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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종전에 사용하던 포털 사이트가 여러 차례 소멸되어 희미한 글씨의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읽기 쉽게 재수록합니다. 박지원/ 原士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http://kydong77.tistory.com/7938 ,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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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호질虎叱/ 열하일기 4.관내정사

虎叱 https://kydong77.tistory.com/18892 은 안 보이고, 대신 <범의 꾸중>이라 번역해 사용합니다. 최상의 권위를 지닌 북곽이 최하위의.."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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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허생전/ 열하일기 10.옥갑야화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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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초기구전

양반전兩班傳 ◇ <兩班傳>의 성공 비결 1)충격적 소재:양반 매매.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의식 파괴-양반과 천부의 전도(顚倒) 신분 맞바뀜. 2)수사법:반어법(신분과 부의 불일치, 士族의 존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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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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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1 자서(自序)

2 마장전(馬駔傳)

3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4 민옹전(閔翁傳)

5 광문자전(廣文者傳)

6 양반전(兩班傳)

7 김신선전(金神仙傳)

8 우상전(虞裳傳)

9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10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자서(自序)

 

오륜 끝에 벗이 놓인 것은 / 友居倫季

보다 덜 중시해서가 아니라 / 匪厥疎卑

마치 오행 중의 흙이 / 如土於行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 / 寄王四時

()과 의()와 별()과 서() / 親義別敍

() 아니면 어찌하리 / 非信奚爲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 常若不常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 友迺正之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 所以居後

이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네 / 迺殿統斯

세 광인이 서로 벗하며 / 三狂相友

세상 피해 떠돌면서 / 遯世流離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 論厥讒諂

그들의 얼굴이 비치어 보이는 듯하네 / 若見鬚眉

 

이에 마장전(馬駔傳)을 짓는다.

 

선비들이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 士累口腹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 百行餒缺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 鼎食鼎烹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 不誡饕餮

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嚴自食糞

하는 일은 더럴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 迹穢口潔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을 짓는다.

 

민옹은 사람을 누리같이 여겼고 / 閔翁蝗人

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 學道猶龍

풍자와 골계로써 / 託諷滑稽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 翫世不恭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 書壁自憤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 可警惰慵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선비란 바로 천작이요 / 士迺天爵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 / 士心爲志

그 뜻은 어떠한가 / 其志如何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 弗謀勢利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 達不離士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 窮不失士

이름 절개 닦지 않고 / 不飭名節

가문(家門) 지체(地體) 기화 삼아 / 徒貨門地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 酤鬻世德

장사치와 뭐가 다르랴 / 商賈何異

 

이에 양반전(兩班傳)을 짓는다.

 

홍기는 대은이라 / 弘基大隱

노니는 데 숨었다오 / 迺隱於遊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 淸濁無失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 / 不忮不求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광문은 궁한 거지로서 / 廣文窮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聲聞過情

이름나기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 非好名者

형벌을 면치 못하였거든 / 猶不免刑

더구나 이름을 도적질하여 / 矧復盜竊

가짜로써 명성을 다툰 경우리요 / 要假以爭

 

이에 광문전(廣文傳)을 짓는다.

 

아름다운 저 우상은 / 孌彼虞裳

옛 문장에 힘을 썼네 / 力古文章

서울에서 사라진 예()를 시골에서 구한다더니 / 禮失求野

생애는 짧아도 그 이름 영원하리 / 亨短流長

 

이에 우상전(虞裳傳)을 짓는다.

 

세상이 말세로 떨어져 / 世降衰季

허위만을 숭상하고 꾸미니 / 崇飾虛僞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는 / 詩發含珠

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愿賊亂紫

은자인 체하며 빠른 출세를 노리는 짓을 / 逕捷終南

예로부터 추하게 여겼느니 / 從古以醜

 

이에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을 짓는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하면 / 入孝出悌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 하리니 / 未學謂學

이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 斯言雖過

거짓 군자를 경계할 만하네 / 可警僞德

공명선(公明宣)은 글 읽지 않았어도 / 明宣不讀

삼 년을 잘 배웠으며 / 三年善學

농부가 밭을 갈며 / 農夫耕野

아내를 손님같이 서로 공경하니 / 賓妻相揖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 目不知書

참된 배움이라 이를 만하네 / 可謂眞學

 

이에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을 짓는다.

 

[D-001]오륜 ……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차례를 두고 한 말이다.

[D-002]마치 …… 같다네 : 오행설(五行說)에서는 봄에는 나무의 기운이 왕성하고, 여름에는 불의 기운이 왕성하고, 가을에는 쇠의 기운이 왕성하고, 겨울에는 물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 만 그에 해당하는 계절이 없는 셈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계절 90일에서 18일씩을 덜어서 흙에 배당함으로써 오행에 맞추어 각 계절이 모두 72일씩으로 고루 안배될 수 있게 한 것을 가리킨다.

[D-003]상도(常道) …… 시정하나니 : 인의예지(仁義禮智)에다 신()을 보태어 오상(五常)이라 한다. 본래 신은 오행설의 유행에 따라 인의예지에 추가된 것이었다.

[D-004]그들의 …… 듯하네 : 순자(荀子) 해폐(解蔽), 인심(人心)을 대야의 물에 비유하면서, 대야의 물을 안정시켜 혼탁한 것들을 가라앉히면 수염과 눈썹을 볼 수 있다足以見鬚眉고 했다.

[D-005]호화롭게 …… 해도 : 정식(鼎食)은 솥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식사하는 것을 뜻하고, 정팽(鼎烹)은 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D-006]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는 엄 행수는 제힘으로 먹고살았으니嚴自食力로 소개되어 있다.

[D-007]노자(老子)의 도()를 배웠네 :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D-008]천작(天爵) : 인작(人爵)의 대립 개념으로, 천부적으로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D-009]선비의 …… 뜻이라네 : ‘()’라는 글자의 구조를  의 결합으로 풀이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풀이는 이와 다르다.

[D-010]대은(大隱) : 은자에도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의 등급이 있다. 산중에 숨어 사는 은자가 소은이라면, 진정으로 위대한 은자인 대은은 하층 민중이나 다름없이 시중에서 산다.

[D-011]남을 …… 않았네 : 시경(詩經) 패풍(邶風) 웅치(雄雉)에 나오는 구절이다.

[D-012]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했다.

[D-013]서울에서 …… 구한다더니 : 한서(漢書) 30 예문지(藝文志) 10에 공자(孔子)가 한 말로 소개되어 있다. 연암집 3 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양반 사대부들의 글에서 사라진 고문사(古文辭)를 역관(譯官)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였다.

[D-014]시를 …… 도굴하는 : 장자(莊子) 외물(外物), 시경의 시를 읊조리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진 구슬을 훔치는 타락한 유자(儒者)의 이야기가 나온다.

[D-015]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향원(鄕愿)은 덕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鄕愿 德之賊也라고 했으며, 또한 자줏빛이 붉은빛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고 했다.

[D-016]은자인 …… 짓을 : 당 나라 노장용(盧藏用)이 수도 장안(長安)의 종남산에 은거함으로써 고사(高士)라는 명성을 얻어 도리어 재빠르게 출세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D-017]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적에 관한 전기(傳記)라는 뜻이다.

[D-018]집에서 …… 하리니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자제들은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해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悌고 했으며, 자하(子夏) 어진 이를 좋아하여 호색하는 마음을 바꾸며 …… 벗과 사귈 때 말이 믿음직하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하겠다.賢賢易色 ……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고 했다.

[D-019]공명선(公明宣) …… 배웠으며 :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 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 說苑 反質

[D-020]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50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의하면, 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무식한 농민이 한글밖에 모르지만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해 실천했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부부가 같이 날마다 소학언해를 읽었으므로, 그 고을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봉산학자전은 이 사실을 소재로 한 전기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마장전(馬駔傳)

 

말 거간꾼이나 집주릅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짓이나, 관중(管仲)과 소진(蘇秦)이 닭 ·  ·  · 소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던 일은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어렴풋이 헤어지잔 말만 들어도 가락지를 벗어던지고 수건을 찢어 버리고 등잔불을 돌아앉아 벽을 향하여 고개를 떨구고 울먹거리는 것은 믿을 만한 첩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가슴속의 생각을 다 내보이면서 손을 잡고 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친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콧잔등〕 - 음은 ()’이다.  까지 부채로 가리고 좌우로 눈짓을 하는 것은 거간꾼들의 술책이며, 위협적인 말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고 상대가 꺼리는 곳을 건드려 속을 떠보며 강한 상대에겐 협박을 하고 약한 상대는 짓눌러서 동맹한 나라들을 흩어 버리거나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하게 하는 것은 패자(覇者)와 유세가들이 이간하고 농락하는 권모술수이다.

옛날에 가슴앓이 하는 이가 있어, 아내를 시켜 약을 달이게 하였는데 그 양이 많았다 적었다 들쑥날쑥하였으므로 노하여 첩을 시켰더니, 그 양이 항상 적당하였다. 그 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창구멍을 뚫고 엿보았더니, 많으면 땅에 버리고 적으면 물을 더 붓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첩이 양을 적당하게 맞추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귀에 대고 소근거리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요,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은 깊은 사귐이 아니요,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것은 훌륭한 벗이 아니다.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이 광통교(廣通橋) 위에서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탑타가 말하기를,

 

내가 아침에 일어나 바가지를 두드리며 밥을 빌다가 포목전에 들렀더니, 포목을 사려고 가게로 올라온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목을 골라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공중에 비쳐 보기도 하면서 값은 부르지 않고 주인에게 먼저 부르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둘 다 포목은 잊어버린 채 포목 장수는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사러 온 사람은 뒷짐을 지고 서성대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더군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태도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하였다. 덕홍이 말하기를,

 

꼭두각시놀음에 장막을 드리우는 것은 노끈을 당기기 위한 것이지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겉모습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무릇 군자가 사람을 사귀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법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나이 삼십이 되었어도 벗 하나 없다. 그러나 그 도만은 내 옛적에 들었노라. 팔이 밖으로 펴지지 않는 것은 술잔을 잡았기 때문이지.”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시경(詩經)에도 본래 그런 말이 있지요.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 鳴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 / 其子和之

내게 좋은 벼슬이 있으니 / 我有好爵

내가 너와 더불어 같이한다 / 吾與爾縻之

하였는데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하였다. 송욱이 말하기를,

 

너만 하면 벗에 대한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내가 아까 그 한 가지만을 알려 주었는데, 너는 두 가지를 아는구나. 천하 사람이 붙따르는 것은 형세요, 모두가 차지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이다. 술잔이 입과 더불어 약속한 것도 아니건만, 팔이 저절로 굽혀지는 것은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형세이다. 학과 그 새끼가 울음으로써 서로 화답하는 것은 바로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벼슬을 좋아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붙따르는 자가 많아지면 형세가 갈라지고, 도모하는 자가 여럿이면 명예와 이익이 제 차지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말하기를 꺼려 왔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은유적인 말로 네게 알려 주었는데 네가 이 뜻을 알아차렸구나.

너는 남과 더불어 교제할 때, 첫째, 상대방의 기정사실이 된 장점을 칭찬하지 말라. 그러면 상대방이 싫증을 느껴 효과가 없을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지 말라. 장차 행하여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낙담하여 실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을 제일이라고 일컫지 말라. 제일이란 그 위가 없단 말이니 좌중이 모두 썰렁해지면서 기가 꺾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도 기법이 있다. 첫째, 상대방을 칭찬하려거든 겉으로는 책망하는 것이 좋고, 둘째, 상대방에게 사랑함을 보여 주려거든 짐짓 성난 표정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셋째, 상대방과 친해지려거든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돌아서야 하고, 넷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꼭 믿게끔 하려거든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또한 열사(烈士)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때문에 영웅이 잘 우는 것은 남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기법은 군자가 은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처세(處世)에 있어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탑타가 덕홍에게 묻기를,

 

송 선생님의 말씀은 그 뜻이 너무나 어려워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네까짓 게 어찌 알아? 잘한 일을 가지고 성토하여 책망하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노여움이 생기는 것이요, 꾸지람을 하는 과정에서 정이 붙는 것이므로 가족에 대해서는 이따금 호되게 다루어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친한 사이일수록 거리를 둔다면 이보다 더 친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미 믿는 사이인데도 오히려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이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뭇사람은 다 졸고 있을 때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그 남은 취기(醉氣)를 타서 슬픈 심사를 자극하면 누구든 뭉클하여 공감하지 않는 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는 상대를 이해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즐겁기로는 서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따라서 편협한 사람의 불만을 풀어 주고 시기심 많은 사람의 원망을 진정시켜 주는 데에는 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울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울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31년 동안 나라 안을 돌아다녀도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탑타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충()으로써 사귐에 임하고 의()로써 벗을 사귀면 어떻겠는가?”

하니, 덕홍이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네 말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비루하구나.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냐? 너는 듣거라. 가난한 놈이란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한없이 의()를 사모한다. 왜냐하면 저 아득한 하늘만 봐도 곡식을 내려 주지 않나 기대하고, 남의 기침 소리만 나도 무엇을 주지 않나 고개를 석 자나 빼고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물을 모아 놓은 자는 자신이 인색하단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을 끊자는 것이다. 그리고 천한 자는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심(忠心)을 다하여 어려운 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을 건널 때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지 않는 것은 떨어진 고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레를 타고 다니는 자가 갖신에 덧신을 껴신는 것은 그래도 진흙이 묻을까 염려해서이다. 신 바닥도 아끼거든 하물며 제 몸일까 보냐? 그러므로 충()이니 의()니 하는 것은 빈천한 자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부귀한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하였다. 탑타가 발끈하여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내 차라리 세상에 벗이 하나도 없을지언정 군자들과는 사귀지 못하겠다.”

하고서 이에 서로 의관을 찢어 버리고 때묻은 얼굴과 덥수룩한 머리에 새끼줄을 허리에 동여매고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골계선생(滑稽先生)은 우정론(友情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무를 붙이자면 생선 부레를 녹여서 붙이고, 쇠를 붙이자면 붕사(鵬砂)를 녹여서 붙이고, 사슴이나 말의 가죽을 붙이자면 멥쌀밥粳飯을 이겨서 붙이는 것보다 단단한 것이 없음을 내 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사귐에 있어서는 떨어진 틈이란 것이 있다. () 나라와 월()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산천(山川)이 가로막고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아 있다 하여 반드시 밀접한 사이가 아니요,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는 관계라 하여 반드시 마음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이에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상앙(商鞅)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자 효공(孝公)이 꾸벅꾸벅 졸았고, 범저(范雎)가 성내지 않았다면 채택(蔡澤)이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나와서 상앙을 꾸짖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었으며, 채택의 말을 전하여 범저가 화를 내도록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있었던 것이다. 공자(公子) 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이 소개의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성안후(成安侯 진여(陳餘))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은 사귐에 있어 조금의 틈도 없이 너무나 절친하게 지냈으므로, 그들 사이에 한번 틈이 생기자 누구도 그들을 위해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중히 여길 것은 틈이 아니고 무엇이며, 두려워할 것도 틈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첨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영합하는 것이요, 참소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이간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잘 사귀는 이는 먼저 그 틈을 잘 이용하고, 사람을 잘 사귈 줄 모르는 이는 틈을 이용할 줄 모른다.

성격이 강직한 사람은 외골수여서 자신을 굽히고 남에게 나아가지도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하지도 않으며, 한번 말을 꺼냈다가 의견이 합치하지 않으면 남이 이간질하지 않아도 제풀에 막히고 만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찍고 또 찍어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어디 있으리.”라고 했으며, “아랫목에 잘 보이기보다는 아궁이에 잘 보여라.”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아첨을 전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 몸을 정제(整齊)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스레 하고 명예와 이익에 담담하며 상대와 사귀려는 마음이 없는 척함으로써 저절로 아첨을 하는 것이 상첨(上諂)이다. 다음으로 바른 말을 간곡하게 하여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것이 중첨(中諂)이다. 말굽이 닳도록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하며 돗자리가 떨어지도록 뭉개 앉아, 상대방의 입술을 쳐다보며 얼굴빛을 살펴서, 그 사람이 하는 말마다 다 좋다 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마다 다 칭송한다면, 처음 들을 때에야 좋아하겠지만 오래 들으면 도리어 싫증이 난다. 싫증이 나면 비루하게 여기게 되어, 마침내는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이는 하첨(下諂)이다.

관중(管仲)이 제후(諸侯)를 여러 번 규합하였고, 소진(蘇秦)이 육국(六國)을 합종(合縱)시켰으니 천하의 큰 사귐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송욱과 탑타는 길에서 걸식을 하고 덕홍은 저자에서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다니면서도 오히려 말 거간꾼의 술수를 부리지 않았거늘, 하물며 군자로서 글 읽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D-001]손뼉을 …… 짓이나 : 맹세할 때 하는 동작들이다. 격장위서(擊掌爲誓), 지일서심(指日誓心)이니 하는 성구(成句)들이 있다.

[D-002] ……  : 고대 중국에서 동맹을 맺을 때 천자는 입가에 말이나 소의 피를 바르고, 제후는 개나 돼지의 피를 바르고, 대부 이하는 닭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D-003]콧잔등 : ‘ 자를 콧잔등이란 뜻으로 쓸 때는 이라 읽는다.

[D-004]상대가 …… 떠보며 : 원문은 餂情投忌이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 선비가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말을 하면, 이는 말로써 속을 떠보는 것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라고 비판하였다. 투기(投忌) 쥐 잡으려 해도 그릇 깨뜨릴까 봐 꺼려진다.投鼠忌器는 말의 준말이다.

[D-005]송욱(宋旭) : 연암집 7 염재기(念齋記)에 의하면, 송욱은 당시 한양에 실존했던 기인(奇人)이었다.

[D-006]광통교(廣通橋) : 한양 중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다리. 광교(廣橋)라고도 한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였다.

[D-007]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름은 무심하게 산굴에서 나오고雲無心以出岫라는 구절이 있다.

[D-008]벽에 …… 있더군요 : 원문은 壁上觀畵인데,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의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 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다른 제후의 장수들이 성벽 위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던 고사에서 나온 벽상관전(壁上觀戰)’이란 성어의 패러디이다. 역시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D-009]팔이 …… 때문이지 :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李德懋) 열상방언(洌上方言)에는 술잔 잡은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把盃腕 不外卷라고 소개되었다. 靑莊館全書 卷62

[D-010]우는 …… 같이한다 : 주역(周易)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이다. 따라서 인용상 실수를 범했거나, 아니면 이를 시경의 일시(逸詩)로 간주한 듯하다.

[D-011]가족에 …… 법이다 : 주역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가족을 호되게 다루었으나 엄격함을 뉘우치면 길하니라.家人嗃嗃 悔厲 吉라고 하였다.

[D-012]골계선생(滑稽先生) …… 말했다 : 골계선생은 작가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 인물이다. 따라서 우정론 역시 실제로는 작가가 지은 글이다. 골계란 풍자나 궤변(詭辯)을 잘한다는 뜻이니, 사기에 골계열전(滑稽列傳)이 있다.

[D-013]멥쌀밥粳飯 : 찹쌀밥糯飯의 오류인 듯하다. 멥쌀은 차지지 않아 풀로 쓰기 어렵다.

[D-014]상앙(商鞅) …… 졸았고 : 상앙이 진()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이에 경감이 나와서 상앙을 꾸짖자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覇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D-015]범저(范雎) …… 것이다 : 채택(蔡澤)이 진 나라에 들어가 진 소왕(秦昭王)을 볼 목적으로 먼저 사람을 시켜 당시 승상인 범저에게 자신이 진왕을 만나면 승상의 자리를 빼앗게 될 것이라고 하여 범저를 노하게 만듦으로써 범저와 만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진왕을 만났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D-016]공자(公子) …… 하였다 : () 나라 군대가 조()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노중련(魯仲連)이 위()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설득하여 조 나라를 돕도록 하겠노라고 자청했으므로, 공자 조승, 즉 평원군(平原君)이 노중련을 신원연에게 소개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위 나라 장수 신원연을 상대로 유세할 수 있었던 것은 평원군의 소개 덕분이었다는 뜻이지만, 탈문(脫文)이 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생략한 탓인지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

[D-017]성안후(成安侯) …… 없었다 : 사기 8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자세히 나온다.

[D-018]아랫목에 …… 보여라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선귤자(蟬橘子)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은 그의 성()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묻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벗의 도를 들었는데, ‘벗이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하지 않은 형제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이란 이같이 소중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선생님을 따라 그 아랫자리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자는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서 열악한 곳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선생님께서는 자주 그의 덕()을 칭송하여 선생이라 부르는 동시에 장차 그와 교분을 맺고 벗하기를 청할 것같이 하시니 제자로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러하오니 문하에서 떠나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선귤자가 웃으면서,

 

앉아라. 내가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 주마. 속담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 했다. 사람마다 자기가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 남들이 몰라주면, 답답해하면서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고 싶은 체한다. 그럴 때 예찬만 늘어놓는다면 아첨에 가까워 무미건조하게 되고, 단점만 늘어놓는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 같아 무정하게 보인다. 따라서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변죽만 울리고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크게 책망하더라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니, 상대방의 꺼림칙한 곳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비슷한 물건을 늘어놓고 숨긴 것을 알아맞히듯이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을 은근슬쩍 언급한다면,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 준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 등을 토닥일 때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어루만질 때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결국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을 알아준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벗을 사귄다면 좋겠느냐?”

하였다. 자목은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며 말하기를,

 

지금 선생님께서는 시정잡배나 하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려 하시는군요.”

하니,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전자에는 있지 않고 후자에만 있구나.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道義)로 사귀는 것일세. 위로 천고(千古)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箭串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 · 오이 · 수박 · 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 마늘 · 부추 ·  · 염교며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 600)이나 된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 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귀를 타고나면 부귀하게 지내고 빈천을 타고나면 빈천한 대로 지낸다.’ 하였으니, 타고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말한다네. 시경(詩經),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공소(公所)에 있으니, 진실로 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夙夜在公 寔命不同 하였으니, 명이란 그 사람의 분수를 말하는 것이네.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명을 타고난 이상 무슨 원망할 까닭이 있으랴. 그런데 새우젓을 먹게 되면 달걀이 먹고 싶고 갈포옷을 입게 되면 모시옷이 입고 싶어지게 마련이니, 천하가 이로부터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고 농토가 황폐하게 되는 것이지. 진승(陳勝) · 오광(吳廣) · 항적(項籍)의 무리들은 그 뜻이 어찌 농사일에 안주할 인물들이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짐을 짊어져야 할 사람이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불러들일 것이다.’ 한 것도 이를 두고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의리에 맞지 않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준다 하여도 불결한 것이요 아무런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그 이름에 썩는 냄새가 나게 될 걸세. 그런 까닭에 사람이 죽었을 때 입속에다 구슬을 넣어 주어 그 사람이 깨끗하게 살았음을 나타내 주는 걸세.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이상을 통해 나는 깨끗한 가운데서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서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네. 나는 먹고사는 일에 아주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데, 엄 행수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었지. 진실로 마음속에 좀도둑질할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엄 행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를 더 확대시켜 나간다면 성인(聖人)의 경지에도 이를 것일세.

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그 티를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 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걸세.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하였다.

 

 

[D-001]선귤자(蟬橘子) : 이덕무의 호() 중의 하나이다.

[D-002]종본탑(宗本塔) : 미상(未詳)이다. 현재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圓覺寺址)의 석탑白塔을 가리킨다. 박제가(朴齊家) 정유문집(貞蕤文集) 1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 의하면, 한때 그 부근에 연암과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이 살았다고 한다.

[D-003]벗이란 …… 같다 :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 수록된 이덕무의 적언찬(適言讚) 찬지칠(讚之七) 간유(簡遊)에 나오는 말이다.

[D-004]열악한 곳 : 원문은 下流이다. 논어 자장(子張) 그러므로 군자는 하류(下流)에 거처하기를 싫어한다. 천하의 더러운 것이 모두 모여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D-005]살곶이箭串 : 현재 서울 성동구에 있는 뚝섬의 옛 이름 중의 하나이다.

[D-006]상상전(上上田) : 토지의 질에 따라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토지를 상 ·  · 하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상 ·  · 하로 나누어 모두 9등급을 두었다. 상상전은 최상급의 토지를 말한다.

[D-007]자신의 …… 대은(大隱) : () 나라 때의 동방삭(東方朔)이나 위진(魏晉)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D-008]이른 …… 때문이라 : 시경 소남(召南) 소성(小星)의 한 구절이다.

[D-009]진승(陳勝) · 오광(吳廣) · 항적(項籍) : 진승과 오광은 진() 나라 때 함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항적은 곧 항우(項羽)이니, 그의 자()가 우()이다.

[D-010]짐을 …… 것이다 : 주역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민옹전(閔翁傳)

 

 

민옹이란 이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무신년 난리에 출정하여 그 공으로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그 뒤로 집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였다. 유독 옛사람들의 뛰어난 절개와 위대한 자취를 사모하여 강개(慷慨)히 분발하였으며, 그들의 전기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7세 때에는 벽에다 큰 글씨로 항탁(項槖)이 스승이 되었다.”라고 썼으며, 12세 때에는 감라(甘羅)가 장수가 되었다.”고 하고, 13세 때에는 외황(外黃) 고을 아이가 유세를 하였다.”고 썼으며, 18세 때에는 더욱 쓰기를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祈連山)에 나갔다.”고 했으며, 24세 때에는 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고 썼다. 40세가 되었으나 더욱더 이름을 날린 바가 없었기에 마침내 맹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크게 써 놓았다. 이렇게 해마다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벽이 다 온통 새까맣게 되었다. 70세가 되자 그의 아내가 조롱하기를,

 

영감, 금년에는 까마귀를 그리려우?”

하니, 옹이 기뻐하며,

 

당신은 빨리 먹을 가시오.”

하고, 마침내 크게 쓰기를,

 

범증(范增)이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하니, 그 아내가 더욱 화를 내면서,

 

계책이 아무리 기발한들 장차 언제 쓰시려우?”

하니, 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강 태공(姜太公) 80살에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하였으니 지금 나는 그에 비하면 젊고 어린 아우뻘이 아니오?”

하였다.

계유 · 갑술년 간, 내 나이 17, 8세 즈음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을 때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서화, 옛 칼, 거문고, 이기(彝器)와 여러 잡물들에 취미를 붙이고, 더욱더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갯소리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나에게 민옹을 소개하면서, 그는 기이한 선비로서 노래를 잘하며 담론도 잘하는데 거침없고 기묘하여 듣는 사람마다 후련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함께 와 달라고 청하였다.

옹이 찾아왔을 때 내가 마침 사람들과 풍악을 벌이고 있었는데, 옹은 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피리 부는 자를 보고 있더니 별안간 그의 따귀를 갈기며 크게 꾸짖기를,

 

주인은 즐거워하는데 너는 왜 성을 내느냐?”

하였다. 내가 놀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옹이 말하기를,

 

그놈이 눈을 부라리고 기를 쓰니 성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므로,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옹이 말하기를,

 

어찌 피리 부는 놈만 성낼 뿐이겠는가. 젓대 부는 놈은 얼굴을 돌리고 울 듯이 하고 있고 장구 치는 놈은 시름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며 온 좌중은 입을 다문 채 크게 두려워하는 듯이 앉아 있고, 하인들은 마음대로 웃고 떠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음악이 즐거울 리 없지.”

하기에, 나는 당장에 풍악을 걷어치우고 옹을 자리에 맞아들였다. 옹은 매우 작은 키에 하얀 눈썹이 눈을 내리덮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유신(有信)이며 나이는 73세라고 소개하고는 이내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병인가? 머리가 아픈가?”

아닙니다.”

배가 아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병이 든 게 아니구먼.”

그리고는 드디어 문을 열고 들창을 걷어 올리니,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음속이 예전과는 아주 다르게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래서 옹에게 말하기를,

 

저는 단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병입니다.”

했더니, 옹이 일어나서 나에게 축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옹은 어찌하여 저에게 축하를 하는 것입니까?”

하니, 옹이 말하기를,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으니 재산이 남아돌 게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 사는 턱이 아닌가.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 살면 오복(五福) 중에 수()와 부() 두 가지는 이미 갖춘 셈이지.”

하였다. 잠시 후 밥상을 들여왔다. 내가 신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음식을 들지 못한 채 이것저것 집어서 냄새만 맡고 있었더니, 옹이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일어나 가려고 하였다. 내가 놀라 옹에게 왜 화를 내고 떠나려 하는지 물었더니, 옹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식사를 차려 내오지 않고 혼자만 먼저 먹으려 드니 예()가 아닐세.”

하였다. 내가 사과를 하고는 옹을 주저앉히고 빨리 식사를 차려 오게 하였더니 옹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 올린 다음 수저를 시원스레 놀려 먹어 대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군침이 돌고 막혔던 가슴과 코가 트이면서 예전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밤이 되자 옹은 눈을 내리감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하였으나, 옹은 더욱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아 나는 꽤나 무료하였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자 옹이 갑자기 일어나서 촛불을 돋우면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릴 적에는 눈만 스쳐도 바로 외워 버렸는데 지금은 늙었소그려. 그대와 약속하여 평소에 못 보던 글을 두세 번 눈으로 읽어 보고 나서 외우기로 하세. 만약 한 자라도 틀리게 되면 약속대로 벌을 받기로 하세나.”

하기에, 나는 그가 늙었음을 업수이여겨,

 

그렇게 합시다.”

하고서, 곧바로 서가 위에 놓인 주례(周禮)를 뽑아 들었다. 그래서 옹은 고공기(考工記)를 집어 들고 나는 춘관(春官)을 집어 들었는데 조금 지나자 옹이,

 

나는 벌써 다 외웠네.”

하고 외쳤다. 그때 나는 한 번도 다 내리 읽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놀라서 옹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옹이 자꾸만 말을 걸고 방해를 하여 나는 더욱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이 와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옹에게 묻기를,

 

어젯밤에 외운 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옹이 웃으며,

 

나는 처음부터 아예 외우지를 않았다네.”

하였다.

하루는 옹과 더불어 밤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옹이 좌객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매도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막아 낼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옹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여 옹에게 물었다.

 

옹은 귀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옹이 눈을 부릅뜨고 물끄러미 둘러보다가 손 하나가 등잔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외치면서,

 

귀신이 저기 있지 않소.”

하였다. 그 손이 노하여 따져 들자,

 

밝은 데 있는 것은 사람이요, 껌껌한 데 있는 것은 귀신인데, 지금 어두운 데 앉아 밝은 데를 보고 제 몸을 감추고 사람들을 엿보고 있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하니,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손이 또 물었다.

 

옹은 신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신선이 어디에 있던가요?”

가난뱅이가 모두 신선이지. 부자들은 늘 세상에 애착을 가지지만 가난뱅이는 늘 세상에 싫증을 느끼거든. 세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옹은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을 보았소?”

보았지. 내가 아침나절 숲 속에 갔더니 두꺼비와 토끼가 서로 나이가 많다고 다투고 있더군. 토끼가 두꺼비에게 하는 말이 나는 팽조(彭祖)와 동갑이니 너는 나보다 늦게 태어났다.’ 하니, 두꺼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더군. 토끼가 놀라 너는 왜 그처럼 슬퍼하느냐?’ 하고 물으니, 두꺼비가 말했지. ‘나는 동쪽 이웃집의 어린애와 동갑인데 그 어린애가 5살 먹어서 글을 배우게 되었지. 그 애는 목덕(木德)으로 태어나서 섭제격(攝提格 인년(寅年))으로 왕조의 기년(紀年)을 시작한 이래 여러 왕대를 거치다가, () 나라의 왕통(王統)이 끊어짐으로써 순수한 역서(曆書) 한 권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진() 나라로 이어졌으며, () 나라와 당() 나라를 거친 다음 아침에는 송() 나라, 저녁에는 명() 나라를 거쳤지. 그러는 동안에 갖가지 일을 다 겪으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으며, 죽은 이를 조문하기도 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어져 왔지. 그런데도 귀와 눈이 밝고 이와 머리털이 갈수록 자라나니, 나이가 많기로는 그 어린애만 한 자가 없겠지. 팽조는 기껏 800살 살고 요절하여 시대를 겪은 것도 많지 않고 일을 겪은 것도 오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나는 슬퍼한 것이다.’ 토끼가 이 말을 듣고는 거듭 절하고 뒤로 물러나 달아나면서 너는 내 할아버지뻘이다.’ 하였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될 걸세.”

옹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보았소?”

보았지. 달이 하현(下弦)이 되어 조수(潮水)가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그 땅을 갈아 염전을 만들고 소금흙을 굽는데, 알갱이가 거친 것은 수정염(水晶鹽)이 되고 가는 것은 소금염(素金鹽)이 된다네. 온갖 음식 맛을 내는 데에 소금 없이 되겠는가?”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불사약(不死藥)만은 옹도 못 보았을 것입니다.”

하니, 옹이 빙그레 웃으며,

 

그거야 내 아침저녁으로 늘 먹는 것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깊은 골짜기의 반송(盤松)에 맺힌 감로(甘露)가 땅에 떨어져 천 년이 지나면 복령(茯靈)이 되지. ()은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이 으뜸인데 모양이 단아하고 붉은빛을 띠며, 사지를 다 갖추고 동자처럼 쌍상투를 틀고 있지. 구기자(枸杞子)는 천 년이 되면 사람을 보고 짖는다 하네. 내가 이것들을 먹은 다음 백 일가량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지냈더니 숨이 차면서 곧 죽을 것만 같았네. 이웃 할머니가 와서 보고는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 ‘그대는 주림병이 들었소. 옛날 신농씨(神農氏)가 온갖 풀을 맛본 다음에야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였소. 무릇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약이 되고 주림병을 고치는 것은 밥이 되니, 그대의 병은 오곡이 아니면 낫지 못하오.’ 하고는 밥을 지어 먹여 주는 바람에 죽지 않았지. 불사약으로는 밥만 한 것이 없네. 나는 아침에 밥 한 사발 저녁에 밥 한 사발로 지금껏 이미 70여 년을 살았다네.”

하였다.

민옹은 말을 할 때면 장황하면서도 이리저리 둘러대지만, 어느 것 하나 곡진히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 속에는 풍자를 담고 있었으니, 그는 달변가라 할 만하다. 손이 옹에게 물을 말이 다하여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분이 올라 하는 말이,

 

옹도 역시 두려운 것을 보았습니까?”

하니, 옹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두려워할 것은 나 자신만 한 것이 없다네. 내 오른 눈은 용이 되고 왼 눈은 범이 되며, 혀 밑에는 도끼가 들었고 팔목은 활처럼 휘었으니, 깊이 잘 생각하면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겠으나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되놈이 되고 만다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 죽이거나 베어 버릴 것이야. 이 때문에 성인은 사심(私心)을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 것이며 사악함을 막아 진실된 자신을 보존한 것이니, 나는 나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하였다.

수십 가지 난제(難題)를 물어보아도 모두 메아리처럼 재빨리 대답해 내 끝내 아무도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추어올리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한 반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조롱도 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옹의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어도 옹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가 말하기를,

 

황해도는 황충(蝗蟲)이 들끓어 관에서 백성을 독려하여 잡느라 야단들입니다.”

하자, 옹이,

 

황충을 뭐 하려고 잡느냐?”

하고 물었다.

 

이 벌레는 크기가 첫잠 잔 누에보다도 작으며,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털이 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을 명()이라 하고 볏줄기에 기어오르는 것을 모()라 하는데, 우리의 벼농사에 피해를 주므로 이를 멸구滅穀라 부릅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파묻을 작정이지요.”

하니, 옹이 말하기를,

 

이런 작은 벌레들은 근심할 거리도 못 된다네. 내가 보기에 종루(鐘樓) 앞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황충이오. 길이는 모두 7척 남짓이고, 머리는 까맣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웅얼웅얼 소리를 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며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해치우는 것이 이것들만 한 것이 없더군. 그래서 내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큰 바가지가 없어 아쉽게도 잡지를 못했네.”

하였다.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정말로 이러한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하루는 옹이 오고 있기에, 나는 멀찍이 바라보다가 은어(隱語) 춘첩자방제(春帖子狵啼)’라는 글귀를 써서 보였더니, 옹이 웃으며,

 

춘첩자(春帖子)란 문()에 붙이는 글월이니 바로 내 성 민()이요, ()은 늙은 개를 지칭하니 바로 나를 욕하는 것이구먼. 그 개가 울면 듣기가 싫은데, 이 또한 나의 이가 다 빠져 말소리가 분명치 않은 것을 비꼰 것이로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대가 늙은 개를 무서워한다면 개 견() 변을 떼어 버리면 될 것이고, 또 우는 소리가 싫으면 그 입 구()변을 막아 버리면 그만이지. 무릇 제()란 조화를 부리고 방()은 큰 물건을 가리키니, () 자에 방() 자를 붙이면 조화를 일으켜 큰 것이 되니 바로 용()이라네. 그렇다면 이는 그대가 나를 욕한 것이 아니라, 그만 나를 크게 칭송한 것이 되어 버렸구먼.”

하였다.

다음 해에 옹이 죽었다. 옹이 비록 엉뚱하고 거침없이 살았지만 천성이 곧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 데다, 주역(周易)에 밝고 노자(老子)의 말을 좋아하였으며, 책이란 책은 안 본 것이 없었다 한다. 두 아들이 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은 받지 못했다.

금년 가을에 나의 병이 도졌으나, 이제는 더 이상 민옹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나와 함께 주고받은 은어와 우스갯소리, 담론(談論)과 풍자 등을 기록하여 민옹전을 지었으니, 때는 정축년(1757, 영조 33) 가을이다.

나는 민옹을 위하여 뇌문(誄文 추도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아아! 민옹이시여 / 嗚呼閔翁

괴상하고 기이하기도 하며 / 可怪可奇

놀랍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 可驚可愕

기뻐함직도 하고 성냄직도 하며 / 可喜可怒

게다가 밉살스럽기도 하구려 / 而又可憎

벽에 그린 까마귀 / 壁上烏

매가 되지 못하였듯이 / 未化鷹

옹은 뜻 있는 선비였으나 / 翁蓋有志士

늙어 죽도록 포부를 펴지 못했구려 / 竟老死莫施

내가 그대 위해 전을 지었으니 / 我爲作傳

아아! 죽어도 죽지 않았구려 / 嗚呼死未曾

 

 

[D-001]무신년 난리 : 영조 4(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가리킨다.

[D-002]항탁(項槖)이 스승이 되었다 : 항탁은 7세에 공자(孔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감라(甘羅)가 여불위(呂不偉)를 설득하면서 한 말이다. 戰國策 秦策》 《史記 卷71 甘茂列傳

[D-003]감라(甘羅)가 장수가 되었다 : 이본에는 승상이 되었다로 되어 있다. 여불위는 진() 나라 장수 장당(張唐)이 연() 나라 승상으로 부임하기를 바랐으나, 장당이 이를 거부하자 감라가 그를 대신하여 장당을 설득하고 조() 나라에 가서 유세한 것을 말한다. 감라는 진 나라 명장 감무(甘茂)의 손자로 여불위의 가신(家臣)이었다. 여불위에게 등용되어 12세에 조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 나라를 설득하여 5개의 성을 할양받고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토를 획득하였다. 戰國策 秦策》 《史記 卷71 甘茂列傳

[D-004]외황(外黃) …… 하였다 : 항우가 진류(陳留)의 외항을 공격하였는데 외항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 며칠 후 항복하자 항우가 노하여 15세 이상 남자들을 성의 동쪽에다 파묻으려 하였다. 이에 외황 영(外黃令) 사인(舍人) 13세 된 아들이 항우에게 유세하여 외황 백성들을 살렸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5]곽거병(霍去病) …… 나갔다 : 곽거병이 18세에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 표요교위(剽姚校尉)가 되어 흉노족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기련산에까지 출정하여 공을 세운 것은 그가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된 21세 때의 일이다. 기련산은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경계에 있는 고산(高山)이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太平寰宇記 卷191 匈奴篇

[D-006]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 : 항우는 24세 때 처음 기병(起兵)하여, () 나라 군대에 포위당한 조왕(趙王)을 구하기 위해 오강(烏江)을 건넜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7]맹자는 …… 않았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나는 40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我四十不動心고 하였다.

[D-008]범증(范增) …… 좋아하였다 : 범증은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여, 나이 70세 때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을 찾아가 진() 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9]옛날에 …… 용맹하였으니 :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 태사(太師) 상보(尙父)는 당시 매가 날아오르는 듯하였네.維師尙父 時維鷹揚라는 구절이 있다. 강 태공이 무왕(武王)을 도와 은() 나라를 정벌한 사실을 가리킨다. 단 그때 그의 나이가 80살이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설인지 알 수 없다.

[D-010]계유 · 갑술년 간 : 영조 29(1753)과 영조 30(1754)이다.

[D-011]지금 : 원문은 今者인데, 이본에는 今子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지금 그대는 이다.

[D-012]팽조(彭祖) : 800살까지 살았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유향(劉向) 열선전(列仙傳), 갈홍(葛洪) 신선전(神仙傳) 등에 소개되어 있다.

[D-013]너는 …… 슬퍼하느냐 : 원문은 若乃若悲也인데, 이본에는 若乃何悲也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너는 어째서 슬퍼하느냐?’이다.

[D-014]목덕(木德)으로 …… 이래 : 십팔사략(十八史略) 첫머리에, “천황씨(天皇氏)는 목덕으로 왕이 되니 세성(歲星 : 목성)이 섭제(攝提), 즉 인방(寅方)에 나타났다.”라고 하였는데, 십팔사략에서는 천황씨를 삼황오제(三皇五帝) 이전 중국 최초의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학(初學) 역사 교과서인 십팔사략을 읽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D-015]() 나라의 …… 이루어졌고 : 상고(上古)부터 주 나라 때까지의 정통 왕조의 역사를 섭렵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춘추(春秋)에서는 일 년의 첫 달을 () 왕정월(王正月)”이라 표기하여 주 나라의 왕통을 받들고 있음을 나타냈다. 순수한 역서란 춘추를 가리키는 듯하다.

[D-016]마침내 …… 이어졌으며 : 원문은 乃閏于秦이다. 진 나라와 같이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 왕조는 윤달과 같다고 해서 윤통(閏統)이라 폄하(貶下)한다.

[D-017]팽조는 …… 요절하여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요절한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자가 없으니, 그에 비하면 팽조도 요절한 셈이다.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라고 하였다.

[D-018]반송(盤松) …… 되지 : 복령(茯靈)은 곧 버섯의 일종인 복령(茯苓)을 말한다. 송진松脂이 땅에 스민 지 천 년이 되면 변하여 복령이 되고, 복령이 변하여 호박(琥珀)이 된다고 한다. 廣東通志 卷52 

[D-019]() …… 으뜸인데 : 원문은 蔘伯羅産인데, 우리나라 인삼 중에서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을 나삼(羅蔘)이라 하고, 영동(嶺東)에서 나는 것을 산삼(山蔘)이라 하며,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이라 하고, 집에서 재배하는 것을 가삼(家蔘)이라 한다. 心田考 3 應求漫錄

[D-020]동자처럼 …… 있지 : 쌍상투雙紒는 고대 중국의 예법에 따른 남녀 아동의 머리 모양이다. 居家雜服攷 卷3 幼服 조선 시대의 아동은 변발(辮髮)을 하고 있었는데, 연암은 정온(鄭蘊)이나 송시열 등의 선구적 시도를 계승하여 이를 쌍상투로 개혁하고 싶어했다. 過庭錄

[D-021]이리저리 둘러대지만 : 원문은 遷就而爲之이다.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에서, 대신(大臣)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그에게 분명히 죄가 있어도 그 죄상(罪狀)을 직접 가리켜 말하지 않고 둘러대어 말함으로써 이를 덮어 준다.遷就而爲之諱也고 하였다.

[D-022] …… 되며 : 위엄이 있거나 무시무시한 모습을 용정호목(龍睛虎目)이라 한다.

[D-023]갓난아기처럼 …… 보존하겠으나 : 맹자 이루 하(離婁下) 대인이란 그의 갓난아기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하였다.

[D-024]사심(私心) …… 것이니 : 원문은 克己復禮 閑邪存誠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고, 한사존성(閑邪存誠) 주역 건괘(乾卦) 풀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D-025]()이라네 : ‘ 자를 ‘’ 자로 쓰기도 한다. 원래는 얼룩덜룩할  자로 읽어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광문자전(廣文者傳)

 

 

광문(廣文)이라는 자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녔는데, 거지 아이들이 광문을 추대하여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소굴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날이 몹시 차고 눈이 내리는데, 거지 아이들이 다 함께 빌러 나가고 그중 한 아이만이 병이 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위에 떨며 거듭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였다. 광문이 너무도 불쌍하여 몸소 나가 밥을 빌어 왔는데, 병든 아이를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광문이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다 함께 광문을 두들겨 쫓아내니, 광문이 밤에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의 어느 집으로 들어가다가 그 집 개를 놀라게 하였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아다 꽁꽁 묶으니, 광문이 외치며 하는 말이,

 

나는 날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온 것이지 감히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이 믿지 못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저자에 나가 알아 보십시오.”

하는데, 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집주인이 내심 광문이 도적이 아닌 것을 알고서 새벽녘에 풀어 주었다. 광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떨어진 거적을 달라 하여 가지고 떠났다. 집주인이 끝내 몹시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아 멀찍이서 바라보니, 거지 아이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수표교(水標橋)에 와서 그 시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데, 광문이 다리 속에 숨어 있다가 떨어진 거적으로 그 시체를 싸서 가만히 짊어지고 가, 서쪽 교외 공동묘지에다 묻고서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집주인이 광문을 붙들고 사유를 물으니, 광문이 그제야 그전에 한 일과 어제 그렇게 된 상황을 낱낱이 고하였다. 집주인이 내심 광문을 의롭게 여겨, 데리고 집에 돌아와 의복을 주며 후히 대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광문을 약국을 운영하는 어느 부자에게 천거하여 고용인으로 삼게 하였다.

오랜 후 어느 날 그 부자가 문을 나서다 말고 자주자주 뒤를 돌아보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자물쇠가 걸렸나 안 걸렸나를 살펴본 다음 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몹시 미심쩍은 눈치였다. 얼마 후 돌아와 깜짝 놀라며, 광문을 물끄러미 살펴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다가,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만두었다. 광문은 실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날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지냈으며, 그렇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부자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 부자에게 돌려주며,

 

얼마 전 제가 아저씨께 돈을 빌리러 왔다가, 마침 아저씨가 계시지 않아서 제멋대로 방에 들어가 가져갔는데, 아마도 아저씨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광문에게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에게,

 

나는 소인이다. 장자(長者)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앞으로 너를 볼 낯이 없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러고는 알고 지내는 여러 사람들과 다른 부자나 큰 장사치들에게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두루 칭찬을 하고, 또 여러 종실(宗室)의 빈객들과 공경(公卿) 문하(門下)의 측근들에게도 지나치리만큼 칭찬을 해 대니, 공경 문하의 측근들과 종실의 빈객들이 모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밤이 되면 자기 주인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두어 달이 지나는 사이에 사대부까지도 모두 광문이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에 서울 안에서는 모두, 전날 광문을 후하게 대우한 집주인이 현명하여 사람을 알아본 것을 칭송함과 아울러, 약국의 부자를 장자(長者)라고 더욱 칭찬하였다.

이때 돈놀이하는 자들이 대체로 머리꽂이, 옥비취, 의복, 가재도구 및 가옥 · 전장(田庄) · 노복 등의 문서를 저당잡고서 본값의 십분의 삼이나 십분의 오를 쳐서 돈을 내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광문이 빚보증을 서 주는 경우에는 담보를 따지지 아니하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에 내주곤 하였다.

광문은 사람됨이 외모는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은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하고, 만석희(曼碩戲)를 잘하고 철괴무(鐵拐舞)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 댔는데, 달문은 광문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이 길을 가다가 싸우는 사람을 만나면 그도 역시 옷을 홀랑 벗고 싸움판에 뛰어들어, 뭐라고 시부렁대면서 땅에 금을 그어 마치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는 것을 판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늉을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다 웃어 대고 싸우던 자도 웃음이 터져, 어느새 싸움을 풀고 가 버렸다.

광문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머리를 땋고 다녔다. 남들이 장가가라고 권하면, 하는 말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남들이 집을 가지라고 권하면,

 

나는 부모도 형제도 처자도 없는데 집을 가져 무엇 하리. 더구나 나는 아침이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저자에 들어갔다가, 저물면 부귀한 집 문간에서 자는 게 보통인데, 서울 안에 집 호수가 자그만치 팔만 호다. 내가 날마다 자리를 바꾼다 해도 내 평생에는 다 못 자게 된다.”

고 사양하였다.

서울 안에 명기(名妓)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 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예전에 궁중의 우림아(羽林兒), 각 전(殿)의 별감(別監),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청지기들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운심(雲心)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운심은 유명한 기생이었다. 대청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운심더러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운심은 일부러 느리대며 선뜻 추지를 않았다. 광문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대청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상좌(上坐)에 앉았다. 광문이 비록 해진 옷을 입었으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의기가 양양하였다. 눈가는 짓무르고 눈꼽이 끼었으며 취한 척 게욱질을 해 대고, 헝클어진 머리로 북상투北髻를 튼 채였다. 온 좌상이 실색하여 광문에게 눈짓을 하며 쫓아내려고 하였다. 광문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춰 높으락나지락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 옷을 바꿔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하여 온 좌상이 모두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광문전 뒤에 쓰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몹시 병을 앓아서, 늘 밤이면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을 불러 놓고 여염(閭閻)에서 일어난 얘깃거리 될 만한 일들을 묻곤 하였는데, 대개는 광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그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도 못났었다. 나는 한창 문장을 배우기에 힘쓰던 판이라, 이 전()을 만들어 여러 어른들께 돌려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고문(古文)을 잘 한다는 칭찬을 크게 받게 되었다.

광문은 이때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명성을 남겼고,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났다.

바닷가에서 온 거지 아이 하나가 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에서 빌어먹고 있었다. 밤이 되어 그 절의 중들이 광문의 일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며 흠모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 거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거지 아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마침내 광문의 아들이라 자칭하니, 그 절의 중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이때까지 그에게 밥을 줄 때는 박짝에다 주었는데, 광문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씻은 사발에 밥을 담고 수저에다 푸성귀랑 염장을 갖추어서 매번 소반에 차려 주었다.

이 무렵에 영남에는 몰래 역모를 꾀하는 요사한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아이가 이와 같이 융숭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대중을 현혹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여 가만히 거지 아이를 달래기를,

네가 나를 숙부라 부르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저는 광문의 아우라 칭하고 제 이름을 광손(廣孫)이라 하여 광문의 돌림자를 땄다.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광문은 본래 제 성도 모르고 평생을 형제도 처첩도 없이 독신으로 지냈는데, 지금 어떻게 저런 나이 많은 아우와 장성한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고변(告變)을 하였다. 관청에서 이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 광문과 대질심문을 벌였는데, 제각기 얼굴을 몰랐다. 이에 그 요사한 자를 베어 죽이고 거지 아이는 귀양 보냈다.

광문이 석방되자, 늙은이며 어린애들까지 모두가 가서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게 되었다.

광문이 표철주(表鐵柱)를 가리키며,

너는 사람 잘 치던 표망둥이表望同가 아니냐. 지금은 늙어서 너도 별 수 없구나.”

했는데, 망둥이는 그의 별명이었다. 서로 고생을 위로하고 나서 광문이 물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과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은 무고들 하신가?”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다네.”

김군경(金君擎)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지?”

용호장(龍虎將)이 되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말했다.

이 녀석은 미남자로서 몸이 그렇게 뚱뚱했어도 기생을 껴안고 담을 잘도 뛰어넘었으며 돈 쓰기를 더러운 흙 버리듯 했는데, 지금은 귀인(貴人)이 되었으니 만나 볼 수가 없겠군. 분단(粉丹)이는 어디로 갔지?”

벌써 죽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탄식하며 말했다.

옛날에 풍원군이 밤에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벌인 후 유독 분단이만 잡아 두고서 함께 잔 적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하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모(貂帽)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네. 풍원군이 웃으면서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하고는 곧바로 압수전(壓羞錢) 5000(50)을 주었었지. 나는 그때 분단이의 수파(首帕)와 부군(副裙)을 들고 난간 밑에서 기다리며 시커멓게 도깨비처럼 서 있었네. 풍원군이 방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다가 분단이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저 시커먼 것이 무엇이냐?’ 하니, 분단이가 대답하기를 천하 사람이 다 아는 광문입니다.’ 했지. 풍원군이 웃으며 바로 네 후배(後陪)?’ 하고는, 나를 불러들여 큰 술잔에 술을 한 잔 부어 주고, 자신도 홍로주(紅露酒) 일곱 잔을 따라 마시고 초헌(軺軒)을 타고 나갔지. 이 모두 다 예전 일이 되어 버렸네그려. 요즈음 한양의 어린 기생으로는 누가 가장 유명한가?”

작은아기小阿其라네.”

조방(助房)은 누군가?”

최박만(崔撲滿)이지.”

