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5%ED%9D%AC

 

박정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정희(朴正熙[2],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는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중수(中樹)이다.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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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 소장과  박종규 소령, 차지철 대위.

 

https://www.youtube.com/watch?v=Fc5n6qs3tp0

 

사랑을 할 때만 한 송이씩 피는 장미꽃이라니, 백만송이 장미꽃을 피우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다만 그런 분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라우.

나라 사랑의 집념으로 자신을 불태운 박대통령이나 온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육영수 여사는 백만송이에 가까운 장미꽃을 피웠으리라 추정해 봅니다. 물론 박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대한 민주투사들의 저항과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갈망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박대통령의 서독 방문시 광부들 앞에서의 연설장에서,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고생을 하신다고 말해, 그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린 진심에서 우러난 명연설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보인 그의 집념, 남산터널, 동해고속도로 등 도로망 확충을 통한 가시적 새나라 건설, 포항제철 설립 등에 전념하셨고, 바다를 막아 담수호를 만들어 거대한 농지를 확보한 정주영님의 서산간척지 축하연설을 다녀오시던 날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군부정권은 全·盧 정권 12년을 더 지내고 나서야 마감하고, 마침내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진정한 문민정부 민주정부가 탄생된 것입니다.

박대통령은 18년간의 장기집권 동안 수많은 민주투사 희생자들도 발생했지만 포항제철, 건설산업, 조성사업, 전자산업 등 한국의 근대화산업은 그의 나라사랑의 리더쉽에 바탕한 공적임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첨언하면, 장기집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드러난 재산은 청구동 자택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그의 호언장담은 근대화산업의 일자리 창출을 통하여 실현되었습니다.

육여사가 소록도에 격리된 환자분들을 찾고, 청와대에 올라온 개인의 민원사항에 대해 편지로 수많은 답장을 보낸 것은 매우 인상 깊은 실화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분의 이름만 부르는 사람은 드물고 대개는 성씨나 성명 뒤에 '여사'라는 존칭을 덧붙입니다.

삼가 두 분의의 명복을 빕니다.

*문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독립운동과 월북후 고위층에 올라 북조선 남침의 중요한 역할을 한 김원봉을 언급한 이후 지금까지도 뉴스판이 뜨겁다. 옛부터 국정 지도자의 국정방향은 한결같이 '國利民福'이었다. 국가에 이롭고 국민들의 수익을 증대시켜 잘살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서훈 문제는 이를 검정한 이후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는 점을 충언한다. 후기의 그의 활동은 분명한 전범이었음도 지적한다. 정부에서도 분명한 목적이 있는 발상이겠지만 이를 소상히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한다. 어물쩍 서훈을 추서하자는 발상은 국민들을 좌우로 편가르기하자는 데 지나지 않는다. 세대결 해서 어쩌자는 건가? 국민통합만이 국정의 올바른 국정 방향이다. 남북통일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그런 발설을 하는 것은 서로 상충됨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경영자들은 소수로 투표권도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활동이 위축된다면 일자리만들기는 공념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깊이 자성할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mHGSU1Qy1mU

 

https://www.youtube.com/watch?v=RzdaTtIzsIM

 

https://www.youtube.com/watch?v=bvSB-AXqxUA

 

https://www.youtube.com/watch?v=gG0JgUyObRc

 

https://www.youtube.com/watch?v=N3IKO654NpI

 

https://www.youtube.com/watch?v=rlE_bGD6GtQ

 

https://www.youtube.com/watch?v=5TuUWfqwOD0

 

https://www.youtube.com/watch?v=LT51vc1_usE

 

https://www.youtube.com/watch?v=c_kfsme_pNs&t=76s

 

https://www.youtube.com/watch?v=BpyI9HylPk0

 

아래 포스트는 삽교천 관련 자료의 보충을 위하여 실었습니다.

https://kydong77.tistory.com/18306

 

소나무숲의 솔그늘과 솔향기/ 안면도

5/22(수) 성동복지관 등산반에서 안면도에 가다. 정주영회장의 서산만 현대농장을 지나 60m쯤 되는 교량 하나를 건너면 안면도였다. 워낙 큰 섬이어서 작은 강 하나를 건넌 느낌이었다. 아산만 바다를 막아 농지..

kydong77.tistory.com

 

https://www.youtube.com/watch?v=kdpHSYMtUGY

 

아, 육영수 여사!

https://www.youtube.com/watch?v=8fOQkrjz1js

 

https://www.youtube.com/watch?v=uBuCqQlr69A

 

https://www.youtube.com/watch?v=H0ncyLbGLb0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 1948년7월20일 초대대통령 이승만 취임.

