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파(塔婆), 또는 파고다(Pagoda)는 산스크리트어인 스투파(Stupa)에 어원을 둔 단어로 석가모니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일종의 무덤 건축물을 의미한다. 사리라면 일반인들은 구슬 같은 형태를 연상하지만, 실제의 의미는  화장후에남은 유해(뼛조각)이다.

석가붓다 사후 그를 신앙하는 부족들이 유해를 나눠가 탑을 세운 데서 유래한다.

한국어에서 탑은 산스크리트어(범어)의 스투파(स्तूप, stūpa)에서 기원한다. 이는 고대 인도에서 온 말로 돔 형태로 만든 흙 무덤을 지칭했던 말이었으며, 불교가 중국을 거쳐오면서 솔도파(窣都婆)로 음차되었고 이것이 줄어 오늘날에 쓰이는 탑파(塔婆), 탑(塔)이 되었다.

동양에서 탑은 불교의 건축물로 원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건축물이었다. 이후 부처님의 사리가 여러 지방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형태의 탑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대부분 네모난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봉분에 해당하는 둥근 구조물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우산 모양의 상륜부를 얹은 당시 인도의 무덤 형태를 따랐다. 이 구조는 탑이 중국으로 전파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는데, 중국의 목조건축양식 혹은 벽돌건축양식과 만나 둥근 구조물과 상륜부는 축소되어 탑의 지붕 위에 장식처럼 얹히게 되었다. 이들을 각각 목탑양식, 전탑양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방식의 탑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해졌고 이 두 양식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양식이 석탑이다.

 

파고다공원> 탑골공원> 삼일공원

파고다공원과 탑골공원

 

 

서울특별시 종로 2가에 있는 탑골 공원은 3 · 1운동 때에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한용운 등 애국지사 33인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전기(1464)에는 유명한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에는 사찰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탑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안 사람들은 이곳을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마을' 혹은 '탑골'이라고 불렀고 한자어로 '탑사동()'이라고 부르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곳을 3 · 1운동 때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파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멀리 인도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파고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서 '신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파가바티(bhagavati)'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차용되어 파고드(pagode)가 되었고, 다시 영어로 차용되어 파고다(pagoda)가 되었다가 한국어로 차용되어 쓰인 것이다. 그래서 파고다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말이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 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으로 면모를 바꾸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고다 공원과 탑골공원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85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ongchshin37&logNo=220363983877

 

만해용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

2) 만해용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 韓國末年에 山中佛敎를 都市로 끌어내려 大衆化하고 아울러 衰...

blog.naver.com

 

https://namu.wiki/w/%ED%83%91%EA%B3%A8%EA%B3%B5%EC%9B%90

 

탑골공원 - 나무위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

namu.wiki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https://www.youtube.com/watch?v=NiPHudQTNoU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운허(耘虛龍夏),만해룡운당대선사비(卍海龍雲堂大禪師碑)/탑골공원

*이 비문을 사진을 찍긴 했으나 정리해 보지 못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에 탑재된 것이 있어 여기 소개합니다. 비석의 비문은 1967년 것으로 세로 쓰기를 했으니 윗글에 착오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21666

 

원각사지 13층석탑/팔각정, 기미독립선언서/만해한룡운대선사비

https://m.mk.co.kr/news/culture/view/2022/01/29107/ "국보 원각사탑은 13층…日학자 주장 `10층설`에 오류" 남동신 교수, 학술지 `미술자료` 논문서 층수 인식 변화 분석 www.mk.co.kr 1906년 조선에 온 아사미 린타

kydong77.tistory.com

 

공약 3장 작성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있었고,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낭송한 것으로 전함..

현재 광화문 교보 앞에 남아 있는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앞에서의 시위.

광화문에서의 만세운동.

3,1일 택일은 3,3일이 고종 장례일이라 전국민의 집결이 용이함을 고려했기 때문임.

고종 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인산일이라고 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장례식도 인산일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덕수궁 앞의 만세운동.

 

https://www.youtube.com/watch?v=9tCxD0ZRmaw 

 

3·1 만세운동 ‘정재용 선생’ 육성 증언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서슬 퍼런 일제 경찰의 물샐틈 없는 가시로 인하여 파고다공원 팔각정에서의 선언문 낭송은 어림없는 일이었고,

부득이 현재 광화문 교보 앞 코너에 남아 있는  "고종 칭경기념비(稱京紀念碑)" 앞에서 학생대표 정재용이 낭송함.

3,1일 택일은 3,3일이 고종 장례일이라 전국민의 집결이 용이함을 고려했기 때문임.

고종 인산일(因山日)이란 조선과 대한제국에서 왕이나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 태상왕(太上王)과 그 비(妃), 왕세자와 그 빈(嬪), 왕세손(王世孫)과 그 빈의 장례일을 인산일이라고 했고,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장례식도 인산일이라고 했다.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자, 3월 3일 고종 황제의 장례식인 인산일을 계기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3·1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광화문 "고종 칭경기념비(紀念碑)" / 여기서 정재용 낭송

 

최남선, 기미독립선언서/천도교 손병희의 요청에 의함.

