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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4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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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4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

1 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2 좌소산인(左蘇山人)에게 주다

3 해오라비 한 마리 도중에 잠시 개다道中乍晴라고도 되어 있다.

4 농삿집

5 산해도를 열람한 노래搜山海圖歌

6 해인사(海印寺)

7 갓을 노래한 연구(聯句)

8 담원 팔영(澹園八詠) 구체적인 사실은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9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

10 새벽길

11 극한(極寒)

12 산중에서 동짓날 이생(李生)에게 써 보이다

13 산행(山行) ‘산전갈이山耕로 된 데도 있다.

14 이거(移居)

15 노군교(勞軍橋)

16 필운대(弼雲臺)의 꽃구경

17 강가에 살며

18 압록강을 건너 용만성(龍灣城)을 돌아보다

19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며

20 통원보(通遠堡)에서 비에 막히다

21 요동(遼東) 벌판을 새벽에 지나며

22 동관(東關)에서 유숙하다

23 원문 빠짐 절구 한 수를 읊다

24 원문 빠짐  말 위에서 구호(口號)하다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25 필운대(弼雲臺)에서 살구꽃 구경하며

26 절구 네 수 제목 없음. 연경에 들어가는 사람을 송별한 때이거나 연경에 가면서 지은 잡영(雜咏)인 듯하다.

27 강가에 살며 멋대로 읊다

28 연암(燕岩)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다

29 홍태화(洪太和)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시에 차운하다

30 재실(齋室)에서 제릉 영(齊陵令)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31 술을 조금 마시다

32 구일날 맹원(孟園)에 올라 두목(杜牧)의 시에 차운하다

 

 

 

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길손들 한밤중에 서로 주고받는 말이 / 行旅夜半相呌譍

먼 닭이 울었는가 아직 울지 않을 텐데 / 遠鷄其鳴鳴未應

먼저 우는 먼 닭은 그게 바로 어드메냐 / 遠鷄先鳴是何處

의중에만 있는 거라 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 只在意中微如蠅

마을 속의 개 한 마리 짖다 도로 고요하니 / 邨裏一犬吠仍靜

고요 극해 찬기 일어 마음이 으시으시 / 靜極寒生心兢兢

이때 마침 소리 있어 두 귀가 울리는 듯 / 是時有聲若耳鳴

자세히 듣자니 집닭 울음 뒤따르네 / 纔欲審聽簷鷄仍

예서 가면 총석정이 십 리밖에 되잖으니 / 此去叢石只十里

동해에 곧바로 다다르면 해돋이를 보겠구먼 / 正臨滄溟觀日昇

하늘과 맞닿은 물만 넘실넘실 해 뜰 조짐 전혀 없고 / 天水澒洞無兆朕

거센 파도 언덕 치니 벼락이 일어나네 / 洪濤打岸霹靂興

노상 의심쩍은 건 폭풍이 바다를 뒤집어엎고 / 常疑黑風倒海來

뿌리째 산을 뽑아 뭇 바위 무너질까 / 連根拔山萬石崩

고래 곤어 다투다가 뭍으로 나올 법도 하이 / 無怪鯨鯤鬪出陸

뜻밖에 회오리 바람 일어 나래 치는 붕새를 만날지도 / 不虞海運値摶鵬

다만 걱정되는 건 이 밤이 오래도록 아니 새어 / 但愁此夜久未曙

이제부터 혼돈을 뉘 다시 징벌할지 / 從今混沌誰復徵

아마도 겨울 신이 제 힘을 과시하여 / 無乃玄冥劇用武

구유(九幽)를 일찍 닫고 우연(虞淵)을 얼게 하지 않았나 / 九幽早閉虞淵氷

아마도 하늘 축이 오래도록 돌고 돌다 / 恐是乾軸旋斡久

서북으로 기울어져 묶은 줄이 끊어진 게지 / 遂傾西北隳環絙

세 발 달린 까마귀 날기로는 천하제일인데 / 三足之烏太迅飛

누가 주술 부려 발 하나를 노끈으로 매어 놓았나 / 誰呪一足繫之繩

해야(海若)의 옷과 띠엔 물방울이 뚝뚝 듣고 / 海若衣帶玄滴滴

수비(水妃)의 쪽 찐 머린 추위 서려 싸늘하네 / 水妃鬢鬟寒凌凌

큰 고기 활개 치며 준마같이 내달리니 / 巨魚放蕩行如馬

붉고 푸른 지느러미 어찌 그리 터부룩한고 / 紅鬐翠鬣何鬅鬙

개벽 이전 어둔 누리 본 사람이 누구더냐 / 天造草昧誰參看

참다 못해 외쳐 대며 등이라도 켜려 드네 / 大呌發狂欲點燈

혜성이 꼬리를 끌고 화성(火星)이 광망(光芒)을 뻗치네 / 欃槍擁彗火垂角

낙엽 진 나무의 부엉이 울음 더욱더 밉상일레 / 禿樹啼鶹尤可憎

조금 뒤에 수면에 작은 부스럼 생긴 듯 / 斯須水面若小癤

용의 발톱 잘못 긁혀 독기로 벌겋더니 / 誤觸龍爪毒可

그 빛이 점점 커져 만리를 비추누나 / 其色漸大通萬里

물결 위에 번진 빛 꿩의 가슴 비슷하이 / 波上邃暈如雉膺

아득아득 이 천지에 한계 처음 생겼으니 / 天地茫茫始有界

붉은 붓 한 번 그어 두 층이 되었구려 / 以朱劃一爲二層

매삽이라 신성이라 염색집이 하도 커서 / 梅澁新惺大染局

몇 천 필 색을 들여 온갖 비단 으리으리 / 千純濕色縠與綾

산호나무 누가 베어 참숯을 만들었나 / 作炭誰伐珊瑚樹

부상나무 뒤이으니 더욱더 이글이글 / 繼以扶桑益熾蒸

염제는 불을 불어 입이 응당 비틀리고 / 炎帝呵噓口應喎

축융은 부채 휘둘러 바른팔이 지쳤구려 / 祝融揮扇疲右肱

새우 수염 가장 길어 그슬리기 제일 쉽고 / 鰕鬚最長最易爇

굴껍질은 굳을수록 더욱더 절로 익네 / 蠣房逾固逾自

한 치 구름 조각 안개 동으로 다 쓸려 가서 / 寸雲片霧盡東輳

온갖 상서 바치려고 제 힘을 다하누나 / 呈祥獻瑞各效能

자신궁(紫宸宮)엔 조회 전에 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 紫宸未朝方委裘

병풍만 펼쳐 논 채 용상은 비어 있네 / 陳扆設黼仍虛凭

초승달은 샛별 앞에 오히려 밀려나서 / 纖月猶賓太白前

먼저 예를 행하겠다고 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 頗能爭長薛與滕

붉은 기운 차츰 묽어 오색으로 나뉘더니 / 赤氣漸淡方五色

먼 물결 머리부터 절로 먼저 맑아지네 / 遠處波頭先自澄

바다 위 온갖 괴물 어디론지 숨어 버리고 / 海上百怪皆遁藏

희화만이 홀로 남아 수레 장차 타려 하네 / 獨留羲和將驂乘

육만이라 사천 년을 둥글둥글 내려왔으니 / 圓來六萬四千年

오늘 아침 동그라미 고쳐 어쩌면 네모가 될라 / 今朝改規或四楞

만길의 깊은 바다에서 어느 누가 길어 올렸을까 / 萬丈海深誰汲引

이제서야 믿겠노라 하늘도 오를 계단이 있음을 / 始信天有階可陞

등림에 가을 열매 한 덩이가 붉었고 / 鄧林秋實丹一顆

동공이 채색 공을 차서 반만 올렸구려 / 東公綵毬蹙半登

과보는 헐레벌떡 뒤따라오고 있고 / 夸父殿來喘不定

육룡은 앞서 끌며 교만스레 자랑하네 / 六龍前道頗誇矜

하늘가 어둑해져 갑자기 눈살 찌푸리듯 하늘가 어두워지다가 / 天際黯慘忽顰蹙

어영차 해 수레 미니 기운이 솟아난 듯 / 努力推轂氣欲增

바퀴처럼 둥글잖고 독처럼 길쭉한데 / 圓未如輪長如瓮

뜰락 말락 하니 철썩철썩 부딪치는 소리 들리는 듯 / 出沒若聞聲砯砯

만인이 어제처럼 모두 바라보는데 / 萬物咸覩如昨日

어느 뉘 두 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올려놨노 / 有誰雙擎一躍騰

 

 

[C-001]총석정(叢石亭)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朴宗采)가 지은 과정록(過庭錄)에 의하면, 영조 41(1765) 연암은 벗 유언호(兪彦鎬) · 신광온(申光蘊)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할 때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를 보고 판서 홍상한(洪象漢)이 칭찬해 마지않았다고 하며, 연암 스스로도 득의작으로 자부하여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 수록해 놓았다. 윤광심(尹光心) 병세집(幷世集)에는 총석관일(叢石觀日)이라는 제하에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의 차이가 있으며 12 84자가 추가되어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시의 초고로 짐작된다.

[D-001]파리 소리처럼 희미하네 : 시경(詩經) 제풍(齊風) 계명(鷄鳴) 닭이 우는 것이 아니라, 파리 소리로다.匪鷄則鳴 蒼蠅之聲라고 하였다. 현비(賢妃)가 임금이 조회(朝會)에 늦지 않게 깨우려고 조바심하다가 파리 소리를 닭 울음으로 잘못 들었다는 뜻이다.

[D-002]두 귀가 울리는 듯 : 이명증(耳鳴症)으로 헛소리를 들은 듯하다는 뜻이다.

[D-003]곤어(鯤魚) : 북해(北海)에 살며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는 물고기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04]나래 치는 붕새 : 제해(齊諧)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이동할 때 물보라가 삼천 리나 일어나며 나래로 회오리바람을 쳐서 오르기 구만 리나 된다.摶扶搖而上者九萬里고 하였다. 장자 소요유에 나온다.

[D-005]이제부터 혼돈을 : 혼돈은 천지개벽 초에 만물이 아직 구별되지 않은 어두운 상태를 가리킨다. 이 혼돈은 중국 고대 문헌에서 주로 부정적인 존재로 의인화(擬人化)되었다. 장자 응제왕(應帝王)에서는 눈, , , 귓구멍, 콧구멍이 없는 중앙의 제왕으로 소개되어 있다. 삼황(三皇) 이전 천지의 시초의 제왕이라고도 한다. 또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제홍(帝鴻) 즉 황제(黃帝)의 못난 자식으로서 그 후손이 요순(堯舜) 시대 때 악명 높은 사흉(四凶)의 하나였다고 한다. 신이경(神異經)에는 곤륜산(崑崙山) 서쪽에 사는 악수(惡獸)라고도 하였다. 원문의 從今 병세집에는 從玆로 되어 있다.

[D-006]구유(九幽) : 땅속의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킨다.

[D-007]우연(虞淵) : 전설상 해가 지는 곳이다.

[D-008]하늘 축 : 원문의  병세집 등 이본에는 로 되어 있다. ‘건뉴(乾紐)’는 천도(天道)란 뜻이다.

[D-009]서북으로 기울어져 :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이 서북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일월성신(日月星辰)이 그쪽으로 가고 있다고 믿었다. 列子 湯問》 《사기(史記) 127 일자열전(日者列傳)에도 하늘은 서북쪽이 부족하니 별들이 서북으로 이동한다.天不足西北 星辰西北移고 하였다.

[D-010]묶은 …… 게지 :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1]세 발 달린 까마귀 : 전설상 해 속에 산다는 새이다.

[D-012]주술 :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3]해야(海若) : 전설상의 해신(海神)이다.

[D-014]수비(水妃) : 전설상 수중의 신녀(神女)이다.

[D-015]쪽 찐 머린鬢鬟 : 양쪽 귀밑머리를 잡아당겨 만든 환상(環狀)의 쪽 찐 머리를 말한다.

[D-016]혜성이 꼬리를 끌고 : 원문의 참창(欃槍)은 혜성의 이름이고, 혜성은 비를 들어 쓸어 버린 듯이 꼬리를 길게 끌기 때문에 소추성(掃帚星)이라고도 한다.

[D-017]붉은 …… 그어 : 원문의 以朱劃一 병세집에는 殷紅深碧으로 되어 있다.

[D-018]매삽(梅澁)이라 신성(新惺)이라 : ‘매삽 신성은 그 의미가 불확실하나 염색집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원문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9]부상(扶桑)나무 : 전설상 해 뜨는 곳에 자란다는 나무이다.

[D-020]염제(炎帝) : 전설상 불을 주관하는 신이다.

[D-021]축융(祝融) : 이 또한 불을 주관하는 신이다.

[D-022]온갖 …… 다하누나 : 원문의 獻瑞各效能 병세집에는 效瑞難具稱으로 되어 있으며, 이어서 成曇變霱爭來王 縓緣絳領金線縢’ 2행이 추가되어 있다.

[D-023]자신궁(紫宸宮) : 당송(唐宋) 시대에 천자가 신하나 외국의 사신을 조회하던 정전(正殿)이다.

[D-024]바야흐로 갖옷을 모셔놓고 : 임금이 죽고 새 임금이 아직 조정에 나와 앉기 전에는 선왕의 유의(遺衣)인 갖옷을 모셔놓고 조회한다.

[D-025]등설(滕薛)처럼 제법 맞서누나 : () 나라 은공(隱公) 11년 봄에 등후(滕侯)와 설후(薛侯)가 노 나라에 조현(朝見)을 왔다가 예를 행하는 데 있어 그 선후를 다투자 은공이 설후를 설득하여 등후가 먼저 예를 행하도록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11

[D-026]먼 물결 머리부터 : 원문의  병세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7]바다 위 : 원문은 海上인데, 병세집에는 俄者로 되어 있다.

[D-028]희화(羲和) : 전설상 해를 태운 수레를 모는 신이다.

[D-029]수레 …… 하네 : 병세집에는 이 다음에 有物如盖來覆之 其下蜿蜒馳神螣’ 2행이 추가되어 있다.

[D-030]육만이라 사천 년 : 소옹(邵雍)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에 의하면, 우주가 개시해서 소멸할 때까지를 1()이라 하는데, 1원은 12(), 1회는 30()으로, 1운은 12(), 1세는 30()으로 나뉜다. 따라서 1원은 12 9600년이 된다. 우주의 역사가 6()가 되면 6 4800년이 된다.

[D-031]하늘도 …… 있음을 : 논어(論語) 자장(子張), 진자금(陳子禽)이 자공(子貢)에게 공자라도 그대만 못하겠다고 칭찬하자, 자공은 선생님에게 미칠 수 없음은 하늘을 계단을 밟아 오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라고 반박하였다.

[D-032]등림(鄧林) : 전설상의 숲 이름이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북경(海外北經), 과보(夸父)가 해를 따라 달리다가 목이 말라 죽었는데 그때 버린 지팡이가 숲을 이뤄 등림이 되었다고 한다.

[D-033]동공(東公) : 전설상의 해를 맡은 신이다.

[D-034]육룡(六龍)은 앞서 끌며 : 전설에서 해의 신이 수레를 타면 여섯 용이 수레를 끌고 희화가 이를 몰고 다닌다고 한다. 원문의  열하일기 일신수필(馹迅隨筆) 7 20일 조에는 로 되어 있다.

[D-035]바퀴처럼 둥글잖고 : 원문의  병세집 등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36]뜰락 ……  : 병세집에는 이 구절 다음부터 끝까지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金銀震蕩色未定 欲掛冥靈枝不勝 慌惚直欲雙手擎 轉眄之間一躍騰 快如盡曉難解書 喜極新逢欲招朋 爽如翻惺作噩夢 喉中未聲聲忽能 離海一尺無不照 儘覺生平天宇弘으로 되어 있다.

[D-037]만인이 …… 바라보는데 : 주역(周易) 건괘(乾卦) 구오(九五)의 효사(爻辭)에 대한 공자의 풀이 중에 성인이 나타나시니 만물이 바라본다.聖人作而萬物覩는 말이 있다. 주자(朱子)의 본의(本義)에 의하면 이때 만물(萬物)은 만인(萬人)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해를 성인에 비겼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좌소산인(左蘇山人)에게 주다

 

 

이 세상 사람들을 내 살펴보니 / 我見世之人

남의 문장을 기리는 자는 / 譽人文章者

()은 꼭 양한을 본떴다 하고 / 文必擬兩漢

시는 꼭 성당을 본떴다 하네 / 詩則盛唐也

비슷하다는 그 말 벌써 참이 아니라는 뜻 / 曰似已非眞

한당(漢唐)이 어찌 또 있을 리 있소 / 漢唐豈有且

우리나라 습속은 옛 투식 즐겨 / 東俗喜例套

당연하게 여기네 촌스러운 그 말을 / 無怪其言野

듣는 자는 도무지 깨닫지 못해 / 聽者都不覺

얼굴이 붉어지는 사람이 없군 / 無人顔發赭

못난 놈은 기쁨이 뺨에 솟아서 / 騃骨喜湧頰

입을 벌려 웃어 대며 침을 흘리고 / 涎垂噱而哆

약은 놈은 갑자기 겸양을 발휘하고 / 黠皮乍撝謙

삼십 리나 피하여 달아나는 척 / 逡巡若避舍

허한 놈은 두 눈이 놀라 휘둥글 / 餒髥驚目瞠

더웁지 않은데도 땀 쏟아지고 / 不熱汗如瀉

약골은 굉장히도 부러워하여 / 懦肉健慕羨

이름만 들어도 향기 나는 듯 / 聞名若蘅若

심술꾼은 공공연히 노기를 띠어 / 忮肚公然怒

주먹 불끈 후려치길 생각한다오 / 輒思奮拳打

내 또한 이와 같은 기림을 듣고 / 我亦聞此譽

갓 들을 땐 낯가죽이 에이는 듯싶더니 / 初聞面欲剮

두 번째 듣고 나니 도리어 포복절도 / 再聞還絶倒

여러 날 허리 무릎 시큰하였다네 / 數日酸腰髁

이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욱 흥미 없어 / 盛傳益無味

밀조각을 씹은 듯이 도리어 맛이 없더군 / 還似蠟札飷

그대로 베껴서는 진정 안 될 말 / 因冒誠不可

오래 가면 마치도 실성하여 바보가 된 듯하지 / 久若病風傻

심술쟁이를 돌아보며 얘기하노니 / 回語忮克兒

잔재주 따윌랑 우선 버리게 / 伎倆且姑舍

조용히 내가 한 말 들어나 보면 / 靜聽我所言

네 마음 응당 너그러워질 터 / 爾腹應坦奲

흉내쯤이야 시새울 게 무엇이 있다고 / 摸擬安足妒

스스로 야료를 부리다니 무안스럽지 않나 / 不見羞自惹

걸음을 배우려다가 되려 기어서 오고 / 學步還匍匐

찌푸림을 본받으면 단지 추할 뿐 / 效嚬徒醜䰩

이제 알리라 그려 놓은 계수나무가 / 始知畵桂樹

생생한 오동만 못하다는 걸 / 不如生梧檟

손뼉 치며 초() 나라를 놀라게 해도 / 抵掌驚楚國

마침내는 의관(衣冠)을 빌린 것이며 / 乃是衣冠假

푸르고 푸른 언덕의 보리를 노래한 것은 / 靑靑陵陂麥

입속의 구슬을 몰래 빼내기 위함이라 / 口珠暗批撦

제 속이 속된 줄은 생각 안 하고 / 不思膓肚俗

아름다운 붓 벼루만 애써 찾거든 / 强覓筆硯雅

육경의 글자로만 점철하는 건 / 點竄六經字

비하자면 사당에 의탁한 쥐와 꼭 같지 / 譬如鼠依社

훈고(訓詁)의 어휘를 주워 모으면 / 掇拾訓詁語

못난 선비들은 입이 다 벙어리 되네 / 陋儒口盡啞

태상이 제물을 벌여 놓으니 / 太常列飣餖

절인 생선과 젓갈 뒤섞여 썩은 냄새 진동하고 / 臭餒雜鮑鮓

여름철 농사꾼이 허술한 제 차림 잊고 / 夏畦忘疎略

창졸간에 갓끈과 띠쇠로 겉치장한 셈이지 / 倉卒飾緌銙

눈앞 일에 참된 흥취 들어 있는데 / 卽事有眞趣

하필이면 먼 옛것을 취해야 하나 / 何必遠古抯

한당은 지금 세상 아닐 뿐더러 / 漢唐非今世

우리 민요 중국과 다르고말고 / 風謠異諸夏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 班馬若再起

반고나 사마천을 결단코 모방 아니 할걸 / 決不學班馬

새 글자는 창조하기 어렵더라도 / 新字雖難刱

내 생각은 마땅히 다 써야 할 텐데 / 我臆宜盡寫

어쩌길래 옛 법에만 구속이 되어 / 奈何拘古法

허겁지겁하기를 붙잡고 매달린 듯 하나 / 刦刦類係把

지금 때가 천근(淺近)하다 이르지 마소 / 莫謂今時近

천년 뒤에 비한다면 당연히 고귀하리 / 應高千載下

손자(孫子) 오자(吳子)의 병서 사람마다 읽긴 하지만 / 孫吳人皆讀

배수진을 아는 자는 극히 드물지 / 背水知者寡

남들이 사 두지 않는 물건을 서둘러 산 이는 / 趣人所不居

유독 저 여불위(呂不韋)란 큰 장사치뿐이었네 / 獨有陽翟賈

이 몸은 음()이 허해 병이 깊어져 / 而我病陰虛

사 년째 다리가 쑤시고 아팠다오 / 四年疼跗踝

적막한 물가에서 그대를 만나니 / 逢君寂寞濱

가을철 쓸쓸한 규방의 미인마냥 얌전도 하이 / 靜若秋閨姹

웃음을 자아내는 광형(匡衡)이 방금 온 듯 / 解頤匡鼎來

몇 밤이나 등잔 심지 돋우었던가 / 幾夜剪燈灺

글 평론 약속한 듯 서로 꼭 들어맞으니 / 論文若執契

두 눈을 빛내며 술잔을 잡네 / 雙眸炯把斝

하루아침에 막힌 가슴 쑥 내려가니 / 一朝利膈壅

입에 가득 매운 생강 씹은 맛일레 / 滿口嚼薑葰

평생에 숨겨 둔 두어 줌 눈물 / 平生數掬淚

싸 두었다 뿌리노라 가을 하늘에 / 裹向秋天灑

목수장이 나무 깎길 맡았지마는 / 梓人雖司斲

대장장이를 배척한 일이 없었네 / 未曾斥鐵冶

미장이는 제 스스로 쇠흙손 잡고 / 圬者自操鏝

기와 이는 놈 제 스스로 기와 만드네 / 蓋匠自治瓦

그들이 방법은 비록 같지 않지만 / 彼雖不同道

목적은 큰 집을 짓자는 거야 / 所期成大厦

저만 옳다 하면 남이 붙지를 않고 / 悻悻人不附

지나치게 깔끔을 떨면 복 못 받느니 / 潔潔難受嘏

그대는 아무쪼록 현빈을 지키고 / 願君守玄牝

아무쪼록 기저를 장복(長服)하게나 / 願君服氣姐

부디 한창 젊을 적에 노력한다면 / 願君努壯年

전문이 동쪽으로 활짝 열리리 / 專門正東閜

 

 

[C-001]좌소산인(左蘇山人) : 서유본(徐有本 : 1762~1822)의 호이다. 서유본은 그 아우 서유구(徐有榘)와 함께 연암을 종유(從遊)하고 문학적으로 큰 감화를 받았다.

[D-001]() …… 하네 : () 나라 왕세정(王世貞) 문은 반드시 서한을 본뜨고 시는 반드시 성당을 본떠야 한다.文必西漢 詩必盛唐고 제창하여 의고주의(擬古主義) 문풍이 성행하게 되었다.

[D-002]향기 나는 듯 : 원문의 형약(蘅若)은 향초(香草)인 두형(杜蘅)과 두약(杜若)을 말한다. 형약(蘅若) ()’은 이때 상성(上聲) 마운(馬韻)으로 압운하였으므로  의 반절(反切) 로 읽어야 한다.

[D-003]걸음을 …… 오고 : 수릉(壽陵) 지방의 젊은이가 당시 조() 나라의 서울인 한단(邯鄲)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세련된 걸음걸이를 배우려다가 이를 제대로 익히지도 못하고 예전의 걸음걸이마저 잃어버린 채 기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莊子 秋水

[D-004]찌푸림을 ……  : 중국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는 서시(西施)가 가슴앓이로 인상을 찌푸리고 다녔는데 그 모습마저 아름답게 보이자 이웃의 추녀가 그 모습을 흉내 내었으나 도리어 더 추해 보였다고 한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莊子 天運

[D-005]손뼉 …… 것이며 : () 나라 악공(樂工) 우맹(優孟)이 죽은 초 나라 재상 손숙오(孫叔敖)의 의관을 입고 장왕(莊王) 앞에 나타나 손뼉을 치면서 이야기하자 장왕이 깜짝 놀라면서 손숙오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으로 믿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126 滑稽列傳

[D-006]푸르고 …… 위함이라 : 장자(莊子)가 유자(儒者)를 도굴꾼에 비유해 풍자한 글에서, 유자가 시체의 입에 물고 있는 구슬을 보고 푸르고 푸른 보리, 언덕 위에 자랐네. 살아 생전 베풀지 않더니만, 죽어서 구슬 문들 무엇하리오.靑靑之麥 生于陵陂 生不布施 死何含珠爲라는 시를 읊조리며 입을 벌려 구슬을 끄집어냈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즉 시문(詩文)을 지을 때 남의 훌륭한 구절을 훔쳐 내어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말한 것이다. 莊子 外物

[D-007]육경(六經) …… 같지 : 사람들이 범할 수 없는 사당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쥐처럼, 사람들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성스러운 경전(經典)에 의탁하여 시문을 짓는 것을 말한다. 晏子春秋 問上九

[D-008]태상(太常) : 제사와 예악을 담당하는 관리이다.

[D-009]지금 …… 고귀하리 : 근대 이전 동양에서는 복고적인 역사관에 따라 문학에서도 옛것일수록 고귀하게 여기고 요즘 것일수록 천시하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경향이 심했다. 연암은, 지금 것도 천년이 지나면 옛것이 되어 고귀하게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하여 복고적인 사상을 비판한 것이다.

[D-010]배수진(背水陣) …… 드물지 : () 나라 장수 한신(韓信) 사지(死地)에 빠진 뒤에야 살 수 있고, 죽을 자리에 놓인 뒤라야 산다.”는 병법을 활용하여, 오합지졸들을 모아 배수진을 침으로써 조() 나라 군대를 대파할 수 있었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D-011]여불위(呂不韋) : 전국 시대 말기 양적현(陽翟縣)의 대상인이다. () 나라에 볼모로 와 천대받고 있던 진() 나라 공자 자초(子楚)를 만나자 이를 사 둘 만한 기화奇貨可居라 여기고는, 계책을 써서 진 나라의 왕이 되게 함으로써 그의 아들인 진 시황에 이르기까지 진 나라의 승상을 지낼 수 있었다. 史記 卷85 呂不韋列傳

[D-012]이 몸은 …… 깊어져 : 한의학에서 음()에 속하는 정액이나 진액(津液)이 부족해지는 병을 음허(陰虛)라고 한다. 음허가 되면 몸에 열이 나고 식은땀과 천식이 생긴다고 한다.

[D-013]웃음을 ……  : () 나라 광형(匡衡) 시경에 대한 풀이를 잘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시경에 대해 풀이할 사람이 없다 싶으면 광형이 바로 오고, 광형이 시경을 풀이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웃음을 터뜨린다.無說詩 匡鼎來 匡說詩 解人頤 하였다. 漢書 卷81 匡張孔馬傳

[D-014]현빈(玄牝) : 노자(老子) 6장에 곡신은 죽지 않으니 현빈이라 이른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이다.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天地之根라고 하였다. 현빈은 현묘한 모체(母體)란 뜻으로, 양생(養生)의 도()를 가리킨다.

[D-015]기저(氣姐) : 기저의 저()는 모()와 같은 뜻으로 說文 女部, ‘ 의 반절인 로 읽어야 한다. 기저는 기모(氣母), 즉 우주의 원기(元氣)를 말한다. 장자 대종사(大宗師), 복희씨가 도를 얻어 기모를 배합했다고 한다. 복기(服氣)는 도가(道家)의 양생술인 호흡법을 말한다.

[D-016]전문(專門) …… 열리리 : 이백(李白)의 고시(古詩) 59수 중 제 3 수에서 진 시황(秦始皇)이 천하를 제압한 사실을 노래하면서, “함곡관(函谷關)이 동쪽으로 활짝 열렸네.函谷正東開라고 하였다. 진 시황이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침략을 두려워할 일이 없어, 그동안 굳게 닫아걸었던 동쪽 관문(關門) 함곡관을 활짝 열어 두었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좌소산인 서유본이 문장 공부에 전념한다면 장차 천하를 제압하는 명가(名家)가 되리라는 격려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해오라비 한 마리 도중에 잠시 개다道中乍晴라고도 되어 있다.

 

 

한 마리 해오라비 버들 등걸 밟고 섰고 / 一鷺踏柳根

또 한 마리 물 가운데 우뚝 서 있네 / 一鷺立水中

산허리는 짙푸르고 하늘은 시커먼데 / 山腹深靑天黑色

무수한 해오라비 공중을 빙빙 돌며 나네 / 無數白鷺飛翻空

선머슴 소를 타고 시냇물 거슬러 건너는데 / 頑童騎牛亂溪水

시내 너머로 각시 무지개 날아오르네 / 隔溪飛上美人虹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농삿집

 

 

늙은 첨지 참새 쫓느라 남녘 둑에 앉았는데 / 翁老守雀坐南陂

개꼬리 같은 조 이삭에 노란 참새 매달렸네 / 粟拖狗尾黃雀垂

큰아들 작은아들 모두 다 들에 나가니 / 長男中男皆出田

농삿집 진종일 낮에도 문 닫겼네 / 田家盡日晝掩扉

솔개가 병아리를 채려다가 빗나가니 / 鳶蹴鷄兒攫不得

호박꽃 울타리에 뭇 닭이 꼬꼬댁거리네 / 群鷄亂啼匏花籬

젊은 아낙 바구니 이고 시내를 건너려다 주춤주춤 / 小婦戴棬疑渡溪

꾀복쟁이와 누렁이가 줄지어 뒤따르네 / 赤子黃犬相追隨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산해도를 열람한 노래搜山海圖歌

 

 

 

여름날에 백씨(伯氏) 및 종제(從弟) 이중(履仲), 덕보(德保), 무관(懋官)과 약속하여 현원(玄園)에 노니는데, 각기 하나씩 감상품을 내놓고 비교해 보기로 했다. 이 두루마리 그림은 길이가 거의 활 한 마당 지점에 달하게 되므로 원중(園中)에 벌여 놓고 그림을 따라 모두 걸음을 옮겨가면서 감상했다.

 

() 기르는 복부(服不) 소임 어느 뉘 맡았는고 / 豢龍服不誰其司

동서남북 넓은 세상 기괴한 것 하고하네 / 四荒之野多詭奇

북두성 빗기어라 늙은 여우 절을 하고 / 北斗星斜拜老狐

화표주 푯말 아랜 누런 살쾡이 울음 우네 / 華表柱下啼黃貍

남산의 큰 원숭이 고운 첩을 훔쳐 내어 / 南山大玃盜媚妾

바위틈에 함께 살며 억지로 사통하네 / 與處岩穴强之私

산도깨비 대낮에 산을 떠나 내려와서 / 山魈白日下山來

사람 사는 부엌 빌려 방게를 구워 먹네 / 借人竈突燒蟛蜞

울루를 야유하고 백익과 숨바꼭질 / 揶揄鬱累迷伯益

늪이라 수풀에서 제멋대로 실컷 노네 / 菹澤叢林恣飽嬉

관운장이 모습 바꿔 신병을 거느리니 / 關王變相領神兵

하얀 낯에 수염은 한 올도 돋지 않고 / 白面乃無一莖髭

검은 관 붉은 신에 누른 비단 도포 입고 / 玄冠赤舃黃羅袍

석 자 길이 교의에 호피 깔고 앉았구려 / 三尺胡床委皐比

왼손을 무릎까지 드리우고 바른편을 돌아보며 / 左手垂膝右顧視

성났어도 미소 지으며 그 눈썹 치켜세웠네 / 怒而微笑竪其眉

도검을 받든 자는 칼자루를 오른손으로 잡고 있고 / 奉刀劍者右其柄

동자놈은 탄환 갖고 찰싹 붙어 따라가네 / 小童執彈親身隨

녹의 입은 늙은 관리 백책을 손에 쥐고 / 綠衣老吏執白策

몸을 굽혀 붙따르며 힐끗힐끗 눈치를 먼저 보네 / 鞠躳將趨頻先窺

어떤 자는 동개 차고 어떤 자는 도끼 잡아 / 或佩櫜鞬或秉鉞

엄숙하고 경건하니 뉘 감히 딸꾹질하리 / 肅敬伊誰敢噦嘻

봉황 부채 학 일산(日傘) 빽빽이 늘어서고 / 鳳扇鶴傘立簇簇

붉은 깃발 반만 가려 바람에 펄렁펄렁 / 紅旂半遮風旖旎

땅에 엎뎌 영을 듣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떠나가니 / 伏地聽令挐雲去

모두 다 새까맣고 험상궂은 놈들일세 / 盡是黑漢與醜厮

푸른 놈은 그 얼굴이 쪽물을 들여논 듯 / 綠者其面如入藍

누런 놈은 그 다리 치자를 발라논 듯 / 黃者其脚如塗梔

부리가 뾰족뾰족 닭 같은 놈 있다면은 / 有如鷄者喙尖尖

뿔이 우뚝우뚝 외뿔소 같은 놈도 있다마다 / 有如兕者角觺觺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를 빗질 않아 긴 털이 더풀더풀 / 生不梳頭髮鬅鬙

귀신 밉단 사람 말을 내 이제 알았다오 / 人言鬼憎吾今知

겨드랑이 주변에 입이 달려 아! 괴이하도다 / 脇上有口吁可怪

그 입에 칼을 무니 수저를 머금은 듯 / 其口遇劍如含匙

귀 뚫어 구리 고리 달고 팔목에는 팔찌 찼네 / 耳穿銅環臂跳脫

다리에는 모직 행전을 치고 신에는 끈을 매지 않았네 / 脚繫毛偪不屨綦

어떤 놈은 칼 안 들고 돌만을 쥐고 / 或不執兵但執石

나무 뽑아 가지 쳐서 거꾸로 쥐었구나 / 拔木去枝仍倒持

만 발 길이 쇠줄에 흉악한 용 매달고서 / 萬丈鐵索係毒龍

한 마디 영차 소리 늪과 언덕 무너지네 / 一聲許邪拔澤陂

줄 끊기자 두 귀신 넘어져 엉치 다치니 / 索絶二鬼顚傷尻

한 귀신 팔을 펴며 한바탕 크게 웃네 / 一鬼張臂大笑之

용이란 놈 기세등등하며 떨어지질 아니하니 / 龍也搖頭不能落

그 비늘과 뺨의 털 가지런히 달려 있구나 / 纍纍縣其鱗之而

거센 물결 이처럼 시커멓다 이상할 것 없네 / 無怪驚濤黑如此

용의 침을 섞어서 귀신 다리 씻겼겠지 / 應洗鬼脚和龍漦

뱀 잡는 놈이 있어 뱀이 그놈 목 감아 대니 / 有捕蛇者蛇纏頸

눈이 솟고 낯이 벌건 채 턱을 덜덜 떨고 있네 / 目聳面赤簸其頤

칼 휘둘러 달려가니 다시 주춤 물러서서 / 揮劍直前復小卻

갈라진 혓바닥을 실로 불꽃처럼 날름거리네 / 實燀如炎舌有歧

헐떡거리며 달아나는 놈은 붉은 옷을 입었는데 / 喙且走者衣紫衣

꼬리 탐스러워 어슬렁대는 숫여우 같구나 / 尾豐似是雄綏綏

아내 하나 화살 맞아 두 팔을 쭉 뻗대고 / 一妻箭中兩臂伸

아내 하나 매에게 채여 오른 눈썹 비틀렸네 / 一妻鷹攫右眉攲

아내 하나 아이 안고 낭자 잡고 달아나는데 / 一妻抱兒奉髻走

아이가 여전히 젖을 빨자 그 아이를 나무라네 / 兒猶吮乳嗔其兒

왕 원숭이 타박 입어 뼈마디가 물러지고 / 猴王被打骨到軟

배꼽 아래로 고개 처져 사지는 비실비실 / 頭垂過臍委四肢

두 계집 부축 받아 절뚝절뚝 걸어가니 / 兩女扶腋踉蹡行

서두르는 손길에 부딪쳐 오사모(烏紗帽)가 떨어지네 / 手忙觸落烏接䍦

화상 입은 한 덩이 육신을 보전코자 / 欲全焦揚一塊肉

몸종은 울면서 비단보로 감싸 주누나 / 侍婢泣以錦襁詩

범의 네 발목을 얽어 작대기로 꿰어 드니 / 縛虎四蹄貫以木

축 늘어진 꼴이 홰에 걸린 갖옷과도 같구려 / 離披有如裘掛椸

땅 위에 철봉 꽂고 붉은 띠로 얽고 얽어 / 植棒地上纏赤帶

그 꼬리 손에 쥐고 당기기를 엿 늘이듯 / 手執其尾引如飴

물소를 잡아 와서 두 손가락으로 코 뚫고 / 兩指穿挽水牛鼻

코뚜레 못 얻으니 노끈으로 목을 얽었네 / 索絼不得項繫縻

날아오른 사슴의 이마 뿔이 꺾여 내려오니 / 飛上鹿定摧角下

너무 뾰족해서 갈면 송곳으로 합당하이 / 太尖只合磨爲觿

거북을 짊어지니 거북 발톱 다릿살을 후벼 파고 / 負龜龜以爪爬腿

고래를 껴안으니 고래 코는 수염 내를 씩씩 맡네 / 抱鯨鯨以鼻嗅髭

자라 끌고 두껍 들고 양옆으로 칼을 끼며 / 曳鼈提蟾挾擁劍

멧돼지 메고 이리를 내쫓으며 비유를 꿰찼네 / 肩豕揮狼佩肥遺

크고 작은 귀신 합쳐 아흔에 여덟인데 / 大小鬼凡九十八

또 하나 왕 귀신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진 않네 / 又一鬼王不在斯

털 짧은 추한 짐승들 스물하나라면 / 臝毛之醜二十一

어여쁜 선녀들 열여섯이 섞여 있네 / 一十有六之魔姬

용어와 자라에다 뱀마저 열에 여덟 / 龍魚鼈鼇蛇十八

개 하나 매 하나에 다시 또 거북 하나 / 犬一鷹一復一龜

묻노라 어느 사람 이 그림 그렸는고 / 借問何人作此畵

왕적(王迪)이라 기후(起侯)가 만든 걸로 되어 있네 / 王迪起侯之所爲

여러 손들 모여서 보고 다투어 찬탄하며 / 諸客聚觀爭讚歎

유과(油菓) 기름 묻을까 봐 서로를 경계하네 / 相戒勿汚寒具脂

나 역시 집에 오니 눈에 아직 삼삼하여 / 我亦歸家眼森森

밤에도 잠 못 이루고 생각이 여기에만 / 宵不成寐念在玆

애오라지 붓을 들고 수효대로 기록하여 / 聊復捻筆記其數

때때로 펼쳐 보며 스스로 즐긴다오 / 時時披閱以自怡

 

 

[C-001]산해도를 열람한 노래搜山海圖歌 : 유득공(柳得恭) 영재집(泠齋集) 1에도 같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상 차이가 적지 않다. 제목 아래에 소주(小註) 이 아래에 형암(炯菴 : 유득공의 호) 2수를 써야 한다.此下當書炯菴二首고 적혀 있고, 작품이 끝나는 곳의 상단 여백에도 두주(頭註) 이 아래에 형암의 2수를 쓰시오.此下書炯菴二首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수산해도가는 연암의 원작이 영재집에 잘못 수록된 것이며, 형암이 지었다는 수산해도가 2수가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산해도(山海圖)는 고대 중국의 신화집(神話集)이자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의 내용을 소재로 삼은 그림이다. 완씨칠략(阮氏七略)에 의하면 남조(南朝) () 나라의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그렸다는 산해도가 기록으로 전하는 최초의 작품이다. 六硏齋筆記 卷3 동진(東晉) 때 곽박(郭璞)이 산해경도찬(山海經圖讚)을 지었고, 도연명(陶然明)이 독산해경(讀山海經) 시를 지은 이래, 이백(李白)과 맹호연(孟浩然) 등 저명한 시인들이 산해도를 본 시들을 남기고 있음을 보면, 산해도가 후대에 지속적으로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연암이 보았다는 산해도는 왕적(王迪)이 그린 작품이라 하는데, 왕적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 참고로, 남송(南宋) 신종(神宗) 때 유명한 은자(隱者)로 먹을 잘 만들었다는 왕적(王迪)이란 인물이 있다. 墨史 卷中》 《能改齋漫錄 卷18

[D-001]백씨(伯氏) …… 무관(懋官) : 연암의 백씨는 박희원(朴喜源)이다. 벼슬을 하지 못했으며,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를 양자로 들였다. 이중(履仲)은 연암의 삼종제(三從弟)인 박수원(朴綏源)의 자이다. 그는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의 손자로서, 진사 급제 후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지냈다. 덕보(德保)는 홍대용(洪大容)의 자이고, 무관(懋官)은 이덕무(李德懋)의 자이다.

[D-002]복부(服不) : 맹수를 키우거나 조련시키는 관직이다. 周禮 夏官 司馬 요순(堯舜) 시절 동보(董父)가 용을 잘 길렀으므로 순 임금이 그에게 환룡(豢龍)이란 성씨를 내렸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29

[D-003]북두성 빗기어라 : 원문의 斜拜老 영재집에는 高拜蒼으로 되어 있다.

[D-004]화표주 푯말 아랜 : 화표주는 교량이나 성곽, 능묘 따위의 앞에 세우는 거대한 기둥을 가리킨다. 원문의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으나, 잘못인 듯하다.

[D-005]고운 첩 : 원문의 媚妾 영재집에는 媚婦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중편연암집(重編燕巖集)에는 美妾으로 되어 있다.

[D-006]산도깨비 …… 내려와서 : 원문의 白日下山來 영재집에는 彳亍窺村竈로 되어 있다.

[D-007]사람 …… 빌려 : 원문은 借人竈突인데, 영재집에는 束蘊乞火로 되어 있다. ‘ 자가 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8]울루(鬱累) : 악귀를 잘 다스린다는 신()의 이름이다. ‘鬱壘라고도 한다. 세간에서 대문의 신門神으로 받들었다. 論衡 訂鬼

[D-009]백익(伯益) : () 임금의 신하로 우()를 도와 치수(治水)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書經 舜典 순 임금이 백익에게 불을 관장하게 하자 백익이 산과 못을 불질러 태웠더니 새와 짐승들이 달아나 숨었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上

[D-010]관운장이 …… 거느리니 : 원문은 關王變相領神兵인데, 영재집에는 帝聞之怒勅鬼伯으로 되어 있다.

[D-011]하얀 …… 않고 : 원문은 白面乃無一莖髭인데, 영재집에는 部勒六丁兵一枝로 되어 있다.

[D-012]도포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3]돌아보며 : 원문은 顧視인데, 영재집에는 顧眄으로 되어 있다.

[D-014]성났어도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15]녹의(綠衣) : 정색(正色)이 아닌 하등(下等) 복색(服色)으로, () 나라 때 6, 7품의 하급 관리가 착용했다.

[D-016]백책(白策) : 영재집에는 白板으로 되어 있다. 정식으로 도장이 찍혀 있지 않은 사령장(辭令狀)을 뜻한다. 정식 발령을 받지 못한 관리도 백판이라 한다.

[D-017]봉황 …… 일산(日傘) : 원문은 鳳扇鶴傘인데, 영재집에는 頭稀脚衆으로 되어 있다.

[D-018]쪽물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9]부리가 뾰족뾰족 : 원문은 喙尖尖인데, 영재집에는 嘴微曲으로 되어 있다.

[D-020]뿔이 …… 있다마다 : 원문은 有如兕者角觺觺인데, 영재집에는 有如牛者角雙觺로 되어 있다.

[D-021]긴 털이 더풀더풀 : 원문은 髮鬅鬙인데, 영재집에는 髮蓬葆로 되어 있다.

[D-022]내 이제 : 원문은 吾今인데, 영재집에는 今乃로 되어 있다.

[D-023]영차 소리 : 원문은 許邪인데, 영재집에는 邪許로 되어 있다.

[D-024]엉치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5]그 비늘과 뺨의 털 : 원문은 其鱗之而인데,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 재인(梓人) 에 나오는 표현으로, 해석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청() 나라 왕인지(王引之)의 설에 따라 해석하였다.

[D-026]주춤 : 원문의 가 이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 같은 뜻이다.

[D-027]붉은 옷을 입었는데 : 원문은 衣紫衣인데, 영재집에는 其衣紫로 되어 있다.

[D-028]어슬렁대는 숫여우 : 시경(詩經) 위풍(衛風) 유호(有狐) 여우가 어슬렁댄다有狐綏綏는 구절이 있다. ‘수수(綏綏)’에 대해 주자(朱子) 짝을 찾아서 혼자 다니는 모습이라고 풀이했다.

[D-029]쭉 뻗대고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30]걸어가니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31] : 원문의 이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D-032]비유(肥遺) : 산해경 서산경(西山經) 영산(英山)에 새가 있어 그 모습이 메추라기와 같고 노란 몸에 붉은 부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을 비유(肥遺)라 한다.” 하였다.  산해경 북산경(北山經)에는 혼석산(渾夕山)에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뱀이 있는데, 그 이름을 비유라 한다.” 하였다.

[D-033]왕 귀신 : 원문은 鬼王인데, 영재집에는 鬼伯으로 되어 있다.

[D-034]용어(龍魚) : 산해경 해외서경(海外西經)에 용어는 잉어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신성한 사람이 그것을 타고 구주(九州)를 다닌다고 하였다.

[D-035]자라 : 원문은 鼈鼇인데, 영재집에는 鼈蟹로 되어 있다.

[D-036]다시 …… 하나 : 원문은 復一龜인데, 영재집에는 蟾與龜라고 되어 있다.

[D-037] …… 삼삼하여 : 원문은 我亦歸家眼森森인데, 영재집에는 我歸森森長在眼으로 되어 있다.

[D-038]수효대로 기록하여 : 원문은 記其數인데, ‘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해인사(海印寺)

 

 

합천이라 해인사 절이 있으니 / 陜川海印寺

웅장 화려 팔도에 이름이 났네 / 壯麗稱八路

가마 타고 골짝에 막 들어서니 / 肩輿初入洞

그윽한 경치 차츰차츰 모여드누나 / 幽事漸相聚

못은 깊어 수은을 담아 놓은 듯 / 湫深若貯汞

온갖 형상 아리땁게 갖추었어라 / 窈窕萬象具

팔다리에 얼크러진 나무 그림자 / 樹影錯脛肘

폐부를 뚫고 드는 산빛이로세 / 山光寫肺腑

제 깃 사랑하여 비춰 보려고 새는 자주 물을 기웃거리고 / 愛羽鳥頻窺

제 터럭 믿고 수달은 능히 물을 거슬러 오르네 / 恃毛獺能泝

으슥진 곳 헤치고 지날 땐 악몽을 꾸는 듯 / 剔幽類夢噩

괴성을 지를 적엔 건주정 피우는 듯 / 呌奇競淸酗

다람쥐는 뺨에다 물어 밤을 저장하고 / 鼯廩頰藏栗

고슴돛은 등의 가시로 찔러 토란을 싣네 / 蝟載背刺芋

눈 깜짝하는 사이에 기괴하게 변하니 / 俄頃轉譎詭

너무도 생소하여 의구심마저 나네 / 生疎甚疑懼

갑자기 으리으리 깁옷 입은 것은 / 照爛忽衣錦

십리 길을 양옆에 낀 단풍나무 숲이어라 / 十里擁丹樹

천둥 같은 폭포 소리 높은 골짝 짜개고 / 飛霆疈高峽

온 샘이 용솟아 한데로 쏟네 / 百泉湧傾注

후려치고 물어뜯다가 놀라서 서로 합치고 / 搏嚙驚相合

부딪치고 싸우다가 물러섰다 도로 내닫네 / 觸鬪卻還赴

물의 성질 본래는 유순하지만 / 水性本柔順

수많은 험한 돌과 서로 만나면 / 犖确石與遇

한 치도 선선히 양보하지 않아 / 不肯一頭讓

마침내 수천 년을 성낸 채 내려오네 / 遂成千古怒

남은 여울물은 모래밭에 엎디어 울며 / 餘湍伏沙鳴

사람 향해 하소연 흐느껴 우네 / 幽咽向人訴

모를레라 저 물이랑 저 돌을 보면 / 不知水於石

서로 무슨 질투가 있다는 건지 / 有何相嫉妒

물이 돌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 使水不相激

돌도 응당 원망하며 거스르지 않을 텐데 / 石應無怨忤

원하노니 돌이 조금 양보한다면 / 願言石小遜

물도 편평하게 퍼지며 흘러갈 것을 / 水亦流平鋪

어쩌자고 힘자랑 밀치고 다투어 / 奈何力排爭

밤낮으로 야단법석 일삼는 건고 / 日夜事喧嘑

가마 떠멘 중 덕분에 험지(險地)를 지나는데 / 歷險賴轝僧

두어 걸음 못 벗어나 번갈아 메네 / 替擔纔數步

어깨 붉어지고 오목한 홈이 패여 가엾고 / 肩騂憐凹筧

시뻘개진 까까머리 박처럼 깨져 버릴까 걱정 / 巓赭恐破瓠

허리 쥐고 숨을 한창 헐떡거리고 / 捧腰喘方短

등에 밴 땀방울 흐르다 말라 버리네 / 透背汗因沍

묻노라 너희는 무슨 낙() 있어 / 問爾何所聊

갖은 고생 다 겪으며 깊은 산속에 사느냐 / 辛苦萬山住

잡역으로 관가에 종이 만들어 바치고 / 雜役供官紙

힘 남으면 사사로 신도 삼지요 / 餘力織私屨

오히려 무서운 건 지나는 나그네들 / 猶將畏過客

관의 부름에 나아가듯 빨리 달려간다오 / 犇趨似赴募

이를 보니 마음이 측은하여라 / 見此心悱惻

호소할 데 없는 신세 차마 못 볼레 / 不忍無控籲

미투리 바꿔 신고 지팡일 챙겨 / 換屨覓短笻

엎어지고 자빠지며 가는 비탈길 / 仄逕任顚仆

화공(畵工)이 가을 산에 들어가면은 / 畵史入秋山

해질녘의 먼 경치 그리려 하나니 / 意匠在遠暮

서리 숲은 단청으로 풍요로운데 / 霜林饒丹靑

찬 햇볕이 하얀 깁을 대신하누나 / 冷陽替絹素

골짝 입구 갑자기 넓게 벌어져 / 洞門忽廣坼

수레 백 대도 나란히 몰 수 있겠군 / 百車可並驅

숲은 첩첩 아스라이 어리비치고 / 疊樹遠掩映

()는 층층 반만이 얼굴 내미네 / 層閣半呈露

여라 넝쿨 무성한 길에 마중 나온 노승을 보니 / 老僧候蘿逕

장삼 굴갓 차림새가 괴이하구려 / 巾衲詭制度

은근히 먼 길을 위로하면서 / 慇懃勞遠途

합장으로 대신하며 예의를 갖추네 / 合掌成禮數

나를 끌어 절 문으로 발을 들이자 / 引我入寺門

눈이 놀라 몇 번이고 돌아보는 걸 / 眩轉勞眄顧

사천왕상 우뚝허니 앞을 막으니 / 巨靈屹當前

팔다리 느닷없이 벌벌 떨려라 / 手脚實危怖

벌린 입은 찢겨져 눈까지 닿았고 / 張口裂至目

불거진 두 눈깔엔 황금 발랐군 / 突睛黃金鍍

귓속에서 뽑아낸 두 마리 뱀은 / 耳中拔雙蛇

꿈틀꿈틀 독 안개 뿜어내는 듯 / 蜿蜒若射霧

제멋대로 비파를 끼고도 있고 / 汗漫擁琵琶

알록달록한 칼 끈을 쥐고도 있네 / 落莫執劍韄

힘을 써서 요귀의 배를 밟으니 / 努力蹋鬼腹

그 요귀 혀와 눈이 모두 튀어나왔네 / 鬼目舌並吐

단풍나무 귀신은 팔이 잘려 떨어지고 / 楓魖腕鑿落

대나무 귀신은 손톱이 갈큇발 같아 / 竹魈爪回互

벽라의 옷깃 어깨를 덮고 / 覆肩薜蘿襟

호피의 바지로 배를 가렸네 / 掩肚虎皮袴

괴룡이랑 가뭄 귀신은 / 乖龍及旱魃

꽁무니와 뿔이 서로 엉겨 붙었고 / 尻角相依附

우레 치는 귀신이랑 바람 귀신은 / 雷公與飛廉

부리나 이마가 유독 타고난 자질이라 / 嘴額獨天賦

엎치락뒤치락 갖신 밑에 숨어 / 顚倒竄鞾底

팔다리 돌려대며 허공에 허우적이네 / 爬空匝臂股

불전은 깊은 골짝이라 몹시 차가워 / 佛殿寒洞天

용마루 서까래만 햇볕 겨우 드네 / 甍桷纔容煦

황금빛과 푸른빛 번쩍번쩍 눈부실 지경 / 金碧閃相奪

해를 보니 저절로 눈이 침침해지네 / 視陽自昏瞀

창문을 아로새겨 연꽃 이루고 / 雕窓成菡萏

파닥파닥 가마우지는 멱을 감누나 / 翩翩浴鶿鷺

연리화(連理花)는 붉은 꽃받침 함께하고 / 連理幷紫蔕

비익조(比翼鳥)는 푸른 목이 하나로 되었네 / 比翼結翠嗉

예쁜 아이 검은 용의 구슬을 손에 놀리고 / 妖童弄驪珠

고운 계집 새장에다 봉새 기르네 / 豔女調鳳笯

칠성(七星)의 관원님들 시위(侍衛)를 거느리고 / 星官從羽衛

구름 타고 경포에 모여드누나 / 步雲集瓊圃

영롱 세계 두루두루 구경코 나니 / 玲瓏罷周覽

서글퍼서 마음이 무너지는걸 / 悵然使心斁

도리어 꿈속에서 경치를 보면 / 還如夢中景

어두침침해서 늘 비 내리는 날과 같고 / 沈沈常雨雨

시름 속에 밥을 먹으면 / 又似愁裏饍

눈앞에 성찬이 있어도 배불리 못 먹는 것과도 같네 / 滿眼不飽饇

비로소 알괘라 괴이한 구경은 / 始知詭異觀

즐거움 극에 달하면 되려 운치 없음을 / 樂極還無趣

내 진작 들었노라 석가여래는 / 我聞牟尼佛

코와 눈이 본래 추악했는데 / 鼻眼本醜惡

뒷세상 사람들이 더럽게 여겨 / 或恐後世人

애모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 / 嘔穢不愛慕

저 경박한 제() · ()의 아이놈들이 / 輕儇齊梁兒

제멋대로 화상과 소상(塑像) 만드니 / 私意傅繪塑

어떤 건 아주 작아 팥알 같건만 / 幺麽或如豆

전생을 깨달은 것처럼 해 놓고 / 前生若可悟

우람하기 짝이 없는 장륙불상(丈六佛像) / 塊然丈六身

다리 하나가 수레를 다 차지할 만하네 / 一肢可專輅

감괘(坎卦)처럼 손가락들을 맞대었는데 / 箇箇指連坎

크고 작은 손가락들 모두 곱고 예쁘네 / 巨細悉媺嫮

부처에게 더구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 於佛更何有

알고 보면 이런 꾀는 모두 잘못이지 / 此計儘錯誤

그렇게 해서 부처를 높이려는 수작이 / 所以尊之者

도리어 극심한 비방을 초래하였지 / 還自極訿䜑

이러쿵저러쿵 곱네 밉네 해도 / 紛紛姸蚩間

혜심은 응당 예전 그대로겠지 / 慧心應如故

빙 두른 팔십 칸 행랑을 보소 / 回廊八十間

넓고 넓도다 장경판고(藏經板庫) / 蕩蕩藏經庫

거울처럼 윤이 나는 옻칠한 판자 / 漆板明如鏡

좀이 못 들게 소금물에 삶아 냈다지 / 烹鹽備蟫蠹

차곡차곡 쌓아서 얼음 창고 같은데 / 委積若凌陰

실명한 듯 깜짝 놀라 제대로 보질 못하겠네 / 失目驚瞿瞿

비하자면 늘어선 비단 가게와 같아 / 譬如列錦肆

 원문 빠짐  / □□□□□

방패들이 늘어선 듯 짜임새 있게 놓였고 / 織織比盾干

댓가지 꽂아 논 듯 촘촘히 쌓였네 / 簀簀揷箘簵

서성대며 시험 삼아 뽑아다 보니 / 徘徊試抽看

주석조차 없어서 도무지 모르겠지만 / 茫然失箋註

괴이한 빛이 때로 터져 나오니 / 光怪時迸發

오금이 용광로에 녹아 있는 양 / 五金入鎔鑄

뉘 능히 승법을 풀이할 건고 / 誰能說乘法

갈대배 타고 바다 건넌 사람 없으니 / 無人蘆渡

뜰에서 거닐 땐 침도 못 뱉어 / 步庭不敢唾

밥알이 떨어져도 주워 먹겠군 / 粒墜堪拾哺

섬돌 틈엔 개밋둑도 없고 / 除級無封螘

기와 이음매엔 새들도 깃들지 않네 / 瓦縫絶棲羽

쓸지 않아도 절로 먼지가 없어 / 不掃自無塵

조촐해라 봄비로 씻긴 듯하네 / 淨若沐新澍

찬바람이 으스스하니 / 寒風瑟然

온갖 신이 남몰래 꾸짖으며 지켜주나 봐 / 百神陰呵護

묻노라 그 누가 이 절 지었노 / 問誰剏此寺

나라를 기울일 재물 축냈네 / 傾國致財賂

옛날 옛적에 천흉의 중이 / 宿昔穿胸僧

바다를 건너와 살았다는데 / 浮海常來寓

그 조각상은 새까매 까마귀 같고 / 厥像黑如烏

비쩍 말라서 할망구 같았네 / 崎嶇若老嫗

() 새기던 처음 일을 남김없이 말하는데 / 緬言刻經初

황당하고 괴이하여 후려잡기 어려워라 / 荒怪難討

이씨 성에 이름은 거인이란 자 / 李氏名居仁

부처에 아첨하여 복을 비는데 / 媚佛求嘏祚

그 집에는 눈 셋 박힌 개가 생겨나 / 家産三眼狗

어린애 기르듯이 곱게 길렀네 / 愛養如養孺

그 개가 달아나 뵈지 않으니 / 狗去不知處

갑자기 보살펴 준 은공을 잊어버린 듯했네 / 忽若忘濡呴

나중에 몸이 죽어 황천에 가서 / 及死到黃泉

어떤 한 신인(神人)을 만났었는데 / 乃與神人遌

그 신인 개마냥 눈이 셋이라 / 三目亦如狗

깜짝 놀라 반기며 몰래 부탁했더니 / 驚喜潛囑喩

주인님 은혜에 실로 감동해 / 實感主人恩

신령의 도움으로 깨어나게 할 터이니 / 冥祐行

원컨대 팔만의 게()를 새기어 / 願刻八萬偈

불사를 널리널리 전파해 달라 했네 / 佛事廣傳布

땀을 쭉 쏟으며 꿈 깨듯 일어나니 / 汗發若夢寐

시원스레 묵은 병이 달아났어라 / 洒然去沈痼

친척들이 입관(入棺) 소렴(小斂) 서두는 동안 / 親戚謀棺斂

고을과 이웃에선 부조 보냈네 / 鄕隣致賵賻

신인이 한 말에 감격이 되어 / 感激神所言

온갖 불경 판목에 새기었다니 / 全經剞劂付

이 일은 진실로 황당하여라 / 此事誠荒唐

아득한 옛날 일을 거슬러 오를 수 없으니 / 邃古非可遡

설령 진짜 이런 일이 있다 하여도 / 且令眞有是

유자(儒者)로선 마음에 둘 일이 아닐세 / 儒者所不措

십삼경을 생각하면 탄식이 절로 / 所歎十三經

머나먼 연경(燕京)의 시장까지 달려가 사 오질 않나 / 遠購燕市騖

저네들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도 / 彼能一人力

천년토록 굳건하게 경판을 전하였구나 / 刻板千載固

아침나절 학사대에 올라 보니 / 朝上學士臺

문창후(文昌侯)를 만날 것도 같구만 그래 / 文昌如可晤

이분이 신선을 하 좋아하여 / 此子喜神仙

종신토록 장가 두 번 안 들었다네 / 終身不再娶

도를 얻어 갑자기 하늘 오르니 / 得道忽飛昇

신발 두 짝 숲 언덕에 버려두었네 / 雙履遺林步

황제(黃帝)가 비록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 軒轅雖騎龍

교산에는 상기도 무덤이 있네 / 喬山尙有墓

선탑(禪榻)에 기대어 밤을 묵으니 / 暝宿倚禪榻

초승달엔 이지러진 두꺼비와 옥토끼 / 初月缺蟾兎

금탑에선 풍경이 땡그랑 울고 / 金塔鳴風鐸

옥등잔엔 심지가 무지개 이루었네 / 玉燈貫虹炷

청아한 범패 소리 어고(魚鼓) 흔들고 / 淸梵搖魚

바람 소리 일어나 고루 퍼지네 / 虛籟發鈞濩

 

 

[C-001]해인사(海印寺) : 연암이 지리산 아래 경상도 안의현(安義縣)에서 사또로 지내던 1790년대 전반기의 창작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이 있는 글로 1795(정조 19) 음력 9월에 지은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 연암집 1에 실려 있다.

[D-001] …… 대신하누나 : 찬 햇볕이 비치는 가운데 울긋불긋 단풍이 든 광경을 하얀 비단 위에 채색 그림을 그린 것에 비유한 표현이다.

[D-002]제멋대로 …… 있고 : 사천왕(四天王) 중 북방(北方)을 수호하는 다문천(多聞天)은 비파를 들고 있다.

[D-003]알록달록한 …… 있네 : 사천왕 중 동방(東方)을 수호하는 지국천(持國天)은 칼을 들고 있다.

[D-004]벽라(薜蘿) : 넝쿨식물인 벽려(薜荔 : 줄사철나무)와 여라(女蘿 : 소나무겨우살이)를 가리킨다. 초사(楚辭) 구가(九歌) 중 산귀(山鬼), 산신(山神)을 뜻하는 산귀는 벽려로 옷을 삼아 입고 여라로 띠를 삼아 두른다고 하였다. 은자(隱者)의 의복을 벽라라고 하기도 한다.

[D-005]괴룡(乖龍) : 전설에 나오는 나쁜 용으로, 비를 내려주기를 싫어해서 온갖 방법으로 숨지만 결국 뇌신(雷神)에게 붙잡히고 만다고 한다. 茅亭客話 卷5

[D-006]연리화(連理花) : 한 꽃받침에 꽃이 두 개 달린 병체화(幷蔕花)를 말한다. 사랑하는 부부를 상징한다.

[D-007]비익조(比翼鳥) : 날개 하나에 눈이 하나인 암수 새 둘이 한 몸이 되어 난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D-008]푸른 목翠嗉 : 규장전운(奎章全韻)  새의 목鳥吭이라 새겼다.

[D-009]칠성(七星)의 관원님들 : 칠성각(七星閣)에 모신 북두칠성의 신을 가리킨다.

[D-010]경포(瓊圃) : 신선이 산다는 동산을 말한다.

[D-011]마음이 무너지는걸 : 원문의 은 거성(去聲) 우운(遇韻)으로 압운을 했으므로 로 읽어야 한다. 규장전운(奎章全韻)  敗也라 새겼다.

