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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막북행정록(漠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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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 신해(辛亥)에 시작하여 8 9일 을묘(乙卯)에 그쳤다. 모두 닷새 동안이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熱河)에 이르기까지이다.

 

1.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2. 가을 8 5일 신해(辛亥)

3. 6일 임자(壬子)

4. 7일 계축(癸丑)

5. 8일 갑인(甲寅)

6. 9일 을묘(乙卯)

 

 

 

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열하는 황제의 행재소(行在所 군주가 임시 머무는 곳)가 있는 곳이다. 옹정 황제 때에 승덕주(承德州)를 두었는데, 이제 건륭 황제가 주()를 승격시켜 부()로 삼았으니 곧 연경의 동북 4 20리에 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에서는 2백여 리이다. 열하지(熱河志)를 상고해 보면,

 

() 시대에 요양(要陽)백단(白檀)의 두 현()으로 어양군(漁陽郡)에 속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밀운(密雲)안락(安樂) 두 군()의 변계로 되었고, 당대(唐代)에는 해족(奚族)의 땅이 되었으며, ()는 흥화군(興化軍)이라고 하여 중경에 소속시켰고, ()은 영삭군(寧朔軍)으로 고쳐서 북경에 소속시켰으며, ()에서는 고쳐서 상도로(上都路)에 속하였다가 명()에 이르러서는 타안위(朶顔衛)의 땅이 되었다.”

하니, 이는 곧 이때까지 열하의 연혁(沿革)이다. 이제 청()이 천하를 통일하고는 비로소 열하라 이름하였으니 실로 장성 밖의 요해의 땅이었다. 강희 황제 때로부터 늘 여름이면 이곳에 거둥하여 더위를 피하였다. 그의 궁전들은 채색이나 아로새김도 없이 하여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이름하고, 여기에서 서적을 읽고 때로는 임천(林泉)을 거닐며 천하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는 짐짓 평민이 되어 보겠다는 뜻이 있는 듯하다. 그 실상은 이곳이 험한 요새이어서 몽고의 목구멍을 막는 동시에 북쪽 변새 깊숙한 곳이었으므로 이름은 비록 피서(避暑)라 하였으나, 실상인즉 천자 스스로 북호(北胡)를 막음이었다. 이는 마치 원대(元代)에 해마다 풀이 푸르면 수도를 떠났다가, 풀이 마르면 남으로 돌아옴과 같음이다. 대체로 천자가 북쪽 가까이 머물러 있어서 자주 순행하여 거둥을 하면, 북방의 모든 호족들이 함부로 남으로 내려와서 말을 놓아 먹이지 못할 것이므로 천자의 오고 감을 늘 풀의 푸름과 마름으로써 시기를 정하였으니, 이 피서라는 이름도 역시 이를 이름이었다. 올 봄에도 황제가 남방을 순행하였다가 바로 북쪽 열하로 온 것이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은 해로 더하고 달로 늘어서, 그 화려하고 튼튼하고 웅장함이 저 창춘원(暢春苑)이라든가 서산원(西山苑) 들보다도 지나치다. 뿐만 아니라 그 산수의 경치도 오히려 연경보다 나으므로 해마다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었으며, 애초에는 외적을 막기 위했던 곳이 도리어 방탕한 놀이터로 발전되었다. 이제 우리나라 사신이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명을 받아서 밤낮 없이 달려 닷새 만에야 겨우 다달았으니, 그 노정을 짐작하건대 4백여 리뿐이 아닐 것이다. 열하에 와서 산동 도사(都司) 혁성(郝成)과 함께 이정의 원근을 논할 제 그도 역시 열하에 처음 온 모양이다. 그의 말이,

 

대개 구외(口外)에서 북경이 7백여 리이나, 강희 황제 이후로 해마다 이곳에 피서하여 석왕(碩王 황제의 아들)액부(額駙)와 각부 대신(閣部大臣)들이 닷새마다 한번씩 조회하게 마련되었는데, 길에 빠른 여울, 사나운 큰물, 높은 고개, 험한 언덕이 많아서 모두들 그 험하고도 먼 곳으로의 발섭(跋涉)을 꺼리므로 강희 황제가 일부러 참( 차참(車站))을 줄여 4백여 리를 만든 것이지 그 실은 7백 리나 됩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늘 말을 달려와서 일을 품하므로, 막북(漠北)을 문앞처럼 여기고 몸이 안장 위에 떠날 겨를이 없으니, 이는 성군(聖君)이 편안할 때 오히려 위태로움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랍니다.”

하니, 그의 말이 근사한 듯싶다. 그리고 고염무(顧炎武) 창평산수기(昌平山水記),

 

고북구역(古北口驛)으로부터 북으로 56리를 가서 청송(靑松)이란 곳이 한 참()이고,  50리를 가서 고성(古城)이라 하는 곳이 한 참이며,  60리를 가서 회령(灰嶺)이란 곳이 한 참이고,  50리를 가서 난하(灤河)라 하여 한 참이다.”

하였으니, 이제 난하를 건너서 열하까지 40리인즉, 고북구(古北口)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2 56리이다. 이를 보더라도 벌써 56리가 열하지에 기록된 것보다 많다.

구외(口外)의 노정(路程)이 서로 이렇게 어긋나니 장성 안이야 더욱 그러할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제 이 걸음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일뿐더러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달려와서 마치 소경이 걷는 것이나 꿈결에 지나치는 것 같아서, 역참이며 돈대를 일행 중에 아무도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열하지를 상고하니 4 20리라 하였은즉, 그를 좇을 수밖에 없다.

 

 

[C-001]막북행정록 서(漠北行程錄序) : 이 소제는 다른 본에는 없었으나, 이제 주설루본에 의하여 추록하였다.

[D-001]열하지(熱河志) : 열하의 지지(地志)이니, 건륭 42년에 고종의 칙명에 의하여 엮었다.

[D-002]액부(額駙) : 부마(駙馬)의 만주어. 예를 들면 화석공주(和碩公主)에 장가든 사람을 화석액부(和碩額駙)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가을 8 5일 신해(辛亥)

 

 

개고 덥다.

아침 사시(巳時)에 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를 따라 연경으로부터 열하 길을 떠날 때 부사 서장관과 역관 세 사람, 비장 네 사람, 또 하인들, 모두 일흔넷이고, 말이 모두 쉰다섯 필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서관(西館)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애당초 책문을 들어선 뒤로, 길에서 자주 비를 만나고 물이 막히어 통원보(通遠堡)에서는 앉아서 5~6일을 허비했으므로 정사가 밤낮으로 근심하였다. 나는 때마침 그 건너편 구들에 묵었으므로 비 소리가 들리는 밤이면 곧 불을 밝히고 밤을 새웠다. 그리하여 휘장을 넘어 나에게 말로,

 

천하 일은 알 수 없는 것일세. 만일 우리 일행을 열하까지 오라고 하는 일이 있다면 날짜가 모자랄 것인즉, 그때에는 장차 어떻게 할 것이며, 또 설사 열하로 가는 일이 없다 하더라도 마땅히 만수절(萬壽節 황제의 탄일)은 대어 가야 할 것인데, 다시 심양과 요양의 사이에서 비에 막히는 일이 있다면, 이야말로 속담(俗談)에 밤새도록 가도 문에 닿지 못하였다는 격이 아니겠는가.”

하고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밝은 날 백방으로 물 건널 계책을 세울 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말리면, 그는 곧,

 

나는 나랏일로 왔으니 물에 빠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는 내 직분이라, 또한 어찌하리.”

한다. 이로부터 아무도 감히 물이 많아서 건너지 못하겠다는 말이 없었다. 때마침 더위가 심하고, 또 이곳에는 비오지 않은 날에도 마른 땅이 갑자기 물바다를 이루는 일이 일쑤이니, 이는 모두 저 천리 밖에서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물을 건널 때면 모두 몸이 떨리고 앞이 캄캄하여, 낯빛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가만히 잠깐 동안 목숨을 빌지 않은 자 없었으며, 그리하여 저쪽편에 도달한 뒤에야 비로소 서로 돌보며 축하의 말들을 나누되 마치 죽을 고비를 겪고 난 사람이나 만난 듯이 하였으나, 다시 앞 물이 지나간 물보다 더하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놀라서 서로 돌보며 생각이 막연할 뿐이었다. 그러면 정사는,

 

제군들은 걱정마소. 이 역시 왕령(王靈)이 도우시리.”

하고는, 불과 몇 리도 못 가서 다시 물을 건너게 되고, 어떤 때에는 하루에 여덟 번이나 건너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쉴 참을 뛰어가며 쉴 새 없이 달렸으므로 말이 많이 더위에 쓰러지고, 사람 역시 모두 더위를 먹어서 토하고 싸게 되면, 문득 사신을 원망하되,

 

열하 갈 일이야 만무할 텐데 이렇듯 한 더위에 쉴 참을 뛰어감은 전례에 없는 일이에요.”

하며, 투덜거리고, 혹은,

 

나랏일이 아무리 중하다손 정사께선 늙고 또 쇠약하신 분이 이렇게 몸을 가벼이 하시다가 만일 덧나시기나 하면 도리어 일을 그르치는 거요.”

하고, 또는,

 

지나치게 서두르면 도리어 더딘 법이라오.”

하고, 또는,

 

앞서 장계군(長溪君)이 진향사(進香使)로 왔을 때 책문 밖에서 물이 막혀 침상(寢牀)을 쪼개어서 밥 지으며 열이레를 묵었어도 쉴 참을 뛰어가는 일은 없었다오.”

하고, 옛 일까지 끌어대곤 하였다. 그리하여 8월 초하룻날 연경에 닿아서 사신은 곧 예부(禮部)에 가서 표문과 자문(咨文)을 바치고 서관에서 나흘을 묵었으나 별다른 지시가 없으므로 그제야 모두들,

 

과연 아무런 염려는 없나보다. 사신이 매양 우리 말을 곧이 안 들으시더니 글쎄 그런 것을. 아무튼 일이야 우리들이 잘 알지. 참대로 왔어도 열사흗날 만수절에야 넉넉히 대어 올 것을.”

하며, 빈정거리었다. 그리하여 더욱 열하는 염에도 두지 않았으며, 사신도 차츰 열하로 갈 걱정을 놓기 시작하였다.

초나흗날, 나는 구경 나갔다가 저녁 때 취하여 돌아와서 이내 곤히 잠들어서 밤중에야 잠깐 깨었다. 남들은 벌써 깊이 잠들었고 목이 몹시 마르기에 상방(上房)에 가서 물을 찾았다. 방안에는 촛불을 밝혔는데, 정사가 내 오는 기척을 듣고는 불러서,

 

아까 잠깐 졸았더니 꿈결에 열하 길을 떠났는데 행리(行李)가 역력하데그려.”

하시기에, 나는,

 

길 뜨신 뒤로 열하가 늘 생각에 떠올랐으므로 이제 비록 편안히 계시어도 오히려 꿈에 오르는가 보지요.”

하며 대답하고, 물을 마시고 돌아와서 이불에 들어 곧 코를 골았다. 꿈결에 별안간 여러 사람의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허물어지고 집이 쓰러지듯이 요란스레 들리므로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내 하루 종일 나가 돌아다니다가 밤에 돌아와 누우면 매양 관문(館門)이 깊이 잠긴 것을 생각할 제 마음이 울적하여 여러 가지 망념에 사로잡히곤 했다.

이는 곧 옛날 원 순제(元順帝)가 북으로 도망갈 제 그제야 고려의 사신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니 사신은 관을 나서서야 비로소 명 나라의 군대가 온 천하를 점령한 줄 알았고, 가정(嘉靖) 때에는 엄답(俺答 달단(韃靼)의 추장)이 갑자기 수도를 에워싼 일이 있다고 한다. 어젯밤에 내가 변군내원과 이 이야기를 하고 웃었다. 이제 저렇듯 요란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큰 변고가 일어난 것은 틀림없는 듯싶다. 급히 옷을 주워 입을 제 시대(時大)가 달려 와서,

 

이제 곧 열하로 떠나게 되었답니다.”

한다. 그제야 내원과 변군도 놀라 깨어서,

 

관에 불이 났소.”

하기에, 나는 짐짓 장난으로,

 

황제가 열하에 거둥하여 연경이 비어서 몽고 기병(騎兵) 십만 명이 쳐들어 왔다오.”

했더니, 변군들이 놀라서,

 

아이고.”

한다. 내가 곧 바삐 상방으로 간즉 온 관이 물끓듯 한다. 통관(通官) 오림포(烏林哺)박보수(朴寶秀)서종현(徐宗顯) 등이 달려와서 모두 황급하여 얼굴빛을 잃고서 혹은 제 가슴을 두드리고 혹은 제 뺨을 치며 혹은 제 목을 끊는 시늉을 하며 외치고 울면서,

 

이제야 카이카이[開開].”

한다. ‘카이카이는 목이 달아난다는 말이었다. 또 펄펄 뛰며,

 

아까운 목숨 달아난다.”

한다. 아무도 그 까닭을 묻지 못하나 그 하는 짓거리는 몹시 흉측하고 왈패스러웠다. 이는 대체로 황제가 날로 조선 사신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주문(奏文)을 받아 보고는, 예부가 조선 사신을 행재소(行在所)로 보낼 것인가 또는 아니 보낼 것인가를 품하지 않고서, 다만 표문만 올렸음을 노하여 감봉(減俸) 처분을 내렸으므로, 상서(尙書) 이하 연경에 있는 예부의 관원들이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다만 얼른 짐을 꾸리고 인원을 줄이어서 빨리 떠나도록 독촉할 따름이었다.

이에 부사와 서장관이 모두 상방에 모여서 데리고 갈 비장을 뽑는데, 정사는 주 주부 명신(命新), 부사는 정 진사 창후(昌後), 이 낭청(李郎廳) 서귀(瑞龜)를 지명하고, 서장관은 조 낭청(趙郞廳) 시학(時學)을 데리고 수역 홍 첨추(洪僉樞) 명복(命福)과 조 판사(趙判事) 달동(達東), 윤 판사(尹判事) 갑종(甲宗)이 수행하기로 하였다. 나는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첫째 먼 길을 겨우 쫓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피곤이 가시지 않은 데다가 다시 먼 길을 떠남은 실로 견딜 수 없는 노릇이요, 둘째는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황경(皇京) 구경이 낭패가 되는 것이다. 전례에 황제가 우리나라 사행을 각별히 생각하여 빨리 돌아가도록 분부한 특별 은전이 있었으니, 이번에도 십중팔구는 바로 돌려보낼 염려가 없지 않다 하고 내가 주저하던 차에, 정사가 나더러,

 

자네가 만 리 연경을 멀다 않고 온 것은 널리 구경하고자 함이거늘, 이제 열하는 앞서 온 사람들의 보지 못한 곳일뿐더러 돌아간 뒤에 열하가 어떻더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고. 그리고 연경은, 온 사람치고는 다 본 바이지만 이번 길이야말로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꼭 가야만 할 것이 아닌가?”

하기에, 나는 드디어 가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정사 이하로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예부로 보내어 역말 편에 먼저 황제에게 알리기로 하였으나, 나의 성명은 단자(單子) 속에 넣지 않았으니, 이는 별상(別賞)이 있을까 보아서 피혐(避嫌)한 것이었다.

그제야 인마를 점고(點考)할 때 사람은 발이 모두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서 실로 대어갈 것 같지 아니하다. 이에 일행이 모두 마두를 없애고 견마잡이만 데리고 가기로 하여 나도 하는 수 없이 장복을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변군과 노 참봉(盧叅奉) 이점(以漸), 정 진사(鄭進士) (), 건량 판사(乾糧判事) 조학동(趙學東) 등은 관문 밖에서 손 잡고 서로 작별할 제 여러 역관들도 다투어 와서 손을 잡으며 무사히 다녀 오기를 빌었다. 남아 있고 떠나고 하는 이 마당에 자못 처연함을 금치 못하였으니, 이는 함께 외국에 와서 또 다시 외국에서 헤어지게 되는 만큼 인정이 어찌 그렇지 않으리오. 마두들이 다투어 빈과(蘋果)와 배를 사서 드리므로 각기 한 개씩을 받았다. 그들은 모두 첨운패루(瞻雲牌樓) 앞까지 이르러서 말 머리에서 절하고 작별할 때, 각기,

 

귀중하신 몸 조심하소서.”

하고는, 눈물을 짓지 않는 이가 없었다.

지안문(地安門)에 드니, 지붕은 누런 유리기와를 이었고 문안 좌우에는 시전이 번화장려하여, 이른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 어깨가 서로 스치고 땀은 비 같으며, 소매는 천막을 이루었다는 말이 곧 이를 이름이었다. 문을 나서서 다시 꼬부라져 북으로 자금성(紫禁城)을 끼고 돌아 7~8리를 갔다. 자금성은 높이가 두 길이며 밑바닥을 돌로 깔고 벽돌로 쌓아 올리고, 누런 기와를 이고 주홍빛 석회를 칠했는데, 벽은 마치 대패로 민 듯하고 그 윤기가 왜칠(倭漆)한 것 같았다. 길 가운데 대여섯 발 되는 높은 돈대가 있고 그 위에는 삼층 다락이 있는데, 그 제도는 정양문루(正陽門樓)보다도 훌륭하고 돈대 밑에는 붉은 난간을 둘렀으며 문이 있으나 모두 잠기었고 병졸들이 지키고 섰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것이 곧 종루(鍾樓)입니다.”

한다. 거기에서 30~40리를 가서 동직문(東直門)을 나서니 내원이 따라와서 슬피 작별하여 가고, 장복은 말 등자를 붙잡고 흐느껴 울며 차마 헤어지기 어려워한다. 내가 돌아가라 타이른즉 또 창대의 손목을 잡고 서로 슬피 우는데 눈물이 마치 비내리듯 한다. 이 만 리를 짝지어 와서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니, 인정이 그렇지 않을 수 없겠다. 나는 이내 말 등에서 생각하기를,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도 생이별(生離別)보다 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대개 저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인자한 아버지와 효성스러운 아들, 믿음 있는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정의로운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 피로 맺은 벗과 마음 통하는 친구들이 그의 역책(易簀)할 때에 마지막 교훈을 받들거나 또는 궤석(几席)에 기대어 말명(末命)을 받을 즈음, 서로 손을 잡고 눈물 지며 뒷일을 정녕히 부탁함은 이 천하의 부자부부군신붕우가 다 한가지로 겪는 바이요, 이 세상 사람의 인자와 효도, 믿음과 아름다움, 정의와 충성, 혈성(血誠)과 지기(知己)에 솟아나온 정리는 한결같을 것이다. 이것이 사람마다 한가지로 겪는 바이요, 사람마다 한결같이 솟는 정이라면 이 일은 곧 천하의 순리일 것이다. 그 순리를 행함에 있어서는 삼년(三年) 동안을 아버지의 도()를 고치지 말라 하였고, 또는 구원(九原)에서 다시 살려 일으켰으면 함에 불과하였고, 살아 남은 자의 괴로움을 논한다면 부모를 따라서 죽으려는 이, 아들을 여의고 눈이 먼 이, ()을 두들기며 노래 부르는 이, 거문고 시위를 끊은 이, 숯을 머금고 벙어리 된 이, 슬피 울어 성()을 무너뜨린 이 들도 있거니와, 나랏일을 위하여 몸이 망쳐져 죽은 뒤에야 만 이도 없지 않으나 모두 죽은 이에겐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인즉, 역시 그들에게 괴로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천고에 임금과 신하의 사이로는 반드시 부견(苻堅 전진(前秦)의 임금)과 왕경략(王景略 부견의 승상), 당 태종(唐太宗)과 위 문정(魏文貞 당 태종 때의 직신인 위징(魏徵)의 시호)이라 일컬으나 나는 아직 경략을 위하여 눈이 멀고 문정을 위하여 시위를 끊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노라. 오히려 무덤의 풀이 어울리기 전에 그 채찍을 던지고 그 비()를 넘어뜨려 구원(九原)에 깊이 간직한 사람에게 부끄러울 바가 있었은즉, 이로써 보면 살아 남은 자로서 괴로움을 느끼지 못한 이도 없지 않으리라. 또 세상 사람이 흔히들 사생의 즈음에 대하여 너그럽게 위안하는 말로,

순리(順理)로 지냄이 옳지.”

한다. 그 순리로 지낸다는 말은 곧 이치를 따르라는 말이다. 만일 그 이치를 따를 줄 안다면 이 세상에는 벌써 괴로움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 된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별의 괴로움은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의 괴로움보다 더함이 없을 것이다. 대개 이러한 이별에 있어서는 벌써 그 땅이 그 괴로움을 돋우는 것이니, 그 땅이란 정자(亭子)도 아니며, 누각(樓閣)도 아니며, 산도 아니며 들판도 아니요, 다만 물을 만나야만 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 물이란 반드시 큰 것으로 강과 바다거나 또는 작은 것으로 도랑과 개천이어야 됨은 아니고, 저 흘러가는 것이라면 모두 물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고에 이별하는 자 무한히 많건마는 유독 저 하량(河梁)을 일컫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결코 소무(蘇武)이릉(李陵)만이 천하의 유정(有情)한 사람이 아니건만 특히 그 하량이란 곳이 이별하는 지역으로 알맞았던 것이며, 그 이별이 그 지역을 얻었으니 괴로움이 가장 심한 것이다. 저 하량은 내가 아노니, 아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으며, 잔잔하지도 않고 거세지도 않은 그 물결이 돌을 이끌어 안고 흐느껴 우는 듯하며, 바람도 불지 않는, 비도 내리지 않는, 음산하지도 않는, 볕도 쪼이지 않는, 그 햇볕이 땅을 감돌아 어슴프레 해미 끼고 하수 위의 다리는 오랜 세월에 곧장 허물어지려 하고, 물 가의 나무는 늙어서 가지 없이 고목이 되려 하고, 물 언덕 모래톱은 앉았다 섰다 할 수 있고, 물 속에는 물새가 있어 떴다 잠겼다 노닐며, 이 가운데 사람은 넷도 아니요, 셋도 아님에도 서로 묵묵히 말없는 이 이별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별부(別賦)에 이르기를,

말 없이 마음 아픔 / 黯然銷魂

이별에서 더할쏜가 / 唯別而已

하였으니, 어찌 그 표현이 이렇게 멋이 없을까. 천하의 어떤 이별치고 누가 말없지 않는 이 있으며, 마음 아프지 않는 이가 있으리오. 이는 다만 한 개의 별() 자에 대한 전주(箋注)에 지나지 않을 말이니 그다지 괴로움이 될 것이 없으리라. 특히 이별하는 일 없이 이별하는 마음을 지닌 자는 천고에 오직 시남료(市南僚)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이르기를,

그대를 보내러 갔던 이가 저 아득한 강둑으로부터 돌아오니, 그대의 모습은 이로부터 멀어졌구나.”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천고의 애끊을 만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곧 물에 다다라서 이별함이니 그야말로 이별이 땅을 얻은 까닭이다. 옛날 유우석(劉禹錫)이 상수(湘水) 가에서 유종원(柳宗元)과 헤어졌다가 그 뒤 5년 만에 우석이 옛길로부터 계령(桂嶺)을 나와 다시 앞서 이별하던 곳에 이르러 시를 읊어서 유()를 슬퍼하기를,

내 말은 구슬피 숲 가린 채 울건마는 / 我馬暎林嘶

임 싣고 감돈 배는 산 너머 아득하구나 / 君帆轉山滅

하였으니, 천고의 귀양살이꾼이 무한히 많건마는 이것이 가장 괴롭게 여겨짐은 오로지 물가에서 이별한 까닭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 곳이라 살아서 멀리 이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리 심한 괴로움을 겪은 일은 없으나, 다만 뱃길로 중국에 들어갈 때가 가장 괴로운 정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악부(大樂府) 중에 이른바 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이 있으니 우리 시골 말로는 배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 곡조가 몹시 구슬퍼서 애끊는 듯하다. 자리 위에 그림배를 놓고 동기(童妓) 한 쌍을 뽑아서 소교(小校)로 꾸미되, 붉은 옷을 입히고, 주립(朱笠)패영(貝纓)에 호수(虎鬚)와 백우전(白羽箭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엔 채찍을 쥐고, 먼저 군례(軍禮)를 마치고는 첫 곡조를 부르면 뜰 가운데에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생들이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들을 입은 채 일제히 어부사(漁父辭)를 부르며 음악이 반주(伴奏)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동기가 소교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배 떠나는 포를 놓으라고 창한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닻 들자 배 떠난다 / 碇擧兮船離

이제 가면 언제 오리 / 此時去兮何時來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 / 萬頃蒼波去似回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눈물지을 때이다. 이제 장복은 어버이와 아들의 친함도 아니요, 임금과 신하의 의도 아니요, 남편과 아내의 정도 아니요, 동창과 친구의 사귐도 아니거늘, 그 살아서 헤어지는 괴로움이 이러한즉, 이는 그 이별하는 땅이 오로지 강이나 바다, 또는 저 하수의 다리에서만이 이러함은 아니었으리라. 실로 이국이나 타향치고서 이별에 알맞은 땅이 아닌 것이 없는 까닭이리라. 아아, 슬프외다. 앞서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께서 심양에 계시올 때 당시 신료(臣僚)들이 머물고 떠날 즈음이나 사신의 오가는 무렵이면 그 심회 어떠하였으리. 임금이 욕되매 신하된 자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것도 이 경지면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일지니, 그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가며, 어떻게 참고 보내며 어떻게 참고 놓았겠는가.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통곡할 때였던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내 비록 이나 벼룩 같은 미천한 신민(臣民)이건마는 백 년이 지난 오늘에 시험조로 한번 생각해 볼 때에도 오히려 정신이 싸늘하고 뼈가 저리어 부러질 것 같거늘, 하물며 그 당시 자리에 일어서서 절하고 하직할 즈음이리오. 하물며 그 당시 걸림이 많고 혐의 또한 깊어서, 눈물을 참고 소리를 머금으며, 얼굴엔 슬픈 표정을 드러내지 못할 때이리오. 하물며 그 당시 떨어져서 머무른 여러 신하가 아득히 떠나가는 이들의 행색을 바라볼 제 저 요동의 넓은 들판은 가이 없고, 심양의 우거진 나무들은 아득한데, 사람은 팥낱처럼 작아지고 말은 지푸라기처럼 가늘어서, 시력이 다하는 곳에 땅의 끝, 물의 마지막이 하늘에 닿도록 아련하게 지경이 없으니, 해가 저물어 관문을 닫을 때에 그 간장이 어떠하리. 이런 이별일진대 어찌 반드시 물가만이 이에 알맞은 땅이 되리오. 정자도 좋고, 누각도 좋고, 산도 좋고, 들판도 좋을지니, 어찌 반드시 저 흐느껴 우는 물결과 어슴프레 해미 낀 햇볕만이 우리의 괴로운 심정을 자아낼 것이며, 또 하필이면 저 무너지려는 다리, 오똑한 망가진 고목만이 우리 이별의 마당이 될 것인가.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비록 저 그림 기둥에 현란스러운 문지방과 푸른 봄철에 밝은 날씨라도 모두들 우리를 위한 애끓는 이별의 땅이 될 수 있겠고, 또는 우리를 위한 가슴치고 통곡할 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를 만나서는 제가 비록 돌부처라도 머리를 돌릴 것이요, 쇠로 된 간장일지라도 다 녹고 말 것이니, 이는 또 우리나라에서 정사(情死)함에 제일 알맞은 때일 것이리라.”

하고는,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20여 리를 갔다. 성문 밖은 꽤 쓸쓸한 편이어서 산천이 눈에 드는 것이 없다. 해는 이미 저물었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수레바퀴를 쫓아간다는 것이 서쪽으로 너무 치우쳐서 벌써 수십 리나 돌림길을 걸었다.

양편에 옥수수가 하늘에 닿을 듯 아득하여 길은 함() 속에 든 것 같은데, 웅덩이에 고인 물에 무릎이 빠진다. 물이 가끔 스며 흐르도록 구덩이를 파 놓았는데 물이 그 위를 덮어서 보이지 않으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조심하여 길을 따라 소경처럼 용을 쓰고 앞으로 나아간즉, 밤이 벌써 깊었다. 손가장(孫家庄)에서 저녁을 먹고 머물다. 동직문(東直門)은 그 지름길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수십 리 돌림길을 걸었다.

 

 

[C-001]가을 : ‘수택본에는 이 위에 건륭 45년 경자라는 한 구절이 있으나, 그를 따르지 않았다.

[D-001]사은겸진하정사(謝恩兼進賀正使) : 사은사(謝恩使)와 진하사(進賀使)를 겸한 정사. 곧 박명원을 말한다.

[D-002]밤새도록 …… 못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많이 유행되는 말.

[D-003]별상(別賞) : 청의 황제가 유상(有賞) 종인(從人)에 주는 상사(賞賜).

[D-004]수레바퀴가 …… 이루었다 : 전국 때 제()의 수도 임치(臨淄)의 번화함을 설명한 말. 사기(史記)에 나온다.

[D-005]역책(易簀) : 공자의 제자 증참(曾參)이 운명할 때에 제자를 시켜 자리를 바꿨으므로, 스승의 운명을 역책이라 한다.

[D-006]삼년(三年) …… 말라 : 논어에 나오는 말.

[D-007]구원(九原)에서 ……  : 예기(禮記)에 나오는 조문자(趙文子)의 말.

[D-008]살아 ……  : 효경(孝經)에 나오는 실사.

[D-009]아들을 ……  : 복상(卜商) 즉 자하(子夏)의 고사.

[D-010]() ……  :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장주(莊周)의 고사. 아내가 죽으매 분을 두들기며 노래하였다.

[D-011]거문고 ……  : 종자기(鍾子期)가 죽으매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고 뜯지 않았다.

[D-012]숯을 ……  : 예양(豫讓)이 그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숯을 머금어 벙어리가 되었다.

[D-013]슬피 ……  : 기량(杞梁)이 죽으매 그 아내가 울어서 성을 무너뜨렸다.

[D-014]나라 ……  : 제갈량(諸葛亮) 출사표(出師表)에서 나온 구절.

[D-015]무덤의 …… 던지고 : 부견이 처음에는 왕맹을 써서 국세가 크게 떨치고 강북을 통일했으나, 그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남으로 진()을 치다가 패하여 나라가 망했다.

[D-016]() …… 있었은즉 : 위징이 죽은 뒤에 당 태종이 몹시 슬퍼하였으나, 고구려 정벌을 반대했다 하여 나중에는 그 묘비(墓碑)를 넘어뜨리었다가,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를 뉘우쳐서 다시 세웠다.

[D-017]하량(河梁) : 북방 오랑캐 땅에 있는 하수의 다리. 소무와 이릉이 이에서 작별할 때에, 이릉이 소무에게 읊어 준 시가 천고에 비장강개하기 짝이 없었다.

[D-018]소무(蘇武) : 한 무제(漢武帝)의 명신으로서 흉노(匈奴)에게 사절로 갔었는데, 그들에게 억류당하였다가 10년 만에 돌아왔다.

[D-019]이릉(李陵) : 한 무제의 명장이요, 이광(李廣)의 손자로서, 흉노를 치다가 실패하여 흉노에게 머물고 있었다.

[D-020]별부(別賦) : 남북조(南北朝) 때 유명한 문학가 강엄(江淹)이 이별의 슬픔을 묘사한 작품 이름.

[D-021]시남료(市南僚) : 장주(莊周) 남화경(南華經) 중에 나오는 사람.

[D-022]유우석(劉禹錫) : ()의 문학가. 자는 몽득(夢得).

[D-023]유종원(柳宗元) : 당의 문학가. 자는 자후(子厚). 일찍이 유주 자사(柳州刺使)로 좌천되었다.

[D-024]대악부(大樂府) : 소악부(小樂府)에 비하여 장형(長型)이다.

[D-025]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 :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이 지었다 한다.

[D-026]소교(小校) : 군교(軍校)를 따라서 죄인을 잡는 사령(使令).

[D-027]어부사(漁父辭) : 중국 굴평(屈平)이 지은 것도 있겠지마는, 여기서는 우리나라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것인 듯싶다.

[D-028] …… 돌아오소 : 이것이 곧 배따라기곡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6일 임자(壬子)

 

 

아침에 갰다가 차츰 덥더니 낮에는 크게 비바람치며 천둥과 번개를 치다가, 저녁 나절에 개다.

새벽에 길을 떠나다. 역정(驛亭) 표목에 순의현계(順義縣界)라 쓰였고, 또 수십 리를 가니 표목에 회유현계(懷柔縣界)라 쓰였는데, 그 현성(縣城)은 길에서 십여 리 혹은 7~8리 떨어져 있다 한다.

()의 개황(開皇 수 문제(隋文帝)의 연호) 연간에 말갈(靺鞨 당 때의 만주족 칭호)이 고구려와 싸워서 지자 그 부장(部將 추장과 같음) 돌지계(突地稽)가 팔부(八部)를 거느리고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그 부락을 통틀어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새로이 순주(順州)를 두어서 이에 수용하였더니, 당 태종(唐太宗) 때에 오류성(五柳城)을 주치(州治)로 하고 돌리극한(突利可汗 동돌궐(東突厥)의 추장)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아서 그 무리를 거느리고 순주를 도독(都督)하게 하였으며,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에는 탄한주(彈汗州)를 두었고,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이후로는 귀화현(歸化縣)이라 고쳤으며, 후당(後唐)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의 묘호) 때 주덕위(周德威)가 유수광(劉守光)을 쳐서 순주를 점령하였다 하니, 생각하건대 순의(順義)회유(懷柔) 두 고을의 땅이 곧 옛날의 순주인 듯싶다. 우란산(牛欄山)이 그 서북 삼백 리에 뻗쳐 있는데, 옛 늙은이의 전해 내려오는 말에,

 

옛날에는 금소[金牛]가 그 골짜기에서 나오고 선인(仙人)이 이를 타고 노닐었다 하며, 돌이 마치 구유처럼 생긴 것이 있어서 이름을 음우지(飮牛池)라 하고, 이 뫼를 또한 영적산(靈蹟山)이라 부른다.”

한다. 그 산 동쪽에서는 조하(潮河)가 백하(白河)와 합하며 동북에 호로산(狐奴山)이 있고, 또 서북엔 도산(桃山)의 다섯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이 마치 손가락을 세운 것 같다. 다시 수십 리를 가서 백하를 건너는데 백하의 근원은 새문(塞門) 밖에서 흘러 나와 석당령(石塘嶺)에서 장성을 뚫고, 황화(黃花)의 진천(鎭川), 창평(昌平)의 유하(楡河) 등 새문 밖의 모든 물과 합하여 밀운성(密雲城) 밑으로 지나간다. ()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일찍이 수리(水利)에 능한 자를 뽑아서 둑을 내고 논을 풀어 해마다 곡식 백여만 섬을 거두었더니 뒤에 명()의 태감(太監) 조길상(曹吉祥)이 몰수한 땅으로 국영 농장을 삼자, 세민(細民)들이 이로 말미암아 업을 잃고, 백하의 수리도 마침내 폐지되었다. ()의 알리불(斡離不)이 순주에 들어와서 곽약사(郭藥師)를 백하에서 깨뜨렸다 하니 곧 이곳이다. 물살이 세고 빛이 탁하니, 이는 대체 새외(塞外)의 물은 모두 누런 빛이다. 다만 작은 배 두 척밖에 없는데, 모래톱에 다투어 건너려는 자의 수레가 수백 대요, 인마가 수없이 서 있다. 올 때 길에서 본즉, 막대를 가로 질러서 누런 궤() 수십 개를 나르고 있는데, 혹은 뾰족하고 혹은 넓적하고 혹은 길쭉하고 혹은 높다란 것들이다. 여기에는 모두 옥그릇을 실었는데 회자국(回子國 회교국)에서 조공 바치는 것이었으며 북경에서 짐꾼을 세내어서 나르고 회자 너덧 사람이 이를 거느리고 가는 판이다. 그 생김새는 벼슬아치인 듯하며 그 중 한 사람은 회자국의 태자(太子)라 하는데, 그 몰골이 웅건하고 사나워 보인다. 누런 궤짝을 배 속에 메어다 놓고 방금 삿대를 저어서 언덕에서 떠나려 할 순간에 주방(廚房)과 구인(驅人 말몰이꾼)들이 펄쩍 배에 뛰어 올라 말을 포개어 놓은 궤짝 위에 세웠다. 배는 이미 길을 떠났고 언덕에 있는 회자는 놀라서 소리 치고 발을 구르나 주방과 구인들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먼저 건너려고만 한다. 내가 수역에게 말하니 수역이 크게 놀라서,

 

빨리 내려.”

호령하고, 회자들 역시 어지러이 지껄여 대면서 배를 돌리게 하여 그 궤짝을 모두 메어 내렸으나 한 마디도 우리나라 사람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중류(中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한 조각 검은 구름이 생겨 거센 바람을 품고 남에서부터 굴러 오더니 삽시간에 모래를 날리고 티끌을 자아올려 연기와 안개처럼 하늘을 덮어서 지척을 분변하지 못할 지경이다. 배를 내려서 하늘을 쳐다본즉, 검으락푸르락하고 여러 겹 구름이 주름잡듯 하였는데, 독기를 품은 듯 노염을 피는 듯 번갯불이 그 사이에 얽히어서 올올이 번쩍이는 금실이 천 송이 만 떨기를 이루었으며, 벽력과 천둥이 휘감고 겹겹이 싸여서 마치 검은 용이라도 뛰어 나올 듯싶다. 밀운성을 바라보니 겨우 몇 리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채찍을 날려서 빨리 말을 몰았으나, 바람과 우레가 더욱 급하여지고 빗발이 비껴치는 것이 마치 사나운 주먹으로 후려갈기는 듯하여 형세가 지탱할 수 없으므로, 재빨리 길가 낡은 사당에 뛰어 들었다. 그 동편 월랑(月廊)에 두 사람이 책상을 사이에 놓고 교의에 걸터 앉아서 바삐 문서(文書)를 다루고 있으니, 이는 밀운 역리(驛吏)가 오가는 역말들을 적는 것이었다. 하나는 한자(漢字)로 쓰고 또 하나는 만주 글자로 번역하는데, 그 중에서 내 눈에 얼핏 조선(朝鮮)이란 글자가 보이기에 들여다보니, ,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북경에 있는 병부(兵部)로부터 조선 사신들에게 건장한 말을 주어서 험난함이 없게 하며, 또는 그들 행리(行吏)의 필수품을 공급하라.”

는 내용이다. 이윽고 사신이 비를 피하여 뒤이어서 들어왔으므로 내 수역을 끌어서 그 종이를 보이매 수역이 사신에게로 가져 갔다. 이에 그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들은,

 

저희들은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들은 다만 오가는 문서를 장부와 견주어 맞춰볼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 문서에 이른바 건장한 말이란 찾아볼 곳도 없거니와 설령 그 말을 준다 한들 모두 몹시 날세고 건장해서 불과 한 시간에 70리를 달리니, 이는 그들의 이른바 비체법(飛遞法)이다. 길에서 역말의 달리는 것을 보니, 앞에서 선창하기를 노래하듯 하면 뒤에서 응하기를 마치 범을 쫓는 듯이 하는데, 그 소리가 산골과 벼랑을 울리면 말이 일시에 굽을 떼어 바위시내덩굴을 가리지 않고 훌훌 날뛰며 달리는데, 그 소리가 마치 북 치는 듯 소낙비가 퍼붓는 듯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쥐처럼 잔약한 과하마(果下馬) 따위를 견마 잡히고 부축하여서도 오히려 떨어질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이렇게 날뛰는 역말이야 누가 능히 탈 수 있겠는가. 만일 황제의 명령으로 억지로 이를 타게 한다 해도 도리어 걱정거리일 것이다. 대개 황제가 근신(近臣)을 보내어서 우리 사신을 영접 두호하게 한 것이 방금 이곳을 지나쳤는데 길이 서로 어긋난 모양이다.

비가 좀 멎기에 곧 길을 떠났다. 밀운성 밖을 감돌아서 7~8리를 갔다. 별안간 건장한 호인(胡人) 몇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가 손을 내저으며,

 

가지 마시오. 앞으로 5리쯤에 시냇물이 크게 불어서 우리도 모두 되돌아오는 길이오.”

하고, 또 채찍을 이마에까지 들어 보이며,

 

이마만큼 높으니 당신네들 두 날개가 돋쳤나요.”

한다. 이에 서로 돌아보며 낯빛을 잃고 모두 길 가운데서 말을 내려 섰으나, 위에서는 비가 내리고 아래로는 땅이 질어서 잠시 쉴 곳도 없다. 그제야 통관과 우리 역관들을 시켜서 물을 가보게 하였다. 그들이 돌아와서,

 

물 높이가 두어 발이나 되어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한다. 버드나무 그늘이 촘촘하고 바람결이 몹시 서늘한데 하인들의 홑옷이 모두 젖어서 덜덜 떨지 않는 자가 없다. 비가 잠깐 개자 길 왼편 버드나무 밖에 새로 지은 조그만 행전(行殿)이 보이므로 곧 말을 달려 그리로 들어가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대개 연경으로부터 길가에 삼십 리마다 반드시 행궁(行宮)이 하나씩 있어서 창름(倉廩)과 부고(府庫)까지도 다 갖추어 있다. 그러나 이 성 밖에 이미 행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십 리도 못 되는 이곳에 또 이 집을 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제도의 거대하고 사치함과 현란한 품이 여느 대목 따위의 손으로 이룩된 것이 아닌 듯싶으나 다만 내 몸이 춥고 배가 주려서 두루 구경할 경황이 없었다.

때마침 해는 홍라산(紅螺山)에 지는데 온 산 봉우리 겹겹이 쌓인 푸른 빛이 한덩이 붉은 빛으로 물들고, 아계(丫髻)서곡(黍谷)조왕(曹王)의 여러 산이 금빛 구름과 수은 안개 사이에 삥 둘러섰다. 삼국지(三國志),

 

조조(曹操)가 백단(白檀)을 거쳐 오환(烏桓)을 유성(柳城)에서 쳐부셨으므로 지금까지 그 산 이름을 조왕(曹王)이라 하였다.”

는 것이 곧 이를 이름이었고, 유향(劉向) 별록(別錄)에는,

 

()에 서곡(黍谷)이란 땅이 있으나 추워서 오곡(五穀)이 나지 않더니 추연(鄒衍)이 율()을 불어서 온기(溫氣)가 생기었다.”

하였고,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북쪽으로 한곡(寒谷)을 지나쳤다.”

하였으니, 곧 이곳을 이름이다. 내 어렸을 때 과체시(科體詩 과거 볼 때 짓는 시체(詩體))를 짓다가 서곡의 취율(吹律)을 써서 고실(古實)을 삼았더니 이제 눈으로 바로 그 산을 바라보게 되었다.

역관이 제독(提督)과 통관과 더불어 의논하되,

 

이제 이미 앞으로 물을 건널 수 없고 물러나도 밥 지을 곳이 없는데 해가 또한 저무니 어찌하면 좋을까.”

하니, 오림포(烏林哺),

 

여기는 밀운성에서 겨우 5리밖에 안 되는 곳이니 사세가 부득불 도로 성으로 들어가서 물 빠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다. 오림포는 나이가 70이 넘어서 그 중 춥고 주림을 못 견디는 모양이다. 대개 새북(塞北) 길을 제독 이하의 여러 사람이 전에 가본 일이 없으므로, 길도 모르고 해는 저물어 사람의 그림자도 드물어지자 그 아득히 갈 바를 모름이 우리와 다름이 없다. 내 먼저 밀운성에 이르렀는데 길가의 물이 벌써 말 배에 닿았다. 성문에서 말을 세우고 일행을 기다려서 함께 들어가니, 뜻밖에 쌍등쌍촛불을 들고 와서 맞이하는 이가 있고, 또 기병(騎兵) 10여 명이 앞에 와서 환영하는 듯이 보이었다. 이는 곧 밀운 지현(知縣)이 몸소 와서 맞이함이다. 통관이 먼저 가서 주선한 것이 불과 몇 마디 말이 끝나기 전인데 이처럼 그 거행이 재빠르다. 중국의 법이 비록 왕자(王子)나 공주(公主)의 행차라도 민가(民家)에 머무르지 못하므로 그 사관은 반드시 점방이 아니면 사당이다. 이제 이 고을에서 우리 일행의 숙소로 정해진 곳은 관묘(關廟)인데, 지현은 문까지 와서 곧 돌아가고 관묘인즉 인마를 들일 수는 있으나 사신이 거접할 곳은 없었다. 이때 밤이 이미 깊어서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었으므로, 오림포가 백 번 천 번 두드리고 부르고 한 끝에 겨우 나와서 응대하는 이가 있으니 이는 곧 소씨(蘇氏)의 집이었다. 이 고을 아전으로서 집이 훌륭하기가 행궁이나 다름없다. 그 주인은 이미 죽고 다만 열여덟 살 나는 아들이 있는데, 눈매가 청수하여 속세의 풍상(風霜)을 겪지 않은 사람 같다. 정사가 불러서 청심환 한 개를 주니 그는 무수히 절하나 몹시 놀라서 두려워하는 기색이다. 이에 마침 잠이 들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어 나가보니, 사람 지껄이는 소리와 말 우는 소리가 요란한데 모두 생전 처음 듣는 소리요, 급기야 문을 열자 벌떼처럼 뜰에 가득 찬 사람들이 이 어디 사람들인가. 이른바 조선 사람이라고는 이곳에 온 일이 없으므로 북로(北路)에서는 처음 보니, 그들은 아마 안남(安南) 사람인지 일본(日本)유구(琉球)섬라(暹羅)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쓴 모자는 둥근 테가 몹시 넓어서 머리 위에 검은 우산을 받은 것 같으니, 이는 처음 보는 것이라, “이 무슨 갓일까 이상하다.” 했을 것이며, 그 입은 도포는 소매가 몹시 넓어서 너풀거리는 품이 마치 춤추는 듯하니, 이 또한 처음 보는 것이라, “이 무슨 옷이랴, 이상한지고.” 했을 것이요, 그 말소리도 혹은 남남(喃喃)’ 하고 혹은 니니(呢呢)’ 또는 각각(閣閣)’ 하니 이 역시 처음 듣는 소리라, “이 무슨 소리랴 야릇한지고.” 했을 것이다. 처음 본다면 비록 주공(周公)의 의관(衣冠)이라도 오히려 놀라울 것이거늘, 하물며 우리나라 제도가 몹시 크고 고색이 창연할까보냐. 그리고 사신 이하의 복장이 모두들 달라서 역관들의 복장, 비장들의 복장, 군뢰들의 복장이 각기 따로따로 되어 있고, 역졸(驛卒)마두배는 맨발 벗고 가슴을 풀어 헤치고는 얼굴은 햇볕에 그을리고 옷은 해져서 엉덩이를 가리지 못하였으며, 왁자하게 지껄이며 대령하는 소리는 너무도 길게 빼니 이 모두 처음이라. “이 무슨 예법이랴. 이상하고 야릇한지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한 나라 사람이 함께 온 것을 모르고 아마 남만(南蠻)북적(北狄)동이(東夷)서융(西戎) 들이 함께 제 집에 들어온 줄로 알았을 것이니, 어찌 놀랍고 떨리지 아니하리오. 이는 비록 백주에라도 넋을 잃을 것이거늘 하물며 아닌밤중이리오. 비록 깨어 앉았어도 놀라울 것이거늘 하물며 잠결에서리오. 또 더군다나 열여덟 살 약관(弱冠)의 어린 사내이겠는가. 비록 세상 일을 싫도록 겪은 여든 살 노인일지라도 필시 놀라서 와들와들 떨며 졸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역관이 와서,

 

밀운 지현이 밥 한 동이와 채소과실 다섯 쟁반, 돼지거위오리고기 다섯 쟁반, 술 다섯 병을 보내왔고, 또 땔나무와 말먹이도 보내왔습니다.”

한다. 정사는,

 

그래, 땔나무나 말먹이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마는, 밥과 고기 들은 주방이 있으니 남에게 폐를 끼칠 게 있겠어. 받든지 안 받든지 간에 부사님과 서장관 나리께 여쭈어 결정짓는 게 옳을 거야.”

하였다. 수역은,

 

이곳을 들어오면 동팔참(東八站)으로부터 으레 공궤(供饋)가 있는 법이랍니다. 다만 이렇게 익힌 음식을 제공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제 이곳에 도로 오게 된 것은 비록 뜻밖의 일이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저들이 지주(地主)의 체면으로서 이를 제공하였은즉 무슨 이유로 그를 물리칠 수 있사오리까.”

한다. 이러한 차에 부사와 서장관이 들어와서,

 

이건 황제의 명령도 없은즉 어찌 받을 수 있겠어요. 마땅히 돌려보냄이 옳겠습니다.”

한다. 정사도,

 

그렇겠소.”

하고는, 곧 명령을 내려 그를 받기 어려운 뜻을 밝히게 하였다. 이제 여남은 인부들이 끽 소리도 없이 다시 지고 가버렸다. 서장관이 또 하인들에게,

 

만일 한 줌의 땔나무나 말먹이를 받는다면 반드시 무거운 매를 내릴 거야.”

하고, 엄격히 단속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서 조달동(趙達東)이 와서,

 

군기 대신(軍機大臣) 복차산(福次山)이 당도하였답니다.”

하고 여쭙는다. 대개 황제가 특히 군기 대신을 파견하여 사신을 맞게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가 바른 길로 덕승문(德勝門)에 들어가자 우리의 일행은 벌써 동편 바른 문을 통과하였으므로 서로 어긋나게 된 것이다. 복차산은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뒤를 쫓아 온 것이다. 그는,

 

황제께옵서 사신을 고대하고 계시오니 반드시 초아흐렛날 아침 일찍 열하에 도달하여 주시오.”

하며, 두세 번 거듭 부탁하고 가버린다. 군기(軍機)란 마치 한()의 시중(侍中)과 같아서 늘 황제 앞에 모시고 앉았다가, 황제가 군기에게 명령을 내리면 군기가 하나하나를 의정대신(議政大臣)에게 전달하곤 한다. 그가 비록 계급은 낮으나 황제에게 가까운 직책을 맡았으므로 대신(大臣)’이라 일컬었다. 복차산의 나이는 스물 대여섯쯤 되는데 키는 거의 한 길쯤이고 허리가 날씬하고 눈매가 가늘어서 매우 풍치가 있어 보이었다. 그는 말이 끝난 뒤에 화고(花糕) 하나를 먹고는 곧 말을 달리며 떠나버렸다.

그리고 벽돌이 깔린 대청이 넓고도 통창하였으며 탁자 위의 모든 물건은 위치가 정돈되었다. 하얀 유리 그릇에 불수감(佛手柑) 세 개를 담았는데 맑은 향내가 코를 찌른다. 10여 개의 교의는 모두 무늬 있는 나무로 꾸몄으며, 서편 바람벽 밑에는 등자리와 꽃방석양털보료 등이 깔려 있고, 구들 위에는 붉은 털방석을 깔았으되 길이나 너비가 알맞게 되어 있고, 침대 위에 깔린 자리는 말총으로 쌍룡을 수놓았으되 오색이 찬란하였다. 두 하인이 그 위에 누워 있음을 보고 시대를 시켜 깨웠으나 곧 일어나지 않자 시대가 크게 호통하여 쫓아버렸다. 나는 이때 하도 피로하기에 잠깐 그 위에 누웠더니 별안간 온 몸이 가려워 견디기 어렵기에 한 번 긁자 굶주린 이들이 더덕더덕하였다. 곧 일어나 옷을 털고 나서,

 

밥이 이미 익었느냐.”

하고, 물었다. 시대는,

 

애초부터 밥을 지은 일이 없답니다.”

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대체로 이때는 밤이 곧 닭울 녘이어서 한 그릇 물이나 한 움큼 땔나무도 사올 곳이 없으니, 비록 저 사자(獅子) 어금니같이 흰 쌀과 높게 쌓인 은이 있다 하더라도 밥을 익힐 길은 없었다. 그리고 부사의 주방은 낮에 벌써 비 내리기 전에 시내를 건넜으므로 영돌(永突) 상방의 건량고(乾糧庫) 지기이다. 이 부사와 서장관의 주방을 겸하였으나 밥을 지을 기약은 아득하였다. 하인들이 모두 춥고 굶주려서 혼수 상태에 빠졌다. 나는 그들을 채찍으로 갈겨 깨웠으나 일어났다가 곧 쓰러지곤 한다. 하는 수 없어서 몸소 주방에 들어가 살펴본즉 영돌이 홀로 앉아 공중을 쳐다보면서 긴 한숨을 뽑는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종아리에 고삐를 맨 채 뻗고 누워 코를 곤다. 마침 간신히 수숫대 한 움큼을 얻어서 밥을 지으려 했으나 한 가마솥의 쌀에 반 통도 못 되는 물을 부었으니 결코 끓을 리 없거니와 도리어 가소로운 일일 뿐이다. 이윽고 밥을 받아 본즉 물이 쌀에 스며들지 못 하였으니 그 생()과 숙()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리하여 한 숟갈을 들지 못한 채 정사와 함께 술 한 잔씩을 마시고 곧 길을 떠났다. 이때 닭은 서너 홰를 쳤다. 창대가 어제 백하를 건너다 말굽에 밟혀서 발굽철이 깊이 들어 쓰리고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신음하고 있으나, 그의 대신으로 견마잡을 자도 없어서 일이 극히 낭패스러웠다. 그렇다 해서 촌보를 옮기지 못하는 그를 중도에다 떨어뜨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비록 잔인하기 짝이 없으나 하는 수 없이 기어서라도 뒤를 따라 오게 하고 스스로 고삐를 잡고 성을 나섰다. 사나운 물결이 길을 휩쓸고 간 나머지 어지러운 돌이 이빨처럼 날카로웠다. 손에는 등불 하나를 가졌으나 거센 새벽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리하여 다만 동북쪽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별빛만을 바라보며 전진하였다. 앞 시냇가에 이른즉, 물은 이미 물러갔으나 아직 말 배꼽에 닿았다. 창대는 몹시 춥고 주린데다 발병이 나고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채 또 차가운 물을 건너게 되어 그저 걱정되기 짝이 없었다.

 

 

[D-001]돌지계(突地稽) : 수 문제(隋文帝) 때 말갈의 추장으로, 수 나라에 귀화하여 순주 도독(順州都督)이 되었다.

[D-002]주덕위(周德威) : 후당의 명장. 자는 진원(鎭遠).

[D-003]유수광(劉守光) : 후량(後梁)의 난신(亂臣) 패자(悖子).

[D-004]조길상(曹吉祥) : 명 영종(明英宗) 때의 사례 태감(司禮太監)으로, 삼대영(三大營)을 총독하여 석형(石亨)과 더불어 위복(威福)을 누리었으나, 나중에 반란을 꾀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D-005]알리불(斡離不) : 금 태조(金太祖) 아골타(阿骨打)의 둘째 아들.

[D-006]곽약사(郭藥師) : ()가 망할 때 원군(怨軍)의 괴수.

[D-007]과하마(果下馬) : 과실나무 가지 밑을 타고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작은 말.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중에 나오는 한반도의 말.

[D-008]행전(行殿) : 군주가 지방을 순시할 때 임시 거처하는 곳. 행재소(行在所). 행궁(行宮).

[D-009]삼국지(三國志) : ()의 진수(陳壽)가 지은 위()()() 삼국의 역사.

[D-010]유향(劉向) : ()의 종실(宗室)로서 저명한 학자.

[D-011]추연(鄒衍) : 전국 시대 제()의 음양가(陰陽家). 퉁소를 불어서 추운 날씨가 따뜻해지게 하였다.

[D-012]불수감(佛手柑) : 중국 복건(福建)과 광동(廣東) 등지에서 자라는 상록관목의 과실. 곧 귤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7일 계축(癸丑)

 

 

아침에 비가 조금 뿌리다가 곧 개다.

목가곡(穆家谷)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고 남천문(南天門)을 나섰다. 성은 큰 재 마루턱에 있고 그 후미진 곳에 문을 내었는데 이름은 신성(新城)이다. 옛날 오호(五胡) 때 석호(石虎 후조(後趙)의 임금)가 단요(段遼)를 추격하자 단요가 모용황(慕容皩 북연(北燕)의 임금)과 함께 도로 반격하여 석호의 장수 마추(麻秋)를 쳐서 죽인 곳이 곧 이곳이었다.

이로부터 잇달아 높은 고개를 넘게 되어 오르막은 많으나 내리막이 적어지는 것을 보아 지세가 점차 높아짐을 알겠고 물결은 더욱 사나웠다. 창대가 이곳에 이르자 통증을 견디지 못하여 부사의 가마에 매달려 울면서 하소연하고 또 서장관에게도 호소하였다 한다. 이때에 나는 먼저 고북하(古北河)에 이르렀으므로 부사와 서장관이 이르러 창대의 딱하고 민망스러운 꼴을 얘기하면서, 나에게 달리 구처(區處)할 좋은 꾀를 생각해 보기를 권하였으나 실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창대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따라 왔다. 이는 중로에서 말을 얻어 타고 온 모양이다. 곧 돈 2백 닢과 청심환 다섯 알을 주어서 나귀를 세내어 뒤를 따르게 하였다.

드디어 냇물을 건넜다. 이 물의 또 하나의 이름은 광형하(廣硎河)였으니 이곳이 곧 백하의 상류였다. 물세가 변방에 이를수록 더욱 사나우므로 건너기를 다투는 거마들이 모두 웅기중기 서서 배 오기를 기다린다. 제독과 예부 낭중(禮部郞中)이 손수 채찍을 휘두르면서 이미 배에 오른 사람들까지도 몰아쳐 내리게 하고는 우리 일행을 먼저 건너 주게 하였다.

저녁 나절에 석갑성(石匣城) 밖에서 밥을 지었다. 이 성의 서쪽에 갑()처럼 생긴 돌이 있다 하여 역() 이름까지도 석갑이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옛날 유수광(劉守光)이 도망왔다가 사로잡힌 데가 곧 이곳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곧 떠났다. 날은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산길은 심한 굴곡이 거듭되었다. 왕기공(王沂公)이 일찍이 거란(契丹)에 올린 서한 중에,

 

금구전(金溝淀)에 이르러 산을 감돌아 들어 오르고 또 오르되 이표(里標)나 척후(斥堠)도 없으므로 말이 달리는 시간을 따져서 대체로 90리쯤 가서 고북관(古北館)에 이르렀습니다.”

고 하였다는데, 이제 벌써 금구전은 어디인지를 알 길이 없을뿐더러 새북의 노정이 멀고 가까운 것에 대하여는 옛사람도 역시 아리송한 모양이다.

때마침 대추가 반쯤 익었는데 마을마다 대추나무로 울타리가 이룩되었으며, 혹은 대추나무 밭이 보여 마치 우리나라의 청산(靑山)보은(報恩)과 같았고, 대추는 모두 한 줌이 넘을 만큼 컸다. 그리고 밤나무 역시 숲을 이루었으나 밤톨이 극히 자잘하여 겨우 우리나라 상주(尙州)의 것과 비슷하였다. 옛날 소진(蘇秦)이 연 문공(燕文公)을 유세하던 말 중에,

 

()의 북쪽에 밤과 대추의 생산지가 있는데 천부(天府)’라 이른답니다.”

하였으니, 아마 이는 고북구(古北口)를 두고 이른 듯싶다.

마을 거리를 지날 때마다 남녀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나이 조금 지긋한 여인치고 혹이 목에 달리지 않은 자 없는데, 큰 것은 거의 뒤웅박처럼 되었고, 더러는 서넛이 주렁주렁 달린 이가 없지 않아서 대개 열에 7~8은 모두 그러하였고, 젊은 계집애들과 얼굴 고운 여인은 흰 분을 발랐으나 목에 달린 뒤웅박처럼 생긴 혹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남자 중에도 늙은이는 가끔 커다란 혹이 달렸다. 옛 말에,

 

()에 살고 있는 사람은 이가 누렇고, 험한 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목에 혹이 달린다.”

하였고, ,

 

안읍(安邑)은 진()의 땅으로, 대추가 잘 되므로 그들은 단 것을 많이 먹어서 이가 모두 누렇다.”

하였으나, 이제 이곳에는 대추나무밭이 이룩되었으나 여인들의 하얀 이가 마치 박씨를 쪼개 세운 듯하니 이는 잘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의방(醫方)에 이르기를,

 

산협(山峽)의 물은 흔히들 급히 내리흐르므로 오래도록 마시면 혹이 많이 생긴다.”

하였으니, 이제 이곳 사람들의 혹이 많음은 험한 곳에 살고 있는 까닭이겠지마는, 유독 여인에게 많이 볼 수 있음은 어인 일인지 알 길이 없겠다.

잠시 성안에서 말을 쉬었다. 시전(市廛)과 거리가 제법 번화하긴 하였으나 집집마다 문이 닫혔으며, 문밖에는 양각등(羊角燈)을 달아 오롱조롱 별빛과 함께 오르내리곤 한다. 때는 이미 밤이 깊었으므로 두루 구경하지 못하고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 곧 나섰다. 어두운 가운데 군졸 수백 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아마 검색하려고 지키고 있는 듯싶다. 세 겹의 관문(關門)을 나와서 곧 말에서 내려 장성에 이름을 쓰려고, 패도(佩刀)를 뽑아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 내고 붓과 벼루를 행탁 속에서 꺼내어 성 밑에 벌여놓고 사방을 살펴보았으나 물을 얻을 길이 없었다. 아까 관내(關內)에서 잠시 술 마실 때 몇 잔을 남겨서 안장에 매달아 밤 샐 때까지를 준비한 일이 있기에, 이를 모두 쏟아 밝은 별빛 아래에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여남은 글자를 썼다. 이때는 봄도 아니요 여름도 아니요 겨울도 아닐뿐더러, 아침도 아니요 낮도 아니요 저녁도 아닌 곧 금신(金神)이 때를 만난 가을에다 닭이 울려는 새벽이었으니, 그 어찌 우연한 일일까보냐. 이에서 또 한 고개에 올랐다. 초승달은 이미 졌는데, 시냇물 소리는 더욱 요란히 들렸으며, 어지러운 봉우리는 우중충하여 언덕마다 범이 나올 듯 구석마다 도적이 숨은 듯할뿐더러, 때로는 우수수하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나부낀다. 따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적은 것이 있다. 산장잡기(山莊襍記) 속에 들어 있다.

물가에 다다르니 길이 끊어지고 물이 넓어서 아득히 갈 곳을 찾을 수 없는데 다만 너덧 허물어진 집들이 언덕을 의지하여 서 있었다. 제독이 달려가서 말에서 내려 손수 문을 두드리며 백천 번 거듭 그 주인을 불러 호통쳤다. 그는 그제야 대답하며 문을 나와 자기 집 앞에서 곧 건너기를 가르쳐 준다.  5백 닢으로 그를 품사서 정사의 가마 앞을 인도하게 하여 마침내 물을 건넜다. 대개 한 강물을 아홉 번이나 건너는데 물 속에는 돌에 이끼가 끼어서 몹시 미끄러우며, 물이 말 배에 넘실거려 다리를 옹송그리고, 발을 모아 한 손으로 고삐를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안장을 꽉 잡고, 끌어 주는 이도 부축해 주는 이도 없건마는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다. 내 이에 비로소 말을 다루는 데는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대개 우리나라의 말 다루는 방법은 몹시 위태로운 것이다. 옷소매는 넓고 한삼(汗衫) 역시 길므로 그것에 두 손이 휘감겨서 고삐를 잡거나 채찍을 드날리려 할 때 모두 거추장스러움이 첫째 위태로움이다. 그런 형편이므로 부득이 딴 사람으로 하여금 견마를 잡히게 되니, 온 나라의 말이 벌써 병신이 되어 버린다. 이에 고삐를 잡은 자가 항상 말의 한쪽 눈을 가려서 말이 제멋대로 달릴 수 없음이 둘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길에 나서면 그 조심함이 사람보다 더하거늘 사람과 말이 서로 마음이 통하지 않으므로 마부(馬夫) 자신이 편한 땅을 디디고 말을 늘 위태한 곳으로 몰아넣으므로 말이 피하려는 곳을 사람이 억지로 디디게 하고, 말이 디디고 싶어하는 곳에서 사람이 억지로 밀어버리니, 말이 되받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항상 사람에게 노여운 마음을 품은 까닭이니, 이는 셋째의 위태로움이다. 말이 한 눈은 이미 사람에게 가려졌고 남은 또 한 눈으로 사람의 눈치를 살피노라고 온전히 길만 보고 걷기 어려우므로 잘 넘어지기 일쑤이니, 이는 말의 허물이 아닌데도 채찍을 함부로 내리치니 이는 넷째 위태로움이다. 우리나라 안장과 뱃대끈의 제도는 워낙 둔하고 무거운데 더군다나 끈과 띠가 너무 많이 얽히었다. 말이 이미 등에 한 사람을 싣고 입에 또 한 사람이 걸려 있으니, 이는 말 한 필이 두 필의 힘을 쓰는 것이라 힘에 겨워서 쓰러지게 되니 이는 다섯째 위태로움이다. 사람이 몸을 씀에도 바른편이 왼편보다 나음을 보아서 말 역시 그러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의 오른 귀가 사람에 눌리어 아픔을 참을 수 없으므로 할 수 없이 목을 비틀어서 사람과 함께 한 옆으로 걸으며 채찍을 피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곧 말이 그 목을 비틀어서 옆으로 걷는 것을 사납고도 날랜 자태라 하여 기뻐하기는 하나 실은 말의 본정이 아니니 이는 여섯째 위태로움이다. 말이 채찍을 늘 받아 오니 그 바른편 다리만이 짝지게 아플 것임에도 불구하고 탄 사람은 무심히 안장을 버티고 앉아 있고, 견마잡이는 갑자기 채찍질하므로 몸을 뒤쳐서 사람을 떨어뜨리게 하고는 도리어 말을 책망하나, 이 역시 말의 본의가 아니니 이는 일곱째 위태로움이다. 문무를 막론하고 벼슬이 높으면 반드시 좌견(左牽)을 잡히니 이는 무슨 법인지, 우견(右牽)이 이미 좋지 않거늘 하물며 좌견이며, 짧은 고삐도 불가한데 하물며 긴 고삐이겠는가. 사삿집의 출입에는 혹시 위의를 갖출 법도 하거니와 심지어 임금의 어가를 모시는 신하로서 다섯 길이나 되는 긴 고삐로써 위엄을 보이려 함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는 문관(文官)도 불가한데 하물며 영문(營門)으로 나아가는 무장(武將)이겠는가. 이는 이른바 스스로 얽을 줄을 찬다는 겪이니 이 곧 여덟째 위태로움이다. 무장이 입는 옷을 철릭[帖裹]이라 하는데 이는 곧 군복이다. 세상에 어찌 명색이 군복이면서 소매가 중의 장삼처럼 넓단 말인가. 이제 이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이 모두 넓은 소매와 긴 한삼 때문이거늘, 오히려 이러한 위태로움에 편안히 지내려 하니 아아, 슬프구나. 이는 설사 백락(伯樂)으로 바른편에 견마잡히고 조보(造父)로 왼편에 따른다 한들 이 여덟 가지의 위태로움을 그대로 둔다면 비록 준마(駿馬)가 여덟 필일지라도 배겨내지 못할 것이다. 옛날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진칠 때 멀리 숲 사이에서 연기가 오름을 바라보고는 군관 한 사람을 시켜 가보게 하였더니, 그 군관이 좌우로 쌍견(雙牽)을 잡히고 거들먹거리고 가다가 뜻밖에 다리 밑에서 왜병 둘이 내달아 말의 배를 칼로 베고 군관의 목을 베어가 버렸다. 만력 임진년 왜구가 왔을 때의 일이다. 그리고 서애(西厓) 유성룡공(柳成龍公)은 어진 정승인데, 그가 징비록(懲比錄)을 지을 때에 이 일을 기록하여 비웃었다. 그런데도 그 잘못된 습속을 그런 난리와 어려움을 겪고도 고치지 못하였으니, 심하구나, 습속의 고치기 어려움이여. 내 이 밤에 이 물을 건넘은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말만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어서 견마잡히지 않는 보람이 이와 같구나. 수역이 주부더러 하는 말이,

 

옛사람이 위태로운 것을 말할 제 소경이 애꾸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물가에 섰는 것이라고 하지 않소. 정말 우리들 오늘 밤 일이 그러하구려.”

한다. 나는 곧,

 

그게 위태롭긴 위태로운 일이지만 위태로움을 잘 아는 것이라곤 할 수 없소.”

했다. 그 둘은,

 

어째서 그렇단 말씀이오.”

한다. 나는,

 

소경을 볼 수 있는 자는 눈 있는 사람이라 소경을 보고 스스로 그 마음에 위태로이 여기는 것이지, 결코 소경이 위태로운 줄 아는 것이 아니오. 소경의 눈에는 어떠한 위태로움도 보이지 않는데 무엇이 위태롭단 말이오.”

하고는, 서로 껄껄대고 웃었다. 따로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적은 것이 있다. 산장잡기(山莊襍記) 속에 들어 있다.

 

 

[D-001]오호(五胡) : 북방의 다섯 개 종족, 곧 흉노(匈奴)()선비(鮮卑)()()이 중국 내부에 들어와서 집권하던 시대.

[D-002]왕기공(王沂公) : 송의 문학가 왕증(王曾). 기공은 봉호.

[D-003]연 문공(燕文公) : 전국시대 연의 임금. 소진의 말을 들어서 6국을 연합하여 종장(從長)이 되었다.

[D-004]여남은 …… 썼다 : 그 제자(題字) 산장잡기(山莊襍記)중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에 실렸다.

[D-005]한삼(汗衫) : 소매 끝에 붙여 드리우는 흰 헝겊.

[D-006]백락(伯樂) : () 나라 때 말을 잘 다루던 사람.

[D-007]조보(造父) : 주 목왕(周穆王)의 팔준(八駿)을 잘 길들인 사람.

[D-008]서애(西厓) 유성룡공(柳成龍公) : 임진왜란 당시에 영상까지 지낸 저명한 정치가. 서애는 호요, 자는 이현(而見).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일 갑인(甲寅)

 

 

개다.

