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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8권 별집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1 자서(自序)
2 마장전(馬駔傳)
3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4 민옹전(閔翁傳)
5 광문자전(廣文者傳)
6 양반전(兩班傳)
7 김신선전(金神仙傳)
8 우상전(虞裳傳)
9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10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자서(自序)
오륜 끝에 벗이 놓인 것은 / 友居倫季
보다 덜 중시해서가 아니라 / 匪厥疎卑
마치 오행 중의 흙이 / 如土於行
네 철에 다 왕성한 것과 같다네 / 寄王四時
친(親)과 의(義)와 별(別)과 서(序)에 / 親義別敍
신(信) 아니면 어찌하리 / 非信奚爲
상도(常道)가 정상적이지 못하면 / 常若不常
벗이 이를 시정하나니 / 友迺正之
그러기에 맨 뒤에 있어 / 所以居後
이들을 후방에서 통제하네 / 迺殿統斯
세 광인이 서로 벗하며 / 三狂相友
세상 피해 떠돌면서 / 遯世流離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논하는데 / 論厥讒諂
그들의 얼굴이 비치어 보이는 듯하네 / 若見鬚眉
이에 마장전(馬駔傳)을 짓는다.
선비들이 먹고사는 데에 연연하면 / 士累口腹
온갖 행실 이지러지네 / 百行餒缺
호화롭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해도 / 鼎食鼎烹
그 탐욕 고치지 못하거늘 / 不誡饕餮
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嚴自食糞
하는 일은 더럴망정 입은 깨끗하다네 / 迹穢口潔
이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을 짓는다.
민옹은 사람을 누리같이 여겼고 / 閔翁蝗人
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 學道猶龍
풍자와 골계로써 / 託諷滑稽
제멋대로 세상을 조롱하였으나 / 翫世不恭
벽에 써서 스스로 분발한 것은 / 書壁自憤
게으른 이들을 깨우칠 만하네 / 可警惰慵
이에 민옹전(閔翁傳)을 짓는다.
선비란 바로 천작이요 / 士迺天爵
선비의 마음이 곧 뜻이라네 / 士心爲志
그 뜻은 어떠한가 / 其志如何
권세와 잇속을 멀리하여 / 弗謀勢利
영달해도 선비 본색 안 떠나고 / 達不離士
곤궁해도 선비 본색 잃지 않네 / 窮不失士
이름 절개 닦지 않고 / 不飭名節
가문(家門) 지체(地體) 기화 삼아 / 徒貨門地
조상의 덕만을 판다면 / 酤鬻世德
장사치와 뭐가 다르랴 / 商賈何異
이에 양반전(兩班傳)을 짓는다.
홍기는 대은이라 / 弘基大隱
노니는 데 숨었다오 / 迺隱於遊
세상이야 맑건 흐리건 청정(淸淨)을 잃지 않았으며 / 淸濁無失
남을 해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았네 / 不忮不求
이에 김신선전(金神仙傳)을 짓는다.
광문은 궁한 거지로서 / 廣文窮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聲聞過情
이름나기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 非好名者
형벌을 면치 못하였거든 / 猶不免刑
더구나 이름을 도적질하여 / 矧復盜竊
가짜로써 명성을 다툰 경우리요 / 要假以爭
이에 광문전(廣文傳)을 짓는다.
아름다운 저 우상은 / 孌彼虞裳
옛 문장에 힘을 썼네 / 力古文章
서울에서 사라진 예(禮)를 시골에서 구한다더니 / 禮失求野
생애는 짧아도 그 이름 영원하리 / 亨短流長
이에 우상전(虞裳傳)을 짓는다.
세상이 말세로 떨어져 / 世降衰季
허위만을 숭상하고 꾸미니 / 崇飾虛僞
시를 읊으면서 무덤을 도굴하는 / 詩發含珠
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愿賊亂紫
은자인 체하며 빠른 출세를 노리는 짓을 / 逕捷終南
예로부터 추하게 여겼느니 / 從古以醜
이에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을 짓는다.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하면 / 入孝出悌
배우지 않았어도 배웠다 하리니 / 未學謂學
이 말이 비록 지나치지만 / 斯言雖過
거짓 군자를 경계할 만하네 / 可警僞德
공명선(公明宣)은 글 읽지 않았어도 / 明宣不讀
삼 년을 잘 배웠으며 / 三年善學
농부가 밭을 갈며 / 農夫耕野
아내를 손님같이 서로 공경하니 / 賓妻相揖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 目不知書
참된 배움이라 이를 만하네 / 可謂眞學
이에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을 짓는다.
[주D-001]오륜 …… 것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차례를 두고 한 말이다.
[주D-002]마치 …… 같다네 : 오행설(五行說)에서는 봄에는 나무〔木〕의 기운이 왕성하고, 여름에는 불〔火〕의 기운이 왕성하고, 가을에는 쇠〔金〕의 기운이 왕성하고, 겨울에는 물〔水〕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 흙〔土〕만 그에 해당하는 계절이 없는 셈인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계절 90일에서 18일씩을 덜어서 흙에 배당함으로써 오행에 맞추어 각 계절이 모두 72일씩으로 고루 안배될 수 있게 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3]상도(常道)가 …… 시정하나니 : 인의예지(仁義禮智)에다 신(信)을 보태어 오상(五常)이라 한다. 본래 신은 오행설의 유행에 따라 인의예지에 추가된 것이었다.
[주D-004]그들의 …… 듯하네 : 《순자(荀子)》 해폐(解蔽)에, 인심(人心)을 대야의 물에 비유하면서, 대야의 물을 안정시켜 혼탁한 것들을 가라앉히면 “수염과 눈썹을 볼 수 있다〔足以見鬚眉〕”고 했다.
[주D-005]호화롭게 …… 해도 : 정식(鼎食)은 솥들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식사하는 것을 뜻하고, 정팽(鼎烹)은 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주D-006]엄 행수(嚴行首)는 똥으로 먹고살았으니 :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에는 “엄 행수는 제힘으로 먹고살았으니〔嚴自食力〕”로 소개되어 있다.
[주D-007]노자(老子)의 도(道)를 배웠네 :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주D-008]천작(天爵) : 인작(人爵)의 대립 개념으로, 천부적으로 존귀한 존재라는 뜻이다. 《孟子 告子上》
[주D-009]선비의 …… 뜻이라네 : ‘지(志)’라는 글자의 구조를 ‘士’와 ‘心’의 결합으로 풀이한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풀이는 이와 다르다.
[주D-010]대은(大隱) : 은자에도 대은(大隱), 중은(中隱), 소은(小隱)의 등급이 있다. 산중에 숨어 사는 은자가 소은이라면, 진정으로 위대한 은자인 대은은 하층 민중이나 다름없이 시중에서 산다.
[주D-011]남을 …… 않았네 : 《시경(詩經)》 패풍(邶風) 웅치(雄雉)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12]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쳤네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했다.
[주D-013]서울에서 …… 구한다더니 : 《한서(漢書)》 권30 예문지(藝文志) 10에 공자(孔子)가 한 말로 소개되어 있다. 《연암집》 권3 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면서, 양반 사대부들의 글에서 사라진 고문사(古文辭)를 역관(譯官)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였다.
[주D-014]시를 …… 도굴하는 :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시경》의 시를 읊조리면서 무덤을 도굴하여 죽은 사람의 입에 물려진 구슬을 훔치는 타락한 유자(儒者)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D-015]위선자요 사이비 군자라네 :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는 “향원(鄕愿)은 덕을 어지럽히는 도적이다.〔鄕愿 德之賊也〕”라고 했으며, 또한 “자줏빛이 붉은빛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고 했다.
[주D-016]은자인 …… 짓을 : 당 나라 노장용(盧藏用)이 수도 장안(長安)의 종남산에 은거함으로써 고사(高士)라는 명성을 얻어 도리어 재빠르게 출세한 것을 풍자한 말이다.
[주D-017]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학문을 팔아먹는 큰 도적에 관한 전기(傳記)라는 뜻이다.
[주D-018]집에서 …… 하리니 : 《논어》 학이(學而)에서 공자는 “자제들은 집에서 효도하고 밖에서 공손해야 한다.〔弟子入則孝 出則悌〕”고 했으며, 자하(子夏)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호색하는 마음을 바꾸며 …… 벗과 사귈 때 말이 믿음직하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하겠다.〔賢賢易色 ……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고 했다.
[주D-019]공명선(公明宣)은 …… 배웠으며 : 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 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에 그 까닭을 묻자, 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 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 《說苑 反質》
[주D-020]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50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의하면, 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무식한 농민이 한글밖에 모르지만 《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해 실천했다고 한다. 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 부부가 같이 날마다 《소학언해》를 읽었으므로, 그 고을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봉산학자전은 이 사실을 소재로 한 전기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마장전(馬駔傳)
말 거간꾼이나 집주릅이 손뼉을 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는 짓이나, 관중(管仲)과 소진(蘇秦)이 닭 · 개 · 말 · 소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던 일은 신뢰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어렴풋이 헤어지잔 말만 들어도 가락지를 벗어던지고 수건을 찢어 버리고 등잔불을 돌아앉아 벽을 향하여 고개를 떨구고 울먹거리는 것은 믿을 만한 첩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요, 가슴속의 생각을 다 내보이면서 손을 잡고 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친구임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콧잔등〔準〕 - 음은 ‘절(巀)’이다. - 까지 부채로 가리고 좌우로 눈짓을 하는 것은 거간꾼들의 술책이며, 위협적인 말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고 상대가 꺼리는 곳을 건드려 속을 떠보며 강한 상대에겐 협박을 하고 약한 상대는 짓눌러서 동맹한 나라들을 흩어 버리거나 분열된 나라들을 통합하게 하는 것은 패자(覇者)와 유세가들이 이간하고 농락하는 권모술수이다.
옛날에 가슴앓이 하는 이가 있어, 아내를 시켜 약을 달이게 하였는데 그 양이 많았다 적었다 들쑥날쑥하였으므로 노하여 첩을 시켰더니, 그 양이 항상 적당하였다. 그 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창구멍을 뚫고 엿보았더니, 많으면 땅에 버리고 적으면 물을 더 붓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 첩이 양을 적당하게 맞추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귀에 대고 소근거리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요, 남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은 깊은 사귐이 아니요, 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것은 훌륭한 벗이 아니다.
송욱(宋旭), 조탑타(趙闒拖), 장덕홍(張德弘)이 광통교(廣通橋) 위에서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탑타가 말하기를,
“내가 아침에 일어나 바가지를 두드리며 밥을 빌다가 포목전에 들렀더니, 포목을 사려고 가게로 올라온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목을 골라 혀로 핥아 보기도 하고 공중에 비쳐 보기도 하면서 값은 부르지 않고 주인에게 먼저 부르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나중에는 둘 다 포목은 잊어버린 채 포목 장수는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사러 온 사람은 뒷짐을 지고 서성대며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더군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태도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道)는 보지 못했다.”
하였다. 덕홍이 말하기를,
“꼭두각시놀음에 장막을 드리우는 것은 노끈을 당기기 위한 것이지요.”
하니, 송욱이 말하기를,
“너는 사귀는 겉모습만 보았을 뿐 사귀는 도는 보지 못했다. 무릇 군자가 사람을 사귀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법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나이 삼십이 되었어도 벗 하나 없다. 그러나 그 도만은 내 옛적에 들었노라. 팔이 밖으로 펴지지 않는 것은 술잔을 잡았기 때문이지.”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시경(詩經)》에도 본래 그런 말이 있지요.
우는 학이 그늘에 있으니 / 鳴鶴在陰
그 새끼가 화답한다 / 其子和之
내게 좋은 벼슬이 있으니 / 我有好爵
내가 너와 더불어 같이한다 / 吾與爾縻之
하였는데 아마도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하였다. 송욱이 말하기를,
“너만 하면 벗에 대한 도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내가 아까 그 한 가지만을 알려 주었는데, 너는 두 가지를 아는구나. 천하 사람이 붙따르는 것은 형세요, 모두가 차지하려고 도모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이다. 술잔이 입과 더불어 약속한 것도 아니건만, 팔이 저절로 굽혀지는 것은 응당 그럴 수밖에 없는 형세이다. 학과 그 새끼가 울음으로써 서로 화답하는 것은 바로 명예를 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벼슬을 좋아하는 것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붙따르는 자가 많아지면 형세가 갈라지고, 도모하는 자가 여럿이면 명예와 이익이 제 차지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오랫동안 이 세 가지를 말하기를 꺼려 왔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은유적인 말로 네게 알려 주었는데 네가 이 뜻을 알아차렸구나.
너는 남과 더불어 교제할 때, 첫째, 상대방의 기정사실이 된 장점을 칭찬하지 말라. 그러면 상대방이 싫증을 느껴 효과가 없을 것이다. 둘째, 상대방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주지 말라. 장차 행하여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낙담하여 실망하게 될 것이다. 셋째, 사람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남을 제일이라고 일컫지 말라. 제일이란 그 위가 없단 말이니 좌중이 모두 썰렁해지면서 기가 꺾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도 기법이 있다. 첫째, 상대방을 칭찬하려거든 겉으로는 책망하는 것이 좋고, 둘째, 상대방에게 사랑함을 보여 주려거든 짐짓 성난 표정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셋째, 상대방과 친해지려거든 뚫어질 듯 쳐다보다가 부끄러운 듯 돌아서야 하고, 넷째,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꼭 믿게끔 하려거든 의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다려야 한다. 또한 열사(烈士)는 슬픔이 많고 미인은 눈물이 많다. 때문에 영웅이 잘 우는 것은 남을 감동시키자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 기법은 군자가 은밀하게 사용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처세(處世)에 있어 어디에나 통용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였다. 탑타가 덕홍에게 묻기를,
“송 선생님의 말씀은 그 뜻이 너무나 어려워 마치 수수께끼와 같다.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덕홍이 말하기를,
“네까짓 게 어찌 알아? 잘한 일을 가지고 성토하여 책망하면 이보다 더한 칭찬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보니 노여움이 생기는 것이요, 꾸지람을 하는 과정에서 정이 붙는 것이므로 가족에 대해서는 이따금 호되게 다루어도 싫어하지 않는 법이다. 친한 사이일수록 거리를 둔다면 이보다 더 친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미 믿는 사이인데도 오히려 의심을 품게 만든다면 이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어디에 있겠는가.
술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 뭇사람은 다 졸고 있을 때 말없이 서로 바라보다가 그 남은 취기(醉氣)를 타서 슬픈 심사를 자극하면 누구든 뭉클하여 공감하지 않는 자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사귀는 데에는 상대를 이해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즐겁기로는 서로 공감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따라서 편협한 사람의 불만을 풀어 주고 시기심 많은 사람의 원망을 진정시켜 주는 데에는 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나는 사람을 사귈 때 울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울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31년 동안 나라 안을 돌아다녀도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탑타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충(忠)으로써 사귐에 임하고 의(義)로써 벗을 사귀면 어떻겠는가?”
하니, 덕홍이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네 말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비루하구나.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 거냐? 너는 듣거라. 가난한 놈이란 바라는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한없이 의(義)를 사모한다. 왜냐하면 저 아득한 하늘만 봐도 곡식을 내려 주지 않나 기대하고, 남의 기침 소리만 나도 무엇을 주지 않나 고개를 석 자나 빼고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에 재물을 모아 놓은 자는 자신이 인색하단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을 끊자는 것이다. 그리고 천한 자는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심(忠心)을 다하여 어려운 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을 건널 때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지 않는 것은 떨어진 고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수레를 타고 다니는 자가 갖신에 덧신을 껴신는 것은 그래도 진흙이 묻을까 염려해서이다. 신 바닥도 아끼거든 하물며 제 몸일까 보냐? 그러므로 충(忠)이니 의(義)니 하는 것은 빈천한 자에게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부귀한 자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다.”
하였다. 탑타가 발끈하여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내 차라리 세상에 벗이 하나도 없을지언정 군자들과는 사귀지 못하겠다.”
하고서 이에 서로 의관을 찢어 버리고 때묻은 얼굴과 덥수룩한 머리에 새끼줄을 허리에 동여매고 저자에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골계선생(滑稽先生)은 우정론(友情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무를 붙이자면 생선 부레를 녹여서 붙이고, 쇠를 붙이자면 붕사(鵬砂)를 녹여서 붙이고, 사슴이나 말의 가죽을 붙이자면 멥쌀밥〔粳飯〕을 이겨서 붙이는 것보다 단단한 것이 없음을 내 안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사귐에 있어서는 떨어진 틈이란 것이 있다. 연(燕) 나라와 월(越) 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요, 산천(山川)이 가로막고 있어야 틈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무릎을 맞대고 함께 앉아 있다 하여 반드시 밀접한 사이가 아니요, 어깨를 치고 소매를 붙잡는 관계라 하여 반드시 마음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사이에도 틈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상앙(商鞅)이 장황한 말을 늘어놓자 효공(孝公)이 꾸벅꾸벅 졸았고, 범저(范雎)가 성내지 않았다면 채택(蔡澤)이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나와서 상앙을 꾸짖어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었으며, 채택의 말을 전하여 범저가 화를 내도록 만든 사람이 반드시 있었던 것이다. 공자(公子) 조승(趙勝 평원군(平原君))이 소개의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성안후(成安侯 진여(陳餘))와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은 사귐에 있어 조금의 틈도 없이 너무나 절친하게 지냈으므로, 그들 사이에 한번 틈이 생기자 누구도 그들을 위해 사이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중히 여길 것은 틈이 아니고 무엇이며, 두려워할 것도 틈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첨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영합하는 것이요, 참소도 그 틈을 파고들어가 이간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잘 사귀는 이는 먼저 그 틈을 잘 이용하고, 사람을 잘 사귈 줄 모르는 이는 틈을 이용할 줄 모른다.
성격이 강직한 사람은 외골수여서 자신을 굽히고 남에게 나아가지도 않고 우회적으로 말을 하지도 않으며, 한번 말을 꺼냈다가 의견이 합치하지 않으면 남이 이간질하지 않아도 제풀에 막히고 만다.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찍고 또 찍어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어디 있으리.”라고 했으며, “아랫목에 잘 보이기보다는 아궁이에 잘 보여라.”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아첨을 전하는 데에도 방법이 있다. 몸을 정제(整齊)하고 얼굴을 다듬고 말을 얌전스레 하고 명예와 이익에 담담하며 상대와 사귀려는 마음이 없는 척함으로써 저절로 아첨을 하는 것이 상첨(上諂)이다. 다음으로 바른 말을 간곡하게 하여 자신의 속을 드러내 보인 다음 그 틈을 잘 이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는 것이 중첨(中諂)이다. 말굽이 닳도록 조석(朝夕)으로 문안(問安)하며 돗자리가 떨어지도록 뭉개 앉아, 상대방의 입술을 쳐다보며 얼굴빛을 살펴서, 그 사람이 하는 말마다 다 좋다 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마다 다 칭송한다면, 처음 들을 때에야 좋아하겠지만 오래 들으면 도리어 싫증이 난다. 싫증이 나면 비루하게 여기게 되어, 마침내는 자기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이는 하첨(下諂)이다.
