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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옥산서원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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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소개 > 문중 탐구 > 이언적(李彦迪) 신도비명(神道碑銘)

이언적(李彦迪) 신도비명(神道碑銘)  글쓴이 : 관리자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아들 李全仁이 수집하였고, 1565년경 退溪 李滉이 讎校한 후 行狀을 지어 붙여 定稿本이 완성되었다. 이 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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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집[비명(碑銘)]

증(贈) 영의정(領議政) 문원공(文元公)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명종 20년(1565)에 권간(權奸)들을 축출하고 정사를 크게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나이 많은 노성(老成)한 분과 준걸(俊傑)들을 맞이하여 등용하고, 당시에 죄를 입고 과오를 범한 자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을사년(乙巳年 을사사화(乙巳士禍)) 이후로 귀양 가거나 쫓겨난 자들이 혹은 서용(敍用)되고 혹은 전직되었으며,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관직을 복구하도록 명하였다. 고 의정부 좌찬성 회재(晦齋) 이공은 강직한 도를 행하다가 배척을 입고 별세한 지가 13년이 되었는데, 이때 비로소 복관(復官)의 대열에 참여되었다. 세도(世道)는 태평성대를 만나 훌륭한 정치가 날로 새로워져서 수년간에 과거의 나쁜 짓을 깨끗이 씻어 내고 훌륭한 인물을 선발하여 쓰는 것이 진실로 장차 극진하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재앙을 내리어 명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니 신민의 애통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금상-선조-께서 즉위하신 초년에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시어 지극한 도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산릉(山陵)의 역사가 끝나자 맨 먼저 큰 은혜를 내려 아직 다 풀려나지 않은 자들을 모두 풀어 주고 관원으로 임용한 다음,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납시어 성학(聖學)을 강론하고 당세의 일을 더욱 자문하였다. 이때에 선비 중에 억울함을 품고 있던 자들로 하여금 모두 머리를 들고 자기의 마음을 토로하여 그동안 숨겨져 있던 사실들을 모두 아뢰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공의 훌륭한 도덕과 문장도 또한 임금께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생의 유서(遺書)를 찾아 수집하라는 명이 내려지고, 얼마 후에는 조정의 의논에 따라 공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또 명종의 묘정(廟庭)에 배향하도록 명하였으니, 아, 공의 도(道)가 이제는 한 세상에 다소나마 알려지게 되었다.


공의 휘는 언적(彦迪)이며, 자는 복고(復古)이고, 자호(自號)는 회재(晦齋)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인데, 중종께서 언(彦) 자를 가하도록 명하였다. 선계(先系)는 여주(驪州)에서 나왔는데, 그 후 경주(慶州)의 양좌촌(良佐村)으로 옮겼다. 증조의 휘는 숭례(崇禮)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조의 휘는 수회(壽會)로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선고의 휘는 번(蕃)으로 성균 생원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선비는 정경부인 손씨(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 9세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차츰 자라자 학문에 힘쓰고 문장을 잘하였다.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생원시에 입격하고, 다음 해인 갑술년(151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가 얼마 후 정식으로 교서관 부정자가 되었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저작(著作)에 이르렀는데, 할아버지인 참군공(參軍公)이 별세하자 공은 승중(承重)으로서 상을 마쳤다. 그 후 박사로 승진되고 홍문관 박사와 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과 병조 좌랑, 이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외직(外職)으로 나갈 것을 청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겨우 2년 만에 불려 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병조 정랑과 이조 정랑을 역임하고 문학(文學)으로 옮겨졌다가 장령(掌令)과 보덕(輔德)이 되었다.


가정(嘉靖) 기축년(1529, 중종24)에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는데, 백성을 대하고 아전들을 다스림에 모두 조리와 법도가 있어 관리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사랑하였다. 1년 남짓 있다가 사간원 사간으로 소환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김안로(金安老)를 끌어들여 동궁(東宮)을 우익(羽翼)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김안로의 아들이 공주에게 장가들어 동궁과 친하기 때문이었다. 이 말을 제창한 자는 정언 채무택(蔡無擇)이었으며 대사헌 심언광(沈彦光) 등이 이에 부화뇌동하니, 온 조정이 그대로 따랐다. 공은 홀로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여 채무택과 의견이 합해지지 못하였다. 이에 채무택은 정언에서 체직되었는데, 바깥 의논들은 공이 딴 의견을 세운다고 비방하여 공도 차례로 체직되고 사예(司藝)가 되었다.


심언광이 공에게 “이군은 어찌 김아무개가 소인임을 아는가?” 하고 묻자, 이공은 “김안로가 동경 부윤(東京府尹 경주 부윤)이었을 때 그의 처신과 행사를 보니 참으로 소인이었다. 이 사람이 뜻을 얻으면 반드시 국가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혹자가 “김안로가 비록 조정으로 들어온다 한들 어찌 그에게 큰 권력을 주겠는가. 다만 동궁을 위하여 배려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저 사람들이 만일 들어오면 반드시 국정을 잡을 것이니, 자기 마음대로 용사(用事)한다면 누가 감히 막겠는가. 또 동궁은 한 나라의 신민들이 함께 촉망하는 분인데 어찌 김안로가 있은 뒤에야 편안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심언광은 노하여 가 버리고 마침내 공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파직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그 후 7년 만에 김안로가 실패하여 죽자, 상은 공의 충직함을 생각하여 불러 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校理)에 임명하였다. 그 후 교리(校理)와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의정부 검상에 제수되었다가 사인(舍人)으로 옮겨졌으며,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고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승진되었다.


무신년(1548, 명종3) 겨울에는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년 만에 한 지방이 크게 다스려졌다. 공은 비록 늙어서 외직을 청했으나, 국가를 걱정하는 생각은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마침 재이(災異)로 인하여 구언(求言)하자 공은 마침내 수천 자의 상소문을 올렸는데, 말한 바가 모두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시무(時務)를 조처하는 내용으로서 임금에게 아뢰고 도모한 것이 지극히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다. 상은 칭찬과 감탄을 깊이 하시고 명하여 동궁 및 바깥 조정에게 돌려보게 하였으며, 공의 자급을 승진시켰다. 얼마 후 병조참판 겸 세자우부빈객(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나의 말씀을 받아 주시니 이것은 다행이지만 마침내 지나친 상이 있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바이다.’ 하시고, 전문(箋文)을 올려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그 후 예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고,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자 다시 상소하여 성학(聖學)의 본말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구 아뢰었다.