새벽에 반간방(半間房)에서 밥 지어 먹고, 삼간방(三間房)에서 잠깐 쉬었다. 가끔 산기슭에 화려한 사당과 절들이 보이는데 혹은 아흔아홉 층의 백탑(白塔)이 있다. 그 탑과 사당을 지은 자리를 살펴보아도 아무런 아름다운 경개가 없는 혹은 산등성이 또는 물이 흘러 떨어지는 곳에 거만의 돈을 허비하였음은 대체 무슨 뜻인지. 이런 것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으며, 그 제작의 웅장함과 조각의 공교로움과 단청의 찬란함이 모두 똑같은 수법이어서 하나만 보면 다른 것은 모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일일이 기록할 것조차 없겠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지니 사방에서 조공(朝貢)이 모여들어서, 수레낙타 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울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창대가 별안간 말 앞에 나타나 절한다. 몹시 반가웠다. 제 혼자 뒤떨어질 때 고개 위에서 통곡하자 부사와 서장관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겨 말을 멈추고 주방에게,

 

혹시 짐이 가벼운 수레가 있어 저를 태울 수 있겠느냐?”

하고 물었으나 하인들이,

 

없소이다.”

하고 대답하므로, 민망하게 여기고 지나갔을 뿐이더니 또 제독이 이르매 더욱 서럽게 울부짖으니, 제독이 말에서 내려 위로하고 그 곳에 머물러 있다가 지나가는 수레를 세내어 타고 오게 하였다. 어제는 입맛이 없어 먹지 못하니 제독이 친히 먹기를 권하고 오늘은 제독이 자기가 그 수레를 타고 자기가 탔던 나귀를 창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에 따라 올 수 있었다. 그 나귀가 매우 날쌔어 다만 귓가에 바람 소리가 일 뿐이었다 하기에 나는,

 

그 나귀는 어디다 두었느냐?”

하고 물었더니,

 

제독이 저더러 이르기를, ‘네 먼저 타고 가서 공자(公子)를 따르되 만일 길에서 내리고 싶거든 지나가는 수레 뒤에 나귀를 매어 두라. 그러면 내가 뒤에 가면서 찾을 테니 염려 말라.’ 하더이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50리를 달려 고개 위에서 수레 수십 바리가 지나가기에 나귀에서 내려 맨 나중 수레 뒤에 매어 주었습니다. 차부가 묻기에 멀리 고개 남쪽 지나 온 길을 가리켜 보였더니 차부[車人]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이다.”

한다. 제독의 마음씨가 매우 아름다우니 고마운 일이다. 그의 벼슬은 회동사역관 예부정찬사낭중 홍려시소경(會同四譯官禮部精饌司郞中鴻臚寺少卿)이요, 그 직품은 정사품(正四品) 중헌대부(中憲大夫)였으며, 그 나이는 이미 60에 가까웠다. 그러나 외국의 한 마부를 위하여 이토록 극진한 마음씨를 보임은 비록 우리 일행을 보호함이 직책이라 하겠지만, 그 처신의 간략함과 직무에 충실함이 가히 대국의 풍도를 엿볼 수 있겠다. 창대의 발병이 조금 나아서 견마를 잡고 갈 수 있게 되었음은,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哈喇河)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 가는 수많은 수레가 길을 재촉하면서 달린다. 나는 서장관과 고삐를 나란히 하며 가는데, 산골짝 속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두세 마디 들려 온다. 그 많은 수레가 모두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싶다. 아아, 굉장하구나. 따로 만방진공기(萬方進貢記)〉 〈산장잡기 속에 들어 있다. ‘수택본에는 없다. 를 썼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온 나흘 밤낮을 눈을 붙이지 못하여 하인들이 가다가 발길을 멈추면 모두 서서 조는 것이었다. 나 역시 졸음을 이길 수 없어, 눈시울이 구름장처럼 무겁고 하품이 조수 밀리듯 한다. 혹시 눈을 뻔히 뜨고 물건을 보나, 벌써 이상한 꿈에 잠기고, 혹은 남더러 말에서 떨어질라 일깨워 주면서도, 내 자신은 안장에서 기울어지고는 한다. 포근포근 잠이 엉기고 아롱아롱 꿈이 짙을 때는, 지극한 낙이 그 사이에 스며 있는 듯도 하였다. 그리하여 때로는 온 몸이 날아갈 듯하고 두뇌가 맑아져서, 그 견줄 곳 없는 묘한 경지야말로 취리(醉裏)의 건곤이요, 몽중(夢中)의 산하(山河)였다. 또 때는 가을 매미 소리가 가느다란 실오리를 뽑고, 태공에 흩어진 꽃봉오리가 어지러이 떨어지며, 그 아늑한 마음은 도교(道敎)의 내관(內觀 묵상(黙想))과 같고, 놀라서 깰 때는 선가(禪家)의 돈오(頓悟)와 다름없었다. 팔십일난(八十一難)이 삽시간에 걷히고, 사백사병(四百四病)이 잠깐에 지나간다. 이런 때엔, 비록 추녀가 몇 자가 넘는 화려한 고대광실에 석 자를 괸 큰 상을 받고 예쁜 계집 수백 명이 모시고 있는 즐거움이나,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아니한 구들목에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베개를 베고,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깊지도 얕지도 않은 술잔을 받으면서, 장주(莊周)도 호접(蝴蝶)도 아닌 꿈나라로 노니는 그 재미와는 결코 바꾸지 않으리라. 길가에 돌을 가리키며,

 

, 장차 우리 연암(燕巖) 산중에 돌아가면, 일천하고도 하루를 더 자서 옛 희이 선생(希夷先生)보다 하루를 이길 것이고 코 고는 소리가 우레 같아 천하의 영웅으로 하여금 젓가락을 놓치고, 미인으로 하여금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이 돌과 같으리라.”

하다가 한번 꾸벅하면서 깨니, 이 또한 꿈이었다. 그리고 창대도 가면서 이야기하기에, 나 역시 대꾸하다가 가만히 살펴보니, 헛소리를 자주한다. 대개 제가 여러 날 동안 주린 끝에 다시 크게 추위에 떨다가 학질에 걸린 듯 인사를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때에 밤은 이미 이경(二更) 즈음이다. 마침 수역과 동행하였는데, 그의 마부도 역시 벌벌 떨고 크게 앓으므로 함께 말에서 내렸다. 다행히 앞 참() 5리밖에 남지 않았다 하므로, 병든 두 마부를 각기 말에 싣고, 흰 담요를 꺼내어 창대의 온몸을 둘러싸고 띠로 꼭꼭 묶어서 수역의 마두더러 부축하여 먼저 가게 하고, 수역과 더불어 걸어서 참에 이르니, 밤이 이미 깊었다. 이곳에는 행궁이 있고 여염과 시전이 극히 번화하였으나, 그 참의 이름은 잊었다. 아마 화유구(樺楡溝)인 듯싶다. 객점에 이르니 곧 밥을 내어 왔으나, 심신이 피로하여 수저가 천 근이나 되는 듯 무겁고, 혀는 백 근인 양 움직이기조차 거북하다. 상에 가득한 소채나 적구이가 모두 잠 아닌 것이 없을뿐더러, 촛불마저 무지개처럼 뻗쳤고 광채가 사방으로 퍼지곤 한다. 이에 청심환 한 개로써 소주와 바꾸어 마시니, 술맛이 또한 좋아서, 마시자 곧 훈훈히 취하여 퇴연(頹然)히 베개를 이끌어 잠들었다.

 

 

[D-001]팔십일난(八十一難) : 중생(衆生)이 도를 통하기에 여든한 가지의 장애가 있다. 불가에서 나온 말.

[D-002]사백사병(四百四病) : ()()()()이 각기 일백여덟 가지의 병이 있다 한다. 유마경(維摩經)에서 나온 말.

[D-003]장주(莊周) …… 노니는 : 남화경(南華經)에서 나온 몇 구절.

[D-004]희이 선생(希夷先生) : 송의 은사 진단(陳摶). 희이는 호요, 자는 도남(圖南). 그는 한 번 잠들면 천 날씩 오래 잤다 한다.

[D-005]천하의 …… 놓치고 :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와 함께 영웅을 논하다가, 조조가 자기를 영웅이라 지적할 때 유비는 수저를 떨어뜨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9일 을묘(乙卯)

 

 

개다.

아침나절 사시(巳時)에 열하에 들어 태학(太學)에 머물렀다. 그 날 닭울 녘에 먼저 떠나서 수역과 동행하였다. 길에서 난하(灤河)가 건너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수역이 오는 사람마다 붙들고 난하의 소식을 물었다. 그들은 모두,

 

예니레 기다려야 한번 얻어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한다. 강가에 이르니, 거마가 구름처럼 모인 것이 무려 천이며 만인데, 물은 넓고 거세어서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흘러 행궁 앞이 제일 물살이 세다. 난하는 독석구(獨石口)에서 나와 옛 흥주(興州)의 지경을 거쳐 북예(北隸)에 들어가는 것이다. 수경(水經) ()에 이르기를,

 

유수(濡水)는 어융진(禦戎鎭)에 나와서 사야(沙野)를 거치며 굽이굽이 돌아서 1 5백 리쯤 흘러 장성에 든다.”

하였다. 겨우 작은 배 너덧 척이 있었다. 사람은 많고 배는 작으므로 건너기 어려운 것이다. 말 탄 사람들은 모두 옅은 물결을 골라서 건너지만, 수레는 그리할 수 없었다. 석갑(石匣)에서 가마 탄 자 하나를 만났다. 따르는 사람이 10여 기요, 네 사람이 어깨에 가마채를 메고 5리에 한 번씩 교대하는데, 말 탄 사람이 내려서 서로 바꾸어 메곤 하였다.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데, 병부 시랑(兵部侍郞)의 행차라 한다. 가마는 녹색 우단(羽緞)으로 가리고 삼면에 유리를 붙여서 창을 내었으나, 탄 사람은 늘 깊이 들어앉았으므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모자를 벗어 창 한 구석에 걸어 놓고 종일토록 책을 읽고 있다. 어제는 종자(從者)를 부르니까 종자가 갑() 속에서 책 하나를 꺼내어 바쳤는데, 그 제목은 오자연원록(五子淵源錄)이었다. 창 안에서 손을 내밀어 이를 받는데, 그 팔뚝이나 손가락이 옥같이 희었다. 또 창 안에서 이아익(爾雅翼 송 나안(羅顔)의 저) 한 권을 내준다. 그 목소리나 손길이 모두 여인 같다. 이곳에 이르자 가마에서 내리고, 가마 안의 책을 꺼내어 종자들이 나누어 품 속에 간직하며, 그 사람은 다시 말을 타는데, 참으로 미남자였다. 미목이 시원하고 몇 줄기 흰 윗수염이 듬성듬성하다. 가마는 휘장을 걷고, 종자를 태웠던 말들은 모두 물에 둥둥 떠서 건넌다. 모자에 푸른 새깃을 꽂은 사람이 언덕 위에 서서 채찍을 들어 지휘하여 먼저 우리 일행을 건너게 하는데, 비록 짐짝에다 진공(進貢)’이니 상용(上用 황제의 어용(御用))’이니 하는 글자를 쓴 기()를 꽂은 것이라도 먼저 건너지 못하게 하였다. 혹시 먼저 뛰어오른 자의 차림새가 관원인 듯하여도, 반드시 채찍으로 몰아 내어 버린다. 이는 곧 행재 낭중(行在郞中)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이 건너는 일을 간검하는 자이다. 다만 쌍교(雙橋) 넷이 있어 그 크기가 집채만한데, 바로 배 안으로 메고 들어가는 것이 마치 무거운 산을 들어서 알[]을 누르는 듯싶다. 그러하므로, 낭중들도 채찍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의 날카로운 위세를 피하곤 한다. 그 가마꾼들의 눈에는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물도 없을뿐더러, 사람도 뜨이지 아니하고 외국 사람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다만 그가 멘 가마만이 있을 뿐이니, 알지 못하겠노라. 그 가운데 어떠한 보물이 들었건대, 가마꾼이 그처럼 세를 쓸까.

강을 건너 10여 리를 가니, 환관(宦官) 셋이 와서 박보수(朴寶樹)와 더불어 말머리를 대고 몇 마디 수작하고는, 곧 말을 돌려 가버린다. 또 한 내시가 오림포(烏林哺)와 나란히 타고 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림포가 가끔 낯빛을 변하고 놀라워하는 기색을 보일 때, 박보수와 서종현(徐宗顯)이 말을 달려서 옆을 가면 오림포가 손짓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아, 무슨 비밀한 이야기인 듯싶다. 그 내시 역시 말을 달려 가 버린다.

한 산모롱이를 지나치니, 언덕 위에 돌을 깎아 세운 듯한 봉우리가 탑처럼 마주 서 있어서, 하늘의 기교한 솜씨를 보이는 듯 높이가 백여 길이나 된다. 그리하여 쌍탑산(雙塔山)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 연달아 내시가 와서, 사행이 지금 어디까지 왔는지 알아보고 간다. 예부에서 태학에 들라는 뜻을 먼저 알리러 왔다.

며칠 동안 산골 길을 다니다가 열하에 들어가니, 궁궐이 장려하고 좌우에 시전이 10리에 뻗쳐 실로 새북(塞北)의 한 큰 도회이다. 바로 서쪽에 봉추산(捧捶山)의 한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마치 다듬잇돌과 방망이 같은 것이 높이 백여 길이요, 꼿꼿이 하늘에 솟아서 석양이 옆으로 비치어 찬란한 금빛을 뿜고 있다. 강희 황제가 이를 경추산(磬捶山)’이라 고쳐 이름지었다 한다. 열하성(熱河城)은 높이 세 길이 넘고, 둘레가 30리이다. 강희 52(1713)에 돌을 섞어서 얼음 무늬로 쌓아올리니, 이는 이른바 가요문(哥窰紋)이었다. 인가의 담도 모두 이 법으로 하였다. 성 위에 비록 방첩(防堞)을 쌓긴 하였으나 여느 담과 다름이 없으며 지나온 여러 고을의 성곽(城郭)만도 오히려 못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삼십육경(三十六景)이 있다 한다. 한 나라의 옛 요양(要陽)백단(白檀)활염(滑鹽) 세 고을의 땅이니, 한 경제(漢景帝)가 이광(李廣)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기를,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달려 백단에서 깃발을 멈추라.”

한 것이 곧 이곳을 이름이다. 거란의 아보기(阿保機)가 활염(滑鹽)의 허물어진 성을 고쳐 쌓았는데, 세속 사람들은 이를 대흥주(大興州)’라 일렀고, 명 나라 상우춘(常遇春)이 먀속(乜速 ()의 명장)을 전녕(全寧)으로 몰아서 깨뜨리고 대흥주로 나아가 머물렀다 함은 곧 이곳이다.

지난해에 태학(太學)을 새로 지었는데, 그 제도는 연경과 다름없었다. 대성전(大成殿)과 대성문(大成門)이 모두 겹처마에 누런 유리기와를 이었고, 명륜당(明倫堂)은 대성전의 오른편 담 밖에 있으며, () 앞 행각(行閣)에는 일수재(日修齋)시습재(時習齋) 등의 편액이 붙어 있고, 그 오른편에는 진덕재(進德齋)수업재(修業齋) 등이 있었다. 뒤에는 벽돌로 쌓은 대청이 있고, 그 좌우에 작은 재실이 있어서, 그 오른편엔 정사가 들고 왼편엔 부사가 들었다. 그리고 서장관은 행각 별재(別齋)에 들고 비장과 역관은 한 재실에 모두 들었으며 두 주방은 진덕재에 나누어 들었다. 대성전 뒤와 좌우에 둘려 있는 별당(別堂)별재 들은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울 만큼 많고도 또 모두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우리 주방으로 인해 많이 그슬리고 더럽혀졌으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로 승덕태학기(承德太學記)를 썼다.

 

 

[D-001]삼십육경(三十六景) : 피서록(避暑錄) 첫머리에 상세히 적혀 있다.

[D-002]이광(李廣) : 북방 흉노족과 70여 회를 싸워서 이긴 한의 명장.

[D-003]아보기(阿保機) : 요 태조(遼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D-004]상우춘(常遇春) : 명 태조(明太祖) 때의 명상(名相).

[D-005]승덕태학기(承德太學記) : 일문(逸文)이 되었다. ‘박영철본 권지 십오(卷之 十五) 끝 보유(補遺) 중에도 열하태학기(熱河太學記)라는 편목(篇目)이 남아 있으나, 역시 일문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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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관내정사(關內程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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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관내정사(關內程史) 박지원(朴趾源, 17371805)

 

 

관내정사(關內程史)

 

관내정사(關內程史) 7 24일 경자에 시작하여 8 4일 경술에 그쳤다. 모두 11일 동안이다. 산해관(山海關)으로부터 연경까지 이르기가 모두 6 40리다.

 

1. 가을 7 24일 경자(庚子)

2. 25일 신축(辛丑)

3. 열상화보(冽上畵譜)

4. 26일 임인(壬寅)

5. 이제묘기(夷齊廟記)

6.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7. 석호석기(射虎石記)

8. 27일 계묘(癸卯)

9. 28일 갑진(甲辰)

10. 호질(虎叱)

11. 호질후지(虎叱後識)

12. 29일 을사(乙巳)

13. 30일 병오(丙午)

14. 8 1일 정미(丁未)

15. 동악묘기(東嶽廟記)

16. 2일 무신(戊申)

17. 3일 기유(己酉)

18. 4일 경술(庚戌)

 

 

 

가을 7 24일 경자(庚子)

 

 

개다.

홍화포에서 떠나 범가장(范家庄)까지 2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범가장에서 양하제(楊河堤)까지 3, 대리영(大理營) 7, 왕가령(王家嶺) 3, 봉황점(鳳凰店) 2, 망해점(望海店) 8, 심하역(深河驛) 5, 고포대(高舖臺) 8, 왕가포(王家舖) 2, 마붕포(馬棚舖) 7, 유관(楡關) 3, 모두 48리이다. 이날에는 68리를 걸었다. 유관(楡關)에서 묵다. 유관은 혹은 유관(渝關)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임유현(臨渝縣)이다.

관내(關內)의 풍기는 관동에 비하여 아주 달라서 산천이 밝고 아름다우며 굽이굽이 그림 같다. 홍화포로부터 비로소 돈대가 있어 5리에 하나, 10리에 하나씩인데, 그 제도는 네모지고 바르며, 높이는 다섯 길 그 위에 집 3칸을 짓고, 곁에는 세 길 되는 깃대를 세웠으며, 돈대 밑에 다시 집 5칸을 지었다. 담 위에는 활집살통과 표창(熛鎗)화포(火砲) 등을 그려 붙였고, 집 앞에는 도()()()()을 늘어 꽂았으며, 무릇 봉화 드는 것과 망보는 일들에 관한 여러 가지 조목을 써서 벽에 둘러 붙였다.

 

 

[C-001]가을 : ‘수택본에는 이 위에 성상 4년 경자 청 건륭 45이라는 원주(原註)가 있으나, 여기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5일 신축(辛丑)

 

 

개다.

유관에서 떠나 영가장(營家庄)까지 3, 상백석포(上白石舖) 2, 하백석포(下白石舖) 3, 오가장(吳家庄) 3, 무령현(撫寧縣) 9, 양장하(羊腸河) 2, 오리포(午哩舖) 3, 노가장(蘆家庄) 2, 시리포(時哩舖) 3, 노봉구(蘆峯口) 5, 다붕암(茶棚菴) 5, 음마하(飮馬河) 3, 배음보(背陰堡) 3, 모두 4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배음보에서 쌍망점(雙望店)까지 8, 요참(要站) 5, 달자영(㺚子營) 3, 부락령(部落嶺) 6, 노룡새(盧龍塞) 3, 여조(驢槽) 13, 누택원(漏澤園) 3, 영평부(永平府) 2, 모두 43리이다. 이날 89리를 걸었다. 영평부에서 잤다.

무령현을 지나자 산천이 더욱 명랑(明朗)한 기운을 띠고, 성안 거리에는 집집마다 금편(金篇)옥음(玉音)이요, 패루가 곳곳이 휘황찬란하다. 길 오른편 한 문 앞에 부사와 서장관의 하인들이 가마를 멎고 있다. 이는 곧 서 진사(徐進士) 학년(鶴年)의 집이다. 부사와 서장관이 지금 이 집에서 구경을 하고 있다 하기에 나도 말에서 내려 들어가니, 그 집이 사치스럽고 그릇들의 진기함이 과연 전날 듣던 바와 다름없다. 학년은 십여 년 전에 죽고, 두 아들이 있어서 맏은 조분(苕芬)이요, 둘째는 조신(苕信)인데, 조신은 제법 문필(文筆)에 능하여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꾸미는 데 서사원(書寫員)으로 뽑혀서 방금 북경에 가 있고, 조분만이 집에 있긴 하나 문필이 매우 짧다. 당에 가득히 과친왕(果親王 청 세종의 일곱째 아들)아극돈(阿克敦 청 고종 때의 명신. 문장가)우민중(于敏中 청 고종 때의 학자. 정치가)악이태(鄂爾泰 청 태종 때의 명신)황삼자(皇三子 이름은 홍시(弘時))황오자(皇五子 이름은 홍서(弘書). 화석공친왕(和碩恭親王)) 등의 시()를 새겨 걸었다. 그들은 모두 흥경 제관(祭官)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묵고 시를 남기고 간 것이다. 우민중과 아극돈은 다 해내(海內)의 명필이라 일컫건만 과친왕(果親王)에 비해 여간 손색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침실 문설주 위에 백하(白下) 윤 판서(尹判書) ()의 칠언 절구 한 수를 새겨 걸었고, 문 밖 설주 위에는 조 참판(曺叅判) 명채(命采)가 윤()의 시를 차운(次韻)한 것을 새겨 걸었다. 윤공(尹公)은 우리나라의 명필이라, 한 점 한 획이 옛법 아닌 것이 없어, 그 천재의 화려하고 고운 품이 마치 가는 구름과 흐르는 물 같고, 먹빛이 짙고 연함과 획의 살찌고 여윈 것이 알맞게 섞이었으나, 이제 그들의 글씨에 비해서는 손색이 없지 않음은 어인 까닭일까. 대개 우리나라에서 글씨를 익힘에는 옛날 사람의 참된 필적을 보지 못하고 한평생 본뜬 것이 기껏해야 금석문자(金石文字)에 지나지 않으니, ‘금석이란 다만 고인의 글씨에 대하여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뿐, 그지없이 오묘(奧妙)한 그 붓 놀림의 신운(神韻)은 벌써 선천(先天)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본 글씨의 체세(體勢)에는 방불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뼈대가 뻣뻣해져서 전혀 필의(筆意)가 엿보이지 않으며, 그 먹빛이 짙을 때에는 묵저(墨猪)처럼 되고, 마를 때는 고등(枯藤)처럼 되니, 이는 다름 아니라 금석에 새긴 획이 습성에 젖어 있고 또 종이와 붓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서 옛날부터 고려의 백추지(白硾紙 백지를 다듬질한 것)낭모필(狼毛筆)을 일컬었다 하나, 이는 특히 외국의 진기한 물건이라 해서 그런 것이지 실지로 쓰고 그리기에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종이도 먹빛을 잘 받고 붓길이 순순히 풀려남을 귀히 여기는 것이요, 반드시 단단하고 질겨서 찢어지지 않은 것만이 덕()이 됨은 아니리라. 서위(徐渭)가 말하기를,

 

고려 종이는 그림에는 맞지 않고 다만 돈[]처럼 두꺼운 게 좀 낫다.”

하였으니, 이와 같이 별로 좋지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종이는 애초에 다듬지 않으면 결이 거칠어서 쓰기 힘들고, 다듬이질을 지나치게 하면 지면이 너무 빳빳해지므로 미끄러워서 붓이 머무르지 않고 딱딱하여서 먹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종이가 중국만 못하다 함이요, 붓은 부드럽고 날씬하고 고르고 순하여 팔과 함께 잘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것이요, 뻣뻣하고 강하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은 좋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좋은 붓이라면 반드시 호주(湖州) 것을 말하는데, 이는 오로지 양호(羊毫)를 써서 다른 털을 섞지 아니한다. 양털은 다른 털에 비하여 가장 부드러우므로 부서지지 않고, 종이에 닿으면 먹을 마음대로 놀리는 것이 마치 효자(孝子)가 어버이의 뜻을 말하기 전에 벌써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른바 낭모필(狼毛筆)’이란 더욱 잘못인 것이, 이리가 무슨 짐승인지도 알지 못하고 어찌 그 꼬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곧 족제비의 속명(俗名) ()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광() 자에서 녹() 변을 떼고 또 광() 자에서 엄(广)을 버리면 황() 자가 되므로 이를 황필(黃筆)’이라 한다. 이는 늘 굳세며 억세고 뻣뻣하여 부서질 염려가 있어 마치 동서를 가리지 않고 제멋대로 내닫는 철없는 아이 같다. 그러므로 우리 붓이 중국 것만 못하다 함이다. 종이와 붓이 이러한 데다가 안동(安東)의 마간석(馬肝石) 벼루에 해주(海州)의 후칠(厚漆)먹을 갈아서 왕희지(王羲之) 필진도서(筆陣圖序)를 체첩(體帖)으로 본받으니, 이 아무리 삼절법(三折法 세 번 붓을 꺾는 서법)을 쓰더라도 여윈 뼈대가 메마르다. 아이들의 습자에 쓰는 분판(粉版)이란 또 무엇들인지.

그 후당(後堂)이 매우 조용하고 깨끗하여 세간의 잡된 소리가 들리지 않고 강진향(降眞香 열대산 향나무로 만든 향)으로 만든 와탑(臥榻)이 있는데, 탑 위에 진열해 놓은 것들은 여러 사람이 지닐 수 없는 진기(珍奇)한 물건들이었고, 시렁 위에 놓인 서화(書畵)는 그야말로 금권(錦卷)옥축(玉軸)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었다.

정사부사의 비장들이 함부로 어지러이 뽑아서 무어라 떠들면서 빙 둘러서 펼쳐 보는 품이 마치 조보(朝報)를 펴보듯, 피륙을 말라 재는 듯이 접었다 꺾었다 하고, 함부로 날뛰는 양은 성을 무너뜨리고 전진을 떨어뜨리며, 적장을 베고 적기(敵旗)를 꺾어뜨리는 듯한 기세이다. 더구나 구경할 마음만이 바빠서 그 긴 것을 다 펴 보기 어려운즉,

 

공연히 펴기 시작했네그려.”

하고 도리어 만든 공장(工匠)을 탄하여,

 

이렇게 긴 축()을 무엇에 쓴단 말야. 병풍도 안 되겠고 족자도 못 만들 것을.”

하고 투덜거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나는 그림을 모르네만, 그림이야 주홍빛 나는 까마귀가 가장 좋데그려.”

한다. 그리고 보니 환현(桓玄 ()의 서화 애호가) 같은 사람은 자기 집에 손님이 와도 혹시나 붙여둔 서화를 더럽힐까 하여 기름과자를 대접하지 않았으니, 이야말로 참말 명사(名士)라 아니할 수 없겠다. 서편 벽 밑에서 별안간 군대가 행진하는 듯이 우당탕하는 소리가 나기에 깜짝 놀라서 돌아다 보니 여러 사람이 정()()()() 등의 고동(古董)을 제멋대로 들추는 것이다. 나는 하도 민망하여 바삐 문을 나섰다. 그 아래 윗집이 모두 금자(金字)로 현판을 달았기에, 장복만 데리고 이집저집을 들렀으나 모두 주인이 없었다. 한 집에 이르니, 담 밑에 자죽(紫竹) 수십 대가 자라고 축대 아래에 벽오동(碧梧桐) 한 그루가 서 있으며, 그 서쪽에는 두어 이랑 되는 모난 못이 있되, 흰 돌로 난간을 만들어 못 가를 둘렀다. 못 가운데는 대여섯 자루 연밥이 떠 있고, 난간 가까이 거위 새끼 세 마리가 노닌다. 당 가운데는 주렴을 깊게 드리우고 주렴 속에는 뭇 사람의 지껄이고 웃는 소리가 와아 하고 들린다. 나는 곧 못 가에 이르러 잠깐 난간에 기대어 섰다. 온 당 안이 잠잠하여 쥐죽은 듯하고 주렴 너머로 엿보는 것이 어른거린다. 나는 못 가를 배회하면서 당 안을 향하여 연거푸 기침을 보냈더니, 이윽고 한 동자가 당 뒤를 둘러 나오며 멀찌감치 서서 읍을 하고 소리를 높여,

 

노장(老丈)께서는 무엇하러 여기를 오셨습니까?”

한다. 장복은,

 

너희집 어른이 어디 계시관대 멀리서 오신 손님을 맞이하지 않느냐?”

하니, 동자는,

 

아버지는 아까 일가 어른 이공(李公)과 함께 고려에서 온 양반들의 사관을 찾아 그들의 태의관(太醫官)을 만나러 가셔서 아직껏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하기에, 나는,

 

너희 댁에서 의원을 찾을 때는 필시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게로군. 내가 곧 태의관이고 이미 이곳까지 온 김이니 진찰해 보아도 좋고, 또 진짜 청심환도 있으니 네 곧 가서 너의 아버지를 모셔 오너라.”

하였으나, 동자는 들은 체도 않고 옷을 빌려서 거위새끼를 몰아 새초롱에 넣고, 난간에 세워 둔 낚싯대를 집어서 못 가운데 꺾어진 연잎을 끌어내어 우산처럼 들고 주척대며 가버린다. 주렴 안에는 일여덟 사람이 있는 듯한데, 무어라고 소곤소곤하고는 또 입을 막고 가만히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서성거리다가 몸을 돌이켜 나오는데 장복을 돌아보니 그 귀밑의 사마귀가 요즘 더 커진 듯싶다. 조 주부(趙主簿) 명회(明會)와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면서,

 

무령의 풍속이 좋지 못하군.”

하였더니, 조는,

 

무령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귀찮은 손님으로 친답니다. 서학년은 성품이 본래 손님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처음으로 백하(白下) 윤공(尹公)을 만나 흉금을 터놓고 정성을 다해 대접하며, 그가 간직했던 서화를 내어 보였던 것이, 그 뒤로부터 무령현 서 진사(徐進士)의 이름이 우리나라에 회자하여 해마다 사행(使行)이 반드시 찾아 들른 것이 마침내 준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고을에 서씨집보다 더 나은 집들이 많고 또 손님을 좋아하는 주인도 다 학년만 못지 않으나, 공교로이 윤공이 먼저 학년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가진 것이 우리나라 재상도 당할 수 없음을 보고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기리어서, 그 뒤로부터 역관들이 으레 서씨집으로 찾아 들게 됨은 역시 다시 다른 집을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우리 사행은 반드시 하인 수십 명을 거느리는 까닭에 비록 두어 길 되는 문호(門戶)를 드나들 때에도 반드시 소리를 갖추어 알리고, 또 한 군데 몰리어 당에 오르면 물러나 기다릴 줄 모르는 것은 대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년의 집에서도 그 접대가 차츰 전과 같지 못하던 것이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들이 조선 손님을 아주 귀찮게 여기어서, 우리 사행이 올 무렵이면 좋은 그릇은 갈무리고 너저분한 것들만 벌여 놓아서 겨우 이때까지의 준례를 지킬 뿐이랍니다. 이제 그 옆집에서 피하고 숨은 것도 학년의 집처럼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자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윤공이 돌아온 뒤에 되놈의 새끼에게 재주를 팔았다 하여 탄핵을 입은 것은 대개 이 시()를 지은 까닭이다. 당시 언론(言論)의 지나침이 이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산세는 맑은 기운이 서리었다. 태항산(太行山)이 서쪽으로 쫓아와서 연경(燕京)을 껴안은 듯하고, 의무려산이 동으로 달려서 후진(後鎭)이 되어 용이 나는 듯 봉이 춤추듯이 각산(角山)에 이르러 뭉툭 잘리어 산해관이 되었다. 관에 들어서자 뭇 산들은 더욱 대막(大漠)의 억세고 거친 기세를 벗어나서 남으로 탁트인 국면이 맑고 빼어나며 밝고 부드럽다. 창려(昌黎)에 이르자 모든 바닷가 고을들의 산기는 더욱 아름다웠다.

우공(禹貢)의 갈석(碣石)이 창려현(昌黎縣) 서쪽 20리 되는 가까운 곳에 있으니, 조조(曹操 위 무제(魏武帝)) (),

 

동으로 갈석에 다다라 / 東臨碣石

아득한 저 바다 구경코저 / 以觀滄海

라 함은 곧 이를 말함이다. 이 고을에는 한 문공(韓文公)과 한상(韓湘)의 사당이 있다. 당서(唐書) 본전(本傳 한유전(韓愈傳))에는 문공을 등주(鄧州) 남양인(南陽人)이라 하였고, 광여기(廣輿記 () 육응양(陸應陽)의 저)에는 곧 창려인(昌黎人)이라 하였으며, ()의 원풍(元豊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 문공을 창려백(昌黎伯)으로 봉하였고, 원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곳에다 사당을 세워서 지금도 문공의 소상(塑像)이 있다 한다. 내 평생에 문공을 몽상(夢想) 중에 그리워했으므로 여러 사람더러 함께 가 보자고 하였으나 응하는 이가 없으니, 이는 20리나 길을 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가기도 어려우니 한스러운 일이다. 지나는 길에 동악묘(東嶽廟)에 들렀다. 뜰에 비석 다섯이 있고 전각 위에는 금자(金字) 동악대제(東嶽大帝)’라 써 붙였고, 그 가운데에는 금신(金神) 둘을 앉혔는데, 모두 단정히 손을 모으고 홀()을 잡았다. 후전(後殿) 제도도 전전과 같은데, 여상(女像) 셋을 앉혔고 이름을 낭랑묘(娘娘廟)’라 한다. 머리에는 모두 면류관을 썼다.

영평부(永平府)에 이르니, 성 밖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성을 둘러싸서 그 지형이 평양과 흡사하나 시원하게 툭 트인 것은 평양보다 더 낫다. 다만 대동강과 같이 맑은 물이 없을 뿐이다. 세인들의 전하는 말에,

 

김 학사(金學士) 황원(黃元 고려 예종 때의 문장가)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서,

긴 성 저 한 편에는 용용히 흐르는 강물이요 / 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이로다 / 大野東頭點點山

의 두 구()를 읊고는 아무리 끙끙거려도 시상(詩想)이 메말라서 그 다음을 잇지 못한 채 통곡(痛哭)하고 누를 내려오고 말았다.”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논평하기를,

 

평양의 아름다운 경치가 이 두 글귀에 다 표현되었으므로 그 뒤 천 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을 지냈건만 다시 한 구라도 덧붙이는 이가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늘 이것이 좋은 글귀가 아니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용용(溶溶)’은 대강(大江)의 형세를 표현함에는 부족하고, ‘동두(東頭)’점점(點點)’의 산이란 그 거리가 40리에 불과한데 어찌 대야(大野)라 이를 수 있으리오. 이제 이 글귀를 연광정(練光亭)의 주련(柱聯)으로 붙였으나, 만일 중국의 사신이 이 정자에 올라가서 읽어 본다면 반드시 대야의 글자를 웃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영평성루(永平城樓)는 그야말로,

 

넓은 벌 동쪽 머리엔 점점이 찍힌 뫼이로다

라고 할 만하다. 혹은 이르기를,

 

영평도 역시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땅이다.”

하나, 이는 잘못이다. 영평은 곧 한()의 우북평(右北平)이요, ()의 노룡새(盧龍塞)이다. 옛날에는 아주 궁벽한 땅이었던 것이 요()() 때로부터 북경에 가까이 있어서 거리와 점포의 번영함이 다른 곳보다 더하고, 진사(進士)의 패액(牌額)이 무령에 비기어 훨씬 많다. 영평부 앞 원문(轅門 병영 앞에 세운 문) 고지우북평(古之右北平)’이라 써 붙였다.

어두워진 뒤에 정 진사(鄭進士)와 함께 조용히 거닐다가 우연히 한 집에 드니, 마침 등불을 켜놓고 고려진공도(高麗進貢圖 조선 사행을 그린 그림)를 새기는 중이다. 지나온 길의 바람벽에 흔히 이 그림을 붙인 것을 보았는데, 모두 너절한 그림에다 추하게 찍어 내어 괴상스럽고 가소롭다. 그 그림에 홍포(紅袍)를 떨쳐 입은 것은 서장관이요, 몇십 년 전에는 당하관(堂下官)이 홍포를 입더니, 이제는 푸른 것으로 변했다. 흑립(黑笠)을 쓴 건 역관이요, 얼굴이 흡사 중과 같으면서 입에 담뱃대를 문 것은 전배(前排)의 비장이요, 곱슬수염에 고리눈은 군뢰(軍牢)이다. 이제 여기서 새기는 것도 추악하기 그지없어서 얼굴이 모두 원숭이처럼 되었다. () 가운데에 세 사람이 있으나 더불어 이야기할 만한 자가 못 된다. 탁자 위에 돌병풍[硏屛]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두 자 남짓, 너비는 한 자쯤 되는 화반석(花斑石)이다. 강산(江山)수목(樹木)누대(樓臺)인물(人物) 등을 그려 새겼으되, 모두 돌 무늬를 따라 천연스럽게 빛깔을 내어 그 미묘한 품이 신경(神境)에 들 지경이다. 강진향(降眞香)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세웠다.

이때 소주(蘇州) 사람 호응권(胡應權)이란 자가 화첩(畵帖) 하나를 가지고 왔는데, 겉장에는 어지러운 초서(草書)를 썼으되 먹똥이 거듭 앉아 비눌지고 더할나위 없이 해져서, 한 푼어치도 못 되어 보이건만 호생(胡生)의 거조를 보니 마치 세상에 다시 없는 보배인 듯 사뭇 조심조심하여 이를 받들고 꿇어앉아서 여닫는 데도 오직 깍듯이 한다. 정군(鄭君)이 침침한 눈으로 두 손에 이를 움켜 쥐고 책장을 풍우처럼 재빨리 넘기니, 호생이 얼굴을 찡그리며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다. 정군이 다 보고는 획 집어 던지면서,

 

겸재(謙齋)나 현재(玄齋)가 모두 되놈의 호이구먼.”

하기에, 나는 웃으면서,

 

아니 보아도 잘 알 일이지.”

하고, 호생더러,

 

당신은 이걸 어디서 구하셨소.”

하고 물으니, 그는,

 

아까 초저녁 때 귀국 김 상공(金相公)이 우리 점포에 오셔서 팔고 갔소. 김 상공은 믿음직한 사람이옵고 또 나와는 정분이 자별하여 친형제나 다름 없습니다. 문은(紋銀 품질이 우수한 은) 3 5푼으로 샀으니 만일 장황(裝潢)을 고쳐 놓으면 7냥은 실히 가리다. 다만 그린 이의 관지(款識)가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선생께서 이를 일일이 고증해서 적어 주시옵소서.”

하고는, 이내 품 속에서 붉은 주사 한 홀()을 꺼내어 패물로 주며, 화자(畵者)의 소전(小傳)을 간곡히 부탁한다. 주인도 주과를 내어 왔다. 대개 우리나라의 서화 권 중에는 연호(年號)도 없고 이름을 적기도 꺼리며, 시축(詩軸)의 끝에도 흔히들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하였을 뿐 어느 때 어느 곳 아무 성 어떠한 사람의 솜씨인지 알 길이 없다. 이제 이 책 가운데도 간단한 두 글자씩 된 별호(別號)가 적혀 있기는 하나 분명하지 않아서 누가 누군지를 분간할 수 없으므로, 정군이 겸재현재를 되놈이라 한 것도 괴이한 일은 아니다. 정군은 한어(漢語)가 서투른데다 또 이가 성기어서 달걀 볶음을 매우 좋아하므로, 책문에 들어온 뒤로 늘 하는 한어라고는 다만 초란(炒卵)’뿐인데, 그나마 혹시 말할 때 잘못 비어질까, 듣는 사람이 잘못 들을까 두려워하여,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면 문득 초란 하고 불러 보아서 그 혀끝이 돌아가는가를 잘 가늠하므로, () 초란공(炒卵公)’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 광대놀음에 탈쓴 것을 초란(俏亂)’이라 부르는데, 중국말로 계란볶음이라는 초란과 발음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주인이 곧 가서 한 쟁반을 지져 가지고 왔다.

그러나 행적이 마치 음식을 빼앗아 먹은 것같이 되었으므로 한바탕 웃고 나서 주인에게 사연을 말하고 값을 치르려 하니, 주인이 도리어 몹시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여기는 음식점이 아니어요.”

하고 자못 노여워하는 기색까지 있기에 나는 곧 대강 그림 옆에 적힌 별호(別號)를 상고하여 그들의 성명을 적어서 사례하였다.

 

 

[D-001]사고전서(四庫全書) : 청의 건륭 37년에 시작해서 천하의 서적을 모아, 16 8천여 책을 경()()()()의 네 종류로 나눠 정리한 것이다.

[D-002]백하(白下) …… () : 조선 숙종(肅宗) 때의 서예가. 백하는 호요, 순은 이름. 자는 중화.

[D-003]조 참판(曺叅判) 명채(命采) : 조선 영조(英祖) 때 사람. 명채는 이름.

[D-004]서위(徐渭) : ()의 저명한 예술가. 시문과 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자는 문장(文長).

[D-005]마간석(馬肝石) : 경상북도 안동 독천(禿川)이라는 냇물 속에서 나는 유명한 벼룻돌.

[D-006]왕희지(王羲之) 필진도서(筆陣圖序) : 왕희지는 진()의 서예가. 중국의 대표적 명필. 희지는 이름, 자는 일소(逸少). 필진도서는 왕희지가 짓고 쓴 유명한 필첩.

[D-007]분판(粉版) : 종이가 귀하므로, 널판에다 분을 칠하고 기름을 먹여서 종이로 대용하였다.

[D-008]한 문공(韓文公) : ()의 저명한 문학가 한유(韓愈). 문공은 시호. 자는 퇴지(退之).

[D-009]한상(韓湘) : 한유의 조카. 그의 자는 청부(淸夫).

[D-010]겸재(謙齋) : 조선 숙종 때 저명한 화원(畫員) 정선(鄭歚)의 호. 자는 원백(元伯).

[D-011]현재(玄齋) : 겸재의 제자인 화원 심사정(沈師正)의 호. 자는 이숙(頤叔).

[D-012]김 상공(金相公) : ‘상공은 애초에는 정승이라는 의미지마는, 여기서는 상인들끼리 서로 높여서 하는 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열상화보(冽上畵譜)

 

 

이조화명도(二鳥和鳴圖), 충암(冲菴 ).

김정(金淨)의 자는 원충(元冲)이요, () 가정(嘉靖)때 사람이다.

한림와우도(寒林臥牛圖)

김식(金埴).

석상분향도(石上焚香圖)

이경윤(李慶胤)은 학림정(鶴林正)이다.

녹죽도(綠竹圖), 탄은(灘隱 ).

이정(李霆)의 자는 중섭(仲燮)이요, 석양정(石陽正)이니, 익주군(益州君)의 지자(枝子)이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노안도(蘆雁圖)

이징(李澄)의 자는 자함(子涵)이요, 호는 허주재(虛舟齋), 학림정(鶴林正)의 아들이다.

노선결기도(老仙結綦圖), 연담(蓮潭 ).

김명국(金鳴國)이니, () 천계(天啓) 연간 사람이다.

연강효천도(煙江曉天圖)

임지사자도(臨紙寫字圖), 공재(恭齋 ).

윤두서(尹斗緖)의 자는 효언(孝彦)이니, 강희(康熙) 연간 사람이다.

춘산등림도(春山登臨圖), 겸재(謙齋 ).

정선(鄭歚)의 자는 원백(元伯)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나이 80이 넘어서도 겹돋보기 안경을 끼고 촛불 아래에서 가는 그림을 그려도 털끝만큼도 그릇됨이 없었다.

산수도(山水圖)

네 폭인데, 겸재.

사시도(四時圖)

여덟 폭인데, 겸재.

대은암도(大隱巖圖)

겸재. 이 위의 것은 모두 정선(鄭歚)’원백(元伯)’이라는 소인(小印)이 있다.

부장임수도(扶杖臨水圖), 종보(宗甫).

조영석(趙榮祏)의 자는 종보요, 호는 관아재(觀我齋),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도두환주도(渡頭喚舟圖), 진재(眞宰 ).

김윤겸(金允謙)의 자는 극양(克讓)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금강도(金剛圖), 현재(玄齋 ).

심사정(沈師正)의 자는 이숙(頤叔)이니, 강희건륭 연간 사람이다.

초충화조도(草蟲花鳥圖)

여덟 폭인데, 현재. ‘심사정사인(沈師正私印)’ 현재(玄齋)’라는 소인이 있다.

심수노옥도(深樹老屋圖),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의 자는 경백(敬伯)이니, 공재(恭齋)의 아들이다.

백마도(白馬圖)

군마도(羣馬圖)

팔준도(八駿圖)

춘지세마도(春池洗馬圖)

쇄마도(刷馬圖)

이상은 모두 낙서의 윤덕희사인(尹德熙私印)’ 낙서(駱西)’라는 소인이 있다.

무중수죽도(霧中睡竹圖), 수운(峀雲 ).

유덕장(柳德章). ‘수운사인(峀雲私印)’이 있다.

설죽도(雪竹圖)

수운(峀雲)’이란 두 글자와 수운(峀雲)’의 인이 있다.

검선도(劒仙圖), 인상(麟祥).

이인상(李麟祥)의 자는 원령(元靈)이요, 호는 능호관(凌壺觀)이니, ‘이인상(李麟祥)’의 인이 있다.

송석도(松石圖), 원령.

인상(麟祥)’이란 인과 기미삼월삼일(己未三月三日)’이란 소지(小識)가 있다.

난죽도(蘭竹圖), 표암(豹菴 ).

강세황(姜世晃)의 자는 광지(光之), ‘표암광지(豹菴光之)’의 인이 있다.

묵죽도(墨竹圖)

위와 같다.

추강만범도(秋江晩泛圖), 연객(烟客).

허필(許佖)의 자는 여정(汝正)이니, ‘연객(烟客)’이라는 소인이 있다.

 

[D-001]김정 …… 사람이다 : 이와 같은, 연암의 적은 그림에 대한 모든 해설은, ‘박영철본에는 소주(小註)로 되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별행(別行) 대자(大字)로 하였다. 다음의 것도 모두 이에 따랐다.

[D-002]김식(金埴) : 조선 선조(宣祖) 때 화가. 자는 중후(仲厚), 또는 치온(致溫)이요, 호는 퇴촌.

[D-003]이경윤(李慶胤) : 조선 인조(仁祖) 때의 종실(宗室). 학림정은 봉호요, 자는 계길(季吉)이며, 호는 낙촌(駱村).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6일 임인(壬寅)

 

 

개다. 오후에 우레 일고 비바람이 몹시 불었으나 곧 멈추었다.

영평부에서 청룡하(靑龍河)까지 1, 남허장(南墟庄) 2, 압자하(鴨子河) 7, 범가점(范家店) 3, 난하(灤河) 2, 이제묘(夷齊廟) 1, 모두 16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묘에서 망부대(望夫臺)까지 5, 안하점(安河店) 8, 적홍포(赤紅舖) 7, 야계타(野雞坨) 5, 사하보(沙河堡) 8, 조장(棗庄) 10, 사하역(沙河驛) 2, 모두 45리이다. 이날 61리를 가서 사하역 성 밖에서 잤다.

이날 아침 일찍 영평부를 떠날 때 새벽 바람이 선선하였다. 성 밖의 강가에 장이 섰는데, 온갖 물건이 거리에 꽉 찼고 수레와 말이 즐비하였다. 장판에 들어가서 능금 두 개를 사노라니 옆에 대상자를 멘 자가 있어서 상자를 여니 수정합(水晶盒) 다섯이 나오고, 합마다 뱀 한 마리씩 들었다. 뱀은 모두 그 합 속에 도사리고 있는데 머리 내민 것이 마치 솥뚜껑에 꼭지 달린 듯이 한복판에 솟아 있고 두 눈이 반들반들하다. 검은 놈이 한 마리, 흰 놈이 하나, 초록색이 둘, 빨간 놈이 하나, 모두가 합 밖에서 환히 들여다 보이긴 하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분간하기 어렵기에 물어보니, 대답이 시원하지 않다. 대개 이를 악창(惡瘡)에 쓰면 기이한 효과가 난다 한다. 또 다람쥐 놀리는 자, 토끼 놀리는 자, 곰 놀리는 자의 여러 가지 놀이가 있는데 모두 비렁뱅이들이다.

곰은 크기가 개만 한데 칼춤도 추고 창춤도 추며, 사람처럼 서서 다니기도 하고, 절도 하며 꿇어앉기도 하며, 머리를 조아리기도 하여 사람이 시키는 대로 온갖 시늉을 다하나, 꼴이 몹시 흉악하고 그 민첩함도 원숭이보다 못하다. 토끼와 다람쥐놀이는 더욱 재롱스럽고 또 사람의 의도를 잘 알아차리긴 하나 길이 바빠서 상세히 구경하지 못하였다.

도사(道士) 둘과 동자 하나가 장판에 비럭질하며 다니는데 운관(雲冠 도사 관의 일종)을 쓰고 하대(霞帶 도사 띠의 일종)를 띠고 눈매가 청수한데, 손으로 영저(鈴杵)를 흔들며 입으론 주문(呪文)을 외고, 그 행동이 괴특하여 사람인가 귀신인가 의심스럽다.

여자 셋이 바야흐로 길차림을 차리고 말을 타고 달린다.

배로 청룡하(靑龍河)와 난하(灤河)를 건넜다. 따로 이제묘기(夷齊廟記)’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고죽성기(孤竹城記)’가 있다.

이제묘에서 먼저 떠나서 야계타(野雞坨)에 거의 다 갔을 무렵에 날씨가 찌는 듯하고 한 점 바람기도 없더니, ()()()()의 여러 사람들과 앞서거니 뒷서거니 이야기하며 가는데, 손등에 갑자기 한 종지 찬물이 떨어지며 마음과 등골이 함께 선듯하기에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아무도 물을 끼얹는 이는 없었다.

다시 주먹 같은 물방울이 떨어지며 창대(昌大)의 모자 챙을 쳐서 그 소리가 탕하고, 또 노군의 갓 위에도 떨어졌다. 그제야 모두들 머리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니, 해 옆에 바둑돌만 한 작은 구름장이 나타나고 은은히 맷돌가는 소리가 나더니, 삽시간에 사면 지평선(地平線)에 각기 자그마한 구름이 일되 마치 까마귀 머리 같고 그 빛은 유난히 독해 보인다. 그리고 해 곁에 검은 구름이 이미 해 둘레의 반쯤을 가렸고, 한 줄기 흰 번갯불이 버드나무 위에 번쩍하더니 이내 해는 구름 속에 가리고 그 속에서 천둥하는 소리가 마치 바둑판을 밀어치는 듯 명주를 찢는 듯하다. 수많은 버들이 다 어둠침침하여 잎마다 번갯불이 번쩍인다.

여럿이 일제히 채찍을 날려 길을 재촉하나 등 뒤에 수많은 수레가 다투어 달리고, 산이 미친 듯 뒤집히는 듯, 성낸 나무가 부르짖는 듯하여 하인들은 손발이 떨리어, 급히 우장을 꺼내려 하나 얼른 부대끈이 풀리지 않는다. 바람천둥번개가 가로 휘몰아쳐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말은 모두 사시나무 떨듯 하고 사람은 숨길이 급하여 할 수 없이 멀머리를 모아서 삥 둘러 섰는데 하인들은 모두 얼굴을 말갈기 밑에 가리고 섰다.

가끔 번갯불에 비치는 데 보니, 노군이 새파랗게 질리어 두 눈을 꼭 감고 곧 숨이 넘어갈 것 같다. 조금 뒤에 비바람이 좀 멎자 서로 바라보니 얼굴이 모두 흙빛이었다. 그제야 비로소 양편에 있는 집들이 보이는데 불과 40~50보밖에 안 되는 곳에 두고서도 비가 막 쏟아질 때에는 피할 줄 알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조금만 더했더라면 거의 숨막혀 죽을 뻔했군.”

한다. ()에 들어가서 잠깐 쉬려니 하늘이 맑게 개고 바람과 햇빛이 산뜻하였다. 간단히 술잔을 나누고는 곧 떠났다. 길에서 부사를 만나서,

 

어디서 비를 피하셨소.”

하고 물었더니, 부사는,

 

가마문이 바람에 떨어졌기 때문에 빗발이 가로 들이쳐서 한데 선 것이나 다름 없었소. 빗방울 크기가 주발(酒鉢)만큼 하니 대국은 빗방울조차 무섭소그려.”

한다. 나는 계함더러,

 

나는 오늘에야 더욱 사전(史傳 역사에서 전하는 기록)을 믿지 않으우.”

하였더니, 정 진사가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서면서,

 

무슨 말씀이오?”

하기에, 나는,

 

항우(項羽)가 아무리 노하여 고함친다 하더라도 어찌 이 우레 소리를 당할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史記)에 적천후(赤泉侯)의 인마가 모두 놀라서 수리(數里)를 물러섰다 하였으니, 이는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이오. 항우가 비록 눈을 부릅떴다 하기로서니 이 번갯불만 못했을 터인즉, 여마동(呂馬童 한의 장수)이 말에서 떨어졌다 함은 더욱 못 믿을 일이오.”

하니, 여럿이 모두 크게 웃었다.

 

 

[D-001]영저(鈴杵) : 중이 가지는 악기(樂器)의 일종. 송 태종(宋太宗) 때 인도(印度)에서 왔다 하였다.

[D-002]이제묘기 …… 고죽성기(孤竹城記) : 모든 본에 다 보이지 않으니 의심되는 일이다.

[D-003]적천후(赤泉侯) : ()의 장수 양무(楊武)의 봉호. 항우가 죽을 때 그 시체를 찢어서 가진 다섯 장수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이제묘기(夷齊廟記)

 

 

난하(灤河) 기슭에 자그마한 언덕을 수양산(首陽山)’이라 하고, 그 산 북쪽에 조그만 성이 있으니 고죽성(孤竹城)’이라 한다. 성문에는 현인구리(賢人舊里)’라 써 붙였고, 문 오른편 비석에는 효자충신(孝子忠臣)’이요, 왼편 비에는 지금칭성(至今稱聖)’이라 새겼으며, 묘문(廟門) 앞 비석에는 천지강상(天地綱常)’이요, 문 남쪽 비에는 고금사표(古今師表)’라 하였다. 그리고 문 위에는 상고일민(上古逸民)’이란 현판이 걸렸고, 문 안에 비석 셋, 뜰 가운데 비석 둘, 섬돌 좌우에 비석 넷이 있으니, 모두 명()() 때의 어제(御製)들이다.

뜰에는 고송(古松) 수십 그루가 서 있고, 섬돌 가에는 흰 돌로 난간을 둘렀다. 가운데에 큰 전각이 있어 고현인전(古賢人殿)’이라 하고, 전각 속에 곤룡포면류관을 갖추고 홀을 들고 섰는 것이 곧 백이(伯夷)숙제(叔齊)이다.

전 문에는 백세지사(百世之師)’라 써 붙였고, 전 안에는 큰 글자로 만세표준(萬世標準)’이라 쓴 것은 강희제의 글씨요,  윤상사범(倫常師範)’이라 한 것은 옹정제의 글씨이다. 전 가운데 간직한 보기(寶器)들은 만력(萬曆) 때 물건이 많다. 그 주련(柱聯)에는,

 

인을 찾아서 인을 행했으니 만고의 맑은 바람 고죽국이요 / 求仁得仁萬古淸風孤竹國

몹씀으로 몹씀을 바꿨다 하니 천추의 외론 절개 수양산이로다 / 以暴易暴千秋孤節首陽山

하였고, 뜰에 두 문이 있으니 동쪽에는 염완(廉頑)’이요, 서쪽에는 입나(立懦)’라 하였으며, 또 작은 문 둘이 있으니 왼편은 관천(盥薦)’이요, 오른편은 재명(齊明)’이라 하였고, 그 문을 나서면 당()이 있어 읍손(揖遜)’이라 하였으며, 비석이 있는데 이는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연간에 세운 것이다. 비 뒤에 대()가 있어 청풍(淸風)’이라 하고, 문 둘이 있어 하나는 고도풍진(高蹈風塵)’이요, 또 하나는 대관환우(大觀寰宇)’라 새겨 붙였으며, 대 위에는 각()이 있어 재수지미(在水之湄)’라 하였고, 그 주련(柱聯)에는,

 

뫼들은 인자처럼 고요하고 / 山如仁者靜

바람은 성인인 양 맑디맑다 / 風似聖人淸

하였고, ,

 

가산 가수는 고죽나라에 / 佳山佳水孤竹國

난형 난제의 성인 나시다 / 難兄難弟古聖人

라고 한 것이 있다. 대 위에 문 둘이 있어 하나는 백대산두(百代山斗)’, 또 하나는 만고운소(萬古雲霄)’라 하였다. ()의 헌종 순황제(憲宗純皇帝) 때에 백이에게는 소의청혜공(昭義淸惠公), 숙제에게는 숭양인혜공(崇讓仁惠公)이란 시호를 주었다. 중국에서 수양산(首陽山)이라 하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으니, 하동(河東)의 포판(蒲坂)인 화산(華山)의 북쪽 하곡(河曲)의 어름에 산이 있어 수양이라 하였고, 혹은 농서(隴西)에도 있다 하며, 혹은 낙양(洛陽) 동북쪽에도 있다 하고, 또 언사(偃師) 서북쪽에도 이제묘가 있다 하며, 또는 요양(遼陽)에도 수양산이 있다 하여, 모든 전기(傳記)에 나타났다. 그러나 맹자(孟子)에는,

 

백이가 주왕(紂王)을 피하여 북해(北海) 가에 살았다.”

하였고, 우리나라 해주(海州)에도 수양산이 있어서 백이숙제를 제사지내나, 이는 중국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자(箕子)가 동으로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주()의 판도 안에 살기 싫어함이요, 백이도 차마 주의 곡식을 먹을 수 없음인즉, 혹은 그가 기자를 따라와서 기자는 평양에 도읍하고 백이숙제는 해주에 살지나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나라 항간에서 전하는 말에,

 

대련(大連)소련(少連)이 해주 사람이다.”

하였으니, 이를 무엇으로 고증할 수 있을까.

문과 담장에 당()() 역대의 치제문(致祭文)을 많이 새겨 놓은 것을 보아서는 이 묘가 영평에 있은 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홍무(洪武) 초년에 영평부 성 동북쪽 언덕에 옮겨 세웠다가 경태(景泰 명 경종(明景宗)의 연호) 연간에 다시 이곳에 세웠다.”

한다. 행궁(行宮)이 있어 그 제도는 강녀묘북진묘의 행궁과 같으나 지키는 자가 금하므로 그 내용을 구경하지 못하였다.

 

 

[D-001]백이(伯夷)숙제(叔齊) : ()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는 형, 숙제는 아우로 어버이가 죽자 서로 자리를 사양하였고, 주 무왕이 은을 칠 때에 반대하여 수양산에 숨어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D-002]인을 …… 하니 : 백이숙제의 채미가(采薇歌) 중에서 나오는 구절.

[D-003]뫼들은 …… 고요하고 : 논어(論語), “인자(仁者)는 뫼를 사랑한다.” 하였다.

[D-004]바람은 …… 맑디맑다 : 논어, “백이는 성인 중의 맑은 이다.” 하였다.

[D-005]하곡(河曲) : 황하가 북에서 남으로 흐르다가 또 동으로 굽이치는 곳.

[D-006]주왕(紂王) : ()의 말왕(末王). 중국 고대의 대표적 폭군.

[D-007]대련(大連)소련(少連) : 예기(禮記) 중에 나오는 인물. 이들 형제는 동이(東夷)의 아들로서, 상주질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

 

 

난하는 장성 북쪽 개평(開平)에서 처음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서 천안현(遷安縣) 지경을 거쳐 노룡새(盧龍塞)에 이르러 칠하(漆河)와 합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낙정현(樂亭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요동요서에 ()’라고 이름한 물 치고는 모두 흐린 것인데, 다만 이 난하만이 고죽사(孤竹祠 고죽군(孤竹君)의 사당) 밑에 이르러 깊게 고여서 호수가 되어 그 맑은 빛이 거울 같다. 고죽성은 영평부 남쪽 1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후한서(後漢書)의 군국지(郡國志),

 

우북평(右北平) 영지(令支)에 고죽성이 있다.”

하였고, 그 주(),

 

백이숙제의 본국(本國)이다.”

하였다. 난하의 남쪽 기슭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고, 그 위에는 청풍루(淸風樓)가 있는데, 누 아래 강물이 더욱 맑으며 강 한복판에 작은 섬이 있고, 섬 가운데 돌을 병풍처럼 쌓고 그 앞에 고죽군(孤竹君)의 사당이 있으며, 사당 아래 배를 띄우니, 물 맑고 모래 희며, 들 넓고 숲 깊숙한데, 물가에 수십 호 되는 집이 모두 그림자가 호수 속에 박혔고, 고기잡이 배 서너 척이 한창 그물을 사당 밑에 치고 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중류에 대여섯 길 되는 돌봉우리가 있어 이름은 지주(砥柱)’라 하는데, 기암괴석이 삑 둘러싸서 우뚝우뚝 서 있으며, 교청새뜸부기 같은 물새 떼 수십 마리가 모래 위에 늘어 앉아 깃을 다듬고 있다. 배에 함께 탄 사람들이 이 경치를 돌아보고 기뻐하면서,

 

강산이 그림 같으오.”

하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은 강산도 모르고 그림도 모르는구려. 어디 강산이 그림에서 나온 것인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지. 흔히들 흡사하다느니 같다느니 유사하다느니, 닮았다느니 똑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같다는 의미를 말함이다. 그러나 비슷한 것으로써 비슷한 것을 비유함은 실은 같을 성싶어도 같은 것이 아닌거요. 옛사람이 강(양자강(揚子江))에서 나는 요주(瑤柱)를 여지(荔支 남방에서 나는 과실)와 같다 하고, 서호(西湖)를 서자(西子 서시(西施))와 같다 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다시 말하기를, 담채(淡菜 조개의 일종)는 용안(龍眼 용안수(龍眼樹)의 열매)과 같고, 전당(錢塘)은 비연(飛燕)과 같다 하니, 어찌 그럴 수 있겠소.”

 

[D-001]요주(瑤柱) : 조개의 일종. 껍질이 엷고 길게 생겼으며, 줄이 방사선으로 났다.

[D-002]서호(西湖) :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경치 좋기로 유명한 호수.

[D-003]전당(錢塘) : 항주에 있는 경치 좋은 호수.

[D-004]비연(飛燕) : 한 성제(漢成帝)의 황후 조비연(趙飛燕). 몸이 나는 제비처럼 가볍다 하여 붙인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석호석기(射虎石記)

 

 

영평부에서 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가파른 언덕에 드러난 바위가 있다. 비스듬히 보면 빛깔이 희고, 그 밑에는 비석이 있어 한비장군석호처(漢飛將軍射虎處)’라 새겨 있다. 나는, “청의 건륭 45년 가을 7 26일에 조선인(朝鮮人) 아무아무는 이를 구경하다.”라고 썼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7일 계묘(癸卯)

 

 

개다. 아침에 잠깐 서늘하였으나 낮에는 몹시 더웠다.

사하역(沙河驛)에서 홍묘(紅廟)까지 5, 마포영(馬舖營) 5, 칠가령(七家嶺) 5, 신점포(新店舖) 5, 건초하(乾草河) 5, 왕가점(王家店) 5, 장가장(張家莊) 5, 연화지(蓮花池) 10, 진자점(榛子店) 5, 모두 5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진자점에서 연돈산(烟墩山)까지 10, 백초와(白草漥) 6, 철성감(鐵城坎) 4, 우란산포(牛欄山舖) 4, 판교(板橋) 6, 풍윤현(豐潤縣) 20, 모두 50리이다. 이날 1백 리를 가서 풍윤성 밖에 묵었다.

어제 이제묘 안에서 점심 먹을 때 고사리 넣은 닭찜이 나왔는데, 맛이 매우 좋고 또 길에서 변변한 음식을 먹지 못한 끝이라 별안간 입맛이 당기는 대로 달게 먹었으나, 그것이 구례(舊例)인 줄은 몰랐다. 오후에 길에서 소나기를 만나서 겉은 춥고 속은 막히어 먹은 것이 내려가지 않고 가슴에 그득히 체하여, 한번 트림을 하면 고사리 냄새가 목을 찌르는 듯하여 생강차를 마셔도 속이 오히려 편하지 않았다.

 

이 한창 가을에 철 아닌 고사리를 주방(廚房)은 어디서 구해 왔는고.”

하고 물었더니, 옆에 사람이 말하기를,

 

이제묘에서 점심 참을 대는 것이 준례가 되어 있사오며, 또 사시를 막론하고 여기서는 반드시 고사리를 먹는 법이옵기에 주방이 우리나라에서 마른 고사리를 미리 준비해 가져와 여기에서 국을 끓여서 일행을 먹이는 것이 이젠 벌써 하나의 고사(故事)로 되었답니다. 10여 년 전에 건량청(乾糧廳)이 이를 잊어버리고는 갖고 오지 않아서 이곳에 이르자 궐공(闕供)되었으므로, 건량관(乾糧官)이 서장관에게 매를 맞고 물 가에 앉아서 통곡하면서 푸념하기를, ‘백이숙제, 백이숙제야. 나하고 무슨 원수냐. 나하고 무슨 원수냐.’ 라고 하였답니다. 소인(小人)의 소견으로는 고사리가 고기만 못하며, 또 듣자온즉 백이들은 고사리를 뜯어 먹고 굶어죽었다 하오니, 고사리는 참 사람 죽이는 독물인가 하옵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잡았다. 태휘(太輝)란 자는 노 참봉의 마두(馬頭)인데 초행일뿐더러 위인이 경망해서, 조장(棗庄)을 지나다가 대추나무가 비바람에 꺾이어 담 밖에 넘어진 것을 보고는, 그 풋열매를 따 먹고 배앓이로 설사가 멎지 않아서, 한창 속이 허하고 몸이 달고 마음이 답답하고 목이 타는 듯하다가, 급기야 고사리독이 사람 죽인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몸부림치면서,

 

아이고, 백이숙채(熟菜 삶은 나물)가 사람 죽이네. 백이숙채가 사람 죽인다.”

하니, 숙제(叔齊)와 숙채(熟菜)가 음이 서로 비슷한지라, 또한 당에 가득한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

내 일찍이 백문(白門 서울 부근의 지명)에 살 때이었다. 때마침 숭정(崇禎) 기원(紀元)  137, 세 돌째 맞이한 갑신년(甲申年)이며, 3 19일은 곧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가 순사(殉社 국가와 함께 죽음)한 날이다. 시골 선생님이 동리 아이 수십 명을 거느리고 성서(城西 서울 서대문 밖)에 있는 송씨(宋氏)의 셋방살이 집에 찾아가서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에 절하고, 초구(貂裘)를 내어서 어루만지며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는 이까지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성 밑에 이르러서 팔을 뽐내며 서쪽을 향하여,

 

되놈.”

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이에 여수(旅酬)를 벌이되 고사리나물을 차렸다. 이때 마침 주금(酒禁)이 내렸으므로 꿀물로서 술을 대용하여 그림 놓은 자기주발에 담았으니, 그 주발의 관지(款識)에는 대명(大明) 성화(成化)에 만든 것이다라고 새겼다. 여수하는 자가 꿀물을 따를 때면 반드시 머리를 숙여 주발을 들여다보곤 한다. 이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잊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이에 서로 시()를 읊었다. 그 중 한 동자(童子)가 쓰기를,

 

무왕도 만약 패해서 죽었다면 / 武王若敗崩

아득한 천 년 뒤에 주왕에겐 역적이 되올 것을 / 千載爲紂賊

여망이 어이하여 백이를 구하고도 / 望乃扶夷去

역적을 옹호했다 하여 벌을 받지 않았던고 / 何不爲護逆

춘추의 큰 의리를 이제껏 떠들건만 / 今日春秋義

되놈으로 간주하면 되놈의 역적일 걸 / 胡看爲胡賊

하였다.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 선생님이 섭섭한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

 

아이들은 불가불 일찍부터 춘추를 읽혀야 돼. 아직 그게 무엇인지 분간을 못하므로 이 따위의 괴상한 말들을 하는 게야. 어디 한번 즉경(卽景)이나 읊어 보아라.”

하자, 또 한 동자가 짓기를,

 

고사리 캐고 캔들 배 부르단 거짓말이 / 採薇不眞飽

백이도 나중에는 주려서 죽었다오 / 伯夷終餓死

꿀물이 몹시 달아 술보다 나을지니 / 蜜水甘過酒

이것 마시자 죽는다면 그 아니 원통하리 / 飮此亡則寃

하였다. 선생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어어, 이게 또 무슨 괴상한 수작이여.”

하니, 만좌의 사람들이 또 한번 크게 웃었다. 그리한 지도 어언간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때의 늙은이들도 다 가버린 오늘날에 다시 백이의 고사리로 이런 말썽이 생겨서, 타향(他鄕)의 풍등(風燈) 아래에서 옛 이야기를 하다보니 끝내 잠을 잃고야 말았다.

새벽에 떠나 길에서 상여(喪轝)를 만났다. 널 위에 흰 수탉을 놓았는데 닭이 홰를 치며 울고 있다. 연이어 상여를 만났으나 모두 닭을 놓았으니 이는 영혼을 인도하는 것이라 한다.

길 곁에 넓이 수백 이랑이나 되는 못이 있는데 연꽃은 벌써 지고 사람들이 각기 조그마한 배를 타고 들어가서, 마름연밥연근 같은 것을 캐고 있었다. 돼지 수십 마리를 몰고 가는 이가 있는데, 그 모는 법이 마소 다루는 것과 같다. 길 가 백여 리 사이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수없이 많이 자빠져 있다. 이는 어제 비바람에 쓰러진 것이다.