관중(管仲)이 제후(諸侯)를 여러 번 규합하였고, 소진(蘇秦)이 육국(六國)을 합종(合縱)시켰으니 천하의 큰 사귐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송욱과 탑타는 길에서 걸식을 하고 덕홍은 저자에서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다니면서도 오히려 말 거간꾼의 술수를 부리지 않았거늘, 하물며 군자로서 글 읽는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주D-001]손뼉을 …… 짓이나 : 맹세할 때 하는 동작들이다. 격장위서(擊掌爲誓)니, 지일서심(指日誓心)이니 하는 성구(成句)들이 있다.
[주D-002]닭 …… 일 : 고대 중국에서 동맹을 맺을 때 천자는 입가에 말이나 소의 피를 바르고, 제후는 개나 돼지의 피를 바르고, 대부 이하는 닭의 피를 바르고 맹세했다.
[주D-003]콧잔등〔準〕 : ‘準’ 자를 콧잔등이란 뜻으로 쓸 때는 ‘절’이라 읽는다.
[주D-004]상대가 …… 떠보며 : 원문은 ‘餂情投忌’이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선비가 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말을 하면, 이는 말로써 속을 떠보는 것이다.〔士未可以言而言 是以言餂之〕”라고 비판하였다. 투기(投忌)는 ‘쥐 잡으려 해도 그릇 깨뜨릴까 봐 꺼려진다.〔投鼠忌器〕’는 말의 준말이다.
[주D-005]송욱(宋旭) : 《연암집》 권7 염재기(念齋記)에 의하면, 송욱은 당시 한양에 실존했던 기인(奇人)이었다.
[주D-006]광통교(廣通橋) : 한양 중부 광통방(廣通坊)에 있던 다리. 광교(廣橋)라고도 한다. 청계천에 놓인 다리 중 가장 큰 다리였다.
[주D-007]구름이 나왔다고 흥얼대고 :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무심하게 산굴에서 나오고〔雲無心以出岫〕”라는 구절이 있다.
[주D-008]벽에 …… 있더군요 : 원문은 ‘壁上觀畵’인데,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서 항우의 군대가 거록(鉅鹿)에서 진(秦) 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다른 제후의 장수들이 성벽 위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던 고사에서 나온 ‘벽상관전(壁上觀戰)’이란 성어의 패러디이다. 역시 무심한 체하는 모양을 표현한 것이다.
[주D-009]팔이 …… 때문이지 :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李德懋)의 《열상방언(洌上方言)》에는 “술잔 잡은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다.〔把盃腕 不外卷〕”라고 소개되었다. 《靑莊館全書 卷62》
[주D-010]우는 …… 같이한다 : 《주역(周易)》 중부괘(中孚卦) 구이(九二)의 효사(爻辭)이다. 따라서 인용상 실수를 범했거나, 아니면 이를 《시경》의 일시(逸詩)로 간주한 듯하다.
[주D-011]가족에 …… 법이다 : 《주역》 가인괘(家人卦) 구삼(九三)의 효사에 “가족을 호되게 다루었으나 엄격함을 뉘우치면 길하니라.〔家人嗃嗃 悔厲 吉〕”라고 하였다.
[주D-012]골계선생(滑稽先生)은 …… 말했다 : 골계선생은 작가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 인물이다. 따라서 우정론 역시 실제로는 작가가 지은 글이다. 골계란 풍자나 궤변(詭辯)을 잘한다는 뜻이니, 《사기》에 골계열전(滑稽列傳)이 있다.
[주D-013]멥쌀밥〔粳飯〕 : 찹쌀밥〔糯飯〕의 오류인 듯하다. 멥쌀은 차지지 않아 풀로 쓰기 어렵다.
[주D-014]상앙(商鞅)이 …… 졸았고 : 상앙이 진(秦) 나라 총신(寵臣)인 경감(景監)을 통해 진 효공을 만났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 제도(帝道)에 대하여 유세하였더니 진 효공이 꾸벅꾸벅 졸았다. 이에 경감이 나와서 상앙을 꾸짖자 다음 만남에서는 왕도(王道)에 대해 말하였으나 이 또한 듣지 않았고, 다음에는 패도(覇道)에 대하여 말하자 차츰 관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강국(强國)에 대하여 말하자 효공이 매우 좋아하였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15]범저(范雎)가 …… 것이다 : 채택(蔡澤)이 진 나라에 들어가 진 소왕(秦昭王)을 볼 목적으로 먼저 사람을 시켜 당시 승상인 범저에게 자신이 진왕을 만나면 승상의 자리를 빼앗게 될 것이라고 하여 범저를 노하게 만듦으로써 범저와 만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이를 통해 진왕을 만났다. 《史記 卷79 范睢蔡澤列傳》
[주D-016]공자(公子) …… 하였다 : 진(秦) 나라 군대가 조(趙)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노중련(魯仲連)이 위(魏) 나라 장수 신원연(新垣衍)을 설득하여 조 나라를 돕도록 하겠노라고 자청했으므로, 공자 조승, 즉 평원군(平原君)이 노중련을 신원연에게 소개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일개 선비인 노중련이 위 나라 장수 신원연을 상대로 유세할 수 있었던 것은 평원군의 소개 덕분이었다는 뜻이지만, 탈문(脫文)이 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생략한 탓인지 문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
[주D-017]성안후(成安侯)와 …… 없었다 : 《사기》 권8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자세히 나온다.
[주D-018]아랫목에 …… 보여라 : 《논어》 팔일(八佾)에 나오는 말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선귤자(蟬橘子)에게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벗이 한 사람 있다. 그는 종본탑(宗本塔) 동쪽에 살면서 날마다 마을 안의 똥을 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지냈는데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그를 엄 행수(嚴行首)라 불렀다. ‘행수’란 막일꾼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에 대한 칭호요, ‘엄’은 그의 성(姓)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묻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벗의 도를 들었는데, ‘벗이란 함께 살지 않는 아내요 핏줄을 같이하지 않은 형제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이란 이같이 소중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이름난 사대부들이 선생님을 따라 그 아랫자리에서 노닐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지만 선생님께서는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엄 행수라는 자는 마을에서 가장 비천한 막일꾼으로서 열악한 곳에 살면서 남들이 치욕으로 여기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데, 선생님께서는 자주 그의 덕(德)을 칭송하여 선생이라 부르는 동시에 장차 그와 교분을 맺고 벗하기를 청할 것같이 하시니 제자로서 심히 부끄럽습니다. 그러하오니 문하에서 떠나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선귤자가 웃으면서,
“앉아라. 내가 너에게 벗을 사귀는 것에 대해 말해 주마. 속담에 ‘의원이 제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 한다.’ 했다. 사람마다 자기가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는 것이 있는데 남들이 몰라주면, 답답해하면서 자신의 허물에 대해 듣고 싶은 체한다. 그럴 때 예찬만 늘어놓는다면 아첨에 가까워 무미건조하게 되고, 단점만 늘어놓는다면 잘못을 파헤치는 것 같아 무정하게 보인다. 따라서 잘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렁뚱땅 변죽만 울리고 제대로 지적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크게 책망하더라도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니, 상대방의 꺼림칙한 곳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비슷한 물건을 늘어놓고 숨긴 것을 알아맞히듯이 자신이 잘한다고 여기는 것을 은근슬쩍 언급한다면, 마치 가려운 데를 긁어 준 것처럼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다. 가려운 데를 긁어 주는 것에도 방법이 있다. 등을 토닥일 때는 겨드랑이에 가까이 가지 말고 가슴을 어루만질 때는 목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뜬구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 속에 결국 자신에 대한 칭찬이 들어 있다면, 뛸 듯이 기뻐하며 자신을 알아준다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벗을 사귄다면 좋겠느냐?”
하였다. 자목은 귀를 막고 뒷걸음질치며 말하기를,
“지금 선생님께서는 시정잡배나 하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지고 저를 가르치려 하시는군요.”
하니, 선귤자가 말하기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네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전자에는 있지 않고 후자에만 있구나. 무릇 시장에서는 이해관계로 사람을 사귀고 면전에서는 아첨으로 사람을 사귀지. 따라서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누구나 멀어지게 되고,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다 하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누구나 친하게 되기 마련이지. 그러므로 이해관계로 사귀게 되면 지속되기 어렵고, 아첨으로 사귀어도 오래갈 수 없다네. 훌륭한 사귐은 꼭 얼굴을 마주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훌륭한 벗은 꼭 가까이 두고 지낼 필요가 없지.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하면 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도의(道義)로 사귀는 것일세. 위로 천고(千古)의 옛사람과 벗해도 먼 것이 아니요,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사귀어도 먼 것이 아니라네.
저 엄 행수란 사람은 일찍이 나에게 알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항상 그를 예찬하고 싶어 못 견뎌했지. 그는 밥을 먹을 때는 끼니마다 착실히 먹고 길을 걸을 때는 조심스레 걷고 졸음이 오면 쿨쿨 자고 웃을 때는 껄껄 웃고 그냥 가만히 있을 때는 마치 바보처럼 보인다네. 흙벽을 쌓아 풀로 덮은 움막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고 들어갈 때는 새우등을 하고 들어가고 잘 때는 개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지만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어나 삼태기를 지고 마을로 들어와 뒷간을 청소하지. 9월에 서리가 내리고 10월에 엷은 얼음이 얼 때쯤이면 뒷간에 말라붙은 사람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 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주옥인 양 긁어 가도 염치에 손상이 가지 않고, 그 이익을 독차지하여도 의로움에는 해가 되지 않으며, 욕심을 부려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해도 남들이 양보심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네. 그는 손바닥에 침을 발라 삽을 잡고는 새가 모이를 쪼아 먹듯 꾸부정히 허리를 구부려 일에만 열중할 뿐, 아무리 화려한 미관이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좋은 풍악이라도 관심을 두는 법이 없지. 부귀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바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지. 따라서 그에 대해 예찬을 한다고 해서 더 영예로울 것도 없으며 헐뜯는다 해서 욕될 것도 없다네.
왕십리(枉十里)의 무와 살곶이〔箭串〕의 순무, 석교(石郊)의 가지 · 오이 · 수박 · 호박이며 연희궁(延禧宮)의 고추 · 마늘 · 부추 · 파 · 염교며 청파(靑坡)의 미나리와 이태인(利泰仁)의 토란들은 상상전(上上田)에 심는데, 모두 엄씨의 똥을 가져다 써야 땅이 비옥해지고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으며, 그 수입이 1년에 6000전(錢 600냥)이나 된다네. 하지만 그는 아침에 밥 한 사발이면 의기가 흡족해지고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한 사발 먹을 뿐이지. 남들이 고기를 먹으라고 권하였더니 목구멍에 넘어가면 푸성귀나 고기나 배를 채우기는 마찬가지인데 맛을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대꾸하고, 반반한 옷이나 좀 입으라고 권하였더니 넓은 소매를 입으면 몸에 익숙하지 않고 새 옷을 입으면 더러운 흙을 짊어질 수 없다고 하더군. 해마다 정월 초하루 아침이나 되어야 비로소 의관을 갖추어 입고 이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세배를 하는데 세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곧바로 헌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삼태기를 메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네. 엄 행수와 같은 이는 아마도 ‘자신의 덕을 더러움으로 감추고 세속에 숨어 사는 대은(大隱)’이라 할 수 있겠지.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부귀를 타고나면 부귀하게 지내고 빈천을 타고나면 빈천한 대로 지낸다.’ 하였으니, 타고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말한다네. 《시경(詩經)》에,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공소(公所)에 있으니, 진실로 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夙夜在公 寔命不同〕’ 하였으니, 명이란 그 사람의 분수를 말하는 것이네. 하늘이 만백성을 낼 때 정해진 분수가 있으니 명을 타고난 이상 무슨 원망할 까닭이 있으랴. 그런데 새우젓을 먹게 되면 달걀이 먹고 싶고 갈포옷을 입게 되면 모시옷이 입고 싶어지게 마련이니, 천하가 이로부터 크게 어지러워져 백성들이 들고일어나고 농토가 황폐하게 되는 것이지. 진승(陳勝) · 오광(吳廣) · 항적(項籍)의 무리들은 그 뜻이 어찌 농사일에 안주할 인물들이었겠는가. 《주역》에 이르기를, ‘짐을 짊어져야 할 사람이 수레를 탔으니 도적을 불러들일 것이다.’ 한 것도 이를 두고 말한 것이네. 그러므로 의리에 맞지 않으면 만종(萬鍾)의 녹을 준다 하여도 불결한 것이요 아무런 노력 없이 재물을 모으면 막대한 부를 축적하더라도 그 이름에 썩는 냄새가 나게 될 걸세. 그런 까닭에 사람이 죽었을 때 입속에다 구슬을 넣어 주어 그 사람이 깨끗하게 살았음을 나타내 주는 걸세.
엄 행수는 지저분한 똥을 날라다 주고 먹고살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할 수 있겠지만 그가 먹고사는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지극히 지저분하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다 할 것이니, 그 뜻을 미루어 보면 비록 만종의 녹을 준다 해도 그가 어떻게 처신할는지는 알 만하다네.
이상을 통해 나는 깨끗한 가운데서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서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네. 나는 먹고사는 일에 아주 어려운 처지를 당하면 언제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데, 엄 행수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일이 없었지. 진실로 마음속에 좀도둑질할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엄 행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지. 이를 더 확대시켜 나간다면 성인(聖人)의 경지에도 이를 것일세.
선비로서 곤궁하게 산다고 하여 얼굴에까지 그 티를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요, 출세했다 하여 몸짓에까지 나타내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니, 엄 행수와 비교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는 거의 드물 걸세.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하여 스승으로 모신다고 한 것이네. 어찌 감히 벗하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엄 행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이라 부르는 것일세.”
하였다.
[주D-001]선귤자(蟬橘子) : 이덕무의 호(號) 중의 하나이다.
[주D-002]종본탑(宗本塔) : 미상(未詳)이다. 현재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지(圓覺寺址)의 석탑〔白塔〕을 가리킨다. 박제가(朴齊家)의 《정유문집(貞蕤文集)》 권1 백탑청연집서(白塔淸緣集序)에 의하면, 한때 그 부근에 연암과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이 살았다고 한다.
[주D-003]벗이란 …… 같다 : 윤광심(尹光心)의 《병세집(幷世集)》에 수록된 이덕무의 적언찬(適言讚) 찬지칠(讚之七) 간유(簡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4]열악한 곳 : 원문은 ‘下流’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그러므로 군자는 하류(下流)에 거처하기를 싫어한다. 천하의 더러운 것이 모두 모여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주D-005]살곶이〔箭串〕 : 현재 서울 성동구에 있는 뚝섬의 옛 이름 중의 하나이다.
[주D-006]상상전(上上田) : 토지의 질에 따라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토지를 상 · 중 · 하로 나누고, 각각을 다시 상 · 중 · 하로 나누어 모두 9등급을 두었다. 상상전은 최상급의 토지를 말한다.
[주D-007]자신의 …… 대은(大隱) : 한(漢) 나라 때의 동방삭(東方朔)이나 위진(魏晉) 때의 죽림칠현(竹林七賢)과 같은 인물을 가리킨다.
[주D-008]이른 …… 때문이라 : 《시경》 소남(召南) 소성(小星)의 한 구절이다.
[주D-009]진승(陳勝) · 오광(吳廣) · 항적(項籍) : 진승과 오광은 진(秦) 나라 때 함께 농민 반란을 일으켰다. 항적은 곧 항우(項羽)이니, 그의 자(字)가 우(羽)이다.
[주D-010]짐을 …… 것이다 : 《주역》 해괘(解卦) 육삼(六三)의 효사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민옹전(閔翁傳)
민옹이란 이는 남양(南陽) 사람이다. 무신년 난리에 출정하여 그 공으로 첨사(僉使)가 되었는데, 그 뒤로 집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옹(翁)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총명하였다. 유독 옛사람들의 뛰어난 절개와 위대한 자취를 사모하여 강개(慷慨)히 분발하였으며, 그들의 전기를 하나씩 읽을 때마다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7세 때에는 벽에다 큰 글씨로 “항탁(項槖)이 스승이 되었다.”라고 썼으며, 12세 때에는 “감라(甘羅)가 장수가 되었다.”고 하고, 13세 때에는 “외황(外黃) 고을 아이가 유세를 하였다.”고 썼으며, 18세 때에는 더욱 쓰기를 “곽거병(霍去病)이 기련산(祈連山)에 나갔다.”고 했으며, 24세 때에는 “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고 썼다. 40세가 되었으나 더욱더 이름을 날린 바가 없었기에 마침내 “맹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라고 크게 써 놓았다. 이렇게 해마다 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벽이 다 온통 새까맣게 되었다. 70세가 되자 그의 아내가 조롱하기를,
“영감, 금년에는 까마귀를 그리려우?”
하니, 옹이 기뻐하며,
“당신은 빨리 먹을 가시오.”
하고, 마침내 크게 쓰기를,
“범증(范增)이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하니, 그 아내가 더욱 화를 내면서,
“계책이 아무리 기발한들 장차 언제 쓰시려우?”
하니, 옹이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강 태공(姜太公)은 80살에 매가 날아오르듯이 용맹하였으니 지금 나는 그에 비하면 젊고 어린 아우뻘이 아니오?”
하였다.
계유 · 갑술년 간, 내 나이 17, 8세 즈음 오랜 병으로 몸이 지쳐 있을 때 집에 있으면서 노래나 서화, 옛 칼, 거문고, 이기(彝器)와 여러 잡물들에 취미를 붙이고, 더욱더 손님을 불러들여 우스갯소리나 옛이야기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나에게 민옹을 소개하면서, 그는 기이한 선비로서 노래를 잘하며 담론도 잘하는데 거침없고 기묘하여 듣는 사람마다 후련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하기에,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함께 와 달라고 청하였다.
