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취산* 가는 길
ㅡ 이승하
붓다는 왜 이 가파른 산길을 올라온 것일까
산기슭 나무 밑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제자와 청중에게
붓다가 되는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불성은 비우면 그만큼 채울 수 있고
베풀면 그만큼 돌아오는 것이라고
배움의 많고 적음에,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다고
영취산 올라가는 길 먼지바람 속에서
구걸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어머니
“원 달러!” “원 달러!” “기브 미 원 달러!”
우는 아기 달래지도 않고 손만 내미는 어머니
붓다가 간 지 이천오백 년 동안 이 길에서는
얼마나 많은 자비가 있었고 해탈이 이루어졌을까
거적때기 깔아놓고 밥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법화칠유**는 멀고도 먼 북두칠성
영취산 꼭대기에 올라가니 불당이 만들어져 있다
절을 하고 돈을 내시오 시주하고 죄를 씻으시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일까 법화경을 설한 영취산
내려가다 보니 서너 살짜리 알몸아이 똥 누고 있다
붓다가 금붙이 좋아했을 리 없는데
영취산 바로 아래 가섭굴은 온통 금칠이다
거지가 아니면 장사치, 팔아야 살 수 있으니
초도 팔고 삶은 달걀도 팔고 돌로 만든 신상(神像)도 판다
납치 살해된 외국인 관광객 보호를 위해 군인도 나와 있다
잠든 저 할머니는 3대가 걸인인가 누대(累代)로 걸인인가
처음부터 길인 길은 어디에도 없었으리
들길도 산길도 비탈길도 에움길도
수많은 사람의 발걸음이 만드는 것
걷는 동안 돌들이 자취 감추고
걷는 동안 풀들이 점차 사라진다
돌아서 가도 길은 길이고, 길이면 갈 수 있으니
가자! 영취산 아닌 그 어느 산에라도
* 영취산(靈鷲山):고대 인도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산. 부처가 법화경과 무량수경을 강(講)했다는 곳이다. 영축산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도 경남 양산 등에 이 이름을 가진 산이 있다.
** 법화칠유(法華七喩):법화경에서 설하는 일곱 가지 비유.
―『불의 설법』(서정시학, 2014)에서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http://encykorea.aks.ac.kr/Article/E0078279
『법화경(法華經)』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 중의 하나로서 『정법화경(正法華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의 세 가지가 있다. 이 중에서 『법화경』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묘법연화경』을 지칭한다. 번역의 연대는 『정법화경』이 오래되었지만,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후진(後秦) 시기에 장안에 들어와 『묘법연화경』을 번역한 후 『묘법연화경』은 이후 전개되는 불교 사상 중에서 천태종이나 여러 주석가들이 주로 의거했던 경전이 되었다.
불교의 교리를 가르치는 방법을 12분교(分敎)라 하는데, 12분교 중의 하나가 비유(譬喩)이다. 비유는 불교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일찍부터 활용되었으며, 『법화경』 역시 경전의 내용을 비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법화경』에는 대략 12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 중 대표적인 것은 7개이다. ‘법화칠유(法花七喩)’란 법화경의 7가지 비유라는 뜻이다.