진자점(榛子店)에 이르렀다. 이 점은 본래 기생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강희 황제가 일찍이 천하의 창기를 엄금하여 양자강(揚子江)판교(板橋) 같은 곳의 창루(娼樓)기관(妓館) 들이 모두 쑥대밭이 되었는데, 이곳만이 남아 있어서 그를 양한적(養閒的)’이라 이름하는데 얼굴이 그럴싸하고 음악도 곧잘 한다. 재봉(再鳳)과 상삼(象三)이 후당(後堂)으로 들어가며 나를 보고는 빙긋 웃음을 띤다. 나도 그 뜻을 짐작하고 가만히 그 뒤를 밟아가서 문틈으로 들여다본즉 상삼이 벌써 한 여인을 끼고 앉았다. 이는 전부터 안면이 있는 모양이다. 청년 둘이 의자에 마주 걸터앉아서 비파를 타고 한 여인은 의자 위에서 봉() 부리에 금고리를 물린 저를 불고 있는데, 부리에는 금고리가 달렸고 금고리에는 붉은 수술을 드리웠다. 재봉은 그 아래에 서서 손으로 수술을 어루만지고 있고, 또 한 여인은 주렴을 걷고 나오더니 손에 박자 판을 들고 재봉을 부축하여 앉히려 하였으나 재봉은 듣지 않았다. 한 늙은이가 주렴을 걷고 서서 재봉을 향하여,

 

안녕하시오.”

한다. 나는 곧 밖에서 큰 기침 한번을 내며 가래침을 뱉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란다. 상삼과 재봉이 서로 보고 웃으며 곧 일어나 문을 열고 나를 맞아들인다. 내가 문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안녕들 하시오.”

했더니, 늙은이와 두 젊은이가 일제히 일어나서 웃으며,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 답하니, 세 양한적도 모두들,

 

천복(千福)을 누리시옵소서.”

한다. 재봉은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저 이름은 유사사(柳絲絲)랍니다. 병신년(丙申年)에 이곳을 지날 때 나이 스물넷에 그야말로 일색이었던 것이 이제 5년 동안에 얼굴이 아주 그냥 망가져서 보잘것없이 되었습니다그려.”

한다. 상삼은,

 

유사사는 일찍이 열네 살부터 소리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답니다.”

하고, 검은 웃옷에 주홍치마를 입은 여인을 가리키며,

 

저 이름은 요청(幺靑)이고 올해에 나이 스물다섯입니다. 작년부터 이곳에 와 있는 산동 여자입니다.”

한다. 나는 검은 저고리에 초록치마를 입은 그 중 제일 앳되보이는 여인을 가리켰더니, 상삼은,

 

그는 처음 보는 여인이어서 이름이나 나이를 모르겠습니다.”

한다. 세 기생이 모두들 특별한 자색은 없으나 대체로 당화(唐畵) 미인도(美人圖) 중에서 보이는 여인과 같았다. 그 늙은이는 곧 관() 주인이고, 두 청년은 모두 산동에 온 장사치들이다. 나는 상삼에게 눈짓하여 그들에게 음악을 아뢰도록 했더니, 상삼이 그 청년을 보고 무어라고 하자 한 청년은 노래하고 요청은 홀로 박자판을 치며 소리를 맞추어 합창할 때, 다른 기생들은 모두 부는 것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한다. 한 청년이 자리를 옮겨, 나더러,

 

알아 들으시는지요?”

하기에, 나는,

 

잘 모르네.”

하였더니, 그는 글로 써서 보이며,

 

이 사곡(詞曲) 계생초(雞生草)’라 부르고, 가사는,

전조에 낳은 장수 모두들 영웅이라 / 前朝出了英雄尉

도원의 의를 맺어 그 성은 유장을 / 桃園結義劉關張

그 셋이 뜻이 맞아 제갈량을 군사 삼고 / 他三人請了軍師諸葛亮

신야와 박망파를 불사라 버리고선 / 火燒新野博望屯

상양성을 또 깨뜨렸네 / 炮打上陽城

노천을 원망하건대 주유를 낳았으니, 제갈량이 또 웬일고 / 怨老天旣生瑜又生亮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그 청년이 글은 제법 아는 모양이나 얼굴은 못생겼다. 그는 스스로 소개하기를,

 

저는 신성(新城)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성은 왕()이요, 이름은 용표(龍標)라 합니다.”

한다. 나는,

 

자네가 혹시 왕서초(王西燋) 사록(士祿) 선생의 후손되시는 이인가?”

했더니, 그는,

 

아니올시다. 저희는 민가(民家) 출신으로서 장사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한다. 그 청년이 또 한 곡조를 부를 때 모든 기생들이 혹은 박자판을 치고, 혹은 비파를 뜯고, 또는 봉저[鳳笛]를 불어서 소리를 맞춘다. 왕용표는,

 

공자(公子)께선 이를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모르네. 이건 무슨 사()라 하나.”

했더니, 용표는 글로 써 보이기를,

 

이 곡조는 답사행(踏莎行)’이라 하옵니다. 그리고 그 가사는,

세월은 문틈의 말달리기 티끌이나 곧 아지랑이 / 日月隙駒塵埃野馬

동으로 흐른 강물 쉴 줄 모르누나 / 東流不盡江河瀉

명리를 다투던 건 예로부터 헤어보니 / 向來爭奪名利人

백년이 채 못 되어 몇몇이나 남았던고 / 百歲幾個長存者

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유사사는 그 뒤를 이어서,

고기잡이 나무꾼의 싸늘한 이야기가 / 漁樵冷話

옳고 그름 예 있으니 춘추만 못잖으리 / 是非不在春秋下

술 부어 마시면서 시구를 길이 읊어 / 自斟自飮自長吟

알아 줄 이 적다고 한탄하지 마소서 / 不須贊嘆知音寡

라고 부르는데, 그 소리가 사뭇 구슬퍼서 남의 창자를 에이는 듯싶고, 참으로 들보의 티끌이 저절로 나부낀다. 상삼이 다시 이어서 창()하기를 청하니,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채소 사는지요, 더 달라게.”

한다. 그 청년은 손수 비파를 뜯으면서 유사사더러 노래 계속하기를 권한다. 그 소리는 더욱 보드랍고 아리땁다. 왕용표는 또 글을 써서 보이었다.

 

이 곡조는 서강월(西江月)’이라 하며, 가사는,

쓰르라미 울음소리 세월이 바쁘구나 / 蟪蛄忍忍甲子

모기가 날아들 제 산천이 어지러라 / 蚊擾擾山河

거센 바람 소낙비가 밤 사이 지나가고 / 疾風暴雨夜來過

그제야 눈 떠보니 한 낱도 없구나 / 轉眼都無一個

라고 한 것입니다.”

하고, 요청은 곧 그 뒤를 이어서 창()을 하였다.

 

항아리 속 빚은 술을 다하도록 마시고서 / 且盡尊中美酒

달 아래 높은 노래 고요히 들어 보소 / 閑聽月下高歌

공명이랑 부귀마저 마침내 그 무언고 / 功名富貴竟如何

닥쳐 오는 뒷일일랑 그 아예 묻지 마오 / 莫問收場結果

그 소리는 매우 거세어서 유사사의 가냘픔만 못하였다. 나는 그제야 곧 일어서서 나올 때 재봉 역시 뒤를 따랐다. 재봉이 나에게 말하기를,

 

상삼이 관주(館主)에게 은() 두 냥, 대구어(大口魚) 한 마리, 부채 한 자루를 주었답니다.”

한다. 이곳에서 식암(息菴) 김공(金公 식암은 김석주(金錫冑)의 호)이 보았다는 계문란(季文蘭)의 시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은 피서록(避暑錄)중에 보인다.

연로(沿路) 수천 리 사이에 부녀들의 말소리들은 모두 연연(燕燕)앵앵(鶯鶯)이고 하나도 거친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야말로,

 

아리따운 님이시여 있는 곳을 몰랐더니 / 不識佳人何處在

눈썹 그리는 그 소리 주렴 넘어 들리는 듯 / 隔簾疑是畵眉聲

이 곧 그것이었다.

나는 한번 그들의 앳된 노래소리를 듣고 싶어 했더니, 이제 그 부르는 사곡(詞曲)의 의미는 짐작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성음(聲音)은 분변하지 못할뿐더러, 더욱이 그 곡조를 알지 못하므로 차라리 듣지 않았을 때 여운(餘韻)을 지니고 있느니만 같지 못했다.

저녁 나절에 풍윤성(豊潤城) 아래에 이르다. 주인 집 뒷문이 해자를 향해서 열리고 문 앞엔 몇 그루 실버들이 가렸다. 정사(正使),

 

지난 정유년(丁酉年 1777) 봄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일찍이 이 집에 머물면서 서장관 신형중(申亨重) 이름은 사운(思運)이다 과 함께 이 버드나무 밑에서 한담한 일이 있었다.”

하고, 가마에서 내려 곧 뒷문 밖에 자리를 펴게 하고 모든 비장들과 잠깐 술을 나눴다. 그 해자의 넓이는 십여 보나 되는데 버들 그늘이 짙어서 땅 위에 치렁치렁 드리우고 물가에 남실남실 잠기었다. () 위엔 3층 높은 다락이 구름 위에 솟아 보일락말락한다.

드디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성에 들어가 다락에 올라 구경할 제, 그 이름은 문창루(文昌樓)’라 하였는데 문창성군(文昌星君 별 이름을 딴 귀신 이름)을 모셨다 한다.

길에서 초인(楚人) 임고(林皐)를 만나 함께 호형항(胡逈恒)의 집에 가서 촛불을 밝히고, 차수(次修 박제가(朴齊家)의 자)가 쓴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의 자)의 시()를 구경하고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다시 오기로 약속할 제,

 

혹 성문이 닫히지나 않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곧 닫겠지만 반 시간도 못 되어 다시 연답니다.”

하고 답한다. 저녁 뒤에 촛불을 들고 다시 가보니 성문이 닫히지 않았다. 이때 우리를 따라 온 하인들은 더부룩한 맨머리로 거리에 삑삑하게 쏘다니며 말먹이 풀을 구하는 모양이었다.

()와 임() 두 사람이 반기며 나와서 맞이한다. 방안엔 벌써 주안상을 차려 놓았다. 그는,

 

이형암(李炯菴 형암은 이덕무의 일호(一號))과 박초정(朴楚亭 초정은 박제가의 호)이 모두 잘 지내십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모두 편하지요.”

하였더니, 임생(林生),

 

()과 이() 그 두 분은 참으로 인품이 맑고 재주가 높은 선비지요.”

하기에, 나는,

 

그들은 모두 나의 문생(門生)이지만 그 변변하지 않은 글 재주를 이다지 칭찬할 게야 뭐 있겠소.”

하였더니, 임생은,

 

옛말에 정승의 문하엔 정승이 나고 장수의 문하엔 장수가 난다더니 과연 헛된 말이 아니군요.”

하고, 그는 또,

 

형암초정 두 분이 일찍이 무술년(戊戌年 1778) 황태후(皇太后) 진향(進香) 때 이곳을 지나다 하룻밤 쉬어 갔습니다.”

한다. 임과 호 그 둘이 비록 정성껏 대접하는 셈이나 전연 글을 모르고 게다가 호생(胡生)은 얼굴마저 단아하지 못하여 시정배의 모습을 면치 못했고, 임생은 긴 수염에 장자(長子)의 풍도가 없진 않으나, 다만 수작하는 사이에 장사치들의 행투가 바이 가시지 못했다. 호생은 내게 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를 주고, 임생 역시 그림 부채 한 자루를 선사하기에 각기 부채 한 자루와 청심환 한 개씩을 주어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술을 몇 잔 하였다. 그 곁에는 유리등(琉璃燈) 한 쌍이 있어서 제법 아름다워 보였다. 밤이어서 다른 골동품은 구경하지 못할 것이므로, 나는 곧장 일어서면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찾기를 약속했다. 임생이 문에 나와 전송하며 제법 섭섭한 모양이다. 사관에 돌아와 호생이 선사한 민강(閩薑 복건산(福建産) 생강)국다(菊茶)귤병(橘餠 귤 말린 것) 등을 내어서 장복으로 하여금 푸욱 달여 소주에 타서 두어 잔을 마시니 그 맛이 유달리 좋았다.

성 밖에 사성묘(四聖廟)가 있고 옹성(甕城) 안에 백의암(白衣菴)이 있으며, 앞 네거리엔 패루(牌樓) 둘이 있고, 초루(譙樓)에는 관제(關帝)의 소상을 모셨다.

 

 

[D-001]건량청(乾糧廳) : 먼 길을 가는 데 마른 양식을 준비하는 부서.

[D-002]초구(貂裘) : 초피 두루막. 효종의 하사품인데, 북벌 곧 청을 칠 때 요()()의 풍설(風雪)에 입으라 하였다.

[D-003]여수(旅酬) : 제사를 마친 뒤 술잔을 나누는 일종의 음복놀이.

[D-004]여수하는 …… 한다 : ‘대명성화(大明成化)’라는 글자를 새겼으므로, 대명을 잊지 않음이 곧 춘추의 대의라는 것이다.

[D-005]여망이 …… 구하고도 : 백이숙제가, 무왕이 주왕을 치려 함을 말렸을 때, 무왕의 좌우가 모두 그를 죽이려 하자, 여망(呂望)이 홀로 그를 의사(義士)라 하여 놓아주었다.

[D-006] : 중국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중에 나오는 유비(劉備)관우(關羽)장비(張飛) 등의 결의형제의 고사(故事).

[D-007]주유(周瑜) : 주유가 죽을 때에, “하늘이 이왕 주유를 낳았으니 어찌 또 제갈량을 낳았을꼬.” 하며 비탄하였다.

[D-008]신성(新城) : 직례성(直隷省) 무극현(無極縣)에 있는 지명.

[D-009]고기잡이 …… 못잖으리 : 초동과 어부의 쑥덕공론이 춘추대의를 부르짖는 이들의 이론만 못하지 않다는 말.

[D-010]들보의 …… 나부낀다 : 유향(劉向) 별록(別錄), “우공(虞公)이 맑은 새벽에 노래를 부르면, 그 소리가 들보 위의 티끌을 움직였다.” 하였다.

[D-011]연연(燕燕)앵앵(鶯鶯) : 둘 다 유명한 기생의 이름.

[D-012]황태후(皇太后) 진향(進香) : 황태후의 탄일 열흘 전에 황제가 향을 바치는 예식.

[D-013]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 : 고송(古松) 밑을 거니는 선인을 그린 것.

[D-014]초루(譙樓) : 먼 적진(敵陣)을 바라보기 위하여 세운 문 위의 높은 누각.

[D-015]관제(關帝) : ‘수택본에는 관공(關公)’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8일 갑진(甲辰)

 

 

아침에 갰다가 오후엔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었으나 우세(雨勢)는 앞서 야계타에서 만난 것만 못했다.

풍윤성(豊潤城)에서 새벽에 떠나 고려보(高麗堡)까지 10, 사하포(沙河舖) 10, 조가장(趙家庄) 2, 장가장(蔣家庄) 1, 환향하(還香河) 1리인데, 환향하의 일명은 어하교(魚河橋)였고, 거기에서 민가포(閔家舖) 1, 노고장(盧姑庄) 4, 이가장(李家庄) 3, 사류하(沙流河) 8리를 가서 점심을 먹으니 모두 40리였고, 또 사류하로부터 양수교(亮水橋)까지 10, 양가장(良家庄) 5, 입리포(廿里舖) 5, 시오리둔(十五里屯) 5, 동팔리포(東八里舖) 7, 용읍암(龍泣菴) 1, 옥전현(玉田縣) 7, 모두 40리인데 이날에는 80리를 가서 옥전성(玉田城) 밖에서 잤다. 옥전은 옛 이름이 유주(幽州), 무종국(無終國)이 이에 있었는데 곧 소공(召公)의 봉지(封地)이다. 정의(正義 당 공영달(孔穎達)이 지은 경전 주석서)에 이르기를,

 

소공은 애초에 무종에 봉했다가 나중엔 계주(薊州)로 옮겼다.”

하였고, 시서(詩序)에는,

 

부풍(扶風) 옹현(雍縣) 남쪽에 소공정(召公亭)이 있으니, 이곳이 곧 소공의 채읍(采邑 식읍(食邑))이다.”

하였으나, 어느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고려보에 이르니, 집들이 모두 띠 이엉을 이어서 몹시 쓸쓸하고 검소해 보인다. 이는 묻지 않아도 고려보임을 알겠다. 앞서 정축년(丁丑年 병자호란 다음 해, 1637)에 잡혀 온 사람들이 저절로 한 마을을 이루어 산다. 관동 천여 리에 무논이라고는 없던 것이 다만 이곳만은 논벼를 심고, 그 떡이나 엿 같은 물건이 본국(本國)의 풍속을 많이 지녔다. 그리고 옛날에는 사신이 오면 하인들의 사 먹는 주식치고는 값을 받지 않는 일도 없지 않았고, 그 여인들도 내외하지 아니하며, 말이 고국 이야기에 미칠 때에는 눈물을 짓는 이도 많았다. 그러므로 하인들이 이를 기화로 여겨서 마구잡이로 주식을 토색질해서 먹는 일이 많을뿐더러, 따로이 그릇이며 의복 등속을 요구하는 일까지 있으며, 또 주인이 본국의 옛 정의를 생각하여 심하게 지키지 않으면 그 틈을 타서 도둑질하므로, 그들은 더욱 우리나라 사람들을 꺼려서 사행이 지날 때마다 주식을 감추고 즐겨 팔지 않으며, 간곡히 청하면 그제야 팔되 비싼 값을 달라 하고 혹은 값을 먼저 받곤 한다. 그럴수록 하인들은 백방으로 속여서 그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상극이 되어 마치 원수 보듯 하며 이곳을 지날 때면 반드시 일제히 한 목소리로,

 

너희 놈들, 조선 사람의 자손이 아니냐. 너희 할아비가 지나가시는데 어찌 나와서 절하질 않느냐.”

하고 욕지거리를 하면, 이곳 사람들도 역시 욕설을 퍼붓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도리어 이곳 풍속이 극도로 나쁘다 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길에서 소낙비를 만났다. 비를 피하느라고 한 점포에 들었더니 차를 내어 오고 대접이 좋았다. 비가 한동안 멎지 않고 천둥 소리가 드높아진다. 그 점포의 앞마루가 제법 넓고 뜰도 백여 보나 되는데, 마루 위에는 늙고 젊은 여인 다섯이 바야흐로 부채에 붉은 물감을 들여서 처마 밑에 말리고 있었다. 이때 별안간 말몰이꾼 하나가 알몸으로 뛰어드는데 머리엔 다 해진 벙거지를 쓰고, 허리 아래엔 겨우 한 토막 헝겊을 가릴 뿐이어서 그 꼴은 사람도 아니요, 귀신도 아니고 그야말로 흉측했다. 마루에 있던 여인들이 왁자그르 웃고 지껄이다가 그 꼴을 보고는 모두 일거리를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주인이 몸을 기울여 이 광경을 내다보고는 얼굴을 붉히더니, 교의에서 벌떡 뛰어내려 팔을 걷고 철석하고 그의 뺨을 한 대 때렸다. 말몰이꾼은,

 

말이 허기가 져서 보리찌꺼기를 사러 왔는데 당신은 왜 공연히 사람을 치오.”

한다. 주인은,

 

이 녀석, 예의도 모르는 녀석. 어찌 알몸둥이로 당돌하게 구는 거야.”

한다. 말몰이꾼이 문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주인은 오히려 분이 풀리지 않아서 비를 무릅쓰고 뒤를 쫓아 나갔다. 그제야 말몰이꾼이 몸을 돌이켜 왝 소리를 내며 한 번 그의 가슴을 움켜잡고 치니, 주인이 흙탕 속에 나가 넘어지는 것을 다시 앙가슴을 한 번 걷어차고 달아나버렸다. 주인이 꿈쩍도 하지 못하고 마치 죽은 듯하더니, 이윽고 일어나서 아픔을 못 이겨 비틀거리며 걸어오는데,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으나 분풀이할 곳이 없어서 씨근거리면서 도로 돌아와, 곱지 않은 눈시울로 나를 보는데 입으로 말은 못하나 풍세가 매우 사납다. 나는 그럴수록 넌지시 눈을 내리뜨고 사색을 가다듬어 늠름히 범하지 못할 기세를 보인 후에, 이윽고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주인더러,

 

하인이 매우 무례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봅니다만 다시 마음에 두지 마시지요.”

했더니, 주인이 곧 노염을 풀고 웃으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선생, 다신 그 말씀 마십시다.”

한다. 우세(雨勢)가 점차 드높고 오래 앉았으니 몹시 답답하였다. 주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옷을 갈아입고 8, 9세쯤 되어 보이는 계집애를 데리고 나와서 내게 절을 시킨다. 아이 생김새가 한악(悍惡)해 보인다. 주인이 웃으며,

 

이게 제 셋째 딸년입니다. 전 사내아이를 두지 못했답니다. 선생께선 보아 하니 너그러우신 어른이시니까 성심껏 이 아이를 선생께 바치오니, 수양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하기에, 나도 웃으며,

 

실로 주인의 후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마는 일이 그렇지 않은 것이, 나로 말하면 외국 사람으로 이번에 한번 왔다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즉, 잠깐 동안 맺은 인연이 나중에 서로 생각하는 괴로움만 남길지니 이는 한갓 부질없는 일이오.”

했더니, 주인은 그래도 굳이 수양아비가 되어 달라 하나 나 역시 굳이 사양했다. 만일 한 번 수양딸을 삼으면 돌아갈 때 으레 연경의 좋은 물건을 사다 주어서 정표를 삼아야 하니, 이는 실로 마두(馬頭)들의 사이에 항용이 있는 일이라 한다. 괴롭고도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가 잠시 멎고 산들바람이 일기에 곧 일어나 문을 나가니 주인이 문까지 나와서 읍하고 작별하는데 제법 섭섭한 모양이다. 청심환 한 개를 내주었더니, 그는 두세 번 사양하기를 마지않는다. 이곳 여인들은 발에 검은 신을 신었으니 대체 기하(旗下 만주 사람)들인 듯싶다.

용읍암(龍泣菴)에 이르니 그 앞 큰 나무 밑에 건달패 여남은 명이 더위를 피하는데, 도끼를 돌리는 자도 있거니와, 비파 타고 저[] 불며 서유기(西遊記)놀음을 하는 판이었다.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 이르니 무종산(無終山)이 있다. 혹은 이르기를,

 

연 소왕(燕昭王)의 사당이 이곳에 있었다.”

한다. 성중에 들어가서 한 점포를 조용히 구경하고 있는 즈음에 어디서인지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므로, 곧 정 진사와 함께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가 보니 낭각 아래에 젊은이 대여섯이 늘어 앉아서, 혹은 저와 피리를 불며 혹은 현악(絃樂)을 타는 이도 있다. 방 가운데에는 한 사람이 교의 위에 단정히 앉았다가 우리를 보고 일어나 읍하는데, 얼굴이 제법 단아하고 나이는 쉰 남짓해 보이며 수염이 희끗희끗하다.

이름을 써 보이니 그는 머리를 끄덕일 뿐 성명을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네 쪽 벽엔 이름난 사람들의 서화가 가득 걸리었다. 주인이 일어나 작은 감실(龕室)을 여니, 그 속에 주먹 만한 옥으로 새긴 부처가 들어 있고 부처 뒤에는 관음상(觀音像)을 그린 조그마한 장자(障子)를 걸었는데, 그 화제(畵題)에는,

 

태창(泰昌) 원년(元年 1620) 춘삼월(春三月)에 제양(除陽) 구침(邱琛)은 쓰다.”

라고 씌었다. 주인이 부처 앞에 나아가 향을 피우고 절을 한 뒤에 감실문을 닫고 도로 교의 위에 앉더니, 그 성명을 글씨로 써 보인다.

 

전 심유붕(沈由朋)입니다. 소주(蘇州)에 살고 있으며, 자는 기하(箕霞), 호는 거천(巨川)이며, 나이는 마흔여섯입니다.”

그는 매우 말수가 적으며 조용한 기상을 지녔다. 나는 곧 그를 하직하고 일어나 문을 나오려는 즈음에, 얼핏 보니 탁자 위에 구리를 녹여서 사슴을 만든 것이 있는데, 푸른 빛이 속속들이 스민 듯하고 높이는 한 자 남짓 되며 또 두어 자 남짓한 연병(硏屛)에 국화를 그렸고, 그 겉에는 유리를 붙였는데 솜씨가 매우 기교하였으며, 서쪽 바람벽 밑에 푸른 꽃항아리가 있고 게다가 벽도화(碧桃花) 한 가지를 꽂았는데, 검은 왕나비 한 마리가 그 위에 앉았기에 애초에는 만든 것이려니 하였더니, 상세히 본즉 비취 바탕에 금무늬가 진짜 나비로서 꽃잎 위에 다리를 붙여서 말라버린 지 벌써 오래된 것이었다.

그리고 벽 위에 한 편의 기문(奇文)이 걸려 있는데, 백로지(白鷺紙)에다 가늘게 써서 격자(格子)를 만들어 가로 붙인 것이 한 폭 벽에 가득하였다. 글씨 역시 정미롭기에 그 밑에 다가서서 한 번 읽어 본즉, 가히 절세(絶世)의 기이한 글이라 이르겠다.

나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서,

 

저 벽 위에 걸린 글은 어떤 사람이 지은 거요.”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어떤 이가 지은 것인지를 모릅니다.”

한다. 정군은,

 

이는 아마 근세(近世)의 작품인 듯싶은데, 혹시 주인 선생께서 지으신 게 아닙니까?”

하니, 심유붕은,

 

저는 글을 한 줄도 모른답니다. 지은이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즉, 대체 한()이 있는 줄도 모르는 놈이 어찌 위()인지 진()인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그럼, 이게 어디에서 났단 말씀이오.”

했더니, 심은,

 

며칠 앞서 계주(薊州) 장에서 사온 것입죠.”

한다. 나는,

 

베껴 가도 좋습니까?”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끄떡이며,

 

관계없습니다.”

한다. 종이를 가지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저녁 뒤에 정군과 함께 간즉 방 안에는 벌써 촛불 두 자루를 켜 놓았다. 내가 벽 가까이 가서 격자를 풀어 내리려 하였더니, 심은 심부름하는 사람을 불러서 내려 준다. 나는 다시,

 

이게 선생이 지으신 게 아니오.”

하였더니, 심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는 거짓이 없기가 마치 저 밝은 촛불과 같답니다. 전 오래 전부터 부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부질없는 말은 삼가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그제야 정군에게 부탁하여 그 한가운데에서 쓰기 시작하게 하고 나는 처음부터 베껴 내려가는 판이었다. 심은,

 

선생은 이걸 베껴 무얼 하시려오.”

하기에, 나는,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 번 읽혀서 모두들 허리를 잡고 한바탕 웃게 하려는 거요. 아마 이걸 읽는다면 입 안에 든 밥알이 벌처럼 날아갈 것이며, 튼튼한 갓끈이라도 썩은 새끼처럼 끊어질 것이야.”

하고 말을 마쳤다. 사관에 돌아와 불을 밝히고 다시 훑어 본즉, 정군이 베낀 곳에 그릇된 것이 수없이 많을뿐더러, 빠뜨린 글자와 글귀가 있어서 전혀 맥이 닿지 않으므로 대략 내 뜻으로 고치고 보충해서 한 편을 만들었다.

 

 

[D-001]시서(詩序) : 공자의 제자 복상(卜商)이 지은 시경(詩經) 각 편의 해제.

[D-002]마두(馬頭) : 역마(驛馬)의 일을 맡아 보는 사람.

[D-003]연 소왕(燕昭王) : 전국 시대 연()의 임금. 소왕은 시호요, 이름은 평().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질(虎叱)

 

 

범은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스럽고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그러나 비위(狒胃)는 범을 잡아먹고, 죽우(竹牛 짐승 이름)도 범을 잡아먹고, ()도 범을 잡아먹고, 오색 사자(五色獅子)는 범을 큰 나무 선 산꼭대기에서 잡아먹고, 자백(玆白)도 범을 잡아먹고, 표견(䶂犬)은 날며 범과 표범을 잡아먹고, 황요(黃要)는 범과 표범의 염통을 꺼내어 먹고, () 뼈가 없다. 은 범과 표범에게 일부러 삼켜졌다가 그 뱃속에서 간을 뜯어먹고, 추이(酋耳)는 범을 만나기만 하면 곧 찢어서 먹고, 범이 맹용(猛㺎 짐승 이름)을 만나면 눈을 감은 채로 감히 뜨질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사람은 맹용을 두려워하지 않되 범은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보아서는 범의 위풍이 몹시 엄함을 알 수 있겠구나.

범이 개를 먹으면 취하고 사람을 먹으면 조화를 부리게 된다. 그리고 범이 한 번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倀鬼)가 굴각(屈閣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 살면서, 범을 남의 집 부엌으로 이끌어 들여서 솥전을 핥으면 그 집 주인이 갑자기 배고픈 생각이 나서, 밤중이라도 밥을 지으려 하게 되며, 두 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이올(彛兀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광대뼈에 붙어 살며, 높은 데 올라가서 사냥꾼의 행동을 살피되, 만일 깊은 골짜기에 함정(陷穽)이나 묻힌 화살이 있다면, 먼저 가서 그 틀을 벗겨 놓으며, 범이 세번째 사람을 먹으면 그 창귀는 육혼(鬻渾 창귀 이름)이 되어 범의 턱에 붙어 살되 그가 평소에 알던 친구들 이름을 자꾸만 불러댄다.

하루는 범이 창귀들을 모아 놓고 분부를 내리되,

 

오늘도 벌써 해가 저무는데 어디서 먹을 것을 취한단 말이냐.”

한다. 굴각은,

 

제가 진작 점쳐 보았더니 뿔 가진 것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검은 머리한 것이, [] 위에 발자국이 비틀비틀 성긴 걸음을 하며 뒤통수에 꼬리가 붙어서 꽁무니를 못 감추는 그런 놈입니다.”

하고, 이올은,

 

저 동문(東門)에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의원(醫員)’이라 한답니다. 그는 입에 온갖 풀을 머금어서 살과 고기가 향기롭고, 서문(西門)에도 먹을 것이 있사오니 그 이름은 무당(巫堂)’이라 한답니다. 그는 온갖 귀신에게 아양부려 날마다 목욕재계해서 고기가 깨끗하온즉, 이 두 가지 중에서 마음대로 골라 잡수시죠.”

했다. 그제야 범이 수염을 거스리고 낯빛을 붉히며,

 

에에, ‘()’란 것은 ()’인만큼 저도 의심나는 바를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해서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것이 몇만 명으로 셀 수 있고, ‘()’ ()’인만큼 귀신을 속이고 인민들을 유혹하여 해마다 남의 목숨을 끊은 것이 몇만 명으로 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뭇 사람의 노여움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것이 화하여 금잠(金蠶)이 되었으니,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했다. 이에 육혼은 또,

 

저 숲속(유림(儒林))에 살코기가 있사온데 그는 인자한 염통과 의기(義氣)로운 쓸개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지니고 순결한 지조를 품었으며, ()은 머리 위에 이고 있고, ()는 신처럼 꿰고 다닌답니다. 뿐 아니라 그는 입으로 백가(百家)의 말들을 외며 마음속으로는 만물의 이치를 통했으니, 그의 이름은 석덕지유(碩德之儒 높은 덕망을 지닌 유학자)’라 하옵니다. 등살이 오붓하고 몸집이 기름져서 오미(五味)를 갖추어 지녔답니다.”

한다. 범이 그제야 눈썹을 치켜 세우고 침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싱긋 웃으면서,

 

()이 이를 좀 상세히 듣고자 한다.”

하였다. 모든 창귀들이 서로 다투어가며 범에게 추천한다.

 

일음(一陰)일양(一陽)을 도()라 하옵는데, 저 유()가 이를 꿰뚫으며, 오행(五行)이 서로 낳고 육기(六氣)가 서로 이끌어 주옵는데, 저 유가 이를 조화시키나니, 먹어서 이보다 맛좋은 것이 없으리다.”

범이 이 말을 듣자 문득 추연(愀然)히 낯빛을 붉히며 기쁘지 않은 어조로서,

 

아니다. 저 음()과 양()이란 것은 한 기운에서의 죽고 삶에 불과하거늘, 그들이 둘로 나뉘었으니 그 고기가 잡()될 것이요, 오행은 각기 제 바탕이 있어서 애당초 서로 낳는 것은 아니거늘, 이제 그들은 구태여 자()()로 갈라서 심지어는 짜고 신맛들에 이르기까지 분배(分配)시켰으니 그 맛이 순()하지 못할 것이요, 육기는 제각기 행하는 것이어서 남이 이끌어 줌을 기다릴 것이 없거늘, 이제 그들은 망녕되이 재성(財成)보상(輔相)이라 일컬어서 사사로이 제 공을 세우려 하니, 그것을 먹는다면 어찌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 구역질이 나지 않겠느냐.”

하였다.

때마침 정()의 어느 고을에 살고 있으면서 벼슬을 좋아하지 않는 척하는 선비 하나가 있으니, 그의 호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었다. 그는 나이 마흔에 손수 교정한 글이 1만 권이요, 또 구경(九經)의 뜻을 부연(敷衍)해서 책을 엮은 것이 1 5천 권이나 되므로, 천자(天子)가 그의 의()를 아름답게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이름을 사모하였다.

그리고 그 고을 동쪽에는 동리자(東里子)라는 얼굴 예쁜 청춘과부 하나가 살고 있었다. 천자는 그의 절조(節操)를 갸륵히 여기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어짊을 연모하여, 그 고을 사방 몇 리의 땅을 봉하여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 하였다.

동리자는 이렇게 수절(守節)하는 과부였으나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각기 다른 성()을 지녔다. 어느 날 밤 그 아들 다섯 놈이 서로 노래처럼 된 말로서,

 

강 북편에 닭 울음 소리 / 水北雞鳴

강 남쪽엔 별이 반짝이네 / 水南明星

방 안 소리 자아하니 / 室中有聲

북곽선생 어인 일고 / 何其甚似北郭先生也

하고는 성 다른 형제 다섯이 번갈아서 문 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동리자가 북곽선생께 청하기를,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연모하였답니다. 오늘 밤엔 선생님의 글 읽으시는 음성을 듣고자 하옵니다.”

한다. 그제야 북곽선생은 옷깃을 여미고 꿇어앉아서 시() 한 장()을 읊었다.

 

병풍에는 원앙새요 반짝반짝 반딧불을 / 鴛鴦在屛耿耿流螢

가마솥과 세발솥은 무얼 본떠 만들었나 / 維鬵維錡云誰之型

흥이라 / 興也

그 꼴을 본 다섯 아들은 서로 말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과부의 문엔 함부로 들지 않는다.’ 하였는데 북곽선생은 어진이라서 그런 일 없을 거야.”

나는 듣자 하니, 이 고을 성문이 헐어서 여우가 구멍을 내었다고 하더군요.”

나는 들은즉, 여우가 천 년을 묵으면 환생(幻生)하여 능히 사람 시늉을 할 수 있다 하니, 그놈이 필시 북곽선생으로 둔갑한 것일게다.”

하고, 다시 서로 의논하되,

 

나는 듣건대, 여우의 갓을 얻는 자는 천금의 장자가 되고, 여우의 신을 얻는 자는 대낮의 그림자를 감출 수 있고, 여우의 꼬리를 얻는 자는 남을 잘 괴어서 누구라도 그를 기뻐한다 하니, 우리 저 여우를 잡아 죽여서 나눠 갖는 게 어떨꼬.”

하고, 이에 다섯 아들이 함께 어미의 방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북곽선생이 크게 놀라서 뺑소니를 칠 제 남들이 행여 제 얼굴을 알아볼까 해서 한 다리를 비틀어서 목덜미에 얹고 도깨비처럼 춤추고 귀신처럼 웃으며 문밖으로 나와서 들이뛰어 가다가 벌판 구덩이에 빠지니 그 속에는 똥이 가뜩 채워져 있었다. 간신히 휘어잡고 기어 올라서 목을 내밀고 바라본즉 범이 어흥하며 길을 가로막았다. 범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구역질하고 코를 싸 쥐고 머리를 왼편으로 돌리며,

 

에퀴이, 그 선비 구리도다.”

한다. 북곽선생이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서 고개를 쳐들고 여쭈되,

 

범님의 덕이야말로 참 지극하시지요. 대인(大人)은 그 변화를 본받고제왕(帝王)은 그 걸음을 배우며,남의 아들 된 이는 그 효성을 본받고,장수는 그 위엄을 취하며 그 거룩하신 이름은 신룡(神龍)과 짝이 되어 한 분은 바람을, 또 한 분은 구름을 일으키시니, 저 같은 하토(下土)의 천한 신하 감히 하풍(下風)에 있습니다.”

한다. 범은 이 말을 듣자 꾸짖는다.

 

에에, 앞에 가까이 오질 말렸다. 앞서 내 들은즉, ‘()’란 것은 ()’라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네가 평소에는 온 천하의 모든 나쁜 이름을 모아서 망녕되이 내게 덧붙이더니, 이제 다급해지자 낯간지럽게 아첨하는 것을 그 뉘라서 곧이 듣겠느냐. 대개 천하의 이치야말로 하나인만큼 범이 진정 몹쓸진대 사람의 성품도 역시 몹쓸 것이요, 사람의 성품이 착할진대 범의 성품도 역시 착할지니, 너희들의 천만 가지의 말이 모두 오상(五常)을 떠나지 않으며 경계나 권면이 언제나 사강(四綱)에 있긴 하나, 저 도회지나 큰 고을에 코 베이고 발 잘리고 얼굴에 먹바늘을 뜨고 다니는 것들은 모두 오륜(五倫)을 순종하지 않았다는 사람이란 말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밧줄이며 먹바늘이며 도끼며 톱 따위를 공급하기에 겨를이 없었지만 그 나쁜 짓들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는 본래 이러한 악독한 형벌이 없으니, 이로써 본다면 범의 성품이 사람보다 어질지 아니하냐. 그리고 범은 나무와 푸새를 씹지 않고,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으며, 강술 같은 좋지 못한 것을 즐기지 않고, 새끼나 기르는 것 같은 자잘구레한 것도 차마 먹지 않는다. 그리고는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을 사냥하고, 들에 나가면 마소를 사냥하되, 아직 구복(口腹)의 누()를 입거나 음식의 송사를 일으키거나 한 일은 없으니, 범의 도()야말로 어찌 광명 정대하지 아니하냐. 범이 노루나 사슴을 먹으면 너희들 사람은 범을 미워하지 않다가도, 범이 만일 마소를 먹는다면 사람들은 원수라고 떠들어대니, 이것은 아마 노루와 사슴은 사람에게 은혜로움이 없지만, 저 마소는 너희들에게 공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들은 저 마소의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도, 따르고 충성하는 생각도 다 저버리고 다만 날마다 푸줏간이 미어지도록 이들을 죽이고, 심지어는 그 뿔과 갈기까지 남기지 않고도 다시 우리들의 노루와 사슴을 토색질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산에서 먹을 것이 없고 들에서도 끼니를 굶게 하니, 하늘로 하여금 이를 공평하게 처리하게 한다면 너희를 먹어야 하겠는가, 놓아 주어야 되겠는가. 대개 제것 아닌 것을 취함을 도()라 하고, 남을 못살게 굴고 그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적()이라 하나니, 너희들이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쏘다니며 팔을 걷어붙이며 눈을 부릅뜨고, 함부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훔쳐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심지어는 돈을 형이라 부르고,장수되기 위해서 아내를 죽이는 일까지도 있은즉, 이러고도 인륜의 도리를 논할 수 있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메뚜기에게 그 밥을 빼앗고 누에한테서 옷을 빼앗으며, 벌을 제압하여 꿀을 약탈하고, 심한 자는 개미 알을 젓담아서 그 조상께 제사하니 그 잔인하고도 박덕함이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는가. 너희들은 이()를 말하며 성()을 논하면서 툭하면 하늘을 일컬으나, 하늘이 명()한 바로써 본다면 범이나 사람이 다 한가지 동물이요,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아서 기르는 인()으로써 논한다면 범과 메뚜기누에개미와 사람이 모두 함께 길러져서 서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요, 또 그 선악으로써 따진다면 뻔뻔스레 벌과 개미의 집을 노략질하고 긁어 가는 놈이야말로 천하의 큰 도()가 아니며, 함부로 메뚜기와 누에의 살림을 빼앗고 훔쳐 가는 놈이야말로 인의(仁義)의 큰 적()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범은 아직 표범을 먹지 않음은 실로 차마 제 겨레를 해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범이 노루나 사슴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마소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마소를 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며, 범이 사람을 먹는 것을 헤아려도 사람이 저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이만큼 많지 못할 것이다. 지난해 관중(關中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지방)이 크게 가물었을 때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몇만 명이요, 그 앞서 산동(山東)에 큰물이 났을 적에도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것이 역시 몇만 명 있었으니까. 그러나 서로 잡아먹음이 많기야 어찌 저 춘추 전국 시대만 하였으랴. 춘추 그 때엔 명색이나마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는 난리가 열일곱 번이요, 원수를 갚는다고 일으킨 싸움이 서른 번에 그들의 피는 천리를 물들였고 죽어 자빠진 시체는 백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범의 집에선 물이나 가뭄의 걱정을 모르므로 하늘을 원망할 것도 없고, 원수와 은혜를 모두 잊고 지내므로 다른 물건에게 미움을 입지 않고, 천명을 알고 그에 순종하므로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함에 혹하지 않고, 타고난 바탕 그대로 지녀서 천명을 다하므로 세속의 이해에 병들지 아니하니, 이것이 곧 범이 착하고도 성스러운 것이다. 그뿐일까. 그 한 곳의 아롱진 것을 엿보더라도 족히 그 문()을 온 천하에 보일 수 있겠고, 척촌의 병장기(兵仗器) 하나 지니지 않고 발톱과 날카로운 이빨만을 쓰는 것은 이로써 무()를 천하에 빛내는 것이었다. 범과 원숭이를 그릇에 그린 것은 효()를 천하에 넓히는 것이었으며, 하루에 한번 사냥하여 까마귀솔개참개구리말개미 따위와 함께 그 대궁[ 먹다 남은 음식]을 나눠 먹으니, 그 인()이야말로 이루 다 쓸 수 없겠고, 고자질하는 자는 먹지 않으며, 병폐한 자도 먹지 않고, 상제된 자도 먹지 않으니, 그 의()야말로 이루 쓸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먹고 사는 것이야말로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저 틀과 함정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저 새 그물과 작은 노루 그물과 물고기 그물과 큰 물고기 그물과 수레 그물과 삼태 그물 따위들을 만들었으니, 이는 애당초 그물을 뜬 자야말로 뚜렷이 천하에 화근을 퍼뜨린 놈일 것이다. 게다가 큰 바늘이니, 쥘 창이니, 날 없는 창이니, 도끼니, 세모난 창이니, 한 길 여덟 자 창이니, 뾰족 창이니, 작은 칼이니, 긴 창이니 하는 것들이 생기고, 또 화포(火礮)란 것이 있어서 터뜨린다면 소리가 화산(華山)을 무너뜨릴 듯 그 불 기운은 음양을 누설하여 그 무서움이 우레보다 더하거늘, 이러고도 그 못된 꾀를 마음껏 부리지 못하여서 이제는 보드라운 털을 빨아서 아교를 녹여 붙여 날을 만들되, 끝은 대추씨처럼 뾰족하고 길이는 한 치도 못 되게 하여, 오징어 거품에다 담그었다가 세로 가로로 멋대로 치고 찌르되, 그 굽음은 세모창 같고, 날카로움은 작은 칼 같고, 열쌤은 긴 칼 같고, 갈라짐은 가지창 같고, 곧음은 살 같고, 팽팽하기는 활 같아서, 이 병장기가 한 번 번뜩이면 모든 귀신들이 밤중에 곡()할 지경이라니, 그 서로 잡아먹기로도 가혹함이 뉘라서 너희들보다 더할 자 있겠느냐.”

한다. 북곽선생이 자리를 떠나 한참 엎드렸다가 일어나 엉거주춤하더니, 두 번 절하고 머리를 거듭 조아리며,

 

()에 이르기를 비록 아무리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욕재계를 한다면 상제(上帝)라도 섬길 수 있다 하였사오니, 이 하토(下土)에 살고 있는 천신(賤臣)이 감히 하풍(下風)에 섭니다.”

하고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듣되, 오래도록 아무런 분부가 없으므로 실로 황송키도 하고 적이 두렵기도 해서,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쳐다본즉 동녘이 밝았는데, 범은 벌써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마침 아침에 밭갈러 온 농부가,

 

선생님, 무슨 일로 이 꼭두새벽에 벌판에다 대고 절은 웬 절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북곽선생은,

 

내 일찍이 들으니

하늘이 높다 하되 / 謂天蓋高

머리 어찌 안 굽히며 / 不敢不跼

땅이 비록 두텁단들 / 謂地蓋厚

얕디디지 않을쏘냐 / 不敢不蹐

하였네그려.”

하고는 말 끝을 흐려 버렸다.

 

 

[D-001]비위(狒胃) : 짐승 이름. 비비(狒狒)의 일종.

[D-002]() : 말과 같은 짐승인데, 산해경(山海經), “몸은 희고 꼬리는 검으며 외뿔에 범처럼 생겼으며, 어금니와 발톱을 가졌고,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3]오색 사자(五色獅子) : 호회(虎薈), “누런 털에 오색이 찬란하고, 꼴은 사자와 같다.” 하였다.

[D-004]자백(玆白) : 급총궐서(汲冢闕書), “꼴이 말 같으며, 톱니가 날카로워서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5]표견(䶂犬) : 거수국(渠搜國)에 있는 개. 일명은 노견(露犬)인데, 날아서 호표를 먹는다 하였다.

[D-006]황요(黃要) : 개의 일종. 표범과 비슷하고, 허리 이상은 누르고 이하는 검으며, 작은 놈은 청요(靑要)라 하는데, ()는 요()와 같다.

[D-007]() : 범의 입에 들어가도 범이 물지 못한다. 그러면 범의 뱃속에서부터 먹어 나온다.

[D-008]추이(酋耳) : 범의 일종. 크고 꼬리가 길다 한다.

[D-009] …… 놈입니다 : 사람을 가리킨다.

[D-010]금잠(金蠶) : 박물지(博物志), “남방 사람이 금잠을 기르는데, 촉금(蜀錦)을 먹이고, 그 똥을 음식 속에 넣으면 독이 있다.” 하였다.

[D-011]육기(六氣) : ()()()()()().

[D-012]재성(財成)보상(輔相) : 역경(易經), “천지의 도를 마련해 이룩하며, 천지의 의()를 도와 준다.” 하였다.

[D-013]구경(九經) : 역경(易經)》ㆍ《서경(書經)》ㆍ《시경(詩經)》ㆍ《춘추좌전(春秋左傳)》ㆍ《예기(禮記)》ㆍ《주례(周禮)》ㆍ《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

[D-014]가마솥과 …… 만들었나 : 발 없는 가마솥과 세발솥은 그 모형이 다 다르다. 이로써 성 다른 다섯 아들에게 비하였다. 대체 다섯 아이들이 성도 다르고 얼굴도 같지 않으니, 이는 어떤 잡놈들과 관계해서 이런 것들을 낳았다는 의미.

[D-015]흥이라[興也] : 육의(六義)의 하나. 먼저 어떤 다른 물건을 읊어서 그 목적하고 있는 것을 끄집어 일으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원앙새를 먼저 이끌어서 남녀의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D-016]여우의 꼬리 : 꼬리라 하였지마는, 사실은 샅을 일컬었다.

[D-017]대인(大人) …… 본받고 : 역경(易經)에 나오는 구절.

[D-018]제왕(帝王) …… 배우며 : 송사(宋史) 태조기(太祖紀)에 나오는 말.

[D-019]남의 …… 본받고 : 서경(書經) 채침(蔡沈)의 주()에 나오는 말.

[D-020]장수는 …… 취하며 : 무관직에는 범호() 자를 많이들 쓴다. 예를 들면 촉한(蜀漢) 때의 오호대장(五虎大將)과 같은 것.

[D-021]신룡(神龍) …… 일으키시니 : 역경에 나오는 말.

[D-022]오상(五常) :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

[D-023]사강(四綱) : ()()()().

[D-024]돈을 …… 부르고 : 옛날 돈이 구멍이 났으므로 공방형(孔方兄)이라 하였고, 또는 돈을 가형(家兄)이라 한 이도 없지 않았다. () 나라 노포(魯褒) 전신론(錢神論)에 나오는 말들.

[D-025]장수되기 ……  : 전국 때 명장 오기(吳起)의 고사.

[D-026]개미 …… 제사하니 : 예기 내칙편(內則篇)에 나오는 일.

[D-027]고자질하는 …… 않으니 : 이 세 가지를 먹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나라 재래로부터 내려오는 속담.

[D-028]보드라운 …… 지경이라니 : 붓으로 문자를 써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한다는 비유. 옛날 창힐(倉頡)이 한자(漢子)를 처음 짓자, 귀신이 밤에 울었다 하였다.

[D-029]아무리 …… 있다 : 맹자(孟子) 이루편(離婁篇)에 나오는 한 구절.

[D-030]하늘이 …… 않을쏘냐 : 시경(詩經)에 나오는 글귀.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호질후지(虎叱後識)

 

 

연암씨(燕巖氏) 가로되,

 

이 편()이 비록 지은이의 성명은 없으나 대체로 근세 중국 사람이 비분(悲憤)함을 참지 못해서 지은 글일 것이다. 요즘 와서 세운(世運)이 긴 밤처럼 어두워짐에 따라 오랑캐의 화()가 사나운 짐승보다도 더 심하며, 선비들 중에 염치를 모르는 자는 하찮은 글귀나 주워 모아서 시세에 호미(狐媚)하니, 이는 바로 남의 묘혈(墓穴)을 파는 유학자(儒學者)로서 시랑 같은 짐승으로도 오히려 먹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닐는가 싶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본즉, 말이 많이들 이치에 어긋나서 저 거협(胠篋)도척(盜跖)과 뜻이 같다. 그러나 온 천하의 뜻있는 선비가 어찌 하룬들 중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청()이 천하의 주인이 된 지 겨우 네 대째건마는 그들은 모두 문무가 겸전하고 수고(壽考)를 길이 누렸으며, 승평을 노래한 지 백 년 동안에 온 누리가 고요하니, 이는 한()() 때에도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처럼 편안히 터를 닦고 모든 건설하는 뜻을 볼 때에 이 또한 하느님의 배치(配置)한 명리(命吏 제왕을 일컬음)가 아닐 수 없겠다. 옛날 어느 학자가 일찍이 하늘이 순순(諄諄)히 명령하신다는 말씀을 의심하여 성인(맹자)에게 질문했더니, 그 성인은 똑똑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서,

하느님은 말씀으로 하진 않으시고 모든 실천과 사실로서 표시하는 거야.’

하셨으니, 소자(小子) 일찍이 이 글을 읽다가 이곳에 이르러선 퍽 의심스러웠다. 이제 나는 감히 묻노니,

하느님께선 모든 실천과 사실로써 그의 의사를 표시하실진대, 저 오랑캐의 제도로써 중국의 것을 뜯어 고친다는 것은 천하의 커다란 모욕인만큼 저 인민들의 원통함이 그 어떠하며, 향기로운 제물과 비린내 나는 제물은 각기 그들의 닦은 덕()에 따라 다른 것이니, 백신(百神)은 그 어떤 냄새를 응감할 것인가.”

요컨대, 사람으로서 보면 중화(中華)와 이적의 구별이 뚜렷하겠지마는 하늘로서 본다면 은()의 우관(冔冠)이나 주()의 면류(冕旒)도 제각기 때를 따라 변하였거니, 어찌 반드시 청인(淸人)들의 홍모(紅帽)만을 의심하리오. 이에 천정(天定)인중(人衆)의 설()이 그 사이에 유행되고는, 사람과 하늘의 서로 조화되는 이()는 도리어 한 걸음 물러서서 기()에게 명령을 받게 되며, 또 이런 문제로써 옛 성인의 말씀에 체험하여도 맞지 않으면 문득 이르기를,

이건, 천지의 기수(氣數)가 이런 것이야.’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어찌 참으로 기수의 소치라 이르고 말 것인가. 아아, 슬프다. ()의 왕택(王澤)이 끊인 지 벌써 오래여서 중원의 선비들이 그 머리를 고친(치발(薙髮)) 지도 백 년의 요원한 세월이 흘렀으되, 자나깨나 가슴을 치며 명실(明室)을 생각함은 무슨 까닭인고. 이는 차마 중국을 잊지 못함이다. 그러나 청이 저를 위한 계책도 역시 허술하다 하리로다. 그는 전대(前代) 오랑캐 출신의 말주(末主)들이 항상 중화의 풍속과 제도를 본받다가 쇠망했음을 징계하여 철비(鐵碑)를 새겨서 전정(箭亭 파수 보는 곳)에 묻었으나, 그들 평소에 하고 버리는 말 가운데에는 언제나 스스로 그의 옷과 벙거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음이 없건마는, 오히려 다시 강약의 형세에만 마음을 두니 그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저 문왕(文王)처럼 깊은 꾀와 무왕(武王) 같은 높은 공렬로도 오히려 말주(은의 주왕(紂王))의 쇠퇴함을 구해 내지 못했거늘, 하물며 구구(區區)하게 저 의관 제도의 하찮은 것을 고집해선 무엇할 것인가. 그들의 옷과 벙거지가 진정 싸움에 경편하다면 저 북적(北狄)이나 서융(西戎)의 그것인들 아니될 이유는 없을 것인즉, 그들은 의당 힘껏 저 서북쪽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도리어 중국의 옛 습속을 따르게 한 연후에야 비로소 천하에 홀로 강한 체할 것이어늘, 이제 온 천하의 인민들을 모두 욕된 구렁에 몰아넣고는 홀로 호령하되,

잠깐 너희들의 수치를 참으면 우리를 따라 강하게 될지어다.’

하나, 나는 그 강하다는 것이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굳이 의관 제도만으로 강함이 된다면, 저 신시(新市)녹림(綠林) 사이에 그 눈썹을 붉게 물들이거나 또는 그 머리 수건을 노란 빛깔로 고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했던 도적놈이라야 되는 것은 아니리라. 가령 어리석은 인민들로 하여금 한번 일어나서 그들이 씌워 주었던 벙거지를 벗어서 땅에 팽개친다면, 청 황제(淸皇帝)는 벌써 천하를 앉은 자리에서 잃어버리게 될지니, 지난날 이를 믿고서 스스로 강하다고 뽐내던 것이 도리어 망하는 실마리가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그 빗돌을 새겨 묻어서 후세에 경계한 일이야말로 어찌 부질없는 짓이 아니리오. 이 편은 애초엔 제목(題目)이 없으므로 이제 그 글 중에 호질(虎叱)’이란 두 글자를 따서 제목을 삼아 두어 저 중원의 혼란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하였다.

 

 

[C-001]호질후지(虎叱後識) : 다른 에는 이 소제가 없었던 것을, 이제 주설루본을 좇아 추록하였다.

[D-001]거협(胠篋)도척(盜跖) : 모두 장자의 편명. 남화경(南華經) 외물편(外物篇)에 나오는 말.

[D-002]옛날 …… 거야 : 맹자 만장편에 나오는 구절. 여기서 어느 학자란 맹자의 제자인 만장(萬章)을 말함.

[D-003]소자(小子) : 연암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서 한 말.

[D-004]천정(天定) …… () : 귀잠지(歸潛志),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하늘도 막아 낼 수 없고, 하늘이 정해 놓은 것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 하였다.

[D-005]신시(新市)녹림(綠林) : 이 둘은 모두 당시의 소위 유적(流賊)이 출몰하는 근거지.

[D-006]눈썹을 …… 물들이거나 : 적미적(赤眉賊). 서한(西漢) 말년의 유적.

[D-007]머리 …… 고쳐서 : 동한(東漢) 말기의 황건적(黃巾賊).

[D-008]도적놈 : 옛날 지배 계급의 역사에서는, 정의를 들고 일어서서 항쟁하는 농민들은 모두 도적이라 일컬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9일 을사(乙巳)

 

 

개다.

옥전현(玉田縣)에서 새벽에 떠나 서팔리보(西八里堡)까지 8, 오리둔(五里屯) 7, 채정교(釆亭橋) 5, 대고수점(大枯樹店) 10, 소고수점(小枯樹店) 2, 봉산점(蠭山店) 3, 별산점(鱉山店) 12, 송가장(宋家庄)을 구경하고 모두 47리를 가서 점심 먹고, 또 별산점에서 이리점(二里店)까지 2, 현교(現橋) 5, 삼가방(三家坊) 2, 동오리교(東五里橋) 16리인데, 이 다리의 일명은 용지하(龍池河) 어양교(漁陽橋)라 한다. 거기에서 계주성(薊州城)까지 5, 서오리교(西五里橋) 5, 방균점(邦囷店) 15, 모두 50리이다. 이날 95리를 가서 방균점에서 묵었다.

산 오목한 곳에 큰 나무가 있는데 몇 백 년 동안을 잎이 피어나지 않으나 가지나 줄기가 썩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고수(枯樹)’라 일컫는다. 송가장의 성 둘레는 2, ()의 천계(天啓) 연간에 송씨(宋氏)들이 쌓은 것이다. 그들의 이른바 외랑(外郞)이란 서리(胥吏 아전(衙前))의 별칭(別稱)인데, 송씨가 이 지방의 큰 성바지여서 그 일족이 몇 백 명이요, 살림이 모두 넉넉하여 명청이 교체될 즈음에 저희들끼리 이 성을 쌓아서 겨레들을 모아 지키었다. 성 가운데엔 대() 셋을 세웠는데 높이가 각기 여남은 길이나 되고 문 위엔 다락을 세웠고, 집 뒤에는 네 층 높은 다락이 있고, 맨 꼭대기엔 금부처를 모셨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눈앞이 시원스레 트이었다. 청인(淸人)이 처음 이곳을 들어올 때 온 문중을 모아서 성을 사수하였고, 천하의 대세가 정한 뒤에도 곧 나가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청인이 이를 미워하여 해마다 은() 1천 냥을 벌로 받치게 하였더니, 강희 말년에 이르러서는 그 대신으로 말먹이 풀 1천 단씩을 내게 하였다.

성중에는 아직도 큰 집 여남은 채가 모두 송씨들이며 노비들도 오히려 오륙백 명이나 된다 한다.

계주(薊州) 성안엔 인물들이 번화하니 실로 북경 동쪽의 거진(巨鎭)답다. 산 위엔 안녹산(安祿山)의 사당이 있고 성중엔 돌로 세운 패루 셋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금자(金字)로 대사성(大司成)이라 새기고, 그 아래엔 국자좨주(國子祭酒 국자감(國子監)의 벼슬 이름)  삼대고증(三代誥贈)’이라고 나란히 써서 붙였다. 이곳의 술맛은 관동에서 으뜸이라 하므로 한 주루(酒樓)에 들어가 여러 사람과 함께 흉금을 터놓고 한번 취토록 마셨다. 독락사(獨樂寺)에 들어간즉, 정전(正殿)의 제액(題額)은 자비사(慈悲寺)였고, 그 뒤엔 2층 다락이 서 있는데 그 가운데엔 아홉 길이나 되는 금부처를 세웠고, 그 머리 위엔 작은 금부처 수십 개를 앉히었다. 다락 밑엔 한 부처를 누인 채 비단 이불을 덮어 두었는데, 그 다락의 현판엔 관음지각(觀音之閣)’이라 하고, 그 왼편엔 조그마한 글자로 태백(太白)’이라 써 붙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저기 이불 덮은 채 누운 것은 부처님이 아니고 이백(李白)이 취해서 자는 소상(塑像)입니다.”

한다. 행궁(行宮)이 있긴 하나 굳게 잠그고는 구경을 허락하지 않는다. 객관에 돌아온즉, 문밖엔 장사치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말과 나귀에다 서책서화골동 등을 실었고, 곰을 놀리는 등 여러 가지 재주를 구경했다. 그러나 뱀 놀리는 자 범 놀리는 자도 있었던 모양이나 벌써 흩어져 버렸으므로 미처 보지 못해서 한스러운 일이다. 앵무새를 파는 자가 있으나 날이 저물어서 그 털빛을 상세히 볼 수 없으므로 막 등불을 찾아 오는 동안에 그 자가 그만 가버려서 더욱 유감이었다.

 

 

[D-001]안녹산(安祿山) : 본래 당 나라 때의 잡호(雜胡)로서, 당 현종(唐玄宗) 때 양귀비의 눈에 들어 몇 개 절도사(節度使)를 겸임했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후계자 문제로 아들 경서(慶緖)에게 시해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0일 병오(丙午)

 

 

개다.

방균점(邦囷店)에서 별산장(別山庄)까지 2, 곡가장(曲家庄) 2, 용만자(龍灣子) 3, 일류하(一柳河) 2, 현곡자(現曲子) 2, 호리장(胡李庄) 10, 백간점(白幹店) 2, 단가점(段家店) 2, 호타하(滹沱河) 5, 삼하현(三河縣) 5, 동서조림(東西棗林) 5, 모두 46리를 가서 점심 먹고, 조림에서 백부도장(白浮屠庄)까지 6, 신점(新店) 6, 황친점(皇親店) 6, 하점(夏店) 6, 유하점(柳河店) 5, 마이핍(馬已乏) 6, 연교보(烟橋堡) 7, 모두 41리이다. 이날 84리를 가서 연교보에서 묵었다.

계주는 옛날 어양(漁陽)이다. 그 북에 반산(盤山)이 있는데 위태로이 솟은 봉우리가 깎아 세운 듯하고, 봉우리마다 위가 퍼지고 아래가 가늘어서 그 꼴이 소반과 같으므로 반산이란 이름을 얻었고, 또 일명 오룡산(五龍山)이라고도 한다. 내 앞서 원중랑(袁中郞) 반산기(盤山記)를 읽다가 기승(奇勝)한 곳이 많음을 알았더니, 이제 기어코 한번 올라가 보고 싶었지만 함께 갈 사람이 없으니 하는 수 없었다.

그 산이 비록 가파로우나 몇백 리를 웅장(雄壯)하게 서려 있을뿐더러 겉은 바위가 입혔지만, 속은 살찐 흙이어서 과실 나무들이 극히 많으므로 연경(燕京)에서 날마다 소비하는 대추배 등속이 모두 이곳에서 나는 것이라 한다.

어양교(漁陽橋)에 다다르니 길 왼편에 양귀비(楊貴妃)의 사당이 있어서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안녹산의 사당과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천하에 돈 있는 자가 아무리 많다손 치더라도 하필이면 이런 추잡한 사람들의 사당을 지어서 명복(冥福)을 빈단 말인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무리 복을 구한단들 사곡해선 안 되리라 / 求福不回

하였으니, 이런 것이야말로 돈만 헛되이 버렸다 하겠다. 혹은 이르기를,

 

성인(공자)도 정() 나라() 나라의 음시(淫詩)를 뽑아버리지 않아서 후세 사람의 경계를 삼지 않았던가. 뿐만 아니라 계주 금병산(錦屛山) 석벽에는 양웅(揚雄)이 반교운(潘巧雲)을 베는 상()도 있다.”

고 변명한다. 백간점에서 구경하러 온 수재(秀才) 하나를 만나서 서로 이야기할 제 그는,

 

안녹산 역시 명사랍니다. 그가 앵두를 두고 읊은 시에,

앵두 알 한 광주리 / 櫻桃一籃子

파랑 노랑이 반씩일세 / 半靑一半黃

절반은 회왕(안녹산의 아들)에게 / 一半寄懷王

절반은 주지(안녹산의 스승)에 나눠 보내고저 / 一半寄周摯

하였기에, 어떤 이가 청하기를,

당신의 주지(周摯) 구를 회왕(懷王) 구와 바꾸었으면 운()이 맞지 않겠소.’

하였더니, 녹산은 크게 노하여,

그게 무슨 말야. 주지로 하여금 우리 집 아이 위에 누르게 한단 말이야.’

했으니, 이 정도의 시인을 어찌 사당이 없고야 배기겠소.”

하고는,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지나는 길에 향림사(香林寺)에 들어갔다. 불전(佛殿)에는 향림암(香林菴)’이라 씌어 있고 그 위에는 금자로서 향림법계(香林法界)’라 씌었으니, 이는 강희 황제의 글씨이다. 순치(順治 청 세조(世祖)의 연호)의 아우 누이가 청상과부로서 여승이 되어 이 암자에 있다가 나이 아흔이 넘어서 죽었다 한다. 그리고 이 암자에는 모두 비구니(比丘尼)만이 살고 있었다. 뜰 가운데에는 줄기가 흰 소나무 두 그루가 있어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나무 껍질의 비늘도 푸른 채 희다. 암자 동편에는 작은 탑 다섯이 있고 그 좌우에는 역시 흰 소나무 세 그루가 있어서 푸른 빛이 뜰에 가득 차고, 바람 소리가 마치 물결처럼 서늘함을 돕는다. 그러고 보니 백간점이라는 이름도 아마 흰 줄기 소나무에서 말미암은 듯싶다.

차츰 연경이 가까워지자 거마 울리는 소리가 메마른 하늘에 우레 소리인 듯하고, 길 양편에는 모두 부호가들의 무덤인데, 담을 둘러서 마치 여염집같이 즐비하고 담 밖에는 하수를 이끌어 해자를 만들었고, 문 앞의 돌다리는 모두 무지개처럼 공중에 떠 있는 듯하고, 가끔 돌로 패루(牌樓)를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해자 가의 갈대 사이엔 때로 콩깍지만 한 작은 배가 매여 있고, 다리 아래에는 여기저기 고기 그물을 쳐놓았다. 담 안에는 수목이 울창한데 가끔 기왓골이나 처마 끝이 보이기도 하고, 혹은 지붕 위의 호리병 박 꼭대기가 솟아 오르기도 하였다.

점방에서 잠깐 쉬노라니 울 밖에 예쁜 아이들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노래하며 가는데, 비단저고리에 수놓은 바지를 입고 옥같이 맑은 얼굴에 살결이 눈처럼 희다. 혹은 박자판을 치고, 혹은 피리를 불며, 혹은 비파를 뜯고, 나란히 서서 천천히 노래한다. 모두들 곱고도 아름다운 치장이다. 이들은 모두 연경의 거지들로서 거리로 돌아다니며 멀리서 온 장사치들에게 하룻밤 베개를 같이하고 몇백 냥의 돈을 받는 일이 있다 한다.

길 옆에 삿자리를 걸쳐서 햇빛을 가리고 군데군데 놀이 하는 곳을 만들었는데, 삼국지(三國志)를 연출(演出)하는 자, 수호전(水滸傳)을 연출하는 자, 서상기(西廂記)를 연출하는 자가 있어서, 높은 소리로 그 사()를 부르고 음악이 이에 따른다. 온갖 장난감들을 벌여놓고 파는데 모두들 어린이들의 일시적 장난감이었지만, 그 재료가 희귀한 것일뿐더러 만든 솜씨가 하나도 교묘하지 않은 게 없으며, 어떤 것은 손만 거쳐도 깨질 물건인데도 그 수공은 몇 냥이나 좋이 된다. 탁자 위에는 관공(關公)의 상을 몇만 개나 별여놓았는데 칼을 가로 잡고 말을 탔으나 그 크기는 겨우 두어 치밖에 안 되며, 모두 종이로 만들어 교묘하기 짝이 없다. 이는 아이들 장난감인데 이렇게 많음을 보니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하도 황홀찬란한 것들을 많이 보았는지라 이목과 정신이 함께 피로할 지경이었다.

배로 호타하를 건너서 삼하현 성중에 들어가 손용주(孫蓉洲) 유의(有義)의 댁을 찾았더니, 용주는 벌써 달포 전에 산서(山西)에 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 집은 성 동편 관왕묘(關王廟) 곁으로 대여섯 칸 초가집이니 그의 가난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손 심부름하는 아이도 없이 주렴 너머로 부인의 목소리가 마치 연연(燕燕)앵앵(鶯鶯)처럼 아름답다. 그는,

 

저희 집 주인께선 어떤 글방 훈장으로 맞이되어 산서 지방에 가시고는 제 홀로 딸년 하나 데리고 살고 있는 형편이옵니다. 조선서 멀리 오신 선생님께서 이런 누지(陋地)에 왕림하셨는데도 공손히 맞아들이지 못하여 죄송하옵니다.”

하고는 또 사람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제야 담헌(湛軒 홍대용의 호)의 편지와 정표를 내어 주렴 앞에 놓고 나온다. 담이 허물어진 곳에 나이 열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계집애 하나가 섰는데, 그 흰 얼굴에 조촐한 목덜미, 아마 용주의 따님인 듯싶다.

삼하현은 옛날 임후(臨昫)이다.

 

 

[D-001]원중랑(袁中郞) : 명의 저명한 문학가. 원굉도(袁宏道). 중랑은 그의 자.

[D-002]양웅(揚雄) …… () : 중국 고전 소설 수호지(水滸誌)에 나오는 양웅이, 그의 애인 반교운이 행실이 부정하다고 하여 금병산에서 찔러 죽였다.

[D-003]당신의 …… 않겠소 : 그 두 글귀를 바꾸면 황() 자와 왕() 자가 같은 양() 운이 된다.

[D-004]손용주(孫蓉洲) 유의(有義) : 연암의 친구 홍대용(洪大容)이 전년에 왔을 때에 깊이 사귀었던 학자. 용주는 호요, 유의는 이름.

[D-005]마치 …… 아름답다 : 이 부분은 다른 본에는 모두, “몹시 분명하지 않다.”로 되었으나, ‘다백운루본을 좇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8 1일 정미(丁未)

 

 

아침엔 개고 찌는 듯 덮다가 오후에는 비가 오다 멎다 했고, 밤엔 큰비가 우레치며 내리다.

연교보에서 새벽에 떠나서 사고장(師姑庄)까지 5, 등가장(鄧家庄) 3, 호가장(胡家庄) 4, 습가장(習家庄) 3, 노하(潞河) 4, 통주(通州) 2, 영통교(永通橋) 8, 양가갑(楊家閘) 3, 관가장(關家庄) 3, 모두 35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거기에서 다시 삼간방(三間房)까지 3, 정부장(定府庄) 3, 대왕장(大王庄) 3, 태평장(太平庄) 3, 홍문(紅門) 3, 시리보(是里堡) 3, 파리보(巴里堡) 2, 신교(新橋) 6, 동악묘(東岳廟) 1, 조양문(朝陽門) 1, 서관(西館)에 드니 모두 27리이다. 이날 모두 62리를 걸었다. 압록강으로부터 연경까지 모두 33() 2 30리였다.