아침나절 상고당(尙古堂)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네. 듣자니 집을 둥그재圓嶠 아래로 옮기고 대청 앞에는 벽오동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아래에서 손수 차를 달이며 철돌(鐵突)을 시켜 거문고를 탄다고 하데.”

철돌은 지금 그 형제가 다 유명하다네.”

그런가? 이는 김정칠(金鼎七)의 아들일세. 나는 제 애비와 좋은 사이였거든.”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서글퍼하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다 나 떠난 후의 일들이군.”

하였다. 광문은 머리털을 짧게 자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쥐꼬리처럼 땋아 내리고 있었으며, 이가 빠지고 입이 틀어져 이제는 주먹이 들락거리지 못한다고 한다.

광문이 표철주더러 말하였다.

너도 이제는 늙었구나. 어떻게 해서 밥을 먹고사나?”

집이 가난하여 집주릅이 되었다네.”

너도 이제는 궁함을 면했구나. 아아! 옛날 네 집 재산이 누거만(累鉅萬)이었지. 그때에는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그 투구 어따 두었노?”

이제야 나는 세상 물정을 알았다네.”

광문이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네 꼴이 마치 재주를 다 배우고 나니 눈이 어둡다 이로구나.”

하였다.

그 뒤로 광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D-001]추위에 …… 흐느끼는데 : 원문은 寒專纍欷인데, ‘寒專 寒戰 또는 寒顫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纍欷는 거듭 흐느껴운다는 뜻으로, 연암집 10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에도 ‘’累欷掩抑이란 표현이 있다.

[D-002]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 원문은 辭甚樸인데, 이본에는 辭甚款樸이라고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말이 몹시 진실되고 순박하므로이다.

[D-003]수표교(水標橋) :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의 하나로, 홍수에 대비하여 수심을 재는 눈금이 교각(橋脚)에 표시되어 있었다.

[D-004]만석희(曼碩戲) : 개성 지방에서 음력 4 8일에 연희되던 무언 인형극이다. 이 놀이는 개성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미색과 교태에 미혹되어 파계하였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는 속전이 있으며, 일설에는 지족선사가 불공 비용을 만 석이나 받은 것을 욕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고도 한다.

[D-005]철괴무(鐵拐舞)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의 모습을 흉내 내어 추는 춤이다. 이철괴는 그 모습이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에는 때가 자욱하고 배는 훌떡 걷어 올리고 다리는 절뚝거리며 쇠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D-006]비록 …… 마찬가지다 : 원문은 唯女亦然인데, 이 경우  자는 비록이란 뜻으로  자와 같다.

[D-007]우림아(羽林兒) : 궁궐의 호위를 맡은 친위(親衛) 부대 중의 하나인 우림위(羽林衛) 소속의 군인들을 말한다. 우림위는 영조 때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되었다.

[D-008]별감(別監) : 궁중의 하례(下隸)로서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 등에서 잡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왕이 행차할 때 시위와 봉도(奉導)를 맡았다.

[D-009]북상투北髻 : 여자의 쪽머리(낭자머리)를 모방하여 뒤통수에 상투처럼 묶은 머리 모양을 가리킨다. 硏經齋集 外集 卷5 蘭室譚叢 北髻

[D-010]광문에게 …… 하였다 : 원문은 瞬文欲敺之인데, 여기서  의 고자(古字) 쫓아내다로 새겨야 한다.

[D-011]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 : 개령은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에 속하는 고을이고, 수다사는 그 이웃 고을인 선산군(善山郡)에 있다. 신라 때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D-012]광문이 석방되자 : 영조 40(1764)에 일찍이 나주(羅州) 괘서(掛書) 사건으로 처형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하징(李夏徵)의 서얼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달손(達孫) 즉 광문의 동생을 자처하면서, 광문의 아들이라는 자근만(者斤萬)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덩달아 체포되었던 광문은 역모 혐의는 벗었으나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推案及鞫案 卷22》 《英祖實錄 40 4 17

[D-013]표철주(表鐵柱) : 실존 인물로서 당시 서울의 무뢰배 조직인 검계(劍契)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자칭 왈짜曰者라고도 하는데, 노름판과 사창가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살인과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D-014]용호장(龍虎將) : 용호영(龍虎營)의 정 3 품 벼슬이다.

[D-015]압수전(壓羞錢) : 부끄러움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주는 돈이다.

[D-016]수파(首帕)와 부군(副裙) : 수파는 여자들의 머리를 감싸는 머릿수건이고, 부군은 덧치마를 가리킨다.

[D-017]후배(後陪) : 뒤를 따르는 하인을 말한다.

[D-018]홍로주(紅露酒) : 소주에다 멥쌀로 만든 누룩과 계피 등을 넣고 우려 만든 약주로, 감홍로(甘紅露), 감홍주(甘紅酒)라고도 부른다.

[D-019]조방(助房) : 기생의 기둥서방으로, 조방(助幇)이라고도 한다.

[D-020]상고당(尙古堂) : 김광수(金光遂)의 호이다. 숙종 22(1696)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서른 살에 진사 급제 후 잠시 인제 군수(麟蹄郡守)를 지냈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3 필세설(筆洗說), 7 관재소장청명상하도발(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21]둥그재圓嶠 : 서대문 밖 아현동 부근에 있었던 고개로, 원현(圓峴)이라고도 한다.

[D-022]철돌(鐵突) : 거문고의 명수로 알려진 실존 인물로, 김철석(金哲石)이라고 한다.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가기(歌妓) 추월(秋月) · 매월(梅月) · 계섬(桂蟾) 등과 한 그룹을 이루어 직업적인 연예 활동으로 자못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D-023]너도 …… 면했구나 : 원문은 汝今免矣인데, 곤궁에서 벗어나는 것을 면궁(免窮)’이라 한다.

[D-024]재주를 …… 어둡다 : ‘복이 박하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62 열상방언(洌上方言) 기술 익히자 눈에 백태 낀다.技纔成 眼有眚는 유사한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반전(兩班傳)

 

양반(兩班)이란 사족(士族)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정선(旌善) 고을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군수가 새로 도임하게 되면 반드시 몸소 그의 집에 가서 인사를 차렸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다 보니, 해마다 쌓여서 그 빚이 천석(千石)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환곡 출납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인가?”

하고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보상을 할 길이 없음을 내심 안타깝게 여겨 차마 가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역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울기만 하고 있으니, 그의 아내가 몰아세우며,

 

당신은 평소에 그렇게도 글을 잘 읽지만 현관(縣官)에게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구려. 쯧쯧 양반이라니, 한 푼짜리도 못 되는 그놈의 양반.”

이라 했다.

그때 그 마을에 사는 부자가 식구들과 상의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높고 귀하며, 우리는 아무리 잘 살아도 늘 낮고 천하여 감히 말도 타지 못한다. 또한 양반을 보면 움츠러들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뜰 아래 엎드려 절해야 하며, 코를 땅에 박고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니 우리는 이와 같이 욕을 보는 신세다. 지금 저 양반이 환곡을 갚을 길이 없어 이만저만 군욕(窘辱)을 보고 있지 않으니 진실로 양반의 신분을 보존 못할 형편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양반을 사서 가져보자.”

하고서 그 집 문에 나아가 그 환곡을 갚아 주겠다고 청하니, 양반이 반색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부자는 당장에 그 환곡을 관에 바쳤다. 군수가 크게 놀라 웬일인가 하며 그 양반을 위로도 할 겸 어떻게 해서 환곡을 갚게 되었는지 묻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그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 아뢰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 붙들며,

 

그대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욕되게 하시오?”

하니까, 양반이 더욱더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땅에 엎드리며,

 

황송하옵니다. 소인놈이 제 몸을 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환곡을 갚기 위하여 이미 제 양반을 팔았으니, 이 마을의 부자가 이제는 양반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예전의 칭호를 함부로 쓰면서 스스로 높은 척하오리까?”

했다. 군수가 탄복하며,

 

군자로다, 부자여! 양반이로다, 부자여! 부자로서 인색하지 않은 것은 의(), 남의 어려운 일을 봐준 것은 인()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바라는 것은 지()라 할 것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양반이로고. 아무리 그렇지만 사적으로 주고받았을 뿐 아무런 증서도 작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소송의 빌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너는 고을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증서를 작성하여 믿게 하자. 군수인 나도 당연히 자수(自手)로 수결(手決)할 것이다.”

했다. 그리고 군수는 관사로 돌아와, 고을 안의 사족(士族) 및 농부, 장인, 장사치들을 모조리 불러다 뜰 앞에 모두 모이게 하고서, 부자를 향소(鄕所)의 바른편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서게 하고 다음과 같이 증서를 작성했다.

 

건륭(乾隆) 10(1745, 영조 21) 9월 모일 위의 명문(明文)은 양반을 값을 쳐서 팔아 관곡을 갚기 위한 것으로서 그 값은 1000섬이다.

대체 그 양반이란, 이름 붙임 갖가지라. 글 읽은 인 선비 되고, 벼슬아친 대부 되고, 덕 있으면 군자란다. 무관 줄은 서쪽이요, 문관 줄은 동쪽이라. 이것이 바로 양반, 네 맘대로 따를지니.

비루한 일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흠모하고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오경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줄줄 외어야 한다.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 타령 아예 말며, 이빨을 마주치고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침을 입 안에 머금고 가볍게 양치질하듯 한 뒤 삼키며 옷소매로 휘양揮項을 닦아 먼지 털고 털무늬를 일으키며, 세수할 땐 주먹 쥐고 벼르듯이 하지 말고, 냄새 없게 이 잘 닦고, 긴 소리로 종을 부르며, 느린 걸음으로 신발을 끌 듯이 걸어야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글자씩 쓴다. 손에 돈을 쥐지 말고 쌀값도 묻지 말고, 날 더워도 발 안 벗고 맨상투로 밥상 받지 말고, 밥보다 먼저 국 먹지 말고, 소리 내어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술 마시고 수염 빨지 말고, 담배 필 젠 볼이 움푹 패도록 빨지 말고, 분 나도 아내 치지 말고, 성 나도 그릇 차지 말고, 애들에게 주먹질 말고, 뒈져라고 종을 나무라지 말고, 마소를 꾸짖을 때 판 주인까지 싸잡아 욕하지 말고, 병에 무당 부르지 말고, 제사에 중 불러 재()를 올리지 말고, 화로에 불 쬐지 말고, 말할 때 입에서 침을 튀기지 말고, 소 잡지 말고 도박하지 말라.

이상의 모든 행실 가운데 양반에게 어긋난 것이 있다면 이 문서를 관청에 가져와서 변정(卞正)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 군수(旌善郡守)가 화압(花押 수결(手決))하고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증서(證署).”

이에 통인(通引)이 여기저기 도장을 찍는데, 그 소리가 엄고(嚴鼓) 치는 것 같았으며, 모양은 북두칠성과 삼성(參星)이 종횡으로 늘어선 것 같았다. 호장(戶長)이 문서를 다 읽고 나자 부자가 어처구니없어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이것뿐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양반은 신선 같다는데,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도 심하게 횡령당한 셈이니, 원컨대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 주옵소서.”

하므로, 마침내 증서를 이렇게 고쳐 만들었다.

 

하느님이 백성 내니, 그 백성은 넷이로세. 네 백성 가운데는 선비 가장 귀한지라, 양반으로 불려지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하고, 문사(文史)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文科) 급제, 작게 되면 진사(進士)로세. 문과 급제 홍패(紅牌)라면 두 자 길이 못 넘는데, 온갖 물건 구비되니, 이게 바로 돈 전대(纏帶), 서른에야 진사 되어 첫 벼슬에 발 디뎌도, 이름난 음관(蔭官)되어 웅남행(雄南行)으로 잘 섬겨진다. 일산 바람에 귀가 희고 설렁줄에 배 처지며, 방 안에 떨어진 귀걸이는 어여쁜 기생의 것이요, 뜨락에 흩어져 있는 곡식은 학()을 위한 것이라. 궁한 선비 시골 살면 나름대로 횡포 부려, 이웃 소로 먼저 갈고, 일꾼 뺏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네 놈 코에 잿물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하고 귀얄수염 다 뽑아도, 감히 원망 없느니라.”

부자가 그 문서 내용을 듣고 있다가 혀를 내두르며,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으로 맹랑한 일이요. 장차 나로 하여금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가서는, 종신토록 다시 양반의 일을 입에 내지 않았다.

 

 

[D-001]한 푼짜리도 …… 양반 : 양반(兩班)을 양반(兩半)으로 풀어 한 냥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풍자한 것이다.

[D-002]벙거지 : 하인들이 쓰던 털모자.

[D-003]향소(鄕所) :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D-004]공형(公兄) : 호장(戶長)과 이방(吏房) 및 수형리(首刑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한다.

[D-005]명문(明文) : 증명서란 뜻으로, ‘적발이라고도 한다.

[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신선전(金神仙傳)

 

 

김 신선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디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의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이지요.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體府洞)에 살고 있는데 그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 봉사(金奉事)라 하더군요. 누각동(樓閣洞) 김 첨지(金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 만호(李萬戶)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三淸洞) 사는 이 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美垣洞) 사는 서 초관(徐哨官)과 모교(毛橋) 사는 장 첨사(張僉使)와 사복천(司僕川) 가에 사는 지 승(池丞)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 조 봉사(趙奉事)라는 분도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가득 심겨져 있고, 계동(桂洞) 유 판관(劉判官)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두 손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金丈人 장인은 노인에 대한 경칭이다.)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쳐 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倉洞)이나 회현방(會賢坊)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 · 배오개 · 구리개 · 자수교(慈壽橋) · 사동(社洞) · 장동(壯洞) · 대릉(大陵) · 소릉(小陵) 등지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暢橋)에 사는 임 동지(林同知)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시오?’ 하였더니,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떱습디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밀 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지요.’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홍기가 나이 열아홉에 장가들어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아들이 겨우 스물 전후이니, 홍기의 나이 지금 쉰 남짓쯤 될 것이다.”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 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컴컴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方術)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1763, 영조 39)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斷髮嶺)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띠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창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 노송나무는 더욱 푸르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菴)에 벽곡(辟穀)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소.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길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은 수미봉(須彌峯)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며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 ‘산에 들어가 있는 사람入山을 신선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이란 너울너울僊僊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D-001]홍기(弘基) : 김홍기는 당시의 실존 인물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3에는 金洪器로 소개되어 있다.

[D-002]윤생(尹生)과 신생(申生)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에서 연암은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에게 여염에서 일어난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물었다고 했는데, 윤생과 신생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D-003]서학동(西學洞) : 한양의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던 동네로, 현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부근이다.

[D-004]누각동(樓閣洞) : 누각골이라고도 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서리(胥吏)들의 거주지로 인왕산 아래 누각이 있었으므로 누각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D-005]미원동(美垣洞) : 미동(美洞)을 가리키는 듯하다. 미동은 현재 을지로 1가 소공동 북쪽에 해당한다.

[D-006]서 초관(徐哨官) : 초관(哨官)은 군대의 편제인 초()의 우두머리로 종 9 품의 벼슬이다.

[D-007]모교(毛橋) : 청계천에 놓인 다리의 하나로, 모전교(毛廛橋)라고도 한다. 현재의 무교동과 서린동의 사거리 지점에 있었다.

[D-008]사복천(司僕川) : 한양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 수송동 일대)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앞의 계천(溪川)이다.

[D-009]지 승(池丞) : ()은 서() · () · () 등 중앙의 각 관청에 있었던,  5 품에서 종 9 품에 걸친 벼슬이다.

[D-010]이문안里門內 : 한양 중부에 있던 동네로, 이문동(里門洞)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삼성타워(예전 화신백화점 자리) 뒤편에서 태화빌딩(옛날 順化宮과 태화관 자리)에 이르는 골목 일대에 해당한다.

[D-011]창동(倉洞) : 남대문 안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부근에 있었던 동네로, 현재 남대문 시장이 있는 남창동 일대이다.

[D-012]동관(董關) …… 소릉(小陵) : 동관은 미상(未詳)이다. 배오개는 현재 종로 4가 인의동에 있었던 고개이고,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던 고개이다. 자수교는 현재 옥인동과 효자동 · 궁정동이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로, 조선 시대에 후궁들의 거처로 쓰인 자수궁(慈壽宮)이 있었던 곳이어서 자수궁교라고도 하였다. 사동은 사직단(社稷壇 : 현재 사직공원) 부근의 동네이다. 장동은 장의동(壯義洞)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효자동 · 궁정동 · 청운동 일대이다. 대릉과 소릉은 각각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가리킨다. 원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중구 정동 일대이다.

[D-013]장창교(長暢橋) :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의 하나로 한양 중부 장통방(長通坊 : 현재 장교동, 관철동 일대)에 있었다. 장창교(長倉橋), 장통교(長通橋), 장교(長橋)라고도 불렸다.

[D-014]홍기가 …… 것이다 :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작품의 서두에서는 김홍기가 16세에 장가들었다고 하였다. 설령 그가 열아홉에 장가들었다고 해도 그때 낳은 아들이 스무 살 전후가 되었다면 홍기의 현재 나이는 마흔 살쯤이라야 한다.

[D-015]그 이듬해 …… 바라보았다 :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연암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2년 뒤인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D-016]선암(船菴) : 내금강(內金剛) 표훈사(表訓寺)에 딸린 암자이다.

[D-017]진주담(眞珠潭) : 금강산 입구 만폭동(萬瀑洞)의 팔담(八潭) 중 가장 장대한 명승지이다.

[D-018]영원(靈源)과 백탑(白塔) : 골짜기의 이름으로, 내금강 명경대(明鏡臺) 구역에 있는 명승지들이다.

[D-019] …… 뿐이었다 : 신선이 득도하여 승천(昇天)한 증거로 흔히 신발만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든다.

[D-020]나는 : 원문은 인데, 이본에는 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자면 는 섬돌의 뜻으로 앞 구에 연결되어 신 두 짝만 섬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로 해석된다.

[D-021]어떤 …… 의미한다 : 석명(釋名)이나 자휘(字彙) 등의 사전류에서  자를 풀이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우상전(虞裳傳)

 

 

일본 관백(關白)이 새로 들어서자, 널리 재정을 비축하고 이궁(離宮)과 별관을 수리하고 선박을 정비하고서, 속국의 각 섬들에서 남다른 재주를 갖춘 검객과 기이한 기예를 갖춘 사람과 서화나 문학에 재능이 있는 인사를 샅샅이 긁어내어, 도읍으로 불러 모아놓고 수년 동안 훈련을 시킨 다음에, 마치 시험 문제 내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우리나라에 사신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3품 이하의 문관을 엄선하여 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사신을 보좌하는 이들도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식견이 많은 자들이었으며, 천문, 지리, 산수(算數), 복서(卜筮), 의술, 관상, 무예에 뛰어난 자들로부터, 피리나 거문고 등의 연주, 해학이나 만담, 음주 가무, 장기, 바둑, 말타기, 활쏘기 등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재주로써 나라 안에서 이름난 자들을 모두 딸려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가장 중하게 여겼으니, 조선 사람이 쓴 글을 한 자라도 얻는다면 양식을 지니지 않아도 천 리를 갈 수 있었다.

사신들이 거처하는 건물은 모두 비췻빛 구리 기와를 이었고 섬돌은 무늬를 아로새긴 돌이었으며 기둥과 난간에는 붉은 옻칠을 하고, 휘장은 화제주(火齊珠), 말갈아(靺鞨芽), 슬슬(瑟瑟) 등으로 치장하고, 식기는 모두 금은(金銀)으로 도금하여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천 리를 가는 동안 그들은 곳곳에 기묘한 볼거리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찮은 포정(庖丁)이나 역부(驛夫)에게까지도 의자에 걸터앉아 발을 비자(枇子)나무로 만든 통에 드리우게 하고 꽃무늬 적삼 입은 왜놈 아이종으로 하여금 씻어 주게 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며 존모(尊慕)의 뜻을 보였으나, 우리 역관들이 호랑이 가죽, 표범 가죽, 담비 가죽, 인삼 등 금지된 물건들을 가져다 보석과 보도(寶刀)와 몰래 바꾸는 바람에 그곳의 거간꾼들이 이익을 노려 재물에 목숨을 걸기를 마치 말이 치달리듯 하니, 그 이후로는 왜인들이 겉으로만 공경하는 척할 뿐 더 이상 문명인으로 존모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상(虞裳)만은 한어(漢語)의 통역관으로 수행하여 홀로 문장으로 일본에 큰 명성을 날렸다. 이에 일본의 이름난 중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운아(雲我) 선생은 둘도 없는 국사(國士)이다.” 라고 하였다. 오사카大阪 이동(以東)에는 중들이 기생처럼 많고 절들이 여관처럼 즐비한데, 도박에 돈을 걸듯이 시문(詩文)을 지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수전(繡牋)과 화축(花軸)을 상에 그득 쌓아놓고, 대개는 어려운 글제와 억센 운()을 내어 궁지에 몰려 했으나 우상은 매번 즉석에서 읊어 대기를 마치 진작에 지어 놓은 것을 외우듯이 하였으며, 운을 맞추는 것도 평탄하고 여유가 있었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며 기운 없는 글귀가 없었다.

그가 지은 해람편(海覽篇)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지 안에 널려 있는 일만 나라가 / 坤輿內萬國

바둑알 놓이듯 별이 깔리듯 / 碁置而星列

머리 틀어 상투 쫒은 우월(于越)의 나라 / 于越之魋結

머리를 박박 깎은 인도의 나라 / 竺乾之祝髮

소매 너른 옷 입은 제로(齊魯)의 나라 / 齊魯之縫腋

모포를 뒤집어쓴 호맥(胡貊)의 나라 / 胡貊之氈毼

혹은 문명하여 위의를 갖추기도 하고 / 或文明魚雅

혹은 미개하여 음악이 요란스럽기만 하네 / 或兜離侏佅

무리로 나뉘고 끼리끼리 모여서 / 群分而類聚

온 땅에 펼쳐진 게 모두 인간인데 / 遍土皆是物

일본이란 나라를 볼작시면 / 日本之爲邦

깊은 파도 넘실대는 섬나라 / 波壑所蕩潏

숲 속엔 부목이 울창하여 / 其藪則搏木

그곳에선 해돋이를 볼 수 있고 / 其次則賓日

여인네 하는 일은 비단에 수놓기요 / 女紅則文繡

토산품은 등자와 귤이며 / 土宜則橙橘

고기 중에 괴이한 게 낙지라면 / 魚之怪章擧

나무 중에 기이한 건 소철이라네 / 木之奇蘇鐵

그 진산(鎭山)과 방전(芳甸 방초 무성한 들판) / 其鎭山芳甸

구진성(句陳星)처럼 차례로 섬들이 늘어서 있어 / 句陳配厥秩

남북으론 가을과 봄이 다르고 / 南北春秋異

동서로는 낮과 밤이 갈라지도다 / 東西晝夜別

중앙은 그릇 엎어 놓은 것과 같아서 / 中央類覆敦

꼭대기엔 태곳적 눈이 영롱하네 / 嵌空龍漢雪

그늘로 소 떼를 뒤덮는 큰 나무와 / 蔽牛之鉅材

까치 잡는 데나 쓰이는 흔한 옥돌과 / 抵鵲之美質

단사나 금이나 주석들이 / 與丹砂金錫

모두 다 산에서 흔히 나온다네 / 皆往往山出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 大阪大都會

진기한 보물들은 용궁의 보물을 다 털어낸 듯 / 瓌寶海藏竭

기이한 향은 용연향(龍涎香)을 사른 것이요 / 奇香爇龍涎

보석은 아골석(雅鶻石)을 쌓아 놓았네 / 寶石堆雅骨

입에서 뽑은 코끼리 어금니 / 牙象口中脫

머리에서 잘라낸 무소뿔 / 角犀頭上截

페르시아의 상인들도 눈이 부셔하고 / 波斯胡目眩

절강의 저자들도 빛이 바랬네 / 浙江市色奪

온 섬이 지중해를 이루어 / 寰海地中海

오만 가지 산 것들이 구물거려라 / 中涵萬象活

돛을 펼친 후어(鱟魚)의 등이며 / 鱟背帆幔張

깃발을 달아맨 해추(海鰌)의 꼬리며 / 鰌尾旌旗綴

다닥다닥 붙은 굴은 벌집 같은데 / 堆壘蠣粘房

굴 더미 등에 진 거북은 소굴에서 쉬네 / 屭贔龜次窟

산호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珊瑚海

번쩍번쩍 음화가 타오르고 / 煜耀陰火烈

검푸른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紺碧海

노을 비치어 갖가지 빛깔이로세 / 霞雲衆色設

수은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水銀海

수만 개가 뿌려진 큰 별 작은 별 / 星宿萬顆撒

커다란 염색가게로 문득 변하니 / 忽變大染局

천 필의 능라 비단 찬란도 하고 / 綾羅爛千匹

커다란 용광로로 문득 변하니 / 忽變大鎔鑄

오금의 빛이 터져 퍼지네 / 五金光迸發

용이 하늘을 가르며 힘차게 나니 / 龍子劈天飛

천 벼락 만 번개가 치고 / 千霆萬電戞

발선과 마갑주는 / 髮鱓馬甲柱

신비하고 기괴해 마구 얼을 빼네 / 秘怪恣怳惚

백성들은 알몸에다 관을 썼는데 / 其民裸而冠

독하게 쏘아 대니 속이 전갈 같구나 / 外螫中則蝎

일 만나면 죽 끓듯 요란 떨고 / 遇事則麋沸

사람을 모략할 땐 쥐처럼 교활하네 / 謀人則鼠黠

이익을 탐낼 땐 물여우가 독을 쏘듯 / 苟利則蜮射

조금만 거슬려도 돼지처럼 덤벼들고 / 小拂則豕突

계집들은 남자에게 농지거리 잘하고 / 婦女事戱謔

아이들은 잔꾀를 잘 부리네 / 童子設機括

조상은 등지면서 귀신에 혹하고 / 背先而淫鬼

살생을 즐기면서 부처에 아첨하네 / 嗜殺而侫佛

글자는 제비 꼬락서니 못 면하고 / 書未離鳥鳦

말은 때까치 울음소리나 다를 바 없네 / 詩未離鴃舌

남녀간은 사슴처럼 문란하고 / 牝牡類麀鹿

또래끼린 물고기처럼 몰려다니며 / 友朋同魚鱉

씨부려 대는 소린 새 지저귀듯 / 言語之鳥嚶

통역들도 잘 알지 못한다네 / 象譯亦未悉

진귀한 풀과 나무들은 / 草木之瓌奇

나함조차 자기 책을 불사를 지경 / 羅含焚其帙

수없이 뻗어 있는 물길들은 / 百泉之源滙

역생조차 항아리 속 진디등에로 만드네 / 酈生瓮底蠛

요사스러운 수족들은 / 水族之弗若

사급조차 도설을 덮게 하고 / 思及閟圖說

도검에 새겨진 꽃무늬와 글자들은 / 刀劒之款識

정백이 속편을 다시 지어야 하리 / 貞白續再筆

지구상의 차이며 / 地毬之同異

섬들의 등급에 관해서는 / 海島之甲乙

서태 이마두가 / 西泰利瑪竇

치밀하고 명쾌하게 밝혀 놓았네 / 線織而刃割

무식한 제가 이 시를 지어 바치노니 / 鄙夫陳此詩

말은 촌스러도 뜻은 퍽 진실하이 / 辭俚意甚實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큰 계략 있으니 / 善隣有大謨

잘 구슬려서 화평을 잃지 마소 / 羈縻和勿失

 

위의 시로 볼 때 우상 같은 자는 이른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겠는가. 신종(神宗)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우리나라를 엄습하여, 우리의 삼도(三都)를 유린하고 우리의 노약자들을 코를 베어 욕보였으며 왜철쭉과 동백을 우리나라 각지에 심었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이 의주로 피난을 가서 천자께 사연을 아뢰자, 천자가 크게 놀라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으로 구원을 보냈다. 당시에 대장군(大將軍)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 마귀(麻貴) · 유정(劉綎) · 양원(楊元)은 모두 다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으며, 어사(御史) 양호(楊鎬) · 만세덕(萬世德) · 형개(邢玠)는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고 도략이 귀신을 놀래킬 만했으며, 그 군사 역시 모두 진봉(秦鳳) · 섬서(陝西) · 절강(浙江) · 운남(雲南) · 등주(登州) · 귀주(貴州) · 내주(萊州)의 날랜 기병과 활 잘 쏘는 군사들이며, 대장군의 가동(家僮) 1000여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이었다. 그런데도 끝내 왜적과 화평을 맺고 겨우 나라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사신의 행차가 자주 에도江戶를 내왕하였다. 그러나 사신으로서 체통을 지키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치중하느라 그 나라의 민요, 인물(人物), 요새, 강약(强弱)의 형세에 대해서는 마침내 털끝만큼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왔다갔다만 하였다. 그런데 우상은 힘으로는 붓대 하나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 나라의 정화(精華)를 붓끝으로 남김없이 빨아들여 섬나라 만리의 도성(都城)으로 하여금 산천초목이 다 마르게 하였으니, 비록 붓대 하나로써 한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상의 이름은 상조(湘藻)이다. 일찍이 손수 제 화상(畵像)에 제()하기를,

 

 

공봉백(供奉白)과 업후필(鄴侯泌) / 供奉白鄴侯泌

철괴와 합쳐 창기가 되니 / 合鐵拐爲滄起

옛 시인과 옛 선인 / 古詩人古仙人

옛 산인이 모두 다 이씨(李氏)라네 / 古山人皆姓李

 

했는데, ()는 그의 성이요, 창기(滄起)는 그의 또 다른 호이다.

대체로 선비란 자신을 알아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고 자신을 몰라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지 못하는 법이다. 교청(鵁鶄 푸른 백로)과 계칙(鸂鶒 자원앙(紫鴛鴦))은 새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새이지만, 그럼에도 제 깃털에 도취되어 물에 비추어 보고 서 있다가 다시 하늘을 맴돌다 내려앉거늘, 사람이 지닌 문장을 어찌 고작 새 깃털의 아름다움에 비하겠는가. 옛날에 경경(慶卿)이 밤에 검술을 논하자 합섭(蓋聶)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어 나가게 하였으며,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연주하자 형가(荊軻)가 화답하여 노래하더니 이윽고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붙들고 운 일이 있었다. 무릇 그 즐거움이야 극에 달했겠지만, 더 나아가 울기까지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 복받쳐서 엉겁결에 슬퍼진 것이다. 비록 그 당사자에게 물어본다 해도 역시 그때 제 마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문장으로써 서로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이 어찌 구구한 검사(劒士)의 한 기예 정도에 비할 뿐이겠는가? 우상은 아마도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일까? 그의 말에 어쩌면 그렇게도 슬픔이 많단 말인가? 그의 시에,

 

 

닭의 머리 위 벼슬은 높기가 관과 같고 / 鷄戴勝高似幘

소의 축 처진 멱미레는 크기가 전대 같네 / 牛垂胡大如袋

집에 있는 보통 물건이란 하나도 기이할 것 없지만 / 家常物百不奇

크게 놀랍고 괴이한 건 낙타의 등이로세 / 大驚怪槖駝背

 

하였으니, 우상은 늘 자신을 남다르게 여겼던 것이다.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그동안 지어 놓은 작품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누가 다시 알아주겠는가.”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공자가 말하기를,

 

재주 나기가 어렵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하였다. 자공(子貢)이 묻기를,

 

저는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호련(瑚璉)이다.”

하였다. 이는 자공의 재주를 칭찬하면서도 작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그릇에 비유되고 재주는 그 속에 담기는 물건에 비유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결이 쪼록쪼록 저 옥 술잔이여, 황금빛 울창주가 그 속에 들었도다.”라 했고, 주역에 이르기를 솥이 발이 부러져 공()의 먹을 것이 엎어졌도다.” 했으니, 덕만 있고 재주가 없으면 그 덕이 빈 그릇이 되고, 재주만 있고 덕이 없으면 그 재주가 담길 곳이 없으며, 있다 해도 그 그릇이 얕으면 넘치기가 쉽다. 인간은 천지(天地)와 나란히 서니 바로 삼재(三才)가 된다. 그러므로 귀신은 재()에 속하며 천지는 큰 그릇이 아니겠는가? 깔끔을 떠는 자에게는 복이 붙을 데가 없고, 남의 정상(情狀)을 잘 꿰뚫어 보는 자에게는 사람이 붙지를 않는 법이다. 문장이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다. 오묘한 근원에서 정화(精華)를 끄집어내고, 형적이 없는 데서 숨겨진 이치를 찾아내어 천지 음양의 비밀을 누설하니, 귀신이 원망하고 성낼 것은 뻔한 일이다. 재목 중에 좋은 감이 있으면 사람이 베어 갈 생각을 하고, 재물 중에 좋은 감이 있으면 사람이 뺏어 갈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재목 재() 자와 재물 재() 자 속에 있는 ()’ 자의 글자 모양이 밖으로 삐치지 않고 안으로 삐치는 것이다.

우상은 일개 역관에 불과한 자로서,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소문이 제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벼슬아치들이 그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다 밖 만리의 나라에 드날리고, 몸소 곤어(鯤魚)와 고래와 용과 악어의 소굴까지 뒤졌으며, 솜씨는 햇빛과 달빛으로 씻은 듯 환히 빛났고, 기개는 무지개와 신기루에 닿을 듯이 뻗치었다. 그러므로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 것이며,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본해(勝本海)를 지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맨발의 왜놈 사내 몰골조차 괴상한데 / 蠻奴赤足貌魀

압색의 윗도리 등엔 별과 달이 그려져 있네 / 鴨色袍背繪星月

꽃무늬 적삼 입은 계집들 달음질해 문 나서니 / 花衫蠻女走出門

머리 빗다 못 마친 양 그 머리 동여 맸네 / 頭梳未竟髽其髮

어린아이 칭얼대며 어미 젖을 빨아 대니 / 小兒號嗄乳母乳

어미가 등을 토닥이자 울음소리 잦아드네 / 母手拍背鳴嗚咽

이윽고 북 울리며 관인이 들어오니 / 須臾擂鼓官人來

오만 눈이 둘러싸고 활불인 양 여기누나 / 萬目圍繞如活佛

왜놈 관리 무릎 꿇고 절하며 값진 보물 올리는데 / 蠻官膜拜獻厥琛

산호랑 대패를 소반 받쳐 내오누나 / 珊瑚大貝擎盤出

주인과 손님이 늘어섰으나 실로 벙어리인 양 / 眞如啞者設賓主

눈짓으로 말을 하고 붓끝으로 얘기하네 / 眉睫能言筆有舌

왜놈의 관부(官府)에도 정원 풍취 풍부하여 / 蠻府亦耀林園趣

종려나무 푸른 귤이 뜨락에 가득 찼네 / 栟櫚靑橘配庭實

 

배 안에서 치질 병이 생겨 매남노사(梅南老師)의 말을 누워 생각하며 다음의 시를 지었다.

 

 

공자의 유교와 석가의 불교는 / 宣尼之道麻尼敎

각각 경세와 출세로서 해라면 달이로세 / 經世出世日而月

서양 선비 일찍이 오인도 가 보았으나 / 西士嘗至五印度

과거나 현재에 부처 하나 없었다오. / 過去現在無箇佛

유가에도 장사꾼이 있기로는 마찬가지 / 儒家有此稗販徒

붓과 혀를 까불려서 괴이한 말 퍼뜨려 / 弄筆舌神吾說

산발을 하고 뿔이 난 채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 披毛戴角墜地犴

생시에 남 속인 죄 마땅히 받으리라 / 當受生日欺人律

해독의 불길이 진단의 동쪽에도 미쳐 와서 / 毒焰亦及震旦東

화려하고 큰 절들이 도시와 시골에 널렸구려 / 精藍大衍都鄙列

섬 백성 흘겨보며 화복으로 겁을 주니 / 睢盱島衆怵禍福

향화(香火)라 공양미가 끊일 날이 없고말고 / 炷香施米無時缺

비하자면 제 자식이 남의 자식 죽여 놓고 / 譬如人子戕人子

들어와 봉양하면 어느 부모 좋아하리 / 入養父母必不說

육경이 중천에서 밝은 빛을 비추는데 / 六經中天揚文明

이 나라 사람들은 눈에 옻칠한 듯하네 / 此邦之人眼如漆

양곡이나 매곡이 이치가 둘이겠나 / 暘谷昧谷無二理

순종하면 성인 되고 배반하면 악인 되네 / 順之則聖背檮杌

우리 스승 나더러 대중에게 고하라기 / 吾師詔吾詔介衆

목탁 대신 이 시 지어 네거리에 울리노라 / 以詩爲金口木舌

 

우상의 이러한 시들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다. 나중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들렀더니 그새 이 시들이 모두 책으로 인출(印出)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상과는 생전에 상면이 없었다. 그러나 우상은 자주 사람을 시켜 나에게 시를 보여 주며 하는 말이,

 

유독 이분만이 나를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했다기에, 나는 농담 삼아 그 사람더러 이르기를,

 

이거야말로 오농(吳儂)의 간드러진 말투이니 너무 잗달아서 값나갈 게 없다.”

했더니, 우상이 성을 내며,

 

창부(傖夫)가 약을 올리는군!”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에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고 두어 줄의 눈물을 쏟았다기에, 나 역시 듣고서 슬퍼했다.

얼마 후 우상이 죽으니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의 집안사람이 꿈속에서, 신선이 술에 취하여 푸른 고래를 타고 가고 그 아래로 검은 구름이 드리웠는데 우상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 후에 우상이 죽으니, 사람들 가운데는 우상이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들 말하기도 하였다. ! 나는 일찍이 속으로 그 재주를 남달리 아꼈다. 그럼에도 유독 그의 기를 억누른 것은, 우상이 아직 나이 젊으니 머리를 숙이고 도()로 나아간다면, 글을 저술하여 세상에 남길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우상은 필시 나를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상의 죽음에 대해 만가(輓歌)를 지은 이가 있어 노래하기를,

 

 

오색을 두루 갖춘 비범한 새가 / 五色非常鳥

우연히도 지붕 꼭대기에 날아 앉았네 / 偶集屋之脊

뭇사람들 다투어 달려가 보니 / 衆人爭來看

놀라 일어나 홀연 자취를 감추었네 / 驚起忽無跡

 

하였고, 그 두 번째 노래에,

 

 

까닭 없이 천금을 얻고 나면은 / 無故得千金

그 집엔 재앙이 따르는 법 / 其家必有災

더구나 이처럼 세상에 드문 보배를 / 矧此稀世寶

오래도록 빌릴 수 있으리요 / 焉能久假哉

 

하였고, 그 세 번째 노래에,

 

 

조그마한 하나의 필부였건만 / 渺然一匹夫

죽고 나니 사람 수가 준 걸 알겠네 / 死覺人數減

세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 豈非關世道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많다마는 / 人多如雨點

 

하였다. 또 노래하기를,

 

그 사람은 쓸개가 박마냥 크고 / 其人膽如瓠

그 사람은 눈빛이 달같이 밝고 / 其人眼如月

그 사람은 팔목에 귀신 붙었고 / 其人腕有鬼

그 사람은 붓끝에 혀가 달렸네 / 其人筆有舌

 

하였고, ,

 

 

남들은 아들로써 대를 잇지만 / 他人以子傳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 虞裳不以子

혈기야 때로는 끊어지지만 / 血氣有時盡

명성은 끝질 날이 없으리 / 聲名無窮已

 

하였다.

나는 이전에 우상을 보지 못하여 매양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 문장까지 불살라서 남은 것이 없다 하니, 세상에 그를 알 사람이 더욱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자 속에 오래 수장한 것을 꺼내어 그가 예전에 보여 준 것을 찾았는데, 겨우 두어 편뿐이었다. 이에 모조리 다 기록하여 우상전을 지었다.

우상에게 아우가 있는데, 그 역시도  이하 원문 빠짐 

 

 

[D-001]일본 …… 들어서자 : 관백은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한다는 뜻으로, 막부(幕府)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10 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 1761(영조 37) 정식으로 관백에 즉위하였다.

[D-002]속국 : 당시 일본은 기내(畿內) 5(), 동해도(東海道) 15, 동산도(東山道) 8, 북륙도(北陸道) 7, 산음도(山陰道) 8, 산양도(山陽道) 8, 남해도(南海道) 6, 서해도(西海道) 9국 등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蜻蛉國志 卷2 輿地

[D-003]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 영조 39(1763) 정사(正使) 조엄(趙曮), 부사(副使) 이인배(李仁培), 종사관(從事官) 김상익(金相翊)을 통신사(通信使)의 삼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D-004]섬돌은 …… 돌이었으며 : 원문은 除嵌文石인데, 무늬 있는 돌로 된 궁궐의 섬돌을 문석계(文石階)’ 또는 문석지계(文石之階)’라고 한다.

[D-005]화제주(火齊珠) : 보석의 일종으로 청색, 홍색, 황색 등 빛깔이 다양하다. 매괴주(玫瑰珠)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유리(琉璃)라고도 한다.

[D-006]말갈아(靺鞨芽) : 보석의 일종으로 붉은빛을 띤다. 홍마노(紅瑪瑙)라고도 하며 주로 말갈 지역에서 생산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D-007]슬슬(瑟瑟) : 보석의 일종으로 푸른빛을 띤다. 녹주(綠珠)라고도 한다.

[D-008]우상(虞裳) : 이언진(李彦瑱 : 1740~1766)의 자()이다. 호는 운아(雲我), 송목관(松穆館) 등이다.

[D-009]해람편(海覽篇) : 이언진의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수록되어 있다. 송목관신여고 1860년에 저자의 시문(詩文) 잔편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본으로서 같은 해에 중국과 조선 두 곳에서 함께 출간되었다. 중국본은 이상적(李尙迪)이 간행한 목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고, 조선본은 후손 이진명(李鎭命) 등이 간행한 활자본(한국문집총간 252)이다. 그리고 청장관전서 1809년경에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재편한 것을 1900년대 초에 등사한 본(한국문집총간 258)으로서 이들 송목관신여고 2종을 포함한 4종의 판본 사이에는 글자나 구절상의 차이가 다소 있다.

[D-010]대지 …… 나라가 : 마테오리치利瑪竇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리킨다.

[D-011]소매 …… 나라 : 제로(齊魯)는 제 나라와 노 나라로,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문화국가이다. 공자는 노 나라에서 성장하여 소매 너른 옷을 입었다고 한다. 禮記 儒行 봉액(縫腋)은 봉액(逢掖)이라고도 하며, 옷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복장을 가리킨다.

[D-012]모포를 …… 나라 : 호맥(胡貊)은 중국 북방에 사는 흉노(匈奴) 등의 민족을 가리킨다.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부목(搏木) : 부상(扶桑), 부상(榑桑), 부상(搏桑)이라고도 하며, 전설상 해 돋는 곳에서 자란다는 신목(神木)이다. 일본을 가리키기도 한다.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14]나무 …… 소철이라네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15]구진성(句陳星) : 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별로, 모두 6개의 소성(小星)으로 이루어져 있다.

[D-016]그늘로 …… 나무 :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장석(匠石)이 제() 나라에 가서 신목(神木)을 보았는데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그늘로 가릴 정도나 된다.” 하였다.

[D-017]까치 …… 옥돌 : 환관(桓寬) 염철론(鹽鐵論), “곤륜산(崑崙山) 근처에서는 박옥(璞玉)으로 까치를 잡는다.” 하였다. 즉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아주 흔하게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D-018]진기한 ……  :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이 구절 다음에 빛나는 것은 수시은(朱提銀)이요 둥근 것은 말갈아(靺鞨芽)요 붉은 것 푸른 것은 화제주(火齊珠)와 슬슬(瑟瑟)이라네.光者是朱提 圓者是靺鞨 赤者與綠者 火齊映瑟瑟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19]용연향(龍涎香) : 고래의 분비물로 만든 명향(名香)의 이름이다.

[D-020]아골석(雅鶻石) : 슬슬(瑟瑟)과 비슷한 청록색 보석이다.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D-021]절강의 …… 바랬네 :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수레를 밀며 떼 지어 몰려가니 수많은 거간꾼들 늘어섰는데却車而攈至 駔儈千戶埒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22]돛을 …… 등이며 : 후어(鱟魚)는 참게를 말한다. 등 위에는 7, 8() 되는 껍질이 있는데 바람이 없으면 이 껍질을 눕히고 바람이 불면 이 껍질을 돛처럼 펴서 바람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酉陽雜俎

[D-023]깃발을 …… 꼬리며 : 해추(海鰌)는 꼬리지느러미가 솟아 있는 긴흰수염고래를 말한다. 유순(劉恂) 영표록이(嶺表錄異)에 의하면 그 지느러미가 붉은 깃발을 흔드는 것 같다고 하였다.

[D-024]다닥다닥 붙은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 청장관전서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5]음화(陰火) : 산호가 물 속에서 내는 빛을 가리킨다.

[D-026]오금(五金) : 황색의 금, 백색의 은, 적색의 구리, 청색의 납, 흑색의 철을 가리킨다.

[D-027]하늘을 가르며 : 원문의 劈天 송목관신여고에는 擘天으로 되어 있다.

[D-028]천 벼락 …… 치고 : 이 구절이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千電萬霆戞’, 조선본에는 雷霆極閃戞로 되어 있고,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동쪽 구름 사이론 용의 비늘과 발톱이 번뜩이고 서쪽 구름 사이론 지체가 드러났네.東雲閃鱗爪 西雲露肢節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29]발선(髮鱓)과 마갑주(馬甲柱) : 발선은 드렁허리의 일종이다. 마갑주는 살조개, 또는 꼬막이라고 하며, 그 육주(肉柱)가 맛있다.

[D-030]죽 끓듯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조선본과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31]조금만 거슬려도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로 되어 있다.

[D-032]글자는 …… 면하고 : 원문의 鳥鳦 鳦鳥 즉 제비를 뜻한다. 한자의 초서체(草書體)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히라카나平假名가 제비 모양과 같다고 풍자한 것이다. 송목관신여고에는 鳥鳦 鳥跡으로 되어 있는데, ‘鳥跡은 조전(鳥篆), 즉 새의 형태와 같은 장식을 가하여 전체(篆體) 비슷하게 된 예술적인 자체(字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춘추전국 시대에 유행하였다. 따라서 鳥跡으로 하면 일본의 글자 모양과는 무관하게 된다.

[D-033]말은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34]때까치 울음소리 : 다른 나라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鴃舌이라고 한다.

[D-035]남녀간은 사슴처럼 문란하고 : 예기 곡례 상(曲禮上) 저 금수(禽獸)만은 예가 없다. 그러므로 부자가 암컷을 공유한다.父子聚麀고 하였다.

[D-036]또래 : 원문의 友朋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朋流로 되어 있다.

[D-037]새 지저귀듯 : 원문의 鳥嚶 송목관신여고에는 啁啾로 되어 있다.

[D-038]통역들도 …… 못한다네 : 이 구절이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鞮象譯未悉로 되어 있다.

[D-039]나함(羅含) : 동진(東晉) 때의 인물로서 상수(湘水) 지역의 산수를 다룬 상중산수기(湘中山水記)를 저술하였다.

[D-040]역생(酈生) : 북위(北魏) 때의 인물인 역도원(酈道元 : 466~527)을 가리킨다. 그는 중국지리학의 명저인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하였다.

[D-041]항아리 속 진디등에 : ‘우물 안 개구리와 비슷한 말로 식견이 좁다는 뜻이다.

[D-042]사급(思及) :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艾儒略 : Julio Aleni, 1582~1649의 자()이다. 그는 명 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와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권두에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수록한 뒤 아시아 등 오대주에 대해 기록하고 사해총설(四海總說)을 덧붙여 각국의 풍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D-043]꽃무늬와 글자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44]정백(貞白) : () 나라 때의 인물인 도홍경(陶弘景 : 452~536)의 시호이다. 그는 역대 제왕들과 각국 인물들의 도검(刀劍)에 대하여 기술한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을 저술하였다.

[D-045]서태(西泰) 이마두(利瑪竇) : 서태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자()이다. ‘西泰 송목관신여고에는 서양을 뜻하는 泰西로 되어 있다.

[D-046]치밀하고 …… 놓았네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D-047]말은 촌스러도 : 원문의 辭俚意 송목관신여고에는 語俚義로 되어 있다.

[D-048] …… 마소 : 기미(羈縻)란 말에 굴레를 씌우거나 소에 고삐를 매어 통제한다는 뜻으로, 억센 상대를 회유(懷柔)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은 주변의 이민족(異民族)들에 대해 잘 구슬리면서 외교 관계를 끊지 않는羈縻勿絶 정책을 취하였다.

[D-049]삼도(三都) : 경주東都, 한양, 평양西都을 가리킨다.

[D-050]진봉(秦鳳) : 봉상부(鳳翔府)의 진계(秦階), 농봉(隴鳳) 일대를 가리킨다. 大淸一統志

[D-051]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유주와 계주의 치소(治所)는 각각 지금의 북경(北京)과 하북성 계현(薊縣)에 있었다.

[D-052]상조(湘藻) : 상조는 이언진이 스스로 지은 또 하나의 이름이다. 淸脾錄 卷3 李虞裳

[D-053]공봉백(供奉白) : () 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공봉한림(供奉翰林)에 제수되었으므로 공봉백이라 한 것이다.

[D-054]업후필(鄴侯泌) : 당 나라 문장가 이필(李泌 : 722~789)을 가리킨다. 신선술을 좋아하였다. 업후(鄴侯)에 봉하여졌으므로 업후필이라 한 것이다.

[D-055]철괴(鐵拐)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를 가리킨다.

[D-056]공봉백(供奉白) …… 이씨(李氏)라네 : 이 시는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 동호거실(衕衚居室)’이라는 제목의 장편 육언시 중의 한 수로 수록되어 있고, 원문의 古詩人古仙人 古山人皆姓李 송목관신여고에는 古詩人古山人 古仙人皆姓李로 되어 있다.

[D-057]옛날에 …… 있었다 : 형가(荊軻)는 전국 시대 말기 위() 나라 사람으로 위 나라에서는 경경(慶卿)으로 불렸다. () 나라가 위 나라를 멸망시키자 연() 나라로 망명한 다음 연 나라 태자 단()과 모의하여 진왕(秦王) ()을 죽이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형가가 어느날 유차(楡次) 고을을 지나다가 합섭(蓋聶)과 검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합섭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자 형가가 그만 기분이 상해 나가 버렸다. 또 형가가 연 나라에 가서 고점리와 시장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한 고점리가 축()을 연주하자 형가가 이에 화답하여 노래를 부르고 이어 주위도 아랑곳 않고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가에게 있어서 합섭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 해당하고 고점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 해당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D-058]닭의 …… 등이로세 : 이 시 또한 송목관신여고 동호거실(衕衚居室)’의 한 수로 수록되어 있다.

[D-059]재주 …… 아니겠는가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D-060]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 논어 팔일(八佾)에 보인다.

[D-061]자공(子貢) …… 호련(瑚璉)이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호련은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는 데 쓰는 그릇이다.

[D-062]시경(詩經)…… 했고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나오는 구절이다.

[D-063]주역 …… 했으니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의 효사이다. 구사는 대신(大臣)의 지위를 상징하고, ()은 임금을 가리킨다. 소인(小人)이 대신의 중책을 감당하지 못해 국사를 그르친다는 뜻이다.

[D-064]귀신은 재()에 속하며 : 예기 예운(禮運) 그러므로 사람이란 천지(天地)의 덕()이며, 음양이 서로 교통하고, 귀신이 서로 만난 것이다.鬼神之會也라고 하였다. ()는 형체(形體), ()은 정령(精靈)을 뜻한다.

[D-065]곤어(鯤魚) : 북쪽 대해(大海)에 산다는 큰 물고기이다. 莊子 逍遙遊

[D-066]솜씨는 …… 빛났고 : 원문은 手沐日月이다. () 임금이 남악(南岳)에 올라 금간옥자(金簡玉字)의 비서(秘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목일욕월(沐日浴月)’ 운운한 표현이 있었다고 한다. ‘목일욕월은 햇빛과 달빛으로 목욕한 듯이 윤택하다는 뜻이다. 庾仲雍 荊州記

[D-067]재물을 …… 다름없다 : 주역 계사전(繫辭傳),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고, 얼굴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음심(淫心)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慢藏誨盜, 冶容誨淫 하였다.

[D-068]물고기란 …… 된다 : 노자  장자(莊子) 거협(胠篋),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나라의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하였다.

[D-069]승본해(勝本海) : 승본(勝本)은 현 장기현(長崎縣) 북쪽 일기도(壹岐島)에 소속된 지명으로 그 일대의 바다를 승본해라 한다.

[D-070]압색(鴨色)의 윗도리 : 오리 머리 빛깔인 녹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압두록(鴨頭綠)이라고도 한다. ‘ 우에노기누라고 하는 윗도리를 말한다.

[D-071]꽃무늬 적삼 : 원문의 花衫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花裙으로 되어 있다.

