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 양주동(1903년 6월 24일, 경기도 개성 - 1977년 2월 4일 ) 선생님께서 향가연구서인 《고가연구》를 출간하자 위당 정인보(1893∼1950) 선생님이 그 위업을 고시 5수로 찬양했다. 그 고시가 <詞腦歌 證釋 題詞> 인데 무애 선생은 이를 번역하고 해설하여 수필집 등에 등재한 글들이다. 그 글이 아래의 논문이다.
이 블로그에서는 注譯 중 전문성을 요하는 注는 생략하고 번역시만 옮겨 보고자 한다. 주석 부분이 필요한 분들은 아래 논문집을 참고하기 바란다.
鄭爲堂(寅普)의 自筆 存稿 漢詩文集 <薝園文錄>이 얼마 전에 간행되었다.(1967.11. 延世大學校出版部 景印,866面)
集中 심상한 銘碣 · 詩文 외에 余와의 文交 ·學緣*을 읊은 詩 2篇,
西京別曲 [文錄四]
題梁柱東鄕歌證釋卷首[文錄六]
가 收錄되어 있는 바, 두 篇이 다 國文學界에 전할 만한 作이요, 특히 後者는 그의 詩文 중 最古의 苦心力作으로, 古歌에 대한 그의 摯意, 그 民族的 意義의 宣揚 및 그 硏究 方法의 奧義까지를 道破한 귀중한 文子이나, 原詩가 爲堂流의 筆法대로 자못 詰屈하여 後學이 좀체로 그 微旨를 터득키 어렵겠기, 그 原詞에 간단한 注解 및 譯詞를 붙인다.
[學緣*]:1938년경 日帝 포학의 極期 중 내가 平壤서 上京하여 落山陋屋에서 詞腦歌 解讀에 畢生의 心血을 기울일 때 그 學的 勞苦를 알아준 이는 실로 爲堂이었다. 내가 硏鑽의 겨를에 가끔 그를 찾아 學的 述懷를 거듭했던 것을 기억한다. 1940년 10월[庚辰 小春] 그 證釋의 草稿가 완성되자 내가 그 사연을 그에게 고하고, 그 弁卷의 一文을 청했더니, 그가 文 대신 題詞 長詩 5篇을 손수 淨書하여 내게 주었다. 그로서도 累日의 苦吟과 몇 번의 推敲를 겪은 平生의 力作이요, 그의 많은 詩文 중에서도 특히 후세에 전할 만한 名作이었다. 그러나, 이 詩는 그 內容 관계로 日治下 간행된 鄙著[1942]의 題詞로 싣지 못했었고, 解放 겨우 鄙文 <鄕歌硏究의 回憶>[<國學硏究論攷> 所收] 중에 引用 著錄했고, 그 뒤 <고가연구> 訂補판[1965] 鄙跋文 중에 비로소 附見되었다.
지금도 나는 各大壑 國文學科에서 新羅歌謠를 강의할 때면, 반드시 이 長詩를 먼저 풀이하고 읊는다. 國文學 내지 史學徒도 10卷의 古典, 100卷의 풀이책을 읽음보다 이 몇 首를 吟味함으로써 더 古典의 貴重性과 그 안에 담긴 民族的 高貴한 ‘情神’, 또 그 硏究 方法의 깊숙한 一端을 悟得함이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字句의 典據를 略解하고 大意를 國譯(時調體)하나, 拙驛으론 原詩의 眞價를 방불치 못함이 恨이다.
詞腦歌 證釋 題詞 五首
- 爲堂 鄭寅普
*‘文錄’엔 ‘題梁柱東鄕歌證釋卷首’,
鄙著 原題 ‘詞腦歌箋注’
‘詞腦歌’는 周知하는 대로 ‘새내놀애’의 借字, 俗稱 ‘鄕歌’이나, 鄙著엔 이 俗稱을 일체 쓰지 않았음(<고가연구> 序說二)
*이 블로그에서는 이하에서 題詞 五首를 5꼭지로 나누어 爲堂 정인보님의 題詞, 무애 양주동님의 국역과 해설순으로 정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