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능동재사 | 안동김씨 태장재사 |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안동권씨 능동재사

m.blog.naver.com/andongcity00/221754721018

 

안동권씨 능동재사 고려 삼태사 중 권행장군의 묘가 있는 곳 :: 안동여행, 안동문화재, 능동재사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의 묘제를 위한 건물인 능동재사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재사란 이름이 붙음으...

blog.naver.com

 

 안동김씨 태장재사

m.blog.naver.com/blogtotal/221717778803

 

안동 갈만한곳 안동김씨 태장재사

안동 갈만한곳 안동김씨 태장재사​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는 건물로 경상북도 민속문화제 제26호로 지...

blog.naver.com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 본관안동金 權 張氏 3태사의 자녀들끼리는 혼사를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한다.

 

안동권씨 능동재사 | 안동김씨 태장재사 | 안동 장태사공 성곡재사

www.youtube.com/watch?v=wtQ37zukDvw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고려의 개국공신 김선평, 권행, 장정필 3명의 태사(太師)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www.tsm3.or.kr/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tablet

 

삼태사제향 > 삼태사의 위패와 배향 1 페이지

고려시대는 삼태사(三太師)의 위패를 부(府)의 삼공신묘(三功臣廟)에 모시다가 조선 중종(中宗,1542)때부터 이곳 태사묘(太師廟)에 모셔왔다. 조선 광해군(光海君, 1608) 때에 세 성씨의 대표 권함(

www.tsm3.or.kr

 

 

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D%83%9C%EC%82%AC%EB%AC%98

 

안동 태사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 3명의 태사(太師)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74년 12월 10일

ko.wikipedia.org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문동에 있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정필 3명의 태사(太師)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의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건국시 후백제 견훤을 토벌한 개국공신 김선평·권행·장정필 등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1540년(중종 35년)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현위치에 사묘를 건립하였다. 1556년 안동부사로 부임한 권소는 권씨 성을 가진 수석 호장(戶長)에게 관리를 맡겨 매년 제사를 받들게 하는 등 제도화에 힘썼다.

1950년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그 후 복원하였다.

부속건물은 보물각과 숭보당, 동·서재, 경모루(敬慕樓), 안묘당, 차전각 등이 있다. 정문 경모루로 누각건물인데, 이곳을 들어서면 전면에 숭보당(강당)이 있고,좌우로 동·서재가 있으며, 그 뒤쪽으로 태사묘(사당)가 있다. 보물각에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三太師)의 유물 12종 22점이 보관되어 있다. 뜰에는 삼공신비(三功臣碑)가 세워져 있다.

 

김선평(金宣平), 구안동

신라 효공왕 5년 흥덕궁에서 태어났다. 춘추 26세에 고창의 성주가 되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지리상 중요한 성에 26세의 젊은 성주였다면 필시 진골이었을 것이니 효공왕의 왕자로 추정된다. 김선평은 권행, 장정필과 함께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물리쳤고 이에 왕건은 병산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김선평에게 대광(정1품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현재 김선평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ko.wikipedia.org/wiki/%EA%B9%80%EC%84%A0%ED%8F%89

 

김선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작위 고창의 문신 재위 ? 전임 안동 김씨(安東 金氏) 후임 ? 이름 휘 김선평(金宣平) 별호 ? 연호 없음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신상정보 출생일 생년 미상(生年 未詳

ko.wikipedia.org

 

ko.wikipedia.org/wiki/%EA%B5%AC_%EC%95%88%EB%8F%99_%EA%B9%80%EC%94%A8

 

구 안동 김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구 안동 김씨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 안동 김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구 안동 김씨 (舊 安東 金氏)관향경상북도 안동시시조김숙승

ko.wikipedia.org

 

시조 김일긍(金日兢)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태사대광(太師大匡)를 역임했다고 한다.

후손 김효인(金孝印)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토벌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283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후손들이 김방경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 혹칭 상락 김씨(上洛金氏)라고도 한다.

 

kydong77.tistory.com/20580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

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A%B9%80%EC%94%A8 안동 김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

kydong77.tistory.com

 

 

권행(權幸)

권행은 원래 신라의 종성으로 왕실 성씨인 경주 김씨이다.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자살하게 한 데 대해 분개하던 중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물리쳤다. 일명 병산전투에서 김행의 공을 크게 여긴 왕건은 김행에게 수훈이 크다 하여, 능병기달권 즉, “기미에 밝고 정세를 밝게 판단해 권도에 통달했다”라고 하며 권씨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왕건은 이후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하고, 고창군 별장이었던 권행에게 안동부를 식읍으로 주었다. 또한 왕건은 권행에게 장정필과 함께 대상(고려 초기에 둔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의 벼슬을 내렸다. 현재 권행의 묘는 안동 서후면 성곡동 천등산에 위치하고 있다.