옹이 찾아왔을 때 내가 마침 사람들과 풍악을 벌이고 있었는데, 옹은 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물끄러미 피리 부는 자를 보고 있더니 별안간 그의 따귀를 갈기며 크게 꾸짖기를,
“주인은 즐거워하는데 너는 왜 성을 내느냐?”
하였다. 내가 놀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옹이 말하기를,
“그놈이 눈을 부라리고 기를 쓰니 성낸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므로, 나는 크게 웃고 말았다. 옹이 말하기를,
“어찌 피리 부는 놈만 성낼 뿐이겠는가. 젓대 부는 놈은 얼굴을 돌리고 울 듯이 하고 있고 장구 치는 놈은 시름하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며 온 좌중은 입을 다문 채 크게 두려워하는 듯이 앉아 있고, 하인들은 마음대로 웃고 떠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음악이 즐거울 리 없지.”
하기에, 나는 당장에 풍악을 걷어치우고 옹을 자리에 맞아들였다. 옹은 매우 작은 키에 하얀 눈썹이 눈을 내리덮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유신(有信)이며 나이는 73세라고 소개하고는 이내 나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병인가? 머리가 아픈가?”
“아닙니다.”
“배가 아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병이 든 게 아니구먼.”
그리고는 드디어 문을 열고 들창을 걷어 올리니, 바람이 솔솔 들어와 마음속이 예전과는 아주 다르게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래서 옹에게 말하기를,
“저는 단지 밥을 잘 먹지 못하고 밤에 잠을 잘 못 자는 것이 병입니다.”
했더니, 옹이 일어나서 나에게 축하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며,
“옹은 어찌하여 저에게 축하를 하는 것입니까?”
하니, 옹이 말하기를,
“그대는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밥을 잘 먹지 못하고 있으니 재산이 남아돌 게고, 잠을 못 잔다면 밤까지 겸해 사는 것이니 남보다 갑절 사는 턱이 아닌가. 재산이 남아돌고 남보다 갑절 살면 오복(五福) 중에 수(壽)와 부(富) 두 가지는 이미 갖춘 셈이지.”
하였다. 잠시 후 밥상을 들여왔다. 내가 신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리고 음식을 들지 못한 채 이것저것 집어서 냄새만 맡고 있었더니, 옹이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일어나 가려고 하였다. 내가 놀라 옹에게 왜 화를 내고 떠나려 하는지 물었더니, 옹이 대답하기를,
“그대가 손님을 초대해 놓고는 식사를 차려 내오지 않고 혼자만 먼저 먹으려 드니 예(禮)가 아닐세.”
하였다. 내가 사과를 하고는 옹을 주저앉히고 빨리 식사를 차려 오게 하였더니 옹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팔뚝을 걷어 올린 다음 수저를 시원스레 놀려 먹어 대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군침이 돌고 막혔던 가슴과 코가 트이면서 예전과 같이 밥을 먹게 되었다.
밤이 되자 옹은 눈을 내리감고 단정히 앉아 있었다. 내가 얘기 좀 하자고 하였으나, 옹은 더욱 입을 다문 채 말을 하지 않아 나는 꽤나 무료하였다. 이렇게 한참이 지나자 옹이 갑자기 일어나서 촛불을 돋우면서 하는 말이,
“내가 어릴 적에는 눈만 스쳐도 바로 외워 버렸는데 지금은 늙었소그려. 그대와 약속하여 평소에 못 보던 글을 두세 번 눈으로 읽어 보고 나서 외우기로 하세. 만약 한 자라도 틀리게 되면 약속대로 벌을 받기로 하세나.”
하기에, 나는 그가 늙었음을 업수이여겨,
“그렇게 합시다.”
하고서, 곧바로 서가 위에 놓인 《주례(周禮)》를 뽑아 들었다. 그래서 옹은 고공기(考工記)를 집어 들고 나는 춘관(春官)을 집어 들었는데 조금 지나자 옹이,
“나는 벌써 다 외웠네.”
하고 외쳤다. 그때 나는 한 번도 다 내리 읽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놀라서 옹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였더니, 옹이 자꾸만 말을 걸고 방해를 하여 나는 더욱 외울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잠이 와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다음날 날이 밝자 옹에게 묻기를,
“어젯밤에 외운 것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옹이 웃으며,
“나는 처음부터 아예 외우지를 않았다네.”
하였다.
하루는 옹과 더불어 밤에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옹이 좌객들을 조롱하기도 하고 매도하기도 하였으나 아무도 막아 낼 사람이 없었다.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옹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여 옹에게 물었다.
“옹은 귀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귀신이 어디 있습니까?”
옹이 눈을 부릅뜨고 물끄러미 둘러보다가 손 하나가 등잔 뒤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크게 외치면서,
“귀신이 저기 있지 않소.”
하였다. 그 손이 노하여 따져 들자,
“밝은 데 있는 것은 사람이요, 껌껌한 데 있는 것은 귀신인데, 지금 어두운 데 앉아 밝은 데를 보고 제 몸을 감추고 사람들을 엿보고 있으니, 귀신이 아니고 무엇이오.”
하니, 온 좌중이 크게 웃었다. 손이 또 물었다.
“옹은 신선을 본 일이 있소?”
“보았지.”
“신선이 어디에 있던가요?”
“가난뱅이가 모두 신선이지. 부자들은 늘 세상에 애착을 가지지만 가난뱅이는 늘 세상에 싫증을 느끼거든. 세상에 싫증을 느끼는 사람이 신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옹은 나이 많이 먹은 사람을 보았소?”
“보았지. 내가 아침나절 숲 속에 갔더니 두꺼비와 토끼가 서로 나이가 많다고 다투고 있더군. 토끼가 두꺼비에게 하는 말이 ‘나는 팽조(彭祖)와 동갑이니 너는 나보다 늦게 태어났다.’ 하니, 두꺼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울더군. 토끼가 놀라 ‘너는 왜 그처럼 슬퍼하느냐?’ 하고 물으니, 두꺼비가 말했지. ‘나는 동쪽 이웃집의 어린애와 동갑인데 그 어린애가 5살 먹어서 글을 배우게 되었지. 그 애는 목덕(木德)으로 태어나서 섭제격(攝提格 인년(寅年))으로 왕조의 기년(紀年)을 시작한 이래 여러 왕대를 거치다가, 주(周) 나라의 왕통(王統)이 끊어짐으로써 순수한 역서(曆書) 한 권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진(秦) 나라로 이어졌으며,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를 거친 다음 아침에는 송(宋) 나라, 저녁에는 명(明) 나라를 거쳤지. 그러는 동안에 갖가지 일을 다 겪으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였으며, 죽은 이를 조문하기도 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지루하게 이어져 왔지. 그런데도 귀와 눈이 밝고 이와 머리털이 갈수록 자라나니, 나이가 많기로는 그 어린애만 한 자가 없겠지. 팽조는 기껏 800살 살고 요절하여 시대를 겪은 것도 많지 않고 일을 겪은 것도 오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나는 슬퍼한 것이다.’ 토끼가 이 말을 듣고는 거듭 절하고 뒤로 물러나 달아나면서 ‘너는 내 할아버지뻘이다.’ 하였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될 걸세.”
“옹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보았소?”
“보았지. 달이 하현(下弦)이 되어 조수(潮水)가 빠지고 갯벌이 드러나면 그 땅을 갈아 염전을 만들고 소금흙을 굽는데, 알갱이가 거친 것은 수정염(水晶鹽)이 되고 가는 것은 소금염(素金鹽)이 된다네. 온갖 음식 맛을 내는 데에 소금 없이 되겠는가?”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불사약(不死藥)만은 옹도 못 보았을 것입니다.”
하니, 옹이 빙그레 웃으며,
“그거야 내 아침저녁으로 늘 먹는 것인데 어찌 모르겠는가. 깊은 골짜기의 반송(盤松)에 맺힌 감로(甘露)가 땅에 떨어져 천 년이 지나면 복령(茯靈)이 되지. 삼(蔘)은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이 으뜸인데 모양이 단아하고 붉은빛을 띠며, 사지를 다 갖추고 동자처럼 쌍상투를 틀고 있지. 구기자(枸杞子)는 천 년이 되면 사람을 보고 짖는다 하네. 내가 이것들을 먹은 다음 백 일가량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지냈더니 숨이 차면서 곧 죽을 것만 같았네. 이웃 할머니가 와서 보고는 한숨을 지으며 하는 말이, ‘그대는 주림병이 들었소. 옛날 신농씨(神農氏)가 온갖 풀을 맛본 다음에야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였소. 무릇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약이 되고 주림병을 고치는 것은 밥이 되니, 그대의 병은 오곡이 아니면 낫지 못하오.’ 하고는 밥을 지어 먹여 주는 바람에 죽지 않았지. 불사약으로는 밥만 한 것이 없네. 나는 아침에 밥 한 사발 저녁에 밥 한 사발로 지금껏 이미 70여 년을 살았다네.”
하였다.
민옹은 말을 할 때면 장황하면서도 이리저리 둘러대지만, 어느 것 하나 곡진히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그 속에는 풍자를 담고 있었으니, 그는 달변가라 할 만하다. 손이 옹에게 물을 말이 다하여 더 이상 따질 수 없게 되자, 마침내 분이 올라 하는 말이,
“옹도 역시 두려운 것을 보았습니까?”
하니, 옹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두려워할 것은 나 자신만 한 것이 없다네. 내 오른 눈은 용이 되고 왼 눈은 범이 되며, 혀 밑에는 도끼가 들었고 팔목은 활처럼 휘었으니, 깊이 잘 생각하면 갓난아기처럼 순수한 마음을 보존하겠으나 생각이 조금만 어긋나도 되놈이 되고 만다네. 이를 경계하지 않으면 장차 제 자신을 잡아먹거나 물어뜯고, 쳐 죽이거나 베어 버릴 것이야. 이 때문에 성인은 사심(私心)을 극복하여 예(禮)로 돌아간 것이며 사악함을 막아 진실된 자신을 보존한 것이니, 나는 나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하였다.
수십 가지 난제(難題)를 물어보아도 모두 메아리처럼 재빨리 대답해 내 끝내 아무도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추어올리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한 반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조롱도 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였다. 사람들이 옹의 말을 듣고 배꼽을 잡고 웃어도 옹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누가 말하기를,
“황해도는 황충(蝗蟲)이 들끓어 관에서 백성을 독려하여 잡느라 야단들입니다.”
하자, 옹이,
“황충을 뭐 하려고 잡느냐?”
하고 물었다.
“이 벌레는 크기가 첫잠 잔 누에보다도 작으며, 색깔은 알록달록하고 털이 나 있습니다. 날아다니는 것을 명(螟)이라 하고 볏줄기에 기어오르는 것을 모(蟊)라 하는데, 우리의 벼농사에 피해를 주므로 이를 멸구〔滅穀〕라 부릅니다. 그래서 잡아다가 파묻을 작정이지요.”
하니, 옹이 말하기를,
“이런 작은 벌레들은 근심할 거리도 못 된다네. 내가 보기에 종루(鐘樓) 앞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황충이오. 길이는 모두 7척 남짓이고, 머리는 까맣고 눈은 반짝거리고 입은 커서 주먹이 들락날락할 정도인데, 웅얼웅얼 소리를 내고 꾸부정한 모습으로 줄줄이 몰려다니며 곡식이란 곡식은 죄다 해치우는 것이 이것들만 한 것이 없더군. 그래서 내가 잡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큰 바가지가 없어 아쉽게도 잡지를 못했네.”
하였다. 그랬더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정말로 이러한 벌레가 있는 줄 알고 크게 무서워하였다.
하루는 옹이 오고 있기에, 나는 멀찍이 바라보다가 은어(隱語)로 ‘춘첩자방제(春帖子狵啼)’라는 글귀를 써서 보였더니, 옹이 웃으며,
“춘첩자(春帖子)란 문(門)에 붙이는 글월〔文〕이니 바로 내 성 민(閔)이요, 방(狵)은 늙은 개를 지칭하니 바로 나를 욕하는 것이구먼. 그 개가 울면 듣기가 싫은데, 이 또한 나의 이가 다 빠져 말소리가 분명치 않은 것을 비꼰 것이로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대가 늙은 개를 무서워한다면 개 견(犬) 변을 떼어 버리면 될 것이고, 또 우는 소리가 싫으면 그 입 구(口)변을 막아 버리면 그만이지. 무릇 제(帝)란 조화를 부리고 방(尨)은 큰 물건을 가리키니, 제(帝) 자에 방(尨) 자를 붙이면 조화를 일으켜 큰 것이 되니 바로 용()이라네. 그렇다면 이는 그대가 나를 욕한 것이 아니라, 그만 나를 크게 칭송한 것이 되어 버렸구먼.”
하였다.
다음 해에 옹이 죽었다. 옹이 비록 엉뚱하고 거침없이 살았지만 천성이 곧고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 데다, 《주역(周易)》에 밝고 노자(老子)의 말을 좋아하였으며, 책이란 책은 안 본 것이 없었다 한다. 두 아들이 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아직 벼슬은 받지 못했다.
금년 가을에 나의 병이 도졌으나, 이제는 더 이상 민옹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나와 함께 주고받은 은어와 우스갯소리, 담론(談論)과 풍자 등을 기록하여 민옹전을 지었으니, 때는 정축년(1757, 영조 33) 가을이다.
나는 민옹을 위하여 뇌문(誄文 추도문)을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아아! 민옹이시여 / 嗚呼閔翁
괴상하고 기이하기도 하며 / 可怪可奇
놀랍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 可驚可愕
기뻐함직도 하고 성냄직도 하며 / 可喜可怒
게다가 밉살스럽기도 하구려 / 而又可憎
벽에 그린 까마귀 / 壁上烏
매가 되지 못하였듯이 / 未化鷹
옹은 뜻 있는 선비였으나 / 翁蓋有志士
늙어 죽도록 포부를 펴지 못했구려 / 竟老死莫施
내가 그대 위해 전을 지었으니 / 我爲作傳
아아! 죽어도 죽지 않았구려 / 嗚呼死未曾
[주D-001]무신년 난리 :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가리킨다.
[주D-002]항탁(項槖)이 스승이 되었다 : 항탁은 7세에 공자(孔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감라(甘羅)가 여불위(呂不偉)를 설득하면서 한 말이다. 《戰國策 秦策》 《史記 卷71 甘茂列傳》
[주D-003]감라(甘羅)가 장수가 되었다 : 이본에는 ‘승상〔相〕이 되었다’로 되어 있다. 여불위는 진(秦) 나라 장수 장당(張唐)이 연(燕) 나라 승상으로 부임하기를 바랐으나, 장당이 이를 거부하자 감라가 그를 대신하여 장당을 설득하고 조(趙) 나라에 가서 유세한 것을 말한다. 감라는 진 나라 명장 감무(甘茂)의 손자로 여불위의 가신(家臣)이었다. 여불위에게 등용되어 12세에 조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 나라를 설득하여 5개의 성을 할양받고 연 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토를 획득하였다. 《戰國策 秦策》 《史記 卷71 甘茂列傳》
[주D-004]외황(外黃) …… 하였다 : 항우가 진류(陳留)의 외항을 공격하였는데 외항 사람들이 항복하지 않고 버티다 며칠 후 항복하자 항우가 노하여 15세 이상 남자들을 성의 동쪽에다 파묻으려 하였다. 이에 외황 영(外黃令) 사인(舍人)의 13세 된 아들이 항우에게 유세하여 외황 백성들을 살렸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05]곽거병(霍去病)이 …… 나갔다 : 곽거병이 18세에 대장군 위청(衛靑)을 따라 표요교위(剽姚校尉)가 되어 흉노족을 공격하여 공을 세웠다. 그러나 기련산에까지 출정하여 공을 세운 것은 그가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된 21세 때의 일이다. 기련산은 중국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경계에 있는 고산(高山)이다. 《史記 卷111 衛將軍驃騎列傳》 《太平寰宇記 卷191 匈奴篇》
[주D-006]항적(項籍)이 강을 건넜다 : 항우는 24세 때 처음 기병(起兵)하여, 진(秦) 나라 군대에 포위당한 조왕(趙王)을 구하기 위해 오강(烏江)을 건넜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07]맹자는 …… 않았다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나는 40세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我四十不動心〕”고 하였다.
[주D-008]범증(范增)이 …… 좋아하였다 : 범증은 기발한 계책을 좋아하여, 나이 70세 때 항우의 숙부인 항량(項梁)을 찾아가 진(秦) 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紀》
[주D-009]옛날에 …… 용맹하였으니 : 《시경》 대아(大雅) 대명(大明)에 “태사(太師) 상보(尙父)는 당시 매가 날아오르는 듯하였네.〔維師尙父 時維鷹揚〕”라는 구절이 있다. 강 태공이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나라를 정벌한 사실을 가리킨다. 단 그때 그의 나이가 80살이었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설인지 알 수 없다.
[주D-010]계유 · 갑술년 간 : 영조 29년(1753)과 영조 30년(1754)이다.
[주D-011]지금 : 원문은 ‘今者’인데, 이본에는 ‘今子’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지금 그대는’ 이다.
[주D-012]팽조(彭祖) : 800살까지 살았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 등에 소개되어 있다.
[주D-013]너는 …… 슬퍼하느냐 : 원문은 ‘若乃若悲也’인데, 이본에는 ‘若乃何悲也’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너는 어째서 슬퍼하느냐?’이다.
[주D-014]목덕(木德)으로 …… 이래 : 《십팔사략(十八史略)》 첫머리에, “천황씨(天皇氏)는 목덕으로 왕이 되니 세성(歲星 : 목성)이 섭제(攝提), 즉 인방(寅方)에 나타났다.”라고 하였는데, 《십팔사략》에서는 천황씨를 삼황오제(三皇五帝) 이전 중국 최초의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초학(初學) 역사 교과서인 《십팔사략》을 읽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주D-015]주(周) 나라의 …… 이루어졌고 : 상고(上古)부터 주 나라 때까지의 정통 왕조의 역사를 섭렵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춘추(春秋)》에서는 일 년의 첫 달을 “춘(春) 왕정월(王正月)”이라 표기하여 주 나라의 왕통을 받들고 있음을 나타냈다. 순수한 역서란 《춘추》를 가리키는 듯하다.
[주D-016]마침내 …… 이어졌으며 : 원문은 ‘乃閏于秦’이다. 진 나라와 같이 정통으로 인정받지 못한 왕조는 윤달과 같다고 해서 윤통(閏統)이라 폄하(貶下)한다.
