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의 독백 -- 사소단장(娑蘇斷章) 

서정주(1915~2000)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바닥에 얼굴이나 비치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1359

 

박혁거세신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417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 또는 푸른 빛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벌(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매 몸에는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조리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따라서 이름을 혁거세왕 아마도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니 광명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이다.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 418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일컬어 말하기를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에 따라 이렇게 불렀으니 이로부터 임금(王者)의 존칭으로 되었다.
이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여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이미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군(女君)을 찾아서 배필을 정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註 417신라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와 관련된 우물로,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에 비정된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시조혁거세거서간조와 ≪삼국유사≫ 권1 기이1 신라시조혁거세왕조에 나정과 관련된 탄생신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註 418서술성모에 관한 설화는 ≪삼국유사≫ 감통(感通) 선도성모수희불사조(仙桃聖母隨喜佛事條)를 참조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5 감통(感通)7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743

 

사소(娑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삼국시대 신라의 선도산신모, 선도성모라고 불리는 전설 속의 주인공.

이칭 : 선도산신모(仙桃山神母), 선도성모(仙桃聖母)

삼국시대 신라의 선도산신모, 선도성모라고 불리는 전설 속의 주인공.
내용

선도산신모(仙桃山神母)·선도성모(仙桃聖母)라고도 한다. 원래는 중국 황실의 딸로,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렀는데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아버지가 솔개의 발에 편지를 부쳐 보내 이르기를,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고 하였다.

이에 솔개를 놓아 보내자 선도산으로 날아가 멈추므로 그 곳에 집을 짓고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오랫동안 이 산에 웅거하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이상하고 신령스러운 일이 많았다. 그녀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반드시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을 낳았을 것이다.

또 일찍이 제천(諸天)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검을 알게 되었다. 진평왕 때는 안흥사(安興寺)의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으나 힘이 모자랐는데, 어느 날 꿈에 사소가 나타나 도와주었다.

또, 매 사냥을 좋아하는 경명왕이 선도산에 올라가서 매를 잃어 버렸다가 사소의 덕으로 찾게 되자 그녀를 대왕(大王)으로 봉작하였다. 한편,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일찍이 사신으로 중국 송나라에 가서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에 사소의 상이 모셔져 있음을 보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치 가야 수로왕의 비 허왕후(許王后)가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라고 한 것과 비슷한데, 이는 아마도 고대 우리 민족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옮겨 온 것과 관련된 듯하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8661

 

선도산성모설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

 
경주의 서산 선도산성모가 불사(佛事)를 도와준 감응(感應)의 이적에 관한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感通篇)에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절)의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의 자리 밑을 파 보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고 하였다.

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

신령스러운 일 중에는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다른 일로는 선도산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신라 박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등의 지명도 닭은 원래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金富軾)이 일찍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를 접대한 왕보(王黼)는 김부식에게 우신관(佑神館)에 모셔 놓은 여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알겠는가?”고 물었다. 김부식이 대답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來宅西鳶幾十霜

래택서연기십상, 서연산에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고, 

招呼帝子織霓裳

초호제자직예상, 천제녀(天帝女)를 불러 신선의 옷을 짰도다,

長生未必無生異

장생미필무생이, 장생술(長生術)도 영이함이 없지 않았는데,

故謁金仙作玉皇

고알금선작옥황, 부처를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도다

 

"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이 설화를 통해 고대의 산신 신앙(山神信仰)에 불교 사상과 신선 사상이 모순 없이 융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85064 

 

신라 娑蘇(仙桃聖母) 神話의 변화와 國家祭祀

신라 상고기 始祖廟 제사 시기에는 여러 계통의 시조신화들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6촌장 天降 신화에 혁거세, 알영 신화가 연결된 모습의 건국신화가 중심이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 신

www.kci.go.kr

신라 상고기 始祖廟 제사 시기에는 여러 계통의 시조신화들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6촌장 天降 신화에 혁거세, 알영 신화가 연결된 모습의 건국신화가 중심이 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시기 신라는 辰韓의 6개 집단이 결집하여 왕을 共立하여 건국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娑蘇는 여러 시조신화들 중의 한 주인공이면서 織羅와 관련된 신성성을 지닌 존재로, 牟梁 지역에 위치한 西述(仙桃山)을 그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그 신화의 내용은 儒理王代 6部 王女들이 麻布를 짜던 행위, 阿達羅王代 迎日縣 지방의 都祈野에서 細烏女가 짠 細綃를 天祭의 제물로 사용한 점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여성신화로 존재했을 것이다.

신라 상고기 말에는 始祖母 娑蘇가 初生했다는 혁거세 신화의 현장인 奈乙에 神宮이 설치되어, 이를 중심으로 지방 제사권을 통합하였다. 이에 따라 이전에 6촌장 天降 신화에 혁거세, 알영 신화가 연결되었던 모습의 건국신화가 娑蘇(仙桃聖母) 신화를 매개로 하여 始祖母가 始祖를 낳았다는 건국신화로 재편된 것으로 보았다. 이는 신라가 6부 연합 체제에 의한 국가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이행된 면모가 반영된 것이다.

三祀(大·中·小祀)의 위에 있는 최고의 국가제사로 天地神을 모신 신궁 제사에서 사소는 혁거세, 알영과 함께 配位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사소의 거처인 仙桃山의 위상도 中祀 五岳 중 西岳의 위상을 가졌다.

하지만 중고기 말 眞平王代 이후로는 불교의 융성으로 인해 娑蘇(仙桃聖母)가 불교와 융화되어 佛殿을 만드는데 財力을 제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 위상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한다.

신라 중대에는 중국식 宗廟制인 五廟制가 시행되면서 그 太祖로 少昊金天氏에서 연원한 金姓 始祖인 星漢이 설정되어, 박혁거세 중심 건국신화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소(선도성모)의 출자도 중국 帝室의 딸로 변형되었으며, 그 제사에서의 위상도 小祀에 속한 山神으로 약화되었다.

도교와 융화되는 모습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文武王을 낳은 文明皇后 文姬의 오줌 설화가 일어난 배경으로 仙桃山이 등장하고, 경명왕 때에는 선도산 神母가 西岳大王에 책봉되며, 고려 왕실의 신화에도 오줌 설화 요소가 차용되는 등 그 신화적인 신성성은 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 661년 (음) )

문무왕(文武王)註 001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이고, 태종무열왕註 002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註 003로,
 
문명왕후(文明王后): 각간 서현(舒玄)의 딸이며, 김유신(金庾信)의 여동생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태종춘추공조)에는 문명황후(文明皇后)로 표기하였고, 이름은 문희(文姬)라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김유신조)에 따르면 어릴 때 이름[小名]은 아지(阿之)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王曆))에서는 이름이 훈제부인(訓帝夫人)이고, 어릴 때 이름[小名]이 문희(文熙)이며, 시호가 문명왕후라고 하였다. 태종무열왕과의 사이에서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을 비롯하여 인문(仁問), 문왕(文王), 노차(老且), 지경(智鏡), 개원(愷元) 등 다섯 아들을 낳았다. 첫째인 법민이 태자로 책봉될 때, 문명왕후 소생의 나머지 네 명에게도 이찬·각간 등 최고위 관등이 부여되었다고 전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다.
 
소판(蘇判)註 004 김서현(金舒玄)註 005의 막내딸이며,
김유신(金庾信)註 006의 여동생이다.
그 언니註 007가 꿈 속에서 서형산(西兄山)註 008 정상에 올라 앉아서 오줌을 누니 온 나라에 두루 흘러넘쳤다.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이야기하자, 동생이 장난으로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라고 하였다. 인하여 비단 치마를 주어 꿈 값을 치렀다.註 009 며칠 뒤,註 010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함께 축국(蹴鞠)註 011을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우니, 가서 옷고름을 꿰매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함께 집으로 갔다. 〔김유신이〕 술상을 차리고 조용히 보희(寶姬)註 012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꿰매게 하였다.
언니가 일이 있어 나아가지 못하자,註 013 동생이 앞으로 나아가 바느질하여 꿰맸다. 옅은 화장에 가벼운 옷을 입었는데, 빛나는 아름다움이 환하게 비추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바로 혼인을 청하고 혼례를 지냈다.註 014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이다. 왕비는 자의왕후(慈儀王后)註 015로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註 016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영휘(永徽) 초에 당나라에 갔을 때註 017 고종(高宗)註 018이 태부경(太府卿)註 019의 벼슬을 주었다. 태종(太宗) 원년(654)에 파진찬으로써 병부령(兵部令)註 020이 되었고, 얼마 뒤 태자(太子)에 봉해졌다. 현경(顯慶)註 021 5년(660)에 태종이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註 022과 함께 백제를 평정할 때, 법민이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때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https://kydong77.tistory.com/21649