새벽에 연교보를 떠나 변()() 여러 사람과 먼저 갔다. 몇 리를 가지 않아서 날이 벌써 밝아지는데 별안간 우레 같은 소리가 우렁차게 공중을 울린다. 이는 노하(潞河)의 배 속에서 나는 포성이라 한다. 아침노을이 어린 곳으로 멀리 바라본즉, 돛대들이 총총히 늘어선 갈대 같고, 버드나무 위에는 뗏목과 풀뿌리 따위가 많이 걸렸는데, 이는 한 열흘 전에 연경에 큰비가 내려서 노하가 넘치어 민가 몇만 호를 쓸어가고, 물에 휩쓸린 사람과 짐승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한다. 내 이제 말 위에서 담뱃대를 쥔 채 팔을 뻗쳐서 버드나무 위의 물 찬 흔적을 가늠해 본즉, 땅에서 두서너 길 됨직하다. 물가에 다다르니 물이 넓고도 맑으며 배가 빽빽이 들어선 것이 장성(長城)의 웅대함과 견줄 만하고 큰 배 십만 척에 모두 용()을 그렸는데, 호북(湖北)의 전운사(轉運使 운수(運輸)를 맡은 벼슬 이름)가 어제 호북의 곡식 3백만 석을 싣고 왔다 한다. 한 배에 올라가서 그 대략의 제도를 구경하니, 배 길이는 모두 여남은 발이나 되고 쇠못으로 장치하였으며, 그 위에는 널빤지를 깔아서 층 집을 세웠으며 곡물들은 모두 선창 속에 그냥 쏟아 넣었다.

집은 모두 아로새긴 난간, 그림 기둥, 아롱진 들창, 수놓은 지게문으로 꾸미어, 그 제도가 뭍의 건물과 다름없이 밑은 창고이고 위에는 다락으로 되었으며, 그 패액(牌額)주련(柱聯)장유(帳帷)서화(書畵) 등이 모두 아득히 신선의 세계였다. 지붕에는 쌍돛을 높이 세웠는데 돛은 가는 등()으로 엮어 몇 폭이나 되고, 온 배에 연분(鉛粉)을 기름에 타서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노란 칠을 입혔으므로 한 방울 물도 스며들지 않으니 비가 내려도 아무런 걱정이 없는 것이다.

선기(船旗)에는 절강(浙江)’이니 산동(山東)’이니 하는 배 이름이 크게 씌었으며, 물을 따라 1백 리를 내려오는 사이에 배들은 마치 대밭처럼 빽빽하게 들어 섰으되, 남으로 직고해(直沽海)에 줄곧 통하여 천진위(天津衛)를 거쳐 장가만(張家灣)에 모이게 된다. 그리하여 천하의 선운(船運)들이 모두 통주(通州)에 모여들게 되니, 만일 노하의 선박들을 구경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수도의 장관(壯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삼사(三使)와 함께 한 배에 오르니, 그 양쪽에는 채색 난간을 두르고 그 앞에는 휘장을 드리우고 창을 세워서 문을 만들고, 양편에는 온갖 의장(儀仗)기치(旗幟)도창(刀鎗)검극(劒戟)봉인(鋒刃) 등을 세웠는데 모두 나무로 만들었고, 방 안에는 관() 하나가 놓이고 그 앞에는 교의와 탁자가 늘어 놓였으며 탁자 위에는 온갖 제기(祭器)를 벌여 놓았다. 상주는 푸른 들창 아래에 걸터앉았는데 몸에는 무명 옷을 입었고 머리는 깎지 않아서 두어 치나 자란 것이 마치 중과 같은 모양이다.

남과 수작을 즐기지 않고 앞에는 의례(儀禮) 한 권을 놓았다. 부사가 그 앞으로 다가서서 읍하니 상주가 역시 읍하여 답례하고 이마를 조아리며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다가 다시 교의에 앉는다. 부사가 나더러 그와 필담(筆談)하여 보라 하기에 나는 그제야 부사의 성명과 관함을 써 보이었더니, 상주 역시 머리를 조아리며 쓰되,

 

저의 성은 진()이요, 이름은 경()이옵고, 가계(家系)는 호북(湖北)이옵니다. 선친(先親)께옵서 북경에 벼슬하여 한림원(韓林院) 수찬(修撰)을 지내시고 금년 칠월 구일에 세상을 버리시자, 임금께옵서 토지(土地)와 돌아갈 배를 내리시옵기에 고향으로 유해(遺骸)를 모시고 돌아가는 길이옵니다. 상복이 몸에 있으므로 손님을 접대하질 못하와 죄송합니다.”

한다. 부사가 글씨로 그의 나이를 물었으나 진경은 대답하지 않는다. 부사가 또 글씨로,

 

중국서는 누구든지 모두 삼년상(三年喪)을 치르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진경은,

 

성인께옵서 인정을 따라 예를 제정하였사온즉 저같이 불초한 자도 힘껏 따르고자 하옵지요.”

한다. 부사는,

 

상제(喪制)는 모두들 주자(朱子)의 학설을 따르는가요?”

했더니, 진경은,

 

그렇습니다. 모두 문공(文公 주희(朱熹)의 시호)을 따르지요.”

한다. 창 밖에 아롱진 대 난간이 사창에 비치어 영롱하고, 옆 배에서 흘러나오는 풍류 소리가 소란하며, 갈매기 날고 내와 구름 끼고 누대(樓臺)의 아름다움이 모두 선창에 어리고 흰 모래톱 아득한 언덕에는 바람을 안은 돛들이 나타났다 꺼졌다 한다. 사람으로 하여금 슬며시 이것이 곧 부가(浮家)범택(泛宅)들인 줄로 알고도 마치 저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 화려한 방안에 몸을 담고서, 강호(江湖) 경물(景物)의 아름다운 낙()을 겹누르는 듯싶었다. 부사가 몸을 돌려 미소를 지으며,

 

저야말로 월파정(月波亭) 상주라고 이르겠군.”

하기에, 나 역시 가만히 웃었다.

정사가 사람을 보내어 구경할 것이 있으니 얼른 오라 하기에 곧 부사와 함께 일어날 제, 등 뒤에 무엇이 툭하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다본즉, 부사의 비장 이서구(李瑞龜)가 넘어져서 겸연쩍은 듯이 웃고 있다. 대개 배 위에 깐 널빤지가 얼음처럼 미끄러워 발 붙이기가 힘들다. 부사가 쩔쩔매자 좌우로 부축하고 가다가 이를 돌아다본다는 것이 그만 옆의 사람들까지 함께 쿵하고 넘어졌다.

휘장 안에서 네 사람이 한창 투전을 하고 있기에 나는 들여다보았으나 모두 만주 글자여서 도시 알 수 없다, 혹은,

 

이것의 이름은 마조(馬吊)랍니다.”

한다. 깊숙한 곳에 탁자를 늘어놓고 그 위에 준()()()() 등의 그릇을 진열했는데 모두 기이하게 생긴 물건들이다. 또 한 문을 나선즉, 정사와 서장관이 널빤지에 앉아서 선창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안이 곧 주방(廚房)인데, 흰 베로 머리를 감싼 늙은 부인 둘이 가마솥에 녹두나물미나리 등속을 삶아서 다시 찬물에 헹구고 있고, 또 나이 열여섯쯤 되어 보이는 처녀 하나가 있는데 아리따운 얼굴이 견줄 데 없다. 낯선 손님을 보고도 조금도 수줍은 태가 없이 찬찬하고 다소곳이 제 맡은 일만 하고 있는데, 고운 깁옷의 주름은 안개처럼 어른어른하고 하얀 팔목은 연뿌린양 민듯하다. 아마 진씨(秦氏)의 차환(叉鬟)으로서 아침상을 보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배 양편에는 파초선(芭蕉扇)을 두루 꽂았는데 한림(翰林)’지주(知州)’정당(正堂)’포정사(布政使)’라 썼으니, 이는 모두 죽은 이의 이력들이었다.

강 가운데에는 이곳저곳 뱃놀이가 한창이다. 작은 배에 혹은 붉은 일산을 펴고, 혹은 푸른 휘장을 두르고는 삼삼오오(三三五五) 서로 짝을 지어 각기 다리 짧은 교의에 기대기도 하고, 혹은 평상 위에도 앉아서 책권이며 그림축이며 향로며 차도구들을 벌여 놓았고, 혹은 봉생(鳳笙)이나 용관(龍管)을 불고, 혹은 평상에 의지하여 글씨와 그림도 치고, 더러는 술 마시며 시 읊기도 하는데, 그들이 반드시 모두가 고인(高人)운사(韻士)들은 아니겠지만, 그윽하게 아취가 있어 보인다.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오른즉, 수레와 말이 길을 막아서 다닐 수가 없다.

동문에서 서문까지 줄곧 5리 사이에 외바퀴 수레 몇 만 채가 꽉 차서 몸 돌릴 곳이 없다. 말에서 내려 한 점방으로 들어가니 기려하고 번창함이 벌써 성경(盛京)산해관 따위에는 비길 것이 아니었다.

길이 비좁아 간신히 조금씩 나아가 본즉, 시문(市門)의 현판에는 만수운집(萬艘雲集)’이라 하였고, 한길 위에 이층 높은 누()를 세우고는 성문구천(聲聞九天)’이라 써붙였다. 성 밖에는 창고 셋이 있는데 그 제도를 성곽과 같이 해서, 지붕은 기와로 이었고 그 위에는 공기창을 내어서 나쁜 기운을 내보내게 하고, 벽에도 곁 구멍을 뚫어서 습기가 가시게 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창고를 둘러 해자[]를 만들었다.

영통교(永通橋)에 이르렀는데, 이 다리는 일명 팔리교(八里橋)라 한다. 길이가 수백 발, 너비는 여남은 발이요, 무지개 문의 높이도 여남은 발이나 되는데, 좌우에는 난간을 돌리고 그 위에는 사자 몇백 마리를 앉혔는데, 그 새김의 정미로움이 마치 도장(圖章) 꼭대기의 가는 무늬와 같았다. 다리 밑에 선박들은 줄곧 조양문(朝陽門 북경의 동북문) 밖에 닿아서 다시 작은 배로써 물문을 열고 태창(太倉)에 끌어들인다 한다.

통주에서 연경까지 40리 사이는 돌을 깎아서 길에 깔았다. 쇠 수레바퀴가 서로 맞닿는 소리가 더욱 커서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이 아찔하게 한다. 길가 양편에는 모두 무덤인데 담이 잇달고 나무가 울창하여 봉분은 보이지 않는다.

대왕장(大王庄)에 이르러서 잠깐 쉬고 곧 떠났다. 길 왼편에 돌 패루 세 칸이 있기에 말에서 내려 그 만든 양을 보니, 이는 곧 퉁국유(佟國維 청 강희 때의 충신)의 무덤이었다. 패루에는 그의 벼슬들을 나란히 새겨 붙였고, 윗층에는 여러 가지 조칙을 새겼다. 곧 다리를 건너 문 안에 들어서니 좌우에 여덟모난 화표주(華表柱 망주석)를 세우고 그 위에는 돌 사자를 새겼다. 가운데에는 길을 쌓아 올려서 층대 높이가 한 발이나 되며, 길 좌우에는 늙은 소나무 수십 그루가 섰고, 3층 돌대를 쌓고 그 위에 큰 비석 열셋을 세웠는데, 모두 퉁씨(佟氏) 삼대의 훈벌(勳閥)을 표창한 조칙(詔勅)들이다. 퉁국유의 일명은 융과다(隆科多)라고도 하며 그 아내는 하사례씨(何奢禮氏)이다. 북쪽 담 밑에 봉분 여섯이 나란히 있는데, 띠를 입히지 않고 밑은 둥글고 위는 뾰족하게 석회로 번질번질하게 발랐다. 누런 기와로 이은 집 수십 칸이 있는데 단청이 이미 우중충하며, 층계는 무너지고 채색한 주렴은 해졌는데, 집 안에는 박쥐똥이 가득할 뿐 텅 비고 괴괴하여 지키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마치 깊은 산중의 낡은 절과 같다. 매우 괴이한 일이다.

아마도 훈벌이 혁혁하였던 집안이었으나 이제는 자손이 없어서 그런 것인 듯싶다.

동악묘(東嶽廟)에 이르러 심양에 들어갈 때처럼 삼사가 옷을 갈아입고 반열을 정돈하였다. 이때 통역관 오림포(烏林哺)서종현(徐宗顯)박보수(朴寶秀) 등이 벌써 그 가운데에 와서 기다린다. 그들은 모두 망포(蟒袍)수보(繡補 청 관리의 예복)에다 목에는 조주(朝珠)를 걸고, 말을 타고 앞을 인도하여 조양문에 이르니, 그 제도는 산해관과 다름없으나 다만 상세히 볼 수 없었다. 검은 먼지가 공중에 자욱하니 수레에 물통을 싣고 곳곳마다 길바닥에 물을 뿌린다.

사신은 곧장 예부(禮部)를 찾아 표문(表文)과 자문(咨文)을 바치러 갔다. 나는 그와 헤어져서 조명회와 함께 먼저 사관으로 갔다. 순치(順治) 초년에 조선 사신의 사관을 옥하(玉河) 서쪽 기슭에다 세우고 옥하관(玉河館)이라 일컬었더니, 그 뒤에 악라사(鄂羅斯)가 점령한 바 되었다. 악라사는 이른바 대비달자(大鼻㺚子)인데 하도 사나우므로 청인도 그들을 누를 길이 없어서, 할 수 없이 회동관(會同館)을 건어호동(乾魚衚衕)에다 세우니, 이는 곧 도통(都統) 만비(滿丕)의 집이었다. 만비가 도륙당할 때에 집안 사람이 많이 자결하였으므로 그 집에 귀매(鬼魅)가 많았다 한다. 혹은 우리나라 별사(別使 임시 사행(使行))와 동지사가 한꺼번에 맞부딪치면 서관(西館)에 나누어 들게 되었다. 연전에 별사가 먼저 건어호동에 들었으므로 금성위(錦城尉)가 마침 동지사로 와서 서관에 머문 일도 있었다. 지난해 건어호동에 있는 회동관이 불타 버리고 여태까지 다시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번 걸음에도 서관에 옮겨 들게 되었다.

아아, 슬프다. 옛 역사에 이르기를,

 

문자(文字)가 생기기 전엔 연대(年代)와 국도(國都)를 상고할 수 없다.”

하였으나, 문자가 생긴 이후 21() 3천여 년 동안에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과연 어떠한 술법으로 하였을 것인가. 이는 곧 그들의 이른바 유정(惟精)유일(惟一)이란 심법(心法)으로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하를 다스림에는 요()순씨(舜氏)가 있음을 알고, 홍수를 다스림에는 하우씨(夏禹氏)가 있음을 알며, 정전(井田) 제도를 마련함엔 주공씨(周公氏)가 있음을 알고, 학문의 선전엔 공자씨(孔子氏)가 있음을 알고, 재정과 세금을 골고루 마련함엔 관중씨(管仲氏)가 있음을 알았을 뿐이다. 나는 알지 못하겠구나. 그 밖에 또 다시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머리를 짜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심력을 기울였으며,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그 총기를 다했던고. 뿐 아니라 또 얼마나 많은 성인이 벌써 저 21 3천여 년 동안 문자(文字)가 창조되기 전에 이를 기초(起草)하고 이를 빛내고 이를 수정하였던고. 생각하건대, 이러한 여러 성인이 그 생각과 그 심력과 그 총기를 다 기울여서 기초하고 빛내고 수정하였으니, 그들은 장차 이것으로써 자기의 사리(私利)를 취하려 하였음일까, 아니면 길이길이 만세를 두고 모든 백성들과 그 행복을 함께 누리고자 하였음일까.

그리하여,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의 심술(心術)이 같지 못하고 사업(事業)이 각기 다르면 이를 곧 우인(愚人)’이라 지목하였을뿐더러, 그를 일찍이 집과 나라를 망친 자라고 시종 헐뜯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체로 마음의 음탕함과 귀와 눈의 영리함이 도리어 성인을 능가하므로, 더욱이 후세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그의 몸을 배격하면서도 은근히 그의 공훈을 본받고, 또 겉으로는 그 사람을 욕하면서도 속으론 그 이익점을 얻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의 온갖 기이한 기술과 음탕한 솜씨가 날로 부풀어오른 법이다.

보라, 대개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민 자는 이른바 걸()()가 아니었으며, 산을 허물어 골을 메우고 만 리의 장성을 쌓은 자는 이른바 몽염(蒙恬)이 아니었으며, 천하에 곧은 도로를 닦은 자는 이른바 진 시황(秦始皇)이 아니었으며, 천하의 일이 법()이 아니고는 아니 된다 해서 드디어 나무를 옮겨 보기도 하고, 또는 쓰레기를 버리는 것까지 간섭하여 그 제도를 통일시킨 자는 이른바 상앙(商鞅)이 아니었던가. 대개 이 네댓 사람들은 그의 역량과 재주와 정신기백과 계획과 시설이 족히 천지를 움직일 만하였던 만큼, 애초에는 모든 성인들과 함께 이 우주 사이에서 나란히 설 수 있으련마는, 불행히 서계(書契 문자(文字))가 이미 이룩된 뒤에 나왔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와 이익의 누림은 오로지 뒷사람에게로 돌아가고, 그 몸은 화단(禍端)이 되어 길이 우부의 이름을 듣게 되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는 더욱 알지 못하겠구나.  21() 3천여 년의 사이에는 몇 명의 걸주와, 몇 명의 몽염과, 몇 명의 진 시황과, 몇 명의 상앙이 있어서, 그 서계가 이룩된 이후의 것을 본받았던 것인가. 서계가 이룩된 뒷일이 그러하니, 서계가 이룩되기 전의 일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하여 이를 아는가 하면, 옛날에 진시황이 육국(六國)의 것을 본떠서 아방궁(阿房宮)의 전전(前殿)을 크게 지었으니, 본뜬다는 것은 저 환쟁이들의 이른바 모사(摹寫)가 곧 그것이다. 육국의 선비들이 그들의 임금을 유세(遊說)할 때에는 모두 걸주를 욕하지 않은 이가 없었건마는, 그 실에 있어서는 앞서 이른바 궁궐을 옥과 구슬로 꾸몄다는 것이 마침내는 족히 저 장화대(章華臺 전국 초()의 누각)와 황금대(黃金臺 전국 때 연 소왕(燕昭王)의 궁전)의 부본이 되는 동시에, 장화대황금대는 역시 아방궁의 윤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항우(項羽)가 이에 한번 불질러서 곧 평지의 재가 되고 만 것은 족히 뒷세상의 토목(土木) 공사(工事)만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한 거울이 되었음직하다. 그 본심은 이왕 내가 이에 살지 못할 바에는 다른 사람이 와서 차지함을 싫어했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그렇다면 저 팽성(彭城)의 도시 또한 아방궁이 될 것이었으나, 다만 미처 하지 못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 한 고조의 궁궐)을 크게 공사할 때에, 한 고제(漢高帝 고제는 유방의 묘호)는 귀와 눈이 없지는 않았건마는, 짐짓 모르는 체하다가 궁궐이 다 이룩된 뒤에는 도리어 소하를 꾸지람하였으니, 이 꾸지람이 실로 옳다면 어째서 소하를 당장 죽여 저자에 조리돌리지 않았으며, 또 궁궐을 불질러 태워 버리지 아니하였던고. 이로써 미루어 볼 것 같으면, 앞서 육국의 것을 본떠서 아방궁의 전전을 지은 것은 곧 미앙궁을 위하여 터를 닦은 것에 지나지 않은 셈이었다.

내 이제 조양문에 들어서자, 곧 저 요순의 이른바 유정유일의 마음씨가 이러하고, 하우씨의 홍수 다스림이 이러하고, 주공의 정전이 이러하고, 공자의 학문이 이러하고, 관중의 이재(理財)가 이러하였음이 눈에 선하게 띄었으며, 주가 옥과 구슬로 궁궐을 세운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고, 몽염이 산을 허물어서 골을 메운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으며, 진 시황이 곧은 길을 닦은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고, 상앙이 제도를 통일시킨 것도 이런 방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성인이 일찍이 율()()()() 등을 하나로 통일시켜서 둥근 것은 그림쇠에 맞도록, 모난 것은 곡척(曲尺)에 맞도록 하고, 곧은 것은 먹줄에 맞추었기에, 천하에 퍼지자 천하가 이를 좇고, 주에게 주어도 걸주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성인이 일찍이 높은 언덕에 넘실거리는 홍수를 다스릴 제, 그 삼태기에 삽질하는 번거로움과 부착(斧鑿)의 날카로움과, 기술자의 교묘함과 역부의 많음이, 어찌 뫼를 헐고 골을 메워 만 리의 장성을 쌓음에 그치었으며, 성인이 일찍이 천하의 밭이란 밭은 죄다 금을 그어 정전의 제도를 만들면서, 그 밭두둑과 도랑 사이에는 수레 몇 채가 달릴 수 있도록 마련하였은즉, 그 곧고 바름이 어찌 천 리의 한길을 닦음만 못하였으며, 성인이 일찍이 그 문인(門人)의 물음에 대답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말씀하셨으나, 이는 다만 말로만 하였을 뿐 몸소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세의 임금들이 반드시 그 학문이 성인보다 나은 것이 아니로되 곧 이를 행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역시 어찌 중화(中華)의 민족만이 그러하리오. 이적(夷狄)의 출신으로서 중원의 임금이 된 자치고, 일찍이 도()를 물려받아서 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의식(衣食)이 넉넉한 뒤에야 예절을 지킬 수 있다 하였은즉, 후세의 임금들 중에 그 나라를 튼튼히 하고 그 군사를 굳세게 하고자 한 자가, 차라리 각박하고 인정머리 없다는 이름을 무릅쓸지언정, 어찌 그 자신을 위해서 사리를 탐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또 그 심술의 위험미묘한 때를 논하여 본다든지, 혹은 그 사업을 공사(公私)의 사이에서 분간한다면, 저들에게 곧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 공리(功利)의 효과를 누림에 있어서는, 비록 그 방법이 이적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 여러 가지 좋은 점을 모아서 행하는 데 있어서는 역시 정일을 본받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앞서 이른바 재지와 역량이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다 함이 오늘날의 중국을 이룩한 것이며, 21 3천여 년 동안의 모든 제도를 이에서 가히 상고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나라 이름을 ()’이라 하고, 수도를 순천부(順天府)’라 하니, 천문으로 보면 기()() 두 별의 사이였고, 지리로 말한다면 우공(禹貢)에서 이른바 기주(冀州)의 터전으로서, 고양씨(高陽氏 오제(五帝)의 하나인 전욱(顓頊))는 유릉(幽陵)이라 하였고, 도당씨(陶唐氏 ())는 유도(幽都), ()는 유주(幽州), ()()은 기주(冀州), ()은 상곡(上谷)어양(漁陽)이라 하였으며, ()의 초기엔 연국(燕國)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나누어서 탁군(涿郡)이라 했고, 또 고쳐서 광양(廣陽)이라 하였으며, ()()에서는 범양(范陽)이라 하였고, ()는 남경이라 하였다가 뒤에는 고쳐서 석진부(析津府)라 하였으며, ()은 연산부(燕山府)라 하였고, ()은 연경(燕京)이라 했다가 곧 중도(中都)라 고쳤으며, ()은 대도(大都)라 하였고, ()의 초년엔 북평부(北平府)라 하였다가, 태종 황제(太宗皇帝 청 태조의 8)가 이에 수도를 옮기고 순천부(順天府)라 고쳤더니, 이제 청()은 이내 이곳에 수도를 세웠다. 그 성 둘레는 40, 왼쪽에 창해(滄海)가 둘리고, 오른편에는 태항산(太行山)을 끼고, 북으로 거용관(居庸關)을 베고, 남으로는 하수(河水)제수(濟水)가 옷깃처럼 되어 있다. 성문의 정남은 정양(正陽), 오른편은 숭문(崇文), 왼편은 선무(宣武), 동남은 제화(齊化), 동북은 조양(朝陽), 서남은 평택(平澤), 서북은 서직(西直), 북동은 덕승(德勝), 북서는 안정(安定)이고, 외성(外城)에 문이 일곱 있으며, 자금성(紫禁城 황제가 거처하는 궁성)에는 문이 셋 있고, 궁성(宮城) 17리인데 문이 넷이며, 그 전전(前殿)을 태화(太和)라 하여 오로지 한 사람만이 살고 있으니, 그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그 종족은 여진(女眞) 만주부(滿洲部), 그 위()는 천자(天子), 그 호()는 황제(皇帝)이고, 그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었으며, 그가 자신을 일컬을 때는 ()’이라 하고,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그를 높여서 폐하(陛下)’라 하며, 말씀을 내면 ()’라 하고, 명령을 내리면 ()’이라 하며, 그 갓은 홍모(紅帽)이고, 그 옷은 마제수(馬蹄袖)이며, 그는 국통(國統)을 이은 지 벌써 네 대였고, 연호(年號)를 세워 건륭(乾隆)’이라 한다. 이 글을 쓴 자가 누구인가 하면 조선에서 온 박지원(朴趾源)이고, 쓴 때가 언젠가 하면 건륭 45년 가을 8월 초하루이다.

 

 

[D-001]2 30 :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2 49.

[D-002]노하(潞河) : 통주(通州)에서 천진(天津)까지 이르는 운하.

[D-003]월파정(月波亭) 상주 :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되던 말인데, 황주(黃州) 월파정에 놀러 온 풍류적인 상주(喪主).

[D-004]마조(馬吊) : 투전 40장을 가지고 노는 중국의 놀음감.

[D-005]조주(朝珠) : 청의 제도에 5() 이상과 한림(翰林)중서(中書) 등이 가슴에 달게 된 1 8개의 구슬.

[D-006]회동관(會同館) :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 나중에는 사린관(四隣館)과 합쳐서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 하였다.

[D-007]만비(滿丕) : 청 강희 때의 외교관. 아라사와 조약을 맺을 때에도 참가하였다.

[D-008]21() : () 이전 21()의 소위 정사(正史) 21()라 하였다.

[D-009]유정(惟精)유일(惟一) : 서경(書經), “인심(人心)은 오직 정미고, 도심(道心)은 오직 위태롭다.” 하였는데, 이 몇 구절에 동방 천고 성인의 정신이 표현되었다.

[D-010]하우씨(夏禹氏) : 9년 동안 치수 사업에 공적이 많아서 순()의 선양을 받아 임금이 되었다.

[D-011]정전(井田) 제도 : 중국 고대의 농촌 경리에 적용하던 일종의 토지 제도.

[D-012]관중씨(管仲氏) : 전국 제()의 정치가. 특히 경제에 밝았다. ()은 그의 자요, 이름은 이오(夷吾).

[D-013]몽염(蒙恬) : ()의 유명한 장수. 진 시황을 도와서 장성을 쌓아 흉노(匈奴)를 물리쳤다.

[D-014]도로를 …… 아니었으며 : 진 시황이 6국을 통일한 뒤에, 함곡관(函谷關)을 중심으로 하여 각처에 곧은 길을 냈다.

[D-015]상앙(商鞅) : 진의 정치가. 그는 법치(法治)를 주장하여 처음 법을 행할 때에, 나무 기둥을 남문에 세우고 그것을 북문까지 옮기면 상금을 준다 하여 백성의 믿음을 얻었다. 마침내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서 부국 강병하였으나, 지나치게 가혹한 법을 만들었으므로 나중에는 실패하였다.

[D-016]육국(六國) : 전국 때의 진()을 제외한 초()()()()()().

[D-017]아방궁(阿房宮) : 중국 진 시황이 지은 궁전 이름. 그 뒤 항적(項籍)이 관중에 들어와서 이 궁을 불살랐으나, 석 달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D-018]소하(蕭何) : ()의 관리로서, 한 고제(漢高帝)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재상이 되었다.

[D-019]모르는 …… 꾸지람하였으니 : 사기(史記)에 나오는 한 고제와 소하의 고사.

[D-020]의식(衣食) …… 하였은즉 : 관이오(管夷吾) 관자(管子)에 나오는 구절.

[D-021]마제수(馬蹄袖) : 만인(滿人) 옷의 소매 모양을 형용하여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동악묘기(東嶽廟記)

 

 

동악묘는 조양문 밖 1리에 있다. 그 건물의 웅장하고 화려함은 여태까지 보던 중 처음이다. 성경의 궁궐도 이에 비기면 어림없었다. 묘문(廟門)의 건너편에는 두 패루가 섰는데 파란 유리벽돌과 초록빛 유리벽돌로 쌓았다.

그 찬란하고 휘황함이 앞서 본 돌집을 능가한다. 이 사당은 원()의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연간에 비로소 세웠고, ()의 정통(正統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대에 더 넓혔다. 그 가운데에는 인성제(仁聖帝 동악태제(東嶽太帝)의 별칭)병령공(炳靈公 동악태제의 셋째 아들)사명군(司命君 사람의 목숨을 맡은 귀신)과 네 승상(丞相 태제를 모신 네 정승)의 소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원()의 소문관(昭文館) 태학사(太學士) 정봉대부(正奉大夫) 비서감경(秘書監卿) 유원(劉元 원의 저명한 조각가)이 만든 소상으로서, 유원은 그 만드는 교묘한 법이 천하에 짝이 없었다.

요즘 청의 강희 경진(1700) 3월에 불이 나서 전(殿)()와 함께 사당 가운데 있던 모든 소상이 다 불타 버리고, 다만 양편의 도원(道院)만 남아 있었다. 강희 황제는 특히 내탕금(內帑金 황제의 사용금)을 내리고, 아울러 내외의 대소 관원들에게 명하여 비용을 돕게 하고, 유친왕(裕親王)으로 하여금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비로소 이룩하자 황제가 친히 거둥하였고, 옹정 황제와 지금 황제 역시 내탕금을 내어 이를 수리하였다.

그 제일전(第一殿)에는 영소화육(靈昭化育)’이라 써 붙였는데, 동악태제가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었고, 모신 제신(諸神)은 왼편에 문(), 오른편에 무()가 늘어섰다.

() 앞에는 몇 섬들이 쇠항아리를 놓아서, 심지 네 개에 불을 댕겨 둔 채 철망(鐵網)을 둘렀다. 그리고 등불 앞에는 한 길이나 되는 쇠화로를 놓고 침향(沈香)을 태웠다. 그리하여 검은 등에 푸른 불꽃이 번뜩이고, 전자(篆字)처럼 얽힌 연기가 푸르며, 술을 드리운 휘장에는 쇠풍경이 댕그랑 울리는데, 전각은 침침해서 꿈속 같다. 그 제이전(第二殿)에는 여상(女像) 셋이 앉았는데, 역시 구슬로 꾸민 술을 드리웠고, 양편에서 모신 자도 모두 여선(女仙)들이다.

그 제삼전(第三殿)에는 무슨 신()을 본뜬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낭무(廊廡)에는 72() 36()을 벌여놓은 것이 기괴하여 천태만상이었다. () 위에 놓인 값진 모든 그릇들은 거의 송()() 시대의 관지(款識)가 많고, 뜰 가운데에는 큰 비석 1백여 개가 섰는데, 조맹부(趙孟頫)가 쓴 것이 많고, 또 그 아우 세연(世延)과 우집(虞集)이 쓴 것도 있었다. 동서의 제일항(第一行)에 선 비석은 모두 누런 기와로 덮고, 그 위에는 고루(鼓樓)를 설치했는데, 동쪽의 것은 별음(鼈音)’이라 하고, 서쪽의 것은 경음(鯨音)’이라 하였다.

 

 

[C-001]동악묘기(東嶽廟記) : 다른 본에는 모두 관내정사의 편말에 있었으나, ‘주설루본에 의하여 여기로 옮겼다.

[D-001]조맹부(趙孟頫) : 원의 저명한 서예가. 맹부는 이름이요, 자는 자앙(子昂).

[D-002]우집(虞集) : 원의 문학가. 집은 이름이요, 자는 백생(伯生).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일 무신(戊申)

 

 

개다.

간밤에 뇌성 벽력과 함께 내린 비를 겪고서, 아직 수리하지 못한 객관의 창호지가 떨어졌으므로, 새벽에 찬바람이 들어와서, 감기가 조금 들고 입맛을 잃었다.

아침 일찍 아문(衙門)에 모두들 모여드니, 이들은 예부(禮部)호부(戶部)의 낭중(郞中 낭관)과 광록시(光祿寺)의 관원이었다. 쌀과 팥 대여섯 수레와 돼지거위채소 등속이 바깥 뜰에 가득히 찼다. 그 부()의 관원이 교의를 나란히 하여 앉았는데, 아무도 감히 떠드는 자가 없었다.

정사에게는 날마다 관()의 찬()으로 거위 한 마리, 닭 세 마리, 돼지고기 다섯 근, 생선 세 마리, 우유 한 병, 두부 세 근, 백면(白麪) 두 근, 황주(黃酒) 여섯 항아리, 엄채(醃菜 김치) 세 근, 다엽(茶葉) 넉 냥, 오이지 넉 냥, 소금 두 냥, 청장(淸醬) 여섯 냥, 감장(甘醬) 여덟 냥, () 열 냥, 향유(香油) 한 냥, 화초(花椒 산초) 한 돈, 등유(燈油) 세 병, 납초 석 자루, 내수유(奶酥油 우유로 만든 낙농 제품) 석 냥, 세분(細粉) 근 반, 생강 닷 냥, 마늘 열 뿌리, 빈과(蘋果 능금) 열다섯 개, 배 열다섯 개, 감 열다섯 개, 말린 대추 한 근, 포도 한 근, 사과 열다섯 개, 소주 한 병, 쌀 두 되, 나무 서른 근, 또 사흘마다 몽고양(蒙古羊) 한 마리씩을 준다.

그리고 부사와 서장관에게는 날마다 두 사람 어울러서 양() 한 마리, 거위 각기 한 마리, 닭 각기 한 마리, 생선 각기 한 마리, 우유 어울러서 한 병, 고기 어울러 세 근, 백면 각기 두 근, 두부 각기 두 근, 엄채 각기 세 근, 화초 각기 한 돈, 다엽 각기 한 냥, 소금 각기 한 냥, 청장 각기 여섯 냥, 감장 각기 여섯 냥, 초 각기 열 냥, 황주 각기 여섯 항아리, 오이지각기 넉 냥, 향유 각기 한 냥, 등유 각기 한 종지, 쌀 각기 두 되, 빈과 어울러 열다섯 개, 사과 어울러 열다섯 개, 배 어울러 열다섯 개, 포도 어울러 닷 근, 말린 대추 어울러 닷 근, 그 밖의 과실은 닷새 만에 한 번씩 준다. 부사에게는 날마다 나무 열일곱 근, 서장관에게는 열닷 근씩을 준다.

그리고 대통관(大通官) 3명과 압물관(押物官) 24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닭 한 마리, 고기 두 근, 백면 한 근, 엄채 한 근, 두부 한 근, 황주 두 항아리, 화초(花椒) 닷 푼(), 다엽 닷 돈, 청장 두 냥, 감장 넉 냥, 향유 너 돈, 등유 한 종지, 소금 한 냥, 쌀 한 되, 나무 한 근씩을 주고, 또 득상(得賞) 종인(從人) 30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고기 근 반, 백면 반 근, 엄채 두 냥, 소금 한 냥, 등유 어울러 여섯 종지, 황주 어울러 여섯 항아리, 쌀 한 되, 나무 너 근씩을 주고, 무상(無賞) 종인 2 21명에게는 날마다 각기 고기 반 근, 엄채 넉 냥, 초 두 냥, 소금 한 냥, 쌀 한 되, 나무 너 근씩을 주었다.

 

 

[D-001]광록시(光祿寺) : 식량(食糧)과 찬품(饌品)의 제절을 맡은 관부.

[D-002]득상(得賞) 종인(從人) : 상을 탈 자격을 지닌 수행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3일 기유(己酉)

 

 

개다.

해 뜬 뒤에 비로소 관문(館門)을 연다. 나는 곧 시대장복과 함께 관을 떠나 첨운패루(瞻雲牌樓) 밑까지 걸어와서 태평거 하나를 세내었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아까 주방(廚房)에서 하룻동안 쓸 것을 주기에, 시대로 하여금 돈으로 바꾸어서 차에 실으니, () 두 냥이 돈 2 2백 닢이었다. 시대는 오른편에, 장복은 뒤에 태우고는 빨리 달려서 선무문(宣武門)에 이르니, 그 제도가 조양문과 같다. 왼편은 상방(象房 코끼리를 기르는 곳)이요, 오른편은 천주당(天主堂)이다. 문으로 나와 오른편으로 굽어서 유리창(琉璃廠)에 들어간즉, 첫 거리에 오류거(五柳居)라는 세 글자의 간판이 붙었다. 이는 곧 도옥(屠鈺)의 책사이다. 지난해에 무관(懋官)들이 이 책사에서 책을 많이 샀다 해서 퍽 흥미 있게 오류거를 이야기하더니, 이제 이곳을 지나고 보니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싶다. 그리고 무관이 나를 떠나보낼 때에 또 말하기를,

 

만일 당원항(唐鴛港) 낙우(樂宇) 을 찾으려거든, 먼저 선월루(先月樓)에 가서 그 남쪽 조그만 거리로 돌아들면 둘째 번 대문이 곧 당씨(唐氏)의 댁이랍니다.”

하였다. 곧 차를 몰아 양매서가(楊梅書街)에 이르러 우연히 육일루(六一樓)에 올랐다가 유황포(兪黃圃) 세기(世奇) 를 만나서 잠깐 이야기할 제, 서문포(徐文圃) () 와 진립재(陳立齋) 정훈(庭訓) 등이 마침 자리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담한 선비이기에 날을 골라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수레를 돌려 북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길가에 금자로 선월루(先月樓)’라 쓴 것이 별안간 수레 앞에 눈부시게 보인다. 이 역시 책사이다. 곧 수레에서 내려 두 하인과 함께 당씨(唐氏)의 집을 찾아갔는데, 마치 익숙한 곳을 찾듯이 했다. 문 앞에 하인 셋이 나오더니,

 

대감께선 아침 일찍 아문(衙門)에 나가셨답니다.”

한다. 나는,

 

그럼, 어느 때쯤이나 돌아오실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묘시(卯時)에 나가셔서 유시(酉時)면 돌아오십니다.”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잠깐 외관(外館)에 올라 땀을 들이시지요.”

하기에 곧 따라가니, 옹졸한 학구(學究) 한 사람이 나와 맞이한다. 그의 성은 주()라고 기억되나 이름은 잊어버렸다. 앞서 듣건대, 원항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모두들 잘났다더니, 이제 두 아이가 방에서 나와 공손히 읍하는 것을 보니, 묻지 않아도 원항의 아들임이 틀림없기에 나는 그 두 아이의 나이를 물었더니, 맏이는 열셋, 다음은 열하나였다. 나는 곧,

 

형의 이름은 장우(張友), 아우의 이름은 장요(張瑤)가 아니냐?”

하고 물었더니, 둘이 함께,

 

예에, 그렇습니다. 어른께선 어찌 아시옵니까?”

한다. 나는,

 

너희들이 글 잘 읽는다 하여 이름이 해외(海外)에까지 들리기에.”

하였다. 조금 뒤에 그 집 하인이 파초잎 모양으로 생긴 흰 주석 쟁반을 받들고 나와서 더운 차 한 그릇, 빈과(蘋果) 세 개, 양매탕(楊梅湯) 한 그릇을 은근히 권한다. 그리고 하인이 그 집 늙은 마나님의 말씀을 전갈하되,

 

지난해 조선 어른 두 분이 가끔 제 집에 놀러 오셨는데, 지금도 평안하신지요. 만일 청심환 가지고 오신 게 있으시면 한 두 개 주십시오.”

한다. 나는,

 

마침 지니고 온 것이 없사오니, 뒷날 다시 올 때 갖다 드리겠습니다.”

하고 답을 전했다. 앞서 듣기에, 당씨의 늙은 마나님은 늘 동락산방(東絡山房)에 있으며, 나이가 여든이 넘어도 근력이 오히려 좋다더니, 이제 하인이 멀리 손으로 가리키며,

 

노마나님이 방금 중문에 나오셔서, 귀국 사람들의 옷차림을 구경하시고 계십니다.”

한다. 나는 바로 보기가 겸연쩍어서 못 본 체하고는, 붉은 종이로 만든 중머리 부채 두 자루와 여러 가지 빛깔의 시전지(詩箋紙)를 내어 장우와 장요에게 나눠 주고, 열흘 안으로 다시 오리라 약속하고 곧 일어나 문을 나섰다. 돌아보니 마나님이 오히려 중문에 섰고 아환(丫鬟) 둘이 옆에서 부축하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니, 학발(鶴髮)이 그 머리를 덮었으나 몸이 웅건해 보이고, 아직도 화장과 보물 꾸미개를 폐하지 않았다. 두 하인의 말이,

 

아까 당씨의 여러 하인이 우리들을 좌우로 에워싸서 뜰 가운데에 세워 놓고, 늙은 마나님이 우리 옷을 벗겨서 그 제도를 보겠다 하므로, 소인들이 황공하여 감히 바로 치어다보지 못하고, ‘날이 더워서 입은 것이 단지 홑적삼뿐입니다.’ 하니, 그는 돌려 세워 보기도 하고 모로 세워 보기도 하고는, 다시 여러 하인을 시켜 깃고대도련을 들추어보고, 술과 먹을 것을 내어다 먹입디다. 소인들의 의복이 이렇게 남루해서 부끄러워 죽을 뻔했습니다.”

한다. 돌아오는 길에 회자관(回子館 이슬람 교당)에 들러 구경하였다.

 

 

[D-001]천주당(天主堂) : 당시 북경에는 네 천주당이 있었는데, 연암이 찾아간 곳은 곧 선무문 안 서천주당(西天主堂)이었다.

[D-002]유리창(琉璃廠) : 북경성 남부에 있는 거리. 본래는 해왕촌(海王村)이었으나, 유리가마가 있으므로 이름지었다. 명 때부터 서화와 골동의 저자로 유명하였다.

[D-003]오류거(五柳居) : 유리창의 서문 가까이 있는 서사(書肆). 주인 도정상(陶正祥)은 서지학(書誌學)에 밝아서, 사고전서(四庫全書) 중에 강남(江南)의 희서(稀書)를 많이 바쳤다.

[D-004]도옥(屠鈺) : 이문조(李文藻) 유리창서사기(琉璃廠書肆記)에는, 오류거의 주인이 도씨(陶氏)’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4일 경술(庚戌)

 

 

개다. 더위가 심하여 삼복(三伏)이나 다름 없었다. 수레를 몰아 정양문을 나와서 유리창을 지나면서,

 

이 창()이 모두 몇 칸이나 되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어떤 이가,

 

모두 27만 칸이나 된답니다.”

하고 답한다. 대개 정양문에서부터 가로 뻗어 선무문에 이르기까지의 다섯 거리가 모두들 유리창이었고, 국내와 국외의 모든 보화가 이에 쌓였다.

내 그제야 한 누() 위에 올라서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였다.

 

이 세상에 진실로 저를 아는 사람 하나를 만났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이다. 아아, 인정은 대체 제 몸을 알고자 하되 이를 알지 못하면, 때로는 커다란 바보나 또는 미치광이처럼 되어서, 저 아닌 남이 되어 저를 보아야만 저도 비로소 다른 물건과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몸이 움직이는 곳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성인은 이 방법을 지녔으므로 세상을 버리고도 아무런 고민이 없으며, 외로이 서 있어도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남이 나를 알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노여운 뜻을 품지 않는 이라면 어찌 군자(君子)가 아니겠느냐.’ 하였고, 노담(老耼 노자(老子))도 역시, ‘나를 알아 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이다.’ 하였으니, 이렇듯이 남이 나를 몰라 보았으면 하여, 혹은 그의 의복을 바꾸기도 하려니와, 혹은 그 얼굴을 못 알아보게 하고, 혹은 그 성명을 갈아 버린다. 이는 곧 성()()과 현()() 들이 세상을 한 개의 노리개로 보아서, 비록 천자의 자리를 준다 하더라도 그의 즐거움과 바꾸지 않는 까닭이다. 이러한 때에 천하에 혹시 한 사람만이라도 저를 아는 이가 있다면, 그의 자취는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실()에 있어서는, 천하에 단지 한 사람만이라도 그를 알아 주는 이가 없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 미복(微服)으로 강구(康衢)에서 놀았으나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늙은이가 나타났고, 석가(釋迦)가 얼굴을 달리 하였으나 아난(阿難 석가의 으뜸가는 제자)이 그를 알았고, 태백(太伯)은 몸에 그림을 떠서 놓아 남만(南蠻)으로 도피하였으나 중옹(仲雍)이 뒤를 따랐고, 예양(豫讓)은 몸에 칠을 하였으나 그 벗이 알았고, 삼려대부(三閭大夫)는 얼굴이 파리했을 때에 어부(漁夫)가 알았고, 치이자(鴟夷子 범려(范蠡)의 호)가 오호(五湖)에 뜰 때 서시(西施)가 따랐고, 장록(張祿)은 객관에서 가만히 걸을 때 수가(須賈)를 만났고, 장자방(張子房)은 이교(圯橋 다리 이름)에서 조용히 걸을 때 황석공(黃石公)을 만났다. 이제 내 이 유리창 중에 홀로 섰으니, 그 옷과 갓은 천하에 모르는 바이요, 그 수염과 눈썹은 천하에 처음 보는 바이며, 반남(潘南 연암의 관향)의 박()은 천하에 일찍이 듣지 못하던 성일지라도, 내 이에서 성()도 되고 불()도 되고 현()도 되고 호()도 되어, 그 미침이 기자(箕子)나 접여(接輿)와 같기로, 장차 그 누가 와서 이 천하의 지락(至樂)을 논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가 묻기를, ‘공자께서 송()을 지나갈 때에 무슨 관()을 쓰셨을까.’ 하기에, 나는, ‘아마 우물과 창고와 평상과 거문고가 벌여 있고, 그는 앞에 있었던 것이 별안간 뒤에 있었을 것이며, 또 물고기 가죽이나 표범 무늬처럼 별의별 변덕이 많았을 테니, 누가 그 참된 모습을 알 수 있으리오.’ 하고는 껄껄 웃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르기를, ‘선생님께서 계시니 회()가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볼 때, 공자가 천하의 지기(知己)를 논한다면 오직 안자(顔子 안회를 높여 부르는 말) 한 사람이 있었을 따름일 것이다.”

 

[D-001]격양가(擊壤歌) : 요가 미복으로 큰 거리를 미행하였을 때에, 격양하던 농부가 찬송의 노래를 불렀다.

[D-002]태백(太伯) : ()의 왕자로서, 그 자리를 아우에게 양보하여 남만으로 도피하였다.

[D-003]중옹(仲雍) : 태백의 아우, 곧 우중(虞仲). 태백이 자기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함을 보고 자기도 뒤를 따랐다.

[D-004]예양(豫讓) : 전국 때 지백(智伯)의 신하. 지백이 죽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서 몸에 옻칠을 하고 입에 숯을 머금어서 문둥이와 벙어리로 행세하였을 때, 그의 아내는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벗 중에는 아는 이가 있었다.

[D-005]삼려대부(三閭大夫) : 전국 초()의 정치가이며, 문학가 굴평(屈平). 삼려대부는 벼슬. 자는 원(), 또는 영균(靈均). 그가 정계에서 추방된 뒤에 어부사(漁父辭)를 지었는데, 그 중에 어부와 문답한 말이 있다.

[D-006]장록(張祿) : 전국 때 진()의 정치가 범저(范雎)의 변성명.

[D-007]수가(須賈) : 전국 때 위()의 고관. 일찍이 범저를 박대했는데, ()에 사신갔을 때에 범저를 만나서 그의 궁곤을 측은히 여겨 선물을 주었으나, 실은 그때 범저는 이미 진의 승상이 되었는데 궁곤을 가장하여 수가를 속였다.

[D-008]장자방(張子房) …… 만났다 : 자방은 장량(張良)의 자. 황석공은 장량에게 비서(秘書)를 전해 준 도사. 장량이 창해(滄海)의 역사(力士)로 하여금 진시황을 저격(狙擊)하게 하고는 조용히 이 다리에서 걸을 때, 황석공이 비서(秘書)를 주었다.

[D-009]그 미침이 …… 같기로 : 세상에 뜻을 잃고 미친 척하고 산 사람. () 말의 기자는 거짓 미쳐서 종이 되었고, 접여는 전국 초()의 광사(狂士) 육통(陸通).

[D-010]공자께서 ……  : 공자가 일찍이 송의 광() 땅 사람에게 습격을 당해서 미복으로 지나갔다.

[D-011]우물과 …… 거문고 : 맹자(孟子)에 나오는 순()과 상()의 고사. 여기서는, 이 네 가지는 학자의 일상생활에 보통 있을 수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D-012]그는 …… 것이며 :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가 공자의 학문이 변화 무궁하여 포착할 수 없음을 찬송한 말로, 논어에 실렸다.

[D-013]물고기 …… 테니 : 역경 군자는 표변(豹變)한다.” 하였다.

[D-014]선생님께서 …… 있겠습니까 : 이 한 구절은, 공자가 미복으로 송을 지나치다가 안회가 뒤처졌던 것을 죽은 줄만 알았다고 하였을 때에 안회가 답한 말인데, 논어에 실렸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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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일신수필(馹汛隨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일신수필(馹汛隨筆)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일신수필(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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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수필(馹汛隨筆)

 

일신수필(馹汛隨筆) 7 15일 신묘(辛卯)에 시작하여 23일 기해(己亥)에 그쳤다. 모두 아흐레 동안이다.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 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5 62리다.

1. 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2. 가을 7 15일 신묘

3. 북진묘기(北鎭廟記)

4. 거제(車制)

5. 희대(戲臺)

6. 시사(市肆)

7. 점사(店舍)

8. 교량(橋梁)

9. 16일 임진(壬辰)

10. 17일 계사(癸巳)

11. 18일 갑오(甲午)

12. 19일 을미(乙未)

13. 20일 병신(丙申)

14. 21일 정유(丁酉)

15. 22일 무술(戊戌)

16. 23일 기해(己亥)

17. 강녀묘기(姜女廟記)

18. 장대기(將臺記)

19. 산해관기(山海關記)

 

 

 

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한갓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이들과 학문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인데, 하물며 그의 평생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에서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어떤 이가 성인(聖人)이 태산(泰山)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생각하였다고 말한다면,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가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보살핀다 하면 그는 곧 환망(幻妄)된 일이라고 배격할 것이며, 태서(泰西 서양(西洋)) 사람이 큰 배를 타고 지구(地球) 밖을 둘러 다녔다 하면, 그는 괴이하고도 허탄한 이야기라고 꾸짖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와 함께 천지 사이의 크나큰 구경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아아, 성인(공자를 가리킴) 2 40년간의 역사를 필삭(筆削)하여 이름을 춘추(春秋)라 하였으나,  2 40년간의 옥백(玉帛)과 병거(兵車)의 모든 일은 곧 하나의 꽃피고 잎지는 삽시의 광경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아, 슬프도다. 내 이제 글을 빨리 써서 이에 이르러 생각하니, 이 한점의 먹을 찍을 사이는 하나의 순()과 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건만, 눈 한번 감고 숨 한번 쉬는 사이에 벌써 소고(小古)소금(小今)이 이룩된다. 그러면 하나의 옛날이란 것이나, 지금이란 것 역시 대순(大瞬)대식(大息)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에 그 사이에서 온갖명예와 사업을 세우고자 한다는 것이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내 일찍이 묘향산(妙香山)에 올라서 상원암(上元庵)에 묵을 때 밤이 다하도록 낮과 다름없이 달빛이 밝았다. 창문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니, 절 앞에는 안개가 질펀하여 그 위에 달빛을 받자 별안간 수은 바다가 이룩되었다. 그리고 바다 밑에는 은은히 코고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자 중들이,

 

저 하계(下界)에는 방금 큰 천둥과 소나기가 내리는 것이다.”

한다. 며칠 뒤에 산을 떠나 안주(安州)에 이른즉, 전날 밤에 과연 갑작스러운 비천둥번개로 물이 평지에 한 길이나 괴고, 민가들이 많이 해를 입었다. 이를 보고서 나는 말을 멈추고 섭섭한 듯이,

 

어제 밤에는 나는 운()() 밖에서 밝은 달을 껴안고 누웠은즉, 저 묘향산이란 태산에 비한다면 겨우 한 개의 둔덕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으나, 이토록 높낮이가 심한 세계를 이룩했거늘 하물며 성인이 천하를 봄이랴.”

하니, 설산(雪山 석가가 도를 닦던 곳)의 고행(苦行)을 닦는 이가 만일 공씨(孔氏 공자의 한 가족)의 집을 두고서 다만 세 번이나 출처(出妻)를 했느니, 백어(伯魚)가 일찍 죽었느니, ()()에서 봉변을 당했느니 하고서 조금 더 넓게 보지 못한다면, 이는 실로 땅바람불 등이 별안간에 모두 빈 것이 된다는 것인즉 정말 한심한 일일 것이다. 또 그들은 성인과 불씨(佛氏)의 관점도 오히려 땅에 떠나지 못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이 지구를 어루만지고 공중을 달리며 별을 따서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이들은 스스로 자기의 보는 것이, ()() 이씨(二氏)보다 낫다고 함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그들이 모두 이국(異國)에 와서 말을 배우며, 머리끝이 희도록 남의 글을 익혀서 썩지 않을 사업을 꾀함은 무슨 까닭일까. 대체로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경지이니, 그 경지가 지나고 또 지나서 쉬지 않는다면 옛사람들의 이를 빙자하여 학문을 하는 이 역시 무엇을 가지고 고증(考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꿋꿋이 글을 지어서 남들이 이를 반드시 믿어주게 하고자 함이다. 그리하여 그들(서양 사람)은 우리 유가(儒家)에서 이단(異端)을 치는 이론을 보고는 그 남은 일을 주어서 억지로 불교를 배격하고, 또 그들은 불씨의 천당(天堂)지옥(地獄)의 설을 기뻐하여 그의 조박(糟粨)을 들일 뿐이었다. 몇 글자가 빠졌다. 내 이번 걸음 이하는 탈락되었다. ,

 

 

[C-001]일신수필 서(馹汛隨筆序) : ‘박영철본에는 이 소제가 없었으나 수택본 또는 일재본에 모두 서() 자가 있으므로 이들을 따라서 이 다섯 글자의 소제를 붙였다.

[D-001]태산(泰山) …… 생각하였다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성인은 곧 공자. 공자의 학문 세계가 점차 넓어짐을 의미한 것이다.

[D-002]시방세계(十方世界) : 불가에서 말하는 이 세상 밖의 다른 여러 세계들.

[D-003]춘추(春秋) : 공자가 지은 책. 기원전 770년으로부터 240년간 노()를 중심으로 하여 쓴 역사서. 십삼경(十三經)의 하나.

[D-004]공씨(孔氏) …… 했느니 : 공자백어자사의 3대가 모두 아내를 내쫓았다 한다.

[D-005]백어(伯魚) …… 죽었느니 : 백어는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의 자. 공리는 공자가 재세할 때에 요사하였다.

[D-006]() …… 당했느니 : 공자는 일찍이 노위 등지에서 무뢰배에게 봉변하였다.

[D-007]귀로 …… 보았다 : ‘수택본에는 애초 이 몸의 현재를 위함이다.”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가을 7 15일 신묘

 

 

개다.

내원과 변 태의(卞太醫) 관해(觀海) 조 주부 달동과 새벽에 소흑산을 떠나 중안포(中安浦)까지 30리를 와서 점심 먹고, 또 앞서 떠나 구광녕(舊廣寧)을 지나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고, 달빛을 띠고 40리를 가서 신광녕(新廣寧)에서 묵었다. 북진묘를 구경하느라고 20리 돌림길을 하니 모두 90리를 갔다. 정리록(程里錄)에 실린 것으로 말하면, 백대자(白臺子)망우대(蟒牛臺)사하자(沙河子)굴가둔(屈家屯)삼의묘(三義廟)북진보(北鎭堡)양장하(羊腸河)우가둔(于家屯)후가둔(侯家屯)이대자(二臺子)소고가자(小古家子)대고가자(大古家子) 등의 지명과 이수가 서로 어긋난 것이 많다. 만일 이대로 계산한다면 1 80리가 될 것이나 지금은 상고할 길이 없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우리나라 선비들이 북경에서 돌아온 이를 처음 만나면 반드시,

 

자네, 이번 걸음에 제일 장관(壯觀)이 무엇이던고. 그 제일 장관을 뽑아서 이야기해 다오.”

하면, 그들은 제각기 본 바를 좇아서 입에 나오는 대로,

 

요동 천 리의 넓디넓은 들이 장관이죠.”

구요동 백탑(白塔)이 장관이더군.”

그 연로의 시가와 점포가 장관이오.”

계문(薊門)의 내 낀 숲들이 장관이오.”

노구교(蘆溝橋)가 장관이야.”

산해관이 장관이오.”

각산사(角山寺)가 장관이오.”

망해정(望海亭)이 장관이오.”

조가패루(祖家牌樓)가 장관이오.”

유리창이 장관이오.”

통주(通州)의 주집(舟楫)들이 장관이오.”

금주위(錦州衛)의 목축(牧畜)이 장관이오.”

서산(西山)의 누대가 장관이오.”

사천주당(四天主堂)이 장관이오.”

호권(虎圈)이 장관이오.”

상방(象房)이 장관이오.”

남해자(南海子)가 장관이오.”

동악묘가 장관이오.”

북진묘가 장관이오.”

하고, 대답이 분분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상사(上士)는 섭섭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바꾸면서,

 

도무지 볼 것이 없더군요.”

한다.

 

어째서 아무런 볼 것이 없더냐?”

하고 물으면, 그는,

 

황제가 머리를 깎았고, ()()과 대신 모든 관원들이 머리를 깎았으며, ()와 서인(庶人)들까지도 모두 그러한즉, 비록 공덕이 은()()와 같고 부강함이 진()()에 지나치다손 치더라도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아직껏 머리 깎은 천자는 없었다오. 또 비록 육롱기(陸隴其)이광지(李光地)의 학문이 있고, 위희(魏禧)왕완(汪琬)왕사징(王士澂 왕사진(王士稹)인 듯함)의 문장이 있고, 고염무(顧炎武)주이준(朱彛尊)의 박식이 있다 한들 한번 머리를 깎는다면 곧 되놈이요, 되놈이면 곧 짐승일 것이니, 우리가 그들 짐승에게서 무슨 볼 게 있단 말이오.”

한다. 이것이 곧 으뜸가는 의리(義理)라 하여 이야기하는 이도 잠잠하고, 듣는 이도 옷깃을 여민다. 그리고 중사(中士)는 말하기를,

 

그들의 성곽은 장성(長城)의 남은 제도를 물려받은 것이요, 건물은 아방궁(阿房宮)의 법을 본뜬 것이요, ()서인(庶人)은 위()()의 부화를 숭배함이요, 풍속은 대업(大業 수 양제(隋煬帝)의 연호)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의 사치함을 지었으며, 신주(神州)가 더럽힘을 입어서 그 산천이 피비린내 나는 고장으로 변했고, 성인들의 끼친 자취가 묻혀지자 언어조차 야만의 것을 따르게 되었으니 무슨 볼 만한 게 있으리오. 진실로 1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다면 급히 달려 산해관을 쳐 들어가서, 중원(中原)을 소탕한 다음에야 비로소 장관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한다. 이는 춘추(春秋)를 잘 읽은 이의 말이다. 이 일부(一部) 춘추는 중화를 높이고 이족(夷族)을 낮추어보는 사상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글이다. 우리나라가 명()을 섬긴 지 2백 년 동안 충성을 한결같이 하여 이름은 속국(屬國)이라 하나 실상은 한 나라나 다름 없고,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 왜적의 난에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사를 이끌고 우리를 구원하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종(頂踵)모발(毛髮) 어느 것 하나하나 그 은혜 아닌 것이 없었고, 인조(仁祖) 병자(丙子 1636)에 청()의 군대가 쳐 들어오매, 의열 황제(毅烈皇帝)가 우리나라가 난리를 입었다는 말을 듣고, 곧 총병(總兵) 진홍범(陳洪範 명의 장수 이름)에게 명하여 시급히 각 진()의 수군(水軍)을 징벌하여 구원병을 파견하였다. 홍범이 관병(官兵)의 출범(出帆)을 아뢸 제, 산동순무(山東巡撫) 안계조(顔繼祖)가 조선이 이미 무너져서 강화(江華)마저 떨어졌다 아뢰니, 황제는 계조가 힘껏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조서를 내려 준절히 나무랐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는 안으로 복주(福州)초주(楚州)양주(襄州)당주(唐州) 등 각지의 난리를 누를 길이 없고, 밖으로 조선의 근심이 더욱 절박하여 그 구출해 줄 뜻이 형제의 나라에 못지 않았더니, 마침내 온 누리가 천붕(天崩)지탁(地坼)의 비운을 만나고 온 인민의 머리를 깎아서 모두 되놈을 만들었은즉, 비록 우리나라만이 이런 수치를 면했으나 그 중국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 하는 마음이야 어찌 하루 사인들 잊을 수 있었으랴. 그리고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춘추 ()()의 이론을 일삼는 이가 군데군데 우뚝 서서 백년을 하루같이 줄기차게 잇달렸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 이르겠다.

그러나 존주(尊周)의 사상은 주를 높이는 데에만 국한될 것이요, 이적(夷狄)의 문제는 이적에서만 쓸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성곽과 건물과 인민들이 예와 같이 남아 있고,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의 도구도 파괴된 것이 없으며, ()()()()의 씨족도 없어지지 않았고, ()()()()의 학문도 사라지지 않았으며, 삼대(三代 ()()()) 이후로 성스럽고 밝은 임금들과 한()()()()의 아름다운 법률 제도도 변함없이 남아 있다. 저들이 이적일망정 실로 중국이 자기에게 이로워서 길이 누리기에 족함을 알고, 이를 빼앗아 웅거하되 마치 본시부터 지녔던 것같이 한다.

대개 천하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될 일이라면, 그 법이 비록 이적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으려거든, 하물며 삼대 이후의 성제(聖帝)명왕(明王)과 한명 등 여러 나라의 고유적(固有的)인 옛것인들 어떨쏘냐.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제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그렇다고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힘을 분히 여겨서 중화의 숭배할 만한 진실 그것마저 물리친다는 일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먼저 우리나라의 유치한 문화를 열어서 밭갈기, 누에치기, 그릇굽기, 풀무불기 등으로부터 공업상업 등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음이 없으며,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인민들에게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의 굳은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를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그러나 나와 같은 사람은 하사(下士 하류의 선비)이지마는 이제 한 말을 한다면,

 

그들의 장관은 기와 조각에 있고, 또 똥부스러기에도 있다.”

고 하련다. 대개 저 깨어진 기와 조각은 천하에 버리는 물건이지만,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담 높이가 어깨에 솟을 경우, 다시 이를 둘씩 또 둘씩 포개어서 물결 무늬를 만든다든지, 혹은 넷을 모아서 둥근 고리처럼 만든다든지, 또는 넷을 등지워서 옛 노전(魯錢)의 형상을 만들면 그 구멍난 곳이 영롱하고 안팎이 서로 어리비쳐서 저절로 좋은 무늬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깨어진 기와 쪽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무늬가 이에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집마다 뜰 앞에 벽돌을 깔지 못한다면 여러 빛깔의 유리 기와 조각과 시냇가의 둥근 조약돌을 주워다가 꽃나무와 새짐승의 모양으로 땅에 깔아서 비올 때 진수렁이 됨을 막으니, 이는 곧 부서진 자갈돌을 버리지 아니하여 천하의 도화(圖畫)가 이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만 이를 밭에 내기 위해서 황금처럼 아껴 길에 내다 버린 분회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가 삼태기를 들고 말 뒤를 따라 다닌다.

그리고 이를 주워 모으되 네모 반듯하게 쌓고, 혹은 여덟 모로 혹은 여섯 모로 하고 또는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으로 만드니, 이는 곧 똥무더기를 보아서 모든 규모가 벌써 세워졌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저 기와 조각이나 똥무더기가 모두 장관이니, 하필 이 성지(城地)궁실(宮室)누대(樓臺)시포(市舖)사관(寺觀)목축(牧畜)이라든지, 또는 저 광막한 원야(原野)라든지, 변환하는 연수(煙樹)라든지, 그런 것들만이 장관이 아닐 것이다.”

구광녕성은 의무려산(醫巫閭山) 밑에 있는데, 앞으로 큰 강이 열리고 강물을 끌어서 해자를 만들었으며, () 둘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성에 못 미쳐 몇 마장 되는 곳에 큰 사당이 하나 있어 단청을 새로이 하여 찬란하게 눈에 든다.

광녕성 동문밖 다리 머리에 새긴 공하( 패하(覇夏)와 같음)가 매우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였다. 겹문을 들어가서 거리를 지나노라니 점포들의 번화함이 요동만 못지 않다. 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의 패루(牌樓)가 성 북쪽에 있다. 혹은 이르기를,

 

광명은 본시 기자(箕子)의 나라여서 옛날에 기자의 우관(冔冠 () 때의 갓 이름) 쓴 소상이 있더니, ()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연간의 난리통에 타버렸다.”

한다. 성이 겹으로 되었는데 내성은 온전하나 외성은 많이 헐었다. 성 안의 남녀가 집집이 나와서 구경하며 거리의 노는 사람들이 수없이 떼를 지어 말머리를 둘러싸기 때문에 빠져 나가기가 힘들었다.

성 밖의 관제묘는 그 장려함이 요양의 것과 비슷하다. 문 밖에는 희대(戲臺)가 있어 높고 깊고 화려사치하며, 마침 뭇사람이 모여서 연극을 하고 있는 모양이나 길이 바빠서 구경하지 못하였다. 천계(天啓) 연간에 왕화정(王化貞)이 이영방(李永芳)에게 속아서 그의 날랜 장수 손득공(孫得功)이 적군을 성 안으로 맞아들이었으므로 광녕이 떨어지고 천하의 대세가 어찌할 수 없이 되어 버렸다.

 

 

[C-001]가을 : ‘수택본 일재본에는 이 위에 18년이란 글자가 있으나 삭제됨이 옳다. 여기서는 박영철본을 따랐다.

[D-001]관해(觀海) : 곧 변계함. 태의는 그의 벼슬이요, 관해는 이름.

[D-002]상사(上士) : () 중에서도 지식이 높은 이. 여기서는 존명사상에 철저한 고루한 선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D-003]이광지(李光地) : 청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광지는 이름이요, 자는 진경(晉卿).

[D-004]위희(魏禧) : 청의 문학가(文學家). 희는 이름이요, 자는 빙숙(氷叔).

[D-005]왕완(汪琬) : 역시 청의 문학가. 완은 이름이요, 자는 소문(苕文). 당시에 요봉(堯峯)의 문필(文筆)과 원정(院亭)의 시()를 병칭하였으니, 요봉은 그의 호요, 원정은 왕사진(王士稹)의 호.

[D-006]아방궁(阿房宮) : 진 시황(秦始皇)이 그의 수도 함양(咸陽)에 세운 큰 궁궐 이름.

[D-007]신주(神州) : 전국 때 학자 추연(騶衍)이 중국을 신주라 하였는데, 그 뒤에 이내 중국의 별칭으로 써왔다. 신은 신성의 의미를 지녔다.

[D-008]각지의 난리 : 명말(明末) 안으로 장헌충(張獻忠)이자성(李自成)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D-009]정덕(正德) …… 도구 : 이 세 가지의 일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 중에 나온 말.

[D-010]() …… 씨족 : 이 네 성씨는 진()으로부터 당()에 이르기까지의 벌족들.

[D-011]() …… 학문 : 이 넷은 송의 성리학(性理學)의 대가 주돈이(周敦頤)장재(張載)와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와 주희(朱熹)를 일컬었다.

[D-012]노전(魯錢) : 노는 전신론(錢神論)의 저자 노포(魯褒).

[D-013]영원백(寧遠伯) 이성량(李成梁) : 명 신종 때 요동좌도독(遼東左都督)이 되었으며, 그의 선조는 조선 사람이었다. 영원백은 그의 봉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

[D-014]왕화정(王化貞) : 명말의 장수로 일찍이 광녕을 지켜서 몽고를 무마하였으나 웅정필(熊廷弼)과 함께 요동에서 실패하여 극형을 받았다.

[D-015]이영방(李永芳) : 명의 유격(游擊)으로 무순(撫順)을 지키다 청에 항복하여 병자호란에도 종군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북진묘기(北鎭廟記)

 

 

북진묘는 의무려산 밑에 있다. 그 뒤에 여러 묏부리가 마치 병풍을 친 듯이 둘러 있고 앞으로는 큰 벌이 트이었으며, 오른편은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광녕성은 마치 슬하의 아이들처럼 앞에 벌여져 있다.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는 띠를 두른 듯 그 속에 잠긴 탑()이 유달리 희게 보인다. 그 지형을 살펴본즉 편편한 벌판이 차츰 여러 길 되는 둥근 언덕을 이루어, 굽어보나 쳐다보나 천지가 하도 넓어 걸릴 것이 없으며, 해와 달이 떴다 졌다 하며 바람과 구름이 일다 사라졌다 함이 모두 그 가운데 있다. 동쪽을 바라보니 오()() 두 나라는 나의 손에 닿을 듯 가까워 보이나 내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사당의 모양이 웅장하고 괴걸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진사(鎭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에는 북의의 현명제군(玄冥帝君 북방을 맡은 신군)과 아울러 그 종신(從神)을 모셨는데, 모두 곤포(袞袍)를 입고 면류관(冕旒冠)을 쓴 채 옥을 차고 옥홀(玉笏)을 받들고 섰는데, 위풍이 늠름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향정(香鼎)은 높이 여섯 자가 넘고 괴상한 간물(姦物)과 귀물(鬼物)들을 새겼는데, 푸른 기운이 속속들이 스며 배었다. 그 앞에는 검은 항아리가 놓여 있어서 열 섬은 듬직하며, 횃불 네 개를 켜서 밤낮없이 밝히고 있다.

