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말기에월(越)나라에 도화(桃花)처럼 예쁜 얼굴을 타고난 서시는 지나가는 물고기도 그녀의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아 침어(浸魚)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당시서시는 심장병으로 인한 통증에 가슴을 움켜 쥐고 얼굴을 찌푸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를 동네 여자들이 많이 흉내 내었다고 한다. 여기서‘서시가 가슴을 쓸어내리다’는 ‘서시봉심西施捧心’과 ‘서시가 눈살을 찌푸리다’는 ‘서시빈목西施嚬目’이란 사자성어가 따라 나왔다.
또한, 서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이기도 하다. 당시 서시의 조국인 월나라는 오(吳)나라에 패망한 상태였다.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왕소군(王昭君)
어느가을의화창한날, 변경을 나서 흉노 땅으로 떠나는 왕소군은 비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해 비파를 연주했는데, 이 비장한 이별의 곡에 기러기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떨어졌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를 두고 ‘낙안(落雁)’이라 했다.
왕소군은중국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절세의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는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아 추하게 그려진 왕소군은 끝내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흉노의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 보내졌다. 흉노와의 화친(和親)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많은 소재를 제공했다.
초선(貂蟬)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어느날 초선은 뒤 뜰화원에서 달을 쳐다보니 달이 그 미모에 움츠려져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은 ‘폐월(閉月)’이란 표현으로 그녀의 미모를 형언했다.
초선은『삼국지연의』에나온인물로, 왕윤 부중(府中)의 가기(家妓·궁중 또는 관청이 아닌 개인 사가의 기녀)였는데, 그녀의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고 한다. 포악한 동탁 때문에 한나라 황실이 위태로워지자 왕윤(王允)은 초선에게 연환계(連環計)를 사용하여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하도록 했다. 여포가 동탁을 죽인 뒤 초선을 첩으로 삼았지만, 조조(曹操)가 여포를 사로잡아 죽이고 초선을 허도(許都)로 보냈다고 한다. 야사(野史)에는 조조가 관우(關羽)에게 준 후 관우는 홍안화수(紅顔禍水, 예쁜 여자는 화를 초래한다)란 이유로 초선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양귀비(楊玉環)
양귀비의 본래이름은 양옥환으로 17세에 당 현종의 아들인 수왕 이모와 혼인을 하였다. 양귀비가 막궁에 들어갔을 때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화원에서 꽃을 보며 눈물을 흘렸는데, 만발하는 꽃들에게 신세한 탄을 하면서 손으로 꽃을 만지니 갑자기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고하여‘수화(羞花)’의 미모를 갖췄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정사(正史)도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艷)’ 즉,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현종의 눈에 들게 되어 귀비로 책봉되고 현대에 익숙한 이름은 양귀비가 되었다. 비록 신분은 비(妃)였지만 당시 황후의 자리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권세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도주하던 중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양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인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현종과 양귀비로 인해 특권을 얻은 세 자매와 양씨 일족은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매관매직을 하는 등 당나라를 좀먹는 세력이 되어버렸다. 특히 그중에서 끝판왕은 양국충으로 양귀비의 뒷배만 믿고 각종의 국정 농단을 저질렀으며, 양귀비와 현종의 눈에 든 절도사 안녹산과 권력을 놓고 서로 반목하여 당나라를 파국으로 몰았다.
결국 천보 14재(755, 37세)에 양국충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세워 동북 변방의 번장 안녹산(安祿山)이 대란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천보 15재(756, 38세)에는 안녹산의 군대가 수도 장안(長安) 가까이까지 치고 들어왔고, 귀비와 황제 일행은 사천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장안의 서쪽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진현례(陳玄禮)와 호위 병사들의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간신 양국충과 그 자매를 포함한 양씨 일족을 학살한 후, 모든 사단의 원흉인 양귀비를 처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황제에게 항의를 했다(마외병변).
물론 현종은 양귀비는 죄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변호했지만 워낙 병사들의 기세가 드세어 도저히 달랠 수가 없었기에 결국 양귀비는 고력사의 도움을 받아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의 모친이 장경성이 상서로움을 알리는 꿈을 꾸었기 때문에 이름과 자에 모두 그 상을 취했다.”고 했다.
