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소리

-김창범


누가 재가 되었다고 했는가

부러져 말라버린 나뭇가지가 되었다고 했는가


모래틈에서 터진 민들레 꽃잎 속에서

명주실같이 감기는 물소리가 되어

아 누구에게나

숨 넘어갈 듯이 달려오는 것


꽃들이 흐드러지게 웃어 댄다고 모르겠느냐

바람들이 수선을 떨며 쏘다닌다고

누가 잊어버리겠느냐


생각해서야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고함쳐야 들리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두 모두 떠나고 만 봄날

길고 긴 낮잠 속에서도


자꾸만 흔들리며 밀리며 일어나는

저 수많은 소리

[양평 들꽃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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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의 사냥꾼

-김승희


다이아나 언니.

마차를 매요.

바람이 좋으니 사냥나가자.

요정 1. 요정 2. 요정 3. 요정 4

그리고 어린 모짤트도 불러

사슴과 거미와 토끼와 나비를

표범과 매와 태양과 절망을

언니는 쫓고 나는 잡고.

언니는 활쏘고 나는 겨누고.


영혼의 마차에는

네 개의 바퀴가 반짝이고 있다.

숲의 정. 벌의 정. 꿈의 정. 활의 정

우리는 정비하여

해 가까이 나가는데

지금 누런 들판에서는

엑스레이빛, 엑스레이빛으로

마른 개들이 죽고 있다.

죽고 있다.


나는 알지.

긴 어둠의 창작을 내가 할 때

흰 물결. 검은 물결. 파랑 물결 사이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황야를.

메마른 의식의 침엽수 이파리와

필생의 그 든든한 어둠소리를

나는 알고 나는 견디리

나는 활쏘고 나는 밝히리.


돌아오는 마차엔

햇님의 머리칼.

눈부시게 타오르는 요정들의 옷자락.

어둠은 이제 말을 몰고 돌아가고

밝아지는 뼛속과 태양 취한 일센티.

다이아나 언니.

햇님을 매요.

반짝이는 사냥노래 나의 노래를.

[싱가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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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가시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 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었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되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오.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장미인가 장미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장미원] 제4회 소월문학상 수상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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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여름의 포장마차

-김승희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의 푸른 속력 속에서

그 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들판.

그 들판 속의 포장마차의 황혼.

[팔색조, 홍학-싱가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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