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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

- 사성제와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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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성제와 팔정도 http://cafe.naver.com/jungjin37/205


사성제와 팔정도 ◑

사성제(四聖諦)

사성제는 '네가지 거룩한 진리'라는 말이다.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가지를 설하신
부처님 최초의 법문이다

마치 의사가 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원인을 알아 낸 다음, 건강한 상태의 정상적인 표준을 알아서
거기에 맞는 치료 방법을 강구하듯이, '고→ 집→멸'을 알고
멸에 이르는 바른길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 고성제(苦聖諦)

우리 인생의 현실은 고(苦)라는 것으로
경전은 8가지 괴로움을 들고 있다.
생노병사와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하는 괴로움,원하는일이 이루어지지않는
괴로움 오온(안,이,비,설,신)에 집착하는 괴로움) 등 8가지이다

불교에서 '괴롭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인생에서의 행복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일반적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행복을 인정하였다.
그러 한 행복을 인정하고 찬양한 후,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쉽다'라고 하였다.

즉 무상한 것은 무엇이든지 괴롭다는 속성을 가진 의미에서
괴로움인 것이다.

(2) 집성제(集聖諦)

괴로움의 집(苦集)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는가의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집(集)이라는 술어는 원래 '결합하여 일어난다'는 뜻으로
이는 괴로움은 연기(緣起)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경에서는 집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

그것(集)은 재생(再生)의 원인이 되는
갈애로서 격렬한 탐욕에 묶여 있으며,
여기저기 새로운 기쁨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욕애(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망),
유애(존재 그 자체와 형성에 대한 갈망),
무유애(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등이다'

인간에게 온갖 괴로움과 윤회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여러가지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탐욕 욕망 갈애 열망등이다.

그러나 연기법에서 보았듯이 모든것은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고의 근본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는 탐욕도 다른 것,
즉 느낌(受)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며,
이 느낌은 접촉(觸)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어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
으로 순환되면서, 결국 연기적 의미의 '집 (集, 緣起)'이 되는 것이다.

(3) 멸성제(滅聖諦)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개념이다.
고의 원인이 애 탐등의 집기라면 무명의 멸진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 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지를 원적, 혹은 열반이라고 하여,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해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생불명의 진리를 체득한 경지를 말한 것이다.

(4) 도성제 (道聖諦)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 곧 실천하는 수단을 말한다.
그 방법은 여덟가지의 수행 방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가 곧 팔정도의 수행방법이다.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도성제는 위에서 제시된
멸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즉 고의 멸진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항목인 것이다.

종교의 생명은 말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있다는 말이 있다.
걸어간다는 것은 곧 실천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성제는 이처럼 고 집 멸 도의 네가지 진리이다.
고는 집의 결과 즉 현실 이며 집은 고의 원인이다
멸은 도의 결과 즉 현실 이며 도는 멸의 원인이다

도성제의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서는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라 불리우는 팔정도가 있다.

팔정도(八正道)

(1) 정견 (正見)
정견은 [바로봄]을 뜻한다. 곧 올바른 견해이다.
이 정견은 유무(有無)의 편견을 벗어난 정중(正中)의 견해이다.
곧 사(사)와 정(正)을 분별하는 견해이고 바른 견해로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2) 정사유(正思惟)
정사유는 올바른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입장을 바르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게 사유한다.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이다

(3) 정어 (正語) 올바른 말,
곧 온갖 망어(妄語) 사어(사語)등을 하지 않는 말이 정어이다.
올바른 생각에 의해 하는 말이고 항상 바른 생각과 바른 말을 하여
구업을 짖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이는 '진실되고 올바른 언어생활'을 말한다.
즉 거짓말, 꾸며대는 말, 서로 이간시키는 말, 남을 성나게 하는 말
등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이다.

(4) 정업 (正業)
올바른 행위,
살생이나 도둑질 따위의 악한 행위를 하지 않고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것도 역시 '바른 견해'의 적극적 실천인 것이다.

(5) 정명 (正命)
'올바른 생활 수단'을 말하는 것으로
바른 견해에 입각한 전체적인 생활에 있어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구하는 것으로 남과 나를
다같이 이롭게 하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도 그 뜻의 하나이다.

(6) 정정진 (正精進)
올바른 노력, 한 마음으로 노력해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는 곧 노력으로 인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나지 못하게 하며,
나지 아니한 선을 발생하게 하는 일이며,
옳은 일에는 물러섬이 없고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이는 바로 불자의 구도 자세라 할 수 있다.

(7) 정념(正念)
올바른 정신과 생각, 사념을 버리고 항상 향상을 위하여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하며 바른 생각을 말한다.
또한 '바르게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할 바에 따라 잊지 않는 것이다.

참된 진리를 항상 명심하고 기억하여 다른 잡념이 일어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사유와 함께 내면적인 마음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니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마음속에 정견 (正見)이 가득차고
항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8) 정정 (正定)
'바르게 집중(集中)'한다는 말로서,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인데
'삼매(三昧)' 라는 음역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행법이다.

이는 정념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서,
정념의 성취로 몸과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지극히 잘 조화되고
통일된 마음에 온갖 번뇌와 어지러운 대상이 모두 쉬게 되면서
마치 가을 하늘에 지혜의 달이 뚜렷이 빛나는 경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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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 암벽에 조각한 신라인들의 佛心/사성제(四聖諦) 八正道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https://www.youtube.com/watch?v=_3fF40cDmCQ&t=20s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6558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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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八)為婦貿鼻喻

28. 부인의 코를 자른 남편

昔有一人,其婦端正唯其鼻醜,

옛날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부인은 매우 아름다웠으나 코가 흉하였다.