청련거사 이백은 《답족질승중부증옥천선인장다(答族侄僧中孚贈玉泉仙人掌茶)‧ 서(序)
ㅡ집안 조카 중부 스님이 옥천사 선인장차를 주어 답하다》에서 자신의 신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청련거사는 귀양 온 신선인데 술집에 이름 깔은 지 어언 30년호주거사여 어찌 꼭 물어봐야 하오금속여래가 후신이라네
青蓮居士謫仙人
(청련거사적선인)
酒肆藏名三十春
(주사장명삼십춘)
湖州居士何須問
(호주거사하수문)
金粟如來是後身
(금속여래시후신)
청련(靑蓮)은 본래 서역에서 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우발라화(優缽羅花 또는 우담바라화優曇婆羅花라 한다)라고 한다. 청색과 흰색이 분명하고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불경(佛經)에서는 우발라화가 필 때 ‘만왕의 왕(萬王之王)’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장차 세간에 내려와 중생을 널리 제도한다고 한다. 이백은 자신을 청련이라 자칭했고 또 ‘금속여래가 후신’이라 했으니 이는 장차 우발라화가 피면 전륜성왕이 여의진리(如意真理)를 지니고 세간에 내려온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외에도 극히 높은 대각자(大覺者)는 층층 우주 중에서 아래로 내려와 인간 세상에 진입한 후 늘 전생(轉生)하며 인류문명과 역사의 새로운 장을 개창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곤 한다.
다음과 같은 이백의 시편(詩篇) 속에서 우리는 이백의 전생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수왕보궐익혜장묘송승체송별(酬王補闕翼惠莊廟宋丞泚贈別)
–보궐 왕익과 혜장태자묘승 왕체가 헤어지면서 준 시에 답하다》란 시에서
學道三十年 自言羲皇人
“도를 배운 지 30년에 스스로 희황(羲皇)때 사람이라 말하네.
軒蓋宛若夢 雲松長相親
수레 타던 지난날은 꿈만 같고 구름과 소나무와 길이 친하네.
라고 했다.
또 《희정율양(戲鄭溧陽)–정율양에게 장난삼아》에서는
清風北窗小 自謂羲皇人
“시원한 바람 부는 북창아래 스스로 희황인이라 하네
何時到溧里 一見平生親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의 친구를 만나게 될까?”라고 했다.
이백이 시에서 언급한 ‘희황(羲皇)’은 바로 중국 역사상 ‘삼황(三皇)’의 최초로 존경받는 복희(伏羲)를 말한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글자를 연습했으며 다섯 살 때 이미 초인적이며 천부적인 자질을 드러냈다.
그는 《상안주배장사서(上安州裴長史書)–안주 배 장사님께 드리는 글》에서
“다섯 살 때 육갑을 다 외웠고 열 살 때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했으며(五歲誦六甲,十歲觀百家)”,
“늘 경서를 두루 읽고 창작에 나태하지 않았다(常橫經籍書,制作不倦)”라고 했다.
여기서 육갑(六甲)이란 간지(干支)로 연월일을 계산하는 역학(曆學)을 말한다.
이백이 다섯 살 때 부친이 사마상여(司馬相如 한 무제 때의 유명한 문인)의 《자허부(子虛賦)》를 읽게 했다.
그가 15세 때 지은 《명당부(明堂賦)》는 사마상여와 우열을 다툴 만했다.
그래서 《증장상호(贈張相鎬)–재상 장호께 드림》에서 이백은
十五觀奇書,作賦淩相如
“15세 때 기이한 책들을 읽었고, 부(賦)를 지으면 사마상여를 능가했다.”고 했다.
이백의 부친은 일찍이 그를 미주(眉州) 상이산(象耳山)으로 보내 책을 읽게 했다.
이백은 처음에 책을 읽어도 전념하지 않았고 또 싫증을 내어 도망칠 때도 있었다.
송나라 때 축목(祝穆)이 편찬한 명승고적과 각 지방의 연혁을 소개한 《방여승람(方輿勝覽)‧미주(眉州)‧마침계(磨針溪)》에 따르면 이태백이 상이산에서 공부할 때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이백이 아직 공부를 마치지 않았는데 중간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작은 계곡을 지나는데 한 노파가 계곡 옆 바위 위에서 철공이를 가는 것을 보았다.
이백이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묻자 노파는 “갈아서 자수바늘을 만든다(磨成繡花針)”고 대답했다.
이백이 “철공이를 갈아서 자수바늘을 만드는 게 정말 가능한가요?”라고 묻자
노파는 “오직 깊이 공력을 들인다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백은 이 말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다시 산위로 올라가 열심히 공부했고 학업에 큰 진전을 이뤘다.
노파가 자신의 성을 무(武)씨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도 시냇가 옆에 무씨암(武氏岩)이 남아 있다.
후세에 이 이야기에서 ‘철봉마성침(鐵棒磨成針 철봉을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 6년(718년) 이백은 상이산을 떠나 대광산(大匡山)에 은거해 책을 읽었고
또 조유(趙蕤)를 따르며 종횡술(縱橫術)을 배웠다.
