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敎宗)은 경전과 가르침을 중시하는 불교의 교파로 천태종과 화엄종이 대표적이다. 한반도에서는 삼국 시대에 유입된 이후 발전을 거듭해 신라 하대 5교, 즉 보덕의 열반종, 자장의 계율종, 원효의 법성종, 의상의 화엄종, 진표의 법상종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통일 신라 말에 유입된 선종은 이론이나 지식에 치우친 교종과 달리 참선을 통해 직접 진리에 도달할 것을 강조했다. 선종은 교종의 주류인 화엄종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세를 키웠다. 선종은 화엄종보다는 자신들이 높은 차원의 도를 닦는다고 주장하며 우위를 입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 화엄종의 많은 승려들이 선종으로 전향했고, 화엄종 사원을 선종 사원으로 바꾸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화엄종의 세력이 쉽게 수그러든 것은 아니다. 9세기 말 화엄종은 ‘화엄 결사(結社)’라는 일종의 자체 반성을 통해 세를 지켜 나갔다.
위의 시의 제목을 클릭하면 작품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해 선생의 사문시는 타고르의 영향으로 의미전달을 우선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소월의 중학 스승이었던 김억이 공들인 7.5조 또는 3음보격 리듬을 무시했던 것이지요. 실상 3음보격은 고려가요에서 이미 정착된 율조입니다. 조선시대 시조와 가사에 와서 4음보격이 정착했던 것이구요. 이를테면 의미전달에 주력한, 우리나라 산문시는 만해 선생이 개발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만해의 시가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은 불교적 세계관으로 현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시에 있어서 반어와 역설은 일상입니다. 성북동 심우장을 북향으로 지은 것처럼. 하지만 그 자리에 남향집을 지었다면 언덕배기나 바라보며 무슨 재미로 살 수 있을까요?
한국의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은 삼가 파리평화회의 각 대표자분들께 글을 드립니다. 하늘과 땅 사이 모든 것이 함께 생기고 성장하며 살고 있으니 이렇게 우리는 햇볕을 같이 쬐고 변하고 성장하는 혜택을 함께 누리는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우고 빼앗는데서 강하고 약함이 나누어지고 빼앗아 합치는 권한을 함부로 하여, 크고 작음의 차이가 생기면서부터, 남의 생명을 해쳐 그 위세를 부리고 남의 나라를 훔쳐 가로채는 경우가 아! 천하에 어찌 이리도 허다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늘이 각국 대표 분들로 하여금 천지의 바른 기운을 받들어 햇볕처럼 밝히게 하고 가르쳐 변화를 행하게 하여 천하를 하나로 묶어 크게 서로 하나 되는 세계로 돌아가게 하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본성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만국(萬國)이 같고 사해(四海)가 한길인데도 소문만 듣고 실덕(實德)을 입지 못했거나 원통한데도 여럿이 의논함에 알리지 못한 나라가 있다면, 어찌 여러 대표의 배려가 홀로 여기에만 제외될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 생각하건대 제외시킬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 피를 뿌리고 울분을 쏟아내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또한 비통하고 절박하여 참을 수 없는 심정에서 울어나는 것이니, 여러 대표 분들은 살피십시오.
아! 우리 한국은 세계의 하나입니다. 영토가 삼천리이고 국민이 2천만이며 4천여 년을 유지보존 하면서 반도의 문명을 잃지 않았으니, 또한 만방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불행히도 근래에 힘 있는 이웃나라가 밖에서 압박하여 맹약을 억지로 맺고 뒤이어 국토를 빼앗으며 왕위를 폐하여 우리 한국을 세계에서 없애버렸습니다.
이에 이 글에서 하고자하는 것을 거론 하자면, 일본은 병자년(1876)에 우리나라 대신과 강화에서 맹약하고 을미년(1895)에 청국대신과 시모노세키(馬關)에서 조약하면서 우리 한국에게 선전포고 할 적에도 명확하게 우리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는 사실을 성명으로 공포하였으니 이는 만국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온갖 거짓을 만들어 안으로 협박하고 밖으로 속이더니, 독립이 변하여 보호가 되고 보호가 변하여 합병이 되었습니다.
이에 한국인이 자원한다고 핑계하여 만국의 여럿이 의논함을 피하려 하니, 이는 그들의 수단아래 한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로 그들의 심중에는 만국도 없는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여러 분들은 참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하는 짓이 여럿의 뜻에 위배됨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갖추지 못한 채 떨쳐 일어남이 소용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낮밤으로 나라와 백성에 대하여 여럿이 칭송하기를“하느님이 우리를 도와 좋은 기운이 올 것이다.”하면서 부끄러움을 참고 어려움을 이겨낸지 이제 십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표 분들께서 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힘차게 박차고 일어서서 이르기를, “세계가 평화롭게 된다면, 우리도 세계의 하나거늘 어찌 우리만이 평화롭지 않게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폴란드제국(波蘭諸國)들이 이미 독립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만세를 외치면서 말하기를, “평화와 공론이 이미 정해졌다. 저들은 어떤 나라이며, 우리는 어떤 나라인가? 세계를 하나로 보는 인덕(仁德)이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은 때가 오면 돌아오니, 여러 대표 분들은 이에 따라 그 맡은 바 일을 마치고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나라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당장 죽어 구렁이에 뒹군다 하여도 백골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니 눈을 부릅뜬 채 좋은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에 하늘 또한 무심하여 하루 밤에 갑자기 우리 임금 승하하시니, 온 나라가 흉흉하고 슬픔에 가득하여 원통함을 호소할 곳 조차도 없었습니다.
