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서울을 함락하고 바로 철령(鐵嶺)을 넘었다. 장계(長溪) 황정욱(黃廷彧)이 북청(北靑) 진남루(鎭南樓)에 올라 한탄하기를,

“정입부(鄭立夫)가 살았더라면 왜놈이 어찌 능히 철령을 넘었으랴.”

하더니, 7월에 회령(會寧)에서 사로잡혔다.

장계의 문장은 우뚝하고 웅건하며 속기가 없다. 조선초로부터 문병(文柄)을 잡은 자가 모두 사가독서(賜暇讀書)한 자 가운데서 나왔지만 장계만은 그렇지가 않아 세상에선 그를 영화롭게 여기지만 지난해 난리에 화를 유달리 더 입었다.

황정욱(黃廷彧)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장수인(長水人)이며 벼슬은 병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정입부(鄭立夫)의 이름은 언신(彦信), 호는 나암(懶庵),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우의정인데, 기축년(1589, 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獄事)에 원통하게 죽었다. 뒤에 신원되었다.


34. 중추(中樞) 최립(崔岦)은 문장이 간결(簡潔)하고도 예스러워 당대의 대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더러 그의 시는 문만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을 제(祭)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伐木丁丁山鳥悲 벌목정정산조비

獨來懸劍向何枝 독래현검향하지

才名不救當時謗 재명불구당시방

交道還應入地知 교도환응입지지

瀛海別回爲此別 영해별회위차별

驛亭詩後斷君詩 역정시후단군시

平生對酒須皆飮 평생대주수개음

倘省靈牀奠一卮 당성령상전일치

나무 찍는 소리 쩡쩡 울려라 산새도 슬퍼하네

홀로 와 어느 가지에 칼을 건단 말가

재주와 명망이 당시의 비방을 이기지 못했는데

사귐 도는 응당 저승 가야 알리라

영해에서 작별한 뒤에 영 이별을 하다니

역정에서 시 지은 뒤 그대 시가 끊어졌네

평생 술만 보면 다 마시고야 마시던 님

궤연에 부어놓은 한잔 술 살피실지

역시 근엄하고도 기발하며 건장하니 어찌 문만 못하다 할 것인가.

최립(崔岦)의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 통천인(通川人)이며 벼슬은 형조 참판이다.

하응림(河應臨)의 자는 대이(大而), 호는 청천(菁川), 진주인(晉州人)이다. 경재(敬齋) 하연(河演)의 오대손(五代孫)이며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36. 나의 중형은 언젠가,“내가 평생에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익히 읽은 탓으로 문장이 높지 못하다.” 고 한탄하였고,

 

이익지(李益之:이달) 또한,“소동파ㆍ황산곡의 시가 내 폐부에 달라붙은 지가 이미 오래인지라, 시어를 만듦에 성당(盛唐)의 품격이 없다.”하였다.

 

그러나 시 짓기를, 소동파ㆍ황산곡처럼 하면 그만이지, 하필 새삼스레 도연명(陶淵明)ㆍ사영운(謝靈運) 사이를 꾀할 것인가.

 

 

37. 나의 중형의 만년의 글은 유자후(柳子厚) [

유종원柳宗元, 773 ~ 81

9]와 너무도 같아서, 주한정기(晝寒亭記)ㆍ축려문(逐癘文) 등 작품은 가히 대씨당(戴氏堂)ㆍ축필방(逐畢方)등 문과 서로 어슷비슷하다.

 

최입지(崔岦之)가 화기(畫記)에 대해서 말하기를 철로보지(鐵鑪步志)만 못지 않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명(碑銘)과 묘지(墓誌)는 무엇보다도 그의 장기인데도 세상 사람은 다 모르고, 보아도 아는 이가 드무니, 후세에 반드시 양웅(揚雄)이 있어 알아 줄 것이다.

 

35. 나의 중형은,

“문장을 배우려면 반드시 한퇴지(韓退之) 글을 익히 읽어, 우선 문호를 세우고,

다음으론 《좌씨전(左氏傳)》을 읽어 간결체를 배우고,

다음에는 《전국책(戰國策)》을 읽어 문장력이 종횡무진케 하고,

다음에는 《장자(莊子)》를 읽어 신출귀몰(神出鬼沒)하는 솜씨를 연구하고,

《한비(韓非)》ㆍ《여람(呂覽)》으로 지류를 통창케 하고,

《고공기(考工記)》ㆍ《단궁(檀弓)》을 읽어 뜻을 가다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익히 읽어 자유자재롭고 뛰어난 태를 키우는 것이다.

시를 배울 때는 먼저 《당음(唐音)》을 읽고,

다음으로 이백(李白)의 시를 읽되,

소동파(蘇東坡)ㆍ두목(杜牧)은 그 솜씨만 따면 그만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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