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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 김명호

  《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김명호(金明昊)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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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 해제(解題)

 

 

김명호(金明昊)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0568A

 

 

1. 머리말

본서는 한국문학사의 최고봉에 속하는 문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시문(詩文)을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연암은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정조(正祖) 임금이 특별히 거론하고 그 문체의 영향력을 문제 삼았을 정도로 당대 조선의 걸출한 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사후(死後)에도 그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어 간 점에서 유례가 드문 작가라 할 수 있다.

 

19세기에 필사본으로만 전하던 그의 문집은 20세기의 벽두인 애국계몽기(愛國啓蒙期)에 처음 활자본으로 공간(公刊)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조선학운동(朝鮮學運動)이 일어나던 무렵에 다시 활자본으로 공간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그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북에서는 홍기문(洪起文)김하명(金河明)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이루졌으며, 남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이가원(李家源)이우성(李佑成) 등의 선구적 연구에 이어 오늘날까지 실로 왕성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리하여 이제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암의 작품들은 한국문학이 낳은 특출한 성과로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이 연암 연구가 날로 발전해 온 추세를 감안할 때 아직 연암의 문집이 완역되지 못한 것은 만시지탄을 금할 수 없다. 연암의 문집 중 열하일기는 이미 완역본이 나온 바 있으나, 일반 시문은 선집(選集)의 형태로만 몇 차례 국역되었을 따름이다.

 

홍기문의 박지원 작품 선집(1960)을 비롯해서 현재까지 남과 북에서 몇 종의 국역서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된 시문 전체의 3할을 넘지 않는 일부 작품들만 국역되는 데 그쳤다. 게다가 이러한 국역서들은 대개 텍스트 자체에 대한 서지적 검토를 소홀히 하고 작품의 이해와 감상에 필요한 주해(註解)를 충실히 베풀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본서는 종전의 국역서들이 지닌 이와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자 연암의 시문 전체를 국역 대상으로 했을 뿐 아니라, 역자(譯者) 자신을 포함한 학계의 연암 연구 성과를 국역에 충분히 반영한 전문적 학술 번역을 추구하였다.

 

그간 학계의 숙원 사업의 하나였던 연암의 시문 완역이 이루어지게 된 데에는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 1914 ~1993) 선생의 공로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우전 선생은 일찍이 1978년부터 매주 연암집 강독회를 열고 작고할 때까지 연암의 글들을 국역구술하셨다.

 

그 뒤 문하생들이 선생의 유업(遺業)으로 연암집 국역 출간을 기획했으나 선생의 구술을 받아 적은 원고가 방대한 분량이라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결국 문하생 중에서 연암 문학을 전공한 필자가 그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동안 필자는 연암의 손자인 환재(瓛齋) 박규수(朴珪壽)에 대한 연구에 전념하고 있어서 그 연구를 마치는 대로 우전 선생의 국역 원고를 정리할 계획이었는데, 어느덧 10여 년이 지났음에도 환재 연구가 끝나지 않아 연암집 국역 작업 역시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던 차,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시급히 국역해야 할 고전의 하나로 연암집을 선정하고 우전 선생과 필자의 공역(共譯) 형식으로 국역해 줄 것을 요청해 왔으므로, 제백사하고 이 일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암 서거 200주년이 되는 2005년에 맞추어 연암의 시문을 드디어 완역 출간하게 된 것이다.

 

2. 연암의 생애와 문학

연암 박지원은 1737(영조 13) 음력 2 5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미(仲美)이다. 연암의 가문은 선조조(宣祖朝)의 공신인 박동량(朴東亮)과 그의 아들로서 선조의 부마가 된 박미(朴瀰)를 위시하여 세신귀척(世臣貴戚)을 허다히 배출한 명문거족이었다.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와 호조 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장간(章簡)이다.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평생 포의(布衣)로 지내면서 부모 밑에서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연암의 정신적 성장에는 집안의 기둥이던 조부가 부친보다 더 강한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연암은 16세 때 전주 이씨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였다. 장인 이보천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명망이 높았다. 이보천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결혼 후 연암은 이러한 장인 형제의 자상한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20세 무렵부터 연암은 여느 양반가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혼탁한 벼슬길에 과연 나서야 할 것인지 몹시 번민했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이러한 심각한 정신적 갈등 상황에서 창작된 것으로서, 여기에 수록된 마장전(馬駔傳)’ ‘양반전 등은 당시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들이다. 또한 연암은 1765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고 장편 한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를 지었다.

 

장래의 거취 문제로 오랫동안 번민하던 연암은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이 시절에 그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되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특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파격적이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을 필두로 잇달아 연행(燕行)을 다녀온 박제가 등과 함께,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청 나라의 발전상을 깊이 연구하였다.

 

1778년경 연암은 왕위 교체기의 불안한 정국과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인해 개성(開城)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연암협(燕巖峽)으로 은둔했다. 이곳에서 그의 고명을 듣고 찾아온 개성의 선비들을 지도하는 한편, 국내외의 농서(農書)들을 두루 구해 읽고 초록(抄錄)해 두었다. 후일 연암은 이때 초록해둔 것을 바탕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게 된다.

 

1780(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 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수행원으로서 숙원이던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북경(北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 사행은 사상 처음으로 황제의 별궁이 있던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의 견문을 도도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열하일기, 이 책은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연암의 작가적 명성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나이 쉰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그 후 평시서 주부, 의금부 도사, 제릉 영(齊陵令), 한성부 판관을 거쳐, 1792년부터 1796년까지 경상도 안의(安義)의 현감으로 재직했다. 이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은 선정(善政)에 힘쓰는 한편으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지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비판한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과부의 순절(殉節) 풍속을 문제삼은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幷序), 장편 한시 해인사 등의 걸작들은 모두 이 시기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 시절에 그는 뜻밖에 열하일기로 인해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통 고문(古文)에서 벗어난 점을 질책하면서 속죄하는 글을 지어 바치라는 정조의 어명이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편승하여 열하일기가 오랑캐인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쓴 글이라는 비방 여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온 연암은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했다. 면천 군수 시절에 그는 어명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지어 바쳤다. 이 글은 제주도 사람 이방익이 해상 표류 끝에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극적으로 귀환한 사건을 서술한 것으로서, 정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연암은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을 받들어 과농소초를 진상하였다. 과농소초에 대해 정조는 좋은 경륜 문자(經綸文字)를 얻었다고 칭찬하면서 장차 연암에게 농서대전(農書大全)의 편찬을 맡겨야겠다고까지 했으며, 규장각의 문신들 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인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다. 그러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횡포를 부리던 중들을 징치(懲治)하는 문제로 상관인 관찰사와 불화한 끝에 이듬해 봄 노병(老病)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순조 5) 음력 10 29일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연암의 저작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열하일기 과농소초이다. 이 책들에서 벽돌과 수레 등 청 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하고 선진적인 중국의 농사법과 농기구를 소개했고, 이로 말미암아 연암은 오늘날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김택영(金澤榮)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서는 연암을 중국의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비견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문가(古文家)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런데 연암은 고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속담지명 등을 구사하여 기기(奇氣)’ 기변(奇變)’이 넘치고 민족문학적 개성이 뚜렷한 산문들을 남겼다.

 

방경각외전 중의 양반전, 열하일기 중의 호질(虎叱) 허생전, 그리고 안의 현감 시절 작품인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등은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암은 조선후기 소설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록 과작(寡作)이기는 하지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해인사 등과 같이 빼어난 한시도 남겼다. 따라서 연암은 탁월한 자연 묘사를 성취한 시인으로서도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핵심으로 한 연암의 문학론은, 시대착오적인 모방을 일삼던 당시의 문풍을 비판하고 당대 조선의 현실을 참되게 그릴 것을 역설한 점에서 근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문학론의 선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3. 연암집의 편성과 수록 작품

본서에서 국역 대본으로 삼은 텍스트는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편한 활자본 연암집이다. 이는 연암의 직계 6대손인 박영범(朴泳範)이 보관해온 필사본 연암집을 그 저본(底本)으로 삼았다고 하며, 모두 17 6책으로 되어 있다.

 

그중 제 1 권부터 제 10 권까지가 일반 시문이고,

 11 권부터 제 15 권까지는 열하일기,

 16 권과 제 17 권은 과농소초이다.

 

본서의 국역 대상이 된 일반 시문에 한하여 박영철 편 연암집의 편성을 필사본 연암집과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다.

 

박영철 편 연암집 필사본
연암집
양식별 특징
원집(原集)  1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 1 ~ 6 각종 산문
 2  연상각선본
 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7 ~ 10 각종 산문
 4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  11  ()
 5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12  척독(尺牘)
별집(別集)  6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13  서사(書事)
 7  종북소선(鍾北小選) 14 ~ 15 각종 산문
 8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16  ()
 9  고반당비장(考槃堂秘藏)  56  각종 산문
 10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  57  각종 산

 

박영철 편 연암집에서 근간을 이루는 부분은 제 1 권에서 제 3 권까지에 해당하는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라고 할 수 있다. 연암의 초기작부터 만년작까지 망라하여 전체 산문의 절반이 넘는 글들이 여기에 정선(精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핵심적인 부분은 연상각선본이다.

 

연상각(煙湘閣)은 연암이 안의 현감 시절에 세운 정각(亭閣)의 하나였다. 안의 현감으로 갓 부임한 때인 1793, 연암은 정조로부터 열하일기로 인해 문풍(文風)의 타락을 초래한 잘못을 속죄하는 뜻에서 순정(純正)한 문체로 글을 지어 바치라는 하교를 받았다.

 

이에 그는 새로 글을 지어 바치는 대신 구작(舊作)에서 고른 약간 편과 안의에서 지은 글 몇 편을 합쳐 몇 권의 책자로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장차 정조에게 진상할 목적으로 연암 자신이 정선한 글들만을 모은 자찬(自撰) 문집이 바로 연상각선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연상각선본과 유사한 성격의 필사본 선집들을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연상각집(煙湘閣集), 운산만첩당집(雲山萬疊堂集),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 등은 판심(版心) 연암산방(燕岩山房)’이라 찍힌 사고지(私稿紙)를 사용하고 있어 연암 집안의 가장본(家藏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필사본 선집에 수록된 글들은 열하일기에서 뽑은 5편의 글을 제하면 모두 연상각선본의 수록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짐작건대 연암은 열하일기의 일부도 포함한 자찬본(自撰本)을 만들어 두었으나, 그의 사후에 문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열하일기를 별도로 포함함에 따라 연상각선본에서 열하일기 중의 글들은 배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연암의 처남이자 지기(知己)였던 이재성(李在誠) 연상각선본과 아울러 공작관문고에만 평어(評語)를 남긴 점으로 미루어, 공작관문고 역시 연암의 작품 중 정수(精髓)를 모아 놓은 부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연상각선본에는 모두 32편의 글에 대해 이재성의 평어가 있는 데 비해, 공작관문고에는 단 3편의 글에 대해서만 평어가 있다. 공작관문고에는 연암이 십대 소년인 1755년에 지은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에서부터 노년인 1801년 양양 부사로서 강원도 관찰사에게 올린 편지까지 상당한 시차를 둔 작품들이 두루 섞여 있는 점이 특색이다.