이에 국장일(國葬日)에 즈음하여 각 학교 각 회사 개인 남녀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우리 임금의 영혼을 위로 하였습니다. 비록 포박과 매질을 당하여도 맨손으로 죽음을 돌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니 이에 억울함이 오래 동안 쌓이면 반드시 분출함을 볼 수 있으니, 이는 또한 여러 대표 분께서 그 기회를 열어주고, 용기를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시간만 끌면서 분명한 처분을 내리지 않으니 또 의아하고 괴이하게 여기면서 통(通)할 수 없음을 탄식 하였습니다. 이는 중간에서 일을 방해하는 자들이 거짓을 반복하여 여러 대표 분들의 보고 듣는 바를 현혹시키니, 청컨대 다시 이를 해명 하겠습니다.
하늘의 모든 것이 태어나면 반드시 사물마다 그 능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작게는 물고기, 조개와 곤충도 모두 자유로운 생활능력을 지니며, 사람이 사람 되고, 나라가 나라 되는 까닭도, 또한 각자가 다스리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은 비록 작지만, 2천만 국민과 4천년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족히 나라 일을 담당할 사람이 부족하지 않거늘, 맨 처음에 어찌 이웃나라의 대신 다스리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천리마다 풍토가 다르고, 백리마다 민속이 다른 것입니다.
저들이 이르기를, “한국은 독립할 수 없으니 우리가 다스려야 된다.”고 하나 풍속이란 갑자기 변할 수 없으며, 이른바 대신 다스리는 것은 단지 혼란만을 일으킬 뿐 이므로 이는 행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또 만국평화회의에서 말하기를, “한국인이 일본에 부속되기를 원 한지 오래다.”라고 할 것입니다.
무릇 한국 백성들이 스스로 한국 백성들이 된 까닭은, 그 영토와 풍토가 이미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타고난 성품에서 얻은 바가 그러한 것입니다. 차라리 일시에 속하여 복종을 기꺼이 할지언정, 그 마음만은 장차 천만년이 지나도 한국 백성임을 잃지 않을 것이니, 본심이 존재함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본심을 끝내 속일 수 없거늘, 만국이 함께 끼친 권위를 이용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함께 하는 뜻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는 일본에게도 또한 정당한 계책이 아닙니다. 곽종석(郭鍾錫) 등은 변두리의 쓸모없는 사람이라 외국의 사정을 상세히 못 듣고, 오직 옛 나라의 신하된 사람으로서 옛 임금의 내려오는 풍속에 의지하여 유교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가 새롭게 거듭나는 날을 맞이하여, 나라의 있음과 없음이 한번 움직이는 것에 달렸으니, 그 나라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가지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구석진데서 말라죽는 것 보다는, 모든 사람이 보고 듣는 자리에서 한 번 그 억울함을 드러내고 그 나아가고 물러섬을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돌아 보건데 바다와 땅의 길이 너무나 멀고 까다로우니, 행여나 길이 막혀 이르지 못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여러 대표 분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 목숨이 도중에 쓰러지고 만다면, 이 세상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길이 드러낼 가망이 없습니다.
비록 여러 대표 분들의 총명으로도 또한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에 감히 짧은 편지를 마련하여 10년간 고통 받은 사실을 갖추어 하늘 끝의 만리 밖에서 편지를 드리니, 참으로 비통하고 절박한 심정에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직 여러 대표 분들께서는 가련하게 여겨 이를 살펴주시고, 함께 판단함에 논의를 더욱 넓히시어 햇볕의 광채로 하여금 두루 미치게 하고,만물이 만들고 길러짐으로 하여금 흐름을 순탄하게 한다면, 종석(鍾錫) 등은 나라를 잃었다가, 나라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덕이 한 시대에 펼쳐져 여러 대표 분들의 할 일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종석(鍾錫) 등은 차라리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2천만 생명이 홀로 천지의 만물을 만들고 길러내지 못하고, 바야흐로 화창하고 조화로운 기운을 한탄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 대표 분들은 대책과 방법을 세워 주시오. 개국(開國)528년 3월에 아룁니다.
청원인(請願人) 곽종석 등 137명(곽종석 등 137명의 서명자 명단 생략) *청원인 명단은 원문 참조.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유림들이 3ㆍ1운동 발기에 참여하지 못하고 따로 장서운동을 일으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큰 이유로는 2가지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독립선언서에 왕조의 복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서명하는 것은 한국 유림의 전통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학문을 배우며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자들과 자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