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武階列西 文秩敍東 是謂兩班.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양반'이라고 한다.
[주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任爾所從 絶棄鄙事 希古尙志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 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五更常起 點硫燃脂
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目視鼻端 會踵支尻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
[주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권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東萊博議 誦如氷瓢.
"동래박의"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주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忍饑耐寒, 口不說貧
叩齒彈腦 細嗽嚥津 *嗽(수):기침.
굶주림과 추위를 인내하며 입에는 가난이라는 말을 담지 않는다.
아래 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袖刷毳冠 拂塵生派.
[주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明)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盥無擦拳 潄口無過. *潄(수):양치질하다.
세수 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주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長聲喚婢 緩步曳履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如荏 一行百字.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주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명(明)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手毋執錢 不問米價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暑毋跣襪 飯毋徒髻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食毋先羹 歠毋流聲*歠(철):마시다.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下箸毋舂 毋餌生葱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嘬(최):물다. *窳(유):비뚤다.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忿毋搏妻 怒毋踢器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毋拳毆兒女 毋罵死奴僕. *毆(구):때리다.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죽일놈의 종놈이라고 꾸짖지 말아야 한다.
[주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권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권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叱牛馬 毋辱鬻主.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病毋招巫 祭不齋僧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에 중을 불러다 재(齋)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
爐不煮手 語不齒唾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毋屠牛 毋賭錢.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도박도 하지 말아야 한다.
凡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
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양반의 규범에 한 가지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城主 旌善郡守 押. 座首別監 證署.”
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於是 通引搨印 *搨(탑):박다, 베끼다.
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錯落聲中嚴鼓 斗縱參橫.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주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戶長讀旣畢.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 太乾沒. 願改爲可利.”
"양반이 겨우 이것뿐입니가?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 지나치게 재산을 몰수합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
[주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제2문권-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
於是 乃更作券曰,
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維天生民 其民維四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四民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焉.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決文科 小成進士.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備具 維錢之橐. *橐(탁):전대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進士三十 乃筮初任 猶爲名蔭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은자주] 연암도 쉰 살에 음관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
지체 높은 음관을 잘 섬기면,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희어지고,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됩니다.
[주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주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室珥治妓 庭穀鳴鶴.
방안의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뜰 앞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주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窮士居鄕 猶能武斷.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무력을 마음대로 단행할 수 있다.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慢我?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글만 읽으면 '선비'라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 하며, 착한 덕이 있으면 군자(君子)라고 한다.
武階列西 文秩敍東 是謂兩班.
무계렬서 문질서동 시위양반.
무관의 계급은 서쪽에 벌여 있고, 문관의 차례는 동쪽에 자리 잡았으며, 이들을 '양반'006)이라고 한다.
[주D-006]무관 …… 동쪽이라 : 궁궐에서 무관과 문관이 각각 서쪽과 동쪽에 나누어 서는 것을 가리킨다.
任爾所從 絶棄鄙事 希古尙志
임이소종 절기비사 희고상지
이 여러 가지 양반 가운데서 그대 마음대로 골라잡되, 오늘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야비한 일들을 깨끗이 끊어 버리고, 옛 사람을 본받아 뜻을 고상하게 가져야 한다.
五更常起 點硫燃脂
오갱상기 점류연지
오경(五更)이 되면 언제나 일어나서 성냥을 그어 등불을 켜고,
目視鼻端 會踵支尻
목시비단 회종지고
눈으로 코끝을 내려다보며, 두 발굽을 한데다가 모아 볼기를 괴고 앉아서007)
[주D-007]눈은 …… 보며 : 호흡법의 일종이다. 주자(朱子)의 조식잠(調息箴)에 보인다. 《연암집》 권4 담원팔영(澹園八詠) 중 소심거(素心居)를 노래한 제 3 수에도 나온다.
東萊博議 訟如氷瓢.
동래박의 송여빙표.
