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婚別(신혼별. 신혼 후 이별)

兎絲附蓬麻

(토사부봉마) 넝쿨이 삼에 엉켜 자라면

引蔓故不長

(인만고부장) 줄기가 길게 뻗지 못하듯

嫁女與征夫

(가녀여정부) 출정하는 병사에게 딸을 시집 보냄은

不如棄路傍

(불여기로방) 길가에 버림만 못하다 하네.

結髮爲夫妻

(결발위부처) 머리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나

席不煖君牀

(석불난군상) 남편과 잠자리 덥혀지지도 아니했는데

暮婚晨告別

(모혼진고별) 저녁에 혼인하고 새벽에 작별을 고하니

無乃太忽忙

(무내태총망) 성급하고 허무한 일이 아니냐.

君行雖不遠

(군행수불원) 임은 가심이 비록 멀지 아니하시고

守邊赴河陽

(수변부하양) 변방을 수비하러 하양에 오시니.

妾身未分明

(처신미분명) 며느리 신분이 아직 분명하지 아니하여

何以拜姑嫜

(하이배고장) 어찌 시부모님께 절을 올릴가

父母養我時

(부모양아시) 부모님 나를 키우실 때

日夜令我臧

(일야영아장) 낮이나 밤이나 잘 되기를 바라셨고

生女有所歸

(생녀유소귀) 딸낳아 시집보낼 때

鷄狗亦得將

(계구역득장) 어울리는 짝 얻고자 하셨네.

君今往死地

(군금왕사지) 이제 임은 사지(전쟁터)에 가시니

沈痛迫中腸

(침통박중장) 뼈저린 마음 창자에 스며

誓欲隨君去

(서욕수군거) 임을 따라 가기를 마음에 새겨보나

形勢反蒼黃

(형세반창황) 형세가 도리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네.

勿爲新婚念

(물위신혼념) 신혼이라는 생각을 마시고

努力事戎行

(노력사융행) 나라 지키는 일에 힘쓰소서.

婦人在軍中

(부인재군중) 부인 생각 군중에서 하시면

兵氣恐不揚

(병기공불양) 군인으로 사기가 오르지 못하지요.

自嗟貧家女

(자차빈가녀) 한스럽게도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나

久致羅褕裳

(구치나유상) 어렵게 비단치마 장만했으나

羅褕不復施

(나유불부시) 비단옷 다시는 입지 않겠고

對君洗紅粧

(대군세홍장) 임 뵈올 때 화장을 할께요.

仰視百鳥飛

(앙시백조비) 날아가는 많은 새 우러러 보니

大小必雙翔

(대소필쌍상) 큰 새 작은 새 반드시 짝을 지어 나는데

人事多錯迕

(인사다착오) 인간사 착오가 많아

與君永相望

(여군영상망) 임과 더불어 언제까지(기약없이) 서로 바라만 보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758

 

두보 - 戰亂의 참혹한 현실/ 三吏 三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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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家別(무가별. 집없이 이별)

寂寞天寶後 (적막천보후) 황폐하여 쓸쓸하다. 천보 후에

園廬但蒿藜 (원려단호려) 들과 집은 명아주와 쑥만 자라네.

我里百餘家 (아리백여가) 우리 동네 백 여 집이

世亂各東西 (세란각동서) 세상 난리에 동과 서로 헤어졌네.

存者無消息 (재자무소식) 산 자는 소식이 없고

死者爲塵泥 (사자위진니) 죽은 자는 티끌 진흙이 되었네.

賤子因陳敗 (천자인진패) 천한 이 몸 전쟁에 패하여

歸來尋舊蹊 (귀래심구계) 고향에 돌아와 옛 길을 더듬네.

久行見空巷 (구행견공항) 오래 다녀 봐도 빈 거리요

日瘦氣慘悽 (일수기참처) 햇빛도 시들하고 참혹하고 서글프다.

但對狐與狸 (단대호여리) 다만 대하는 것 여우와 더불어 살쾡이

竪毛怒我啼 (수모노아제) 털을 세워 나를 보고 사납게 짖네.

四隣何所有 (사린하소유) 사방의 이웃은 어찌 있는바

一二老寡妻 (일이노과처) 한두명의 늙은 과부 뿐.

宿鳥戀本枝 (숙조연본지) 잠이 든 새도 본 가지를 그리워하는데

安辭且窮棲 (안사차궁서) 한 처소라 사양하리오.