[D-072]울음소리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73]관인(官人) : 우리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D-074]대패(大貝) : 바닷조개 중 가장 크다는 거거(車渠)와 흡사한 조개의 일종이다. 껍질은 장식품으로 쓴다.

[D-075]말을 하고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76]왜놈의 …… 풍부하여 : 이 부분이 송목관신여고에는 蠻府亦解園林趣로 되어 있다.

[D-077]맨발의 …… 찼네 : 이 시는 일기도(壹岐島)’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다.

[D-078]석가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에는 ’,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79]일찍이 : 원문의  청장관전서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80]오인도(五印度) 가 보았으나 : 인도를 오천축(五天竺)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가 동, , , , 중의 5부로 구획되어 있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16세기에 인도에 진출한 사실을 가리킨다.

[D-081]장사꾼 : 원문의 俾販徒 송목관신여고에는 稗販徒’, 청장관전서에는 裨販徒로 되어 있다.

[D-082]괴이한 말 : 원문은 吾說인데,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83]산발을 …… 하니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84]생시에 ……  : 원문의 日欺 송목관신여고에는 前誣’, 청장관전서에는 日誣로 되어 있다.

[D-085]진단(震旦)의 동쪽 : 일본을 가리킨다. 진단은 고대 인도에서 중국을 일컫던 말이다.

[D-086]절들이 : 원문의  송목관신여고 청장관전서에는 로 되어 있다.

[D-087]향화(香火) …… 없고말고 : 원문의 無時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長無로 되어 있다.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부처를 받들면서 부처가 싫어하는 것 되레 좋아하여 물고기 구워 먹고 회 쳐 먹고 마구마구 죽여 대니好佛反好佛所惡 燒剔魚鼈恣屠殺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D-088]육경이 …… 비추는데 : 원문의 揚文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揭文’, 조선본에는 揭大로 되어 있다.

[D-089]양곡(暘谷)이나 매곡(昧谷) : 양곡은 해 뜨는 곳, 매곡은 해 지는 곳을 가리킨다.

[D-090]우리 ……고하라기 : 원문의 전후에 있는 가 모두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91]공자의 …… 울리노라 : 마지막 구 以詩爲金口木舌  송목관신여고에는 로 되어 있다. 이 시는 일양의 배 안에서 혜환노사의 말씀을 생각하며壹陽舟中念惠寰老師言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는데, 혜환(惠寰)은 이언진의 스승 이용휴(李用休 : 1708~1782)의 호이다.

[D-092]오농(吳儂)의 간드러진 말투 : 오농은 오() 나라 사람, 즉 화려하고 세련됨을 추구한 강남(江南)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 시대 때 오 나라 땅이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말투가 간드러진 느낌을 주었으므로 오농연어(吳儂軟語)’ 오농교어(吳儂嬌語)’니 하였다. 원문의 오농세타(吳儂細唾)’도 같은 뜻의 말이다.

[D-093]창부(傖夫) : 창부는 시골뜨기라는 뜻으로, 강남 사람들이 중원(中原) 사람들을 비하하여 부른 말이다. 오 나라 출신인 육기(陸機)가 동생 육운(陸運)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문학적 경쟁 상대로서 중원 출신인 좌사(左思) 창부라 비웃은 적이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左思 여기서 이언진은 자신과 연암의 관계를 육기와 좌사의 관계에 비긴 것이다.

[D-094]만가(輓歌)를 지은 이 :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 만이우상(挽李虞裳)’이라는 제목의 오언고시 10수가 실려 있으며 그 작자가 이용휴(李用休)로 되어 있다. 연암은 그 중 5수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D-095]놀라 일어나 : 원문의 驚起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飛去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유실됨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유실됨

 

외숙 지계공(芝溪公)의 말씀을 듣건대, “역학대도전은 당시에 선비로서의 명성을 빌려 권세와 이권을 몰래 사들여 기세등등한 자가 있어서 부군(府君)이 이 글을 지어 기롱한 것인데, 대개 노소(老蘇)의 변간론(辨姦論)과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패가망신 당하자, 부군이 마침내 이 글을 불살라 버렸으니, 대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자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편 우상전에 결락이 있고 하편들이 유실된 것은 권질(卷帙)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함께 없어진 것이다.” 하였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이상 아홉 편의 전은 다 아버님이 약관 시절에 지은 것으로서, 집에 장본(藏本)이 없어 매번 남들에게서 얻어 왔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이들 작품을 없애 버리라고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젊었을 적에 작가에 뜻을 두어 작문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도 더러 이 작품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셨다. 불초한 우리 형제가 비록 아버님의 명을 받들고는 싶지만, 사람들이 전파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에 이러한 일로 외숙 지계공께 상의를 드렸더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선공(先公)이 지은 논설 중에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것이 많다. 반면에 이 작품들은 사실 저술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니 있건 없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더구나 젊었을 때의 작품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예로부터 문장가들에게는 이와 같이 유희 삼아 지어 보는 작품이 없지 않았으니, 반드시 폐기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양반전 한 편은 속된 말이 많아서 조그마한 흠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실로 왕포(王褒)의 동약(僮約)을 모방하여서 지은 것이니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으므로, 불초한 우리 형제가 감히 함부로 취사(取舍)를 할 수 없어, 별집(別集)의 말미에 붙여 둔다.

아들 종간이 삼가 쓰다.

 

[D-001]지계공(芝溪公) :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이다. 호를 지계(芝溪)라 하였다.

[D-002]노소(老蘇) : 소식(蘇軾)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을 가리킨다. 소순은 변간론(辨姦論)을 지어 왕안석(王安石)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D-003]종간(宗侃) :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의 초명(初名)이다. 그의 형 박종의(朴宗儀)는 백부 박희원(朴喜源)의 양자가 되었다.

[D-004]왕포(王褒)의 동약(僮約) : 노비 계약을 다룬 글로서 그 내용은, 왕포가 양혜(楊惠)라는 과부의 집에 들렀다가 오만하게 술심부름을 거부하는 양혜의 노비 편료(便了)를 샀는데, 그 노비문서에서 노비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 조항까지도 세세하게 밝혀 놓음으로써 편료를 길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왕포는 전한(前漢) 시대의 인물로 사부(辭賦)에 능했다. 古文苑 卷17 僮約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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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7권 별집 - 종북소선(鍾北小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7권 별집 - 종북소선(鍾北小選)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7권 별집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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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1 자서(自序)

2 낭환집서(蜋丸集序)

3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

4 우부초서(愚夫艸序)

5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6 북학의서(北學議序)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8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9 영처고서(嬰處稿序)

10 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11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12 영재집서(泠齋集序)

13 순패서(旬稗序)

14 염재기(念齋記)

15 관재기(觀齋記)

16 선귤당기(蟬橘堂記)

17 애오려기(愛吾廬記)

18 환성당기(喚醒堂記)

19 취미루기(翠眉樓記)

20 이당(李唐)의 그림에 제()하다.

21 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발문

22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발문

23 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4 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5 담헌(湛軒)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26 우인(友人)의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에 제()하다

27 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28 양 호군(梁護軍) 묘갈명

29 취묵와(醉黙窩) 김군(金君) 묘갈명

30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자서(自序)

 

, 포희씨(庖犧氏)가 죽은 뒤로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벌레의 촉수(觸鬚), 꽃술, 석록(石綠), 비취(翡翠)의 깃털에 이르기까지도 그 문장의 정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으며, 솥 발, 병 허리, 해 고리, 달 시울에도 그 자체(字體)가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바람과 구름, 천둥과 번개, 비와 눈, 서리와 이슬 및 새와 물고기, 짐승과 곤충 등이 웃고 울고 지저귀는 소리에도 성() · () · () · ()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을 읽지 않으면 그림을 알지 못하고, 그림을 알지 못하면 글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포희씨가 주역을 만들 적에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 땅을 관찰하여 홀수인 양효(陽爻)와 짝수인 음효(陰爻)를 배가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그림이 되었으며, 창힐씨(蒼頡氏)가 문자를 만들 적에도 사물의 정()과 형()을 곡진히 살펴서 상()과 의()를 전차(轉借)한 것에 불과하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에도 소리가 있는가?

이윤(伊尹)이 대신(大臣)으로서 한 말과 주공(周公)이 숙부(叔父)로서 한 말을 내가 직접 듣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정성스러웠을 것이며, 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의 모습과 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의 모습을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글을 통해 그 목소리를 상상해 보면 아주 간절하였을 것이다.

글에도 빛깔이 있는가?

시경(詩經)에도 있듯이, “비단 저고리를 입으면 엷은 덧저고리를 입고, 비단 치마를 입으면 엷은 덧치마를 입는다네.衣錦褧衣 裳錦褧裳라 하고,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달비도 필요 없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노래한 것이 그 예이다.

어떤 것을 정()이라 하는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른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경()이라 하는가?

멀리 있는 물은 물결이 없고 멀리 있는 산은 나무가 없고 멀리 있는 사람은 눈이 없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요 공수(拱手)하고 있는 사람은 듣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에게 고할 때의 심정과, 버림받은 아들과 홀로된 여인의 사모하는 마음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함께 소리를 논할 수 없으며, 글에 시적인 구상(構想)이 함께 없으면 시경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이별을 겪지 못하고 그림에 고원한 의취(意趣)가 없다면 글의 정()과 경()을 함께 논할 수 없다. 벌레의 촉수나 꽃술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문장의 정신이 전혀 없을 것이요, 기물(器物)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글자를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도 될 것이다.

 

 

[D-001]포희씨(庖犧氏) …… 오래다 : 포희는 복희(伏羲)라고도 하며, 태곳적 중국의 삼황(三皇) 중의 한 사람이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 포희가 천지를 관찰하여 팔괘(八卦)로 된 최초의 ()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문장이 흩어진 지 오래다라는 것은, 포희가 팔괘와 각 효()를 풀이한 문장繫辭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D-002]석록(石綠) : 공작석(孔雀石)이라고도 한다. 녹청색의 아름다운 광물로 장식품이나 안료(顔料)로 쓰인다.

[D-003]비취(翡翠)의 깃털 : 원문은 羽翠인데, ‘翠羽와 같은 뜻이 아닌가 한다. 비취는 물총새로 아름다운 녹색 깃털을 지녔는데, 귀중한 물건으로 여겨져 장식품으로 쓰인다.

[D-004]솥 발 …… 남아 있다 : 솥 정() 자는 솥의 세 발을 상형(象形)으로 나타낸 것이고, 병 호() 자는 병의 허리 부분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해 일() 자는 해의 둥근 고리 모양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고, 달 월() 자는 달의 휜 가장자리인 시울을 상형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뜻이다.

[D-005]사물의 …… 전차(轉借) : 한자(漢字)의 조자(造字) 방법인 육서(六書)’를 가리킨다. 사물의 정()과 형()을 곡진히 살펴서 글자를 만든 것은 지사(指事) 및 회의(會意)와 상형(象形), ()과 의()를 전차한 것은 형성(形聲) 및 전주(轉注)와 가차(假借)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D-006]이윤(伊尹) ……  : 탕왕(湯王)이 죽고 그의 아들 태갑(太甲)이 왕이 되자 이윤이 어린 왕을 훈도하는 글을 올렸다. 서경(書經) 이훈(伊訓) · 태갑(太甲) · 함유일덕(咸有一德) 등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D-007]주공(周公) ……  : 무왕(武王)이 죽고 그의 아들 성왕(成王)이 왕이 되자 무왕의 아우인 주공 단()이 어린 왕에게 안일(安逸)을 경계하는 글을 올려 훈계하였다. 서경 무일(無逸)은 이를 기록한 것이다.

[D-008]아비에게 버림받은 백기(伯奇) : () 나라 선왕(宣王)의 신하인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가 계모(繼母)의 모함을 받아 쫓겨나게 되자 이상조(履霜操)’라는 노래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樂府詩集 琴曲歌辭1

[D-009]기량(杞梁)의 홀로된 아내 : 춘추 시대 제() 나라 대부인 기량이 전사(戰死)하자 그의 아내가 슬퍼하면서 목놓아 크게 울다 강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녀의 여동생이 언니의 이러한 죽음을 애도하여 기량처(杞梁妻)’라는 노래를 지었다. 古今注 音樂

[D-010]비단 저고리를 …… 입는다네 : 시경 정풍(鄭風) ()에 나온다.

[D-011]검은 머리 …… 필요 없네 :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에 나온다. 달비는 여자들이 머리를 장식하기 위해 덧넣은 가발로서 다리라고도 한다.

[D-012]새가 …… 말한다 : () 나라 현종(玄宗)이 양 귀비(楊貴妃)와 사별(死別)한 뒤에, “새가 울고 꽃이 지며 물이 푸르고 산이 푸르니鳥啼花落 水綠山靑 더욱 슬프다고 탄식했다 한다. 여기에서는 花落 花開로 고쳐 인용한 것이다. 說郛 卷111下 楊太眞外傳下

[D-013]멀리 …… 없다 : 산수화에서 원경(遠景)을 간략하게 그리는 수법을 말한 것이다. 왕유(王維)의 산수론(山水論)이나 형호(荊浩)의 화산수부(畵山水賦)에 유사한 구절이 있다.

[D-014]고원한 의취(意趣) : 왕유는 산수론에서 산수를 그릴 때 의취가 붓질보다 우선한다.凡畵山水 意在筆先고 하여, 원경(遠景)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원의(遠意)를 표현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낭환집서(蜋丸集序)

 

 

자무(子務)와 자혜(子惠)가 밖에 나가 노니다가 비단옷을 입은 소경을 보았다. 자혜가 서글피 한숨지으며,

 

, 자기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기 눈으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하자, 자무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낫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 함께 가서 물어보았더니, 선생이 손을 내저으며,

 

나도 모르겠네, 나도 몰라.”

하였다.

옛날에 황희(黃喜) 정승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 딸이 맞이하며 묻기를,

 

아버님께서 이를 아십니까? 이는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옷에서 생기지요?”

하니,

 

그렇단다.”

하므로 딸이 웃으며,

 

내가 확실히 이겼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며느리가 묻기를,

 

이는 살에서 생기는 게 아닙니까?”

하니,

 

그렇고 말고.”

하므로 며느리가 웃으며,

 

아버님이 나를 옳다 하시네요.”

하였다. 이를 보던 부인이 화가 나서 말하기를,

 

누가 대감더러 슬기롭다고 하겠소. 송사(訟事)하는 마당에 두 쪽을 다 옳다 하시니.”

하니, 정승이 빙그레 웃으며,

 

딸아이와 며느리 둘 다 이리 오너라. 무릇 이라는 벌레는 살이 아니면 생기지 않고, 옷이 아니면 붙어 있지 못한다. 그래서 두 말이 다 옳은 것이니라. 그러나 장롱 속에 있는 옷에도 이가 있고, 너희들이 옷을 벗고 있다 해도 오히려 가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땀 기운이 무럭무럭 나고 옷에 먹인 풀 기운이 푹푹 찌는 가운데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은, 옷과 살의 중간에서 이가 생기느니라.”

하였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을 타려고 하자 종놈이 나서며 말하기를,

 

나으리께서 취하셨군요. 한쪽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른 한쪽에는 짚신을 신으셨으니.”

하니, 백호가 꾸짖으며

 

길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가죽신을 신었다 할 것이고, 길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짚신을 신었다 할 것이니, 내가 뭘 걱정하겠느냐.”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논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발만 한 것이 없는데도 보는 방향이 다르면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참되고 올바른 식견은 진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그르다고 여기는 것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땀에서 이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살피기 어렵기는 하지만, 옷과 살 사이에 본디 그 공간이 있는 것이다. 떨어져 있지도 않고 붙어 있지도 않으며, 오른쪽도 아니고 왼쪽도 아니라 할 것이니, 누가 그 중간을 알 수가 있겠는가.

말똥구리蜣蜋는 자신의 말똥을 아끼고 여룡(驪龍)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여룡 또한 자신에게 구슬이 있다 하여 말똥구리의 말똥蜋丸을 비웃지 않는다.

자패(子珮)가 이 말을 듣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로써 내 시집(詩集)의 이름을 붙일 만하다.”

하고는, 드디어 그 시집의 이름을 낭환집(蜋丸集)’이라 붙이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내가 자패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가 정령위인지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격이 아니겠는가. 태현경(太玄經)이 크게 유행하였어도 이 책을 지은 자운(子雲 양웅(揚雄))은 막상 이를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소경이 비단옷을 입은 격이 아니겠는가. 이 시집을 보고서 한편에서 여룡의 구슬이라 여긴다면 그대의 짚신을 본 것이요, 한편에서 말똥으로만 여긴다면 그대의 가죽신을 본 것이리라. 남들이 그대의 시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정령위가 학이 된 격이요, 그대의 시가 크게 유행할 날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이는 자운이 태현경을 지은 격이리라. 여룡의 구슬이 나은지 말똥구리의 말똥이 나은지는 오직 청허선생만이 알고 계실 터이니 내가 뭐라 말하겠는가.”

하였다.

 

 

[C-001]낭환집서(蜋丸集序) : 유득공(柳得恭)의 숙부인 유연(柳璉 : 1741~1788)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는 길강전서(蛣蜣轉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으나, 동일한 작품이다. 길강전(蛣蜣轉)은 유연의 시고(詩藁)로서, 다름 아닌 낭환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낭환집서에서 낭환집의 작자로 소개되어 있는 자패(子珮)는 곧 유연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계명대학교 김윤조(金允朝) 교수의 조언에 의거한 것이다.

[D-001]자무(子務)와 자혜(子惠) : 자무는 이덕무(李德懋)의 자()인 무관(懋官), 자혜는 유득공(柳得恭)의 자인 혜풍(惠風)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D-002]비단옷 ……  : 항우(項羽)가 진 시황의 아방궁을 함락하고 나서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 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라고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史記 卷7 項羽本紀

[D-003]여룡(驪龍)의 구슬 : 여룡은 검은 빛깔의 흑룡을 말한다. 용의 턱밑에는 여의주(如意珠)라는 영묘한 구슬이 있다고 한다.

[D-004]말똥구리蜣蜋 …… 않는다 :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 螗蜋自愛滾丸 不羨驪龍之如意珠 驪龍亦不以如意珠 自矜驕而笑彼蜋丸이라 하여 거의 똑같은 구절이 있다.

[D-005]정령위(丁令威) …… 못하였으니 : 정령위는 한() 나라 때 요동(遼東) 사람으로 신선이 된 지 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고향을 찾아갔으나, 그가 학이 되어 화표주(華表柱)에 앉은 줄을 모르는 한 젊은이가 활로 쏘려고 했으므로 탄식하며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搜神後記 卷1

[D-006]짚신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가죽신으로 되어 있다.

[D-007]가죽신 :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및 기하실시고략 길강전서에는 짚신으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녹앵무경서(綠鸚鵡經序)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가 푸른 앵무새를 얻었는데, 지혜로울 듯하다가도 지혜로워지지 않고 깨우칠 듯하다가도 깨우쳐지지 않기에, 새장 앞으로 가서 눈물을 흘리며, “네가 말을 못하면 까마귀烏鴉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네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야말로 동이(東夷)로구나   자가 이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하니, 갑자기 앵무새의 총기가 트였다. 이에 녹앵무경(綠鸚鵡經)을 짓고 나에게 그 서문을 청해 왔다.

내가 일찍이 흰 앵무새의 꿈을 꾸고서 박수무당을 불러다 꿈 이야기를 들려준 후 점을 쳐 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내 평소에 꿈을 꾸는데, 꿈에서는 밥을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꿈에서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고, 꿈에서는 악취를 맡아도 더럽지 않고, 꿈에서는 향내를 맡아도 향기롭지 않고, 꿈에서는 힘을 써도 강해지지 않고, 꿈에서는 불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네. 혹은 용()이 하늘을 날기도 하고, 혹은 봉황이나 기린이나 귀물(鬼物)이나 이수(異獸)들이 뒤섞이어 달리고 쫓곤 하지. 눈 넷 달린 신장(神將)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입이 등 위에 있고, 이빨에는 칼이 물려져 있고, 손에도 눈이 있으며, 작은 눈에 작은 귀, 큰 입에 큰 코를 가지고 있지. 또 큰 바다에 파도가 넘실대기도 하고 푸른 산이 불에 타기도 하며,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이 내 몸을 휘감아 에워싸기도 하고 천둥과 번개에 놀라 식은땀이 흐르기도 하고, 높은 하늘에 올라 빛나는 구름을 타기도 하지. 9층 누대에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아름다운 단청(丹靑)과 유리 창문에 아름다운 여인들이 눈웃음 지으며 즐거워하고 절묘한 노랫소리 맑게 드날리니 피리 젓대 어우러져 반주하기도 하네. 혹은 매미 날개마냥 몸이 가벼워져 나뭇잎에 붙기도 하고, 지렁이와 싸우기도 하고, 맹꽁이와 함께 웃기도 하며或助蛙笑〕 -  자가 이본에는  자로 되어 있다 , 혹은 담벼락을 뚫고 들어가니 바로 널찍한 집이 있기도 하고, 혹은 높은 손이 되어 큰 깃발과 작은 깃발, 대장기(大將旗)를 휘날리며, 큰 파초선(芭蕉扇)을 받친 초거(軺車)가 백 채나 되기도 한다네. 무슨 망상(妄想)이 이와 같이 뒤죽박죽 나타난단 말인가?”

하니, 박수무당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기를,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를 받을까봐 두렵다. 너는 잘 생각해 보아라. 네가 연단(鍊丹)을 하게 되면 공기 속의 진기(眞氣)만 들이마시고 아무런 음식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며, 점차 가족도 싫어져 집도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저 바위 밑에 거처하면서 아내와 자식을 다 버리고 친구마저 이별하며, 하루아침에 몸이 가벼워져 어깨에는 도토리 나뭇잎을 걸치고 허리에는 범 가죽을 두른 채, 아침에는 창해(滄海)에서 노닐고 저녁에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노닐다가 그 이튿날 낮이나 저녁이 되어 잠시 만에 돌아오는데, 그 사이에 이미 천 년이 지나기도 하고 혹은 팔백 년이 지나기도 한다. 저렇듯이 오래 사는 것을 이름하여 신선(神仙)이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찌할 텐가?”

하였다. 나는 바로 마다하며,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다. 천 년이나 팔백 년이 아침저녁으로 노니는 사이에 지나가 버리다니 어찌 그리 짧은 건가. 내가 장생(長生)한들 누가 다시 나를 알아보겠으며, 어느 친구가 있어 내가 나인 줄 알아보겠는가. 만에 하나라도 다행스럽게 옛집이 허물어지지 않고 마을도 예전 그대로 있으며 자손도 번성하여 8, 9대 또는 10대에 이른다 한들, 내가 내 집에 돌아가면 대문에 들어설 때 잠깐 기쁠 뿐이고 다시금 슬퍼질 것이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가는 목소리로 집안사람들에게 살짝 이르기를, 동산 뒤에 있는 배나무와 부엌에 있는 크고 작은 솥들이며 진주(眞珠)와 보당(寶璫)에 대하여 어떤 게 있고 어떤 게 없는지를 말하여, 그 말이 조금씩 맞아떨어지게 되면, 자손들이 크게 성을 내면서, 저기 어떤 망령된 늙은이냐, 저기 어떤 미친 영감이냐, 저기 어떤 취한 놈이냐 하며 와서 나를 욕하고 지팡이로 나를 쫓아내며 몽둥이로 나를 몰아낼 터이니, 내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나를 증명할 만한 문서도 없으니 관청에 가서 소송한들 어찌하겠는가. 비유하자면 내가 꿈을 꾸는 것과 같아서, 내 꿈은 나만이 꿀 뿐 남들이 내 꿈을 꾸어 주지는 않으니 누가 내 꿈을 믿겠는가.”

하였다. 박수무당이 큰 소리로 외치며 말하기를,

 

온몸이 덜덜 떨리는구나. 죄를 받을까 봐 두렵다.”

하고는, 큰 자비심을 내어 탄식하기를,

 

네 말인즉 크게 맞는 말이다. 너도 알 것이다. 자손과 처첩이 잠시만 이별해 있어도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데, 네가 그들을 연연해서 무엇하겠는가. 서방(西方)에 한 나라가 있으니 세계(世界)의 낙국(樂國)이다. 네가 고행(苦行)을 하여 수양을 혹독하게 하면, 그 나라에 왕생(往生)하여 삼재(三災)에서 벗어나고 줄칼에 쓸려 불에 타 죽는 것剉燒을 면할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 어찌할 텐가?”

하였다. 나는 바로 마다하며,

 

이것도 하나의 망상이다. 이미 왕생이라 말할진대 이승에서 죽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다비(茶毘)를 하여 뼛가루를 날려 버리는데 어찌 줄칼에 쓸려 불에 타 죽는 것을 면한다는 말인가. 지금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고 이렇게 각고의 고행을 하면서 저 내세(來世)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깜깜하고 아득한 그곳이 극락임을 누가 알겠는가. 만약에 내세의 세계가 극락임을 안다면 어찌하여 이승에서는 전생을 모른단 말인가.”

하였다.

이를 듣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진짜 신선이나 부처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닐세. 신선은 신령스럽고 부처는 지혜로운 존재인데 앵무새가 그러한 본성을 지녔으니, 이는 박수무당이 앵무새가 신령스럽고 지혜로워 사람의 말을 잘하는 것을 점친 것일세. 그대의 문장이 앞으로 날로 진보함이 있을 것이네.”

하였다.

! 그 일이 있은 후로 지금 18년이 지났는데 나의 도덕은 날이 갈수록 졸렬해지고 문장은 조금도 진보되지 못했으며, 어리석은 마음과 망상은 꿈을 꾸지 않을 때도 꿈을 꿀 때와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녹앵무경을 보니 앵무새의 둥근 혀와 갈라진 발가락이 완연히 꿈에서 본 것과 같으며, 신령한 본성으로 신묘하게 알아듣고 지혜로운 말이 구슬 구르듯 하여, 신선의 신령함과 부처의 지혜로움을 다했다 할 것이다. 박수무당의 해몽은 아마도 이 점을 두고 한 말이리라.

 

 

[D-001]지혜로울 …… 않기에 : 푸른 앵무새가 스스로 말을 하거나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형(禰衡)의 앵무부(鸚鵡賦) 본성이 지혜로워서 말을 할 줄 알며, 재주가 총명하여 기미를 알아챈다.性辯慧而能言兮 才聰明而識機고 하였다. 文選 卷31

[D-002]까마귀烏鴉 : 이본에는 까치烏鵲로 되어 있다.

[D-003]네 말을 …… 동이(東夷)로구나 : 중국에서 수입된 앵무새이기에 중국어를 하는 앵무새의 말을 자신은 동이(東夷) 즉 조선인이라서 알아듣지 못한다는 자조적(自嘲的) 표현이다. 원문에서는 오랑캐라는 뜻의  자를 기휘(忌諱)하여  자로 바꾸어 놓았다. 원주(原註)는 이 점을 시사하고 있다.

[D-004]녹앵무경(綠鸚鵡經) : 이서구가 북경(北京)에서 수입된 푸른 앵무새를 접한 것을 계기로, 영조 46(1770)에 앵무새에 관한 각종 문헌 기록들을 모아 편찬했다는 책이다. 불리비조편(不離飛鳥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그 내용의 일부가 이규경(李圭景)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48 앵무변증설(鸚鵡辨證說)에 전하고 있다. 또한 이규경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도 녹앵무경서와 그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D-005]이수(異獸) : 이본에는 귀수(鬼獸)’로 되어 있다.

[D-006]신장(神將) : 무속(巫俗)에서 잡귀나 악신을 물리친다는 장수신(將帥神)을 말한다.

[D-007]절묘한 …… 드날리니 : 원문은 妙肉淸颺으로, 반주 없이 부르는 노래를 육성(肉聲) 또는 청창(淸唱)이라 한다.

[D-008]맹꽁이와 …… 하며 : ‘웃기도 하며는 원주에 따라 울기도 하며로 고쳐야 옳다. 조객(弔客)이 오면 상주(喪主)가 사람을 시켜 조객과 함께 곡하도록 하는 것을 조곡(助哭)’이라 한다.

[D-009]삼재(三災) : 불교 용어로, 계산할 수 없는 긴 세월인 겁()의 말년에 일어나는 세 가지 재해를 말한다. 도병재(刀兵災) · 역병재(疫病災) · 기근재(饑饉災)의 소삼재(小三災)가 있고 화재(火災) · 수재(水災) · 풍재(風災)의 대삼재(大三災)가 있다고 한다.

[D-010]줄칼에 ……  : 좌골소신(剉骨燒身)을 말한다. 뼈가 줄칼에 쓸려 가루가 되고 육신이 뜨거운 불에 타는 지옥의 형벌이다.

[D-011]그대의 …… 것이네 : 연암이 흰 앵무새의 꿈을 꾼 것은, 말 잘하는 앵무새처럼 문인으로서 대성할 것을 예언한 것이라는 뜻이다.

[D-012]나의 …… 못했으며 : 문학은 도()를 전달해야 하며, 문인은 글쓰기에 앞서 도덕에 힘써야 한다는 문이재도(文以載道)’ 도문일치(道文一致)’의 문학관을 전제로 한 말이다.

[D-013]갈라진 발가락 : 앵무새는 앞 발가락이 2, 뒷 발가락이 2개로 갈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五洲衍文長箋散稿 卷48 鸚鵡辨證說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우부초서(愚夫艸序)

 

 

상말도 알고 보면 모두가 고상한 말이다. 예를 들어 지금 여염(閭閻)에서는 부스럼을 가리켜 곤데라 하고 식초를 단 것이라고 한다. 어린 계집애가 마을의 할멈이 단 것을 판다는 말을 듣자 그것이 꿀이라 생각하고, 어머니 어깨에 매달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에이, 시다. 어째서 단 것이라고 하는 거야?”

하니, 그 어미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라는 것이로구나. 무릇 예라는 것은 인정(人情)에서 연유된 것이다. 매실(梅實)이란 말만 들어도 저도 모르게 입에 침이 고인다. 그러므로 식초를 음식에 치기 전에는 오히려 그것이 시다고 말하기를 꺼린다. 하물며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부스럼보다 더 더럽게 여기는 것에 있어서랴.”

이에 사소전(士小典)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무릇 귀가 먹어 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귀머거리라 부르지 않고 소곤대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며, 눈이 흐려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장님이라 부르지 않고 남의 흠집을 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며, 혀가 굳고 목소리가 막혀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벙어리라 부르지 않고 남 비평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등이 굽고 가슴이 튀어나온 사람鉤背曲胸 곱사등이을 가리켜 아첨하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며, 혹이 달린 사람을 가리켜 중후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라고 한다. 심지어 네 발가락이나 여섯 손가락, 절름발이나 앉은뱅이처럼 비록 육체는 병신이지만 덕()에는 해가 될 것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오히려 둘러대어 말할 것을 생각하고 곧바로 지적하여 말하는 것을 꺼린다. 하물며 이른바 어리석다고 하는 말은 소인(小人)의 덕이요, 변화될 수도 없는 성품임에 있어서랴. 천하에 치욕스러움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그런데 여경(汝京 유언호(兪彦鎬)) 같은 총명과 예지를 갖춘 사람이 그 어리석음을 자처하고 스스로 우부(愚夫)’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

그의 문집인 연석(燕石)을 읽어 보았더니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혐노(嫌怒)를 범한 것이 퍽이나 많았다. 백가(百家)의 장점을 포용하고 만물(萬物)을 다 감싸 안아 그 정상(情狀)을 터득한 것이 마치 무소뿔에 불을 붙여 비추어 보고 구정(九鼎)에다 그림을 그려 넣은 것과 같았으며, 그 미묘한 데에서 변화하는 것은 알에서 털이 돋기 시작하고 매미의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과 같아서, 운기(雲氣)와 돌고드름까지도 만져 볼 수 있으며 벌레의 촉수와 꽃술까지도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직설적으로 지적하여 말하는 것이 어찌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라 부르는 정도뿐이겠으며, 원망과 노여움을 사게 되는 것이 또한 어찌 식초의 신맛에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뿐이겠는가.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는 것도 오히려 피해야 하거늘 하물며 조물주가 꺼리는 바이겠는가.

무릇 이러한 것을 두려워한다면, 총명(聰明)과 혜지(慧智)와는 반대로 행동하여 자신을 숨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도 또한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게 한다거나 입에서 군침이 돌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아!

 

 

[C-001]우부초서(愚夫艸序) : 유언호(兪彦鎬)의 문집인연석(燕石)에 써 준 서문인 연석서(燕石序)와 거의 같은 글이다. 연석서의 말미에 을미년(1775, 영조 51) 12월에 지었다고 밝혔다.

[D-001]부스럼을 …… 하고 : 원문은 指癤爲麗,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서울 방언에서 부스럼을 곤데라고 하는 것은 곪았다는 의미인 곪은 데요 곱다는 의미인 고운 데가 아닐 것이라고 하면서 지절위려(指癤爲麗)’의 그릇된 해석은 연암의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하였다. 홍기문의 朴燕巖 藝術 思想(조선일보, 1937. 7. 29) 참고.

[D-002]사소전(士小典) : 연암이 연석서를 쓴 영조 51 12월에 이덕무는 사전(士典)  3편으로 구성된 사소절(士小節) 8책을 완성하였다. 사소전은 이 사소절과 같거나 유사한 책이 아닌가 한다.

[D-003]마치 …… 같았으며 : () 나라 사람인 온교(溫嶠)가 무소뿔을 태워 물속을 비추어 보았더니 괴물들이 모조리 정체를 드러냈다는 전설이 있다. 異苑 卷7 () 나라 때에는 구정(九鼎)에다 온갖 사물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백성들이 괴물들을 익히 알아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宣公3 두 가지 비유 모두 사물에 대한 통찰이 비범한 경우를 뜻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달관한 사람에게는 괴이한 것이 없으나 속인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이른바 본 것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관한 사람이라 해서 어찌 사물마다 다 찾아 눈으로 꼭 보았겠는가.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눈앞에 그려 보고, 열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마음속에 설정해 보니, 천만 가지 괴기(怪奇)한 것들이란 도리어 사물에 잠시 붙은 것이며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마음이 한가롭게 여유가 있고 사물에 응수함이 무궁무진하다.

본 것이 적은 자는 해오라기를 기준으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기준으로 학을 위태롭다고 여기니, 그 사물 자체는 본디 괴이할 것이 없는데 자기 혼자 화를 내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자기 생각과 같지 않으면 만물을 모조리 모함하려 든다.

, 저 까마귀를 보라. 그 깃털보다 더 검은 것이 없건만, 홀연 유금(乳金) 빛이 번지기도 하고 다시 석록(石綠) 빛을 반짝이기도 하며, 해가 비추면 자줏빛이 튀어 올라 눈이 어른거리다가 비췻빛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새를 푸른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고, ‘붉은 까마귀라 불러도 될 것이다. 그 새에게는 본래 일정한 빛깔이 없거늘, 내가 눈으로써 먼저 그 빛깔을 정한 것이다. 어찌 단지 눈으로만 정했으리오. 보지 않고서 먼저 그 마음으로 정한 것이다.

,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고정 짓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늘, 또다시 까마귀로써 천하의 모든 색을 고정 지으려 하는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하지만,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른빛과 붉은빛이 그 검은 빛깔 안에 들어 있는 빛인 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 하는 것은 비단 까마귀만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빛깔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옻칠은 검기 때문에 능히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빛깔이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형체가 있는 것치고 맵시가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미인(美人)을 관찰해 보면 그로써 시()를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나직이 숙이고 있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턱을 고이고 있는 것은 한스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홀로 서 있는 것은 누군가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이는 것이고, 눈썹을 찌푸리는 것은 시름에 잠겨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있으면 난간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파초 아래 서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만약 다시 그녀에게 서 있는 모습이 재계(齋戒)하는 것처럼 단정하지 않다거나 앉아 있는 모습이 소상(塑像)처럼 부동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나무란다면, 이는 양 귀비(楊貴妃)더러 이를 앓는다고 꾸짖거나 번희(樊姬)더러 쪽을 감싸 쥐지 말라고 금하는 것과 마찬가지며, ‘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를 요염하다고 기롱하거나 손바닥춤掌舞을 경쾌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은 격이다.

나의 조카 종선(宗善)은 자()가 계지(繼之)인데 시()를 잘하였다. 한 가지 법에 얽매이지 않고 온갖 시체(詩體)를 두루 갖추어, 우뚝이 동방의 대가가 되었다. 성당(盛唐)의 시인가 해서 보면 어느새 한위(漢魏)의 시체를 띠고 있고 또 어느새 송명(宋明)의 시체를 띠고 있다. 송명의 시라고 말하려고 하자마자 다시 성당의 시체로 돌아간다.

, 세상 사람들이 까마귀를 비웃고 학을 위태롭게 여기는 것이 너무도 심하건만, 계지의 정원에 있는 까마귀는 홀연히 푸르렀다 홀연히 붉었다 하고, 세상 사람들이 미인으로 하여금 재계하는 모습이나 소상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손바닥춤이나 사뿐대는 걸음걸이는 날이 갈수록 경쾌하고 요염해지며 쪽을 감싸 쥐거나 이를 앓는 모습에도 각기 맵시를 갖추고 있으니, 그네들이 날이 갈수록 화를 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상에 달관한 사람은 적고 속인들만 많으니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쉬지 않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아!

연암노인(燕巖老人)이 연상각(烟湘閣)에서 쓰노라.

 

 

[D-001]오리를 …… 여기니 : 다리가 짧은 오리가 다리가 긴 학을 넘어지기 쉽다고 비웃는다는 뜻이다. 부단학장(鳧短鶴長)이란 말이 있다. 장자(莊子) 변무(騈拇) 길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며, 짧다고 해서 부족한 것이 아니다. 이런 까닭에 오리는 다리가 짧지만 그 다리를 이어 주면 걱정하고, 학은 다리가 길지만 그 다리를 자르면 슬퍼한다.”고 하였다.

[D-002]양 귀비(楊貴妃) : 당 나라 현종(玄宗)의 애첩이다. 양 귀비가 평소 치통을 앓았는데 그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를 그린 양귀비병치도(楊貴妃病齒圖)가 있다.

[D-003]번희(樊姬)더러 …… 말라고 : 번희는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영현(伶玄)의 애첩이었던 번통덕(樊通德)을 가리킨다. 영현이 번희에게 조비연(趙飛燕)의 고사를 이야기하자, 번희가 손으로 쪽을 감싸 쥐고 서글피 울었다고 한다. 이를 소재로 한 번희옹계(樊姬擁髻)라는 희곡도 있다. 趙飛燕外傳 附 伶玄自敍

[D-004]사뿐대는 걸음걸이蓮步 : () 나라 폐제(廢帝) 동혼후(東昏侯)가 금으로 연꽃을 만들어 땅에다 깔아 놓고 애첩인 반비(潘妃)로 하여금 그 위를 걸어가게 한 후 사뿐대는 걸음걸이를 보고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난다고 하였다. 南史 齊紀下 廢帝東昏侯

[D-005]손바닥춤掌舞 : 한 나라 때 유행한 춤으로 춤사위가 유연하고 경쾌하다. 한 나라 성제(成帝)의 황후인 조비연(趙飛燕)이 잘 추었다고 한다. 장상무(掌上舞) 또는 장중무(掌中舞)라고도 한다.

[D-006]종선(宗善) : 1759~1819. 연암의 삼종형(三從兄)인 박명원(朴明源)의 서장자(庶長子)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D-007]연상각(烟湘閣) : 연암이 안의 현감(安義縣監) 시절 관아(官衙) 안에 지었다는 정각(亭閣) 중의 하나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북학의서(北學議序)

 

 

학문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길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물어야 한다. 심지어 동복(僮僕)이라 하더라도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더 많이 안다면 우선 그에게 배워야 한다. 자기가 남만 같지 못하다고 부끄러이 여겨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면, 종신토록 고루하고 어쩔 방법이 없는 지경에 스스로 갇혀 지내게 된다.

() 임금은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로부터 제()가 되기까지 남들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나는 젊었을 적에 미천했기 때문에 막일에 능한 것이 많았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막일 또한 농사짓고 질그릇을 굽고 고기를 잡는 일 따위였을 것이다. 아무리 순 임금과 공자같이 성스럽고 재능 있는 분조차도, 사물에 나아가 기교를 창안하고 일에 임하여 도구를 만들자면 시간도 부족하고 지혜도 막히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순 임금과 공자가 성인이 된 것은 남에게 잘 물어서 잘 배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쪽 구석 땅에서 편벽된 기운을 타고나서, 발은 대륙의 땅을 밟아 보지 못했고 눈은 중원의 사람을 보지 못했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을 때까지 제 강역(疆域)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학의 다리가 길고 까마귀의 빛이 검듯이 각기 제가 물려받은 천성대로 살았고, 우물의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마냥 제가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고 살아왔다. ()는 차라리 소박한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누추한 것을 검소하다고 여겨 왔으며, 이른바 사민(四民 () · () · () · ())이라는 것도 겨우 명목만 남아 있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는 날이 갈수록 빈약해져만 갔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배우고 물을 줄을 몰라서 생긴 폐단이다.

만일 장차 배우고 묻기로 할진대 중국을 놓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지금의 중국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은 오랑캐들이다.” 하면서 배우기를 부끄러워하여, 중국의 옛법마저도 다 함께 얕잡아 무시해 버린다. 저들이 진실로 변발(辮髮)을 하고 오랑캐 복장을 하고 있지만, 저들이 살고 있는 땅이 삼대(三代) 이래 한(), (), (), ()의 대륙이 어찌 아니겠으며, 그 땅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삼대 이래 한, , , 명의 유민(遺民)이 어찌 아니겠는가. 진실로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울진대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그 규모의 광대함과 심법(心法)의 정미(精微)함과 제작(制作)의 굉원(宏遠)함과 문장(文章)의 찬란함이 아직도 삼대 이래 한, , , 명의 고유한 옛법을 보존하고 있음에랴.

우리를 저들과 비교해 본다면 진실로 한 치의 나은 점도 없다. 그럼에도 단지 머리를 깎지 않고 상투를 튼 것만 가지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고 하면서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산천은 비린내 노린내 천지라 나무라고, 그 인민은 개나 양이라고 욕을 하고, 그 언어는 오랑캐 말이라고 모함하면서, 중국 고유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마저 배척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장차 어디에서 본받아 행하겠는가.

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재선(在先 박제가(朴齊家))이 그가 지은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과 외편(外編)을 보여 주었다. 재선은 나보다 먼저 북경에 갔던 사람이다.

그는 농잠(農蠶), 목축(牧畜), 성곽(城郭), 궁실(宮室), 주거(舟車)로부터 기와, 대자리, ,  등을 만드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배웠다. 시험 삼아 책을 한 번 펼쳐 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熱河日記))과 더불어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어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았다. 이러한 까닭에 그가 진실로 즐거운 마음으로 나에게 보여 준 것이요, 나도 흐뭇이 여겨 3일 동안이나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 이것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진실로 비 뿌리고 눈 날리는 날에도 연구하고, 술이 거나하고 등잔불이 꺼질 때까지 토론해 오던 것을 눈으로 한번 확인한 것뿐이다. 요컨대 이를 남들에게 말할 수가 없으니, 남들은 물론 믿지를 않을 것이고 믿지 못하면 당연히 우리에게 화를 낼 것이다. 화를 내는 성품은 편벽된 기운을 타고난 데서 말미암은 것이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원인은 중국의 산천을 비린내 노린내 난다고 나무란 데 있다.

 

 

[C-001]북학의서(北學議序) : 박제가의 북학의에 붙은 원래의 서문 말미에 신축년(1781, 정조 5) 중양절(重陽節)에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D-001]나는 …… 많았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D-002]심법(心法) : 용심지법(用心之法)을 말한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청 나라 문물의 특장(特長)으로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 즉 규모가 크고 심법이 세밀한 점을 들었다.

[D-003]내가 북경에서 돌아오니 : 연암은 정조 4(1780) 5월부터 10월까지 진하 겸 사은별사(進賀兼謝恩別使)의 일원으로 중국 북경을 다녀왔다.

[D-004]재선은 …… 사람이다 : 박제가는 정조 2(1778) 사은 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의 일원으로 이덕무와 함께 북경을 다녀온 뒤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옛날에 승려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총명하고 영특하고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한번이라도 임금이 그의 계행(戒行)을 존경하고 불전(佛典)에 마음을 두어 그에게 호()를 내리고 예를 달리하여 빈객으로 대우하고 스승으로 맞아들이는 일이 있으면 당시의 사대부들 역시 모두가 그와 함께 어울리기를 즐겨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고행을 하며 숨어 지내고 조용히 있어도 도리어 부귀와 영화가 뒤따른다. 이것이 본디 불문(佛門)의 본분은 아니지만 불교를 권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의 언어와 문장이 찬란하여 볼 만하였다.

국조(國朝) 이래로 유교를 전적으로 숭상하여 사대부들이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데 엄격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스스로 체득하는 선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이른바 이단의 학설마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 그 황폐된 사찰에는 살고 있는 승려들이 여전히 끊이지 않고는 있으나, 모두 궁핍한 백성과 굶주린 종들로서 군역(軍役)을 도피하여 머리 깎고 검은 장삼을 입는 자들이라, 비록 이름은 승려라 하지만 어리석고 혼몽하여 눈으로는 글자 하나 보지 못하는 형편이니, 불교를 금지하지 않아도 그 도()가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나는 항상 명산(名山)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여 명산의 태반을 둘러보았다. 일찍이 특이한 중을 만나 방외(方外)의 교유를 해 보고자 생각하였으나, 산수(山水)에 등림(登臨)할 적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해 쓸쓸히 배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친구인 신원발(申元發 신광온(申光蘊)) · 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과 어울려 백화암(白華菴)에서 함께 잔 적이 있었다. 그때 준()이란 중이 깊은 밤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불등(佛燈)은 밝게 빛나고 선탑(禪榻)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반야심경(般若心經) 법화경(法華經) 등 여러 불경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준에게,

 

네가 불경을 좀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모릅니다.”

하고 사과하기에, 

 

네가 시율(詩律)을 알고 지을 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못합니다.”

하고 또 사과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이 산중에 더불어 교유할 만한 특이한 중이 있느냐?”

했더니, 대답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이튿날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서 일행끼리 말하기를,

 

준공(俊公)은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니, 만약 문자를 조금만 알았다면 시를 꼭 잘 짓지는 못하더라도 시축(詩軸)에 연서(聯書)할 정도는 될 것이요, 담론(談論)이 반드시 심오하지는 못하더라도 회포를 풀기에는 충분할 것이니, 어찌 우리들의 풍류를 돋우어 주지 않았겠는가.”

하면서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일어섰다.

이번에 풍악대사(楓嶽大師) 보인(普印)의 시문(詩文)을 보다가, 미처 다 보기도 전에 탄식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특이한 중을 만나서 방외의 교유를 해 보고자 했으면서도 인공(印公)을 놓쳤구나!”

하였다. 대체로 그는 내원통(內圓通)에서 수행을 하였는데, 그 시기가 바로 내가 관동(關東) 지방을 유람하던 때였다. 그의 문집을 보았더니 준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시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준은 확실히 그의 벗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보인(普印)이라는 특이한 중이 있다고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가? 준이 아마도 나를 속인 것이리라. 나는 여기에서, 보인이 본디 고승이었으나 준이 과연 그를 위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임을 더욱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준이 과연 시에도 능하고 불경의 담론에도 능한 자일 것이니, 준 역시 고승이었을 것이다. 나는 함께 놀았던 준도 몰라보고 놓쳤는데, 하물며 직접 보지도 못한 인공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불교를 권장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그 도()를 믿고 스스로 수행한 것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인공처럼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산에 있어서도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 북으로는 장백산(長白山), 남으로는 지리산(智異山), 서로는 구월산(九月山)이 있다. 내 장차 두루 유람하여 혹시 그런 이를 한번 만나게 된다면 준공에게서 그랬던 것처럼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우선 이 시집에다 서문을 지어 놓는 바이다.

 

 

[D-001]방외(方外)의 교유 : 세속의 예법에서 벗어나 승려나 도인(道人), 은자(隱者)들과 사귀는 것을 말한다.

[D-002]일찍이 …… 있었다 : 박종채(朴宗采) 과정록에 의하면, 연암은 1765(영조 41) 몇몇 친구들과 함께 금강산 일대를 유람하였다.

[D-003]보인(普印) : 1701~1769. 호가 풍악(楓嶽)으로, 금강산의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염불과 참선에 전념하다가 법랍(法臘) 51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비가 금강산 유점사에 세워졌으며, 저서로 시문집인 풍악당집(楓嶽堂集) 1책이 전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씨도서보서(柳氏圖書譜序)

 

 

연옥(連玉)은 인장(印章)을 잘 새겼다. 그는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을 모으고 칼을 밀고 나가는데 눈썹을 찡긋찡긋하며 힘을 쓰더니, 이윽고 허리를 받치고 하늘을 쳐다보며 !’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무관(懋官 이덕무(李德懋))이 지나는 길에 들렀다가 그 모습을 보고 위로하기를,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새겨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건가?”

하였더니, 연옥이 대답하기를,

 

무릇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각각 그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내가 무늬 있는 좋은 돌을 얻었는데 결이 반질반질하고 크기가 사방 한 치로 옥처럼 빛이 난다네. 손잡이 꼭지에다 쭈그리고 앉아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서 으르렁대는 사자를 새겨 놓으면, 나의 문방(文房 서재)을 지키고 문방의 사우(四友 종이, , , 벼루)를 보호할 걸세.  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이라는 여덟 글자를 아름답고 우아하게 종정문(鍾鼎文)과 석고문(石鼓文)의 서체나 조전(鳥篆)과 운전(雲篆)의 서체로 새긴 다음, 서책에다 찍어서 나의 자손들에게 물려준다면 산일(散佚)될 우려가 없어 수백 권이라도 다 보전될 걸세.”

하였다. 무관(懋官)이 허허 웃으며,

 

그대는 화씨(和氏)의 벽()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그야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지.”

하므로,

 

그렇다네. 옛날 진 시황이 6국을 병합한 후 그 옥돌을 깨뜨려 도장을 만들었네. 위에는 푸른 용을 서려 두고 옆에는 움츠린 붉은 용을 새겨, 이것을 자신이 천자(天子)라는 증거물과 사해(四海)를 진정시키는 상징물로 삼고,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네. 그러고는 하는 말이, ‘2, 3세로 내려가 만세(萬世)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였다. 연옥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어린 아들을 무릎에서 밀쳐 내려 놓으며,

 

어찌 네 아비의 머리를 희게 만드느냐?”

하였다.

하루는 그가 전에 수집했던 고금의 인본(印本 인보(印譜))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이 없어졌다.” 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세태를 슬퍼한 것이다. 여기에 함께 적어 두어,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사람을 깊이 경계하는 바이다.

 

 

[D-001]연옥(連玉) : 유연(柳璉 : 1741~1788)의 자이다. 유연은 유득공의 숙부로, 1776(영조 52) 연행(燕行)을 다녀오면서 이름을 유금(柳琴)으로 고쳤다.

[D-002]자네는 …… 새겨서 : 원문은 子之攻堅也인데 攻堅은 원래 견고한 곳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관자(管子) 제분(制分)에 용병술(用兵術)과 관련하여, 상대방의 견고한 곳을 공격하면 쉽사리 패배시킬 수 없으며, 틈이 있는 곳을 파고들어야 신속히 승리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무관의 말은 풍자의 어조를 띤 것이다.

[D-003]백부장(百夫長) : 천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백 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이라 하였다. 書經 牧誓

[D-004]새끼에게 …… 으르렁대는 : 새끼를 기르는 맹수를 유수(乳獸)라 한다. 맹수는 젖을 물려 새끼를 기르는 동안에는 평소보다 더욱 사납다.

[D-005]아조헌원 씨류명련(我祖軒轅氏柳名璉) : 유연의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문화 유씨의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원래 차씨(車氏)로서 차무일(車無一) 38세손이라고 한다. 차씨는 황제(黃帝) 헌원씨의 후손 사신갑(似辛甲)이 조선으로 망명한 뒤 그 후손이 차무일로 변성명함으로써 비롯되었으며, 신라 말에 유씨(柳氏)로 개성(改姓)하였다가, 고려 초에 유차달의 아들 중 장남이 차씨를 계승하고 연안(延安) 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유연(柳璉) 기하실시고략(幾何室詩藁略)에 이와 같은 문화 유씨의 세계(世系)를 노래한 술계(述系)라는 시가 있다.

[D-006]종정문(鐘鼎文) …… 서체 : 종정문은 주로 주() 나라 때의 청동기에 새겨진 문자인 금문(金文)을 말하며, 석고문(石鼓文)은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보존되어 있는 북 모양의 돌에 새겨진 문자를 말한다. 조전(鳥篆)은 전체(篆體)의 고문자(古文字)로 모양이 새의 발자국과 흡사하다 해서 조적서(鳥迹書), 조서(鳥書)라고도 한다. 운전(雲篆) 역시 전체의 고문자로 필획이 구름 같다고 해서 운서(雲書)라고도 한다.

