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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이생이 담장 안을 엿본 이야기)

[주]담장은 빈부의 세계, 서민과 귀족,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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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담장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다. 담장 안은 이생이 경험하지 못한 이상세계였다. 담장을 넘어 최랑과 시를 창수하니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어떻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이생이 담장 안을 엿본 이야기

-김시습(金時習)

 

1]이생, 최랑집 담장 안에서 최랑을 만나다

1)이생, 담장 너머 최랑과 시를 수작하다

 

松都有李生者

(송도유이생자) : 송도에 이생이라는 자가 있는데

居駱駝橋之側

(거낙타교지측) : 낙타교 옆에 살고 있었다

年十八

(년십팔) : 나이는 열 여덟이었다.

風韻淸邁

(풍운청매) : 풍운이 맑고

天資英秀

(천자영수) : 재주가 뛰어나

常詣國學

(상예국학) :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讀詩路傍

(독시로방) : 길가에서도 시를 읽었다.

 

善竹里'

(선죽리) : 선죽리

有巨室處崔氏

(유거실처최씨) : 귀족집에서는 최씨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年可十五六

(년가십오륙) :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었다.

態度艶麗

(태도염려) : 태도가 아리땁고

工於刺繡

(공어자수) : 수도 잘 놓았으며,

而長於詩賦

(이장어시부) : 시와 문장도 잘 지었다.

世稱

(세칭) :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風流李氏子

(풍류이씨자) : 풍류로워라 이씨 집안 총각

窈窕崔家娘

(요조최가낭) : 아리따워라 최씨 집안 처녀여

才色若可餐

(재색약가찬) : 그 재주와 그 얼굴 [한 번 보면]

可以療飢腸

(가이료기장) : 주린 창자 채운 둣하지.

 

李生嘗挾冊詣學

(이생상협책예학) : 이생은 일찍부터 책을 옆에 끼고 학교에 다닐 때에

常過崔氏之家北牆外

(상과최씨지가북장외) : 언제나 최씨네 집 북쪽 담 밖으로 지나다녔다.

垂楊裊裊

(수양뇨뇨) : 간들거리는 수양버들

數十株環列

(수십주환열) : 수십 그루가 그 담을 둘러싸고 있었다.

李生憩於其下

(이생게어기하) : 이생이 그 나무 아래에서 쉬다가

一日窺牆內

(일일규장내) : 어느 날 담 안을 엿보았더니,

名花盛開

(명화성개) :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고

蜂鳥爭喧

(봉조쟁훤) :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고 있었다.

 

傍有小樓

(방유소루) : 그 곁에는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隱映於花叢之間

(은영어화총지간) : 꽃떨기 사이로 은은히 보였다.

株簾半掩

(주렴반엄) : 구슬발이 반쯤 가려 있고

羅幃低垂

(라위저수) :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워져 있었는데,

有一美人

(유일미인) : 한 아리따운 아가씨가

倦繡停針

(권수정침) : 수를 놓다가 지쳐 잠시 바늘을 멈추며

支頤而吟曰

(지이이음왈) : 턱을 괴고 시를 읊었다.

 

獨倚紗窓刺繡遲

(독의사창자수지) : 사창(紗窓)에 홀로 기대앉아 수놓기도 귀찮구나.

百花叢裏囀黃鸝

(백화총리전황리) : 온갖 꽃 떨기 속에 꾀꼬리 소리 다정도 해라.

無端暗結東風怨

(무단암결동풍원) : 부질없이 마음속으로 봄바람을 원망하며

不語停針有所思

(불어정침유소사) : 말없이 바늘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어라.

 

路上誰家白面郞

(로상수가백면랑) : 저 길 위의 저 총각은 어느 집 도련님일까.

靑衿大帶映垂楊

(청금대대영수양) : 푸른 옷깃 넓은 띠가 늘어진 버들 사이로 비쳐 오네.

何方可化堂中燕

(하방가화당중연) : 이 몸이 죽어 가서 대청 위의 제비 되면

低掠珠簾斜度墻

(저략주렴사도장) : 주렴 위를 가볍게 스쳐 담장 위를 날아 넘으리.

 

生聞之

(생문지) : 이생은 그 여인이 읊은 시를 듣고

不勝技癢

(불승기양) : 마음이 근질근질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然其門戶高峻

(연기문호고준) : 그러나 그 집의 담이 높고도 가파르며

庭闈深邃

(정위심수) : 안채가 깊숙한 곳에 있었으므로,

但怏怏而去

(단앙앙이거) :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還時以白紙一幅

(환시이백지일폭) :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흰 종이 한 장에다

作詩三首

(작시삼수) : 시 세 수를 써서

繫瓦礫投之曰

(계와력투지왈) : 기와 쪽에 매달아 담 안으로 던져 넣었다.

 

巫山六六霧重回

(무산육육무중회) : 무산 열두 봉우리 첩첩이 쌓인 안개 굽어도는데

半露尖峰紫翠堆

(반로첨봉자취퇴) : 반쯤 드러난 뽀죽한 봉우리가 붉고도 푸르구나.

惱却襄王孤枕夢

(뇌각양왕고침몽) : 양왕의 외로운 꿈을 수고롭게 하지 마오.

肯爲雲雨下陽臺

(긍위운우하양대) :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에서 만나 보세.

 

相如欲挑卓文君

(상여욕도탁문군) :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되어 탁문군(卓文君)을 꾀어내려니

多少情懷已十分

(다소정회이십분) :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은 이미 다 이루어졌네.

紅粉墻頭桃李艶

(홍분장두도리염) : 붉은 담머리의 복사꽃과 오얏꽃은

隨風何處落繽紛

(수풍하처락빈분) : 바람에 날려서 어디로 떨어지나.

 

好因緣邪惡因緣

(호인연사악인연) : 좋은 인연되려는지 나쁜 인연 되려는지

空把愁腸日抵年

(공파수장일저년) : 부질없는 이 내 시름 하루가 일 년 같아라.

二十八字媒已就

(이십팔자매이취) : 스물 여덟 자로 황혼의 기약을 맺었으니

藍橋何日遇神仙

(남교하일우신선) : 남교에서 어느 날 신선을 만나려나.

 

崔氏

(최씨) : 최씨가

命侍婢香兒

(명시비향아) : 몸종 향아(香兒)를 시켜서

往取見之

(왕취견지) : 그 편지를 주워다 보니,

卽李生詩也

(즉이생시야) : 바로 이생이 지은 시였다.

 

披讀再三

(피독재삼) : 최랑이 그 시를 펼쳐서 두세 번 읽고는

心自喜之

(심자희지) : 마음속으로 혼자 기뻐하였다.

以片簡

(이편간) : 종이 쪽지에

又書八字

(우서팔자) : 여덟 자를 써서

投之曰

(투지왈) : 담 밖으로 던져 주었다.

 

將子無疑

(장자무의) : "그대여. 의심 마오.

昏以爲期

(혼이위기) : 황혼에 만나요."

 

 

2)이생 황혼에 최랑집 담장을 넘어 시를 창수하다

-신선세계에서 선녀를 만난 기분이었다

 

生如其言

(생여기언) : 이생이 그 말대로

乘昏而往

(승혼이왕) : 황혼이 되자 최랑의 집을 찾아갔다.

忽見桃花一枝

(홀견도화일지) : 갑자기 복사꽃 한 가지가

過墻而有搖裊之影

(과장이유요뇨지영) : 담 위로 넘어오면서 하늘거리는 그림자가 나타났다.

往視之則以鞦韆絨索

(왕시지칙이추천융삭) : 이생이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네줄이

繫竹兜下垂(계죽두하수) : 대바구니를 매어서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다.

生攀緣而踰

(생반연이유) : 이생을 그 줄을 잡고 담을 넘었다.

 

會月上東山

(회월상동산) : 마침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花影在地(화영재지) : 꽃 그림자가 땅에 비껴

淸香可愛(청향가애) : 맑은 향내가 사랑스러웠다.

生意謂已入仙境

(생의위이입선경) : 이생은 자기가 신선 세계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여

心雖竊喜

(심수절희) : 마음은 비록 기뻤지만,

而情密事秘

(이정밀사비) : 자기의 마음이나 지금 하려는 일이 비밀스러워서

毛髮盡竪

(모발진수) : 머리칼이 모두 곤두섰다.

 

回眄左右

(회면좌우) : 이생이 좌우를 둘러보았더니,

女已在花叢裏

(여이재화총리) : 최랑은 꽃떨기 속에서

與香兒(여향아) : 향아와 같이

折花相戴

(절화상대) :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는,

鋪罽僻地

(포계벽지) : 외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었다.

 

見生微笑

(견생미소) : 최랑이 이생을 보고 방긋 웃으면서

口占二句

(구점이구) : 시 두 구절을

先唱曰

(선창왈) : 먼저 읊었다.

 

桃李枝間花富貴

(도리지간화부귀) : 복사와 오얏 가지 사이로 꽃송이 탐스럽고

鴛鴦枕上月嬋娟

(원앙침상월선연) : 원앙새 베개 위엔 달빛도 고와라.

 

生續吟曰

(생속음왈) : 이생이 뒤를 이어 시를 읊었다.

 

他時漏洩春消息

(타시루설춘소식) : 다음날 어쩌다가 봄소식이 새나간다면

風雨無情亦可憐

(풍우무정역가련) : 비바람 무정하니 더욱 가련하리라.

 

女變色而言曰

(여변색이언왈) : 최랑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本欲與君

(본욕여군) : "저는 본디 당신과 함께

終奉箕帚

(종봉기추) : 부부가 되어 끝까지 남편으로 모시고

永結歡娛

(영결환오) :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어요.

郞何言之若是遽也

(랑하언지약시거야) : 그런데 당신은 어찌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妾雖女類

(첩수여류) : 저는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心意泰然

(심의태연) : 마음이 태연한데,

丈夫意氣

(장부의기) : 장부의 의기를 가지고도

肯作此語乎

(긍작차어호) :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他日閨中事洩

(타일규중사설) : 다음날 규중의 일이 누설되어

親庭譴責

(친정견책) : 친정에서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妾以身當之

(첩이신당지) : 제가 혼자 책임을 지겠습니다."

 

香兒可於房中

(향아가어방중) : "향아야. 방 안에서

賫酒果以進

(재주과이진) : 술과 안주를 가져오너라."

兒如命而往

(아여명이왕) : 향아가 시키는 대로 가버리자,

四座寂寥

(사좌적요) : 사방이 고요하여

闃無人聲

(격무인성) :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生問曰

(생문왈) : 이생이 최랑에게 물었다.

此是何處

(차시하처) : "이곳은 어디입니까?"

女曰

(여왈) : 최랑이 말하였다.

此是北園中小樓下也

(차시북원중소루하야) : "이곳은 뒷동산에 있는 작은 누각 아래이지요.

父母以我一女

(부모이아일녀) : 저희 부모님께서는 제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情鍾甚篤

(정종심독) : 여간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別構此樓于芙蓉池畔

(별구차누우부용지반) : 그래서 연못가에다 이 누각을 따로 지어 주셨지요.

 

方春時

(방춘시) : 봄이 되어

名花盛開

(명화성개) : 이름난 꽃들이 활짝 피면

欲使從侍兒遨遊耳

(욕사종시아오유이) : 몸종 향아와 함께 즐겁게 놀라고 하신 거지요.

親闈之居

(친위지거) : 부모님이 계신 곳은

閨閤深邃

(규합심수) : 여기서 멀기 때문에

雖笑語啞咿

(수소어아이) : 아무리 웃으며 크게 이야기해도

亦不能卒爾相聞也

(역불능졸이상문야) : 쉽게 들리지는 않는답니다."

 

女酌綠蟻一巵

(여작녹의일치) : 최랑이 술 한 잔을 따라

口占古風一篇曰

(구점고풍일편왈) : 이생에게 권하면서 고풍(古風)으로 한 편을 읊었다.

 

曲欄下壓芙蓉池

(곡란하압부용지) : 부용못 푸른 물을 난간에서 굽어보다

池上花叢人共語

(지상화총인공어) : 꽃떨기 속에서 님들이 속삭이네.

香霧霏霏春融融

(향무비비춘융융) : 향그런 안개 깔린 속에 봄빛이 화창해서

製出新詞歌白紵

(제출신사가백저) : 새 가사를 지어내어「백저사(白紵詞)」를 부르는구나.

月轉花陰入氍毹

(월전화음입구유) : 꽃그늘에 달빛이 비껴 털방석에 스며들고

共挽長條落紅雨

(공만장조락홍우) : 긴 가지 함께 잡으니 붉은 꽃비가 떨어지네.

風攪淸香香襲衣

(풍교청향향습의) : 바람이 향내를 끌어와 옷 속에 스며들자

賈女初踏春陽舞

(고녀초답춘양무) : 첫봄을 맞은 아가씨가 햇살 속에 춤추네.

羅衫輕拂海棠枝

(나삼경불해당지) : 비단 적삼 가볍게 해당화를 스쳤다가

驚起花間宿鸚鵡

(경기화간숙앵무) : 꽃 사이에 졸고 있던 앵무새만 깨웠네.

 

生卽和之曰

(생즉화지왈) : 이생도 바로 시를 지어 화답하였다.

 

誤入桃源花爛熳

(오입도원화난만) : 도원에 잘못 들어와 복사꽃이 만발한데

多少情懷不能語

(다소정회불능어) : 많고 많은 이 내 정회(情懷)를 다 말할 수가 없네.

翠鬟雙綰金Ꟃ低

(취환쌍관금차저) : 구름같이 쪽찐 머리에 금비녀 낮게 꽂고

楚楚春衫裁綠紵

(초초춘삼재록저) : 산뜻한 봄 적삼을 모시 베로 지었구나.

東風初拆竝帶花

(동풍초탁병대화) : 나란히 달린 꽃가지를 봄바람에 꺾다니

莫使繁枝戰風雨

(막사번지전풍우) : 하많은 꽃가지에 비바람아 부지 마소.

飄飄仙袂影婆婆

(표표선몌영파파) : 선녀의 소맷자락 나부껴 그림자도 하늘거리고

叢桂陰中素娥舞

(총계음중소아무) : 계수나무 그늘 속에선 미녀가 춤을 춘다

勝事未了愁必隨

(승사미료수필수) : 좋은 일이 끝나지 않아도 시름이 따를 테니

莫製新詞敎鸚鵡

(막제신사교앵무) : 함부로 새 곡조 지어 앵무새에게 가르치지 마오

 

3)이생, 최랑의 누각 내실에 들어 마음껏 정을 나누다

-비경의 그림과 화제(畵題) 속에서 황홀경을 헤매다

 

吟罷

(음파) : 술자리가 끝나자

女謂生曰

(여위생왈) : 최랑이 이생에게 말하였다.

今日之事

(금일지사) : "오늘의 일은

必非小緣

(필비소연) : 반드시 작은 인연이 아니랍니다.

郞須尾我

(랑수미아) : 당신은 저를 따라오셔서

以遂情款(이수정관) : 정을 나누는 것이 좋겠어요."

言訖(언흘) : 말을 마치고

女從北窓入

(여종북창입) : 최랑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生隨之

(생수지) : 이생도 그 뒤를 따라갔다.

樓梯在房中

(루제재방중) : 누각에 달린 사다리가 있었는데,

綠梯而昇

(록제이승) :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더니

果其樓也

(과기루야) : 과연 그 다락이 나타났다.