신축년(1541, 중종36) 가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얼마 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올라 의정부우참찬 겸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 판서 및 형조 판서와 예조 판서를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과 우참찬이 되었으며, 안동 부사로 나갈 것을 청했으나 사간원에서 머무르게 할 것을 청하자 인하여 의정부참찬 겸 홍문관제학을 맡았다. 공은 모부인(母夫人)께서 노병이 있어 멀리 곁을 떠날 수 없다 하고 여러 번 돌아가 봉양할 것을 청하니, 상은 위로하고 윤허하지 않았으며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오도록 하였다. 공은 더욱 황공하여 외직을 더욱 강력히 청하여 마침내 경상 감사로 나갔다.


갑진년(1544) 8월에는 한성판윤 겸 좌부빈객(漢城判尹兼左副賓客)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병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불러 우찬성에 임명하였고, 좌찬성 겸 지경연사로 전직되었다. 공은 재차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유지(有旨)를 내려 돈독히 효유하고 인하여 의약품을 하사하였다. 공은 다시 굳게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병이 덜해지자 그제야 조정에 나갈 수 있었다. 공은 양조(兩朝 중종ㆍ인종)의 융숭한 예우에 감동되어 스스로 길에 올라 서울로 올라갔으니 이는 큰일을 하려고 한 것이었는데, 인종께서 병환이 오래되어 국가의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공은 사석(私席)에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말하기를 “지금 주상께서는 후사(後嗣)가 없고 대군은 나이가 어리니, 어찌 일찍이 건백(建白)하여 대군을 세제(世弟)로 책봉해서 나라의 근본을 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윤인경은 공의 말을 옳게 여겼으나 따르지 못하였다.


을사년(1545, 인종1) 7월 인종께서 승하하시자 명종이 순서를 이어 즉위하고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는데, 백관 회의에서 윤인경이 “지금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계시니 어느 전(殿)에서 수렴청정을 하여야 하는가?” 하고 물었으나, 좌우의 신하들은 묵묵히 있었다. 이때 공이 말하기를 “옛날 송나라 철종(哲宗) 때에 태황(太皇)과 태후(太后)가 함께 수렴청정하였다. 이러한 옛날 준례가 있으니 굳이 의심하고 물을 것이 없다. 지금에는 다만 수렴하는 의식을 정할 뿐이다.” 하여 의논이 마침내 정해졌다.


8월에 의정부에서 10가지 조항을 써 올렸는데, 첫 번째는 자전(慈殿)께서 성상의 자질을 잘 인도하여 기를 것, 두 번째는 경연관을 널리 뽑아 항상 성상과 더불어 강론하고 자문해서 성학을 성취할 것, 세 번째는 전하가 대행왕(大行王 인종)에 대하여 자식과 신하의 도리가 있으니 상례(喪禮)에 있어 정성과 효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을 것, 네 번째는 궁중을 엄격히 하고 외척을 방비할 것, 다섯 번째는 궁인을 가려 뽑을 것, 여섯 번째는 특지(特旨)를 쓰지 말 것, 일곱 번째는 판부(判付)를 쓰지 말 것, 여덟 번째는 승정원의 직책은 왕명의 출납을 맡고 있으니 내지(內旨)에 합당하지 못함이 있으면 함봉하여 반환하도록 허락할 것, 아홉 번째는 궁중(宮中)과 부중(府中 조정)은 마땅히 일체가 되어야 하니 사문(私門 권문세가)을 열지 말아서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할 것, 열 번째는 대행왕은 학문의 효험으로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져 사람들이 지극한 정치를 이룩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제 갑자기 승하하시어 금상께서 뒤를 이으셨으므로 국민들은 지금 막 대행왕에게 기대하던 것을 가지고 전하에게 기대하고 있는바 그 실마리가 매우 중요하니 양전(兩殿)께서는 유념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당초에 윤원형(尹元衡)은 윤임(尹任)과 원한 관계가 이미 깊었는데, 임백령(林百齡)과 이기(李芑)는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사림(士林)들을 전복시켜서 자기의 간사한 꾀를 이루려고 하였다. 윤원형은 밀지(密旨)라고 칭탁하고 대간(臺諫)을 유인하여 윤임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간들이 이에 따르지 않자 이기 등은 합문(閤門)에 나아가 아뢸 일이 있다 하여 양전이 즉시 충순당(忠順堂)에 납시자, 재추(宰樞)들을 들어오게 하여 장차 윤임 등에게 죄를 가하려고 하였다. 이때 대비의 노여움이 진동하니 사람들은 감히 거역하지 못하였는데, 공은 조용히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마땅히 섬기는 군주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그때에 저들이 대행왕에게 마음을 다한 것을 지금에 어찌 깊이 죄줄 수 있겠습니까. 또 이러한 일은 분명히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선비들이 죄에 걸릴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자들은 두려워 목을 움츠리고 있었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이기 등은 명종이 대통을 계승할 적에 수종(隨從)한 사람들을 공신(功臣)으로 기록하고 위사 공신(衛社功臣)이라 이름 붙였으며, 이날 입시한 재추들을 함께 공신으로 기록하니, 공 역시 이에 참여되었다. 공은 이것을 강력히 사양하며 “어찌 공이 없이 지나치게 상을 받아서 국가의 법을 문란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 공은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선현들의 말씀에 임금의 덕이 성취됨은 경연에 달려 있다 하였습니다. 신은 이 직책에 있으므로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삼가 선현들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 중에서 성상의 덕에 보탬이 되고 오늘날에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발췌하여 조목조목 기록하여 올리오니, 전하께서 진실로 깊이 믿고 힘써 행하신다면 성상의 공업(功業)에 도움 됨이 어찌 적겠습니까.” 하였고, 얼마 후 장차 어버이를 문안하기 위하여 가면서 또다시 차자를 올려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히며 어진 신하를 친근히 하고 간신을 멀리 할 것을 바랐으니, 군부(君父)에게 기대한 것이 더욱 깊고 간절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한 자들과는 마치 빙탄(氷炭) 같은 형세라서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돌아간 다음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해서 체직되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수개월 후에 이기가 공을 모함하여 아뢰기를 “이언적은 일찍이 세자(世子 인종)에게 아첨하여 붙고 중종을 배반하였습니다. 써서 올린 10가지 조항은 임금의 손과 발을 묶는 것이며, 유인숙(柳仁淑) 등과 결탁하여 역적들을 구원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이언적은 신에게 은혜가 있으나, 신은 이제 국가를 위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아룁니다.” 하였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뒤를 이어 공을 논박하자 마침내 공의 공훈과 관작을 삭탈하였다.