유엔임시한국위원단(UNTCOK)의 감독에 의해 1948년 5월 10일 남한 지역에서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의장 자격으로 대통령 중심제 헌법 제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같은 해 7월 20일에는 제헌국회의 간접선거로 진행된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5·16 군사혁명은 1961년 5월 16일

제3공화국(第三共和國)은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의한 군정 아래에서 1962년 12월 17일에 실시된 국민 투표로 공포, 시행된 헌법에 따라 설립한 대한민국의 세 번째 공화 헌정 체제이다. 이 헌법에 따라 이듬해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직접 선거박정희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였다. 제3공화국은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체제로 전환하면서 끝났다.

14대 대선 1992년 대통령선거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후보의 3파전에서  김영삼 당선, 문민정부 출범

2017년 제19대 대통령 문재인 당선

https://www.youtube.com/watch?v=dmqRzRMUic8

 

https://www.youtube.com/watch?v=hx9qghphDkQ

 

노조측 역대대통령 song

https://www.youtube.com/watch?v=m0j343owUZA

 

https://www.youtube.com/watch?v=gxWNTCyZeYM

 

https://www.youtube.com/watch?v=DLTOpeTVkLU

 

https://namu.wiki/w/%EC%9D%B4%EC%8A%B9%EB%A7%8C

 

이승만 - 나무위키

평생을 우리나라의 독립, 통일, 강력한 민주정부 수립과 그 발전에 바쳐왔다. 그러나 최근 사건이 말하여주듯 과업은 완수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져야 할 책임이나 닥쳐오는 위험을 회피한 일은 결코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1959년 2월 3일, 대선 출마 질문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답변 中 공산주의자는 콜레라[43]와 같다. 인간은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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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AC%B8%EC%9E%AC%EC%9D%B8

 

문재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슷한 이름의 문재린에 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2]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며 박정희 유신 독재에 항거하다가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됐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에는 신체 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로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특전사를 제대한 후 복학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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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직후, 5월 16일 오전 8~9시 경 중앙청 앞에서 박정희와 이낙선 소령, 박종규 소령, 차지철

 

 

상호3 相好

(1) 얼굴의 생긴 모양.

  • 상호가 마음에 들다

  • 상호를 보아하니 그는 부유한 집 자제 같았다.

(2) (기본의미) [불교]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

운영자가 부제로 부여한 것을 보면 용모와 형상을 나타내는 '相好'란 붓다의 "三十二相八十種好"에서 두 음절을 취해 결합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60985&cid=46663&categoryId=46663

 

비목

한명희 작시·장일남 작곡의 예술가곡. [구성 및 형식] 이 곡은 전체 16마디로 A(ab), B(cb')의 구조로 된 두도막 형식의 노래이다. 4분의 4박자로 전체적인 조성은 라장조이나 라장조의 나란한 조인 나단조 음계가 번갈아 사용되었다. 곡 전체의 선율 중 가장 낮은 음으로 시작되며 악상기호 아주여리게(pp)로 시작되지만, 점차 상승하여 11, 12마디, ‘두고 온 하늘가’에서 선율 중 가장 높은 음과 악상기호 점점 세게(crescendo), 강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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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비목으로 서 있거나 흔적조차 사라진 무명용사들의 영혼을 위무해 주소서.

그분들은 자유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되신 분들입니다.

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가지신 부처님과  17相好를 가지신 처용님께 삼가 비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gxq6h5vqtI

 

1960년대 중반 평화의 댐에서 북쪽으로 14km 떨어진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명희라는 청년장교는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 하나를 발견하였다. 한명희는 돌무덤의 주인이 전쟁 당시 자기 또래의 젊은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비목》의 노랫말을 지었고 그 후 장일남이 곡을 붙여 19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었다.

 

碑木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 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이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초연(硝煙)* : 화약의 폭발에 의하여 생기는 연기. 수류탄을 투척하거나 대포 같은 폭발물 발사후 발생하는 연기로 이해하면 됩니다. 예컨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여가던 <미아리고개> 가사의 눈을 뜰 수 없는 ' 화약연기'입니다. 장교의 자긍심을 한껏 발휘하여 사병들이 듣도 보도 못한 한자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일반인들에게는 의미 전달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시가 대중가요의 가사가 될 줄은 본인조차 꿈에도 몰랐었다고 보면 되겠네요. 전투중에 죽은 동료을 표시하기 위래 꺾어 세운 나무 꼬챙이를 <碑木>이라 이름지어 마치 영구한 비석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군요.

