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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엄화계수일 잡저(罨畫溪蒐逸雜著), 연암집 제 10 권 별집 [은자주]이 글을 문집에 챙겨 넣은 아들 종채의 주석도 흥미롭겨니와 사마천의 , 유학 경전의 인용까지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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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열하일기, 허생전, 양반전

*종전에 사용하던 포털 사이트가 여러 차례 소멸되어 희미한 글씨의 수정이 불가능하므로 읽기 쉽게 재수록합니다. 박지원/ 原士 원사(原士) -선비란 무엇인가? http://kydong77.tistory.com/7938 ,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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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호질虎叱/ 열하일기 4.관내정사

虎叱 https://kydong77.tistory.com/18892 은 안 보이고, 대신 <범의 꾸중>이라 번역해 사용합니다. 최상의 권위를 지닌 북곽이 최하위의.."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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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질(虎叱)

(호랑이의 질책, 범의 꾸중)

-박지원(朴趾源, )

 

虎睿聖文武慈孝智仁雄勇壯猛

(호예성문무자효지인웅용장맹) : 범은 모든 일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착하고 성스러우며, 문채롭고 무인다우며, 인자롭고 효성이 지극하며, 슬기롭고 어질며, 기운차고 날래며, 용맹스럽고 사나워

天下無敵

(천하무적) :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다.

然狒胃食虎

(연비위식호) : 그러나 비위는 호랑이를 먹고,

竹牛食虎

(죽우식호) : 죽우도 호랑이를 먹고,

駮食虎

(박식호) : 박도 호랑이를 먹고,

五色獅子食虎於巨木之岫

(오색사자식호어거목지수) : 오색사자도 호랑이를 먹고,

玆白食虎

(자백식호) : 자백도 호랑이를 먹고,

䶂犬飛食虎豹

(표견비식호표) : 표견도 날아서 호랑이를 잡아 먹고

黃要取虎豹心而食之

(황요취호표심이식지) : 황요 등은 호랑이의 심장을 취하여 먹는다.

猾無骨爲虎豹所呑

(활무골위호표소탄) : 활이란 동물은 뼈가 없는 관계로 호랑이가 꿀떡 삼켜 버리면

內食虎豹之肝

(내식호표지간) : 뱃속에 들어가서 그 간을 먹으며,

酋耳遇虎

(추이우호) : 추이(酋耳)란 짐승은  호랑이를 만나면

則裂而啖之

(칙렬이담지) : 갈기갈기 찢어서 씹어먹는 습성이 있다.

虎遇猛㺎

(호우맹용) : 그리고 호랑이가 맹용을 만나면

則閉目而不敢視

(칙폐목이불감시) : 무서워서 눈을 감고 보지도 못한다.

人不畏猛㺎而畏虎

(인불외맹용이외호) : 그러나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맹용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호랑이를 무서워한다.

虎之威其嚴乎

(호지위기엄호) : 어쨌든 호랑이의 위세란 대단한 것인저.

虎食狗則醉

(호식구칙취) : 범이 개를 잡아먹으면 술을 마신 것처럼 취하고

食人則神

(식인칙신) : 범이 사람을 한번 잡아먹으면 신들린 듯 하다

虎一食人

(호일식인) : 호랑이가 한번 사람을 먹으면

其倀爲屈閣

(기창위굴각) : 그 창귀가 굴각이 되어

在虎之腋

(재호지액) : 범의 겨드랑이에 붙어 살면서

導虎入廚

(도호입주) : 범을 남의 집 부엌에 인도하여서

舐其鼎耳

(지기정이) : 솥전을 핥으면

主人思饑(주인사기) : 그 집 주인이 갑자기 시장끼를 느껴

命妻夜炊

(명처야취) : 한밤중이라도 아내더러 밥을 지으라고 하게 된다

虎再食人

(호재식인) : 두번째로 그 사람을 잡아 먹는다.

其倀爲彛兀(기창위이올) : 그러면 창귀는 이올이란 귀신이 되어서

在虎之輔(재호지보) : 호랑이의 볼에 붙어 다니며

升高視虞(승고시우) : 높은 곳에 올라 우를 살핀다.

若谷穽弩(약곡정노) : 만약 산골짜기에 이르러서 함정이 있으면

先行釋機(선행석기) : 먼저 가서 위험이 없도록 차귀를 풀어 놓는다.

虎三食人(호삼식인) : 호랑이가 세번째로 사람을 잡아 먹으면

其倀爲鬻渾(기창위죽혼) : 그 창귀는 육혼이란 귀신이 되어서

在虎之頤(재호지이) : 호랑이 턱에 붙어서

多贊其所識朋友之名(다찬기소식붕우지명) : 그가 평소에 잘 알던 친구의 이름을 불러댄다.

虎詔倀曰(호조창왈) : 어느 날 범이 창귀를 불러 놓고 하는 말이,

日之將夕(일지장석) : "오늘도 곧 날이 저무는데

于何取食(우하취식) : 어디 가서 먹을 것을 구한단 말이냐." 하니

屈閣曰(굴각왈) : 굴각이 대답하기를,

我昔占之(아석점지) : "제가 전에 점쳐 보았더니

匪角匪羽(비각비우) : 뿔을 가진 짐승도 아니고 날짐승도 아닌

黔首之物(검수지물) : 검은 머리를 가진 것이

雪中有跡(설중유적) : 눈 위에 발자국이

彳亍踈武(척촉소무) : 비틀비틀 성긴 걸음,

瞻尾在腦(첨미재뇌) : 뒤통수에 꼬리가 붙어

莫掩其尻(막엄기고) : 꽁무니를 감추지 못하는 그런 놈입니다." 하니

彛兀曰(이올왈) : 다음에 이올이 말하기를,

東門有食(동문유식) : "동문에 먹을 것이 하나 있는데,

其名曰醫(기명왈의) : 그 놈의 이름은 의원(醫員)이라고 합니다.

口含百草(구함백초) : 의원(醫員)은 약초를 다루고 먹으니

肌肉馨香(기육형향) : 그 고기도 별미(別味)인 줄로 아옵니다.

西門有食(서문유식) : 그리고 서문에도 먹을 것이 있는데

其名曰巫(기명왈무) : 그것은 무당입니다.

求媚百神(구미백신) : 그 계집은 천지 신명께 온갖 미태(媚態)를 부리고

日沐齊潔(일목제결) : 매일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여

請爲擇肉於此二者(청위택육어차이자) : 깨끗하고 맛있는 계집이오니 이 둘 중에서 골라서 잡수시길 바라옵니다." 하니,

虎奮髯作色曰(호분염작색왈) : 범이 화를 내며 하는 말이,

醫者疑也(의자의야) : "의(醫)란 의(疑)인데

以其所疑而試諸人(이기소의이시제인) : 저 자신도 의심스러운 것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시험하여,

歲所殺常數萬(세소살상수만) : 해마다 죽이는 것이 항상 몇 만이 넘는다.

巫者誣也(무자무야) : '무(巫)란 무(誣)인데

誣神以惑民(무신이혹민) : 결국 무당이란 귀신을 속이고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니

歲所殺常數萬(세소살상수만) : 해마다 목숨 잃는 것이 수만이나 된다

衆怒入骨(중노입골) : 그래서 여러 사람의 노여움은 그들의 뼈 속에까지 스며들어

化爲金蚕(화위금잠) : 금잠이란 벌레가 되어서

毒不可食(독불가식) : 독기가 있어 먹을 수 없다."

鬻渾曰(죽혼왈) : 이에 육혼이 또 말한다.

有肉在林(유육재림) : "어떤 고기가 저 숲속에 있는데

仁肝義膽(인간의담) : 인자한 염통과 의기로운 쓸개며

抱忠懷潔(포충회결) : 충성스런 마음을 지니고 순결한 지조를 품었으며,

戴樂履禮(대악리례) : 악은 머리 위에 이고 예는 신처럼 신고 다닌답니다.

口誦百家之言(구송백가지언) : 뿐만 아니라 그는 입으로 제자(諸子)백가(百家)의 말들을 외며,

心通萬物之理(심통만물지리) : 마음속으로는 만물의 이치를 통했으니

名曰碩德之儒(명왈석덕지유) : 그의 이름은 석덕지유라 하옵니다.

背盎軆胖(배앙체반) : 등살이 오붓하고 몸집이 기름져서

五味俱存(오미구존) : 오미(五味)를 갖추고 있답니다." 하였다.

虎軒眉垂涎(호헌미수연) : 범이 그제야 눈썹을 치켜세우고 침을 내리 흘리며

仰天而笑曰(앙천이소왈) : 하늘을 쳐다보고 씽긋 웃으면서 말한다.

朕聞如何(짐문여하) : "짐(朕)이 이를 좀더 상세히 듣고자 하니 자세히 말하라." 했다.

倀交薦虎曰(창교천호왈) : 그러자 창귀들이 서로 범에게 추천하기를,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 : "일 음· 일 양을 도(道)라 하옵는데,

儒貫之(유관지) : 저 유가 이를 꿰뚫으며

五行相生(오행상생) : 오행(五行)이 서로 낳고

六氣相宣(륙기상선) : 육기(六氣)가 서로 이끌어 주는데,

儒導之(유도지) : 저 유가 이를 조화시킨다고 합니다.

食之美者無大於此

(식지미자무대어차) : 그러니 먹어서 맛이 있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으리라."

虎愀然變色易容而不悅曰

(호초연변색역용이불열왈) : 범이 이 말을 듣고 문득 추연히 낯빛을 붉히며 기쁘지 않은 어조로 말한다.

陰陽者

(음양자) : "아니야, 저 음·양이란 것은

一氣之消息也而兩之

(일기지소식야이량지) : 한 기운의 생성과 소멸에 불과하다거늘 그들이 두 가지를 겸했으니

其肉雜也

(기육잡야) : 그 고기가 잡될 것이며,

五行定位

(오행정위) : 오행이 각기 제 자리에 있어서

未始相生

(미시상생) : 애당초 서로 낳는 것은 아니거늘

乃今强爲子母

(내금강위자모) : 이제 그들이 억지로 자·모로 갈라서

分配醎酸

(분배함산) : 짜고 신맛을 분배시켰으니

其味未純也

(기미미순야) : 그 맛이 순하지 못할 것이며,

六氣自行

(륙기자행) : 육기는 스스로 행하는 것이어서

不待宣導

(불대선도) : 남이 이끌어줌을 기다릴 것이 없거늘

乃今妄稱財相

(내금망칭재상) : 이제 그들이 망녕되어 재성·보상이라 일컬어서

私顯己功

(사현기공) : 사사로이 자기 공을 세우려 하니,

其爲食也

(기위식야) : 그것을 먹는다면

無其硬强滯逆而不順化乎

(무기경강체역이불순화호) : 어찌 딱딱하여 가슴에 체하거나 목구멍에 구역질이 나서 순하게 소화가 되지 못할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鄭之邑

(정지읍) : 정나라 어느 고을에

有不屑宦之士曰

(유불설환지사왈) :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학자가 살았으니

北郭先生

(북곽선생) : '북곽 선생(北郭先生)'이었다.

行年四十

(행년사십) : 그는 나이 마흔에

手自校書者萬卷

(수자교서자만권) : 손수 교정(校訂)해 낸 책이 만 권이었고,

敷衍九經之義

(부연구경지의) : 또 육경(六經)의 뜻을 부연해서

更著書一萬五千卷

(경저서일만오천권) : 다시 저술한 책이 일만 오천 권이었다.

天子嘉其義

(천자가기의) : 천자(天子)가 그의 행의(行義)를 가상히 여기고

諸侯慕其名

(제후모기명) : 제후(諸侯)가 그 명망을 존경하고 있었다.

邑之東

(읍지동) : 그 고장 동쪽에는

有美而早寡者

(유미이조과자) : 미모의 과부가 있었는데,

曰東里子

(왈동리자) : 동리자(東里子)라는고 불렀다

天子嘉其節(천자가기절) : 천자가 그 절개를 가상히 여기고

諸侯慕其賢(제후모기현) : 제후가 그 현숙함을 사모하여,

環其邑數里而封之曰東里寡婦之閭

(환기읍수리이봉지왈동리과부지려) : 그 마을의 둘레를 봉(封)해서 '동리과부지려'(東里寡婦之閭)라고 정표(旌表)해 주기도 했다.

東里子善守寡

(동리자선수과) : 이처럼 동리자가 수절을 잘 하는 부인이라 했는데,

然有子五人

(연유자오인) : 실은 슬하의 다섯 아들이

各有其姓

(각유기성) : 저마다 성을 달리하고 있었다.

五子相謂曰

(오자상위왈) : 어느 날 밤, 다섯 놈의 아들들이 서로 이르기를,

水北鷄鳴

(수북계명) : "강 건너 마을에서 닭이 울고

水南明星

(수남명성) : 강 저편 하늘에 샛별이 반짝이는데,

室中有聲

(실중유성) :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는

何其甚似北郭先生也

(하기심사북곽선생야) : 어찌도 그리 북곽 선생의 목청을 닮았을까."하고

兄弟五人

(형제오인) : 다섯 놈이

迭窺戶隙

(질규호극) : 차례로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東里子請於北郭先生曰

(동리자청어북곽선생왈) : 동리자가 북곽 선생에게 이르기를

久慕先生之德

(구모선생지덕) : "오랫동안 선생님의 덕을 사모했는데,

今夜願聞先生讀書之聲

(금야원문선생독서지성) : 오늘밤은 선생님 글 읽는 소리를 듣고자 하옵니다."하고 간청하매,

北郭先生

(북곽선생) : 북곽 선생은

整襟危坐而爲詩曰

(정금위좌이위시왈) : 옷깃을 바로 잡고 점잖게 앉아서 시(詩)를 읊었다.

䲶鴦在屛

(䲶앙재병) : 원앙새는 병풍에 그려 있고,

耿耿流螢

경경류형) : 반딧불 흘러 잠 못 이룬다

維鬵維錡

(유심유기) : 저기 저 가마솥 세발 솥은

云誰之型

(운수지형) : 무엇을 본떠서 만들었나 한다.

興也(흥야) : 흥야랴

五子相謂曰

(오자상위왈) : 다섯 놈이 서로 소곤대기를,

禮不入寡婦之門

(례불입과부지문) : "예의 상으로 과부의 방에 들어올 리 없다

北郭先生賢者也

(북곽선생현자야) : 북곽 선생은 현자이니까

吾聞鄭之城門壞而狐穴焉

(오문정지성문괴이호혈언) : 우리 고을의 성문이 무너져서 여우 구멍이 생겼대.

吾聞狐老千年

(오문호로천년) : 여우란 놈은 천 년을 묵으면

能幻而像人

(능환이상인) : 사람 모양으로 둔갑할 수 있단다. 틀림없이 그 여우란 놈이

是其像北郭先生乎

(시기상북곽선생호) : 저건 바로 북곽 선생으로 둔갑한 것이다."하고

相與謀曰

(상여모왈) : 함께 의논했다.

吾聞得狐之冠者

(오문득호지관자) : "들으니 여우의 갓을 얻으면

家致千金之富

(가치천금지부) : 큰 부자가 될 수 있고,

得狐之履者

(득호지리자) : 여우의 신발을 얻으면

能匿影於白日

(능닉영어백일) : 대낮에 그림자를 감출 수 있고,

得狐之尾者

(득호지미자) : 여우의 꼬리를 얻으면

善媚而人悅之

(선미이인열지) : 애교를 잘 부려서 남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더라.

何不殺是狐而分之

(하불살시호이분지) : 어찌 저 놈의 여우를 때려잡아서 나눠 갖지 않으랴."

於是五子共圍而擊之

(어시오자공위이격지) : 다섯 놈들이 방을 둘러싸고 우루루 쳐들어 갔다.

北郭先生大驚遁逃

(북곽선생대경둔도) : 북곽 선생은 크게 당황하여 도망쳤다.

恐人之識己也

(공인지식기야) :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 겁이 나서

以股加頸

(이고가경) : 두 다리 사이에 목을 들이박고

鬼舞鬼笑

(귀무귀소) : 귀신처럼 춤추고 낄낄거리며

出門而跑

출문이포) : 문을 나가서 내닫다가

乃陷野窖

(내함야교) : 그만 들판의 구덩이 속에 빠져 버렸다.

穢滿其中

(예만기중) : 그 구덩이에는 똥이 가득 차 있었다.

攀援出首而望

(반원출수이망) : 간신히 기어올라 머리를 들고 바라보니

有虎當徑

(유호당경) : 뜻밖에 범이 길목에 앉아 있었다.

虎顰蹙嘔哇

(호빈축구왜) : 범은 북곽 선생을 보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구역질을 하며

掩鼻左首而噫曰

(엄비좌수이희왈) : 코를 싸쥐고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고 이르기를,

儒句臭矣

(유구취의) : "유자여! 더럽다."

北郭先生頓首匍匐而前

(북곽선생돈수포복이전) : 북곽 선생은 머리를 조아리고 범 앞으로 기어 가서

三拜以跪

(삼배이궤) :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

仰首而言曰

(앙수이언왈) : 머리를 쳐들고 우러러 아뢴다.

虎之德其至矣乎

(호지덕기지의호) : "호랑님의 덕은 지극하시지요.

大人效其變

(대인효기변) : 대인(大人)은 그 변화를 본받고,

帝王學其步

(제왕학기보) : 제왕(帝王)은 그 걸음을 배우며,

人子法其孝

(인자법기효) : 자식된 자는 그 효성을 본받고,

將帥取其威

(장수취기위) : 장수는 그 위엄을 취하며,

名並神龍

(명병신룡) : 거룩하신 이름은 신령스런 용(龍)의 짝이 되는지라,

一風一雲

(일풍일운) : 풍운이 조화를 부리시매

下土賤臣

(하토천신) : 하토(下土)의 천신(賤臣)은

敢在下風

(감재하풍) : 감히 아랫바람에 서옵나이다."

