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f_uYDub_j8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깨달음에 뿌리를 내리자.)


*위 주문(呪文)산스크리트어[범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어 :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
            가테 가테 파라가테 파라상가테 보디 스와하 <=== 억양을 부드럽게 했을 때

(한자 음역)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한국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영   어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해   석 :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가라. 가라. 
피안으로 건너가라.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가라. 
깨달음에 뿌리를 내려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2912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093

 

 

[참고]

옴마니반메훔 (OM MA NI PAD ME HUM)

'옴마니파드메홈'의 뜻

-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주문으로 '옴 마니반메훔(산스크리트어)'의 여섯 자를 말함. [六字眞言]

이 주문을 위우면 관세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함.

- 산스크리트어로 지혜와 함께하는 방편이자 방편과 함께하는 지혜라는 뜻으로도 해석됨.

- 또는 '참다운 우주적인 근본 지혜와 자비가 마음에 깃들기를'이라는 뜻으로도 해석됨.

 

 

https://www.youtube.com/watch?v=N6-P1Wl7B2w 

 

 

 

 

반야심경 해설 21. 불구부정(不垢不淨)

 

http://blog.daum.net/mahatop7/5481

제법실상(諸法實相)이 곧 空입니다.

제법(諸法)이란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겨난 모든 것들을 뜻합니다.

즉 모든 존재를 포함한 삼라만상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존재하려면.... 생겨나려면.... 무조건 연기법에 적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생겨난 법들(諸法)의 본래 모습(實相)이 바로 空입니다.

그 空의 모습이 바로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는 말입니다.

空에는 그 어떤 형체나 모습이 없으므로, 더러움이나 깨끗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空을 청정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불경에 청정하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대지도론에는 왜 청정하다라는 표현을 부처님께서 쓰셨는가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중생이 그저 空하다고 하면 두려워하기 때문에 청정하다는 표현을 쓰셨다고 합니다.

더러움(垢)이란 윤회이며, 깨끗함(淨)이란 열반을 의미하는데...

空 그 자체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습니다.

즉 空 그 자체엔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8空 중에 <제일의공>이 있는데 이 뜻은 바로 열반도 실체가 없어 공하다라는 의미입니다.

空 그 자체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空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디에도 집착할 대상도 없고, 집착할 꺼리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열반인 것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空 그 자체엔 윤회도 없고, 열반도 없다. 그러므로 열반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온에는 스스로의 성품(실체)이 없어서 공한데, 그 공한 오온으로 열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세속법에 따라서 열반을 얻었다라고 할 뿐이지, 실상은 얻을 수 없는 걸 얻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뭘 얻을 수 있다면, 그건 空과는 반대인 것입니다.

뭘 얻는다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므로, 그것이 곧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은 세간에 적용되는 게 아니고, 출세간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간에서야 더러움도 있고 깨끗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그 이면에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런 세간에서도

더러움이나 깨끗함에 어떤 정해져 있는 법(규칙)이 없습니다.

딱 이건 더럽고, 이건 깨끗하다고 정확하게 구분 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똥을 아주 더럽게 여깁니다만,

똥을 먹는 똥개는 그 똥이 아주 깨끗해 보이고 좋아 보이니까 그 똥을 먹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신선한 돼지고기를 아주 깨끗하다고 여기지만,

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걸 더럽다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선이지만, 그게 또 어떤 사람에겐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속에서도 사실상 정해져 있는 법은 없습니다.

空과 가장 유사한 것이 바로 허공입니다.

허공 그 자체엔 그 어떤 것도 없으니, 깨끗하다고도 할 수 없고 더럽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空이 바로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본래 우리는 더럽다거나 깨끗한 것이 없이 그저 청정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걸 불성, 진여, 여여, 법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공/불성/진여/여여/실제/법성 등은 모두 반야바라밀에 포섭됩니다.

반야바라밀에도 그 어떤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걸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일체의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B%B0%98%EC%95%BC

 

반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प्रज्ञा prajñā) 또는 팔리어 빤냐(paññā)를 가리키는 낱말인데, 뜻에 따라 지혜(智慧)로 번역하고, 간단히 지(智) 또는 혜(慧)라고도 한다.[1] 불교