 

ko.wikipedia.org/wiki/%EA%B6%8C%ED%96%89

 

권행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A%B6%8C%EC%94%A8

 

안동 권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권씨 (安東 權氏)관향경상북도 안동시시조권행(權幸)주요 인물권수평, 권단, 권렴, 수비 권씨, 권한공, 권중화, 권근, 권우, 권담, 권제, 권규, 권총, 권람,

ko.wikipedia.org

 

 

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C%9E%A5%EC%94%A8

 

안동 장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장씨(安東 張氏)는 경상북도 안동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장정필(張貞弼)이 고려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워 대상(大相)에 임명되었다. 화

ko.wikipedia.org

 

장정필(張貞弼)

장길은 자는 영보, 호는 포음, 시호는 충헌이다. 나중에 정필(貞弼)로 개명하였다. 장길은 장보고 장군의 고손이다. 장보고 장군의 증손이자 장정필의 아버지인 장원은 대사마대장군으로 당의 절강성 소흥부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아들 장길을 얻었다. 당나라가 혼란해지자 장원은 5살인 장정필을 데리고 강원도 강릉으로 이주하였다. 장길이 18세 때 정조사(정월 초하룻날 새해를 축하하러 중국에 가던 사신)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까지 알려져, 한때 벼슬이 이부상서에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의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장정필은 서기 930년 고창 성주인 김선평, 판관(외직무관으로 5품에서 6품) 김행과 함께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의 군대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삼한벽상에 책록되고 삼중대광으로 아부공신에 녹권되어 태사 및 영운사에 오르고 대상(고려 초기에 둔 16등급 가운데 일곱째 품계)의 벼슬을 받았으며 안동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현재 장정필의 묘는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https://kydong77.tistory.com/22378

 

구안동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行列表)

중시조 忠烈公 김방경(金方慶)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174 김방경(金方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

kydong77.tistory.com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김씨 사연

https://www.youtube.com/watch?v=JGjV_APTPA0

 

[구(舊)안동김씨]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外

https://www.youtube.com/watch?v=TAk3P_I33Js

 

https://kydong77.tistory.com/22378

 

구안동 중시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구안동 김씨와 신안동 김씨의 항렬표(行列表)

중시조 忠烈公 김방경(金方慶)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174 김방경(金方慶)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https://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

kydong77.tistory.com

 

남산 안중근기념관공원

 

인천대공원

 

 

http://www.ulji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279

 

안동김씨(安東金氏)편 - 김알지계의 신라 왕족 - 울진신문

[조회수 : 1871] 민족의 지도자 白凡을 배출 ▶신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의 시향(음력10월10일)에 참석한 울진 종친회원들이 시조묘소에서 기념촬영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www.uljinnews.co.kr

안동김씨(安東金氏)는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

고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뉜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안동의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은열의 둘째 아들로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와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시중,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구안동’은 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흔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윤(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선의 아들 승용(承用)은 대제학, 승택(承澤)은 평장사, 영돈(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영후(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사렴(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 : 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 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 : 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 수동(壽童), 이조판서 찬(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시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휘(徽), 숙종 때의 시인 득신(得臣 : 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응하(應河)와 훈련대장 응해(應海) 형제, 훈련대장 중기(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구(九)가 있다.

출처 : 울진신문(http://www.uljinnews.co.kr)

[운영자 첨가]

김구 선생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된 시호 충렬(忠烈)인 중시조(中始祖) 상락공(上洛公)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좌의정을 역임한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시다. 



 

ko.wikipedia.org/wiki/%EC%95%88%EB%8F%99_%EA%B9%80%EC%94%A8

 

안동 김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동 김씨(安東 金氏)는 경상북도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를 달리 하는 구(舊) 안동 김씨와 신(新) 안동 김씨가 있다. 구 안동 김씨[편집]

ko.wikipedia.org

 

구 안동 김씨

이 부분의 본문은 구 안동 김씨입니다.

구(舊) 안동 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金叔承)이다.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이 고려 고종 때 몽골이 침략하자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서 위도(葦島)로 들어갔고, 삼별초를 토벌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283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ko.wikipedia.org/wiki/%EA%B5%AC_%EC%95%88%EB%8F%99_%EA%B9%80%EC%94%A8

 

구 안동 김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구 안동 김씨에 관한 것입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신 안동 김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구 안동 김씨 (舊 安東 金氏)관향경상북도 안동시시조김숙승

ko.wikipedia.org

《김씨 분관록》과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등에 의하면 시조 김일긍(金日兢)은 경순왕의 후예로 고려조에 태사대광(太師大匡)를 역임했다고 한다. 일운 시조의 아버지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라 한다.

후손 김효인(金孝印)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되었다. 그의 아들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토벌한 공으로 수태위(守太尉)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올랐으며, 1283년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로 치사(致仕)하였다.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다. 후손들이 김방경을 중시조(中始祖)로 모시고 있다. 혹칭 상락 김씨(上洛金氏)라고도 한다.

 

ko.wikipedia.org/wiki/%EA%B9%80%EB%B0%A9%EA%B2%BD

 

김방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 원종 때부터 봉공한 무신이자 문신이다.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은

ko.wikipedia.org

 

김방경(金方慶, 1212년 ~ 1300년)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 말기 원종 때부터 봉공한 무신이자 문신이다. 자는 본연(本然)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추증되고,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안동(安東)을 식읍으로 받아 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lhyunn&logNo=221507100755&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 본관 분파 족보 항렬 돌림자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 본관 분파 족보 항렬 돌림자 1.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blog.naver.com

 

www.surname.info/gim/an_dong1.html

 

성씨정보 | 구 안동김씨 (舊安東金氏) -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 www.Surname.iNFO

구 안동 김씨 (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시조 김숙승(叔承)은 신라 경순왕(敬順王) 의 넷째 아들 김은열(殷說)의 둘째 아들로 고려 때

www.surname.info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순(淳) ○근(根) ○병(炳) ○규(圭) ○진(鎭) ○한(漢) ○동(東)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현(顯) ○년(年) ○일(鎰) ○구(求) ○모(模) ○연(然) ○배(培)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선(銑) ○원(源) ○영(榮) ○사(思) ○준(埈) ○선(善) ○택(澤)
43세 44세 45세        
○식(植) ○환(煥) ○철(喆) - - - -

*운영자는 대동 항렬표에 따르면 28세손이다.

