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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10년신춘문예 시 당선작

성은주/ 풀터가이스트

하늘은 별을 출산해 놓고 천, 천, 히 잠드네

둥근 시간을 돌아 나에게 손님이 찾아왔어 동구나무처럼 서 있다가 숨 찾아 우주를 떠돌던 시선은 나를 더듬기 시작하네 씽끗, 웃다 달아나 종이 인형과 가볍게 탭댄스를 추지

그들은 의자며 침대 매트리스를 옮기고 가끔, 열쇠를 집어삼켜 버리지 그럴 때마다 나는 침대 밑에서 울곤 해 스스로 문이 열리거나 노크 소리가 들릴 때 화장실 문은 물큰물큰 삐걱대며 겁을 주기도 해 과대망상은 공중으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리지 끊임없이 눈앞에서 주변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조였다 풀어져

골치 아픈 그들의 소행에 시달리다 못해 어느 날, 광대를 찾아갔지 광대는 자신이 두꺼운 화장에 사육당하고 있다며 웃어야 할 시간에 울고 있었어

천장을 훑어 오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그들은 그림자를 흔들고 있어
자연스럽게 때론 엉성하게
그러다 접시가 입을 쩌억 벌렸어
누워있던 골목들 일제히 제 넋을 출렁였지
붙어있던 그들은 홀가분하게 나를 떠났어
갖 소동 부리고 떠난 자리,
무성한 음모만 시끄럽게 남아있네


* Poltergeist: 불안정하게 소란을 피우는 영(靈)

심사평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 문학적 역량 높이 평가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 외 2편과 김아타의 '달로 날아가는 방' 외 5편이었다.

김아타의 시는 새로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체 실험실에서 나온 듯한 그의 의욕적인 작품들은 특이한 언어의 선택과 뒤틀린 배치, 엉뚱한 결합을 통해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물론 평범한 문법을 거부하려는 신인의 자세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소통의 단절을 앞세우는 듯한 난해하고 모호한 문장들을 누가 읽어낼 수 있겠는가. 현란한 수사에의 도취는 자칫 시의 본질을 벗어난 장식적이고 기교적인 언어의 쇄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작은 것과 큰 것,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해 내는 큰 안목을 갖추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의심하지 않는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성은주의 '폴터가이스트'를 당선작으로 뽑는 데는 이견이 전혀 없었다. 그만큼 든든한 문학적 역량이 느껴졌고 신뢰가 깊이 갔던 작품이다. '폴터가이스트'는 불안을 형상화했다. 불안을 토로하는 것은 쉽지만 불안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진심이 묻어 있는 어눌하면서도 차분한 어조, 공포를 잠시 해소시키는 짧은 농담, 살얼음처럼 떨리는 섬세한 문체로, 불안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고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이었다.

●심사위원 : 문정희 - 최승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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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10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유병록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칼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둔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듯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 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된다니!

목 아래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가을이면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심사평

생물의 마지막 순간 끈질기게 천착

예심에서 골라준 시 작품들 가운데서 다섯 분의 작품들을 중점적으로 거론했다. 성동혁의 '렌터카를 타고’ 외 4편은 장식적이거나 매끄럽지 않은 조립이 있지만 고통스러운 순간을 유희로 전환하는 유머가 돋보였다. 안웅선의 ‘미션스쿨의 하루’ 외 4편은 간혹 서사를 기록할 때 어색한 문장들이 들어있는 시편이 있었지만 미성숙한 사춘기 화자를 내세워 오히려 내면적 고투의 나날이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방법이 눈길을 끌었다.

강윤미의 ‘소심한 소녀의 소보루 굽기’외 4편은 암시성이 확장하는 폭은 좁았지만 지루한 일상에 발랄한 리듬과 어조의 고명을 얹어 아기자기한 서술이 되게 하는 상쾌함이 장점이었다. 박은지의 ‘서랍의 눈’ 외 4편은 시에 산문적이고 설명적인 언술들이 섞여 들었지만 한 가지 사물이나 현상을 끈질기게 해석해 보려는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가 눈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다.

유병록의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외 4편 모두가 절명의 순간에 바쳐진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생물의 마지막 그 한순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간혹 상투적 해석이 불필요하게 첨가되었지만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서 단연 시선의 깊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 작품들 간의 질적 수준의 균질함,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묘사력 등이 탁월했다.

●심사위원 : 최동호 시인 - 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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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0년 신춘문예시 당선작

김성태 / 검은 구두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
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
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
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
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심사평

일상의 관찰력·꿰맨 자국 없는 표현 미덕



심사자들은 응모작을 셋으로 나눠 예심을 본 후에 올린 20편의 작품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정움의 '실종', 이정현의 '빗살무늬토기의 냄새', 김성태(필명 김아타)의 '검은 구두' 등 3편이었다.

'실종'은 산악 등반을 소재로 하여 극한상황의 고통을 담담하게 성찰한 수작이다. '주인 없는 발자국도 신앙'인 고지대, '짐승의 몸을 가진 바람', 사방에서 채찍을 휘둘러오는 길 등과 같은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작고 나약한 육체에서 꺼낸 의지를 대비적으로 실감나게 드러냈다. 감정을 잘 통제하면서 종교적인 경지가 느껴질 정도로 강한 극기의 사유를 관념과 감각을 조화시켜 그린 점이 돋보였다.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신석기 사내가 비와 흙과 하늘로 빗살무늬토기를 빚는 과정을 상상한 시다. 오랫동안 보아서 사내의 몸에 충분히 육화된 빗줄기를 흙에 넣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빗살무늬 속에 내재된 기억의 원형을 현대인인 화자의 시점에서 읽어내고 신석기와 현대의 시공간을 빗줄기와 흙 속의 냄새로 결합시키는 상상력이 특히 볼 만하였다.

'검은 구두'는 쉽고 평이해 보이지만 구두를 통해 삶을 관통하는 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방법은 결코 평이하지 않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 일상의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관찰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꿰맨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표현과 그것에 잘 어울리는 유머러스한 어조도 이 시의 미덕인데, 그것은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오랫동안 육화되었다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으나, 아쉽게도 두 작품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종'은 시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여 전체적으로 부자유스럽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같이 논의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에 반해 '검은 구두'는 삶에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고, 작은 것 속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발상도 참신하여,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길 기대한다. 끝까지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매머드 뼈'(김영각)와 '프로필'(기리나)도 매력적인 개성을 지닌 가작이었음을 밝힌다. 용기를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이시영(시인·단국대 초빙교수),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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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화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아도
어린 시절의 마당보다 좁은 이 세상
인간의 자리 부질 없는 자리
가리울 곳 없는 회오리 들판

아 고독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 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 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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