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펠탑에서 내러다 본 파리 시가지. 도시 전체가 평지더군요.
그래서 예술가들과 거지들이 모인다는 몽마르트 언덕을 얘기하나봐요.
아이들 놀이터인 동네 동산 높이도 안되는데...

인간 존재는 부단히 현실에서 일탈(逸脫)하려 한다.
제도나 조직이 규범을 강조하는 데 반비례하여 현실 공간에서 지친 영혼들이
여기에서 벗어나려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적 조건인지도 모른다.
인간 존재에 대해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라고 한 시인의 진술도
있지만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시인의 선언도 있다.
예술가들의 奇行과 일화는 확실히 치기로 저질러 보는 일반인들의 그것과
구분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고 몸부림이다. 북한산정을 향해
집을 앉힌 만해의 심우장(尋牛莊),
남이 李氏라고 부른다고 필명을 이상(李箱)으로 정해 버린 김해경(金海卿),
--일본애들은 지금도 성씨 뒤에 '상'을 붙입니다. 箱은 이 '상'의 음사입니다.--
장판지 대신 쌍룡양회 시멘트 포대를 깔고 앉아 호피 담요 운운하는 김관식,
문학지사에 들러 원고료를 선불해 가는 천상병,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다 대통령의 강권에 의해 말해본
박재삼의 청탁, 한밤중에 홀로 일어나 앉아 우는 고은 등 문인들의 일화는 끝이 없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생활은 패턴 자체가 정상인들의 그것과 판연히 구분된다.
예술가들의 비정상적인 생활과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과 결론은 그 자체가 작품의 재료와
기본틀을 제공한다.
예술이란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고 현실의 규범서 벗어나려는 인간 존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졌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멋진
연애를 하기도 하고 현실에서 금기시하고 질시하는 행동의 자유가 예술에는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 수용자들은 작품에 탐닉하여 잠시 현실의 규제와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즐길 수 있다. 그것도 내밀하고 은밀하게 자신을 감춘 상태에서.
그러나 작품의 상황과 분위기는 현실의 그것과 엄격히 구분되므로 독자가 작품에서
느끼는 정서적 반응은 도연명의 《桃花源記》처럼 넉넉한 안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백일몽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술에서는 작가의 주관에 따른 현실의 변형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걸리버 여행기』『수호전』등에서의 인물의 변형도 그 예로 들 수 있다.
『수호전』에서 실례를 찾아보기로 하자.판짐롄(반금련)과 우다랑(무대랑)의
후손들이 5백년간 오명 속에서 살아온 선조들의 명예회복에 나섰다.
『산동성 양각현 지리지』와 명대에 증보된 『무씨가보』에 의하면 우다랑은
하북성 청하현 사람. 소설 속에 묘사된 밀빵을 파는 왜소한 체구가 아니라
7척 장신에 진사급제, 양구현을 훌륭하게 다스려 명성을 날린 인재였다.
또한 판진롄도 소설에서처럼 서문경을 유혹하는 요부가 아니라 8대조 조부가
청하현에서 관리를 지낸 뼈대 있는 집안으로 우다랑의 진사급제 전에 시집가
네 아들을 둔 현모양처였다.
이들이 못난이와 탕녀로 전락한 동기는 출세한 우다랑에게 도움을 청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우다랑의 죽마고우에게서 유래한다. 과거에 이 친구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던 우다랑은 은밀하게 고향집을 수리해 주고 논밭도 내주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지 못한 화가인 그 친구는 우다랑을 못난이로,
판진롄을 음녀로 그려 길거리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시내암이 소설의 모델로 이용하는 바람에 그들의 성격은
부정적 인물로 구현되었다.



[사진]에펠탑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세느강변 풍경. 한강에 비하면 세느강은 도랑이라예.딱 한 사람,하느님의 생김새를 궁금해 한 天上의 시인이시여,영면하소서!천상엔 고문 같은 건 없겠지요.세상이 선진화되면 지상에도 고문같은 건 없어지겠지요.세계사라는 게 개인의 자유와 인권신장을 위해 투쟁한피의 역사라는 게 서글퍼집니다.시인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에는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이 소개되었고, 아래의 천상병 까페에도 <시인소개>를 클릭하면 인용되어 있습니다. http://chunsangbyung.new21.org/main.htm시인 천상병<上> /시인 천상병<中> / 시인 천상병<下>한국경제신문 게재분'시인 천상병' <上> 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으로 확대.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한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동독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1천원씩 받아 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 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 잿빛의 얼굴, 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괜찮다,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반복적인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인.문학평론가 한국경제신문 2002-06-02 '시인 천상병' <中>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천상병<중>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문예"에 "나는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 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시집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의 초연함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시인.문학평론가 한국경제신문 2002-06-09 '시인 천상병' <下> &nbsp;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씽씽 바람 불어라"("나의 가난은")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든다면"을 내놓는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싶다.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의정부시립병원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게 하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세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시인.문학평론가 한국경제신문 200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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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북해도 7월 꽃축제. 라벤더 재배지.