정미년(1547, 명종2) 9월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으로 인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가하자, 공 역시 강계부(江界府)로 안치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선생을 귀양 보낸다는 명을 듣고 서로 울부짖었으나, 공은 태연하여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기를 “대부인을 잘 봉양하라. 황천(皇天)이 계시니 나는 오래지 않아 마땅히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다음 해에 대부인이 별세하자, 공은 대부인이 남긴 의복을 가지고 신위(神位)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 수척해진 몸으로 삼년상을 다하였다.


공은 곤궁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스스로 편안함이 있었다. 그리하여 학문을 강론하고 책을 짓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밤새도록 하였다. 그리고 책상에 일찍이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붙이기를, “나는 매일 내 몸을 세 가지로 반성하노니, 하늘을 섬김에 있어서 미진함이 있었는가? 인군과 어버이를 위하여 정성스럽지 못함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짐에 있어서 바르지 못함이 있었는가?” 하였다. 하루는 갑자기 왕명을 가지고 온 관원이 급히 말을 몰아 성으로 들어오자 온 부중(府中)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바르게 앉아 책을 보았으니, 죽고 사는 것을 한결같이 보아 평소의 조행을 바꾸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1553, 명종8) 11월 을축일에 병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63세였다. 다음 해인 갑인년 봄에 경주(慶州)로 반츤(反櫬)하였고, 11월 갑진일에 흥해군(興海郡) 남쪽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사 지냈다.


이보다 앞서 공의 선부군(先府君)께서는 일찍 유학자로 세상에 알려졌고, 본도(本道)의 하과(夏課)에 장원하였다. 성종께서는 그 사부(詞賦)를 가상히 여겨 불러 보시고는 의복과 물건을 하사하고 인하여 국학(國學 성균관)에 머물러 공부하게 하였다. 그 후 향리로 돌아가 날마다 후생을 가르침으로 일을 삼았으니, 공은 비록 가정에서 직접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 가업(家業)은 진실로 유래가 있었다.
모친인 손 부인은 또 어질고 지식과 사려가 깊었으며, 자식을 사랑한다 하여 가르침과 독려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외숙인 사재(四宰 의정부 우참찬) 손중돈(孫仲暾)에게 취학하게 하였고, 또 가난함을 무릅쓰고 멀고 가까운 곳에 가서 공부하게 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까웠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리하여 세속의 학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여 강명하고 실천하여 치지(致知)와 성의(誠意) 공부에 힘을 썼다. 27세에 〈오잠(五箴)〉을 지었고 30세에는 또 〈입잠(立箴)〉을 지었는데, 그 말씀은 다 옛 성현들의 간절하고 요긴한 취지였다. 대체로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省察)하며 분함을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며 개과천선하는 데 실제로 종사하였고, 빈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와서는 자옥산(紫玉山) 속에 집을 짓고 고요히 지내면서 좌우에는 도서를 쌓아 놓고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이미 전일(專一)하게 오랫동안 공부하니 소견이 더욱더 도(道)에 가까워졌다.


어버이를 섬길 때에는 사랑과 공경이 함께 지극하였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리며 음식을 장만하기를 또한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었고, 선조를 제사할 때에는 더욱 그 정성을 다하였다. 아우인 언괄(彦适)과 우애하고 사랑하기를 더욱 돈독히 하였으며,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고 사람을 대하기를 예로써 하였다. 종족(宗族)을 어루만지고 노복을 어거함에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사람됨이 중후 단정하고 자상하며 높은 지취(志趣)가 있어 묵묵히 하루를 마치니, 사람들은 그 마음을 엿볼 수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건의하고 시행한 것이 광명정대하였으며, 언론과 풍지(風旨)는 진실로 권강(勸講)에 대비하고 성덕(聖德)을 돕는 데 보탬이 있었다. 간사한 사람을 배척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함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곧바로 가고 두려움이 없어 비록 옛날의 용감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기개(氣槪)가 있었다. 그러나 공은 이미 스스로 깊이 감추고 숨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가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저서로는 《봉선잡의(奉先雜儀)》와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晉修八規)》,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혹문(續或問)》이 있고, 또 《중용(中庸)》의 구경연의(九經衍義)를 편수하였으나 미처 책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문집 약간 권이 있다.
공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 박씨(朴氏)로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이신데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종제(從弟)인 경력(經歷) 통(通)의 아들 응인(應仁)으로 양자를 삼았는데 지금 송라도 찰방(松羅道察訪)으로 있으며, 서자 하나는 전인(全仁)이요, 딸은 한 사람이다. 전인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전인은 시서(詩書)를 익히고 의리를 알았으며, 아들을 잘 가르쳐 또한 다 훌륭하다.


공을 장례할 때에는 미처 묘도(墓道)에 비문을 세우지 못했는데 덕업의 빛남은 자연히 가릴 수가 없었으니, 표창하는 예전(禮典)은 실로 간절히 바라는 인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하니 공의 도는 오래될수록 더욱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퇴계 이 선생은 일찍이 공의 행장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으나 그 학문은 전함이 없었다. 고려 말엽으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에는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이 도학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았고, 세상에서도 도학을 했다는 명칭을 그분들에게 돌리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를 상고해 볼 때에 대부분 명(明)ㆍ성(誠)의 실제 공부를 다 하지 못하였고 후세에 칭할 때에도 또 연원(淵源)의 증거가 없어서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찾고 따르게 할 수가 없어서 오늘에 이르도록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생으로 말하면 전수받은 곳이 없이도 스스로 도학에 분발하여 속에 간직한 덕이 날로 드러나 덕이 행실에 부합하였고 밝게 글로 써 내어 훌륭한 말을 후세에 전하였으니, 동방(東方)에서 찾아보더라도 거의 그만한 분이 있지 않다.”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도학에 대하여 깊이 알고 잘 말했다고 이를 만하다.


