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書 洪範篇 11-9th

1st 수(壽),  2nd 부(富),  3rd 강녕(康寧), 4th 유호덕(攸好德), 5th 고종명(考終命)

 

 

 

https://www.youtube.com/watch?v=LFbZp_5ukU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267

 

오복(五福)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교개념용어  『서경』 홍범편 등에서 인생의 바람직한 조건으로 제시한 수·부·강녕·유호덕·고종명의 5가지를 가리키는 일반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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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五福)
첫째가 수(壽)로, 인간의 소망이 무엇보다도 장수를 원하기 때문이다.
둘째가 부(富)로, 부유하고 풍족하게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인 것이며,
셋째가 강녕(康寧)으로, 일생 동안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넷째가 유호덕(攸好德)으로, 덕을 좋아한다는 뜻은 오래 살고 풍족하고 몸마저 건강하면 그 다음에는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보람있는 봉사를 해보자는 것으로, 선을 권하고 악을 미워하는 선본사상의 발로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고종명(考終命)은 죽음을 깨끗이 하자는 소망으로, 모든 사회적인 소망을 달성하고 남을 위하여 봉사한 뒤에는 객지가 아닌 자기집에서 편안히 일생을 마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민간에서 바라는 오복은 『통속편(通俗編)』에 나오는데,

(壽) · 부(富) · 귀(貴) · 강녕(康寧) · 자손중다(子孫衆多)로, 『서경』에 나오는 오복과 다소 차이가 있다.

*福이란 현대어로 풀이하면 '행복'의 의미다. 따라서 심리적 요인도 내포된다.

 

주(周)/ 하, 은(상), 주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771년까지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에 두어서 '서주'라 칭하고,

기원전 771년 ~ 기원전 256년까지 수도가 낙읍(현재의 뤄양)으로 천도되어서 '동주'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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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 周書. 洪範篇 11)홍범의 9번째, 오복(五福)과 육극(六極)

[11] 홍범의 아홉번째인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은 이와 같습니다 九五福 (구 오복) "홍범의 아홉번째로, 다섯 가지의 복인 오복(五福)으로, 一曰壽(일왈수) 二曰富(이왈부) 그 첫째를 장수(長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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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홍범의 아홉번째인 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은 이와 같습니다

五福

(구 오복)   "홍범의 아홉번째로, 다섯 가지의 복인 오복(五福)으로, 

一曰壽

(일왈수)     그 첫째는 장수(長壽)인 수(壽)이며,

二曰富

(이왈부) 둘째는 부유한 부(富)이고,

三曰康寧

(삼왈강녕)    셋째는 건강과 평안인 강녕(康寧)이며,

四曰攸好德

(사왈유호덕)  넷째는 덕을 지키는 것을 낙으로 삼는 유호덕(攸好德)이며, 

五曰考終命

(오왈고종명) 다섯째는 늙어서 목숨을 다하는 고종명(考終命)입니다.

 

 六極. 여섯 가지의 곤액 (오복과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6가지 불행)

  (육극) 그리고 여섯 가지의 곤액(困厄)은,

   一曰 凶短折

    (일왈 흉단절) 첫째는 횡사(橫死)와 요절(夭折)이고,

   二曰 

   (이왈질) 둘째는 질병(疾)이며,

   三曰憂

   (삼왈우) 셋째는 근심인 우(憂)이고, 

   四曰貧

    (사왈빈) 넷째는 가난한 빈곤(貧)이며,

   五曰惡

    (오왈악) 다섯째는 죄악을 짓는 악(惡)이며,

   六曰弱

  (육왈약) 여섯째는 몸이 쇠약한 약(弱)입니다"       

 

周나라 시대에 이미 어떤 현상이 나타나면 미래에 닥칠 재난에 대비하기 위해 거북점. 시초점을 개발하고,

후대를 위해 갑골문자까지 만들어 역사 기록으로 남기려 노력했다.

우리는 미래사회의 재난에 대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부끄럽기 그지없다.

周나라 지식인들이 음양오행 등 당시의 지식을 총동원해 주역을 정리한 것도 어떤 현상에 대한 미래의 예측 가능한 수단을 개발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운영자는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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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점(─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래와 같이 출처를 표시하여 이용할 수 있습니다.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encykorea.aks.ac.kr),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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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과 시초(蓍草) - 크리스천 라이프 - 에듀 라이프

거북과 시초(蓍草) 고대 중국에서 여자 무당인 무(巫)와 남자 무당인 격(覡)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중재자로서 천신(天神)의 사자(使者)이자 씨족의 수호자였다. 문명의 모태, 혹은 문화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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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 목차, 괘사(卦辭) 64괘, 효사(爻辭) 384효/ 陰陽五行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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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 64괘 해석, 괘사(卦辭) 64괘, 효사(爻辭) 384효/陰陽五行 원리

太極>兩儀> 四象>八卦 太極>兩儀> 四象>八卦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705 팔괘(八卦)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팔괘는 자연계 구성의 기본이 되는 하늘·땅·못·불·지진·바람·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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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周易) 목차, 괘사(卦辭) 64괘, 효사(爻辭) 384효/ 陰陽五行 원리

주역은 역경(易經)이라고도 한다 자료 활용을 가능케 하신 작성자 이즈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애국가를 부르면서도 태극기의 음양과 건곤감리의 상징을 이해하지 못해 대한민국 국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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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jFFAg1rqYlY 

 

 

https://www.youtube.com/watch?v=tA_2hEgSJMU 

 

 

https://www.youtube.com/watch?v=Ltw6xUlvae0 

 

 

https://www.youtube.com/watch?v=FlW17iQVRF8 

 

https://www.youtube.com/watch?v=gnJ82yLeu58 

 

https://www.youtube.com/watch?v=XSW0GAIxumg 

 