"동래박의"008)처럼 어려운 글을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외워야 한다.
[주D-008]《동래박의(東萊博議)》 : 남송(南宋) 때 여조겸(呂祖謙)이 지은 《동래좌씨박의(東萊左氏博議)》를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주제를 취해 평론한 것인데, 과거(科擧)에서 논설을 짓는 데 도움 되는 책으로 중국과 조선에서 널리 읽혔다.
叩齒彈腦 細嗽嚥津 *嗽(수):기침.
고치탄뇌 세수연진
아래 윗니를 맞부딪쳐 똑똑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뒤통수를 튕긴다.
가는 기침이 나면 가래침을 씹어 넘기고, 009)
[주D-009]이빨을 …… 삼키며 : 도가(道家)에서 유래한 양생법(養生法)이다. 가볍게 윗니와 아랫니를 36번 부딪치고, 손바닥으로 귀를 막고 둘째와 셋째 손가락으로 뒷골을 24번 퉁긴다. 입 안에 고이게 한 침을 가볍게 양치질하듯이 부걱부걱하기를 36번 하면 이를 수진(漱津)이라 하여 맑은 물이 되는데, 이것을 3번에 나누어 꾸르륵 소리를 내며 삼켜서 단전(丹田)에 이르게 한다. 퇴계(退溪) 선생의 유묵(遺墨)으로 전하는 명(明) 나라 현주도인(玄洲道人) 함허자(涵虛子)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자세하다.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 7월 6일 조를 보면 연암이 고치탄뇌(叩齒彈腦)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袖刷毳冠 拂塵生派.
수쇄취관 불진생파.
털 감투를 쓸 때에는 소맷자락으로 털어서 티끌 물결을 일으킨다.
盥無擦拳 潄口無過. *潄(수):양치질하다.
관무찰권 수구무과.
세수 할 때에는 주먹의 때를 비비지 말 것이며, 양치질할 때에는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010)
[주D-010]냄새 …… 닦고 : 원문은 ‘漱口無過’인데, 입냄새를 구과(口過)라 한다. 당(唐) 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송지문(宋之問)이 재주 있는 시인임을 알았으나 그의 입냄새가 심한 것을 싫어하여 기용하지 않았다.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수록되어 있는 송지문의 걸작 명하편(明河編)은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여 지은 시라고 한다.
長聲喚婢 緩步曳履
장성환비 완보예리
긴 목소리로 '아무개야' 계집종을 부르고, 느리게 걸으면서 신뒤축을 끌어야 한다.
古文眞寶 唐詩品彙 鈔寫如荏 一行百字.
고문진보 당시품휘 초사여임 일행백자.
『고문진보』나 『당시품휘』 011)같은 책들을 깨알처럼 가늘게 배껴 쓰되, 한 줄에 백 자씩 써야 한다.
[주D-011]《당시품휘(唐詩品彙)》 : 명(明) 나라 때 고병(高棅)이 편찬한 당시집(唐詩集)이다. 모두 90권으로 시인 620인의 작품 5700여 수를 형식별로 수록하였다. 따로 습유(拾遺) 10권이 있다.
手毋執錢 不問米價
수무집전 불문미가
손에 돈을 지니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도 말아야 한다.
暑毋跣襪 飯毋徒髻
서무선말 반무도계
날씨가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며, 밥을 먹을 때에도 맨상투 꼴로 앉지 말아야 한다.
食毋先羹 歠毋流聲*歠 *歠(철):마시다.
식무선갱 철무류성철
식사하면서 국물부터 먼저 마셔 버리지 말며, 마시더라도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下箸毋舂 毋餌生葱
하저무용 무이생총
젓가락을 내리면서 밥상을 찧어 소리 내지 말며, 생파를 씹지 말아야 한다.
飮醪毋嘬鬚 吸煙毋輔窳.*嘬(최):물다. *窳(유):비뚤다.
음료무최수 흡연무보유.