공의 사자(嗣子)인 찰방이 또 신도비문을 퇴계 선생에게 청하자, 퇴계 선생께서는 성덕(盛德)을 칭찬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은 부당하다 하시고 마침내 나에게 명하였다. 나는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매우 신중히 여겼고 또한 그 사이에 서신을 교환하면서 자세히 수정한 뒤에야 확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퇴계 선생이 별세하시자 찰방이 사람을 보내와서 비석이 준비되었다고 말하므로, 마침내 더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행장을 근거하고 아울러 관직을 지낸 차례를 상고하여 대강의 내용을 엮어서 위와 같이 쓰고 명문을 붙인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帝有顯命
 /상제께서 밝은 명을 내리사

畀人以性
 /사람에게 본성을 부여하셨으니

 性之四德
 /본성의 사덕을

 實性人秉
 /실제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네

蔽氣與質
 /기질에 가려

性由以失
 /이 때문에 본성을 잃는 것이니

學以反之
 /배워서 본성을 회복하면

其性則一
 /본성은 하나이네

嗟惟我公
 /아 우리 공께서는

生此一方
 /이 나라에 태어나사

氣寬而莊
 /기운은 넓고 씩씩하며

德渾而剛
 /덕은 온후하고 강하였네

爰初知學
 /처음부터 학문을 알아

愼修懋履
 /삼가서 닦고 실천하였네

亹亹充養
 /더욱 충양하여

善有諸己
 /선을 자기 몸에 소유하셨네

入則盡孝
 /들어가서는 효도를 다하고

出而移忠
 /나가서는 충성하여

亦遠亦近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모두 적당하니

道該汚隆
 /도는 높고 낮음에 다 포함되었네

一時之詬
 /한때에는 비록 비방을 들었으나

萬世之光
 /만대에는 빛나네

搜書褒贈
 /선생의 저서를 찾아내어 칭찬하고 추증하였으며

配庭洋洋
 /묘정에 배향하여 양양히 강림하시니

維先王志
 /선왕의 뜻을

維我后承
 /우리 임금님께서 받드신 것이네

刻示無窮
/이것을 새겨 무궁한 세상에 보여 주노니

吾道候興

우리 도는 일어나리 

[주D-001]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 사건 : 조선 명종 때의 정치적 옥사(獄事)로, 당시 외척으로서 정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반대파 인물들을 숙청한 사건이며,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불린다. 1547년(명종2) 9월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과 선전관 이로(李櫓)가 경기도 과천(果川)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주(女主)가 정권을 잡고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겠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라는 내용으로 된 익명의 벽서를 발견해 임금에게 바쳤다. 이에 지난날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빙(李若氷)을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ㆍ유희춘(柳希春)ㆍ백인걸(白仁傑)ㆍ김난상(金鸞祥)ㆍ권응정(權應挺)ㆍ권응창(權應昌)ㆍ이천계(李天啓) 등 30여 명을 유배하였다. 《明宗實錄 2年 9月 18日》
[주D-002]반츤(反櫬) : 외지(外地)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반장(返葬)하는 것이다.
[주D-003]손중돈(孫仲暾) : 1463∼1529. 자는 태발(泰發), 호는 우재(愚齋), 시호는 경절(景節)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고,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원문은 ‘孫仲敦’인데, 《중종실록(中宗實錄)》 및 여러 전적에 근거하여 ‘敦’을 ‘暾’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위기지학(爲己之學) : 자신을 위한 학문으로 위인지학(爲人之學)과 대칭되는 말이다. 《논어(論語)》〈헌문(憲問)〉에 “옛날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하였다.
[주D-005]전인은……순(淳)이다 : 원문은 ‘全仁生一子 曰浚曰淳’인데, 한국문집총간 24집에 실린 《회재집(晦齋集)》 부록(附錄) 〈문원공 회재 이 선생 신도비명(文元公晦齋李先生神道碑銘)〉에 근거하여 ‘一’을 ‘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사덕(四德) : 사람의 본성(本性)에 간직되어 있는 네 가지 덕으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가리킨다. 사람은 원래 천도(天道)의 원(元)ㆍ형(亨)ㆍ이(利)ㆍ정(貞)을 받아서 이 네 가지 본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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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옥산서원(사적154호), 조선중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소재한 사적 154호로 지정된 옥산서원은 조선 중종때 문신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전 서원이다. 옥산서원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72년(선조5)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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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02

[은자주]두 번째 사진이 계곡물을 서원 내부의 담장안으로 끌어들여 앞담장과 무변루 사이를 흘러가게 만든 도랑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자연과의 친화를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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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01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주] 09년 3월 사진 http://blog.paran.com/kydong/30802009 http://blog.paran.com/kydong/3080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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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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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대 & 용추 /옥산서원 04

[주]09년 3월 사진 http://blog.paran.com/kydong/3080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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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BhdPDPwR6zE

 

 

https://www.youtube.com/watch?v=QqJvqMeaDtU

 

(主) 1. 중심이 되는 것.

 

 

https://www.youtube.com/watch?v=PcfYFnQSEQ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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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흐마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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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슈누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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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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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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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신화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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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힌두교의 3대 主神

초기 인도의 베다 시대에는 아리아인의 신앙이 페르시아계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을 거쳐 힌두교가 정립되면서 베다 시대의 기존 신앙과 크게 달라지게 되고, 이들은 주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들 3대 주신은 로카팔라들조차도 뛰어넘는 인도 신화의 정점에 속한 최상위 삼주신을 일컫는다고 한다. 즉, 인도 신화 내에서 등장하는 신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위계에 있는 신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중 한 예로 인드라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들 중에서도 왕, 즉 모든 신들의 왕에 있는 존재인데, 인드라가 힌두교 신화이자 인도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왕의 의미가 여기에서 언급을 하고 있는 3주신, 즉 3대신들을 제외한 신들의 왕이라는 의미인 것만 보아도, 이들 3대 주신이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 신인지 알 수가 있다.

