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中庸, 영어: Doctrine of the Mean, Middle Way)은 사서오경에 속하는 경전 중 하나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지녀야 할 자세와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본래 예기의 31편이다.
주자는 《중용》의 작자가 자사라고 단정했고, 사마천의 사기와 몇몇 서적에도 《중용》의 작자는 자사라고 언급했지만, 청대에 이르러 이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근래에는 《중용》은 자사에 의해 기초가 이루어졌고 이후 전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가 학자들의 보충과 해설이 더해져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예기 원본을 보면 글자 한자 틀리지 않고 중용 전편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예기 전체 49편 중 제31편이 바로 중용이다. 예기의 한편에 불과했던 중용이 유학의 핵심 과목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주자의 덕이다.
중용의 저자는 공자 손자 자사(子思)이다. 아버지 앞에서 종종걸음으로 지나치던 공자 아들 공리(孔鯉, 즉 공잉어)의 외아들로 이름은 급(伋)이다.
그는 공자 사후 공자제자 증자에게서 배웠다. 맹자가 자사의 제자였으니 공자의 정통 학통은 자사가 없었더라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사는 유교의 4대 성인의 한사람으로 맹자와 동급으로 문묘에 배향되어 있다.
중용(中庸)의 용(庸)은 ‘쓸 용’이다. 설문해자에서는 庸用也(庸은 ‘사용한다’ 이다)라고 되어 있다. 庸은 更(庚)과 用의 합자이다. 정밀한 뜻은 ‘다시 사용하다’이다. 중(中)은 가운데라는 뜻이다. 그러나 중용의 중(中)은 가운데의 뜻이기 보다는 적중하다고 할 때의 포함된 center를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은 ‘중간을 사용함’이 아니라 ‘올바른 중앙을 사용함’이라고 할 수 있다.
中庸 1장
1-1.
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修道之謂教。
천명지위성、솔성지위도、수도지위교。
道也者,不可須臾離也;可離非道也。
도야자,부가수유리야;가리비도야。
<직역>
하늘의 명령(天命), 그것(之)을 성(性)이라 말한다
성을 따르는 (率性) 그것(之)을 도(道)라 말한다
도를 닦는 것(修道) 그것(之)을 교(教)라 말한다
도(道)라는 것(者)은 잠시(須臾) 떠남(離)도 가능치 않다(不可也)
떠남이 가능하다면(可離) 도가 아니다(非道也)
<해설>
해석에서 당장 之(갈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지시대명사 ‘그것’으로 해석할 것인가 조사 ‘~의’로 해석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之를 조사 ‘~의’로 사용하면 ‘천명(天命)의(之) 일컬음(謂)은 성(性)’으로 해석된다. 약간 어색하다. 性다음에 ‘~이도다’의 뜻인 ‘也’가 첨가되어야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之를 ‘그것’으로 해석하고 ‘謂’를 동사로 파악하면 올바른 해석이 된다. 그래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은 ‘하늘의 명령(天命), 그것(之)을 성이라(性) 말한다(謂)’로 해석되는 것이다.
