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청계(靑溪)-왕유(王維;?699-761?)

[푸른 개울물]

言入黃花川
(언입황화천), ;황화천에 들어와

每逐靑溪水
(매축청계수). ;푸른 개울물 쫓아간다

隨山將萬轉
(수산장만전), ;물 흐르는 산을 따라, 만 굽이를 돌았으나

趣途無百里
(취도무백리). ;길은 백리도 못갔네

聲喧亂石中
(성훤난석중), ;흩어진 바위 돌에 물소리 요란하고

色靜深松里
(색정심송리). ;깊은 소나무 고을, 경치는 고요하다.

漾漾泛菱荇
(양양범능행), ;마름풀은 둥둥 떠다니고

澄澄映葭葦
(징징영가위). ;물에 비친 갈대는 맑기도 하구나

我心素已閑
(아심소이한), ;내 마음 본래 한가로워

淸川澹如此
(청천담여차). ;맑은 개울물 담박하기 내 마음 같구나

請留盤石上
(청류반석상), ;청컨대 너른 바위에 앉아 

垂釣將已矣
(수조장이의). ;낚싯대 드리우고 이렇게 살리라. 

 

015

- 푸른 시내

 

황화천에

들어와

매양 푸른 시냇물을

따라 갔노라.

 

물은 산을 따라 굽이쳐

배는 만 번이나 돌았건만

갈 길은

비록 백 리도 못되었네.

 

흐트러진 돌 가운데

소리는 시끄럽고

깊은 소나무 가운데

경치는 고요하더라.

 

시내 가운데 마름풀들은

물결따라 떠다니고

시냇가의 갈대는

맑게도 비치도나.

 

내 마음

본디 한가로와

맑은 시냇물

이와 같이 담박하구나.

 

청컨대

반석 위에 머물러

낚싯대 드리우고

한평생을 마칠진저.

 

 

014송기무잠낙제환향(送綦毋潛落第還鄕)-왕유(王維)
기무잠이 과거에 떨어져 고향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왕유(王維)

聖代無隱者(성대무은자) : 태평한 시대에 은자는 없어
英靈盡來歸(영령진내귀) : 뛰어난 인재들이 모두 조정에 돌아왔다네
遂令東山客(수령동산객) : 산동에 귀양살이 하던 나그네도
不得顧采薇(부득고채미) : 고사리 캐는 생활 할 수 없었던가
旣至金門遠(기지금문원) : 이미 금마문에 이른지 오래지만
孰云吾道非(숙운오도비) : 누가 우리들의 이상이 그릇되다 하리오
江淮度寒食(강회도한식) : 고향 떠나 강회에서 한식을 보내는데
京洛縫春衣(경낙봉춘의) : 장안가 낙양에서는 봄옷을 만드네
置酒長安道(치주장안도) : 장안길에 술자리 마련함은
同心與我違(동심여아위) : 마음 맞는 옛 친구와 이별이라네
行當浮桂棹(항당부계도) : 그대 떠남에 배를 탈 것이니
未几拂荊扉(미궤불형비) : 얼마 되지 않아 그대 집 대문에 닿겠지
遠樹帶行客(원수대항객) : 멀리 보이는 나무 나그네 안고
孤城當落暉(고성당낙휘) : 외로운 성에는 저녁빛이 깔리겠지
吾謀適不用(오모적부용) : 우리들의 생각이 마침 나라에 쓰이지 못하지만
勿謂知音稀(물위지음희) : 참된 친구 드물다고 생각하지 말게나

 

014송기무잠낙제환향(送綦毋潛落第還鄕)-왕유(王維)

-과거에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모잠을 보내며

 

태평한 시대에

은사가 없어

현재들은 다

조정에 모였네.

 

사안 같이

동산에 숨어살던 그대마저도

고사리 캐는 생활

계속할 수 없었구나.

 

그대 이미

금마문은 멀어졌지만

그 누가 우리들의 이상이

틀렸다고 말할 것인가?

 

고향 떠나 강회에서

한식절 맞았는데

장안과 낙양에는

또다시 봄옷을 만드는구나

 

오늘 장안길에

술을 놓고 그대를 전별하니

옛 친구

나와 덜어지게 되었음이라.

 

먼 곳 나무들은

멀리 오는 사람을 안고섣양 노을은

외로운 성에 비치겠지.

 

그대는 곧

배를 타고

얼마 안 가

그대 집 문에 닿으리니.

 

우리들의 계획이

비록 나라에 쓰일 수 없었지만

결코 지음이 적다고

한탄일랑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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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천도 운동, 묘청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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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상 한시의 영원한 생명력, 동악어문론집 제31집, 1996년.

논문이어서 각주가 복사되지 않네요. 양지 바랍니다.

鄭知常 漢詩의 영원한 생명력

金 英 東

目 次

1. 머리말

2. 정지상 시의 매력

3. 고독한 날의 편린들

  1) 고향에서의 몸부림

  2) 십 년 동안의 고독

4. 諫官의 正論과 近臣의 逆說

  1) 현실 초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

  2) 西京三聖의 빗나간 애향심

5. 천재시인에 대한 끝없는 흠모

 

1. 머 리 말

 

서경의 한미한 가정에서 출생한 정지상은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1135년(인종13) 피살되었다. 유일한 시문집인 ≪정사간집≫마저 소실되고 보니 그가 과거시험에 합격한 1112년(예종7) 3월 이전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하는 것이 없다. 오직 그의 어머니에게 인종이 물품을 하사하신 데 대하여 감사하는 글인 <謝賜物母氏表>와 ≪파한집≫에 전하는 長短句 한 편이 남아 있어 편모슬하에서 외

 

<도표-1> 정지상 시의 출전

작품명

출전

동문선

여지승람

보한집

삼한시귀 감(영인)

청구풍아

기타

백운소설

기타

대동시선

기타

1.백률사

21.경주불우

동경잡기,불우

2.송인

권 9

p.11

해동시선

기아

대동시선

3.영죽

상 21

4.하운다 기봉

백운,제5

5.장원정

권 12

13,풍덕군 고적

p.74

청구풍아

대동시선

6.춘일

권 12

p.75

7.분행역

권 12

8,죽산현 역원

상 21

8.등고사

권 12

대동시선

9.개성사 팔척방

권 12

42,우봉현 불우

동시정선

10.제변산 소래사

권 12

상 21

청구풍아

소화시평

기아

대동시선

11.월영대

32,창원도

호부고적

상 21

12.서도

권 19

51,평양부제영

상 21

p.76

‘西郊’

청구풍아

기아

대동시선동시정선

13.송인

권 19

51,평양부산천

p.76

역옹패설성수시화

파한집,하

30,기아

대동시선

동시정선

14.취후

권 19

p.77

청구풍아

기아

대동시선

동시정선

15.장원정

권 19

13,풍덕군

고적

상 21

청구풍아

16.단월역

권 19

14,충주목

역원

상 21

17.신설

권 19

p.75

18.영곡사

14,충주목

19.(미상)

동인,상9

20.(미상)

파한하30

21.영두견

소화.

22.백로

23.(미상)

백운소설

24.영남사루

하제1

*(형식)1;오언고시, 2~4;오언율시, 5~11;칠언율시, 12~19;칠언절구, 20;장단구,

21~23;오언단구, 24;칠언단구.

 

롭게 성장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십여 년간 천리 타향에서 표박한 젊은 날의 고독과 좌절감을 후세에 전할 따름이다.

그의 작품으로는 <도표-1>에 나타난 바와 같이 20편의 한시와 4편의 聯句밖에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도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삼한시귀감≫ 이후의 수많은 詩華集, ≪파한집≫ 이후의 대부분의 詩話集 등에 나타난 정지상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사후 한 시기도 단절된 적이 없다. 이미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이인로(1152-1220)의 ≪파한집≫ 이후 최자(1188-1260)의 ≪보한집≫, 이규보(1168-1241)의 ≪백운소설≫,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 최해(1284-1340) 批點 조운흘(1332-1404) 精選의 ≪삼한시귀감≫ 등 모든 한시 관련 문헌들이 그의 행적과 상관없이 그를 고려조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는 데 이론이 없었다.

한시가 양반관료지배계층의 징표이자 교양의 한 척도였던 조선시대에는 물론,한시가 창작의 대상에서 벗어나 감상의 대상으로 그 절반의 기능을 상실한 광복 이후, 더욱 가깝게는 1965년 양주동의 인물연구 이후에 발표된 단독 학술 관련 연구논문만19편에 달하는 것은 정지상 한시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그의 한시가 신랄하게 현실을 비평한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시간적으로 부단히 인구에 회자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수용미학적 관점에서 정지상 한시의 매력을 점검한 다음, 그의 작품에서 추출한 정서를 기준으로 그의 삶의 궤적을 재구성해 보기로 하겠다.

이 <도표-1>을 마련한 것은 現傳하는 그의 전작품에 대한 출전을 밝힘으로서 수용미학적 연구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다. 도표에는 동일 제목에 대한 혼란을 방지하고 쉽게 작품을 찾아볼 수 있도록 작품의 고유번호를 부여하였고 그 순차는 ≪동문선≫의 형식에 따른 순서를 따랐다.

 

2. 정지상 시의 매력

 

정지상의 한시가 부단히 애송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필자는 그 매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첫째, 평이하나 원숙한 일상어를 시어로 차용한 점이 지적된다. 현대시에서도 일상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면 독자들의 마음에 쉽사리 각인되게 마련이다. 그의 시구가 문헌에 따라 달리 표기된 경우가 있는 것도 筆寫 상의 착오라기보다 口誦에서 발생한 오류로 추정된다. 일상어를 시어화한 용례를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a.故國江山千里遠 고향의 강산은 천 리 밖에 먼데

一樽談笑萬緣空 한 두루미의 술 마시며 담소하니 만 가지 인연 부질없네.

b.百年風雅新詩句 한 평생 시 짓는 일은 새로운 시구 찾기

萬里江山一酒杯 만 리 길 강산 유람에 술 한 잔 없을소냐.

 

a는 <6.春日>의 경련이고 b는 <11.月影臺>의 경련이다. a의 고국,강산, 천리,담소와 b의 백년, 시구, 만리,강산은 오늘날의 워드 프로세스에도 한자 단어로 수록될 만큼 너무나 평이한 일상어들이다. 一酒杯도 당초 一杯酒를 脚韻을 맞추기 위해 음절을 바꾼 데 불과하다. 천하의 대시인의 시구에서 이러한 일상어를 확인하는 독자의 기쁨은 작가와의 친숙감을 배가시켜 한 걸음에 작가의 시의 경지를 찾아 바장이게 한다.

둘째, 절차탁마한 절창의 련구들을 들 수 있다. 율시의 함련과 경련은 對偶를 맞추는 것이 필연이므로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교양의 척도인 한시 창작을 위하여 對句에 대한 많은 수련을 쌓았다. 이는 선배 시인들의 작품을 섭렵하는 고된 작업을 요구했으므로 조선시대 초기에는 ≪百聯抄≫ ≪百聯抄解≫등이 편찬 되어 童蒙들의 시학습을 도왔다. ≪백련초≫는 칠언고시에서 일백 개의 對句를 뽑아 모은 것으로 ≪백련초해≫와의 선후관계는 확실치 않다. ≪백련초해≫의 현존 최고본은 명종18년(1563) 판본이다. 오백 聯句를 ≪千字文≫의 순서에 따라 첫구를 시작한 ≪千字聯句≫의 작자를 金時習으로 단정한 정주동은 김시습을 ≪백련초해≫의 작자로 추정했다. 표현의 참신성을 살피기 위해 대구의 전범이 된 聯句 몇 개를 뽑아 본다.

 

a.花笑檻前聲未聽 꽃이 난간 앞에서 웃되 소리를 듣지 못하고

鳥啼林下淚難看 새가 수풀 아래서 울되 눈물을 보기 어렵도다.

b.螢火不燒籬下草 반디불은 울타리 아래 풀을 사루지 못하고

月鉤雖掛殿中簾 달의 갈구리는 집 가운데 발을 걸기 어렵도다.

c.月掛山空無柄扇 달이 산 위에 걸렸으니 자루 없는 부채이고

星排碧落絶纓珠 별이 하늘에 벌여 있으니 끈 끊긴 구슬이로다.

d.山影入門推不出 산 그늘이 문에 드니 밀되 나가지 않고

月光鋪地掃還生 달빛이 땅에 펴지니 쓸어도 도로 나놋다.