 

항렬표(行列表)

1) 통일(統一)된 항렬표(行列表)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원(源) 영(榮) 묵(默) 재(在) 회(會) 태(泰) 식(植) 용(容) 교(敎) 종(鍾)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우(雨) 병(秉) 희(熙) 기(基) 현(鉉) 수(洙) - - - -

*운영자는 통일된 항렬표에 따르면 25세손이다.

 

 

신 안동 김씨

이 부분의 본문은 신 안동 김씨입니다.

신(新) 안동 김씨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 말 고창성주(古昌城主)였는데, 930년(고려 태조 13년) 고창군(高昌郡)에서 권행(權幸), 장길(張吉)과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대광(大匡)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말 세도정치의 중심으로 종묘배향공신을 무려 6명이나 배출했다. 이밖에도 정승 15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 호당 1명, 청백리 1명을 배출하였다.

조선 인조 때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김상용이 우의정을 지냈고, 김상헌은 좌의정을 지냈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순조 비 순원왕후헌종 비 효현왕후(孝顯王后), 철종 비 철인왕후에 이르기까지 세도가문이 되었다.

본관

안동은 경상북도 중북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고창녕국(古昌寧國)이었는데, 신라에 정복되어 고타야군(古陀耶郡)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古昌郡)으로 개칭되었다. 930년(고려 태조 13년)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 장길(張吉)이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980년(경종 5년) 영가군(永嘉郡)으로 개칭되었다. 1197년(명종 27)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204년(신종 7)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308년(충렬왕 34) 복주목(福州牧)으로 개편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 온 공민왕을 섬긴 공으로 다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의 토성(土姓)으로 (權)·김(金)·강(姜)·조(曺)·(張)·고(高)·이(李) 7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경상북도 안동군으로 개편되었고, 1963년 안동시로 승격되었다.

 

 

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345812486&qb=5rqQwoA=&enc=utf8&section=kin.qna&rank=120&search_sort=0&spq=0

 

안동 김씨 족보및 무슨파 인지 궁금해요

제가 안동 김씨인데요아버님이 조실부모 하시고 성북구 일대에서 살아오셨습니다.(삼선교, 돈암동, 동소문동, 정릉 등등)증조부 성함이 김 달 순조부 성함이 김(金) 영(英) 식(植)아...

kin.naver.com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중시조(中始祖) 김방경(金方慶)은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世孫)

  ㅡ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封)해짐.

2.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유래(由來)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은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손자(孫子)이며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高麗) 때에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중시조(中始祖) 김방경(金方慶)은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世孫)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高麗) 원종 때 명장(名將)으로 삼별초(三別抄)의 난(難)과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定難定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에 치사(致仕)되었다. 그 후(後)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封)해졌다. 그 후(後) 후손(後孫)들이 김숙승(金叔承)을 시조(始祖)로,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1 ○源(원) 22 榮(영)○ 23 ○黙(묵) 24 在(재)○ 25 ○會(회)
26 泰(태)○ 27 ○植(식) 28 容(용)○ 29 ○敎(교) 30 鍾(종)○
31 ○雨(우) 32 秉(병)○ 33 ○熙(희) 34 基(기)○ 35 ○鉉(현)
36 洙(수)○ 37 ○동(東) 38 연(然)○ 39 ○혁(赫) 40 진(鎭)○
41 ○영(泳) 42 근(根)○ 43 ○병(炳) 44 효(孝)○ 45 ○용(鏞)
46 택(澤)○ 47 ○목(穆) 48 희(熹)○ 49 ○규(圭) 50 련(鍊)○
51 ○준(浚) 52 - 53 - 54 - 55 -

​파별 항렬표 (2001. 3. 13. 문온공파 영환씨 제공)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

 중시조 김방경(상락공(上洛公))

ㅡ 좌의정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도 족보상으로는 위 항렬표와 동일함.

 

*익원공파 - 좌의정 사형(士衡)

ko.wikipedia.org/wiki/%EA%B9%80%EC%82%AC%ED%98%95

 

김사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사형(金士衡, 1341년 ~ 1407년)은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1] 본관은 구 안동(舊 安東)이며 자(字)는 평보(平甫), 호(號)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ko.wikipedia.org

 

*익원공파 - 좌의정 사형(士衡) 계보

ㅡ 구안동의 시조 김숙승(金叔承) 

ㅡ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

ㅡ 좌의정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운영자는 구안동 항렬표로는 25세손이고, 신안동 항렬표로는 28세손, 통일된 항렬표로는 25세손으로 구안동에 속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한성판윤을 역임하신 조부께서는 초명에 ○黙(묵) 字를 쓰시다가 관계에 진출하게 되어 판윤에 오르셨다. 이때 신안동 분들과 항렬을 따지기 쉽게 부득이 신안동의  진(鎭) 를 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야욕이 법적으로 본격화하고 조선 국왕이 무력했던 을사조약 직전 진도로 귀양가신 걸 보면 조부님께서는 조선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족보 표기]