[D-012]() · ()의 아이놈들이 : 제 나라와 양 나라는 남조(南朝)에 세워진 나라들로서 당시에 중국의 불교가 가장 극성하였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을 경멸하여 부른 말이다.

[D-013]제멋대로 …… 만드니 : 원문의 가 이본에는  자로 되어 있으나, 채색한다는 뜻의 를 취하여 새겼다.

[D-014]우람하기 짝이 없는 : 원문은 塊然인데, 이본에 따라 瑰然으로도 되어 있지만 높고 크다는 그 뜻은 마찬가지이다.

[D-015]감괘(坎卦)처럼 손가락들을 맞대었는데 : 감중련(坎中連)이라고 하여 음효(陰爻) 가운데 양효(陽爻)가 끼여 있는 감괘 모양으로 소지(小指)를 대지(大指)와 맞닿게 한 인상(印相)을 말한다.

[D-016]크고 …… 예쁘네 : 부처는 전생에 베푼 선행의 결과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날 때 32가지 길상(吉相)을 갖추었는데, 그중의 하나로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 예뻤다고 한다. 大智度論 卷4

[D-017]혜심(慧心) : 불교 용어로, 진리를 달관할 수 있는 밝은 마음을 말한다.

[D-018]장경판고(藏經板庫) :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건물로, 남북으로 마주 보는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의 두 채로 되어 있다.

[D-019]거울 : 원문은 인데, 이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20]오금(五金) :  ·  · 구리 ·  · 주석 등 다섯 가지 금속을 말한다.

[D-021]승법(乘法) : 행인을 실어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 수레車乘에다 부처의 교법을 비유한 말이다.

[D-022]갈대배 …… 없으니 : 보리달마(菩提達磨)가 남인도에서 갈대로 만든 배를 타고 포교하러 중국에 건너온 고사를 거론한 것이다. 보리달마와 같은 고승이 없다는 뜻이다. 시문에서 折蘆渡江’ ‘折蘆渡水’ ‘折蘆渡海 등의 표현이 종종 보이므로, 빠진 글자는  자가 아닌가 한다. 河南通志 表》 《學言稿 卷2 送無悅上人歸高句麗

[D-023]천흉(穿胸) : 중국 남방의 이민족 중의 하나이다. 이아(爾雅)에서 육만(六蠻)’에 대한 이순(李巡)의 주석에 육만은 천축(天竺), 해수(咳首), 초요(僬僥), 기종(跂踵), 천흉(穿胸), 담이(儋耳), 구지(狗軹), 방척(旁脊)이다.”라고 하였다. 천흉족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어, 그중의 귀인들은 그 구멍에 긴 장대를 꿰어 가지고 두 사람이 떠메게 하여 다닌다고 한다.

[D-024]옛날 …… 같았네 : 해인사의 조사당(祖師堂)에 모셔져 있던 희랑조사상(希郞祖師像)을 묘사한 것이다. 신라 말의 고승이었던 희랑(希郞)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과 싸울 때 큰 도움을 주어 그 보답으로 해인사를 크게 중건할 수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 유래를 모르고 조사상이 천흉국(穿胸國) 사람의 모습이라는 설이 있었다고 한다. 雅亭遺稿 卷3 伽倻山記

[D-025]후려잡기 어려워라 : 원문의 빠진 글자는 문맥과 운자(韻字)로 보아, 토포(討捕)  자가 아닌가 한다.

[D-026]이씨 ……  : 이거인(李居仁)은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합천의 이서(里胥)로서, 왕을 설득하여 해인사의 사간장경판(寺刊藏經板)을 만들게 했다는 인물이다. 이하 시의 내용은 그와 관련한 영험담(靈驗談)을 전한 것이다.

[D-027]갑자기 …… 듯했네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샘물이 말라 버리니 물고기들이 함께 뭍에 처하여, 서로 촉촉한 입김을 불어 주고 입의 거품으로 적셔 주었으나, 강호에서 피차 잊고 지내느니만 못하였다.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문의 忘濡呴는 어려울 때 도와준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D-028]십삼경 : () 나라 때 학관(學官)에 세운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5경에다, () 나라 때 주례(周禮), 의례(儀禮),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을 합쳐 9경이 되었고, 여기에 다시 효경(孝經), 논어(論語), 이아(爾雅)를 보태 12경이라 했다. () 나라 때 다시 맹자(孟子)를 보탰으며, () 나라 때 이들을 합쳐 13경이라 일컬었다.

[D-029]문창후(文昌侯) : 최치원(崔致遠)은 고려 현종(顯宗) 때 문창후에 추시(追諡)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D-030]교산(喬山)에는 …… 있네 : 교산은 황제(黃帝)를 장사 지냈다는 곳이다. 교산(橋山)이라고도 한다. 열선전(列仙傳), 황제를 교산에 장사 지냈더니 산언덕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묘에 시신이 사라지고 단지 칼과 신발만 남았다고 한다.

[D-031]두꺼비와 옥토끼 : 달에 산다는 요정이다. 보름달이 아니면 그들의 모습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D-032]어고(魚鼓) : 원문에는  자 다음에 한 글자가 빠졌으나, ‘ 자가 아닌가 한다. 어고는 곧 목어(木魚)로서,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을 파낸 것으로 불사(佛事) 할 때 두들긴다.

[D-033]바람 소리虛籟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천뢰(天籟), 지뢰(地籟), 인뢰(人籟)가 있다고 했다. 바람 소리는 천뢰로서, 허뢰(虛籟)라고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갓을 노래한 연구(聯句)

 

 

 

봄날 밤에 연상각(烟湘閣)에 모여 갓을 두고 시를 지었는데, () 자를 운자로 얻었다. 나이 순서로 첫 번째 운자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나는 정사(丁巳)생이고, 청장(靑莊 이덕무)은 신유(辛酉)생이며, 영재(泠齋 유득공)는 무진(戊辰)생이다. 내가 마침내 먼저 시구를 불렀다.

 

포변이 주 나라 때 만든 거면 / 布弁周製歟

죽관은 한 나라 때 의식일까  연암 / 竹冠漢儀未

금화모는 우아한 멋 다하고 / 金華輸雅致

청약립은 시골 멋이 넘치네  이덕무 / 靑篛饒風味

백방립은 경아전(京衙前)의 근심거리요 / 白方畿吏愁

골소다는 고구려에서 귀하게 여겼지  유득공 / 骨多麗朝貴

둥근 갓양태는 부처의 광배(光背) 같고 / 旁圓佛放光

볼록한 갓모자 의서(醫書)에 그려진 위 같네  연암 / 中凸醫畵胃

갓을 두고 맹약한 것은 월 나라 사람부터이고 / 結盟越人自

갓을 씌워 싸움 금지한 건 기자국을 말함이라  이덕무 / 止鬪箕邦謂

그림쇠는 썼으되 곱자는 쓰지 않았고 / 以規不以矩

씨줄에다 또 날줄로 베처럼 짰네  유득공 / 有經復有緯

패랭이는 혹 이상하다 하겠지만 / 蔽陽或異件

절풍건은 점잖은 부류에 속하지  연암 / 折風是常彙

비 오면 쓰는 갈모는 도롱이 비슷하고 / 雨冒紙類萆

먼지 털면 휘양은 고슴도치 닮았네  이덕무 / 塵刷毛肖蝟

성한 갓과 찌부러진 갓은 실로 범군과 초왕 같고 / 成虧眞凡楚

좋은 갓과 거친 갓은 때로 경수와 위수 같네  유득공 / 精粗或涇渭

벼슬아친 뺨 왼쪽에 산호 매달았고 / 爵頰左綰瑚

선비는 턱 양쪽에 비단 끈 드리웠네  연암 / 儒頷雙緌緭

옻칠 말리는 건 비 오고 구름 낀 날 틈타고 / 燥髹乘雨霮

아교로 붙이는 건 불기운을 빌려야지  이덕무 / 緻膠藉火煟

제 혼자 단정히 쓰면 영락없는 일산이요 / 獨整儼華蓋

나란히 서게 되면 마주 대한 상위 같네  유득공 / 離立峙象魏

큰길에서 걸핏하면 서로 부딪치니 / 康莊動相觸

백성들 시비하느라 물 끓듯 하네  연암 / 黎黔鬧若沸

비스듬히 그림자 지면 막 피려는 연꽃 보는 듯 / 仄影看卷荷

성글게 그늘 드리우면 그늘 우거진 팥배나무 같네  이덕무 / 疏陰怳棠芾

함께 식사할 땐 거치적거려 싫지만 / 共食礙堪嫌

측간에 갈 땐 벗어도 누가 비난하랴  유득공 / 如厠免何誹

왕기는 그림을 몹시 그르쳤고 / 王圻畵殊失

왜놈은 나무로 새기느라 힘만 빠졌네  연암 / 倭奴刻浪費

 

세상에 전하기를, 교역하던 한 왜인이 갓을 보고 좋아하면서 나무로 새겨야겠다고 여겨, 그 나라의 솜씨 좋은 장인이 나무로 새겼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과산의 두보에겐 씌울 수 있어도 / 可加飯顆甫

상투 쫒은 위타에겐 어찌 도움이 되랴  이덕무 / 寧資椎髻尉

모자가 떨어진 걸 벼슬아친 자랑할 만하지만 / 帽妥仕堪詫

비녀를 지탱할지 노인을 위로하긴 어렵구려  유득공 / 簪支老難慰

벽에 붙어 기대기에 불편하고 / 襯壁倚不便

문미(門楣)를 지날 땐 부딪칠까 두렵네  연암 / 過楣觸可畏

비구승이 쓴 건 엎어 논 사발처럼 둥글고 / 比邱圓覆盂

우바새(優婆塞)가 쓴 건 얽어 논 어망처럼 엉성하네  이덕무 / 優婆疎結罻

좌중에 참석하면 주위를 산처럼 에워싸고 / 參座圍岌嶪

구경거리에 끼어들면 대숲처럼 무성하네  유득공 / 觀場簇蓊蔚

반쯤 파손된 갓을 협객은 일부러 애호하고 / 半挫俠故喜

갓 쓰고 너무 가까이 가면 난쟁이가 꺼려하지  연암 / 太博矮所諱

고관은 붉은 명주실로 감아 근엄하고 / 達官儼朱線

새 사위는 노란 풀로 엮어 어여쁘네  이덕무 / 新壻姣黃卉

선비에겐 물총새 깃으로 만든 관이 어울리지 않는데 / 不稱士冠鷸

여자들도 비비 털로 된 다리를 달가워하랴  유득공 / 寧屑女髢狒

영달하면 종립(鬃笠)에다 갖신이 합당하고 / 達可鬃而鞾

궁색하면 전립(氈笠)에다 짚신이 합당하지  연암 / 窮可氈而屝

제주도 갓은 매미 날개보다 더 얇고 / 耽羅薄於蜩

고려 때 갓은 비취새처럼 파랗게 물들였지  이덕무 / 高麗染如翡

섬세한 빛깔은 아침 해처럼 눈에 가득하고 / 纖彩旭滿眶

둥근 갓 그림자 정오엔 다리까지 덮치네  유득공 / 圓影午壓腓

저물녘 처마 밑처럼 거미나 하루살이가 뒤덮고 / 夕簷蒙蝣蛛

타작마당처럼 껑충대는 메뚜기를 머리에 이네  연암 / 秋場戴跳蜚

평평한 갓 천장은 하늘 구멍 메운 듯하고 / 平頂天穿補

검은 갓양태는 개기월식 같구나  이덕무 / 玄規月蝕旣

금작은 우전에게 더해졌고 / 金雀加優旃

옥로는 악의(樂毅)에게 내려졌네  유득공 / 玉鷺賜樂毅

이마가 꽉 조이면 죽사(竹絲)를 몸에 맞게 구부리고 / 額穹竹彎體

상투가 갑갑하면 모시로 하여 더운 기를 제거하네  연암 / 髻鬱紵泄氣

얼굴에 덮으면 잠시 잠을 즐길 수 있지만 / 面覆睡暫悅

옆에 끼고 담 넘자니 어찌 탄식이 나오지 않으랴  이덕무 / 腋挾超詎欷

먹으로 칠한 건 담제인(禫制人)을 위로하기 위함이요 / 墨塗慰服禫

은으로 꾸민 건 녹미 받음을 축하해서라네  유득공 / 銀飾賀祿餼

빨리 달리면 가는 휘파람과 서늘한 바람 일고 / 迅馳細嘯颸

갓 너머로 엿보려면 흐릿한 무늬 번지네  연암 / 閃睨潤纈霼

습기 찰세라 노끈으로 팽팽히 당겨 두고 / 恐濕撑繩糾

더럽혀질세라 갓집에 싸서 두네  이덕무 / 惜汚套匣衣

머리 뒤로 젖혀 쓰면 방탕해 보이고 / 岸腦則近蕩

이마 쪽으로 눌러 쓰면 성난 듯하네  유득공 / 貼額者若愾

머리 크기 다르지만 않다면 / 頭顱苟不異

친구 사이엔 빌려 줄 수도 있지  유득공 / 朋友可相乞

 

 

[C-001]갓을 노래한 연구(聯句) : 유득공의 영재집 1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다. 이덕무의 아정유고(雅正遺稿) 1에도 같은 제목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덕무가 지은 14구만 수록되어 있으며 역시 자구상 약간 차이가 있다. 연암이나 홍대용, 이덕무 등은 갓을 쓰던 당시 풍속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갓을 개량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연암집 15 열하일기 동란섭필(銅蘭涉筆)’과 홍대용의 연기(燕記) 건복(巾服), 이덕무의 앙엽기(盎葉記) 8 입당개조(笠當改造), 입폐(笠弊), 논제립(論諸笠) 등 참조.

[D-001]봄날 …… 불렀다. : 영재집에 수록된 갓을 노래한 연구의 서문은 이와 조금 다르다.  경인년(1770) 봄에 선귤당(蟬橘堂 : 이덕무의 서실)에 모여, 박연암, 이무관(李懋官 : 이덕무)과 함께 미운(未韻)을 다 써서 지었다.”고 하였다. 시구의 말미에 연암이 지은 것은 ’, 이덕무가 지은 것은 ’, 유득공이 지은 것은 로 표시되어 있다. 이에 따라 번역에서 각 시구 말미에   연암으로, ‘  이덕무, ‘  유득공으로 보충해 두었다.

[D-002]포변(布弁) : 상례(喪禮) 때 착용하는 것으로, 작변(爵弁)과 제도가 같으나 15()의 베를 사용하며, 그 위에 환질(環絰)을 얹는다. 禮記集說 卷48 曾子問

[D-003]죽관(竹冠) : 대나무 껍질이나 댓잎으로 만드는데, 사서(士庶)나 석도(釋道)가 주로 썼다. 언월관(偃月冠)과 고사관(高士冠)의 두 가지 식이 있다. 朱子語類 卷91

[D-004]금화모(金華帽) : 금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한 모자이다. 이백(李白)의 고구려(高句麗) 시에 금화로 장식한 절풍모 썼는데, 흰말이 조금 멈칫거리며 빙빙 도네.金花折風帽 白馬小遲回 하였다.

[D-005]청약립(靑篛笠) : 푸른 조릿대로 만든 삿갓이다.

[D-006]백방립(白方笠) : 방립(方笠)은 원래 서울의 아전들이 쓰던 모자로 검은색이었으나, 조선 중엽 이후 흰색으로 바뀌면서 상을 당한 사람들이 쓰는 것으로 되었다.

[D-007]골소다(骨蘇多) …… 여겼지 : 골소다는 고구려 때 귀인(貴人)들이 쓰던 고깔 모양의 모자로, 골소(骨蘇), 소골(蘇骨)이라고도 했다. 원문은 骨多麗朝貴인데, 영재집에는 蘇骨麗朝貴로 되어 있다.

[D-008]갓을 …… 사람부터이고 : 풍토기(風土記)에 월 나라에서는 남과 처음 사귈 때의 예의로, 개와 닭을 잡아 제사 지내면서 그대가 수레 타고 나는 갓 쓰고 있으면, 후일 만날 때 그대는 수레에서 내려 읍하라. 그대가 우산 쓰고 내가 말을 타고 있으면, 후일 만날 때 그대 위해 말에서 내릴 것이다.”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노래를 월요가(越謠歌)라고 한다. 古詩紀 卷2

[D-009]갓을 …… 말함이라 : 우리나라 사람들이 싸움하기를 좋아하므로,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와서 큰 갓과 긴 소매의 옷을 지어 입혀 백성들이 몸을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했으니, 이는 싸움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盎葉記 8 笠爲雨具

[D-010]그림쇠는 …… 않았고 : 둥글기만 하고 모가 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병무(騈拇)에서 천하의 사물 중에 둥근 것은 그림쇠를 쓰지 않고도 스스로 둥글고, 모난 것은 곱자를 쓰지 않고도 스스로 모났다.圓者不以規 方者不以矩고 한 데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D-011]그림쇠는 …… 짰네 : 원문은 以規不以矩 有經復有緯인데, 영재집에는 怪彼倭帽兀 鄙哉滿冠緯로 되어 있다.

[D-012]절풍건(折風巾) : 고구려인들이 즐겨 썼던 것으로, 중국에 들어가 한위(漢魏) 시대에 유행했다. 北史 卷94 高麗傳

[D-013]먼지 …… 닮았네 : 휘양은 방한용 털모자로, 연암의 양반전에 옷소매로 휘양을 닦고, 먼지 털어 털 무늬를 일으킨다.袖刷毳冠 拂塵生波고 하였다.

[D-014]범군(凡君)과 초왕(楚王) : 약소국인 범국(凡國)의 임금과 강대국인 초 나라의 임금처럼 형세가 판이하다는 뜻이다. 장자 전자방(田子方)에 초왕과 범군의 대화가 나온다. 범국은 세 번이나 망할 뻔했지만 그래도 범군은 참된 자아를 보존했는데, 초왕은 나라를 보존했어도 참된 자아를 보존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했다.

[D-015]경수(涇水)와 위수(渭水) : 중국의 강 이름으로, 경수는 흐리고 위수는 맑다.

[D-016]성한 …… 같네 : 원문은 成虧眞凡楚 精粗或涇渭인데, 영재집에는 風欹醉登峴 雪覆翁釣渭로 되어 있다.

[D-017]산호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18]상위(象魏) : 고대 중국의 궁궐문 밖에 마주 보게 세운 한 쌍의 건물이다. 그곳에 교령(敎令)을 현시(懸示)했다고 한다. 周禮 天官 太宰

[D-019]제 혼자…… 같네 : 원문은 獨整儼華蓋 離立峙象魏인데, 영재집에는 何物人笑齊 小加史證魏로 되어 있다.

[D-020]비스듬히 …… 같네 : ‘그늘 우거진 팥배나무棠芾 시경(詩經) 소남(召南) 감당(甘棠) 蔽芾甘棠이란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蔽芾의 풀이는 주석가에 따라 구구하다. 여기서는 초목이 무성해서 그늘이 짙은 모양으로 새겼다. 원문은 仄影看卷荷 疏陰怳棠芾인데, 아정유고에는 護髮峙娑婆 俯肩蔭蔽芾로 되어 있다. 영재집에는 卷荷 荷卷으로 되어 있다.

[D-021]거치적거려 싫지만 : 원문의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2]왕기(王圻) …… 그르쳤고 : () 나라 때 왕기가 편찬한 삼재도회(三才圖會)에 갓이 잘못 그려져 있다는 뜻이다.

[D-023]반과산(飯顆山)의 두보(杜甫) : 이백(李白)의 희증두보(戲贈杜甫) 시에 반과산 정상에서 두보를 만났더니, 해가 정오라 머리에 삿갓 썼구려.飯顆山頭逢杜甫 頭戴笠子日正午 하였다.

[D-024]위타(尉陀) : 위타는 남월(南越)의 왕으로, 그 나라 습속에 따라 상투 머리를 하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한() 나라 사신 육가(陸賈)를 접견했다. 說苑 奉使

[D-025]모자가 …… 만하지만 : () 나라 때 맹가(孟嘉) 9 9일 중양절(重陽節)에 환온(桓溫)이 베푼 용산(龍山)의 연회에서 바람에 모자를 떨어뜨렸다는 고사를 말한 것이다. 晉書 卷98 孟嘉傳 그 이후 중양절에 높은 곳에 올라 모자를 떨어뜨리는 풍류가 생겨났다. 원문은 帽妥仕堪詫인데, 영재집에는 巾妥仕頗矜으로 되어 있다.

[D-026]비녀를 …… 어렵구려 :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 중에 흰머리 긁적여 보니 더욱 짧아져, 전혀 비녀를 지탱하지 못하겠네.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라고 한 시구를 말한 것이다.

[D-027]우바새(優婆塞) …… 엉성하네 : 우바새는 속세에 있으면서 부처를 믿는 남자를 가리키는데, 거사(居士)라고도 한다. 원문은 優婆疎結罻인데, 아정유고에는 頭陀疏結罻로 되어 있다.

[D-028]참석 : 원문은 인데,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다.

[D-029]반쯤 …… 애호하고 : 사기(史記) 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 등장하는 후영(侯嬴)의 고사를 가리키는 듯하다. 후영은 비천한 문지기로서 다 떨어진 의관(衣冠) 차림으로 위 나라 공자 무기(無忌)의 수레에 선뜻 올라타고는 대연회에 참석했다.

[D-030] …… 꺼려하지 : 관장왜인(觀場矮人)이란 말이 있다. 난쟁이가 키 큰 사람들 틈에 끼여 구경거리를 보려 하나 잘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보지 못해 식견이 얕은 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D-031]고관은 …… 어여쁘네 : 첫째 구는 갓 중의 극상품(極上品)인 진사립(眞絲笠)을 가리키고, 둘째 구는 초립(草笠)을 말한다. 원문은 達官儼朱線 新婿姣黃卉인데, 아정유고에는 取輕鋪玄鬃 憐細編黃卉로 되어 있고, 영재집에는 達官 高官으로 되어 있다.

[D-032]선비에겐 …… 않는데 :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24년 조에 정() 나라의 자장(子臧)이 송() 나라로 달아나서 물총새의 깃을 모아 만든 관鷸冠을 쓰기를 좋아했으나, 이 소문을 들은 정백(鄭伯)이 법도에 어긋난 관을 쓴 것을 증오하여 도적을 시켜 그를 죽였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이 기사에 이어 논평을 가하면서, 시경 조풍(曹風) 후인(候人) 저와 같은 사람들은 그 옷이 어울리지 않도다.彼其之子 不稱其服라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D-033]여자들도 …… 달가워하랴 : 비비(狒狒)는 원숭이의 일종으로,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빠르게 달린다고 한다. 爾雅 釋獸 다리는 여자들이 머리숱을 풍부하게 보이려고 덧넣었던 딴머리를 말한다. 또한 시경 용풍(鄘風) 군자해로(君子偕老) 검은 머리 구름 같으니, 다리를 달갑잖게 여기네.鬒髮如雲 不屑髢也라고 하였다.

[D-034]종립(鬃笠) : 말총으로 만든 갓이다.

[D-035]전립(氈笠) : 짐승 털을 다져 넣어 만든 모자로, 벙거지라고도 한다.

[D-036]섬세한 …… 덮치네 : 원문은 纖彩旭滿眶 圓影午壓腓인데, 영재집에는 簪緇避漢溺 冠玉笑荊䠊로 되어 있다.

[D-037]거미나 하루살이 : 원문의  영재집에는 로 되어 있으나, 잘못이다.

[D-038]금작(金雀) …… 더해졌고 : 금작은 갓 꼭대기의 장식물인 정자(頂子)의 일종인 듯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대군(大君)은 금정자(金頂子)를 사용한다. 우전(優旃)은 진() 나라의 배우인데, 우전에게 금작이 상으로 더해진 고사는 출처를 알 수 없다. 영재집에는 우전이 초() 나라의 악공인 우맹(優孟)’으로 되어 있다.

[D-039]옥로(玉鷺) …… 내려졌네 : 옥로 역시 정자(頂子)의 일종이다. 옥로로 장식한 갓을 옥로립(玉鷺笠)이라 하는데, 장신(將臣)이 착용했다. 악의(樂毅)는 중국 전국(戰國) 시대 연() 나라의 명장(名將)이다.

[D-040]은으로 …… 축하해서라네 :  3 품 이상이 되면 은정자(銀頂子)로 갓 꼭대기를 장식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담원 팔영(澹園八詠) 구체적인 사실은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붉은 파초 푸른 돌 동녘 담에 솟아 있고 / 紅蕉綠石出東墻

한 그루 벽오동은 그윽한 누각 앞에 / 一樹梧桐窈窕堂

꿋꿋한 한평생 손님 응대 게으르니 / 傲骨平生迎送嬾

저물녘 산 풍경에나 허리를 숙이신다네 / 丈人惟拜暮山光

 

이상은 내청각(來靑閣)이다.

 

남녘 둑의 못에 종일토록 그림자 한들한들 / 南陀竟日影婆娑

저 그림자 나를 부를 듯하고 나도 저를 부를 수 있을 듯한데 / 耐可呼吾亦喚他

갑자기 산들바람 그치고 오리 백로 지나가니 / 乍綴微風鳧鷺去

내 그림자 어지러이 백 갈래로 나눠지고 말았네 / 不禁撩亂百東坡

 

이상은 감영지(鑑影池)이다.

 

코끝을 따라서 어렴풋한 흰 기운을 바라본 뒤 / 已觀微白鼻端依

장신을 분별코자 두 눈꺼풀을 감았더니 / 欲辨臟神掩兩扉

그윽한 향기 호올로 쓸쓸한 꿈결에 스며들고 / 獨有暗香侵夢冷

나부산(羅浮山) 밝은 달이 환히 빛나네 / 羅浮明月弄輝輝

 

이상은 소심거(素心居)이다.

 

() 자 난간 깊고 깊어 솔 그늘 덮였는데 / 松覆深深卍字欄

늘어진 다래 기울어진 돌 서로 얽혀 푸르네 / 垂蘿攲石翠相攢

그림배 바람 따라 흘러가게 맡겨 두니 / 一任畵舫風吹去

밤새도록 차거운 솔바람 소리 여울처럼 쏟아지네 / 盡夜寒聲瀉作灘

 

이상은 송음정(松蔭亭)이다.

 

꽃잎에 살짝 뿜어 취한 넋을 깨워 주고 / 噀輕堪醒醉魂花

푸른 갈기 더풀더풀 허공 닫는 천마(天馬)인 양 / 天褭行空翠鬣髿

불사약을 캐고자 유신(劉晨) 완조(阮肇) 찾아가니 / 採藥將尋劉阮去

적성 노을 아른아른 길을 잃었네 / 路迷廉閃赤城霞

 

이상은 비하루(飛霞樓)이다.

 

꽃은 흡사 가려는 손 억지로 잡아 논 듯한데 / 花似將歸强挽賓

비바람에게 불지 말라 당부했다가 되려 꾸짖음만 당했다오 / 囑他風雨反逢嗔

두어라 골짝에서 병사(甁史)를 익힌 이래로 / 自從洞裏修甁史

삼백이라 예순 날이 모두 다 봄이로세 / 三百六旬都是春

 

이상은 유춘동(留春洞)이다.

 

옥주 쥐고 맑은 밤 홀로 누대에 오르니 / 玉麈淸宵獨上臺

구기자나무 시렁에 서리 지고 기러기 울음소리 애처롭네 / 杞棚霜落鴈流哀

한 가락 휘파람 소리 가을 구름을 다 흩날리니 / 一聲劃裂秋雲盡

창공이라 만리에 하얀 달이 솟아오르네 / 萬里瑤空皓月來

 

이상은 소월대(嘯月臺)이다.

 

화예부인 처음으로 궁중에 들어오니 / 花蘂夫人初入宮

부끄럼이 말을 앞서 볼 먼저 붉어지네 / 含羞將語臉先紅

앵가사리 본래로 묘한 게 아니라오 / 鸚哥舍利元非妙

도를 깨닫게 한 아난의 공덕 그 뉘라 알려는지 / 誰識阿難悟道功

 

이상은 어화헌(語花軒)이다.

 

[C-001]담원 팔영(澹園八詠) : 중국인 곽집환(郭執桓 : 호 회성원繪聲園)은 홍대용이 1766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분을 맺게 된 그의 친구 등사민(鄧師閔 : 호 문헌汶軒)을 통해, 자신의 시고(詩稿) 회성원집(繪聲園集)에 대한 조선 명사들의 서문과 아울러, 부친 곽태봉(郭泰峯 : 호 금납錦納)의 거처인 담원(澹園)을 노래한 시를 지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燕記 鄧汶軒》 《湛軒書 內集 卷3 繪聲園詩跋 담원 팔영은 이에 호응하여 지은 시로, 유득공과 박제가(朴齊家) 등도 같은 제목의 시를 지었다. 泠齋集 卷1 곽집환에게 보낸 박제가의 편지에 의하면, 이는 영조 49(1773)의 일로 짐작된다. 貞蕤閣文集 卷4 與郭澹園 附答書 피서록(避暑錄) 열하일기에 실려 있다.

[D-001]백 갈래로 …… 말았네 : 백동파(百東坡)는 소동파의 시 범영(泛潁)에 나오는 표현이다. 거울 같은 영수(潁水)에 제 얼굴을 비추어 보던 중 홀연 물고기 떼가 나타나 물에 비친 얼굴을 교란시켜 놓는 바람에 흩어져 수백 동파 되었다가 잠깐 새에 도로 여기에 있네.散爲百東坡 頃刻復在玆라고 하였다.

[D-002]코끝을 ……  : 불교에서 유래한 수양법을 말한다. 눈으로 코끝을 바라보면서 호흡을 조절하는데, 그렇게 하면 코로 숨쉴 때 연기처럼 흰 기운이 출입하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 능엄경(楞嚴經) 등 참조.

[D-003]장신(臟神) : 오장(五臟), 즉 심장, 신장, , , 비장을 가리킨다. ‘()’ ()’이란 뜻으로, ()은 신장에 숨고, ()은 심장에 숨고, ()은 간에 숨고, ()은 폐에 숨고, ()는 비장에 숨는다고 한다.

[D-004]나부산(羅浮山) : 중국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산으로 도교(道敎)의 명산 중의 하나이며, 매화(梅花)의 고사로 유명한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조사웅(趙師雄)이란 사람이 나부산에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녀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나 향기롭고 목소리가 청아하여 함께 술을 마시고 대취하였다가 깨어나 보니 큰 매화나무 아래였다고 한다. 龍城錄 매화를 나부몽(羅浮夢)이라 한다.

[D-005]유신(劉晨) 완조(阮肇) : 두 사람 모두 후한 때의 인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후한 명제(明帝) 영평(永平) 연간에 이 두 사람이 약을 캐러 천태산(天台山)으로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헤매다 두 여인을 만났다. 그집에 들어가 하룻밤 유숙한 다음 부부의 연을 맺고 살게 되었다. 반년이 지난 후 세상에 나와 보니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아무도 없고 이미 7()가 지났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여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다시는 돌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太平廣記 神仙傳

[D-006]적성(赤城) : 중국 절강성(浙江省) 천태현(天台縣)에 있는 산이다. 천태산(天台山)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산을 거쳐 가야 한다고 한다. 또한 도교(道敎)의 전설에도 적성산이 나오는데, 그 산 아래 단동(丹洞)이 있어 단()이 풍족하다고 한다. 初學記 8 登眞隱訣

[D-007]병사(甁史) : 병중(甁中)의 화사(花史)란 뜻으로, 꽃병에다 이꽃 저꽃을 갈아 꽂는 것을 말한다. 또한 명() 나라 원굉도(袁宏道)가 지은 병사란 책이 있는데, 병화(甁花 : 병에 꽂은 생화生花)와 그 삽법(揷法)에 대해 논하였다.

[D-008]옥주(玉麈) : 옥으로 만든 자루에다 고라니 털을 달아서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털 때 사용하는 물건이다. 옛사람들이 한가롭게 담론을 할 때 늘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D-009]화예부인(花蘂夫人) : 오대(五代) 때 촉주(蜀主) 맹창(孟昶)의 부인을 일컫는다. 재색(才色)으로 궁에 들어와 왕비가 되었으며 문장에도 뛰어났다. 작품으로 당() 나라 말기의 시인 왕건(王建)의 궁사(宮詞)를 본떠 지은 화예부인궁사(花蘂夫人宮詞)가 있다. 미인을 말하는 꽃解語花이라 한다.

[D-010]앵가사리 : 지혜롭고 말 잘하는 앵무새를 가리켜 한 말인 듯하다. 앵가(鸚哥)는 앵무새란 뜻이다. 또한 부처의 10대 제자 중 지혜가 제일이라는 사리불(舍利佛)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사리(舍利)라는 여인의 아들이란 뜻이고, 사리(舍利)는 말 잘하는 새라는 뜻이라고 한다.

[D-011]도를 …… 알려는지 : 아난(阿難)은 부처의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다문제일(多聞第一)이었다고 한다. 수달 장자(須達長者)에게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아난이 그 새들을 위해 사제(四諦)의 법을 설하니 듣고 깨우쳤으며, 죽은 뒤 하늘에 태어났다고 한다. 金藏經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설날 아침에 거울을 마주 보며

 

 

두어 올 검은 수염 갑자기 돋았으나 / 忽然添得數莖鬚

육척의 몸은 전혀 커진 것이 아니네 / 全不加長六尺軀

거울 속의 얼굴은 해를 따라 달라져도 / 鏡裡容顔隨歲異

철모르는 생각은 지난해 나 그대로 / 穉心猶自去年吾

 

 

[C-001]설날 …… 보며 : 연암집 5 ‘성백에게 보냄與成伯 두 번째 편지에도 인용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새벽길

 

 

까치 하나 외로이 수숫대에 잠자는데 / 一鵲孤宿薥黍柄

달 밝고 이슬 희고 밭골 물은 졸졸 우네 / 月明露白田水鳴

나무 아래 오두막은 둥글어라 돌 같은데 / 樹下小屋圓如石

지붕 위 박꽃은 별처럼 반짝이네 / 屋頭匏花明如星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극한(極寒)

 

 

깎아지른 북악은 높기도 한데 / 北岳高戌削

남산이라 송림(松林)은 새까만 빛을 / 南山松黑色

송골매 지나가니 숲이 소슬하고 / 隼過林木肅

두루미 울음소리 하늘 파랗네 / 鶴鳴昊天碧

 

 

[D-001]북악(北岳) : 한양의 경복궁 뒷산을 가리킨다. 다음에 나오는 남산은 한양의 목멱산(木覓山)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산중에서 동짓날 이생(李生)에게 써 보이다

 

 

연암이라 그 아래 집을 지으니 / 築室燕岩下

바로 화장산(華藏山) 동쪽이로세 / 乃在華藏東

수석에 다다를 땐 지팡이 짚고 / 倚杖臨水石

물거리를 베느라 낫을 찬다오 / 携鎌剪灌叢

기이한 바위는 푸른빛 이슬진 병풍 같고 / 奇巖翠滴屛

그윽한 여울물 소리 궁음(宮音) 곡조로 울리네 / 幽湍響操宮

뜰 안에 심어 논 건 무어냐 하면 / 庭中何所植

복숭아와 대나무 소나무 단풍일세 / 桃竹與松楓

시냇가 푸른 사슴 물을 마시고 / 磵畔飮蒼鹿

섬돌에 꿩이 내려 곡식 쪼누나 / 階除啄華蟲

짚 처마 정교하게 달을 새기고 / 簷茅工鏤月

추녀 끝의 풍경은 바람에 절로 우네 / 楹磬自戞風

해 다 가도 사람은 아니 보이니 / 盡日不見人

적막에 사로잡힌 방지기 신세 / 寂寞守窓櫳

어찌 보면 선정(禪定)에 든 중과도 같고 / 還如僧入定

공곡(空谷)으로 도망간 부처도 같네 / 復似佛逃空

어느 뉘 겨울 해가 짧다고 했나 / 誰謂冬日短

이따금 낮잠 들어 정신이 몽롱하네 / 午睡時矇矓

나를 따르는 이생이 있어 / 相隨有李生

농에 가득 고서를 가지고 왔네 / 古書携滿籠

산전(山田)이라 가을 되어도 곡식이 여물지 않아 / 山田秋不熟

푸성귀나 풋콩으론 배 못 채워 괴롭네 / 蔬菽苦未充

그렇지만 부지런히 외우고 읽어 / 猶然勤誦讀

목이 메도록 웅얼거리네 / 伊吾嗌喉嚨

늙어서 게을러진 나를 깨우쳐 주어 고마운데 / 感君警衰惰

연마하는 너를 깔보다니 부끄럽구나 / 媿我蔑磨礱

()이 처음 자라나는 이날을 맞아 / 是日値陽至

대학(大學) 책 한 권을 끝마쳤다니 / 君讀曾傳終

묻노라 무엇을 네 얻었는고 / 問君何所得

()는 본래 하나라서 서로 통하지 / 一理本相通

성하거나 쇠하는 건 각자 점차적으로 되나니 / 消長各有漸

쌓고 또 쌓아야만 다함 없느니 / 累積乃無窮

겨울 되면 비록 견고해지지만 / 及冬雖貞固

봄이 오면 누그러져 퍼지기 마련 / 至春得發融

빠르지 않은 반면 느리지도 않아 / 不疾亦不舒

총총히 오가는 게 아니고말고 / 來往非怱怱

한 가지 일 제아무리 독차지할 수 있어도 / 一事雖得專

사시(四時)는 제 혼자서 공() 못 이루네 / 四時不自功

비하자면 알을 품은 암탉과 같아 / 譬如鷄伏卵

아득한 그 가운데 말없이 되는 법 / 默化窅冥中

미약한 양()은 겨우 실낱 같고 / 微陽僅如線

초승달은 영락없이 활 모양이네 / 初月又似弓

아무리 눈 밝은 이루가 있고 / 雖有離婁明

귀 밝은 사광이 온달지라도 / 復使師曠聰

그 기미를 듣고 보기 어려운 것은 / 其幾難聞覩

혼돈에서 비롯된 갈라짐이기 때문 / 判別肇鴻濛

사사로운 지력(智力) 따위 어찌 용납이 되리 / 寧容智力私

천지조화의 공평함을 예서 보는걸 / 乃見運化公

창의 해그림자 책력(冊曆)을 대신하는데 / 窓晷代曆日

물시계를 시험해서 무엇 하리오 / 何用驗漏筒

네 부디 밝은 덕을 숭상하여라 / 願君崇明德

일신의 효험을 차츰 보게 되리라 / 漸看日新工

 

 

 

[C-001]이생(李生) : 이본들에는 이현겸(李賢謙)’이라 밝혀져 있다. 정조 2(1778)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갓 이거(移居)한 연암은 그전에 잠시 개성(開城) 금학동(琴鶴洞)에 있던 양호맹(梁浩孟)의 별장에 머물면서 개성의 청년 문사들을 가르쳤는데, 그중 이현겸은 그 지역에서 문학으로 가장 명성이 높던 청년이었다. 연암이 금학동 별장으로부터 연암협으로 돌아오자, 이현겸 등도 따라와 글을 배웠는데, 이 시는 그때 지은 작품으로 추정된다. 過庭錄 卷1

[D-001]부처 : 원문은 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02]()이 처음 자라나는 : 동짓날은 일양시생(一陽始生)이라 하여, 음이 극에 달하여 양이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날이라고 한다.

[D-003]대학(大學) : 원문의 증전(曾傳)’은 증자(曾子)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한 것,  대학을 가리킨다.

[D-004]이루(離婁) : 고대 중국에서 눈이 몹시 밝았다는 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 아래의 사광(師曠)은 춘추 시대 진() 나라의 유명한 맹인 악사(樂師), 역시 맹자의 같은 편에 나온다.

[D-005]일신(日新) : 대학 명덕을 밝히라明明德는 말씀에 이어 탕() 임금의 반명(盤銘)을 인용하여 진실로 날로 새롭게 되려면, 나날이 새로 하고, 또 날로 새로이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산행(山行) ‘산전갈이山耕로 된 데도 있다.

 

 

이랴저랴 소몰이 소리 구름 속에 들리고 / 叱牛聲出白雲邊

하늘 찌른 푸른 봉우리엔 비늘같이 밭골 즐비하네 / 危嶂鱗塍翠揷天

견우직녀 왜 구태여 까막까치 기다리나 / 牛女何須烏鵲渡

은하수 서쪽 나루 달이 걸려 배 같은데 / 銀河西畔月如船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거(移居)

 

 

관도 주변으로 집을 옮기니 / 移家官道下

하루 내내 행인 구경 하누나 / 盡日看行人

가는 자가 오는 자를 맞는가 하면 / 去者逢來者

앞사람 발자취가 뒷사람 발자취를 잇대는구려 / 前塵接後塵

이 길을 말미암아 천리를 가노라고 / 由玆千里適

인생 백년의 몸이 늙어 버리는데 / 老彼百年身

 원문 빠짐  / □□□□□

딴 길을 따르는 사람을 도리어 가엾어하네 / 還嗟異所循

 

 

[D-001]관도(官道) : 조선 정부에서 만든 간선도로로, 한양을 기점으로 전국에 10대 간선도로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노군교(勞軍橋)

 

 

어옹노래 초부타령 영웅이 몇이더뇨 / 漁歌樵唱幾英雄

날고 뛰는 싸움 공격 패기도 없어졌네 / 戰伐飛騰伯氣終

옛날이라 어구(御溝)에 흐르는 물 어디 가고 / 昔日御溝流水盡

보리밭 묵정 속에 노군교만 남아 있네 / 勞軍橋在麥田中

 

 

[C-001]노군교(勞軍橋) : 개성 송악산 입암동(立岩洞)에 있던 다리 이름이다. 부근에 고려 왕궁 터가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운대(弼雲臺)의 꽃구경

 

 

나비의 꽃 희롱 하필 극성이라 나무라노 / 戲蝶何須罵劇顚

사람들 되려 나비 따라 꽃과 인연 맺으려 달려가네 / 人還隨蝶趁芳緣

아지랑이 뜬 저 너머에 한낮의 봄은 새파랗고 / 春靑晝白遊絲外

길엔 붉은 먼지 자욱하고 마실 풍경 드설레네 / 井哄烟喧紫陌前

새 울음 각각인 건 제 뜻대로라지만 / 各各禽啼容汝意

도처에 꽃이 핀 건 저 하늘 뜻대로지 / 頭頭花發任他天

명원(名園)에 앉아 둘러보니 소년들 하나 없고 / 名園坐閱無童髦

머리 허연 노인들만 작년과 달라진 게 서글프네 / 白髮堪憐異去年

 

 

[C-001]필운대(弼雲臺) : 한양 경복궁 서쪽 인왕산의 필운동에 있던 명승지이다.

[D-001]명원(名園) …… 서글프네 : 이 두 구절이 원문에는 이라고 되어 있으나,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 의거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강가에 살며

 

 

푸른 나무 그늘 짙고 짙어 산비둘기 까치 새끼 놀고 / 鳴鳩乳鵲綠陰垂

돛대 머리에 돛 날리네 조운선(漕運船) 올라올 때 / 亂颿檣頭漕上時

강가 누각에서 졸고 나니 하나도 일이 없어 / 江閣罷眠無一事

박태기나무 꽃 아래에서 당시(唐詩)를 베낀다오 / 紫荊花下錄唐詩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압록강을 건너 용만성(龍灣城)을 돌아보다

 

 

손바닥만 한 외론 성에 빗발이 어지럽고 / 孤城如掌雨紛紛

갈대 억새 아득아득 변방 해는 어둑어둑 / 蘆荻茫茫塞日曛

먼 길 나선 말 울음 쌍나팔에 어울리고 / 征馬嘶連雙吹角

고향 산은 점점 희미하게 만겹 구름에 감싸였네 / 鄕山渲入萬重雲

용만이라 군리들은 모래톱에서 돌아가고 / 龍灣軍吏沙頭返

압록강에서 새와 물고기도 물 사이에서 나눠지네 / 鴨綠禽魚水際分

고국 소식 담은 편지 예서부터 끊어지니 / 家國音書從此斷

가없는 저 벌판으로 고개 돌려 어이 들리 / 不堪回首入無垠

 

 

[C-001]압록강을 …… 돌아보다 : 용만(龍灣)은 의주(義州)를 말한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정조 4(1780) 6 24일 조에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며

 

 

요양(遼陽) 가는 만리 길에 누워서 생각하니 / 臥念遼陽萬里中

예 이제 강과 산에 영웅이 몇이더뇨 / 山河今古幾英雄

이적이 도호부(都護府) 설치한 곳엔 나무들 잇대었고 / 樹連李勣曾開府

동명왕 살던 궁궐 구름에 뒤덮였네 / 雲壓東明舊住宮

날고 뛰는 싸움 공격 강물과 함께 흘러가버렸고 / 戰伐飛騰流水盡

어부와 나무꾼 태평세월 노래하니 석양만 쓸쓸하이 / 漁樵問答夕陽空

출새곡(出塞曲) 노래하다 취한 김에 웃어 대니 / 醉歌出塞歌還笑

머리 하얀 한낱 서생 바람으로 머리를 빗질하겠구나 / 頭白書生且櫛風

 

 

[C-001]구련성(九連城)에서 노숙하며 : 열하일기 도강록 6 24 · 25일 조에 관련 기사가 있다. 구련성은 압록강 너머 30리 거리에 있었다.

[D-001]이적(李勣) …… 곳엔 : 668년 당() 나라 고종(高宗)은 장수 이적을 시켜 고구려를 정벌케 했다. 이적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D-002]동명왕(東明王) 살던 궁궐 :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을 가리킨다. 연암은 구련성이 곧 예전의 국내성일 것으로 보았다.

[D-003]출새곡(出塞曲) : 국경의 요새를 거쳐 외국으로 나갈 때 불렀다는 악부(樂府) 횡취곡(橫吹曲)의 이름이다. 중국의 한() 나라 초부터 불려졌다고 하며, 당 나라 때 두보(杜甫) 등 유명한 시인들이 가사를 지었다.

[D-004]머리 …… 빗질하겠구나 : 바람으로 머리를 빗질하고 비로 머리를 감는다는 뜻의 즐풍목우(櫛風沐雨)’는 갖은 고생을 하며 바삐 돌아다니는 경우에 쓰는 표현이다. ‘머리 하얀 한낱 서생은 연암이 자신을 자조적(自嘲的)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통원보(通遠堡)에서 비에 막히다

 

 

변방에 비 주룩주룩 그칠 줄 모르니 / 塞雨淋淋未肯休

어명 받든 사신들 행차 길이 막혔구려 / 皇華使者滯行輈

예로부터 유세(遊說)하기를 소의 꼬리 되는 게 부끄럽다는데 / 遊談從古羞牛後

마두들만 믿고 있는 일행들이 가엾구려 / 眷屬還憐恃馬頭

취한 속에 바라보아도 내 나라가 아니로세 / 醉裏相看非故國

어느 시대 세상인지 초가을이 또 왔구려 / 人間何世又新秋

앞 강에 배 없다 기별이 전해 오니 / 前河報道闕舟楫

긴긴 날 지루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 長日無聊那可由

 

 

[C-001]통원보(通遠堡)에서 비에 막히다 : 열하일기 도강록 7 2일 조에 관련 기사가 있다. 6 29일 통원보에 도착한 조선 사행(使行) 7 1일부터 큰비를 만나 그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7 2일에도 앞 계곡에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다는 보고를 받고 계속 체류하게 되었다.

[D-001]예로부터 …… 부끄럽다는데 : 중국 전국 시대의 유세가인 소진(蘇秦)이 한() 나라 선혜왕(宣惠王)에게 진() 나라에 신복(臣服)하지 말도록 설득하면서 닭의 머리가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 말라.寧爲鷄口 無爲牛後는 속담을 인용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史記 卷69 蘇秦列傳 앞장서지 못하고 낙후함이 부끄럽다는 뜻이다.

[D-002]마두(馬頭) : 중국 사행길을 수행하는 하천배의 하나로 말을 모는 일을 담당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요동(遼東) 벌판을 새벽에 지나며

 

 

요동 벌판 어느 제나 끝이 날는지 / 遼野何時盡

열흘 내내 산이라곤 보지 못했네 / 一旬不見山

새벽 별은 말 머리 위로 솟아오르고 / 曉星飛馬首

아침 해가 논밭에서 솟아나누나 / 朝日出田間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동관(東關)에서 유숙하다

 

 

앞 계곡에 물이 불어 수레를 또 멈추니 / 前溪水漲又停車

난간에 기대어 어쩔거나 외칠밖에 / 只得憑欄喚奈何

어린 시절부터 중국 일을 글에서만 읽었더니 / 自幼讀書中國事

이로부터 대방가의 풍속을 보겠구려 / 從玆觀俗大方家

예나 지금이나 오가는 비와 구름 여름 겨우 지났는데 / 雨今雲古纔經夏

조삼모사(朝三暮四) 이 아니랴 강물을 몇 번이나 건넜던고 / 暮四朝三幾渡河

 원문 빠짐  / □□□□□□□

 원문 빠짐  / □□□□□□□

 

 

[D-001]이로부터 …… 보겠구려 : 장자(莊子) 추수(秋水)에서 강의 신인 하백(河伯)은 가을에 비가 많이 내려 황하(黃河)가 불어난 것을 보고 크게 자부심을 느꼈다가, 황하가 흘러든 북해(北海)가 아득하게 넓은 것을 보고는 자신의 식견이 좁았던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바다의 신인 해야(海若)에게 나는 길이 대방지가(大方之家)의 웃음거리가 되겠구려.”라고 말했다. 대방지가는 대도(大道)를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 시에서는 대국(大國)인 중국에서는 조선과 달리 비가 한번 왔다 하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물이 엄청나게 불어난다는 뜻으로 그와 같은 표현을 쓴 듯하다.

[D-002]원문 빠짐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필사본에는 원문이 빠진 곳에 결구(缺句) 표시를 하고 그 아래에, “어떤 본에는 절하느라 이마에 진흙 묻힌 꼴을 보고 웃었더니, 되려 날 보고 웃긴 왜 웃나我政笑君泥點額, 君還向我笑甚麽로 되어 있다.”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문 빠짐 절구 한 수를 읊다

 

 

머리 하얀 서생이 황경(皇京)을 들어가니 / 書生頭白入皇京

의복 차림 의연히 하나의 노병(老兵)일레 / 服着依然一老兵

말을 타고 또다시 열하를 향해 가니 / 又向熱河騎馬去

공명(功名)에 나아가는 가난한 선비 같네 / 眞如貧士就功名

 

 

[C-001]절구 한 수를 읊다 : 어떤 이본들에는 이 시의 제목이 熱河途中으로 되어 있다. 열하일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 의하면 연암은 정조 4 8 5일 북경에서 열하로 출발하였다.

[D-001]머리 하얀 : 원문은 頭白인데, 어떤 이본들에는 白首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원문 빠짐  말 위에서 구호(口號)하다 피서록(避暑錄)에 보인다.

 

 

푸른 깃에 은정자(銀頂子) 모자 쓰니 이야말로 무부(武夫) 같네 / 翠翎銀頂武夫如

요양(遼陽)이라 천리 길 사신 수레 뒤따랐소 / 千里遼陽逐使車

중국에 한번 들어온 뒤 호칭 세 번 바뀌었으니 / 一入中州三變號

좀스러운 선비들은 예로부터 물고기 벌레 따위나 배우는 법 / 鯫生從古學蟲魚

 

 

[C-001]구호(口號) : 입에서 나오는 대로 즉흥적으로 읊었다는 뜻이다. 또한 그렇게 지은 시를 구호라고 한다.

[D-001]호칭 세 번 바뀌었으니 : 연암 자신처럼 아무런 직임을 띠지 않고 사행길을 따라가는 자를 국내에서는 밴댕이盤當와 음이 같은 반당(伴當), 중국에서는 새우 : 무부武夫라는 뜻, 가오리(哥吾里 : 고려高麗라는 뜻)라고 부르는 것을 빗대어서 말한 것이다.

[D-002]좀스러운 ……  : 추생(鯫生)은 식견이 얕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고, 충어(蟲魚)를 배운다는 것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면서 벌레나 물고기의 명칭과 같은 자질구레한 지식들을 추구하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이 시에서는 연암 자신이 사행 길에 밴댕이, 새우, 가오리 등으로 불린 것을 스스로 풍자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운대(弼雲臺)에서 살구꽃 구경하며

 

 

석양이 갑자기 넋을 거두어들이니 / 斜陽倏斂魂

위는 밝고 아래는 그윽하고 고요해 / 上明下幽靜

꽃 아래 노니는 하고한 사람 / 花下千萬人

옷과 수염 저마다 볼 만하네 / 衣鬚各自境

 

 

[D-001]넋을 거두어들이니 : ‘斂魂은 원래 죽은 이의 넋을 모은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석양이 지면서 어두워졌다는 뜻으로 쓰인 듯하다. 황혼을 염혼(斂昏)이라고도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절구 네 수 제목 없음. 연경에 들어가는 사람을 송별한 때이거나 연경에 가면서 지은 잡영(雜咏)인 듯하다.

 

 

먼 길 나선 옷차림 월 나라 비단 치마로 갈아입었으니 / 征裙換盡越羅裳

강서(江西)의 문란(文蘭)으로 여점(旅店) 가득 향기롭네 / 江右文蘭滿店香

오직 조선에만 그 슬픈 사랑 이야기 글로 엮어 전해졌나니 / 唯有東韓編艶史

쓸쓸한 진자점(榛子店) 성벽 석양을 띠었구려 / 城寒榛子帶斜陽

 

화려한 집의 닭 울음소리 늘어진 버들처럼 길어라 / 金屋鷄聲似柳長

배신이 응대한 말 이제껏 향기롭네 / 陪臣牙頰至今香

노구교 새벽달은 상기도 맑고 고운데 / 蘆溝曉月涓涓在

심양왕의 만권당을 어느 뉘 알리 / 誰識瀋王萬卷堂

 

육왕(六王)을 겨우 끝장내자 한 철퇴가 날아드니 / 六王纔畢一椎來

산신(山神)은 소리 없고 백옥만 애처롭네 / 尾蔗閒談推第一 / 山鬼無聲白璧哀

미자한담에서 그를 당세 제일의 재사(才士)라 추앙하니

원매(袁枚) 같은 사람 중국에 몇이더뇨 / 幾人中土似袁枚

 

난하(灤河)의 맑은 모래 외로운 저 섬 속에 / 灤水沙晴島嶼孤

신세 좋은 해오라기는 티끌 한 점 안 묻었네 / 鵁鶄身世一塵無

백이(伯夷) 숙제(叔齊) 사당 아래 서글피 섰노라니 / 夷齊祠下悄然立

서희(徐熙)처럼 몰골도를 그리고 싶어지네 / 欲寫徐熙沒骨圖

 

 

[C-001]연경에 …… 듯하다 : 네 수 모두 연행 도중에 지은 시임이 분명하다.

[D-001]먼 길 …… 갈아입었으니 : 청 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강서성(江西省) 출신으로 수재(秀才) 우상경(虞尙卿)의 젊은 아내였던 계문란(季文蘭)은 남편이 만주족에게 피살당하고 자신은 납치되어 심양(瀋陽)으로 팔려 가면서, 산해관(山海關) 밖 진자점(榛子店)의 벽에다 구원을 호소하는 칠언절구 1수를 남겼다. 열하일기 피서록에 그 시의 전문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시구는 그 시의 둘째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D-002]오직 …… 전해졌나니 : 1683년 사신으로 갔던 김석주(金錫冑)가 처음 계문란의 시를 기록하여 돌아왔고, 息菴集 그 이듬해 남구만(南九萬)도 그 시를 보았다고 했으며, 1712년 김창업(金昌業)도 그 시를 보고 차운한 시를 남겼다. 老稼齋燕行錄 그 이후 연행(燕行)에 나선 조선 문사들은 진자점을 지날 적마다 계문란의 고사를 회상하면서 시를 짓곤 하였다.

[D-003]화려한 …… 길어라 : 고려 때 충선왕(忠宣王)은 원() 나라 수도에서 만권당(萬卷堂)이란 서실을 짓고 기거하면서 조맹부(趙孟頫) 등 저명한 문사들과 교제했는데, 하루는 충선왕이 닭 울음소리가 문 앞의 버드나무 같네.鷄聲恰似門前柳라는 시구를 지었으나, 중국 문사들이 그 출처를 묻는데 답을 하지 못했다. 이때 왕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고려 사람의 시에 해 돋는 지붕 위로 금계가 우는데, 늘어진 버들처럼 간들간들 길어라.屋頭初日金鷄唱 恰似垂柳裊裊長라는 구절이 있다고 응대하여 온 좌중의 감탄을 샀다고 한다. 淸脾錄 卷1 鷄聲似柳 충선왕은 원 나라에 있을 때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다.

[D-004]배신(陪臣) : 이제현을 가리킨다. 제후(諸侯)의 신하는 천자에 대하여 신하의 신하가 된다는 뜻으로 배신이라 부른다.

[D-005]노구교(蘆溝橋) : 연경(燕京)의 광안문(廣安門) 서쪽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D-006]육왕(六王) …… 애처롭네 : 청 나라 건륭(乾隆) 때 시인 원매(袁枚 : 자 자재子才, 호 수원隨園)가 진 시황(秦始皇) 때의 역사를 노래한 회고시(懷古詩) 박랑성(博浪城)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육왕(六王)은 전국 시대의 6국인 제() · () · () · () · () · ()의 왕을 가리킨다. ‘한 철퇴가 날아드니는 장량(張良)이 박랑사(博浪沙)에서 진 시황을 철퇴로 저격하려다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산신은 소리 없고 백옥만 애처롭네라고 한 것은 진 시황 36년에 어떤 신령스러운 사람이 진 시황의 사자(使者) 앞에 나타나 벽()을 주면서 진 시황의 죽음을 암시하는 예언을 하고 사라진 사건을 말한다. 이를 보고받은 진 시황은 산신은 본래 한 해의 일을 아는 데 불과하다고 짐짓 무시했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55 留侯世家 원매의 박랑성 시는 열하일기 피서록에 전문이 소개되어 있다.

[D-007]미자한담(尾蔗閒談)에서 …… 추앙하니 : 미자(尾蔗)는 사탕수수甘蔗를 맛이 쓴 뿌리부터 먹는다는 뜻으로 점입가경(漸入佳境)을 말한다. 청 나라 건륭 때 시인 이조원(李調元 : 호 우촌雨村)은 원매를 당세 제일의 재사(才士)라고 칭송하면서 자신의 미자헌한담(尾蔗軒閒談)에서 그에 관한 일을 기록했노라고 하였다. 淸脾錄 卷4 袁子才 이조원이 편집한 함해(函海) 미자총담(尾蔗叢談) 4권이 수록되어 있다.

[D-008]육왕(六王) …… 몇이더뇨 :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이 제 3 수만을 회증원수원(懷贈袁隨園)이란 제목을 붙여 수록해 놓았다. 그러나 연암과 원매 간에는 아무런 교분이 없으므로 적절한 제목이라 하기 어렵다.

[D-009]난하(灤河) …… 묻었네 : 이덕무의 청비록(淸脾錄) 3 연암조(燕巖條)에도 이 두 시구가 소개되어 있다. 단 첫 구 중의 灤水沙淸 水碧沙明으로 되어 있다. 박종채의 과정록(過庭錄) 4에도 이 시구를 소개한 대동소이한 기사가 있다.

[D-010]몰골도(沒骨圖) : 묵필(墨筆)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곧바로 채색한 그림을 말한다. 서희는 오대(五代) 말기에서 송() 나라 초기의 저명한 화가로 몰골도의 기법을 개발하였다.

[D-011]난하(灤河) …… 싶어지네 : 열하일기 일신수필 7 26일 조에 영평부(永平府)에서 출발하여 난하를 건너 이제묘(夷齊廟)를 들렀다고 기록되어 있고, 따로 이제묘기(夷齊廟記)와 난하범주기(灤河泛舟記)가 수록되어 있다. 연암은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강가에 살며 멋대로 읊다

 

 

우리 집 문밖은 바로 서호(西湖) 나루 근처 / 我家門外卽湖頭

쌀 사려 소금 사려 몇 곳의 배들이냐 / 米鬨鹽喧幾處舟

가을 기러기 한번 울자 일제히 닻을 올리고 / 霜鴈一聲齊擧矴

강에 가득 밝은 달 비추일 때 금주로 내려가네 / 滿江明月下金州

 

 

[D-001]서호(西湖) : 한양의 서강(西江)을 말한다. 한강의 마포(麻浦) 나루로 흘러드는 하천으로, 조운(漕運)의 한 중심지였다.

[D-002]금주(金州) : 한강 입구의 김포(金浦)를 금주 또는 금릉(金陵)이라 불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연암(燕岩)에서 선형(先兄)을 생각하다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고 / 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 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드메서 본단 말고 / 今日思兄何處見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 自將巾袂映溪行

 

 

[C-001]연암(燕岩)에서 …… 생각하다 : 정조 11(1787)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이 향년 58세로 별세하여 연암협(燕巖峽)의 집 뒤에 있던 부인 이씨 묘에 합장하였다.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 過庭錄 卷1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태화(洪太和)의 비성아집(秘省雅集) 시에 차운하다

 

 

첫가을 맑은 잔치 난향(蘭香)이 상쾌한데 / 新秋淸讌洒蘭薰

밥상 받은 여러 님은 효반(皛飯)과 취반(毳飯)으로 나뉘었네 / 會飯群公皛毳分

영지(靈芝) 돋은 늙은 나무 옛 비를 간직했고 / 老樹蒸芝藏舊雨

 

어떤 본에는 장맛비를 머금고含積雨로 되어 있다. /

신기루 같은 먼 누각 무너지는 구름을 부축하고 있네 / 遙樓學蜃擁頹雲

시마(詩魔)에 홀렸다는 비웃음이 뒤따르고 / 詩魔邂逅從他笑

 

자주(自註) : 차수(次修 : 박제가朴齊家의 자)가 내 시를 보고 시마에 홀린 것이 아닙니까?” 하니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용의 뿔 우뚝하게 그렸노라

 

어떤 본에는 허겁지겁 수묵화를 그렸노라墨畵蒼茫로 되어 있다.

반쯤 술이 취한 김에 / 龍角崢嶸倚半醺

 

자주 : 태화가 종이를 펴고 나더러 용을 그려 달라고 떼를 쓰기에 내가 비늘과 뿔을 대충 그리고 먹을 뿌려 보았다.

귀밑털에 서리 내린 이래로 기사(耆社)에 들기 넉넉하니 / 霜鬢由來優入社

북산에서 이문(移文)을 보내오진 않겠구먼 / 北山應不便移文

 

 

[C-001]홍태화(洪太和) …… 차운하다 : 태화(太和)는 홍원섭(洪元燮 : 1744~1807)의 자이다. 홍원섭은 충주 목사를 지냈으며 고문(古文)을 잘 지었다. 그의 문집 태호집(太湖集)에 비성아집첩전운(秘省雅集疊前韻)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시에 붙인 소주(小註)에 연암과 이덕무 · 박제가 · 유득공 · 성대중(成大中) 등과 함께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비성(秘省)은 비서성(秘書省) 즉 규장각(奎章閣)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을 가리킨다. 정조 15(1791) 7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가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병지(兵志)를 편찬할 때 성대중이 마침 교서관에 숙직하자 홍원섭과 박지원 등이 함께 모여 시를 지었다고 한다. 貞蕤詩集 卷3 辛亥七月同靑莊泠菴奉命纂輯國朝兵事開局於秘省而靑城適就直太湖燕巖玉流諸公偶集

[D-001]효반(皛飯)과 취반(毳飯)으로 나뉘었네 : 소식(蘇軾)과 전협(錢勰) 간의 해학적인 일화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전협이 소식에게 편지를 보내 효반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가 보니 밥 한 사발, 무 한 접시, 백탕(白湯) 한 그릇뿐이었다. 세 가지가 모두 백색(白色)이라고 효반이라 한 것이었다. 며칠 뒤 소식은 전협에게 편지를 보내 취반을 대접하겠노라고 했는데, 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 ()’와 통하므로,  ·  · 백탕 세 가지가 모두 없다는 뜻으로 취반이라 한 것이었다. 高齋漫錄 여기서는 차려진 음식이 변변치 않았음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D-002]차수(次修) …… 웃었다 : 평소 시를 즐겨 짓지 않던 연암이 모처럼 시를 지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농담을 한 것이다.

