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遠視)

-오세영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바람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수련- 강화도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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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누구인가

-정호승

 

슬픔을 만나러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우리들 생의 슬픔이 당연하다는

이 분단된 가을을 버리기 위하여

우리들은 서로 가까이

개벼룩풀에 몸을 비비며

흐느끼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황토물을 바라보며 무릎을 세우고

총탄 뚫린 가슴 사이로 엿보인 풀잎을 헤치고

낙엽과 송충이가 함께 불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을 형제여

무릎으로 걸어가는 우리들의 생

슬픔에 몸을 섞으러 가자.

무덤의 흔적이 있었던 자리에 숨어 엎드려

슬픔의 속치마를 찢어내리고

동란에 나뒹굴던 뼈다귀의 이름

우리들의 이름을 지우러 가자.

가을비 오는 날

쓰러지는 군중들을 바라보면

슬픔 속에는 분노가

분노 속에는 용기가 보이지 않으나

이 분단된 가을의 불행을 위하여

가자 가자

개벼룩풀에 온몸을 비비며

슬픔이 비로소 인간의 얼굴을 가지는

쥐똥나무 숲으로 가자.

 

 

[도야마 & 구로베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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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정호승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다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 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 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네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북해도 바닷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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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도종환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저녁 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달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였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 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 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 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겠어

[백록담 &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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