庸(떳떳할 용) : 떳떳하다, 쓰다, 고용하다, 일정해 변치 않다, 보통
命(목숨 명) : 목숨, 성질, 규정, 생명, 명령
率(거느릴 솔/비율 률) : 솔/거느리다, 따르다, 쫓다, 가볍다 률/비율, 제한
須臾(수유) : 잠시
臾(잠깐 유) : 잠시, 잠깐
1-2.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
시고군자계신호기소부도,공구호기소불문。
莫見乎隱,莫顯乎微。故君子慎其獨也。
막견호은,막현호미。고군자신기독야。
<직역>
이런 까닭에 군자(君子)는 보이지 않는 그 장소(其所)에 대하여(乎) 경계하고 삼간다(戒慎)
들리지 않는(不聞) 그런 곳(其所)에 대하여(乎) 몹시 두려워한다(恐懼)
숨기는 것(隱)보다(乎) 잘 나타남(見)이 없다(莫) 미묘한(微) 것보다(乎) 더 드러나는 것(顯)이 없다(莫)
그러므로(故) 군자(君子)는 그 홀로 있음(其獨)에도 삼간다(慎也)
<해설>
이 구절은 천명인 성을 따르는 도(率性之謂道)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도는 잠시도 떨어질 수 없으며 떨어지게 되면 도가 아니다(可離非道)라고 말했다. 본성에 따르기 위해서는 경계하면서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늘의 명이 성(天命之謂性)이고 이 성을 따르는 것이 도(率性之謂道)인데 본성을 잘 따르기 위해 익히고 수련하는 것이 교(修道之謂教)라고 했다. 여기가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 탄생하게 되는 고향이다. 본성을 잘 따르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자라고 하는데 만약 그 본성이 성악설에서 주장하듯 나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 본성을 따르고 닦을 수가 없게 되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위의 구절에서 희노애락 같은 기본적인 본성이 하늘이 내린 명령 즉 천명이라고 해놓고도 혼자 있을 때 그 것이 드러나지 않게 하라고 하고 있다. 천명인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라고 해놓고 본성이 드러날까봐 수양하라고 말하는 모순이 생기고 있다. 유학이나 성리학의 대부분의 문제가 여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주자는 性이 理(이성)라는 황당한 설명을 내놓는다.
'性卽理也' - 성이 곧 理이다.'
중용집주에서 주자가 한 이 주장은 사실 정이(程頤)의 설을 따른 것인데 성즉리(性卽理)라는 주장에서 바로 성리학이 시작하게 된다.
마지막 구절을 천하가 이상하게 해석한다.
‘君子慎其獨’ - 군자는 홀로 있는 것을 삼간다.
이 해석이 말이 되는가? ‘其獨’을 목적어로 해석하니 저렇게 해석이 되는 것이다.
‘其獨’ 역시 마찬가지다. 목적어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영어의 보어처럼 해석해야만 문맥과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모범 해석은 이것이다.
“君子는 신중(慎)해라. 혼자 있을 때(其獨)도”
是故(시고) : 그러므로, 이런 까닭에
戒慎(계신) : 경계하여 삼감
慎(삼갈 신) : 삼가다, 근신하다, 두려워하다
乎(어조사 호) : 於, 于와 동일 의미, ~에게, ~에 대하여, ~와 비교하여, ~이도다, ~인가?
저 하늘이라고 하는 것은 촛불 하나가 반짝이는 것 같은 밝음이 많을 뿐인데, 그 무궁한 데 이르러서는 ‘日月星辰’이 다 거기에 매달려 있고 만물을 덮고 있다. 땅이라고 하는 것은 단 한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일 뿐인데, 넓고 후박한 데 이르러서는 華嶽을 등어리에 싣고도 무거운 줄 모르고 河海를 가슴에 안고도 새지 않는다. 그러니 만물을 실을 만하다. 대저 산이라 하는 것은 한 뭉치의 돌로부터 출발할 뿐이지만, 그것이 광대한 대 이르러서는 초목이 다 거기서 살며, ‘寶藏’이 많이 나온다. 물이라는 것은 一勺, 한 바가지의 물이 많은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不測한 데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 악어, 교룡, 용, 물고기, 자라 등이 살고, 많은 貨財가 그 물에서 불어나게 된다.
昭昭는 밝디 밝음과 같으니, 작은 밝음이다. 여기서는 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及其無窮이란 12장의 ‘그 지극함에 이르면’의 뜻과 같으니, 대체로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振은 거두어들인다는 것이다. 卷은 구역이란 것이다. 네 가지 조항은 모두 ‘不貳不息’하여 성대함에 이르러 물건을 생성하는 뜻을 발명한 것이다.그러나 하늘과 땅과 산과 냇가는 실제로 쌓이고 누적된 후에 커진 것은 아니니, 읽는 사람은 표현으로 속뜻을 해쳐선 안 된다.