낭독자 정재용/탐골공원 팔각정  

https://ko.wikipedia.org/wiki/%EB%AF%BC%EC%A1%B1%EB%8C%80%ED%91%9C_33%EC%9D%B8

 

민족대표 33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개신교 인사 16명,

ko.wikipedia.org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료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손병희님이 첫 서명자여서 탑골공원의 터주대감으로 우뚝 서 계신 겁니다. 물론 만해스님비도 세웠지만. 삼일공원을 대표하는 본디 상징물은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입니다. 그 정교한 조각을 보면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알 만하지요. 원각사는 세조의 자책으로 건립한 사찰이었습니다.

한용운 1879 1944 충남 홍성 신흥사 승려 신간회, 사회계몽, 징역 3년 공약3장 작성자 대한민국장1962
백용성 1864 1940 전북 장수 해인사 승려 징역 1년 6월 임정 지원 대통령장 1962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84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아래 포스트에 잘 정리된 선언서와 해설을 옮깁니다.

http://blog.daum.net/kw2996/864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이 되어,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긴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고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꺽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우르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회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軸)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번 한 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이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1.천도교 측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2.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李承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의 16명,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成)의 2명이 서명·날인했다.

독립선언의 방법을 구상한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은 처음에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최제우(1824- 1864) 선생

https://www.youtube.com/watch?v=oHGiOpsScik

 

*3.1운동의 중심세력은 민족종교인 천도교였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70632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학의 장점을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민간 신앙, 유교, 불교 등도 모두 녹아 있어요. 그중 동학의 대표적인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인내천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다시 편성하면서 내세운 사상이에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재해석한 것이에요.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 사상으로 변화되었지요. 세 가지 사상 모두 인간 존중과,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인내천  人乃天

 

 

https://kydong77.tistory.com/12689

 

원각사지 10층석탑/ 파고다공원 4

11/27(목) 대학동기모임 집결지는 파고다공원 원각사지 10층석탑이었다. 탑사진 끝의 석 장은 인터넷에서 퍼왔다. https://namu.wiki/w/%EC%9B%90%EA%B0%81%EC%82%AC 원각사 - 나무위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

kydong77.tistory.com

고려 때부터 흥복사(興福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로 조선 태조 때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다.

세조 11년(1465) 사월초파일에 세조가 직접 방문하여 승려 2만 명에게 공양을 베풀고 죄인을 사면했으며 세금을 감면하였다. 1467년 사월초파일에는 원각사지 십층석탑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절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신하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https://www.youtube.com/watch?v=sYWMKg4h1yM

 

 

 

앞 꼭지의 글에서 92세의 고령인 김동길님이 맑은 정신과 또렷한 발음으로 민족정기 말씀하시는 걸 듣고 최남선님의 기미독립선언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유공자 명단에는 못 올릴 망정 친일론자 명단에 춘원과 함께 올라 있다니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분을 예로 들면 <기미독립선언서> 와 <무정>의 공적을 감안하여 친일은 별건으로 다루는 게 바람직하다. 친일행위는 비판받아 마당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유능한 사람들은 모두 감방에서 생을 마쳐야 한단 말인가? 뉴스에 의하면 좌익운동을 한 사람들도 버젓이 독립유공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데, 친일 행적으로 그분들의 당당한 역사적 공적마저 폄하하거나 지워버리려 한다는 건 집권세력의 일방통행적 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는 후세에 국민들이 평가한다.

통일논의가 급물살을 타지만 실상은 국가 체제 논의에 대한 합의 없이는 통일은 불가능하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자유민주체제를 포기할 수 없듯이 북한의 집권층도 핵무기를 앞세워 자신들의 체제 보장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운영자는 추악했던 종3에 나아가면 자랑스러운 삼일공원(탑골공원, 파고다공원)을 자주 찾는다. 그곳은 소득이 없어 보이는 노인들의 휴식공간이다. 공원 바깥 담벼락 아래엔 바둑, 장기 두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대낮인데도 담벼락 아래엔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누워 계신 분들도 계신다. 관광 차원에서 가난한 노인분들의 휴식공간인 창덕궁 앞을 정비하다 보니 이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이분들부터 잘 돌보는 것이 복지정책의 1순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용옥 <기미독립선언서> 해설

https://www.youtube.com/watch?v=sYWMKg4h1yM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국보2호 원각사지10층석탑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파고다공원> 탑골공원> 삼일공원

파고다 공원과 탑골공원

 

 

서울특별시 종로 2가에 있는 탑골 공원은 3 · 1운동 때에 손병희 선생을 비롯하여 한용운 등 애국지사 33인이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민족해방운동의 발상지로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고, 조선 전기(1464)에는 유명한 원각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원각사를 폐사하고, 중종 때에는 사찰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백탑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장안 사람들은 이곳을 '탑이 있는 절터 마을'이라는 뜻으로 '탑마을' 혹은 '탑골'이라고 불렀고 한자어로 '탑사동()'이라고 부르고 표기하였다.