虎叱曰

(호질왈) : 범은 북곽 선생을 여지없이 꾸짖었다

毋近前

(무근전) : “내 앞에 가까이 오지 말아라.

曩也吾聞之

(낭야오문지) : 접때 내가 들으니

儒者諛也

(유자유야) : 내 듣건대 유(儒)는 유(諛)라 하더니

果然

(과연) : 과연 그렇구나.

汝平居集天下之惡名

(여평거집천하지악명) : 네가 평소에 천하의 악명을

妄加諸我

(망가제아) : 망령되이 나에게 덮어씌우더니,

今也急而面諛

(금야급이면유) : 이제 사정이 급해지자 면전에서 아첨을 떠니

將誰信之耶

(장수신지야) : 장차 누가 이를 믿겠느냐?

夫天下之理一也

(부천하지리일야) : 천하의 원리는 하나뿐이다.

虎誠惡也

(호성악야) : 범의 본성(本性)이 악한 것이라면

人性亦惡也

(인성역악야) : 인간의 본성도 악할 것이요,

人性善則虎之性亦善也

(인성선칙호지성역선야) : 인간의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면 범의 본성도 선할 것이다.

汝千語萬言

(여천어만언) : 너희들의 떠드는 천 소리 만 소리는

不離五常

(불리오상) : 오륜(五倫)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戒之勸之

(계지권지) : 경계하고 권면하는 말은

恒在四綱

(항재사강) : 항상 사강(四綱)에 머물러 있다.

然都邑之間

(연도읍지간) : 그런데 도회지에

無鼻無趾

(무비무지) : 코 베이고, 발꿈치 짤리고,

文面而行者

(문면이행자) : 얼굴에다 자자(刺字)질하고 다니는 것들은

皆不遜五品之人也

(개불손오품지인야) : 다 오륜을 지키지 못한 자들이 아니냐?

然而徽墨斧鉅

(연이휘묵부거) : 포승줄과 먹실, 도끼, 톱 같은 형구(刑具)를

日不暇給

(일불가급) : 매일 쓰기에 바빠 겨를이 나지 않는데도

莫能止其惡焉

(막능지기악언) : 죄악을 중지시키지 못하는구나.

而虎之家自無是刑

(이호지가자무시형) : 범의 세계에서는 원래 그런 형벌이 없으니

由是觀之

(유시관지) : 이로 보면

虎之性不亦賢於人乎

(호지성불역현어인호) : 범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보다 어질지 않느냐?

虎不食草木(호불식초목) : 범은 초목을 먹지 않고,

不食虫魚(불식충어) : 벌레나 물고기를 먹지 않고,

不嗜麴蘖悖亂之物

(불기국얼패란지물) : 술 같은 좋지 못한 음식을 좋아하지 않으며,

不忍字伏細瑣之物

(불인자복세쇄지물) : 순종 굴복하는 하찮은 것들을 차마 잡아먹지 않는다.

入山獵麕鹿

(입산렵균록) : 산에 들어가면 노루나 사슴 따위를 사냥하고,

在野畋馬牛

(재야전마우) : 들로 나가면 말이나 소를 잡아먹되

未甞爲口腹之累飮食之訟

(미상위구복지루음식지송) : 먹기 위해 비굴해진다거나 음식 따위로 다투는 일이 없다.

虎之道

(호지도) : 범의 도리가

豈不光明正大矣乎

(기불광명정대의호) : 어찌 광명 정대(光明正大)하지 않은가.

虎之食麕鹿

(호지식균록) : 범이 노루나 사슴을 잡아먹을 때는

而汝不疾虎

(이여불질호) :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다가,

虎之食馬牛

(호지식마우) : 말이나 소를 잡아먹을 때는

而人謂之讐焉

(이인위지수언) : 사람들이 원수로 생각하는 것은

豈非麕鹿之無恩於人

(기비균록지무은어인) : 어찌 노루나 사슴은 사람들에게 은공이 없고

而馬牛之有功於汝乎

(이마우지유공어여호) : 소나 말은 유공(有功)하기 때문이 아니냐?

然而不有其乘服之勞戀效之誠

(연이불유기승복지로련효지성) : 그런데 너희들은 소나 말들이 태워 주고 일해 주는 공로와 따르고 충성하는 정성을 갖지 않고

日充庖廚

(일충포주) : 날마다 푸줏간을 채워

角鬣不遺

(각렵불유) : 뿔과 갈기도 남기지 않고,

而乃復侵我之麕鹿

(이내부침아지균록) : 다시 우리의 노루와 사슴을 침노하여

使我乏食於山

(사아핍식어산) : 우리들로 하여금 산에도 들에도

缺餉於野

(결향어야) : 먹을 것이 없게 만든단 말이냐?

使天而平其政

(사천이평기정) : 하늘이 정사를 공평하게 한다면

汝在所食乎所捨乎

(여재소식호소사호) : 너희가 나의 먹을 것이 되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이겠느냐?

夫非其有而取之

(부비기유이취지) : 대체 제 것이 아닌데 취하는 것을

謂之盜

(위지도) : 도(盜)라 하고,

殘生而害物者

(잔생이해물자) : 생(生)을 빼앗고 물(物)을 해치는 것을

謂之賊

(위지적) : 적(賊)이라 하나니,

汝之所以日夜遑遑

(여지소이일야황황) : 너희가 밤낮으로 쏘다니며

揚臂努目

(양비노목) : 팔을 걷어붙이고 눈을 부릅뜨고

挐攫而不恥

(나확이불치) : 노략질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甚者

(심자) : 심한 놈은

呼錢爲兄

(호전위형) : 돈을 불러 형님이라 부르고,

求將殺妻

(구장살처) : 장수가 되기 위해서 제 아내를 살해하였다면

則不可復論於倫常之道矣

(칙불가부론어륜상지도의) : 다시 윤리 도덕을 논할 수도 없다.

乃復攘食於蝗

(내부양식어황) : 뿐 아니라 메뚜기에게서 먹이를 빼앗아 먹고,

奪衣於蚕

(탈의어천) : 누에에게서 옷을 빼앗아 입고,

禦蜂而剽甘

(어봉이표감) : 벌을 막고 꿀을 따며,

甚者

(심자) : 심한 놈은

醢蟻之子

(해의지자) : 개미 새끼를 젖담아서

以羞其祖考

(이수기조고) : 조상에게 바치니

其殘忍薄行

(기잔인박행) : 잔인하고 박행함이 

孰甚於汝乎

(숙심어여호) : 무엇이 너희보다 더 하겠느냐?

汝談理論性

(여담리론성) : 너희가 이(理)를 말하고 성(性)을 논할 적에

動輒稱天

(동첩칭천) : 걸핏하면 하늘을 들먹이지만,

自天所命而視之

(자천소명이시지) : 하늘의 소명(所命)으로 보자면

則虎與人

(칙호여인) : 범이나 사람이나

乃物之一也

(내물지일야) : 다같이 만물 중의 하나이다.

自天地生物之仁而論之

(자천지생물지인이론지) : 천지가 만물을 낳은 인(仁)으로 논하자면

則虎與蝗蚕蜂蟻與人並畜

(즉호여황천봉의여인병축) : 범과 메뚜기․누에․벌․개미 및 사람이 다같이 땅에서 길러지는 것으로

而不可相悖也

(이불가상패야) : 서로 해칠 수 없는 것이다.

自其善惡而辨之

(자기선악이변지) : 그 선악을 분별해 보자면

則公行剽刦於蠭蟻之室者

(칙공행표겁어蠭의지실자) : 벌과 개미의 집을 공공연히 노략질하는 것은

獨不爲天地之巨盜乎

(독불위천지지거도호) : 홀로 천지간의 거대한 도둑이 되지 않겠는가?

肆然攘竊於蝗蚕之資者

(사연양절어황천지자자) : 메뚜기와 누에의 밑천을 약탈하는 것은

獨不爲仁義之大賊乎

(독불위인의지대적호) : 홀로 인의(仁義)의 대적(大賊)이 아니겠는가?

虎未甞食豹者

(호미상식표자) : 범이 일찍이 표범을 잡아먹지 않는 것은

誠爲不忍於其類也

(성위불인어기류야) : 동류를 차마 그럴 수 없어서이다.

然而計虎之食麕鹿

(연이계호지식균록) : 그런데 범이 노루와 사슴을 잡아먹은 것이

不若人之食麕鹿之多也

(불약인지식균록지다야) : 사람이 노루와 사슴을 잡아먹은 것만큼 많지 않으며,

計虎之食馬牛

(계호지식마우) : 범이 말과 소를 잡아먹은 것이

不若人之食馬牛之多也

(불약인지식마우지다야) : 사람이 말과 소를 잡아먹은 것만큼 많지 않다.

計虎之食人

(계호지식인) : 범이 사람을 잡아먹은 것이

不若人之相食之多也

(불약인지상식지다야) : 사람이 서로를 잡아 먹는 것만큼 많지 않다.

去年關中大旱

(거년관중대한) : 지난해 관중(關中)이 크게 가물자

民之相食者數萬

(민지상식자수만) :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은 것이 수만이었고,

往歲山東大水

(왕세산동대수) : 전해에는 산동(山東)에 홍수가 나자

民之相食者數萬

(민지상식자수만) :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은 것이 수만이었다.

雖然

(수연) : 비록 그러하나

其相食之多

(기상식지다) : 사람들이 서로 많이 잡아먹기로야

又何如春秋之世也

(우하여춘추지세야) : 춘추(春秋) 시대 같은 때가 있었을까?

春秋之世

(춘추지세) : 춘추 시대에

樹德之兵十七

(수덕지병십칠) : 공덕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 열에 일곱이었고,

報仇之兵十三

(보구지병십삼) : 원수를 갚기 위한 싸움이 열에 셋이었는데,

流血千里

(류혈천리) : 흘린 피가 천 리에 물들었고,

伏屍百萬

(복시백만) : 거꾸러져 죽은 시체가 백만이나 되었더니라.

而虎之家水旱不識

(이호지가수한불식) : 범의 세계는 큰물과 가뭄의 걱정을 모르기 때문에

故無怨乎天

(고무원호천) :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讐德兩忘

(수덕량망) : 원수도 공덕도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故無忤於物

(고무오어물) : 누구를 미워하지 않으며,

知命而處順

(지명이처순) : 운명을 알아서 따르기 때문에

故不惑於巫醫之姦

(고불혹어무의지간) : 무(巫)와 의(醫)의 간사에 속지 않고,

踐形而盡性

(천형이진성) : 타고난 그대로 천성을 다하기 때문에

故不疚乎世俗之利

(고불구호세속지리) : 세속의 이해에 병들지 않으니,

此虎之所以睿聖也

(차호지소이예성야) : 이것이 곧 범이 예성(睿聖)한 것이다.

窺其一班

(규기일반) : 우리 몸의 얼룩무늬 한 점만 엿보더라도

足以示文於天下也

(족이시문어천하야) : 족히 문채(文彩)를 천하에 자랑할 수 있으며,

不藉尺寸之兵

(불자척촌지병) : 한 자 한 치의 칼날도 빌리지 않고

而獨任爪牙之利

(이독임조아지리) : 다만 발톱과 이빨의 날카로움을 가지고

所以耀武於天下也

(소이요무어천하야) : 무용(武勇)을 천하에 떨치고 있다.

彛卣蜼尊

(이유유존) : 종이(宗彛)와 유준(蜼尊)은 

所以廣孝於天下也

(소이광효어천하야) : 효(孝)를 천하에 넓힌 것이며,

一日一擧而烏鳶螻螘

(일일일거이오연루의) : 하루 한 번 사냥을 해서 까마귀나 솔개․청마구리․개미 따위에게까지

共分其餕

(공분기준) : 대궁을 함께 나누어 주니

仁不可勝用也

(인불가승용야) : 그 인(仁)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고,

讒人不食

(참인불식) : 굶주린 자를 잡아먹지 않고,

廢疾者不食

(폐질자불식) : 병든 자를 잡아먹지 않고,

衰服者不食

(쇠복자불식) : 상복(喪服) 입은 자를 잡아먹지 않으니

義不可勝用也

(의불가승용야) : 그 의로운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다.

不仁哉

(불인재) : 불인(不仁)하기 짝이 없다,

汝之爲食也

(여지위식야) : 너희들의 먹이를 얻는 것이여!

機穽之不足

(기정지불족) : 덫이나 함정을 놓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모자라서

而爲罿也罞也罛也罾也罦也罭也

(이위동야모야고야증야부야역야) : 새 그물․ 노루 망(網)․ 큰 그물․ 고기 그물․ 수레 그물․ 삼태 그물 따위의 온갖 그물을 만들어 냈으니,

始結網罟者

(시결망고자) : 처음 그것을 만들어 낸 놈이야말로

裒然首禍於天下矣

(부연수화어천하의) : 세상에 가장 재앙을 끼친 자이다.

有鈹者戣者殳者斨者叴者矟者鍜者鈼者者

(유피자규자수자장자구자삭자하자작자자) : 그 위에 또 가지각색의 창이며 칼 등속에다

有礮發焉

(유포발언) : 화포(火砲)란 것이 있어서, 이것을 한번 터뜨리면

聲隤華嶽

(성퇴화악) : 소리는 산을 무너뜨리고

火洩陰陽

(화설음양) : 천지에 불꽃을 쏟아

暴於震霆

(폭어진정) : 벼락치는 것보다 무섭다.

是猶不足以逞其虐焉

(시유불족이령기학언) : 그래도 아직 잔학(殘虐)을 부린 것이 부족하여,

則乃吮柔毫

(칙내연유호) : 이에 부드러운 털을 쪽 빨아서

合膠爲鋒

(합교위봉) : 아교에 붙여 뾰족한 물건을 만들어 냈으니,

體如棗心

(체여조심) : 그 몸은 대추씨 같고

長不盈寸

(장불영촌) : 그 길이는 한 치도 못 되는 것이다.

淬以烏賊之沫

(쉬이오적지말) : 이것을 오징어의 시커먼 물에 적셔서

縱橫擊刺

(종횡격자) : 종횡으로 치고 찔러 대는데,

曲者如矛

(곡자여모) : 구불텅한 것은 세모창 같고,

銛者如刀

(섬자여도) : 예리한 것은 칼날 같고,

銳者如釖

(예자여도) : 예리한 것은 낫같고,

歧者如戟

(기자여극) : 두 갈래 길이 진 것은 가시창 같고,

直者如矢

(직자여시) : 곧은 것은 화살 같고,

彀者如弓

(구자여궁) : 팽팽한 것은 활 같아서,

此兵一動

(차병일동) : 이 병기(兵器)를 한번 휘두르면

百鬼夜哭

(백귀야곡) : 온갖 귀신이 밤에 곡(哭)을 한다.

其相食之酷

(기상식지혹) : 서로 잔혹하게 잡아먹기를

孰甚於汝乎

(숙심어여호) : 너희들보다 심히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北郭先生離席俯伏

(북곽선생리석부복) : 북곽 선생은 자리를 옮겨 부복(俯伏)해서

逡巡再拜

(준순재배) : 머리를 새삼 조아리고 아뢰었다.

頓首頓首曰

(돈수돈수왈) :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아리었다.

傳有之

(전유지) : “맹자(孟子)에 일렀으되

雖有惡人

(수유악인) : ‘비록 악인(惡人)이라도

齋戒沐浴

(재계목욕) : 목욕 재계(齋戒)하면

則可以事上帝

(즉가이사상제) : 상제(上帝)를 섬길 수 있다.’ 하였습니다.

下土賤臣

(하토천신) : 하토의 천한 신하는

敢在下風

(감재하풍) : 감히 아래 처지에 서옵니다.”

屛息潛聽

(병식잠청) : 북곽 선생이 숨을 죽이고 명령을 기다렸으나

久無所命

(구무소명) : 오랫동안 아무 명령이 없기에

誠惶誠恐

(성황성공) : 참으로 황공해서

拜手稽首

(배수계수) : 절하고 조아리다가

仰而視之

(앙이시지) :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東方明矣

(동방명의) : 이미 먼동이 터 주위가 밝아오는데

虎則已去

(호칙이거) : 범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農夫有朝菑者

(농부유조치자) : 그 때 새벽 일찍 밭 갈러 나온 농부가 있었다.

問先生何早敬於野

(문선생하조경어야) : “선생님, 이른 새벽에 들판에서 무슨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北郭先生曰

(북곽선생왈) : 북곽 선생은 엄숙히 말했다.

吾聞之

(오문지) : “내가 들으니

謂天蓋高

(위천개고) : ‘하늘이 높다 해도

不敢不局

(불감불국) : 머리를 아니 굽힐 수 없고,

謂地蓋厚

(위지개후) : 땅이 두텁다 해도

不敢不蹐

(불감불척) : 조심스럽게 딛지 않을 수 없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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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허생전/ 열하일기 10.옥갑야화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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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전 -초기구전

양반전兩班傳 ◇ <兩班傳>의 성공 비결 1)충격적 소재:양반 매매.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의식 파괴-양반과 천부의 전도(顚倒) 신분 맞바뀜. 2)수사법:반어법(신분과 부의 불일치, 士族의 존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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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兩班傳>의 성공 비결

1)충격적 소재:양반신분 매매, 중세의 가치관과 질서의식 파괴-양반과 천부의 전도(顚倒) 신분 맞바뀜.