*조부 O묵(默)[初名, O鎭]

* 父 : 在o [初名,o] 

o會[初名,o東

* 운영자의 후손들은 아들의 작명시, 위의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적용이 바람직하다.  이 항렬표를 다른 자료에서 확인하여 아래에 재록한다.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숙승(金叔承)

2.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유래(由來) :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은 신라(新羅)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손자(孫子)이며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며 고려(高麗) 때에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중시조(中始祖) 김방경(金方慶)은 시조(始祖) 김숙승(金叔承)의 6세손(世孫)이며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효인(金孝印)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高麗) 원종 때 명장(名將)으로 삼별초(三別抄)의 난(難)과 왜구(倭寇)를 토평(討平)한 공(功)으로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定難定遠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子師)에 치사(致仕)되었다. 그 후(後) 상락군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封)해졌다. 그 후(後) 후손(後孫)들이 김숙승(金叔承)을 시조(始祖)로,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中始祖)로 삼고 안동(安東)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구 안동 김씨(舊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재록합니다.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21 ○源(원) 22 榮(영)○ 23 ○黙(묵) 24 在(재)○ 25 ○會(회)
26 泰(태)○ 27 ○植(식) 28 容(용)○ 29 ○敎(교) 30 鍾(종)○
31 ○雨(우) 32 秉(병)○ 33 ○熙(희) 34 基(기)○ 35 ○鉉(현)
36 洙(수)○ 37 ○동(東) 38 연(然)○ 39 ○혁(赫) 40 진(鎭)○
41 ○영(泳) 42 근(根)○ 43 ○병(炳) 44 효(孝)○ 45 ○용(鏞)
46 택(澤)○ 47 ○목(穆) 48 희(熹)○ 49 ○규(圭) 50 련(鍊)○
51 ○준(浚) 52 - 53 - 54 - 55 -

파별 항렬표 (2001. 3. 13. 문온공파 영환씨 제공)  

군사공파 : 21세0相, 22세應0 23세0默, 24세在0, 25세0鏞, 26세灐0, 27세0植, 28세景0

도평의공파 : 21세0裕, 22세 壽0 23세0鍾 24세浩0, 25세0秀, 26세熙0, 27세0相

제학공파 : 21세由0, 22세0年, 23세0浩, 24세相0, 25세0應, 26세奎(泰)0, 27세0植, 28세容0

안렴사공파 : 21세0基, 22세好0, 23세思0, 24세0演, 25세0卿, 26세0振, 27세起0,

서운관정공파 : 21세0憲, 22세會0, 23세0善, 24세在0, 25세0永, 26세圭0, 27세0浩, 28세周0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에 대(對)하여

1.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시조(始祖) : 김선평(金宣平)

2.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유래(由來) :

원 비조(鼻祖) 김알지(金閼智)의 후손(後孫)이며 경순왕(敬順王)의 후손(後孫)인 신안동김씨(新安東金氏) 시조(始祖)는 김선평(金宣平) 36세 때 고창군주(古昌郡主)로 군병(郡兵)을 일으켜,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견훤(甄萱)을 병산(甁山)에서 대파(大破), 그 훈공(勳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아부(太師亞父)에 올랐다.

'태사공(太師公)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보면, 그는 신라(新羅)말에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어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토벌할 때 공(公)이 권행(權幸)·장길(張吉) 등(等)과 더불어 군(郡)을 들어 귀부(歸附), 병산(甁山)의 승첩(勝捷)을 있게 했다고 하였다.

그 공(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號)를 주고 고창(古昌)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昇格)시켰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삼게 되었다.

안동(安東)(신(新))김씨(金氏)의 선계(先系)는 신라김씨(新羅金氏) 곧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나 김알지계(金閼智系)인지 혹(惑)은 경순왕계(敬順王系)인지는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라김씨선원보(新羅金氏璿源譜)'에서도 그의 상계(上系)를 알 수 없다 하여 김선평(金宣平)을 관조(貫祖)라고 표시(表示)하였다.

또 하나 세계정오(世系正誤)에 관한 문제(問題)다. 시조(始祖)공 이후(以後)의 소목(昭穆)이 한동안 7세 김득우(金得雨)사이가 분명(分明)치 않아 전농정공(典農正公) 김득우(金得雨)를 기세조(起世祖)로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전농정공(典農正公)의 호장(戶帳)이 발견(發見)되어 공수부정공(公須副正公)까지의 계대(系代)가 알려져 '기해구보(己亥舊譜)'이후(以後) 기세조(起世祖)를 공수부정공(公須副正公)으로 하고 있다.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순(淳) ○근(根) ○병(炳) ○규(圭) ○진(鎭) ○한(漢) ○동(東)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현(顯) ○년(年) ○일(鎰) ○구(求) ○모(模) ○연(然) ○배(培)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선(銑) ○원(源) ○영(榮) ○사(思) ○준(埈) ○선(善) ○택(澤)
43세 44세 45세
○식(植) ○환(煥) ○철(喆) - - - -

항렬표(行列表)

1) 통일(統一)된 항렬표(行列表)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원(源) 영(榮) 묵(默) 재(在) 회(會) 태(泰) 식(植) 용(容) 교(敎) 종(鍾)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우(雨) 병(秉) 희(熙) 기(基) 현(鉉) 수(洙) - - - -

제학공파 항렬표(行列表)

세(世) 21 22 23 24 25
항렬자(行列字) 유(由)○ ○년(年) ○호(浩) 상(相)○ ○응(應)
세(世) 26 27 28 - -
항렬자(行列字) 규(奎)○
태(泰)○
식(植) 용(容) - -

*이름은 대체로 항렬자를 따랐으니 본관이 안동인 김가분들은 위의 항렬표를 참고 바랍니다.