文房几案

(문방궤안) : 문방구와 책상들이

極其濟楚

(극기제초) : 아주 말끔했으며,

一壁展煙江疊嶂圖

(일벽전연강첩장도) : 한쪽 벽에는「연강첩장도(烟江疊圖)」와

幽篁古木圖

(유황고목도) :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가 걸려 있었는데,

皆名畵也

(개명화야) :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題詩其上

(제시기상) : 그 그림 위에는 시가 씌어 있었는데,

詩不知何人所作

(시부지하인소작) : 누가 지은 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其一曰

(기일왈) : 첫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何人筆端有餘力

(하인필단유여력) : 어떤 사람의 붓끝에 힘이 넘쳐

寫此江心千疊山

(사차강심천첩산) : 이 강 속에다 겹겹이 쌓인 산을 그렸던가?

壯哉方壺三萬丈

(장재방호삼만장) : 웅장해라. 삼만 길의 저 방호산(方壺山)은

半出縹緲烟雲間

(반출표묘연운간) : 아득한 구름 사이로 반쯤만 드러났네.

遠勢微茫幾百里

(원세미망기백리) : 저 멀리 산세(山勢)는 몇백 리까지 뻗어 있는데

近見崒嵂靑螺鬟

(근견줄률청라환) : 푸른 소라처럼 쪽진 머리가 가까이 보이네.

滄波淼淼浮遠空

(창파묘묘부원공) : 끝없이 푸른 물결 공중에 닿았는데

日暮遙望愁鄕關

(일모요망수향관) : 저녁노을 바라보니 고향이 그리워라.

對此令人意蕭索

(대차령인의소삭) : 이 그림 구경하며 사람 마음이 쓸쓸해져

疑泛湘江風雨灣

(의범상강풍우만) : 소상강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여라.

 

其二曰

(기이왈) : 둘째 그림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幽篁蕭颯如有聲

(유황소삽여유성) : 쓸쓸한 대숲에선 가을 소리가 들리는 듯

古木偃蹇如有情

(고목언건여유정) : 비스듬히 누운 고목은 옛정을 품은 듯해라.

狂根盤屈惹苺苔

(광근반굴야매태) : 구부러진 늙은 뿌리엔 이끼가 가득 끼었고

老幹夭矯排風雷

(노간요교배풍뢰) : 굵고 곧은 가지는 바람과 천둥을 이겨 왔네.

胸中自有造化窟

(흉중자유조화굴) : 가슴속에 간직한 조화가 끝이 없으니

妙處豈與傍人說

(묘처기여방인설) : 미묘한 이 경지를 누구에게 말할 텐가.

韋偃與可已爲鬼

(위언여가이위귀) : 위언(韋偃)과 여가(輿可)도 이미 귀신이 되었으니

漏洩天機知有幾

(루설천기지유기) : 천기를 누설할 자가 그 몇이나 되려나.

晴窓嗒然淡相對

(청창탑연담상대) : 갠 창가 그윽한 곳에서 말없이 바라보니

愛看幻墨神三昧

(애간환묵신삼매) : 삼매경에 든 필법이 못내 사랑스러워라.

 

一壁貼四時景

(일벽첩사시경) : 한쪽 벽에는 사철의 경치를 읊은 시를

各四首

(각사수) : 각각 네 수씩 붙였는데,

亦不知爲何人所作

(역부지위하인소작) : 역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其筆

(기필) : 그 글씨는

則摹松雪眞字

(칙모송설진자) : 송설(松雪)의 서체를 본받아

體極精姸

(체극정연) : 자체가 아주 곱고도 단정하였다.

其一幅曰

(기일폭왈) : 그 첫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芙蓉帳暖香如縷

(부용장난향여루) : 연꽃 그린 휘장은 따뜻하고 향내는 실같은데

窓外霏霏紅杏雨

(창외비비홍행우) : 창밖에 붉은 살구꽃이 비 내리듯 하는구나.

樓頭殘夢五更鐘

(루두잔몽오경종) : 다락 머리에서 새벽 종소리에 남은 꿈을 깨고 보니

百舌啼在辛夷塢

(백설제재신이오) :신이화핀 언덕에 백설조가 우짖네.

燕子日長閨閤深

(연자일장규합심) : 제비새끼 커 가는데 안방 깊숙이 들어앉아

懶來無語停金針

(라래무어정금침) : 귀찮은 듯 말도 없이 금바늘을 멈추었네.

 

花底雙雙飛蝶蛺

(화저쌍쌍비접협) : 꽃 아래로 쌍쌍이 나비들 짝 지어 날며

爭趰落花庭院陰

(쟁이락화정원음) : 그늘진 동산으로 지는 꽃을 따라가네.

嫩寒輕透綠羅裳

(눈한경투록라상) : 꽃샘 추위가 초록 치마를 스쳐 가면

空對春風暗斷腸

(공대춘풍암단장) : 무정한 봄바람에나의 애가끊어지네.

脉脉此情誰料得

(맥맥차정수료득) : 말없는 이 심정을 그 누가 안다더냐.

百花叢裏舞鴛鴦

(백화총리무원앙) : 온갖 꽃 만발한 속에 원앙새가 춤추는구나.

春色深藏黃四家

(춘색심장황사가) : 깊어 가는 봄빛을 뉘 집 동산에 간직했나?

深紅淺綠映窓紗

(심홍천록영창사) : 붉은 꽃잎 푸른 나뭇잎 사창에 비치었네

一庭芳草春心苦

(일정방초춘심고) : 뜨락의 꽃과 풀들은 봄시름에 겨웠는데

輕揭珠簾看落花

(경게주렴간낙화) : 주렴을 가볍게 걷고 지는 꽃을 바라보네.

 

其二幅曰

(기이폭왈) : 그 둘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小麥初胎乳燕斜

(소맥초태유연사) : 밀이삭 처음 베고 제비 새끼 날아드는데

南園開遍石榴花

(남원개편석류화) : 남쪽 뜰엔 석류꽃이 두루 피었구나.

綠窓工女幷刀響

(록창공녀병도향) : 푸른 창가에 앉아 길쌈하는 아가씨는 가위소리 울리고

擬試紅裙剪紫霞

(의시홍군전자하) : 붉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새 치마를 지으려네.

 

黃梅時節雨簾纖

(황매시절우렴섬) : 매실이 익는 철에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데

鸎囀槐陰燕入簾

(앵전괴음연입렴) : 홰나무 그늘에 꾀꼬리 울고 제비는 주렴으로 날아드네.

又是一年風景老

(우시일년풍경노) : 또한 해 봄 풍경이 시들어 가니

棟花零落笋生尖

(동화영락순생첨) : 고련꽃 떨어지고 죽순이 삐죽 솟았네.

 

手拈靑杏打鸎兒

(수념청행타앵아) : 푸른 살구 손에 쥐고 꾀꼬리에게 던져 보네.

風過南軒日影遲

(풍과남헌일영지) : 남쪽 난간에 바람 일고 해그림자 더디어라.

荷葉已香池水滿

(하엽이향지수만) : 연잎에 향내 가시고 못에는 물이 가득한데

碧波深處浴鸕鶿

(벽파심처욕로자) : 푸른 물결 깊은 곳에서 가마우지가 목욕하네.

 

藤牀筠簟浪波紋

(등상균점랑파문) : 등 평상 대자리에 무늬가 물결 지고

屛畵瀟湘一抹雲

(병화소상일말운) : 소상강 그린 병풍에는 구름이 한 자락 있네.

懶慢不堪醒午夢

(라만불감성오몽) : 낮꿈을 깨고도 나른해 누웠더니

半窓斜日欲西曛

(반창사일욕서훈) : 반창에 비낀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네.

 

其三幅曰

(기삼폭왈) : 그 셋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秋風策策秋露凝

(추풍책책추로응) : 가을 바람이 쌀쌀해서 찬이슬이 맺히고

秋月娟娟秋水碧

(추월연연추수벽) : 달빛도 고와서 물빛 더욱 푸르구나.

一聲二聲鴻雁歸

(일성이성홍안귀) : 한 소리 또 한소리 기러기 울며 돌아가는데

更聽金井梧桐葉

(경청금정오동엽) : 우물에 오동잎 지는 소리를 다시금 듣고파라.

 

床下百蟲鳴喞喞

(상하백충명즐즐) : 상 밑에서는 온갖 벌레들이 처량하게 울고

床上佳人珠淚滴

(상상가인주루적) : 상 위에서는 아가씨가 구슬 눈물을 떨어뜨리네.

良人萬里事征戰

(양인만리사정전) : 만리 밖 싸움터에 몸을 바친 님에게도

今夜玉門關月白

(금야옥문관월백) :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 달빛이 환하겠지.

 

新衣欲裁剪刀冷

(신의욕재전도냉) : 새 옷을 마르려니 가위가 차가워라.

低喚丫兒呼熨斗

(저환아아호위두) : 나직이 아이 불러 다리미를 가져오라네.

熨斗火銷全未省

(위두화소전미성) : 다리미에 불 꺼진 걸 살피지 못하다가

細撥秦箏又搔首

(세발진쟁우소수) : 머리를 긁으며 피리대로 가만히 헤치네.

 

小池荷盡芭蕉黃

(소지하진파초황) : 작은 연못에 연꽃도 지고 파초 잎도 누래지자

鴛鴦瓦上粘新霜

(원앙와상점신상) : 원앙 그린 기와 위에 첫서리가 내렸네.

舊愁新恨不能禁

(구수신한불능금) : 묵은 시름 새 원한을 막을 길이 없는데

況聞蟋蟀鳴洞房

(황문실솔명동방) : 귀뚜라미 울음까지 골방에 들리네.

 

其四幅曰

(기사폭왈) : 그 넷째 폭에 쓰인 시는 이러하였다.

 

一枝梅影向窓橫

(일지매영향창횡) : 한 가지 매화 그림자가 창 앞으로 뻗었는데

風緊西廊月色明

(풍긴서랑월색명) : 바람 센 서쪽 행랑에 달빛 더욱 밝아라.

爐火未銷金筋撥

(로화미소금근발) : 화롯불 꺼졌는지 부저로 헤쳐 보고는

旋呼丫髻換茶鐺

(선호아계환다당) : 아이를 불러다 차솥을 바꾸라네.

 

林葉頻驚半夜霜

(임엽빈경반야상) : 밤서리에 놀란 잎이 자주 흔들리고

回風飄雪入長廊

(회풍표설입장랑) : 돌개바람이 눈을 몰아 긴 마루로 들어오네.

無端一夜相思夢

(무단일야상사몽) : 님 그리워 밤새도록 꿈속에 뒤척이니

都在氷河古戰場

(도재빙하고전장) : 빙하(氷河)가 어디런가, 그 옛날 전쟁터일세.

 

滿窓紅日似春溫(만창홍일사춘온) : 창에 가득한 붉은 해는 봄날처럼 따뜻한데

愁鎖眉峰著睡痕(수쇄미봉저수흔) : 시름에 잠긴 눈썹에 졸음까지 더하네.

膽甁小梅腮半吐(담병소매시반토) : 병에 꽂힌 작은 매화는 필 듯 말듯 하는데

含羞不語繡雙鴛(함수불어수쌍원) : 수줍어 말도 못하고 원앙새만 수놓는구나.

 

剪剪霜風掠北林

(전전상풍략북림) : 쌀쌀한 서리 바람이 북쪽 숲을 스치는데

寒鳥啼月正關心

(한조제월정관심) : 처량한 까마귀가 달을 보며 우는구나.

燈前爲有思人淚

(등전위유사인루) : 등불 앞에 님 생각 눈물 되어 흐르니

滴在穿絲小挫針

(적재천사소좌침) : 실에도 떨어지고 바늘에도 떨어지네.

 

一傍

(일방) : 한쪽에

別有小室一區

(별유소실일구) : 작은 방 하나가 따로 있었는데,

帳褥衾枕

(장욕금침) : 휘장 . 요 . 이불 .베개들이

亦甚整麗

(역심정려) : 또한 아주 깨끗하였다.

帳外爇麝臍

(장외설사제) : 휘장밖에는 사향을 태우고

燃蘭膏

(연난고) : 난향의 촛불을 켜놓았는데,

熒煌映徹

(형황영철) : 환하게 밝아서

恍如白晝

(황여백주) : 마치 대낮 같았다.

 

生與女

(생여녀) : 이생은 최랑과 더불어

極其情歡

(극기정환) : 마음껏 즐거움을 누리면서

遂留數日

(수유수일) : 여러 날 머물었다.

生謂女曰

(생위녀왈) : 어느 날 이생이 최랑에게 말하였다.

先聖有言

(선성유언) : "옛 성인의 말씀에,

父母在

(부모재) : '어버이가 계시면

遊必有方

(유필유방) : 나가 놀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而今我定省

(이금아정성) : 이제 내가 부모님을 떠난 지가

已過三日

(이과삼일) : 사흘이나 되었소.

親必倚閭而望

(친필의려이망) : 부모님께서 반드시 대문에 기대어 기다리실 테니,

非人子之道也

(비인자지도야) : 이 어찌 아들의 도리라고 하겠소?"

 

女惻然而頷之

(여측연이함지) : 최랑은 서운하게 여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踰垣而遣之

(유원이견지) : 담을 넘어 보내 주었다.

生自是以後

(생자시이후) : 이생을 이 뒤부터

無已不往

(무이불왕) : 저녁마다 최랑을 찾아가지 않는 날이 없었다.

 

 

[노르웨이]







 

 

 

 

 

萬福寺摴蒲記 下

만복사저포기 

 

2]무덤에서 사흘간 처자 환신과 지내다

1)처자 환신을 따라 개령동 처자의 집에 가다

 

生執女手, 經過閭閻,

생집녀수, 경과려염,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마을을 지나가는데,

犬吠於籬, 人行於路,

견폐어리, 인행어로,

개는 울타리에서 짖고 사람들이 길에 다녔다.

而行人不知與女同歸, 但曰:

이행인불지여녀동귀, 단왈:

그러나 길가던 사람들은 그가 여인과 함께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生早歸何處?”

생조귀하처?”

"양총각, 새벽부터 어디에 다녀오시오?" 하였다.

生答曰:

생답왈: 양생이 대답하였다.

“適醉臥萬福寺, 投故友之村墟也”

적취와만복사, 투고우지촌허야

"어젯밤 만복사에서 취하여 누웠다가 이제 친구가 사는 마을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至詰朝, 女引至草莽間,

지힐조, 녀인지초망간,

날이 새자 여인이 양생을 이끌고 깊은 숲을 헤치며 가는데,

零露瀼瀼, 無逕路可遵.

령로양양, 무경로가준.

이슬이 흠뻑 내려서 갈 길이 아득하였다.

生曰: “何居處之若此也?”

생왈: “하거처지약차야?”

양생이, "어찌 당신 거처하는 곳이 이렇소?" 하자

女曰: “孀婦之居, 固如此耳.”

녀왈: “상부지거, 고여차이.”

여인이 대답하였다.

"혼자 사는 여자의 거처가 진실로 이렇답니다."

女又謔曰:

녀우학왈:

여인이 또(『시경』行露편) 농을 걸어왔다.

“於邑行路, 豈不夙夜, 謂行多露.

어읍행로, 개불숙야, 위행다로.”

축축히 젖은 길이슬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엔 어찌 다니지 않나?

길에 이슬이 많기 때문이라네.