 

번역은 언해의 번역을 충실히 따랐다. 시가 일상에 묻혀 버린 감성을 새롭게 하고 삶에 대한 깨달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위에 예시한 聯句들은 모더니즘의 시인들도 부러워 할 동심의 순수성을 표출하였다. 대구로서의 짝맞추기는 기본이요 淸新한 감수성이 시구마다 번뜩인다.

a는 일상어를 되짚어 본 기쁨이다. 한자문화권의 새는 언제나 울었다. 새가 운다면 꽃이 웃는 건 지극히 상투적이다. 그런데 왜 인간은 꽃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하고 새의 눈물을 보지 못하는가? b의 첫구는 a의 연장선에서 이뤄졌고 둘째구는 초승달을 갈구리로 인식한 데서 시인 특유의 감수성이 발동된다. 갈구리를 보니 문에 거는 발이 연상된다. 그러나 이 갈구리에는 왜 발을 걸 수 없는가, 하는 것이 시인의 외침이다. c에서는 산 위에 반쯤 내민 보름달과 하늘에 흩어진 별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투명한 눈빛이 감지된다. d도 고차원으로 세련된 감수성이 아니고는 넘나들기 어려운 경지이다. 한 번 문 안에 들어선 산의 그림자는 아무리 밀어도 미동도 않고 대지에 깔린 달빛은 아무리 쓸어도 쓸려 나지 않고 도로 쌓여만 간다. 빛과 그림자와 어우러져 한바탕 씨름하는 시인의 철부지한 지적 모험이 도리어 눈물겹기까지하다.

조선시대의 아동용 시 학습서가 ≪백련초≫ ≪백련초해≫였다면 고려시대의 그것은 ≪宋賢集≫이다. 이제현은 ≪역옹패설≫에서 그 가운데 荊國公 王安石의 칠언절구 8수를 예시하고, ‘한 字 한 句는 투명한 구슬이 소반 위에 구르듯이 완곡하게 표현하여 사랑스럽다.’고 言表의 절묘함을 격찬하였다.

정지상의 현전 한시 가운데 10작품이 율시이므로 그는 빼어난 聯句들을 많이 남겼다. 본문에서 다루지 않은 그의 모든 작품이 이 논문의 부록으로 다뤄질 예정이고, 다음의 요체시 설명에서 제시한 대구들도 한국 시화집에서 흔히 예시되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例擧를 생략한다.

셋째, 그는 晩唐 때에 유행한 拗體詩의 명수였다. 고려조에서 가장 성률에 밝았던 이제현은 칠절 <13.送人>의 결구를 添綠波로 결론 짓고, 아래의 시구들은 이 시인이 즐겨 쓰는 운율이라고 밝혔다.

 

a.地應碧落不多遠 땅은 하늘에 맞닿아 그다지 멀지 않고

人與白雲相對閑 스님은 한가로이 흰 구름 마주하였네.

b.浮雲流水客到寺 뜬 구름 흐르는 물 같은 길손 절간에 들어가니

紅葉蒼苔僧閉門 단풍잎 푸른 이끼 속의 스님 문을 닫치는구나.

c.綠楊閉戶八九屋 푸른 버들 속 여남은 집은 문을 닫았는데

明月依樓三四人 밝은 달 아래 서너 사람 누각에 기대섰네.

d.上磨星斗屋三角 위로 북두성을 만질 듯한 세모난 절집엔

半出虛空樓一間 반쯤 허공에 솟아 나온 누각이 한 칸.

e.石頭松老一片月 바위 위 늙은 소나무엔 하 조각 달이요

天末雲低千點山 하늘 끝 구름 아랜 일천 점의 산이로다.

 

d는 칠언절구 <18.靈鵠寺>의 전구와 결구이고, 나머지는 모두 칠언율시에서 취했는데 a는 <8.題登高寺>의 함련, b는 <10.題邊山蘇來寺>의 함련, c는 <5.長源亭>의 경련, e는 <9.開聖寺 八尺房>의 경련이다.

서거정(1420-1488)도 정지상 시의 특징을 시어의 운율이 청신하고 화려하며[淸華] 시구의 풍격이 호방하고 표일하니[豪逸], 이는 晩唐의 시법을 깊이 체득한 것으로 더욱 拗體에 능했다.고 요약했다. 이어서 위의 聯句 a, c, e를 들고, 이러한 시구들은 읊자마자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당시 많은 사람들의 입에 膾炙되었다.가히 일세를 풍미할 정도로 뛰어나다는 극찬까지 아끼지 않았다. 위에서 이제현이 말한 이 시인이 즐겨 쓰는 운율이란 바로 이 요체를 말하는데 서거정은 요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요체라는 것은 唐의 시율에서 변한 것으로 고금에 걸쳐 작자는 많지 않다. 그 작법은 운율이 변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下平字를 仄韻字로 換韻해서 用韻하는 것으로 말의 기운을 새롭고 굳세게 하여[奇健] 별나게 이루고자 한 것이다. 만당 사람들이 이 체를 즐겨 사용했다. 정지상의 시에서는 요체의 묘리를 깊이 체득했지만 그를 뒤이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가 오직 영헌공 金之岱만이 그 요체의 법을 터득하였다.

 

홍만종(1643-1725)도 요체를 설명하여, “성률의 변화이다. 평성을 써야 하는데 측성을 쓰고 측성을 써야 하는데 평성을 사용”한 것이라 하였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형성된 근체시의 평측법에 성률상의 변화를 준 것은 만당 때에 유행되었는데 홍만종은 측성 자리에 평성을 둔 것도 요체라고 정의하여 요체의 설명을 보완했다.

근체시의 평측법에서 흔히 제1자와 제3자와 제5자 중에는 평측을 논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므로 下三字를 중심으로 평측의 교체를 점검해 보기로 하겠다. a는 仄起格이어서 함련 前句의 제5자,제6자가 평성이어야 하는데 제5자가 측성이고, 後句의 제5자는 측성의 자리인데 평성을 놓았다. b는 측기격이어서 함련 전구의 제5자, 제6자가 평성인데 모두 측성으로 바꾸었고, 후구 제5자의 측성 자리에는 평성을 사용했다. c는 平起格이어서 경련의 전구 제5자, 제6자는 평성이어야 하는데 모두 측성을 사용하고, 후구 제3자, 제4자는 평성이어야 하는데 제3자에 측성을 배치했다. d는 측기격이어서 轉句에 해당하는 前句의 제5자, 제6자는 평성이어야 하는데 제5자가 측성이다. 끝으로 e는 측기격이어서 경련 전구의 제4자, 제5자는 평성이어야 하는데 모두 측성이고, 후구의 제5자는 측성이어야 하는데 평성을 구사했다.

 

넷째, 그의 탁월한 서정성 내지 감수성을 들 수 있다. 등과하기까지의 고독했던 젊은 날들은 그의 뛰어난 감수성을 갈고 닦아 名器로 단련했을 것이다. <13.送人>의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에서 보여주는 곰살궂은 표현은 그 작품을 천고의 절창으로 떠받들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시구의 내용을 부등식으로 나타내 보기로 하자. 강물을 R이라 하고 눈물을 ‘α’라 하면, 언제나 ‘α> 0’이다. 따라서 ‘R+α>R’이다. 눈물 한 방울로 불어나는 강물, 해마다 강나루에서 이별하는 연인들의 눈물로 강물이 마르지 않는다니 이런 억지가 없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과학적으로도 사리에 딱 들어맞는 이러한 상상력을 표출한 이가 없으니 정지상은 단연코 천고의 절창 자리를 차지하였다. 남포 나루의 강물은 이미 자연의 강이 아니라 시적 화자의 마음 속에 자리한 또 다른 강이다. 이 마음 속의 강물은 눈물 한 방울에도 광풍을 만난 듯 거대한 파문을 일으키는 그런 강물이다.

 

정지상 시에 대한 평가는 ≪고려사≫의 晩唐의 詩體를 얻어 더욱 절구에 工巧하고 詞語가 淸新 華麗하며 韻格이 豪放 飄逸하여 스스로 一家의 법도를 이뤘다.는 것이 正論이고 후세의 비평가들도 이를 받아들여 정지상이 나오면 으례 이 말을 되풀이하였다

杜甫(712-770)도 <春日憶李白>에서 淸新庾開府라 하여 庾信의 시를 淸新하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晩唐 때의 司空圖(837-908)는 두 음절로 24종의 시의 풍격을 설정한 적이 있는데 淸新하다는 시풍은 사공도의 24시품중 16번째의 淸奇에 해당하고 華麗는 9.綺麗에 해당한다. 청신한 시풍은 연약함에 빠지기 쉬우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이함을 갖춰야한다. 綺麗 또한 공소한 미사려구에 빠지기 쉬운 점이 보완되기 위해서는 천연성의 확보가 급선무이다. 11.豪放은 浩然之氣로 돌아가 기상이 크고 사소한 절도에 얽매이지 않음을 뜻하고, 22.瓢逸은 구름을 지르고 하늘을 나는 신선의 정취와 방불함을 의미한다.

 

정지상이 일가의 법도를 성취했다고 지적함은 그러한 시품들이 범하기 쉬운 약점을 극복하고 당당히 일가를 내세울 만큼 개성적인 시법을 구비했음을 인정함이다. 더구나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별도의 열전을 갖지 못하고 叛逆의 항에 분류된 묘청의 傳記 끝에 몇 줄 적은 기록 치고는 정지상으로서는 너무나 과분한 대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정치적 처신 때문에 그의 시적 성취와 위업마저 지워 버리지 못하는 역사서 편찬자의 고심이 짚혀진다.

 

이러한 정지상의 시법은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님은 물론이다. 새로운 시구를 찾아 고뇌하는 정지상의 모습은 현전하는 20수 가운데 2수에나 투영되었다.

 

a.興來意欲題新句 흥겨워 새로운 시 한 수를 쓰려 하나

下筆慚無氣吐虹 붓 들어 적으려 하니 豪氣 모자라 부끄러우이.

b.百年風雅新詩句 한 평생 시짓는 일 새로운 시구 찾기였는데

萬里江山一酒杯 만리길 강산유람에 술 한 잔 없을소냐.

 

a는 <6.春日>의 미련이고,b는 <11.月影臺>의 경련이다. a에서는 절구의 결구나 율시의 미련을 쓸 때 만나게 되는 고충을 토로하였다. 한시를 마무리하는 데는 두고두고 독자의 뇌리에 여운을 남길, 확 차고 올라가 꽝 치는 그런 표현을 갈망하게 된다. 작자 자신에게마저 덤덤한 표현이 어떻게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겠는가? b에서는 숫제 새로운 시구 찾는 일이야말로 한 평생 동안의 자신의 시 창작의 임무로 여기고 있음을 표방하였다.

 

다섯째, 유교적 교훈보다 불교 노장 사상의 표출은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그것도 실천유학과 주자설에 바탕한 성리학 중심의 편협한 학문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이미 최치원의 <난랑비서>에서 화랑정신으로 명시한 유불선에 대한 지식은 지배계층의 보편적 교양이었다.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의 축적은 과거에 대비하고 현달의 현실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수적이고 불교 도교에 관한 지식의 섭렵도 폭 넓은 교유와 원만한 정신생활을 위하여 절실한 과제였다. 12세기 전기의 지식인 정지상도 유불선의 지식에 통달했다.

 

≪고려사≫에는 정지상이 경연에 참가한 것을 네 군데나 전한다.

