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할 때만 한 송이씩 피는 장미꽃이라니, 백만송이 장미꽃을 피우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다만 그런 분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라우.
나라 사랑의 집념으로 자신을 불태운 박대통령이나 온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육영수 여사는 백만송이에 가까운 장미꽃을 피웠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물론 박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대한 민주투사들의 저항과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갈망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박대통령의 서독 방문시 광부들 앞에서의 연설장에서,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고생을 하신다고 말해, 그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린 진심에서 우러난 명연설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보인 그의 집념, 남산터널, 동해고속도로 등 도로망 확충을 통한 가시적 새나라 건설, 포항제철 설립 등에 전념하셨고, 바다를 막아 담수호를 만들어 거대한 농지를 확보한 정주영님의 서산간척지 축하연설을 다녀오시던 날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군부정권은 全·盧 정권 12년을 더 지내고 나서야 마감하고, 마침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문민정부 민주정부가 탄생된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18년간의 장기집권 동안 수많은 민주투사 희생자들도 발생했지만 포항제철, 건설산업, 조성사업, 전자산업 등 한국의 근대화산업은 그의 나라사랑의 리더쉽에 바탕한 공적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첨언하면,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드러난 재산은 청구동 자택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그의 호언장담은 근대화산업의 일자리 창출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육여사가 소록도에 격리된 환자분들을 찾고, 청와대에 올라온 개인의 민원사항에 대해 편지로 수많은 답장을 보낸 것은 매우 인상 깊은 실화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분의 이름만 부르는 사람은 드물고 대개는 성씨나 성명 뒤에 '여사'라는 존칭을 덧붙입니다.
삼가 두 분의의 명복을 빕니다.
*문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운동과 월북후 고위층에 올라 북조선 남침의 중요한 역할을 한 김원봉을 언급한 이후 지금까지도 뉴스판이 뜨겁다. 옛부터 국정 지도자의 국정방향은 한결같이 '國利民福'이었다. 국가에 이롭고 국민들의 수익을 증대시켜 잘살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서훈 문제는 이를 검정한 이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점을 충언한다. 후기의 그의 활동은 분명한 전범이었음도 지적한다. 정부에서도 분명한 목적이 있는 발상이겠지만 이를 소상히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어물쩍 서훈을 추서하자는 발상은 국민들을 좌우로 편가르기하자는 데 지나지 않는다. 세대결 해서 어쩌자는 건가? 국민통합만이 국정의 올바른 국정 방향이다. 남북통일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그런 발설을 하는 것은 서로 상충됨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경영자들은 소수로 투표권도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활동이 위축된다면 일자리만들기는 공념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깊이 자성할 일이다.
1960년대 중반 평화의 댐에서 북쪽으로 14km 떨어진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명희라는 청년장교는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하였다. 한명희는 돌무덤의 주인이 전쟁 당시 자기 또래의 젊은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목》의 노랫말을 지었고 그 후 장일남이 곡을 붙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었다.
碑木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 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이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초연(硝煙)* : 화약의 폭발에 의하여 생기는 연기. 수류탄을 투척하거나 대포 같은 폭발물 발사후 발생하는 연기로 이해하면 됩니다. 예컨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여가던 <미아리고개> 가사의 눈을 뜰 수 없는 ' 화약연기'입니다. 장교의 자긍심을 한껏 발휘하여 사병들이 듣도 보도 못한 한자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게는 의미 전달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시가 대중가요의 가사가 될 줄은 본인조차 꿈에도 몰랐었다고 보면 되겠네요. 전투중에 죽은 동료을 표시하기 위래 꺾어 세운 나무 꼬챙이를 <碑木>이라 이름지어 마치 영구한 비석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군요.
화천군에서 비목공원까지 만들어 단장의 격전지인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킨 그 발상에 찬사를 보냅니다.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무오사화). 이후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 고관들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국문장에서 김일손을 국문하자 김일손은 자신은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하며 스승과 스승의 동료 문하생들을 모두 발설했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남곤(南袞)·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유배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문인인 성희안, 유순정 역시 연좌하여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이들은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박원종의 쿠데타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즉위 초부터 그는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균관과 양사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 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추숭 시도를 반대한다. 강하게 반발하던 사림의 태도에 연산군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감정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사림파 관료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경연과 사헌부를 축소하는 한편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했다.
또한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시켰다. 또한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 등 한성부의 일부 사찰은 연회장과 마굿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에 본래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던 연산군의 성품을 본 이극돈(李克墩), 임사홍 등 훈구파 재상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 확장 및 정쟁에 이용하려 한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년 음력 10월에 훈구파 내에서 궁중파와 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폐비 윤씨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씨)을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자인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 복위를 반대했고, 임사홍 등 궁중파는 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사림파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했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뒤,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 부중파 역시 숙청한다.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정창손, 정여창(鄭汝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또 폐비 윤씨의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은 정씨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시켜 때려 죽이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어 산야에 버리고 아무에게도 매장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 안양군과 봉안군은 유배를 보냈다가 이듬해 죽였고,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했다(두 사람은 중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도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쳤고(들이받았다고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또는 역월지제(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삼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름)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홍문관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과 월하매 정도였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씨는 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후 연산군이 박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 의해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다. 그 뒤 박씨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 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연산군은 압반과 사헌부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물들어있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했고 또한 의정부의 정4품직인 사인, 검상, 이조와 병조의 낭관들의 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가며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관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했다. 이로써 문인 관료들 사이에 경쟁을 하게 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 그는 정무를 보좌할 때 영의정이나 삼정승이라고 해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하게 했으며, 문묘에서 공자에게 작헌례를 할 때 그의 생전의 직분은 신하였다며 제배만 하게 했다.