 

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105&docId=302927226&qb=5rqQwoA=&enc=utf8&section=kin.qna&rank=178&search_sort=0&spq=0

 

안동김씨 돌림자

제 4대조 할아버님은 김복한 할아버님이구요3대조 할아버님께선 '동'2대조할아버님께선 '현'할아버지께서는 '중' 자 돌림이시고아빠는 '일'자 돌림이십니다저는 여자아이기도 하고해서 제...

kin.naver.com

 

 

ko.wikipedia.org/wiki/%EA%B9%80%EA%B5%AC

 

김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ko.wikipedia.org

김구(金九, 1876년 8월 29일 (음력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는 대한제국의 승려교사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정치인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치인, 남북통일 활동가이다. 항일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이끌었고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김방경의 25대손으로 태어났다.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로 활동하다가 부친 3년상을 탈상한 뒤엔 기독교에 입문하였다.[1][2]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을 역임했고, 안악양산학교, 재령보강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안악양산학교 재직 중 안악사건에 연루, 조선총독부에 연행되어 5년간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 정부(9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개편)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내무부위원, 내무부 경무국장 등을 지냈다. 임정 내 좌우이념 갈등이 극심했을 때 임정고수파(현상유지파)의 입장에 있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 박희광 등을 통한 친일파 암살 및 주요공관 파괴, 군자금 모집 등을 비밀리에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노동국 총판, 국무령, 내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등을 거쳤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거윤봉길 의거 등을 지휘하였다. 이후 임정은 일본 제국의 표적이 되어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관내 여러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외무부장, 재무부장 등을 지냈다. 1938년 이운한의 총격을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조직하였고, 1940년 10월 9일부터 1947년 3월 3일까지 임정 주석을 역임하였다.[3][4][5][6][7]

광복 후에는 이승만과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임정 법통 운동을 추진하였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9년 5월 19일 민족진영 3영수(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합작이 태동하였으나,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격에 서거하였다.

본관은 구 안동(安東), 자(字)는 연하(蓮下), 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는 미천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정의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범부의 ‘범(凡)’ 자를 따서 지었다.[8] 초명은 창암(昌巖)이고, 19세 때 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었다가, 37세(1912년)에 거북 '구'(龜)였던 이름을 아홉 즉 9인 '구'(九)로 바꾸었다. 그 밖에 환속 이후의 이름인 두래(斗來), 임정 이동시기에 사용한 가명인 장진(張震), 장진구(張震球)도 있었다. 젊어서 동학교도였고, 불교에 귀의해서 법명 원종(圓宗)을 얻은 승려였고, 부친상 탈상 후 감리교에 입교하였으며, 사후에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리고 백범 선생님 이라고 불렸다.

출생과 가계 (1876 ~ 1949)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基洞)[9][10][11][12] 에서 (구)안동 김씨 김순영(金淳永, 당시 24세), 현풍곽씨 곽양식(郭陽植)의 딸 곽낙원(郭樂園, 당시 17세) 부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7대 독자로 알려져 왔으나 그의 아버지 김순영은 4형제였고 할아버지 김만묵, 증조부 김영원에게도 각각 형제가 있었다.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충렬공 김방경의 25대손이며, 익원공 김사형의 21대손이었다. 

 

mediahub.seoul.go.kr/archives/1287924?tr_code=snews

 

남산 '역사문화길' 산책…민족의 얼을 찾아서

서울시대표소통포털 - 내 손안에 서울

mediahub.seoul.go.kr

 

[남산 역사문화길] 백범기념관 광장에 가면 김구 선생의 동상도 만날 수 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는 의미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자신을 취조했던 검찰관에게 써 준 글귀다.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남산 둘레길 역사문화길에 조성된 백범광장 ⓒ이봉덕

남산둘레길 역사문화길에 백범광장 공원이 넓게 조성돼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한 애국 지사를 위해 아름답게 단장된 널따란 공원에 들어오니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남산 백범광장에 세워진 백범 김구 동상 ⓒ이봉덕

백범 김구는 한국 독립 운동가이고 교육자이자 정치가다. 그의 항일구국 운동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상이 설립되었다. 동상 앞으로 넓은 잔디밭이 조성돼 있고 남산으로 오르는 길과 서울 한양도성 길이 있다. 뜨거운 햇빛 아래였지만 꼼꼼하게 비문을 읽어 내렸다. 읽는 동안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0528

 

김좌진(金佐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encykorea.aks.ac.kr

 

 

kydong77.tistory.com/20583

 

안동 태사묘(安東 太師廟) - 金宣平, 權幸, 張貞弼(장정필)

www.tsm3.or.kr/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tablet 삼태사의 위패와 배향 1 페이지" data-og-description="고려시대는 삼태사(三太師)의 위패를 부(府)의 삼공신묘(三功臣廟)에 모시다가 조..

kydong77.tistory.com

 

 

 

 

namu.wiki/w/%EA%B9%80%EC%A0%95%ED%98%B8

 