 

a.인종5년11월 을묘에 기린각에 거동하여 정지상에게 명하여 서경의 無逸편을 강의케 하고 從臣들과 西京 儒臣 이십오인을 불러 시를 짓게 하고 酒食을 賜하였다.(권15)

b.인종 10년 3월 임인에 기린각에 거동하여 國子司業 윤언이에게 명하여 역경의 건괘를 강의케 하고 承宣 鄭沆과 예부랑중 李之저와 起居注 정지상 등으로 하여금 問難케 하였다.(권16)

c.인종 10년 하사월 갑술에 정항과 윤언이와 정지상을 다시 경연에 나와 경서를 강의케 하고 아울러 花犀帶 一腰씩 사하였다.(권16)

d.인종11년5월 임신에 시장을 옮겼다. 崇文殿에 거동하여 평장사 김부식에 명하여 주역과 상서(서경)를 강의하게 하고 한림학사 승지 金富儀와 知奏事 洪彛敍와 承宣 정항과 기거주 정지상과 司業 윤언이 등으로 하여금 논난케 하였다.(권16)

 

a에서는 ≪서경≫의 무일편을 강의했음을 명시했고, c에서는 경전 이름은 밝히지 않았으나 삼경 중 하나를 강의했을 것이다. 인종 5년(1112)이면 등과한 지 15년이 경과했으므로 정지상의 연령은 이미 4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이즈음에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하는 경연에서 강의를 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경학에 대한 높은 학식을 가늠케 한다. b에서는 ≪역경≫의 건괘, d에서는 ≪주역≫과 ≪서경≫ 상서편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질문하게 한 것 역시 경연임을 전제하면 고급한 질문을 던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처럼 그는 유학 경전에 박학했으나 그가 篤信한 것은 불교와 도교의 사상이었다.

 

그가 남긴 전편이 전하는 산문은 ≪동문선≫에 실린 5편이 전부인데 왕을 대신하여 지은 <轉大藏經道場疏>에서 불교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 국태민안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엎드려 원하건대, 재앙은 햇살 앞에 눈 녹듯 사라지고 복은 오직 천 가지 만 가지로 이르러서 하늘의 아들된 이는 크게 長壽의 경사를 누리게 하시고, 끝없이 백성을 보전하여 임금의 성덕을 칭찬하고 그리워하는 경사를 앉아서 받게 하소서. 號令은 북극의 불모지에 미치게 하시고, 금목수화토의 오행은 각각 그 마땅함을 얻게 하소서. 온화한 기운이 이뤄져서 백곡은 풍년이 들고, 아름다운 왕의 교화가 이뤄져서 사방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이 없게 하소서. 근본은 만세를 지탱하게 하고, 기강은 온 천하를 규율하게 하소서. 우러러 부처님의 원만한 깨달음을 대하오니, 간절히 기도하는 至誠이 견딜 수 없습니다. 삼가 疏하나이다.

 

약 6주야 동안 대장경을 전경하는 도량을 개설한 공덕으로 종묘사직의 평안과 나라의 영구한 태평을 약속한다면 뉘라서 이를 마다할 것인가?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 其一이 我 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으로 시작함을 감안하면 여러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의지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풍년을 기약하며 국력을 확장 시키려는 기원은 국시에도 부합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심이다.

 

그러나 정지상의 문학을 비평한 이들은 그의 참다운 독자성을 노장사상에서 찾는다. 이인로는 인구에 회자되는 정지상의 시문으로 <12.送人> <20.제목미상>과 함께 다음 시구를 순서대로 예시하였다.

 

a.風送客帆雲片片 바람이 길손의 돛배를 보내니 구름처럼 가볍게 뜨고

露凝宮瓦玉鱗鱗 이슬이 궁궐 기와에 맺히니 구슬처럼 반짝인다.

綠楊閉戶八九屋 푸른 버들 속 여남은 집은 문이 닫혔고

明月捲簾三兩人 밝은 달 아래 두어 사람 발 걷고 앉았네.

b.鶴背登眞 乘白雲於杳莫 학을 타고 등선하여 백운을 타니 아득하고,

螭頭記事 披紫詔之丁寧 비석에 사실을 기록하니 紫詔 내림이 친절하도다.

c.年踰七十 不雜中壽之徒 나이가 칠십을 넘었으니 中壽에서 떠난 게 아니며,

功滿三千 必被上淸之召 공덕이 삼천을 채우니 반드시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으심이로다.

d.而出入先生之門 其來久矣 선생의 문에 드나든 것이 그 유래 오래거든

況對揚天子之命 無所辭焉 하물며 天子의 명을 對揚하매 사양할 것이 없도다.

 

a는 <5.長源亭>의 함련과 경련인데, a다음에 그 말의 뛰어난 구사력이나 속진을 벗은 품위가 모두 이와 같았다는 비평을 실었다. b, c, d는 東山齋 眞靜先生인 郭輿의 제문을 지을 때에 역시 정지상에게 <동산재기>를 짓게 했는데 그때 올린 表文의 단편들이다. 동산재는 예종의 동궁시절 寮佐로 있었던 郭輿로 예종 즉위 후 궁중에서 지내다가 성의 동쪽 약두산 아래 거처를 옮겼을 때 동산처사라 한 데서 유래한다. 실제로 예종이 친서하여 사액한 堂名은 虛靜, 재실명은 養志였다.

이제현도 司諫 정지상이 老莊을 즐겨했고 <동산진정선생비>를 지었는데 그 글이 너울너울 烟霞의 想을 지녔다.고 지상 시문의 사상적 특질을 지적했다.

실제로 <5.長源亭> <15.長源亭>에 의거하면 그의 시에서 이상향으로 추구된 것은 도교적 상상력에 의해 구축된 봉래산이고, <9.開聖寺 八尺房>에 의지하면 그의 이상적 인간형은 幽人이다.

 

3. 고독한 날의 편린들

1) 고향에서의 몸부림

먼저 연령 추정 작업을 시도해 보면, 그에 생애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1112년(예종7) 3월 성시에 수석으로 급제한 사실이다. 그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20.제목미상>의 다음 시구가 한 단서를 제공한다.

 

桃李無言兮蝶自徘徊 복사꽃 오얏꽃은 말이 없어도 나비가 스스로 넘나 들고,

梧桐蕭洒兮鳳凰來儀 오동은 말쑥하나 봉황이 와 멎듯이

無情物引有情物 무정한 물건이 유정한 물건을 끌거니

況是人不交相親 하물며 절로 친해진 사람들끼리랴

君自遠方來此邑 그대 먼 곳에서 이 고을에 와서

不期相會是良因 나와 절로 친했으니 이 무슨 인연이런가.

七月八月天氣凉 칠월, 팔월에 날씨도 서늘하여

同衾共枕未盈旬 한 이불 한 베개에 며칠을 지냈것다.

我若陳雷膠漆信 나는 陳重과 雷義의 膠漆처럼 믿음직하나

君今棄我如敗茵 그대는 나를 버리기를 헌 자리 같이 하는구나.

父母在兮不遠遊 부모님이 계셔 멀리 길 떠날 순 없고

欲從不得心悠悠 함께 못가니 마음만 훨훨 내닫네.

簷前巢燕有雌雄 처마 끝에 깃들인 제비도 암수가 있고

池上鴛鴦成雙浮 연못 위의 원앙새도 쌍쌍이 떠 있더라.

何人驅此鳥 어느 누가 저 새들을 훠이훠이 날려서

使我解離愁 나의 이 이별의 설움을 풀어줄까.

 

이인로가 垂髫時의 작품으로 <13.送人>을 소개하고 이어서 장단구 형식의 이 시를 제시한 다음, 其後赴上都 擢高第라 했으므로 이 두 편은 고향인 평양을 떠나기 전의 작품으로 간주된다. 위의 작품은 ‘그대는 나를 버리기를 헌 자리 같이 하는구나’.라는 시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친구와의 이별을 슬퍼한 시다. 먼 곳에서 이 고장, 곧 평양에 온 그는 시적 자아인 나와 친분을 쌓아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는 훌쩍 내 곁을 떠나갔다. 아마도 청운의 꿈을 안고 개경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이 계셔 멀리 길 떠날 순 없고/ 함께 못 가니 마음만 훨훨 내달을 뿐이다. 암수가 쌍쌍이 노니는 제비와 원앙을 바라보며 작자는 저 새들이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가슴 속에 차오르는 이 이별의 설움이 잊혀질까, 하고 넌짓 딴청을 부려본다. 그 새들이 興의 수사법처럼 친구와의 다정다감했던 한 때를 상기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새들이 날아가 버린다고 지워질 마음 속의 고독감과 적막함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홀로 고향에 남겨진 정지상의 이별의 情恨 저 편에는 고향을 떠나 개경으로 향하는 그의 간절한 소망이 서려 있다는 점이다. 청운의 꿈을 안은 서경의 젊은이들은 <2.送人>과 <13.送人>의 님처럼 기약 없이 떠나 버리는 데서 그 고장에 버려진 사나이로서 맞딱뜨린 좌절감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에 시적 자아는 숙명처럼 어두운 절망을 간신히 추스려 이별의 정한으로 승화시킨 것이 이 작품들이다.

 

그리고 <謝賜物母氏表>에는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 學庠[國子監]에 와 입학했으나 십여 년간 일이 뜻대로 안 되고 일천 리 밖에서 漂泊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정지상은 15세 무렵의 약관에 고향을 떠날 때는 이미 아버지를 여의었고, 국자감 생활이 얼마 동안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의지할 곳 없는 천 리 타향 개경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좌절과 절망뿐이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15세 무렵의 약관에 꿈에도 그리던 국자감에 입학했으나 십여 년간 과거의 방에는 오르지 못하다가 20대 후반에야 급제의 영광을 안은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가 급제한 해인 1112년에서 27년쯤을 빼면 그는 1085년경 출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국자감에 입학한 처지를 들어 한미한 출신 성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논문도 있으나 <謝賜物母氏表> 가운데 초야의 미미한 몸이 縉紳 선생의 뒤를 좇아 대궐에 몸을 의탁했음을 감안하면 비록 겸사라 하더라도 대대로 縉紳을 유지해 온 문벌계층은 아님이 확실하다.

 

끝으로 이 시기의 대표작을 통해 그의 심경을 가늠해 보기로 하자.

 

a.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뚝에 풀빛도 선명한데

送君南浦動悲歌 남포에서 임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건가.

別淚年年添綠波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

b.庭前一葉落 뜰 앞에 한 잎 떨어지고

床下百蟲悲 마루밑 온갖 벌레 슬프구나.

忽忽不可止 홀홀히 떠남을 말릴 수 없네만

悠悠何所之 유유히 어디로 가는가.

片心山盡處 한 조각 마음은 산이 다한 곳,

孤夢月明時 외로운 꿈은 달이 밝을 때.

南浦春波綠 남포에 봄 물결 푸르러질 때,

君休負後期 그대는 훗날의 기약 제발 잊지 마오.

 

a는 설명이 필요 없는 <13.送人>이고, b는 오언율시인 <2.送人>이다. a의 결구의 문자에 대한 異論이 있으나 김만중(1637-1692)의 다음 언표가 그 정론이다.

고려 정사간의 <南浦> 절구는 곧 해동의 渭城三疊이다. 끝 구의 別淚年年添作波를 혹 添綠波라 하기도 하는데 益齋(필자주;李齊賢)는 마땅히 綠波를 좇을 것이라 했고, 四佳(필자주;徐居正)는 作자가 낫다 하였다. 생각컨대 沈休文(필자주;江淹의 잘못)의 <別賦>에 이르기를,

 

春草碧色 春水綠波 送君南浦 傷如之何

 

라 했으니, 정사간의 시가 바로 沈休文(필자주;강엄의 잘못)의 말을 쓴 것이므로 綠波를 바꿀 수 가 없다.