生乃謔之曰:

생내학지왈:

양생 또한 (『시경』의 衛風 有狐章:전2구,齊風 載驅章:후2구) 농을 받았다.

*위풍 유호장 전2구,  제풍 재구장 후2구

“有狐綏綏, 在彼淇梁. 魯道有蕩, 齊子 翶 翔.”

  “유호수수, 재피기량. 로도유탕, 제자 고 상.”

여우가 어슬렁어슬렁

저 기수 다릿목에 어정거리네,

노나라 오가는 길 평탄하여

제나라 아가씨 한가로이 노니네.

 

吟而笑傲. 遂同去開寧洞,

음이소오. 수동거개녕동,

둘이 읊고 한바탕 웃은 다음에 함께 개령동(開寧洞)으로 갔다.

 

蓬蒿蔽野, 荊棘參天,

봉호폐야, 형극삼천,

(한 곳이 이르자) 다북쑥이 들을 덮고 가시나무가 하늘에 치솟은 가운데

有一屋, 小而極麗,

유일옥, 소이극려,

한 집이 있었는데, 작으면서도 아주 아름다웠다.

邀生俱入,

요생구입,

그는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 들어갔다.

 

裀褥帳幃極整, 如昨夜所陳.

인욕장위극정, 여작야소진.

방안에는 이부자리와 휘장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밥상도 어젯밤에 차려온 것과 같았다.

留三日, 歡若平生然,

류삼일, 환약평생연,

양생은 그곳에 사흘을 머물렀는데, 즐거움이 평상시와 같았다.

其侍兒, 美而不黠,

기시아, 미이불힐,

시녀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활하지 않았고,

器皿潔而不文, 意非人世,

기명결이불문, 의비인세,

그릇은 깨끗하면서도 무늬가 없었다. 인간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而繾綣意篤, 不復思廬,

이견권의독, 불복사려,

그러나 여인의 은근한 정에 마음이 끌려,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2)처자는 네 여인을 불러 이별연을 베풀고 시를 창수하다

 已而女謂生曰:

이이녀위생왈:

얼마 뒤에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此地三日 不下三年 君當還家以顧生業也.”

 “차지삼일 불하삼년 군당환가이고생업야.”

"이곳의 사흘은 인간세상의 삼 년과 같습니다. 낭군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생업을 돌보십시오."

遂設離宴以別. 生悵然曰:

수설리연이별. 생창연왈:

드디어 이별의 잔치를 베풀며 헤어지게 되자, 양생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何遽別之速也?”

하거별지속야?”

"어찌 이별이 이다지도 빠르오?"

女曰: “當再會, 以盡平生之願爾,

녀왈: “당재회, 이진평생지원이,

여인이 말하였다. "다시 만나 평생의 소원을 풀게 될 것입니다.

今日到此弊居, 必有夙緣,

금일도차폐거, 필유숙연,

오늘 이 누추한 곳에 오시게 된 것도 반드시 묵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宜見鄰里族親, 如何?”

의견린리족친, 여하?”

이웃 친척들을 만나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生曰: “諾.” 卽命侍兒, 報四鄰以會.

생왈:   “.”  즉명시아보사린이회.

양생이 '좋다'고 하자, 곧 시녀에게 시켜, 사방의 이웃에게 알려 모이게 하였다.

 

其一曰鄭氏. 其二曰吳氏. 其三曰金氏. 其四曰柳氏.

기일왈정씨. 기이왈오씨. 기삼왈금씨. 기사왈류씨.

첫째는 정씨이고 둘째는 오씨이며, 셋째는 김씨이고 넷째는 류씨인데,

皆貴家巨族, 而與女子,

개귀가거족, 이여녀자,

모두 문벌이 높은 귀족집의 따님들이었다.

同閭閈親戚, 而處子者也.

동려한친척, 이처자자야.

이 여인과는 한 마을에 사는 친척 처녀들이었다.

性俱溫和, 風韻不常,

성구온화, 풍운부상,

성품이 온화하며 풍운이 보통 아니었고,

而又聰明識字, 能爲詩賦,

이우총명식자, 능위시부,

총명하고 글도 또한 많이 알아 시를 잘 지었다.

皆作七言短篇四首以贐,

개작칠언단편사수이신,

이들이 모두 칠언절구 네 수씩을 지어 양생을 전송하였다.

鄭氏態度風流, 雲鬟掩鬢,

정씨태도풍류, 운환엄빈,

정씨는 태도와 풍류가 갖추어진 여인인데, 구름같이 쪽진 머리가 귀밑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乃噫而吟曰:

내희이음왈:

정씨가 탄식하며 시를 읊었다.

 

春宵花月兩嬋娟,

춘소화월량선연,  봄이라 꽃피는 밤 달빛마저 고운데

長把春愁不記年.

장파춘수불기년. 내 시름 그지없이 나이조차 모르겠네.

自恨不能如比翼,

자한불능여비익, 한스러워라, 이 몸이 비익조(比翼鳥)나 된다면

雙雙相戱舞靑天.

쌍쌍상희무청천푸른 하늘에서 쌍쌍이 춤추고 놀련만.

 

漆燈無焰夜如何,

칠등무염야여하칠등(漆燈)엔 불빛도 없으니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星斗初橫月半斜.

성두초횡월반사.  북두칠성 가로 비끼고 달도 반쯤 기울었네.

惆悵幽宮人不到,

추창유궁인불도,  서글퍼라. 무덤 속을 그 누가 찾아오랴?

翠衫撩亂鬢鬖髿.  

취삼료란빈삼.  푸른 적삼은 구겨지고 쪽진 머리도 헝클어졌네.

 

摽梅情約竟蹉跎,

표매정약경차타매화 지니 정다운 약속도속절없이 되어 버렸네.

辜負春風事已過.

고부춘풍사이과.  봄바람 건듯 부니 모든 일이 지나갔네.

枕上淚痕幾圓點,

침상루흔기원점,  베갯머리 눈물 자국 몇 군데나 젖었던가?

滿庭山雨打梨花.

만정산우타리화산비도 무심하구나 배꽃이 뜰에 가득 떨어졌네.

 

一春心事已無聊,

일춘심사이무료꽃다운 청춘을 하염없이 지내려니

寂寞空山幾度宵.

적막공산기도소.  적막한 이 빈 산에서 잠 못 이룬 지 몇 밤이던가?

不見藍橋經過客,

불견람교경과객,  남교(藍橋)에 지나는 나그네를 님인 줄 몰랐으니

何年裴航遇雲翹.

하년배항우운교.어느 해나 배항(裴航)처럼 운교(雲翹)부인을 만나려나.

 

 

吳氏, 丫鬟妖弱,

오씨, 아환요약,

오씨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에 가냘픈 몸매로

不勝情態, 繼吟曰:

불승정태, 계음왈:

속에서 일어나는 정회를 걷잡지 못하며, 뒤를 이어 읊었다.

 

寺裏燒香歸去來,

사리소향귀거래만복사에 향 올리고 돌아오던 길이던가

金錢暗擲竟誰媒.

금전암척경수매. 가만히 저포를 던지니 그 소원을 누가 맺어 주었나.

春花秋月無窮恨,

춘화추월무궁한,  꽃 피는 봄날 가을 달밤에 그지없는 이 원한을

銷却樽前酒一盃.

소각준전주일배임이 주신 한 잔 술로 저근덧 녹여 보세.

 

漙漙曉露浥桃腮,

단단효로읍도시, 복사꽃 붉은 뺨이 새벽 이슬에 젖건마는

幽谷春深蝶不來.

유곡춘심접불래. 깊은 골짜기라 한 봄 되어도 나비조차 아니 오네.

却喜隣家銅鏡合,

각희린가동경합,  기뻐라. 이웃집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更歌新曲酌金疊.

갱가신곡작금첩. 새 곡조를 다시 부르며 황금술잔이 오가네.

 

年年燕子舞東風,

년년연자무동풍,  해마다 오는 제비는 봄바람에 춤을 추건만

腸斷春心事已空.

장단춘심사이공. 내 마음 애가 끊어져 모든 일이 헛되어라.

羨却芙蕖猶竝蔕,

선각부거유병체,  부럽구나. 저 연꽃은 꼭지나마 나란히 하여

夜深同浴一池中.

야심동욕일지중. 밤 깊어지면 한 연못에서 함께 목욕하는구나.

 

一層樓在碧山中,

일층누재벽산중, 푸른 산 속에 다락이 하나 높이 솟아

連理枝頭花正紅.

련리지두화정홍. 연리지(連理枝)에 열린 꽃은 해마다 붉건마는

却恨人生不如樹,

각한인생불여수, 한스러워라. 우리 인생은 저 나무보다도 못하여

靑年薄命淚凝瞳.

청년박명루응동. 박명한 이 청춘에 눈물만 고였구나.

 

金氏, 整其容儀, 儼然染翰,

, 정기용의, 엄연염한,

김씨가 얼굴빛을 가다듬고 얌전한 태도로 붓을 잡더니,

責其前詩, 淫佚太甚, 而言曰:

책기전시, 음일태심, 이언왈:

앞에 읊은 시들이 너무 음탕하다고 꾸짖으면서 말하였다.

“今日之事, 不必多言, 但叙光景,

 “금일지사, 불필다언, 단서광경,

"오늘 모임에서는 말을 많이 할 필요가 없고, 이 자리의 광경만 읊으면 됩니다.

胡乃陳懷, 以失其節, 傳鄙懷於人間.”

호내진회, 이실기절, 전비회어인간.”

어찌 자기들의 속마음을 베풀어 우리의 절조를 잃게 하고,(저 손님으로 하여금) 우리들의 마음을 인간 세상에 전하도록 하겠습니까?"

遂郞然賦曰:

수랑연부왈:

그리고는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杜鵑鳴了五更風,

두견명료오갱풍, 밤 깊어 오경(五更)이 되니 소쩍새가 슬피 울고

寥落星河已轉東.

요낙성하이전동. 희미한 은하수는 동쪽으로 기울었네.

莫把玉簫重再弄,

막파옥소중재농, 애끊는 옥퉁소를 다시는 불지 마오.

風情恐與俗人通.

풍정공여속인통. 한가한 이 풍정을 속인이 알까 걱정스럽네.

 

滿酌烏程金叵羅,

만작오정금파나, 오정주(烏程酒)를 가득히 금술잔에 부으리다.

會須取醉莫辭多.

회수취취막사다. 취하도록 잡으시고 술이 많다 사양 마오.

明朝捲地東風惡,

명조권지동풍아, 날이 밝아 저 동풍이 사납게 불어오면

一段春光奈夢何.

일단춘광나몽하.  한 토막 봄날의 꿈을 내 어이하려나.

 

綠紗衣袂懶來垂,

녹사의몌나내수,  초록빛 소맷자락 부드럽게 드리우고

絃管聲中酒百巵.

현관성중주백치. 풍류 소리 들으면서 백잔 술을 드소서.

淸興未闌歸未可,

청흥미란귀미가, 맑은 흥취 다하기 전엔 돌아가지 못하시리니

更將新語製新詞.

갱장신어제신사.  다시금 새로운 말로 새 노래를 지으소서.

 

幾年塵土惹雲鬟,

기년진토야운환,  구름같이 고운 머리가 티끌 된 지 몇 해던가?

今日逢人一解顔.

금일봉인일해안.  오늘에야 님을 만나 얼굴 한번 펴보았네.

莫把高唐神境事,

막파고당신경사,  고당(高塘)의 신기한 꿈을 자랑하지 마소서.

風流話柄落人間.

풍류화병낙인간.  풍류스런 그 이야기가 인간에 전해질까 두려워라.

 

柳氏, 淡粧素服, 不甚華麗, 而法度有常,

류씨는 엷게 화장하고 흰옷을 입어 아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법도가 있어 보였다.

沈黙不言, 微笑而題曰:

말없이 가만있다가 (자기의 차례가 되자) 빙그레 웃으면서 시를 지어 읊었다.

 

確守幽貞經幾年,

확수유정경기년,  금석같이 굳세게 정절을 지켜온 지 몇 해던가?

香魂玉骨掩重泉.

향혼옥골엄중천. 향그런 넋과 옥같은 얼굴이 구천에 깊이 묻혔네.

春宵每與姮娥伴,

춘소매여항아반,  그윽한 봄밤이면 달나라 항아(姮娥)와 벗을 삼아

叢桂花邊愛獨眠.

총계화변애독면.  계수나무 꽃그늘에 외로운 잠을 즐겼다오.

却笑春風桃李花,

각소춘풍도리화,  우습구나. 복사와 오얏꽃은 봄바람에 못 이겨서

飄飄萬點落人家.

표표만점낙인가.  이리저리 나부끼다 남의 집에 떨어지네.

平生莫把靑蠅點,

평생막파청승점, 한평생 내 절개에 쇠파리가 없을지니

誤作崑山玉上瑕.

오작곤산옥상하.  곤산옥(崑山玉) 같은 내마음에 티가 될까 두려워라.

 

脂粉慵拈首似蓬,

지분용념수사봉,  연지도 분도 싫은데다 머리는 다북 같고

塵埋香匣綠生銅.

진매향갑록생동. 경대에는 먼지 쌓이고 거울에는 녹이 슬었네.

今朝幸預鄰家宴,

금조행예린가연,  오늘 아침엔 다행히도 이웃 잔치에 끼였으니

羞看冠花別樣紅.

수간관화별양홍. 머리에 꽂은 붉은 꽃이 보기만 해도 부끄러워라.

 

娘娘今配白面郞,

랑랑금배백면랑, 아가씨는 이제야 백면 낭군을 만났으니

天定因緣契闊香.

천정인연결활향. 하늘이 정하신 인연 한평생 꽃다워라.

月老已傳琴瑟線,

월로이전금슬선,  월로가 이미 거문고와 비파 줄을 전했으니

從今相待似鴻光.

종금상대사홍광. 이제부터 두 분이 양홍 맹광처럼 지내소서.

 

女乃感柳氏終篇之語, 出席而告曰:

녀내감류씨종편지어, 출석이고왈:

여인은 류씨가 읊은 시의 마지막 장을 듣고 감사하여, 앞으로 나와서 말하였다.

“余亦粗知字畵, 獨無語乎.”

 “여역조지자화, 독무어호.”

"저도 또한 자획은 대강 분별할 정도이니, 어찌 홀로 시를 짓지 않겠습니까?"

乃製近體七言四韻, 以賦曰:

내제근체칠언사운, 이부왈:

그리고는 칠언율시 한 편을 지어 읊었다.

 

開寧洞裏抱春愁,

개녕동리포춘수, 개령동 골짜기에 봄시름을 안고서

花落花開感百憂.

화락화개감백우.  꽃 지고 필 때마다 온갖 근심을 느꼈었네.

楚峽雲中君不見,

초협운중군불견,  초협(楚峽) 구름 속에서 고운 님 여의고는

湘江竹下泣盈眸.

상강죽하읍영모. 소상강 대숲에서 눈물을 뿌렸었네.

晴江日暖鴛鴦竝,

청강일난원앙병  따뜻한 날 맑은 강에 원앙은 짝을 찾고

碧落雲銷翡翠遊.

벽락운소비취유. 푸른 하늘에 구름이 걷히자 비취새가 노니누나.

好是同心雙綰結,

호시동심쌍관결,  님이여, 동심결(同心結)을 우리도 맺읍시다.

莫將紈扇怨淸秋.