2)수사법:반어법(신분과 부의 불일치, 士族의 존칭에서 멀어진 양반론), 열거법(두 문권)

3)허상과 실상의 대비: 제일문권에서는 양반 행동양식의 허위의식을, 제이문권에서는 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를 고발함.

 

[은자주] 고전번역원의 주석을 첨가하였다. 주석의 필요성을 느꼈으나 번거로움을 피해왔는데, 민추의 해박한 주석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어구가 맞지 않더라도 바로 위의 주석임을 감안하고 보면 된다.

 

1]권위의 상징인 양반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다

兩班者 士族之尊稱也.

양반자 사족지존칭야.

'양반'이란 사족(士族)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旌善之郡 有一兩班 賢而好讀書.

정선지군 유일양반 현이호독서.

정선 고을에 한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현명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였다.

每郡守新至 必親造其廬而禮之.

매군수신지 필친조기려이례지.

그래서 군수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반드시 그 집에 몸소 나아가서 예의를 갖추었다.

然家貧 歲食郡糶 積歲至千石.

연가빈 세식군조 적세지천석.

그러나 그는 살림이 가난해서, 해마다 관가에서 환자를 빌어먹었다. 여러 해가 지나고 보니, 환곡(還穀)은 천 석이나 되었다.

觀察使巡行郡邑 閱糶糴 大怒曰,

관찰사순행군읍 열조적 대로왈,

관찰사가 여러 고들을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이르러 환곡의 출납을 검열하고는 매우 노하였다.

“何物兩班 乃乏軍興?”

하물양반 내핍군흥?”

"어떤 놈의 양반이 군량미를 이렇게 축냈단 말이냐?"

命囚其兩班

명수기양반

그 양반을 가두도록 명령하였다.

郡守意哀 其兩班貧 無以爲償.

군수의애 기양반빈 무이위상.

군수는 그 양반이 가난해서 갚을 길이 없는 것을 없으니

不忍囚之 亦無可奈何.

불인인지 역무가내하

차마 가두고 싶지 않았지만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兩班日夜泣 計不知所出.

양반일야읍 계불지소출.

그 양반은 밤낮으로 울음을 삼켰지만 대책은 세우지 못했다.

其妻罵曰,

기처매왈

그의 아내는 불평을 털어 놓았다.

“生平 子好讀書 無益縣官糴. 咄 兩班. 兩班不直一錢.”

생평 자호독서 무익현관적. 돌 양반. 양반불직일전.”

"한평생 당신은 글읽기를 좋아했지만, 관가의 환곡을 갚는데 아무런 도움도 못 되는군요.

쯧쯧, 양반! 양반은한 푼짜리도 못 되는 구려.” 001)

[주D-001]한 푼짜리도 ……구려 :

양반(兩班)을 양반(兩半)으로 풀어 한 냥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풍자한 것이다.

 

2]부자 농부는 양반신분을 사서 양반이 되다.

其里之富人 私相議曰,

기리지부인 사상의왈,

그 마을의 부자가 가족들과 서로 의논하였다.

“兩班雖貧 常尊榮 我雖富 常卑賤 不敢騎馬.

양반수빈 상존영 아수부 상비천 불감기마.

"양반은 아무리 가난해도 언제나 높고 영광스럽지만, 우리들은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언제나 낮고 천하여 감히 말을 탈수도 없다.

見兩班 則跼蹜屛營 匍匐拜庭

양반만 보면 저절로 기가 죽어서 굽실거리며 엉금엉금 기어가서 뜰 밑에서 절해야 한다.

曳鼻膝行 我常如此 其僇辱也.

예비슬행 아상여차 기륙욕야.

코가 땅에 닿도록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면서, 우리네는 줄창 이렇게 창피를 당해야 한다.

今兩班貧 不能償糴 方大窘.

금양반빈 불능상적 방대군.

지금 저 양반이 가난해서 환자를 갚지 못해 몹시 곤란해질 모양이야.

其勢誠不能保其兩班 我且買而有之.”

기세성불능보기양반 아차매이유지.”

참으로 그의 가세가 양반 신븐을 보전할 수 없으니 내가 그것을 사서 가지려 한다."

遂踵門 而請償其糴.

수종문 이청상기적.

부자는 곧 양반의 집을 찾아가서 그 환자를 대신 갚겠다고 청하였다.

兩班大喜許諾.

양반대희허락.

양반은 크게 기뻐하면서 허락하였다.

於是 富人立輸其糴於官.

어시 부인립수기적어관.

그래서 부자가 곧 그 환곡을 관가로 수송했다.

郡守大驚異之 自往勞其兩班 且問償糴狀.

군수대경이지 자왕로기양반 차문상적장.

군수는 매우 놀라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직접 양반에게 찾아가 위로하면서, 환자를 갚은 사정을 물으려 하였다.

兩班氈笠衣短衣 伏塗謁稱小人 不敢仰視.

양반전립의단의 복도알칭소인 불감앙시.

그러자 양반은 벙거지를 쓰고 베잠방이를 입은 채로 길바닥에 엎드려, '쇤네'라고 칭하면서 감히 올려다보지를 못하였다.

[주D-002]벙거지 : 하인들이 쓰던 털모자.

郡守大驚 下扶曰,

군수대경 하부왈,

군수가 깜짝 놀라 내려가서 그를 부축하며,

“足下 何自貶辱若是?”

족하 하자폄욕약시?”

"선생께서 어찌 이다지도 스스로를 욕되게 하시는지요." 하였다.

兩班益恐懼 頓首俯伏曰,

양반익공구 돈수부복왈,

양반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렸다.

“惶悚 小人非敢自辱 已自鬻其兩班 以償糴 里之富人 乃兩班也.

황송 소인비감자욕 이자죽기양반 이상적 리지부인 내양반야.

"황송하옵니다. 쇤네가 감히 일부러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쇤네는 벌써 스스로 양반을 팔아 환자를 갚았으니, 마을의 부자가 바로 양반이옵니다.

小人安敢冒其舊號 而自尊乎?”

소인안감모기구호 이자존호?”

쇤네가 어찌 다시금 뻔뻔스럽게 옛날처럼 양반 행세를 하면서 스스로 높이겠습니까?"

郡守歎曰,

군수탄왈,

군수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君子哉 富人也 兩班哉 富人也.

군자재 부인야 양반재 부인야.  

"군자답구려 부자시여. 양반답구려 부자시여.

富而不吝 義也 急人之難 仁也 惡卑而慕尊 智也 此眞兩班.

부이불인 의야 급인지난 인야 오비이모존 지야 차진양반.

부유하면서도 아끼지 않음은 의(義)요, 남의 어려움을 돌봐 줌은 인(仁)이요, 낮은 신분을 싫어하고 높은 자리를 그리워함은 지(智)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양반이로다.

雖然私自交易 而不立券 訟之端也.

수연사자교역 이불립권 송지단야.

비록 그러하더라도 사사로이 신분을 바꾸고 문권(文券)을 작성하지 않으면 소송의 단서가 된다.

我與汝約 郡人而證之 立券而信之 郡守當自署之.”

아여여약 군인이증지 립권이신지 군수당자서지.”

내가 그대와 약조하노니, 고을 사람들을 모아 증인을 세우고, 문권을 작성하여 증거하리라.

군수인 내가 마땅히 서명해야 하네."

 

於是 郡守歸俯 悉召郡中之士族 及農工商賈 悉至于庭.

어시 군수귀부 실소군중지사족 급농공상가 실지우정.

군수가 곧 동헌으로 돌아와서 온 고들 사족과, 농민, 공장(工匠), 장사치까지 모두들 불러 뜰에 모았다.

富人坐鄕所之右 兩班立於公兄之下.

부인좌향소지우 양반립어공형지하.

부자는 향소(鄕所)003)의 오른쪽에 앉히고 양반은 공형(公兄) 004)의 아래에 세웠다.

[주D-003]향소(鄕所) :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주D-004]공형(公兄) :

호장(戶長)과 이방(吏房) 및 수형리(首刑吏)를 삼공형(三公兄)이라 한다.

 

3]문권 작성

1)제1문권 -양반의 행동규범[허위의식]

乃爲立券曰,

내위립권왈

바로 증서를 작성하였다.

“乾隆十年九月日 右明文段

건륭십년구월일 우명문단

"건륭(乾隆) 10년 9월 모일에 아래와 같이 문권을 밝힌다.

[주D-005]명문(明文) : 증명서란 뜻으로, ‘적발’이라고도 한다.

국(厂下屮2)賣兩班 爲償官穀 其直千斛.   *厂下屮2(국):持也

국              매양반 위상관곡 기직천곡.

양반을 팔아서 관가의 곡식을 갚은 일이 생겼는데, 그 곡식은 천 섬이나 된다.

維厥兩班 名謂多端

유궐양반 명위다단

이 양반의 이름은 여러 가지다.

讀書曰士 從政爲大夫 有德謂君子

독서왈사 종정위대부 유덕위군자

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武階列西 文秩敍東 是謂兩班.  

무계렬서 문질서동 시위양반.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양반'006)이라고 한다.

[주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任爾所從 絶棄鄙事 希古尙志

임이소종 절기비사 희고상지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 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五更常起 點硫燃脂

오갱상기 점류연지

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目視鼻端 會踵支尻

목시비단 회종지고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007)

[주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권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東萊博議 訟如氷瓢.

동래박의 송여빙표.

"동래박의"008)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주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叩齒彈腦 細嗽嚥津  *嗽(수):기침.

고치탄뇌 세수연진

아래 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009)

[주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明)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袖刷毳冠 拂塵生派.

수쇄취관 불진생파.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盥無擦拳 潄口無過. *潄(수):양치질하다.

관무찰권 수구무과.

세수 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010)

[주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長聲喚婢 緩步曳履

장성환비 완보예리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如荏 一行百字.

고문진보 당시품휘 초사여임 일행백자.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011)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주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명(明)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手毋執錢 不問米價

수무집전 불문미가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暑毋跣襪 飯毋徒髻

서무선말 반무도계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食毋先羹 歠毋流聲*歠  *歠(철):마시다.

식무선갱 철무류성철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下箸毋舂 毋餌生葱

하저무용 무이생총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嘬(최):물다. *窳(유):비뚤다.

음료무최수 흡연무보유.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忿毋搏妻 怒毋踢器

분무박처 로무척기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毋拳毆兒女 毋罵死奴僕. *毆(구):때리다.

무권구아녀 무매사노복.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죽일놈의 종놈이라고 꾸짖지 말아야 한다. 012)

[주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권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권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叱牛馬 毋辱鬻主.

질우마 무욕죽주.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病毋招巫 祭不齋僧

병무초무 제불재승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에 중을 불러다 재(齋)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

爐不煮手 語不齒唾

로불자수 어불치타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毋屠牛 毋賭錢.

무도우 무도전.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도박도 하지 말아야 한다.

凡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

범차백행 유위양반 지차문기 변정우관.

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양반의 규범에 한 가지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城主 旌善郡守 押. 座首別監 證署.”

성주 정선군수 압. 좌수별감 증서.”

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於是 通引搨印 *搨(탑):박다, 베끼다.

어시 통인탑인

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錯落聲中嚴鼓 斗縱參橫.

착락성중엄고 두종참횡.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013)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주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戶長讀旣畢.

호장독기필.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 太乾沒. 願改爲可利.”

양반지차이이야? 오문양반여신선 심여시 태건몰. 원개위가리.”

"양반이 겨우 이것뿐입니가?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 지나치게 재산을 몰수합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 014)

[주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제2문권-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

於是 乃更作券曰,

어시 내갱작권왈,

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維天生民 其民維四

유천생민 기민유사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四民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焉.

사민지중 최귀자사 칭이양반 리막대언.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決文科 小成進士.

불경불상 조섭문사 대결문과 소성진사.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備具 維錢之橐. *橐(탁):전대

문과홍패 불과이척 백물비구 유전지탁.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進士三十 乃筮初任 猶爲名蔭

진사삼십 내서초임 유위명음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은자주] 연암도 쉰 살에 음관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

선사웅남 이백산풍 복파령락

지체 높은 음관을 잘 섬기면 015),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희어지고,016)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됩니다.

[주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주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室珥治妓 庭穀鳴鶴.

실이치기 정곡명학.

방안의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017), 뜰 앞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주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窮士居鄕 猶能武斷.

궁사거향 유능무단.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무력을 마음대로 단행할 수 있다.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慢我?

선경린우 차운리맹 숙감만아?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灰灌汝鼻 暈髻汰鬢 無敢怨咨.”*暈(훈):무리. *咨(자):묻다.

회관여비 운계태빈 무감원자.”

네 놈의 코에 잿물을 따르고 상투를 범벅이며 수염을 뽑더라도 원망조차 못하리라."

 

4]부자 농부는 양반신분을 포기하다

富人中其券 而吐舌曰,

부인중기권 이토설왈,

부자가 그 증서 만들기를 중지시키고, 혀를 빼면서 말하였다.

“已之已之 孟浪哉. 將使我爲盜耶?”

이지이지 맹랑재. 장사아위도야?”

"그만 두시오. 제발 그만 두시오. 참으로 맹랑합니다. 나를 도둑놈이 되게 하시렵니까?"

掉頭而去

도두이거

농부는 머리를 내두르며 달아났다.

終身不復言兩班之事.

종신불복언양반지사.

그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양반'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당시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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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당시의 연경)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삼종형(8촌 형)이자 사절단의 수장인 금성위 박명원의 자제 군관 자격으로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고 러허강(열하강)까지 다녀온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물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및 서화가들이 남긴 서적, 서화, 골동품 등 문화재급 유품 3만여 점과 함께 연민 이가원이 소장하여 오다가 1986년 12월 22일 기증하였고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다.[1][2]

구성

열하는(熱河) 중국어로 러허(중국어 정체자: 熱河, 병음: Rèhé)라고 하는 청나라의 지역 이름으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청더(承德, 승덕)이며, 최종 목적지는 열하행궁 또는 피서산장으로 불리는 건륭제의 여름 별궁이었는데 박지원(朴趾源)이 조선 정조 때에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이다.[1]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정본 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서 발견되었다.[2]

도강록[편집]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편집]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편집]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편집]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편집]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

태학유관록[편집]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편집]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

환연도중록[편집]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

금료소초[편집]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

옥갑야화[편집]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고전소설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편집]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편집]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이다.

앙엽기[편집]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편집]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편집]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편집]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편집]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편집]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편집]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편집]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편집]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편집]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다.

산장잡기[편집]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편집]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그렇고 그렇다는 이야기다라고 말할수 없지 않고 그렇다.

 

https://kydong77.tistory.com/8093

 

연암 박지원 년보

[이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주수 작품] [주]특기사항을 표시하여 다시 읽어본다. 연암 박지원 년보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EC%97%B0%EB%B3%B4 박지원 연보 - 위키백과, 우..

kydong77.tistory.com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B6%81%ED%95%99(%EC%82%AC%EC%83%81) 

 

북학(사상) - sillokwiki

청나라가 중화의 문물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차원에서 청의 문물을 배우자는 의미로, 주로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사조. 개설 조선후기 지성사는 병자호란

dh.aks.ac.kr

명을 여전히 조선의 군부(君父)로 여기고 명의 문물을 주(周)·한(漢)·당(唐)·송(宋)의 적통을 잇는 중화로 굳게 믿은 조선의 양반 지식인들은 청이 중원의 새 패자(覇者)로 군림한 후에도 여전히 한족(漢族)의 중화 문물을 흠모하며 청을 오랑캐로 멸시했다. 이는 조선후기를 지배한 존주의리(尊周義理)나 대명의리(對明義理), 그리고 조선중화(朝鮮中華) 등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청의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명이 망한 지도 100년이 지나면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이런 주장은 대개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의 북경을 방문해 조선을 훨씬 능가하는 선진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일부 지식인이 귀국 후에 제기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호응하는 지식인들이 서서히 증가했다.

이들이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던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주장을 펼 수 있었던 명분은 청은 비록 이적의 국가이지만 그들이 보유한 문물은 이전의 명이 간직했던 중화의 문물이므로 조선이 그것을 수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또 청은 학문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조선 사회보다 훨씬 진보한 고도의 선진 문물을 갖추고 있으니, 조선의 국력을 신장하고 민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문물을 배워서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아울러 제시했다. 특히 이전의 실학 움직임이 대개 토지 분배와 같은 전통적인 개혁에 중점을 둔 데 비해, 북학을 주장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기술 향상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와 상공업 장려를 통한 국부의 창출 등과 같이 새로운 프레임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들의 성향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개 한양과 경기 지역에 거주하던 낙론(洛論)계 노론(老論) 출신이 많았고, 철학적으로 보면 대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고 주기론(主氣論)에 경도된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존주의리론(尊周義理論)을 여전이 강조하고 서학(西學)을 배척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런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청의 문물을 새롭게 중화 문물로 인식하는가 하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자는 자세를 취했다.

이런 성향을 보인 인물군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대개 북학파(北學派)라는 이름으로 묶었는데, 학자에 따라 차이가 나며, 후대로 올수록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북학파라는 학파가 당시에 실존했다기보다는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분류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현재 거론되는 북학파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서명응(徐命膺)·홍양호(洪良浩)·성해응(成海應)·김정희(金正喜)·정약용(丁若鏞) 등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기한 북학의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하는 학자는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세 명이다.

이들 세 학자는 모두 존주의리 의식이 너무 지나쳐 경제와 민생을 도외시한 기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라의 부강과 민생에 정치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홍대용은 의리(義理)를 고양하고 문장을 공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경제(經濟)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의리와 윤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당시의 명분주의 사조를 비판하고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제가도 현실정치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고상한 담론보다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통상의 확대를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임을 설파했다.

