 고씨에게 도로 돌려주었은즉, 평양은 본시 요동에 있었거나 혹은 이곳에다 잠시 빌려 씀으로 말미암아 패수와 함께 수시로 들쭉날쭉하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의 낙랑군 관아(官衙)가 평양에 있었다 하나 이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요, 곧 요동의 평양을 말함이다. 그 뒤 승국(勝國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는, 요동과 발해의 일경(一境)이 모두 거란(契丹)에 들어갔으나, 겨우 자비령(慈悲嶺)과 철령(鐵嶺)의 경계를 삼가 지켜 선춘령(先春嶺)과 압록강마저 버리고도 돌보지 않으니, 하물며 그 밖에야 한 발자국인들 돌아보았겠는가. 고려는 비록 안으로 삼국(三國)을 합병하였으나, 그의 강토와 무력이 고씨의 강성함에 결코 미치지 못하였는데,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이 평양의 옛 이름을 그리워하여 다만 중국의 사전(史傳)만을 믿고 흥미진진하게 수ㆍ당의 구적(舊蹟)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은 패수요, 이것은 평양이오.”
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벌써 말할 수 없이 사실과 어긋났으니, 이 성이 안시성인지 또는 봉황성인지를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는가.
성의 둘레는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았다. 그 제도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네 모서리가 반듯하여 네모 말[斗]을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지금 겨우 반쯤밖에 쌓지 않아서 그 높낮이는 비록 예측할 수 없으나, 성문 위 다락 세울 곳에 구름다리를 놓아 허공에 높이 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 공사는 비록 거창스러운 듯하나 여러 가지 기계가 편리하여 벽돌을 나르고 흙을 실어 오고 하는 것이 모두 기계가 움직이고 수레바퀴가 굴러 혹은 위로부터 끌어올리기도 하며 혹은 저절로 가기도 하여 그 법이 일정하지 않으나, 모두 일은 간단하되 공로는 배나 되는 기술이다. 그 어느 하나 본받지 않을 것이 없으나, 다만 길이 바빠서 골고루 구경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설사 진종일 두고 자세히 본다 하더라도 갑자기 배울 수 없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식후에 변계함과 정 진사와 함께 먼저 떠났다. 강영태(康永泰)가 문 밖에까지 나와서 읍(揖)하며 전송하는데 자못 석별(惜別)의 뜻이 보이며, 또 돌아올 때는 겨울이 될 터인즉 책력 한 벌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청심환(淸心丸) 한 개를 내어 주었다.
한 점포 앞을 지나다 보니, 한쪽에 금으로 ‘당(當)’ 자를 쓴 패(牌)가 걸려 있는데, 그 곁줄에는 ‘유군기부당(惟軍器不當 군기만은 전당잡지 않는다는 뜻)’이란 다섯 글자가 씌었으니, 이것은 전당포(典當舖)다. 예쁘장하게 생긴 청년 두셋이 그 안에서 뛰어 나와서 길을 막아 서며, 잠깐만 땀을 들이고 가라 한다. 이에 모두들 말에서 내려 따라 들어가 본즉, 그 모든 시설이 아까 강씨의 집보다도 더 훌륭하다. 뜰 가운데 큰 분(盆)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속에는 서너 대의 연(蓮)이 심어져 있으며, 오색 붕어를 기르고 있다. 한 청년이 손바닥만 한 작은 비단그물을 가져와서 작은 항아리 쪽으로 가더니, 빨간 벌레 몇 마리를 떠다가 분 속에 띄운다. 그 벌레는 게알[蟹卵]같이 작으며, 모두 꼬물꼬물 움직인다. 청년이 다시 부채로 분의 가장자리[盆部]를 두들기면서 고기를 부르니, 고기가 모두 물 위로 나와서 물을 머금고 거품을 뿜는다.
마침 때가 한낮이라 불볕이 내리쬐어서 숨이 막혀 더 오래 머물 수 없으므로, 드디어 길을 떠났다. 정 진사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다가, 나는 정 진사에게 물었다.
“그 성 쌓은 방식이 어떠한가.”
“벽돌이 돌만 못한 것 같애.”
하고 답한다. 나는 또,
“자네가 모르는 말일세. 우리나라의 성곽제도[城制]는 벽돌을 쓰지 않고 돌을 쓰는 것은 잘못일세. 대저 벽돌로 말하면, 한 개의 네모진 틀에서 박아 내면 만 개의 벽돌이 똑 같을지니, 다시 깎고 다듬는 공력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아궁이 하나만 구워 놓으면 만 개의 벽돌을 제 자리에서 얻을 수 있으니, 일부러 사람을 모아서 나르고 어쩌고 할 수고도 없을 게 아닌가. 다들 고르고 반듯하여 힘을 덜고도 공이 배나 되며, 나르기 가볍고 쌓기 쉬운 것이 벽돌만한 게 없네.
이제 돌로 말하자면, 산에서 쪼개어 낼 때에 몇 명의 석수(石手)가 들어야 하며, 수레로 운반할 때에 몇 명의 인부를 써야 하고, 이미 날라다 놓은 뒤에 또 몇 명의 손이 가야 깎고 다듬을 수 있으며, 다듬어내는 데까지 또 며칠을 허비해야 할 것이요, 쌓을 때도 돌 하나하나를 놓기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야 하며, 이리하여 언덕을 깎아내고 돌을 입히니, 이야말로 흙의 살에 돌옷을 입혀 놓은 것이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뻔질하나 속은 실로 고르지 못한 법일세. 돌은 워낙 들쭉날쭉하여 고르지 못한 것이기에, 조약돌로 그 궁둥이와 발등을 괴며, 언덕과 성과의 사이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서 채우므로, 장마를 한 번 치르고 나면 속이 텅 비고 배가 불러져서, 돌 한 개가 튀어나 빠질 경우 그 나머지는 모두 저절로 무너질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요, 또 석회의 성질이 벽돌에는 잘 붙지만 돌에는 붙지 않는 것일세.
내가 일찍이 차수(次修)와 더불어 성제를 논할 때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벽돌이 굳다 한들 어찌 돌을 당할까보냐’ 하자, 차수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벽돌이 돌보다 낫다는 게 어찌 벽돌 하나와 돌 하나를 두고 한 말이오’ 하더군 그래. 이는 가위 움직일 수 없는 철칙일세. 대개 석회는 돌에 잘 붙지 않으므로 석회를 많이 쓰면 쓸수록 더 터져 버리며, 돌을 배치하고 들떠 일어나는 까닭에 돌은 항상 외톨로 돌아서 겨우 흙과 겨루고 있을 따름이네. 벽돌은 석회로 이어 놓으면, 마치 어교(魚膠)가 나무에 합하는 것과 붕사(鵬砂)가 쇠에 닿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많은 벽돌이라도 한 뭉치로 엉켜져 굳은 성을 이룩하므로, 벽돌 한 장의 단단함이야 돌에다 비할 수 없겠지마는, 돌 한 개의 단단함이 또한 벽돌 만 개의 단단함을 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벽돌과 돌 중 어느 것이 이롭고 해로우며 편리하고 불편한가를 쉽사리 알 수 있겠지.”
하였다. 정 진사는 방금 말등에서 꼬부라져 거의 떨어질 것 같다. 그는 잠든 지 오래된 모양이다. 내가 부채로 그의 옆구리를 꾹 지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웬 잠을 자고 듣지 않아.”
하고 큰 소리로 꾸짖으니, 정 진사가 웃으며,
“내 벌써 다 들었네. 벽돌은 돌만 못하고, 돌은 잠만 못하느니.”
한다. 나는 화가 나서 때리는 시늉을 하고,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다.
시냇가에 이르러 버드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이다. 오도하(五渡河)까지 5리만큼씩 돈대가 하나씩 있다. 이른바 두대자(頭臺子)ㆍ이대자(二臺子)ㆍ삼대자(三臺子)라는 것은 모두 봉대(烽臺 봉화를 놓는 곳)의 이름이다. 벽돌을 성처럼 쌓아 높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마치 필통(筆筒)같이 동그랗다. 대 위에는 성첩(城堞)이 시설되었는데, 형편없이 헐어진 대로 내버려 두었음은 무슨 까닭일까. 길가에 간혹 널을 돌 무더기로 눌러 둔 것이 보인다. 오랫동안 그냥 내버려 두어서 나무 모서리가 썩어 버린 것도 있다. 대개 뼈가 마르기를 기다려서 불사른다 한다.
흔히 길 옆에 무덤이 있는데, 위가 뾰족하고 떼를 입히지 아니하였으며, 백양(白楊)을 많이 줄지어 심었다.
도보(徒步)로 길 다니는 사람들이 극히 적다. 걷는 이는 반드시 어깨에 포개(鋪盖) 침구를 포개라 한다 를 짊어졌다. 포개가 없으면 여점에서 재우지 않으니, 이는 도둑이 아닌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안경을 쓰고 길가는 자는 눈의 정력을 기르고자 함이다. 말을 탄 이는 모두 검은 비단신을 신고, 걷는 이는 대체로 푸른 베신을 신었는데, 신바닥에는 모두 베를 수십 겹이나 받혀 댄 것이다. 미투리나 짚신은 보지를 못했다.
송참(松站)에서 묵다. 이 곳은 설리참(雪裏站)이라고도 하고, 또 설유참(雪劉站)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 70리를 갔다. 누가 말했다.
“이곳은 옛날 진동보(鎭東堡)이다.”
[주D-001]경조당상(京兆堂上) : 경조는 한성부의 별칭. 한성부의 당상관을 말함.
[주D-002]당서(唐書) : 유후(劉煦)의 《구당서(舊唐書)》, 구양수(歐陽修)의 《신당서(新唐書)》가 있다.
[주D-003]동이(東彝) : 어떤 본에는 동이(東夷)로 되었으나 그릇되었다. 연암은 이(夷)는 야만족이라 하여 이(彝)를 썼다.
[주D-004]한서(漢書) : 동한(東漢, 後漢) 반고(班固)가 지은 전한(前漢)의 역사서.
[주D-005]금사(金史) : 원(元)의 탁극탁(托克托) 등이 순제(順帝)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주D-006]문헌통고(文獻通考) : 원의 마단림(馬端臨)이 지었다.
[주D-007]차수(次修) : 박제가(朴齊家)의 자. 또는 재선(在先)ㆍ수기(修其)라고도 하였다. 연암의 제자.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9일 병자(丙子)
맑게 개다. 배로 삼가하(三家河)를 건넜다. 배가 마치 말구유같이 생겼는데 통나무를 파서 만들었고, 상앗대도 없이 양편 강언덕에 아귀진 나무를 세우고 큰 밧줄을 건너질렀다. 그 줄을 따라가면 배가 저절로 오가기 마련이다. 말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다시 배로 유가하(劉家河)를 건너 황하장(黃河庄)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낮이 되니 극도로 더웠다. 말 탄 채로 금가하(金家河)를 건너니, 여기가 이른바 팔도하(八渡河)이다. 임가대(林家臺)ㆍ범가대(范家臺)ㆍ대방신(大方身)ㆍ소방신(小方身) 등지는 5리나 10리마다 마을이 즐비하고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졌으며, 때마침 올기장이 누렇게 익었고 옥수수 이삭이 한창 패었는데, 그 잎을 모조리 베었으니, 이는 말과 노새의 먹이로 쓰기도 하고, 또는 옥수숫대가 지기(地氣)를 오로지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관제묘(關帝廟)가 있고, 몇 집만 모여 사는 곳에는 반드시 벽돌 굽는 큰 가마가 있어서 벽돌을 굽는다. 벽돌을 틀에 박아 내어 말리는 것이며, 전에 구워 놓은 것, 새로 구울 것들이 곳곳에 산무더기처럼 쌓였으니, 대개 벽돌이 무엇보다도 일용에 요긴한 물건인 까닭이다.
