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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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무소득)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야(의반야바라밀다고)

마음에 걸림이 없고 또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고,

결국 모든 전도된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즉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해서 구경열반(究竟涅槃)에 이른다.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을 행하여 결국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세부적인 단어의 뜻을 알아보겠습니다.

 

원리(遠離) : 멀리 떠나다.

전도(顚倒) : 뒤집어진, 잘못된

몽상(夢想) : 꿈에서는 그 상황이 진짜라고 생각했으나, 깨보니 가짜더라... 그러니 몽상이란 헛된 생각이란 뜻

구경(究竟) : 궁극의....더 이상이 없는..

열반(涅槃) : 열반!!

 

구경열반(究竟涅槃)이란 오로지 부처님만이 도착하신 열반이란 뜻입니다.

아라한 · 벽지불도 도착 못했고,

보살도 또한 도착하지 못한 곳이며,

오로지 부처님만이 도착하신 경지의 열반을 말합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중생은 뒤집어진 헛된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본래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다만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본래는 새끼줄인데,

그 새끼줄을 밤에 보니 꾸불텅해 보여서 뱀인줄 착각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중생의 전도몽상이라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문제가 없는 것이지만 다만 착각에 빠져 있으므로

그걸 박살내고 거기서 멀리 떠나는게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입니다.

전도몽상을 완전히 박살내는게 空이며,

그 空에도 역시나 실체가 없어 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에 크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사전도(四顚倒)라고 부릅니다. 

사전도(四顚倒)란 상락아정(常樂我淨) 이 네 가지를 말합니다.

常 : 중생은 항상(영원)하지 않은데도 착각해서 항상하다고 여긴다.

樂 : 중생은 괴로운 것인데도 착각해서 즐겁다라고 여긴다.

我 : 중생은 실체가 없는데도 착각해서 실체가 있다고 여긴다.

淨 : 중생은 더러운 것인데도 착각해서 깨끗하다고 여긴다. 

 

상락아정(常· · · 淨)은 열반사덕(열반의 네 가지 덕)도 됩니다만,

열반경에서의 상락아정(常·  ·  · 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완전 오해합니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우선적으로 상락아정(常·  ·  · 淨)을 사전도(四顚倒)로써 이해하고 배워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점프를 해버리면 오히려 더더욱 이 중생세간에 집착하게 되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이 상락아정(常·  ·  · 淨)이라는 네가지 전도몽상을 깨부수는 것이

바로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입니다.

37조도품에서 바로 첫번째가 사념처 수행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8B%AD%EC%B9%A0%EB%8F%84%ED%92%88

 

삼십칠도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각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각지(覺知)에 대해서는 십호#대승의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7도품(三十七道品)은 깨달음(도, 보리, 각)에 이르는 37가지의 법을 말

ko.wikipedia.org

37도품(三十七道品)은 깨달음(도, 보리, 각)에 이르는 37가지의 법을 말하는데, 

초기불교의 《아함경》 또는 《니까야》 에서 고타마 붓다가 언급하거나 설명하고 있는 37가지의 도품(道品)

즉 수행법(修行法)을 가리키는 낱말로, 사실상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통칭하는 낱말이다.[1][2][3]

도품(道品, 팔리어bodhipakkhiyā dhammā산스크리트어bodhipakṣa dharma)의 팔리어 또는 산스크리트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깨달음(bodhi, 보리)에 속하는(pakkhiyā) (dhammā, 法)', '깨달음의 일부를 이루는 ' 또는 '깨달음에 관계된 '이다.[4][5][6][7] 이런 문자 그대로의 뜻을 따르면서 'bodhi'를 '보리'라고 음역하여, 37도품(三十七道品)이라는 낱말 대신에 37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이라고도 하는데, 보리분법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보리의 일부를 이루는 법'이다.