막걸리를 마신 뒤에 수염을 빨지 말며, 담배를 태울 때에도 볼이 오목 파이도록 빨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忿毋搏妻 怒毋踢器
분무박처 로무척기
아무리 분하더라도 아내를 치지 말며, 화가 나더라도 그릇을 차지 말아야 한다.
毋拳毆兒女 毋罵死奴僕. *毆(구):때리다.
무권구아녀 무매사노복.
맨주먹으로 아녀자들을 때리지 말며, 죽일놈의 종놈이라고 꾸짖지 말아야 한다. 012)
[주D-012]뒈져라고 …… 말고 : 《연암집》 권3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도 “뒈져라고 악담하다〔惡言詈死〕”와 같은 표현이 있다. 이덕무의 《사소절(士小節)》 권1 사전(士典) 1 언어조(言語條)에, 종에게 ‘뒈질 놈〔可殺〕’ ‘왜 안 뒈지냐〔胡不死〕’와 같은 욕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叱牛馬 毋辱鬻主.
질우마 무욕죽주.
말이나 소를 꾸짖으면서 팔아먹은 주인을 들추지 말아야 한다.
病毋招巫 祭不齋僧
병무초무 제불재승
병이 들어도 무당을 불러오지 말고, 제사에 중을 불러다 재(齋)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
爐不煮手 語不齒唾
로불자수 어불치타
화롯가에 손을 쬐지 말며, 말할 때에 침이 튀지 말아야 한다.
毋屠牛 毋賭錢.
무도우 무도전.
소백정 노릇을 하지 말며, 도박도 하지 말아야 한다.
凡此百行 有違兩班 持此文記 卞正于官.
범차백행 유위양반 지차문기 변정우관.
이러한 여러 가지 행위 가운데 양반의 규범에 한 가지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양반은 이 증서를 가지고, 관청에 와서 송사하여 바로잡을 수 있다.
城主 旌善郡守 押. 座首別監 證署.”
성주 정선군수 압.좌수별감 증서.”
성주(城主) 정선 군수 화압(花押)
좌수(座首) 별감(別監) 증서(證署)
於是 通引搨印 *搨(탑):박다, 베끼다.
어시 통인탑인
증서를 다 쓰고는 통인(通引)이 인(印)을 받아서 찍었다.
錯落聲中嚴鼓 斗縱參橫.
착락성중엄고 두종참횡.
뚜욱뚜욱하는 그 소리는 마치 엄고(嚴鼓)013) 치는 소리 같았고, 그 찍어 놓은 모습은 마치 북두칠성이 세로 놓인 듯, 삼성(參星)이 가로놓인 듯 벌렸다.
[주D-013]엄고(嚴鼓) : 임금이 행차할 때 치던 큰북이다.
戶長讀旣畢.
호장독기필.
호장(戶長)이 읽기를 마쳤다.
“兩班只此而已耶? 吾聞兩班如神仙 審如是 太乾沒. 願改爲可利.”
“양반지차이이야?오문양반여신선 심여시 태건몰.원개위가리.”
"양반이 겨우 이것뿐입니가? 나는 '양반은 신선과 같다'고 들었지요. 정말 이와 같다면, 너무 지나치게 재산을 몰수합입니다. 아무쪼록 좀 더 이롭게 고쳐 주시오." 014)
[주D-014]너무도 …… 셈이니 : 원문은 ‘太乾沒’인데, ‘乾沒’은 물을 말려 없애듯이 남의 재산을 마구 횡령하거나 몰수하는 것을 말한다. 부자가 양반을 대신해서 환곡 천 석을 갚아 주었으나 그 대가가 너무도 보잘것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2)제2문권-양반지배계층의 특권의식과 횡포[도둑]
於是 乃更作券曰,
어시 내갱작권왈,
그래서 다시 증서를 만들었다.
“維天生民 其民維四
“유천생민 기민유사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에, 그 갈래를 넷으로 나누셨다.
