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註 249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註 250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註 251≫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註 252이라고도 한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註 249진평왕 9년(587)은 간지로 정미(丁未)이고, 갑신(甲申)은 진평왕 46년(624)이다. 어느 쪽이 맞는지 알 수 없다.
註 250사방의 불국토에 사는 부처를 말한다. 동방 아축불(阿閦佛),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을 가리킨다.
註 251≪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약칭이며 ≪연경(蓮經)≫이라고도 한다.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7권 28품으로 이루어졌다. 천태종·법상종의 소의경전이다.
註 252경상북도 문경시 대승사(大乘寺)가 위치한 산으로, 산 위 바위에 새겨진 사방불에 이하여 산 이름이 지어졌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법(法)과 율(律)로 나뉘고, 그 가르침을 모아놓은 것을 장(藏)이라고 하는데, 세 가지가 있다. 경장(經藏)과 율장(律藏) 그리고 논장(論藏)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법을 체계적인 형태로 모아 놓은 것이 경장이고, 승가에서 지켜야 할 계율을 담고 있는 것이 율장이며, 경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고 체계화한 것이 논장이다. 이 가운데 경장을 남방의 팔리어 전승에서는 니까야, 즉 부(部)라고 하는데, 장부(長部), 중부(中部), 상응부(相應部), 증지부(增支部), 소부(小部)의 5개 부로 나누고 있다. 한편 북방 산스크리트 전승에서는 경장을 아가마(아함ㆍ阿含), 즉 ‘전승된 것’이라고 부르며, 장아함(長阿含), 중아함(中阿含), 잡아함(雜阿含), 증일아함(增壹阿含)의 4대 아함이 있다.
아함은 예로부터 귀중하게 여겨져 왔는데, 인도의 부파불교 시대에 있어서 아함만이 절대적인 권위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며, 중관 사상의 비조 용수보살의 경우도 그 사상의 철저한 기반은 아함이었다. 중국불교의 천태나 화엄철학 등에서는, 부처님께서 경을 설한 순서를 상정하고 그에 따라 일체의 경전을 분류하고 있는데, 기초적인 경으로 아함을 들고 있다. 이로 미루어 모든 경전 가운데서 아함이 지니는 비중 및 불교학에서의 중요성은 예로부터 인정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아함은 대승의 기초경전으로서, 소승으로 불리는 부파불교 학자들의 절대적인 경전이 아함이었고 그래서 소승경전으로 취급하려고 하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소승으로 지칭되는 것은 부파시대 학자들이 아함을 통해 이해한 교리체계이지 아함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대승경전으로 불리는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등의 내용을 살필 때 아함의 기초 경전으로서의 위치는 확고해진다 하겠다. 즉 〈반야심경〉에 나오는 5온, 12처 18계 12연기 사제 등의 술어는 오로지 아함에서만 충분히 익혀지는 개념이다. 그리고 제법개공(諸法皆空)도 ‘오온은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아함교리의 전개에 불과함을 볼 수 있어 〈반야경〉의 기초가 〈아함경〉에 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기원 후 4세기 후반에 5세기 초반 사이에 산스크리트 전승의 4아함이 중국에서 한역되었고, 팔리어 전승의 5부는 남방 상좌부라는 단일 부파에서 전승해온 것이 온전히 보존되었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부파에서 전승되어온 경장은 대부분 산실되었다. 기원후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 사이에 중국에서 한역된 4아함은 단일한 부파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4아함은 법장부 소속의 〈장아함경〉 설일체유부 소속의 〈중아함경〉, 〈잡아함경〉, 대중부 계통의 어떤 부파에 소속된 것으로 추정되는 〈증일아함경〉 등 몇몇 부파에서 전하는 아함이 따로따로 번역되어 하나의 경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록 전승해온 부파는 다르지만, 기본적인 교리적인 바탕에 있어서는 놀라울 만큼 한결같은 일치를 보이고 있다.