 

또한 공작관문고의 자서(自序)와 동일한 글인 공작관집서(孔雀館集序) 겸헌만록(謙軒漫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글을 지은 시기가 기축(1769)’년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 공작관문고에는 청향당 이선생 묘지명(淸香堂李先生墓誌銘) 죽각 이 선생 묘지명(竹閣李先生墓誌銘)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연암 손자 박규수가 필사본에 붙인 두첨(頭籤)에 의하면 이는 이재성의 글이 잘못 편입된 것이어서, 박영철 편 연암집에서는 제외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연암이 중년 이전에 자찬(自撰) 공작관집(孔雀館集)이 있었는데, 거기에다 연암의 만년작들까지 포함하여 연상각선본에 수록되지 못한 작품들을 합쳐서 개편한 것이 곧 공작관문고가 아니었던가 한다. 이재성의 평어가 단 세 군데에 그치고 있고 그의 글 2편이 혼입되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공작관문고는 이재성이 별세한 1809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편찬된 듯하다.

 

이와 같이 연암집의 근간을 이루는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에다, 연암의 시만을 모은 영대정잡영, 중년 이전의 짧은 편지들만을 모은 영대정잉묵, 1797년경 정조의 어명으로 지은 독립된 저술 서이방익사, 주로 중년에 지은 소품 산문들을 모은 종북소선, 그리고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는 그의 초기 전() 9편을 모은 방경각외전이 합쳐져서, 1차로 문집이 완성되었던 듯하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선친의 언행을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을 지은 뒤 1831년에 쓴 추기(追記), 열하일기 과농소초를 제외한 연암의 문고(文稿)는 모두 ‘16이라고 하였다. 위의 표에서도 보듯이, 이는 곧 필사본으로 제 16 권인 방경각외전까지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은 각각 연암의 은거지에 있던 고반당이란 집과 엄화계란 시내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또한 박종채가 문집에 붙인 안설(按說)이 모두 일곱 군데 있는데, 그중 엄화계수일에 마지막으로 수록되어 있는 원사(原士) 한 군데에만 자신의 초명(初名) 종간(宗侃)’을 적지 않고 종채라 적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은 아마도 박종채가, 과정록에 추기를 쓴 1831년부터 그의 몰년인 1835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황해도 금천 연암협에 남아 있던 선친의 유고를 마저 수습하여 문집에 최후로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박영철 편 연암집은 위와 같은 경위로 만들어져 후손가에 보관되어 온 필사본 연암집을 모두 6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연암집을 편찬하면서 종종 임의로 개작했던 것과 달리, 박영철본이 필사본의 원문을 존중하여 함부로 고치지 않은 점은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원문 판독이나 인쇄 과정에서 발생한 오자탈자가 적지 않고, 필사본 원문 자체의 오류가 시정되어 있지 않으며, 필사본의 편차를 그대로 따른 결과 편차가 정연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점 등 일부 문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박영철 편 연암집에 수록된 연암의 시문을 양식별로 분류하고 괄호 안에 작품의 편수를 표시하면 아래와 같다. 연암의 글인지, 독립된 작품인지, 어떤 양식으로 분류할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는 별도의 설명을 붙였다.

 

 (30) : (20)/ 自序(3)/ (1)/ 贈序(3)/ 送序(2)/ 壽序(1)

 (35)

 

* 안의현 여단 신우기(安義縣厲壇神宇記)(1)는 본래 박제가(朴齊家)가 연암의 부탁으로 대신 지은 글이다. 박제가가 지은 원본은 그의 문집에 여단기(厲壇記)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안의현 여단 신우기를 이 원본과 대조해 보면 연암이 박제가의 글에 상당한 손질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안의현 여단 신우기를 연암의 글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보아 작품 편수에 넣었다.

 (12) : (3)/ 題跋(7)/ 書後(2)

* 광문전 뒤에 쓰다書廣文傳後〕」(8) 외에 이몽직 애사(李夢直哀辭)(3)의 후기(後記) 1편의 서후(書後)로 간주하였다. 연암집 목록에서 그 제목 아래에 서후를 붙였다書後附고 밝히고 있을 뿐더러, 이 작품의 본보기가 된 한유(韓愈) 구양생 애사(歐陽生哀辭)에도 별도로 애사 뒤에 쓰다題哀辭後〕」가 있기 때문이다.

 書牘(101) : (52)/ 尺牘(49)

 傳狀(14) : (8)/ 行狀(1)/ 家狀(1)/ 事狀(3)/ 諡狀(1)

*방경각외전(8)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은 실전(失傳)이라 작품 편수에서 제외했다.

 碑誌(18) : 墓誌銘(5)/ 墓碣銘(9)/ 墓表陰記(1)/ 神道碑(1)/ 紀蹟碑(1)/ 塔銘(1)

 哀祭(11) : 祭文(6)/ 進香文(2)/ 哀辭(3)

 論說(5) : (4)/ (1)

 奏議(7) : (2)/ 狀啓(2)/ 報牒(2)/ 對策(1)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2)의 부록인 감사 자핵소 초본監司自劾疏草〕」을 독립된 1편의 소()로 간주했다. 감사 자핵소 초본은 김택영의 중편(重編)연암집에도 경상 감사를 대신하여 지은 자핵소代慶尙監司自劾疏〕」라는 제목으로 별개의 글로 수록되어 있다.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2)의 부록 병영에 올린 보첩의 초본兵營報草〕」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3)의 부록 보첩의 초본(報草)을 각각 독립된 1편의 보첩(報牒)으로 간주하였다.

*주금책(酒禁策)(3)은 실전(失傳)이라, 작품 편수에서 제외했다.

 雜著(3)

*원사(原士)(10)와 아울러,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答任亨五論原道書〕」(2)에서 덕성이기(德性理氣)를 논한 부록과,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書〕」(2)에서 사학원위(邪學源委)를 논한 부록도 별개의 잡저(雜著)로 간주하였다.

 書事(1) : 5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

 (42) : 4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 32()

 

위와 같이 계산하면 연암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통틀어 시() 42, () 237편이다.

 

4. 원문 교감과 주해 작업

본서가 목표로 한 전문적 학술 번역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연암집의 이본(異本)들을 널리 수집검토하여 신뢰할 수 있는 교감본(校勘本)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종전의 국역서들처럼 어구 풀이에 그치지 않고, 창작 시기나 창작 배경, 작품들의 상호 관계, 난해하거나 심오한 의미를 지닌 대목들에 대한 해명 등 작품 해석에 긴요한 내용까지 충실히 주해(註解)해야 할 것이다.

 

연암집의 주요 이본으로는 다음과 같은 활자본 4종과 필사본 6종이 알려져 있다.

 

활자본

 김택영 편, 연암집(1900) : 선집(選集)으로 6 2책이다.

 김택영 편, 연암속집(燕巖續集)(1901) : 선집으로 3 1책이다.

 김택영 편, 중편(重編)연암집(1917) : 선집으로 7 3책이다.

 박영철 편, 연암집(1932) : 전집(全集)으로 17 6책이다.

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승계문고본(勝溪文庫本) : 전집이나 총 57 22책 중 2 1책이 빠졌다.

 숭실대 소장 자연경실본(自然經室本) : 전집이나 11책만 남아 있다.

 연세대 소장본 : 전집이나 7책만 남아 있다.

 영남대 소장본 : 전집이나 8책만 남아 있다.

 연암 후손가 소장 연상각집 : 1. ()와 기() 27편을 수록했다.

 연암 후손가 소장 운산만첩당집 : 1. 33편의 글을 수록했다.

 

이러한 주요 이본들에 관해서는 김혈조(金血祚) 교수가 연암집 이본에 대한 고찰(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17, 1994)에서 자세히 검토한 바 있으며, 본서에서는 그 연구 결과를 원문 교감에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다만 그 연구에서도 이본 간의 차이를 간과한 경우가 간혹 있고, 서로 차이 나는 경우에 시비(是非) 판단을 내리지 않았으며,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결과 이본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오류 등은 적시(摘示)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그러한 한계를 보완하고, 나아가 아래와 같은 여러 문헌들을 추가로 참고하여 더욱 철저한 원문 교감을 하고자 하였다.

 

○ 《병세집(幷世集) : 윤광심(尹光心)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암의 시 2수와 문() 11편을 수록했다.

 

○ 《종북소선(鍾北小選) : 연암 후손가 소장. 1. ()를 포함하여 연암의 글 11편을 수록했다.

 

○ 《연암제각기(燕岩諸閣記) : 서울대 소장. 1. ‘연암산방(燕岩山房)’ 사고지(私稿紙)를 사용했으며, 연암의 글 7편을 수록했다.

 

○ 《백척오동각집(百尺梧桐閣集) : 장서각(藏書閣) 소장. 1. 연암의 글 15편을 수록했다.

 

○ 《하풍죽로당집(荷風竹露堂集) : 성균관대 소장. ‘()’ 1. ‘연암산방 사고지를 사용했으며, 연암의 글 41편을 수록했다.

 

○ 《연상각집(煙湘閣集) : 성균관대 소장. 1. ‘연암산방 사고지를 사용했으며, 연암이 지은 비지(碑誌) 11편을 수록했다. 말미에 문고 보유목록(文稿補遺目錄) 열하일기 보유목록(熱河日記補遺目錄)이 있어 주목된다.

 

○ 《연암집(燕巖集) : 성균관대 소장. 1. 산고(散稿)로서, 여릉 참봉 왕군 묘갈명(麗陵參奉王君墓碣銘)」 「운봉 현감 최후 묘갈명(雲峰縣監崔侯墓碣銘)」 「백수 이 공인 묘갈명(伯嫂李恭人墓碣銘) 3편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이본들에는 일실(逸失) 여릉 참봉 왕군 묘갈명(麗陵參奉王君墓碣銘)의 명사(銘辭)가 보존되어 있는 등 자료적 가치가 적지 않다.

 

○ 《동문집성(東文集成) : 송백옥(宋伯玉) . 연암의 글 26편을 수록했다.

 

○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 김택영 편(1921). 연암의 글 17편을 수록했다.

 

이 밖에 모초재실기(慕初齋實紀), 나은선생문집(羅隱先生文集) , 연암의 글이 단 1 ~ 2편이라도 실려 있는 다수의 문헌들을 찾아서 원문 교감에 참고하였다.