게다가, 로카팔라가 이들 3주신 바로 아랫 등급에 있는 신들인데, 이 로카팔라에 신들의 왕 인드라가 포함되어져있다. 게다가, 이들 3주신이 인드라를 불러다가 너는 몇 번째 인드라이냐?라고 말을 하는 것으로써 인드라를 데꿀멍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는 인드라 또한 세계가 다시 태어날 때마다 인드라도 다시 태어나게 된다라는 의미이자, 이들 3대 주신이 세계의 흥망에 상관없이 시간의 흐름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한 이들도 격이 다른 신들을 나타낸다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자, 인드라의 탄생과 죽음은 결국 자기들 손에 의해 일어나니 겸손해지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들 3주신은 인드라를 포함한 다른 신들과 악마,인간들은 이 세계에 속하는 존재들이지만, 이들 3주신은 수없이 나타났다 사라져가는 세계들 그 자체를 관장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른 편이다.

예시로 한 가지 일화가 있다. 3주신 중 하나인 시바가 인형에 혼을 불어 넣어 아기를 대신하여 만들어내었으나, 그 아기가 얼마 살지 못하고 머리가 뚝 하고 떨어지자, 비통해하는 파르바티를 달래기 위해 인드라가 아끼던 코끼리의 머리를 잘라서 붙였다는 일화.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시바 본인의 신격 자체가 인드라와는 비교가 안되기 때문이다. 시바 본인이 신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라면, 인드라는 왕으로서의 중간관리자격에 위치한 존재이기 때문.

그리고, 이들 트라무르티, 즉 브라흐마,비슈누,시바는 인도의 삼위일체사상을 만족시키는 3명의 신이면서도 모두 영원하고 절대적이면서도 브라흐만[2]의 가장 강력한 화신에 해당된다고 한다.

또한, 이들 힌두교 3대 주신이자 주요 3신을 트라무르티라고 하는데, 트라무르티의 교의에서는 우주의 창조,유지,파괴 세 가지의 우주적 작용들이 창조의 작용을 하는 신인 브라흐마, 유지 또는 보존의 작용을 하는 신인 비슈누, 파괴 또는 변형의 작용을 하는 시바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트리무르티는 '세 개 형상(Three Forms)'이라는 뜻이다. 트리무르티 또한 힌두교 교의로 정의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리무르티는 힌두교의 주요 3신 브라흐마비슈누시바가 통합되어 일체화된  혹은 존재로 정의된다고 한다. 그리고, 트리무르티의 교의에는 우주의 창조,유지,파괴의 세 가지 우주적 작용들이 창조의 작용을 하는 신인 브라흐마와 유지 또는 보존의 작용을 하는 신인 비슈누, 그리고 파괴 또는 변형의 작용을 하는 신인 시바의 모습으로 의인화 혹은 인격화되어 표현된다고 한다.

 

파르바티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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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imoTzDsyggg

 

https://www.youtube.com/watch?v=u-5KQ0Au_5A

 

 

 

https://www.youtube.com/watch?v=VBpRNSHealg

 

 

https://kydong77.tistory.com/7999

 

바다에서 허황후 오시다/ 가락국기

† 김해 망월석탑 보주태후허씨릉 가락국기 駕洛國記 [은자주]가락국은 나라 이름부터 문화 전체가 한반도의 것이 아닌 해양문화다. 수로왕은 이름뿐이고 허황후의 나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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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 수로왕비 허황후의 정체

[사진] 파사석탑&가락국 수로왕비릉[경남 김해시 구산동(龜山洞)] & 수로왕릉[경남 김해시 서상동]& 구지봉[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 가락국기 가락,가야의 뜻;물고기. 가야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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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밀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타밀어(தமிழ்)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언어로,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고전 언어 중 하나이며[1][2] 현대에도 활발히 쓰이는 언어이다. 인도 정부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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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sMSqN1zqdg

 

 

https://www.youtube.com/watch?v=EB-38ST4Tf0

 

 

한국어와 똑닮은 언어, 타밀어 PART 2

https://www.youtube.com/watch?v=BPbQyLwXa4c

https://www.youtube.com/watch?v=BPbQyLwXa4c

* 가야의 지배계층은 드라비다족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슴.

 

https://www.youtube.com/watch?v=CR8AVxOq94c

 

 

타밀어에서는 한자 독음발음이 한국 발음과 유사하고 그 의미도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O7ume24XTX4

 

 

향가 <처용가> 해석에 타밀어 도입

https://www.youtube.com/watch?v=Wp4mWDR_fFE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

https://www.youtube.com/watch?v=LsfQtVk7nO8&t=85s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173?category=487669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코미족外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

동이족은 농요에서처럼 고달픈 삶을 춤과 노래로 극복함 https://www.youtube.com/watch?v=VBpRNSHealg https://haanel01.tistory.com/entry/%EC%95%84%EB%A6%AC%EB%9E%91-%EC%93%B0%EB%A6%AC%EB%9E%91-%EC%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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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A42f__kfBBA

 

 

 

 

유지나 - 화류춘몽(花柳春夢, 이화자, 1940)

https://www.youtube.com/watch?v=u0kbyYsaY6M

 

황선남 - 정선아라리

https://www.youtube.com/watch?v=xOwdWF6lGfQ

 

 

www.youtube.com/watch?v=Ib48ueH2ccs

 

황선남 - 배띄워라[민요]

https://www.youtube.com/watch?v=mEm8MSg-o7I&start_radio=1&list=RDmEm8MSg-o7I

 

 

www.youtube.com/watch?v=2hnOj8rCdDY

 

 

붓다월드

http://www.buddhaworld.org/cyber/beopmun_view.asp?pk_idx=558&b_budle=weolha&b_type=&page=5&search_select=&search_text=

192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설강()
 
191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설강()
 
 
190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설강()
 
189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설강()
 
188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설강()
187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설강()
 