[D-003]기사(耆社) : 기로소(耆老所)를 말한다. 70세 이상의 고관들을 예우하기 위한 경로(敬老) 기관이었다.

[D-004]북산(北山)에서 …… 않겠구먼 : 북산은 중국의 종산(鍾山)을 가리키며 남경(南京)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북산이라 한다. 이문(移文)은 관부 문서의 일종으로 격문(檄文)과 비슷하며 어떤 대상을 성토하는 글이다. 남조(南朝) 때에 주옹(周顒)이 북산에 은거하다가 나중에 불려 나가 해염 영(海鹽令)이 되었는데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들어오다 다시 북산을 지나게 되었다. 이에 공치규(孔稚珪 : 447~501)가 북산의 산신(山神) 이름을 빌려 사이비 은사(隱士)인 그를 성토하였다. 文選 北山移文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재실(齋室)에서 제릉 영(齊陵令)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한두 잔 막걸리로 혼자서 맘 달래노라 / 淺酌村醪獨自寬

백발이 성글성글 탕건 하나 못 이기네 / 蕭蕭霜髮不勝冠

천년 묵은 나무 아래 황량한 집 / 千年樹下蒼涼屋

한 글자 직함 중에서도 쓸데없이 많은 능관(陵官)일레 / 一字啣中冗長官

맡은 일 시시하여 신경 쓸 일도 적지마는 / 都付鼠肝閒計小

그래도 닭 갈비처럼 버리기 아깝구려 / 猶將鷄肋快抛難

만나는 사람마다 지난겨울 괴로웠다 말하는데 / 逢人盡說前冬苦

나는 마침 재실에서 되려 추운 줄 몰랐다네 / 最是齋居却忘寒

 

 

[C-001]제릉 영(齊陵令)으로 …… 것이다 : 1790(정조14) 연암은 경기도 개풍군(開豐郡)에 있는 태조비(太祖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을 관리하는 제릉 영으로 임명되어 그 이듬해까지 재직하였다. 작품 중에 겨울 추위를 겪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시는 1791(정조15)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D-001] …… 능관(陵官)일레 : ()은 사온서 · 평시서 · 사직서 · 종묘서 · 소격서 · 의영고 · 장흥고 등과 각 전(殿) 및 능()의 우두머리 벼슬로 종 5 품이었다. 그중에서도 능을 지키는 능관(陵官)이 가장 많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술을 조금 마시다

 

 

새소리는 여리고 느리게 문 앞에서 들리고 / 禽聲當戶緩

꽃 그림자 천천히 섬돌을 올라오네 / 花影上階遲

손자를 본 날이라 술 맛이 더욱 진하고 / 酒重添丁日

관직을 벗은 때라 몸이 가볍네 / 身輕解紱時

묵은 취반(毳飯)은 넉넉하고 / 三毛贏舊飯

양쪽 귀밑털에 새 흰머리 빛나누나 / 雙鬢耀新絲

고요한 속에 도로 일거리 찾노니 / 靜裡還尋事

남을 위해 만시(輓詩)를 쓰는 거로세 / 爲人寫輓詩

 

 

[C-001]술을 조금 마시다 : 국립중앙도서관 및 영남대 필사본에는 때는 병진년(1796) 봄으로, 안의 현감(安義縣監)에서 해임되어 돌아왔는데, 어린 손자가 태어난 지 겨우 수일이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만시(輓詩)를 청하였다.時丙辰春 解安義宰歸 小孫生才數日 又有人請輓는 소주(小註)가 있다.

[D-001]손자를 본 날이라 : ‘첨정(添丁)’은 아들이나 손자가 태어난 것을 뜻한다. 아들이나 손자를 낳음으로써 나라를 위해 역역(力役)에 복무할 장정(壯丁)을 추가했다는 뜻이다.

[D-002]관직을 벗은 때라 : ‘해불(解紱)’은 수령이 차는 도장의 끈을 풀었다는 뜻으로, 관직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D-003]취반(毳飯) : () 삼모(三毛)’는 삼무(三無)와 같은 뜻으로 극히 보잘것없는 음식을 말한다. 소식(蘇軾)과 전협(錢勰) 간의 해학적인 일화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전협이 소식에게 편지를 보내 효반을 대접하겠다고 했는데, 가 보니 밥 한 사발, 무 한 접시, 백탕(白湯) 한 그릇뿐이었다. 세 가지가 모두 백색(白色)이라고 효반이라 한 것이었다. 며칠 뒤 소식은 전협에게 편지를 보내 취반을 대접하겠노라고 했는데, 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 () ()’와 통하므로,  ·  · 백탕 세 가지가 모두 없다는 뜻으로 취반이라 한 것이었다. 高齋漫錄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구일날 맹원(孟園)에 올라 두목(杜牧)의 시에 차운하다

 

 

백발노인이 어찌 걸음 날래다 뽐낼쏜가 / 霜鬢爭誇步屧飛

삼청동(三淸洞) 구름 낀 숲은 바라봐도 아득하이 / 三淸雲木望中微

얼큰히 취한 내 얼굴은 단풍잎과 어떠한지 묻노라 / 半酣爲問楓何似

늘그막엔 두말 말고 국화와 절조를 함께해야지 / 晩節眞堪菊與歸

송동에서 화전(花煎) 부치며 옛일을 읊조리고 / 宋洞花餻吟古事

맹원에서 풍모 쓰고 가을 햇빛을 사랑하노라 / 孟園風帽媚秋暉

늙어 쇠했으나 금년에도 건재하니 / 婆娑又得今年健

천길 산꼭대기에서 한번 옷자락을 털어 보세 / 千仞岡頭試振衣

 

자주 : 이에 앞서 송동(宋洞)에 모여 화전을 부쳐 먹고 높은 곳에 오르자 약조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유몽득(劉夢得)이 구일시(九日詩)를 지으면서 ()’ 자를 쓰려고 했으나 오경(五經) 중에 없는 글자라 하여 걷어치우고 더 이상 짓지 않았다. 그리하여 송자경(宋子京)의 시에 유랑(劉郞)도 과감하게  자 운을 못 썼으니, 한세상 시호(詩豪)란 말 속절없이 저버렸네.劉郞未敢題餻字 空負詩中一世豪라고 하였다.

 

 

시는 고체(古體)와 금체(今體) 도합 42수이다. 아버님이 본시 시인으로 자처하지 아니하여 남과 더불어 창수(唱酬)한 것이 극히 드물었으며, 보통 요구에 응해 지은 작품들도 상자에 남겨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작품 제목이 몹시 적다. 게다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는 것을 수집한 시가 많으므로 중간에 빠지고 확정하지 못한 곳이 꽤 있으나, 삼가 평소의 뜻을 좇아 문편(文編)의 끝에 붙여 둔다. 구고(舊稿) 영대잡영(映帶雜咏)’이라는 편제(編題)가 있으므로 지금 그대로 답습한다.

아들 종간(宗侃 박종채의 초명(初名))이 삼가 쓰다.

 

[C-001]구일날 …… 차운하다 : 구일날은 음력 9 9일 중양절(重陽節)을 가리킨다. () 나라 때 맹가(孟嘉)가 용산(龍山)에 올라 바람에 모자를 떨어뜨렸다는 고사로 인해 중양절에는 높은 곳에 올라 모자를 떨어뜨리는 풍류가 생겼다. 맹원(孟園)은 한양 가회방(嘉會坊 : 지금의 가회동) 북쪽에 있던 높은 고개인 맹현(孟峴)을 가리킨다. 연암이 차운했다는 두목(杜牧)의 시는 구일제산등고(九日齊山登高)이다.

[D-001]풍모(風帽) : 추위와 바람을 막는 방한모를 말한다.

[D-002]한번 옷자락을 털어 보세 : 맑은 바람에 옷의 먼지를 털어 보자는 뜻이다. 초사(楚辭) 어부(漁父)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모자의 먼지를 털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지를 터는 법이다.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하였다.

[D-003]유몽득(劉夢得) : 몽득(夢得)은 당 나라 유우석(劉禹錫 : 772~842)의 자이다.

[D-004]송자경(宋子京) : 자경(子京)은 송 나라 송기(宋祁 : 998~1061)의 자이다. 인용된 시구는 송기의 구일식고(九日食餻)의 후반부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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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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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4]

41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42 순찰사에게 답함

43 순찰사에게 올림

44 순찰사에게 답함

45 순찰사에게 올림

46 순찰사에게 올림

47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48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49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50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51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52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53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이 감사(李監司) 서구(書九) 가 귀양 중에 보낸 편지에 답함

 

초가을에 집의 아이 혼인을 치르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중씨(仲氏) · 계씨(季氏) 두 분 진사를 만날 수 있어 귀양살이 소식을 대략 들었지요. 내 비록 영해(寧海)를 보지는 못했지만, 추측건대 천하의 동쪽 끝에 처하여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마치 아교로 붙이고 실로 꿰맨 듯이 맞닿고, 낙지나 인어(人魚)뿐일 터이니 누구를 이웃으로 삼으리오? 임금의 은혜를 받잡고 자신의 허물을 반성할 따름이지요. 옛사람은 그래서 어디에 들어가도 스스로 뜻을 이루었던 것이니, 군자(君子 남에 대한 존칭)께서는 더욱 명덕(明德)을 높여 나가시기 바라오.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닥쳐오매, 바람은 높은 곳에서 불고 서리는 조촐히 내려 그리움이 한창 간절했는데, 뜻밖에 소곡(巢谷)에서 갑자기 친필 편지를 전해 올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는 묵은 학질이 또 발작하여, 이불을 포개 덮고도 추워서 떨며 숨을 몰아쉬고 있던 참이었는데, 편지를 받고는 이불을 걷어 젖히고 기쁨이 넘쳐 땀이 나면서, 등이 땅기던 것도 바로 그쳤답니다. 편지로 인하여 객지에서 신령의 가호로 건강히 지내심을 알게 되었으나, 어찌 한() 나라 대부(大夫)처럼 씩씩한 걸음으로 용감하게 갈 수 있으리오.

상자평(向子平)처럼 자녀의 혼사도 이미 다 치렀고, 도연명(陶淵明)처럼 집 정원에는 소나무와 국화가 아직도 그대로 있는데 어찌하여 오래도록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어 홀로 텅 빈 관아를 지키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매화가 아내처럼 다정스럽게 안방을 떠나지 아니하고, 또 작은 화분이 있어서 매화 화분을 따라와 그 시녀가 되었지요. 옛사람 중에는 파초를 벗한 이가 없는데, 나는 유독 파초를 사랑하지요. 줄기는 비록 백 겹으로 돌돌 말려 있지만 가운데가 본래 텅 비어 한번 잎을 펼치면 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이 때문에 나의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된 것이라오. 달 밝은 창이나 눈 내리는 창가에서 가슴을 터놓고 마음껏 이야기하니, 중산군(中山君)이 민첩하여 말없이 도망치는 것과는 같지 않소이다.

생각해 보면, 젊은 시절에는 식사할 때 이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딱딱한 것 연한 것 가리지 않고, 혀를 놀리기를 바람같이 하고 뺨을 불끈거리기를 우레같이 하면서도, 물고 뜯고 씹어 대곤 하는 것을 각자 맡은 것이 있는 줄을 전혀 깨닫지 못했지요. 그런데 최근 4년 사이에 잇몸 사이가 요란스럽게 모두 들썩이고, 시고 짜고 덥고 찬 것에 따라 각기 다른 통증이 나타나니, 잠시 뭘 마시고 씹으려 해도 먼저 조심하게 되는구려.

지난가을에 왼쪽 볼의 둘째 이가 갑자기 빠져 나가고, 오른쪽 볼의 셋째 어금니는 안쪽은 빠지고 겉만 간신히 걸려 있어서 마치 마른 나뭇잎이 나뭇가지에 연연하는 것과 같으니, 이야기하고 숨쉬는 사이에도 뒤집힌 채로 들락날락하여 잘그락잘그락 패옥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곤 한다오. , 이가 빠진 뒤에도 이는 남아 있지만, 남아 있는 이라 해서 어찌 진실로 내가 소유했다 할 수 있겠소이까.

아침 해가 떴을 때 창가로 가서 빠진 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뼈도 아니요 돌도 아닌 데다, 붙어 있는 뿌리가 너무나 옅어서 망치와 끌로도 단단히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대개 온몸의 힘과 원기가 그것들을 단속하고 다스릴 수 있었으나, 급기야 피와 살이 차츰 마르고 진원(眞元 원기)이 그것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되어서는, 예전에 나를 위하여 효능을 발휘했던 것들이 얼음 녹듯이 먼저 무너지고 마니, 예로부터 천하의 대세가 본디 대부분 이와 같지요. 내 이제 이 하나가 빠졌으나, 역시 또 어찌하겠소?

최근에 지은 졸작(拙作) 두어 편이 있기에, 이 편에 기록해 보내어 삼가 적막함을 위로하는 바이니 글을 바로잡아 주기를 망녕되이 바라오. 글에 대한 평어(評語)는 모두 중존(仲存 이재성)이 쓴 것이외다.

겨울 날씨가 봄같이 따뜻한데, 대감께서 더욱 조리 잘하시기만을 바라며, 나머지 많은 말은 우선 줄입니다.

 

 

[C-001]이 감사(李監司) …… 답함 : 정조실록에 의하면 전라 감사 이서구는 1795(정조 19) 6월 도내의 진휼(賑恤)을 실시한 고을에서 굶어 죽은 자들이 속출한 사건으로 인해 치죄를 당하고 경상도 영해부(寧海府)로 귀양 갔으며, 그해 11월 방면된 뒤 12월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었다.

[D-001]초가을에 …… 들었지요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 1795년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이서구에게는 아우로 경구(經九 : 1763~1818)와 소구(韶九 : 1766~1818)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1790년에 함께 진사 급제하였다.

[D-002]옛사람은 …… 것이니 : 중용장구  14 장에 군자는 환난에 처하면 환난 속에서 도를 행한다. 군자는 어디에 들어가도 스스로 뜻을 이룬다.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고 하였다.

[D-003]어찌 …… 있으리오 : 만나러 가기 힘들다는 뜻을 장취(張翠)의 고사를 이용하여 해학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 나라 대부(大夫) 장취는 초() 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진() 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러 사신으로 파견되었을 때, 병을 핑계 대고 날마다 하나의 현()만 행진하였다. 장취가 진 나라에 도착하니, 승상 감무(甘武) 한 나라가 급하긴 급하군요. 선생이 병든 몸으로 오시다니.”라고 하였다고 한다. 戰國策 韓策

[D-004]상자평(向子平)처럼 …… 치렀고 : 자평은 한() 나라 때의 고사(高士) 상장(向長)의 자이다. 상장은 자녀의 혼사를 다 치르고 나자, 다시는 가사(家事)를 묻지 않고 명산을 유람하러 떠나 그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D-005]도연명(陶淵明)처럼 …… 있는데 :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정원의 세 갈래 작은 길은 잡초가 우거졌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 있네.三徑就荒 松菊猶存라고 하였다.

[D-006]매화가 아내처럼 다정스럽게 : 원문은 梅妻卿卿인데, 매처(梅妻)는 송 나라 은사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고, 경경(卿卿)은 아내가 남편을 친근하게 부른다는 뜻으로 세설신어(世說新語) 중 왕안풍(王安豐)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부부가 금슬이 좋은 모양을 표현할 때 쓴다.

[D-007]아무런 꾸밈이 없으니 : 원문은 無表襮邊幅인데, 옷의 겉이나 가장자리를 꾸미지 않듯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D-008]중산군(中山君) ……  : 생각을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붓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산(中山)에 나는 토끼의 털로 만든 붓이 가장 좋다고 하여 이를 중산호(中山毫)라 한다. 한유(韓愈)의 모영전(毛穎傳)에 붓毛穎은 중산(中山) 사람이며, 그 조상 중에 준() 민첩하여 달리기를 잘한다狡而善走고 하였다. 또한 붓은 진 시황 때 중서령(中書令)으로까지 승진하여 황제와 더욱 친근했으므로, 황제가 그를 중서군(中書君)’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대범 살인 옥사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만, 이 옥사처럼 상리(常理)에 어긋난 것은 없었습니다. 형적이 의심되는 것은 정상으로써 헤아리고, 죄수의 말에 숨김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증인의 말을 참고하는 법이니, 옥사를 신중히 살피는 대체(大體)가 진실로 이에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옥사의 경우는, 정상으로 보면 죄수의 공초에 일컬은 바와 같이 친척 관계는 비록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지만 아버지로 부르고 자식으로 기른 처지였고, 형적으로 말하면 검시장(檢屍場)에서 증험된 바와 같이 곧바로 칼로 찔러서 피가 다하자 죽음이 뒤따른 것이었습니다. 죄수의 말은, 몹시 사랑하고 아끼는 사이로서 진실로 그의 방탕한 마음을 깨우쳐 주자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이고, 증인의 말은, 우물쭈물 횡설수설하는 가운데도 오히려 그자가 칼을 가졌다는 것은 숨기지 않았습니다. 정상과 형적을 참조하여 연구해 보아도 진실로 상리가 아니고, 죄수와 증인의 말을 되풀이해 따져 보아도 더욱 의혹만 생깁니다.

왜냐하면 당초에 판열(判烈)의 아비 조응붕(曺應鵬)이 그 처남 임종덕(林宗德)과 더불어 한 마을에서 수십여 년을 살아 왔는데, 살림이 모두 넉넉하고 서로간에 관계도 아울러 돈독한 처지였습니다. 판열이 어릴 때부터 그 외삼촌에게서 자랐으므로, 종덕은 판열을 자기 자식같이 보아서 그에게 훈계하고 독촉하기를 부지런히 했고, 응붕은 실지로 종덕의 앞에서는 판열이 자기 자식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판열이 장성하여 장가든 뒤로, 몇 년 전부터 주색에 빠져서 남의 꾐에 넘어가 종덕의 집 여종아이에게 현혹되어 정실을 소박놓고 무뢰배와 휩쓸렸습니다. 그 때문에 그 외삼촌만이 깊이 우려한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역시 밤낮으로 버릇을 고칠 방도를 생각하였으나, 다만 자식을 사랑하는 정이 지극하여 망나니 자식을 위엄으로 억제하지 못하다 보니 평소에 외삼촌보다 덜 무서워하고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판열을 손수 끌고 종덕에게로 함께 가서 잘못을 자복하도록 강요하면서 정신을 차리라고 맹렬히 꾸짖었던 것이니, 그날 사건의 원인은 이와 같은 데 불과했습니다. 종덕은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한 탓에 일에 임하여 어려워할 줄 모르고, 함부로 가장으로 자처하고 엄준한 역할을 자임하다가, 갑자기 패악한 행동을 저질러 스스로 흉악한 짓을 한 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아, 부자간에 책선(責善)하는 것도 오히려 크게 경계하는 바인데, 하물며 외삼촌과 조카 사이에 은의(恩義)를 상한다는 것은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이가 죄를 지었으면 회초리로 때리면 그만이지 어찌 잔인하게 칼로써 위협하며, 사랑할진댄 살리고 싶은 법인데 어찌하여 죽는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 옥사는 죄수와 증인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형적을 가지고서 정상을 따진다면,  이하 원문 빠짐 

 

 

[C-001]순찰사에게 답함 : 목록에는 편지의 제목이 함양의 옥사에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論咸陽獄書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는 1792(정조 16)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 경상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부탁을 받아 도내의 의심스러운 옥사를 심리(審理)하면서 경상 감사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편지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그다음의 순찰사에게 올림도 마찬가지의 경위로 작성된 편지인 듯하다. 연암집 2 현풍현 살옥의 진범을 잘못 기록한 데 대해 순찰사에게 답함答巡使論玄風縣殺獄元犯誤錄書 등 이와 유사한 편지 4통이 수록되어 있다.

[D-001]부자간에 …… 바인데 : 맹자 이루 상(離婁上) 부자간에는 책선(責善)하지 아니하나니, 책선하면 사이가 벌어지고, 사이가 벌어지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이 없다.”고 하였다.

[D-002]이하 원문 빠짐 : 원문은 無 缺인데, ‘ 자는 결자(缺字)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지난번 정순기(鄭順己)의 의옥(疑獄) 사건으로써 직접 뵙고 아뢴 바 있었으나, 자세한 곡절은 다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대저 이 옥사는 실로 맹랑한 일에 속합니다. 당초에 재검(再檢)하여 옥사를 마무리할 사건이 아니었는데, 그때 겸관(兼官)이 도임한 지 수일 만에 갑자기 이 옥사를 당하자 겸읍(兼邑)의 하인들이 제멋대로 검시(檢屍)를 행하여, 상처가 어떠한지도 돌아보지 않고 자백과 증언의 유무도 헤아리지 않고서, 대강대강 옥안(獄案)을 갖춘 것이므로 이미 소홀하다는 탄식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검 때에 낙태라는 한 조목을 특별히 덧붙인 것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전임 순찰사 때에 그 원통한 실상을 살펴서 안 바 없지 않아, 특별히 관문(關文)을 보내 이치를 따져서 여러 추관(推官)들로 하여금 의견을 내어 보고를 올리게 한 것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옥사의 정황을 곰곰이 따져 보니 완성된 옥안과 저절로 어긋나서 역시 앞뒤가 모순되는 혐의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질질 끌어 온 것입니다. 이른바 원범(元犯)이라는 자는 그 생김새를 살펴보니, 평범하기 이를 데 없으며 지극히 순하고 용렬한 놈입니다. 해가 넘도록 옥에 갇혀 있는데 그동안에 부모는 다 죽고 아내도 또한 다른 데로 시집가 버렸으니, 비단 본 사건이 원통할 뿐만 아니라 인정상으로 또한 몹시 불쌍한데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습니다. 더더구나 지난겨울부터 감옥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그가 비록 사형수라 할지라도, 텅 빈 감옥에 홀로 둔 채로 돌보고 먹여줄 사람이 없어, 주림과 병이 잇달아 옥중에서 병사하고 말 것이니, 신중히 살필 것을 거듭 당부하는 것 외에는 역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방도가 어찌 있겠습니까. 사실을 낱낱이 들어 보첩(報牒 보고서) 속에 모두 기록하였으니, 재량하여 처리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 보첩의 초본

 

 

지금 이 옥사는 군수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에 생긴 것이어서, 검시에 참여하지 못했고 물어볼 만한 관련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초검과 복검의 검안(檢案)을 반복하여 따져 보니, 시친(屍親 피살자의 친척) 김한성(金汗成),

제 처 설운례(雪云禮)가 순기(巡己)와 싸움이 붙어 그자의 뺨을 갈기려 들자, 순기가 두 손으로 꽉 잡고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했는데, 3일 동안 앓아누웠다가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초 싸움이 벌어졌을 때에 저는 출타 중이라서 애당초 목격하지는 못했습니다.”

라고 공초하였고, 원범 정순기(鄭巡己)의 공초에는

 

설운례와 싸움이 붙었을 때 그 여자가 몽둥이를 가지고 달려들기에 두 손을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서로 버티고 있을 때 평소에 전혀 모르던 지나가는 사람이 힘껏 당겨서 양편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여 제 몸을 마구 내던지며 스스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지고 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공초를 보면 모두 말이 되지 않습니다. 시친이 비록 목격했다고 말할지라도 믿을 바가 못 되므로, 관련자들을 잡아다 조사하여 참고가 될 만한 증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가 이미 애당초 목격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진술했으니, 반드시 전해 들은 긴요한 증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증언을 한 자는 그의 아들인 일곱 살 난 아이에 지나지 않으며, 한성의 집이 산골짝에 외떨어져 있으니, 싸울 때의 광경과 두들겨 맞을 때의 경중(輕重)은 직접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다른 집의 일곱 살 난 아이라 할지라도 나이가 이미 차지 못하고 말이 자세하지 못하여 증인이 될 수 없는데, 하물며 딴 사람이 아니고 바로 그의 자식이고 보면 법으로 보아 당연히 물을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감히 증인으로 삼았으니 어찌 사리에 맞겠습니까.

원범에 대하여 논하자면, 둘이 서로 욕을 하다가 차츰 격해져서 몽둥이로 때리려 하였으니, 피해 달아나지 않으면 형세상 맞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장정인 그가 어찌 단지 그 여자의 두 손만 붙잡고 꼿꼿이 멍청하게 서 있었겠습니까. 머리채를 휘어잡고 발길질을 하는 것은 그렇게 아니 할 수 없는 바였습니다. 급기야 흉악한 짓을 한 몸이 되어 죄를 피할 수 없게 되어서는, 극구 발뺌하는데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당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어찌 말이나 될 법한 일입니까. 손을 붙잡고 때리지 못하도록 막을 때에 만류하여 떼 놓은 사람은 과연 누구였겠습니까? 전혀 모르던 지나가는 사람을 얼렁뚱땅 증인으로 삼았으니, 극히 교묘하고 악독한 일입니다. 이것이 자백과 증언이 갖추어지지 못하고 정상과 형적이 더욱 알 수 없게 된 까닭입니다.

비록 두 검안의 실인(實因 사망 원인)을 들어 논한다 해도, 뜬구름을 잡는 것을 면치 못하여 억지로 상처를 찾아낸 것입니다.

 

하나는 불두덩陰岸에 피멍이 번진 것이고 하나는 아랫배에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이니, 마치 외부로부터 입은 상처인 듯하지만, 이미 정수리에 혈흔이 없으니 상처가 그다지 중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했는데, 상처가 과연 중하지 않다면 어찌 목숨을 잃게 되었단 말입니까. ‘마치 …… 듯하다宛是란 것은 긴가민가하는 말이요, ‘이미 …… 없다旣無라는 것은 분명히 그렇다고 단정하는 말입니다. 아랫배나 불두덩은 모두 급소에 속하는데 또한 어찌 3일 동안이나 연명했으며, ‘마치 …… 듯한 상처와 이미 …… 없다는 증험으로써 어찌 옥안을 충분히 갖출 수 있겠습니까. 요안(腰眼) 위쪽과 등뼈 아래쪽 사이에 찰과상이 이와 같이 확실하다면, 발에 차인 곳은 앞에 있어야지 뒤에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스스로 이리 넘어지고 저리 자빠졌다는 순기의 말은 이렇게 해서 발뺌하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처가 불분명한 것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인을 하나는 내상(內傷)이라 하고 하나는 태상(胎傷)이라 한 것은, 결국 억지로 찾아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외상(外傷)이 드러나지 않으면 대개는 내상으로 돌리고, 내상을 알기 어려우면 태상으로 단정하지만, 그와 같이 단정한 것은 더욱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릇 죽은 사람은 대맥(大脈)이 이미 풀어지면 평소에 쌓였던 어혈(瘀血)이 저절로 덩어리져 흘러내리는 수가 있습니다. 출산을 많이 한 부녀자의 경우에는 핏덩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닌데, 이것으로써 억지로 태상이라고 실인을 정한다면 옳겠습니까? 더구나 그 여자는 출산한 뒤 겨우 열 달이 되었으니, 일 년에 두 번 임신한다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더구나 제 남편도 모르고 있는데, 볼록 튀어나온 것이 살짝 보인다고 해서 어찌 낙태했다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 한성이 3일 뒤에야 억지로 고발한 문서를 보면, 이미 그가 고주(苦主)가 아닙니다. 전임 순찰사가 특별히 공문을 보내어 의문점을 낱낱이 거론하고서, ‘반복하여 자세히 조사해서 의견을 내어 보고함으로써 무고히 재앙을 당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했는데, 그때 갑자기 영문(營門 순찰사)이 교체되는 때를 만나 미처 보고를 올리지 못하였고, 그 뒤에 한성이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조사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넘도록 질질 끌어 온 것이니, 실로 옥체(獄體)를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대저 이 옥사는 현저한 상흔이 없고 또 직접 목격한 긴요한 증언이 없으니, 낙태 여부는 끝내 알 수가 없습니다. 원범에 대한 추궁을 중지한 지도 이미 오래이고 시친의 종적도 영원히 끊어져서 다시 힐문할 곳이 없으니, 또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운운(云云).

 

 

[D-001]겸관(兼官) : 이웃 고을의 수령 자리가 비었을 때 임시로 그 고을의 사무를 겸임하는 수령을 말한다. 또한 이웃 고을의 수령이 겸관으로서 다스리는 고을을 겸읍(兼邑)이라 한다. 함양군과 안의현은 본래 겸관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겸관은 연암 자신을 가리키고, 겸읍은 함양군을 가리킨다. 연암집 2 ‘함양 군수 윤광석에게 보냄與尹咸陽光碩書 참조.

[D-002]추관(推官) : 사죄(死罪)를 저지른 경우 수령들이 회동하여 죄인을 신문(訊問)하는 것을 동추(同推)라고 하는데 그때의 동추관(同推官)을 말한다.

[D-003]군수 :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을 가리킨다.

[D-004]싸움이 붙어 : 원문은 爭鬪인데, ‘爭鬨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5]정순기(鄭巡己)의 공초에는 : 원문은 鄭巡己之招則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6]서로 ……  : 원문은 相撑拒之際인데, ‘互相撑拒之際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7]잡아다 조사하여 : 원문은 拘覈인데, ‘鉤覈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8]지나가는 사람 : 원문은 過去人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過去之人으로 되어 있다.

[D-009]요안(腰眼) : 허리의 뒤쪽 허리등뼈의 좌우 부위를 가리킨다. 급소에 속한다.

[D-010]태상(胎傷) : 태중(胎中)의 태아(胎兒)가 입은 상처를 말한다.

[D-011]대맥(大脈) : 한의학에서는 인체의 기가 운행하는 통로로 각 장부(臟部)에 속하는 12정맥(正脈)과 그렇지 않은 8개의 기경맥(奇經脈)이 있다고 보는데 대맥은 기경맥 중 허리를 한 바퀴 도는 경맥을 말한다. 경맥 내부에 정상적인 생리 기능을 상실한 혈액이 풀어지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것이 어혈(瘀血)이다.

[D-012]고주(苦主) : 시친(屍親)으로서 고발하는 사람, 즉 살인사건의 원고(原告)를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18일의 식희(飾喜)는 온 나라가 다 같이 기뻐하는 일이니, 비록 성대하게 초청하는 일이 없다 할지라도, 마땅히 공북루(拱北樓)와 쌍수정(雙樹亭)의 사이로 나는 듯이 달려가서 이 태평만세의 즐거움을 함께 기뻐해야 할 터인데, 저는 지금 더위를 먹어 설사가 나서 음식을 전폐한 채 여러 날 지쳐서,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니 유감되고 한스러울 뿐입니다.

() 성곽의 동쪽, 향교의 앞에 둘레가 1056() 되는 버려진 방죽이 있는데, 둑 아래에 물을 받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스무 섬지기 남짓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오래되어 메워져 버려, 둑 안에는 말무덤馬塚이 옹기종기한 데다가 가시덩굴이 무성하고 뱀과 벌레 따위가 득실대었습니다. 봄에 시원스레 파내고 말무덤을 다 제거하고, 가운데에 조그마한 대()를 쌓고 대 위에다 초가지붕을 씌운 육면(六面)의 정자를 세우고, 세 개의 수문(水門)이 난 긴 다리를 만들어 북쪽 둑에 연결시켰습니다. 구름과 물은 아득한데 줄지은 봉우리들은 멀리 잠겨 있고 질펀한 들은 아스라히 넓으니, 혹은 달빛 아래 배를 띄우며 혹은 난간에 기대어 낚시도 드리우곤 합니다. 그 구조와 배치는 빈약하고 검소함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경물(景物)과 풍치에 있어서는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을 만합니다.

옛날에 정자 이름을 지은 사람은 늙어 창백한 얼굴에 흰머리를 하고 조금만 마셔도 문득 취한다 하여 취옹정(醉翁亭)’이라 하였으며, 한바탕의 큰비가 사흘을 내리고 그쳤는데 이때 나의 정자가 마침 이루어졌다 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건물로 말하면 실로 두 가지 일을 겸했으므로, 드디어 감히 이름을 짓기를 취옹희우우사정(醉翁喜雨又斯亭)’이라 하였습니다. 이 일곱 자를 새겨서 걸어놓고 싶은데, 비단 저의 필의(筆意 운필의 멋)가 본시 졸렬할 뿐 아니라 여러 해 전부터 오래도록 풍비(風痺 중풍으로 인한 마비 증세)를 앓아서 붓과 벼루를 가까이하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저번에 붓을 들어 시험해 보니 먹이 많이 묻은 곳은 묵저(墨猪)가 되고 그렇지 않은 곳은 메마른 등나무 덩굴처럼 되어 종이 수십 장을 바꿔도 끝내 글자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분수에 넘치는 망녕된 짓임을 잊고서 이 일곱 글자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써 주시기를 청하는 바이니, 혹시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면, 호서(湖西)의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을 터입니다. 다만 하읍(下邑 면천군을 가리킴)에는 각수(刻手)가 없을 뿐 아니라 화공(畫工)도 얻기 어렵사온즉, 빨리 각수에게 맡겨 주시고 화공을 시켜 대충 단청을 하게 하여 이 정자를 완성할 수 있게 하여 주신다면, 이보다 다행이 없겠습니다. 둑을 빙 둘러 버들을 심고 또 살구씨와 오얏씨 대여섯 말을 뿌려 놓았으며, 또 관노비를 시켜 지난가을에 먹고 버린 복숭아 씨를 주워 오게 하여 줄지어 심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물정에 어두운 제 자신을 스스로 비웃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만,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C-001]순찰사에게 답함 : 연암은 1797년 충청도 면천 군수(沔川郡守)로 부임한 이후 성 동쪽 향교 앞의 버려진 연못을 준설하고 둑을 쌓아 저수지로 만들었으며, 그 연못 중앙에 작은 섬을 만들어 육각(六角) 초가 정자를 세우고 건곤일초정(乾坤一艸亭)’이라 이름 지었으며 부교(浮橋)를 놓았다고 한다. 過庭錄 卷3 이 편지는 그 일과 관련하여 당시 충청 감사 이태영(李泰永)에게 보낸 편지로 짐작된다. 이태영은 연암과 한동네 살았던 친구 사이로,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재임할 때에도 경상 감사로서 재임한 적이 있는데, 또한 연암이 면천 군수로 재임하던 중인 1798년 음력 7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충청 감사로 재임하였다.

[D-001]18일의 식희(飾喜) : 식희는 부모의 경사에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하는데, 6 18일은 정조(正祖)의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탄신일이었다.

[D-002]공북루(拱北樓)와 쌍수정(雙樹亭) : 공북루는 충청도 공주(公州)에 있는 공산성(公山城)의 북문이고, 쌍수정은 공산성 내에 있는 정자이다.

[D-003]늙어 …… 하였으며 : 구양수(歐陽脩)의 취옹정기(醉翠亭記)를 가리킨다.

[D-004]한바탕의 …… 하였습니다 : 소식(蘇軾)의 희우정기(喜雨亭記)를 가리킨다.

[D-005]지금 …… 말하면 : 원문은 今此所搆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6]묵저(墨猪) : 획이 굵기만 하고 힘찬 기운이 부족한 서투른 글씨를 말한다.

[D-007] …… 바이니 : 원문은 仰丐此掌大七字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 다음에  자가 추가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인산(因山)이 문득 지나서 왕께서 영원히 떠나셨으니, 하늘을 바라보며 길이 부르짖은들 어느 곳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섣달 추위에 순사또께서는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노병이 날로 깊어가는데도 오히려 다시 산으로 바다로 헤매면서 기꺼이 밥이나 탐하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무슨 심보입니까.

지난번 대질 심문할 때에 마침 첫 추위를 만나서 5일 동안 찬 데서 거처한 탓에 다리 부분이 마비된 데다 다시 험하고 먼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오다 보니 마침내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으니, 스스로 가련해한들 어찌하겠습니까. 고을의 폐단이나 백성들의 고질이 모두 고치기 어려운 형편인데, 두어 달 지내는 동안에 비로소 바람마저 매우 다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몰아치는 폭풍과 비릿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하면 곧 기왓장을 날리고, 고래나 악어의 울음 같은 거센 파도소리가 베갯머리에서 들리는 듯하니, 돌이켜 고향 집이 생각나도, 수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대저 이곳은 한때의 구경꾼들이 지팡이 짚고 나막신 신고 명승지로 찾을 만한 땅은 될 수 있지만, 노경에 노닐면서 몸을 보양할 곳은 전혀 못 됩니다. 더구나 하인 하나도 데리고 있지 않고 중처럼 외롭게 살고 있는 신세이리요!

도임한 지 9일 만에 앉은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금방 취리(就理)하는 일로 길을 떠났다가 10월 보름 뒤에 병을 안고 다시 왔는데, 갑자기 황장(黃腸)의 역사(役事)를 당하여 차관(差官)을 겨우 보내고 나니 세금 거두는 일이 시급했고, 환곡 받아들이는 일이 겨우 끝나자 또다시 진영(鎭營)에 죄를 지어 날마다 머리를 썩이고 있습니다.

가만히 헤아려 보면 관()에 있은 지 50일이 채 못 되는데, 온갖 사무가 바빠서 두서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며, 진영 장교의 목근적간(木根摘奸)은 간교하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어, 촌민들이 겁을 먹고 올린 소장(訴狀)이 날마다 다시 관청의 뜰에 가득합니다. 진영에서는 아무렇게나 쓴 힐책하는 관문(關文)을 보내 단속을 너무 준엄하게 합니다. 어부 한 사람이 배를 고친 일로 인해 좋지 못한 말이 전관(前官)에게까지 파급되도록 하였으니, 제 마음에 미안함이 응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당초에 진영 장교들이 지나는 길에 함부로 침탈한 것으로서 바로 그들의 수법인데, 뇌물을 토색질한 흔적을 은폐하고자 하여 사감(私憾)을 품고서 고자질한 것인즉, 교졸(校卒)들의 말만을 들어 부당하게 처리한 형편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 곧장 먼저 감영에 보고한 것을 노여워해서, 반드시 한쪽 편을 들면서 자기 주장만 우기고자 하여 이렇게까지 일이 확대되어 버린 것입니다. 비단 저의 곤경이 비할 바 없을 뿐 아니라, 이 일이 전임 수령에게 관계되기 때문에 조사를 행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모두 새로 온 수령이 너무도 어리석어서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소홀히 다루었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앞서 순영(巡營)에서 간사한 상인들이 모여드는 폐단을 염려하여 각 고을에 특별히 관문을 보내어 엄하게 경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어찌 유독 양양(襄陽) 일대에만 특별히 진영으로 하여금 따로 목근적간을 하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진영의 장교들이 재삼 와서는, 봉산(封山)의 금표(禁標)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고 나무 뿌리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많이만 적발하기 위하여 보이는 족족 기록하기 때문에, 산 아래 사는 백성과 다 쓰러져가는 절의 중들이 모두 놀라 도망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특별히 측근의 비장(裨將)을 보내시어  이하 원문 빠짐 

 

 

[C-001]순찰사에게 올림 : 연암은 순조(純祖) 즉위년(1800) 9월에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부임하였다. 이 편지는 그해 연말에 강원 감사 이노춘(李魯春)에게 보낸 것이다. 같은 시기에 족제(族弟) 박준원(朴準源)에게 보낸 편지가 연암집 10에 수록되어 있다.

[D-001]인산(因山) …… 떠나셨으니 : 순조 즉위년 11월에 정조(正祖)의 장례가 거행된 사실을 가리킨다. 원문은 因山奄過 弓劍永閟인데, ‘궁검영비(弓劍永閟)’는 활과 칼이 영영 감춰지고 말았다는 뜻으로,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승천할 적에 활을 지상에 떨어뜨렸으며 그의 관에는 칼만 남아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D-002]곱사등이 : 원문은 癃痤인데 癃疾의 오류인 듯하다. 융질(癃疾)은 늙고 병약하여 허리가 굽는 병을 말한다.

[D-003]취리(就理) : 죄를 지은 벼슬아치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을 받는 일을 말한다.

[D-004]황장(黃腸)의 역사(役事) : 황장은 왕실에서 관을 만드는 데 쓰는 질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黃腸木)을 말하는데, 양양에는 황장목 숲이 많았다. 정조가 승하한 뒤 양양에 황장목을 벌채하라는 부역이 내렸으며, 임시로 파견된 차관(差官)이 그 일을 감독하였다. 過庭錄 卷3

[D-005]목근적간(木根摘奸) : 산림의 도벌(盜伐) 여부를 조사하는 일을 말한다.

[D-006]봉산(封山)의 금표(禁標) : 봉산은 나라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산이고, 금표는 봉산의 출입 금지를 알리는 푯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새해를 맞이하여 순사또의 건강이 신령의 가호로 만강하시며, 부모님께서도 한결같이 강녕하시리라 믿으며, 위로와 축하를 아울러 올리는 정성을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지난 겨울에 독감을 거듭 앓고부터 두 다리에 힘이 없어지더니, 그대로 무릎이 오그라붙어 펼 수 없게 되어 버려, 안방에서 움직이는 데도 반드시 부축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바뀐 뒤 이처럼 오랜 시일이 지나도록 아직도 나아가 새해 인사를 올리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어찌 그지 있겠습니까.

지금 예조의 관문(關文) 신흥사(神興寺)의 잡역을 경감한 뒤로 종이에 먹도 마르기도 전에 불법 징수가 전보다 10배나 더하다.”고 하고, 심지어 수향리(首鄕吏)를 상사(上使)하여 엄형으로 다스리라는 조처까지 있으니, 그 땅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으로서는 너무도 놀랍고 두려워 몸 둘 바가 없습니다. 지난해 여름에 잡역 경감에 대한 절목(節目)을 영문(營門) 감영으로부터 반첩(反貼)받아 책자로 만들어서, 하나는 영문에 비치하고 하나는 본부(本府 양양부)에 비치하고 하나는 그 절에 보내어 증빙할 자료로 삼았으니, 설사 탐관오리가 있다 한들 어찌 구구하게 몇 권()의 종이를 절목 이외에 더 징수하려 하겠습니까.

또 관속(官屬)들이 시방 그 절로부터 협박받는 처지가 되어, 조심조심 날을 보내며 오히려 털끝만큼이라도 탈이 잡힐까 두려워하는 판국인데, 또한 어찌 감히 멋대로 10배의 불법 징수를 자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해(利害)를 놓고 헤아려 보면 절대로 이럴 리는 없습니다. 진실로 관문의 내용과 같다면, 아무 것도 꺼릴 바가 없는 듯이 구는 절의 중들이 어찌 절목을 하나하나 들어 본관(本官 양양 부사)에게 따져 바로잡지도 않고, 또한 어찌 의송(議送)을 순사또에게 올리지도 않고서, 감히 감영과 고을을 무시한 채 단계를 건너뛰어 경사(京司 중앙 관청)에 호소하여 무난히 사실을 날조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하관이 재임한 지 지난해 시월 보름부터 이달 그믐까지 겨우 100일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고을 일에 대해서는 아직 두서를 자세히 알지 못하니, 시행해야 할 모든 일은 단지 문서화된 규정을 살펴 행할 뿐입니다. 이른바 삭납지지(朔納紙地)는 두어 권에 불과한 데다, 비록 명색은 관납(官納)이나 본래부터 넉넉한 값으로 사서 썼으며, 지금은 또 값을 더 쳐주고 있습니다. 그 밖에 감영에서 소용되는 지석(紙席 두꺼운 종이로 만든 자리)과 상사(上司 직속 상급 관청)에 전례에 따라 납부하는 것도 모두 본전(本錢)으로 직접 샀으며 조목에 따라 값이 매겨져 있으니, 한 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세세한 일이라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저 본부(本府)에 신흥사(神興寺)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고을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으며, 그 절에 창오(昌悟)와 거관(巨寬)이라는 승려가 있는 것 역시 그 절의 난치병과 다름이 없습니다. 저놈들이 하찮은 중으로서 여러 해 동안 서울 근교의 산들에 머무르면서, 중들을 꾀고 협박하여 절 재산을 탕진했는데, 말과 외모가 간사스럽고 종적이 수상합니다. 무뢰배와 결탁하고 외람되이 막중(莫重)한 곳을 빙자해서, 오로지 수령을 모함하고 관속들에게 위엄을 세우는 것만을 일삼는 것이 제놈의 수법인즉, 관리가 관리 노릇 못 한 지가 오래입니다. 토호들이 시골 구석에서 무단(武斷)하고 관부(官府)를 쥐고 흔드는 일이 옛날부터 간혹 있었지만, 중들이 이같이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은 지금 처음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번에 내수사(內需司)의 관문 내용을 고쳐 바꾸고 용동궁(龍洞宮)의 수본(手本 손수 작성한 서류)을 첨부하였는데, 제일 먼저 강원도 양양에 있는 신흥사는 바로 열성조(列聖朝)의 구적(舊蹟)이 봉안된 곳이라는 점을 들고 수령이 삼가 받들어 행하지 않은 죄를 나열해 놓았으니, 이는 모두 창오와 거관에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면, 제 한 몸에 갑자기 닥친 재난은 본시 걱정할 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고을의 폐해는 어찌하며 나라의 기강은 어찌하겠습니까?

열성조의 구적이라고 한 것은 본부에 있는 낙산사(洛山寺)와 같은 곳을 이름이요, 신흥사가 아닙니다. 세조 병술년(1466)에 낙산사를 임시 숙소로 삼으신 일이 있는 데다, 성종의 친필이 열 겹이나 싸여 보물로 간직되어 있고, 숙종의 어제(御製) 현판은 사롱(紗籠)에 싸인 채 걸려 있어 지금까지도 보배로운 글씨가 하늘을 돌며 빛을 발하는 은하수처럼 휘황찬란하며, 명 나라 성화(成化) 5(1469)에 주조한 큰 종에는 당시의 명신(名臣)들이 왕명을 받들어 기록한 글이 있어 한 절의 귀중한 보물이 되었으니, 이것들은 모두 낙산사의 오래된 보배인 것입니다. 신흥사의 경우는 명 나라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 새로 창건하여 내력이 100여 년밖에 되지 않아 역대 임금들이 남긴 글들이 본래 있지 않은데도, 감히 모호하게 막중한 곳을 끌어다가 궁속(宮屬)들을 속여서 부탁하여 수본을 발급받기를 도모하기를 이처럼 쉽게 하였으니, 다른 것은 오히려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작년에 감영과 본 고을에서는 비록 실상이 이와 같은 것을 알았지만, 다만 말이 막중한 곳과 관계되고 일이 내수사에 관련되는 까닭에, 감히 드러내놓고 분명하게 말할 수 없어서 미봉하여 넘겼으니, 중들이 더욱 패악을 부리는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 절이 본시 전답의 소출이 많아서 부자 절이라 일컬어지는데도, 분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정초에는 취한 김에 아료를 부려, 떠돌이 걸인들을 묶은 채로 구타하여 거의 살옥(殺獄)을 이룰 뻔한 것이 6명이나 되었습니다. 고한(辜限)이 이미 지났는데, 5명은 겨우 목숨을 건져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게 되었으니 거의 걱정이 없겠으나, 그중 1명은 상기도 위태로운 지경이니 앞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중들의 버릇이 세력을 믿고 완강하고 막돼먹어 못할 짓이 없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원당(願堂)을 다시 설립하는 일은 책임진 곳이 따로 있으며 한낱 중들과 관련된 바가 아니니, 사리(事理)로써 헤아려 보면 실로 쥐 잡다 그릇 깰 우려는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러한 사정을 비변사에 보고하거나 장계(狀啓)를 올려 조사해 주도록 청함으로써, 요망한 중놈들이 막중한 곳을 빙자하여 속임수를 일삼는 죄를 속히 시정하게 해 주심이 어떻겠는지요?

현재 병세를 돌아보건대 감기까지 더치는 바람에 묵은 증세가 한꺼번에 발작하여 실로 무리하기는 어려운 형편이나, 바야흐로 군사훈련에 달려가야 할 때를 당하여 기일이 몹시 촉박할 뿐더러 여러 해 동안 누적된 속오군(束伍軍)의 궐액(闕額 부족한 수효)을 보충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병을 말하고 사무를 폐할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 답답한 개인적인 사정을 어찌 이루 다 아뢰겠습니까. 군사훈련이 지난 뒤에는 사면(辞免)을 거듭 간청해야 될 형편이니 하량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올림 : 1801년 음력 1월 강원 감사에게 양양 신흥사(神興寺) 중들의 행패를 바로잡아 줄 것을 청원한 편지이다. 그러나 강원 감사가 미온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그해 봄에 연암은 병을 핑계 대고 양양 부사직을 사임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3

[D-001]상사(上使) :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에 명하여 죄인을 잡아 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D-002]반첩(反貼) : 보내온 공문서에 의견을 첨부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D-003]() : 한지를 세는 단위로, 스무 장으로 된 한 묶음을 말한다.

[D-004]의송(議送) : 백성이 고을 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관찰사에게 올리는 항소장(抗訴狀)을 말한다.

[D-005]삭납지지(朔納紙地) : 매월 초하루마다 바치는 지물(紙物)을 말한다.

[D-006]창오(昌悟) : ‘창오(暢悟)’의 오기인 듯하다. 창오(暢悟) 1797(정조 21) 거관(巨寬)과 함께 신흥사의 명부전(冥府殿)을 중수했으며, 1801(순조 1) 역시 거관 등과 함께 용선전(龍船殿)을 창건하고 열성조(列聖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도 그는 1813(순조 13) 거관 등과 함께 보제루(普濟樓)를 중수하고, 1821(순조 21) 거관 등과 함께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수하였다.

[D-007]거관(巨寬) : 1762~1827. 호를 벽파(碧波)라고 하며, 율승(律僧)으로서 많은 제자를 두었다. 창오(暢悟)와 함께 신흥사 내의 건물들을 힘써 중수하였다. 신흥사에 있는 그의 부도(浮屠)에는 강원 감사 정원용(鄭元容)이 찬한 비가 있다.

[D-008]막중(莫重)한 곳 : 왕실을 가리킨다.

[D-009]용동궁(龍洞宮) : 명종(明宗) 때 세자궁(世子宮)으로 설치한 궁인데, 한양의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었다. 명례궁(明禮宮 : 덕수궁德壽宮) · 어의궁(於義宮) · 수진궁(壽進宮)과 함께 4궁이라 불렸다. 이러한 궁들은 토지를 약탈 · 매입하거나 면세 특권을 이용하여 수세지(收稅地)를 확대하는 등으로 재산 늘리기에 힘써 폐단이 많았다.

[D-010]사롱(紗籠) : 현판에 먼지가 앉지 않도록 씌운 천을 말한다.

[D-011]하늘을 …… 은하수 : 원문은 雲漢昭回인데,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 저 밝고 큰 은하수는 하늘을 따라 그 빛이 도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고 하였다.

[D-012]고한(辜限) : 보고기한(保辜期限)의 준말이다. 남을 상해한 사람에 대하여 피해자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처벌을 보류하는 기간으로, 이 기간 안에 피해자가 사망하면 살인죄가 성립되었다.

[D-013]원당(願堂) : 역대 임금들의 명복을 비는 법당(法堂)인데, 궁중에 있는 것은 내원당(內願堂)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창오와 거관 등이 설립을 추진한 신흥사의 용선전(龍船殿)을 가리킨다.

[D-014]속오군(束伍軍) : 선조(宣祖) 이후 향촌을 지키기 위해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을 혼합하여 편성한 지방군(地方軍)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영목당(榮木堂)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祭文)

 

 

유세차(維歲次) 을해(1755) 11월 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에 반남(潘南) 박지원은 삼가 술과 과일로 제물을 갖추어, 홍문관 교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내 나이 열여섯에 / 余年二八

덕망 높은 집안에 장가드니 / 入贅賢門

형제분이 우애로워 / 弟兄湛樂

화기가 애애했네 / 和氣氤氳

장인께서 이르시되 / 外舅謂我

내 아우 글 좋아하여 / 余季好文

벼슬에는 비록 소홀해도 / 仕宦雖疎

문학에는 몹시 부지런하니 / 文學甚勤

생관에 와 머물거라 / 來舍甥館

내 아우가 너의 스승이니라 / 余季汝師

나에 대한 공의 사랑 / 公之愛我

장인보다 더 깊어서 / 視舅亦深

내게 경서(經書) 가르칠 제 / 授我詩書

엄한 일과 사정없었네 / 嚴課無私

공 모시고 따라다닌 지 / 陪公周旋

이제 어언 사 년일세 / 四年于玆

세상 따라 문학도 쇠퇴해지매 / 文與世降

공이 다시 일으켜 세웠나니 / 公起其衰

산문은 한유의 골수를 취했고 / 文劈韓骨

시는 두보의 속살을 얻었네 / 詩斲杜肌

재주 없는 이 소자는 / 小子不佞

어리석고 노둔한데 / 才魯性癡

공의 유도에 힘입어서 / 荷公誘掖

우공이산(愚公移山) 바랐더니 / 庶幾愚移

내 한창 진취하려는데 / 余方有進

공이 갑자기 별세하시니 / 公奄棄世

갈림길 하많은데 / 茫茫岐路

어느 분을 찾아가야 하리 / 我尙疇詣

옛 전() 한 편 읽자 해도 / 讀古一傳

막히는 곳 너무 많아 / 已多觝滯

두어 줄만 읽어 내려가면 / 數行才下

뭇 의심이 앞을 가려 / 群疑交蔽

책을 덮고 장탄식 / 廢書太息

슬픈 눈물 뒤따르네 / 繼以悲涕

의심나면 뉘게 묻고 / 我疑何質

게으르면 뉘 잡아주리 / 我惰孰勵

생각할수록 슬픈 것은 / 念玆益悲

실은 제 처지가 슬퍼서네 / 實爲我地

지난 여름 장마와 무더위에 / 去夏潦暑

공의 병이 처음 생겼네 / 公疾始祟

아름다운 암벽 맑은 샘에서 / 玉巖淸泉

공은 갓끈을 씻고 / 公于濯纓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제 입을 새옷 / 浴沂新服

그날에 다 지어졌는데 / 此日旣成

이 소자 돌아보며 이르시길 / 顧謂小子

어찌 물에서 보지 않느냐 / 盍觀於水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니 / 盈科而進

뜻 이루는 것도 이 같은 법 / 有爲若是

흘러가는 냇물처럼 바빠야 한다 / 逝水其忙

그 말씀 아직도 귀에 쟁쟁 / 言猶在耳

이제 와서 생각하니 / 而今思之

공의 마지막 가르침이셨네 / 警誨止此

하늘이 우리 공을 낳으시고 / 天生我公

어찌 수명은 짧게 주셨는고 / 年命何屯

거적 자리엔 상주(喪主) 없고 / 苫席無孤

북당(北堂)에는 모친 계시네 / 萱堂有親

모를 것이 이치라서 / 昧昧者理

신에게도 묻지 못해 / 難質鬼神

후사 없고 단명한 건 / 無年無嗣

옛사람도 슬퍼한 일 / 昔人所愍

누가 이를 주장했나 / 孰主張是

그도 또한 잔인하이 / 其亦不仁

장원 급제 일렀으나 / 早擢魁科

집은 몹시 청빈했고 / 家甚淸貧

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歷敭華要

고을 수령되어 부모 봉양 못 했네 / 養未專城

금마옥당도 / 金馬玉堂

공에겐 영화가 아니었어라 / 於公非榮

전에 상소 한번 올렸다가 / 曩進一疏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가고 마셨지 / 遂竄南荒

나는 병으로 송별을 못 해 / 余病未別

고당에 와 절 드리니 / 來拜高堂

벽에 지도 걸어놓고 / 壁掛輿圖

가리키며 눈물지으셨네 / 指示泫然

아스랗다 귀양 가시는 분 / 逖矣遷人

산과 물이 얼기설기 / 鬱繆山川

아무 물 아무 산을 / 某水某山

어느 제 다 거칠꼬 / 何時度越

생이별도 못 참거든 / 不忍生離

사별이야 오죽하리 / 況此死別

전에 공이 귀양 가실 젠 / 昔公謫去

위로드릴 말이라도 있었지만 / 奉慰有說

지금 공이 이렇게 가실 제는 / 今公此行

차마 무슨 말을 하오리 / 忍作何言

이내 가슴 답답하여 / 余懷抑塞

저도 몰래 울음 삼키네 / 不覺聲呑

광주(廣州)라 그 남쪽이 / 維廣之陽

바로 공의 안식처일레 / 卽公眞宅

밤 지나면 계빈이라 / 啓殯隔宵

슬픈 영결 고하오니 / 含哀告訣

문장 비록 졸렬해도 / 文辭雖拙

가슴속에서 우러나왔고 / 腑肺攸出

제물 비록 박하지만 / 奠物雖薄

정례로써 올린 거니 / 情禮所設

밝으신 영령이시여 / 尊靈不昧

이 술 한 잔 받으소서 / 庶歆玆酌

상향 / 尙饗

 

 

[C-001]영목당(榮木堂) : 연암의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 : 1716~1755)의 호이다. 연암의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의 동생으로,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이양천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수학 시절의 연암에게 문학을 지도하였다. 연암집 3 ‘영목당 이공에 대한 제문祭榮木堂李公文 참조.

[D-001]경오삭(庚午朔) 1일 경오 : 고대에는 날짜를 적을 적에 元嘉三年三月丙子朔二十七日壬寅이라는 식으로 연월(年月) 다음에 반드시 초하루를 뜻하는 삭() 자를 붙여서 삭() () 몇 일()이라 쓰고 또 간지(干支)를 붙였다. 따라서 초하루를 적을 때에도 이 제문처럼 乙亥十一月庚午朔一日庚午라 하여, 번거롭지만 날짜를 중복해서 적었다. 日知錄 卷20 年月朔日子

[D-002]생관(甥館) : 사위가 거처하는 방을 말한다.

[D-003]우공이산(愚公移山) : 우공(愚公)이란 노인이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들을 깎아 없애버리고자 결심하고 쉬지 않고 노력했더니 상제(上帝)가 감동하여 그 산들을 딴 곳으로 옮겨주었다고 하는 열자(列子) 탕문(湯問) 중의 우화에서 나온 고사성어로,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노력하여 마침내 큰 뜻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D-004] …… 해도 : ‘옛 전()’ 사기 한서에 실린 전()들을 가리킨다. 연암은 이양천으로부터 사기를 배웠는데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본떠 이충무전(李忠武傳)을 지었더니, 이양천은 사마천(司馬遷)이나 반고(班固)와 같은 경지를 얻었다고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1

[D-005]기수(沂水)에서 …… 지어졌는데 : 공자가 여러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증점(曾點) 늦은 봄이 되어 봄옷이 다 지어지면, () 쓴 어른 5, 6, 동자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論語 先進 여기서는 이양천이 연암을 데리고 물가로 놀러 나갔던 일을 가리킨다.

[D-006]어찌 …… 나아가니 : 맹자 진심 상(盡心上) 물을 보는 데에 방법이 있다. …… 흐르는 물이란 것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觀水有術 …… 流水之爲物也 不盈科 不行고 하였고, 이루 하(離婁下) 근원이 있는 물은 용솟음치며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웅덩이를 채우고야 나아가 사해로 쏟아진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고 하였다. 쉬지 않고 실천함으로써 차근차근 학업을 성취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D-007]흘러가는 …… 한다 : 논어 자한(子罕) 공자께서 냇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아가는 것은 이 냇물과 같도다.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고 하였다.”는 구절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따르면, 이 구절은 쉬지 말고 면학할 것을 당부한 말이다.

[D-008]장원 급제 일렀으나 : 이양천은 1749(영조 25) 춘당시(春塘試)에 문과 급제하였다.

[D-009]화직(華職) 요직(要職) 거쳤지만 : 이양천은 1749년 이후 1755년 작고할 때까지 사간원 정언 · 헌납, 홍문관 부수찬 · 부교리 · 교리, 세자시강원 사서 · 필선 등을 지냈다.

[D-010]금마옥당(金馬玉堂) : 원래 한() 나라 때 글 잘짓는 신하들이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던 궁중의 금마문(金馬門)과 옥당서(玉堂署)를 가리키는데, 후대에는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양천이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한림원의 학사에 견주어 표현한 것이다.

[D-011]전에 …… 마셨지 : 이양천은 홍문관 교리로서 영조 28(1752) 10월 소론의 영수인 이종성(李宗城)을 영의정으로 임명한 조치에 항의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다. 연암집 3 불이당기(不移堂記) 참조.

[D-012]광주(廣州) …… 안식처일레 : 이양천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 돌마면(突馬面) 율촌(栗村)에 있었다.

[D-013]계빈(啓殯) : 발인을 할 때에 관을 내오기 위하여 빈소(殯所)를 여는 것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장인 처사(處士) 유안재(遺安齋) 이공(李公)에 대한 제문

 

 

정유년(1777) 6 23일 정사(丁巳)일에 사위 반남 박지원은 삼가 술을 올려 장인 유안재 이공의 영전에 곡하며 영결을 고합니다.

아아, 이 소자 나이 열여섯에 선생의 가문에 사위로 들어와서 지금 26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비록 어리석고 우매하여 선생의 도를 잘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여 선생을 부끄럽게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제 선생이 멀리 떠나시는 날에 한마디 말로써 무궁한 슬픔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 嗚呼

선비로서 일생 마치는 걸 / 以士沒身

세상 사람들은 수치로 알지만 / 世俗所恥

이를 비천하다 여기는 저들이 / 彼以卑賤

어찌 선비를 알 수 있으랴 / 惡能識士

이른바 선비란 건 / 所謂士者

상지하고 득기하나니 / 尙志得己

유하(柳下)의 절개와 유신(有莘)의 자득(自得) / 柳介莘囂

이와 같은 데 불과한 것 / 不過如是

이로써 보자하면 / 由是觀之

선비로 일생 마치기도 / 沒身以士

역시 어렵다 하리 / 亦云難矣

아아 / 嗚呼

선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 先生存沒

선비 본분 안 어겼네 / 不違士也

예순이라 네 해 동안 / 六十四年

글을 진정 잘 읽으시어 / 善讀書者

오랫동안 쌓인 빛이 / 積久光輝

온아(溫雅)하게 드러났지 / 溫乎發雅

배부른 듯이 굶주림을 즐기셨고 / 樂飢若飽

과부처럼 절개 지키셨네 / 守節如寡

고고해도 무리를 떠나지 않고 / 孤不離群

꼿꼿해도 남을 책하지 않으셨네 / 貞不詭物

발언은 정곡을 찌르고 / 發言破鵠

일 처리는 똑부러지게 하셨지 / 制事截鐵

빙호추월처럼 / 氷壺秋月

안팎 모두 툭 틔었지 / 外內洞澈

천박한 세상의 썩은 유자(儒者)들은 / 陋世酸儒

변함없는 선비 절개 부끄러워하는데 / 恥士一節

객기는 진작 다 없애셨고 / 夙刊客浮

만년에는 호걸 기상 감추셨네 / 晩韜英豪

진실만을 바라보고 탄탄대로 걸으시어 / 視眞履坦

심기가 차분히 가라앉으셨지 / 心降氣調

타고난 천성 외엔 / 所性之外

털끝 하나 아니 붙여 / 不著一毫

먹 묻으면 씻어 버리고 / 墨則斯浣

논의 잡초 어찌 아니 뽑으리 / 稂豈不薅

팔을 베고 물 마시건 / 曲肱飮水

좋은 말 사천 필을 매어 놓건 / 繫馬千駟

덜고 보탬 있지 않네 / 旣無加損

()라는 한 글자엔 / 士之一字

운명이란 정해진 것 / 命有所定

때도 만나야 하는 법 / 時有所値

이를 분별할 줄 아는 이만 / 能辨此者

공의 뜻을 알게 되리 / 始識公志

아아 / 嗚呼

대들보 부러진 슬픔에다 / 梁木之哀

강한 같은 그리움으로 / 江漢之思

잔을 올리며 통곡하노니 / 奠斝一慟

만사가 끝났도다 / 萬事已而

공의 모습 빼닮은 / 眉宇之寄

아들 한 분 두셨으니 / 獨有庭芝

즐겁거나 슬프거나 잠깐 사이라도 / 歡戚造次

바라건대 함께 손잡고 / 庶共挈携

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不忘偲怡

알아주신 은혜 보답 잊지 않으리 / 以報受知

아아 / 嗚呼

예전의 어린 사위 / 昔日小婿

이젠 저도 백발이 되었다오 / 今亦白頭

이제부터 죽기 전까지 / 從今未死

허물 적기 바라오니 / 庶寡悔尤

은덕과 사랑으로 / 維德之愛

음조(陰助)하여 주소서 / 願言冥酬

간장에서 쏟는 눈물 / 肝膈之寫

영령께서 아실는지 / 靈或知不

아아 슬프외다 / 嗚呼哀哉

상향 / 尙饗

 

 

[C-001]유안재(遺安齋) : 이보천(李輔天 : 1714~1777)의 호이다. 이보천은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인 계양군(桂陽君)의 후손으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제자인 종숙부 이명화(李命華)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같은 농암 제자인 어유봉(魚有鳳)의 사위가 되어 그에게서도 사사받음으로써, 우암(尤庵)에서 농암으로 이어지는 노론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 처사로서 명망이 높았다. 그는 사위인 연암에게 맹자를 가르쳤으며, 정신적으로 큰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D-001]그래도 …… 않았다 : 이 제문에서 장인을 예찬한 내용이 연암의 사호(私好)에서 나온 아부의 발언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기 위해 한 말이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맹자는 재아(宰我)와 자공(子貢)과 유약(有若)은 지혜가 성인(聖人)을 넉넉히 알아볼 만하였다. 낮추어 보더라도 그들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汚不至阿其所好라고 하면서, 재아와 자공과 유약이 그의 스승 공자를 극구 예찬한 말을 공자에 대한 정당한 평가로서 인용하였다. 또한 이루 하에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D-002]이를 …… 저들이 : 원문 중 卑賤 貧賤으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3]상지(尙志)하고 득기(得己)하나니 : 맹자 진심 상에서 제() 나라 왕자 점() 선비란 무슨 일을 하는가?”라고 묻자, 맹자는 뜻을 고상하게 가진다尙志라고 답했다. 또한 송구천(宋句踐) 어떻게 해야 이처럼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가?何如斯可以囂囂矣라고 묻자, 맹자는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선비는 스스로 만족한다.窮不失義 故士得己焉고 하였다.