이상과 같이 철저한 원문 교감을 한 위에서, 본서에서는 가급적 충실하고 친절한 주해를 달고자 하였다. 본서의 주해에서 특별히 힘을 기울인 점을 밝히고, 아울러 그에 해당하는 사례를 하나씩만 들면 아래와 같다.

 

(1) 이본들 간의 차이에 대해 시비를 판단하고자 했다.

소완정의 하야방우기에 화답하다酬素玩亭夏夜訪友記〕」(  3 ) 중 연암의 자찬(自讚) 鼓琴似子桑戶 著書似揚雄으로 1자가 누락되어 있으나, 영남대본승계문고본연세대본김택영본 등에는 공백 없이 鼓琴似子桑戶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본 간의 차이에 대해 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해를 달았다.

자상호(子桑戶)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인물로, 그가 죽자 막역지우인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이 그의 시신을 앞에 두고서 편곡(編曲)하거나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자상호가 거문고를 탔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는 같은 대종사에 나오는 자상(子桑)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즉 자상의 벗 자여(子輿)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자상은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지독한 가난을 한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하였다. 원문의 鼓琴似子桑를 그 다음 문장과 연결시켜서 鼓琴似子桑 戶著書似揚雄으로 구두를 떼고 누락된 글자를 로 추정하여 鼓琴似子桑 閉戶著書似揚雄으로 판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찬의 문장들이 대개 □□□□ 5자구(字句)를 취하고 있는 점과 어긋난다. 또한 소순(蘇洵) 폐호독서(閉戶讀書)’한 사실은 있어도 양웅이 폐호저서(閉戶著書)’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子桑戶 는 역시 연자(衍字)로 보아야 할 것이다.(국역 연암집 1 325)

 

(2) 이본들의 공통된 오류로서 필사 또는 인쇄상의 오자탈자연문(衍文)연자(衍字) 등을 지적하였다.

창애에게 답함答蒼厓〕」( 5 ) 두 번째 편지의 첫머리 還他本分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이는 還守本分의 잘못이다. 초서로  자가  자와 비슷하여 잘못 판독한 듯하다. 이 편지의 말미에 守分이라는 유사한 표현이 다시 나오고, 김병욱(金炳昱) 곡망자묘문(哭亡子墓文)에도 이제부터는 출세길에서 일찍 물러나 본분으로 돌아가 이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惟願從今以後 早謝名途 還守本分라는 예가 있다. 磊棲集 卷4

 

(3) 이본들의 공통된 오류로서 원문 자체가 잘못된 경우, 즉 저자가 인명지명서명원전(原典) 인용 등에서 범한 실수를 바로잡았다.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書〕」( 2 ) 첫 번째 편지의 부록에서 잘못된 사항들을 바로잡고 자세한 주해를 달았다. 사학(邪學)의 본말을 논한 부록 중 제 5 조에서 연암은 선우(單于)가 안문(雁門)의 위사(尉史) 천주(天主)’로 삼았으며 이것이 천주란 말이 쓰인 최초의 사례라고 하였다. 이는 자치통감(資治通鑑) 18 한기(漢紀) 10 세종 효무황제(世宗孝武皇帝) 원광(元光) 2년 조의 기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나 자치통감의 해당 기사와, 그것의 전거가 되는 사기(史記)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흉노열전(匈奴列傳)이나 전한서(前漢書) 흉노열전 등을 보면, 모두 선우가 안문의 위사를 천왕(天王)’으로 삼았다고 했지 천주로 삼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연암은 자치통감에 의거한 결과, 부록 제 6 조에서 인명인 옹유조(雍由調)’ 옹곡조(雍曲調)’, 부록 제 8 조에서 인명인 복고돈(伏古敦)’ 복명돈(伏名敦)’으로 적는 오류를 답습했다. 또한 같은 제 8 조에서 인명인 후려 능씨(候呂陵氏)’ 후릉 여씨(候陵呂氏)’로 잘못 적었다. 본서에서는 주해와 원문 각주에서 이상의 사실들을 지적하고 본문에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4) 필요한 경우 창작 시기나 창작 배경, 소재와 주제 등에 대해서도 해설하여 작품 감상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주공탑명(麈公塔銘)( 2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가 원문에는 (𪊧)’로 되어 있는데, 오자이다. (𪊧)는 사슴의 일종이고, ()는 고라니에 속하여 서로 다르나 글자가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다. ()는 사슴보다 몸집이 훨씬 크고 그 꼬리가 움직이는 대로 뭇 사슴들이 따라간다고 해서 사슴 중의 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왕중왕(王中王) 주중주(麈中麈)’라 한다. 또한 그 꼬리인 주미(麈尾)는 고승이 설법할 때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서 손에 쥐는 불자(拂子)로 쓰이는데 이를 승주(僧麈)라 한다. 이 글은 연암의 젊은 시절 작품으로, 그 시절 연암과 절친했던 김노영(金魯永 : 1747 ~ 1797)이 이를 애송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연암의 처조카인 이정리(李正履 : 1783 ~ 1843)는 이 글을 불교를 배척하는 작품이라 보았고, 아들 박종채가 이 글을 어느 노승에게 보였더니 그 노승 역시 불교를 배척하는 글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4 아울러 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 글은 실존했던 고승의 사리탑에 대한 명()이 아니라, 승주(僧麈)를 의인화(擬人化)한 이름의 가상적인 고승을 설정하고 그에 대한 탑명(塔銘)의 형식을 빌어 불교를 비판한 희작(戱作)이 아닐까 한다.(국역 연암집 1 290)

 

(5) 내용이 난해하거나 심오하여 오역하기 쉬운 대목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석의 근거를 밝혔다.

원도에 대해 임형오에게 답함答任亨午論原道書〕」( 2 )에서 출전이 명시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하여 일일이 원전의 출처를 밝히고 해설해 두었다. 이를테면 馬牛之起櫪也 圓蹄先前 耦武先後라는 구절에 대해 말과 소가 마구간에서 일어설 때 말은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는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라고 번역하고,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원제(圓蹄)는 발굽이 둥근 말을 가리키고 우무(耦武)는 발굽이 둘로 갈라진 소를 가리킨다. 조화권여(造化權輿)에 말은 양물(陽物)이라 발굽이 둥글고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며起先前足, 소는 음물(陰物)이라 발굽이 갈라졌고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킨다起先後足고 하였다. 周易玩辭 卷15 馬牛(국역 연암집 1 147)

 

(6) 종전의 번역서들에서 답습하던 해석상의 오류들을 철저히 바로잡고자 했다.

양반전( 8 )에서 양반이 지켜야 할 예의 범절을 나열한 대목 중 漱口無過에 대해, 종전에는 양치질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해 냄새 없게 이를 잘 닦아야 한다로 번역하고 다음과 같이 주해하였다.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고 한다.(국역 연암집 2 241)

5. 맺음말

본서의 번역 대본이 된 박영철 편 연암집은 연암의 전() 저술을 모아 최초로 공간한 점에서, 편자의 친일 행적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원문 판독이나 인쇄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오류를 범했을 뿐더러, 실은 여기에도 누락된 연암의 작품들이 없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발굴하여 보완하는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연암집의 보유편(補遺篇)을 만들고 이를 마저 번역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그와 아울러, 필사본의 편차를 답습한 결과 혼란스러운 박영철 편 연암집의 편성을 해체하여, 연암의 전 작품들을 양식과 창작 순서에 따라 정연하게 재편성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이제 연암의 시문에 대한 완역이 이루어진 만큼, 학계의 연암 연구도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국역 연암집 12의 출간을 계기로, 종래와 같이 어느 일면에 치우치거나 국한되지 않고 연암 문학의 총체적인 실상(實相)을 다각도로 밝히는 연구 논저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2005 12 16

 한국고전번역원 | 김명호(金明昊) | 2005

 

김종직 1431-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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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집 [김종직 1431-1492] 시집 제1권 [시(詩)] 53편

점필재집 [김종직 1431-1492] 시집 제1권 [시(詩)] 53편     [시(詩)] 53편 1 진주 권 양구의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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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년 이월 이십 팔일에 직산의 성환역에서 묵는데, 제주에서 약물을 진공하러 온 김극수란 사람도 왔기에, 인하여 밤에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곳의 풍토와 물산을 대략 물어보고 마침내 그 말을 기록하여 탁라가 십사 수를 짓다[乙酉二月二十八日宿稷山之成歡驛濟州貢藥人金克修亦來因夜話略問風土物産遂錄其言爲賦乇羅歌十四首]

 

여관서 막 만났어도 마치 서로 친한 듯한데 / 郵亭相揖若相親

겹겹의 보자기엔 갖가지 약물 진기도 해라 / 包重般般藥物珍

옷에선 비린내 나고 언어는 간삽하니 / 衣袖帶腥言語澁

보건대 그대는 진정 바다 안 사람이구려 / 看君眞是海中人

 

당초의 세 사람은 바로 신인이었는데 / 當初鼎立是神人

서로 짝지어 해뜨는 동쪽에 와서 살았네 / 伉儷來從日出濱

백세토록 세 성씨만 서로 혼인을 한다 하니 / 百世婚姻只三姓

듣건대 그 유풍이 주진촌과 비슷하구려 / 遺風見說似朱陳

 

성주는 이미 죽고 왕자도 끊어져서 / 星主已亡王子絶

신인의 사당 또한 황량하기만 한데 / 神人祠廟亦荒涼

세시엔 부로들이 아직도 옛 일을 추모하여 / 歲時父老猶追遠

광양당에서 퉁소와 북을 다투어 울리누나 / 簫鼓爭陳廣壤堂

 

바닷길이 어찌 수천 리만 되리오마는 / 水路奚徒數千里

해마다 왕래하여 일찍부터 잘 아는지라 / 年年來往飽曾諳

구름 돛을 걸고서 쏜살같이 달리어 / 雲帆掛却馳如箭

하룻밤의 순풍에 해남을 당도하누나 / 一夜便風到海南

 

한라산의 푸른 기운 방사와 통하여라 / 漢拏縹氣通房駟

물풀 사이에 아침 놀이 활짝 걷혔네 / 雲錦離披水草間

한번 호원에서 목장을 주관한 이후로 / 一自胡元監牧後

준마들이 해마다 황실로 들어갔다오 / 驊騮歲歲入天閑

 

오매며 대모이며 검은 산호에다 / 烏梅玳瑁黑珊瑚

부자며 청피는 천하에 없는 것이니 / 附子靑皮天下無

물산만이 동방의 부고일 뿐 아니라 / 物産非惟東府庫

그 정수가 다 사람 살리는 데로 들어간다오 / 精英盡入活人須

 

대합조개며 해파리며 석화에다 / 車螯海月與蠔山

농어며 문린 이외에 또 몇 가지이던고 / 巨口文鱗又幾般

해 저물면 비린 연기가 향정을 덮어라 / 日暮腥煙冪鄕井

수우의 수많은 배들이 생선 싣고 돌아오네 / 水虞千舶泛鮮還

 