四民之中 最貴者士 稱以兩班 利莫大焉.
사민지중 최귀자사 칭이양반 리막대언.
이 네 갈래 백성들 가운데 가장 존귀한 이가 선비이고, 이 선비를 양반이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서 양반보다 더 큰 이문은 없다.
不耕不商 粗涉文史 大決文科 小成進士.
불경불상 조섭문사 대결문과 소성진사.
그들은 농사 짓지도 않고, 장사하지도 않는다. 옛글이나 역사를 대략만 알면 과거를 치르는데, 크게 되면 문과(文科)요, 작게 이르더라도 진사(進士)다.
文科紅牌 不過二尺 百物備具 維錢之橐. *橐(탁):전대
문과홍패 불과이척 백물비구 유전지탁.
문과의 홍패(紅牌)는 두 자도 채 못 되지만, 온갖 물건이 이것으로 갖추어지니 돈 자루나 다름없다.
進士三十 乃筮初任 猶爲名蔭
진사삼십 내서초임 유위명음
진사는 나이 서른에 첫 벼슬을 하더라도 오히려 이름난 음관(蔭官)이 될 수 있다.
*[은자주] 연암도 쉰 살에 음관으로 처음 출사하였다.
善事雄南 耳白傘風 腹皤鈴諾
선사웅남 이백산풍 복파령락
지체 높은 음관을 잘 섬기면 015), [수령 노릇을 하느라고] 귓바퀴는 일산(日傘) 바람에 희어지고,016) 배는 동헌(東軒) 사령(使令)들의 '예이'하는 소리에 살찌게 됩니다.
[주D-015]웅남행(雄南行) : 음관을 남행(南行)이라 한다. 웅남행은 위품(位品)이 높은 음관을 가리킨다.
[주D-016]일산 …… 처지며 : 수령은 행차할 때 일산을 받쳐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햇빛을 쏘이지 않아 귀가 희어지고, 일을 시킬 때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르면 되므로 편해서 배에 살만 찐다는 뜻이다.
室珥治妓 庭穀鳴鶴.
실이치기 정곡명학.
방안의 귀고리로 기생이나 놀리고 017), 뜰 앞에 곡식으로 학을 기른다.
[주D-017]방 안에 …… 것이요 : 기생이 놀다 간 뒤라 귀걸이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사기》 골계열전에서 순우곤(淳于髡)이 제(齊) 나라 위왕(威王)에게 자신의 주량(酒量)을 설명하며 한 말 중에, 주려(州閭)의 모임에 남녀가 뒤섞여 앉아 술을 즐겁게 마시고 나면 “앞에는 귀걸이가 떨어져 있고 뒤에는 비녀가 남겨져 있다.〔前有墮珥 後有遺簪〕”고 하였다.
窮士居鄕 猶能武斷.
궁사거향 유능무단.
궁한 선비로 시골에 살더라도, 무력을 마음대로 단행할 수 있다.
先耕隣牛 借耘里氓 孰敢慢我?
선경린우 차운리맹 숙감만아?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내어 내 밭을 김 매게 하더라도, 어느 놈이 감히 나를 괄시하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정조 때의 북학파인 박지원이 1780년(정조 4년) 청나라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 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당시의 연경)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이다. 박지원은 자신의 삼종형(8촌 형)이자 사절단의 수장인 금성위 박명원의 자제 군관 자격으로 일행에 합류할 수 있었고 러허강(열하강)까지 다녀온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기록물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상가 및 서화가들이 남긴 서적, 서화, 골동품 등 문화재급 유품 3만여 점과 함께 연민 이가원이 소장하여 오다가 1986년12월 22일 기증하였고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 친필본이 소장되어 있다.[1][2]
명을 여전히 조선의 군부(君父)로 여기고 명의 문물을 주(周)·한(漢)·당(唐)·송(宋)의 적통을 잇는 중화로 굳게 믿은 조선의 양반 지식인들은 청이 중원의 새 패자(覇者)로 군림한 후에도 여전히 한족(漢族)의 중화 문물을 흠모하며 청을 오랑캐로 멸시했다. 이는 조선후기를 지배한 존주의리(尊周義理)나 대명의리(對明義理), 그리고 조선중화(朝鮮中華) 등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청의 국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명이 망한 지도 100년이 지나면서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고 그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이런 주장은 대개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의 북경을 방문해 조선을 훨씬 능가하는 선진 문물을 직접 목도하고 충격을 받은 일부 지식인이 귀국 후에 제기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에 호응하는 지식인들이 서서히 증가했다.