김정호 - 나무위키

김정호가 지도 제작과 지리학에 재능이 많았으나 국가는 지도 제작에 전혀 뜻이 없어 김정호 자신이 직접 전 국토를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었지만, 쇄국 정책을 취하던 흥선대원군이 이에 분노

namu.wiki

 

 

 

 

 

 

www.youtube.com/watch?v=eWdDSpaZmhU&feature=emb_title

 

 

 

 

 

ko.wikipedia.org/wiki/%EA%B9%80%EC%86%8C%EC%9B%94

 

김소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소월(金素月, 1902년 9월 7일 (음력 8월 6일)[1] ~ 1934년 12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金廷湜)이지만, 호인 소월(素月)로 더 널리 알려져 있

ko.wikipedia.org

 

 

 

 

kydong77.tistory.com/19444

 

김소월, 往十里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往十里(왕십리) ㅡ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

kydong77.tistory.com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노래’ 외에 연대미상의 작품 ‘봄’, ‘남의 나라 땅’, ‘전망’, ‘물마름’, ‘옷과 밥과 자유’, ‘가을 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 등을 보면 민족적 저항의식이 은근히 깔렸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빼앗긴 땅에 대한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이 눈에 띈다.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ㅡ 김 소 월

나는 꿈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집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
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물 손에
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
희망의 반가임은, 별빛이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가슴에 팔다리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자칫 가늘은 길이 이어갈. 나는 나아가리라
한걸음 한걸음. 보이는 산비탈엔
온새벽 동무들 저 혼자 - 산경(山耕)을 김매이는

-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더면, <개벽>, 1923

 

 

 

 

 

kydong77.tistory.com/17054?category=485565

 

벽파 이창배 동상/ 왕십리역 광장

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예능보유자인 벽파 이창배 선생 동상 벽파 이창배 선생의 생애 벽파 이창배 선생은 20대에 소리에 입문하여 최경식 선생에게 가사와 시조를, 원병산 선생에게

kydong77.tistory.com

 

 

 

 

 

ko.wikipedia.org/wiki/%EB%AC%B4%ED%95%99

 

무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주 제조사에 대해서는 무학 (기업)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무학(無學: 1327년 10월 5일(음력 9월 20일)~1405년 10월 3일(음력 9월 11일)[1])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승

ko.wikipedia.org

 

 

 

 

 

www.youtube.com/watch?v=NyA-rMOcSr8

 

 

『시경(詩經)』,「주아(周兒)」편에 나오는 ‘기취이주(旣醉以酒) 기포이덕(旣飽以德)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景福宮)‘이라 지었습니다.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는 구절에서 따온 ‘경복’의 의미는 길이 길이 크게 복을 누린다는 말로 새 왕조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253 詩經-大雅-生民之什기취(旣醉)-이미 취하여

[대아(大雅) / 생민지십(生民之什) 제3편 기취8장(旣醉八章)]

(1장)

旣醉以酒ㅣ오 旣飽以德호니 (기취이주ㅣ오 기포이덕호니

君子萬年에 介爾景福이로다군자만년에 개이경복이로다 賦也ㅣ라)

이미 술에 취했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가 만년토록 네 큰 복을 크게 하리로다.

○賦也ㅣ라 德은 恩惠也ㅣ라 君子는 謂王也ㅣ라 爾는 亦指王也ㅣ라

○此는 父兄所以答行葦之詩라 言享其飮食恩意之厚하고 而願其受福이 如此也ㅣ라

○부라. 덕은 은혜라. 군자는 왕을 이름이라. 이는 또한 왕을 가리킴이라.

○이는 부형들이 행위의 시에 답한 것이라. 그 음식과 은의의 두터움을 누리고, 그 복을 받음이 이와 같도록 원함이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5023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www.youtube.com/watch?v=by6Ue71y8tU

 

 

 

 

www.youtube.com/watch?v=7DtP8UABKdA

 

 

 

 

www.youtube.com/watch?v=KdGOVaURO7k

 

 

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

namu.wiki/w/%ED%94%BC%EB%A1%9C%EC%8A%A4%EC%9D%98%20%EC%8A%B9%EB%A6%AC

 

피로스의 승리 - 나무위키

Pyrrhic Victory "천하가 어지러울 때 5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재앙을 면치 못하고, 4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피폐해지고, 3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패자가 되고, 2번 싸워

namu.wiki

 

"천하가 어지러울 때 5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재앙을 면치 못하고, 4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피폐해지고, 3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패자가 되고, 2번 싸워 승부를 결정지은 나라는 왕자(王者)가 되고, 1번 싸워 승리를 결정지은 나라는 제자(帝者)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여러 번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써 천하를 손에 넣은 자는 드물고, 오히려 망한 자가 더 많았던 이유다.

키네아스는 이탈리아 원정 준비로 바쁜 피로스를 찾아왔다.
"전하, 로마는 대단히 호전적인 나라라고 합니다. 만약 그런 나라를 물리칠 수 있게 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 아닌가. 로마를 정복하게 된다면 그리스인이건, 다른 야만인들이건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더 이상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탈리아는 우리의 차지가 되는 것이지."