 

주희(朱熹),朱子十悔 & 武夷九曲歌/ 도연명, 桃花源記 & 歸去來辭

주희(朱熹), 朱子十悔 or 朱子十訓 不孝父母死後悔 (불효부모사후회)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후에 뉘우친다. 不親宗族疎後悔 (부친종족소후회) 종친들에게 친밀하밀 않으면 헤어진

kydong77.tistory.com

 

https://historylibrary.net/entry/%EC%A3%BC%ED%9D%AC%E6%9C%B1%E7%86%B9%E3%80%88%EB%AC%B4%EC%9D%B4%EA%B5%AC%EA%B3%A1%EA%B0%80%E6%AD%A6%E5%A4%B7%E4%B9%9D%E6%9B%B2%E6%AD%8C%E3%80%89

 

주희(朱熹)〈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

《주자대전(朱子大全)》 권9에 수록되었는데, 그 제목은 〈순희 갑진년 2월에 정사에서 한가로이 거처하다가 장난삼아 무이도가 10수를 지어 함께 놀러온 동지들에게 주고 한번 웃노라[淳熙甲辰

historylibrary.net

주자대전(朱子大全)》 권9에 수록되었는데, 그 제목은 〈순희 갑진년 2월에 정사에서 한가로이 거처하다가 장난삼아 무이도가 10수를 지어 함께 놀러온 동지들에게 주고 한번 웃노라[淳熙甲辰仲春 精舍閒居 戱作武夷櫂歌十首 呈諸同遊相與一笑]〉이다.

〈무이구곡가〉 로 줄여 일컫는다. 무이구곡은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무이산(武夷山)에 일대인데, 주희는 1183년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지었고, 이듬해 이 〈무이구곡가〉를 지었다.

〈무이구곡가〉 서(序) 1수1곡부터 9곡까지 각각 1수씩 모두 10 수로 되어 있다.

 

[1]

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상유선령, 무이산 산속에 신선이 살고 있고       

山下寒流曲曲淸   

산하한류곡곡청, 산 아래 찬 냇물 굽이굽이 맑아라          

欲識箇中奇絶處

욕식개중기절처, 그 속의 멋진 경치 아시고 싶거들랑       

棹歌閑聽兩三聲

도가한청량삼성, 뱃노래 두어 가락 조용히 들어 보소       

 

[2]

一曲溪邊上釣船

일곡계변상조선, 첫째 구비 냇가에서 낚싯배에 올라타니   

幔亭峰影蘸晴川

만정봉영잠청천, 만정봉 그림자가 맑은 시내에 잠겼어라   

虹橋一斷無消息

홍교일단무소식, 홍교가 한번 끊어진 뒤로 소식이 없더니  

萬壑千巖鎖翠烟

만학천암쇄취연, 만학천봉을 푸른 안개가 잡아 가두었네   

 

[3]

二曲亭亭玉女峯

이곡정정옥녀봉, 둘째 굽이에 우뚝 서 있는 옥녀봉이여    

揷花臨水爲誰容

삽화림수위수용, 꽃 꽂고 물 굽어보며 뉘 보라 화장했나   

道人不復荒臺夢

도인불부황대몽, 도인은 황대몽을 다시는 꾸지 아니하니  

興入前山翠幾重

흥입전산취기중, 흥겨운 것은 앞산의 첩첩한 푸르름이네  

 

해설)

3행 ‘道人不復荒臺夢’을 ‘道人不復陽臺夢(도인불부양대몽)’으로 쓰기도 한다.

황대몽(荒臺夢)은 꿈속에 무산(巫山)에서 신녀(神女)와 만나는 것을 말한다.

 

[4]

三曲君看架壑船

삼곡군간가학선, 셋째 굽이에서 그대 보았던 가학선은   

不知停棹幾何年

부지정도기하년, 노 젖지 않은 지 몇 해인지 모르겠소      

桑田海水今如許

상전해수금여허, 바다가 지금 이처럼 뽕밭이 되었으니     

泡沫風燈敢自憐

포말풍등감자련, 포말과 풍등 같은 인생 가련타 하리라    

 

해설)

1행 ‘架壑船(가학선)’은 架壑船棺(가학선관)으로 무이산 일대에서 행하던 시신을 배에 담아 바위 벼랑에 매달아 장사지내던 풍습을 이른다.

 

[5]

四曲東西兩石巖

사곡동서량석암, 넷째 굽이 동서로 마주선 두 바위산에    

巖花垂露碧㲯毿

암화수노벽모삼, 꽃은 이슬 맺혀 바위는 푸른 모포로다    

金鷄叫罷無人見

금계규파무인견, 새벽닭 울었건만 인적은 보이지 않고     

月滿空山水滿潭

월만공산수만담, 빈 산에 뜬 둥근달이 못에도 그득하오     

 

[6]

五曲山高雲氣深

오곡산고운기심, 다섯째 굽이 산 높고 운무 두터워     

長時烟雨暗平林   

장시연우암평림, 언제나 안개비가 평림에 자욱하네   

林間有客無人識     

림간유객무인식, 숲속의 나그네 알아보는 사람 없고       

欸乃聲中萬古心 

애내성중만고심, 뱃노래 소리에 만고의 마음 담겼네        

 

[7]

六曲蒼屛繞碧灣

륙곡창병요벽만, 여섯째 푸른 물굽이 푸른 병풍 둘러쳤고  

茅茨終日掩柴關

모자종일엄시관, 초가집은 하루 종일 사립문이 닫혔도다   

客來倚棹巖花落

객래의도암화락, 객이 와 배를 띄우니 산꽃만 떨어질 뿐    

猿鳥不驚春意閑

원조불경춘의한, 원숭이 새 놀라지 않고 봄기운 고요하네  

 

[8]

七曲移船上碧灘

칠곡이선상벽탄, 일곱째 굽이에서 배 몰아 벽탄에 가서    

隱屛仙掌更回看

은병선장갱회간, 대은병이며 선장봉을 다시금 돌아보네    

却憐昨夜峯頭雨

각련작야봉두우, 어여뻐라 지난밤 산꼭대기에 뿌린 비여   

添得飛泉幾度寒

첨득비천기도한, 불어난 비천의 물 그 얼마나 차가울까     

 

해설)

대은병(大隱屛)은 오곡에 있는 봉우리로 무이정사(武夷精舍)가 그 아래에 있었고,

선장봉(仙掌峯)은 육곡에 있는 봉우리이다.

 

[9]

八曲風烟勢欲開

팔곡풍연세욕개, 팔곡에 바람 불어 연무가 걷히려하고      

鼓樓巖下水縈迴

고루암하수영회, 고루암 아래로는 물이 소용돌이치네       

莫言此處無佳景

막언차처무가경, 이곳에 멋진 경치 없다고 하지 마오       

自是遊人不上來

자시유인不상래, 단지 유람객이 올라오지 않아서라오       

 

[10]

九曲將窮眼豁然

구곡장궁안활연, 구곡이 끝나려하니 눈앞이 탁 트이고      

桑麻雨露見平川

상마우로견평천, 비이슬 젖은 뽕밭 삼밭 평천에 보인다     

漁郎更覓桃源路

어랑갱멱도원로, 젊은 어부 다시 무릉도원 길을 찾지만     

除是人間別有天

제시인간별유천,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 있을까     

* 위의 '별천지'는 '이상적 세계'의 의미다.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세상을 뜻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21464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티스토리]

 

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70907.010220742500001 

 

[九曲기행 .3] 주자의 무이구곡가...산수 풍광 읊었나, 도학사상 담았나…무이구곡가 해석 분분

조선에 찬란한 구곡문화를 낳게 한 무이도가(武夷櫂歌), 즉 무이구곡가는 어떤 내용일까. 주자가 1184년 무이산 계곡에 구곡을 정하고 지은 무이도가는 무이산의 개황을 읊은 서시로부..

www.yeongnam.com

조선에 찬란한 구곡문화를 낳게 한 무이도가(武夷櫂歌), 즉 무이구곡가는 어떤 내용일까.

주자가 1184년 무이산 계곡에 구곡을 정하고 지은 무이도가는 무이산의 개황을 읊은 서시로부터 시작된다.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고

산 아래 찬 물결은 굽이굽이 맑도다

그 가운데 기막힌 절경을 알고자 하는가

뱃노래(櫂歌)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어보게’.