이들이 오랑캐의 나라로 여기던 청으로부터 배우자는 주장을 펼 수 있었던 명분은 청은 비록 이적의 국가이지만 그들이 보유한 문물은 이전의 명이 간직했던 중화의 문물이므로 조선이 그것을 수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또 청은 학문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조선 사회보다 훨씬 진보한 고도의 선진 문물을 갖추고 있으니, 조선의 국력을 신장하고 민생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그 문물을 배워서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아울러 제시했다. 특히 이전의 실학 움직임이 대개 토지 분배와 같은 전통적인 개혁에 중점을 둔 데 비해, 북학을 주장한 사람들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기술 향상을 통한 생산력의 증대와 상공업 장려를 통한 국부의 창출 등과 같이 새로운 프레임의 개혁안을 제시했다.
이들의 성향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개 한양과 경기 지역에 거주하던 낙론(洛論)계 노론(老論) 출신이 많았고, 철학적으로 보면 대개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지지하고 주기론(主氣論)에 경도된 이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존주의리론(尊周義理論)을 여전이 강조하고 서학(西學)을 배척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런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청의 문물을 새롭게 중화 문물로 인식하는가 하면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하자는 자세를 취했다.
이런 성향을 보인 인물군을 후대의 역사가들이 대개 북학파(北學派)라는 이름으로 묶었는데, 학자에 따라 차이가 나며, 후대로 올수록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북학파라는 학파가 당시에 실존했다기보다는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분류된 것임을 잘 보여준다. 현재 거론되는 북학파 인물로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서명응(徐命膺)·홍양호(洪良浩)·성해응(成海應)·김정희(金正喜)·정약용(丁若鏞) 등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상기한 북학의 특성을 가장 잘 대표하는 학자는홍대용·박지원·박제가등 세 명이다.
이들 세 학자는 모두 존주의리 의식이 너무 지나쳐 경제와 민생을 도외시한 기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라의 부강과 민생에 정치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홍대용은 의리(義理)를 고양하고 문장을 공부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경제(經濟)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지원은 의리와 윤리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당시의 명분주의 사조를 비판하고 국가에 실제로 필요한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힘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제가도 현실정치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고상한 담론보다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통상의 확대를 통해 국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임을 설파했다.
또한 그 방법으로 세 학자 모두 북학을 강조했다. 이들은 청의 문물을 이적시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청에 대해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다.
홍대용은 북경 방문을 통해 청나라 학자뿐만 아니라 청에 거주하는 서양인 학자들과 만나며 다양한 학문을 접했는데, 특히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문학을 수용해 귀국 후에는지전설(地轉說)을 거론하고 중화를 상대화함으로써 조선인의 세계관과 중화관이 바뀔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의산문답』은 그의 사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박지원은『과농소초』를 지어 농업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열하일기』를 통해 자신의 북학 인식을 잘 드러냈다.
박제가는 국왕 정조에게 바친『북학의』를 통해 농법 개발을 통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 해외 통상의 장려를 통한 국부의 증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술의 도입 등을 강조함으로써 조선후기 북학 사조의 절정을 이루었다.
* 북학파 인물들은 원각사 탑이 현존하는 탑골공원 부근에 살았기 때문에 그 주변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현재 탑골공원은 종묘 정문 정비사업 이후 거처를 잃은 무의탁 어른들의 놀이공간으로 변모했다.