동양인이 말하는 天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주관으로 말한다면, 태양계의 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에서 보이는 모든 우주공간을 말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天을 오늘날처럼 무궁한 우주공간(boundless four dimensional time space)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공간을 좌악 펼쳐서 평면화시켜 버렸습니다. 일월성신이 모두 동일한 평면 위에 있다고 본 것이죠.
‘天圓地方’이라고 할 때, 모든 일월성신은 서로 ‘近遠之差’가 없이 한 면에 좌악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주자의 자연학』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옛날 사람들의 우주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地 나는 中庸을 처음으로 읽을 때, 이 ‘載華嶽而不重 振河海而不洩’라는 말을 읽고서 눈물을 주루룩 흘렸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격이라는 것은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요. 中庸의 생각의 스케일! 그건 대단합니다.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화악을 실고도 짜식이 무거운 줄을 모르고, 하해를 가슴에 안고도 하나도 새지가 않아! 야! 이거 스케일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참 멋있는 말입니다. 이 문장은 어렸을 때 내 감성을 지극히 자극한 그런 문장이예요. 여러분들은 그런 감상이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짜릿한 느낌이 없어요?
‘華嶽’이라는 것은, ‘五嶽’ 중의 하나로 지금 협서성의 동부에 있는 ‘華山’을 일컫는다는 설도 있고, ‘華山’ ‘嶽山’이 따로 따로 있는데 그 중 하나라는 설도 있는데, 협서성 동부의 ‘華山’일 것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中庸은 노나라 사람이 쓴 것일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도 몇 가지 근거를 대면서 말하였지만, 中庸은 진시황의 대륙통일 이후의 문장인 게 틀림없습니다.
『中庸』은 魯나라같은 시골 어느 구석에서 쓰여졌다고 보기에는 스케일이 너무 커요. 노나라 촌놈이 이 정도까지의 스케일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겁니다. 또한 ‘河海’의 ‘河’라는 말에서는 『中庸』의 성립 장소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양쯔강 이북의 강에 대해서는 ‘河’라는 명칭을 쓰고, 양쯔강 이남에서는 ‘江’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黃河’가 그 용례죠. 따라서 ‘河’라는 용법은 中庸이 북방문화권에서 성립한 문헌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江의 上古音은 ‘가르’이고, 河의 上古音은 ‘가람’으로서 우리말 강의 어원과 비교해 볼 수 있어요. 우리말의 ‘강‘이라는 말은 ‘가르’보다는 ‘가람’에서 온 것이며, 따라서 북방계열의 영향을 받은 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도올논문집』에 최교수의 논문에 이런 내용들이 상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참고하세요.
동양인들에게 山과 水는 함께 한다
이 구절 전체의 구조를 보면, 天地가 나온 다음에 山水로 나가고 있죠? 이 山水의 문제는 『石濤畵論』을 읽으면 상세하게 알 수 있는데1, 우리가 ‘山畵’ 또는 ‘水畵’라고 하지 않고 흔히 ‘山水畵’라고 하듯이, 동양인들의 공간관으로는 반드시 山과 水가 같이 껴있어야 해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그 원칙이 山과 水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대동여지도는 단적으로 말해서 조선반도의 山과 水를 그린 것이죠.
무슨 말이냐 하면, 대동여지도에는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전부 다 표현이 되어 있는데, 山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그 산들 사이로 계곡이 끼어 있고 그 계곡을 따라서 물이 흐르고 있으면, 반드시 이 山水가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니깐! 또한 마찬가지로 논리로 아무리 큰 산줄기라 할지라도 水가 가로 막고 있으면 이 물줄기를 건너뛰지 못합니다. 즉, 산줄기는 물이 합쳐지는 합수지점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멈추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산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다른 산으로 가는 길이 반드시 하나 있지요. 따라서 산줄기의 흐름은 조선 반도 끝에 와서야 비로소 멈추게 됩니다.