불난 집의 비유는 화택유(火宅喩) 혹은 화택삼거유(火宅三車喩)라고도 한다. 『법화경』 전반부에 속하는 「비유품(譬喩品)」제3에 나오는 내용이다. 불난 집이란 모든 존재가 거주하고 있는 삼계(三界)를 지칭한다. 즉 삼계는 불난 집처럼 편안하게 안주할 수 없는 집이란 점에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불난 집의 비유에서 불이란 물리적이고 실질적인 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가 편안하게 머물 수 없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 결국 『법화경』에서 말하는 불이란 정신적이면서도 심리적인 불안정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들이 연출하는 오탁(五濁)의 세계와 여덟 가지의 고뇌[八苦], 탐•진•치•만•의(貪瞋癡慢疑) 등을 상징한다. 오탁의 세계란 중생탁(衆生濁: 중생이 악업을 많이 지어 인과의 과보를 두려워하지 않음), 견탁(見濁: 중생이 사견(邪見)으로 가득 차서 선도(善道)를 닦지 않음), 번뇌탁(煩惱濁: 중생이 탐욕이나 애착 등이 많아 고뇌가 많음), 명탁(命濁: 중생의 악업이 증가하여 수명을 단축함), 겁탁(劫濁: 시대가 혼탁하여 삶의 환경이 열악하고 질병 같은 것이 계속 일어남)이다. 탐•진•치•만•의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 교만, 의심을 말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이라 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속성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맹목적이란 점에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을 끊임없이 고뇌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을 불에 비유하며, 온 세상을 불태우고 있다고 묘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처럼 불타는 집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비유품」에 의하면 아버지가 출타한 낡고 큰 집에는 아이들만 남아 놀고 있었다. 놀이에 빠져 희희낙락하고 있는 사이에 불이 났으며, 그 불은 번져서 집을 태우기에 이르렀다. 마침 외출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보니 불이 집 전체로 옮겨 붙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방법은 아이들을 집 밖으로 유인해 내는 것이다. 놀이에 빠져 정신이 없는 아이들을 유인하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 따라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집 밖에 양이 끄는 수레[羊車], 사슴이 끄는 수레[鹿車], 소가 끄는 수레[牛車]가 있는데, 나가면 그것을 주겠다고 말했다. 수레를 준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이들은 무사히 그 불타는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세 가지의 수레로 아이들을 유혹했지만 공평하게 희고 큰 소가 끄는 멋진 수레를 각각 선물했다. 아이들이 너무나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이상의 내용이 불난 집의 비유인데, 세 가지의 수레는 삼승(三乘)으로, 희고 큰 소가 끄는 수레는 일승(一乘)으로 해석한다. 또 양이 끄는 수레는 성문(聲聞), 사슴이 끄는 수레는 연각(緣覺), 소가 끄는 수레는 보살을 의미한다고 본다. 교학적으로 성문은 사성제(四聖諦)를 수학하고, 연각은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추종하며, 보살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실천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각각 개성과 기질의 문제이며, 근본적인 차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떠한 가르침을 중시하고 따르더라도 결국 일불승(一佛乘)으로 귀착하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상대적 가치를 존중하되 본질적 차원에서 절대 평등을 중시하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잘 묘사하고 있는 비유라 할 수 있다.
다만 중국에서 종파불교가 전개되면서 이 비유에 나오는 수레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다른 주장이 등장한다. 그것은 소가 끄는 수레와 희고 큰 소가 끄는 수레를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삼론종과 법상종은 동일하다고 보는 점에서 삼거가(三車家)라 하고, 천태종이나 화엄종은 다르다고 보는 입장에서 사거가(四車家)라 한다. 방편과 진실을 동일하다고 볼 것인가 다르다고 볼 것인가 하는 점이 시각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천태종이나 화엄종이 방편과 진실은 동일할 수 없다고 보았다면, 삼론종과 법상종은 방편과 진실이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2. 방황하는 가난뱅이 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
방황하는 가난뱅이 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는 장자궁자(長者窮子: 부자와 가난뱅이 아들)의 비유 혹은 궁자유(窮子喩: 가난뱅이 아들의 비유)라고도 한다. 『법화경』 「신해품(信解品)」 제4에 나오는 비유이다.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거렁뱅이는 원래 부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미아가 되어 자기의 신분도 모르고 유랑 걸식하며 성장한다. 성장한 뒤에도 가난과 싸우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팔이를 하며 유랑한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부자 아버지가 있는 고향에 도착해 장자의 집 앞에 도달했지만 비천한 신분에 다가갈 수 없다고 느껴 도망한다. 거지가 자신의 아들임을 직감한 장자는 다양한 방법으로 거지를 자신의 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유인한다. 그리고 점차 환경에 익숙해지자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마침내는 장자의 출납을 담당하는 회계로 키운다. 이후 집사로 성장시켰다가 자신의 아들임을 인식시키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
이 비유의 핵심어는 네 가지이다. 장자, 가난뱅이 아들, 고향, 가난이다. 『법화경』에 등장하는 장자는 불타를 의미한다. 가난뱅이 아들은 중생이다. 고향을 상실하고 미아가 되어 방황하는 아들은 중생들이며, 이러한 중생을 성숙시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는 장자는 물론 불타이다. 불타의 자비가 어떠한 방식으로 중생들에게 전달되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상실한 고향을 향해 본능적으로 다가간다는 것이 경전의 가르침이다. 문제는 고향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고향은 태어난 장소를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법화경』은 비유적으로 활용한다. 따라서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고향은 정신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법화경』에서는 일승, 혹은 일불승이라 한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의 세계를 의미하며, 정토종에서는 정토(淨土)를 상징한다.