이 몇년 동안 그는 인근의 여러 군(郡)을 다니며 검각(劍閣), 재주(梓州) 등을 유람하기도 했다.
20세 때 조정에서 예부상서를 지낸 소정(蘇頲)이 익주장사(益州長史)로 부임하자 성도(成都)로 찾아가 그를 알현했다.
당시 당나라 문단에서는 허국공(許國公) 소정과 병부상서를 지낸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을 최고로 쳤는데 두 사람을 합해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이라 했다.
때문에 이백이 자신의 시와 문장을 들고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 것이다.
소정이 그의 글을 읽은 후 “이 젊은이는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 한번 붓을 들면 그치지 않고 완성하니 비록 문장의 풍력(風力 풍골이라고도 하는데 힘찬 기운)은 아직 완성되진 않았지만 웅대한 기백이 보인다. 만약 널리 배우기만 한다면 사마상여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상안주배장사서(上安州裴長史書)》)라고 평가했다.
《천보유사(天寶遺事)》에서는 이태백이 어릴 때 꿈에 붓끝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본 후 다음날부터 재능이 만개해 천하에 이름을 얻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이야기가 후세에 흔히 쓰는 ‘묘필생화(妙筆生花)’란 고사성어의 출처다.
개원 13년(725년) 25세의 이백은 촉중(蜀中)을 유람한 후 검을 메고 장거리 유람에 나서기 시작했다.
강릉(江陵)에서 원구생(丹丘生)을 만났는데 그는 천태산 도사로 천하에 이름을 날리던 사마승정(司馬承禎)과 안면이 있었다.
사마승정은 자가 자미(子微), 호는 백운자(白雲子)로 당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다.
그는 일찍이 측천무후, 예종, 현종 3대에 걸쳐 여러 차례 황제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고 현종을 알현한 적도 있었다.
사마승정은 단순히 유명한 도사로 도술에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전서(篆書)를 잘 썼고 시(詩)에도 조예가 있어 신선처럼 유유자적했다.
현종은 그를 몹시 존경했으며 일찍이 대궐로 초빙해 도법(道法)에 관한 가르침을 청한 적도 있다.
또 그를 위해 양태관(陽台觀)이란 도관을 지어주기도 했으며 현종의 누이 옥진공주(玉真公主)는 그를 사부로 모셨다.
이백을 만나본 후 사마승정은 그의 뛰어난 외모와 비범하고 천부적인 재능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하며
“선풍도골(仙風道骨)을 지녀 팔극의 밖에서 함께 정신적으로 사귈만하다(有仙風道骨,可與神遊八極之表)”고 평가했다.
이는 사마승정이 수십 년간 조정과 재야에서 그와 같은 인재를 만나본 적이 없다는 의미였다.
때문에 그는 도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말로 이백을 찬미한 것이다.
또 이백에서 ‘선근(仙根 신선이 될 수 있는 선천적인 요소)’가 있다고 했으니 이는 나중에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을 ‘귀양 온 신선(謫仙人)’이라고 찬미한 것과 비슷하다.
두 사람 다 이백을 비범한 인물로 보았다.
사마승정을 만난 후 이백은 《대붕우희유조부(大鵬遇希有鳥賦)–대붕이 희유조를 만난 부》를 지었다.
이는 이백이 최초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 문장이다. 흔히 《대붕부(大鵬賦)》라 한다.
《대붕이 희유조를 만난 부 및 서문(大鵬遇希有鳥賦及序)》
내가 예전에 강릉에서 천태산 도사 사마승정(司馬承禎)을 만났는데, 나에게 선풍도골이 있어 팔극의 밖에서 함께 정신적으로 사귈만하다 했다.
그래서 나는 《대붕이 희유조를 만나다(大鵬遇希有鳥賦)》를 지어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이 부(賦)가 이미 세상에 전해진 후 세상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젊을 때 작품이라 웅대한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함을 후회하다가 중년에 이를 폐기했다.
《진서(晉書)》를 읽다가 완수(阮脩)가 지은 《대붕찬(大鵬讚)》을 보는데 내 어리석은 마음에도 비루해보였다. 마침내 기억을 되살려 지으니 옛것과 많이 달라졌다. 지금 손으로 적어 만든 문집에 다시 수록하니 어찌 감히 여러 작자들에게 전하려는 것이겠는가? 그저 자제들에게 보이고자 할 따름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其辭曰:南華老仙,發天機於漆園,吐崢嶸之高論,開浩蕩之奇言.
徵至怪於齊諧,談北溟之有魚.
