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파(塔婆), 또는 파고다(Pagoda)는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에 어원을 둔 단어로 석가모니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일종의 무덤 건축물을 의미한다. 사리라면 일반인들은 구슬 같은 형태를 연상하지만, 실제의 의미는 화장후에남은 유해(뼛조각)이다.
석가붓다 사후 그를 신앙하는 부족들이 유해를 나눠가 탑을 세운 데서 유래한다.
한국어에서 탑은 산스크리트어(범어)의 스투파(स्तूप, stūpa)에서 기원한다. 이는 고대 인도에서 온 말로 돔 형태로 만든 흙 무덤을 지칭했던 말이었으며, 불교가 중국을 거쳐오면서 솔도파(窣都婆)로 음차되었고 이것이 줄어 오늘날에 쓰이는 탑파(塔婆), 탑(塔)이 되었다.
동양에서 탑은 불교의 건축물로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었다. 이후 부처님의 사리가 여러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네모난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의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를 따랐다. 이 구조는 탑이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중국의 목조건축양식 혹은 벽돌건축양식과 만나 둥근 구조물과 상륜부는 축소되어 탑의 지붕 위에 장식처럼 얹히게 되었다. 이들을 각각 목탑양식, 전탑양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탑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고 이 두 양식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양식이 석탑이다.
파고다공원> 탑골공원> 삼일공원
파고다공원과 탑골공원
서울특별시 종로 2가에 있는 탑골 공원은 3 · 1운동 때에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한용운 등 애국지사 33인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전기(1464)에는 유명한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에는 사찰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탑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안 사람들은 이곳을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마을' 혹은 '탑골'이라고 불렀고 한자어로 '탑사동(塔寺洞)'이라고 부르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곳을 3 · 1운동 때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파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멀리 인도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파고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서 '신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파가바티(bhagavati)'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차용되어 파고드(pagode)가 되었고, 다시 영어로 차용되어 파고다(pagoda)가 되었다가 한국어로 차용되어 쓰인 것이다. 그래서 파고다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말이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 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면모를 바꾸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파고다 공원과 탑골공원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있었고,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낭송한 것으로 전함..
현재 광화문 교보 앞에 남아 있는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앞에서의 시위.
광화문에서의 만세운동.
3,1일 택일은 3,3일이 고종 장례일이라 전국민의 집결이 용이함을 고려했기 때문임.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인산일이라고 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장례식도 인산일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서슬 퍼런 일제 경찰의 물샐틈 없는 가시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의 선언문 낭송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부득이 현재 광화문 교보 앞 코너에 남아 있는 "고종 칭경기념비(稱京紀念碑)" 앞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낭송함.
3,1일 택일은 3,3일이 고종 장례일이라 전국민의 집결이 용이함을 고려했기 때문임.
고종의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인산일이라고 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장례식도 인산일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료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손병희님이 첫 서명자여서 탑골공원의 터주대감으로 우뚝 서 계신 겁니다. 물론 만해스님비도 세웠지만. 삼일공원을 대표하는 본디 상징물은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입니다. 그 정교한 조각을 보면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알 만하지요. 원각사는 세조의 자책으로 건립한 사찰이었습니다.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이 되어,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긴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고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꺽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우르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회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軸)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번 한 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이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학의 장점을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민간 신앙, 유교, 불교 등도 모두 녹아 있어요. 그중 동학의 대표적인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인내천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다시 편성하면서 내세운 사상이에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사상을 재해석한 것이에요.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 사상으로 변화되었지요. 세 가지 사상 모두 인간 존중과,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 꼭지의 글에서 92세의 고령인 김동길님이 맑은 정신과 또렷한 발음으로 민족정기 말씀하시는 걸 듣고 최남선님의 기미독립선언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유공자 명단에는 못 올릴 망정 친일론자 명단에 춘원과 함께 올라 있다니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분을 예로 들면 <기미독립선언서> 와 <무정>의 공적을 감안하여 친일은 별건으로 다루는 게 바람직하다. 친일행위는 비판받아 마당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유능한 사람들은 모두 감방에서 생을 마쳐야 한단 말인가? 뉴스에 의하면 좌익운동을 한 사람들도 버젓이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데, 친일 행적으로 그분들의 당당한 역사적 공적마저 폄하하거나 지워버리려 한다는 건 집권세력의 일방통행적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는 후세에 국민들이 평가한다.