그런데 이곳을 3 · 1운동 때 '파고다 공원'이라고 불렀는데 이 '파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멀리 인도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파고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 어로서 '신에 귀의한다'는 뜻을 가진 '파가바티(bhagavati)'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말이 포르투갈어로 차용되어 파고드(pagode)가 되었고, 다시 영어로 차용되어 파고다(pagoda)가 되었다가 한국어로 차용되어 쓰인 것이다. 그래서 파고다는 '사찰의 탑'을 뜻하는 말이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팔각정을 중심으로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이 있고, 보물 3호인 '원각사비' 등 문화재가 많이 있다.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으로 면모를 바꾸고 1992년 이곳의 옛 지명을 따라 '파고다 공원'에서 '탑골공원'으로 개칭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고다 공원과 탑골공원 (어원을 찾아 떠나는 세계문화여행(아시아편), 2009. 9. 16., 최기호)

 

 

최남선 작성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자 정재용/탐골공원 팔각정

 

 

 

 

기미독립선언문에 목숨 걸고 서명하신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 등 종교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인내천을 주창하신 천도교 3대교주 손병희님의 요청에 따라 당대 최고의 문필가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명문이 <기미독립선언서>입니다. 손병희 선생은 그 공적으로 탑골공원의 터주대감으로 우뚝 서 계신 겁니다. 물론 민족시인 만해스님비도 거북비 옆을 지키고 있지만. 삼일공원을 대표하는 본디 상징물은 국보2호인 원각사지 10층석탑입니다. 그 정교한 조각을 보면 국보로 지정된 이유를 알 만하지요. 원각사는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영월로 추방하고 몸에 돋아나는 종기에 시달리다가 왕위찬탈을 감행한 데 대한 속죄의 참회를 위해 건립한 사찰입니다.

 

己未 獨立 宣言書(기미독립선언서)

宣 言 書( 선 언 서 )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 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正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半萬年(반 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 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 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 (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인류) 共存同生權(공존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억제)치 못할지니라.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 (유사이래) 累千年(누천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 (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 전)의 障碍(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 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機緣(기연) 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이 되어, (우리나라의) 역사가 생긴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擺脫(파탈)하려 하면, 將來(장래)의 脅威(협위)를 芟除(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 소잔)을 興奮伸張(흥분 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 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 (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 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 급무)가 民族的(민족 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 하고, 人類通性(인류 통성)과 時代良心(시대 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 (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 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고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를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꺽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수호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 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 (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 서,我(아) 世宗世業(세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 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 (탁락) 한 民族心理(민족 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自己(자 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 무) 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辨(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 (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 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羈 (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 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 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 광정)하야, 自然(자연), 又(우) 合理(합리) 한 正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우르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서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회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 한 兩國倂合(양국 병합)의 結果(결과)가, 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 과 統計數字上(통계 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 원)히 和同(화동)할 수 업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 심조)하는 今來實績(금래 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 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 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 지)할 것 안인가.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 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 (동양 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 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 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 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正當 (정당)한 生榮(생영)을 遂(수)케 하는 同時(동시)에, 日本(일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 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야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 하는 不安(불안), 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 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 를 삼는 世界平和(세계 평화), 人類幸福(인류 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軸)인 4억만 지나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 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 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 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 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 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 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 (오인)은 아모 躊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 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번 한 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이 이 한 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吾等(오등)이 玆(자)에 奮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 (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 (만휘 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부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 (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着手(착수)가 곳 成功(성 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公約三章(공약 삼 장)

ㅡ.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 (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ㅡ.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 히 發表(발표)하라.

ㅡ.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 야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

 

1.천도교 측

민족대표는 각 교파별로 선정되었다. 천도교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권병덕(權秉悳)·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이종일(李鍾一)·최린(崔麟)의 15명이,

2.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李承薰)·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吳華英).최성모(崔聖模)·이필주(李弼柱)·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신홍식(申洪植)·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의 16명,

불교측 대표로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成)의 2명이 서명·날인했다.

독립선언의 방법을 구상한 송진우·현상윤·최린·최남선 등은 처음에

천도교·기독교측 인물, 구한말의 유지를 조선민족대표로 하여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이유서〉를 각국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구한말 유지들은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를 알게 된 불교측이 참여하게 되어 3교단이 주축이 되었다. 독립선언에 서명한 33명 외에 운동의 기획자들을 포함하면 모두 48명이다.

 

이들은 독립선언을 기획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인맥을 통해서 서울과 북부지방은 물론 3월 중순 이래의 남부지역에서 시위를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33인 자신은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는 학생대표자들과의 사전 합의를 어기고, 명월관지점 태화관에 별도로 모여 일본 경찰에 통고했다.

