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구(司寇) 정유일(鄭惟一)이 세상을 뜨자, 북해(北海)가 듣고 다음과 같이 만사를 지었다.

念昔游玄菟 념석유현토

傾蓋淸江上 경개청강상

寒月漾芳罇 한월양방준

雪花凝毳帳 설화응취장

斯年五子上河梁 사년오자상하양

握手臨風起三唱 악수림풍기삼창

別來何自遽游仙 별래하자거유선

萬里逍遙鶴背煙 만리소요학배연

秋夜冷然華表柱 추야랭연화표주

碧天無際望君還 벽천무제망군환

그리워라 지난날 현도 땅에 노닐 때

청강 위에 일산을 기울이고 즐긴 일

싸늘한 달빛 감미로운 술잔에 일렁이고

눈송인 털방장에 엉기었었지

그해 다섯 사람은 다리에 올라

바람머리에 손잡고 일어나 세 번이나 노래 불렀지

헤어진 뒤 갑자기 신선이 되어

학 타고 놀 속 만릿길을 소요하다니

가을밤은 쓸쓸하고 화표주에

푸른 하늘 가없는데 그대 오기만을 바라누나

말쑥하고 속기가 없어 읽으면 마음이 시원해진다. 중국인이 인재를 아끼기가 대개 이와 같다.

[황홍헌 / 허봉의 감식안]

33. 황 조사(黃詔使 황홍헌을 가리킴)의 시를 사람마다 시원찮게 여겼으나 나의 중형만은,

“이런 재주는 예로부터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했지만, 남들은 믿지 않았다.

《풍교운전(風敎雲箋)》에 첨사(詹事)의 글이 실린 것을 보면, 문법이 간결ㆍ엄숙하고 전아ㆍ미려하며 온후ㆍ순수하였으니 나의 중형은 인재를 아는 분이라고 할 만하다.


31. 명 나라 사람 등계달(滕季達)의 자는 진생(晉生)인데 오인(吳人)으로 글과 시를 잘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한 천하의 명산 대천을 두루 돌아다녔고 스스로 북해(北海)라 호하였다.

소재(小宰) 한세능(韓世能)이 계유년(1573, 선조6)에 우리나라에 조서를 반포할 때 북해(北海)가 따라왔는데, 그때 습재(習齋) 권벽(權擘)ㆍ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ㆍ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종사관(從事官)이 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수행하였었다.

북해가 네 분과 서로 몹시 좋아하여 여러 번 시문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때, 나의 중형은 태사(太史 사관(史官)의 별칭)로 임금을 모시고 거침없이 일을 기록하자 조사(詔使)가 누구냐고 물으니 재상인 김계휘(金繼輝)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이름은 모요, 자는 모라 대답하였다. 북해가 만나고자 하였으나 기회가 닿지 않았다.

갑술년(1574, 선조7)에 나의 중형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조천궁(朝天宮)에서 서로 만나보고 늦게 만난 것을 한스러워하였고, 중형이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도 북해는 여러 번 사신 편에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였다.

첨사(詹事) 황홍헌(黃洪憲)ㆍ도헌(都憲) 왕경민(王敬民)이 임오년(1582, 선조15)에 조서를 반포하러 올 때 북해가 나의 중형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 부탁하고, 또 그들에게,

“모의 벼슬이 선위사(宣尉使)가 되지 않았으면 반드시 도감(都監)이 됐을 것이오. 당신들은 그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오.”

하였다.

첨사가 의순관(義順館)에 이르러, 역관 곽지원(郭之元)에게 물어보고 중형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편지를 보이고 한편 쥘부채[手扇]를 선사하였다. 나의 중형도 율시를 지어 두 사신에게 인사하자, 서로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번국(藩國 우리나라를 말함)에도 또한 인재가 있구려.” 하였다.

귀국하자 첨사가 북해에게,

“노형은 참으로 사람을 볼 줄 아십니다그려.” 하였다.

이것은 당성군(唐城君) 홍순언(洪純彦)에게 들은 말이다.

권벽(權擘)의 자는 대수(大手), 안동인(安東人)이며 벼슬은 감사(監司)이다.