또한 그 방법으로 세 학자 모두 북학을 강조했다. 이들은 청의 문물을 이적시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청에 대해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다.

홍대용은 북경 방문을 통해 청나라 학자뿐만 아니라 청에 거주하는 서양인 학자들과 만나며 다양한 학문을 접했는데,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문학을 수용해 귀국 후에는 지전설(地轉說)을 거론하고 중화를 상대화함으로써 조선인의 세계관과 중화관이 바뀔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의산문답』은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박지원『과농소초』를 지어 농업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열하일기』를 통해 자신의 북학 인식을 잘 드러냈다.

박제가는 국왕 정조에게 바친 『북학의』를 통해 농법 개발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 해외 통상의 장려를 통한 국부의 증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의 도입 등을 강조함으로써 조선후기 북학 사조의 절정을 이루었다.

* 북학파 인물들은 원각사 탑이 현존하는 탑골공원 부근에 살았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현재 탑골공원은 종묘 정문 정비사업 이후 거처를 잃은 무의탁 어른들의 놀이공간으로 변모했다.

 

https://kydong77.tistory.com/18218

 

박지원,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誌銘)

박지원, 홍덕보 묘지명(洪德保墓誌銘) 한문 원문은 아래책 참조. 박지원 연암집 권2 연상각선본, 묘지명, 경인문화사,1974, p.51. 박지원 연암집 1/3책, 권2 연상각선본 묘지명, 계명문화사, 1986, p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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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leeza.tistory.com/5814

 

박지원 -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뛰어난 능력에도 조선에선 인정받지 못하고 중국에서 인정받던 내 친구 홍대용 홍덕보묘지명(洪德保墓誌銘) 박지원(朴趾源) 대용의 친구 용주에게 부고를 전하려 중국 가는 사람에게 전하다 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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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음과 같다.

銘曰:

宜笑舞歌呼,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하하 웃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고 환호할 일,

서호西湖1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입에 반함飯含2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儒者3를 미워해서지.

 

이 명銘은 짧지만 대단히 문제적이다. 연암의 문집 전체가 간행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와서 였다. 당시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돈을 대고 출판을 주관하였다. 이 본本을 보통 박영철본 『연암집』이라 부른다. 그런데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이 명이 빠져 있다. 하지만 『과정록』에는 다음과 같이 이 명을 특별히 소개해 놓고 있다.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면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를 미워해서지.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열하일기』에도 이 명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魂去不冥招 相逢西子湖 넋이 떠난다고 초혼할 것 없네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리니
口裏不含珠 怊悵詠麥儒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에 분개해서지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D%95%99%EC%9D%98

 

북학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북학의》(北學議)는 조선 정조 때 북학파인 박제가가 쓴 책이다. 정조 2년(1778년) 이덕무 등과 함께 사은사 채제공을 따라 청의 수도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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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는 서명응과 박지원(朴趾源), 그리고 저자인 박제가 자신이 쓴 서문과 함께 내(內)ㆍ외(外) 2편으로 나뉜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300200&code=kc_age_30 

 

우리역사넷

북학파(北學派)는 조선 후기 청(淸)의 학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 등의 학자들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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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가 농업 생산력의 증진만큼이나 중요시한 것은 상업과 유통 및 외국과의 통상이었다. 그는 당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되어 왔던 상업에 주목하여, 상업을 발전시키고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수레・선박・도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용한 물건을 유통시키고 거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쓸모 있는 물건이라도 대부분 한 곳에 묶여 있거나 홀로 떠돌다가 쉽게 고갈될 것이며, 상인들이 교역을 하지 않고 놀고먹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이 할 일을 잃게 될 것이었다. 박제가가 상행위를 통한 물자의 유통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업이 발달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국가의 지속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유통과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기반시설이 확보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교량이나 도로와 같은 기반시설은 개인의 힘으로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국가가 주도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인데, 자원의 소유 및 이동의 권한이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박제가는 상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유통 수단을 정비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수레나 선박과 같은 유통 수단이 잘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에도 도입하고자 하였다. 수레와 선박의 운용을 위해서는 도로와 교량을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https://kydong77.tistory.com/8093

 

연암 박지원 년보

[이 초상화는 연암의 손자 박주수 작품] [주]특기사항을 표시하여 다시 읽어본다. 연암 박지원 년보 http://ko.wikipedia.org/wiki/%EB%B0%95%EC%A7%80%EC%9B%90_%EC%97%B0%EB%B3%B4 박지원 연보 - 위키백과,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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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작품부터 읽어 봅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5489

 

001 관저 /주남

은자주]시경 주자주 원문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이윤숙님의 아래 주소창에서 이전해 덧붙인다. http://www.tae11.org/>고전강의>시경 원문 http://blog.naver.com/bhjang3/140035480672 001 國風(국풍)周南(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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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sy1851&logNo=221691011766&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 및 시의식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 및 시의식 - <관저(관저)>장(장)을 중심으로 -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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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췌언] 문장의 호흡이 길어 읽기 편하게 의미 단위를 중심으로 운영자가 행 바꾸기를 한 점 양해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bhjang3/140034950338

다산정약용의 시경(詩經)론 및 詩意識

- <관저(關雎)>장(章)을 중심으로 -

ㅡ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 茶山은 조선후기의 실학자로서 여러 방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의 詩觀 또한 연구의 대상이 되는데는 이상할 것도 없다.

전경원의 "茶山의 詩"의 학술연구의 한 논문을 발췌하여 옮겨본다

시(詩)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과거 선인들에게 시(詩)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잠시라도 게을리 할 수 없는 소중한 공부였다.

그런 이유로 과거 많은 지식인들은 끊임없이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역시 시(詩)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철저한 자세로 고증(考證)하고 훈고(訓)했던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산은 우리에게 철학가이자 사상가로서 더욱 알려져 있기에 문학 분야에서의 조명은

여타의 분야에 비해 비교적 연구가 한산한 편이다.

특히 다산은 정조 임금 당시에 행해졌던『시경강의(詩經講義)』를 통해

그의 시론(詩論)이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경론(詩經論)에 대한 연구보다는 그가 남긴 2,487수의 시작품만을 중심으로 연구성과가 일정 정도 마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시경론(詩經論)에 주목한 논의로는 김흥규와 심경호, 이병찬 등의 연구성과가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김흥규의 논의는 최초이자 본격적으로 다산의『시경강의(詩經講義)』와 일련의 저서에 주목하면서,

시론과 시세계의 관련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다산 시경론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인정된다.

그러나 연구방향이 통시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경론의 사적 고찰은 가능했지만

다산만의 시경론과 시작품 사이의 관련성을 심도있게 서술하지는 못하고 개략적인 수준에서 머물고 말았다.

심경호의 논의는 다산의 "시경강의"에 주목했다기 보다는

청나라의 "모기령"의 학설과 다산의 학설을 비교하여 그 영향 관계를 규명하고자 했기 때문에

다산의 시경론과 그의 시세계의 상관성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이병찬의 연구는 최근까지 진행된 우리나라 시경론의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논의에서는 한국 시경론의 사적 개관을 통해서 시경론의 쟁점이 되어 온

"시서설(詩序說)"과 "음시설(淫詩說)"의 문제,

국풍(國風)의 체재(體裁)와 차서론(次序論)

그리고 국풍의 해석과 부비흥(賦比興)의 문제 등을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도 역시 다산의 시경론이 부분적으로 소개되고 있을 뿐,

집중적인 논의는 이루어지 못했고, 아울러 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다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다산의 문학적 성과를 논의한 연구성과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에서는 그간 선행연구를 통해 마련된 한국 시경론의 사적 전개 과정을 토대로 하되,

그 가운데에서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만이 갖고 있는 시사적 위치와 의의를 고찰하는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와 시경론(詩經論)과의 관련성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2. 다산(茶山)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

다산 시경론(詩經論)의 핵심은 <관저(關雎)>편의 해설을 통해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주자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관저>를 "후비(后妃)의 덕(德)"을 찬미(讚美)하는 작품으로 해석한 반면에

다산은 <관저(關雎)>를 풍자시로 파악한다.

다산의 견해가 주자와 정면으로 대립되는 지점이다.

이는 시경 전체의 해석에서 첨예한 대립으로 이어지는 "미자설(美刺說)"이 제기된 지점이다.

과연 <관저>편을 찬미시(讚美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면 풍자시(諷刺詩)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다산은 어째서 당대의 보편적이자 타당하다는 견해였던 "미시설(美詩說)"을 인정하지 않고,

"풍자설(諷刺說)"을 주장하게 된 것인지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이는 『시경(詩經)』을 포함하여 경학을 인식하는 다산의 관점과

시경 관련 기사의 수용 및 인식 과정을 통해 구체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다산은 시경(詩經)을 포함한 경학(經學) 연구에서 일정한 태도와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임금이 "모든 경서(經書)의 목록 중에 십삼경(十三經)이 제일 첫머리에 있다.

십삼경(十三經)은 진실로 도덕(道德)이 담겨있는 풀무요, 문예(文藝)가 실려 있는 깊은 못이요, 큰 바다이다.

그 전수(傳受)의 원류와 전주(箋注)의 옳고 그름에 대하여 모두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라며

십삼경(十三經)에 대하여 물음을 던지자 다음과 같이 답을 개진해 올린다.

다신은 대답합니다.

신이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건대, 경서(經書)들을 해석하는 데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전하여 들은 것으로,

둘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셋째는 자기의 의사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사로 해석한 것은 아무리 천백년 뒤에 출생하였어도

천백년 이상의 것을 초월하여 능히 입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中略...

무릇 한(漢)나라 때의 선비들이 위(魏)·진(晉) 시대의 선비보다 낫고,

위·진 시대의 선비들이 수(隨)·당(唐) 시대의 선비들보다 낫다는 것은,

옛 사람들은 모두 현명하고 지금 사람들은 모두 못나서가 아닙니다.

이는 시대의 원근(遠近)과 사승(師承)의 친소(親疎)의 차이가 서로 상대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거리가 동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삼경의 원래 뜻을 연구하려면 그 주소(注疏)를 버리고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가『시경』,『서경』의 집전(集傳)과 『논어』,『맹자』의 집주(集注) 등을 만들 적에

그 의리(義理)의 조리나 도학(道學)의 맥락 등에 있어서는

실로 자신의 의사로써 초월하여 입증하고 주소(注疏)와는 들쭉날쭉한 점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글자의 뜻을 풀이하거나 장구(章句)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는 전적으로 주소를 인용했습니다.

주자의 뜻은 한 사람이나 한 학파의 말만 가지고 싸워 이겨서

천하의 학문을 변혁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아, 그런데 지금의 학자들은 모두 주자의 칠서대전(七書大全)이 있는 줄만 알지,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춘추(春秋)』와 『의례(儀禮)』, 『주례(周禮)』, 『예기(禮記)』등의 천지에 빛나는 글도

칠서(七書)의 목록에 배열되지 않았다 해서 그들을 폐기하여 강론하지 않으며, 도외시하여 들여놓지도 않으니,

이는 참으로 유학(儒學)의 큰 걱정거리이며, 세상의 교화에도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하생략)

인용문의 언급과 같이 다산이 경학(經學)을 연구하는 기본 자세는 경전의 근본에 충실함으로써

경전이 지니고 있는 참된 의미에 다가설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더라도 위(魏)·진(晉)시대보다는

한(漢)나라 때의 논의가 실상과 부합되는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등의 관점을 통해,

이른 시기에 전해진 기록들이 더욱 신빙성 있음을 제시하면서,

주자가 정리한 "칠서(七書)"에만 집착하는 경학 연구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이는 설득력 있는 견해로서 다산의 경학 연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본 인식에 해당한다.

이처럼 근본에 충실하고자 했던 다산의 경학 연구자세는

송나라 때의 주자가 정리한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입각해서 논의를 진행하되,

주자의 논리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논리 가운데도 의문나는 사항이 있으면

다양한 문헌을 널리 참고해서 철저하게 고증하는 과정을 통해 주자가 지녔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학문 자세는 당대의 주자 존숭의 맹목적 태도와는 구별되는

다산 정약용의 학문적 특징이 드러나는 측면이라 할 수 있다.

그같은 점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을 토대로 분석하되,

많은 부분에서 한(漢)대 삼가시(魯詩, 齊詩, 韓詩) 계열의 논의와

십삼경(十三經) 가운데 시경과 관련된 언급에 더욱 주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하고 본다면

다산이 반주자학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는 시각은 지나치게 도식적 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주자의『시경집전(詩經集傳)』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유학에 주목하면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대의 시경론 전체를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다산은 맹자의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됨에 시(詩)가 없어졌으니,

시(詩)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라는 언급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맹자의 이 언급은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본래의 기능과 의미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자기 고유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공자께서 『시경(詩經)』을 대신해서 『춘추(春秋)』를 지었다는 인식이다.

이같은 언급은 다산의 시경론 형성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춘추(春秋)』는 "포폄( 貶)"을 생명으로 한다.

그렇다면 시경 역시 "포폄( 貶)"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칭송하고 높일만한 것은 높이는 것이 "포( )"이고, 떨어뜨리고 평가절하 하는 것이 "폄(貶)"이다.

『시경』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대에는 "포폄( 貶)"이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공자가『춘추(春秋)』를 지었다는 논리인 셈이다.

이는 당대의 『시경(詩經)』이 지니고 있었던 의미가

오늘날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시경(詩經)』의 개념과는

그 시간적 거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본질적 의미였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산이 『시경강의(詩經講義)』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그의 나이 48세가 되던 1809년에 작성한 글에서

"건륭 신해년(1791년) 가을 구월에 내원(內苑)에서 활쏘기를 시험했는데,

내가 명중하지 못하여 벌로 북영(北營)에서 숙직하였다.

얼마 후에 정조께서 시경조문 800여장을 내려주시며

나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되, 40일 이내에 올리도록 하였다.

나는 기한을 20일 더 늘려달라고 빌어서 임금님께 윤허를 받았다.

조문을 완성하여 개진해 올렸더니 임금님의 평이 찬란하게 빛났다.

임금님의 격려가 융성하고 무거웠으며 조문마다 품평해 주심이 모두 나의 분수를 지나쳤다."

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소개했다.

1809년 기사년에 작성된『시경강의(詩經講義)』원고는

처음 작성한 1791년의 원고 내용을 정리한 후에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조문의 수가 800여장이라 했으나 500장을 조금 넘는 수의 조문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1791년 당시 정조가 내린 시경조문은 800여장이었는데,

이를 다산이 다시 첨삭하고 정리하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1791년 신해년 겨울에 작성한 『시경강의(詩經講義)』서문(序文)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詩)란 맑게 성음과 용모나 말과 안색 밖에서 읊어야만 그 말의 맥락이 언뜻언뜻 나타나므로,

일문일답(一問一答)하는 기사문(記事文)과 같이 평범하게 그 뜻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글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구(句)의 뜻이 어두워지고,

한 구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장(章)의 뜻이 어지러워지고,

한 장의 뜻을 잘못 해석하면 한 편(篇)의 뜻이 이미 서로 멀리 동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서(小序)가 폐해진 뒤에 한마디 말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훈고(訓詁)에 밝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돕는(許與) 자가 적은 사람은 말이 꺽이게 되고,

후원이 많은 자의 말은 사리가 펴지게 되는 것이다.

경서를 해석하는 이가 참으로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많고 적은 그 중간을 절충하면 본래의 뜻이 거의 나타날 것이다.

나는 다만 뜻은 있으면서 저술하지 못했다가 신해(辛亥) 가을에

임금께서『시경문(詩經問)』 800여 조목을 친히 지어서 신에게 조목조목 대답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이를 삼가 받아서 읽어보니,

아무리 큰 선비나 대학자라도 대답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에 구경(九經)과 사서(四書) 및 고문(古文)과 모든 제자(諸子)와 사서(史書)에서

극히 짧은 말 한마디 글 한 구절이라도 시경(詩經)의 시를 인용하거나 논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차례대로 초록(抄錄)하고 이에서 인용하여 대답하였는데,

대체로 훈고(訓 )가 분명해지자 올바른 뜻에 문제가 없었다.

글을 올리자, 임금은 어필(御筆)로 그 끝에 비평하시기를,

"백가(百家)의 말을 두루 인증하여 그 출처가 무궁하니,

진실로 평소의 학문적 역량(蘊蓄)이 깊고 넓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대답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아아!, 내가 어찌 학문의 깊고 넓은 데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내가 감히 사사로운 의견으로 성상(聖上)의 분부에 대답하지 못했을 뿐이다.

위의 서문(序文)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다산은 한 글자 한 글자의 정확한 의미를 훈고(訓考)해 내는 것이

작품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산은 소서(小序)를 불신하게 된 상황을 지적하며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주변에서 긍정하지 않으면 그 말은 기세가 꺽이는 법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은 사리가 펴지게 마련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돕는 이가 적은 말"이란 "소서(小序)"를 의미하는 것이고,

"후원하는 사람이 많은 말"이란『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자의 설명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산은

"선진(先秦)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문자를 널리 고증하여" 경서를 해석해야 한다는

일관된 경서 해석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다산은 정조의 물음에 대한 답을 개진하여 올릴 적에는

이같은 방법으로 13경은 물론이고 제자백가와 여러 사서(史書)에 등장하는 시경 관련 언급들을

모조리 고증하여 기록하였고,

이를 토대로 답안을 작성할 때는 일단 훈고(訓考)를 통해 글자의 의미가 분명해지자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다산이 경학을 연구하는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제는 이러한 다산의 경학 연구 방식이 <관저(關雎)>편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어떠한 방식으로 접근하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

<관저(關雎)>편은 『시경(詩經)』「국풍(國風)」《주남(周南)》의 첫머리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다.