[D-007]사해(四海) …… 상징물 : 이와 유사한 것으로 진규(鎭圭)가 있다. 사방을 진정시킨다는 뜻으로 사방의 진산(鎭山)을 본떠 만든 천자의 홀()을 진규라고 한다.

[D-008]2 …… 전하라 :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시법(諡法)을 없앨 것을 명하면서,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고 후세는 숫자로만 헤아려, 2, 3세라는 식으로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전하라고 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9]그래도 …… 없어졌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수록된 원문을 보면 그래도 예전에는 사관(史官)이 의심나는 내용은 적지 않고 말을 가진 사람이 남에게 빌려 주어 타게 하는 풍습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풍습조차 없어졌다.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로 되어 있다. ‘有馬者借人乘之를 생략하였으나, 실은 생략된 부분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공자가 남에게 말을 빌려 주지 않는 야박한 세태를 비판했듯이, 연암은 남에게 책을 빌려 주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연암집 5 여인(與人) 참조.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처고서(嬰處稿序)

 

 

자패(子佩 유연(柳璉))가 말했다.

 

비루하구나, 무관(懋官)이 시를 지은 것이야말로! 옛사람의 시를 배웠음에도 그와 비슷한 점을 보지 못하겠다. 털끝만큼도 비슷한 적이 없으니 어찌 그 소리인들 비슷할 수 있겠는가? 야인(野人)의 비루함에 안주하고 시속(時俗)의 자질구레한 것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오늘날의 시이지 옛날의 시는 아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여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에서 살필 수 있는 점이다. 옛날을 기준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이 진실로 비속하기는 하지만, 옛사람들도 자신을 보면서 반드시 자신이 예스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를 살펴보던 사람 역시 그때에는 하나의 지금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세월이 도도히 흘러감에 따라 풍요(風謠)도 누차 변하는 법이다. 아침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저녁에는 그 자리를 떠나고 없으니, 천추만세(千秋萬世)토록 이제부터 옛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것은 옛날과 대비하여 일컬어지는 이름이요, ‘비슷하다는 것은 그 상대인 저것과 비교할 때 쓰는 말이다. 무릇 비슷하다고 하는 것은 비슷하기만 한 것이어서 저것은 저것일 뿐이요, 비교하는 이상 이것이 저것은 아니니, 나는 이것이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아직껏 보지 못하였다.

종이가 하얗다고 해서 먹이 이를 따라 하얗게 될 수는 없으며, 초상화가 아무리 실물과 닮았다 하더라도 그림이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사단(雩祀壇) 아래 도저동(桃渚洞)에 푸른 기와로 이은 사당이 있고, 그 안에 얼굴이 붉고 수염을 길게 드리운 이가 모셔져 있으니 영락없는 관운장(關雲長)이다. 학질(瘧疾)을 앓는 남녀들을 그 좌상(座牀) 밑에 들여보내면 정신이 놀라고 넋이 나가 추위에 떠는 증세가 달아나고 만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무서움도 없이 그 위엄스러운 소상(塑像)에게 무례한 짓을 하는데, 그 눈동자를 후벼도 눈을 깜짝이지 않고 코를 쑤셔도 재채기를 하지 않는다. 그저 덩그러니 앉아 있는 소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보건대, 수박을 겉만 핥고 후추를 통째로 삼키는 자와는 더불어 그 맛을 말할 수가 없으며, 이웃 사람의 초피(貂皮) 갖옷을 부러워하여 한여름에 빌려 입는 자와는 더불어 계절을 말할 수가 없듯이, 관운장의 가상(假像)에다 아무리 옷을 입히고 관을 씌워 놓아도 진솔(眞率)한 어린아이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릇 시대와 풍속을 걱정하고 가슴 아파한 사람으로는 역사상 굴원(屈原)만 한 사람이 없는데도, () 나라 풍속이 귀신을 숭상했기 때문에 귀신을 노래한 구가(九歌)를 지었으며, () 나라는 진() 나라의 옛것에 의거하여 진 나라의 땅에서 황제가 되고 진 나라의 성읍에다 도읍을 정하고 진 나라의 백성을 백성으로 삼았으되, 약법삼장(約法三章)에 있어서는 진 나라의 법을 답습하지 않았다.

지금 무관(懋官)은 조선 사람이다. 산천과 기후가 중화(中華) 땅과는 다르고 언어와 풍속도 한당(漢唐)의 시대와 다르다. 그런데도 만약 작법을 중화에서 본뜨고 문체를 한당에서 답습한다면, 나는 작법이 고상하면 할수록 그 내용이 실로 비루해지고, 문체가 비슷하면 할수록 그 표현이 더욱 거짓이 됨을 볼 뿐이다.

우리나라가 비록 구석진 나라이기는 하나 이 역시 천승(千乘)의 나라요, 신라와 고려가 비록 검박(儉薄)하기는 하나 민간에 아름다운 풍속이 많았으니, 그 방언을 문자로 적고 그 민요에다 운()을 달면 자연히 문장이 되어 그 속에서 참다운 이치眞機가 발현된다. 답습을 일삼지 않고 빌려 오지도 않으며, 차분히 현재에 임하여 눈앞의 삼라만상을 마주 대하니, 오직 이 시가 바로 그러하다.

, 시경에 수록된 삼백 편의 시는 조수(鳥獸)와 초목(草木)의 이름을 들지 않은 것이 없고, 여항(閭巷)의 남녀가 나눈 말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패국(邶國)과 회국(檜國) 사이에는 지리적으로 풍토가 같지 않고, 강수(江水)와 한수(漢水) 유역에는 백성들이 그 풍속을 각기 달리하므로, 시를 채집하는 사람이 열국(列國)의 국풍(國風)으로 만들어 그 지방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고찰하고 그 풍속을 파악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무관(懋官)의 이 시가 예스럽지 않은 점에 대해 어찌 다시 의아해하겠는가. 만약 성인(聖人)이 중국에 다시 나서 열국의 국풍을 관찰한다면,  영처고(嬰處稿)를 상고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게 될 것이고, 우리나라 남녀의 성정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를 조선의 국풍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D-001]이것이야말로 …… 점이다 : 원문은 此可以觀인데,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로써 풍속의 성쇠(盛衰) 살필 수 있다.可以觀고 하였다.

[D-002]옛날을 …… 따름이다 : 옛날을 이상화하고 지금을 말세로 여기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복고적 사상을 비판한 말이다.

[D-003]우사단(雩祀壇) : 서울 남산 서편 기슭에 있었던 기우제 지내던 단()이다. 사방이 40척이고, 구망(句芒), 축융(祝融), 후토(后土), 욕수(蓐收), 현명(玄冥), 후직(后稷)을 모셨다. 유월 상순에 제사를 드렸다. 남관왕묘(南關王廟)가 그 부근인 남대문 밖 도저동(桃渚洞)에 있었는데 선조(宣祖) 때 명 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세웠다고 한다.

[D-004]구가(九歌) : 태일신(太一神)인 동황태일(東皇太一), 구름신인 운중군(雲中君), 상수(湘水)의 신인 상군(湘君),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상부인(湘夫人) 등 귀신들을 노래한 11수로 되어 있다.

[D-005]약법삼장(約法三章) : 한 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은 진 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한 뒤, 진 나라의 가혹하고 번다한 법률 대신 삼장(三章), 즉 살인자는 죽이고 상해자와 도적은 처벌한다는 세 가지 법만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史記 卷8 高祖本紀

[D-006]실로 : 원문은 로 되어 있는데,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7]시경 …… 없고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시경(詩經)의 시를 공부하면 조수와 초목의 이름을 많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D-008]여항(閭巷) …… 않는다 : 주자(朱子)는 시집전서(詩集傳序)에서 시경의 국풍(國風)은 여항의 가요에서 나온 것이 많으며, 남녀가 함께 노래하면서 각자의 감정을 말한 것이라 하였다.

[D-009]우리나라 남녀의 성정 : 원문은 貊男濟婦之性情인데, ‘貊男은 강원도 남자, ‘濟婦는 제주도 여자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한다. 강원도는 옛날에 맥국(貊國)의 땅이었다고 한다. 연암집 3 送沈伯修出宰狼川序 또한 연암집 7 ‘이방익의 사건을 기록함(書李邦翼事)’에서 제주도 사람을 제인(濟人)’이라 표현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언도필첩서(炯言桃筆帖序)

 

 

아무리 작은 기예(技藝)라 할지라도 다른 것을 잊어버리고 매달려야만 이루어지는 법인데 하물며 큰 도()에 있어서랴.

최흥효(崔興孝)는 온 나라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시권(試卷)을 쓰다가 그중에 글자 하나가 왕희지(王羲之)의 서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는, 종일토록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 시권을 품에 품고 돌아왔다. 이쯤 되면 이해득실 따위를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이징(李澄)이 어릴 때 다락에 올라가 그림을 익히고 있었는데 집에서 그가 있는 곳을 몰라서 사흘 동안 찾다가 마침내 찾아냈다. 부친이 노하여 종아리를 때렸더니 울면서도 떨어진 눈물을 끌어다 새를 그리고 있었다. 이쯤 되면 그림에 온통 빠져서 영욕(榮辱)을 잊어버렸다고 이를 만하다.

학산수(鶴山守)는 온 나라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산속에 들어가 소리를 익힌 적이 있었는데, 매양 한 가락을 마치면 모래를 주워 나막신에 던져서 그 모래가 나막신에 가득 차야만 돌아왔다. 일찍이 도적을 만나 장차 죽게 되었는데, 바람결에 따라 노래를 부르자 뭇 도적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쯤 되면 죽고 사는 것을 마음속에 두지 않는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큰 도()가 흩어진 지 오래되어,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여색 좋아하듯이 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저들은 기예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마저도 바꿀 수 있다 여겼으니, ! 이것이 바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것이로구나.”

도은(桃隱) 형암총언(炯菴叢言) 도합 열세 조목을 글씨로 써서 한 권의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서문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도은과 형암 이 두 사람은 내적인 면에 오로지 마음을 쓰는 사람인가, 육예(六藝) 속에서 노니는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고 이 두 사람이 사생(死生)과 영욕(榮辱)의 분별을 잊어버리고 이와 같이 정교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 두 사람이 무언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면, 도와 덕 속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기 바란다.

 

 

[D-001]최흥효(崔興孝) : 조선 세종(世宗) 때의 명필로 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D-002]이징(李澄) : 선조 14(1581) 유명한 화가였던 종실(宗室) 학림정(鶴林正) 이경윤(李慶胤)의 서자로 태어났다.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 되었으며, 산수화에 뛰어났다고 한다.

[D-003]학산수(鶴山守)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는 종친부(宗親府)의 정 4 품 벼슬이다.

[D-004]어진 이를 …… 못하였다 : 논어 자한(子罕)과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이다.

[D-005]아침에 …… 좋다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D-006]형암총언(炯菴叢言) : 이덕무가 지은 책인데,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전하지 않는다. 형암은 이덕무의 호이다.

[D-007]육예(六藝) …… 사람인가 : 육예는 예() · () · () · () · () · ()를 말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서 노닌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遊於藝 하였는데, 앞의 세 항목이 내적인 면에 마음을 쓰는 것이라면, 육예에서 노니는 것은 외적인 면, 즉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수양에 힘쓰는 것을 뜻한다. 주자(朱子)의 주에 따르면, 그렇게 할 때 본말을 갖추게 되고 내외가 서로 함양된다고 하였다. 論語 述而

[D-008]도와 …… 바란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물고기들이 샘물이 말라붙는 바람에 졸지에 육지에 처하여 서로 습기를 호흡하고 입의 거품으로 서로의 몸을 축여 주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相忘於江湖이 낫다고 하였다. 연암은 이와 같이 유교의 예악(禮樂)과 인의(仁義)를 모두 잊어버릴 것을 역설한 장자의 일절(一節)을 변용하여, 도리어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철저히 실천하는 일 외에 다른 모든 일을 잊어버리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옛글을 모방하여 글을 짓기를 마치 거울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반대로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물이 형체를 비추듯이 하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뿌리와 가지가 거꾸로 보이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이 한다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한낮이 되면 난쟁이侏儒僬僥가 되고 석양이 들면 키다리龍伯防風가 되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림이 형체를 묘사하듯이 한다면 비슷하다고 하겠는가? 걸어가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소리가 없는데 어찌 비슷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옛글과 끝내 비슷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런데 어찌 구태여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가? 비슷한 것을 구하려 드는 것은 그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말할 때 꼭 닮았다酷肖라 일컫고, 분별하기 어려운 것을 말할 때 진짜에 아주 가깝다逼眞라고 일컫는다. 무릇 ()’이라 말하거나 ()’라고 말할 때에는 그 속에 ()’ ()’의 뜻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전혀 다르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언어가 달라도 통역을 통해 의사를 소통할 수 있고, 한자(漢字)의 자체(字體)가 달라도 모두 문장을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은 서로 다르지만 내심은 서로 같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은 내면의 의도라 할 것이요 외형이 비슷한 것形似은 피상적인 겉모습이라 하겠다.

이씨의 자제인 낙서(洛瑞 이서구(李書九))는 나이가 16세로 나를 따라 글을 배운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 심령(心靈)이 일찍 트이고 혜식(慧識)이 구슬과 같았다. 일찍이 녹천관집(綠天館集)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질문하기를,

 

, 제가 글을 지은 지가 겨우 몇 해밖에 되지 않았으나 남들의 노여움을 산 적이 많았습니다. 한 마디라도 조금 새롭다던가 한 글자라도 기이한 것이 나오면 그때마다 사람들은 옛글에도 이런 것이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발끈 화를 내며 어찌 감히 그런 글을 짓느냐!’고 나무랍니다. , 옛글에 이런 것이 있었다면 제가 어찌 다시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판정해 주십시오.”

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모아 이마에 얹고 세 번 절한 다음 꿇어앉아 말하였다.

 

네 말이 매우 올바르구나. 가히 끊어진 학문을 일으킬 만하다.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들 때 어떤 옛것에서 모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안연(顔淵)이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저서가 없었다. 만약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를 생각하고, 안연이 표현하지 못한 취지를 저술한다면 글이 비로소 올바르게 될 것이다.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 남들에게 노여움을 받으면 공경한 태도로 널리 배우지 못하여 옛글을 상고해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사과하거라. 그래도 힐문이 그치지 않고 노여움이 풀리지 않거든, 조심스러운 태도로 은고(殷誥)와 주아(周雅)는 하() · () · () 삼대(三代) 당시에 유행하던 문장이요,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진() 나라와 진() 나라에서 유행하던 속필(俗筆)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거라.”

 

[D-001]난쟁이侏儒僬僥 : 주유(侏儒)는 난쟁이를 말하고, 초요(僬僥)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나오는 단인국(短人國) 사람, 또는 국어(國語) 노 하(魯下)에 나오는 키가 석 자밖에 안 된다는 종족이다.

[D-002]키다리龍伯防風 : 용백(龍伯) 열자 탕문에 나오는 대인국(大人國) 사람, 방풍(防風) 국어 노 하에 나오는 키가 큰 종족이다.

[D-003]나이가 16세로 : 이서구는 1754년에 태어났으므로, 이 글을 지은 때는 1769년임을 알 수 있다.

[D-004]은고(殷誥)와 주아(周雅) : 은고는 중훼지고(仲虺之誥)와 탕고(湯誥),  서경(書經)을 가리키고, 주아는 주공(周公)이 제정했다는 소아(小雅)와 대아(大雅),  시경(詩經)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재집서(泠齋集序)

 

 

장석(匠石 돌을 다듬는 사람)이 기궐씨(剞劂氏 돌에 글씨를 새기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 가운데 돌보다 단단한 것은 없다. 그렇게 단단한 것을 베어 내어 자르고 깎고 하여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만들어 신도(神道)에 세우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바로 나의 공이니라.”

하니, 기궐씨가 이렇게 말했다.

 

오래도록 닳아 없어지지 않기로는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없다. 위대한 인물의 훌륭한 행적에 대하여 군자가 비명(碑銘)을 지어 놓았다 하더라도 나의 공력이 들어가지 않으면 장차 그 빗돌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렇게 다투다가 마침내 마렵자(馬鬣子 무덤)에게 함께 가서 시비를 가리려 했으나, 마렵자는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히 있기만 할 뿐 세 번을 불러도 세 번 다 대답이 없었다. 이때 옆에 있던 석옹중(石翁仲 무덤 앞에 세워놓은 석인(石人))이 껄껄대고 웃으면서,

 

그대들은 천하에서 가장 단단한 것으로 돌보다 더한 것이 없고, 오래도록 닳아 없어지지 않는 것으로 글자를 새기는 것보다 더 오래가는 것이 없다고 하는구먼. 비록 그러하나 돌이 정말 단단하다면 어떻게 깎아서 빗돌을 만들 수 있겠으며, 닳아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글자를 새길 수 있겠는가. 그것을 깎아서 새길 수 있는 이상 부엌을 만드는 사람이 가져다가 솥을 앉히는 이맛돌로 쓰지 않으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양자운(揚子雲 양웅(揚雄))은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자(奇字)를 많이 알았다. 한창 태현경(太玄經)을 저술하다가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하더니, 개연히 크게 탄식하기를,

 

! (), 너는 알고 있어라. 석옹중의 풍자를 들은 사람들은 장차 이 태현경을 장독의 덮개로 쓰겠지.”

하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봄날에 영재집에다 쓴다.

 

 

[D-001]기자(奇字) : 고문(古文 : 공자벽중서孔子壁中書), 전서(篆書), 예서(隸書), 무전(繆篆), 충서(蟲書)와 함께 한자(漢字)의 육체(六體)의 하나로, 고문의 변체(變體)인데 양웅이 이를 즐겨 배웠다고 한다.

[D-002]() : 양웅의 아들 양오(揚烏), 동오(童烏)라고도 한다. 문학의 신동(神童)이었으나 아홉 살로 요절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패서(旬稗序)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方言)과 속기(俗技) 등을 두루 기록하고, 심지어는 종이연에도 계보(系譜)를 만들고 어린애들 수수께끼에도 해설을 붙여 놓았다. 여항(閭巷) 구석구석의 익숙한 실태며, 문에 기댄 기녀들이 몸을 움츠리고 아양을 떠는 모습과 칼을 두드리는 백정이 손뼉을 치면서 맹세하는 모습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수집해 실어 놓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각의 내용들을 조목별로 잘 엮어 놓았다. 입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까지도 붓으로 잘 묘사했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내용들까지도 책을 펼쳐 보면 곳곳에 나와 있으며, 닭이 울고 개가 짖어 대는 소리와 벌레가 몸을 일으키고 굼벵이가 꿈틀거리는 모습 등 모든 것이 실제의 모습과 소리대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십간(十干)의 순으로 배열하고는 책이름을 순패(旬稗)라 하였다.

하루는 이 책을 소매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며,

 

이 책은 내가 어린 시절에 손장난 삼아 지어 본 것일세. 그대는 음식 가운데 거여(粔籹 유밀과(油蜜菓)의 일종인 중배끼)를 보지 못하였는가? 찹쌀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적시어 누에 크기만큼 잘라서 더운 구들장에 말린 다음 기름에다 튀기면 그 모양이 누에고치 모양으로 부푼다네. 보기에 깨끗하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 속이 텅텅 비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으며, 잘 부스러지는 성질이 있어 입으로 훅 불기만 해도 눈발 날리듯 한다네. 그래서 물건 가운데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이 비어 있는 것을 거여라고 하지.

그런데 개암, , 벼 등은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실로 아름다우면서도 참으로 배가 불러서, 이것으로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드릴 수도 있고 귀한 손님에게 예물로 드릴 수도 있지. 무릇 문장을 짓는 방법 역시도 이와 마찬가지일세.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암, , 벼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니 그대가 나를 위해 시비를 가려 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에게 대답하기를,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었다는 말은 믿지 않을 수 없지만, () 나라 때의 장수 이광(李廣)이 쏜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끝내 의문을 남긴다네. 왜냐하면 꿈이라는 것은 직접 보기 어려운 것이고, 반면에 실제로 눈앞에 일어난 일은 징험하기가 쉽기 때문이지. 그런데 지금 그대는 일상생활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조사하고 사회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집하였으므로, 평범한 남녀들의 가벼운 웃음거리와 일상적인 생활사들이 어느 것 하나 눈앞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눈이 시도록 보고 귀로 실컷 들어서 성단용노(城旦庸奴)라도 그렇다고 여기는 것들이네. 그렇기는 하지만 묵은 장()이라도 그릇을 바꾸어 담으면 입맛이 새로워지듯, 늘 보던 것도 장소가 달라지면 마음과 보는 눈이 모두 달라지는 법이지.

이 책을 보는 사람들은 굳이 소천암이 어떤 사람인지, 민요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 책만 보면 바야흐로 알 수가 있으이. 이 책에다 운()을 달아 연독(聯讀)하면 백성들의 성정(性情)을 논할 수 있고, 계보에 따라 그림을 그리면 그 대상의 수염과 눈썹까지도 검증할 수가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䏁睞道人)이 일찍이 말하기를, ‘석양 아래 작은 돛단배가 갈대숲 속에 살짝 가리워지니, 사공과 어부가 모두 텁수룩한 수염에 구레나룻이 험상궂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 건너 물가에서 바라보면 그들이 곧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이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하였으니, 아아, 도인(道人)이 이러한 생각을 나보다 먼저 해버렸네그려. 그러니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섬겨야 하겠네. 찾아가서 징험해 보도록 하게나.”

하였다.

 

 

[D-001]문에 …… 모습 : 원문은 肩媚인데, 견미란 협첨(脅諂)’과 같은 말로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몸을 움츠리고 억지웃음 짓는 것이 여름철 밭일하기보다 괴롭다.脅肩諂笑 病于夏畦고 하였다. ‘협견첨소(脅肩諂笑)’는 소인배가 권세가 앞에서 아첨하는 태도를 말한다.

[D-002]손뼉을 …… 모습 : 원문은 掌誓로 민간에서 맹세할 때 손뼉을 쳐서 신용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격장위서(擊掌爲誓)’라 한다.

[D-003]이광(李廣) …… 이야기 : 이광이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에 있는 바위를 호랑이인 줄 알고 힘껏 쏘았더니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갔으나, 바위인 줄 알고 난 뒤 다시 쏘았을 때는 끝내 화살이 바위를 뚫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D-004]성단용노(城旦庸奴) : 도형(徒刑)을 사는 무식한 자이다. 원문에서는 조선 태조(太祖)의 이름자 단()을 휘하여 城朝庸奴라 하였다.

[D-005]이 책에다 …… 있고 : 이 책의 내용을 소재로 시를 지으면 이를 통해 백성들의 심성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D-006]재래도인(䏁睞道人) : 재래도인은 귀머거리에다 사팔뜨기를 겸한 도인이란 뜻으로 이덕무의 호의 하나이다. ‘䏁䚅道人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재래도인이 했다는 말은 청장관전서 63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말과 거의 똑같다.

[D-007]육노망(陸魯望) : 당 나라 때의 인물로 이름은 귀몽(龜蒙),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며, 노망(魯望)은 그의 자이다. 강호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였으며, 조정에서 고사(高士)로서 초빙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염재기(念齋記)

 

 

송욱(宋旭)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자다가 해가 떠올라서야 겨우 잠에서 깨었다. 누워서 들으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 수레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시끄러우며, 울 밑에서는 절구 소리가 나고 부엌에서는 그릇 씻는 소리가 나며, 늙은이의 부르는 소리와 어린애의 웃음소리, 남녀 종들의 꾸짖는 소리와 기침하는 소리 등 문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분별하지 못할 것이 없건만 유독 자신의 소리만은 들리지 않았다.

이에 몽롱한 가운데 중얼거리기를,

 

집안 식구는 모두 다 있는데 나만 어찌하여 없는가?”

하며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고리와 바지는 다 횃대에 놓여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띠는 횃대 끝에 걸려 있으며, 책들은 책상 위에 놓여 있고, 거문고는 뉘어져 있고 가야금은 세워져 있으며,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쇠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다. 무릇 방 안의 물건치고 하나도 없는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급히 일어서서 제가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하여 요가 깔려 있으며 이불은 그 속이 드러나 있었다. 이에 송욱이 미쳐서 발가벗은 몸으로 집을 나갔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슬퍼하고 불쌍히 여겼다. 한편으로 나무라기도 하고 한편으론 비웃기도 하다가, 마침내 의관(衣冠)을 안고서 그에게 찾아가 옷을 입혀 주려고 온 길을 다 찾아다녔으나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성() 동쪽에 살고 있는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쳐 보니, 소경이 점을 치며 말하기를,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갓끈이 끊겨 염주가 흩어졌구나. 저 부엉이를 불러다가 헤아려 보게 하자꾸나.”

하고는 엽전을 던지자 동그란 것이 잘도 굴러가 문지방에 부딪쳐서야 멈추었다. 소경이 엽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축하하기를,

 

주인은 여행을 나가고 나그네는 여의(旅衣)가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가 지나면 돌아오리라. 이 점사(占辭)가 크게 길()하니 마땅히 과거에 장원급제하리라.”

하였다.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양 과거가 열려 선비를 시험할 때면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응시를 하였는데, 그때마다 제 시권(試券)에다 비점(批點)을 치고 나서 큰 글씨로 높은 등수를 매겨 놓았다. 그래서 한양(漢陽)의 속담에 반드시 이뤄질 수 없는 일을 두고 송욱의 과거 보기宋旭應試라고 말한다.

식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미치긴 미쳤으나 역시 선비답구나. 이러한 행동은 과거에 응시하면서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계우(季雨)는 성격이 소탈하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목청을 높여 노래하면서 스스로 주성(酒聖)’이라고 호를 지었다. 세상에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보면 마치 자기 몸이 더렵혀지기나 한 듯 구역질을 하였다.

내가 그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술에 취하고서 자신을 성인이라 일컫는 것은 미친 것을 숨긴 것이거니와, 그런데 심지어 취하지 않고서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큰 미치광이大狂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니, 계우가 수심에 잠겨 한동안 있다가,

 

그대의 말이 옳소.”

하고는, 드디어 그 당()의 이름을 염재(念齋)’라 짓고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송욱의 일을 써서 그를 권면하는 바이다. 저 송욱은 미치광이이기는 하지만 그 또한 스스로 노력한 자이다.

 

 

[D-001]여의(旅衣) : 여행 도중 입을 옷, 즉 행장(行裝)을 말한다.

[D-002]계우(季雨) : 성명은 미상(未詳)이다. 연암집 5 여중관(與仲觀)에 백우(伯雨)의 동생으로 언급되어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필사본 종북소선집(鍾北小選集)에는 이 글의 제목이 염재당기(念哉堂記)로 되어 있으며, 그와 함께 계우 숙응(叔凝)’으로 되어 있다. 숙응은 연암의 친구인 신광온(申光蘊)의 아우 신광직(申光直 : 1738~1794)의 자(), 그의 호가 또한 염재(念齋)였다. 신광직은 젊은 시절 연암뿐만 아니라 홍대용(洪大容)과도 절친하여 담헌서(湛軒書)에도 여신염재부증박연암지원(與申念齋賦贈朴燕巖趾源)’ 등 신광직과 관련된 시문이 몇 편 있다. 김영진의 조선 후기의 明淸小品 수용과 小品文의 전개 양상(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3) 참고.

[D-003]세상에 …… 하였다 : 공자는 겉으로는 씩씩한 체하면서 속으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며 몰래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둑에 비겨 비판하였고, 論語 陽貨 백이(伯夷)는 시골 사람과 서 있을 적에 그가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으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마치 자기 몸이 더럽혀지기나 할 듯이 여겼다.若將浼焉고 하며,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거위 요리를 먹고 난 뒤 그 거위가 바로 형에게 선물로 들어온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나가서 구역질을 하였다.出而哇之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04]술에 …… 않겠는가 : 서경(書經) 다방(多方) 성인이라도 반성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반성할 줄 알면 성인이 된다.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고 하였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을 강조한 말이다. 본래 서경 다방에서의 광인 어리석은 사람이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송욱(宋旭)의 경우와 연계되어 쓰였으므로 미치광이로 새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관재기(觀齋記)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에 나는 팔담(八潭)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마하연(摩訶衍)에 들어가서 준대사(俊大師)를 방문하였다. 그때 대사는 손가락으로 감중련(坎中連)을 하고서 눈으로는 코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동자(童子)가 옆에서 화로를 헤치고 향()을 피우는데, 그 연기가 둥글게 피어올라 머리털을 묶은 듯 버섯이 돋아난 듯 방 안에 자욱하였다. 연기는 붙들지 않아도 곧게 피어오르고 바람이 없어도 저절로 출렁이며, 너울너울 한들한들하며 장차 다함이 없을 듯싶었다. 동자가 갑자기 깨우침을 얻은 듯 웃음을 지으며,

 

공덕(功德)이 충분히 쌓이면 움직임動轉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나의 깨달음이 성취되면 한낱 향은 무지개로 화하리라.”

하니, 대사가 눈길을 돌리며 말하기를,

 

얘야, 너는 향()을 맡았지만 나는 그 재를 보며, 너는 그 연기를 보고 좋아하지만 나는 그 공()을 본다. 동정(動靜)이 이미 적멸했으니, 공덕(功德)을 어디에 베풀랴.”

하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이른 말씀입니까?”

하니, 대사가,

 

너는 시험 삼아 그 재를 맡아 보아라. 다시 무슨 냄새가 나느냐? 너는 그 공()을 보아라. 다시 무엇이 있느냐?”

하였다.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예전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저에게 오계(五戒)를 내리셨고 저의 법명(法名)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름은 곧 내가 아니요, 나는 바로 저 공()이다.’ 하셨습니다. 공이란 곧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이 있다 한들 장차 어디에다 쓰오리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니, 대사가,

 

너는 공순히 받아서 고이 보내라. 내가 60년 동안 세상을 보았는데 어떠한 사물이든 머물러 있는 것이 없이 모두가 도도하게 흘러간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 바퀴를 멈추지 않으니, 내일의 해는 오늘의 해가 아니다. 그러므로 미리 헤아린다는 것은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요, ‘붙잡는다는 것은 억지로 애쓰는 것이요, ‘보낸다는 것은 순응하는 것이다. 너는 마음속에 머물러 두지 말고 기운이 막힘이 없도록 하라. ()에 순응하여 명()으로써 나를 보고, ()에 따라 보내어서 이()로써 사물을 보면, 흐르는 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곳에 있을 것이요 흰 구름이 일어날 것이다.”

하였다. 나는 이때 턱을 고이고 옆에 앉아서 듣고 있었으나 진실로 아득한 기분이었다.

백오(伯五 서상수(徐常修))가 그의 대청을 관재(觀齋)’라 이름 짓고 나에게 글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저 백오도 준대사의 설법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를 짓는 바이다.

 

 

[D-001]손가락으로 …… 있었다 : 손가락으로 감중련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괘(坎卦) 모양으로 소지(小指)를 대지(大指)와 맞닿게 한 인상(印相)을 말한다.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는 것은 조식법(調息法)의 일종이다.

[D-002]동정(動靜) : 이본에는 동전(動轉)’으로 되어 있다.

[D-003] …… 내리셨고 : 계사(戒師)가 수행자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나서 계()를 내려 주는 것을 말한다. 오계(五戒)란 살생 · 도적질 · 간음 · 망언 · 술을 금하는 계율이다.

[D-004]미리 …… 것이요 : 거스를  자에  자와 같이 맞이한다는 뜻이 있음을 이용한 궤변이다. 단 여기서 ()’ 자는 예측한다는 뜻이다. 한편 ()’ 자에도 미리’, ‘사전에라는 뜻이 있다.

[D-005]붙잡는다 …… 것이요 : 이본에는  , ‘ 으로 되어 있다.

[D-006]보낸다 …… 것이다 :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7]관재(觀齋) : 이본에는 관물(觀物)’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글의 제목도 관물헌기(觀物軒記)’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선귤당기(蟬橘堂記)

 

 

영처자(嬰處子 이덕무(李德懋))가 당()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하겠느냐.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요 땅이나 집도 아니며,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요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도 아니요 큰 가마나 큰솥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아니요 곡식 담는 각종 제기(祭器)도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香囊)처럼 풀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을 수놓은 흉배(胸背), 서대(犀帶)나 어과(魚果)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鴛鴦)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비단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 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 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울리는 종에 비유해 보자. 북채를 멈추어도 그 소리는 울려 퍼진다. 그렇듯이 사람의 몸이 백 번 죽어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매미 소리를 찾거나 귤 향기를 맡으려 한다면 이는 껍질이나 허물이 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처음 태어나서 강보(襁褓)에서 응애응애 울 때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었다. 부모가 아끼고 기뻐하여 상서로운 글자를 골라 이름을 지어 주고, 다시 더럽고 욕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네가 잘 되기를 축원한 것이다. 너는 이때만 해도 부모에 딸린 몸이어서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성장하고 나서야 네 몸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를 입신(立身)하고 나서는 가 없을 수 없으니, ‘ 에게 와서 짝이 되어 몸이 홀연 한 쌍이 되었다. 한 쌍의 몸이 잘 만나서 자녀를 두니 둘씩 짝을 이루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

그리하여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名山)이 있어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몸이 얽매이고 구속을 받는 것은 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는 네 이름과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는 아명(兒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이 있으며, ()을 나타내기 위해 자()를 짓고 사는 곳에 호()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官爵)으로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로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 낼지 모르겠다.’

이는 대각무경(大覺無經)에 나온 이야기일세. 열경(悅卿)은 은자(隱者)로서 이름이 아주 많아 다섯 살 적부터 호()가 있었지. 때문에 대사(大師)가 이로써 경계한 것이네.

갓난아기는 이름이 없으므로 영아(嬰兒)라 부르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를 처자(處子)라고 하지. 따라서 영처(嬰處)라는 호는 대개 은사(隱士)가 이름을 두고 싶지 않을 때 쓴다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귤(蟬橘)로써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자네는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일세. 왜냐하면 영아는 지극히 약한 것이고 처자란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네의 유약함을 보고는 여전히 이 호로써 부를 것이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귤 향기까지 난다면 자네의 당()은 앞으로 시장처럼 사람이 모이게 될 걸세.”

이에 영처자(嬰處子)가 말하기를,

 

대사가 한 말과 같이, 매미가 허물을 벗어 그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서 그 껍질이 텅 비어 버렸는데 어디에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있겠소? 이미 좋아할 만한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없는데 사람들이 장차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나를 찾겠소?”

하였다.

 

 

[D-001]그대는 …… 많은가 : 이덕무는 젊은 시절에 삼호거사(三湖居士) · 경재(敬齋) · 팔분당(八分堂) · 선귤헌(蟬橘軒) · 정암(亭巖) · 을엄(乙广) · 형암(炯菴) · 영처(嬰處) · 감감자(憨憨子) · 범재거사(汎齋居士) 등의 호를 지녔다. 靑莊館全書 卷3 嬰處文稿1 記號 그 밖에 청음관(靑飮館) · 탑좌인(塔左人) · 재래도인(䏁睞道人) · 매탕(槑宕) · 단좌헌(端坐軒) · 주충어재(注蟲魚齋) · 학초목당(學草木堂) · 향초원(香草園) 등의 호가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호는 청장관(靑莊館)과 아정(雅亭)이다.

[D-002]열경(悅卿) : 김시습(金時習)의 자이다. 김시습 역시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峯) · 매월당(梅月堂)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등 호가 많았다.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D-003]회두타(灰頭陀) : 두타(頭陀)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행각승(行脚僧)을 말한다.

[D-004]어과(魚果) : ()는 신표(信標)라는 뜻이다. 물고기 모양을 나무에 새기거나 구리로 빚어 허리띠에 차던 관리의 신표를 말한다. 어부(魚符) 또는 어패(魚佩)라고도 하였다.

[D-005]몸이 …… 생겨서 : 원문은 卽有是事 廼有是名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卽有身故 乃有是名으로 되어 있어 이본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다시 …… 주었으니 : 유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에 귀신이 데려가지 말라고 일부러 개똥이와 같은 천한 이름을 지어 불렀던 풍습을 말한다.

[D-007]몸이 홀연 : 원문은 遂忽로 되어 있는데 뜻이 어색하다. 종북소선 身忽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8]한 쌍의 …… 만나서 :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혼의(昏義) 혼례란 장차 두 성씨가 잘 만나는 것婚禮者 將合二姓之好이라 하였다.

[D-009]둘씩 …… 같았다 : 자녀들이 차례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팔괘가 음효(陰爻)와 양효(陽爻)의 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 구절이 卽成四身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들과 딸을 두어 네 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D-010]몸이 …… 보니 : 원문은 身之旣多인데, ‘몸이 이미 넷이다 보니身之旣四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1]이것 …… 그치고 : 원문은 爲此艮兌인데, 간괘(艮卦)는 그침을 상징하고, 태괘(兌卦)는 즐거움을 상징한다. 이 구절이 이 네 몸 때문에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2] …… 생각하여 : 원문은 爲此卦身인데, ‘이 네 몸을 생각하여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3]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 원문은 以多身故인데, ‘몸이 넷이기 때문이다以四身故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4]대각무경(大覺無經) : 허구로 지어낸 불경 이름이다.

[D-015]다섯 …… 있었지 : 김시습은 다섯 살 적에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명성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오세(五歲)’라고 불렀다고 한다. 梅月堂先生傳 오세암(五歲菴)도 그의 당호(堂號)라는 설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애오려기(愛吾廬記)

 

 

정군 인산(鄭君仁山)이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애오려(愛吾廬)’라 이름하고 하루는 나에게 기()를 청해 왔기에, 나는 인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나 사물이 처음 생길 적에는 진실로 각자가 구별되지 않았다. 즉 남이나 나나 다 사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기를 들어 남과 마주 놓고서 라 일컬으며 구분을 짓게 되었다. 이에 천하의 사람들이 비로소 분분히 일어나 자기를 말하고 일마다 라 일컫게 되었으니, 이미 그 사심(私心)을 이겨 낼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까지 스스로 덧붙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효경(孝經)에서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므로 감히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를 이미 라고 할진댄, 지금 의 터럭 하나를 잡아당긴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온몸이 편치 않을 것이다. 어찌 내 몸 전체를 들어 라고 여긴 경우에만 그러하겠는가. 비록 가느다란 터럭 하나라도 다 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요, 장차 사랑하지 않는 터럭이 없게 될 것이다.

, 터럭 하나도 라고 하여 이미 사랑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면, 나의 몸에서 겨우 터럭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대상이라도 실로 모른 척하고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제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 사람에게 이로움이 돌아간다 해도 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이미 자기의 터럭 하나를 천하보다 중하게 여기고 사랑하기를 지극히 두텁게 하니, 자기를 온전히 보호하여 아끼고자 생각하는 것이 어찌 지극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해(四海)가 지극히 넓다지만 장차 나의 터럭 하나도 잘 간수할 방법이 없을 터인즉, 또한 제 몸을 도외시함으로써 몸을 보존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저들은 제 몸을 도외시하여도 스스로를 보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면, 자신을 사랑하기를 더욱 깊이 하고 근심하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심지어는 제 몸을 적멸(寂滅)하고자 하여 라는 것을 가합(假合)으로 여기고 사랑을 원업(冤業)으로 여기며 삼강오륜을 끊어 버리고 삶을 보기를 원수 대하듯 한다. 따라서 저들은 제 한 몸의 도 스스로 지닐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터럭 하나의 이랴. 그리되면 앞에서 말한 사랑하기를 지극히 두텁게 한다는 것이 도리어 천하에 지극히 박한 것이 되고 만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내 한 몸을 사유물로 여기고 자기를 사랑하기를 지나치게 하기 때문이다.

()에 이르기를, “사람은 제 몸을 골고루 사랑하니, 제 몸을 기르는 것도 골고루 하려 한다. 그러나 몸의 작은 부분으로써 큰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으로써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라.” 하였다. 그러므로 왕응(王凝)의 아내는 도끼를 가져다가 자신의 팔목을 끊어서 그 몸을 깨끗이 하였던 것이다. 팔목이 이미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면, 그 대소(大小)와 귀천(貴賤)이 어찌 한 점의 살이나 한 올의 머리털에 비할 바이랴. 그런데도 장차 자기 몸에 오물이 묻을 듯이 여겨, 이를 악물고 잘라 내어 조금도 연연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팔목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를 사랑하기를 왕씨의 아내같이 한다면 이는 사랑할 바를 안다고 할 것이다.

 

 

[D-001] …… 있다 : 맹자가 양자(楊子)에 대해 “ ‘나를 위함爲我을 취하여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 사람에게 이로움이 돌아간다고 해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孟子 盡心上

[D-002]적멸(寂滅)하고자 하여 : 열반(涅槃)에 들게 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D-003]가합(假合) : 불교에서는 일체의 사물을 지() · () · () · () 사대(四大)가 잠시 합쳐져서 이루어진 가합지신(假合之身)이라 본다.

[D-004]원업(冤業) : 악업(惡業), 즉 악한 결과를 받는 행동을 말한다.

[D-005]하물며 …… 나이랴 : 중이 삭발하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

[D-006]() …… 하였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맹자가 한 말이다. 몸에서 천하고 작은 부분이란 구복(口腹)을 가리키며, 귀하고 큰 부분은 심지(心志)를 가리킨다. 구복만을 기르는 자를 소인이요, 심지를 기르는 자를 대인이라 하였다.

[D-007]왕응(王凝) …… 것이다 : 왕응이 타향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병으로 죽게 되자 그의 아내 이씨(李氏)가 어린 아들과 함께 유해를 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개봉(開封)에 들러 숙박을 하게 되었다. 이때 여관 주인이 그녀를 보고 수상하게 여겨 숙박을 거절하며 팔을 잡아당겨 끌어내자 이씨가 하늘을 보고 통곡하며 내가 여자가 되어 수절하지도 못하고 다른 남자에게 손이 잡혔으니, 이 손 때문에 내 몸을 더럽힐 수 없다.” 하고는 도끼를 가져다 제 팔목을 끊어 버렸다. 新五代史 卷54 雜傳

[D-008]장차 …… 여겨 : 백이(伯夷)는 관을 올바로 쓰고 있지 않은 시골 사람과 마주 서게 되면 뒤도 안 보고 가 버리면서 장차 자기 몸에 오물이 묻을 듯이 여겼다.若將浼焉 한다. 孟子 公孫丑上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환성당기(喚醒堂記)

 

 

()의 액호(額號) 불러서 깨운다는 뜻의 환성당(喚醒堂)’으로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주인옹(主人翁)이 손수 쓴 것이다. 주인옹은 누구인가? 서봉(西峰) 이공(李公)이다. 부르는 대상은 누구인가? 바로 자신을 부른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렀는가? 공은 평소에 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잠깐 사이라도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언제나 삼가고 독실하여 하나의 공경할 ()’ 자로써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온 세상 사람들이 무지몽매하여 취생몽사(醉生夢死)하니 어느 한 사람도 이러한 도리를 간파한 자가 없었으므로, 아무리 불러 보았자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였고 아무리 깨워 보았자 취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에 기거하는 당에다 편액을 걸어서 좌우명(座右銘)으로 대신하고 아침저녁으로 스스로를 깨우치며 항상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의 후손인 판서공(判書公)이 집을 짓고자 한 선조의 뜻을 잊지 아니하고 훌륭한 집을 이처럼 빛나게 지어 능히 선조의 미덕을 계승하였으니, 그 집안의 어진 자손이요 조상을 욕되게 아니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 당에 대하여 거듭 감회가 있다. 이른바 오래된 가문이라는 것은 거기에 교목(喬木)이 있다고 해서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대로 공신이 이어져 온 집에는 반드시 수백 년 된 교목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그 정원을 두루 살펴보면, 늙은 나무가 우람하고 큰 가지 작은 가지가 새로 나서 울울창창하니, 이는 단지 비와 이슬만 먹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만약에 나무를 배양하는 노고가 없었더라면 어찌 이처럼 무성할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이 당에 사는 후손이 진실로 거경(居敬)하여 몸가짐을 지켜가지 않는다면, 뜰을 뒤덮은 늙은 나무를 보고 왕씨(王氏)의 세 그루 홰나무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를 힘써야 할진저.

 

 

[D-001]서봉(西峰) 이공(李公) : 이시방(李時昉 : 1594~1660)의 호가 서봉(西峰)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아들이요 영의정을 지낸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부친과 함께 가담하여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으며,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 병자호란 때에도 공로가 있었다.

[D-002]경이직내(敬以直內)하고 …… 주일무적(主一無適)하여 : 주역 곤괘(坤卦) 군자는 경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로써 행동을 바르게 한다.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고 하였다.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가 천승(千乘)의 제후국을 통치하는 방법으로서 그 일을 공경하고 인민들에게 신임을 얻어야 한다.敬事而信고 했는데, 주자(朱子)의 주() 경이란 주일무적을 이른 것이다.敬者 主一無適之謂라고 하였다. ‘주일무적은 정신을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성리학에서 경이직내 주일무적은 수양(修養) 방법을 나타내는 표어로 흔히 쓰였다.

[D-003]판서공(判書公) : 연암과 교분이 있었으며 공조 판서 · 형조 판서를 지낸 이민보(李敏輔 : 1717~1799)가 아닌가 한다.

[D-004]이른바 …… 마련이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맹자가 제() 나라 선왕(宣王)을 만나서 이른바 오래된 나라라는 것은 거기에 교목이 있다고 해서 이르는 것은 아니다. 대대로 이어져 온 공신들이 있기에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所謂故國者 非謂有喬木之謂也 有世臣謂之也라고 하였다. 연암의 말은 맹자의 이 말을 조금 변형한 것이다.

[D-005]거경(居敬) : 경으로써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거경궁리(居敬窮理)는 성리학에서 수양과 학문의 요체로 간주되었다.

[D-006]왕씨(王氏)의 세 그루 홰나무 : () 나라 때 왕우(王祐)가 뜰에다 홰나무 세 그루를 심어 놓고서,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三公)이 나올 것이다.” 하였는데, 그 후에 아들 왕단(王旦)이 정승이 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삼괴왕씨(三槐王氏)’라 하였다. 宋史 卷282 王旦傳 삼괴(三槐)는 주 나라 때 삼공이 천자에게 조회할 때 궁정 뜰의 세 그루 홰나무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므로 삼공을 상징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취미루기(翠眉樓記)

 

 

해마다 연말에 사신이 북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대부들이 역관을 시켜 당액(堂額)의 글씨를 받아 오게 하는데, 받아 온 글씨를 보면 언제나 박명(博明)의 글씨였다. 박명은 현재 기거주(起居注) 일강관(日講官)으로서, 진실로 당액의 글씨를 잘 썼다. 그런데 그 뒤에 박명의 다른 글씨를 여러 번 보게 되었는데, 필력(筆力)이 당액의 글씨에 비하여 크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나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들리는 말로는 한 역관이 사물재(四勿齋)의 당액을 써 달라고 청하자 박명이 종이를 집어던지며 투덜대기를, “동방에는 호가 같은 자가 어찌 그리도 많으냐? 내 녹침필(綠沈筆)이 사물재를 쓰느라 다 닳아 버렸다.” 하더라는 것이었다.

박명은 조선 주고(主顧) 황씨(黃氏)의 사위인 까닭에 역관들이 박 기거(博起居)가 글씨를 잘 쓰는 줄 알게 되었을 것이며, 박명이 당액을 잘 썼던 것은 사물(四勿)’이란 액호(額號)를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 우물에 빠진 모수(毛遂)와 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도 똑같은 이름 때문에 오히려 당대에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물며 호()란 것은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거늘, ‘삼성(三省)’이니 구용(九容)’이니 하며 가는 곳마다 다 그런 호들이고, ‘눌와(訥窩)’ 묵재(黙齋)’니 하는 호들이 열에 서넛을 차지한다. 남산(南山) 밑에 사는 사람은 그 대청의 이름을 반드시 공신(拱辰)’이라 짓고, 북촌(北村) 안에 사는 사람은 그 당()의 이름을 모두 유연(悠然)’이라 짓는다. 조금이라도 원림(園林)이 있어서 잠시나마 그윽한 운치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면 반드시 성시산림(城市山林)’이라 써서 걸어 놓고 있으니, 한 번은 있을 수 있지만 두 번은 지나친 것이다.

, 경기의 남양(南陽)이나 황해도 황주(黃州)는 지명이 중국과 우연히 같은데도, 남양에는 반드시 와룡선생(臥龍先生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을 두고 황주에는 기어이 죽루(竹樓)를 짓고 마는데, 이것은 실질을 흠모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름만 흠모한 것인가?

내가 임진강을 지나다가 강가의 절벽을 바라보았더니, 깎아지른 암벽이 수십 리나 뻗어 있었고 단풍나무 잎이 한창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몇 사람의 길손과 함께 한참 동안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정색을 하며 옷깃을 여미고 똑바로 앉더니,

 

적벽(赤壁)은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다만 세월이 임술년이 아니요 기망(旣望)의 달도 없는 것이 한스럽구나.”

하기에, 내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지금부터 임술년을 기다리자면 내 나이 예순여섯 살 먹은 노인이 될 것이니, 가을 강의 찬 바람과 이슬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오. 게다가 그대는 소씨(蘇氏)가 아니요, 나 또한 그대의 노래에 화답하여 퉁소를 불지 못하니 이를 어찌하겠소?”

하고서, 서로 한바탕 웃은 일이 있었다.

이번에 이군 유일(李君有一)의 서루(書樓)에 올라가 보니, 누각이 남산 기슭에 있어 북으로는 백악산(白嶽山)을 바라보고 서로는 길마재鞍嶺 무악재를 마주하고 동으로는 낙산(駱山)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면이 확 틔어 있어 수많은 집들이 지상에 널려 있고 먼 봉우리들이 처마 위에 떠 있어 마치 미인의 눈썹처럼 아름다웠다. 누각의 이름을 취미루(翠眉樓)’로 지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누각의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마치 미인의 안방 이름과 같다 하여, 괴이하다고 질책하는 등 뭇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였다. 이군이 이러한 점을 답답하게 여겨 나에게 오해를 풀어 줄 것을 청하기에 나는 바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예로부터 임금에게 충성과 사랑을 바치는 자는 반드시 미인을 노래하며 그리워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저 미인이여, 서방 사람이로다.有美一人兮 西方之人兮 하였는데, 이 시를 설명하는 자가 말하기를, ‘서방의 미인은 주() 나라 문왕(文王)이다.’ 하였다. 굴원(屈原)과 경차(景差)의 일파도 미인을 노래하며 찬송한 시가 많았다. 지금 그대의 누각을 어찌 꼭 취미루라고 할 것이 있는가. ‘미인루(美人樓)’라 이름 지어도 무방할 것이다. 더구나 저 하늘가에 마치 그림과 같이 긴 눈썹이 검푸르게 드리워져 있으니, 시인이 노래를 지어 읊듯이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생각을 일으키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나는 그대가 남을 따라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요, 시문을 짓되 반드시 진부한 표현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다. 나는 그대가 누각의 이름을 지은 것만으로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족히 기록할 만하다.

 

 

[D-001]박명(博明) : 호는 석재(晰齋) · 서재(西齋) 등이다. 몽골인으로, 원 세조(元世祖)의 후손으로 자칭하였다. 건륭(乾隆) 때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한림편수(翰林編修) 등을 거쳐 운남이서도(雲南迆西道)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냈다. 저명한 고증학자 옹방강(翁方綱)과 동향(同鄕)이자 동문(同門)에다 동방(同榜)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조선 사행(使行)을 상대로 장사하여 치부한 북경 상인 황씨(黃氏) 집안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북경에 온 조선 인사들과 빈번하게 교유하였다. 장고(掌故)에 밝았으며 글씨를 잘 썼다. 저서로 봉성쇄록(鳳城鎖錄) 등이 있다.

[D-002]사물재(四勿齋) : 사물(四勿)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극기복례(克己復禮) 즉 인을 실천하는爲仁 조목을 묻는 안연에게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답한 것을 가리킨다.

[D-003]녹침필(綠沈筆) : 대나무 붓대에 옻칠을 한 붓이다.

[D-004]조선 주고(主顧) : 조선인을 단골 고객으로 삼은 상인을 말한다.

[D-005]박 기거(博起居) …… 것이며 : 기거(起居)는 박명의 당시 직책인 기거주 일강관의 줄임말이다. 이본에는 이 구절의 첫머리에 유독이란 뜻의  자가 첨가되어 있다.

[D-006]우물에 빠진 모수(毛遂) : () 나라에 두 사람의 모수, 즉 평원군(平原君)의 식객(食客)으로 있는 모수와 야인(野人)인 모수가 있었다. 하루는 야인 모수가 우물에 빠져 죽었다. 식객 중에 한 사람이 이를 평원군에게 고하자, 평원군이 이 말을 듣고 , 하늘이 나를 버리셨도다.” 하며 탄식하였다. 西京雜記 卷6

[D-007]좌중을 놀라게 한 진준(陳遵) : 진준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로 자는 맹공(孟公)이다. 당시에 열후(列侯) 가운데 진준과 성()과 자()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진준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언제나 진맹공(陳孟公)이 왔노라고 알렸다. 좌중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 열후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진준을 가리켜 진경좌(陳驚座)’라고 불렀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D-008]삼성(三省) : 논어 학이(學而)에서 증자(曾子)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조목에 비추어 자신을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하였다.