무이산 천유봉에는 도교의 천유각(天游閣)이 있고, 천유각에는 800여세를 살았다는 신선 팽조와 두 아들 팽무·팽이를 모시고 있다.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

무이산 개황 담은 序詩로 시작
일곡∼구곡 절경 노래 총 10수
성리학 탐구·토론 조선 선비들
朱子 뜻 이해 열쇠로 받아들여


무이구곡을 노래한 무이도가

‘1곡 시냇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만정봉 그림자 맑은 물에 잠겨 있네

무지개 다리 한번 끊어진 뒤 소식이 없고

골짜기와 바위 봉우리마다 푸르스름한 안개 자욱하네’

1곡 시다. 일곡 북쪽에는 대왕봉(527m)이 솟아있고 그 왼쪽에 만정봉(512m)이 있다. 만정봉은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2곡에 우뚝 솟은 옥녀봉아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한 단장인가

도인은 더 이상 양대(陽臺)의 운우(雲雨)를 꿈꾸지 않으리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2곡에는 유명한 옥녀봉(玉女峯)이 있다.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한 봉우리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마치 옥석을 잘라 조각한 모습이다.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고 우연히 대왕(大王)과 만나 좋아하게 되어 돌아오지 않자,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옥녀와 대왕이 돌로 변해 계곡의 양쪽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 젓기 그친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밭이 바다로 바뀐 것이 언제인가

물거품 같고 바람 앞의 등불같이 가련한 인생이여’

3곡에는 높고 험준한 암벽의 소장봉(小藏峯)이 있다. 소장봉에는 아득한 절벽 위 틈 사이에 배모양의 목제 관이 있다. 홍교판(虹橋板)과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가학선관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풍장(風葬)을 하던 고대 남방의 소수민족 관인 가학선관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고 있다.

‘4곡의 동서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산

바위 틈 꽃은 이슬 머금고 푸르게 드리웠네

금계(金鷄) 울어 새벽을 알려도 보이는 이 없고

공산엔 달빛 가득하고 와룡담엔 물결만 넘실대네’

4곡으로 돌아들면 거대한 바위산인 대장봉(407m)과 선조대(仙釣臺)가 마주하고 있다. 대장봉(大藏峯)은 도가(道家)의 대장경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 중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선조대는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 한다. 강태공도 이곳에 와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대장봉에는 금닭이 있었다는 동굴 금계동(金鷄洞)이 있는데, 이곳에도 홍교판과 선관이 있다.

‘5곡은 산 높고 구름이 깊어

언제나 안개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 속의 나그네 알아보는 이 없고

사공의 노랫가락에 만고의 수심 깊어지네’

5곡은 주자가 무이정사를 세워 살던 곳이다. 무이구곡의 중심으로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峯)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을 말한다.

‘6곡의 바위 병풍 푸른 물굽이 휘감아 돌아가고

초가집 사립문은 온종일 닫혀 있네

나그네 와서 배를 띄워 바위 꽃이 떨어져도

원숭이와 새들 놀라지 않고 봄 정취 한가롭네’

9곡은 6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 돈다. 쇄포암은 수백개의 물줄기 자국이 파여 있어 장관을 이루는데, 마치 큰 천을 햇볕에 말리는 듯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신선의 손바닥 같다고 해서 선장암(仙掌巖)이라고도 한다.

‘7곡이라 배를 저어 푸른 여울 거스르며

은병봉과 선장봉을 다시금 돌아본다

어여쁘다 어젯밤 봉우리에 비가 내려

폭포수에 더해지니 얼마나 차가울까’

7곡에는 달공탄(獺控灘)이라는 여울이 있다. 달공탄에서 아래쪽으로 돌아보면 거대한 선장암과 은병봉이 보인다.

‘8곡에 바람 불어 안개 개려 하고

고루암 아래에는 물결이 굽이쳐 돌아가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여기부터 유람객들이 올라오지 않는구나’

8곡을 돌아 구곡을 향하면 높이 솟은 고루암이 막아선다.

‘9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탁 트이고

비와 이슬 내리는 쌍마(桑麻) 밭 평천이 보이네

뱃사공은 다시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

구곡을 지나면 평천(平川)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지나온 구곡까지와는 달리 하천은 평평하게 흐르고, 주위에는 뽕나무, 대마 등이 자라는 들판이 있다.

◆조선 성리학자들의 무이도가 해석

조선의 구곡문화는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이 무이도가(무이구곡가)를 접하면서 시작된다. 주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9곡을 설정하고 무이도가를 읊었을지 모르나,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와 토론의 대상이 된 16세기에 이르면 퇴계 이황과 같은 이들에 의해 무이도가는 주자의 문학과 사유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인들과는 달리 무이도가를 특별한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한 이해인가를 따지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9곡문화의 핵심인 무이도가 해석은 도학적으로 인식하여 입도차제(入道次第: 유교 도학의 경지로 진입하는 차례)를 읊은 재도시(載道詩) 또는 조도시(造道詩)라고 보는 관점(하서 김인후), 서정적으로 인식하여 인물기흥(因物起興: 일정한 사물을 통하여 시인이 흥취를 일으키는 것)을 읊은 서경시(敍景詩) 또는 서정시라고 보는 관점(고봉 기대승)으로 나뉘었다.

한편 퇴계 이황은 재도시로 해석하면서도 서경시로 해석하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퇴계는 주자가 ‘경치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탁흥우의(托興寓意)했다’는 절충적인 결론을 내렸다. 산수의 흥취에 의탁하여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는 말이 ‘탁흥우의’이다.

이처럼 무이도가의 수용에서 드러나는 사림파 지식인들의 의식 차이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면서 구곡문화는 더욱 다양화하고 심화되게 되었다.

‘무이도가는 도에 들어가는 순서를 읊은 시’라는 인식은 조선 후기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더욱 확산시킨 것은 ‘도가시주(櫂歌詩註)’였다. 지금 전하는 책이 아니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헌에 부분적으로 전하는 내용을 보면 무이도가 10수를 입도차제에 맞게 정밀하게 해석하며 비평한 책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 후기 많은 선비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무이도가를 인식하고 감상했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조도시라는 도학적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다.

무이도가 인식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구곡이다. 구곡을 도의 극처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무이도가 인식을 결정해 준다. 구곡은 경치가 빼어나지 않고 일상의 경관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평상의 공간을 극처로 인식하는 것은 유람적 접근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더욱 빼어난 경치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이곳이 바로 극처가 되는 것이다. 유자(儒者), 즉 선비의 도는 일상의 인륜에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https://ko.wikipedia.org/wiki/%EC%A3%BC%ED%9D%AC

 

주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주희(朱熹, 1130년 10월 18일 ~ 1200년 4월 23일)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 주부자(朱夫子), 주문공(朱文公) 송태사휘국문공(宋太師徽國文公)이라는 존칭

ko.wikipedia.org

사상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은 우주 만물의 구조를 (理)와 (氣)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이기론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이와 기가 결합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 이는 만물을 낳는 근본 원리를 말하며, 기는 만물을 생성하는 재료를 말한다. 주자는 모든 사물이 이와 기의 결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理氣不相離], 동시에 원리로서의 이와 재료로서의 기의 역할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이와 기는 서로 뒤섞일 수 없다[理氣不相雜]고 보았다. 주자는 모든 사물은 이(理)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의 측면에서는 똑같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만물이 서로 다른 것은 기(氣)의 맑고 흐림 또는 바르고 치우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1]

심성론(心性論)[편집]

심성론은 이기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내면적 구조와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심성론에 따르면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괄한다[心統性情]. 성이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이치(理)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눌 수 있다. 본연지성은 기질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순선한 것이고,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아 나타나는 것이다. 모든사람의 본연지성은 동일하지만 기질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기질지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또한 정은 성이 외부의 사물에 감응(感應)하여 나타난 감정으로 사단과 칠정을 말한다.[2]

거경궁리론(居敬窮理論)

거경궁리론은 도덕을 실천하여 인격적으로 완성된 군자 성인이 되는 방법에 관한 이론이다. 주자에 따르면 순선한 본연지성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본연지성이 기질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수양이 필요하다. 그는 이를 위해 먼저 인간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참모습을 밝게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格物致知]. 그래서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먼저 알아야 그에 맞는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선지후행(先知後行)을 강조하였다. 주자는 이와 더불어 선한 본성을 보존하고 함양하여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살펴 경계해야 한다[存養省察]고 주장하였다. 주자에 따르면 이러한 노력을 통해 인간은 천리를 보존하고 이기적 욕망을 제거하여[存天理去人欲] 이상적 인간이 될 수 있다.[3]

경세론(經世論)

경세론은 세상을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이론이다. 주자는 자신을 먼저 수양하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수기안인(修己安人)의 원리에 근거하여, 수양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닦는데 그치지 않고 제도·법률·생산 등과 같은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문제까지도 적극적으로 해결할 것을 강조하였다.[4]

이기이원론과 태극도설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의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 원리로서 태극(太極)을 제시한다.