4아함 중 어느 것이 먼저 성립되었는지에 대한 시간적인 선후 관계를 확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승하는 초기의 방법은 암송에 의한 구전이었다. 암송해서 구전되는 것을 서사하여 전하면서 구성이나 내용에 있어서 조금씩 변화를 겪게 되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4아함 가운데 짧은 게송의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는 〈잡아함경〉이 가장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잡아함경〉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모은 것이면서, 그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서, 불교의 근본이 되는 소중한 경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아함"이란 산스크리트어 낱말 아가마(āgama)의 음역(音譯)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번역(飜譯)된다.[1] "아함"이란 문자 그대로 ""전승(傳承)" 또는 "전승(傳承)한 가르침"이며,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한 것을 뜻한다.[1][2] 즉, 《아함경》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성전(聖典)을 가리킨다.[1] 실제로는 고타마 붓다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며, 원시 불교 연구의 근본 자료이다.[1]
후일 대승 불교가 일어나자 아함(阿含)은 소승(小乘)이라고 천칭(賤稱)되어 중국 등의 전통적인 불교에서는 그리 중시되지 않았으나 근래에 이르러 원전 연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팔리어 대장경의 《4부(四部)》와 한역 대장경의 《4아함(四阿含)》의 비교 연구에 의하여 원시 불교의 진의(眞意)를 구명하려는 경향이 생겨 뛰어난 성과를 가져왔다.[1]
"아함"이란 산스크리트어 낱말 아가마(āgama)의 음역(音譯)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번역(飜譯)된다.[1] "아함"이란 문자 그대로 ""전승(傳承)" 또는 "전승(傳承)한 가르침"이며, 스승에서 제자로 계승한 것을 뜻한다.[1][2] 즉, 《아함경》은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성전(聖典)을 가리킨다.[1] 실제로는 고타마 붓다와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며, 원시 불교 연구의 근본 자료이다.[1]
4아함
한역된 《4아함(四阿含)》은 다음의 《장아함(長阿含)》·《중아함(中阿含)》·《잡아함(雜阿含)》·《증일아함(增一阿含)》의 4종의 《아함경(阿含經)》을 가리킨다:[1][2]
불교계에서 분파된 신흥종교 중 전통적인 불교의 미륵신앙을 그들의 교리 속에 절충하여 가진 경우가 있다. 주로 증산교(甑山敎) 계통과 용화교(龍華敎)가 그 대표적 예이다. 증산은 평소 제자들에게 금산사의 미륵불로 강림할 것이라고 말해 왔다고 한다. 또는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 불양탑(佛養塔)이나 차지하리라.”,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들어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증산은 금산사와 미륵불에 대하여 관심을 표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의 제자들은 금산사를 차지하여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재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의도는 순수한 불교의 미륵신앙이라기보다 증산의 가르침에 의한 미륵불의 출세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증산의 제자 김형렬(金亨烈)은 한때 금산사에 미륵불교라는 한 교파를 세우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증산의 영체(靈體)로 신봉하기도 하였다.
김형렬의 뒤를 이어 유제봉(柳濟鳳)·최선호(崔善湖) 등이 미륵계(彌勒稧)를 조직하고 금산사의 미륵불을 신앙하는 활동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서백일(徐白一)이 세운 용화교는 금산사를 본거지로 삼아 한때 그 교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1966년 교주 서백일이 피살된 뒤 그 교세는 쇠퇴했지만, 금산사 주변의 용화동(龍華洞)을 중심으로 용화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1950년대에는 강성태(姜聖泰)를 중심으로 미륵존불숭배회(彌勒尊佛崇拜會)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금산사 미륵전을 중심으로 찾아들었던 대부분의 미륵 신자들은 증산교 계통의 신흥종교 신도들이었다. 이들의 미륵신앙은 불교의 전통적인 미륵신앙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으므로, 전통적인 미륵신앙을 전개하기 위해서 이종익(李鍾益)은 불교십선운동본부(佛敎十善運動本部)를, 송월주(宋月珠)는 미륵정신회(彌勒正信會)를 각각 조직하기도 하였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가 창건하였다.[1]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 印度)에 갔다가 백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절을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 길에 흰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울었다고 한다. 의신조사가 노새의 기이한 행적에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경치에 비범한 기운도 느껴져서 그곳에 절을 지은 후 절 이름을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법이 머물렀다는 뜻에서 법주사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선조 시기의 무신(武臣)이었던 충무공이순신이 1592년 ~ 1598년(임란 7년)동안 군중에서 쓴 일기를 말한다. 정확히는 1592년(선조 25년) 정월(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선조 31년) 11월 17일(양력 1598년 12월 14일)까지 2,539일간 기록한 일기이다. 현재까지도 이순신이 직접 쓴 일기 초고본 8권 중 7권이 남아서 충남현충사에 비치되어 있고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3] 2013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 별망군이 와서 고하기를 "적선이 부지기수이며 곧바로 우리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시 전 함대에 명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백 서른이 넘는 배가 우리 전 함대를 감쌌다. 제장들은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거듭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 우수사 김억추(金億秋)가 탄 배는 아득한 곳으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노(櫓)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입한 뒤 지자, 현자, 각양의 총통을 폭풍 우레처럼 난사했고 군관들은 배 위에 빽빽히 서서 비 오듯 난사했다. 적의 무리는 당해내지 못하고 잠깐 다가오다 잠깐 물러나곤 하였는데 우리를 수 겹으로 에워싼 탓에 전세를 예측할 수가 없었고 나와 같은 배의 병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이 되어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이르며 말하였다.