 

()이 일찍이 열 두 곳의 이름난 산에 봉선(封禪)할 때 이 의무려산을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더니, 그 뒤 하()()()()이 모두 그대로 변경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예식은 저 오악(五岳)이나 사독(四瀆)과 같이하였다. 이 사당이 어느 시대에 비롯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의 개원(開元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때에 의무려산의 신을 봉하여 광녕공(廣寧公)으로 삼았고, ()() 때에는 왕호를 붙였으며, ()의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연간에 정덕광녕왕(貞德廣寧王)을 봉했더니, 명의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초년에는 다만 북진의무려산지신(北鎭醫巫閭山之神)이라 하고, 설이 되면 향품을 하사하여 제사하고 축문(祝文)에는 천자의 성명까지 쓴다고 한다. 나라에 큰 식전(式典)이 있으면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하였다. 지금은 청이 동북에서 일어났으므로 특히 이 산의 신을 받드는 품이 더욱 융숭하다 한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옹정 황제(雍正皇帝)가 아직 등극하기 전에 칙명을 받들고 강향하러 와서 그 제삿날 밤에 재실에서 자는데, 꿈에 신인이 그에게 커다란 구슬 한 개를 주어 그 구슬이 해가 되었더니, 그 길로 돌아가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므로, 이에 이 사당을 크게 중수하여 그 신인의 은덕을 갚았다.”

한다.

 

사당 앞에는 다섯 문의 패루가 있는데 순전히 돌로만 세워 기둥이며 서까래며 기와며 추녀며 모두 다 나무는 하나도 쓰지 않았으며, 높이는 너덧 길이나 되고 그 구조의 공교함이나 조각의 정미로움이 거의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만큼 잘 되었다. 패루의 좌우에는 돌사자가 있는데 높이는 두 길이었고, 묘문(廟門)으로부터 흰 돌로 층계를 놓았으며, 묘문의 왼편에는 절이 있는데 그 뜰에는 빗돌 둘이 서 있다. 하나는 만수선림(萬壽禪林)’이라 하였고, 또 하나는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하였으며, 절 속에는 큰 금불 다섯을 모셨다.

 

절 오른편에는 문 하나가 있는데 왼쪽은 고루(鼓樓), 오른쪽은 종루(鍾樓)였고, 그 두 누의 사이에 또 문 셋이 있고 그 앞에는 비석 셋이 있는데, 모두 누런 기와로 비 위를 덮었다. 그 둘은 강희제(康熙帝)의 글과 글씨였고, 또 하나는 옹정제의 글과 글씨였다.

 

정전(正殿)은 푸른 유리기와를 이었는데, 북쪽 벽에는 울총가기(鬱葱佳氣)’라 써 붙였으니 이는 옹정제의 글씨였고, 층계 위에는 동서로 돌화로가 마주 서 있는데 높이는 모두 한 발이 넘었으며, 다시 동서로 낭무 수백 칸이 있고 정전 뒤에는 공전(空殿)이 있으되, 그 제도는 정전과 다름없이 단청이 휘황찬란하나 텅 비어서 아무 것도 놓인 것이 없고, 그 뒤에 또 전각 한 채가 있는데 제도는 역시 정전과 같으며, 소상 둘이 있는데 면류를 쓰고 옥홀을 가진 이는 문창 성군(文昌星君)이요, 봉관(鳳冠 중국 고대 여자용의 관)을 이고 구슬띠를 띤 것은 옥비 낭랑(玉妃娘娘)이라 한다. 그 좌우에는 두 동자가 모시고 섰다. 현판에는 건시령구(乾始靈區)’라 하였으니 이는 지금 황제의 글씨이다. 바깥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층계마다 흰 돌로 만든 난간을 둘렀는데 그 조촐하고 매끄러움이 마치 옥 같으며, 그 위에는 골고루 이룡과 도롱룡을 새겨서 곁채와 층대를 두루 둘러 전전(前殿)에까지 이르고, 또 전전에서 굼틀굼틀 끊이지 않게 후전(後殿)까지 흰 빛 일색이 눈부시어 티끌 하나가 날지 않는다. 정전의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 이랑 같으며, 거기에 새긴 글들은 모두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빈 말들이다. 그 중에는 송의 연우비(延祐碑 연우는 송 인종(宋仁宗)의 연호)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각문(西角門)을 나서니, 두어 길이나 되는 창벽이 있어 보천석(補天石)’이라 새겼는데, 이는 명의 순무(巡撫) 장학안(張學顔 명 신종(明神宗) 때의 명신)의 글씨였고, 다시 한 칸쯤 떨어져 취병석(翠屛石)’이라 새긴 것이 있으며, 동문 밖으로 수백 걸음을 나와서 커다란 둥근 돌이 놓였는데, 마치 거북의 등처럼 금이 갔으며, ‘여공석(呂公石)’ 또는 회선정(會仙亭)’이라 새겼다. 그 위에 오르니 의무려산의 아름다운 기운과 가득찬 형세가 한 눈에 선뜻 들어온다. 문득 조그만 정자 하나가 바위를 의지하여 섰는데 흙 섬돌이 두 층이요, 띠이엉에 끝을 약간 가지런하게 베었는데 그 깨끗하고 그윽함이 퍽 마음을 즐겁게 한다. 거기서 잠깐 앉아 쉬면서 변군은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마치 감사(監司)가 군읍을 돌아다니느라면 아침저녁으로 공궤하는 것이 모두 산해의 진미여서 속이 거북하고 구역질이 날 즈음에 문득 산뜻한 야채 한 접시를 보면 그냥 구미가 당기는 것 같군요.”

한다. 나는 웃으면서,

 

그야말로 참 의원다운 말이로군.”

하니, 조군은,

 

늘 분단장한 기생과 노닐어서 그 예쁘고 예쁘지 않은 것조차 분간하지 못하다가 들이랑 촌 싸리문에서 별안간 형차(荊釵)포군(布裙)으로 수수하게 차린 여인을 만나면 모르는 결에 눈이 훤하게 트이지 않겠습니까.”

한다. 나는,

 

이건 호색가(好色家)다운 말이로군. 만일 그대들 말과 같이 될진댄 이제 이 흙 섬돌과 띠 이엉에 천자의 안목과 비위를 이끌 수 있겠지요.”

하고는, 돌아와 회랑(廻廊) 아래에 앉았는데, 사당을 지키는 도사(道士) 셋이 있기에 부채 석 자루, 종이 세 권, 청심환 세 개를 선물하니, 모두들 못내 기뻐하였다. 뜰 앞에 복숭아가 방금 무르익은 것을 도사가 한 쟁반 따 왔다. 하인들이 다투어 나무 아래로 달려가서 가지를 휘어잡고 마구 딴다. 내가 그리 말라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였다. 도사는,

 

애써 금하실 게 없습니다. 배부르면 저절로 그만두겠죠.”

하고, 또 하인들을 향하여,

 

마음대로 따 먹게만 가질랑 다치지 마오 / 任君摘取莫傷枝

그렇게들 두었다가 명년에 다시 때맞춰 오소 / 留待明年再到時

라 한다. 그 도사의 성명은 이붕(李鵬)이요, 호는 소요관(逍遙館), 또는 찬하도인(餐霞道人)이라 한다. 뜰에는 반이나 썩은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황제가 갑술년(甲戌年 건륭 19) 거둥 때에 남겼다는 시()와 그림은 바위 사이에 새겨져 있다.

 

 

[D-001]오악(五嶽) : 태산화산형산항산숭산.

[D-002]사독(四瀆) : ()()()().

[D-003]형차(荊釵)포군(布裙) : ()의 양홍(梁鴻)의 아내. 맹광(孟光)의 고사에서 나온 말. 형차는 나무로 만든 머리꽂이.

[D-004]마음대로 …… 오소 : 고시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거제(車制)

 

 

타는 수레는 태평차(太平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팔꿈치에 닿으며 바퀴마다 살이 서른 개인데, 대추나무로 둥글게 테를 메우고 쇳조각과 쇠못을 온 바퀴에 입혔다. 그 위에는 둥근 방을 만들어 세 사람이 들 만하다. 방에는 푸른 베 혹은 공단이나 우단으로 휘장을 치고 더러는 주렴을 드리워 은 단추로 여닫게 되었다. 좌우에는 파리(玻璃)를 붙여서 창을 내고, 앞에 널판을 가로 놓아서 마부가 앉게 되었으며, 뒤에도 역시 하인이 앉게 마련이다.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갈 수 있으나 먼 길을 가려면 말이나 노새 수를 더 늘린다.

짐을 싣는 것은 대차(大車)라 한다. 바퀴 높이가 태평차보다 조금 덜한 듯하며 바퀴 살은 입(廿) 자의 모양으로 되었고, 싣는 수량은 8백 근으로 정하여 말 두 필을 메우고, 8백 근이 넘을 경우에는 짐을 보아서 말을 늘린다. 짐 위에는 삿자리로 방을 꾸미되 마치 배 안같이 하여 그 속에서 자고 눕게 되어 있다. 대체로 말 여섯 필이 끄는데 수레 밑에 커다란 왕방울을 달고 말 목에도 조그만 방울 수백 개를 둘러서 그 댕그랑댕그랑 하는 소리로 밤을 경계한다. 태평차는 겉 바퀴로 돌며, 대차는 속 바퀴로 돈다. 그리고 쌍 바퀴가 똑같이 둥글므로 고루 돌아가고 빨리 달릴 수 있다. 멍에 밑에 매는 말은 제일 튼튼한 말이나 건실한 나귀를 사용하며, 수레 멍에를 쓰지 않고 조그만 나무 안장을 만들어 가죽끈이나 튼튼한 바로 멍에 머리에 얽어매어서 말을 달았다. 멍에 밑에 들지 않은 말들은 모두 쇠가죽끈으로 배띠를 하고 바를 매어서 끌게 되었다. 짐이 무거우면 바퀴채보다도 훨씬 더 밖으로 튀어 나오고 때로는 높이가 몇 길이나 되며, 끄는 말도 많으면 십여 필이나 된다. 말 모는 사람을 칸처더[看車的]’라 부르며, 그는 짐 위에 덩실 높이 앉아서 손에는 긴 채찍을 쥐고 길이 두 발이나 되는 끈 두 개를 그 끝에 매어서, 그것을 휘둘러 때리되 그 중에 힘내지 않는 놈은 귀며 옆구리며 헤아리지 않고 때리고, 손에 익으면 더욱 잘 맞는다. 그 채찍질하는 소리가 우레처럼 요란스럽다.

독륜차(獨輪車)는 뒤에서 한 사람이 칫대를 잡고 수레를 밀도록 되었다. 한가운데쯤 바퀴를 달았는데 바퀴가 수레바탕 위로 반이나 솟았으며, 양쪽이 상자처럼 되어 싣는 물건이 꼭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 바퀴 닿는 곳에는 북을 반쯤 자른 것같이 보이며, 바퀴를 가운데로 하고 짐은 사이를 두고 실어서 바퀴와 짐이 서로 닿지 않도록 하였다. 칫대 밑에 짧은 막대가 양쪽으로 드리워서, 갈 때는 칫대와 함께 들리고 멈출 때는 바퀴와 함께 멈추어서, 이것이 버팀나무가 되어 수레가 쓰러지지 않게 마련이다. 길가에서 떡능금오이 등을 파는 장사들도 모두 이 독륜차를 이용하며, 또 밭둑 길에 거름 내기에 가장 편리하다. 언젠가 보니, 시골 여자 둘이 양쪽 상자에 타고 앉아서 각기 어린애 하나씩을 안고 가는 것도 있으려니와 물을 긷는 데는 한 쪽에 대여섯 통씩 싣는다. 짐이 무겁고 많으면 끈을 달아서 한 사람이 끌고, 때로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마치 배를 끌 듯이 한다.

대개, 수레는 천리로 이룩되어서 땅 위로 가는 것이며, 땅 위를 다니는 배요, 움직일 수 있는 방이다. 나라의 쓰임에 수레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주례(周禮)에 임금의 가멸함을 물었을 때 수레의 많고 적음으로써 대답했다 하니, 수레는 비단 싣고 타는 것뿐이 아님을 말함이다. 수레 중에도 융차(戎車)역차(役車)수차(水車)포차(砲車) 등이 있어서 천백 가지의 제도가 있으므로 이제 창졸간에 이루 다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타는 수레, 싣는 수레는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시급히 연구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이다. 내 일찍이 담헌(湛軒) 홍덕보(洪德保), 참봉(叅奉) 이성재(李聖載)와 더불어 거제(車制)를 이야기할 제,

 

수레의 제도는 무엇보다도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이 이른바 궤도를 똑같이 하여야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두 바퀴 사이에 일정한 본을 어기지 않음을 이름이다. 그리하면 수레가 천이고 만이고 간에 그 바퀴자리는 하나로 통일될 것이니, 이른바 거동궤(車同軌)는 곧 이를 두고 말함이다. 만일 두 바퀴 사이를 마음대로 넓히고 좁힌다면 길 가운데 바퀴 자리가 한 틀에 들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이제 천 리 길을 오면서 날마다 수없이 많은 수레를 보았으나, 앞 수레와 뒷 수레가 언제나 한 자국을 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쓰지 않고도 같이 되는 것을 일철(一轍)이라 하고, 뒤에서 앞을 가리켜 전철(前轍)이라 한다. 성 문턱 수레바퀴 자국이 움푹 패어서 홈통을 이루니 이는 이른바 성문지궤(城門之軌 맹자(孟子)에 나오는 구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혀 수레가 없음은 아니나 그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 바퀴 자국이 틀에 들지 않으니, 이는 수레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늘 하는 말에,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 무슨 말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까 길이 닦이지 않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니게 된다면 길은 저절로 닦이게 될 테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리오. (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배와 수레 이르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

이라 하였으니, 이는 수레가 어떠한 먼 곳이라도 이를 수 있다고 하는 말이다.

중국에도 검각(劍閣) 아홉 굽이의 험한 잔도(棧道)와 태항(太行)과 양장(羊腸)처럼 위태한 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수레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리하여 관()()()()()()()() 등지와 같은 먼 곳에서도 큰 장사치들이나, 또는 온 가족을 이끌고 부임(赴任)하러 가는 벼슬아치들의 수레바퀴가 서로 잇대어서 저의 집 뜰 앞을 거니는 것이나 다름없이 다니고, 우렁차게 굉굉거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대낮에도 늘 우레치듯 끊이지 않는다. 이제 이 마천(摩天)청석(靑石)의 고개와 장항(獐項)마전(馬轉)의 언덕들이 어찌 우리나라의 것보다 덜 위험하겠는가. 그 큰 바위에 막혀 험준한 것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도 목격(目擊)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수레를 폐하고 다니지 않음이 있던가. 이러므로 중국의 재산이 풍족할뿐더러 한 곳에 지체되지 않고 골고루 유통(流通)함은 모두 수레를 쓴 이익일 것이다. 이제 비근한 예를 든다면, 우리 사행이 모든 번거로운 폐단을 없애버리고 우리가 만든 수레에 우리가 올라 타고 바로 연경에 닿을 텐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영남(嶺南) 어린이들은 새우젓을 모르고, 관동(關東) 백성들은 아가위를 절여서 장 대신 쓰고, 서북(西北) 사람들은 감과 감자(柑子)의 맛을 분간하지 못하며, 바닷가 사람들은 새우나 정어리를 거름으로 밭에 내건만 서울에서는 한 웅큼에 한 푼씩 하니 이렇게 귀함은 무슨 까닭일까. 이제 육진(六鎭)의 마포(麻布)와 관서(關西)의 명주(明紬), 양남(兩南 영남과 호남)의 딱종이와 해서(海西)의 솜, 내포(內浦 충청남도 서해안)의 생선소금 등은 모두 인민들의 살림살이에서 어느 하나 없지 못할 물건들이며, 청산(靑山 충청북도에 있다)보은(報恩)의 천 그루 대추와 황주(黃州 황해도에 있다)봉산(鳳山)의 천 그루 배와 흥양(興陽 전남 고흥)남해(南海)의 천 그루 귤()유자[], 임천(林川 충청남도에 있다)한산(韓山)의 천 이랑 모시와 관동의 천 통 벌꿀 들은 모두 우리 일상생활에서 교역해 써야 할 것인데도, 이제 이곳에서 천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귀할뿐더러 그 이름만 알고 실지로 보지 못함은 어찌된 까닭일까. 그것은 오로지 멀리 나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밖에 안 되는 나라에 인민의 살림살이가 이다지 가난함은, 한 말로 표현한다면 수레가 국내(國內)에 다니지 못한 까닭이라 하겠다. 어떤 이가,

 

그러면 수레는 어찌하여 다니지 못하는 거요.”

하고 묻는다면, 역시 한 마디 말로,

 

이는 사대부(士大夫)들의 허물입니다.”

하고 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글을 읽을 때에는,

 

주례는 성인이 지으신 글이야.”

하고는, 또 윤인(輪人)이니, 여인(輿人)이니, 거인(車人)이니, 주인(輈人)이니 하고 떠들어대나, 끝내 그것을 만드는 기술이나 움직이는 방법에 대해서는 도무지 연구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한갓 글만 읽을 뿐이니 참된 학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황제(黃帝)가 수레를 창조하였으므로 헌원씨(軒轅氏)라 불린 뒤에 백천 년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에 몇 성인의 심사(心思)목력(目力)수기(手技)가 마멸 되었고, 또 몇 사람의 수()처럼 공교한 손을 거쳤으며, 또 상앙(商鞅)이사(李斯) 같은 이들의 제도 통일을 가져왔으니, 이는 실로 저 현관(縣官)들의 학술에 비한다면 몇백 배나 나을 것이다. 그들의 정미로운 연구와 행하기 간편함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는 진실로 민생의 살림에 이익되고 나라 경영에 큰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날마다 눈에 나타나는 놀랍고 반가운 것들을 이 수레의 제도로 미루어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렴풋이나마 몇천 년 모든 성인의 고심(苦心)을 알 수 있겠다.

밭에 물을 대는 것으로 용미차(龍尾車)용골차(龍骨車)항승차(恒升車)옥형차(玉衡車) 등이 있고, 불을 끄는 것으로서 홍흡(虹吸)학음(鶴飮) 등의 제도가 있으며, 싸움에 쓰는 수레로는 포차(砲車)충차(衝車)화차(火車) 등이 있어서 모두 서양의 기기도(奇器圖)와 강희제(康熙帝)가 지은 경직도(耕織圖)에 실려 있고, 그 글로 설명된 것은 천공개물(天工開物)》ㆍ《농정전서(農政全書 명 서광계(徐光啓)의 저)에 있으니 이에 뜻있는 이가 잘 연구하여 그 제도를 본받는다면 우리나라 백성들의 극도에 달한 가난병도 얼마쯤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본 불끄는 수레의 제도를 대략 적어서 우리나라에 돌아가 이를 전하려 한다.

북진묘(北鎭廟)에서 달밤에 신광녕(新廣寧)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성밖의 어떤 집이 저녁 나절에 불이 나서 이제 겨우 불길을 잡은 모양인데, 길 위에 수차(水車) 세 대가 있어서 방금 거두어 가려는 것을 내가 그들을 잠깐 멈추어 세우고 먼저 그 이름을 물었더니, 수총차(水銃車)라 한다. 그 제도를 살펴본즉 바퀴가 넷에 그 위에 큰 나무 구유가 놓였고, 구유 속에 커다란 구리그릇이 있으며, 구리그릇 속에는 구리통 둘을 두었는데, 구리통 사이에는 목이 을() 자 모양으로 생긴 물총을 세웠다. 물총은 발이 둘이어서 양쪽 구리통에 통하였고, 양쪽 구리통은 짧은 다리가 있어서 밑에 구멍이 뚫렸으며, 구멍은 얇은 구리쇠쪽으로 문짝을 만들어서 물의 오르내림을 따라 여닫게 되었다. 그리고 두 구리통 주둥이에는 구리반으로 뚜껑을 해 달되 그 둘레가 구리통에 꼭 알맞게 되었다. 그 구리반 한복판에 쇠기둥을 세워서 나무를 건너지르고 그 나무가 구리반을 누르기도 하고 들기도 할 수 있게 되어서 구리반의 드나들고 오르내림이 그 나무에 달렸다.

그리고는 물을 구리동이 속에 붓고 몇이서 나무를 밟으면 구리반이 솟았다 내렸다 하여, 대체로 물을 빨아들이는 조화는 구리반에 있다. 구리반이 구리통 목에까지 솟으면 구리통 밑에 뚫린 구멍이 갑자기 열리면서 바깥 물을 빨아들이고, 이와 반대로 구리반이 구리통 속으로 떨어지면 그 밑구멍이 세차게 닫히어서 이에 구리통 속에 물이 가득 차서 쏟아질 곳이 없으므로, 물총 뿌리로부터 을() 자로 생긴 물총의 목으로 내달아서 위로 치솟아 내뿜으니, 여남은 길이나 물발이 서고 가로는 3, 40보에 뻗는다.

그 제도가 생황(笙簧 관악기(管樂器)의 일종)과 비슷하고 물 긷는 이는 연방 나무 구유에 물을 들어부을 따름이다. 옆에 있는 두 물차는 그 제도가 이것과도 다르고 더욱 무슨 곡절이 있는 듯싶으나 창졸간에 상세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물을 빨아들이고 뿜는 묘리는 거의 같았다.

물건을 찧고 빻는 데는 큰 아륜(牙輪 치륜(齒輪))이 두 층으로 되어서, 쇠궁글 막대로 이를 꿰어 방 안에 세워두고 틀을 움직여서 돌리게 되었다. 아륜이라는 것은 마치 자명종(自鳴鍾)의 기계 속처럼 이가 들쭉날쭉하여 서로 맞물게 된 것이다. 방 안 네 구석에 두 층으로 맷돌반을 두고, 맷돌반의 가장자리 역시 들쭉날쭉하여 아륜의 이와 서로 맞물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륜이 한번 돌기만 하면 여덟 맷돌 반이 모두 다투어 돌며, 순식간에 밀가루가 눈처럼 쌓인다. 이 법은 시계의 속과 비슷하다. 길가의 민가들은 각기 맷돌 방아 하나와 나귀 한 마리씩이 있고 곡식 빻는 데는 항상 돌곰배를 쓰며, 더러는 나귀를 끌어서 방아공이를 대신하기도 한다.

가루 치는 법은 굳게 닫힌 방 안에 바퀴가 셋이 달린 요차(搖車)를 놓았는데, 그 바퀴는 앞이 두 개, 뒤가 한 개이다. 수레 위에 기둥 넷을 세우고 그 위에 두어 섬들이 큰 채를 두 층으로 간들거리게 놓았다. 윗채에 가루를 붓고, 아래채는 비워 두어서 윗채의 것을 받아서 더 보드랍게 갈리도록 되었다. 그리고 요차 앞에는 막대기 하나를 바로 질렀는데 그 막대기의 한쪽 끝은 수레를 잡아 달리고 또 한쪽 끝은 방 밖으로 뚫고 나가 있다. 밖에 기둥 하나를 세워서 그 막대기 끝을 잡아매고, 기둥 밑에는 땅을 파서 큰 널빤지를 놓아 막대기 밑이 이에 닿게 했다. 그 널빤지 밑 한가운데에 받침을 놓고, 그 양쪽을 뜨게 하여 마치 풀무를 다루듯 한다. 사람이 널빤지 위에 걸터앉아서 다리만 약간 움직이면 널빤지의 두 머리가 서로 오르내리며 널빤지 위의 기둥이 견디지 못하여 흔들린다. 그러면 그 기둥 끝에 가로지른 막대기가 세게 들이밀고 내밀고 하여 방 안의 수레가 나섰다 물러섰다 한다. 방은 네 벽에 열 층으로 시렁을 매어서 그릇을 그 위에 올려 놓아 날아오는 가루를 받게 되었다. 방 밖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발을 놀리면서 책도 읽고 글씨도 쓰고 손님과 수작도 하여 못하는 일이 없다. 다만 등 뒤에 약간 요란한 소리가 들릴 뿐 누가 그러는지 알지 못한다. 대체로 그 발 움직이는 공력은 아주 적으면서도 일은 많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여자들이 몇 말 가루를 한 번에 치려면 머리도 눈썹도 삽시에 하얗게 되고 팔이 나른해지니, 그 어느 것이 힘이 덜들고 편리한 것인가. 이와 비교해 보면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치 켜는 소차(繅車)는 더욱 묘하니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 이는 아까 곡식 빻는 것과 같이 커다란 아륜을 쓰되 소차의 양쪽 머리에 아륜이 달리고, 그 역시 들쭉날쭉한 이가 서로 맞물려서 쉴 새 없이 저절로 돌아간다. 소차는 별 것이 아니요, 곧 몇 아름드리가 되는 큰 자새이고, 수십 보 밖에서 고치를 삶되, 그 사이에는 여러 층 시렁을 매고 높은 곳에서부터 차츰 낮은 데로 기울게 하고, 시렁 머리마다 쇳조각을 세워서 구멍을 바늘귀처럼 가늘게 뚫고 그 구멍에 실을 꿴다. 틀이 움직이면 바퀴가 돌고, 바퀴가 돌면 자새가 따라 돌되 그 아륜이 서로 맞물려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실을 뽑는다. 그 움직임이 거세지도 않고 몰리지도 않게 제대로 법도가 있으므로 실이 고르지 않거나 한데 얽히거나 하는 탈이 없는 것이다. 켠 실이 솥에서 나와 자새로 들기까지에 쇠구멍을 두루 지나서 털도 다듬어지고 가시랭이도 떨어져 버렸으며, 또 자새에 들기 전에 실몸이 알맞게 말라서 말쑥하고 매끄러우므로, 다시 재에 삭히지 않아도 곧 베틀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고치 켜는 법이란 다만 손으로 훑기만 할 뿐이지 수레를 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놀림이 그 타고난 바탕 제대로의 성질에 맞지 않아서, 빠르고 더딘 것이 고르지 않다. 어쩌다 홀치고 섞갈리면 실과 고치가 성내는 듯 놀래는 듯 뛰어 내달려서 실켜는 널판 위에 휘몰리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고, 무거리가 나서 덩이가 지면 저절로 광택을 잃게 되며 실밥이 얽히어 붙으면 실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므로, 티를 뽑고 눈을 따려면 입과 손이 모두 피로하다. 이를 저 고치 켜는 수레와 비교하면, 그 우열이 또한 어떠한가. 나는 그들에게 고치가 여름을 나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방법을 물었더니, 약간 볶으면(찌면) 나비도 나지 않고, 또 더운 구들에 말리면 나비도 나지 않고 벌레도 먹지 않으므로 겨울철이라도 켤 수 있다 한다.

길에서 날마다 상여(喪轝)를 만났는데, 그 제도는 한결같지 않으나 가장 거추장스럽게 보인다. 거의 두 칸 방만하고 오색 비단으로 휘장을 치고, 거기다 구름참새 같은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렸으며, 당마루턱에는 혹은 은실을 땋아 늘이었다. 양쪽 대채의 길이는 거의 일곱여덟 발이나 되는데, 붉은 칠을 하고 누런 구리를 올려서 금빛으로 꾸몄다. 횡강목(橫杠木)은 앞뒤에 각기 다섯씩인데 길이는 역시 서너 발이나 되고 그 위에 짧은 막대기를 걸쳐서 양쪽을 어깨에 메게 되었다. 상여꾼은 적어도 수백 명이고, 명정(銘㫌)은 모두 붉은 비단에 금자(金字)로 썼다. 명정대는 세 길이나 되는데 검은 칠을 하고 금빛 나는 용을 그렸다. 깃대 밑에는 발을 달고, 거기에 역시 막대기 두 개를 가로 놓아서 반드시 아홉 사람이 멘다. 붉은 일산 한 쌍, 푸른 일산 한 쌍, 검은 일산 한 쌍, 수레 앙장 대여섯 쌍이 이에 따르고 그 다음에 저퉁소나팔 등 악대가 서고, 승려와 도사들이 각기 그 구색을 차리고 불경과 주문(呪文)을 외면서 그 뒤를 따른다. 중국의 모든 일이 간편함을 위주하여 하나도 헛됨이 없는데 이 상여만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는 물론 본받을 것이 못 된다.

 

 

[D-001]이성재(李聖載) : 이광려(李匡呂). 참봉은 벼슬이요, 성재는 자.

[D-002]거동궤(車同軌) : 중용(中庸) 좌전(左傳) ()에 나오는 말.

[D-003]육진(六鎭) : 두만강(豆滿江) 기슭에 있는 여섯 고을. 곧 종성(鍾城)경원(慶源)회령(會寧)경흥(慶興)온성(穩城)부령(富寧).

[D-004]윤인(輪人) …… 주인(輈人)이니 : 이 넷은 모두 주례 중에 나오는, 옛날 수레를 맡은 관리의 벼슬 이름.

[D-005]글만 읽을 뿐 : 전국 때 장수 조괄(趙括)의 고사.

[D-006]() : 중국 황제(黃帝) 때의 유명한 공장(工匠)의 이름.

[D-007]상앙(商鞅) : 전국시대 정치가. 위인(衛人)으로서 형명(刑名)의 학으로 진 효공(秦孝公)을 도와 부국강병의 실적을 이룩하였다.

[D-008]이사(李斯) : 전국시대 정치가. 진 시황(秦始皇)을 도와서 육국을 통일하였다.

[D-009]홍흡(虹吸) : 굽은 관()으로 만들어서 액체(液體)를 이 그릇에서 다른 높은 그릇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한 기계.

[D-010]학음(鶴飮) : 홍흡과 비슷한 기계일 것이나 자세한 제도는 알 수 없다.

[D-011]기기도(奇器圖) :  기기도설(奇器圖說). 서양 사람 등옥함(鄧玉函)의 저. 전중(轉重)취수(取水)전마(轉磨)  39()에다 각기 설명을 붙였다.

[D-012]천공개물(天工開物) : 명 송응성(宋應星)의 저. 중국의 천산(天産)과 인공(人工)에 관한 저서. 그 원본은 일본제국도서관(日本帝國圖書館)에 간직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희대(戲臺)

 

 

절이나 관( 도사가 깃들이는 건물)이나, 사당의 맞은편 문에는 반드시 희대(戲臺)가 하나씩 있다. 들보의 수가 모두 일곱 혹은 아홉이므로 드높고 깊숙하고 웅걸하여 보통 점방과는 비길 바가 아니다. 이렇게 깊고 넓지 않으면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들일 수 없는 까닭이다. 등자(登子), 탁자며, 의자며, 평상이며 모든 앉을 자리가 적어도 천을 헤아리며 붉은 칠이 조촐하고도 사치롭다. 연로 천 리에 가끔 삿자리로 누()()()(殿)의 모양을 본떠서 높은 희대를 만들었는데, 그 구조의 공교로움이 기와집보다 더 낫게 보인다. 혹은 현판에 중추경상(中秋慶賞)’이라 하였고, 또는 중원가절(中元佳節)’이라 하였다. 소소한 시골 동네에 사당이 없는 곳이면 반드시 정월 보름과 8월 보름을 맞이하여 이러한 삿자리로 희대를 만들어 여러 가지 광대놀이를 연출한다. 언젠가 고가포(古家舖)를 지나다가 보니, 길에 수레가 끊이지 않고 수레마다 여인들 일곱여덟 명씩 탔는데 모두 진한 화장에 고운 나들이 차림새였다. 그런 차들이 몇백 대로 셀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소흑산(小黑山)에 가서 광대놀이를 구경하고 해가 저물어서 돌아가는 시골 부인네들이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시사(市肆)

 

 

이번 천여 리 길에 지나온 시포(市舖)는 봉성요동성경신민둔소흑산광녕 등지였는데, 그 크고 작고, 사치하고 검소한 구별이야 없지 않겠지만 그 중 성경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그곳은 모두 비단 창에 수 놓은 무늬요, 길을 사이 두고 늘어선 술집들이 더욱 오색이 찬란하였다. 다만 이상한 것은 처마 밖에 불쑥 내민 아롱진 난간이 여름 장마를 겪고도 그 단청 빛이 퇴색하지 않은 것이었다. 봉성은 동쪽 변두리에 있는 다시 더 발전하지 못할 궁벽한 곳이지만, 그곳의 의자탁자주렴휘장담요 등의 모든 도구라든가 꽃과 풀까지도 모두 우리로서는 처음 본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그 문패며 간판들이 서로 사치화려함을 다투어 그 겉치레를 꾸미기 위하여 낭비가 천금에 그칠 뿐이 아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장사가 잘 되지 않을뿐더러 재신(財神)이 도와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모신 재신은 흔히들 관공(關公)의 소상이었으며, 탁상에 향불을 피우고 아침저녁으로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품이 가묘(家廟)보다 더하다. 이로 미루어 보면 산해관 안의 습속을 가히 예측할 수 있겠다.

길을 가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치들은 혹은 큰 소리로 싸구려를 부르기도 하나, 푸른 천을 파는 장수는 손에 든 작은 북을 흔들고, 머리를 깎는 이는 양철판을 두드리고, 기름 장수는 바리때를 친다. 또 더러는 쇠징대비치개목탁 따위를 갖고 다니는 자도 있다. 그들이 거리를 감돌며 두드리는 소리가 쉬지 않으니 집 안에서 작은 아이들이 달려나와 이를 부른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두드리는 소리만 들으면 그 파는 물건을 알게 마련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점사(店舍)

 

 

점사는 뜰이 넓어서 적어도 수백 보는 된다. 그렇지 못하면 수레와 말과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에 들어가서도 한 마장을 달리어야 전당(前堂)에 이르니, 그 넓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낭각 사이에 의자탁자 40~50개가 놓였고 마굿간에는 길이가 두세 칸, 너비가 반 칸쯤 되는 돌구유가 있었는데 돌이 아니면 벽돌을 쌓아서 돌구유처럼 만들었다. 뜰 가운데 역시 나무통 수십 개를 나란히 두고는 양쪽 머리에 아귀진 나무로 받쳐 두었다. 기명은 오로지 그림 그린 자기를 쓰고, 백통놋쇠주석 등의 그릇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궁벽한 두메에 다 허물어져 가는 집에서라도 날로 쓰는 밥주발접시 등속은 모두 울긋불긋 그림을 아로새긴 것들이다. 이는 반드시 사치를 숭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릇 굽는 이들의 솜씨가 본시 그러해서 아무리 조잡한 것을 쓰려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깨어져도 버리지 않고 밖으로 쇠못을 쳐서 다시 쓴다. 다만 아무리 해도 내가 알지 못할 것은 못이 그릇 속에는 비어져 나오지 않고 꼭 끼어서 풀로 붙인 듯 감쪽같은 것이다. 높이 두 자나 되는 여러 가지 빛깔의 술잔과 오지병이며, 꽃과 잎을 꽂은 병과 두루미 같은 것은 어딜 가나 흔히들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우리나라 분원(分院)에서 구운 것은 저자에 들어올 수도 없을 것들이다. 아아, 그릇 굽는 법 한 가지가 좋지 못하여 온 나라의 모든 일과 모든 물건이 그 그릇과 같아서 마침내 한 나라의 풍속을 이루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D-001]분원(分院) : 조선시대 궁중이나 중앙 관아에서 쓰던 자기를 만든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이 있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 경기도 광주(廣州) 즉 한강 기슭 마현(麻峴)의 건너편에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교량(橋梁)

 

 

교량은 모두 무지개 다리여서 다리 밑이 성문과 같다. 큰 것은 돛단배가 마음대로 지나갈 수 있겠고, 작은 것도 거룻배는 지나다닐 수 있다. 돌 난간에는 흔히들 구름 무늬와 공하()교리(蛟螭) 등을 새겼고, 나무 난간에도 역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양쪽 다리목에는 모두 팔() 자로 된 담을 쌓아서 이를 보호하게 하였다. 지나온 것 중에서 만보교(萬寶橋)화소교(火燒橋)장원교(壯元橋)마도교(磨刀橋)가 가장 큰 것들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6일 임진(壬辰)

 

 

개다.

정 진사변 주부내원과 이날도 서늘한 새벽에 먼저 떠나기로 약속했다. 신광녕에서 흥륭점(興隆店)까지 5, 쌍하보(雙河堡) 7, 장진보(壯鎭堡) 5, 상흥점(常興店) 5, 삼대자(三臺子) 3, 여양역(閭陽驛) 15, 모두 40리를 와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부터 등마루 없는 집이 시작된다. 여양역에서 두대자(頭臺子)까지 10, 이대자(二臺子) 5, 삼대자 5, 사대자(四臺子) 5, 왕삼포(王三舖) 7, 십삼산(十三山) 8리 이날 80리를 가 십삼산에서 묵었다.

새벽에 신광녕을 떠날 때 지새는 달이 아직 땅 위에서 몇 자 아니 되는 곳에 걸려 있는데 서늘하고 완연하다. 계수나무 그림자가 성기고 옥토끼와 은두꺼비는 금방도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듯하고 펄펄 날리는 항아(姮娥 달 속에 산다는 선녀)의 흰 옷자락 속으로 비치는 살결이 얼룽얼룽하여, 나는 정군(鄭君)을 돌아보면서,

 

이상도 하이,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돋는구려.”

하였더니, 정은 그것이 달인 줄을 깜박 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늘 새벽에 여관을 떠나므로 처음에 정말 동서남북을 가리기 어렵더군요

하매, 모두들 허리를 잡았다. 조금 뒤에 달이 점점 기울어져 들 밖에 떨어지니 정도 역시 크게 웃었다. 아침 노을이 물결처럼 일어 먼 나무 끝에 가로 뻗치더니, 별안간 천만 가지 이상한 봉우리로 화하여 맑은 기운 탄탄한 형세가 마치 용이 서린 듯 봉이 춤추는 듯 천리 벌에 가없이 뻗쳤다. 나는 정을 돌아보면서,

 

, 장백산이 뽀얗게 눈에 드네그려.”

하니, 비단 정군만이 그러려니 할 뿐 아니라 모두들 기이하다고 외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조금 뒤에 구름과 안개가 말끔히 걷히니, 해가 이미 서 발은 솟았는데 하늘에는 한 점 티끌도 없다. 별안간 먼 마을 나무숲 사이로 새어드는 빛이 마치 맑은 물이 하늘에 고여서 어린 듯, 연기도 아니며 안개도 아니요, 높지도 낫지도 않고 늘상 나무 사이를 감돌며 훤하니, 비치는 품이 마치 나무가 물 가운데 선 것 같고, 그 기운이 차츰 퍼지며 먼 하늘에 가로 비낀다. 흰 듯도 하고, 검은 듯도 한 것이 마치 큰 수정 거울과 같아서 오색이 찬란할뿐더러 또 한 가지 빛인 듯 기운인 듯 그 무엇이 있다. 비유 잘하는 이도 흔히들 강물빛 같다 하고 또는 호수(湖水)빛 같다 하나, 말끔하고도 어리어리한 것이 그 무엇인지는 실로 형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동네와 집, 수레와 말들이 모두 그림자가 거꾸로 비친다. 태복은,

 

이것이 곧 계문(薊門)의 연수(煙樹)올시다.”

하기에, 나는,

 

계주(薊州)가 여기서 오히려 천 리인데 연수가 어찌 이곳에 있으랴.”

하니, 의주(義州) 상인 임경찬(林景贊)의 말이,

 

계문이 비록 이곳에서 멀지만 이를 통칭 계문연수(薊門煙樹)’라 한답니다.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이 잔잔한 때면 요동 천 리 벌에 늘상 이 기운이 있사오나, 계주에 들어가더라도 만일 바람이 불고 날씨가 음산하면 볼 수 없습니다.”

한다. 이는 통상 겨울 날씨가 고요하고 따뜻하면 산해관 안팎에서 날마다 볼 수 있다 한다. 마침 여양(閭陽)의 장날을 만났는데 온갖 물건이 모여들고 수레와 말이 거리에 가득 찼다. 아로새긴 듯한 초롱 속에 가지가지 새를 넣어서 그 이름이 매화조(梅花鳥), 요봉(幺鳳)이니, 오동조(梧桐鳥), 화미조(畵眉鳥)니 하여 형형색색이다. 새장수는 수레가 여섯, 우는 벌레를 실은 수레가 둘이어서 그 지저귀는 소리에 온 장판이 마치 깊은 산 속에나 들어온 듯싶다. 국차[菊茶] 한 잔, ‘불불[餑餑]’ 두 덩이를 사먹고, 거기서 조 역관(趙譯官) 명회(明會)를 만나서 어떤 술집에 들어가니, 마침 소주를 내린다기에 다른 집으로 옮기려 했더니 술집 아범이 성을 내고 조에게 달려들어 머리로 앙가슴을 받으며 꼼짝 못하게 한다. 조는 부득이 웃고 자리에 돌아와 돼지고기 볶음 한 쟁반, 달걀 지진 것 한 쟁반, 술 두 주발을 사서 배불리 먹고 자리를 떴다. 멀리 십삼산을 바라보니, 산맥이 뻗어온 것도 없고 끊어진 곳도 없이 별안간 큰 벌판 가운데에 열세 무더기의 돌메 봉우리가 날아와 앉은 듯하여, 그 보일락말락 기이하게 솟은 품이 마치 여름 하늘에 피어오르는 구름 봉우리 같다. 머리가 뽀얗게 센 늙은이 하나가 손에 조그만 낚싯대를 들고 그 끝에 고리를 달아서 참새 한 마리를 앉히고 색실로 발을 잡아 매어 길로 다니고 있다. 그 새짐승을 놀리는 양이 거의 다 이러하다. 더위에 지쳐서 졸리므로 말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7~8세쯤 되는 아이 하나가 머리에는 새빨간 실로 뜬 여름 모자를 쓰고 몸에는 고동색 운문사(雲紋紗) 두루마기를 입고 공단 까만 신을 신었는데, 걸음걸이가 아담하고 얼굴이 눈빛 같고 눈매가 그린 듯싶다. 내 짐짓 길을 막아 서니,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는 빛도 없이 앞에 와 공손히 절하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황망히 안아 일으켰다. 그 뒤에 한 노인이 멀찌감치 따라오면서 웃음을 머금고,

 

이 애는 이 늙은 몸의 손주놈이오. 영감께서 이 놈을 귀여워하시니, 원 무어라 고마운 말씀을 사뢰리까.”

하기에, 나는 그 아이에게,

 

나이는 이제 몇 살이냐.”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손가락을 꼽아서 보이면서,

 

아홉 살입니다.”

한다. 나는 또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제 성은 사()입니다.”

하더니, 곧 신발 속에서 작은 쇠빗[鐵箆] 하나를 꺼내어 땅에다 효()()의 두 글자를 그으면서,

 

효는 백행(百行)의 근본이요, 수는 오복(五福)의 으뜸이기에 저의 할아버지가 제게 축원하시기를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를 해야 한다 하시고, 또 저에게, 첫째는 수()하라 하시고, ‘ 두 글자를 합하여 아명(兒名)을 지어서 효수(孝壽)라 부르옵니다.”

하고 설명한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지금 무슨 글을 읽느냐.”

하고 물었더니, 효수는,

 

두 책은 벌써 외고 지금은 학이편(學而篇 논어(論語)의 편명)을 읽는 중입니다.”

하기에, 내가,

 

두 책이라니 무엇무엇인가?”

하였더니, 그는,

 

대학(大學)》ㆍ《중용(中庸)입니다.”

한다. 나는,

 

그러면 강의(講義)도 이미 끝났느냐?”

하니, 그는,

 

두 글은 외우기만 하였고, 논어(論語)는 강의(講義)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이어서,

 

선생께서는 성이 누구시오니까?”

하기에, 나는,

 

내 성은 박()이야.”

하고 답하였다. 효수는,

 

백가원(百家源)에도 없는 것이옵니다.”

한다. 노인은 내가 그 손자를 귀여워함을 보고는, 얼굴에 천진스러운 웃음을 가득 머금고,

 

고려 노야(老爺)께서는 부처님같이 어지신 양반입니다. 아마 슬하에는 많은 봉새 같은 아드님에 기린 같은 손주님을 두신 모양이어서, 그 생각을 하시고 남의 어린이를 귀여워하신 게죠.”

하기에, 나는,

 

내 나이는 많이 먹었으나 아직 손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이내,

 

당신께서는 연세가 얼마나 되셨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는,

 

헛되이 쉰여덟 해를 지났소이다.”

한다. 나는 손에 들었던 부채를 아이에게 주니, 노인은 허리춤에서 쇠사슬 고리에 달아매어 찼던 비단 수건과 아울러 부시까지 겹쳐 주면서 못내 고마운 뜻을 표한다. 나는 노인에게,

 

댁은 어디 계신지요.”

하고 물었더니, 사생(謝生)

 

여기에서 멀지 않은 왕삼포(王三舖)에서 살고 있습니다.”

한다. 나는,

 

영손(令孫)이 매우 숙성하고 총명하여 옛날 왕()사가(謝家)의 풍류에 부끄럽지 않겠소이다.”

하니, 사생은,

 

조상(祖上) 때부터 내려오는 계통이 끊인 지 이미 오래이니 어찌 강좌(江左 강소성(江蘇省))의 풍류를 다시 바라오리까.”

한다. 길이 바빠서 드디어 서로 작별하였다. 아이가 공손히 읍하면서,

 

영감, 행리(行吏) 보중(保重)하옵소서.”

한다. 나는 길을 가며 늘 그 아이의 절묘한 눈매와 동작이 눈에 삼삼하고 또 사생이 땅에 그린 몇 마디 말이 족히 서로 이야기할 만하였으나, 갈 길이 바빠서 그 집을 찾지 못하였음이 한스럽다.

 

 

[D-001]대학(大學)중용(中庸) : 이 두 책은 본시 예기(禮記) 중의 각기 한 편이었으나 주희(朱熹)가 뽑아 사서(四書)의 하나로 독립시켰다.

[D-002]백가원(百家源) : 백가성(百家姓). 곧 여러 성씨를 모은 책으로, 중국 촌 글방에 흔히들 유행되는 책이다.

[D-003]() …… 풍류 : 사는 진()의 왕검(王儉)과 사안(謝安). 풍류는 왕검이 일찍이, “강좌의 풍류는 다만 사안이 있을 뿐이야.” 하였으니, 이는 실은 자기를 비기어 하는 말.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7일 계사(癸巳)

 

 

개다.

아침에 십삼산을 떠나 독로포(禿老舖)까지 12, 배로 대릉하(大陵河)를 건너기까지 14, 대릉하점(大陵河店) 4, 이곳에서 묵었다. 이날 겨우 30리를 갔다.

대릉하는 그 근원이 장성 밖에서 시작하여, 구관대(九官臺)와 변문을 뚫고 광녕성을 지나 두산(斗山)을 나와서, 금주위(錦州衛) 지경에 들어와 점어당(點魚塘)에 이르러, 동으로 바다에 든다.

호행통관(護行通官) 쌍림(雙林)은 곧 조선수통관(朝鮮首通官) 오림포(烏林哺)의 아들이며, 집은 봉성에 있다. 말은 호행이라 하지만 저는 태평차를 타고 뒤를 따를 뿐이며, 그의 행동거지는 우리 사행의 관할할 바가 아니다. 그는 하인 넷을 거느렸는데, 하나는 성이 악()이라 하여 연로의 조석 공궤와 말 먹이는 일만을 맡아보고, 또 하나는 이()인데 매를 가지고 그저 길에서 꿩 사냥만 일삼고, 또 하나인 서()는 제 말로 의주 부윤 서모(徐某)와는 서로 일가간이라 하며, 또 하나는 감()인데 그들은 모두 조선 사람이고 나이도 열아홉 살이며 눈매가 아름다워서 쌍림의 길동무들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감()이란 성은 없으니 이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내 책문에 든 지 10여 일이 되어도 쌍림의 꼴을 보지 못하더니, 통원보(通遠堡)의 시냇물을 건널 때 언덕에 올라가서, 내가,

 

물살이 센데.”

하니, 이때 언덕 위에 깨끗하게 차린 되놈 하나가 우리 역관들과 함께 서 있다가 선뜻 조선말로,

 

물살이 셉니다. 그런데도 용하게 건너셨습니다.”

한다. 그는 연산관에 이르러서 수역더러,

 

아침나절 물 건널 때 얼굴이 웅위(雄偉)한 이가 거 누구요?”

하고 물으매, 수역은,

 

정사 대감과 일가 형제 되시는 분이오. 글을 잘 아셔서 구경하러 오셨답니다.”

하니, 쌍림은,

 

그러면 사점(四點)인가요?”

한다. 수역은,

 

아니오, 정사 대감의 적친(嫡親) 삼종형제(三從兄弟)입죠.”

하니, 쌍림은,

 

그럼, 이량위첸[伊兩羽泉]이구먼.”

한다. ‘이량위첸이란 중국 말로 한냥 닷돈을 말한다. 한냥 닷돈은 곧 양반(兩半)이라, 우리나라에서 사족(士族)을 양반(兩班)이라 하니, 양반(兩半)과 양반(兩班)이 음이 같으므로, 쌍림이 이량우첸[一兩五錢]’이라 하여 은어(隱語)를 쓴 것이다. 사점(四點)이란 서() 자이니 우리나라 서얼(庶孼)을 두고 말함이다.

사행이 갈 때마다 사무를 맡은 역관이 공비(公費)로 은 4천 냥(四千兩)을 가져 가서 5백 냥은 호행장경(護行章京)에게 주고, 7백 냥은 호행통관에게 주어 차삯과 여관비에 쓰게 되었으나, 실상은 한 푼도 쓰는 일이 없이 상사와 부사의 주방(廚房)에서 돌려가면서 두 사람을 먹인다. 쌍림은 그 사람됨이 교활하고 조선말을 잘한다고 한다. 앞서 소황기보(小黃旗堡)에서 점심을 먹을 때 여러 비장역관 들과 둘러앉아서 한담을 하노라니, 쌍림이 밖에서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반겨 맞았다. 쌍림이 부사의 비장 이성제(李聖濟)와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또 내원을 향하여 말을 붙였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두 번째 길이어서 구면이기 때문이다. 내원이 쌍림더러,

 

, 영감께 섭섭한 일이 있소.”

하니, 쌍림이 웃으면서,

 

무슨 섭섭한 일이오니까.”

한다. 내원은,

 

상사또(上使道)께서는 비록 작은 나라의 사신이라 할지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일품(正一品) 내대신(內大臣)이므로 황제께서도 각별히 예법으로 대우하시는 바이니, 영감은 대국 사람이지만 조선의 통관인즉 우리 사또에게 마땅히 체면을 지켜야 할 것이어늘, 두 사또께서 말을 갈아타실 때마다 길가에 가마를 멈추시는 데마다 영감들은 마땅히 수레를 멈춰 기다려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번번이 수레를 그냥 몰아서 지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요. 이래서 장경(章京)도 영감을 본받으니 더욱 한심한 일이오.”

하니, 쌍림은,

 

그것은 당신이 모르는 거요. 대국의 체모가 당신네 나라와는 훨씬 다르오. 대국에서 칙사가 가면 당신네 나라 의정대신(議政大臣 내각의 세 대신)이 우리들과 평등하게 대접하여 말도 서로 공경하는 것인데, 이제 당신이 새로이 체모를 지어내어서 나더러 회피하란 말이오.”

하고 발끈 성을 낸다. 조 역관 학동(學東)이 내원에게 눈짓하여 더 다투지 말라 하였으나, 내원은 한층 소리를 높여서,

 

그럼, 영감의 종놈은 어느 존전이라고 손에 매를 낀 채 의기가 양양하게 지나간단 말이오. 그건 해괴한 일이 아니오. 이제 다시금 그런 걸 보면 내 곧 곤장을 내릴 테니 영감은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오.”

하니, 쌍림은,

 

그것은 아직 못 보았소. 만일 내가 보기만 하면 단매에 처치해 버리겠소.”

한다. 그는 조선말을 잘한다지만 가장 분명하지 못하고 다급하면 도로 북경말을 쓰곤 한다. 공연히 7백 냥 돈을 허비하니 실로 아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내가 이때 종이를 꼬아서 코를 쑤시니, 쌍림이 제 콧담배(코로 피우는 담배) 그릇을 끌러서,

 

재채기를 하시려오.”

하나, 나는 그와 말을 건네기도 싫고 또 콧담배 그릇을 쓰는 법도 알지 못하므로 받지 않았다. 쌍림이 날 보고 몇 번이나 말을 걸고 싶어했으나 내가 더욱 도사리고 앉으니 그는 곧 일어나서 나가 버렸다. 그 뒤에 역관들의 말을 들은즉, 쌍림이 내가 저와 수작을 건네지 않으므로 무료히 일어나서 매우 노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아비가 늘 아문(衙門)에 앉아 있으니 만일 쌍림의 노염을 사면 구경하러 드나들 때 반드시 말썽이 있을 것이고, 또 속담에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저번 쌍림을 냉대한 것은 재미없는 일이라고들 한다. 나 역시 마음에 그러려니 여겼다. 이윽고 사행은 먼저 떠나고, 나는 곤히 잠들었기 때문에 늦게 일어나서 마침 밥상을 물리고 행장을 차리는 차에 쌍림이 들어온다. 나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여,

 

영감, 한참 못 뵈었구려. 요즘 안녕들 하시오.”

하니, 쌍림이 좋아라고 자리에 앉으면서 삼등초(三登草)를 달라 하고 또 제집에 붙일 주련(柱聯)도 구하며, 또 내가 먹는 진짜 청심환과 단오(端午)에 기름 먹인 접부채를 달라 한다. 나는 일일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수레에 실은 짐이 도착되면 다 드리구말구.”

하고, ,

 

내 먼 길에 말을 타고 왔기에 퍽 고단하니 한 정거장만 당신과 한 수레에 타고 갔으면 좋겠소.”

하였더니,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공자(公子)와 함께 타고 간다면 이 길이 퍽 제게 영광이겠소.”

하고, 곧 함께 떠날 즈음에 쌍림이 수레 왼편을 비워서 나를 앉히고 제가 스스로 몰아갔다. 쌍림은 또 장복을 불러서 오른편에 앉히고는 그더러,

 

내가 조선말로 묻거든 너는 북경말로 대답하여라.”

한다. 둘이서 수작하는 것을 들으니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었다. 한편 쌍림의 조선말은 세 살 먹은 아이가 밥 달라는 말이 밤 달라는 듯싶고, 또 한편 장복의 중국 말은 반벙어리가 이름 부르는 듯 언제나 애()하는 소리만 거듭한다. 혼자서 보기는 참 아까운 일이다. 쌍림의 우리말이 장복의 중국말보다 어림없이 못하여 말끝마다 존비(尊卑)를 가려 쓸 줄 모르고, 게다가 말 마디를 굴릴 줄 모른다. 그는 장복더러,

 

, 우리 아버지를 보았니.”

하니, 장복은

 

칙사 나왔을 때 보았소이다. 대감(大監) 수염이 좋으시고 내가 보행으로 뒤를 따르며 권마성(勸馬聲)을 거푸 지르니, 대감이 눈에 웃음을 가득 담고 네 목청이 좋아. 그치지 말고 불러라.’ 하시기에 나는 쉬지 않고 외쳤더니 대감이 연방 좋다, 좋아.’ 하시고, 곽산(郭山)에 이르러선 손수 차담(茶啖)을 주시었다오.”

하매, 쌍림은,

 

우리 아버지 눈이 흉악해 보이지.”

하니, 장복은 껄껄 웃으면서,

 

마치 꿩 잡는 매 눈과 같더구먼요.”

하니, 쌍림은,

 

옳아.”

하고, ,

 

, 장가들었나.”

한즉, 장복은,

 

집이 가난해서 아직 못 들었습니다.”

하매, 쌍림은 연신,

 

하하, 불상(不祥)하이.”

한다. ‘불상이란 우리말로 아아, 안 됐군.’ 하고 차탄하는 따위의 말이다. 쌍림은 다시,

 

의주 기생이 몇 명이나 되느냐?”

하매, 장복은,

 

아마 30~40명 있죠.”

하니, 쌍림은,

 

예쁜 것도 많겠지야.”

한다. 장복은,

 

예쁘다 뿐이오. 양귀비(楊貴妃) 같은 것도 있고, 서시(西施) 같은 것도 있소. 이름이 유색(柳色)이라는 기생은 수줍은 꽃, 밝은 달 같은 자태가 있고, 또 춘운(春雲)이란 기생은 구름을 멈추고 남의 애를 끊을 만큼 창()을 잘한다오.”

하니, 쌍림은 깔깔대면서,

 

이런 기생이 있다면 내가 갔을 때에는 왜 현신(現身)하지 않았나?”

한다. 장복은,

 

만일 한번만 보시면 대감님 따위는 혼이 그만 구만 리 장천(長天) 구름 밖으로 날아가 버리고, 손 속에 쥐었던 만 냥 돈이 저절로 사라지고는 저 압록강을 다시 건너오질 못하리다.”

하니, 쌍림은 손뼉치고 깔깔거리면서,

 

내 다음 번 칙사를 따라 가거든 네가 가만히 데려오려무나.”

한다. 장복은 머리를 흔들면서,

 

잘 안 될 거요. 남에게 들키면 목이 달아나게요.”

하고, 둘이 모두 한바탕 크게 웃는다. 이렇게 주고받고 하면서 30리를 갔다. 이는 대개 둘이 서로 피차의 말을 시험하려 한 것인데 장복은 겨우 책문에 들어온 뒤 길에서 주워 들은 데 불과하나, 쌍림이 평생 두고 배운 것보다 더 잘한다. 이로 보아 우리말보다 중국말이 쉬움을 알겠다. 수레는 삼면을 초록빛 전으로 휘장을 쳐서 걷어올렸고, 동서 양쪽에는 주렴을 드리우고 앞에는 공단으로 차일을 쳤다. 수레 안에는 이불이 놓였고, 한글로 쓴 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두어 책이 있다. 비단 언문(諺文) 글씨가 너절할 뿐 아니라 책장이 해어진 것이 있다. 내가 쌍림더러 읽으라 하였더니, 쌍림이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높여 읽었으나 전혀 말이 닿지 않고 뒤범벅으로 읽어 간다. 입 안에 가시가 돋힌 듯 입술이 얼어 붙은 듯 군소리를 수없이 내며 끙끙거린다. 내 역시 한참 들어도 멍하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 그래서는 제가 늙어 죽도록 읽어도 아무 보람이 없을 것이다. 길에서 사행이 말을 갈아타는데 쌍림이 수레에서 뛰어 내려 점포 속으로 몸을 숨겼다가 사행이 떠난 뒤에 천천히 수레에 올랐다. 전날 내원이 그를 나무랐을 때 겉으로 버티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움츠러들었던 모양이다.

 

 

[D-001]내대신(內大臣) : 황제의 친척으로 시위하는 관직. 조선에서는 이런 것이 없으나 정사 박명원(朴明源)이 부마(駙馬)이므로 청()의 제도에 비겨서 말한 것.

[D-002]삼등초(三登草) : 평안남도 삼등에서 나는 질이 좋은 담배.

[D-003]양귀비(楊貴妃) : 당 현종(唐玄宗)이 사랑하던 미녀 양태진(楊太眞). 귀비는 봉호.

[D-004]서시(西施) : 전국시대 월()의 미녀. 시는 그의 성이요, 서는 시가(施家)의 서편 동네에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D-005]유씨삼대록(劉氏三代錄) : 우리 고전 소설의 일종. 작자는 미상.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8일 갑오(甲午)

 

 

개다.

새벽에 대릉하점(大凌河店)을 떠나 사동비(四同碑)까지 12, 쌍양점(雙陽店) 8, 소릉하(小凌河) 10, 소릉하교(小凌河橋) 2, 송산보(松山堡) 18, 모두 50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송산보에서 행산보(杏山堡)까지 18, 십리하점(十里河店) 10, 고교보(高橋堡) 8, 모두 36, 이날은 80리를 가서 고교보에서 묵었다.

사동비 근처에 이르니, 길가에 큰 비석 넷이 있는데 그 제도가 꼭 같으므로 지명을 사동비라 한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만력(萬曆) 15(1587) 8 29일에 왕성종(王盛宗 명말에 요동을 지키던 장수)을 요동전둔유격장군(遼東前屯遊擊將軍)으로 삼는다는 칙문(敕文)을 새겼고, 위에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찍었는데 비문 가운데 노추(虜酋)라는 두 글자는 모두 지워 버렸다. 그 둘째는 만력 15 11 4일에 왕성종을 요동도지휘체통행사(遼東都指揮體統行事)로 삼아서 금주(金州) 지방을 지킨다는 칙문을 새긴 것이요, 그 셋째는 만력 20(1592) 9 3일에 왕평(王平 명말에 요동을 지키던 장수)으로 요동유격장군(遼東遊擊將軍)을 삼는다는 칙문을 새긴 것인데, 위에는 칙명지보(敕命之寶)를 찍었고, 그 넷째는 만력 22(1594) 10 10일에 왕평으로 유격장군금주통할(遊擊將軍錦州統轄)을 삼는다는 칙문을 새겼고, 위에는 광운지보(廣運之寶)를 찍었다. 왕평은 왕성종의 아들이 아니면 조카인 듯싶다. 그들이 노추를 잘 막았다 하여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칙명을 내려 이를 표창하고, 큰 돌을 갈아 칙문과 고신(告身 사령장(辭令狀))을 새겨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의 갸륵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성종이 만일 요동에서 대대로 장수의 직책에 있었다면, 임진년에 왜놈들을 칠 때 참가하지 않았음은 어찌된 까닭일까.

전에 사행이 다닐 때 이곳에 이르면, 비장이 반드시 이 비석에다, ‘모일 모시에 관()에 나왔고 모일 모시에 이곳을 지난다.’고 써 놓기로 되어 있다. 먹이는 말이 곳곳마다 떼를 지어 한 곳에 천여 마리씩 몰리어 다니는데 모두 흰 빛깔이다.

배로 소릉하를 건넜다. 수레에 몇 천 바리의 쌀을 싣고 지나가는데 먼지가 하늘을 덮는다. 이는 해주(海州)에서 금주(錦州)로 실어들이는 것이다. 사나운 바람이 일기에 내가 먼저 말을 달려 사관에 들어가 한숨 자고 나니, 정사가 뒤이어 와서 말하기를,

 

낙타 수백 마리가 철물(鐵物)을 싣고 금주로 가더군.”

한다. 나는 공교롭게 두 번이나 낙타를 보지 못한 셈이다. 강가에 민가 몇 백 호가 있던 것이 지난해 몽고의 침략을 입어서 모두 아내들을 잃고 몇 리 밖으로 옮겨갔다 한다. 이제 그 길가에 허물어진 담이 둘렸으나 네 벽만이 쓸쓸하게 서 있을 뿐, 강가 아래 위에 흰 장막을 치고 파수를 보고 있다. 대개 이 강은 몽고의 지경에서 50리밖에 되지 않은 곳으로 며칠 전에 몽고기병 수백 명이 이에 이르렀다가 수비가 있음을 알고 도망해 버렸다 한다. 송산(松山)에서부터 행산(杏山)고교(高橋)를 거쳐 탑산(塔山)까지의 백여 리 사이에는 동리나 점포가 있기는 하나 가난하고 쓸쓸하여 그들은 조금도 생업에 안주할 의사가 없다. 아아, 이곳이 곧 옛날 숭정(崇禎) 경진(庚辰)신사(辛巳) 연간(1640~41)에 피흘리던 마당이다. 이제 벌써 백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소생하는 기색이 뵈지 않으니, 그 당시 용과 범들의 싸움이 격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지금 황제가 엮은 전운시(全韻詩) (),

 

숭덕(崇德) 6(1633) 8월에 명의 총병 홍승주(洪承疇)가 구원병 13만 명을 송산에 모으니, 태종(太宗)이 곧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려 할 때 마침 코피를 쏟았는데, 일이 시급하자 증세가 더욱 심하여 사흘 만에 겨우 그쳤다. 제왕(諸王)과 패륵(貝勒)들이 천천히 행군하기를 청했으나 태종은 싸움에 이기려면 행군을 빨리해야 한다 하고는, 빨리 달려서 엿새 만에 송산에 이르러 군사를 송산행산 사이에 풀어서 한길을 가로 막았다. 이에 명의 총병 여덟 명이 전봉을 범하는 것을 모두 쳐 무찌르고 그들이 필가산(筆架山)에 쌓아둔 양식을 빼앗고, 해자를 파서 송산행산의 길을 끊었다.

이날 밤 명의 여러 장수가 칠영(七營)의 보병을 거두어 와서 송산성(松山城) 가까이 진을 쳤다. 이에 태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오늘 밤 들어 적병이 반드시 도망치리라 하고, 이내 호군(護軍) 오배(鼇拜) 등으로 사기(四旗)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봉과 몽고 군사가 함께 나란히 진을 펴고 곧 바닷가에 닿게 하고, 또 몽고 고산액진(固山額眞) 고로극(固魯克 액진의 이름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 길에 매복하였다가 적을 맞아서 치게 하고, 예군왕(睿郡王)을 시켜서 금주로 가서 탑산 한길에 이르러 가로질러 적을 치게 하였다.

이날 밤 초경(初更)에 명의 총병 오삼계(吳三桂 명말의 이름 높던 장수) 등이 바닷가로 도망치는 것을 서로 잇대어 추격하고, 또 파포해(巴布海 청 태조의 열한째 아들) 등을 시켜서 탑산 길을 끊고,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제격(阿濟格)에게 명하여 역시 탑산으로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며, 패자(貝子) 박락(博洛 청 태조의 손자)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상갈이채(桑噶爾寨)에 가서 적을 쳐부수게 하고, 고산액진 담태주(譚泰柱)를 시켜서 소능하에 가서 바닷가까지 이르러 적의 돌아가는 길을 끊게 하며, 매륵장경(梅勒章京) 다제리(多濟里 매륵장경의 성명)에게 명하여 패하여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게 하고, 또 고산액진 이배(伊拜) 등을 보내어 행산의 사방에서 명병(明兵)이 행산으로 도망하여 들어오는 것을 치게 하고, 몽고 고산액진 사격도(思格圖) 등을 보내어 그들의 도망하는 군사를 추격(追擊)하게 하며, 국구(國舅) 아십달이한(阿什達爾漢 청 태종의 장인인 듯하다) 등에게 명하여 행산의 병영을 가 보아서 만일 그곳이 좋지 못하거든 다른 곳을 골라서 옮기게 하며, 그 이튿날 예군왕과 무영군왕을 시켜 탑산의 사대(四臺)를 에워싸고 홍의포(紅衣礮 대포의 일종)로 쳐서 이겼다.

명의 총병 오삼계와 왕박(王樸 명말의 장수)이 행산으로 달아나니, 이날 태종은 군사를 송산으로 옮기고 해자를 파서 에우려 하였다. 이날 밤 총병 조변교(曹變蛟)가 진을 버리고 에워싼 것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를 여러 차례 하므로 다시 내대신(內大臣) 석한(錫翰) 등과 사자부락(四子部落) 도이배(都爾拜 사자부락 군대의 장수)에게 명하여 각기 정병 2 50명을 거느리어 고교보(高橋堡)와 상갈이보(桑噶爾堡)에 매복시키고는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교보 동쪽에 이르러 패륵 다탁(多鐸)으로 하여금 군사를 매복시켰다. 오삼계와 왕박이 패하여 고교보에 이르니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겨우 몸을 빼쳐 도망하였다. 이 싸움에서 명병 5 3 7백 명을 죽이고,  7 4백 필, 낙타 60, 갑옷과 투구 9 3백 벌을 노획하였다. 행산의 남쪽으로부터 탑산에 이르기까지 바다로 뛰어들어가 죽은 자도 심히 많아서 시체가 마치 물오리와 따오기처럼 물에 둥둥 떴으나 청군은 잘못하여 다친 자가 겨우 여덟일 뿐, 그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한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이른바 송산행산의 싸움이다. 각라(覺羅 청 태조 애친각라(愛親覺羅))는 관외(關外)의 이자성(李自成)이요, 이자성은 역시 관내(關內)의 각라였으니, 명이 비록 망하지 아니한들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에 13만의 많은 군사로 각라의 수천 명에게 에워싸인 바 되어서 잠시 동안에 마치 마른 나무가 꺾이듯이, 썩은 새끼 끊기듯이 되어버리고, 홍승주와 오삼계같이 슬기 있고 용맹스러움이 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이들이건만 한번 각라를 만나자 곧 혼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져 그의 거느린 13만의 군사가 마치 지푸라기나 물거품같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 지경에 이르면 어찌할 수 없이 운수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겠다.

전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지은 송계집(松溪集)을 읽자니까,

 

청병이 송산을 에워쌌을 때에 마침 효종 대왕(孝宗大王 이호(李淏)의 묘호)께옵서 세자의 몸으로 인질(人質)이 되어 청의 진중(陣中)에 계시더니 잠깐 다른 곳으로 막차(幕次)를 옮긴 사이에 영원총병(寧遠摠兵) 오삼계가 거느린 만 명의 기병이 포위를 뚫고 달려 나오니 애초에 막차이던 곳이 바로 그 길목이었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왕령(王靈)이 계신 곳에 천지의 신명이 힘을 합하여 도우신 밝은 증험이 아니겠는가.

밤에 고교보(高橋堡)에 묵었다. 이곳은 지난해 사행이 은()을 잃은 곳이다. 지방관은 이로 말미암아 파직을 당하였고, 근처 점포에 애매하게 죽은 사람이 있었으므로 갑군(甲軍)이 밤이 새도록 야경을 돌면서 우리나라 사람을 도적과 다름 없이 엄하게 방비한다. 사처방 청지기의 말에 의하면,

 

이곳 사람들은 조선 사람을 원수같이 보아서 간 곳마다 문을 닫고 맞이하지 않으며, ‘고려야, 고려는 그 신세진 사관 주인을 죽였다. 단 천 냥 돈이 어찌 4~5명의 목숨을 당할 것인가. 우리들 가운데도 불량한 이가 많지만 당신네들 일행 중엔들 어찌 좀도둑이 없을 건가.’ 하고는 그 은닉하는 교묘한 방법이 몽고와 다름없사옵니다.”

한다. 내가 이 사실을 역관에게 물으니, 그는,

 

지난 병신년(丙申年 1776) 고부차(告訃次)로 사행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공비은(公費銀) 1천 냥을 잃어버린 일이 있습니다. 사신들이 의논하되, ‘이는 나라의 돈이라 만일 쓴 곳이 없을 때에는 액수를 맞추어서 환납함이 곧 국법이거늘 이제 공연히 잃었으니 장차 돌아가 무슨 말로 사뢸 것인가. 잃었다 한들 누가 믿으며, 이를 물자 한들 누가 감당하겠는가?’ 하고 곧 지방관에게 그 사연을 알렸더니, 곧 중후소 참장(中後所叅將)에게 알리고, 중후소에서는 금주위(錦州衛), 금주에서는 산해관 수비(守備)에게 알리게 되어 며칠 사이에 이 일이 예부(禮部)에 알려져서 황제의 분부가 이내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방에 관은(官銀)으로 잃은 돈을 물리고, 또 이 지방관이 항상 도적을 막기에 힘쓰지 아니하여 길손에게 원통한 변을 당하게 하였다 하여 파직으로 그 책임을 지우고, 사관의 주인과 그 가까운 이웃에 사는 용의자들을 잡아다가 닥달해서 그 중 너덧 사람이나 죽었습니다. 사행이 미처 심양에 이르기 전에 황제의 분부가 벌써 내렸으니, 그 거행의 신속함이 이러합니다. 그 뒤로부터 고교보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원수같이 봄이 괴이한 일은 아닐까 하옵니다.”