집집마다 귤과 유자 가을 서리에 잘 익어 / 萬家橘柚飽秋霜

상자마다 가득 따 담아 바다를 건너오는데 / 採著筠籠渡海洋

고관이 이를 받들어 대궐에 진상하면 / 大官擎向彤墀進

빛과 맛과 향기가 완연히 그대로라네 / 宛宛猶全色味香

 

사군의 수레와 기마대가 길이 포위하여라 / 使君車騎簇長圍

꿩 토끼 고라니 노루 온갖 짐승이 쓰러지네 / 雉兔麇麚百族披

해도엔 다만 곰과 범과 표범이 없어 / 海島但無熊虎豹

숲에서 노숙을 해도 놀래킬 것 없다오 / 林行露宿不驚疑

 

뜨락의 풀밭에서 전룡을 만나면은 / 庭除草際遇錢龍

분향하고 축주 올리는 게 그 지방 풍속인데 / 祝酒焚香是土風

육지 사람들 놀라며 서로 다퉈 비웃으면서 / 北人驚怕爭相笑

도리어 오공이 죽통에 든 걸 원망한다오 / 還怨吳公在竹筒

 

여염집 자제들이 태학에 유학하여 / 閭閻子弟游庠序

학문으로 많은 인재 길러짐을 기뻐하노니 / 絃誦而今樂育多

큰 바다라서 어찌 지맥이야 끊어졌으랴 / 滄海何曾斷地脈

높은 인재가 이따금 문과에도 오른다오 / 翹材往往擢巍科

 

두무악의 위에 있는 영추의 물은 / 頭無岳上靈湫水

가물어도 안 마르고 비가 와도 불지 않는데 / 旱不能枯雨不肥

천둥 벼락과 구름이 별안간에 발생하나니 / 霹靂雲嵐生造次

노는 이가 뉘 감히 신의 위엄을 가벼이 보리 / 遊人疇敢褻神威

 

화태도의 서쪽은 물이 서로 부딪치어 / 火脫島西水相擊

풍뢰를 뿜어대고 성난 파도가 하도 높아 / 風雷噴薄怒濤高

만곡의 크나큰 배가 비스듬히 가노라면은 / 萬斛海鰌傾側過

나그네의 목숨은 가볍기 그지없다오 / 行人性命若鴻毛

 

순풍 기다리며 조천관에 머무노라면 / 候風淹滯朝天館

처자들이 서로 만나 술잔을 권하는데 / 妻子相看勸酒盃

한낮에도 이슬비 부슬부슬 내리나니 / 日中霢霂霏霏雨

알건대 이는 고래가 기를 뿜어서라네 / 知是鰍魚噴氣來

 

[주D-001]당초의 세 사람은……신인이었는데 : 제주도(濟州島)에는 맨처음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세 사람이 있어 그 땅에 나누어 살면서 그 사는 곳을 도(都)라고 이름하였는데, 신라(新羅) 때에 고을나의 후손 고후(高厚)가 그 두 아우와 함께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조회하니, 왕이 기뻐하여 고후에게는 성주(星主)란 호칭을 주고, 그 둘째 아우는 왕자(王子)라 하고, 끝 아우는 도내(都內)라 하고, 나라 이름을 탐라(耽羅)라 했다고 한다.

[주D-002]주진촌 : 옛날 중국 서주(徐州)의 주진촌에는 주씨와 진씨만이 살면서 대대로 통혼(通婚)을 하며 서로 의좋게 살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

[주D-003]광양당 : 제주도 남쪽 호국신사(護國神祠)의 당명(堂名)임. 전설에 이르기를 “한라산신(漢拏山神)의 아우가 나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고 죽어서는 신이 되었다. 고려(高麗) 때에 송(宋) 나라 호종단(胡宗旦)이 와서 이 땅을 압양(壓禳)하고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신이 매로 변화하여 돛대 머리에 날아오르더니, 이윽고 북풍이 크게 불어 호종단의 배를 쳐부숨으로써 호종단은 끝내 비양도(飛揚島) 바위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그 신의 신령함을 포창하여 식읍(食邑)을 주고 광양왕(廣壤王)을 봉하고 나서 해마다 향(香)과 폐백을 내려 제사하였고, 본조(本朝)에서는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고 하였다.

[주D-004]방사 : 거마(車馬)를 관장한다는 별 이름이다.

[주D-005]호원에서 목장을 주관 : 원(元) 나라 때에 제주도를 거마(車馬)를 관장하는 방성(房星)의 분야(分野)라 하여 이 곳에 말의 목장(牧場)을 두고 단사관(斷事官)이나 만호(萬戶)를 두어 목축을 주관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D-006]수우 : 본디 소지(沼池)나 하천(河川)을 맡은 관명인데, 여기서는 곧 해산물(海産物)을 관장하는 기관을 가리킨 말이다.

[주D-007]전룡 : 큰 뱀을 말하는데, 용(龍)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주D-008]두무악 : 한라산(漢拏山)의 이칭이다.

[주D-009]조천관 : 제주도 세 고을을 경유하여 육지로 나가는 자는 모두 여기에서 바람을 기다리고, 전라도를 경유하여 세 고을로 들어오는 자도 모두 이 곳과 애월포(涯月浦)에 배를 댄다고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6

 

與猶堂全書 所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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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다산 정약용 선생 -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是唯洌水丁鏞之墓也。 (이는 열수[한강의 별칭] 정용의 묘이다.) 本名曰若鏞。字曰美庸。號曰俟菴。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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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是唯洌水丁鏞之墓也。

시유렬수정용지묘야

(이는 열수[한강의 별칭] 정용의 묘이다.)

 

本名曰若鏞。字曰美庸。號曰俟菴。

본명왈약용자왈미용호왈사암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父諱載遠。蔭仕至晉州牧使。

부휘재원음사지진주목사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母淑人海南尹氏。

모숙인해남윤씨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以英宗壬午六月十六日。生鏞于洌水之上馬峴之里。

이영종임오륙월십륙일생용우렬수지상마현지리

(영종英宗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주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幼而穎悟。長而好學。

유이영오장이호학

(용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二十二以經義爲進士。專治儷文。二十八中甲科第二人。

이십이이경의위진사전치려문이십팔중갑과제이인

(22세(1783, 정조 7)에 경의經義[과문 육체科文六體의 하나]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에 갑과甲科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大臣選啓。隷奎章閣月課文臣。旋入翰林。爲藝文館檢閱。升爲司憲府持平,司諫院正言,弘文館修撰,校理,成均館直講,備邊司郞官。出而爲京畿暗行御史。

대신선계예규장각월과문신선입한림위예문관검열승위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교리성균관직강비변사랑관출이위경기암행어사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課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京畿暗行御使가 되었다. )

 

乙卯春。以景慕宮上號都監郞官。由司諫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由右副至左副承旨。爲兵曹參議。

을묘춘이경모궁상호도감랑관유사간탁배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유우부지좌부승지위병조참의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上號都監郞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嘉慶丁巳。出爲谷山都護使。多惠政。

가경정사출위곡산도호사다혜정

(가경嘉慶[청 인종淸仁宗의 연호]정사년(1797, 정조 21)에 곡산 도호부사谷山都護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己未復入爲承旨,刑曹參議。理冤獄。

기미부입위승지형조참의리원옥

(기미년(1799, 정조 23)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

 

庚申六月。蒙賜漢書選。

경신륙월몽사한서선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是月正宗大王薨。於是乎禍作矣。

시월정종대왕훙어시호화작의

(이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十五娶豐山洪氏。武承旨和輔女也。

십오취풍산홍씨무승지화보녀야

(15세(1776, 영조 52)에 풍산 홍씨豐山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旣娶游京師。則聞星湖李先生瀷學行醇篤。從李家煥,李承薰等得見其遺書.自此留心經籍。

기취유경사칙문성호리선생익학행순독종리가환리승훈등득견기유서.자차류심경적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 선생 익李先生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旣上庠。從李檗游。聞西敎見西書。

기상상종리벽유문서교견서서

(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丁未以後四五年。頗傾心焉。辛亥以來。邦禁嚴遂絶意。

정미이후사오년파경심언신해이래방금엄수절의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

 

乙卯夏蘇州人周文謨來。邦內洶洶。

을묘하소주인주문모래방내흉흉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

 

出補金井察訪。受旨誘戢。

출보김정찰방수지유집

(이에 금정도 찰방金井道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辛酉春。臺臣閔命赫等。以西敎事發啓。與李家煥,李承薰等下獄。

신유춘대신민명혁등이서교사발계여리가환리승훈등하옥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西敎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

 

旣而二兄若銓,若鍾皆被逮。一死二生。

기이이형약전약종개피체일사이생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한 명은 죽고 두 명은 살았다.)

 

諸大臣議白放。唯徐龍輔執不可。鏞配長鬐縣。銓配薪智島。

제대신의백방유서룡보집불가용배장기현전배신지도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定配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秋逆賊黃嗣永就捕。惡人洪羲運李基慶等謀殺鏞。百計得朝旨。鏞與銓又被逮按事。

추역적황사영취포악인홍희운리기경등모살용백계득조지용여전우피체안사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조정의 뜻]를 얻으니, 용鏞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無與知狀。獄又不成。

무여지상옥우불성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蒙太妣酌處。鏞配康津縣。銓配黑山島。

몽태비작처용배강진현전배흑산도

(태비太妣의 작처酌處[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함]를 입어 용鏞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銓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癸亥冬。太妃命放鏞。相臣徐龍輔止之。

계해동태비명방용상신서룡보지지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그를 저지하였다.)