『법화경』에서 중시하는 일승 혹은 일불승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일승 내지 일불승은 불성(佛性)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법화경』은 중생은 누구나 일승으로 회귀하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평등하며, 똑같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생은 누구나 평등하게 일승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법화경』의 핵심 사상이 여기서 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가난은 무엇인가? 본질적인 인간성의 결여, 탈 고향 의식이다. 존재의 본질이 존엄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마음도 여기에 속한다. 교학적으로는 삼독심(三毒心)과 교만한 마음, 의심 등에 매몰된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장자는 이러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유도하여, 마침내는 존재의 본질적 정당성을 자각할 수 있도록 한다. 다양한 방편을 베풀어 진실한 본질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 약초의 비유
약초(藥草)의 비유, 운우(雲雨)의 비유 혹은 삼초이목(三草二木)의 비유가 있다. 「약초유품(藥草喩品)」 제5에 나오는 비유로, 어떠한 것에 비중을 두고 있는가에 따라 위와 같이 달리 불리기도 하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속의 산과 강, 계곡과 땅에서 나고 자라는 모든 풀·나무·숲·약초는 종류도 많고 이름과 모양도 각각 다르다. 짙은 구름이 가득하게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 비가 고루 내려 적심에 흡족하게 여긴다. 비가 내리니 모든 풀과 나무, 숲과 약초들의 작은 뿌리·작은 줄기·작은 가지·작은 잎새와 중간 뿌리·중간 줄기·중간 가지·중간 잎새와 큰 뿌리·큰 줄기·큰 가지·큰 잎새와 크고 작은 나무들이 제각기 비를 맞는다.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를 맞지만 그 초목의 종류와 성질에 맞추어서 자라고 크며, 꽃이 되고 열매를 맺게 된다. 비록 한 땅에서 나고, 한 비로 흡족하게 적시고 축여 주지만 여러 가지 풀과 나무는 각각 차별이 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구름과 비는 불타의 자비를 상징하며, 약초는 중생을 의미한다. 약초 중에는 작은 것, 중간 것, 큰 것의 차별이 있고, 나무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을 삼초이목의 비유라 한다. 불타가 뿌리는 자비의 비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지만, 그 비를 받아들이는 대상은 각각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중생의 다양성을 설명하면서도 각각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경전이 밝히고자 하는 내용이지만, 삼초이목을 해석하는 중국 종파불교의 입장에는 차이가 있다. 즉 법상종은 오성각별설(五性各別說)에 의거해 작은 풀은 성문정성(聲聞定性), 중간 풀은 연각정성(緣覺定性), 큰 풀은 보살정성(菩薩定性), 작은 나무는 부정정성(不定定性), 큰 나무는 무유정성(無有定性)으로 해석한다. 이들 중에서 무유정성은 성불을 할 수 있는 근거인 불성이 없다는 의미에서 『법화경』의 근본 사상과 위배된다. 이와 달리 천태종은 삼초이목을 인천승(人天乘), 이승(二乘: 성문과 연각승), 보살승(菩薩乘), 통교(通敎)의 보살, 별교(別敎)의 보살로 해석한다. 삼초이목의 비유를 활용해 천태종의 교리를 독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4. 화성의 비유
화성(化城)의 비유 혹은 보처화성(寶處化城)의 비유는 「화성유품(化城喩品)」 제7에 나오는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는 불타와 중생을 여행객과 그 여행을 안내하는 가이드로 묘사한다. 긴 여행에서 여행객들이 피로에 지쳐 목적지에 가는 것을 중도에 포기하고자 할 때 짐짓 목적지인양 중간 귀착지를 설정하여 심기일전하는 계기로 삼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이 비유의 핵심어는 안내자, 여행객, 중간 귀착지인 화성, 최종 목적지인 보처(寶處)이다. 보처는 보소(寶所)나 보성(寶城)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행의 목적은 보처에 가는 것이다. 보배로운 장소, 혹은 보배로운 도시, 보배가 있는 땅이라 할 수 있는데, 인간들이 추구하는 욕망의 세계가 아니라 궁극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고향'이란 단어가 지향하는 인식의 세계와 같다. 