 

[재미로 보는 관상] 71세까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Kc4gFLl2MHw 

 

바다는 받아래요

정용원

낮에는 해님의 사랑을 받아요
별밤에는 달님과의 속삭임도 받아요

바람의 심술도 받아요  구름의 눈물도 다 받아요

갈매기의 칭얼거림도 받아요
고기랑 해조랑 조개의 청도 받아요

밝음도 어둠도 다 받아요
그래서 바다는 받아래요

―『시선』(2012년 가을호)에서 

 

對酒五首 [二]

蝸牛角上爭何事
(와우각상쟁하사) 달팽이 뿔처럼 좁은 세상에서 싸운들 무엇하리

石火光中寄此身
(석화광중기차신) 부싯돌 빤짝하는 찰라 동안 머물다 가는 몸

隨富隨貧且歡樂
(수부수빈차환락) 부귀빈천 주어진 대로 즐겨할지니

不開口笑是癡人
(불개구소시치인) 입 벌려 웃지 않는 사람이 바보라네.

 

https://kydong77.tistory.com/21705

 

白居易, 對酒五首 / 長恨歌·琵琶行& 백낙천(白樂天)의 한시 51수

白居易(백거이, 772년 ~ 846년) 자(字)는 낙천(樂天) 對酒五首 [一] 巧拙賢愚相是非 (교졸현우상시비) 어리석다 똑똑하다 서로 옳고 그름보다 何如一醉盡忘機 (하여일취진망기) 흠뻑 취하여 속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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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李之菡, 1517년 10월 5일(음력 9월 20일)[1] ~ 1578년 8월 19일(음력 7월 17일)[2])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출생지는 보령이다. 사헌부 감찰, 우봉현령을 지낸 이치의 아들이며,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고 이산해의 작은아버지이다. 이덕형은 그의 조카사위이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자기가 사는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해서 정자를 지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3][1][4]

생애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과[1][4][5] 개성의 서경덕으로부터도 글을 배웠다고 한다.[6]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그 성품은 기위(奇偉)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7]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8]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했으며[9]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4][10][1]가 많다. 이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5][4]

평가

  • 이이: "(이지함을) 물건에 비유하자면 기화 이초(奇花異草)와 진금괴석(珍禽怪石) 같다."[5]
  • 조헌: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11]
  • 조선왕조실록》: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돌보는 정성을 다했으며, 맑은 마음에 욕심이 적고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12]

https://namu.wiki/w/%ED%86%A0%EC%A0%95%EB%B9%84%EA%B2%B0

 

토정비결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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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정비결()대한민국에서 운세를 보는 데 널리 쓰이는 연대・작자 미상의 도참서이다. '토정'비결이라는 이름 때문에 농사와 관련된 책이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주생년월일과 육십갑자를 이용 한 해 동안의 운을 점치는, 일종의 점치는 책이다. 사주(연, 월, 일, 시) 중 '시'는 따지지 않으므로 엄밀히는 삼주를 기반으로 한 책.

흔히 조선시대 중기에 토정 이지함이 썼다고 알려져 있지만, 학계에서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이지함이 죽고 나서 한참 후에 토정비결이 등장했기 때문에 상관성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지함의 개인문집에 토정비결이 들어있지가 않다. 만약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썼다면 동시대 다른 사람들의 글에도 '토정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썼다', '토정 이지함이 작성한 도참서를 사람들이 보더라'라는 문장이 등장해야 하는데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색의 후손이며 왕실의 인척 가문의 자제가 이런 도참서나 쓰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허무맹랑하다.

이지함은 당시에도 풍수를 잘 보기로 유명하기는 했는데, 그런 측면 때문에 도참서의 저자로 소문이 퍼졌을 수 있다. 이에 토정비결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토정 이지함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웠을 것이며, 그가 비기에 능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정말 이지함이 몰래 썼다가 나중에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까?'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민속학자인 최상수 선생은 '토정 가탁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지함의 호인 '토정'을 빌려 만든 책이라는 주장이다. 민속학자인 문화재 연구소 임형진 연구관 또한 공신력을 얻기 위해 당시 천문과 음양에 능통했던 이지함의 호를 빌려 왔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00231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사실상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선택의 여지없이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이지함과 그의 처가에 새겨진 역적 집안이라는 낙인은 그 후 20년이 흐른 1570년, 그의 나이 54세에 이르러서야 선조의 특명으로 벗겨진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재앙, 자신이 잘못이 아닌 세상이 만든 잔인한 굴레에도 이지함은 한때 방황했을지언정 좌절하거나 자신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살아생전 낙인을 지울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고, 그 끝도 알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극복하면서 마침내 조선 최초의 경제학자, 사회복지의 선구자로 거듭난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자신의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백성들의 삶과 함께 했다. 육지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가보려도 하지 않았던 저 머나먼 유배의 땅 제주도를 왕래하기도 했다. 양반과 선비라는 허장성세로 뒤덮인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그 시대에 가장 천한 업인 소금을 굽고, 물고기를 잡고, 섬에서 박을 키워 바가지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노동자와 장사꾼의 삶을 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등과 교류하면서 학문을 닦아 언젠가 다가올 경륜을 펼 시간을 준비해갔다. 모진 체험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았기에 훗날 그가 “서산과 태안의 염전을 잘 경영하면 능히 국가 재정 비용을 댈 수 있다”라며 재정 빈곤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이지함 졸기의 기록처럼 자신은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

54세 이지함. 온몸에 찍힌 낙인은 지워졌지만 다시 과거 공부를 해서 경륜을 펼치기에는 늦은 나이였다. 게다가 그가 추구한 삶이 과거 급제가 아니었기에 그는 다시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런 그였기에 역사의 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경륜을 펼칠 기회가 왔다.