전당포에서 잠깐 쉬려는데, 주인이 중간방으로 맞이하여 더운 차(茶) 한 잔을 권한다. 집안에는 진귀한 물건이 진열되었다. 시렁의 높이는 들보에 닿고, 그 위엔 전당 잡은 물건을 차례로 얹어 놓았다. 모두들 옷이다. 보자기에 싼 채 종이쪽을 붙여서 물건 임자의 성명ㆍ별호(別號)ㆍ상표(相標 얼굴의 특징을 기록한 것)ㆍ거주(居住) 등을 적고는 다시,
“모년ㆍ모월ㆍ모일에 무슨 물건을 무슨 자호(字號) 붙인 전당포에다 친히 건너주었다.”
라고 썼다. 그 이자는 10분의 2를 넘는 법이 없고, 기한을 지난 채 한 달이 넘으면 물건을 팔아 버릴 수 있다. 금자(金字)로 쓴 주련(柱聯)에,
홍범의 구주에는 먼저 부를 말하였고 / 洪範九疇先言富
대학의 십장에도 반은 재를 논하였는데 / 大學十章半論財
라는 것이 있다. 옥수숫대로 교묘하게 누각처럼 만들어, 그 속에 풀벌레 한 마리를 넣어 두고 그 우는 소리를 듣는다. 처마 끝에는 조롱을 달아매고 이상한 새 한 마리를 기른다.
이날 50리를 행하여 통원보(通遠堡)에서 묵다. 여기가 곧 진이보(鎭夷堡)이다.
[주D-001]홍범(洪範) : 홍범은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진술한 국가의 기본 법도.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7월 1일 정축(丁丑)
새벽에 큰비가 내려 떠나지 못하다.
정 진사ㆍ주 주부ㆍ변군ㆍ내원ㆍ조 주부(趙主簿) 학동(學東)상방의 건량판사(乾粮判事)이다. 등과 더불어 투전판을 열어서 소일도 할 겸 술값을 벌자는 심산이다. 그들은 나더러 투전에 솜씨가 서툴다고 한몫 끼지 말고, 그저 가만히 앉아서 술만 마시라고 한다. 속담에 이른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셈이니, 슬며시 화가 나긴 하나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혼자 옆에 앉아서 지고 이기는 구경이나 하고 술은 남보다 먼저 먹게 되었으니, 미상불 해롭잖은 일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가끔 여인의 말소리가 들려 온다. 하도 가냘픈 목청과 아리따운 하소연이어서 마치 제비와 꾀꼬리가 우짖는 소리인 듯싶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는 아마 주인집 아가씨겠지. 반드시 절세의 가인이리라.”
하고, 일부러 담뱃불 댕기기를 핑계하여 부엌에 들어가 보니, 나이 쉰도 넘어 보이는 부인이 문쪽에 평상을 의지하고 앉았는데, 그 생김생김이 매우 사납고 누추하다. 나를 보고,
“아저씨, 평안하세요.”
한다. 나는,
“주인께서도 많은 복을 받으십시오.”
하며 답하고는, 짐짓 재를 파헤치는 체하면서 그 부인을 곁눈질해 보았다. 머리쪽지에는 온통 꽃을 꽂고, 금비녀 옥귀고리에 분연지를 살짝 바르고, 몸에는 검은 빛 긴 통바지에 촘촘히 은단추를 달았으며, 발엔 풀ㆍ꽃ㆍ벌ㆍ나비를 수놓은 한 쌍의 신을 신었다. 대개 만주 여자인 듯싶다. 다리에는 붕대를 감지 않고 발에는 궁혜(弓鞋)를 신지 않았음을 보아서 짐작할 수 있다. 주렴 속에서 한 처녀가 나온다. 나이나 얼굴이나가 20여 세쯤 되어 보인다. 그가 처녀임은 머리를 양쪽으로 갈라서 위로 틀어올린 것으로 보아서 분별할 수 있다. 생김새는 역시 억세고 사나우나, 다만 살결이 희고 깨끗하다. 쇠양푼을 갖고 와서 퍼런 질그릇을 기울여 수수밥 한 사발을 수북하게 퍼담고, 양푼의 물을 부어서 서쪽 벽 아래 놓여 있는 교의에 걸터앉아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다. 또 두어 자 길이나 되는 파뿌리를 잎사귀째 장에 찍어서 밥과 같이 먹는다. 목에는 달걀만 한 혹이 달려 있다. 그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얼굴엔 조금도 수줍어하는 기색이 없다. 이는 아마 해마다 조선 사람을 보아 와서 아주 예사로 낯익었기 때문이리라.
뜰은 넓이가 수백 칸이나 된다. 장마비에 수렁이 되어 있다. 시냇가 물에 씻긴 조약돌이, 마치 바둑돌이나 참새알 같은 것이 애초에는 쓸데없는 물건이었지마는, 그 모양과 빛이 비슷한 것을 골라서 문간에 아롱진 봉새 모양으로 무늬지게 깔아서 수렁을 막았다. 그들에게는 버리는 물건이 없음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닭은 모두 꼬리와 깃을 뽑고 두 겨드랑 밑의 털까지도 뜯어 버리어, 이따금 고깃덩이만 남은 닭이 절름거리면서 다닌다. 이는 빨리 키우는 한 방법이요, 또 이가 이는 것을 예방함이다. 여름이 되면 닭에 검은 이가 일어서, 꼬리와 날개에 붙어오르면 반드시 콧병이 생기며, 입으로는 누른 물을 토하고 목에는 가래 소리가 난다. 이것을 계역(雞疫)이라 한다. 그러므로 미리 그 꼬리와 깃을 뽑아서 시원한 기운을 통해 준다 한다. 꼴은 하도 추악해서 차마 바로 볼 수 없다.
[주D-001]일부러 …… 보니 : 이 부분은 다른 본에 빠졌고, ‘수택본’과 ‘일재본’에서만 보인다.
[주D-002]재를 …… 보았다 : 이 구절은 ‘수택본’에 의거하였다. 다른 본들에는, “그 복식의 제도를 구경하였다.”로 되었다.
[주D-003]이는 빨리 …… 준다 한다 : 이 부분은 모든 본에 빠진 것을, ‘일재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2일 무인(戊寅)
새벽에 큰비가 내리다. 늦게 개었다.
앞 시냇물이 불어서 건널 수 없으므로 떠나지 못했다. 정사가 내원과 주 주부를 시켜 앞 시내에 나가서 물을 보고 오라 한다. 나도 따라 나섰다. 몇 리를 가지 않아서 큰 물이 앞을 가로막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헤엄 잘 치는 사람을 시켜서 물속에 들어가 그 얕고 깊음을 재게 하니, 열 발자국도 못 가서 어깨가 잠긴다. 돌아와서 수세를 알리니, 정사가 걱정하여 역관과 각방(各房)의 비장들을 모조리 불러서 각기 물 건널 계책을 말하게 한다. 부사와 서장관 역시 참석하였다. 부사가,
“문짝과 수레의 바탕을 많이 세내어 떼를 매어서 건너는 게 어떠하리까.”
하니, 주 주부가,
“거, 참 좋은 계책이올시다.”
한다. 수역관이,
“문짝이나 수레를 그렇게 많이 얻을 수 없으리다. 그런데 이 근처에 집 지으려고 둔 재목이 십여 간분 있으니 그것을 세낼 수는 있으나, 단지 이를 얽어맬 칡덩굴을 얻기 어려울 듯합니다. ”
하여,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내가,
“무어, 뗏목을 맬 것까지야 있소. 내게 한두 척이 있는데, 노도 있고 상앗대도 갖추었으나 다만 한 가지가 없소.”
하니, 주 주부가,
“그럼, 없는 게 무엇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다만 그를 잘 저어갈 사공이 없소.”
한즉,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는다.
주인은 워낙 추솔하고 멍청하여 눈을 부릅뜨고도 ‘고무래 정(丁) 자’를 모를 무식쟁이였지만, 책상 위에는 오히려 《양승암집(楊昇菴集)》과 《사성원(四聲猿)》 같은 책들이 놓여 있고, 길이 한 자 넘어 보이는 정남색(正藍色) 자기병에 조남성(趙南星)의 철여의(鐵如意)가 비스듬히 꽂혀 있으며, 운간(雲間) 호문명(胡文明)이 만든 조그만 납다색(蠟茶色) 향로며 그 밖의 교의ㆍ탁자ㆍ병풍ㆍ장자(障子) 등이 모두 아치(雅致)가 있어서 궁벽한 시골티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주인의 살림살이는 좀 넉넉한가보오.”
하고 물은즉, 그는,
“1년 줄곧 부지런히 일해 봐야 기한을 면하지 못한답니다. 만일 귀국 사신의 행차가 없다면, 아주 살림살이는 막연할 형편입니다.”
한다. 나는 또,
“아들과 딸을 몇이나 두었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도둑놈 하나만 있으나, 아직 여의지 못했답니다.”
하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이오. 도둑놈 하나라니.”
“예, 도둑도 딸 다섯 둔 집에는 들지 않는다 하오니, 어찌 집안의 좀도둑이 아니옵니까.”
한다.
오후에 문을 나서 바람을 쐬었다. 수수밭 가운데서 별안간 새총 소리가 난다. 주인이 급히 나와 본다. 밭 속에서 어떤 사람 하나가 한 손에 총을 들고 또 한 손으로 돼지 뒷다리를 끌고 나와 주인을 흘겨 보고,
“왜, 이 짐승을 내놓아서 밭에 들여 보내지.”
하고 노한 음성을 낸다. 주인은 다만 송구한 기색으로 공손히 사과하여 마지않는다. 그 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돼지를 끌고 가버린다. 주인은 자못 섭섭한 모양으로 우두커니 서서 거듭 한탄만 한다. 내가,
“그 자가 잡아간 돼지는 뉘 집에서 먹이던 돼지인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우리 집에서 기르던 거죠.”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잘못 남의 밭에 들어갔기로서니 수숫대 하나 다친 것이 없는데, 그 놈이 왜 함부로 돼지를 잡아 죽이지요. 주인은 당연히 그 자에게 돼지 값을 물려야 하지 않겠소.”
한즉, 주인은,
“값을 물리다니요, 돼지우리를 잘 단속하지 못한 것이 이쪽의 잘못이죠.”
한다.
대개 강희제(康熙帝 청의 제4대 황제)가 농사를 매우 소중히 여겨서, 그 법에 마소가 남의 곡식을 밟으면 갑절로 물어 주어야 하고, 함부로 마소를 놓는 자는 곤장 60대를 맞히며, 양이나 돼지가 밭에 들어간 것을 밭 임자가 보면, 곧 그 짐승을 잡아가도 주인은 감히 내가 주인인 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만 수레가 다니는 자유는 막지 못한다. 그리하여, 길이 수렁이 되면 밭이랑 사이로도 수레를 끌고 들어가기 쉬우므로, 밭 임자는 항상 길을 잘 닦아서 밭을 지키기에 힘쓴다고 한다.