이 보배로운 도시 혹은 보배로 가득 찬 도시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에서 오백유순(五百由旬)이라는 아득하게 떨어진 세계로 묘사된다. 그리고 가고자 하더라도 그 과정 역시 쉽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렇지만 여행객으로 묘사되고 있는 중생은 궁극적으로는 이 보배로운 도시에 도달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 길은 쉽지 않기 때문에 여행을 안전하게 안내하는 가이드가 필요하며, 그 가이드는 여행의 도정에서 막히고 뚫린 곳, 쉬고 가야할 곳을 훤하게 아는 가이드이다. 그리고 길고 긴 여행에서 지친 여행객을 위해 등장하는 것이 화성이다. 화성은 그림자와 같은 도시란 의미이며, 실체가 없고 영원하지 않은 도시이다. 그렇지만 보성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도시라는 점에서 방편을 의미한다. 보성은 진실을 상징한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방편의 문을 열어 진실한 세계를 보여준다는 『법화경』의 핵심 가르침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5.옷 속에 보배 구슬을 매다는 비유
옷 속에 보배 구슬을 매다는 비유는 의주유(衣珠喩: 옷과 구술의 비유) 내지 계주유(繫珠喩: 구술을 매 다는 비유), 혹은 의리계주(衣裏繫珠: 옷 속에 구술을 매달다)의 비유라 한다.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 제8에 나오는 비유이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친구 집에 가서 놀다 술이 취해 잠이 들었다. 급한 일이 생긴 친구는 잠든 친구를 위해 그 사람의 옷 안에 구술을 매달아 주고 나갔다. 필요할 때 팔아서 활용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는 친구는 이후에도 여전히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뒷날 친구를 만나 그런 사실을 알고 구술을 팔아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비유이다. 누구나 이처럼 귀중한 보배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설하고 있으며, 후대의 선종에서 “자가보장(自家寶藏)”이란 용어로 널리 활용된다.
이는 성문과 연각의 두 승려가 과거세에 대통지승여래(大通智勝如來)의 처소에서 대승과 인연을 맺었지만 무명(無明)에 가려 깨닫지 못하고 생사고해(生死苦海)를 헤매다가 여래의 방편에 의거한 안내에 의해 일불승에 들어가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본다. 여기서 핵심 용어는 옷 속의 보배 구술, 가난한 방랑자이다. 보배 구술은 일승, 가난한 방랑자는 중생을 의미한다. 중생은 불성이란 보배를 지니고 살면서도 아직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가난 역시 정신적·심리적 가난이다.
6.이마 속의 보배 구슬에 대한 비유
이마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는 계주유(髻珠喩: 상투 속의 구술의 비유) 혹은 정주유(頂珠喩: 이마 속의 구술의 비유)라 부르기도 한다. 「안락행품(安樂行品)」 제14에 나온다. 전륜성왕이 여러 나라를 항복받고자 할 때 작은 나라의 왕들이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전륜성왕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한다. 이때 전륜성왕은 전공에 따라 상을 주는데 말이나 코끼리, 집이나 재물 등을 나누어 주지만 상투 속에 있는 명주(明珠)만은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 하나 뿐이기도 하지만, 이 구술을 나누어 주면 전륜성왕 주변의 여러 권속들이 놀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아끼던 명주도 가장 큰 전공을 세운 병사에게는 기쁜 마음으로 준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핵심 용어는 전륜성왕, 작은 나라의 임금, 전쟁, 명주이다. 전륜성왕은 불타를 상징하며, 작은 나라의 임금은 다양한 번뇌 망상을 상징한다. 전쟁은 수행을 의미하고, 명주는 일승 즉 불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번뇌 망상을 다스리고 수행을 완성하면 불성을 체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비유의 교훈이다. 천태종에서는 진실한 가르침인 일승은 다양한 방편을 통해 체득된다고 보았으며, 이 비유도 그런 가르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7.훌륭한 의사의 비유