통일논의가 급물살을 타지만 실상은 국가 체제 논의에 대한 합의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유민주체제를 포기할 수 없듯이 북한의 집권층도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들의 체제 보장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운영자는 추악했던 종3에 나아가면 자랑스러운 삼일공원(탑골공원, 파고다공원)을 자주 찾는다. 그곳은 소득이 없어 보이는 노인들의 휴식공간이다. 공원 바깥 담벼락 아래엔 바둑, 장기 두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대낮인데도 담벼락 아래엔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누워 계신 분들도 계신다. 관광 차원에서 가난한 노인분들의 휴식공간인 창덕궁 앞을 정비하다 보니 이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이분들부터 잘 돌보는 것이 복지정책의 1순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울특별시 종로 2가에 있는 탑골 공원은 3 · 1운동 때에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한용운 등 애국지사 33인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전기(1464)에는 유명한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에는 사찰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탑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안 사람들은 이곳을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마을' 혹은 '탑골'이라고 불렀고 한자어로 '탑사동(塔寺洞)'이라고 부르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곳을 3 · 1운동 때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파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멀리 인도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파고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서 '신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파가바티(bhagavati)'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차용되어 파고드(pagode)가 되었고, 다시 영어로 차용되어 파고다(pagoda)가 되었다가 한국어로 차용되어 쓰인 것이다. 그래서 파고다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말이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 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면모를 바꾸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파고다 공원과 탑골공원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인내천을 주창하신 천도교 3대교주 손병희님의 요청에 따라 당대 최고의 문필가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명문이 <기미독립선언서>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그 공적으로 탑골공원의 터주대감으로 우뚝 서 계신 겁니다. 물론 민족시인 만해스님비도 거북비 옆을 지키고 있지만. 삼일공원을 대표하는 본디 상징물은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입니다. 그 정교한 조각을 보면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알 만하지요. 원각사는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영월로 추방하고 몸에 돋아나는 종기에 시달리다가 왕위찬탈을 감행한 데 대한 속죄의 참회를 위해 건립한 사찰입니다.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이 되어,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긴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고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꺽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우르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회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軸)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번 한 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이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학의 장점을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민간 신앙, 유교, 불교 등도 모두 녹아 있어요. 그중 동학의 대표적인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인내천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다시 편성하면서 내세운 사상이에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재해석한 것이에요.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 사상으로 변화되었지요. 세 가지 사상 모두 인간 존중과,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세종이 석가의 일생을 서사시로 찬미한 월인천강지곡 전3권과 수양대군 자신이 1446년에 지은 석보상절* 전24권을 합하여 1459년(세조 5)에 편집한 것으로, 두 책제목의 앞 글자 2자씩을 따서 '월인석보(月印釋譜)'라 이름한 것이다.
* "세조를 도와 이 책[석보상절]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학열(學悅)·학조(學祖)·김수온(金守溫) 등이다. "에서도 밝혔듯이 세종의 어명을 받은 이는 수양대군이지만 편찬 실무자들은 불교를 신봉하는 신미, 김수온 등의 학자들이다.
여기의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1은 15∼16세기경에 목판본으로 복각(復刻)된 중간본으로서, 상 하 2책으로 분책되어 있다. 권말에 간기가 있어 1562년 8월 18일 전라도 순창 무량굴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첫머리에는 석가의 팔상도(八相圖)의 하나인 도솔내의상과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변상도(變相圖)가 있다.
