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故說 般若波羅蜜多呪 卽說呪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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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는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 그자체를 설한다라는 내용입니다.

 

故說

고설 : 그러므로 설하노니

般若波羅蜜多呪

반야바라밀다주 :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卽說呪曰

즉설주왈  : 바로 말하면 주문이란 이와 같느니라.

 

반야바라밀다의 본래 뜻을 깨우치는 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空으로써 가능합니다.

空을 깨닫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전 편에 써놓은 게 있으니 참고하세요.

空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건 겨우 첫발을 내디딘 것과 같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깨달음은 같습니다.

모두가 제법실상인 空을 깨달은 것입니다.

깨달음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혜의 깊이에서는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용수보살께서는 이러한 표현을 썼습니다.

空을 처음 깨달은 사람은 이제 겨우 강물에 한발 들여놓은 것이며,

좀 더 정진한 사람은 더 깊은 곳까지 간 것이며,

부처님께서는 이미 물의 가운데까지 완전히 도달하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곧 깨달음은 같되, 지혜의 깊이에서 차이가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보리(깨달음)에 세 종류의 보리가 있습니다.

아라한의 보리, 벽지불의 보리, 부처의 보리!!!

이러한 차이가 있다함은 깨달음은 같되, 지혜에서는 깊이의 차별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제법실상인 空을 아라한도 깨닫고 벽지불도 깨닫고 부처도 깨달았으되,

아라한과 벽지불은 我空을 깨달아 번뇌는 없지만

法空을 완전히 깨닫지 못해 번뇌의 습기가 남아 있으나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습기조차 모두 사라진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의 지혜와 부처님의 지혜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걸 다 아는 일체지가 있으시지만, 아라한에게는 그런 일체지가 없습니다.

 

아라한의 습기란 무엇인가?

필릉가바차란 아라한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생에 수없이 많은 생 동안 바라문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타고난 천성이 굉장히 거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이 되고서도 그 거만함의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 입니다.

물론 그의 마음에서는 남을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만, 그 버릇....즉 습기/습관의 힘은 남아 있었던거죠.

그래서 그는 항하강을 건너 걸식하러갈 때 항하강을 지키는 여자 신에게

마치 종처럼 대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년아, 어서 빨리 물을 반으로 쪼개서 그 사이로 내가 걸어가게 해라."

아라한의 명령이니 어쩔수 없이 그 항하강의 여신은 강물을 반으로 쪼개서 그 사이로 그를 걸어가게 했습니다.

또 걸식하고 되돌아 올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 번 천한 취급 받자 그 여자 신(神)은 화가 치민거죠.

종년 취급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서 부처님께 가서 고자질을 합니다. 수시로 종년취급 당하니 못살겠다고 말이죠.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필릉가바차를 오라고 해서 이런 일이 있었냐..라고 물으시고 저 여신에게 사과하라고 하죠.

필릉가바차가 사과를 하는데 아주 황당하게 합니다.

"야 이 종년아, 내가 사과한다."

이렇게 또 하대하듯이 사과를 하니까 모여있던 군중들이 배꼽을 잡고 웃습니다.

저 아라한은 왜 사과를 하면서도 정중하게 못하고 마치 구박하듯이 저렇게 하냐고 말이죠.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 항하강의 여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필릉가바차라는 아라한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바라문으로 윤회를 해서,

아라한이 된 지금조차도 그 습관의 힘(습기)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다.

너를 정말 무시하거나 경멸하는 그러한 마음은 전혀 없고, 다만 습관의 힘 때문에 그런 것이다..

라고 말이죠.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이 됐습니다.

오해가 풀린거죠.

아함경에 위의 얘기가 나오는데,

위의 내용엔 대지도론에 나와 있는 내용도 첨가해서 덧붙였습니다.

 

또 어느 아라한은 500생동안 원숭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라한이 됐지만,

원숭이처럼 나무 타는 걸 그렇게 좋아했다는 내용이 대지도론에 나옵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습기...즉 습관의 힘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 향내가 밴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역시 습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살은 지혜를 점점 증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보살 제1지에서 보살 제10지까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보살은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를 얻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보살은 오로지 성불, 즉 佛道가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불할 때까지 도를 얻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일부러 도를 안 얻는다는 뜻입니다.

성불할 만한 자격을 다 갖추지 못했는데 도를 얻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소승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보살이 가장 주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살행을 제대로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반야경대지도론을 봐야만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된 보살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배우는 것을 통해서 입니다.

 

 

36.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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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도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다를 찬탄하는 내용입니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能除一切苦 眞實不虛)!!!

반야바라밀다는 능히 일체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며, 진실되며 헛되지 아니하도다.

개별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

능히 일체의 고통을 제거한다라는 의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화합에 의해 생겨났으므로

모든 것에는 스스로의 자성이 없다는 걸 알아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아 해탈한다는 뜻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몰라서,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를 얻어서 그걸로 고통을 벗어나는 줄 아는데...그것이 틀린 것입니다.

