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8년 가을부터 친히 남송 정벌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양 태수 여문환(呂文煥)의 군사는 5년간 저항했고, 쿠빌라이는 퇴각과 재 원정을 반복했다. 그는 동생 훌라구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 아라비아 기술자들에게 투석 병기들을 제작하게 했다. 1273년3월에 이르러 다시 남송을 본격 공략, 3월 14일 양양(襄陽)이 마침내 함락되고 양양 태수 여문환과 그의 일족이 투항,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쿠빌라이는 5년간 자신에게 철옹성으로 저항한 여문환의 군사 능력을 높이 평가해, 원나라의 장수로 받아들이고 환대하였다.
쿠빌라이는 명을 내려 원나라의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쿠빌라이는 한인 출신 장수들을 등용하는 한편, 남송의 장졸들에게 투항을 요구하였다.
1274년7월 20일 여사정남소(興師征南詔)를 내려 남송 정벌을 선언, 친히 옛 남송의 천호, 만호 등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섰다.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2월 4일바린 바얀(伯顔)에 의해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원 제국 선포
1271년 유병충을 재상에 임명했다. 1271년12월 18일 쿠빌라이는 주역(周易) 십익(十翼)의 건괘(乾卦) 중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뜻에서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여 원 왕조를 창설, 스스로를 대원제국 황제이자 대몽골제국 황제로 선언하고 수도를 대도(大都, 'Grand Capital')로 옮겼다. 정식 국호는 대원대몽골국(大元大蒙古國, ᠳᠠᠢ ᠦᠨ ᠦᠯᠦᠰ)이다. 1272년 그는 서북지역에 도시 상도(上都)를 건설하고 개평부라 했으며, 이 지역은 여름 지역에 머무르는 여름 수도로 지정했다. 쿠빌라이는 중국 남부에 있던 남송 정벌을 기획했다.
1274년2월 9일대도 황궁의 정전 대명전(大明殿)을 새로 지어 이어하고, 조회를 시작하였다. 태자 친킴과 제친왕, 족장 및 고려 군주원종이 대도로 와 조회에 참여, 하례하였다.
우구데이 칸국과 갈등
평소 우구데이 칸국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서북방 국경(현, 신장 웨이우얼 자지추 주변)으로 파견, 우구데이 칸국과 맞서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몽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이들은 1276년에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사로잡은 뒤 킵차크 한국에 넘겨 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노무간은 1278년에야 탈출에 성공한다.
1276년 쿠빌라이는 회유책으로 귀부안민소(歸附安民詔)를 반포, 새로 편입된 강남 지역의 주군현 관리및 사졸군민에게 새 질서를 받아들이고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육수부(陸秀夫) 등은 쿠빌라이의 회유를 거부, 송 단종과 동생 조병을 데리고 도피, 해상유망정권을 세우고 쿠빌라이 군에 저항하였다. 남송의 장군 문천상이 원나라와 강화를 체결하고자 장군 바얀에게 왔다가, 문천상을 사로잡았지만 곧 탈출, 문천상은 육상에서 원나라에 저항한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 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과 티베트를 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1278년 육상에서 저항하던 남송 장군 문천상군을 상대, 장홍범 군에 의해 오파령 전투 궤멸당했다. 장홍범은 문천상을 사로잡는데 성공, 대도(지금의 베이징)로 압송하였다. 쿠빌라이는 사람을 보내 장군이면서 뛰어난 문인이던 문천상을 회유, 여러번 설득을 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고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고, 곧 재투옥시켰다. 1283년까지 문천상을 설득했지만 충신은 두 주군을 섬기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만 되풀이하고 거절, 결국 1283년 1월 문천상은 처형당한다. 문천상의 사형 선고를 접한 쿠빌라이는 문천상의 사형을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했으나, 이미 문천상은 처형당한 뒤였다.
그 후, 다시 남송 정벌군을 편성하여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3월 19일애산 전투에서 최종 전멸시키고,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송사에 의하면 일주일 뒤, 십만여 구의 시신이 해상에 떠다녔다 한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몽골족의 야망은 스텝 지역 밖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것이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 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部將)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 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대로 다른 유목민들은 패배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곧 몽골족들은 규모가 큰 성읍도 투석기·쇠뇌·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킬 수 있었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가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착문화를 가진 국가와 접촉하게 되면서 칭기즈 칸은 서서히 공격·파괴·약탈보다 더 멋진 권력의 향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칭기즈 칸에 대항했던 마지막 몽골 부족인 나이만의 한 신하는 그에게 문화의 유용함을 일깨워 주었고, 몽골어를 문자로 정착시키는 일을 도와주었다. 〈몽골 비사〉에 따르면 1222년말 아무다리야 강(고대명은 옥수스)과 시르다리야 강(고대명은 작사르테스) 지역에서 호라즘 샤 왕조와 전쟁을 벌였을 때, 칭기즈 칸은 이슬람 출신의 측근으로부터 성읍의 의미와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한때 금나라의 신하였던 또 다른 측근인 야율초재는 농민과 장인들이 생산해내는 물품은 과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칭기즈 칸은 당초 중국 북부의 비옥한 전답들을 말의 목초지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몽골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시킬 위대한 정복은 아직 수행되지 않은 단계였고 그 주목표로 중국이 떠올랐다.