[주D-017]팽조는 …… 요절하여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서 “요절한 아이보다 더 오래 산 자가 없으니, 그에 비하면 팽조도 요절한 셈이다.〔莫壽乎殤子 而彭祖爲夭〕”라고 하였다.
[주D-018]반송(盤松)에 …… 되지 : 복령(茯靈)은 곧 버섯의 일종인 복령(茯苓)을 말한다. 송진〔松脂〕이 땅에 스민 지 천 년이 되면 변하여 복령이 되고, 복령이 변하여 호박(琥珀)이 된다고 한다. 《廣東通志 卷52 寶》
[주D-019]삼(蔘)은 …… 으뜸인데 : 원문은 ‘蔘伯羅産’인데, 우리나라 인삼 중에서 영남(嶺南)에서 나는 것을 나삼(羅蔘)이라 하고, 영동(嶺東)에서 나는 것을 산삼(山蔘)이라 하며, 강계(江界)에서 나는 것을 강삼(江蔘)이라 하고, 집에서 재배하는 것을 가삼(家蔘)이라 한다. 《心田考 3 應求漫錄》
[주D-020]동자처럼 …… 있지 : 쌍상투〔雙紒〕는 고대 중국의 예법에 따른 남녀 아동의 머리 모양이다. 《居家雜服攷 卷3 幼服》 조선 시대의 아동은 변발(辮髮)을 하고 있었는데, 연암은 정온(鄭蘊)이나 송시열 등의 선구적 시도를 계승하여 이를 쌍상투로 개혁하고 싶어했다. 《過庭錄》
[주D-021]이리저리 둘러대지만 : 원문은 ‘遷就而爲之’이다. 가의(賈誼)의 치안책(治安策)에서, 대신(大臣)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그에게 분명히 죄가 있어도 그 죄상(罪狀)을 직접 가리켜 말하지 않고 “둘러대어 말함으로써 이를 덮어 준다.〔遷就而爲之諱也〕”고 하였다.
[주D-022]내 …… 되며 : 위엄이 있거나 무시무시한 모습을 용정호목(龍睛虎目)이라 한다.
[주D-023]갓난아기처럼 …… 보존하겠으나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대인이란 그의 갓난아기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大人者 不失其赤子之心者也〕”라고 하였다.
[주D-024]사심(私心)을 …… 것이니 : 원문은 ‘克己復禮 閑邪存誠’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는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고, 한사존성(閑邪存誠)은 《주역》 건괘(乾卦) 풀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
[주D-025]용()이라네 : ‘龍’ 자를 ‘’ 자로 쓰기도 한다. 원래는 얼룩덜룩할 ‘망’ 자로 읽어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광문자전(廣文者傳)
광문(廣文)이라는 자는 거지였다. 일찍이 종루(鐘樓)의 저잣거리에서 빌어먹고 다녔는데, 거지 아이들이 광문을 추대하여 패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소굴을 지키게 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날이 몹시 차고 눈이 내리는데, 거지 아이들이 다 함께 빌러 나가고 그중 한 아이만이 병이 들어 따라가지 못했다. 조금 뒤 그 아이가 추위에 떨며 거듭 흐느끼는데 그 소리가 몹시 처량하였다. 광문이 너무도 불쌍하여 몸소 나가 밥을 빌어 왔는데, 병든 아이를 먹이려고 보니 아이는 벌써 죽어 있었다. 거지 아이들이 돌아와서는 광문이 그 애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다 함께 광문을 두들겨 쫓아내니, 광문이 밤에 엉금엉금 기어서 마을의 어느 집으로 들어가다가 그 집 개를 놀라게 하였다. 집주인이 광문을 잡아다 꽁꽁 묶으니, 광문이 외치며 하는 말이,
“나는 날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온 것이지 감히 도적질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영감님이 믿지 못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저자에 나가 알아 보십시오.”
하는데, 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집주인이 내심 광문이 도적이 아닌 것을 알고서 새벽녘에 풀어 주었다. 광문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떨어진 거적을 달라 하여 가지고 떠났다. 집주인이 끝내 몹시 이상히 여겨 그 뒤를 밟아 멀찍이서 바라보니, 거지 아이들이 시체 하나를 끌고 수표교(水標橋)에 와서 그 시체를 다리 밑으로 던져 버리는데, 광문이 다리 속에 숨어 있다가 떨어진 거적으로 그 시체를 싸서 가만히 짊어지고 가, 서쪽 교외 공동묘지에다 묻고서 울다가 중얼거리다가 하는 것이었다.
이에 집주인이 광문을 붙들고 사유를 물으니, 광문이 그제야 그전에 한 일과 어제 그렇게 된 상황을 낱낱이 고하였다. 집주인이 내심 광문을 의롭게 여겨, 데리고 집에 돌아와 의복을 주며 후히 대우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광문을 약국을 운영하는 어느 부자에게 천거하여 고용인으로 삼게 하였다.
오랜 후 어느 날 그 부자가 문을 나서다 말고 자주자주 뒤를 돌아보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자물쇠가 걸렸나 안 걸렸나를 살펴본 다음 문을 나서는데, 마음이 몹시 미심쩍은 눈치였다. 얼마 후 돌아와 깜짝 놀라며, 광문을 물끄러미 살펴보면서 무슨 말을 하고자 하다가, 안색이 달라지면서 그만두었다. 광문은 실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날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지냈으며, 그렇다고 그만두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 부자의 처조카가 돈을 가지고 와 부자에게 돌려주며,
“얼마 전 제가 아저씨께 돈을 빌리러 왔다가, 마침 아저씨가 계시지 않아서 제멋대로 방에 들어가 가져갔는데, 아마도 아저씨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이에 부자는 광문에게 너무도 부끄러워서 그에게,
“나는 소인이다. 장자(長者)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으니 나는 앞으로 너를 볼 낯이 없다.”
하고 사죄하였다. 그러고는 알고 지내는 여러 사람들과 다른 부자나 큰 장사치들에게 광문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두루 칭찬을 하고, 또 여러 종실(宗室)의 빈객들과 공경(公卿) 문하(門下)의 측근들에게도 지나치리만큼 칭찬을 해 대니, 공경 문하의 측근들과 종실의 빈객들이 모두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밤이 되면 자기 주인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두어 달이 지나는 사이에 사대부까지도 모두 광문이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과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당시에 서울 안에서는 모두, 전날 광문을 후하게 대우한 집주인이 현명하여 사람을 알아본 것을 칭송함과 아울러, 약국의 부자를 장자(長者)라고 더욱 칭찬하였다.
이때 돈놀이하는 자들이 대체로 머리꽂이, 옥비취, 의복, 가재도구 및 가옥 · 전장(田庄) · 노복 등의 문서를 저당잡고서 본값의 십분의 삼이나 십분의 오를 쳐서 돈을 내주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광문이 빚보증을 서 주는 경우에는 담보를 따지지 아니하고 천금(千金)이라도 당장에 내주곤 하였다.
광문은 사람됨이 외모는 극히 추악하고, 말솜씨도 남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며, 입은 커서 두 주먹이 들락날락하고, 만석희(曼碩戲)를 잘하고 철괴무(鐵拐舞)를 잘 추었다. 우리나라 아이들이 서로 욕을 할 때면, “니 형은 달문(達文)이다.”라고 놀려 댔는데, 달문은 광문의 또다른 이름이었다.
광문이 길을 가다가 싸우는 사람을 만나면 그도 역시 옷을 홀랑 벗고 싸움판에 뛰어들어, 뭐라고 시부렁대면서 땅에 금을 그어 마치 누가 바르고 누가 틀리다는 것을 판정이라도 하는 듯한 시늉을 하니, 온 저자 사람들이 다 웃어 대고 싸우던 자도 웃음이 터져, 어느새 싸움을 풀고 가 버렸다.
광문은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머리를 땋고 다녔다. 남들이 장가가라고 권하면, 하는 말이,
“잘생긴 얼굴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다. 그러나 사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록 여자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나는 본래 못생겨서 아예 용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였다. 남들이 집을 가지라고 권하면,
“나는 부모도 형제도 처자도 없는데 집을 가져 무엇 하리. 더구나 나는 아침이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며 저자에 들어갔다가, 저물면 부귀한 집 문간에서 자는 게 보통인데, 서울 안에 집 호수가 자그만치 팔만 호다. 내가 날마다 자리를 바꾼다 해도 내 평생에는 다 못 자게 된다.”
고 사양하였다.
서울 안에 명기(名妓)들이 아무리 곱고 아름다워도, 광문이 성원해 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어치도 못 나갔다.
예전에 궁중의 우림아(羽林兒), 각 전(殿)의 별감(別監),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청지기들이 옷소매를 늘어뜨리고 운심(雲心)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운심은 유명한 기생이었다. 대청에서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운심더러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운심은 일부러 느리대며 선뜻 추지를 않았다. 광문이 밤에 그 집으로 가서 대청 아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마침내 자리에 들어가 스스로 상좌(上坐)에 앉았다. 광문이 비록 해진 옷을 입었으나 행동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의기가 양양하였다. 눈가는 짓무르고 눈꼽이 끼었으며 취한 척 게욱질을 해 대고, 헝클어진 머리로 북상투〔北髻〕를 튼 채였다. 온 좌상이 실색하여 광문에게 눈짓을 하며 쫓아내려고 하였다. 광문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치며 곡조에 맞춰 높으락나지락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곧바로 일어나 옷을 바꿔 입고 광문을 위하여 칼춤을 한바탕 추었다. 그리하여 온 좌상이 모두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
광문전 뒤에 쓰다
내 나이 열여덟 살 적에 몹시 병을 앓아서, 늘 밤이면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을 불러 놓고 여염(閭閻)에서 일어난 얘깃거리 될 만한 일들을 묻곤 하였는데, 대개는 광문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어렸을 적에 그 얼굴을 보았는데 너무도 못났었다. 나는 한창 문장을 배우기에 힘쓰던 판이라, 이 전(傳)을 만들어 여러 어른들께 돌려 보였는데, 하루아침에 고문(古文)을 잘 한다는 칭찬을 크게 받게 되었다.
광문은 이때 호남과 영남의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명성을 남겼고, 더 이상 서울에 올라오지 않은 지가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났다.
바닷가에서 온 거지 아이 하나가 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에서 빌어먹고 있었다. 밤이 되어 그 절의 중들이 광문의 일을 한가롭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모두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며 흠모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그 거지 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 거지 아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다 마침내 광문의 아들이라 자칭하니, 그 절의 중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이때까지 그에게 밥을 줄 때는 박짝에다 주었는데, 광문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서는 씻은 사발에 밥을 담고 수저에다 푸성귀랑 염장을 갖추어서 매번 소반에 차려 주었다.
이 무렵에 영남에는 몰래 역모를 꾀하는 요사한 사람이 있었는데, 거지 아이가 이와 같이 융숭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대중을 현혹시킬 수 있겠다 생각하여 가만히 거지 아이를 달래기를,
“네가 나를 숙부라 부르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저는 광문의 아우라 칭하고 제 이름을 광손(廣孫)이라 하여 광문의 돌림자를 땄다. 어떤 사람이 의심하기를,
“광문은 본래 제 성도 모르고 평생을 형제도 처첩도 없이 독신으로 지냈는데, 지금 어떻게 저런 나이 많은 아우와 장성한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서, 마침내 고변(告變)을 하였다. 관청에서 이들을 모두 다 잡아들여 광문과 대질심문을 벌였는데, 제각기 얼굴을 몰랐다. 이에 그 요사한 자를 베어 죽이고 거지 아이는 귀양 보냈다.
광문이 석방되자, 늙은이며 어린애들까지 모두가 가서 구경하는 바람에 한양의 저잣거리가 며칠 동안 텅 비게 되었다.
광문이 표철주(表鐵柱)를 가리키며,
“너는 사람 잘 치던 표망둥이〔表望同〕가 아니냐. 지금은 늙어서 너도 별 수 없구나.”
했는데, 망둥이는 그의 별명이었다. 서로 고생을 위로하고 나서 광문이 물었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과 풍원군(豊原君 조현명(趙顯命))은 무고들 하신가?”
“모두 다 세상을 떠나셨다네.”
“김군경(金君擎)은 지금 무슨 벼슬을 하고 있지?”
“용호장(龍虎將)이 되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말했다.
“이 녀석은 미남자로서 몸이 그렇게 뚱뚱했어도 기생을 껴안고 담을 잘도 뛰어넘었으며 돈 쓰기를 더러운 흙 버리듯 했는데, 지금은 귀인(貴人)이 되었으니 만나 볼 수가 없겠군. 분단(粉丹)이는 어디로 갔지?”
“벌써 죽었다네.”
그러자 광문이 탄식하며 말했다.
“옛날에 풍원군이 밤에 기린각(麒麟閣)에서 잔치를 벌인 후 유독 분단이만 잡아 두고서 함께 잔 적이 있었지. 새벽에 일어나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하는데, 분단이가 촛불을 잡다가 그만 잘못하여 초모(貂帽)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어쩔 줄을 몰라 하였네. 풍원군이 웃으면서 ‘네가 부끄러운 모양이구나.’ 하고는 곧바로 압수전(壓羞錢) 5000문(50냥)을 주었었지. 나는 그때 분단이의 수파(首帕)와 부군(副裙)을 들고 난간 밑에서 기다리며 시커멓게 도깨비처럼 서 있었네. 풍원군이 방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다가 분단이의 귀에 대고 말하기를, ‘저 시커먼 것이 무엇이냐?’ 하니, 분단이가 대답하기를 ‘천하 사람이 다 아는 광문입니다.’ 했지. 풍원군이 웃으며 ‘바로 네 후배(後陪)냐?’ 하고는, 나를 불러들여 큰 술잔에 술을 한 잔 부어 주고, 자신도 홍로주(紅露酒) 일곱 잔을 따라 마시고 초헌(軺軒)을 타고 나갔지. 이 모두 다 예전 일이 되어 버렸네그려. 요즈음 한양의 어린 기생으로는 누가 가장 유명한가?”
“작은아기〔小阿其〕라네.”
“조방(助房)은 누군가?”
“최박만(崔撲滿)이지.”
“아침나절 상고당(尙古堂)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네. 듣자니 집을 둥그재〔圓嶠〕 아래로 옮기고 대청 앞에는 벽오동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아래에서 손수 차를 달이며 철돌(鐵突)을 시켜 거문고를 탄다고 하데.”
“철돌은 지금 그 형제가 다 유명하다네.”
“그런가? 이는 김정칠(金鼎七)의 아들일세. 나는 제 애비와 좋은 사이였거든.”
이렇게 말하고 다시 서글퍼하며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이는 다 나 떠난 후의 일들이군.”
하였다. 광문은 머리털을 짧게 자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쥐꼬리처럼 땋아 내리고 있었으며, 이가 빠지고 입이 틀어져 이제는 주먹이 들락거리지 못한다고 한다.
광문이 표철주더러 말하였다.
“너도 이제는 늙었구나. 어떻게 해서 밥을 먹고사나?”
“집이 가난하여 집주릅이 되었다네.”
“너도 이제는 궁함을 면했구나. 아아! 옛날 네 집 재산이 누거만(累鉅萬)이었지. 그때에는 너를 ‘황금투구’라고 불렀는데 그 투구 어따 두었노?”
“이제야 나는 세상 물정을 알았다네.”
광문이 허허 웃으며 말하기를,
“네 꼴이 마치 ‘재주를 다 배우고 나니 눈이 어둡다’ 이로구나.”
하였다.
그 뒤로 광문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주D-001]추위에 …… 흐느끼는데 : 원문은 ‘寒專纍欷’인데, ‘寒專’은 ‘寒戰’ 또는 ‘寒顫’과 같은 뜻으로 풀이된다. ‘纍欷’는 거듭 흐느껴운다는 뜻으로, 《연암집》 권10 ‘도화동시축발(桃花洞詩軸跋)’에도 ‘’累欷掩抑‘이란 표현이 있다.
[주D-002]말이 몹시 순박하므로 : 원문은 ‘辭甚樸’인데, 이본에는 ‘辭甚款樸’이라고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면 ‘말이 몹시 진실되고 순박하므로’이다.
[주D-003]수표교(水標橋) :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의 하나로, 홍수에 대비하여 수심을 재는 눈금이 교각(橋脚)에 표시되어 있었다.
[주D-004]만석희(曼碩戲) : 개성 지방에서 음력 4월 8일에 연희되던 무언 인형극이다. 이 놀이는 개성의 명기 황진이(黃眞伊)의 미색과 교태에 미혹되어 파계하였다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조롱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는 속전이 있으며, 일설에는 지족선사가 불공 비용을 만 석이나 받은 것을 욕하기 위하여 연희되었다고도 한다.
[주D-005]철괴무(鐵拐舞)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의 모습을 흉내 내어 추는 춤이다. 이철괴는 그 모습이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에는 때가 자욱하고 배는 훌떡 걷어 올리고 다리는 절뚝거리며 쇠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고 한다.
[주D-006]비록 …… 마찬가지다 : 원문은 ‘唯女亦然’인데, 이 경우 ‘唯’ 자는 ‘비록’이란 뜻으로 ‘雖’ 자와 같다.
[주D-007]우림아(羽林兒) : 궁궐의 호위를 맡은 친위(親衛) 부대 중의 하나인 우림위(羽林衛) 소속의 군인들을 말한다. 우림위는 영조 때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되었다.
[주D-008]별감(別監) : 궁중의 하례(下隸)로서 대전(大殿)과 중궁전(中宮殿) 등에서 잡무를 수행하는 한편 국왕이 행차할 때 시위와 봉도(奉導)를 맡았다.
[주D-009]북상투〔北髻〕 : 여자의 쪽머리(낭자머리)를 모방하여 뒤통수에 상투처럼 묶은 머리 모양을 가리킨다. 《硏經齋集 外集 卷5 蘭室譚叢 北髻》
[주D-010]광문에게 …… 하였다 : 원문은 ‘瞬文欲敺之’인데, 여기서 ‘敺’는 ‘驅’의 고자(古字)로 ‘쫓아내다’로 새겨야 한다.
[주D-011]개령(開寧)의 수다사(水多寺) : 개령은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에 속하는 고을이고, 수다사는 그 이웃 고을인 선산군(善山郡)에 있다. 신라 때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주D-012]광문이 석방되자 : 영조 40년(1764년)에 일찍이 나주(羅州) 괘서(掛書) 사건으로 처형된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하징(李夏徵)의 서얼 이태정(李太丁)이란 자가 달손(達孫) 즉 광문의 동생을 자처하면서, 광문의 아들이라는 자근만(者斤萬)을 시켜 유언비어를 퍼뜨리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덩달아 체포되었던 광문은 역모 혐의는 벗었으나 함경도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推案及鞫案 卷22》 《英祖實錄 40年 4月 17日》
[주D-013]표철주(表鐵柱) : 실존 인물로서 당시 서울의 무뢰배 조직인 검계(劍契)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자칭 왈짜〔曰者〕라고도 하는데, 노름판과 사창가 등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살인과 약탈,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주D-014]용호장(龍虎將) : 용호영(龍虎營)의 정 3 품 벼슬이다.