[D-004]유하(柳下) …… 자득(自得) : 유하는 노() 나라 대부(大夫) 전금(展禽)으로, 유하라는 곳에 살았고 시호(諡號)가 혜()였기 때문에 유하혜(柳下惠)라고 불렀다. 맹자 진심 상에, “유하혜는 삼공(三公)의 지위로도 그 절개를 바꾸지 않았다.” 하였다. 유신(有莘)의 자득(自得)이란 이윤(伊尹)이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살고 있을 때 탕() 임금이 사람을 시켜 초빙하자, 이윤이 스스로 만족해하며 말하기를囂囂然曰 내가 어찌 탕왕의 폐백을 받아들이리오. 내 어찌 들판에서 농사지으며 이대로 요순(堯舜)의 도를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한 데서 나온 말이다. 孟子 萬章上

[D-005]무리를 떠나지 않고 : 동문지간(同門之間)인 벗들을 떠나서 혼자 쓸쓸히 지내는 것을 이군삭거(離群索居)라 한다.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失明)을 하자 증자(曾子)가 조문을 왔는데, 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을 주었다고 자하가 하늘을 원망하므로 증자가 이를 나무라며 그의 잘못을 성토하니, 자하는 내가 벗들을 떠나 혼자 산 지 역시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뉘우쳤다고 한다.

[D-006]빙호추월(氷壺秋月) :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와 가을철의 밝은 달처럼 마음이 맑고 깨끗함을 말한다.

[D-007]팔을 …… 놓건 : 논어 술이(述而)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그런 가운데에서도 역시 즐거움은 있다. 의롭지 못하면서 부귀한 것은 내게는 뜬구름과 같다.”고 하였고,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은 유신의 들판에서 농사짓고 살 적에 요순(堯舜)의 도()를 좋아하여 의()가 아니고 도()가 아니거든, 천하를 녹으로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좋은 말 4000필을 마구간에 매어 놓아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하였다.

[D-008]대들보 …… 그리움으로 : 예기 단궁 상에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꿈을 꾸고는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지고 철인(哲人)이 죽을 것이다.”라고 노래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들보가 부러진다는 것은 스승이나 철인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또한 맹자 등문공 상에 증자(曾子)가 공자를 찬양하여 강한(江漢)으로 씻은 것 같고 가을 볕으로 쪼인 것 같아서 밝고 깨끗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였다. 강한(江漢)은 양자강과 한수(漢水)를 말한다. 따라서 강한 같은 그리움이란 작고한 스승을 애타게 추모함을 뜻한다.

[D-009]아들 한 분 두셨으니 : 빼어난 자제(子弟)를 뜰에서 자라는 지란(芝蘭)과 옥수(玉樹)에 비유하여 정지(庭芝)’ 정옥(庭玉)’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을 가리킨다.

[D-010]서로 책선하고 화기애애하여 : 논어 자로(子路)에서 자로가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을 선비라 부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간절하게 서로 책선(責善)하고 화기애애하면 선비라고 부를 수 있다. 붕우간에 간절하게 책선하고 형제간에 화기애애하니라.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에 대한 제문

 

 

모년 모월 모일 반남 박모는 삼가 척계지서(隻鷄漬絮)의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올리고 글로써 곡합니다.

 

아아 / 嗚呼

내가 나서 세 살 되니 / 我生三年

말 비로소 배울 때라 / 自始能言

밤이라 능금이라 / 栗兮楂兮

오천을 노래했지 / 詠言梧川

누굴 자랑한 거냐면 / 云誰之誇

갓 시집온 형수님 집이었네 / 新婦之家

공이 따님 보러 오실 제 / 公來視女

노상 흰 나귀를 탔고 / 常乘白驢

눈은 오목하고 수염 길어 / 深目長髯

위엄 있고 정숙하셨네 / 威儀雅魚

뛰어나가 절 드리며 / 超躍迎拜

기뻐서 글공부도 잊었지 / 喜闕課書

나도 장인이라 부르면서 / 亦呼丈人

형을 따라 같이 했네 / 隨兄而如

어제 아침 일 같은데도 / 怳若隔晨

어언 삼십여 년 / 三十年餘

공의 성품 강직하고 / 公性剛明

사리와 인정에 통달했으며 / 深達事情

고사에 정통하고 예의를 숭상 / 博古好禮

인륜 의리 투철하셨네 / 倫備義精

나라에 못 쓰이고 / 進不需國

산골짝에서 늙었으나 / 守老一壑

운명이니 어찌 슬퍼하리 / 命也何怛

후회도 부끄럼도 없이 사셨노라 / 生無悔怍

아아 / 嗚呼

어머님 같고말고 / 先妣之似

우리 형수 나에게는 / 母我嫂氏

우리 집의 형수님은 / 嫂氏於家

옛 충신과 같아서 / 如古藎臣

힘 다해 죽어서야 그만두니 / 盡瘁後已

공은 제 몸처럼 아프게 여겨 / 公癏若身

정성스레 보살피길 / 綢繆慇懃

마치 옛날 제후국이 / 如古矦邦

이웃 나라 구제하고 백성을 보호하며 / 恤鄰保民

때맞추어 곡물 주어 / 賑糶以時

제 백성을 돌보듯이 하셨네 / 視厥赤子

딸 생각은 그렇대도 / 女固念矣

그 동서까지 염려해 주셨네 / 推及厥娌

부모님을 여읜 뒤로 / 自我孤露

더욱 공의 비호에 의지했네 / 益仰燾庇

길 가다 반백의 노인 보면 / 路見斑白

내 마음 몹시 송구스럽네 / 我心怵惕

더구나 공은 연세와 덕망으로 / 況公年德

아버님과 의기투합한 벗이었거늘 / 父之誼執

어찌 백 년을 못 사시어 / 胡不百年

나를 섧게 만드시나 / 使我深慽

이 소자 와서 곡을 하고 / 小子來哭

뜰과 집을 두루 살펴보니 / 周瞻院屋

국화 피어 향기 짙고 / 菊有剩馨

솔 푸르러 뜰에 가득 / 松翠滿庭

오천의 산은 울울창창 / 梧山鬱鬱

오천의 물은 맑디맑네 / 梧水泠泠

고인의 자취 어제런 듯한데 / 遣䠱如昨

영상(靈床)에서 절 드리니 예전과 다르네 / 拜床非昔

두 줄기 눈물 쏟아지고 / 雙淚磊落

호곡 소리 목이 메네 / 聲苦喉嗌

지칠 줄 모르고 장려해 주셨는데 / 不倦奬掖

이제 어디에 가르침을 청하리 / 今安請益

거듭 당부하신 그 유언을 / 丁寧遺托

감히 어찌 명심하지 않으리오 / 敢不銘臆

혼령이시여 가까이 계시거든 / 尊靈不膈

이 술잔을 받으소서 / 庶歆玆酌

상향 / 尙饗

 

 

[C-001]오천(梧川) 처사 이장(李丈) :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의 장인인 이동필(李東馝 : 1724~1778)을 가리킨다. 연암집 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 참조.

[D-001]척계지서(隻鷄漬絮)의 제수 : 간단한 제수를 뜻하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서치(徐穉)는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라 일컬어졌던 사람인데, 그가 먼 곳으로 문상(問喪)하러 갈 때 술을 솜에 적셔서 햇볕에 말리고 그것으로 구운 닭을 싸서 가지고 간 다음 솜을 물에 적셔 술을 만들고 닭을 앞에 놓아 제수를 올린 뒤 떠났던 데서 나온 말이다. 後漢書 卷53 周黃徐姜申屠列傳 徐穉

[D-002] …… 그만두니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 몸이 닳도록 힘을 다하여 죽어서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고 하였다.

[D-003]영상(靈床) : 염을 마치고 입관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셔 놓은 곳을 말한다.

[D-004]혼령이시여 가까이 계시거든 : 원문의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는데, 뜻은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대범 사람의 삶은 요행이라 할 수 있는데도 그 죽음이 공교롭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루 동안에도 죽을 뻔한 위험에 부딪치고 환난을 범하는 것이 얼마인지 모르는데, 다만 그것이 간발의 차이로 갑자기 스쳐가고 짧은 순간에 지나가 버리는 데다가, 마침 민첩한 귀와 눈, 막아 주는 손과 발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렇게 되는 까닭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 뿐이며, 사람들도 편안하게 생각하고 안심하고 행동하여 밤새 무슨 변고가 없을까 염려하지 않는다. 진실로 사람마다 늘 뜻하지 않은 변고를 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게 한다면, 비참하도록 두려워서 비록 종일토록 문을 닫고 눈 가리고 앉아 있다 해도,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어떤 망기(望氣)하는 자가 한 여자의 관상을 보고서 소가 들이받는 것을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지게문 앞에서 귀이개로 귀를 후비다 지게문이 세차게 부딪치는 바람에 귀를 찔러서 죽었으니, 귀이개는 소뿔로 만든 것이었다. 또 사주쟁이가 한 사내의 사주팔자를 논하면서 쇠를 먹고 죽게 될 것이라 했는데, 이른 아침 밥을 먹다가 폐가 수저를 빨아들여 죽었다. 그 신기하게 들어맞고 공교하게 증험된 것이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일을 당하기에 앞서 간곡하게 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쇠는 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소도 규방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니, 비록 천명을 아는 선비일지라도 이런 일을 미리 헤아려서 경계하고 조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 “군자는 그가 듣지 못하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경계한다.” 했지만, 이것이 어찌 소에 찔리고 쇠를 먹는 것을 두고 이름이겠는가. 요컨대 높은 산에 오르지 아니하고 깊은 물가에 다가가지 않고,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조절하며, 나의 생각이 속에서 생겨나는 바를 경계한 것일 뿐이다. 밖에서 닥쳐오는 환난이야 역시 또 어찌하겠는가.

이몽직의 휘()는 한주(漢柱)이니, 본관은 덕수(德水)로서 충무공(忠武公)의 후손이다. 그 부친은 절도사(節度使)로 휘가 관상(觀祥)인데, 나의 매형(姊婿)인 의금부 도사 서중수(徐重修) 씨에게 외삼촌이 된다. 그러므로 몽직은 어렸을 때부터 내게 와서 배웠고, 그의 매제인 박씨의 아들 제운(齊雲 박제가)은 젊은 나이로 문장에 능하여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였는데 나와 친한 사이다. 몽직은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라 비록 무관으로 종사했지만 문인을 좋아하여, 항상 초정을 따라서 나와 교유하였다. 사람됨이 어려서는 곱고 귀엽더니, 장성한 뒤에는 시원스럽고 명랑하여 호감을 주었다. 하루는 남산에서 활쏘기를 익히다가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렇게 죽었을 뿐 아니라 아들도 없었다.

, 국가가 태평을 누린 적이 오래라 사방에 난리가 없어 싸울 만한 일이 없는데도, 선비가 유독 창끝이나 살촉에 찔려 죽는다는 것은 어찌 공교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릇 사람이 하루를 사는 것도 요행이라 하겠다. 이에 애사를 지어 전장에서 죽은 장사(壯士)를 애도하고, 이로써 몽직의 죽음에 대해 조문하노라. 애사는 다음과 같다.

 

장사가 몸을 솟구쳐 전장으로 내달리니 / 士踴躍兮赴戰塲

바람 모래 들이쳐라 양편 군사 맞붙는다 / 風沙擊兮兩軍當

목소리가 쉬고 거칠어 도리어 고조되지 아니하고 / 聲廝暴兮還不颺

입으로는 칼을 물고 전진하며 창 휘두르네 / 口含劍兮前舞槍

눈 한번 깜짝 않네 뭇 창끝이 몰려와도 / 目不瞬兮集衆鋩

오른발론 짓밟고 왼발을 날리누나 / 踏右足兮左脚揚

모든 힘을 다 쏟아라 임금님을 위함일레 / 竭膂力兮爲君王

모양 소리 사나워도 참으로 미치광이 아니라오 / 容聲惡兮諒非狂

아아 / 嗚呼

죽은 지가 오래지만 곧게 선 채 쓰러지지 않고 / 死已久兮立不僵

주먹 상기 쥐었어라 두 눈마저 부릅떴소 / 手猶握兮兩目張

자손에게 벼슬 주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며 / 蔭子孫兮表其鄕

역사책에 기록하니 아름다운 이름 길이 전하리 / 史書之兮流芬芳

 

 

나는 내 친구 이사춘(李士春)이 죽은 뒤부터는 사람들과 다시 교제하고 싶지 않아 경하(慶賀)건 조위(弔慰)건 모두 폐해 버렸다. 그리하여 평생의 절친한 친구로 이를테면 유사경(兪士京 유언호(兪彦鎬)), 황윤지(黃允之 황승원(黃昇源)) 같은 이들이 험한 횡액을 만나 섬에서 거의 죽게 되었어도, 한 글자 안부를 물은 적이 없었다. 비록 왕래하는 일이 있다 해도, 가까운 이웃에 밥 지을 물과 불을 얻거나 시복(緦服) 이내의 집안 친척을 조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척 원망하고 노여워하여, 꾸지람과 책망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나 역시 스스로 이와 같이 하겠다 감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교제가 끊어지는 것도 달갑게 여겨, 비록 실성하거나 멍청한 사람으로 지목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았다.

대개 생각은 다 망상이요, 인연은 다 악연이다. 생각하는 데서 인연이 맺어지고, 인연이 맺어지면 사귀게 되고, 사귀면 친해지고, 친하면 정이 붙고, 정이 붙으면 마침내는 이것이 원업(冤業)이 되는 것이다. 그 죽음이 사춘(士春)처럼 참혹하고 몽직(夢直)처럼 공교로운 경우에는, 평생 서로 즐거워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데 마침내 재앙과 사망으로 고통이 혹독하여 뼈를 찔러대니, 이것이 어찌 망상과 악연이 합쳐져서 원업이 된 게 아니겠는가. 만약에 몽직과 애당초 모르는 사이였다면, 아무리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도 마음이 아프고 참담한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몽직이 나를 종유(從遊)한 것은 비록 사춘의 경우처럼 정이 깊고 교분이 두텁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달 밝은 저녁과 함박눈 내린 밤이면, 문득 술을 많이 가지고 와서 거문고를 퉁기고 그림을 평론하며 흠뻑 취하곤 했었다. 나는 고요히 지내면서 이런 생활에 익숙해 있었는데, 혹은 달빛 아래 거닐며 서글퍼하다 보면 몽직이 하마 이르렀고, 눈을 보면 문득 몽직을 생각하는데, 문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하면 과연 몽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만이다.

내가 그의 집에 가서 곡하고 조문하지 못할 형편이므로, 그를 위해 이 애사를 지어 저 옛날 한창려(韓昌黎)가 구양생(歐陽生)에 대한 애사를 손수 썼던 일을 본떠서, 드디어 한 통을 써서 초정에게 주는 바이다.

 

[C-001]이몽직(李夢直)에 대한 애사(哀辭) : 몽직은 이한주(李漢柱 : 1749~1774)의 자이다. 애사는 한문(漢文) 문체의 하나로, 주로 요절한 사람에 대한 추도사를 말한다.

[D-001]망기(望氣) : 망운(望雲)이라고도 하며, 구름을 보고 길흉을 예언하는 점술을 말한다.

[D-002]귀이개 : 원문은 ‘’인데, 이는 우리식 한자이다.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음은 이다. 귀지를 파내는 도구인데 조선조의 제품이다.音滔 取耳中垢之具也 韓代所製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도 유사한 주를 달아 놓았다.

[D-003]천명을 아는 : 주역 계사전 상에 천도를 즐기고 천명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 故不憂고 하였다.

[D-004]군자는 …… 경계한다 : 중용장구  1 장에 나오는 말이다. 단 앞뒤 구절의 순서가 바뀌었다.

[D-005]관상(觀祥) : 이관상(1716~1770)은 충무공의 5세손으로, 그의 친아들 한주는 형 이보상(李普祥)의 양자가 되었으며, 그의 둘째 서녀(庶女)가 박제가(朴齊家)에게 시집갔다. 무과 급제 후 고을 수령과 병수사(兵水使)를 여러 차례 지냈으며,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재임 중 사망했다.

[D-006]서중수(徐重修) : 1734~1812. 그의 자는 성백(成伯)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연암의 둘째 누님의 남편이다. 연암집 5 성백에게 보냄與成伯이란 두 통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D-007]주먹 : 원문 가 대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여한십가문초 등에 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고쳐 번역하였다.

[D-008]이사춘(李士春) : 이희천(李羲天 : 1738~1771)으로, 그의 자가 사춘(士春)이다. 호는 석루(石樓)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연암은 그의 부친인 이윤영(李胤永)에게서 주역을 배우게 된 것을 계기로, 젊은 시절부터 그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이희천은 청() 강희(康熙) 때 남양지부(南陽知府)를 지낸 주린(朱璘)이 편찬한 명기집략(明紀輯略)에 조선 태조의 세계(世系)를 왜곡 · 모독한 내용이 있는 줄 모르고 그 책을 책 장사로부터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문제되어 참수되는 변을 당했다. 英祖實錄 47 5 26

[D-009]유사경(兪士京 ) …… 되었어도 : 영조 48(1772) 유언호(兪彦鎬)는 노론 청류(淸流)로 지목되어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0월 탕척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황승원(黃昇源)이 사간원 정언으로서 이광좌(李光佐) 등 소론계 대신의 관직을 복구하라는 영조의 특지(特旨)에 항의한 참판 조영순(趙榮順)을 두둔했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어 몇 달 만에 풀려났다.

[D-010]시복(緦服) : 시마(緦麻)로 된 상복을 입는 3개월의 상을 말한다. 족부모(族父母), 족형제(族兄弟) 등 가장 촌수가 먼 친척의 상이 이에 해당한다.

[D-011]원업(冤業) : 악업(惡業), 즉 악한 결과를 받는 행동을 말한다.

[D-012]한창려(韓昌黎) ……  : 한유(韓愈)는 요절한 벗 구양첨(歐陽詹)을 위해 구양생애사(歐陽生哀辭)를 짓고 나서 덧붙인 제애사후(題哀辭後)에서 나 한유는 본래 쓰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글을 짓고 난 뒤 단 두 통만을 손수 써서, 그중 한 통은 청하(淸河)의 최군(崔群)에게 주었다. 최군과 나는 모두 구양생의 벗이다.”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경집(兪景集)에 대한 애사

 

 

유경집의 휘는 성환(成煥)이고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외모가 훤출하고 건장하며 성품은 순하고 언행은 겸손하며, 기억력이 아주 뛰어났고 문학에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 그런데 나이 스물둘에 병에 걸려 죽었다.

아아, 나는 경집의 아버지의 친구로서, 경집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버지를 잘 알았다. 경집의 조부모는 경집의 아버지만을 일찍 기르고서, 뚝 끊기듯이 다른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경집이 태어나자 손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작은 아들로 여겼으며, 경집의 부모 역시 감히 스스로 그 아들을 제 아들이라 하지 못하였는바, 경집도 어렸을 적부터 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급기야 경집이 죽자 그 부모는 감히 그 아들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늙은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조부모는 차마 그 손자의 죽음에 곡도 못하고, 아들의 슬픔을 더 크게 할까 두려워하여 속으로 울었다. 두 살배기 아들은 그 아비에 대해 곡하는 슬픔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어미가 슬퍼하는 것 때문에 울어대니, 그 아내 이씨(李氏)는 감히 죽지도 못하고 또한 감히 곡도 못하고 속으로 울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유생(兪生)이 재주와 덕행을 지니고도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그 아버지에게까지 조문하고 곡할 겨를이 없었으니, 그 조부모가 다 늙어서 작은 아들과 다름 없는 손자를 잃은 때문이다. 이것이 경집의 죽음을 대단히 슬퍼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애사를 지어 애도하는 바이다.

 

죽은 사람이 죽음의 슬픔을 모르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과, 산 사람이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함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슬퍼할 만한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슬플까?

어떤 이는 죽은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것을 모를 뿐 아니라, 산 사람이 그의 죽음이 슬퍼할 만한 일임을 슬퍼한 줄을 모르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산 사람이 슬프지. 죽은 사람은 이미 아무것도 몰라 슬퍼할 만한 것을 슬퍼함도 없으나, 산 사람은 날마다 그를 생각하여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생각하면 슬퍼서, 빨리 죽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기를 바라니, 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렇지 않다. 효자는 더러 부모 여읜 슬픔으로 생명이 위급하기도 하고, 자부(慈父)는 더러 자식 잃은 슬픔으로 실명하기도 하고, 열부(烈婦)는 더러 자결하기도 한다. 이는 다 죽은 자에 대한 슬픔으로 말미암아 혹은 따라 죽고 혹은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논한다면,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슬픔은 함께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나는 유경집의 죽음에 대해서 산 사람이 슬프다.”고 단언한다.

무릇 사람의 감정으로 볼 때 가장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기로는, 나는 믿었는데 상대방이 속이는 것만 한 것이 없으며, 속임을 당한 고통은 가장 친하고 다정한 이가 문득 나를 등지고 떠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친하고 다정하기로 손자와 할아버지, 아들과 아버지, 남편과 아내 같은 사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등을 돌리기를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또 믿어 의심함이 없기로는, 어느 것이 경집의 재주와 외모로 보아 장래가 크게 기대되는 경우와 같겠는가. 그런데도 마침내 상식과 이치에 어긋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그러니 어찌 원망스럽고 한스러워 혹독한 고통이 뼈를 찌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아아, 비록 그렇지만 산 사람은 제 슬픔에 슬퍼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이 슬퍼하는지 슬퍼하지 않는지를 모른다. 그렇다면 평일에 나처럼 그를 아끼던 자가 어찌 애사를 지어, 한편으로는 산 사람의 슬픔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이 제 슬픔에 슬퍼하지 못하는 것을 애도하지 않겠는가.

 

 

[D-001]경집의 아버지 : 유정주(兪靖柱 : 1729~1798)를 가리킨다. 유정주는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의 족자(族子)가 되므로, 유한준도 그의 아들을 위해 애사(哀辭)를 지었다. 自著 卷15 族孫成煥哀辭

[D-002]조부모를 제 부모로 여겼다 : 원문은 乃大父焉是母인데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문맥으로 유추하여 번역하였다.

[D-003]자부(慈父) …… 하고 :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아들을 여의고 상심하여 실명을 하였다고 한다. 禮記 檀弓上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재종숙부 예조 참판 증 영의정공(領議政公) 묘갈명(墓碣銘)

 

 

공의 휘는 사정(師正)이요 / 公諱師正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 潘南人也

자는 시숙(時叔)이요 / 字曰時叔

부친의 휘는 필하(弼夏)이네 / 考諱弼夏

우리 박씨는 / 維我朴氏

신라에서 비롯되어 / 肇自新羅

여덟 망족(望族)으로 갈렸는데 / 分爲八望

반남이 제일 대가 / 潘爲大家

평도공(平度公) / 維平度公

우리 태종 도우셨고 / 相我太宗

야천(冶川)께서 상서로운 조짐 일으켜 / 冶川發祥

대대로 번창하게 되었네 / 族世遂昌

금계군(錦溪君)의 공적이며 / 錦溪功業

금양군(錦陽君)의 문장이라 / 錦陽文章

증조 휘는 세교(世橋)이고 / 曾祖世橋

조부 휘는 태두(泰斗)이니 / 祖諱泰斗

추증(追贈)되는 경사 거듭되고 / 榮贈襲休

봉군(封君)이 대를 이었네 / 君封世受

모친 윤씨 부인은 / 妣尹夫人

관찰사 반()의 따님 / 監司攀女

공께서는 숙종대왕 / 公於肅廟

계해년에 출생하여 / 癸亥以擧

기미년에 돌아가시니 / 己未乃卒

향년은 오십칠 세 / 壽五十七

정유년에 정시 급제 / 丁酉庭試

한림이며 옥당이며 / 翰林玉堂

춘방이며 대각이며 / 春坊臺閣

검상이며 전랑을 / 檢詳銓郞

두루두루 거치셨지 / 周歷流轉

산직(散職) 겸직(兼職)도 있고 / 有冗有兼

해읍에도 간혹 보직되고 / 間補海邑

호남도 안렴(按廉)했네 / 亦按湖廉

처음에 흉당들이 / 厥初凶黨

사필 장악할 욕심으로 / 圖秉史筆

외직으로 공 내쫓고 / 絀公于外

효경(梟獍) 같은 자들을 배치했네 / 獍梟峙列

공이 그 간상(姦狀) 파헤쳐서 / 公發其姦

드디어 신치운 · 조지빈을 공박하니 / 遂駁雲彬

누가 저들을 함께 천거했나 / 誰其同剡

그 사람을 알 수 있네 / 可知其人

엄숙한 저 청묘는 / 肅肅淸廟

묘정(廟庭) 배향 장엄한데 / 庭食嚴哉

저 세 정승들은 / 若彼三相

진실로 재앙의 괴수들이라 / 寔俱禍魁

저들 배향 물리쳐서 / 並斥其享

제사 의식 중히 하고 / 以重祀典

몸가짐 고고히 하여 / 持我矯矯

저들의 관리 선발 조소하였네 / 譏彼銓選

네 충신을 함께 제사하자고 / 並祠四忠

공이 처음 의견 내셨네 / 詢謀自公

적신들이 집권하자 / 賊臣執命

국시가 무너지니 / 國是北崩

평피의 회합은 / 平陂之會

또 하나의 사당(私黨)일레 / 又一淫朋

공은 맹종하지 않고 / 公不詭隨

정절이 돌보다 단단했으니 / 貞于介石

사람들은 공의 처신 살펴보고 / 視公進退

영예로운 때인지 아닌지를 예측하였네 / 占時榮辱

왕릉 이전 공사 감독하여 / 董匠遷陵

그 공로로 승지로 승진하고 / 勞陞銀臺

안변 부사로서 치적 드러났나니 / 著治安邊

검약하고 절제하였네 / 廉約自裁

대사간으로 들어온 다음 / 入長薇垣

예조 형조 참의 되고 / 參議禮刑

이조 참의 세 번 되어 / 三入選部

청탁(淸濁)을 꼼꼼히 따졌네 / 錙分渭涇

강화 유수로 발탁되고 / 擢守沁府

한성부의 우윤과 좌윤 거쳤네 / 左右尹京

예조 참판 재임하고 / 再佐秩宗

도승지가 한 번 되니 / 一爲知申

품계로는 가의대부 / 階則嘉義

춘추관과 경연 직함에다 / 春秋經筵

의금부와 오위도총부 관직 겸하고 / 金吾摠管

봉상시 제조 거쳐 / 提擧奉常

비변사 제조 힘껏 사양해도 / 力辭籌司

수석 영광 차지했네 / 首席據光

부인은 이씨이니 / 夫人李氏

본적이 함평이요 / 其籍咸平

부친 휘는 택상(宅相)이며 / 父曰宅相

고조 휘는 춘영(春英)이라 / 高祖春英

공이 세상 떠나시고 / 距公之沒

십구 년 뒤에 별세했네 / 十九年卒

여섯 남매 낳았는데 / 六子是擧

아들 넷에 따님이 둘 / 四男二女

흥원(興源)은 스무 살에 / 興源弱冠

진사과에 합격했고 / 迺成進士

창원(昌源)은 문과 장원이나 / 昌源魁科

벼슬은 정언에 그쳤네 / 正言而止

형원(亨源)까지 일찍 죽어 / 亨源蚤歿

모두 서른 못 넘겼네 / 俱未卅禩

명원(明源)은 부마 되어 / 明源尙主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지니 / 封錦城尉

공이 영의정에 증직된 건 / 贈公議政

실로 그가 귀한 신분 된 덕일레 / 寔用其貴

큰사위는 김기조요 / 女金基祚

둘째 사위는 이도양인데 / 次李度陽

열렬한 이씨 아내는 / 烈烈李妻

남편 따라 자결했네 / 從夫自戕

장남에겐 아들 셋 있으니 / 長派三男

상덕(相德)은 이조 판서 / 相德吏判

상악(相岳)은 사간원 정언이며 / 相岳正言

상철(相喆)은 한성 부윤인데 / 相喆府尹

상악은 형원의 양자 되고 / 岳繼亨後

상철은 금성위의 양자 되고 / 喆爲尉子

족자인 상집(相集) / 族子相集

창원의 제사를 받들었네 / 亦承昌祀

공은 풍채 아름답고 / 公美姿度

천품이 곧고 깐깐하여 / 天姿抗簡

남의 부정 보게 되면 / 視人不正

그자의 갓이 기운 듯이 여겼네 / 若攲厥冠

집안에선 위의(威儀) 있고 / 在家獻獻

관에서는 강직하셨네 / 在官侃侃

소생이 묘갈명 지었으니 / 小子作銘

영원토록 마멸되지 않으리이다 / 永世不刊

 

 

[D-001]여덟 망족(望族) : 박씨 중 밀양(密陽) · 반남 · 고령(高靈) · 함양(咸陽) · 죽산(竹山) · 순천(順天) · 무안(務安) · 충주(忠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른바 팔박(八朴)’을 가리킨다.

[D-002]평도공(平度公) : 박은(朴訔 : 1370~1422)의 시호이다. 태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D-003]야천(冶川) : 박소(朴紹 : 1493~1534)의 호이다. 연암집 1 ‘합천 화양동 병사기(陜川華陽洞丙舍記)’ 참조.

[D-004]금계군(錦溪君) : 박동량(朴東亮 : 1569~1635)의 봉호이다.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扈從)한 공신이었다.

[D-005]금양군(錦陽君) : 선조의 다섯째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한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 1592~1645)이다. 뒤에 금양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당대의 문장가로서, 분서집(汾西集)이 있다.

[D-006]한림이며 …… 거치셨지 : 한림(翰林)은 예문관, 옥당(玉堂)은 홍문관, 춘방(春坊)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대각(臺閣)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가리킨다. 검상(檢詳)은 의정부의 정 5 품 벼슬로 문서 검열을 담당하였고, 전랑(銓郞)은 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가리킨다. 박사정(朴師正)의 관력(官歷) 연암집 9 ‘예조 참판 증 영의정 부군 묘표음기(禮曹參判贈領議政府君墓表陰記)’에 자세하다.

[D-007]해읍(海邑)에도 …… 안렴(按廉)했네 : 흥양 현감(興陽縣監), 남해 현령(南海縣令) 등에 임명된 사실과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사실을 말한다.

[D-008]처음에 …… 배치했네 : 영조 즉위 초에 경종실록(景宗實錄)을 편찬하는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할 때 당상관(堂上官)은 유봉휘(柳鳳輝) · 조태억(趙泰億) · 김일경(金一境) · 이진유(李眞儒) , 낭청(郞廳)은 조지빈(趙趾彬) · 신치운(申致雲) 등 소론 일색으로 임명되고, 낭청으로 임명된 박사정은 회인 현령(懷仁縣令)으로 축출되었던 사실을 말한다.

[D-009]누가 …… 있네 : 박사정은 신치운 등이 박필몽(朴弼夢 : 1668~1728)에게 붙어 사관(史官) 자리를 차지한 것을 공박하였다. 박필몽은 소론 강경파로서 영조 즉위 초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실록청을 사사로이 출입한다고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D-010]청묘(淸廟) : 종묘의 묘실(廟室), 여기에서는 숙종의 묘실을 가리킨다.

[D-011]세 정승들 : 숙종의 묘에 배향된 소론측의 삼대신(三大臣)으로,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崔錫鼎), 우의정을 지낸 윤지완(尹趾完)을 가리킨다.

[D-012]몸가짐 …… 조소하였네 : 영조 즉위 초에 노론과 소론을 가리지 않고 탕평책에 순응하는 사람들만 선발하는 데 항의하여, 박사정이 누차 관직에 제수되었어도 취임을 거부한 사실을 말한다.

[D-013]네 충신 : 노론 사대신인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를 가리킨다. 이들은 경종 때 왕세제(王世弟 : 후일의 영조)를 책봉하고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는 문제로 소론의 미움을 사서, 1722(경종 2) 노론계의 역모사건인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1725(영조 1) 사충서원(四忠書院)을 건립하여 이들을 제향하고 사액(賜額)하였다.

[D-014]평피(平陂)의 회합 : 영조의 탕평책은 서경 홍범(洪範) 치우치지 말고 왕의 의로움을 따르라.無偏無陂 遵王之義”,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탕평하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라는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러므로 평피의 회합은 노론과 소론이 뒤섞인 탕평파(蕩平派)를 풍자하여 한 말인 듯하다.

[D-015]천품이 곧고 깐깐하여 : 원문의 天姿 天資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는데, 뜻은 비슷하다.

[D-016]그자의 …… 여겼네 :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D-017]위의(威儀) 있고 : ‘獻獻 의의라 읽으며,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을 나타내는 儀儀와 같은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삼종형(三從兄) 수록대부(綏祿大夫) 금성위(錦城尉)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贈諡) 충희공(忠僖公) 묘지명(墓誌銘)

 

 

지금 임금 14년 경술년(1790) 3 25일 을사일에 금성위 박공(朴公)이 제생동(濟生洞) 사제(賜第 임금이 하사한 집)의 정침(正寢 몸채의 방)에서 편안히 운명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임금께서는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급히 전교하여 애도하는 뜻을 표했는데, 고굉폐부(股肱肺腑)의 신하로서 한 글자를 얻으면 사후나 생시의 영광으로 삼는 것이, 공에게는 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널은 장생전(長生殿) 비기(秘器 상례에 쓰는 기구)의 여벌을 내려 주고 장례는 1등급의 예()를 적용하게 하였으며, 무릇 봉( 수레와 말), 수의(襚衣), 제수로 쓰일 물품은 모두 내부(內府 왕실의 창고)에서 지급하게 하였다. 담당 관원들이 각기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바야흐로 분주하게 문하에서 기다리는데, 가족들이 고인의 뜻을 아뢰어 예장(禮葬)을 면해 주기를 빌므로 임금께서 마지못해 응낙하여 그 뜻을 이뤄 주게 하였다. 그리고 바로 호조에 명하여, 그 대신 돈 30만 전(), 백미 100섬과 면포와 갈포 1400여 필을 실어 보내게 하였다. 염이 끝나자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게 하고, 공경 대신(公卿大臣)들에게 명하여 모두 조문하게 하였다. 성복(成服)날이 되자 승지를 보내 어제 치제문(御製致祭文)을 읽어 제사 지내게 하였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을 다했던 신하로서 한 글자라도 얻으면 공훈을 기록한 명정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공에게는 또 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이에 도신(道臣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도위(都尉)의 장사 날짜가 정해졌으니, 내 장차 비문을 친히 지어 그 신도(神道 무덤으로 가는 큰 길)를 빛나게 할 생각이다. 너는 큰 돌을 채취해 놓고 기다려라.”

하고, 이내 사신(詞臣 홍문관 제학)에게 명하기를,

 

어진 도위에게 시호(諡號)를 내려 주는 것은 정해진 은전(恩典)이다. 너는 그의 덕을 기록하여 봉상시(奉常寺)에 고하라.”

했다. 이에 봉상시 제조가 공의 평생의 대략을 특서한 것을 채집하니, ‘밀찬익호(密贊翊護)’ 건의천원(建議遷園)’이라는 여덟 글자였다. 의정부와 홍문관의 신하들이 모두 건의하기를,

 

공은 일찍이 바깥 조정에서 능히 못할 바에 절개를 바치고, 온 나라가 감히 못할 바에 충성을 다하여, 사직에 공이 있으니 시호를 충희(忠僖)라 짓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은 그 건의를 윤허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시법(諡法)에 나라를 생각하느라 집을 잊은 것을 ()’이라 하고, 조심하여 공순하고 삼가는 것을 ()’라 했다. 아아, 공은 그 시호에 합당하다 하겠다.

공의 휘()는 명원(明源)이요 자는 회보(晦甫)이다. 우리 박씨는 계통이 신라에서 나왔는데, 시조가 나주(羅州)의 반남(潘南)에서 성()을 얻었다. 고려 말에 휘 상충(尙衷)이 있어 우리 왕조에서 문정(文正)의 시호를 추증받았다. 이분이 평도공(平度公) 휘 은()을 낳으니, 우리 태종을 보좌하는 정승이 되었다. 그로부터 5대를 전해 내려와, 문강공(文康公) 휘 소()는 세상 사람들이 야천(冶川) 선생이라 일컬었으며, 선조(宣祖) 때의 명신인 충익공(忠翼公) 휘 동량(東亮)은 공훈으로 금계군(錦溪君)에 봉해졌으며, 아들 문정공(文貞公) 휘 미()는 선조의 따님 정안옹주(貞安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우리 왕조의 문장 대가로 반드시 금양위(錦陽尉)를 손꼽으니, 바로 공의 5세조이다.

고조는 첨정공(僉正公) 휘 세교(世橋)인데 이조 판서 금흥군(錦興君)에 추증되었으며, 증조 군수공(郡守公)은 휘 태두(泰斗)인데 좌찬성 금은군(錦恩君)에 추증되었고, 조부 참봉공(參奉公)은 휘 필하(弼夏)인데 좌찬성 금녕군(錦寧君)에 추증되었으니, 충익공의 적손(嫡孫)인 때문에 모두 훈봉을 이어받은 것이다. 부친은 예조 참판 휘 사정(師正)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모친은 정경부인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학생 택상(宅相)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대왕 원년인 을사년(1725) 10 21일에 태어났으며, 14세에 영조의 셋째 따님인 화평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처음에는 순의대부(順義大夫)에 제수되고, 품계가 쌓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이르렀으며,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봉상시(奉常寺) · 전의감(典醫監) · 선공감(繕工監) · 사재시(司宰寺) · 장흥고(長興庫) · 제용감(濟用監)의 제조(提調)가 되었다. 누차 금보(金寶)와 옥책(玉冊)의 글씨를 써서 그때마다 상으로 말을 하사받았고, 사명을 받들고 세 번이나 북경에 갔으며, 임금의 특지(特旨)로 도감(都監)의 당상(堂上)에 제수된 것이 세 번인데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공적이 있었다.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천성이 단정하고 선량하며 성실하고 정중하였다. 50여 년이나 대궐을 출입하였으나, 보는 것은 발길 미치는 곳을 넘지 않았고 들은 것은 가족들에게도 말을 옮기지 않았으며, 조정의 논의는 입 밖에 낸 적이 없고 조정 벼슬아치들의 집에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임금의 총애와 예우가 여러 귀척(貴戚 임금의 인척)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지만, 밤이나 낮이나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늙을 때까지 해이해지지 않았다. 임금이 특별히 예외로 전장(田庄)과 노비를 하사하면, 문득 사양하며,

 

신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일찍이 부마로 선택되었으니, 가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였다. 완상(玩賞)할 만한 옛 기물(器物)을 특별히 하사해도, 감히 스스로 지니지 않았다. 처음에 저택으로 이현궁(梨峴宮)을 하사했으나, 상소하여 기어이 사양하였다. 화평옹주가 돌아가매 영조가 누차 거둥하여 상사를 살피니, 공은 상소를 올려 기어이 임금의 행차를 중지토록 하였으며, 뜻대로 되지 않자 계속 어가(御駕)를 부여잡고 완강히 간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한적하여 사람이 없는 것 같았으며, 의원을 맞이하는 일이 아니면 새 얼굴을 대할 길이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때문에 말하기를,

 

누가 그의 마음을 사랴? 차라리 금을 캐는 게 낫지. 그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 말아라. 촌철(寸鐵)도 안 통한다.”

했다. 그러므로 조카 종덕(宗德) 10여 년 동안 이조와 병조의 판서직을 맡았으나, 세상에 감히 공에게 인사 청탁을 하는 자가 없었다. 몸가짐을 항상 새 옷을 입은 듯이 하면서,

 

물건을 남에게 줄 때도 오히려 먼지를 터는 법인데, 하물며 몸을 임금에게 바침에 있어서랴.”

했다.

일찍이 지원(趾源)에게 말하기를,

 

부마가 무슨 벼슬인고?”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품계는 높아도 뭇사람이 우러러보는 재상의 직책이 아니요, 녹봉은 후해도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는다는 책망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했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일찍이 수레를 하사하며 타라고 명하시므로, 남성(南城 남한산성)에서 호정(湖亭)까지만 타고 말았네. 십수 년 뒤에 임금이 다시 무엇을 타고 다니는지를 물으셨으므로 황공하여 미처 대답을 못했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대신 이 사람은 수레가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대번에 명을 내려 만들어 주게 하셨지. 그래서 또 동대문으로부터 나와 교외의 별장까지만 타고 그만두었네.”

하므로, 내가 묻기를,

 

왜 타지 않았습니까?”

하였더니,

 

이는 명망과 덕행이 있는 이가 사용하는 것인데 어찌 재상과 나란히 수레를 몰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뒷날에 또 나에게 이르기를,

 

의빈(儀賓 부마)이란 어떤 사람인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궐에 들어가면 임금의 일상생활을 시중들고 대궐 밖으로 나가면 임금의 행차를 뒤따라가니 귀근인(貴近人)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공은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 이슬 · 서리 · 눈 내리는 것이 하늘의 조화 아닌 것이 없는데, 만약 다시 하늘을 쳐다보고 구름을 바라보며, 망녕되이 비가 올지 볕이 날지를 점친다면 이는 모두 신하로서 죽을죄인데, 하물며 귀근인이랴?”

하였다. 공은 마음속으로, 자취가 왕실과 연결된 자는 마땅히 그 행동을 조심하여 세상 사람들이 의중을 엿보게 하지 말아야 하며, 명성을 지니기보다는 차라리 국민들이 아무개 도위가 있는 줄을 모르게 하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비록 걷거나 달려가고 한 번 찌푸리거나 한 번 웃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아주 사소한 것도 신중히 하고, 다만 국시에 따를 뿐이요 자기 의견은 개입시킨 바 없었다. 대중들과 함께 듣고 볼 뿐 대중들보다 먼저 하고자 하지 아니하며, 사소한 것까지 신중히 하고 자세히 검토하는 것은 감히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으니, 그 공경하고 겸손하며 신중하고 과묵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우(知遇)를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서 입어, 세자에게 닥친 곤란과 우환을 항상 말없이 살피면서, 공과 귀주(貴主 화평옹주)가 안팎으로 협찬하며 정성을 다해 보호해 나갔으나, 궁중의 일이라서 이를 아는 이가 없었다. 귀주가 일찍 세상을 떠나매 공의 진실되고 외로운 충성은 임금의 마음속에만 기억되어 있었지만, 차마 자세히 드러내 말씀하시지 못하고 누차 귀주의 제문에다 뜻을 나타내셨으니, 이에 비로소 공이 세자를 보좌한 큰 공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공에게 넌지시 묻는 자가 있자, 공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임금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목이 멜 따름이다.”

하였다.

급기야 공이 장헌세자의 예전 장지의 네 가지 해로운 점을 자세히 아뢰자, 위로는 임금의 마음에 맞고 아래로는 여론이 흡족해하였다. 이에 좋은 묏자리를 얻어 나라의 터전을 영원히 굳혔으니, 돌아가신 세자에게 못다 한 공의 충정으로는 이 공사로써 거의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고 하겠다. 바야흐로 이때에 임금은 공을 은인으로 여기셨고, 나라 안에서는 시귀(蓍龜)처럼 믿고 있었다. 공은 병이 심해져 점점 피곤해져서 거의 식사를 끊다시피 한 지가 여러 해였다. 그러나 여전히 길지(吉地)를 살피고 공사를 감독할 수 있었다. 매번 한번 왕명을 들으면 반드시 신속히 왕래하면서 자신이 쓰러질 것도 걱정하지 않았으니, 왕실에 관한 일을 근심하고 염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만둔 것은 역시 그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원(趾源)이 일찍이 공을 따라 국경을 나갔다가 요하(遼河)에서 비로 길이 막혔는데, 하루는 공이 스스로 나가 물을 살펴보고는 드디어 급히 채찍질하여 곧장 건너므로, 사람들이 허둥지둥 놀라서 뒤를 따랐다. 강을 건너고 난 뒤 공이 사람들을 불러 위로하기를,

 

오늘 일은 진실로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조의 위덕(威德)에 힘입은 자는 물에 빠져 죽을 리가 없고, 설사 빠져 죽는다 해도 이것은 자기의 직분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아무도 감히 다시는 물이 넘실대어 건너갈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였다. 또 길을 다급히 재촉하여 열하(熱河)로 갈 적에도 일을 요량하고 임기응변하는 것이 매번 시의적절하였으며, 자신을 다스리고 대중을 통제함에 있어서는 엄격함이 마치 행진(行陣)하는 것과도 같았다. 비단 사신으로서 왕명을 받든 이 한 가지 일만이 공에게서 볼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 밝은 식견과 굳센 지조는 조정에 나아가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할 만한데도, 이미 나라의 제도에 제한되어 어찌할 수 없는 일인즉, 실로 한 세상이 모두 다 애석히 여기는 바이며, 임금께서도 조정에 임어(臨御)하실 적에 누차 탄식으로 그런 뜻을 드러내셨다.

임금께서 일찍이 연( 가마)을 타고 공의 집에 납시어, 공의 침소가 벼슬이 없는 선비와 같이 쓸쓸한 것을 보고 가상히 여겨 어서(御書) 만보정(晩葆亭)’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또 시를 하사하여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현륭원(顯隆園)이 완성됨에 미쳐서는 승지를 보내어 전장과 노비를 하사하고, 덧붙여 백금과 구마(廐馬)를 내렸으며, 무릇 금성위의 상소에 대해 비답(批答)을 내릴 때는 반드시 사관(史官)이 어전에서 한 번 읽었으니, 모두 특별한 예우였다.

병이 위급하자 태의(太醫 어의)가 약을 싸가지고 가 밤낮으로 진찰하고 간호하였으며, 액정서(掖庭署)의 사자들은 병세를 묻기 위해 날마다 길에 줄을 이었다. 임금께서 거둥하시는 길에 들러 보고자 하여 먼저 사관을 시켜 가 보게 했는데, 공은 이미 말을 못하는 지경이었고 띠를 걸쳐 놓을 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임금께서 슬퍼하며 돌아갔다. 그 후 수일 만에 공이 마침내 별세했으니, 향년 66세였다. 5 16일에 귀주의 묘에 합장하였다. 귀주는 영조 3년 정미년(1727) 4 27일에 태어나서 무진년(1748) 6 24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22세였다. 선왕(先王 영조)의 어찬(御撰) 효우록(孝友錄)이 있다. 공에게는 작은 초상화 두 벌이 있었는데, 선왕께서 모두 충효소심(忠孝小心)’이라 찬()을 하셨다.

공은 형의 아들 상철(相喆)을 데려다 양자로 삼았는데, 상철은 문과에 합격하여 부윤을 지냈다. 안동 김간행(金簡行)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부인은 일찍 죽고, 첩에게 4 3녀가 있으니, 아들은 종선(宗善) · 종현(宗顯) · 종건(宗蹇) · 종련(宗璉)이요, 딸은 장손(張僎), 서근수(徐瑾修), 이건영(李建永)에게 시집갔다. 상철은 종덕의 둘째 아들 홍수(紭壽)를 양자로 삼았는데, 홍수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을 지냈으나 일찍 죽었다. 그 아들 제일(齊一)이 지금 승중(承重)하였는데, 특명으로 상()이 끝나기를 기다려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보임토록 하였다. 딸은 이희선(李羲先), 홍정규(洪正圭)에게 시집갔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초상 때에 임금께서 공이 이 일에 두루 밝은 것을 살피시고, 빈궁(殯宮) 마련부터 사당 건립에 이르기까지 일을 많이 공에게 위임했다. 공은 이미 피로가 쌓여 병든 상태였는데도 오히려 자신의 몸이 추운지 더운지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지내며 깊이 생각에 잠겨 실의에 빠진 모습이 바보와도 같았고, 때로는 말을 잊은 채 저절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로부터 다시는 풍악 소리를 듣지 않고, 후방(後房 소실)의 즐거움도 끊고 정사(亭榭 정자)의 놀이도 끊었으며, 비록 술잔만이 오가는 작은 잔치라도 집에서 베풀지 않았으니, 대개 남모르는 애통함이 마음에 있는 때문이었다.

임종할 때에 조카 종악(宗岳)의 손을 잡고서 말하기를,

 

내가 세 조정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티끌만큼도 보답한 것이 없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하고, 유서를 초하려다 하지 못해 입으로 불렀는데, 한마디도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공 같은 이는 나라의 충신이라 이를 만하니, 충희라는 시호를 얻음이 역시 합당하지 않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위의 있는 금성위여 / 獻獻錦城

화평옹주 배필 되어 / 作配和平

왕실에 공이 있었나니 / 功在王室

두 분 함께 아름답고 곧았도다 / 匹徽共貞

()을 옛사람과 견주어도 / 公於古人

뉘가 더 위대하리 / 將誰與京

 이하 원문 빠짐 

 

 

어떤 이본에는 공경스러운 금성위여, 나랏님의 사위 되어, 왕실에 공이 있었나니, 두 분 함께 아름답고 곧았도다. 천생배필 합장되었으니, 翼翼錦城 天家作甥 功在王室 匹徽共貞 天作隨山〕- 이하 원문 빠짐  로 되어 있다.

 

[C-001]삼종형(三從兄) …… 묘지명(墓誌銘) : 1790(정조 14)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죽자 정조는 손수 그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짓겠노라고 하면서, 아울러 그의 묘지명을 연암이 짓도록 하교하였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고굉폐부(股肱肺腑)의 신하 : 임금이 자신의 팔다리처럼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를 고굉지신(股肱之臣)이라 한다. 폐부의 신하란 간과 폐가 서로 붙어 있듯이 임금과 가장 친근한 관계에 있는 신하를 말한다.

[D-002]삼백여 글자나 되었다 : 정조실록 14 3 25일 조에 삼백여 자에 달하는 정조의 하교가 수록되어 있다.

[D-003]장례는 …… 하였으며 : 예장(禮葬) 1등급의 널감柩材을 사용하게 했다는 뜻이다.

[D-004]예장(禮葬) : 대신이나 공신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예식을 갖추어 치러주는 장례를 말한다.

[D-005]30만 전() : 엽전 1냥이 10()으로, 엽전 3만 냥이다.

[D-006]성복(成服)날이 …… 되었다 : 홍재전서(弘齋全書) 21에 정조가 지은 금성도위 박명원의 성복일 치제문錦城都尉朴明源成服日致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D-007]밀찬익호(密贊翊護) …… 글자였다 : ‘밀찬익호는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은밀히 돕고 보호에 힘쓴 공로가 있다는 뜻이고, ‘건의천원(建議遷園)’은 장헌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옮길 것을 건의한 공로가 있다는 뜻이다.

[D-008]순의대부(順義大夫) :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종 2 품의 품계이다.

[D-009]수록대부(綏祿大夫) : 왕의 사위들에게 주는 정 1 품의 품계이다.

[D-010]금보(金寶)와 옥책(玉冊) : 금보는 죽은 임금이나 왕후의 존호(尊號)를 새긴 도장이고, 옥책은 왕이나 왕비에게 존호를 올릴 때 그 덕을 기리는 글을 새긴 옥 조각을 엮어 매어 책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D-011]효창묘(孝昌墓) : 정조의 요절한 첫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이다.

[D-012]천성 : 원문은 姿性인데, ‘姿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D-013]이현궁(梨峴宮) : 한양 동부 연화방(蓮華坊) 즉 지금의 종로구 인의동에 있던 광해군의 잠저(潛邸)인데, 이 부근은 속칭 배고개梨峴라고 불려 이현궁(梨峴宮)이라고 하였다. 영조도 세제(世弟) 시절에 한때 이 궁에 거주했다.

[D-014]촌철(寸鐵) : 짧고 날카로운 무기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상대방의 마음을 찌르는 짧은 말을 뜻한다.

[D-015]10여 년 : 대본은 數十年인데 十數年의 잘못이다. 연암집 1 ‘족형 도위공의 환갑에 축수하는 서문族兄都尉公周甲壽序 공의 조카가 10여 년 동안 번갈아 이조와 병조의 판서로 있었으되라고 하여 十餘年이라 되어 있다.

[D-016]호정(湖亭) : 한강 삼포(三浦)에 있던 박명원의 별장 세심정(洗心亭)을 가리키는 듯하다. 過庭錄 卷1 삼포는 곧 삼개로 마포(麻浦)를 가리킨다. 漢京識略 卷2 山川

[D-017]귀근인(貴近人) : 임금이 중히 여기고 친근하게 여기는 사람을 말한다.

[D-018]행동 : 원문은 聲臭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 하늘이 하시는 일은 소리도 나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上天之載 無聲無臭 하였다. 겉으로 드러난 자취가 없어 하늘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D-019]세자에게 …… 귀주(貴主) : 원문은 常黙審艱虞 公曁貴主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世子之在艱虞 與貴主로 되어 있다.

[D-020]공이 …… 아뢰자 : 사도세자의 처음 장지인 영우원(永祐園)이 본래 협소하여 정조는 즉위 초부터 이장하고자 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박명원이 상소하여 이장해야 할 네 가지 문제점을 거론하므로, 비로소 이장을 결단하고 원래 양주군(楊州郡)의 배봉산(拜峯山)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게 되었다. 正祖實錄 13 7 11, 15

[D-021]예전 장지 : 원문은 舊園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永祐園으로 되어 있다.

[D-022]나라 …… 피곤해져서 : 이 부분이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委以其事 方是時 公以疾病으로 되어 있다. 시귀(蓍龜)는 시초(蓍草)를 이용한 주역(周易) ()과 거북 껍질을 이용한 점()으로, 이 점괘에 따라 대사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자문(諮問)하는 덕망이 높은 인물을 시귀라 하기도 한다.

[D-023]거의 …… 해였다 : 원문은 幾絶粒食將數歲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4]신속히 왕래하면서 : 원문은 迅往遄反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遄往迅返으로 되어 있다.

[D-025]지원(趾源) …… 못하였다 :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 1일부터 6일까지의 기사에 통원보(通遠堡)에서 폭우로 강물이 불어 며칠 지체되었던 사실이 언급되어 있고,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8 5일자 기사에 또 정사 박명원이 결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사실이 회고되어 있다. 연암집 4에 수록된 통원보에서 비에 막히다滯雨通遠堡는 그때의 사건을 소재로 한 시이다.

[D-026]비단 …… 아니었다 : 원문은 不特啣命一事有足觀公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27]조정에 …… 만한데도 : 원문은 可以正色廊廟인데, 서경 필명(畢命)에 주 나라 강왕(康王)이 필공(畢公)에 대해, “엄숙한 태도로 아랫사람들을 통솔한다.正色率下고 칭찬하였다.

[D-028]이미 …… 제한되어 : 원문은 旣局邦制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旣局於邦制로 되어 있다.

[D-029]벼슬이 없는 선비 : 원문은 素士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寒士로 되어 있다.

[D-030]구마(廐馬) : 임금이 거둥할 때 쓰는 가마와 말을 맡아보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는 말을 가리킨다.

[D-031]비답(批答) : 임금이 상소문의 말미에 적는 가부(可否)의 답변을 말한다.

[D-032]액정서(掖庭署) :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왕이 쓰는 필기구, 대궐 안의 열쇠, 설비 등을 관리하는 관청이다.

[D-033]띠를 …… 상태 : 조복(朝服) 위에 띠를 걸쳐 놓지도 못한다는 말로,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는 뜻이다. 논어 향당(鄕黨) 병이 들었을 때에 임금이 병문안을 오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누워서 조복을 몸에 걸치고 그 위에 띠를 걸쳐 놓았다.”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 “병들어 누워 있어서 옷을 입고 띠를 맬 수가 없으며, 또 평상복 차림으로 임금을 뵐 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원문은 莫可以拖紳矣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이 6자 대신에 로만 되어 있다.

[D-034]() : 한문 문체의 하나로서 인물을 칭송하는 글을 말한다. 서화의 옆에 적는 찬을 화찬(畫贊)이라 한다.

[D-035]딸은 …… 시집갔다 : 원문은 女張僎徐瑾修李建永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女長適張僎 次適徐瑾修 次適李建永으로 되어 있다.

[D-036]승중(承重) : 장손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D-037]문효세자(文孝世子) : 정조의 첫아들로, 다섯 살 때인 정조 10(1786)에 병사하였다. 당시 연암이 박명원을 대신하여 지은 문효세자 진향문(進香文)’ 연암집 9에 수록되어 있다.

[D-038]나라의 충신 : 원문은 國之藎臣인데,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는 王之藎臣으로 되어 있다.

[D-039]천생배필 합장되었으니 : 천생배필을 천작지합(天作之合)’이라 한다. 박명원은 화평옹주의 묘에 합장되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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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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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3]

24 주금책(酒禁策)

25 유사경(兪士京 유언호 )에게 답함

26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27 어떤 이에게 보냄

28 홍덕보(洪德保 홍대용 )에게 답함

29 두 번째 편지

30 세 번째 편지

31 네 번째 편지

32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33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3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35 순찰사에게 답함

36 어떤 이에게 보냄

37 순찰사에게 올림

38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39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40 전라 감사에게 답함

 

 

 

주금책(酒禁策)

 

선친의 글은 유실된 것이 많다. 백이론(伯夷論) 등과 같은 작품은 남의 집 묵은 종이 속에서 발견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제목만 있고 글이 없는 작품이 10여 종이어서 그것을 일일이 수집하리라 기약할 수는 없으나, 주금책 3편의 경우는 동년배나 장로(長老)들 중에 그 구어(句語)를 외어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 널리 퍼져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가 그 권()을 비워 두어 훗날 써서 메꾸기를 기다리노니, 혹시 동호자(同好者)가 본다면 수고를 아끼지 말고 등사하여 돌려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세의 대아 군자(大雅君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종간(宗侃 박종채)이 삼가 쓰다.

 

[D-001]주금책 …… 있다 :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이 태호(太湖) 홍원섭(洪元燮)에게 연암의 글 중 어느 작품이 가장 낫더냐고 물었더니, 홍원섭은 주금책을 몹시 애호하여 서산(書算)으로 글 읽은 횟수를 세어가며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었노라고 답했다고 한다. 過庭錄 卷4

[D-002]() : 한지를 묶어서 세는 단위로, 한 권은 한지 스무 장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사경(兪士京 유언호)에게 답함

 

 

어제 수레 타고 사람들 거느리고 위의를 갖추어 왕림하셨는데 마침 더위를 피하여 교외로 나가는 바람에 맞이하여 얘기할 기회를 잃어버렸으므로 못내 아쉬움이 배나 더하던 차에 바로 또 편지가 이르니 자못 깊이 위로가 됩니다.

창문 밖에 수레와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인데, 종자(從者)들의 발소리가 우레와 같아 지붕 모퉁이가 무너질 듯합니다. 처음 이사왔을 적에는 아이가 문득 책을 읽다가도 걷어치우고 먹던 밥도 내뱉고는 허둥지둥 나가 구경하더니만, 차츰 시일이 지나자 잘 나가 보지를 않더군요. 비단 우리 집 아이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이 동네의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다 심상하게 보아 넘기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단지 날마다 보아 온 까닭이지요.

이로 말미암아 보면, 몇 자쯤 되는 외바퀴 수레에 몸을 싣고 하인배가 벽제(辟除)하는 소리를 빌리는 것 정도로는 길에서 노는 아이들을 부러워서 허둥지둥 뛰쳐나오게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갑자기 잔뜩 거드름을 부려 목을 석 자나 뽑고 기세가 산처럼 솟구친다면, 과연 그 모습을 어떻다 해야 할지요.

전날에 안성(安城)의 유 응교(兪應敎)는 아무리 좀먹은 안장에 여윈 망아지를 타더라도 진실로 자기 본성에 손상됨이 없었고, 오늘 송도(松都)의 신임 유수(留守)는 비록 아기(牙旗 대장의 기)를 앞세우더라도 진실로 평소 행동과 달라질 것이 없겠지요. 서경(西京 개경)의 호수는 줄잡아 9000호에 밑돌지 않으니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호걸이 없다고는 못 할 뿐더러, 더더구나 그들의 지혜가 사대부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분별하고도 남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하하하!

 

 

[D-001]수십 명 : 원문은 數十輩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數百輩로 되어 있다.

[D-002]외바퀴 수레 : 조선 시대에 종 2 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초헌(軺軒)을 가리킨다. 개성 유수는 종 2 품의 관직이었다.

[D-003]안성(安城)의 유 응교(兪應敎) : 유언호는 포의(布衣) 시절에 안성에서 살았다. 그는 1772(영조 48)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었으나, 곧 청류(淸流)로 지목되어 흑산도에 유배되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으며, 그해 10월 탕척(蕩滌)되어 안성의 선영 아래로 돌아왔다. 閔鍾顯 兪文忠公行狀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황윤지(黃允之)에게 감사함

 

 

( 나의 겸칭)는 머리를 조아려 인사드립니다. 얼마 전 청지기 김가(金哥)가 형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와, 여러 형제분들이 친상 중에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건강을 지탱하고 계심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시골로 가서 선영에 의지하고 사는 것은 바로 이 아우가 지난가을에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계획입니다. 작별할 때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으니, 어찌 나의 마음을 이다지도 슬프게 하는지요. 긴 장마가 걷히기 바쁘게 가을철이 하마 반이 지났는데, 여러 형제분들 기력은 어떠신지요? 군자의 효심에서 우러난 그리움은 계절의 변화에 감개하여 더욱 새로워지겠지만, 새로 거처한 곳의 갖가지 일들은 자못 정돈되어 두서가 잡히셨는지요? 마음에 걸리고 자꾸 생각나면서, 서글프고 암담한 심정을 누를 길 없습니다.

이 아우는 모진 목숨을 연명하여 어느덧 상기(喪期)를 마치게 되니, 천지가 텅 빈 듯하고 신세는 외로워 너무도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 평생에 자식 구실을 한 적이 얼마 없었으므로 삼년상의 기간에나 모든 심력을 바쳐볼까 했는데, 오랫동안 고질을 앓느라고 몸소 상식(上食)을 받든 것도 며칠이 안 되건만 눈 깜짝할 사이에 벌써 궤연(几筵)을 걷게 되니, 소리 내어 울자 해도 울 곳이 없어 너무도 통탄스럽습니다.

원발(元發)은 박봉의 관직에 종사하느라 너무 바빠 겨를이 없고, 유구(悠久 이영원(李英遠))는 아마 벌써 남으로 내려갔을 게고, 여중(汝中)은 가끔 서로 보기는 하나 대개 1년 중에 두서너 차례에 지나지 않는데, 형 또한 상중에 있는 외로운 신세라 만나지 못한 지가 대략 3년이 되었습니다. 지금 무덤 곁에 여막을 이미 지었으니 초췌해진 모습을 뵐 날이 까마득합니다. 인생에서 만남과 이별, 슬픔과 기쁨이 다 성쇠를 벗어나지 못하는군요. 아득히 생각하면 대릉(大陵)과 소릉(小陵) 사이에서 서로 붙어 다니던 일이 한바탕 꿈과 같으니 어찌 감개스럽지 않으리까.

