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는 생전에 영아행(嬰兒行)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보살의 다섯 가지 행 중 하나로 어린 아이 같은 지혜와 행동을 비유한 것이다. 원래 보살의 지혜는 수승하나 지혜가 얕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그들과 같이 작은 선행을 하는 것이다. 무학의 영아행은 지공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무학대사의 행적을 보면 스승인 지공과 혜근, 특히 혜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어 임제선풍을 견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일단 그의 출가가 이미 송광사여서 수선사 계통의 임제종(臨濟宗) 간화선(看話禪)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승 혜근이 조주(趙州)의 돌다리 쌓는 화두를 꺼내어 선문답을 던졌을 때 조주의 수좌도 답하지 못했던 것을 무학이 받아 답했다는 것은 그 깨달음의 경지가 높았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혜근에게 임제선풍을 사사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무학대사는 수선사 계통의 임제종 간화선풍 위에 지공의 선사상을 수용하여 조선 초 불교계의 선풍을 진작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무학대사의 대표적 문도로 기화(己和)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외에 『인공음(印空吟)』 이 있어 목은 이색(李穡)이 그 서문과 발문을 썼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조선 건국초. 송도 도창관에서 등극한 이성계는 조정 대신들과 천도를 결정하고 무학대사에게 도읍지를 찾아달라고 청했다. 무학대사는 옛 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알려진 계룡산으로 내려가 산세와 지세를 살폈으나 아무래도 도읍지로는 적당치 않았다. 발길을 북으로 옮겨 한양에 도착한 스님은 봉은사에서 하룻밤을 쉬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뚝섬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니 넓은 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방으로 지세를 자세히 살핀 스님은 그곳이 바로 새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음, 땅이 넓고 강이 흐르니 과연 새 왕조가 뜻을 펼만한 길상지로구나.」 무학대사는 흐뭇한 마음으로 걸어오는데 한 노인이 소를 몰면서 소리쳤다. 「꼭 무학 같구나. 왜 바른 길로 가지 않고 굳이 굽은 길로 들어서느냐?」 순간 무학대사의 귀가 번적 뜨였다. 고개를 들고 돌아보니 길 저쪽으로 소를 몰고 가는 한 노인이 채찍으로 소를 때리며 꾸짖고 있었다. 스님은 얼른 노인 앞으로 달려갔다. 「노인어른, 지금 소더러 뭐라고 하셨는지요?」 「미련하기가 무학 같다고 했소.」 「그건 무슨 뜻의 말씀이신지요? 」 「아마 요즘 무학이 새 도읍지를 찾아다니는 모양인데, 좋은 곳 다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니 어찌 미련하고 한심한 일이 아니겠소.」 무학대사는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님은 공손히 합장하고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제가 바로 그 미련한 무학이옵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곳이 좋은 도읍지라고 보았는데 노인장께서 일깨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더 좋은 도읍지가 있으면 이 나라 천년대계를 위하여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은 채찍을 들어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 10리를 더 들어가서 주변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시오.」 「노인어른, 참으로 감사합니다.」 무학대사가 정중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순간, 노인과 소는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스님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북쪽을 향해 10리쯤 걸었다. 그때 스님이 당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경복궁 자리 근처였다. 「과연 명당이로구나.」 삼각산, 인왕산, 남산 등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땅을 보는 순간 무학대사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운 스님은 그 길로 태조와 만나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여 도성을 쌓고 중궐을 짓기로 했다. 「스님, 성은 어디쯤을 경계로 하면 좋겠습니까?」 태조는 속히 대역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북쪽으로는 삼각산 중바위 밖으로 도성을 축성하십시오. 삼각산 중바위(인수봉)는 노승이 5백 나한에게 예배하는 형국이므로 성을 바위 밖으로 쌓으면 나라간 평안하고 흥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학대사의 뜻과는 달리 조정의 일파는 이를 반대, 인수봉안으로 성을 쌓아야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태조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존경하는 스님의 뜻을 따르고 싶었으나 1등 개국공신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학대사와 대신들의 도성 축성에 관한논쟁은 날이 갈수록 심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인수봉 안으로 성을 쌓으면 중바위가 성만을 넘겨다보는 형국이므로 불교가 결코 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 역시 인수봉안으로 성을 쌓아야 유교가 흥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으므로 무학대사 의견에 팽팽히 맞섰던 것이다. 입장이 난처해진 태조는 천재를 지내 결정키로 했다.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낸 이튿날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봄볕에 다 녹아내리는데 축성의 시비가 되고 있는 인수봉 인근에 마치 선을 그어 놓은 듯 눈이 녹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 등 대신들은 이 이야기를 태조에게 즉시 고하고 이는 하늘의 뜻이므로 도성을 인수봉 안으로 쌓아야 한다고 거듭 주청했다. 「거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그 선대로 성을 쌓도록 하시오.」 이 소식을 들은 무학대사는 홀로 탄식했다. 「억불의 기운이 감도니 이제 불교도 그 기운이 다해가는구나.」 성이 완성되자 눈이 울타리를 만들었다 하여 눈「설」자와 삥둘러 쌓는다는 울타리「원」자를 써서. 「설울」이란 말이 생겼고 점차 발음이 변하여「서울」로 불리어졌다는 설도있다. 그리고 노인이 무학대사에게 10리를 더들어가라고 일러준 곳은 갈왕자와 십리를 써서 왕십리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소를 몰고 가다 무학대사의 길을 안내한 노인은 바로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의 후신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왕십리에 속했던 일부지역이 도선동으로 분할됐다. 도선동은 1959년부터 행정동으로 불리다가 1963년 법정동이 됐다. 왕십리 청련사 부근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바위터가 있었고 주위에는 송림이 울창했다고 하나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청련사 밑에는 무학과 발음이 같고 글씨는 다른 청련봉에서 도선국사가 수도했다는 전설도 있어 왕십리는 도선·무학 두 스님의 인연지인 것이 같다.