其人出外見他婦女面貌端正其鼻甚好,

便作念言:

「我今寧可截取其鼻著我婦面上,

不亦好乎?」

그는 밖에 나가 남의 부인의 얼굴이 아름답고

그 코도 매우 예쁜 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지금 저 코를 베어다 내 아내의 얼굴에 붙이면 좋지 않겠는가’고.

即截他婦鼻持來歸家,急喚其婦:

「汝速出來與汝好鼻。」

그리하여 그는 곧 남의 부인의 코를 베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급히 부인을 불렀다.

“당신 빨리 나오시오. 당신한테 좋은 코를 주리다.”

其婦出來即割其鼻,

尋以他鼻著婦面上,

부인이 나오자 그는 곧 부인의 코를 베어 내고

남의 코를 그 자리에 붙였다.

既不相著復失其鼻,

唐使其婦受大苦痛。

그러나 코는 붙지 않고 부인의 코만 잃어버리고

그 부인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되었다.

世間愚人亦復如是,

聞他宿舊沙門婆羅門有大名德,

而為世人之所恭敬得大利養,便作是念言:

「我今與彼便為不異。」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도 그와 같다.

늙은 바라문이 세상 사람의 공경과 큰 이익을 받는 것을 보고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

虛自假稱,妄言有德,

既失其利,復傷其行。

스스로 거짓으로 일컫고는

망령되이 거짓을 덕이 있다고 말하여

이익도 잃고 다시 그 행을 해치는 것이다.

如截他鼻徒自傷損,

世間愚人亦復如是。

그것은 마치 남의 코를 베어 스스로 해치는 것과 같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도 또한 이와 같다.


  (二七)治鞭瘡喻

27. 말똥을 상처에 바른 사람

昔有一人為王所鞭,既被鞭已,

以馬屎拊之欲令速差。有愚人見之心生歡喜,

便作是言:「我決得是治瘡方法。」

옛날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매를 맞았다.

그는 매를 맞고는 그 상처를 빨리 고치려고 말똥을 발랐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확실히 치료하는 방법을 배웠다.”

即便歸家語其兒言:

「汝鞭我背,我得好法今欲試之。」

그리고는 곧 집으로 돌아가 아들에게 말하였다.

“너는 내 등을 쳐라. 좋은 치료법을 얻었는데 지금 시험해 보리라.”

兒為鞭背,以馬屎拊之以為善巧。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쳤다.

그러자 그는 거기에 말똥을 바르고 의기양양하였다.

世人亦爾,聞有人言修不淨觀,

即得除去五陰身瘡,便作是言:

「我欲觀於女色及以五欲。」

세상 사람들도 그와 같다.

사람이 ‘부정관(不淨觀)을 닦으면

곧 오온(五蘊)의 몸의 부스럼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여색(女色)과 다섯 가지 탐욕을 관하리라”고 한다.

未見不淨,返為女色之所惑亂,

流轉生死墮於地獄,世間愚人亦復如是。

그러나 그 더러운 것은 보지 못하고

도리어 여색에 홀리어

생사에 흘러 다니다 지옥에 떨어진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도 실로 이와 같다.


(二六)人效王眼瞬喻

26. 실룩거리는 왕의 눈

昔有一人,欲得王意,

問餘人言:

「云何得之?」

옛날 어떤 사람이 왕의 환심을 사려고

다른 사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왕의 환심을 살 수 있겠는가?”

有人語言:

「若欲得王意者,

王之形相汝當效之。」

그 사람이 말하였다.

“네가 왕의 환심을 사려거든 왕의 형상을 본받아라.”

此人即便後至王所,

見王眼瞬便效王瞬。

그는 왕궁에 가서 왕의 눈이 실룩거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본받아 똑같이 눈을 실룩거렸다.

王問之言:

「汝為病耶?為著風耶?

何以眼瞬?」

왕이 물었다.

“너는 무슨 눈병에 걸렸는가.

혹은 바람을 맞았는가.

왜 눈을 실룩거리는가?”

其人答王:

「我不病眼,亦不著風,

欲得王意,見王眼瞬故效王也。」

그는 대답하였다.

“저는 눈을 앓지도 않고 또 바람도 맞지 않았습니다만

왕의 환심을 사려고 그것을 본받은 것입니다.”

王聞是語即大瞋恚,

即便使人種種加害擯令出國。

왕은 이 말을 듣고 곧 크게 화를 내어 사람을 시켜

갖가지로 벌을 준 뒤에 나라에서 쫓아내 버렸다.

世人亦爾,

於佛法王欲得親近,

求其善法以自增長。

세상 사람들도 그러하여

불법의 왕에 대하여 친근히 하고

그 훌륭한 법에 대하여 스스로 자라나기를 구하다가

既得親近,

不解如來法王為眾生故,

種種方便現其闕短,

이미 친근해진 다음에는

여래법왕이 중생을 위한 고로

갖가지 방편으로 결함이나 단점을 드러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或聞其法見有字句不正,

便生譏毀,效其不是。

법을 듣거나 혹은 글귀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문구가 있으면

곧 그것을 비방하거나 헐뜯고 잘못된 것을 본받는다.

由是之故,於佛法中永失其善

墮於三惡,如彼效王,亦復如是。

그 때문에 부처님 법안에서도 선(善)한 것을 잃어버리고

세 갈래 나쁜 길[삼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니

저 왕의 실룩거리는 눈을 본받은 사람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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