위성삼첩은 왕유(699-759)의 渭城朝雨읍輕盡으로 시작하는 칠절악부 <渭城曲>을 노래할 때에 한 구 이상을 세 번 중첩되게 반복한 데서 붙여진 말이다. 당나라 사람들은 벗을 송별할 때에 이 노래를 부르므로 陽關三疊의 唱法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김만중이 a를 해동의 위성삼첩이라 지적한 것은 신광수(1712-1775)의 千年絶唱鄭知常의 先唱이다. <관서악부병서>에서는 이 시구를 풀이라도 하듯 정지상의 官船 一絶은 비로소 악부의 뜻을 얻어 가락이 천년 절창이라 할 만하고 盛唐에 견줄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허균(1569-1618)도 ≪성수시화≫에서 정대간의 시는 고려가 번성했을 때에도 그 중 가장 아름다웠다.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주 적지만, 작품마다 모두 절창임을 전제하고 시구를 예시하여 <5.장원정>의 함련은 조금 가볍지만, <5.장원정>의 경련에 이르러서는 바야흐로 神品처럼 빼어나다. 그의 <9.개성사 팔척방>의 경련도 비록 애는 썼지만 또한 청초하다고 논평했다. 이어서 a를 예거하고 이 시는 지금까지도 절창이라고 한다. 다락에다 걸어 둔 시들은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모두 걷어 치우지만 오직 이 시만은 그대로 둔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申 緯(1769-1845)는 ≪警修堂集≫에서 이색(1328-1396)과 정지상의 풍격을 비교하여,

豪艶逸難相下 웅호와 염일이 각기 최고의 경지

偉丈夫前窈窕娘 한 분은 웅위한 사나이,한 분은 아리따운 아가씨.

라고 했다. 곧 이들 시인의 특징을 이색은 웅위한 대장부에, 정지상은 요조숙녀에 비견하였다. 그리고 나는 일찍부터 서경의 고급 題詠은 다만 두 절창이 있을 뿐이라 했는데, 이색의 長嘯倚風磴 山靑水自流와 정지상의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의 두 시가 그것이다. 그런데 我朝(필자주;조선시대)에는 그 메아리를 이은 이가 없다.고 자신의 논시를 해설하기도 했다.

 

a의 기구 雨歇長堤草色多에서 草色多에 대한 번역이 분분하나 <6.春日>의 物象鮮明 霽色中, 곧 활짝 갠 날씨에 자연 속의 사물들이 선명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풍경과 일치한다. 따라서 草色多는 풀빛이 선명하다고 번역하는 것이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님이 떠나간다기에 실컷 울고 싶은 날에 내 심정을 대신하여 하늘에선 비를 퍼붓더니만 금새 온 몸에 햇살을 받은 긴 방뚝의 풀빛은 눈이 시리고 서럽도록 초록빛도 선명하다. 이러한 풍경을 배경으로 남포 포구에는 구성진 이별의 노래가 터져 나온다. 여기까지는 전주곡이고 정작 작자의 절규는 결구에 있으니 이 강나루에서 해마다 이별하는 연인들의 눈물로 대동강 물이 불어난다는 데 있다. 앞의 제2장 넷째 항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시에서의 대동강은 이미 시인의 마음 속에 자리한 강이기에 눈물 한 방울로 강물이 불어나는 강으로 변모되었다. 자연의 강을 마음 속의 강으로 바꾸는 기술이 정지상의 천재성이고, 意境은 강엄의 <별부>에서 빌어 왔지만 이 작품을 천고의 절창으로 추앙하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b의 작품도 말련의 전구 南浦春波綠에서 알 수 있듯이 정지상은 이별이란 말만 나오면 으례 강엄의 <별부> 가운데서 취한 春水綠波 送君南浦를 떠올리나 보다. a에서의 남포는 이별의 장소였으나 여기에서는 떠나간 님이 돌아오는 만남을 기약하는 공간으로 전환하였다. 이덕무(1741-1793)는 일년 중 가장 좋은 풍경이 暮春 십여 일에 불과하므로 이때는 헛되이 보낼 수 없다.며 친구들과 어울려 높은 산에 올라 詩酒를 즐겼는데 여기에서 春波綠은 바로 일 년중 가장 마음 설레게 하는, 신록이 산과 들의 빛깔을 바꾸기 시작하는 그런 호시절이다. 그런 날에 금의환향하는 님의 모습은 얼마나 황홀하겠는가?

 

시간적 배경이 a는 봄이었으나 b는 가을이다. 가을빛 애잔한 마당에 마지막 잎새 하나 떨어지고, 밤이면 풀벌레들도 나의 설움을 아는지 그 울음소리 슬프다. 홀홀히 가볍게 떠나간 그대 모습은 언제나 머리 속에 선연히 남아 있어 나는 밤마다 꿈길을 헤맨다. 나의 외로운 마음은 그대를 뛰따르지만 배웅하던 날 그대가 시야에서 사라진, 산이 다한 곳에 오면 끝이 나고, 꿈에서 깨어나면 휘영청 밝은 달빛은 오두마니 홀로 남은 현실 속의 내 모습을 비칠 따름이다. 한 번 떠나버린 님이 돌아올 기약이야 희박하지만 짐짓 떠나던 날의 약속을 상기해 본다.

 

위에 든 세 편의 시는 제목과 이별의 정한이라는 주제의 측면에서 공통점 내지 유사성을 보인다. <20.제목미상>의 제목을 送人 또는 送友人이라 하여도 자연스러울 정도다. 이들 시의 창작 순서를 정리해 보면 <20.제목미상>은 떠나간 이가 친구임이 확실하고, a와 b에 이르면 이별한 이를 연인이라 하더라도 걸리는 데가 없다. 그리고 강엄의 <별부>에서 빌어온 시구를 참조하면 a는 계절을 그대로 차용했으나 b는 가을로 변환하고 낙엽, 벌레, 님이 가뭇없이 사라져 간 산, 밝은 달 등을 끌어 들여 말련의 전구가 아니면 a와는 무관한 별개의 작품으로 간주될 뻔하였다. 사실의 변형이라는 차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 시기의 시로는 진솔한 감정을 그대로 옮긴 <20.제목미상>이 가장 먼저 씌어졌고, a와 b의 순서대로 창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2) 십 년 동안의 고독

고향을 떠나 개경에 머문, 십대 후반에서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이십대 후반까지의 십여 년의 시기를 다루겠는데 이 시기에 관한 기록으로는 <謝賜物母氏表>에서 십여 년간 일이 뜻대로 안 되고 천 리 밖에서 표박하였다는 것이 전부이므로 그가 남긴 시편들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기간은 고독과 불안 속에 방황한 시기였으므로 그의 시편 가운데 미래지향적 이상세계와는 무관하게 고독의 정서를 표출한 시편들을 이 시기의 것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a.物象鮮明霽色中 활짝 갠 날씨에 물색이 산뜻한데

勝遊懷抱破忡忡 즐거운 놀이에 온갖 회포와 시름 다 잊는다.

江含落日黃金水 지는 해를 먹음은 강물은 황금 빛이요

柳放飛花白雪風 바람결에 흩날리는 버들솜은 흰 눈이어라.

故國江山千里遠 고향 강산은 천 리 밖에 먼데

一樽談笑萬緣空 한 두루미 술로 담소하니 만 가지 인연도 부질없네.

興來意欲題新句 감흥이 일어 새로운 시 한 수 쓰려 하나

下筆慚無氣吐虹 붓 들어 적으려 하니 豪氣 모자라 부끄러우이.

b.石逕崎嶇苔錦班 높고 높은 돌길엔 이끼가 아롱졌고

錦苔行盡入禪關 비단 같은 이끼 깔린 길 다하자 암자에 들어서네.

地應碧落不多遠 땅은 하늘에 호응하여 그다지 멀지 않고

僧與白雲相對閒 스님은 한가로이 흰 구름과 마주하였네

日暖燕飛來別殿 날씨 따뜻해지자 제비가 날아와 별전에 들고

月明猿嘯響空山 달이 밝아지자 원숭이 울음소리 빈 산에 울려 퍼지네.

丈夫本有四方志 대장부 뜻은 본디 천하에 두어야 하거늘

吾豈匏瓜繫此間 내 어찌 박과 오이처럼 이 사이에 얽매일 건가?

c.百步九折登巑岏 백 걸음에 아홉 번 꺾인 길로 높이 높이 올라가니

家在半空唯數間 두어 칸 집만이 반공중에 자리했네.

靈泉澄淸寒水落 맑디 맑은 신령한 샘에선 찬 물이 떨어지고

古壁暗淡蒼苔斑 어둑한 옛 벽에는 푸른 이끼 아롱졌네.

石頭老松一片月 바위 위의 늙은 소나무엔 한 조각 달이요

天末雲低千點山 하늘 끝 구름 아랜 일천 점의 산이로다.

紅塵萬事不可到 홍진 세상의 온갖 일 여기까진 오지 못해

幽人獨得長年閑 그윽한 사람 혼자서 긴긴 세월 한가하구나.

d.古徑寂寞縈松根 쓸쓸한 옛 길엔 솔뿌리가 얼기설기

天近斗牛聊可捫 하늘이 가차와 두우성이라도 숫제 만질 듯

浮雲流水客到寺 뜬 구름 흐르는 물 같은 길손이 절간에 들어오니

紅葉蒼苔僧閉門 단풍잎 푸른 이끼에 중은 문을 닫는구나.

秋風微凉吹落日 가을 바람 적이 산들산들 지는 해에 불어오고

山月漸白啼淸猿 산 달이 차츰 훤해지니 맑은 잔나비 울음소리.

奇哉尨眉一老納 기이하구나, 눈썹이 터부룩한 저 늙은 중은

長年不夢人間喧 한평생 인간 세상의 시끄러운 일은 꿈조차 안 꾸다니.

e.碧波浩渺石崔嵬 푸른 물결 아득한 바닷가에 바위산이 우뚝한데

中有蓬萊學士臺 그 곳에 최치원이 놀던 학사대가 있다.

松老壇邊蒼蘇合 노송이 드리워진 제단 가엔 풀이 우거졌고

雲低天末片帆來 구름 낀 하늘 끝엔 돛단배 돌아온다.

百年風雅新詩句 한 평생 시 짓는 일은 새로운 시구 찾기

萬里江山一酒杯 만리길 강산유람에 술 한 잔 없을소냐.

回首鷄林人不見 계림쪽으로 머리 돌려도 그 사람 뵈지 않고

月華空炤海門回 달빛만 부질없이 海岸을 비치며 도네.

 

a는 <6.春日>,b는 <8.題登高寺>,c는 <9.開聖寺 八尺房>,d는 <10.題邊山蘇來寺>, e는 <11.月影臺>이다. a의 경련 故國江山千里遠 一樽談笑萬緣空에서 고향의 강산이 천리 밖에 멀다고 했으니 <謝賜物母氏表>의 漂泊一千里外와 부합하여 개경에서의 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급제 전후의 문제는 즐거운 놀이에 온갖 회포와 시름 다 잊는다.는 首聯의 후구, 한 잔 술로 시름을 삭히는 경련의 후구, 그리고 고달픈 삶에 지쳐 시흥이 일어도 호기가 모자라 붓방아를 찧는다는 말련의 시구로 보아 급제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련 후구의 萬緣은 기본적으로 전구의 千里와 대를 맞추면서 같은 구 안의 一 樽과 自對를 이룬다. 최해는 함련의 2구와 경련의 후구에 批點을 찍어 놓았으니 이미 당시에도 시구의 독창성을 인정 받았다.

 

b에서는 천리 타관땅에서 세파에 시달린 정지상의 정신 상태를 표백하였다. 상처 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겠는가만 국자감 생활을 끝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탁월한 감수성을 지닌 한 천재는 갈등과 번민,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해 사찰을 찾았다. 하늘에 맞닿은 산정에 위치한 암자에 올라 흰 구름을 벗하며 여생을 보내는 노승을 바라보며 청년 정지상은 관복을 입지 못할 바엔 차라리 승복을 입는 게 낫다고 잠시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論語≫ 陽貨편의 내 어찌 박과 오이처럼 한 곳에 매달려 남들이 따먹지 못하게 하겠느냐?(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는 말로 자신을 다잡는다.

 

c는 b와 같은 시기에 쓴 동질의 작품이다. 작자는 자신의 인생길처럼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산의 정상 가까이 있는 암자를 찾는다. 숲이 울창하여 하늘을 덮었는데 습기를 머금은, 인적이 드문 돌길과 암벽엔 푸른 이끼가 카페트처럼 깔려 있다. 곧 b의 수련 石逕崎嶇苔錦班 錦苔行盡入禪關이 c의 경련 후구의 古壁暗淡蒼苔斑으로 요약되었다. 그리고 b의 경련 후구의 구름을 벗하며 한가로움을 달래는 노승은 c의 말련 후구의 幽人으로 구체화 된다. 풍진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동분서주하다 그 욕구의 부림을 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홍진 세상의 모든 욕망과 번뇌에서 벗어나 한가로움을 구가하는 유인에게서 그는 가치 있는 삶의 한 유형을 만난다.