마을 가에 벽돌가마가 둘이 있었다. 하나는 마침 거의 굳어서, 흙을 아궁이에 이겨 붙이고 물을 수십 통 길어다가 잇달아 가마 위로 들어붓는다. 가마 위가 조금 움푹 패어서 물을 부어도 넘치지 않는다. 가마가 한창 달아서 물을 부으면 곧 마르고 하므로 가마가 달아서 터지지 않게 물을 붓는 것 같다. 또 한 가마는 벌써 구워서 식어졌으므로, 방금 벽돌을 가마에서 끌어내는 중이다. 대체로 이 벽돌가마의 제도가 우리나라의 기와가마와는 아주 다르다. 먼저 우리나라 가마의 잘못된 점을 말해야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와가마는 곧 하나의 뉘어 놓은 아궁이여서 가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애초에 가마를 만드는 벽돌이 없기 때문에 나무를 세워서 흙으로 바르고 큰 소나무를 연료로 삼아서 이를 말리는데, 그 비용이 벌써 수월찮다. 아궁이가 길기만 하고 높지 않으므로,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한다. 불이 위로 오르지 못하므로 불 기운이 힘이 없으며, 불 기운이 힘이 없으므로 반드시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한다. 소나무를 때어 불꽃을 세게 하므로 불길이 고르지 못하고, 불길이 고르지 못하므로 불에 가까이 놓인 기와는 이지러지기가 일쑤이며, 먼 데 놓인 것은 잘 구워지지 않는다. 자기를 굽거나 옹기를 굽거나를 무론하고 모든 요업(窯業)의 제도가 다 이 모양이며, 그 소나무를 때는 법 역시 한가지니, 송진의 불광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세다. 그러나 소나무는 한번 베면 새 움이 돋아나지 않는 나무이므로, 한번 옹기장이를 잘못 만나면 사방의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된다. 백년을 두고 기른 것을 하루아침에 다 없애 버리고, 다시 새처럼 사방으로 소나무를 찾아서 흩어져 가버린다. 이것은 오로지 기와 굽는 방법 한 가지가 잘못되어서, 나라의 좋은 재목이 날로 줄어들고 질그릇점 역시 날로 곤궁해지는 것이다.
이곳의 벽돌가마를 보니, 벽돌을 쌓고 석회로 봉하여 애초에 말리고 굳히는 비용이 들지 않고, 또 마음대로 높고 크게 할 수 있어서 그 꼴이 마치 큰 종(鐘)을 엎어 놓은 것 같다. 가마 위는 못처럼 움푹 패게 하여 물을 몇 섬이라도 부을 수 있고, 옆구리에 연기 구멍 네댓을 내어서 불길이 잘 타오르게 되었으며, 그 속에 벽돌을 놓되 서로 기대어서 불꽃이 잘 통하도록 되어 있다. 대개 요약해 말한다면, 그 묘법은 벽돌을 쌓는 데 있다 하겠다. 이제 나로 하여금 손수 만들게 한다면 극히 쉬울 듯싶으나, 입으로 형용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정사가,
“그 쌓은 것이 ‘품(品) 자’와 같던가.”
하고 묻기에, 내 대답하되,
“그런 것 같기도 하오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
하니, 변 주부가,
“그러면 책갑(冊匣)을 포개 놓은 것 같습디까.”
하기에, 나는 또,
“그런 듯도 하지만, 꼭 그렇다고도 할 수 없을 걸.”
하였다.
대략 그 쌓는 법이, 벽돌을 눕히지 않고 모로 세워서 여남은 줄을 방고래처럼 만들고, 다시 그 위에다 벽돌을 비스듬히 놓아서 차차 가마 천장에 닿게까지 쌓아올린다. 그러는 중에 구멍이 저절로 뚫어져서 마치 고라니의 눈같이 된다. 불기운이 그리로 치오르면 그것이 각기 불목이 되어, 그 수없이 많은 불목이 불꽃을 빨아들이므로 불기운이 언제나 세어서, 비록 저 하찮은 수수깡이나 기장대를 때도 고루 굽히고 잘 익는다. 그러므로 터지거나 뒤틀어지거나 할 걱정은 저절로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옹기장이는 먼저 그 제도를 연구하지 않고, 다만 큰 솔밭이 없으면 가마를 놓을 수 없다고만 한다. 이제 요업(窯業)은 금할 수 없는 일이요, 소나무 역시 한이 있는 물건인즉, 먼저 가마의 제도를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니, 그렇게 되면 양편이 다 이로울 것이다. 옛날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과 노가재(老稼齋)가 모두 벽돌의 이로움을 논하였으되, 가마의 제도에 대해서는 상세히 말하지 않았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수수깡 3백 줌이면 한 가마를 구울 수 있는데, 벽돌 8천 개가 나온다.”
한다. 수수깡의 길이가 길 반이고, 굵기가 엄지 손가락만큼씩 되니, 한 줌이라야 겨우 너덧 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즉, 수수깡을 때면 불과 천 개 남짓 들여서 거의 만 개의 벽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하루 해가 몹시 지루하여 한 해[年]인 듯싶고,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더욱 심해져서 졸려 견딜 수 없던 차에, 곁방에서 투전판이 벌어져 떠들고 야단들이다. 나도 뛰어가서 그 자리에 끼어 연거푸 다섯 번을 이겨 백여 닢을 땄으므로, 술을 사서 실컷 마시니 가히 어제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다. 내가,
“그래도 불복인가.”
하니, 조 주부와 변 주부가,
“요행으로 이겼을 뿐이죠.”
한다. 서로 크게 웃었다. 변군과 내원이 직성이 풀리지 않았음인지 다시 한판 하자고 조르나, 나는,
“뜻을 얻은 곳에 두 번 가지 말아야 하느니, 만족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라.”
하고 그만두었다.
[주D-001]양승암집(楊昇菴集) : 명의 학자 양신(楊愼)의 문집이다. 승암은 그의 호.
[주D-002]사성원(四聲猿) : 명 서위(徐渭)가 지은 전기(傳奇).
[주D-003]조남성(趙南星) : 명 희종(明熹宗)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로서, 위충현(魏忠賢)에게 몰리어 대주(代州)로 귀양가서 죽었다.
[주D-004]철여의(鐵如意) : 쇠로 만든 여의. 여의는 손에 지니는 완상물의 일종.
[주D-005]운간(雲間) : 강소성(江蘇省) 송강현(松江縣)의 옛 이름.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3일 기묘(己卯)
새벽에 큰비가 내리다가 아침과 낮에는 화창하게 개었다. 밤들어 다시금 큰비가 내려서 이튿날 새벽까지 멎지 않으므로 또 묵다.
아침에 일어나 들창을 여니, 지리하던 비가 깨끗이 개고 맑은 바람이 이따금 불어오며 날씨가 청명한 것으로 보아서, 낮에는 더울 것 같다. 석류꽃이 땅에 가득히 떨어져서 붉은 진흙으로 변해 버렸다. 수구화는 이슬에 함빡 젖고, 옥잠화는 눈덩이처럼 머리를 쳐든다.
문 밖에서 퉁소ㆍ피리ㆍ징 등의 소리가 나기에 급히 나가 보니, 신행가는 행차다. 채색 그림 그린 사초롱[紗燈籠]이 여섯 쌍, 푸른 일산(日傘)이 한 쌍, 붉은 일산이 한 쌍이요, 퉁소 한 쌍, 날라리 한 쌍, 피리 한 쌍, 징경 한 쌍이 있고, 가운데 푸른 가마 한 채를 교군 넷이 메고 간다. 사면에 유리를 끼어서 창을 내었고, 네모에는 색실을 드리워서 술을 달았다. 가마 한 허리에 통나무를 받혀서 푸른 밧줄로 가로 묶고, 그 통나무 앞뒤로 다시 짧은 막대를 가로질러 얽어매어 그 양쪽 머리를 네 사람이 메었는데, 여덟 발자국이 발맞추어 한 줄로 가므로, 흔들리거나 출렁거리거나 하지 않고 그저 허공에 떠서 가는 폭이다. 그 법이 아주 묘하다. 가마 뒤에 수레 두 채가 있는데, 모두 검은 베로 방처럼 둘러씌우고 나귀 한 마리로 끌고 간다. 한 수레에는 두 늙은 여인을 태웠는데, 얼굴은 모두 추하지만 성적(成赤)은 폐하지 않고 앞머리가 다 벗어져서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처럼 번들번들 빛난다. 시늉만 생긴 쪽이 뒤에 달렸는데 가지가지 꽃을 빈틈없이 꽂았다. 양쪽 귀에는 귀고리를 달고, 몸에는 검은 웃옷에 누런 치마를 입었다. 또 한 수레에는 젊은 여인 세 사람을 태웠는데, 주홍빛 또는 푸른빛 바지를 입고 모두 치마를 두르지 않았다. 그 중에 한 소녀는 제법 아리땁다. 대체 그 늙은이는 한님과 젖어미요, 이 소녀들은 몸종이라 한다.
30여 명의 말 탄 군사가 삑 둘러서 옹위(擁衛)한 속에 한 뚱뚱한 사내가 앉아 있다. 그는 입 가에나 턱 밑에 검은 수염이 거칠게 헝클어지고, 구조망포(九爪蠎袍 청인 관리들이 입는 관복)를 걸쳐 입었으며, 흰 말과 금안장에 은등자를 넌지시 디디고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찼다. 뒤에는 수레 세 바리에 의롱(衣籠)이 가득 실렸다.
내가 주인더러,
“이 동리에도 수재(秀才)나 훈장(訓長)이 있을 테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이런 시골 구석에 아무런 왕래가 없으니 무슨 학구선생(學究先生)이 있사오리까마는 지난해 가을에 우연히 수재 한 분이 세관(稅官)을 따라 서울서 오셨는데, 도중에서 이질을 만나 이곳에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그려. 이곳 사람들의 각별한 구료를 입어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이르기까지에 아주 말끔히 낫게 되었죠. 그 선생님은 문장이 뛰어날 뿐더러, 겸하여 만주글도 쓸 줄 안답니다. 그는 계속해 이곳에 머물러 계셔서, 한두 해 동안 글방을 내고 이 시골의 아이들을 성심껏 가르쳐서 병 구료를 해 준 은혜를 갚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 관제묘에 계십니다.”
한다. 나는,
“그럼, 잠깐 주인이 인도해 줄 수 없겠소.”
한즉, 주인은,
“무어, 남의 길잡이를 요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하며 손을 들어,
“저기 저 높다란 사당집이 거기죠.”
하고 가리킨다. 나는,
“그 선생의 성함은 무엇이지요?”
하니, 주인은,
“이 마을에서는 모두들 그를 부 선생(富先生)이라 부릅니다.”
한다. 나는 또,
“부 선생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소?”
한즉, 주인은,
“나으리께서 친히 가셔서 직접 물어 보십시오.”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 붉은 종이 수십 쪽을 들고 나와서 펴 보이며,
“이게 부 선생님께서 친히 써 주신 글씨입니다.”
한다. 그 붉은 종이의 글씨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내리쓴 가는 글자로,
“아무 어른 존전(尊前)에 아뢰옵니다. 모년ㆍ모월ㆍ모일에 어른께옵서 제게로 왕림하여 주시옵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주인은 이어서,
“이것은 제 아우가 지난 봄에 사위를 볼 때에 청첩을 그에게 빌려서 쓴 것입니다.”
한다. 대체로 그 글씨는 겨우 글자가 모양을 이룬 정도이다. 다만 수십 장의 자양이 크지도 않고 작지고 않으며, 실에 구슬을 꿴 듯 책판에 글자를 박은 듯 똑같다. 나는 혼자서,
“혹시 그 수재는 부정공(富鄭公)의 후손이나 아닌가.”