한다. 대개, 의주의 말몰이꾼들은 태반이 거의 불량한 축들이며, 오로지 연경에 드나드는 것으로 생계를 삼아서 해마다 연경 다니기를 저희들 뜰 앞처럼 여긴다. 그리고 의주부에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사람마다 백지 60권에 지나지 않으므로, 백여 명 말몰이꾼들이 길가며 훔치지 않으면 다녀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넌 뒤로는 낯도 씻지 않고 벙거지도 쓰지 않아 머리털이 더부룩하여 먼지와 땀이 엉기고 비바람에 시달리어 그 남루한 옷과 벙거지 차림이 귀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꼴이 마치 도깨비처럼 우습게 보인다. 이 무리 중에는 열다섯 살 나는 아이가 있는데 벌써 이 길을 세 번이나 드나들었다는데 처음 구련성에 닿았을 때는 제법 말쑥하여 뵈던 것이 반 길도 못 가서 햇빛에 얼굴이 그슬리고 시꺼먼 먼지가 살에 녹슨 듯하여 다만 두 눈만 빠꼼하니 희게 보일 뿐 홑 고쟁이가 낡아서 엉덩이가 다 드러났다. 이 아이가 이러할 제야 다른 것들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도둑질하는 것을 보통으로 하고, 밤에 사관에 들면 어떠한 방법으로든 훔치고 만다. 그러므로 이를 막으려는 주인의 수단도 극도에 달하였다. 지난해 동지(冬至) 사행 때에 의주 상인 하나가 은화를 가만히 가지고 오다가 말몰이꾼에게 맞아 죽었는데, 빈 말 두 마리만 고삐를 놓아서 도로 강을 건너보냈으므로 말이 각기 그 집에 찾아 드는 것을 증거로 삼아서 마침내 법에 걸렸다 한다. 그 흉험함이 대체로 이와 같으니 이제 그 은을 잃음이 어찌 이놈들의 소행이 아니라 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사소한 일이지만 만일 병자년 호란(胡亂) 같은 일이 다시 있다 하면 용천(龍川)철산(鐵山)의 이서는 우리 땅이 아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자 역시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날 밤 바람이 심하여 날이 새도록 하늘을 뒤흔드는 듯하였다.

 

 

[D-001]노추(虜酋) : 오랑캐의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명이 청의 임금이나 장수를 부를 때 쓴 말.

[D-002]홍승주(洪承疇) : ()의 장수로서 청군과 싸우다가 항복하여 청에 공이 많았다. 그가 송산에서 청군에게 사로잡혔을 때, 명의 조정에서는 그가 순국한 줄로 알고 치제하였다.

[D-003]오배(鼇拜) : 만인. 일찍부터 전공을 세워 의정대신(議政大臣)이 되고, 강희 초년에 선제의 고명(顧命)을 받아 정치에 참여했으나 전횡이 심하여 적몰(籍沒) 당하였다.

[D-004]고산액진(固山額眞) : 청의 벼슬 이름. 고산장경(固山章京)이라고도 함. ‘고산은 만주 말에서 아름다운 칭호이므로 그들의 벼슬 이름 위에 씌워서 불렀다.

[D-005]예군왕(睿郡王) : 청 태조의 열넷째 아들. 세조를 받들고 관에 들어가 이자성(李自成)을 깨뜨리고 중원을 평정하였다.

[D-006]아제격(阿濟格) : 청 태조의 열두째 아들. 무영군왕은 봉호.

[D-007]패자(貝子) : 청의 벼슬 이름. 종실(宗室)이나 몽고 외번(外藩)에게 주었다. 패륵의 아래요, 진국공(鎭國公)의 위이다.

[D-008]담태주(譚泰柱) : 만인. 명과 싸운 공으로 일등공(一等公)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극형을 당하였다.

[D-009]매륵장경(梅勒章京) : 팔기(八旗)의 부장(副將). 장경은 액진(額眞)이라고도 하였다.

[D-010]이배(伊拜) : 만인. 홍승주를 송산에서 사로잡았다.

[D-011]조변교(曹變蛟) : 명말의 장수. 홍승주를 따라 송산에서 싸우다가 붙잡혀서 죽었다.

[D-012]다탁(多鐸) : 청 태조의 열다섯째 아들. 보정왕(輔政王).

[D-013]이자성(李自成) : 명말의 유적(流賊)으로서 북경을 함락시켜 명을 망하게 했으나 오삼계가 끌어들인 청군에게 패사하였다.

[D-014]인평대군(麟坪大君) :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 이요(李㴭)의 봉호. 병자호란이 끝난 뒤 세자(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볼모로 잡혀 갔다.

[D-015]고부차(告訃次) : 국상을 알리는 사신. 이때는 영조(英祖)의 국상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9일 을미(乙未)

 

 

개다.

새벽에 고교보를 떠나 탑산(塔山)까지 12, 주사하(朱獅河) 5, 조라산점(罩羅山店) 5, 이대자(二臺子) 10, 연산역(連山驛) 7, 모두 32리를 가서 점심 먹었다. 또 연산역에서 오리하자(五里河子)까지 5, 노화상대(老和尙臺) 5, 쌍수포(雙樹舖) 5, 간시령(乾柴嶺) 5, 다붕암(茶棚菴) 5, 영원위(寧遠衛) 5, 모두 30리이다. 이날 62리를 가서 영원성 밖에서 묵었다.

어저께 벌써 부사서장관과 새벽 일찍 탑산에 가서 해돋이를 구경하자고 약속하였으나, 모두 늦게 떠났으므로 탑산에 이르자 해가 세 발이나 높이 올랐다. 동남으로 큰 바다가 하늘에 닿은 즈음에, 만으로 헤일 만큼 많은 상선(商船)이 간밤의 바람에 쫓기어 들어와서 작은 섬에 의지하였다가 마침 일시에 돛을 달고 떠나는 것이 마치 물에 뜬 오리떼 같았다. 영녕사(永寧寺)는 숭정(崇禎) 연간에 조대수(祖大壽)가 처음 지은 절이라 한다. 절이나 관묘(關廟)는 요동에서 처음 그 웅장 화려함을 보았으므로 대략 기록한 바 있었으나, 그 뒤 길에서 수없이 본 것이 비록 대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제도는 대체로 같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을뿐더러 역시 구경하기에도 지쳐서 나중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길가에 여남은 길이나 되는 묏봉우리가 있어 이름이 구혈대(嘔血臺)라 한다. 전하는 말에,

 

청 태종이 이 봉우리에 올라서 영원성 안을 굽어보다가 명의 순무(巡撫) 원숭환(袁崇煥)에게 패한 바 되어서 피를 토하고 죽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한다. 영원성 안 한길 가에 조가(祖家)의 패루(牌樓)가 마주 섰는데, 그 사이가 수백 보나 되며, 두 패루가 모두 삼문(三門)으로 되었고 기둥마다 앞에 몇 길 되는 돌사자를 앉혔다. 하나는 조대락(祖大樂 조대수의 형)의 패루요, 또 하나는 조대수의 패루이다. 높이 모두 예닐곱 길이나 되는데, 대수의 패루가 조금 낮은 편이다. 둘 다 옥결 같은 흰 돌로 층층이 쌓아 올려, 추녀도리들보서까래며, 기와처마들창기둥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한 토막도 쓰지 않았고, 대락의 패루는 오색 무늬가 있는 돌로 세웠다. 두 패루를 세운 솜씨와 그 아로새긴 공력은 거의 사람 힘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대락의 패루에는 삼대(三代)의 고증(誥贈), 곧 증조 조진(祖鎭)과 할아비 조인(祖仁), 아비 조승교(祖承敎)를 쓰고, 전면에는 원훈초석(元勳初錫)이요, 후면에는 등단준열(登壇峻烈)이며, 맨 위층에는 옥음(玉音)이라 썼고, 주련(柱聯)에는,

 

무덤이 처음 같아 새로운 경사가 네 대를 쌓였거니 / 松檟如初慶善培于四世

자손이 현달하여 영광이 천추에 빛나리라 / 琳琅有赫賁永譽于千秋

라 새겼고, 그 뒷면에는,

 

노래로 찬송하니 늠름한 모습은 간성의 중책이요 / 恒赳興歌國倚干城之重

임금이 괴오시니 갸륵한 공훈 금석에 새겼구나 / 絲綸錫寵朝隆銘鼎之褒

라고 새겼다. 대수의 패루에도 사대(四代)의 고증을 썼는데, 증조와 조부는 대락과 같고, 아버지는 조승훈(祖承訓)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력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승훈이 요동 부총병(副摠兵)으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맨 먼저 구원하러 왔던 사람이다. 윗층에는 확청지열(廓淸之烈)이요, 아래층에는 사대원융(四代元戎)이라 썼으며, 그 앞뒤 주련이며 날짐승과 길짐승의 모양이나 싸움하는 그림을 새긴 것은 모두 양각(陽刻)이다. 주련의 글은 바빠서 적지 못했다. 조씨는 요계(遼薊)에서 대대로 이름난 장수 집안이다. 숭정 2(1629) 일월에 청병이 북경을 쳐들어오매 이해 12월에 독수(督帥) 원숭환이 조대수하가강(何可剛) 등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구원하여 지나는 곳마다 군대를 머물러서 지키니, 황제는 그가 이른다는 말을 듣고 심히 기뻐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군을 모두 통솔하게 하였다. 청인이 이를 이간하려고 그 장수 고홍중(高鴻中)을 시켜 사로잡아 온 명의 태감(太監) 두 사람 앞에서 일부러 귓속말로,

 

오늘 군사를 파함은 아마 원 순무(袁巡撫)와 비밀 약속이 있어서 한 일인가 보오. 아까 두 사람이 와서 한()을 뵙고 이야기하다 한참 만에야 돌아갔다오.”

하였다. 양 태감(楊太監 양의 성을 가진 태감)이 잠든 체하고 그 말을 가만히 엿듣고 있다가 청이 짐짓 그를 놓아 보내자 이 일을 황제에게 일러 바쳤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원숭환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대수가 크게 놀라 하가강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동으로 달아나서 산해관을 헐고 나갔다. 그 뒤 금주송산의 싸움에 조대락조대성(祖大成)조대명(祖大明 세 사람 모두 한 형제간임) 등이 모두 사로잡히고, 대수는 대릉하성(大凌河城)을 지키던 중 청군에게 에워싸였다가 양식이 다하여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의 패루만 우뚝 서 있을 뿐, 농서(隴西)의 가성(家聲)은 벌써 헐리어서 부질없이 후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그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대수가 성 안에 있던 곳을 문방(文坊)이라 하고, 성 밖에 있던 곳을 무당(武堂)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딴 사람이 들어있다. 그리고 서쪽 몇 길 되는 담 안에 조그만 일각문이 서 있고, 그 문과 담의 제도가 패루의 기묘한 솜씨와 비슷하다. 담 안에 오히려 두어 칸 정사(精舍)가 남아 있어서 이 지방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대수가 한가할 때 글 읽던 곳이라 한다. 이날 밤에 천둥과 비가 새벽까지 멎지 않았다.

 

 

[D-001]조대수(祖大壽) : 명의 장수로서 대릉하를 지키다가 실패하고, 면주(綿州)에서 청에게 항복하여 총병(摠兵)이 되었다.

[D-002]원숭환(袁崇煥) : 명말의 대장, 병부 상서(兵部尙書)로서 요동 순무(遼東巡撫)로 공이 많았으나 청과 화친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D-003]고증(誥贈) : 추증과 같다. 청의 제도에 5품관 이상은 죽은 조모 처를 추봉했는데 이때 고() 자를 붙였다. 생존한 이는 고봉(誥封)이라 한다.

[D-004]하가강(何可剛) : 명의 장수로서 대릉하 싸움에 조대수가 청군에 항복하려는 것을 굳이 말리다가 피살되었다.

[D-005]태감(太監) : 명의 벼슬 이름. 내부(內部) 모든 감()의 장관.

[D-006]() : 청의 군장(君長)을 일컫는 말.

[D-007]농서(隴西)의 가성(家聲) : () 이광(李廣)이 농서의 명장으로 대대로 높은 명망이 일세를 울렸으나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0일 병신(丙申)

 

 

아침에 개었다가 저녁나절에 비가 내리다.

이날 새벽에 영원성을 떠나 청돈대(靑墩臺)까지 7, 조장역(曹庄驛) 6, 칠리파(七里坡) 7, 오리교(五里橋) 5, 사하소(沙河所) 5, 모두 30리를 가서 점심 먹으니, 사하소는 곧 중우소(中右所). 낮 뒤에 찌는 듯한 더위가 비를 빚더니 겨우 간구대(乾溝臺) 3리를 와서 큰 비가 왔다. 비를 무릅쓰고 연대하(煙臺河) 5, 반랍점(半拉店) 5, 망하점(望河店) 2, 곡척하(曲尺河) 5, 삼리교(三里橋) 7, 동관역(東關驛) 3, 모두 30리이다. 이날 60리를 갔다. 청돈대는 해돋이를 구경하는 곳이다. 부사와 서장관이 닭 울 임시에 먼저 떠나서 해돋이를 구경할 예정으로 내게 하인을 보내어 같이 가기를 청했으나, 나는 푸근히 자야겠다 하고 늦게 떠났다. 대체로 해돋이를 구경함도 역시 운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내 전에 동쪽 바다에 노닐 때 총석정(叢石亭)의 해돋이와 옹천(甕遷 통천군 남쪽)석문(石門 통천군 바닷가)의 해돋이를 하나도 시원히 보지 못했다. 혹은 늦게 이르러 해가 벌써 바다를 떠났고, 혹은 밤새 자지 않고 일찍 나가 보면 구름과 안개에 가려서 흐리곤 하였다.

대개, 해뜰 하늘에 구름 한점 없으면 잘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이처럼 무미한 것이 없다. 이는 다만 빨간 구리 쟁반 한 덩이가 바다 속에서 나올 뿐 아무런 가관이 없는 것이다. 해는 임금의 기상이라, ()를 기리는 말에도,

 

바라볼 젠 구름이요 / 望之如雲

다가서니 해일러라 / 就之如日

하였으니, 그러므로 해가 돋기 전에는 반드시 많은 구름 기운이 그 변두리에 몰려들어, 마치 앞길을 인도하는 듯 뒤를 따르는 듯 의장(儀仗)을 갖추는 듯 천승(千乘)만기(萬騎)가 임금을 모시고 옹위하여 깃발이 펄럭이고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연후에야 비로소 장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구름이 너무 많이 끼면 도리어 가물가물하고 가려져서 또한 볼 것이 없으려니, 대개 새벽 순음(純陰) 기운이 햇빛을 받아서, 이로 말미암아 바위 틈에 구름이 서리고 시냇가에 안개가 피어나서 서로 비치어 해가 돋을락 말락할 때에 그 기상이 원망스러운 듯 수심겨운 듯 해미가 끼어서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가 읊은 시(),

 

나그네 밤중되자 서로들 외치는데 / 行旅夜半相呌譍

먼 마을 닭 울음소리 외로이 들리누나 / 遠雞其鳴鳴未應

먼 닭이 먼저 우니 그곳이 어디더뇨 / 遠雞先鳴是何處

내 마음속 그 소리는 파리처럼 가늘도다 / 只在意中微如蠅

이웃 개 짖던 것이 그마저 고요하구나 / 村裏一犬吠仍靜

고요에 잠긴 이 몸 마음속이 떨리네 / 靜極寒生心兢兢

이때에 또 한 소리 귓가에 울려 와서 / 是時有聲若耳鳴

더 자세히 들으니 또 한 소리 홰를 친다 / 纔欲審聽簷雞仍

예서 총석정이 가까워 십 리라니 / 此去叢石只十里

넓디넓은 바닷가에 해돋이를 보오리라 / 正臨滄溟觀日昇

하늘인양 물인양 혼돈하여 가이 없고 / 天水澒洞無兆眹

언덕 위에 물결 치니 벼락이 이는 듯이 / 洪濤打岸霹靂興

흑풍이 이는 곳에 온 바다를 뒤집는 듯 / 常疑黑風倒海來

멧부리째 뽑을 듯이 돌인들 온전하리 / 連根拔山萬石崩

고래 싸움 등 터지니 이게야 예사련만 / 無怪鯨鯤鬪出陸

별안간 바다 끓어 큰 붕새 날아든다 / 不虞海運値摶鵬

오래도록 이날 밤이 안 샐까 근심이라 / 但愁此夜久未曙

이제 더욱 혼돈한들 뉘라서 분간할꼬 / 從今混沌誰復徵

이곳에 신령 있어 삼엄한 경계 펴니 / 無乃玄冥劇用武

땅 깊이 문이 닫혀 서산에 얼음 어네 / 九幽早閉虞淵氷

저 하늘 한 덩이가 뒤집혀 도는 듯이 / 恐是乾軸旋斡久

서북이 기울고 지구가 휘둘리네 / 遂傾西北隳環絙

세 발 까마귀 날기도 빨리 하네 / 三足之烏太迅飛

뉘라서 그 발 하나를 놋줄에 달아맬까 / 誰呪一足繫之繩

해약(바다 귀신)의 옷과 띠에 검은 빛이 듣는 듯 / 海若衣帶玄滴滴

수비(바다의 여신)의 쪽질머리 차갑기 짝이 없네 / 水妃鬢鬟寒凌凌

큰 고기 설렁이며 용마처럼 달려올 제 / 巨魚放蕩行如馬

붉은 갈기 푸른 등성이 어찌 그리 터벅한고 / 紅鬐翠鬣何鬅鬠

하늘이 만물 낼 제 뉘라서 참간했나 / 天造草昧誰叅看

미친 듯이 고함 치며 등불 켜고 보련다 / 大呌發狂欲點燈

창날 같은 혜성 꼬리 불살을 드리운 듯 / 攙搶擁彗火垂角

나무 위에 부엉이는 그 울음이 얄미워라 / 禿樹啼鶹尤可憎

잠깐 만에 바다 위에 작은 멍울 생긴 듯이 / 斯須水面若小癤

용의 발톱 그릇 닿아 독이 나서 아픈 듯이 / 誤觸龍爪毒可疼

그 빛깔 점점 커져 만 리를 뻗치누나 / 其色漸大通萬里

물결 위 붉은 무늬 꿩 가슴 모습일레 / 波上邃暈如雉膺

아득한 이 천지가 이제야 경계 생겨 / 天地茫茫始有界

붉은 빛 선 하나가 나누어 두 층 되네 / 以朱畵一爲二層

어둠 세계 깨어나서 온누리가 물든 듯이 / 梅澀新醒大染局

만상에 빛이 스며 비단 무늬 이루었네 / 千純濕色縠與綾

산호수 찍어 내니 검은 숯을 구우련가 / 作炭誰伐珊瑚樹

동녘에 빛 오르자 찌는 듯 뜨거워라 / 繼以扶桑益熾蒸

염제는 풀무 불어 입이 응당 비뚤겠고 / 炎帝呵噓口應喎

축융이 부채 부쳐 오른팔이 피로하리 / 祝融揮扇疲右肱

새우 수염 길다 한들 불사르긴 가장 쉽고 / 鰕鬚最長最易爇

달팽이 집 굳다 한들 저절로 익어지네 / 蠣房逾固逾自脀

얇은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모여들어 / 寸雲片霧盡東輳

찬란한 온갖 상서 제각기 나타내네 / 呈祥獻瑞各效能

옥황상제 뵙기 전에 갖옷을 던져 두고 / 紫宸未朝方委裘

도끼 그린 병풍 치고 잠자코 비껴 앉아 / 陳扆設黼仍虛凭

조각달이 가늘건만 계명성과 빛을 새워 / 纖月猶賓太白前

설의 나라일망정 장단을 다투도다 / 頗能爭長薛與滕

붉은 기운 점점 엷어 오색이 찬란쿠나 / 赤氣漸淡方五色

머나먼 곳 물결 머리 그 먼저 맑아지니 / 遠處波頭先自澄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딘지 도망치고 / 海上百怪皆遁藏

희화(태양을 몰고 가는 귀신)만 홀로 수레를 타는구나 / 獨留羲和將驂乘

둥글둥글 저 얼굴이 육만하고 사천 년에 / 圓來六萬四千年

오늘 아침 변하더니 네모도 나는구나 / 今朝改規或四楞

만 길이나 깊은 속에 뉘라서 떠올릴지 / 萬丈海深誰汲引

하늘에도 섬돌 있어 오르게 되었구려 / 始信天有階可陞

등림의 익은 과실 한 낱이 붉어 있어 / 鄧林秋實丹一顆

해 아드님 붉은 공이 꺼지고 반만 올라 / 東公綵毬蹙半登

과보(해와 경주하던 선인(仙人))도 뒤에 와서 쉬지 않고 헐떡이고 / 夸父殿來喘不定

여섯 용이 앞을 서서 자랑하기 그지없네 / 六龍前導頗誇矜

하늘 가이 어두워져 얼굴빛을 찌푸린다 / 天際黯慘忽顰蹙

햇바퀴를 힘껏 밀어 기운이 배가 솟네 / 努力推轂氣欲增

길기가 항아리라 바퀴처럼 못 궁글어 / 團未如輪長如瓮

솟았다 잠겼다 철석 소리 들리는 듯 / 出沒若聞聲砯砯

어제와 같이 환하게 만물을 보려면 / 萬物咸覩如昨日

뉘라서 두 손으로 한 번 들어 뛰올릴꼬 / 有誰雙擎一躍騰

라 하였다. 대개 해돋는 광경은 천변만화하여 사람마다 보는 바가 같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바다에서 구경할 것만도 아니다. 내가 요동 벌에서 날마다 해돋이를 보았는데 하늘이 개서 구름 없으면 햇덩이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열흘을 두고 보아도 날마다 같지 않다. 부사와 서장관은 오늘도 역시 구름이 가려서 보지 못하였다 한다.

오후에 더위가 심하더니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우장옷이 찌는 듯하고 가슴이 그득한 것이 더위를 먹은 듯싶다. 잠자리에 들 때 큰 마늘을 갈아 소주에 타서 마셨더니, 그제야 배가 편하여 온전히 잘 수 있었다. 밤새 비가 멎지 않았다.

 

 

[D-001]총석정(叢石亭) : 관동 팔경의 하나. 강원도 통천(通川)에 있다.

[D-002]바라볼 …… 해일러라 :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서 나왔다.

[D-003]세 발 까마귀 : 태양 속에 까마귀가 깃들었다는 전설. 삼족오(三足烏).

[D-004] : 전국 때 두 개의 작은 나라. 맹자(孟子)에서 나온 말.

[D-005]등림(鄧林) : 곧 도림(桃林)인데, 중국의 전설에 과보(夸父)라는 선인(仙人)이 해를 쫓아 가다가 목이 타서 죽을 때 지팡이를 던지매 등림이 이룩되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1일 정유(丁酉)

 

 

비오다 개다 하다.

강물에 막혀서 동관역(東關驛)에 머물렀다. 들으니 옆 사관에는 등주(登州)에서 온 이 선생(李先生)이란 자가 있어서 점을 잘 치고, 또 사람을 시켜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자 한다 하기에 식후에 찾아갔다. 그의 점치는 법은 태을수(太乙數)를 본다 한다. 나는 그에게,

 

이게 자미두수(紫微斗數)가 아니오.”

하고 물었더니, 이생(李生),

 

이른바 자미(紫微)’란 소수(小數)에 불과하오나, 이 태을(太乙)은 곧 태을의 일성(一星)이 자미궁(紫微宮 옥황이 살고 있는 궁전)에 있어서 천일생수(天一生水)에 속하므로 태을이라 하오. 그리하여 을()이란 곧 일()이요, ()는 조화의 근본이며, 육임(六壬)은 곧 물이요, 둔갑(遁甲) 역시 태을이라, 이는 오월춘추(吳越春秋) 같은 책에 명험(明驗)이 많이 나타나 있고, 육십사괘(六十四卦 역경(易經)에 실린 네 개의 괘)가 도시 이에 자나지 못하는 거요. 그러므로 장수(將帥)가 된 자로서 이 육임과 둔갑(遁甲)의 법을 모르면 기변(奇變)을 알지 못하는 법이오.”

한다. 내 본시 성미가 관상(觀相)이나 사주(四柱 생년) 같은 걸 좋아하지 않으므로 평생에 그 법을 알지 못하고, 또 그가 말한 육임둔갑이라는 것이 몹시 허망한 것이므로 사주를 내어 주지 않았다. 보아하니 그 자 역시 그의 술수를 과장하여 많은 복채를 낚으려다가 내 기색이 매우 냉담함을 살피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방 맞은편에 한 노인이 안경을 쓰고 앉아서 글을 베끼고 있기에, 그 앞으로 다가서서 베끼는 것을 본즉, 모두 근세의 시화(詩話)이다. 노인이 안경을 늦추고 붓을 멈추면서,

 

손님이 멀리 오셨으니 길에서 해랑(奚囊)이 필수 풍부하시리니 아름다운 글귀 두어 구를 남겨 주시지요.”

한다. 그 베끼는 글씨는 비록 옹졸하나 시화에는 제법 묘한 것이 더러 있고, 노인 역시 생김새가 밝고 아담하고 곁에 놓인 물건들도 정쇄하기에 구들에 들어앉아서 서로 성명을 대니, 노인 역시 등주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성은 축()인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그가 우리나라 여자의 비녀를 지르는 법과 의복 제도를 묻기에, 나는,

 

모두 중국 상고 시대의 것을 본받았습니다.”

하니, 축은,

 

좋아요, 좋소이다.”

한다. 나는 그에게,

 

그럼, 귀향(貴鄕)의 여복은 어떠하오니까.”

한즉, 축은,

 

대략 같습니다. 풍습이, 여자가 시집갈 때면 쪽지만 하고 비녀는 꽂지 않으며, 빈부를 가릴 것 없이 평민(平民)의 부녀는 관()을 쓰지 않고, 다만 명부(命婦)만이 관을 쓰는데, 제각기 남편의 직품(職品)에 따라서 잠이나 머리꽂이 역시 모자의 제도와 같이 층하가 있으며, 쌍봉차(雙鳳釵)가 제일 고귀하되, 그 중에도 비봉(飛鳳)입봉(立鳳)좌봉(坐鳳)즙봉(戢鳳) 등의 구별이 있고, 비취잠(翡翠簪)에도 모두 품직의 차이가 있으며, 처녀는 긴 바지저고리를 입다가 시집가면 적삼에다 큰 소매 달린 긴 치마를 입고 띠를 두릅니다.”

한다. 나는,

 

등주가 여기서 얼마나 되며, 무슨 일로 이곳에 와 계시오.”

하니, 축은,

 

등주는 옛날 제()의 지경으로 이른바 바다를 등진 나라라 하는 곳입니다. 육로로는 북경까지 1 5백 리지만 우리들은 배를 타고 면화(綿花)를 사러 금주(金州)에 가다 이곳에 지체하고 있습니다.”

한다. 그 베끼는 글 중에 다음과 같이 적힌 것이 있다.

 

나홍선(羅洪先 양명학파(陽明學派)의 대가)은 길수(吉水) 사람인데, ()의 가정(嘉靖) 기축년(1529) 과거에 장원(壯元)했다.

주연유(周延儒)는 직례(直隷) 사람인데 만력(萬曆) 계축년(1613) 과거에 장원했다.

위조덕(魏藻德)은 통주(通州) 사람인데 숭정(崇禎) 경진년(1640) 과거에 장원했다.

그 중 연유는 명의 왕실을 크게 무너뜨렸고, 조덕은 적병에게 항복하였으나 죽음을 당했고, 나홍선은 문묘에 종사(從祀)되었으나 그는 20년 동안 성인의 도()를 배운 힘이 마음속에 겨우 장원(壯元)’ 두 글자를 잊어버렸을 정도이다.

또 근세의 유림(儒林)들을 열록(列錄)하였다.

 

육가서(陸稼書) 선생의 시호는 청헌(淸獻)이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탕형현(湯荊峴) 선생의 휘는 빈()이요, 시호는 문정(文正)이요, 자는 공백(孔伯)이며, 호는 잠암(潛菴)이니, 문묘에 종사하였다.

이용촌(李榕村 용촌은 호()) 선생 광지(光地) 운운(云云).

위상추(魏象樞 청초의 직신(直臣), 자는 환극(環極))는 모두들 큰 선비라 일컫는다.

서섬포(徐蟾圃 청초의 학자. 섬포는 호) 건학(乾學) 운운(云云).

그리고 축 노인(祝老人)은 이야기를 멈추고 다시 글 베끼기에 바빴다. 그 옆에 다섯 권 책이 있어 고인의 생년시를 적었는데 하우씨(夏禹氏)항우(項羽)장량(張良)영포(英布 한의 명장)관성(關聖 관우(關羽)) 등의 사주가 모두 적혀 있다.

내가 종이 몇 쪽을 빌려서 한 벼루에 대고 대강 초하는데 이때에 점쟁이 이()는 방에 있지 않았더니, 내 겨우 백 명 남짓 베꼈을 때 그가 밖에서 들어와서 보고는 크게 노하여 이를 빼앗아 찢으면서,

 

천기(天機)를 누설하면 아니되어.”

하기에, 나는 한 번 껄껄 웃고 일어나 사관으로 돌아왔다. 손에는 오히려 찢은 나머지 종이쪽이 있다.

 

왕서공(王舒公 진 명제(晉明帝)의 명신)은 신유 11 1일 진시(辰時)에 나다.

부정공(富鄭公 부필(富弼), 정공은 봉호)은 갑진 정월 20일 사시(巳時)에 나다.

소자용(蘇子容)은 경신 2 22일 사시에 나다.

왕정중(王正仲 ()은 중()인 듯, 명말의 절신(節臣))은 계해 정월 11일 신시(申時)에 나다.

한장민(韓莊敏)은 기미 7 9일 인시(寅時)에 나다.

채경(蔡京 ()의 정치가)은 정해년 임인월 임진일 신해시에 나다.

증포(曾布 송대 증공(曾鞏)의 아우 채경에게 밀려났다)는 을해년 정해월 신해일 기해시에 나다.

그 중 한장민왕정중은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모두 귀인임은 짐작할 수 있겠다. 이른바 천기 누설이란 말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오후에 비가 잠깐 개기에 심심하여 한 상점에 들어갔다. 뜰 안에는 반죽(斑竹)으로 난간을 두르고, 도미(茶蘼 장미과에 속한 식물)로 짠 시렁 아래에 한 길 되는 태호석(太湖石)이 서 있다.

돌 빛은 파랗고 뒤에는 길 넘는 파초(芭蕉)가 심어져 있어서 비온 뒤의 빛깔이 더욱 산뜻해 보인다. 난간 가에 다만 사람 하나가 걸터앉아 있고, 책상 위에 놓인 붓과 벼루가 다 품질이 좋은 것들이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 앉아 글을 써서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손을 흔들며 대답하지 않고 곧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 주인이 아닌가보다 하였으나 태호석을 구경하느라고 잠깐 지체하였더니, 그 사람이 한 청년을 데리고 웃으며 들어온다.

청년이 내게 읍하여 앉히고 바삐 종이 한 쪽을 내어 만주 글자를 쓰기에, 나는,

 

그건 모르오.”

한즉, 둘이 다 웃는다. 아마 주인이 글을 한 글자도 모르므로 나가서 맞은편 점포 청년을 데리고 온 모양이다.

그 청년은 비록 만주 글은 잘 아는 듯하나 한자(漢子)는 모르므로, 마침내 서로 말로 두어 마디 수작(酬酌)하였으나 피차에 얼버무려 넘기니, 이야말로 이른바 귀머거리 아닌 귀머거리요, 장님 아닌 장님이요, 벙어리 아닌 벙어리 꼴이다.

세 사람이 정좌(鼎坐)한즉 천하에 더할 나위 없는 병신들이다. 다만 서로 웃음으로 껄껄거리고 지나가는 판이다. 아까 그 청년이 만자(滿字)를 쓸 때 주인은 옆에서,

 

동무가 먼 곳에서 찾아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나는 만주 글을 모르오.”

하니, 청년은,

 

배운 것을 때로 복습하면 어찌 즐겁지 않겠소.”

한다. 나는,

 

그대들이 논어를 이처럼 잘 외면서 어찌 글자를 모르나.”

하니, 주인은,

 

남이 나를 몰라주더라도 노여워하는 뜻을 품지 않는다면 어찌 군자(君子)가 아니겠소이까.”

하기에, 나는 시험삼아서 그들이 외운 석 장()을 써 보인즉, 그들은 모두 눈이 둥그레지며 들여다볼 뿐, 멍하니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는 모양이다. 이윽고 소나기가 퍼부어서 옆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좋으나, 둘이 다 글을 모르고 나 역시 북경 말에 서툴러서 어쩌는 수 없다.

지척(咫尺) 사이에 비에 막혔으므로 더욱 마음이 갑갑하고 무료(無聊)하기 짝이 없다. 청년이 일어나 나가더니 조금 뒤에 그 비를 무릅쓰고 손에 능금 한 바구니, 달걀 지진 것 한 쟁반, 수란(水卵) 한 자배기를 들고 왔다. 그 자배기는 둘레가 칠 위(七圍 다섯 치)나 되고, 두께는 한 치, 높이는 서너 치 되는데 푸른 유리를 올리고 두 볼엔 도철(饕餮)의 무늬를 새겼으며, 입에는 큰 고리를 물렸는데 세숫대야로 쓰기에 알맞을 것 같으나 무거워서 멀리 가져 갈 수는 없게 생겼다.

그 값을 물으니 1()라 한다. 1초는 1 63푼이니 은()으로 치면 겨우 서 돈에 지나지 않는다. 상삼(象三)의 말이,

 

이게, 북경에선 두 돈밖에 주지 않으나 몹시 무거워서 옮겨가기 어렵습니다. 만일 우리나라에 가져 가면 희귀한 보배일 줄 뻔히 알면서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한다. 저녁 때 비가 쾌히 개기에 또 한 점포에 들렀더니, 역시 등주서 온 장사치 세 사람이 솜을 틀고 고치를 켜기 위하여 배로 금주(金州)를 다니는데, 대개 금주의 우가장(牛家庄)은 등주에서 수로로 2백여 리의 맞은 편이건만 순풍에 돛을 달아 쉽사리 왕래할 수 있다 한다. 셋이 모두 약간 글을 아나 다만 사납게 생긴데다 전혀 예의를 모르고 버릇없이 농담을 붙이기에 곧 돌아왔다.

 

 

[D-001]태을수(太乙數) : 점술의 용어. 태을은 별의 이름.

[D-002]자미두수(紫微斗數) : 점술의 용어. 자미는 별의 이름. 제왕에 해당한 성좌(星座).

[D-003]천일생수(天一生水) : 하늘이 열릴 때 첫째로 물을 낳는다는 것.

[D-004]육임(六壬) : ()이 음수(陰數)인 동시에 임()도 북방의 귀신이었다.

[D-005]둔갑(遁甲) : 다른 사람의 눈에 자기의 몸을 못 보도록 한다는 술법.

[D-006]오월춘추(吳越春秋) : () 조욱(趙煜)의 저. 전국 때 오와 월의 역사를 소설체로 쓴 것.

[D-007]해랑(奚囊) : 시구를 수집해 넣은 주머니. () 천재 시인 이하(李賀)의 고사에서 나왔다.

[D-008]명부(命婦) : 부녀로서 봉호를 받음이니 내명부와 외명부의 구별이 있다.

[D-009]주연유(周延儒) : 내치(內治)와 외정(外政)에 많은 공이 있었으나, 위인이 용렬하여 나중에 사사(賜死)되었다.

[D-010]위조덕(魏藻德) : 이자성에게 붙잡혀 굴복하였으나 피살되었다.

[D-011]탕형현(湯荊峴) : () 초의 명신. 형현은 자.

[D-012]태호석(太湖石) : 양주(楊州) 태호에서 나는 돌. 구멍이 많고 주름살이 잡힌 것.

[D-013]동무가 …… 않겠소 : 논어(論語) 학이장(學而章)의 첫째 절().

[D-014]배운 …… 않겠소 : 논어(論語) 학이장의 둘째 절.

[D-015]남이 …… 아니겠소이까 : 논어(論語) 학이장의 셋째 절.

[D-016]도철(饕餮) : 탐식하는 악수(惡獸)의 이름. 옛날 그릇에 흔히 이를 새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2일 무술(戊戌)

 

 

개다.

동관역에서 떠나 이대자(二臺子)까지 5, 육도하교(六渡河橋) 11, 중후소(中後所) 2, 모두 18리를 가서 점심 먹다. 중후소에서 일대자(一臺子) 5, 이대자 3, 삼대자(三臺子) 4, 사하점(沙河店) 8, 엽가분(葉家墳) 7, 구어하둔(口魚河屯) 3, 어하교(魚河橋) 1, 석교하(石橋河) 9, 전둔위(前屯衛) 6, 모두 48리이다. 전둔위서 묵었다. 이날 66리를 갔다.

배로 중후소하(中後所河)를 건너다. 옛날엔 성이 있었더니 중년에 허물어져서 방금 수축하는 중이다. 점포와 여염이 심양에 버금가겠고, 관제묘(關帝廟)의 장려함이 요동보다 나은데 매우 영험이 있다 한다. 일행이 모두 예폐(禮幣)를 바치고 머리를 조아리며 제비를 뽑아 길흉을 점쳐본다. 창대가 참외 한 개를 놓고 무수히 절하고 또 그 참외를 소상 앞에서 제가 먹어버렸다. 제가 무엇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가진 것이 적으면서 바라는 것은 너무 사치롭다.’는 옛말이 곧 이를 두고 이름이다. 문 안 조장(照墻)에 그린 파란 사자가 그럴 듯하다. 이는 감로사(甘露寺)의 것을 본뜬 것 같다.

오도자(吳道字)가 그리고,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가 찬()을 지었는데, 그 글에,

 

위엄은 이빨에 보이고 / 威見齒

기쁨은 꼬리에 나타나네 / 喜見尾

하였으니, 이는 가히 잘 형용했다고 할 만하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털모자는 모두 이곳에서 만드는 것이다. 그 공장은 모두 셋이 있는데, 한 집이 적어도 30~40칸은 되며 거기서 일하는 공인은 모두 백 명이 넘는다. 의주 상인들이 수없이 많이 와서 모자를 예약해 놓았다가 돌아갈 때 싣고 간다. 모자 만드는 법은 매우 쉽다. 양털만 있다면 나도 만들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양을 치지 않으므로 인민이 1년 내내 고기 맛을 모르고, 전국의 남녀 수는 수백 만이 넘는데 사람마다 털모자 하나씩을 써야만 겨울을 날 수 있게 된다. 해마다 동지(冬至)황력(黃曆)재자(賫資) 등의 사행에 가지고 가는 은이 줄잡아도 10만 냥은 될 것인즉, 10년을 계산하면 무려 백만 냥이다.

모자는 사람마다 삼동만 쓰다가 봄이 되어서 해지면 버리고 말 뿐인즉, 천 년을 가도 헐지 않는 은으로써 한겨울 쓰면 내어버리는 모자와 바꾸고 산에서 캐어 내는 한도 있는 은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땅에 갖다 버리니, 그 얼마나 생각이 깊지 못한 일인가. 모자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고 그 손놀림이 바람처럼 날쌔다. 우리나라에서 갖고 온 은화(銀貨)가 이곳에서 반은 사라지는 터이므로 공장 주인이 각기 단골 손님을 정하여 의주(義州) 장사치가 오면 반드시 크게 주식(酒食)을 베풀어 대접한다는 것이다.

길에서 도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은 짝을 지어 시장 골목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구걸한다. 그 중 하나는 머리에 구름 무늬를 놓은 검은 사()로 만든 모난 갓을 쓰고, 몸에는 옥색 추사(縐紗)로 지은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긴 도포와 푸른 항라 바지를 입고, 허리에는 붉은 비단 띠를 띠고 발엔 붉고 모난 비운리(飛雲履)를 신고, 등에는 옛 참마검(斬魔劒 마귀를 베는 칼)을 지고 손에는 죽간(竹簡)을 들었는데, 흰 얼굴과 삼각(三角) 수염에 미목이 헌칠하다.

또 하나는 머리에 두 갈래 뿔상투를 짜고 붉은 비단을 감았으며, 몸에는 소매가 좁은 푸른 비단 저고리를 입고, 어깨에는 벽려(薜荔)를 걸치고, 두 무릎 위에는 호피(虎皮)를 대었으며, 허리에는 홍단 넓은 띠를 띠고 발에는 청혜(靑鞋)를 신고, 등에는 비단으로 꾸민 오악도(五嶽圖 오악을 그린 그림)의 족자를 지고 또 허리엔 금호로병을 찼으며, 손에는 도서(道書) 한 갑()을 들었는데 얼굴은 희고 가냘프다.

또 하나는 머리를 말아서 어깨에 척 걸치고 금테를 둘렀으며, 몸은 검은 공단으로 지은 소매 넓은 장삼(長衫)을 입고, 맨발인 채 손엔 붉은 호로병을 들었다. 붉은 얼굴에 고리눈이요, 입 속으로 주문(呪文)을 외면서 간다. 저자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그들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석교하에 다다르니, 강물이 불어서 물과 언덕의 분간이 없다. 물은 그렇게 깊지 않으나 물살이 제법 세다. 모두들 말하기를,

 

지금 곧 건너지 않으면 물이 차츰 더 불을 걸.”

한다. 이에, 나는 정사의 가마에 들어 함께 건너서 저쪽 언덕에 닿아서 보니 말을 타고 건너는 이는 모두 모두 하늘을 쳐다보고 얼굴빛[顔色]이 푸르락누르락 한다.

서장관의 비장 조시학이 물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하여 모두들 몹시 놀랐다. 의주 상인 중에 돈주머니를 빠뜨린 자가 있어 물을 굽어 보면서, ‘아이구, 어머니 하고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한다.

전둔위 시장에 연극이 열렸다가 막 파하려 한다. 시골 여자 수백 명이 모두 늙은이들이었으나 오히려 차림새는 야단스럽게 꾸몄다. 연극하는 자는 망포(蟒袍)상홀(象笏)피립(皮笠)종립(椶笠)등립(藤笠)종립(鬉笠)사립(紗笠)사모(紗帽)복두(幞頭) 같은 것이 완연히 우리나라 풍속과 다름없다. 도포는 자줏빛도 있고 방령(方領)은 검은 선을 둘렀으니, 이는 아마 옛날 당()의 제도인 듯싶다. 아아, 슬프다. 신주(神州)가 육침(陸沉)한 지 이제 백여 년에 의관의 제도는 오히려 저 배우 연극의 사이에 남아 있으니 하늘이 마치 이에 무심하지 않는 성싶다. 무대에는 모두 여시관(如是觀 불가(佛家)의 말)’이란 석 자를 써 붙였으니 이에서도 역시 그 숨은 뜻이 어디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마침 지현(知縣 ()의 장관) 한 사람이 지나는데, ‘정당(正堂)’이라 쓴 큰 부채 한 쌍, 붉은 일산 한 쌍, 검은 일산 한 쌍, 붉은 우산 한 개, () 두 쌍, 대곤장 한 쌍, 가죽채찍 한 쌍을 가졌으며 지현은 가마를 타고 뒤에 활과 살을 가진 기병 5~6명이 따랐다.

 

 

[D-001]가진 …… 사치롭다 : 사기(史記) 골계전(滑稽傳) 중에 실린 순우곤(淳于髡)의 말.

[D-002]오도자(吳道字) : ()의 저명한 화가(畵家)인 오도현(吳道玄). 도자는 자.

[D-003]황력(黃曆) : 역서(曆書)를 받으러 가는 사행. 본시 동지사가 받아왔던 것을 조선 현종(顯宗) 원년부터는 따로 가게 되었다.

[D-004]재자(賫資) : 삼사의 격식을 갖추지 않고 역관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골라서 보내는 약식 사행.

[D-005]비운리(飛雲履) : 신발 이름. 검은 능 바탕에 흰 견을 가지고 구름 모양으로 꾸몄다. 당의 백거이(白居易)에서 비롯하였다 한다.

[D-006]벽려(薜荔) : 풀 이름. 여기에서는 은사(隱士)들 옷의 일종.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23일 기해(己亥)

 

 

이슬비 내리다 곧 개다. 이날이 처서(處暑)이다.

전둔위에서 아침에 떠나 왕가대(王家臺)까지 10, 왕제구(王濟溝) 5, 고령역(高嶺驛) 5, 송령구(松嶺溝) 5, 소송령(小松嶺) 4, 중전소(中前所) 10, 모두 39리를 가서 점심을 먹었다. 중전소에서 대석교(大石橋)까지 7, 양수호(兩水湖) 3, 노군점(老君店) 2, 왕가점(王家店) 3, 망부석(望夫石) 10, 이리점(二里店) 8, 산해관 2, 관에 들어 다시 10리를 가서 심하(深河)에 이르러 배로 건넜다. 거기에서 홍화포(紅花舖) 7, 모두 47리이다. 이날 86리를 갔다. 홍화포에서 묵었다.

길가에 보이는 분묘(墳墓)들은 반드시 담을 둘렀는데, 그 둘레가 수백 보이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나란히 심어서 그 배포가 가지런하다. 묘 앞에는 모두 화표주(華表柱)가 서 있는데, 석물(石物)들을 보니 거의 전조(前朝) 귀인들의 무덤이다. 문은 셋이나 혹은 패루로 하였는데 그 제도는 비록 이전 조가(祖家)의 패루만은 못하나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것이 많다. 문 앞에는 돌다리를 무지개처럼 놓고 난간을 둘렀다. 그 중 영원 서문 밖의 조대수(祖大壽)의 선영과 사하점의 섭씨(葉氏)의 분묘가 가장 웅장화려한 것이다.

여인 셋이 있어 모두 준마를 타고 말 위에서 재주를 넘는데, 그 중에 열세 살난 소녀가 가장 재빠르고 잘 탄다. 모두 머리에 초립(草笠)을 쓰고, 그 좌우(左右)칠보(七步)도괘(倒掛)시괘(尸掛) 등 법은 날램이 마치 나부끼는 눈송인 듯 춤추는 나비인 듯하다. 한녀(漢女)는 살 길이 막히면 대개 비럭질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이 된다 한다.

또 들 위에 한 전진(戰陣)을 벌여 놓았는데, () 네 귀퉁이에 각기 기 하나씩을 꽂았다. 비록 검()()()() 따위는 없으나 사람마다 앞에 체바퀴만한 큰 화살통을 놓고 모두 수백 개나 되는 화살을 꽂았다. 진의 모양은 똑바르고 기병은 모두 말에서 내려 진 밖에 흩어져 있다. 내가 말에 내려서 한 바퀴 둘러본즉 다만 둘씩 늘어서 있을 뿐 중권(中權 참모부 같은 중심부)의 깃발이나 북소리도 없으려니와 또 천막을 친 것도 없다.

혹은 말하기를,

 

성경장군(盛京將軍)이 내일 순시한다오.”

하고, 또는,

 

성경 병부시랑(兵部侍郞)이 갈리어서 점심 참에 당도(當到)할 예정이므로 중전소(中前所) 참장(叅將)이 이곳에서 맞이하는데, 참장이 아직 이르지 아니하므로 진을 풀어 방금 신지(迅地)에 모이는 중이에요.”

한다. 들판 못에 붉은 연꽃이 한창이라 말을 멈추고 한참 구경했다. 왕가점에 이르니 산 위에 장성이 아득히 눈에 들어온다. 부사서장관과 변 주부(卞主簿)정 진사(鄭進士)와 수종인 이학령(李鶴齡) 등과 함께 강녀묘(姜女廟)에 갔다가 다시 관 밖의 장대(將臺)를 거쳐 마침내 산해관에 들다. 저녁 나절에 홍화포(紅花舖)에 닿았다. 밤엔 약간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잠을 설쳤다.

 

 

[D-001]좌우(左右) …… 시괘(尸掛) : 마상재(馬上才) 연기의 네 가지 종류 이름. 도괘는 새의 이름.

[D-002]신지(迅地) : 청의 병제(兵制)에 있는 일종의 군관구.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강녀묘기(姜女廟記)

 

 

강녀(姜女)의 성은 허씨(許氏), 이름은 맹강(孟姜)인데, 섬서(陝西) 동관(同官)에 사는 사람이다. 범칠랑(范七郞)에게 시집갔더니 진()의 장군(將軍)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을 때, 범랑(范郞)이 그 일에 역사하다가 육라산(六螺山) 밑에서 죽어 그 아내 맹강에게 현몽되었다. 그리하여, 맹강이 손수 옷을 지어 혼자서 천 리를 가서 그 지아비의 생사를 탐지하다가 이곳에서 쉬며 장성을 바라보고 울어서 이내 돌로 화하였다 한다. 혹은 이르기를,

 

맹강이 그 지아비의 죽음을 듣고 홀로 가서 그 뼈를 거두어 업고 바다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돌 하나가 바다 가운데 솟아서 조수가 밀려 들어도 잠기지 않았다.”

한다. 뜰 가운데 비석 셋이 있는데 거기 기록된 것이 모두 같지 않고, 또 허황한 말이 많다. ()에는 소상을 세우고 좌우에 동남(童男)동녀(童女)를 늘어 세웠다. 황제가 여기다 행궁(行宮)을 두었는데, 지난해 심양에 거둥할 때, 지나는 행궁마다 죄다 중수하였으므로 단청이 아직도 휘황찬란하다. 묘에 문문산(文文山)이 쓴 주련(柱聯)이 있고, 망부석(望夫石)에는 황제가 지은 시()를 새겼으며, 돌 곁에는 진의정(振衣亭)이 있다. () 왕건(王建)의 망부석시(望夫石詩)는 이 돌을 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지(地志),

 

망부석이 둘인데 하나는 무창(武昌)에 있고, 또 하나는 태평(太平)에 있다.”

하였은즉, 왕건의 읊은 것이 그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진() 나라 때엔 아직 섬()이란 땅 이름이 없었을뿐더러 강()도 제녀(齊女)를 일컬은 것인즉, 허씨를 섬서 동관 사람이라 함은 더욱 터무니 없는 말이다. 행궁 섬돌에서 강녀묘에 이르기까지 돌난간을 둘렀고, ‘방류요해(芳流遼海)’라는 현판은 지금 황제의 글씨이다.

 

 

[D-001]문문산(文文山) : 송말의 이름 높은 충신 문천상(文天祥). 문산은 호.

[D-002]왕건(王建) : 당의 시인(詩人). 특히 궁사(宮詞)로 유명하였다.

[D-003]()도 제녀(齊女) : ()는 강성의 고장이요, 또 미녀가 강성에 많기로 이름났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장대기(將臺記)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요,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산해관을 1리쯤 못 가서 동향으로 모난 성 하나가 있다. 높이가 여남은 길, 둘레는 수백 보이고, 한 편이 모두 칠첩(七堞)으로 되었으며, 첩 밑에는 큰 구멍이 뚫려서 사람 수십 명을 감출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구멍이 스물 네 개이고, 성 아래로 역시 구멍 네 개를 뚫어서 병장기를 간직하고, 그 밑으로 굴을 파서 장성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역관들은 모두 한()의 쌓은 것이라 하나 그릇된 말이다. 혹은 이를 오왕대(吳王臺)’라고도 한다.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을 지킬 때에 이 굴 속으로 행군하여 갑자기 이 대에 올라 포성을 내니, 관 안에 있던 수만 병이 일시에 고함을 질러서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관 밖의 여러 곳 돈대에 주둔했던 군대도 모두 이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호령이 천 리에 퍼졌다. 일행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첩 위에 올라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고 창해(滄海)는 남에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을 다다르고 서로는 관 속을 엿보게 되었으니, 이 대만큼 조망(眺望)이 좋은 곳은 다시 없을 것이다. 관 속 수만 호의 거리와 누대(樓臺)가 역력히 마치 손금을 보는 듯하여 조금도 가리어진 곳이 없고, 바다 위 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듯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은 곧 창려현(昌黎縣) 문필봉(文筆峯)이다. 한참동안 서서 바라보다가 내려오려 하니 아무도 먼저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다. 벽돌 쌓은 층계가 높고 험해서 내려다 보기만 해도 다리가 떨리고 하인들이 부축하려 하나 몸을 돌릴 공간이 없어서 일이 매우 급하게 되었다. 나는 서쪽 층계로 먼저 간신히 내려와서 대 위에 있는 여러 사람을 쳐다보니, 모두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모르고 있다. 대개 오를 때엔 앞만 보고 층계 하나하나를 밟고 올라갔기 때문에 그 위험함을 몰랐는데, 급기야 내려오려고 눈을 한번 들어 밑을 내려다 보니 저절로 현기증이 일어나니 그 허물은 눈에 있는 것이다. 벼슬살이도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한 계단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혹은 남을 밀어젖히면서 앞을 다툰다. 그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면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긴다.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이 사라질 뿐 아니라 내려오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법이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그렇다.

 

 

[D-001]() : 혹은 한()으로도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산해관기(山海關記)

 

 

산해관은 옛날의 유관(楡關)인데, 왕응린(王應麟) 지리통석(地理通釋),

 

()의 하양(下陽), ()의 상당(上堂), ()의 안읍(安邑), ()의 유관, ()의 서릉(西陵), ()의 한락(漢樂)은 모두 그 지세로 보아서도 꼭 웅거해야 하고, 그 성으로 보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

하였다. ()의 홍무(洪武) 17(1384)에 대장군 서달(徐達)이 유관을 이곳에 옮겨 다섯 겹의 성을 쌓고 이름을 산해관이라 하였다. 태항산(太行山)이 북으로 달려가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는데, ()이 열두 산을 봉()할 때 유주(幽州)의 진산(鎭山)으로 삼았다. 그 산이 중국의 동북을 가로막아 중국과 외국의 경계가 되었으며, 관에 이르러서는 크게 잘리어서 평지가 되어 앞으로 요동 벌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는 창해를 낀 듯하니, 이는 우공(禹貢),

 

오른편으로 갈석(碣石)을 끼었다.”

는 것이 곧 이를 두고 일컬음이다. 그리고 장성이 의무려산을 따라 굼틀굼틀 굽이쳐 내려와 각산사(角山寺)에 이르며, 봉우리마다 돈대가 있고 평지에 들어와서 관을 둔 것이다. 장성을 따라 다시 15리를 가서 남으로 바다에 들어서 쇠를 녹여 터를 닦아 성을 쌓고는 그 위에 삼첨(三簷) 큰 다락을 세워서 망해정(望海亭)’이라 하니, 이는 모두 서중산(徐中山 서달의 봉호)이 쌓은 것이다. 이 관의 첫째 관은 옹성(甕城)이어서 다락이 없고, 옹성의 남동을 뚫어서 문을 내고 쇠로 만든 문 위의 홍예(虹霓) 이마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라 새겼고, 둘째 관에는 4층의 적루(敵樓)로 되었는데 홍예 이마에 산해관이라 새겼고, 셋째 관은 삼첨 높은 다락에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사(三使)가 모두 문무로 반()을 나누어 심양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했다. 세관(稅官)과 수비(守備)들이 관 안의 익랑(翼廊)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는데, 전에 봉성의 청단(淸單 조사서(調査書))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과 사는 곳과 물화(物貨)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두 만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芭蕉扇)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십자가(十字街)에 성을 둘렀는데, 사면에 둥근 문을 내고 그 위에 삼첨 높은 다락을 세웠으며, ‘상애부상(祥靄榑桑)’이라 현판을 붙였으니 이는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글씨다. 원수부(元帥府)의 문 밖에 돌사자 둘을 앉혔는데, 높이가 각기 두어 길이나 되며 여염과 저자의 번영함이 성경보다 낫고 수레와 말이 가장 많은데, 청춘 남녀들이 더욱 화려한 화장을 꾸몄으니 그 번화롭고 풍부한 품이 이제껏 보아 온 중에 제일이라 하겠다. 대개 이곳은 천하의 웅관(雄關)이며 또는 서쪽으로 북경이 멀지 않은 까닭이다. 봉성으로부터 천여 리 사이에 보(), ()이니, (), ()이니 하여 나날이 성 몇 곳씩은 보아 왔건만, 이제 장성을 보고 나니, 그들의 시설이나 솜씨가 모두 이 관에서 본뜬 것이긴 하나 그들을 이 관에 비하면 어린 손자뻘밖에 되지 않는다. 아아, 슬프다. 몽염(蒙恬)이 장성을 쌓아서 되놈을 막으려 하였건만 진()을 망칠 호()는 오히려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서중산이 이 관을 쌓아 되를 막고자 하였으나 오삼계는 관문을 열고서 적을 맞아들이기에 급급하였다. 그리하여 천하가 일이 없는 지금, 부질없이 지나는 상인과 나그네들의 비웃음을 사게만 되었으니, 난들 이 관에 대하여 다시 무어라고 말할 것이 있으리오.

 

 

[D-001]왕응린(王應麟) : 송의 저명한 학자. 자는 백후(伯厚).

[D-002]우공(禹貢) : 서경(書經)의 편명. 중국 최초의 지리지(地理志).

[D-003]() …… 났으며 : 진 시황이 당시에 진을 망칠 자는 호()라는 비결을 믿어서 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사실 진을 망친 자는 호()가 아니요, 집안에 생겨난 그의 아들 호해(胡亥)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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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성경잡지(盛京雜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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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 - 성경잡지(盛京雜識)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성경잡지(盛京雜識)

 

성경잡지(盛京雜識) 7 10일 병술(丙戌)에 시작하여 14일 경인(庚寅)에 마쳤다. 모두 5일 동안이다. 십리하(十里河)로부터 소흑산(小黑山)에 이르기까지 모두 3 27리다.

 

1. 4년 경자(庚子) 가을 7 10일 병술(丙戌)

2. 11일 정해(丁亥)

3. 속재필담(粟齋筆談)

4. 상루필담(商樓筆談)

5. 12일 무자(戊子)

6. 고동록(古董錄)

7. 13일 기축(己丑)

8. 14일 경인(庚寅)

9.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10. 산천기략(山川記略)

 

 

 

4년 경자(庚子) 가을 7 10일 병술(丙戌)

 

 

비오다 곧 개었다.

십리하(十里河)에서 일찍 떠나 판교보(板橋堡) 5, 장성점(長盛店) 5, 사하보(沙河堡) 10, 폭교와자(暴交蛙子) 5, 전장보(氈匠堡) 5, 화소교(火燒橋) 3, 백탑보(白塔堡) 7, 도합 40리를 가고, 백탑보에서 점심 먹고 거기서 다시 일소대(一所臺) 5, 홍화포(紅火舖) 5, 혼하(渾河) 1, 배로 혼하를 건너서 심양(瀋陽)까지 9, 도합 20리이니, 이날은 60리를 갔다. 심양에서 묵었다.

이날은 몹시 더웠다. 멀리 요양성(遼陽省) 밖을 돌아보니 수풀이 아주 울창한데 새벽 까마귀 떼가 들 가운데 흩어져 날고 한 줄기 아침 연기가 하늘 가에 짙게 끼었는데다 붉은 해가 솟으며 아롱진 안개가 곱개 피어 오른다. 사방을 둘러본즉 넓디넓은 벌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다. 아아, 이곳이 옛 영웅들이 수없이 싸우던 터전이구나. 범이 달리고 용이 날 제 높고 낮음은 내 마음에 달렸다는 옛말도 있겠지만, 그러나 천하의 안위(安危)는 늘 이 요양의 넓은 들에 달렸으니 이곳이 편안하면 천하의 풍진(風塵)이 자고, 이곳이 한번 시끄러워지면 천하의 싸움 북이 소란히 울려댄다. 이는 어인 까닭일까. 대개 평평한 벌과 넓은 들판이 한 눈에 천 리가 트인 이곳을 지키자니 힘들고, 버리자니 오랑캐가 쳐들어 오는데 아무런 방비할 계교가 없으므로 이곳은 중국으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터전이어서, 비록 천하의 병력을 기울여서라도 이를 지킨 뒤에야 천하가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천하가 백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음이 어찌 그들의 덕화와 정치가 전대(前代)보다 훨씬 뛰어난 때문이라 할 수 있으리오. 단지 이 심양은 본시 청()이 일어난 터전이어서 동으로 영고탑(寧古塔)과 맞물리고, 북으로 열하(熱河)를 끌어당기고, 남으로는 조선을 어루만지며 서로는 향하는 곳마다 감히 까딱하지 못하니, 그 근본을 튼튼히 다짐이 역대에 비하여 훨씬 낫기 때문일 것이다.

요양에 들어오면서부터 뽕나무와 삼밭이 우거지고, 닭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토록 백 년 동안이나 무사하긴 하나 청의 황제로서는 오히려 한낱 근심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몽고(蒙古) 수레 수천 채가 벽돌을 싣고 심양에 들어오는데, 수레마다 소 세 마리가 끈다. 그 소는 흰 빛깔이 많으나 간혹 푸른 것도 있으며, 찌는 듯한 더위에 무거운 짐을 끌고 오느라고 코에서 피를 뿜는다. 몽고 사람들은 코가 우뚝하고 눈이 깊숙하며 험상궂고 날래고 사나운 품이 인간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옷과 벙거지가 남루하고 얼굴에는 땟국이 흐른다. 그런데도 버선은 꼭 신고 있다. 우리 하인배들이 알정강이로 다니는 것을 보곤 이상스럽게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의 말몰이꾼들은 해마다 몽고 사람을 봐 와서 그 성격을 잘 알므로 서로 희롱하면서 길을 간다. 채찍 끝으로 그들의 벙거지를 퉁겨서 길 곁에 버리기도 하고, 혹은 공처럼 차기도 한다. 그래도 몽고 사람들은 웃고, 성내지 않으며 두 손을 펴서 부드러운 말씨로 돌려 달라고 사정한다. 또 하인들이 뒤로 가서 그 벙거지를 벗겨 가지고 밭 가운데로 뛰어들어 가면서 짐짓 그들에게 쫓기는 체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이켜 그들의 허리를 안고 다리를 걸면 영락없이 넘어지고 만다. 그러면 그 가슴을 가로 타고 앉아서 입에 티끌을 넣으면, 뭇 되놈들이 수레를 멈추고 서서 모두들 웃으며, 밑에 깔렸던 자도 웃으며 일어나서 입을 닦고 벙거지를 털어서 쓰고는 다시 덤벼들지 않는다.

길에서 한 수레를 만났다. 사람 일곱을 태웠다. 모두 붉은 옷을 입었고 쇠사슬로 어깨와 등을 얽어 매어서 목덜미에다 채우고는 다시 한 끝은 손을 매고 한 끝은 다리를 묶었다. 이들은 금주위(錦州衛)의 도둑으로, 사형을 한 등 감하여 멀리 흑룡강(黑龍江) 수자리 지역으로 귀양보내는 것이라 한다. 그들의 입이나 눈의 생김새가 무서워 보인다. 그래도 수레 위에서 서로 웃고 떠들며 조금도 괴로워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말 수백 필이 길을 휩쓸고 지나간다. 마지막 한 사람이 썩 좋은 말을 타고 손에 수숫대 한 가지를 쥐고 뒤에서 말 떼를 따라 간다. 말들은 굴레도 없고 고삐도 없이 다만 가끔 뒤를 돌아다 보면서 걸어 간다.

탑포(塔舖)에 이르렀다. 탑은 그 동리 한 가운데 있는데, 8 13층이고, 높이는 20여 길이나 된다. 층마다 둥근 문 네 개씩 틔어져 있다. 그 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서 우러러보니 홀연 현기증이 생기기에 고삐를 되돌려 나와 버렸다. 일행은 벌써 사관에 들었다. 뒤쫓아 후당으로 들어가니 주인의 수염 밑에서 갑자기 강아지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멈칫하니, 주인이 얼굴에 미소를 띠면서 나에게 앉기를 청한다. 주인은 긴 수염이 희끗희끗한 늙은이로 방 안 나지막한 걸상에 오똑이 걸터앉았고, 방 밖에는 교의를 마주하여 한 할멈이 앉아 있다. 머리 위에 희붉은 촉규화(蜀葵花) 한 봉오리를 꽂았으며, 옷은 야청 빛깔에 복숭아꽃 무늬 놓은 치마를 입었다. 할멈의 품에서도 강아지 짓는 소리가 더욱 사납게 들린다. 그제사 주인이 천천히 가슴 속에서 삽살강아지 한 마리를 끄집어 낸다. 크기는 토끼만 한데, 눈처럼 흰 털은 길이가 한 치나 되고, 등은 담청색이고 눈은 노랗고 입 언저리는 붉으레하다. 노파도 옷자락을 헤치고 강아지 한 마리를 꺼내어 내게 보이는데, 털 빛은 똑같다. 노파가 웃으면서,

 

손님, 괴이하게 여기지 마셔요. 우리 영감할멈 둘이서 하는 일 없이 집안에 들앉았으려니 정말 긴긴 해를 지우기가 지루해서 이것들을 안고 놀리다가 도리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곤 하지요.”

한다. 나는,

 

주인 댁엔 자손이 없으신가요.”

하고 물은즉 주인은,

 

아들 셋, 손주 하나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올해 서른 하나에, 방금 성경장군(盛京將軍)을 모시는 장경(章京)으로 있으며, 둘째 놈은 열아홉 살이고, 막내는 열여섯 살인데 둘 다 서당에 가서 글 읽는답니다. 아홉 살 된 손주놈은 저 버드나무에서 매미 잡는다고 나가선 해가 지도록 보기조차 어려워요.”

한다. 얼마 안 되어서 주인의 어린 손자가 손에 웬 나팔을 쥐고 숨이 차서 후당으로 뛰어 들어 노인의 목을 끌어안고 나팔을 사 달라고 조른다. 노인은 얼굴 가득히 사랑겨운 빛을 띠면서,

 

이런 건 쓸데없어.”

하고 타이른다. 그 아이는 미목이 희맑게 생겼다. 살구빛 무늬 놓인 비단 저고리를 입었다. 갖은 재롱과 어리광을 다 떨면서 이리저리 뛴다. 노인이 손자더러 손님 뵙고 인사 드리라고 시킨다. 군뇌가 눈을 부르뜬 채 후당으로 쫓아 들어와서 그 나팔을 빼앗고 큰 소리로 야단을 친다. 노인이 일어나서,

 

미안합니다. 그 놈이 놀잇감으로 갖고 온 게요. 물건은 아무런 파손이 없습니다.”

하고 사과한다. 나도,

 

찾았으면 그만이지. 하필 이토록 야단을 쳐서 남을 무료하게 한단 말인가.”

하고 군뇌를 나무랐다. 나는 또,

 

이 개는 어디서 나는 것이오.”

물은즉, 주인은,

 

운남(雲南)서 나는 거랍니다. 촉중(蜀中사천(四川) 지방)에서도 이와 같은 강아지가 있지요. 이것의 이름은 옥토아(玉兎兒)이고, 저것은 설사자(雪獅子)라 부른답니다. 둘이 모두 운남 산이지요.”

하고 주인이 옥토아를 불러 인사하라 하니, 그 놈이 오똑히 서서 앞 발을 나란히 추켜들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다시 땅에 머리가 닿도록 조아리곤 한다.

장복이 와서 식사를 여쭙는다. 나는 곧 몸을 일으켰다. 주인은,

 

영감, 이미 이 미물을 귀여워하셨은즉 삼가 이걸 드리고자 합니다. 방물을 바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영감께서 가져 가셔도 무방하옵죠.”

한다. 나는,

 

고맙소이다마는, 어찌 함부로 받으리까.”

하고 급히 돌아서 나왔다. 일행이 벌써 나팔을 불고 떠나려 했으나, 내가 간 곳을 몰라서 장복을 시켜 두루 찾아 다닌 것이다. 밥을 이미 지은 지 오래되어 굳어지고, 또 마음이 바빠서 목에 넘어가질 않기에 장복과 창대더러 나눠 먹으라 하고, 혼자서 음식점에 들어가서 국수 한 그릇, 소주 한 잔, 삶은 달걀 세 개, 참외 한 개를 사 먹고는 마흔두 닢을 헤어서 치르고 나니 상사의 행차가 문 앞을 막 지나간다. 곧 변군과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길을 떠났다. 배가 잔뜩 불렀으므로 20리 길을 잘 갈 수 있었다. 해는 벌써 사시(巳時)가 가까워서 볕이 몹시 내려 쪼인다.

요양에서부터 길가에 버드나무를 수없이 많이 심어서 그 우거진 그늘에 더위를 잊을 만하다. 가끔 버드나무 밑에 물이 괴어서 웅덩이를 이루었으므로 이를 피하여 길 위로 둘러 나오면, 찌는 듯한 햇볕이 내려 쪼이고, 후끈거리는 흙 기운이 치올라서 삽시간에 가슴이 막힐 듯 갑갑해진다. 멀리 버들 그늘 밑을 바라본즉 수레와 말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다. 말을 재촉하여 그곳에 이르러서 잠깐 쉬기로 했다. 장사꾼 수백 명이 짐을 내리고 땀을 들이고 있다. 혹은 버드나무 그루에 걸터 앉아서 옷을 벗어놓고 부채질을 하며, 혹은 차를 마시고 술을 기울이며, 어떤 이는 머리를 감기도 하고 깎기도 하며, 더러는 골패도 치며, 또는 팔씨름도 한다. 짐 속에는 모두 그림 그린 자기가 있고, 또 껍질 벗긴 수숫대로 조그맣게 누각의 모양을 만들어서 그 속에는 각기 우는 벌레나 매미를 넣은 것이 여남은 짐이나 되며, 어떤 것은 항아리에 빨간 벌레와 파란 마름을 넣었는데, 빨간 벌레는 물 위에 둥둥 뜬 것이 마치 새우알처럼 작다. 이는 고기 밥으로 쓰인다. 수레 30여 채에 모두 석탄을 가득히 실었다. 술도 팔며, 차도 팔고, 떡과 과실 등 모든 음식을 파는 자가 모두 버들 그늘 밑에 걸상을 죽 늘어 놓고 앉아 있다. 나는 여섯푼으로 양매차(楊梅茶) 반 사발을 사서 목을 축이었다. 맛이 달고 신 것이 제호탕(醍醐湯)과 비슷하다.