 

d도 또한 북두칠성이라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높은 산 정상 가까이 있는 변산의 소래사에 올라 또다른 절간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b에서는 흰 구름, c에서는 맑은 샘물 떨어지는 소리와 어울리던 푸른 이끼는 여기에서는 온 산을 붉게 물들인 단풍과 대비되어 이끼의 새로운 느낌을 부여한다. b에서 흰구름을 벗하는 노승, c에서 멀리 홍진 세상을 벗어나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유인은 여기에서는 한 평생 인간 세상의 욕망을 꿈조차 꾸지 않는, 터부룩한 눈썹을 가진 한 老納으로 등장한다. 雲水納者도 아니면서 浮雲流水처럼 방황하는 자신의 신세가 인간 세상의 시끄러움에 끄덕도 않는 작품 속의 老納과 대비되어 더욱 쓸쓸하고 처량하다.

 

e의 月影臺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창원도호부 고적조의 회원고현에 의하면 회원현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최치원이 놀던 곳으로 바위에 새긴 글씨가 떨어져 나갔다고 적었다. 따라서 봉래학사는 말년에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857-?)을 가리킨다. 조정에 인정받지 못하고 새로운 시구 짓는 일을 자신의 한 평생 임무로 여겨 고작 만리 강산을 유람하며 동이술로 시름을 삭히는 자신의 신세는 어쩌면 時務十條를 올리고 권력구조에서 밀려나 이 곳을 배회하던 최치원의 처지와 유사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자신은 권력의 세계에는 아직 발을 들여 놓은 적도 없으니 장차 어이 해야 할 지 답답하기 그지없다. 海門은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오는 입구의 언덕을 말한다. 시인은 홀로 학사대에 올라 우두커니 앉아 있다 보니 해안을 비치던 달은 위치를 바꾸어 어느새 새로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권력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다. 禮部詩에 급제한 것이다. 아래 제4장에서는 그가 과거에 합격한 1112년부터 김부식(1075-1151)에게 피살된 40대 후반인 1135년까지의 23년간의 삶을, 諫官과 近臣으로서의 활동으로 나누어 기술하기로 하겠다.

 

4. 諫官의 正論과 近臣의 逆說

 

1) 현실 초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

20대 후반 그는 그토록 갈망하던 과거 시험의 관문을 을과 수석으로 통과했다.이때부터 그의 생애는 서경의 한 한미한 선비에서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는 인물로 전환된다. ≪고려사≫에서 이 눈부신 시절의 족적을 탐색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예종 7년 3월에 평장사 지공거 오연총과 시랑 동지공거 임언이 진사를 취하고 을과 鄭之元 등 3인, 병과 6인 同進士 16인,명경 3인에게 及第를 下賜하였다. [고려사73, 志27, 선거1]

b. 예종 8년 3월에 신급제 정지원 등을 인견 하시고 좌정언 호종단에게 명하여 데려가 합문에서 술과 음식을 하사하게 하였다. 이에 갈옷을 벗게 했다. [고려사74, 志28, 선거2]

c. 예종9년4월 경술에에 有司가 상소하였다. 서경진사 정지원은 임진년 省詩에 第一名으로 합격하였사오니 청컨대 舊制에 의거하여 왕경에 머물도록 서용하소서.制하여 可타 하였다.[고려사13, 세가13, 예종2]

 

그의 예부시 합격이 a에서는 예종 7년(1112), b에서는 예종 8년으로 차이를 보이나 c에서 임진년 성시라 했으므로 그의 합격은 임진년인 예종 7년이 확실하다. 그리고 c에서 알 수 있듯이 2년 후인 1114년에는 개경에 서용되는 영광을 맞이한다. a에서 을과, 병과, 동진사로 구분한 것을 보면 여기에서의 을과는 조선시대 세조 12년(1467) 이후의 文科 甲科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19.제목미상> 결구의 壯元郞에 오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갑과 3인 중 장원 1인에게는 종6품직을 주었는데 正言에 해당하는 拾遺 직관이 이 품직이다. 그러나 정지상이 ≪고려사≫에 左正言으로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급제 15년 후인 인종 5년(1127)이다

 

고려시대에는 좌주 문생의 관계가 관계 진출에 중요시되고 천거한 문생에게 잘못이 있으면 좌주에게 연좌시켰으므로 그의 추천인 내지 후원자를 찾는 작업도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필자는 일단 그 후원자로 郭輿(1058-1130)를 추정해 본다. 그 근거로는 첫째, 인종이 곽여의 <동산진정선생비>와 <동산재기>를 정지상에게 짓게 한 점이다. 곽여는 예종의 동궁시절 寮佐로 있었으므로 예종이 그의 거처를 찾을 정도로 각별한 예우를 받았는데 정지상이 예종 7년에 합격한 것도 우연한 일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둘째, <동산재기>를 짓게 했을 때 정지상이 올린 表에 선생의 문에 드나든 것이 그 유래 오래거든 하물며 天子의 명을 對揚하매 사양할 것이 없도다.라고 한 점이다. 그 유래가 오래다는 것이 얼마 동안을 지칭하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불혹의 나이를 넘어선 정지상이 십여 년 가지고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은 외람되지 않을까? 셋째, 정지상의 도교 취향의 인생관이다.묘청(?-1135)의 풍수지리설에 미혹된 것도 단순한 애향심의 발로로만 치부하기 어렵고, 離宮인 장원정에서 봉래산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정지상이다. 그가 노장에 탐닉한 것도 예종과 唱和하며 성 동쪽 약두산 아래 살면서 東山處士를 자처하는 곽여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넷째, 곽여의 사후에 그의 벼슬은 종6품에 머물렀다. 이 점은 그가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든가 묘청의 일당이 되어 해괴한 이야기로 서경천도설을 주장하는데 대한 경주김씨 등의 견제도 고려되어야 하겠다. 김부일 김부식 형제의 경주김씨가 이자겸 몰락이후 중앙문벌귀족을 대표하여 사사건건 서경파 타도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의 환로에 대해 어느 때에 그 직책에 임명되었는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활동과 관련하여 제시된 직책을 ≪고려사≫ 등에서 뽑아 정리해 보기로 하겠다. 1127년 3월 左正言, 1129년 5월 左司諫, 1130년 知制誥, 1132년 3월 1133년 5월 起居注, 1133년 11월 起居郞 등의 관직으로 등장한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좌정언은 종6품직이다. 기거주, 기거랑은 중서문하성 소속의 종5품직이다. 그리고 지제고는 왕명인 제고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경국대전≫ 吏典 京官職 弘文館 항을 참고하면 副提學으로부터 副修撰에 이르는 관원은 또 知製敎의 임무를 兼帶한다.고 했으니 부수찬 곧 홍문관의 종6품 이상이면 감당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도 이와 유사했으리라 짐작된다.

 

그가 諫官으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것은 권신 척준경을 타도하여 암타도에 유배시킨 일이다.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그 후 서울에 올라와서 과거에 높이 뽑혀 대궐에 드나들며 직언을 하여 옛날 諍臣의 풍도가 있었다.고 한 것도 이때의 일을 전제한 발언이다. 다음은 이때 올린 상소문의 한대목이다.

 

이듬해(필자주; 1127년, 인종5년)에 좌정언 정지상은 준경이 이미 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며 또 왕이 준경을 꺼림을 알고 드디어 상소하기를, 丙午(필자주; 1126년) 춘2월에 준경이 최식 등으로 더불어 궐을 범하매 上이 신봉문루에 거동하여 諭旨하니 군사가 다 갑옷을 벗고 기뻐하나 홀로 준경은 詔를 받들지 않고 군사를 위협하여 전진하니 나는 화살이 黃屋車를 지나는 것이 있었고 또 군사를 이끌고 掖門(궁문)에 돌입하여 宮禁을 불태웠으며 다음날에 南宮에 移御하매 모든 좌우에 모시던 자를 다 잡아 죽였으니 자고로 亂臣으로 이와 같은 자가 더문지라 진실로 천하의 大惡입니다. 5월의 일은 일시의 공로이나 2월의 일은 만세의 죄악이니 폐하는 비록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사오나 어찌 일시의 공으로서 만세의 죄를 덮으리까. 청컨대 吏에 내려 이를 죄하소서.

 

척준경은 州吏 집안 출신으로 두 차례의 東女眞 공격 때 출전하여 공을 세워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1126년 2월에는 이자겸의 힘을 입어 궁궐을 공격하였으나 그해 5월에는 인종의 친서에 호응하여 이자겸을 사로잡아 유배시키는 공을 세운 자이다.

 

고려 전기는 문벌귀족사회였는데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78 십여 년은 仁州李氏의 시대였다. 이자연은 세 딸을 문종의 후비로 들였고 7대의 왕 가운데 인주이씨의 외손인 숙종만 인주이씨가 아닌 홍씨를 비로 맞았으나 그 아들인 예종은 다시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이한다.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이자겸은 인종 즉위년인 1122년 12월에 선왕인 예종의 동생 帶方公 보를 비롯하여 왕당파로 분류한 한안인 문공미 이영 정극영 등 50여명을 살해 또는 유배했다. 숙청 당한 이들은 예종에 의해 양성된 지방토착 출신의 신진관료들이었다. 인종 4년(1126) 2월 이자겸 일당의 모반은 2월 25일 왕당파에 속하는 하급관료와 무장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가 이자겸의 우익인 병부상서 척준신(준경의 아우), 내시 척순(준경의 아들) 등을 살해한 데 대한 반격이었다. 이때 인종의 간곡한 친서를 받은 척준경은 심경을 바꾸어 이자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으니 고려 王姓이 바뀌지 않은 것은 실로 척준경의 공로였다. 척준경이 왕의 은총을 믿고 어떻게 발호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정지상은 왕권을 위협했던 인주이씨 일당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 왕권을 능멸하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던 중앙의 문벌귀족 세력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작업에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가 환로에서 쓴 시중에서 근신과 관련된 것은 다음 제2절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만을 다루고자 한다.

 

a.暮經靈鵠峯前路 저물 녘에 영곡봉 앞길을 지나서

朝到分行樓上吟 아침에는 분행루에 올라 읊조린다.

花接蜂鬚紅半吐 벌의 수염에 닿은 꽃은 붉은 빛을 반쯤 토하고

柳藏鸚翼綠初深 꾀꼬리 나래를 감춘 버들은 초록빛이 마악 짙어 가도다.

一軒春色無窮興 누각 마루의 봄빛엔 무궁한 흥이 일지만

千里皇華欲去心 천리길 使臣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

回首中原人不見 머리를 중원으로 돌이키나 사람은 뵈지 않고

白雲低地樹森森 땅에 나직한 흰 구름 아래 나무들만 빽빽하도다.

 

b.千刃岩頭千古寺 천 길 바위 꼭대기에 천 년 묵은 절

前臨江水後依山 앞은 강물을 내려다 보고 뒤는 산에 기대었다.

上摩星斗屋三角 위로 북두성을 만질 듯한 세모난 절집엔

半出虛空樓一間 반쯤 허공에 솟아 나온 누각이 한 칸.

 

c.飮闌倚枕畵屛低 술자리 끝나고 그림 병풍 아래서 베개에 기대었다가

夢覺前村第一鷄 꿈에서 깨어나니 앞마을에 첫닭이 운다.

却憶夜深雲雨散 문득 생각하니 깊은 밤 운우의 꿈 흩어질 제

碧空孤月小樓西 푸른 하늘엔 외로운 달이 작은 다락 서쪽에 있네.