[주D-015]압수전(壓羞錢) : 부끄러움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주는 돈이다.
[주D-016]수파(首帕)와 부군(副裙) : 수파는 여자들의 머리를 감싸는 머릿수건이고, 부군은 덧치마를 가리킨다.
[주D-017]후배(後陪) : 뒤를 따르는 하인을 말한다.
[주D-018]홍로주(紅露酒) : 소주에다 멥쌀로 만든 누룩과 계피 등을 넣고 우려 만든 약주로, 감홍로(甘紅露), 감홍주(甘紅酒)라고도 부른다.
[주D-019]조방(助房) : 기생의 기둥서방으로, 조방(助幇)이라고도 한다.
[주D-020]상고당(尙古堂) : 김광수(金光遂)의 호이다. 숙종 22년(1696)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서른 살에 진사 급제 후 잠시 인제 군수(麟蹄郡守)를 지냈다. 서화에 뛰어났으며, 골동품 수집과 감정으로 명성이 높았다. 《연암집》 권3 필세설(筆洗說), 권7 관재소장청명상하도발(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주D-021]둥그재〔圓嶠〕 : 서대문 밖 아현동 부근에 있었던 고개로, 원현(圓峴)이라고도 한다.
[주D-022]철돌(鐵突) : 거문고의 명수로 알려진 실존 인물로, 김철석(金哲石)이라고 한다.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 가기(歌妓) 추월(秋月) · 매월(梅月) · 계섬(桂蟾) 등과 한 그룹을 이루어 직업적인 연예 활동으로 자못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주D-023]너도 …… 면했구나 : 원문은 ‘汝今免矣’인데, 곤궁에서 벗어나는 것을 ‘면궁(免窮)’이라 한다.
[주D-024]재주를 …… 어둡다 : ‘복이 박하다’는 뜻의 우리나라 속담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권62 열상방언(洌上方言)에 “기술 익히자 눈에 백태 낀다.〔技纔成 眼有眚〕”는 유사한 속담이 소개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양반전(兩班傳)
양반(兩班)이란 사족(士族)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정선(旌善) 고을에 한 양반이 있었는데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으므로, 군수가 새로 도임하게 되면 반드시 몸소 그의 집에 가서 인사를 차렸다. 그러나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청의 환곡을 빌려 먹다 보니, 해마다 쌓여서 그 빚이 천석(千石)에 이르렀다.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하면서 환곡 출납을 조사해 보고 크게 노하여,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축냈단 말인가?”
하고서 그 양반을 잡아 가두라고 명했다.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하여 보상을 할 길이 없음을 내심 안타깝게 여겨 차마 가두지는 못하였으나, 그 역시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반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고 밤낮으로 울기만 하고 있으니, 그의 아내가 몰아세우며,
“당신은 평소에 그렇게도 글을 잘 읽지만 현관(縣官)에게 환곡을 갚는 데에는 아무 소용이 없구려. 쯧쯧 양반이라니, 한 푼짜리도 못 되는 그놈의 양반.”
이라 했다.
그때 그 마을에 사는 부자가 식구들과 상의하기를,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늘 높고 귀하며, 우리는 아무리 잘 살아도 늘 낮고 천하여 감히 말도 타지 못한다. 또한 양반을 보면 움츠러들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뜰 아래 엎드려 절해야 하며, 코를 땅에 박고 무릎으로 기어가야 하니 우리는 이와 같이 욕을 보는 신세다. 지금 저 양반이 환곡을 갚을 길이 없어 이만저만 군욕(窘辱)을 보고 있지 않으니 진실로 양반의 신분을 보존 못할 형편이다. 그러니 우리가 그 양반을 사서 가져보자.”
하고서 그 집 문에 나아가 그 환곡을 갚아 주겠다고 청하니, 양반이 반색하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부자는 당장에 그 환곡을 관에 바쳤다. 군수가 크게 놀라 웬일인가 하며 그 양반을 위로도 할 겸 어떻게 해서 환곡을 갚게 되었는지 묻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그 양반이 벙거지를 쓰고 잠방이를 입고 길에 엎드려 소인이라 아뢰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 붙들며,
“그대는 왜 이렇게 자신을 낮추어 욕되게 하시오?”
하니까, 양반이 더욱더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리고 땅에 엎드리며,
“황송하옵니다. 소인놈이 제 몸을 낮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환곡을 갚기 위하여 이미 제 양반을 팔았으니, 이 마을의 부자가 이제는 양반입니다. 소인이 어찌 감히 예전의 칭호를 함부로 쓰면서 스스로 높은 척하오리까?”
했다. 군수가 탄복하며,
“군자로다, 부자여! 양반이로다, 부자여! 부자로서 인색하지 않은 것은 의(義)요, 남의 어려운 일을 봐준 것은 인(仁)이요, 비천한 것을 싫어하고 존귀한 것을 바라는 것은 지(智)라 할 것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양반이로고. 아무리 그렇지만 사적으로 주고받았을 뿐 아무런 증서도 작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소송의 빌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너는 고을 백성들을 불러모아 그들을 증인으로 세우고, 증서를 작성하여 믿게 하자. 군수인 나도 당연히 자수(自手)로 수결(手決)할 것이다.”
했다. 그리고 군수는 관사로 돌아와, 고을 안의 사족(士族) 및 농부, 장인, 장사치들을 모조리 불러다 뜰 앞에 모두 모이게 하고서, 부자를 향소(鄕所)의 바른편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의 아래에 서게 하고 다음과 같이 증서를 작성했다.
“건륭(乾隆) 10년(1745, 영조 21) 9월 모일 위의 명문(明文)은 양반을 값을 쳐서 팔아 관곡을 갚기 위한 것으로서 그 값은 1000섬이다.
대체 그 양반이란, 이름 붙임 갖가지라. 글 읽은 인 선비 되고, 벼슬아친 대부 되고, 덕 있으면 군자란다. 무관 줄은 서쪽이요, 문관 줄은 동쪽이라. 이것이 바로 양반, 네 맘대로 따를지니.
비루한 일 끊어 버리고, 옛사람을 흠모하고 뜻을 고상하게 가지며, 오경이면 늘 일어나 유황에 불붙여 기름등잔 켜고서, 눈은 코끝을 내리 보며 발꿈치를 괴고 앉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동래박의(東萊博議)》를 줄줄 외어야 한다. 주림 참고 추위 견디고 가난 타령 아예 말며, 이빨을 마주치고 머리 뒤를 손가락으로 퉁기며 침을 입 안에 머금고 가볍게 양치질하듯 한 뒤 삼키며 옷소매로 휘양〔揮項〕을 닦아 먼지 털고 털무늬를 일으키며, 세수할 땐 주먹 쥐고 벼르듯이 하지 말고, 냄새 없게 이 잘 닦고, 긴 소리로 종을 부르며, 느린 걸음으로 신발을 끌 듯이 걸어야 한다. 《고문진보(古文眞寶)》, 《당시품휘(唐詩品彙)》를 깨알같이 베껴 쓰되 한 줄에 백 글자씩 쓴다. 손에 돈을 쥐지 말고 쌀값도 묻지 말고, 날 더워도 발 안 벗고 맨상투로 밥상 받지 말고, 밥보다 먼저 국 먹지 말고, 소리 내어 마시지 말고, 젓가락으로 방아 찧지 말고, 생파를 먹지 말고, 술 마시고 수염 빨지 말고, 담배 필 젠 볼이 움푹 패도록 빨지 말고, 분 나도 아내 치지 말고, 성 나도 그릇 차지 말고, 애들에게 주먹질 말고, 뒈져라고 종을 나무라지 말고, 마소를 꾸짖을 때 판 주인까지 싸잡아 욕하지 말고, 병에 무당 부르지 말고, 제사에 중 불러 재(齋)를 올리지 말고, 화로에 불 쬐지 말고, 말할 때 입에서 침을 튀기지 말고, 소 잡지 말고 도박하지 말라.
이상의 모든 행실 가운데 양반에게 어긋난 것이 있다면 이 문서를 관청에 가져와서 변정(卞正)할 것이다.
성주(城主) 정선 군수(旌善郡守)가 화압(花押 수결(手決))하고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이 증서(證署)함.”
이에 통인(通引)이 여기저기 도장을 찍는데, 그 소리가 엄고(嚴鼓) 치는 것 같았으며, 모양은 북두칠성과 삼성(參星)이 종횡으로 늘어선 것 같았다. 호장(戶長)이 문서를 다 읽고 나자 부자가 어처구니없어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양반이라는 것이 겨우 이것뿐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양반은 신선 같다는데,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도 심하게 횡령당한 셈이니, 원컨대 이익이 될 수 있도록 고쳐 주옵소서.”
하므로, 마침내 증서를 이렇게 고쳐 만들었다.
“하느님이 백성 내니, 그 백성은 넷이로세. 네 백성 가운데는 선비 가장 귀한지라, 양반으로 불려지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하고, 문사(文史)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文科) 급제, 작게 되면 진사(進士)로세. 문과 급제 홍패(紅牌)라면 두 자 길이 못 넘는데, 온갖 물건 구비되니, 이게 바로 돈 전대(纏帶)요, 서른에야 진사 되어 첫 벼슬에 발 디뎌도, 이름난 음관(蔭官)되어 웅남행(雄南行)으로 잘 섬겨진다. 일산 바람에 귀가 희고 설렁줄에 배 처지며, 방 안에 떨어진 귀걸이는 어여쁜 기생의 것이요, 뜨락에 흩어져 있는 곡식은 학(鶴)을 위한 것이라. 궁한 선비 시골 살면 나름대로 횡포 부려, 이웃 소로 먼저 갈고, 일꾼 뺏어 김을 매도 누가 나를 거역하리. 네 놈 코에 잿물 붓고, 상투 잡아 도리질하고 귀얄수염 다 뽑아도, 감히 원망 없느니라.”
부자가 그 문서 내용을 듣고 있다가 혀를 내두르며,
“그만두시오. 그만두시오. 참으로 맹랑한 일이요. 장차 나로 하여금 도적놈이 되란 말입니까?”
하며 머리를 흔들고 가서는, 종신토록 다시 양반의 일을 입에 내지 않았다.
[주D-001]한 푼짜리도 …… 양반 : 양반(兩班)을 양반(兩半)으로 풀어 한 냥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풍자한 것이다.
[주D-002]벙거지 : 하인들이 쓰던 털모자.
[주D-003]향소(鄕所) :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주D-004]공형(公兄) : 호장(戶長)과 이방(吏房) 및 수형리(首刑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한다.
[주D-005]명문(明文) : 증명서란 뜻으로, ‘적발’이라고도 한다.
[주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주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권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주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주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明)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주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명(明)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주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권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권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주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주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주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주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김신선전(金神仙傳)
김 신선의 이름은 홍기(弘基)이다. 나이 16세에 장가를 들어 아내와 한 번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서는 더 이상 가까이하지 않았다. 화식(火食)을 물리치고 벽을 향하여 앉아서, 그렇게 하기를 여러 해 만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국내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항상 수백 리 길을 걷고서야 때가 얼마나 되었나 해를 살폈으며, 5년에 신을 한 번 바꿔 신고, 험한 곳을 만나게 되면 걸음이 오히려 더욱 빨라졌다. 그런데도 그는,
“물을 만나 바지를 걷고 건너기도 하고, 배를 타고 건너기도 하느라 이렇게 늦어진 것이다.”
라고 말하곤 하였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않고 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신선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우울증을 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듣자니 신선의 방술(方術)이 더러 특이한 효험이 있다 하므로 더욱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윤생(尹生)과 신생(申生)을 시켜서 가만히 찾아보게 하여, 한양 안을 열흘 동안 뒤졌으나 만나지 못했다. 윤생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홍기가 서학동(西學洞)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라 바로 그 사촌 형제의 집으로 거기다 처자를 맡겨 두었습디다. 아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의 부친은 한 해에 대략 서너 번 찾아올 뿐이지요. 부친의 친구 분이 체부동(體府洞)에 살고 있는데 그분은 술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하는 김 봉사(金奉事)라 하더군요. 누각동(樓閣洞) 김 첨지(金僉知)는 바둑을 좋아하고, 그 뒷집 이 만호(李萬戶)는 거문고를 좋아하고, 삼청동(三淸洞) 사는 이 만호는 손님을 좋아하고, 미원동(美垣洞) 사는 서 초관(徐哨官)과 모교(毛橋) 사는 장 첨사(張僉使)와 사복천(司僕川) 가에 사는 지 승(池丞)은 모두 손님을 좋아하고 술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이문안〔里門內〕 조 봉사(趙奉事)라는 분도 역시 부친의 친구 분인데 그 집엔 이름난 화초가 가득 심겨져 있고, 계동(桂洞) 유 판관(劉判官)은 기서(奇書)와 고검(古劍)을 가지고 있어, 부친이 늘 그분들 집에서 놀며 지내고 있으니, 그대가 만나 뵙고 싶으면 이 몇 집을 찾아보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집을 다니며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어느 집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저물녘에 한 집에 들렀더니, 주인은 거문고를 타고 있고 두 손은 모두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허연 머리에 관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는 김홍기를 만났구나 생각하고 한참 동안 서서 기다렸습니다. 거문고 가락이 끝나 가기에 나아가, ‘어느 분이 김 장인(金丈人 장인은 노인에 대한 경칭이다.)이신지 감히 여쭙습니다.’ 했지요. 주인이 거문고를 밀쳐 놓고 대답하기를, ‘좌중에 김씨 성 가진 사람은 없소. 그대는 왜 묻는가?’ 하기에, ‘저는 목욕재계하고서 감히 찾아와 뵙는 것이오니 노인께서는 숨기지 마소서.’ 하였더니, 주인이 웃으며, ‘그대가 아마 김홍기를 찾는가 보오. 홍기는 오지 않았소.’ 하였습니다. ‘어느 때나 오시는지 감히 여쭙습니다.’ 하였더니, ‘홍기란 사람은 묵어도 일정한 거처가 없고 놀아도 일정한 곳이 없으며, 와도 온다고 예고하지 않고 가도 다시 오겠다는 약조를 하지 않으며, 하루에 두세 번 올 때도 있는 반면 안 올 때는 해가 지나도 오지 않소. 듣자니 홍기가 창동(倉洞)이나 회현방(會賢坊)에 주로 있고, 또 동관(董關) · 배오개 · 구리개 · 자수교(慈壽橋) · 사동(社洞) · 장동(壯洞) · 대릉(大陵) · 소릉(小陵) 등지에도 오락가락하며 놀고 자곤 한다는데, 내가 그 주인의 이름은 거의 다 모르고 유독 창동만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서 물어보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가 물었더니, ‘그가 오지 않은 것이 벌써 두어 달 되었소. 내 들으니 장창교(長暢橋)에 사는 임 동지(林同知)가 술 마시기를 좋아해서 날마다 홍기와 더불어 술 겨루기를 한다는데, 지금 임씨 집에 있는지도 모르겠소.’라고 답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집을 찾아갔더니, 임 동지라는 이는 나이 80여 세여서 자못 귀가 먹었는데, 하는 말이, ‘쯧쯧, 어젯밤에 나와 술을 잔뜩 마시고 오늘 아침에 취기가 남은 채로 강릉(江陵)에 간다고 떠났소.’ 하였습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있다 묻기를, ‘김홍기란 이에게 특이한 점이 있습니까?’ 하니,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단지 밥 먹는 것을 못 보았소.’ 하였고, ‘생김생김이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키는 7척이 넘고 몸집은 여위고 수염이 좋으며, 눈동자는 파랗고 귀는 길고 누렇지요.’ 하였으며, ‘술은 얼마나 마시오?’ 하였더니,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데 한 말을 마셔도 더 취하지는 않소. 예전에 취하여 길에 누워버린 적이 있었는데, 포리(捕吏)가 잡아다가 이레 동안 구속했으나 그 술이 깨지 않으므로 마침내 놓아주었다오.’ 하였습니다. ‘말할 때는 어떱습디까?’ 하였더니, ‘여러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할 때면 그대로 앉아서 졸고 있다가, 그 말이 끝나면 계속해서 웃기만 한다오.’ 하였으며, ‘몸가짐은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조용한 품은 참선(參禪)하는 중 같고, 꾸밀 줄 모르기는 수절하는 과부 같았지요.’ 하였습니다.”
나는 한때 윤생이 힘들여 찾지 않았나 의심을 했었다. 그러나 신생 역시 수십 집을 찾아다녔어도 다 못 만났고, 그의 말도 윤생과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홍기는 나이가 백여 살이고, 더불어 노는 사람들도 모두 노인이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홍기가 나이 열아홉에 장가들어 곧바로 아들을 낳았고 지금 그 아들이 겨우 스물 전후이니, 홍기의 나이 지금 쉰 남짓쯤 될 것이다.”
하였으며, 어떤 이는
“김 신선이 지리산으로 약초를 캐러 갔다가 벼랑에서 떨어져서 돌아오지 못한 지 지금 하마 수십 년이 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지금도 컴컴한 바위굴에 번쩍번쩍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게 바로 노인의 눈빛이다. 산골짜기에서 이따금 기지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하였다. 그런데 지금 홍기는 단지 술을 잘 마실 뿐이요, 딴 방술(方術)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직 그 이름을 빌려서 행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 동자 복(福)을 시켜서 가서 찾아보라 했으나 끝내 만나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이때는 계미년(1763, 영조 39)이었다.
그 이듬해 가을에 나는 동으로 바닷가를 여행하다가 저녁나절 단발령(斷髮嶺)에 올라서 금강산을 바라보았다. 그 봉우리가 만이천 개나 된다고 하는데 흰빛을 띠고 있었다. 산에 들어가 보니 단풍나무가 많아서 한창 탈 듯이 붉었으며, 싸리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예장(豫章)나무는 다 서리를 맞아 노랗고, 삼나무, 노송나무는 더욱 푸르르며, 사철나무가 특히나 많았다. 산중의 갖가지 기이한 나무들은 다 잎이 노랗고 붉게 물들어 있어 둘러보고 즐거워했다. 가마를 멘 중에게 묻기를,
“이 산중에 도승이 있느냐? 있다면 그 도승과 더불어 놀 수 있느냐?”