태평거(太平車 청의 승용차의 한 가지) 한 채에 두 여인이 탔는데 나귀 한 마리가 끌고 간다. 나귀가 물통을 보자 수레를 끈 채 통으로 달려 든다. 그 여인 둘 중 하나는 늙고 하나는 젊었다. 앞을 가렸던 발을 걷고 바람을 쏘이고 있다. 둘 다 꾀꼬리 무늬 놓은 파란 웃옷에 주황 빛깔 치마를 입고, 옥잠화패랭이꽃석류화로 머리를 야단스럽게 꾸몄다. 아마 한녀(漢女)인 듯하다.

변군이 술을 마시자기에 각기 한 잔씩 기울였다. 곧 떠났다. 몇 리를 못 가서 멀리 군데군데에 불탑(佛塔)이 나타나서 훤히 눈에 든다. 아마 심양이 점점 가까워지는가보다.

 

어부가 손을 들어 강성이 여기매요 / 漁人爲指江城近

뱃머리에 솟은 탑이 볼수록 더 높아지네 / 一塔船頭看漸長

하는 옛 시가 문득 생각난다. 대개 그림을 모르는 이 치고 시를 아는 이가 없는 법이다. 그림에는 짙고 옅은 법이 있으며, 또는 멀고 가까운 자세가 있다. 이제 이 탑의 모양을 바라보니 더욱 옛사람이 시를 지을 때 반드시 저 그림 그리는 방법을 체득했으리라고 깨달은 것이 있다. 대개 성의 멀고 가까움을 탑의 길고 짧음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까닭이다.

혼하의 이름은 아리강(阿利江)이요, 또는 소요수(小遼水)라고도 부른다. 장백산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사하(沙河)와 합하고, 성경성(盛京城) 동남을 굽이쳐 흘러 태자하와 합하며, 또 서로 비끼어서 요하(遼河)와 합하여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바다로 흐른다.

혼하를 건너 몇 리를 가서 토성이 있다. 그다지 높지 않고 성 밖에는 검은 소 수백 마리가 있는데, 그 빛깔이 아주 새까맣게 옷칠한 듯하다.  1백 경()이나 되는 큰 못이 있는데, 붉은 연꽃이 한창이고 그 속에는 거위와 오리 떼가 수없이 떠다닌다. 못가에는 백양(白羊) 천여 마리가 마침 물을 먹다가 사람을 보고 모두 머리를 쳐들고 섰다. 외곽의 문을 들어가니 성 안 인물의 번화함과 점포의 호화스러움이 요양보다 10배나 더하다.

관묘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삼사(三使)는 관복을 모두 갖추었다. 한 노인이 있어 수화주(秀花紬)로 지은 홑적삼을 입고 민숭하니 벗어진 이마에, 땋은 뒷머리가 드리웠다. 내게 깊이 읍하면서,

 

수고하십니다.”

한다. 나도 손을 들어서 답례하였다. 노인이 내가 신고 있는 가죽신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 마치 그 만든 법을 상세히 알고자 하는 듯하므로 나는 곧 한 짝을 벗어서 보였다. 사당 안에서 갑자기 도사(道士) 한 사람이 뛰어나오는데 몸에는 야견사(野繭絲) 도포를 걸치고, 머리에는 등갓을 썼으며, 발에는 검은 공단 신을 신었다. 그는 갓을 벗고 상투를 어루만지면서,

 

이게 영감의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한다. 노인은 자기 신을 벗고서 내 신을 바꿔 신어 보면서,

 

이 신은 무슨 가죽으로 만들었소이까.”

하고 묻는다. 내가,

 

나귀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하니, 그는 또,

 

밑창은 무슨 가죽입니까.”

한다. 나는,

 

쇠가죽에 들기름을 먹여서 만든 것이라 흙탕을 디디어도 젖지 않는답니다.”

하고 답했다. 노인과 도사가 한 마디로 참 좋다고 칭찬하고 또,

 

이 신은 진 땅에는 편리하지만 마른 땅엔 발이 부르트지나 않을까요?”

하고 묻는다. 나는,

 

정말 그렇소.”

하고 답하였다. 노인이 나를 인도하여 사당 안 한 군데에 이르렀다. 도사가 손수 두 주발의 차를 따라서 각기 권한다. 노인이 제 성명을 복녕(福寧)이라 써 보인다. 그는 만주 사람으로 현재 성경 병부낭중(兵部郞中)의 벼슬에 있으며 나이는 63세이다. 성 밖에 피서 와서 큰 못에 연꽃이 한창 핀 것을 조용히 한 바퀴 둘러 보고 방금 돌아가는 길이라 한다. 그는 이어,

 

영감의 벼슬은 몇 품이오며, 연기(年紀)는 몇이시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나의 성명은 아무개요, 그저 선비의 몸으로 중국에 관광(觀光)하러 온 것이고 나이는 정사생(丁巳生)입니다.”

하고 답하였다. 그는 또,

 

그러면 월일과 생시(生時)?”

하기에 나는,

 

“2 5일 축시(丑時).”

했다. 그는,

 

그러면 하마경(蝦蟆更)이오.”

하기에, 나는,

 

아니오.”

했다. 복녕이 다시,

 

저 윗 자리에 앉으신 분은 지난해에도 오셨더랬죠. 내 그 때 서울서 막 내려오다가 옥전(玉田)서 며칠 동안 한 객사에서 묵은 일이 있습니다. 이는 아마 한림(翰林) 출신이죠.”

하고 묻는다. 나는,

 

한림이 아니라 부마도위(駙馬都尉). 나하고는 삼종 형제 사입니다.”

하고 답했다. 그가 또 부사와 서장관에 대한 일을 묻기에 각각 성명과 관품을 일러 주었다. 사행들이 옷을 갈아 입고 떠나려 한다. 나는 하직하고 일어섰다. 복녕이 앞으로 나와서 손을 잡고,

 

행차 보중(保重)하시오. 마침 쇠어 가는 더위가 점점 더하오니 날오이나 냉한 음료수를 부디 자시지 마시오. 우리 집은 서문 안 마장거리 남쪽에 있는데, 문 위엔 병부낭중이란 패가 있고, 또 금자로 계유문과(癸酉文科)라 써 붙였으니 찾기 쉬우리다. 영감은 언제쯤 오시게 되는지요.”

한다. 나는,

 

“9월 중에나 성경에 돌아오게 될 것 같소이다.”

한즉, 복녕은 또,

 

그 무렵에 긴급한 공무가 생기지 않는다면 반가이 맞이하오리다. 이미 당신의 사주(四柱)를 알았으니 조용히 추수(推數)해 두었다가 귀한 행차가 돌아오시길 기다리리다.”

한다. 그 어조가 정중하여 작별을 못내 서운해 하는 모양이다. 도사는 코 끝이 뾰족하고 눈동자가 똑바로 박혔으며 행동이 경박하여 전혀 은근한 맛이라곤 없다. 복녕은 사람됨이 기걸하고 원만하다.

삼사(三使)가 차례로 말을 타고 간다. 대개 문무관이 반()을 짜서 성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 둘레가 10리인데 벽돌로 여덟 문루를 쌓았다. 누는 모두 3층이며 옹성(甕城)을 쌓아서 보호했다. 좌우에는 또한 동서 두 대문이 있는데 네거리를 통하도록 돈대를 쌓고, 그 위에 3층으로 문루를 세웠다. 문루 밑에는 저절로 십자로가 트이었는데 수레바퀴는 서로 부딪히고 어깨가 서로 닿을 정도이다. 그 번화함이 바다 같다. 점방들은 한길을 사이에 두고 그림 그린 층집과 아로새긴 들창에다 붉은 간판 푸른 방()을 써 붙였으며, 가지 각색의 보화가 그 속에 가득하다. 점방을 보는 이들은 모두 희멀건 얼굴에 옷[] 차린 맵씨가 깨끗하다.

심양은 본시 우리나라 땅이다. 혹은 이르기를,

 

() 4군을 두었을 때에는 이곳이 낙랑의 군청[治所]이더니 원위(元魏)()() 때 고구려에 속했다.”

한다. 지금은 성경이라 일컫는다. 봉천 부윤(奉天府尹)이 백성을 다스리고 봉천 장군(奉天將軍)부도통(副都統)이 팔기(八旗)를 통할하며, 또한 승덕지현(承德知縣)이 있는데, 각부(各部)를 설치하고 좌이아문(佐貳衙門)을 두었다. 문 맞은편에 조장(照墻)이 있고 문 앞마다 옻칠한 나무를 어긋매끼로 세워서 난간을 만들었다. 장군부(將軍府) 앞에는 큰 패루(牌樓) 한 채가 서 있다. 길에서 그 지붕의 알록달록한 유리 기와를 바라보았다.

내원과 계함과 함께 행궁(行宮) 앞을 지나가다가 한 관인(官人)을 만났다. 그는 손에 짧은 채찍을 쥐고 매우 바쁜 걸음으로 간다. 내원의 마두(馬頭) 광록(光祿)이 관화(官話)를 잘하므로 관인을 쫓아가서 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그는 얼른 광록을 붙들어 일으키면서

 

큰 형님, 왜 이러시오. 편히 하시오.”

한다. 광록이 절하며 여쭙기를,

 

저는 조선 방자(幫子)이온데, 우리 상전께서 큰 임금님 계신 궁궐을 구경하시길 마치 하늘같이 높이 바라오니, 영감께서 이를 승낙하시겠습니까.”

한즉, 관인이 웃으면서,

 

그것, 어려울 것 없소. 날 따라 오시오.”

한다. 나는 곧 쫓아가서 인사를 하고자 했으나 그의 걸음이 나는 듯 빨라서 따라갈 수 없다. 길이 막다른 곳을 바라본즉 붉은 목책(木柵)을 둘렀는데, 관인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서 돌아다 보고 채찍으로 한 군데를 가리키면서,

 

여기 좀 서서 기다리시오.”

하고 이내 몸을 돌이켜 어딘지 가버린다. 내원은,

 

이왕 들어가 보지 못할 바에는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 게 싱거운 노릇이야. 또 이렇게 겉으로 한 번 바라보았으면 그만이지.”

하고 곧 계함과 함께 술집으로 가버린다. 나는 다만 광록과 함께 목책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정문의 이름은 태청문(太淸門)이라 하였다. 마침내 그 문을 들어섰다. 광록의 말이,

 

아까 만났던 관인은 필시 수직장경(守直章京)일 겁니다. 지난해 하은군(河恩君)을 모시고 왔을 때도 두루 행궁을 구경했으나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었사오니 아주 마음 놓고 구경하시지요. 설사 사람을 만나더라도 쫓겨나기밖에 더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네 말이 옳다.”

하고 곧 걸어서 전전(前殿)에 이르렀다. 현판에 숭정전(崇政殿)이라 하였고, 또 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왼편은 비룡각(飛龍閣), 오른편은 상봉각(翔鳳閣)이라 하였고, 그 뒤에는 3층 높은 다락이 있는데, 이름은 봉황루(鳳凰樓)이다. 좌우에 익문(翼門)이 있고 문 안에는 갑군(甲軍) 수십 명이 있어서 길을 막는다.

할 수 없이 문 밖에서 멀리 바라본즉, 높은 누각 겹전과 겹겹이 둘린 회랑들이 모두 오색 찬란한 유리 기와로 지붕을 이었다. 이층 8각 집을 대정전(大政殿)이라 하였고, 태청문 동쪽에는 신우궁(神祐宮)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삼청(三淸)의 소상을 모셨는데, 강희 황제(康熙皇帝)의 어필로 소격(昭格), 옹정 황제(雍正皇帝)의 어필로 옥허진제(玉虛眞帝)라 써 붙였다.

도로 나와서 내원을 찾아 한 술집에 들렀다. ()에 금자로,

 

하늘 위엔 술별[酒星] 한알 번쩍번쩍 빛나고요 / 天上已多星一顆

인간 세상엔 부질없이 고을이름[酒泉]과 나란하네 / 人間空聞郡雙名

라고 썼다. 술집은 붉은 난간에, 파란 문, 하얀 벽에 그림 기둥인데, 시렁 위에는 층층이 똑 같은 놋 술통을 나란히 놓고 붉은 종이로 술 이름을 써 붙인 것이 이루 다 헤일 수 없이 많다.

조 주부(趙主簿) 학동(學東)이 마침 그 집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일어나 웃으면서 나를 맞아들인다. 방 안에는 50~60개의 훌륭한 걸상과 20~30개의 탁자가 놓였으며, 화분 수십 그루가 있는데 마침 저녁 물을 주고 있었다. 추해당수구화는 이제 한창으로 피었고, 다른 꽃들은 모두 처음 보는 것뿐이다.

조군이 불수로(佛手露 술 이름) 석 잔을 내게 권한다. 계함 등은 어디로 갔느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한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에서 또 주부 조명회(趙明會)를 만나니 몹시 반가워하면서 어디 가서 함께 실컷 마시자는 것이다. 나는 몸을 돌이켜 방금 나온 술집을 가리켰다. 다시 저기로 가서 마시자는 의미이다. 조는,

 

반드시 저 집뿐만이 아니라 어디를 가더라도 다 그만큼은 하죠.”

한다. 이에 서로 손을 맞잡고 어떤 술집에 들었다. 그 웅장하고 화려함은 아까 그 집보다 훨씬 지나친다. 달걀부침 한 쟁반, 사괴공(史蒯公) 한 병을 사서 실컷 먹고 나왔다.

어떤 한 골동품 다루는 점포에 들렀다. 그 집 이름은 예속재(藝粟齋)이다. 수재(秀才) 다섯 사람이 동업하여 점포를 내고 있는데, 모두 나이가 젊고 얼굴이 아리따운 청년들이다.

다시 밤에 이 집을 찾아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상세한 이야기는 따로 속재필담(粟齋筆談)에 실었다.

또 한 점포에 들렀다. 이는 모두 먼 곳에서 온 선비들이 갓 개업한 비단점이었다. 집 이름은 가상루(歌商樓)이다. 모두 여섯 사람인데 의관의 차림이 깨끗하고 행동과 인상이 모두 단아하므로 또한 밤이 되면 예속재에 함께 모여서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형부(刑部 지금의 재판소) 앞을 지나니 아문이 활짝 열렸다. 문 앞에는 나무를 어긋지게 둘러쳐서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나는 스스로 외국 사람임을 믿고 거리낄 것이 없을뿐더러, 여러 아문 중에 오직 이 문만 열렸으므로 관부(官府)의 제도를 속속들이 봐 두리라 생각하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막는 이가 없었다.

한 관인이 대 위에서 걸상에 걸터앉았고 그 뒤에는 한 사람이 손에 지필을 든 채 모시고 섰다. 뜰 아래는 한 죄인이 꿇어앉았고, 그 좌우에는 한 쌍 사령이 대곤장을 짚고 섰다. 그러나 분부나 거행 등의 여러 가지 호통도 없이, 관인이 죄인을 마주보고 순순히 말을 따진다. 한참 만에 큰 소리로 치라고 호통하니, 그 사령이 손에 들었던 곤장을 던지고 죄인 앞으로 달려가서 손바닥으로 따귀를 네다섯 번 때리고 다시 전 자리에 돌아가서 막대를 들고 섰다. 다스리는 법이 아무리 간단하다기로니 따귀 때리는 형은 옛적에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저녁 뒤에 달빛을 따라 가상루에 들러서 여러 사람을 이끌고 함께 예속재에 이르렀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지다.

 

 

[D-001]범이 …… 달렸다 : 후한서(後漢書) 하진전(何進傳)에 있는 말인데, 큰 권세를 홀로 잡았으며, 그 조종(操縱)은 나 한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D-002]()이 일어난 터전 : 청은 애초 무순(撫順)의 동쪽 흥경(興京)에서 일어나서 태조 천명(天命) 10년에 심양에 수도를 옮겼다.

[D-003]청의 황제 : ‘박영철본(朴榮喆本)’에는 청실(淸室)로 되었다.

[D-004]성경장군(盛京將軍) : 성경을 지키는 관원. 성경은 지금의 봉천(奉天).

[D-005]양매차(楊梅茶) : 소귀나무의 열매를 볶아서 만든 차.

[D-006]제호탕(醍醐湯) : 오매육(烏梅肉)백단향(白檀香)사인(砂仁)초과(草果) 등의 가루를 꿀에 넣어서 끓인 청량 음료.

[D-007]하마경(蝦蟆更) : 오경(五更). 주준도(周遵道)의 표은기담(豹隱紀談)에 나온다. “내루(內樓) 5경이 다하면 목탁과 북을 울리니 이를 하마경이라 한다.” 하였다.

[D-008]부마도위(駙馬都尉) : 임금의 사위인데, 일반적으로 부마라 하였다.

[D-009]옹성(甕城) : 큰 성 밖의 작은 성인데 혹은 월성(月城)이라 한다.

[D-010]원위(元魏) : 남북조 시대의 후위(後魏). 그의 성은 본시 척발(拓跋)이었으나 효원제(孝元帝)에 이르러서 원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 일컬었다.

[D-011]조장(照墻) : 병문(屛門)의 담. ‘박영철본에는 향장(響牆)으로 되었다.

[D-012]패루(牌樓) : 우리나라 홑살문처럼 세우는 기념용 장식 건물.

[D-013]방자(幫子) : 지방 관아 하례(下隷)의 하나. 조선시대에는 방자(房子)로 통용함.

[D-014]하은군(河恩君) : 이광(李垙)의 봉호. 정조 원년에 진하사은진주겸동지행정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行正使)가 되었다.

[D-015]정대광명전(正大光明殿) : ‘박영철본에는 태정전(太政殿)으로 되었다.

[D-016]삼청(三淸) : 도교에서 말하는 세 신선(神仙). , 원시천존(元始天尊)태상도군(太上道君)태상노군(太上老君).

[D-017]옹정 황제(雍正皇帝) : 청의 5대 황제인 세종(世宗). 강희 황제의 아들.

[D-018]사괴공(史蒯公) : 술 이름. ‘박영철본에는 사국공(史國公)으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1일 정해(丁亥)

 

 

개었다. 몹시 덥다. 심양에서 묵다.

아침 일찍 성 안에 우레 같은 대포소리가 들린다. 대개 상점들이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 때면 으레 종이 딱총을 터뜨리는 버릇이라 한다.

급히 일어나 가상루로 가자 여러 사람이 또 모였다.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사관에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거리 구경을 나섰다. 길에서 두 사람을 만났는데 서로 팔을 끼고 간다. 보아한즉 생김새들이 모두 수려하기에 그들이 혹시 글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그 앞에 가서 읍을 한즉, 둘이 팔을 풀고 답례를 아주 공손히 하고는 이내 약방으로 들어간다. 나도 뒤좇아 들어갔다. 둘은 빈랑(檳榔) 두 개를 사서 칼로 넷으로 쪼개어 나에게 한 쪽을 먹어보라 권하고 자기네도 씹어 먹는다. 내가 그들의 성명과 거주를 글로 써서 물은즉, 둘이 들여다보고 멍해 하는 품이 글을 모르는 듯싶다. 다만 길이 읍하고는 가버린다.

해마다 연경에서 심양의 여러 아문과 팔기(八旗)의 봉급을 지급하면 심양에서 다시 흥경(興京)선창(船廠)영고탑 등지로 나누어 보내는데 그 돈이 1 25만 냥이라 한다.

저녁에는 달빛이 더욱 밝다. 변계함에게 함께 가상루에 가자 하였더니, 변군이 부질없이 수역(首譯)에게 가도 좋으냐고 물었으므로 수역의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성경은 연경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함부로 밤에 나다닌단 말씀이오.”

하는 바람에 변군이 한풀 꺾이었다. 수역은 실로 어젯밤 우리 일을 모르는 모양이다. 만일 알게 되면 나도 붙잡힐까 두려워서 일부러 알리지 않고 홀로 빠져 나가면서 장복더러 혹시라도 나를 찾는 이가 있거든 뒷간에 간 것처럼 대답하라고 일러 두었다.

 

 

[D-001]빈랑(檳榔) : 한약의 일종으로 소화제로 씹기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속재필담(粟齋筆談)

 

 

전사가(田仕可)의 자는 대경(代耕) 또는 보정(輔廷)이고, 호는 포관(抱關)이며, 무종(無終) 사람이다. 자기 말로, 전주(田疇)의 후손이며 집은 산해관(山海關)에 있는데, 태원(太原) 사람 양등(楊登)과 함께 이곳에 점포를 내었다 한다. 나이는 스물아홉이요, 키는 일곱 자이다. 넓은 이마와 갸름한 코에 풍채가 날렵하다. 그는 고기(古器)의 내력을 잘 알고 남에게 몹시 다정스러웠다.

이귀몽(李龜蒙)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인재(麟齋)이며, ()의 면죽(綿竹)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아홉이요, 키는 일곱 자이다. 입이 모나고 턱은 넓으며 얼굴은 분바른 듯 희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여 금석을 울리는 듯싶다.

목춘(穆春)의 자는 수환(繡寰)이요, 호는 소정(韶亭)이며 촉 사람이다. 나이는 스물넷이요, 눈매가 그린 듯하나 글을 모르는 게 흠이다.

온백고(溫伯高)의 자는 목헌()이며 촉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하나인데 역시 까막눈이다.

오복(吳復)의 자는 천근(天根)이요, 항주(杭州) 사람이며, 호는 일재(一齋). 나이는 갓 마흔이요, 학문은 짧으나 사람은 얌전하다.

비치(費穉)의 자는 하탑(下榻)이요, 호는 포월루(抱月樓) 혹은 지주(芝洲) 또는 가재(稼齋)이며 대량(大梁) 사람이다. 나이는 서른다섯이요, 아들 여덟을 두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조각에도 능하며, 경의(經義)도 곧잘 이야기한다. 집이 가난한데도 남들을 잘 도와 주니, 이는 여러 아들을 위하여 복을 기르는 것이라 한다. 목수환(穆繡寰)온목헌(溫軒)을 위하여 회계를 보아줄 양으로 방금 촉에서 돌아온 것이라 한다.

배관(裴寬)의 자는 갈부(褐夫)이며 노룡현(盧龍縣) 사람이다. 나이는 마흔일곱이요, 키는 일곱 자 남짓 하고, 아름다운 수염에 술을 잘하고 문장에 능하여 나는 듯 빠르며, 너그러운 품이 장자의 풍도이다. 스스로 과정집(薖亭集) 두 권을 새기고 또 청매시화(靑梅詩話) 두 권을 지었다. 아내 두씨(杜氏)는 열아홉에 요절했다 한다. 임상헌집(臨湘軒集) 한 권이 있는데 내게 서문을 부탁하므로 써주었다.

그 다음 몇몇 사람들은 모두 녹록하여 적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게다가 목소정이나 온목헌과 같은 풍골도 없고 그저 장사치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틀 밤이나 함께 놀았으나 그 이름을 잊어버렸다.

내가 목소정을 보고,

 

저처럼 미목이 그림 같은 분으로서 젊어서 이렇게 멀리 고향을 떠나와 있음은 어인 까닭이오. 인재와 온공(溫公)과는 모두 같은 촉의 사람인즉 무슨 친척의 연줄이나 없으시오?”

하고 물은즉, 인재가,

 

그에겐 묻질 마십시오. 그의 얼굴은 비록 아름답긴 하나 마치 관옥(冠玉) 같아서 그 속엔 아무 것도 든 것이 없답니다.”

한다. 나는,

 

이건 비평이 너무 지나치지 않소.”

한즉, 인재는,

 

온형과 수환과는 종모(從母) 형제 사이지만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이다. 우리 세 사람이 배에다 서촉(西蜀) 비단을 싣고 병신년(丙申年 청의 건륭 41) 2월에 촉을 떠나, 삼협(三峽)을 거쳐 오중(吳中강소성(江蘇省)오현(吳縣))에 넘겨 버리고 장삿길을 좇아서 구외(口外)로 나와 이곳에 점포를 낸 지도 벌써 3년이랍니다.”

한다. 내 목춘을 못내 그리워하여 그와 더불어 필담(筆談)을 하고자 하였더니, 이생(李生 이귀몽)이 손을 저으면서,

 

목 저 두 분은 입으론 봉황새를 읊을 수 있으나 눈으론 시()와 해()를 분간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럴 리가 있나요.”

한즉, 배관이,

 

허튼 소리가 아니오. 귀에는 이유(二酉)의 많은 서적을 간직했으나 눈엔 하나의 고무래정() 자도 뵈지 않는답니다. 하늘에 글 모르는 신선은 없어도 인간 속세엔 말 잘하는 앵무새가 있다오.”

한다. 나는,

 

과연 그러할진댄 비록 진림(陳琳)으로 하여금 격문(檄文)을 쓰인대도 골치 앓는 것이 시원해지지 않겠소그려.”

한즉, 배관이,

 

아주 이것이 모두 유행(流行)이랍니다. ( 서한(西漢))이 육국(六國)을 세운 뒤에 문득 이 법이 그릇됨을 깨달았다 합니다. 이는 이른바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나오는 학문이라는 것이니, 지금 향교(鄕校)나 서당(書堂)에서도 한갓 글을 읽기에만 힘쓸 뿐 강의(講義)는 하지 않으므로 귀로는 똑똑히 들으나 눈으로 보는 건 아득해서, 입으론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모두 술술 풀려 나오지만 손으로 글을 쓰려면 한 글자도 어려울 뿐이랍니다.”

한다. 이생이,

 

귀국에서는 어떠합니까.”

하기에, 나는,

 

책을 펴놓고 읽는 법을 가르치되 소리와 뜻을 함께 익힌답니다.”

한즉, 배생(裵生 배관(裵寬))이 거기에 관주(貫珠)를 치면서,

 

그 법이 정말 옳습니다.”

한다. 나는,

 

비공(費公 비치(費穉))은 언제 촉을 떠나셨습니까.”

하고 물은즉 비생(費生),

 

이른 봄이었습니다.”

한다. 내가,

 

촉에서 여기가 몇 리나 됩니까.”

한즉, 비는,

 

 5천여 리나 된답니다.”

한다. 나는,

 

비씨(費氏)의 여덟 용( 아들들을 지칭)은 모두 한 어머니가 낳으셨나요.”

하자, 비는 다만 빙그레 웃을 뿐이었고, 배생이,

 

아니어요. 소실 두 분이 좌우에서 도와 드렸답니다. 난 저 사람의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것보다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그만이겠소.”

한다. 온 방안 사람들이 모두 한바탕 웃었다. 나는,

 

오실 때 검각(劒閣)의 잔도(棧道)를 지나셨나요.”

하고 곧 물은즉, 비는,

 

그랬죠. 참 좁디좁은 조도(鳥道) 일천 리(一千里), 하루에 열두 시간 줄곧 원숭이 소리뿐입디다그려.”

한다. 배생은,

 

참말, ()의 길은 배로 가나 뭍으로 가나 마찬가지로 어려워요. 이는 이른바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지요. 내가 요전 신묘년(辛卯年 청의 건륭 36)에 강을 거슬러 촉()으로 들어갈 제 74일 만에 겨우 백제성(白帝城)에 이르렀습니다. 배를 타니 때마침 늦은 봄철이이어서 양쪽 언덕에는 여러 가지 꽃이 한창으로 피었고, 쓸쓸한 다북 창 속의 나그네 외론 밤 길기도 한데 소쩍새 피를 뿜고, 원숭이 우지지며, 학이 울고, 매가 웃으니, 이것은 고요한 강물 위의 달 밝은 경치였고, 낭떠러지 위의 큰 바위가 무너져 강에 떨어지자 두 돌이 서로 부딪혀서 번갯불이 번쩍하고 일어나니 이것이 여름 장마 때의 경치입니다. 이 길을 걸어서 비록 황금덩이와 비단이 바리로 많이 생긴다손 치더라도 머리칼이 세고 가슴이 타는 이 고생을 어찌 하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비록 고생하신 것은 그러하지만 저 육방옹(陸放翁 송대의 문호인 육유(陸游)의 호)의 입촉기(入蜀記)를 읽을 때면 미상불 흥겨워 춤이라도 너풀너풀 추고 싶던 걸요.”

한즉, 배생은,

 

무어,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한다.

이날 밤에는 달이 낮처럼 밝았다. 전사가가 주식을 차리느라고 이경(二更)에야 겨우 돌아왔다. 불불(호떡의 일종) 두 소반, 양 곱창 곰국 한동이, 익힌 오리고기 한 소반, 닭찜 세 마리, 돼지 삶은 것 한 마리, 신선한 과실 두 쟁반, 임안주(臨安酒 중국 남방산 명주) 세 병, 계주주(薊州酒 중국 북방산 명주) 두 병, 잉어 한 마리, 백반(白飯) 두 냄비, 잡채(雜菜) 두 그릇이니, 돈으로 친다면 열두 냥어치나 된다. 전생(田生 전사가)이 앞으로 나와 공손히,

 

이 변변치 못한 걸 장만하느라고 오늘밤 선생님의 좋은 말씀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한다. 나는 교의에서 내려서며,

 

이다지 수고하시니 꼿꼿이 앉아 받긴 황송합니다.”

한즉, 여러 사람들도 일어서면서,

 

귀하신 손님이 오셨는데 도리어 부끄럽습니다.”

한다. 이에 일제히 일어나서 다른 좌석(座席)으로 옮기고 이내 점방 문을 닫았다.

들보 위에 부채 모양의 사초롱[紗燈] 한 쌍을 달았는데, 겉에는 모두 꽃과 새를 그렸으며, 또 이름 있는 사람의 시구(詩句)도 적혀 있다. 그리고 네모난 유리등(琉璃燈) 한 쌍이 낮처럼 밝게 비친다.

여러 사람들이 각기 한두 잔씩 권하는데 닭이나 오리는 모두 주둥이도 발도 떼지 않았고, 양고기 국도 몹시 비려서 비위에 받지 않으므로 떡과 과실만 먹었다.

전생이 필담한 종이쪽을 두루두루 열람하고 연신,

 

좋아, 좋거든.”

하고 감탄한다. 그리고 그는 또,

 

선생께서 아까 저녁 전에 골동을 구하셨으면 하시더니, 어떤 진품(眞品)을 구하시렵니까?”

하기에, 나는,

 

비단 골동뿐만이 아니라 문방(文房)의 사우(四友)까지도 사고 싶습니다. 정말 희귀하고 고아(古雅)한 것이라면 값은 계교치 않으렵니다.”

하니, 전생은,

 

선생께서 이제 오래지 않아서 북경에 들르시면 유리창(琉璃廠) 같은 데도 들르실 테니 얻기 어렵지는 않으리다. 그러나 다만 그의 참과 거짓을 분간하기 어렵사오니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선생의 감상력이 어떠하신지요?”

한다. 나는,

 

궁벽한 바다 구석에 살고 있는 이 사람이라 감식이 고루하니, 어찌 진짜 가짜를 잘 분간할 줄 알겠습니까?”

하니, 전생은 또,

 

이곳은 말이 도회이지 중국에선 한 구석이었으므로, 모든 거래는 다만 몽고나 영고탑이나 또는 선창 등지에 의뢰할뿐더러, 변방의 풍습이 몹시 무디어서 아담한 취미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빛깔이나 고아한 그릇조차 이곳에는 나온 일이 드물거늘, 하물며 은()의 그릇과 주()의 솥과 같은 것이야 어디서 볼 수 있겠습니까. 귀국에서 골동 다루는 식이 이곳과는 또 달라서 전에 그 장사하는 이들을 본즉, 비록 차[]와 약재 같은 따위라도 상품을 가리지 않고 값싼 것만 따지더군요. 그러고서야 무슨 진짜 가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차나 약재뿐만 아니라, 모든 기물이 무거우면 실어가기 어려우니까 대개 변문(邊門)에서 사가지고 돌아가더군요. 그러므로 북경 장사꾼들이 미리 내지(內地)에서 쓰지 못할 물건들을 변문으로 넘겨보내서 서로 속여서 이익을 취한답니다. 이제 선생께서는 구하시는 것이 속류(俗流)에서 훨씬 벗어난 것이고, 또 우연히 이 타향에서 서로 만나서 불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나머지 벌써 지기의 벗이 되었으니, 비록 정성을 다하여 물건을 드리진 못할망정 어찌 잠깐이라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선생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는 가히 이미 술로 취하게 하고 또 덕()으로써 배부르게 했다.’고 할 만하군요.”

하니, 전생은,

 

너무 지나치신 사랑이십니다. 내일 아침 다시 오셔서 점포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구경하시죠.”

하니 배생은,

 

내일 아침 일을 미리 이야기할 것 있소. 다만 선생을 모시고 이 밤의 즐거움을 다하면 그만이죠.”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옳소.”

한다. 전생은 또,

 

옛날 공자께서도 구이(九夷)의 땅에 살고 싶다.’ 하셨고,  군자(君子)가 그곳에 산다면 무엇이 야비함이 있겠느냐.’ 하셨은즉, 상공(相公)께서 비록 먼 나라에 계시오나 기우(氣宇)가 헌칠하시고, 또 글은 공()()의 끼치신 글을 통하시며, 예법에는 주공(周公)의 도()를 닦았사온즉 이는 곧 한 분의 군자이신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우리들이 먼 땅 다른 하늘 밑에 살고 있어서 서로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풀지 못한 채 만나자 곧 헤어지게 되니 이를 어이하오리이까.”

하니 이귀몽이 그 대목에다 수없이 동그라미를 치면서,

 

은근하고도 애처로움이 꼭 내 마음 같구려.”

하고 감탄한다. 술이 다시 두어 순배 돈 때에 이생이,

 

이 술 맛이 귀국의 것과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 임안주는 너무 싱겁고, 계주주는 지나치게 향기로워서, 둘 다 술의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맑은 향기는 아니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엔 법주(法酒)가 더러 있습니다.”

한즉, 전생은,

 

그러면 소주(燒酒)도 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 있습니다.”

하고 답하였다. 전생이 곧 몸을 일으켜 벽장에서 비파를 끄내어 두어 곡조를 뜯었다. 나는,

 

옛날에도 연()()엔 슬피 노래부르는 이가 많다고 일컬었으니 여러분도 응당 노래를 잘 하시겠죠. 원하건대, 한 곡조 들려 주시지요.”

하니, 배생은,

 

잘 부르는 이가 없어요.”

하고, 이생은,

 

옛날에 이른바 연조의 슬픈 노래는 곧 궁벽하고도 작은 나라 선비로서 뜻 잃은 이들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제야 사해가 한 집이 되고 성스러운 천자(天子)가 위에 계시오니, 사민(四民)이 업을 즐기어서 어진 이는 밝은 조정의 상서로운 인물이 되어, 임금과 신하가 노래를 창수(唱酬)하며, 어리석은 백성들은 강구(康衢)의 연월(煙月) 속에서 밭 갈고 우물 파며 노래 부르니 아무런 불평이 있을 리 없으니, 어찌 슬픈 노래가 있을 수 있겠나이까.”

한다. 나는,

 

성스러운 천자가 위에 계시면 나아가 섬김이 의당하올 것인데, 여러분으로 말하면 모두 당세의 영걸이시라 재주가 높고 학문이 넉넉하옵거늘, 어찌 세상에 나가서 일하지 않으시고 이다지 녹록하게 이 시정 사이에 잠겨 지내시나요.”

하고 물으니, 배생은,

 

이런 자격은 다만 전공(田公)께서나 담당하실 수 있겠죠.”

하니, 한 자리에 앉은 사람의 웃음보가 터졌다. 이생은,

 

이야말로 때와 운수가 있는 것인즉, 함부로 요구할 수는 없겠지요.”

하고, 그는 곧 책꽂이 위에서 선문(選文) 한 권을 뽑아서 나에게 한 번 읽기를 청한다.

나는 곧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읽을 제 우리나라 식의 언토(諺吐) 구두(句讀) 를 달지 않고 높은 소리로 읽었다. 여럿이 둘러앉아 듣다가 무릎을 치며 좋아하지 않는 이가 없다. 이생이 내가 다 읽기를 기다려서 유량(庾亮) 사중서감표(辭中書監表)를 골라 읽는데 그의 높았다 낮았다 하는 음절이 분명해서 비록 글자를 따라 일일이 알 수는 없어도 지금 어느 구절을 읽고 있는가를 넉넉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청이 맑아서 마치 관현을 듣는 듯하였다.

벌써 달은 지고 밤은 깊었는데 문 밖에는 인기척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성경에는 순라(巡邏 야경꾼)가 없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전생은

 

, 있습니다.”

한다. 나는 또,

 

그럼, 길에 행인이 끊이지 않음은 어인 까닭이죠.”

한즉, 전생은

 

다들 긴한 볼일이 있는게죠.”

한다. 나는,

 

아무리 볼 일이 있은들, 어찌 밤중에 나다닐 수 있겠어요.”

한즉, 전생은

 

, 못 다닌답니까. 초롱 없는 이야 못 다니겠지만, 거리마다 파수보는 데가 있어서 갑군이 지키고, 창과 곤봉으로 나쁜 놈을 적발하여 낮과 밤의 구별이 없거늘, 어찌 밤이라고 다니지 못하리까.”

한다. 나는,

 

밤도 깊고 졸리니 초롱을 들고 사관으로 돌아감이 어떨까요.”

하니, 배와 전이 함께,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반드시 파수꾼에게 검문을 당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 깊고깊은 밤에 혼자서 쏘다니냐고 하며 오가면서 들르신 처소까지 밝히라 할 것이온즉, 몹시 귀찮을 것입니다. 선생이 이미 졸리신다면 이 누추한 곳에서나마 잠시 눈을 붙이시죠.”

하자, 목춘(穆春)이 곧 일어나서 탑() 위의 털방석을 말끔히 털고 나를 위해서 누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젠 졸음도 갑자기 깨는군요. 다만 나 때문에 여러분께서 하룻밤 잠을 잃으실까 두려울 뿐입니다.”

하니, 여럿이,

 

아니오, 조금도 졸립지 않아요. 이토록 고귀하신 손님을 모시고 하룻밤 아름다운 이야기로 새는 건 참으로 한 평생 가도 얻기 어려운 좋은 인연일까 합니다. 이렇게 세월을 보낸다면 하룻밤은커녕 석달이 넘도록 촛불을 돋우어 밤을 새워도 무슨 싫증이 나겠습니까.”

하고, 모두들 흥이 도도하여 다시 술을 더 데우고 안주를 다시 가져오게 한다. 나는,

 

술을 다시 데울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그들은,

 

찬 술은 폐()를 해칠 우려가 있을뿐더러 독이 이[]에 스며듭니다.”

한다. 그 중 오복(吳復)은 밤새도록 단정히 앉았는데 눈매가 범상치 않다. 나는,

 

일재선생(一齋先生)께선 오중을 떠나신 지 몇 해나 되시는지요.”

하니, 오생(吳生 오복(吳復)),

 

열한 해나 되었습니다.”

한다. 내가,

 

무슨 일로 고향을 떠나 이다지 분주히 다니십니까?”

하니, 오생은,

 

장사로 생애를 삼고 있습니다.”

한다. 내가 또,

 

가족도 이곳에 따라와 계십니까?”

하니, 오생은,

 

나이는 벌써 40세입니다마는, 아직껏 장가 들지 못했습니다.”

한다. 나는,

 

오서림선생(吳西林先生)의 휘()는 영방(潁芳)이옵고, 항주(杭州)의 고사(高士)이신데 혹시 노형의 일가가 아닙니까?”

한즉, 오생은,

 

아니에요.”

하기에, 나는 또,

 

해원(解元) 육비(陸飛)와 철교(鐵橋) 엄성(嚴誠)과 향조(香祖) 반정균(潘庭筠)은 모두 서호(西湖절강(浙江)에 있는 명소)의 이름 높은 선비들인데 노형이 혹시 잘 아시나요.”

한즉, 오생은,

 

모두들 서로 이름을 통한 적도 없습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으니까요. 다만 육비가 그린 모란을 본 기억은 납니다. 그는 호주(湖州) 사람이더군요.”

한다.

조금 뒤에 닭이 우니 이웃 사람들이 일어나 움직인다. 나는 고단한데 또 술까지 취하여, 교의 위에 걸터앉은 채 꾸벅꾸벅하다가 곧장 코를 골고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훤하게 밝을 무렵에야 놀라서 잠을 깨니, 모두들 서로 걸상에 의지하여, 베기도 하고, 눕기도 하며, 혹은 의자에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나는 홀로 두어 잔 술을 기울이고 배생을 흔들어 깨워서, 가노라 이르고는 곧 사관에 돌아오니 해가 벌써 돋았다.

장복은 깊은 잠에 빠졌고 일행 상하도 모두 일어나지 않았다. 장복을 툭 차 깨워서,

 

누가 날 찾는 이가 있더냐.”

하고 물었더니,

 

아무도 없더이다.”

한다. 곧 세숫물을 재촉하여 망건을 두르고 바삐 상방(上房)으로 가니, 여러 비장과 역관들이 바야흐로 아침 문안을 아뢰는 중이었다. 아무도 간밤의 일을 눈치채지 못한 듯한 모양이므로 마음속으로 적이 기뻐하며 다시 장복더러,

 

입밖에 내지 말라.”

당부하였다.

아침 죽을 약간 마시고 곧 예속재에 이르니 모두들 일어나 가고, 전생과 이인재가 골동을 벌여 놓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모두 놀라는 듯이 반기면서,

 

선생은 밤새 고단하지 않았습니까.”

하기에, 나는,

 

밤낮을 헤일 것 없이 게으름증은 나질 않아요.”

하니, 전생은,

 

그럼, 차나 한 잔 드시죠.”

한다. 조금 앉았으려니 한 아름다운 청년 하나가 밖에서 들어와 찻잔을 받들어 내게 권한다. 나는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그는,

 

저는 부우재(傅友榟)입니다. 집은 산해관에 있사옵고 나이는 열아홉 살입니다.”

한다. 전생이 골동들을 다 늘어놓고는 날더러 감상하기를 청한다. ()()()() 등이 모두 열하나인데,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모난 것이 제각기 다르고, 그 새김질과 빛깔이 낱낱이 고아하며, 관지(款識)를 살펴보니 모두 주()() 시대의 물건이다. 전생은,

 

그 글자는 고증할 것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요새 금릉(金陵)하남(河南) 등지에서 새로 꽃 무늬를 새긴 것이라, 관지는 비록 옛 식을 본떴더라도 꼴이 벌써 질박하지 못하고, 빛깔이 또한 순하지 못해서, 만일 이것들을 진짜 골동 사이에 놓는다면 필시 야비함이 대번에 드러날 것입니다. 내 비록 몸은 시전(市廛)에 잠겨 있더라도, 마음은 늘 배움터에 있던 차에 선생을 뵈오니, 마치 여러 쌍 보패(寶貝)를 얻은 듯싶사온즉, 어찌 조금이라도 서로 속여서 한평생을 두고 마음에 께름칙하게 하오리까.”

한다. 나는 여러 그릇 중에서 창 같은 귀가 달리고 석류 모양으로 발을 단 통화로 하나를 들고 자세히 훑어본즉, 납다색(臘茶色) 빛깔에 제법 정미하게 만들었다. 화로 밑을 들쳐보니 대명선덕년제(大明宣德年製 선덕은 명 선종(明宣宗)의 연호)라고 양각(陽刻)으로 새겨져 있다. 나는,

 

이것은 제법 좋은 듯싶은데요.”

하니, 전생은,

 

실상 그대로 말씀드린다면 이는 선로(宣爐)가 아닙니다. 선로는 대개 납다색 수은(水銀)으로 잘 문질러서 속속들이 스미게 한 뒤 다시 금가루를 이겨 칠하였으므로, 불을 오래 담으면 저절로 붉은 빛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거야 어찌 민간에서 함부로 흉내낼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또,

 

그렇다면 골동기에 청록색 주반(硃斑 주사의 얼룩)이 생기는 건 흙 속에 오랫동안 파묻혀야 그러하므로, 그래서 무덤 속에 묻혔던 것이 좋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이 그릇들이 만일 갓 구운 것이면 어찌 이런 빛깔을 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즉, 전생은,

 

이건 참 알아 두어야 합니다. 대개 골동기는 흙에 들면 청색(靑色)이 나고, 물에 들면 녹색(綠色)이 나는 법입니다. 무덤 속에서 파낸 그릇들은 흔히 수은빛을 내는데, 어떤 이는 시체 기운이 스며들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아득한 옛날에는 흔히 수은으로 염()을 했기 때문에, 혹시 제왕의 능묘에서 나오는 그릇은 수은이 옮아서 오래된 것일수록 속속들이 스며 배는 법이므로, 대개 갓 구운 것인지, 옛 것인지, 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가리기 쉽습니다. 고기(古器)는 비단 살이 두껍고 질이 좋을 뿐만 아니라, 본 몸에서 나는 빛이 대체로 천연스럽게 맑고도 윤기 있고, 수은 빛 역시 그릇 전체에 고루 퍼지는 게 아니라, 혹은 반쪽에서, 혹은 귀에서만, 또는 다리에서만, 그리고 가끔 번져나간 것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청록색 얼룩 역시 그러하여, 전체 아닌 반만이 짙게도 들고, 여리게도 들고,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흐리다고 더러울 정도는 아니어서 머리카락 같은 무늬가 투명하게 뵈며, 맑다고 매마르진 않아서 어른어른함이 마치 물오른 듯합니다. 가끔 주사 알록점이 속속들이 깊이 스며든 것이 있는데, 그 중에도 갈색(褐色)진 것이 가장 고귀한 것이어서, 흙 속에 오래 들어 있으면 청()()()()의 점들이 알록달록 하여, 혹은 버섯 무늬 같기도 하고, 혹은 구름 속 햇무리 같기도 하고, 또는 함박눈 조각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흙 속에서 천 년쯤 묻혀 있어야 될 테니 이건 정말 상품으로 치는 것입니다. 옛날 명 선종(明宣宗)이 무척 갈색을 좋아해서 이른바 선로에는 갈색이 많았던 것입니다. 근년에 섬서(陝西)에서 갓 지은 것도 문득 선덕의 것을 본뜨려 하였으나, 선로는 아예 꽃 무늬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일부러 꽃 무늬를 새겼으니, 이것은 모두 요즘의 가짜입니다. 그들이 빛깔을 이토록 잘 위조함은, 대체로 그릇을 구운 뒤에 칼로 무늬를 새기고 관지를 파서 넣은 다음 땅속에 구덩이를 파서 거기에다 소금물 두어 동이를 들이 붓고 마르기를 기다려 그릇을 그 속에 묻어두었다가 몇 해 만에 꺼내 보면 자못 고의(古意)가 있어 보이나, 이는 가장 하품이며 서투른 솜씨입니다. 이보다 더 교묘한 방법은, 붕사(鵬砂)한수석(寒水石)망사(䃃砂)담반(膽礬)금사반(金砂礬)으로 가루를 만들어 소금물에 풀어서, 붓으로 골고루 그릇에 먹여 말린 뒤에, 씻고 또 씻은 다음 다시 붓질하여, 이러기를 하루에 서너 번 한 뒤에 땅을 깊게 파서 그 속에 숯불을 피워 구덩이를 화로처럼 달군 뒤에 진한 초[]를 뿌리면, 구덩이가 펄펄 끓으면서 곧 말라 버립니다. 그 다음 그릇을 그 속에 넣고 초 찌꺼기로 두껍게 덮고, 또 흙을 다져서 빈틈 없이 하여 4~5일 지난 뒤에 꺼내 보면 여러 가지 알록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댓잎을 태워 그 연기를 풍겨서 푸른빛을 더 짙게 하고, 납으로 문지르되, 수은 빛을 내려고 한다면 바늘로 가루를 만들어 문지르고 그 위에 백랍(白蠟)으로 닦으면 그럴듯한 고색(古色)이 납니다. 그러고도 혹은 일부러 한쪽 귀를 떼기도 하고, 또는 몸에 흠집을 내기도 해서, ()()()() 시대의 유물이라고 속이는 것은 더욱 얄미운 짓입니다. 뒷날 창() 중에 가시면 모두 먼 곳에서 온 장사치들이오니 물건을 사실 때 진가를 분간치 못한 채 우물쭈물하다가 웃음감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한다. 나는,

 

감사합니다. 선생이 이렇게 진심을 보여주시니까요.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북경으로 떠날테니, 바라건대, 선생은 문방서화정이(鼎彛) 등 여러 가지에 대하여 고금의 동이(同異)와 명호(名號)의 진위(眞僞)를 기록하셔서 어두운 길에 지남(指南)이 되도록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생은,

 

선생이 만일 이것이 소용이 있으시다면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서청고감(西淸古鑑) 박고도(博古圖) 중에서 제 소견을 첨가하여 깨끗이 써서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에 달이 돋으면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사관에 돌아오니, 이미 아침 밥을 올렸으므로 잠깐 상방에 다녀 빨리 조반을 치르고 다시 나오니, 정 진사가 계함과 내원과 함께 역시 유람을 나서면서 나더러,

 

혼자서 다니며 무슨 재미난 구경을 하시오.”

하고 나무라더니, 내원이 또,

 

실은 아무 것도 구경한 게 없습디다. 옛날 광주(廣州) 골 생원님이 처음 서울에 와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인사 한 마디도 똑똑히 못하여 서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더니 이제 우리들이 꼭 그 꼴이군요. 난 더군다나 두 번째라 아무런 재미란 느끼지 못했구려.”

한다.

길에서 비치(費穉)를 만났더니 나를 이끌고 담자리전으로 들어가서 오늘 밤 가상루에서 모이자고 부탁한다. 나는 이미 전포관(田抱關)과 예속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어제 저녁에 모였던 여러분들이 다 모이기로 했다고 말했더니, 비생은,

 

아까 포관과도 잘 이야기 되었습니다. 이제 선생이 외국의 손님으로 녹명(鹿鳴)을 노래하며 북경으로 가시는 길이온즉, 우리들이 선생을 위해서 백구(白駒)의 옛 시를 읊는 심정은 누구나 다 같을 것입니다. 배공이 이미 촉중의 온공(溫公)과 함께 주식을 장만하였은즉, 이 약속을 어기시면 안 될 것입니다.”

한다. 나는,

 

어제 저녁엔 너무 많이 여러분께 폐를 끼쳤는데 오늘밤은 그러시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비생은,

 

저 뫼에 아름다운 나무가 있다면 공장이 자로 잴 것이요, 나는 백로(白鷺)가 멀리 찾았으니 피차 서로 싫지 않을 것입니다. 열두 행와(行窩)엔 애초부터 일정한 약속이 없을 것이요, 사해가 모두 형제인즉 누구에게 후박이 있겠습니까.”

하자, 마침 내원 등이 거리를 서성거리다가 나를 찾아 가게로 들어왔다. 나는 급히 필담(筆談)하던 종이쪽을 걷어치우고 고개를 끄덕여서 응낙하였다. 비생 역시 내 뜻을 눈치채고 빙그레 웃으면서 턱을 끄덕였다. 계함이 종이를 찾으며 말을 하고 싶어 하기에 내가 먼저 일어나면서,

 

그와 더불어 이야기할 게 못 되네.”

하니, 계함 역시 웃고 일어선다. 비생이 문까지 나와서 내 손을 넌지시 잡고 은근한 뜻을 비치므로, 나는 그저 끄덕이고 나와 버렸다.

 

 

[C-001]속재필담(粟齋筆談) : ‘다백운루본(多白雲樓本)’에는 속재야화(粟齋夜話)라 하여 성경잡지에서 각립(各立)시켰으며, 또 차례를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의 다음에 두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1]전주(田疇) : 조위(曹魏)의 문학가. 격검(擊劒)에 능하였다.

[D-002]소정(韶亭) : 어떤 본에는 소정 두 글자가 궐문(闕文)이 되었다.

[D-003]아들 여덟 : 어떤 본에는 아들 여덟이 궐문으로 되었다.

[D-004]온공(溫公) : 곧 온백고인데, ()은 성 밑에 붙이는 미칭(美稱).

[D-005]관옥(冠玉) : 한서(漢書) 진평전(陳平傳)에 있는 말. 마치 옥으로 꾸민 갓과 같아서 비록 밖에 나타나는 빛은 아름다우나 그 내용은 변변하지 못함을 이른 말이다. 미남자의 호칭으로 쓰임.

[D-006]구외(口外) : 장성(長城) . 그 경계에 장가구(張家口)와 고북구(古北口)가 있으므로 그 밖의 땅을 구외라 한다.

[D-007]이유(二酉) : 대유산(大酉山)과 소유산(小酉山). 그 산 밑에 석혈(石穴)이 있는데, 그 중에는 책 천 권을 간직하였다 한다.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에서 나온 말이다.

[D-008]진림(陳琳) : 조위(曹魏)의 문학가. 일찍이 원소(袁紹)의 밑에 있으면서 조조(曹操)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바쳤더니 조조는 마침 머리를 앓다가 그 자리에서 나았다 한다.

[D-009]귀로 …… 학문 : 순자(荀子)에서 나온 말. 소인(小人)의 학문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새어 나간다. 그의 얕음을 일렀다.

[D-010]제자백가(諸子百家) : 중국 고전으로 각파 학자들의 학술이 실려 있는 서적.

[D-011]관주(貫珠) : 글이 잘된 곳을 보아서 그 글자의 오른편에 주묵(朱墨)으로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다.

[D-012]잔도(棧道) : 중국 사천(四川) 지방에 있는 험준한 절벽에 나무로 시렁을 만들어 길을 낸 곳.

[D-013]하늘에 …… 더 어렵다 : 이백(李白)의 시구에, “촉도의 가기 어려움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하구려.” 하였다.

[D-014]양곱창 곰국 한 동이 : 이 구절은 수택본에는 다음에 나오는 과실 두 쟁반의 밑에 있다.

[D-015]이미 술로 …… 했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 생민지십(生民之什) 기취(旣醉).

[D-016]구이(九夷) …… 싶다 : 논어(論語) 자한편(子罕篇) 공자께서 구이에 살고 싶으셨다.” 했다. 구이는 견이(畎夷)어이(於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 등 동방의 여러 민족.

[D-017]상공(相公) : 통속편(通俗篇) 이제 의관을 차린 이를 모두 상공이라 남용하여 그의 계급에 따라서 대상공(大相公)이상공(二相公)이라 한다.” 했다. 여기서는 연암을 가리킨 말.

[D-018]주공(周公) : 성명은 희단(姬旦). ()의 대표적 정치가.

[D-019]() …… 많다 : 한유(韓愈) 송동소남서(送董邵南序) 중의 한 구절.

[D-020]어리석은 …… 부르니 : 열자(列子), “제요(帝堯)가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 만에 미복(微服)으로 강구에 놀면서 동요(童謠)를 들었다.” 했다. 강구는 한길.

[D-021]전공(田公) …… 있겠죠 : 전의 이름이 사가(仕可)  출사할 만하다는 뜻이었으므로 농담을 붙인 것이다.

[D-022]선문(選文) : 어떤 본에는 문선(文選)으로 되었으나 그릇된 듯하다. 문선에는 출사표는 있으나 후출사표는 실려 있지 않다.

[D-023]후출사표(後出師表) : 촉한의 명신 제갈량이 지었다 하나 출사표 곧 속칭 전출사표(前出師表)는 그가 지은 것이요, 소위 후출사표는 뒷사람의 위작(僞作)이라 한다.

[D-024]유량(庾亮) : 동진(東晉)의 정치가로서 특히 사부(辭賦)에 능하였다. 사중서감표는 유량이 진 명제(晉明帝)에게 올려서 중서감을 사퇴한 표문.

[D-025]오서림선생(吳西林先生) : 청 고종(淸高宗) 때의 학자. 서림은 그의 자.

[D-026]관지(款識) : 골동에 새긴 글자. 관은 음각(陰刻)이요, 지는 양각(陽刻).

[D-027]서청고감(西淸古鑑) : 청 고종(淸高宗)의 명참(命讖)으로서 내부(內府)에 있는 고기를 해설한 책 이름.

[D-028]박고도(博古圖) : 송 휘종(宋徽宗)이 지은 책 이름. 흔히 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라 한다.

[D-029]광주(廣州)  …… 되었다 : 우리나라에 많이 유행된 속담.

[D-030]녹명(鹿鳴)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임금이 군신(羣臣)을 모아서 잔치할 때 녹명편을 노래로 불렀다.

[D-031]백구(白駒) : 시경의 편명. 어진 선비를 여의는 노래. 백구는 흰 말.

[D-032]저 뫼에 …… 잴 것 : 좌전(左傳)에서 나온 말.

[D-033]나는 …… 찾았으니 : 시경 진로편(振鷺篇)에서 나온 말. 나는 백로로써 외국 손님이 이름에 비하였다.

[D-034]열두 행와(行窩) : 송사(宋史) 소옹전(邵雍傳), “일을 좋아하는 자가 별도로 소옹의 살고 있는 집과 비슷한 집을 지어서 그가 이르기를 기다렸으니 그 이름은 행와라 한다.” 했다. 그리하여 열두 군데에 행와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상루필담(商樓筆談)

 

 

저녁에는 더위가 오히려 찌는 듯하고 하늘 가엔 붉은 햇무리가 끼었다.

나는 밥을 재촉해 먹고 잠깐 상방에 가서 조금 앉았다가 곧 일어나면서 혼잣말로,

 

고단하고 더위가 특히 심하니 일찍 자야겠군.”

하고는, 뜰로 내려와서 서성거리다가 틈만 있으면 나갈 궁리였다. 마침 내원과 주 주부노 참봉 등이 밥 먹은 뒤 뜰을 거닐면서 배를 문지르며 트림을 하고 있다. 때에 달빛이 차츰 돋아나고 시끄러운 소리가 잠깐 끊기었다. ()가 달그림자를 따라 두루 거닐면서 부사가 요양서 지은 칠률(七律)을 외고, 또 자기가 차운(次韻)한 것을 읊고 있었다. 나는 바쁜 걸음으로 마루로 올라갔다가 도로 나오면서 노군더러,

 

형님이 매우 심심해하시더군.”

하니, 노군은,

 

사또께서 너무나 적막하시리다.”

하고, 곧 마루 위로 향한다. 주군도 근심스러운 낯빛으로,

 

요즘 병환이 나실까 두렵습니다.”

하고, 곧장 마루 쪽으로 향해 가니 내원도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빨리 문을 나가면서, 장복에게,

 

어제처럼 잘 꾸며 대려무나.”

하고, 타이르자 계함이 밖에서 들어오다가 나를 보고,

 

어디를 가시오.”

한다. 나는 가만히,

 

달을 따라 어디 좋은 데 가서 이야기나 해보자꾸나.”

한즉, 계함은,

 

어딜요.”

하므로, 나는,

 

그야 어디든지.”

하였더니, 계함이 발을 멈추고 망설이는 차에 수역이 마침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달이 좋으니 좀 거닐다 와도 좋겠지요.”

한다. 수역이 깜짝 놀라면서 무어라고 말하니, 계함은 웃으면서,

 

일이야 의당 이렇게 해야죠.”

하기에, 나도 허튼 말로,

 

그럴 법 하군.”

하고, 곧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들어갈 제 마침 수역과 계함이 마루에 올라서 돌아보지 않는 틈을 타서 나는 가만히 빠져 나왔다. 이미 한길에 나오니, 비로소 가슴이 후련하였다. 더위도 약간 물러가려니와 달빛이 땅에 가득하다. 먼저 예속재에 이른즉, 벌써 문이 닫혔는데 전생은 어딘지 나가고 이인재만이 혼자 있었다. 이는 곧,

 

잠깐 앉으셔서 차나 마시세요. 전공이 곧 돌아올 겁니다.”

한다. 나는,

 

가상루의 여러분께서 벌써 모여서 몹시 기다릴 걸요.”

하니, 이생은,

 

가상루의 아름다운 약속은 벌써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모시고 가리다.”

한다. 마침 전생이 손에 붉은 양각등(羊角燈)을 들고 들어와서 곧 가기를 재촉하므로, 이생과 함께 담뱃대를 입에 문 채 문을 나섰다. 한길이 하늘처럼 넓고 달빛은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전생이 손에 들었던 초롱을 문 위에 걸기에, 나는,

 

초롱을 들지 않아도 무방한가요.”

한즉, 이생은,

 

아직 밤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한다. 드디어 천천히 네거리를 거닐었다. 양편 상점(商店)들은 벌써 문이 닫혔고, 문 밖엔 모두 양각등을 걸었는데 더러는 푸르고 붉은 빛깔도 섞여 있다.

가상루 여러 사람들이 마침 난간 밑에 죽 늘어서 있다가 나를 보고 모두들 못내 반겨하며 상점 안으로 맞아들인다. 이중에는 배관갈부이귀몽동야비치하탑전사가포관온백고목재( 목헌())목춘수환오복천근 등이 모두 모였다. 배생이,

 

박공(朴公)은 가히 믿음 있는 선비라 이를 만합니다.”

한다. 마루 가운데에 부채처럼 생긴 사초롱 한 쌍이 걸려 있고 탁상에는 촛불 두 자루가 켜졌는데, ()()()() 들을 이미 차려 놓았으며, 북쪽 벽 밑에도 따로이 한 식탁을 벌여 놓았다.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먹기를 청하기에 나는,

 

저녁밥이 아직 덜 내려갔습니다.”

한즉, 비생이 손수 더운 차 한 잔을 따라서 권한다. 마침 자리에 처음 보는 손님이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저이는 마영(馬鑅)이라 하며, 자는 요여(耀如)이고, 산해관에 살고 있는 분인데 장사하러 이곳에 왔으며, 나이는 스물셋이고 글도 대략 안답니다.”

하고, 소개한다. 비생은,

 

오십독역(五十讀易)을 어떤 이는 정복독역(正卜讀易)이라 하여 복() 자에다 획 하나 더 붙은 것이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기에, 나는,

 

오십독역의 오십(五十)은 비록 졸() 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는 있겠으나, 이제 정복(正卜)의 그릇된 것이라 함은 너무 천착함이 아닐까요. 역경(易經)은 비록 복서(卜筮)에 쓰는 책이지만 계사(繫辭 역경 중의 한 편명(篇名))에도 점()과 서()를 말했으나 복()자는 보이지 않을뿐더러 복 자로 말한다 하더라도 곤() 자에다 한 점()을 더한 것인만큼 애초에 일() 자의 획을 건너 그은 건 아니니까요.”

하니, 비생은 또,

 

혹은 무약단주오(無若丹朱傲)의 오() 자를 오() 자의 잘못이라 하고, 그 아래 망수행주(罔水行舟)라는 글을 보아서도 두 사람으로 봄이 옳다 하는데요.”

하기에, 나는,

 

()가 능히 뭍에서 배를 저었다 하니, 망수행주와 뜻은 매우 그럴싸하게 맞으나 오()와 오()는 비록 음은 같을지라도 글자의 모양은 아주 다를뿐더러 오()와 착()으로 말하면 모두 하 태강(夏太康) 때의 사람인즉 위로 우순(虞舜) 시대와는 매우 요원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이동야는,

 

선생의 변증이 꼭 옳습니다.”

한다. 나는 전포관더러,

 

부탁드린 골동의 목록은 이미 집필을 시작하셨지요.”

하고 물은즉, 전생은,

 

점심 때 마침 조그마한 일이 생겨서 아직 반도 베끼지 못한 채 그대로 접어 두었습니다. 내일 아침 떠나시는 길에 잠시 점포 앞에서 행차를 멈추시면, 제 손수 수하 사람에게 전해 드릴 터이오며, 이번엔 결단코 전 약속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한다. 나는,

 

선생께 이렇듯 수고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니, 전생은,

 

이건 친구간의 예사 일입죠. 다만 진작 못해 드려 부끄러울 뿐입니다.”

한다. 나는 또,

 

여러분은 일찍이 천산(千山)을 구경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예서 백여 리나 되어 아무도 가본 일이 없답니다.”

한다. 나는,

 

병부 낭중(兵部郞中) 복녕(福寧)이란 이를 잘 아십니까.”

하니, 전생은,

 

아직 모릅니다. 우리 친구 중에도 다들 그럴 것입니다. 그는 벼슬하는 양반이요, 우리는 장사치인데 어찌 서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한다. 동야는,

 

선생은 이번 길에 황제를 직접 뵈옵지요?”

하기에, 나는,

 

사신은 때로 뵐 수 있겠지만, 나는 한갓 수원(隨員)이라 그 반열에 참가할 것 같지 않습니다.”

하니, 동야는,

 

지난해에 어가(御駕)가 능()에 거둥하셨을 때 귀국의 종관(從官)들은 모두 천자의 존안을 가까이 뵙곤 하던데 우리네는 도리어 그가 부럽더군요.”

하기에, 나는,

 

여러분은 어째서 우러러뵙지 못합니까?”

하니, 배갈부는,

 

어찌 감힌들 당돌한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문 닫은 채 잠자코 있을 뿐이죠.”

한다. 나는,

 

황상께서 거둥하실 때면 아이 어른할 것 없이 들판에 모여들어 다투어 그 행차를 우러러보려고 할 것 아닙니까.”

하니, 그는,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한다. 나는,

 

지금 조정 각로(閣老)들 중에 누가 가장 인망이 높지요?”

하였더니, 동야는,

 

그들 이름은 모두 만한진신영안(滿漢搢紳榮案)에 실렸으니 한번 훑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기에, 나는,

 

비록 영안(榮案)을 본단들 그들의 사업이야 알 수 있습니까.”

하니, 동야는,

 

우리네야 모두 초야(草野)에 묻힌 몸이어서 지금 조정에 누가 주공(周公)인지 소공(召公)인지, 또 누가 꿈에서, 또는 점쳐서 등장되었는지를 모르지요.”

한다. 나는,

 

심양성 중에 경술(經術)과 문장이 능통한 이가 몇이나 있을까요?”

하니, 배생은,

 

저는 녹록해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고, 전생은,

 

심양 서원(書院)에 서너너덧 사람 거인(擧人)이 있었는데 마침 과거보러 북경에 가고 없답니다.”

한다. 나는,

 

여기서 북경까지 1 5백 리 사이 연로에 이름난 사람과 높은 선비들이 응당 많겠죠. 그들 성명(姓名)을 알았으면 찾아보기에 편리할 것 같습니다.”

하니, 전생은

 

산해관(山海關) 밖은 아직도 변방이라 지기(地氣)가 거칠고 사람이 사나워서, 연로엔 모두 우리와 같은 장사꾼들뿐이니, 이름을 들 만한 이도 없거니와 역시 사람을 천거하기란 가장 어려운 노릇이어서, 기껏해야 제가 아는 사람을 들춤에 지나지 못하며,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랬다가 한번 높으신 눈으로 보시어 꼭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에겐 부질없는 말이 되고, 남들에겐 실망을 줄 뿐이리다. 이제 무슨 좋은 바람이 불어서 선생을 뵙고, 덕망을 우러러 촛불을 밝히고 마음껏 토론하니, 이를 어찌 꿈엔들 생각이나 했던 일이겠습니까. 이는 실로 하늘이 맺어 준 연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나서 한 사람 지기의 벗을 얻는다면 족히 한이 없을 것이니, 선생께서는 가시는 길에 스스로 좋은 사람을 만날 것인즉, 어찌 다른 사람을 미리 소개할 일이겠습니까.”

한다. 술이 몇 순배 돌 때에 비생이 먹을 갈고 종이를 펴면서,

 

목수환이 선생의 필적을 얻어서 간직하고자 합니다.”

하기에, 나는 곧 반향조가 김양허(金養虛)를 보낼 때 준 칠절(七絶) 중에서 한 수()를 써서 주었다. 동야는,

 

반향조란 귀국의 이름 높은 선비입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전당(錢塘) 사람으로 이름은 정균(廷筠)인데, 지금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있고 향조는 그의 자랍니다.”

했다. 배생은 또 한 공첩(空帖)을 내어서 글씨를 청한다. 짙은 먹 부드러운 붓끝에 자획이 썩 잘 되었다. 내 스스로도 이렇게 잘 쓰여질 줄은 몰랐고, 다른 사람들도 크게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한 잔 기울이고 한 장 써 내치고 하매 필태(筆態)가 마음대로 호방해진다. 밑에 몇 쪽은 진한 먹으로 고송(古松)과 괴석(怪石)을 그렸더니, 여러 사람들이 더욱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가면서 종이와 붓을 내놓고 삥 둘러 서서 써 달라고 조른다. 또 검은 용() 한 마리를 그리고 붓을 퉁겨서 짙은 구름과 소낙비를 그렸는데, 지느러미는 꼿꼿이 세워지고, 등비늘은 순서 없이 붙었으며, 발톱이 얼굴보다 더 크고, 코는 뿔보다 더 길게 그렸더니,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이하다 한다. 전생과 마영(馬鑅)이 초롱을 들고 먼저 돌아가려 하므로, 나는,

 

이야기가 한창 재미있는데 선생은 왜 먼저 가시렵니까.”

하고 물은즉, 선생은,

 

지레 돌아가고 싶진 않으나 다만 약속을 지키려니 하는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 문에 나서서 작별 드리오리다.”

한다. 나는 아까 그린 검은 용을 들고 촛불을 당겨 사르려 했다. 온목헌이 급히 일어나서 앗아다가 고이 접어서 품속에 간직한다. 배생은 껄껄 웃으면서,

 

관동(關東) 천 리에 큰 가뭄이 들까 두렵군.”

하기에, 나는,

 

어째서 가문단 말씀이오.”

하니, 배생은,

 

만일 이게 화룡(火龍)이 되어 간다면 누구든지 괴로움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을 걸요.”