장례를 치른 이래로 외모는 매미 허물 같고 멍청하기는 흙으로 빚은 사람의 형상과 같아, 염부계(閻浮界 이승)에 잠시 묵으며 오직 꿈에만 몰두하니, 잠잘 때는 즐겁지만 깨고 나면 슬퍼집니다. 30년 사이에 이리저리 이사다닌 것이 서너 번이지만, 어느 밤이고 꿈을 꾸면 넋이 떠돌다가 항상 도성(都城) 서쪽의 옛집에 머뭅니다. 몸소 살구 ·  · 복숭아 나무 밑에 노닐면서, 혹은 참새 새끼를 잡고 혹은 매미도 잡고 나비도 쫓으며, 동쪽 정원에는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어 또 잘 익은 과일을 따기도 합니다. ()의 양세(兩世 조부와 부친)께서 다 무양(無恙)하게 살아 계시고 중부(仲父)와 계부(季父) 및 나의 종형도 완연히 평소와 같았습니다. 그러다 꿈에서 깨고 나면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고 쫓아가다가 되돌아온 듯하며, 다시 볼 듯하면서도 못 보게 되니, 슬피 울고 가슴을 치며 깬 것을 후회한답니다.

이 세상에 살아 계셨던 때를 가만히 헤아려 보면, 또한 꿈속에서처럼 많이 뫼시고 친밀하지 못했으니 꿈속이 즐거울 수밖에요. 비록 또한 이 때문에 편안히 누워 영영 잠들어 버린들 그 즐거움이 또 꿈속보다 더할 수 있을는지요?

네 살짜리 어린 자식은 이제 조금 분별이 생겨 다른 사람을 아비 어미라 부르지는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노상 품속에서 떠나려 들지 않으므로 수십 글자를 입으로 가르쳐 주었는데, 갑자기 묻기를,

 

나는 아버지가 계신데 아버지는 왜 유독 아버지가 없나요? 우리 아버지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도 일찍이 젖을 먹고 크셨나요?”

하여, 나도 모르게 무릎에서 밀쳐 버리고 엉겁결에 목 놓아 한참 울었답니다. 이는 다 이 아우가 상을 당한 뒤에 겪은 슬프고 쓰라린 심정을 말한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 지금 애형(哀兄)께서 새로 비통한 일을 당해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운 상황일 텐데, 아마도 필시 나 때문에도 한바탕 눈물을 흘리겠군요.

예서(禮書)를 읽는 여가에 다시 무슨 책을 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의 생활 방편은 다만 경서를 몸에서 떼지 않으면서 몸소 밭을 가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시경 빈풍(豳風)과 당풍(唐風)의 시들은 농삿집의 시력(時曆)이요, 논어(論語) 한 질은 시골에 사는 비결이요, 중용(中庸) 30()은 섭생(攝生)의 좋은 방법이니, 늘그막까지 힘써 할 일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아우는 9월 보름경에 북쪽으로 올라가 돌아다니면서 단양(丹陽)과 영동(永同)의 사이에서 농지를 찾아볼까 하는데, 생각대로 잘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총총하여 할 말을 다 못 하오며, 다만 슬픔을 절제하고 스스로 몸을 보호하여 상중에 건강을 손상하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윤지(允之) 대형(大兄)의 예석(禮席)

8월 초이틀 담제인(禫制人) 아우 모()가 절하며 올림.

 

 

[C-001]황윤지(黃允之) : 황승원(黃昇源 : 1732~1807)으로 윤지는 그의 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친 뒤 이조 판서를 지냈다. 연암과는 20세 전후에 산사(山寺)에서 과거 공부를 같이 한 절친한 사이이다.

[D-001]친필 서한 : 원문은 手書인데 手疏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부모상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보내는 편지나 부모상을 당한 사람이 위로 편지를 받고 보내는 답장을 소()라고 한다.

[D-002]군자의 …… 새로워지겠지만 : 예기 제의(祭義)에 군자가 계절이 바뀌는 봄과 가을에 각각 제사를 지내는 것은, 가을이 되어 서리나 이슬 내린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리워 서글픈 마음이 들고, 봄이 되어 비나 이슬 내린 땅을 밟게 되면 반드시 부모님을 장차 뵐 것처럼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D-003] …… 되니 : 부친상을 마친 사실을 말한다. 연암의 부친 박사유(朴師愈) 1767년 향년 65세로 별세하였다.

[D-004]삼년상의 …… 했는데 : 원문은 庶其自致於喪紀之間인데, ‘자치(自致)’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심력을 다 쏟는다는 뜻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나는 선생님에게서 들었다. ‘사람 중에 자신의 심력을 다 쏟지 않는 자가 있으나 그런 자도 부모의 상에는 반드시 심력을 다 쏟는구나!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라고 하신 것을.” 하였다.

[D-005]소리 …… 없어 : 원문은 攀號無地인데, 원래 반호(攀號)’는 옛날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할 때 땅에 떨어진 용의 수염을 지상에 남은 신하들이 부여잡고 호곡(號哭)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왕의 죽음을 애도할 때 쓰는 말이다.

[D-006]원발(元發) : 신광온(申光蘊 : 1735~1785)의 자이다. 1762(영조 38) 진사시 급제 후 벼슬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을 지냈다. 연암과 젊은 시절부터 절친하여 1765(영조 41) 금강산 유람을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연암집 4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 7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 참조.

[D-007]여중(汝中) : 이심전(李心傳)의 자이다. 그의 생년이 사마방목에는 1738, 문과방목에는 1739년으로 되어 있다. 이심전은 본관이 전주(全州), 대사간을 지낸 이성수(李性遂)의 아들이다. 유무(柳懋)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황승원과 동서(同壻)간이다. 1773(영조 49) 정시(庭試) 급제 후 정자(正字)에 제수되었으나 세손(世孫) 즉위 반대파로 몰려 파직되었다가 1784(정조 8) 사면된 이후 사헌부 장령, 사간원 정언 등을 지냈다.

[D-008]대릉(大陵)과 소릉(小陵) : 대정동(大貞洞)과 소정동(小貞洞)을 말한다.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일대이다.

[D-009]오직 꿈에만 몰두하니 : 원문은 惟是大翫於夢인데, 한유(韓愈)의 정요선생묘지명(貞曜先生墓誌銘)에 맹교(孟郊) 오직 시에만 몰두하였다.唯其大翫於詞고 하였다.

[D-010]잘 익은 과일 : 원문은 黃熟으로, 잎이 누렇게 되어 떨어질 정도로 과일이 잘 익은 상태를 말한다.

[D-011]()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면 又摘黃熟梅로 앞구에 붙여 구두를 끊어야 하는데, 또한 兩世 앞에는 문의상  자가 있어야 할 듯하다.

[D-012]중부(仲父) …… 종형 : 중부는 박사헌(朴師憲)으로 자식이 없었고, 계부(季父)는 박사근(朴師近)으로 박필주(朴弼周)의 양자가 되었는데 진원(進源)과 유원(綏源) 두 아들을 두었다. 연암이 말한 종형은 진원으로, 요절하였다.

[D-013]깨고 나면 : 원문은 及旣悟로 되어 있으나, 이본들에는 及旣寤 또는 及其寤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 자는 잘못인 듯하다.

[D-014]편안히 …… 잠들어 버린들 : 원문은 偃然大寢인데, 장자 지락(至樂)에서 장자가 제 처가 죽었는데도 곡을 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부른 이유를 해명하면서 사람들이 장차 큰 집에서 편안히 쉴 터인데人且偃然寢於居室, 내가 아이고아이고 하면서 덩달아 곡을 한다면 천명에 통달하지 못한 것을 자인하는 셈이라, 그래서 곡을 그쳤노라.”고 하였다.

[D-015]네 살짜리 어린 자식 : 연암의 장남 종의(宗儀)를 가리킨다. 종의는 1766년에 태어났다.

[D-016]애형(哀兄) : 친상을 당한 황승원을 지칭한 말이다.

[D-017]시경》 …… 시력(時曆)이요 : 시력은 당대에 통용되는 책력(冊曆)을 말한다. 시경 빈풍(豳風)과 당풍(唐風)의 시들을 읽으면 농사철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예컨대 빈풍의 칠월(七月)은 농사에 관한 월령가(月令歌)였다.

[D-018]중용(中庸) 30() : 중용은 모두 33개의 장()인데, 여기서는 대략의 숫자를 들어 말한 것이다.

[D-019]서식을 …… 못하였습니다 : 원문은 不備疏例인데, 소례(疏例)는 서식을 뜻하는 서례(書例)와 비슷한 말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不備疏禮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지의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둘 다 편지를 끝맺을 때 공손하게 말하는 관례적인 표현이다.

[D-020]윤지(允之) 대형(大兄)의 예석(禮席) : 수신인을 밝힌 것이다. 상례(喪禮)를 지키고 있는 황승원에게 보낸다는 뜻이다.

[D-021]담제인(禫制人) : 삼년상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인 담제(禫祭)를 지낼 때까지 상중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요즘 자네는 친상 중에 기력이 어떠한가? 이 몸은 차츰 병이 깊어져 기동할 수 있는 날이 요원함을 고려하면, 피차간에 서로 면대하기란 당장에는 기약하기 어렵겠네.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방법이 없네그려. 지금 자네가 약관(弱冠)의 나이로 상을 당했는데, 다른 도와줄 만한 벗도 없고 또 아주 가까운 친척도 없는 처지이니, 매양 그 점을 생각하면 어찌 기가 막히도록 슬프지 않겠는가. 이미 마음을 깊이 터놓은 사이가 되었고, 외람되게 내가 나이도 몇 살 더 먹었으니, 어리석은 소견이나마 일러줄 수 있는 사람은 나만 한 이가 없을 걸세. 그러므로 이처럼 병중에 되는대로 적어 보내니, 양해하기를 간절히 바라네.

 

자네와 같은 재능으로 이미 얌전하고 부드러운 기질을 지닌 데다, 총명하면서도 신중한 바탕을 겸하였고 게다가 나이도 젊고 기력도 왕성하니, 어찌 심력을 문장과 같은 말단에만 낭비하고 실득(實得)이 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해서야 되겠는가. ‘독서궁리(讀書窮理)’ 네 글자는 늙은 서생(書生)의 진부한 말이요 남을 권면하는 의례적인 말이네. 그러나 대저 지금에 이르러 실지(實地)에 공력을 쏟고 본령(本領)을 추구한다면 자연히 마음이 진정되고 기()가 귀착할 곳이 있을 걸세. 인의(仁義)에 정통하는 것은 잠깐 사이에 되는 것이 아니고,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분변하는 것도 스스로 차례가 있는 것이므로, 효과와 득실을 먼저 논할 수는 없으나, 양생(養生)하여 장수하고 가도(家道)를 온전히 하는 점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것독서궁리이 중요한 실마리가 되지 않는다고는 못 할 것일세.

 

평소 문학에 있어서는 비평소품(批評小品)을 보기 좋아하여 애써 찾는 것은 오직 오묘한 지혜의 깨달음이요, 자세히 음미하는 것은 모두 신랄하기 짝이 없는 어휘들인데, 이런 것들은 비록 젊은 시절 한때의 기호(嗜好)이기는 하지만 차츰 노숙해지면 저절로 없어지게 마련이므로, 심각하게 말할 것까지는 없네.

그러나 대체로 이런 문체는 전혀 법칙이 없고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것이네. 명 나라 말의 문식(文飾)만 성행하고 실질(實質)은 피폐해진 시대에 오() · () 지역의 잔재주는 있으나 덕이 부족한 문사들이 기괴한 설을 짓기에 힘써, 한 문단의 풍치(風致)나 한 글자의 참신한 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용이 빈곤하고 자질구레해서 원기라고는 찾아볼 곳이 없는 것이네. 그런즉 예부터 내려오는 오 · 초 지역 촌뜨기들의 괴벽스러운 짓거리요 추잡스러운 말투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지금 자네는 아직 혈기가 안정되지 않은 나이에 거듭 상례를 당하여, 돌아보아도 한 몸을 의지하고 도움받을 곳이 없어, 외롭고 허약하며 천지가 텅 빈 것 같을 것이니, 슬픔과 괴로움과 근심 걱정으로 심정이 과연 어떻겠는가. 이는 인간 세상의 일대 궁민(窮民)인 동시에 인생에서의 일대 전환점이기도 하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혹 심기가 약하여 몹시 놀라고 기가 꺾여 그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못해 생명을 잃은 자도 있으며, 혹은 상례를 치르고 난 뒤 달관하고 마음을 비워 심령(心靈)이 툭 트이게 되면, 백년 인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온갖 일이 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슬퍼하여, 아무 것도 아끼는 것이 없고 제 몸도 돌아보지 않아 그로 인해서 본래의 심성을 잃어버리는 자도 있네. 혹 군자인 경우에는 예()로써 자신을 보전하며, 경각심을 가지고 시련을 견디어 더욱 큰 일을 해내니 비유하자면 초목이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더욱 굳건해지고 바람과 서리가 매서워지는 즈음에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네. 지금 자네는 나이 비록 약관이나, 뜻이 일찌감치 정해지고 재능이 일찍부터 성숙했으니, 진실로 능히 뜻을 굳게 세우고 이런 가운데 조금만 더 스스로 분발하여 매사를 다 옛사람처럼 하기로 스스로 기약한다면, 어찌 역량이 크지 못하며 재기(才氣)가 미치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사람이 매양 부모님 봉양을 할 수 없게 된 뒤에 가서 옛일을 추억해 보면, 자식 구실을 했다고 할 만한 이가 거의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특히 뼈가 저리고 심장이 찔리는 경우라네. 부모님 사후에 효성을 바치는 것이 단지 궤연을 모시고 제물을 받드는 데에 있는 것만은 아니네. 이러한즉 부모에 대한 자네의 다함 없는 그리움은 갈수록 무궁할 줄 아네만, 이 몸은 여막을 지키면서 질병에 시달리느라 심상한 예절도 모두 폐하고 말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부끄럽고 송구하여 심장이 끓고 뼈가 후끈거린다네. 그러므로 뒤늦게야 뉘우치며 언급하는 바이네.

 

옛사람은 거상(居喪)할 때 읽는 것은 예서(禮書)일 따름이며, 그 나머지 허황하고 당장에 필요치 않은 책은 덮어 두고 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일념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잠깐이라도 잊어버린 적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네. 그러나 옛 성인의 경전(經傳)에 이르러서는, 어찌 일각인들 폐한 적이 있었던가.

 

가례(家禮)는 비록 주자(朱子)가 내용을 미처 확정하지는 못한 책이지만 먼저 익히 보아두는 것이 좋으니, 무릇 생전에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장례 치르는 때에 차례와 절목(節目)을 절충하여 취할 수 있네.

 

어찌 꼭 예기(禮記)라야만 예서를 읽는다 하겠는가. 지금 자네는 이미 대인(大人)의 학문에 입문하였으니 소학(小學)에 힘을 쏟을 것까지는 없겠지만, 옛사람 중에 노년이 되어서도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이가 있었다네. 학문을 하는 차례는 함부로 등급을 뛰어넘어 버리면 안 되네. 곧장 먼저 소학에다 기초를 세우면, 학문의 방향이 올바르게 되는 법일세.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제목 아래에 이 글은 정리되지 않은 원고에서 발견했는데 누구에게 준 것인지 모르겠다. 후고(後考)를 기다린다.此篇得於亂藁 未知與何人 容俟後考는 주가 있다.

[D-001]자네는 …… 어떠한가 : 원문은 哀侍奠氣力何似인데 ()’는 부모의 상중에 있는 상대방을 지칭한 말이고 시전(侍奠)’은 제물(祭物)을 시봉(侍奉)한다는 뜻이다. 이하 ()’를 문맥에 맞추어 모두 자네로 의역하였다.

[D-002]독서궁리(讀書窮理) : 궁리는 천지 만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라 하여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수양 방법이다.

[D-003]신중히 ……  : 원문은 愼思明辨인데 중용장구  20 장에서 군자가 성()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으로 박학(博學) · 심문(審問) · 신사(愼思) · 명변(明辨) · 독행(篤行)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D-004]가도(家道) : 가정의 도덕을 말한다. 주역 가인괘(家人卦) 단사(彖辭) 아비가 아비답고 아들이 아들답고 형이 형답고 아우가 아우답고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다워야 가도(家道)가 바르게 되니, 가정이 바르게 되어야 천하가 안정되리라.” 하였다.

[D-005]비평소품(批評小品) : 비점(批點)과 평주(評注)를 가한 짧은 산문이란 뜻이다.

[D-006]() · () 지역 : 춘추 시대 오 나라와 초 나라의 영토였던 지역으로, 지금의 양자강(揚子江) 중류와 하류 일대를 말한다. 중국에서 특히 문학 예술이 발달한 지역이다.

[D-007]기괴한 설을 짓기에 힘써 : 원문은 務爲弔詭인데, ‘조궤(弔詭)’ 장자에 나오는 말로, 기이한 말이라는 뜻이다. 즉 제물론(齊物論)에 인생을 한바탕의 꿈으로 여기는 이런 언설을 일컬어 조궤라고 한다.是其言也 其名爲弔詭고 하였다.

[D-008] · 초 지역 촌뜨기들 : 원문은 吳傖楚儂인데, 중국의 중원(中原) 사람들이 오 지역 사람들이 간드러진 말투를 구사한다고 해서 오농연어(吳儂軟語)’ 오농세타(吳儂細唾)’라고 비하하였다. 또한 오 지역 출신 문사인 육기(陸機)가 중원 출신인 좌사(左思)를 촌뜨기란 뜻의 창부(傖夫)’라고 비웃은 적이 있다.

[D-009]궁민(窮民) : 의지할 데가 없는 백성을 말한다.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 늙어서 아내가 없는 이를 환()이라 하고, 늙어서 지아비가 없는 이를 과()라 하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이를 독()이라 하고, 어려서 아비가 없는 이를 고()라 한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의 궁민이요 호소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D-010]경각심을 …… 해내니 : 원문은 動忍增益인데,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큰 소임을 맡긴 사람에게 혹독한 시련과 좌절을 겪게 하는 것은 경각심을 일깨우고 참을성 있는 기질로 만들어 그가 해내지 못했던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D-011]부끄럽고 송구하여 : 원문은 慚悚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慚惶으로 되어 있다.

[D-012]그러므로 …… 바이네 : 원문은 故乃追訟而及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3]대인(大人)의 학문 : 대학(大學) 공부를 가리킨다. 대학은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학문을 가르치는 책이라고 하였다.

[D-014]소학동자(小學童子)라 자칭한 이 : 성종(成宗) · 연산군(燕山君) 연간의 유학자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을 가리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홍덕보(洪德保 홍대용)에게 답함

 

 

천리 밖에서 편지 전하기를 낭정(朗亭)과 문헌(汶軒)이 하듯이 하여, 얼어붙은 비탈, 눈 쌓인 골짝 속에서 이를 얻어보게 되니, 어찌 위로가 되고 기뻐서 펄쩍 뛰지 않으리오. 청수하신 모습을 잠깐 접했다가 곧 이별의 회포를 자아내는 것보다는 이 편이 도리어 낫겠지요. 더구나 심한 추위에 부모님을 모시면서 관직 생활도 신령의 가호에 힘입어 잘하고 계시며, 아드님 또한 탈 없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들이 작별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났으니, 얼굴이며 수염과 모발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나를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다만 알지 못하겠는 것은, 스스로 점검하기에 정력과 기개가 쇠퇴하거나 왕성한 정도가 어떠하신지 하는 점입니다.

성인(聖人)의 수천 마디 말씀은 사람으로 하여금 객기(客氣)를 없애게 하려는 것입니다. 객기와 정기(正氣)는 마치 음()과 양()이 서로 반대로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과 같지요. 비유하자면 큰 풀무에서 쇠를 녹여 두들기는 것과 같아서, 객기가 겨우 조금만 없어져도 정기가 저절로 서지요. 그러나 정기란 더듬어 볼 수 있는 형체가 없으며, 오직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매 부끄럼이 없는 경지에서만 찾을 수 있지요.

성인이 제 한 몸을 다스릴 뿐인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큰 도적이나 큰 악당처럼 여겨서, 성급히 하나의 이길 ()’ 자를 썼겠습니까? ‘이라는 말은,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날짜를 다그쳐서 기필코 이기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서경 목서(牧誓)에는

 

상 나라를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戎商必克

하였고, 주역에는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3년 만에 이겼다.高宗伐鬼方 三年克之

했으니, 이른바 ()과 적()은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이 아우는 평소 늘 객기가 병통이 되어 왔는데, 이를 이겨내고 다스리는 수단으로는 이미 구용(九容)의 방어도 없고 사물(四勿)의 무기도 없으니, 귀며 눈이며 입이며 코가 도둑떼의 소굴이 아님이 없고, 지의(志意)와 언동은 모두 객기의 성사(城社)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는 평소의 병의 근원이 다스리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졌으나, 이른바 정기(正氣)까지도 함께 사라져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비유하자면 궁지에 몰린 도적이 험한 지세를 믿고 스스로 방자하게 날뛰다가, 급기야 군사가 흩어지고 식량이 다 떨어지자 그대로 앉아서 곤욕을 받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리하여 포부와 사업이 도리어 객기가 득세할 때만 못하니, 어떻게 정기를 함양하며, 어떻게 집의(集義)하며, 어떻게 스승으로 삼고 본받으며, 어떻게 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마침내 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내가 본래 지닌 천상(天常 천부적 윤리)인데 노상 객기에 눌려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객기가 이미 제거되면 모든 일이 다 이치에 들어맞아, 정기가 서지 않는 것은 걱정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른하게 지쳐 버리고 스러지듯 까라지며 닳고 닳아 버린 탓에 감정이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맞부닥치니, 다시는 옛날의 기개를 찾아볼 길 없고 무기력한 일개 늙은 농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격려해 주신 별지(別紙)를 받고 보니,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 땀이 얼굴을 뒤덮었으므로 잠시 이와 같이 늘어놓습니다. 아마도 반드시 이 편지를 보시고는 한 번 웃으며,

 

이는 필시 늙어가고 곤궁함이 날로 심해진 것뿐일세. 만약 객기를 제거할 수 있다면 하늘을 떠받치고 땅위에 우뚝 설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나른하게 처져 있는 것인가? 나른하게 처지도록 만든 것이야말로 객기일세.”

하실 테지요.

대개 제가 평소에 비록 장중하고 공손함이 부족하지만, 날로 더욱 노력하는 공부 역시 그와 같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학문을 쌓아나가는 것도 기운에 따라 쇠퇴하거나 왕성한 법이지요. 그래서 형의 정력과 기개가 스스로 점검하기에 어떠하신지를 물은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자세한 답을 주시고, 또 가슴에 절실히 와 닿는 몇 마디 말씀을 기록하여 주신다면, 이 몸을 일깨워 주고 분발시켜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D-001]낭정(朗亭)과 문헌(汶軒) : 낭정은 서광정(徐光庭)의 호이다. 서광정은 항주(杭州)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홍대용과 결교한 반정균(潘庭筠)의 외사촌형이다. 북경의 매시가(煤市街)에서 점포를 열고 있었으므로, 홍대용은 그를 만나 본 적은 없으나 그에게 편지를 보내 반정균과의 서신 교류를 중개해 줄 것을 부탁했으며, 이를 계기로 홍대용과 서광정 사이에도 서신 교류가 있었다. 문헌은 등사민(鄧師閔 : 1731~?)의 호이다. 등사민은 산서(山西) 태원(太原)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삼하현(三河縣)에서 소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북경에서 귀환하던 홍대용과 만나 교분을 맺었다. 그 후 홍대용과 꾸준히 서신 교류를 했으며, 자신의 벗 곽집환(郭執桓)을 위해 연암 등 조선의 명사들에게 담원 팔영(澹園八詠)’ 시를 지어주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2]심한 …… 말입니다 : 홍대용은 1780(정조 4) 음력 1월 경상도 영천(榮川)의 군수로 부임하였다.

[D-003]성인이 …… 썼겠습니까 : 논어 안연(顔淵)에서 공자가 제 자신을 이기고 예의를 회복하는 것이 인이다.克己復禮爲仁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D-004]서경》 …… 하였고 : 인용상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인용된 구절은 목서(牧誓)가 아니라 태서 중(泰誓中)에 나온다. 목서는 주() 나라 무왕(武王)이 은() 나라 주왕(紂王)과 목야(牧野)에서 싸우기 전에 훈시한 내용이고, 태서는 역시 주 나라 무왕이 맹진(孟津)에서 훈시한 내용이다.

[D-005]주역에는 …… 했으니 : 주역 기제괘(旣濟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종(高宗)은 은 나라의 임금 무정(武丁)이고, 귀방(鬼方)은 지금의 귀주(貴州) 지역에 살았던 서융(西戎)의 하나이다.

[D-006]() …… 못한다 :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은 촉()을 가리키고, ()은 조조(曹操)의 위()를 가리킨다.

[D-007]구용(九容) : 구용은 군자의 아홉 가지 자태로, “발은 무겁고 손은 공손하며, 눈은 단정하고 입은 다물며, 목소리는 조용하고 머리는 곧게 세우며, 기색은 엄숙하고 선 자세는 덕스러우며, 낯빛은 씩씩하여야 한다.足容重 手容恭 目容端 口容止 聲容靜 頭容直 氣容肅 立容德 色容莊고 하였다. 禮記 玉藻

[D-008]사물(四勿)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D-009]성사(城社) : 안전한 은신처를 말한다. 성안의 여우나 사당의 쥐처럼 권세의 비호 아래 몰래 나쁜 짓을 하는 자를 성호사서(城狐社鼠)라 한다.

[D-010]집의(集義) :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뜻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호연지기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의리를 속으로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지 의리가 밖에서 엄습하여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是集義所生者 非義襲而取之也 하였다.

[D-011]유익한 벗을 사귀어야 : 논어 계씨(季氏)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D-012]나른하게 : 원문은 苶然인데, ‘薾然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비슷하다. 뒤에 나오는  자도 같다.

[D-013]늙어가고 : 원문은 朽落인데, 나이가 늙어 이가 빠진다年朽齒落는 뜻이다.

[D-014]하늘을 …… 텐데 : 원문은 頂天立地인데, 이는 대장부의 기개를 형용하는 말이다.

[D-015]장중하고 …… 공부 : 예기 표기(表記)에서 공자는 군자가 장중하고 공손하면 날로 더욱 노력하게 되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구차해진다.君子莊敬日强 安肆日偸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두 번째 편지

 

 

이 아우의 평소 교유가 넓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덕을 헤아리고 지체를 비교하여 모두 벗으로 허여한 터이지요. 그러나 벗으로 허여한 자 중에는 명성을 추구하고 권세에 붙좇는 혐의가 없지 않았으니, 눈에 벗은 보이지 아니하고, 보이는 것은 다만 명성과 이익과 권세였을 따름이외다. 그런데 지금 나는 스스로 풀숲 사이로 도피해 있으니,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승이요 아내를 둔 행각승이라 하겠습니다. 산 높고 물이 깊으니, 명성 따위를 어디에 쓰겠는지요? 옛사람의 이른바 걸핏하면 곧 비방을 당하지만, 명성 또한 따라온다.”는 것 또한 헛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겨우 한 치의 명성만 얻어도 벌써 한 자의 비방이 이르곤 합니다. 명성 좋아하는 자는 늙어가면 저절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과연 나도 허황된 명성을 연모하여, 문장을 표절하고 화려하게 꾸며서 예찬을 잠시 받고는 했지요. 그렇게 해서 얻은 명성이란 겨우 송곳 끝만 한데 쌓인 비방은 산더미 같았으니, 매양 한밤중에 스스로 반성하면 입에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지요. 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스스로 깎아내리기에도 겨를이 없거늘 더구나 감히 다시 명성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그러니 명성을 구하기 위한 벗은 이미 나의 안중에서 떠나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른바 이익과 권세라는 것도 일찍이 이 길에 발을 들여놓아 보았으나, 대개 사람들이 모두 남의 것을 가져다 제 것으로 만들 생각만 하지 제 것을 덜어내서 남에게 보태주는 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명성이란 본시 허무한 것이요 사람들이 값을 지불하는 것도 아니어서, 혹은 쉽게 서로 주어 버리는 수도 있지만, 실질적인 이익과 실질적인 권세에 이르면 어찌 선뜻 자기 것을 양보해서 남에게 주려 하겠습니까. 그 길로 바삐 달려가는 자들은 흔히 앞으로 엎어지고 뒤로 자빠지는 꼴을 보기 마련이니, 한갓 스스로 기름을 가까이 했다가 옷만 더럽힌 셈입니다. 이 역시 이해(利害)를 따지는 비열한 논의라 하겠지만, 사실은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 또한 진작 형에게 이런 경계를 받은 바 있어, 이익과 권세의 이 두 길을 피한 지가 하마 10년이나 됩니다.

내가 명성 · 이익 · 권세를 좇는 이 세 가지 벗을 버리고 나서, 비로소 눈을 밝게 뜨고 이른바 참다운 벗을 찾아보니 대개 한 사람도 없습디다. 벗 사귀는 도리를 다하고자 할진댄, 벗을 사귀기란 확실히 어려운가 봅니다. 그러나 어찌 정말 과연 한 사람도 없기야 하겠습니까.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잘 깨우쳐 준다면 비록 돼지 치는 종놈이라도 진실로 나의 어진 벗이요, 의로운 일을 보고 충고해 준다면 비록 나무하는 아이라도 역시 나의 좋은 벗인 것이니, 이를 들어 생각하면 내 과연 이 세상에서 벗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돼지 치는 벗은 경서(經書)를 논하는 자리에 함께 참여하기 어렵고, 나무하는 벗은 빈주(賓主)가 만나 읍양(揖讓)하는 대열에 둘 수는 없는 것인즉, 고금을 더듬어 볼 때 어찌 마음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속으로 들어온 이래 이런 생각마저 끊어 버렸지만, 매양 덕조(德操)가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할 적에 아름다운 정취가 유유하였고,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 짝지어 밭을 갈 적에 참다운 즐거움이 애틋하였던 것을 생각하면서, 산에 오르고 물에 다다를 적마다 형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답니다.

생각하건대 형은 벗 사이의 교제에 열렬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줄 잘 알지만, 심지어 구봉(九峯) 등 여러 사람들이 하늘가와 땅 끝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을 거쳐 힘들게도 편지를 부쳐오는 것은 천고의 기이한 일이라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전, 이 세상에서는 다시 만날 수 없으니, 곧 꿈속과 다를 바 없어 실로 진정한 정취는 드물 것입니다. 혹시 우리나라 안에서 한 번 만나 보아 서로 거리낌 없이 회포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천리를 멀다 아니 하고 찾아가고 말겠는데, 형도 이런 벗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영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서 끊어 버렸는지요? 지난날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지금 마침 한 가닥의 울적한 마음이 들어 우선 여쭙는 바입니다.

 

 

[D-001]교유 :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교유의  자가 로 되어 있다.

[D-002]나는 …… 있으니 : 1778(정조 2) 연암이 가족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이주한 사실을 말한다.

[D-003]걸핏하면 …… 따라온다 : 한유의 진학해(進學解)에 나오는 말이다. 단 진학해에는 動而得謗 ……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은 動輒得謗 ……으로 되어 있다. 이는 진학해의 앞부분에 動輒得咎라고 한 표현과 혼동한 결과인 듯하다.

[D-004]명성과 실정의 사이에서 : 원문은 名實之際인데,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서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침을 군자는 부끄러워한다.聲聞過情 君子恥之고 하였다.

[D-005]덕조(德操) …… 적에 : 덕조는 사마휘(司馬徽)의 자이다. 사마휘는 후한(後漢) 말의 인물로 인재를 잘 알아보았는데, 유비(劉備)에게 제갈량과 방통(龐統)을 천거하였다. 사마휘와 제갈량 등은 양양(襄陽) 현산(峴山)에 사는 은사 방덕공(龐德公)을 존모하여 섬겼다. 제갈량은 방덕공의 집에 갈 때마다 상() 아래에서 절을 하곤 했다. 그러나사마휘는 방덕공의 집에 갔을 때 방덕공이 출타하고 없자, 그 부인에게 빨리 기장밥을 지으라고 재촉하여 방덕공의 처자들이 분주히 상을 차렸는데, 잠시 뒤 방덕공이 돌아오더니 곧바로 안으로 들어가서 누가 주인인지 손님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였다고 한다. 三國志 卷37 蜀書 龐統傳 裴松之註

[D-006]장저(長沮) …… 적에 : 장저와 걸닉(桀溺)은 춘추 시대의 은자이다. 장저와 걸닉이 밭을 갈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가던 공자(孔子)가 자로(子路)를 시켜 나루를 물었으나 가리켜 주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공자를 비웃었던 사람들이다. 論語 微子

[D-007]구봉(九峯) : 홍대용과 결교한 엄성(嚴誠)의 형인 엄과(嚴果)의 호이다. 북경에서 귀국한 뒤 홍대용은 편지를 보내 그와도 결교를 청하였고, 엄성의 부음(訃音)을 접하고 애도하는 편지도 보냈다. 연암집 2 ‘홍덕보(洪德保) 묘지명 참조.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D-008]그러나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다.

[D-009]천리를 …… 말겠는데 : 원문은 不難千里命駕인데, 천리명가(千里命駕)는 멀리 벗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 나라 때 여안(呂安)이 혜강(嵇康)의 고상한 취미에 탄복하여 그를 보고 싶은 생각이 날 적마다 즉시 천리 밖이라도 수레를 준비시켜 그를 만나러 갔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D-010]끊임없이 …… 때에도 : 원문은 談屑之際인데, 담설(談屑)은 톱으로 나무를 썰 때 톱밥이 술술 나오듯이 말이 막히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두 사람이 만나 대화할 때 의기투합하여 화제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세 번째 편지

 

 

형암(炯菴 이덕무) · 초정(楚亭 박제가) 등이 관직에 발탁된 것은 가히 특이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평성대에 진기한 재주를 지니고 있으니 자연히 버림받는 일이 없겠지요. 이제부터 하찮은 녹이나마 얻게 되어 굶어 죽지는 않을 터입니다. 어찌 사람에게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에 달라붙어 있거나 구멍 속의 지렁이가 지하수만 마시듯이 살라고 요구할 수야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귀국한 이래로 안목이 더욱 높아져서 한 가지도 뜻에 맞는 것이 없으며, 표정에까지 간혹 재기(才氣)를 드러내곤 합니다. 중국인과의 특이한 교유에 대해서는 이미 간정록(乾淨錄)을 통해서 귀에 젖고 눈이 익어 실로 제 자신이 답사한 것과 다름 없으니, 다시 야단스럽게 탐문하고 토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 밖에 기이한 일이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잠시 억눌러두고 일부러 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이를 자못 괴이히 여겨 답답한 생각이 없지 않은 모양이니, 아마 나의 이런 의중을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혜풍(惠風 유득공)이 길에서 천자를 본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답디다. 왼쪽에 천자기(天子旗)를 세우고 누런 비단덮개를 씌운 수레에다 수천 대의 수레와 수만 명의 기병이 뒤따르는 광경은 마치 벼락이 치는 듯 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듯 으리번쩍하더랍니다. 그런데 천자가 친히 말을 멈추고 고삐를 당긴 채, 손짓하여 우리 조선 사람을 불러 대등하게 서서 우러러보도록 했다는군요. 그의 콧날은 우뚝 솟아 두 눈썹 사이까지 쭉 뻗었고, 눈꼬리는 몹시 길어 귀밑머리 부분까지 옆으로 뻗쳤으며, 턱수염은 덤불 같고 광대뼈는 불끈 튀어나왔더랍니다.

그래서 내가 대꾸하기를,

 

이는 바로 진 시황(秦始皇)의 복사판일세.”

했지요. 혜풍이 묻기를,

 

어찌 그런 줄 아십니까?”

하기에, 내가

 

이미 삼재도회(三才圖會)의 제왕상(帝王像)을 보고 알았네.”

했더니, 형암 · 초정 · 혜풍 이 세 사람이 모두 크게 웃으며 내 앞에서 다시는 남달리 중국의 장관을 본 것을 자랑하지 않더군요.

형암이 향조(香祖)가 쓴 연암산거(燕巖山居)’ 넉 자를 얻어 와서 주기에, 이미 새겨 산중의 서재에 걸고 그 진본은 형에게 드리니, 고항첩(古杭帖)에 함께 붙여 넣어서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그 수인(首印 서화의 앞 부분에 찍는 도장) 무더운 여름철에도 서리 내린 듯 서늘하다.暑月亦霜氣고 하였고, 낙관(落款) 및 말미에 덕원(德園)’이라 칭했는데 그것이 그의 자인지 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 사람의 현재 직함이 모두 검서로 공교롭게도 한데 뭉치게 된 데다가, 그들이 평소 함께 지내며 교유하고 지취(志趣)도 같기 때문에, 저절로 시기와 원망을 당하는 일이 자못 많았는데 요새 와서는 더욱 심하다 합니다. 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됩니다. 비록 시기와 질투가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야 할 텐데, 하물며 신분은 낮으면서 벼슬길은 영화롭고 직책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은 어려우니, 더욱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술도 조심하면서 오로지 서적의 교열에만 전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허황된 영화를 좇는 자들이 날로 그 곁에서 법석을 떨어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없다 하니, 형세가 그럴 듯도 합니다. 이미 서한으로 이러한 나의 뜻을 알려주긴 하였는데, 형암은 물론 세심한지라 스스로 조심할 터이지만, 초정은 너무도 재기(才氣)를 드러내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니 어찌 능히 그 뜻을 알겠습니까.

나는 지금 시골 오두막집에 영락(零落)해 있으니, 산 밖의 일은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묻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일에 상관할 바 없으나, 다만 평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기는 형과 사뭇 같기 때문에 편지를 쓰면서 자연히 언급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이에 서신 왕래가 있었으며, 그 친구들이 중국 다녀온 일기를 이미 완성하여 보여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D-001]형암(炯菴) …… 하겠습니다 : 1779(정조 3) 6월 이덕무(李德懋) · 박제가(朴齊家)가 유득공(柳得恭) · 서이수(徐理修)와 함께 서얼 출신으로 처음 규장각의 외각(外閣)인 교서관(校書館)의 검서(檢書)로 임명된 사실을 말한다. 1781 1월 규장각으로 소속을 옮겼다.

[D-002]구멍 …… 마시듯이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맹자는 오릉중자(於陵仲子)가 청렴을 지키기 위해 인륜마저 저버림을 비판하면서, “오릉중자의 지조를 충족시키자면 지렁이가 된 뒤라야 가능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는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는 지하수만을 마시고 산다.”고 하였다.

[D-003]다만 …… 높아져서 : 이덕무와 박제가는 1778(정조 2) 음력 3월부터 7월까지 사은진주사(謝恩陳奏使)의 일원으로 북경을 다녀왔다. 귀국 이후 이덕무는 입연기(入燕記),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하였다.

[D-004]간정록(乾淨錄) : 간정동 회우록(乾淨衕會友錄)을 말한다. 홍대용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간정동에서 중국의 문사들과 만나 필담을 나눈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연암집 1 회우록서(會友錄序) 참조.

[D-005]눈이 익어 : 원문은 目擩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D-006]노구교(蘆溝橋) 서쪽의 일 : 북경에서 보고 들었던 일을 가리키는 듯하다. 노구교는 북경 광안문(廣安門) 밖 영정하(永定河)에 있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다리로서 노구효월(蘆溝曉月)이라 하여 북경 팔경(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단 노구교는 지금의 북경시 서남쪽 풍대구(豐臺區)에 속해 있어 엄격히 따지면 노구교 서쪽은 북경 서쪽의 외곽지역을 가리키는 셈이 된다. 노구교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약간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D-007]혜풍(惠風) …… 장관이었답디다 : 유득공은 1778년 가을 문안사(問安使)의 일원으로 중국의 심양(瀋陽)을 다녀왔다. 건륭(乾隆) 황제는 그해 7월에 성경(盛京) 즉 심양에 순행(巡幸)하여 9월에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그 행차를 목격한 듯하다.

[D-008]삼재도회(三才圖會) : 명 나라 때 왕기(王圻)가 편찬한 책으로 모두 106권이다. 천문 · 지리 · 인물 · 시령(時令) · 궁실 등 14()으로 나누어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D-009]향조(香祖) : 반정균(潘庭筠 : 1742~?)의 자이다. 반정균은 절강성(浙江省) 전당(錢塘) 사람으로 호는 추루()이다. () · () · ()에 모두 능했으며, 과거 급제 후 벼슬은 어사(御使)까지 지냈다. 이덕무는 1778(정조 2) 연행 당시 북경의 종인부(宗人府) 근처에 있던 반정균의 자택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D-010]고항첩(古杭帖) : 홍대용은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인 1766(영조 42) 음력 5 15일 반정균 · 엄성(嚴誠) · 육비(陸飛) 등 중국 항주(杭州) 출신 문사들의 편지를 모두 4개의 서첩(書帖)으로 장정하고 고항문헌(古杭文獻)이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湛軒書 外集 卷1 杭傳尺牘 與潘秋庭筠書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네 번째 편지

 

 

이 아우가 산골짜기로 들어와 살려고 마음먹은 지가 벌써 9년이나 되었습니다. 물가에서도 잠자고 바람도 피하지 않고 밥지어 먹으며, 아무것도 없이 두 주먹만 꽉 쥐었을 뿐이라, 마음은 지치고 재간은 서투르니 무엇을 이루어 놓았겠습니까. 겨우 돌밭 두어 이랑에 초가삼간을 마련했을 뿐이지요. 그 가파른 비탈과 비좁은 골짜기에는 초목만 무성하여 애초부터 오솔길도 없었지만, 골짜기 입구를 들어서고 나면 산기슭이 다 숨어 버리고 문득 형세가 바뀌어 언덕은 평평하고 기슭은 부드러우며 흙은 희고 모래는 곱고 깨끗합니다. 평탄하면서 툭 트인 곳에다 남쪽을 향해 집터의 형국(形局)을 완전히 갖추었는데, 그 집터가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서성대며 노닐고 안식할 공간이 그 가운데 모두 갖추어졌지요.

전면의 왼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푸른 벼랑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바위틈은 깊숙이 텅 비어 저절로 동굴을 이루매 제비가 그 속에 둥지를 쳤으니, 이것이 바로 연암(燕巖 제비 바위)이라는 거지요. 집 앞으로 100여 걸음 되는 곳에 평평한 대()가 있는데, 대는 모두 바위가 겹겹이 쌓여 우뚝 솟은 것으로 시내가 그 밑을 휘감아 도니 이것을 조대(釣臺 낚시터)라 하지요.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면 울퉁불퉁한 하얀 바위가 마치 먹줄을 대고 깎은 듯하며, 혹은 잔잔한 호수를 이루기도 하고 혹은 맑은 못을 이루기도 하는데 노는 고기들이 몹시 많지요. 매양 석양이 비치면 그림자가 바위 위까지 어른거리는데 이를 엄화계(罨畫溪)라 하지요. 산이 휘돌고 물이 겹겹이 감싸 사방으로 촌락과 두절되니 한길을 나가 7, 8리를 거닐어야만 비로소 개짖는 소리와 닭 울음 소리를 듣게 된답니다.

지난가을부터 불러 모은 이웃도 현재 서너 가구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해진 옷에 귀신 같은 몰골로 무슨 소리인지 지절지절하며 오로지 숯 굽는 일에만 종사하고 농사는 짓지 않으니, 깊은 계곡에 사는 오랑캐가 호랑이나 표범을 이웃 삼고 족제비나 다람쥐를 벗 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험하고 동떨어짐이 이와 같은데도, 마음속으로 한번 이곳을 좋아하게 되자 어떤 곳과도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집 뒤에다 형수님의 묘까지 썼으니 영영 옮기지 못할 땅이 되었지요.

띠 지붕 소나무 처마로 된 집은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서늘하며, 조와 보리로 한 해를 무사히 넘길 수가 있고 채소와 고사리가 매우 왕성하게 자라 한번 캤다 하면 대바구니에 가득 찹니다. 더러는 눈 오는 날  이하 원문 빠짐 

 

이 편지가 모두 여덟 편이라고 예전에 들었으나, 지금 상자를 뒤져 겨우 네 편을 얻었는데 그나마도 완전하지 못하다.

 

[D-001]이 아우가 …… 되었습니다 : 연암은 1771(영조 47) 과거를 포기한 뒤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燕巖峽)을 답사하고 나서 장차 이곳에 은둔할 뜻을 굳히고 자신의 호를 연암이라 지었다고 한다. 연암집 1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서문贈白永叔入麒麟峽序 참조.

[D-002]엄화계(罨畫溪) : 엄화는 채색화(彩色畫)란 뜻이다. 연암집 10 엄화계수일(罨畫溪蒐逸)’이란 표제가 붙어 있다.

[D-003]이미 …… 썼으니 : 연암의 형수 이씨(李氏) 1778년 음력 7월 향년 55세로 별세하였다. 그해 9월 연암은 형수의 유해를 연암협으로 옮겨 집 뒤뜰에 장사 지냈다. 연암집 2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伯嫂恭人李氏墓誌銘 참조.

[D-004]이 편지가 …… 못하다 : 연암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것이다. 홍기문(洪起文) 선생은, 연암이 홍대용에게 답한 네 번째 편지는 연암집에 그 내용이 반 이상 결락된 채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 친필의 바로 그 결락된 편지를 내가 전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산거경제(山居經濟)를 기초한다고 한마디가 있었던 것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으니 이 산거경제가 발전되어 만년의 과농소초를 이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박지원 작품선집1 연암집에 대한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유수(留守)가 대궐에서 하사받은 귤 두 개를 보내 준 데 감사한 편지

 

 

금란(金蘭)과 같이 절친한 사이라 바야흐로 백열(柏悅)이 몹시 깊었는데, 오두막집에 향기가 진동하니 감사하게도 목노(木奴)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임금님의 은사(恩賜)임을 아는데, 또한 저까지 넘치는 은혜를 입었군요.

저는 어디에서나 즐겁게 지내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며 쓰라림만 많이 맛보았지요. 산속에 은거하여 욕심 없이 지내니 어찌 회수(淮水)를 건넌 티가 나는 것을 꺼려하겠습니까만, 경거(璚琚)로써 갚고자 해도 송() 짓는 재주가 모자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연암(燕巖) 한 지역은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려는 뒤늦은 계획에서 마련한 것이었습니다. 유하혜(柳下惠)와 같은 자가 이곳에 이끌려 머물러 있으니 어찌 공손하지 못한 혐의가 없으리오만, 방덕공(龐德公)처럼 밭을 갈면서 남몰래 유안(遺安)의 술책을 본받고 있지요. 주읍(晝邑)에서 느긋하게 걸어다니고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는 삶을 택했다고 하지만, 수레와 육식을 잊기 어려워했던 점을 비루하게 여기고, 고산(孤山)에서 학을 자식 삼고 매화를 아내 삼아 살았다고 하지만, 처자식이 여전히 딸려 있는 셈인 것을 가소롭게 여깁니다.

유상(留相) 합하(閤下)는 문장은 수호(綉虎)와 같다고 일컬어지고 도()는 용과 같기를 바라는 분으로서, 직제학이란 화려한 직함으로 새로 세운 규장각의 직무를 오래도록 겸임하고, 웅부(雄府 개성부를 가리킴)를 관할하여 고려의 옛 수도의 장()이 잠시 되셨습니다. 도성(都城)을 나고 들 때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구경하니 의연히 낙양(洛陽)을 지키던 군실(君實)과 같고, 청정(淸靜)함은 누구에 비할 건가 하면 완연히 제 나라를 다스렸던 개공(蓋公)과 같지요. 촛불 아래에서 시를 쓸 제 몇 번이나 산공(山公)처럼 거마(車馬)로 왕림하셨으며, 반쯤 이지러진 화로에 술을 데울 제 해당(亥唐)의 나물국도 배불리 드셨습니다.  이하 원문 빠짐 

 

 

[D-001]금란(金蘭) :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줄임말로, 매우 두터운 친교를 뜻한다.

[D-002]백열(柏悅) : 가까운 친구의 좋은 일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유언호(兪彦鎬)가 개성 유수로 부임하게 된 일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D-003]목노(木奴) : 감귤의 별칭이다. 삼국 시대 오() 나라의 단양 태수(丹陽太守) 이형(李衡)이 감귤 1000그루를 심어 두고는 죽을 때에 아들에게, ‘1000명의 목노(木奴)를 남겼으니 해마다 비단 1000필을 바칠 것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休傳 裴松之註

[D-004]회수(淮水) …… 꺼려하겠습니까만 : 회수는 중국 사대강(四大江)의 하나인데, 회수 이남 지역의 귤나무가 회수를 건너 그 이북 지역에 심겨지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설이 있다. 좋지 못한 환경을 만나면 타고난 좋은 자질도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다.

[D-005]경거(璚琚)로써 갚고자 해도 : 경거는 아름다운 옥과 패옥(佩玉)으로, 상대방의 선물을 받고 답례를 후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시경 위풍(衛風) 목과(木瓜) 나에게 모과를 던져주니, 경거로써 보답하였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라고 하였다.

[D-006]() 짓는 재주 : 송은 대상을 찬송하기 위해 짓는 운문의 한 종류이다. 굴원(屈原)이 자신의 재주와 덕을 귤나무에 비유하여 노래한 귤송(橘頌 : 초사 구장九章의 한 편)이 있다.

[D-007]녹문산(鹿門山) : 은사(隱士)가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후한 때 방덕공(龐德公)이 처자를 거느리고 녹문산으로 들어가 은거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D-008]유하혜(柳下惠) …… 없으리오만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는 노() 나라의 대부 유하혜의 처신을 공손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연암은 유하혜의 처신 중에서 특히 재야에 버려져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을 겪어도 근심 걱정하지 않으며 …… 자신을 끌어당겨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으니援而止之而止, 끌어당겨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던 것은 또한 떠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때문이었다.”라고 한 점에 공감하여 그와 같은 표현을 한 듯하다.

[D-009]유안(遺安)의 술책 : 유안은 자손에게 편안함을 남겨 준다는 뜻이다. 방덕공이 현산(峴山) 남쪽에서 밭을 갈고 살면서 성시(城市)를 가까이 하지 않자, 형주 자사(荊州刺史) 유표(劉表)가 찾아와서 선생은 시골에서 고생하며 지내면서도 벼슬해서 녹봉을 받으려 하지 않으니, 무엇을 자손에게 남겨 주려오?” 하였다. 그러자 방덕공은 세상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남겨 주는데 나는 유독 편안함을 남겨 주니,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똑같지는 않으나, 남겨 주는 것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龐公

[D-010]주읍(晝邑)에서 …… 여기고 : ( : ‘으로도 읽음)는 전국 시대 제() 나라 도읍 서남쪽에 있는 가까운 고을이다. 孟子集註 公孫丑下 제 나라 선왕(宣王)이 은사(隱士) 안촉(顔斶)을 접견했을 때, 안촉은 선비가 왕보다 존귀하다고 주장하며 선비를 잘 대우하도록 선왕을 설득하였다. 이에 공감한 선왕이 안촉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최고의 의식(衣食)과 수레 제공을 약속하니, 안촉은 이를 사절하면서 재야로 돌아가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을 육식과 맞먹는 것으로 여기고, 느긋하게 걷는 것을 수레와 맞먹는 것으로 여기면서晩食以當肉 安步以當車 살겠노라고 하였다. 戰國策 齊策 안촉은 다른 문헌에는 왕촉(王蠋)’으로 되어 있는데, 사기 82 전단열전(田單列傳)에 왕촉은 주읍(晝邑)에 사는 어진 선비로 소개되어 있다.

[D-011]고산(孤山)에서 …… 하지만 : () 나라 때 임포(林逋)는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평생을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다.

[D-012]유상(留相) 합하(閤下) : 개성 유수 유언호를 존대하여 부른 말이다. 유상은 유수(留守)를 달리 부른 말이고, 합하는 편지에서 존귀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D-013]수호(綉虎) : 화려한 시문(詩文)을 민첩하게 짓는 것을 말한다.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이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 시를 지어냈으므로 사람들이 수호라 불렀던 데서 나온 말로, ‘는 수를 놓은 것처럼 화려한 글을, ‘는 호랑이처럼 민첩한 솜씨를 뜻한다.

[D-014]용과 같기를 : 원문은 유룡(猶龍)’인데,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용과 같이 도()의 경지가 심오하다는 뜻이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나서 용과 같다猶龍고 감탄했다고 한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D-015]낙양(洛陽)을 지키던 군실(君實) : 군실은 송 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사마광이 신종(神宗)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다가 뜻이 맞지 않자 판서경어사대(判西京御史臺)를 자청하여 낙양으로 돌아가서 15년간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진재상(眞宰相)’이라 하였고, 촌로들도 모두 사마 상공(司馬相公)’이라 불렀으며, 부녀자들도 그가 군실인 줄을 알았다 한다. 宋史 卷336 司馬光傳

[D-016]청정(淸靜)함은 …… 같지요 : 청정은 청정무위(淸靜無爲)라 하여 도가(道家)에서 주장하는 통치술을 말한다. 백성들을 들볶지 않고 정치를 간편하게 행하는 것이다. () 나라 혜제(惠帝) 때 제 나라 승상 조참(曹參)이 백성들을 안집(安集)시키고자 도가의 학설에 밝다는 개공(蓋公)을 초빙하니, 개공이 치도(治道)란 청정함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며,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저절로 안정된다.”고 하므로, 그의 말을 따라 제 나라를 다스린 결과 나라가 안집되어 어진 승상이라는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D-017]촛불 …… 왕림하셨으며 : 산공(山公)은 진() 나라 때 산도(山濤)의 아들로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낸 산간(山簡)을 가리킨다. 산간은 술을 몹시 좋아하여, 정남장군으로 양양(襄陽)을 지킬 때 항상 고양지(高陽池)로 놀러가 배에 실은 술을 다 마신 다음에야 돌아왔다고 한다. 晉書 卷43 山濤傳 附

[D-018]반쯤 …… 드셨습니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 화자권(和自勸) 해 저무니 반쯤 이지러진 화로에 뜬숯이 타네.日暮半罏麩炭火 하였다. 해당(亥唐)은 춘추 시대 진() 나라의 현인(賢人)이다. 맹자 만장 하(萬章下), “진 나라 평공(平公)이 해당을 몹시 존경하여 그가 집에 들어오라 하면 들어가고, 앉으라고 하면 앉고, 먹으라고 하면 먹어,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배불리 먹지 않은 적이 없으니, 아마도 감히 배불리 먹지 않을 수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족손(族孫) 홍수(弘壽) 에게 답함

 

 

뜻밖에 종놈이 왔기에 그가 가져온 편지를 뜯어 반도 채 읽지 않아서 글자 한 자마다 눈물이 한 번 흘러 천 마디 말이 모두 눈물로 변하니 종이가 다 젖어 버렸구나. 이런 일들은 내가 지난날에 두루 겪었던 일들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려 팥알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세상의 가난한 선비들 중에는 천 가지 원통함과 만 가지 억울함을 품고도 끝내 그 한을 풀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릇 성() 하나를 맡아 국가의 보루가 되었는데, 불행히도 강성한 이웃나라의 오만한 적군이 번갈아 침략하여, 운제(雲梯)와 충거(衝車) 등으로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공격해 오는데도, 밖으로는 개미만큼의 미미한 원조도 끊어지고 안으로는 참새나 쥐, 말 고기와 첩의 인육까지 다 떨어져 필경에는 간과 뇌가 성과 함께 으스러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뜻을 꺾고 몸을 굽히지 않은 것은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살아서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의로운 귀신이 되었으며, 아내는 봉작(封爵)되고 자손들은 음직(蔭職)을 얻어 만대에 길이 부귀를 누렸으며, 이름이 역사에 남겨지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았다.

가난한 선비가 굳은 절조를 지킨 경우, 그가 겪은 곤란과 우환이 어찌 열사(烈士)가 고립된 성을 지킨 것과 조금이라도 다른 적이 있었겠는가. 그 또한 오직 나에게는 지켜야 할 바가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평생을 헤아려 보면,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는 씻은 듯이 찾아볼 수 없고, 종국에 성취한 것이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는 것을 흉내낸 데 불과하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못난 사내요 죽어서는 궁한 귀신이 되며, 종들은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고 처자는 보존되지 못하며, 제 이름자는 묻혀 없어지고 무덤은 적막할 뿐이다.

, 슬프다! 하늘이 백성들에게 선()을 부여하실 때 어찌 그토록 다르게 했겠으며, 뜻의 독실함 또한 어찌 남과 같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들이 원통함과 억울함을 끝내 풀어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런데도 세상의 논자들은 선뜻 한마디 말로 마감하여 말하기를, “가난이란 선비에게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는데, 도대체 이 말이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전혀 모르겠어서 마침내 옛 성현들이 남긴 교훈을 뒤적여 보았더니, 공자는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君子固窮 했고, 맹자는 선비는 뜻을 높이 가진다.士尙志 하였다. 천하에서 본디 곤궁하고 뜻을 높이 가지는 선비 중에 이 사람若人 가난한 선비보다 더 심한 사람이 없는데도, 성인은 이 사람을 위해서 이와 같은 말을 준비하여 거듭 훈계하신 듯하니, 어찌 지극히 원통하고 지극히 억울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소계(蘇季)는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글을 읽고 곤궁한 매고(枚皐)는 독서에 더욱 매진했으니 이는 바로 그들이 원통함을 씻고 억울함을 푸는 밑천이 되었지.

종놈을 붙잡아 두어 무엇 하리오마는, 부득불 장날을 기다려 베도 사와야 하고, 겸하여 솜도 타야 하겠기에 자못 날짜를 허비하게 되었고, 또 비와 눈이 연달아 내려 즉시 떠나보내지 못했을 뿐이다. 둘째 아이 혼사는 아직 정한 곳도 없는데 미리 준비하는 것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느냐. 아마도 내가 평소에 물정에 어두운 줄을 잘 알 텐데, 오히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도리어 절로 웃음이 난다.

누이의 편지가 비록 위로가 되지만, 내행(內行)을 다 보내고 홀로 빈 관아를 지키고 있자니, 곁에서 대신 글을 읽게 하고 필사(筆寫)를 시킬 사람이 없어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이 일은 아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터이니, 나를 대신해서 이 말을 전해 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현수(玄壽)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약간의 물자를 보내어 도와주고 싶지만 애닯게도 인편이 없어서,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무엇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이 종놈에게 주어 보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이놈의 생김새가 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우선 그만두고 다른 인편을 기다릴 따름이다. 장부 정리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으니 환곡을 다 받아들이면 결단코 돌아가려 한다.

이제 막 안경을 걸치고 이 편지 쓰기를 다 못 마쳤는데, 통진(通津)에서 편지 두 통이 또 왔구나. 아직 편지를 뜯어서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사연은 보나마나 뻔한 일이다. 이만 줄인다.

 

 

[C-001]홍수(弘壽) : 박홍수(1751~1808)는 자가 사능(士能)으로, 박상로(朴相魯)의 아들이다. 벼슬은 현감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연암의 4대조 박세교(朴世橋) 이후 갈라진 집안이다. 그의 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외조부가 바로 연암의 고조 박필균(朴弼均)이었다.

[D-001]운제(雲梯)와 충거(衝車) : 성을 공격하는 무기들로, 운제는 높은 사다리이고, 충거는 충돌하여 성을 무너뜨리는 병거(兵車)이다.

[D-002]참새나 …… 말았지만 : 당 나라 안사(安史)의 난 때 어사중승(御史中丞) 장순(張巡)은 태수(太守) 허원(許遠)과 함께 수양(睢陽)을 지키고 있었는데, 반란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곡식이 다 떨어져 많은 병사들이 굶어 죽자 장순은 자신의 애첩을 죽여 군사들에게 먹였고, 허원은 종을 죽여서 군사들을 먹였다. 또 참새나 쥐 등도 모조리 잡아서 먹도록 하고 갑옷, 쇠뇌 등도 삶아서 먹게 했다. 이렇게 해서까지 성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끝내 함락되면서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新唐書 卷192 張巡傳

[D-003]작은 ……  : 논어 헌문(憲問)에서 공자는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를 바로잡게 한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되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과 같이 행동하겠는가.” 하였다.

[D-004]군자는 본디 궁하다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내용이다. 공자가 진() 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져 종자(從子)들이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자로(子路)가 성난 얼굴로 공자에게 군자(君子)도 곤궁할 때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군자는 본디 곤궁하다. 소인(小人)은 곤궁하면 외람된 짓을 한다.” 하였다.

[D-005]선비는 …… 가진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서 제 나라 왕자(王子) () 선비는 무엇을 일삼는가?” 하고 묻자, 맹자는 뜻을 높이 가진다.”라고 답하였다.

[D-006]소계(蘇季) …… 읽고 : 소계는 전국 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으로, 그의 자가 계자(季子)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소진은 글을 읽다가 졸음이 오면 자신의 허벅지를 송곳으로 찔러 잠을 쫓아, 피가 발까지 흘러내리곤 했다 한다. 戰國策 秦策

[D-007]곤궁한 …… 매진했으니 : 매고(枚皐)는 한() 나라 경제(景帝) 때의 저명한 문인 매승(枚乘)의 서자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헤어져 어머니와 함께 곤궁하게 살다가, 나중에 대궐에 글을 올려 자신이 무제(武帝)가 초빙하고 싶어했으나 작고한 매승의 아들임을 밝힘으로써 벼슬을 얻게 되었다. 부송(賦頌)에 뛰어나고 또 글을 빨리 지었기 때문에 무제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漢書 卷51 枚皐傳 단 그가 독서에 매진했다는 고사는 출전을 알 수 없다.

[D-008]둘째 아이 …… 없는데 : 연암의 차남 종채(宗采) 1795(정조 19) 가을에 처사 유영(柳詠)의 딸인 전주 유씨(全州柳氏)와 결혼하였다.

[D-009]내행(內行) : 먼 길을 나들이한 집안의 부녀자들을 가리킨다.

[D-010]50년 동안 해로한 아내 : 연암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연암과 동갑으로, 16세 되던 1752(영조 28)에 시집 와서 1787(정조 11) 향년 51세로 별세하였다. 그러므로 부부로서 해로한 햇수는 35년인데, 아마 부인의 향년을 들어 대략 ‘50이라 말한 듯하다.

[D-011]현수(玄壽) : 박현수(1754~1816)는 자가 사문(士門)으로, 박상규(朴相圭)의 아들이고 박홍수의 사촌 동생이다. 벼슬은 하지 못했다.

[D-012]신실치 못한 것 같기에 : 원문은 若不信實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苦不信實  몹시 신실하지 않기에로 되어 있다. 이 역시 문리는 통한다.

[D-013]장부 …… 끝났으니 : 1792(정조 16) 연암은 안의 현감(安義縣監)으로 부임하자 아전들에게 그간 환곡을 횡령한 사실을 자수하도록 권하고, 처벌을 가하는 대신 자진하여 변상하게 하니, 아전들이 몇 년 안에 완납하여 장부가 완전히 정리되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14]통진(通津)에서 …… 왔구나 : 통진은 경기도 김포(金浦)의 한강 입구에 있던 현()이다. 그곳에 사는 연암의 친척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낸 듯하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인편에 서한을 보내 주시어 자못 위로가 됩니다.

제방 쌓는 군정(軍丁)을 배정한 날짜를 이렇게 먼저 지시하여 주시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만 귀군(貴郡)에서 부역을 시작한 뒤에, 또한 응당 저희 고을의 백성들 사정에 따라서 그 완급(緩急)과 선후(先後)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게 해야지, 억지로 맨 뒤로 돌리는 것은 부당합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보면, 매양 거창(居昌) 고을을 들어 그 멀고 가까움을 비교해서 이런 배정이 나온 것 같으나, 저희 현에서 가호(家戶)를 가려 뽑아 징발하는 군정은 모두 서상동(西上洞)과 북상동(北上洞) 두 동에서 나오는데, 이 두 면()과 저희 관아와의 거리가 혹은 80, 혹은 90리가 되니, 부역 장소와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모두 백수십 리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이로써 헤아린다면 거창이 도리어 저희 현보다 가까운 셈입니다. 왜냐하면 거창에서 모집하는 군정은 모두 읍내에서 대신 서 주므로 부역 장소와의 거리를 헤아려 보면 70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역하는 곳은 마찬가지이니, 특별히 선후에 따른 이해(利害)의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죄송하오나 저의 마음에는 스스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혹시 뒤질까 두려워하는 일은 있을망정, 무슨 이익이 있다고 빨리 달려 앞을 다투겠습니까. 수십 수백 명의 규율 없는 군정들을 몰아가다 밥은 제가 준비한 밥을 먹으면서 일은 남의 일을 하게 하니, 속담에 이른바 고양(高陽) 밥 먹고 파주(坡州) 구실 하러 간다는 격입니다.