이로써 33인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이후의 운동은 민중 스스로가 조직하고 추진했다. 현재 33인이 3·1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3가지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최제우(1824- 1864) 선생

https://www.youtube.com/watch?v=oHGiOpsScik

 

*3.1운동의 중심세력은 민족종교인 천도교였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70632

동학은 서학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서학의 장점을 받아들였고, 전통적인 민간 신앙, 유교, 불교 등도 모두 녹아 있어요. 그중 동학의 대표적인 인내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지요.

인내천 사상은 동학의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다시 편성하면서 내세운 사상이에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으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재해석한 것이에요. 2대 교주인 최시형은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 사상으로 변화되었지요. 세 가지 사상 모두 인간 존중과, 평등사상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천주侍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인내천  人乃天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185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https://www.youtube.com/watch?v=MrUItG-tw6s

 

국보2호 원각사지10층석탑

https://www.youtube.com/watch?v=bkPzNkvkGv4

 

 

「임사절명시」 성삼문1)

[ 臨死絶命詩 成三問 ]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을 울리며 사람의 목숨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斜(회두일욕사) 머리를 돌리니 해가 지려고 한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황천길에는 주막 하나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잘까?

〈감상〉

이 시는 세조(世祖)의 회유(懷柔)에 응하지 않아 죽음에 임하여 목숨이 끊어지기 전 형장(刑場)에서 지은 시이다.

둥둥 북을 울리며 망나니가 사람의 목숨을 거두기를 재촉하는데,

조금 있으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하직(下直)이나 하려고 머리를 들어 산천을 돌아다보니, 태양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서산(西山)으로 지려고 하고 있다.

저승으로 가는 길에는 주막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는데,

오늘밤은 누구 집에서 자고 갈까?

이 시 외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성삼문이 지은 시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승지 성삼문의 「이제묘」 시에,

‘초목 또한 주나라 이슬비에 컸으니,

그대들이 오히려 수양산 고사리 먹은 것 부끄럽네’ 하였다.

유준(劉峻, 자는 효표(孝標), 시호는 현정선생(玄靖先生))의 「변명론(辨命論)」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숙원(淑媛, 여인을 말함)의 말 때문에 죽었다’ 하고,

그 주석에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다 어떤 여자가 〈당신들이 의리상 주나라 곡식을 먹지 못한다고 하는데,

고사리도 주나라의 초목이다〉 하자, 그대로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했으니,

성삼문의 시가 우연히 그와 부합된 것일까? 혹 그대로 이 일을 따다 쓴 것일까?

(成承旨三問夷齊廟詩(성승지삼문이제묘시)

草木亦霑周雨露(초목역점주우로)

愧君猶食首陽薇(괴군유식수양미)

劉峻辨命論云(유준변명론운) 夷齊斃淑媛之言(이제폐숙원지언)

注夷齊采薇(주이제채미) 有女子謂之曰(유녀자위지왈)

子義不食周粟(자의불식주속) 此亦周之草木也(차역주지초목야)

因饑首陽成詩偶然符合耶(인기수양성시우연부합야) 或因用此事歟(혹인용차사여))”

〈주석〉

〖催〗 재촉하다 최, 〖黃泉(황천)〗 저승. 〖店〗 가게 점

[네이버 지식백과] 「임사절명시」 성삼문1) [臨死絶命詩 成三問] (조선시대 한시읽기(上), 2010. 10. 8., 원주용)

사육신과 생육신

아래 포스트 참조./ EBS 동영상 주소창

 

[네이버 지식백과] 사육신과 생육신 (EBS 동영상)

生六臣

서산서원은 1703년(숙종 29)에 경상도 유학 곽억령(郭億齡) 등이

조려(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의 병향(幷享)을 사육신의 예에 따라 이루어짐이 마땅함을 국왕에게 상소하여 윤허를 받고 여섯 사람의 제향을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 되었다.

死六臣

성삼문(成三問:1418~56)·하위지(河緯地:1387~1456)·이개(李塏:1417~56)·유성원(柳誠源:?~1456)·박팽년(朴彭年:1417~56)·유응부(兪應孚:?~1456) 등을 일컫는다.

 

단종 복위 꾀하며 불의에 저항하다 수레에 팔다리를 묵여 문자 그대로 사지를 찢겨 죽임을 당한 분들이 사육신이시다. 모든 이들이 겁에 질려 있을 때 김시습은 분연히 나서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금의 노량진 묘소 자리에 안장했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008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https://www.youtube.com/watch?v=8j4F2CVgOGI

상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모신 분은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입니다.

그가 과거를 포기하고 승려로 경주 금오산(남산)에 칩거한 것도 그 때문이지요.

역설적으로 한국의 인귀교환소설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로 기록되었습니다.

변절자의 오명을 뒤집어 쓴 신숙주는 <동국정운>을 통해 한자의 우리말 표기에 크게 기여한 공로자입니다. 훈민정음을 논하자면 신미대사와 함께 먼저 거론해야 할 분이시지요.