선조 6년인 1573년 6월, 57세의 이지함은 조목(趙穆)·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숨은 현자라는 ‘탁행지사(卓行之士·행실이 아주 뛰어난 선비)’로 천거돼 7월에는 포천 현감으로 부임했다. 자신의 평소 장담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 결과는 조선 최초의 국부론이라고 할 수 있는 ‘포천에 부임했을 때 올린 상소(莅抱川時上疏)’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혁신적인 건의가 완고한 유교 이념주의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듬해인 1574년 8월 사직했다.

62세인 1578년에 다시 천거되었다. 수령의 무능이 크게 문제가 되었던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다. 부임 직후 곧바로 사회복지시설인 걸인청을 만들어 백성을 구휼했고, 현안이었던 군역 문제를 해결하는 제안을 했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도 전에 안타깝게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등지면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PQ4f6YzD8

 

 
 
 
 
 

  • 1.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 5.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4001

참고문헌

http://www.geumgye.kr/bbs/content.php?co_id=first0105

풍수이야기

동국의 명승이며 세상을 기리는 보배로다.

적선한 자 후손이 들어가 살리라

금계가 첫째이니 좋은 운이 천년에 뻗으리라

삼길성이 내려 비치고 오성이 모이도다.

넓게 열려 평탄하고 물이 나뉘어져 다시 만남이 분명하다.

냇물은 북에서 동으로 흐르고

남으로 학가산에 통하는 도다.

남쪽에는 생봉이 있고, 북에는 곡봉이 있으며

동쪽엔 염봉이 있고 서쪽에는 적봉이 있도다.

둘레가 40리에, 수구는 멀리까지 잠겼도다.

공명이 세상을 덮지만 금계는 더욱 높도다.

묻노니 그 언제 이런고?

운이 트일 때는 돌이 희게 될 때이니라

자죄는 운이 장원하고, 건좌는 발복이 빠르다.

비록 소국이나 중국보다 낫도다.

대신이 많이 나고 명재상이 날지로다.

난시에 살만하니 여기를 버리고 어디로 갈 것인가?

죽령을 보지 마라 바람과 돌도 많도다.

왼편에 흙 언덕이 있고 오른쪽은 샘이 있으니 찾기 여럽지 않다.

36대나 장수와 대신이 나며 부귀가 겸한 땅이다.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저자나 연대가 미상으로 미래의 국운을 대화 형식으로 예언한 도참서입니다. 고려와 조선조의 흥망을예언하고, 정씨 왕조가 계룡산에 출현하여 800년 동안 도읍을 하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갖가지 전쟁과 폭정, 억압과 착취, 가난과 질병에 처한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서는 해방과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과 위안을 심어 주는 것이었으며 동학혁명을 비롯해서 민중봉기의 이념적 사상을 심어주는 책이기도 했습니다.

정감록(鄭鑑錄)이란 성이 정씨(鄭氏)이고 이름이 감(鑑)이라는 사람이 예언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감록 내용인 <감결(鑑訣)>의 원문과 이것을 해석한 책들을 참고하여 필자가 재구성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완산백으로 임명된 한융공(漢隆公)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큰아들은 일찍 죽고, 둘째 심(沈)과 셋째 연(淵)이 정감(鄭鑑)이라는 사람을 만나 8도를 유람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감이라는 사람은 삼국지에서 나오는 유비의은사(隱士)인 수경선생 사마휘나 지략가 제갈 공명보다도 더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경치가 빼어나고 기이한 금강산을 구경하면서 "천지는 음양의 주장으로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를 서로 돌아가면서 하였습니다.

형인 심이 "산수의 법이 기이하고 경치가 참으로 빼어나 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대답하기를 "곤륜산으로부터 온 산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원기(元氣)가 평양에 이르렀지만 평양은 이미 천년운세가 지났고, 이제는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500년 도읍 할 땅이기는 하지만 요사스런 중과 궁녀가 난을 일으켜 땅의 기운이 떨어지고 천운(天運)이 다하게 되면 한양으로 원기가 옮겨질 것이다.

대강 살펴보건데 전쟁은 평정되지 않고 충신은 죽었으니 세상이 긴 밤중이로다. 교룡(蛟龍)은 남쪽으로 건넜는데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반드시 흰소(白牛)을 따라 종성(從城)으로 달아나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말을 받아 대답하기를 "내맥(來脈)의 운수가 금강산으로 옮겨진 다음 안동에 있는 태백산, 순흥에 있는소백산에 도착해서 산천의 기운을 뭉치고 계룡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정씨(鄭氏)가 800년 도읍 할 땅이고, 다시 원맥(元脈)은 가야산으로 들어갔으니 이곳은 조씨(趙氏)가 1000년 도읍 할 땅이며, 전주(全州)는 범씨(范氏)가 도읍 할 땅이다. 또한 송악은 운수가 되돌아와서 왕씨(王氏)가 다시 일어나는 땅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해 말할 수가 없도다."