"적이 비록 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대적할 순 없으니 결코 마음이 흔들리지 말고 전력을 다하여 적을 쏘라"
제장들의 배들을 돌아보니 먼바다로 물러나서 관망(觀望)만 할 뿐 나오지 않았으며 배를 돌리고자 하는 눈치였다. 곧장 중군 김응함(金應諴)에 배에 댄 뒤 참수, 효시하고 싶었으나 내 배가 선두를 돌리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러 배들이 차차 멀리 물러날 터이고, 적선이 점차 압박해와서 사세는 낭패가 될 터였다. 즉시 중군영하기(中軍令下旗)를 세우라고 명하고 또 초요기(招搖旗)를 세우니 중군장 겸 미조항(彌助項) 첨사 김응함의 배가 점차 내 배로 가까이 왔는데, 거제 현령 안위(安衛)의 배가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말하였다.
"너는 중군(中軍)이 되어 멀리 피하기만 할 뿐 대장(大將)을 구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당장 처형하고 싶지만 적세가 또한 급하니 일단은 공을 세우라"
두 배가 교전의 틈으로 곧장 돌입하니 적장이 그 휘하 전선 세 척을 지휘하여 일시에 개미떼처럼 안위로 배로 달라붙었고 매달려서는 다투어 안위의 배로 올랐다. 안위와 안위 배 위의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 듯이 공격하여 거의 힘이 다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도 배를 돌려 곧바로 돌입해 비 오듯 난사했고 적선 세 척을 남김없이 멸하였다. 여도 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丁應斗)의 배가 속속 이르러 힘을 합쳐 적을 쏘았다. 항왜(降倭)[15]준사(俊沙)는 안골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이때 내 배 위에 타고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그림 무늬의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안골 진영의 적장 마다시(馬多時)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김돌손(金石孫)[16]으로 하여금 갈고리로 그 자를 선두 위로 끌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준사(俊沙)가 보곤 뛰면서 말하기를 "이 자가 마다시입니다!"라고 하였다. 고로 즉시 참수하게 하였고 이에 적의 사기가 대폭 꺾였다.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 현자 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 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天幸)[17]이었다. 수세(水勢)가 극히 험하고 아군의 세력도 지쳐 위태로웠으므로 당사도(唐笥島)[18]로 진을 옮겼다.