 

https://www.youtube.com/watch?v=nzqId5oew9E

 

 

 

 

월인석보(月印釋譜)는 세종이 석가의 일생을 서사시로 찬미한 월인천강지곡 전3권과 수양대군 자신이 1446년에 지은 석보상절* 전24권을 합하여 1459년(세조 5)에 편집한 것으로, 두 책제목의 앞 글자 2자씩을 따서 '월인석보(月印釋譜)'라 이름한 것이다.

* "세조를 도와 이 책[석보상절]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학열(學悅)·학조(學祖)·김수온(金守溫) 등이다. "에서도 밝혔듯이 세종의 어명을 받은 이는 수양대군이지만 편찬 실무자들은 불교를 신봉하는 신미, 김수온 등의 학자들이다.


  여기의 월인석보(月印釋譜) 권21은 15∼16세기경에 목판본으로 복각(復刻)된 중간본으로서, 상 하 2책으로 분책되어 있다. 권말에 간기가 있어  1562년 8월 18일 전라도 순창 무량굴에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첫머리에는 석가의 팔상도(八相圖)의 하나인 도솔내의상과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변상도(變相圖)가 있다.

[참조]

훈민정음 창제와 신미대사  (0) 2018.11.04

월인석보 목판본

목판본. 세조를 도와 이 책의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미(信眉)·수미(守眉)·홍준(弘濬)·학열(學悅)·학조(學祖)·김수온(金守溫) 등이다. 〈석보상절〉로 미루어 모두 24권으로 추정되지만,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은 중간본까지 합쳐도 완질(完帙)이 되지 못한다. 편찬동기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한다고 되어 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의 많은 신하들을 죽인 뒤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월인석보> 편차자 중 한 분이신 김수온(金守溫)은 당시 석학으로 신미대사의 동생이다.(운영자)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의 방식을 따라서 〈월인천강지곡〉 몇 수를 먼저 싣고 주석(註釋)에 해당하는 〈석보상절〉을 붙여 지었는데, 조권(調卷)과 문장에 상당히 수정이 가해졌다. 조권의 경우 〈석보상절〉 권11·19의 내용이 〈월인석보〉 권21·18에 합치되며, 권13의 〈석보상절〉은 〈법화경 法華經〉 권1의 내용을, 〈월인석보〉는 〈법화경〉 권2·3의 내용을 보이는 등 권11부터 권차(卷次)가 다르다. 문장과 표기법의 경우 〈월인천강지곡〉은 한자와 독음(讀音)의 위치가 바뀌고 한자음 종성 '자'와 협주(夾註)가 추가되는 등 부분적으로 변개(變改)가 있으나, 〈석보상절〉은 대폭적으로 첨삭(添削)되었으므로 〈월인석보〉는 완전히 새로운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이며, 국어학과 국문학의 귀중한 연구자료이기도 하다. 특히 권1의 첫머리에 실린 〈훈민정음〉의 언해는 국어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현전하는 책 가운데 초간본은 권1·2, 권9·10, 권13·14, 권17·18, 목각본은 1568년(선조 1)의 권1·2, 1572년의 권7·8, 1542(중종 37), 1562(명종 17), 1569년의 권21, 1559년의 권23 등 12권이 남아 있다. 이중 1568년 권1(통문관), 1572년의 권7(동국대학교), 권7~10, 권17·18, 권23(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은 영인되었다. 초간본 10권, 중간본 2권 3책이 보물 제745호로, 권11·12의 2권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었다.

월인석보(月印釋譜)해석및 해설(일부 발췌)

*위 영인본의 현대역

 옛, 헤아릴 수 없이 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어,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밖으로 나아가시어 구담 바라문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왕복)을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나라에 빌 먹으로 오시니, (예전 왕인 줄을) 모두 몰라보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소구담이라 (그담의 제자이므로) 하더라. - 보살의 출가-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 밭에 불도를 닦는 깨끗한 집을 만들고 혼자 앉아 계셨는데, 도둑 오백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 정사 곁으로 지나가니 그 도둑이 보살의 전 세상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그 보살을 (도둑을 오인하여) 잡아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더니, 대구담 (보살의 선생)이 신통한 눈으로 보고 허공에서 날아와 묻되, 그대 자식 없더니, (이렇게 죽는 것은)무슨 죄이요? 보살이 대답하시되, 멀쟎아 죽을 나인데 자손을 의론하리요? 그 왕(보살의 아우)이 사람을 시켜 활로 쏘아 죽이니라. - 수도하던 보살의 죽음-

 대구담이 슬퍼하여, (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피가 묻은 흙을 파 가지고 정사에 돌아와,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되,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 열달 만에 왼쪽 피는 남자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거늘, 성을 구담씨라 했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이으시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 - 구담씨 탄생-

<출처>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58062924&qb=7JuU7J247ISd67O0IDHqtowg7ZW07ISd&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

 

 