[D-009]구용(九容) : 예기 옥조(玉藻)에 제시된 바 군자가 수신하고 처세할 때 지녀야 할 9종의 자용(姿容)으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운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D-010]눌와(訥窩) :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군자는 말은 유창하지 못해도 실천은 민첩하고자 한다.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고 하였다.

[D-011]묵재(黙齋)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말없이 마음에 새겨 두고, 배우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내게 무슨 힘든 일이랴.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라고 하였다.

[D-012]공신(拱辰) : 논어 위정(爲政)에서 덕정(德政)이란 비유컨대 제자리에 정지해 있는 북극성을 뭇별이 에워싸고 도는 것과 같다.譬如北辰 居其所 而衆星共之고 하였다.

[D-013]유연(悠然) : 도잠(陶潛)의 음주(飮酒) 시에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따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고 하였다.

[D-014]와룡선생(臥龍先生)을 모신 사당 :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신은 본래 포의로서 남양에서 몸소 농사를 지었다.臣本布衣 躬耕於南陽고 하였다. 이덕무(李德懋) 동짓날 내제(內弟)를 그리워함至日憶內弟이란 시 제목 아래 주() 남양(南陽)에 와룡사(臥龍祠)가 있다.南陽有臥龍祠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2 嬰處詩稿

[D-015]죽루(竹樓) : 왕우칭(王禹稱)의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실려 있다. 왕우칭(954~1001)은 송 나라 진종(眞宗) 때 재상(宰相)과 불화하여 호북성(湖北省) 황주부(黃州府) 황강현(黃岡縣)으로 좌천되었다. 그곳은 대나무의 명산지였으므로, 왕우칭은 대나무로 조촐한 누각 2칸을 짓고 나서 이 기를 지었다고 한다.

[D-016]세월이 ……  :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임술년 가을 7월 기망(旣望)에 내가 길손들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赤壁)의 아래에서 노닐었다.壬戌之秋七月旣望 蘇子與客浮舟於赤壁之下로 시작되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D-017] …… 어찌하겠소 :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소동파가 술이 거나하여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사람이 있어 노래에 따라 화답을 하였다.客有吹洞簫者 依歌而和之고 하였다.

[D-018]이군 유일(李君有一) : 이유동(李儒東)으로, 자가 유일(有一)이고 호는 취미(翠眉)이다. 박제가(朴齊家)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요절하였다. 貞蕤詩集 卷1 戱倣王漁洋歲暮懷人六十首幷小序, 2 四悼詩

[D-019]有美一人兮 : 영남대본 연암집에는 彼美人兮로 되어 있다. 시경 패풍(邶風) 간혜편(簡兮篇)에 의거하여 바로잡은 것으로 보인다.

[D-020]경차(景差) : 전국(戰國) 시대 초() 나라의 시인으로서, 굴원(屈原)의 뒤를 이어 송옥(宋玉), 당륵(唐勒)과 함께 사부(辭賦)를 잘 지었다.

[D-021]긴 눈썹 : 당시(唐詩)에서 먼산遠山을 흔히 긴 눈썹脩眉에 비유하였다.

[D-022]진부한 …… 사람 : 한유(韓愈)는 답이익서(答李翊書)에서 오직 진부한 표현을 없애는 데 힘쓸 것惟陳言之務去을 역설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당(李唐)의 그림에 제()하다.

 

 

() 나라 도군황제(道君皇帝 휘종(徽宗)) 때에 하양현(河陽縣)의 삼성(三城) 사람 이당(李唐)이 있었는데, 자는 희고(晞古)이다. 화원(畵院)에 들어가 건염(建炎 남송 고종(高宗)의 연호. 1127~1130) 연간에 태위(太尉) 소연(邵淵)의 천거로 어지(御旨)에 따라 성충랑(成忠郞)과 화원대조(畵院待詔)를 제수받고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이때 나이가 80세였다.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소 그림을 잘 그렸다. 고종이 평소 그의 그림을 사랑하여 일찍이 그가 그린 장하강사도(長夏江寺圖)의 두루마리 첫머리에 제사(題辭)를 쓰기를, “이당은 당 나라 이사훈(李思訓)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다.

이 화첩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은 만력(萬曆) 연간의 말기였는데 제사(題辭)로는 진인석(陳仁錫), 신용무(申用懋), 진계유(陳繼儒), 누견(婁堅), 요희맹(姚希孟), 동기창(董其昌), 문진맹(文震孟), 범윤림(范允臨), 설명익(薛明益), 진원소(陳元素) 등 여러 사람의 글씨가 있다.

설을 쇨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그림을 내놓은 것이니, 그 값은 오천 냥이다. 그러나 그 주인의 이름은 숨기고 있다. 아마도 기계 유씨(杞溪兪氏) 집안에서 나온 물건으로 보인다. 나는 가난하여 이것을 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므로 그 내력이나마 기록해 둔다.

만력후(萬曆後) 사갑오(四甲午 1774) 섣달 그믐날 저녁 전의호동(典醫衚衕)에서 쓰다.

 

 

[D-001]() 나라 …… 하였다 : 이 단락은 연암이 도회보감(圖繪寶鑑) 4, 식고당서화휘고(式古堂書畵彙考) 44에 있는 내용을 거의 그대로 전재(轉載)한 것이다. 이사훈(李思訓 : 651~716)은 당() 나라 종실(宗室)로서 청록 산수화(靑綠山水畵)로 유명하였다.

[D-002]진인석(陳仁錫) …… 진원소(陳元素) : 모두 명말(明末)의 저명한 문사요 서화가이다. 진인석은 숭정(崇禎) 때 남경국자좨주(南京國子祭酒)를 지냈다. 明史 卷288 신용무(申用懋)는 천개(天開) 때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를 지냈다. 明史 卷218 진계유(陳繼儒)는 동기창(董其昌 : 1555~1636)과 동향으로, 산중에 은거하면서 시사(詩詞)와 서화에 전념하였다. 明史 卷298 요희맹(姚希孟)은 숭정 때 남경소첨사(南京少詹事)를 지냈다. 明史 卷216 문진맹(文震孟)은 문징명(文徵明)의 증손으로, 숭정 때 예부좌시랑 겸 동각대학사(禮部左侍郞兼東閣大學士)를 지냈으며, 문징명에 못지않은 명필이었다. 明史 卷251 범윤림(范允臨)은 서화에 뛰어나 동기창과 제명(齊名)하였다. 설명익(薛明益)은 글씨에 뛰어나 형산(衡山 : 문징명) 이후 제일인자로 평가되었다. 진원소(陳元素)는 묵란(墨蘭)을 잘 그렸으며 글씨와 시에 뛰어났다.

[D-003]전의호동(典醫衚衕) : 전의감동(典醫監洞)으로 종로구 견지동 일대에 해당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천산엽기도(天山獵騎圖) 발문

 

 

엽기도(獵騎圖)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는 모두 다섯 축()이 있는데, 진거중(陳居中)이 그린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숲 밖에 구름 기운이 음침하게 덮은 것은 바로 눈이 내릴 기세요, 꼬리가 긴 하얀 새가 갈 곳이 없어 나뭇가지에 앉았는데 그 털과 깃이 더욱 하얗게 보이고, 그 새를 흘겨보며 화살을 뽑은 되놈의 눈알은 온통 흰자위만 보이며, 말 위에서 비파를 절묘하게 타는 여인의 손가락도 하얗다.

이 그림만 보아도 북방의 한기(寒氣)가 음침하게 몰려와 온 하늘이 곧 눈으로 가득해지리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C-001]천산 :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경계에 있는 고산(高山)으로, 기련산(祁連山)이라고도 한다.

[D-001]진거중(陳居中) : 남송(南宋) 때의 유명한 화가로 영종(寧宗) 초에 화원대조(畵院待詔)가 되었다. 南宋院畵錄 卷5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발문

 

 

도읍으로서 융성하기는 송() 나라 도읍인 변경(汴京) 같은 데가 없고, 절기로서 화려하기는 청명(淸明) 같은 때가 없고, 화품(畵品)으로서 가장 섬세하기는 구영(仇英) 같은 사람이 없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그리자면 10년 세월은 걸렸을 터이다. 이 두루마리 그림을 제외하고도 내가 본 것을 세어 보면 이미 일곱 종이나 된다.

십주(十洲) 15세의 정년(丁年)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다면 이것은 95세 때의 작품에 해당할 터인데, 그때까지도 두 눈이 어둡거나 백태가 끼지 않고 털끝만큼이나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림 속의 거리와 점포들은 어슴푸레하여 꿈결 같고, 콩알만 한 사람과 겨자씨 같은 말들은 소리쳐 불러야 할 만큼 가물가물하다. 그중 특히 거위를 몰고 가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세심하게 그렸다.

 

 

[C-001]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 청명절(淸明節)에 변하(汴河)를 거슬러 오를 때 보이는 풍경을 그린 대작(大作)이다. 송 나라 때 장택단(張澤端)이 그렸다고 하는데, 원작은 전하지 않고 구영(仇英) 등 후대 화가들의 모방작만 전한다.

[D-001]구영(仇英) : () 나라 때의 화가로서 자는 실보(實父), 호는 십주(十洲)이다. 산수화와 화조화를 주로 그렸으며 특히 인물화를 잘 그렸다.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등과 함께 명대 4대가로 불린다.

[D-002]정년(丁年) : 장정(壯丁)으로 간주되는 나이를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관재(觀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이 두루마리 그림은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의 소장으로서 구십주(仇十洲)의 진품이라 여기어 훗날 자신이 죽으면 무덤에 같이 묻히기로 다짐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병이 들자 다시 관재(觀齋 서상수(徐常修)) 서씨(徐氏)의 소장품이 되었다.

당연히 묘품(妙品)에 속한다. 아무리 세심한 사람이 열 번 이상 완상했더라도 매양 다시 그림을 펼쳐 보면 문득 빠뜨린 것을 다시 보게 된다. 절대로 오래 완상해서는 안 된다. 자못 눈을 버릴까 두려워서다.

김씨는 골동품이나 서화의 감상에 정밀하여, 절묘한 작품을 만나면 보는 대로 집안에 있는 자금을 다 털고, 전택(田宅)까지도 다 팔아서 보태었다. 이 때문에 국내의 진귀한 물건들은 모두 다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그렇게 하자니 집안은 날로 더욱 가난해졌다. 노경에 이르러서는 하는 말이, “나는 이제 눈이 어두워졌으니 평생 눈에 갖다 바쳤던 것을 입에 갖다 바칠 수밖에 없다.” 하면서 물건들을 내놓았으나, 팔리는 값은 산 값의 10분의 2, 3도 되지 않았으며, 이도 이미 다 빠져 버린 상태라 이른바 입에 갖다 바치는 것이라곤 모두 국물이나 가루음식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D-001]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상고당은 김광수(金光遂 : 1696~?)의 호이다.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3 필세설(筆洗說)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일수재(日修齋)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변경(汴京)이 전성기에는 40만 호가 되었는데 숭정(崇禎) 말기에 주왕(周王)이 변경을 지켰다.

틈장(闖將)으로 조조(曹操)라는 별호를 가진 나여재(羅汝才)가 세 차례나 쳐들어와 포위했으나, 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남녀들이 들끓어 식량과 병기를 어느 것 하나 성안에서 가져다 쓰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변경이 가장 오래 버티다 함락되었다.

바야흐로 포위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 되어 보리쌀 한 되의 값이 은()으로 수천 수백 냥이나 되었고, 인삼(人蔘), 백출(白朮), 복령(茯苓) 등 모든 약재들도 다 먹어 없어지자, 수중의 물벼룩이나 뒷간의 지충(地蟲)까지도 다 보옥(寶玉)을 주고 사자 해도 살 수가 없었다.

급기야 황하가 터지고 성이 잠기게 되자 하룻밤 사이에 마침내 모든 곳이 늪지대가 되고 말았으며, 주왕부(周王府)에 있는 팔면 누각의 황금호로(黃金胡盧)가 겨우 그 꼭지만 보일 정도였다.

나는 매양 이 그림을 볼 때마다 당시의 번화한 모습을 상상하였는데, 그림 속의 복전(複殿 복층의 궁전)과 주랑(周廊)과 층대(層臺)와 첩사(疊榭)를 보면, 주왕부의 황금호로 생각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이 없었다.

 

 

[D-001]주왕(周王) : 숭정 14(1641) 주공효(朱恭枵)가 개봉(開封)의 왕, 즉 주왕으로 봉해졌다.

[D-002]틈장(闖將) : 맹장(猛將)이라는 뜻으로, 이자성(李自成) · 장헌충(張獻忠) · 나여재(羅汝才) 등을 부르는 칭호로 쓰였다. 나여재는 장헌충을 좇아 도적이 되었다가 이자성에게 귀의하였다.

[D-003]수중의 …… 지충(地蟲) : 물벼룩은 물고기의 사료로 쓰인다. 지충은 풍뎅이의 애벌레로 농작물을 해치는 땅속의 해충이다.

[D-004]황금호로(黃金胡盧) : 호로(胡盧)는 곧 호리병박葫蘆으로, 누각 지붕의 중앙 정점(頂點)에 설치한 호리병박 모양의 장식물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담헌(湛軒)이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

 

 

나는 이 그림에 발문을 지은 것이 이미 여러 번이었다. 모두 다 십주(十洲) 구영(仇英)의 그림이라 일컫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품이고 어느 것이 위조품인가?

중국의 강남(江南) 사람들은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정에 어두우니, 이 두루마리 그림이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온 것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글씨는 왜 꼭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유공권(柳公權)이라야 하며, 그림은 어찌 꼭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염입본(閻立本), 오도자(吳道子)라야 하며, 고정(古鼎)과 이기(彝器)는 어찌 꼭 오금(五金)으로 만든 선덕(宣德) 연간의 제품이라야만 하는가? 진품만 찾기 때문에 위조품이 수백 가지로 나오는 것이니, 비슷할수록 가짜가 많다.

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에 가면 손수 글씨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나와 파는 사람들이 있으니, 우아한지 속된지를 대충 가려서 사 두면 된다. 향로(香爐)로 말하면 건륭(乾隆) 연간의 제품이라도 모양이 고괴(古怪)하고 돈후(敦厚)한 것만 취한다면 북경 시장에서 웃음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D-001]오금(五金)으로 …… 제품 : () 나라 선종(宣宗) 선덕 연간에 강서(江西)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제품으로,  ·  · 구리 ·  · 납을 사용한다. 특히 선덕로(宣德爐)라 하여 선덕 연간에 만든 향로(香爐)를 일품으로 친다. 宣德鼎彛譜 卷1

[D-002]융복사(隆福寺)나 옥하교(玉河橋) : 제경경물략(帝京景物略) 1 성북내외(城北內外)에 의하면 융복사는 명 나라 경종(景宗) 때 창건한 큰 절이었으나 현재는 없어지고 북경 동성구(東城區)에 융복사가(隆福寺街)라는 지명으로만 남아 있다. 옥하교는 어하교(御河橋)라고 하며, 정양문(正陽門) 안 한림원(翰林院)과 조선관(朝鮮館 : 옥하관玉河館) 부근에 있었다. 연암의 열하일기 앙엽기(盎葉記) 및 알성퇴술(謁聖退述)에 이 두 곳에 관한 언급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우인(友人)의 국화시(菊花詩) 시축(詩軸)에 제()하다

 

 

꽃이란 들쑥날쑥 틀어지고 비스듬한 것이 도리어 정제(整齊)된 모습이 되는 것이니, 마치 진() 나라 시대 사람의 글씨가 글자를 구차스레 배열하지 않고도 줄이 저절로 시원스레 곧은 것과 같다. 만약 노란 꽃 흰 꽃을 서로 마주 대하게 한다면 이는 곧 자연스러운 멋을 잃어버리고 만다.

담배를 피워 연기로 꽃을 질식시키지 말 것이며, 속인들이 함부로 평론하여 꽃을 기죽게 하지 말 것이며, 가끔 맑은 물을 살짝 뿜어 주어 꽃의 정신을 안정시키도록 하라.

 

 

[D-001]마치 …… 같다 : 이와 거의 동일한 구절이 연암집 5 답창애(答蒼厓) 여덟 번째 편지에 있다. () 나라 사람은 왕희지(王羲之)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효자 증 사헌부 지평 윤군(尹君) 묘갈명(墓碣銘)

 

 

효자의 휘()는 관주(觀周), 자는 중빈(仲賓)으로, 칠원(漆原) 사람이다. 그의 7세조 율()이 명 나라 도독(都督) 진린(陳璘)을 따라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순천(順天)에 머물렀는데, 도독이 본국으로 돌아가자 마침내 남쪽에 그대로 남아 자손들이 대대로 살게 되었다. ()에 이르기까지 6세가 연달아 진사(進士)였다.

군은 효도로써 고을에 알려졌으며, 계모를 섬김에 있어서도 효성이 지극하였다. 군이 죽은 후 고을의 선비들이 이러한 사실을 글로 적어 관찰사에게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 글 속에는 말하기 어려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군의 맏아들 모()가 또한 효도로써 알려졌는데, 그가 길에까지 쫓아 나와서 그 글을 빼앗아 구기고 울면서 말하기를,

 

누가 우리 아버지를 효자라 해 달라던가?”

하니, 고을의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향중(鄕中)에서 의논을 모으자 모두들 하는 말이,

 

이 일은 효자의 자제들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차라리 그 선행을 아주 묻어 버릴지언정 효자의 마음을 슬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더더구나 죽은 자의 마음까지 슬프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 글을 고쳐서 말하기 어려운 사실은 없애 버리고 그 내용을 심오하게 표현하여 관찰사에게 바치니, 관찰사가 그의 효를 살펴보았으나 증빙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내버려 두고 조정에 아뢰지 않았다.

그 후 관찰사가 세 번 바뀌고 나서야 비로소 장계(狀啓)를 올려 그 사안이 예조(禮曹)에 내려졌다. 그러나 예조에서도 효자가 어버이를 섬긴 시말을 보고한 글이 애매모호하여 그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역시 내버려 둔 채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 이에 고을의 선비 14인이 도내 57개 고을 836인의 연명장을 가지고서 예조의 문 아래에 서서 큰 소리로,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주는 법이요,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 향당(鄕黨)에서의 정직함이란 의리상 서로 숨겨 주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서 눈물을 흘리며 그 언사가 강개하니, 예관(禮官) 알겠다.”고 말하고는 그날로 즉시 아뢰어 효자로 정려(旌閭)하였다.

그 후 3년이 지나서 이 도를 안찰(按察)하는 어사(御史)가 장계를 올려, 사헌부 지평에 추증하였다.

묘는 군 소재지 남쪽 10리 지점 곤좌(坤坐)의 묘역에 있다. 세 아들 모(), (), ()를 두었다. ()은 다음과 같다.

 

효자란 외쳐댄다고 해서 만들어지겠는가? / 孝可聲

외쳐대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 如可聲也

크게 탄식하며 명을 썼으리라. / 太息而銘

 

 

[D-001]이 일은 …… 일이다 : ‘이 일이란 효자로 표창해 줄 것을 상소하는 일을 가리킨다. 연암집 10 박 열부 사장(朴烈婦事狀)에서, 순절한 박씨를 열녀로 표창해 주도록 건의하려는 것을 박씨의 아버지가 만류하자, 동네 사람들은 이 일은 친정집과는 관계없는 일이오.是無與於本家라고 하면서 예조에 글을 올린 내용이 나온다.

[D-002]어버이를 …… 있습니다 : ‘어버이를 위해서는 그 잘못을 숨겨 준다爲親者諱는 것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민공(閔公) 원년(元年) 조에 나오는 말이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觀過知仁는 것은 논어 이인(里仁)에 출처를 둔 고사성어이다. 또한 논어 자로(子路)에서 아비가 양을 훔친 사실을 증언한 아들을 정직하다고 칭찬한 섭공(葉公)에 대해 공자는 우리 향당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아비는 아들의 잘못을 숨겨 주고, 아들은 아비의 잘못을 숨겨 주나니, 정직은 바로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양 호군(梁護軍) 묘갈명

 

 

내가 연암협(燕巖峽)에 집을 짓고 장차 가서 살 요량으로 자주 개성(開城)을 내왕하게 됨에 따라 남원 양씨(南原梁氏)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양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대갓집이라 어질고 호방한 장자(長者)들이 많이 출입하였다. 그 자제를 따라 숭산(崧山 송악산) 남쪽 계곡 사이에서 노닐었는데, 연못과 누대가 맑고 그윽하였으며 숲 속의 나무들이 모두 아름드리였다. 서로 함께 술을 마시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즐기고 있을 때 그중에 호맹(浩孟)이란 사람이 탄식하며,

 

그대는 미처 나의 백부(伯父)와 함께 노닐어 보지 못했지요. 백부께서는 좋은 술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빈객(賓客)을 좋아했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 그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청하기를,

 

우리 백부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니, 그대가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니, 군의 휘는 제영(濟泳)이요, 자는 군섭(君涉)이다. 증조는 부신(敷信)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조부는 의섬(義暹)이니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의 휘는 지성(枝盛)이니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비()는 남양 홍씨(南陽洪氏)이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이 되어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나이도 젊은 데다 재산도 풍부하여 호탕하게 행동하였으며, 마음속으로 이제 훈신(勳臣)이 되었으니 족히 당세에 벼슬을 할 만하다.’ 여기고서, 의기양양하여 좋은 옷에 좋은 말을 타고 여러 조신(朝臣)들과 교유하였다. 여러 조신들도 어여삐 보고서 천거하고 위로하면서, 장차 쓸 만한 사람이라 지목하고 모두 자기 문하에서 출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래 지날수록, 금품에 손발이 달린 듯 남몰래 오가며 벼슬자리에 샛길과 구멍이 많음을 알게 되자, 깊이 탄식하고 말하기를,

 

나는 내 고향으로 가서 즐겨야겠다.”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원과 집을 더욱 깨끗이 가꾸고 집안 살림은 모두 아우 일가에게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다. 날마다 향중의 부로(父老)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4세요, 계미년(1763) 12 12일이었다.

효도와 우애에 독실하여 한 고을의 모범이 되었으며, 부모상을 당해서는 이미 늙어 머리가 하얀데도 예법을 지키기를 몹시 엄격히 하였다. 배위(配位)는 평산 이씨(平山李氏) 기숭(基崇)의 딸인데, 선영(先塋) 곤좌(坤坐)의 묘역에 합장하였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하고, 아우 제택(濟澤)의 아들 시맹(時孟)으로 대를 이었으나 그 역시 요절하였으므로 언맹(彦孟)의 아들 경헌(景憲)으로 뒤를 잇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네 / 鎡基不如待時

상관에게 잘 빌붙는 건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다거나 / 或曰巧宦不如乘時

짧은 인생 즐겁게 살 따름이니 / 或曰人生行樂耳

부귀하기를 언제 기다리랴 하기도 하네 / 須富貴何時

 

 

[C-001]호군(護軍) : 조선 시대의 군사조직인 오위(五衛)의 정 4 품 벼슬. 실지로 맡아보는 일이 없는 산직(散職)이다.

[D-001]서로 …… 마시면서 : 원문은 相與飮酒인데, ‘相與飮食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2]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 : 양무는 영조 4(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 데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려 준 공신호(功臣號)이다.

[D-003]훈신(勳臣)이 되었으니 : 원문은 勳胥 勳胥란 본래 연기가 점차 퍼져 나가듯이 다른 사람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뜻하나 여기서는 양무 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이 된 사실을 고려하여 이와 달리 풀이하였다.

[D-004]농기구가 …… 못하다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때를 잘 타는 것만 못하고, 비록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雖有知慧 不如乘勢 雖有鎡基 不如待時는 제() 나라의 속담을 인용하였다.

[D-005]짧은 …… 기다리랴 : () 나라 양운(楊惲)이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에서 한 말이다. 文選 卷41》 《漢書 卷66 楊敞傳 양운은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으로, 선제(宣帝) 때 그의 벗 손회종이 자중할 것을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오자 이를 반박하는 답서를 보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취묵와(醉黙窩) 김군(金君) 묘갈명

 

 

내가 개성(開城)에 기거할 잠시 기거할 적에 그 고을 선비들의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향사례(鄕射禮)를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누차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서 말없이 기억해 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용모가 단정하고 진중하여, 음악과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서도 종일토록 말과 행동이 항상 처음 온 때와 같아서, 마치 덕이 높은 귀인이 스스로 뽐내지 않아도 풍모가 중후하게 보이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를 몹시 특이하다고 여기어 더불어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가 정주 김씨(貞州金氏) 진사(進士) 형백(亨百)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서서히 그에 대한 고을 사람들의 평가를 듣게 되었는데, 모두가 충후한 장자(長者)라는 칭송을 그에게 돌리며, “()를 좋아하고 선행을 즐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김공(金公)뿐이다.”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그의 행장을 읽어 보니 그 말이 더욱 징험이 되었다. 지난날 내가 말없이 특이하게 여겼던 것과 고을 사람들의 칭찬하던 것이 모두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 자()는 석여(錫汝), 정주(貞州)는 지금의 풍덕부(豊德府)에 해당한다. () ()로부터 5()를 내려오면 휘 대춘(大春)에 이르는데, 남달리 특출하고 거침없이 행동했으며 이름난 산수에 노닐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처사(處士)라 불렀다. 이분이 바로 군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가 승휘(承輝)이니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는 휘가 종엽(宗燁)이니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는 휘가 시광(始光)이니 무과로 발신하여 용양위 부사과(龍驤衛副司果)를 지냈으며, ()는 옥야 임씨(沃野林氏) 학생(學生) 흥량(興良)의 딸이다. 영종(英宗) 2년 병오년(1726) 3 24일에 군을 낳았다.

군은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씩씩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으므로 사과군(司果君)이 특별히 사랑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식견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나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하고서, 드디어 바깥일을 물리치고 아들을 보살피기에 전심하였으며, 부부가 서로 타이르고 깨우치며 남에게 널리 베풀어 선행을 많이 쌓음으로써 아들을 위해 복을 쌓기를 지극히 하였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장성하자 이를 가슴 아파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 제삿날이 오면 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였으며, 종신토록 어린아이처럼 사모하여 사랑하고 공경하기를 거의 고인이 살아서 나타난 듯이 하였다.

한 분 형, 세 분 누나와 함께 어머니 임씨를 섬겼다. 형이 죽자 슬퍼하기를 마치 아버지를 여읜 듯이 하여, 상사(喪事)에 정성과 예()를 다했고 고아가 된 조카들과 과부가 된 형수를 따뜻하게 정성껏 돌보았으며, 가정을 자상히 보살피어 형이 살아 있을 때보다 도리어 재산이 더욱 불어나게 하였다.

어머니 임씨가 자기한테 와서 봉양을 받았는데, 성품이 자비로워서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셨다. 친족이나 이웃 사람들의 궁핍한 사정을 차마 보지 못하여, 좀 도와주었으면 하는 눈치가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이면, 반드시 먼저 주선해 주되 한 번도 어려워하는 안색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얼마 후 어머니 상을 당하자, 상사(喪事)를 한결같이 예법에 따랐으며 순심(純心)으로 애모(哀慕)하여, 다른 일이나 쓸데없는 말로 그 마음을 저해하지 않았다.

누나들에게도 우애가 고루 지극하여, 살아 있을 때는 의식(衣食)을 함께 나누었고, 죽어서는 대신하여 그 소생 자손들을 어루만지고 가르치되, 마치 나무를 심고 북돋우듯, 벼의 모를 옮기고 물을 대듯이 하여, 기필코 자립시켜 성취가 있도록 만들었다.

가승(家乘)이 병란(兵亂)으로 불에 탔으므로 선대의 사적을 징험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여 서둘러 족보를 만들었다. 이때 의심난 점은 빼 버리고 미더운 것만 전하였으며, 스스로 글을 지어 종족 간에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서술하였다. 선조 3대의 묘에 묘지(墓誌)가 없으므로, 행적과 계파(係派)를 삼가 기록하여 무덤 속에 넣어 먼 장래에 대비하였다. 족인(族人)으로 마땅히 신주(神主)를 받들어야 하는 자가 가난하여 집을 갖지 못한 경우에는 그를 위하여 집을 사고 살림살이를 마련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외가(外家)가 친척도 없고 가난하여 단지 현손(玄孫) 하나만 있었는데, 그가 아직 어렸으므로 데려다 집에서 양육하였고, 장성해서는 장가를 들이고 농토를 떼어 주어 그것으로 제사를 지내고 먹고살게 해 주었다. 선조를 추모하고 후손을 염려하는 지극한 정성이 모두 이와 같았다.

친구들의 상사(喪事)에 있어서는 인정과 능력에 알맞게 부의(賻儀)를 보내어 혹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만들어 보내 주기도 하였으며, 가난한 일가로서 산골짜기에 들어와 생활하는 자에게는 혹 전답을 주기도 하였으며, 예전에 꿔 준 돈을 가난하여 갚지 못하는 자에게는 빚 문서를 돌려주기도 하였으며, 살림이 가난하여 시집이나 장가를 들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반드시 도와주었으며, 농토나 농가를 가난한 사람들더러 경영하게 한 경우에는 대개 그 세를 가볍게 받아들였으므로 이에 힘입어 목숨을 부지해 가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부지런히 공부를 하여 글을 배운 지 몇 년 사이에 사서(四書)를 두루 외웠으며, 경서(經書)를 연구하려고 뜻을 두었으나, 집안 살림을 주간할 사람이 없어 어머니 임씨에게 심려를 끼칠까 염려하여 마침내 학업을 중단하였으니, 이것이 종신의 한이 되었다.

그러나 분별력이 정확하고 무릇 다스리고 계획하는 데 탁월하여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일이 시비(是非)가 뒤섞여 여러 논란이 한창 분분할 경우에도 군이 천천히 한마디 말로써 분석해 내면 보는 사람들이 당초에는 긴가민가하다가, 그 일이 끝내는 그 말대로 들어맞고 나서야 모두들 놀라 탄복하였다.

평소에 집안의 남녀들은 숙연하면서도 화목하였으며 자제와 동복(僮僕)들까지도 아순(雅順)하고 각자 직분을 잘 알아 법도를 넘어서지 않았다. 군은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앉아서 일을 보살폈다. 집에 손님들이 항상 가득하였으나 반드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였으며, 아래로 소작인이나 촌부들까지 뒤섞여 북적대면서 도와 달라고 서로 다투어도, 일마다 척척 처리하여 어느 것 하나 흡족하게 해결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람들을 대할 때는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흉금을 터놓고 지냈으나, 유독 자신의 몸가짐에 대해서만은 엄격하여 향중(鄕中)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고 관청에는 발조차 들이지 않았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서울에서 노닐었는데, 그때 교유한 사람들은 모두 신중한 장자(長者)들이었다. 그 영향으로 군은 종신토록 위태롭고 치욕이 될 만한 일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더욱 관대하고 화락하며 편안하고 영화로웠다. 성곽을 두른 경치 좋은 땅에다 별장을 마련하니, 화단과 연못이 씻은 듯이 깨끗하고 나무들이 무성하게 늘어섰는데 그 속에서 날마다 유유자적하게 소요하였다.

일찍이 동으로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바닷가의 절경들을 유람하고, 서쪽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올라 비류수(沸流水 대동강의 지류인 비류강)를 굽어보는 등 옛사람의 발자취를 뒤밟아 가며 훌쩍 속세를 벗어날 뜻을 품었다.

병이 위독하자, 가족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편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으니, 이날이 기유년(1789) 7 28일이요 향년 64세였다. 이해 9 9일에 수우리(修隅里) 고산동(高山洞) 해좌(亥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는 화개 김씨(花開金氏) 학생(學生) 이태(麗兌)의 딸인데 3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재진(載晉)인데 진사(進士), 다음은 재해(載海)인데 일찍 죽었고, 다음은 재보(載普)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장녀는 김상육(金尙堉)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생원(生員) 이희조(李熙祖)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박상흠(朴尙欽)에게 출가했다.

재진은 우후(虞候) 상원(祥原) 최창우(崔昌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으며, 재해는 문의(文義) 이춘교(李春喬)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고 언교(彦敎)를 양자로 들였으며, 재보는 목천(木川) 마지광(馬之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언사(彦師)를 낳았는데 재진의 양자로 들어갔고, 딸 하나를 두었다. ()은 다음과 같다.

 

공직을 못 가졌으니 / 未嘗奉公

그 충성 어이 알며 / 焉知其忠

백성을 다스려 보지 못하였으니 / 未嘗莅民

그 어짊 어이 알리 / 焉知其仁

오직 효성과 우애는 / 惟孝友于

온갖 행실의 근원이라 / 實源百行

저 옥과 비단 같은 예물을 / 如彼玉帛

바치기에 앞서 공경을 갖추어야 하듯 / 未將也敬

못 써 보았다고 뭐가 슬프리 / 不試何傷

몸에 이기(利器) 지닌 것을 / 利器在躬

후손에게 경사(慶事) 있고말고 / 必有餘慶

선행을 쌓은 집 아니던가 / 積善之家

착한 사람 무덤이라 / 善人之藏

묘지에 심은 나무들까지 무성하도다 / 澤及松柞

이제 그 묘갈명을 새기어 / 我刻銘詩

천박해진 세상에 충고하노라 / 以勸衰薄

 

 

[D-001]내가 …… 적에 : 원문은 某嘗客松京인데, 이본에는 某嘗客遊松京으로 되어 있다.

[D-002]그때마다 안절부절못하였으며 : 원문은 輒皇皇如이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 부모의 장례를 마친 뒤에는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마치 누군가 오기를 바라건만 오지 않는 것 같다.旣葬 皇皇如有望而弗至 하였고,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공자는 석 달만 임금을 섬기지 못하면 안절부절못하였다.孔子三月無君 則皇皇如 하였다.

[D-003]사랑하고 …… 하였다 : 원문은 庶幾著存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돌아가신 부모에 대해 사랑을 바치기를 마치 살아 계신 듯이 하고, 정성을 다하기를 마치 감응(感應)하여 나타난 듯이 한다.致愛則存 致慤則著 하였다.

[D-004]아순(雅順)하고 …… 알아 : 원문은 雅馴職職인데, ‘職職 識職과 같다. 한유(韓愈)의 남양번소술묘지명(南陽樊紹述墓誌銘) 문자가 종순하여 각자 그 직분을 알았다.文從字順 各識職고 하였다.

[D-005] …… 하듯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예다 예다 하는데 옥과 비단을 이른 말이냐.禮云禮云 玉帛云乎라고 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없이 예물을 바치는 것은 예가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도 공경이란 예물을 바치기에 앞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恭敬者 幣之未將者也라고 하였다.

[D-006]후손에게 …… 아니던가 : 주역 곤괘(坤卦) 선행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후손에게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운봉 현감(雲峯縣監) 최군(崔君) 묘갈명

 

 

군의 휘()는 모()요 자()는 모()이니 양천 최씨(陽川崔氏)이다. 고려 때에 휘 모가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금천(衿川)에 식읍(食邑)을 하사받음으로써 자손이 그곳에 대대로 살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금천에 본관을 두게 되었는데, 뒤에 개성부(開城府)로 옮겨 갔다.

군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정교하고 날렵한 솜씨를 아무도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다. 금상(今上 영조) 4년 무신년(1728)에 영남에서 역적이 크게 일어나 서쪽으로 올라오자 군은 스스로 관부(官府)에 나아가 장사(壯士)의 선발에 끼었는데, 화살을 활통에 꽂고 말에 가슴걸이를 갖추고 활을 메고서 칼을 쥐고 나가며,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

하였다. 역적이 평정되자 양무공신(揚武功臣)에 녹훈(錄勳)되어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거쳐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에 올랐다.

()이 만월대(滿月臺)에 거둥하여 보인 시험에 합격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고, 오위장(五衛將)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운봉 현감(雲峯縣監) 겸 영장(營將)이 되었다. 이때 운봉현과 그 속읍들에 크게 기근이 들고 역병(疫病)이 돌자 군이 한탄하며 말하기를,

 

우리 고향이 관직 진출이 막힌 지가 오래되었다. 내가 이번에 성상의 후한 은덕을 입고서 병부(兵符)와 인끈을 차고 일산(日傘)을 덮고 오마(五馬)를 몰아 부임한 것은 우리 고향의 영광이 되겠으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라도 살리지 못한다면 우리 고향의 수치가 될 것이다.”

하고는 녹봉을 모두 털어서 구제하고, 그래도 부족하자 관할하는 다섯 고을에서 두루 빌려 와서 진휼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자 힘썼다. 그리하여 해마다 풍년이 들었으며 병들어 죽는 백성이 없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 71세였다. 모년 모월 모일에 모좌(某坐)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의 휘()는 모()이니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의 휘는 모()이니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의 휘는 모()이니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는 정부인(貞夫人) 모씨(某氏)이며 아들과 딸은 아래쪽에 기록되어 있다. ()은 다음과 같다.

 

작은 곳간 큰 곳간 든든히 재어 놓고 / 窖廩囷倉固所藏

조금씩 골고루 나누어 주니 유사들은 착실했네 / 庾斛釜鍾有司良

운봉 현감으로 승진되었는데 재량을 잘못하여 / 升以雲峯失所量

쌀을 쌓아 놓고 썩혀 두면 우리 고향을 슬프게 하리 / 積久腐紅悲我鄕

자신은 크게 떨치지 못했어도 후손은 창성하리 / 不振厥躬留後昌

 

 

[D-001]철권(鐵券) : 공신들의 후손들에게도 각종의 특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의 증명서를 말하며 단서철권(丹書鐵券)’이라고도 한다.

[D-002]우리 …… 오래되었다 : ‘우리 고향이란 개성(開城)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개성 사람들의 관직 진출이 오래도록 막혔었다.

[D-003]우리 …… 것이다 : 원문은 爲我鄕恥耶인데, 이본에는 爲我鄕洗恥耶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우리 고향의 수치를 씻을 수 있겠는가.”이다.

[D-004]조금씩 …… 착실했네 : 원문의 유(), (), (), ()은 모두 소량(少量)의 단위들이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는 제자 공서적(公西赤)이 제() 나라에 사신으로 갈 적에 사치스러운 차림을 한 사실을 들어 그의 모친에게 부( : 6 4) 아니면 유( : 16)의 식량만을 주도록 허락하면서, “군자는 급한 사람을 두루 돕지, 부자가 계속 여유 있도록 돕지는 않는다.君子周急 不繼富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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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6권 별집 - 서사(書事)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6권 별집 - 서사(書事)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6권 별집   서사(書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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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6권 별집

 

 

서사(書事)

 

 

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면천 군수(沔川郡守) 신 박지원은 교명(敎命)을 받들어 지어 올립니다.

 

금상(今上 정조(正祖)) 20  () 나라 가경(嘉慶) 원년(1796)  9 21일에 제주 사람 전() 충장장(忠壯將) 이방익이 서울에 있는 자기 부친을 뵐 양으로 배를 탔다가 큰바람을 만나 표류되어 10 6일에 팽호도(澎湖島)에 닿았습니다. 관에서 의복과 음식을 주어 십여 일을 머물게 한 뒤에 호송하여 대만(臺灣)에 당도하고, 거기서 또 하문(厦門)을 경유하여 복건(福建), 절강(浙江), 강남(江南), 산동(山東) 등 여러 성()들을 거쳐 북경(北京)에 도달하고, 요양(遼陽)을 경유하여 다음해인 정사년 윤6월에 서울에 돌아오니, 수륙(水陸) 만여 리를 거쳐온 것입니다.

상께서 특별히 방익을 불러 보고 지나온 산천과 풍속을 하문하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배를 같이 탄 8명 가운데 방익만이 문자를 알기는 하였으나, 겨우 노정(路程)만을 기록해 놓았을 뿐이요, 또 기억을 더듬어 입으로 아뢴 것도 왕왕 차서(次序)를 잃었습니다. 신 지원이 면천 군수로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러 희정당(熙政堂)에 입시(入侍)하자 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이방익의 사건이 몹시 기이한데 좋은 기록이 없어 애석하니 네가 한 책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하시었습니다. 이에 신 지원이 송구한 마음으로 명을 받들고는 물러나 그 사실을 가져다 대략 증정(證正)을 가하였습니다.

방익의 부친은 전() 오위장(五衛將) 광빈(光彬)인데 일찍이 무과에 응시하려고 바다를 건너다가 표류되어 일본 장기도(長崎島)에 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국 선박들이 많이 모이고 시장과 마을이 번화하였습니다. 그때 의사(醫士) 한 사람이 광빈을 맞아 그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잘 대접하면서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광빈이 굳이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하니 의사가 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예쁘장한 젊은 계집을 나오라 하여 광빈에게 절을 시키면서,

 

내 집에 천금 재산을 쌓아 놓았으나 사내자식은 하나도 없고 다만 이 계집애가 있을 뿐이니, 원컨대 그대는 내 사위가 되어 달라. 내가 늙어서 죽게 되면 천금의 재산은 그대의 차지가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계집을 슬쩍 보니 치아가 서리같이 하얗고 아직 철즙(鐵汁)을 물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과연 처녀였습니다. 광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제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재물을 탐내고 여색에 연연해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린다면 이는 개돼지만도 못한 자이다. 더구나 나는 내 나라에 돌아가면 과거에 올라 부귀를 누릴 수 있는데, 하필 그대의 재물과 그대의 딸을 탐내겠는가.”

했더니, 의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보내 주었다고 합니다. 광빈이 비록 섬 속의 무인(武人)이지만 의젓하여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었으며, 그 부자(父子)가 멀리 이국에 노닐게 된 것도 역시 기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제주는 옛날의 탐라(耽羅)입니다. 북사(北史)에 이르기를, “백제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백제에 복속하였다.”라 했고, 또 이르기를, “고구려 사신 예실불(芮悉弗)이 위() 나라 선무제(宣武帝)에게 말하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나고 옥은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났고 섭라는 백제에게 합병이 됐으므로, 이 두 가지 물품은 그 때문에 올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용삭(龍朔) 초에 담라(澹羅)가 있었는데 그 왕 유리도라(儒理都羅)가 사신을 보내 입조(入朝)했다.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박루(樸陋)하여 개가죽 옷을 입고 여름에는 혁옥(革屋 가죽을 펴서 지붕을 삼은 집)에서 살고 겨울에는 움집에서 생활한다. 처음에는 백제에 복속되었으나 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이는 다 탐라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방언에 도() 이라 이르고 국() 나라라 이르는데 탐() · () · () 세 음은 모두 과 유사하니 대개 섬나라라는 뜻입니다. 옛 기록에 일컬은 바, “처음에 탐진(耽津 강진(康津))에 배를 정박하고 신라에 조회했기 때문에 탐라라 한다.”고 한 것은 견강부회의 설입니다.

송 나라 가우(嘉祐) 연간에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 해상에 배 하나가 돛대 꼭지가 부러져 바람에 날리어 해안에 닿았는데, 배 안에는 30여 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의관(衣冠)은 당 나라 사람 같았으며 홍정(紅鞓 붉은 가죽 띠)과 각대(角帶 뿔로 장식한 허리띠)를 띠고 짧고 검은 베적삼을 입었는데, 사람을 보면 모두 통곡만 하고 언어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시험 삼아 글자를 쓰게 했더니 쓴 글자 역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다닐 적에는 서로 줄지어 다녀 기러기 줄과 같았습니다. 한동안 있다가 문서 하나를 꺼내어 사람에게 보이는데, 바로 한자(漢字)로 씌어진 것으로서 당 나라 천수(天授 690~692) 연간에 둔라도(屯羅島) 수령 배융부위(陪戎副尉)에 임명한다는 제서(制書 왕의 명령서)이고, 또 하나의 문서가 있는데 바로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으로서 둔라도라 칭했으며 그 역시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곤산현 지사(崑山縣知事)가 사람을 시켜 그 돛대 꼭지를 수리해 주게 했는데 그 돛대 꼭지는 예전에는 선목(船木) 위에 꽂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인(工人)이 그를 위하여 돌리는 굴대를 만들어 돛대를 일으키고 눕히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살펴보건대, 제주는 옛날에 또한 탁라(乇羅)’라고도 불렸으며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 탐부라(耽浮羅)’라 불렀습니다. 이른바 둔라(屯羅)’라는 것은 탁라(乇羅)’의 와전입니다. 천수(天授)는 고려 태조의 연호이니 고려사 천수 20년에 탁라 도주(乇羅島主)가 내조(來朝)하여 왕이 작()을 내렸다.”는 것이 바로 그 실례입니다. 송 나라 사람이 이를 당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로 본 것은 더욱 틀린 것으로서, 제주 사람이 중국에 표류되어 들어간 것은 예로부터 있어 온 일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배가 바람에 휘날려 혹은 동서로 혹은 남북으로 표류하기를 열엿새 동안이나 하였습니다. 일본에 가까워지는 듯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중국으로 향하였습니다. 양식이 떨어져서 먹지 못한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문득 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들어 여덟 사람이 함께 산 채로 씹어 먹었습니다. 먹을 물이 다 떨어졌는데 하늘이 또 큰비를 내려 주어 모두들 두 손을 모아 받아 마시고 갈증을 풀었습니다. 배가 처음 해안에 닿았을 때는 정신이 어지러워 인사불성이 되었사온대, 어떤 사람이 멀리 서서 이를 엿보고 있더니 이윽고 무리를 지어 배에 올라 배 안에 있는 의복 따위들을 모두 챙기고 각자 한 사람씩 업고 나섰습니다. 이렇게 30여 리를 가니 마을이 나왔는데 30여 호쯤 되었고 중앙에는 공청(公廳)이 있어 곤덕배천당(坤德配天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미음을 만들어 주어 마시고 화로를 가져다 옷을 말려 주곤 하여 겨우 정신을 차려서는 지필(紙筆)을 청하여 글자를 써서 묻고서야 비로소 그곳이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소속인 팽호도(澎湖島) 지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팽호도는 서쪽으로 천주(泉州)의 금문(金門)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도경(圖經 지도책)에 의하면 팽호도는 동길서(東吉嶼), 서길서(西吉嶼)  36개의 섬이 있어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반드시 동길서와 서길서를 경유하여야 합니다.

예전에는 동안현(同安縣)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명 나라 말기에 이르러 지역이 바다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있음으로 인해 세금 수납이 불가능하므로, 마침내 논의하여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 후 내지(內地)의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리다 못해 가끔 그 안으로 도피해 갔는데, 동안(同安)과 장주(漳州)의 백성이 가장 많았습니다. 홍모(紅毛 네덜란드인)가 대만(臺灣)을 점령했을 때 이 지역도 아울러 차지했으며, 정성공(鄭成功) 부자(父子)가 다시 대를 이어 웅거할 때 이 지역을 맏고 대만의 문호로 삼았습니다. 주위를 빙 둘러 36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 제일 큰 섬은 마조서(媽祖嶼) 등지로 오문구(澳門口)에 두 포대(砲臺)가 있고, 그 다음은 서서두(西嶼頭) 등지이며, 각 섬들 가운데 서서(西嶼)만이 조금 높을 뿐 나머지는 다 평탄합니다. 하문(厦門)으로부터 팽호에 이르기까지는 물빛이 검푸른 색이어서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며 뱃길의 중도(中道)가 되어 순풍이면 겨우 7() 반 만에 갈 수 있는 물길이지만 한번 태풍을 만나면 작게는 별항(別港)에 표류되어 한 달 남짓 지체하게 되고, 크게는 암초에 부딪쳐 배가 엎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바람을 보고 기후를 점치는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하였고, 바다에 나갈 때는 시기에 따라 각각 그 방향을 달리하였습니다. 즉 봄과 여름에는 진해기(鎭海圻)를 통해 바다로 나가는데, 정남풍이 불면 건해방(乾亥方 서쪽에서 북으로 45~60도 방향)에서 손사방(巽巳方 동쪽에서 남으로 45~6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서남풍이 불면 건방(乾方 북서향)에서 손방(巽方 남동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겨울에는 요경(寮經)을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는데, 정북풍이 불면 술방(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도 방향)에서 진방(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술방(乾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30~45도 방향)에서 손진방(巽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30~45도 방향)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신술방(辛戌方 서쪽에서 북으로 15~30도 방향)에서 을진방(乙辰方 동쪽에서 남으로 15~30도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혹 위두(圍頭)를 경유하여 바다로 나가기도 하는데, 정북풍이 불면 건방(乾方)에서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고 한밤중에는 건해방(乾亥方)에서 손사방(巽巳方)을 향해 나아가며, 동북풍이 불면 건술방(乾戌方)에서 손진방(巽辰方)을 향해 나아갑니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날이 밝아질 즈음이면 모두 팽호의 서서두(西嶼頭)를 볼 수가 있습니다. 팽호를 거쳐 대만으로 갈 때에는 모두 손방(巽方)을 향해 나아가는데 저물녘이면 대만을 볼 수 있습니다. 팽호는 애초에 벼를 심을 만한 수전(水田)이 없었고 다만 고기 잡는 것으로써 생계를 삼았으며 혹은 남새를 가꾸어 자급하는 형편이었는데, 지금은 무역선이 폭주하여 점차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여덟 사람이 함께 채선(彩船 아름답게 장식한 배)을 타고 5리쯤 가서 마궁(馬宮)의 아문(衙門)으로 나아가니 강물을 따라 채선 수백 척이 널려 있고 강가에는 화각(畵閣)이 있는데 바로 아문이었습니다. 문 안에서 소리를 높여 세 번 외치고는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였습니다. 마궁의 대인(大人 고위 벼슬아치)이 홍포(紅袍)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는 예순 남짓하고 수염이 좋게 났으며, 계단 아래에는 붉은 일산을 세우고 대상(臺上)에는 시립(侍立)해 있는 자가 80명쯤 되었습니다. 모두 무늬 새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혹은 남색 혹은 녹색이었으며, 혹은 칼을 차고 혹은 화살을 짊어졌고, 대하(臺下)에는 붉은 옷 입은 병졸이 30명쯤 되는데 모두 몽둥이를 쥐고 있었으며 간혹 대나무 작대기도 쥐고 있었습니다. 황룡기 2쌍을 들고 징 1쌍을 울리면서 우리 여덟 사람을 인도하여 대상에 올라가니 마궁의 대인이 바다에 표류된 연유를 묻기에, 우리는 조선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사람으로서 이러이러한 연유로 표류하게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물러 나오니, 큰 건물이 있는데 바닥에 깐 것이 모두 주단이었습니다. 우리들 각자에게 대로 만든 자리와 베개를 주고 날마다 미음 한 그릇과 닭고깃국 한 그릇을 주고 또 향사육군자탕(香砂六君子湯)을 두 때씩 주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마궁 대인의 그 궁() 자는 아마도 공() 자인 것 같습니다. ()과 궁()이 중국 음으로는 서로 같으므로 이는 응당 마씨(馬氏) 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통판(通判 주부(州府)의 장관(長官) 다음 직책)이 된 자일 것입니다. 또 탐라 사람이 이국에 표류된 경우 본적을 일컫기를 꺼리고 영광(靈光) · 강진(康津) · 해남(海南) · 전주(全州) 등의 지방으로 둘러대는 것은, ()에서 전하기를 유구(琉球)의 상선(商船)이 탐라 사람의 해를 입은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은 유구가 아니고 안남(安南)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중환(李重煥) 택리지(擇里志)에 그에 대한 시()가 모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증거가 될 만한 옛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세속의 유전(流傳)일 뿐이니 굳이 그 진위(眞僞)를 분변하려 들 것은 없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두 척의 큰 배에 나누어 타고 서남(西南)으로 향하여 이틀 만에 대만부(臺灣府)의 북문(北門) 밖에서 하륙(下陸)했는데, 번화하고 장려하여 길 양옆에 누대가 늘어서 있고 밤에는 유리등을 켜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또 기이한 새를 채색 초롱에 기르고 있는데 그 새는 시간을 알아서 울곤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대만은 명사(明史)에 계롱산(鷄籠山)이라 칭하였고 또 동번(東蕃)이라 칭했습니다. 영락(永樂) 연간에 정화(鄭和)가 동서의 대양(大洋)을 두루 원정하여 모두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유독 동번만은 멀리 피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화가 이를 미워하여 집마다 하나씩 구리 방울을 주어 그 목에 걸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구국(狗國)에 비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사람들은 도리어 그 방울을 보배로 여겨, 부자는 여러 개씩을 걸고 다니며 이는 조상이 물려준 것이라며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풍속은 꿩을 먹지 않고 다만 그 털만 취하여 장식품을 만든다 합니다. 건륭 52(1787)에 임상문(林爽文)의 난을 토벌하자 임상문의 군사가 패하여 내산(內山)으로 들어가니 생번(生番)들이 포박하여 바쳤는데 열하(熱河)의 문묘(文廟) 대성문(大成門) 바른편 벽의 비()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번들은 다 키가 왜소하며 단발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머리카락은 칠흑색이며 양미간이나 턱 위에 팔괘(八卦) 무늬와도 같은 낙인을 찍었으며, 귓바퀴를 뚫어 주석(朱錫) 통을 꽂았는데 그 통은 앞뒤가 통하며, 혹은 횡목(橫木)을 꿰어 골패(骨牌)를 달고 다닌다고 합니다. 투왕(投旺), 균력력(勻力力), 나사회축(囉沙懷祝), 야황와단(也璜哇丹), 회목회(懷目懷)라 불리는 자들은 일찍이 열하에 입조(入朝)한 자들입니다.