막장환선원청추.  비단 부채처럼 맑은 가을을 원망하지 말게 하오.

 

生亦能文者. 見其詩法淸高,

생역능문자. 견기시법청고,

양생도 또한 문장에 능한 사람이어서, 그들의 시법이 맑고도 운치가 높으며

音韻鏗鏘, 唶唶不已.

음운갱장, 차차불이.

음운이 맑게 울리는 것을 보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卽於席前, 走書古風長短篇一章, 以答曰:

즉어석전, 주서고풍장단편일장, 이답왈:

그도 곧 즉석에서 고풍(古風) 장단편 한 장을 지어 화답하였다.

 

今夕何夕, 

금석하석이 밤이 어인 밤이기에

見此仙姝.

견차선주이처럼 고운 선녀를 만났던가?

花顔何婥妁,

화안하작작, 꽃 같은 얼굴은 어이 그리도 고운지

絳脣似櫻珠.

강순사앵주.  붉은 입술은 앵두 같아라.

風騷尤巧妙,

풍소우교묘, 게다가 시마저 더욱 교묘하니

易安當含糊.

역안당함호. 易安도 마땅히 입을 다물리라.

織女投機下天津, 

직녀투기하천진직녀 아씨가 북 던지고 인간세계로 내려왔는가?

嫦娥抛杵離淸都.

항아포저리청도. 상아가 약방아 버리고 달나라를 떠났는가.

靚粧照此玳瑁筵,

정장조차대모연대모(玳瑁)로 꾸민 단장이 자리를 빛내 주니

羽觴交飛淸讌娛.

우상교비청연오.  오가는 술잔 속에 잔치가 즐거워라.

殢雨尤雲雖未慣,

체우우운수미관운우의 즐거움이 익숙하진 못할망정

淺斟低唱相怡愉.

천짐저창상이유. 술 따르고 노래 부르며 서로들 즐겨하네.

自喜誤入蓬萊島,

자희오입봉래도봉래섬을 잘못 찾아든 게 도리어 기뻐라

對此仙府風流徒.

대차선부풍류도. 신선세계가 여기던가, 풍류도를 만났구나.

瑤漿瓊液溢芳樽,

요장경액일방준, 옥잔의 맑은 술은 향그런 술통에 가득 차 있고

瑞腦霧噴金猊爐.

서뇌무분금예노서뇌(瑞腦)의 고운 향내가 금사자 향로에 서려 있네.

白玉牀前香屑飛,

백옥상전향설비백옥상 놓은 앞에 매운 향내 흩날리고

微風撼波靑紗廚.

미풍감파청사주.  푸른 비단 장막에는 실바람이 살랑이는데,

眞人會我合巹巵,

진인회아합근치님을 만나 술잔을 합하며 잔치를 베풀게 되니

綵雲冉冉相縈紆.

채운염염상영우. 하늘에 오색 구름 더욱 찬란하여라.

君不見文簫遇彩鸞,

군불견문소우채란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문소(文蕭)와 채란(彩鸞)이 만난 이야기와

張碩逢杜蘭.

장석봉두란.  장석(張碩)이 난향(蘭香) 만난 이야기를.

人生相合定有緣,

인생상합정유연, 인생이 서로 만나는 것도 반드시 인연이니

會須擧白相闌珊.

회수거백상란산.  모름지기 잔을 들어 실컷 취해 보세나.

娘子何爲出輕言,

낭자하위출경언님이시여. 어찌 가벼이 말씀하시오?

道我掩棄秋風紈.

도아엄기추풍환.  가을 바람에 부채 버린다는 서운한 말씀을,

世世生生爲配耦,

세세생생위배우,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배필이 되어

花前月下相盤桓.

화전월하상반환. 꽃 피고 달 밝은 아래에서 끊임없이 노닐려오.

 

3] 처자 환신을 보련사에서 더사 만나다

1)은주발을 들고 보련사 가는 길에 기다리다 대상을 지내러 온 그녀 부모를 만나다

 

酒盡相別, 女出銀椀一具, 以贈生曰:

주진상별, 녀출은완일구, 이증생왈:

술이 다하여 헤어지게 되자, 여인이 은그릇 하나를 내어 양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明日, 父母飯我于寶蓮寺.

명일, 부모반아우보련사.

"내일 저희 부모님께서 저를 위하여 보련사에서 음식을 베풀 것입니다.

若不遺我, 請遲于路上,

약불유아, 청지우로상,

당신이 저를 버리지 않으시겠다면, 보련사로 가는 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同歸梵宇, 同 覲我父母, 如何?”

동귀범우, 동 근아부모, 여하?”

저와 함께 절로 가서 부모님을 뵙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生曰: “諾.”

생왈: “.”

양생이 대답하였다. "그러겠소."

 

生如其言, 執椀待于路上,

생여기언, 집완대우로상,

(이튿날) 양생은 여인의 말대로 은그릇 하나를 들고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果見巨室右族, 薦女子之大祥 車馬騈闐上于寶蓮,

과견거실우족, 천녀자지대상 거마병전상우보련,

정말 어떤 귀족의 집안에서 딸자식의 대상을 치르려고 수레와 말을 길에 늘어세우고서 보련사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見路傍, 有一書生, 執椀而立, 從者曰:

견로방, 유일서생, 집완이립, 종자왈:

그러다가 길가에서 한 서생이 은그릇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하인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娘子殉葬之物, 已爲他人所偸矣.”

낭자순장지물, 이위타인소투의.”

"아가씨 장례 때에 무덤 속에 묻은 그릇을 벌써 어떤 사람이 훔쳐 가졌습니다."

主曰: “如何?”

주왈: “여하?”

주인이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從者曰: “此生所執之椀.”

종자왈: “차생소집지완.”

하인이 말하였다. "저 서생이 가지고 있는 은그릇을 보고 한 말씀입니다."

遂聚馬以問,

수취마이문,

주인이 마침내 탔던 말을 멈추고 (양생에게 그릇을 얻게 된 사연을) 물었다.

生如其前約以對, 父母感訝良久曰:

생여기전약이대, 부모감아량구왈:

양생이 전날 약속한 그 대로 대답하였더니, (여인의) 부모가 놀라며 의아스럽게 여기다가 한참 뒤에 말하였다.

“吾止有一女子, 當寇賊傷亂之時, 死於干戈,

오지유일녀자, 당구적상란지시, 사어간과,

"내 슬하에 오직 딸자식 하나가 있었는데, 왜구의 난리를 만나 싸움판에서 죽었다네.

不能窀窆, 殯于開寧寺之間,

불능둔폄, 빈우개녕사지간,

미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개령사 곁에 임시로 묻어 두고는

因循不葬, 以至于今.

인순불장, 이지우금

이래저래 미루어 오다가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다네.

今日大祥已至, 暫設齌筵, 以追冥路.

금일대상이지, 잠설제연, 이추명로.

오늘이 벌써 대상 날이라, (어버이된 심경에) 재나 올려 명복을 빌어 줄까 한다네.

君如其約, 請竢女子以來, 願勿愕也.”

군여기약, 청사녀자이래, 원물악야.”

자네가 정말 그 약속대로 하려거든, 내 딸자식을 기다리고 있다가 같이 오게나. 놀라지는 말게나."

言訖先歸.

언흘선귀.

그 귀족은 말을 마치고 먼저 (개령사로) 떠났다.

 

2)양생, 보련사에서 처자를 다시 만나다 

生佇立以待.

생저립이대.

양생은 우두커니 서서 (여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及期, 果一女子, 從侍婢,

급기, 과일녀자, 종시비,

약속하였던 시간이 되자 과연 한 여인이 계집종을 데리고

腰裊而來, 卽其女也.

요뇨이래, 즉기녀야.

허리를 간들거리며 오는데, 바로 그 여인이었다.

相喜携手而歸,

상희휴수이귀,

그들은 서로 기뻐하면서 손을 잡고 절로 향하였다.

女入門禮佛, 投于素帳之內,

녀입문례불, 투우소장지내,

여인은 절 문에 들어서자 먼저 부처에게 예를 드리고 곧 흰 휘장 안으로 들어갔다.

親戚寺僧, 皆不之信, 唯生獨見,

친척사승, 개불지신, 유생독견,

그의 친척과 절의 스님들은 모두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오직 양생만이 혼자서 보았다.

女謂生曰: “可同茶飯.”

녀위생왈: “가동다반.”

그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함께 저녁이나 드시지요."

生以其言, 告于父母.

생이기언, 고우부모.

양생이 그 말을 여인의 부모에게 알리자,

父母試驗之, 遂命同飯,

부모시험지, 수명동반,

여인의 부모가 시험해 보려고 같이 밥을 먹게 하였다.

唯聞匙筋聲, 一如人間.

유문시근성, 일여인간.

그랬더니 (그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면서) 오직 수저 놀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인간이 식사하는 것과 한가지였다.

父母於是驚歎, 遂勸生, 同宿帳側,

부모어시경탄, 수권생, 동숙장측,

그제야 여인의 부모가 놀라 탄식하면서, 양생에게 권하여 휘장 옆에서 같이 잠자게 하였다.

中夜言語琅琅, 人欲細聽, 驟止其言.

중야언어랑랑, 인욕세청, 취지기언.

한밤중에 말소리가 낭랑하게 들렸는데, 사람들이 가만히 엿들으려 하면 갑자기 그 말이 끊어졌다.

 

4]처지 환신과 영별하다

1)처자는 영별을 고하다 

 

曰: “妾之犯律, 自知甚明.

: “첩지범률, 자지심명.

여인이 양생에게 말하였다.

"제가 법도를 어겼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少讀詩書, 粗知禮義,

소독시서, 조지례의,

저도 어렸을 때에 『시경』과『서경』을 읽었으므로, 예의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非不諳褰裳之可愧, 相鼠之可赧,

비불암건상지가괴, 상서지가난,

『시경』에서 말한 「건상( 裳)」이얼마나 부끄럽고「상서(相鼠)」가 얼마나 얼굴 붉힐 만한 시인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然而久處蓬蒿, 抛棄原野,

연이구처봉호, 포기원야,

그렇지만 하도 오래 다북쑥 우거진 속에 묻혀서 들판에 버림받았다가

風情一發, 終不能戒.

풍정일발, 종불능계.

사랑하는 마음이 한번 일어나고 보니, 끝내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曩者, 梵宮祈福,

낭자, 범궁기복,

지난번 절에 가서 복을 빌고

佛殿燒香, 自嘆一生之薄命,

불전소향, 자탄일생지박명,

부처님 앞에서 향불을 사르며 박명했던 한평생을 혼자서 탄식하다가

忽遇三世之因緣.

홀우삼세지인연.

뜻밖에도 삼세(三世)의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擬欲荊𨥁椎䯻, 奉高節於百年,

의욕형추고, 봉고절어백년,

소박한 아내가 되어 백년의 높은 절개를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羃酒縫裳, 修婦道於一生.

멱주봉상, 수부도어일생.

술을 빚고 옷을 기워 평생 지어미의 길을 닦으려 했었습니다만,

自恨業不可避, 冥道當然,

자한업불가피, 명도당연,

애닮게도 업보(業報)를 피할 수가 없어서 저승길을 떠나야 하게 되었습니다.

歡娛未極, 哀別遽至.

환오미극, 애별거지.

즐거움을 미처 다하지도 못하였는데, 슬픈 이별이 닥쳐왔습니다.

今則步蓮入屛, 阿香輾車,

금칙보련입병, 아향전거,

이제는 제가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雲雨霽於陽臺, 烏鵲散於天津,

운우제어양대, 오작산어천진,

운우(雲雨)는 양대(陽臺)에 개고 오작(烏鵲)은 은하에 흩어질 것입니다.

從此一別, 後會難期.

종차일별, 후회난기.

이제 한번 헤어지면 뒷날을 기약하기가 어렵습니다.

臨別凄惶, 不知所云.”

림별처황, 불지소운.”

헤어지려고 하니 아득하기만 해서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送魂之時, 哭聲不絶,

송혼지시, 곡성불절.

사람들이 여인의 영혼을 전송하자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至于門外, 但隱隱有聲. 曰:

지우문외, 단은은유성. :

혼이 문 밖에까지 나가자 소리만 은은하게 들려 왔다.

 

冥數有限

명수유한 저승길도 기한 있으니

慘然將別.

참연장별. 슬프지만 이별이라오.

願我良人

원아량인 우리 님께 비오니

無或踈闊.

무혹소활. 저버리진 마옵소서.

哀哀父母

애애부모  애닯아라, 우리 부모

不我匹兮.

불아필혜. 나의 배필을 못 지었네.

漠漠九原

막막구원  아득한 구원(九原)에서

心糾結兮.

무혹소활 마음에 한이 맺히겠네.

 

 

餘聲漸滅, 嗚哽不分, 

여성점멸, 오경불분

남은 소리가 차츰 가늘어지더니 목메어 우는 소리와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父母已知其實, 不復疑問. 生亦知其爲鬼, 尤增傷感, 與父母聚頭而泣, 

부모이지기실, 불복의문. 생역지기위귀, 우증상감, 여부모취두이읍

여인의 부모는 그제야 그 동안 있었던 일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양생도 또한 그 여인이 귀신인 것을 알고는 더욱 슬픔을 느끼게 되어, 여인의 부모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었다.

父母謂生曰:

부모위생왈:

여인의 부모가 양생에게 말하였다.

“銀椀任君所用. 但女子, 有田數頃, 蒼赤數人, 君當以此爲信, 勿忘吾女子.”

은완임군소용. 단녀자, 유전수경, 창적수인, 군당이차위신, 물망오녀자.”

"은그릇은 자네가 쓰고 싶은 대로 맡기겠네. 또 내 딸자식 몫으로 밭 몇 마지기와 노비 몇 사람이 있으니, 자네는 이것을 신표로 하여 내 딸자식을 잊지 말게나."

 

2)양생은 개령동에서 처자의 시신을 찾아 장례지내고 재를 올려 천도하다

翌日, 設牲牢朋酒, 以尋前迹, 果一殯葬處也. 生設奠哀慟, 焚楮鏹于前, 遂葬焉. 作文以弔之曰:

익일, 설생뢰붕주, 이심전적, 과일빈장처야. 생설전애통, 분저강우전, 수장언. 작문이조지왈:

이튿날 양생이 고기와 술을 마련하여 개령동 옛 자취를 찾아갔더니, 과연 시체를 임시로 묻어 둔 곳이 있었다. 양생은 제물을 차려 놓고 슬피 울면서 그 앞에서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준 뒤에, 제물을 지어 위로하였다.

 “惟靈, 生而溫麗, 長而淸渟.

 “유령, 생이온례, 장이청정.

아아. 영이시여. 당신은 어릴 때부터 천품이 온순하였고, 자라면서 얼굴이 말끔하였소.

儀容侔於西施, 詩賦高於淑眞,

의용모어서시, 시부고어숙진,

자태는 서시(西施) 같았고, 문장은 숙진(淑眞)보다도 나았소.

不出香閨之內, 常聽鯉庭之箴.

불출향규지내, 상청리정지잠.

규문(閨門) 밖에는 나가지 않으면서 가정교육을 늘 받아 왔었소.

逢亂離而璧完, 遇寇賊而珠沈.

봉란리이벽완, 우구적이주침.

난리를 겪으면서 정조를 지켰지만, 왜구를 만나 목숨을 잃었구려.

托蓬蒿而獨處, 對花月而傷心.

