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정운》은 훈민정음 반포한 다음 해인 1447년 음력 9월에 완성하고, 1448년 음력 11월에 반포했었다. 편찬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曹變安), 김증(金曾)이 담당하였다.[4] 신숙주가 동국정운서 통해 책 쓴 이유를 밝혔다.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에 관한 동국(즉 한국)의 표준적인 운서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었다.
일체는 ‘다’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이오 종종은 여러 가지라 하는 뜻이다 중생은 모든 세간에 있는 사람이며 하늘이며 기는 것이며 나는 것이며 물에 있는 것이며 뭍에 있는 것을 다 중생이라 하느니라. 제도는 물을 건너게 하다는 것이니 세간의 번뇌가 많음이 바다의 물과 같으니 부처님께서 번뇌 바다에 건네어 내시는 것을 ‘제도’이라 하느니라
인연은 까닭이니 전생의 일 때문을 인연이라 하고 그 일을 말미암아 후생에 되는 것을 과보이라 하나니 과는 열매이오 보는 갚는다는 것이다 좋은 씨를 심으면 좋은 열매가 여는 것이 전생의 일의 인연으로 후생에 좋은 몸이 되거나 궂은 몸이 되거나 함과 같으므로 ‘과’이라 하고 후생에 되는 것이 전생의 인연을 갚음이므로 ‘보’이라 하느니라 부부가 되어 삶은 행실이 깨끗하지 못하여 윤회를 벗지 못하는 근원이므로 ‘생사의 인연’이라 하는 것이다 부는 남편이오 처는 아내이다 윤회는 수레바퀴가 휘돈다는 것이니 부처님은 번뇌를 떨어버리므로 죽살이의 수고를 아니 하시거니와 보통 사람은 번뇌를 못 떨어버리므로 이 생에서 후생의 인연을 지어 사람이 되락 벌레 짐승이 도락하여 항상 죽으락 살락하여 수고함을 ‘윤회’라고 하느니라
네 방해하는 일을 할 뜻을 내어 이 보시하는 마음을 무너뜨리지 말라.‘ 구이 이르시되 ’그대의 말대로 하겠으니, 내가 계집이어서 가져가기 어려우므로 두 줄기를 마저 맡기니 부처님께 바쳐 세세생생에 내 소원을 잃지 아니하게 해 주구료.‘ 그 때에 등조왕이 신하와 백성과를 거느리고
팔부는 여덟부류이니 천과 용과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후라가이니 용은 고기 중에 으뜸가는 것이니 한 몸이 크락 작으락하여 신기한 변화가 끝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야차는 날래고 모질다 하는 뜻이니 허공에 날아 다니느니라 건달바는 향내를 맡는다 하는 뜻이니 하늘 음악을 하는 신령인데 하늘에 있어 음악하려 할 때면 이 신령이 향내 맡고 올라가느니라 아수라는 하늘이 아니라하는 뜻이니 복과 힘는 하늘과 같되 하늘의 행실이 없으니 성내는 마음이 많기 때문이다. 가루라는 금날개라 하는 뜻이니 두 날개 사이가 삼백 삼십 육만리오 목에 여의주가 있고 용을 밥 삼아 잡아 먹느니라 긴나라는 의심스런 신령이라 하는 뜻이니 사람과 같되 뿔이 있으므로 사람인가 사람 아닌가하여 의심스러우니 노래 부르는 신령이니 부처님 설법하신 데마다 다 능히 노래로 부르나니라 마후라가는 큰 뱃바닥으로 기어 움직인다 하는 뜻이니 큰 뱀의 신령이다 변은 보통과 다름이오 화는 됨이다 삼은 셋이오 십은 열이오 육은 여섯이다 열백이 천이오 열천이 만이다 여섯 자가 보이고 삼백보가 이다 주는 구슬이다 설은 말함이다
셋은 중생들이 내 몸안에 들며, 넷은 손에 해를 잡으며 다섯은 손에 달을 잡으니 세존님이시어 나를 위하여 말씀해 주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다에 누운 일은 네가 죽살이의 바다에 있는 모습이오 수미산을 벤 일은 죽살이를 벗어날 조짐이오 중생이 몸에 듦은 중생의 귀의할 곳이 될 조짐이오 해를 잡음은 지혜가 널리 비칠 조짐이오 달을 잡은 일은 맑고 시원한 도리를 중생을 제도하여 더운 번뇌를 없앨 조짐이니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조선 세종 30년(1448)에 최초의 한글 활자로 간행했다. 1. 훈민정음자_월인천강지곡 2. 훈민정음자_석보상절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으로 세종 25년(1443)에 창제하여 동왕 28년(1446)에 반포한 우리 고유의 문자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동기는《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어제서문(御制序文)>에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뜻을 전하고자 함이 있어도 이를 글자로 표현하지 못하니 이를 딱하게 여겨 새 글자 28자를 만드나니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이게 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잘 나타나 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조선 세종 30년(1448)에 최초의 한글 활자로 간행했다. 세종이 훈민 정음으로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어제서문과 훈민정음의 음가(音價) 및 운용법을 밝힌《훈민정음(訓民正音)》을 목판본으로 간행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최초의 한글 활자를 만들어《석보상절(釋譜詳節)》을 간행하고 이어서《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등을 간행하였다. 이때 사용된 한글 활자는 고딕체 모양의 큰 자와 가는체의 작은 자가 있으며 인본에는 갑인자와 함께 병용되고 있다.