ko.wikipedia.org

불교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 혹은 팔리어 빤냐를 '지혜'라고 번역하지 않고 음역인 '반야'를 사용한 것은 불경의 한역(漢譯)시 적용했던 원칙인 5종불번(五種不翻: 5가지 번역하지 않는 원칙) 가운데 존중불번(尊重不翻)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즉, 반야를 지혜라 번역하면 그 본래의 뜻은 깊고 심대하나 번역함으로 인해 그 뜻이 얕아지고 가벼워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불교 논서들에서는 흔히 반야를 (慧)로 번역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교학에 따르면, 반야(般若) 즉 (慧, prajñāpaññā)는 택법(擇法) 즉 간택(簡擇: 정확히 식별하여 판단함)[3][4][5] · 판단작용 · 판단력 또는 식별력으로,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心所法)의 대지법(大地法: 마음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항상 함께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에 속한다.[6][7][8]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慧)는 부파불교에서와 마찬가지로 택법[9][10] 즉 간택[11][12] · 판단작용 · 판단력 또는 식별력이지만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심소법의 별경심소(別境心所: 특정 대상 또는 경계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마음작용들)에 속한다.[13][14][15][16][17] 상좌부 불교의 교학에서는 8정도를 크게 (戒) · (定) · (慧)의 3학(三學)으로 분류하여 보는데,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를 로 분류한다.[18][19] 이와 관련하여 《잡아합경》 제13권 제334경〈유인유연유박법경(有因有緣有縛法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정사유(正思惟)의 반대인 부정사유(不正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가 무명(無明)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구사론》 등에 따르면, (智) · (見) · (明) · (覺) · (解) · (慧) · (光) · (觀)을 통칭하여 혜의 8가지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20][21] 이 때문에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과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慧)라는 명칭의 은 있어도 (智) · (見) · (明) · (覺) · (解) · (光) · (觀)이라는 명칭의 은 없는데, 이들의 본질[自性, 自相]이 모두 (慧)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3993

 

십바라밀(十波羅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 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행(菩薩行)이며,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의 일반 보살행은 처음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

encykorea.aks.ac.kr

우리 나라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보살행(菩薩行)이며,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연장이기도 하다. 대승불교의 일반 보살행은 처음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반야(般若)의 육바라밀로 완성시켰으나

뒤에 방편(方便)·원(願)·역(力)·지(智)의 네 가지를 더하여 십바라밀을 만들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십바라밀(十波羅蜜))]

 

https://www.youtube.com/watch?v=MuUoqyAX3BQ 

 

https://www.youtube.com/watch?v=XBAc-i17CaM 

 

 

https://kydong77.tistory.com/category/%ED%95%B4%EC%99%B8%EC%97%AC%ED%96%89/%EC%A1%B1%EC%9E%90%EC%B9%B4%EB%A5%B4%ED%8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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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RyZ2WadfSPc 

 

 

 

https://kydong77.tistory.com/11984?category=612190 

 

극락세계 4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11984?category=612190 

 

극락세계 4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qdnskbraNgY 

 

 

https://kydong77.tistory.com/11927?category=612190 

 

[해설] 보로부드르 사원

먼저 사원 탑신의 광대한 규모와 1,460면에 달하는 탑신 부조물들의 정교한 조각에 압도당한다.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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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__kKH3qk0Rg 

 

 

https://kydong77.tistory.com/12021?category=612190 

 

보로부두르 사원을 떠나며 4

 

kydong77.tistory.com

 

 

 

천 년 동안 화산재에 묻혀있던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https://www.youtube.com/watch?v=tlM3e-tGrAc 

 

 

반야심경 해설 20. 불생불멸(不生不滅)

http://blog.daum.net/mahatop7/5480

 

空은 대승과 소승을 막론하고 공통적인 해탈문입니다.

그만큼 이 空은 중요한 것입니다.

空은 모습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無相입니다.

모든 법의 공한 모습(諸法空相)이 곧 불생불멸(不生不滅)이죠.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생겨난 게 없으므로 소멸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전에 자주 설명드렸다시피,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가 아닙니다.

空은 아무것도 없는 無도 아니며, 그렇다고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空을 여여(如如)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즉 오온은 있되 그 오온에 고정불변의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어서 空입니다.

이 空은 그 어떠한 표현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 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런 표현도 맞지 않습니다.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허공을 그 어떤 단어나 설명으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空을 허공에 비유합니다.

허공엔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허공을 알 수 있습니다. 물건으로 알 수 있죠. 물체가 없는 곳이 곧 허공입니다.

허공처럼 불생불멸한 것이 우리 마음의 본래 모습입니다.

이 생멸하며 찰라생 찰라멸하는 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공한 것이며, 불생불멸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의 몸도 죽고, 마음도 생겼다가 사라지는 걸 반복하지만,

몸과 마음엔 원래 자체가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이라, 공 그 자체엔 태어난 것도 없고 소멸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죽습니다만,

이 몸과 마음의 본질은 텅 빈 허공과 같아서 본래 죽는게 없는 것입니다. 생겨난 게 없으므로 죽을 것도 없죠.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생사를 벗어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외도의 종교나 도닦는 것들과는 정반대죠.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변한 영혼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 영혼을 나의 본체라고 여기는 것 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오로지 오온에 의지해서 있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그저 명칭상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그 오온은 空한데, 그 空한 오온에 의지해서 나가 있으니,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란 개념은 이 오온 이외에 어떤 고정불변의 영원한 실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영원불멸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죠.

