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총 제595- 늙은 기생의 하소연 (辛亥春)

신해년(辛亥年: 1731년) 봄에

본 설화집 '파수록'을 편찬한

김연이 영변(寧邊)에 가서

몇 달을 머물게 되었다.

그 때 이웃에 옥매(玉梅)라는

늙은 기생이 살면서,

수시로 김연의 거처에 찾아와

노래도 들려주고 이야기도 해주며,

집을 떠나 사는

김연의 적적함을 달래 주었다.

하루는 기생 옥매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인의 나이 지금 일흔이지만,

머리가 세어 성성해진 것은

마흔 살 이전이랍니다.

이는 소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기생들은 모두 그러하답니다."

이에 김연은 그 까닭을 물으니,

기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대체로 기생이 남자를 따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재물을 탐해서 따르는 경우도 있고,

욕정에 빠져서 따르는 경우도 있지요.

그 풍채에 반해서 따르기도 하고,

인정에 이끌려서 따르기도 한답니다.

또, 그 사람을 매우 싫어하지만

위압에 굴복하여 따르기도 하고,

우연히 만나 따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남자를 따르지만,

함께 지내는 동안

자연히 정이 들어

떠나기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남자들은

기생을 영원히 데리고 있지 못하고,

임기를 마치면

이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답니다.

그리하여 님자들이

이별의 노래 한 곡조로

손을 흔들고 떠나갈 때,

기생들은 정말로 참기 어려운

단장의 쓰라림을

겪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러고 돌아와 울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또 다른 남자를 만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되니,

목석(木石)이 아닌 사람으로서

어찌 빨리 늙지 않겠습니까?"

이에 부묵자 김연은

기생이 남자와 다르다는 것이

꼭 이익을 좇고

재물을 탐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늙은 기생 옥매를 위로했더라 한다.

 

고금소총 제594- 천자문과 아이들 (五六歲童子)

한 시골에 대여섯 살 된 아이 셋이

친구가 되어 늘 함께 놀았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 숙성하여,

남녀간의 잠자리와

성적(性的)인 문제에 대해서도

먼저 깬 상태였다.

그리하여 모여 놀면서도

여성과 관련된 농담을 자주하곤 했다.

이 세 아이는 한 훈장 밑에서

'천자문'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평소 여인들이 들에서 일하다가

밭 구석에 소변을 보는 경우가 많았으니,

그 소리와 음부의 모습에 대해

농담하던 것들을

자신들이 배워나가는 '천자문' 속의

넉 자로 된 글귀와 연관시켜,

제각기 한 구절씩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먼저 한 아이가

여자들 소변 볼 때의 소리와 관련하여,

空谷傳聲(공곡전성)

"텅 빈 골짜기에 전해지는 메아리 소리.

라고 읊으니,

 

다른 아이는

소변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읊었다.

川流不息(천류불식)

"냇물이 흘러 내려 쉬지를 않는구나.

 

마지막 한 아이는 소변을 볼 때

음부 주위의 음모에 대해,

如松之盛(여송지성)

"청청한 소나무와 같은 왕성함이여.

 

이러고 그들은,

서로 마주 보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이 소리를 들은 훈장은

아직 어린 아이들이

지나치게 성적인 문제에

앞서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들을 나무라는 뜻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 선비가 크게 되려면

도량과 지식이 앞서고,

문예적 기능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공자도 자기 고향 마을 아이들이

분수없이 난잡하게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니 너희들 셋은

나이가 어리면서 하는 말은 어른스럽고,

학식은 얕으면서 재주만 뛰어나니,

재주와 기능으로

이름은 날릴 수 있을지 모르나

큰 출세는 장담할 수 없노라."

훈장은 이렇게 우회적으로 꾸짖었는데,

나중에 보니

이 세 아이는 자라서 훈장의 말처럼

큰 인물은 되지 못했더라 한다.

 

고금소총 제593- 한 상주의 실수 (有一居喪者)

어느 시골에 한 상주가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이 상주는 마당가에 빈소를 따로 지어

사방을 짚으로 둘러놓았다.

그리하여 빈소 안에는

짚을 얽은 새끼줄들이

군데군데 늘어져 있었다.

때는 마침 여름이라,

한낮이 되니

뙤약볕이 무섭게 내리쪼여

빈소 안은 마치 찜통 같았다.

이에 상주는,

'이렇게 더운데

설마 문상객이 오진 않겠지?'

라고 생각하여,

입고 있던 상복과 허리에 두른 띠며

머리에 쓴 두건 등을 벗어

빈소의 늘어진 새끼줄에 걸어 두고,

얇은 속옷만 입은 채

부채질을 하며 쉬고 있었다.

그러나 상주의 생각은

그만 빗나가고 말았다.

 

한 손님이 이런 대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문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곧 상주는 그 사람을

잠시 머물게 하고는,

급히 상복을 입고 허리에 띠를 두른 뒤

머리에는 두건을 썼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만 빈소에 늘어뜨려 놓았던 새끼줄이

띠와 함께 휩쓸려

허리에 둘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상주는 이것을 전혀 모른 채

문상객과 함께 곡을 한 뒤

마주 서서 절을 하는데,

마치 뒤에서 누눈가가 잡아당기는 듯하여

도저히 허리를 굽힐 수가 없었다.