 

庚午秋。男學淵鳴冤。命放逐鄕里。因有當時臺啓。禁府格之。

경오추남학연명원명방축향리인유당시대계금부격지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鳴冤[원통함을 호소함]으로 방축 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後九年戊寅秋。始還鄕里。

후구년무인추시환향리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己卯冬。朝議欲復用鏞以安民。徐龍輔又沮之。

기묘동조의욕복용용이안민서룡보우저지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鏞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鏞在謫十有八年。專心經典。所著詩書禮樂易春秋及四書諸說共二百三十卷。精研妙悟。多得古聖人本旨。詩文所編共七十卷。多在朝時作。

용재적십유팔년전심경전소저시서례락역춘추급사서제설공이백삼십권정연묘오다득고성인본지시문소편공칠십권다재조시작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

 

雜纂國家典章及牧民按獄武備疆域之事醫藥文字之辨。殆二百卷。皆本諸聖經而務適時宜。

잡찬국가전장급목민안옥무비강역지사의약문자지변태이백권개본제성경이무적시의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ㆍ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不泯則或有取之者矣。

불민칙혹유취지자의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鏞以布衣。結人主之知。正宗大王寵愛嘉獎。踰於同列。

용이포의결인주지지정종대왕총애가장유어동렬

  (내가 포의布衣[벼슬이 없는 선비]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의 총애와 가장嘉獎이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前後受賞賜書籍廏馬文皮及珍異諸物。不可勝記。

전후수상사서적구마문피급진이제물불가승기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ㆍ문피文皮 [호표虎豹의 가죽]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

 

與聞機密。許有懷以筆札條陳。皆立賜允從。

여문기밀허유회이필찰조진개립사윤종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陳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常在奎瀛府校書。不以職事督過。

상재규영부교서불이직사독과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

 

每夜賜珍饌以飫之。凡內府祕籍。許因閣監請見。皆異數也。

매야사진찬이어지범내부비적허인각감청견개이수야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其爲人也。樂善好古而果於行爲。卒以此取禍命也。

기위인야락선호고이과어행위졸이차취화명야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夫平生罪孼極多。尤悔積於中。

부평생죄얼극다우회적어중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

 

至於今年。曰重逢壬午。世之所謂回甲。如再生然。

지어금년왈중봉임오세지소위회갑여재생연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遂滌除閑務。蚤夜省察。以復乎天命之性。自今至死。庶弗畔矣。

수척제한무조야성찰이부호천명지성자금지사서불반의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夫丁氏本貫押海。

부정씨본관압해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高麗之末。居白川。我朝定鼎。遂居漢陽。

고려지말거백천아조정정수거한양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始仕之祖。校理子伋。

시사지조교리자급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自玆繩承。副提學壽崗,兵曹判書玉亨,左贊成應斗,大司憲胤福,觀察使好善,校理彦璧,兵曹參議時潤。皆入玉堂。

자자승승부제학수강병조판서옥형좌찬성응두대사헌윤복관찰사호선교리언벽병조삼의시윤개입옥당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自玆時否。徙居馬峴。三世皆以布衣終。

자자시부사거마현삼세개이포의종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高祖諱道泰,曾祖諱恒愼,祖父諱志諧。唯曾祖爲進士也。

고조휘도태증조휘항신조부휘지해유증조위진사야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洪氏產六男三女。夭者三之二。唯二男一女成立。

홍씨산륙남삼녀요자삼지이유이남일녀성립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男曰學淵,學游。女適尹昌謨。

남왈학연학유녀적윤창모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卜兆于家園之北子坐之原。尙能如願。

복조우가원지북자좌지원상능여원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銘曰
명銘은 다음과 같다.

荷主之寵 
하주지총, 임금의 총애 입어

入居宥密 
입거유밀, 근밀近密에 들어갔네 

爲之腹心 
위지복심, 임금의 복심腹心 되어

朝夕以昵 
조석이닐, 조석으로 모셨도다

荷天之寵 
하천지총,  하늘의 총애 입어 

牖其愚衷
유기우충,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精硏六經
정연륙경,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妙解微通 
묘해미통,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妙解微通 
묘해미통,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憸人旣張 
섬인기장 소인이 치성해지니 

天用玉汝
천인옥여,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斂而藏之
렴이장지,  거두어 간직하고

將用矯矯然遐擧
장용교교연하거, 장차 훨훨 노니련다. 

출전 : 『정약용』「다산시문집」'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https://www.iheadlin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092 

 

정약용의 자찬묘지명…“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하지 못하도록 하다” - 헤드라인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⑬[한정주=역사평론가]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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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안고

궁궐 깊은 곳에 들어가 모셨으니

참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하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아

못난 충심(衷心)을 압유(納牖 : 차근차근 말씀드리면 받아들여줌)하셨고

육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오묘하게 해석하고 은미한 데 통했네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폈지만

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으니

잘 거두어 속에 갖추어 두면

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올리리라.

’” 정약용, 『다산시문집』, ‘자찬묘지명 광중본(壙中本)’

출처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http://www.iheadlinenews.co.kr)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⑬…자의식(自意識)의 미학⑬

[한정주=역사평론가]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1822년(순조 22년)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서 정조대왕과의 인연, 천주교에 대한 입장, 자신을 시기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몬 인물들, 유배 생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엮은 500여권의 책 그리고 평생의 뜻을 새긴 명(銘)을 담았다.

정약용이 스스로 묘지명을 지은 까닭은 비록 폐족(廢族)으로 몰락했지만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의 인생을 모욕하거나 왜곡해 후세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정약용은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과 무덤에 묻을 ‘광중본(壙中本)’의 두 가지 자찬묘지명을 썼다.

‘집중본(集中本)’에서는 장문의 글로 자신의 생애를 상세하게 서술한 반면 ‘광중본(壙中本)’에서는 비교적 간략하고 핵심적인 내용만을 기록했다.

여기에서는 ‘광중본(壙中本)’을 소개하는데, 이 자찬묘지명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정약용 생가와 묘지가 있는 다산 유적지 내에 게시되어 있다.

출처 : 헤드라인뉴스(HeadlineNews)(http://www.iheadlin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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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원문-풀이 글

   ◈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讚墓誌銘) 원문-풀이 글  ~ 광중본(壙中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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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대한 문학치료적 고찰

이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두 편을 중심으로, 서사적 정체성의 복원을 통한 문학치료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산문인 지(誌)와 운문인 명(銘)으로 구성되는 묘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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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이 연구는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두 편을 중심으로, 서사적 정체성의 복원을 통한 문학치료적 글쓰기의 가능성을 탐색한 것이다. 산문인 지(誌)와 운문인 명(銘)으로 구성되는 묘지명은 죽은 자의 일생과 행적을 전하는 한문 양식으로, 동아시아 자전 문학으로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자찬묘지명은 자신의 묘지명을 생전에 직접 쓴 경우를 가리킨다. 본고는 ‘나를 말하는 글쓰기’로서 자찬묘지명이 지니는 속성과 정약용의 ‘자찬묘지명’ 두 편이 보이는 특수성에 주목하여, 자기 스스로 자신의 묘지명을 서술하는 행위가 지니는 문학치료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였다. 정약용은 무덤에 함께 매장하기 위한 광중본(壙中本)과 문집에 수록하기 위한 집중본(集中本), 도합 두 편의 자찬묘지명을 지었다. 이 중 집중본은 양적 방대함, 군왕인 정조와의 일화가 차지하는 비중, 정약용 자신의 저작을 정리한 부분의 비중, 천주교와의 관계에 대한 서술의 변화 면에서 특이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들은 결국 자신에 대한 기억으로서 영원히 고정될 자신의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저자의 의도와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즉, 정약용은 자찬묘지명의 방대한 서사와 요약적인 명(銘)을 통해, ‘성실한 유자(儒者), 군왕의 총신(寵臣), 정치적 모함의 피해자’라는 정체성 혹은 에토스(ethos)를 구성하려 한 것이다.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자기 역사의 재구성, 사회적 에토스의 구성, 공감의 시간성 확보를 통해 자신의 서사적 정체성을 복원함으로써 침해당하고 손상된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치유하려는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나를 말하는 글쓰기’로서 자찬묘지명은 외적으로는 언어를 통해 구성한 자신의 에토스를 타인에게 전개하고 내적으로는 자기 반성과 더불어 자기 치유를 꾀한다. 이렇게 볼 때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은 ‘나를 말하는 글쓰기’의 치유 효과, 특히 자기 에토스 구성하기가 지니는 문학치료적 효용의 관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http://www.gosinga.net/archives/1260

 

여유당(與猶堂) 당호의 해석 문제 | 고싱가 숲

다산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은 다산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래서 해당하는 도덕경 구절을 참조하면

www.gosinga.net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

http://www.edasan.org/sub03/board01_list.html?bid=b31&page=98&ptype=view&idx=134 

 

여유당(與猶堂)

다산 정약용의 호는 본디 사암(俟菴)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산의 연보(年譜)를 ‘사암연보’라고 했습니다. 다산은 그가 귀양 살던 산의 이름이 ‘다산’이어서 뒷날 그렇게 부르면서 ..

www.edasan.org

<노자>(老子) 제 15장에 나오는

‘머뭇거리기는 마치 겨울 내를 건너듯’,

‘두리번리기는 마치 네 이웃을 두려워하듯’(猶兮若畏四隣)

이라는 구절이 너무 자신의 처지와 흡사하여 ‘여유’를 당호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8725

 

老子 道德經 15章

第十五章 [原文] 古之善为道者①, 微妙玄通,深不可识。 夫不唯不可识,故强为之容②; 豫兮③若冬涉川④; 犹兮⑤若畏四邻⑥; 俨兮⑦其若客⑧; 涣兮其若凌释⑨; 敦兮其若朴⑩; 旷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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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焉若冬涉川,

예언야동섭천, 머뭇거리니 겨울개울을 건너는 듯 하고[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조심하다.]

猶兮若畏四隣,

유혜야외사린주저하니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ULzJc8EgVH0 

 

 

https://www.youtube.com/watch?v=8MmkVyNB-Ds 

 

 

https://kydong77.tistory.com/21755

 

정약용,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六首/ 정약전,자산어보(玆山魚譜)-흑산도 유배시

​ 다산 선생의 유머 https://www.dotomari.com/1442?category=235637 ​ ​​ 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_ 다산 정약용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늙은이

kydong77.tistory.com

 

1.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髮鬜良獨喜

발간량독희,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 

髮也本贅疣

발야본췌우,머리털은 본디 군더더기이건만 

處置各殊軌

처치각수궤, 처치하는 데 각각 법도가 달라 

無文者皆辮,

무문자개변, 예문 없는 자들은 땋아 늘이고 

除累者多薙

제루자다치, 귀찮게 여긴 자들은 깎아 버리는데 

髻丱計差長

계관계차장, 상투와 총각이 조금 낫기는 하나 

弊端亦紛起

폐단역분기, 폐단이 또한 수다하게 생기었고 

巃嵷副編次

롱종부편차, 높다랗게 어지러이 머리를 꾸미어라 

雜沓笄總縰

잡답계총쇄, 쪽 짓고 비녀 꽂고 비단으로 싸도다 

網巾頭之厄

망건두지액, 망건은 머리의 재액이거니와 

罟冠何觸訾

고관하촉자, 고관은 어이 그리 비난을 받는고 호원(胡元)의 관이다. 

今髮旣全無

금발기전무, 이제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으니 

衆瘼將焉倚

중막장언의, 모든 병폐가 어디에 의탁하리오 

旣無櫛沐勞

기무즐목로, 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고 

亦免衰白恥

역면쇠백치, 백발의 부끄러움 또한 면하여라 

光顱皓如瓠

광로호여호, 빛나는 두개골은 박통같이 희고 

員蓋應方趾

원개응방지, 둥근 두상이 모난 발에 어울리는데 

浩蕩北窓穴

호탕북창혈, 널따란 북쪽 창 아래 누웠노라면 

松風洒腦髓

송풍쇄뇌수, 솔바람 불어라 머릿골이 시원하구려 

塵垢馬尾巾

진구마미건, 말총으로 짠 때묻은 망건일랑 

摺疊委箱裏

접첩위상리, 꼭꼭 접어 상자 속에 버려 두나니 

平生拘曲人

평생구곡인, 평생을 풍습에 얽매이던 사람이 

乃今爲快士

내금위쾌사, 이제야 쾌활한 선비 되었네그려 

[주-D001] 고관(罟冠) : 고고관(罟罟冠)의 준말로, 원(元) 나라 시대에 귀부인(貴婦人)들이 착용했다고 한다.