이어서 정감이 삼각운대에 앉아 말하기를 "어떤 해를 거쳐서 어떤 해에 이르면 지각이 있는 사람이 살고, 지각이 없는 사람은 죽게 될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심이 "그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너의자손 말년에 궁중 과부가 모든 일을 자신의 뜻대로 하고, 어린 임금이 스스로 일을 내 맡기면 나라의 일은 장차 그르쳐지고 단신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져서 집집마다 인삼이요, 마을마다 물방아요, 집집마다 급제하고,사람마다 진사가 나올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며, 후에 현인이 있어 이러한 일들의 잘못됨을 논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갓을 비뚤어지게 쓰고, 신인(神人)이 옷을 벗고, 주변(走邊)에 몸을걸쳐 성인(聖人)의 이름에 8자를 더하고, 계룡의 돌이 흰색으로 변하고, 청포(淸浦)의 대나무가 흰색으로 변하고, 초포(草浦)에 조수(潮水)가 생겨 배가 다니고, 누런 안개와 검은 구름이 사흘 동안 천지를 덮고, 혜성이진성(軫星, 28수의 하나) 머리에서 나와 은하수 사이 또는 북두(北斗)로 들어갔다가 자미원(紫薇垣)을 범한후 두미(斗尾)로 옮겨갔다가 두성(斗星) 또는 은하 사이에 이른 후 남두(南斗)에서 그 끝을 마치면 대중화(大中華: 중국)와 소중화(小中華: 조선)가 함께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삼각산이 규봉이 되고, 백악이 주산이 되고, 한강이 허리띠가 되고, 계락산이 청룡이 되고, 안현이 백호가 되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고, 목멱이 남산이 되었도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도둑이 4번이나 들어 도둑질을 하지만 반드시 2번은 다시 일어설 것이고, 관악산이 안산이 되었으니 왕궁에 화재가 3번 일어날 것이며, 단우에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위에서는 근심하고, 아래에서는 흔들릴 것이며, 아전이 태수를 죽일 것이고, 삼강오륜이 영영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마주 하였으니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신년(申年) 봄 3월과 성세 가을 8월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1천척이 닿고, 안성과 죽산 사이에 송장이 산처럼 쌓이며, 여주와 광주 사이에 사람의 그림자가 영영 끊어지고, 수성과 당성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며, 한강 남쪽 1백리에 닭과 개의소리가 없어지고, 사람의 그림자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장차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에 심이 말하기를 "몸을 보존할 땅이 열 군데 있으니,

첫째는 풍기 예천이고,

둘째는 안동 화곡이며,

셋째는 개령 용궁이고,

넷째는 가야이며,

다섯째는 단춘이고,

여섯째는 공주 정산 마곡이며,

일곱째는 진천 목천이고,

여덟째는 봉화이며,

아홉째는 운봉 두류산으로 이곳은 영구히 살만한 땅이어서 어진 정승과 훌륭한 장수가 계속하여 날 것이고,

열째는 태백이다."라고 하였다.

심은 계속하여 말하기를 "곡식 종자는 양백(兩白:태백과 소백)에서 구할 것이니 앞서 말한 열 곳은 병화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으며, 백의적(白衣賊)을 만나면 결혼을 하고 형제처럼 되어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즐겁게 지낼 것이다. 영가 사이에 화기애애한기운이 성하다고 하였는데 영가는 바로 대소백(大小白)이다. 금강산 서쪽과 오대산 북쪽은 12년 동안 적의소굴이 될 것이고, 9년 동안 수재(水災)가 들며, 12년 동안 병란이 있을 것이니 누가 이 변고를 피할 수 있겠는가? 십승지(十勝地)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그 때를 알아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감이 "해가 저물었으니 서쪽으로 돌아가자.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라고 말하며 서쪽 암자로 돌아가니 경쇠 소리가 멀리 흰 구름 속에서 들려오고, 쏟아지는 폭포가 귀를 씻어주며 갖가지 형상의 구름이 산골짜기를 덮었습니다.

이튿날 세 사람은 금강산을 떠나 가야산에 이르렀습니다.

정감이 "후세 사람 중에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십승지에 들어갈 것이니, 가난한 사람은 살고 부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이 "어째서 그런가?"라고 묻자

정감이 대답하기를 "부자는 돈과 재산이 많기 때문에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고, 가난한 사람은 재산이 없으니 어디에 간들 가난하고 천하게 살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때를 살펴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이 "황해도 평안도 두 서쪽 땅은 1천리 지경에 3년 동안 사람의 연기가 없을 것이고, 동쪽 산골 강원도 땅은 마땅 꺼려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과 물의 형세가 이러저러하니 천 년 후의 일을 자세히 알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적이 전주에서 일어나 호중(湖中)의 진(津)과 화(華) 사이에서 세력을 키워 1만척의 배로 강을 가로막을 것이니 이것이 큰 재난이로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되지 않는다. 말세에 이르면 아전이 수령을 죽이는 일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위와 아래의 분별이 없어지며, 삼강오륜의 변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금의 힘이 없어지고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이르러 비틀거리게 되면 대대로 국록을 먹는 신하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정감은 "말세의 재앙을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9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나무껍질을 먹고 살 것이며, 4년 동안은전염병이 돌아 전체 백성의 반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사대부의 집은 인삼으로 망하고, 벼슬아치의집은 이익을 탐하다가 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이 "후세에 미련한 사람들은 용문산을 은신하기에 적당한 곳으로 볼 것이다. 그러나 산수를 보는 법에 따라 살펴보면 용운산은 겉으로 드러나는 생기만 있을 뿐 모든 기운을 한양에 빼앗겼기 때문에 가운데의 기세는 모두 죽은 혈뿐이다. 따라서 후세 사람들이 이 산에 오면 오대산 북쪽 도둑들의 침범을 받아 1년도 못되어 일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정감이 "산수 생긴 것이 이렇게 괴상하고 패역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후세 사람들이 지각이 있어 십승지로 들어가려 하더라도 반드시 미련한 사람들이 말릴 것이다. 공과 사의 대소를 막론하고 길흉화복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렵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정감이 말하기를 "계룡산의 돌이 희어지고, 평평한 모래밭 30리에 남문이 다시 일어나고, 너의 자손 끝에 쥐얼굴에 범의 눈을 가진 사람이 생기고, 때때로 흉년이 들고, 호환으로 사람이 상하고, 물고기와 소금이 지극히 천하고, 냇물이 마르고 산이 무너지면 백두산 북쪽에 있는 오랑캐의 말이 길게 울고, 평안도와 황해도 양서 사이에 원통한 피가 하늘에 넘칠 것이다. 한양 남쪽 백 리에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연이 "목멱산은 해산하는 여자의 음부 형상과 같아서 사대부의 추행이 있으면 온 나라가 무례해질 것이니 이것을 어찌 하겠는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 음풍을 막으면 황씨가 무후(無后)하게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심이 "계룡산에 개국하면 변씨(卞氏) 정승과 배씨(裵氏) 장수가 일등 개국 공신이 될 것이고, 방성(房姓)과 우가(牛哥)가 수족과 같이 될 것이고, 대백과 소백 사이의 묵은 양반들이 복고할 것이니 후세 사람 중에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자손을 대백과 소백 사이에 간직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감이 "대개 세상에 몸을 피하려면 산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고 양궁(兩弓)이 가장 좋다. 너의 자손 끝에 나라 운수가 팔임(八壬)에 다하고, 목하(木下)에 어지러워지면 나의 자손에 의해 끝을 마치게 될것이다."라고 말하자,