화천군에서 비목공원까지 만들어 단장의 격전지인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킨 그 발상에 찬사를 보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051INApepo

 

https://www.youtube.com/watch?v=ew0G09K1Ix4

 

https://www.youtube.com/watch?v=fIZiPKECYV4

 

https://www.youtube.com/watch?v=N8ssHzSPJFU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eaingsoon&logNo=221245795380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 32상 80종호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육체상에 구족(具足)한 특수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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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7409

 

처용의 17상호

처용의 17상호 [악학궤범 사진] 고려가요 처용가 [은자주]고려가요 처용가에는 8행에서 24행까지 17상호를 적었는데 액을 물리치는 제융의 의미를 붓다의 32상호에서 빌어왔다 하겠다. 이 점은 국문학사상 은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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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ydong77.tistory.com/8010

 

처용가 -처용

處容歌 처용랑과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은자주] 처용가는 벽사진경의 주제로 인하여 고려시대에는 樂學軌範 권5에 <鶴․蓮花臺․處容舞 合設> 조에 려요<처용가>가 나온다. 그 가운데 향가의 구절도 수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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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4NTHNODq6U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8371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는 부처가 인간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부처의 형상에 대한 후세의 설명으로 ‘깨달은 자(Buddha)’가 지니는 인간과 다른 32가지의 모습, 80가지의 특징을 말한다. 인간은 갖출 수 없는 부처의 존엄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대지도론(大智度論)』, 『중아함경(中阿含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에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는 일부 겹치는 부분도 있고,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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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obifudo.jp/newmon/shinbutu/32so.html

 

仏の32相80種好・仏の三十二相八十種好

足の裏が平らで安定している。 手と足に法輪の模様がある。 指が繊細で長い。   かかとが広い。 手足の指の間に水かきのようなものがある。 手足が柔らかく色が良い。 足の甲が亀のように形が良い。 足のすねが鹿のように繊細。 手が長い。 男根が目立たない。 身体の均整がとれている。 身体の毛が上向きに生え右旋している。 よい香りを放ち輝く毛が生えている。 身体が金色である。 身体が輝いている。 皮膚が滑らかで柔らかい。 両手足肩・頭の肉付きバランスが良い。 脇腋が引き締まっている。 獅子のように威風堂々として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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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1961년 대종상 시상식

https://www.youtube.com/watch?v=GWBpvddaCSs&t=88s

 

 

https://www.youtube.com/watch?v=LD-NmCD9xh8

 

 

https://www.youtube.com/watch?v=rV_zhhMnJBA

 

https://www.youtube.com/watch?v=yf0VgOznG90

 

https://www.youtube.com/watch?v=6NxmyacYtMQ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6803

 

연산군(燕山君)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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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C%97%B0%EC%82%B0%EA%B5%B0

 

조선 연산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연산군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연산군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연산군(燕山君, 1476년 11월 23일 (음력 11월 7일) ~ 1506년 11월 20일 (음력 11월 6일), 재위 1494년 ~ 1506년)은 조선의 제10대 왕이다. 성은 이(李), 휘는 융(㦕), 본관은 전주 이씨.[1] 조선 성종의 장자로 폐비 윤씨의 소생이며, 비는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이다.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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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위 자료의 발췌입니다.

무오사화[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무오사화입니다.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조의제문세조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하였다(→무오사화). 이후 이극돈, 유자광, 윤필상훈구파 고관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국문장에서 김일손을 국문하자 김일손은 자신은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하며 스승과 스승의 동료 문하생들을 모두 발설했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하였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고, 강겸(姜謙)·표연말(表沿沫)·홍한(洪澣)·정여창(鄭汝昌)·강경서·이수공(李守恭)·정승조(鄭承祖) 등은 난(亂)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유배보냈으며, 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이원·이주(李胄)·김굉필(金宏弼)·박한주(朴漢柱)·임희재(任熙載)·강백진(姜伯珍)·이계맹(李繼孟)·강혼(姜渾)·남곤(南袞)·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유배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문인인 성희안, 유순정 역시 연좌하여 한직으로 좌천되는데 이들은 이때부터 연산군에게 원한을 품고 박원종쿠데타에 적극 동참하게 된다. 한편 어세겸(魚世謙)·이극돈(李克墩)·유순(柳洵)·윤효손(尹孝孫)·김전(金銓) 등은 수사관(修史官)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생모 추숭 시도와 좌절[편집]