 

2.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齒豁抑其次

치활억기차, 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 

半落誠可苦

반락성가고, 절반만 빠지면 참으로 고통스럽고 

全空乃得意

전공내득의, 완전히 없어야 마음이 편안하네 

方其動搖時

방기동요시, 한창 움직여 흔들릴 적에는 

酸痛劇芒刺

산통극망자, 가시로 찌른 듯 매우 시고 아파서 

鍼灸意無靈

침구의무령, 침 놓고 뜸질해도 끝내 효험은 없고 

鑽鑿時出淚

찬착시출루, 쑤시다가는 때로 눈물이 났었는데 

如今百不憂

여금백불우, 이제는 걱정거리 전혀 없어 

穩帖終宵睡

온첩종소수, 밤새도록 잠을 편안히 잔다네 

但去鯁與骨

단거경여골, 다만 가시와 뼈만 제거하면은 

魚肉無攸忌

어육무유기, 어육도 꺼릴 것 없이 잘 먹는데 

不唯呑細聶

불유탄세섭, 잘게 썬 것만 삼킬 뿐 아니라 

兼能吸大胾

겸능흡대자, 큰 고깃점도 능란히 삼키거니와 

兩齶久已堅

량악구이견, 위아래 잇몸 이미 굳은 지 오래라 

頗能截柔膩

파능절유니, 제법 고기를 부드럽게 끊을 수 있으니 

不以無齒故

불이무치고, 그리하여 치아가 없는 것 때문에 

悄然絶所嗜

초연절소기, 쓸쓸히 먹고픈 걸 끊지 않는다오 

山雷乃兩動

산뢰내량동, 다만 턱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여 

嗑嗑差可愧

합합차가괴, 씹는 모양이 약간 부끄러울 뿐일세 

自今人病名

자금인병명, 이제부터는 사람의 질병 이름이 

不滿四百四

불만사백사, 사백 네 가지가 다 안 되리니 

快哉醫書中

쾌재의서중, 유쾌하도다 의서 가운데에서 

句去齒痛字

구거치통자, 치통이란 글자는 빼 버려야겠네 

 

3.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眼昏亦一快

안혼역일쾌,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이라 

不復訟禮疏

불부송례소, 다시는 예경 주소 따질 것 없고 

不得硏易卦

부득연역괘, 다시는 주역 괘사 연구할 것도 없어 

平生文字累

평생문자루, 평생 동안 문자에 대한 거리낌을 

一朝能脫灑

일조능탈쇄, 하루아침에 깨끗이 벗을 수 있네 

生憎汲古板

생증급고판, 급고각 판본은 가증스럽기도 해라 

蠅頭刻纖芥

승두각섬개, 자디잔 글자를 티끌처럼 새겼는데 

六卿郊外去

륙경교외거, 육경은 교외로 나갔거니와 

再閏何時掛

재윤하시괘, 재윤은 어느 때에 걸 것인고 

嗟哉望經注

차재망경주, 슬프다, 경문의 주석을 엿보건대 

後人依樣畫

후인의양화, 후인들은 옛사람 본만 따라서 

唯知駁宋理

유지박송리, 송 나라 이학 반박할 줄만 알고 

不恥承漢註

불치승한주, 한대의 오류 답습함은 수치로 안 여기네 

如今霧中花

여금무중화, 이젠 안개 속의 꽃처럼 눈이 흐리니 

無煩雙決眥

무번쌍결자, 눈초리를 번거롭게 할 것 없고 

是非旣兩忘

시비기량망, 옳고 그름도 이미 다 잊었는지라 

辨難隨亦懈

변난수역해, 변난하는 일 또한 게을러졌으나 

湖光與山色

호광여산색, 강호의 풍광과 청산의 빛으로도 

亦足充眼界

역족충안계, 또한 안계를 채우기에 충분하다오 

 

4.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耳聾又次之

이롱우차지, 귀먹은 것이 또 그 다음이로세 

世聲無好音

세성무호음, 세상 소리는 좋은 소리가 없고 

大都皆是非

세성무호음, 모두가 다 시비 다툼뿐이나니 

浮讚騰雲霄

헛부찬등운소, 칭찬은 하늘에까지 추어올리고

虛誣落汚池

허무락오지, 헛 무함은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며 

禮樂久已荒

례락구이황, 예악은 황무한 지 이미 오래이어라 

儇薄嗟群兒

현박차군아, 아, 약고 경박한 뭇 아이들이여 

譻譻螘侵蛟

앵앵의침교, 개미가 떼지어 교룡을 침범하고 

喞喞鼷穿獅

즐즐혜천사. 생쥐가 사자를 밟아 뭉개도다 

不待纊塞耳

부대광색이, 그러나 귀막이 솜을 달지 않고도 

霹靂聲漸微

벽력성점미, 천둥소리조차 점점 가늘게 들리고 

自餘皆寂寞

자여개적막,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黃落知風吹

황락지풍취, 낙엽을 보고야 바람이 분 줄을 아니 

蠅鳴與蚓叫

승명여인규, 파리가 윙윙대거나 지렁이가 울어 

亂動誰復知

란동수복지, 난동을 부린들 누가 다시 알리오 

兼能作家翁

겸능작가옹, 겸하여 가장 노릇도 잘할 수 있고 

塞黙成大癡

색묵성대치, 귀먹고 말 못해 대치(大癡)가 되었으니 

雖有磁石湯

수유자석탕, 비록 자석탕 같은 약이 있더라도 

浩笑一罵醫

호소일매의, 크게 웃고 의원을 한번 꾸짖으리 

5.

老人一快事

로인일쾌사,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縱筆寫狂詞

종필사광사,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

경병불필구, 경병을 굳이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

퇴고불필지,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 

興到卽運意

흥도즉운의,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意到卽寫之

의도즉사지, 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되 

我是朝鮮人

아시조선인,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甘作朝鮮詩

감작조선시, 조선시 짓기를 가장 좋아한다네.

卿當用卿法

경당용경법,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 

迂哉議者誰

우재의자수,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區區格與律

구구격여률,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遠人何得知

원인하득지,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凌凌李攀龍

릉릉리반룡, 능가하기 좋아하는 이반룡은 

嘲我爲東夷

조아위동이, 우리를 동이라고 조롱했는데 

袁尤槌雪樓

원우퇴설루, 원굉도는 오히려 설루를 쳤으나 

海內無異辭

해내무이사, 천하에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네 

背有挾彈子

배유협탄자, 등 뒤에 활을 가진 자가 있거늘 

奚暇枯蟬窺

해가고선규, 어느 겨를에 매미를 엿보리오 

我慕山石句

아모산석구, 나는 산석의 시구를 사모하노니 

恐受女郞嗤

공수녀랑치, 여랑의 비웃음을 받을까 염려로세 

焉能飾悽黯

언능식처암, 어찌 비통한 말을 꾸미기 위해 

辛苦斷腸爲

신고단장위, 고통스레 애를 끊일 수 있으랴 

梨橘各殊味

리귤각수미,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나니 

嗜好唯其宜

기호유기의, 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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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다산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다산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 ~ 1836년 4월 7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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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생활

대과 급제

 
 화성성역의 궤에 실린 거중기

1789년(정조 13년), 27세 되던해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서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23][24]이후 사간원과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년에는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 30세가 되던해인 1792년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죽는다.

성균관

1794년에는 성균관에서 강의하게 되고, 음력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 삭녕 등을 순찰하였다. 1795년 을묘박해 사건이 벌어졌을 때 모함을 받아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23]이어 병조참지, 좌부승, 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

곡산부사

곡산 부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 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법학자 조국 서울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아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25] 즉,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1799년에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천주교와 인연

천주학 입문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의 만남으로 성호 이익의 학문에 연을 맺었다. 자연스럽게 남인 소장파 학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성호 이익 문하에서 학습하여 학문적 명성이 자자한 권철신과도 연을 맺게 된다. 또한 이들이 천주학과 서양학문을 많이 연구하는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이를 접하게 되었다. 권철신이 주도하여 1777년과 1779년에 경기도 양주에 있는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여러날에 걸쳐 서학교리 강습회를 열었는데,[26] 정약용은 이벽, 정약전, 권일신, 이가환, 이기양, 이승훈 등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27] 이 시기에 학문적 호기심에 서양학문과 함께 천주학을 접했다. 1784년 4월에 큰 형수의 제사에 참여했다가 귀경하면서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13] 천지창조의 기원, 영혼과 육신, 생사의 이치에 관한 이벽의 설명은 놀랍고도 오묘하여 즉시 매료되었다.[28] 이를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책을 여러권 탐독하며 심취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천주교와의 인연은 곧 악연이 되어 훗날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29]

명례방 사건

 이 부분의 본문은 명례방사건입니다.

1784년, 이벽에게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인이 되었다. [23].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귀국한 이승훈이 서울 명동에 있는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 운영하였는데[30] 정약용도 이 모임은 참여하였다. 그러던중 1785년 초에 포졸들에게 이 비밀모임이 발각되어 형조에 끌려가는 명례방사건이 벌어진다.[31][32]다행히 중인신분인 역관 김범우만 투옥되고 정약용을 비롯한 양반출신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범우는 유배지에서 사망하였고 이벽은 그의 부친과 갈등끝에 식음전폐하다 죽었다. 이승훈은 가문의 압박속에 배교했으며 모임의 주축이었던 양반출신들이 모두 떠나자 '명례방공동체'는 와해되었다. 이때 정약용도 일시적이나마 배교했으나 훗날 천주교인들과 은밀하게 교제를 재개했다.

반회사건

1787년(정조 11) 10월경, 반촌에 있는 김석태(金錫泰)의 집에서 정약용은 이승훈, 강이원 등과 은밀히 천주교서적을 연구, 토론하였다.[23] 그러한 사실을 안 이기경(李基慶)이 천주교 배척론자인 홍낙안(洪樂安)에게 알리자, 척사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랐다. 그로 인하여 당사자들에게 직접적인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천주학 도서의 도입과 유포가 문제되어 조정에서 그 폐해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33]이 당시 조선에는 한글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이 목판으로 간행되어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었는데, 충청도 지방의 산골마을에까지 천주교 서적이 보급되어 있었다.[33] 1788년에 8월에 이경명이 서학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34][35] 아울러 전국에 천주교 관련 서학서적을 색출, 소각하는 조처가 내려졌다.[36] 반회사건이 발생한 직후 아버지 정재원은 자식들에게 천주학을 멀리하라고 명했다.[37] 정약용은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아버지 말씀을 따랐으나 정약종은 천주학을 내려 놓치못했다.