목판본. 세조를 도와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학열(學悅)·학조(學祖)·김수온(金守溫) 등이다. 〈석보상절〉로 미루어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完帙)이 되지 못한다. 편찬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의 많은 신하들을 죽인 뒤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월인석보> 편차자 중 한 분이신 김수온(金守溫)은 당시 석학으로 신미대사의 동생이다.(운영자)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의 방식을 따라서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주석(註釋)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을 붙여 지었는데, 조권(調卷)과 문장에 상당히 수정이 가해졌다. 조권의 경우 〈석보상절〉 권11·19의 내용이 〈월인석보〉 권21·18에 합치되며, 권13의 〈석보상절〉은 〈법화경 法華經〉 권1의 내용을, 〈월인석보〉는 〈법화경〉 권2·3의 내용을 보이는 등 권11부터 권차(卷次)가 다르다. 문장과 표기법의 경우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讀音)의 위치가 바뀌고 한자음 종성 '자'와 협주(夾註)가 추가되는 등 부분적으로 변개(變改)가 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으로 첨삭(添削)되었으므로 〈월인석보〉는 완전히 새로운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이며, 국어학과 국문학의 귀중한 연구자료이기도 하다. 특히 권1의 첫머리에 실린 〈훈민정음〉의 언해는 국어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전하는 책 가운데 초간본은 권1·2, 권9·10, 권13·14, 권17·18, 목각본은 1568년(선조 1)의 권1·2, 1572년의 권7·8, 1542(중종 37), 1562(명종 17), 1569년의 권21, 1559년의 권23 등 12권이 남아 있다. 이중 1568년 권1(통문관), 1572년의 권7(동국대학교), 권7~10, 권17·18, 권23(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은 영인되었다. 초간본 10권, 중간본 2권 3책이 보물 제745호로, 권11·12의 2권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었다.
월인석보(月印釋譜)해석및 해설(일부 발췌)
*위 영인본의 현대역
옛, 헤아릴 수 없이 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어,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밖으로 나아가시어 구담 바라문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왕복)을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나라에 빌 먹으로 오시니, (예전 왕인 줄을) 모두 몰라보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소구담이라 (그담의 제자이므로) 하더라. - 보살의 출가-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 밭에 불도를 닦는 깨끗한 집을 만들고 혼자 앉아 계셨는데, 도둑 오백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 정사 곁으로 지나가니 그 도둑이 보살의 전 세상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그 보살을 (도둑을 오인하여) 잡아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더니, 대구담 (보살의 선생)이 신통한 눈으로 보고 허공에서 날아와 묻되, 그대 자식 없더니, (이렇게 죽는 것은)무슨 죄이요? 보살이 대답하시되, 멀쟎아 죽을 나인데 자손을 의론하리요? 그 왕(보살의 아우)이 사람을 시켜 활로 쏘아 죽이니라. - 수도하던 보살의 죽음-
대구담이 슬퍼하여, (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피가 묻은 흙을 파 가지고 정사에 돌아와,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되,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 열달 만에 왼쪽 피는 남자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거늘, 성을 구담씨라 했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이으시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 - 구담씨 탄생-
세조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편(合編)하여 간행한 책이다. 체재는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석보상절>을 그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하였다. 책이름의 ‘월인’은 ‘월인천강지곡’에서 ‘석보’는 ‘석보상절’에서 각각 따온 것으로 이 책의 서문서명(序文書名)과 판심서명(版心書名)에 일치한다. 서지학적으로 엄격히 말한다면, 이 책의 이름은 권수제에 따라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이 되어야겠지만, 학계에서는 ‘월인석보’라는 서명이 관례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간혹 책 표지나 도서관의 표목(標目)에서 권수제의 첫 행인 ‘월인천강지곡’만으로 서명을 삼는 경우가 있는데, 《월인천강지곡》은 별개의 책이므로 이는 혼란의 우려가 있다.
이 책의 원간 연대는 <어제월인석보서>의 “天順 3年 己卯(1459) 7月 7日序”이라는 기록에 따라 1459년(세조 5)으로 추정된다. 편찬 간행의 경위는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아,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전 24권)을 지었는데 그것을 보고 세종이 친히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전 3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두 책은 세종대에 모두 동활자(銅活字)로 간행되었으나, 간행된 직후부터 합편의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 교정본 권6, 9, 13, 19의 교정 내용과 난상(欄上)의 기록, 본문의 절단 상태, 그리고 <월인천강지곡> 낙장(落張)의 편입 위치 등이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결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세조 즉위 후에 다시 사업이 시작되어 목판본(전 25권)으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월인석보》는 원간본과 복각본이 모두 영본(零本)으로 전하고 있다. 원간본으로는 권1,2(서강대 도서관 소장), 권7,8(동국대 도서관 소장), 권9,10(김민영 소장), 권11,12(호암미술관 소장), 권13,14(연세대 도서관 소장), 권15(성암문고 및 순창 구암사 소장), 권17(장흥 보림사 구장), 권17,18(평창 월정사 소장), 권19(가야대 박물관 소장), 권20(개인 소장), 권23(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권25(보림사 소장), 그리고 복각본으로는 권1,2(1568년 풍기 희방사판), 권4(간행지 미상, 16세기 중엽 간행 추정, 김병구 소장), 권7,8(1572년(선조5) 풍기 비로사판), 권21(1542년(중종37) 안동 광흥사판, 1562년(명종17) 순창 무량굴판, 1569년(선조2) 은진 쌍계사판), 권22(간행지 미상,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권23(1559년(명종14) 무량굴판, 연세대 및 영광 불갑사 소장) 등이 전한다. 복각본이라 하더라도 인출의 시기가 오래된 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현전하는 《월인석보》는 원간본과 복각본을 다 합쳐도 권3, 5, 6, 16, 24의 5권이 결권이 된다. 이 책에 쓰인 한글 자형(字形)은 한글 창제 직후의 모습과 다르다. 《용비어천가》, 《석보상절》에 사용된 한글 자형과 달리, 글자의 획이 부드러운 직선으로 바뀌고, 방점과 아래아(?)가 권점(圈點)에서 점획(點劃)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는 1455년(단종 3)의 《홍무정운역훈》에 사용된 한글목활자에서부터 비롯되는 한글 자형의 변화인데, 이후의 한글 문헌에서도 대체로 이 글자형이 사용된다.