하니,
“그런 중은 없고, 선암(船菴)에 벽곡(辟穀)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들었소. 누구는 말하기를 영남 선비라고 하는데, 꼭 알 수는 없습니다. 선암은 길이 험하여 당도하는 자가 없습니다.”
했다. 내가 밤에 장안사(長安寺)에 앉아서 여러 중들에게 물으니, 모두 처음의 대답과 같았으며, 벽곡하는 자가 100일을 채우고 떠나겠다고 했는데 지금 거의 90일 남짓이 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몹시 기뻐서 ‘아마 그 사람이 선인(仙人)인가 보다.’ 생각하고 당장에 밤이라도 가고 싶었으나, 그 이튿날 아침을 기다려서 진주담(眞珠潭) 아래에 앉아 같이 갈 사람을 기다렸다. 거기서 한참 동안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모두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관찰사가 군읍(郡邑)을 순행하다가 마침내 산에 들어와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쉬고 있었으므로, 각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모여들어 잔치를 벌이고 음식과 거마(車馬)를 제공했으며, 매양 구경 나갈 때는 따라다니는 중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선암은 길이 끊기고 험준하여 도저히 혼자 도달할 수는 없으므로 영원(靈源)과 백탑(白塔) 사이를 스스로 오가며 애만 태운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날이 오랫동안 비가 내려 산중에 엿새 동안을 묵고서야 선암에 당도할 수 있었다. 선암은 수미봉(須彌峯) 아래에 있었으므로 내원통(內圓通)으로부터 20여 리를 들어갔는데, 큰 바위가 깎아질러 천 길이나 되었으며 길이 끊어질 때마다 쇠줄을 부여잡고 공중에 매달려서 가야만 했다. 당도하고 보니 뜨락은 텅 비어 우는 새 한 마리도 없고, 탑(榻) 위에는 조그마한 구리부처가 놓여 있고 신 두 짝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 이리저리 서성이며 우두커니 바라만 보다가, 마침내 암벽 아래에다 이름을 써 놓고 탄식하며 떠나왔다. 그런데 거기에는 노상 구름 기운이 감돌고 바람이 쓸쓸하게 불었다.
어떤 책에는 “신선〔仙〕이란 산사람〔山人〕을 의미한다.”라고 하며 또 어떤 책에는 “ ‘산에 들어가 있는 사람〔入山〕’을 신선〔屳〕이라고 한다.” 하기도 한다. 또한 신선〔僊〕이란 너울너울〔僊僊〕 가볍게 날아오르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벽곡하는 사람이 꼭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뜻을 얻지 못해 울적하게 살다 간 사람일 것이다.
[주D-001]홍기(弘基) : 김홍기는 당시의 실존 인물로,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권3에는 ‘金洪器’로 소개되어 있다.
[주D-002]윤생(尹生)과 신생(申生)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에서 연암은 예전부터 집에서 부리던 사람들에게 여염에서 일어난 얘깃거리가 될 만한 일들을 물었다고 했는데, 윤생과 신생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던 듯하다.
[주D-003]서학동(西學洞) : 한양의 사학(四學)의 하나인 서학(西學)이 있던 동네로, 현재 태평로 1가 조선일보사 부근이다.
[주D-004]누각동(樓閣洞) : 누각골이라고도 한다. 누상동(樓上洞), 누하동(樓下洞), 체부동(體府洞)에 걸쳐 있었던 마을이다. 서리(胥吏)들의 거주지로 인왕산 아래 누각이 있었으므로 누각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주D-005]미원동(美垣洞) : 미동(美洞)을 가리키는 듯하다. 미동은 현재 을지로 1가 소공동 북쪽에 해당한다.
[주D-006]서 초관(徐哨官) : 초관(哨官)은 군대의 편제인 초(哨)의 우두머리로 종 9 품의 벼슬이다.
[주D-007]모교(毛橋) : 청계천에 놓인 다리의 하나로, 모전교(毛廛橋)라고도 한다. 현재의 무교동과 서린동의 사거리 지점에 있었다.
[주D-008]사복천(司僕川) : 한양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 수송동 일대)에 있던 사복시(司僕寺) 앞의 계천(溪川)이다.
[주D-009]지 승(池丞) : 승(丞)은 서(署) · 시(寺) · 감(監) 등 중앙의 각 관청에 있었던, 종 5 품에서 종 9 품에 걸친 벼슬이다.
[주D-010]이문안〔里門內〕 : 한양 중부에 있던 동네로, 이문동(里門洞)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의 종로구 공평동 삼성타워(예전 화신백화점 자리) 뒤편에서 태화빌딩(옛날 順化宮과 태화관 자리)에 이르는 골목 일대에 해당한다.
[주D-011]창동(倉洞) : 남대문 안 선혜청(宣惠廳)의 창고 부근에 있었던 동네로, 현재 남대문 시장이 있는 남창동 일대이다.
[주D-012]동관(董關) …… 소릉(小陵) : 동관은 미상(未詳)이다. 배오개는 현재 종로 4가 인의동에 있었던 고개이고, 구리개는 현재 을지로 입구, 롯데백화점 맞은편에 있었던 고개이다. 자수교는 현재 옥인동과 효자동 · 궁정동이 만나는 곳에 있던 다리로, 조선 시대에 후궁들의 거처로 쓰인 자수궁(慈壽宮)이 있었던 곳이어서 자수궁교라고도 하였다. 사동은 사직단(社稷壇 : 현재 사직공원) 부근의 동네이다. 장동은 장의동(壯義洞)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효자동 · 궁정동 · 청운동 일대이다. 대릉과 소릉은 각각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가리킨다. 원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으로, 현재 중구 정동 일대이다.
[주D-013]장창교(長暢橋) :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의 하나로 한양 중부 장통방(長通坊 : 현재 장교동, 관철동 일대)에 있었다. 장창교(長倉橋), 장통교(長通橋), 장교(長橋)라고도 불렸다.
[주D-014]홍기가 …… 것이다 :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작품의 서두에서는 김홍기가 16세에 장가들었다고 하였다. 설령 그가 열아홉에 장가들었다고 해도 그때 낳은 아들이 스무 살 전후가 되었다면 홍기의 현재 나이는 마흔 살쯤이라야 한다.
[주D-015]그 이듬해 …… 바라보았다 : 박종채의 《과정록》에는 연암이 금강산을 유람한 것은 2년 뒤인 을유년(1765, 영조 41) 가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주D-016]선암(船菴) : 내금강(內金剛) 표훈사(表訓寺)에 딸린 암자이다.
[주D-017]진주담(眞珠潭) : 금강산 입구 만폭동(萬瀑洞)의 팔담(八潭) 중 가장 장대한 명승지이다.
[주D-018]영원(靈源)과 백탑(白塔) : 골짜기의 이름으로, 내금강 명경대(明鏡臺) 구역에 있는 명승지들이다.
[주D-019]신 …… 뿐이었다 : 신선이 득도하여 승천(昇天)한 증거로 흔히 신발만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을 든다.
[주D-020]나는 : 원문은 ‘余’인데, 이본에는 ‘除’로 되어 있다. 이본에 따라 번역하자면 ‘除’는 섬돌의 뜻으로 앞 구에 연결되어 “신 두 짝만 섬돌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로 해석된다.
[주D-021]어떤 …… 의미한다 : 《석명(釋名)》이나 《자휘(字彙)》 등의 사전류에서 ‘仙’ 자를 풀이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우상전(虞裳傳)
일본 관백(關白)이 새로 들어서자, 널리 재정을 비축하고 이궁(離宮)과 별관을 수리하고 선박을 정비하고서, 속국의 각 섬들에서 남다른 재주를 갖춘 검객과 기이한 기예를 갖춘 사람과 서화나 문학에 재능이 있는 인사를 샅샅이 긁어내어, 도읍으로 불러 모아놓고 수년 동안 훈련을 시킨 다음에, 마치 시험 문제 내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우리나라에 사신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3품 이하의 문관을 엄선하여 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사신을 보좌하는 이들도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식견이 많은 자들이었으며, 천문, 지리, 산수(算數), 복서(卜筮), 의술, 관상, 무예에 뛰어난 자들로부터, 피리나 거문고 등의 연주, 해학이나 만담, 음주 가무, 장기, 바둑, 말타기, 활쏘기 등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재주로써 나라 안에서 이름난 자들을 모두 딸려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시문(詩文)과 서화(書畵)를 가장 중하게 여겼으니, 조선 사람이 쓴 글을 한 자라도 얻는다면 양식을 지니지 않아도 천 리를 갈 수 있었다.
사신들이 거처하는 건물은 모두 비췻빛 구리 기와를 이었고 섬돌은 무늬를 아로새긴 돌이었으며 기둥과 난간에는 붉은 옻칠을 하고, 휘장은 화제주(火齊珠), 말갈아(靺鞨芽), 슬슬(瑟瑟) 등으로 치장하고, 식기는 모두 금은(金銀)으로 도금하여 사치스럽고 화려하였다. 천 리를 가는 동안 그들은 곳곳에 기묘한 볼거리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찮은 포정(庖丁)이나 역부(驛夫)에게까지도 의자에 걸터앉아 발을 비자(枇子)나무로 만든 통에 드리우게 하고 꽃무늬 적삼 입은 왜놈 아이종으로 하여금 씻어 주게 하였다. 이처럼 그들이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며 존모(尊慕)의 뜻을 보였으나, 우리 역관들이 호랑이 가죽, 표범 가죽, 담비 가죽, 인삼 등 금지된 물건들을 가져다 보석과 보도(寶刀)와 몰래 바꾸는 바람에 그곳의 거간꾼들이 이익을 노려 재물에 목숨을 걸기를 마치 말이 치달리듯 하니, 그 이후로는 왜인들이 겉으로만 공경하는 척할 뿐 더 이상 문명인으로 존모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상(虞裳)만은 한어(漢語)의 통역관으로 수행하여 홀로 문장으로 일본에 큰 명성을 날렸다. 이에 일본의 이름난 중이나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기를, “운아(雲我) 선생은 둘도 없는 국사(國士)이다.” 라고 하였다. 오사카〔大阪〕 이동(以東)에는 중들이 기생처럼 많고 절들이 여관처럼 즐비한데, 도박에 돈을 걸듯이 시문(詩文)을 지어 보이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이 수전(繡牋)과 화축(花軸)을 상에 그득 쌓아놓고, 대개는 어려운 글제와 억센 운(韻)을 내어 궁지에 몰려 했으나 우상은 매번 즉석에서 읊어 대기를 마치 진작에 지어 놓은 것을 외우듯이 하였으며, 운을 맞추는 것도 평탄하고 여유가 있었다. 자리가 파할 때까지도 피로한 기색이 없었으며 기운 없는 글귀가 없었다.
그가 지은 《해람편(海覽篇)》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지 안에 널려 있는 일만 나라가 / 坤輿內萬國
바둑알 놓이듯 별이 깔리듯 / 碁置而星列
머리 틀어 상투 쫒은 우월(于越)의 나라 / 于越之魋結
머리를 박박 깎은 인도의 나라 / 竺乾之祝髮
소매 너른 옷 입은 제로(齊魯)의 나라 / 齊魯之縫腋
모포를 뒤집어쓴 호맥(胡貊)의 나라 / 胡貊之氈毼
혹은 문명하여 위의를 갖추기도 하고 / 或文明魚雅
혹은 미개하여 음악이 요란스럽기만 하네 / 或兜離侏佅
무리로 나뉘고 끼리끼리 모여서 / 群分而類聚
온 땅에 펼쳐진 게 모두 인간인데 / 遍土皆是物
일본이란 나라를 볼작시면 / 日本之爲邦
깊은 파도 넘실대는 섬나라 / 波壑所蕩潏
숲 속엔 부목이 울창하여 / 其藪則搏木
그곳에선 해돋이를 볼 수 있고 / 其次則賓日
여인네 하는 일은 비단에 수놓기요 / 女紅則文繡
토산품은 등자와 귤이며 / 土宜則橙橘
고기 중에 괴이한 게 낙지라면 / 魚之怪章擧
나무 중에 기이한 건 소철이라네 / 木之奇蘇鐵
그 진산(鎭山)과 방전(芳甸 방초 무성한 들판)은 / 其鎭山芳甸
구진성(句陳星)처럼 차례로 섬들이 늘어서 있어 / 句陳配厥秩
남북으론 가을과 봄이 다르고 / 南北春秋異
동서로는 낮과 밤이 갈라지도다 / 東西晝夜別
중앙은 그릇 엎어 놓은 것과 같아서 / 中央類覆敦
꼭대기엔 태곳적 눈이 영롱하네 / 嵌空龍漢雪
그늘로 소 떼를 뒤덮는 큰 나무와 / 蔽牛之鉅材
까치 잡는 데나 쓰이는 흔한 옥돌과 / 抵鵲之美質
단사나 금이나 주석들이 / 與丹砂金錫
모두 다 산에서 흔히 나온다네 / 皆往往山出
오사카는 큰 도회지라 / 大阪大都會
진기한 보물들은 용궁의 보물을 다 털어낸 듯 / 瓌寶海藏竭
기이한 향은 용연향(龍涎香)을 사른 것이요 / 奇香爇龍涎
보석은 아골석(雅鶻石)을 쌓아 놓았네 / 寶石堆雅骨
입에서 뽑은 코끼리 어금니 / 牙象口中脫
머리에서 잘라낸 무소뿔 / 角犀頭上截
페르시아의 상인들도 눈이 부셔하고 / 波斯胡目眩
절강의 저자들도 빛이 바랬네 / 浙江市色奪
온 섬이 지중해를 이루어 / 寰海地中海
오만 가지 산 것들이 구물거려라 / 中涵萬象活
돛을 펼친 후어(鱟魚)의 등이며 / 鱟背帆幔張
깃발을 달아맨 해추(海鰌)의 꼬리며 / 鰌尾旌旗綴
다닥다닥 붙은 굴은 벌집 같은데 / 堆壘蠣粘房
굴 더미 등에 진 거북은 소굴에서 쉬네 / 屭贔龜次窟
산호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珊瑚海
번쩍번쩍 음화가 타오르고 / 煜耀陰火烈
검푸른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紺碧海
노을 비치어 갖가지 빛깔이로세 / 霞雲衆色設
수은 바다로 문득 변하니 / 忽變水銀海
수만 개가 뿌려진 큰 별 작은 별 / 星宿萬顆撒
커다란 염색가게로 문득 변하니 / 忽變大染局
천 필의 능라 비단 찬란도 하고 / 綾羅爛千匹
커다란 용광로로 문득 변하니 / 忽變大鎔鑄
오금의 빛이 터져 퍼지네 / 五金光迸發
용이 하늘을 가르며 힘차게 나니 / 龍子劈天飛
천 벼락 만 번개가 치고 / 千霆萬電戞
발선과 마갑주는 / 髮鱓馬甲柱
신비하고 기괴해 마구 얼을 빼네 / 秘怪恣怳惚
백성들은 알몸에다 관을 썼는데 / 其民裸而冠
독하게 쏘아 대니 속이 전갈 같구나 / 外螫中則蝎
일 만나면 죽 끓듯 요란 떨고 / 遇事則麋沸
사람을 모략할 땐 쥐처럼 교활하네 / 謀人則鼠黠
이익을 탐낼 땐 물여우가 독을 쏘듯 / 苟利則蜮射
조금만 거슬려도 돼지처럼 덤벼들고 / 小拂則豕突
계집들은 남자에게 농지거리 잘하고 / 婦女事戱謔
아이들은 잔꾀를 잘 부리네 / 童子設機括
조상은 등지면서 귀신에 혹하고 / 背先而淫鬼
살생을 즐기면서 부처에 아첨하네 / 嗜殺而侫佛
글자는 제비 꼬락서니 못 면하고 / 書未離鳥鳦
말은 때까치 울음소리나 다를 바 없네 / 詩未離鴃舌
남녀간은 사슴처럼 문란하고 / 牝牡類麀鹿
또래끼린 물고기처럼 몰려다니며 / 友朋同魚鱉
씨부려 대는 소린 새 지저귀듯 / 言語之鳥嚶
통역들도 잘 알지 못한다네 / 象譯亦未悉
진귀한 풀과 나무들은 / 草木之瓌奇
나함조차 자기 책을 불사를 지경 / 羅含焚其帙
수없이 뻗어 있는 물길들은 / 百泉之源滙
역생조차 항아리 속 진디등에로 만드네 / 酈生瓮底蠛
요사스러운 수족들은 / 水族之弗若
사급조차 도설을 덮게 하고 / 思及閟圖說
도검에 새겨진 꽃무늬와 글자들은 / 刀劒之款識
정백이 속편을 다시 지어야 하리 / 貞白續再筆
지구상의 차이며 / 地毬之同異
섬들의 등급에 관해서는 / 海島之甲乙
서태 이마두가 / 西泰利瑪竇
치밀하고 명쾌하게 밝혀 놓았네 / 線織而刃割
무식한 제가 이 시를 지어 바치노니 / 鄙夫陳此詩
말은 촌스러도 뜻은 퍽 진실하이 / 辭俚意甚實
이웃 나라와 잘 지내는 큰 계략 있으니 / 善隣有大謨
잘 구슬려서 화평을 잃지 마소 / 羈縻和勿失
위의 시로 볼 때 우상 같은 자는 이른바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겠는가. 신종(神宗) 만력(萬曆) 임진년에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우리나라를 엄습하여, 우리의 삼도(三都)를 유린하고 우리의 노약자들을 코를 베어 욕보였으며 왜철쭉과 동백을 우리나라 각지에 심었다.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이 의주로 피난을 가서 천자께 사연을 아뢰자, 천자가 크게 놀라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동으로 구원을 보냈다. 당시에 대장군(大將軍) 이여송(李如松), 제독(提督) 진린(陳璘) · 마귀(麻貴) · 유정(劉綎) · 양원(楊元)은 모두 다 옛날 명장의 기풍이 있었으며, 어사(御史) 양호(楊鎬) · 만세덕(萬世德) · 형개(邢玠)는 재주가 문무(文武)를 겸하고 도략이 귀신을 놀래킬 만했으며, 그 군사 역시 모두 진봉(秦鳳) · 섬서(陝西) · 절강(浙江) · 운남(雲南) · 등주(登州) · 귀주(貴州) · 내주(萊州)의 날랜 기병과 활 잘 쏘는 군사들이며, 대장군의 가동(家僮) 1000여 명과 유계(幽薊)의 검객들이었다. 그런데도 끝내 왜적과 화평을 맺고 겨우 나라 밖으로 몰아내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수백 년 동안 사신의 행차가 자주 에도〔江戶〕를 내왕하였다. 그러나 사신으로서 체통을 지키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치중하느라 그 나라의 민요, 인물(人物), 요새, 강약(强弱)의 형세에 대해서는 마침내 털끝만큼도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그저 왔다갔다만 하였다. 그런데 우상은 힘으로는 붓대 하나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지만, 그 나라의 정화(精華)를 붓끝으로 남김없이 빨아들여 섬나라 만리의 도성(都城)으로 하여금 산천초목이 다 마르게 하였으니, 비록 ‘붓대 하나로써 한 나라를 무너뜨렸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상의 이름은 상조(湘藻)이다. 일찍이 손수 제 화상(畵像)에 제(題)하기를,
공봉백(供奉白)과 업후필(鄴侯泌)이 / 供奉白鄴侯泌
철괴와 합쳐 창기가 되니 / 合鐵拐爲滄起
옛 시인과 옛 선인 / 古詩人古仙人
옛 산인이 모두 다 이씨(李氏)라네 / 古山人皆姓李
했는데, 이(李)는 그의 성이요, 창기(滄起)는 그의 또 다른 호이다.