만약 또 군정을 전진 후퇴하게 하는 호령을 본현에서 하지 않아서, 그들로 하여금 우선 천천히 하게 할 경우에는 이미 기약한 날짜가 저절로 다 지나가 버릴 것이요, 좀 기다리게 할 경우에는 저절로 한창 농사지을 때를 빼앗을 것입니다. 비록 11일까지 맞추어 가 억지로 지휘를 따른다 해도, 또 어찌 자기 일처럼 여겨서 허겁지겁 달려가 힘을 다할 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농사 형편을 들어 말하더라도 들판과 산골짜기는 현격하게 다릅니다. 산은 높고 물은 차가워 바람과 서리가 자못 이른 편이니, 농토를 경작하는 모든 절차를 다른 어떤 곳보다 먼저 해야 하므로, 귀군의 평탄하고 넓은 지대와는 그 이르고 늦음을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또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해를 끼친다.”고 책망하셨는데, 이 또한 어찌 저의 마음에 편안하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서로 돕는 의리에 있어서 오직 힘을 다할 뿐이거니와, 하물며 조정의 명령이 내렸는데 누가 감히 공사를 방해할 계획을 하겠습니까. 설사 귀군에서 역군(役軍)이 몹시 넉넉하여 이웃 고을을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해서 동원을 중지할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곳에서도 장차 잘된 일이라고 흡족하게 생각하고 머뭇거리다가 주저앉고 말겠습니까? 이 또한 감히 말씀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부역하는 곳이 이미 대단히 큰 데다가 다른 고을 군정까지 아울러 투입하게 되면 실로 감독하기가 어렵고, 모든 일에는 주객(主客)의 구별이 없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진실로 저의 생각도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다만 초나흗날에 가마를 타고 병든 이 몸을 이끌고서, 친히 역군을 거느리고 가 몸소 감독하고 독려한다면, 함양군과 안의현 양쪽이 다 무방할 것 같습니다.

저의 우둔함을 채찍질하고 단련해 주신 점은 진실로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만, 바라건대 반드시 양찰하시어 이미 단속해 놓은 군정들로 하여금 중도에 기일을 바꾸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십시오.

 

 

[C-001]함양 군수(咸陽郡守)에게 답함 : 연암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초기에, 함양군의 제방(堤防) 보수를 돕기 위한 부역에 안의 고을 백성들을 동원하는 문제로 함양 군수 윤광석(尹光碩)이 보내온 편지에 답한 것이다. 전에도 제방 보수를 위한 부역에 수차 동원되었으나 공사가 지지부진했으므로, 연암은 함양 군수와 약속하여 담당 구역을 확실히 분담한 다음에, 부역에 징발된 백성들을 몸소 통솔하고 식사도 제공하여 신속히 공사를 마쳤다. 이리하여 연암의 재임 중에 다시는 이런 일로 부역이 없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D-001]군정(軍丁) : 군적(軍籍)에 오른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성인 남자로, 병역이나 부역에 징발되었다.

[D-002]어찌 …… 받아들여지겠습니까 : 원문은 豈所安於鄙心耶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도 있다.

[D-003]부역하는 …… 큰 데다가 : 원문은 旣已役處浩大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이는 같은 의미이지만  자로 되어 있는 이본들을 따를 경우에는 앞서 함양 군수의 편지 내용을 인용한 예에 준하여, ‘役處浩大부터 함양 군수의 편지 내용이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답함

 

 

하교(下敎)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부임한 초기에 시노(寺奴)에 관한 사안으로 시끄럽게 말들이 귀에 들려오길래 그 김에 즉시 비밀리에 알아보았습니다. 계묘년(1783, 정조 7) 무렵에 시노의 두목(頭目)들이 신공(身貢)을 방납(防納)한다는 핑계로 돈을 거둬들인 것이 모두 900여 냥이나 되는데 그것을 모두 다 써서 없애버려, 이 때문에 패가망신한 자가 많으므로 원통함이 뼛속까지 사무쳤는데, 지난겨울에 추가로 노비를 찾아내어 신공을 거둘 때에 또다시 때를 타서 농간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시노들이 남몰래 뇌물을 바친 것은 본래 앞으로 있을 신공을 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10년 후에 마침내 추가로 찾아내어 신공을 거두는 대상에 들고 말았으므로, 이름을 누락시키고 몸을 숨긴 그 밖의 다른 자들도 모두 두려움을 품고, 지난 일을 뒤미쳐 끄집어내어 원망하는 말을 서로 퍼뜨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교하신 것을 보면 일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아신 듯하나, 두목들이 방납을 빙자하여 침학(侵虐)하는 것은 본래 때가 있으니, 바로 세밑에 추가로 노비를 찾아내는 때입니다. 지금은 추가로 찾아내는 날짜가 아직 멀었으니, 아무리 농간을 부리고자 해도 형세상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대개 지난겨울에도 이러한 폐단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 일을 끌어다 붙여 원망과 비난이 떼지어 일어나고 있어, 엄정하게 조사하여 보고를 드려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일 뿐만 아니라 전임(前任) 수령과 관계된 점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임 수령으로서 작고한 자가 이미 3()인데, 그중에서도 족숙(族叔)이 가장 곤란한 입장이 되겠기에, 반복해서 깊이 헤아리며 감히 경솔히 발설을 못 하고 사건의 추이를 관망하여 조처할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근원은 이와 같은 데 불과하나, 다만 이들 무리가 원한이 깊어서, 외람되이 임금에게까지 소원(訴冤)하는 일이 자주 있는 점이 걱정됩니다. 어떤 일을 막론하고, 만약 거둬들인다는 따위의 말로써 두루뭉술하게 원통함을 하소연한다면, 본 고을에 탈이 생기는 것은 놔두고라도 영문(營門 경상 감영)에 근심을 끼치는 것은 응당 또 어떠하겠습니까. 원한이 쌓인 지 이미 오래이고 말이 멀리까지 퍼졌으니, 일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만약 직관(直關)을 보내 엄중히 조사하라고 지시한다면, 또한 어찌 감히 적당히 얼버무리고 발뺌을 하겠으며, 뒤처리를 잘할 방책을 스스로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치는 별지(別紙)는 바로 저의 족질이 우의정에 제수됨을 축하한 편지입니다. 감영(監營)으로부터 황각(黃閣 의정부)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처음 연석(筵席)에 나갔을 때 임금께 아뢰면 힘써 도와주기가 쉬울 듯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 폐단을 손이 가는 대로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본(副本)입니다. 보시면 짐작하실 것이나, 이는 본디 제가 평소에 고심했던 바입니다. 이만 줄입니다.

 

 

[C-001]순찰사에게 답함 :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부임한 직후인 1792(정조 16) 족질(族姪) 박종악(朴宗岳)이 우의정에 제수됨을 축하하면서 그에게 시노(寺奴) 문제에 관해 건의한 편지,  연암집 2에 수록된 삼종질 종악이 정승에 제수됨을 축하하고 이어 시노 문제를 논한 편지賀三從姪宗岳拜相 因論寺奴書를 보낸 뒤에, 역시 시노 문제로 경상 감사의 편지를 받고 그에 답한 것이다.

[D-001]신공(身貢)을 방납(防納)한다는 핑계 : 신공은 지방에 거주하는 시노들이 해당 관아에 가서 신역(身役 : 구실)을 하는 대신 공포(貢布)라고 하여 베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방납(防納)은 이 공포를 대신하여 납부하고 나중에 그 대가를 받는 것을 말한다. 중간에서 높은 이윤을 취하여 폐단이 심했다.

[D-002]3() : ()은 수령의 임기를 말한다. 수령의 임기 동안을 등내(等內)라고 한다. 여기서는 작고한 수령이 3명이라는 뜻이다.

[D-003]직관(直關) : 중앙의 각 관청에서 순영(巡營)이나 병영(兵營)을 경유하지 않고, 바로 외읍(外邑)으로 보내는 관문(關文)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어떤 이에게 보냄

 

 

정아(政衙 수령이 정무 보는 곳) 서남쪽 100리 밖에 푸른 장막이 드리운 듯한 것은 바로 호남과 영남 아홉 고을에 웅거하여 도사린 산인데 그 이름은 지리산이오. 황여고(皇輿攷)에 이르기를 천하에 신선이 산다는 산이 여덟이 있으며 그중 셋은 외국에 있다고 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풍악산(楓嶽山)은 봉래산(蓬萊山)이고, 한라산은 영주산(瀛洲山)이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다.”라고도 하지요. () 나라 때 방사(方士)의 말에 삼신산(三神山)에 불사약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후세의 인삼입니다. 한 줄기에 가장귀가 셋이고, 그 열매는 화제주(火齊珠 보석의 일종)와 같고 그 형상은 동자(童子)와 같은데, 옛날에는 인삼이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불사약이라 일컬어, 오래 살기를 탐내는 어리석은 천자를 속여 현혹되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내가 돈 수백 냥을 내어서 산에서 캐다가 뒤뜰에다 길렀는데, 얼마 안 가서 갑자기 망양(亡陽)을 앓게 되어 거의 다 캐 먹었답니다. 맛은 몹시 쓰디쓰고 향기가 오래 남으나, 기실은 노상 먹는 당귀나 죽순채(竹筍菜)만도 못하더군요. 그러나 이것을 석 냥쭝 먹고 나자 여러 달 동안 계속해서 목욕하듯 흐르던 식은땀을 능히 막아주었으니, 반드시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든다고는 못 하겠지만, 역시 사람을 현혹하는 요사스러운 풀이 아니겠습니까.

나날이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을 대하고 있노라면, 그 푸르른 장막을 드리운 것이 문득 변하여 푸른 도자기 빛이 되고, 또 얼마 안 가서 문득 파란 쪽빛이 되지요. 석양이 비스듬히 비추면 그 빛이 또 변하여 반짝이는 은빛이 되었다가, 황금빛 구름과 수은빛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 수만 송이 연꽃으로 변하여 하늘거리는 광경이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 같으니, 신선이나 은군자(隱君子)가 무거(霧裾)를 열어젖히고 하대(霞帶)를 휘날리면서, 단아하게 그 사이를 출몰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였답니다. 나는 우리 팽()이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지요.

 

지금 내가 복용한 인삼 한 줄기가 과연 사람을 죽지 않게 하여, 가벼운 몸으로 멀리 날아 삼신산을 구름처럼 노닌다 하더라도, 만약 가족들을 데리고 있지 않고 또 친구들도 없다면 무슨 좋은 정취가 있겠느냐. 비록 잠시 안기생(安期生)이나 적송자(赤松子)를 만났다 할지라도, 인간세상에서 도끼 자루 썩는 기간이 바로 신선 세상의 하루에 불과할 테니 그곳의 세월은 또 얼마나 촉박하겠느냐. 하루 동안 먹는 음식이 비록 화조(火棗)나 영지(靈芝)라 할지라도 어찌 요사이 먹는 언배氷梨나 홍시만 하겠느냐. 설령 참으로 안기생 · 적송자를 만나서 황정경(黃庭經) 녹자(綠字)를 강독한다 할지라도 또한 어찌  원문 7자 빠짐 현담(玄談)과 묘게(妙偈)만 하겠느냐.

설령 속세를 벗어나 이야기하고 웃고 하는 것이 혹 즐겁다 할지라도, 그와 같이 이야기하고 웃는 동안에 인간 세상에는 후손이 이미 십대(十代)가 지났을 것이다. 사랑스럽고 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때로 바람을 타고 돌아와서 그 후손들에게 내가 바로 너의 10대조이다.’라고 하면, 버럭 성을 크게 내며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진 시황과 한 무제(漢武帝)로 하여금 진작 이런 깨달음을 알게 했더라면, 어찌 기꺼이 부귀를 버리고 참즐거움을 놓아 버린 채 곤궁한 삶을 택하여 적막함을 달게 여기며, 만승(萬乘) 천자의 존엄을 집어던지고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에 머물려고 했겠느냐.”

바라노니 그대는 흥이 나면 한번 찾아와, 이 동산에 가득 찬 죽순을 나물로 데쳐 먹고 개천에 가득한 은어를 회 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맑은 못의 곡수(曲水) 위에 참말로 술잔을 띄워 흘려 보시지요. 그러면 진() 나라 제현(諸賢)의 풍류만 못하지 않을 것이며, 계축년의 수계(修禊)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C-001]어떤 이에게 보냄 : 연암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던 1793년 봄에 김기무(金箕懋), 처남 이재성(李在誠), 사위 이종목(李鍾穆)과 이겸수(李謙秀), 문하생 이희경(李喜經) · 윤인태(尹仁泰) · 한석호(韓錫祜) · 양상회(梁尙晦) 등을 초청하여, 왕희지(王羲之)의 난정(蘭亭) 고사를 본떠 술잔을 물에 띄워 흐르게 하고 시를 읊조리며 즐거운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過庭錄 卷2 그러므로 이 편지는 1793년 봄의 그 모임에 초청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로 짐작된다.

[D-001]황여고(皇輿攷) : 명 나라 신종(神宗) 때 장천복(張天復)이 편찬한 지리서이다.

[D-002]() 나라 …… 하였으니 : 진 나라 때 방사(方士) 서복(徐福 : 서불徐巿)이 진 시황(秦始皇)에게 글을 올려 봉래 · 방장 · 영주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고,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며 동남 동녀(童男童女) 30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던 일을 가리킨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3]망양(亡陽) : 식은땀을 많이 흘림으로 인해 몸 안의 양기가 없어지면서 오한이 나고 손발이 차지며 심한 허탈 상태에 빠지는 병인데, 산삼이 특효약이라고 한다.

[D-004]죽순채(竹筍菜) : 삶은 죽순을 얇게 썰어 육편(肉片)과 함께 양념하여 볶은 나물을 말한다.

[D-005]석양이 비스듬히 비추면 : 원문은 夕陽乍映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夕陽斜映으로 되어 있다. 후자가 문맥과 더 합치한다고 보아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무거(霧裾) …… 휘날리면서 : 무거는 옅은 안개처럼 가벼운 비단 옷깃을 말하고, 하대(霞帶) 역시 노을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허리띠를 말한다. 신선은 노을로 옷을 삼는다고 하여 이를 하의(霞衣)라고 한다.

[D-007]우리 팽() : 원문은 阿彭인데, ()는 항렬이나 아명(兒名) 또는 성() 앞에 친밀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붙이는 말이다. 예컨대 이덕무(李德懋) 16세 연하인 그의 막내 아우 공무(功懋)의 아명이 정대(鼎大)였으므로 그를 아정(阿鼎)’이라 불렀다. 靑莊館全書 卷4 嬰處文稿2 題阿弟所學字卷末 그러므로 아팽(阿彭)은 당시 연암을 시종(侍從)하던 나이 어린 사람을 부른 애칭이었을 것이다. 연암을 따라가 있던, 당시 10대 초반의 둘째 아들 박종채의 아명이 아무였을 가능성이 있다.

[D-008]안기생(安期生) : () 나라 때 사람으로, 하상장인(河上丈人)에게 신선술을 배워 장수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를 천세옹(千歲翁)이라 불렀다. 진 시황이 금벽(金璧)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봉래산(蓬萊山)으로 떠나갔다 한다.

[D-009]적송자(赤松子) : 중국 고대 전설 속의 신선이다.

[D-010]도끼 자루 썩는 기간 : () 나라 때 왕질(王質)이란 사람이 벌목을 하다가 동자(童子)들이 잠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했는데 그 사이에 보니 자신의 도끼 자루가 다 썩어 버렸으며, 귀가했더니 동시대 사람들이 이미 죽어 아무도 없었더라고 한다. 述異記

[D-011]화조(火棗) : 전설에 나오는 선과(仙果)로 이것을 먹으면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한다.

[D-012]황정경(黃庭經) 녹자(綠字) : 황정경은 도가의 경전이다. 녹자 녹문(綠文), 녹도(綠圖)라고도 한다. 황하(黃河)에서 나왔는데 인간 세상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책이라 한다.

[D-013]현담(玄談)과 묘게(妙偈) : 불경을 가리킨다. 현담은 현묘한 담론이란 뜻으로, 불경의 제목과 저자 및 대의를 논술한 것이다. 묘게는 오묘한 게송(偈頌)이란 뜻으로, 운문으로 부처의 덕을 찬송하거나 경전의 내용을 부연 또는 총결한 것이다.

[D-014]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말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을 가리킨다.

[D-015]이 동산에 …… 데쳐 먹고 : 원문은 喫緊此滿園筍蔬인데, 순소(筍蔬)는 곧 죽순채(竹筍菜)를 가리킨다. ‘끽긴(喫緊)’은 원래 급박하다든가 중요하다는 뜻인데, 문맥으로 보아 여기서는 먹는다는 뜻으로 새길 수밖에 없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그런 뜻과 유사한 돈끽(頓喫)’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돈끽도 끼니마다 먹는다든가 단번에 먹는다는 뜻이어서 문맥과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끽긴(喫緊)은 다음 문장의 회초(鱠錯)’와 대응 관계에 있으며, 회초(鱠錯) ()’ 자는 초()와 통하니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 긴() 자에는 끓는 물에 데친다는 뜻이 있으므로, 원문을 살려 번역하였다.

[D-016]맑은 못의 곡수(曲水) : 연암은 안의현 관아의 빈터에 공작관(孔雀館)이라는 정각을 짓고 북쪽 연못의 물이 흘러넘쳐 그 앞을 지날 때에는 곡수(曲水)가 되게 만들어 연잎을 따서 그 위에 술잔을 실어 띄워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 연암집 1 공작관기(孔雀館記) 참조.

[D-017]() 나라 …… 않는다면 : 진 나라 때 왕희지(王羲之)는 회계(會稽)의 산음현(山陰縣)에 있던 난정(蘭亭)에서 계축년(353) 3 3일 수십 명의 명사들과 함께 수계(修禊)하면서 곡수연(曲水宴)을 벌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1 蘭亭記 수계(修禊)란 옛날 중국에서 3월의 첫 번째 사일(巳日)에 냇가에서 몸을 씻고 놀았던 일로, 이렇게 하면 그해의 액운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순찰사에게 올림

 

 

김매기 한 뒤로 심한 가뭄이 들어, 갑자기 6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늘엔 한 점 구름도 없었습니다. 부채질을 하고 찬물을 마셔 대지만 밤낮없이 활활 타는 화로 속에 앉아 있는 듯하니, 이는 지난 60년 동안 처음 겪는 일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순사또께서는 원기왕성하게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하관(下官 연암의 자칭)은 갈수록 쇠약하고 병이 깊어지고 있지만, 분주히 달려가 비를 빌었어도 신령의 보응은 한층 더 멀어지기만 하니, 백성들의 일에 대한 걱정으로 목이 타는 듯합니다. 고을살이 3년에 한 가지도 은혜로운 정사가 없었으니, 재앙이 닥쳐오는 것은 이치상 혹시 당연할 듯도 합니다. 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붉은 도장을 마구 찍어 대는 것이 부정(不正) 아닌 것이 없는데,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하여 잘못된 전례를 답습하며 바로잡아 고쳐 가는 일이 없으니, 이는 어찌 거심(距心)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원문 74자 빠짐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大夫)와 사(), 지금의 이른바 수령이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입니다. 만약 백이(伯夷)나 오릉중자(於陵仲子) 같은 이로 하여금 지금 장리(長吏 고을 수령) 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은 것같이 여길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는 관문(關文)이나 가는 첩보(牒報 서면 보고)가 한 가지도 절실한 내용이 없으며, 백성의 근심이나 나라의 장래를 전혀 상관하지 않고 어물어물 넘기고 모호하게 처리할 따름입니다.

지금과 같은 무더위에 걸리는 병은 학질과 이질이요 관격(關格)인데, 이는 풍한서습(風寒暑濕)이 원인이 되거나 허로(虛勞)와 내상(內傷)이 빌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삐 주명신(周命新)을 불러오지만, 애시당초 어찌 맥박이나 증세를 제대로 살펴본 적이 있었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이진탕(二陳湯)의 약방문을 받아 적게 하고, 한편으로는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읊어 주고는, 국수에다 돼지고기까지 먹고 총총히 일어나 가 버리지요. 날마다 수백 가지 병을 살펴보지만, 가는 곳마다 이런 식입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증세를 진단하기를, ‘인순고식(因循姑息)이요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라고 봅니다. 이렇게 하면서 복의(福醫)로 세상에 행세하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그 복의부터 처벌해야만, 비로소 백성들의 병이 치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돼지 족발 하나로 풍년을 빌었던 사람은, 바친 것은 비록 보잘것없었으나, 그 뜻은 그래도 진실하고 그 말은 매우 정성스러웠습니다. 지금 비를 비는 제사로써 따져 본다면, 비록 땅을 깨끗이 쓸고 제사를 올린다고 하지만 자리를 깔고 장막을 친 것부터 그다지 평평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릇들은 금 가고 비틀어졌으며 제기(祭器)들은 한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시골구석의 집사(執事)들도 예의에 익숙하지 못하여 무릎 꿇고 절하는 것이 바르지 못하며, 옛 법도에도 지금 법도에도 맞지 않은 관을 쓰고, 평성(平聲)인지 거성(去聲)인지도 분변하기 어려운 성조로 무미건조한 축문을 읽어 대니, 이렇게 하면서 사방 천리에 큰비를 맞이하기를 바란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세간의 만사가 모두 다 이런 부류입니다.  이하 원문 빠짐 

 

 

[D-001]거심(距心)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 고을 수령인 연암 자신의 죄라는 뜻이다. 공거심(孔距心)은 제 나라의 평륙(平陸)이란 고을의 수령이었는데, 맹자가, “지금 남에게서 소와 양을 받아 대신해서 기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반드시 목장과 꼴을 구할 것이다. 목장과 꼴을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소와 양을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인가, 아니면 또한 소와 양이 죽어 가는 것을 서서 볼 것인가?” 하고 질책하니, “이는 저 거심의 죄입니다.” 하고 뉘우쳤다고 한다. 孟子 公孫丑下

[D-002]도신(盜臣) :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3]만약 …… 것입니다 : 백이는 악인(惡人)의 조정(朝廷)에 참여하고 악인과 말하는 것을 마치 의관을 갖추고서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은 듯이 여겼다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오릉중자(於陵仲子)는 제()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下

[D-004]풍한서습(風寒暑濕) : 한의학에서 풍 ·  ·  · 습은 병을 일으키는 외부의 사기(邪氣)를 가리킨다. 이 사기가 인체에 들어와 병을 일으키는 것을 각각 중풍(中風), 중한(中寒), 중서(中暑), 중습(中濕)이라 한다.

[D-005]허로(虛勞)와 내상(內傷) : 허로는 한의학에서 오랫동안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과로한 결과 나타난 증상을 총칭한 말이다. 내상은 한의학에서 내인성(內因性) 질환을 말하는데, 음식을 잘못 섭취해 생기는 음식상(飮食傷), 술을 과음해서 생기는 주상(酒傷), 심신을 과도하게 사용해 생기는 노권상(勞倦傷) 등이 있다.

[D-006]주명신(周命新) : 조선 후기의 명의이다. 허준(許浚)의 제자로 동의보감을 참조하여 1724(경종 4) 임상치료학의 명저인 의문보감(醫門寶鑑) 8권을 저술하였다.

[D-007]이진탕(二陳湯) : 반하(半夏), 귤껍질, 붉은 복령(茯笭), 감초 등을 넣어 달인 탕약으로 담()을 다스리는 데 특히 효과가 있다.

[D-008]인순고식(因循姑息)이요 구차미봉(苟且彌縫)이다 : 인순고식은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방편을 구하는 것을 뜻하고, 구차미봉 역시 비슷한 말로 대충 해치우고 임시변통하여 문제를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연암은 만년에 병풍에다 큰 글씨로 인순고식 구차미봉 여덟 자를 쓰고는, “천하만사가 모두 이 여덟 자를 따라 무너지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過庭錄 卷4

[D-009]복의(福醫) : 운 좋게도 병을 잘 낫게 하는 의사를 말한다. 실력은 부족하지만 운 좋게도 늘 승리하는 장수를 복장(福將)이라 하며, ‘지장(智將)은 복장(福將)만 못하다는 속담이 있다.

[D-010]옛날에 …… 정성스러웠습니다 : 사기 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순우곤(淳于髡)이 제 나라 위왕(威王)을 설득하면서 한 이야기에 나온다. 위왕은 초 나라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순우곤을 조() 나라로 구원병을 청하러 보내면서도, 조 나라에 보내는 선물을 매우 인색하게 준비했으므로, 순우곤은 돼지 족발 하나로 풍년을 기원하는 사람의 예를 들면서 그 사람이 바치는 것은 보잘것이 없으면서 바라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여 왕을 깨우치게 했다고 한다.

[D-011]무미건조한 : 대본은 古淡無味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古談無味로 되어 있다. 둘 다 잘못된 것으로, ‘枯淡無味라야 옳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지난가을에 자녀와 남녀 종들을 다 보내고 나니 관아가 온통 비었고, 몸에 딸린 것은 관인(官印)을 맡아 곁을 지키는 동자 하나뿐인데, 밤이면 문득 꿈결에 잠꼬대를 외치므로 한심하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늘 그 아이로 하여금 동헌(東軒)을 지키도록 바꾸어주고, 홀로 매화 화분 하나, 파초 화분 하나를 동반하여 삼동을 났습니다. 옛사람 중에 매화를 아내로 삼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눈 내리는 날 푸른 파초는 마음을 터놓는 벗이 될 만하더군요.

봄이 오자 위쪽의 연못에 물이 넘쳐 섬돌을 따라 졸졸 흐르는데, 그 소리는 마치 거문고를 타는 듯합니다. 대청 앞에 한 그루 하얀 배나무는 활짝 꽃이 피었는데, 땅에 자리 깔고 그 아래 누워서 옥 같은 꽃잎과 구슬 같은 꽃술을 쳐다보니, 위로 달빛을 받아 이슬방울과 서로 어리비쳐 경물(景物)이 너무도 조용하고 쓸쓸하더군요. 그래서 혼자 승천사기(承天寺記)를 읊었더니, 정신이 맑아지고 뼛속까지 싸늘하여 잠이 잘 오지 않았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중존(仲存 처남 이재성(李在誠))이 편지를 보내와 이 고독한 처지를 위로하기를,

 

자고로 가족을 거느린 신선은 없으니, 쓸쓸하다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소. 쓸쓸해야만 신선을 만나 볼 수 있는 법이지요.”

하였답니다. 이 사람은 곧 이번에 급제한 노진사(老進士)이지요. 아마도 그와는 집안끼리 세의(世誼)가 있으실 터이기에, 환한 창 아래에서 글을 쓰면서 손길 가는 대로 그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길사(吉士)가 이끌어 주실 때는 바로 지금인가 합니다. 다만 세상에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한스러우나, 그의 맑고 깨끗함은 옥수(玉樹 아름다운 나무)와 아름다움을 다툴 만하답니다.

저는 천은(天恩)을 두터이 입어 한 고을의 수령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지 4년 동안에 부엌에는 기름진 고기가 있고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으며, 하당(荷堂)과 죽각(竹閣)에는 맑은 정취가 있어 저절로 만족스럽습니다만, 노쇠로 인한 병이 날로 깊어만 가므로 돌아갈 생각이 갈수록 더하니 어찌하겠습니까. 천리 먼 곳에서 오랫동안 나그네 살이를 하느라고, 도리어 연암(燕巖)에서의 농사일만 제철을 어기고 있으니 이 점이 후회스럽고 안타깝습니다.

일찍이 천고(千古)에 일 좋아하는 사람으로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같은 이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들은 밭 갈고 고기 낚고 담장 쌓는 일을 스스로 마치지도 못한 채, 남의 잔치에 바삐 달려가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훈수하고, 신 매실을 넣어라 짠 소금을 쳐라 하면서 귀 따갑게 떠들어 댈 수밖에 없었으나 그것은 본래 이미 자기 신분에 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소위 만냥태수(萬兩太守)란 모두가 멧돼지를 잡으려다 도리어 집돼지까지 잃는 자들임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득실을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낫고 어느 쪽이 못하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세간에는 원래 천금태수(千金太守)도 없지 않습니까.

어제 두서너 이웃 수령들과 모여 복어를 끓여 먹었는데, 부엌에서 일하던 사람이 복어 알을 우물가에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솔개들이 보고 한참 동안 공중에서 맴돌다가, 차례로 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칼을 뽑아 든 듯이 하다가 발을 오그리고 몸을 돌려 지나가 버리더니, 최후에 한 늙은 솔개가 대담하게 한 번에 채어 가지고 공중에서 배회하다가 마침내 용마루에 떨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까마귀 한 마리가 와서 앉아 한참 동안 곁에서 흘깃대다가 가 버리더군요. 그걸 보고 집이 떠나갈 듯 일제히 웃으면서,

 

지독하구나, 이 사람이여! 먹을 것을 탐내는 솔개나 까마귀도 오히려 저 먹는 것에 조심하여 이와 같이 자상히 살피는데, 동파(東坡) 노인은 오히려 목숨을 걸었구려!”

하였습니다.

조금 있자니 그 까마귀가 다시 검은 색깔의 큰 덩어리 하나를 물고 와서, 득의한 양 머리를 들었다 숙였다 하며 좌우로 번갈아 쪼아 허겁지겁 배불리 먹은 뒤, 부리를 기와 위에 문지르고는 한 번 까악 하며 울고 날아가더군요. 관노비를 시켜 천천히 살피게 했더니 조금 전에 물고 온 것은 바로 똥덩이였습니다. 똥은 해독(解毒) 작용을 하니, 저 까마귀가 해독을 하는 데는 지혜롭지만, 맛은 아직 잘 모르는 놈입니다. 세간에 과연 오유선생(烏有先生)처럼 해독하는 좋은 처방을 지닌 분이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C-001]김 우상(金右相)에게 올림 : 우의정 김이소(金履素)에게 보낸 편지이다. 1792년 그의 우의정 취임을 축하하면서 아울러 화폐 문제를 논한 편지가 연암집 2에 실려 있다.

[D-001]옛사람 …… 있었습니다만 : 송 나라 때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한 임포(林逋)의 고사를 가리킨다. 임포가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평생을 살았으므로, 그를 가리켜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았다梅妻鶴子고 하였다.

[D-002]땅에 …… 누워서 : 원문은 地臥其下인데, 문리가 잘 통하지 않는다. ‘ 앞에  자가 누락된 듯하다.

[D-003]승천사기(承天寺記) : 소식(蘇軾) 동파지림(東坡志林) 중 기승천야유(記承天夜遊)를 가리킨다. 원풍(元豐) 6(1083) 10 12일 달 밝은 밤에 소식이 승천사로 벗을 찾아가 함께 뜰을 거닐었다는 내용으로, 80여 자밖에 안 되는 짧은 산문이다.

[D-004]이 사람은 …… 노진사(老進士)이지요 : 이재성(李在誠) 1795(정조 19) 식년시에 45세로 진사 급제하였다.

[D-005]길사(吉士) …… 합니다 : 원문은 吉士之誘 迨其今乎인데, 시경 소남(召南) 야유사균(野有死麕) 여자가 이성을 그리워하니, 미남자가 유혹하네.有女懷春 吉士誘之라 하였고, 표유매(摽有梅) 나를 찾는 남자들이여, 바로 지금을 놓치지 마오.求我庶士 迨其今兮라고 하였다. 길사(吉士)는 미남자라는 뜻 외에 덕을 갖춘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이 있고, ‘()’ 자에도 교도(敎導)한다는 뜻이 있다. 시경의 시구를 이용하여, 우의정 김이소에게 노진사(老進士) 이재성을 관직으로 이끌어 주도록 은근히 청탁한 말이다.

[D-006]하당(荷堂)과 죽각(竹閣) : 연못과 대숲이 있는 정각을 말한다. 연암은 안의 관아의 서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었다. 연암집 1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D-007]일찍이 …… 없었으나 : 이윤(伊尹)은 은() 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이다. 사기 3은본기(殷本紀)에 이윤은 탕왕에게 기용되고 싶었으나 길이 없자, 탕왕의 비()인 유신씨(有薪氏)가 시집올 때 종으로 따라와 요리사가 되어 음식맛으로써 탕왕을 즐겁게 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는 그러한 설을 부정하고, 이윤은 유신국(有薪國)의 들에서 밭을 갈고 있다가 탕왕이 세 번이나 초빙했으므로 부득이 그에 응했다고 주장하였다. 부열(傅說)은 은 나라 고종(高宗)의 재상이다. 부열은 부암(傅巖)의 들에서 담장 쌓는 노역을 하다가, 꿈에 본 성인을 찾아 나선 고종을 만나 재상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서 고종은 부열에게 자신을 훈계해 주도록 당부하면서, “내가 만약 맛있는 국을 만들거든 그대는 소금과 매실 식초가 되어 주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을 도와서 선정을 베풀게 하는 것을 염매(鹽梅)라고 한다.

[D-008]만냥태수(萬兩太守) : 녹봉이 많은 고을 수령을 말한다.

[D-009]천금태수(千金太守) : 녹봉이 만냥은커녕 천냥이 되는 수령 자리도 없다는 뜻으로, 연암이 풍자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다.

[D-010]동파(東坡) …… 걸었구려 : 소식(蘇軾) ‘4 11일에 여지를 처음 먹다四月十一日初食荔支라는 시에 나오는 다시 복어를 씻어 복부의 기름진 고기를 삶누나.更洗河豚烹腹腴라는 구절을 두고 한 말이다. 복어는 독이 있는데도 복어 배 부위의 기름진 고기를 삶아 먹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풍자한 것이다.

[D-011]오유선생(烏有先生) :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와 상림부(上林賦)에 등장하는 가공 인물이다. 오유(烏有)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뜻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 자는 이와 같이 어찌라는 뜻과 함께 까마귀라는 뜻도 있으므로, 연암은 익살스럽게 까마귀를 오유선생이라 부른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김계근(金季謹)에게 답함

 

 

지난가을에 중존(仲存 이재성)이 편지 한 통을 손수 가지고 와 전해 주었고, 이어 또 성위(聖緯)가 와서 머물고 오일(五一)도 와서 합류하였지요. 쌍지(雙池)에 물은 맑고 언배와 붉은 대추가 주렁주렁 열려 뜰에 가득하며, 더구나 또 동산에 가득한 고종시(高種柹)는 월중홍(越中紅)에 못지않은데, 운사(雲社)에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은 절반이 송원(松園)에 대한 말이었지요. 이때에 비록 한 글자의 답서도 올리지 못했지만, 그대의 두 귀가 몹시 가려웠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소이다.

그 뒤 중존은 세밑이 임박해서 떠나고, 성위도 봄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말을 달려 돌아가 버리니, 비로소 이 몸이 갑자기 대령(大嶺 새재) 남쪽800리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삼복더위가 요새 들어 더욱 심한데, 신령의 가호로 벼슬살이를 탈 없이 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대의 사촌 형님 시가(時可)씨가 문득 고인이 되었다니 애통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그런데 원례(元禮)의 부고가 또 이르렀군요. 이 두 사람은 모두 나의 20대 친구로서 기개는 산악을 무너뜨릴 만하고 언변은 황하나 한수(漢水)의 둑을 무너뜨릴 만하여 천지간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는지를 몰랐지요. 신선술을 배울 수도 있고, 장수가 될 수도 있고, 문장과 공훈을 머지않아 성취할 수 있었을 터인데, 40년 세월을 통틀어 결산해 보면 그저 분주하게 평범한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서, 겨우 건물 약간을 세운 데 불과했습니다. 인생 백년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으니 가슴속에 애착을 둘 것은 아니지만, 매양 한번 생각하면 아쉬움으로 마음에 걸릴 뿐이외다.

오늘날의 수령된 자들은 읍황(邑貺)이 후하고 박한 것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을 뿐, 산수의 승경(勝景)으로 좋고 나쁜 기준을 삼는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이른바 후하고 박하다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킨답니까? 저는 고을살이한 지가 벌써 3년이지만, 날마다 책상 머리에서 읍총(邑摠)을 뒤져 보아도  원문 빠짐  도무지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답니다.

하루는 저의 아들더러 이르기를,

 

너는 예서(禮書)를 읽었느냐? 한 조각 고기가 비뚤게 잘린 것을 먹는다고 입과 배에 무엇이 해로우며, 잠시 쉴 때 한쪽으로 기댄다고 엉덩이와 다리에 무엇이 나쁘겠느냐마는, 성인은 임신했을 때에 대해 간곡히 훈계하시기를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말고, 자리가 바르지 못하면 앉지 말라.’고 하셨으니, 이는 뱃속에 있을 때부터 양생(養生)하는 데 바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했지요. 이로써 미루어 보면, ()에서 받는 만종(萬鍾)의 녹봉도 반드시 꽥꽥거리는 거위처럼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없고, 낙읍(洛邑)의 구정(九鼎)도 어찌 백이(伯夷)로 하여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게 만든 시골 사람의 갓처럼 바르지 못한 것이 아니겠소이까? 지금의 이른바 양반이란 옛날의 이른바 대부와 사(), 지금 이른바 좋은 태수란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이니, 그가 먹고 입는 것에 명색이 부정하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겠소이까? 백이와 오릉중자(於陵仲子)로 하여금 태수로서 처신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더러운 진흙탕과 잿더미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이 여길 뿐이겠소. 반드시 밖으로 뛰쳐나가 먹은 것을 토해 내고 말 것이외다. 하지만 까마귀는 온갖 새가 다 검은 줄로만 믿고, 개구리는 온갖 벌레가 다 같은 소리를 내는 줄로만 의심하는 법이오.

그런데 지금 형은 벼슬길에 나섰소. 벼슬길에 나서는 것은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서이고, 좋은 태수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장차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오. 모르겠소만 그대가 스스로 처신하는 바는 백이도 아니고 도척(盜跖)도 아닌, 옳고 그름의 중간쯤인가요?

그렇다면 소 잡는 칼을 한번 시험해 보기로는 이 안의현만 한 데가 없을 거외다. 무성한 숲과 긴 대나무는 산음(山陰)과 흡사하고, 굽이도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 것은 난정(蘭亭)에 못지않으며, 지금 한창 죽순이 껍질을 벗고 은어가 그물에 들고 있으니, 비록 백이로 하여금 현감이 되게 하더라도 응당 기뻐하며 배를 한번 불릴 거외다. 깊이 바라건대 그대는 꼭 돈 많이 생기는 좋은 태수를 바라지 말고, 앉아서 이 옛 친구와 임무 교대 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술이 약간 취했길래 남을 시켜 적었소이다. 우선 이만 줄입니다.

 

 

[C-001]김계근(金季謹) : 계근은 김이도(金履度 : 1750~1813)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송원(松園)이며,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그의 형 김이소(金履素)와 함께 연암과 절친한 사이였다. 1800(정조 24)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경기도 관찰사, 예조 판서, 형조 판서, 한성부 판윤, 의정부 좌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D-001]성위(聖緯) : 이희경(李喜經 : 1745~?)의 자이다. 그의 부친 이소(李熽)는 서자로, 생원(生員) 급제하였다. 이희경은 아우 이희명(李喜明)과 함께 연암의 문하생이 되었으며, 중국을 다섯 차례나 다녀왔다. 그가 남긴 설수외사(雪岫外史)는 박제가의 북학의에 비견될 만한 저술이다.

[D-002]오일(五一) : 윤인태(尹仁泰)의 자이다. 윤인태는 연암의 문하생으로 전서(篆書)를 잘 썼다.

[D-003]쌍지(雙池) : 연암은 안의 관아 서북쪽에 백척오동각(白尺梧桐閣)을 지으면서 북지(北池)를 만들었고, 그 남쪽에 하풍죽로당(荷風竹露堂)을 지으면서 남지(南池)를 만들었다고 한다. 연암집 1 백척오동각기(百尺梧桐閣記), 공작관기(孔雀館記), 하풍죽로당기(荷風竹露堂記) 참조.

[D-004]고종시(高種柹) : 알이 다소 작지만 껍질이 얇고 씨가 거의 없으며 당도가 월등히 높으면서 육질이 연한 감이다. 산청 · 함양 · 하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지리산 곶감은 모두 이 고종시로 만들어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D-005]월중홍(越中紅) : 홍시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그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D-006]운사(雲社) : 연암이 이재성 · 이희경 · 윤인태 등과 함께 시주(詩酒)의 모임을 갖고 그 모임의 명칭을 운사라고 붙인 듯하다.

[D-007]시가(時可) : 김이중(金履中 : 1736~1793)의 자이다. 그는 김조순(金祖純)의 부친으로, 1771(영조 47) 36세로 뒤늦게 진사 급제 후 음직으로 중앙의 하위 관직과 지방관을 전전하여 용인 현령, 고양 군수, 평양 서윤, 과천 현감, 서흥 부사를 지냈다. 연암과는 소싯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1793년 음력 9 29일 사망하였다. 楓皐集 卷12 先府君墓表

[D-008]원례(元禮) : 한문홍(韓文洪)의 자이다. 그는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1736년에 태어났다. 1765년 진사 급제 이후, 벼슬은 1787년에서 1790년까지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재임하는 등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한 듯하다. 그의 몰년은 1792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편지로 미루어 보면 1794년이 아닌가 한다. 연암과는 젊은 시절에 같이 과거 공부를 했던 친구였다. 연암집 3 ‘대은암에서 창수한 시의 서문大隱菴唱酬詩序 참조.

[D-009]겨우 …… 불과했습니다 : 예컨대 한문홍은 1789(정조 13) 음력 12월 마전 군수로서 경내에 있는 고려 태조의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을 중건하였다. 그 부근 잠두봉(蠶頭峯)에 그가 지은 중작숭의전(重作崇義殿)’이라는 칠언율시가 새겨져 있다.

[D-010]인생 …… 같으니 : 원문은 人生百歲間 忽如遠行客인데, 문선(文選)의 고시(古詩) 19수 중 제 3 수에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아가는 것이 덧없기가 먼 길 가는 나그네와 같네.人生天地間 忽如遠行客라는 구절이 있다.

[D-011]읍황(邑貺) : 읍황(邑況)과 같은 말로, 고을의 판공비 명목으로 전세(田稅)에 부가하여 거둬들이던 쌀이나 돈을 가리킨다. ‘邑況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12]읍총(邑摠) : 고을의 재정 현황을 적은 작은 책자이다. 목민심서 부임(赴任) 사조조(辭朝條), 읍총에는 녹봉으로 받는 쌀과 돈의 액수를 기록하고, 농간을 부려 잉여분을 사취하는 방법을 갖가지로 나열하고 있어, 수리(首吏)가 이를 바치면 신임 사또는 조목조목 캐 물어서 그 묘리와 방법을 알아내니, “이는 천하의 큰 수치이다.”라고 하였다.

[D-013]자른 …… 말라 : 논어 향당(鄕黨)에서 공자는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드시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다.”고 하였고, 유향(劉向) 열녀전(列女傳)에 주() 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姙)의 태교(胎敎)를 예찬하면서, “옛날에 부인이 자식을 임신하면 …… 자른 것이 바르지 못하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았다.”고 하였다. 열녀전의 이 대목은 주자(朱子)가 찬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등 예서(禮書)에 전재(轉載)되어 있다.

[D-014]()에서 …… 없고 : 맹자 등문공 하에 나오는 오릉중자(於陵仲子)의 고사에 출처를 둔 말이다. 오릉중자는 제() 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한 가문 출신으로, 그의 형은 식읍(食邑)인 합()에서 만종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오릉중자는 형의 녹봉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한 집에서 살지 않고 오릉(於陵)에 은둔하였다. 훗날 집에 돌아와 형에게 뇌물로 거위를 바치는 자를 보고 이 꽥꽥거리는 것은 무엇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며 얼굴을 찌푸렸는데, 그 뒤 어머니가 요리한 거위 고기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보고는 이것이 꽥꽥거리던 고기다.”라고 하자, 밖으로 뛰쳐 나가 먹은 것을 토해 버렸다고 한다.

[D-015]낙읍(洛邑) …… 아니겠소이까 : 낙읍은 주 나라의 수도이고, 구정(九鼎)은 우() 임금 때 중국의 구주(九州)에서 바친 쇠로 만들었다는 귀중한 솥으로, 은 나라 상읍(商邑)에 있던 것을 주 나라 무왕(武王) 때 낙읍으로 옮겼다고 한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백이(伯夷) 시골 사람과 함께 서 있을 때 그가 쓴 갓이 바르지 못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기를 마치 제 몸이 더럽혀질 듯이 여겼다.與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고 하였다.

[D-016]도척(盜跖)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도적으로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사기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와 같은 선인(善人)과 대비되는 악인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되었다.

[D-017]소 잡는 칼 : 지방관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작은 고을의 수령이 되는 것을 뜻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에서 예악(禮樂)으로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論語 陽貨

[D-018]무성한 …… 못지않으며 : ()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산음현(山陰縣) 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한 일을 기록한 난정기(蘭亭記) 높은 산 험준한 고개와 무성한 숲 긴 대나무가 있다.有崇山峻嶺 茂林脩竹 하고, “물을 끌어다가 술잔을 띄우는 곡수를 만들고 차례로 줄지어 앉는다.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고 한 것을 끌어다 쓴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전라 감사에게 답함

 

 

눈보라 치는 추위에 순사또의 건강이 두루 좋으시다니, 구구한 제 마음도 삼가 위안이 됩니다.

전번 서한에 죽은 자는 저승으로 가 버리고, 남아 있는 자는 새벽별처럼 드물다.”고 하신 말씀에는 너무도 깊은 슬픔이 뒤얽혀 있었으니,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인지요?

옛날의 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도 물정 모르는 유학자요 서투른 선비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어찌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능력이 있다고 자처한 적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평일에 진실한 마음으로 옛사람의 글을 읽었고, 급기야 벼슬에 나가 당세에 할 일을 담당하게 되어서는 평탄함과 험난함을 막론하고 다만 옛사람의 글 가운데서 처방을 찾았을 뿐이니, 스스로 힘을 들인 것은 한낱 정성 ()’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서한에서 하신 말씀에, 마치 이 두 분을 보기를 하늘 높이 솟고 땅을 뒤흔드는 특별난 사람으로 여긴 듯하였으니, 이는 어리석은 제가 감사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닙니다. 감사께서는 글 읽은 것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못하지 않을 뿐더러 범중엄과 부필보다 몇 백 년 늦게 태어났으니, 그 좋은 처방이 범중엄과 부필보다 반드시 많을 터입니다. 다만 감히 알지 못할 것은, ‘ 자 한 자에 힘을 들이는 것을 옛사람과 같이 할 수 있는지 하는 점입니다.

옛날의 이른바 도신(盜臣)은 지금의 이른바 수령인데, 옛날의 이른바 재물을 긁어모은다聚歛는 책망 역시 귀속시킬 데가 어찌 없겠습니까.맹자는 말하기를,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라.”

했는데, 한 고을의 아전들은 곧 한 고을의 거실이요, 각 읍의 수령들은 바로 한 도의 거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지키는 것이요 이와 같이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됨은 오직 저 관리들이 알고 있을 뿐이니, 저들이 비록 눈앞의 위협적인 형구(刑具)를 무서워할지라도 어찌 마음속으로는 시비를 판단하지 않겠습니까? 아마도 저 옛 현인들은 거실에 원망을 사지 않았을 터입니다.

지난가을에 태풍 피해가 심한 데도 있고 심하지 않은 데도 있었으니, 이른바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다만 대령(大嶺) 이남은 노령(蘆嶺) 이북과는 같지 않아서, 나무가 꺾이고 기왓장이 날아가는 일은 있었지만, 수만 그루의 나무들이 울부짖고 사방팔방이 뒤흔들린 건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한창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 영천(永川)에서 경주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멀리 백리 밖을 바라보니 바다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먹이 번진 것 같았고, 또 무수한 버섯이나 수천수만 개의 수레바퀴와도 같았습니다. 길가는 사람이 멀리 하늘로 오르는 흰 용을 가리키는데, 그 형상은 또한 산언덕 사이에 나무꾼이 다니는 길이 여러 갈래 난 것 같고, 그 색깔은 희지도 검지도 않으며 맑고 밝은 것이 엷은 얼음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것이 용인지 구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날 풍력이 거세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내신 편지에 재해를 입지 않은 것을 축하하신 것은 축하가 아닙니다. 바람은 어찌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하읍(下邑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서 1000여 리 밖의 대궐로 달려가 임금님을 가까이에서 뵈었으니, 지극한 영광이었습니다. 본현이 풍년인지 흉년인지를 먼저 물으시고, 다음으로 연로의 농작물 형편 및 도내의 백성들 사정이 어떠한지, 지난번에 태풍 피해가 있었는지를 물으셨는데 말씀을 간곡하게 되풀이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백성들 사정에 대해서는 임자년(1792)과 비교해서 어떠한지 듣고 본 대로 대답하라는 뜻을 간곡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에 전상(殿上)에는 촛불이 휘황하고 좌우에는 다만 승지와 사관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임금께서 천신(賤臣)을 대우하시는 것이 측근의 신하와 다름이 없었으니, 천신의 직분상 의견을 피력할 자리를 잠시 얻은 이상 오직 숨김없이 다 아뢰어야 마땅할 터인데, 가슴속에 글로 쓰지 않은 만언(萬言)의 상소가 등 위에서 한 섬의 땀으로 모조리 변하고 말았습니다. 소원하고 천한 몸이라 속에 있는 생각을 다 못 아뢴 것은 진실로 그 형세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중엄이나 부필과 같은 분들에 비교하면 또 어떻다 하겠습니까.  이하 원문 빠짐 

 

 

[C-001]전라 감사에게 답함 :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낸 답서이다. 이서구는 1793(정조 17) 8월 전라 감사에 제수되었다.

[D-001]범중엄(范仲淹)과 부필(富弼) : 송 나라 인종(仁宗 : 1062~1063 재위) 때의 명재상들이다.

[D-002]옛날의 …… 없겠습니까 : 도신(盜臣)은 관청 창고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관리라는 뜻이다. 대학에서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백승지가(百乘之家 : 경대부가卿大夫家)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聚斂之臣를 기르지 않는다. 재물을 긁어모으는 관리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신(盜臣)을 둘 것이다.”라고 하였다. 원문 중 聚斂之責이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聚斂之臣으로 되어 있다.

[D-003]거실(巨室) …… 말라 : 거실은 명문 대가를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임금이 정치를 하기가 어렵지 않으니, 거실(巨室)에 원망을 사지 말아야 한다. 거실이 사모하는 바를 온 나라가 사모하고, 온 나라가 사모하는 바를 천하가 사모한다. 그러므로 덕으로써 교화하는 정치가 성대하게 사해(四海)에 넘치는 것이다.” 하였다.

[D-004]천리까지 …… 않는다 : 왕충(王充) 논형(論衡) 뇌허편(雷虛篇) 천리까지 같은 바람이 불지 않고, 백리까지 같은 우레가 치지 않는다.千里不同風 百里不共雷고 하였다.

[D-005]하읍(下邑)의 수령 : 원문은 下邑小吏인데 小吏는 대개 아전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적절치 않다.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고을 수령邑宰이란 뜻의 小宰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6]저는 …… 영광이었습니다 : 연암은 1794(정조 18) 가을에 차원(差員)으로 상경했을 때 임금의 특명으로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임금은 연암에게도 안의현과 연로의 농사 형편과 도내 백성들의 사정을 간곡하게 물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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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번]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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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제3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2]

15 만휴당기(晩休堂記)

16 명론(名論)

17 백이론(伯夷論) ()

18 백이론(伯夷論) ()

19 형암(炯菴) 행장(行狀)

20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21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22 필세설(筆洗說)

23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만휴당기(晩休堂記)

 

내가 예전에 작고한 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씨와 함께 눈 내리던 날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우며 난회(煖會)를 했는데, 속칭 철립위(鐵笠圍)라 부른다. 온 방안이 연기로 후끈하고,  · 마늘 냄새와 고기 누린내가 몸에 배었다. 공이 먼저 일어나 나를 이끌고 물러 나와, 북쪽 창문 가로 나아가서는 부채를 부치며,

 

그래도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과 그다지 멀지 않다 할 만하구먼.”

하였다.

조금 있다가 보니 뭇 종들이 심부름을 하느라 처마 아래 서서는 추위를 못 견디어 발을 구르고 있었는데도, 공의 자제들은 떼 지어 소란을 피우다가 국물을 쏟아 손을 데는 등 왁자지껄 장난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공은 크게 웃으며,

 

더운 곳에서 일찌감치 물러 나오니 당장에 효험을 보네만, 눈 속에서 발을 구르는 자들이 국물 한 방울도 얻어먹지 못하는 것이 안됐구먼.”

하기에, 나 역시 젊은이들이 국물을 쏟은 일을 들어 공에게 넌지시 충고하고, 그 김에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진퇴(進退)와 영욕(榮辱)에 대해서 역설하였다. 그랬더니 공은 정색을 하고서,

 

부귀를 누릴 만큼 누린 뒤에야 만족할 줄을 알고, 다 늙고 나서야 휴식을 생각한다면 역시 너무 늦은 것이니,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대개 공은 반드시 벼슬길에서 일찌감치 물러나는 일에 용단할 수 있었다고는 못 하겠으나, 공이 이 말을 한 것은 역시 속으로 느낀 바가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싶다.

내가 서쪽으로 개성에 와서 노닐게 되면서, 양씨(梁氏)의 자제인 정맹(廷孟)과 몹시 친해졌다. 그 부친의 학동(鶴洞) 별장에서 노닌 적이 있는데, 꽃과 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서고 뜰과 당()이 깨끗이 다듬어졌으며, 그 당을 이름하여 늘그막에 쉰다는 뜻의 만휴(晩休)’라 했다. 양옹(梁翁 양정맹의 부친)은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옛날 장자(長者)의 풍도가 있었다. 날마다 동네 노인들과 함께 활 쏘고 바둑 두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거문고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으니, 대개 명성과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기를 일찌감치 그칠 수 있어서 늘그막에 오래 즐거움을 누린 것이었다. 이 어찌 참으로 만휴의 즐거움을 얻은 분이 아니겠는가!

일찍이 양정맹이 나에게 기()를 지어 달라고 청했었다. , 김공이 이 도읍의 유수(留守)를 지낸 적이 있는데, 김공이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공을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화로에 둘러앉아 고기 구워 먹던 옛일을 말하여 양옹의 만휴(晩休)의 즐거움을 치하하고, 아울러 이를 글로 적어서 떼 지어 소란을 피우다가 손을 데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D-001]대부(大夫) 김공 술부(金公述夫) : 술부는 김선행(金善行 : 1716~1768)의 자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김선행은 1739(영조 15) 문과 급제 후 옥당(玉堂), 황해 감사, 대사헌, 한성부 좌윤, 도승지 등을 거쳐 1765 년부터 1766년까지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연행을 다녀왔다. 당시 연행에는 서장관 홍억(洪檍)의 조카인 홍대용도 참여하였다. 귀국 직후인 1766년 음력 5월 개성 유수로 임명되어 1768 2월까지 재임하였다. 그 후 대사헌, 좌윤을 지내다가 곧 사망했다. () 나라의 제도에 국군(國君) 아래 경() · 대부(大夫) · ()의 세 등급이 있었으므로, 후대에 관직에 임명된 자를 대부라 하였다. 조선 시대의 품계에서도 4품 이상의 문관에게는 ‘~대부라 하였다.

[D-002]난회(煖會) : 난로회(煖爐會)를 말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서울 풍속에 숯불을 화로에 피워 번철(燔鐵)을 올려 놓고 쇠고기에 갖은 양념을 하여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 한다고 하였다. 번철은 전을 부치거나 고기를 볶는 데 쓰는 무쇠 그릇으로 전철(煎鐵)이라고도 한다. 삿갓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번철 주위에 둘러앉는다고 하여, 난로회를 철립위(鐵笠圍)’라고 한 듯하다.

[D-003]더운 곳 : 원문은 열처(熱處)’인데, 이는 권세 있는 벼슬자리라는 뜻도 있다.

[D-004]진퇴(進退)와 영욕(榮辱) : 진퇴는 벼슬길에 나서는 것과 은퇴하는 것을 가리킨다. 벼슬할 때와 은퇴할 때를 잘 분별해야 영예를 누리고 치욕을 면할 수 있다.

[D-005]학동(鶴洞) : 금학동(琴鶴洞)으로 개성에 있던 동명(洞名)이다. 그곳에 개성의 선비로서 연암을 종유(從遊)하던 양호맹(梁浩孟) · 양정맹(梁廷孟) 형제의 별장이 있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명론(名論)

 

 

천하라는 것은 텅 비어 있는 거대한 그릇이다. 그 그릇을 무엇으로써 유지하는가? ‘이름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써 이름을 유도할 것인가? 그것은 욕심이다. 무엇으로써 욕심을 양성할 것인가?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만물은 흩어지기 십상이어서 아무것도 연속할 수 없는데 이름으로써 붙잡아 둔 것이요, 오륜(五倫)은 어그러지기 쉬워서 아무도 서로 친할 수 없는데 이름명분으로써 묶어 놓은 것이다. 무릇 이렇게 한 뒤라야 저 큰 그릇이 아마도 충실하고 완전할 수 있어, 기울어지거나 엎어지거나 무너지거나 이지러질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의 작록(爵祿)으로도 선()을 행하는 자에게 두루 다 상을 줄 수는 없으니, 군자는 이름명예으로써 선을 행하도록 권장할 수가 있다. 온 세상의 형벌로도 악()을 행하는 자를 두루 다 징계할 수는 없으니, 소인은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한밤중에 야광주(夜光珠)를 던지면, 칼을 쥐고 적을 기다리지 않을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이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주어진 이름명예이라 기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하라는 큰 그릇임에랴. 조정에 갖옷을 모셔 놓으면, 옷섶을 여미고 예법에 따라 종종걸음을 하지 않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은 왜인가? 이름명분이 건재하여 한계를 넘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더구나 참으로 충효(忠孝)를 다하여 비통해할 때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주() 나라의 쇠퇴기에 빈 그릇을 끼고 강대한 제후들의 위에 군림해도 아무도 감히 먼저 무례한 짓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도 여전히 그 빈 이름명분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사슴과 말의 생김새가 서로 비슷하지만, 한번 그 이름이 어지러워져 버리자 천하에 제 임금을 죽이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 저 사슴과 말의 이름이 천하의 존망(存亡)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만 그래도 하루도 구별이 없어서는 아니 되는데, 더구나 선과 악처럼 서로 같지 아니하고 명예와 치욕처럼 분명히 갈라지는 경우에 있어서랴.

무릇 천하의 재앙 중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선왕(先王)은 사람들이 장차 태만하고 해이하여 한결같이 물러나기만 하고 나아감이 없게 될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로써 그들의 눈을 유도하고, 종고(鍾鼓)와 금슬(琴瑟)과 생용(笙鏞 생황과 큰 종)으로써 그들의 귀를 유도하고, 인수(印綬 관직을 상징함)와 거마(車馬)로써 그들의 몸을 유도하고, 남다른 선행을 표창하고 비석에 새기고 노래로 지어 찬탄함으로써 그들의 기개를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그 누구도 분발하고 단련해서, 의욕을 내야 할 일에 힘차게 나서고, 물러나 남에게 미루거나 제풀에 꺾이고 마는 마음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결같이 나아가기만 하고 물러날 줄 모른다면, 천하의 재앙 중에 또한 태연하여 부끄러움이 없는 것보다 더 참담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선왕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고상한 품성을 양성하고, 위로하고 타이르며 힘써 노력하도록 함으로써 사양하고 물러나는 미덕을 양성하였다.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은 절개를 양성한 때문이요, 형벌이 위로 대부(大夫)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 것은 염치를 기르고자 한 때문이다. 신체에 형벌을 가하거나 유배의 형을 내린 뒤에 또한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뜻을 표시하는 것은, 천하의 대중들로 하여금 곧은 절개로써 자신을 지키고, 장차 아무 짓이나 다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욕심 내기로는 부귀보다 더 심한 것이 없지만, 그가 욕심 내는 대상이 도리어 부귀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부끄러워하기로는 형벌보다 더 큰 것이 없지만, 부끄러이 여기는 대상이 도리어 형벌보다 클 경우에는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는 법이다. 이는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가? 이른바 이름명예이 아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형벌과 포상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은 결국 한계가 있는 방법이요, 이름명예을 장려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어디서든 제한이 없는 방법이다. 왜 그런가? 사람 중에 혹 선행을 하면서도 포상을 기다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작록이 그가 한 선행을 능가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또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형벌을 꺼리지 않는 자가 있으니, 이는 매질과 회초리로는 그가 저지르는 악행을 억제하기에 부족한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 중에는 반드시 포상을 할 필요 없이 권장하기만 하고, 형벌을 가할 필요 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게만 하면, 힘차게 의욕을 내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라는 이름은 공평하고 정대(正大)하나, ()이라는 이름은 이기적이고 천박한 것이다. 그대의 논법대로 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을 다 몰아서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이다.”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른바 이름을 혐오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그 폐단은 어리석은 점이지만, 그래도 근엄하고 자중하여 세속에 따라 우왕좌왕하는 지경까지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아무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에게 갑자기 실정보다 지나친 칭찬을 가한다면, 그 역시 뒤로 물러서 겸손히 사양하고 불안해하며 그렇다고 자처하지 못할 터이다. 어찌 사람들을 몰아다 위선을 행하게 만들 것을 걱정할 게 있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모두가 다 군자라면, 또한 무엇 때문에 이름명예에 대해 힘쓰겠는가. 만약 천하 사람들이 있는 힘을 다해 성취하려고만 한다면, 인의(仁義)의 행실을 욕심으로써 인도할 수 있고, 불의(不義)의 일을 이름명예으로써 부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천하의 대중들이 무관심하여 이름명예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선왕이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세상을 다스리는 계책과 충효 인의(忠孝仁義)의 행실이 모두 다 텅텅 비어서 빈 그릇이 되고 말 터이니, 장차 어디에 의탁하여 스스로 행해지겠는가?”

 

[D-001]이름 : 명칭이라는 뜻 외에도 명분(名分)이나 명예(名譽)라는 뜻을 포함하므로 문맥에 따라 그 뜻을 변별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용어의 통일성은 유지해야 하므로, 부득이 변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괄호 안에 별도의 표기를 하였다.

[D-002]한밤중에 …… 왜인가 : 추양(鄒陽)의 옥중서(獄中書)에 출처를 둔 말이다. 추양은 참소로 인해 하옥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양 효왕(梁孝王)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편지에서 ()은 듣자온대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을 어둠 속에서 노상에 있는 사람을 향해 던지면, 칼을 쥐고 서로 노려보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런 까닭 없이 제 앞에 이르러 왔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83 魯仲連鄒陽列傳》 《文選 卷39 獄中上書自明 명월주와 야광벽은 둘 다 야광주(夜光珠)를 뜻한다.

[D-003]조정에 …… 놓으면 : 천자가 승하하고 새 천자가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천자의 보좌(寶座)에 선왕(先王)의 갖옷을 모셔 놓았던 것을 가리킨다. 새 천자가 즉위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이렇게 보좌에 선왕의 갖옷을 모셔 놓고서 조하(朝賀)를 올렸다고 한다. 원문의 朝堂은 몇몇 이본들에는 廟堂으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D-004]사슴과 …… 되었다 : 진 시황(秦始皇)이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국권(國權)을 독차지하려 하였으나, 조정의 중신들 가운데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이세(二世)인 호해(胡亥)에게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고 하였다. 이세가 말을 가지고 왜 사슴이라 하느냐고 묻자, 조고를 두려워하는 신하들은 대부분 말이라고 답하였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고 답했던 사람을 죄를 씌워 죽여 버렸으므로,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史記 卷6 秦始皇本紀

[D-005]보불(黼黻)과 조회(藻繪)와 치수(絺繡) : ()는 도끼 무늬이고, ()은 기() 자 둘이 서로 등진 모양의 무늬이다. 조회는 수초(水草) 무늬를 그린 것이고, 치수는 자수(刺繡)를 뜻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에서 순() 임금은 우()에게 일() · () · 성신(星辰) · () · () · 화충(華蟲 : )을 그리고, 종이(宗彛 : 종묘宗廟의 주기酒器) · () · () · 분미(粉米 : 백미白米) · () · ()을 수놓아 예복(禮服)을 만듦으로써 존비(尊卑)의 질서를 분명히 밝히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천자는 일() · () 이하 열두 가지 무늬로 장식한 12장복(章服)을 입었고, 왕은 산() · () 이하 아홉 가지 무늬로 장식한 9장복을 입었고, 신하들은 계급에 따라 7장복 · 5장복 · 3장복 · 1장복 · 무장복(無章服)을 입었다.