 

a는 <7. 分行驛寄忠州刺史>이고, b는 <18. 靈鵠寺>이고, c는 <16.團月驛>이다.

a의 분행역은 경기도 죽산현에 있다. 경련의 벌의 수염에 닿은 꽃은 붉은 빛을 반쯤 토하고/ 꾀꼬리 나래를 감춘 버들은 초록빛이 마악 짙어 가도다.라는 시구는 ≪백련초≫의 한 대목처럼 서정성이 뛰어나고 참신하며 한평생 새로운 시구 짓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하겠다던 젊은 날의 치기가 묻어난다. 말하자면 다음의 <21.詠杜鵑>처럼 기발한 시상과 다소 작위적인 표현이 감지된다.

 

聲催山竹裂 소쩍새 울음소리 산의 竹筍 터짐을 재촉하고

血染野花紅 목이 쉬어 토하는 피는 들꽃을 붉게 물들이네.

 

홍만종도 두견화의 시구가 怪其工艶하다고 비평했다. 따라서 20대의 싱싱한 서정이 살아 숨쉬는 a의 시는 30대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천리길 使臣은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로다.라고 한 데서 그는 지금 공무수행 중임이 확인된다.

 

b는 a의 수련의 저물 녘에 영곡봉 앞길을 지나서/ 아침에는 분행루에 올라 읊조린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a의 시를 쓴 전날의 작품이다. 한시에서 虛實法의 虛, 곧 정서를 배제한 채 實景만으로 시를 구성한 것이 특이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의 불우조에서 대림산에 있는데 깎아지른 암벽에 의지하고 푸른 강물을 내려다 본다. 공중에 시렁처럼 얹어서 누각을 지어 아래에서 올려다 보면 마치 매단 것 같다.고 경관을 소개하였다. 이 경관을 b의 시와 비교해 보면 그 모습이 딱 들어 맞는다. 기구와 승구는 각기 自對를 취하고 드물게도 전구와 결구가 對偶를 이루어 시의 맛을 새롭게 한다.

 

c의 시는 碧空孤月 때문에 급제 이전의 작품이 아닌가, 하고 생각되기도 하지만 단월역은 b의 영곡사와 함께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에 나온다. 따라서 이틀간의 여정은 공중에 매달린, 충주의 영곡사를 관광한 날 저녁에는 단월역에서 휴식을 취하고 이튿날 아침 나절엔 상경길에는 경기도 죽산의 분행역 누각에 오른 것으로 짐작된다. 술에 취해 그림 병풍 아래서 雲雨之樂을 꿈꾸다 첫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깬 사내는 여행 중의 객수에 잠긴 자신을 빗대어 넌짓 孤月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서 雲雨는 일차적으로 자연 현상인 구름과 비로 보아 잘못이 없지만 중의적으로 楚나라 宋玉의 <高唐賦>에 나오는 雲雨之樂의 구름과 비라야 더욱 운치가 있다.

48구의 오언고시 <1.栢栗寺>도 환로 진출 후의 여행길에서 창작되었다.

 

稽首祝吾君 머리를 조아려 우리 임금님 위해 비나니

萬年受天祐 만년토록 부처님의 보우 받으심을.

(...중략...)

樂哉無所憂 즐거워라! 근심할 바 없으니

此樂何太古 이 즐거움 태고적과 어떠할가?

飛盖下松門 일산을 날리며 송문을 내려오니

松門日當午 송문 위의 해 중천에 높이 떴네.

 

위의 시구들은 작품의 끝부분이다. 이 시에서 그는 계림 樓觀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금강산 백률사의 서루에 올라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을 정리한 다음, 국정을 결제할 때면 중앙문벌귀족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임금의 만세무강한 복을 영험 많은 백률사 부처님께 빌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시대를 중국역사의 이상국가인 三代에 비겼으나 이것은 그의 간절한 바램이요, 실상은 허약한 왕권으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일산을 펄럭이며 소나무숲을 빠져 나오는 의젓한 중년 관리의 풍채가 눈 앞에 선연하다. a, b, c가 30대 초반의 시라면 매4구마다 換韻한 <1.백률사>는 시라면 기발하고 참신한 새로운 시구만을 추구하던 혈기 방장한 시절의 생각이 바뀌어 효용론적 시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돌아보고 인생을 다시 생각하는, 불혹의 나이에 넘어 선 시적 화자의 원숙함이 돋보인다.

 

그는 바쁜 공무 중에도 높이 있는 절간이나 암자를 보면 올라야 직성이 풀렸다. 이러한 습성은 갈등과 번민과 불안에 휩싸였던 젊은 날에 비롯되었다. 홍진에서 벗어나 초절한 세계를 지향하는 그의 갈망은 환로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곳이 仙境이고 봉래산이었다.

 

2) 西京三聖의 빗나간 애향심

고려 태조의 훈요십조 제2항에서는 모든 사찰은 도선이 山水의 順逆을 推占하여 창건하였으므로 마음대로 가감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제5항에서는 서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곧 짐이 삼한 산천의 陰佑에 힘입어 국가 창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水德이 순조로와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요 국가 창업 萬代의 땅이니 일년의 四仲에는 순행하여 머물러 백일을 넘겨야 안녕에 이른다.고 했다. 서경천도설의 논리적 근거인 풍수지리설은 이미 태조가 자신의 정치적 책략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전기에는 궁궐 내부에서도 이 풍수도참설이 크게 성행하였다. 문종 10년(1056) 예성강변 병악에 離宮인 長源亭을 짓고 자주 巡駐한 것도 도선의 이른바 <松岳明堂記>를 따랐고 또한 이러한 행위가 地氣의 변화에 대응하여 국가의 터전을 굳건하게 한다는 延基說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시행되었다. 같은 해의 흥왕사 창건 이외에도 南京의 설치 및 이궁 창건, 西京畿 설치와 左右宮 창건 등도 이 연기사상에 근거한 役事였다.

열전 叛逆조의 묘청전은 다음과 같이 정지상을 서경천도설의 선봉으로 기록하였다.

 

인종6년에 日官 白壽翰이 檢校少監으로서 서경을 分司했다. 그는 묘청을 스승으로 삼고 음양비술을 칭탁하여 뭇 사람을 미혹케 하였다. 서경 출신 정지상도 그 말을 믿고 말하기를, 상경은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불타 남은 것이 없으나 서경은 왕기가 있으니 移御하여 상경을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내시랑 김안 등도 동조하여 서로 칭찬하니 近臣 홍이서 이중부 및 大臣 문공인 임경청도 和同하여 주하기를, 묘청은 성인이요 백수한도 그 다음가는 사람이니 국가의 일은 일일히 자문한 뒤에 행하시고 그 진청하는 바는 들어주지 아니함이 없어야만 정사가 이루어지고 일이 성취되어 국가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武人 최봉심은 정지상과 비밀히 약속하고 묘청을 師事하면서, 폐하가 삼한을 平治하고자 하면 서경의 三聖人을 두고는 같이 함께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상언하고 세 성인은 묘청 백수한 정지상을 가르킨다고 열전은 전한다. 그러면 정지상이 그들 집단의 성인으로 추앙된 배경을 살펴 보기로 하겠다.

첫째, 정지상은 남다른 애향심의 소유자다. 그는 김소월이 고향 산천을 무의식의 심층에 간직했듯이 평양을 사랑했고 서경 사람들의 그에 대한 추앙은 그의 사후에까지 지속되었다. <12.西都> 시는 평양 찬가다.

 

紫陌春風細雨過 호화로운 거리, 봄바람에 가랑비 지나가니

輕塵不動柳絲斜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버들가지 비껴 있네.

綠窓朱戶笙歌咽 푸른 창 주홍 문에 피리가락에 실은 노랫가락

盡是梨園弟子家 목멘 듯 들려오나니 집집마다 기생방일세.

 

양주동은 앞의 글에서 관서지방에 전설로 전하는 野史 한 편을 소개했는 데 그것이 <22.白鷺> 聯句이다.

 

何人將白筆 뉘라서 흰 물감 묻힌 붓으로

乙字寫江波 乙字를 강물 위에 써 놓았나.

 

야사에는 다섯 살 때의 작품이라고 한다. 고구려 유민의 절규를 대신하여 서경천도설을 주장하다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지닌 김부식에 의해 참수 당한 한 천재시인의 고독한 영혼을 추모해 마지 않는 평양 사람들의 애통한 마음이 전설로 승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조정에 중용되지 못하고 한 평생 유랑을 일삼는 김시습(1435-1493)의 천재를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시구의 전설과 궤도를 같이한다. 예를 들면 5세의 김시습이 세종 앞에 초대 받아 박이창이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의 대구를 짓게 하니 태연히 聖主之德 黃龍飜碧海之中이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는 따위이다.

 

둘째, 그는 풍수도참설의 신봉자다. 그는 위의 상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臣등이 林原驛 땅을 보니 이는 음양가의 말하는 大華勢라 만약 궁궐을 세워 이에 이어하시면 가히 천하를 합병할 것이요 金國이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다 臣妾이 될 것입니다.라고 상언하여 이를 실현한다. 인종 7년(1129) 왕이 新宮인 乾龍殿에 거동하여 하례를 받을 때 묘청 일당은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니 이는 신궁에 거동한 상서라 하여 賀表를 草하여 재추에게 서명하기를 청했으나 거절 당하자 정지상은 분노하여 이를 탄식했다 한다. 또 묘청 일당은 큰 떡을 만들어 그 속에 숙유를 넣어 물 속에 잠그고는 대동강에 서기가 있으니 이는 신룡이 침을 토한 것이라 하여 이 때를 놓치지 말고 金國을 공격하자고 궤변을 늘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신궁 안에 八聖堂을 짓고 낙성식을 거행할 때 정지상이 지은 제문에는 풍수도참설에 탐닉한 그의 사상적 편린의 점검이 가능하다.

 

빠르지 않되 속하고 가지 않되 이르러니 이것을 이름하여 得一의 靈이라 하며 無에 卽하여 有가 있고 實에 卽하여 虛가 있으니 대개 본래의 부처를 이름함이다.오직 천명이라야 만물을 재제할 수 있고 오직 土德이라야 사방에 왕이 될 수 있다. 이에 평양성 중에 大華의 형세를 卜定하여 궁궐을 개창하고 삼가 陰陽에 상고하여 그 사이에 八聖을 봉안하니 白頭仙人을 첫째로 모심입니다. 耿光이 있으심을 생각하오매 妙用이 現前할 것을 바라오며 황홀한 至眞이 오매 비록 그 靜態를 형상하기는 어려우나 오직 實德이 이 如來이오매 그림으로써 장엄하고 玄關을 두드려 기원하나이다.

 

八聖人의 이름을 분석해 보면 一曰 護國白頭嶽太白仙人 實德文殊仙人菩薩하는 식으로 우리나라 명산과 부처의 결합이다. 大華勢란 음양지리가의 전문용어로 華勢는 山水의 發脈과 結脈을 樹木의 根幹 枝葉 花實에 비유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정지상의 풍수도참은 불교와 도교를 교묘히 결합하여 민간신앙에 접근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셋째, 북방인들의 소외의식을 대변한 묘청 일당은 고구려 중심의 역사관을 소유한 집단으로 그들의 광란은 빗나간 애향심의 표본이다. 서경인을 포함해 북방인들을 결속시킨 것은 인재등용에 대한 지역적 차등의식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 데 기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대변하여 원한을 풀어 주고 구원해 줄 영웅을 필요로 했는데 이 때에 만들어진 영웅이 묘청이다. 묘청은 이들의 군중심리를 교묘히 이용하여 이 지역적 소외감을 연대시키고 드디어 분노로 폭발시켰다. 묘청이 난을 자주의식 주체의식 운운하는 글들도 있으나 이러한 의미부여는 그들이 난공불락의 평양성에 웅거하여 大爲國을 일으키고 天開라 建元했을 때 兩府로부터 州郡守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속에 서경인만을 임명한 데서 그들의 자주의식은 부정된다. 그즈음은 지역적 정서를 묶을 때가 아니라 국제적 관계를 고려하더라도 온 국민이 힘을 합해 중앙문벌귀족에 의해 허약해진 왕권을 강화시켜야 할 시기였다.

 

a.桃花紅雨鳥南南 복사꽃 붉은 비에 새들이 지저귀니

繞屋靑山間翠嵐 집을 둘러싼 청산에는 푸른 이내 아른거리네.