이상의 개념들을 통해 주자는 주염계 태극도설, 정이의 성즉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주자는 동시에 젊은 시절 탐독했던 불교 도교의 사상에서 받았던 영향에서 착안하여 유학의 사상적 이학적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마음의 고향 6
ㅡ초설(初雪)

ㅡ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 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마음의 고향2
ㅡ언덕

ㅡ이시영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가름젱이 사래 긴 우리 밭 그 건너의 논실 이센 밭
가장자리에 키 작은 탱자 울타리가 쳐진.
훗날 나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콩밭 이슬을 무릎으로 적시며
그곳을 지나다녔지
수수알이 꽝꽝 여무는 가을이었을까
깨꽃이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 밝은 여름날이었을까
아랫냇가 굽이치던 물길이 옆구리를 들이받아
벌건 황토가 드러난 그곳
허리 굵은 논실댁과 그의 딸 영자 영숙이 순임이가
밭 사이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커다란 웃음들을 웃고
나 그 아래 냇가에 소고삐를 풀어놓고
어항을 놓고 있었던가 가재를 쫓고 있었던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르르 솨르르 무엇이 물살을 헤짓는 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면 아,  청청히 푸르던 하늘
갑자기 무섬증이 들어 언덕 위로 달려 오르면
들꽃 싸아한 향기 속에 두런두런 논실댁의 목소리와
까르르 까르르 밭 가장자리로 울려 퍼지던
영자 영숙이 순임이의 청랑한 웃음소리
나 그곳에 오래 앉아
푸른 하늘 아래 가을 들이 또랑또랑 익는 냄새며
잔돌에 호미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었다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소를 몰고 돌아오다가
혹은 객지로 나가다가 들어오다가
무엇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나 오래 그곳에 서 있곤 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B%9C%EC%98%81_(%EC%8B%9C%EC%9D%B8) 

 

이시영 (시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시영(李時英, 1949년 8월 6일~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를 수학하였다. 1969년 《중

ko.wikipedia.org

이시영(李時英,1949년 8월 6일~ )은 대하민국의 시인이다.

생애

전남 구례에서 출생하였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와 고려대대학원 국문과를 수학하였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제3회 신인작품 공모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정지용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작품

시집

  • 《하동》(창비, 2017)
  • 《호야네 말》(창비, 2014)
  •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 시선집 《긴 노래, 짧은 시》(창비, 2009)
  •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 2007)
  • 《아르갈의 향기》(큰나, 2005)
  • 《바다 호수》(문학동네, 2004)
  • 《은빛 호각》(창비, 2003)
  • 《조용한 푸른하늘》(솔출판사, 1997), 재출간 (책만드는집, 2015)
  • 《사이》(창비, 1996)
  • 《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 《이슬 맺힌 노래》(들꽃세상, 1991)
  • 《길은 멀다 친구여》(실천문학사, 1988)
  • 《바람 속으로》(창비, 1986)
  • 《만월》(창비, 1976)

산문집

  • 《시 읽기의 즐거움》(창비, 2016)
  •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한양출판, 1995)

 

https://m.cafe.daum.net/jaybe/4oMt/215?listURI=%2Fjaybe%2F4oMt 

 

이시영 시인의 시 세계

“집 앞 공터엔 다행히도 몇 그루 감나무와 대추나무 그리고 잡다한 풀숲이 있다. 깊은 밤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저 여름의 무성한 수풀을 지내온 벌레들이 다시는 울지 못할 것처럼, 마지막

m.cafe.daum.net

“집 앞 공터엔 다행히도 몇 그루 감나무와 대추나무 그리고 잡다한 풀숲이 있다. 깊은 밤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저 여름의 무성한 수풀을 지내온 벌레들이 다시는 울지 못할 것처럼, 마지막인 것처럼 요란스레 울어 젖히는 소리를 듣는다.

생명 가진 것들의 그 찬란한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을은 혹 종언의 계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그리고 거기엔 견고한 인간의 집이 들어서리라.” ― 산문 《기쁨의 마음으로》에서

이시영 시인의 세계를 보는 눈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주는 내용의 산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집을 짓는다. 측량을 하고 경계말뚝을 박고 이윽고 나무를 베어내고 바위를 치워내고 풀을 걷어내고 터를 닦는다. 그런 과정 중에 아무도 나무의 목숨을, 바위 밑의 귀뚜라미, 지렁이 등의 곤충을, 풀숲의 여치 방아깨비를 생각하지 않는다. 신(우주)의 안목으로 본다면 그 땅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결코 소유권 등기가 되어 있는 그 인간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튼, 자연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사람, 부단히 세계를 감시 관리 수정하여 평화를 구축하려는 사람,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이시영 시인이었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 하사(下沙). 이시영 시인이 태어나고 자란 곳, 그곳에는 섬진강이 있었다. 마을 앞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지리산 노고단에서 발원하여 화엄사 골짜기를 지나 흘러 내려온 맑고 고운 시내를 등에 업고, 아픈 세월도 업고, 한 시절 대처로, 대처로 떠나던 우리네 누님들처럼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시인이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도처에서 강물소리 들린다. 또한 괴괴한 달밤 바람에 사운대는 갈대 소리도 들리고 한겨울 쩡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도 들린다. 간간 수면을 박차고 힘차게 비상하는 물새들의 날개소리도 들린다. 삶 속에 그대로 강이 흐르는 것이다. 그 강은 하류가 아니고 상류도 아니고, 상류를 막 벗어난 중류였다.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은 사시사철 기름졌다. 여름이면 더욱 그러했다. 강에는 ‘섬뜸’이라고 불리는 삼각주가 있었는데 풀이 자라 그곳은 대초원 같았다. 소를 몰고 나온 소년들은 이곳에 소를 풀어놓고 첨벙 강물 속에 뛰어들어 미역을 감으며 은어를 잡곤 했다. 은어는 더운 강물의 중심을 피해 강가의 찬물을 찾아왔으므로 소년들의 손에 쉽게 잡히곤 했다. 해질 무렵 소년들은 그렇게 잡은 은어들을 뀀에 꿰어 마을로 돌아간다. 마을 어귀에는 주막이 있었고, 그 주막에서는 어른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으므로 으레 소년들의 은어는 이 어른들의 손에 넘어갔다. 대신 커다란 눈깔사탕이 소년들의 손에 쥐어졌다.

그 소년들 틈에 이시영 소년이 있었다. 이시영 소년은 특히 여름 논일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좋아했다. 안들, 통새미, 사구배미, 우묵쟁이 등의 이름이 붙은 마을 앞 논에 엎드려 초벌 두벌 만벌 김을 메는 어른들의 모습은 소년의 생각을 온통 초록빛으로 채색하곤 했다. 아마도 소년은 그런 모습에서 노동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배웠을 것이다. 그때의 벌판 가득 울려 펴지던 민요, 소리 가락들을 이시영 소년은 먼 훗날에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렇게 여름이 남자들의 계절이었다면 겨울은 여자들의 계절. 겨울밤 소년은 미영(목화) 잣는 소리에 살풋 잠을 깨곤 했다. 그리고는 아름답게 그려지는 농촌 겨울밤의 삽화를 듣게 되는 것이다. 물레 돌아가는 소리, 모여 물레를 잣고 실을 감으며 찬 겨울밤을 훈훈하게 데우는 여자들의 웃음소리, 헐벗은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 사랑방 머슴들의 두런거리는 소리, 쇠죽불 가에서 참새 구워먹는 소리, 오줌통에 오줌 누는 소리, 아버지의 놋재떨이에 담뱃대 부딪는 소리. 이 모든 것들은 이시영 소년의 마음에 그대로 스며 뼈가 되고 살이 되어 이른바 농촌 정서의 구체적 모습을 형성해 간다. 유년의 자연 환경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지대한 것이어서 그러한 소년 이시영은 자라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아름다운 시편들로 그대로 거듭나서 춥고 시린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털옷이 되고 목도리가 된 것이다.

이시영 시인의 유년은 나름대로 풍요로웠다. 머슴을 부릴 정도의 넉넉한 집안의 내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엔 강(섬진강)이 있었고 산(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 강과 산은 상처의 원인으로 시인에게 남기도 하는데 그것은 산업사회의 태동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농촌과, 6.25가 남기고 간 후유증의 하나인, 시인의 말을 빌자면, 산사람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이 될 것이다.