만약 영원불멸이라면, 그 어떠한 변화가 없어야 합니다.

그 어떤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과연 나랑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또 영혼이 괴롭다느니...뭐 이런 소리를 하는데...

영혼이 괴롭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한다는 것은 곧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불변의 영혼이라고 주장할 수가 없죠. 변하니까 말입니다.

또 괴로운 것은 오온 중에서 느낌입니다.

괴로움은 느낌이지, 그게 영혼은 아닙니다.

그래서 소승이든 대승이든 밀교든, 불교에서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가끔 영혼이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고 여기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게 되면 해탈은 불가능합니다.

영혼이 있다라고 설법해주는 부류들은 해탈할 부류가 아니고, 선업을 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이 있다고 얘기해야, 내생을 믿고, 그로 인해 내생이 잘되길 바래서 선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것은 희망의 말씀입니다. 소멸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왜 소멸이 안 되느냐 하면 본래 생겨난 게 없으므로 소멸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죽음조차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인들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멸도...즉 열반에 드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라한이 되신 비구니 스님들이 너도 나도 미리 열반에 들겠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열반에 들겠다라는 얘기는 세속적으로 죽겠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 석가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에 수많은 비구니 스님들께서 열반에 들어버렸습니다.

또 석가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나서도 수많은 아라한들이 앞을 다퉈 열반에 들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죽음을 초월한 상태라서 그렇죠.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생노병사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걸 설명한 것이 바로 12연기법입니다.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고....

이 뜻이 과연 뭘까요?

본질적으로 따져보면

결국은 안 죽었다는 뜻이고, 결국은 태어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죽고나서 다시 또 태어났다는 것은 결국 안 죽었다는 뜻이고,

태어났다가 죽었다라는 것은 결국 태어난 게 없다는 뜻입니다.

계속 죽고 또 죽고를 반복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따져 봤을 때 안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계속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따져봤을 때 태어난 게 없다는 의미입니다.

불생불멸이므로 윤회가 가능합니다.

본질이 空하기 때문에 윤회가 가능합니다.

우리의 몸에 정말로 영원한 실체가 있다면 죽을 수 없습니다.(상주론)

또한 정말 몸에 영원한 실체가 있는데도 죽었다면

그 실체도 또한 몸이 죽을 때 소멸돼서 없어져 버려야 하니 그것은 단멸론입니다.

空(불생불멸)이 곧 중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아주 소멸되지 않습니다.

왜 소멸되지 않는가 하면, 소멸될 만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후세계가 있고, 내생이 있고, 내생에 또 전생에 지은 업력을 받게 됩니다.

귀신영화/공포영화/전설의 고향같은 걸 보면 아주 웃긴 게 하나 있습니다.

알고 보면 정말 웃긴데, 이걸 잘 안 따지고 보죠.

귀신이 멀쩡히 살아있으면서도 <나는 죽었어, 원수를 갚아야 해>하면서 복수하는 장면입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죽었다라고 여기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모습은 사실 꽤 웃긴 겁니다.

도를 닦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면,

아, 난 안 죽었잖아...아 신나네..이러면서 춤을 출 텐데 말입니다.

 

 

반야심경 해설 19.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http://blog.daum.net/mahatop7/5478

 

처음에는 오온이 모두 다 공함을 조견했고,(조견오온개공)

그후에는 오온과 공의 관계를 설명했고,(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제부터는 모든 법의 공한 모습에 대해서 설명이 시작됩니다.

空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입니다.

제법(諸法)이란 무엇일까요?

인과 연의 화합으로 생겨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空의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無가 아닙니다.

색수상행식은 있되, 그 색수상행식에 내재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어 空한 것입니다.

왜 실체가 없을까요?

왜냐면 색수상행식이 모두 다 인연화합으로 인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색수상행식이 모조리 다 매순간순간마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변화한다라는 의미는 곧 영원한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상(相)이란 무엇일까요?

모습을 뜻합니다.

축구공의 모습은 둥글고, 땅은 편편하고, 산은 울퉁불퉁하고, 엉덩이는 볼록한 모습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게 다 모습입니다. 모습/형태가 바로 相입니다.

空하다는 것에 과연 相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치 허공에 그 어떤 모습도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근데 왜 공상(空相), 즉 공한 모습이라는 용어를 썼을까요?

그것은 중생을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입니다.

모습이라는 용어 이외엔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공상(空相), 즉 공한 모습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모습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해탈문이 바로 그 어떤 모습도 없다는 無相해탈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空을 깨달으려고 한다면, 절대로 어떤 모습에서 찾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만약 空에 뭐가 있다면 그게 空일까요?

아닙니다.

마치 하늘(허공)은 텅빈 게 하늘이지, 뭐가 있다면 그건 허공이라고 불리울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래 마음의 모습이 이렇듯이 무한하게 텅 비어 있습니다.