 

<1>

關關雎鳩 관관(關關)하고 우는 저구(雎鳩)새

在河之洲 하수(河水)의 모래섬에 있도다

窈窕淑女 요조(窈窕)한 숙녀(淑女)

君子好逑 군자(君子)의 좋은 짝이로다.

 

<2>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流之 좌우로 물길따라 취하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寤寐求之 자나깨나 구하도다

求之不得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지라

寤寐思服 자나깨나 생각하고 그리워하니

悠哉悠哉 아득하고 아득해라

輾轉反側 전전하며 반측하노라.

 

<3>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采之 좌우로 취하여 가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琴瑟友之 거문고와 비파로 친히 하도다

參差荇菜 들쭉날쭉한 마름나물을

左右芼之 좌우로 삶아올리도다

窈窕淑女 요조한 숙녀를

鍾鼓樂之 종과 북으로 즐겁게 하도다.

다산이 인식했던 <관저(關雎)>편을 논하기 위해서는

<관저>가 실려있는 "국풍(國風)"의 "풍(風)"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 정조의 물음에 조문별로 대답을 하였는데,

훗날 다시 시경을 정리할 기회가 생기자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면서『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나의 「시경강의(詩經講義)」12권이 이미 차례가 정해지고 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강의의 체제는 오직 물음에 대답할 뿐이어서

물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종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라도 감히 서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논한 것은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해 조금 알고 있는 바를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경오년(1810년) 봄에 내가 다산에 있을 때에 학유(學游)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이청이 곁에 있었는데 산은 고요하고 해는 길어서 마음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때때로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못다 한 내용을 이청에게 받아쓰게 하였다.

내가 중풍이 들고 몸이 피곤하여 정신이 맑지 않았는데도 이 일을 그치지 않은 것은

선성(先聖)·선왕(先王)의 도에 있는 힘을 다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 잘못되고 망령된 점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나를 용서해주기 바란다.

인용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정조의 조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이미 『시경강의(詩經講義)』가 이루어졌으나

당시의 방식은 임금의 물음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야했기 때문에

묻지 않은 것은 감히 답할 수가 없어서 제대로 서술하지 못한 것이 많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다산은 그 정도를 백에 하나도 거론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 『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를 통해

『시경(詩經)』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시경강의보유(詩經講義補遺)』의 "국풍(國風)" 조(條) 부분을 보면 "풍(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風)에는 두 가지 뜻이 있고 또한 두 가지 음이 있으니

의미하는 바가 아주 달라서 서로 통할 수가 없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풍으로써 교화하는 것은 풍교(風敎)·풍화(風化)·풍속(風俗)이니 그 음은 평성(平聲)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자하는 것은 풍간(風諫)·풍자(風刺)·풍유(風喩)이니 그 음이 거성(去聲)이다.

어떻게 하나의 "풍(風)" 자가 거듭 두 가지의 뜻을 포함하고 두 가지의 음을 지녔는가?

「주역(周易)」에 "풍행지상(風行之上)이 관(觀)이니

선왕이 이 관괘(觀卦)로서 사방을 살피고 백성을 관찰한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에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들이 눕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교(風敎)의 퍼져나감으로 국풍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충신에게는 다섯 가지의 간(諫)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내가 그 풍간을 따르리라"고 하였고,

「백호통(白虎通)」에 "그 일을 보고 드러나기 전에 풍(風)으로 고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풍자에 인한 감동으로써 이름을 얻은 것이다.

「시서(詩序)」에서는 두 가지의 뜻을 겸비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가능한가?

주자의「시집전(詩集傳)」에서는 풍자를 제거하고 풍화만 남겨두었다.

그러나 풍자의 뜻을 여기에서 강론할 수가 있다. ...

 

다산은 훈고(訓 )와 고증(考證)을 통해 "풍(風)"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같은 "풍(風)"자 안에도 평성일 경우와 거성일 경우의 차이점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교화하는 "풍교(風敎)", "풍화(風化)", "풍속(風俗)"을 말할 때는 평성(平聲)으로 읽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풍간(風諫)", "풍자(風刺)", "풍유(風諭)"할 때는 거성(去聲)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 용례를 『주역(周易)』과 『맹자(孟子)』, 『공자가어(孔子家語)』등의 문헌을 통해 고증해 내고 있다.

그러면서 본래는 두 가지의 의미가 공존했었으나

주자의 『시집전(詩集傳)』에 이르러 "풍자"의 의미를 제거하고, "풍화"로 남겨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고 판단된다.

이 외에도 다산은 시경에서 중요한 개념인 "육의(六義)"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는 시경의 체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된다.

 

...(공영달의 소(疏)에 이르기를, "부(賦)·비(比)·흥(興)은 시의 기능이요,

풍(風)·아(雅)·송(頌)은 시의 형식이다."라고 했다.) 보충해서 말한다.

풍·아·송을 일컬어 세 가지 날줄(三經)이라하고 부·비·흥을 세 가지 씨줄(三緯)이라 한다.

내가 보건대, 「주례(周禮)」춘관(春官) <태사(太師)> 본문에

부(賦)·비(比)·흥(興)이 아(雅)·송(頌)보다 앞서 있음은 대개 풍시(風詩)에만 부·비·흥이 있고,

아·송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雅)는 모두 바르게 하는 말이고, 송(頌)은 찬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글이 은미(隱微)한 뜻에 힘쓰지 않는데, 어떻게 부·비·흥의 구별이 있겠는가?

풍(風)은 풍간(諷)으로, 더러는 의미를 펴고 베풀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賦),

더러는 물건의 비슷한 것에 견주어서 스스로 알게 하고(比),

더러는 깊고 먼 뜻을 의탁하여 스스로 알게 하니(興),

이것은 모두 풍시(風詩)의 체(體)이다.

 

그러므로 풍(風)·부(賦)·비(比)·흥(興)은 본래 육의(六義)의 네 부분이나

-「주례」에 이르기를, "태사가 여섯 시를 관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합쳐져서 풍(風)이 된 것이다.

소아(小雅)에는 비록 비(比)·흥(興)에 가까운 것이 있으나, 그 지취(志趣)는 같지 않다....

 

인용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풍아송(風雅頌)은 삼경(三經)으로 시의 형식이 되고,

부비흥(賦比興)은 삼위(三緯)로서 시의 표현기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 풍아송(風雅頌)과 부비흥(賦比興)의 차례가

풍(風)·부(賦)·비(比)·흥(興) 그리고 아(雅)·송(頌)의 차례로 되어 있음에 주목하여,

본래는 오직 "풍(風)"에 부(賦)·비(比)·흥(興)이 속해 있는 것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부(賦)·비(比)·흥(興)이 없는 것임을 주장한다.

그 근거로 "아(雅)"는 모두가 바르게 말하는 것이고, "송(頌)"은 오직 "찬미(贊美)"하는 말이기 때문에

그 문장은 "국풍(國風)"의 부비흥(賦比興)과 같이 "은미함(隱微)"에 힘쓰는 글이 아닌데,

어째서 부비흥(賦比興)의 구별이 따로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있다.

반면에 "풍(風)"은 "풍자(諷刺)"를 의미하므로

문장의 성격 자체가 직접 서술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은미함"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다산의 논리대로라면 "부비흥(賦比興)"을 통해 "풍시(風詩)"를 구현하게 되는 셈이다.

 

논의의 초점을 다시 <관저(關雎)> 편에 맞춰보면,

당대에 <관저(關雎)>를 해석했던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하나의 지침으로 삼았던 말은

공자가 논어에서 언급한 <관저>에 대한 평이었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관저(關雎)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상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던 사실에 주목해서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관저>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산은 철저한 고증(考證)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낸다.

 

...보충해서 말한다. 서(序)에 쓰인 "애상(哀傷)" 두 자(字)는 "슬픔에 응하되 상심하지 않는다" 하니 한마디로 비루하고 졸렬함의 극치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은 <권이(卷耳)>를 이름이다.

<춘추전(春秋傳)>에 목숙(穆叔)이 진나라에 가니, 진나라 제후가 그를 대접했는데(양공4년),

악공이 <문왕(文王)>의 삼장(三章)을 노래하고,

또 <녹명(鹿鳴)>의 삼장(三章)을 노래했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세 편의 시는 첫 편의 제목을 나란히 덮어쓰는 것이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시(詩)를 칭하던 법례(法例)였다....

 

<관저(關雎)>라고 이르는 것은 <관저(關雎)>가 머리편이 되고

<갈담(葛覃)>, <권이(卷耳)>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관저(關雎)>는 "즐겁되 음란하지 않고(樂而不淫)",

<갈담(葛覃)>은 "부지런하되 원망하지 않고(勤而不怨)",

<권이(卷耳)>는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다(哀而不傷)"라고 하였으니,

계자(季子)와 공자(孔子)의 말을 합쳐서 살펴보면 곧 그 뜻이 명료해진다.

<권이(卷耳)>의 시에 이르기를,

"오래 그리워하지 않으리라, 오래 상심하지 않으리라(維以不永懷 維以不永傷)"라고 했으니

이른바 "애이불상(哀而不傷)"이 아니겠는가!

 

옛날의 시악(詩樂)은 반드시 세 편을 취했기 때문에

향음(鄕飮)이나 연례(燕禮) 등에서 주남(周南)이라면

<관저(關雎)>, <갈담(葛覃)>, <권이(卷耳)>를 취했고,

소남(召南)이라면 <작소(鵲巢)>, <채번(采 )>, <채빈(采 )>을 취했음은 살펴서 알 수 있다.

이는 본디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공의 학설이니, 나의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에 상세하게 나온다.

 

<관저(關雎)>장에 대한 논의는

다산의 저서인『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에서도 동일한 관점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관저(關雎)>라고 할 때는 <관저(關雎)>를 포함해서 <갈담(葛覃)>, <권이(卷耳)>까지를 포함한 3장을 말한다.

<관저>는 "금슬(琴瑟)"과 "종고(鐘鼓)"로 하되 그 공경함을 잊지 않으니 즐겁되 음란하지 않은 것이고,

"척고(陟高)"하고 "승리(乘羸)"하되 오래 상심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슬프되 상심하지 않는 것이다.(哀而不傷)"이다.

정리해보면, 공자가『논어(論語)』에서 언급한 <관저(關雎)>편에 대한 언급은

<관저>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갈담(葛覃)>과 <권이(卷耳)>를 포함하여

세 작품의 총칭으로 가장 먼저 나오는 작품으로 이름을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애이불상(哀而不傷)"의 의미가 명료해진다.

 

작품 해석과 관련하여 정조가 내린 조문과 이에 다산이 답해 올린 답안을 통해

당대 시경강의(詩經講義)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기에

<관저>편과 관련된 정조 임금의 물음과 다산의 답안을 살펴보겠다.

 

군자(君子)는 문왕(文王)을 가리킨다.

군자라는 것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호칭이니,

<은기뢰(殷其雷)>편(篇)의 "진진군자(振振君子)"와

<여분(汝墳)>편(篇)의 "기견군자(旣見君子)"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시는 궁인(宮人)이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태사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문왕(文王)을 군자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록(旱麓)>편(篇)의 개제군자(豈弟君子)를 인용하면서

이것은 인군을 가리키는 호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문왕이 태사와 결혼한 것은 그가 세자(世子)였을 때였다.

그러니 어떻게 대번에 인군에 대한 호칭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대기(戴記)』를 보면 "문왕은 97세에 죽었다."고 하였고,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에서는 "문왕은 50년 간 왕위에 있었다."하였으니,

그렇다면 문왕은 48세에야 즉위하여 서백(西伯)이 된 것이다.

그리고 문왕이 13세 때에 백읍고(伯邑考)를 낳았으니,

태사와 결혼한 것은 10여 세 때에 해당된다.

옛날에 과연 세자를 군자라고 일컬은 글이 있었는지 보지 못했다.

만약 문왕이 즉위한 뒤에 전에 혼인하던 때를 돌이켜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면,

대지(大旨)에서 말한 "궁중(宮中)에 있는 사람이 그가 처음 이르렀을 때

유한정정(幽閑貞靜)한 덕이 있음을 보고 이 시를 지은 것이다."고 한 것은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신이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문왕(文王)이 세자인데도 군자(君子)라고 이름은

"덕(德)"으로 말한다면 세자도 역시 (德이 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만일 반드시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뜻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실로 그와 같다면) 문왕은 왕계를 아버지로 모시고,

나이 10여세에 갑자기 스스로 배필을 구하여 자나깨나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했다는 것인데,

이는 이치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자가 비록 어진 배우자를 얻었다고 할 지라도

"금슬종고(琴瑟鐘鼓)"로 "이우이락(以友以樂)"함은 때에 맞지 않습니다.

제시(齊詩)와 노시(魯詩) 두 계열(二家)의 풍자(諷刺)설은

비록 요점을 서술할 수는 없으나 시인은 예(禮)와 의(義)의 시를 베풀어 설명했습니다.

제1장은 오직 숙녀인 뒤에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고,

제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취할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고,

제3장은 이미 얻었기에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태사가 처음 이르렀던 초기에 궁인이 지은 것이라면 곧 의미가 대부분 통하기 어렵습니다.

진실로 임금님께서 하문(下問)하심과 같습니다."...

 

『시경강의(詩經講義)』에서 행해진 정조와 다산의 문답이다.

정조는 "군자(君子)"라는 시어(詩語)에 주목하여 예리한 시각을 보인다.

곧 <관저(關雎)>에 등장하는 "군자(君子)"가 문왕(文王)을 지칭하는 것인데

문왕이 배필을 구한 시점은 세자 때일 것이고,

"군자"라는 말은 부인이 남편을 일컫는 경우에 쓰이거나

<한록(旱麓)>편에 사용된 용례에서처럼 인군(人君)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는데,

문왕이 세자 신분이었는데, 어찌 시인이 문왕에게 "군자(君子)"라는 칭호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러면서 문왕이 결혼할 당시의 상황을 토대로 해석 상의 무리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다산은 "군자(君子)"란 말은 "덕을 이룬 사람의 명칭(德者, 成德之名)"이니,

세자 신분이라도 덕(德)을 갖추었다면 "군자(君子)"라고 칭할 수 있다고 답함으로써

"군자(君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의문을 말끔히 씻어낸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태사"나 "궁인"의 작품일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정조의 의문과 그 맥을 함께 한다.

이 작품을 문왕의 비인 "태사"나 "궁인"의 작품으로 보기 위해서는 많은 무리가 따름을 지적한다.

인용문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문왕이 지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그래서, 다산이 인식한 <관저>편은

제1장에서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좋은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했고,

제2장에서는 정숙한 숙녀를 얻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함부로 아무나 취할 수 없음을 언급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제3장에서는 배우자를 이미 얻은 상황이므로 화락(和樂)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관저(關雎) 새는 다른 강의 물가에 있지 않고, 황하(黃河)의 물가에 있으니

<관저(關雎)>는 황하(黃河) 주변의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지,

빈( )이나 기(岐)의 풍(豊), 호(鎬) 지역의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데,

문왕의 궁인이 어찌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주소(周召) 영락(營洛)의 후에 이락(伊洛) 삼하(三河)의 땅이 마침내 경연(京輦)이 되고서야

임금과 신하, 위와 아래가 서로 왕래교유 했는데,

<관저(關雎)>의 시는 그 기간에 지어졌다고 한 제시(齊詩)와 노시(魯詩)의 설명을 모조리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양웅(揚雄)은 이르기를,

"주나라 강왕(康王) 때에 <관저(關雎)>가 비로소 지어졌다."고 하였고,

사마천이 말하기를 "주나라의 도가 이지러짐에 잠자리( 席)를 근본으로 하여 <관저>를 지었다(12제후년표)"고 하였고,

두흠이 말하기를 "패옥(佩玉)이 아침 늦게 울림에 <관저(關雎)>로 탄식하였다(전한서)"고 하였으며,

명제(明帝)의 조칙에 "응문(應門)이 파수를 잘못하여 <관저(關雎)>로 풍자하였다"고 하였고,

범엽의 사론(史論)에 "강왕(康王)이 조회에 늦게 나오자 <관저>를 지어 풍자하였다.(皇后記)"고 하였습니다.

 

주자는「소서변설(小序辨說)」에서 이 설을 배척하지 않고 도리어 "아마도 이런 이치가 있을 법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주자의 말인데 하필이면「변설(辨說)」의 견해를 버리고「집전(集傳)」의 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공자께서 <관저>를 성대하게 칭송하였는데 이제 자시(刺詩)라고 이름하면 혹 사체(事體)에 미안한 것 같지만,

이것이 성현을 높이는 인사들이 문왕의 설을 고수하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그렇지만 <관저>는 성인의 시입니다.

강후(康后)가 실덕(失德)한 것이 어찌 <관저(關雎)>에 오점이겠습니까?

 

시인의 뜻은 대개 배필은 가려뽑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른 것입니다.

(두흠이 이르기를,

"숙녀가 배필을 갈구하되 위로는 충효가 돈독하고 인후(仁厚)함을 일으키기를 바라는 마음을 노래했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는 공경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슬종고(琴瑟鐘鼓)"는 즐기면 즐거운 것입니다만 음란함으로 이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물(事物)에 의탁하여 흥(興)을 일으킴이니 먼저 "저구(雎鳩)"를 사용한 것입니다.

 

"저구(雎鳩)"는 사나운 새입니다.

"관관(關關)"은 화합하는 울음입니다.

화합하면서도 사나울 수 있고, 즐거우면서도 분별이 있으니, 제비나 참새, 원왕새의 등속과는 같지 않습니다.