오히려 불교는 그와는 정반대로 모조리 다 텅 비어 있는 걸 앎을 통해 고액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세속 종교가 아니고 탈세속의 출세간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오로지 불교에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불교 이외의 종교/사상/철학에서는 이런 불교적인 방식의 접근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연기법/무아/空은 오로지 불교에만 있는 진리입니다.

진실불허(眞實不虛)

반야바라밀다를 진실되고 허망하지 않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표현은 진제가 아닌 속제의 차원에서 말한 것입니다.

진제의 측면에서는 진실된 것도 없으며, 허망한 것도 없습니다.

진제에는 진실과 거짓/허망을 따질만한 실체라는게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속제 즉 세속법에서는 온갖 중생들이 이 반야바라밀로 말미암아 해탈하게 되니,

그야말로 진실 그 자체이며, 전혀 허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진실불허는 세속법에 따라 반야바라밀을 칭송한 것이지, 진제의 측면에서 찬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진제와 속제를 구분해서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35.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故知 般若波羅蜜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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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반야바라밀다를 찬탄하는 부분입니다.

 

고지(故知) :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是大神呪) : 이것은 크게 신묘한 주문이며,

시대명주(是大明呪) : 이것은 크게 밝은 주문이며,

시무상주(是無上呪) : 이것은 위없는 주문이며,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 이것은 비교할 대상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최상/최고의 주문이니라.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를 찬탄하는게 아니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찬탄하는 것입니다.

왜 반야바라밀다를 주(呪)에 비유했을까요?

대지도론에 그 내용을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세간에서는 이 주(呪)를 최고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대신주(是大神呪)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묘한 주문이다라는 뜻은 결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신묘하고도 신묘해서 神呪에 비유한 것입니다.

신묘한게 呪인데, 거기서도 대단히 크게 신묘해서 大神呪입니다.

 

시대명주(是大明呪)

큰 밝음의 呪라라고 한 것은 무명 중생의 어두움을 밝혀주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반야바라밀다의 대광명은 한계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시대신주입니다.

 

시무상주(是無上呪)

반야바라밀다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보다 더 높은게 없으므로 시무상주입니다.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그 무엇도 이 반야바라밀다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것이 等(균등/비교)인데 等等이므로 그 어떤 것도 아예 비교조차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야말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최고 중에 최고요, 보물중에 보물이라는 뜻입니다.

반야바라밀다라는 보물을 발견하지 못하신 분들은 어서 빨리 발견하시고,

반야바라밀다라는 보물을 발견하신 분들은 성불할 때까지 잃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34.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http://blog.daum.net/mahatop7/549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9397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스끄리뜨어 아누따라삼약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를 음사한 것으로 ‘위없는 올바르고 두루 한 깨달음, 또는 지혜’라 번역된다.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한

encykorea.aks.ac.kr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을 의미하는 불교교리.무상정변지·무상정등각.

내용
산스끄리뜨어 아누따라삼약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를 음사한 것으로 ‘위없는 올바르고 두루 한 깨달음, 또는 지혜’라 번역된다.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으로 한역되며,
빠알리 원어(anuttara sammasambodhid)도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 번역된다.
한문의 음사표기는 아누다라삼막삼보제(阿耨多羅三藐三菩提)이지만,
속화된 발음의 변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읽는다.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을 가리킨다.
 
『금강경』의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서
‘붓다가 설하시길 붓다가 연등불이 계신 곳에서 무유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佛於然燈佛所 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는 구절을 볼 수 있다.
 
『아함경(阿含經)』 계열의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서 붓다가 사성제를 통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설한 장면을 비롯해 경전에서 무수히 언급되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三世諸佛)

삼세란 과거 · 현재 · 미래를 뜻합니다. 

삼세제불이란 과거에 성불하신 부처님, 현재에 성불해서 계신 부처님, 미래에 성불하실 부처님을 말합니다.

현재에도 까마득하게 먼 다른 우주에는 수많은 부처님이 계신 것 입니다.

반야경 초입부에 다른 아주 먼 우주에 수많은 부처님들이 계시고,

그곳의 각각 수많은 보살들이 석가부처님을 찬탄하러 이 지구상으로 모여드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라는 뜻입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함은 의지할 바 없는 것에 의지한다는 의미임을 이전 편에서 밝혔습니다.

 

반야바라밀다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반야바라밀다원인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결과입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라는 원인을 닦아, 결국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결과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것은 최상의 깨달음 · 무상정등정각 · 일체종지 · 정변지를 말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분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는 보살의 것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부처님의 것입니다.

보살이 성불을 하게 되면, <반야바라밀다>가 변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依般若波羅蜜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죠.

 

보살이 성불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

그러나 이 반야심경에는 오로지 반야바라밀만 나옵니다.

그러나 설사 나머지 5바라밀은 말하지 않고 반야바라밀만 설했다 하더라도,

이 반야바라밀에 나머지 5바라밀이 포함이 된 것 입니다.