피로스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키네아스는 잠시 후 다시 물었다. "그럼 이탈리아를 정복하신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키네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었다.
"이탈리아 옆에는 아주 부유한 시칠리아가 있지 않은가? 그곳은 지금 온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으니 손에 넣기에 수월하지 않겠는가?"
"그렇겠지요. 그렇게 된다면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전체를 지배하시게 되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피로스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편안히 쉬면서 날마다 즐거운 이야기나 나누지 뭐......"[1]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끌어온 키네아스는 말했다.
"전하는 지금도 편안히 쉬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습니다. 아무런 노력과 고통 그리고 위험 없이도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고생을 하시려고 합니까?"

 

고대의 유명한 일화이자 시사용어. 

이겨도 결코 득이 되지 않는 승리를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래 최고의 전략·전술가로 회자되었고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섬에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발발한 피로스 전쟁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승리를 여러 번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거둔 승리에 비해 아군의 손실이 너무 많았다.

로마군과 첫 결전을 벌인 헤라클레아 전투에서는 휘하 병력 3만 5천 중 4천을, 그 다음 해에 치른 아스쿨룸 전투에서는 병력 4만 명 중 3천 명을 잃는 큰 손실을 입고 말았다.[2]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피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로마인들과 싸워 한 번 더 승리를 거둔다면, 우리는 완전히 끝장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승리자에게 엄청난 손실을 안겨 결국에는 패배를 안길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피로스는 전투에서는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그에 따르는 손해를 자체적으로 감당하지 못했던 데다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지원 태만으로 손해를 메우지 못해, 결국 끝내 전쟁에서 패하고 에페이로스로 물러나게 된다. 물론 이기지도 못한 로마군의 피해는 산술적으로 볼 때 훨씬 더 컸지만, 로마는 자신들의 본토이고 이탈리아반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로마는 멀리 원정온 데다 본국의 규모도 훨씬 작았던 피로스에 비해 물량에서 훨씬 우위여서 이 손해를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언뜻 파비우스 전략과 비슷하거나, 같은 결과에 대한 다른 해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양측 모두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는다는 공통점을 보이기 때문. 하지만 피로스의 승리는 공격자의 입장에서,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의도했던 전략적 목적(예: 영토 쟁탈, 적의 정치적 굴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에서 분명 차이를 나타낸다.

3. 역사상의 실제 사례

  • 피로스 전쟁 (기원전 280 ~ 기원전 275) :피로스 1세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로마와의 전투에서 계속 이겼지만 로마와 결속한 동맹시들은 여전히 로마를 지지했고, 피로스의 병력은 계속 소모되었다. 거기에 시칠리아에도 개입하는 바람에 카르타고마저 적으로 돌려버렸다. 결국, 베네벤툼 전투 이후 더는 전쟁을 계속할 의지를 잃어버린 피로스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피로스는 전투에서는 계속 이겼음에도 결과적으로는 로마가 남이탈리아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병력만 잔뜩 소모한 채 물러난 것이 이 전쟁이 남긴 전부였다. 피로스는 동원한 3만 5천의 병력 중 2만 이상을 잃어버렸다. 이 전쟁은 나중에 로마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두고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이는 피로스와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다.

    • 헤라클레아 전투 (기원전 280): 이 표현의 직접적 유래. 다만, 이 전투의 승리로 지금까지 도움을 주지 않던 남 이탈리아 지역에서 피로스에게 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술적 승리와 더불어 전략적인 승리도 이룬 것이기에 이 전투 자체만 따지면 피로스의 승리 사례라 부르기는 힘들다.

  •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8 ~ 기원전 202) - 한니발의 로마 원정군은 로마 진입 시까지 연전 연승을 거두고 있었으나, 소수 정예인 한니발 군의 특성상 전투마다 병력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고, 한니발을 제외한 카르타고군은 전체가 로마에게 탈탈 털리던 상황이라, 지원다운 지원 따윈 하나도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니발은 이런 전투 속에서 악전고투 해왔으나,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참패를 당한다. 위의 간략한 서술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 이 전쟁은 피로스의 승리와는 좀 거리가 먼 편이다. 한니발은 완벽한 전략에 입각해서 전투를 치렀고, 모든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조국에게 못 먹으면 바보인 수준의 완벽한 판을 깔아주었다. 한니발의 잘못은 그가 카르타고의 무능함을 과소평가했다는 점밖에 없다.

  • 초한전쟁 (기원전 206 ~ 기원전 202) - 한(유방)의 '파비우스의 승리' 사례이면서, 초패왕 항우의 '피로스의 승리'로도 볼 수 있다. 항우 문서 2.6.7.단락의 '패왕의 최후' 항목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지만 간단히 요약하자면, 항우는 최후의 전투인 해하 전투 이전까지 근 70번의 전투에서 한번도 지지 않았지만 이기면 이길수록 도리어 항우가 불리해지고 결국 마지막까지 패배를 모르는 상태로 자결했다. 이후 초는 망했고 한은 400여 년을 남아 중국 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다만 항우가 패배한 건 유방과 싸우다가 손해를 보아서라기보단, 항우가 없는 전역에서 팽월이나 한신 등이 입히는 피해가 쌓이다보니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 되어버린 탓이라서 해석하기에 따라선 어긋나는 면도 있다. 항우 한명만 무적이었지 초나라 전체로 따지면 엄청나게 패배했기 때문.