1392년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1][2]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3]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4]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5]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2][6]
旣醉以酒(기취이주)-임금이 내리신 술 나 이미 취했네
旣飽以德(기포이덕)-임금의 큰 덕에 배가 이미 부르다네
君子萬年(군자만년)-원컨대 우리 임 천년만년 사시고
介爾景福(개이경복)-큰 복 누리사와 만수무강하옵소서
[출처: 중앙일보] <한자여행>景福-임금의 덕과 만수무강을 기원
253 詩經-大雅-生民之什기취(旣醉)-이미 취하여
[대아(大雅) / 생민지십(生民之什) 제3편 기취8장(旣醉八章)]
(1장)
旣醉以酒ㅣ오 旣飽以德호니 (기취이주ㅣ오 기포이덕호니
君子萬年에 介爾景福이로다군자만년에 개이경복이로다 賦也ㅣ라)
이미 술에 취했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가 만년토록 네 큰 복을 크게 하리로다. ○賦也ㅣ라 德은 恩惠也ㅣ라 君子는 謂王也ㅣ라 爾는 亦指王也ㅣ라
○此는 父兄所以答行葦之詩라 言享其飮食恩意之厚하고 而願其受福이 如此也ㅣ라
○부라. 덕은 은혜라. 군자는 왕을 이름이라. 이는 또한 왕을 가리킴이라.
○이는 부형들이 행위의 시에 답한 것이라. 그 음식과 은의의 두터움을 누리고, 그 복을 받음이 이와 같도록 원함이라.
(2장)
旣醉以酒ㅣ오 爾殽旣將하니 (기취이주ㅣ오 이효기장하니
君子萬年에 介爾昭明이로다 군자만년에 개이소명이로다 賦也ㅣ라)
이미 술에 취했고, 네 안주를 이미 올리니
군자가 만년토록 네 밝음을 크게 하리로다. ○賦也ㅣ라 殽는 俎實也ㅣ라 將은 行也ㅣ니 亦奉持而進之意라 昭明은 猶光大也ㅣ라
○부라. 효는 제기에 담아놓은 것이라. 장은 행함이니 또한 받들어 올리는 뜻이라. 소명은 광대함과 같으니라.
○부라. 융은 밝음의 성함이니 『춘추전』에 가로대 밝되 환하지는 않음이라. 랑은 허명이라. 영종은 선종이니 (『서경』) 「홍범」에 이른바 고종명이라. 『고기물명』에 이른바 영종영명이 이것이라. 숙은 비로소라. 공시는 임금의 시동이라. 주나라가 왕이라고 일컫는데 시에 다만 공시라고 이른 것은 대개 그 옛날로 인함이니 마치 진나라가 이미 황제라고 일컬으면서 그 남녀를(아들딸을) 공자와 공주라고 일컫는 것과 같으니라. 가고는 좋은 말로써 고한다는 것이니 복된 말을 이름이라. 대개 그 마침을 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시작을 잘하니 지금 진실로 마침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이미 그 시작이 있으니 이에 왕의 시동이 이로써 고했느니라.