1506년음력 9월 2일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신수근, 임사홍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여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연산군은 폐위(廢位)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김포군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7]정현왕후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한다.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뒤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연산군은 한성부 근처의 한 민가에 숨었으나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즉시 압송되어 폐위(廢位)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그는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했다. 그러나 유배 직후 열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된다. 뒤이어 강화도 근처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진다.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을 모면했다. 함께 유배되었던 그의 왕자들도 사사, 처형당했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다시 교동도로 이배되었다. 유배생활중 그는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 하였다.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 강화교동도에서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7] 사망 후 민중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1세였다.
[참고] 후세에 부르는 왕의 호칭은 왕의 업적에 대한 평가에 따라 다음 왕이 부여한 시호(諡號)다. 시호를 받지 못한 왕들은 왕자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君'으로 호칭한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成宗인데도 그 아들은 시호를 받지 못했다. '成' 자는 그 나라 禮樂의 기틀이 완비되었다고 부여하는 시호인데도. 갑자사화를 일으킨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시호를 내릴 명분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정치판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다. 물론 역사의 정론에 가까운 판결은 후세 역사가의 몫이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위의 <우리 역사의 진실>은 너른 하늘을 보고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하시던 조상님들이 그리워 옮긴 글이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관용어도 있잖아요? 너른 들판에 낮은 첨성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지만 높은 산에 위치한다고 하늘과 얼마나 더 가까위지겠는가?
앞글에서도 설명했듯이 견우는 농부고 직녀는 실크를 짜던 여인이었다. 신라라는 국명도 한자 표기로 헷갈려서 그렇지, '실'도, '羅'도 실크의 의미를 내포한다. 요즘에 와서 부부가 맞벌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폭로다. 견우와 직녀는 유대인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아담과 이브가 되었는데, 아담의 뜻은 농부고, 이브의 뜻이 직녀였듯이. 유대인들이 명민한 것은 동이족이기때문이다. 온갖 시련을 극복한 모세가 이집트 탈출기를 통하여 고토회복의 꿈을 실현한 것은 결국 조상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죽음을 무릅쓴 우리 독립투사들의 열정도 조상숭배에 근거한 국권회복, 주권회복운동도 선지자 모세의 투쟁과 일치한다. 하늘도 유대인들의 정당한 욕구와 염원과 투쟁을 수용하여 홍해가 갈라져 이들의 탈출을 도운 기적은 영화 <십계>의 화면에서도 보셨잖아요?
굳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개 일하신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부연한 것은 가끔 하늘의 뜻도 헤아리면서 한국에서도 실물경제에 밝은 지도자를 배출하여 서역인들이 파미르고원을 지나 실크로드를 넘어오게 했듯이 정치인들은 정권연장에만 골몰하지 말고, 좀 외국인들이 찾는 상품 생산에 대한 정책을 입안해 달라는 간절한 심정에서다. 태양광집열판 설치는 이미 알려진 실패작이래잖아요?
북극성과 북두칠성만 바라보이는 곳에서 베짜고 농사짓던, 파미르고원지대 마고성에 거주했던 우리 조상님들은 실상 천문학의 고수들이었습니다.
"칠월 칠석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서로 맞닿아 있다.
요즘 칠석이야 견우와 직녀, 그리고 까치와 까마귀 놓았다는 오작교를 알면 다행이듯 관심 밖의 일이 되었지만, 우리의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점령한 날이었다.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견우와 직녀의 러브스토리는 수천년 동안 다양한 버전으로 진화하면서 사랑받은 드라마였다.
1년에 한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 설화의 배경은 천문학에서 왔다.
독수리별자리의 알타이르(Altair)와, 거문고별자리의 베가(Vega)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다.
두 별은 태양의 황도(黃道)를 운행할 때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에 보이다가, 칠석 무렵 천장 부근에서 관찰되는데 마치 일년에 한 번 만나는 것으로 상상한 결과물이다. "
노아는 동이족이 파견한 슈메르 지역(sumeru, ur는 땅) 출신으로 유대교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는 데 목숨을 걸 만큼 조상숭배의 모범국가임.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동이족과 일치하는 구석이 많은 것은 해문화를 가진 동이족들이 우르 지역에 선진문화 전파를 위해 3천명을 파견한 덕분이지요.
Adhim 농부
Eve: 직녀(織女)
E - 노래하다. / 한국민요의에헤야데야 노를 저어라
ve - 베짜다 / 직녀(織女)
'노아'의 '노'는 배를 젓는 노, 노아는 9년 대홍수 때 방주(작은 배)를 만들어 노를 저은 뱃사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