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론에서 야기된 세계경제의 침체, 경기침체와 물가상승이 맞물려 돌아가는 스태그플레이션의 조짐, 1년만에 100% 상승된 고유가 시대의 도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서 촉발된 촛불집회, 이로 인한 이명박 정부의 끝없는 신뢰 추락, 현정부의 권위의 상실, 북한군에 의한 금강산 관광객의 피살 사건, 일본의 독도 자국영토 편입을 위한 계산된 도발 등 머리 속은 황량하고 어지러운데 희망의 불빛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고, 동터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주식시장의 격언이 현실로 실현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시대를 예견한 듯한, 박희진 시인의 <백치의 노래>를 읊조려 본다.

白痴의 노래
- 박희진

저희는 이제 감동할 줄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한없는 어지러움 속에서


사람마다 엄청난 비극이라 하지만


저희는 그러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웃는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우는 것인지


저희는 조금도 놀라울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누가 미치든지 서러워하든지


아니 저희 가슴에 총알이 맞아도


저희는 그러나 아무렇지 않듯이 쓰러질 겝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여기는 도무지 사막도 아닙니다


여기는 도무지 지옥도 아닙니다


삼가 비나니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시여


이렇게 백주에 무릎을 꿇고


마지막 힘을 모아 기도를 올립니다


저희들을 한 번만 울리어 주십시오


저희들을 한 번만 웃기어 주십시오

[인사동 길가 화분의 백합]











'문학 > 시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아라 - 양성우  (2) 2008.07.17
객지에서 밤에 회포를 적다  (0) 2008.07.17
화사 -서정주  (0) 2008.07.16
회복기 -박희진  (1) 2008.07.16
배우일지 5 -김정웅  (2) 2008.07.16

화사(花蛇)

-서정주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 내던 달변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방초ㅅ길 저놈의 뒤를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 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 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동화 같은 나라 노르웨이 풍경]









'문학 > 시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객지에서 밤에 회포를 적다  (0) 2008.07.17
백치의 노래 -박희진  (1) 2008.07.16
회복기 -박희진  (1) 2008.07.16
배우일지 5 -김정웅  (2) 2008.07.16
봄의 소리 -김창범  (1) 2008.07.16

회복기

-박희진


어머니, 눈부셔요.

마치 금싸라기의 홍수 사태군요.

창을 도로 절반은 가리시고

그 싱싱한 담쟁이넝쿨잎 하나만 따 주세요.


그것은 살아 있는 5월의 지도

내 소생한 손바닥 위에 놓인

신생의 길잡이, 완벽한 규범,

순수무구한 녹색의 불길이죠.

삶이란 본래 이러한 것이라고.

병이란 삶 안에 쌓이고 쌍인 독이 터지는 것,

다시는 독이 깃들지 못하게

나의 살은 타는 불길이어야 하고

나의 피는 끊임없이 새로운 희열의 노래가 되어야죠.


참 신기해요, 눈물이 날 지경이죠

사람이 숨쉬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죽지 않게 마련이라는 것이.

저 창 밖에 활보하는 사람들,

금싸라기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저것은 분명 걷는 게 아니예요.

모두 발길마다 날개가 돋혀서

훨훨 날으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웃음소리, 저 신나게 떠드는 소리,

사람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날까요.

그것은 피가 노래하는 걸 거예요,

사는 기쁨에서 절로 살이 소리치는 걸 거예요.


어머니, 나도 살고 싶습니다.

나는 아직 한번도 꽃 피어 본 일이 없는 걸요.

저 들이붓는 금싸라기를 만발한 알몸으론

받아 본 일이 없는 이 몸은 꽃봉오리

하마터면 영영 시들 뻔하였던

이 열 일곱 어지러운 꽃봉오리

속을 맴도는 아픔과 그리움을

어머니, 당신 말고 누가 알겠어요.

마지막 남은 미열이 가시도록

이 좁은 이마 위에

당신의 큰 손을 얹어 주세요.

죽음을 쫓은 손,

그 무한히 부드러운 약손을.

[노르웨이의 동화 같은 풍경]




'문학 > 시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치의 노래 -박희진  (1) 2008.07.16
화사 -서정주  (0) 2008.07.16
배우일지 5 -김정웅  (2) 2008.07.16
봄의 소리 -김창범  (1) 2008.07.16
햇님의 사냥꾼 -김승희  (0) 2008.07.15

배우일지 5

-김정웅


멀리 수평선을 가로막으며 고딕체로 누워있는 긴 봇둑, 붉게 타는 나문재

질펀히 깔린 간척지의 갯바닥, 조수가 밀지 않는 갯고랑, 폐선 한 척-

공중에 뻔쩍 들린 고물이 아직도 녹슨 닻줄에 매어 있다.


연일 힘 없이 부는 바람이

낡은 밧줄이

부러진 마스트에 칭칭 감겨 있다.


해가 바뀌어도 물러가지 않는 몇 개의 황혼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다.


조심스런 프롬프터의 목소리가

무언극의 저쪽에서 가늘게 떨린다.


들린다, 들린다, 안 들린다.


[석모도 가는 길]

















'문학 > 시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사 -서정주  (0) 2008.07.16
회복기 -박희진  (1) 2008.07.16
봄의 소리 -김창범  (1) 2008.07.16
햇님의 사냥꾼 -김승희  (0) 2008.07.15
장미와 가시 -김승희  (0) 2008.07.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