이들 한글 활자를 통상적으로 '훈민정음자', '월인석보 한글자' 또는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자'라고 일컫는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와 《석보상절(釋譜詳節)》 등 한글 활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곧바로 주조하여 우리도 고유의 문화민족임을 상징케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현존하는 인본을 보면 유려하고 부드럽게 운필된 필서체인 초주 갑인자와 강직하게 직선으로 그은 인서체인 한글 활자가 서로 조화 있게 배열되어 그 우아함과 정교도에 있어 우리 나라 금속활자본 중 백미임을 자랑할 만 하다.
이 중 특히《석보상절》은 세종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왕(同王) 29년(1447)에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의 일대기를 엮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인데, 한글 활자가 처음으로 사용되어 인출된 서책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여, 대한인쇄문화협회는 1988년 창립 40주년 기념 사업으로 이 책이 간행된 날(9월 14일)을 '인쇄문화의 날'로 제정해 매년 기념해 오고 있다.
또한,《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훈민정음으로 지은 장편 서사시로 자신의 불교 신앙을 표현한 것이지만 백성들에게도 불교의 진리를 쉽게 깨우치도록 지은 책인데, 인본은 고딕체인 한글 활자와 갑인자가 잘 조화되어 있다.
우리 나라가 1991년 유엔에 가입했을 때 증정한 기념품이 바로 이 책의 인쇄 동판으로,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제작한 해의 육십갑자를 이름으로 붙이는데, 1434년에 제작한 갑인자(甲寅字)를 비롯해 1455년에 만든 을해자(乙亥字), 1465년 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보이는 유물이 확인됐다.
갑인자는 을해자보다 21년 이른 것으로, 현존 최고(最古) 한자 금속활자로 추정된다.
연구원 측은 "추후 연구를 통해 (발굴한 유물이) 갑인자로 확인되면, 조선시대 각종 사료 기록과 일치하는 중요한 실물자료가 된다"며 "(1450년대) 구텐베르크의 인쇄 시기보다 이른 시기의 조선 활자 관련 유물은 인쇄본으로만 존재하는데, 최초로 인쇄본과 금속활자를 동시에 확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구텐베르크의 성서는 1452년에 시작하여 1455년에 완성됐는데, 이 성서는 한 페이지가 42줄의 2단으로 이루어져 「42행성서」라고 한다.
구텐베르크는 이 성서를 인쇄하기 위해 대·소문자와 약어, 복합문자와 마침표 등 290개의 다른 활자를 만들었으며, 활자 조판을 위해 적어도 10만 개의 활자를 주조했다.
구텐베르크 금속 활자는 납, 주석, 안티몬 등의 합금으로 이루어졌는데, 녹여낸 합금을 정교하게 제작된 활자 몰드(주형)에 부어서 만들었다. 주조된 활자는 여러 칸으로 나누어진 상자에 보관했다가 한 페이지를 찍는 데 필요한 것들을 뽑아 작은 나무틀로 만든 조판막대 위에 올리고 조판막대가 꽉 차면 교정쇠 위에 올려 묶어서 조판형태로 정돈했다.
한글날과 조선글날의 날짜가 다른 것은 우리측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날(1446년 10월9일)을 기준으로 삼은 반면 북한은 훈민정음이 만들어진 날(1444년 1월15일)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남한 한글날 10월9일 반포일 기준
북한 '조선글날' 1월15일 제작일 기준
북한의 한글날인 '조선글날'은 10월9일이 아닌 1월15일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전문매체 뉴포커스는 9일 "북한에는 남한의 '한글날'과 같은 '조선글날(1월15일)'이 있지만 '조선글은 인민이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었다'는 언급만 있을 뿐 세종대왕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거의 없다"며 "남과 북은 같은 말을 쓰면서도 그 말의 창시자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다르다"고 밝혔다.