대체로 선비란 자신을 알아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고 자신을 몰라주는 이 앞에서는 재능을 펴지 못하는 법이다. 교청(鵁鶄 푸른 백로)과 계칙(鸂鶒 자원앙(紫鴛鴦))은 새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새이지만, 그럼에도 제 깃털에 도취되어 물에 비추어 보고 서 있다가 다시 하늘을 맴돌다 내려앉거늘, 사람이 지닌 문장을 어찌 고작 새 깃털의 아름다움에 비하겠는가. 옛날에 경경(慶卿)이 밤에 검술을 논하자 합섭(蓋聶)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어 나가게 하였으며, 고점리(高漸離)가 축(筑)을 연주하자 형가(荊軻)가 화답하여 노래하더니 이윽고 주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붙들고 운 일이 있었다. 무릇 그 즐거움이야 극에 달했겠지만, 더 나아가 울기까지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 복받쳐서 엉겁결에 슬퍼진 것이다. 비록 그 당사자에게 물어본다 해도 역시 그때 제 마음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문장으로써 서로 높이고 낮추고 하는 것이 어찌 구구한 검사(劒士)의 한 기예 정도에 비할 뿐이겠는가? 우상은 아마도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사람일까? 그의 말에 어쩌면 그렇게도 슬픔이 많단 말인가? 그의 시에,
닭의 머리 위 벼슬은 높기가 관과 같고 / 鷄戴勝高似幘
소의 축 처진 멱미레는 크기가 전대 같네 / 牛垂胡大如袋
집에 있는 보통 물건이란 하나도 기이할 것 없지만 / 家常物百不奇
크게 놀랍고 괴이한 건 낙타의 등이로세 / 大驚怪槖駝背
하였으니, 우상은 늘 자신을 남다르게 여겼던 것이다. 병이 위독하여 죽게 되자 그동안 지어 놓은 작품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누가 다시 알아주겠는가.”
하였으니, 그 뜻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공자가 말하기를,
“재주 나기가 어렵다는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또,
“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하였다. 자공(子貢)이 묻기를,
“저는 무슨 그릇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너는 호련(瑚璉)이다.”
하였다. 이는 자공의 재주를 칭찬하면서도 작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덕은 그릇에 비유되고 재주는 그 속에 담기는 물건에 비유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결이 쪼록쪼록 저 옥 술잔이여, 황금빛 울창주가 그 속에 들었도다.”라 했고, 《주역》에 이르기를 “솥이 발이 부러져 공(公)의 먹을 것이 엎어졌도다.” 했으니, 덕만 있고 재주가 없으면 그 덕이 빈 그릇이 되고, 재주만 있고 덕이 없으면 그 재주가 담길 곳이 없으며, 있다 해도 그 그릇이 얕으면 넘치기가 쉽다. 인간은 천지(天地)와 나란히 서니 바로 삼재(三才)가 된다. 그러므로 귀신은 재(才)에 속하며 천지는 큰 그릇이 아니겠는가? 깔끔을 떠는 자에게는 복이 붙을 데가 없고, 남의 정상(情狀)을 잘 꿰뚫어 보는 자에게는 사람이 붙지를 않는 법이다. 문장이란 천하의 지극한 보배이다. 오묘한 근원에서 정화(精華)를 끄집어내고, 형적이 없는 데서 숨겨진 이치를 찾아내어 천지 음양의 비밀을 누설하니, 귀신이 원망하고 성낼 것은 뻔한 일이다. 재목〔木〕 중에 좋은 감〔才〕이 있으면 사람이 베어 갈 생각을 하고, 재물〔貝〕 중에 좋은 감〔才〕이 있으면 사람이 뺏어 갈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재목 재(材) 자와 재물 재(財) 자 속에 있는 ‘재(才)’ 자의 글자 모양이 밖으로 삐치지 않고 안으로 삐치는 것이다.
우상은 일개 역관에 불과한 자로서, 나라 안에 있을 때는 소문이 제 마을 밖을 벗어나지 못하였고 벼슬아치들이 그의 얼굴조차 몰랐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름이 바다 밖 만리의 나라에 드날리고, 몸소 곤어(鯤魚)와 고래와 용과 악어의 소굴까지 뒤졌으며, 솜씨는 햇빛과 달빛으로 씻은 듯 환히 빛났고, 기개는 무지개와 신기루에 닿을 듯이 뻗치었다. 그러므로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 것이며,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본해(勝本海)를 지나면서 다음의 시를 지었다.
맨발의 왜놈 사내 몰골조차 괴상한데 / 蠻奴赤足貌魀
압색의 윗도리 등엔 별과 달이 그려져 있네 / 鴨色袍背繪星月
꽃무늬 적삼 입은 계집들 달음질해 문 나서니 / 花衫蠻女走出門
머리 빗다 못 마친 양 그 머리 동여 맸네 / 頭梳未竟髽其髮
어린아이 칭얼대며 어미 젖을 빨아 대니 / 小兒號嗄乳母乳
어미가 등을 토닥이자 울음소리 잦아드네 / 母手拍背鳴嗚咽
이윽고 북 울리며 관인이 들어오니 / 須臾擂鼓官人來
오만 눈이 둘러싸고 활불인 양 여기누나 / 萬目圍繞如活佛
왜놈 관리 무릎 꿇고 절하며 값진 보물 올리는데 / 蠻官膜拜獻厥琛
산호랑 대패를 소반 받쳐 내오누나 / 珊瑚大貝擎盤出
주인과 손님이 늘어섰으나 실로 벙어리인 양 / 眞如啞者設賓主
눈짓으로 말을 하고 붓끝으로 얘기하네 / 眉睫能言筆有舌
왜놈의 관부(官府)에도 정원 풍취 풍부하여 / 蠻府亦耀林園趣
종려나무 푸른 귤이 뜨락에 가득 찼네 / 栟櫚靑橘配庭實
배 안에서 치질 병이 생겨 매남노사(梅南老師)의 말을 누워 생각하며 다음의 시를 지었다.
공자의 유교와 석가의 불교는 / 宣尼之道麻尼敎
각각 경세와 출세로서 해라면 달이로세 / 經世出世日而月
서양 선비 일찍이 오인도 가 보았으나 / 西士嘗至五印度
과거나 현재에 부처 하나 없었다오. / 過去現在無箇佛
유가에도 장사꾼이 있기로는 마찬가지 / 儒家有此稗販徒
붓과 혀를 까불려서 괴이한 말 퍼뜨려 / 弄筆舌神吾說
산발을 하고 뿔이 난 채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 披毛戴角墜地犴
생시에 남 속인 죄 마땅히 받으리라 / 當受生日欺人律
해독의 불길이 진단의 동쪽에도 미쳐 와서 / 毒焰亦及震旦東
화려하고 큰 절들이 도시와 시골에 널렸구려 / 精藍大衍都鄙列
섬 백성 흘겨보며 화복으로 겁을 주니 / 睢盱島衆怵禍福
향화(香火)라 공양미가 끊일 날이 없고말고 / 炷香施米無時缺
비하자면 제 자식이 남의 자식 죽여 놓고 / 譬如人子戕人子
들어와 봉양하면 어느 부모 좋아하리 / 入養父母必不說
육경이 중천에서 밝은 빛을 비추는데 / 六經中天揚文明
이 나라 사람들은 눈에 옻칠한 듯하네 / 此邦之人眼如漆
양곡이나 매곡이 이치가 둘이겠나 / 暘谷昧谷無二理
순종하면 성인 되고 배반하면 악인 되네 / 順之則聖背檮杌
우리 스승 나더러 대중에게 고하라기 / 吾師詔吾詔介衆
목탁 대신 이 시 지어 네거리에 울리노라 / 以詩爲金口木舌
우상의 이러한 시들은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하다. 나중에 머물렀던 곳을 다시 들렀더니 그새 이 시들이 모두 책으로 인출(印出)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상과는 생전에 상면이 없었다. 그러나 우상은 자주 사람을 시켜 나에게 시를 보여 주며 하는 말이,
“유독 이분만이 나를 알아줄 수 있을 것이다.”
했다기에, 나는 농담 삼아 그 사람더러 이르기를,
“이거야말로 오농(吳儂)의 간드러진 말투이니 너무 잗달아서 값나갈 게 없다.”
했더니, 우상이 성을 내며,
“창부(傖夫)가 약을 올리는군!”
하고는 한참 있다가 마침내 한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세상에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고 두어 줄의 눈물을 쏟았다기에, 나 역시 듣고서 슬퍼했다.
얼마 후 우상이 죽으니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그의 집안사람이 꿈속에서, 신선이 술에 취하여 푸른 고래를 타고 가고 그 아래로 검은 구름이 드리웠는데 우상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얼마 후에 우상이 죽으니, 사람들 가운데는 “우상이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들 말하기도 하였다. 아! 나는 일찍이 속으로 그 재주를 남달리 아꼈다. 그럼에도 유독 그의 기를 억누른 것은, 우상이 아직 나이 젊으니 머리를 숙이고 도(道)로 나아간다면, 글을 저술하여 세상에 남길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우상은 필시 나를 좋아할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상의 죽음에 대해 만가(輓歌)를 지은 이가 있어 노래하기를,
오색을 두루 갖춘 비범한 새가 / 五色非常鳥
우연히도 지붕 꼭대기에 날아 앉았네 / 偶集屋之脊
뭇사람들 다투어 달려가 보니 / 衆人爭來看
놀라 일어나 홀연 자취를 감추었네 / 驚起忽無跡
하였고, 그 두 번째 노래에,
까닭 없이 천금을 얻고 나면은 / 無故得千金
그 집엔 재앙이 따르는 법 / 其家必有災
더구나 이처럼 세상에 드문 보배를 / 矧此稀世寶
오래도록 빌릴 수 있으리요 / 焉能久假哉
하였고, 그 세 번째 노래에,
조그마한 하나의 필부였건만 / 渺然一匹夫
죽고 나니 사람 수가 준 걸 알겠네 / 死覺人數減
세도와 관련된 일이 아니겠는가 / 豈非關世道
사람들은 빗방울처럼 많다마는 / 人多如雨點
하였다. 또 노래하기를,
그 사람은 쓸개가 박마냥 크고 / 其人膽如瓠
그 사람은 눈빛이 달같이 밝고 / 其人眼如月
그 사람은 팔목에 귀신 붙었고 / 其人腕有鬼
그 사람은 붓끝에 혀가 달렸네 / 其人筆有舌
하였고, 또,
남들은 아들로써 대를 잇지만 / 他人以子傳
우상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 / 虞裳不以子
혈기야 때로는 끊어지지만 / 血氣有時盡
명성은 끝질 날이 없으리 / 聲名無窮已
하였다.
나는 이전에 우상을 보지 못하여 매양 한스럽게 여겼는데, 그 문장까지 불살라서 남은 것이 없다 하니, 세상에 그를 알 사람이 더욱 없게 되었다. 그래서 상자 속에 오래 수장한 것을 꺼내어 그가 예전에 보여 준 것을 찾았는데, 겨우 두어 편뿐이었다. 이에 모조리 다 기록하여 우상전을 지었다.
우상에게 아우가 있는데, 그 역시도 - 이하 원문 빠짐 -
[주D-001]일본 …… 들어서자 : 관백은 천황을 대신하여 섭정(攝政)한다는 뜻으로, 막부(幕府)의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을 가리킨다. 제 10 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1761년(영조 37) 정식으로 관백에 즉위하였다.
[주D-002]속국 : 당시 일본은 기내(畿內) 5국(國), 동해도(東海道) 15국, 동산도(東山道) 8국, 북륙도(北陸道) 7국, 산음도(山陰道) 8국, 산양도(山陽道) 8국, 남해도(南海道) 6국, 서해도(西海道) 9국 등의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蜻蛉國志 卷2 輿地》
[주D-003]삼사(三使)를 갖추어 보냈다 : 영조 39년(1763) 정사(正使) 조엄(趙曮), 부사(副使) 이인배(李仁培), 종사관(從事官) 김상익(金相翊)을 통신사(通信使)의 삼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주D-004]섬돌은 …… 돌이었으며 : 원문은 ‘除嵌文石’인데, 무늬 있는 돌로 된 궁궐의 섬돌을 ‘문석계(文石階)’ 또는 ‘문석지계(文石之階)’라고 한다.
[주D-005]화제주(火齊珠) : 보석의 일종으로 청색, 홍색, 황색 등 빛깔이 다양하다. 매괴주(玫瑰珠)라고도 하며 일설에는 유리(琉璃)라고도 한다.
[주D-006]말갈아(靺鞨芽) : 보석의 일종으로 붉은빛을 띤다. 홍마노(紅瑪瑙)라고도 하며 주로 말갈 지역에서 생산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주D-007]슬슬(瑟瑟) : 보석의 일종으로 푸른빛을 띤다. 녹주(綠珠)라고도 한다.
[주D-008]우상(虞裳) : 이언진(李彦瑱 : 1740~1766)의 자(字)이다. 호는 운아(雲我), 송목관(松穆館) 등이다.
[주D-009]《해람편(海覽篇)》 : 이언진의 《송목관신여고(松穆館燼餘稿)》와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도 수록되어 있다. 《송목관신여고》는 1860년에 저자의 시문(詩文) 잔편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본으로서 같은 해에 중국과 조선 두 곳에서 함께 출간되었다. 중국본은 이상적(李尙迪)이 간행한 목판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고, 조선본은 후손 이진명(李鎭命) 등이 간행한 활자본(한국문집총간 252집)이다. 그리고 《청장관전서》는 1809년경에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재편한 것을 1900년대 초에 등사한 본(한국문집총간 258집)으로서 이들 《송목관신여고》 2종을 포함한 4종의 판본 사이에는 글자나 구절상의 차이가 다소 있다.
[주D-010]대지 …… 나라가 : 마테오리치〔利瑪竇〕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가리킨다.
[주D-011]소매 …… 나라 : 제로(齊魯)는 제 나라와 노 나라로, 공자와 맹자가 태어난 문화국가이다. 공자는 노 나라에서 성장하여 소매 너른 옷을 입었다고 한다. 《禮記 儒行》 봉액(縫腋)은 봉액(逢掖)이라고도 하며, 옷 소매가 넓은 유자(儒者)의 복장을 가리킨다.
[주D-012]모포를 …… 나라 : 호맥(胡貊)은 중국 북방에 사는 흉노(匈奴) 등의 민족을 가리킨다. 원문의 ‘氈’가 《송목관신여고》에는 ‘氀’로 되어 있다.
[주D-013]부목(搏木) : 부상(扶桑), 부상(榑桑), 부상(搏桑)이라고도 하며, 전설상 해 돋는 곳에서 자란다는 신목(神木)이다. 일본을 가리키기도 한다. 원문의 ‘搏’는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榑’로 되어 있다.
[주D-014]나무 …… 소철이라네 : 원문의 ‘木’과 ‘奇’가 《송목관신여고》 및 《청장관전서》에는 ‘卉’와 ‘怪’로 되어 있다.
[주D-015]구진성(句陳星) : 자미원(紫微垣)에 속하는 별로, 모두 6개의 소성(小星)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D-016]그늘로 …… 나무 :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장석(匠石)이 제(齊) 나라에 가서 신목(神木)을 보았는데 그 크기가 수천 마리의 소를 그늘로 가릴 정도나 된다.” 하였다.
[주D-017]까치 …… 옥돌 :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곤륜산(崑崙山) 근처에서는 박옥(璞玉)으로 까치를 잡는다.” 하였다. 즉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아주 흔하게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D-018]진기한 …… 듯 : 《송목관신여고》 및 《청장관전서》에는 이 구절 다음에 “빛나는 것은 수시은(朱提銀)이요 둥근 것은 말갈아(靺鞨芽)요 붉은 것 푸른 것은 화제주(火齊珠)와 슬슬(瑟瑟)이라네.〔光者是朱提 圓者是靺鞨 赤者與綠者 火齊映瑟瑟〕”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주D-019]용연향(龍涎香) : 고래의 분비물로 만든 명향(名香)의 이름이다.
[주D-020]아골석(雅鶻石) : 슬슬(瑟瑟)과 비슷한 청록색 보석이다. 《송목관신여고》에는 ‘雅’가 ‘鴉’로 되어 있다.
[주D-021]절강의 …… 바랬네 :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수레를 밀며 떼 지어 몰려가니 수많은 거간꾼들 늘어섰는데〔却車而攈至 駔儈千戶埒〕”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주D-022]돛을 …… 등이며 : 후어(鱟魚)는 참게를 말한다. 등 위에는 7, 8촌(寸) 되는 껍질이 있는데 바람이 없으면 이 껍질을 눕히고 바람이 불면 이 껍질을 돛처럼 펴서 바람을 타고 다닌다고 한다. 《酉陽雜俎》
[주D-023]깃발을 …… 꼬리며 : 해추(海鰌)는 꼬리지느러미가 솟아 있는 긴흰수염고래를 말한다. 유순(劉恂)의 《영표록이(嶺表錄異)》에 의하면 그 지느러미가 붉은 깃발을 흔드는 것 같다고 하였다.
[주D-024]다닥다닥 붙은 : 원문의 ‘壘’가 《송목관신여고》에는 ‘磊’로, 《청장관전서》에는 ‘疊’으로 되어 있다.
