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중국 근래 명사로 글 잘하는 이 중에 요천(瑤泉) 신시행(申時行)ㆍ영양(穎陽) 허국(許國)ㆍ동록(洞麓) 여유정(余有丁)ㆍ상서(尙書) 육광조(陸光祖)ㆍ사업(司業) 원응기(苑應期)ㆍ강주(康洲) 나만화(羅萬化)ㆍ시랑(侍郞) 심일관(沈一貫)ㆍ규양(葵陽) 황홍헌(黃洪憲)ㆍ백담(柏潭) 손계고(孫繼皐)ㆍ태사(太史) 심무학(沈懋學)ㆍ곤명(崑溟) 위윤중(魏允中)ㆍ태사(太史) 이정기(李廷機)가 더욱 두드러지고, 글을 잘하여 후세에 입언(立言)할 만한 정도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옥당 벼슬을 하는 사람도 눈으로 어로(魚魯)를 구별 못하며, 제고(制誥) 벼슬을 띠고 있는 사람도 사륙문(四六文)에 익숙지 못하여 심지어는 잘하는 이에게 차작을 해서 자기 직책을 메워가기까지 하니, 남의 의론이나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고평(考評)을 하는 이도 또한 그 이름만 따라 등수의 고하(高下)를 매기니, 조선조에는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의 무리를 바라볼 만한 사람도 없거든, 하물며 중국의 칠자(七子)와 재주를 겨룰 수 있겠는가.

대개 명 나라 사람은 학문을 애써 쌓아서 문과에 오른 사람도 등잔불을 켜놓고 새벽까지 글을 읽어 늙어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시문(詩文)이 모두가 혼후(渾厚)하고 기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문구(文句)나 잘 꾸며서 과거를 보는데 과거에 붙게 되면 곧바로 책 버리기를 원수같이 한다. 우리나라가 예전에는 문헌으로 일컬어졌는데, 이제 와서는 문헌이 어찌 이다지도 미약하단 말인가. 이 어찌 윗사람이 장려하고 이끌어 성취시키지 못해서가 아니겠는가. 아니면 혹 세상이 말세가 되고 풍속이 저속해져서 인재가 옛날에 미치지 못해서인가?

그러나 사람마다 다 요순(堯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인데, 하찮은 하나의 기예를 어찌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포기하여 진력하지 않을 것인가. 애써 공부를 계속하면 고인에게 미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칠자(七子)라든지, 신시행(申時行)ㆍ허국(許國) 따위일까 보냐. 우선 이것을 써서 스스로를 경계한다.

70.명 나라 사람으로서 시로 이름난 이로는 대복(大復) 하경명(何景明)ㆍ공동(崆峒) 이몽양(李夢陽)이 있어 사람들이 이백(李白)ㆍ두보(杜甫)에 비긴다.

한 시대에 잘 한다고 칭도된 자는 화천(華泉) 변공(邊貢)과 박사(博士) 서정경(徐禎卿)ㆍ태백(太白) 손일원(孫一元)ㆍ검토(檢討) 왕구사(王九思)인데,

하경명ㆍ이몽양의 장편칠률(長篇七律)은 근체(近體)ㆍ고체(古體)를 다 잘 쓴다.

이우린(李于鱗)ㆍ왕원미(王元美) 역시 이대가(二大家)라 일컬어지며,

오국륜(吳國倫)ㆍ서중행(徐中行)ㆍ장가윤(張佳胤)ㆍ왕세무(王世懋)ㆍ이세방(李世芳)ㆍ사진(謝榛)ㆍ여민표(黎民表)ㆍ장구일(張九一) 등이 모두 나란히 달려 앞을 다투었다.

우리나라의 김계온(金季昷)ㆍ김열경(金悅卿)ㆍ박중열(朴仲說)ㆍ이택지(李擇之)ㆍ김원충(金元冲)ㆍ정운경(鄭雲卿)ㆍ노과회(盧寡悔) 등의 작품이 비록 하경명ㆍ이몽양ㆍ왕세정ㆍ이우린에게는 못 미친다 하더라도 어찌 오국륜ㆍ서중행 이하 사람에게야 뒤지겠는가.

그러나 칠자(七子)로 더불어 중국에서 서로 겨루지 못함이 한스럽다.

중열(仲說)의 이름은 은(誾),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며 고령인(高靈人)이다. 벼슬은 수찬(修撰)이다. 18세에 문과 급제하고 연산군 갑자년(1504)에 사형되었다.

그때 나이는 26세였다.

71.요즘 중국인의 문학은 서경(西京)의 시조(詩祖)인 두보(杜甫)를 숭상하기 때문에 두보의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이른바 고니를 새기다가 집오리를 만드는 셈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문(文)은 삼소(三蘇)를,

시는 황정견(黃庭堅)ㆍ진사도(陳師道)를 배우므로 저속하여 취할게 없다.