일본의 우리나라 지형 왜곡 행태
그런데 요즘의 지도를 보면,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해서 무슨 산맥2들이 즐비하게 듬성듬성 금을 그어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는 그런 게 있을 수 없어요. 이런 것은 일본놈들이 완전히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산자락 물줄기를 따라서 지도에다가 산줄기를 표시한 게 아니라, 즉 실질적인 자연 형세로 지도에다가 산줄기3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땅 속의 지질구조를 기준으로 하여 소위 ‘산맥’이라는 것을 마구 그려 놓은 거예요. 그래서 산줄기를 뚝뚝 잘라 놓게 되었죠. 山水가 흐르는 데 따라서, 백두산에서부터 쭈욱 백두대간이 뻗어 내려오는 것이 우리의 山水개념입니다.
그런데 묘향산맥, 차령산맥, 태백산맥 이런 식으로 뚝뚝 끊어 놓았어요. 자기네들이 인위적으로 정해 놓은 산맥을 마치 사실상의 산줄기인 것처럼 억지로 규정해 버린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도인 겁니다. 이건 완전히 우리 민족을 말살시킬려는 음모의 소산이었던 거죠. 완벽하게 땅부터 왜곡을 시켜버렸어요. 일본놈들의 식민지정책이 얼마나 악랄한지 모릅니다! 엄청나게 교묘한 짓이었거든요. 도대체 이놈들은 안 해 본 짓이 없어요. 우리 조선땅에 와서 현대 지질학을 핑계로 땅을 마구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대동여지도, 우리 산하를 파악하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구조와 삶의 공간이라는 걸 보면, 마을과 마을 사이에 내가 흐르고 있을 때는 그 유수량이 아무리 작은 경우라 하더라도 두 마을 사이에는 어떤 격리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山水를 같이 봐야만 인문지리학이 나오는 거예요. 대동여지도를 보면 훨씬 더 리얼하게 우리 삶의 양식을 알 수 있습니다.
도대체 대동여지도를 안 갖고 다니면서 여행을 다닌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예요. 나는 반드시 대동여지도를 가지고 여행을 다닙니다. 대동여지도가 현대의 지도보다 훨씬 더 낫거든요. 地勢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훨씬 더 정확해요. 대동여지도를 꼭 사두시고 이 대동여지도를 통해서 우리 강산에 대한 본래의 인식을 깨닫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의 산천이 다 망가지기는 했지만, 대동여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놀랍도록 정확하며 진짜 우리의 山水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사는 이 따님(大地)을 볼 때 반드시 山水를 같이 봐야 한다!
‘今夫山 一券石之多 及其廣大 草木生之 禽獸居之 寶藏興焉’ 여기서 ‘一券’은 한 줌, 한 뭉치를 뜻하는데, 한 뭉치의 돌이 흙으로 되는 것이죠. 돌이 흙이 되기까지는 온갖 미생물의 엄청난 수고가 깃들어 있으며, 이외로도 모든 것이 다 작용해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돌로부터 시작하여 광대함에 이른 산에서 모든 미네랄과 모든 유기·무기 물질이 나와서 초목이 거기서 살게 되고, 또한 禽獸가 거기서 살게 되는 거예요. ‘寶藏’이라는 것은 옥석, 보물들을 말합니다.
‘今夫水一勺之多 及其不測 黿鼉蛟龍魚鼈 生焉 貨財殖焉’ 주자가 말하기를, “언뜻 보기에 이 글은 작은 데서 비롯하여 만물이 생장하도록 하는 지대한 데에 이르는 것을 말하고는 있지만, 마치 山川이라는 것이 단지 작은 것들이 쌓여서 되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 달라”는 재미있는 註를 달고 있습니다. 마치 조그만 것들이 쌓여서 거대하게 된다는 뜻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이것은 표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라는 거예요.
