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속을 비워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공광규 시집 "소주병" (실천문학사) 에서.

[베니스 수로 풍경]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고 재 종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 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에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 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 '2003년 <유심> 여름호' 에 수록

[순천 향일암 앞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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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양성우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총창뿐인 마을에 과녁이 되어

소리없이 어둠 속에 쓰러지면서

네가 흘린 핏방울이 살아 남아서

오는 봄에 풀뿌리를 적셔 준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골백번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이 진흙의 한반도에서

다만 녹슬지 않는 비싼 넋으로

밤이나 낮이나 과녁이 되어

네가 죽꼬 다시 죽어

스며들지라도

오는 봄에 나무 끝을 쓰다듬어 주는

작은 바람으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혹은 군화 끝에 밟히는

끈끈한 눈물로

잠시 머물다가 갈지라도

불보다 뜨거운 깃발로

네가 어느날 갑자기 이 땅을 깨우고

남과 북이 온몸으로 소리칠 수 있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엄동설한에 재갈물려서

여기저기 쫓기며 굶주리다가

네가 죽은 그 자리에 과녁이 되어

우두커니 늘어서서 눈 감을지라도

오직 한마디 민주주의, 그리고

증오가 아니라 포옹으로

네가 일어서서 돌아온다면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이 저주받은 삼천리에 피었다 지는

모오든 꽃들아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노르웨이 겨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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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학동기가 이 무더위에 29회에 걸친소설 <김삿갓 방랑기> 마지막회를 동기홈피에 올려 나의 소회를 써준 답글입니다.

참으로 큰일 하셨습니다. 또 가만히 있어도 짜증나는 무더위에 큰욕 보셨습니다.

맨위 사진 보니 문득 두보(杜甫)의 여야서회(旅夜書懷)가 생각납니다.


여야서회(旅夜書懷)

-객지에서 밤에 회포를 적다


細草微風岸 어린 풀잎 돋아난 언덕엔 실바람 불어오는데

危檣獨夜舟 높이 돛을 단 배에서 홀로 밤을 지샌다.

星垂平野闊 별빛 드리운 탁 트인 평야에

月湧大江流 달빛 어린 큰 강물은 용솟음쳐 흐른다.

名豈文章著 이름을 어떻게 문장으로 드날리랴

官因老病休 벼슬도 늙고 병들어 쉬어야 할 판인데.

飄飄何所似 표표히 떠도는 신세 무엇에다 비길꼬?

天地一沙鷗 천지간에 한 마리 물새일레라.


삼협은 지났는가? 굽이굽이 인생길 참, 녹녹한 게 아닙니다.

당뇨에 폐결핵에 병든 몸을 물살이 급한 강물 위에서 흔들리는 밤배에 맡기고

홀로 밤잠을 설치며 광야를 지나는데, 새 한 마리 돛대 따라 날아오나 봅니다.

넓은 공간과 물새의 존재의 대비가 더욱 외로움을 증폭시킵니다. 문장으로 11살

위의 이백(李白)처럼 이름을 떨치고자 했던 꿈은 무산되고 마는 것인가?

이젠 영영 이름없는 물새 한 마리 되고 마는 것인가? 이런 생각들이 인간

두보를 괴롭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야심한 밤에 뱃전에서 흔들리는 나는 깃들 곳을 잃어버리고 날개짓을 계속하고

있는 저 한 마리 물새일 뿐입니다. 사물에 자아를 투영하다보니 자아는 물새가 되어

버립니다. 물아일체, 사물과의 동일화가 이뤄진 겁니다.


지금은 나도 감기 몸살과 싸우고 있으니 그놈들 물리치고 함 봅시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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