북한의 한글날인 '조선글날'은 10월9일이 아닌 1월15일인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전문매체 뉴포커스는 9일 "북한에는 남한의 '한글날'과 같은 '조선글날(1월15일)'이 있지만 '조선글은 인민이 과학적인 글자를 만들었다'는 언급만 있을 뿐 세종대왕에 대한 명백한 언급은 거의 없다"며 "남과 북은 같은 말을 쓰면서도 그 말의 창시자에 대한 의견은 서로 다르다"고 밝혔다.
[운영자 의견]
문자의 명칭 - '훈민정음'
제작자의 장의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취지임.
한국어에는 한자어가 많다. 북한에서는 인위적인 두음법칙을 만들지 않고 발음대로 적는데 그것이 표기법에 맞다고 본다. 발음은 별개의 문제다.
‘용비어천가’와 더불어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가장 오래된 가사 ‘월인천강지곡’은 우리에게도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한 독일인 교수가 5년여의 작업 끝에 ‘월인천강지곡’ 제1권 194연을 독일어로 번역 출간했다. 주인공은 독일 함부르크대학 베르너 삿세 교수(61·한국학). 삿세 교수는 같은 대학 안정희 교수와 공동으로 ‘월인천강지곡’(소학사)을 출간했다. 이 책은 원문의 독일어 번역뿐 아니라 불교 용어 해설, 중세국어의 어휘와 어법 등 언어학적 연구를 망라해 해외 한국학의 영역을 중세국어로까지 넓힌 역작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동국정운》은 훈민정음 반포한 다음 해인 1447년 음력 9월에 완성하고, 1448년 음력 11월에 반포했었다. 편찬은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현로(李賢老), 조변안(曹變安), 김증(金曾)이 담당하였다. 신숙주가 동국정운서 통해 책 쓴 이유를 밝혔다. 《동국정운》은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에 관한 동국(즉 한국)의 표준적인 운서라는 뜻에서 그 이름을 지었다.
《동국정운》에서 제시된 한자음은 예로부터 한반도에서 써온 현실 한자음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 한자음을 일반적으로 동국정운식 한자음(東國正韻式漢字音)이라 부른다. 《동국정운》 편찬자들은 현실 한자음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여 이상적인 표준 한자음을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 제시한 것이다. 《동국정운》 서문에 따르면 현실 한자음의 ‘잘못’은 아래와 같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체계에서 특징적인 것은 한자음을 초성, 중성, 종성 세 부분으로 나눈 점이다. 이는 중국 음운학에서 한자음을 성모(聲母)와 운모(韻母) 두 부분으로 나눈 것과는 다르다. 또 한국어 표기와 달리 한자음 표기에는 초성, 중성, 종성 세 부분이 모두 갖춰져 있고 종성이 없는 한자음이 없는 것도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특징 중 하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중국어 중고음(中古音)의 음운 체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하면서도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1297년)나 《홍무정운(洪武正韻)》(1375년)의 체계, 그리고 현실 한자음의 음형(音形)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성모(聲母) 체계는 훈민정음의 초성과 같은 23 자모 체계이며 중고음의 삼십육자모(三十六字母) 체계와 다르다. 자모는 중국 음운학에서 쓰이는 자모를 사용하지 않고 훈민정음에 나타나는 자모를 사용한다. 따라서 중국 음운학의 견모(見母)는 《동국정운》에서 군모(君母)가 되며 계모(溪母)는 쾌모(快母)가 된다. 성모에 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전탁음
《동국정운》에서는 전탁(全濁) ‘ㄲ, ㄸ, ㅃ, ㅉ, ㅆ, ㆅ’을 인정하고 있다. 탁음에 관해서는 《동국정운》 서문에 “我國語音, 其淸濁之辨, 與中國無異, 而於字音獨無濁聲(한국 말소리에서 청탁의 구별은 중국과 다름이 없으나 유독 한자음에서만 탁성이 없다)”라고 되어있다.
2. ㅋ
계모(溪母; [kʰ])는 ‘쾌’를 제외하고 현실 한자음에서 모두 ‘ㄱ’로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에서는 중고음에 의거해 ‘ㅋ’로 했다.