方春獨荷鋤 (방춘독하서) 봄철에 홀로 호미질하고

日暮還灌畦 (일모환관휴) 날이 저물면 돌아와 물을 대었네.

縣吏知我至 (현리지아지) 고을의 관리가 내가 온 것을 알아

召令習鼓鞞 (소령습고비) 불러 명하기를 북을 연습을 하라했네.

雖從本州役 (수종본주역) 비록 근본을 따라 고을 일을 하지만

內顧無所携 (내고무소휴) 집안을 돌아본바 처자권속 없으니

近行止一身 (근행지일신) 가까이 간대도 이 한 몸 뿐이네.

遠去終轉迷 (원거종전미) 멀리 가면 끝내 떠돌며 헤매 일 것이고

家鄕旣蕩盡 (가향기탕진) 집과 고향은 이미 탕진되었으니

遠近理亦齊 (원근리역제) 멀고 가까움이 역시 같지요.

永痛長病母 (영통장병모) 오래도록 마음이 아픔은 긴 병에 가신 어머니

五年委溝谿 (오년위구계) 오년 전 개울가에 묻히셨고

生我不得力 (생아부득력) 내 나서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였으니

終身兩酸嘶 (종신양산시) 죽을 때까지 둘이 슬프게 울었네.

人生無家別 (인생무가별) 인생 집도 없이 이별하니

何以爲蒸黎 (하이위증려) 어찌 백성이라 할 수 있으랴.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8758

 

두보 - 戰亂의 참혹한 현실/ 三吏 三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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潼關吏(동관리)  -동관의 벼슬아치-

ㅡ  杜甫(두보)

 

士卒何草草(사졸하초초) 병사들은 어찌 저리 허둥대나

築城潼關道(축성동관도) 동관 길에 성을 쌓는데

大城鐵不如(대성철불여) 큰 성은 견고하여 견줄 바가 없고

小城萬丈餘(소성만장여) 작은 성은 만여 장 높이 있네

借問潼關吏(차문동관리) 동관 아전에게 물어보니

修關還備胡(수관환비호) 관문을 고쳐 다시 오랑캐를 막고자 한다며

要我下馬行(요아하마행) 나를 말에서 내려 걷게 하고

爲我指山隅(위아지산우) 산모퉁이를 가리켜 보이네 

連雲列戰格(연운열전락) 방책은 구름에 닿아

飛鳥不能踰(비조불능유) 나는 새도 넘을 수 없고   

胡來俱自守(호래구자수) 오랑캐가 와도 절로 지켜주니

豈復憂西都(기부우서도) 어찌 다시 장안을 걱정할까

丈人視要處(장인시요처) 노인장 저 요새를 보시요

窄狹容單車(착협용단거) 비좁아 겨우 수레 하나 지나니

艱難奮長戟(간난분장극) 어지럽고 어려울 때 긴 창 휘두르는

萬古用一夫(만고용일부) 사내 하나만 있다면 딱이라오

哀哉桃林戰(애재도림전) 슬퍼라 도림의 전투여

百萬化爲魚(백만화위어) 병사 백만이 고기밥 되었거늘

請囑防關將(청촉방관장) 관문 지키는 장수에게 당부하오니

愼勿學哥舒(신물학가서) 제발 가서한을 본받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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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 戰亂의 참혹한 현실/ 三吏 三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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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리(新安吏) - 신안의 관리 -

ㅡ 杜甫

 

客行新安道(객행신안도)① 객이 신안의 거리에 들어서니

喧呼聞點兵(훤호문점병) 병사들 점호하는 시끄러운 소리 들린다.

借問新安吏(차문신안리) 신안의 아전에게 물으니

“縣小更無丁(현수갱무정)②” 현이 적어 장정이 없습니다.

“府帖昨夜下(부첩작야하) 병첩이 지난 밤에 왔기에

次選中男行(차선중남행)③.” 다음 차례 중남들을 뽑고 있습니다.“

“中男絕短小(중남절단소) 중남들은 체구가 작으니

何以守王城(하이수왕성)?” 어찌 왕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肥男有母送(비남유모송) 살찐 남아들은 모친이 나와 송별하는데

瘦男獨伶俜(수남독령빙)④. 야윈 남아들은 혼자 외롭다.

白水暮東流(백수모동류) 하얀 강은 어둠 속에서 흐르고

青山猶哭聲(청산유곡성) 청산은 큰소리로 곡을 하는 듯하다.

