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승지(承旨) 이정립(李廷立)이 지은 표류된 사람들을 돌려보내 준 데 감사하는 표[謝刷還漂海人口表]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越萬頃之波濤 월만경지파도

就堯如日 취요여일

返千里之桑梓 반천리지상재

微禹其魚 미우기어

만 이랑 파도 헤치고

빛나는 요 임금 땅에 나아갔다가

천리라 고향 땅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우 임금 같은 임금 아니었던들 고기밥 되었으리

이 글은 대우(對偶)가 적절하고 뜻이 좋다. 전편을 볼 수 없음이 섭섭하다.

이정립(李廷立)의 자는 자정(子正), 광주인(廣州人)으로, 호는 계은(溪隱)이고, 벼슬은 이조 참의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79.

신묘년(1591, 선조24) 겨울에 중국 상인 20여 명이 사탕을 팔다가 우리나라 제주도에 표류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왔었다. 내가 친구와 같이 가서 보고 소주와 항주의 풍속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당신은 외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중국 풍토를 역력히 아십니까?”

하였다.

그 중에 장덕오(莊德吾)란 사람이 있어, 자기 말로 복건(福建) 장포(漳浦) 사람이라 하기에,

내가 시랑(侍郞) 장국정(莊國禎)과 시랑 주천구(朱天球)가 당신의 이웃인가고 묻자

장덕오가 놀라며,

“장 시랑은 저의 당숙(堂叔)이고 주 시랑은 한 동네 사람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그러면 태사(太史) 장이풍(莊履豊)과 어사(御史) 이명(履明)은 당신 당형제(堂兄弟)이겠구려.”

하자, 덕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껄껄대고 웃었다.

역관이 말하기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수재가 나이 젊어도 중국의 일을 잘 안다고 하더라.’고 했다.

왕신민(王信民)이라는 자가 나에게,

“무슨 벼슬이요?”

하고 묻기에, 무자년에 과거하여 국자감생(國子監生)이 되었다 하니, 왕씨가,

“언제 추천되지요?”

하고 물었다.

대개 중국에서는 국자감 학생이 으레 이부(吏部)에 추천되기 때문에 그의 말이 이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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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성종(成宗) 때 정의 현감(旌義縣監)에 이섬(李暹)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최보(崔溥)보다 앞서 역시 풍랑으로 표류하여 양주부(揚州府) 굴항채(崛港寨)에 닿으니, 채관(寨官)이 가두고 상부에 아뢰어 문초하게 하였다. 이섬이 옥중에서 지은 시에

열 폭짜리 돛폭은 바람도 못 가리고 布帆十幅不遮風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책임자가 보고 그가 해적이 아님을 알아 잘 대우하여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섬(暹)은 무인(武人)이라 전할 만한 여행 기록이나 기사(記事)가 없어 애석하다.

76.

가정(嘉靖) 임술년(1572, 명종17) 간에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 정 상공(鄭相公)의 이웃 사람으로 해상(海商)을 업으로 하는 자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닿자, 지부에서는 호패를 근거로 신원을 확인하고 북경으로 보냈다.

북경을 가는 길이 공 천사(龔天使 조선에 사신왔던 공용경(龔用卿))의 집을 지나게 되었다. 공씨(龔氏)는 그때 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에 있었다.

조선 사람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역관(譯官)에게 청하여 길을 늦추어 상인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상인이 호음의 가계(家系)와 벼슬 지낸 경위를 말하자, 공씨가 크게 놀라 데리고 집으로 가서 처자를 나오라 하여 인사시키고, 호음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또 후히 대접하여 보냈으니, 공씨가 호음에게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77.

장흥(長興) 사람 이언세(李彦世)가 왜인(倭人)에게 사로잡혀 남번(南蕃)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주야(晝夜) 40일을 가서야 중국의 광서(廣西) 향산현(香山縣) 땅에 닿았다. 그는 한 배에 탄 중국 상인에게 물어서 그곳이 명(明) 나라 지방인 것을 알았다. 그는 동반자[火伴]와 함께 밤을 타 도망쳐 그 지방 지현(知縣)에게 호소하니 지현이 처음에는 만인(蠻人)이 올린 고장(告狀)이라고 하여 팽개쳐 버리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며칠을 울부짖으니 그제서야 조사 심문하였다.

이언세는 글을 좀 알았는데 ‘조선국(朝鮮國)의 장흥(長興) 사는 사람으로, 해전을 하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혀 오랑캐 배에 넘겨졌다.’고만 썼다. 그것을 본 지현이 남웅부(南雄府)에 압송하니 삼사관(三司官)이 그 문초에 의거, 북경으로 이송했다. 그때 마침 동지사(冬至使)가 북경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사행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다.

언세는 남창(南昌)과 항주(杭州)ㆍ소주(蘇州)의 풍경이며 북경ㆍ남경의 훌륭한 경치를 말하기는 하나, 자세하지는 못하다.