심이 "나의 자손이 너의 자손을 죽이고, 너의 자손이 나의 자손을 죽일 것이다."라고말했습니다.

연이 "십승지가 세상에서 피신하기에 가장 좋은 땅이나 새재(조령) 앞뒤의 큰길은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자,

정감이 "새재에 성을 쌓으면 큰 군사가 바다에 떠서 배를 타고 와서 남쪽으로 해서 전주로 들어가고, 호중(湖中)의 도둑 백성들이 당(黨)을 모으면 화(華), 진(津)과 양서의 백성들이 살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열곳은 난리가 들어오지 않고, 흉년이 들지 않는 곳으로 이곳을 버리면 사람이 어디 살겠는가? 장씨(張氏)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시작하는 시기가 경염(庚炎)이 있으니 지각이 있는 사람은 이때 십승지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들어가는 자는 되돌아오고, 중간에 들어가는 자는 살고, 나중에 들어가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이 이어서 "이 열 곳은 비록 12년 동안 병란이 있어도 피해가 없지만 육도(六道)의 백성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 열 곳은 사면이 이러이러해서 흉년이 들지 않으니 참으로 산수의 법은 기이하다. 뒤에 지각 있는 자가 비록 빌어먹으며 들어가더라도 좋은 것이다. 신년(新年) 섣달과 임년(壬年) 3월에 일이 없으면 요행이고,비록 일이 있더라도 들로 향하면 편안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연은 또한 "계룡산 남쪽 밖 네 고을 또한 백성들이 몸을 보존할 곳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감은 "이곳은 경기 강원보다도 낫고, 일이 허다하여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두 물 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의 고기로 청양현에 있으며, 동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네 증항 근처로 난리를 당해 몸을 숨기면 만 명중에 한 사람도 다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杏村)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임금의 수레가 이 땅에 다다르면 달라질 것이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 유구 마곡 사이로 물 골 사이의 둘레가 2백 리나 되어 난을 피할 만 하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어지러운 세상에 종적을 감출만하나 수염이 없는 자가 먼저 들어가면 달라질 것이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북쪽동방 상동(相洞)으로 난을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쪽이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둘레가 2백 리나 되어서 영구히 몸을 보전 할 수가 있다. 동북쪽 상원산(上元山) 계류봉 또한 가하다."라고 말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YFRpGcnRc&t=428s

 

 

10,이상향의 땅 태백구무소 용궁을 다녀온 엄씨 이야기/구무소/용왕/뚜루내/도화원기/도원향

https://www.youtube.com/watch?v=gxj5kL7WV50

 

남사고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남긴 예언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조선시대 최대의 사건이라 할 만한 선비들의 ‘동서 분당(分黨)’에 대한 것인데 이 이야기는 유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이라는 책에 기록이 남아 있다. 1575년 남사고가 이산해를 만났다.

남사고는 한양의 서쪽 안산(鞍山)과 동쪽 낙산(駱山)을 가리킨 뒤 말했다.

“조정에서 분당이 있을 것이오. 낙(駱)이란 각(各) 마(馬)로 끝에 가서 헤어지며 안(鞍)은 혁(革) 안(安)이라 개혁 후 편안해지지요.”

말대로 서인은 조선 말기까지 정권의 주류를 이뤘으며 동인은 훗날 대북·소북으로 찢어졌다.

남사고는 명종의 사망과 선조의 즉위도 예언했다고 한다.

그는 남산에 올라 “왕기가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사직동으로 옮겨지리라”라고 되뇌었다.

그의 예언처럼 명종은 후손 없이 사망하고 16세 된 하성군 균(鈞)이 보위를 이어받았는데 그의 집이 사직동에 있었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남사고가 임진왜란을 예고해 적중시켰다는 이야기가 실려 전해진다.

“임진년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에서 조선을 침범하리라!”

과연 그의 말대로 왜군의 선봉이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백마를 타고 있었다.

격암 남사고가 말한 십승지 으뜸은 경상북도 풍기 금계촌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정감록마을’이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풍기는 제주도처럼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인데 놀라운 것은 거란·몽골의 외침과 임진왜란, 6·25 때도 피해를 안 봤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비율이 낮아졌지만 한때 주민의 70%가량이 이북 출신이라는 점도 기이하다. 이북 사람들이 해방 후 공산당의 횡포를 피해 월남할 때 《정감록》에 나오는 풍기를 찾아 대거 이주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이들이 들고 온 게 베틀과 인삼이다.

베틀로 시작한 게 지금 저 유명한 풍기 인견의 시발점이 됐고 인삼농사로 풍기인삼은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이다. 금계촌에 서면 뒤로는 소백산이 병풍처럼 막아서고 좌우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데 사과나무밭이 많은 게 인상적이다.