그래서 마치 임금이 가면 신하들이 자동적으로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육바라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나머지 5바라밀을 행하더라도,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하면 성불을 불가능합니다.

마치 이 반야바라밀은 무리를 이끄는 길잡이와 같습니다.

길잡이가 없으면 길을 잃게 됩니다.

이 반야바라밀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마하바라밀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반야바라밀에만 마하가 붙습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즉 성불하게 되므로

이 반야바라밀을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불모(佛母)라고 부릅니다.

반야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부처가 탄생되기 때문에 불모(佛母)인 것입니다.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러므로 그 반야바라밀을 핵심적으로 설한 반야경이나 반야심경을 함부로 비방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비방한다는 것은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전편에서 설명했듯이 오역죄와는 비교조차 될 수 없는 무량한 중죄입니다.

보살은 보리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보리심을 일으킨 존재가 바로 보리살타..........즉 보살입니다.

보리심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의 약자입니다.

그러므로 보리심이란 중생을 위해 기필코 성불하겠다라는 마음을 일으킨 것을 말합니다.

성불의 목적은, 다른 중생들을 제대로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중생제도의 도구가 바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일체종지입니다.

보살의 파계란 바로 이승(아라한/벽지불)에 떨어지는 것이다..라고 반야경에 나와 있습니다.

보살이란 성불이 목적인데, 그걸 못이루고 소승에 떨어지면 그게 곧 무량한 중생들을 버린 것이므로

그것이 보살의 큰 죄요, 또한 파계인 것 입니다.

악마들은 이렇듯 보살을 소승에 떨어트리기 위해서

심지어 부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보살을 현혹한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그러나 불퇴전의 아비발치 보살은 그런데 전혀 동요없이 반드시 성불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일체종지)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실상/본질을 명확하게 아는 것..즉 진제를 완전히 아는 것 입니다.

둘째, 존재하는 세부적인 모든 것의 모양을 명확하게 아는 것..즉 속제를 완전히 아는 것입니다.

세간과 출세간을 모조리 다 아는 것이 바로 일체종지입니다.

그래서 외도들이 의심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어느 산에 낙엽이 총 몇 개이며, 어느 산에 떨어지는 빗방불이 총 몇 개냐..라고 말이죠.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명확하게 몇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일반인으로서는 아라한의 지혜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큰 보살의 지혜를 온 우주에 새까맣게 깔린 아라한들의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또한 보살의 지혜로도 역시나 부처님의 무량한 지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부처님의 무량한 지혜는 불가사의하다는 의미입니다.

소승(아라한/벽지불)은 중생에 대한 자비가 깊지 않으므로 많이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살은 많이 배워야 합니다.

보살이 된다라는 것은 배워야 할 것을 모조리 다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을 모조리 다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왜 이런 걸 배우고 알아내고 익힐까요?

그것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도하기 위함이죠.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만 보다 더 수월하게 수많은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라니와 삼매가 있는데, 소승에게는 다라니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다라니라는 용어도 많이 왜곡돼서 알려져 있습니다만,

본래의 뜻은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것이 바로 다라니입니다.

그래서 다라니총지(總持)라고 부릅니다.

총지란 모든 것을 다 지닌다라는 의미입니다.

한 번 보고 들은 것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다라니로써 사무애지(四無礙智)를 얻습니다.

사무애지는 중생에게 법을 설할 때 장애가 없는 네 가지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승경전에 다라니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 다라니를 얻어야,

한번 본 경전의 내용을 잊지 않아서 중생들에게 제대로 설법을 해줄 수 있습니다.

이런 다라니를 얻는 것도 역시나 중생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보살은 갖춰야 할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부처가 될만한 모든 자격을 하나도 빼지 말고 모조리 다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런 요소들이 무엇인지 알려면 반야경을 읽어봐야 합니다.

 

[운영자 주]

사무애지(四無礙智)라 함은

법무애지(法無礙智): 중생을 교화함에 막힘이 없다.

의무애지(義無礙智): 온갖 교법의 요긴한 내용에 대하여 막힘이 없이 안다.

사무애지(辭無礙智): 여러 가지 말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다.

요설무애지(樂說無礙智): 중생의 기류(機類)에 따라 알기 쉽게 설한다.

[보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425

 

다라니(陀羅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총지(摠持)·능지(能持)·능차(能遮)’라고도 한다. 두 가지 뜻으로 풀이되는데, 첫째는 지혜 또는 삼매(三昧)를 뜻한다. 우주의 실상(實相)에 계합하여 수많은 법문(法門)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

encykorea.aks.ac.kr

다라니산스끄리뜨어[범어]를 음사한 발음이어서 한문 음사로는 뜻풀이가 불가능하다.

반야심경의 아래 주문은 뜻풀이가 알려져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t=6s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개달음에 뿌리를 내리자.)


*위 주문(呪文)의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Tayata Om'은 '즉설주왈(卽說呪曰)' 에 해당함.


본토말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국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Gate Gate  가라. 가라. 
paragate  피안으로 건너가라. 
parasamgate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bodhi svaha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2912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087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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