[편자주]

잘 짜여진 황금설연휴 즐거우셨나요?
라디오방송에서, 이번 연휴 같으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천상병 시인의 시구를 듣고 그럴싸해서 올려봅니다.
고향에 못간 분들을 위해 같은 시인의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자면”이라는 시집 제목의 시구가
들어간 작품도 함께 승차합니다.

1964년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약 2년간 재직하던 한 엘리트
젊은이였던 기인 천상병은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불혹의 나이에 어느 날 실종되었습니다.

과음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형려병자가 되었던 겁니다.
제1시집 『새』는 친구들이 우정을 모아
유고시집이라는 모자를 씌워 출간되었습니다.
그후로 그는 부인이 인사동에서 연 "귀천"다방에서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는 기구한 팔자의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공짜로 중정에 여행 가 전기고문 세 번도 당한 나[我]인데
여비가 없으면 저승을 못가냐구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생김새를 궁금해 한 지상의 딱 한 사람이고
동어반복의 어눌한 말투지만
하늘과 통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문학은 실상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불타는 정열의 사나이 예수도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는 어린아이였으니까
살아서는 하늘과 통화하는 천상의 시인이었고,
죽어서는 어린아이로 천당 한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겁니다.

"여보개, 저승갈 때 뭘 가져가지."
란 한 승려의 수필집의 제목은
하늘과 담화하는 천재시인에게 빚지고 있군요.

그의 홈피 년보에는 다음 사항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류되어 체포, 약 6개월간 옥고를 치름.

1971년
고문 휴유증과 심한 음주로 인한 영양 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짐. 행려병자로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입원됨.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행방불명, 사망으로 추정되어
문우 민영, 성춘복 등의 노력으로 유고 시집 [새]가 발간됨. 이로써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 시집이 발간되는 일화를 남김.

천상병(千祥炳)

홈피

http://chunsangbyung.new21.org/main.htm

1930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수학

1952년 『문예』에 시 <강물>, <갈매기>가 추천되어 등단

1952년 『현대문학』에 평론 추천

1993년 사망

시집 : 『새』(1971), 『주막(酒幕)에서』(1979),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등


귀천(歸天)

―主日-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르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소릉조(小陵調)>

─ 七十年 秋日에─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사진] 중국 운남성 5월의 석림. 돌숲길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Er14e7C5-M 



[편자 주]

<춘전난출(春前難出)> 번역문입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출입하기 어렵다네.---

위 본글 <게구멍에 온줌눈 과부>의 원조는 <어수신화> 중 <춘전난출>인데,
<어수신화>는 조선 후기 우스개를 집대성한 <고금소총>에도 들어 있지요.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조선시대 서민들은 귀동냥으로
이 이야기를 전수해 왔습니다.
그 원형인 <춘전난출>을 보면 전라도 사람들의 변용하는 재주에 감탄하게 됩니다.
다양한 인물의 등장과 상황설정, 말솜씨에 초점을 맞추어 보세요.
“벗어나고파! 벗어나고파!”하는 윤시내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이 상황을 우째 견디겠어요?
그러나 결말로 보아 홍풍헌은 이 상황을 즐겼던 것 같군요.


홍풍헌의 아내는 음모가 많았다.
겨울밤 얼음 위에서 오줌을 누다가
그 털이 얼음과 함께 얼어붙었다.
---음모가 긴 여자분은 얼음 위에서 오줌 누지 마세요.---

방에서 외마디 비명을 들은 홍풍헌은 놀라 뛰쳐나갔다.
그가 입김을 불어 얼음을 녹이고 있었는데
그의 수염까지 함께 얼어붙었다.

결국, 아내의 음문과 그의 입이 마주 보는 꼴이 되었다.

날이 밝자 김約正(약정,향약의 임원)이 밖에서 불렀다.
홍이 대꾸했다.

“비록 관가의 일이 중요하나
나는 해동 전에는 출입할 수 없으니
자네는 이 뜻을 관가에 고해서 내 소임을 바꾸어 고쳐 주게.
내년 봄 이후에는 비록 권농으로 임명되더라도
내가 마땅히 따라 행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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