[D-006]속백(束帛)에다 벽옥(璧玉)을 추가함으로써 : 속백은 비단 다섯 필을 한 묶음으로 만든 것으로 귀중한 예물로 쓰였다. 예기 예기(禮器)에 제후가 천자를 조회할 때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하는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존경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尊之라고 하였고, 교특생(郊特牲)에서도 속백에다 벽옥을 추가한 것은 천자의 덕을 옥에 비겨 덕 있는 천자에게 귀의함을 표한 것이다.束帛加璧 往德也라고 하였다. 후대에는 왕이나 천자가 덕 있는 군자를 초빙할 때에도 속백가벽(束帛加璧)의 예를 갖추었다.

[D-007]위엄과 ……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 부귀도 그를 방탕하게 할 수 없고, 빈천도 그를 변절하게 할 수 없으며, 위엄과 무력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으니,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고 하였다.

[D-008]형벌이 ……  : 예기 곡례 상(曲禮上) 예절은 아래로 서민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으며, 형벌은 위로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형벌이 대부에게까지 미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부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의 형벌을 별도로 정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대부를 이처럼 예우함으로써 스스로 염치를 알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D-009]또한 …… 것은 : 원문은 又從而示其傷慘矜恤之意인데, 몇몇 이본들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자가 옳다.

[D-010]시퍼런 …… 법이다 : 보통 사람으로는 행하기 힘든 용기를 발휘한다는 뜻이다. 중용장구  9 장에서 공자는 천하와 나라와 집안도 고루게 다스릴 수 있고, 작록(爵祿)도 사양할 수 있고, 시퍼런 칼날도 밟고 갈 수 있으되, 중용(中庸)을 행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D-011]만약 …… 한다면 : 중용에 출처를 둔 말이다. 중용장구  20 장에 어떤 이는 편안히 실행하고, 어떤 이는 민첩하게 실행하고, 어떤 이는 있는 힘을 다해 실행하나니, 공을 이루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一也라고 하였다.

[D-012]세상을 다스리는 계책 : 원문은 禦世之策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백이론(伯夷論) ()

 

 

사기(史記), 무왕(武王)이 주()를 치러 나서자 백이가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하며 충고했고, 무왕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백이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굶어 죽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논한다.

백이가 무왕에게 충고한 사실은 경서(經書)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제() 나라 동쪽 시골 사람들의 말인데 사마천(司馬遷)이 취하여 역사적인 사실로 만들었으니 이는 믿을 것이 못 된다. 비록 그렇지만, 이 책을 믿을진댄 논의할 거리가 있을 수 있다.

백이는 이른바 천하의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므로 서백(西伯)이 일찍이 예의를 갖추어 그를 봉양했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백이를 무기로 치려고 했던 것이다. , 선왕이 예의를 갖추어 봉양했던 신하이자 천하의 이른바 대로요 현인인데도, 측근의 신하들이 곧장 그 앞에서 무기로 치려고 했더니, 무왕은 오히려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라는 식이었다. 그러니 접때 태공(太公)이 아니었던들 백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에 이윤(伊尹)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그를 떠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같이 여겼으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여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 해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또한 무왕의 뜻이기도 하다. 무왕은 아마도 천하를 향해,

 

은 나라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했다.”

하고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제자리를 얻지 못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아마도 백성들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무왕은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 나라가 노성(老成)한 사람의 말을 저버렸다.”

하였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불의를 충고했으니, 무왕이 천하를 얻은 것은 아마도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 천하를 향해 외치기를,

 

은 나라가 죄 없는 이를 죽였다.”

하였다. 그러나 주 나라가 장차 일어날 적에 대로요 현인이라는 이가 온전히 죽음을 맞지 못했으니,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한 것은 아마도 죄 없는 이를 죽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릇 이 세 가지는 무왕이 남을 정벌한 명분이었는데도, 난폭하게 거리낌 없이 행동했단 말인가?

무왕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 주고, 비간(比干)의 무덤에 봉분을 해 주고, 상용(商容)의 마을을 지나갈 때 수레에서 경의를 표했으면서, 유독 백이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 살았을 때는 예의를 갖추어 봉양하기를 문왕(文王)과 같이 하고, 그가 떠날 적에는 신하로 대하지 않기를 기자와 같이 하고, 의롭게 여겨 표창하기를 상용과 같이 하고, 그가 죽었을 적에는 봉분하기를 비간과 같이 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 백이와 무왕은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천하와 후세를 위해 염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탕 임금이 걸()을 내쳤는데도 천하 사람들이 흡족해하며 아무도 괴이하게 여기는 자가 없자, 탕 임금은 진실로 이미 염려하기를,

 

나는 후세 사람들이 나를 구실로 삼을까 걱정이다.”

하였다. 그런데 무왕이 마침내 그 뒤를 따라 그와 같은 일을 행했으니, 천하 사람들이 또 흡족해하며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후세를 위하여 염려됨이 진실로 클 것이다. 그러므로 백이가 무왕을 비난한 것은 그의 거사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리를 밝혔을 따름이며, 무왕이 백이의 봉분을 만들어 주지 않은 것은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의리를 밝게 드러냈을 따름이니, 천하와 후세를 염려한 점은 똑같았다.

, 예의를 갖추어 봉양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표창한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신하로 대하지 않은들 그의 의리를 후세에 밝히기에는 부족하며, 봉분을 만들어 준들 백이를 후대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D-001]사기(史記) …… 했다 : 사기 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의하면 백이와 숙제(叔齊)는 은 나라의 제후(諸侯)인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숙제에게 지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숙제가 형인 백이에게 양보하려 하였다. 백이는 아버지의 명이다.”라고 하고는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숙제도 왕위에 오르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리니, 나라 사람들이 다른 형제를 왕으로 세웠다. 백이와 숙제가 서백(西伯 : 뒷날의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로 갔는데, 도착해 보니 서백은 이미 죽었고, 그 아들 무왕이 아비의 신주(神主)를 수레에 싣고서 동쪽으로 은 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려 하였다. 백이와 숙제가 말고삐를 부여잡고 충고하기를,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을 효()라고 하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인()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무왕의 측근 신하들이 무기로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강 태공(姜太公) 이들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고는 부축하여 나갔다. 무왕이 은 나라를 평정하고 나자 천하가 모두 주() 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으나, 백이와 숙제는 수치스럽게 여겨 의리상 주 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며 고사리를 캐 먹고 살다가 굶주려 죽었다.

[D-002]()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자 : 원문은 旣改殷命인데, 서경 소고(召誥)에 출처를 둔 표현이다. 무왕이 하늘을 대신해서, 은 나라가 받은 천명을 교체해 버렸다는 뜻이다.

[D-003]경서(經書) : 여기에서는 서경을 가리킨다.

[D-004]() 나라 ……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가리킨다.

[D-005]천하의 대로(大老)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는 폭군 주()를 피하여 북쪽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 나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 하였으며, 강 태공이 폭군 주를 피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다가 문왕이 정벌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 나는 서백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이 두 노인은 천하의 대로(大老)인데 문왕에게 귀의하였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귀의한 셈이다. 천하 사람들의 아버지가 귀의했는데, 그 아들 되는 자들이 어찌 문왕에게 귀의하지 않으리오.”라고 하였다. 대로는 덕망 높은 노인이란 뜻이다.

[D-006]내가 …… 것이다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맹자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지 않고 흉년만 핑계 대는 위() 나라 왕에게 이것은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서도 내가 아니라 무기가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난하였다.

[D-007]이윤(伊尹) …… 않았으니 : 이윤은 은 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으로 이름은 지()이다. 탕왕의 부름을 받아 하() 나라의 무도한 걸()을 치고 은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맹자 만장(萬章), 이윤은 천하의 백성 중에 필부(匹夫)와 필부(匹婦)라도 요순(堯舜)의 혜택을 입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마치 자신이 그를 밀어 도랑 속으로 처넣은 것과 같이 생각하였다.” 하였고, 공손추 상(公孫丑上), 공손추가 백이와 이윤이 공자(孔子)와 같은 점을 묻자, 맹자가 답하기를, “백리(百里) 되는 땅을 얻어서 임금 노릇을 하면 모두 제후들에게 조회 받고 천하를 소유할 수 있거니와, 한 가지라도 불의를 행하며, 한 사람이라도 죄 없는 이를 죽이고 천하를 얻는 것은 모두 하시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같은 점이다.” 하였다. 또한 서경 열명 하(說命下), 이윤은 한 사람의 필부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는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고 한다.

[D-008]노성(老成)한 사람 : 덕망 높은 노인이라는 뜻과 함께, 노련한 옛 신하라는 뜻도 있다.

[D-009]난폭하게 : 대본은 놀라고 두려워한다는 뜻의 恤然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따라 悍然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또 어리석다는 뜻의 懜然으로 된 이본도 있다. 거리낌 없이 난폭하게 구는 것을 한연불고(悍然不顧)’라 한다.

[D-010]무왕이 …… 표했으면서 : 서경 무성(武成)에 나온다. 상용(商容)은 은 나라 주왕 때 대부가 되어 직언을 하다가 내쫓긴 현인(賢人)이다. 사기 61 백이열전에는 무왕이 상용의 마을에 정표(旌表)를 내렸다고 하였다.

[D-011]나는 …… 걱정이다 :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나온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백이론(伯夷論) ()

 

 

공자(孔子)가 옛날의 인자(仁者)를 칭송했으니, 기자(箕子), 미자(微子), 비간(比干)이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인()이라는 명칭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맹자가 옛날의 성인(聖人)을 칭송했으니,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백이(伯夷)가 이들이다. 이 세 분의 행실이 각기 다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모두 성()이라는 칭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저 태공(太公)은 옛날의 이른바 대로(大老)요 현인(賢人)이었으니, 그 행실은 백이와 똑같고 도()는 이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의 인()을 칭송하며 세 분의 인자와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며, 맹자도 그의 성()을 칭송하며 세 분의 성인과 함께 나열하지는 않았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 내가 은 나라를 살펴보건대 그 나라에는 다섯 분의 인자가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다섯 분의 인자라고 말하는 것인가? 백이와 태공을 합해서 하는 말이다. 저 다섯 분의 인자들은 소행은 역시 각자 달랐지만, 모두 절실하고 간곡한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서로 기다려야만 인()이 되고, 서로 기다리지 않을 경우 불인(不仁)이 되는 처지였다.

미자는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도 없는데 충고하려고 애쓰느니 차라리 은 나라의 종사(宗祀 조종(祖宗)에 대한 제사)를 보존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나라를 떠났으니, 미자는 비간이 왕에게 충고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비간은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충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서 충고하지 않느니 차라리 낱낱이 충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충고하고 죽었으니, 비간은 기자가 도()를 전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기자는 속으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이니, 내가 도를 전하지 않으면 누가 도를 전하랴.’라고 생각하고서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척하다가 잡혀서 종이 되었으니, 기자에게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천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니, 기자는 태공이 백성들을 구제해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태공은 속으로 자신을 은 나라의 유민(遺民)으로 생각하면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少師)는 떠났고, 왕자(王子)는 죽었고, 태사(太師)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은 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장차 천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를 쳤으니, 태공 역시 서로 기다릴 사람이 없는 듯하다. 비록 그러하나 인자의 마음은 하루라도 후세를 잊지 못하는 것이니, 태공은 백이가 의리를 밝혀 줄 것을 기다린 것이다.

백이는 속으로 자신을 은 나라의 유민으로 생각하면서, ‘은 나라가 결국 망하고 말 터인데, 소사는 떠났고, 왕자는 죽었고, 태사는 구금되었으니, 내가 그 의리를 밝혀 놓지 않는다면 장차 후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서, 마침내 주() 나라를 받들지 않았다. 무릇 이 다섯 분의 군자가 어찌 좋아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두 마지못해서 한 일이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 서로 기다려서 인()이 된다 할 것 같으면, 태공이 없었을 경우 기자가 목야(牧野)의 대사(大事)를 치렀어야 하고, 백이가 아니었다면 태공이 말고삐를 끌어당겨 못 가도록 충고했어야 한단 말인가?”

하기에, 이렇게 답하였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해서 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리를 기다릴 따름이니, 신포서(申包胥)와 오자서(伍子胥)가 서로에게 고지(告知)한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왕자가 없었다면, 소사가 반드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떠날 필요가 없었는데도 떠났다면, 소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소사가 떠나지 않았는데도 왕자가 홀로 죽었다면, 왕자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왕자가 이미 죽고 소사가 이미 떠났는데도 태사가 거짓으로 미친 척하지 않았다면, 태사는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태공이 천하 백성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백이가 후세 사람을 염려하지 않았다면 백이와 태공은 인자가 되기에 부족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자가 주 나라로 달아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비간이 충고하다가 죽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기자가 도를 전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태공이 주()를 친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요, 백이가 주 나라를 받들지 않은 것도 마지못해 한 것이다.

나는 그러기에 백이와 태공의 도()를 은 나라의 세 분의 인()에 합친 것이다. 이는 또한 공자의 뜻이었다. 공자가 태공을 칭송하지 않은 것은 아마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백이의 경우에는 자주 그 덕을 칭송하고,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또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감히 그를 세 분의 인자와 연계시키지 않은 것은 아마 무왕에게 누가 될까봐 말하기를 꺼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약에 다섯 분의 인자가 합해야 온전한 인()이 된다면, 어찌 수고스럽지 않은가?”

하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일로써도 인이 되기로 말하자면, 편협하거나 공손하지 못한 점이, 어찌 백이가 청렴해서 성인이 되고 유하혜가 화합을 잘해서 성인이 된 사실을 가릴 수 있겠는가.”

 

[D-001]공자(孔子) …… 이들이다 : 논어 미자(微子) 미자(微子)는 나라를 떠났고, 기자(箕子)는 잡혀서 종이 되었으며, 비간(比干)은 충고하다가 죽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 나라에 세 사람의 인자(仁者)가 있었다.’고 하였다.”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02]맹자가 …… 이들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실린 말로, 맹자가, “백이(伯夷)는 성인(聖人) 중의 청()한 자요, 이윤(伊尹)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柳下惠)는 성인 중의 화()한 자요, 공자(孔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D-003]태공(太公) …… 때문이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맹자는 태공을 백이와 함께 대로(大老)라고 불렀다. 태공은 백이와 마찬가지로 폭군 주()를 피해 은거하다가 서백(西伯) 즉 주 나라 문왕에게 귀의하였다. 또한 태공은 이윤이 탕왕(湯王)을 도와 은 나라를 세웠듯이, 무왕을 도와 주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도()가 흡사했다고 한 것이다. ()가 똑같다고 하지 않은 것은, 이윤이 천하를 얻지 못하는 한이 있어도 정의를 지키고자 한 데 비해, 태공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법과 기계(奇計)를 즐겨 구사한 때문인 듯하다. 史記 卷31 齊太公世家 태공이 지었다는 육도(六韜)라는 병서가 전한다.

[D-004]소사(少師) …… 구금되었으니 : 문맥으로 보면 소사는 미자, 왕자(王子)는 비간, 태사(太師)는 기자라야 하지만, 서경 미자(微子)에는 왕자인 미자가 부사(父師) 즉 태사인 기자와 소사인 비간과 상의하여 망명을 결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기 3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도 태사는 기자, 소사는 비간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사는 죽었고, 왕자는 떠났고, 태자는 구금되었으니로 되어야 옳다. 비간 역시 왕자였으므로, 약간 착오가 빚어진 듯하다. 소사는 제왕의 스승으로, 태사 다음가는 직책이다.

[D-005]목야(牧野)의 대사(大事) : 목야는 무왕이 주()와 결전을 벌였던 전쟁터이다. 목야에서 은 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피가 내를 이루어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한다. 書經 武成

[D-006]신포서(申包胥) ……  : 신포서와 오자서(伍子胥)는 모두 초() 나라 사람이다. 오자서는 부형이 초 나라 평왕(平王)에게 살해당하자 복수하려고 오() 나라로 망명하였다. 9년 후 오왕 합려(闔閭)를 도와 초 나라의 도읍 영()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에 매질을 가하여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신포서는 초 나라의 대부이다. 오 나라 군사가 침입하여 왕이 피난하는 국난이 있자 진()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진 나라가 구원을 허락하지 않자 그는 대궐의 뜰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울면서 이레 동안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진 나라 애공(哀公)이 그 정성에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 오 나라를 물리쳤다. 처음에 신포서와 오자서는 친구 사이였는데, 오자서가 망명하면서 나는 반드시 초 나라를 멸망시키고 말겠다.” 하니, 신포서가 나는 반드시 초 나라를 보존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므로, 본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D-007]떠날 …… 것이다 : 이 대목이 원문에는 없으나,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과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 不必行而行 微子爲不足仁矣라고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微子는 문맥에 맞추어 少師로 바꿔 번역하였다.

[D-008]인을 …… 있겠는가 :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D-009]편협하거나 …… 있겠는가 : 맹자 공손추 상에 백이는 편협하고 유하혜는 공손하지 못하니, 편협함과 공손하지 못함은 군자(君子)가 따르지 않는다.” 하고, 만장 하(萬章下) 백이는 성인(聖人) 중의 청()한 자요, 이윤은 성인 중의 자임(自任)한 자요, 유하혜는 성인 중의 화()한 자요, 공자는 성인 중의 시중(時中)한 자이시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뜻은, 백이와 유하혜가 모든 미덕을 갖춘 공자와는 다르지만 한 가지 미덕만으로도 ()’이 되는 데는 문제가 없듯이, 백이와 태공 또한 ()’이라는 범주에 넣어도 손상이 없다는 말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형암(炯菴) 행장(行狀)

 

 

우리 정종 공정대왕(定宗恭靖大王)의 열다섯째 아들 무림군(茂林君) 시호(諡號) 소이공(昭夷公)은 휘가 선생(善生)이다. 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휘 정형(廷衡)은 감찰로서 호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휘 상함(尙馠)을 낳았다. 상함공이 휘 필익(必益)을 낳으니 강계 부사(江界府使), 부사공이 휘 성호(聖浩)를 낳으니 이분이 형암의 선친이다. 모친은 반남 박씨(潘南朴氏)로 토산 현감(兎山縣監) 휘 사렴(師濂)의 따님이요, 금평위(錦平尉)로서 시호가 효정공(孝靖公)인 휘 필성(弼成)의 손녀이다.

형암은 휘가 덕무(德懋)요 자는 무관(懋官)이니, 형암은 그의 호이다. 영종(英宗) 신유년(1741, 영조 17)에 태어났는데,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을 지녔고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였다. 세 살 때 이웃에 사는 창기(娼妓)가 엽전 한푼을 가지라고 주자, 즉시 더러워. 더러워.” 하며 땅에 던졌고, 그 돈이 빗나가서 신고 있는 신 위에 떨어지자 수건으로 그 신을 닦았다. 겨우 6, 7세밖에 되지 않아서는 능히 글을 지었고 책 보기를 좋아했다. 한번은 집안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이었다.

차츰 장성하자 뜻을 독실히 하여 학문에 힘썼다. 앉거나 눕거나 거동하는 것이 일정한 법도가 있어 한자 한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종일토록 여럿이 있을 적에도 정중하되 뻐기지 않고, 잘 어울리되 허물없이 굴지 않았다. 그리고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두어 칸의 허물어진 가옥에 거친 음식도 건너뛰는 때가 많았지만 편안하게 받아들여, 남들은 그가 근심하는 빛을 보지 못했다. 무릇 세간의 재화와 이익, 가무와 여색, 애완물, 잡기(雜技) 따위는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옛사람의 취지를 구하되 답습하거나 거짓으로 꾸며서 표현하지 않았다. 한 글자 한 구절도 다 정리(情理)에 핍근(逼近)하고 진경(眞境)을 묘사하여, 편마다 그 묘미가 곡진해서 읽어 볼 만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두어 사람과 학문을 강론하는 외에는, 지은 시나 산문을 남에게 잘 보여 주려 하지 않았다. 교유도 함부로 하지 않아서, 현달한 벼슬아치들은 한 사람도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나이가 약관이 넘도록 명성이 마을 골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책 하나를 얻으면 반드시 보면서 초록(抄錄)했는데, 본 책이 거의 수만 권을 넘었으며, 초록한 책도 거의 수백 권이었다. 비록 여행할 때라도 반드시 책을 소매 속에 넣어 갔으며, 심지어는 붓과 벼루까지 함께 가지고 다녔다. 여관에서 묵거나 배를 타고 가면서도 책을 덮은 적이 없었다. 만약 기이한 말이나 특이한 소문을 듣기라도 하면 곧바로 기록하였다.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는 고거(攷據)와 변증(辨證)을 잘하였다. 일찍이 동식물과 명물도수(名物度數), 나라를 경영하는 방략과 금석비판(金石碑板)으로부터 우리 왕조의 법제와 외국의 풍토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어서는 부친의 명령으로 과거 공부를 하였다. 시에 뛰어나, 당세에 과시(科詩)로써 이름난 자들도 스스로 미치지 못할 것으로 여겼다. 간간이 과거를 본 적도 있었으나 즐겁게 여기진 않았으며, 마침내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을유년(1765, 영조 41)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풀지 않았으며 조석으로 슬피 울부짖어, 이웃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귀를 막았을 정도였다. 성묘하는 일이 아니라면 비록 종자(宗子)의 집이라도 간 적이 없었다.

무술년(1778, 정조 2)에 사신 행차를 따라 북경에 들어가면서 산천과 풍물을 관광하였으며, 당시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담론하고 시를 지어 주고받은 일이 많았다. 항주(杭州) 사람 반정균(潘庭筠)이 그를 만나 보고 탄복하며,

 

눈빛이 번쩍번쩍하니 이야말로 비범한 사람이다.”

하였다.

기해년(1779)에 외각(外閣 교서관(校書館))의 검서관(檢書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성상이 등극한 지 3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임금께서는 문풍(文風)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人材)가 묻혀 버림을 염려하여 문풍을 진작하고 인재를 발탁할 방법을 생각한 끝에, 영릉(英陵)의 옛일을 모방하여 규장각을 세우고 각신(閣臣)을 두었으며, 교서관을 창덕궁 단봉문(丹鳳門) 밖으로 옮겨 설치하고 규장각의 외각을 삼았다. 그리고는 각신들에게 물어서 벼슬하지 못한 선비들 중에 학문과 지식이 있는 자들로 외각의 관원을 채우게 하고, 처음으로 검서라는 관명을 하사하였는데, 무관이 첫 번째로 선발되었다. 임금께서 검서들에게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는, ‘규장각 팔경(奎章閣八景)’이라는 제목의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는데 무관이 장원을 차지했고, 이튿날 다시 영주에 오르다登瀛州라는 제목으로 20()의 시를 짓게 했는데 또 장원을 차지하니, 두 번 모두 임금께서 상을 내리되 차등있게 내리셨다. 이렇게 해서 남들에게 받지 못했던 인정을 비로소 임금에게서 받게 된 것이다.

신축년(1781) 정월에 외각의 관직을 옮겨서 내각(內閣 규장각)의 관직으로 만들도록 명하였으니, 무관이 규장각 검서관이 된 것은 대개 이때부터였다. 3월에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로 승진되었는데, 이로부터는 매양 본래의 관직에 검서의 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해 12월에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으로 제수되었는데, 사근역(沙斤驛)에는 해묵은 공채(公債)가 있어 매년 그 이자를 받아 공비(公費)로 삼는 관계로, 가난에 지친 백성들을 날마다 들볶아 백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일을 상관(上官 경상 감사)에게 보고하여 혁파하였는데, 이 덕분에 역민(驛民)들이 지금까지도 그 혜택을 입고 있다.

계묘년(1783) 11월에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廣興倉主簿)에 제수되고, 갑진년(1784) 2월엔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로 옮겼다. 6월에는 적성 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적성에 있는 5년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다 최우수를 받았다.

적성 현감으로 재직할 당시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치게 된다.”

하였고, 남들이 간혹 녹봉이 박하지 않느냐고 하면, 문득 정색을 하고,

 

내가 한낱 서생(書生)으로서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벼슬이 현감에 이른 덕분에,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하고 아래로 처자를 기르고 있으니 영광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다만 임금님의 은혜를 찬송할 뿐이지 어찌 감히 가난을 말할 수 있으랴!”

하였다. 고을 남쪽에 청학동(靑鶴洞)이 있었는데 고송(古松)과 백석(白石)이 그윽하여 사랑스러웠다. 예전에 정자가 있었으나 다 허물어졌으므로 다시 두어 칸을 얽고 우취옹정(又醉翁亭)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두 바퀴 달린 작은 수레를 손수 만들어 여가 있을 때면 홀로 그곳에 가서 유유자적하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기유년(1789) 6월에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인 와서 별제(瓦署別提)로 옮기고, 경술년(1790) 7월에 사도시 주부로 옮기고, 신해년(1791) 2월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옮기고, 3월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로 옮기고, 5월에 사옹원 주부로 옮겼다.

무관은 젊은 시절부터 가난을 편안히 여겼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가 준비되지 못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때지 못하기도 했다. 벼슬을 하게 되어서도 제 몸을 돌보는 데는 매우 검소하여, 거처와 의복이 벼슬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한(饑寒)’이라는 두 글자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나 기질이 본래 부녀자나 어린아이처럼 연약하였는데, 나이가 거의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이 손상된 지 오래였다. 겨울에 날씨가 몹시 추우면 나무 판자 하나를 벽에 괴고 그 위에서 자곤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병이 나자 병중에도 앉고 눕고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태연자약하였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의관을 다시 정제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때는 계축년(1793) 1 25일이요, 향년은 겨우 53세였다. 2월에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 판교(板橋) 유좌(酉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일찍이 저서 12종이 있었다. 영처고(嬰處稿)는 바로 젊은 시절에 지은 시와 산문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처신하는 것과 행동을 조심하기를 어린아이나 처녀처럼 해야 한다.”

했는데, 그래서 원고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청장관고(靑莊館稿) 청장은 바로 해오라기의 별명인데,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뒤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고기만 쪼아 먹기 때문에 신천옹(信天翁)이라고도 부른다. 무관이 이로써 스스로 호를 삼은 것은 까닭이 있어서였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는 곧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과 입으로 말한 것과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것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옛날의 어진 이들이 남긴 교훈을 인용하여 훈계의 말씀으로 삼고, 지금 사람들의 요새 일들을 기록하여 보고 느끼는 바가 있도록 한 것이다.

청비록(淸脾錄)은 옛날과 지금 사람들의 시화(詩話)를 실은 것이요, 기년아람(紀年兒覽)은 상고부터 시작하여 명() · () 및 춘추 시대의 소국(小國)들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명확히 구별하였다. 청정국지(蜻蜓國志)는 일본의 세계(世系) · 지도 · 풍속 · 언어 · 물산을 기록한 것이다. 앙엽기(盎葉記)는 곧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고증하고 변증한 말들을 모은 것이다. 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은 경상도에서 역승(驛丞 찰방)으로 재직할 때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기억(禮記臆) 예기의 어려운 글자나 의심나는 뜻에 대해 풀이한 것이다. 송사보전(宋史補傳)은 곧 하교를 받들어 어정송사전(御定宋史筌)을 편집 · 교열한 것으로서, 유민열전(遺民列傳)과 고려열전(高麗列傳) · 요열전(遼列傳) · 금열전(金列傳) · 몽고열전(蒙古列傳)을 보완하여 편찬한 것이다.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는 많은 서적들을 열람하면서 명 나라 말의 유민(遺民)들의 행적을 편집한 것인데, 미처 원고를 정리하지 못하였다.

매번 문헌을 편찬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무관이 참여하였으니, 국조보감(國朝寶鑑) · 갱장록(羹墻錄) · 문원보불(文苑黼黻) · 대전통편(大典通編) 같은 종류가 그것이다. 또 일찍이 어명을 받들어 운서(韻書)를 편찬하여 진상하였으니, 이름을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 하였다. 자획(字畫)은 모두 육서(六書)를 쓰고, 주석은 제가(諸家)의 운서를 참고하여 협운(叶韻)과 통운(通韻)까지 자상히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무관은 이 일을 마치고 죽었다.

갑인년(1794) 겨울에 임금은 책을 간행하도록 명하고, 그 아우 공무(功懋)와 아들 광규(光葵)에게 명하여 함께 교정하고 그 일을 감독하게 했다. 삼년상을 마치고 담제(禫祭)를 지내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오늘 운서를 인쇄하는 일로 인하여 생각하건대, 작고한 검서관 이 아무의 재주와 학식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아들이 이미 탈상했다고 아뢰니, 그를 검서관에 특별히 임명하라.”

하고, 또 돈 500냥을 하사하시어 유고를 출간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이어서 규장각의 각신과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서 현재 장임(將任 대장이나 장수), 지방 관직, 관찰사, 큰 고을 수령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각자 능력껏 출간 비용을 돕도록 하고, 가까운 친척인 훈련대장 이경무(李敬懋)에게도 일체가 되어 출간 비용을 대는 것을 돕도록 하교하였다.

이날 임금께서 광규에게 입시토록 명하였으며, 은혜로운 하교가 정중하였다. 일족과 친구들이 서로 돌아보며 축하하기를,

 

무관이 평소에 제 몸을 깨끗이 지키고 학업에 부지런하며 편찬하는 일로 수고가 많았는데, 죽은 뒤에 지존(至尊)께서 그 재주를 생각하고 그 가난을 염려하여 마침내 그의 아들을 등용하고 유고를 출판하라는 명을 내리셨구나! 이렇게 큰 은혜와 영광이 내린 것은 구천(九泉)에 간 망인을 깊이 감격시킬 뿐 아니라, 또한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분발하게 할 터이니, 어찌 거룩하지 않으랴!”

하였다.

무관은 수성 백씨(隋城白氏 수성은 수원(水原))에게 장가들었으니, 동지중추부사 사굉(師宏)의 따님이요, () 호조 판서 행 평안 병사(行平安兵使)로 시호가 충장공(忠莊公)인 시구(時耈)의 증손녀이다. 1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광규요, 두 딸은 전주(全州) 유선(柳烍)과 광산(光山) 김사황(金思黃)에게 시집갔다. 광규의 자녀는 아직 어리다.

, 무관은 품행이 독실하여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고,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서 만물을 정밀히 연구하기에 넉넉하였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는 내면의 수양에 독실하여 외부의 유혹을 물리쳐 끊었고, 본체(本體 마음의 본바탕)가 맑고 투철하며 그 용( 마음의 활동)은 섬세하고 빈틈이 없었다.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증자(曾子)의 삼성(三省)은 모두 그가 부지런히 힘을 쏟던 것이다.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에서 널리 취재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독창적인 경지를 홀로 추구하고 진부한 것은 따라 배우지 않았다. 기이하고 날카로우면서도 진실되고 절실함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으며, 순박하고 성실하면서도 졸렬하거나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았으니, 수백 수천 년이 지난 뒤라도 한번 읽어 보기만 하면 완연히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고금의 일에 해박하고 명물(名物)을 명백히 분석하기로 말하자면, 전무후무(前無後無)하다 해도 좋을 것이다.

무관은 가난한 선비 시절부터 민생이 곤궁하고 인재가 묻히고 마는 데 깊은 관심을 쏟아서, 개연(慨然)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뜻을 두었다. 그의 논설과 기록은 법령과 제도에 특히 치중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다. 그런즉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뜻을 잠깐 사이도 잊은 적이 없었으니, 진실로 그를 기용하여 능력을 시험해 보기로 한다면, 장차 어디건 안 될 곳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도하게 유행하는 풍속을 싫어하고 마음의 본바탕이 자유롭고 트인 것을 좋아하여, 뜻을 굳건히 지키고 운명을 믿어 담담히 욕심이 없으며, 쓸쓸한 오두막집에 살면서 빈천을 감수하였다. 권세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아, 지위 높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는 내실을 갖추었고,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지녀, 하마터면 불우한 채 늙어 죽어 그대로 묻힌 채 이름이 후세에 일컬어지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우리 성상께서 문치(文治)를 숭상하는 정치를 천명하고 인재 뽑는 길을 넓히사, 무관이 궁벽한 여항에 사는 한낱 가난한 선비인데도 날마다 임금을 가까이 모시게 되니, 성상은 이미 그가 오래 쌓아온 학식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는 구중궁궐에 달려나가 문헌의 편찬 사업에 이바지하였으니, 세상이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성상이 유독 아셨고,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기지 못한 것을 성상이 유독 기특하게 여기신 것이었다. 그의 처지는 한낱 소원하고 지위 낮은 관원이었으나 그의 소임은 규벽(奎璧)을 맡는 것이었고, 그의 관직은 한낱 유품(流品 잡다한 하급 관직)이로되 그의 일은 성상의 고문(顧問)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전후로 부지런히 장려하시고 후하게 하사하신 은혜는 지위 높은 신하도 얻기 힘든 바였으니, 무관이 성상으로부터 입은 지우(知遇)도 성대하다 하겠다.

벼슬길이 순탄치 못해 관직이 한낱 현감에 그치고, 타고난 수명이 짧아 역량을 당세에 펴지 못하고 뜻을 품은 채 죽은 점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운명이지 때를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성상은 은혜로운 말씀을 내려 그의 재주와 학식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내탕전(內帑錢)으로 유고를 간행하여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하고, 그의 검서 관직을 그의 아들이 물려받게 하셨으니,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은총을 입은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옛사람을 낱낱이 헤아려 보더라도 임금에게 이와 같은 은총을 입을 수 있었던 자가 몇 사람이나 되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무관은 유감이 없을 것이다.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이 바야흐로 임금의 하교를 받들어 그의 유집을 편찬하면서, 내가 무관의 평생 사적을 잘 안다고 하여 행장을 짓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C-001]형암(炯菴) 행장(行狀) : 이덕무의 삼년상이 끝난 정조 19(1795) 4, 왕은 그의 유고(遺稿)를 정선(精選)하여 활자로 인쇄하고 그 서문과 발문 및 묘지(墓誌)와 묘갈(墓碣) 등은 글 짓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나누어 짓도록 명하면서, 행장은 연암이 지어 바치도록 특별히 명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해 12월부터 간본(刊本) 아정유고(雅亭遺稿)의 인쇄를 시작했으나, 서문과 묘문(墓文) 및 행장이 지어지기를 기다려 정조 21(1797) 2월에야 인쇄를 끝냈다고 한다. 過庭錄 卷2》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연암이 지은 행장은 간본 아정유고에 수록된 것과 연암집에 수록된 것이 내용상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연암집에 수록된 행장이 연암의 초고에 더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원문의 炯菴 李懋官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1]그로부터 10세를 내려와 :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적성 현감 부군 연보(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에는 이덕무가 무림군(茂林君) 10세손이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D-002]명물도수(名物度數) : 명물은 각종 사물의 명칭과 특징을 가리키고, 도수는 계산을 통해 얻은 각종 수치를 말한다.

[D-003]금석비판(金石碑板) : 금석은 글자가 새겨진 동기(銅器)와 비석을 말하고, 비판은 비석의 탁본인 비첩(碑帖)을 가리킨다. 역사학과 문자학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D-004]마침내 …… 못했어도 : 시관(試官)에게 합격자로 뽑히지 못했음을 뜻한다. 이덕무는 33세 때인 1773(영조 49)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급제하고 그 이듬해 증광(增廣) 초시(初試)에 합격했다. 1779(정조 3)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에 임명된 뒤로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D-005]영릉(英陵)의 옛일 : 세종 2(1420)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한 사실을 말한다.

[D-006]임금께서 …… 내리셨다 : ‘규장각 팔경을 짓고는 명의록(明義錄) 1질을 특별히 하사받았고, ‘영주에 오르다를 짓고는 백면지(白綿紙) 다섯 묶음을 하사받았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이 두 시는 모두 청장관전서 20 간본 아정유고 12에 수록되어 있다.

[D-007]사근역(沙斤驛) : 경상도 함양(咸陽)에 있던 역참(驛站)이다.

[D-008]공채(公債) : 백성들이 나라에 진 빚을 말하는데, 대개 환곡을 갚지 못한 경우를 말한다.

[D-009]적성 현감(積城縣監) : 적성은 경기도에 있던 현으로, 지금의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이다.

[D-010]우취옹정(又醉翁亭) : () 나라 때 구양수(歐陽脩)가 저주 지사(滁州知事)로 재임할 적에 취옹정(醉翁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백성들과 함께 즐겁게 잔치를 벌인 일을 기록한 취옹정기(醉翁亭記)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D-011]영처고(嬰處稿) …… 것이다 : 연암이 영처고에 대해 지은 서문이 연암집 7에 수록되어 있다. 이덕무가 지은 자서(自序)는 그의 나이 20세 때인 1760년에 지은 것이다.

[D-012]청장관고(靑莊館稿) …… 있어서였다 : 청장관고 청장관전서와는 다르다. 간본 아정유고에 실린 행장에 의하면, 이덕무의 첫 번째 문집其初集의 이름이 영처고이고, 두 번째 문집其二集의 이름이 청장관고라고 하였다. 이는 곧 청장관전서 중의 필사본 아정유고를 가리킨다. 청장은 일명 신천옹(信天翁 : 앨버트로스)이라고 하는 해조(海鳥)로서, 해오라기鵁鶄와는 별종이다. 연암집 1 담연정기(澹然亭記) 참조. 연암이 지은 행장은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의거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는 이 대목과 같이 오류를 포함한 채 그대로 전재(轉載)하기도 했다.

[D-013]송사보전(宋史補傳) …… 것이다 : 송사보전 청장관전서  편서잡고(編書雜稿)에 수록되어 있다.

[D-014]자획(字畫) …… 쓰고 : 상형(象形) · 지사(指事) · 회의(會意) · 형성(形聲) · 전주(轉注) · 가차(假借) 등 한자(漢字)의 여섯 가지 조자법(造字法)에 따라서 속자(俗字)나 위자(僞字)를 배제하고 정자(正字)만을 썼다는 뜻인 듯하다. 이광규가 지은 선고 부군 유사(先考府君遺事)’에 이덕무가 육서에 능통하여 아무리 바쁘더라도 속자나 위자를 쓰지 않았다고 하며,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자획이 비록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수 없을지라도, 육서를 좋아한다고 자처하면서 만약 체세(體勢)만 숭상하고 그 자의(字義)를 모른다면 어찌 되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D-015]협운(叶韻)과 통운(通韻) : 당시의 음()으로 고대의 운문을 읽을 경우 운이 맞지 않는 글자의 음을 운에 맞도록 임시로 고쳐 읽는 것을 협운이라 한다. 주자(朱子) 시경이나 초사(楚辭)를 해석할 때 협운을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통운은 한시를 지을 때 서로 통용될 수 있는 운부(韻部)를 말한다. 예컨대 평성(平聲) 동운(東韻)과 동운(冬韻)에 속하는 글자들은 서로 운자(韻字)로 통용될 수 있다.

[D-016]담제(禫祭) : 삼년상(25개월)을 마친 그 다음다음 달 하순에 탈상(脫喪)하면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D-017]초계문신(抄啓文臣) : 37세 이하의 당하관(堂下官) 중에서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켜 40세 이전까지 학문과 문장 연마에 전념하도록 한 문신을 말한다.

[D-018]이날 …… 정중하였다 : 정조 19(1795) 4 3, 왕은 이광규에게 부친 이덕무의 유고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를 묻고, 유고를 간행할 비용이 곧 조처될 것인데 집이 가난하다 하니 유고를 간행하고 남는 것은 생활비로 쓰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유고를 정선(精選)하는 일은 각신 윤행임(尹行恁)에게 맡겼노라고 하였다. 靑莊館全書 卷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D-019]품행이 독실하여 : 원문은 行義敦篤인데, ‘ 자가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20]안자(顔子) …… 삼성(三省) :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인()을 실천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는 ()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 말라는 ()’ 자가 네 번 나왔으므로 이를 사물(四勿)이라 한다. 論語 顔淵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마음을 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친구들과의 교우 관계에서 성실하지 못한 점은 없었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복습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論語 學而

[D-021]권세 …… 않아 : 원문에는 足不到 다음에 두 글자가 결락되었는데, ‘권문(權門)’과 같은 단어가 아닌가 한다. 문맥에 비추어 번역하였다.

[D-022]남들이 …… 않으려는 : 논어 학이(學而) 남들이 몰라주어도 불평하지 않으면 어찌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주역 대과(大過) 군자는 대과(大過)의 괘를 얻으면 혼자 실행하게 되어도 두려워하지 않고獨立無懼 숨어 살게 되어도 괴로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D-023]규벽(奎璧) : 임금의 친필과 인장(印章)을 가리킨다. 규장각은 임금의 친필과 인장을 관리하는 곳으로 세워졌다.

[D-024]후하게 하사하신 은혜 : 이덕무가 벼슬한 지 15년 동안 왕으로부터 책 · 옷감 · 음식 · 채소 · 과일 · 생선 · 약 등 모두 139종의 물품을 총 520여 번이나 하사받았다고 한다. 刊本雅亭遺稿 卷8 先考府君遺事

[D-025]순탄치 못해 : 원문은 崚嶒인데, ‘ 자가 ‘’ 자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뜻은 같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발문

 

 

위학지방도는 상하 2권이고, 그림이 모두 몇 편, 그림에 대한 설( 설명)과 지( 기록)가 모두 몇 편인데, 호가 경암(敬菴)인 조군 연귀(趙君衍龜)가 수집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다. , 이야말로 명계(冥界)의 지남거(指南車)요 미계(迷界)의 보벌(寶筏)인 셈이니, 어찌 여러 가지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규사(圭駟)의 탄식을 자아낼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사양하다 못하여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도()란 길과 같으니, 청컨대 길을 들어 비유해 보겠다. 동서남북 각처로 가는 나그네는 반드시 먼저 목적지까지 노정이 몇 리나 되고, 필요한 양식이 얼마나 되며, 거쳐가는 정자 · 나루 · 역참 · 봉후(烽堠)의 거리와 차례를 자세히 물어 눈으로 보듯 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다리로 실지(實地)를 밟고 평소의 발걸음으로 평탄한 길을 가는 법이다. 먼저 분명히 알고 있었으므로, 바르지 못한 샛길로 달려가거나 엉뚱한 갈림길에서 방황하게 되지 않으며, 또 지름길로 가다가 가시덤불을 만날 위험이나 중도에 포기해 버릴 걱정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지()와 행()이 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행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헤엄쳐서 물속의 달을 건지거나 북을 치면서 자식을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끝내는 완적(阮籍)처럼 통곡하고 양주(楊朱)처럼 울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비유하면 서울 방내(坊內)의 자제들이 힘써 농사짓는 것이 귀하다는 말만 듣고서, 역서(曆書)가 반포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한겨울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얼굴에 땀이 나도록 한다면, ()은 비록 힘썼다고 하겠지만 지()에 있어서는 어떻다 하겠는가? 이는 행을 먼저하고 지를 뒤로하여 끝내 수확을 얻지 못한 것이니, 바로 조군이 두려워하는 점이다.

만약 배우는 사람들이 이 그림들에 의거하여 방법을 삼는다면, 밤에 등불이 걸린 것과 같고 소경에게 지팡이가 있는 것과 같으며, 진도(陣圖)에 의거하여 진을 치는 것과 같고 처방에 따라 약을 쓰는 것과 같아, 한편으로는 농가(農家)의 역서(曆書)가 되고 한편으로는 나그네의 정후(亭堠 이정표)가 될 것이다. 모든 군자들이 어찌 이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C-001]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 : 조연귀(趙衍龜 : 1726~?)가 편찬한 책이다. 조연귀는 본관이 배천(白川)이고, 자는 경구(景九)이다. 우암 송시열계의 저명한 성리학자인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평생 은거하여 저술에 힘썼다. 그의 저술로 대학 중용의 내용을 알기 쉽게 대학도(大學圖) 중용도(中庸圖)로 도식화(圖式化)하고 해설을 덧붙인 학용도설(學庸圖說)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위학지방도 역시 성리학을 공부하는 방법을 여러 편의 그림들과 그에 대한 해설로써 알기 쉽게 소개한 계몽적 저술로 짐작된다. 이덕무가 지은 숙강규약도발(塾講規約圖跋) 금년 겨울에 조경암(趙敬菴) 위학지방도설(爲學之方圖說)을 편찬했다.”고 하면서, 그의 요청으로 청초(淸初)의 성리학자인 시황(施璜)이 지은 숙강규약(塾講規約)의 내용을 9편의 그림으로 나타내고 그림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숙강규약도를 지어 그 책에 실었다고 했으며, 똑같은 사실이 이덕무의 연보(年譜) 중 신묘년(1771) 11 8일 조에 기록되어 있다. 靑莊館全書 卷19 雅亭遺稿11 5 趙敬菴, 70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上》 《刊本雅亭遺稿 卷3 塾講規約圖跋 또한 이서구(李書九)의 성인가문유도지(聖人家門喩圖識)에는 계사년(1773, 영조 49) 겨울에 조연귀의 요청으로, 청초의 문인인 위상추(魏象樞)의 성인가문유(聖人家門喩)를 그림으로 그리고 그 사실을 적어 위학지방도에 보태었다고 한다. 自問是何人言

[D-001]명계(冥界) …… 보벌(寶筏) : 원문의 명도(冥道)’는 곧 명계(冥界)로 염라대왕이 있다는 지옥의 저승 세계를 말한다. 지남거(指南車)는 옛날에 황제(黃帝)가 치우(蚩尤)와 싸울 때 치우가 피운 짙은 안개로 병사들이 방향을 잃자 황제가 방향을 지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수레이다. 원문의 미진(迷津)’은 곧 미계(迷界), 번뇌로 미혹에 빠진 중생들의 세계를 가리킨다. 보벌은 보석으로 만든 뗏목이란 뜻으로, 미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게 해 주는 불법(佛法)을 비유한 것이다.

[D-002]규사(圭駟)의 탄식 : 쓸데없는 말을 한 데 대한 후회를 뜻한다. 시경 대아(大雅) () 백규의 흠은 오히려 갈아 없앨 수 있거니와, 이 말의 결함은 다스릴 수가 없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 하였고, 논어 안연(顔淵) 말이 혀에서 나오면 사마(駟馬)도 따라잡을 수 없다.駟不及舌 하였다.

[D-003]평소의 …… 법이다 : 주역 이괘(履卦) 초구(初九)의 효사(爻辭) 평소의 발걸음으로 가면 허물이 없다.素履往无咎고 하였고, 구이(九二)의 효사에 밟아가는 길이 평탄하나, 욕심 없고 차분한 사람이라야 정조를 지키고 길하다.履道坦坦 幽人貞吉고 하였다.

[D-004]북을 ……  : 장자 천운(天運)에서 노자(老子)가 공자에게 인의 도덕(仁義道德)을 외쳐 오히려 인심을 크게 혼란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사람들이 본래의 순박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지 않고 어찌하여 인의 도덕을 표방하기에 급급하기를 마치 큰 북을 치면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듯이 하는가?”라고 하였다.

[D-005]완적(阮籍)처럼 ……  : 중국 진()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완적은 때때로 마음껏 혼자 수레를 타고 달리다가 길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또 전국 시대 때 양주(楊朱), 이웃 사람이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므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사람은 갈림길이 갈수록 더욱 갈라져서 찾을 수 없었다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양주는 침통해져서 한참 동안 말문을 열지 않고 며칠간 웃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길을 잃고 곤경에 빠지게 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D-006]역서(曆書) …… 않고 : 원문은 不待人時之敬授인데,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천문역법(天文曆法)을 맡은 관원들에게, “해와 달과 별들을 관측하고 기록하여 인민들에게 절기(節氣)를 삼가 가르쳐 주라.敬授人時고 명하였다고 한다. 예전에 농사를 지을 때에는 농사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24절기를 표시한 역서(曆書)를 반드시 살펴보았다.

[D-007]수확 : 원문은 인데, ‘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회성원집(繪聲園集) 발문

 

 

옛날에 붕우(朋友)를 말하는 사람들은 붕우를  2 의 나라 일컫기도 했고, ‘주선인(周旋人)’이라 일컫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자를 만드는 자가 날개 우() 자를 빌려 벗 붕() 자를 만들었고, 손 수() 자와 또 우() 자를 합쳐서 벗 우() 자를 만들었으니, 붕우란 마치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에게 두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도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다.尙友千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너무도 답답한 말이다. 천고의 옛사람은 이미 휘날리는 먼지와 싸늘한 바람으로 변해 버렸으니, 그 누가 장차  2 의 나가 될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인이 되겠는가. 양자운(揚子雲)은 당세의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탄하면서 천년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으며,

 

내가 지은 태현경(太玄經)을 내가 읽으면서, 눈으로 그 책을 보면 눈이 자운(子雲)이 되고, 귀로 들으면 귀가 자운이 되고, 손으로 춤추고 발로 구르면 각각 하나의 자운이 되는데, 어찌 굳이 천년의 먼 세월을 기다릴 게 있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런 말에 또다시 답답해져서, 곧바로 미칠 것만 같아 이렇게 말하였다.

 

눈도 때로는 못 볼 수가 있고 귀도 때로는 못 들을 수가 있을진대, 이른바 춤추고 발 구르는 자운(子雲)을 장차 누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누구로 하여금 보게 한단 말인가. , 귀와 눈과 손과 발은 나면서부터 한몸에 함께 붙어 있으니 나에게는 이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은데, 누가 답답하게시리 천고의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어리석게시리 천세의 뒤 시대를 굼뜨게 기다릴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벗이란 반드시 지금 이 세상에서 구해야 할 것이 분명하다.

, 나는 회성원집을 읽고서 나도 몰래 속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눈물을 마구 흘리면서 속으로 이렇게 자문자답했다.

 

나는 봉규() 씨와 더불어 이미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났으니, 이른바 나이도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 하겠는데, 어찌 서로 벗이 될 수 없단 말인가. 기필코 장차 서로 벗을 삼을진대 어찌 서로 만나볼 수 없단 말인가. 두 지역의 거리가 만리(萬里)인즉, 지역이 멀어서 그런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아아, 이미 서로 만나 볼 수 없는 처지라면 그래도 벗이라 이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봉규 씨의 키가 몇 자인지, 수염과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용모도 알 수 없다면 한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는 장차 어찌해야 할 것인가? 나는 장차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식으로 벗을 삼을 것인가?”

봉규의 시는 성대하도다! 장편의 시는 소호(韶頀) 풍악이 일어나듯 하고, 짧은 시들은 옥이 부딪치듯 맑게 울린다. 시가 차분하고 기품이 있으며 따뜻하고 우아함은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깊이 있고 쓸쓸함은 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러니 나는 또 이 시를 지은 이가 자운(子雲)인지, 읽는 이가 자운인지 모르겠다.

, 언어는 비록 다르나 문자는 똑같으니, 그가 시에서 즐거워하고 웃고 슬퍼하고 우는 것은 통역을 안 해도 바로 통한다. 왜냐하면 감정을 겉으로 꾸미지 않고, 소리가 충심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장차 봉규 씨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후세의 자운을 기다리는 이를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의 옛사람을 벗 삼는 이를 위문할 것이다.

 

 

[C-001]회성원집(繪聲園集) : 청 나라 산서인(山西人) 곽집환(郭執桓 : 1746~1775)의 문집이다. 곽집환은 자가 봉규() · 근정(勤庭)이며, 호가 반오(半迂) · 동산(東山) · 회성원(繪聲園)으로, 시를 잘 지었으며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곽집환은, 홍대용이 1766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분을 맺게 된 그의 친구 등사민(鄧師閔)을 통해, 자신의 시고(詩稿) 회성원집에 대해 조선 명사들의 서문을 요청하였다. 이에 홍대용과 아울러 연암이 회성원집의 발문을 짓게 되었다. 熱河日記 避暑錄》 《湛軒燕記 鄧汶軒》 《湛軒書 內集 卷3 繪聲園詩跋

[D-001]붕우를 …… 했다 :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交友論)의 첫머리에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곧 나의 반쪽이요 바로 제 2 의 나이다.吾友非他 卽我之半 乃第二我也라고 하였다. 주선인(周旋人)은 보통 시중드는 사람이나 문객(門客)을 뜻하는데, () 나라 이전에는 한때 붕우의 뜻으로 쓰이기도 했다. 晉書 卷99 陶潛傳》 《宋書 卷89 袁粲傳

[D-002]날개 우() …… 것이다 : 마테오 리치의 설을 취한 것이다. 교우론의 원주(原註) () 자는 전서(篆書)로는 로 쓰니 이는 곧 두 손으로서, 꼭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자는 전서로는 로 쓰니 이는 곧 양 날개로서, 새가 이를 갖추어야 바야흐로 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자에 대해서는 붕() 자의 가차자(假借字)라는 설, ()의 옛글자라는 설, 두 개의 월() , 또는 육() , 또는 패() 자를 합친 것이라는 설 등 정설이 없다. () 자는 손을 뜻하는 우()  2개가 합쳐진 회의자(會意字)이다.

[D-003]싸늘한 바람 : 대본은 영풍(泠風)’인데 이는 표풍(飄風)의 반대말로, 부드러운 미풍(微風)을 뜻한다. 莊子 齊物論 그러나 문맥과 잘 어울리지 않으므로,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 등에 의거하여 냉풍(冷風)’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D-004]양자운(揚子雲) …… 했는데 : 자운(子雲)은 양웅(揚雄)의 자이다. 자신이 저술한 태현경(太玄經)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양웅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나와 반드시 이 저술을 애호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서 87 양웅전(揚雄傳)에는 보이지 않으며, 한유(韓愈)의 여풍숙논문서(與馮宿論文書)에만 나온다. 이어서 한유는, “양웅이 죽은 지 거의 천년이 되었으나 끝내 아직도 양웅이 나오지 않았으니 한탄스럽다.”고 했다.

[D-005]조보여(趙寶汝) : 조귀명(趙龜命 : 1694~1737)으로, 보여(寶汝)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호는 동계(東谿)이다. 재종형(再從兄)인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과 절친하였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에 제수되고, 공조 좌랑(工曹佐郞)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말년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시직(侍直) · 익위(翊衛) 등을 지냈다. 황경원(黃景源)과 함께 당대의 문장가로손꼽힐 만큼 문장에 뛰어났다. 문집으로 동계집(東谿集)이 있다.

[D-006]내가 …… 있겠는가 : 조귀명의 조성언시집서(趙聖言詩集敍) 나로 말하자면 세상에 나를 알아줄 자운이 없는 사람이다. 자운이 없으니 자신의 글을 스스로 보면서 나의 눈으로 하나의 자운을 삼고, 스스로 읊으면서 나의 귀로 하나의 자운을 삼고, 스스로 춤추고 발을 구르면서 나의 손과 발로 각각 하나의 자운을 삼는다.余則無子雲於世者也 無已則自覽以吾目爲一子雲 自諷而以吾耳爲一子雲 自舞自蹈而以吾手足各爲一子雲고 하였다. 東谿集 卷7

[D-007]봉규() : 청장관전서에는 ‘’ 자가  자로 되어 있는데, 같은 글자이다.

[D-008]나이도 …… 비슷하다 : 한유의 사설(師說)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글에서 한유는 당시 사대부들이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는 이유로 비웃는 세태를 개탄하였다.

[D-009]소호(韶頀) : () 나라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고, ()는 순() 임금 때의 궁중음악, ()는 탕 임금 때의 궁중음악이라는 설도 있다. 옛날 태평성대의 음악을 가리킨다.

[D-010]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 : 낙수는 지금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하(洛河)를 말한다. 삼국 시대 위() 나라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에서 하수(河水)의 여신(女神)을 묘사하기를 경쾌한 모습이 마치 놀라서 날아오르는 기러기 같다.翩若驚鴻고 하였다.

[D-011]동정호(洞庭湖)의 낙엽 지는 소리 : 남북조 시대 북주(北周)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 낙엽 지는 동정호를 떠난다.辭洞庭兮落木고 하였다. 이는 굴원(屈原)의 구가(九歌)  상부인(湘夫人)’ 동정호에 파도 일고 낙엽이 지네.洞庭波兮木葉下라고 한 구절에 전고(典故)를 둔 것이다.

[D-012]문자는 똑같으니 : 원문은 書軌攸同이다. 중용장구  28 장에 지금 천하에 수레는 궤도가 똑같고 서적은 문자가 똑같다.今天下車同軌 書同文고 하였다. 그러므로 원래는 천하가 통일되었다는 뜻이나, 여기서는 중국인과 조선인이 비록 언어는 다르나 같은 문자를 쓴다는 점에 치중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D-013]그가 …… 것은 : 원문은 惟其歡笑悲啼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필세설(筆洗說)

 

 

오래된 그릇을 팔려고 하나 3년 동안이나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릇의 재질은 투박스러운 돌이었다. 술잔이라고 보기에는 겉이 틀어지고 안으로 말려들었으며, 기름때가 끼어 광택을 가리고 있었다. 온 장안을 다 돌아다녀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다시 부귀한 집안을 다 찾아갔지만 값이 더욱 떨어져 수백에 이르고 말았다.

하루는 누군가가 이것을 가지고서 서군 여오(徐君汝五)에게 보였다. 그러자 여오가 말하기를,

 

이것은 필세(筆洗 붓 씻는 그릇)이다. 이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는 것인데, 옥에 버금가는 것으로 옥돌과도 같다.”

하며,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8000냥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때를 긁어내니, 예전에 투박스럽게 보였던 것은 바로 물결 모양의 무늬가 있고 쑥잎처럼 새파란 돌이었다. 비틀어지고 끝이 말려든 모양은 마치 말라서 그 잎이 또르르 말린 가을의 연꽃과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장안의 이름난 그릇이 되었다.

여오는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치고 하나의 그릇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꼭 맞는 곳에 사용할 따름이다. 붓은 먹을 머금은 채 딴딴히 굳어지면 모지라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먹을 씻어서 부드럽게 해 둔다. 그러므로 이 그릇이 필세가 된 것이다.”

하였다.

무릇 서화나 골동품에는 수장가가 있고 감상가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이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은 많아도 단지 제 귀만을 믿는 자요,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해도 제 눈만은 배신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러 수장가가 있기는 하지만, 서적은 건양(建陽)의 방각(坊刻)이고 서화는 금창(金閶 소주(蘇州))의 안본(贋本 위조품)뿐이다. 율피색(栗皮色) 화로를 곰팡이가 피었다고 여겨 긁어내려 하고, 장경지(藏經紙)를 더럽혀졌다고 여겨 씻어서 깨끗이 만들려고 한다. 조잡한 물건을 만나면 높은 값을 쳐주고, 진귀한 물건은 버리고 간직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픈 일일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들은 당 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들어갔으며, 고려의 선비들은 원() 나라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했으므로 안목이 트이고 흉금을 넓힐 수 있었으니, 그들은 감상학(鑑賞學)에 있어서도 아마 그 시대에 출중했을 터이다. 우리 왕조 이래로 3, 4백 년 동안에 풍속이 갈수록 촌스러워졌으니, 비록 해마다 북경을 내왕하였으나 부패한 약재나 저질의 비단 따위나 사올 뿐이었다. 우하(虞夏) · () · ()의 옛날 그릇이나 종요(鍾繇) · 왕희지(王羲之) · 고개지(顧愷之) · 오도자(吳道子)의 친필이 어찌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으랴.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를 일컫는다. 그러나 재사(才思 재기)가 없으니 완미(完美)하다고는 못 할 것이다. 대개 김씨는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여오(汝五)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데다가, 재사까지 겸비하여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문장을 잘 짓고 해서(楷書)로 소자(小字)를 잘 쓰며, 아울러 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에도 능숙하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봄가을로 틈나는 날에는 정원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차를 음미하였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여 수장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한탄했고, 또 시속의 무리들이 그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할까 걱정하곤 하였다. 그 때문에 답답해하면서 내게 말하기를,

 

나더러 좋아하는 물건에 팔려 큰 뜻을 상실했다玩物喪志고 나무라는 자는 어찌 진정 나를 아는 자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것은 바로 시경(詩經)의 가르침과 같네.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고서 어찌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을 자가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위두(威斗)를 보고서 어찌 반성하여 경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를 위로하기를,

 

감상이란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일세. 옛날 허소(許劭)는 인품이 좋고 나쁜 것을 탁한 경수(涇水)와 맑은 위수(渭水)처럼 분명히 판별했으나 당세에 허소를 알아주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네.”

하였다.

지금 여오는 감상에 뛰어나서, 뭇사람들이 버려둔 가운데서 이 그릇을 능히 알아보았다. 아아, 그러나 여오를 알아주는 자는 그 누구이랴?

 

 

필세를 빌려서 자신의 문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D-001]수백 : 화폐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의 물가로 미루어 보면 수백 문(), 즉 너덧 냥이 아닌가 한다. 뒤에 나오는 ‘8000’ 역시 8000,  80냥이 아닌가 한다.

[D-002]서군 여오(徐君汝五) : 서상수(徐常修 : 1735~1793), 여오는 그의 자의 하나이다. 호는 관재(觀齋) · 관헌(觀軒) 등이다. 서얼 출신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그쳤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백탑(白塔) 서쪽의 관재(觀齋)와 도봉산 서쪽의 별장인 동장(東庄)을 소유하였으며, 이덕무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D-003]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 : 복주는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에 속한 부(), 그 동북쪽에 있는 수산은 아름다운 옥돌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수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오화석갱이 있는데, 돌이 다섯 가지 색을 띠어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D-004]값의 …… 아니하고 : 원문은 不問値高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05]건양(建陽)의 방각(坊刻) : 방각은 방본(坊本)과 같은 말로, 민간의 서점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인쇄한 조잡한 서적을 말한다. 송 나라 때 복건성 건양현에서 인쇄한 방각본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D-006]율피색(栗皮色) …… 한다 : () 나라 선덕(宣德) 연간에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유명한 향로인 선덕로(宣德爐)의 빛깔은 밤색栗色, 가지 껍질색茄皮色, 팥배나무색棠梨色, 갈색(褐色), 장경지색(藏經紙色)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데, 그중 장경지색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장경지(藏經紙)는 밀납을 먹여 광택이 나는 짙은 황색(黃色)의 견지(繭紙)인데, 장경(藏經)이 많기로 유명한 절강성(浙江省) 금속사(金粟寺)의 장경이 이 종이에 쓰여졌기 때문에 장경지라 부른다.

[D-007]제과(制科) : 제거(制擧)라고도 하며, 황제가 임시로 조령(詔令)을 내려 실시하는 부정기적인 과거(科擧)를 말한다. 고려 말에 최해(崔瀣) · 안축(安軸) · 이곡(李穀) · 이색(李穡) 등이 제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D-008]우하(虞夏) : () 임금의 치세와 하() 나라 왕조를 함께 묶어서 부른 말이다.

[D-009]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김광수(金光遂 : 1696~?), 상고당은 그의 호이다. 조선후기의 화가이자 서화고동(書畫古董) 감식가 및 수장가이다. 그의 자는 성중(成仲)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이다. 진사 급제 후 벼슬은 인제 군수를 지냈다. 연암집 7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D-010]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 : 소미는 북송 때의 유명한 서화가 미불(米芾)의 아들로서 그 역시 뛰어난 서화가였던 미우인(米友仁 : 1086~1165)을 가리킨다. 발묵법은 선을 사용하지 않고 먹을 뿌리듯이 하여 번져나간 먹 자국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미불과 미우인 부자는 화면에 이른바 미점(米點)이라는 횡으로 길고 큰 먹점을 겹쳐 찍는 기법으로 안개 짙은 산수를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을 창시했는데, 이후 문인 화가들이 수묵 산수화를 그릴 때 이 기법을 즐겨 따랐다.