"닐닐설설(    )"은 음탕하고 무람한 뜻이 있습니다.

"하주(河洲)"는 깊고 빽빽한 땅으로 대하(大河)의 가운데에 이 작은 섬이 있는데,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오호라! 화(和)·낙(樂)·귀(貴)에는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요조숙녀(窈窕淑女)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한 것입니다.

"요조(窈窕)"는 깊고도 깊음(深邃)이니 부인의 뜻입니다.

"규방의 문(규달閨 )"은 깊게 하고자 함이고, "문지방(곤역  )"은 엄히 하고자 함입니다.

다만 "박(薄)"은 엄밀하고자 함이니, 말하자면, 움직이면서도 고요하고자 함입니다.

이것이 "요조(窈窕)"가 "숙녀" 되는 조건입니다.

 

뜻은 강왕(康王)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드러난 곳에서도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풍자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 지취(志趣)는 신하와 자식이 충성하고 사랑하는 것이요,

그 의미는 세상에서 배필(配匹)과 합함이요,

그 덕은 온화함과 공경의 지극함이요,

그 소리는 우렁차서 귀에 가득함이니, 그 어떻습니까?

「시경(詩經)」삼백 편의 으뜸되는 것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궁인(宮人)은 여어(女御)입니다.

저 궁녀의 충성(忠誠)스런 마음으로 신부를 아름답다고 일컬으며,

아첨하고 아부하여 신부가 된 초기에 그녀를 높이고서야 성경(聖經)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주자가 노시(魯詩) 학설(學說)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었습니다. ...

 

다산은 인용문에서처럼 "관저(關雎)"가 황하(黃河) 물가에 있는 것임을 통해,

문왕(文王) 시대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양웅, 사마천, 두흠, 범엽, 명제(明帝)의 조칙 심지어 주자의 『소서변설(小序辨說)』등 여러 문헌에서의 고증(考證)을 통해 <관저(關雎)>의 작자가 문왕(文王) 당시의 궁인(宮人)이 아니며,

<관저(關雎)> 시는 풍자시(諷刺詩)임을 논증하고 있다.

<관저(關雎)>의 작자 문제에 대해서는 주자 자신도 분명한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자는『소설변설(小序辨說)』에서 <관저>를 풍자시로 본 견해에 이치가 있다며 수긍했는데,

『시집전(詩集傳)』에서는 "궁인(宮人)"의 작품이라고 상호 모순되는 시각을 드러내놓았다.

다산은 이렇게 주자가 <관저>를 풍자시로 본 노시(魯詩)의 설명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가,

다산의 지적과 같이 <관저>의 작자라고 생각하는 궁인(宮人)들이 태사가 처음에 문왕의 신부로 들어왔을 때,

그녀를 가리켜 칭송하며 아름답다고 아첨하고 아부하는 것이라면,

그같은 내용으로 어떻게 "경전(經典)"에 포함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제기이다.

이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결국, 다산은 다양한 문헌을 두루 고증하여

<관저>가 시기적으로는 강왕 때의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고,

풍자의 대상은 밑줄 친 바와 같이

왕 때에 왕과 후비의 행락(行樂)이 이따금씩 공개된 곳에서도 절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저>를 통하여 은근하게 풍자(諷刺)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조선조의 유학자들의 <관저>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고자 자료를 검색했는데

서하(西河) 김인후의 문집에 <관저(關雎)편을 읽고서-原題는 讀關雎>라는 작품이 있어 잠깐 소개해 본다.

김인후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시경의 주석만도 수 천번을 읽었다고 할만큼 시경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대부였다.

 

綿綿王業起岐山 면면한 왕업이 기산(岐山)에서 일어나

至于文王德如天 문왕(文王)에 이르러서는 덕(德)이 하늘과도 같구나

天生聖女洽之陽 하늘이 낳으신 성녀(聖女)는 임금의 짝으로 적합하니

窈窕婦德曾無前 요조한 후비의 덕은 일찍이 전에 없었다네

造舟爲梁嬪于周 배를 만들고 들보를 지어 주나라로 향하니

國人爭詠關雎篇 백성들은 다투어 <관저편(關雎篇)>을 읊조리네

由來夫婦居人倫 예부터 부부가 인륜에 거처함은

陰比乎坤陽比乾 음은 땅에 비유되고, 양은 하늘에 비유되었네

文王旣聖 又聖 문왕은 이미 성인이시고 태사 또한 성인이시니

同明 德家道全 함께 밝고 나란한 덕이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네

赫赫盛化流乾坤 혁혁하고 성대한 문화가 천지에 넘쳐 흐르고

汝漢陋俗皆相悛 여(汝)수와 한(漢)수 지역 비루한 풍속을 서로 고쳐서

天下歸心大命集 천하에 귀일하는 마음이 천명으로 운집되어서는

子孫相傳八百年 자손에게 서로 전하여 8백년을 이어왔도다

吾觀興廢由婦人 내 보니, 흥하고 망하는 것은 부인(婦人)으로 말미암으니

喜己入宮邦國顚 "하나라 말희와 은나라 달기"가 입궁했기에 나라가 엎어졌네

不有懿德徒淫荒 아름다운 덕은 있지 않고 다만 음란하고 황폐해졌으니

明眸皓齒空嬋姸 아름다운 눈동자와 새하얀 치아는 부질없이 고왔구나

如何後王不能承祖武 어찌하여 후대의 왕은 조상의 위업을 잇지 못하고

僞烽一擧兵戎連 거짓 봉화가 한 번 오름에 난리만 계속되었는가!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관저편(關雎篇)>을 읽은 서하 김인후 역시

문왕(文王)과 후비 태사의 덕(德)을 찬미하는 작품으로 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후반부에 가서는 "말달(  )의 고사를 빌어 후비를 함부로 뽑을 수 없음을 경계하기도 하면서

약간의 자시적(刺詩的) 측면으로 읽히는 면도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다산이 <관저>편 3장을 해석한 내용과 그 맥락이 닿아있음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다산은 <관저>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1장은 오직 정숙한 숙녀라야 군자의 배우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2장은 숙녀를 얻기 어려워도 가벼이 함부로 취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이 시의 후반부 역시 이 같은 의미로 읽을 수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다산의 시경론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산은 시경의 "풍(風)"에는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밝혀내면서,

주자 이후로 "풍자(風刺)"의 의미가 사라지고, "풍교(風敎)"의 의미만 남게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육의(六義)"의 문제에서는 풍(風)·부(賦)·비(比)·흥(興)·아(雅)·송(頌) 의 순서와 갈래의 특징에 주목한 결과,

풍아송(風雅頌)은 시의 형식이고,

부비흥(賦比興)은 "풍(風)"에만 해당되는 개념이고,

"아(雅)"와 "송(頌)"에는 해당되지 않는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그 이유는 "아(雅)"와 "송(頌)"의 경우는

그 갈래가 요구하는 갈래의 속성 자체가 부(賦)·비(比)·흥(興)과는 서로 동떨어진 것이기에

"아(雅)"와 "송(頌)"에서는 변별되어 사용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주자(朱子)는 다산과 달리 그것을 구별하여 구분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자의 자의적인 구분이지 본래의 의미와는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관저>에 대한 해석은

강왕(康王)과 후비(后妃)의 행락(行樂)을 <관저(關雎)>를 통해 은미(隱微)하게 간(諫)한 작품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끝으로 다산은 <경의시(經義詩)>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이해한 내용을 칠언절구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시경(詩經)"도 물론 다섯 수로 구분되어 포함되어 있다.

다산이 시경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핵심적인 측면이 드러나기에 참고할 수 있게 소개한다.

 

<1>

古人百計格君心  誦工歌被素琴/

全把國風兼二雅  直須看作諫書林

 

옛사람은 온갖 방법으로 임금 마음을 바로잡아

장님이 외고 악관이 외어 소금에 올렸는데

국풍과 소아 대아까지 모조리 가져다가

곧장 임금 간하는 글로 간주하였네

 

<2>

風賦比興都是風  正言體栽不相同/

六詩平列無經緯  納五言時未頌功

 

(풍과 부와 비와 흥이 모두가 풍인데

바른 말 하는 체재가 서로 같지 않더라

육시를 평등하게 열거하여 조리가 없고

오언을 바칠 때는 공을 칭송하지 않도다.)

 

<3>

鼎彝紀惡尙堪憎  于誦于絃豈不懲

樂器未遷詩道喪  春秋袞鉞乃相承

(정이에 악을 기록해 둔 것도 미움직한데

읊고 거문고 타고 함에도 왜 징계하지 않는고

악기는 그대로 있으나 시도가 없어졌기에

춘추의 포폄이 이에 서로 이어졌다오)

 

<4>

狹邪淫冶本無歌   設有謳唫采奈何

虞帝巡方無此法  獻詩誰到太山阿

(화류가의 음란한 풍은 본디 노래도 없지만/

설령 노래가 있다 해도 채집하면 무엇하랴/

순임금이 지방 순수할 땐 이 법이 없었으니/

누가 태산 모퉁이까지 시를 갖다 바치리오)

 

<5>

小序傳流大小毛/衛宏潤色總摸撈/

紫陽劈破眞豪快/垂二千年隻眼高

(소서가 대모 소모에게 전해 내려왔는데/

위굉이 윤색한 건 다 더듬어 찾은 거로세/

자양이 벽파한 것은 참으로 호쾌하여라/

공자 이후 이천 년간에 견식이 가장 높았네)

 

3. 시의식(詩意識)과 작품 세계의 관련성

앞에서는 다산의 시경론(詩經論)과 <관저(關雎)>장의 해석에 나타난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앞장의 논의를 토대로 하되,

다산의 시에 대한 견해라 할 수 있는 시의식(詩意識)과 다산(茶山)의 한시 작품과의 상관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무릇 문장이라는 것은 어떠한 물건인가 하면, 학식이 속에 쌓여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네.

이는 기름진 음식이 창자에 차면 광택이 피부에 드러나고 술이 배에 들어가면 얼굴에 홍조가 도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들어간다고 이룰 수 있겠는가.

 

중화(中和)한 덕으로 마음을 기르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성(性)을 닦아

공경으로 그것을 지니고 성실로 일관하여 이로써 변하지 않아야 하네.

이렇게 힘쓰고 힘써 도(道)를 바라면서 사서(四書)로 나의 몸을 채우고 육경(六經)으로 나의 지식을 넓히고,

여러 가지 사서(史書)로 고금의 변천에 달통하여

예악형정의 도구와 전장법도의 전고(典故)를 가슴 속 가득히 쌓아놓아야 하네.

그래서 사물(事物)과 서로 만나 시비와 이해에 부딪히게 되면

나의 마음 속에 한결같이 가득 쌓아온 것이 파도가 넘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

세상에 한번 내놓아 천하 만세의 장관으로 남겨보고 싶은 의욕을 막을 수 없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네.

그리고 이것을 본 사람은 서로들 문장이라고 말할 것이네. 이러한 것을 일러 문장이라 하는 것이네.

 

.위의 인용문은 다산 자신의 문장관(文章觀)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다산은 문장(文章)이라는 것을 삶 속에서 도(道)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것들,

예컨대, 외적으로는 효우(孝友)와 같은 행실로 본성(本性)을 연마하여 공경을 몸에 지니고

성실함으로 일관됨을 유지하는 자세와 더불어 내적으로는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그리고 역사서와 고금의 저서들을 통해 지식을 체득해야 함을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 뒤라면, 특정한 상황이나 경우에 처했을 때,

마음 속에 쌓아놓았던 것이 파도치듯 거세게 소용돌이쳐서 쏟아져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참된 문장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늘어놓음으로써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글쓰는 사람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절로 우러나야 참된 문장이라는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음은 다산이 시(詩)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겠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뜻이 근본적으로 낮고 추잡하면 억지로 맑고 고상한 말을 해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뜻이 본디 편협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한 말을 해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않게 된다.

시를 배움에 있어 그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는 것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하게 하면 된다.

 

다산이 인식하고 있는 시(詩)의 본질을 언급하는 인용문이다.

이처럼 다산의 시의식(詩意識) 역시 앞에서 살펴본 문장관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詩)는 뜻을 말하는 것이므로 뜻이 낮거나 추잡하면

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아울러 뜻이 낮거나 비루해지면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되므로 뜻을 헤아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다음은 다산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서신의 일부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 편지라는 형식을 빌어서 그리고 아들이기에

다른 양식의 글에서보다 더욱 진솔하고 과감하게 자신의 시의식(詩意識)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번에 성수(惺 ) 이학규(李學逵)의 시를 읽어보았다.

그가 너의 시를 논평한 것은 잘못을 잘 지적하였으니 너는 당연히 수긍해야 한다.

그의 자작시 중에는 꽤 좋은 것이 있기는 하더라만 내가 좋아하는 바는 아니더라.

오늘날 시는 마땅히 두보(杜甫)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시인들의 시 가운데 두보(杜甫)의 시가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시경(詩經)』에 있는 시 300편의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경』에 있는 모든 시는 충신, 효자, 열녀, 진실한 벗들의 간절하고 진실한 마음의 발로로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내용이 아니면 그 시는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지 않은 시를 시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뜻이 세워져 있지 아니하고,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위정자를 도와 민중에게 혜택을 주려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시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에 힘쓰기 바란다

. ... 中略...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적 사실을 인용한답시고 걸핏하면 중국의 일이나 인용하고 있으니, 이건 또 볼품 없는 것이다.

아무쪼록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징비록(懲毖錄)』,『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및

우리나라의 다른 글 속에서 그 사실을 뽑아내고 그 지방을 고찰하여 시에 인용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나올 것이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 혜풍(惠風) 유득공(柳得恭)이 지은 「16국회고시」는

중국 사람들도 책으로 간행해서 즐겨 읽던 시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 사실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동사즐(東史櫛)』은 본디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놓은 것인데, 지금은 대연(大淵)이가 너에게 빌려줄 턱이 없으니,

우선 중국의 17사(史)에 있는 동이전(東夷傳) 가운데서 이름난 자취를 뽑아놓았다가 사용하면 될 것이다.

 

인용문과 같이 다산은 두보(杜甫)야말로 『시경(詩經)』의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작가로 손꼽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두보의 시 세계가 다산이 지향하고자 했던 시 세계와 가장 잘 부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나라를 사랑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세속을 분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찬미(讚美)할 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것은 풍자(諷刺)할 줄도 알아야 하고,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할 줄 알아야 참다운 시(詩)가 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은 용사(用事)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이는 주목할만한 다산의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다산은 한시 작품에서 역사적 사실을 인용하는데 대개의 경우가 중국(中國)의 역사를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한심한 일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역사서인『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역사서와

우리나라 고유의 문헌을 대상으로 그 속에서의 사실을 통해 인용할 줄 알아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좋은 시가 되며,

세상에 명성을 떨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다산의 "조선시(朝鮮詩)" 선언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의 글도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이기 위해 작성한 서신인데,

이 글에서 다산은『시경(詩經)』시의 전형적 형식인 네 자로 된 시(四字詩)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인식했던 시의 근본에 관해 언급한다.

 

... 시(詩)를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은 아니지만 성정(性情)을 도야(陶冶)하려면 시를 읊는 것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예스러우면서 힘있고, 기이하면서 우뚝하고, 웅혼하고, 한가하면서 뜻이 심원하고, 맑으면서 환하고 거리낌없이 자유로운 그런 기상에는 전혀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가늘고 미미하고, 자질구레하고 경박하고 다급한 시에만 힘쓰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로다. 단지 율시(律詩)만 짓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루한 습관으로 실제로 다섯 자나 일곱 자로 된 고시(古詩)는 한 수도 보지 못했으니, 그 지취(志趣)의 낮고 얕음과 기질의 짧고 껄끄러움은 반드시 바로잡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내가 요즈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자기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는 데나 회포를 읊어내는 데는 넉 자로 된 시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본다. 고시(古詩) 이후의 시인들은 남을 모방하는 것을 혐오하여 마침내 4자로 시짓는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요즈음 같은 처지는 4자시 짓기에 아주 좋구나.

너희들도 『시경(詩經)』「풍아(風雅)」의 근본 뜻을 깊이 연구하고

그 후에 도연명(陶淵明)이나 사령운(謝靈運)의 빼어난 점을 본받아 넉자시(四字詩)를 짓도록 하여라.

무릇 시의 근본은 부자(父子)나 군신(君臣)·부부(夫婦)의 떳떳한 도리를 밝히는 데 있으며,

더러는 그 즐거운 뜻을 드러내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원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이끌어내게 하는 데 있다.

 

그 다음으로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서

항상 힘없는 사람을 구원해 주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고자

방황하고 안타까워서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는 간절한 뜻을 가진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이해(利害)에만 얽매일 것 같으면 그 시는 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은 다산이 두 아들에게 보낸 서신인데,

다산의 시의식(詩意識)이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밑줄 친 부분의 지적과 같이 다산은 자신의 뜻을 사실적(事實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네 글자로 된 시만큼 효율적인 형식은 없다고 본다.

그만큼 『시경(詩經)』의 정신을 형식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용출처 - 사림서당.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5265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전경원, 다산 정약용의 시경론(詩經論) 및 시의식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sy1851&logNo=221691011766&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장(장)을 중심으로 - 전경원(건국대강사) 1.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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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설화 or 쌍녀분(雙女墳)설화

雙女墳 江蘇省高淳縣 최치원설화/崔致遠傳  또는 쌍녀분(雙女墳)설화 雙女墳記<太平通載 卷68> 임명덕본, 한국한문소설전집, 권7,p.261. 국역은 김현양 외, <수이전 일문> (박이정, 1996) 을 참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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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雙女墳記/ 崔致遠傳

 

최치원, 雙女墳記/ 崔致遠傳

https://www.youtube.com/watch?v=eWIxclVd1_s https://www.youtube.com/watch?v=Tg_E8bZx6cQ https://www.youtube.com/watch?v=RCmdjC2GfrI [참고] 인귀교환설화의 첫 작품으로는 최치원의 〈쌍녀분전기〉(雙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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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은 젊은 날의 초상화, 하단은 "자사진찬"까지 쓴 주름진 늙으막의 초상화]

 

자화상 찬(自寫眞贊)

-위 사진.