한자어 도품(道品)도 문자 그대로의 뜻이 '도(道: 진리, 깨달음, 또는 진리, 깨달음에 이르는 길)의 1품' 즉 '도의 한 부분'으로 팔리어 원어의 뜻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한편, 《아비달마구사론》 제25권에서는 '깨달음 즉 각(覺) 즉 보리에 따르고 보리로 나아가는 것[順趣菩提]'이기 때문에 보리분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보리 즉 각이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8]

37도품 또는 37보리분법을 37각분(三十七覺分), 37각지(三十七覺支), 37도분(三十七道分), 37조도법(三十七助道法), 37품도법(三十七品道法), 또는 37품(三十七品)이라고도 한다.[1][9]

 

사념처 수행으로써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네가지 전도를 박살냅니다.

그러나 완전히 끝까지 박살내는 것은 空을 관할 때입니다. 

 

아래는 용수보살(나가르주나)의 저서 대지도론에서 발췌한 내용인데,

상락아정과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의 관계에 대해서 대단히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

중생은 몸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깨끗하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느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즐겁다 하는 뒤바뀜에 잡착하며,

마음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항상하다고 하는 뒤바뀜에 집착하고,

법 안에서는 거의 모두가 나가 있다 하는 뒤바뀜에 집착한다.  

이 때문에 수행하는 이는  

몸은 깨끗하지 않다고 관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관하며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나가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

위에서 "나"라는 용어는 고정불변의 실체/자성이라는 의미입니다. 

위 말씀을 토대로, 상락아정(常樂我淨) 사전도(四顚倒)와

신수심법(身受心法) 사념처(四念處)의 관계를 알아보겠습니다.

 

常 : 심념처로 마음의 무상함을 관함으로써 영원하다는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樂 : 수념처로 느낌은 괴롭다라는 것을 관함으로써 즐거움이라는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我 : 법념처로 법(모든 존재/현상/진리)에는 실체가 없음을 관함으로써 실체(나)가 있다는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淨 : 신념처로 몸의 더러움을 관해 몸이 깨끗하다고 여기던 전도몽상을 박살낸다.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은 대승과 소승 공통입니다.

또한 불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불교 수행이란 그저 앉아서 마음을 텅 비우는 그런 수행만 하는 게 아닙니다.

이 신수심법 사념처 수행처럼 관찰하는 수행도 있습니다.

 

편안히 앉아서 눈을 살짝 뜨든 감든 편하게 하고,

아래 네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그저 관찰을 하는 것 입니다. 살펴보는 것이죠.

이 수행은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그저 덮어놓고 믿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직접 본인이 살펴보고, 분석하고, 따져봐서 정확하게 맞다 싶을 때 믿으면 됩니다.

그런 앎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살펴보는 수행을 해보세요.

  

1. 신념처(身念處) : 몸을 관찰하라.

 우리와 같은 중생들은 이 몸을 대단히 깨끗하다고 여기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화장을 합니다.
그러나 화장을 한다는 것은 더러움을 숨기기 위한 것이죠.

본래가 깨끗하다면 이뻐보이기 위해 화장할 필요가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위 용수보살께서 하신 말씀처럼 중생은 자기의 몸도 깨끗하다고 여기고, 이성의 몸도 깨끗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 몸에 집착하고, 이성의 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따져보면 깨끗하질 않습니다.

이 몸의 여러 구멍에서는 언제나 더러운 물질이 흘러나오고, 몸안의 물질들도 모조리 다 더러운 것들 뿐이죠.

 

똥구녕에서는 똥나오고,

눈구녕에서는 눈꼽이 나오고

코구녕에서는 콧물과 코딱찌가 나오고,

땀구멍에서는 시큼한 냄새의 땀이 나오고,

귓구멍에서는 귀지가 나오고,

남녀의 성기에서는 오줌이 나오고..... 

 

이 몸이 죽으면 썩습니다.

썩으면 냄새나니까 안보이게 파뭍어버리거나 또는 태워버리는 거죠. 

인간의 몸이 정말 깨끗하다면, 죽은 시체도 그냥 거리에 방치했을 겁니다.

그러나 사람 몸이 썩으면 그것만큼 더러운 게 없죠. 

이것처럼 인간의 몸은 본래 더러운 것입니다. 

뱃속에 당장 똥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걸어다니는 화장실>이라고 표현했죠. 뱃속에 똥이 항상 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바깥에 있는 똥은 쿠리고 더러워서 진절머리를 떨고 끔찍하게 여기면서,

자기 안에 있는 똥은 눈이 어두워 그런 더러운게 항상 뱃속에 가득 차 있는 줄 생각도 못하고 삽니다.