[D-011]시경(詩經)의 가르침 : 시경을 배우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주자(朱子) 시집전(詩集傳)의 서문에서, 시경의 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인데 감정에는 사()도 있고 정()도 있어 시에도 좋은 시가 있고 나쁜 시가 있으나, 좋은 시를 읽고서 선을 행하고 나쁜 시를 읽고서 악을 경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D-012]곡부(曲阜)의 신발 :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에는 후손들이 간직해 온 공자의 신발 등 유품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 ()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D-013]점대(漸臺)의 위두(威斗) : 점대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는 대()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건장궁(建章宮)을 짓고는 태액지(太液池) 안에 점대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0여 장()이었다. 漢書 卷25 郊祀志下 왕망(王莽)이 유현(劉玄)의 군사에게 쫓겨서 점대에 이르러 살해되었는데, 왕망은 쫓기는 와중에도 부명(符命)과 위두(威斗)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위두는 왕망이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만든 기물(器物), () 5()으로 만들었고 길이는 2 5촌이었으며, 모양이 북두칠성과 유사했다고 한다. 漢書 卷99 王莽傳

[D-014]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 : 구품중정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관리 선발제도로서, 각 고을에 중정관(中正官)을 두어 그 고을 인사들을 재능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평가해서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여기서는 인재를 엄격히 품평하듯이 골동품과 서화를 품평하는 것도 전문 분야라는 뜻으로 썼다.

[D-015]허소(許劭) …… 판별했으나 : 허소는 후한 때 사람으로,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특히 향리(鄕里)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해서 달마다 사람들을 품평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월단평(月旦評)이라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경수(涇水)는 위수(渭水)의 지류로 모두 섬서성에 있다. 경수가 맑고 위수가 탁하다는 설도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서얼 소통(疏通)을 청하는 의소(擬疏)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르지 않사옵니다. 그러므로 전얼(顚蘖)과 변지(騈枝)도 고루고루 비와 이슬에 젖고, 썩은 그루터기 나무나 더러운 두엄에서도 영지(靈芝)가 많이 나며, 성인(聖人)이 태평의 치세로 이끄실 적에는 귀하고 천한 선비가 따로 없었습니다. 시경

 

문왕(文王)이 장수를 누리셨으니 어찌 인재를 육성하지 않았으리오.文王壽考 遐不作人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왕국이 안정되었으며, 크나큰 명성이 끊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아, 우리 왕조가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지 300여 년이 되었으니, 폐단이 큰 정책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이는 건국 초기에 간사한 신하들이 기회를 틈타 감정을 푼 것이 대번에 중대한 제한 규정으로 되어 버렸으며, 후대에 요직에 있던 인사들이 공론을 핑계 대어 주장함으로써 명성이 높아지자 오류를 답습하여 하나의 습속을 이루었고, 세대가 차츰차츰 멀어지면서 구습을 따르고 개혁을 하지 못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오로지 문벌만을 숭상하여 인재를 초야에 버려둔다는 탄식을 초래하였으며, 사가(私家)에서는 한갓 명분만을 엄히 하여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단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지족(支族 먼 조상 때 갈라진 일족)에게서 양자를 입양하니 대개 임금을 속이는 죄를 범하는 것이요, 모계를 더 중시하는 셈이니 도리어 본종(本宗)을 높이는 도리를 경시하는 것입니다.

아아, 적자와 서자 사이에 비록 차등이 있다 해도 나라의 체통에는 이로울 것이 없으며, 구분과 한계가 너무 각박하여 가족간에 애정이 적어지는 것입니다. 무릇 자기 집안의 서얼이야 비천하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온 세상에서 배척받을 이유는 없으며, 한 문중의 명분은 의당 엄히 해야겠지만 온 조정에서까지 논할 바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명분의 논의를 고수하다 보니 벼슬길을 막는 관례는 더욱 심해지고, 조종(祖宗)의 제도라 핑계 대다 보니 갑자기 혁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까지 안일하게 세월만 보내면서 개혁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옛날에도 상고할 데가 없고 예법에도 근거가 없는데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고질이요 깊은 폐단이 되고 있기에, 정치하는 올바른 방법을 깊이 아는 선정(先正 선대의 유현(儒賢))과 명신(名臣)들은 모두 이를 급선무로 여기고, 공정한 도리를 확대하여 반드시 벼슬길을 터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연(經筵)에서 아뢰고 차자(箚子)로써 논한 분들이 끊이지 않고 나왔던 것입니다.

역대 임금들께서는 공정한 원칙을 세워 통치의 법도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벼슬자리에는 어진 사람만 임명하고 직무를 나누어 맡기는 데는 능력만을 고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모두를 공정하게 대하였으니, 어찌 또 모계의 귀천(貴賤)을 가지고 차별을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조정에 임하여 널리 묻고, 그 처지를 애통해하며 불쌍히 여겨, 변통하여 벼슬길을 열어줄 방도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세족(世族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의 권세가 막중하고 언론을 아래에서 좌우하는 까닭에, 명예로운 벼슬과 화려한 경력을 본래부터 자기네가 차지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여러 갈래로 갈림길이 생기고 권한이 쪼개질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똑같은 세족의 자손이라도 정밀한 저울로 눈금을 재듯이 따지니 정주(政注)를 한 번 거치고 나면 수치와 분노가 마구 몰려들고 지탄과 알력이 벌떼처럼 일어나는데, 하물며 서얼은 명분이 굳어지고 행동에 구애를 받아 세상에서 천대받은 지 오래이니, 대등하게 인정해 주려 하지 않는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진실로 제 가문만을 오로지 위하고 사욕을 달성하려는 편파적인 의도이지, 공공을 위하는 통치의 보편적 도리는 결코 아닙니다. ()이 그 잘못됨을 남김없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무릇 서얼과 적자(嫡子)는 진실로 차등이 있지만, 그 가문을 따져 보면 그들 역시 선비 집안입니다. 저들이 진실로 국가에 대하여 무슨 잘못이 있다고, 벼슬길을 막고 폐기하여 저들로 하여금 벼슬아치의 대열에 끼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군자가 없으면 야인(野人)을 다스릴 수 없고, 야인이 없으면 군자를 먹여살릴 수 없다.”

하였으니, 대범 군자와 야인은 지위를 들어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덕(明德)을 지녔으면서도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천거하라고 한 것明明揚側陋은 요() 임금이 관리를 임용한 준칙이요, ‘어진 이를 기용하는 데 출신을 따지지 않은 것立賢無方은 탕() 임금이 정치적 안정을 구한 방도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 · () · () 삼대(三代)의 시대에도 이미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었지만, 인재를 천거할 때에는 본시 귀천의 차별을 두지 않았고 어떤 부류인지도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왕조의 이른바 서얼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은 혁혁한 문벌인데, 어찌 모계가 비천하다 하여 고귀한 본종(本宗)을 싸잡아 무시해 버릴 수 있겠습니까.

() 나라와 당() 나라 이래로 차츰 벌열을 숭상하였으나, 그런데도 강좌(江左)의 사대부들은 도간(陶侃)을 배척하지 않았고 왕씨(王氏)와 사씨(謝氏) 같은 명문 귀족들도 주의(周顗)를 동류로 끼워 주었으며, 소정(蘇頲)은 바로 소괴(蘇瓌)의 얼자(孼子)이지만 지위는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이소(李愬)는 바로 이성(李晟)의 얼자로되 벼슬이 태위(太尉)에 이르렀으며, 한기(韓琦)와 범중엄(范仲淹)은 송 나라의 어진 정승이 되었고, 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는 당세의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서얼이라 하여 벼슬길을 막지 않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진실로 남의 문벌을 따질 적에는 단지 그 부계만을 중시하고 그 모계는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모계를 중시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본종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계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부계가 몹시 변변찮을 경우, 현달한 문벌이라고 칭송이 자자할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려 시대로 말하더라도 정문배(鄭文培)는 예부 상서(禮部尙書)가 되었고, 이세황(李世璜)은 합문지후(閤門祗侯)가 되었고, 권중화(權仲和)는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도 도평의사(都評議使)가 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왕조의 법으로 따진다면 도간이나 주의 같은 어진 이도 장차 사대부에 끼지 못하고, 소정이나 이소 같은 인재로도 장차 장수와 정승이 될 수 없고,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 같은 사람들도 모두 장차 억눌리고 버림받아, 기껏해야 문관으로는 교서관(校書館), 음직(蔭職)으로는 전옥서(典獄署)에나 자리를 얻어, 지위는 유품(流品 잡다한 하급 관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녹봉은 승두(升斗 소량의 쌀)에 지나지 않을 터이니, 공훈과 업적, 지조와 절개가 장차 당세에 혁혁히 드러나고 먼 후세까지 아름다운 명성을 남길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옛날을 상고해도 그러한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서(經書)에 이르기를,

 

서자는 장자(長子)의 상() 3년의 복()을 입을 수 없다.”

하였고, 정현(鄭玄)의 주()에 이르기를,

 

서자란 아비의 뒤를 잇는 자의 동생이다. ()라 말한 것은 구별하여 거리를 두자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서자는 비록 적자와 어머니가 같더라도 끊은 듯이 구별하여 거리를 두는 것이 이와 같이 엄했는데, 천한 첩자(妾子)의 경우는 서자보다 더욱 신분이 낮으나 다시 서자와 구별함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란 차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통(宗統)은 근본을 둘로 나누지 아니하고 차등은 거듭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모에게 비자(婢子) 및 서자와 서손(庶孫)이 있어 이들을 몹시 사랑했다면, 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종신토록 이들을 공경하여 변함이 없어야 한다.”

하였고, 진호(陳澔)의 주에는,

 

비자(婢子)는 천한 자의 소생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부모가 사랑했던 이라면 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들여 중히 여기고, 감히 소홀히 하거나 도외시하지 못했던 것은 또한 근본을 중히 여기고 종통을 높이는 까닭이었습니다. 회전(會典)에 이르기를,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적자(嫡子)나 적손(嫡孫)이 없을 경우에는 서장자(庶長子)가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한다.”

하였으니, 서장자란 첩자(妾子)를 이른 것입니다.

무릇 예란 헷갈려서 의혹스러운 경우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칭을 바로잡고 신분을 정하는 것이니, 비록 어머니가 같은 적제(嫡弟)라도 오히려 구별하여 거리를 두었던 것입니다. 무릇 예란 남을 후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지(本支)를 중히 여기는 것이니, 천첩의 자식이라도 오히려 끌어안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회전에서 아비의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하는 데 적서(嫡庶)로써 구애를 삼지 않은 까닭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주관(周官 주례(周禮))은 주공(周公)이 정한 관직 제도를 기록한 책이며, 한서(漢書)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는 모든 관직을 구분해 놓은 것인데,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문구는 대충 보아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말씀드린, ‘예법과 형률을 살펴봐도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듣자온대 예로부터 전해지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은 데는 대개 유래가 있다고 합니다. 건국 초기의 죄상(罪相) 정도전(鄭道傳)은 서얼의 자손인데, 우대언(右代言) 서선(徐選)이 정도전이 총애하던 종에게 욕을 본 일이 있어 그 원수를 갚을 길만 생각하고 있다가, 정도전이 패망하게 되자 서선이 마침내 명분의 논의를 견강부회하여 죽은 뒤에나마 한 번 욕을 본 데 대한 감정풀이를 한 것이었으나, 제 말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법이 반드시 행해지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이때 정도전이 죄를 지어 막 처형당한 때다 보니, 그 말이 먹혀들기 쉬웠고 그 법이 성립되기 쉬웠던 것입니다. 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등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처음 만들면서 조문을 미처 다듬을 겨를이 없어, 서얼에 대한 과거 금지와 관직 진출 금지의 주장이 조문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하면서 유자광(柳子光)에 대한 사림파(士林派)의 원망이 잔뜩 쌓였는데, 분풀이할 곳이 없자 서얼의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가 더욱 엄중하고 심각해진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분풀이하게 만든 상황이 참으로 또한 슬프다 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자고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찌 유자광 같은 무리에게서만 나왔겠습니까. 불행히도 한 번 서얼 가운데서 나온 것인데, 유자광 하나로 인해 서얼의 벼슬길을 모조리 막아 버리고 말았으니, 만약에 불행하게도 양반 자손 중에서 난신적자가 뒤이어 나왔을 경우 또 장차 무슨 법으로 처리하시겠습니까?

아아, 유학과 문장으로 추앙받을 만하고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었는데도, 한 번 전락(轉落)하여 명분의 논의에 제한을 받더니, 거듭 전락하여 문벌 숭상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송익필(宋翼弼) · 이중호(李仲虎) · 김근공(金謹恭)의 도학(道學), 박지화(朴枝華) · 이대순(李大純) · 조신(曺伸)의 행의(行誼 덕행)와 어무적(魚無迹) · 어숙권(魚叔權) · 양사언(楊士彦) · 이달(李達) · 신희계(辛喜季) · 양대박(梁大樸) · 박호(朴淲)의 문장과, 유조인(柳祖認) · 최명룡(崔命龍) · 유시번(柳時蕃)의 재주는 위로 임금의 정책을 보필할 수 있고 아래로 한 시대의 표준이 될 만한데도 끝내 오두막집에서 늙어 죽었으며, 때로는 간혹 하찮은 녹을 받은 사람도 있었으나 보잘것없이 미관말직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비록 분수를 지키고 처지대로 살면서 액운을 편히 여기며 근심하지 않더라도, 성왕(聖王)이 관직을 마련하고 직책을 나누어 어진 이를 예우하고 능력 있는 이를 임용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다 하겠습니까?

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같은 경우는 충의로 떨치고 일어나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을 쳐부쉈으며, 권정길(權井吉)은 피를 토하며 군사들에게 훈시하고 남한산성에 지원하러 들어갔으니, 그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뜻은 오히려 뭇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가운데에서도 스스로 떨치고 일어섬이 저렇듯 우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시대가 평화롭고 세상이 편안해지고 나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잊어 그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이에 대하여 개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근래의 일로 보더라도, 홍림(洪霖)은 일개 잔약한 서얼로서 늘그막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막료(幕僚)가 되어 처량하게도 호구지책을 삼았는데, 갑자기 국난에 목숨을 바쳐 늠름히 열사(烈士)의 기풍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표창과 증직의 은전을 아끼지 않아 비록 비상한 관직을 추증(追贈)하기는 했으나, 그것보다는 그가 살아서 백부(百夫)의 장()이 되어 우뚝이 성에 임했더라면, 변방을 굳건히 하고 환란을 막아냄이 어찌 막부(幕府)에서 한 번 죽는 것뿐이었겠습니까.

아아, 벼슬길을 막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배척하고 관계를 끊어 버려, 본디 가지고 있는 윤상(倫常 오륜)을 스스로 일반인들 앞에 내세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은애(恩愛)는 부자 사이보다 중한 것이 없는데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의리는 군신 관계보다 큰 것이 없는데 임금에게 가까이 할 길이 없으며, 늙은이가 말석에 앉게 되어 학교에는 장유(長幼)의 차서가 없게 되고, 더불어 동류가 되기를 부끄러워하는 바람에 향당(鄕黨)에서는 붕우(朋友)의 도의가 없어졌습니다.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인저!”

하였으니, 아들은 아비를 아비로 대하고, 아비는 아들을 아들로 대하며, 형은 형 노릇 하고 아우는 아우 노릇 하는 것이 바로 명분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륜상의 존칭으로는 부형(父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지금의 서얼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우가 형을 오히려 감히 직접 가리켜 제대로 부르지 못하니, 저절로 종이 그 상전을 대하는 것과 같아졌습니다. 이른바 명분이란 적()과 서()를 이름인데, 어찌 서로 부르는 때에 아비라거나 형이라 하지 못하고, 자신을 낮추어 천한 노복들과 같이 해야만 명분을 엄히 하고 적서를 구분한다 하겠습니까.

지금의 서얼들은 낭관(郞官)도 오히려 하지 못하는 처지인데 시종신(侍從臣)을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충성을 바칠 마음을 지녔을지라도 임금을 보필하는 직책은 맡을 수 없고, 아무리 국가를 경영할 재주를 품었을지라도 포부를 펼 곳이 없습니다. 인의(引儀)로서 여창(臚唱)할 때에는 잠깐 조신(朝臣)의 대열에 순서대로 서지만 끝내 노복이나 다름 없으며, 해당 관서의 윤대(輪對)를 통해서 간혹 임금을 가까이에서 뵙기도 하지만 서먹서먹함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아가도 감히 대부(大夫)가 하는 일은 하지 못하고, 물러나면 차마 평민들의 생업에 종사할 수도 없으니, 이른바 나라의 고신(孤臣)이요 집안의 얼자로 마음에 병이 들어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러운 자들입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태학(太學)에 들어가면 치() 순서로써 한다.”

하였으니, ‘치 순서로써 한다는 것은 나이를 중시한다는 것이고, ()에 이르기를,

 

잔치 자리에서 모()로써 구별하는 것은 연치(年齒)의 순서를 정하자는 것이다.”

하였으니, ‘()’란 머리털의 흑백을 말한 것입니다. 지금의 서얼들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갈 경우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여, 황발(黃髮)과 태배(鮐背)의 노인이 아래에 앉고, 겨우 관례를 마친 자들이 도리어 윗자리에 앉습니다. 무릇 태학은 인륜을 밝히자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자의 원자(元子 맏아들)와 중자(衆子 나머지 아들들)로부터 제후의 세자(世子)까지도 오히려 태학에서 나이 순서를 지키는 것은 천하에 공손함을 보이기 위함이며, 천자가 태학을 순시할 적에 조언을 구하고 음식을 대접하는 예의가 있었으니 이는 효도를 천하에 넓히기 위함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이 태학에서 나이에 따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옛날 어진 임금의 효제(孝悌)를 넓히는 도리가 아닙니다.

()에 이르기를,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벗이란 그의 덕을 벗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 많다고 으스대지 않고 신분이 높다고 으스대지 않고 형제를 믿고 으스대지 않고서 벗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귀천이 비록 다를망정 덕이 있으면 스승이 될 수 있고 나이가 같지 않더라도 인()을 도울 경우에는 벗이 될 수 있다는 말인데, 더구나 서얼은 본디 모두 양반의 자제들입니다. 그들이 아름다운 재주나 현명함과 능력이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만일 그들이 진실하고 곧고 들은 것이 많아 재주와 덕이 나보다 낫다면 또한 어찌 서얼이라 해서 그들과 벗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겠습니까.

그런데도 서얼은 양반과 서로 어울려도 벗은 할 수 없고, 서로 친해도 나이 대접을 받을 수 없으며, 충고하거나 책선(責善)하는 도리도 없고, 탁마(琢磨)하고 절시(切偲)하는 의리도 끊겼으며, 말을 하는 때에는 예절이 너무 까다롭고, 만나서 예의를 차리는 즈음에도 원망과 비방이 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서얼들의 경우 오륜(五倫) 가운데 끊어지지 않고 간신히 남아 있는 것은 부부유별(夫婦有別) 한 가지뿐입니다.

아아, 재주 있고 어진 이가 버려져 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인륜이 무너져도 구제하지 않으면서도,

 

서얼 중에는 재주 있고 어진 이가 없다.”

하고, 또한

 

이렇게 해야만 명분이 바로잡힌다.”

하니, 이것이 어찌 이치라 하겠습니까. 무릇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는 것은 할아비를 계승하여 중책(重責)을 전하자는 것입니다. 옛날에 석태중(石鮐仲)이 적자가 없고 서자만 여섯 명이 있어, 뒤를 이을 자를 점쳤을 때 기자(祁子)에게 길조가 나타났으니, 이는 어진 이를 가린 것이었습니다. 당 나라의 법률에,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1년의 도형(徒刑)에 처한다.”

고 되어 있고, 이에 대하여 뜻을 풀이한 자가 말하기를,

 

적처(嫡妻)의 장자가 적자가 되는데, 부인의 나이가 50이 넘어서 다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서자를 세워 적자로 삼기를 허락하되, 서자 중의 맏이를 세우지 않으면 형률이 또한 같다.”

하였으니, 이는 근본이 어지러워짐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대명률(大明律)에도,

 

무릇 적자를 세움에 있어 법을 어긴 자는 장()으로 다스린다. 적처의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는 서장자(庶長子)를 세울 수 있게 하고, 서자 중의 장자를 세우지 않는 자는 죄가 같다.”

하였으며, 경국대전에는,

 

적처와 첩에 모두 아들이 없어야만 같은 종족의 지자(支子 적장자가 아닌 아들)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는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관에서 작성한 문서와 양가(兩家)에서 작성한 문서에 명백한 증거와 근거가 있은 후에 마침내 임금에게 아뢸 수 있는 것은, 조명(造命)을 신중히 여긴 까닭입니다.

세간의 사대부들이 제가 보고 들은 것에만 익숙하다 보니 대다수가 잘못된 규례를 답습하여, 본처에게 아들이 없으면 아무리 첩들의 자식이 많더라도 도리어 가문을 위한 개인적 타산에서 정을 끊고 사랑을 억누르고서, 임금에게 아뢰는 글을 엉터리로 지어 지족(支族) 중에서 양자를 들여오되 촌수가 멀고 가까운 것도 가리지 않는 실정입니다.

,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으니 혈맥(血脈)이 계승되고, 조부의 제사를 손자가 받드니 정기(精氣)가 서로 유사하여 감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갓 적서의 구분에 얽매여, 혹은 촌수가 이미 멀어진 후손을 멀리서 데려다가 조상의 혼령을 받드는 경우도 있으니, 이는 바로 옛사람이 말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술병을 들고 술을 따라 강신(降神)하게 한다 한들 무슨 황홀(怳惚)이 있겠으며, 신령의 향취가 진동하여 애통한 마음이 생긴다 한들 어찌 정기(精氣)를 교접(交接)할 수 있겠습니까.

시경에 이르기를,

 

날이 새도록 잠 못 이루고 두 분을 그리워한다.”

했으니, ‘두 분이란 부모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을 극진히 하면 마치 존재하시는 듯하고, 정성을 극진히 하면 마치 나타나신 듯하다.” 한 것은 군자가 제사 지내는 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까운 사람을 두고 먼 데서 구하여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한다면, 어찌 신령이 아련히 나타나 존재하시는 듯할 턱이 있겠습니까. 천리(天理)를 거스르고 인정에 위배되며, 예법으로 따지면 조상을 멀리하는 것이요, 법률로 따지면 임금을 속이는 것이니, 신은 일찍이 이를 통한하여 마지않았습니다.

무릇 명분의 논의가 승세하고 습속이 변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한 집안 안에서도 구별하고 제한하는 법이 거의 남과 다를 바 없습니다. 심지어는 부형(父兄)조차 그 자제(子弟)를 노예처럼 부리고, 종족들은 친척으로 대하기를 부끄러워하여, 족보에서 빼 버리기도 하고 항렬 이름자를 달리하기도 합니다. 이는 단지 외가쪽에만 치중하느라 도리어 본종(本宗)을 가벼이 여기는 일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인륜상으로 너무나도 각박하고 몰인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조정에 건의하기를,

 

우리 왕조는 인물이 중국에 비하여 적은데, 또 적서를 분별하는 법마저 있습니다. 무릇 신하로서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마음이 어찌 적자냐 서자냐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인재를 뽑아 쓰는 길이 너무도 편협하니 신은 그윽이 통탄하는 바입니다. 청하건대 서얼 중에서도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되, 직위가 높아진 뒤에 혹 명분을 어지럽히는 죄를 지을 경우에는 엄격히 법률을 적용하소서.”

하였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미쳐 신분(申濆)  1600명이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자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라 도는 것은 곁가지라도 다를 바가 없다. 신하로서 충성하고자 하는 뜻이 어찌 적자에게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에 선정신 이이(李珥)가 제일 먼저 서얼을 통용할 것을 건의하여 비로소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선정신 성혼(成渾)과 선정신 조헌(趙憲)이 연달아 봉사(封事 밀봉한 상소)를 올려 서얼을 청요직(淸要職)에도 통용할 것을 각기 청하였습니다.

인조 때는 고()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부제학으로서 홍문관의 동료 심지원(沈之源) · 김남중(金南重) · 이성신(李省身)과 더불어, 의견을 구하는 성지(聖旨)에 호응하여 연명(聯名)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는데 그 내용이 몹시 절실하였습니다. 또한 고 상신 장유(張維)도 소를 올려 그 일에 대해 논하니, 임금께서는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고 상신 김상용(金尙容)이 이조 판서로서 회계(回啓)하기를,

 

하늘이 인재를 낸 것은 적자든 서자든 차이가 없는바, 서얼 금고법은 고금의 역사에 없는 것입니다. 옥당(玉堂 홍문관)의 차자(箚子)를 통해서 여론을 알 수 있습니다. 묵은 폐단을 깨끗이 개혁하고자 하여 성지에 호응해 간절히 아뢰었으니, 청컨대 대신(大臣)에게 의견을 수합하게 한 뒤 정탈(定奪 채택)하소서.”

하여, 사안이 비변사로 내려졌습니다. 고 상신 이원익(李元翼) · 윤방(尹昉) 등이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을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는 법이니, 유신(儒臣 홍문관 관원들)이 아뢴 차자는 대단히 식견이 있습니다.”

하였고, 고 상신 오윤겸(吳允謙)은 의견을 올리기를,

 

서얼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는 법이니, 조정에서는 어진 이를 등용하고 인재를 거두어 쓸 따름입니다. 직위가 높아진 후에 명분을 문란시킬 경우에는 국법이 본디 엄중하니 염려할 바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호조 판서 심열(沈悅), 순흥군(順興君) 김경징(金慶徵), 공조 판서 정립(鄭岦), 판결사(判決事) 심집(沈諿), 동지중추부사 정두원(鄭斗源), 호군(護軍) 권첩(權怗)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고, 도승지 정온(鄭蘊)도 상소하여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은 일찍이 의소(擬疏)를 지어 정도전도 오히려 대제학이 되었던 사실을 끌어대면서, 대개 서얼의 벼슬길을 제한하는 법은 중세(中世)에 나온 것이므로 모두 벼슬길을 열어주기를 청하였으니, 이 상소를 끝내 올리지는 못했으나 우암집(尤庵集)에 실려 있습니다. 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는 아뢰기를,

 

서얼 중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기재(奇才)가 있을지라도 등용될 길이 없으니, 크게 변통하기를 청합니다. 성상께서는 유행하는 풍속에 구애되지도 마시고 상규(常規)에 얽매이지도 마시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치를 자각하시고 결단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 지돈녕부사 신() 김수홍(金壽弘)은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일이 끝내 시행되지 못했고, () 판서 이무(李袤)는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으나, 도승지 신() 김휘(金徽)가 물리쳐서 상소가 임금께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 뒤 고 상신 최석정(崔錫鼎)이 이조 판서로서 상소를 올려 서얼을 통용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논의한 지 오래였는데도 시행되지 못했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 오직 가문만을 위하고 제 이익을 이루려는 계획이 깊어질수록 명분의 논의를 더욱 굳게 지키고, 벼슬에 등용하거나 벼슬을 막는 권한이 커지자 도리어 조종(祖宗)의 법을 핑계 대어, 인정을 억누르고 은애(恩愛)를 저버림으로써 본종을 중히 여기는 것을 멸시하고, 친한 사람을 버리고 소원한 사람을 취함으로써 고의로 임금을 속입니다.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 습속을 이루었는데도 인륜을 무너뜨리는 것인 줄 모르고, 정밀한 저울로 달아 눈금을 재듯이 문벌을 따지면서 인재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무도 걱정 하지 않습니다.

명분의 주장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남김없이 변론했으니, 청컨대 옛 제도를 혁신하는 논의에 대해서 다시 남김없이 말씀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무릇 법이란 오래가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고, 일이란 막히면 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준수해야 할 때에 준수하는 것이 바로 계술(繼述)이거니와, 변통해야 할 때 변통하는 것도 역시 계술이니, 굳게 지키거나 혁신하는 것을 오직 때에 맞도록 한다면 그 의의는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

하였고, 서경 대우모(大禹謀)에 이르기를,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야 진실로 그 중()을 잡으리라.”

하였습니다. 무릇 이란 이치의 극진함이요, ‘이란 의리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서경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으면 왕도(王道)가 평탄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두고 이름입니다.

더구나 서얼 금고법은 옛날을 상고해 봐도 그러한 법이 없고, 예법과 형률을 뒤져봐도 근거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사람의 감정 풀이에서 나온 것일 뿐 본시 건국 당시 정한 제도가 아니었으며, 100년이 지난 뒤에 선조(宣祖)께서 비로소 과거에 참여하는 길을 터 주었고, 인조(仁祖) 때 미쳐 또 삼조(三曹)의 관직을 허락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면 역대 임금들께서 혁신하고 변통하려 한 성의(聖意)를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아아, 서얼로 태어나면 세상의 큰 치욕이 되어 버리니, 현요직(顯要職 지위가 높고 중요한 벼슬)을 금지하여 조정과 멀어지고, 명칭을 제대로 가리켜 부르지 못하여 가정에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학교에 가도 나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고향 마을에서는 친구마저 끊어져서, 처지가 위태롭고 신세가 고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때문에 큰 부담을 진 듯이 전전긍긍하면 사람들은 천히 여기니, 궁하여도 귀의할 곳 없어 몸 둘 바를 모릅니다. 혹은 자취를 감추어 조용히 지내고자 무리를 떠나 뜻을 높이 가지면 교만하다 이르며, 혹은 어깨를 움츠리고 가련한 태도를 취하며 무릎을 꿇고 구차히 비위를 맞추면 비루하고 간사하다 합니다.

,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배양 방법이 다르고 진로가 달라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맹자는 이르기를,

 

만약 제대로 배양하면 성장하지 않는 생물이 없고, 만약 제대로 배양하지 않으면 소멸하지 않는 생물이 없다.”

하였으니, 다만 배양하여 성숙시키지 않고서는 어찌 그들 중에 인재가 없다고 질책하겠습니까?

혹은 적전(嫡傳 적자의 지위)을 이어받더라도 서얼이란 이름이 삭제되지 않고, 아무리 세대가 멀어져도 영원히 천속(賤屬)이 되는 것이 실로 노비의 율()과 같습니다. 그들의 친족이 번성하여 거의 나라의 반에 이르렀으나, 귀의할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항산(恒産 생업)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야윈 얼굴에 삐쩍 마른 목으로 무기력한 채 피폐하게 살아가고, 가난이 뼈에 사무치되 떨치고 일어날 길이 없습니다.

아아, 옛날의 이윤(伊尹)은 백성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하면 마치 자기가 밀어서 웅덩이 속에 집어넣은 것같이 여겼는데, 지금 서얼로서 제자리를 잃고 고생하는 자가 어찌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억눌려 지내온 지 이미 오래라서 울분이 갈수록 쌓였으니,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하여 재해를 부른 것이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을 본받아 민물(民物)을 다스림에 성스러운 업적이 우뚝하고 빛나시니, 온 나라의 생명치고 제자리를 얻어 각기 그 삶을 즐기고 그 생업에 편안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묻혀 있고 버려져 있던 자들을 진작시키고 기용하여 능히 탕평(蕩平)의 정책을 확대하시고,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어 모두 임금의 교화에 감싸이게 하셨습니다. 묵은 폐단과 미비된 법들을 모조리 바로잡으시면서도, 유독 서얼을 통용하는 법에 있어서는 아직 뚜렷한 정책이 서지 못했습니다.

, 지금 신의 이 말씀은 어리석은 신 한 사람의 개인적 발언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식자들의 공언(公言)이며, 현재의 온 나라 공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역대 임금들 이래로 선정(先正)과 명신(名臣)들이 간절히 잊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에 대해서도 신이 이미 낱낱이 거명하여 아뢰었는데, 대개 학식이 천박하고 도량이 좁아서 제가 보고 들은 것만을 굳게 지키고 한갓 유행하는 풍속만을 따르는 자들이니,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명분을 엄히 해야 한다는 것과 혁신하기가 어렵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즘 세상에도 편들기를 주장하고 상식과 어긋난 주장 펴기를 좋아하는 이런 무리들이 반드시 없다고는 못 하겠는데, 이들은 모두 명신 정온(鄭蘊)의 상소 하나만을 끌어와 구실 삼고 있습니다. 무릇 정온의 순수한 충성과 큰 절개야말로 일월(日月)과 함께 빛을 다툴 만한즉, 신은 감히 이 상소가 무엇에 격발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개 그 요지는 역시 명분과 국가 제도의 두 가지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 먼 시골 지방의 사람은 그의 내력을 모르더라도 문반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에 통용될 수 있고 무반으로는 병사(兵使) · 수사(水使)를 지낼 수 있는데, 그의 문벌을 묻지 않아 아무런 구애될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서얼들은 가깝게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이고 멀리로는 저명한 유학자와 어진 재상이 그 조상이니, 먼 시골 지방 사람에게 비하면 그의 내력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벼슬길을 막는 법은 죄에 연루된 자보다 심하고 차등하는 명분은 종보다 엄하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지금 서얼들 중에 누가 어질어 쓸 만하고 누가 재간이 있어 발탁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정이 백성들에게 차별없이 베푸는 은혜를 하늘이 덕을 베풀 듯이 하시고, 천지와 같은 덕화를 만물에게 빈틈없이 미치시어, 단점을 고치고 장점을 발휘하게 함으로써 이미 무너진 인륜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성숙시키고 배양함으로써 오래 버려 두었던 인재를 다시 거두어들이며, 양자 세우는 법을 경국대전에 위배되지 않게 하고 본종을 높이는 도리를 모조리 고례(古禮)로 돌아가게 하며, 가정에서는 부자간의 호칭을 바로잡고 학교에서는 나이에 따른 질서를 세워서, 300년 동안이나 버려졌던 뒤에 다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들 모두가 스스로 새 출발 할 것을 생각하여 명예를 지키고 품행을 닦고자 노력하며, 충성을 바치고자 하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여 나라를 위해 죽기를 다투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중대한 왕정(王政) 가운데 이보다 더한 것은 없을 터이니, 위대하신 성인(聖人 임금)이 장수를 누리면서 인재를 육성하시는 공적 역시 이 일을 버려 두고 어디에서 찾으시겠습니까.

 

 

[C-001]서얼 …… 의소(擬疏) : 원문은 擬請疏通疏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擬請疏通庶孼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소통(疏通)’은 곧 허통(許通)으로, 천인(賤人)이나 서얼에게 벼슬길을 터주는 조치를 말한다. ‘의소(擬疏)’는 상소의 초고(草稿)를 말하는데, 대개 기초(起草)만 해두고 실제로 올리지는 않은 상소를 뜻한다. 이 글은 누락된 글자가 많아 이본들을 참작하여 보충 번역하였다.

[D-001]삼가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 원문은 云云으로 되어 있으나,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伏以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D-002]하늘이 …… 않사옵니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 풍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느긋해지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많이 거칠어지는데, 하늘이 인재를 내린 것이 그토록 다른 것이 아니라非天之降才爾殊也, 그들의 마음을 빠져들게 한 원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다.

[D-003]전얼(顚蘖)과 변지(騈枝) : 전얼은 쓰러진 나무에 난 싹을 말한다. 서경 반경 상(盤庚上)에서 若顚木之由蘖을 인용한 것이다. 변지는 변무 지지(騈拇枝指)의 줄임말이다. 변무는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과 붙어 하나가 된 것을 가리키고, 지지는 엄지손가락 곁에 작은 손가락 하나가 더 생겨 육손이가 된 것을 가리키는데, 모두 쓸모없는 물건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莊子 騈拇 여기서는 한데 붙은 기형적인 나뭇가지라는 뜻으로 쓰였다.

[D-004]성인(聖人) : 성왕(聖王)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05]문왕(文王) …… 않았으리오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나온다. 원시(原詩)에는 주왕(周王)’으로 되어 있는 것을 연암은 문왕으로 고쳐 인용하였다. 원시에 따라 文王 周王으로 고친 이본도 있는데 주왕은 곧 문왕을 말한 것이다. 이 시는 주 나라 문왕이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한 것을 예찬한 시이다.

[D-006]인재를 …… 초래하였으며 : 원문은 □□遺才之歎인데, 여러 이본에 致有遺才之歎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07]사가(私家)에서는 …… 마침내 : 원문은 私家□□□인데, 여러 이본에 私家徒嚴名分 遂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08]임금을 …… 것이요 : 조선 시대에 사대부가에서 후사가 없어 양자를 두고자 하는 경우에는, 양가(兩家)가 계후(繼後)하는 데 동의한 뒤 계후를 청원하는 소지(所志)를 작성하여 예조에 올리고, 예조에서는 양가와 관계자로부터 사실을 확인하는 진술서를 받은 다음, 이를 왕에게 보고하여 왕의 허락을 받은 뒤 예조로부터 양자의 허가증명서인 예사(禮斜)를 발급받아야 했다. 단 본처와 첩에게서 모두 자식을 얻지 못했을 경우에 한하여 계후를 허락했으므로, 서자가 있는 사실을 숨기고 계후를 청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D-009]적자와 …… 해도 : 원문은 等威인데, 여러 이본에 等威雖殊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0]공정하게 대하였으니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 均視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1]어찌 …… 했겠습니까 : 원문에는 豈復差於□□□□인데, 이본에 豈復差別於母族之貴賤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2]언론을 아래에서 좌우 :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하급 관원임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과 같은 청요직(淸要職)에 대한 후보 제청권과 자신의 후임을 추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어 조정의 언론을 좌우하였다. 그러나 영조 17(1741) 한림(翰林)에 대해 회천(回薦)하던 규례를 혁파하면서, 아울러 이조의 정랑과 좌랑의 그와 같은 권한들도 혁파되었다. 연암집 3 ‘조부께서 손수 쓰신 한림 추천서에 대한 기록王考手書翰林薦記 참조.

[D-013]정주(政注) : 관직의 후보자를 복수로 추천하여 올리는 일을 말한다.

[D-014] …… 의도이지 : 원문은 專門濟私之□□인데, 여러 이본에 專門濟私之偏意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5]저들이 …… 있다고 : 원문은 固何負於國家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16]저들로 …… 말입니까 : 원문은 □□不得齒衿紳之列哉인데, 몇몇 이본에는 使不得齒衿紳之列哉,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使之不得齒衿紳之列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원문 중의 금신(衿紳)’은 원래 유자(儒者)의 복장을 뜻하며, 나아가 선비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진신(搢紳), 즉 벼슬아치로 번역해야 합당할 듯하다.

[D-017]군자가 …… 없다 : 맹자 등문공 상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군자는 치자(治者) 계급을 뜻하고, 야인은 소인(小人) 즉 일반 백성을 뜻한다.

[D-018]그렇지만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는 然而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19]명덕(明德) ……  : 서경 요전(堯典)에서 요 임금이 신하들에게 제위(帝位)를 선양할 사람을 천거하라고 하면서 한 말이다. 이 말에 대한 해석은 상서정의(尙書正義)를 따랐다.

[D-020]어진 이를 ……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집주(孟子集註)에 따라 해석하였다.

[D-021]강좌(江左) : 강동(江東) 즉 양자강(揚子江) 이남의 동쪽 지역으로, 동진(東晉)을 비롯한 남조(南朝)의 국가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D-022]도간(陶侃) : 259~334. 어려서 고아로 가난하였으나, 현리(縣吏)가 되어 공적을 쌓아 자사(刺史)에 이르렀다. 반란을 진압하여 장사군공(長沙郡公)에 봉해졌으며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었다. 도간의 어머니 담씨(湛氏)는 첩이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陶侃母湛氏

[D-023]주의(周顗) : 269~322. 안동장군(安東將軍) 주준(周浚)의 아들로, 젊은 시절부터 명망이 높았다.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으며, 왕돈(王敦)의 반란에 저항하다 피살되었다. 주의의 어머니 이씨(李氏)는 쇠잔한 이씨 가문을 일으키고자 명문 귀족인 안동장군 주준을 유혹하여 자진해서 그의 첩이 되었다. 晉書 卷96 列女傳 周顗母李氏

[D-024]소정(蘇頲) : 670~727. 좌복야를 지낸 허국공(許國公) 소괴(蘇瓌)의 아들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진사가 되고 습봉(襲封)하여 소허공(小許公)으로 불렸다. 현종(玄宗) 때 자미황문평장사(紫微黃門平章事)가 되었다.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함께 문장가로 유명하였다. 소정은 부친 소괴가 천비(賤婢)에게서 얻은 자식으로, 처음에 소괴는 그를 아들로 알지 않고 마구간에 두고 일을 시켰으나, 손님이 그의 시재(詩才)를 알아보고 소괴에게 그대의 종족의 서얼이냐?”고 물었다. 그제야 소괴가 사실을 밝히자 손님은 아들로 거두어 기르기를 청하였다. 그때부터 소괴가 조금씩 그를 가까이하다가 어느날 그의 시재에 놀라 마침내 아들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開天傳信記》 《靑莊館全書 卷24 編書雜稿4 詩觀小傳

[D-025]얼자(孼子) : 원문은 인데, 여러 이본에는 賤産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천산(賤産)은 천첩산(賤妾産) 즉 얼자를 말한다. 양첩산(良妾産)은 서자(庶子)라 하여, 얼자와 구별하였다.

[D-026]이소(李愬) : 773~821. 당 나라 덕종(德宗) 때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를 회복한 공으로 서평군왕(西平郡王)에 봉해진 이성(李晟)의 아들로, 헌종(憲宗) 때 오원제(吳元濟)가 회서(淮西)에서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양국공(涼國公)에 봉해졌다. 벼슬은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이르렀고, 사후에 태위(太尉)에 증직(贈職)되었다.

[D-027]호인(胡寅) · 진관(陳瓘) · 추호(鄒浩) : 호인(1098~1156)은 호안국(胡安國)의 조카로 그의 양자가 되었으며, 양시(楊時)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저서로 논어상설(論語詳說) 등이 있다. 진관은 송 나라 철종(哲宗) · 휘종(徽宗) 연간에 태학박사(太學博士) · 간관(諫官)을 지냈으며 저서로 요옹역설(了翁易說) 등이 있다. 추호는 휘종 때 용도각직학사(龍圖閣直學士)를 지냈으며 저서로 역계사의(易繫辭義) 등이 있다.

[D-028]정문배(鄭文培)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1724) 서얼 출신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이 올린 상소에는 정문측(鄭文則)’으로 되어 있다. 英祖實錄 卽位年 12 17

[D-029]이세황(李世璜) : 미상이다. 영조 즉위년 서얼 출신 진사 정진교 등이 올린 상소에는 이세황(李世黃)’으로 되어 있다. 上同

[D-030]합문지후(閤門祗侯) : 각문지후(閣門祗侯), 고려 때 각종 의식을 담당하던 각문(閣門 : 통례원通禮院)의 정 7 품 벼슬이다.

[D-031]권중화(權仲和) : 1322~1408. 고려 공민왕 때 과거 급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 · 정당문학(正堂文學), 공양왕 때 삼사좌사(三司左使) ·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조에 들어 태조(太祖) 때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태종 때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의약서(醫藥書) 편찬에도 힘썼다. 도평의사(都評議使)는 나중에 의정부(議政府)로 개칭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속한 관직이다. 권중화는 고려 말의 권신(權臣)인 권한공(權漢功)의 서자였다. 高麗史 卷125 奸臣傳1 權漢功

[D-032] …… 남길 : 원문은 流光於百代인데, 직역하면 먼 후세까지 복택(福澤)을 끼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한기 · 범중엄 · 호인 · 진관 · 추호에 대해 지나친 찬사가 되므로, ‘유방백세(流芳百世)’와 비슷한 뜻으로 판단하고 번역하였다.

[D-033]경서(經書) …… 하였습니다 : 의례(儀禮) 상복(喪服)의 원문과 정현의 주를 인용한 것이다.

[D-034]비록 …… 같더라도 : 원문은 雖與□□□인데, 여러 이본에 雖與嫡子同母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D-035]비자(婢子) : 원문에는 없는데, 예기 원문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6]비록 부모가 돌아가셨을지라도 : 원문에는 없는데, 예기 원문에 雖父母沒이라 한 것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7]비자(婢子) : 원문에는 없는데, () 나라 때 진호(陳澔 : 1261~1341)가 지은 예기집설(禮記集說)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D-038]예기(禮記) …… 하였습니다 : 진호의 예기집설 5 내칙(內則)에서 인용했는데, 인용된 예기 내칙의 원문과 그에 대한 진호의 주석에 모두 빠진 글자들이 있어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비자(婢子)는 대개 천첩(賤妾)으로 해석하는데, 진호는 천첩이 낳은 자식으로 해석하였다.

[D-039]회전(會典) …… 하였으니 : 명 나라 무종(武宗) 4(1509)에 간행된 명회전(明會典) 106 병부(兵部) 습직체직조(襲職替職條) 무릇 군관(軍官)이 사망하거나 연로하거나 원정에서 부상하면 반드시 적장남아(嫡長男兒)가 계승하여 직책을 대체한다. 혹시 적장남아가 죽거나 심한 불구라면 적손(嫡孫)이 세습하여 대체한다. 만약 적자나 적손이 없으면, 서장자(庶長子)나 서장손(庶長孫)이 세습하여 대체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청 나라 서건학(徐乾學) 독례통고(讀禮通考) 53 상의절(喪儀節) 16 입후조(立後條)에 역시 명회전을 인용하여, “무릇 직책을 세습하여 대체함에 있어 홍무(洪武) 26년에 정하기를, 군관이 사망하거나 연로하거나 원정에서 부상하면 반드시 적장남(嫡長男)이 계승하여 직책을 대체한다. 혹시 적장남이 일찍 죽거나 심한 불구가 되면, 적손으로써 세습하여 대체한다. 만약 적자나 적손이 없으면 서장자가 계승하여 대체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연암은 이 조목을 명회전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독례통고를 통해 재인용하면서 축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D-040]본지(本支) : 적계(嫡系)와 서출(庶出)의 자손들을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D-041]건국 …… 정도전(鄭道傳) : 원문은 □□□相鄭道傳인데, 여러 이본에 國初罪相鄭道傳으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정도전이 후일 태종(太宗)이 되는 왕자 이방원(李芳遠)과 권력 다툼을 벌이다 역모죄로 처단되었기 때문에 죄상(罪相)’이라 한 것이다.

[D-042]서선(徐選) : 1367~1433. 원천석(元天錫)의 문인으로, 태조 때 과거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15(태종 15) 우부대언(右副代言 : 우부승지)이 되자 서얼의 차별대우를 진언하였다. 그 뒤 예조 우참의, 우대언(右代言 : 우승지)을 거쳐 관찰사, 참판, 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공도(恭度)이다.

[D-043]찬성(贊成) 강희맹(姜希孟), 안위(安瑋) : 사실 관계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강희맹(1424~1483)과 안위(1491~1563)는 동시대 사람이 아니다. 강희맹은 세조(世祖) 때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 호조판서 겸 대제학 서거정(徐居正), 우찬성(右贊成) 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 형조 판서로서 경국대전 편찬에 참여하였다. 안위는 1550(명종 5)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로서 봉상시 정(奉常寺正) 민전(閔荃)과 함께 경국대전의 주해관(註解官)에 임명되어 주해 작업을 맡았으며, 1554(명종 9) 청홍도 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부임하여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를 간행하였다.

[D-044]송익필(宋翼弼) …… 도학(道學) : 송익필(1534  1599)은 조모가 천첩의 소생이어서 본래의 신분은 미천하였다.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에 전념하여 이이(李珥) · 성혼(成渾) 등과 학문적 교유가 깊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김장생(金長生)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이중호(李仲虎 : 1512~1554)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현손(玄孫)으로, 호는 이소재(履素齋)이다. 일찍부터 시로써 명성이 높았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성리명감(性理明鑑) 등의 저술을 남기는 한편으로 제자들을 많이 길러 그의 문하에서 김근공(金謹恭) · 유조인(柳祖認) 등이 배출되었다. 김근공(1526~1568)은 본관이 강릉(江陵)이고 호는 척암(惕菴)이다. 목사(牧使) 김모(金瑁)의 서자이다. 동몽훈도(童蒙訓導)에 천거되었으며,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다.

[D-045]박지화(朴枝華) …… 행의(行誼) : 박지화(1513~1592)는 본관이 정선(旌善)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이문학관(吏文學官)이 되었으나 곧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 춘천으로 피란갔다가 자살하였다. 사례집설(四禮集說) 등의 저술이 있다. 이대순(李大純 : 1602~?)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호는 남포(南浦)이다.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주살(誅殺)된 정준(鄭遵)의 사위였으므로, 1624(인조 2) 문과에 급제하고도 오래동안 벼슬길이 막혔다가 강서 현령(江西縣令), 서윤(庶尹)을 지냈다. 조신(曺伸)은 본관이 창녕(昌寧)이고 호는 적암(適庵)이며, 조위(曺偉 : 1454~1503)의 서형(庶兄)이다. 사역원 정(司譯院正)에 발탁되었고 명 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다. 중종 때 어명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했다.

[D-046]어무적(魚無迹) …… 문장 : 어무적은 본관이 함종(咸從)이고 호는 낭선(浪仙)이다. 모친이 관비(官婢)였으므로 김해(金海)의 관노(官奴)가 되었다. 성종 · 연산군 연간에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대변한 한시들을 남겼다. 어숙권(魚叔權)은 본관이 함종이고 호가 야족당(也足堂)이며, 어세겸(魚世謙)의 서손(庶孫)이다. 이문(吏文)에 능통하였으며 중종 · 명종 연간에 중국 사신을 수행하거나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왔다. 저술로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있다. 양사언(楊士彦 : 1517~1584)은 호가 봉래(蓬萊)이고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평안도 안변(安邊)의 시골 여자인데 자진하여 첩이 되었다고 한다. 이달(李達 : 1539~1618)은 호가 손곡(蓀谷)이다. 허균(許筠)에게 시를 가르쳤다고 하며,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관기(官妓)였다. 신희계(辛喜季 : 1606~1669)는 본관이 영월(寧越)이고 호가 송서(松西)이며, 부제학을 지낸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의 손자이다. 1633(인조 1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고 이후 문신 중시(文臣重試)에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으로서 장원을 차지했는데 이처럼 서얼이 장원을 차지하기로는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고 한다. 1660(현종 1) 조부 신응시와 부친 신경진(辛慶晉)의 시문집인 백록유고(白麓遺稿)를 간행하였다. 벼슬은 낭청을 거쳐 군수를 지냈다. 양대박(梁大樸 : 1544~1592)은 본관이 남원(南原)이고 호가 청계(淸溪)이며, 목사 양의(梁艤)의 서자이다. 임진왜란 때 가산을 털어 모병(募兵) 활동을 벌이다가 과로로 죽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글씨를 잘 썼고 시를 잘 지었다. 박호(朴淲)는 박호(朴箎 : 1567~1592)의 오류인 듯하다. 박호는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자가 대건(大建)이다. 1584(선조 17) 18세로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수찬, 교리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다.

[D-047]유조인(柳祖認) …… 재주 : 유조인(1533~1599)은 본관이 문화(文化)이고 호가 범애(泛愛)이며, 서봉(西峰) 유우(柳藕)의 서자이다. 1583(선조 16) 충효와 절의로 천거되어 이천 현감(伊川縣監)과 우봉 현감(牛峰縣監)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고, 임진왜란 때 임금과 세자를 호종하여 형조 참의에 제수되고 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최명룡(崔命龍 : 1567~1621)은 본관이 전주이고 호가 석계(石溪)이며, 현감 최위(崔渭)의 서자이다. 성혼(成渾)으로부터 도학(道學)으로 인정받았으며, 김장생(金長生)을 종유(從遊)하였다. 주역과 상수학(象數學)에 정통했으며 그림도 잘 그렸다. 유시번(柳時蕃 : 1616~1692)은 본관이 문화이고 호는 사월당(沙月堂)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저명한 학자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57(효종 8) 문과 급제 후 봉상시 주부, 교서관 교리 등을 거쳐 여러 고을의 군수를 역임했으며, 태상시 첨정에 이르렀다.

[D-048]그들이 …… 살면서 : 원문은 雖其守分行素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49]과연 …… 하겠습니까 : 원문은 果安在也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50]이산겸(李山謙), 홍계남(洪季男) : 이산겸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의 서자로, 임진왜란 때 충청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조헌(趙憲)의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조헌이 전사한 뒤 잔여 병력을 이끌고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1594(선조 27) 송유진(宋儒眞)의 난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처형되었다. 홍계남은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1590(선조 23)부터 1591년에 걸쳐 통신사의 군관(軍官)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때 부친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수원 판관(水原判官)이 되었을 때 홍계남도 첨지로 승진했다. 부친이 전사하자 적진에 돌입하여 부친의 시신을 찾아왔으며 왜적을 추적하여 다수 참살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D-051]권정길(權井吉) : 무관으로 임진왜란 때 상주 판관(尙州判官)이었고, 정묘호란 때 연평부원군 이귀(李貴)의 군관으로 전쟁터에 자원하여 포상을 받았다. 병자호란 때 원주 영장(原州營將)으로 강원도의 근왕병(勤王兵)을 지휘하여 남한산성을 향하다가 부근 검단산(黔丹山)에서 청 나라 군대와 격전 끝에 패퇴하였다. 그 뒤 회양 부사(淮陽府使), 춘천 부사, 인동 부사(仁同府使) 등을 지냈다.

[D-052]피를 …… 훈시하고 : 원문은 沬血誓衆인데, ‘회혈(沬血)’은 피로 얼굴을 씻다시피한다는 뜻이다. 문맥상으로는 구혈서중(嘔血誓衆)’이나 역혈서중(瀝血誓衆)’이라야 적합할 듯하다. 전자로 판단하고 번역하였다.

[D-053]쓸모 있는 …… 않는다 : 한비자(韓非子) 현학(顯學) 녹을 주어 기르는 자들은 쓸모가 없고, 쓸모 있는 자들은 녹을 주어 기르지 않는다. 이것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원인이다.所養者非所用 所用者非所養 此所以亂也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기 63 한비열전(韓非列傳)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연암은 이를 재인용하였다.

[D-054]홍림(洪霖) : 1685~1728. 본관은 남양이고 부친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홍수명(洪受命)이다. 1727(영조 3)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의 막료가 되었는데 그 이듬해 이인좌(李麟左)의 난 때 청주성이 함락되자 이봉상과 함께 반란군에 저항하다 죽었다. 나중에 호조 참판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렸다.

[D-055]비록 : 원문은 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D-056]백부(百夫)의 장() : 서경 목서(牧誓)에 나오는 말로, 1000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천부장(千夫長), 100명의 병졸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를 백부장(百夫長)이라 한다.

[D-057]반드시 …… 것인저 : 논어 자로(子路)에서 정치의 급선무가 무엇이냐고 물은 자로의 질문에 공자가 답한 말이다.

[D-058]아들은 …… 것입니다 : 논어 안연(顔淵)에서 제() 나라 임금이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공자는 임금이 임금 노릇을 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며, 아비가 아비 노릇을 하며 아들이 아들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하였다.

[D-059]낭관(郞官) …… 바라겠습니까 : 낭관은 육조(六曹) 5 · 6품 하급 관원을 말하고, 시종신은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홍문관 · 예문관 · 승정원 등의 관원을 가리킨다.

[D-060]인의(引儀) : 궁중 의식을 담당하는 통례원의 종 6 품 벼슬이다. 조회(朝會)나 기타 의례에서 여창(臚唱), 즉 식순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았다. 업무가 과다하고 빈번하여 종 9 품의 겸인의(兼引儀), 가인의(假引儀)를 증설하였다.

[D-061]윤대(輪對) : 윤번(輪番)으로 궁중에 들어가서 임금의 질문에 응대(應對)하거나 정사(政事)의 득실을 아뢰는 일을 말한다.

[D-062]나라의 …… 자들입니다 : 맹자 진심 상(盡心上) 덕행과 지혜와 학술과 재지(才智)가 있는 사람은 항상 마음의 병이 떠나지 않는다. 오직 고신(孤臣 : 외로운 신하)과 얼자(孼子)만이 그 마음가짐이 늘 조심스럽고 환난을 염려함이 깊기 때문에 사리(事理)에 통달하게 된다.”고 하였다. 원문의 疹疾 맹자의 원문대로 疢疾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으나 뜻은 마찬가지이다.

[D-063]예기 …… 하였으니 : 예기 왕제(王制)에 나오는 말이다.

[D-064]() …… 하였으니 : 중용집주(中庸集註)  19 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D-065]황발(黃髮)과 태배(鮐背) : 황발은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가 다시 누런 빛을 띠는 것이고, 태배는 등에 복어처럼 검은 반점이 생긴 것을 말한다. 아주 나이 많은 노인의 특징이다.

[D-066]천자가 …… 있었으니 :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 등에 나오는 내용이다. 삼로(三老)와 오경(五更)이라는 직위를 두어 벼슬에서 물러난 연로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을 임명하고, 천자가 그들에게 태학에서 음식을 대접하면서 조언을 구하였다고 한다.

[D-067]() …… 하였고 :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말이다.

[D-068]벗이란 …… 것이다 :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나오는 말인데, 앞뒤 순서를 바꾸어 인용하였다.

[D-069]진실하고 …… 많아 : 논어 계씨(季氏) 유익한 벗이 셋이요 유해한 벗이 셋이니, 곧은 사람을 벗하며, 진실한 사람을 벗하며,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하였다.

[D-070]충고하거나 …… 없고 : 맹자 이루 하(離婁下) 책선(責善)은 붕우간의 도리이다.” 하였다.

[D-071]탁마(琢磨)하고 …… 끊겼으며 : 붕우들이 함께 강학(講學)하는 것을 뜻한다. 절시(切偲)는 절절시시(切切偲偲)의 준말이다. 논어 자로(子路) 붕우간에는 간절하고 자상히 권면하여야 한다.朋友切切偲偲고 하였다.

[D-072]구제하지 않으면서도 : 원문은 莫之救인데, ‘莫之救而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73]할아비를 …… 것입니다 : 고대의 종법(宗法)에 적자(嫡子)가 죽으면, 혹시 서자가 있더라도 적손(嫡孫)에게 할아비를 계승해서 상제(喪祭)나 가묘(家廟)의 중책을 맡도록 했다. 할아비가 적손에게 중책을 전한다고 하여 전중(傳重)’이라 하고, 적손이 중책을 계승한다 하여 승중(承重)’이라 하였다.

[D-074]석태중(石鮐仲) …… 나타났으니 :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오는 내용이다. 석태중은 위() 나라의 대부였는데, 그가 죽자 여섯 명의 서자 중에 누구를 양자로 정할 것인가를 점치게 되었다. 점치는 사람이 목욕하고 옥()을 찬 다음에 점을 치도록 하겠다고 하자, 다른 서자들은 모두 그 말을 따랐으나 석기자(石祁子)만은 부친상 중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부했는데 점을 쳐 보니 석기자의 점괘가 길조를 보였다고 한다.

[D-075]당 나라의 …… 하였으니 : 당률소의(唐律疏義) 12 입적위법조(立嫡違法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D-076]대명률(大明律)에도 …… 하였으며 : 대명률 호율(戶律) 입적자위법조(立嫡子違法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으로가 아니라 () 80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D-077]경국대전에는 …… 하였습니다 : 경국대전 예전(禮典) 입후조(立後條)에 나오는 내용이다.

[D-078]조명(造命) : 사람의 화복(禍福)을 좌우하는 것을 뜻한다. 임금은 이러한 조명의 권능을 지녔다고 보았다. 여기서는 양자(養子)로 인정함으로써 그의 운명을 바꾸어 주는 조치를 가리킨다.

[D-079]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 사기 7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맹상군 전문(田文)은 제() 나라의 재상인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이 천첩에게서 얻은 자식이었다. 그는 불길한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여 태어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으나, 장성한 뒤 부친을 만나 설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자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마침내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 맹상군이 되었다. 맹상군이 부친을 만나 설득할 때 묻기를, “아들의 아들은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손자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손자의 손자는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현손(玄孫)이다.” 하였다. 또다시 묻기를, “현손의 현손은 무엇입니까?” 하니, 부친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맹상군은, 부친이 나라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몹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탐욕스럽게 재산을 모아, 그와 같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所不知何人에게 남겨 주려 한다고 비판하였다.

[D-080]황홀(怳惚) : 후손이 정성껏 제사를 받들면 조상의 혼령이 내려와 어렴풋이 직접 그 모습을 뵙게 되는 듯한 경지를 말한다. 禮記 祭義 원문의  자는 예기 으로 되어 있는데, 서로 통하는 글자이다.

[D-081]신령의 …… 한들 : 원문은 焄蒿凄愴인데,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의  자는 예기 로 되어 있는데, 뜻은 같다.

[D-082]날이 …… 그리워한다 :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나오는 구절이다.

[D-083]사랑을 …… 듯하다 :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D-084]신령이 …… 듯할 : 원문은 僾然著存인데, ‘애연(僾然)’ 저존(著存)’ 모두 예기 제의에 나오는 말이다.

[D-085]종족들은 …… 부끄러워하여 : 원문은 宗族恥於爲類인데, ‘宗族而恥於爲類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D-086]선정신(先正臣) : 문묘(文廟)에 배향된 선대(先代)의 유현(儒賢)을 임금 앞에서 지칭할 때 쓰는 표현이다.

[D-087]판결사(判決事) : 노비 문서와 노비 문제 소송 사건을 처리하는 장례원(掌隷院)의 우두머리로 정 3 품 벼슬이다.

[D-088]송시열(宋時烈) …… 있습니다 : 이 의소(擬疏) 송자대전(宋子大全) 13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시대순으로 상소를 배열한 점으로 미루어 1670(현종 11)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에서 송시열은 서얼 방한(防限) 제도의 경우는 애초 조종(祖宗)이 확정한 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초에 정도전은 그 어미가 실은 사비(私婢)였지만 마침내 대제학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방한으로 된 것은 혹시 중간 시대에 나온 것인 듯합니다.”라고 하면서, 서얼이 기용되지 못함을 애석해하였다.

[D-089]반드시 …… 자각하시고 : 원문은 自見必然之理인데, 여러 이본에는自見其必然之理로 되어 있다.

[D-090]다시 ……  : 원문은 復得而極言之인데, 여러 이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다.

[D-091]하늘이 …… 없다 : 인용상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시경 주송(周頌) 사문(思文)에는 곡식으로 우리 뭇 백성을 기르시니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立我蒸民 莫非爾極고 하였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낳으시니天生蒸民 시경 대아(大雅) ()과 증민(蒸民)에 나오는 구절이다. 또한 너의 극()이 아님이 없다에서 ()’은 대개 시중(時中)’ 또는 중정(中正)’의 도()나 지극한 덕()으로 풀이하는데, 연암은 그와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D-092]치우침도 …… 평탄하리라 : 인용상에 약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無偏無陂 王道平平이라 하였으나, 홍범에는 無偏無陂 遵王之義라 하고 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 하였다.

[D-093]인조(仁祖) …… 허락하였으니 : 삼조(三曹)의 관직은 호조(戶曹), 형조(刑曹), 공조(工曹)의 낭관(郞官)이다. 인조 3년 옥당의 차자로 인해서 서얼을 허통(許通)하는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 11년에 이를 준행하기를 왕에게 다시 청하였다. 仁祖實錄 11 10 15

[D-094]만약 …… 없다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D-095]옛날의 …… 여겼는데 : 서경 열명 하(說命下) 맹자 만장(萬章)에 거듭 나오는 내용이다.

[D-096]능히 …… 확대하시고 : 정조(正祖)가 당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한 사실을 말한다.

[D-097]이 상소가 …… 것인지는 : 원문은 此疏卽何所激인데, 영남대 소장 필사본에는  자가  자로 되어 있고, 김택영의 중편연암집에는  자가 누락되어 있다.

[D-098]단점을 …… 함으로써 : 원문은 洗濯磨礪인데, 앞에서 나온 단점을 고쳐 주고 결점을 덮어 주다刮垢掩瑕와 호응하는 표현으로, ‘괄구마광(刮垢磨光)’과 같은 뜻이다.

[D-099]죽기를 다투기에 : 원문은 爭死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爭先死로 되어 있다.

[D-100]이보다 …… 터이니 : 원문은 無過於此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無過於此而로 되어 있다.

[D-101]위대하신 …… 공적 : 시경 대아(大雅) 역복(棫樸)에 전거를 둔 표현이다. 이 글 첫머리에도 인용되었다.

[D-102]역시 …… 찾으시겠습니까 : 원문은 云云인데, 김택영의 중편연암집 등에는 其亦捨此而奚求哉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보충 번역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김명호 (공역)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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