俯視李賀(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3023002&wlog_tag3=naver#csidx5cb1eef2c190ffca8ad78f9df6ab14d

*[운영자 주]

번역에 '금오산'은 운영자가 덧붙임.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 그래서 기존 번역의 제목인 '나의 초상에 쓰다'를 바꾸어 '자화상 찬'이라 했다.

작품집 이름에 '금오'를 얹은 것은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에서 유래함.

김시습은 34세 때 경주 남산 삼릉계곡 용장사 서고에 거처하며 <금오신화> 5편을 창작함.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당대 천재시인.

문맥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이 글의 하단에 그의 시 <將進酒>를 소개한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김시습의 '自寫眞贊'부터 그는 기인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젊은 날의 자기 모습에다 노년의 오만상을 찌푸린 모습까지 그렸으나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젊은 날의 모습은 노추에도 변함없다. 허나 주름 때문인가 많이 온화한 모습이다

자화상이야 서구에도 많지만 찬을 쓴다는 게 희귀한 발상이다.

贊(찬)이란 찬양, 찬미의 의미다. 자기 자랑 해 봤자 듣는이는 귓전으로 듣는다. 그래서인지 내용인즉 찬이 아니라 자기 비하다. 5세 때 세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비단 필을 허리에 묶어 끌고 나오던 神童의 그런 호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47세 때 환속하여 재혼했으나 1년도 못견디고 가출하여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는 참으로 별난 천재고, 그의 삶은 별난 인생살이였다. 우리는 이를 험한 산길에 비유하여 흔히 기구하다(崎嶇--) 고 말한다. '69다방'까지 경영했던 <날개>의 작가 이상도 그렇거니와 왜 천재들은 박복하고 불행한가? 그것이 알고 싶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008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173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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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전-율곡 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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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원문과 번역 목록

[용장사지 위 마애불과 석탑들] [은자주] 이 블로그에 실은 금오신화의 원문과 번역 주소창을 소개한다. [참고] 금오신화 vs 구우/전등신화 http://kydong77.tistory.com/5413 금오신화 작품 요약 금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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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총정리

<금오신화>의 금오는 경주 남산의 주봉을 지칭하고, 신화란 새로운 이야기의 뜻인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재든 주제든 문체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굳이 금오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창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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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전 -율곡 이이 (0) 2008.08.05

 

김시습전 -율곡 이이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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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萬福寺摴蒲記 下 2]무덤에서 사흘간 처자 환신과 지내다 1)처자 환신을 따라 개령동 처자의 집에 가다 生執女手, 經過閭閻,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犬吠於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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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담장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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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이 작품은 부벽루에서 시를 창수할 짝을 만난 홍생과 기씨녀의 회고시의 향연이다. 홍생의 칠률 6수, 기씨녀의 칠률 6수, 40운 80구의 기씨녀의 오언고시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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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염부주지 상 -김시습 (0) 2008.08.07

 

김시습,남염부주지 上

이 작품에는 매월당이 20년에 걸친 정신적 방황에서 도출하려 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와 불교의 세계관 및 의식의 오류에 대해 염왕과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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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염부주지 하--김시습 (0) 2008.08.07

 

김시습, 남염부주지 下

3]염왕과의 담론 1)유불을 비교하다 生問曰(생문왈) : 박생이 물었다. 周孔瞿曇(주공구담) : "주공과 공자와 석가는 何如人也(하여인야) : 어떤 사람들입니까?" 王曰(왕왈) : 임금이 말하였다. 周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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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부연록 -김시습 (0) 2008.08.07

 

김시습, 용궁부연록

[주]한생이 용궁의 상량식 잔치에 초대되어 상량문 짓고, 용궁의 풍류잽이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재주를 보이며 시를 지은 후, 한생은 용궁을 두루 구경하고, 진주 두 알과 비단 두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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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316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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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5편 총정리/ 同安常察,十玄談/ 김시습,십현담요해 & 한룡운, 십현담주해

[상단은 젊은 날의 초상화, 하단은 "자사진찬"까지 쓴 주름진 늙으막의 초상화] 자화상 찬(自寫眞贊) -위 사진. 俯視李賀(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우어해동) 조선에서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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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복사저포기 상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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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금오신화 5편중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귀교환설화를 소재로 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생시처럼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을 인귀교환설화라 한다. 얼마나 지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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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취유부벽정기

[주] 이 작품은 부벽루에서 시를 창수할 짝을 만난 홍생과 기씨녀의 회고시의 향연이다. 홍생의 칠률 6수, 기씨녀의 칠률 6수, 40운 80구의 기씨녀의 오언고시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 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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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남염부주지 上

이 작품에는 매월당이 20년에 걸친 정신적 방황에서 도출하려 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회의와 불교의 세계관 및 의식의 오류에 대해 염왕과 대화하는 형식을 통해 정리하고 있다. 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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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염부주지 하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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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남염부주지 下

3]염왕과의 담론 1)유불을 비교하다 生問曰(생문왈) : 박생이 물었다. 周孔瞿曇(주공구담) : "주공과 공자와 석가는 何如人也(하여인야) : 어떤 사람들입니까?" 王曰(왕왈) : 임금이 말하였다. 周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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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궁부연록 -김시습

http://kydong77.tistory.com/8080

 

김시습, 용궁부연록

[주]한생이 용궁의 상량식 잔치에 초대되어 상량문 짓고, 용궁의 풍류잽이들과 초대받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재주를 보이며 시를 지은 후, 한생은 용궁을 두루 구경하고, 진주 두 알과 비단 두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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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5414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https://kydong77.tistory.com/18573

 

금오신화 정리/ 경주 기림사 김시습 影堂

https://www.youtube.com/watch?v=ao9p-W9dsQI 자화상 찬(自寫眞贊) -위 사진 상단. * 두번째 사진은 젊은날의 자화상. *이땅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스스로 '贊'을 붙여 자신을 예찬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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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4889

 

정약용 / 自笑(나 자신을 비웃노라)

http://blog.naver.com/bhjang3/140055011109 〔自笑〕 나 자신을 비웃노라 如醉如醒度半生 취한 듯이 깬 듯이 반평생을 보내면서 여취여성도반생 到頭 得此身名 간 곳마다 푸짐한 건 이 몸의 이름이지 도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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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笑

(나 자신을 비웃노라)


如醉如醒度半生 
여취여성도반생

취한 듯이 깬 듯이 반평생을 보내면서

到頭 得此身名 
도두 득차신명 

간 곳마다 푸짐한 건 이 몸의 이름이지

泥沙滿地掉晩   

니사만지도 

진창 모래 천지인데 갈기 늦게 흔들었고

網罟彌天舒翼輕 

망미천서익경

하늘 가득 그물인데 경솔하게 날개 폈어

落日齊山誰繫住 
낙일제산수계주

제산에 지는 해를 누가 잡아맬 것인가

衝風楚水可橫行 
충풍초수가횡행

풍파 드센 초수를 마음대로 어이 가리

同胞未必皆同命 
동포미필개동명

형제라고 운명이 다 같지야 않겠지만

自笑迂儒闇世情 
자소우유암세정

세상물정 어두운 선비 나 자신을 비웃노라

草草冠裳是汝欺 
초초관상시여기

초초한 그 옷차림 바로 너를 속인 것이지

十年驅策 奔疲 
십년구책 분피

십 년을 쏘댔지만 피곤 말고 소득이 뭔가

智周萬物愚無對 
지주만물우무대

만물을 다 안다면서 대답 못하는 우자이며

名動千人謗已隨 
명동천인방이수

천인이 이름 알아도 그 뒤에는 훼방인 것을

不見紅顔多薄命 
부견홍안다박명

미인이 흔히 박명하다고 그 기록 안 보았던가

由來白眼在親知 
유래백안재친지

백안으로 보는 자는 언제나 친지 쪽인데

蛇鱗 翼終何待 
사린 익종하대

뱀비늘에 매미날개 게서 뭘 기대하리

自笑吾生到底癡 

자소오생도저치

우스워라 나야말로 철저한 멍청이로세

 

迷茫義路與仁居 

미망의로여인거

의로 인거(義路 仁居) 어디인지 갈피를 못 잡고서

求道彷徨弱冠初 

구도방황약관초

그 길을 찾으려고 약관 시절에 방황했지

妄要盡知天下事 

망요진지천하사

이 세상 모든 일을 모두다 알 양으로

遂思窮覽域中書 

수사궁람역중서

책이라고 생긴 것은 다 읽기로 생각했다네

淸時苦作傷弓鳥 

청시고작상궁조

태평시절 괴롭게도 활에 다친 새였더니

殘命仍成掛網魚 

잔명잉성괘망어

남은 목숨 이제는 그물에 걸린 고기로세

載有人知我否 

천재유인지아부

천년 두고 어느 누가 나를 알자 있을는지

立心非枉是才

입심비왕시재

 마음 잘못 먹은 게 아니라 재주 적어 그런거야

 

浮世論交問幾人 

부세론교문기인

뜬 세상에 사귈 사람 몇이나 된다던가

枉將朝市作情眞 

왕장조시작정진

조시(朝市)사람 잘못 알고 진정으로 대해서야

菊花影下詩作重 

국화영하시작중

국화 그림자 아래서는 시 잘한다는 이름 높고

楓樹壇中嘗會頻 

풍수단중상회빈

단풍나무 단 속에선 연회가 잦은 법이지

驥展好看蠅附尾 

기전호간승부미

천리마 꼬리에 붙은 파리는 좋게 보고

龍顚不禁蟻侵鱗 

용전부금의침린

개미가 기어올라도 용은 그냥 둬둔다네

紛綸物態成孤笑 

분륜물태성고소

세상의 온갖 꼴들 웃음이 절로 나와

一任東華暗軟塵 

일임동화암연진

동화(東華)의 먼지 속에다 묻어두고 말자꾸나

 

深知涉世難 

심지섭세난

강직하면 세상 살기 참으로 어려워

俳優叢集笑儒冠 

배우총집소유관

광대들이 때로 모여 유자라면 비웃어대지

都無熱肺爭微祿 

도무열폐쟁미록

열정이라곤 전혀 없이 적은 녹이나 다투고

未作卑顔事達官 

미작비안사달관

달관이나 꿈꾸면서 얼굴빛은 안 그런 체

紅杏園林留酒飮 

홍행원림유주음

살구나무 동산에서 술이나 늘 마시고

綠苔門卷抱書看

록태문권포서간

이끼 낀 집에 앉아 책을 들고 보기도 하지

呑舟不遇瀛溟水 

탄주부우영명수

배를 삼킬 큰 고기는 큰 바다 못 만나서

容易含鉤上竹竿 

용이함구상죽간

낚시 물고 낚시대에 매달리기 일쑤라네

 

金華玉署解塵綠 

금화옥서해진록

금화거나 옥서거나 세상 인연 모두 끊고

苕水鍾山興杳然 

초수종산흥묘연

아슴푸레 그리운 곳 소수 종산 뿐이라네

喚婦 張桑拓圃 

환부 장상탁포

아내 불러 뽕나무 심을 밭이나 더 넓히고

敎兒經略菜苽田 

교아경략채고전

채소밭은 자식 시켜 가꾸라고 하면 되지

天於淸福無比 

천어청복무비

하늘이 점지한 복은 인색하기 그지없어도

地設荒 待有年 

지설황 대유연

땅이 만든 벽촌에는 풍년이 없지 않아

萬事不如今日飮 

만사부여금일음

뭐니뭐니 해도 오늘 당장 마시는 게 제일이지

思明日事是癡癲 

사명일사시치전

내일 일을 생각하면 그는 벌써 바보라네

 

圄圄纍纍二十秋 

어어류류이십추

낙심하고 실망하고 이십년을 보내면서

夢中微獲覺來收 

몽중미획각래수

꿈속에서 얻은 것을 깨고 나서 거뒀다네

浮名四達已陳跡 

부명사달이진적

사방에 난 헛 명예 그도 모두 지나간 일

外物一空餘禿頭 

외물일공여독두

몸 말고는 있는 게 없고 남은 것은 대머리뿐

顧賀昔稱江左望 

고하석칭강좌망

옛날에는 강좌에서 고하를 쳤었는데

蔡陵今作 西羞 

채릉금작 서수

지금은 채릉이 농서의 추물이라오

眼前莫造崎嶇想 

안전막조기구상

기구한 생각일랑 지금 당장 하지 말자

隨意雲行又水流 

수의운행우수류

구름 따라 물 따라 가는 대로 가면 되지

 

不幸窮來莫送窮 

불행궁래막송궁

불행하게 온 빈궁을 쫓으려고 하지 말자

固窮眞正是豪雄 

고궁진정시호웅

곤궁을 이기는 것 그게 영웅 호걸이지

成灰孰顧漢安國 

성회숙고한안국

재가 된 한안국을 누가 다시 돌아보리

臨渡常逢呂馬童 

임도상봉여마동

강 건널 때 언제나 여마동을 만난다네

寵辱莊生春夢裡 

총욕장생춘몽리

사랑 받건 욕을 먹건 장주의 춘몽이요

賢愚杜老醉歌中 

현우두노취가중

현자거나 우자거나 술취한 두보 노래 속이야

海天昨夜雨 

해천작야우

어젯밤 바다 위에 부슬부슬 내린 비로

雜沓林花萬樹紅 

잡답림화만수홍

잡다한 나무숲에 온갖 꽃들 다 폈겠다

 

呂宋瓜 東復東 

여송과 동부동

여송 과애 풍속들이 동으로 동으로 밀려와서

被風吹轉似飛蓬 

피풍취전사비봉

바람 타고 날아오는 쑥대처럼 빠르다네

晩年湯沐長 縣 

만년탕목장 현

늘그막의 탕목읍이 장기현이 기란 말가

小劫滄桑短髮翁 

소겁창상단발옹

상전벽해 다 겪은 머리 짧은 영감이로세

滿案魚蝦非薄祿 

만안어하비박록

고기반찬 상에 가득 이 어디 박한 녹인가

園松竹也淸風 

원송죽야청풍

정원 두른 송죽은 맑은 바람 만들어낸다

破書千卷將何措 읽고 남은 천 권 책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파서천권장하조

如夷是汝功 

여이시여공

구덩이 속을 평지처럼 네 덕으로 살고 있단다

 

衆口銷金太母知 

중구소김태모지

입이 많으면 쇠도 녹는 것 할머니가 아는 일이지

叢拳下石莫驚疑 

총권하석막경의

뭇주먹 돌팔매를 이상하게 여길 것 없어

人方怯耳非憎我 

인방겁이비증아

사람들이 겁나서지 내가 미워하는 짓 아니며

天實爲之欲恨誰 

천실위지욕한수

하늘의 뜻인 것을 그 누구를 한할 것인가

北極星辰如昨日 

북극성진여작일

북극에 별들은 어제와 똑같은데

西江風浪竟何時 

서강풍랑경하시

서강의 풍랑은 어느 때나 멎을는지

窮途只 胸懷窄 

궁도지 흉회착

막다른 골목에서 이 마음 좁아질까봐

臨海柴門 立遲 

림해시문 립지

바다쪽 사립문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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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_ 다산 정약용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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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

_ 다산 정약용

(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老人一快事)'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의 시집 '송파수작(松坡酬酢)’에 수록되어 있다. 그의 나이 71세 때(75세에 서거)에 쓴 것으로서, 늙음에 따른 신체의 변화를 겸허하고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달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요 내용은..
1수에서 머리카락이 없어지니 감고 빗질하는 수고도 없고 백발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하며 민둥머리를 예찬하고,
2수에서는 치아가 다 빠져도 음식을 씹고 삼키는 데 지장이 없고 무엇보다 치통이 없어졌음을 즐거워 하고,
3수에서는 이 어두어지니 책 읽어야 할 부담이 없어지고 좋은 경치를 보고 즐기게 되며,
4수에서는 가 들리지 않아 세상의 시비 다툼을 듣지 않게 됨을 노래하고
5수에서는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써도 퇴고할 필요도 없고 남의 비평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고,
6수에서는 손님과 바둑을 두는 일을 꼽으며, 만만한 상대만을 골라 두며 편안히 즐김을 읊고 있다.