생각하고, 곧 시대를 불러서 함께 관제묘를 찾아갔다. 괴괴하여 인기척이 없다. 두루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차에, 오른편 곁방에서 아이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있다가 한 아이가 문을 열고 목을 늘여 한번 살피더니, 이내 뛰어나와 우리를 돌아보지도 않고 한 달음에 어디로 가버린다. 나는 이 아이의 뒤를 따라가면서,
“너의 스승님은 어디 계시냐?”
하고 물은즉, 아이는,
“무엇 말씀이어요?”
한다. 나는 또,
“부 선생님 말씀이야.”
하였으나, 아이는 조금도 듣는 체 않고 다만 입속으로 중얼중얼하다가 휑하니 가버린다. 내가 시대더러,
“그 선생이 아마 이 속에 있겠지.”
하고, 줄곧 오른편 곁방으로 가서 문을 열어 보니, 빈 교의 네댓이 놓였을 뿐, 아무런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문을 닫고 몸을 돌이키려고 할 즈음에, 아까 그 아이가 한 노인을 데리고 온다. 생각에 이 이가 곧 ‘부’란 사람인 듯싶다. 그가 잠깐 이웃에 나간 것을 아이가 달려가서 손님이 왔다 하여 돌아온 모양이다. 그 생김생김을 보니, 단아한 빛이라곤 도무지 없다. 앞으로 가서 깍듯이 읍(揖)하자, 노인이 별안간에 와락 달려들어서 허리를 껴안고 힘껏 들었다 놓으며, 또 손을 잡고 흔들면서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짓는다. 처음에는 놀랍고, 다음에는 불쾌하였다. 내가,
“당신이 부공(富公)이시오?”
한즉, 그 노인이 아주 기뻐하면서,
“영감께서 어찌 제 성을 아십니까.”
한다. 나는,
“저는 오랫동안 선생의 성화를 높이 들어서, 마치 우레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싶습니다.”
한즉, 부가,
“당신의 성함은 무어라 하십니까.”
한다. 내 성명을 써서 보이니, 그 역시 써 보인다. 이름은 부도삼격(富圖三格)이요, 호는 송재(松齋), 자는 덕재(德齋)라 한다. 나는,
“삼격이란 무슨 뜻입니까?”
한즉, 그는,
“이건 저의 성명이옵니다.”
한다. 나는 또,
“살고 계신 고을과 관향(貫鄕)은 어디셔요.”
한즉, 그는,
“저는 만주양람기(鑲藍旗)에 사는 사람이올시다.”
하고 다시,
“영감께서는 이번엔 의당 면가(面駕)하시겠지요?”
하고 묻기에, 나는,
“그게 무슨 말씀이오.”
한즉, 그는,
“황제께옵서 의당 영감을 불러 보시겠지요?”
한다. 내가,
“황제께서 만일 접견하신다면 노인의 말씀을 잘 여쭈어서 작은 벼슬이라도 붙게 할 생각인데, 어떠하오.”
한즉, 그는,
“만일 그렇게까지 해 주신다면, 박공(朴公)의 갸륵하신 은덕은 결초보은(結草報恩)으로도 갚기 어렵겠소이다.”
한다. 나는 또,
“물에 막혀서 이곳에 머무른 지가 벌써 수일이나 되었소. 이다지 긴 여름 해를 보내기 난감하니, 노인께 볼 만한 책이 있으면 며칠만 빌려 주실 수 없겠소.”
하였더니, 그는,
“별로 없습니다. 전에 서울 있을 때, 가친 절공(折公)이 명성당(鳴盛堂 북경 유리창(琉璃廠)에 있었다)이라고 이름을 붙인 각포(刻舖 판각하는 집)를 내었는데, 그 때의 책 목록(目錄)이 마침 행장 속에 들어 있사온즉, 만일 소일삼아 보시려면 빌려 드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영감께서는 이제 바로 돌아가셔서 진짜 환약 청심환이다. 과 조선 부채 중에 잘 된 것을 골라서 초면의 정표로 주신다면 영감의 참된 사귐의 뜻을 알겠으니, 그 때에 서목을 빌려 드려도 늦지 않겠소이다.”
한다. 그 생김새와 말투를 보자니, 뜻이 하도 비루하고 용렬하여 더불어 이야기할 바가 못 될 뿐더러, 오래 앉았을 수도 없으므로 곧 하직하고 일어섰다. 부가 문에 나와 읍을 하여 보내면서,
“귀국의 명주를 살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왔다. 정사가,
“무어 볼 만한 것이 있던가. 더위 먹을까 조심스러우이.”
하기에, 나는,
“아까 한 늙은 훈장을 만났는데, 한갓 만주 사람일 뿐 아니라 몹시 비루하여 더불어 이야기할 위인이 못 됩디다그려.”
한즉, 정사는,
“그가 이왕 구하는 바에야 어찌 환약 한 개, 부채 한 자루를 아끼겠는가. 그리고 서목을 빌려다 봄도 해롭진 않아.”
한다. 드디어 시대를 시켜서 청심환 한 개와 어두선(魚頭扇) 한 자루를 보냈더니, 시대가 이내 크기가 손바닥만하고 몇 장 되지도 않은 작은 책을 들고 돌아온다. 그나마 모두 빈 종이였고, 기록된 서목은 모두 청인의 소품(小品) 70여 종이다. 이는 불과 몇 장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많은 값을 요구하니, 그의 뻔뻔스러움은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왕 빌려 온 것이요, 또 눈을 새롭기 하기 위하여, 베껴 놓고 돌려 보내기로 한다.
명성당서목(鳴盛堂書目)
척독신어(尺牘新語) 6책(六册) : 왕기(汪淇 청대 학자) 첨의(瞻漪 왕기의 자) 전(箋).
분서(焚書) 6책, 장서(藏書) 18책, 속장서(續藏書) 9책 : 이지(李贄 명의 사상가요 문인, 이름을 재지(載贄)라고도 함) 탁오(卓吾 이지의 자) 저 (著).
궁규소명록(宮閨小名錄), 장주잡설(長洲雜說), 서당잡조(西堂雜俎) : 우동(尤侗 명의 문학가) 전성(展成 우동의 자) 저.
균랑우필(筠廊偶筆) : 송락(宋犖 청의 문인) 목중(牧仲 송락의 자) 저.
동서자(同書字), 촉민소기(蜀閩小記), 인수옥서영(因樹屋書影) : 주량공(周亮工 명말 청조 문학가) 원량(元亮 주량공의 자) 저.
사례촬요(四禮撮要) : 감경(甘京 청의 학자, 자는 건재(健齋)) 저.
설림(說林), 서하시화(西河詩話) : 모기령(毛奇齡 청대의 학자, 자는 대가(大可)) 저.
운백광림(韻白匡林), 운학통지(韻學通指), 손서(潠書) : 모선서(毛先舒 청대의 시인) 치황(稚黃 모선서의 자) 저.
서산기유(西山紀游) : 주금연(周金然 청대의 시인, 자는 광거(廣居)) 저.
일지록(日知錄), 북평고금기(北平古今記) : 고염무(顧炎武 청대의 학자, 자는 영인(寧人)) 저.
부지성명록(不知姓名錄) : 이청(李淸 청의 학자) 영벽(映碧 이청의 호, 자는 심수(心水)) 저.
장설(蔣說) : 장호신(蔣虎臣) 저.
영매암억어(影梅菴憶語) : 모양(冒襄 명말 학자) 벽강(辟疆 모양의 자) 저.
고금서자변와(古今書字辨訛), 동산담원(東山談苑), 추설총담(秋雪叢談) : 여회(余懹 명말 학자) 담심(淡心 여회의 자) 저.
동야전기(冬夜箋記) : 왕숭간(王崇簡 청대 학자, 자는 경재(敬載)) 저.
황화기문(皇華記聞), 지북우담(池北偶談), 향조필기(香祖筆記) : 왕사진(王士禛 청대의 문인, 사정(士禎)이라고도 함.) 이상(貽上 왕사진의 자) 저.
모각양추(毛角陽秋), 군서두설(羣書頭屑), 규합어림(閨閤語林), 주조일사(朱鳥逸史) : 왕사록(王士祿 왕사진의 형으로 문인, 자는 자저(子底)) 저.
입옹통보(笠翁通譜), 무성희(無聲戲), 소설귀수전고사(小說鬼輸錢故事) : 이어(李漁 청대의 극작가) 입옹(笠翁 이어의 자) 저.
천외담(天外談) : 석방(石龎 청대 문인, 자는 천외(天外)) 저.
주대기연(奏對機緣) : 홍각(弘覺) 저.
십구종(十九種) : 시호신(柴虎臣) 저.
귤보(橘譜) : 저호남(諸虎男) 저.
일하구문(日下舊聞) 20책, 분묵춘추(粉黑春秋) : 주이준(朱彝尊 청대 학자) 석창(錫鬯 주이준의 자) 저.
우초신지(虞初新志) : 장조(張潮 청대 학자) 산래(山來 장조의 자) 저.
기원기소기(寄園寄所寄) 8책 : 조길사(趙吉士 청대 학자, 자는 천우(天羽)) 저.
설령(說齡) : 왕완(汪涴) 저.
설부(說郛) : 오진방(吳震方 청대 학자) 청단(靑壇 오진방의 자) 저.
단궤총서(檀几叢書) : 왕탁(王晫 청대 학자) 저.
삼어당일기(三魚堂日記) : 육롱기(陸隴其 청대 성리학자, 자는 가서(稼書)) 저.
역선록(亦禪錄), 유몽영(幽夢影) : 장조(張潮) 저.
양경구구록(兩京求舊錄) : 주무서(朱茂曙) 저.
연주객화(燕舟客話) : 주재준(周在浚 주양공의 아들, 자는 설객(雪客)) 저.
숭정유록(崇禎遺錄) : 왕세덕(王世德 명말 절사(節士), 자는 극승(克承)) 저.
입해기(入海記) : 사사련(査嗣璉 청대 학자, 다른 이름은 신행(愼行), 자는 하중(夏重) 또는 회여(悔餘)) 저.
유구잡록(琉球雜錄) : 왕즙(汪楫 청대 학자, 자는 주차(舟次)) 저.
박물전휘(博物典彙) : 황도주(黃道周 명말 절사, 자는 유현(幼玄) 또는 이약(螭若)) 저.
관해기행(觀海紀行) : 시윤장(施閏章 청대 문인, 자는 상백(尙白)) 저.
석진일기(析津日記) : 주운(周篔 청대 학자, 자는 청사(靑士), 또는 당곡(簹谷)) 저.
정 진사와 함께 나누어 베껴서 이 뒤에 책사에서 참고하기로 하고, 곧 시대를 시켜서 돌려 보내고, 또 시대더러,
“이런 책들은 우리나라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 영감께서 이 서목을 보시지 않았소.”
라고 말하라 일렀더니,시대가 돌아와서,
“부씨가 제가 전하는 말을 듣더니, 자못 계면쩍은 빛을 보이면서 저에게 수건 한 개를 주더이다.”
한다. 그 수건의 길이는 두 자 남짓한 추사(縐紗 올이 말려들게 짠 천)인데, 새 감으로 만든 것이다.
[주D-001]수재(秀才) : 부(府)ㆍ주(州)ㆍ현(縣)의 학교에 있는 생원(生員).
[주D-002]부정공(富鄭公) : 송(宋) 인종(仁宗) 때의 정치가 부필(富弼). 부는 성이요, 정은 봉호.
[주D-003]양람기(鑲藍旗) : 만주족은 전부 군대의 편제로 하여 팔기(八旗)로 나누었는데, 이는 그 중의 하나이다.