이 명銘은 짧지만 대단히 문제적이다. 연암의 문집 전체가 간행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와서 였다. 당시 박영철이라는 사람이 돈을 대고 출판을 주관하였다. 이 본本을 보통 박영철본 『연암집』이라 부른다. 그런데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이 명이 빠져 있다. 하지만 『과정록』에는 다음과 같이 이 명을 특별히 소개해 놓고 있다.
相逢西子湖 知君不羞吾
서호에서 이제 상봉하면 서호의 벗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리
口中不含珠 空悲咏麥儒
입에 반함을 하지 않은 건 보리 읊조린 유자를 미워해서지.
한편, 연암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필사본 『열하일기』에도 이 명이 실려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제가가 농업 생산력의 증진만큼이나 중요시한 것은 상업과 유통 및 외국과의 통상이었다. 그는 당시 많은 학자들에 의해 말단의 일이라고 천시되어 왔던 상업에 주목하여, 상업을 발전시키고 유통을 촉진하기 위해 수레・선박・도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용한 물건을 유통시키고 거래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쓸모 있는 물건이라도 대부분 한 곳에 묶여 있거나 홀로 떠돌다가 쉽게 고갈될 것이며, 상인들이 교역을 하지 않고 놀고먹기만 한다면 이는 사람이 할 일을 잃게 될 것이었다. 박제가가 상행위를 통한 물자의 유통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업이 발달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바로 국가의 지속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계획이었다. 유통과 거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기반시설이 확보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교량이나 도로와 같은 기반시설은 개인의 힘으로 설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국가가 주도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바탕으로 마련되어야 하는 것인데, 자원의 소유 및 이동의 권한이 국가에 귀속되어 있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박제가는 상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유통 수단을 정비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가 보기에 중국은 수레나 선박과 같은 유통 수단이 잘 운용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모범으로 삼아 조선에도 도입하고자 하였다. 수레와 선박의 운용을 위해서는 도로와 교량을 늘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다.
【오행설(五行說)에서는 봄에는 목(木)의 기운이 왕성하고,여름에는 화(火)의 기운이 왕성하고,가을에는 금(金)의 기운이 왕성하고,겨울에는 수(水)의 기운이 왕성한 것으로 본다.토(土)만 그에 해당하는 계절이 없는 셈인데,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각 계절90일에서18일씩을 덜어서 흙에 배당함으로써 오행에 맞추어 각 계절이 모두72일씩으로 고루 안배될 수 있게 한 것을 가리킨다.】.
예가 사라지자 시골에서 구한다 했으니【『한서(漢書)』권30예문지(藝文志) 10에 공자(孔子)가 한 말로 소개되어 있다.『연암집』권3자소집서(自笑集序)에서도 이 말을 인용하면서,양반 사대부들의 글에서 사라진 고문사(古文辭)를 역관(譯官)들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개탄하였다.】,향년은 짧았어도 드날림은 오래네.
공명선은 책을 읽질 않았어도3년 동안 잘 배웠고【공명선은 증자(曾子)의 제자로,그의 문하에서 삼 년이나 있으면서도 글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이에 그 까닭을 묻자,공명선은 스승인 증자의 모범적인 행동을 보고 따라 배우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답했으므로,증자가 감복(感服)했다고 한다.『설원(說苑)』 「반질(反質)」】,
【이덕무(李德懋)의『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권50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의하면,황해도 봉산에 사는 어느 무식한 농민이 한글밖에 모르지만『소학언해(小學諺解)』를 읽고 그의 모든 언행을 이에 준해 실천했다고 한다.외출하거나 귀가할 때 반드시 서로 절하기로 아내와 약속하고,부부가 같이 날마다『소학언해』를 읽었으므로,그 고을의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나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봉산학자전은 이 사실을 소재로 한 전기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