186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설강()
 
185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완주가翫珠歌 설강()
 
184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완주가翫珠歌 설강()
 
183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완주가翫珠歌 설강()
 
182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
 
181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
180 월하대종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Ⅰ)
這靈珠 極玲瓏 저영주 극영롱
體.河沙內外空 체편하사내외공
人人.裏堂堂有 인인대이당당유
弄去弄來弄莫窮 롱거농래농막궁

신령스런 이 구슬은 지극히 영롱할새
모든 세계에 두루하고 안팎이 비었으며
사람들의 푸대 속에 당당하게 들어 있어
오고 가며 가지고 놀아도 다함이 없도다



或摩尼 或靈珠 혹마니 혹영주
名相雖多體不殊 명상수다체불수
刹刹塵塵明了了 찰찰진진명료료
還如朗月滿江秋 환여낭월만강추

마니구슬이라 하고 靈珠라고도 부르나니
이름은 비록 많아도 본체는 다 다르지 않네
모든 세계 어디서나 밝고 또한 분명하니
가을의 밝은 달이 강에 가득한 듯하도다



飢也他 渴也他 기야타 갈야타
知渴知饑不較多 지갈지기불교다
晨朝喫粥齋時飯 신조끽죽재시반
困則打眠也不差 곤칙타면야불차

배고픔도 그것이요 목마름도 그것이나
목마름과 배고픔 아는 것 대단하지 않네
아침에는 죽을 먹고 낮에는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을 자되 어긋남이 없느니라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Ⅱ)
差也他 正也它 차야타 정야타
不勞開口念彌陀 불로개구염미타
若能着着無能着 약능착착무능착
在世縱橫卽蕯埵 재세종횡즉륭타

어긋남도 그것이요 올바름도 그것이라
수고로이 입을 열어 아미타불 부를 건가
능히 집착할 것에 능히 집착함이 없으면
세간 속에 노닐어도 대심중생 보살일세



此心珠 難把捉 차심주 난파착
宛轉玲瓏難可得 완전영롱난가득
無相無形現相形 무상무형현상형
往返無蹤非可測 왕반무종비가측

이 마음 구슬은 붙잡기가 어려우니
분명하고 영롱하나 가히 얻을 수 없도다
형상도 없으면서 형상을 능히 나타내고
가고 옴에 자취 없어 예측하지 못한다네



追不及 忽自來 추불급 홀자래
暫到西天瞬目廻 잠도서천순목회
放則虛空爲袍內 방칙허공위포내
收則微塵難析開 수칙미진난석개

쫒아가도 못 미치나 갑자기 스스로 오나니
서천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갔다 다시 돌아온다네
놓아 버리면 허공도 옷 안에 들어오지만
거둬들이면 작은 티끌도 쪼개기 어렵도다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 완주가翫珠歌(Ⅲ)
差也他 正也它 차야타 정야타
不勞開口念彌陀 불로개구염미타
若能着着無能着 약능착착무능착
在世縱橫卽薩埵 재세종횡즉륭타

어긋남도 그것이요 올바름도 그것이라
수고로이 입을 열어 아미타불 부를 건가
능히 집착할 것에 능히 집착함이 없으면
세간 속에 노닐어도 대심중생 보살일세



此心珠 難把捉 차심주 난파착
宛轉玲瓏難可得 완전영롱난가득
無相無形現相形 무상무형현상형
往返無.非可測 왕반무종비가측

이 마음 구슬은 붙잡기가 어려우니
분명하고 영롱하나 가히 얻을 수 없도다
형상도 없으면서 형상을 능히 나타내고
가고 옴에 자취 없어 예측하지 못한다네



追不及 忽自來 추불급 홀자래
暫到西天瞬目廻 잠도서천순목회
放則虛空爲袍內 방칙허공위포내
收則微塵難析開 수칙미진난석개

쫒아가도 못 미치나 갑자기 스스로 오나니
서천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갔다 다시 돌아온다네
놓아 버리면 허공도 옷 안에 들어오지만
거둬들이면 작은 티끌도 쪼개기 어렵도다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완주가翫珠歌 설강(Ⅳ)
不思議 體堅剛 불사의 체견강
牟尼喚作自心王 모니환작자심왕
運用無窮又無盡 운용무궁우무진
時人忘作本自忘 시인망작본자망
가히 헤아릴 수 없어라, 견고한 그 몸이여
석가모니는 그것을 心王이라 불렀나니
그 작용이 무궁하고 또한 다함 없는데도
사람들은 망령되이 스스로 잊고 있도다




正令行 孰當頭 정령행 숙당두

斬盡佛魔不小留 참진불마불소유
從玆徧界無餘物 종자편계무여물
血滿江河急急流 혈만강하급급류
바른 법령 시행되니 누가 그 앞에 설 건가
부처도 魔도 모두 베어 남기지 않는다네
그로부터 온 세계에 남아난 물건 없으니
피가 가득한 강물만이 급격히 흐르누나



眼不見 耳不聞 안불견 이불문
不見不聞眞見聞 불견불문진견문
箇中一箇明珠在 개중일개명주재
吐去呑來新又新 토거탄래신우신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나
보도 듣도 못함이 참으로 보고 들음일세
그 가운데 한 알의 밝은 구슬이 있으니
토하거나 삼키거나 새롭고 또 새롭도다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완주가翫珠歌 설강(Ⅴ)
或名心或名性 혹명심혹명성
心性元來是緣影 심성원래시연영
若人於此卽無疑 약인어차즉무의
自己靈光常囧囧 자기영광상경경

마음이라고 하고 성품이라고도 하지만
마음이든 성품이든 원래 반연의 그림자라
만일 이에 대해 의심 없는 이가 있다면
신령스런 자기 광명이 언제나 빛나리라



或爲道或爲禪 혹위도혹위선
禪道由來是强宣 선도유래시강선
實知師姑女人做 실지사고여인주
不勞擡步到那邊 불로대보도나변

혹은 道라고 하고 禪이라고도 하지만
선이나 도라 한 것도 억지로 한 말이니
할머니가 여자인 줄을 진실로 알면
걷는 수고 들이지 않고 피안에 도착하리