즉위 초부터 그는 생모인 폐비 윤씨의 복권과 추숭에 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성균관과 양사에 포진한 사림파 인사들은 사후 백 년간 언급하지 말라는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연산군의 생모추숭 시도를 반대한다. 강하게 반발하던 사림의 태도에 연산군은 이들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 정계와 연산군과의 사이에는 감정적 갈등이 일어났다. 그는 사림파 관료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경연사헌부를 축소하는 한편 사간원, 홍문관, 예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직도 혁파 또는 감원을 했다.

또한 기타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시켰다. 또한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 등 한성부의 일부 사찰은 연회장과 마굿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에 본래부터 사림파 인사들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던 연산군의 성품을 본 이극돈(李克墩), 임사홍훈구파 재상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 확장 및 정쟁에 이용하려 한다.

갑자사화[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갑자사화입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1504년 음력 10월에 훈구파 내에서 궁중파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하여 어머니의 한을 풀고자 했다. 폐비 윤씨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씨)을 비롯하여 당시의 관련자인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다.

당시 사림파 일부는 성종의 유지를 주장해 폐비 복위를 반대했고, 임사홍궁중파갑자사화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사림파를 비롯한 반대파에게 대대적인 타격을 가했다. 연산군은 이들을 이용하여 사림파를 숙청한 뒤,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부중파 역시 숙청한다.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정창손, 정여창(鄭汝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폐비 윤씨의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두 후궁은 정씨 소생인 안양군봉안군을 시켜 때려 죽이고, 그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어 산야에 버리고 아무에게도 매장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했다. 또 안양군봉안군유배를 보냈다가 이듬해 죽였고, 정씨 소생의 정혜옹주와 엄씨 소생의 공신옹주는 폐서인하고 유배했다(두 사람은 중종 즉위 후 복권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인수대비(仁粹大妃)와도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강하게 밀쳤고(들이받았다고도 한다),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또는 역월지제(易月之制),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삼년상 대신 25일상을 치름)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음란 행위[편집]

채청사채홍사를 파견하여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기생들은 고려 시대 때부터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월하매 정도였다. 이는 반정 측에서 연산군을 깎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씨는 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이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추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또 연산군은 승평부부인의 당호 앞에 '大' 자를 넣어 승평부대부인이라는 도장을 만들게 하였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이후 연산군이 박씨와 자다가 꿈에 월산대군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월산대군의 묘에 긴 창을 꽂게 했다는 소리까지 있었다. 이처럼 박씨가 시조카인 연산군에 의해 겁탈당하였다는 소문은 당시에 파다했다. 그 뒤 박씨는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연산군의 아이를 잉태하여 자결했다고 말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사에선 연산군에게 성병을 옮아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당시 박씨는 쉰을 넘긴 나이였으므로 아이를 가져 자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중종반정의 주모자였던 박원종이 자신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이와 연산군 간의 사건을 조작하여 소문을 퍼뜨렸다거나, 불심이 깊었던 박씨가 당시 유교 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치세 후반[편집]

연산군은 압반과 사헌부감찰 등을 동원하여 사치와 나태에 물들어있던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유생들을 규찰, 감시하게 했고 또한 의정부의 정4품직인 사인, 검상, 이조병조의 낭관들의 관직에 문관과 무관을 번갈아가며 임명하게 함으로써 문신 관료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폐지했다. 이로써 문인 관료들 사이에 경쟁을 하게 했다.

1506년(연산군 12년) 8월 그는 정무를 보좌할 때 영의정이나 삼정승이라고 해도 직함 뒤에 존칭을 생략하게 했으며, 문묘에서 공자에게 작헌례를 할 때 그의 생전의 직분은 신하였다며 제배만 하게 했다.

폐위와 최후[편집]

폐위와 유배 생활[편집]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유순정, 박원종, 신윤무 등은 사전에 준비한 사병들로 거병하여, 신수근, 임사홍등 연산군의 측근들을 살해하고 궁을 장악하여 성종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연산군은 폐위(廢位)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김포군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했다.[7] 정현왕후는 처음에 주저하는 듯 하다가 바로 반정군의 요청을 수용한다.