십승지마을 가운데 두 번째로 꼽히는 봉화는 지금도 오지 중의 오지다. 그중에서도 춘양(春陽)마을은 임진왜란 때 《징비록》의 저자인 서애 류성룡 선생의 형인 겸암 류운용 선생이 가솔을 이끌고 피란 갔던 곳으로 지금도 흔적이 남아 있다. 겸암선생은 안동 하회마을에서 이곳으로 와 아무 피해도 받지 않았다는데 교통수단이 발달한 지금도 안동에서 봉화 춘양마을까지 가는 것은 만만치 않다.

더구나 춘양마을 근처에 태백산 사고(史庫)가 있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에는 전란 등을 피해 가장 안전한 곳에 실록을 나눠 보관했다. 춘양마을 인근에 태백산 사고가 있다는 것은 이곳이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라는 반증이 된다.

세번째가 안동에서 가까운 예천 금당실마을이다. 이 마을 북쪽에는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그곳에는 주민들을 위한 운동시설과 현대식 정자가 있다. 그 바로 아래에는 마을을 지킨다는 노거수가 아직도 웅장한 자태로 마을을 보고 있다. 그곳에서 보면 금당실마을은 분지형이며 산들이 마을을 빙 둘러싼 형상인데 특이하게도 2010년 이웃 안동에서 전국으로 번진 구제역 파동이 이곳에만은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금당실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얽인 일화도 있다. 이여송이 마을 지형을 보고 깜짝 놀란 뒤 “(마을 뒤편) 오미봉(五美峰)의 산세를 보아하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날 모습이다. 장차 중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당실마을에서는 조선시대 대과에 급제한 사람만 15명이나 됐다고 하며 지금에도 법조계와 금융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충북 보은 속리산은 누구나 한 번쯤 가 봤을 장소다. 이 산은 보은·괴산과 경북 상주의 경계에 있다. 몇 가지 설화만 소개하자면 속리산은 고려시대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안동으로 몽진 왔던 공민왕이 개경으로 가던 중 넉달이나 머물렀던 곳이며 조선 중기 최고의 명장이라 할 임경업장군이 경업대·입석대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도 서려 있다.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관기리는 사실 속리산과 거리가 있으며 주변에는 구병산(九屛山·해발 876m)이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관기리 옆에는 적암리가 있는데 이곳에 있는 촌로로부터 “여기는 옛날부터 피란지처”라는 말을 들었다.

“북한의 미사일이 구병산에 막혀 이곳에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88서울올림픽 때 이곳에 국가기간방송망의 송신탑이 설치됐지요. 6·25가 났을 때는 이북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기도 했고요. 지금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지만요.”

특이한 것은 구병산을 끼고 있는 마을 한가운데 시루봉이 서 있는 것이다. 마치 떡시루와 같은 형상인데 놀랍게도 이 주변에는 시루봉이라는 이름의 산만 최소 5개가 있다는 것이다. 이름만으로 봐도 뭔가 범상치 않은 지역임에 틀림없다.

 

간지(干支)
십간










십이지












 

 

 
 
 
사주팔자 - 나무위키

1. 개요 흔히 '사주팔자( 四 柱 八 字 )'라고 말하지만 좀 더 정확히는 '사주명리( 四 柱 命 理 )'라고 할 수 있다. 심효첨(沈孝瞻)의 『자평진전(子平眞詮)』 서문은 사주명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命之不可不信 而知命之君子 當有以順受其正 명(命)은 불신할 수 없는 것이어서 명을 아는 군자라면 마땅히 순리로써 그 바른 명을 받아들임이 있어야 한다. 人能知命 則營競之可以息 非分之想可以屏 凡一切富貴窮通壽夭之遭 皆聽之於天而循循焉 各安於義命 以共勉於聖賢之路 豈非士君子厚幸哉 사람이 명을 알 수 있다면 꾀하고 다툼을 그칠 수...

3. 사주의 구성

사주를 해석하는 것은 수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만 요즘은 기술의 발전으로 자신의 사주 자체를 산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이 산출 과정 자체는 공부가 필요하지만 이런 검증은 생략하고 자신의 사주를 쉽게 보고 싶다면 이 링크에 자신의 생년월일시(태어난 시간), 성별을 기입하여 구할 수 있다.

사주팔자에서 사주(四柱)는 말 그대로 네개의 기둥을 의미하고 팔자(八字)는 여덟 글자를 의미한다. 이 여덟 글자가 모여서 네개의 기둥을 이룬다고 해서 '사주팔자'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0년 1월 1일 0시에 태어난 밀레니엄 베이비의 사주는 다음과 같다. 음력으로는 1999년 11월 25일이다.

 

세로쓰기를 하기 때문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니까 밀레니엄 베이비의 사주는 기묘(己卯)년 병자(丙子)월 무오(戊午)일 임자(壬子)시이다.

 

3.1. 년주(年柱)

자신이 태어난 해. 정확하게 세우려면 만세력을 봐야 하나 대략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해를 육십갑자로 바꾸면 된다. 예를 들어 2000년에 태어났다면 해당 년도가 육십갑자로는 경진(庚辰)년이므로 경진(庚辰)을 년주로 사용한다.

자신이 태어난 달이 양력 1~2월 경인 사람이라면 년주를 세울 때 주의해야 하는데, 명리학에서 해가 바뀌는 기준은 설날이 아니라 입춘이다.[8] 설날이 지났더라도 아직 입춘이 되기 전에 태어났다면 금년도가 아닌 전년도의 간지를 적용한다. 더군다나 입춘이라 하더라도 해당 년도의 간지가 시작되는 절입(節入)시각까지 따지는데, 절입시각이 되기 전에 태어났다면 마찬가지로 금년도가 아닌 전년도의 간지가 적용된다.[9]

년주는 한평생의 운명을 나타내며 보통 초년운으로 삼는다. 조상이나 부모 및 웃사람과의 대인관계를 상징한다.