吾不知其幾千里,其名曰鯤.
化成大鵬,質凝胚渾. 脫鬐鬣於海島,張羽毛於天門.
刷渤澥之春流,晞扶桑之朝暾.
燀赫乎宇宙,憑陵乎昆侖. 一鼓一舞,煙朦沙昏.
五嶽爲之震蕩,百川爲之崩奔.
남화의 노신선(장자를 말함)이 칠원(漆园)에서 하늘의 영감을 발휘해, 산처럼 드높은 담론을 토해내고 호탕하고 기이한 말을 펼쳤다.
《제해(齊諧)》로부터 괴이한 일을 인용하여,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는데 이름을 곤(鯤)이라 했다.
대붕(大鵬)으로 변할 때 바탕이 형성되었으나 배아는 아직 혼돈 상태더니, 바닷가 섬에서 등지느러미를 벗고 천문(天門)에서 날개를 펼쳤다.
발해의 봄물에서 깃털을 씻고, 부상(扶桑) 나무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에 몸을 말렸다.
우주에서 빛을 내며 곤륜산을 넘어가는데, 한 번 치고 한 번 춤추면 안개로 흐릿하고 모래로 어두워진다.
이에 두터운 대지를 차고 올라, 태청(太淸)을 짊어지고, 층층의 하늘을 가로 질러, 겹겹의 바다와 부딪쳤다. 날개로 삼천리의 바다를 쳐서 일어나고, 구만 리 하늘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등은 솟아오름은 저 높은 태산과 같고, 날개를 들면 긴 구름이 종횡으로 펼쳐진 듯했다. 왼쪽으로 선회하고 오른쪽으로 꺾어 날아가니, 홀연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광대무변[汗漫]한 허공을 휘돌아 오르니 드높은 창합(閶闔 하늘의 문)에 이르렀다. 태고의 혼돈의 기운을 휘젓고 우레와 천둥을 부채질하니, 별들이 돌아가고 하늘이 뒤뚱거리고, 산이 흔들리고 바다가 기울었다. 떨쳐 일어나면 마주할 상대가 없고, 웅대한 기력을 뻗치면 맞서 다툴 상대가 없었다. 본디 그 기세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고, 또한 그 형태를 어렴풋이 형용할 수 있을 뿐이다.
발에는 무지개가 감기고, 눈은 해와 달처럼 빛나는데, 훨훨 유연히 비행하다가 경쾌하고 빠르게 날아갔다. 입김을 내뿜으니 천지 사방에 구름과 안개가 일어나고, 깃털을 터니 천 리 땅에 눈발이 날렸다. 아득한 저 북방의 황막한 지역을 날고, 장차 남방의 끝까지 가려고 하였다. 빼어난 날개를 휘저어 양편을 치고, 폭풍을 일으키며 멀리 내달았다. 촉룡(燭龍)이 불을 물어 만물을 비추고, 번개가 하늘을 갈라 채찍을 휘두르며 길을 열었다. 삼산(三山 3곳의 신산)을 한 덩이 흙으로 여기고 오호(五湖)를 한 잔의 물로 여겼다. 그 움직임은 또 신(神)과 응하고, 그 운행은 또 도(道)를 구비했다. 이를 본 임공자(任公子 역주: 소를 미끼로 동해에서 거대한 고기를 낚은 인물)는 낚시를 그만 두고, 유궁국의 후예(后羿)는 활을 당기지 못하였다. 낚싯대를 내던지고 화살을 떨어뜨리지 않은 자가 없으니 그저 대붕을 올려다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그 웅대하고 장관의 모습이 드넓은 은하수에 있는데, 위로는 푸른 하늘을 스쳐 지나고 아래로는 넓은 대지를 뒤덮었다. 반고(盤古)가 하늘을 열다가 바라보고, 희화(羲和)가 해에 기대어 감탄하였다. 팔방의 끝과 끝을 사이를 훨훨 날아가니 사해(四海)의 절반이 가리어졌다. 가슴으로 대낮을 가리자 마치 태초의 혼돈이 아직 갈라지지 않은 듯했다. 문득 치솟아 뒤집은 후 몸을 비틀면 노을도 사라지고 안개도 걷혔다.