《월인석보》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한 것이라 하더라도 조권(調卷)과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권에 있어서는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이 《석보상절》에서는 권13~21에 나타나지만 《월인석보》에서는 권11~19에 대응되고 있다. <지장경(地藏經)>의 내용도 《석보상절》에서는 권11에, 《월인석보》에서는 권21에 각각 나타난다. 또한 《석보상절》 권23, 24의 내용은 《월인석보》에서는 권24, 25에 대응된다. 체재면에 있어서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한자와 독음의 표기 위치(?功득德→功?德득), 한자음 종성 ㅇ표기 유무(셰世존尊→世솅尊존), 협주의 추가 등 부분적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다. <석보상절> 부분은 내용 및 문장에 있어서 대폭적인 첨삭이 있다.
내용의 추가뿐만 아니라 표기법, 문법, 어휘 선택의 여러 가지 언어사실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이는 이들 문헌 편찬자들 간의 언어 사실 차이에 기인된 것도 있고(?/의 그?→ ?/의게, -긔→-게, 즉자히→즉재, ?니-→?지-, 미혹→迷惑 등), 또 한편으로는 《석보상절》과는 달리 《월인석보》를 불경(佛經)의 성격에 더 가깝게 하려는 편찬자의 의도에 기인된 것도 있다(“그지 업스며 數 업슨 비쳇 光明을 펴샤”(석19:38b)→ “無量無數色光? 펴샤”(월18:4a) 등). 그러나 이러한 변개(變改)가 일률적으로 적용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이 추가된 부분에서는 언어사실의 차이가 좀더 명확하지만 《석보상절》의 내용을 답습한 부분에 있어서는 언어사실이 혼합되어 있다. 개편 대상 문헌인 《석보상절》의 언어사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월인석보》를 전혀 새로운 국어사 자료로 이용함에 있어서도 이 점은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월인석보》의 후대 복각본들은 그 대부분이 원간본을 판하(版下)로 하여 충실히 복각한 것들이므로 언어사실에 있어서 원간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오각(誤刻)과 탈각(脫刻)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원간본이 전하지 않는 권차의 복각본을 15세기 국어 자료로 이용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방점의 경우는 탈각이 특히 심하므로 이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방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어형(語形)의 오각, 탈각은 복각본에서 흔히 보인다. 한 예로 1568년(선조1)의 희방사판 복각본 권1,2의 ‘?비리’(序2b), ‘다?기짓’(2:13b) 등은 각각 ‘?바리’, ‘다?가짓’에서 탈획된 것이다.