 바다로 둘러싸인 대만부(臺灣府)의 경내에는 모두 뱃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는 것을 거리로 구분하지 않고 하루를 10()으로 나눈 시간으로 기준을 삼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에서 배로 복주(福州) 항구에 이르자면 5()이 걸리고, 대만항으로부터 팽호(澎湖)에 이르자면 4경이 걸리고, 팽호로부터 천주(泉州) 금문소(金門所)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립니다. 동북으로 향하여 일본국에 이르자면 72경이 걸리며, 남으로 여송국(呂宋國 스페인 치하의 필리핀 루손섬)에 이르자면 60경이 걸리며, 동남으로 대항(大港)에 이르자면 22경이 걸리며, 서남으로 남오(南澳)에 이르자면 7경이 걸리는데, 다 순풍을 만났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동쪽 끝의 바다에 위치하여 달이 항상 일찍 뜨기 때문에 조수(潮水)의 드나듦도 하문(厦門)과 동안(同安)에 비교하여 또한 이른 편입니다. 바다에 큰바람이 많아서 그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태풍(颱風)입니다. 토번(土蕃)에 태풍이 오는 것을 알려 주는 풀이 있어 이 풀이 나면서 마디가 없으면 일 년 내내 바람이 없고, 마디가 하나면 태풍이 한 번 불고, 마디가 많으면 태풍 또한 그 수만큼 부는데, 들어맞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녹이문(鹿耳門)은 대만 서쪽 30리에 있는데 그 형상이 사슴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습니다. 양쪽 해안에 모두 포대(砲臺)를 쌓아 놓았고 바닷물이 해협 사이로 흘러 구불구불 휘돌아 들어옵니다. 그 가운데에 해옹굴(海翁崛)이 있는데 평소에는 뜬모래가 많고 물이 얕으나, 바람이 세게 불면 깊이가 돌변하여 가장 험한 곳이 됩니다. 녹이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세(水勢)가 약해지고 넓은 곳이 나와 1000척의 배를 정박해 둘 만한 곳이 있으니 곧 대원항(大圓港)이라는 곳입니다.

 가의현(嘉義縣)은 정씨(鄭氏) 때에 천흥주(天興州)에 속하였다가 강희(康熙) 23(1684)에 분리되어 제라현(諸羅縣)이 되었습니다. 건륭 52(1787)에 대만의 도적 임상문이 현성(縣城)을 공격했을 때 성내의 거주민 4만 명이 제독(提督)을 도와 성을 지켰으므로, 이로 인해 칙령을 내려 제라현을 가의현으로 고쳐 정표(旌表)를 한 것입니다.

 안평진성(安平鎭城)은 일곤신(一崑身)의 위에 있는데, 곤신(崑身)이란 번어(蕃語 원주민의 말)로 모래 제방이라는 뜻입니다. 동쪽으로는 만가도두(灣街渡頭)에 닿고 서쪽의 모래언덕은 대해(大海)에 닿으며, 남쪽으로는 이곤신(二崑身)에 이릅니다. 북쪽에는 해문(海門 해협)이 있는데 원래 홍모(紅毛)의 협판선(夾板船)이 드나들던 곳입니다. 살펴보건대, 일곤신은 둘레가 5리입니다. 홍모가 성을 쌓을 때 큰 벽돌을 이용하고 동실유(桐實油)와 석회를 섞어 함께 다져서 만든 것입니다. 성의 기초는 땅 밑으로 한 길 남짓 들어가고 깊이와 너비도 한두 길이나 됩니다. 성벽 위의 성가퀴는 모두 쇠못을 박았는데 둘레가 1리이며 견고하여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동쪽 지역에는 집들과 시장을 마련하여 백성의 무역을 허용하였습니다. 성안은 누대를 오르내리듯 굴곡이 심하고, 우물물은 싱겁고 짠맛이 일정하지 않아 별도로 우물을 파 놓았는데 구멍이 하도 작아서 두레박이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고 물이 벽에서 흘러내립니다. 서쪽과 남쪽 일대는 본시 모래 돈대였는데 홍모들이 돌을 실어다 견고하게 쌓아서 파도가 대질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적감성(赤嵌城) 역시 홍모가 쌓은 것인데 대만의 해변에 있어 안평진(安平鎭)과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 성의 둘레는 반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계롱(鷄籠)과 담수(淡水)는 조그마한 성인데 홍모가 쌓아서 바닷바람을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풍만 막아 줄 뿐 북풍은 막아 주지 못합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대만에 머문 지 7일째 되던 날 글을 올리고 돌아갈 것을 청했더니 관에서 옷 한 벌을 내주고 전별연을 열어 송별해 주었는데 손을 꼭 잡고 아쉬워하였습니다. 배로 하문(厦門)에 이르러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머물렀는데, 들어가서 주자(朱子)의 상()에 절을 하니 유생 수백 명이 와서 보고 다정스레 대해 주었습니다. 험한 길에는 또 죽교(竹轎)를 타고 갔으며 동안현(同安縣)의 치소(治所)와 천주부(泉州府) · 흥화부(興化府)를 지났는데, 대홍교(大虹橋 대형 무지개다리)가 있어 좌우로 용주(龍舟 용머리로 장식한 경주용 배) 만여 척이 줄지어 서 있고 노래와 풍악 소리로 시끌벅적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주자가 동안현의 주부(主簿)로 있을 때에 고사헌(高士軒)을 지어 여러 유생과 더불어 그곳에서 강습한 일이 있는데 지금의 서원이 서 있는 자리는 아마도 그 옛터인 듯합니다. 또 원() 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고을 수령 공공준(孔公俊)이 서원을 세우고 청하여 대동서원(大同書院)이란 액호를 하사받았는데 바로 이 서원을 가리킵니다. 대홍교는 곧 낙양교(洛陽橋)로서, 당 나라 선종(宣宗)이 미행(微行)을 나와 산천의 승경(勝景)을 구경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경탄하며 하는 말이, “우리 낙양과 너무나 닮았구나.” 했기 때문에 낙양교라 이름한 것이고, 일명(一名) 만안교(萬安橋)라고도 합니다. 또 강어귀에 낭자교(娘仔橋)가 있는데 그 길이가 매우 깁니다. 예전에 바닷나루海渡에서 해마다 빠져 죽는 자가 수없이 많았기에 군수 채양(蔡襄)이 돌을 포개어서 교량을 만들고자 했는데, 조수가 밀려들어 인력으로는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해신(海神)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을 지어 한 아전에게 주어 보냈는데 그 아전이 술을 실컷 마시고는 해안에서 반나절 동안이나 잠을 자다가 조수(潮水)가 빠질 때 깨어나 보니 문서는 이미 봉투가 바뀌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바치므로 채양이 열어 보았더니 다만 작() 자 한 자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채양이 그 뜻을 깨닫고서 ()이 나에게 스무하룻날 유시(酉時)에 공사를 시작하라고 하는구나.”라고 하였는데 그날에 이르자 조수가 과연 물러갔습니다. 그리하여 8일 저녁만에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소비된 금전이 1400만이요, 길이가 360()이요, 너비는 1 5()입니다. 예전에도 표류하다 돌아온 제주 사람 가운데 이 다리를 지나온 자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다리의 길이가 10리라 하고 어떤 이는 50리라 하는 등 안타깝게도 정확하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기록에는 길이가 360장이고 홍공(虹空) 47개라고도 합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정월 초닷샛날 복건성(福建省)에 들어서니 문안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절이 있었고 보리는 하마 누렇게 익었으며 귤과 유자(柚子)는 열매가 드리워 있고 의복과 음식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였습니다.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앞 다투어 사탕수수를 던져 주었으며, 어떤 이는 머뭇거리고 아쉬워하며 자리를 떠나지 못하였고 어떤 이는 우리의 의복을 입어 보고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옷을 안고 돌아가 가족들에게 보여 주고 돌아와서는 소중하게 감상하면서 가족들과 돌려 보았다고도 말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장주(漳州)에는 신라현(新羅縣)이 있는데 당 나라 시대에 신라가 조공을 바칠 때 거쳤던 지역이었습니다.  신라가 오() · ()을 침범하여 그 지역의 일부를 점령하여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泉州)와 장주 지역의 유속(遺俗)이 우리와 유사하다는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나라 의복을 보고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직도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행차가 지체되어 또다시 글을 올려 순무부(巡撫府)에 애걸하던 차에 관인(官人) 한 사람이 쌍가마를 타고 누런 일산(日傘)을 받치고 지나가기에 바로 나아가 길을 가로막고 진정하였더니, 그 관원이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며칠 후에 서른다섯 명의 관원이 일제히 모일 터이니 그때 다시 오라.’ 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대로 가서 호소하였더니 뭇 관원이 돌려 가면서 보고 나서 순무부에 고하여 순검(巡檢) 한 사람을 임명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의 서문(西門)으로 나와 40리를 가서 황진교(黃津橋)에 당도하였고, 작은 배에 올라 이틀 만에 상륙하여 서양령(西陽嶺), 보화사(寶華寺)를 경유하여 절강성(浙江省)에 당도하여 선하령(仙霞嶺)을 넘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선하령은 강산현(江山縣)에 있습니다. 송 나라 사호(史浩)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곳을 지나면서 돌을 쌓아 길을 냈는데 모두 360개의 층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에 당도한 다음 배를 타고 길을 재촉하여 떠났습니다. 강가에 작은 배가 있는데 어옹(漁翁)이 청둥오리靑鳧 수십 마리를 싣고 가서 물 한가운데에다 풀어놓으니 그 오리가 고기를 물고 배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강산현의 지명은 그곳에 강랑산(江郞山)이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뱃사람이 곡식으로 돼지를 키워 돼지고기 맛이 보통과 다른데, 사람들 말에 이르기를 희생(犧牲)으로는 대려(大荔)의 염소와 강산의 돼지가 가장 좋다.” 하였습니다. 또 고기를 잡아 오는 청둥오리는 바로 가마우지요, 물오리가 아닙니다. 일명 오귀(烏鬼)라고도 하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집집마다 오귀를 기르니 / 家家養烏鬼

끼니마다 황어를 먹게 된다 / 頓頓食黃魚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강남 지방을 그린 그림 속에 왕왕 이러한 풍경이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용유현(龍游縣)을 지나서 엄주(嚴州)에 당도하여 자릉대(子陵臺)에 올라보니 대() 곁에 자릉사(子陵祠)가 있었습니다.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의 대선사(大善寺)에 이르니 산천의 수려함이라든가 인구의 번성함이라든가 누대의 웅장함이 쉴 새 없이 보아도 다 볼 수 없을 정도였으며, 큰 배가 출렁이는 물결 위에 떠 있어 여러 명의 기녀들이 뱃머리에서 유희를 하고 있었는데 차고 있는 패옥 소리가 쟁그랑쟁그랑 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용구산(龍邱山)은 용유현에 있는데 아홉 개의 바윗돌이 수려하게 솟아서 형상이 연꽃과 흡사합니다. () 나라 용구장(龍邱萇)이 이곳에 은거하였는데 엄광(嚴光)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조대(釣臺)는 바로 엄광이 은거한 곳으로서 두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서서 검주(黔州)와 무주(婺州)에서 흘러온 물을 끼고 동려(桐廬)현으로 내려가는데 꾸불꾸불 헤엄치는 용의 형세로 7리를 뻗쳐 있습니다. 물이 불어나면 물살이 부딪치는 것이 화살과 같고 산허리에 큰 바윗돌 두 개가 우뚝하니 마주 서서 기울어 떨어질 듯하므로 조대(釣臺)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는 천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사자(好事者)가 그 위에 정자를 짓고 왼편에는 백 척()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오른편에는 아주 작은 솥 하나를 남겨 두었습니다. ()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깊은 못은 물빛이 녹옥(綠玉 에메랄드)처럼 검푸른 빛을 띠고 있고 산기슭에는 온갖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어 있으며 아래에는 십구천(十九泉)이 있는데 육우(陸羽)의 품평을 거친 샘입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항주(杭州)로부터 엿새 만에 소주(蘇州)에 당도하니 서쪽에 한산사(寒山寺)가 있는데 누런 기와집 40칸이었습니다. 지현(知縣)인 왕공(王公)이 음식을 장만하여 후대하고 저희들에게 유람을 시켜 주었습니다. 배로 10리를 가니 고소대(姑蘇臺)에 당도했고 또 30리를 가니 악양루(岳陽樓)가 나왔는데 구리로 기둥을 세웠고 창문과 대청마루는 다 유리를 써서 만들었으며 대청 밑에다 못을 파고 오색 물고기를 길렀고, 앞으로는 동정호(洞庭湖)가 바라보였습니다. 거기서 돌아와서 또 호구사(虎邱寺)에 당도하니 천하에서 제일 큰 절이라고 하는데 7층의 탑이 바라보니 가없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지원이 일찍이 듣건대, 중국 사람들은 강산이 아름답기로는 항주가 제일이요, 번화하기로는 소주가 제일이라 하였고, 또 여자의 머리 모양새는 소주에서 유행하는 모양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소주는 한 주()의 부세(賦稅)만 보더라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항상 10배가 더하니, 천하의 재물과 부세가 소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산사(寒山寺)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일찍이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계(張繼)의 시() 중에 고소성 밖의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익히 들어 왔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반드시 이로써 품평을 하는데 이것은 모방이 지나친 것으로, 진짜 한산사나 진짜 고소대로 말하자면 종래로 이곳에 몸소 갔다 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금 방익이 창문(閶門)에서 옷을 털고 태호(太湖)에서 갓끈을 씻을 수는 있으나, 그가 악양루(岳陽樓)를 보았다고 말한 것은 사뭇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대개 태호는 동동정(東洞庭)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고 태호 속에는 포산(包山)이 있어 이를 또 동정산(洞庭山)이라 불렀습니다. 이 동정(洞庭)이라는 이름 때문에 마침내 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악양루)의 이름까지 함부로 들먹였으니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태호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을 부기(附記)하여 근거 없이 하는 이야기를 논파하고자 합니다.

 태호는 오군(吳郡)의 서남쪽에 있는데 넓이가 3 6000()이며 그 안에는 72개의 산이 있고 소주(蘇州), 호주(湖州), 상주(常州)를 접하고 있습니다. 일명은 구구(具區)이며 일명은 입택(笠澤), 일명은 오호(五湖)입니다. 우중상(虞仲翔)이 말하기를, “태호는 동으로 장주(長洲)의 송강(松江)과 통하고, 남으로 오정(烏程)의 삽계(霅溪)와 통하고, 서로 의흥(宜興)의 형계(荊溪)와 통하고, 북으로 진릉(晉陵)의 격호(滆湖)와 통하고, 동으로 가흥(嘉興)의 구계(韭溪)와 이어진다. 물이 무릇 다섯 길로 흐르기 때문에 오호라 이른다.” 하였습니다. 지금 호수 속에 또한 다섯 개의 호수가 있는데 즉 능호(菱湖), 막호(莫湖), 유호(游湖), 공호(貢湖), 서호(胥湖)입니다. 막리산(莫釐山)의 동에 30여 리를 두른 것은 능호요, 그 서북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막호요, 장산(長山)의 동으로 50리를 두른 것은 유호요, 무석(無錫)과 노안(老岸)을 따라 내려가서 190리를 두른 것은 공호요, 서산(胥山)의 서남쪽 60리를 두른 것은 서호입니다. 오호 이외에 또 세 개의 작은 호수, 즉 매량호(梅梁湖), 금정호(金鼎湖), 동고리호(東皐里湖)가 있는데 오인(吳人 강남 지방 사람)들은 이들을 일컬을 때 오직 태호라고만 합니다.

태호에는 봉우리가 72개가 있는데 그 시발(始發)은 천목산(天目山)으로부터 뻗어 와서 의흥(宜興)에까지 이르고 태호에 들어 우뚝 솟아 여러 산이 되었습니다. 태호의 서북쪽에 있는 산은 14개인데 그중에 마적산(馬跡山)이 가장 크며, 또 서쪽에 있는 산은 41개인데 서동정산(西洞庭山)이 가장 크고, 또 동쪽에 있는 산은 17개인데 동동정산(東洞庭山)이 가장 큽니다. 마적산과 두 동정산을 멀리서 바라보면 아득하여 속세를 벗어난 듯한데, 가까이 나아가 보면 무성한 숲과 넓은 들, 여항(閭巷)과 정사(井舍), 선궁(仙宮 도관(道觀))과 범우(梵宇 )들이 별이나 바둑알처럼 널려 있습니다. 마적산의 북쪽에는 진리산(津里山)과 부초산(夫椒山)이 큰 산인데 부초산은 부차(夫差)가 월 나라를 무너뜨린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동북쪽에는 도저산(渡渚山), 원산(黿山), 횡산(橫山), 음산(陰山), 봉여산(奉餘山), 장사산(長沙山)이 큰 산이며, 장사산의 서쪽에는 충산(衝山), 만산(漫山)이 큰 산입니다. 동동정산의 동쪽에는 무산(武山)이 있고, 북쪽에는 여산(餘山)이 있으며, 서남쪽에는 삼산(三山), 궐산(厥山), 택산(澤山)이 큰 산입니다. 이들 산 위에도 사람들이 수백 가호가 살고 있습니다. 마적산의 서북쪽에는 마치 돈을 쌓아 놓은 듯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전퇴산(錢堆山)이라 합니다. 조금 동으로 가면 대올산(大屼山)과 소올산(小屼山)이 있으며, 석산(錫山)과 더불어 이어진 것 같으면서도 끊어져서 배가 그 사이로 다니는데 이를 독산(獨山)이라 하며, 물오리 두 마리가 서로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동압산(東鴨山)과 서압산(西鴨山)이며 그 가운데 삼봉산(三峯山)이 있습니다. 조금 남으로 나가면 대타산(大墮山)과 소타산(小墮山)이 있고 부초산과 더불어 마주 대하면서 조금 작은 산이 있는데 이것을 소초산(小椒山), 두기산(杜圻山)이라 합니다. 두기산은 범려(范蠡)가 일찍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서동정산의 북쪽 공호(貢湖) 가운데 두 개의 산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대공산(大貢山), 소공산(小貢山)이라 이르며, 오성(五星)이 모인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오석부산(五石浮山)이라 합니다. 또 묘부산(茆浮山)과 사부산(思夫山)이 있으며, 마치 두 새가 날려다가 그친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남오산(南烏山), 북오산(北烏山)입니다. 그 서쪽으로 두 산이 남북으로 마주했으나 서로 보이지 아니하며, 보이면 바로 바람 불든가 번개 치든가 하는 이상(異常) 현상이 있으니 이는 대뢰산(大雷山), 소뢰산(小雷山)입니다. 횡산의 동쪽에는 천산(千山)과 소산(紹山)이 있고 탄부산(疃浮山)이 있으며 또 동옥산(東獄山)과 서옥산(西獄山)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오 나라 왕이 이곳에다 남녀의 감옥을 각각 설치했다 합니다. 그 앞은 죽산(粥山)이라 하는데 오왕(吳王)이 죄수를 먹이던 곳이라 합니다. 거문고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금산(琴山)이요, 방앗공이 같은 모양의 산이 있는데 이는 저산(杵山)이며, 대죽산(大竹山)과 소죽산(小竹山)은 충산(衝山)에 가까이 있습니다. 마치 물건이 수면에 뜬 것 같아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이는 장부산(長浮山), 나두부산(癩頭浮山), 전전부산(殿前浮山)이며, 원산(黿山)과 더불어 마주 대하여 조금 작은 것은 구산(龜山)이라 하며, 두 여자가 곱게 단장하고 서로 대한 것 같은 것은 사고산(謝姑山)입니다. 깎아지른 듯한 산머리에 기둥을 세운 것 같은 것이 있는데 옥주산(玉柱山)이요, 조금 물러서서 금정산(金庭山)이 있으며 그 남쪽에는 해산(峐山)이 있고 역이산(歷耳山)이 있으며, 가운데는 높고 옆이 낮은 산은 필격산(筆格山)이요, 머리를 쳐들고 달리는 것 같은 산은 석사산(石蛇山)이요, 노인이 섰는 것 같은 산은 석공산(石公山)인데 석사산과 석공산이 가장 기이합니다. 원산 · 구산과 더불어 남북으로 대면한 산은 타산(鼉山)이며 그 산 옆에는 소타산(小鼉山)이 있습니다. 소라 같은 모양의 산은 청부산(靑浮山)이며, 타산과 소타산 사이에 보일락 말락 한 산이 있는데 이것은 경람산(驚藍山)입니다. 동동정산의 남쪽으로 산머리가 뾰족하고 산자락이 갈라진 산은 전부산(箭浮山)이며, 집이 마치 틀어진 것 같이 생긴 것은 왕사부산(王舍浮山), 저부산(苧浮山)이요, 또 남으로 나가면 백부산(白浮山)이 되었으며, 택산(澤山)과 궐산(厥山)의 사이에 삿갓이 수면에 떠 있는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것은 약모산(蒻帽山)이요, 앞에서 도망가고 뒤에서 쫓아가서 잡은 모습의 산이 있는데 이는 묘서산(猫鼠山)이요, 마치 비석이 드러누워 있는 것 같은 산이 있는데 이는 석비산(石碑山)입니다. 이상은 태호 속에 있는 일흔두 봉을 열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크고 이름난 것은 두 동정산입니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그 아래에 동굴이 있어 물밑으로 잠행(潛行)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으므로 지맥(地脈)이라 부른다.” 하였고, 도가서(道家書)에는 이것을 제구동천(第九洞天)이라고 하였습니다.

 호구산(虎邱山)은 일명 해용봉(海湧峯)으로 불리는데 그 안에 작은 시내가 많고 굽이쳐 흐르는 물이 그 사이로 끼고 돌아 마치 달을 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깊고도 아름다운 곳으로는 화정사(和靖祠) 터가 제일인데 푸른빛이 흰빛 너머로 찌를 듯이 비치어 하늘과 더불어 서로 닿아 있으며 그 위에는 탑이 있어 그곳에서 고소대(姑蘇臺)를 내려다보면 손바닥만 하게 보입니다. 탑을 돌아 남쪽으로 가면, 대대로 전하기를 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이 그곳에 있다고 하며, 오석헌 곁에는 검지(劒池)가 있는데 칼로 잘라 놓은 듯이 양쪽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수천 척 높이로 곁에 서 있으며 맑고 차가운 물이 콸콸 소리 내며 흐르는데 그 아래에 사방이 트이고 한없이 넓은 거석(巨石)이 있어 그 위에 천 명이 앉을 만하고, 가운데에는 백련지(白蓮池)가 있는데 백련이 쭉쭉 솟아나 있고 꽃은 단청(丹靑)처럼 울긋불긋 피어 있습니다. 또 조금 내려가면 조그마한 돌길이 그 사이에 구불구불 뻗어 있는데 샘이 더욱 희한하고 돌은 더욱 기이하며, 홀연 높이 우뚝 솟아올라 소나무와 대나무가 넓게 자라나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화정(和靖)이 글 읽던 곳이었습니다. 호구산은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장지(葬地)여서 그 속에는 금부(金鳧) · 옥안(玉雁) · 동타(銅駝) · 수정(水精) · 벽해(碧海) · 단사(丹砂) 등 여러 물건이 많았으며, 일찍이 백호(白虎)가 산마루에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 나라의 사도(司徒) 왕순(王珣)과 그 아우 민()이 함께 여기에서 살았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금산사(金山寺)는 오색의 채와(彩瓦)로써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 인공으로 만든 돌산)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 직하고 또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의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儒生)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 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하는 사람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十字形)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石版)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法堂)이었으며, 또 종경(鐘磬) 14개가 있는데 목인(木人 나무 인형)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게 되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살펴보건대, 금산(金山)은 양자강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 빼어난 경치가 천하의 제일이라 합니다. 산아래에는 돌들이 그 앞에 나란히 솟아 쌍궐(雙闕)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곽박(郭璞)을 장사 지낸 곳이라 전해집니다. 그곳에 있는 샘을 중냉천(中冷泉)이라 하는데 맛이 극히 달고 차서 육씨(陸氏)의 수품(水品)에는 이 샘을 동남 지방의 제일로 삼았습니다. 절로는 용유사(龍游寺)가 있고 누각으로는 비라각(毘羅閣)이 있습니다. 비라각의 남쪽은 묘고대(妙高臺)라 하는데 대() 위에는 예전에 능가실(楞伽室)이 있어 송 나라 미산(眉山) 소공(蘇公)이 일찍이 여기서 불경을 베껴 썼다 합니다. 북쪽은 선재루(善財樓)와 대비각(大悲閣)이 있으며, 탄해정(呑海亭) · 유운정(留雲亭) 두 정자가 산마루를 웅거하여 있고 그 두 정자를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강 물결이 아득하여 대()와 전(殿)이 모두 그 아래에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날아갈 듯 정신이 상쾌해지게 만든다고 합니다. 동파(東坡)의 시에,

 

 

금산의 누각은 어찌 그리 심원한가 / 金山樓閣何耽耽

종소리 북소리가 회남까지 들려오네 / 撞鍾伐鼓聞淮南

 

한 것은 이를 묘사한 것입니다. 정자 남쪽에는 돌에 묘고대(妙高臺)와 옥감당(玉鑑堂)이라는 여섯 자의 큰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조금 내려가면 탑의 기단(基壇)이 둘이 있는데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송 나라 승상 증포(曾布)가 건립한 것인 듯한데, 불에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관란정(觀瀾亭)을 경유하여 돌계단을 타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세월이 오래되어 계단의 돌이 많이 끊어지고 짜개졌으며, 강물결을 굽어보면 하늘 위를 다니는 것 같아서 발이 몹시 부들부들 떨린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조사암(祖師巖)이라는 바위가 있어, 가운데 부분이 당 나라 배두타(裴頭陀)의 형상과 닮았는데, 배두타가 산을 개간하다가 금을 얻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금산(金山)이라 부른 것입니다. 바위의 바른편에는 동굴이 있어 깊고 캄캄하여 들어갈 수가 없으며, 용지(龍池)가 있어 가문 해에 기도를 드리면 비구름을 일으킬 수 있다 합니다. 왼편에는 용왕사(龍王祠)가 있는데 사전(祠典)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강산일람정(江山一覽亭)과 연운기관정(烟雲奇觀亭)이라는 두 정자가 있는데 더욱 기이하고 빼어나다 합니다. 방익이 말한 이층의 누각은 바로 강천각(江天閣)으로서, 중 혜개(惠凱), 풍몽정(馮夢楨), 오정간(吳廷簡) 등 여러 사람의 기()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방익이 아뢰기를,

 

산동성(山東省) 이후로는 배에서 내려 수레를 탔는데 풍속이 비루하고 인민이 검소하여 가시싸리문에 먹는 것이라고는 기장과 서숙뿐이었습니다.”

하여, 일체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방익은 나이 41세로, 갑진년(1784)에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무겸선전관(武兼宣傳官)이 되었는데, 활쏘기 시합에 으뜸을 차지하여 특별히 자급(資級)을 올린 것입니다. 상께서 방익을 불러 보고는 장유(壯游)로 고생했다고 하여 특별히 전라도 중군(全羅道中軍)을 제수하여 그의 귀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치세에 무인(武人)인 노인(魯認)이라는 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쳐서 무주(婺州)에 이르러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늠생(廩生)으로 지내다가 압록강(鴨綠江)을 통해 돌아왔는데, 민중(閩中 복건성) 지방의 여러 명사(名士)들로부터 받은 송별시가 지금까지 그 집에 수장되어 있습니다. 노인 이후로 국외에 멀리 나간 자로는 방익을 처음으로 꼽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앞서 연경(燕京)에 들어간 자가 들은 바로는 해적이 중국의 남해를 가로막고 있어 상려(商旅)가 통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방익이 만리 길을 뚫고 지나왔으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조금도 듣지 못했으니 온 누리가 태평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방익이 기록한 도정(途程) 주행비람(周行備覽) 등의 책들과 꼭 들어맞아 어긋나지 않으므로 이에 부록(附錄)하는 바입니다.

 

팽호(澎湖)  대만부(臺灣府)  하문(厦門)  동안현(同安縣)  천주부(泉州府)  흥화부(興化府)  복청(福淸)  복녕(福寧)  복건성성(福建省城) 법해사(法海寺)  황진교(黃津橋)  민청현(閩淸縣) 황전역(黃田驛)  청풍관(淸風館)  금사일(金沙馹)  남평현(南平縣) 대왕관(大王館)  태평일(太平馹)  건녕부(建寧府) 섭방관(葉坊館)  건양현(建陽縣) 인화관(仁化館)  서양령(西陽嶺)  만수교(萬壽橋)  보화사(寶華寺)  포성현(浦城縣)  절강성(浙江省) 선하령(仙霞嶺)  협구참(峽口站)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 제하관(齊河館)  서안현(西安縣) 부강산(浮江山)  용유현(龍游縣)  엄주부(嚴州府) 건덕현(建德縣)  자릉조대(子陵釣臺)  동려현(桐廬縣)  부양현(富陽縣)  항주부(杭州府) 북관(北關) 대선사(大善寺)  석문현(石門縣)  가흥부(嘉興府)  소주부(蘇州府) 한산사(寒山寺)  고소대(姑蘇臺)  호구사(虎邱寺)  동동정(東洞庭)  상주부(常州府) 무석현(無錫縣)  장주(長洲)  단양현(丹陽縣)  근강부(近江府)  과주(瓜洲)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  금산사(金山寺)  하신현(下信縣)  고우현(高郵縣) 고우사(高郵寺)  회부(懷府) 회현(懷縣)  청강부(淸江阜)  왕가영(王家營)  보응현(寶應縣)  산양현(山陽縣)  청호현(淸湖縣)  도원현(桃源縣) 도원역(桃源驛)  산동성(山東省) 담성현(郯城縣)  이가장(李家庄)  난산현(蘭山縣) 반성관(半城館)  서공점(徐公店)  두장점(杜庄店)  몽음현(蒙陰縣)  신태현(新泰縣) 양류점(楊柳店)  태안부(太安府) 장성관(長城館)  제하현(齊河縣)  우성현(禹城縣)  덕주(德州)  경주(景州)  하간현(河閒縣)  탁주()  낭야현(娘縣)  북경(北京)

 

팽호에서 대만까지는 수로(水路) 2일이요, 대만에서 하문(厦門)까지는 수로로 10일이며, 하문에서 복건성성(福建省城)까지는 1600리요, 복주(福州)에서 연경(燕京)까지는 6800리이고, 연경에서 우리 국경 의주(義州)까지는 2070리이며, 의주에서 서울까지는 1030리이고, 서울에서 강진(康津)까지는 900리입니다. 탐라에서 북으로 강진까지와 남으로 대만까지의 수로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합 1 2400리의 여정이 됩니다.

 

 

[C-001]이방익(李邦翼)의 사건을 기록함 : 정조 21(1797) 7월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임명되어 사은(謝恩)차 입시했을 때 정조는 내가 전에 문체를 개변하라는 뜻으로 타일렀는데 과연 개변하였느냐?”고 물은 후, “내가 요즘 좋은 제목을 하나 얻어, 너를 시켜 한 편의 좋은 문자를 창작하도록 하고 싶은 지가 오래되었다.”고 하면서 이방익의 사건을 문자화하도록 명하였다. 정조는 타락한 문풍(文風)을 바로잡으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열하일기의 문체를 문책한 뒤, 연암에게 개과천선의 기회를 주려고 이러한 지시를 내린 것이다. 過庭錄 卷3 이방익(1756~?)은 국문으로 된 표해가(漂海歌)를 남겼다.

[D-001]하문(厦門) : 샤먼, 또는 아모이(Amoy)라고 불리는 복건성(福建省) 남동부의 항구도시이다. 명말(明末)부터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출입하였다.

[D-002]치아가 …… 처녀였습니다 : 일본에는 예전에 시집간 여자가 이빨을 까맣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칠치지국(漆齒之國)이라고도 한다.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 “이미 시집간 여자는 이가 모두 검은빛인데 철액(鐵液)을 약에 타서 머금으면 그 이가 곧 물들여진다. 시집가지 아니한 처녀와 기생은 모두 흰 치아이다.” 하였다. 海行總載

[D-003]북사(北史) …… 하였습니다 : 북사 94 백제전(百濟傳)에 나온다.

[D-004]담라(澹羅) : 신당서(新唐書)에는 儋羅로 표기되어 있다.

[D-005]유리도라(儒理都羅) : 신당서에는 儒利都羅로 표기되어 있다.

[D-006]당서(唐書) …… 하였습니다 : 신당서 220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D-007]배융부위(陪戎副尉) : 고려 시대 무관의 종 9 품 품계이다.

[D-008]송 나라 …… 주었습니다 : 이 부분은 송 나라 범성대(范成大)가 찬집한 오군지(吳郡志) 46 이문편(異聞篇)을 인용한 것이다.

[D-009]한 문공(韓文公) …… 불렀습니다 : 창려선생문집(昌黎先生文集) 21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나온다.

[D-010]천수 …… 내렸다 : 연암이 어떤 기록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현재 전하는 고려사(高麗史)에는 그와 같은 내용이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사 2 세가(世家) 2 태조(太祖) 2와 권57 () 21 지리(地理) 2에 태조 21년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가 내조하여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을 내렸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태조 21년은 천수 21년에 해당된다.

[D-011]정성공(鄭成功) : 1624~1662. 명 나라의 유신(遺臣)이다. 명 나라가 망한 후 중국 남부로 이동하여 청 나라에 대항하다 1661년에 대만으로 건너가 네덜란드군을 축출하고 대만에 웅거하다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D-012]마조서(媽祖嶼) : 팽호도 본섬의 옛 이름이다.

[D-013]별항(別港) : 강이나 바다로 통하는 작은 강支流을 말한다.

[D-014]저물녘이면 …… 있습니다 : 원문은 薄暮可望見으로만 되어 있다.

[D-015]예전에는 …… 있습니다 : 이 부분은 청 나라 임겸광(林謙光)이 지은 대만기략(臺灣紀略)을 인용한 것이다.

[D-016]마궁(馬宮) : 팽호군도의 주도(主島)의 중심 도시인 마공(馬公)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다. 여신(女神)인 낭마보살(娘媽菩薩)을 제사 지내는 낭마궁(娘媽宮)이 있어 마궁(媽宮)’이라 불렸던 것이 마궁(馬宮)’으로 되고, 다시 마공(馬公)’으로 변한 듯하다.

[D-017]이중환(李重煥) …… 있습니다 : 택리지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조(山水條), 인조(仁祖) 때 유구(琉球)의 세자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간 왕을 구속(救贖)하기 위해 국보(國寶)를 배에 싣고 항해하다가 제주도에 표류했는데 보물을 탐낸 제주 목사에게 장살(杖殺)되었다고 하며, 유구의 세자가 죽기 전에 지었다는 율시(律詩) 1수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인조 때가 아니라 광해군 초에 있었던 실제 사건이었다. 한편 영조(英祖) 말에 제주도 선비인 장한철(張漢喆)이 유구에 표류하였다가 안남(安南) 상선에 구조된 끝에 귀환한 기록인 표해록(漂海錄)에서는, 안남 선원들은 장한철 일행이 탐라인임을 알게 되자, 옛날 탐라 왕이 안남의 세자를 죽였다고 하여 그들을 중도에 내려놓고 가버렸다고 하며, 이로 미루어 예전에 제주 목사가 죽였다는 유구 세자는 실은 안남의 세자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D-018]정화(鄭和) : 1371~1433. 명 나라 때의 환관이다. 영락 3(1405) 성조(成祖)의 명으로 해외로 나간 것을 시작으로 7차에 걸쳐 28년 동안 동남아와 아라비아 등 30여 개국을 순회하며 각국을 중국에 복속하게 하였다.

[D-019]구국(狗國) : 원래는 서융(西戎)이 세운 고국(古國)의 하나를 가리키나, 다른 나라에 대한 욕으로도 쓰인다.

[D-020]명사(明史) …… 합니다 : 명사 323 계롱전(鷄籠傳)에 나온다.

[D-021]임상문(林爽文) : ?~1788. 청 나라 때 대만의 창화(彰化) 사람이다. 농민으로 천지회(天地會)에 참가하여 창화천지회의 수령이 되었고, 건륭 51(1786)에 봉기하였으나 다음해에 진압되고 포로로 잡혀 죽었다.

[D-022]생번(生番) : 야만인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대만의 원주민을 가리킨다. 원문은 生蕃으로 되어 있다.

[D-023]투왕(投旺) …… 회목회(懷目懷) : 투왕은 주라대포사번(珠蘿大埔社番)의 두목, 균력력(勻力力)은 망자립사번(望仔立社番)의 두목, 나사회축(囉沙懷祝)은 말독사번(末篤社番)의 두목, 야황와단(也璜哇丹)은 옥오사번(屋鼇社番)의 두목, 회목회는 사자사번(獅子社番)의 두목이다. 八旬萬壽盛典 卷52

[D-024]토번(土蕃) : ‘土番이라고도 적으며, 야만적인 원주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토번이 사는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D-025]정씨(鄭氏) : 정성공(鄭成功) 부자를 가리킨다.

[D-026]협판선(夾板船) : 중국인들이 네덜란드의 대형 범선(帆船)을 가리켜 부른 말이다. 원문은 夾版船으로 되어 있다.

[D-027]공공준(孔公俊) : 자는 사도(師道)이고, 공자의 53대손으로 지정 연간에 동안현을 맡아 다스려 치적을 올렸으며 대동서원(大同書院)을 세워 주자(朱子)를 제사 지냈다. 福建通志 卷30

[D-028]채양(蔡襄) : 1012~1067. 송 나라 때 사람으로 자는 군모(君謨)이다. 천주부(泉州府)의 태수가 되어 천주만을 횡단하는 만안교를 건설하였다.

[D-029]8 …… 완료되었는데 : 원문은 凡八日夕而工成으로 되어 있는데, 채양이 지은 만안교비문(萬安橋碑文)에 의하면 황우(皇祐) 5(1053)에 시작하여 가우(嘉祐) 4(1059)에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와전된 것이거나 전사(轉寫)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福建通志 卷73

[D-030]홍공(虹空) : 아치형 교각(橋脚)을 가리킨다.

[D-031]정월 …… 들어서니 : 이방익의 표해가(漂海歌)에는 정사(丁巳)년 정월 4일에 하문부(厦門府)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 들었다고 하였고, “염칠일(念七日 : 27) 교자(轎子) 타고 복건(福建)으로 발행(發行)하니라고 하였다. 표해가는 청춘(靑春) 창간호(1914)에 소개되어 있다.

[D-032]우리나라 …… 것입니다 : 당시 청조 치하에서 만주족(滿洲族)의 의복을 강요당해 착용하고 있던 한족(漢族)들은 조선의 의복이 망한 명 나라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고 하여 몹시 흠모하였다.

[D-033]순무부(巡撫府) : 순무(巡撫)는 전성(全省)의 군사와 행정 등을 총찰하는 최고 직위로, 복건 순무(福建巡撫)는 복주(福州)에 주재(駐在)하였다. 淸史稿 卷116 91 職官3

[D-034]사호(史浩) : 1106~1194. 남송(南宋) 때의 사람으로 자는 직옹(直翁)이다. 장준(張浚)의 북벌론(北伐論)에 대항하여 강남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며, 저서에는 상서강의(尙書講義)가 있다.

[D-035]강남성(江南省) 강산현(江山縣) : 강남성은 순치(順治) 2(1645)에 설치했던 성으로, 강희(康熙) 연간에 강소성(江蘇省)과 안휘성(安徽省)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강산현은 절강성(浙江省) 구주부(衢州府)에 속한 현이었다. 淸史稿 卷65 40 地理12

[D-036]강산현의 …… 것입니다 : 강랑산(江郞山) 수서(隋書)에 강산(江山)이라 하였다. 淸史稿 卷65 40 地理12

[D-037]집집마다 …… 된다 : 두시상주(杜詩詳註) 20 희작배해체견민(戱作俳諧體遣悶)에 나오는 구절이다.

[D-038]용구장(龍邱萇) : 한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서 왕망(王莽)을 피해 태말산(太末山)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왕망이 죽고 유현(劉玄)이 황제가 되자 관직에 나왔으나 곧 병으로 죽었다.

[D-039]엄광(嚴光) : 자는 자릉(子陵)이고 한 나라 때의 은사(隱士)이다. 광무제(光武帝)와 동문수학하였으며 광무제가 즉위한 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은둔하였다.

[D-040]아래에는 …… 샘입니다 : 당 나라 은사(隱士)인 육우(陸羽 : 733~804)가 지은 다경(茶經)에 천하의 물맛을 품평하여 등급을 나누었는데 조대(釣臺) 아래에 있는 이 샘의 물이 열아홉 번째를 차지하였으므로 십구천(十九泉)이라 하였다. 육우는 차를 좋아하고 다도(茶道)에 밝아 다신(茶神), 다성(茶聖), 다선(茶仙)으로 불린다. 浙江通志 卷19

[D-041]한산(寒山)과 습득(拾得) : 당 나라 태종 때의 고승으로 서로 교우관계를 맺었다.

[D-042]장계(張繼) …… 한산사 : ‘고소성 밖의 한산사 풍교야박(楓橋夜泊)’ 시의 한 구절로서, 이 시의 전문은 月落烏啼霜滿天 江楓漁火對愁眠 姑蘇城外寒山寺 夜半鐘聲到客船이다. 장계(?~779년경)는 당 나라 때의 시인으로 자는 의손(懿孫)이며, 저서에 장사부시집(張祠部詩集)이 있다.

[D-043]창문(閶門)에서 …… 있으나 : 창문은 소주(蘇州)의 성문 이름으로, () 나라 왕 합려(闔閭)가 초() 나라를 격파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옷을 턴다振衣는 것은 먼지를 털어 복장을 단정히 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턴다.新浴者必振衣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니 나의 갓끈을 씻을 만하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는 모두 굴원(屈原) 초사(楚辭)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구절이다.

[D-044]악주성(岳州城) 서문루(西門樓) : 악양루(岳陽樓)를 가리킨다. 동정호(洞庭湖) 옆에 있다.

[D-045]우중상(虞仲翔) : 우번(虞翻 : 164~232)의 자가 중상(仲翔)이다. 우번은 삼국 시대 오() 나라 사람으로 손권(孫權)에게 기용되었으나 직언을 자주하여 좌천되었다. 저명한 학자로서 특히 주역에 밝았다.

[D-046]부차(夫差) : 오 나라 왕으로 선왕 합려(闔閭)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월 나라 왕 구천(句踐)을 부초(夫椒)에서 크게 무찔렀다. 나중에 다시 월 나라에 패하여 나라가 멸망하고 자신은 자살하였다.

[D-047]범려(范蠡) : 춘추 시대 초() 나라 사람으로, 월 나라 왕 구천을 보좌하여 오 나라를 멸망시킨 뒤, 월 나라를 떠나 제() 나라로 가서 변성명하고 상업으로 치부하였다.

[D-048]왕사부산(王舍浮山) : 고소지(姑蘇志) 9에는 王舍山으로 되어 있다.

[D-049]생공강당(生公講堂)과 오석헌(悟石軒) : 호구산의 검지(劍池) 앞에 천 명이 앉을 만한 넓고 평편한 거석(巨石)이 있는데, 그곳이 진() 나라 때의 신승(神僧) 축도생(竺道生)이 설법한 자리 즉 생공의 강당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때 축도생의 설법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고 하는 점두석(點頭石) 옆에 오석헌이 세워졌다고 한다. 姑蘇志 卷8》 《江南通志 卷31》 《方輿勝覽 卷2

[D-050]화정(和靖) : 윤순(尹焞 : 1071~1142)의 호이다. 윤순은 송 나라 하남(河南) 사람으로 자는 언명(彦明) 또는 덕충(德充)이며, 정이(程頤)에게서 수학하였다. 저서에 논어해(論語解), 문인문답(門人問答), 화정집(和靖集)이 있다.

[D-051]쌍궐(雙闕) : 궁전이나 사묘(祠廟), 능묘(陵墓) 등의 앞쪽 양편에 설치하는 누대를 말한다.

[D-052]곽박(郭璞) : 276~324. 동진(東晉)의 학자로서 자는 경순(景純)이다. 진사(晉史)의 편수에 참여하였고 이아(爾雅), 산해경(山海經) 등의 주석서를 저술하였다.

[D-053]육씨(陸氏)의 수품(水品) : 육우(陸羽) 다경(茶經)에서 물맛을 평한 것을 가리킨다.

[D-054]미산(眉山) 소공(蘇公) :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소식의 본향이 미주(眉州)의 미산(眉山)이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

[D-055]금산의 …… 들려오네 : ‘금산에서 배를 타고 초산에 이르다自金山放船至焦山 시에 나온다. 한시대성(漢詩大成) 본에는 이 구절이 金山樓觀何耽耽, 撞鍾擊鼓聞淮南으로 되어 있다.

[D-056]증포(曾布) : 1036~1107. 송 나라 때 관료로서 자는 자선(子宣)이며 증공(曾鞏)의 아우이다.

[D-057]배두타(裴頭陀) : 두타(頭陀)는 탁발승이라는 뜻이다. 배두타는 당 나라 때 상국(相國) 배휴(裴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영특했다고 하며, 출가하여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금산에 이르렀다고 한다. 江南通志 卷174

[D-058]노인(魯認) : 1566~1622. 호는 금계(錦溪)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南原)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잡혀갔으나 명 나라로 탈출하여 무이서원(武夷書院 : 고정서원考亭書院)에서 주자학을 배우며 지내다가, 신종(神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포로가 되어서도 절개를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귀환을 허락함에 따라 3년 만인 1599년에 귀국하였으며, 선조(宣祖)도 그의 충절을 칭찬하고 수원 부사에 임명하였다. 당시 일본과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금계일기(錦溪日記)가 전한다. 그의 문집 금계집(錦溪集)에 명 나라 인사들의 송별시가 수록되어 있다.

[D-059]동안현(同安縣) : 복건성(福建省) 천주부(泉州府)에 속한 현이다.

[D-060]천주부(泉州府) : 천주부의 치소(治所), 현재 천주시(泉州市)를 가리킨다.

[D-061]복청(福淸) : ‘복청현(福淸縣)’이라야 정확한 표기가 된다. 복건성 복주부(福州府)에 속한 현이다.

[D-062]복녕(福寧) : ‘복녕부(福寧府)’라야 정확한 표기가 된다. 복건성에 속한 부이다.

[D-063]복건성성(福建省城) : 복주부(福州府)의 치소로 현재의 복주시(福州市)인 복주(福州)에 있었다.

[D-064]민청현(閩淸縣) : 복주부(福州府)에 속한 현이다.

[D-065]남평현(南平縣) : 복건성 연평부(延平府)에 속한 현이다.

[D-066]섭방관(葉坊館) : 복건성 건녕부(建寧府) 건안현(建安縣)에 속한 역() 이름이다. 淸史稿 卷70 45 地理17 福建

[D-067]건양현(建陽縣) : 복건성 건녕부에 속한 현이다.

[D-068]포성현(浦城縣) : 복건성 건녕부에 속한 현이다.

[D-069]선하령(仙霞嶺) : 절강성 구주부(衢州府) 강산현(江山縣)에 있다. 淸史稿 卷65 40 地理12 浙江

[D-070]서안현(西安縣) : 절강성 구주부에 속한 현이다.

[D-071]용유현(龍游縣) : 절강성 구주부에 속한 현이다.

[D-072]자릉조대(子陵釣臺) : 절강성 엄주부 동려현(桐廬縣) 부춘산(富春山)에 있다.

[D-073]동려현(桐廬縣) : 절강성 엄주부에 속한 현이다.

[D-074]부양현(富陽縣) : 절강성 항주부(杭州府)에 속한 현이다.

[D-075]석문현(石門縣) : 절강성 가흥부(嘉興府)에 속한 현이다.

[D-076]가흥부(嘉興府) : 가흥부의 치소(治所), 현재의 가흥시(嘉興市)를 가리킨다.

[D-077]소주부(蘇州府) : 강소성(江蘇省)에 속한 부이다.

[D-078]장주(長洲) : 강소성 상주부 무석현에 속한 모래섬의 이름이다. 淸史稿 卷58 33 地理5 江蘇

[D-079]단양현(丹陽縣) : 강소성 진강부(鎭江府)에 속한 현이다.

[D-080]근강부(近江府) : ‘진강부(鎭江府)’의 잘못인 듯하다. 진강부의 치소는 현재의 진강시(鎭江市)이다.

[D-081]과주(瓜洲) : 강소성 양주부(楊州府) 강도현(江都縣)에 속한 모래섬으로 군사와 교통의 요지였다. 淸史稿 卷58 33 地理5 江蘇

[D-082]금산사(金山寺) : 강소성 진강시(鎭江市)의 서북쪽 금산(金山)에 있다.

[D-083]하신현(下信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하신현이 없다.

[D-084]고우현(高郵縣) : ‘고우주(高郵州)’의 잘못인 듯하다. 고우주는 강소성 양주부에 속한 주이다.

[D-085]회부(懷府) 회현(懷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회부가 없다. ‘회안부(淮安府)’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회현 역시 강소성 내에는 없다.

[D-086]청강부(淸江阜) : 강소성 회안부(淮安府) 청하현(淸河縣) 북쪽에 있던 청강포(淸江浦)를 가리키는 듯하다.

[D-087]왕가영(王家營) : 강소성 회안부 청하현에 있던 진()의 이름이다.

[D-088]보응현(寶應縣) : 강소성 양주부에 속한 현이다.

[D-089]산양현(山陽縣) : 강소성 회안부에 속한 현이다.

[D-090]청호현(淸湖縣) : 미상(未詳). 강소성 내에는 청호현이 없다. 회안부 청하현(淸河縣)’의 잘못인지도 모른다.

[D-091]도원현(桃源縣) : 강소성 회안부에 속한 현이다.

[D-092]담성현(郯城縣) : 산동성 기주부(沂州府)에 속한 현이다.

[D-093]난산현(蘭山縣) : 산동성 기주부에 속한 현이다.

[D-094]서공점(徐公店) : 난산현에 속한 역()의 하나이다. 淸史稿 卷61 36 地理8 山東

[D-095]몽음현(蒙陰縣) : 산동성 기주부에 속한 현이다.

[D-096]신태현(新泰縣) : 산동성 태안부(泰安府)에 속한 현이다.

[D-097]태안부(太安府) : ‘태안현(泰安縣)’의 잘못인 듯하다. 태안현은 태안부에 속한 현으로, 그 치소는 현재의 태안시(泰安市)에 있다.

[D-098]제하현(齊河縣) : 산동성 제남부(濟南府)에 속한 현이다.

[D-099]우성현(禹城縣) : 산동성 제남부에 속한 현이다.

[D-100]덕주(德州) : 산동성 제남부에 속한 주이다.

[D-101]경주(景州) : 직례(直隸) 하간부(河間府)에 속한 주이다.

[D-102]하간현(河閒縣) : 직례 하간부에 속한 현이다.

[D-103]탁주() : 직례 순천부(順天府)에 속한 주이다.

[D-104]낭야현(娘縣) : ‘양향현(良鄕縣)’의 잘못인 듯하다. 양향현은 직례 순천부에 속한 현으로, 탁주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도중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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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5권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5권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5권     ...

blog.naver.com

 

연암집 제5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척독(尺牘)

1 자서(自序)

2 경지(京之)에게 답함

3 두 번째 편지

4 세 번째 편지

5 중일(中一)에게 보냄

6 두 번째 편지

7 세 번째 편지

8 창애(蒼厓)에게 답함

9 두 번째 편지

10 세 번째 편지

11 네 번째 편지

12 다섯 번째 편지

13 여섯 번째 편지

14 일곱 번째 편지

15 여덟 번째 편지

16 아홉 번째 편지

17 설초(雪蕉)에게 보냄

18 치규(穉圭)에게 보냄

19 중관(仲觀)에게 보냄

20 어떤 이에게 보냄

21 중옥(仲玉)에게 답함

22 두 번째 편지

23 세 번째 편지

24 네 번째 편지

25 북쪽 이웃의 과거 급제를 축하함

26 사강(士剛)에게 답함

27 영재(泠齋)에게 답함

28 두 번째 편지

29 아무개에게 답함

30 성지(誠之)에게 보냄

31 석치(石癡)에게 보냄

32 두 번째 편지

33 세 번째 편지

34 네 번째 편지

35 어떤 이에게 보냄

36 아무개에게 보냄

37 두 번째 편지

38 군수(君受)에게 답함

39 중존(仲存)에게 보냄

40 경보(敬甫)에게 보냄

41 두 번째 편지

42 원심재(遠心齋)에게 보냄

43 초책(楚幘)에게 보냄

44 성백(成伯)에게 보냄

45 두 번째 편지

46 종형(從兄)에게 올림

47 두 번째 편지

48 대호(大瓠)에게 답함

49 두 번째 편지

50 세 번째 편지

51 담헌(湛軒)에게 사과함

 

 

 

자서(自序)

 

 원문 60자 빠짐  우자(右者)는 삼가 아룁니다라는 의미의 우근진(右謹陳)’을 들어 타매(唾罵)하고 있다. 이른바 우근진이란 말이 저열한 표현인 것은 사실이나, 세상에 붓대를 쥐고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마는, 그들의 글을 책으로 간행한 것들을 보면 모두가 가득 늘어만 놓은 음식의 찌꺼기처럼 시금떨떨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왜 구태여 문서의 서두어나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만을 나무라는지 모를 일이다. 제전(帝典 서경(書經) 요전(堯典) · 순전(舜典)) 월약계고(曰若稽古)’나 불경(佛經) 여시아문(如是我聞)’도 바로 지금의 우근진과 같은 성격의 투식어일 뿐이다.