여기 『詩經』의 구절은 「周頌 維天之命」편에 나오는 네 구절인데, 中庸의 저자는 그 네 구절을 두 구절씩 떼어서 둘로 나눴습니다. 즉, “아! 天之命이여, 오! 穆不已하여라!” 이것은 하늘이 하늘 된 바의 까닭을 표현한 것이고, “아! 드러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文王之德의 순수함이여!” 이 말은 文王의 文됨을 나타낸 것이예요.
여기서 ‘純‘이라는 말은 ‘雜’하지 않다는 뜻인데, 宋明儒家에서는 이것 때문에 純·雜 논쟁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性命論’에도 순하다, 잡하다는 논쟁이 많이 나와요. 잡하지 않다는 문왕의 文됨은 뭐냐? 이 ‘文’은 추상적인 의미를 띠는 것으로서, 이 『詩經』의 네 구절이 ‘天’과 ‘文’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서 그 뜻을 풀어야 합니다. 즉, 天은 자연세계이고 文은 문명, 문명질서의 세계를 말해요. 天의 세계는 ‘至誠無息’하는 ‘穆不已’의 세계, 끊임없는 세계, 끊임없이 天命을 받는 세계로서, 中庸의 저자는 ‘이것이 곧 天이 天다운 것’임을 영탄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문명은 잡하면 안 되고 순해야 한다는 것이죠. 문명에서는 순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깨끗하고, 맑고 그래야 해요.
道家는 이런 문제에서 문명을 최소화시키는 ‘樸’의 세계, 심플한 세계를 지향했죠? 가장 좋은 문명의 형태는 심플한 것입니다. 모든 물리학의 법칙은 가장 단순한 일반법칙을 향해서 가고 있는 거 아닙니까? 상대성이론이든 통일장이론이든 뭐가 되었든 물리이론들이 깔고 있고 추구하는 대전제는 가장 단순한 법칙이 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중력이 법칙이든 뭐든 원리에 있어서는 가장 단순한 그 무엇인가가 지배하고 있을 것이라는 거죠. 순해야지 잡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마치 문명의 모습이 잡하면 잡할 수록 좋은 걸로만 알고 있는데 이건 크게 잘못된 생각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적 삶은 가급적 순해야 합니다. 과거와 현대, 서양과 동양을 불문하고 잡하게 살면 안 되요!. 동양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간명한 게 아름답다(Simple is beautiful!)’는 겁니다. 단지 크기의 작음(Small is beautiful!)이 문제가 아니라, 單하고 純해야 한다는 것이죠.
조선은 단순함을 존중했으나 1세기 만에 망가졌다
일본놈들은 사이즈에 관심이 많지만, 조선문명은 단순성에 대한 淡泊한 감각을 추구합니다. 에도 문명과 조선문명의 차이가 여기에 있고, 또한 조선문명의 심플한 맛을 일본문명이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조선조 木器같은 것을 보면, 거기에 깃들어 있는 단순미, 그 단순한 맛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 어느 문명도 당해낼 수 없는 ‘맛’이요 ‘멋’이죠4. 중국문명을 보면, ‘文王之道’를 말하면서도 그 잡스러움이 그지 없습니다. 심플한 맛은 조선 문명이 최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잡스러워져 버렸냐? 우리는 단 1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잡스러운 민족으로 둔갑해 버렸는데, 이제 다시 이 심플한 삶의 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27장 첫 머리에, “大哉라 聖人之道, 洋洋乎! 카아!” 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26장을 반드시 외워둬야 합니다. 얼마나 좋으냐 이말이요? ‘至誠無息’에서부터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 ‘純亦不已’라! 천지자연은 지극히 성실하고 쉼이 없어야 하는 한편, 문명은 순수해야 하고 끊임이 없어야 한다 이겁니다. 맨 끝의 ‘純亦不已’가 맨 앞의 ‘至誠無息’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끝나고 있는데, 이 26장은 맨 처음과 맨 끝이 시종 일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中庸이 가지고 있는 자연예찬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예찬, 이 스케일, 그 문학성, 그 상상력 등등 이 모든 것이 곧 中庸의 맛이고 또한 中庸의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대학생 시절 이 中庸을 읽을 때, 참으로 격정적으로 감동되어pacinated 中庸에 대해 열광했었어요. 나는 이 정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백번 죽는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학교 때 이 中庸을 읽으면서 나의 상상력과 문장력을 키운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오늘의 문필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中庸을 통해서 끊임없이 삶의 예지와 통찰력을 배우도록!