【장계에서】 이 달 23일 성첩된 좌부승지의 서장이 새벽 네 시쯤 에 선전관 조명(趙銘)이 가져 왔다. "왜적들이 이미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또 밀양에 들어 왔다는데, 이제 경상도 우수사 원균(元均)의 장계를 보았더니,'각 포구의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군사의 위세을 뽐내고 적선을 엄습할 계획이다.'고 하니, 이는 가장 좋은 기회이므로 마땅히 그 뒤를 따라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대가 원균(元均)과 합세하여 적선을 쳐부순다면 적을 평정시킬 것 조차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전관을 급히 보내어 이르노니, 그대는 각 포구의 병선들을 거느리고 급히 출전하여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천리 밖에 있으므로 혹시 뜻밖의 일이 있을 것 같으면 그대의 판단대로 하고 너무 명령에 거리끼지는 말라.'고 하였다. 이 말대로라면, 왜적들은 침입한지 오래되어 반드시 지쳐서 사기가 떨어지고 가진 전비품도 거의 없어졌을 것이니, 왜적들을 꼭 이 때에 막아내야 하겠거니와 다만 앞뒤 적선의 척수가 500여 척 이상이라 하므로 우리의 위세를 불가불 엄하게 갖추어 엄습할 모습을 보여서 적으로 하여금 겁내고 떨도록 해야 하겠다. 그래서 수군에 소속된 방답․사도․여도․발포․녹도 등 5개 진포의 전선만으로는 세력이 심히 고약하기 때문에 수군이 편성되 어있는 순천․광양․낙안․흥양․보성 등 5개 고을에도 아울러 방략에 의해서 거느리고 갈 예정으로 처음에는 경상도로 출전하면 해로를 지나게 되는 "본영 앞바다로 일제히 도착하라"고 급히 통고하였다. 그러나 출전할 기일이 급한데다 수군의 여러 장수중에 보성 및 녹도 등지는 3일이나 걸리는 먼 거리에 있기 때문에 통고하여 불러 모은다 해도 그곳 수군은 쉽게 모일 수 없으므로 반드시 기일 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므로, 그 밖의 여러 장수들만이라도 모두 이달 29일 본영 앞바다에 모이게 하여 거듭 약속을 밝힌 뒤에 즉시 경상도로 출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풍세의 순역을 미리 생 각하여 어렵게 되면 형편에 따라서 빨리 출전하려고 하는 바, 경상도 순변사(이일)․겸관찰사(김수)․우수사 등에게도 공문을 보내어 약속하였음을 장계올렸다.
4월 29일 (무오) [양력 6월 8일]
【장계에서】 정오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회답 공문이 왔다. "적산 500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 등지에 정박하고, 제 맘대로 상륙하여 연해변의 각 관포와 병영 및 수영을 거의 다 점령하였으며, 봉홧불이 끊어졌으니 매우 통분하다. 본도(경상우 도)의 수군을 뽑아 내어 적선을 추격하여 10 척을 쳐부수었으나, 나날이 병마사를 끌여들인 적세는 더욱 성해져서 적은 많은데다 우리는 적기 때문에 적을 맞아 싸울 수 없어서 본영(경상우수영) 도 이미 함락되었다. 귀도(전라좌도)의 군사와 전선을 남김없이 뽑아 내어 당포 앞바다로 급히 나와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소속 수군으로, 중위장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좌부 장에 낙안군수 신호(申浩), 전부장에 흥양현감 배흥립(裵興立), 중 부장에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유군장에 발포가장․영군관․훈 련원봉사 나대용(羅大用), 우부장에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후 부장에 녹도만호 정운(鄭運), 좌척후장에 여도권관 김인영(金仁 英), 우척후장에 사도첨사 김완(金浣), 한후장에 영군관․급제 최대성(崔大晟), 참퇴장에 영군관․급제 배응록(裵應祿), 돌격장에 영군관 이언량(李彦良) 등을 모두 배치하고 거듭 약속을 명확히 하였다. 선봉장은 우수사 원균(元均)과 약속할 때 그도의 변장으로써 임명할 계획이며, 본영은 우후 이몽구(李夢龜)를 유진장으로 임명하고, 방답․사도․여도․녹도․발포 등의 5개 포구에는 담략이 있는 이를 가장(假將)으로 임명하여 엄중히 훈계하여 보냈다. 