칭기즈 칸의 금나라 정복은 1211년에 시작되어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시대인 123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될 수 있었다. 몽골인들은 중국의 오래된 전투방법인 공성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그들이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학살의 방법은 인구가 많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또한 여진은 정주한 지 100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목민의 용맹함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1213년에는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다. 이 후 남으로 기수를 돌려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이 북경을 봉쇄작전으로 공격하려고 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분란이 일어나 폐제가 호사호에게 암살을 당하였고, 호사호는 폐제의 조카인 오도보(선종)을 제위에 앉혔다. 당시 북경을 공격하고 있었으나 잇따른 실패에다 물자 부족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칭기즈 칸은 오도보의 화의를 받아들이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받고 철수하였다.
이후 오도보는 바로 개봉으로 천도하였고, 칭기즈 칸은 그것을 반격의 준비로 생각하고 다시 북경을 쳐서 마침내 성공적으로 함락해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초원의 거주자들은 아무런 과도기적 단계도 없이 도시문명을 가진 고대국가를 소유하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들은 난감함에 의하여 방화와 살육을 하게 되었다. 개인적인 약탈은 몽골군의 규범인 야삭에서 금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 들어가서 한달 동안이나 약탈을 계속 하였다. 이것은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 사람들이 살육을 최소화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이전 왕조를 계승하여 차지한 것과 비교해 볼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은 개봉 천도 이후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이 중앙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다시 북경을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칭기즈 칸의 신하 무칼리는 중국의 작전을 일임받고 지속적인 전투를 계속하였으나 이제 전투는 중국식 공성전으로 완전히 변해 버려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칭기즈 칸은 금나라 정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인 우구데이와 톨루이에 의하여 1234년에야 정복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금나라 정복 기간 중 칭기즈 칸은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던 호라즘 제국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몽골과 호라즘의 1차 충돌은 1218년에 있었는데, 1218년 당시 호라즘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 샤(황제)의 통치 하에 쇠퇴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를 몰아내고 서요를 속국으로 삼으며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몽골에서는 명맥만 유지하던 메르키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한 몽골군은 남은 메르키트 병사들을 서요 국경지대까지 쫓아가 전멸시켰다. 이 때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요를 방문한 무함마드 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고, 이를 우습게 본 샤가 몽골군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몽골군은 호라즘군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으나 치밀한 전략과 기마술로 호라즘군 절반을 죽이고 샤의 본진을 습격해 왕실 물품을 소수 탈취했다.
이후 칭기즈 칸은 나이만전 당시 도망쳤던 나이만 족장 타양 칸의 아들 쿠츨루크가 서요의 국왕이 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수 제베를 시켜 서요를 공격해 쿠츨루크를 죽이고 서요를 점령함으로써 호라즘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전쟁 중에 호라즘과 같은 강국과 전쟁을 치를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칭기즈 칸은 이후 호라즘과 통상을 맺기 위해 사신을 보냈으나, 샤는 편지에 쓰여진 '그대를 사랑하는 내 아들처럼 대할 것'이라는, 자신을 비하하는 글귀에 분노했다. 그는 통상에 응하였으나 통상을 위해 방문한 450명의 상단을 오트라르 성의 성주 이날축을 시켜 붙잡아 처형했고, 항의하러 온 사신단마저 처형했다.(일각에는 칭기즈 칸의 전쟁을 위한 계략이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이는 사실상 선전 포고나 다름이 없었으니 칭기즈 칸은 이에 선전 포고를 하고, 1219년 20만의 병력으로 호라즘 침공을 개시했다.
침공 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제국 내의 불화와 반목을 이용하는 계락을 펼쳤다. 호라즘은 알라 웃딘의 통치기간 동안 넓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내정을 안정시킬 기간이 없어 나라 안 민중과 귀족, 왕족들 간의 파벌 갈등이 심했다. 칭기즈 칸은 호라즘 내의 여러 장수나 귀족들이 몽골과 내통하고 있는 것처럼 한 편지를 샤에게 들어가도록 했고, 몇몇 귀족이나 왕족에게 복속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불안해진 샤는 수도를 사마르칸트로 옮기고, 몽골군의 몇 배가 넘던 대군을 이리저리 갈라 배치하는 실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몽골군의 호라즘 정복을 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칭기즈 칸은 주변 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특히 샤리 골골라의 경우 정복활동 도중 징기스칸의 손자인 모토칸(또는 무투겐)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므로 칭기즈 칸의 분노를 사서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두 죽일 뿐만 아니라 모든 건물을 파괴시켜 전대미문의 폐허로 만들면서 멸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