음력 9월 2일 새벽, 궁궐의 방화를 틈타 민간복으로 변복한뒤 말을 타고 궁궐을 빠져나온 연산군은 한성부 근처의 한 민가에 숨었으나 그를 추격한 박원종의 사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 즉시 압송되어 폐위(廢位)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뒤 유배지의 별감과 상궁들은 그를 조롱했으나 그는 이를 묵묵히 참고 인내했다. 그러나 유배 직후 열병에 걸려서 오랫동안 고생하게 된다. 뒤이어 강화도 근처 교동도로 배소가 옮겨진다.

최후[편집]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가 셀 수 없이 많았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을 모면했다. 함께 유배되었던 그의 왕자들도 사사, 처형당했다. 중종은 조카들의 나이가 어리고 형세가 고단한 점을 들어 처벌을 반대했지만, 대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수용하고 말았다. 공신들은 훗날 누군가 이들 왕자들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세력이 결집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다시 교동도로 이배되었다. 유배생활중 그는 폐세자 황이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 하였다. 강화군 교동도에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강화 교동도에서 역질을 앓다가 11월 6일 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7] 사망 후 민중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1세였다.

 

[참고] 후세에 부르는 왕의 호칭은 왕의 업적에 대한 평가에 따라 다음 왕이 부여한 시호(諡號)다. 시호를 받지 못한 왕들은 왕자시절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여 '君'으로 호칭한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成宗인데도 그 아들은 시호를 받지 못했다.  '成' 자는 그 나라 禮樂의 기틀이 완비되었다고 부여하는 시호인데도. 갑자사화를 일으킨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된 중종은 시호를 내릴 명분이 없었다. 예나 이제나 정치판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다. 물론 역사의 정론에 가까운 판결은 후세 역사가의 몫이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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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시호(諡號)는 죽은 인물에게 국가에서 내려주거나 죽은 군주에게 다음 군주가 올리는 특별한 이름으로, 동양의 군주제 국가에서 시행되었다. 시호를 받는 대상은 황제, 제후, 임금 등의 군주와 그 조상 및 부인, 공신, 고급 관료, 기타 국가적으로 명망을 쌓은 저명한 인물이다. 시호는 국가가 부여하는 공적인 시(諡)로서, 개인이 붙이는 사시(私諡)와 구별되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시(諡)는 전자 쪽이다. 시호를 붙이는 제도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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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종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세종 (동음이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조선 세종(朝鮮 世宗, 1397년 5월 15일[1] (음력 4월 10일) ~ 1450년 3월 30일(음력 2월 17일), 재위 1418년 ~ 1450년)은 조선의 제4대 군주이며 언어학자이다. 그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성은 이(李), 휘는 도(祹),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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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총 22명 중 적자녀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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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 성종(成宗, 1457년 8월 19일 (음력 7월 30일) ~ 1495년 1월 19일 (음력 1494년 12월 24일) , 재위 1469년 ~ 1495년)은 조선의 제9대 왕이며 시인, 유학자이다. 성은 이(李), 휘는 혈(娎),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아무. 사후 시호는 성종강정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成宗康靖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아버지의 요절로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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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16남 12녀(28명)로 자녀 복 많은 조선 군주 랭킹 2위.

자녀수 많은 조선 군주 랭킹

1위 태종. 부인 10명. 12남 17녀. 29명

2위 성종. 부인 12명. 16남 12녀. 28명

3위 선조 부인8명. 14남 11명. 25명

4위 정종 비빈 6명. 15남 8녀. 23명

5위 세종. 부인6명. 18남 4녀. 22명

6위  태조. 부인6명. 8남 5녀. 1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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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광해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광해군(光海君, 1575년 6월 4일 (음력 4월 26일) ~ 1641년 8월 7일 (음력 7월 1일)[1])은 조선의 제15대 임금이다. 청나라(후금)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중립적인 중립외교를 펼쳐 조선이 자주적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었으나, 자기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반대했던 반대세력을 숙청하다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 등 폐모살제(廢母殺弟)때문에 서인세력과 힘을 합치던 능양군 인조가 반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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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제왕의 금기사항 어기다

• 연산군, 제왕의 금기사항 어기다 • -사초(史草) 보기 [은자주] 조선왕조실록에는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이 두 분이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자의 칭호를 유지한 채 그들의 사적마저도 "실록"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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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묘/ 북한산 둘레길 02