74.최부(崔溥)의 자는 연연(淵淵)이요 나주인(羅州人)으로 호는 금남(錦南)이다. 문장에 능하여 문과와 문과중시에 거듭 급제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제주도에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바다를 건너오다 풍랑을 만나 표류한 지 40일 만에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牛頭) 외양(外洋) 땅에 배가 닿게 되었다.

당두채(塘頭寨) 천호(千戶)가 왜구(倭寇)라 무고하였으나 최보가 질문에 척척 응답하였으므로 화를 모면하였다. 항주(杭州)에 이르자, 삼사관(三司官)이 본국의 역대 흥망과 군현의 건치(建置), 산천ㆍ예악ㆍ인물에 대하여 매우 꼼꼼히 물었으나 최부의 대답이 마치 대를 쪼개듯 하므로, 삼사관이 모두 감탄하였다.

돌아오자 성종이 일기를 쓰도록 명하므로 이를 써서 바치니, 모두 3권이다. 최부의 시는 흔히 볼 수 없는데, 송사를 읽다[讀宋史]라는 시에,

挑燈輟讀便長吁 도등철독변장우

天地間無一丈夫 천지간무일장부

三百年中國土 삼백년중국토

如何付與老單于 여하부여노단우

등잔불 돋우고 다 읽고 나선 문득 긴 한숨 짓노니

중국 천지엔 대장부랄 사람 하나 없구나

삼백 년 내려온 중국 전토를

어쩌자고 늙은 선우에게 내어 주었나

하였다. 시가 침착하고 노련하니, 그 사람 됨됨이를 짐작할 만하다.

최보의 벼슬은 사간(司諫)인데 연산군 갑자년(1504)에 처형되었다.

https://namu.wiki/w/%ED%97%88%EC%97%BD

 

허엽 - 나무위키

나의 친가(親家)는 건천동(乾川洞)에 있었다. 청녕공주(靑寧公主) 저택의 뒤로 본방교(本房橋)까지 겨우 서른네 집인데, 이곳에서 국조 이래로 명인(名人)이 많이 나왔다.김종서ㆍ정인지ㆍ이계

namu.wiki

 

73. 선대부(先大夫:허엽)께서 언젠가 말씀하시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고사(古史)만 전공하여 우리나라 사적은 알지 못하니 근본을 힘쓰는 도리가 결코 아니다.”

하셨다.

그러므로 두 형과 나는 모두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읽었다.

그러나 젊었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읽을 만한 책이 하도 많은데, 하필 이것을 읽을 것이 무엇인가 하였었다.

그러다가 황 조사(黃詔使)가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관반(館伴)인 정임당(鄭林塘) 상공(相公)에게 고려와 신우(辛禑) 부자의 내력을 묻자 상공이 입만 벌리고 대답을 못하니, 우리 중형이 들어가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선대부의 높은 견식이 여느 사람보다 매우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아, 재주가 임당(林塘) 같은 분으로서도 중국 사신과 문답할 때에 곤욕을 당했으니, 사신의 접반관이 되어 본국의 일을 몰라서 되겠는가.

 

임당(林塘)의 이름은 유길(惟吉), 자는 길원(吉元)이며 동래인(東萊人)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유길의 '사제극성(賜祭棘城)'이란 시에,

聖朝枯骨亦霑恩

성조고골역점은

香火年年降寒垣

향화년년강한원

祭罷上壇風雨定

제파상단풍우정

白雲如海蒲前村

백운여해포전촌

 

성조에선 죽은 이에게도 은혜 베푸사

해마다 쓸쓸한 담장에 제사를 내려주시네

제사 마친 단 위엔 비바람도 잦아지고

흰 구름만 바다인 양 앞 마을에 자옥해라

 

라 하였고,

영유이화정(永柔梨花亭)이란 시에는,

 

落花風雨古人詩

낙화풍우고인시

花到今春巧耐遲

화도금춘교내지

直至開時應有月

직지개시응유월

個中春色子規知

개중춘색자규지

 

꽃샘 비바람은 옛 시에도 있거니와

올봄 꽃은 공교롭게도 늦장부리네

꽃 필 때 되면 응당 달이 있겠고

그중의 봄빛 자규야 알고말고

 

라 하였으며, 또 그의 '몽뢰정춘첩(夢賚亭春帖)'이란 시는 다음과 같다.

 

白髮先朝老判書

백발선조노판서

閑忙隨分且安居

한망수분차안거

漁翁報道春江暖

어옹보도춘강난

未到花時進鱖魚

미도화시진궐어

 

선대의 백발 판서

한가컨 분망컨 깜냥대로 편안했네

고기잡이 영감 봄 강이 따사롭다면서

꽃도 피기 전이건만 쏘가릴 진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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