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속에 내얼골이 남어있는 것은 어느王朝(왕조)의遺物(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懺悔(참회)의글을 한줄에 주리자。 ― 滿二十四年一介月(개월)을 무슨깁븜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어느 즐거운날에 나는 또 한줄의 懺悔錄(참회록)을 써야한다。 ―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웨그런 부끄런 告白(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이면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는느 隕石(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 온다。
一月二十四日。
*당시의 글쓰기는 국한문혼용체였으므로 운영자가 감히 윤시인의 원고에 한자 독음을 답니다.
잃어버린 성(姓)을 찾아서
ㅡ 이승하
창씨는 해도 개명은 하지 않았다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일본 본토에 가 공부한다는 것이 그다지 욕된 일이었을까 성씨를 고쳐 신고한 날 1942년 1월 29일 그 닷새 전에 시를 썼지 「참회록」을 여백에 낙서할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시인의 고백, 도항증명, 힘, 생존, 생명, 문학, 시란? 不知道, 古鏡, 비애 금물
조상을 부정하라고 한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하이! 매일 매시간 일본 교수가 출석부 보며 부른 낯선 성 대답할 때마다 떨리는 입술 육첩방은 남의 나라 내 나라가 아닌데 시를 썼기에 요시찰인물 시를 썼기에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16분 후쿠오카 형무소 캄캄한 독방에서 크게 한 번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윤—동—주—!
윤동주는 학창시절 농구와 축구를 즐겼으며, 축구선수로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그의 친동생 윤혜원 씨는 윤동주를 ‘건강이 좋아 앓는 법이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랬던 그가 투옥 10개월 만에 뇌혈관이 터져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1945년 2월16일 새벽 3시36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 땅의 28세, 그 순수하고 애국적인 영혼은 그렇게 꺼져갔다.
1980년 일본인 한국유학생 고노오 에이치(鴻農映二, 일본중앙대학 출신, 동국대 대학원 한국문학 전공)는 잡지 ‘현대문학(10월호)’에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으나, 일제의 생체실험 대상으로 징발되어 생리식염수 주사를 맞고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용악(李庸岳,1914년~1971년)은한국의시인이다.함경북도경성출신으로일본도쿄에 있는조치대학(上智大学)을 졸업했고 1939년 귀국하여 주로 잡지사 기자로 일하였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1935년,신인문학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광복 후 서울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소속으로 <노한 눈들>, <짓밟히는 거리에서>, <빛발 속에서> 등의 시를 발표하며 '미제와 이승만을 반대하는 문화인' 모임에서 활동하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인민군의 서울 점령 때 출옥하여 자진 월북했다. 한국 전쟁 중에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 등의 시를 발표했으며 월북한 지 21년이 지난1971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북국의 가을》, 《풀벌렛소리 가득차 잇섯다》, 《낡은 집》, 《슬픈 사람들끼리》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분수령》, 《낡은 집》, 《오랑캐꽃》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