그런 다음에 여섯 달에 숨을 한 번 마시고 내뱉으며 바닷가에 이르렀다. 갑자기 해를 가리고 가로질러 날더니, 높은 하늘을 등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광대무변한 들에서 쉬다가 광활한 못 속으로 들어갔다. 맹렬한 기세로 쏘는 곳과 남은 바람이 부는 곳에는 넓은 바다가 거세게 솟구치고, 바위산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천오(天吳 바다의 신)가 이 때문에 벌벌 떨고 해약(海若 바다의 신)이 이 때문에 꿈틀거렸다. 거대한 자라도 산을 머리에 인 채 거꾸로 달아나고, 큰 고래도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해저로 숨어들었다. 자라는 껍질 속으로 움츠리고 고래는 지느러미가 부러졌으니, 누구 하나 감히 직시하지 못했다. 나 또한 신령스럽고 괴이함이 이와 같은 줄 생각지도 못했으니 이는 아마도 조물주가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어찌 저 봉래산의 황곡(黃鵠)이 금빛 옷과 국화 치마를 자랑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으랴? 채색 비단 같은 체질과 수놓인 비단 같은 깃털을 뽐내는 창오산의 검은 봉황(玄鳳)마저 부끄럽게 하더라. 저들은 신선에게 부림을 당하고 오랫동안 세속에 길들여졌으니, 정위(精衛 신화속의 새)는 바다를 메우기 위해 나뭇가지를 물어 옮기느라 힘들었고, 원거(鶢鶋 봉황과 비슷한 새)는 종묘에서 술을 받았기에 슬퍼했으며, 천계(天鷄 천계의 닭)는 복숭아나무 위에서 새벽을 알리고,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속에서 빛을 발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유롭게 마음껏 다니지도 못하니, 어찌하여 구속되어 정해진 규칙만 지키고 있는가? 정위와 원거, 천계와 삼족오 같은 무리들은 소요하는 대붕만 못하니, 대붕과 나란히 짝할 자가 없었다. 대붕은 자신을 위대하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용맹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매번 때에 순응해 모습을 나타내고 감추었다. 현근(玄根 가장 근원적인 도)이 생길 때부터 존재해 왔으며, 원기(元氣 우주 근원의 기)를 마시며 배를 채웠다. 해가 떠오르는 양곡(暘谷)에서 놀며 배회하고, 남해에 있는 염주(炎洲)에 기대 오르락내리락한다.
얼마 후 희유조가 이를 보고는 말하였다. “위대하구나, 대붕이여! 이것이 바로 즐거움이로구나! 나는 오른쪽 날개로 서쪽 끝을 덮고 왼쪽 날개로 동쪽의 황막한 변방을 덮는다. 대지의 줄기를 가로질러 함께 밟고 하늘의 축을 두루 돌아다니며, 황홀(恍惚)을 둥지로 삼고 허무(虛無)를 마당으로 삼는다네. 내 너를 불러 노닐 테니 너는 나와 함께 날아보자.” 이에 대붕이 허락하니 서로 기쁘게 따랐다. 이들 두 마리 새가 광활한 천공을 뛰어오르니 울타리에 앉아있던 메추라기 무리들이 공연히 이를 보고 비웃었다.
그러니 한 잔의 물을 마루의 움푹 패인 자리 위에 엎지르면 기껏 티끌 정도가 그 위에 떠서 배가 되지만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
(치배언즉교 수천이주대야)
거기에 잔을 놓으면 뜨지 못하고 바닥에 닿고 만다.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풍지적야불후 즉기부대익야무력)
바람이 두터이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를 짊어져 띄울 만한 힘이 없다.
故九萬里則風斯在下矣
(고구만리즉풍사재하의)
그러므로9만 리의 높이까지 올라가야만〈붕의 큰 날개를 지탱할 만한〉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쌓이게 된다.
以後乃今培風 背負靑天
(이후내금배풍 배부청천)
그런 뒤에 이제서야 붕은 바람을 타고 푸른 하늘을 등에 진 채
而莫之夭閼者而後乃今將圖南
(이막지요알자 이후내금장도남)
갈 길을 막는 장애(障碍)가 하나도 없게 된 뒤에 비로소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도모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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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20>坳堂(요당):마루의 움푹 패인 자리.坳는 깊이 패인 곳[陷也 凹也].林希逸은‘坳堂 堂上坳深處也’라 주해하고 있다.
역주21>九萬里則風斯在下矣(구만리즉풍사재하의):9만 리의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바람이 비로소 아래에 쌓이게 됨.이 부분은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步行의 번거로움을 초월한列子라 하더라도,그것이 바람[風]이라고 하는 그 무엇엔가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한 초연(超然)이라고 볼 수 없다는 아래 문장의 표현과 연결되는 대목이다.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상식을 뛰어 넘은9만 리의 높이에서 태풍과 같은 엄청난 큰 바람에 날개 치며天空을 나는 웅혼장대(雄渾壯大)한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에 대한 찬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역주22>培風(배풍):바람을 탐.林希逸은培를 두터울厚의 뜻으로 보고“培는厚이다. 9만 리의 바람이라야 비로소 두터운 바람이라고 일컬을 만하다.이처럼 두터운 바람이라야 비로소 붕새의 날개를 실을 수 있다[培厚也 九萬里之風 乃可謂之厚風 如此厚風 方能負載鵬翼].”고 풀이했다.