시인이 중학생이 되던 무렵에 농촌에서는 빈농 계층에서부터 부분 이농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 무렵 시인이 겪은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명수라는 학생이 어느 날 시인의 집 깔머슴(꼴머슴)으로 들어온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20명중에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고작 7~8명이었으니 당시의 농촌은 그야말로 빈곤했던 것이다.) 그날 아침 시인은 장독대 뒤에 숨었다. (그때 이미 시인에게는 민중에 대한 연민의 무늬들이 자리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로 나설라치면 벌써 일어나 한 짐 꼴을 베어 지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명수, 명수는 어느 날 마당에 대추나무 한 그루를 정성껏 심어두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명수와 같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정님이, 두례 누나의 사연은 몰락해 죽어가던 농촌 사회의 단면과 6.25가 남기고 간 상처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님이, 두례는 자매로서 불타 사라진 지리산의 한 마을에서 내려와 시인의 집 부엌살이를 했던 처녀들이었다. 시인은 이들 두 자매의 이야기를 그대로 아름다운 시편으로 옮겨 놓았다.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어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싯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 <정님이> 전문

시인의 고등학교 시절은 주로 농촌의 붕괴로 야기된 여러 내용들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시인이 다녔던 고등학교가 있는 전주에 이르는 철길을 따라 점점이 나타나다가 기차역에서 하나의 집약적 모습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전라선을 오르내리며 분해 되어져 가는 농촌의 여러 단면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특히 구례구역에서 대처로 어린 딸을 보내는 한 어머니의 애절한 모습은 시인의 가슴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어디 구례구역 뿐이었겠는가. 그 시절에는 어느 역에서건 어린 자식을 서울로 보내며 눈물 흘리는 어머니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의 전송을 받는 것은 행복한 축이었다. 부모 형제 몰래 가출을 하는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이 퍽 많았던 것이다. 그런 형태는 나중에는 지방 소도시로 이어져서 작은 도시의 빈민층에서도 무작정 상경이 무슨 유행처럼 번지곤 했었다. 어쨌건 그러한 상황 속에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의 시인에게는 남달리 마음에 각인 된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경우의 하나로 작은집의 형자 누나가 있다. 처음엔 아는 집의 식모로, 다음엔 영등포의 어느 공장으로, 다음엔 술집으로, 이렇게 당시의 처녀들의 일부가 서울 생활을 했듯이 형자 누나도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다 결국 서울의 한 유곽에 목을 매고 말았다.

 

“부엌살이 형자 누나는 서울로 간 뒤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가벼운 혼백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마당엔 관솔불이 일렁이고 어른들의 목소리가 두세두세 깊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도 다 들지 못한 채 누나의 혼백은 흰 광목에 싸여 강으로 갔습니다

새벽 강이 시린 등을 내밀어 이 세상 혼자뿐인 누나의 슬픈 영혼을 실어 갔습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이듬해 가을

우리집 정지 뒤란엔 키 작은 코스모스가 가득 피었습니다“

 ― <형자 누나> 전문

 

다들 서울행 열차를 탔다. 마을의 동급생들 중에 서울행 열차를 타지 않은 사람은 단 셋 뿐이었다. 모두들 서울로 몰렸다. 콩나물 공장엘 다니고 자장면 배달을 하고 조리사의 시다, 상점의 점원, 막 노동꾼, 시장 행상… 그렇게, 오토바이 배달꾼 용준이는 차에 치여 죽었다. 썰물처럼 모두들 서울로 떠나고 마을은 점점 활기를 잃고 빛을 잃어갔다. 시인의 집도 어려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농촌 사정은 남의 손을 빌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태로 인력이 귀했다. 손수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미 시인의 집 노동력은 노쇠한 상태였다. 자가 노동력이 없는 상태에서 시인의 집은 한 해 두 해 급속도로 쇠퇴해 갔다.

시인은 생생하게 목격했던 것이다. 우리의 농촌이 와해 분해 되어지는 과정을, 자본주의의 산업구조 아래 논밭을 일구어야 할 손들이 하나 둘 도시로 빠져나가 묵힌 논밭이 늘어나고 수로가 막히고 빈집이 늘어나 을씨년스러워지는 마을, 예전의 그 생기 넘치고 활기차던 마을 모습을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서울행> 

(1967년 겨울)

“여수발 서울행 밤 열한시 반 비둘기호

말이 좋아 비둘기호 삼등열차

아수라장 같은 통로 바닥에서 고개를 들며

젊은 여인이 내게 물었다

명일동이 워디다요?

등에는 갓난아기 잠들어 있고

바닥에 깐 담요엔

예닐곱 살짜리 사내아이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야들 아부지 찾아가는 길이어요

일년 전 실농하고 집을 나갔는디

명일동 워디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

나는 안다 명일동

대낮에도 광산촌같이 컴컴하던 동네

스피커가 칵칵 악을 쓰고

술 취한 사내들이 큰댓자로 눕고

저녁이 오면 낮은 처마마다

젊은 아낙들의 짧은 비명이 새어나오는 곳

햇볕에 검게 탄, 향기로운 밭이슬이 흐르는

저 여인의 목에도 곧 핏발이 서리라

집 앞 똘물에 빨아 신긴

아이의 새하얀 고무신에도

곧 검은 석탄가루가 묻으리라

그러나 나는 또 안다

그녀가 모든 희망을 걸고 찾아가는 명일동은

이제 서울에 없다는 것을.

엿장수 고물장수 막일꾼들의 거리는 치워지고

바라크 대신 들어선 크린맨션 단지에선

깨끗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푸른 잔디 위를 질주하고 있음을.

여수발 서울행 밤 열한시 반 비둘기호

보따리를 풀어 삶은 계란을 내게 권하며

젊은 여인이 불안스레 거듭 물었다

명일동이 워디다요?“

― <서울행> 전문

1967년 겨울 시인은 그 한 많은 전라선을 타고 정훈희의 <안개>가 울려 퍼지는 서울역 광장에 이불보따리를 메고 내렸다. 모두가 그랬듯이 시인도 서울행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서라벌 예술대학에 입학을 하게 된다. 당시의 서라벌예대는 서정주 김동리 시대의 문단 축소판 같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시인은 모더니즘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이 죄 많고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표현할까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모순의 연속이었다. 시인에게는 이 세상이 너무도 낯익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훌쩍 전라선에 올랐다. 서울발 여수행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당시 완행열차로는 11시간, 급행열차로는 7시간 반정도 가면 구례구역에 닿았다. 시인은 주로 밤 열한시 반에 서울역을 출발하는 진주행 순환열차를 탔는데, 이 열차를 타면 새벽 어스름에 도착할 수 있어서 강이 뒤척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디서 닭 우는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들 가운데에 서 있는 고향 마을의 둥구나무가 보이면 마음이 안온했다. 나는 그 들길을 개구리 잠깨는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아니 개구리들도 내 발자국소리를 알아주는 것만 같았다. 왕시리봉의 높은 이마가 발그레하게 빛날 무렵 대숲의 왁자한 참새들을 젖히고 마당에 들어선다. 늙으신 어머니가 반색을 하며 달려나온다. 그러나 집안 꼴은 말이 아니다. 여기 저기 쇠락의 기운이 창연하다. 머슴들도 없고 이제는 자신이 손수 쇠죽가마 앞에 앉은 늙으신 아버지에게 가 절을 한다. 아버지는 예전처럼 말이 없으시지만 속으로는 지나가 버린 당신의 세월을, 아니 다시 올 수 없는 당신의 세상을 우시고 있는 걸 나는 안다.

떠나올 때 늙으신 어머니가 하얀 머리를 날리며 동구 앞까지 따라 나오신다. 방아다리를 지나 아랫냇가로 내려서서 내 등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머니는 오래 거기 서 계실 것이다. 다시 전라선 기차를 탄다. 나는 열차 난간을 붙들고 서서 다짐을 해본다. 고향을 그려보자. 내 숨결로 나의 고향을 재현해 보자. ― 산문, <문학적 자전> 중에서 -

이시영 시인은 이렇듯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고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어머니가 두 분이셨다. 생모이신 작은어머니와 길러주신 큰어머니 이렇게 두 분이셨다. 대를 이을 자식을 얻기 위해 아버지께서 후처를 보신 것이다. 시인은 시인의 아버지께서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 낳은 외아들이다. 독자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시인의 큰어머니에게서 아들 둘 딸 하나를 그리고 작은어머니에게서 아들 넷 딸 셋을 낳았으나 모두 잃고 시인의 위로 누님 한 분과 아래로 두 여동생만 남았다. 흔히 있을 법한 두 어머니 사이의 문제로 인한 갈등은 시인의 삶 어디에서도 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시인이 스스로에게 다짐한 그 고향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학창시절이 다 끝나갈 무렵인 1971년경부터였다. 사실 시인의 작품들 중에는 고향을 사실적으로 옮겨놓은 작품들이 많다. 시만 봐도 시인의 고향과 시인의 유년의 모습들과, 한 시대의 시대적 진실들이 잘 그려진 수채화처럼 선명하게 와 닿는다.