 

3.2. 월주(月柱)

자신이 태어난 달. 정확하게 세우려면 만세력을 봐야 하지만 월건기법(月建起法)이라는 것이 있어서 년주의 천간(년간)을 기준으로 쉽게 세우는 방법이 있다.

 
월(月)
1월
(입춘)
2월
(경칩)
3월
(청명)
4월
(입하)
5월
(망종)
6월
(소서)
7월
(입추)
8월
(백로)
9월
(한로)
10월
(입동)
11월
(대설)
12월
(소한)
갑(甲), 기(己)년
丙寅
丁卯
戊辰
己巳
庚午
辛未
壬申
癸酉
甲戌
乙亥
丙子
丁丑
을(乙), 경(庚)년
戊寅
己卯
庚辰
辛巳
壬午
癸未
甲申
乙酉
丙戌
丁亥
戊子
己丑
병(丙), 신(辛)년
庚寅
辛卯
壬辰
癸巳
甲午
乙未
丙申
丁酉
戊戌
己亥
庚子
辛丑
정(丁), 임(壬)년
壬寅
癸卯
甲辰
乙巳
丙午
丁未
戊申
己酉
庚戌
辛亥
壬子
癸丑
무(戊), 계(癸)년
甲寅
乙卯
丙辰
丁巳
戊午
己未
庚申
辛酉
壬戌
癸亥
甲子
乙丑

 

월주를 세울 때 주의해야 할 점은, 해당 달이 시작되는 기준은 그 달의 1일이 아니라 아래 언급한 절기이다. 예를 들어 음력 2월생이라도 경칩 이전에 태어났다면 전 달인 1월생으로 취급한다. 물론 경칩이 시작되는 절입시각까지 따져서 그 시각 이전에 태어났어도 전달의 월주를 사용한다. 위의 년주에서도 설명하다시피 입춘이 한 해의 시작으로 취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절입시각은 해당 절기의 태양의 황경(黃經)[10]을 측정한 날짜와 시각이다. 절입시각은 매해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살피려면 만세력을 봐야 한다.

월주는 성년 이후의 운수를 나타내며, 부모형제자매 및 동료간의 관계를 상징한다.

 

3.3. 일주(日柱)

자신이 태어난 날. 일률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으므로 짤없이 만세력을 봐야 한다.

일주는 청년 시기의 운수를 나타내며, 결혼과 배우자, 가정, 정신세계 등 일신상의 운명을 상징한다. 또한 자기 자신(특히 성격)을 대부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3.4. 시주(時柱)

 

자신이 태어난 시각. 정확하게 세우려면 만세력을 봐야 하지만 월건기법과 마찬가지로 시기법(時期法)이라고 해서 일주의 천간(일간)을 기준으로 쉽게 세우는 방법이 있다.

 
시(時)
23~01
01~03
03~05
05~07
07~09
09~11
11~13
13~15
15~17
17~19
19~21
21~23
갑(甲), 기(己)일
甲子
乙丑
丙寅
丁卯
戊辰
己巳
庚午
辛未
壬申
癸酉
甲戌
乙亥
을(乙), 경(庚)일
丙子
丁丑
戊寅
己卯
庚辰
辛巳
壬午
癸未
甲申
乙酉
丙戌
丁亥
병(丙), 신(辛)일
戊子
己丑
庚寅
辛卯
壬辰
癸巳
甲午
乙未
丙申
丁酉
戊戌
己亥
정(丁), 임(壬)일
庚子
辛丑
壬寅
癸卯
甲辰
乙巳
丙午
丁未
戊申
己酉
庚戌
辛亥
무(戊), 계(癸)일
壬子
癸丑
甲寅
乙卯
丙辰
丁巳
戊午
己未
庚申
辛酉
壬戌
癸亥

시주를 세울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위의 시각에서 30분씩 뒤로 땡겨서 시주을 정한다. 예를 들면 원래 묘시는 오전 5시에서 오전 7시인데, 시주를 세울 때는 묘시를 오전 5시 30분에서 오전 7시 30분으로 정한다. 그러니 만약 자신이 오전 5시 10분에 태어났다면 시주를 묘시로 사용하지 않고, 인시를 사용한다. 오전 7시 20분에 태어났다면, 진시를 사용하지 않고 묘시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한국은 동경 135도선을 기준으로 하여 표준시각을 정했는데(UTC+9), 이 자오선은 한반도를 지나지 않고 일본을 관통하여 한반도보다 훨씬 오른쪽에 있기 때문이다. 대신 동경 127도 30분(동경 127.5도)이 한반도를 관통하므로 한국 표준시는 태양시보다 대략 30분 빠르다. 사주에서 시주는 태양시를 기준으로 정하므로 동경 127.5도선을 기준으로 시주를 세우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11]

그렇기 때문에 혹시 사주를 보러 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십이지지를 사용하여 시간을 말하지 말고 자기가 원래 태어난 시간을 말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오전 1시 15분에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치자. 이 사람이 위의 시간표를 보고 사주가에게 본인의 생일이 축시라고 말하게 되면 사주상의 시간인 자시와 틀리게 된다.

또 태어난 시각이 자시(子時)인 경우에도 주의가 필요한데, 일반적인 상식대로 00시 30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날짜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야자시(夜子時)와, 23시 30분부터 익일 일주를 적용하는 정자시(正子時)가 있다.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적용하느냐에 대해서는 사주가들 사이에서 첨예한 떡밥이 되고 있다. 만일 위에 예시로 든 밀레니엄 베이비의 시주는 야자시를 적용하면 정사(丁巳)일 임자(壬子)시, 정자시를 적용하면 무오(戊午)일 임자(壬子)시가 된다.