신해박해

 이 부분의 본문은 신해박해입니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 유지충이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는 진산사건이 발생했다. 정약용의 집안도 큰 충격에 휩싸였다.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가쪽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37] 조상제사거부는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는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38) 유지충과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은 참수당했다.[39] [40] 평택현감으로 있던 정약용의 매부 이승훈은 삭탈관직 당했다.[41]

그동안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었다.[42][43] 그러나 지난 1788년에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도 극형을 명한후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서양서적을 소각하여 불온한 서양사상의 전파를 차단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서인들은 윤지충이 남인이었던 관계로 이 사건을 정쟁화하며 사건을 증폭시켰으며 남인들 조차 공서파와 신서파로 분열하였다.

한편 천주교가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힌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관계를 완전히 청산했다. 그러나 유지충과 친척이었던 관계로 서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44] 집안내에서도 약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둘째 형 정약전도 이번 사건 발생직후 배교를 했으나 셋째형 정약종은 반회사건과 신해박해로 전국이 소란스러웠는데도 불구하고 천주교에 대한 열정에는 변함이 없었다,[45] 정약종은 교리에 따라 제사참여를 거부하며 갈등하다가 처자식을 데리고 한강 건너 양근의 분원으로 이사를 가버렸다.[45]

을묘박해

 이 부분의 본문은 을유박해입니다.

1795년 6월, 포도청이 밀입국후 은밀히 활동하던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를 체포하는데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관련자들이 체포되여 선교사의 도피처를 추궁받았으나 이들은 끝까지 함구하였고 모진 고문끝에 옥사하였다.[45] [47] [48] 조용히 지나가는 듯하던 사건은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세 사람이 일찍 죽는 바람에 선교사 주문모체포의 기회를 놓쳤는데, 이는 포도대장의 경솔함과 사건의 진상을 덮으려한 의혹이 있어 보이니 치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조정이 다시 시끄러워졌다.[49][50] 부사과 박장설이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이 주문모 도주사건에 연류되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이들을 성토하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노론 벽파의 공세가 빗발치자 정조는 한발 물러서게 되었는데, 결국 1795년 7월 25일에 이승훈을 예산으로 유배 보내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충청남도 홍주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52][53] 당시 충청지역에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터라 정조는 이 지역으로 이들을 보내어 교세 확산을 막음으로 천주교에 심취했었던 과오를 속죄하고[53] 지방좌천을 통해 노론 공격의 예봉도 차단하려 내린 초치였다. 정약용은 무려 7품계나 떨어지며 체면이 몹시 구겨졌다. 그러나 정약용이 금정에서 교세 저지를 위해 펼친 노력은 실효를 거두었고 충청지역 천주교계의 거물인 이존창을 체포하는 공도 세웠다[54]

신유박해

 이 부분의 본문은 신유박해입니다.

정조의 급사

형조참의를 제수받아 재직하던 중에 대사간 신헌조가 형 정약전을 부당하게 탄핵하자 '자명소'를 올리고 1799년 7월 26일에 사직하였다.[55] 잠시 서울에 머물다가 1800년 초에 낙향하여 마재에서 지내던 중 6월 28일에 정조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급하게 상경하였다. 국장을 치루는 동안에 독살설 등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며 어수선해지자 정약용은 처자를 마재으로 내려보내고 홀로 서울에 머물면서 정국을 살폈다.[56] 겨울에 주상의 졸곡(卒哭)[57]이 지나자 낙향하였고, 오직 초하루와 보름날 벼슬순서에 따라 차례로 열을 지어 곡하는 곡반(哭班)[58]에만 참석하였다.[59] 그 나머지 시간은 고향집에서 경전을 읽으며 지냈다.

숙청 작업

염려했던대로 어린 순조의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가 1801년 음력 1월 10일에 천주교 탄압령을 내리며 남인에 대한 숙청작업을 시작했다.[60][61] 오가작통법을 적용하고 역율로 다스리라는 엄명이 전국에 떨어졌다 정순왕후는 과거에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던 전력이 있어[62][63]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었기에 정조가 즉위한후 집안은 몰락했고 오라비 김귀주가 귀양지에서 사망하며[64] 정조와는 원수지간이었다. 이런 정순왕후의 목표는 정조때 성장한 남인을 몰아내고 재기하지 못하도록 박멸하는 것이었다.[65] 선왕 정조는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다.[66] 남인들이 서학에 관심을 두고 천주교에 가까운 자가 많았으니 좋은 명분이 되었다.

노론 벽파의 최우선 목표는 정조의 총애를 받던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3인의 제거에 있었다.[67] 이가환과 권철신은 남인을 이끌고 있었고 정약용은 남인을 이끌 차세대 젊은 주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가환은 반드시 죽여야 했는데, 이는 이가환의 가문이 조상때부터 있었던 노론 벽파와의 악연 때문으로[68] 이가환은 노론벽파가 가장 기피하는 인물이었다.[69] 이가환은 1791년 진산사건 직후 배교하며 천주교 탄압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노론 벽파도 알고 있었으나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노론 벽파가 원했던 것은 이가환이 천주교를 버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의 목숨이었다.[70] 이가환과 권철신은 모진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구속과 석방

정약용은 가슴 졸이며 지내던중에 셋째형 정약종이 서적과 서찰등을 숨기려다 관아에 적발되어 모두 압수당했다는 소식을 1월 29일에 접하였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월 8일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국문장에서 단지 학문적 관심으로 천주교를 접했을뿐이었기에 이미 1791년 진산사건(신해박해)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자신을 변호했다.[71][72][73] 그러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노론 벽파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2월 11일에 정약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밖에도 이승훈, 최창현 등 많은 이들이 투옥되었다.

정약용은 1791년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버렸다.[65] 1797년 천주교도로 오해 받자 《자명소》를 써서 반박했고 1799년에는 《책사방략》을 저술하여 배교를 분명히 한적이 있다.[74] 또한 '동부승지 사직상소'에서도 배교했음을 분명히 밝힌적이 있었다.[75][76] 이번 국문중에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론하며 천주교 지도자인 권철신, 황사영 등을 고발하였다.[77] 또한 천주교신도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77] 자신의 구명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자 체념하였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은 후 천주교 선교활동을 주도했던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고[78]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셋째 형이며 지난번 진산사건(1791년)을 일으킨 윤지충은 외사촌 형이었기 때문에 정약용은 궁지에 몰려있었다.[79]그러던중 잡혀온 여러 신자들의 국문이 거듭될수록 정약용의 배교가 명백한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80] 분명한 물증들로 인해 정약용과 정약전은 구속된지 18일만에 유배로 감형된 후 석방되었다.

귀양살이

정약용은 18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기간에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저술하였으며, 둘째 형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

말년

1818년(순조 18) 음력 5월에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고향으로 돌아왔다. 혼인 60주년 회혼일 아침인 1836년 마현리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는 〈회혼시〉였다.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은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텨라"는 것이었다.

추증

1910(융희 4) 7월 18일에 정헌대부 규장각 제학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도(文度)'가 내려졌다.[81]

 

回婚詩(회혼시)

六十風輪轉眼翩
륙십풍륜전안편,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穠桃春色似新婚
농도춘색사신혼,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生離死別催人老
생리사별최인로,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戚短歡長感主恩
척단환장감주은,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此夜蘭詞聲更好
차야란사성갱호,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舊時霞帔墨猶痕
구시하피묵유흔, 그 옛날 붉은 치마[1]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剖而復合眞吾象
부이부합진오상,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留取雙瓢付子孫
류취쌍표부자손, 한 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1.  원문의 ‘霞帔’는 조선 시대 여인들이 입던 붉은 치마이다. 다산이 유배지에 있을 때, 부인 홍씨가 이 ‘하피’를 보내 오자 다산이 치마를 이리저리 잘라 그 위에 글을 써 올려 보낸 일이 있다.

 

https://m.blog.naver.com/nrpark-/220738732902

 

정약용의 <회근시(回巹詩)>

회근시(回巹詩)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편) 穠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 生離...

blog.naver.com

 

[참고]

https://parksungwoong.tistory.com/entry/%EC%A0%95%EC%95%BD%EC%9A%A9-%EB%9C%AC%EC%84%B8%EC%83%81%EC%9D%98-%EC%95%84%EB%A6%84%EB%8B%A4%EC%9B%80-1

 

정약용 - 뜬세상의 아름다움

회혼시回婚時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으니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이 늙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이 밤 목

parksungwoong.tistory.com

 

[참고]

목란사(木蘭辭)는 중국 장편 서사시로, 작자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북위 후기에 만들어졌으며, 남조 진(陳)나라 사람인 지장(智匠)이 지은 《고금악록》(古今樂錄)[1]에 처음으로 수록되었으며, 총 글자 수는 330자이다.

내용

여자 영웅 화목란(花木蘭)이 효도에 몸과 마음을 다했는데,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장을 하고 전장에 가는 모험을 하기까지 하면서까지 집안을 지키려 하였다. 화목란이 전장에서 지낸 지 10년째 되던 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전쟁에서 공을 세워 금의환향한다. 그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목란이 여자임을 알게 되었다.[2]

원문

 

喞喞復喞喞, 木蘭當戶織。不聞機杼聲,唯聞女嘆息。
問女何所思,問女何所憶。
女亦無所思,女亦無所憶。
昨夜見軍帖,可汗大點兵,
軍書十二卷,卷卷有爺名。
阿爺無大兒,木蘭無長兄,
願爲市鞍馬,從此替爺征。
東市買駿馬,西市買鞍韉
南市買轡頭,北市買長鞭。
旦辭爺娘去,暮宿黃河邊。
不聞爺娘喚女聲,
但聞黃河流水鳴濺濺。
旦辭黃河去,暮至黑山頭。
不聞爺娘喚女聲,
但聞燕山胡騎鳴啾啾。
萬里赴戎機,關山度若飛。
朔氣傳金柝,寒光照鐵衣。
將軍百戰死,壯士十年歸。
歸來見天子,天子坐明堂。
策勳十二轉,賞賜百千强。
可汗問所欲,木蘭不用尙書郞,
願馳千里足,送兒還故鄕。
爺娘聞女來,出郭相扶將。
阿姉聞妹來,當戶理紅妝。
小弟聞姉來,磨刀霍霍向豬羊。
開我東閣門,坐我西閣床。
脫我戰時袍,着我舊時裳。
當窓理雲鬢,對鏡帖花黃。
出門看火伴,火伴皆驚忙。
同行十二年,不知木蘭是女郞。
雄兎脚撲朔,雌兎眼迷離。
兩兎傍地走,安能辨我是雄雌。
즉즉부즉즉, 목란당호직.불문기저성, 유문여탄식.
문녀하소사? 문녀하소억?
여역무소사, 여역무소억.
작야견군첩, 가한대점병.
군서십이권, 권권유야명.
야야무대아, 목란무장형.
원위시안마, 종차체야정.
동사매준마, 서시매안천.
난시매비두, 북시매장편.
단사야랑거, 모숙황하변.
불문야랑환여성,
단문황하유수명천천.
단사황하거, 모지흑산두.
불문야랑환여성.
단문연산호기명추추.
만리부융기, 관산도약비.
삭기전금탁, 한광조철의.
장군백전사, 장사십년귀.
귀래견천자, 천자좌명당.
책훈십이전, 상사백천강.
가한문소욕, 목란불용성서랑.
원치천리족, 송아환고향.
야랑문여래, 출곽상부장.
아자문매래, 당호이홍장.
소제문자래, 마도곽곽향저양.
개아동각문, 좌아서각상.
탈아전시포, 착아구시상.
당창이운빈, 대경첩화황.
출문간화반, 화반개경망.
동행십이년, 부지목란시여랑.
웅토각박삭, 자토안미리.
양토방지주, 안능변아시자웅