[주D-004]명성당서목(鳴盛堂書目) : 원전에는 잇달아 씌어 있으나, 위의 ‘예단물목(禮單物目)’의 예를 따라 별도로 제목을 붙이고 정리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4일 경진(庚辰)
어젯밤부터 밤새도록 비가 억수로 퍼부어서 길을 떠나지 못했다.
양승암집도 보며 바둑도 두어 심심풀이하다. 부사와 서장관이 상사의 처소에 모이고, 또 다른 여러 사람을 불러서 물 건널 방도를 묻다가, 오래되어서야 모두 돌아가다. 아마 별 좋은 계책이 없는 모양이다.
[주D-001]바둑 : ‘수택본’에는 투전으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5일 신사(辛巳)
맑게 개었다. 물에 막혀서 또 묵다.
주인이 방고래를 열고 기다란 가래로 재를 긁는다. 나는 그 구들 제도의 대략을 엿보았다. 먼저 높이 한 자 남짓하게 구들바닥을 쌓아서 편평하게 만든 뒤에, 깨뜨린 벽돌로 바둑돌 놓듯 굄돌을 놓고, 그 위에는 벽돌을 깔 뿐이다.
벽돌의 두께가 본시 같으므로 깨뜨려서 굄돌을 해도 절름발이가 될 리 없고, 벽돌의 몸이 본디 가지런하므로 나란히 깔아 놓으면 틈이 날 리 없다. 고래 높이는 겨우 손이 드나들 만하고, 굄돌은 갈마들며 불목이 되어 있다. 불이 불목에 이르면 그 넘어가는 힘이 빨아들이듯 하므로, 불꽃이 재를 휘몰아 메어지듯 세차게 들어간다.
그리하여 여러 불목이 서로 잡아당기어, 도로 나올 새가 없이 쏜살같이 굴뚝으로 빠져 나간다. 굴뚝의 깊이는 길이 넘는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말의 개자리[犬座]다. 불꽃이 항상 재를 몰아다가 고래 속에 가득히 떨어뜨리므로, 3년 만에 한 번씩 고래목을 열고 재를 쳐내야 한다. 부뚜막은 한 길이나 땅을 파서 위로 아궁이를 내고, 땔나무는 거꾸로 집어 넣는다.
부뚜막 옆에는 큰 항아리만큼 땅을 뚫고, 그 위에 돌덮개를 덮어서 봉당바닥과 가지런히 한다. 그 빈 데서 바람이 일어나서 불길을 불목으로 몰아 넣으므로, 연기가 조금도 새지 않는다. 또 굴뚝을 내는 법이,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고 벽돌을 탑처럼 쌓아올리되 지붕과 가지런하게 하였으므로, 연기가 그 항아리 속으로 굴러 들어서 서로 잡아당기고 빨아들이듯 한다. 이 법이 가장 묘하다. 대개 굴뚝에 틈이 생기면, 약간의 바람에도 아궁이의 불이 꺼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온돌은 항상 불을 내뿜고 방이 골고루 덥지 않다. 그 잘못이 모두 굴뚝에 있다. 혹은 싸리로 엮은 농(籠)에 종이를 바르고, 혹은 나무 판자로 통을 만들어 쓴다. 처음 세운 곳에 흙이 틈이 나거나, 혹은 종이가 떨어지거나, 또는 나무통이 벌어지거나 하면, 연기 새는 것은 막을 길이 없고, 바람이 한 번 크게 불면 연통은 소용이 없게 된다. 나는 생각에,
“우리나라에서는 집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해서, 겨울이 되면 수많은 형제들의 코끝에는 항상 고드름이 달릴 지경이니, 이 법을 배워 가서 삼동의 그 고생을 덜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변계함이,
“이곳 구들은 아무래도 이상해요. 우리나라 온돌만 못한 것 같아요.”
하기에, 나는,
“못한 까닭이 무어지.”
하고 물었다. 변군은,
“어찌, 저 기름 넉 장을 반듯하게 깔아서, 빛은 화제(火齊 운모(雲母)의 일종으로 빛이 붉다)와 같고 번드름하기는 수골(水骨)과 같을 수야 있겠소.”
한다. 나는,
“이곳의 벽돌 장판이 우리나라의 종이 장판만 못한 것은 그럴싸한 말이야. 그러나 이 구들 놓는 방법을 본받아 가서 우리나라 온돌에 쓰고, 그 위에 기름 먹인 장판지를 깔아만 보아. 누가 금할 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나라 온돌제도는 여섯 가지 흠이 있으나 아무도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내 시험조로 한번 논할 테니, 자네는 떠들지 말고 조용히 들어 보게. 진흙을 이겨서 귓돌을 쌓고 그 위에 돌을 얹어서 구들을 만드는데, 그 돌의 크고 작음과 두껍고 얇음이 애초에 고르지 못하므로, 조약돌로 네모를 괴어서 그 절름발이를 금지하려 했으나 돌이 타고 흙이 마르면 곧잘 허물어짐이 첫째 흠이요, 돌이 울퉁불퉁하여 옴폭한 데는 흙으로 메워서 평평하게 하므로, 불을 때어도 고루 덥지 못함이 둘째 흠이요, 불고래가 덩실 높아서 불길이 서로 맞물지 못함이 셋째 흠이요, 벽이 성기고 얇아서 곧잘 틈이 생기므로, 바람이 새고 불이 내쳐서 연기가 방 안에 가득하게 됨이 넷째 흠이요, 불목이 목구멍처럼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길이 안으로 빨리어 들어가지 않고 땔나무 끝에서만 남실거림이 다섯째 흠이요, 또 방을 말리려면 적어도 땔나무가 백 단은 들고, 열흘 안으로 입주를 못함이 여섯째 흠이다. 이제 곧 자네와 더불어 벽돌 수십 개만 깔아 놓으면, 웃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벌써 몇 칸 온돌이 이루어져서 그 위에 누워 잘 수 있을 것이니, 그 어떠한가.”
하고 설명하였다.
저녁에 여럿이 술을 몇 잔 나누고, 밤이 이슥하여 취해 돌아와서 누웠다. 정사의 맞은편 방인데, 다만 베 휘장이 중간을 가리었다. 정사는 벌써 한잠이 들었고, 나 혼자 담배를 피워 물고 정신이 몽롱한데, 머리맡에서 별안간 발자국 소리가 나므로 깜짝 놀라서,
“거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른즉,
“도이노음이오(擣伊鹵音爾幺).”
하고 대답한다. 말소리가 심히 수상해서, 나는,
“이놈 누구야.”
하고 거듭 소리친즉,
“소인 도이노음이오.”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시대와 상방(上房) 하인들이 모두 놀라 일어난다. 뺨 치는 소리가 들리고, 덜미를 밀어서 문 밖으로 끌어가는 모양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저 갑군(甲軍)이 밤마다 우리 일행의 숙소를 순찰하여 사신 이하 모든 사람의 수를 헤어가는 것을, 깊이 잠든 뒤이므로 여태껏 그런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갑군이 제 스스로 ‘도이노음’이라 함은 더욱 절도할 일이다. 우리나라 말로 오랑캐를 ‘되놈’이라 하니, 이는 대개 ‘도이(島夷)’의 준말이요, ‘노음(老音)’은 낮고 천한 이를 가리키는 말이요, ‘이오(伊吾)’란 높은 어른에게 여쭈는 말이다. 갑군이 오랫동안 사행을 치르는 사이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배우되, 다만 ‘되’란 말이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한바탕의 소란 때문에 그만 잠이 달아나, 이어 벼룩에게 시달렸다. 정사 역시 잠이 달아났는지 촛불을 켠 채 그냥 날을 새웠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6일 임오(壬午)
개었다. 시냇물이 약간 줄었으므로 길을 떠났다. 나는 정사의 가마에 함께 타고 건넜다. 하인 30여 명이 알몸으로 가마를 메고 가다가, 강 한가운데쯤 물살이 센 곳에 이르러 별안간 왼쪽으로 기우뚱하여 하마터면 떨어질 뻔하니 사세가 실로 위급하기 짝이 없었다. 정사와 서로 부둥켜 안고서 겨우 물에 빠짐을 면했다. 저쪽 강언덕에 올라서 물 건너는 자들을 바라보니, 혹은 사람의 목을 타고 건너고, 혹은 좌우에서 서로 부축하여 건너기도 하며, 더러는 나무로 떼를 엮어서 타고 네 사람이 어깨로 메고 건너기도 한다. 말을 타고 떠서 건너는 이는 모두 머리를 쳐들어서 하늘만 바라보고, 혹은 두 눈을 꼭 감기도 하고, 혹은 억지로 웃음을 짓기도 한다. 하인들은 모두 안장을 풀어 어깨에 메고 건너는데 젖을까 염려하는 모양이다. 이미 건너왔다 다시 건너가려는 이도 무엇을 어깨에 지고 물에 들므로, 이상하여 물은즉,
“빈 손으로 물에 들면 몸이 가벼워 떠내려가기 쉬우므로,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어깨를 눌러야 된다.”
한다. 몇 번씩 갔다왔다한 사람은 추워서 벌벌 떨지 않는 이가 없다. 산 속 물이 몹시 찬 때문이다.
초하구(草河口)에서 점심을 먹다. 이른바 답동(畓洞)이니, 이곳이 항상 진창이 되어 있으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이름지었다 한다. 답(畓) 자는 본시 없는 글자인데, 우리나라 아전들 장부에 수전(水田) 두 글자를 합쳐서 논이란 뜻을 붙이고, ‘답(畓)’ 자의 음을 빌렸다.분수령(分水嶺)ㆍ고가령(高家嶺)ㆍ유가령(劉家嶺)을 넘어 연산관(連山關)에서 묵다. 이날 60리를 갔다.
밤에 조금 취하여 잠깐 조는데, 몸이 홀연 심양 성중에 있었다. 궁궐(宮闕)과 성지(城地)와 여염과 시정들이 몹시 번화ㆍ장려하다. 나는 스스로,
“여기가 이처럼 장관일 줄은 몰랐네그려. 내 집에 돌아가서 이를 자랑해야지.”
하고 드디어 훌훌 날아가는데, 산이며 물이 모두 내 발꿈치 밑에 있어 마치 나는 소리개처럼 날쌔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야곡(冶谷) 옛 집에 이르러 안방 남창 밑에 앉았다. 형님(박희원(朴喜源))께서,
“심양이 어떻더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듣기보다 훨씬 낫더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또 수없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마침 남쪽 담장 밖을 내다보니, 옆집 회나무 가지가 우거졌는데, 그 위에 큰 별 하나가 휘황히 번쩍이고 있다. 나는 형님께,
“저 별을 아십니까.”
하고 사뢴즉, 형님은,
“이름도 모르겠다.”
하시기에, 나는,
“저게 노인성(老人星 남극성(南極星))이올시다.”
하고 일어나 형님께 절하고,
“제가 잠시 집에 돌아옴은 심양 이야기를 상세히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이제 갈 길이 바빠서 하직드립니다.”
하고, 안문을 나와서 마루를 지나 사랑 일각문을 열고 나섰다. 머리를 돌이켜 북쪽을 바라본즉, 길마재[鞍峴] 여러 봉우리가 역력히 얼굴을 드러낸다. 그제야 홀연히 깨달았다.
“아아, 내가 바보야. 내 홀로 어이 책문을 들어간담. 여기서 책문이 천여 리니, 누가 나를 기다리고 머물러 있으리.”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안타깝기 짝이 없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나, 문지도리가 하도 빡빡하여 열리지 않으므로, 큰 소리로 장복을 부르려 하나, 소리가 목에 걸려서 나오질 않는다. 할 수 없이 힘껏 문을 밀다가 잠을 깨었다. 정사가 마침,
“연암(燕巖).”