왕답지 않은 왕이라하여 사후에 받는 왕의 시호를 받지 못해 왕자시절의 이름을 고수한 채 왕릉으로 격상되지 못하고 일반인의 무덤 호칭인 묘에 머물렀다. 이것이 한자문화권의 역사의식이다. 참고로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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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원작 박종화  각본  임희재

감독 신상옥
출연 신영균 (연산군 역), 김동원 (성종 역), 전옥 (인수대비 역), 허장강

연산군 -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6bZqPbV6UJQ

연산군 - 2부 

https://www.youtube.com/watch?v=1qIOycp9tvE

 

 

오작교

오작교 (烏鵲橋)라니, 세상에나! 정말 착한 까막까치도 다 있네요. 하늘나라에서 내려보낸 신성한 三足烏(삼족오)들인가?  1년에 딱 한번 칠석날밖에 못 만나다는데 지네들도 구경만 할 순 없었나 보죠. 남의 사랑 방해하면 까막까치만도 못한 인간임은 당연한 말씀.

https://www.youtube.com/watch?v=Zc1hhFrXh4U

 

 

 

삼신할머니와 마고할머니   

https://www.youtube.com/watch?v=iOETaPRz8-g&t=185s

 

http://coo2.net/bbs/board.php?bo_table=operators&wr_id=386

 

우리역사의 진실

내일 음력 칠월 칠일_칠석제, 칠성제  글쓴이 : 최고관리자 [우리의 명절은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내일은 음력으로 ‘칠월 칠석날’입니다. 칠성날 이라고도 합니다. 새벽에 정안수 한그릇 장독대에 올려놓고 북두칠성께 치성을 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주변에 성황당이 있으면 반드시 정안수 한그릇 올리시길 바랍니다. 지극정성으로 치성을 드리면 반드시 하늘 북극성에 계신 마고님이 감응 하신답니다. 서토에서는 사랑에 빠진 직녀에게 형벌을 내리신 분이 서왕모라 합니다.

coo2.net

첨성대

위의 <우리 역사의 진실>은 너른 하늘을 보고 우주를 이해하려 노력하시던 조상님들이 그리워 옮긴 글이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관용어도 있잖아요? 너른 들판에 낮은 첨성대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지만 높은 산에 위치한다고 하늘과 얼마나 더 가까위지겠는가?

앞글에서도 설명했듯이 견우는 농부고 직녀는 실크를 짜던 여인이었다. 신라라는 국명도 한자 표기로 헷갈려서 그렇지, '실'도, '羅'도 실크의 의미를 내포한다. 요즘에 와서 부부가 맞벌이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무지의 폭로다. 견우와 직녀는 유대인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아담과 이브가 되었는데, 아담의 뜻은 농부고, 이브의 뜻이 직녀였듯이. 유대인들이 명민한 것은 동이족이기때문이다. 온갖 시련을 극복한 모세가 이집트 탈출기를 통하여 고토회복의 꿈을 실현한 것은 결국 조상 숭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죽음을 무릅쓴 우리 독립투사들의 열정도 조상숭배에 근거한 국권회복, 주권회복운동도 선지자 모세의 투쟁과 일치한다. 하늘도 유대인들의 정당한 욕구와 염원과 투쟁을 수용하여 홍해가 갈라져 이들의 탈출을 도운 기적은 영화 <십계>의 화면에서도 보셨잖아요?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7m3709n15

 

모세의 기적

히브리 민중을 이집트의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시킨 모세가 신의 도움으로 행했다고 전승되는 기적. 모세는 유대교 전통에서 가장 위대한 예언자, 교사로서 추앙받고 있다. 성서의 기록에

100.daum.net

 

굳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개 일하신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부연한 것은 가끔 하늘의 뜻도 헤아리면서 한국에서도 실물경제에 밝은 지도자를 배출하여 서역인들이 파미르고원을 지나 실크로드를 넘어오게 했듯이 정치인들은 정권연장에만 골몰하지 말고, 좀 외국인들이 찾는 상품 생산에 대한 정책을 입안해 달라는 간절한 심정에서다. 태양광집열판 설치는 이미 알려진 실패작이래잖아요?

북극성과 북두칠성만 바라보이는 곳에서 베짜고 농사짓던, 파미르고원지대 마고성에 거주했던 우리 조상님들은 실상 천문학의 고수들이었습니다.

"칠월 칠석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서로 맞닿아 있다.