一頂烏紗慵不整 이마에 비스듬한 오사모 게으런 탓이어니

醉眠花塢夢江南 취하여 꽃동산에 누워 강남을 꿈꾸네.

 

b.苕嶢雙闕枕江濱 높고 높은 쌍 대궐 강가에 임했으니

淸夜都無一點塵 맑은 밤에 티끌 한 점 전연 없구나.

風送客帆雲片片 바람이 길손 실은 帆船을 보내니 구름처럼 가볍게 뜨고

露凝宮瓦玉鱗鱗 이슬이 궁궐의 기와에 맺히니 구슬처럼 반짝인다.

綠楊閉戶八九屋 푸른 버들 속 여남은 집은 문이 닫혔고

明月捲簾三四人 밝은 달 아래 서너 사람 발 걷고 앉았네.

縹渺蓬萊在何許 까마득한 봉래는 어디매쯤 있을까.

夢闌黃鳥囀靑春 꿈길 다했는데 꾀꼬리는 한창인 봄을 노래하네.

 

c.玉漏丁東月掛空 물시계는 딩동하고 달은 공중에 걸렸는데

一天春興牡丹風 한봄의 흥취는 모란 꽃에 부는 바람.

小堂捲箔春波綠 작은 마루 발 걷으니 봄 물이 푸르렀는데

人在蓬萊縹渺中 사람들은 아득한 봉래산 속에 있는 듯.

 

d.昨夜紛紛瑞雪新 어제밤 펄펄 내린 서설이 새로워라.

曉來鵷鷺賀中宸 새벽에 문무 백관 대궐에 와 하례하네.

輕風不起陰雲捲 가벼운 바람도 불지 않고 어둔 구름 걷히니

白玉花開萬樹 春 백옥 같은 꽃 피어나서 온갖 나무 봄이로세.

 

a는 <14.醉後>이고, b는 <5.長源亭>이고, c는 <15.長源亭>이고, d는 <17.新雪>이다. a는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인생의 포만감이 시구마다 배어 있다. 불현듯 급제 이전 불안과 고독에서 헤매던 수많은 불면의 밤들이 떠올랐다. 자신의 장래에 대해 그저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실낱 같은 희망도 뵈지 않던 나날들이었다. 그리고 1114년 30세 무렵 개경에 관직을 받아 살아온 10여 년은 실로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 동안 그의 개경 생활이란 제어장치가 고장난 기관차처럼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맹목적인 삶이었다. 1122년 이자겸이 선왕 예종이 등용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을 숙청할 때는 등골이 오싹했고, 1127년 좌정언의 신분으로 인종이 신임하는 척준경 배척을 상소할 때는 참으로 진땀 나는 목숨을 건 한판 승부였다. 그러나 그까짓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또 산다는 건 다 무엇인가? 복사꽃 꽃비되어 내리는 오늘 하루 질탕 마셔 보자. 오사모쯤 비뚤어졌다고 무슨 상관인가? 술에 취하고 꽃에 취해 누웠으니 무릉도원 예 아닌가? 이런 분위기가 새벽 안개처럼 시의 전편을 감싸고 돈다. 최해는 전구와 결구에 비점을 찍었다.

 

b는 최해가 가장 좋아한 작품이다. ≪춘향전≫에는 字字이 批點이요 句句이 貫珠로다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작품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해는 경련에는 관주, 나머지 모든 글자엔 비점을 쳤다. 이 시의 경련 綠楊閉戶八九屋 明月捲簾三四人.은 정지상의 청신한 기풍을 대표하는 시구로 요체를 구사하였다. 1056년(문종10) 이른바 도선의 <송악명당기>에서 적시한 대로 왕건이 개국한 지 120년 후 예성강변 병악에 창건한 이궁인 장원정에 순행하여 머무는 임금을 정지상이 호종하였다.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찬탄하여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도 여기에서 멀지 않으리라,하고 장원정을 봉래산의 이상세계와 견주어 본다.

 

c는 시의 형식을 바꾸어 다시 읊어본 장원정이다. 시상은 b와 동일하다. b가 장원정에서 바라본 낮의 풍경이라면 c는 春波綠을 짐작할 정도로 휘영청 밝은 달빛이 환상적 공간 속의 경물을 만들어 내는 밤이다. 분주하게 드나들던 사람들의 발자취 그치고 대궐 안은 정적속에 잠겨 있다. 오직 물시계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또옥 똑 쉬임없이 들려오고 조심스럽게 제 모습을 드러낸 모란 위로 불어오는 봄바람이 봄밤의 정취를 한껏 고조시킨다. 이런 봄밤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시적 화자는 작은 집의 마루에 쳐 둔 발을 걷어 올린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자신이 봉래산에 무척 가까이 와 있음을 실감한다.

 

d는 20대의 참신하고 발랄한 감수성이 되살아난 걸작이다. 鵷雛새는 ≪莊子≫에 나오는 남방의 새로 봉황의 일종이다. 원추새와 백로,사전에도 이 두 새의 儀容이 閑雅하다 하여 조정에 늘어선 百官의 질서 정연함을 이른다 하였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 속에서 온갖 나무들이 백옥 같은 눈꽃을 달고 있다 하여 봄을 말하는 정지상은 어찌할 수 없는 天生의 시인이다.

겨울이 길면 봄이 어이 까마득하리.가 아니라 눈꽃을 본 시적 화자는 한겨울의 추위도 잊은 채 봄이 왔다고 탄성을 올린다.

50세 전후로 추정되는 정지상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개경에 있던 정지상 등은 김부식이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의정석상에서 김부식이 낸 견해는 서도의 반란에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이 모의에 참여하였으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서도를 평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재상들의 동의를 얻은 김부식은 결국 정지상 등 3인을 불러오게 하고 비밀히 김정순(필자주;都兵馬使로 서경토벌 때는 김부식이 지휘한 中軍의 보좌관)을 훈유하여 용사를 시켜 3인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베게 하고 이를 임금께 아뢰었다. 이것이 ≪고려사≫의 김부식조에 전하는 기록의 전부다.

인종 13년(1135) 정월에 시작한 서경인들의 반란은 이듬해 2월에야 평정되고 정지상의 아내와 자식들은 동북성의 노비로 전락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모두 당시의 여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식은 본래 지상과 문인으로서 명성이 같았으므로 불평이 쌓였더니 이에 이르러 내응하였다 하고 그를 죽였다.고 말한다. 얼음처럼 냉철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할 역사가의 붓조차 한 천재의 타살에 분노하여 여론을 기술한 것이라 해석된다.

 

5. 천재시인에 대한 끝없는 흠모

 

위에서 <22.白鷺>가 정지상을 추앙하는 관서지방 사람들의 僞作일 가능성에 대해서 그 단서를 제공했거니와 정지상 설화의 절창은 아무래도 <23.제목미상>이 수록된 다음 시화이다.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항시 문장으로 같은 시기에 이름을 가지런히 하여 두 사람은 다투어 알력하여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정지상이,

琳宮梵語罷 절에는 염불 소리 그치고

天色靜琉璃 하늘은 유리처럼 맑다.

라는 시구를 지었다. 부식이 좋아하여 거기다 제 시를 붙여 지으려고 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지상이 부식에게 주살되어 陰鬼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읊은 시를 지어, 柳色千絲綠 桃花萬點紅(버들은 천 가닥 실로 푸르고/ 복사꽃은 일만 점으로 붉다.)라고 했다. 문득 공중에서 지상의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천 실 만점을 누가 세겠느냐? 왜 柳色絲絲綠 桃花點點紅(버들은 실실이 푸르고/ 도화는 점점이 붉다.)고 하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부식이 자못 마음 속으로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 후 부식이 어떤 절에 가서 뒷간에 올랐는데 지상의 귀신이 뒤에서 음낭을 쥐며 물었다. 술도 안 먹고 왜 얼굴이 붉었느냐? 부식이 대답했다. 저 건너 언덕의 단풍이 얼굴을 비춰 붉었다. 지상의 귀신이 음낭을 단단히 쥐며, 무슨 놈의 가죽 주머니냐?고 말했다. 부식이 네 애비 불알이다.라고 하며 낯빛이 변치 않았다. 지상의 귀신이 음낭을 더 힘껏 쥐어 부식은 마침내 뒷간에서 죽었다.

 

<22.白鷺>가 정지상에 대한 단순한 추앙에 그쳤다면 위의 설화는 그를 참수한 김부식을 적대자로 설정하고 깁부식은 시에서 정지상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역설했다. 정지상과 김부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첫째, 정은 서경출신의 신진관료계층이라면 김은 경주출신의 중앙문벌귀족계층이다. 둘째, 권력구조에서 정이 신진개혁파라면 김은 정통보수세력이다. 셋째, 정이 고구려 중심의 역사의식을 지닌 시인이자 행동가라면 김은 신라중심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역사가이다. 넷째, 老莊에 탐닉한 정이 풍수도참설에 의지하여 민중의 힘을 규합함으로써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한 혁명가 내지 몽상가라면 유학사상으로 무장한 김은 묘청의 난 때 왕명에 따라 군사 7천 명을 거느린 元帥가 되어 西賊 1,200여 명을 죽이고 난을 평정한 합리주의자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그들은 시에 있어서도 김부식의 시는 富贍하나 화려하지 않고 정지상의 시는 화려하나 경박하지 않다.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 설화의 화자는 현실에서 패배한 정지상과 김부식의 위상을 역전시켰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사람들은 끝까지 원혼의 손을 빌어 직접 김부식을 죽였던 것이다. 정지상의 죽음을 원통해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방식으로라도 정지상의 억울한 영혼을 伸寃하여 위로했다. 이 설화의 작자 역시 관서지방 출신의 인물이고 이를 유포시킨 사람들은 뛰어난 才德을 가지고도 인사에서 소외된 지식인 계층으로 짐작된다.

 

<4.夏雲多奇峯>이 수록된 시화는 아예 俗傳으로 시작하였다. 산사에서 과거 공부를 익히던 정지상은 달 밝은 밤에 누각에 홀로 앉았다가 문득 시 읊조리는 소리를 듣는다. 僧看疑有刹 鶴見恨無松(스님은 보고서 절간이 있을까 의심하고/ 학은 보고서 소나무 없음을 한탄한다.) 그는 귀신이 알리는 소리로 여겼다. 훗날 과장에 들었는데 夏雲多奇峯을 제목으로 峯자 운을 냈으므로 정지상은 위의 시구를 기억해 내고 이것을 함련에 삽입하여 장원에 뽑혔다는 것이다. 홍만종의 ≪소화시평≫에는 이와 유사한 당나라 錢起(715-770)의 사례를 소개하고 정지상의 시화를 그 뒤에 수록하였다. 錢起는 曲終人不見 江上數峯靑(곡조는 끝나도 사람은 뵈지 않고/ 강가의 두어 봉우리만 푸르다.)이라는 시구를 <湘靈鼓瑟>이라는 시제의 落句로 써서 高第에 뽑혔다고 한다. 정지상의 시화는 실제 이야기이거나 창작이라기보다 錢起 시화의 모방작이다.

 

시화의 끝에 이규보는 僧看鶴見 한 련은 비록 가구이나 나머지는 모두 유치한 말솜씨니 어느 곳을 취하여 장원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다.라고 비평했다. 홍만종도 두 개의 시구가 모두 신묘한 일로서 또한 서로 유사하니 기이하다고 의아함을 표시했다. 시화의 모방은 물론, 전자는 시구의 위작 가능성까지 적시한 논평이다.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진위 여부를 떠나 그토록 열렬한 사랑을 보낸, 한 천재시인에 대한 후세인들의 추앙심이다.

끝으로 樓亭詩로서 천고의 절창이라는 신광수의 논시로 본고를 가름하고자 한다.

 

從來東國盛文章 종래로 동국에 문장이 많아

幾處紗籠滿畵梁 곳곳 누대에 걸린 시가 가득해도

當日送君南浦曲 저 옛날 송군남포의 곡만이

千年絶唱鄭知常 천년의 절창 정지상의 시.