특히 봄 숲에서 새 울음을 들으면 소리마다 각기 다르고 해시(海市)에서 보물을 둘러보면 하나하나 다 새로우며, 연잎 위의 이슬은 본디 둥글고 초() 나라의 박옥(璞玉)은 깎지 않은 채로 있다. 이것이 바로 척독가(尺牘家)들이 논어(論語)를 조술(祖述)하고 풍아(風雅 시경(詩經))로 거슬러 올라간 점이다. 사령(辭令)으로 말하면 자산(子産)과 숙향(叔向)을 본받고 장고(掌故)로 말하면 신서(新序) 세설(世說)을 본받았다. 확실하고 적절한 점으로 말하면 양책(良策)을 올린 가 태부(賈太傅 가의(賈誼))나 정사(政事)를 주관하던 육 선공(陸宣公 육지(陸贄))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저들은 일단 고문사(古文辭)라 하면 단지 서()와 기()가 으뜸이 되는 줄만 알아서, 거짓으로 글을 짓고 부화한 표현들을 끌어다 쓰고는, 정작 이러한 글들에 대해서는 소가(小家)의 묘품(妙品)이라고 배척하여, 밝은 창가의 조촐한 궤석(几席)에서 잠이 깬 뒤 베개 고이고 읽을 따름이다.

무릇 공경은 예()를 갖추어야 확립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엄숙하고 근엄하게만 대하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 더 나아가 큰 손님이라도 맞이하듯 도포를 떨쳐입고는 대충 안부나 묻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버이를 공경한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예를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기쁜 안색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곁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빙그레 웃으며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다.” 한 것은 공자다운 멋진 해학이요, “아내가 닭이 울었다 하자, 남편은 아직 어두운 새벽이다 말하네.” 한 것은 시인(詩人)의 편지인 셈이다.

우연히 상자 속을 뒤지다가, 추운 겨울을 맞아 창구멍을 바르려던 참에 옛날에 친구에게 보냈던 편지의 부본(副本)으로 쓸데없는 것들을 찾아내었는데, 모두 50여 건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게 작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마냥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 넉넉하고 어떤 것은 농을 바르기에 부족하다. 이에 한 권으로 베껴 내어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한다.

임진년(1772) 맹동(孟冬) 상한(上澣)에 연암거사(燕巖居士)는 쓴다.

 

 

[D-001]문서의 …… 상투어 : 앞의 우근진(右謹陳)’은 관청에 청원하는 문서, 즉 소지(所志)의 서두어이다. 다음에 나오는 옛일을 상고하건대라는 뜻인 월약계고(曰若稽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라는 뜻인 여시아문(如是我聞) 서경이나 불경에서 말을 꺼낼 때 사용하는 상투어이다.

[D-002]해시(海市) : 일반적으로는 맑은 날 바다 한가운데 나타난다는 화려한 성시(城市), 즉 신기루(蜃氣樓)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는 해안의 성시로 보아야 할 듯하다. 우상전(虞裳傳)에 소개된 이언진(李彦瑱)의 시 해람편(海覽篇)에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각종 보물들이 거래되고 있음을 노래하면서 페르시아 상인들도 눈이 부셔하고 절강의 성시들도 빛이 바랬네.波斯胡目眩 浙江市色奪라고 하였듯이, 중국 동남 해안의 성시들에서는 각종 보석 거래를 비롯하여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다.

[D-003]() 나라의 박옥(璞玉) : 초 나라 사람 화씨(和氏)가 얻었다는 다듬어지지 않은 옥덩어리로, 화씨벽(和氏璧)이라고도 한다.

[D-004]이것이 …… 점이다 : 척독(尺牘)이 문학적으로 볼 때, 논어 시경의 참신하면서도 진솔한 문답체 표현 방식을 계승했다는 뜻이다. 그 좋은 예가 자서의 후반에 인용되어 있다.

[D-005]사령(辭令)으로 …… 본받고 : 사령은 말로써 응대(應對)하는 것을 말한다. 외교에서는 특히 사령을 잘해야 한다. () 나라가 형법(刑法)의 조문을 새긴 정()을 주조하자, () 나라 숙향(叔向)이 정 나라 공자(公子) 자산(子産)에게 서신을 보내어 형벌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하는 것을 힐난했으며, 자산은 이러한 숙향의 서신을 받고 그의 충고에 감사하는 답신을 보냈다. 春秋左氏傳 昭公 6 3 이는 서신을 통해 사령을 잘한 예이다.

[D-006]신서(新序) 세설(世說) : 둘 다 한() 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책이다. 신서는 춘추전국 시대의 고사를 모아 놓은 책이다. 세설은 실전(失傳)되어 내용을 알 수 없는데, 후세의 세설신어(世說新語)는 이 책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D-007]양책(良策) …… 아니다 : 가의(賈誼)의 상소(上疏)나 육지(陸贄)의 주의(奏議)에 못지않다는 뜻이다. () 나라 때 가의는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렸으며, 당 나라 때 육지는 덕종(德宗)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는 주의를 올려 국정을 잘 보좌하였다.

[D-008]소가(小家) : 대가(大家)의 반대로, 시시한 군소 작가들이란 뜻이다.

[D-009]격식에 …… 봉양하는 : 원문은 左右無方인데,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부모를 섬길 때에는 곁에서 봉양하는 데 격식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左右就養無方고 하였다.

[D-010]빙그레 ……  : 공자가 무성(武城) 지방에 가서 백성들이 음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하며 넌지시 조롱하였다. 무성의 수령인 제자 자유(子游)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예전에 공자가 한 말을 들어 따지자, 공자가 제자들을 보고서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다.” 하였다. 論語 陽貨

[D-011]아내가 …… 말하네 : 시경(詩經) 계명(鷄鳴)의 첫 구절로서, 아내가 닭이 울었으니 일하러 나가라고 하자 남편이 나가기 싫어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고 둘러대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주자(朱子)는 이 시를 부부가 서로 권계(勸戒)한 것이라고 주해(註解)하였으나, 연암은 부부가 일상적인 집안일로 문답을 나눈 시로 보았다.

[D-012]시인(詩人) : 계명(鷄鳴)을 지은 옛 시인을 가리킨다.

[D-013]종이가 …… 얇다 : 원문은 紙如蝶翅인데, 왕안석(王安石)이 나비를 노래한 시에 날개가 가루보다 가볍고 비단보다 얇다.翅輕於粉薄於繒 하였다.

[D-014]장독 …… 넉넉하고 : ‘장독 덮개覆瓿란 가치가 없는 저작을 가리키며, 주로 자신의 저작에 대한 겸양의 말로 쓰인다. () 나라 때 유흠(劉歆)이 양웅(揚雄)의 태현(太玄)을 두고 후세 사람들이 장독 덮개로나 쓸 것이라고 풍자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경지(京之)에게 답함

 

 

작별할 때의 말씀이 여전히 잊히지 않지만, 이른바 그대를 천리까지 전송해도 한 번 이별은 종당 있기 마련인 것을 어찌하오리까. 다만 한 가닥 희미한 아쉬움이 하늘하늘 마음에 얽혀 있어, 마치 공중의 환화(幻花)가 어디선가 날아왔다가 사라지고 나서도 다시 하늘거리며 아름다운 것과 같습니다.

예전에 백화암(白華菴)에 앉았노라니, 암주(菴主)인 처화(處華) 스님이 먼 마을에서 바람 타고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는, 그의 비구(比丘)인 영탁(靈托)에게 게()를 전하기를,

 

“ ‘탁탁 치는 소리와 땅땅 울리는 소리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들렸겠느냐?”

하니, 영탁이 손을 맞잡고 공손히 대답하기를,

 

먼저도 아니고 나중도 아닌, 바로 그 사이에 들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어제 그대가 여전히 정자 위에서 난간을 따라 배회하고 있을 때, 이 몸도 또한 다리 가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아마 1리쯤 되었지요.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았던 곳도 역시 바로 그때였는지 모르겠습니다.

 

 

[D-001]작별할 …… 않지만 : 원문은 別語關關인데, ‘關關 시경 관저(關雎)에 나오는 표현으로, 원래는 새들이 서로 짝을 그리워하면서 울음소리로 화답함을 뜻한다.

[D-002]그대를 …… 마련 : 멀리까지 전송할 것이 없다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말로, 전송하는 사람을 만류할 때 흔히 쓰는 속담이다. 수호전(水滸傳)에서 무송(武松)이 송강(宋江)을 만류하며 형님은 멀리 전송할 것 없소이다. 속담에 그대를 천리까지 전송해도 끝내 한 번은 이별해야 한다.’고 했소.尊兄不必遠送 常言道 送君千里 終須一別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부지런하고 정밀하게 글을 읽기로는 포희씨(庖犧氏)와 대등할 이 뉘 있겠습니까. 글의 정신과 의태(意態)가 우주에 널리 펼쳐 있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우주 만물은 단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입니다.

후세에 명색이 부지런히 글을 읽는다는 자들은 엉성한 마음과 옅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낡은 종이 사이에 시력을 쏟아 그 속에 있는 좀오줌과 쥐똥이나 찾아 모으고 있으니, 이는 이른바 술찌끼를 잔뜩 먹고 취해 죽겠다.” 하는 격이니 어찌 딱하지 않겠습니까.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라는 한 글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면 채색도 묻혀 버리고 모양과 소리도 빠뜨려 버리는 것이니,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

더러는 늘 하던 소리만 하는 것이 싫어서 좀 가볍고 맑은 글자로 바꿔 볼까 하여 새 ()’ 자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글만 읽고서 문장을 짓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병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로 그늘진 뜰에 철 따라 우는 새가 지저귀고 있기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마구 외치기를, “이게 바로 내가 말하는 날아갔다 날아오는 글자요,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월이다. 다섯 가지 채색을 문장(文章)이라 이를진대 문장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오늘 나는 참으로 글을 읽었다.” 하였습니다.

 

 

[D-001]시골 ……  : 나라에서 경로(敬老)의 뜻으로 노인들에게 하사하던 구장(鳩杖)을 가리킨다. 지팡이 끝에 비둘기 모양을 새겼다.

[D-002]다섯 …… 이를진대 : 다섯 가지 채색은 청() · () · () · () · ()을 가리킨다. 문장(文章)이란 말에는 원래 무늬나 문채(文彩)라는 뜻이 있다. 순자(荀子)의 부() 다섯 가지 채색을 갖추어야 문장이 이루어진다.五采備而成文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그대가 태사공(太史公) 사기(史記)를 읽었으되 그 글만을 읽었을 뿐 그 마음은 읽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읽고서 고점리(高漸離)가 축()을 치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늙은 서생들이 늘 해 대는 케케묵은 이야기로서, 또한 살강 밑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간파해 낼 수 있습니다. 앞다리를 반쯤 꿇고, 뒷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다가가는데,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나비가 그만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기에 어이없이 웃다가 얼굴을 붉히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할 때의 마음입니다.

 

 

[D-001]성벽 …… 장면 : 항우(項羽)의 초() 나라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 나라 군대를 무찌를 때 그 기세에 눌린 다른 제후의 장수들은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고만 있었다.

[D-002]고점리(高漸離) …… 장면 : () 나라 출신의 자객인 형가(荊軻)는 연() 나라에 왔을 때 축()을 잘 치는 고점리와 절친하여, 술이 취하면 고점리가 치는 축에 맞추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 진 시황(秦始皇) 암살 임무를 띠고 떠나기에 앞서 역수(易水)에서 형가가 고점리가 치는 축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니 전송 나온 자들이 모두 감동하였다고 한다. 형가가 암살에 실패하고 죽은 뒤 고점리는 진 시황 앞에 불려 와 축을 치다가, 축을 던져 그를 죽이려 했으나 역시 실패하고 피살되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일(中一)에게 보냄

 

 

힘으로써 남을 구제하는 것은 ()’이라 이르고, 재물로써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라 합니다. ()를 갖추면 명사(名士)가 되거니와, ()을 갖추어도 이름이 드러나 후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이러한 협과 고를 겸하면 ()’라 하나니,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찌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예()란 제멋대로 행함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요, ()는 제멋대로 결단함이 없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급하게 의에 따라 선()을 행하다 보면, 설령 제멋대로 행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기는 하지만, 착한 아들이라도 부모에게 여쭙지 못하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고, 어진 부모라도 이를 금지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옛날에 한() 나라 급암(汲黯)은 황제의 조서를 사칭하고 창고 곡식을 풀어 하남(河南)의 주린 백성을 구제했고, () 나라 범요부(范堯夫)는 보리 싣고 가던 배를 석만경(石曼卿)에게 넘겨준 일이 있었습니다. 무릇 황제의 조서를 사칭한 것은 사형죄에 해당하는 것이요, 아버지 모르게 남에게 주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임금과 아비는 지극히 존엄한 분이지만, ()에 비추어 급히 행해야 할 경우에는 부월(鈇鉞)의 처벌도 피하지 않았고 혼자 결단하여 행하는 죄도 범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제(武帝)는 총명한 군주라는 명성을 잃지 않았고 범 문정(范文正 범중엄(范仲淹))은 어진 아비가 되었으며, 장유(長孺 급암(汲黯))는 곧은 신하가 되는 데 지장이 없었고 요부(堯夫)는 좋은 아들이 되었습니다.

지금 준()은 친상(親喪)을 당한지라, 친한 친구가 이처럼 측석(側席)하고 밥을 배부르게 먹지 못할 때이니, 단지 하남(河南)의 굶주림과 석만경의 다급한 사정에 비할 정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대가 힘을 다해 구제해 준다면, 이는 창고 곡식을 풀고 배의 보리를 넘겨준 행동만큼 멋대로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D-001]() 나라 …… 구제했고 :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하내(河內)의 민가 천여 호가 불에 타는 큰 화재가 발생하자 급암(汲黯)을 사자로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러 보냈다. 급암이 하내의 상황을 보니, 백성들이 가뭄과 홍수로 만여 호가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임의로 황제의 명을 사칭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한 후 무제에게 이를 보고하자 무제가 훌륭히 여겨 용서해 주었다고 한다. 연암집에는 하내(河內)가 하남(河南)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남은 하외(河外)에 속한다. 漢書 卷50 張馮汲鄭傳

[D-002]() 나라 ……  : 요부(堯夫)는 범순인(范純仁)의 자()이고 만경(曼卿)은 석연년(石延年)의 자이다. 범순인이 젊었을 때 그의 부친 범중엄(范仲淹)의 심부름으로 소주(蘇州)로 식량을 구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친의 친구인 석만경(石曼卿)을 만났는데, 석만경이 장례 비용이 없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배로 싣고 온 보리를 모두 그에게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범중엄에게 이 일을 말하자 범중엄이 기뻐했다고 한다. 山堂肆考 卷102

[D-003]() : 두 번째 편지를 보면 ()’은 바로 사준(士俊)’으로, 원문에  자가 빠진 것이 아닌가 한다.

[D-004]측석(側席) : 자신의 좌석만 남기고 내객(來客)을 맞을 좌석은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에 우환이 있는 사람은 측석하고 앉는다.有憂者 側席而坐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그대가 사준(士俊)에게 돈 백 금()을 주면서 장사를 하라 했다니, 어찌 그리 적게 주었습니까. 결국에는 사준이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니, 그대는 그때 가서 날더러 말을 아니해 주었다고 허물일랑 마시오.

무릇 한 집의 살림살이를 잘 다스리는 것이 천하의 정사를 다스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탕왕(湯王)의 땅은 사방 칠십 리요 문왕(文王)은 백 리의 땅으로 일어났는데, 맹자는 이를 구실로 삼아 걸핏하면 은 나라와 주 나라의 예를 끌어와 당시의 임금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런데 등() 나라로 말하자면 임금을 제대로 만나 도를 행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이를 만했습니다. 등 나라 문공(文公) 같은 천하의 어진 임금이 군주로 있고, 허행(許行)과 진상(陳相) 같은 당시의 호걸이 백성으로 있었지만, 그런데도 등 나라를 떠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형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 나라와 위() 나라의 임금은 지극히 불초하지만, 그래도 못내 돌아보고 서성대며 차마 떠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 토지가 넓고 인민이 많고 무기가 날카롭고 모든 물자가 풍부하여 그 형세를 이용하면 공()을 이루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맹자의 말에 제 나라를 가지고서 왕천하(王天下)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나 마찬가지이다.” 하고, 등 나라에 대해서는 이리 잘라 저리 맞추면 거의 사방 오십 리가 될 것이니 큰 나라를 만들 수가 있다.” 하였던 것입니다. 스승의 도는 제 나라를 훨씬 높게 보고 등 나라를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닌데도 때에 따라 맹자가 굴신(屈伸)의 차이를 보인 것은 대국과 소국의 형세가 다르기 때문이요, 등 나라 땅이 은 나라나 주 나라보다 훨씬 작은 것이 아닌데도 맹자의 말과 실제 행동이 서로 어긋난 것은 삼대(三代)와 전국(戰國)이라는 고금(古今)의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D-001]백 금() : ()은 화폐 단위로서 시대마다 값이 다르다. 여기서 백 금은 엽전 백 냥을 가리킨다. 열하일기 옥갑야화(玉匣夜話)에 허생(許生)이 도적 두목에게 천 명이 천 금을 약탈하면 각자의 몫이 얼마냐?千人掠千金 所分幾何라고 묻자, 도적 두목은 한 사람당 한 냥일 뿐이오.人一兩耳라고 답하였다.

[D-002]탕왕(湯王) …… 설득했습니다 : 맹자 공순추 상(公孫丑上) 왕자(王者)는 대국(大國)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탕 임금은 칠십 리의 땅으로 왕자가 되었고 문왕은 백 리의 땅으로 왕자가 되었다.王不待大 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고 하였다.

[D-003]허행(許行)과 진상(陳相) : 허행은 농가(農家)에 속하는 학자로 초 나라 사람인데, 등 문공이 인정(仁政)을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등 나라로 귀의하였다. 진상은 초 나라 사람 진량(陳良)의 제자였으나, 역시 등 문공을 흠모하여 등 나라로 귀의한 뒤 허행의 학설에 공감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맹자는 중원(中原)으로 와서 유교를 배운 진량에 대해서만 호걸지사(豪傑之士)’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D-004]제 나라를 …… 마찬가지이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D-005]이리 …… 있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에는 큰 나라大國가 아니라 좋은 나라善國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D-006]스승의 도 : 맹자는 나라 다스리는 법을 묻는 등 문공에게 정전법(井田法)과 학교 제도를 시행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면 왕자가 나오면 반드시 와서 그 법을 본받을 터이니, 이는 왕자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有王者起 必來取法 是爲王者師也라고 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그러므로 여기서 스승의 도란 장차 왕도(王道)로 다스려질 나라의 모범이 되는 통치 방법을 뜻한다. 제 나라와 같은 대국뿐 아니라 등 나라와 같은 소국도 이러한 스승의 도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맹자의 주장이다.

[D-007]굴신(屈伸) : ‘진퇴(進退)’와 같은 말이다. 벼슬에 나아가 포부를 펴거나, 아니면 물러나 은둔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어린애들 노래에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는 것이 바늘을 가지고 눈동자를 겨누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고, 또 속담에 정승을 사귀려 말고 네 몸가짐부터 신중히 하라.” 하였으니, 그대는 아무쪼록 명심하시오. 차라리 약하면서도 굳센 편이 낫지 용감하면서도 뒤가 물러서는 아니 되오. 하물며 외세(外勢)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D-001]외세(外勢) : 타인의 권세(權勢)를 말한다. 관자(管子) 팔관(八觀) 권력을 쥔 자가 그의 재능과 무관하게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 백성들은 효제충신을 등지고 외세를 구한다.權重之人 不論才能 而得尊位 則民倍本行而求外勢고 하였다. 외세를 구한다는 것은 외국의 세력과 결탁하여 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창애(蒼厓)에게 답함

 

 

보내 주신 문편(文編)을 양치질하고 손을 씻고서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읽고 나서 말하오. 그대의 문장이 몹시 기이하다 하겠지만, 사물의 명칭이 빌려 온 것이 많고 인용한 전거가 적절치 못하니 이 점이 백옥의 티라 하겠기에 노형을 위하여 아뢰는 바요.

문장을 짓는 데에는 법도가 있으니, 이는 마치 송사하는 자가 증거를 지니고 있고 장사치가 물건을 들고 사라고 외치는 것과 같소. 아무리 사리(辭理)가 분명하고 올바르다 하더라도, 다른 증거가 없다면 어찌 이길 수가 있겠소. 그러므로 문장을 짓는 사람은 경전을 이것저것 인용하여 자기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오. 대학(大學)은 성인(聖人)이 짓고 현인(賢人)이 이를 계술(繼述)하였으니, 이보다 더 미더울 게 없소. 그런데도 서경(書經)의 강고(康誥)에서 극명덕(克明德)’을 인용하고 또 제전(帝典 요전(堯典))에서 극명준덕(克明峻德)’을 인용하여 명명덕(明明德)의 뜻을 밝히고 있소.

관호(官號)나 지명은 남의 것을 빌려 써서는 아니 되는 것이니, 나무를 지고 다니면서 소금을 사라고 외친다면 하루 종일 길에 다녀도 장작 한 다발 팔지 못할 것이오. 마찬가지로 황제가 살고 있는 곳이나 제왕의 도읍지를 다 장안(長安)’이라 칭하고 역대의 삼공(三公)을 다 승상(丞相)’이라 부른다면, 명칭과 실상이 혼동되면서 도리어 속되고 비루한 표현이 되고 마오. 이는 곧 좌중을 놀라게 한 가짜 진공(陳公)과 얼굴 찌푸림을 흉내 낸 가짜 서시(西施)의 꼴과 같소. 그러므로 문장을 짓는 사람은 아무리 명칭이 비루해도 이를 꺼리지 아니하고, 아무리 실상이 속되어도 이를 은폐하지 말아야 하오. 맹자 성은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이름은 독자적인 것이다.”라고 했듯이, 또한 문자는 다 같이 쓰는 것이지만 문장은 독자적인 것이다.”라고 하겠소.

 

 

[C-001]창애(蒼厓) : 유한준(兪漢雋 : 1732~1811)의 호이다. 유한준은 진사 급제 후 음직(蔭職)으로 군수 · 부사 · 목사 · 형조 참의 등을 지냈다. 당대의 문장가로 평판이 높았으며, 젊은 시절에 연암과 절친하였으나, 나중에 열하일기를 비방하고 산송(山訟)을 벌이는 등 사이가 극히 나빠졌다. 박종채(朴宗采)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바로 이 편지로 인해 유한준이 연암에 대해 유감을 품기 시작했다고 한다.

[D-001]문편(文編) : 책으로 엮은 글을 말한다.

[D-002]대학(大學) …… 있소 : 주자(朱子) 대학을 경() 1장과 전() 10장으로 나누고, ()은 공자의 말을 증자(曾子)가 조술(祖述)하고, ()은 증자의 뜻을 그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보았다. 서경의 강고와 요전에서 인용한 말은 전()의 제 1 장에 나오는데, 이는 대학의 경()의 첫 문장 즉,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D-003]좌중을 …… 진공(陳公) : 진공은 전한(前漢) 말의 인물인 진준(陳遵)을 가리킨다. 자는 맹공(孟公)이다. 당시에 열후(列侯) 가운데 진준과 성()과 자()가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진준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언제나 진맹공(陳孟公)이 왔노라고 알렸다. 좌중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면 그들이 생각했던 그 열후가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진준을 가리켜 진경좌(陳驚座)’라고 불렀다. 漢書 卷92 游俠傳 陳遵

[D-004]얼굴 …… 서시(西施) : 춘추 시대의 미인인 서시가 가슴앓이로 인해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니 그 모습이 더욱 예뻤다. 그러자 이웃 마을에 사는 추녀(醜女)가 이를 보고는 자신도 흉내 내고 다녔더니 더욱 추해졌다고 한다. 莊子 天運

[D-005]성은 …… 것이다 :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는 것이 어찌 문장에 관한 일뿐이리요. 일체 오만 가지 것이 모두 다 그러하다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 밖에 나갔다가 제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우는 자를 만나서

 

너는 어찌 우느냐?”

했더니, 대답이

 

저는 다섯 살 적에 소경이 되었는데, 그런지 지금 20년이 되었습니다. 아침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천지 만물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밭둑에 갈림길이 많고 대문들이 서로 같아서 제집을 구분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하기에, 선생이

 

내가 너에게 돌아갈 방도를 가르쳐 주마. 네 눈을 도로 감으면 바로 네 집이 나올 것이다.”

했습니다. 이에 소경이 눈을 감고 지팡이로 더듬으며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니 서슴없이 제집을 오게 되었더라오. 눈 뜬 소경이 길을 잃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색상(色相)이 뒤바뀌고 희비(喜悲)의 감정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망상(妄想)이라 하는 거지요. 지팡이로 더듬고 발길 가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분수를 지키는 전제(詮諦), 제집으로 돌아가는 증인(證印)이 되는 것이오.

 

 

[D-001]색상(色相)이 뒤바뀌고 : ‘색상은 불교 용어로, 겉으로 드러난 만물의 모습을 말한다. 색상은 본래 실체가 없는 공()이라고 한다. ‘뒤바뀌다顚倒 역시 불교 용어로, 번뇌로 인해 망상(妄想)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D-002]전제(詮諦) : 불교 용어로 진제(眞諦)와 같은 말이다. 속사(俗事)의 허망한 도리인 속제(俗諦)와 구별되는 진정한 도리를 가리킨다.

[D-003]증인(證印) : 불교 용어로 인가(印可)와 같은 말이다. 제자가 진리를 증득(證得)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

하였소.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蒼頡)로 하여금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어제 자제가 찾아와서 글 짓는 법을 묻기에 내가 일러 주기를,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했더니 자못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하고 떠나더군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즈음에 혹시 고합디까?

 

 

[D-001]자제 :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兪晩柱 : 1755~1788)를 가리킨다. 유만주는 1775년부터 13년간 쓴 일기 흠영(欽英) 24 6책을 남겼는데, 연암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 당시 문단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D-002]() …… 말라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다섯 번째 편지

 

 

저물녘에 용수산(龍首山)에 올라 그대를 기다렸으나 그대는 오지 않고 강물만 동쪽에서 흘러와 어디론가 흘러갔습니다. 밤이 깊어 달빛 비친 강물에 배를 띄워 돌아와 보니, 정자 아래 고목나무가 하얗게 사람처럼 서 있기에 나는 또 그대가 거기에 먼저 와 있는가 의심했었다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섯 번째 편지

 

 

선비란 궁유(窮儒)의 별호(別號)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일이 흰 바탕에서 시작하는 것과 같으니,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선비가 아닐 수 없지요. 저들이 스스로 벼슬할 만하다고 자부하면서도 지치고 굶주린 선비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평생 과거 시험장에서 요행수를 노리다가 스스로 증오하고 스스로 업신여긴 때문이지요. 천자로서 선비가 아닌 자는 주전충(朱全忠 후량(後梁)의 태조(太祖)) 한 사람뿐이지요. 이를테면 조자환(曹子桓)은 동경(東京 낙양(洛陽))의 수재(秀才)이며 환경도(桓敬道)는 강좌(江左 양자강 동쪽 지방)의 명사(名士)라 하겠지요.

 

 

[D-001]그림을 ……  : 논어 팔일(八佾)에서 공자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바탕을 희게 칠한 다음의 일이다.繪事後素라고 하였다. ()를 배우기 전에 그 바탕이 되는 덕행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D-002]천자로부터 …… 없지요 : 연암집 10 원사(原士)에서 그러므로 천자도 근원은 선비이다. 근원이 선비란 것은 생민(生民)의 근본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작위는 천자이지만 그의 신분은 선비인 것이다.故天子者 原士也 原士者 生人之本也 其爵則天子也 其身則士也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옥조(玉藻) 천자도 편히 쉴 때에는 사복(士服)인 현단(玄端)을 입는다.” 하였으며,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 천자의 원자는 선비와 같다. 천하에 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은 없다.天子之元子猶士也 天下無生而貴者也고 하여 세자(世子)가 관례(冠禮)를 치를 때 사례(士禮)와 똑같이 한다고 하였다. 연암의 주장은 이러한 예설(禮說)에 근거한 것이다.

[D-003]조자환(曹子桓) : () 나라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이다. 자환은 그의 자()이다.

[D-004]환경도(桓敬道) : 동진(東晉) 말기에 건강(建康)을 함락시키고 초() 나라를 세운 환현(桓玄)이다. 경도는 그의 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일곱 번째 편지

 

 

그대는 보따리를 풀고 말안장을 내리도록 하시오. 내일은 비가 올 거요. 샘물이 울음소리를 내고 시냇물이 비린내를 풍기고, 흙섬돌에는 개미 떼가 밀려들고, 왜가리는 울며 북으로 가고, 연기는 서려 땅으로 치닫고, 별똥은 서쪽으로 흐르고, 바람도 살펴보니 샛바람이 아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여덟 번째 편지

 

 

나무를 심고 꽃을 심는 것은 마땅히 진() 나라 사람의 글씨가 글자를 구차스레 배열하지 않고도 줄이 저절로 시원스레 곧은 것처럼 해야 하는 거라오.

 

 

[D-001]() 나라 사람의 글씨 : 왕희지(王羲之)의 초서(草書)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아홉 번째 편지

 

 

정옹(鄭翁)은 술을 많이 마실수록 필흥(筆興)이 더욱 도도하여, 그 큰 점은 공만 하고 먹방울은 튀어서 왼뺨에 떨어지곤 하지요. 남녘 ()’ 자의 오른쪽 다리획이 종이 끝을 넘어 깔개 자리까지 뻗치자, 붓을 던지고 허허 웃더니 유유히 용호(龍湖)를 향해 떠나갔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소그려.

 

 

[D-001]정옹(鄭翁) : 정내교(鄭來僑: 16811759)를 가리키는 듯하다. 정내교는 저명한 여항(閭巷) 문인으로, 호는 완암(浣巖)인데 현옹(玄翁)으로도 불리웠다. 홍봉한(洪鳳漢)과 김종후(金鍾厚) 형제의 숙사(塾師)였다. 김종후가 지은 완암 정옹 묘지명(浣巖鄭翁墓誌銘)에 의하면, 정내교는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술이 취하면 강개하여 비가(悲歌)를 부르던가, 붓을 휘둘러 시를 썼는데 서법 또한 굳세고 호방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를 경모(敬慕)했다고 한다. 本庵集 卷8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설초(雪蕉)에게 보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다른 사람의 서첩(書帖)에 제사(題辭)를 써 주면서 아옹(鵝翁)’이라 일컬었는데,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이를 보고 웃으면서

 

대감이 오늘에야 제소리를 내는구려.”

했으니, 이는 아옹이 고양이 소리와 비슷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지요. 이 사람도 오늘 제 마음을 쏟아 내었으니, 두렵고 두려울 뿐이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치규(穉圭)에게 보냄

 

 

백우(伯雨)는 아마도 떨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소. 무당이 문에 들어오자 귀신이 그 방에 가득 차 있었으며, 아침나절 나아가 진찰을 해 보니 얼굴빛은 새까맣고 눈동자는 벌겋고 부어 있었소. 무엇이 빌미가 되었느냐고 묻자,

 

자주 두려움에 시달리고 지난 일을 자주 뉘우쳤더니 이것이 병의 빌미가 되었소.”

하기에,

 

군자는 도를 즐기어 근심을 잊으며, 운명과 이치에 순응하여 도에 맞게 행동하거늘, 두려울 게 무에 있으며 뉘우칠 게 무에 있으랴.”

하였더니, 시자(侍者)가 눈짓을 하며 만류하였소. 시간을 살펴보다 밖으로 나와서 좌우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의 병세는 증오하는 것이 많은 점인데 특히 여자를 가장 꺼려합니다.”

합디다.

생각해 보니 백우는 얼굴이 훤하고 잘생긴 데다 항상 모양을 냈으니 지금 병의 빌미는 여자를 지나치게 총애한 때문이오. 이 이글거리면 쇠붙이가 녹고, 나무가 성하면 흙이 흘러내리듯이, 두려움이 생기면 뉘우침이 뒤따르는 법이니 이 때문에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증세가 생긴 것이지 귀신이 내린 재앙은 아니오. 그런데 무당을 불러다가 기도를 하니 나는 백우의 병이 정말로 귀신이 내린 재앙이 될까 두렵소.

무릇 귀신에도 군자의 귀신이 있고 소인의 귀신이 있소. 삼신(三辰 , , )과 오행(五行), 사직(社稷)과 산천(山川)은 백성에게 주는 이로움으로 인하여 섬기는 귀신이요,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힘쓴 인물과 고생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인물, 공정한 법을 백성에게 실시한 인물과 재해와 큰 환란을 막은 인물은 백성들에게 미친 공로로 인하여 섬기는 귀신이오. 이와 같이 공덕과 큰 이익을 주는 귀신들은 모두 제사를 지내 주도록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소. 이를 일러 명신(明神)이라 하는데, 이들은 어질고 신령하며 귀하고 오래 살며 높고도 밝게 드러나니, 이것이 바로 군자의 귀신이오.

그런데 부엌, 방구석, 문지방, 중류(中霤)에 붙어 있는 귀신들로 말하면 모두 제사에 대한 보답은 있을지언정 위에서 말하는 귀신과는 진실로 그 부류가 다르오. 이를 간신(奸神)이라 하는데, 미련하고 신령하지 못하며 천하고 일찍 죽으며 낮고 음침하니 이것이 바로 소인의 귀신이오. 이들이 숲과 늪에 붙으면 매()가 되고 덤불과 골짜기에 붙으면 양()이 되며, 벌레와 물고기에 붙으면 요()가 되고 풀이나 나무에 붙으면 상()이 되며, 물건에 붙으면 괴()가 되고 사람에게 붙으면 수()가 되며, 꿈에 붙으면 압()이 되고 일에 붙으면 마()가 되고 병에 붙으면 여()가 된다오. 이는 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고 천지(天地) 사이에도 용납되지 못하여, 해와 달이 환히 비추고 바람과 천둥이 뒤흔들어 버리면 구멍 속으로 숨고 틈 사이로 파고들어, 궁핍하게 억눌려 지내다가 간간이 민간의 사귀(邪鬼)가 되어 나타난다오. 이때 무당이 음기(淫氣)를 빙자하여 장구를 두들기고 춤을 추면서 저와 의기가 통하는 귀신들을 불러 대어 집안 식구들을 겁주는 것이오.

시경에 이르기를 점잖은 군자들은 복을 구해도 간사하게 하지 않는다.愷悌君子 求福不回 했거늘, 군자의 병에 어찌하여 소인의 귀신을 섬길 까닭이 있겠소. 부인네를 천시하는 것은 바로 말이 많기 때문이오. 부인네가 말이 많은 것은 무당을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고 여자 무당이 장구 치며 춤추는 행위는 귀신을 불러들이는 매개가 되오. 이러한 미끼와 매개가 이미 다 갖추어졌으니, 이는 실로 화를 불러들이는 것이오. 갈대 빗자루로 쓸어 내고 부적을 가지고 주문을 외면서, 겉으로는 귀신을 쫓는 척하나 남몰래 귀신을 불러들여 머리를 조아리고 귀신을 부르고 그에게 복종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그래서 귀신처럼 말하고 귀신처럼 웃고 귀신처럼 성내고 귀신처럼 기뻐하면서, 이리 부르고 저리 불러 온 방에 가득 차게 하고, 들어오면 목구멍에 머물다가 나갈 때는 꽁무니로 빠져나가며, 남의 병을 가지고 농락하면서 재물을 삼키려 드니, 어찌 떨치고 일어날 수 있겠소.

성인(聖人)은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기 때문에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 하였으니, 지금 방 안에서 항상 빌고 있다면 귀신을 이보다 더 가까이하는 것이 뭐가 있겠소. 이것이 과연 명신(明神)일진대 어찌 희생(犧牲)과 옥백(玉帛)을 놓아 두고 민가에 내려와서 밥을 얻어먹겠으며, 만약 그것이 나쁜 짓을 일삼는 간신(奸神)과 음신(淫神)이라면 무슨 복을 주겠소. 거북점도 두 번 하면 오히려 알려 주지 않거늘 하물며 예()가 아닌 일에 푸짐하게 차려 놓고 많은 재물을 주어 청하려고 한들 될 리가 있겠소.

백우가 말하기를, 그대의 누이가 몹시 어질고 오빠의 감화를 받아 매사를 그대에게 의논한다 하였소. 그렇다면 그대는 번연히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이니, 그들과 똑같은 잘못이 있다 할 것이오. 그대는 아무쪼록 생각해 보시오.

 

 

[D-001]군자는 …… 잊으며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는 도를 즐기어 근심을 잊는다.樂以忘憂고 하였다. 또한 양운(楊惲)의 보손회종서(報孫會宗書) 군자는 도를 행하느라 즐거워서 근심을 잊는다.君子游道 樂以忘憂고 하였다. 文選 卷41

[D-002]삼신(三辰) …… 있소 : 예기(禮記) 제법(祭法), “무릇 성왕(聖王)이 제사를 제정함에 있어 공정한 법을 백성에게 실시한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죽음으로써 나랏일에 힘쓴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고생하여 나라를 안정시킨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재해를 막은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내고, 큰 환란을 막은 인물에 대하여 제사를 지낸다. …… 그리고 일월성신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대상이요, 산림, 천곡, 구릉은 백성들이 재물을 가져다 쓰는 곳이므로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제외한 대상은 사전(祀典)에 실리지 않는다.夫聖王之制祭祀也 法施於民則祀之 以死勤事則祀之 以勞定國則祀之 能禦大菑則祀之 能捍大患則祀之 …… 及夫日月星辰 民所瞻仰也 山林川谷丘陵 民所取財用也 非此族也 不在祀典 하였다.

[D-003]중류(中霤) : 방의 중앙을 가리킨다. ()는 낙숫물이란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방 중앙에 낙숫물 받는 곳이 있었으며 토()는 중앙을 주관하므로, 방 중앙에서 토신(土神)의 제사를 지냈다.

[D-004]점잖은 …… 않는다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나오는 구절이다.

[D-005]성인(聖人) …… 하였으니 : 논어 옹야(雍也), 번지(樊遲)가 지()에 관해 묻자, 공자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의(道義)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라 말할 수 있다.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고 하였다. 논어 술이(述而), 공자가 병이 위중해지자 자로가 신에게 기도를 드릴 것을 청하면서 상하 천지신명에게 기도한다.禱爾于上下神祇라고 한 뇌문(誄文)의 말을 인용하니, 공자가 그런 기도라면 나의 기도는 오래되었다고 하여, 자로의 청을 완곡하게 물리쳤다. 평소의 행동이 신명(神明)의 뜻과 부합했으므로 기도를 일삼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D-006]거북점도 …… 않거늘 : 시경 소아(小雅) 소민(小旻) 나의 거북이 이미 싫증을 낸지라 나에게 길흉을 알려 주지 않네.我龜旣厭 不我告猶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귀염불고(龜厭不告)란 성어가 생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관(仲觀)에게 보냄

 

 

내 듣건대 그대가 계우(季雨)와 절교했다고 하니 이 무슨 일이지요? 계우가 어질다면 절교해서는 안 되는 거고, 만약 불초하다면 그대가 바로잡아 주지 못하고 마침내 대대로 맺어 온 집안의 친분을 저버리는 것이니,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어진 이와 절교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요 불초한 사람을 바로잡아 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니, 그 시비곡직을 가리려 들진대 고을과 이웃의 부형들의 여론을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겠소. 상서로운 일을 저버리고 어진 일을 포기한 것은 그 책임이 그대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오.

예전 그대의 관례(冠禮)에 그대의 선고(先考)께서 자방(子方) 씨를 빈()으로 뽑았고 백우(伯雨)가 실로 찬자(贊者)가 되어, 그들 두 사람이 그대를 붙들어 섬돌 위로 인도하고 축()을 읽고 관을 씌워 주어 성인(成人)의 의식을 행하였으며, 술을 따라 제()를 올려 그 복을 이루게 하고 절을 하고 자()를 지어 그 덕을 표방했으며, 띠와 신을 내려 주면서도 다 훈계하는 말을 하였소. 그런데 자방 씨와 백우가 죽은 뒤에 그들의 고아이자 어린 아우를 모른 척하여 그들의 혼령을 슬프게 한다면 그대가 마음이 편안하겠소? 돌아가신 분들이 생전과 같은 지각(知覺)이 없다 해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며, 만약에 지각이 있다고 한다면 어찌 두 아버님의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소.

무릇 관이란 머리에 얹는 것이요, 띠는 허리에 매는 것이요, 신은 발에 신고 다니는 것인데, 지금 그대는 관만 머리에 얹었지 그 덕은 얹지 않았고, 그 띠만 허리에 매었지 그 훈계의 말은 매지 않았고, 그 신만 발에 신었지 그 훈계는 실천하지 않고 있소. 이는 곧 얹은 관을 떨어뜨리고 맨 띠를 풀어 버리고 그 선대(先代)의 양가의 친목을 이어 가지 않는 것이니, 장차 어떻게 관 쓰고 띠 매고 옷 입고 신 신고 향리에 다닌단 말이오? 그대는 아무쪼록 생각해 보오.

 

 

[D-001]도대체 어쩌자는 것이오 : 원문은 若之何인데, ‘若之何其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이는 서경이나 시경 등에서 종종 쓰이는 표현으로, ‘는 음절을 조정하는 조사(助詞)일 뿐 뜻이 없다.

[D-002]자방(子方) 씨를 …… 되어 : 자방은 누구의 자()인지 알 수 없다. 관례를 행하기 3일 전에 주인은 중빈(衆賓) 가운데서 한 사람을 관례를 주관하는 빈()으로 선택하고 길흉을 점치는데, 이를 서빈(筮賓)이라 한다. 빈은 자신을 돕는 찬자(贊者) 한 사람을 요청한다.

[D-003]술을 …… 하고 : 삼가례(三加禮)를 마친 뒤에 빈()이 관자(冠者)에게 술을 따르며 절하고 술잔을 받아 제사를 올려 너의 복을 이루어라.拜受祭之 以定爾祥라고 치사(致辭)한다. 儀禮 士冠禮

[D-004]그들의 …… 아우 : 계우(季雨)를 가리킨다. 계우는 자방 씨의 아들이자 백우(伯雨)의 동생이었다.

[D-005]두 아버님 : 중관(仲觀)의 부친과 백우(伯雨) · 계우(季雨)의 부친 자방 씨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그대는 고서를 많이 쌓아 놓고 절대로 남에게 빌려 주지 않으니, 어찌 그리 빗나간 짓을 하오. 그대는 장차 대대로 전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요? 무릇 천하의 물건이 대대로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오래되었소. 요순(堯舜)도 전하지 못하고 삼대(三代)도 능히 지키지 못한 천하를 진 시황제가 대대로 지키려 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를 어리석다 하는 것이오. 그런데도 그대는 몇 질의 서적을 대대로 지키고자 하니, 어찌 빗나간 짓이 아니겠소.

책이란 일정한 주인이 없으니,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갖기 마련인 거요. 만약 뒷 세대가 어질어서 선행을 즐기고 학문을 좋아하면 벽간(壁間)에 소장된 책과 총중(冢中)에 비장된 책과 한문으로 번역된 먼 나라의 책들도 장차 남양(南陽)의 시대로 전해질 것이오. 만약 뒷 세대가 어질지 못하여 안일하고 게으르다면 천하도 지키지 못하거늘 하물며 서적이겠소? 남에게 말을 타도록 빌려 주지 않는 것도 공자는 오히려 슬퍼했거늘 책을 가진 자가 남에게 읽도록 빌려 주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잔 셈이오?

그대가 만약 자손이 현우(賢愚)를 막론하고 다 대대로 책들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것 또한 크게 빗나간 짓이오. 군자(君子 제왕(帝王))가 나라를 처음 세워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이를 계속 이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오. 그러므로 법으로써 밝히고 덕으로써 거느리고 위용으로써 보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뒷 세대가 오히려 이를 실추시켜서 제대로 계승하는 경우가 없었소. 관석화균(關石和鈞)을 하() 나라 자손이 대대로 지켰더라면 구정(九鼎)이 어찌 옮겨졌겠으며, 명덕형향(明德馨香)을 은() 나라의 자손이 제대로 지켰더라면 박( 은 나라 수도)의 사직(社稷)이 어찌 누차 옮겨졌겠으며, 천자목목(天子穆穆)을 주() 나라 자손이 대대로 지켰더라면 명당(明堂 제후들의 조회를 받던 궁전)이 어찌 헐렸겠소.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법을 밝혀 후세에 전하고 덕과 위용으로써 보여 주어도 오히려 지키기 어려운 일이거늘, 지금 천하의 고서(古書)를 사장(私藏)하고서 남에게 빌려 주는 선행을 하지 아니하며,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을 품고서 이를 후세로 하여금 계승하게 하려고 하니, 너무도 불가한 일이 아니겠소? 군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보완해 나가는 법이니, 그대가 만약 인을 구할진대 천 상자의 서적을 친구들과 함께 보아서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 그런데도 지금 책들을 묶어서 고각(高閣)에 방치해 두고 구구하게 뒷 자손에게 전해 줄 생각만 한단 말이오?

 

 

[D-001]요순(堯舜) …… 것이오 : 진 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뒤 자신을 시황제(始皇帝)’라 부르게 하고, 자신의 뒤를 잇는 황제들은 숫자로만 헤아려 2, 3세라는 식으로 불러 만세에 이르도록 무궁하게 제위(帝位)를 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진 나라는 불과 2세에서 망하였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2]벽간(壁間) …… 것이오 : 벽간에 소장된 책이란 서한(西漢) 무제(武帝) 때 공자(孔子)의 옛집 벽간에서 출토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의 책들을 가리킨다. 총중에 비장된 책이란 진() 나라 때 급군(汲郡)에 있던 위() 나라 안희왕(安釐王)의 무덤에서 발굴된 일주서(逸周書) 등의 책들을 가리킨다. 한문으로 번역된 먼 나라의 책들이란 아홉 번이나 통역을 거쳐야 할 정도로 먼 외국의 책들을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말하며, 불경(佛經)이나 서학서(西學書)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남양(南陽)의 시대란 광무제(光武帝)의 치세와 같이 학문이 흥성한 시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동한(東漢)을 세운 광무제는 남양 사람이어서 남양에는 왕기(王氣)가 서려 있었다고 한다. 광무제는 보기 드문 호학(好學)의 군주로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예악을 정비하였으며 학문을 장려하여 그의 치세에 경학(經學)이 다시 융성하였다. 그러므로 문심조룡(文心雕龍) 정위(正緯)에서도 광무제의 시대에 이르러 …… 그의 교화에 크게 영향받아 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至于光武之世 …… 風化所靡 學者比肩고 하였다.

[D-003]남에게 …… 슬퍼했거늘 :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불확실한 내용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는 것과 말을 가진 자가 남에게 타도록 빌려 주는 것을 예전에는 보았는데 지금은 그나마 없어졌구나.”라고 탄식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4]관석화균(關石和鈞) : 서경(書經) 오자지가(五子之歌)의 네 번째 노래에, “밝고 밝은 우리 선조 온 나라의 임금이시라 법과 규칙 높이 세워 자손에게 남기셨네. 석과 균을 통용시켜 왕의 창고 풍족하더니 그 전통 실추시켜 종족 망치고 제사 끊겼도다.明明我祖 萬邦之君 有典有則 貽厥子孫 關石和鈞 王府則有 荒墜厥緖 覆宗絶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노래는 하() 나라의 무능한 임금인 태강(太康)이 백성을 돌보지 않고 노는 데에만 빠져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의 다섯 동생이 각각 1수씩 지어 태강의 부덕(不德)함과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에서 석() 120, () 30근으로서, 관석화균은 도량형(度量衡)의 통일을 가리킨다.

[D-005]명덕형향(明德馨香) : 덕정(德政)을 뜻한다. 서경(書經) 군진(君陳), “지극한 정치는 향기로워 신명을 감동시키니, 서직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만이 향기롭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것은 주() 나라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이어 은() 나라의 유민(遺民)을 다스리러 가는 군진(君陳)에게 훈계하면서 한 말이다.

[D-006]천자목목(天子穆穆) : 천자의 위엄을 뜻한다. 시경(詩經) (), “제후들이 와서 제사를 돕거늘 천자는 엄숙하게 계시도다.相維辟公 天子穆穆 한 데서 온 말이다. 이 시는 주() 나라 무왕(武王)이 문왕(文王)에게 제사를 올릴 때를 노래한 것이다. 즉 천자가 권위가 있어 제후들이 자발적으로 와서 제사를 도운 것을 두고 한 말이다.

[D-007]군자는 …… 법이니 : 원문은 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인데, 논어 안연(顔淵)에서 증자(曾子)가 한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옥(仲玉)에게 답함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은 애초에 듣지 말아야 할 것이요, 발설 말라 하면서 하는 말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니, 남이 알까 두려운 일을 무엇 때문에 말하며 무엇 때문에 들을 까닭이 있소?

말을 이미 해 놓고 다시 경계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심하는 일이요, 상대방을 의심하고도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장공예(張公藝)의 참을 인() 자 백 자는 끝내 활법(活法 융통성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하오. 장공예의 9대 동거(同居)를 당() 나라 대종(代宗)이 능히 해냈으니, 무어라 말하여 그리되었소?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 노릇을 하기 어렵다.”고 하였소. 그렇다면 어느 것이 활법이겠소? 그것은 바로 애비는 애비 노릇 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 하고 형은 형 노릇 하고 동생은 동생 노릇 하고 남편은 남편 노릇 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 하고 어른은 어른 노릇 하고 어린이는 어린이 노릇 하고 남종은 남종 구실 하고 여종은 여종 구실 하는 것뿐이오.

이번에 인재기(忍齋記)를 지으면서 이런 내용을 삽입하고자 하는데, 어떨는지 모르겠소. 고견을 밝혀 주시오.

 

 

[D-001]장공예(張公藝) …… 백 자 : 장공예는 9대가 함께 동거하여 북제(北齊), (), () 등 세 왕조에서 정표(旌表)를 내린 집안의 인물이다. 인덕(麟德) 연간에 고종(高宗)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을 하고 나서 그 집에 행차하여 친족 간에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이에 장공예가 지필묵을 꺼내어 참을 인() 자 백여 자를 써서 올렸더니, 고종이 훌륭히 여겨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小學 卷6 善行

[D-002]어리석지 …… 어렵다 : 가장(家長)이 집안을 평화롭게 다스리려면 보아도 못 본 체 들어도 못 들은 체해야 한다는 뜻의 속담이다. 당 나라 대종(代宗) 때 곽자의(郭子儀)의 아들 애()가 승평공주(昇平公主)와 결혼했는데 공주와 말다툼을 하다가 천자에게 저촉되는 말을 했다. 공주가 이를 고자질하자 대종은 공주를 타일러 돌려보냈으며, 또한 이 사실을 안 곽자의가 아들을 감금하고 대죄(待罪)하자, 대종은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 노릇을 하기 어렵다.不痴不聾 不作家翁는 속담을 인용하면서 너그러이 용서했다고 한다. 資治通鑒 卷224 唐代宗 大歷2

[D-003]애비는 …… 하고 :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 애비는 애비 노릇 하고 아들은 아들 노릇 하고 형은 형 노릇 하고 동생은 동생 노릇 하고 남편은 남편 노릇 하고 아내는 아내 노릇 하면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니, 집안이 바르게 되어야 천하가 안정된다.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而家道正 正家而天下定矣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어제는 우리들이 달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 달이 우리들을 저버린 거요. 세상에 어떤 일이든 모두 다 저 달과 같지 않겠소?