그만큼 제대로 잘 안살펴봐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살펴보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몸이 깨끗하다는 이런 고정관념을 깨는게 바로 신념처이며, 이런 신념처가 바로 부정관입니다.

 

2. 수념처(受念處) : 느낌을 관찰하라.

느낌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 

중생은 어떻게 착각하는가 하면 중생의 삶에서 즐거운 느낌이 많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질 못하고, 대다수가 괴로운 느낌이고 아주 조금만 즐거운 느낌일 뿐입니다. 

스스로 살펴보세요.

나에겐 과연 즐거운 느낌이 더 많은가??? 아니면 괴로운 느낌이 더 많은가??? 

중생들에겐 대다수가 괴로운 느낌이고, 아주 조금만 즐거운 느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느낌은 즐거운게 아니고 괴로운 것입니다.

또한 즐거운 느낌의 끝이 바로 괴로운 느낌의 시작입니다.

행복 끝 불행시작이죠. 

그러므로 즐거운 느낌이라고 해도 결코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중생을 윤회에 가장 직접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무명>과 <느낌>입니다.

느낌 중에서도 <즐거운 느낌>이죠. 

이 즐거운 느낌으로 인해 온갖 탐욕과 애착이 생깁니다. 

탐욕의 종말은 고통이죠. 결국 잃게 되니 말입니다.

누구나 다 죽어서 모조리 잃게 됩니다. 

세 가지 느낌 모두가 다 괴롭다라는 걸 알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바로 수념처입니다.

 

즐거운 느낌은 영원하지 못하니 즐거움의 끝은 곧 괴로운 느낌의 시작이니 괴로운 것이요,

괴로운 느낌은 그 느낌 자체로써 괴로운 것이니 괴로운 것이요,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변화하다가 즐거운 느낌/괴로운 느낌이 되니 괴로운 것입니다.

느낌은 무상하니 괴로운 것이며,

그렇게 무상하게 변하는 이유가 바로 느낌 자체에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즉 느낌도 역시나 空한 것 입니다.

  

3. 심념처(心念處) : 마음을 관찰하라.

 우리의 찰라생 찰라멸 하는 이 마음은 영원하지 않고, 항상 생멸을 반복합니다.

즉 변화합니다.

하지만, 중생은 이 생멸하는 마음을 영원하다고 여기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심념처 수행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게 바로 이 생멸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영원(常)하지 않고,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마음엔 이것처럼 생멸식이 있고, 불생불멸식이 있습니다.

생멸식은 허공에 낀 먼지와 같은 것이고, 불생불멸식은 허공 그 자체와 같습니다.

마음의 본질/실체를 깨닫는다는 것은 먼지를 보다가 허공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수관/심념처를 사띠하다가 허공 자체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空을 깨닫는 것이며, 중도를 깨달은 것 입니다. 물론 그게 첫발입니다.

이러한 불생불멸식을 불성/여여/진여 등으로 불리웁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 해야할 것은 이 생멸하는 마음의 무상(無常)을 관하는 것입니다.

곧바로 空을 깨닫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첫 입구가 바로 무상(無常)입니다.

무상(無常)을 관하다가 空을 깨닫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의 공식이 아함경에 나와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무상-->고-->무아-->空-->무소유-->염오-->이욕-->해탈-->해탈지견 

 

4. 법념처(法念處) : 법을 관찰하라. 

법(法)은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존재, 사물, 상,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물이건, 존재건, 현상이건, 진리건 모조리 거기엔 스스로의 성품이 없습니다.

진리라는 것도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최상의 존재인 부처님도 역시나 공한 것이며,

부처님께서 얻으신 무상정등정각,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역시나 공한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에도 얻을 바가 없고,

반야바라밀의 완성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역시나 얻을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중생들은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는다라는 내용이 반야경에 나옵니다.