탁봉호이독처, 대화월이상심.

다북쑥 속에 몸을 내맡기고 홀로 지내면서, 꽃 피고 달 밝은 밤에는 마음이 아팠겠소.

腸斷春風, 哀杜鵑之啼血,

장단춘풍, 애두견지제혈,

봄바람에 애가 끊어지면 두견새의 피울음 소리가 슬프고,

膽裂秋霜, 歎紈扇之無緣.

담렬추상, 탄환선지무연.

가을 서리에 쓸개가 찢어지면 버림받는 비단부채를 보며 탄식했겠구려.

嚮者, 一夜邂逅, 心緖纏綿.

향자, 일야해후, 심서전면

지난번에 하룻밤 당신을 만나 기쁨을 얻었으니,

雖識幽明之相隔, 實盡魚水之同歡.

수식유명지상격, 실진어수지동환.

비록 저승과 이승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알면서도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움을 다하였소.

將謂百年以偕老, 豈期一夕而悲酸.

장위백년이해로, 개기일석이비산.

장차 백년을 함께 지내려하였으니, 하루 저녁에 슬피 헤어질 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月窟驂鸞之姝, 巫山行雨之娘,

월굴참란지주, 무산행우지낭.

임이여. 그대는 달나라에서 난새를 타는 선녀가 되고, 무산에 비 내리는 아가씨가 되리다.

地黯黯而莫歸, 天漠漠而難望.

지암암이막귀, 천막막이난망.

땅이 어두워서 돌아오기도 어렵고, 하늘이 막막해서 바라보기도 어렵구려.

入不言兮恍惚, 出不逝兮蒼茫.

입불언혜황홀, 출불서혜창망.

나는 집에 들어가도 어이없어 말도 못하고, 밖에 나간대도 아득해서 갈 곳이 없다오.

對靈幃而掩泣, 酌瓊漿而增傷.

대영위이엄읍, 작경장이증상.

영혼을 모신 휘장을 볼 때마다 흐느껴 울고, 술을 따를 때에는 마음이 더욱 슬퍼진다오.

感音容之窈窈, 想言語之琅琅.

감음용지요요, 상언어지랑랑.

아리따운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낭랑한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오.

嗚虖哀哉. 爾性聰慧, 爾氣精詳.

오호애재. 이성총혜, 이기정상.

아아. 슬프구려. 그대의 성품은 총명하였고, 그대의 기상은 말쑥했었소.

三魂縱散, 一靈何亡.

삼혼종산, 일령하망.

몸은 비록 흩어졌다지만 혼령이야 어찌 없어지겠소?

應降臨而陟庭, 或薰蒿而在傍.

응항림이척정, 혹훈호이재방.

응당 강림하여 뜰에 오르시고, 옆에 와서 슬픔을 돌보소서.

雖死生之有異, 庶有感於些章.”

수사생지유리, 서유감어사장.”

비록 사생(死生)이 다르다지만 당신이 이 글에 느낌이 있으리라 믿소.

 

後極其情哀,

후극기정애,

장례를 치른 뒤에도 양생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盡賣田舍, 連薦再三夕,

진매전사, 련천재삼석,

밭과 집을 모두 팔아 사흘 저녁이나 잇따라 재를 올렸더니,

女於空中, 唱曰:

녀어공중, 창왈:

여인이 공중에서 양생에게 말하였다.

“蒙君薦拔, 已於他國, 爲男子矣.

몽군천발, 이어타국, 위남자의.

"저는 당신의 은혜를 입어 이미 다른 나라에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雖隔幽明, 寔深感佩.

수격유명, 식심감패.

비록 저승과 이승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신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君當復修淨業, 同脫輪回.”

군당부수정업, 동탈륜회.”

당신도 이제 다시 정업을 닦아 저와 함께 윤회를 벗어나십시오."

生後不復婚嫁,

생후불복혼가,

양생은 그 뒤에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入智異山採藥, 不知所終.

입지리산채약, 불지소종.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었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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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5편 원문과 국역 총정리/ 김시습 년보

自寫眞贊[자화상 찬] -위 사진 상단. * 두번째 사진은 젊은날의 자화상. *이땅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스스로 '贊'을 붙여 자신을 예찬한다는 건 자신이 당당하게 살아온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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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寫眞贊[자화상 찬]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751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茸長寺有懷(용장사 유회)

ㅡ 김시습

 

茸長山洞幽

용장산동유,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不見有人來

부견유인래,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細雨移溪竹

세우이계죽, 가랑비는 시냇가 대나무를 찾아가고

斜風護野梅

사풍호야매, 스쳐가는 바람은 들의 매화를 감싸주네.

小窓眠共鹿

소창면공록,  작은 창에서 잠드니 꿈은 사슴을 따라 나서고         

枋椅坐同灰

방의좌동회, 낡은 의자에 앉으니 몸과 마음 식은 재로다

不覺茅簷畔

부각모첨반, 초가집에 딸린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庭花落又開

정화낙우개, 뜨락의 꽃밭에는 꽃이 지고 또 피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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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원문과 번역 총정리

경주 금오산 용장사지 마애불 굥장사지 삼층석탑 茸長寺有懷(용장사 유회) ㅡ 김시습 茸長山洞幽 용장산동유,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不見有人來 부견유인래,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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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긴 부처, 경주남산 마애불/ 남산의 삼릉계곡 <금오신화> 창작

경주 금오산 삼릉계곡 용장사지 마애 석가여래좌상 ko.wikipedia.org/wiki/%EA%B2%BD%EC%A3%BC_%EB%82%A8%EC%82%B0_%EC%82%BC%EB%A6%89%EA%B3%84_%EB%A7%88%EC%95%A0%EC%84%9D%EA%B0%80%EC%97%AC%EB%9E%98%EC%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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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의 '금오'는 경주 남산의 주봉을 지칭하고, 신화란 새로운 이야기의 뜻인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재든 주제든 문체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굳이 금오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창작한 장소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21세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시험 준비중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20대엔 방랑생활의 연속이었고, 31세때 7년간 정착한 곳이 위의 거대한 마애불이 있는 경주 남산에 위치한 용장사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용장사 거처에서 집필되었다.

그가 선택한 新話는 명나라 구우의 <剪燈新話>에서 시도했던 人鬼交歡說話였다. 인귀교환이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영혼인 귀신이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전등신화>의 '전등'이란 등불 심지에서 그을음이 나서 심지를 자른다는 의미다. 다시말하면 밤이 깊도록 잠도 안 자고 읽는 재미난 이야기를 기술한 소설이란 의미다.

<금오신화>의 경우엔 귀신과 시를 수작하는 장면이 잦은 걸로 보면, 그와 시를 수작할 만한 사람이 현실에 없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라고 운영자는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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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원문과 번역 총정리/ 김시습 년보

自寫眞贊[자화상 찬] -위 사진 상단. * 두번째 사진은 젊은날의 자화상. *이땅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드문 일이거니와 스스로 '贊'을 붙여 자신을 예찬한다는 건 자신이 당당하게 살아온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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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용장사 서실에서 7년간 ‘금오신화’ 5편 창작함.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316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9660 

 

자세한 년보는 아래 글 참조.

https://kydong77.tistory.com/8088

 

율곡 이이(李珥), 김시습전/ 김시습, 自寫眞贊 & 附.김시습 년보/ 금오신화 5편 한문 & 국역 총정리

自寫眞贊 (자화상 찬) ㅡ 김시습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

kydong77.tistory.com

 

김시습 년보

http://www.maewd.com/

매월당 김시습기념관>학습마당>매월당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無 雨 黃 雲]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영정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기림사 경내 입구의 매월당 영당, 경주에서 이전함.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9487601

 

http://m.gjnews.com/view.php?idx=75073 

 

[경주신문]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천년고찰 기림사(15)

김시습의 이름 ‘時習’은 논어 첫 구절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에서 따 왔으며, 승명(僧名)은 설잠(雪岑),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다. 그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 시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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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신동. 세종은 지신사를 통해 그의 재주를 칭찬했다.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동자지학 백학무청공지말) - 동자의 공부가 백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도다. 

성주지덕 번황룡번벽해지중

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

성주지덕 번황룡번벽해지중, 임금님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의 물을 뒤집는 것 같습니다.

 

https://m.cafe.daum.net/hanmunsalang/6axp/1236?listURI=%2Fhanmunsalang%2F6axp 

 

즐거운 한시공부 4 [김시습편]

글 쓴 이 : 조경구 대부분의 부모님들이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자기 자식이 혹 천재가 아닌가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엎어도 천재, 기어도 천재, 일어나 앉아도 천재. 서도 천재, 걸어도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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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召致承政院(소치승정원)하사 試之曰(시지왈)
= 승정원에 불러와서, 시험해 보고자 말씀하시기를,

*童子之學(동자지학)은 白鶴(백학)이 舞靑松之末(무청송지말)이로다 하니
= "동자의 학문은 흰 학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하시자

*時習(시습)이 對曰(대왈),  시습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聖主之德(성주지덕)은 黃龍(황룡)이 飜碧海之中(번벽해지중)이니이다 하다

=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五歲神童'

*卽賜帛五十匹(즉사백오십필)하여, 즉시 비단 오십 필을 하사하시며

*使自運去(사자운거)한대, 스스로 운반해 가도록 하니

時習(시습)이 遂結其端(수결기단)하여 引之而出(인지이출)하다.

=시습이 마침내 그 끝을 묶어 끌고 나갔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10 

 

10.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세계 - 불교신문

사진설명: 매월은 김시습의 호이자 남산의 옛이름. “매화(梅)에 달빛(月) 가득하니속세 떠난 선사따라 노닌다”고위봉과 금오봉 사이로 흐르는 용장골은 경주 남산의 많은 계곡 중 가장 깊고

www.ibulgyo.com

용장사서 7년간 ‘금오신화’집필

문의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선(禪)의 이치를 아는 매월당은 초현실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고자 했을 것이다. 명나라 ‘전등신화’의 모방작이라고 했던 금오신화는 이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전기소설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물이나 배경 설정에 작자의 독창성이 두드러지고 무대가 우리 국토라는 점에서도 ‘금오신화’의 의의는 더욱 분명해진다.

‘내가 보현사에 오고서부터

마음 한가하고 형평도 편안해

돌솥에 새 차 끓이고

쇠향로에 푸른 연기 피어오르네

나 같은 국외인으로서

속세 떠난 선사 따라 놀면서…’ (보현사 중)

잡다한 세속의 번뇌를 씻어낸 그는 50대에 접어들자, 자연에 의탁하여 유유히 자적한 방랑인으로 충남 부여 무량사에 머문다. 이곳에서 친구와 시화답을 하고 후학을 지도하다 5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싯귀는 매양 한가로움 속에서 얻고

선심은 모두 고요함 가운데 끌리네’

라며 시선일여(詩禪一如)의 경지를 보였던 그는 세인의 평가야 어떻든 자성을 깨친 선승의 반열에 둘 수있을 것이다.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https://kydong77.tistory.com/21259

 

최치원, 雙女墳記[崔致遠傳] & 김시습, 금오신화(金鰲新話) 5편

https://kydong77.tistory.com/14011 임명덕본, 한국한문소설전집, 권7,p.261. 국역은 김현양 외, <수이전 일문> (박이정, 1996) 을 참고하" data-og-host="kydong77.tistory.com" data-og-source-url="http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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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금오신화 5편중 <만복사저포기>와 <이생규장전>은 인귀교환설화를 소재로 하였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영혼과 생시처럼 육체적 관계를 나누는 것을 인귀교환설화라 한다. 얼마나 지독한 사랑이기에 그런 판타지를 만들어 낸 걸까?

우리나라 최초의 것은 <최치원 설화[or쌍녀분설화]>이고,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에도 상당수 작품이 이 설화를 사용하였다. 금오신화 중 두 작품을 읽어본다. 분량이 길어 2회로 나누어 수록한다.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摴蒲記 上

-만복사에서 저포놀이하다

 

1]양생, 만복사에서 처자 환신(幻身)을 만나다

1)양생, 조실부모하고 혼자 만복사 동쪽 방에서 살다

 

南原有梁生者, 早喪父母, 未有妻室, 獨居萬福寺之東.

 남원유량생자조상부모미유처실독거만복사지동.

전라도 남원에 양생이 살고 있었는데, 일찍이 어버이를 잃은 데다 아직 장가도 들지 못했으므로 만복사(萬福寺)의 동쪽에서 혼자 살았다.

房外有梨花一株, 方春盛開, 如瓊樹銀堆,

방외유리화일주방춘성개여경수은퇴,

방 밖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마치 봄이 되어 꽃이 활짝 피었다. 마치 옥으로 만든 나무에 은 조각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生每月夜, 逡巡朗吟其下. 詩曰:

생매월야, 준순랑음기하시왈:

양생은 달이 뜬 밤마다 나무 아래를 거닐며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一樹梨花伴寂廖,

 일수리화반적료, 한 그루 배꽃이 외로움을 달래 주지만

可憐辜負月明宵.

가련고부월명소. 휘영청 달 밝은 밤은 홀로 보내기 괴로워라.

靑年獨臥孤窓畔,

청년독와고창반, 젊은 이 몸 홀로 누운 호젓한 창가로

何處玉人吹鳳簫.

하처옥인취봉소. 어느 집 고운 님이 퉁소를 불어 주네.

 

翡翠孤飛不作雙,

비취고비불작쌍, 외로운 저 물총새는 제 홀로 날아가고

鴛鴦失侶浴晴江.

원앙실려욕청강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誰家有約敲碁子,

수가유약고기자, 바둑알 두드리며 인연을 그리다가

夜卜燈花愁倚窓.

야복등화수의창. 등불로 점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吟罷, 忽空中有聲曰:

음파, 홀공중유성왈:

시를 다 읊고 나자 갑자기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君欲得好逑, 何憂不遂.”

군욕득호구, 하우불수.”

"그대가 참으로 아름다운 짝을 얻고 싶다면 어찌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걱정하느냐?"

生心憙之,

생심희지,

양생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2)부처님과 저포놀이하여 이기다 

明日卽三月二十四日也.

명일즉삼월이십사일야.

그 이튿날은 마침 삼월 이십 사일이었다.

州俗燃燈於萬福寺祈福, 士女騈集, 各呈其志.

주속연등어만복사기복, 사녀병집, 각정기지.

이 고을에서는 만복사에 등불을 밝히고 복을 비는 풍속이 있었는데, 남녀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소원을 빌었다.

日晩梵罷人稀,

일만범파인희,

날이 저물고 법회도 끝나자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生袖摴蒲, 擲於佛前曰:

생수저포, 척어불전왈:

양생이 소매 속에서 저포를 꺼내어 부처님 앞에다 던졌다. (소원을 빌었다.)

“吾今日, 與佛欲鬪蒲戱,

오금일여불욕투포희,

"제가 오늘 부처님을 모시고 저포놀이를 하여 볼까 합니다.

若我負, 則設法筵以賽,

약아부, 칙설법연이새,

만약 제가 지면 법연(法筵)을 차려서 부처님께 갚아 드리겠습니다.

若不負, 則得美女, 以遂我願耳.”

약불부, 칙득미녀, 이수아원이.”

만약 부처님이 지시면 아름다운 여인을 얻어서 제 소원을 이루게 하여 주십시오."

祝訖, 遂擲之, 生果勝,

축흘, 수척지, 생과승,

빌기를 마치고 곧 저포를 던지자, 양생이 과연 이겼다.