 

花木蘭 한문 VS 국역

http://www.tufs.ac.jp/ts/personal/choes/etc/kansi/Nmulan.html

 

뮬란의 시

뮬란의 시    중국의 용감한 소녀를 소재로 만든 디즈니의 만화영화 ≪뮬란≫은 한시가 원형이다. 11세기에 북송에서 편찬된 ≪악부시집≫이란 한시집에 수록되여있는 ≪목란사≫가 그 뿌리

www.tufs.ac.jp

 

花木蘭, 花木兰(huā mù lán)[1]


중국의 설화와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장수. 전설 속의 인물일 뿐 실존했던 인물은 아니다. 남북조 시대의 시가인 목란사(木蘭詞)에 등장하는 여성으로, 화라는 성씨는 뒤에 이야기에 살이 붙으면서 붙은 것이다. 목란사에는 목란의 성씨가 나오지 않는다.

5호 16국의 혼란한 사회상에서 여성 무장의 활약이 민간에 퍼졌는데[2] 자신의 성별을 숨긴 채 12년 동안 공을 세운 여성 무장이라는 골자를 지닌 설화로 변형 되었고 그대로 수백 년에 걸쳐 민간설화처럼 이어지면서 5호 16국에서 이어진 수당시대와 더 나아가 송나라 시대까지 여러 번 재창작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화목란이 아버지 대신 종군했다는 전쟁도 창작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공통적으로 중국의 동북방에서 위세를 떨친 세력들로 선비족흉노족고구려 등이 거론된다.

그녀의 성, 고향,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문학 작품 등에 따라 다른데 성이 주씨, 위씨라거나, 목란이라는 이름 자체가 성이라는 설도 있다.

2. 활동상

활동 시기에 대해서는 북위의 효문제에서 선무제 때 사람, 수 공제 때의 사람, 당나라 초기 때 사람이라고 제기되고 있지만 그녀를 묘사하는 시가인 《목란사》목란사 전문의 묘사를 볼 때 북위의 한화정책과 맞물려서 남북조시대일 가능성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북위의 장수로 추정되고 있다.

485년부터 492년까지 아버지가 병약하자 이를 대신해서 유연 정벌에 종군하였다고 하며[3] 그녀의 고향이나 출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양주, 하북성 완현, 영주 초군 동위촌, 송주 혹은 황주, 구화송촌, 북민족의 통만진 등이 제기되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자 가한(可汗)이 벼슬과 봉록을 내렸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귀향한 후 여자로 돌아가자 모두 놀랐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I8OuFNYVo4 

 

 

https://kydong77.tistory.com/21761

 

정약전(丁若銓), 자산어보(玆山魚譜)- 어류백과사전/ 玆山은 흑산도

https://www.youtube.com/watch?v=PtbzZYTKYZo 흑산도 예리항 https://www.youtube.com/watch?v=zDe0jCfvbSU https://www.youtube.com/watch?v=Kon63SRo9xM https://www.youtube.com/watch?v=RMgC2hjQAes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95%BD%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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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가 흑산도 인근 해역의 어류를 총정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남겼다.

그들 형제들은 귀양가서도 백성들의 복리를 위한 학술에 매진했다. 참으로 소중한 혈통의 유전자를 지닌 형제분들이시다.

 

https://kydong77.tistory.com/20875

 

홍도 흑산도/ 정약전(丁若銓), 자산어보(玆山魚譜)

https://www.youtube.com/watch?v=LS9epSlACD4 https://www.youtube.com/watch?v=YzkT5vM4cyY https://www.youtube.com/watch?v=TxHjpXi6_p8 https://www.youtube.com/watch?v=VDhKXteWKu8 https://www.youtube.com/watch?v=gtQ7GYW_gxE https://www.youtube.com/watch?v=Ptb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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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auction.com/htm/off_auction_read.htm?id=62702&off_id=157&page=9&ac_num=70&PHPSESSID=d870b475e1cc2db22ce048bca20730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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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현장경매 > 제 134 회 >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의 시를 柳琴이 選集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 묵서필사본 4권 단책 조선 후기 한시사가(漢詩四家, 약칭 '後四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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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사가들은 세조가 중건한 원각사지 백탑[10층석탑]부근에 살았으며 연암 박지원과 사제관계로 이서구를 제외하면 북학의 선구자들이었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
통덕랑(通德郞) 이성호(李聖浩)의 아들로 집안의 당색은 노론이다. 자는 무관(懋官), 호는 아정(雅亭)·형암(炯庵)·청장관(靑莊館) 등이며 본관은 전주다. 가난 속에서도 평생 서책과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사후 평소 그를 아꼈던 정조의 특명과 도움으로 시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8권4책)가 간행되었고, 초년기, 장년기의 필사본 시문집 및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사소절(士小節)』, 『청비록(淸脾錄)』,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의 저술이 아들 이광규(李光葵)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필사본)로 정리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D%95%EB%AC%B4

 

이덕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덕무(李德懋, 1741년 7월 23일(음력 6월 11일) 출생 ~ 1793년 3월 7일(음력 1월 25일) 서거)는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소위 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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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득공(柳得恭, 1748-1807)
자는 혜풍(惠風)·혜보(惠甫), 호는 영재(齋)·고운당(古芸堂),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본디 집안의 당색은 소북(小北)이나 유득공의 조부, 부친대에서는 달성 서씨 등 소론계와 절친히 교유하였다. 부친 유춘(柳瑃)이 27세로 요절하여, 편모 슬하에서 고학(苦學)하였다. 1773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시문에 능하여 청 이조원으로부터 ‘동국의 문봉(文鳳)’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문학 외에 역사·고거학에도 해박하여 저서로 『발해고(渤海考)』, 『경도잡지(京都雜志)』, 『령재집(泠齋集)』,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사군지(四郡志)』,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등을 남겼다. 총 3차 연행하였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7656

 

영재집(泠齋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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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자는 재선(在先)·수기(修其)·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 또는 위항도인(葦杭道人), 만년에는 정유(貞)로 고쳤다. 본관은 밀양으로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庶子)다. 당색은 소북이다. 1778년 5월 사은(謝恩) 정사 체제공(蔡濟恭)을 따라 처음으로 연경에 들어가게 되었는데(이덕무 또한 서장관 심염조를 따라 같이 입연하였다), 명사들과 교유하는 한편 청의 문물 제도와 각종 시설을 세밀히 관찰하고 돌아와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시문집으로는 『정유집(貞集)』 등이 있다. 총 4차례 연행을 하였던 바 1801년을 전후해서는 그의 『정유고략(貞藁略)』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C%EA%B0%80

 

박제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초정 박제가 선생 조선국의 전설서 별제 임기 1785년 ~ 1791년 군주 정조 이산 조선국의 오위도총부 오위장 임기 1794년 ~ 1795년 군주 정조 이산 조선국의 경기도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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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저서

  • 북학의(北學議)
    • 《정유집》(貞否集)
  • 《정유각집》 박제가의 시문집. 정민의 국역서도 출판됨.
  • 明農草稿
  • 武藝圖譜通志》 - 백동수 이덕무와 공저.
  • 韓客巾衍集
  • 정유시고(貞否詩稿)

 

ⓓ 이서구(李書九, 1754-1825)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齋)·강산(薑山)·석모산인(席帽山人),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열두 번째 왕자인 인흥군(仁興君) 영(瑛)의 후손으로, 부친은 정언(正言)을 지낸 이원(李遠)이다. 당색은 노론이다. 영조 50년(1774)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거쳐 호조판서에 이르고 순조 24년(1824)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오희상은 그를 “초년에는 시율(詩律)로 울렸고, 중년에는 정치로 이름을 날렸으며, 만년에는 경술로 자오(自娛)하였다”고 평하였다. 저서로 『강산초집(薑山初集)』, 『척재집(齋集)』, 『강산필치(薑山筆)』, 『청수당필기(淸修堂筆記)』 등이 있다.

ⓔ 유금(柳琴, 1741-1788, 초명은 璉)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의 편자,
유득공의 숙부로 자는 탄소(彈素), 호는 기하주인(幾何主人)이다. 그는 거문고와 책을 아주 좋아했으며, 천문과 기하학에 정통했다. 정조는 즉위와 함께 규장각을 설치하고 훌륭한 인재를 뽑아 우문지지(右文之治)의 교두보로 삼았는데 1779년에는 서얼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徐理修)를 검서관에 임명하는 전대에 없었던 특채를 하였다. 이들이 이른바 '사검서관(四檢書官)'이다.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은 이 중 서이수를 제외한 3인에 이서구가 낀 것으로, 3인은 모두 서얼이나 이서구는 경화벌열 양반이다. 이들은 모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제자 '북학(北學)'이라는 공동의 학문적·사상적 지향을 가졌다.
유금(柳琴)은 영조 52년(1776)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연행 부사(副使)인 서호수(徐浩修)를 수행하여 연경에 다녀왔다. 그 때 이 네 사람의 시를 선집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을 가지고 가서 청의 문인들인 이조원(李調元)과 반정균(潘庭筠)으로부터 평어(評語)는 물론 서문까지 받아 귀국하였다.

 

[참고]

한문사대가

https://kydong77.tistory.com/10865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월상계택(月象谿澤)이정구,신흠, 장유,이식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조선 중기 한문학 문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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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택(象谿澤)

월사(月沙) 이정구, 상촌(象村) 신흠, 계곡(谿谷) 장유, 택당(澤堂) 이식.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첫째 당송 팔가의 고문을 모범으로 삼아 고문을 쓰려고 노력한 점,

둘째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셋째 화려한 가문의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이들은 중세적인 관료 문학을 대표하는 이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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