중생은 언제나 얻을 바가 있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제법이 공하기 때문에 18空중에 제법공이 있습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1533

 

반야심경해설 9. 조견오온개공 ④ 18공(空)의 뜻

• 반야심경 해설 9. 照見五蘊皆空 ④ 18공(空)의 뜻 http://blog.daum.net/mahatop7/5468 반야심경은 600권 반야경을 짧게 압축해 놓은 경입니다. 그래서 이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야경을 읽어 봐

kydong77.tistory.com

내공(內空), 외공(外空), 내외공(內外空), 공공(空空), 대공(大空), 제일의공(第一義空),

유위공(有爲空), 무위공(無爲空), 필경공(畢竟空), 무시공(無始空), 산공(散空),

성공(性空), 자상공(自相空), 제법공(諸法空), 불가득공(不可得空), 무법공(無法空),

유법공(有法空),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

 

제법공이란 일체개공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스스로의 성품...즉 실체가 있다고 여기므로 집착하는 것 입니다.

이걸 완전히 끝까지 박살내는게 연기법이며, 그 핵심인 空입니다.

..................................

전도되었다라는 것은 착각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착각하고 있다는 것은 정신병에 걸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착각병!!!

그러므로 멀쩡한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해줘야 합니다.

그때 쓰는게 바로 대치법입니다.

 

항상하다는 고정관념은 항상하다의 반대되는 무상(無常)하다로 박살내 주고,

즐겁다라는 고정관념은 즐거움의 반대인 괴롭다는 고(苦)로써 박살내 주고

실체가 있다는 고정관념은 실체가 있다는 반대인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로써 박살내 주고

깨끗하다는 고정관념은 깨끗하다의 반대되는 더럽다라는 것으로써 박살내야 합니다.

 

이런 것이 바로 대치법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곧 치료약이라서 이렇게 반대되는 것으로써 전도몽상을 박살냅니다.

속제의 측면에서는 이렇게 전도몽상을 박살냅니다. 

 

그러나 진제의 측면에서는

항상한 것도 없고 무상한 것도 없으며, 즐거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으며,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걸 따질만한 스스로의 성품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空( '無常'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空은 희론을 멀리 떠난 것이며, 그것이 바로 中道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란게 참으로 멋지지 않습니까?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kyang2011&logNo=221770188407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VII. 진성공품(眞性空品)

[논] 진여의 법은 모든 공덕과 모든 행덕을 갖추어 본성을 삼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고 하였으며...

blog.naver.com

이 진성 상 떠나고 성 떠났으니, 상 떠났다고 하는 (離相) 허망한 상을 떠난 것이고, 성을 떠났다는 (離性) 진성을 떠난 것이다.

 

32.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心無罫碍 無罫碍故 無有恐怖)

http://blog.daum.net/mahatop7/5492

 

以無所得故

이무소득고: 스스로의 성품(실체)을 얻을 수 없으므로

菩提薩埵

보리살타 : 보리살타(보살)은

依般若波羅蜜多故

의반야바라밀다고 :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기 때문에

心無罫碍

심무가애 : 마음에 걸림과 장애가 없으며,

無罫碍故

무가애고 : 걸림과 장애가 없으므로,

無有恐怖

무유공포() : 공포(두려움)이 없다.

 

[해설]

가(罫) : 걸림, 거리끼다. 걸리다.

애(碍) : 장애, 방해되다.

 

왜 마음에 거리낌과 장애가 없을까요?

위에 설명이 나온 대로 스스로의 성품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전편에서 상세히 설명했다시피 <의지할데 없는데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은 空하여,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나"라는 성품이 있다라고 여기기 때문에 마음에 장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것이 있고

그 나의 것에 손해가 오면 화를 내고, 이득이 오면 애착을 합니다.

이것이 탐진치입니다.

 

*삼독(三毒) 탐진치(貪嗔癡) 

 탐욕(貪慾)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스스로의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명이며,

나/나의 것에 이득이 올 때 애착을 하는게 탐심이며,

나/나의 것에 손해가 올 때 화를 내는게 진심입니다.

또한 "너"에게도 성품(실체)가 있다라고 여기고,

네가 하는 짓이 아니꼬우면 미워하고, 네가 하는 짓이 이쁘면 애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와 나에게 정말로 고정불변의 영원한 자성(실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미워하거나 좋아할 대상 자체가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설사 눈에 보여지고 들려지더라도, 거기엔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걸 알아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됩니다.