하고 부른다. 내 오히려 어리둥절하여,
“여기가 어디오.”
한즉, 정사는,
“아까부터 가위에 눌린 지 오래야.”
한다. 일어나 앉아서 이를 부딪으며 머리를 퉁기고 정신을 가다듬으니, 그제야 제법 상쾌해진다. 한편 섭섭하고도 한편은 기쁜 생각에, 오랫동안 마음이 뒤숭숭하다. 다시 잠들지 못하고 자리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공상에 잠겨서 날새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연산관은 또 아골관(鴉鶻關)이라고도 부른다.
[주D-001]야곡(冶谷) : 서울 시내 서북방에 있던 동리 이름으로, 연암이 세거하던 곳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7일 계미(癸未)
개었다.
2리(里)를 가서 말을 타고 그냥 물을 건넜다. 강물이 비록 넓지는 않으나, 물살이 어제 건넜던 곳보다도 훨씬 세다. 무릎을 옴츠리며 두 발을 모아서 안장 위에 옹송그리고 앉았다.
창대는 말머리를 꽉 껴안고 장복은 힘껏 내 엉덩이를 부축하여, 서로 목숨을 의지해서 잠시 동안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빌 뿐이다. 말을 모는 소리조차 ‘오호(嗚呼)’ 말에게 조심해 가자고 타이르는 소리가 원래 ‘호호(好護)’인데, 우리나라 발음으로는 ‘오호(嗚呼)’와 비슷하다. 하니, 어쩐지 처량하게 들린다. 말이 강 복판에 이르자, 갑자기 그 몸이 왼쪽으로 쏠린다.
대개 물이 말의 배에 닿으면 네 발굽이 저절로 뜨기 때문에 누워서 건너는 셈이다. 내 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른편으로 기울어지면서,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하였다. 마침 앞에 말꼬리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그것을 붙들고 몸을 가누어 고쳐 앉아서, 겨우 떨어짐을 면하였다. 나 역시 내 자신이 이토록 재빠를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창대도 말다리에 채여 자칫하면 변을 당할 뻔하였으나, 말이 홀연 머리를 들고 몸을 바로 가누니, 물이 얕아져서 발이 땅에 닿았음을 알 수 있다.
마운령(摩雲嶺)을 넘어 천수참(千水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엔 몹시 무더웠다. 청석령(靑石嶺)을 넘다보니 고갯마루에 관제묘가 있는데, 매우 영검스럽다 하여 역부와 마두들이 서로 다투어 탁자 앞으로 가서 머리를 조아리며, 혹은 참외를 사서 바치기도 하고, 역관들 중에는 향을 피우고 제비를 뽑아서 평생의 신수를 점쳐 보는 이도 있었다. 한 도사(道士)가 바리때를 두드리며 돈을 구걸한다. 그는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한 것이 마치 우리나라 환속한 중과 같기도 하고, 머리에는 등립(藤笠)을 쓰고 몸에는 야견사(野繭紗)로 만든 도포(道袍) 한 벌을 입은 것으로 보아서는 마치 우리나라 선비들의 차림새와 같으나, 다만 검은 빛깔의 방령(方領)만이 조금 다를 뿐이다. 또 한 도사는 참외와 달걀을 파는데, 참외 맛이 매우 달고 물이 많으며, 달걀은 맛이 삼삼하다.
밤에는 낭자산(狼字山)에서 묵었다. 이날 큰 재를 둘이나 넘었다. 80리를 행하였다. 마운령은 회령령(會寧嶺)이라고도 부른다. 그 높이나 가파르기가 우리나라 관북(關北)의마천령(摩天嶺)에 못지않다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8일 갑신(甲申)
개었다.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서,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10리 남짓 가서 산모롱이 하나를 접어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국궁(鞠躬)하고 말 앞으로 달려 나와서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백탑(白塔)이 보입니다.”
한다. 태복은 정 진사의 마두다. 아직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보이지 않는다. 빨리 말을 채찍질하여 수십 보를 채 못 가서 겨우 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 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人生)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한 곳이 없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였다. 정 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나는,
“그래 그래, 아니 아니. 천고의 영웅(英雄)이 잘 울었고, 미인(美人)은 눈물 많다지. 그러나 그들은 몇 줄기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기에, 소리가 천지에 가득 차서 금(金)ㆍ석(石)으로부터 나오는 듯한 울음은 듣지 못하였소. 사람이 다만 칠정(七情) 중에서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欲]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이오. 지극한 정(情)이 우러나오는 곳에,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는다면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오. 인생의 보통 감정은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고,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고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로 인하여 상고를 당했을 때 억지로 ‘애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지. 그러나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란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그러므로, 저 가생(賈生)은 일찍이 그 울 곳을 얻지 못하고, 참다 못해서 별안간 선실(宣室)을 향하여 한 마디 길게 울부짖었으니, 이 어찌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히 여기지 않으리오.”
한즉, 정은,
“이제 이 울음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의당 당신과 함께 한 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이나, 우는 까닭을 칠정 중에서 고른다면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한다. 나는,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 보시오. 그가 처음 날 때 느낀 것이 무슨 정인가. 그는 먼저 해와 달을 보고, 다음에는 앞에 가득한 부모와 친척들을 보니 기쁘지 않을 리 없지. 이러한 기쁨이 늙도록 변함이 없다면, 본래 슬퍼하고 노여워할 리 없으며 의당 즐겁고 웃어야 할 정만 있어야 하련만, 도리어 분한(忿恨)이 가슴에 사무친 것같이 자주 울부짖기만 하니, 이는 곧 인생이란 신성(神聖)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결같이 마침내는 죽어야만 하고 또 그 사이에는 모든 근심 걱정을 골고루 겪어야 하기에, 이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여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서 스스로를 조상함인가. 그러나 갓난아기의 본정이란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거요. 무릇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나다가, 갑자기 넓고 훤한 곳에 터져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매 그 마음이 시원할 것이니, 어찌 한마디 참된 소리를 내어 제멋대로 외치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저 갓난아기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저 비로봉(毗盧峯)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長淵황해도의 고을)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며,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은 곳이 아교풀[膠]로 붙인 듯, 실로 꿰맨 듯,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하였다.
한낮은 몹시 무더웠다. 말을 달려 고려총(高麗叢)ㆍ아미장(阿彌庄)을 지나서 길을 나누어 갔다. 나는 조 주부 달동과 변군ㆍ내원ㆍ정 진사와 하인 이학령(李鶴齡)과 더불어 구요양(舊遼陽)에 들어갔다. 구요양은 봉황성보다도 10배나 더 번화하고 호화스러웠다. 따로 요동기(遼東記)를 썼다. 서문(西門)을 나와 백탑(白塔)을 보았다. 제작 기술이 뛰어나고 규모가 웅장하여 요동 벌판과 잘 어울렸다. 따로 백탑기(白塔記)가 있다.
[주D-001]칠정(七情) : 《예기(禮記)》에서 말한, 사람이 가진 일곱 가지의 감정. 곧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을 말한다.
[주D-002]가생(賈生) : 한(漢)의 신진 문학가. 이름은 의(誼)인데, 나이가 젊었으므로 가생으로 불리었다. 그는 이론이 날카로웠으므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쫓겨났으나, 오히려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이라는 정견을 올려서, 시사(時事)의 통곡(痛哭)ㆍ유체(流涕)ㆍ장태식(長太息)할 만함을 진술하였다.
[주D-003]선실(宣室) : 한의 미앙궁(未央宮) 전전(前殿)의 정실(正室). 문제가 이곳에서 가의에게 귀신(鬼神)에 대한 이론을 물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구요동기(舊遼東記)
요동의 구성(舊城)은 한(漢)의 양평(襄平)ㆍ요양(遼陽) 두 현(縣) 지역에 있었다. 진(秦)이 요동이라 칭하였고, 그 뒤에는 위만조선(衛滿朝鮮)에 편입되었다가, 한 말년에 공손도(公孫度)가 웅거한 바 되었으며, 수(隋)ㆍ당(唐)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거란(契丹)은 이곳을 남경(南京)이라 하였으며, 금(金)은 동경(東京)이라 하였고, 원(元)은 행성(行省 원대의 지방 행정 구역)을 두었으며, 명(明)은 정료위(定遼衛)를 두었더니, 지금은 요양주(遼陽州)로 승격되었다.
20리 떨어진 곳에 성을 옮겨서 신요양(新遼陽)이라 하였으므로, 이 성은 폐하여 구요동(舊遼東)이라고 부른다. 성의 둘레는 20리인데, 혹은 이르기를,
“이 성은 웅정필(熊廷弼)이 쌓은 것이다. 이 성이 옛날에는 몹시 낮고 비좁았는데, 정필이 적기(敵騎)가 들어온다는 정보를 듣고 성을 헐었다. 청인이 이를 보고 의심하여 감히 가까이 이르지 못하다가, 고쳐 쌓는다는 정보를 정탐해 알고는 군사를 이끌고 성 밑에 이르렀으나, 하룻밤 사이에 새로 쌓은 성이 높다랗게 이룩되었다. 나중에 정필이 이곳을 떠나자 요양이 함락되었다. 청인이 그 성이 견고하여 함락시키느라 어려웠던 점을 분히 여겨서 성을 헐어 버릴 적에 싸움에 이긴 열쌘 군사들을 동원했음에도 열흘이 가도 다 헐지 못하였다.”
한다. 명(明) 천계(天啓) 원년(1621) 3월에, 청인(淸人)이 이미 심양을 빼앗고 또 군사를 옮기어 요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가 세 길로 군사를 내어서 무순(撫順)을 회복하려던 차에, 청인이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요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태자하(太子河) 물을 끌어다 해자에 채우고 군사를 성 위로 올라가 빙 둘러서서 지키게 하였다.
청인이 심양을 함락시킨 지 닷새 만에 요양성 밑에 이르렀다. 누루하치[奴兒哈赤]란 자는 이른바 청 태조(淸太祖)다. 그가 스스로 좌익(左翼)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르니, 명(明)의 총병(摠兵) 이회신(李懷信) 등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와서 진을 쳤다. 이때 누루하치가 좌익(左翼) 군대에 속한 사기(四旗 만주군 편성 단위)로 왼편을 공격했다. 청 태종(淸太宗)이란 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한(汗)이라고 부르니, 그의 이름은 홍타시[洪台時]우리나라의 병정록(丙丁錄) 중에 너저분하게 실려 있는 ‘紅打時, 또는 紅他詩’는 모두 발음이 비슷한 대로 적은 것이다. 마치 영알대[英阿兒臺]를 용골대(龍骨大)로, 마부타이[馬伏塔]를 마부대(馬夫大)로 쓴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였다. 그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를 청했으나 누루하치가 허락하지 않다가, 홍타시는 굳이 가서 홍기(紅旗) 두 개를 세워 두고 성 옆에다 매복시켜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누루하치가 정황기(正黃旗)ㆍ양황기(鑲黃旗)를 보내어 홍타시를 도와서 명(明)의 군영(軍營) 왼편을 치게 하였다. 또 사기(四旗) 군사가 뒤이어 이르니 명병(明兵)이 크게 어지러운지라, 홍타시가 승리를 얻어서 60리를 추격하여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이 싸움에 명병이 요양의 서문으로 나와, 앞서 청인이 성 곁에 세워 두었던 두 홍기(紅旗)를 뽑으니, 복병이 일어나서 이를 맞아들여 쳤다. 명병이 다시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느라고 저희들끼리 짓밟혔다. 총병 하세현(賀世賢)과 부장(副將) 척금(戚金)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누루하치가 패륵(貝勒 만주군의 벼슬 이름)의 왼편 사기 군사를 거느려서 성 서쪽의 수문(水門)을 파 호수의 물을 빼고, 또 오른편 사기 군사로 하여금 성 동쪽의 진수구(進水口)를 막게 하고, 자기는 우익(右翼) 군대를 성 밑에 늘어놓고는 흙을 넣고 돌을 날라서 물길을 막았다.