也無佛 也無魔 야무불 야무마
魔佛無根眼裏花 마불무근안리화
常常日用了無事 상상일용료무사
喚作靈珠也被訶 환작영주야피가

부처님도 없음일세 마구니도 없음일세
魔도 佛도 뿌리 없는 눈 속의 꽃인 것을
나날이 쓰면서도 아무런 일도 없음이니
靈珠라고 할지라도 나무람을 못 면하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완주가翫珠歌 설강(Ⅵ)
也無死 也無生 야무사야무생
常蹋毗盧頂上行 상답비로정상행
收來放去隨時節 수래방거수시절
倒用橫拈骨格淸 도용횡념골격청


죽음도 또한 없고 태어남도 또한 없이
항상 비로자나불의 머리를 밟고 다니며
시절 따라 거두고 놓아 주고 오고 가면서
자재하게 작용하나 골격은 마냥 맑다네



也無頭 也無尾 야무두야무미
起坐明明常不離 기좌명명상불리
盡力趕他他不去 진력간타타불거
要尋知處不能知 요심지처불능지


머리도 또한 없고 꼬리도 또한 없는데
서고 앉음에 분명하고 항상 여읨이 없다네
힘을 다해 쫓아 버려도 그는 떠나지 않고
있는 곳을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느니라



阿呵呵是何物 아가가시하물
一二三四五六七 일이삼사오육칠
數去飜來無有窮 수거번래무유궁
摩訶般若波羅密 마가반야파라밀


하하하 우습도다, 이 어떤 물건인가
일이삼사오륙칠이여
세어 보고 또 세어 보아도 끝이 없음이니
마하반야바라밀이로다



<완주가 설강 끝>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설강(Ⅰ)
這百衲 最當然 저백납최당연
冬夏長被任自便 동하장피임자편
袒袒縫來千萬結 단단봉래천만결
重重補處不後先 중중보처불후선



백 번 기운 누더기 내게 가장 알맞도다
겨울 여름 언제 입어도 항상 편안하네
누덕누덕 꿰매어 천만 조각이 되었고
겹겹이 기웠으매 앞과 뒤도 없느니라



或爲席 或爲衣 혹위석혹위의
隨節隨時用不違 수절수시용불위
從此上行知己足 종차상행지기족
飮光遺跡在今時 음광유적재금시



혹은 자리도 되고 혹은 옷도 됨이여,
철에 따라 때에 따라 적절하게 잘 쓰이고
이로부터 두타행에 만족할 줄 아나니
가섭 존자 끼친 자취 지금에도 남아 있네



一椀茶 七斤衫 일완다칠근삼
趙老徒勞擧再三 조로도로거재삼
縱有千般玄妙說 종유천반현묘설
爭似吾家百衲衫 쟁사오가백납삼



한 잔의 차와 일곱 근의 장삼이여
조주 스님 두세 번 들어 보여 헛수고를 했나니
비록 천만 가지 현묘한 말씀 있다고 한들
어찌 우리 집의 누더기 옷만 하겠는가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설강(Ⅱ)
此衲衣 甚多宜 차납의심다의
披去披來事事宜 피거피래사사의
醉眼看花誰敢着 취안간화수감착
深居道者自能持 심거도자자능지



이 누더기 옷은 매우 편리하도다
늘 입고 오가며 무엇을 하든 편리하도다
취한 눈으로 꽃을 보니 그 모양 분명하랴
도에 깊이 들어간 이는 자기를 능히 지키네



知此衲 幾春秋 지차납기춘추
一半風飛一半留 일반풍비일반류
獨坐茅菴霜月夜 독좌모암상월야
莫分內外混蒙頭 막분내외혼몽두



이 누더기 얻고서 몇 해나 추위를 막았던가
반은 바람에 날아가고 반쯤만 남았구나
서리치는 달밤에 초암도 홀로 앉았으니
안팎을 가릴 줄 모르는 더벅머리 중이로다



卽身貧 道不窮 즉신빈도불궁
妙用千般也不窮 묘용천반야불궁
莫笑繿縿癡呆漢 막소람삼치태한
曾參知識續眞風 증참지식속진풍



이 몸은 비록 가난해도 道는 다함이 없도다
천만 가지 묘한 작용은 다함이 없나니
누더기에 멍충이 같은 나를 비웃지 말라
일찍이 선지식 찾아 참된 가풍을 이었도다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백납가百衲歌 설강(Ⅲ)
一鶉衣 一瘦笻 일순의일수공
天下橫行無不通 천하횡행무불통
歷徧江湖何所得 역편강호하소득
元來只是學貧窮 원래지시학빈궁



해진 옷 한 벌에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로
천하를 횡행했어도 막힘 하나 없었다네
강호를 두루 다니며 그 무엇을 얻었던고
원래 배운 것은 빈궁 하나 뿐일세



不求利 不求名 불구리불구명
百衲懷空豈有情 백납회공기유정
一鉢生涯隨處足 일발생애수처족
只將一味過殘生 지장일미과잔생



이익도 구하지 않고 이름도 구하지 않네
누더기 옷이 비었거니 무슨 생각 있으랴
발우 하나의 생활로 어디 가나 만족하고
그저 이 한 맛으로 남은 생을 보내리라



生涯足 更何求 생애족 갱하구
可笑癡人分外求 가소치인분외구
不會福從前世作 불회복종전세작
怨天怨地妄區區 원천원지망구구



이 생애에 만족하거늘 다시 무엇을 구하랴
미련한 이가 분수 밖에서 구함이 우습도다
복은 전생에 지어야 금생에 받는 건데
하늘 땅을 원망하며 부질없이 허덕이누나




不記月 不記年 불기월 불기년
不誦經文不坐禪 불송경문불좌선
土面灰頭癡呆呆 토면회두치태태
唯將一衲度殘年 유장일납도잔년



달도 기억하지 않고 해도 기억하지 않고
경전도 읽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니
누런 얼굴에 잿빛 머리의 이 천치 바보는
오직 누더기 한 벌로 남은 생을 보낸다네