[주D-025]음화(陰火) : 산호가 물 속에서 내는 빛을 가리킨다.
[주D-026]오금(五金) : 황색의 금, 백색의 은, 적색의 구리, 청색의 납, 흑색의 철을 가리킨다.
[주D-027]하늘을 가르며 : 원문의 ‘劈天’이 《송목관신여고》에는 ‘擘天’으로 되어 있다.
[주D-028]천 벼락 …… 치고 : 이 구절이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千電萬霆戞’, 조선본에는 ‘雷霆極閃戞’로 되어 있고,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동쪽 구름 사이론 용의 비늘과 발톱이 번뜩이고 서쪽 구름 사이론 지체가 드러났네.〔東雲閃鱗爪 西雲露肢節〕”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주D-029]발선(髮鱓)과 마갑주(馬甲柱) : 발선은 드렁허리의 일종이다. 마갑주는 살조개, 또는 꼬막이라고 하며, 그 육주(肉柱)가 맛있다.
[주D-030]죽 끓듯 : 원문의 ‘麋’가 《송목관신여고》 조선본과 《청장관전서》에는 ‘糜’로 되어 있다.
[주D-031]조금만 거슬려도 : 원문의 ‘拂’이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怒’로 되어 있다.
[주D-032]글자는 …… 면하고 : 원문의 ‘鳥鳦’은 ‘鳦鳥’ 즉 제비를 뜻한다. 한자의 초서체(草書體)에서 만들어진 일본의 히라카나〔平假名〕가 제비 모양과 같다고 풍자한 것이다. 《송목관신여고》에는 ‘鳥鳦’이 ‘鳥跡’으로 되어 있는데, ‘鳥跡’은 조전(鳥篆), 즉 새의 형태와 같은 장식을 가하여 전체(篆體) 비슷하게 된 예술적인 자체(字體)를 가리키는 것으로 춘추전국 시대에 유행하였다. 따라서 ‘鳥跡’으로 하면 일본의 글자 모양과는 무관하게 된다.
[주D-033]말은 : 원문의 ‘詩’가 《송목관신여고》에는 ‘語’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34]때까치 울음소리 : 다른 나라의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鴃舌’이라고 한다.
[주D-035]남녀간은 사슴처럼 문란하고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저 금수(禽獸)만은 예가 없다. 그러므로 부자가 암컷을 공유한다.〔父子聚麀〕”고 하였다.
[주D-036]또래 : 원문의 ‘友朋’이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朋流’로 되어 있다.
[주D-037]새 지저귀듯 : 원문의 ‘鳥嚶’이 《송목관신여고》에는 ‘啁啾’로 되어 있다.
[주D-038]통역들도 …… 못한다네 : 이 구절이 《송목관신여고》 및 《청장관전서》에는 ‘鞮象譯未悉’로 되어 있다.
[주D-039]나함(羅含) : 동진(東晉) 때의 인물로서 상수(湘水) 지역의 산수를 다룬 《상중산수기(湘中山水記)》를 저술하였다.
[주D-040]역생(酈生) : 북위(北魏) 때의 인물인 역도원(酈道元 : 466~527)을 가리킨다. 그는 중국지리학의 명저인 《수경주(水經注)》를 저술하였다.
[주D-041]항아리 속 진디등에 : ‘우물 안 개구리’와 비슷한 말로 식견이 좁다는 뜻이다.
[주D-042]사급(思及) :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艾儒略 : Julio Aleni, 1582~1649〕의 자(字)이다. 그는 명 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와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저술하였다. 그 내용은 권두에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수록한 뒤 아시아 등 오대주에 대해 기록하고 사해총설(四海總說)을 덧붙여 각국의 풍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주D-043]꽃무늬와 글자 : 원문의 ‘識’이 《송목관신여고》에는 ‘銘’으로 되어 있다.
[주D-044]정백(貞白) : 양(梁) 나라 때의 인물인 도홍경(陶弘景 : 452~536)의 시호이다. 그는 역대 제왕들과 각국 인물들의 도검(刀劍)에 대하여 기술한 《고금도검록(古今刀劍錄)》을 저술하였다.
[주D-045]서태(西泰) 이마두(利瑪竇) : 서태는 마테오리치(Matteo Ricci)의 자(字)이다. ‘西泰’가 《송목관신여고》에는 서양을 뜻하는 ‘泰西’로 되어 있다.
[주D-046]치밀하고 …… 놓았네 : 원문의 ‘刃’이 《송목관신여고》에는 ‘刀’로 되어 있다.
[주D-047]말은 촌스러도 : 원문의 ‘辭俚意’가 《송목관신여고》에는 ‘語俚義’로 되어 있다.
[주D-048]잘 …… 마소 : 기미(羈縻)란 말에 굴레를 씌우거나 소에 고삐를 매어 통제한다는 뜻으로, 억센 상대를 회유(懷柔)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은 주변의 이민족(異民族)들에 대해 ‘잘 구슬리면서 외교 관계를 끊지 않는〔羈縻勿絶〕’ 정책을 취하였다.
[주D-049]삼도(三都) : 경주〔東都〕, 한양, 평양〔西都〕을 가리킨다.
[주D-050]진봉(秦鳳) : 봉상부(鳳翔府)의 진계(秦階), 농봉(隴鳳) 일대를 가리킨다. 《大淸一統志》
[주D-051]유계(幽薊) : 거란(契丹)이 지배했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 등 연운(燕雲) 16주(州)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산서성(山西省)의 북부 일대에 해당한다. 유주와 계주의 치소(治所)는 각각 지금의 북경(北京)과 하북성 계현(薊縣)에 있었다.
[주D-052]상조(湘藻) : 상조는 이언진이 스스로 지은 또 하나의 이름이다. 《淸脾錄 卷3 李虞裳》
[주D-053]공봉백(供奉白) : 당(唐) 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가리킨다. 공봉한림(供奉翰林)에 제수되었으므로 공봉백이라 한 것이다.
[주D-054]업후필(鄴侯泌) : 당 나라 문장가 이필(李泌 : 722~789)을 가리킨다. 신선술을 좋아하였다. 업후(鄴侯)에 봉하여졌으므로 업후필이라 한 것이다.
[주D-055]철괴(鐵拐) : 중국 전설상의 팔선(八仙) 중의 하나인 이철괴(李鐵拐)를 가리킨다.
[주D-056]공봉백(供奉白)과 …… 이씨(李氏)라네 : 이 시는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 ‘동호거실(衕衚居室)’이라는 제목의 장편 육언시 중의 한 수로 수록되어 있고, 원문의 ‘古詩人古仙人 古山人皆姓李’가 《송목관신여고》에는 ‘古詩人古山人 古仙人皆姓李’로 되어 있다.
[주D-057]옛날에 …… 있었다 : 형가(荊軻)는 전국 시대 말기 위(衛) 나라 사람으로 위 나라에서는 경경(慶卿)으로 불렸다. 진(秦) 나라가 위 나라를 멸망시키자 연(燕) 나라로 망명한 다음 연 나라 태자 단(丹)과 모의하여 진왕(秦王) 정(政)을 죽이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형가가 어느날 유차(楡次) 고을을 지나다가 합섭(蓋聶)과 검술에 대하여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합섭이 성을 내며 눈총을 주자 형가가 그만 기분이 상해 나가 버렸다. 또 형가가 연 나라에 가서 고점리와 시장에서 술을 마셨는데 술에 취한 고점리가 축(筑)을 연주하자 형가가 이에 화답하여 노래를 부르고 이어 주위도 아랑곳 않고 서로 붙들고 울었다. 형가에게 있어서 합섭은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 해당하고 고점리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 해당한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주D-058]닭의 …… 등이로세 : 이 시 또한 《송목관신여고》에 ‘동호거실(衕衚居室)’의 한 수로 수록되어 있다.
[주D-059]재주 …… 아니겠는가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인다.
[주D-060]관중(管仲)은 그릇이 작다 : 《논어》 팔일(八佾)에 보인다.
[주D-061]자공(子貢)이 …… 호련(瑚璉)이다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호련은 종묘(宗廟)에서 서직(黍稷)을 담는 데 쓰는 그릇이다.
[주D-062]《시경(詩經)》에…… 했고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나오는 구절이다.
[주D-063]《주역》에 …… 했으니 : 《주역》 정괘(鼎卦) 구사(九四)의 효사이다. 구사는 대신(大臣)의 지위를 상징하고, 공(公)은 임금을 가리킨다. 소인(小人)이 대신의 중책을 감당하지 못해 국사를 그르친다는 뜻이다.
[주D-064]귀신은 재(才)에 속하며 : 《예기》 예운(禮運)에 “그러므로 사람이란 천지(天地)의 덕(德)이며, 음양이 서로 교통하고, 귀신이 서로 만난 것이다.〔鬼神之會也〕”라고 하였다. 귀(鬼)는 형체(形體), 신(神)은 정령(精靈)을 뜻한다.
[주D-065]곤어(鯤魚) : 북쪽 대해(大海)에 산다는 큰 물고기이다. 《莊子 逍遙遊》
[주D-066]솜씨는 …… 빛났고 : 원문은 ‘手沐日月’이다. 우(禹) 임금이 남악(南岳)에 올라 금간옥자(金簡玉字)의 비서(秘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목일욕월(沐日浴月)’ 운운한 표현이 있었다고 한다. ‘목일욕월’은 햇빛과 달빛으로 목욕한 듯이 윤택하다는 뜻이다. 《庾仲雍 荊州記》
[주D-067]재물을 …… 다름없다 : 《주역》 계사전(繫辭傳)에,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 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고, 얼굴을 예쁘게 꾸미는 것은 음심(淫心)을 갖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慢藏誨盜, 冶容誨淫〕” 하였다.
[주D-068]물고기란 …… 된다 : 《노자》 및 《장자(莊子)》 거협(胠篋)에, “물고기란 못을 떠날 수 없는 법이니 나라의 이기(利器)를 남에게 보여 주면 안 된다.〔魚不可脫於淵 國之利器 不可以示人〕” 하였다.
[주D-069]승본해(勝本海) : 승본(勝本)은 현 장기현(長崎縣) 북쪽 일기도(壹岐島)에 소속된 지명으로 그 일대의 바다를 승본해라 한다.
[주D-070]압색(鴨色)의 윗도리 : 오리 머리 빛깔인 녹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압두록(鴨頭綠)이라고도 한다. ‘袍’는 ‘우에노기누’라고 하는 윗도리를 말한다.
[주D-071]꽃무늬 적삼 : 원문의 ‘花衫’이 《송목관신여고》 및 《청장관전서》에는 ‘花裙’으로 되어 있다.
[주D-072]울음소리 : 원문의 ‘鳴’이 《송목관신여고》에는 ‘聲’으로 되어 있다.
[주D-073]관인(官人) : 우리나라 사신을 가리킨다.
[주D-074]대패(大貝) : 바닷조개 중 가장 크다는 거거(車渠)와 흡사한 조개의 일종이다. 껍질은 장식품으로 쓴다.
[주D-075]말을 하고 : 원문의 ‘言’이 《송목관신여고》 및 《청장관전서》에는 ‘語’로 되어 있다.
[주D-076]왜놈의 …… 풍부하여 : 이 부분이 《송목관신여고》에는 ‘蠻府亦解園林趣’로 되어 있다.
[주D-077]맨발의 …… 찼네 : 이 시는 ‘일기도(壹岐島)’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다.
[주D-078]석가 : 원문의 ‘麻’가 《송목관신여고》에는 ‘牟’, 《청장관전서》에는 ‘摩’로 되어 있다.
[주D-079]일찍이 : 원문의 ‘嘗’이 《청장관전서》에는 ‘常’으로 되어 있다.
[주D-080]오인도(五印度) 가 보았으나 : 인도를 오천축(五天竺)이라고도 한다. 고대 인도가 동, 서, 남, 북, 중의 5부로 구획되어 있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16세기에 인도에 진출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81]장사꾼 : 원문의 ‘俾販徒’가 《송목관신여고》에는 ‘稗販徒’, 《청장관전서》에는 ‘裨販徒’로 되어 있다.
[주D-082]괴이한 말 : 원문은 ‘吾說’인데,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怪’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83]산발을 …… 하니 : 원문의 ‘墜’와 ‘犴’이 《송목관신여고》와 《청장관전서》에는 ‘墮’와 ‘獄’으로 되어 있다.
[주D-084]생시에 …… 죄 : 원문의 ‘日欺’가 《송목관신여고》에는 ‘前誣’, 《청장관전서》에는 ‘日誣’로 되어 있다.
[주D-085]진단(震旦)의 동쪽 : 일본을 가리킨다. 진단은 고대 인도에서 중국을 일컫던 말이다.
[주D-086]절들이 : 원문의 ‘衍’이 《송목관신여고》와 《청장관전서》에는 ‘刹’로 되어 있다.
[주D-087]향화(香火)라 …… 없고말고 : 원문의 ‘無時’가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長無’로 되어 있다. 《송목관신여고》에는 이 구절 다음에 “부처를 받들면서 부처가 싫어하는 것 되레 좋아하여 물고기 구워 먹고 회 쳐 먹고 마구마구 죽여 대니〔好佛反好佛所惡 燒剔魚鼈恣屠殺〕”라는 구절이 더 들어 있다.
[주D-088]육경이 …… 비추는데 : 원문의 ‘揚文’이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揭文’, 조선본에는 ‘揭大’로 되어 있다.
[주D-089]양곡(暘谷)이나 매곡(昧谷) : 양곡은 해 뜨는 곳, 매곡은 해 지는 곳을 가리킨다.
[주D-090]우리 ……고하라기 : 원문의 전후에 있는 ‘詔’가 모두 《송목관신여고》 조선본에는 ‘訓’으로 되어 있다.
[주D-091]공자의 …… 울리노라 : 마지막 구 ‘以詩爲金口木舌’의 ‘爲’가 《송목관신여고》에는 ‘替’로 되어 있다. 이 시는 ‘일양의 배 안에서 혜환노사의 말씀을 생각하며〔壹陽舟中念惠寰老師言〕’라는 제목으로 《송목관신여고》에 수록되어 있는데, 혜환(惠寰)은 이언진의 스승 이용휴(李用休 : 1708~1782)의 호이다.
[주D-092]오농(吳儂)의 간드러진 말투 : 오농은 오(吳) 나라 사람, 즉 화려하고 세련됨을 추구한 강남(江南)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삼국 시대 때 오 나라 땅이었던 이 지역 사람들의 말투가 간드러진 느낌을 주었으므로 ‘오농연어(吳儂軟語)’니 ‘오농교어(吳儂嬌語)’니 하였다. 원문의 ‘오농세타(吳儂細唾)’도 같은 뜻의 말이다.
[주D-093]창부(傖夫) : 창부는 시골뜨기라는 뜻으로, 강남 사람들이 중원(中原) 사람들을 비하하여 부른 말이다. 오 나라 출신인 육기(陸機)가 동생 육운(陸運)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문학적 경쟁 상대로서 중원 출신인 좌사(左思)를 ‘창부’라 비웃은 적이 있다. 《晉書 卷92 文苑傳 左思》 여기서 이언진은 자신과 연암의 관계를 육기와 좌사의 관계에 비긴 것이다.
[주D-094]만가(輓歌)를 지은 이 :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 ‘만이우상(挽李虞裳)’이라는 제목의 오언고시 10수가 실려 있으며 그 작자가 이용휴(李用休)로 되어 있다. 연암은 그 중 5수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
[주D-095]놀라 일어나 : 원문의 ‘驚起’가 《송목관신여고》 중국본에는 ‘飛去’로 되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유실됨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유실됨
외숙 지계공(芝溪公)의 말씀을 듣건대, “역학대도전은 당시에 선비로서의 명성을 빌려 권세와 이권을 몰래 사들여 기세등등한 자가 있어서 부군(府君)이 이 글을 지어 기롱한 것인데, 대개 노소(老蘇)의 변간론(辨姦論)과 같은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패가망신 당하자, 부군이 마침내 이 글을 불살라 버렸으니, 대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으로 자처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편 우상전에 결락이 있고 하편들이 유실된 것은 권질(卷帙)상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함께 없어진 것이다.” 하였다.
아들 종간(宗侃)이 삼가 쓰다.
이상 아홉 편의 전은 다 아버님이 약관 시절에 지은 것으로서, 집에 장본(藏本)이 없어 매번 남들에게서 얻어 왔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이들 작품을 없애 버리라고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내가 젊었을 적에 작가에 뜻을 두어 작문하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 지은 것인데, 지금까지도 더러 이 작품들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하셨다. 불초한 우리 형제가 비록 아버님의 명을 받들고는 싶지만, 사람들이 전파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난번에 이러한 일로 외숙 지계공께 상의를 드렸더니, 공이 말씀하시기를,
“선공(先公)이 지은 논설 중에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것이 많다. 반면에 이 작품들은 사실 저술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니 있건 없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더구나 젊었을 때의 작품이니만큼 더욱 그렇다. 게다가 예로부터 문장가들에게는 이와 같이 유희 삼아 지어 보는 작품이 없지 않았으니, 반드시 폐기할 것까지는 없다. 다만 양반전 한 편은 속된 말이 많아서 조그마한 흠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는 실로 왕포(王褒)의 동약(僮約)을 모방하여서 지은 것이니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으므로, 불초한 우리 형제가 감히 함부로 취사(取舍)를 할 수 없어, 별집(別集)의 말미에 붙여 둔다.
아들 종간이 삼가 쓰다.
[주D-001]지계공(芝溪公) :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이다. 호를 지계(芝溪)라 하였다.
[주D-002]노소(老蘇) : 소식(蘇軾)의 아버지인 소순(蘇洵)을 가리킨다. 소순은 변간론(辨姦論)을 지어 왕안석(王安石)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주D-003]종간(宗侃) :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의 초명(初名)이다. 그의 형 박종의(朴宗儀)는 백부 박희원(朴喜源)의 양자가 되었다.
[주D-004]왕포(王褒)의 동약(僮約) : 노비 계약을 다룬 글로서 그 내용은, 왕포가 양혜(楊惠)라는 과부의 집에 들렀다가 오만하게 술심부름을 거부하는 양혜의 노비 편료(便了)를 샀는데, 그 노비문서에서 노비가 해야 할 수많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어겼을 때의 처벌 조항까지도 세세하게 밝혀 놓음으로써 편료를 길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왕포는 전한(前漢) 시대의 인물로 사부(辭賦)에 능했다. 《古文苑 卷17 僮約》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김명호 (공역)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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