나는 수군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4월 30일 새벽 네 시에 출전할 예정으로 경상우도 남해현 미조항과 상주포․곡포․평산포 등 네 개 진영이 이미 거듭 들어왔으므로 그 현령․첨사․만호 등이 "당일 군사와 병선을 정비하여 길 중간까지 나와서 대기하라"고 새벽에 공문을 만들어 사람을 달려 보냈다. 낮 두 시경 본영의 진무이고 순천 수군인 이언호가 급히 돌아와서 보고했다. "남해현 성안의 관청 건물과 여염집들은 거의 비었고, 집안에서 밥짓는 연기마자 별로 나지 않으며, 창고의 문은 이미 열려 곡물은 흩어진채로 있고 무기고의 병기마저 모두 없어지고 비어 있는데, 마침 무기고의 행랑채에 한 사람이 있기에 그 이유를 물어 보니, `적의 세력이 급박해지자 온 성안의 사졸들이 소문만 듣고 달아났으며, 현령과 첨사도 따라 도망하여 간 곳을 알 수 없다'고 대답하므로, 돌아오다가 또 한사람을 보았는데, 쌀 섬을 진채 장전을 가지고 남문 밖에서 달려 나오다가 장전의 일부를 소인에게 주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장전을 살펴 보니, "곡포(曲浦)"라고 새긴 것이 분명하며, "성을 비우고 달아났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하인들 이 보고하는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워서 군관 송한련(宋漢連)에 게 "이 말이 사실과 같다면 적의 군량을 쌓아 주는 격이 되고, 점점 본도(전라좌도)로 침입하여 오래 머물며 물러 가지 않을 것이므로 그 창고와 무기고 등을 불살라 없애라"고 전령하여 급히 달려 보냈다. 대체로 보아 흉악한 적의 세력이 크져 부대를 나누어 도적질을 하는데, 한 부대는 육지 안으로 향하여 먼 곳까지 석권하고, 한 부대는 연해안으로 향하여 닥치는대로 함락하고 있으나, 육지나 바다의 여러 장수들이 한 사람도 막아 싸우지 못하여 벌써 적의 소굴이 되어 버렸고, 바다의 진영으로서도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우수영과 남해의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뿐이지만, 이제 들으니 우수영마저도 함락되었고, 남해의 온 섬들은 벌써 무인지경이 되었다고 하는 바, 이른바 우수영은 내가 지키는 진영과 일해상접이고, 남해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앉은 사람의 모양마저 똑똑히 세어 볼 수 있는 가까운 곳이다. 그러므로 본도로 침범해 올 시기가 곧 박두하였으니 매우 한심할 뿐 아니라, 본도 내의 육지와 연해안 각 고을과 변두리의 성을 방어함에 있어서 새로 뽑은 조방군 등 정예의 사졸은 모두 육전으로 나가고 변두리에 남은 진보에는 병기를 가진 사람조차 너무 적어 다만 맨손으로 모인 수군을 거느리게 되므로 그 세력이 매우 약하여 달리 방어할 대책이 없다. 뿐만 아니라 수군의 중위장이며 순천부사인 권준(權俊)도 바다로 나가 사변에 대비하다가 관찰사의 전령으로 전주로 달려 갔다. 더구나, 오랫동안 임지에 있던 자들은 뜬소문만 듣고서도 가족을 데리고 짐을 지고 길가에 잇달았으며, 혹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고 혹은 틈을 타서 이사 하는데, 본영의 수졸과 본고장 사람들 사이에도 또한 이같은 무리들이 있으므로 그 길목에 포망장(도망자 잡는 장수)을 보내어 도망자 두 명을 찾아내어 우선 목을 베어 군중에 효시하여 군사들의 공포심을 진정시켰거니와 "경상도를 구원하러 출전하라."는 분부가 이같이 정녕할 뿐 아니라 나도 그 소식을 듣고 분노가가 슴에 서리고 쓰라림이 뼈속에 사무쳐 한번 적의 소굴을 무찔러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려는 충곡이 자나 깨나 간절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우수사와 함께 합력하여 무찔러서 적의 무리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런데 남해에 첨입된 평산포 등 네 개의 진영 의 진장과 현령 등이 왜적들의 얼굴을 보지아니하고 먼저 도피하였으므로, 나는 남의 도의 군사이니 그 도의 물길이 험하고 평탄한 것도 알 수 없고 물길을 인도할 배도 없으며, 또 작전을 상의할 장수도 없는데,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것은 천만 뜻 밖의 실 패도 없지 않을 것이다.