한 달이라 서른 날에도 큰달이 있고 작은달도 있으니, 초하룻날과 초이튿날은 방백(旁魄)일 따름이며, 초사흗날에는 겨우 손톱 흔적만 하되 그래도 낙조(落照) 때에는 빛을 발하며, 초나흗날이면 갈고리만 하고 초닷샛날이면 미인의 눈썹만 하고 초엿샛날이면 활만 하되 빛은 아직 넓게 퍼지지 못하고, 칠팔일로부터 열흘에 이르면 비록 얼레빗만 하나 빈 둘레가 여전히 보기 싫고, 열하루, 열이틀, 열사흘이면 변송(汴宋 북송(北宋))의 산하(山河)처럼 오() · () · 강남(江南)이 차례로 평정되어 판도에 들어오는데 운주(雲州)와 연주(燕州)가 요()에 함락되어 국토가 끝내는 이지러진 모습을 지닌 것과 같고, 열나흘이면 마치 곽 분양(郭汾陽)의 운수가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으나 다만 한편으로 옆에 달라붙은 어조은(魚朝恩) 때문에 두려워하고 조심해야 했던 것이 한 가지 결함인 것과 같지요.

그렇다면 거울같이 완전히 둥근 때는 보름날 하루저녁에 불과한 데다 그나마 달이 가장 둥근 때가 열엿새로 옮겨지거나 혹은 살짝 월식(月蝕)이 되든지 달무리가 지거나 혹은 먹구름에 가려지거나 혹은 모진 바람과 세찬 비가 내려 어제처럼 사람들을 낭패하게 만들지요. 우리들은 이제부터 마땅히 송조(宋朝)의 인물을 본뜨고, 다만 곽 분양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복을 아끼기를 바라는 것이 옳겠지요.

 

 

[D-001]작은달 : 한 달이 28일이나 29일이 되는 달로 음력 2 · 4 · 6 · 9 · 11월이 작은달이다.

[D-002]방백(旁魄) : ()은 달이 태양빛을 받지 못해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초하루의 달은 달빛이 아주 소멸하여 사백(死魄)이라 하고, 초이튿날의 달은 사백에 가깝다고 하여 방사백(旁死魄)이라 한다.

[D-003]곽 분양(郭汾陽) …… 같지요 : 곽 분양은 곽자의(郭子儀 : 697~781)를 말한다. 곽자의는 안사(安史)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으로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으며, 부귀와 장수를 누리고 후손들이 모두 현달(顯達)하였다. 단 총신(寵臣) 어조은(魚朝恩)이 관군용선위처치사(觀軍容宣尉處置使)로서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인 곽자의를 견제하고 집요하게 모함했으나, 곽자의는 은인자중하며 잘 대처하여 어조은의 참소가 끝내 통하지 못했다.

[D-004]달이 …… 옮겨지거나 : 달이 가장 밝은 때를 망()이라 하는데, 작은달에는 15일이 망이 되지만, 큰달에는 16일이 망이 된다.

[D-005]우리들은 …… 옳겠지요 :  15일에만 만나려 하지 말고, 그 전에 11일에서 14일 사이에 만나는 것도 좋겠다는 취지로 농담을 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말세에 처하여 사람을 사귈 때는 마땅히 상대방의 말이 간략하고 기운이 차분하며 성품이 소박하고 뜻이 검약한가를 살펴보아야 하며, 절대로 마음속에 계교(計巧)를 지닌 사람은 사귀어서는 안 되고 뜻이 허황된 사람은 사귀어서는 아니 되지요.

세상에서 떠드는 쓸모 있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떠들어 대는 쓸모없는 사람이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지요. 천하가 안락하고 향리에 아무런 사고가 없는데, 참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정신을 분발하면서까지 경솔히 남에게 보여 주려고 애쓸 까닭이 있겠소.

저와 같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는 것은 겉보기에 용맹한 것 같지만 이는 곧 노인의 상투적인 버릇이요, 60만 군사를 굳이 청한 것은 겁쟁이 같지만 이는 곧 지혜로운 이의 깊은 꾀랍니다.

 

 

[D-001]갑옷을 …… 버릇 : 전국(戰國) 시대 조() 나라의 명장 염파(廉頗)가 위() 나라에 도피해 있을 때 조 나라가 진() 나라의 침공으로 곤경에 처하자 조 나라 왕은 사자(使者)를 보내 염파가 아직 쓸 만한지를 탐문해 오게 하였다. 그때까지 조 나라에 다시 등용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염파는 사자가 보는 앞에서 한 말의 밥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은 다음 갑옷 차림으로 말을 타고서 자신이 아직도 쓸 만한 사람임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사자는 조 나라로 돌아가 보고하기를, “염 장군이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밥은 잘 먹습디다. 하지만 신과 함께 앉아 있으면서 잠깐 새에 세 번이나 변을 보았습니다.” 하니, 조 나라 왕은 그가 늙었다고 여겨 마침내 부르지 않았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D-002]60 ……  : 진 시황(秦始皇)이 초()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장군 이신(李信)을 불러 얼마의 군사가 있으면 정벌할 수 있겠냐고 묻자 이신이 20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장군 왕전(王翦)을 불러다 묻자 왕전은 60만 명은 있어야 정벌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진 시황은 왕전이 늙어서 겁이 많다고 질책하고 이신을 출전시켰으나 이신은 초 나라 정벌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진 시황이 다시 왕전을 불러다 사과하고 그의 주장대로 60만의 군사를 내주자, 왕전이 출전하여 결국 초 나라를 멸망시켰다. 史記 卷73 白起王翦列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북쪽 이웃의 과거 급제를 축하함

 

 

무릇 요행을 말할 때에는 만의 하나萬一란 말을 하지요.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이 줄잡아 수만 명이나 되었지만 창명(唱名 급제자 발표)은 겨우 스무 명밖에 아니 되니 이야말로 만의 하나라 이를 만하지 않겠소.

시험장의 문에 들어갈 때 서로 밟고 밟히고 죽고 다치고 하는 자들이 수도 없으며, 형제끼리 서로 외치고 부르고 뒤지고 찾곤 하다가, 급기야 서로 만나게 되면 손을 잡고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나 만난 듯이 여기니, 죽을 확률이 십분의 구라 이를 만하지요.

지금 그대는 능히 십중팔구 죽을 확률에서 벗어나서 만의 하나뿐인 이름을 얻었소.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만의 하나뿐인 영광스러운 발탁을 미처 축하하기 전에, 속으로 사망률이 십분의 구에 달하는 그 위태로운 장소에 다시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을 축하할 따름이오.

즉시 몸소 축하해야 마땅하겠으나, 나 역시 십분의 구의 죽음에서 벗어난 뒤라 지금 자리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으니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주기 바라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사강(士剛)에게 답함

 

 

붓대를 쥐고 언 손을 호호 부니 손톱이나 의대(衣帶)에서 모두 술내가 풍기는구려. 마치 젊은 장수가 사냥에 도취하고 보니 갑옷이나 군화나 깃발이 모두 피비린내를 띤 거와 마찬가지오그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재(泠齋)에게 답함

 

 

옛사람의 술에 대한 경계는 지극히 깊다 이를 만하구려. 주정꾼을 가리켜 후()라 한 것은 그 흉덕(凶德 흉악한 행실)을 경계함이요, 술그릇에 주()가 있는 것은 배가 엎어지듯 술에 빠질 것을 경계함이지요. 술잔 뢰()는 누( 오랏줄에 묶임)와 관계되고, 옥잔 가()는 엄( 계엄(戒嚴))의 가차(假借), ()는 풀이하면 불명(不皿 가득 채우지 말라)이 되고 술잔 치()는 위() 자와 비슷하고, 뿔잔 굉()은 그 저촉(抵觸)됨을 경계함이요,  두 개가 그릇 위에 있는 것은 서로 다툼을 경계한 것이고 술통 준()은 준절(撙節 절제(節制))을 보여 줌이요, ()은 금제(禁制)를 이름이요, 술 유() 부에 졸( 죽다)의 뜻을 취하면 취() 자가 되고 생( 살다) 자가 붙으면 술 깰 성() 자가 되지요. 주관(周官 주례(周禮)) 평씨(萍氏)가 기주(幾酒)를 맡았다.” 했는데, 본초(本草)를 살펴보니 ( 개구리밥)은 능히 술기운을 제어한다.” 했소.

우리들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이 옛사람보다 더하면서, 옛사람이 경계로 남긴 뜻에는 깜깜하니 어찌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니겠소. 원컨대 오늘부터 술을 보면 옛사람이 글자 지은 뜻을 생각하고, 다시 옛사람이 만든 술그릇의 이름을 돌아봄이 옳지 않을는지요.

 

 

[C-001]영재(泠齋) : 유득공(柳得恭)의 호이다.

[D-001]() : 술잔을 받치는 쟁반을 말한다. 찻잔 쟁반을 다주(茶舟)라고 한다.

[D-002]〕 ……  : ‘()’ 자를 가리킨다.

[D-003]() : 술잔을 놓는 탁자를 말한다. 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 정현(鄭玄)의 주에 이름을 금이라 한 것은 술을 경계한 때문이다.名之爲禁者 因爲酒戒也라고 하였다.

[D-004]평씨(萍氏)가 기주(幾酒)를 맡았다 : 주례 추관(秋官)에 나오는 말이다. 평씨는 나라의 물에 관한 금령(禁令)을 맡은 관직 이름이고, 기주는 백성들이 술을 구매하는 것이 적량(適量)이며 적시(適時)인가를 기찰(譏察)하는 임무를 말한다.

[D-005]본초(本草) …… 했소 : 신농씨(神農氏)가 지었다는 본초에 나오는 말로서 주례집설(周禮集說), 시아편(示兒編) 등에 인용되어 있다. 개구리밥은 물에 가라앉지 않는 성질이 있고 수기(水氣)가 승하여 술기운酒氣을 흩어지게 한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는 은어(隱語)인데 나는 벌써 해석했소. ‘마혁과시(馬革裹尸)’는 종군(終軍)을 가리키고, ‘불감앙시(不敢仰視)’는 엄안(嚴顔)을 가리키고, ‘()’는 백기(白起)를 가리키고, ‘()’은 황향(黃香)을 가리키고, ‘()’은 악비(岳飛)를 가리키고, ‘()’은 산도(山濤)를 가리키고, ‘동안백발(童顔白髮)’은 소옹(少翁)을 가리키고, ‘집의소생(集義所生)’은 맹호연(孟浩然)을 가리키고, ‘풍자도(馮子都)’는 흉노(匈奴)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D-001]종군(終軍) : 한 무제(漢武帝) 때 제남(齊南)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박학하고 문장을 잘 지어 18세에 박사제자(博士弟子)가 되었다. 글을 올려 국사를 논한 일로 무제에게 발탁되어 간대부(諫大夫)가 되고 남월(南越)에 사신으로 가서 남월왕으로 하여금 한 나라에 복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월상(越相) 오가(吳嘉)가 이에 반발하여 남월왕과 한 나라 사신을 살해하면서 종군도 죽였다. ‘말가죽에 시체를 싼다馬革裹尸는 것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어서 시신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므로 종군을 비유한 것이다.

[D-002]엄안(嚴顔) : 후한(後漢)의 유장(劉璋)의 장수로서 파촉(巴蜀)을 지키다가 장비(張飛)에게 사로잡혀 항복을 권유받자 우리 주()에는 단두장군(斷頭將軍)만 있지 항장군(降將軍)은 없다.”고 하며 이를 거부하였다. 장비가 노하여 목을 베려 하였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으므로 장비가 이를 장하게 여겨 빈객(賓客)으로 삼았다. ‘감히 쳐다보지 못한다不敢仰視는 것은 엄한 얼굴을 나타내므로 엄안을 비유한 것이다.

[D-003]백기(白起) : 전국 시대 진() 나라의 명장으로서 초() 나라를 정벌한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거품은 하얗게 일어나므로 백기(白起)를 비유한 것이다.

[D-004]황향(黃香) : 후한 때의 강하(江夏) 사람으로 천하에 강하의 황동에 비견할 사람이 없다.天下無雙 江夏黃童고 할 정도로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 ()은 색이 노랗고 향기가 있으므로 황향(黃香)을 비유한 것이다.

[D-005]악비(岳飛) : () 나라 때 금() 나라의 남하(南下)에 대항한 명장으로, 시호는 무목(武穆)이다. 구름은 산 위에 날아다니므로 악비(岳飛)를 비유한 것이다.

[D-006]산도(山濤) : 서진(西晉) 때의 인물로 혜강(嵇康), 완적(阮籍) 등과 교유하였으며 죽림칠현(竹林七賢) 가운데 한 사람이다. 폭포는 산에서 이는 파도라 할 수 있으므로 산도(山濤)를 비유한 것이다.

[D-007]소옹(少翁)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제() 지방의 방사(方士)이다. 무제가 총애하던 왕부인(王夫人)의 혼령을 방술(方術)로 불러들여 그 공으로 문무장군(文武將軍)에 제수되었다. 어린애 얼굴에 흰머리童顔白髮는 애늙은이를 가리키므로 소옹(少翁)을 비유한 것이다. 史記 卷12 孝武本紀

[D-008]집의소생(集義所生) :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장에서 호연지기는 의()가 축적되어 생겨나는 것이지 의가 갑자기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라고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D-009]맹호연(孟浩然) : 당 나라의 시인으로 양양(襄陽) 사람이다. 특히 자연의 경물을 잘 묘사하여 왕유(王維)와 함께 왕맹(王孟)’으로 불린다.

[D-010]풍자도(馮子都) : 한 나라의 대장군 곽광(霍光)의 감노(監奴)로서 주인 곽광의 비첩인 현()과 사통(私通)을 하다가 곽광의 부인 민씨(閔氏)가 죽고 현이 정실부인이 되자 반란을 일으켰다. , 풍자도는 흉악한 노복(奴僕)에 해당하므로 흉노(凶奴) 즉 흉노(匈奴)를 비유한 것이다. 漢書 卷68 霍光金日磾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아무개에게 답함

 

 

우연히 야성(野性)을 찬미하다가 스스로를 고라니에 비한 것은 고라니가 사람만 가까이하면 잘 놀라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 감히 잘난 체해서가 아니었지요. 지금 그대의 편지를 받아 보건대, 스스로를 기마(驥馬) 꼬리에 붙은 파리에 비했으니, 또 어찌 그리 작지요? 진실로 그대가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고말고요. 개미도 있지 않소?

내 일찍이 약산(藥山)에 올라 도읍을 굽어보니 사람들이 달리고 치닫고 하여 땅에 가득 구물대는 것이 마치 개밋둑에 진을 친 개미와 같아서, 한번 불면 능히 흩어질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다시 그 도읍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바라보게 한다면, 비탈을 더위잡고 바위를 오르고 다래 넝쿨을 움켜쥐고 나무를 타고서 산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망령되이 스스로 높고 큰 양하는 모습이 이가 머리털을 타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소?

그런데 지금 마침내 큰소리치며 스스로 비하기를 고라니라 했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던지요. 당연히 대방가(大方家 식자(識者))에게 비웃음을 사 마땅한 일이지요. 만약 다시 그 형체의 크고 작고를 비교하고, 보이는 바의 원근을 분별하기로 든다면, 그대나 내가 모두 다 망령된 짓을 할 뿐이지요. 고라니는 과연 파리보다는 크다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소? 파리가 과연 고라니보다 작다 하지만, 저 개미에게 견주어 본다면 코끼리와 고라니 사이나 마찬가지이지요.

지금 저 코끼리가 서면 집채만 하고 걸음은 비바람같이 빠르며,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하고 눈은 초승달과 비슷하며, 발가락 사이에 진흙이 봉분같이 솟아 올라, 개미가 그 속에 있으면서 비가 오는지 살펴보고서 싸우려고 나오는데, 이놈이 두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코끼리를 못 보는 것은 어쩐 일입니까? 보이는 바가 너무 멀기 때문이지요. 또 코끼리가 한 눈을 찡긋하고 보아도 개미를 보지 못하니, 이는 다름아니라 보이는 바가 너무 가까운 탓이지요. 만약 안목이 좀 큰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백 리의 밖 멀리에서 바라보게 한다면, 어둑어둑 가물가물 아무 것도 보이는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고라니와 파리, 개미와 코끼리를 구별할 수 있겠소?

 

 

[D-001]야성(野性) : 자연 속에서 한적하게 살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말한다.

[D-002]고라니 : 고라니처럼 자연 속에서 한적하게 살고 싶어하는 것을 미록지(麋鹿志)’ 또는 미록성(麋鹿性)’이라 한다. 또한 노루처럼 담이 작아 잘 놀라는 것을 균경(麇驚)’이라 한다.

[D-003]기마(驥馬) …… 파리 : ()는 명마의 이름이다. 사기(史記)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사마천은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을 독실히 했지만 기마의 꼬리에 붙었기에 그의 행실이 더욱 알려졌다.”고 하였다. 쉬파리가 기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를 가듯이, 안연도 공자의 제자가 된 덕분에 후세에 더욱 유명해졌다는 뜻이다.

[D-004]약산(藥山) : 평안도 영변군(寧邊郡)에 있는 산이다. 약산 동대(東臺)는 관서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성지(誠之)에게 보냄

 

 

그의 말이 비록 터무니없이 거짓되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미리 거짓말이라 단정하지 말고 일단 믿을 만한 말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어떨는지요? 비유하자면 마치 거짓말쟁이가 꿈 얘기 하는 것과 같아서, 참이라고 믿어 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고 이를 수도 없는 게 아니겠소. 다른 사람의 꿈속이라 한번 달려 들어가 볼 수도 없으니 말이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석치(石癡)에게 보냄

 

 

옛날에 원민손(袁愍孫)이 부 상시(傅常侍)의 청덕(淸德)을 칭송하면서,

 

그 문을 지날 때면 고요하여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막상 그 휘장을 걷고 보면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

했는데, 나는 매양 눈 속을 걸어가서 쪽문을 열고 매화를 찾을 때면 문득 부 상시의 청덕을 느낀다오.

 

 

[C-001]석치(石癡) : 정철조(鄭喆祚)의 호이다.

[D-001]옛날에 …… 했는데 : 원민손(袁愍孫)은 남조(南朝) () 나라 때의 인물인 원찬(袁粲 : 420~477)의 초명(初名)이며, 부 상시(傅常侍)는 양() 나라 때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낸 부소(傅昭 : 454~528)를 가리킨다. 원찬이 단양 윤(丹陽尹)으로 있을 때 부소를 고을의 주부(主簿)로 삼아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명제(明帝)가 붕어(崩御)했을 때는 원찬의 이름으로 올린 애책문(哀策文)의 절반을 부소가 지었을 정도였다. 매번 부소의 문을 지날 때마다 감탄하기를, “그 문을 지날 때면 고요하여 사람이 없는 듯하다가 막상 휘장을 걷고 보면 그 사람이 거기에 있으니, 어찌 명현(名賢)이 아니겠는가.” 하였다고 한다. 南史 卷60 傅昭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군자의 도는 담박하면서도 싫증 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빛이 난다.” 했는데, 이 말은 바로 매화를 위한 칭송인 것 같소. 소자첨(蘇子瞻)이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논하면서 질박해 보이면서도 실은 화려하고, 여위어 보이면서도 본래는 기름지다.” 했는데, 이로써 매화에 빗대어 말하면 다시 더 평할 말이 없지요.

 

 

[D-001]군자의 …… 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33 장에 나오는 말이다.

[D-002]질박해 …… 기름지다 : 소철(蘇轍)이 지은 추화도연명시인(追和陶淵明詩引)에 나오는 말이다. 소식(蘇軾)이 도연명의 시에 화운(和韻)하여 지은 시를 모은 시집에 그 아우 소철이 서문을 썼는데, 소식이 동생에게 서문을 부탁하는 편지에서 그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옛날에 이 학사(李學士) 어른을 모시고 계당(溪堂)으로 매화 구경을 갔는데, 그 어른이 위연(喟然)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곽유도(郭有道)는 도도하면서도 속세를 끊지 않았고 부흠지(傅欽之)는 맑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뜻밖에도 홀로 빼어난 향기로운 꽃 매화가 이 두 가지 덕을 갖추었단 말인가.”

라고 했지요.

 

 

[D-001]이 학사(李學士) : 연암의 처숙(妻叔)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을 가리킨다.

[D-002]곽유도(郭有道) …… 않았고 : 곽유도는 후한 때의 은사(隱士)인 곽태(郭太 : 128~169)를 가리킨다. 곽태의 자는 임종(林宗)이고 유도(有道)는 곽태가 도()를 지닌 사람으로 천거되었기 때문에 불린 이름이다. 어떤 사람이 범방(范滂)에게 곽태가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은거하면서도 가까운 사람을 떠나지 않았고 도도하면서도 속세를 끊지 않았으며, 천자도 그를 신하로 삼지 못했고 제후도 그를 벗으로 삼지 못했으니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하였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D-003]부흠지(傅欽之) …… 않았다 : 흠지(欽之)는 송() 나라 때 인물인 부요유(傅堯兪 : 1024~1091)의 자이다. 사마광(司馬光)이 소옹(邵雍)에게 맑고 강직하고 용맹한 덕은 사람들이 동시에 갖추기가 어려운 법인데 흠지(欽之)는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소.” 하니, 소옹이 말하기를, “흠지는 맑으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강직하면서도 부딪치지 않고 용맹하면서도 온화하니,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오.” 하였다. 宋史 卷341 傅堯兪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시경 서경에는 매화를 말하면서 열매만 말하고 꽃은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들은 지금 매화시(梅花詩)를 지으면서 향기를 평하고 빛깔을 견주어 꽃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면서 그래도 부족하여, 또 따라서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곤 하니, 겉치레에다 또 겉치레를 더하여 참모습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고 말았소. 어째서 태산이 임방(林放)만 못하다고 보는 거요?

 

 

[D-001]시경 …… 않았는데 : 시경 소남(召南) 표유매(摽有梅) 잎이 떨어진 매화나무여 그 열매가 겨우 일곱이로다.摽有梅 其實七兮라고 하였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 만약 양념을 넣은 국을 만들려거든 그대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는 매실로 만든 식초를 말한다.

[D-002]어째서 …… 거요 : 논어(論語) 팔일(八佾), () 나라의 대부(大夫)인 계씨(季氏)가 대부임에도 불구하고 제후(諸侯)만이 지낼 수 있는 여제(旅祭)를 태산(泰山)에서 지내자 공자가 계씨의 가신(家臣)인 제자 염유(冉有)에게 이를 막지 못한 것을 따지면서 어째서 태산이 임방(林放)만 못하다고 보는가?” 하고 질책하였다. 임방은 공자에게 예()의 근본을 물었던 사람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나는 집이 가난하고 꾀가 모자라니, 생계를 꾸리는데방공(龐公)을 배우고 싶지만 소계(蘇季)와 같은 한탄만 있을 뿐이지요. 허물 벗음은 이슬 마시는 매미보다 더디고 지조는 흙을 먹는 지렁이에 부끄러울 뿐이외다. 옛날에 매화 삼백예순다섯 그루를 심어 날마다 한 그루씩 보면서 세월을 보낸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나는 셋방살이 신세가 되어 고산(孤山)과 같은 동산이 있을 턱이 없으니, 장차 어찌하면 좋지요?

벼루맡의 어린 종은 손재주가 하도 교묘하므로 나 역시 때때로 그를 따라서 연전(硯田 문필로 생활함)의 겨를을 내어 절지(折枝)의 매화를 만드는데, 촛눈물은 화판(花瓣)이 되고 고라니털은 꽃술이 되고 부들의 꽃가루는 꽃술의 구슬이 되어, 이름을 윤회화(輪回花)라 했지요.  윤회라 일렀냐 하면, 무릇 나무에 붙어 있는 생화(生花)가 밀랍이 될 걸 어찌 알며, 밀랍은 벌집에 있는데 그것이 꽃이 될 줄 어찌 알리요? 그러나 노전(魯錢)과 원이(猿耳)는 꽃봉오리가 천연스럽게 이루어졌고 규경(窺鏡)과 영풍(迎風)은 그 자세가 아주 자연스럽지요. 오직 땅에 박히지 않았을 뿐 바로 자연의 정취를 볼 수 있지요. 황혼의 달 아래, 비록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것은 없지만, 눈 가득한 산중에 고사(高士)가 누워 있는 모습을 족히 상상하고말고요.

나는 그대에게 먼저 매화 한 가지를 팔아서 그 값을 정하고 싶소. 만약 그 가지가 가지답지 못하거나, 꽃이 꽃답지 못하거나, 꽃술이 꽃술답지 못하거나, 꽃술의 구슬이 구슬답지 못하거나, 상 위에 놓아도 빛이 나지 않거나, 촛불 아래서도 성긴 그림자가 생기지 않거나, 거문고와 짝지어도 기이한 흥취를 자아내지 않거나, 시에 넣어도 운치나지 않거나, 한 가지라도 이런 것이 있다면 영원히 물리쳐 버려도 끝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을 거요. 이만 줄이오.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목차에는 제목이 동인에게 보냄與同人으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어떤 이에게 윤회매를 보냄與人輪回梅 또는 매화를 파는 편지鬻梅牘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 편지는 이덕무(李德懋)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62 윤회매십전(輪回梅十箋)에도 실려 있다. 즉 윤회매십전 팔지첩(八之帖)에 무릉(茂陵 : 박지원) 씨가 밀랍으로 만든 매화인 윤회매를 사라고 관재(觀齋 : 서상수徐常修)에게 보낸 편지로서 그 내용이 소개되어 있으며, 또한 편지의 말미 부분은 매화를 판 뒤 관재에게 작성해 준 증서인 윤회매십전 구지권(九之券)의 일부로 되어 있다.  연암집의 원문과 자구상의 차이가 적지 않다.

[D-001]방공(龐公) …… 뿐이지요 : 방공은 후한(後漢) 때의 은자(隱者)인 방덕공(龐德公)을 가리키고 소계(蘇季)는 전국 시대의 유세가(遊說家)인 소진(蘇秦)을 가리키는데 소진의 자가 계자(季子)이다. 소진이 연횡책(連衡策)으로 진() 나라 혜왕(惠王)을 설득하다가 실패하고 실컷 고생만 하고 고향에 돌아오자, 가족들이 모두 그를 외면하였다. 이에 소진은 아내는 나를 지아비로 여기지 않고, 형수는 나를 시동생으로 여기지 않고, 부모님은 나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구나.”라고 길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秦策

[D-002]허물 …… 뿐이외다 : 학업에 진전이 없는 것과 남에게 신세 지고 사는 것을 반성한 말이다. 순자(荀子) 대략(大略) 군자의 배움은 매미가 허물 벗듯이 신속하게 변한다.君子之學如蛻 幡然遷之고 하였으니, 부단히 학습하여 구태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낡은 것을 혁신하기를 매미가 허물 벗듯이 한다.去故就新 若蟬之蛻也는 말도 있다.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맹자는 오릉중자(於陵仲子)가 청렴을 지키기 위해 인륜마저 저버림을 비판하면서 오릉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키자면 지렁이가 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지하수만을 마시고 산다.充仲子之操 則蚓而後可者也 夫蚓 上食槁壤 下飮黃泉고 하였다.

[D-003]옛날에 …… 없으니 : () 나라 때의 은자(隱者)인 임포(林逋)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방학정(放鶴亭)과 소거각(巢居閣)을 짓고는 주변에 매화 360그루를 심고 소일하였다고 한다. 欽定南巡盛典 卷86

[D-004]절지(折枝) : 가지가 구부러져 아래로 늘어진 모양을 말한다. 동양화에서는 매화 나무 전체를 그리지 않고 가지가 구부러져 늘어진 부분만을 그린다.

[D-005]노전(魯錢)과 원이(猿耳) : 이덕무의 윤회매십전 오지화(五之花)에 꽃잎 5개가 말려 있고 꽃술이 나와 있지 않은 매화를 옛 노전古魯錢이라 하고, 꽃잎 3개는 떨어지고 남은 2개도 떨어지려 하나 꽃술만은 싱싱한 매화를 원이(猿耳)라고 한다고 하였다. 노포(魯褒)가 전신론(錢神論)을 지었기 때문에 돈을 일러 노전(魯錢)이라 한다.

[D-006]규경(窺鏡)과 영풍(迎風) : 이덕무의 윤회매십전 오지화(五之花)에 꽃잎 5개가 만개한 것을 규경(窺鏡) 또는 영면(迎面)이라 한다고 하였다. 영풍은 영면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아무개에게 보냄

 

 

다른 사람에게 처음 손이 되어 가면, 모름지기 낯설거나 껄끄러운 고태(故態)를 가져야 하고, 친숙하거나 다정한 듯한 태도는 짓지 말아야 하오. “손을 씻고 국을 끓여 먼저 시누이를 불러 맛보게 한다.” 했는데, 이 시를 지은 이는 아마 예()를 아는 사람일 거요. 태묘(太廟)에 들어서는 매사를 반드시 물어서 해야 하는 법이오.

 

 

[D-001]손을 …… 한다 : 당 나라 왕건(王建)의 신가랑(新嫁娘) 시에 시집온 지 사흘 지나 부엌에 가서, 손을 씻고 국을 끓였네. 시어머니 식성을 아직 모르니, 먼저 시누이에게 맛보게 했네.三日入廚下 洗手作羹湯 未諳姑食性 先見小姑嘗라고 하였다. 새색시의 조심성 있고 사려 깊은 태도를 칭송한 것이다.

[D-002]태묘(太廟) …… 법이오 : 논어 팔일(八佾) 공자가 태묘에 들어서 매사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누가 추인(鄹人)의 아들이 예()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서 매사를 묻는구나.’라고 하였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예이니라.’라고 말했다.” 하였다. 공자가 노() 나라 주공(周公)의 묘에서 제사를 거들 때 매사를 물었던 것은 결코 예를 몰라서가 아니라, 극도로 공경하고 근신하여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시골 사람이 서울 맵시를 내 봤자 결국 촌놈이오. 비하자면 술 취한 사람이 아무리 정색을 해 봤자 하는 짓이 취한 짓뿐인 것과 같으니, 이걸 꼭 알아야 하지요.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군수(君受)에게 답함

 

 

보내 준 글은 비하자면 몰골도(沒骨圖)와 같소. 착색에 옅고 짙은 것이 있은 연후에야 눈썹과 눈을 분간할 수 있는 거지요.

 

 

[D-001]몰골도(沒骨圖) : 묵필(墨筆)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곧바로 채색한 그림을 말한다.

[D-002]눈썹과 눈 : 글의 요점을 비유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중존(仲存)에게 보냄

 

 

매탕(梅宕)은 반드시 미친병이 발작하고 말 것이니, 그대는 아는지요? 그가 장연(長淵)에 있을 때 일찍이 금사산(金沙山)에 올라 큰 바다가 하늘에 닿을 듯이 파도치는 것을 보고서 스스로 자기 몸이 좁쌀만 한 것을 깨닫자, 갑자기 수심이 생겨서 마침내 탄식하며 말하기를,

 

가령 저 탄환만 한 작은 섬이 여러 해 동안 기근이 든 데다 풍파가 하늘에 닿아서 구호식량마저 보낼 수 없다면 이를 어찌하나? 해적들이 몰래 일어나 바람에 돛을 올리고 침략해 와서 도망할 곳이 없게 된다면 이를 어찌하나? , 고래, 악어, 이무기가 육지를 타고 올라와 알을 까고 사람을 사탕수수 줄기처럼 마구 씹는다면 이를 어찌하나? 바다의 파도가 크게 넘쳐 마을을 갑자기 덮쳐 버린다면 이를 어찌하나? 바닷물이 멀리 옮겨 가 하루아침에 물길이 끊어지고 고립된 섬의 밑부분이 높이 솟구쳐 우뚝이 바닥을 보인다면 이를 어찌하나? 파도가 섬의 밑부분을 갉아먹어 부딪치고 넘치고 하길 오래 하여 흙도 돌도 지탱하기 어려워 물살에 무너지고 만다면 이를 어찌하나?”

하였다지요.

그의 의심과 염려가 이와 같으니 미치지 않고 어쩌겠소. 밤에 그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포복절도하여 손 가는 대로 써 보내는 거요.

 

 

[C-001]중존(仲存) :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의 자이다.

[D-001]매탕(梅宕) : 이덕무의 일호(一號)이다. 이덕무는 1768년 음력 10월 한양에서 황해도 장연(長淵)의 조니진(助泥鎭)까지 다녀온 여행일기인 서해여언(西海旅言)을 썼다. 서해여언 10 12일 조에 조니진에 머물면서 장산곶(長山串)의 사봉(沙峯) 즉 금사산(金沙山)에 올라 대해를 바라보며, 연암이 편지에서 인용한 바와 같은 망상을 했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단 연암은 서해여언 중의 해당 내용을 조금 줄여 인용하였다. 靑莊館全書 卷62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경보(敬甫)에게 보냄

 

 

공교롭고도 묘하구려, 이처럼 한데 만나게 된 인연이여! 도대체 누가 이런 계기를 만들었단 말이오? 그대는 나보다 앞서 나지도 않았고 나는 그대보다 뒤에 나지도 않아 둘 다 한 세상에 태어났으며, 그대는 이면(剺面)하지도 않았고 나는 조제(雕題)하지도 않아 둘 다 한나라에 태어났으며, 그대는 남쪽에 살지 않고 나는 북쪽에 살지 않아 둘 다 한마을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대는 무()를 업으로 삼지 않고 나는 농사를 배우지 않아 똑같이 사문(斯文)에 종사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큰 인연이요 큰 기회(期會)가 아니겠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말에 구차스레 동조하거나 상대가 하는 일에 구차스레 맞추려고 한다면, 이는 차라리 위로 거슬러 올라가 천고(千古)의 옛사람을 벗하거나 백세(百世) 후에도 미혹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소.

 

 

[D-001]이면(剺面) : 칼로 얼굴에 자국을 낸다는 뜻이다. 고대에 흉노(匈奴)나 위구르 등지의 종족들은 큰 우환이나 초상을 당하면 칼로 얼굴에 자국을 내어 그 비통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북쪽 나라에서 태어남을 말한 것이다.

[D-002]조제(雕題) : 칼로 이마 위에 꽃무늬를 새겨 넣는다는 뜻이다. 고대에 남방의 소수민족 사이에 유행했던 풍속으로, 여기에서는 남쪽 나라에서 태어남을 말한 것이다.

[D-003]백세(百世) …… 않는 : 중용장구(中庸章句)  28 장에, 군자의 도는 백세 후에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고 하였다. 이는 군자는 백세 후에 출현할 성인이라도 자신과 동일한 도를 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뜻이지만, 연암의 편지에서는 백세 후에라도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안회(顔回)처럼 누항(陋巷)에 살면서, 그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를 탐구하고 있소이다. 원헌(原憲)은 봉려(蓬廬)에 살면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가난할 뿐이다.”라고 말했지요.

원숭이를 기르는 사람이 도토리를 아침에는 세 개씩 주고 저녁에는 네 개씩 주니, 도토리를 주고서도 원숭이들을 화나게 만들었소. 그리고 맹자는 일국(一國)으로써 팔국(八國)을 굴복시키려는 것을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짓에 비유하였지요.

그대는 나날이 나아가오. 나도 나날이 나아가겠소.

 

 

[D-001]안회(顔回)처럼 …… 있소이다 :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항(陋巷)에서 살게 되면 남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라고 하였다. 또한 술이(述而)에서도 공자는 거친 음식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은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하였다. 아무리 가난한 생활도 그의 즐거움을 변하게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안회나 공자가 무엇을 즐거워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주자(周子)는 이같이 공자와 안회의 즐거움을 말한 대목에서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所樂何事를 깨우치도록 하였고, 정자(程子)도 공자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所樂者何事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연암은 박제가(朴齊家)에게 굶주림을 하소연하며 돈을 꿔 달라고 요청한 편지에서 해학적인 어조로, “공자가 진() · ()에서 겪은 것처럼 곤액이 심하지만, 도를 실천하느라고 그렇게 된 것은 아닐세. 그러나 망령되이 안회의 누항 생활에 비기면서, 그가 즐거워한 바가 무슨 일인지 탐구하고 있네.厄甚陳蔡 非行道而爲然 妄擬陋巷 問所樂而何事라고 하였다. 貞蕤閣文集 卷4 答孔雀館

[D-002]원헌(原憲) …… 말했지요 : 공자의 제자 원헌은 쑥대를 짜서 문을 겨우 만들어 단 가난한 집에 살면서도 정좌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출세한 자공(子貢)이 좋은 옷차림에 거마(車馬)를 타고 원헌을 방문했는데, 허름한 옷차림의 그를 보고는 탄식하며 무슨 병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원헌이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운 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을 병이라 하네. 나는 지금 가난한 것이지 병에 걸린 것은 아니라네.”라고 하였더니 자공이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莊子 讓王

[D-003]원숭이를 …… 만들었소 :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D-004]맹자는 …… 비유하였지요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맹자는 제() 나라 선왕(宣王)이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고 싶어하자, 이를 나무에 올라서 물고기를 구하는 짓에 비유하면서, 천하의 강국 아홉 나라 중의 하나에 불과한 제 나라가 나머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비판하였다.

[D-005]그대는 …… 나아가겠소 :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 저 할미새를 보라, 부지런히 날면서 울어 대지 않는가. 나는 나날이 나아가니, 너도 다달이 나아가라.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면서, 너를 낳아 주신 분들을 욕되게 말아라.題彼脊令 載飛載鳴 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하였다. 이 시는 형제가 각자 나아가는 길이 혹시 다를지라도 부모에게 욕되지 않도록 서로 부지런히 노력하자고 형이 동생을 면려(勉勵)한 시로 풀이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암은 친구 경보(敬甫)를 면려하는 뜻으로 이 시의 한 구절을 변형하여 인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심재(遠心齋)에게 보냄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의 집에 속백호통(續白虎通)이 있는데 한() 나라 반표(班彪)가 짓고 진() 나라 최표(崔豹)가 주석을 내고 명() 나라 당인(唐寅)이 평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기서(奇書)라 여기고 소매 속에 넣고 돌아와 등잔 밑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혜풍 자신이 범에 대한 얘기를 모아서 한번 웃을 자료로 삼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나는 참으로 머리가 둔하다 하겠소. 당인(唐寅)의 자가 백호(伯虎)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소. 그렇기는 하지만, 한번 웃음거리로 읽기에는 족할 것이니, 보고 나서 바로 돌려주기 바라오.

 

 

[D-001]당인(唐寅) …… 것이었소 : 백호통(白虎通)은 한() 나라 때 반고(班固)가 편찬한 책으로, 백호관(白虎觀)에서 오경(五經)에 관해 논의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유득공이 속백호통을 반고의 아버지인 반표(班彪)가 편찬하고, 고금주(古今注)의 저자 최표(崔豹)가 주석을 냈다고 꾸며 댄 것은, 그들의 이름에 각각 작은 범 표() , 표범 표() 자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인(唐寅)이 평했다고 꾸며 댄 것은 그의 자가 백호(伯虎)이기 때문이었는데, 그 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초책(楚幘)에게 보냄

 

 

그대는 행여 신령한 지각과 민첩한 깨달음이 있다 하여 남에게 교만하거나 다른 생물을 업신여기지 말아 주오. 저들에게 만약 약간의 신령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으며, 만약 저들에게 신령한 지각이 없다면 교만하고 업신여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우리들은 냄새나는 가죽부대 속에 몇 개의 문자를 지니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 불과할 따름이오. 그러니 저 나무에서 매미가 울음 울고 땅 구멍에서 지렁이가 울음 우는 것도 역시 시를 읊고 책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성백(成伯)에게 보냄

 

 

 

문 앞의 빚쟁이는 기러기처럼 줄 서 있고 / 門前債客鴈行立

방 안의 취한 놈들 고기 꿰미마냥 잠을 자네 / 屋裡醉人魚貫眠

 

이 시는 당() 나라 때 큰 호걸 사나이가 지은 시입니다. 지금 나는 찬 방에 외로이 지내면서 냉담한 품은 마치 선()에 든 중과 같은데, 다만 문 앞에 기러기처럼 늘어선 놈들 두 눈깔이 너무도 가증스럽소.

매양 비굴하게 말해야 할 때면 도리어 등() · ()의 대부를 생각할 뿐입니다.

 

 

[C-001]성백(成伯) : 서중수(徐重修 : 1734~1812)의 자이다. 서중수는 연암의 둘째 누님의 남편으로 진사 급제 후 강화부 경력(江華府經歷)을 지냈다.

[D-001]() 나라 …… 사나이 : 당 나라 때의 시인인 이파(李播)를 가리킨다. 이파는 원화(元和 : 806~820)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한 인물로서, 유우석(劉禹錫)과 백거이(白居易)로부터 칭송을 받을 정도로 시를 잘 지었다고 한다. 위에 인용된 시는 그의 대표적인 시 현지(見志)’의 일부분으로서 그 전문은 작년에 산 거문고값 아직 내지 않았고, 올해 산 술값도 돌려주지 않으니, 문 앞의 빚쟁이는 기러기처럼 줄 서 있고, 방안의 취한 놈들 고기 꿰미마냥 잠을 자네.去歲買琴不與價, 今年沽酒未還錢, 門前債主雁行立, 屋裡醉人魚貫眠이다. 唐詩紀事 卷47》 《靑莊館全書 卷53 耳目口心書6

[D-002]() · ()의 대부 : 논어(論語) 헌문(憲問)에서 공자가, “맹공작(孟公綽)은 조() 나라나 위() 나라의 가로(家老)가 되기에는 충분하지만 등() 나라나 설() 나라의 대부(大夫)는 될 수 없다.” 하였는데, 이는 맹공작의 인물됨이 청렴하고 욕심이 없기는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가 부족한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등 나라나 설 나라는 약소국이라 그 나라의 대부가 되면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고생이 막심하다. 연암은 가난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무능한 자신을 그에다 견주어 탄식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나는 나이 스무 살 되던 때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元朝對鏡라는 시를 지었지요.

 

 

두어 올 검은 수염 갑자기 돋았으나 / 忽然添得數莖鬚

육척의 몸은 전혀 커진 것이 아니네 / 全不加長六尺軀

거울 속의 얼굴은 해를 따라 달라져도 / 鏡裡容顔隨歲異

철모르는 생각은 지난해 나 그대로 / 穉心猶自去年吾

 

이 시는 대개 턱밑에 드문드문 난 짧은 수염을 처음 보고서 기뻐서 지은 것이라오. 그 뒤 6년이 지나 북한산에서 글을 읽는데 납창(蠟窓 밀랍 종이를 바른 창)의 아침 햇살에 거울을 마주하고 이리저리 돌아보니 두 귀밑에 몇 올의 은실이 비치는 것이 아니겠소. 스스로 기쁨을 가누지 못하여 시()의 재료를 더 얻었다 생각하고 아까워서 뽑아 버리지 않았지요. 지금 다시 5년이 지나니 앞에서 이른바 시의 재료라는 것은 어지러이 얼크러지고, 턱밑에 드문드문 났던 것은 뻣세기가 생선의 아가미뼈 같으니, 연소한 시절의 철모르던 생각을 회상하면 저도 몰래 부끄러워 웃게 됩니다. 만약 진작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아무리 새 시 몇 백 편을 얻는다 해도, 어찌 스스로 기뻐하면서 남이 알지 못할까 걱정했겠소.

우리들이 만약 말을 타고 문을 나서려고 한다면 용문(龍門)에 오르기보다 어려우니 어느 때에 서로 만날 수 있겠소? 생각이 날 때 즉시 가야 하지만, 단지 지독한 가뭄이 돌을 녹이고 바람 먼지가 얼굴을 덮칠 뿐 아니라, 귀인(貴人)은 더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애쓰고 있고 시생(侍生)은 하마(下馬)를 해야 하니 이것이 난감하외다. 이를 어찌하겠소.

 

 

[D-001]설날 …… 보며 : 이 시는 연암집 4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에 수록되어 있다.

[D-002]지금 …… 지나니 : 이로 미루어 이 편지가 연암의 나이 31세 때인 1767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D-003]용문(龍門) …… 어려우니 : 황하(黃河)의 잉어가 급류를 거슬러 용문에 오르면 용으로 변한다고 해서, 과거에 급제하거나 입신출세하는 것을 등룡(登龍)이라 한다.

[D-004]귀인(貴人) …… 있고 : 귀인은 성백(成伯)을 가리킨다. 원문은 貴人喝扇으로 되어 있는데, 선갈(扇喝)은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을 해 준다는 뜻으로, 덕정(德政)을 찬양할 때 쓰는 말이다. () 나라 무왕(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보고 손수 부축하여 부채질을 해 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淮南子 人間訓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종형(從兄)에게 올림

 

 

사람들이 심한 더위와 모진 추위를 만나면 그에 대처하는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 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하고, 화롯불을 쪼이거나 털배자를 껴입어도 한기(寒氣)를 물리치지 못하면 더욱 떨리기만 하는 것이니, 이것저것 모두가 독서에 착심(着心)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요컨대 자기 가슴속에서 추위와 더위를 일으키지 않아야 하겠지요.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른바 이광(李廣)은 운명이 기구하여 편장(偏將)과 비장(裨將)들도 다 후()에 봉()해졌거늘 홀로 그리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베옷 바람으로 차가운 날씨에 옷자락을 끌고 어느 왕공(王公)의 문하를 쫓아다녔겠습니까?

찾으시는 문편(文編 책으로 엮은 글)을 삼가 받들어 올리기는 합니다만, 제왕(齊王)의 문 앞에서 거문고를 잡고 있는 격이어서 재주를 파는 방법을 모른다는 비웃음을 살 뿐이요, () 나라 궁궐에 옥()을 바치는 격이어서 발뒤축이 잘려도 후회하지 않을는지 두렵습니다.

 

 

[D-001]이광(李廣)은 운명이 기구하여 : () 나라 무제(武帝) 때 이광은 자원하여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의 휘하에서 흉노(匈奴) 정벌에 종군했으나, 이광이 늙었다고 여긴 무제는 위청에게 이광은 운명이 기구하니 선우(單于)와 대적하지 못하게 하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漢書 卷54 李廣傳

[D-002]제왕(齊王) ……  : () 나라 왕이 피리를 좋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제 나라에서 벼슬을 얻기 위해 거문고를 들고 가서 제왕의 문 앞에서 3년 동안 서 있었으나 들어가 보지도 못하자, 밖에서 크게 소리치기를, “내가 거문고를 연주하면 귀신도 춤을 추게 할 수가 있으며 헌원씨(軒轅氏)의 음률에도 합치가 됩니다.” 하였다. 그러자 문객이 나와 꾸짖기를, “왕께서는 피리를 좋아하신다. 네가 거문고를 아무리 잘 연주한다 한들 왕께서 좋아하지 않으시는 것을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한유(韓愈)는 말하기를, “이는 거문고는 잘 타지만 제 나라에 벼슬을 구하는 것은 잘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문체가 당시의 유행에 맞지 않는 것을 그에 비기어 탄식하였다. 韓昌黎文集 卷18 答陳商書

[D-003]() 나라 ……  : 변화(卞和)가 직경이 한 자나 되는 박옥을 얻어 초 나라 여왕(厲王)과 무왕(武王) 두 임금에게 바쳤으나 옥을 감정하는 사람이 보고 돌이라 하여 두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 후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는 박옥을 안고 사흘 밤낮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문왕이 이 사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발이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게 아니라 보배로운 옥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미치광이라 하니, 이 때문에 내가 슬피 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옥공(玉工)을 시켜 박옥을 다듬게 하여 마침내 보옥을 얻고 이를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이름하였다. 韓非子 卷4 和氏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대호(大瓠)에게 답함

 

 

보내 주신 원관루부(遠觀樓賦)는 종횡무진 거침없는 표현이 지나쳐 글제의 뜻을 고려하지 않았더군요. 비하자면 초상화를 그릴 때 본래의 모습과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어도 아무개의 초상화라고 제목을 붙여 놓지 않는다면 필경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도 오히려 불가(不可)하거늘, 더 나아가 녹야당(綠野堂) 안의 사람을 그리면서 그 모습을 고쳐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선명하게 그려 놓는다면, 비록 걸어 놓고 보기에는 좋지만 배도(裴度)나 곽광(霍光)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C-001]대호(大瓠) : 누구의 호인지 알 수 없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호를 따왔다. 혜자(惠子)가 위() 나라 왕이 준 대호(大瓠 : 큰 조롱박)의 씨앗을 심었더니 그 열매가 너무 커서 쓸모가 없어 부수어 버렸다고 하자, 장자(莊子)는 그것으로써 대준(大樽 : 요주腰舟)을 만들어 강호(江湖)에 떠서 노니는 데 쓰면 되지 않느냐고 공박하였다.

[D-001]녹야당(綠野堂) …… 그려 놓는다면 : 녹야당 안의 사람은 당 나라 때의 재상인 배도(裴度 : 756~839)를 가리킨다. 배도는 벼슬에서 은퇴하고 낙양(洛陽)으로 물러나 녹야당이란 별장을 짓고 당대의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과 교유하였다 한다. 그리고 피부가 하얗고 눈썹이 선명한 것은 한 나라 때 대장군을 지낸 곽광(霍光 : ?~기원전68)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한서(漢書)에 의하면, 곽광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치밀하며, 키가 7 3촌에 하얀 피부와 선명한 눈썹, 멋진 수염을 지녔다고 한다. 新唐書 卷173 裴度傳》 《漢書 卷68 霍光傳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남에게 청하는 것과 남에게 주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싫으냐 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청하는 것이 싫다 할 것이오. 만약 남에게 주는 자의 마음이 실로 남에게 청하는 자의 마음만큼이나 싫다면, 사람치고 남에게 주는 자가 없으리다. 그런데 지금 나는 청하지 않고서도 매우 후하게 받았으니, 그야말로 그대는 남에게 주는 것을 즐기는 분이 아니겠소.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은 반드시 보응이 있고, 침착하고 조용한 자는 반드시 수양이 있고, 너그럽고 후한 자는 반드시 복이 있고, 부지런하고 검소한 자는 반드시 이룸이 있다.” 했는데, 이는 감경(甘京)의 말이지요. 그의 스승 정산(程山)은 여기에다 네 가지 말을 더했는데, “근엄하고 공경한 자는 반드시 실수가 없고, 청렴하고 근신한 자는 반드시 허물이 없고, 자상하고 신중한 자는 반드시 뉘우침이 없고, 겸손하고 화순한 자는 반드시 욕보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이 두 사람의 말을 외우고 다녔더니, 이장(李丈)께서 말씀하기를,

 

어찌 기필할 수 있으리오만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할 따름이다.”

하였지요. 지금 무필재기(無必齋記)를 보니, 성인(聖人 공자(孔子))에게 사심(私心)이 없다는 걸 꿰뚫어 보았다 하겠소.

 

 

[D-001]감경(甘京) : 1622~? 명말 청초(明末淸初)의 학자로 호는 건재(健齋)이며, 사문천(謝文洊)의 제자이다.

[D-002]정산(程山) : 명말 청초의 학자인 사문천(謝文洊)을 가리킨다. 정산(程山)은 그의 호이다. 초기에는 왕양명(王陽明)의 학문을 연구하다 40세 이후에는 정주(程朱)의 학문으로 전환하였고 정산학사(程山學舍)를 세워 학문에 매진하였다.

[D-003]이장(李丈) :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을 가리킨다. 과정록 초고본 권4에 연암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필재기를 논하며 이장의 말씀(李丈語)’이라 일컬은 조목은 바로 장인 이보천의 말씀이라고 밝혔다.

[D-004]무필재기(無必齋記) …… 하겠소 : 논어 자한(子罕) 공자는 네 가지를 끊으셨다. 억측하지 않고, 기필하지 않으며, 고집하지 않고, 아집을 부리지 않았다.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하였다. ‘毋必 無必과 같은 말로, 반드시 이루려고 무리하지 않음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담헌(湛軒)에게 사과함

 

 

어젯밤 달이 밝기로 비생(斐生)을 찾아갔다가 그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을 지키던 자가 말하기를,

 

키 크고 수염 좋은 손님이 노랑말을 타고 와서 벽에다 글을 써 놓고 갔습니다.”

하기에, 촛불을 비춰 보니 바로 그대의 필치였소. 안타깝게도 손님이 왔다고 알려 주는 학()이 없기에 그만 그대에게 문에다 ()’ 자를 남기게 하였으니, 섭섭하고도 송구하구려. 이제부터서는 달 밝은 저녁이면 당분간 밖에 감히 나가지 않을 거요.

 

 

[C-001]담헌(湛軒) : 홍대용(洪大容)의 호이다.

[D-001]손님이 …… () : () 나라의 은사(隱士)로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한 임포(林逋)는 학 두 마리를 길렀는데 손님이 오면 그 학이 손님이 온 것을 알렸다고 한다. 宋詩鈔 卷13 林逋和靖詩鈔序

[D-002]문에다 …… 하였으니 : () 나라 때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친하여 매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갔다. 어느 날 여안이 혜강을 찾아갔으나 마침 혜강은 집에 없고 그의 형 혜희(嵇喜)가 문을 나와 맞이하자 여안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위에다 ()’ 자를 쓰고는 가 버렸다. 혜강이 돌아와서 그것을 보고 범조(凡鳥)’  평범한 새로 파자(破字)하여 읽었다. 즉 혜희는 평범한 인물이므로 함께 사귈 만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누구를 찾아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韻府群玉 卷19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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