그런데 복각본 가운데에는 간행자가 의도적으로 변개를 가한 판본도 있다. 광흥사판 권21과 쌍계사판 권21이 그것이다. 이 변개는 한자음 독음에 한정된다. 광흥사판은 동국정운식 한자음 종성 ‘ㄹㆆ’이 ‘ㄹ’로 바뀌고(佛뿔, 一?, ···), 종성 ‘ㅇ’의 표기가 삭제된 (地띠藏?菩뽀薩살, 爲위?야, ···) 예가 상당수 존재한다. 원간본과 같이 ‘ㄹㆆ, ㅇ’이 그대로 나타나는 부분도 있으나 이는 원간본의 영향일 뿐이다. 이 판본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실수라 할 수 있다. ‘ㄹㆆ→ㄹ’로의 변개는 한자음 독음에만 적용되고 고유어 표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처??제). 한자음 종성 ㅇ의 삭제는 종성 ‘ㅱ’에도 적용되었다(求굼(←?), 道똠(←?)). 이는 광흥사판의 종성 ㅇ의 삭제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주기에 충분하다. 쌍계사판은 광흥사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변개를 보여 준다. 한자음 종성의 ‘ㄹㆆ→ㄹ’의 변화와 종성 ㅇ의 삭제뿐만 아니라, 부분적이지만 현실한자음으로 고쳐서 판각한 부분이 눈에 띈다. ‘阿아僧?祇기’(31a)←??낑, 地디藏?菩보薩살(15b)←띵?뽕?, 解해脫탈(30a)←갱?, ···.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따르지 않고 현실한자음으로 독음을 표기한 문헌은 이미 15세기말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문헌이 원간본인 경우에 한한다. 복각본의 경우는 원간본의 언어사실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임에 비추어 볼 때 이들 판본은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복각본이 아닌 개간본(改刊本)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변개가 고유어 표기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한자음에 있어서도 철저하지 못한 점에서 개간본의 일반적인 성격과는 구별된다. 현전 《월인석보》 원간본과 중간본은 그 상당수가 영인되어 학계의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
원간본 가운데는 권1·2(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1972), 권7·8(동국대), 권9·10(연대 동방학연구소, 1956), 권13·14(홍문각, 1982), 권15(성암문고본, 서지학보21, 1998), 권17·18(연대 동방학 연구소, 1957), 권17(보림사 구장본, 장태진, 교학연구사, 1986), 권20(강순애, 아세아문화사, 2001) 등이 영인되었고, 그들의 재영인본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원간본이 전하지 않는 권차의 중간본 권4(경북대, 1997), 권21(홍문각, 1983) 등의 영인본도 있다. (이호권) ① 참고문헌 고영근(1993),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월인석보, 국어사자료와 국어학의 연구, 문학과 지성사. 김영배(2000), 국어사자료연구: 불전언해 중심, 도서출판월인.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 지성사. 진단학회(1993), 월인석보의 종합적 검토(제20회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 진단학보 75. ② 관련항목: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홍무정운역훈, 법화경언해, 지장경언해 ③ 키워드: 세조, 소헌왕후, 한글자형, 복각본, 변개 ④ 원전보기: [서강대 소장 원간본 권1,2] [김병구 소장 복각본 권4] [국립도서관 소장 광흥사판 권21] [불갑사 소장 무량굴판 권23] [보림사 소장 원간본 권25]
옛, 헤아릴 수 없이 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어,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밖으로 나아가시어 구담 바라문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왕복)을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나라에 빌 먹으로 오시니, (예전 왕인 줄을) 모두 몰라보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소구담이라 (그담의 제자이므로) 하더라. - 보살의 출가-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 밭에 불도를 닦는 깨끗한 집을 만들고 혼자 앉아 계셨는데, 도둑 오백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 정사 곁으로 지나가니 그 도둑이 보살의 전 세상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그 보살을 (도둑을 오인하여) 잡아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더니, 대구담 (보살의 선생)이 신통한 눈으로 보고 허공에서 날아와 묻되, 그대 자식 없더니, (이렇게 죽는 것은)무슨 죄이요? 보살이 대답하시되, 멀쟎아 죽을 나인데 자손을 의론하리요? 그 왕(보살의 아우)이 사람을 시켜 활로 쏘아 죽이니라. - 수도하던 보살의 죽음-
대구담이 슬퍼하여, (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피가 묻은 흙을 파 가지고 정사에 돌아와,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되,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 열달 만에 왼쪽 피는 남자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거늘, 성을 구담씨라 했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이으시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 - 구담씨 탄생-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설법을 뽑아 한글로 편역한 서적이다. 불교서적중에 한글로 번역, 편찬된 최초의 책으로[1]소헌왕후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의미하고, ‘상절'(’詳節)은 중요로운 내용은 자세히(詳)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節) 쓴다는 뜻이다.[1] 금속 활자에 의한 15세기 한글 산문 자료로서 한국 어학, 한국 문학, 한국 서지학, 한국 불교학에서 귀중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