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이윤학

둥근 소나무 도마 위에 꽂혀 있는 칼
두툼한 도마에게도 입이 있었다.
악을 쓰며 조용히 다물고 있는 입
빈틈없는 입의 힘이 칼을 물고 있었다.

생선의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고 오는 칼.
목을 치고,
지느러미를 다듬고 오는 칼.

그 순간마다 소나무 몸통은
날이 상하지 않도록
칼을 받아주는 것이었다.

토막 난 생선들에게
접시나 쟁반 역할을 하는 도마.
둥글게 파여 품이 되는 도마.
칼에게 모든 걸 맞추려는 도마.
나이테를 잘게 끊어버리는 도마.

일을 마친 생선가게 여자는
세제를 풀어 도마 위를
문질러 닦고 있었다.

칼은 엎어놓은 도마 위에
툭 튀어나온 배를 내놓고
차갑고 뻣뻣하게 누워 있었다.

 

[순천 향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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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이윤학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집니다
닥나무 이파리들
다닥다닥 떱니다

하루종일
생담배를 태우는 공장 굴뚝, 햇살이
닥나무 이파리 틈바구니에서
갈라져 떨어집니다

벼이삭들 사이에서
바닥을 끌고
참새떼 날아오릅니다
하늘에 회오리 무늬가 그려집니다

빛을 떼내는 닥나무 이파리들,
사기그릇 깨지는 소리들

깃발이 올려집니다
열 몇 칸짜리 객차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갑니다

아득히
회오리바람이 사라져갑니다

객차들의 꽁무늬,
뻥 뚫린 터널이 사라져갑니다

아주 오래 된 터널입니다

당신을 만나야,
불이 밝혀지는 터널입니다

[순천 송주웁 선암사 벽화, 지리산,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친필로쓴 쌍계사의 진감선사비, 화엄사 각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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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어진 길
-이윤학

내 마음은
거기까지밖에 보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거기까지밖에 걷지 못합니다.
내 마음은
거기서부터 진공 상태 입니다.

휘어진 길을 따라
내 마음도 휘어져
버젓이 튕겨집니다.

나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대가 떠나가고
커브에 오동나무가 서 있습니다.
지금은 베어진 오동나무
보도블럭에 덮인 오동나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보랏빛 종들
수백 개 스피커에서
알지 못할 향기가 흐릅니다.

질식할 것 같아
눈을 뜨고 맙니다.

[순천 송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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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바다

-공광규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을 알아듣는

파도가 나와 술을 마시자고


어리고 슬픈 작부처럼 보챈다


술은 파도가 먹고 싶은데


바람이 먼저 횟집 창을 두드리고 들어와


술을 달라고 졸라댄다



아나키스트 그 여자의 술집에서

해변에 버려져 썩어가는 배

폐선처럼 늙어가는 나이를 바라보며

생계에 갇힌 인생을 안주로

파도와 수십 잔 수백 잔


사상의 정부도 마음의 정부도 없이

꿈과 힘과 아름다움이 소진해가는

내가 그리고 네가 안쓰러워

떠나간 사람 떠나간 사랑을 얘기하다

파도가 왜 기타줄에 와서 우느냐고

횡설수설 술잔으로 탁자를 친다

[이탈리아 나폴리 항구 & 카프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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