 

그런데 문상객은 이미 바닥에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으려 하니,

상주는 당황하여

허리를 힘껏 당기면서

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뒤에 매여 있던

새끼줄이 끊어지면서,

잡아당기는 허리의 힘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쏠려,

그 머리가 문상객을 향해 돌진한 것이다.

 

이 때 마침 문상객은

절을 하고 머리를 드는 순간이라,

곧 상주의 머리에 받쳐

이마가 부어올랐다.

하지만 새끼줄에 매여

이렇게 된 줄을 모르는 문상객은,

상주가 고의로 머리를

걷어찼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상주를

미친 사람으로 오해하고 돌아가는데,

마침 문상하러 오는

다른 한 친구를 만났다.

이에 문상을 하고 나온 친구가 말했다.

"자네 문상하러 가거든 조심하게나.

상주가 미쳤는지

문상객을 발로 걷어차니,

그거 정말 어이가 없더구먼."

이에 그 친구는 문상하러 가서

신주 앞에 곡을 하고 절을 한 뒤

상주를 살피니,

머리를 숙이고 절을 하려 하기에

이 친구는 물러나 앉으면서 말했다.

"이보게, 난 상주에게

발로 차일 사람은 아니라네."

이 말에 상주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서

매우 미안해했더라 한다.

 

고금소총 제592- 영혼이 책을 부탁하다 (托友推冊)

연안(延安) 고을에

이씨 성을 가진 선비가 살았는데,

김씨 성을 가진 한 친구와

평생 정이 매우 두터웠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는 동네는

조금 떨어져 있었고,

근래 여러 달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다.

 

하루는 이씨 선비가

김씨 친구를 한번 만나 보려 마음먹고,

오후 늦게 집을 나서

김씨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씨 선비는 가는 동안

신발이 작아 발이 아파 오자

쉬고 또 쉬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원 참, 무슨 해가 이렇게 짧단 말이냐.

벌써 어두워지내.'

이씨 선비는 해가 이렇게 짧은가 하고

혼잣말을 하면서

어두컴컴한 길을 걷노라니,

뜻밖에도 김씨 선비가 저쪽에서

마주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지 이씨 선비는 달려가서

친구의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하니,

김씨 선비도 반가워하면서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니 이 사람아,

오랜만이구먼.

어디를 이렇게 가는가?"

"나 말일세.

자네를 오랫동안 못 봐서

자네 집에 가는 길인데,

여기서 이렇게 만났구먼.

그 간 별고 없었나?"

김씨는 친구가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말에

멈칫하며 말했다.

"뭐야? 우리 집으로

날 만나러 오는 길이라고?

허면 길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됐구먼.

이제 도로 집으로 돌아가게나."

"아닐세. 이미 이렇게 집을 나섰고

날도 어두워졌으니,

여기서 가까운 자네 동네 근처로 가서

다른 친구 좀 만나 볼 참이네."

 

이씨 선비가 자기 동네 근처로

가겠다는 말을 들은

김씨 선비는 기뻐하면서 다가섰다.

"그러면 됐네.

이왕 우리 동네 근처로 간다면

내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는데,

내 말 좀 전해 주겠나?"

"응,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내 가는 길에 전하겠네."

이에 김씨 선비는 길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꺼내는 것이었다.

"내 평생 어느 책을 좋아하는 줄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런데 아무개 친구가 빌려가서는

오래도록 돌려주질 않는구먼.

내 지난날 가서 돌려 달라니

아직 덜 읽었다면서

돌려주지 않더라고.

그러고 몇 달 지나 다시 독촉을 했는데,

역시 못다 읽었다면서 안 주는 거야.

그 책은 말이지,

한 군데는 담뱃불로 인해

여러 장이 탔고,

또 몇 군데는

약간씩 탄 흔적만 있다네.

그러니 자네 우리 집으로 좀 가서,

아이들에게 그 책을 찾아다가

내 방에 놓아두라고 전해 주게나."

 

이 말을 들은 이씨 선비는

다소 의아해 하며

이렇게 물었다.

"아니, 이 사람아!

그런 일이라면 급하지도 않은데

자네가 뒷날 천천히 찾아오면 되지,

왜 그걸 나한테 부탁하는가?"

"이 친구야! 난 지금 죽은 몸일세.

그래서 아무에게도 부탁할 수가 없어

자네를 만난 김에 부탁하는 것이니,

우리 집에 들러 그 책을 꼭 찾아다가

내 탁자 앞에 놓아 달라고

말해 주기 바라네."

그러고 나자 김씨 선비는

문득 간 곳이 없었다.

 

이씨 선비는 마치 꿈을 꾼 듯

의아하게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하여

김씨 선비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과연 그가 사망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난 뒤였다.

이씨 선비는 빈소에 들어가

애도를 표하고

집안사람들한테 그 말을 전했다.

그리고 책을 찾아오라고 해서 살펴보니,

과연 담뱃불에 탄 흔적이

아까 들은 말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씨 선비는 통곡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더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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