더 이상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의 의미는 인연(因緣)과 연연(緣緣)이 화합해서 법(法)이 생겨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들은 조건(緣)에 의해 발생되므로 연기법(緣起法)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겨난 법(法:존재&사물)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언제나 온갖 조건들의 바뀜에 의해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항상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조리 다 변화한다라는 것은, 모로리 다 空하다라는 뜻입니다.

일체가 다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을 뿐입니다.

일체개공!!!

모조리 다 空한걸을 확실히 안다면, 그 어디에도 집착할 꺼리나 대상이 아예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엔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두려움이란 뭘까요?

걸림/장애입니다.

마음에 걸리적 거리고 장애되는 게 바로 두려움입니다.

마치 하늘에 큰 바위가 떡 버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두려움이란 탐진치에서 진(嗔), 즉 분노에 해당합니다.

왜냐면 중생들은 두려움을 싫어합니다.

싫어한다는 게 바로 미워한다는 의미이므로 두려움은 분노에 해당됩니다.

해탈의 증거로 삼는 것이 바로 <두려움 없음>과 <희망(바램)없음>입니다.

<희망없음>이란 탐심이 없다는 증거이며,

<두려움없음>이란 진심이 없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뭘 무서워하거나, 어떤 상황에서 놀란다면 그것은 해탈이 안됐다라는 증거입니다.

어떤 실체/자성이 있다고 여겨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걸림/장애입니다.

내 마음 속에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반드시 두렵게 되고 역시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는게 사실은 좋은 게 아니고, 고통의 뿌리입니다.

"나"라는 것은 속제에서는 있지만, 진제에는 없는 것 입니다.

진제가 진실한 것입니다.

수행자에겐 악마(타화자재천마)가 큰 장애입니다.

이런 장애가 생기는 것은 "나"에게도 실체가 있고 "악마"에게도 실체가 있다고 여겨서 그렇습니다.

대지도론에 보살은 악마나 부처나 둘 다 똑같이 차별없이 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역시나 진제의 측면입니다.

겉모습(속제)은 분명히 차별이 있어서 악마는 무섭게 생기고 부처님은 자비스럽게 보여지지만,

본래모습.......즉 진제의 측면에서 따져보면

악마에게도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부처님에게도 또한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똑같은 것 입니다.

둘 다 텅 비어 있는 것이므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보살은 악마라고 해서 미워하지도 않고, 부처라고 해서 더 애착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미워할 대상도 없고 애착할 대상도 역시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는 미워하고 애착한다는 것은 마치 허공에 팔뚝질하는 것과 매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에서 너에게도 실체가 있고 나에게도 실체가 있다고 착각해서 미음과 애착이 발생됩니다.

중생이 무엇으로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는가 하면 바로 모습(相)입니다.

눈에 보이는 그 모습을 취해서 그걸 나로 여기고 그걸 너로 여긴다는 뜻 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에 냄새 맡아지고..나머지도 역시 그런 특징들을 모습으로 삼아 집착하는 것 입니다.

이런게 바로 세속입니다.

그저 눈에 보이면 그 보이는 대로 진짜라고 여기고 집착하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게 다 진짜라면...즉 스스로의 성품(自性)이 있다면 변화가 생기면 안됩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무상하게 변화하는 것 입니다.

변화하는 것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과 연의 화합으로 생겨난 모든 것들(유위법)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지지만,

그 자체에는 독립적인 실체(자성)이 없으므로 꿈/환영/거품/그림자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여몽환포영이란 거짓이란 의미입니다.

세속의 모든 것들은 거짓이란 뜻이죠.

꿈이란 무엇일까요?

꿈꿀 때야 정말 진짜 현실처럼 눈에 보여지지만, 꿈에서 깨고나면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모든 유위법들은 꿈과 같이 거짓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거짓이냐면 거기엔 스스로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여지건, 귀에 들려지건, 마음으로 알아지건.....그 모든 것엔 스스로의 성품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은 것인데,

중생은 이걸 몰라 모두가 진짜라고 여기니 애착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 입니다.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방법!!!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답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연기법을 깨닫는 것입니다.