소속 전함을 모두 합해 봐야 30 척 미만 으로서 세력이 매우 고약하기 때문에 겸관찰사 이광(李洸)도 이미 이 실정을 알고 본도 우수사(이억기)에게 명령하여 "소속 수군을 신의 뒤를 따라서 힘을 모아 구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일이 매우 급하더라도 반드시 구원선이 다 도착되는 것을 기다려서 약속한 연후에 발선하여 바로 경상도로 출전해야 하겠다. 흉하고 더러운 무리들이 벌써 새재를 넘어 서울을 육박하게 되어 본도의 겸관찰사가 홀로 분발하여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곧 서울로 향하여 왕실을 보호할 계획이라 하는 바, 이 말을 듣고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고 칼을 어루 만지며 혀를 차면서 탄식하고, 또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서울로 달려가 먼저 육지 안으로 들어간 적을 없애고자 하니, 국경을 지키는 신하의 몸으로서 함부로 하가 어려워 부질없이 답답한 채 분함을 참고 스스로 녹이며 엎드려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다. 내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세력이 이와 같이 왕성하여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모두 해전으로써 막아내지 못하고 적을 마음대로 상륙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상도 연해안 고을이는 깊은 도랑과 높은 성으로 든든한 곳이 많은데, 성을 지키던 비겁한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간담이 떨려 모두 도망갈 생각만 품었기 때문에 적들이 포위하면 반드시 함락되어 온전한 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지난번 부산 및 동래의 연해안 여러 장수들만 하더라도 배들을 잘 정비하여 바다에 가득 진을 치고 엄습할 위세를 보이면서 정세를 보아 전선을 알맞게 병법대로 진퇴하여 적을 육지로 기어 오르지 못 하도록 했더라면 나라를 욕되게 한 환란이 반드시 이렇게 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분함을 더 참을 수 없다. 이제 한번 죽을 것을 기약하고 곧 범의 굴로 바로 두들겨 요망한 적을 소탕하여 나라의 수치를 만에 하나라도 씻으려 하는 바, 성공하고 안하고, 잘 되고 못 되고는 내 미리 생각할 바가 아니리라.
11월 28일 맨 뒷장(제3책 52장)에 나오는 자료로서 13 장에 걸쳐 적혀 있다. 먼저 그 첫장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 잡을 주춧돌 같은 인재 없으니, 거듭하여 배들을 덮어 그로 하여금 안전치 못합니다. 안으로는 방책을 세울만 한 기둥 재목 같은 인재 없으니, 기계를 고치고 다루며 나는 그 편안함을 취하였습니다. 나를 알고 저를 알면 백번 싸워도 다 이기고, 나를 알고 저를 모르 면 이기고 지는 것이 반반이며, 나를 모르고 저도 모르면 싸워봐야 반드시 지게 됩니다. 이것은 만고의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투항해온 여몬레니(汝文戀已)․야지로(也時老) 등이 와서,"왜놈들 이 도망가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래서 우우후를 시켜 잡아다가 그 주모자 준시(俊時) 등 두 명의 머리를 베었다. 경상수사․우후 ․웅천현감․방답첨사․남도포만호․어린포만호․녹도만호가 왔 는데, 녹도만호는 곧 내어 보냈다.
11월 18일 (병술) 맑다. [양력 12월 18일]
어응린(魚應麟)이 와서,"소서행장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바다로 나갔는데 거처를 알 수 없다."고 전했다. 그래서 경상수사에게 전 령하여 이를 수륙으로 정탐케 했다. 저녁나절에 하응문(河應文)이 와서 군량 잇대는 일로 보고했다. 조금 있으니 경상수사․웅천현 감 등이 와서 의논하고 갔다.