서울올림픽 무렵인 1987년 ~ 1988년 여름에 태어났다면 이 때 실시된 써머타임(일광절약시간제)을 고려하여 시각을 보정해 주어야 한다. 이 때 뿐만 아니라 40년대와 50년에도 일시적으로 실시된 적이 있다.

시주는 유년과 노년의 운수를 나타내며, 재물, 건강, 자손, 아랫사람과의 관계를 상징한다.

여기까지 했으면 자신의 사주가 다 세워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해석하는 단계에 들어간다.

우리 어릴 적엔 친척들이 둘러앉아 <토정비결> 책을 펴고 그 해의 운수를 보고 함께 즐기던 풍속이 생각나 그 책애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https://blog.naver.com/kydong47/222985951929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토정비결(秘訣),도참서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A7%80%ED%95%A8 이지함(李之菡, 1517년 10월 5일(...

blog.naver.co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084

 

이지함(李之菡)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형백(馨伯) 또는 형중(馨仲)이며 호는 수산(水山) 또는 토정(土亭)이다. 색(穡)의 후손으로, 현령 치(穉)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蕃) 밑에서

encykorea.aks.ac.kr

 

 

 

상생(相生)과 상극(相剋) - 울산신문

만물은 상생(相生)과 상극(相剋) 작용을 통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발전해 나간다.상생(相生이)란 어느 한 오행(五行)이 다른 한 오행(五行을)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오행을 목화토금...

www.ulsanpress.net

만물은 상생(相生)과 상극(相剋) 작용을 통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발전해 나아간다.

상생(相生)이란 어느 한 오행(五行)이 다른 한 오행(五行을)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명리학(命理學)에서는 오행 목화토금수로 분류를 하며, 그 흐름을 살펴보면,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으로 흘러갈 때 이를 상생(相生)이라고 한다.

자연의 원리로 살펴보면 나무는 불을 지피고(木生火),

타버린 나무는 다시 흙이 되고(火生土),

흙 속에서 단단한 금이 나고(土生金),

단단한 바위에서 물이 나고(金生水),

물은 다시 나무를 키운다(水生木)는 이치이다.

이러한 선순환을 통해서 만물은 자라고 많은 생명체들에게 먹거리를 제공한다.

상극(相剋)이란 어느 한 오행(五行)이 다른 한 오행(五行)을 극(剋)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상생(相生)의 흐름과는 다르게 목토수화금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흘러간다.

이를 자연의 이치로 풀어보면 

나무는 흙을 극하고(木剋土), 

흙은 물을 극하고(土剋水), 

물은 불을 끄고(水剋火), 

불은 쇠를 녹이고(火剋金), 

쇠는 나무를 자른다(金剋木).

흔히 상생이면 좋고 상극이면 나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생(生)이 과다하면 상극(相剋)으로 변하기도 하고 반대로 상극(相剋) 속에서도 상생(相生)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

오행의 세계는 자세히 보아야 보이는 법이다.

예를 들면 나무(木)가 불(火)을 생(生) 하지만 아궁이에 불을 지펴놓고

많은 나무를 한꺼번에 넣어 버리면 불은 꺼져 버린다.

이를 목다화식(木多火熄)이라 하며 생(生)이 과다해서 오히려 극(剋)으로 변하는 이치이다.

그렇다면 한꺼번에 많은 나무가 불을 끄는 상황을 막으려면 금으로 나무를 잘게 잘라서 넣으면 된다.

이를 금극목(金剋木) 또는 벽갑인정(劈甲引丁)이라고 한다.

반대로 상극(相剋)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나무는 흙을 극하지만(木剋土), 나무는 흙이 있어야 뿌리를 내릴 수 있고,

흙의 입장에서는 나무가 있어야 홍수가 났을 때 물에 쓸려 내려 가지 않는다.

이때는 목극토가 목극생이 된다.

이것이 바로 극(剋)하는 가운데 생(生)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는 의미의 극중생(剋中生)의 원리이다.

이처럼 생(生)이 과다하면 오히려 극(剋)이 되기도 하고, 상극(相剋) 속에서도 상생(相生)의 이치가 담겨져 있다.

주역의 천지비(天地否)괘 구오효사에 其亡其亡(기망 기망)이라야 繫于苞桑(계우포상)이라는 문구가 있다.

"혹시 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항상 염려해야만 굳건한 뽕나무에 메어 놓은 것처럼 안정된다"는 의미로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고 일이 순조로울 때도 쇠락의 씨앗이 있기에 어려울 때를 대비해야 하고,

반대로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처럼 세상살이에도 음양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의 삶에서 힘이 들 때를 음(陰)이라고 한다면 일이 순조로울 때를 양(陽)이라고 할 수 있다. 

음(陰)이 극(剋)에 달하면 반드시 양(陽)으로 변하고 양(陽)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음(陰)으로 변한다.

한 번은 음(陰) 하고 한 번은 양(陽) 하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것을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 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보면 음양의 논리가 무색하게 극과극으로 치닫는 구조로 가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끝까지 극과극으로 치달으면 후회만 남는다. 이를 주역에서는 항룡유회(亢龍有悔)라 한다.

나아가고(陽) 물러나는(陰) 이치 속에서 중용(中庸)의 도(道)가 유유히 흐른다.

출처 : 울산신문(https://www.ulsanpress.net)

 

 

 

 

https://www.youtube.com/watch?v=Ea57uIAZPXc

 

시각진행바 4분까지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V_H7YnVOOY

 
 

 

 

 

네 켤레의 신발

ㅡ이기철(1943- )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

 

 

 

 

https://www.youtube.com/watch?v=cS-IiArGm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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