<월인석보> 해설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801&docId=54016662&qb=7ISd67O07IOB7KCIIOq2jDI07JmAIOyblOyduOyEneuztCDqtowyNeydmCDsl63so7wg67CPIOu5hOq1kCDsl7Dqtaw=&enc=utf8&section=kin&rank=2&search_sort=0&spq=0

세조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합편(合編)하여 간행한 책이다. 체재는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석보상절>을 그에 대한 주석의 형식으로 하였다. 책이름의 ‘월인’은 ‘월인천강지곡’에서 ‘석보’는 ‘석보상절’에서 각각 따온 것으로 이 책의 서문서명(序文書名)과 판심서명(版心書名)에 일치한다. 서지학적으로 엄격히 말한다면, 이 책의 이름은 권수제에 따라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이 되어야겠지만, 학계에서는 ‘월인석보’라는 서명이 관례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간혹 책 표지나 도서관의 표목(標目)에서 권수제의 첫 행인 ‘월인천강지곡’만으로 서명을 삼는 경우가 있는데, 《월인천강지곡》은 별개의 책이므로 이는 혼란의 우려가 있다.

이 책의 원간 연대는 <어제월인석보서>의 “天順 3年 己卯(1459) 7月 7日序”이라는 기록에 따라 1459년(세조 5)으로 추정된다. 편찬 간행의 경위는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세종의 명을 받아, 모후(母后)인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전 24권)을 지었는데 그것을 보고 세종이 친히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전 3권)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두 책은 세종대에 모두 동활자(銅活字)로 간행되었으나, 간행된 직후부터 합편의 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국립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 교정본 권6, 9, 13, 19의 교정 내용과 난상(欄上)의 기록, 본문의 절단 상태, 그리고 <월인천강지곡> 낙장(落張)의 편입 위치 등이 저간의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작업은 완결을 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가 세조 즉위 후에 다시 사업이 시작되어 목판본(전 25권)으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월인석보》는 원간본과 복각본이 모두 영본(零本)으로 전하고 있다. 원간본으로는 권1,2(서강대 도서관 소장), 권7,8(동국대 도서관 소장), 권9,10(김민영 소장), 권11,12(호암미술관 소장), 권13,14(연세대 도서관 소장), 권15(성암문고 및 순창 구암사 소장), 권17(장흥 보림사 구장), 권17,18(평창 월정사 소장), 권19(가야대 박물관 소장), 권20(개인 소장), 권23(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권25(보림사 소장), 그리고 복각본으로는 권1,2(1568년 풍기 희방사판), 권4(간행지 미상, 16세기 중엽 간행 추정, 김병구 소장), 권7,8(1572년(선조5) 풍기 비로사판), 권21(1542년(중종37) 안동 광흥사판, 1562년(명종17) 순창 무량굴판, 1569년(선조2) 은진 쌍계사판), 권22(간행지 미상,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권23(1559년(명종14) 무량굴판, 연세대 및 영광 불갑사 소장) 등이 전한다. 복각본이라 하더라도 인출의 시기가 오래된 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현전하는 《월인석보》는 원간본과 복각본을 다 합쳐도 권3, 5, 6, 16, 24의 5권이 결권이 된다. 이 책에 쓰인 한글 자형(字形)은 한글 창제 직후의 모습과 다르다. 《용비어천가》, 《석보상절》에 사용된 한글 자형과 달리, 글자의 획이 부드러운 직선으로 바뀌고, 방점과 아래아(?)가 권점(圈點)에서 점획(點劃)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는 1455년(단종 3)의 《홍무정운역훈》에 사용된 한글목활자에서부터 비롯되는 한글 자형의 변화인데, 이후의 한글 문헌에서도 대체로 이 글자형이 사용된다.

《월인석보》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편한 것이라 하더라도 조권(調卷)과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조권에 있어서는 <법화경(法華經)>의 내용이 《석보상절》에서는 권13~21에 나타나지만 《월인석보》에서는 권11~19에 대응되고 있다. <지장경(地藏經)>의 내용도 《석보상절》에서는 권11에, 《월인석보》에서는 권21에 각각 나타난다. 또한 《석보상절》 권23, 24의 내용은 《월인석보》에서는 권24, 25에 대응된다. 체재면에 있어서 <월인천강지곡> 부분은 한자와 독음의 표기 위치(?功득德→功?德득), 한자음 종성 ㅇ표기 유무(셰世존尊→世솅尊존), 협주의 추가 등 부분적 변개와 곡차(曲次)의 변동이 있다. <석보상절> 부분은 내용 및 문장에 있어서 대폭적인 첨삭이 있다.