卽跪於佛前曰:

즉궤어불전왈:

그래서 부처 앞에 무릎은 꿇고 앉아서 말하였다.

“業已定矣, 不可誑矣.”

  “업이정의, 불가광의.”

"인연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속이시면 안 됩니다."

遂隱於几下, 以候其約.

수은어궤하, 이후기약.

그는 불좌(佛座) 뒤에 숨어서 그 약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다.

 

3)불전에서 배필을 구하는 처자 환신(幻身)을 만나다

 俄而有一美姬, 年可十五六,

아이유일미희, 년가십오륙,

얼마 뒤에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열대 여섯쯤 되어 보였다.

丫鬟淡飾, 儀容婥妁,

아환담식, 의용작작,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깨끗하게 차려 입었는데,

如仙姝天妃, 望之儼然,

여선주천비, 망지엄연,

아름다운 얼굴과 고운 몸가짐이 마치 하늘의 선녀 같았다. 바라볼수록 얌전하였다.

手携油甁, 添燈揷香,

수휴유병, 첨등삽향,

그 여인은 기름병을 가지고 와서 등잔에 기름을 따라 넣은 다음 향을 꽂았다.

三拜而跪, 噫而歎曰:

삼배이궤, 희이탄왈:

세 번 절하고 꿇어앉아 슬피 탄식하였다.

“人生薄命, 乃如此邪?”

인생박명, 내여차사?”

"인생이 박명하다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으랴?"

遂出懷中狀詞, 獻於卓前. 其詞曰:

수출회중상사, 헌어탁전. 기사왈:

그리고는 품속에서 축원문을 꺼내어 불탁 위에 바쳤다.

 

“某州某地居住, 何氏某,

 “모주모지거주, 하씨모,

아무 고을 아무 동네에 사는 소녀 아무개가 (외람 됨을 무릅쓰고 부처님께 아룁니다.)

竊以曩者, 邊方失禦倭寇來侵,

절이낭자, 변방실어왜구래침,

지난번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오자,

干戈滿目, 烽燧連年,

간과만목, 봉수련년,

싸움이 눈앞에 가득 벌어지고 봉화가 여러 해나 계속되었습니다.

焚蕩室廬, 盧掠生民,

분탕실려, 로략생민,

왜놈들이 집을 불살라 없애고 생민들을 노략하였으므로,

東西奔竄, 左右逋逃,

동서분찬, 좌우포도,

사람들이 동서로 달아나고 좌우로 도망하였습니다.

親戚僮僕, 各相亂離,

친척동복, 각상란리,

우리 친척과 종들도 각기 서로 흩어졌었습니다.

妾以蒲柳弱質, 不能遠逝,

첩이포류약질, 불능원서,

저는 버들처럼 가냘픈 소녀의 몸이라 멀리 피난을 가지 못하고,

自入深閨, 終守幽貞,

자입심규, 종수유정,

깊숙한 규방에 들어 앉아 끝까지 정절을 지켰습니다.

不爲行露之沾, 以避橫逆之禍,

불위행로지첨, 이피횡역지화,

윤리에 벗어난 행실을 저지르지 않고서 난리의 화를 면하였습니다.

父母以女子守節不爽,

부모이녀자수절불상,

저의 어버이께서도 여자로서 정절을 지킨 것이 그르지 않았다고 하여,

避地僻處, 僑居草野, 已三年矣.

피지벽처, 교거초야, 이삼년의.

외진 곳으로 옮겨 초야에 붙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지가 벌써 삼 년이나 되었습니다.

然而秋月春花, 傷心虛度,

연이추월춘화, 상심허도,

가을 달밤과 꽃 피는 봄날을 아픈 마음으로 헛되이 보내고,

野雲流水, 無聊送日,

야운류수, 무료송일,

뜬구름 흐르는 물과 더불어 무료하게 나날을 보냈습니다.

幽居在空谷, 歎平生之薄命,

유거재공곡, 탄평생지박명,

쓸쓸한 골짜기에 외로이 머물면서 제 박명한 평생을 탄식하였고,

獨宿度良宵, 傷彩鸞之獨舞,

독숙도량소, 상채란지독무,

아름다운 밤을 혼자 지새우면서 (짝 잃은) 채란(彩鸞)의 외로운 춤을 슬퍼하였습니다.

日居月諸, 魂銷魄喪,

일거월제, 혼소백상,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니 이제는 혼백마저 사라지고 흩어졌습니다.

夏日冬宵, 膽裂腸摧,

하일동소, 담렬장최,

(기나긴) 여름날과 겨울밤에는 간담이 찢어지고 창자까지 찢어집니다.

惟願覺皇, 曲垂憐愍,

유원각황, 곡수련민,

오직 부처님께 비오니, 이 몸을 가엽게 여기시어 각별히 돌보아 주소서.

生涯前定, 業不可避,

생애전정, 업불가피,

인간의 생은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으며 선악의 응보를 피할 수 없으니,

賦命有緣,

부명유연,

제가 타고난 운명에도 인연이 있을 것입니다.

早得歡娛, 無任懇禱之至.”

조득환오, 무임간도지지.”

빨리 배필을 얻게 해주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女旣投狀, 嗚咽數聲.

녀기투상, 오열수성.

여인이 빌기를 마치고 나서 여러 번 흐느껴 울었다.

生於隙中, 見其姿容,

생어극중, 견기자용, 

양생은 불좌 틈으로 여인의 얼굴을 보고

不能定情, 突出而言曰:

불능정정, 돌출이언왈: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으므로, 갑자기 뛰쳐나가 말하였다.

“向者投狀, 爲何事也?”

향자투상, 위하사야?”

"조금 전에 글을 올린 것은 무슨 일 때문이신지요?"

見女狀辭, 喜溢於面, 謂女子曰:

견녀상사, 희일어면, 위녀자왈:

그는 여인이 부처님께 올린 글을 보고 얼굴에 기쁨이 흘러 넘치며 말하였다.

“子何如人也, 獨來于此?”

자하여인야, 독래우차?”

"아가씨는 어떤 사람이기에 혼자서 여기까지 왔습니까?"

女曰: “妾亦人也, 夫何疑訝之有,

녀왈: “첩역인야, 부하의아지유,

여인이 대답하였다.

"저도 또한 사람입니다. 대체 무슨 의심이라도 나시는지요?

君但得佳匹, 不必問名姓, 若是其顚倒也.”

군단득가필, 불필문명성, 약시기전도야.” 

당신께서는 다만 좋은 배필만 얻으면 되실 테니까, 반드시 이름을 묻거나 그렇게 당황하지 마십시오."

 

4)처자와 절안 판자방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다

 

時寺已頹落, 居僧住於一隅,

 시사이퇴락, 거승주어일우,

이 때 만복사는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

殿前只有廊廡, 蕭然獨存,

전전지유랑무, 소연독존,

법당 앞에는 행랑만이 쓸쓸하게 남아 있고,

廊盡處, 有板房甚窄.

낭진처, 유판방심착.

행랑이 끝난 곳에 아주 좁은 판자방이 있었다.

生挑女而入, 女不之難,

생도녀이입, 녀불지난,

양생이 여인의 손을 잡고 판자방으로 들어가자, 여인도 어려워하지 않고 들어왔다.

相與講歡, 一如人間.

상여강환, 일여인간.

서로 즐거움을 나누었는데, 보통 사람과 한 가지였다.

 

將及夜半, 月上東山, 影入窓柯,

장급야반, 월상동산, 영입창가,

이윽고 밤이 깊어 달이 동산에 떠오르자 창살에 그림자가 비쳤다.

忽有跫音, 女曰:

홀유공음, 녀왈:

문득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여인이 물었다.

“誰耶? 將非侍兒來耶?”

수야? 장비시아래야?”

"누구냐? 시녀가 찾아온 게 아니냐?"

兒曰: “唯. 向日娘子, 行不過中門, 履不容數步,

아왈: “. 향일낭자, 행불과중문, 리불용수보,

시녀가 말하였다.

"예. 평소에는 아가씨가 문 밖에도 나가지 않으시고 서너 걸음도 걷지 않으셨는데,

昨暮偶然而出, 一何至於此極也?”

작모우연이출, 일하지어차극야?” 

어제 저녁에는 우연히 나가셨다가 어찌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女曰: “今日之事, 蓋非偶然,

녀왈: “금일지사, 개비우연,

여인이 말하였다.

"오늘의 일은 우연이 아니다.

天之所助, 佛之所佑,

천지소조, 불지소우,

하느님이 도우시고 부처님이 돌보셔서,

逢一粲者, 以爲偕老也.

봉일찬자, 이위해로야.

고운 님을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하게 되었다.

不告而娶, 雖明敎之法典,

불고이취, 수명교지법전,

어버이께 여쭙지 못하고 시집가는 것은 비록 예법에 어그러졌지만,

式燕以遨, 亦平生之奇遇也.

식연이오, 역평생지기우야.

서로 즐거이 맞이하게 된 것은 또한 평생의 기이한 인연이다.

可於茅舍, 取裀席酒果來.”

가어모사, 취인석주과래.”

너는 집으로 가서 앉을 자리와 술안주를 가지고 오너라."

 

5)처자는 술자리를 마련하고 시를 수작하다

 侍兒一如其命而往,

 시아일여기명이왕,

시녀가 그 명령대로 가서

設筵於庭, 時將四更也.

설연어정, 시장사경야.

뜨락에 술자리를 베푸니, 시간은 벌써 사경(四更)이나 되었다.

鋪陳几案, 素淡無文,

포진궤안, 소담무문,

시녀가 차려 놓은 방석과 술상은 무늬가 없이 깨끗하였으며,

而醪醴馨香, 定非人間滋味.

이료례형향, 정비인간자미.

술에서 풍기는 향내도 정녕 인간 세상의 솜씨는 아니었다.

生雖疑怪, 談笑淸婉,

생수의괴, 담소청완,

양생은 비록 의심나고 괴이하였지만, 여인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맑고 고우며

儀貌舒遲 意必貴家處子, 踰墻而出, 亦不之疑也.

의모서지 의필귀가처자, 유장이출, 역불지의야.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하여, '틀림없이 귀한 집 아가씨가 (한때의 마음을 잡지 못하여) 담을 넘어 나왔구나' 생각하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觴進, 命侍兒, 歌以侑之,

상진, 명시아, 가이유지,

여인이 양생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시녀에게 명하여 '노래를 불러 흥을 도우라' 하고는,

謂生曰: “兒定仍舊曲,

위생왈: “아정잉구곡,

양생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옛 곡조밖에 모릅니다.

請自 製一章以侑, 如何?”

청자 제일장이유, 여하?”

저를 위하여 새 노래를 하나 지어 흥을 도우면 어떻겠습니까?"

生欣然應之曰: “諾.”

생흔연응지왈: “.”

양생이 흔연히 허락하고는

乃製滿江紅一闋, 命侍兒歌之曰:

내제만강홍일결, 명시아가지왈: 

곧 「만강홍(滿江紅)」 가락으로 가사를 하나 지어 시녀에게 부르게 하였다.

 

惻惻春寒羅衫薄,

측측춘한라삼박,  쌀쌀한 봄추위에 명주 적삼은 아직도 얇아

幾回腸斷金鴨冷.

기회장단금압랭. 몇 차례나 애태웠던가, 향로불이 꺼졌는가 하고,

晩山凝黛,

만산응대, 날 저문 산은 눈썹처럼 엉기고

暮雲張繖.

모운장산. 저녁 구름은 일산처럼 퍼졌는데,

錦帳鴛衾無與伴,

금장원금무여반,  비단 장막 원앙 이불에 짝지을 이가 없어서

寶𨥁半倒吹龍管.

보⥁반도취룡관.  금비녀 반만 꽂은 채 퉁소를 불어 보네.

可惜許光陰易跳丸, 

가석허광음이도환,  아쉬워라, 저 세월이 이다지도 빠르던가

中情懣.

중정만. 마음 속 깊은 시름이 답답하여라.

燈無焰銀屛短, 

등무염은병단, 낮은 병풍 속에서 등불은 가물거리는데

徒收淚誰從款.

도수루수종관.  나 홀로 눈물진들 그 누가 돌아보랴.

喜今宵, 

희금소, 기뻐라, 오늘밤에는

鄒律一吹回暖.

추률일취회난피리를 불어 봄이 왔으니,

破我佳城千古恨, 

파아가성천고한,  겹겹이 쌓인 천고의 한이 스러지네

細歌金縷傾銀椀.

세가금루경은완「금루곡」 가락에 술잔을 기울이세.

悔昔時抱恨, 

회석시포한, 한스런 옛시절을 이제 와 슬퍼하니

蹙眉兒眠孤館.

축미아면고관. 외로운 방에서 찌푸리며 잠들었었지.

 

歌竟, 女愀然曰:

가경, 녀초연왈:

노래가 끝나자 여인이 서글프게 말하였다.

“曩者蓬島, 失當時之約,

 “낭자봉도, 실당시지약,

"지난번에 봉도(蓬島)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은 어겼지만,

今日瀟湘, 有故人之逢,

금일소상, 유고인지봉,

오늘 소상강(瀟湘江)에서 옛 낭군을 만나게 되었으니

得非天幸耶.

득비천행야.

어찌 천행이 아니겠습니까?

郞若不我遐棄, 終奉巾櫛,

랑약불아하기, 종봉건즐,

낭군께서 저를 멀리 버리지 않으신다면 끝까지 시중을 들겠습니다.

如失我願, 永隔雲泥.”

여실아원, 영격운니.”

그렇지만 만약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겠습니다."

生聞此言, 一感一驚曰:

생문차언, 일감일경왈:

양생이 이 말을 듣고 한편 놀라며 한편 고맙게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敢不從命?”

 “감불종명?”

"어찌 당신의 말에 따르지 않겠소?"

然其態度不凡, 生熟視所爲,

연기태도불범, 생숙시소위,

그러면서도 여인의 태도가 범상치 않았으므로, 양생은 유심히 행동을 살펴보았다.

時月掛西峯, 鷄鳴荒村, 寺鐘初擊,

시월괘서봉, 계명황촌, 사종초격,

이때 달이 서산에 걸리자 먼 마을에서는 닭이 울고 절의 종소리가 들려 왔다.

曙色將暝. 女曰

서색장명. 녀왈

먼동이 트려 하자 여인이 말하였다.

“兒可撤席而歸” ,

 “아가철석이귀” ,

"얘야. 술자리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가거라."

隨應隨滅 不知所之.

수응수멸 불지소지.

시녀는 대답하자마자 없어졌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女曰: “因緣已定, 可同携手.”

녀왈:  “인연이정, 가동휴수.”

여인이 말하였다.