  • 유철의 흉노 정벌 - 자존심이 강력한 유철의 입장에서 한나라가 맨날 흉노한테 비단을 갖다 바치는 게 매우 불편했다. 그래서 곽거병이라는 걸출한 무장도 있겠다 병력을 일으켜 흉노를 정벌로 했는데. 곽거병은 무려 바이칼 호까지 진격하며 흉노를 떡이 되도록 두들겨 패 놓았다. 곽거병이 쓰러뜨린 흉노족 고관대작들만 하더라도 흉노왕 7명, 흉노 승상, 흉노 황태자에 심지어는 흉노 황후(선우의 정실부인)까지 있을 정도로 진짜 일방적으로 무찔렀다. 이게 왜 피로스의 승리냐 하면 당대 최고의 부국이었던 한나라는 흉노를 때려잡느라 국고를 완전히 소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트로피를 얻으려고 집을 팔아버린 꼴이었다.

  • 헤라클리우스와 동로마 제국 - 헤라클리우스 즉위 당시 로마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밀려 시리아와 이집트를 잃고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헤라클리우스는 수년간 힘을 비축한 뒤, 과감한 군사 원정으로 적군을 연파하며 페르시아를 굴복시키고 성십자가와 잃어버렸던 땅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모든 힘을 소진한 로마 제국은 얼마 뒤 새롭게 일어난 이슬람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도로 상실하고 만다.[5][6]

  • 북송과 남송 - 북송은 금나라와, 남송은 몽골과 연합하여 숙적이었던 요나라와 금나라를 멸망시켰지만 이 때문에 완충지대가 없어져 북송과 남송도 결국 각각 금나라와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망하게 된다. 특히 해당 전쟁에서 송나라가 요나라를 상대로 졸전하였기 때문에 금나라는 북송을 만만하게 보게 된다.

  • 임진왜란(1592) - 명나라 한정.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막대한 재정소모로 후에 후금에게 멸망하게 되는 간접적인 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 다만 히데요시가 처들어온 명목이 명나라 정벌도 있긴 했고, 명나라 입장에서는 동쪽 국경을 일본보다 훨씬 우호적인 조선으로 남겨두는 것이 확실히 이득인 건 사실이며 한편 명나라의 멸망은 4대 암군들의 지속적인 삽질이 근본적인 원인이었고 여기에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였으니 반드시 피로스의 승리라고 단정짓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물론 이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조선이었으나 조선입장에선 전쟁에 지면 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될 판국이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 했으므로 피로스의 승리는 아니다.

  • 뤼첸 전투(1632) - 30년 전쟁 당시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7] 사이의 전투. 스웨덴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작센 지방에서 가톨릭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스웨덴 측의 전사자는 구교측보다 많았고 정예 고참병들이 다수 희생되었으며, 무엇보다 뛰어난 장군이자 국왕인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8] 이후 스웨덴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페인에게 대패하면서 전쟁에서의 우위를 상실한다. 물론 요한 바네르, 레나르트 토르스텐손의 활약으로 다시 전쟁의 우위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 말플라케 전투 (1709) -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프랑스 말플라케에서 일어난 전투로 영국오스트리아덴마크네덜란드 등을 위시한 연합군과 프랑스와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동맹군은 8만 6천 명의 병력에 포 100문, 프랑스 측은 7만 5천 명의 병력과 포 80문을 동원했다. 전투 자체는 연합군의 승리였지만 연합군의 손실이 더 커서 (사상자 2만 1천 명. 동원 병력의 약 25%가 전투불가 상태가 되어버렸다) 피로스의 승리에 해당한다.

  • 7년 전쟁영국과 프로이센 등이 이기긴 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3세가 역사에 길이 남을 뻘짓을 해서 프로이센이 마지막 일격을 가할 수 있던 것에 가까웠고, 그나마 프로이센은 국력이 완전히 고갈되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고립되었다. 영국은 인도와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큰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역시 막대한 재정부담이 발생해서 북아메리카 지역에 증세를 시도하다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켜 버렸다. 그 외의 국가들도 제대로 된 승자가 없는 패자뿐인 싸움이었다.

  • 미국 독립 전쟁(1775~1783) - 프랑스 한정. 패자인 영국도 일단 전쟁 자체는 막대한 전쟁 비용을 감수해서라도, 큰 경제적 가치를 가진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지키느냐 상실하느냐가 달린 매우 중요한 전쟁이었다. 당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GDP는 대영제국 전체 GDP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으며, 식민지 거주인들의 1인당 GDP는 영국 본토인의 그것을 상회할 지경이었다. 훗날 세계 초강대국이 되는 미국의 경제력은 이미 식민지 시절부터 수치상으로 나타났다. 미국 입장에서도 전쟁에 이기면 독립을 하는 것이고, 지면 그대로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므로 무조건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즉 영국은 알짜배기 땅덩어리를 사수하느냐 마느냐, 미국은 자유로운 생활이 보장되느냐 마느냐가 걸린 사생결단 매치업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경우 여기에 끼어들어야 할 명분이 일단 없지는 않았다. 독립 전쟁의 결과로 경쟁상대인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를 상실하게 만들고, 독립한 미국을 친프랑스 성향으로 돌렸는데 그 효과는 작지 않았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개입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개입 자체는 충분히 정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규모의 전쟁 비용과 미국 지원금으로 인한 재정 소모 그 자체였다. 이미 7년 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크게 소모한 프랑스는 이 미국 독립 전쟁으로 인한 재정 소모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고,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가는 프랑스의 경제는 파탄 상태에 빠졌다. 결국 재정 소모에다 대대로 사치벽[9]을 부린 프랑스 왕실의 최후는 프랑스 대혁명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