<백납가 完>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설강(Ⅰ)
這枯髏 幾千生 저고루기천생
橫形竪像妄勞形 횡형수상망로형
如今落在泥坑裏 여금락재니갱리
必是前生錯用情 필시전생착용정



이 마른 해골이여, 몇 천 생애 동안이나
갖가지 몸을 받으며 헛되이 허덕였는고
지금 흙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음을 보아
틀림없이 전생에 마음을 잘못 썼으리라



無量劫 昧性王 무량겁매성왕
六根馳散走靑黃 륙근치산주청황
只知食愛爲親侶 지지식애위친려
那得廻頭護正光 나득회두호정광



한량없는 세월 동안 마음자리에 어두워
六根은 대상 찾아 각기 흩어져 치달리고
탐욕과 애욕만을 가까이 할 줄 알았으니
어떻게 머리를 돌려 바른 빛을 지킬 건가



這枯髏 甚癡頑 저고루심치완
因他造惡萬般般 인타조악만반반
一朝徹見空無有 일조철견공무유
寸步不離脫體寒 촌보불리탈체한



이 마른 해골은 매우 미련하고 답답하구나
그 때문에 수만 가지 악을 짓고 말았으나
하루 아침에 無도 有도 空임을 꿰뚫어 보면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시원하게 이 몸 벗으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설강(Ⅱ)
背當年 最好時 배당년최호시
波波役役逐風飛 파파역역축풍비
勸君早早今回首 권군조조금회수
蹯着眞空正路歸 번착진공정로귀


이 생을 놓칠 건가 가장 좋은 이 시절을
이리저리 뒹굴뒹굴 바람 따라 굴러 가네
귀하노니 그대 빨리 머리를 돌이켜서
진공의 바른 길 어서 빨리 돌아오라



或聚散或升沈 혹취산혹승침
他方此界不安心 타방차계불안심
但能一念回光處 단능일념회광처
頓脫死生入骨深 돈탈사생입골심


모였다가 흩어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니
이 세계도 저 세계도 마음이 편치 않다네
다만 한 생각에 빛을 돌이킬 수 있게 되면
단박에 생사를 벗어나 참 부처를 만나리라



有頭角 無頭角 유두각 무두각
三途匍匐豈能覺 삼도포복기능각
忽因先覺敎訓來 홀인선각교훈래
此處堂堂始知錯 차처당당시지착


머리에 뿔이 있거나 머리에 뿔이 없거나
삼악도를 기어다닌다면 언제 깨닫겠는가
홀연히 먼저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잘못된 줄을 분명히 알지어다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髏歌 설강(Ⅲ)
或癡愛 或貪瞋 혹치애 혹탐진
處處昏迷被妄塵 처처혼미피망진
頭骨風飄南北走 두골풍표남북주
不知何處見眞人 부지하처견진인


어리석음과 애욕과 탐욕과 분노 때문에
곳곳에서 혼미하여 허망한 티끌 덮어쓰고
뼈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흩어졌거늘
어디에서 본연의 참사람을 볼 수 있을까



生前錯 死後錯 생전착사후착
世世生生又重錯 세세생생우중착
若能一念了無生 약능일념료무생
錯錯元來終不錯 착착원래종불착

나기 전에 잘못 되고 죽은 뒤에 잘못 되어
세세생생 거듭거듭 잘못 되고 그르쳤네
만일 능히 한 생각에 무생도리無生道理 깨달으면
잘못 되고 잘못 됨도 원래 잘못이 아닐세



麤也着 細也着 추야착세야착
着着來來元不覺 착착래래원불각
驀得一聲急轉身 맥득일성급전신
滿目虗空當撲落 만목허공당박락


거친 것에도 집착하고 부드러운 것에도 집착하니
집착만을 하면서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갑작스런 한 소리에 후딱 몸을 뒤집으면
눈에 가득한 허공이 다 부숴져 떨어지리
나옹혜근 선사懶翁惠勤 禪師의 고루가枯.歌 설강(Ⅳ)
或在非 或在是 혹재비혹재시
是非坑裏常憂喜 시비갱리상우희
不覺亡身白骨堆 불각망신백골퇴
到了堂堂不自在 도료당당부자재


혹은 그르다 하고 혹은 옳다고 하면서
시비의 구덩이 속에서 울고 웃고 하다가
어느 새 무너져 백골만이 쌓였나니
당당한 데 이르러도 자재할 수 없다네



這枯髏 忽悟來 저고루홀오래
廣劫無明當下灰 광겁무명당하회
從此恒沙諸佛祖 종차항사제불조
百千三昧也不猜 백천삼매야불시

이 마른 해골도 한 번 홀연히 깨치게 되면
무량 겁의 무명도 당장 재가 되어 버리고
그로부터는 수많은 부처님과 조사들의
백천 가지 삼매도 부러워하지 않게 되네



也不猜 有何過 야불시 유하과
思量擬議便爲過 사량의의편위과
若能運用似盤珠 약능운용사반주
劫石徒爲彈指過 겁석도위탄지과


부러워하지도 않는데 무슨 허물 있을 건가
생각하고 헤아림이 곧 허물이 있을 건가
쟁반에 구슬 굴리듯 운용할 수 있다면
一劫도 그저 손가락 튕길 사이에 지나가리



也無法 也無佛 야무법 야무불
也無心兮也無物 야무심혜야무물
到此酌然似什麽 도차작연사십마
寒時向火燒柮榾 한시향화소돌골


법도 또한 없고 부처도 또한 없음이며
마음도 또한 없고 물질도 또한 없다네
여기에 이르러 분명한 이것은 무엇인가
추울 때는 불 앞에서 나무조각 태우노라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21?category=851518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나옹(懶翁)三歌 - 완주가, 백납가, 고루가/ 한문과 번역문 (0) 2019.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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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懶翁)三歌 - 완주가, 백납가, 고루가/ 한문과 번역문

유지나 - 화류춘몽(花柳春夢, 이화자, 1940) https://www.youtube.com/watch?v=u0kbyYsaY6M 황선남 - 정선아라리 https://www.youtube.com/watch?v=xOwdWF6lGfQ 황선남 - 울지마라 가야금아/ 작사 작곡 박남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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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youtube.com/watch?v=C31Mafm9CMw&t=45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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