 

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들에 관한 시 여섯 수를 향산(香山, 白居易)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짓다

1.[머리카락이 빠져 손질할 일 없음]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髮鬜良獨喜  민둥머리가 참으로 유독 좋아라   
髮也本贅疣  머리털은 본디 군더더기이건만     
處置各殊軌  처치하는 데 각각 법도가 달라       
無文者皆辮  예문 없는 자들은 땋아 늘이고       
除累者多薙  귀찮게 여긴 자들은 깎아 버리는데  
髻丱計差長  상투와 총각이 조금 낫기는 하나    
弊端亦紛起  폐단이 또한 수다하게 생기었고     
巃嵷副編次  높다랗게 어지러이 머리를 꾸미어라 
雜沓笄總縰  쪽 짓고 비녀 꽂고 비단으로 싸도다 
網巾頭之厄  망건은 머리의 재액이거니와   
罟冠何觸訾  고관은 어이 그리 비난을 받는고 호원(胡元)의 관이다. 
今髮旣全無  이제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으니  
衆瘼將焉倚  모든 병폐가 어디에 의탁하리오 
旣無櫛沐勞  감고 빗질하는 수고로움이 없고 
亦免衰白恥  백발의 부끄러움 또한 면하여라  
光顱皓如瓠  빛나는 두개골은 박통같이 희고  
員蓋應方趾  둥근 두상이 모난 발에 어울리는데  
浩蕩北窓穴  널따란 북쪽 창 아래 누웠노라면   
松風洒腦髓  솔바람 불어라 머릿골이 시원하구려 
塵垢馬尾巾  말총으로 짠 때묻은 망건일랑  
摺疊委箱裏  꼭꼭 접어 상자 속에 버려 두나니  
平生拘曲人  평생을 풍습에 얽매이던 사람이     
乃今爲快士  이제야 쾌활한 선비 되었네그려   

[주-D001] 고관(罟冠) : 고고관(罟罟冠)의 준말로, 원(元) 나라 시대에 귀부인(貴婦人)들이 착용했다고 한다.

 

2.[치아 빠져 치통이 사라짐]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齒豁抑其次  치아 없는 게 또한 그 다음이라       
半落誠可苦  절반만 빠지면 참으로 고통스럽고  
全空乃得意  완전히 없어야 마음이 편안하네    
方其動搖時  한창 움직여 흔들릴 적에는           
酸痛劇芒刺  가시로 찌른 듯 매우 시고 아파서     
鍼灸意無靈  침 놓고 뜸질해도 끝내 효험은 없고
鑽鑿時出淚  쑤시다가는 때로 눈물이 났었는데   
如今百不憂  이제는 걱정거리 전혀 없어    
穩帖終宵睡  밤새도록 잠을 편안히 잔다네  
但去鯁與骨  다만 가시와 뼈만 제거하면은  
魚肉無攸忌  어육도 꺼릴 것 없이 잘 먹는데   
不唯呑細聶  잘게 썬 것만 삼킬 뿐 아니라   
兼能吸大胾  큰 고깃점도 능란히 삼키거니와   
兩齶久已堅  위아래 잇몸 이미 굳은 지 오래라   
頗能截柔膩  제법 고기를 부드럽게 끊을 수 있으니 
不以無齒故  그리하여 치아가 없는 것 때문에 
悄然絶所嗜  쓸쓸히 먹고픈 걸 끊지 않는다오  
山雷乃兩動  다만 턱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여 
嗑嗑差可愧  씹는 모양이 약간 부끄러울 뿐일세 
自今人病名  이제부터는 사람의 질병 이름이 
不滿四百四  사백 네 가지가 다 안 되리니     
快哉醫書中  유쾌하도다 의서 가운데에서   
句去齒痛字  치통이란 글자는 빼 버려야겠네  

 

3.[눈이 어두워지니 경치나 구경]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眼昏亦一快  눈 어두운 것 또한 그것이라    
不復訟禮疏  다시는 예경 주소 따질 것 없고  
不得硏易卦  다시는 주역 괘사 연구할 것도 없어
平生文字累  평생 동안 문자에 대한 거리낌을 
 一朝能脫灑  하루아침에 깨끗이 벗을 수 있네 
生憎汲古板  급고각 판본은 가증스럽기도 해라 
蠅頭刻纖芥  자디잔 글자를 티끌처럼 새겼는데
六卿郊外去  육경은 교외로 나갔거니와  
再閏何時掛  재윤은 어느 때에 걸 것인고  
嗟哉望經注  슬프다, 경문의 주석을 엿보건대  
後人依樣畫  후인들은 옛사람 본만 따라서  
唯知駁宋理  송 나라 이학 반박할 줄만 알고 
不恥承漢註  한대의 오류 답습함은 수치로 안 여기네  
如今霧中花  이젠 안개 속의 꽃처럼 눈이 흐리니
無煩雙決眥  눈초리를 번거롭게 할 것 없고
是非旣兩忘  옳고 그름도 이미 다 잊었는지라 
辨難隨亦懈  변난하는 일 또한 게을러졌으나
湖光與山色  강호의 풍광과 청산의 빛으로도 
亦足充眼界  또한 안계를 채우기에 충분하다오 

 

4.[귀가 어두워지니 시비할 일 없음]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耳聾又次之  귀먹은 것이 또 그 다음이로세     
世聲無好音  세상 소리는 좋은 소리가 없고      
大都皆是非  모두가 다 시비 다툼뿐이나니     
浮讚騰雲霄  헛 칭찬은 하늘에까지 추어올리고 
虛誣落汚池  헛 무함은 구렁텅이로 떨어뜨리며 
禮樂久已荒  예악은 황무한 지 이미 오래이어라 
儇薄嗟群兒  아, 약고 경박한 뭇 아이들이여   
譻譻螘侵蛟  개미가 떼지어 교룡을 침범하고     
喞喞鼷穿獅  생쥐가 사자를 밟아 뭉개도다       
不待纊塞耳  그러나 귀막이 솜을 달지 않고도   
霹靂聲漸微  천둥소리조차 점점 가늘게 들리고  
自餘皆寂寞  그 나머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黃落知風吹  낙엽을 보고야 바람이 분 줄을 아니 
蠅鳴與蚓叫  파리가 윙윙대거나 지렁이가 울어   
亂動誰復知  난동을 부린들 누가 다시 알리오     
兼能作家翁  겸하여 가장 노릇도 잘할 수 있고   
塞黙成大癡  귀먹고 말 못해 대치가 되었으니    
雖有磁石湯  비록 자석탕 같은 약이 있더라도    
浩笑一罵醫  크게 웃고 의원을 한번 꾸짖으리     

 

5.[나는 조선인, 조선시를 쓴다]

ㅡ한시의 형식에 다소 벗어나더라도 의미 전달에 초점을 둔다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縱筆寫狂詞  붓 가는 대로 미친 말을 마구 씀일세
競病不必拘  경병을 굳이 구애할 것이 없고
推敲不必遲  퇴고도 꼭 오래 할 것이 없어라
興到卽運意  흥이 나면 곧 이리저리 생각하고 
意到卽寫之생각이 이르면 곧 써내려 가되
我是朝鮮人  나는 바로 조선 사람인지라    
甘作朝鮮詩  조선시 짓기를 달게 여길 뿐일세
卿當用卿法  누구나 자기 법을 쓰는 것인데
迂哉議者誰  오활하다 비난할 자 그 누구리오 
區區格與律  그 구구한 시격이며 시율을  
遠人何得知  먼 데 사람이 어찌 알 수 있으랴
凌凌李攀龍  능가하기 좋아하는 이반룡은
嘲我爲東夷  우리를 동이라고 조롱했는데  
袁尤槌雪樓  원굉도는 오히려 설루를 쳤으나 
海內無異辭  천하에 아무도 다른 말이 없었네 
背有挾彈子  등 뒤에 활을 가진 자가 있거늘 
奚暇枯蟬窺  어느 겨를에 매미를 엿보리오 

我慕山石句  나는 산석의 시구를 사모하노니 
恐受女郞嗤  여랑의 비웃음을 받을까 염려로세

焉能飾悽黯  어찌 비통한 말을 꾸미기 위해
辛苦斷腸爲  고통스레 애를 끊일 수 있으랴
梨橘各殊味  배와 귤은 맛이 각각 다르나니 
嗜好唯其宜  오직 자신의 기호에 맞출 뿐이라오 

[주-D001] 경병(競病) : 험운(險韻)을 가지고 시를 짓는 것을 말함. 양(梁) 나라 조경종(曹景宗)이 개선(凱還)할 때에 양 무제(梁武帝)가 잔치를 베풀고 연구(聯句)를 시험했던바, 험운인 경병 두 자만 남았을 때 조경종이 최후로 참여하여 바로 지어 쓰기를, “떠날 땐 아녀들이 슬퍼하더니, 돌아오매 피리와 북 다투어 울리네. 길가는 사람에게 묻노니, 곽거병 그 사람과 과연 어떤고?[去時兒女悲 歸來笳鼓競 借問行路人 何如霍去病]” 한 데서 온 말이다.《南史 曹景宗傳》
[주-D002] 원굉도(袁宏道)는 …… 쳤으나 : 원굉도는 바로 명(明) 나라 때의 시인이고, 설루(雪樓)는 역시 명나라 때의 시인 이반룡(李攀龍)의 서실(書室) 이름인 백설루(白雪樓)의 준말이다. 원굉도는 본디 시문에 뛰어난 사람으로서 그의 형인 종도(宗道), 아우인 중도(中道)와 함께 모두 당대에 명성이 높았는데, 그는 특히 왕세정(往世貞)과 이반룡의 시체(詩體)를 매우 강력히 배격하고 홀로 일가를 이룸으로써 당대에 많은 학자들이 왕세정ㆍ이반룡을 배제하고 그를 따르면서 그의 시체를 공안체(公安體 : 공안은 원굉도의 자)라 지목했던 데서 온 말이다.《明史 卷二百八十八》
[주-D003] 등 …… 엿보리오 : 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음을 비유한 말. 장자(莊子)가 밤나무 숲에서 이상한 까치를 발견하고 그를 잡기 위해 활에 화살을 끼우고 있었는데, 이때 보니 사마귀[螳蜋]는 신이 나게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고 있었고, 그 뒤에서는 이상한 까치가 그 사마귀를 노리고 있었으며, 또 그 뒤에서는 장자 자신이 그 이상한 까치를 노리고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莊子 山木》[주-D004] 산석(山石)의 …… 염려로세 : 이 고사는 앞의 주 292)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6.[바둑은 강자와의 대국을 기피하고 약자와만 상대함]

老人一快事  늙은이의 한 가지 유쾌한 일은  
時與賓朋奕  때로 손들과 바둑 두는 일인데  
必求最拙手  반드시 가장 하수와 대국을 하고 
掉頭避强敵  강한 상대는 기필코 피하노니   
行其所無事  힘들지 않는 일을 하다 보면  
恢恢有餘力  얼마든지 남은 힘이 있기 때문일세  
業道求賢師  도를 닦자면 어진 스승을 구하고  
學算就巧曆  산을 배우자면 교력에게 가야 하며 
實事宜躋攀  실다운 일은 성취하는 게 타당하나
虛嬉貴閑適  헛놀이는 한적함을 귀히 여기거늘
何苦對勍寇  뭐하러 고통스레 강적을 마주하여
自取遭困阨  스스로 곤액을 당한단 말인가
一念射蜚鴻  한편으론 다른 생각을 가지어
猶然不敗績  오히려 상대에게 패하지 않고 
恒以逸待勞  항상 안일로써 괴로움을 상대하니 
怡然順無逆  순조롭기만 하고 거슬림이 없어라  
頗怪世上人  자못 괴이해라 세상 사람들은
志趣乃乖僻  그 지취가 어그러지고 편벽하여
於德悅卑諛  덕에 있어선 낮고 아첨함을 좋아해 
庸愚充上客  어리석은 자를 상객으로 앉히고
於戲不自量  놀이에 있어선 제 힘을 못 헤아려 
國手思對席  국수와 서로 대국하기를 생각하네 
聊以送炎曦  이것으로 소일이나 하면 그만이지  
精進竟何益  정진한들 끝내 어디에 유익하랴

[주-D001] 교력(巧曆) : 수술(數術) 또는 역법(曆法)에 정통한 사람을 가리킨다.

출처: https://www.dotomari.com/1442?category=235637 [허성원 변리사의 특허와 경영이야기]

 

<春日遊水鐘寺>

麗景明衣袖    고운 햇살 옷깃에 비추어 밝은데                     
輕陰汎遠田    옅은 그림자 먼 밭에 떠 있다.                                
舍舟欣散漫    배에서 내리니 자유로워 기분 좋고                  
入谷愛幽娟    골짜기에 들어서니 그윽하여 즐겁구나.            
巖卉施妝巧    바위 풀 교묘하게 단장하였고                         
山茸發怒專    산 버섯 둥글게 불끈 솟아나왔네.                      
漁村生逈渚    아스라한 강변에 어촌이 보이고                     
僧院寄危巓    위태로운 산머리엔 절간이 붙어있다.               
慮澹須輕物    생각이 맑아지니 사물이 경쾌하게 여겨지고     
身高未遠仙    몸이 높아지니 신선이 멀지 않구나.                 
惜無同志客    안타까움은 뜻 맞은 길손이 없어                     
惜無同志客    현묘한 도 찾는 토론 못함이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66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보충]

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늙은이의 한 가지 즐거움들에 관한 시 6首를 향산(香山, 白居易)의 시체(詩體)를 본받아 짓다.

곧, 향산(香山, 白居易)의 시체(詩體) 본받아 평이한 일상의 언어로 전달을 중시하는 시풍이라 할 수 있다.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평이창달(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을 말한다,

https://ko.wikipedia.org/wiki/%EB%B0%B1%EA%B1%B0%EC%9D%B4

 

백거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백거이(중국어: 白居易,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당나라 때 뤄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에서 태어났다. 대력(大曆

ko.wikipedia.org

백거이(중국어白居易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작품

백거이는 다작(多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존하는 문집은 71권, 작품은 총 3,800여 수로 당대(唐代) 시인 가운데 최고 분량을 자랑할 뿐 아니라 시의 내용도 다양하다. 젊은 나이에「신악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 정치의 실상을 비판하는 이른바 「풍유시(諷喩詩, 風諭詩)」를 많이 지었으나, 강주사마로 좌천되고 나서는 일상의 작은 기쁨을 주제로 한 「한적시(閑適詩)」의 제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밖에도 평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원진(元稹), 유우석(劉禹錫)과 지은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감상시도 유명하다. 백거이가 45세 때 지은 「비파행」은 그를 당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꼽히게 하였으며, 또, 현종(玄宗)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시 「장한가」도 유명하다.

풍유시를 주로 했던 시기, 한적시를 주로 지었던 시기 전체를 통틀어, '짧은 문장으로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平易暢達)' 것을 중시하는 시풍(詩風)은 변함이 없었다. 북송(北宋)의 석혜홍(釋惠洪)이 지은 《냉재시화(冷齎詩話)》 등에 보면, 백거이는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읽어주면서, 노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평이한 표현으로 바꿨다고 한다. 이렇게 지어진 그의 시는 사대부(士大夫) 계층뿐 아니라 기녀(妓女), 목동 같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애창되는 시가 되었다.

이 밖에 <백시 장경집> 50권에 그의 시 2,200수가 정리되었으며, 그의 시문집인 <백씨 문집>은 그의 모든 시를 정리한 시집이다.

장편서사시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kydong77.tistory.com/8149

 

長恨歌 1 -백낙천

[주]작품의 주석번호는 순서대로 1), 2), 3)....으로 볼 것. 長恨歌 -백거이 [白居易, 772~846]字 낙천(樂天). 장한가는 120구 840자. 구섭우편저, 한역당시삼백수, 안병렬역, 계명대출판부, 1991. 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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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dong77.tistory.com/8148

 

長恨歌 2 -백낙천

제3단:전란 후 양귀비를 잊지 못하는 현종의 슬픔과 아픔. 天旋地轉廻龍馭 천지가 돌고돌아 천자는 서울 장안으로 돌아오는데38) 到此躊躇不能去 마외역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차마 가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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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원컨대 비익조 되고35)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원컨대 연리지가 되자고 했소.36)

天長地久有時盡 하늘은 길고 땅은 오래어도 다할 날이 있으련만37)

此恨綿綿無絶期 이들의 恨은 잇고 이어져 끊어질 때 없으리라.38)

 

❙ 注 疏

1)比翼鳥(비익조):남쪽 나라에 사는 새. 암컷과 수컷이 날개가 붙어 있어 언제나 함께 난다고 하는 새. 금슬 좋은 부부에 비유함.

2)連理枝(연리지):나무 밑둥은 두 개의 나무이지만 가지 부분이 하나로 달라붙어 있는 나무. 부부의 애정이 깊은 것에 비유함.

3)天長地久(천장지구):老子에 나오는 말.

4)綿綿(면면):오래오래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상태.

이 마지막 두 구절에서 “장한가”라는 제목이 나왔다.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음과 동시에 불행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랑의 불행은 모든 사랑의 행복을 사라지게 하고 한스러움만 남긴다. 그래서 “천장지구”지만 “차한면면”하여 “다함없는 한스러운 노래” 곧 “장한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장안의 기녀들은 “저는 백 학사의 장한가 전부를 암송하고 있답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과 같은 수준의 화대로는 안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시인 자신이 그의 친구인 원진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다. 즉, 이 노래는 발표되자 즉시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었던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H2gNrnzY2k 

 

 

kydong77.tistory.com/8147

 

늙은 창부의 노래, 비파에 붙여 -백낙천

琵琶行 幷序 元和十年, 予左遷九江郡司馬. 明年秋, 送客湓浦口.聞舟中夜彈琵琶者, 聽其音錚錚然有京都聲.問其人, 本長安倡女.嘗學琵琶於穆曹二善才, 年長色衰, 委身爲賈人婦. 遂命酒, 使快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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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단 동병상련의 눈물 -화려한 날들은 가고

感我此言良久立 나의 말에 감격하여 한 동안 서 있더니

卻坐促絃絃轉急 물러앉아 줄 당기니 곡조는 점점 급해져

凄凄不似向前聲 슬프기 그지 없어 앞의 곡과 다르니

滿座重聞皆掩泣 듣는 모든 사람 소리 죽여 흐느끼네

 

座中泣下誰最多 그 중 흘린 눈물을 누가 가장 많았는고?

江州司馬靑衫濕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 흥건히 젖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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