근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그저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 생멸하는 마음을 "나"로 여기고 집착하는 것 입니다.

내 마음에 고정불변의 영원한 "나/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게 고통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성인들께서는 그 "나"를 버리시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성인이 된 분은 없습니다.

만약 내 마음속에 정말 "나"라는 실체가 없이 텅 비어 있는걸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집착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야 고통에서 벗어나므로, 마음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의 본질이 바로 空입니다.

하늘처럼 텅 비어 맑고 깨끗합니다.

이런 게 본래 우리 마음의 모습입니다. 모습 없는 모습이죠.

空을 깨달았다고 해도, 역시나 그 空에 집착하면 안 됩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空을 깨닫고 나서 그 空에 집착하면 그것이 바로 무명(어리석음)입니다.

空을 깨닫고 나서 그 空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제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제법의 공한 모습을 설명한 것이 바로,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 이 세 가지입니다.

물론 반야경에는 이 세 가지 이외에도 더 많이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합하지도 않으며 흩어지지도 않으며 등등 여러 가지가 더 설명되어져 있죠.

그 중에 핵심적인 것 세 가지만을 간추린 것이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입니다.

 

반야심경 해설 18. 사리자(舍利子)

http://blog.daum.net/mahatop7/5477

 

반야심경은 크게 두 종류가 중국에 번역되었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반야심경은 당나라 현장법사께서 번역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야심경이 있는데,

바로 계빈국(罽賓國) 반야(般若)ㆍ이언(利言)께서 공역하신 반야심경입니다.

위의 두 분께서 번역하신 반야심경을 읽어보시면 전체적인 윤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의 주된 내용은 관세음보살님께서 사리불존자에게 반야바라밀을 설하시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사리불 존자에게 설하신 게 아니라,

관세음보살께서 사리불께 설하신 것입니다.

아래는 계빈국(罽賓國) 반야(般若)ㆍ이언(利言)께서 공역하신 반야심경입니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영취산)에서 큰 비구 대중들과 보살들과 함께 계셨다.

이 때 부처님 세존께서 넓고 크고 매우 깊은 삼매[廣大甚深三昧]에 드셨는데,

그 때 모인 대중 가운데 관자재(觀自在)라 이름하는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있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하여 5온(蘊)이 다 공(空)함을 비추어 보고는

모든 괴로움과 재앙에서 벗어났었다.

그러자 즉시 사리불(舍利弗)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이어받아 합장하고 공손하게 관자재 보살마하살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만약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는 이가 있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이와 같은 물음을 마치자, 이 때 관자재 보살마하살이 구수(具壽) 사리불에게 말했다.

“사리자여,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는 5온의 자성(自性)이 공함을 관(觀)해야 합니다.

사리자여, 물질[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色]입니다.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의식[識]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사리자여,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相]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습니다.

이런 까닭에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도 없고,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없으며,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도 없으며,

무명(無明)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없앰[滅]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道]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습니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나니,

그러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고,

뒤바뀌고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구경열반(究竟涅槃)에 들어가며,

과거ㆍ현재ㆍ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大神呪]이며, 가장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으뜸가는 주문[無上呪]이며, 아무것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無等等呪]인 것을 알아 온갖 괴로움을 없애나니,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말하나니, 주문은 곧 이러합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帝 揭帝 般羅揭帝

般羅僧揭帝 菩提 僧莎訶

[건너가자 건너가자 피안으로 건너가자,

피안으로 온전히 건너가 깨달음을 성취하자!]/우리말 해석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모든 보살마하살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수행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말을 끝내자,

곧바로 세존께서 넓고 크고 매우 깊은 삼마지(삼매)에서 나오셔서 관자재 보살마하살을 찬탄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려면 마땅히 이렇게 수행해야 하며,

이와 같이 수행할 때 일체의 여래는 모두 다 따라서 기뻐하느니라.”

세존께서 이 말씀을 마치셨을 때 구수 사리불은 큰 기쁨이 충만하고 두루했으며,

관자재 보살마하살도 역시 크게 기뻐했으며,

그 때 그 대중에 모였던 하늘ㆍ사람ㆍ아수라(阿修羅)ㆍ건달바(乾闥婆) 등도

부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하였다.

.....

반야심경은 많이 읽고 외워야 합니다.

이 반야심경을 읽고 외우면 어떤 효과가 나는지 반야경에 아주 자세히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그 막강한 힘은 악마들도 해치려고 오다가 되돌아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이 읽고, 배우고, 외워야 합니다.

뜻을 정확하게 알고 외우는 것이 가장 좋은데, 설사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도 외우면 큰 공덕이 됩니다.

이 반야심경은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면 반야바라밀의 핵심을 설한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이란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반야바라밀은 곧 열반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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