"인연이 이미 정해졌으니 낭군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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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총정리

<금오신화>의 금오는 경주 남산의 주봉을 지칭하고, 신화란 새로운 이야기의 뜻인데,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재든 주제든 문체든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굳이 금오를 덧붙인 것은 작품을 창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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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5편 총정리/ 同安常察,十玄談/ 김시습,십현담요해 & 한룡운, 십현담주해

[상단은 젊은 날의 초상화, 하단은 "자사진찬"까지 쓴 주름진 늙으막의 초상화] 자화상 찬(自寫眞贊) -위 사진. 俯視李賀(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우어해동) 조선에서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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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https://www.injurytime.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4#:~:text=28%EC%84%B8%EC%9D%98%20%ED%95%B4%EA%B0%80,%EC%88%98%EC%9D%98%20%EC%9E%91%ED%92%88%EC%9D%B4%20%EB%93%A4%EC%96%B4%EC%9E%88%EB%8B%A4.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12)매월당 김시습㊥ - 인저리타임

평생 방랑하며 세상을 조롱한 김시습 – 관서‧관동‧호남 유람 후 경주 안착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의 위협을 견디지 못해 그에게 왕위를 물려준 시기가 1455년 윤6월 11일이었다. 오늘날 북한

www.injurytime.kr

28세의 해가 저물어가던 무렵 그는 경주로 발걸음을 옮겨 정착할 곳을 찾기로 했던 것이다. 경주 남산인 금오산 중턱에 있는 용장사에서 경실(經室) 하나를 얻어 머물렀다. 그는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1463년, 29세 가을에 호남 지방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들을 정리하여 유호남록을 엮었던 것이다.

경주에 정착한 김시습은 경주의 여러 유적을 둘러보며 인간의 역사와 삶의 문제에 대해 사색하였다. 용장사에 거처하면서 차나무를 심는 등 마음의 평정을 찾아나갔다. <유호남록>을 엮은 이후 서울로 가 효령대군을 만나 그의 추천으로 간경도감의 『묘법연화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하였다. 그 일을 마친 후 용장사로 돌아와 생활하다가, 1465년 봄에 금오산실을 지어 생활하였다. 그러다 1465년 4월에 지금의 서울 탑골공원에 원각사가 낙성되어 김시습이 참석하였다. 이 무렵 세조로부터 도첩을 받아 정식 승려로서 신분을 보장받았다.

낙성식 이후 서울에 머물면서 서거정을 찾아가기도 하고 여러 사대부들의 연석에 참여하여 그들의 생활과 예술세계를 접하면서 만족하기도 했지만, 서울 근교에 안주하지 못하고 가을에 경주 남산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후 37세인 1471년에 변신, 출세(?)를 결심하여 서울로 향하기까지 그는 용장사 부근의 금오산실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그는 경주에서 햇수로 10년을 살았다.

김시습은 금오산실에서 생활하는 동안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엮었다. 이 책에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의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금오신화에는 김시습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 있다도 하며, 책 속의 고독한 인물들은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는 39세인 1473년 봄에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서울을 오가거나 경상도와 관동 남부를 오가면서 지은 시들로 서울 수락산 폭천정사에 있으면서 『유금오록』으로 묶었다. 그래서 유관서록, 유관동록, 유호남록, 유금오록을 ‘사유록’(四遊錄)이라고 한다. 이 네 권의 시집에는 그의 전체 시 가운데 1/4 분량에 해당하는 450여 수의 작품이 들어있다.
출처 : 인저리타임(http://www.injurytime.kr)

[참고]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0579

 

원각사(圓覺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왔던 사찰로, 세종이 불교 종파를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한 뒤 기존 흥복사 영역이 점차 조선왕조 각 아문에 분할 귀속되었다. 1457년(세조 3)에 흥복사를 폐하고 악학도감(樂學都監)을 두었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 10층석탑이 완공되자 연등회(燃燈會)를 베풀고 낙성하였다. 이때 이 절은 법당인 대광명전(大光明殿)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는 선당(禪堂), 오른쪽에는 운집당(雲集堂)을, 뒤쪽에는 해장전(海藏殿)을 지었다. 입구로부터 차례로 해탈문(解脫門) · 반야문(般若門) · 적광문(寂光門) 등 3문을 세웠고 종각(鐘閣)과 법뢰각(法雷閣), 음식을 장만하는 향적료(香寂寮), 10층석탑 등이 있었다. 이 중 10층석탑에는 분신사리언해본 『원각경』을 봉안하였고, 해장전에는 대장경을 두었으며, 법당은 청기와와 금칠로 꾸몄다고 한다. 또, 법당 동쪽에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서쪽에는 동산을 만들어서 화초를 심었다. 그 뒤에도 이 절의 사리가 서기를 나타내거나 분신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이때마다 신하들은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운영자 註. 세조는 왕위 찬탈시 희생된 영령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건한 절로 현재 삼일공원[탑골공원]으로 10층 석탑과 비각을 갖춘 거대한 원각사비석이 보존되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https://blog.daum.net/leejh1938/17503446

 

역사 속에 묻혀버린 용장사 유회시(茸長寺有懷詩)- 김시습

                                   보물 제186호인 삼층석탑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

blog.daum.net

 

 



 

自寫眞贊

(자화상 찬)

ㅡ 김시습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최고라고들 했지.

騰名謾譽

(등명만예) 높은 명성과 헛된 칭찬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게 어찌 걸맞겠는가.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형체는 지극히 작고

爾言大閒

(이언대동) 네 언사는 너무도 오활하네.

宜爾置之

(의이치지) 네 몸을 두어야 할 곳은

丘壑之中

(구학지중) 금오산 산골짝이 마땅하도다.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323023002&wlog_tag3=naver#csidx5cb1eef2c190ffca8ad78f9df6ab14d

*[운영자 주]

번역에 '금오산'은 경주 남산.

산골짝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

그래서 기존 번역의 제목인 '나의 초상에 쓰다'를 바꾸어 '자화상 찬'이라 했다.

작품집 이름에 '금오'를 얹은 것은 금오산에서 유래함.

新話란 구우의 전등신화에서 아이디어를 모방한 人鬼交歡설화를 말함,

김시습은 34세 때 경주 남산 삼릉계곡 용장사 거소에서 <금오신화> 5편을 창작함.

*이하 李賀, Li He (791-817)

26세에 요절한 당대 천재시인.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

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역마살을 자극하여 집을 나서 걷고 또 걷게 만들었다.

년보와 함께 사후 89년 뒤 선조의 명에 의하여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 지으신

<김시습전>도 읽어본다.

 

 

 

 

 

[주]세조의 왕위찬탈로 파탄난 인생, 그는 장부의 표상이라며 수염을 기른 중으로 일생을 방랑했다.47세때 환속하여 조부신께 사죄문도 올렸지만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적 이데올로기는 태생의 역마살을 자극하여 집을 나서 걷고 또 걷게 만들었다. 년보와 함께 사후 89년 뒤 선조의 명에 의하여 율곡 이이(李珥) 선생이 지으신 <김시습전>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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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금오신화 5편 총정리/ 同安常察,十玄談/ 김시습,십현담요해 & 한룡운, 십현담주해

[상단은 젊은 날의 초상화, 하단은 "자사진찬"까지 쓴 주름진 늙으막의 초상화] 자화상 찬(自寫眞贊) -위 사진. 俯視李賀 (부시이하) 이하(李賀)*도 내려다 볼 만큼 優於海東 (우어해동) 조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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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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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기념관>학습마당>매월당

1435년(세종 17년)

시울 반중 북쪽에 있는 충순위(忠純衛) 일성(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江陵)이요, 자는 열경(悅卿), 휘는 시습(時習),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 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법호는 설잠(雪岑)이다. 대대 무인의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이 뛰어나 귀여움을 받았다.

고려조 (高麗朝) 시중 김태현(金太鉉)의 십삼세 손이다. 그이 외조가 맡아서 글을 가르쳤는데 말은 가르치지 않고 천자만 가르치어 어려서부터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빨랐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논어(論語)에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子曰 學而時習之 不亦悅(設)乎)]에서 시습(時習)을 따서 휘(이름)로 하고 경(卿)자를 넣어서 열경(悅卿)이라고 자를 지었다고 한다. 세살 때 한시를 능히 지었다.

유모가 맷돌에 보리 가는 것을 보고 ,

[비도 없이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 조각이 각 사방에 흩어지네]

하고 소리 높이 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無 雨 黃 雲]

 

1439년(세종 21년)

5세 때에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중용과 대학을 배워 능통하였다.

정승 허 조 (許稠)가 그를 찾아가서 불러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늙을 로(老)자로 운을 달아 지어라]라고 하니 곧 [늙은 나무가 꽃 피는 것은 마음이 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니 허 조는 문득 무릎을 치면서 [정말 신동이구나!]하고 탄복하였다 한다.

세종께서 이 소문을 듣고 시습을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그의 재주를 시험하게 하여 [동자의 학문하는 태도가 흰 학이 푸른 하늘 끝에서 춤추는 것 같구나( 子之學 白鶴 靑空之末)]

란 싯귀를 주어 댓귀를 지으라 하니

[성스러운 임금님의 덕은

누런 용이 푸른 바다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聖主之德 黃龍 海之中)]

고 답하여, 세종께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비단 5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로부터 이름은 온 나라에 떨쳐 사람들에게서 5세 신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5세부터 13세까지

이웃에 사는 대사성(大司成) 김 반(金泮)의 문하에서 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時經).춘추(春秋)를 배웠으며, 이웃에 사는 사성(司成) 윤상(尹祥)에게 나아가 역경(易經).예기(禮記)와 여러 사서(史書)에서 제자백가(諸自百家)에 이르기까지 배웠다.

 

1449년(세종 31년)

1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양육을 받았다.

 

1454년(단종 2년) 20세 때,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1455년(세조 1년) 21세에,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글을 읽다가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겼다는 변보를 듣고 문을 닫고 3일 동안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읽던 서적을 다 불에 태우고 거짓 미친 채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1458년(세조 4년) 24세 때,

관서지방을 여행하였다.

가을에 <탕유관서록후지>를 저술하였다 .

 

1463년(세조 9년) 28세 때

방랑 여행으로 호남지방을 여행하였고 그해 가을에 <탕유호남록후지(宕遊湖南錄後志)>를 저술하였다. 가을에 서적 구입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고를 받아 열흘 동안 법화경(法華經)을 교정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31세 때,

경주(慶州)에 정착하였고, 봄에 남산의 주봉인 금오산 용장사 아래 계곡에 금오산실을 지어 살았다. 3월말에 효령대군의 초청을 받아 서울로 나와 원각사(圓覺寺)의 낙성식에 참석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34세 때,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고 <산거백영(山居百詠)>을 저술하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하다. 경주 남산의 주봉이 금오산이다. 명나라 구우의 『전등신화』를 모방하여 인귀교환설화를 수용하여 ‘신화’라 붙이다.

 

1471년(성종 2년) 37세 되던 해

봄에 금오산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 도성 동쪽 수락산 기슭에 폭천정사를 짓고 은거하였다.

 

1476년(성종 7년) 42세 때,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를 저술하다.

 

1481년(성종 12년) 47세 때,

다시 속인이 되었다. 고기를 먹고 머리를 기르며 안씨(安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다.

 

1482년(성종 13년) 48세 때,

이 해 이후부터 세상이 쇠진해짐을 보고는 세상일에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1483년(성종 14년) 49세 때,

육경(六經).자사 등의 많은 서적을 싣고 관동유람의 길을 떠났다.

 

1485년(성종 16년) 51세 때,

봄에 <독산원기(禿山院記)>를 지었다.

 

1493년(성종 24년) 59세 때,

3월에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현재는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무량사(無量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511년 (중종 6년)

세상을 떠난지 18년만에 왕명으로 유집(遺集)을 찾아 모아서 간행케 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세상을 떠난 지 89년만에 선조께서 이 이(李珥)에게 영을 내리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1703년 (숙종 29년)

세상을 떠난지 210년만에 유생 곽억령 등이 김시습 등 6인의 절의를 추모하여 사우를 세울 것을 상소하여 대왕께서 윤허하였다.

1782년 (정조 6년)

세상을 떠난 지 289년만에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하였다.

1784년 (정조 8년)

세상을 떠난 지 291년만에 청간(淸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참고]

무량사 (無量寺)에 선생의 부도(浮屠)가 있고 또 영정이 있다. 경주시 기림사 일주문 안에도 사찰 경내에 경주 남산에서 옮겨온 사당이 중수되어 있다.

이 영정은 선생이 자신의 초상을 자필로 그리셨다는 설이 전해 온다 .

선생은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저명한 학자이시다.

 

http://blog.naver.com/kwank99?Redirect=Log&logNo=30029487601

 

김시습전(金時習傳)

-이이(李珥)

 

『김시습의 자는 열경(悅卿)이고 관은 강릉(江陵)이다. 신라 알지왕(閼智王)의 후손에 주원(周元)이라는 왕자가 있어 강릉을 식읍(食邑: 공신에게 내리어 조세(租稅)를 받아쓰게 한 고을)으로 하였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눌러 살아 관향으로 하였다.

그 후에 연(淵)이 있고 태현(台鉉)이 있었는데 모두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다. 태현의 후손 구주(久住)는 벼슬이 안주목사(安州牧使)에 그쳤는데, 겸간(謙侃)을 낳았으니 그의 벼슬은 오위부장(五衛部將)에 그쳤다. 겸간이 일성(日省)을 낳으니 음보(蔭補: 벼슬을 조상의 음덕으로 얻는 것)로 충순위(忠順衛)가 되었다.

일성이 선사 장씨(仙사 張氏)에게 장가들어 선덕 10년(宣德十年: 世宗 17년, 1435) 시습을 한사(漢師: 지금의 서울)에서 낳았다. 특이한 기질을 타고나 생후 겨우 여덟 달에 스스로 글을 알아보았다. 최 치운(崔致雲: 본관 강릉(江陵). 세종 때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 최윤덕(崔潤德)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야인 정벌에 공을 세웠다.)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기어 이름을 시습이라고 지었다.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영민하여 문장을 대하면 입으로는 잘 읽지 못하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3세에 시를 지을 줄 알았고 5세에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니 사람들은 신동이라 불렀다. 명공(名公) 허조(許稠) 등이 많이 보러갔다.

장헌대왕(莊憲大王: 세종대왕의 시호)께서 들으시고 승정원으로 불러들여 시로써 시험하니 과연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하교(下敎)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친히 보고 싶으나 세속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그 집에서 면려(勉勵)하게 하며 들어내지 말고 교양을 할 것이며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리라"

하시고 비단을 하사하시어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명성이 온나라에 떨쳐 오세(五歲)라고 호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시습이 이미 임금의 장려하여 주심을 받음에 더욱 원대한 안목으로 학업을 힘썼다.

그런데 경태(景泰: 명 태종의 연호 1450-1467)의 연간에 영릉(英陵: 세종대왕)ㆍ현릉(顯陵: 문종대왕을 이름.)이 연이어 돌아가시었고, 노산(魯山: 단종)은 3년 되는 해에 왕위를 손위(遜位)하였다. 이 때에 시습의 나이 21세로 마침 삼각산(三角山)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있었다. 시습은 즉시 문을 닫아걸고 3일 동안 나오지 않다가 이에 크게 통곡하고 서적을 몽땅 불살라 버렸으며, 광증을 발하여 변소에 빠졌다가 도망하여 자취를 불문(佛門)에 의탁하고 승명(僧名)을 설잠(雪岑)이라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그 호를 바꾸어 청한자(淸寒子)ㆍ동봉(東峯)ㆍ벽산청은(碧山淸隱)ㆍ췌세옹(贅世翁)ㆍ매월당(梅月堂)이라 하였다.