훌륭한 의사의 비유는 의자유(醫子喩: 의사와 아들의 비유) 혹은 의사유(醫師喩: 의사의 비유)라 한다.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16에 나온다. 의사인 아버지가 외출하고 돌아와 보니 아이들이 놀다 독약을 마셔 누워 있었다. 급히 해독약을 처방하여 아이들에게 먹였는데, 약을 먹고 바로 깨어나는 아이도 있었지만 약을 먹지 않으려 버티는 아이도 있었다. 이에 의사인 아버지는 꾀를 내었다. 멀리 다른 나라에 가서 죽은 것처럼 하고, 유언처럼 사람을 보내 약을 먹도록 유도했다. 아이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유언이라 생각해 약을 먹고 깨어난다는 것이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거짓으로 죽었다고 한 것은 진정 속임이 아니듯이 여래도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열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비유의 핵심 용어는 의사, 아이들, 독약, 해독약, 거짓 죽음이다. 의사는 불타를 상징하며 아이들은 중생이다. 독약이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의미하며 이것을 삼독(三毒)이라 한다. 색향미(色香味)를 잘 섞어서 해독약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해독약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을 말한다. 이처럼 불타의 자비심은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해 다양한 방편을 활용한다. 훌륭한 의사의 비유에서는 다양한 처방이란 용어를 통해 방편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또한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이란 것을 잘 알기에 이들을 위해 삼학이란 해독약을 제조해 제시했다. 그러나 삼학을 좋아하지 않는 중생들도 있기 때문에 이들을 교화하기 위한 마지막 자비심으로 거짓 죽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을 방편열반이라 한다. 다양한 방편을 통해 중생을 일승으로 유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법화경』의 사상적 핵심을 잘 보여주는 비유이다.
『법화경』을 대표하는 일곱 가지의 비유는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면 방편을 열어 진실을 드러내고자 하는 경전의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부연 설명하면 불타의 자비와 본질로의 회귀를 설명하는 비유와 불성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비유로 구분할 수 있다. 불난 집의 비유, 방황하는 가난뱅이 아들과 부자 아버지의 비유, 약초의 비유, 화성의 비유, 훌륭한 의사의 비유는 불타의 자비가 어떻게 중생들에게 다가가고 있는가를 설하는 비유에 해당한다. 반면에 옷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와 이마 속의 보배 구술에 대한 비유는 불성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세친(世親)은 『법화경론』에서 『법화경』의 일곱 가지 비유를 일곱 가지의 교만함을 치유하기 위해 전개되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제 3장 비유의 가르침(譬喩品)
https://kydong77.tistory.com/21792
https://kydong77.tistory.com/21790
대승경전인 묘법연화경은 대승불교가 성립하여 만개했던
기원 1세기경 서북 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독송해 왔던 구마라집이 역출한 묘법연화경은 전 28장으로
되어 있으나 산스크리트본(梵本)은 27장으로 되어있다.
민족사판 묘법연화경은 산스크리트본을 저본으로 하여 번역하였고
27장을 구마라집 한역에 기준하여 다시 28장(28품)으로 나누었다.
제 1장 서 품(序品)
제 2장 절묘한 방편(方便品)
제 3장 비유의 가르침(譬喩品)
제 4장 믿 음(信解品)
제 5장 약초의 비유(藥草喩品)
제 6장 성불의 예언(授記品)
제 7장 신통력으로 만든 성(化城喩品)
제 8장 오백 제자에게 수기(五白弟子授記品)
제 9장 유학 무학의 제자에게 수기(授學無學人記品)
제 10장 설법자 (法師品)
제 11장 불탑의 출현(見寶塔品)
제 12장 제바닷타(提婆達多品)
제 13장 한결같은 노력(持品)
제 14장 안락한 삶(安樂行品)
제 15장 수많은 보살의 출현(從地涌出品)
제 16장 무량한 여래의 수명(如來壽量品)
제 17장 공덕의 차이(分別功德品)
제 18장 법문을 듣는 기쁨(隨喜功德品)
제 19장 설법자의 공덕(法師功德品)
제 20장 상불경보살의 덕화(常不輕菩薩品)
제 21장 여래의 신통력 (如來神力品)
제 22장 제자들에게 위촉(囑累品)
제 23장 약왕보살의 과거인연(藥王菩薩本事品)
제 24장 묘음보살(妙音菩薩品)
제 25장 관세음보살의 위신력(觀世音菩薩普門品)
제 26장 다라니(陀羅尼品)
제 27장 묘장엄왕의 출가(妙莊嚴王本事品)
제 28장 보현보살의 발원(普賢菩薩勸撥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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