오늘 강의는 여기서 끝납니다. 中庸의 맛은 참으로 좋다! 집에 가서 자꾸 반복을 해서 보시도록! 눈으로만 보지 말고 반드시 입으로 낭독을 해 보세요. 입으로 읽으면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읽는 소리가 귀로 다시 들어가고 또 선명하게 메모리에 남습니다. 그러니 낭독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29일부터 2월 5일까지는 명절 휴가이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여러분들과 이별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김용옥을 일주일 동안 안 보고 살아도 되고 하루에 4시간씩 책상다리하고서 앉아 있지 않아도 되지 참 신나죠? 아주 신날거야! 오늘은 남재하고 같이 점심을 먹겠습니다.
김용옥, 『石濤畵論』(서울: 통나무, 1992), 100-114쪽, 「山川章第八」 참고. [본문으로]
재생 註: 일본인들에 의한 우리 강토의 왜곡과 유린은 조선지리학에는 그 족보가 없는 ‘山脈’이란 이름에서 부터 시작한다. 이 ‘산맥’이란 용어는 일제가 조선 강점을 기정사실화 해가던 무렵인 1903년 일본의 지리학자 코토오분지로小藤文次郞가 붙인 이름이고, 16세기의 『朝鮮方域地圖』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는 ‘대간’, ‘정맥’의 용어가 갖고 있는 내력에 비하면 그 역사가 하잘 것 없는 조작용어에 불과하다. ‘대간’, ‘정맥’ 등의 용어가 16세기에 이미 쓰여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용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지리 인식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山水의 지리인식을 일본놈들은 고작 14개월 동안 단 두차례(1900년과 1902년)의 조사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왜곡시켜 놓았고, 우리는 대부분 지금까지도 이 뒤틀려진 지리인식의 지배 아래에서 너무도 무덤덤하게(不仁하게) 살고 있다. 일본인들의 산맥지형도는 땅 위에 실존하는 산과 강에 기초하여 산줄기를 그린 게 아니라, 땅 속의 지질구조선에 근거하여 땅 위의 산들을 분류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규정에 의한 산맥선은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선이 아니라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지질학적인 선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1대간(백두대간) 1정간(장백정간) 13정맥(낙동정맥, 한북정맥, 호남정맥) 등 15개의 산줄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들은 10개의 큰 강에 물을 대는 젖줄이자, 또한 이 강들을 구획하는 울타리이다. 조석필, 『산경표를 찾아서』(서울: 산악문화, 1993) 참고. [본문으로]
여기서 말하는, 지도 위에 표시된 산줄기는 등고선으로 나타나는 기하학적인 모양을 일컫는 게 아니다. [본문으로]
“淡泊以明知, 誠勤以日新!” 우리 아버지 60 평생의 깨달음이요, 우리 가족 하나하나의 귓전에서 항상 맴돌고 있는 ‘戒言’이다. 조선문명의 ‘멋’과 ‘맛’은 조선인민들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소멸된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왜곡시켜 버린 그릇된 패러다임에 젖어 있는 탓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을 단지 못보고 못 느끼고 있을 뿐이다. 仁하면 이걸 볼 수 있으나, 不仁하면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과 사회 주변을 하찮게 생각했다. 뭔가 모자란 듯한 것으로 비하시켜버리는 시선을 고수하게 된다. 仁이란 인간의 신비적 감정(mithtical emotion)이 아니라 바로 나의 과학적 자세와 방법이자 삶의 실천이다(scientific paradigm, methodology and practice).[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