더 요약하면 空을 깨닫고 익히는 것이죠.

그래서 <조견오온개공>으로써 두려움을 포함한 일체고액을 넘어가서 <도일체고액>입니다.

 

 

31.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http://blog.daum.net/mahatop7/5491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고로...라는 뜻입니다. 

의(依)는 의지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왜 의지하다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세속의 법을 따라 그렇게 표현한 것 입니다.

즉, 속제의 측면입니다.  

반야바라밀에는 얻을 바가 없으므로, 의지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리살타는 의지할 데 없음을 의지하는 고로.........라는 뜻이 됩니다.

  

이전에도 속제와 진제를 명확하게 구분해서 알아야 된다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이걸 명확하게 구분하려면 진제, 즉 空을 실제로 깨달아야 할 겁니다. 

설사 깨닫지 못했다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하면 됩니다.

진제와 속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인 이전에 설명해놓은 것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보리살타는 보살이라는 뜻 입니다. 

반야심경의 앞부분에 관재자보살이란 말이 나오는데

본래는 관자재보리살타인데 줄여서 관자재보살이라고 한 것 입니다.

  

보살이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존재를 말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부처가 되는 성불을 반드시 하겠다라는 마음을 말합니다.

 

부처가 된다는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즉 무량한 모든 중생을 모조리 다 고통에서 건져주기 위함입니다. 

부처가 되면, 완벽하게 제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니다.

물론 제도 가능한 중생들에 한해서 입니다.  

죄가 많은 자는 그 누구도 제도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위대한 성인이 왔다가셨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통받는 중생들이 그득한 것입니다.

 

보살은 자기의 행복보다는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더 중요시 여기며,

자신의 고통을 보살피지 않고, 오로지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없애주기 위해서 발심한 분들입니다.

이것이 대승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낸 존재가 바로 보리살타..........즉 보살입니다. 

보살의 길을 걷다가 성불하기 위한 모든 조건들이 구족되면 그때 성불하여 부처님이 됩니다.

 

물론 보살의 길을 걷는 과정에서도 수없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합니다.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서야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은 큰 자비심으로 고통받는 중생을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중생을 버리고 스스로의 행복만을 위해 열반에 들지 않습니다.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한, 끊임없이 보살행을 통해 성불을 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

이런 마음을 낸 분들이 바로 보살입니다.

 

소승에겐 이러한 광활한 마음이 없습니다.

 소승은 자신을 위해서 빨리 이 생노병사라는 고해에서 벗어나 해탈하려고 합니다.

또한 중생들을 제도 한다고 해도 적은 숫자입니다.

 

대승은 많이 제도한다는 뜻이고, 소승은 적게 제도한다는 뜻입니다.

소승이라고 해서 아예 제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찌됐건 보리심......

즉 모든 중생을 모조리 다 고액에서 건져내주겠다라는 마음을 일으킨 것...

이것은 참으로 위대하고도 위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낸 보살이 한명 탄생하면, 온 우주가 환희스러워 진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보살 한명으로 말미암아 무량한 중생들이 행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보살이 그런 길을 걸을 때 의지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고통당하는 나라는 것에도 실체도 없고,

고통을 주는 타인에게도 실체도 없고,

고통이라는 것에도 실체가 없음을 알아 두려움없이 부지런히 성불을 이루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행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다 중생을 위한 것입니다.

 

이무소득고....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고로.........결국엔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이 완성된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 반야심경 해설 30.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http://blog.daum.net/mahatop7/5490

 

무소득(無所得)!!!

도대체 뭘 얻지 못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스스로의 성품, 즉 자성(自性)을 말합니다.

실체(自性)라고 여길만한 게 그 무엇도 없으므로, 무소득(無所得)입니다.

무소득(無所得)이란 그래서 스스로의 성품을 얻을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 얻을 바가 없냐면 생겨난 모든 법(法)들은 인연화합으로 생겨났으므로(연기법)

거기에는 고정불변의 실체....즉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얻을 바가 없는 고로...라는게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의 뜻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전편에서 했으므로 생략합니다.