명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을 나와서 청병과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버티었다. 청병이 바야흐로 다리를 빼앗으려 할 즈음, 마침 수구(水口)가 막히어서 물이 거의 마를 지경이므로, 사기의 선봉이 해자를 건너 고함을 치면서 동문 밖으로 엄습하자, 명병도 이에 맞서 역전했으나, 청병 홍갑(紅甲) 2백 명과 백기(白旗) 1천 명이 내닫는 바람에 죽은 명병이 해자에 가득하였다. 청병이 무정문(武靖門) 다리를 빼앗고 양쪽으로 나누어 지키는 명병을 치니, 명병이 성 위에서 끊임없이 화포(火砲)를 터뜨리었다. 청병도 이에 용감히 맞서 서성(西城) 한 쪽을 빼앗고 민중들을 베니, 성 안이 요란하였다. 이날 밤 성 안에 있는 명병이 횃불을 들고 싸울 때, 우유요(牛維曜) 등은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명병이 다시 방패를 세우고 힘써 싸웠으나, 청 사기의 군사가 역시 성을 타고 올랐다. 경략 원응태는 성 북쪽 진원루(鎭遠樓)에 올라서 싸움을 독촉(督促)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누(樓)에 불을 놓아서 타죽고, 분수도(分守道) 하정괴(何廷魁)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물에 빠져 죽고, 감군도(監軍道) 최유수(崔儒秀)는 목매어 죽고, 총병(摠兵) 주만량(朱萬良), 부장 양중선(梁仲善)과 참장(叅將) 왕치(王豸)ㆍ방승훈(房承勳)과 유격(遊擊) 이상의(李尙義)ㆍ장승무(張繩武)와 도사(都司) 서국전(徐國全)ㆍ왕종성(王宗盛)과 수비(守備) 이정간(李廷幹)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
어사(御史) 장전(張銓)은 청병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으므로, 누루하치가 죽음을 내려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시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마침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청나라 황제(皇帝 고종(高宗))가 작년에 전운시(全韻詩 어제전운시(御製全韻詩))를 지어 이 성이 함락한 사실의 시말을 상세히 적고 또 말하기를,
“명의 신하로서 항복하지 않는 자에게 우리 선황제께옵서 오히려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때 연경에 있는 명의 군신(君臣)들은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과 죄를 밝히지 않았으니, 그러고서야 망하지 않으련들 될 수 있으리오.”
하였다. 《명사(明史)》를 상고하건대,
“웅정필이 광녕(廣寧)을 구출하지 않았을 때에 삼사(三司) 왕기(王紀)ㆍ추원표(鄒元標)ㆍ주응추(周應秋) 등이 정필을 탄핵하기를, ‘정필의 재식과 기백이 일세를 비웃을 만하므로 지난해에 요양을 지키매 요양이 보존되고 요양을 떠나매 요양이 망했으나, 다만 그 교만하고 괴퍅한 성격은 고칠 길이 없어서 오늘에 한 소(疏)를 올리고 다음날에는 한 방(榜)을 걸었으니, 그는 양호(楊鎬)에게 비하여서는 도망친 한 가지 죄가 더하고 원응태처럼 죽지도 못하였으므로, 만일 왕화정(王化貞)을 죽이고 정필을 살려둔다면 죄는 같음에도 벌이 다른 것입니다.’ 했다.”
하였다. 이제 당시의 토벽(土壁)이 예와 같이 둘러 있고 벽돌 흔적이 오히려 새로우매, 그때 삼사가 탄핵한 글을 다시 외어 본즉, 그의 사람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아아, 슬프다. 명의 말운을 당하여 인재를 쓰고 버림이 거꾸로 되고, 공과 죄가 밝지 못했으므로, 웅정필ㆍ원숭환의 죽음을 보건대 가히 스스로 그 장성(長城)을 허물어뜨렸다 하겠으니, 어찌 후세의 기롱을 받지 않으리오.
태자하(太子河)를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위에는 서너 채 고기잡이배가 떠 있고, 성 밑에는 낚시질하는 이가 수십 명이나 되는데, 다들 좋은 옷을 입었고, 그 생김생김이 단아한 귀공자 같다. 모두 성 안의 장사치들이다. 내가 이에 해자를 한 바퀴 돌아서 그 수문의 여닫는 제도를 엿보려 할 때, 낚시꾼들이 왁자하게 웃으면서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나를 보고 말을 걸기에, 나는 땅에 글자를 써서 보였으나 모두 슬쩍 들여다보고는 웃고 가버린다.
서문(西門)을 나서 백탑을 구경하다. 그 만듦새가 공교롭고 화려하며, 웅장함이 가히 요동 넓은 벌판에 알맞다. 따로이 백탑기(白塔記)를 썼다.
[주C-001]구요동기(舊遼東記) : 구요동성을 중심으로 하여 고금의 연혁과, 명의 말기에 명과 청의 두 나라가 이어서 격렬히 싸우던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 편은 원전에는 편말(篇末)에 있었으나, 이제 이곳으로 옮겼다.
[주D-001]공손도(公孫度) : 후한(後漢) 말기에 어버이를 따라 현도(玄菟)에 갔다가, 요동태수(遼東太守)를 거쳐 스스로 요동후(遼東侯)가 되었다.
[주D-002]웅정필(熊廷弼) : 명의 명신. 그가 요동을 지키매 신흥인 청(淸)도 이를 넘어뜨리지 못하였으나, 당로자의 질시와 파쟁으로 말미암아 참혹하게 최후를 마쳤다.
[주D-003]정황기(正黃旗)ㆍ양황기(鑲黃旗) : 모두 만주군 팔기에 속한 부대.
[주D-004]최유수(崔儒秀) : 어떤 본에는 최윤수(崔允秀)로 되었다.
[주D-005]장전(張銓) : 자는 우형(宇衡). 국사기문(國史紀聞)을 지었다.
[주D-006]명사(明史) : 청의 장정옥(張廷玉) 등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지었다.
[주D-007]삼사(三司) : 시대를 따라 변천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상서형부(尙書刑部)ㆍ어사대(御史臺)ㆍ대리시(大理寺)를 이른 듯하다.
[주D-008]양호(楊鎬) : 명의 장수로서, 임진란에 구원군을 거느리고 패해서 돌아가, 요동에 나가서 청과 싸워 또 패하였으므로 사형을 받았다.
[주D-009]왕화정(王化貞) : 몽고를 무마하여 일찍이 공을 세웠으나, 웅정필과 함께 청에 패했으므로 사형을 당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관제묘기(關帝廟記)
구요동성 문 밖을 나서면 돌다리 하나가 있다. 다릿가 돌 난간은 그 만든 품이 매우 정교하다. 강희(康熙) 57년에 쌓은 것이다. 다리 건너편에서 백여 보쯤 되는 곳에 패루(牌樓)가 있다. 구름 속의 용과 수선(水仙)을 새겼는데, 모두 파서 새긴 것이다. 패루에 올라 본즉 동쪽에 큰 다락이 있는데, 글자를 써서 현판을 걸어 적금루(摘錦樓)라 하였고, 그 왼편의 종루(鍾樓)는 용음루(龍吟樓)요, 오른편의 고루(鼓樓)는 호소루(虎嘯樓)라 하였다.
묘당(廟堂)이 웅장 화려하여 복전(複殿)과 중각(重閣)에 금빛ㆍ푸른빛이 휘황찬란하다. 그 정전(正殿)에는 관공(關公)의 소상(塑像)을 모셨고, 동무(東廡)에는 장비(張飛 자는 익덕(翼德)), 서무(西廡)에는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을 배향(配享)하였으며, 또 촉(蜀)의 장군 엄안(嚴顏)의 굴복하지 않는 꼴을 설치하였다. 뜰 가운데에는 큰 비(碑) 몇이 서 있는데, 모두 이 사당의 창건과 중수한 사실의 시말을 적은 것이다. 그 중 새로 세운 한 비는, 산서(山西)의 어떤 상인(商人)이 사당을 중수한 일을 새긴 것이다.
사당 안에는 노는 건달패 수천 명이 왁자하게 떠들어, 마치 무슨 놀이터 같다. 혹은 총과 곤봉을 연습하고, 혹은 주먹놀음과 씨름을 시험하기도 하며, 혹은 소경말ㆍ애꾸말을 타는 장난들을 하고 있다. 또는 앉아서 《수호전(水滸傳)》을 읽는 자가 있는데, 뭇사람이 삥 둘러앉아서 듣고 있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코를 벌름거리는 꼴이, 방약무인(旁若無人)의 태도이다. 그 읽는 곳을 보니, 곧 화소와관사(火燒瓦官寺 수호 중 장회(章回)의 이름)의 대문인데, 외는 것은 뜻밖에 《서상기(西廂記)》였다.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이건만 외기에 익어서 입이 매끄럽게 내려간다. 이것은 꼭 우리나라 네거리에서 《임장군전(林將軍傳)》을 외는 것 같다. 읽는 자가 잠깐 중지하면 두 사람이 비파(琵琶)를 타고 한 사람은 징을 울린다.
[주C-001]관제묘기(關帝廟記) : 구요동에 있는 관제묘를 구경한 기록이다. 어떤 본에는 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밑에 있으나 그릇된 것이다.
[주D-001]관공(關公) : 촉한(蜀漢) 오호대장(五虎大將) 중의 하나. 이름은 우(羽)요, 자는 운장(雲長). 뒤에 그를 추숭하여 제(帝)라 일컬었다.
[주D-002]엄안(嚴顏) : 유장(劉璋)의 부하로서, 장비에게 굴복하지 않은 의장(義將).
[주D-003]수호전(水滸傳) : 소설 이름. 곧 수호. 원의 시자안(施子安)이 엮은 것을 명의 나본(羅本, 羅貫中)이 완성하였다.
[주D-004]서상기(西廂記) : 희곡 이름. 당 원진(元稹)의 회진기(會眞記)를 원의 왕실보(王實甫)가 각색하였다.
[주D-005]임장군전(林將軍傳) : 조선 국문 소설의 이름. 임경업(林慶業)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본이름은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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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관제묘를 나와 5마장도 채 못 가서 하얀 빛깔의 탑(塔)이 보인다. 이 탑은 8각 13층에 높이는 70길[仞]이라 한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당(唐)의 울지경덕(蔚遲敬德)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에 쌓은 것이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선인(仙人) 정령위(丁令威)가 학을 타고 요동으로 돌아와 본즉, 성곽과 인민이 이미 바뀌었으므로 슬피 울며 노래 부르니, 이것이 곧 그가 머물렀던 화표주(華表柱)다.”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말이다. 요양성 밖에 있으니 성에서 10리도 못 되는 곳이고, 또 그리 높고 크지도 않다. 그저 백탑이라 함은 우리나라 조례(皁隷)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쉽게 지은 이름이다.
요동은 왼편에 창해(滄海)를 끼고 앞으로는 벌판이 열려서 아무런 거칠 것 없이 천 리가 아득하게 틔었는데, 이제 백탑이 그 벌판의 3분의 1을 차지하였다. 탑 꼭대기에는 구리북 세 개가 놓였고, 층마다 처마 네 귀퉁이에 풍경을 달았는데, 그 크기가 물들통만 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풍경이 울어서 그 소리가 멀리 요동벌에 울린다.