그의 생김생김은 못생기고 키는 작았다. 뛰어나게 호걸스럽고 재질이 영특하였으나 대범하고 솔직하여 위의(威儀)가 없고 너무 강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했다. 시대를 슬퍼하고 세속을 분개한 나머지 심기(心氣)가 답답하고 평화롭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세상을 따라 어울려 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육신에 구애 받지 않고 세속 밖을 노닐었다. 국중(國中) 산천은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고 좋은 곳을 만나면 머물러 살았으며, 고도(故都)에 올라 바라볼 때면 반드시 발을 동동 구르며 슬피 노래하기를 여러 날이 되어도 마지않았다.

총명하고 영오(穎悟)함이 남달리 뛰어나서 사서(四書)와 육경(六經: 시ㆍ서ㆍ역ㆍ예기ㆍ주례ㆍ춘추)은 어렸을 때 스승에게서 배웠고 제자백가(諸子百家)는 전수(傳受)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한번 기억하면 끝내 잊지 아니하므로, 평일에는 독서하지 않고 또한 서책을 싸가지고 다니지도 않지만 고금의 문적(文籍)을 빠짐없이 관통하여 사람들이 질문을 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즉시 응대하였다. 돌무더기가 뭉쳐 있는 듯 답답하고 의분과 개탄으로 차있는 심흉(心胸)을 스스로 시원하게 풀어볼 도리가 없었기에 무릇 세상의 풍ㆍ월ㆍ운ㆍ우(風月雲雨), 산림천석(山林泉石), 궁실의식(宮室衣食), 화과조수(花果鳥獸)와 인사(人事)의 시비득실(是非得失), 부귀빈천, 사생질병, 희노애락(喜怒哀樂)이며, 나아가 성명이기(性命理氣)ㆍ음양유현(陰陽幽顯: 음은 유하고 양은 현하다)에 이르기까지 유형무형(有形無形)을 통틀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면 모두 문장으로 나타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문장은 물이 솟구치고 바람이 부는 듯하며 산이 감추고 바다가 머금은 듯 신(神)이 메기고 귀신이 받는 듯 특출한 표현이 거듭거듭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마리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성률(聲律)과 격조(格調)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지만 그중에서 빼어난 것은 사치(思致: 생각의 운치)가 높고 멀어 일상의 생각에서 뛰어났으므로 문장이나 자질구레하게 다듬어 수식하는 자로서는 따라 갈 수 없는 터이었다.

도리(道理)에 대해서는 비록 완미하여 탐색하고 존양(存養: 존심 양성)하는 공부가 적었지만 탁월한 재능과 지혜로써 이해하여, 횡담(橫談)ㆍ수론(竪論)하는 것이 대부분 유가(儒家)의 본지를 잃지 않았다. 선가(禪道)와 도가(道家)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 禪門의 말) 짓기를 좋아하여 현모하고 은미한 뜻을 발휘 천명하되, 날카로워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으므로 비록 이름 높은 중으로서 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도 감히 그 칼날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그의 타고난 자질이 빼어났음을 이것을 가지고도 징험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명성이 일찍부터 높았는데 하루아침에 세상을 도피하여 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동은 불교를 따라 한 시대에 괴이하게 여김을 당하였다고 여겼으므로 그래서 짐짓 미쳐서 이성을 잃은 모양을 하여 진실을 가렸다. 글을 배우고자하는 선비가 있으면 나무나 돌을 가지고 치거나 혹은 활을 당기어 쏘려는 듯이 하여 그 성의를 시험하였으므로 문하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적었다. 또 산전(山田)을 개간하기 좋아하여 비록 부귀한 집안의 자제라도 반드시 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시키는 등 매우 괴롭혔으므로 끝까지 학업을 전수받는 자는 더욱 적었다.

산에 가면 나무껍질을 벗겨 하얗게 하여 시 쓰기를 좋아 하였으며 외워 읊조리기를 얼마동안 하고나서는 번번이 통곡하고 깎아버리곤 하였다. 시를 혹 종이에 쓰기도 하였으나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대부분 물이나 불 속에 던져벼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모양을 만들어 책상 옆에 벌려놓고 하루 종일 골똘히 바라보다가는 통곡하고 불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때로는 심은 벼[禾]가 아주 무성하여 잘 여믄 모습이 완상(玩賞) 할만하면 술에 취해 낫을 휘둘러 온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내어 버리고서는 큰 소리로 목놓아 통곡하기도 하였다. 행동거지가 종잡을 수 없었으므로 크게 세속사람들의 비웃어 손가락질하는 바 되었다.

산에 살고 있을 때 찾아오는 손을 보고서 서울 소식을 물어, '마구 비웃고 꾸짖는 사람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으fp 기쁜 빛을 하고 만일, '거짓으로 미쳤으며 속에 포부가 있다고 하더라'하면 문득 눈살을 찌푸리면서 기뻐하지 않았다. 사령을 받은 고관이 혹 인망이 없는 사람이면 반드시 통곡하여 이르기를,

"백성이 무슨 죄 있길래 이 사람이 이 자리를 맡는가"

하였다. 그 당시에 명경(名卿: 이름있는 공경) 김 수온(金守溫)과 서 거정(徐居正)은 국사(國士: 나라의 모범되는 선비)로 상찬(賞讚)되었다. 거정이 바야흐로 행인을 물리치고 바삐 조회에 들어가는데, 시습이 남루(藍縷)한 옷차림에 새끼줄로 허리띠를 두르고 폐양자(蔽陽子: 천한 사람이 쓰는 백죽립(白竹笠)를 쓰고서 저자에서 만났다. 시습은 앞에서 인도하는 무리를 무시하고 머리를 쳐들고 불러 말하기를 "강중(剛中: 거정의 자)이 편안한가"하였다. 거정은 웃으면서 이에 응답하고 초헌(초軒: 대부가 타는 수레)을 멈추어 서로 대화를 나누니, 온 저자 사람들이 놀라는 눈으로 서로 쳐다보았다. 조정의 선비로서 시습의 모욕을 당한 사람이 참지 못하여 거정을 보고서 상주하여 그 죄를 다스려야겠다고 하니 거정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그만두시오, 미친 사람과 무얼 따질 것이 있겠소. 지금 이 사람을 죄주면 백대(百代)후에 반드시 공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이오."

하였다. 김 수온이 지관사(知館事)로서 "맹자 견양혜왕(孟子見梁惠王)"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태학(太學: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였다. 어떤 상사생(上舍生: 진사나 생원)이 삼각산에 가서 시습을 보고 말하기를,

"괴애(乖崖: 수온의 별호)가 장난을 좋아합니다. '맹자 견양혜왕'이 어찌 논제에 합당하겠습니까."

하였다. 시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노인이 아니면 이 논제를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에 붓을 들어 재빨리 한편의 글을 만들어 주며 말하기를,

"생원이 스스로 지은 것처럼 해서 이 노인을 한번 속여 보시오."

하였다. 상사생이 그 말대로 따라하였더니 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않고 급히 묻기를.

"열경이 지금 서울의 어느 절에 머물고 있는가."

하였다. 상사생은 숨길 도리가 없었으니 그 알려짐이 이와 같았다. 그의 이론은 대략 '양혜왕은 왕을 참칭(僭稱)한 자이니, 맹자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인데 지금은 그 글이 없어져서 수집하지 못한다. 수온이 죽은 뒤 그가 좌화(坐化: 앉아서 죽음)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습은 말하기를,

"괴애는 욕심이 많은데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설혹 있었다 하더라도 좌화는 예가 아니다. 나는 다만 증자(曾子)의 역책(易책)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을 들었을 따름이오.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아마 수온이 부처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성종(成宗) 12년(1481) 시습의 나이 47세였다.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제문을 만들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제(帝: 순임금)께서 오교(五敎: 오륜)를 베푸심에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맨 앞에 위하고 죄가 3천 가지로 나열되지만 불효의 죄가 가장 크옵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이 누구인들 부모의 길러주시고 교육하여 주신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고 미련한 소자는 본지(本支)를 사승(嗣承)하여 이어나가야 하온데 이단(異端: 불교와 노장)에 침체(沈滯)하여 말년에서야 겨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이에 예전(禮典)을 상고하고 성경(聖經)을 탐색하여 추원(追遠)하는 큰 의례를 강구하여 정하고,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지만, 정결하기를 힘쓰며 성의가 담긴 제수를 차리려 애썼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70세에야 비로소 전 승상(田丞相)의 ‘선술(仙術)을 멀리하라’는 말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100세에야 허 노재(許魯齋)의 ‘인의강상(仁義綱常)’의 권고에 감화하였습니다."

드디어 안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하라고 권하였으나 시습은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방광(放曠)하기를 예와 같이 하였다. 달 밝은 밤을 만나면 이소경(離騷經) 외우기를 좋아하였고, 외우고 나면 반드시 통곡하였다. 혹 송사하는 곳에 들어가 사곡(邪曲)한 것을 정직한 것으로 만들어 궤변(詭辯)을 부려서 반드시 이겼으며, 판결 문안이 이루어지면 크게 웃고 파기하기도 하였다. 뛰노는 시동(市童)들과 어울려 놀며 취하여 길가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하루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이 저자를 지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저놈을 멈추게 하라"

고 하였다. 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절교하였는데 다만 종실(宗室: 왕족)인 수천부정(秀川副正) 정은(貞恩)과 남 효온(南孝溫)ㆍ안응세(安應世)ㆍ홍유손(洪裕孫) 등의 무리 몇 사람만이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효온이 시습에게 묻기를,

"나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대답하였다.

"창구멍으로 하늘을 엿보는 거지."

효온이,

"동봉 그대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시습은 말하였다.

"넓은 뜰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는 거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자, 다시 산으로 돌아가 두타(頭陀)(중이 머리를 깎아 눈썹과 같게 한 것)의 모습을 하였다. 강릉과 양양 지방에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고 설악(雪嶽)ㆍ한계(寒溪)ㆍ청평(淸平) 등지의 산에 많이 있었다. 유자한(柳自漢)이 양양의 원으로 있으면서 예로써 대접하며 가업을 회복하여 세상에 나가기를 권하자 시습은 이를 서신으로 사절했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차 장참(長鑱: 긴 자루가 달린 가래. 농기구의 한 가지)을 만들어 영출(笭朮: 茯笭과 蒼朮)이나 캐겠소. 온 나무가 서리에 얼어붙거든 중유(仲由)의 온포(縕袍)를 손질하고, 온산에 백설이 쌓이거든 왕공(王恭)의 학창을 매만지려 합니다. 낙백(落魄)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소요(逍遙)하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을 것이요, 천년 후에 나의 속뜻(素志)을 알아주기 바라는 바이요."

성종 24년(1493)에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워 서거하니 향년 59세였다. 우연을 하여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빈소차림을 하여 놓아두라고 일렀다.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빈소를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중들은 놀라 탄식하며 모두 부처라고 하였다. 마침내 불교식에 의하여 다비(茶毗: 불교의 화장)하고 그 뼈를 취하여 부도(浮圖: 작은 탑)를 만들었다. 생존시에 손수 늙었을 때와 죽었을 때의 두 개의 화상을 그리고, 또 스스로 찬(贊)을 지어 절에 남겨 두었다. 찬의 끝에 이르기를,

네 모습이 지극히 못났는데, 爾形至

네 말 너무 당돌하니, 爾言大동

마땅하도다 네가 宜爾置之

구렁텅에 빠짐이어 溝壑之中

하였다. 지은 시분은 산실(散失)되어 십분의 일도 보존되지 못하였는데 이자(李자)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 등이 선후 수집해서 세상에 인쇄하여 내놓았다고 한다.

신 삼가 생각컨대, 사람이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는데, 청하고 탁하며 후하고 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면서 아는 생지(生知)와 배워서 아는 학지(學知)의 구별이 있으니, 이것은 의리(義理)를 가지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시습과 같은 사람은 문(文)에 대하여 나면서부터 터득했으니 이는 문장에도 생지가 있는 것입니다. 거짓으로 미친 짓을 하여 세상을 도피한 은미한 뜻은 가상하나 그렇다고 굳이 윤리의 유교를 포기하고 방탕하게 스스로 마음내키는 대로 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빛을 감추고 그림자마저 숨기어 후세로 하여금 김시습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한다 한들 도대체 무엇이 답답할 것 있겠습니까. 그 인품을 상상해 보건대 재주가 타고난 기량(器量)의 밖으로 넘쳐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니, 어찌 경청(輕淸)한 기(氣)를 받기는 풍족한데 후중(厚重)한 기를 받기는 부족하였던 이가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절의(節義)를 표방(標榜)하고 윤리를 심어 그 심지를 구극(究極)하여 보면 일월(日月)로 더불어 광채를 다툴 만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풍(氣風)을 접하면 나약(懦弱)한 사람도 감흥하여 일어서게 될 것이니 비록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한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시습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과 실천을 갈고 닦으며 힘썼던들 그 이룩한 바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아! 바른말과 준엄한 논의로 기피(忌避)해야 할 것도 저촉하며, 공(公)ㆍ경(卿)을 매도(罵倒)해 조금도 서슴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 그의 잘못을 들어 말한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선왕의 성대하신 덕과 높은 재상들의 넓은 도량은, 말세에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그 득실이 어떠하겠습니까. 아! 거룩합니다.』

 

【해설】

이이(李珥)가 지은 전(傳). 김시습에 대하여 지은 전이다. 작자의 문집인 <율곡집> 권14∼16 ‘잡저’에 실려 있는 그의 유일한 ‘전(傳)’이다. 율곡의 나이 47세 7월에 지은 것으로, 대부분 김시습에 대해 있는 사실을 그대로 기술하였으며, 다만 끝에 저자의 의견을 덧붙여 절의와 윤기를 내세워 백세지사(百世之師)로 찬양하여 그의 억울한 울분의 넋을 달래주고자 하였다.

<김시습전>의 내용은 김시습의 선세가계(先世家系)에서 시작하여, 어린 시절 학문을 처음 익히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와 단종의 손양(遜讓)과 세조의 즉위에서 비롯된 김시습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특히,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방외(方外)에 놀았으나 그의 중심은 언제나 유자(儒者)의 위치에 머물렀음을 지적하였다. <김시습전> 중에서 학문과 문학적 재능에 대하여 세밀히 기록하는 과정에서 더러 세상에 전해지는 이야기 등도 수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김수온(金守溫)ㆍ서거정(徐居正)ㆍ남효온(南孝溫)ㆍ정창손(鄭昌孫)ㆍ유자한(柳自漢)과의 일화는 대체로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말년에 그가 안씨(安氏)를 취하여 가정을 이루었던 사실과 오늘날 이자(李秕)ㆍ박상(朴祥)ㆍ윤춘년(尹春年)에 의하여 그의 시문집이 전하게 된 내력을 밝혔다. 말미에는 이이 자신의 김시습에 대한 평을 기록하고 있다.

<김시습전>은 전통적인 전의 양식에 충실하여 사실을 기록하는 데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일화로 남는 김시습의 행적 정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설화로 유전하는 그의 일생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위하여 엄격한 비평적 안목에 의하여 그를,

“재주가 그릇(器)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되었으니, 그가 받은 기운이 경청(輕淸: 곡조 따위가 맑고 가벼움)은 지나치고 후중(厚重)은 모자라게 마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義)를 세우고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를 붙들어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풍성(風聲)을 듣는 사람들은 겁장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되기에 남음이 있다.”고 한 말은 그의 내면세계를 중심으로 한 평가일 것이다.

또한, 이이는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애석해하였다. 불우한 삶을 영위하였던 한 인물에 대한 올바른 기록을 전이라는 양식을 빌려 쓴 하나의 전형이다.

김시습 영정[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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