역주23>莫之夭閼(막지요알):障碍가 하나도 없음.성현영은夭는‘꺾어짐[折也]’,閼은‘막힘[塞也]’으로 풀이했다.林希逸도‘장애가 없는 것[莫之夭閼 無障礙也]’으로 풀이했는데 같은 견해이다.
역주24>圖南(도남):남쪽으로 가는 것을 도모함.林希逸은“도남은 북해에서 남쪽으로 옮겨갈 것을 도모함이다.도는 모이다[圖南 自北海而謀南徙也 圖謀也].”라고 풀이했다.
蜩與鷽鳩笑之曰
(조여학구소지왈), 매미나 작은 비둘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我決起而飛槍楡榜
(아결기이비 창유방)
“우리는 후닥닥 있는 힘을 다해 날아올라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위에 머무르되,
時則不至而控於地而已
(시즉부지 이공어지이이)
때로는 혹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지는 경우도 있을 따름이다.
奚以之九萬里而南爲
(해이지구만리이남위)
그러니 무엇 때문에 붕새는 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갈 필요가 있겠는가.”
適莽蒼者三飡而反 腹猶果然
(적망창자삼손이반 복유과연)
가까운 교외(郊外)의 들판에 나가는 사람은 세 끼니의 밥만 먹고 돌아와도 배가 아직 부르고,
適百里者宿舂糧 (적백리자숙용량)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에 식량을 방아 찧어 준비해야 하고,
適千里者三月聚糧
(적천리자삼월취량)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3개월 전부터 식량을 모아 준비해야 한다.
之二蟲又何知
(지이충우하지)
그러니 이 두 벌레가 〈이처럼 큰 일에는 큰 준비가 필요한 이치를〉 또 어찌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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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25>蜩與學鳩(조여학구):매미와 작은 비둘기.蜩(조)는 매미로《說文解字(설문해자)》에서는蟬(선)으로 풀이하고 있다(林希逸).學은鷽(학,小鳩,작은 비둘기)과 같다(《釋文》).蜩與學鳩(조여학구)는스스로의無知와無力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위대한 자를 비웃는 무리를 상징한다.
역주26>決起(결기):있는 힘을 다해 날아오름.林希逸은‘분기하여 나는 것[奮起而飛也]’으로 풀이했다.
역주27>槍(搶)楡枋(창유방):느릅나무나 다목나무에 날아가 머묾.대본의槍은搶과 통하여 이르다,도달하다,머물다의 뜻.林希逸은搶을突(부딪치다,돌진한다)의 뜻으로 풀이했는데 모두 날아가서 머문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역주28>槍(창) :搶이르다,도달하다,머물다
역주29>時則不至(시즉부지)而控於地(이공어지):때로는 혹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바닥에 동댕이쳐짐.王念孫은則을或으로 풀이했는데 이 견해를 따랐다.林希逸은“때로 그것조차도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有時猶不能至].”로 풀이했는데 같은 뜻이다.控은 떨어진다[投]는 뜻(林希逸,安東林).
역주30>奚以之九萬里而南爲(해이지구만리이남위):무엇 때문에9만 리 꼭대기까지 올라가 남쪽으로 가는가.之는 가다는 뜻의 동사. ‘奚以…爲’는‘무엇 때문에…하는가’의 뜻.
역주31>適莽蒼(적망창):가까운郊外의 들판에 나감.莽蒼(망창)은近郊(근교)의 들판.
역주32>飡(손):밥,飧(손)의俗字.飱(손)도 마찬가지.우리나라 재래의林希逸현토본에서는‘飱’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주33>果然(과연):배부른 모양.成玄英은 배부른 모양[飽貌]으로 풀이했다.安東林은果는 열매를 뜻하는 글자인데 과일의 형태가 둥근 데서 배부름을 뜻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참고할 만하다.
역주34>宿舂糧(숙용량):전날 밤에 식량을 찧음.宿은 전날 밤.舂(용)은 방아를 찧다의 뜻.