요즘 칠석이야 견우와 직녀,
그리고 까치와 까마귀 놓았다는 오작교를 알면 다행이듯 관심 밖의 일이 되었지만,
우리의 가슴 깊숙한 곳까지 점령한 날이었다.

우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견우와 직녀의 러브스토리는
수천년 동안 다양한 버전으로 진화하면서 사랑받은 드라마였다.

1년에 한번 만나는 견우와 직녀 설화의 배경은 천문학에서 왔다.

독수리별자리의 알타이르(Altair)와,
거문고별자리의 베가(Vega)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다.

두 별은 태양의 황도(黃道)를 운행할 때 은하수의 동쪽과 서쪽에 보이다가,
칠석 무렵 천장 부근에서 관찰되는데 마치 일년에 한 번 만나는 것으로 상상한 결과물이다. "

https://kydong77.tistory.com/18150

 

강상원 - '朝鮮'의 어원

위 사진은 DNA로 본 세계 동이족의 분포 강의 듣기는 힘들고 지루합니다.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심과 지식의 차이 때문이죠. 그러나 조선의 어원 강의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새로운 것입니다. 朝는 북극..

kydong77.tistory.com

노아는 동이족이 파견한 슈메르 지역(sumeru, ur는 땅) 출신으로 유대교는 잃어버린 조국을 찾는 데 목숨을 걸 만큼 조상숭배의 모범국가임. 유대인들의 가치관은 동이족과 일치하는 구석이 많은 것은 해문화를 가진 동이족들이 우르 지역에 선진문화 전파를 위해 3천명을 파견한 덕분이지요.

Adhim 농부

Eve: 직녀(織女)

E - 노래하다. / 한국민요의에헤야데야 노를 저어라

ve - 베짜다 / 직녀(織女)

'노아'의 '노'는 배를 젓는 노, 노아는 9년 대홍수 때 방주(작은 배)를 만들어 노를 저은 뱃사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063

 

부도지(符都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도지』에 따르면, 마고성(麻姑城)은 마고가 사는 성으로 지상에서 가장 높은 성이며, 천부(天符)를 받들어 선천을 계승하였다고 한다. 성의 가운데는 천부단(天符壇)이, 사방에는 각각 보단(堡壇)이 있다. 천부는 천리를 숫자로 표현하여 우주법칙을 설명한 것이며, 천부삼인(天符三印)이란 천지 본음(本音)을 본 뜬 것이다. 이 마고성에서 출발한 한민족은 마고·궁희·황궁·유인·환인·환웅·단군에 이르는 동안 천산·태백산과 청구를 거쳐 만주로 들어 왔으며, 이렇게

encykorea.aks.ac.kr

부도지(符都志)

삼국시대 신라의 학자 박제상(朴堤上, 363~419)이 저술한 것으로 파미르고원으로 추정되는 마고성의 황궁씨로부터 시작한 1만 1천여 년 전의 한민족 상고사를 기록한 역사적 문헌이다.

이 마고성에서 출발한 한민족은 마고·궁희·황궁·유인·환인·환웅·단군에 이르는 동안 천산·태백산과 청구를 거쳐 만주로 들어 왔으며, 이렇게 시작한 한국의 상고역사는 하늘과 함께해 온 천도적(天道的) 의미를 지닌다.

 

https://www.youtube.com/watch?v=ueQMj1LvqwM&t=1468s

 

https://www.youtube.com/watch?v=rZmyO6WT_o8

 

https://www.youtube.com/watch?v=c5AZXAYH77w&t=9s

 

[세시풍속]

한자문화권에서는 숫자를 陰陽 두 가지로 나누는데 홀수는 陽數, 짝수는 陰數라 합니다. 그런데 陽數가 겹치는 날을 吉日중 吉日이라 하여 특별한 행사를 지내는 세시풍습이 있습니다. 이를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A4%EB%82%A0

 

설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양력 1월 1일에 대해서는 양력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대한민국의 명절에 대해서는 한국의 설날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설날은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세계는 그레고리력(양력)을 표준 달력으로 쓰기 때문에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다. 따라서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인 설날로 기념한다.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으며,

ko.wikipedia.org

 

http://folkency.nfm.go.kr/kr/topic/detail/4155

 