서라벌예술대학 생활을 시작으로 시인의 서울 생활은 막을 올린다. 이곳에서 시인은 서정주 선생을 만난다. 당시 서라벌예술대학에는 자칭 악동 중에서도 상악동들이라고 자부하는 패거리들이 있었는데 그 패거리들 중의 한 사람이 이시영 시인이었다. 이 악동들은 서정주 선생을 모시고 이른바 ‘색싯집’ 이라는 곳에서 야외수업(?)을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진한 화장을 한 아가씨들이 사이사이에 끼어 앉으면 강의가 시작되는, 문창과보다 한 단계 위인 주창과가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선생님 우선 목을 축이셔야지요” “아하! 그럼 시작해 볼까”로 시작되는 서정주 선생의 이런 강의에는 결코 결강이 없었을 것이다. 향학열이 대단했을 것이다. 물론 학점은 모두 올 에이. 이런 강의는 주로 금요일에 열렸다. 강의실은 북청집. 그렇게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면 모두들 까닭도 없이 외로워져서 문득 휘파람을 불어대는 것이다. 서정주 선생께서는 악동들이 외롭다는 것을 알아채시고, 시장 통에서 중국반점으로, 중국반점에서 공덕동 선생 댁으로, 그곳에서 다시 중국반점으로 악동들을 끌고 다니셨다 한다. 순진함과 순수함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그런 강의이며 수강이었다.

1968년 늦은 가을 시인은 한 친구와 함께 도봉산 자락의 한 하숙집에 칩거한다. 한 2개월 남짓 신춘문예 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12월 24일 오후 시인은 우체부에게서 한 통의 전보를 받는다.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繡(수)>가 당선된 것이다.

서라벌예대에서 시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송기원 박종철 감태준 신현정 오정희 이동하 김형영… 등등. 그리고 연인이었던 H가 있다. H는 전라도 출신으로 시인보다 한 살이 많았고 1년 선배였으며 친구의 친구 누나였다. 같은 학과에 다녔으며 역시 똑같이 학보사의 기자였었다. 처음엔 좋은 선후배 사이였으나 이들의 사이는 어느덧 연인의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나 미완으로 끝나고 만다. 물론 슬픔과 아쉬움을 남긴 채… 졸업을 하고 교사가 되어 바다가 있는 고장의 한 학교로 가 있는 H를 시인이 신열(身熱)로 찾아간 것이 이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시인은 서라벌고등학교에서 2년여 동안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1998년 제8회 정지용 문학상 발표지면이었던 《시와시학》에 나와 있는 시인의 연보에는 군데군데 연행, 조사 받음, 구속 등의 단어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시인은 일찍이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개헌청원지지문인 61인 선언’에 서명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송기원과 70년대가 끝날 무렵까지 ‘자유실천문인 협의회’의 가방총무(가방 안에 일체의 살림살이가 들어 있었음)를 역임했고, 염무웅 선생의 권유로 1980년 2월 창작과비평사에 입사한 이래,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의 간행으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 받은 일, 그 일로 국세청으로부터 추징금 일천만원을 부과 받은 일, 역시 김지하의 《大說 南》 1권의 판금, 황석영의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의 게재로 인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된 일, 《창작과비평》의 폐간 복간, 등등 오늘날까지 근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어 왔다.

<시 평>

이시영이 조선미의 본질인 침묵의 미학, 여백의 미학, 자연스러움의 미학을 획득하려는 어떤 분명한 각성을 가졌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의 이러한 태도가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일 것이다. 언어로 환치될 수 없는 것, 표현해서는 안 될 것들을 표현해버림으로써 실체가 훼손되어왔던 무엇을 복원하려는 어떤 것, 이것이 바로 《사이》와 《무늬》의 정신이다. 또 하나는 이 시대에 온통 발기된 (개발과 과학에 대한 절대적 신봉이 빚어낸) 예술형식에 대한 저항형식이요 비판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의 시는 내용과 형식에서  ‘동양적 회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이영진 《창작과비평》 98년 겨울호 -

 

이시영의 시는 대개의 경우 객관적인 사건, 사실일 때나 이야기(설화)를 담고 있을 때는 길어지는 반면, 시인 자신의 주관을 토로하거나 자기반성적일 때는 짧아지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서사적인 것과 서정적인 것이 길이에 따라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인이 서정 양식의 본령에 일층 다가갈 때 그의 시가 압축된 단형으로 씌어짐을 알 수 있다.

― 김윤택 《한길문학》 91년 가을호 -

 

이시영은 단순한 자연 예찬론자가 아니다. 그가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시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이 시인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 속에 매우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자연은 어떤 형식으로든 거의 ‘반드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는 이시영이 자연이 인간과 관계를 맞고 있기 때문에만 자연을 유의미하게 받아들인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시인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찬탄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인간 쪽으로 끌어들인다.

― 김정란 《창작과비평》 94년 가을호 -

 

좋은 시는 그 자체가 생명과 같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며 빛을 뿜고 수런대고 교감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존재하는 시, 시인의 별다른 의미부여 없이도 거기 그대로 그냥 피어 찬연히 자기활동을 전개하는 시, … 온갖 의미를 이루려는 충동 혹은 욕망을 탈각한 채 참된 무의미의 경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의 소용돌이가 피워낸 한 송이 꽃, 혹은 그런 세계.

― 염무웅 《시와시학》 96년 봄호 -

 

이시영의 시는 선시(禪詩)가 아니다. 이 시는 한편으로 이시영의 시가 선시와 비슷한 면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시영의 시는 선시같이 짤막하고 간단한 구조로 짜여져 있다. 그러나 선시는 아니다. 선시는 대체로 오래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애매모호한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이시영의 시는 애매모호한 화두를 던지지도 않으며 보통 사람이 이해 못할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하지도 않는다. 드물게 화두를 던지더라도 그것은 시인이 던진다기보다는 읽는 사람이 그 시를 통해 느끼게 되는 의문점일 뿐이다.

― 차창룡 《현대시》 96년 11월호 -

 

이시영의 시는 어떤 계시의 순간에 열리는 마음의 풍경을 담아낸다. 그것은 마음에 묻어있는 흔적과 무늬를 한순간 포착하여 화폭에 옮겨놓는 방식이다. 그의 시는 의미를 새기는 것이 아니라, 삶과 자연과 하늘이 그의 마음에 남기고 간 무늬를 하나의 장면으로 그려놓는다. 따라서 이시영 시의 주체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삶과 자연과 하늘이다.

― 오형엽 《현대시학》 96년 7월호 -

 

<연 보>

1949년 음력 8월 6일 전남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하사에서 출생. 1962년 구례중학교 입학. 1965년 전주 영생고등학교 입학. 시를 쓰기 시작한 때는 고등학생 시절이며 1968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선생에게서 수학했으며, 송기원, 김종철, 감태준, 김민숙, 이병희, 신현정, 박양호, 윤정모, 오정희, 김형영, 이동하 등을 만남. 이듬해 1969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수<繡>가 당선, 월간문예 제3회 신인 작품 모집에 ‘채탄’외 1편이 당선됨.

1970년 임보 김춘석, 이건청, 오세영, 조정권, 신대철 등과 《六時》 동인 결성. (《六時》는 2집까지 나오다가 이건청 오세영이 《現代詩》로 옮겨감으로써 해체됨) 1971년 염무웅 선생을 알게됨. 1971년 1월 부친 별세, 서라벌예대 졸업. 1974년 1월 “개헌청원지지문인 61인 선언”에 서명하여 중앙정보부에 연행, 3월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입학,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1인 선언” 발표에 참여 연행되어 조사 받음. 1975년 1~2월 “문인. 자유수호격려광고” 운동에 참여, 3월 서라벌고등학교 국어교사 취직.

1976년 12월 첫 시집 《滿月》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1978년 6월 서라벌고등학교 사직, 10월 고은 선생의 주례로 이경희(李景喜)씨와 결혼. 1979년 7월 3일 워커힐의 제4차 세계시인대회장에서 <세계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 시위하다 14일간 구금유치를 받음. 1980년 2월 《창작과비평》 편집장으로 입사, 1982년 김지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의 간행으로 안기부에 연행, 국세청으로부터 추징금 일천만원을 부과 받음, 신동엽 유족과 함께 ‘신동엽 창작 기금’을 제정.

1984년 2월 《창작과비평》 주간으로 승진. 1986년 8월 두 번째 시집 《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1988년 3월 세 번째 시집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에서 간행, 가을 학기부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로 출강. 1989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황석영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게재, 이 일로 11월 23일 안기부로 연행 집은 압수 수색 당함. 11월 25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 발부, 12월 9일 서울구치소에 수감 때까지 안기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과 함께 먹고 자며 집중조사를 받음. 1990년 2월 3일 보석으로 출감. (이 사건은 공민권의 제한을 심하게 받았으며 1심(92년) 2심(93년) 3심(95년)에서 징역8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으로 형 확정 됨. 95년 8월 15일 대통령에 의하여 특별사면 및 특별복권됨.)