정유일(鄭惟一)의 자는 자중(子中), 동래인(東萊人)이며 벼슬은 대사간(大司諫)이다.

한호(韓濩)의 자는 경호(景浩), 삼화인(三和人)이며 진사(進士)로 벼슬은 호군(護軍)이다.

김계휘(金繼輝)의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광주인(光州人)이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이다.

홍순언(洪純彦)은 역관(譯官), 남양인(南陽人)이며 광국공신(光國功臣)에 녹훈되었다.


30. 임진난에 신노 제이(申櫓濟而) [제이는 자]와 같이 북쪽으로 가는데, 명종(明宗)의 제삿날이 되었다. 그가 객창(客窓)에서 다음과 같이 지었다.

先王此日棄群臣 선왕차일기군신

末命丁寧托聖人 말명정녕탁성인

二十六年香火絶 이십육년향화절

白頭號哭只遺民 백두호곡지유민

선왕[明宗]이 이날 세상 뜨실 때

유언은 정녕 새 임금 부탁이었네

선조 이십육년 종묘 제례도 못 모시게 되니

센머리로 울부짖는 건 오직 유민들

뜻이 몹시 서글퍼서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이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어떤 사람은 ‘절(絶)’ 자를 고쳐 ‘냉(冷)’ 자로 하기도 하는데, 뜻은 좋으나 격은 먼저 글자만 못하다.

노(櫓)는 고령인(高靈人)이며 생원(生員)이다. 선대의 누로 과거에서 보류되어 급제를 못했다. 성민(聖民)의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남양인(南陽人)이며, 벼슬은 판중추부사에 그쳤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29. 명 나라 사람의 시를 이손곡(李蓀谷:이달)은 하중묵(何仲黙) [중묵은 하경명(何景明)의 자]으로 첫째를 꼽되,

 

나의 중형은 이헌길(李獻吉) [헌길은 이몽양(李夢陽)의 자]을 최고로 여겼고,

 

윤월정(尹月汀:윤근수)은 이우린(李于麟)[우린은 이반룡(李攀龍)의 자]을 그 두 사람보다 뛰어났다고 여겼으니, 정론(定論)을 내릴 수 없다.

 

봉주(鳳洲 ) [명(明) 나라 왕세정(王世貞)의 호]의 말은,“비교하자면 헌길(獻吉)은 높고 중묵(仲黙)은 통창하며 우린(于麟)은 크다.”하고 그도 또한 누가 첫째요, 누가 다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익지(益之:이달)가 하루는 율시 한 수를 내어 보이며,“이것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 중묵[하경명]의 시일세.” 하기에,

 

처음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서,“이 시는 맑고 뛰어났으니, 율시 고르는 자가 빠뜨렸을 리 없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의작일 겁니다.”하니, 익지가 자기도 모르게 껄걸 웃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客衾秋氣夜迢迢 객금추기야초초深屋疏螢度寂廖 심옥소형도적료明月滿庭凉露濕 명월만정량로습碧天如水絳河遙 벽천여수강하요離人夢斷千重嶺 리인몽단천중령禁漏聲殘十二橋 금루성잔십이교咫尺更懷東閣老 지척경회동각로貴門行馬隔雲霄 귀문행마격운소

 

나그네 이불에 스미는 가을 기운에 밤은 깊어가고 그윽한 집 성긴 반딧불만 고요 속을 나는구나 밝은 달은 뜰에 가득 서늘한 이슬은 함초롬 푸른 하늘은 물 같은데 은하수는 아득해라 이별의 꿈 고개고개 넘다 깨니 대궐 누수 소리 십이교에 여운지네 지척에서 새삼 동각로 그립건만 고관의 말굽 소린 하늘처럼 아득해라

 

짜임새와 구어(句語)가 대복(大復 하경명의 호)과 꼭 같아서, 감식안(鑑識眼)이 있는 사람이라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이 시는 바로 이익지가 월정(月汀)에게 올린 작품이다.

 

월정(月汀)의 이름은 근수(根壽), 자는 자고(子固), 해평인(海平人)이며 벼슬은 예조 판서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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