내용의 추가뿐만 아니라 표기법, 문법, 어휘 선택의 여러 가지 언어사실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이는 이들 문헌 편찬자들 간의 언어 사실 차이에 기인된 것도 있고(?/의 그?→ ?/의게, -긔→-게, 즉자히→즉재, ?니-→?지-, 미혹→迷惑 등), 또 한편으로는 《석보상절》과는 달리 《월인석보》를 불경(佛經)의 성격에 더 가깝게 하려는 편찬자의 의도에 기인된 것도 있다(“그지 업스며 數 업슨 비쳇 光明을 펴샤”(석19:38b)→ “無量無數色光? 펴샤”(월18:4a) 등). 그러나 이러한 변개(變改)가 일률적으로 적용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내용이 추가된 부분에서는 언어사실의 차이가 좀더 명확하지만 《석보상절》의 내용을 답습한 부분에 있어서는 언어사실이 혼합되어 있다. 개편 대상 문헌인 《석보상절》의 언어사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월인석보》를 전혀 새로운 국어사 자료로 이용함에 있어서도 이 점은 항상 고려되어야 한다. 《월인석보》의 후대 복각본들은 그 대부분이 원간본을 판하(版下)로 하여 충실히 복각한 것들이므로 언어사실에 있어서 원간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오각(誤刻)과 탈각(脫刻)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원간본이 전하지 않는 권차의 복각본을 15세기 국어 자료로 이용할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방점의 경우는 탈각이 특히 심하므로 이용이 거의 불가능하다. 방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어형(語形)의 오각, 탈각은 복각본에서 흔히 보인다. 한 예로 1568년(선조1)의 희방사판 복각본 권1,2의 ‘?비리’(序2b), ‘다?기짓’(2:13b) 등은 각각 ‘?바리’, ‘다?가짓’에서 탈획된 것이다.

그런데 복각본 가운데에는 간행자가 의도적으로 변개를 가한 판본도 있다. 광흥사판 권21과 쌍계사판 권21이 그것이다. 이 변개는 한자음 독음에 한정된다. 광흥사판은 동국정운식 한자음 종성 ‘ㄹㆆ’이 ‘ㄹ’로 바뀌고(佛뿔, 一?, ···), 종성 ‘ㅇ’의 표기가 삭제된 (地띠藏?菩뽀薩살, 爲위?야, ···) 예가 상당수 존재한다. 원간본과 같이 ‘ㄹㆆ, ㅇ’이 그대로 나타나는 부분도 있으나 이는 원간본의 영향일 뿐이다. 이 판본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실수라 할 수 있다. ‘ㄹㆆ→ㄹ’로의 변개는 한자음 독음에만 적용되고 고유어 표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처??제). 한자음 종성 ㅇ의 삭제는 종성 ‘ㅱ’에도 적용되었다(求굼(←?), 道똠(←?)). 이는 광흥사판의 종성 ㅇ의 삭제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 주기에 충분하다. 쌍계사판은 광흥사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변개를 보여 준다. 한자음 종성의 ‘ㄹㆆ→ㄹ’의 변화와 종성 ㅇ의 삭제뿐만 아니라, 부분적이지만 현실한자음으로 고쳐서 판각한 부분이 눈에 띈다. ‘阿아僧?祇기’(31a)←??낑, 地디藏?菩보薩살(15b)←띵?뽕?, 解해脫탈(30a)←갱?, ···.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따르지 않고 현실한자음으로 독음을 표기한 문헌은 이미 15세기말부터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그 문헌이 원간본인 경우에 한한다. 복각본의 경우는 원간본의 언어사실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임에 비추어 볼 때 이들 판본은 특이한 예라 할 수 있다. 복각본이 아닌 개간본(改刊本)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변개가 고유어 표기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한자음에 있어서도 철저하지 못한 점에서 개간본의 일반적인 성격과는 구별된다. 현전 《월인석보》 원간본과 중간본은 그 상당수가 영인되어 학계의 연구에 이용되고 있다.

원간본 가운데는 권1·2(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1972), 권7·8(동국대), 권9·10(연대 동방학연구소, 1956), 권13·14(홍문각, 1982), 권15(성암문고본, 서지학보21, 1998), 권17·18(연대 동방학 연구소, 1957), 권17(보림사 구장본, 장태진, 교학연구사, 1986), 권20(강순애, 아세아문화사, 2001) 등이 영인되었고, 그들의 재영인본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원간본이 전하지 않는 권차의 중간본 권4(경북대, 1997), 권21(홍문각, 1983) 등의 영인본도 있다. (이호권) ① 참고문헌 고영근(1993),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월인석보, 국어사자료와 국어학의 연구, 문학과 지성사. 김영배(2000), 국어사자료연구: 불전언해 중심, 도서출판월인. 안병희(1992), 국어사 자료 연구, 문학과 지성사. 진단학회(1993), 월인석보의 종합적 검토(제20회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 진단학보 75. ② 관련항목: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홍무정운역훈, 법화경언해, 지장경언해 ③ 키워드: 세조, 소헌왕후, 한글자형, 복각본, 변개 ④ 원전보기: [서강대 소장 원간본 권1,2] [김병구 소장 복각본 권4] [국립도서관 소장 광흥사판 권21] [불갑사 소장 무량굴판 권23] [보림사 소장 원간본 권25]