시 잘한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임제(林悌)ㆍ허봉(許篈)은 모두 일찍 죽고,

다만 이익지(李益之)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이익지는 비방이 산더미 같으니, 세상이 너무도 재주를 아끼지 않는다.

69.명 나라 사람 중 글로 이름을 날린 십대가(十大家)는

공동(崆峒) 이헌길(李獻吉)ㆍ양명(陽明) 왕백안(王伯安)ㆍ형천(荊川) 당응덕(唐應德)ㆍ

좨주(祭酒) 왕윤령(王允寧)ㆍ안찰(按察) 왕신중(王愼中)ㆍ심양(潯陽) 동분(董玢)ㆍ

녹문(鹿門) 모곤(茅坤)ㆍ창명(滄溟) 이반룡(李攀龍)ㆍ봉주(鳳洲) 왕세정(王世貞)ㆍ

남명(南溟) 왕도곤(汪道昆)인데,

이공동(李崆峒)은 오로지 서한(西漢)만 본받고,

왕세정ㆍ이반룡은 난삽한 글귀가 선진(先秦)을 앞지르고자 하고,

왕남명(汪南溟)은 화려하고 건실하며 동분ㆍ모곤은 평이하고 원숙하며,

왕신중은 풍부하다.

그러나 명 나라 사람은 모두 역겹게 여기며 진부하고 속되다고 한다.

나의 의견도 거의 같다.

백안(伯安)은 문(文)을 전공하지 않고 학문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박잡함을 면치 못하고,

형천(荊川)은 전아 순실(典雅純實)하여 모두 대가가 될 만하다.

왕원미(王元美)의 무리가 명인(明人)의 문장을 서한(西漢)에 비기고,

이헌길(李獻吉)을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을 말함)에게 비기고,

우린(于鱗)은 양자운(揚子雲)에게 비기고,

자기는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 비겼으니, 그 자기 자랑이 너무도 심하다.

우리나라 김계온(金季昷)ㆍ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ㆍ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ㆍ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의 글은

명 나라 십대가 속에 넣어 동심양(董潯陽)이나 모녹문(茅鹿門)에 비긴다면 그다지 못할 것 없으나 중국에서 팔을 휘두르고 뽐낼 수 없음이 안타깝다.

계온(季昷)의 이름은 종직(宗直),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며, 선산인(善山人)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점필재가 제천정운(濟川亭韻)에 차운한 시에,

吹花劈柳半江風 취화벽유반강풍

檣影擔搖背暮鴻 장영담요배모홍

一片鄕心空倚柱 일편향심공의주

白雲飛度酒船中 백운비도주선중

꽃을 흩날리고 버들을 꺾는 반강 바람에

돛그림잔 석양 기러기를 진 채 건드렁거린다

한 조각 고향 생각에 부질없이 기둥에 기대니

흰 구름만 날아서 술 실은 배를 스치는구나

라 하였고, 보천탄즉사(寶川灘卽事)란 시에는,

桃花浪高幾尺許 도화랑고기척허

銀石沒頂不知處 은석몰정불지처

兩兩鸕鶿失舊磯 양양로자실구기

銜魚却入菰蒲去 함어각입고포거

복사꽃 필 때 이는 파도 그 몇 자런가

은빛 바윈 이마까지 묻혀 보이도 않는구나

쌍쌍이 나는 가마우지 옛 놀던 자갈밭 잃고는

물고기 입에 문 채 줄과 부들 속으로 날아드네

라 하였으니, 참 좋다.


68. 명 나라 사람 산동 참의(山東參議) 여민표(黎民表)의 자는 유경(惟敬)인데 시를 잘하였다.

장 시랑의 훌륭한 맏아들 초보(肖甫)에게 부치다[寄張侍郞佳胤肖甫]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滿目川原百戰餘 만목천원백전여

旅情衰草共蕭疏 여정쇠초공소소

寒山古驛逢秋騎 한산고역봉추기

遠樹殘燈見夜漁 원수잔등견야어

地近瀟湘多暮雨 지근소상다모우

雁來湓浦少鄕書 안내분포소향서

故人政在雲霄外 고인정재운소외

怊悵煙波未定居 초창연파미정거

온 냇벌엔 백 번 이상 싸운 자취

나그네 시름과 이운 풀은 한결같이 스산하다

쓸쓸한 산 오래된 역에선 말탄 가을 손을 만나고

먼 숲과 가물대는 불빛은 밤낚시로다

땅이 소상강에 가깝고 보니 저녁 비는 늘 내리고

분포에 기러기는 온다만 고향 소식 드물구나

벗은 정녕 아득한 하늘가에 있거니

안개 낀 물가에 서글퍼 정처 없어라

이 시가 우리나라에 퍼져서, 《송계만록(松溪漫錄)》에는 나 장원 만화(羅壯元萬化)의 시로 실려 있는데, 글자가 잘못된 것이 많으니, 송계(松溪)는 전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을 뿐이기에 착오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송계만록》을 참고하건대, 만화(萬化)는 만호(萬湖)라고도 하는데 어떤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의당 다시 상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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