새벽 꿈에, 어떤 사람이 멀리 화살을 쏘았고, 어떤 사람은 갓을 발로 차서 부수었다. 스스로 이것을 점쳐 보니, 멀리 활쏘는 것은 적들이 멀리 도망하는 것이요, 삭을 차서 부누는 것은 갓은 머리 위에 있는데 발길에 차 보이는 것으로서 이는 적의 괴수를 모조 리 잡아 없앨 징조라 하겠다. 저녁나절에 체찰사의 전령에, "첨지 황신이 이제 명나라 사신을 따라가는 정사(正使)가 되고, 권황 이부사(副使)가 되어 가까운 시일에 바다를 건너 갈 것이니, 타고 갈 배 세 척을 정비하여 부산에다 대어 놓아라."고 했다. 경상우후가 여기 와서 흰 무늬 돗자리 백쉰 닢을 빌려 갔다. 충청우후․ 사량만호․ 지세포만호․ 옥포만호․ 홍주판관․전 적도만호 고여우(高汝友) 등이 와서 봤다. 경상수사가 달려와서 보고 하기를, "춘원도(통영시 광도면)의 왜선 한 척이 도착하여 정박하 였다."고 했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을 뽑아 보내어 샅샅이 찾아내라고 전령했다.
꿈에 돌아가신 두 분 형님을 만났는데, 서로 붙들고 우시면서 하는 말씀이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 한들 어찌하리!"라 하셨다. 이것은 두 형님의 혼령이 천리 밖까지 따라 와서 근심하고 애달파함을 이렇게까지 한 것이니 비통할 따름이다. 또 남원의 추수를 감독하는 일을 염려하시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연일 꿈자리가 어지러운 것도 아마 형님 들의 혼령이 그윽히 걱정하여 주는 탓이라 슬픔이 한결 더하다.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 저녁나절에 능성현령 이계명(李繼命)도 상제의 몸으로 기용된 사 람인데, 와서 보고 돌아갔다. 흥양의 종 우롬금(禹老音金)․박수매(朴守每)․조택(趙澤)과 순화(順花)의 처가 와서 인사했다. 이기 윤(李奇胤)과 몽생(夢生)이 왔다. 송정립(宋廷立)․송득운(宋得運) 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저녁에 정원명(鄭元溟)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물(원균?)의 하 는 꼴을 많이 말했다. 또 부찰사(한효순)가 좌영으로 나와서 병 이라 하여 조리한다고 했다.우수사(이억기)가 편지를 보내 와 조문했다.
6월 18일 (정축)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양력 7월 31일]
아침에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종을 보내어 문안했다. 저녁나 절에 윤감(尹鑑)이 떡을 만들어서 왔다. 명나라 사람 섭위(葉 威)가 초계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나라 사람 주언룡이 일찌기 일본에 사로잡혔다가 이번에야 비로소 나왔는 데, 적병 십만 명 이 벌써 사자마(沙自麻)나 대마도에 이르렀을 것이며, 소서행장은 의령을 거쳐 곧장 전라도를 침범할 것이요, 가등청정은 경주 ․대구 등지로 옮겨 안동 등지로 갈 것이다."고 했다. 저물무렵 원수가 "사천에 갈 일이 있다."고 알려 왔다. 그래서 사복 정상명 (鄭翔溟)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더니, 원수가 "수군에 관한 일 때문에 사천으로 간다."고 하였다.
군사에 관한 일. 이 달(10월) 3일 오늘밤이 조류가 이로워 싸움을 하겠다고 총병 유정(劉綎)에게 서신으로 허가를 받았다. 주되는 일, 즉각 장수를 통솔하여 전함을 전진시키는 것은 각 고을의 군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제몸을 돌보지 않고서 곧장 왜적선에 쳐 들어가 불태웠다. 10여 척을 끌어내는데, 왜적은 산성 위에서 총포를 쏘았다. 한창 격렬히 벌어진 싸움을 생각하니, 마침 조수(潮水)가 막 빠져 나가는 것을 보고는 주되는 일이 곧장 손짓하여 병사들을 거두는 것이 마땅하므로, 앞에 있는 배들은 고함소리를 질러 하늘에까지 시끄럽도록 하였지만, 포성(砲聲)은 우레 같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여 사선(沙船) 19 척 병사를 □□ □, 무서운 것은 왜놈들에게 빼앗기는 것인데, 장수가 탈 배와 아울러 화약(火藥)으로 스스로 불을 내어 불타버렸다. 해당진에서는 왜적을 사로잡기도 하고, 진에서 눈을 잃은 병사를 빼고는 훤히 조사하여 보고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선(沙船) 25척, 호선(號船) 77척, 비해선(飛海船) 17척, 잔선( 船) 9척 (모두 126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