옛, 헤아릴 수 없이 먼 전 세상 시절에 한 보살이 왕이 되어 계시어,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시고, (부처의) 도리를 배우러 밖으로 나아가시어 구담 바라문을 만나시어 자기의 옷(왕복)을 벗고, 구담의 옷을 입으시어 깊은 산에 들어가 과실과 물을 잡수시고, 고요히 앉아 참선하시다가, (자기가 다스리던)나라에 빌 먹으로 오시니, (예전 왕인 줄을) 모두 몰라보았는데, (사람들이 그를) 소구담이라 (그담의 제자이므로) 하더라. - 보살의 출가-

보살이 성 밖의 사탕수수 밭에 불도를 닦는 깨끗한 집을 만들고 혼자 앉아 계셨는데, 도둑 오백명이 관청 재물을 훔쳐 정사 곁으로 지나가니 그 도둑이 보살의 전 세상 원수이더라. 이튿날 나라에서 도둑의 발자취를 밟아가서 그 보살을 (도둑을 오인하여) 잡아 나무에 몸을 꿰어 두었더니, 대구담 (보살의 선생)이 신통한 눈으로 보고 허공에서 날아와 묻되, 그대 자식 없더니, (이렇게 죽는 것은)무슨 죄이요? 보살이 대답하시되, 멀쟎아 죽을 나인데 자손을 의론하리요? 그 왕(보살의 아우)이 사람을 시켜 활로 쏘아 죽이니라. - 수도하던 보살의 죽음-

대구담이 슬퍼하여, (시체를) 염습하여 관에 넣고 피가 묻은 흙을 파 가지고 정사에 돌아와, 왼쪽 피를 따로 담고, 오른쪽 피를 따로 담아 두고 말하되, 이 도사가 정성이 지극하던 것이면 하늘이 마땅히 이피를 사람이 되게 하시리라. 열달 만에 왼쪽 피는 남자가 되고, 오른쪽 피는 여자가 되거늘, 성을 구담씨라 했는데, 이로부터 자손이 이으시니, 구담씨가 다시 일어나시니라. - 구담씨 탄생-

 

[알림] 아래 포스트 추가분

그동안 아래 글 이용에 불편을 드려 미안합니다.

법륜스님 - 반야심경 해설  (0) 2018.07.13

[추가]

아래에 순서대로 정리한 포스트 주소를 클릭하면 저작권 침해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아래  빨간 글씨를 클릭하면 화면 오른쪽에서 유튜브 창에 지금도 연결할 수 있어 법륜스님의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아래 빨간 글씨를 클릭하여 유튜브 창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riWLOwH4X8&index=5&list=PL9O_DAnSPnfo6ZJBfiwdHjCN9ZzYtk34l

여기에도 제7, 8, 23강 [비공개]로 나오네요.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17888 [김영동교수의 고전& life]

<석보상절>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B%B3%B4%EC%83%81%EC%A0%88

 

석보상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설법을 뽑아 한글로 편역한 서적이다. 불교서적중에 한글로 번역, 편찬된 최초의 책으

ko.wikipedia.org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설법을 뽑아 한글로 편역한 서적이다. 불교서적중에 한글로 번역, 편찬된 최초의 책으로[1] 소헌왕후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 ‘석보’(釋譜)는 석가모니의 전기(傳記)를 의미하고, ‘상절'(’詳節)은 중요로운 내용은 자세히(詳) 쓰고, 그렇지 않은 내용은 줄여서(節) 쓴다는 뜻이다.[1] 금속 활자에 의한 15세기 한글 산문 자료로서 한국 어학, 한국 문학, 한국 서지학, 한국 불교학에서 귀중한 자료 중의 하나이다.

 

https://kydong77.tistory.com/21576

 

한말연구회, 월인석보(月印釋譜) 권1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B%B3%B4%EC%83%81%EC%A0%88 석보상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석보상절》(釋譜詳節)은 1447년(세종 29년)에 석가모니의..

kydong77.tistory.com

 

 

https://kydong77.tistory.com/21523

 

천수경, 신묘장구대다라니경/信眉, 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礙 慧覺尊

https://www.youtube.com/watch?v=0ntn3Q28BD4 [산스크리트어 해석] 아제 아제 바라아제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바라승아제 피안으로 완전히 건너 가, 모지 사바하 깨달음의 뿌리를 내려 주소서.) *모지>보

kydong77.tistory.com

[세종이 문종에게 유언한 신미대사의 시호]

信眉, 禪敎宗都摠攝 密傳正法 悲智雙運 祐國利世 圓融無礙 慧覺尊者

신미, 선교종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리세 원융무애 혜각존자

 

* 密傳正法 - 범어[산스크리트어]를 통해 붓다의 가르침을 바로 접근할 수 있게 함.

* "悲智雙運"- '悲智'는 '자비'와 '지혜'의 의미임.

*'祐國利世' - 표음문자인 한글 창제를 선도함.

세종이 지은 시호를 종합해 보면, 범어에 능통한 信眉는 '祐國利世'한 한국의 붓다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