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眼:愁. 宋 葉少縕 <石林詩話> 歐陽修가 일지기 그 한 밤중에는 종을 치지 않을 때라고 하여 병통으로 여겼지만 대개 公이 일지기 吳中에 가보지 못하여서 그렇게 말한다.지금도 吳中의 절에서는 실제로 한밤에 종을 친다. 장계는 과거에 낙방하고 귀가 중 한산사 근처 풍교에서 자다.
● 해설 <고산구곡가>는 이이가 선조 10년 42세의 나이로 해주로 퇴거하여 선적봉과 진암산 두산 사이를 흐르는 구곡 유수의 제오곡인 고산 석담에 복거하고 그 다음해 여기에 은병정사를 세워 은거하면서 주희의 <무이도가>를 본떠서 지었다는 총 10수로 된 연시조이다. 16세기 사림파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근거하여 조선조를 개혁코자 하였는데 그 실천 요강은 주자에 집약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적 의지가 좌절되면 서슴없이 강호로 돌아 갔는데 그들에게는 주자의 삶과 그의 학문, 그리고 그의 문학이 하나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주자의 무이구곡에서의 삶이 동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가 지은 <무이도가> 등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무이도가>는 지고의 시로 인식되어 깊은 천착이 있었는데, 이황은 <무이도가>에서 차음하여 <한거독무이지차구곡자가운>을 지었고, 율곡 이이는 시조의 형식을 빌어 <산구곡가>를 지었다. 조선조의 주자학적 지식인들이 <무이도가>를 수용함에 있어 이황의 경우처럼 거의 한시로 차음한데 반해 이이는 시조의 형태로 변용하였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고산구곡가>는 연시조의 유산중 구조와 내용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작품인데 같은 강호 자연을 노래한 퇴계의 <도산십이곡>이나 입암의 직립불기, 높은 기상과 강건함, 묵묵한 기상을 읊어 자연에의 몰입을 추구하면서도 그 속에서 '머도록'과 '먼 빗치'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고산의 <어부사시사>와도 다르다. <고산구곡가>는 첫수를 서사로 시작하여 1곡에서 9곡까지 노래하는 구곡체 시가라 할 수 있는데, 퇴계.율곡 이후 17세기 송시열을 비롯한 주자학적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애송되기도 하고, 자연을 소재로 한 많은 한시 창작에 영향을 미쳐 20세기 초엽까지 많은 구곡체 시가가 지어졌다. 그러나 한문 구곡체 시가의 작품 수는 많으나 국문 구곡체 시가는 율곡의 <고산구곡가>와 이것의 영향을 직접 받은 권섭의 <황강구곡가>, 가사 형태의 시가인 채헌의 <석문정구곡도가> 등 몇 편에 불과하다. 구곡체 시가 가운데 <고산구곡가>는 형태상 구곡을 읊었다는 점에서 <무이도가>의 영향을 받았으나 의미상 구조나 내용에 있어서는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도산십이곡'은 도산 노인(陶山老人)이 지은 것이다. 노인이 이 시조를 지은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 동방의 가곡은 대체로 음와(淫蛙)하여 족히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저 '한림별곡'과 같은 류는 문인의 구기(口氣)에서 나왔지만 긍호(矜豪)와 방탕에다 설만(褻慢)과 희압(戱狎)을 겸하여 더욱이 군자로서 숭상할 바 못 되고, 다만 근세에 이별(李瞥)이 지은 '육가(六歌)'란 것이 있어서 세상에 많이들 전(傳)한다. 오히려 저것[육가]이 이것[한림별곡]보다 나을 듯하나, 역시 그 중에는 완세 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 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은 것이 애석한 일이다.
('한림별곡'이나 이별의 '육가'는 온유돈후의 실이 적음 )
노인이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써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시는 노래 부를 수 없으므로, 노래로 부르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지어야 함 )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일(其一)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한편 스스로 무도(舞蹈)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廳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도산십이곡'을 지으니 가자나 청자 모두 자익이 있을 것임 )
돌이켜 생각컨데, 나의 종적이 약간 이 세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한사(閑事)로 인하여 요단(鬧端)을 일으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와 음절에 알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 건(一件)을 써서 서협(書莢) 속에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내어 완상(玩賞)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의 거취(去取)의 여하(如何)를 기다리기도 한다.
퇴계는 도산(陶山)의 북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처음 은거지로 삼았다가 후에 도산의 남쪽에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朧雲精舍)를 세우며 구곡원림을 경영하였다.(이황,吾家山誌 권1, 陶山雜詠幷記)
그가 지은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 중에 3곡으로 석담곡(石潭曲), 천사곡(川沙曲), 단사곡(丹沙曲)이라는 명칭이 보이고 그 주(註)에도 “월란암은 산이 가깝고 물이 임하여 잘린 것이 누대의 형상과 같은 것이 무릇 7곳인데 물이 산을 둘러 굽이를 이룬 것이 무릇 3곳이다.(月瀾庵 近山臨水而斷 如臺形者 凡七水繞山成曲者 凡三)”31) 라고 한 것을 볼 때에도 당시 이미 어느 정도 구곡원림이 지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청량산(淸凉山)의 계곡을 따라 낙천(洛川)이 굽이굽이 흐르면서 절경을 이루는 도산구곡 원림은 오가산지(吾家山志) 에 의하면
제1곡이 운암(雲巖),
제2곡이 월천(月川),
제3곡이 오담(鰲淡),
제4곡이 분천(汾川),
제5곡이 탁영(濯;),
제6곡이 천사(川砂),
제7곡이 단사(丹砂),
제8곡이 고산(孤山),
제9곡이 청량(淸凉) 등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제5곡에 마련했는데 이는 주자가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를 건립한 것과 같이 역(易)의 구오(九五), 즉 비룡재천격(飛龍在天格)인 양오(陽五)를 택했으니 성리학자로서의 주도면밀함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퇴계는 도산 구곡원림을 대상으로 구곡가를 짓지 않았으나
정조 때의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이 도산구곡가 를 지어 오늘날에 전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도산구곡의 대체적인 경관을 짐작할 수 있다.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