1991년 5월 네 번째 시집 《이슬 맺힌 노래》 들꽃세상에서 간행. 1993년 8월 중국 연변사회과학원 문학예술연구소 초청으로 <중국조선족 문학예술 국제학술연구회> 참석. 1994년 1월 《창작과비평사》 상무이사 겸 주간이 됨, 5월 다섯 번째 시집 《무늬》 문학과지성사에서 간행. 제4회 서라벌문학상(시부문) 수상. 1995년 2월 (주)창작과비평사 대표이사 부사장에 취임, 5월 첫 산문집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 한양출판에서 간행, 추계예술학교 문예창작과 한 학기 출강. 1996년 3월 여섯 번째 시집 《사이》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 7년간 시간강사로 나가던 중앙대 문예창작과 강의를 그만두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 객원 교수로 출강, 제8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1997년 10월 일곱 번째 시집 《조용한 푸른 하늘》솔 출판사 간행. 동서문학상 수상.

 

[작품 출처]

http://www.poemlove.co.kr/bbs/board.php?bo_table=tb01&wr_id=63540 

 

마음의 고향 6 -초설(初雪)

마음의 고향 6 -초설(初雪) 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

www.poemlove.co.kr

 

마음의 고향2 , 언덕

http://www.sitong.or.kr/bbs/zboard.php?id=recomend&page=16&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subject&desc=asc&no=999 

 

http://www.sitong.or.kr/bbs/zboard.php?desc=asc&divpage=1&id=recomend&no=999&page=16&sc=on&select_arrange=subject&sn=off&sn1=&ss=on

왜 그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가름젱이 사래 긴 우리 밭 그 건너의 논실 이센 밭 가장자리에 키 작은 탱자 울타리가 쳐진. 훗날 나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콩밭 이슬을 무릎으로 적시며 그

www.sitong.or.kr

 

http://books.chosun.com/m/article.html?contid=2009091500906 

 

등단 40주년 맞은 문정희·이시영 시인

문정희(62)·이시영(60) 시인이 등단 40주년을 맞아 나란히 시선집 《지금 장미를 따라》(문학에디션 뿔)와 《긴 노래, 짧은 시》(창비)를 ..

books.chosun.com

 

 

https://kydong77.tistory.com/20645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10條/ 법정, '보왕삼매론' 강의

시이여래어장애중득보제도 법정, '보왕삼매론' 법어 www.youtube.com/watch?v=EqdCPKBT-tc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 ['보왕삼매경'에서 따온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기부터 명나라 초기에 걸쳐 염불

kydong77.tistory.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canto-1/

 

신곡, 지옥, Canto 1 번역 – JayBlog

우리네 인생길 한 가운데에 나는 어두운 숲 속을 헤맸네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아, 이루 말하기 어렵게 숲은 거칠고 황량하고 험했고,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이 되살아나네! 죽음 못지않게

jaythesheep.com

우리네 인생길 한 가운데에
나는 어두운 숲 속을 헤맸네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아, 이루 말하기 어렵게
숲은 거칠고 황량하고 험했고,
생각만으로도 두려움이 되살아나네!

죽음 못지않게 쓰라린 일이어도,
거기서 찾은 선을 말하기 위해
내가 본 다른 것들을 이야기하오.

어떻게 거기 들어갔는지 되풀이하기엔
나는 무척이나 잠에 취해 있었지,
참된 길에서 벗어났을 때.

하지만 내가 다다른 언덕 발치,
내 마음을 두려움으로 꿰뚫었던
계곡이 끝나는 가장자리,

거기서 올려다본 언덕 등성이는
어느 길이나 사람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행성의 첫 빛살을 입어

무척이나 고통스럽게 보냈던 밤에
내 마음의 호수에 지속되던
두려움이 조금은 가라앉았네.

그리고 마치 숨을 헐떡이며
겨우 바다에서 해변에 도달한 사람이
뒤돌아 험한 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여전히 달아나던 내 영혼이
뒤돌아 지켜본 그 길에서
살아 나온 사람은 없었지

잠시 지친 몸을 쉬이고 나서
다시 황량한 기슭을 올랐네,
내 버티는 다리는 언제나 아래에서.

그런데, 겨우 시작되는 오르막에
무척 가볍고 빠른 표범이
점 박힌 가죽을 두른 채

내 앞을 떠나지 않았지.
오히려 내 길을 아주 가로막아서
번번이 나는 되돌아가려 했지.

시간은 아침이 시작될 무렵이어서,
오르는 태양 곁의 별들은 전에도
함께 있었네, 성스러운 사랑께서

그 아름다운 것들을 처음 움직였을 때도.
그래서 나는 희망을 품었네,
번지르르한 가죽의 야수가 있어도,

그 시간과 달콤한 계절 덕분에.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지.
내 앞에 사자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기에.

그것은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지,
머리를 높이 쳐들고. 성난 굶주림에
주위의 공기마저 떨리는 것 같았지.

그리고 늑대 한 마리, 가득한 탐욕에
비쩍 마른 몰골로 나타난 그녀,
이미 수많은 삶을 비참하게 했기에

나의 생각은 두려움에 짓눌려
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
높이 향한 모든 희망이 사라져,

얻은 것들에 기꺼워 하다가도
시간이 흘러 사라질 때엔
슬픔과 후회만 가득한 꼴로

만드는, 쉼없는 짐승에게
밀려나 나는 조금씩 조금씩
태양이 말없는 데로 내려갔네.

나는 낮은 곳으로 무너지니
그 때 눈 앞에 나타난 누군가는
오랜 침묵으로 희미해 보였지.

넓은 황야에서 그를 본 나는
“자비를 베푸시오”하고 외쳤다.
“당신이 그림자든, 산 사람이든!”

“사람은 아니나, 전에는 사람이었다.”
그가 대답했지. “부모는 롬바르디아
에서 왔지만 만토바가 조국이었다.

늦었지만 율리우스 치하에 태어나,
훌륭한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에 살았지만
그 때의 신들은 거짓되고 가짜였다.

시인인 나는 노래했다. 공정한
앙키세스의 아들을. 그가 온 트로이아,
세 높던 일리온은 불타버렸다.

한데 왜 고난으로 돌아가느냐.
왜 기쁜 오르막, 모든
즐거움의 시작과 원인을 오르지 않느냐.”

“그럼 당신은 베르길리우스, 넓은
말의 흐름으로 생긴 강의 수원입니까?”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고는,

“당신은 모든 시인의 영광이자 빛입니다.
오랜 연구와 커다란 사랑은
당신의 책을 열심히 찾게 했습니다.

나의 스승이자 나의 저자, 나는
오직 당신에게서 얻었습니다,
영광을 가져다 준 아름다운 문체를.

보소서! 저 짐승이 저를 돌이켰습니다.
도우소서, 당신은 고명한 현자,
그녀는 혈관과 맥박을 떨게 합니다.”

“너는 다른 길로 가야 할 것이다.”
그 분은 내 눈물을 보며 답하셨다.
“그래야 이 거친 곳을 벗어날게다.

저 짐승은 너를 외치게 했지만,
그녀의 길은 아무도 못지나게 하며,
오히려 가로막아 죽이기도 한다.

본성은 사악하고 잔혹하며,
게걸스러운 욕심은 충족되지 않아
먹은 뒤 전보다 더 굶주리며,

많은 동물이 그녀와 짝지었다.
앞으로도 많겠지만, 사냥개가
오면 그녀는 고통 속에 죽을 것이다.

그는 땅도 금전도 먹지 않아
지혜와 사랑과 덕으로 대신하니,
태어날 때는 펠트 천에 놓이리라.

천한 이탈리아는 회복되리.
그곳을 위해 정숙한 카밀라,
에우뤼알리스, 투르누스, 니수스가 상처 입었으니,

그는 모든 마을에서 그녀를 찾아
마침내 지옥으로 돌려 보내리라.
처음엔 질투가 그녀를 풀어놨지만.

그래서, 널 위해 내린 판단이다.
따르거라, 내가 길잡이 되어
이제 끝없는 곳까지 데려가마.

거기서 들리는 건 절망에 찬 비명,
보이는 건 옛 혼들의 비탄이니
그들은 두 번째 죽음을 애원하며,

그 다음 볼 자들은 기꺼이
불 속에서도 희망하니 언젠가
복받은 이들께 가기를 바라지.

네가 그들에게 오르고자
한다면 나보다 가치 있는 영혼에게
너를 남겨두고 나는 떠날 것이다.