삼짇날

음력 3월 3일을 가리키는 말. 고려시대에는 9대 속절(俗節)의 하나였다. 이날을 ‘강남갔던제비오는날’이라고도 하며, 삼질(삼짇날의 준말), 삼샛날 또는 여자의 날이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삼중일(三重日), 삼진일(三辰日), 상사일(上巳日), 상제(上除), 원사일(元巳日), 중삼일(重三日), 답청절(踏靑節), 계음일(禊飮日) 같은 이칭이 있다. 양의 수가 겹치는 삼짇날은 파릇파릇한 풀이 돋고 꽃들이 피어 봄기운이 완연하다. 그래서 이날은 봄에 걸맞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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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82%BC%EC%A7%87%EB%82%A0

 

삼짇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짇날 또는 삼월 삼짇날, 상사(上巳), 중삼(重三)은 음력 삼월 초사흗날이다.[1]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명절이다. 이 날이 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삼짇날에는 주로 화전(花煎)을 먹는 풍습이 있다. 삼월 삼짇날의 어원[편집] 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며, 한자로는 상사(上巳)·원 사(元巳)·중삼(重三)·상제(上除)·답청절(踏靑節)이라고도 쓴다. 삼짇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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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A8%EC%98%A4

 

단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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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n.cri.cn/1680/2015/06/19/1s226770.htm

 

단오절 유래에 대한 5가지 설은?

음력 5월 5일은 중국 민간 전통명절 단오절이다. 중화민족의 전통명절인 단오절은 춘추전국 시기부터 시작해 약2000여년간 지속되어 왔다. 단오절의 유래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설은 굴원설과 오자서(伍子胥)설이다. 사실 이외에도 민간에는 조아(曹娥)설, 삼대 하지절설, 독월악일(毒月惡日) 축출설, 오월민족 토템제설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전설들이 있다. 이런 전설은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전해지고 있다. 전설1 동한 효녀 조아 기념설 절강 소흥(绍兴)에서는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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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9%A0%EC%84%9D

 

칠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칠석 견우직녀가 만나는 그림(베이징 여름궁전 회랑 천정)공식이름 칠석(七夕)장소 동아시아(한국, 중국, 대만, 일본)중요도 견우직녀 전설, 오작교날짜 음력 7월 7일 (한국, 중국, 대만)양력 7월 7일 (일본)2018년 8월 17일 (금) 2019년 8월 7일 (수)2020년 8월 25일 (화)2021년 8월 14일 (토)행사 백설기, 밀국수, 호박부침 칠석(七夕)은 한국, 중국, 일본 민간전설의 견우와 직녀 전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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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B6%94%EC%84%9D

 

추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는 한국의 명절에 관한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명절 전반에 대해서는 중추절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추석(秋夕) 또는 한가위는 음력 8월 15일에 치르는 명절로 설날과 더불어 한국의 주요 명절이다. 추석은 농경사회였던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연중 최대 명절이다. 중추(仲秋), 중추절(仲秋節), 가배일(嘉俳日), 한가윗날, 팔월 대보름 등으로도 부른다. 가을 추수를 끝내기 전에(조선시대 추수는 음력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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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동지 섣달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128772

 

동지팥죽 유래, 먹는 이유 알고보니…'무병장수' 기원

오늘(22일) 동짓날을 맞아 '동지팥죽 유래'가 화제다. 동지는 24절기 중 22번째 절기로 음력 11월에 들며 보통 양력 12월 22~23일 ..

news.jtbc.joins.com

 

http://www.bulgyofocus.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52

 

설날의 어원을 알아본다 - 불교포커스

**설날의 어원** 1. 에서 보듯 '몸을 삼간다'는 신일(愼日)의 뜻 : 새해가 시작되어 '섧다'는 뜻(옛말 '섧다'는 '삼가다' 또는 '조심...

www.bulgyofocus.net

설날의 어원**

1. <동국여지승람>에서 보듯 '몸을 삼간다'는 신일(愼日)의 뜻 : 새해가 시작되어 '섧다'는 뜻(옛말 '섧다'는 '삼가다' 또는 '조심하여 가만히 있다'는 뜻)

2. 나이를 뜻하는 살(歲)의 고어 '술'에서 기원3. 설쇠, 설장고, 설소리, 설북 등에서 보듯 본래 "처음"을 뜻하고 "으뜸"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말한다.

4. 새로 솟아난다는 뜻과 마디의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 살(sal)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5. "장이 선다"와 같이 쓰이는 '선다'의 '선'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설다(제대로 익지 않다)', '낯설다' '설어둠(해가 진 뒤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때)'의 뜻에서 '설'이 왔다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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