(4장)
其告維何오 籩豆靜嘉ㅣ어늘 (기곡유하오 변두정가ㅣ어늘
朋友攸攝이 攝以威儀로다붕우유섭이 섭이위의(아)로다 賦也ㅣ라)
그 고함이 무엇인고. 제기가 정결하고 아름답거늘
붕우가 돕는 바가 위의로써 하도다. ○賦也ㅣ라 靜嘉는 淸潔而美也ㅣ라 朋友는 指賓客助祭者ㅣ니 說見楚茨篇하니라 攝은 檢也ㅣ라
○부라. 효자는 주인을 잇는 (큰) 아들이라. 『의례』에 제사를 마침에 유사가 술을 들고 올리니라. 궤는 다함이고, 류는 선함이라.
○너의 위의가 이미 그 마땅함을 얻고, 또 효자가 있어서 술잔을 들어올리니, 효자의 효도가 정성스럽고 끊어지지 아니하면 마땅이 길이 너에게 선으로써 주리라. 동래여씨 가로대 군자가 이미 효도하고 뒤를 이은 아들이 또 효도하니 그 효가 가히 근원하고 근원하여 다하지 않음을 이르도다.
한하운 시인은 그날의 소감을 ‘육여사님 수행기’라는 글로 남겼다.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그해 8월 29일, 전국 87개 나환자정착촌 대표들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여성회관에 모여 고인의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과 구라사업(救癩事業·나환자구제사업)을 기리는 ‘육영수 여사 추모회’를 가졌다. 한하운 시인은 그 자리에서 추모시를 낭송했는데 그 시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의 역사를 살펴보고, 기념관을 통해 조국근대화를 향한 그분의 투혼과 지존의 내외분이 총탄에 의해 삶을 마감한 영욕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동영상을 통해 경호대장 차지철과 중정부장 김재규의 갈등이 10.26 사건의 빌미가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육사 생도들을 거리 행진에 동원하여 두터운 신뢰감을 준 것도.
1979년10월 26일 금요일 저녁 7시 41분, 신재순이 심수봉의 반주에 맞춰 '사랑해'라는 노래를 부르던 중 김재규가 발터 PPK를 꺼내 쏘자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맞혔고, 차지철은 실내 화장실로 달아났다. 이어 박정희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박정희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 총소리가 들리는 순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대기실에서 대통령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대통령 경호처장 정인형을 차례로 쏘아 죽였고,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역시 경비원과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원을 죽였다.
김재규가 총구를 차지철에게 조준했고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계속 저항하는 가운데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이 격발불량을 일으켜 고장났다. 그때 정전되었으며 김재규는 연회장을 빠져나가 1층 로비로 갔다.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박선호가 나타났고 김재규는 고장난 발터를 박선호의 스미스 앤 웨슨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와 맞바꾸었다.
박선호는 탐색하러 갔고 김재규는 연회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심수봉과 신재순이 총에 맞아 쓰러진 박정희를 부축하고 있었다. 차지철은 화장실에 숨었다 다시 나와 경호원을 찾으러 나가려는 순간 다시 김재규가 들어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장을 던져 총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김재규는 이를 피한 후 차지철의 폐와 복부를 향해 총을 쏘아 차지철이 맞고 그대로 엎어졌다. 김재규는 박정희 앞으로 다가와 총을 겨누었고 심수봉과 신재순은 도망쳐 숨었다. 김재규는 쓰러진 박정희의 후두부에 총을 쏘았다. 오른쪽 귀 윗부분에서 들어간 총알은 지주막을 꿰뚫고서 박정희의 왼쪽 콧잔등 밑에 박혔다. 머리 총상은 치명상이었다.
[의견] 벌받는 기분으로 비좁아 터진 전시관 내부를 돌아야 하는 협소한 박정희대통령기념관도 하단의 노벨평화상기념관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기념관 전용의 전시공간을 마련할 날을 기다려 본다. 그분의 부정적 평가에 침을 뱉더라도 한국 경제를 세계 10위권에 진입시키는 원동력을 마련한 그분의 근대화 치적 역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에 부합한다.
따라서 건물 아래의 표지판도 '기념관' 하나면 족하다. 부대시설은 안내판을 마련하면 된다. 도로에서 보면 유독 '어깨동무'만 돋보이게 여러 가지 색채의 글씨로 크게 썼다. 내게만 행정 당국의 편가르기 심뽀가 보이는건가? 그 건물이 그렇게 못마땅하면 침을 뱉을 지나가시라.
뭣보다도 도로에 기념관의 진입로 안내표지판부터 설치하고, 서울 관광코스에 넣는 일도 역사 공부에 도움이 되겠다. 나는 첨엔 거눌 유지 운영비를 충당하려 '어개동무' 출판사를 세들인 것쯤으로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