무소득(無所得)!!!

이게 사실 굉장히 중요한 것 입니다.

도를 닦으면서도 뭘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정반대로 닦는 것입니다.

얻을 게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이 바로 불교의 도이며,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본래 없으므로, 실체를 구할래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뜻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우리 눈에 보여지고 들려지는 건 있지만, 거기에 영원불변의 실체(성품)이 없어서 공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보여지는 것이든, 들려지는 것이든 스스로의 성품이 없으므로 영원하지 못하고 변화해 갑니다.

이 변화해 간다라는 게 바로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 정말로 얻을 게 있다면, 반드시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게 물건이든 진리든 말이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곧 고통입니다.

열반과는 정반대지요.

그러므로 진리 자체에도 집착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불교의 진리인 열반/공/반야바라밀/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도 역시나 실체가 없어 공한 것입니다.

공한 것에서는 그 무엇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위의 말은 진제의 측면에서 한 말입니다.

속제의 측면에서는 온갖 차별이 있으니 얻음도 있고, 깨달음/열반도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 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표현은 세속의 틀에 맞게 설명한 것입니다.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서죠.

반야경을 봐야 합니다.

또 그 반야경을 풀이한 대지도론을 봐야만 합니다.

이러한 대단히 깊은 내용의 설법이 반야경과 대지도론에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속적인 그런 관념과는 완전히 꺼꾸로입니다.

정반대입니다.

불자들은 이런 걸 반드시 알고 구도의 길을 걸어야만 바라는 걸 성취할 수 있습니다.

첫째가는 제1의 진리를 불교에서는 제일의제/승의제/진제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곧 반야바라밀입니다.

반야바라밀이란 그 무엇에도 얻을만한 게 없어서 집착할 대상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뭘 얻기 위해 도를 닦는다면 정반대로 닦는 것입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이게 바로 위의 뜻입니다.

얻을게 없는 고로.............!!!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위의 말은 진제의 측면에서 설하신 것입니다.

본질적으로는 얻을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것은 연기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연기법!!!

그래서 연기법이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이라는 것입니다.

연기법에 인과법이 담겨져 있고, 거기에 또 空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의 실체가 바로 공입니다.

윤회의 실체가 바로 해탈이죠. 그러므로 윤회가 없으면 해탈도 없는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이러한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로 떨어트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정말로 중생에게 알려주시려는 게 바로 이 반야바라밀입니다.

이 반야바라밀을 알아야만 아라한/벽지불/부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죠.

반야바라밀이란,

위에서의 설명처럼 무소득(無所得)...얻을 만한게 단 하나도 없어서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공이나 반야바라밀에도 역시나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피안으로 건너는 뗏목이며,

도를 닦는 것은 피안으로 건너가는 게 목적이지 뗏목을 저 언덕에 도착시키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진리에도 역시나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진리에 집착하면 그건 더 이상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무소유(無所有)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도 본래의 뜻은 <있는 바가 없다>는 뜻 입니다. 이 말이 반야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뭘 소유하지 않아서 무소유가 아니고,

본래 있는 게 없어서 소유할 만한 게 그 무엇도 없다는 게 바로 무소유입니다.

왜냐면 본래의 뜻처럼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본래 없습니다.

그래서 본래 가질 수조차 없습니다.

당연히 이 말도 역시나 진제의 측면에서 한 말입니다.

또한 세속에서도 역시나 가진 것을 모조리 잃게 되므로 소유한 게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죽음을 통해 가진 것을 모조리 다 잃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사실상 가진 게 가진 게 아닙니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가졌다라고......착각할 뿐이죠.

결국 잃게 되는 것은 가진 것이 아닙니다.

또한 거기에 집착한다면 반드시 잃게 되니 그땐 고통이 생깁니다.

무소유(無所有)

있는 바가 없어서.....

무소득(無所得)

얻을 바도 역시나 없다.

참으로 멋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은 깊고도 깊고 불가사의하며,

생각이나 논리로써는 절대적인 진리(반야바라밀)에 접근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을 공하게 텅 비워야...

무소유..즉 있는 바가 없어야 반야바라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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