역주35>之二蟲又何知(지이충우하지):이 두 벌레가 또 어찌 알 수 있겠는가.之는是의 뜻.이 편의 제3장에도‘之人也 之德也’라는 표현이 나오며,〈則陽〉편 제8장에도‘之二人何足以識之’라는 표현이 보인다.蟲은 벌레이지만 날짐승을羽蟲이라 하고 길짐승을毛蟲이라 하는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물의 뜻으로 쓰인다.따라서 여기서는 작은 동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본 자료의 원문 및 번역은 전통문화연구회의 동양고전종합DB(http://db.juntong.or.kr)에서 인용된 내용입니다. ---------------------------
가는 것은 이와 같으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되 마침내 줄고 늚이 없으니,
변하는 데서 보면 천지(天地)도 한 순간일 수밖에 없으며, 변하지 않는 데서 보면 사물과 내가 다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 하리요?
또, 천지 사이에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나의 소유가 아니면 한 터럭이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에 뜨이면 빛을 이루어서,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갈무리로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평수신간운략平水新刊韻略≫(1229)에서는106운에 의거하여 한시를 지었음. 곧 한국어를 한자로 적는다고 한시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차적으로 106韻의 운목에 맞아야 한다.
*≪평수신간운략平水新刊韻略≫(1229)106운(韻)
≪광운 廣韻≫
은 운목수가 206운인데, 원본≪절운 切韻≫의 운목수는 193운이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자음체계(字音體系)의 변천에 따라 각 운서의 운목수도 병합되어, 금나라 유연(劉淵)의 ≪임자신간예부운략壬子新刊禮部韻略≫(1252)에서는107운으로 줄고, 같은 금나라의 왕문욱(王文郁)이 지은 ≪평수신간운략平水新刊韻略≫(1229)에서는106운이 되었는데, 이것을 흔히 평수운(平水韻)이라고 하며, 한시를 지을 때압운의 기준으로 삼았으므로시운(詩韻)이라고도 한다.
운서(韻書)에서는 압운(押韻)이 허용되는 운(韻)에 속하는 한자(漢字)들을 한 묶음씩 묶어서 배열하는데, 그 운의 이름으로 삼고자 하여 선정된 대표자(代表字)를 운목이라고 한다. 중국사람들은 남북조시대부터 운모를 기준으로 해서 일종의 한어(漢語) 발음사전인 운서를 편찬하여왔다.
운서를 편찬할 때에는, 모든 자음(字音)을 우선 성조에 따라 평(平)·상(上)·거(去)·입(入) 등 사성(四聲)으로 나누고, 같은 성조를 가진 자음들은 다시 운모가 같은 것끼리 분류하여 배열하였는데, 한자들을 한 묶음씩 배열한 가운데에서 한 글자를 골라 그 운의 이름으로 삼고, 이를 운목이라고 하였다.
가령, 중고한어음(中古漢語音 : 隋·唐代의 음)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는 ≪광운 廣韻≫(1008)에서 보면, ‘東, 公, 中, 弓’ 등과 같은 한자로 이루어진 운을 동운(東韻)이라고 하며, ‘冬, 農, 攻, 宗’ 등으로 이루어진 운을 동운(冬韻), ‘鍾, 重, 恭, 龍’ 등으로 이루어진 운을 종운(鍾韻)이라고 한다.
운을 정하는 기준은 사성상배(四聲相配)라고 하여 같은 운모를 가진 한자들을 한 계열로 쳐서, 이들을 성조에 따라 평성·상성·거성으로 하고, 이들의 운미가 -m, -n, -ŋ으로 끝나는 비음(鼻音)일 때에는 이들과 대(對)가 되는 -p, -t, -k 운미를 입성이라고 하여 배열하였다. 따라서, 어떤 계열은 사성이 전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운들도 있었다. 결국, 운목은 그것이 포함되어 있는 운서의 음계(音系)를 나타내는 기준으로서, 그 운목을 가지고 그 운서가 나타내는 음운체계를 추정한다.
≪광운≫은 운목수가 206운인데, 원본 ≪절운 切韻≫의 운목수는 193운이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자음체계(字音體系)의 변천에 따라 각 운서의 운목수도 병합되어, 금나라 유연(劉淵)의 ≪임자신간예부운략 壬子新刊禮部韻略≫(1252)에서는 107운으로 줄고, 같은 금나라의 왕문욱(王文郁)이 지은 ≪평수신간운략 平水新刊韻略≫(1229)에서는 106운이 되었는데, 이것을 흔히 평수운(平水韻)이라고 하며, 한시를 지을 때 압운의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시운(詩韻)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널리 쓰인 ≪예부운략≫은 모두 106운 계통의 것으로서, 이를 바탕으로 하여 우리 나라에서 편찬된 ≪삼운통고 三韻通攷≫·≪화동정음통석운고 華東正音通釋韻考≫·≪삼운성휘 三韻聲彙≫·≪규장전운 奎章全韻≫ 등 운서도 그 운목수가 106운이다.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는 한자 자전이나 옥편 등의 뒤 끝에 운자표(韻字表)가 실려 있는데, 이것이 106운목이며, 이따금 평성의 운목을 상평(上平)과 하평(下平)으로 나누고 있는 것은 성조의 차이를 보인 것이 아니라 평성자의 수가 많아서 이를 운서에서 둘로 나누어 온 전통을 따른 것이다.