“莫自使眼枯(막자사안고) 스스로 눈물을 마르게 하지 말고

收汝淚縱橫(수여루종횡). 흐르는 눈물 거두게 하지도 말라

眼枯即見骨(즉고즉견골). 눈물 말라 뼈가 드러난다 해도

天地終無情(천지종무정)! 하늘과 땅은 끝내 무정할테니

我軍取相州(아군취상주)⑤ 관군이 상주를 취하여

日夕望其平(일석망기평). 그날 저녁에 난리를 평정하리라고 기대했건만

豈意賊難料(기의적난료) 어찌 적의 동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歸軍星散營(귀군성산영). 관군이 흩어져 후퇴했으나

就糧近故壘(취량근고루) 옛 보루 근처에서 식량을 구하고

練卒依舊京(련졸의구경)⑥. 옛 서울에 의지하여 군사를 훈련시키니

掘壕不到水(굴호부도수) 호를 파도 물이 차지 않으니

牧馬役亦輕(목마역역경) 말을 기르는 일도 역시 가볍다.

況乃王師順(항내왕사순) 하물며 왕의 군대는 하늘에 순응하니

撫養甚分明(무양심분명) 보살핌과 급양도 심히 분명하다.

送行勿泣血(송행물읍혈) 배웅하면서 너무 울지 말아라

仆射如父兄(복야여부형).” 부형처럼 대해줄 곽자의(郭子儀) 복야가 있으니!

 

http://wwww.yangco.net/new0822/?doc=bbs/gnuboard.php&bo_table=sungdang&sselect=&stext=&ssort=wr_datetime&sorder=desc&soperator=&page=2&wr_id=20 

 

한시선 > 성당 > 신안리(新安吏) - 신안의 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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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숙종(唐肅宗) 건원(乾元) 원년(758년) 겨울 장안과 낙양을 수복한 곽자의(郭子儀)는 여세를 몰아 이광필(李光弼)과 왕사례(王思禮) 등의 아홉 절도사들과 함께 20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동진하여 지금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인 업성(鄴城 = 相州)에서 아버지 안록산을 죽이고 반란군의 대장이 된 안경서(安慶緖)를 포위했다. 그러나 곽자의와 이광필 등의 장수들을 믿지 못한 어리석은 당숙종은 전군의 통솔을 환관 어조은(魚朝恩)에게 주어 군기와 선무 및 병영의 일을 처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파견했다. 군사의 일에 무지한 어조은으로 인해 관군은 통솔이 안 되었고 또 겸하여 군량미마저도 부족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관군과 반군이 다음 해 봄까지 대치상태로 있다가 결국은 사사명의 지원군에 합세로 관군은 업성의 싸움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곽자의는 동도 낙양을 지키기 위해 후퇴하고 나머지 각 절도사도 모두 자신의 관할지를 지키기 위해 돌아갔다.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은 건원 원년(758) 겨울 안록산을 죽인 안경서가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후퇴하여 상주로 들어가 주둔하자 숙종이 곽자의와 이광필에게 명하여 아홉 절도사의 20만 보군을 이끌고 상주를 포위하여 공격할 때다. 관군이 겨울에 시작해서 봄에 이르기까지 상주를 함락시키지 못하는 사이 하북의 사사명이 위주(魏州 = 今河北大名)를 경유하여 안경서를 구원하기 위해 남진했다. 사사명의 반군은 관군과 안양을 가로지르는 장하(漳河)의 북안에서 회전에 들어갔다. 아홉 절도사의 군사들은 대패하여 괴멸되어 남쪽으로 패주했다. 안경서와 사사명은 다시 낙양을 점령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다행히 곽자의가 이끄는 삭방군(朔方軍이) 황하를 도하할 수 있는 하양교(河陽橋)를 끊어 간신히 안사의 반군이 남하는 길을 끊을 수 있었다. 상주에서의 패전으로 부족한 병졸들을 대거 보충해야 했음으로 조정에서는 징집령을 발했다. 이때 두보는 낙양에서 신안(新安)을 거쳐 화주(華州)로 돌아가면서 징병이 행해지는 정황을 보고 느낀 바를 시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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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 戰亂의 참혹한 현실/ 三吏 三別

https://ko.wikipedia.org/wiki/%EB%91%90%EB%B3%B4 두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두보(중국어 정체자: 杜甫, 병음: Dù Fǔ 두푸[*], 712년 ~ 770년)는 당나라 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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