높이 군림하시는 황제의 뜻에
따라, 나는 그 분의 법을 어겨
그 분의 도시에 갈 수 없기에.

모든 곳을 다스리고 군림하셔,
그의 도시와 그의 권좌가 있으니,
오, 그 분께서 고른 행복한 자여!”

나는 답했다. “시인이여, 당신이
몰랐던 신 앞에서 탄원하오니,
이 악하고 해로운 곳을 피해 당신이

말하신 곳으로 저를 이끄시길,
그리고 성 베드로의 문과
무척이나 슬픈 자들로 보내주시길.”

그러자 그 분이 나섰고 나는 뒤따랐다.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canto-2/

 

신곡, 지옥, Canto 2 번역 – JayBlog

날은 저물고 어스레한 공기가 대지 위에 사는 것들의 노고를 걷어 가는데, 나 혼자 치르기 위해 준비했던 전쟁의 길과 괴로움에 관해서 내 기억은 실수 없이 적으리. 오 무사여, 오 드높은 지성

jaythesheep.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canto-3/

 

신곡, 지옥, Canto 3 번역 – JayBlog

나를 거쳐 비탄의 도시로 나를 거쳐 끝없는 고통으로 나를 거쳐 길잃은 이들로 정의가 내 높으신 창조주를 움직였고 내가 만들어졌다,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와 최초의 사랑으로. 나를 앞선

jaythesheep.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canto-4/

 

신곡, 지옥, Canto 4 번역 – JayBlog

머리 속 깊은 잠을 깨우는 천둥의 굉음에 움칠해 마치 강제로 일으켜진 사람인 듯, 기운차린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서서 알고자 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실로 알아본 그곳은 벼랑

jaythesheep.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canto-4/

 

신곡, 지옥, Canto 4 번역 – JayBlog

머리 속 깊은 잠을 깨우는 천둥의 굉음에 움칠해 마치 강제로 일으켜진 사람인 듯, 기운차린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며 서서 알고자 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실로 알아본 그곳은 벼랑

jaythesheep.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canto-5/

 

신곡, 지옥, Canto 5 번역 – JayBlog

이렇게 첫번째 원을 내려가 아래 둘째는, 둘레는 작지만 더 큰 고통에 비통이 일었다. 지켜선 미노스 두렵게 으르렁댔다. 그가 입구에서 죄를 평가하니, 판결대로 휘감고서 보냈다. 말하자면, 악

jaythesheep.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ec%8b%a0%ea%b3%a1-%ec%a7%80%ec%98%a5-canto-6-%eb%b2%88%ec%97%ad/

 

신곡, 지옥, Canto 6 번역 – JayBlog

이제는 정신이 돌아왔지만, 두 사람을 향한 연민에 갇힌 난, 슬픔으로 혼란스러웠다. 새 고문과 고문 받는 자들이 어디로 몸을 움직여 보거나 둘러 보아도 나를 마주하니, 나는 세번째 원에 있어

jaythesheep.com

 

https://jaythesheep.com/blog/%ec%8b%a0%ea%b3%a1/%ec%8b%a0%ea%b3%a1-%ec%a7%80%ec%98%a5-canto-7-%eb%b2%88%ec%97%ad/

 

신곡, 지옥, Canto 7 번역 – JayBlog

‘파페 사탄, 파페 사탄 알레페!’ 플루톤 새된 소리로 외치자, 고귀하신 현자께서 잘 아시매 달래셨다. “겁에 질리지 마라, 제 아무리 강해도 이 바윗길 내려가는 일은 못막으리라.” 과격한

jaythesheep.com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7900&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⑪ 연옥(煉獄)의 정의(定義)

시인 단테의 「신곡」은 먼바다를 향해 출범하는 항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미지의 세계로 떠났던 오디세우스처럼, 시인 ...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8236&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⑫ 자유로 가는 순례길

연옥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은 우티카의 카토이다. 현명·정의·용기·절제의 추요덕(樞要德)을 의미하는 성스러운 별 네 개의 빛살이 그의 얼굴을 장식하고 있다...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8524&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⑬ 연옥 문의 천사

지옥의 내문(內門)은 지옥 편 제9곡에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지옥이다. 연옥 편도 제9곡에 와서야 연옥 문이 나온다. 여기서도 그 문을 들어서...

m.catholictimes.org

지옥의 내문(內門)은 지옥 편 제9곡에 나온다. 그 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지옥이다. 연옥 편도 제9곡에 와서야 연옥 문이 나온다. 여기서도 그 문을 들어서야만 본격적인 연옥이 시작된다. 단테가 깊이 잠들어 꿈을 꾸고 있는 사이 성녀 루치아가 단테를 연옥 문 앞까지 옮겨다 준다.


문 하나를 보았는데, 아래에서 문까지

서로 다른 색깔의 계단 세 개가 있었고,

아직은 말 없는 문지기 한 분을 보았다.

(연옥 9, 76-78)


계단 맨 위에는 천사가 앉아있다. 천사가 뽑아 든 칼은 너무나도 눈부셔 단테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칼은 판결을 내리는 권위를 가진 분의 표시이다.


우리는 그곳으로 다가갔는데 첫째 계단은

새하얀 대리석으로 너무 깨끗하고 맑아서

나의 모습이 그대로 안에 비쳐 보였다.

둘째 계단은 어둡기보다 검은색인데

거칠고 메마른 돌로 되어있었으며

가로와 세로로 온통 금이 가 있었다.

그 위에 얹혀있는 세 번째 계단은

마치 핏줄에서 튀어나오는 피처럼

새빨갛게 불타는 반암(斑岩) 같았다.

(연옥 9, 95-102)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8857&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⑭ 교만을 겸손으로 누르다

연옥 안으로 들어간 시인들은 바위 사이를 기어올라 연옥 산 첫째 둘레길에 도착한다. 둘레길은 그 폭이 사람 몸길이의 3배 정도 되는 환도(環道)이다. 그 둘...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9213&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⑮ 연옥 산의 구조

넷째 둘레길로 향하는 계단 위로 올라왔을 때 해가 지고 일행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그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죄의 유형...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9471&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⑯ 마텔다는 누구인가?

단테는 자신의 기쁨을 안내자로 삼아 열의에 넘쳐 앞으로 나아간다. 사부를 돌아보는 일도 없이 처음으로 혼자 전진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향기를 내뿜는 흙...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59814&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17) 신비로운 행렬

마텔다와 단테는 강의 양 기슭 위쪽으로 나란히 걸어간다. 두 사람의 걸음이 합하여 100보가 되었을 때, 번개 같은 빛이 숲 가운데로 퍼진다. 음악 소리가 들...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0197&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18) 베아트리체와의 재회

단테가 베아트리체와 재회하는 연옥 편 제30곡은 「신곡」 처음부터 세어보면 63곡째이고, 그 뒤로 36곡이 남는다. 여기서도 삼위일체를 뜻하는 ‘3’이라는 숫...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0573&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19) 레테 강에서의 죽음

“떨리지 않고 제게 남아있는 피는한 방울도 없습니다. 옛 불꽃의 표징들을 나는 압니다.”나는 베르길리우스께 말하려 하였는데,베르길리우스는 우리들을 남겨...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0886&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0) 에우노에 강에서의 부활

“하느님, 이방인들이 당신 소유의 땅으로 쳐들어와, 당신의 거룩한 궁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습니다.”(시편 79,1) 향주 삼덕과 사추덕의 여...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1336&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1) 미래로의 귀향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이스」(1,33)에서 “로마 민족을 창건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과업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그저 육...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1773&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2) 성모의 가수 ‘성 베르나르도’

지옥 편에서 단테는 제9 지옥 맨 아래까지 가서야 얼굴이 셋인 악마 대왕 루치페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듯 천국 편에서도 단테는 제9천(天)인 원동천(原動...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2390&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3) 지복직관(visio beatifica)

“인생은 나그넷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옛 대중가요 ‘하숙생’의 한 구절처럼 사람은 누구나 다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2825&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4) 천국에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다

이제 초점은 오로지 육화의 신비에 집중된다. 우리의 사멸할 육체가 어떻게 삼위일체의 제2위인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리스도는 ...

m.catholictimes.org

 

https://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363474&params=page%3D1%26acid%3D900%26top%3D900 

 
<p class="og-title" data-ke-size="size

 

[참고]

https://kydong77.tistory.com/22107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가톨릭신문 해설 1~10

https://namu.wiki/w/%EC%8B%A0%EA%B3%A1 신곡 - 나무위키 우리 인생길의 한중앙, 올바른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을 헤매이고 있었다.그러나 내 마음을 무서움으로 적셨던, 골짜기가 끝나는 어느 언덕 기슭에

kydong77.tistory.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