한다. 모두 한 바탕 웃은 뒤에 배생은 다시,

 

용 중에도 어질고 나쁜 것이 있는데 화룡이 가장 독하답니다. 건륭(乾隆) 8년 계해(癸亥 1743) 3월에 산해관 밖 여양(閭陽) 벌판에 용 한 마리가 떨어져서 구름도 없이 우레하며, 비도 내리지 않으면서 번갯불이 번쩍이고, 해서관 밖 늦은 봄 일기가 별안간 6월 더위로 변하였답니다. 용이 있는 곳으로부터 백 리 안은 모두 펄펄 끓는 도가니 속같이 되어서 사람과 짐승이 목말라 죽은 게 수없이 많았고, 장사치와 나그네도 다니지 못했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밤낮 없이 발가숭이로 앉아도 부채를 손에서 놓지 못했답니다. 황제께서 분부를 내리시어 관내의 냉장고에서 얼음 수천 차를 내어 관 밖에 고루 나눠서 더위를 가시게 하였답니다. 용 가까이 있던 나무와 흙과 돌은 모두 콩 볶듯 되고 우물과 샘이 들끓었습니다. 용이 열흘 동안 누워 있더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치고 천둥이 일며 콩알 같은 비가 퍼붓고, 대릉하(大陵河)의 집들이 비 속에서 저절로 불이 나곤 하였으나, 다만 사람과 짐승에겐 아무런 해도 없었답니다. 용이 떠날 때엔 사람들이 나가 보니, 마침 몸을 일으켜서 하늘로 오르려 할 제 처음엔 무척 굼뜨게 머리를 쳐들고 꼬리를 끌되, 마치 타마(駝馬)가 일어선 모양인데 길이는 겨우 서너 길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그러다가 입으론 불을 뿜고 꼬리만 땅에 붙이고는 한 번 몸을 굼틀하매 비늘마다 번개가 번쩍 일면서 우레 소리가 나고 공중에서 빗발이 쏟아지더니, 이윽고 몸을 묵은 버드나무 위에 걸치자, 머리로부터 꼬리에 이르기까지 여남은 길이나 되며, 소낙비가 강물을 뒤엎는 듯 퍼붓더니 이내 멎었답니다. 그제야 하늘을 쳐다본즉, 그 날랜 품이 동쪽 구름 사이에 뿔이 나타나고 서쪽 구름 사이엔 발톱이 드러나는데, 뿔과 발톱 사이가 몇 리나 되더랍니다. 용이 오른 뒤엔 날씨가 청명하여 도로 삼월의 천기가 되고, 용이 누웠던 자리엔 몇 길이나 되는 맑은 못이 파이고, 못 가에 있던 나무와 돌은 모두 타버리고 반쯤만 남았으며, 마소들은 털과 뼈가 모두 타서 녹아버렸고, 크고 작은 물고기 죽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그 냄새에 사람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답니다. 특히 이상한 것은 용이 걸렸던 버드나무는 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합니다. 그 해에 관동의 일대에 큰 가뭄이 들어서 9월이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용이 간다면 또 그런 변이 생길까 저어하는 바입니다.”

하자, 일좌가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나는 잔에 술을 부어 죽 들이키고 나서,

 

이 이야기에 아주 술맛이 도는군요.”

하니, 여럿이,

 

옳습니다. 이번엔 우리 각기 한 잔씩 돌려서 박공의 기쁨을 도웁시다.”

한다. 나는,

 

여러분이 그 용의 이름을 아십니까?”

한즉, 혹은 응룡(應龍)이라 하고, 또는 한발(旱魃)이라 한다. 나는,

 

아니에요. 그 이름은 강철(罡鐵)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강철이 지난 곳엔 가을도 봄이 된다 하니, 이는 가물어 흉년이 짐을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다 잘 이룩되지 않음을 보고는 강철의 가을이라 합니다그려.”

하였더니, 배생이

 

그 용 이름이 참 기이하구려. 내가 난 때가 바로 그 해이니, 이는 곧 강철의 가을이라 어찌 가난치 않고야 견디겠소.”

하고, 그는 다시 긴 목소리로,

 

강처(罡處).”

하기에, 나는,

 

아니오, 강철.”

하고, 다시 일러주니, 배생은 또,

 

강천(罡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이 아니요, 도철(饕餮)이란 철()과 음이 같은 철()이어요.”

하니, 동야가 크게 웃으며 이내 커다란 소리로,

 

강청(罡靑).”

하여, 모두들 허리를 잡고 웃었다. 대개 중국 사람들의 발음엔 갈()() 등의 리을 받침이 잘 궁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분은 모두 오()()에 살고 계시면서 이렇게 멀리 장사와서 해를 거듭 바꾸시면 고향 생각이 간절치 않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오복은,

 

간절타 뿐입니까.”

하고, 동야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심신이 산란해집니다. 천애(天涯)지각(地角)과 같은 먼 곳에 와서 사소한 이문을 다투다 보니, 연만하신 어머니께서는 부질없이 해저문 여문(閭門)에 기대어 나를 기다리시고, 젊은 아내는 침방을 홀로 지키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편지마저 끊어지고, 꾀꼬리 소리엔 꿈 역시 이르지 않으니, 어찌 사람으로서 머리가 세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달 밝고 바람 맑으며, 잎 지고 꽃 피는 때면 하염없이 간장만 타니 이를 그 어이하오리까.”

한다. 나는,

 

그렇다면 진작 고향에 돌아가서 몸소 밭을 갈아 우러러 어버이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거느릴 계획을 세우시지 않고, 오로지 이렇게 하찮은 이문을 좇아서 멀리 고장을 떠나셨나요. 설사 이리하여 재산이 의돈(猗頓)과 겨루고 이름이 도주(陶朱)와 같이 된단들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까.”

하니, 동야는,

 

그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도 더러는 반딧불을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송곳으로 정강이를 찌르면서 글 공부하며, 아침에 나물 밥, 저녁엔 소금 찬으로 가난을 견디는 이가 많습니다. 그러한 정성을 하늘이 가엾이 여기셨음인지 때로 비록 하찮은 벼슬을 얻어 하는 일이 있사오나, 만 리 타향에 일터를 찾으려니 고향을 떠나 사는 건 마찬가지지요. 혹시 친상을 당하든지 파면을 당하든지 한다면 고생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또 관직을 가진 자는 마땅히 그 일터에서 죽어야 할 것이며, 혹시 잘못이 있을 때엔 장물(贓物)을 도로 토해내야 할뿐더러 세업(世業)마저 기울이게 될 것이니, 그때에야 비록 황견(黃犬)의 탄식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희들은 배운 것이 어설프니 벼슬길도 가망 없고, 그렇다고 해서 피땀 흘리며 공장이 노릇으로 일생을 보낼 기술도 없거니와, 쌀 한 알 얻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하는 농업으로 한 평생을 지낸댔자, 이는 나서 늙고 병들어 죽을 때까지 불과 좁은 고장을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한 채, 마치 여름 벌레가 겨울엔 나오지 못하듯이 이 세상을 마칠 터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하루 빨리 죽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이제 가게를 내고 물건을 사고 팔아서 생활을 삼는 건 남들은 비록 하류로 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나를 위하여 이에 하늘이 한 개의 극락계(極樂界)를 열고 땅이 이러한 쾌활림(快活林)을 점지하여, 도주공의 편주(扁舟)를 띄우고, 단목씨(端木氏)의 수레를 잇달아서 유유히 사방을 다니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어떤 넓은 대도시라도 뜻에 맞는 대로 그칠 것이니, 드높은 처마와 화려한 방 안에 몸과 마음이 한가롭고, 모진 추위나 가혹한 더위에도 방편을 따라 자유롭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버이께 위안되시고 처자들도 원망치 아니하여, 나아가나 물러서나 피차간 여유 있고 영화롭거나 욕되거나를 모두들 잊게 된즉, 저 농사와 사환의 두 길에 비하여 그 괴롭고 즐거움이 어떻다 하리까. 또 저희들은 특히 사귐에 있어서 모두 지성(至性)을 지녔답니다. 옛 글에도 세 사람이 같이 행하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될 이가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두 사람의 마음이 합한다면 굳은 쇠라도 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누리의 지락(至樂)이 이보다 더 지나칠 것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한평생에 만일 동무가 없다면 아무런 재미도 없을 것입니다. 저 입고 먹는 것밖에 모르는 위인들은 모두 이런 취미를 모른답니다. 세상에는 과연 그 면목이 얄밉고 말씨가 멋 없는 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들의 눈엔 옷가지 밥사발만 눈에 뜨일 뿐 동무를 사귀는 즐거움이라곤 조금도 지니지 않았답니다.”

한다. 나는,

 

중국의 백성들은 제각기 네 갈래의 분업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만큼 거기엔 귀천의 차별이 없을 터이며, 따라서 혼인이라든지 또는 사환에 있어서도 아무런 구애가 없겠지요.”

한즉, 동야는,

 

우리나라에선 벼슬아치들은 장사치나 장인바치와는 혼인함을 금하여 관기(官紀)를 깨끗이 하고, 아울러 도()를 높이고 이()를 낮게 보며, 근본을 숭상하고 지엽을 누르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네는 모두 대대로 장사하는 집이므로 사대부의 집과는 혼인이 없고, 돈과 쌀을 바쳐서 생원(生員)이나 얻어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역시 향공(鄕貢)을 거쳐서 거인(擧人)이 되지는 못한답니다.”

하매, 비생은,

 

그러나 그건 다만 고향에서만이지 타관에 나서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하고, 덧붙여 설명한다. 나는,

 

한 번 제생(諸生 생원과 같음)이 되기만 하면 사류(士類)로 행세함은 용허됩니까.”

하였더니, 이는,

 

그렇습니다. 제생 중에서도 늠생(廩生 국가 급비생(給費生))감생(監生)공생(貢生) 등의 여러 가지 명목이 있어서 이들은 모두 생원 중에서, 뽑혀 오르기 때문에 한 번만 생원에 통과되면 구족(九族)에게 빛이 나나, 그 대신 이웃들이 해를 입습니다. 왜냐하면 관권(官權)을 잡고 시골에서 무단(武斷)을 감행하는 게 곧 생원님네의 전문적인 기술이고, 소위 사류(士類) 중에도 대체로 세 층이 있으니, 상등은 벼슬아치가 되어 관록을 먹는 것이요, 중등은 학관(學館)을 열어서 생도를 모집하는 것이요, 하등은 남에게 창피를 무릅쓰고 빌붙고 꾸러 다니는 축들입니다. 이는 속담에 이른바 남에게 빌붙어 사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건만, 당장 살길이 막연하니 남에게 빌붙지 않을 수 없지요. 추위와 더위를 헤아리지 않고 줄곧 쏘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 말을 할까말까 주저하다가 그 야비한 정상이 먼저 나타납니다. 한때엔 고담준론만 하던 선비가 뜻밖에 세상이 미워하는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속담에 남에게 구하는 것은 나에게 스스로 구함만 같지 못하다고 했듯이, 장사를 하면 저절로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한다. 나는 말머리를 돌려서,

 

중국의 상정(觴政)엔 반드시 묘한 방법이 있을 터인데, 어제 오늘 이틀 밤을 여럿이 모여 마셔도 주령(酒令)을 내지 않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배갈부가,

 

이는 옛날의 상정을 말씀함이죠. 지금은 하찮은 운전수(運轉手)나 금고직(金庫直)이 따위도 다 아는 일이어서 그리 운치(韻致) 있는 일로 치질 않습니다.”

하니, 비생은 다시,

 

입옹소사(笠翁笑史)에 용자유(龍子猶)의 고려 중의 주령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는데, 어떤 사신이 고려에 갔을 때 고려에서는 한 중으로 하여금 그를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더니 중이 영()을 내되, 항우(項羽)와 장량(張良)이 서로 산() 하나를 놓고 다투는데, 항우는 우산(雨傘)이라 하고 장은 양산(凉傘)이라 했다 하니, 사신이 창졸간에 대답하기를, ‘허유(許由)와 조조(鼂錯)가 호로(胡盧) 하나를 두고 다투는데, 허유는 유호로(油胡盧)라 하고 조조는 초호로(醋胡盧)라 하였다.’ 하니, 그때 고려 중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하기에, 나는,

 

이 영은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을뿐더러 중의 이름도 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조금 눈을 붙였다가 문 밖에 사람 소리가 중얼거리기에 곧 일어나 사관에 돌아오니 아직 날이 채 밝지 않았다. 옷 벗고 다시 잠들어서 조반을 알릴 때 겨우 깨었다.

 

 

[C-001]상루필담(商樓筆談) : ‘다백운루본에는 상루야화(商樓夜話)라 하여 성경잡지에서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형님 : 곧 상사 박명원. 연암의 삼종형.

[D-002]오십독역(五十讀易) : 논어(論語), “쉰 살에 역경(易經)을 읽었다.” 하였다.

[D-003]무약단주오(無若丹朱傲) : 서경(書經) 단주처럼 거오한 자는 없다.” 했다. 단주는 요()의 아들 이름.

[D-004]() : 논어 ()는 능히 뭍에서 배를 끈다.” 했다. 오는 역사(力士)의 이름.

[D-005]망수행주(罔水行舟) : 물도 아닌 뭍에서 배를 가게 함을 이른 말.

[D-006]() : 사람 이름. 혹은 오가 착의 아들이라 하였다.

[D-007]하 태강(夏太康) : ()의 임금. 태강은 시호(諡號).

[D-008]만한진신영안(滿漢搢紳榮案) : 만인과 한인을 함께 실은 일종의 잠영록(簪纓錄).

[D-009]소공(召公) : 성명은 희석(姬奭). 주공과 함께 주초(周初)의 어진 재상. 소공은 봉호(封號).

[D-010]꿈에서 : 은 무정(殷武丁)이 꿈에 부열(傅說)을 만나고 초상을 그려 붙여서 그를 찾아 재상을 삼았다.

[D-011]점쳐서 : 주 문왕(周文王)은 점쳐서 여상(呂尙)을 얻어 스승을 삼았다.

[D-012]거인(擧人) : 지방에서 국가 고시에 합격하고 중앙 고시에 응할 자격을 지닌 선비.

[D-013]김양허(金養虛) : 김재행(金在行). 양허는 자. 그는 김상헌(金尙憲)의 오대손. 영조(英祖) 41년에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연행(燕行)을 하였다.

[D-014]약속 : 등사해 주기로 한 고동록(古董錄)을 베끼기 위함이었다.

[D-015]계해(癸亥) : ‘일재본에는 계사(癸巳)로 되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16]() : ‘일재본에는 명철(明哲)이란 철()로 되었다.

[D-017]의돈(猗頓) : 전국 때 노()의 유명한 부자. 돈은 이름이요, 의는 산동성 의씨(猗氏)라는 고을에서 살림을 일으켰으므로 붙였다.

[D-018]도주(陶朱) : 성명은 범려(范蠡). ()에 살 때에 주공(朱公)이 되었으며, 19년 만에 세 번이나 천금을 이룩하였고 그 자손이 더욱 돈을 늘려서 거만에 이르렀다.

[D-019]반딧불을 …… 하고 : ()의 가난한 학자 차윤(車胤)의 옛 일. 형설(螢雪)의 공()이 여기서 유래되었음.

[D-020]송곳으로 …… 찌르면서 : 육국(六國) 때 여섯 나라 재상을 겸임하던 소진(蘇秦)의 옛 일.

[D-021]황견(黃犬)의 탄식 : ()의 이사(李斯)가 그의 아들과 함께 형장으로 갈 때 그의 아들을 돌아보면서, “내 비록 너와 다시 황견을 몰고 동문을 나서 사냥을 하고자 한들 얻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D-022]쾌활림(快活林) : ()의 수도 교외에 있는 유명한 유원지의 이름.

[D-023]도주공의 …… 띄우고 : 범려가 절세의 가인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함께 오호(五湖)로 떠다녔다.

[D-024]단목씨(端木氏) …… 잇달아서 :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돈벌이를 잘하는 단목사(端木賜). 그의 자는 자공(子貢).

[D-025]세 사람 …… 있다 : 논어(論語)에 나온 말.

[D-026]두 사람의 …… 있다 : 역경(易經)에서 나온 말.

[D-027]향공(鄕貢) : 지방 출신의 과거 응시자.

[D-028]감생(監生) : 국립 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이때에는 아래 나오는 공생과 함께 일정한 월사금을 내고 관립 학교에 학적을 지니게 된 자.

[D-029]상정(觴政) : 주령(酒令)과 같다. 술을 마시는 좌석에서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내면 이에 맞추어 대구를 하여 승부를 보아 벌주를 먹이는 놀음.

[D-030]입옹소사(笠翁笑史) : 청의 유명한 희곡작가 이어(李漁)가 지은 서명(書名).

[D-031]장량(張良) : 한 고제(漢高帝) 유방(劉邦)을 도와서 천하를 얻게 한 책사.

[D-032]허유(許由) : ()가 그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았다는 은사.

[D-033]조조(鼂錯) : 한 경제(漢景帝)의 어진 신하.

[D-034]옷벗고 …… 깨었다 : ‘일재본에는 이 부분이 탈락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2일 무자(戊子)

 

 

보슬비 오다 곧 멎다.

심양에서 원당(願堂)까지 3, 탑원(塔院) 10, 방사촌(方士邨) 2, 장원교(壯元橋) 1, 영안교(永安橋) 14리였고, 길 쌓은 것이 영안교에서 비롯하여 쌍가자(雙家子)까지 5, 대방신(大方身) 10, 모두 45리다. 이곳에서 점심 먹고, 대방신에서 다시 마도교(磨刀橋)까지 5, 변성(邊城) 10, 흥륭점(興隆店) 12, 고가자(孤家子) 13, 모두 40리다. 이날 85리를 갔다. 고가자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 일찍 심양을 떠날 제 가상루에 들르니, 배관이 홀로 나와 맞고 온백고는 마침 잠이 깊이 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배를 작별하고 예속재에 이르니, 전사가와 비치가 나와 맞는다. 전생이 두 봉() 글을 내어서 한 봉은 떼어 내게 뵈는데 곧 내게 주는 고동(古董)의 명목을 기록한 것이었고, 또 한 봉은 겉에 붉은 쪽지로 허태사 태촌선생 수계(許太史台邨先生手啓)’라 썼다. 전생은 다시,

 

이는 저의 성심에서 나온 것이요, 아무런 객기(客氣) 없는 말씀이옵니다. 조선관(朝鮮館 조선 사신이 드는 객관)과 서길사관(庶吉士館)은 바로 문이 나란히 있사오니, 선생이 북경에 도착하시거든 이 편지를 전하시오. 허태사는 그 의표(儀表)가 속되지 않고 게다가 문장이 아름다운즉 반드시 선생을 잘 대우하리다. 편지 중에도 선생의 존함(尊啣)과 자함(字啣)을 함께 적었으니 결코 헛걸음이 되지 않으리다.”

하고 설명한다. 나는,

 

여러분을 면면이 만나서 하직하지 못하니 매우 서운합니다. 선생이 이 뜻을 잘 전해 주시오.”

하니, 전생이 머리를 끄덕인다. 내가 곧 몸을 일으키려 하는 즈음에 전생은,

 

목수환이 옵니다.”

한다. 목춘이 한 청년을 데리고 왔는데, 청년은 손에 포도 한 광주리를 들었다. 대체 청년은 나를 만나기 위하여 예물로 포도를 가지고 온 모양이다. 그는 나를 향하여 공손히 읍한 뒤에 앞으로 다가와서 내 손을 잡는데 구면이나 다름없이 익숙해 한다. 그러나 길이 바빠서 이내 손을 들어 작별하고 점방을 떠나 말을 타는데, 그는 말 머리에 이르러 두 손으로 포도 광주리를 받쳐 들었다. 나는 말 위에서 그 한 송이를 집고 다시 손을 들어 치사하고 떠났다. 얼마 가다 돌아본즉 여러 사람이 아직도 점방 앞에서 내 가는 양을 바라보고 섰다. 길이 바빠서 미처 그 청년의 성명을 묻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연거푸 이틀 밤을 잠을 설치었으므로 해 뜬 뒤에 고단함이 더욱 심하였다. 창대로 하여금 굴레를 놓고 장복과 함께 이쪽저쪽에서 부축하게 하고 가면서 한숨 달게 잤더니, 정신이 비로소 맑아지고 주위의 물색이 한층 더 새롭다. 장복은,

 

아까 몽고 사람이 낙타 두 마리를 끌고 지나가더이다.”

하기에, 나는,

 

, 내게 알리지 않았어.”

하고 꾸짖었더니, 창대는,

 

그때 코 고는 소리가 천둥치듯하와 불렀사오나 아니 깨시는 걸 어찌하오리까. 쇤네들도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무언지는 똑똑히 모르오나 생각에 낙타인가 싶습니다.”

한다. 나는,

 

그 꼴이 어떻게 생겼더냐?”

하고 다시 물었더니, 창대는,

 

정말 형언하기 어렵습디다. 말인가 하면 굽이 두 쪽일뿐더러 꼬리가 소처럼 생겼고, 소인가 하면 머리에 뿔이 없을뿐더러 얼굴이 양같이 생겼고, 양인가 하면 털이 꼬불꼬불하지 않을뿐더러 등엔 두 뫼봉우리가 솟았으며, 게다가 머리를 쳐들면 거위 같기도 하려니와, 눈을 떴다는 것이 청맹과니와 같사옵더이다.”

한다. 나는,

 

그게 과연 낙탄가보다. 그 크기가 얼마만하더냐?”

하니, 그는 한 길이나 되는 허물어진 담을 가리키며,

 

높이가 저만하더이다.”

한다. 나는,

 

이 담엘랑 처음 보는 물건이 있거든 비록 졸 때거나 식사할 때거나 반드시 알려야 한다.”

하고, 타일렀다.

지는 해가 뉘엿뉘엿 말 머리에 감돈다. 강가에 나귀 떼가 수백 마리 물을 먹고 있다. 한 노파가 손에 수숫대를 들고 나귀를 모는데, 일곱여덟 살 된 어린아이가 노파를 따라 다닌다. 그는 시골 마나님으로 몸에는 푸른 색 짧은 치마를 입고 발엔 검은 신을 신었는데, 머리가 모두 벗어져서 뻔질뻔질한 게 마치 바가지처럼 빛난다. 게다가 또 정수리 밑에 조그마하게 낭자를 틀고 겨우 한 치길이밖에 안 되는 곳에 온갖 꽃을 수두룩이 꽂았다. 장복을 보고 조선담배를 달라 한다. 나도,

 

저 나귀가 모두 너의 한 집에서 기르는 것이냐?”

하고 물었더니, 노파는 머리를 끄덕이고 가버린다. 그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D-001]서길사관(庶吉士館) : 한림원에 속한 문인들을 모아 둔 곳. 서길사는 한림의 후보격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고동록(古董錄)

 

 

문왕정(文王鼎)

소보정(召父鼎)

아호부정(亞虎父鼎)

이는 모두 상()() 시대의 유물로서 상상(上賞)에 해당됩니다.

주왕백정(周王伯鼎)

단도정(單徒鼎)

주풍정(周豐鼎)

이는 모두 당()의 천보(天寶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연간(年間)에 국()에서 만든 것인데, 몸집이 작아서 서재(書齋)의 향불 피우기에 가장 알맞습니다.

상부을정(商父乙鼎)

부이정(父已鼎)

부계정(父癸鼎)

상자정(商子鼎)

병중정(秉仲鼎)

도철정(饕餮鼎)

이부정(李婦鼎)

상어정(商魚鼎)

주익정(周益鼎)

상을모정(商乙毛鼎)

부갑정(父甲鼎)

이는 모두 원나라 때 강낭자(姜娘子)의 옛것을 모방해서 만든 것입니다.

주대숙정(周大叔鼎)

주련정(周䜌鼎)

이는 모두 서실(書室)의 청공(淸供)에 들 만합니다. 대개 솥이나 화로의 귀가 고리로 된 것, 아가리가 헤벌어진 것, 배가 민숭하게 내민 것, 밑이 뾰족한 것 등은 다 하품이어서 볼 것이 못 되오니 아예 사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사망대(周師望敦)

시대(兕敦)

익대(翼敦)

상모을력(商母乙鬲)

주멸오력(周蔑敖鬲)

상호수이(商虎首彝)

주신이(周辛彝)

이는 모두 박고도(博古圖) 중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근일에 새로 나온 서청고감(西淸古監)엔 도식(圖式)이 더욱 정밀하니, 먼저 서사(書肆) 중에서 서청고감을 찾아서 그릇 이름을 보고 그림을 살피신 뒤에, 그 모양이 단아한 것을 마음에 골라 두신 다음, 창중(廠中)에나 혹은 융복사(隆福寺) 또는 보국사(報國寺)의 장날에 가서 찾으시면 모두 틀림없으리다.

()

()

()

이 세 가지는 모두 술 그릇이지만 역시 꽃을 꽂아서 평상시의 맑은 감상에 이바지될 것입니다.

대체로 관요(官窰)는 그 법식이나 품격이 가요(哥窰)와 다름없으나, 빛깔은 분청(粉靑) 혹은 난백(卵白)을 취하였으되 맑고도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것이 상품이고, 그 다음이 담백색(澹白色)이고, 다만 유회색(油灰色)은 사지 마십시오. 무늬는 얼음장이 깨진 것처럼 된 것, 또는 뱀장어 피무늬같이 된 것이 상품이고, 자디잔 무늬는 그 중 하품이니 취하지 마십시오. 그 만드는 법식 역시 박고도(博古圖) 중에서 본받은 것이 많습니다. 다만 정()()()()()() 등의 어느 것을 막론하고, 특히 키 작고 배부른 것은 속되고 추악하여 볼품없으니 결코 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전사가여연암서(田仕可與燕巖書)

 

제가 지난해 첫 겨울에 북경까지 갔다가 2월에 돌아왔습니다. 북경에 있을 때 날마다 창중(廠中)에 가보았는데, 눈에 띄는 게 모두 보배롭고 기이하여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그때 심경은 마치 하백(河伯 물귀신)이 자기 얼굴의 누추함을 앎과 같이, 싸움을 시작도 않고서 벌써 항복했답니다. 다만 저 금창(金閶소주(蘇州)의 별명) 지방에 살고 있는 경박한 무리들이 마치 이와 벼룩처럼 기고 뛰어서, 창중(廠中)에 들끓으면서 값을 함부로 올려 불러서 비단 열곱이 넘게 만들뿐더러, 온갖 감언 이설로써 사람의 굳은 간장을 녹일 듯 덤빕디다.

저는 그 길이 처음인지라 하도 놀랍고 미혹하여, 삼관(三官 )이 아찔하고 오장(五膓)이 뒤집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조금도 얻은 바 없이 그저 어리둥절하다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이 일을 생각하면 문득 머리카락이 솟는 듯하니 이는 어인 까닭일까요. 제가 시골에서 생장하여 어리석고 겸허함이 지방성을 그대로 지닌지라, 연석(燕石)을 보배로 여기고 어목(魚目)을 진주로 그릇 앎은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만 분한 것은 그들의 웃음감이 될 만큼 많은 값을 치렀으니, 이는 이른바 도척(盜跖)의 배를 불린다는 셈이 된 것입니다.

이제 선생이 북경으로 가시는 마당에 제가 잊지 못하고 이런 구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실로 선생과 같은 외국의 손님으로 후일 본국에 돌아가시어 중국에 전혀 옳은 사람이 없더라고 하실까 두려워함입니다. 아울러 충심껏 말씀드릴 것은 제가 옛 서화에 대해서는 감상한 것도 아직 넓지 못할뿐더러 사랑하는 버릇도 깊지 못한 것이 함부로 말씀 드리긴 어렵사오나, 이들은 대체로 전현들의 수적은 아닐지라도 역시 후세의 명필들이 잘 본뜬 것이어서, 비록 노성(老成)한 티가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형(典刑)을 엿볼 수 있으며, ( 미불(米芾))( 채경(蔡京))(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은 모두 그 이름을 상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이 전날에 저의 보잘것없음을 헤아리지 아니하시고 아름다운 사람을 구하시는 뜻을 말씀하셨으나, 연로 중에서 누구와 이야기를 붙이는 일도 너무 창졸간이어서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할 것이요, 또한 일부러 길을 돌아가면서 일일이 찾아봄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에 허태사 조당(兆黨)과 며칠 동안 사귀어 지기의 벗으로 맹세하였는데, 그의 자는 태촌(台邨)이며 호북(湖北) 사람입니다.

여기 그에게 부치는 편지 한 통이 있으니, 선생이 북경에 닿으시는 날 곧 한림원(翰林院)에 가셔서 이 허태촌을 찾아서 제 이름을 대시고 이 글을 전하십시오.

그가 만일 선생과 저의 사이가 이처럼 친밀함을 알게 되면 반드시 푸대접하지 아니하오리다.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헌걸하오니 한번만 보시면 문득 뜻이 맞으실 것이오며, 결코 제가 그릇 추천함이 아님을 아시리다. 아울러 박공(朴公) 노야(老爺)께옵서 양해하여 주시길 바라옵니다.

전사가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사뢰옵니다.

 

[C-001]고동록(古董錄) : ‘백운루본에는 성경잡지에서 각립시켰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1]이는 모두 …… 해당됩니다 : ‘박영철본에는, 이 부분이 소주(小註)로 되었는데, 그릇된 것이다.

[D-002]융복사(隆福寺) 또는 보국사(報國寺) : 북경 동사패루(東四牌樓) 융복사가(隆福寺街)에 있다. 보국사와 함께 골동품들을 많이 매매한다. 보국사는 호국사(護國寺)라고도 함. 서성(西城) 호국사가(護國寺街)에 있다. ‘일재본에는 홍인사(弘仁寺)로 되었다.

[D-003]관요(官窰) : () 휘종(徽宗) 정화(政和) 연간에 관에서 직접 구워 낸 자기.

[D-004]가요(哥窰) : ()의 처주(處州)에 살고 있는 장씨(張氏) 형제가 각기 자기를 구웠는데, 형이 구운 것이 아우의 것보다 약간 더 희고 깨진 무늬가 많아서 이를 가요라 하였다.

[D-005]전사가여연암서(田仕可與燕巖書) : 이 편지는 다만 주설루본(朱雪樓本)’에 있는 것을 여기에 추록하였다.

[D-006]연석(燕石) …… 여기고 :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말. ()의 어떤 어리석은 이가 기와 쪽과 다름없는 연석을 보배로 그릇 알고 깊이 간직하여 남의 조소를 샀다.

[D-007]어목(魚目) …… 그릇 앎 :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말. 고기 눈과 구슬과의 혼동을 이른 말.

[D-008]도척(盜跖) : 전국 때 노()의 대도(大盜). ‘는 도적이요, ‘은 그의 이름.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3일 기축(己丑)

 

 

날은 맑으나 바람이 심하다.

고가자(孤家子)에서 새벽에 떠나 거류하(巨流河)까지 8리였으니, 거류하는 주류하(周流河)라고도 한다. 거기서 거류하보(巨流河堡) 7, 필점자(泌店子) 3, 오도하(五渡河) 2, 사방대(四方臺) 5, 곽가둔(郭家屯) 3, 신민둔(新民屯) 3, 소황기보(小黃旗堡) 4리를 와서 이곳에서 점심 먹었다. 모두 35리를 갔다. 소황기보에서 대황기보(大黃旗堡)까지 8, 유하구(柳河溝) 12, 석사자(石獅子) 12, 영방(營房) 10, 백기보(白旗堡) 5, 모두 47리다. 이날에는 도합 82리를 가서 백기보에서 묵었다.

이날 새벽에 일어나 아침 소세를 마치니 몹시 고단하다. 달이 지새니 온 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모두 깜박거리고 마을 닭이 서로 홰를 친다. 몇 리를 못 가서 안개가 뽀얗게 끼어 큰 별이 삽시에 수은 바다를 이루었다. 한 떼의 의주(義州) 장사꾼들이 서로 지껄이며 지나는데, 그 소리가 몽롱하여 마치 꿈속에 기이한 글을 읽는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으나 그 영검스러운 경지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조금 뒤에 하늘 빛이 훤해지며 길에 늘어선 수많은 버드나무에서 매미가 한꺼번에 울기 시작한다. 저들이 그처럼 알리지 아니한들 이미 낮 더위가 몹시 뜨거운 줄을 모르랴. 점차 들에 가득했던 안개가 걷히고 먼 마을 사당 앞에 세운 깃발이 마치 돛대처럼 보인다. 동쪽 하늘을 돌아보니 불빛 구름이 용솟음치며 붉은 불덩이가 옥수수 밭 저편에 솟을 듯 말 듯 천천히 온 요동벌에 꽉 차게 떠오른다. 땅 위의 오가는 말이며, 수레며, 나무며, 집이며, 털끝같이 보이는 것이 불덩이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신민둔의 시가나 점포가 요동보다 못지 않게 번화하다. 한 전당포(典當舖)에 들어가니 뜰 가득히 시렁 위에 포도 덩굴의 그늘이 영롱한데, 뜰 가운데엔 여러 가지 이상스러운 돌을 포개어 한 개의 가산(假山)이 이룩되었고, 그 산 앞에 높이 한 길이나 되는 항아리를 놓아서 연꽃 너덧 포기가 피어 있고, 땅을 파서 한 칸 나무통을 묻고 그 속에 뜸부기 한 쌍을 기른다. 산에는 종려추해당안석류(安石榴) 등 화분 여러 개가 놓여 있고, 휘장 밑엔 의자를 나란히 놓고 우람한 사나이 대여섯이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일어나 읍하며, 앉기를 청하고 시원한 냉차 한 잔을 권한다. 점포 주인이 유금색(乳金色)으로 이룡(螭龍) 두 마리를 곱게 그린 붉은 종이 두 장을 끄내며 주련(柱聯)을 써달라 한다. 나는 곧,

 

쌍 목욕 원앙새는 나는 비단이요 / 鴛鴦對浴能飛繡

갓 피는 연꽃송이 말없는 신선일세 / 菡蓞初開不語仙

라고 쓰니, 보던 이들이 모두 필법이 아름답다고 칭찬이다. 주인은,

 

영감은 잠깐만 지체하셔요. 제가 다시 좋은 종이를 가져 오겠습니다.”

하고 일어나더니, 조금 뒤에 왼손에 종이를 들고 오른손엔 진한 먹 한 종지를 받쳐들고 오더니, 칼로 백로지(白鷺紙) 한 장을 끊어서 석 자 길이로 만들어 문 위에 붙일 만한 좋은 액자(額字)를 써 달라 한다. 내가 길을 오며 보니, 점포 문설주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네 글자가 써 붙여 있는 것이 가끔 눈에 띄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장사치들이 자기네들의 애초에 지닌 심지(心地)가 깨끗하기는 가을 서릿발 같고, 게다가 또 희디흰 눈빛보다도 더 밝음을 스스로 나타내기 위함이 아닐까.”

또 문득 생각하기를,

 

며칠 전에 난리보를 지날 때 어떤 점포 문설주에 붙인 이 넉자의 필법이 심히 기묘하기에, 내 한참 말을 멈추고 감상해 본즉, 상설(霜雪)이란 두 글자는 틀림없이 미해악체(米海嶽體)거니 하였더니, 이제 그 체대로 한번 써봄직도 하구나.’

하고, 먼저 붓끝을 먹물에 담가 붓을 낮추었다 높였다 하니 먹빛은 붉은 기운이 돌 듯, 짙고 연함이 골고루 퍼진 다음 종이를 펴고 왼쪽에서 오른편으로 쓰기 시작하여 ()’ 자가 이룩되었다. 이는 비록 미원장(米元章)의 것에야 비길 수 없겠지만 어찌 동 태사(董太史)만이야 못하랴 싶게 잘된 셈이다.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그들은 일제히,

 

글씨가 퍽이나 잘 되었습니다.”

하고 감탄한다. 다음 ()’ 자를 쓰니 더러는,

 

잘 되었다.”

하고, 칭찬하는 이도 있으나 다만 주인의 기색이 적이 달라지고 아까 ()’ 자 쓸 때처럼 절규(絶叫)하지 않는다. 나는 속으로,

 

정말 () 자야 늘 써본 적도 없어서 손에 익지 못하여 위  자는 너무 빽빽하게 썼고 아래 () 자는 지나치게 길어서, 그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붓끝에서 짙은 먹물이 () 자의 왼편에 잘못 떨어져서 점차 번져 마치 얼룩진 표범처럼 되었으니, 이게 아마 그 자가 언짢게 생각하는 것이리라.’

하고, 짐짓 단숨에 잇달아서 ()’()’의 두 자를 쓰고 붓을 던지고 한번 주욱 읽어본즉, 큼직한 기상새설(欺霜賽雪)’ 네 글자가 틀림없다. 그런데 주인은,

 

이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 없어요.”

하며, 머리를 저을 뿐이다. 나는,

 

그저 두고 보시오.”

하고, 몸을 일으켜 나오면서,

 

이런 궁벽한 곳의 장사치가 제 어찌 전날 심양 사람들만 할까. 저깐 놈이 글이 잘되고 못된 것은 어찌 안단 말야.’

하고, 혼자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날 해가 뜬 뒤에 바람이 온 누리를 뒤덮을 듯이 불어치더니, 오후에는 멎고 공중에 한 점 바람기도 없어 더위가 더욱 찌는 듯하다.

영안교(永安橋)에서부터 아름드리 통나무를 엮어서 다리를 놓았는데, 다리의 높이가 두세 길이가 되고, 넓이가 다섯 길은 되며, 양쪽의 나무 끝이 가지런하여 마치 한 칼로 밀어 놓은 듯싶다. 다리 밑 도랑엔 푸른 물이 끝없이 흐르고 진흙 벌이 윤기난다. 만일 이를 개간해서 논을 만든다면 해마다 몇만 섬의 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이르기를,

 

강희황제가 일찍이 경직도(耕織圖)와 농정(農政)에 대한 모든 글(농정전서(農政全書))을 지었으니, 지금 황제도 역시 노농가(老農家)의 자제이신만큼 이 산해관 밖의 푸른 듯 검은 기름진 땅이 상상전(上上田)이 될 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저 관 밖의 땅은 실로 자기네들이 일어난 고장이라, 벼가 기름지고 향기로우며 이밥이 차져서 백성이 혀에 감기도록 늘 먹어 버릇들인다면, 힘줄이 풀리고 뼈가 연해져서 용맹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 차라리 수수떡과 산벼 밥을 늘상 먹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림을 잘 참고 혈기를 돋우어 구복(口腹)의 사치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함일 것이다. 비록 천 리의 기름진 땅을 버릴지언정 그들로 하여금 메마른 땅에 정의를 위해서 사는 백성이 되게 함이니, 이게 그의 더욱 깊은 생각일 것이다.”

한다.

길에서 보니 2리나 3리마다 시골 집들이 끊어졌다 또 이어지고, 수레와 말이 수없이 쏘다니고, 좌우의 점포들도 모두 볼 만하여 봉성에서 여기까지 비록 사치하고 검박한 것은 혹 다른 점도 없지 않겠지만, 그 규모는 모두 한결같을 뿐이다. 때로 휘딱휘딱 눈에 띄는 것이 실로 놀랄 만한 것, 기뻐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건만 이루 다 적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물어 먼 곳에 자욱이 번지는 연기를 바라보고 말을 채찍질하여 참()으로 달리는데 오이밭에서 한 늙은이가 나와 말 앞에 엎드려서 서너댓 칸 되는 초가집을 가리키면서,

 

이 늙은 게 혼자 길가에서 참외를 팔아서 오늘 내일 지내는데, 아까 당신네 조선 사람 40~50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잠시 쉬면서 처음엔 값을 내고 참외를 사 자시더니, 떠날 때 참외를 한 개씩 손에 쥐고 소리를 지르면서 달아나버렸습니다.”

한다. 나는,

 

그럼, 왜 그 우두머리 어른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는고.”

하니, 늙은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리하였더니 그 어른이 귀먹고 벙어린 척하시는데 나 혼자 어찌 그 40~50명 힘센 장정을 당하오리까. 이제도 쫓아가니까 한 사람이 가는 길을 막으며 참외로 냅다 저의 면상을 갈기니, 눈에선 별안간 번갯불이 일고 아직도 참외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하고, 결국은 청심환을 달라고 조르기에 없다고 했더니, 그는 창대의 허리를 꼭 껴안고 참외를 팔아달라고 떼를 쓰고는 참외 다섯 개를 앞에 갖다 놓는다. 나는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라 한 개를 벗겨서 먹어본즉, 향기와 단맛이 비상하므로 장복더러 남은 네 개를 마저 사가지고 가서 밤에 먹기로 하고, 그들에게도 각기 두 개씩을 먹였다. 모두 아홉 개인데, 늙은이가 80()을 달라고 떼를 쓴다. 장복이 50문을 주니 골을 내며 받지 않는다. 창대와 둘이 주머니를 털어 세어본즉 모두 71문이라, 주기로 하고, 나는 먼저 말에 오르고 장복을 시켜 주게 하였더니, 장복이 주머니를 털어 뵈자 그제야 가만 있다. 그는 애초에 눈물을 흘려서 가련한 빛을 보인 다음에, 억지로 참외 아홉 개를 팔고서 1백 문에 가까운 비싼 값을 내라고 떼를 쓰니 심히 통탄할 만한 일이며, 그보다도 우리나라 하정배들이 길에서 못되게 구는 것이 더욱 한스러운 노릇이다.

어두워서야 참에 이르렀다. 참외를 내어 청여(淸如 내원의 자)계함 들에게 주어 저녁 뒤 입가심으로 먹게 하고, 길에서 하인들이 참외를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한즉, 여러 마두들은,

 

도무지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 외딴집 오이 파는 늙은 것이 본시 간교하기 짝이 없어, 서방님이 홀로 떨어져 오시니까 거짓말을 꾸며 가지고 짐짓 가엾은 꼴상을 지어서 청심환을 얻으려던 것이죠.”

한다.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닫고, 그 참외 사던 일을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다. 대체 그 갑작스러운 눈물은 어디서 솟았을까. 시대(時大)의 말이,

 

그 놈은 바로 한인(漢人)일 겝니다. 만인(滿人)은 실로 그다지 요악한 짓은 아니합니다.”

한다.

 

 

[D-001]기상새설(欺霜賽雪) : 희기가 서리를 능가하여, 백설을 걸고 내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D-002]미해악체(米海嶽體) : 곧 미불(米芾)의 글씨체. 해악은 호, 원장(元章)은 자임.

[D-003]동 태사(董太史) : 동기창(董其昌). 태사는 그의 벼슬.

[D-004]경직도(耕織圖) : 본시 남송의 누숙(樓璹)이 경도(耕圖) 21과 직도(織圖) 24를 그려서 고종(高宗)에게 바쳤던 것을, () 성조 때에 초병정(焦秉貞)냉매(冷枚)진매(陳枚) 등에게 명하여 각기 한 책씩을 짓게 하였다. 특히 초병정이 그린 경도와 직도 각기 23으로 된 것이 아름다웠으므로, 판각하여 군신(羣臣)에게 나누어 주었다.

[D-005]시대(時大) : ‘일재본에는, 창대(昌大)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14일 경인(庚寅)

 

 

개다.

백기보(白旗堡)에서 소백기보(小白旗堡)까지 12, 평방(平房) 6, 일반랍문(一半拉門) 12리인데, 일반랍문은 일판문(一板門)이라고도 한다. 거기서 또 곡산둔(靠山屯) 8, 이도정(二道井) 12, 모두 50리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도정에서 은적사(隱寂寺)까지 8, 고가포(古家舖) 22리다. 여기서 다리[梁路]가 다하다. 다시 고정자(古井子) 1, 십강자(十扛子) 9, 연대(煙臺) 6, 소흑산(小黑山) 4, 모두 5리다. 이날 1백 리를 갔다. 소흑산에서 묵다.

이날은 마침 말복(末伏)이라 늦더위가 더욱 심할 것이고 또 참()이 멀어서 일행이 새벽에 떠났다. 나와 정 비장변 주부가 먼저 떠났다. 길에서 어제 해돋이 광경을 이야기했더니, 두 사람이 꼭 한번 구경하고자 하였으나 막상 해가 뜰 무렵엔 동녘 하늘에 구름과 안개가 개지 아니하여 광경이 어제보다 훨씬 못하다. 해가 이미 한 길이나 땅 위에 솟았을 때 그 밑의 구름이 여러 가지 금빛 용이 되어, 뛰고 솟고 꾸불거리고, 뒤눕는 듯, 신출귀몰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데, 해는 다만 천천히 높은 공중으로 향해 오른다.

요양에서부터 조그마한 성과 못을 많이 거쳐 왔으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이른바, ‘3리마다 성이요 5리마다 곽()이라.’ 함은, 반드시 모두 군이나 읍의 청소(廳所)가 있음이 아니고, 그저 시골의 취락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으나, 그 제도는 큰 성과 다름이 없다.

일판문과 이도정은 땅이 움푹 파인 곳이어서 비가 조금만 와도 시궁창이 되고, 봄에 얼음 풀릴 무렵에는 잘못 시궁창에 빠지면, 사람도 말도 삽시에 보이지 않게 되어 지척에 있어도 구출하기 어려우므로, 작년 봄에 산서(山西) 장사꾼 20여 명이 모두 건장한 나귀를 타고 오다 일판문에 이르러 한꺼번에 빠졌으며, 우리나라 마부 역시 두 사람이 빠져버렸다 한다. 그리고 당서에 이르기를,

 

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80리 진펄에 수레가 통할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양사도(楊師道 당 고조(唐高祖)의 사위) 등이 군정 1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쌓고 수레를 잇달아 다리를 놓을 제 태종이 말 위에서 손수 나무를 날라서 일을 도왔고, 때마침 눈보라가 심해서 횃불을 밝히고 건넜다.”

하였으니, 발착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 진펄 천 리에 흙이 떡가루처럼 보드라워서 비를 맞으면 반죽이 되어 마치 엿 녹은 것처럼 되어, 자칫하면 사람의 허리와 무릎까지 빠지고 겨우 한 다리를 빼면 또 한 다리가 더 깊이 빠지게 된다. 이에 만일 발을 빼려고 애쓰지 않으면 땅 속에서 마치 무엇이 있어서 빨아들이는 듯이 온 몸이 묻혀서 흔적도 없어지게 된다. 지금은 청()에서 자주 성경으로 거둥하므로, 영안교에서부터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들어서 진펄을 막되, 고가포(古家舖) 밑에 이르러서 비로소 그치는데, 2백여 리 사이에 한결같이 뻗쳤으니 이는 비단 물력(物力)이 그처럼 굉장할뿐더러, 그 나무끝이 한 군데도 들쭉날쭉한 것이 없이 2백 리 사이에 두 쪽이 마치 한 먹줄로 퉁긴 듯이 되었으니, 그 일솜씨의 정미로움을 이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민간에서 항용 쓰는 물건들이라도 이를 본받아서 그 규모가 대체로 같으니, 이는 덕보(德保 홍대용(洪大容)의 자)가 이른바 중국의 심법(心法)을 우리로선 당하지 못할 것이라 한 것이 바로 이런 일을 말한 것이리라. 이 다리는 3년 만에 한 번씩 고친다 한다. 그리고 당서의 발착수는 아마 일판문이도정의 사이를 말한 것인 듯싶다.

아골관(鴉鶻關)에서부터 가끔 마을 가운데 높다랗게 흰 패루(牌樓)를 세운 것이 보이는데 이는 초상난 집들이다. 이는 삿자리로 지었는데 기왓골이나 치문(鴟吻)이 여느 성조나 조금도 다름없으며, 높이가 너덧 길이고 그 집 문앞에서 열 걸음쯤 떨어져 세웠는데, 그 밑에는 악공들이 늘어앉아서 풍류를 아뢴다. 바리 한 쌍, 피리 한 쌍, 쇄납(嗩吶) 한 쌍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객이 문에 이르면 요란하게 불고 두드린다. 상식(上食)이나 제전이 시작되자 안에서 곡성이 일면 밖에선 반드시 음악으로 서로 화답하는 듯이 야단들이다. 내가 십강자에 이르러 쉬는 사이에 정()() 둘과 함께 거리를 거닐다가 한 삿자리로 만든 패루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제도를 상세히 구경하려 할 즈음에 요란스러운 음악이 시작된다. 둘은 엉겁결에 귀를 막고 도망치고, 나 역시 두 귀가 먹을 것 같아서 손을 흔들어 소리를 멈추라 하여도 영 막무가내로 듣지 않고, 다만 힐끔힐끔 돌아보기만 하고 그냥 불고 두드리고 한다. 나는 상가의 제도가 보고 싶어서 발을 옮겨 대문 앞에 이르니, 문 안에서 한 상주(喪主)가 뛰어나오더니 내 앞에 와 울며 대막대를 내던지고, 두 번 절하는데 엎드릴 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일어설 땐 발을 구르며 눈물이 비오듯 하면서,

 

창졸에 변을 당했사오니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수없이 울부짖는다. 상주 뒤에 5~6명이 따라 나오는데, 모두 흰 두건을 썼으며 나를 양쪽에서 부축하고 문 안으로 들어가니 상주 역시 곡을 멈추고 따라 들어온다. 때마침 건량마두(乾糧馬頭) 이동(二同)이 안으로부터 나오기에, 나는 하도 반가워서 엉겁결에,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하니, 이동은,

 

소인은 죽은 사람과 동갑이라서 본시 서로 친절하게 지냈습니다. 그래 아까 들어와서 그 처를 조문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한다. 나는,

 

조문례를 어떻게 하는 거야.”

한즉, 이동은,

 

상주의 손목을 잡고 너의 어른이 돌아가셨다지야 할 뿐입니다.”

하고, 이동 역시 나를 따라 다시 들어오면서,

 

백지(白紙) 권이나 주지 않으면 안 되오니 쇤네가 마련해 드리오리다.”

한다. () 앞에 삿자리로 큰 집을 세웠는데 그 제도가 매우 이상스러우며, 뜰에는 흰 베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내외(內外) 복인들을 따로 나누어 두었다. 이동은,

 

주인이 주과 대접을 하오리니 좀 지체하시고 너무 빨리 일어나시지 마십시오. 만일 자시지 않으면 큰 수치랍니다.”

한다. 나는,

 

이왕 들어왔으니 이것 역시 봄직하다만, 상주가 조문을 받으려면 너무 괴롭겠구나.”

하니, 이동은,

 

아까 벌써 조문은 끝났사오니 다시 조문하실 것 없습니다.”

하고, 이내 삿자리집을 가리키며,

 

이게 빈소(殯所)올시다. 남녀가 모두 집을 비우고 이 빈소로 옮겨 옵니다. 그리고 포장 속에 각기 기()()의 복제(服制)를 따라 장소가 마련되었으며, 장사를 치른 뒤에 제마다 돌아간답니다.”

한다. 포장 속에서 한 여인이 가끔 머리를 내밀고 엿보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고 제법 자태가 흐른다. 이동은,

 

저 이는 죽은 이의 딸이온데, 산해관에 살고 있는 부상의 아내랍니다.”

하고, 말해 준다. 이윽고 상주가 빈소에서 나와 걸상에 나앉고, 흰 두건을 쓴 사람 둘이 국수 두 그릇, 과실 한 쟁반, 두부 한 소반, 채소 한 쟁반, 차 두 잔, 술 한 주전자를 탁자 위에 벌여 놓고, 내 앞에 빈 잔 세 개를 놓으며 탁자 저편엔 빈 의자를 가져 오고, 잔 세 개를 나란히 늘어놓고는 이동더러 앉기를 청한다. 이동은 굳이 사양하면서,

 

저의 상전이 계신데 어찌 감히 마주 앉을 수 있으리까.”

하고, 곧 밖으로 나가더니 백지 한 권과 돈 일초(一鈔)를 갖고 들어와서 상주 앞에 놓고 내가 부의(賻儀)하는 뜻을 말하니, 상주가 걸상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히 사례한다. 나는 대충 음복하는 시늉만 하고 곧 일어나 나오니, 상주가 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한다. 문 앞 양쪽 상랑(廂廊)에서는 방금 대말을 만들어 종이로 옷을 입히고 있다. 이윽고 사행이 이곳에 와서 쉬고, 부사도 잇따라 이르러 길가에 가마를 내렸다. 내가 아까 조상하던 이야기를 하니 모두 허리를 잡고 웃는다.

이도정은 마을이 꽤 번화롭다. 은적사는 굉장한 절인데 많이 헐었다. ()에는 조선 사람 시주(施主) 성명들이 새겨졌는데, 이는 모두 의주 상인인 것 같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보이는데, 멀리 서북을 가로지른 것이 마치 푸른 장막을 드리운 것 같고, 뫼 봉우리가 오히려 보일락말락한다. 혼하를 건넌 뒤로 무릇 다섯 번 강을 건넜는데 모두 배로 건넜다. 연대(煙臺)는 이곳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리마다 대()가 하나씩 있는데, 원경(圓徑) 10여 장이요, 높이가 대여섯 발이며, 쌓은 제도가 성과 다름이 없고, 그 위엔 총구멍을 뚫고 여장(女墻 성 위에 또 쌓은 담장)을 둘렀다. 남궁(南宮) 척계광(戚繼光)이 만들었다는 팔백망(八百望)이 곧 이것이다. 소흑산은 들 가운데 민 듯이 편평하며, 조금 불룩하고 주먹처럼 생긴 작은 산이라 하여 이 이름을 지었다 한다. 인가가 즐비하고 점포가 번화한 품이 신민둔보다 못지 않고, 푸른 들 가운데 말노새양 수천백 마리가 떼를 지어 있으니, 역시 큰 곳이라 이를 수밖에 없다. 일행 하인들이 으레 이 소흑산에서 돼지를 삶아서 서로 위로하므로 장복창대 역시 밤에 가서 얻어먹겠다고 여쭙는다.

이날 밤 달빛이 낮같이 밝고 더위는 이미 한물 간 모양이다. 저녁 식사 후에 곧 밖으로 나가서 아득히 먼 들판을 바라보니, 푸른 내는 땅에 깔리고 소와 양이 제각기 집으로 돌아간다. 점방들은 아직 모두 문을 닫지 않았으므로 그 중 한 집에 들어가니, 뜰 가운데 시렁을 높이 매고 삿자리로 덮어 두었다가 밑에서 끈을 당기면 걷히어서 달빛을 받게 되었다. 이상스러운 화초가 달빛 아래 얽히어 있다. 길에서 놀던 사람들이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 들어와서 뜰에 가득하다. 다시 일각문을 들어서니 뜰 넓이가 앞 뜰과 같고, 난간 아래 몇 그루 푸른 파초가 심겨 있으며, 네 사람이 탁자를 가운데 놓고 삥 둘러앉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탁자를 차지하고 신추경상(新秋慶賞)’이란 넉 자를 쓴다. 자줏빛 먹 붉으레한 종이 위에 흰 달빛이 비끼어서 똑똑히 보이지는 않으나, 붓놀림이 매우 간삽하여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루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저 필법을 보매 저토록 옹졸하니, 내가 정작 한번 뽐낼 때로구나.’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 글씨를 다투어가면서 구경하고, 곧 당 앞 한가운데 문설주 위에 붙였으니, 이는 대개 달 구경에 축하하는 방문(榜文)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일어나 당 앞으로 가서 뒷짐을 지고 구경을 한다. 아직 탁자 위엔 남은 종이가 있기에 내가 걸상에 가 앉아서 남은 먹을 진하게 묻혀 시비를 가리지 않고 커다랗게 신추경상(新秋慶賞)’이라 써 갈겼다. 그 중 한 사람이 내가 쓴 글씨를 보더니 뭇 사람들에게 소리쳐 모두 탁자 앞으로 달려왔다. 서로 웃고 떠들며,

 

조선 사람이 글씨 참 잘 쓰네.”

하기도 하고, 혹은,

 

동이(東夷)도 글씨가 우리와 같네.”

하고, 혹은,

 

글자는 같지만 음은 다르다네.”

한다. 나는 붓을 처억 던지고 일어섰다. 여럿이 내 손목을 잡으면서,

 

영감은 잠깐만 앉으셔요. 존함은 뉘시오니까?”

하기에, 내가 성명을 써 보이니 그들은 더욱 기뻐한다. 내가 처음 들어올 때엔 반가워하지 아니할뿐더러 본체만체 하더니, 이제 내 글씨를 본 뒤에 그 기색을 살펴보매 너무 분에 지나치게 반기면서 급히 차 한 잔을 내오고, 또 담배를 붙여 권한다. 그리하여 삽시간에 염량(炎凉)이 달라진다. 그들은 모두 태원(太原) 분진(汾晉)에 사는 사람으로, 지난해에 이곳에 와서 수식포(首飾舖)를 갓 열었는데, ()비녀귀걸이가락지[彄環] 등속을 사들이고 가게 이름을 만취당(晩翠堂)’이라 한다. 그 중 셋은 성이 최(), 둘은 유()()인데 모두 문필(文筆)이 극히 짧아서 말할 것도 없으나, 곽생(霍生)이 가장 나아 보인다. 다섯 사람이 다 나이 서른 남짓하고 호건하기가 마치 노새 같으며, 얼굴들은 모두 희멁고 눈매가 서늘하나 맑고 아담한 기는 전혀 없다. 요전 오()()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다. 지방 풍토의 같지 아니함을 이로써 넉넉히 알 수 있으며, 산서에서 장수[]가 잘 난다더니 과연 빈 말이 아닌 듯싶다. 나는 곽생에게,

 

당신이 태원에 살고 계시다니, 귀향(貴鄕) 곽태봉(郭泰峰), 아호는 금납(錦衲)이란 어른을 아시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곽생은,

 

모릅니다.”

하고는, 이내 곽()과 곽()의 두 글자에다 점을 치면서,

 

이는 곽 태조(郭太祖 후주(後周)의 태조 곽위(郭威))의 곽() 자요, 나는 곽거병(霍去病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의 곽() 자입니다.”

한다. 나는 웃으면서,

 

왜 분양(汾陽)박륙(博陸)을 끌어 오지 않고, 하필이면 주 태조나 표요(驃姚)로써 증명하시오.”

한즉, 곽생이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잠자코 있다. 아마 제 생각엔 내가 만인들처럼 곽()()을 혼용할까 보아서 이렇게 밝히는 듯싶다. 곽생은,

 

등주(登州)에서 뭍에 내리셨으면 어찌해서 이리로 오셨습니까?”

하고, 말머리를 바꾼다. 나는,

 

아니, 거기로 오지 않았소. 육로 3천 리로 바로 북경까지 대어가는 길이오.”

하니, 곽생은,

 

조선은 곧 일본(日本)과 같습니까?”

한다. 마침 한 사람이 붉은 종이를 가지고 와서 글씨를 써 달라 하고는 저의 아는 사람끼리 몰려와서 모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간다. 내가,

 

붉은 종이엔 글씨가 잘 되지 않으니 계란빛 종이를 가져 오시오.”

하니, 한 사람이 바삐 가더니 분지(粉紙) 몇 장을 가져 왔다. 나는 그것을 끊어서 주련(柱聯)을 만들어,

 

옹은 산과 숲을 즐기노니 / 翁之樂者山林也

객도 물과 달을 아시나요 / 客亦知否水月乎

라 썼더니, 그제야 여러 사람들이 좋아라고 환성을 지른다. 서로 다투어 먹을 갈고 왔다갔다 분주하니 모두 종이를 구하느라고 그러는 모양이다. 나는 이에 종이를 펴고 쓰며 쉴새 없이 붓을 달리기를 마치 소지(所志)에 제사(題辭 고소장)를 쓰듯 하니, 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영감은 술을 자실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나는,

 

한 잔 술이야 어찌 사양하리오.”

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크게 한바탕 웃고 곧 따끈한 술 한 주전자를 가져 와서 연거푸 석 잔을 권한다. 나는,

 

주인은 어찌 아니 마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하나도 먹을 줄 아는 이가 없소이다.”

한다. 이에 모여 구경하던 이들이 서로 능금과 사과와 포도 등을 가져다 내게 권한다. 나는,

 

달빛이 비록 밝다 해도 글씨 쓰기엔 방해가 되니 촛불을 켜는 게 좋겠소.”

하니, 곽생은,

 

하늘 위에 저 한 조각 거울이 달렸으니 이 세상에 천만 개의 등불보다 낫지 않소이까.”

하고, 한 사람은,

 

영감, 눈이 좋지 못하십니까?”

하기에, 나는,

 

그렇소.”

하니, 곧 네 가지 촛불을 밝혀 준다. 나는 갑자기 생각하기를,

 

어제 전당포에서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썼는데 주인이 왜 갑자기 좋아하지 않았는지 오늘은 단연코 그 설치를 해 보렸다.”

하고, 곧 주인더러,

 

주인댁에서는 점포 머리에 달 만한 액자(額字)가 어떨까요?”

하니, 그들은 일제히,

 

이것이야말로 더욱 좋겠습니다.”

한다. 내가 드디어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써 놓은즉, 여럿이 서로 쳐다보는 품이 어제 전당포 주인 기색과 한가지로 수상스럽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 또 이상스러운 일이구나.’ 하고, 나는 또,

 

이건 아무런 상관없는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그렇습니다.”

한다. 곽생은,

 

저의 집에선 오로지 부인네들 수식을 매매하옵고 국숫집은 아니옵니다.”

한다. 나는 비로소 내 잘못을 깨달았다. 전에 한 일이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나도 모르는 바 아니로되 애오라지 심심풀이로 써보았을 뿐이오.”

하여 얼버무리고 나서, 전일 요양 점포에서 본 계명부가(鷄鳴副珈 닭이 울자 수식을 갖춤)’라는 금자로 쓴 간판이 퍼뜩 생각나기에, 이와 그와는 한가지일 듯싶어서 이에 부가당(副珈堂)’이란 석 자를 써 주었더니, 그들이 소리치며 좋아해 마지않는다. 곽생은,

 

이게 무슨 뜻이옵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이제 귀댁에선 부인네들의 수식을 전문으로 한다 하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부계육가(副笄六珈)란 곧 이것이오.”

하니, 곽생은,

 

저의 집을 빛내주신 그 은덕을 무엇으로 갚아 드리리까.”

하고, 사례한다. 다음날 북진묘(北鎭廟)를 구경하기로 되었으므로 일찍 돌아와서 일행 여러 사람에게 아까 일을 이야기하니 허리를 잡지 않은 이가 없다. 그 뒤로는 점포 앞에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넉 자를 볼 때마다 이것이 반드시 국숫집이로구나 하였다. 이는 그 심지의 밝고 깨끗함을 이름이 아니요, 실로 그 면발이 서릿발처럼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함이다. 여기서 면발[]이란 곧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진말(眞末)’이다. 청여계함, 조 주부 달동과 함께 다음날 북진묘에 가기로 약속했다.

 

 

[D-001]연대(煙臺) : 옛날의 통신 기관으로, 봉화를 놓던 축대.

[D-002]3리마다 …… ()이라 :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

[D-003]장손무기(長孫無忌) : 당의 명신. 태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저수량(褚遂良)과 함께 고종(高宗)을 섬겼다.

[D-004]치문(鴟吻) : 큰 전각 같은 지붕의 용마루 끝에 장식하는 물형.

[D-005]쇄납(嗩吶) : 애초에 회족(回族)이 사용하던 것인데, 본명은 소랄(蘇㖠) 또는 쇄랄(瑣㖠).

[D-006]상식(上食) : 초상집에서 조석으로 음식을 영좌에 차려 놓는 것이다.

[D-007]제법 …… 흐른다 : 이 한 구절은 일재본에만 있는 것을 추록하였다.

[D-008]척계광(戚繼光) : 명말(明末)의 저명한 군사가요, 학자. 남궁은 그의 호. 기효신서(紀效新書),이융요략(莅戎要略) 등의 저서가 있다.

[D-009]분양(汾陽) : 당의 안녹산(安祿山)사사명(史思明)의 난을 평정한 명장 곽자의(郭子儀). 분양은 봉호.

[D-010]박륙(博陸) : 곽거병의 이모제(異母弟) 곽광(霍光). 박륙은 봉호.

[D-011]표요(驃姚) : 곽거병이 일찍이 표요 교위(驃姚校尉)를 지냈으므로 이른 말이다.

[D-012]옹은 …… 아시나요 : 앞 구절은 구양수(歐陽脩) 취옹정기(醉翁亭記)에서, 뒷 구절은 소식(蘇軾) 적벽부(赤壁賦)에서 각기 따왔다.

[D-013]부계육가(副笄六珈) : 비녀에 뒤이어서 온갖 수식을 꽂는다는 뜻.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성자사(聖慈寺)는 숭덕(崇德 청 태종(靑太宗)의 연호) 2년 무인(戊寅)에 세웠다. 전각은 깊숙하고도 장려(壯麗)하다. 법당은 돈대 높이가 한 길, 두루 돌난간을 세우고, 전각 위엔 부시(罘罳)로 둘러싸고, 세 그루 늙은 소나무 가지가 서로 엉켜서 푸른 그림자가 뜰에 가득하여 어둠침침한 빛이 고요한 속에 잠겨 있다. 비석 둘이 있는데, 하나는 태학사(太學士) 강림(剛林)이 지은 글로 뒷면엔 만주글이고, 또 하나는 앞뒷면이 모두 몽고 서번(西番)의 글자이다. 지키는 중들 중에는 라마(喇麻) 중 몇 명이 있고, 전 속엔 8백 나한(羅漢)이 있는데, 키가 겨우 몇 치씩밖에 되지 않으나 하나하나가 모두 정묘하다. 강희 황제가 손수 작은 탑 수백을 만들었는데 크기가 주사위만하고, 그 아로새긴 솜씨가 기묘하여 신경(神境)에 들어갔고 탑 높이가 10여 길인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났으며 사자를 새기었다.

만수사(萬壽寺)는 강희(康熙) 55년 병신(丙申)에 중수하였다. 절 앞에 패루 하나가 있는데, 현판에는 만세무강(萬歲無彊)’이라 하였고, 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기는 성자사를 능가하나 다만 뜰에 가득한 소나무 그늘이 없었다. 비석 둘이 있으며 정전(正殿)에는 강희황제가 쓴 요해자운(遼海慈雲)’이란 액자가 붙어 있고, 향정(香鼎)이며, 보로(寶爐), 그 밖에도 보물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겠다. 라마 중 10여 명이 있는데, 모두 누런 옷에 누런 벙거지를 썼으며 사납고 헌칠해 보인다.

실승사(實勝寺)는 현판에 연화정토(蓮花淨土)라 하였고, 숭덕 3년에 세웠다. 지붕 위엔 모두 푸르고 누런 유리기와로 이었다. 이는 청 태종(淸太宗)의 원당(願堂)이다.

 

 

[C-001]성경가람기(盛京伽藍記)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을 성경잡지와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부시(罘罳) : 큰 건물에서 참새가 들어 보금자리 트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물 같은 것으로 처마 밑을 둘러친 것.

[D-002]서번(西番) : 서장(西藏)을 비롯하여 중국 아시아 등지 서역의 모든 국가의 총칭.

[D-003]라마(喇麻) : 몽고서장 등지에서 성행하는 불교의 한 종파.

[D-004]병신(丙申) : ‘박영철본에는 병술(丙戌)로 되었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5]실승사(實勝寺) : ‘일재본에는 보승사(寶勝寺)로 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산천기략(山川記略)

 

주필산(駐蹕山)은 요양의 서남에 있다. 애초 이름은 수산(首山)이더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러 왔을 때 이 산 위에 며칠 머물면서 돌에 그 공덕을 새기고 주필산이라 이름을 고쳤다.

개운산(開運山)은 봉천부(奉天府) 서북에 있다. 여러 산봉우리가 둘러 있고 많은 물의 근원이 거기서 나온다. 곧 청()의 영릉(永陵)이다.

철배산(鐵背山)은 봉천부 서북에 있다. 그 위엔 계()() 두 성이 있다 한다.

천주산(天柱山)은 승덕현(承德縣) 동쪽에 있다. 곧 청의 복릉(福陵 청 태조의 능)이 있는 곳이다. 진사(晉史)에 이른바 동모산(東牟山)이 곧 이것이다.

융업산(隆業山)은 승덕현 서북에 있다. 여기에는 청()의 소릉(昭陵 청 태종의 능)이 있다 한다.

십삼산(十三山)은 금주부(錦州府) 동쪽에 있다. 봉우리가 열 셋이 있으므로 채규(蔡珪)의 시에,

 

여산이 다한 곳에 다시금 열세 봉우리 / 閭山盡處十三山

갯마을 집집마다 그림 사이 보이누나 / 溪曲人家畵幅間

라고 하였다.

발해(渤海)는 봉천부 남쪽에 있다. 성경통지(盛京統志)에 이르기를,

 

바다의 옆으로 나간 줄기를 발()이라 한다.”

하였다. 요동 2천 리 벌이 뻗쳤는데 그 남쪽이 곧 발해이다.

요하(遼河)는 승덕현의 서쪽에 있다. 곧 구려하(句驪河)인데 혹은 구류하(枸柳河)라고도 한다. 한서(漢書) 수경(水經)에는 모두 대요수(大遼水)라 하였다. 요수의 좌우가 곧 요동요서의 갈리는 경계이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적에 진펄 2백여 리에 모래를 깔아 다리를 놓아서 건너갔다.

혼하(渾河)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 소요수(小遼水), 혹은 아리강(阿利江)이라 하고, 또는 헌우록수(軒芋濼水)라고도 한다.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태자하(太子河)와 합하고, 다시 요수와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태자하는 요양 북쪽에 있다. 변문(邊門) 밖 영길주(永吉州)에서 발원하여 변문 안으로 흘러들어 혼하요하와 합쳐 삼차하(三叉河)가 되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연 태자(燕太子) ()이 도망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마침내 머리를 베어 진()에 바쳤으므로 후인이 이를 가엾이 여겨 이 물 이름을 태자하라 하였다.”

한다. 소심수(小瀋水)는 승덕현 남쪽에 있다. 동관(東關) 관음각(觀音閣)에서 발원하여 혼하로 들어간다. 물 북편을 양()이라 하므로 심양(瀋陽)의 이름이 대체로 여기에서 난 것이라 한다.

 

산천기략후지(山川記略後識)

 

내가 이제 지나온 산하는 다만 그 지방 사람들의 구전(口傳)하는 말과, 또 길가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의하였을뿐더러 자주 다니는 우리 하인들에게 물어본 것이었는데, 대체로는 생각나는 대로 대답한 것이어서 도무지 상세하지 않다. 화표주는 요동의 고적인데, 그나마 어떤 이는 성 안에 있다 하고 혹은 성 밖 10리에 있다 하니, 다른 것도 이를 미루어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C-001]산천기략(山川記略) : ‘다백운루본에는 이 편을 성경잡지와 각립시켰으나, 그릇된 것이다.

[D-001]영릉(永陵) : 청 태조의 부조(父祖) 4대의 능이 있다.

[D-002]진사(晉史) : 당 태종의 명찬인 진서(晉書)를 이름인 듯하다.

[D-003]채규(蔡珪) : ()의 학자. 자는 정보(正甫).

[D-004]성경통지(盛京統志) : 지은이는 알 수 없다. 다른 본에는 성경통지(盛京通志)로 되었다.

[D-005]수경(水經) : 당서(唐書) 중에 있는 상흠(桑欽)이 지은 서명.

[D-006]산천기략후지(山川記略後識) : 다른 본에는 이 소제(小題)가 없었으나, ‘주설루본에 있으므로 이를 좇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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