참고문헌
『고대국어의 연구』(박병채, 고려대학교출판부, 1971)
『中國音韻學史』(張世祿, 臺灣商務印書館, 臺北, 1963)
『漢語音韻學』(董同龢, 廣文書局, 臺北, 1968)
「한국운서(韻書)에 관한 기초적인 연구」(강신항, 『성균관대학교논문집』 14, 1969)
「한국의 예부운략(禮部韻略)」(강신항, 『국어국문학』 49·50, 1970)
홍무정운(洪武正韻)
정의
明 太祖의 명을 받아 宋濂, 樂韶鳳 등이 중국의 한자음을 통일하기 위하여 편찬한 중국의 韻書로 1548년 인쇄된 중국의 판본을 1770년(영조 46) 번각하여 간행한 것이다.
서지사항
표제와 序題가 御製洪武正韻序이고, 서근제는 御定洪武正韻이다. 장황은 황색지에 菱花紋을 사용한 線裝本이다. 본문의 광곽은 四周雙邊에 上內向二葉花紋黑魚尾이고, 자수는 8행 13자, 쌍행의 주가 있다. 경인년(1770) 洪啓禧가 奉敎하여 지은 序, 洪武 8년(1357) 宋濂의 序, 嘉靖 17년(1548)에 衡王의 小記가 있다. 서문 뒤에 萬曆三年(1525)四月十七日 司禮監奉旨 重刊이란 重刊記가 있고, 책의 말미에 실제 간행일인 上之二十八年壬申(1752) 因筵臣建白 命校書館 翻刻이란 간기가 있다.
체제 및 내용
『洪武正韻』은 명 태조가 천하를 통일하고 난 뒤 중국 한자음의 지역적 방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남방음과 북방음을 절충하여 표준 한자음을 정립하고자 편찬한 운서이다. 『洪武正韻』은 모두 16권 5책으로 되어 있다. 본 도서는 1548년(明 嘉靖 27)에 인쇄된 판본을 바탕으로 1770년(영조 46)에 校書館에서 翻刻하고 洪啓禧의 序文을 붙여 간행한 책이다. 체제는 御製洪武正韻序, 洪武正韻序, 凡例, 目錄, 本文, 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御製洪武正韻序는 홍계희가 쓴 것으로 명 태조 때 펴 낸 『洪武正韻』이 세상에 나온 지 오래 되어 자형의 잘못 됨이 많아 이를 바로 잡고자 새로 인쇄함을 밝히고 있다. 이후의 洪武正韻序, 凡例, 目錄, 本文, 跋文 등은 중국에서 간행된 『洪武正韻』과 동일하다. 『洪武正韻』은 한자를 平, 上, 去, 入의 四聲으로 나누고, 반절로 한자음을 표기한 전통적인 형식의 운서이다. 衡莊王 朱厚燆가 기록한 跋文에 의하면 飜刻의 저본이 된 『洪武正韻』은 1375년에 간행된 초판본이 아니고, 1548년에 改刊된 판본이다. 그러나 내용은 초판과 동일하다.
특성 및 가치
한자음을 인위적으로 교정하고자 했던 『洪武正韻』 편찬 목적은 세종에게 영향을 주어 訓民正音의 창제와 『東國正韻』의 편찬 등 세종의 언어정책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洪武正韻』에 한글로 한자음을 표기한 『洪武正韻譯訓』을 펴내게 할 만큼 우리나라에서 중국 운서의 祖宗으로 평가받았던 운서이다. 『洪武正韻』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한자음의 기준 뿐 아니라 서체의 표준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국어학 해제
이 책의 국어학적 가치는 한국 한자음과 중국 한자음 연구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한자음을 기록한 중국 운서인 이 책은 세종 대의 표준 한자음, 또는 규범적 한자음 제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는데, 이른바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정하는 데 준거가 되었다. 특히, 『홍무정운』과 『홍무정운역훈』을 비교했을 때 홍무정운의 중고모음 /ə/에 대해 으가 선택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역훈이 홍무정운을 대역하면서도 중세국어의 음운체계를 바탕으로 구현되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