탑 아래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만주 사람으로, 약을 사러 영고탑(寧古塔)에 가는 길이다. 땅에 글자를 써서 문답을 하는데, 한 사람이 고본(古本) 《상서(尙書)》가 있나를 묻고, 또 한 사람은,
“안부자(顏夫子 공자의 제자인 안회(顏回), 부자는 존칭)가 지은 책과 자하(子夏 공자 제자, 성명은 복상(卜商), 자하는 자)가 지은 악경(樂經)이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이는 모두 내가 처음 듣는 것이므로 없다고만 답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아직 청년인데,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며 이 탑을 구경하러 온 것이다. 길이 바빠서 그의 이름을 묻지는 못했으나 수재(秀才)인 듯싶다.
[주C-001]요동백탑기(遼東白塔記) : 어떤 본에는 관제묘기(關帝廟記) 위에 있었으나, 그릇되었으므로 여기로 옮겼다.
[주D-001]울지경덕(蔚遲敬德) : 당의 명장. 태종을 따라 여러 군데에 원정하였다.
[주D-002]정령위(丁令威) : 한의 선인. 《수신후기(搜神後記)》에 의하면, 그가 신선이 되어 천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하였다.
[주D-003]화표주(華表柱) : 큰 길거리나 고을 앞과 같은 곳에 세우는 촛대.
[주D-004]고본(古本) …… 묻고 :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고본 상서가 있었다 하므로, 그들이 물은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광우사기(廣祐寺記)
백탑 남쪽에 광우사(廣祐寺)라는 옛날 절이 있다. 아까 만난 수재들의 말에,
“한대(漢代)에 지은 절인데, 당 태종(唐太宗)이 요(遼)를 칠 때에 수산(首山)에 머물러 악공(鄂公 울지경덕의 봉호(封號)) 울지경덕으로 하여금 중수하게 하였다.”
하고, 전하는 말에는,
“옛날 어떤 시골 사람이 광녕으로 가다가 길에서 한 동자를 만났는데, 그 동자의 말이, ‘나를 업고 광우사까지 가면 그 절 오른편으로 열 걸음 가서 고목나무 밑에 돈 10만 냥이 묻혀 있을 것이니, 그 돈을 품삯으로 주겠소’ 하기에, 그 사람이 동자를 업고 수백 리 길을 한나절이 못 되어 닿았다. 내려 놓고 보니, 동자는 사람이 아니고 금부처님이었다. 그 절의 중이 이상히 여겨서 절 오른편 열 걸음쯤 되는 곳 고목나무 밑을 파본즉, 과연 10만 냥이 나왔으므로, 시골 사람이 그 돈으로 절을 중수하였다.”
한다. 이제 절의 비문(碑文)을 읽어 보니,
“강희 27년에 태황 태후(太皇太后 태종 홍타시의 비(妃))가 내탕고(內帑庫)의 돈으로 세운 것이고, 강희제도 일찍이 이 절에 거둥하여 중에게 비단 가사(袈裟)를 하사한 일이 있다.”
하였다. 지금은 절이 황폐하여 중도 없다. 요양성으로 돌아오니 수레와 말의 울리는 소리가 우렁차고, 가는 곳마다 구경군이 떼를 지었다. 주루(酒樓)의 붉은 난간이 높다랗게 한길 가에 솟아 있고, 금글자를 쓴 주기(酒旗)가 나부낀다. 그 가에는,
이름을 듣고서는 말을 곧장 세우고 / 聞名應駐馬
향내를 찾아서 수레를 잠깐 멈추리라 / 尋香且停車
라고 씌어 있다. 나는 술을 마실 만한 기분이 들었다.
빙 둘러선 구경군은 더욱 많아져서 서로 어깨를 비빈다. 일찍이 들으니,
“이곳에는 좀도둑이 많아서, 낯선 사람이 구경에만 마음이 팔려 자신을 잘 보살피지 못하면 반드시 무엇이든 잃어버리고 만다. 지난해 어느 사신 행차에 많은 무뢰배를 반당(伴當)으로 삼아 거느렸는데 상하 수십 명이 모두 초행이어서 의장(衣裝)이나 안구(鞍具)가 제법 호화로웠다. 이곳에 이르러 유람하는 사이에, 혹은 안장을 잃고 혹은 등자(鐙子)를 잃어버려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고 한다. 장복이 갑자기 안장을 머리에 쓰고 등자를 쌍으로 허리에 차고서 앞에 모시고 서서 조금도 창피해하는 기색이 없기에, 내가 웃으며,
“왜 너의 두 눈알은 가리질 않나.”
하고 나무란다. 보는 이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다시 태자하에 이르렀다. 강물이 한창 부풀었을 뿐 아니라, 배가 없어서 건널 길이 막연하다. 강기슭을 타고 위아래로 바장일 무렵에, 갈대 우거진 속에 콩깍지만 한 고기잡이 배가 저어 나오고, 또 작은 배 하나가 강기슭에 아련히 보인다. 장복과 태복 등을 시켜 소리를 질러 배를 부르게 했다. 어부(漁夫)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배 두 머리에 마주 앉아 있다. 버드나무 짙은 그늘에 석양 놀이 금빛으로 아롱졌는데, 잠자리는 물을 점치며 놀고, 제비는 물결을 차고 난다. 아무리 불러도 저들은 돌아다보지도 않는다. 오랫동안 물가 모래판에 섰노라니, 찌는 듯한 더위에 입술이 타고 이마에 땀이 번지며 허기증이 들고 몸이 몹시 지친다. 평생에 구경을 좋아하였더니, 오늘에야 톡톡히 그 값을 치르는구나 싶었다.
정군(鄭君) 등 여럿이 다투어 농담으로,
“해는 지고 길은 먼데 상하가 모두 배고프고 고달프니, 한번 울기라도 하는 수밖에 아무런 계책이 없구려. 선생은 어찌 참고서 울지 않으시오.”
하고 서로들 크게 웃는다. 나는,
“저 어부가 남을 구원해 주질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인심을 가히 알지니, 제가 비록 육노망(陸魯望) 선생처럼 점잖은 어른일지라도 나는 한 주먹으로 때려 눕히고 싶구려.”
하였다. 태복이 더욱 초조해하면서,
“이제 곧 들에 해가 지려 하니, 다른 산기슭에는 벌써 어두움이 깃들었으리이다.”
한다. 대체 태복은, 비록 나이는 젊으나, 일곱 번이나 연경에 드나들었으므로 모든 일에 익숙하다. 얼마 뒤에 사공이 낚시질을 끝마치고서 배 밑에 있던 고기 종다래끼를 거두고 짧은 상앗대로 버드나무 그늘 가로 저어 나오자, 그 속에서 별안간 대여섯 척의 작은 배가 다투어 나온다. 그들은 저 고기잡이배가 저어오는 것을 보고는, 역시 너도 나도 하고 서로 다투어 저어 와서 비싼 삯을 받으려 함이다. 남의 갈급함을 짐짓 기다린 뒤에야 비로소 와서 건네 주려고 하니 그 소행이 밉다. 배 한 척에 세 사람씩을 태우고, 삯은 한 사람의 몫이 일 초(一鈔 은으로는 서 돈쭝)씩이다. 배는 모두 통나무를 후벼파서 만들었다. 이른바,
들배는 넉넉히 두세 사람 탈 수 있네 / 野航恰受兩三人
라 함은, 실로 이를 두고 이름이다. 일행 상하가 모두 열일곱 명에 말이 열여섯 필이다. 함께 강을 건넜다. 뱃머리에서 말굴레를 잡고 순류(順流)를 따라서 7~8리를 내려가니, 그 위험스럽기가 전날 통원보(通遠堡)의 여러 강을 건널 때보다 더하다. 신요양(新遼陽)영수사(映水寺)에서 묵다. 이날 70리를 갔다. 밤에는 몹시 더워서, 잠든 중에 절로 홑이불이 벗겨져서 약간 감기 기운이 있었다.
[주D-001]반당(伴當) : 가마 메는 하인. 반당(伴擋)이라고도 하였다.
[주D-002]육노망(陸魯望) : 당의 문학가 육귀몽(陸龜蒙). 노망은 자. 벼슬을 하지 않고 차[茶]를 심으며 일생을 보내었으므로,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를 강호산인(江湖散人), 또는 보리선생(甫里先生)이라 불렀다.
[주D-003]들배는 …… 있네 : 두보(杜甫)의 시구.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9일 을유(乙酉)
개었다. 몹시 더웠다.
새벽의 서늘함을 타서 먼저 길을 떠났다. 장가대(張家臺)ㆍ삼도파(三道巴)를 거쳐서 난니보(爛泥堡)에서 점심을 먹었다. 요동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을이 끊이지 않고 길 너비가 수백 보나 되며, 길을 따라 양편에는 모두 수양(垂楊)을 심었다. 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에는, 마주 선 문과 문 사이에 장마 때 물이 괴어서 가끔 저절로 큰 못이 이루어졌다. 집집마다 기르는 거위와 오리가 수없이 그 위에 떠서 놀고, 양편 촌집들은 모두 물가의 누대처럼 붉은 난간과 푸른 헌함이 좌우에 영롱하여, 슬며시 강호(江湖)를 방불케 한다.
군뢰가 세 번 나팔을 불고 나서 반드시 몇 리 앞서 가면, 전배(前排) 군관이 역시 군뢰를 따라 먼저 떠난다. 나는 행동이 자유로워서, 매양 변군(卞君)과 함께 서늘함을 타서 새벽에 떠난다. 그러나 10리도 못 가서 전배가 따라와 만나게 된다. 그들과 고삐를 나란히 하여, 재미 있는 이야기와 농담을 붙이면서 간다. 매일 이러하였다.
마을이 가까워질 때마다 군뢰를 시켜서 나팔을 불고, 넷이 모두 합창으로 권마성(勸馬聲)을 부른다. 그러면 집집마다 여인들이 문이 메도록 뛰어나와서 구경들을 한다. 늙은이고 젊은이고 간에 차림은 거의 같다. 머리에는 꽃을 꽂고 귀고리를 드리웠으며, 화장은 살짝 하였다. 입에는 모두 담뱃대를 물었고, 손에는 신바닥에 까는 베와 바늘ㆍ실 등을 들고 어깨를 비비고 서서 손가락질하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한녀(漢女)는 여기서 처음 보는데, 모두 발을 감고 궁혜(弓鞋)를 신었다. 자색은 만주 여자[滿女]만 못하다. 만주 여자는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고운 이가 많았다.
만보교(萬寶橋)ㆍ연대하(烟臺河)ㆍ산요포(山腰鋪)를 거쳐서 십리하(十里河)에서 묵다. 이날 50리를 갔다.
비장과 역관들이 말등에서, 맞은 편에서 이리 보고 오는 만녀나 한녀 중에서 각기 첩 하나씩을 정하는데, 만일 남이 먼저 차지한 것이면 감히 겹으로 정하지 못하고 법이 몹시 엄격하다. 이를 구첩(口妾)이라 하여 가끔 서로 샘도 하고 골도 내며 욕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하여, 이 역시 먼 길에 심심풀이로서 한 가지의 방법이다. 내일은 곧장 심양(瀋陽)에 들어갈 것이다.
[주D-001]권마성(勸馬聲) : 높은 관리의 행차에 앞서, 하인이 위엄을 돋우고 일반 행인을 물러서게 하기 위하여 길게 부르는 소리.
ⓒ 한국고전번역원 ┃ 이가원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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