 

<13.송인>에 대한 諸家의 찬사는 제3장 제1절에서 상론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 參考文獻 ◇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동문선, 삼한시귀감, 청구풍아, 기아, 대동시선, 해동시선, 동시정선, 문선, 익재집, 석북시집, 경수당집, 자하시집, 서포만필, 파한집, 보한집, 백운소설, 역옹패설, 동인시화, 용재총화, 성수시화, 현호쇄담, 소화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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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정지상에 관한 몇 문제에 대하여;예부시 급제, 그리고 요체, 한국한시연구3, 태학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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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논문에서 전편을 다루지 못한 작품을 수록함.

<1.栢栗寺>

晨興小樓頭 새벽에 일어나 작은 西樓에 올라서

捲箔觀天宇 발을 걷고 하늘을 쳐다본다.

樓下卽鷄林 누각 아래가 바로 천년고도 계림으로

奇怪不可數. 기괴한 것들 이루 헤일 수 없네.

老樹煙濛濛 고목들이 들어선 숲 위의 아물거리는 안개는

橫斜一萬戶 일만 호의 집들 위로 빗기었는데

白雲飛東山 흰 구름은 동쪽 산으로 날고

綠水走西浦. 北川의 푸른 물은 서쪽 兄山江 포구로 달리네.

突兀黃金刹 우뚝 솟은 金堂 지붕은

相望朝欲煦 마주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따사롭고,

有森月城中 반월성의 숲은 옛날 그대로인데

花竹今無主. 꽃과 대나무는 이제 주인이 없구나.

空餘古風流 한갓 옛 풍류만이 남아 있어

一曲高聲舞 한 곡조 높은 소리에 춤을 추네.

記憶崔儒仙 돌이켜 최고운을 생각해 보니

文章動中土. 문장은 중국 땅을 진동시켰네.

絲往錦還鄕 무명옷 입고 갔다가 비단옷 입고 돌아오니

年未二十九 나이는 스물아홉 살도 채 못 되었네.

白玉點蒼蠅 白玉 위에 파리가 똥을 갈기듯

不爲時所取. 時世의 취하는 바 되지 못하여

至今南山中 지금까지 남산 북쪽 기슭에는

唯有一遺圃 오직 밭돼기 하나 남아 있네.

邈哉九世孫 아득히 먼 그의 九世孫이

結髮混卒伍. 소년 적부터 졸병들 틈에 섞여 있었는데

喚來峨其冠 불러다가 선비의 관을 높게 씌우니

人識賢者後 남들이 어진 이의 후예임을 알게 되었지.

亦有薛先生 또한 설총 선생이 있었으니

蔚然龍與虎. 한 분은 용 같고 한 분은 범 같이 일어섰네.

方言讀五經 우리말로 오경을 강의하니

學者比東魯 학자가 많이 태어난 魯나라 땅에 견주었네.

俗呼二君子 세상에서는 二君子라 불렀으니

齊名同李杜. 이름 함께 드날림이 李白 杜甫와 같았네.

嘯詠臨淸風 읊조리며 맑은 바람(필자주;두 분의 遺風) 쐬니

宿疾猶可愈 묵은 병도 나을 수 있을 것 같네.

去曷來謁金仙 돌아와 부처님을 뵈오니

虛堂香一炷. 텅 빈 法堂에 향촉 한 가닥 타고 있네.

稽首祝吾君 머리를 조아려 우리 임금님 위해 비나니

萬年受天祐 만년토록 부처님의 보우 받으심을.

想像妙明鏡 오묘하고 밝은 거울 같은 부처님 마음 상상하니

知子此心否. 나의 이 마음 알아 주시리.

試茶閔子泉 茶를 閔子泉에서 試飮하니

甌面發雲乳 차 그릇에 雲乳가 일어나네.

三復壽翁詩 壽翁(崔瀣)의 시를 세 번 읊으니

滿璧珠璣吐. 벽에 가득히 구슬을 토해 놓은 듯.

樂哉無所憂 즐거워라! 근심할 바 없으니

此樂何太古 이 즐거움 태고적과 어떠할가?

飛盖下松門 일산을 날리며 송문을 내려오니

松門日當午. 송문 위의 해 중천에 높이 떴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불우 栢栗寺. <東京雜記> 권2, 佛宇 栢栗寺. 끝 구의 ‘當’ 字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卓’ 字로 표기됨.

 

<3.詠 竹>

脩竹小軒東 작은 집 동쪽에 긴 대나무

蕭然數十叢 호젓이 수십 떨기 서 있네.

碧根龍走地 파란 뿌리는 용처럼 땅에 널려 있고

寒葉玉鳴風 차가운 잎새에는 옥구슬처럼 우는 바람소리.

秀色高群卉 빼어난 빛갈은 온갖 풀보다 고상하고

淸陰拂半空 깨끗한 응달은 半空을 스치도다.

幽奇不可狀 그윽하고 기이하기는 글로 나타낼 수가 없으니

霜夜月明中 서리 내리는 밤달 밝은 가운데 있었도다.

* <보한집> 상21.

 

<4.夏雲多奇峯>

白日當天中 밝은 해 중천에 떠 있는데

浮雲自作峰 뜬 구름은 절로 봉우리를 만드네

僧看疑有寺 스님은 보고서 절간이 있을까 의심하고

鶴見恨無松 학은 보고서 소나무 없음을 한탄한다.

電影蕉童斧 번갯불은 나무하는 아이의 도끼날 같고

雷聲隱士鐘 우뢰소리는 은사가 울리는 종소리 같네.

誰云山不動 뉘라서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는가.

飛去夕陽風 석양녘엔 바람에 날아가는데.

* <백운소설> 제5.

 

<19. 제목미상>

三丁燭盡天將曉 세 자루 촛불 다 사위니 새벽이 오려 하고

八角章成桂已香 팔각시 이루니 계수 이미 향기롭다.

落月半庭人擾擾 지는 달빛 뜰에 반만 남아 소란스러우니

不知誰是壯元郞 누가 장원랑인지 모르겠군

*<동인시화>상 제9.韋永貽의 <試罷>를 예시하고 이 시가 <試罷>를 표절한 것이라 밝힘.

 

<24. 嶺南寺樓>

一溪明月憑欄夜 시내 가득 달 밝은 밤이면 난간에 기대어 서고

萬里淸風卷箔天 먼데서 맑은 바람 불어오는 날에는 발을 걷네.

* <보한집> 하 제1. 嶺南寺樓는 밀양 영남사 종각인 금벽루임. 어떤 이가 성률 7자련구를 모아 21풍격으로 비평한 것을 옮긴 가운데 이 시는 제18번 째의 爽害谷한 풍격의 예시임.

 

[참고]

김영동 교수의 주요 논저

 

[저서]

1988년 * 박지원 소설연구(태학사)

1991년 * 한국의 한문학(민음사,공저)

           * 불교문학연구입문-산문·민속편(동화출판사, 공저) 논문

           * 불교계 고소설고, 동국논집 제100집, 동국대학교

2004년 *[사이버강의] 동양문학의 이해,중문출판사,2004.1.25

2004년 * 한국의 고전문학,청우출판사,2005.1.31

           * 국문고소설,청우출판사,2005.1.31

           * 한문소설강독,청우출판사,2005.1.31

           * 四書의 이해,청우출판사,2005.1.31

 

[논저]

1988년 * 박지원 소설연구(태학사)

1991년 * 한국의 한문학(민음사,공저)

           * 불교문학연구입문-산문·민속편(동화출판사, 공저) 논문

           * 불교계 고소설고, 동국논집 제100집, 동국대학교

1992년 * 박지원의 의청소통소고, 동국논집 제11집, 동국대

1993년 * 증보 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94년 *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불교관, 동악어문론집 29집

1996년 * 정지상 한시의 영원한 생명력, 동악어문론집 제31집

1997년 * 형암 이덕무의 문학관고, 동악어문론집 32집

1998년 * 炯菴李德懋論 조선후기한시작가론2,素石李種燦敎授致任紀念論叢刊行委員會

1999년 *판소리 관련 고소설의 才談考, 東岳語文論集 35집,東岳語文學會,1999.12.25.

*炯菴 李德懋의 詩文學攷, 東岳語文論集 34집,東岳語文學會 ,1998.12.25.

2000년 * 판소리문학의 卑俗性考,東岳語文論集 36집,東岳語文學會

2001년 *文獻說話의 性談論攷, 東岳語文論集 38輯, 東岳語文學會, 2001.12.25

2002년 *한국설화의 性意識攷, 한국어문학연구 40輯, 한국어문학연구학회, 

             2002.12.25

2004년 *사이버강의 동양문학의 이해,중문출판사,2004.1.25

2004년 * 한국의 고전문학,청우출판사,2005.1.31

           * 국문고소설,청우출판사,2005.1.31

           * 한문소설강독,청우출판사,2005.1.31

           * 四書의 이해,청우출판사,2005.1.31

 

2009년 *김영동, 최상의 감동에 대한 설화문학의 표현적 고찰

      -삼국유사소재 설화를 중심으로-,신라문화제34집,동국대신라문화연구구소,

      2009.8 pp.313-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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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송별(送別)-왕유(王維)

送君南浦淚如絲

(송군남포루여사): 남포로 그대를 보내려니 눈물이 실처럼 흘러내리고

君向東州來我悲

(군향동주래아비) : 그대가 동주로 향해 가니 나는 서글퍼지는구나

爲報故人憔悴盡

(위보고인초췌진) : 알려주게나, 친구는 지금 초췌하여 기력이 다하여

如今不似洛陽時

(여금불사낙양시) : 지금은 낙양에 있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013 송별-왕유(王維)

-벗을 보내며

 

말에서 내려

그대에게 한 잔 술을 권하며

묻노니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그대 말하길

세상에 뜻을 얻지 못하여

남산가에

들어가 살려 하네.

 

그대 떠난 뒤에

다시 소식 없어도

산중 유유한 흰 구름

다할 때는 없겠지.

 

 

[사족]

아래의 시는 문학의 라이벌 김부식[<삼국사기. 저술]의 자객에 의해 피살당한

고려시대 천재시인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다.

 

송인(送人)

정지상

雨歇長堤草色多

우헐장제초색다, 비 개인 긴 뚝에 풀빛도 선명한데

送君南浦動悲歌

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임 보내니 노랫가락 구슬퍼라.

大洞江水何時盡

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나 마를건가?

別淚年年添綠波

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의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

 

(고려의 왕건은 한반도를 통일했지만 고구려인들과 신라인들의 갈등은 인사에서 심화시켰다.

서북지역이나 호남지역은 조선시대까지도 유배지로 이용되는 소외지역이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영호남 갈등도 따지고 보면 신라와 백제의 갈등관계에서 유래하였고,

남북분단도 민족통합이라는 국민들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사상을 앞세운 세계 열강들의 외세에 의존하여

남북 지역기반에 바탕을 둔 지도자들의 욕심이 불러온 결과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제3공화국에 이어지는 군인들의 정치참여와 국정 인사로  심화되어

2016년 4.13총선에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심한 일이지만 민주화는 선거용일 뿐

영호남 출신들의 지지정당은 청년층을 제외하면

대체로 수도권에서도 출신지역별로 고정되어 있어

정당에서 내세우는 인물론은 하나의 변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선거를 통한 국민통합은 허울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총선을 며칠 앞둔 현재도 성인들이 모인 장소에 가보면,

입법권을 가졌다고 여러 명의 보좌관의 급여까지 국고에서 챙기는

국회의원들의 파렴치함에 대한 비판과

국회무용론, 선거무용론이 팽배해 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관련하여 정지상은 개경에서 토벌대장 김부식의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부식은 문헌에서 정지상의 자취를 제거하려 노력했지만

누정 현판의 시나 개인적 필담을 통해 전하는 것이 현존하는 정지상의 시작품들이다. )

 

시적 정서나 '送君南浦'로 인해 모작[표절] 논란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결구의 눈물이 보태져 대동강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발상은

천재시인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광활한 대동강에 미미한 눈물 한 방울이 보태진다고

대동강물이 불어나기야 하겠는가만,

눈물은 0보다 크므로 대동강물에 눈물이 보태지면

대동강물이 불어나는 것은 과학적, 수리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참고로 부끄럽지만 블로그 운영자의 관련 논문 1편을

아래 포스트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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