3. 설두음과 설상음, 중순음과 경순음, 치두음과 정치음
설두음(舌頭音)과 설상음(舌上音)의 구별, 중순음(重脣音)과 경순음(輕脣音)의 구별, 치두음(齒頭音)과 정치음(正齒音)의 구별이 없다. 그렇지만 순음의 무겁고 가벼움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에 기술이 있으며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1455년)에서는 중순음 ‘ㅂ, ㅍ, ㅃ, ㅁ’과 경순음 ‘ㅸ, ㆄ, ㅹ, ㅱ’, 치두음 ‘ᄼ, ᄽ, ᅎ, ᅔ, ᅏ’과 정치음 ‘ᄾ, ᄿ, ᅐ, ᅕ, ᅑ’이 벌써 사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은 자모들은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ㆁ
유모(喩母; [j]) 3등이 《동국정운》에서 ‘ㆁ’로 나타난다. “고금운회거요”에서 유모 3등의 반절 상자(反切上字)가 의모(疑母)와 통용되어 있어 《동국정운》도 이를 따른 셈이다. 참고로 아음 ‘ㆁ’의 자형이 ‘ㄱ’에 의거하지 않고 후음 ‘ㅇ’에 의거한 이유가 운서에서 유모(喩母)와 의모(疑母)의 혼동을 반영한 것임은 훈민정음 해례 제자해에 “牙之ㆁ雖舌根閉喉聲氣出鼻, 而其聲與相似, 故韻書疑與喩多相混用, 今亦取象於喉, 而不爲牙音制字之始(아음 ‘ㆁ’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고 소리와 공기가 코에서 나오지만 그 소리가 ‘ㅇ’과 비슷하므로 운서에서는 의모와 유모가 많이 혼용되니 지금 역시 후음에서 모양을 만들고 아음은 문자를 만드는 시작으로 하지 않았다)’처럼 기술된 바와 같다.
운모는 종성의 오음(五音) 차례 ‘ㆁ(ㄱ), ㄴ(ㅭ), ㅁ(ㅂ), ㅱ, ㅇ’에 따라 배열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 운서와 순서가 크게 다르다. 운목은 원칙적으로 “고금운회거요”에 나타나는 각 운의 첫 글자이다. 운모에 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1. 운의 통합, 분리
예를 들어 고금운회거요의 강운(江韻)과 양운(陽韻)은 동국정운에서 강운(江韻)으로 통합되고 반대로 고금운회거요의 경운(庚韻), 청운(青韻), 증운(蒸韻)은 동국정운에서 긍운(搄韻), 굉운(觥韻), 굉운(肱韻), 경운(京韻)으로 세분화되는 등 운의 통합, 분리가 있다.
2. 합구 개음
합구 개음(合口介音)은 현실 한자음에서 아음, 치음, 후음에만 나타나지만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는 설음에도 나타난다.
3. 중성 ㆊ, ㆋ
중성 중에 ‘ㆊ[ju̯je], ㆋ[ju̯jei̯]’는 주모음(主母音)이 두 개 있는데 실제로는 이들의 ㅠ를 전설 원순 개음을 나타내는 표기로 사용해 각각 [y̯e], [y̯ei̯]로 발음했다고 추측된다.
4. 종성 ‘ㅇ, ㅱ’
모음으로 끝나는 운 중에 과섭(果攝), 가섭(假攝), 해섭(蟹攝), 지섭(止攝), 우섭(遇攝)은 종성 ‘ㅇ’을 가지며 운미(韻尾)에 [-w]가 있는 유섭(流攝), 효섭(效攝)은 종성 ‘ㅱ’을 가진다. ‘ㅇ’은 후음이며 ‘ㅱ’은 순음 밑에 ‘ㅇ’을 연서(連書)한 순경음으로 둘다 자음에 속하는데, 실제 문헌에서는 뒤에 붙는 어미가 ‘-를’ 등 모음에 붙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운들은 모음으로 끝나는 운으로 취급되었다.
5. 종성 ‘ㅭ’
중고음의 입성 [t]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에서 이영보래(以影補來) ‘ㅭ’으로 나타난다. 현실 한자음은 ‘ㄹ’[l]로 나타나지만, 원래 입성인 이 소리가 폐쇄음인데도 현실 한자음인 ‘ㄹ’로는 폐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입성의 폐쇄음적 특성을 지니게 하기 위해 ‘ㄹ’에 ‘ㆆ’을 덧붙인 것이다. 입성 [t]를 ‘ㅭ’로 옮기는 것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해례의 종성해에 “半舌之ㄹ, 當用於諺, 而不可用文. 如入聲之彆字, 終聲當用ㄷ.(반설음 ‘ㄹ’은 국어에만 써야 할 것이며 한문에 쓰지 말아야 한다. 입성 ‘彆’자 등은 종성에 ‘ㄷ’을 써야 한다.)”라고 하며 당시 학자 사이에서 견해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한자음의 규범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보았으며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한글 문헌은 모두 이 동국정운식 한자음에 따라 주음(注音)되었다. 그러나 현실 한자음을 반영하지 않은 이 한자음은 급속히 쓰이지 않게 되어 《동국정운》 반포 28년 후에 간행된 《오대진언(五大眞言)》에서는 홍무정운식 한자음에 따라, 《육조법보단경 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1496년)에서는 현실 한자음에 따라 주음되고 16세기에 이르러서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아예 쓰이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